
이 책의 본문은 The Christian Soldier or Heaven Taken by Storm by Thomas Watson (New York: Robert Moore, 1816)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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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향한 거룩한 분투
전자책 발행일 2025년 7월 20일
지은이 토머스 왓슨
옮긴이 장호준
펴낸이 김은주
펴낸곳 부흥과개혁사
편집 권대영 디자인 박슬기 기획 이승영 마케팅 권성직
판권 Ⓒ부흥과개혁사 2025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6길 9-20, 2층(서교동)
전화 Tel. 02) 332-7752 Fax. 02) 332-7742
홈페이지 http://rnrbook.com e-mail rnrbook@hanmail.net
전자책 ISBN 979-11-94295-23-5 (05230)
등록 1998년 9월 15일 (제13-548호)
전자책 정가 14,000원
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추구합니다. 부흥과개혁사는 부흥과 개혁이 이 시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조국 교회의 부흥과 개혁의 방향을 위한 이정표이자, 잠든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나팔 소리요, 깨어난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의 불길을 지속시키는 장작더미이며, 부흥과 개혁을 꿈꾸며 소망하는 교회들을 하나로 모아 주기 위한 깃발이고자 기독교 출판의 바다에 출항하였습니다.
1장 침노를 당하는 천국 7
마태복음 11장 12절 구조 분석 7
본문의 구조 9
본문에서 말하는 침노 곧 분투의 의미 13

2장 그리스도인이 진력해야 할 기독교 신앙의
일곱 가지 의무 25
성경 읽기 25
설교 듣기 31
기도 34
기도를 위해 나아가기 35
기도의 내용 40
묵상 41
묵상해야 할 여섯 가지 주제 42
묵상이 주는 유익 49
자기 성찰 52
자기 성찰의 어려움 53
자기 성찰을 위해 고려해야 할 것 56
주의 날 58
경건한 대화 63
3장 사탄과 분투하기 67
사탄이 올무를 치는 방법 67
사탄을 대적하는 방법 70

4장 천국을 침노하는 맹렬함 74
천국을
천국을 침노해 들어가는 방법 81
76
천국을 맹렬하게 침노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는 책망 83
게으른 자들에 대한 책망 84
형식주의자들에 대한 책망 86
나쁜 의미에서 분투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망 87
천국을 향해 분투하지 않는 자들이 숙고할 것 94
5장 천국을 향한 거룩한 분투 104
천국을 향한 거룩한 분투가 있는지 스스로 살피기 104
천국을 향한 거룩한 분투에 대한 반론들 107
천국을 향한 거룩한 분투를 해야 할 이유 117
천국을 향한 거룩한 분투를 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 143
천국을 향한 거룩한 분투를 하게 하는 방편들 154
6장 결론 160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60

부록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즐거움 164
시편 73편 28절 해설 164
본문의 구조 분석 167
1.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가 168
2.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방편은 무엇인가 169
3.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방식은 무엇인가 170
4.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70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해야 할 일 180
지은이‧옮긴이 183
소개글 185 ※ 이 책의 장 구분은 원문과 달리 가독성을 위해 편집한 것입니다.
침노를 당하는 천국
마태복음 11장 12절 구조 분석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감옥에서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세례 요한은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 이렇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3절 ). 그러나 세례 요한이( 테르툴리아누스의 견해
와는 달리 ) 예수님이 참된 메시아시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
닙니다. 세례 요한은 이미 하나님의 성령과 하늘로부터 오는 표증 을 통해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요 1:33 ). 다만 그리스도
보다 자신을 더 존경하고 따르는 자신의 두 제자의 무지함을 바로
잡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물음에 그리스도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
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
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적과 같이 시각적이고 분명한 증거들을 통해 자신이 참된 메시아이
심을 분명히 증언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자, 그리스도
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고 칭찬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
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치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은
한결같은 사람이라 갈대처럼 생각이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일희일
비하지 않는다. 들끓는 물과 같은 르우벤과 달리 그의 믿음은 단호
하고 분명하다. 그런 그를 감옥도 어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
람이냐”( 8절 ).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
았던 세례 요한은 비단옷이 아니라 낙타 털옷을 입었고, 좋은 집이
나 궁궐이 아니라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마 3:3〜4 ).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은 자기보다 먼저 와서 길을 예비하는 전
령( forerunner ) 이라고 칭찬하십니다( 10절 ). 의의 태양( Sun of Righteousness ) 이 뜰 것을 알려 주는 샛별( morning star ) 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는 이 거룩한 사람을 선지자반열에 놓으실 뿐 아니라, 모든 선지자
보다 더 나은 자라 지극히 높이십니다.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
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9절 ).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11절 ). 그가 맡은 존귀한 직분과 가르
침의 명료함으로 볼 때 세례 요한은 모든 선지자 중에 으뜸이었습
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이런 모든 칭찬이 있고 난 후에 우리가 살
피려는 본문이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구조
1. 도입.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세례 요한은 불같은 설
교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붙여 주신 우레의
아들, 보아너게라는 말은 사실 세례 요한과 같은 설교자에게도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가 설교를 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
에 크게 찔림을 받았습니다.
위와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역이 사람들의 양
심을 일깨우는 가장 선한 역사를 이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나팔 소리와 같이 분명하게 설교했고, 회개에 대한
가르침을 권능으로 선포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
니라”( 마 3:2 ). 먼저 사람들에게서 무성하게 자란 죄악을 사정없이
쳐서 베어 낸 다음에 그리스도를 선포했습니다. 죄로 덧난 환부에 율법의 산을 먼저 부은 후, 복음의 포도주로 진정시켰습니다. 이런
세례 요한의 설교로 사람들은 진지하고도 간절하게 천국을 추구했 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설교보다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설교를 했습니다. 자신의 능변을 과시하는 설교보다는 사람
들의 죄를 드러내는 설교를 했습니다. 매끈매끈하기만 한 거울보다
는 자기 얼굴을 제대로 보여 주는 거울이 좋은 거울이듯이, 자신의
마음과 죄악을 제대로 보게 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입니다.
세례 요한은 밝게 타오르는 빛이었습니다. 성경의 교리로 활활 타
올랐고, 자기 삶으로 밝게 빛났습니다. 그런 그를 보며 사람들은 천
국을 향해 내달았습니다. 열심이 특심했던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청중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겸비해졌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베드
로는 그리스도 보혈의 샘을 열어 보였고, 그들의 마음은 깊은 찔림
을 받았습니다 ( 행 2:37 ). 영혼을 파고드는 사역자를 갖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긍휼을 덧입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질병에 신음하는 사람
은 근본적인 병인이 낱낱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자기 영혼의 숨
은 것들이 샅샅이 드러나고 구원 얻기를 바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2. 본론.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하
늘나라 ( the kingdom of heaven ) 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에라스뮈스와
같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천국을 드러내 주는 복음의 가르침을 하늘
나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베자( Beza ) 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
지로 나는 하늘나라를 영광( glory ) 으로 이해합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suffer violence ). 1)
이 말은 질풍 같은 공격을 통해서만 함락할 수 있는, 전쟁 한가운
1) “침노”에 해당하는 단어 “violence”는 일반적으로는 “폭력”으로 번역되지만 이
책에서 “분투”, “대적”, “맹렬한 싸움”, “힘써 싸우다”, “치열(맹렬)하게 싸우다” 등으로 번역했다-편집자.
천국을 향한 거룩한 분투
데 있는 도시나 성읍을 빗댄 은유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침노해
들어가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땅은 온유한 자가 얻지만( 마 5:5 ),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얻습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 삶은 용사의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장이시고, 복음이 우리의 깃발이며, 은혜는 우리를 지원하는 영적
인 포화입니다. 천국은 이렇게 세차고 강력하게 치고 들어가야만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이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전투-“침노를 당하나니”
2. 승리-“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을 얻는 바른길은 침노하는 것입니다. 침노해 들어가는 자만이
천국을 얻습니다.
침노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1) 이 말은 법을 집행하는 치안관이 관계된 말입니다. 법을 집행
하는 사람들은 강력해야 합니다.
[1] 악인을 벌함에서 그래야 합니다. 아론의 우림과 둠밈의 판결
에도 악인이 아랑곳하지 않으면, 모세가 막대기를 들고 나설 수밖
에 없습니다. 치안관에게는 사회에 만연한 악을 일소해야 할 책
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시려고 총독들을
두십니다( 벧전 2:14 ). 그러므로 머리에만 지느러미가 있는 황새치와
달리, 총독들은 손에 검을 들 뿐 아니라, 마음에도 검을 두어 모든
불경건함을 일소해야 합니다. 재판관의 자리에서 악을 묵인하는 것
은 악을 도와주는 격입니다. 범법자들을 벌하지 않는 것은 그들과
똑같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열정이 없는 재판관은 영혼이 없는
몸과 같습니다. 참수형에 합당한 사람의 머리털만 밀고 마는 물러
터진 재판관은 죄만 북돋을 뿐입니다.
[2] 무죄한 자를 보호함에서 그래야 합니다. 억압받는 자에게 재판
관은 피난처요 도피성의 제단과 같습니다. 캘러브리의 찰스( Charles )
공작은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너무 사모한 나머지 자신의 궁 정
문에 종을 달아 놓아 억울한 사정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종을
울릴 수 있게 했습니다. 그 종을 울린 사람은 즉시로 그 공작에게로
인도되었고, 그렇게 하지 못할 사정이 생겼을 때는 사람을 보내 사
유를 듣게 했습니다. 정의롭기로 유명한 아리스티데스( Aristides ) 에
대해 역사가들은 말하기를 그는 결코 자기 친구라고 해서 더 많이
사정을 봐주거나, 자기 원수라고 해서 더 불의하게 대하지 않았다
고 합니다. 이렇게 정의로운 재판관은 압제 아래 있는 사람의 방패
입니다.
(2)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천국이 값없이 주
어지는 것이라 해도, 우리는 천국을 위해 맹렬히 싸워야 합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전 9:10 ). 엄청난
일이 우리 앞에 있는 데 반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고, 우리
주님은 절박하게 재촉하십니다. 저 천국에 이르려면 생사의 갈림길
에 있는 사람과 같이 온 힘을 다해 끝까지 분투해야 합니다.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맹렬함으로 분투해야 합니다. 이 주제
를 더 명료하게 하려고 몇 가지를 더 말하겠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침노 곧 분투의 의미
1. 본문에서 말하는 분투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1) 무지한 분투.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분투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
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행 17:23 ). 아덴 사람들은 종교에 많이
분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이런 분투는 사마리아인들의
분투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
고”( 요 4:22 ). 로마 가톨릭 신자들 역시 자기들의 신앙에 분투합니다.
고해성사하고, 금식하고, 스스로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지식 없는 분투입니다. 분투가 지식을 앞서서는 안 됩니다. 아론은
향을 피우기 전에 먼저 등을 밝혔습니다 ( 출 25:7 ). 향과 같은 열심을
태우기 전에 먼저 지식의 등을 밝혀야 합니다.
(2) 몸을 상하게 하는 분투. 이런 분투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
니다. 첫째로, 스스로 몸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몸을 통
해 이 땅에 영혼을 두십니다. 하나님이 육체의 죽음을 통해 영혼을 꺼내시기까지는 자기 뜻대로 몸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간수 장의 허락도 없이 간수가 맘대로 죄수를 풀어 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우리 스스로 감히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 니다. 우리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고전 6:19 ). 우리가 스스로 몸을 상 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등불을 태우는
기름과 같은 육신의 수분이 남아 있는 한, 생명의 등불은 계속 타
올라야 합니다. 둘째로, 타인의 생명을 앗아 가는 분투입니다. 오늘
날 이런 분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피 흘림보다 더 소리 높여
울부짖는 죄는 없습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
소하느니라”( 창 4:10 ) 이웃을 은밀히 치는 자를 저주하시는 분이( 신
27:24 ) 이웃을 살해하는 자를 배나 저주하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누
구라도 부지중에 오살하면 도피성 제단으로 피할 수 있습니다. 하
지만 고의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그 땅의 거룩함이 그를 용납하
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출 21:14 ) . 솔로몬왕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제단 뿔을 부여잡고 있던 요압을 끌어내어 처단했습
니다( 왕상 8:29 ). 요압이 무죄한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옛날 보헤
미아( Bohemia ) 에서는 2) 살인자를 참수하여 그가 살해했던 사람의 관
에 함께 묻었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맹렬한 분투는 이런 분
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2. 본문에서 말하는 맹렬한 분투는 거룩한 분투입니다. 이 분투는
다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진리를 위한 분투. 빌라도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
엇이냐?” 진리는 진리의 말씀 ( Word of truth ) 이라 일컫는 복된 하나님
의 말씀( Word of God ) 입니다. 또한 진리는 항상 해를 따라 움직이는
2) 현재 체코 연방공화국 서부지역을 가리키는 이 말은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이 지역에 거주한 선주민인 보이오하이뭄(Boiohaemum )이라는 켈
트 계통의 부족 이름에서 유래했다-옮긴이.
해시계의 바늘이나, 원본을 필사한 사본과 같이 이 말씀에서 비롯
되고, 이 말씀과 일치하는 교리들, 즉 삼위일체 교리, 창조, 은혜 교
리,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는 칭의, 중생, 죽은 자의 부활, 영광
의 생명 등에 대한 교리 등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진리들을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이 진리들을 변호하고 때로 그렇게 하다가 죽기
도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가장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금덩이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
러기가 아무리 미세해도 그것은 값진 것입니다. 진리 말고 우리가
분투할 만한 것이 또 무엇이 있습니까? 진리는 오랜 세월을 지나왔
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진리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진리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 the ancient of days ) 로부터 나옵니다( 단 7:9 ). 이런 진리는 틀림이 없습니다. 진리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큰 별( the Star ) 입니다. 진리는 순결합니다( 시 119:140 ). 진리는 흙 도가
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습니다( 시 12:6 ). 진리의 얼굴에는 미세
한 흠도 없습니다. 진리는 오직 고결함으로 숨을 쉽니다. 진리는 의
기양양합니다. 위대한 정복자와 같습니다. 진리는 모든 원수가 꼬
꾸라진 벌판에서 승리의 트로피를 높이 치켜듭니다. 진리는 저항을
받기도 하고 반대를 당하기도 하지만 결코 그 보좌를 내주지는 않
습니다. 디오클레시아누스3)가 통치하던 때,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3) 로마 시대의 교회 박해 중에서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 때의 박해가 가장 극심 했다. AD 303년에 시작된 당시의 박해를 유세비우스는 이렇게 묘사한다. “살인 자와 강도들을 수용하기 위해 오래전에
감옥들이 감독들과 장로들과 집 사들 및 성경을 읽는 자들과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어 범법자 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옮긴이.
진리가 사그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e ) 시대가 왔고, 진리는 다시 고개를 높이 들
었습니다. 템즈 강물의 수위가 가장 저점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제
곧 만조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편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 진리가 이깁니다.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
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 3:12 ). “오직 주의 말
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벧전 1:25 ).
진리는 멋진 결과를 가져옵니다. 진리는 새로운 출생 ( new birth ) 의
씨앗입니다. 하나님은 이적이나 환상이 아닌,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약 1:18 ). 진리는 은혜를 낳을 뿐 아니라,
은혜를 살찌우기까지 합니다( 딤전 4:6 ). 진리는 거룩하게 합니다. “그
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7 ). 진리는 자기에게 있는 거룩함을 우리에게 인치는 도장입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있는 더러운 것들을 보여 주는 거울 ( speculum ) 이면
서 동시에 더러운 것들을 씻어 주는 놋대야 ( lavacrum ) 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요 18:32 ). 죄의 차꼬를 벗겨 버리고 아들의
지위로 옷 입히고( 롬 8:11 ), 왕의 신분을 수여합니다( 계 1:6 ). 진리는 위
로가 넘칩니다. 진리의 포도주는 흥을 돋웁니다. 다윗의 하프와 비
올로도 얻지 못하는 위로를 진리가 가져다 줍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
119:50 ). 진리는 오류를 치료하는 해독제입니다. 오류는 생각이 빗나 간 것입니다. 반역이 피를 더럽히듯이 오류는 영혼을 더럽힙니다.
오류는 악덕을 불러올 뿐 아니라 파멸을 가져옵니다. 사람은 총으
로도 죽지만 독으로도 죽습니다. 진리만이 오류를 산산이 부숴 버
립니다. 많은 사람이 오류로 빠져드는 이유는 그들이 진리를 모르
거나,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진리에 대해
칭찬을 해도 진리에 합당한 영예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진리는 믿
음의 토대입니다. 진리는 신앙의 정확한 모범을 보여 줍니다. 우리
가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진리를 없앤 우리의 믿음
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진리는 교회의 화원에 핀 가장 아름다운 꽃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귀중한 보석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가장 아름다운 보석은 하나님
의 진리입니다. 진리는 영예로운 휘장입니다. 순결을 가지고 덕스러
운 여인과 매춘부를 구분하는 것처럼, 진리의 휘장이 우리를 거짓
된 교회와 구별해 줍니다. 한마디로, 진리는 교회의 보루요, 한 나라
를 지키는 성채입니다. ( 진리의 담지자요 전달자였던 ) 레위 사람들이 나라
를 강성하게 했다고 합니다( 대하 11:17 ). 진리를 견고한 도성인 로마의
수도나 용사들의 일천 방패를 걸어 두었던 다윗의 망대( 아 4:4 ) 와 비
교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거대한 성채나 해군도 진리처럼
우리를 강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진리는 이 나라가 가진 가장 탁월 한 군대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리를 버리고 교황을 따라간다면, 우
리의 강력함이 머무는 성문이 뚫린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맹렬히
싸우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해 맹렬히 싸우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유 3절 ). 이 나라가 일단 진리를 떠나면, 이 나라
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의 묘비에 이렇게 써야 할
것입니다. ‘영광이 떠났도다.’
(2) 자신의 구원을 위한 분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거룩한 분
투를 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
게 하라”( 벧후 1:10 ). 본문에 쓰인 헬라어는 가슴 졸이는 간절함으로
마음과 생각을 다해 영원에 대해 힘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이런 통로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온 힘을 다해 달음박질쳐야 합니다.
3. 거룩한 분투가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음 세 가지를 의미 합니다.
(1) 의지의 결단
(2) 뜨거운 마음
(3) 불굴의 의지
(1) 의지의 결단 ( resolution of the will ).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시 119:106 ). 천국으로 가는 길에 무엇
을 만나든, 행여 사자를 맞닥뜨린다 해도 온 군대를 통솔하는 지휘
관처럼 결연하게 맞서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단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천국을 취할 것입니다. 이런 결단은 닥쳐오는 모
든 위협을 멸시합니다. 고생도 넘어서고, 두려움을 조롱합니다. 거
룩한 분투에 가장 우선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의지의 결단입니다. 무
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천국을 취하고야 말겠다는 단호함입니다. 이
런 결단은 그리스도의 강력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결단은 볼링에서 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더 강력하고 파괴력 있게
굴러가게 하는 공에 걸린 회전과 같습니다. 구원도 얻고 싶고, 죄도
따라가고 싶은 어중간한 결심으로는 천국을 향해 분투할 수 없습
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여행자는 마음이 변할 때마다 이 길, 저
길을 기웃거리기만 할 뿐, 결연히 한 길만 가지 못합니다.
(2) 뜨거운 마음 ( vigor of the affections ). 의지는 이성에 영향을 받습
니다. 거룩한 땅에 깃든 영광의 탁월함을 들어서 알고( the judgment ),
이 영광의 땅을 향해 나서기로 뜻을 정하면( the will ), 이제 뜨거운 마
음이 그 뒤를 따릅니다( the affections ). 천국을 향한 뜨거운 갈망으로
타오르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
망하나니”( 시 42:2 ). 랍비들은 다윗이 “내 영혼이 굶주린다”고 하지
않고, “목마르다”고 말한 사실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배
고픈 것보다 목마른 것을 더 못 견디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급격하고 격렬하게 타오르는지 보십시오. 이
런 마음은 새의 날개와 같아서 영혼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속히
날아오르게 합니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 곳에서 천국을 향한 맹
렬함이 생겨납니다.
(3) 불굴의 의지 ( strength of endeavor ). 이런 맹렬함은 열렬한 분투를
수반합니다. 생사가 달린 일처럼 구원을 향해 치닫습니다. 천국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만, 천국에 이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천국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하늘의 도움을 구하면서 온 맘으로 힘써야 합 니다.
4. 그리스도인이 맹렬히 힘써야 할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 네 가
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사탄에 대해, 세상에 대해, 천국에 대해 맹
렬히 분투하는 것입니다.
(1)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과 맹렬히 싸워야
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이런 맹렬함은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습
니다. [1] 죄를 죽이고, [2]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다하려 힘쓰는 것
입니다.
[1] 영적인 의미로 볼 때, 자신과 맹렬히 싸운다는 것은 죄를 죽이
는 것 ( mortification of sin ) 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힘써 싸워야 할 자신이
란 바로 육체( flesh ) 입니다. 히에로니무스, 크리소스토무스, 데오필락
투스 모두 죄를 죽이는 것이 바로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라고 합
니다. 육체는 내부의 반역자입니다. 성 안에 온갖 위해를 가져올 트
로이의 목마와 같습니다. 육체는 교활한 원수입니다. 처음에는 요염
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나중에는 쏘는 전갈로 드러납니다. 포옹함
으로 살해합니다. 육체의 포옹은 떡갈나무를 칭칭 감은 담쟁이넝쿨
과 같습니다. 떡갈나무의 진액을 빨아들여 자신의 이파리를 무성하
게 합니다. 육체도 감미로운 포옹으로 우리 마음에서 모든 좋은 것
을 빨아 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갈 5:17 ). 육체가
제멋대로 나대도록 방치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짓입니다. 육체
는 거룩한 몸짓을 방해하고 질식시킵니다. 육체는 마귀와 짝하고 마 귀의 요구에 충실합니다. 육체와 짝하는 사람들은 기도도 하지 않고
믿음에 거하려 하지 않습니다. 육체는 우리가 약속보다는 유혹을
따라가게 합니다. 이런 육체의 조수가 우리 안에 밀려들면 죄를 향
해 부는 바람이 없이도 속히 죄를 향해 미끄러져 갑니다. 육체는 우
향한 거룩한 분투
리와 너무 가까이 있으므로 그 모사( counsel ) 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정욕의 사슬보다 사람을 더 단단하고 바짝 동여매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을 정복한 후, 알렉산드로스는 온갖 악덕의 포로가 되
었습니다. 구원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육신적 욕망과 맹렬히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
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5 ). 근
본에서부터 죄를 죽이려면 단순히 죄의 행위만을 멀리하는 것이 아
니라, 죄가 남아 있는 것 자체를 미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
렇게 해도 중요한 죄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
니다.
심지어 죄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부분적으로 주춤할 때조차도
죄 죽이기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재촉했습니다( 롬 8:13 ). 가장 탁월한 성도에게
조차 죽여야 할 죄악, 예로 큰 교만, 시기, 정욕 등이 있습니다. 그래
서 성경은 죄를 죽이는 일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갈 5:24 ) . 죄를 죽이는 일은 갑자기 한순간에 끝나지 않습 니다. 매일 사망의 몸에 딸린 사지가 조금씩 떨어져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 알렉산드리아의 ) 키릴( Cyrill ) 은 돌보다 더 단단한 것은 없다
고 말하지만, 바위틈 낭떠러지에서 돌을 뚫고 잡초가 자라기도 하 고, 돌 위에 뿌리를 박기도 합니다. 신자보다 강한 사람도 없지만, 죄는 이런 신자에게도 뿌리를 내리고, 무절제한 정욕으로 자라납 니다. 그러므로 죄를 죽이는 일은 항상 계속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기도와 금식과 근신함으로 항상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켰습니다( 고전
하지만 성경은 또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
고”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엡 5:29 )? 물리적 의미에서 육체는 우리 몸
을 의미하지만, 신학적으로는 육신의 더러운 정욕을 말합니다. 사람
은 이런 자기 육체를 미워해야 합니다. 사도는 육체의 정욕이 영혼
을 거슬려 싸운다고 말합니다( 벧전 2:11 ). 육체가 우리를 대적하고 싸
우는 것이라면, 우리 역시 육체를 대항해 싸워야 합니다.
육체를 죽이는 자신과 맹렬하게 싸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정욕을 타오르게 할 연료를 공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유혹을 피하십시오. 죄를 살찌우는 것이 무엇인지 잘 살피십시오.
혈전이나 신장 결석을 막으려면 최대한 육식을 자제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자기를 유혹에 방치해서는 안 됩
니다.
둘째, 영적 무기인 믿음과 기도로 육체의 정욕을 대적하십시오.
죄와 싸우는 가장 탁월한 길은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
을 향해 달려가십시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롬 6:14 ).
헬라어 단어가 의미하는 대로, 죄가 주인 행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빌 4:13 ). 삼손의 능력은 그의 머리칼
에서 나왔습니다. 우리 힘은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있습
니다. 이것이 바로 죄 죽임을 통해 자신과 맹렬히 싸우는 길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죽이기보다는 육체를 따라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
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입니다.
천국을 향한 거룩한 분투 9:27 ).
[2] 자기 자신과 맹렬히 싸우는 두 번째 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의 자기 본문에 힘쓰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 자신을 독려하고 분투
하는 것이 바로 자신과 맹렬히 싸우는 길입니다. 성경은 이를 가리
켜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라고 합니다( 사 64:7 ). 생각해 봅 시다.
첫째, 거룩한 의무에 힘쓰기 위해 스스로 분발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가요?
영적인 일에 굼뜬 우리 마음을 생각할 때, 무딘 연장의 날을 더욱
예리하게 하고, 둔하고 어리석은 마음에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우
리 마음은 하나님의 일에 너무 우둔하고 굼뜨므로 선한 일에 민첩
하려면 더 많은 자극과 채근이 필요합니다. 육체는 우리가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싶어도 육체가
이를 싫어합니다. 인내하고 견디려 하면, 육체가 뒷걸음질칩니다.
하나님만 찾기로 마음을 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예수님은 우
리가 은혜의 보좌로 나가려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기꺼이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문을 위해 스
스로 더욱 분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에서 우리 마음이 느슨 해져 있다면, 당장에 마음을 추슬러 신앙의 의무를 행하기에 적합
하게 조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우리 본성에 반하는 일이므로, 예배하는
일에도 우리는 스스로 분발해야 합니다. 죄를 향해 치닫는 것은 영 혼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향해 달려가려
면 맹렬한 싸움이 필요합니다. 돌은 자연스럽게 지구 중심을 향합
니다. 그러므로 맷돌을 공중으로 들어올리려면 많은 힘이 필요합
니다. 자연의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
의 의무 가운데 마음을 천국에 두려면 맹렬한 싸움을 필요로 하므
로 우리는 스스로 분발해야 합니다.
둘째, 신앙인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 분발한다는 것은 어떻
게 하는 것을 말합니까?
a. 자기를 흔들어 깨워 영적인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입
니다. 다윗은 힘써 예배하면서 자신의 혀와 마음을 일깨웠습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
로다”( 시 57:8 ). 자기 영혼의 나태함과 굼뜬 것을 알고 스스로 일깨웠
습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사망의 죄
에서 일어나기는 했어도, 여전히 잠자리에 머물기를 자주 합니다.
b. 신앙인의 본문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 분발한다는 것은 영혼의
모든 힘을 다해 믿음의 일에 진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흐트러짐 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열렬한 마음으로
믿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c. 스스로 분발하고 자신과 맹렬히 싸우는 가운데 진력해야 할 기
독교 신앙의 일곱 가지 의무를 행해야 합니다. ( 이에 대해 이후 장들에서
살펴보겠습니다-편집자 )
천국을 향한 거룩한 분투
지은이 토머스 왓슨 (Thomas Watson, 1620~1686년)
사랑받는 청교도 설교가
토머스 왓슨은 존 오웬, 리처드 백스터와 더불어 17세기 영국 청교도 시대를 대표하
는 가장 위대한 설교가이자 목회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특히 청교도 신학의 깊이를 간결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내,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쉽게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도록 돕는 데 탁월한 은사를 가졌다.
그는 요크셔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 에마누엘 칼리지에서 학업을 마쳤는데, 재학 시절 매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으로 유명했다. 1639년 학사 학위를, 1642년 석 사 학위를 받았다.
1646년부터 1662년까지 16년간 런던 월브룩의 성 스데반 교회에서 목회했으며, 당시 런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설교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설교는 깊은 신학적 통찰 과 실천적 적용으로 유명했다. 그의 설교는 성경에 대한 깊은 통찰과 불같은 열정, 그 리고 성도들을 향한 따뜻한 목회적 애정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고 평가받는다. 1662년 통일법(Act of Uniformity)이 제정되면서 국교회에 순응하지 않는 목사들이 축출되었는데, 왓슨 역시 자신의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사직을 포기하고 고난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그의 저술 활동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이 시기에 그의 가장 주옥같은 작품들이 쓰였다.
왓슨의 저작들은 청교도 신학의 정수를 보여 주는 걸작들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글은 논리가 정연하면서도 시적인 비유와 일상의 예화가 풍부하여 딱딱하지 않고, 마 치 잘 차려진 영적 만찬처럼 독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입맛을 돋운다. 대표작
으로는 『신학의 체계』(A Body of Practical Divinity), 『회개의 교리』(The Doctrine of Repen- The Doctrine of Repentance), 『천국을 향한 거룩한 분투』(Heaven Taken by Storm), 『죄의 해악』(The Mischief of Sin) 등이 있다.
그의 글쓰기 스타일은 명확하고 실용적이며, 복잡한 신학적 개념을 일반 신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 준다. 특히 성경적 진리를 일상
생활에 적용하는 실제적 지혜와 영혼을 각성시키는 강렬한 표현들로 유명하다.
왓슨은 1686년 7월 28일 에식스주 반스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록 현대에 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기독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실천 신학자 중 한 명으 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저작들은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영적 양식
을 제공하고 있다.
옮긴이 장호준
미국 트리니티 뱁티스트 교회(TBC) 회원으로 퓨리탄 리폼드 신학교(Th. M.)를 졸업
했다. 현재는 TBC 파송 교회개척자로 전남 여수시에서 1689 런던 뱁티스트 신앙고
백에 따른 ‘트리니티 뱁티스트 교회’(tbcsk online)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 역서로는
토머스 보스턴의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해설1』(부흥과개혁사), J. C. 라일의 『거룩』,
존 머레이의 『구속』, 토머스 슈라이너의 『히브리서 주석』,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파
교의학(단권축약본)』 등이 있다.
소개글
잠든 신앙을 깨우는 영적 전투의 필독서!
당신의 심장은 지금, 천국을 향해 얼마나 뜨겁게 뛰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너무나 쉽게 안락함과 타협하고, 세상의 분주함 속에서
미지근하게 식어 버리곤 한다. 회심의 감격은 희미한 추억이 되었고, 거룩함을
향한 열망은 마음 한구석의 부담으로 남았다. 이처럼 영적 나태와 무기력에 빠
진 현대 교회를 향해, 17세기 청교도 거인 토머스 왓슨이 우레와 같은 음성으 로 외친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천국을 향한 거룩한 분투』는 이 격렬한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결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거룩한 분투’(holy violence)를 동반하
는 치열한 영적 전투임을 선포하는 책이다. 왓슨은 이 책에서 우리가 맞서 싸
워야 할 대상이 바로 우리 자신의 나태한 본성과 세상의 유혹, 그리고 끈질기
게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는 나태한 신앙을 버리고
‘폭풍처럼 천국을 점령하기 위해’ 성도가 반드시 감행해야 할 영적 분투가 무
엇인지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안내한다.
우리는 어떻게 거룩하게 분투하여 죄를 죽일 수 있는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싸움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기도의 밀실에서, 말씀 묵상 앞에서, 거룩한 자
기 성찰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천국을 ‘침노’할 수 있는가? 토머스 왓슨은 마치
노련한 지휘관처럼 영적 전투의 모든 전선을 살피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들을 하나하나 손에 쥐여 준다.
이 책은 결코 우리를 율법적인 행위로 몰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
자가라는 가장 확실한 승리의 깃발 아래 서도록 독려하며, 그 은혜가 얼마나 강력한 동기가 되는지를 깨닫게 한다. 왓슨 특유의 명쾌한 논증, 가슴을 찌르는 경구, 보석처럼 빛나는 비유들은 4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의 잠든 영혼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만약 당신의 신앙이 더 이상 뜨겁지 않다면, 기도의 열정이 식어 버렸다면, 거
룩한 삶을 향한 갈망을 다시 불태우고 싶다면, 이 책을 펴서 읽으라. 『천국을
향한 거룩한 분투』는 안일한 신앙생활에 경종을 울리는 영적 각성제이자, 모든
그리스도인을 부르심에 합당한 ‘그리스도의 용사’로 다시 세우는 강력한 훈련
지침서가 될 것이다. 이 책과 함께, 다시 한번 천국을 향한 거룩하고도 격렬한
진군을 시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