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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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켈리 카픽 & 랜들 글리슨

뉴잉글랜드 이주자들이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축제를 즐기는 낭만적인

이미지와는 별개로, 청교도(Puritan)라는 말은 원래 가장 악랄한 신앙적 위

선자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C. S. 루이스의 작품 속에 등장하

는 마귀 스크루테이프는 웜우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러한 현대인의

조롱에 만족감을 표현한다. “우리가 그 말(청교도 운동)에 부여한 가치는

지난 백 년 동안 진실로 우리가 얻은 확고한 승리 가운데 하나다.”1) 하지

만 셰익스피어 시대 이후로, 청교도는 성적으로 억압된 재수 없는 사람들

로 여겨졌음을 역사는 보여 준다. 1602년에 초연된 희곡 『십이야』(12夜)에

서, 셰익스피어는 다른 사람들의 흥(興)과 환희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인

말보리오를 조롱할 때 청교도라는 말을 사용했다.

마리아: 백작님, 어떤 때는 (말보리오가) 약간 청교도 같아요.

10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1) C.S. Lewis, The Screwtape Letters (London: Mentor,1988), pp. 38~39.

앤드루 경: 오! 내 생각도 그렇다면, 나는 그(말보리오)를 개처럼 물어뜯 을 겁니다.

마리아: 청교도 마귀는……제멋에 겨워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은 다 자기

에게 있는 줄 알고 자기를 보는 사람은 다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안다오.2)

이로부터 20년 후, 청교도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제임스 1세가 아들 찰스에게 권고할 때 약간 바뀌었다.

교회와 국가의 악질 전염병(또는 흑사병)인 청교도를 조심하라. 청교도

는 은혜에 감사할 줄도 모르고, 서약이나 약속이 소용 없는 사람들이다.

난동과 중상 외에 토해 내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청교도는 미친 사

람들로, 함께 있으면 아주 악명 높은 도둑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더 큰 배

은망덕과 거짓말과 새빨간 거짓 맹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3)

21세기의 많은 독자들은 왜 우리가 청교도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지 무척 궁금해 할 것이다. ‘청교도는 참된 영성에는 관심 없이 공적 종교

성(religiosity)만 고집했던 광신자 집단이 아니었던가?’ 비록 잘못된 편견으

로 치부하더라도, 이런 편견은 쉽게 무시하지 못할 끈질긴 힘을 갖고 있 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독자들에게 다양한 범주에 걸쳐 있는 실질적

인 청교도를 소개하고, 그들이 실제로 했던 말을 살펴봄으로써 청교도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려 주고자 한다. 이것은 청교도의 핵심 작품들에

익숙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자들이 중요한 청교도 문헌에 익숙하 게 되면, 청교도에 대한 아주 건전하고 더 정확한 견해를 갖게 되고, 이

2) William Shakespeare, Twelfth Night (New York: Bantam, 1988), pp. 2, 3, 139~152.

3) Anonymous, A Puritane Set Forth in His Lively Colours (London: n.p., 1642), pp. 2~3.

1.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11

깨달음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현대적 이해에 긍정적인 영향과

도전을 주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우리가 청교도에 대한 비판 없

는 견해를 지지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종종 무시되지만 사실은 아주 중요한 청교도 운동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리는 데 도움을 주기 바란다는 뜻이다.

특정한 청교도의 고전들을 다루는 장으로 이동하기 전에, 몇 가지 배

경을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먼저 청교도라는 명

칭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명칭은 다

양한 사람들에게 무척 다채로운 사실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

서 대략 1550년대로부터 1700년까지의 기간에 존재했던 청교도 운동의

간략한 역사를 개관해 볼 것이다. 이 개관을 통해 독자들은 청교도 운동

이 자라게 된 역사적, 정치적 토양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받게 될 것이

다. 우리는 이어서 청교도 영성에 대한 관념에 관심을 집중하게 될 것인

데, 여기서 청교도들 간에 나타나는 다양한 차이 가운데 몇 가지 공통적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 주장할 것이다. 즉 우리는 청교도를 하나로 묶어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련의 특징들을 살펴볼 것이다. 일단 이 기본

사실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독자들이 청교도 고전들 간에 어느 정도 상

호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청교도라는 이름

우리는 앞에서 루이스, 셰익스피어, 찰스 1세가 보여 준 청교도에 대한 판단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청교도라는 말을 더 깊이 성찰해 보고자 한

다. 어떤 이들이 청교도라는 말을 재세례파나 브라우니스트(Brownists, 독

립주의자)와 같은 지독한 분리주의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4)

12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헨리 파커는 1641년에 다음과 같이 주의를 촉구했다. “영국에서 청교도

라는 이 불쾌한 말을 혼란스럽게 잘못 적용하는 일이 해소되지 않는다

면……우리는 모든 선이 일시에 몰락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5) 역사가 패트릭 콜린슨은 엘리자베스 시대에 청교도로 불

린 ‘열렬한 개신교인들’은 스스로 ‘경건한 자’ , ‘신실한 자’ 또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로 불리기를 더 좋아했다고 분명히 언급한다.6) 어떤 이들은 청

교도라는 말에 멸시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말이 완전히

없어지기를 원했다. 영국혁명이 진행 중일 때, 다른 이들은 이 말을 교회

개혁을 추구하는 애국적인 비국교도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순화시키려 고 노력했다.7)

청교도가 되는 것을 자랑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사가들은 청교도 운동이 17세기에 영국과 뉴잉글랜드에서 상당 한 힘을 발휘한 참된 운동이었다는 데 동조한다. 그러나 청교도라는 이

름이 다양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청교도 운동에 대한 정 의의 일치 여부를 가리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8) 바실 홀이 영국

4) 자일스 위도우스는 자신의 논문 The Sebysmatical Puritan (Oxford; n.p., 1630), p. B2에서 청교도에 속해 있는 열 부류의 사람들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완전주의자, 당파적인 설교주 의자, 분리주의자, 재세례파, 브라우니스트, 패밀리스트, 엄격주의자, 안식일 엄수주의자, 전(前 l)-훈련주의자, 뻔뻔한 예정론자” 가 포함되었다.

5) Henry Parker, A Discourse Concerning Puritans (n.p., 1641), p. 57.

6) Patrick Collinson, The Elizabethan Puritan Movement (Oxford: Clarendon,1967), pp. 22~28.

7) 예를 들어 익명의 저자가 쓴 The Old Puritan, Godly, Honest, and Loyal (London: n.p., 1642)과 존 게리의 The Character of an old English Puritan or Non-Conformist (London: n.p., 1646)을 보라.

8) 청교도 운동을 정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책들을 보라. Basil Hall, “Puritanism: the Problem of Definition,” in Studies in Church History, ed. G. J. Cuming (Edinburgh: Thomas Nelson,1965), 2:283~296; Lawrence A Sasek, Images of English Puritanism: A Collection of Contemporary Sources 1589~1646 (Baton Rouge: Louisiana State University Press, 1989), pp. 1~27; Peter Lake, “Defining Puritanism: Again?” in Puritanism: Trans-Atlantic Perspectives on a Seventeenth Century Anglo-American Faith (Boston: Massachusetts Historical Society, 1993), pp. 3~29; and John Spurr, English Puritanism 1603~1689 (London: Macmillan, 1998), pp. 1~27.

1.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13

의 시민전쟁(1642~1648)이 일어나기 전 인물인 토머스 풀러(1508~1561)와

리처드 백스터(1615~1691)와 같은 인물들을 통해 예증하는 것처럼, 청교도

라는 말은 “교회 정치와 예배의 수정을 바라고 끊임없이 비판하고 때로

는 반역적이기까지 한 영국 교회 교인으로서……그들 스스로는 영국 교

회의 일원이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9) 그러나

이 제한된 정의는 신앙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네덜란드로 망명한 다른

초기의 청교도 동조자들과 플리머스 식민지에 정착한 뉴잉글랜드 경내

의 분리주의자들을 청교도에서 제외시킨다.10)

여기서 학자들의 폭넓은 일치를 이끌어 내는 더 포괄적인 정의를 제시

해 보자. 청교도는 엄밀하게 급진적인 개신교 비국교도들을 가리키는 것

으로 한정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정치적, 교회적, 종교적 차이들을 넘

어서는 일련의 공통적 특징들에 따라 하나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펼친 더

광범한 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11) 우리가 이 책에서 청교도

에 포함시키고 있는 일부 인물들(예, 토머스 보스턴과 조나단 에드워즈)은 1689

년에 관용령으로 종지부를 찍은 청교도의 국교 반대(Puritan dissent) 시대

이후에도 계속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삶과 사역을 통해 청

교도 선조들과 동일한 사고방식, 활력적인 영성, 역동적인 신앙 문화를

보여 주었다. 마찬가지로 리처드 백스터와 존 오웬은 속죄론과 칭의론

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분명한 신학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

9) Hall, “Puritanism: the Problem of Definition,” p. 290.

10)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History of Plymouth Plantation 1606~1647, ed. Samuel Eliot Morrision (New York: Random House, 1952), p. 7에서 플리머스 거주민 가운데 청교도로 불린 사 람들(예, 윌리엄 퍼킨스)을 분명히 청교도에 포함시킨다. 네덜란드 제2종교개혁에 대한 정보 와 이 개혁이 어떻게 청교도 운동에 대한 논의 속에 포함되는지에 대해서는 Joel R. Beeke, The Quest for Full Assurance: The Legacy of Calvin and His Successors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99), pp. 286~309를 보라.

11) Christopher Durston과 Jacqueline Eales, “Introduction: The Puritan Ethos, 1560~1700,” in The Culture of English Puritan 1560~1700, ed. C. Durston and Eales (London: Macmillan, 1996), pp.1~31과 Spurr, English Puritanism 1603~1689, pp. 28~45를 보라.

람 모두 당연히 청교도 지도자로 간주되는 데 있어서는 논란이 없다. 어

떤 정의가 제시되든 이 정의 역시 어떤 면에서 청교도라는 이름으로 소

개되는 인물들 간에 실제적인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 줄 만큼 충분히 신

축적이어야 한다. 존 스퍼가 다음과 같이 말한 ‘청교도 운동의 본질’이 우 리의 의도에 가장 가깝다.

청교도 운동은 자기들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

암아 구원받도록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에 의해 개인적으로 구원받았다

는 사람들의 신념으로부터 나온 운동이다. 그리고 이 택하심의 결과로 청

교도들은 탁월한 경건을 보여 주는 삶을 살고, 신약 성경의 교회를 본보

기로 따르는 교회의 지체가 되고, 자기가 속한 단체와 국가를 기독교 사

회의 한 모델로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한다.12)

이러한 특징들은 주로 신학적이다. 나중에 이 공통적 특징들을 살펴보 겠지만, 우리는 청교도들이 만들어 낸 역사의 발자취를 무시할 수 없다.

비록 청교도 운동이 16세기 유럽에서 신앙적, 사회적, 정치적 사건들을 기반으로 일어났다고 해도, 우리는 영국에 개신교 종교개혁이 시작된 시

점을 청교도 운동의 출발점으로 볼 것이다.

청교도 운동의 간략한 역사(1558~1700)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된 개신교의 원리들은 급속도로 유럽 전역으로 파급되어 헨리 3세 치세(1509~1547)에 영국에 도달했다.13) 영국 왕은 종교

12) Spurr, English Puritanism 1603~1689, p. 5.

13) Carl R. Trueman, Luther’s Legacy: Salvation and the English Reformers 1525~1556

1.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15

개혁에 대한 요구를 가톨릭 교회를 분열시키는 계기로 삼았고, 그리하

여 왕은 법적으로 이혼하여 재혼을 하고, 아들 후계자에 대한 기대를 가

질 수 있게 되었다. 헨리 3세의 병약한 아들 에드워드 6세의 짧은 치세

(1547~1553) 동안, 루터와 칼빈의 신학이 토머스 크랜머(1489~1556) 대주교

를 통해 영국 교회에 도입되었다. 크랜머 대주교는 자신의 작품, 『설교

학』(1547), 『공동기도서』(1552), 『42개조신앙조항』(1553) 등을 통해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영국에 소개했다. 그러나 이 개혁은 메리 튜더(1553~1558)

의 ‘피의’ 통치 기간에 완전히 반전되고 말았다. 메리 튜더는 라틴어 미사

를 다시 시행하고, 토머스 크랜머를 비롯해 270명의 개신교인들을 처형

함으로써 영국의 로마 교황에 대한 충성을 노골화했다.

엘리자베스 여왕(1533~1603)이 1558년에 보좌에 오르자, 메리 여왕의 박

해를 피해 유럽으로 망명했던 많은 사람이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시작

된 개혁이 지속될 것이란 소망을 품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메리 시대의 망명자들’ 가운데 일부를 요직에 임명했지만(6명의

주교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엘리자베스 여왕이 내린 통일령(1659~1662)

이 단지 교회를 ‘절반의 개혁’에만 머물게 했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가톨

릭 사상의 잔재인 성의(聖衣)와 의식들을 영국에서 근절시키지 못했기 때

문이다. 크랜머의 『공동기도서』와 『42개조신앙조항』을 엄격히 이행하라

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요구로는 대륙의 개혁파 교회들에서 선포되고 있

던 성경적 설교 양식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없었다.

감독 제도로 말미암아 묵인된 부도덕하고 무능한 사제들에 의해 저질러

지는 죄악은 끔찍했다. 토머스 카트라이트(1535~1603)는 1570년에 케임브

리지 강좌를 통해 개혁의 길은 제네바에서 시행된, 더 엄격한 장로교 모

델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각인시켰다. 1586년에 발행

16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Oxford: Clarendon, 1994).

된 『교회규율서』가 관심 있는 목사들 사이에 은밀히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말씀 선포와 적절한 성례 거행을 보증하는 등, 공중예배에 대한

새로운 형식을 담고 있었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인 알마다를 패배시킴으로써 가톨릭 교회

의 국제적 위협을 이겨 낸 엘리자베스 여왕은 다시 영국 국교회에 대한

신봉을 강화시키는 데 관심을 돌렸다. 존 휫기프트(1530~1604) 대주교의

주도 아래 새로운 고등종교법원이 개설되어, 1593년에 발효된 <청교도

반대법>을 통해 난동죄와 불충성죄의 죄목으로 수백 명의 청교도 목사

의 직무를 정지시켰다.14) 정직 당한 목사 가운데 일부는 청교도에 동조적

인 신사들(젠트리)의 후원으로 개인 집에서 몇몇 사람이 모이는 설교 강좌

를 통해 계속 설교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비록 엘리자베스 여왕의 교회

개혁에 대한 조직적인 노력이 어느 정도는 성공으로 끝났다고 해도, 개

혁을 지향하는 온건파들의 ‘영적 결속’은 계속 강화되었다. 콜린슨은 ‘청

교도 신학자들의 왕자’로 불리는 윌리엄 퍼킨스(1558~1602)의 설교를 듣기

위해 각지에서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학생들이 몰려든 것이 특히 이 점을

증명한다고 설명한다. 세인트 앤드루스 교회에서 사역하는 동안, 퍼킨스

는 대학출판사를 통해 영국 전역에서 인기리에 읽혔던 개혁신학과 실천

신학에 대한 책들을 출판하는 데 분주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청교도

운동의 태두’인 로런스 채더턴(1538~1640) 역시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채

더턴은 거의 40년 동안 임마누엘 칼리지의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다수의

유능한 차세대 청교도 설교자들을 배출했다.15)

제임스 1세(1566~1625)는 칼빈주의자였기 때문에, 그가 1603년에 권좌에

오르자 획기적인 개혁을 기대하는 청교도들의 희망이 되살아났다. 청교

14)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ed. Henry Bettenson, 2nd ed.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3), pp. 242~243.

15) 청교도 운동의 발전에 미친 케임브리지 대학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Patrick Collinson, The Elizabethan Puritan Movement (Oxford: Clarendon, 1967), pp. 122~130을 보라.

1.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17

도는 영국 국교회의 ‘붕괴를 획책하는 분리주의자’라는 비난이 사라졌고,

청교도 형제단은 천 명의 목사들이 서명한 <천인의 청원서>(1603)를 통해

새 왕에게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청교도들은 세례를 시행하고 성의(聖衣)

사용을 금지할 것, 성찬 전에 자기 성찰을 의무화할 것, 공석 중인 주교들

을 설교에 유능한 목사로 교체할 것, 교회 법정을 통한 평신도의 출교와

사역자들의 직무 정지에 대한 조치를 완화할 것 등을 탄원했다.16)

1604년에 제임스 1세는 청교도들의 청원을 추진하기 위해 햄프턴 궁

전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자신의 왕권이 영국 국교회의 감독제

도와 긴밀하게 결탁되어 있음을 인식한 제임스 1세는 공개적으로 “주교

가 없으면 왕도 없다.”는 말로 자신의 결론을 선포했다. 비록 제임스 1세

가 영국의 설교자들을 돕기 위해 새로운 성경 번역(킹제임스역)에 동조했

다고 해도, 모든 목사에게 영국 국교회의 전례와 통제에 복종할 것을 요 구했다.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제임스 1세는 주교들을 통해 의식을

준수하도록 강요하는 새로운 운동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1604년에서

1609년까지 존 로빈슨(1575~1625)을 포함하여 거의 90명의 목사들이 직무

를 정지당했다. 존 로빈슨은 나중에 영국의 식민지 플리머스의 총독이

되는 분리파 동료, 윌리엄 브레드포드(1589~1657)와 함께 네덜란드로 망

명했던 사람이었다. 1609년에 윌리엄 에임스(1576~1633) 역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쫓겨난 뒤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네덜란드에서 가장 위대한 청

교도 신학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초기의 정직 사건 이후로 제임스 1세는 청교도에 동조적인 의회의 원들의 압력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청교도 목사들에 대해 무척 관대 한 태도를 취했다.17) 도르트 총회(1618~1619)에서 왕이 칼빈주의를 지원 함으로써 그리고 영국 국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청교도의 예배를 가능

16) “The Millenary Petition (1603)” in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ed. Henry Bettenson, 2nd ed.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3), pp. 282~284.

18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하게 하려고 양보의 길을 찾는 온건파 청교도가 더욱 늘어남으로써, 긴

장은 더욱 완화되었다. 온건파 청교도 운동은 1622년까지 임마누엘 칼

리지의 학장이었던 로런스 채더턴과 케임브리지의 홀리 트리니티 교

회와 이후 런던의 그레이스 인에서 설교자로 사역했던 리처드 십스

(1577~1635)가 주도했다. 교회 문제에 대한 십스의 온건한 태도는 찰스 1

세(1625~1640)의 치세 동안에도 설교자로서 큰 인기를 누리는 요인이 되 었다.18)

1625년 찰스 왕과 헌신적인 가톨릭 신자인 헨리에타 마리아의 결혼으

로 인해, 청교도 목사들 사이에 그리고 새 왕이 영국을 로마 교황청에 예

속시킬 것을 우려한 의회 의원들 사이에 즉각 두려움이 고조되었다. 찰

스 왕이 믿을 만한 보좌관으로 1628년에 런던 주교가 된 윌리엄 로드 (1573~1645)를 지명하자 의혹은 더 커졌다. 비록 로드가 교황의 권위를

반대하기는 했지만 다양한 가톨릭 예배 형식을 재도입하고 아르미니우 스 신학을 지지했기 때문에 청교도 목사들은 곤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

었다. 1629년에 찰스 왕이 의회를 해산하고 독재를 시작하자 로드 주교

는 청교도에 대한 가혹한 박해의 끈을 풀어 놓았다. 로드 주교는 예정론

에 대한 설교를 금지시켰고, 청교도의 모든 목사에게 영국 국교회의 공

동기도서를 낭독하고 성의를 착용할 것을 요구했으며, 성찬을 거행하는

동안 평신도에게 무릎을 꿇도록 조치했다. 1633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된 후에, 로드는 청교도들이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을 반대하 기 위하여 직무 정지를 위협하며 매주 『스포츠의 서(書)』를 강단에서 읽

도록 요구했다.19)

로드의 횡포에 위협을 받아 많은 청교도들이 네덜란드나 뉴잉글랜드

17) Spurr, English Puritanism 1603~1689, p. 61.

18) Mark E. Dever, Richard Sibbes: Puritanism and Calvinism in Late Elizabethan and Early Stuart England (Macon, Ga: Mercer University Press, 2000), pp. 27~85.

1.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19

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1630년에, 존 윈스럽(1588~1649)은 7대의 소함대

를 거느린 아벨라 호 선상에서(사이먼과 앤 브래드스트리트 부부와 함께) 청교

도의 매사추세츠로 1차 탈출을 주도했다. 이후 10년간, 존 코튼, 토머스

후커, 토머스 셰퍼드를 비롯한 존경받는 영국의 저명한 설교자들이 만 3

천 명 이상의 이주자들과 함께 뉴잉글랜드로 가는 배를 탔다.20)

1637년 로드가 억압 정책을 강화시킨 결과가 찰스 왕에게 재앙으로

다가왔다. 로드가 비국교도로서 청교도인 윌리엄 프린(1600~1669)의 귀

를 잘라 내고 뜨겁게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 등 잔혹하게 고문한 것은 메

리 여왕 시대에 개신교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한 사실을 기억나게 할 정

도였다.21) 로드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영국 국교회의 제도(주교직제)

를 도입하려고 시도하자 1638년에 스코틀랜드에서는 개혁파 신앙과 교

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민서약>을 채택하는 등 국민적 저항이 일어났

다. 스코틀랜드 맹약파(Covenanters)와의 대결에서 패하고 의회와의 공조

를 거절함으로써 더 큰 반대를 받게 되자 찰스 1세는 결국 1642년 5월에

런던에서 도망을 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동맹을

맺고 청교도 목사들의 지원을 받아 장기 의회(Long Parliament)가 찰스 1세

의 왕권신수설을 거부하자, 영국은 곧 시민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찰

스 1세와 기사당(왕당파)의 세력은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의 탁월한 지

도력과 청교도 군사들로 구성된 신모범군(New Model Army)과 비교가 되지 못했다. 1645년에 의회는 로드 대주교를 반역죄로 체포하여 처형했다.

19) 1618년 제임스 1세가 최초로 발간한 The Book of Sports는 주일에 댄스와 레크리에이션을 실시하도록 장려했다.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pp. 284~286을 보라.

20) John Coffey, Persecution and Toleration in Protestant England 1558~1689 (Harlow, England: Longman, 2000), pp.125~130; Spurr, English Puritanism 1603~1689, pp. 86~93.

21) 시민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된 프린에 대한 박해와 당시의 민심에 대해서는 William Lamont, Puritanism and His torical Controversy (Los Angeles: UCLA Press, 1996), pp. 16~25를 보 라.

20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왕당파의 패배 이후, 찰스 1세는 옥중에서 더 적대적이었던 스코틀랜드

인들과의 비밀 조약을 추진했다. 그러나 시민전쟁을 질질 끌었다는 이유 로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재판을 받아 처형되었다.

영국은 시민전쟁(1642~1648)이 벌어지는 동안, 의회의 주도 아래 백 명

이상의 청교도 지도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여 국가 교회의 새로

운 신앙고백을 입안했다. 비록 공통적으로는 칼빈주의 신학을 지지했다

고 해도, 청교도 간에 국가 장로교회를 옹호한 다수파와 회중의 독립적 권리를 주장한 토머스 굿윈이 이끄는 소수의 독립파(회중파, 조합파) 간에

입장 차이가 드러났다. 청교도들은 결국 절충을 통해 회중적인 장로교회

의 자발적 창설을 지지한다는 합의에 도달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즉각

그 결정을 지지하며 1647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승인했고, 이

신앙고백은 1648년 뉴잉글랜드의 회중파 교회들도 채택했다. 10년 후

곧 1958년에 런던(사보이 궁전 부속예배당)에서 열린 영국의 회중파 교회들

의 집회에서 사보이 선언이 발표될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했

는데, 이때에는 교회 정부에 대한 내용이 삭제되어 일부가 수정된 상태

로 채택되었다.22) 이리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청교도 신학의 교

리적 표준이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공화정 말기에는 비국교

도들 간의 외견상 유대감이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새로운 공화국이 들어

선 이후로, 의회에서 장로교파와 독립파 사이에 정치적 긴장이 점점 고

조되었다. 정치적 교착 상태를 피하기 위해, 크롬웰은 1653년 의회를 해 산하고, 1658년 죽을 때까지 호민관으로서 영국을 다스렸다. 크롬웰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자 거의 모든 종교 분파 사이에 전례가 없는 성장 이 지속되었다. 독립파는 청교도 공동체 내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위치

22) Documents of the English Reformation, ed. Gerlad Bray (Minneapolis: Fortress, 1994), pp. 521~542.

1.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21

를 차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존 오웬은 과거 왕당파의 본거지였던 옥

스퍼드 대학의 명예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새롭게

주어진 종교의 자유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리처드 크롬웰이 아버지

를 계승하여 시도한 일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여러 가지 면에서 정치 위

기가 다시 찾아왔고, 결국 1660년에 전격적으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찰스 2세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영국 국교

회 왕당파는 보복을 위해, 1166년에 정해진 클라렌든법(클라렌든의 백작인

에드워드 하이드 대법관을 따라 이름을 지은)의 일련의 법조항을 통해 국교신봉

을 복원하도록 왕을 압박했다.

그리하여 비국교도의 국교 반대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존 번

연과 리처드 백스터를 포함한 다수의 저명한 청교도 목사들이 박해를 받

고 투옥되었다. 1662년의 <통일령>은 청교도 목사들에게 교파별 규례

시행을 포기하고 <엄숙동맹과 계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대한

서약을 포기하며 주교 제도 아래서 다시 직임을 받으라고 요구했다.23)

거의 2천 명의 목사들(전체 목사 가운데 5분의 1)이 1662년 8월 24일, 성 바돌

로뮤의 날에 <통일령>의 요구에 대한 수용을 거부하고 주교 제도 아래

서 받게 된 자신의 교구를 거절했다. 1664년에는 비국교도들이 집 밖에

서 설교하거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금지하는 <비밀집회금지령

>이 시행되었고, 1665년에는 <5마일퇴거령>을 시행하여 거절한 목사들

이 과거의 교구나 어느 도시 또는 지역의 5마일 이내에 들어오는 것을 금

지시켰다.

비록 청교도들이 강단이나 대학에서 설교하는 것은 금지당했다고 해

도, 억압 정책이 청교도들의 펜을 침묵시킬 수는 없었다. 1662년 이후로

박해의 그늘 아래에서도, 청교도들은 참으로 주옥같은 경건서와 신학 책

23) Documents of the English Reformation, pp. 546~559.

22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을 출판했다(예, 『천로역정』). 비록 청교도 공동체의 소망이 뉴잉글랜드에

서 계속 깜박거리기는 했지만, 청교도 운동의 힘은 구(舊) 잉글랜드 곧 영

국에서는 급속도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대다수 청교도 지도자

들이 1689년 <관용령>이 시행되기 전 윌리엄 왕과 메리 여왕 치하에서

박해로 인해 죽었다. 존 번연, 토머스 굿윈, 존 오웬 등을 비롯한 수많은

청교도가 죽은 뒤에도 교회 경내의 뜰에 장사되지 못하고, 런던의 번힐

필드에 있는 비국교도 특별 묘지에 장사되었다. 1600년대 말엽, 영국교

회를 개혁하려는 수많은 청교도의 열정에 굴복하여 영국 정부는 국교를

반대하는 비국교도 교파들의 존재를 합법적으로 인정했다.

청교도 영성

청교도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청교도들이 교회 문제에 대해 한 가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왜냐하면 청교도들

은 영국 성공회(예, 윌리엄 퍼킨스, 리처드 십스), 분리파(예, 윌리엄 브레드포드), 독립파(예, 토머스 굿윈, 존 코튼, 존 오웬), 장로교(예, 존 하우, 토머스 왓슨) 그리고

침례교(예, 존 번연) 등에 속한 사람들을 망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교

도들은 예정과 같은 영원한 작정 교리에 대해 일치되지 않았다. 왜냐하 면 그들은 돌티안(Dortian) 칼빈주의자(예, 존 오웬과 토머스 굿윈),24) 온건파 칼

빈주의자(예, 리처드 백스터),25) 그리고 심지어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예, 존 굿윈)26)도 있었다. 나아가 청교도들은 정치적으로 보수파에서 진보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파가 있었기 때문에 공통적인 사회 정치적 강령을

24) 이 범주에는 도르트 총회(1618~1619)에서 채택된 조항에 표현된 전적부패, 무조건적 선택,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들의 견인 그리고 제한적 속죄를 인정하는 청교도들이 포함되었다.

25) 백스터의 “온전한 칼빈주의”에 대해서는 Dewey D.Wallace, Puritans and Predestination:

1.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23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종종 청교도 운동 내의 다양성에

시선을 집중하기도 했다.27)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청교도 운동의 다양한

신학적, 정치적, 교회적 흐름들을 하나로 결집시킨 종합 정신을 보여 주

는 일련의 특징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런데 이들 각각의 특징은 상호보

완적이어서, 다른 특징들과 필수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

다. 왜냐하면 모든 특징이 나름대로 청교도의 가치와 신앙의 핵심을 보

여 주기 때문이다.

첫째, 많은사람이청교도운동을영성운동으로이해한다. 윌리엄 할

러는 청교도 설교자들은 회중에게 영적 생활에 대해 설교할 때 ‘형제애 (brotherhood)’를 최고로 쳤다고 주장했다.28) 찰스 E. 햄브릭-스토우는 “뉴

잉글랜드에서 청교도 운동이 발흥한 것은 기독교 영성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29) E. 글렌 힌슨은 한 마

디로 “청교도 운동은 영성 운동이었다.”고 선언했다.30) 포스트모던 사회

에 존재하는 다양한 ‘영성들’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 한 더 깊은 자각을 추구하는 기독교적 영성을 성경에 일치하는 기독교

Grace in English Protestant Theology 1525~1695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82), pp. 132~140을 보라.

26) 제이콥 아르미니우스의 견해에 동조적인 분파주의자 가운데 선두에 섰던 사람이 존 굿윈 (1594~1665)이었는데, 굿윈은 영국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경건과 활동에 대해서는 다른 청 교도들과 같은 입장을 취했지만, 예정론,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는 거부했다. 월리 스도 자신의 저서 De Doctrina Christiana에서 존 밀턴을 그의 진술을 문제삼아 ‘아르미 니우스자’에 포함시켰다. Wallace, Puritans and Predestination, pp. 130~132를 보라.

27) Lenoard J. Trinterud, ed., Elizabethan Puritan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1), p. 9; H.C. Porter, ed. Puritanism in Tudor England (Columbia: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1971), p. 10; Jerald C. Brauer, “Types of Puritan Piety,” Church History 56:1 (1987): 39~58를 보라.

28) William Haller, The Rise of Puritan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38), pp. 49~82.

29) Charles E. Hambrick-Stowe, The Practice of Piety: Puritan Devotional Disciplines in Seventh-Century New England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82), p. 25.

30) E. Glenn Hinson, “Puritan Spirituality,” in Protestant Spiritual Tradition, ed. Frank C. Senn

24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신앙에 입각한 참된 개념으로 보는 것이 요구된다.31) 비록 영성(spirituality)

이라는 말을 청교도들이 빈번하게 쓰지는 않는다고 해도,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고 성경에서 이끌어 낸 믿음과 가치에 따라 형성된 그

리스도와의 일상적 교제를 강조하는데, 이 안에 참된 기독교 영성의 본

질적 요소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32) 이 점은 혹독했던 시민전쟁을 치른

이후의 청교도 운동에 특별히 해당되고, 청교도 혁명에 대한 신학적 논

쟁들에 비추어 볼 때에도 사실이다. 듀이 월리스는 1660년 이후의 청교

도 운동을 설명하면서, “청교도 운동의 중심에는 항상 경건과 영성이 놓

여 있었다……그리고 아주 강력한 청교도 에너지의 원천이 되었다.”고

말한다.33) 청교도 운동 속에 흐르는 영성의 근본 성격은 회심한 영혼이

회심을 넘어서서 실제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일관된 주장 속에서

발견된다. 영적 성장과 점진적 성화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종종 패커가

훌륭하게 분석해 낸 작품인 존 번연의 『천로역정』(1678)에서 예증하고 있

는 것처럼, 순례(pilgrimage)라는 말로 묘사된다.34) 인격적 거룩함이 자라

가는 영성에 대한 청교도의 관심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음 특징으로 우리를 이끈다.

둘째, 청교도운동은근본적으로하나님과의교제를경험하는데강조

점을두고있다. 리처드 F. 러브레이스는 “최근 학자들은 영국 청교도 운 동의 대부분의 역사는 청교도들이 기독교적 경험에 대해 주도적인 강조

점을 두고 있었다는 관점에 따라 검토해 볼 때 가장 잘 이해될 것이라고

(New York: Paulist, 1986), p. 165.

31) 포스트모던 시대의 용도에 입각한 영성의 정의에 대해서는 D. A. Carson, The Gagging of God: Christianity Confronts Pluralism (Grand Rapids: Zondervan, 1996), pp. 555~569을 보라.

32) ‘삶의 한 양식’으로 표현된 ‘일련의 믿음과 가치들’에 따라 영성을 정의하는 것에 대해서는 Alister McGrath, Christian Spirituality: An Introduction (Oxford: Blackwell, 1999), pp. 1~5 를 보라.

33) Deway D. Wallace Jr. The Spirituality of the Later English Puritans: An Anthology (Macon, Ga.: Mercer University Press, 1987), p. 13.

34) 햄브릭-스토우는 순례라는 주제를 ‘청교도 영성에 어울리는 핵심적인 은유’로 간주한다. (The Practice of Piety, p. 54.)

1.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25

결론지었다.”고 진술한다.35) 제프리 너틀은 청교도 운동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운동”으로 정의하고,36) 찰스 햄브릭-스토우는 “

신앙적 경험에 뿌리를 둔 경건 운동”으로 정의한다.37) 리랜드 라이켄은 “

청교도는 실천을 강조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경

험적 성격을 강조했다.”고 말한다.38) 결론적으로 청교도는 기독교 교리

에 대한 지적 동의와 삶의 경험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실천적 결과 사

이의 균형을 추구했다.

이러한 사상은 보통 경험적(experiential)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실험

적(experimental)이라는 청교도들의 용어를 통해 표현되었다. 토머스 셰 퍼드(1605~1649)는 이렇게 썼다. “성도들은 은혜의 역사에 대한 실험적 (experimental) 지식을 갖고 있어서, 그 지식을 통해 그들은 은혜의 역사

를 확실히……우리가 열기를 느낄 때 불이 뜨겁다고 아는 것처럼, 또 꿀 을 맛보고 그것이 달콤하다고 아는 것처럼, 알게 된다.”39) 리처드 십스 (1577~1635)는 “경험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이라고 선언했다.40) 존 번연 (1628~1688)은 나는 “내가 느낀 것, 철저히 느낀 것”을 설교했다고 강조했

다.41) 제임스 매클리어는 이처럼 경험을 강조하는 사상은 “청교도들의 설교, 일기, 전기 등에서 계속 울려 퍼지고

35) Richard C. Lovelace, The American Pietism of Cotton Mather: Origins of American Evangelicalism (Grand Rapids: Christian University Press, 1979), p. 36.

36) Geoffrey Nuttall, The Holy Spirit in Puritan Faith and Experience, 2nd e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p. 134.

37) Hambrick-Stowe, The Practice of Piety, P. ⅶ.

38) Leland Ryken, Worldly Saints: The Puritans as They Really Were (Grand Rapids: Zondervan, 1986), p. 214. 또한 Gordon Rupp, “A Devotion of Rapture in English Puritanism,” in Reformation, Conformity, and Dissent: Essays in Honour of Geoffrey Nuttall, ed. R. Buick Knox (London: Epworth, 1977), p. 120을 보라.

39) Thomas Shepard, The Parable of the Ten Virgins Opened and Applied (1659; reprint, Morgan, Penn.: Soli Deo Gloria, 1990), p. 222.

40) Richard Sibbes, The Complete Works of the Richard Sibbes, ed. Alexander B. Grosart (1862~1864; reprint,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83), 4:412.

생활을 이끌고 회심의 경 26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험 속에서 그 절정을 보여 주며 신앙 생활의 장식품이 아니라 규범에 해

당된다.”고 지적한다.42) 따라서 청교도들은 단순히 신학에 대한 지적 지

식이나 도덕법의 외적 준수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경험을 일상적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헌신에 관심을 두었다.

셋째, 청교도는성경에대한의존을삶의개혁을위한영적지탱과인

도의 최고의 원천으로 삼았다.43) 청교도는 성경을,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에 영적 헌신의 기초를 두었다. 토머스 왓슨은 “매구절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

하라.”고 말했다.44) 존 오웬도 “성경의 전체적 권위는……오로지 그 신적

기원에 달려 있다……성경은 그 저자로부터 전체 권위가 나온다.”고 말

했다.45) 청교도들은 또 성경의 권위는 성경의 무오성으로 말미암아 절대

적이라고 추론했다. 윌리엄 에임스는 성경의 인간 저자들에 대해, “오직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접적이고 무오한 지시로 말미암아 모든

오류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믿음과 행위의 법칙을 기록할 수 있 었다.”고 말했다.46) 리처드 백스터에 따르면, 사도들은 “오류 없이” 성경

을 기록했고,47) 존 오웬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대한 견고하고 무오한 계시”였다.48) 그러나 청교도들은 성경의 무오성에 관심

41) John Bunyan, Grace Abounding to the Chief of Sinners (1666; reprint, London: SCM Press, 1955), p. 124.

42) James Maclear, “The Birth of the Free Church Tradition,” Church History 26(1957): 101.

43) 성경에 대한 청교도들의 관점에 대한 유익한 개관을 위해서는 Allen Carden, “The Word of God in Puritan New England: Seventeenth Century Perspectives on the Nature and Authority of the Bible,”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18 (1980):1~16; and Brian G. Armstrong, “Puritan Spirituality: The Tension of Bible and Experience,” in The Spirituality of Western Christendom, vol. 2, ed. E. Rozanne Elder (Kalamazoo, Mich.: Cistercian Publications, 1984), pp. 243~248을 보라.

44) Thomas Watson, A body of Divinity (1692; reprint, London: Banner of Truth Trust, 1958), p. 25.

45)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ed. William H. Goold, 24 vols. (1850~1855; republished, Edinburgh: Banner of Truth, 1965, 1991), 16:297, 309.

1.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27

을 두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청중에게 성경에 대한 열렬한 갈망을 계발할 필요

가 있다고 강조했다. 존 코튼은 교인들에게 “말씀을 먹고 살라.”고 강조

했다.49) 리처드 백스터는 독자에게 “성경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읽고 연

구하고 순종하고 가까이 하라.”고 당부했다.50) 성경을 영성의 원천으로

본 청교도들의 신념은 각양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통해 그 나라에서 글

을 읽을 수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적절한 헌신의 계기를 얻는 것을 볼

때 증명된다. 이것은 먼저 1560년 메리 여왕의 치세에 망명한 개신교인

들이 만든 『제네바 성경』을 사용할 때 분명히 증명되었지만, 궁극적으로

는 1611년에 제임스 1세의 주도 아래 흠정역 성경이 등장함으로써 확실

히 증명되었다. 청교도들은 흠정역 성경의 번역에 대한 관념을 제공했

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출판하는 데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

다. 왜냐하면 54명의 번역 위원 가운데 절반이 청교도 학자들이었기 때

문이다.51)

청교도들이 성경에 기초한 영성에 집중했다는 사실은 성경을 이해하

고 묵상하는 수단으로서 구두 설교와 기록 설교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더

욱 깊이 찾아볼 수 있다.52) 채더턴은 청교도의 설교 문체를 “평이하나 감

동적인 설교법”으로 불렀다.53) 전형적으로 청교도 설교자의 목적은 청중

에게 자기들의 지식과 학문을 강조하는 데 있지 않고, 성경의 진리를 일 상생활에 적용시키는 데 있었다. 청교도들은 스스로를 회중 가운데 상처

46) William Ames, The Marrow of Theology (1629; reprint, Boston: Pilgrim, 1968), pp 185~186.

47) Richard Baxter, The Practical works of Richard Baxter, ed. William Orme (London: J. Duncan, 1830), 20:115.

48) Owen, Works, 14:273.

49) John Cotton, Christ the Fountain of Life (London: n.p., 1651), p. 134.

50) Baxter, Practical Works, 22:239.

51) Ralph Barton Perry, Puritanism and Democracy (New York: Vanguard, 1944), p. 238.

28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입은 양심과 상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성경의 약을 공급하는 ‘영혼의 의

사’로 간주했다. 이처럼 청교도의 영성은 궁극적으로 성경에 뿌리를 두 고 있었다.

넷째, 청교도는인간의죄악성과하나님의은혜를강조한다는점에서 현저하게아우구스티누스사상을따랐다.54) 청교도 운동은 “주로 아우구

스티누스 사상에 입각한 경건의 경향”을 보여 주었다는 페리 밀러의 주

장에 이의를 제기할 자는 거의 없었다.55) 『고백록』에 감동적으로 진술되

어 있는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가 마음과 영혼의 회심과 묵상을 통한

순결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수많은 청교도의 자서전과 개인 일 기 등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인간은 타락으로 말

미암아 마음속에 구원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를 필요로 한

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루터와 칼빈이 강조하는 입장을 따랐다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윌리엄 퍼킨스(1558~1602)는 『황금사슬』(1591)

에서 원죄를 논할 때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의지는 (타락으로) 참으로 선한 것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52) 청교도의 영성에 대한 설교의 중요성을 확인하려면 J. I. Packer, A Quest for Godliness (Wheaton, Ⅲ.: Crossway, 1994), pp. 277~289; Harry S. Stout, The New England Soul: Preaching and Religious Culture in Colonial New Englan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pp.3~64를 보라.

53) Cited by John Adair, Puritans: Religion and Politics in Seventeenth Century England and America (Gloucestershire, England: Sutton, 1998), p. 92.

54)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에 반대하여, 타락과 함께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선을 행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선언했다. (The Spirit and the Letter 4~11을 보라.) 따라 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계명을 믿을 때나 그 계명에 순종할 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Enchiridion 30~32, 106~107; Confessions 10:29~30, 37을 보라.

55) Perry Miller, The New England Mind: The Seventeenth Century (1939; reprint, Boston: Bacon, 1961), pp. 4~5.

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을 따르는 것을 바랄 수도 없고 또는 전혀 갈망 할 수 없는 불능성을 받았다……그러기에 의지가 선한 것을 철저히 혐 1.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29

오하는, 곧 오직 악한 것을 바라고 의욕하는 내적 반란이 일어난다. 이

로 인해 의지는 하나님께 회심하는 최초의 행위에 있어서 작인(作人)이 아니고 단순한 피동자로 나타나고, 그 자체로 의지는 회심을 일으킬 수

도 없고 하나님의 법에 따르는 다른 내적 및 건전한 순종을 시작할 수도 없다.56)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무능력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

백(1647)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되고 있다.

인간은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써 구원을 가져올 영적 선에 대한 어떤

의지 능력도 상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자연 그대로의 인간은 선을 전적으

로 싫어하고, 죄로 죽은 상태에 있으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자신

을 변화시킬 수도 없거나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떤 준비도 할 수 없다. 하나

님은 한 죄인을 회심시켜 은혜의 상태 속에 들어가게 하실 때, 그를 죄의

자연적 속박의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만 영적으로 선한 것을 자유롭게 바라고 행할 수 있도록 하실 수 있다.57)

청교도들은 인간의 무능력을 강조하기 때문에 인간 본성에 대한 하나

님 은혜의 회복의 필요성도 똑같이 강조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

아 구속받은 사람에게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베푸신다. 그래서 존 코

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 속에

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창출되는,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주하

는 은혜의 영적 은사가 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생겨남

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영적 생명이 태어나 새롭게 되고, 그

56) William Perkins, A Golden Chaine (Cambridge: John Legate, 1591), p. 29.

57) Documents of the English Reformation, p. 595.

30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리하여 교회의 지체로 적합한 상태가 된다.”58) 이 거듭남의 필요성이 청

교도 영성의 지배적인 주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토머스 굿윈은 “거듭난

영혼 속에는 영적 생명의 고유하고 지속적인 원리가 심겨져 연합되어 있

고, 이 원리를 통해 영혼은 영적 생명의 작용에 내적으로 적합하게 되고

힘을 주고 기울어지고 활력 있게 된다.”고 썼다.59) 마찬가지로 존 오웬도

거듭남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거듭남은 새롭고 진실한 영적인 원리가 영혼 속에 심겨지고, 그 기능 곧

영적 생활, 빛, 거룩함, 의의 기능이 이와 반대되는 죄와 하나님에 대한 증

오의 본성적이고 습관적인 원리를 파괴하거나 제거하는 경향이 있고, 적

합하게 된 상태다.60)

이처럼 청교도 영성은 영적 생명을 가진 영혼에 능력을 주는 내면의

새로움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의 결과로만 이해될 수 있다.

다섯째, 청교도는 신자의 삶 속에 작용하는 성령의 역사를 크게 강조 했다. 리처드 백스터는 성령은 “우리의 인도자요 성화자요 위로자”이

기 때문에 성령론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실천적인 항목”이라고 강조했다.61) 청교도들에게 성령에 대한 반성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 하는 데 본질적인-부수적이 아닌-항목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1900년대에 탁월한 프린스턴 신학자 가운데 하나인 B. B. 워필드는 “성 령의 역사에 대한 발전된 교리는 오직 종교개혁의 교리이고, 그보다 구

58) John Cotton, The Covenant of God’s Free Grace (London: n.p., 1645), p. 27.

59) Thomas Coodwin, The Works of Thomas Goodwin, ed. Thomas Smith (1863; reprint,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79), 6:187; Stephen Charnock, The Doctrine of Regeneration (1840; reprint, Grand Rapids: Baker, 1980)을 보라.

60) Owen, Works, 3:218~219.

1.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31

체적으로는 개혁주의의 교리이고, 그보다 더 구체적으로는 청교도의 교

리다.”라고 놀라운 진술을 했다.62) 비록 누군가 워필드의 평가가 과장이

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워필드는 청교도가 성령의 활동에 얼마나 분명히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지를 당연하게 인정하고 있다. 비록 이것이 청교도

가 성령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합리론자였다고 가정하는 많은 사람에게

는 놀라울 수 있겠지만, 역사적 진실이 보여 주는 증거는 이것이다. 20세

기 프린스턴 학자 중 가장 존경받는 사람 가운데 하나인 제프리 F. 너틀

은 지체 없이 다음과 같이 핵심을 말했다. “다양한 함축적 의미를 가지고

[성령]론을 기독교 역사상 다른 17세기에 영국의 청교도보다 철저하고

상세히 다룬 시기는 어느 시기에도 없었다.”63)

청교도 목사와 신학자들은 일관성 있게 성령의 인격과 역사를 새롭게

탐구하는 데 집중했는데, 그 이유는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을 신실하게

양육하는 방법에 대한 안목을 찾았기 때문이다. 성화에 있어서 성령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상이, 모든 영성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다

는 청교도의 믿음 속에 뿌리박혀 있었다. 따라서 청교도들에게는 영성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활동으로서 하나님이 시작하

신 방법이었다. 이 책의 내용을 통해 독자는 청교도들이 자기들의 생각

을 성령의 고상한 견해를 따라 알게 된 지식으로 채우려고 시도한 창조

적인 방법들을 접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청교도들의 관심

은 그 주제에 대해 저술한 방대한 양의 논문들로 증명되는데, 그 중에서

도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는 토머스 굿윈의 『우리의 구원에 미치는 성령

의 역사』(1663)64)와 존 오웬의 『성령론』(1674)65)이다.

61) Baxter, Practical Works, 1:69.

62) B. B. Warfield, introduction to Abraham Kuper, The Work of the Holy Sririt, trans. Henri De Vries (London: Funk & Wagnalls, 1900), p. 38.

63) Geoffery F. Nuttall, The Holy Spirit, p. 28.

32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여섯째, 청교도는 영국 국교회 안에서 조장된 전례 중심의 가톨릭 영

성을크게기피했다. 청교도는 ‘로마가톨릭의’ 경건 형식으로 낙인을 찍

은 것 곧 리처드 러브레이스에 따르면, “교회의 경건한 삶을 위한 가구가

아니라 교회에서 벗겨 내야 할 일종의 녹으로”66) 간주한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예를 들어, 로마가톨릭의 경건 습관이 영국에 유입된 것을 반

대하여, 헨리 버튼(1578~1648)은 다음과 같이 썼다.

스스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는 자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

에서 토해 낸 맹목적이고 미신적인 헌신이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불이

나와 태워 버린 엘리야의 희생제물처럼 계몽적이고 참으로 신앙적인 헌

신이 있다. 그러나 옛 뱀은 진정한 헌신의 금잔 속에 집어 넣었을 때처럼, 사람들의 생각 속에 악랄하게 홀리는 것을, 흔하고 효과적으로 집어넣지

못한다……성 프란시스와 성 도미니크는 자기들을 따르도록 이끌었고, 그것은 모두 그들이 깊은 헌신을 강력하게 구현한 결과였다.67)

영국 국교회의 경건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또한 ‘교황 종교’의 서약, 서 품, 금식과 고행 등을 “죄를 죽이는 잘못된 방법과 수단”으로 거부하는

존 오웬의 사상 속에서도 증명이 된다.68) 왜냐하면 오웬이 “신자 안에 내

재하는 죄를 죽이는 법”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도록 자극을 받은 것은 “그

리스도나 성령을 전혀 의지하지 않는 이런 외적 노력들, 이런 육체의 수

고들, 이런 자기 수행들, 이런 단순한 율법적 의무들”이었기 때문이다.69)

64) Goodwin, Works, 6:1~522.

65) Owen, Works, 3:1~651.

66) Richard C. Lovelace, “Puritan Spirituality: The search for a Rightly Reformed Church,” in Christian Spirituality: Post-Reformation and Modern, ed. Louis Dupre and Don E. Saliers (New York: Crossroad, 1989), p. 296.

67) Henry Burton, A Tryall of Private Devotions (1628; reprint, Norwood, N. J.: Walter J. Johnson, 1977), p. C-1, quoted in Lovelace, “Puritan Spirituality,” p. 297.

1.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33

따라서 성경적인 영성에 대한 청교도의 열심은 부분적으로는 영국 교회

안에서 발견된 가톨릭 교회 경건의 다양한 요소들을 반대하는 노력의 일 환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일곱째, 청교도 운동은 또한 부흥 운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패커는 “

영적 부흥은 청교도들이 목표로서 고백한 핵심 주제였다.”고 말함으로

써 이 사실을 크게 강조한다. 패커는 부흥을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성

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그리스도를 믿는 살아 있는 믿

음으로 이끌고, 나태하고 활력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생명을 새롭

게 하는 역사”로 정의한다.70) 패커는 청교도 운동을 세 가지 증거에 따

라 ‘부흥 운동’으로 정의한다. 첫 번째 증거는 비록 ‘부흥’이 청교도들의

작품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촉진시켜

야 할 마음과 생명의 내적 새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개혁하다(reform), 개

혁(reformation), 개혁된(reformed)’이라는 말들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청교

도들은 지배자들에게는 “나라를 개혁하도록,”71) 시민들에게는 “신앙의

개혁”을 촉진시키도록,72) 그리고 아버지들에게는 “가정을 개혁하도록”73)

권면했다. 리처드 백스터는 목회 사역에 대한 걸작인 『참된(개혁된) 목자』

(1656)를 출판했을 때, 목사들에게 교리에 있어서 칼빈주의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활력과 열심과 목적에 있어서 새롭게 되라고, 다시 말하면,

68) Owen, Works, 6:16.

69) 같은 책, 6:17.

70) Packer, Quest for Godliness, pp. 36~37.

71) the preface Geneva Bible addressed “To the Most Virtuous and Noble Queen Elizabeth” (1560) in Documents of the English Reformation, ed. Gerald Bray (Minneapolis: Fortress, 1994), p. 358을 보라.

72) “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 1643,” in Documents of the English Reformation, ed. Gerald Bray (Minneapolis: Fortress, 1994), pp. 483~484.

73) The promise made by the church of Dorchester in 1677 according to the records of the First Church in Dorchester (Boston, 1891), p. 19, quoted in Packer, Quest for Godliness, p. 36.

34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부흥된(revived) 자가 되라.”고 권면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두 번째 증거는 “인격적 부흥이 청교도 경건 문헌의 중심 주제였다.”

는 것이다.74) 출판된 수많은 설교, 경건 안내서, 회심에 대한 논문, ‘감동

적인 실천적 저술가들’의 자서전이 이러한 주장을 대변한다.75)

마지막으로 청교도 운동이 부흥 운동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세 번째 증

거는 “청교도 목사들의 사역은 하나님 주도 아래 부흥을 일으켰다.”는

것이다.76) 패커는 1570~1590년 사이에 신실하게 사역했으나 ‘결국은 아 무 열매가 없었던’ 리처드 그린햄의 사역과 키더민스터에서 1641~1660

년(청교도 혁명 동안)에 ‘그의 사역을 통해 회심한’ 사람이 무려 2천 명이나

되었던 리처드 백스터의 사역의 부흥 비결을 대조시킴으로써 이 점을 예

증한다.77) 이것은 수시로 영국에서 청교도 운동의 결과로서 부흥이 일어

났다는 것을 입증한다. 따라서 월리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18세기 복음 주의의 부흥”은 “신앙적 죽음의 세대를 일깨운 새 출발”이 아니라 오히

려 청교도들의 “17세기의……영성의 부흥의 연장선”으로 간주되어야 한

다.78) 이것은 리처드 러브레이스가 청교도와 영적 부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책 마지막 장에서 내세우는 주장이다.

이제 이상에서 강조한 특징들을 하나로 묶어 재음미해 보자.

• 많은 사람이 청교도 운동을 영성 운동으로 이해한다.

• 청교도 운동은 그 핵심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경험을 강조한다.

74) Packer, Quest for Godliness, pp. 38~39.

75) Richard Baxter, Baxter’s Practical Works (1673; reprint, Ligonier, Penn.: Soli Deo Gloria, 1990), 1:732. “아무리 빈약한 서재라도” 성경, 용어 사전, 건전한 주석, 몇 가지 영어 교리문답 이 소장되어 있어야 한다고 진술한 다음, 백스터는 약 60권을 언급했는데, 그 중에 청교도가 쓴 작품은 3권에 불과했다.

76) Packer, Quest for Godliness, p. 42.

77) 같은 책, pp. 43~44.

78) Wallace, Spirituality of the Later English Puritans, p. 12.

1.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35

• 청교도들은 영적 지탱과 삶의 개혁을 위한 인도의 최고의 원천으로

서 성경을 의지하는 데 일치되었다.

• 청교도들은 현저하게 인간의 죄인 됨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을 견지했다.

• 청교도들은 신자들의 삶에 미치는 성령의 역사를 크게 강조했다.

•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 안에서 자라난 가톨릭 교회의 전례 중심적

인 영성에 큰 혼란을 느꼈다.

청교도 운동은 또한 부흥 운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상의 7가지 특징은 청교도들의 부흥과 인격적 경건에 대한 정신을

잘 포착하면서도 그들 간에 존재했던 신학적, 정치적, 교회적 차이점들

을 간과하지 않도록 이끈다. 이 책에 소개되고 있는 작품들은 모두 청교

도 작품들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작품이 성경의 선포에 기초를 두고 성

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기독교적 경험과 통일된 부흥을 강조함으로써

공통적인 영성의 맥락에 서 있기 때문이다.

청교도 고전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청교도의 의미를 정의해 보았

다. 그러나 청교도 운동의 본질을 경험하는 최상의 길은 청교도 고전의

본문들을 읽어보는 데 있음을 깨닫는다. 만일 청교도 고전이 모든 시대

를 망라해서 대중성을 갖고 있는 작품을 의미한다면, 그 안에 드는 작품

은 우리가 이 책에서 엄선한 작품들 가운데 몇 권으로 한정될 것이다. 번

연의 『천로역정』과 밀턴의 『실낙원』을 빼면,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대다

수 고전은, 원본이 출판된 이래로 수많은 재판이 나온 책들이 대부분이

36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기는 해도, 그 익숨함보다는 오히려 방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선정되었

다. 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 각 고전은 미래 세대에 대해 중대한 약속을

제공하는 것만큼 과거 세대에 큰 도움과 자양분이 되었던 작품들이다.

이 책들이 현대에 방치되고 있다고 해서 이 책들이 받아야 할 관심을 박 탈해서는 안 된다.

현대에는 어떤 작품이 서구 문헌의 표준이 되는지 곧 모든 식견 있는

독자가 공감하는 친숙한 작품이 되는지 의심하는 논쟁들이 난무하고 있 다. 가르치는 자들은 선택의 어려움과 편견에 대해 잘 알고 있다.79) 그럼

에도 불구하고 학자의 업무 가운데 하나는 광범하게 읽고 어떤 책이 최

고의 문헌인지 찾아내 평신도 시대에 가치가 있는 엄선된 도서목록을 제

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 책에서 우리는 청교도와

그들에 대한 아주 중요한 기고문으로 간주되는 것을 스스로 찾아보도록

여러분을 초대한다. 궁극적으로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지적 소양을 위

해 작품들을 읽을 때 그 중 어느 작품이 참된 고전인지 결정하는 것은 독 자 여러분의 몫이다. 이것은 확실히 이 책의 기고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왜냐하면 각각의 경우에 그들이 소개하는 작품은 어떤 면에서 그들 자신

의 삶 속에서 그들 개인의 고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의 주관심사는 여러분 스스로 원본 작품을 읽어 보도록 자

극하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고전이란 “누구나 읽어 두어야겠다

는 생각을 하면서도 읽고 싶은 생각이 없는 그런 책이다.”라고 말한 마크 트웨인의 경구가 많은 사람에게 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이유 로 이 책의 많은 장들, 특히 읽는 것이 더 어려운 작품을 다루고 있는 장

79) Herold Bloom, The Western Canon: The Books and School of the Ages (New York: Harcourt Brace, 1994), pp. 15~39; Lillian S. Robinson, “Treason Our Text: Feminist Challenges to the Literary Canon,” in The New Feminist Criticism: Essays on Women, Literature, and Theory, ed. Elaine Showalter (New York: Pantheon, 1985), pp. 105~121에 있는 다양한 견해를 보라.

1.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37

들은 실제 작품을 개관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 비록 수천

페이지를 망라하는 이 책의 고전들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해도, 단순히

이 책 곧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를 읽어 보기만 해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원본을 읽을 수 없는 자들에게 이 책의 본문들은

그렇지 않으면 차지할 수 없는 청교도의 지혜와 신학의 엄청난 보물을

소유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작품을 선정하는 과정은 포함될 수 있는 작품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

에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윌리엄 거널의 『전신갑주를 입은

그리스도인』, 스티븐 차녹의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그리고 존 프레스턴

의 『성도의 매일 운동』을 비롯해 이 책에 포함되지 않은 많은 다른 청교

도 작품들도 청교도 고전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다. 이 작품들이

선택된 것은 청교도 전체 역사를 통해 나타난 다양한 주제들을 제공하려

고 시도한 결과 때문이다.

확실히 수 세기 이전의 고전의 본문을 읽을 때에는 직면하는 어려움이

많다. 이 책의 논문들은 저자들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 안에서 그

들의 의도를 조명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작품을 소개함으로써 이런 어려

움을 어느 정도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현대의 독자는 종종 저자가 살았

던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뿐

만 아니라 그 의도를 현대의 생활에 적용하는 법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도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시대와 상황의 변화로 말미암아, 우리는 청교

도 저자들의 메시지를 통해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의 모든 면에 동

조해야 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청교도 고전 가운

데 어느 하나도 학계의 엘리트를 위해서만 보존되어야 한다고 믿지 않는

로잡은 청교도 원본들을 몇 권 읽어 보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이다. 우리

는 여러분이 원본의 본문을 읽어 볼수록 청교도들을 오늘날 우리 시대의

기독교 신앙과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건전한 대화 파트너로 간

주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C. S. 루이스는 “신간을 그릇되게 좋아하고 고전을 싫어하는 것이 신

학에서만큼 성행하는 분야도 없다.”고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80) ‘고

전’이 특별히 우리를 위해 주어진 책은 아니라고 해도, 그 책들의 저자가

우리와는 동일한 문화적 장애들로 제한을 받는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 아주 강력하게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전을 멀리하는 것

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루이스는 강조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우리 시대의] 이러한 맹목성을 충분히 피할

수 없지만, 우리가 단지 신간만 읽는다면 이러한 맹목성은 확실히 더 증

가하고, 그것을 방비하는 데 있어서도 취약할 것이다. 만일 이 책들이 참

되다면, 이미 절반은 알려진 진리들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반면에

거짓이라면, 우리기 이미 위험스럽게 겪었던 오류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

다. 이에 대한 유일한 대비책은 여러 세기 전의 깨끗한 바다의 미풍이 우

리 지성을 통과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고전을 읽음으로써 이루

어질 수 있다. 물론 과거에 어떤 마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 사람

들이 오늘날 사람들보다 더 똑똑한 것도 아니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많

은 실수를 범했다. 그러나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우리

가 이미 저지르고 있는 오류들을 보고 우리에게 우쭐대지 않을 것이다.

자기들이 범했던 오류가 오늘날 나타나고 명백해진다고 해도 우리를 위 험에 빠뜨리지 아니할 것이다……확실히 미래의 책들도 과거의 책들만

80) C. S. Lewis, “On the Reading of Old Books,” God in the Dock: Essays on Theology and Ethics (Grand Rapids: Eerdmans, 1970), p. 201.

1.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39

큼 훌륭한 교정책이 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미래의 책들을 수중

에 넣을 수가 없다.81)

우리는 ‘현대 지상주의(chronological snobbery)’로 부르는 것에 연루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현대 지상주의란 우리가 어리석게도 우리 시대가 정

확한 교정책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다른 세대

의 사람들이 쓴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이전에 숨겨져 있었던 것을 보게 되

고, 어둠을 피하는 최상의 길은 불을 켜게 된다. 이 책이 여러분에게 청

교도의 세계를 조명하는 스위치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81) 같은 책, p. 202.

40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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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교의

기술

윌리엄 퍼킨스(1558~1602)

윌리엄 퍼킨스는 당대에 가장 널리 읽힌 설교가 중 하나이며 엘리자베

스 시대의 걸출한 신학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교도 책을 꾸준히 사서 보는 이들조차 퍼킨스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

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오웬, 백스터, 십스 같은 저명한 청교도들의 저

술과는 달리 퍼킨스의 작품은 19세기와 20세기에 청교도 저작 복간이 붐

을 이루었던 시기에도 실제 거의 복간되지 않은 탓에 있다.1)

또다른 이유는, 44년(1558〜1602)밖에 안 되는 짧은 생애가 공교롭게도

종교적으로 격동기였던 엘리자베스 1세 시대(재위: 1558〜1603) 전체와 거

의 맞물려 있는 이 윌리엄 퍼킨스라는 사람을 정확히 어떻게 이해할 것

인가 하는 곤혹스러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케임브리지 대

1)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예외도 있다. William Perkins, A Commentary on Galatians, ed. Gerald Shepard (New York: Pilgrim, 1989); William Perkins, A Commentary on Hebrews 11, ed. John Augustine (New York: Pilgrim, 1991); William Perkins, The Work of William Perkins( 몇 가지 잘 알려진 본문을 모아 편집한 선집), ed. Ian Breward (Appleford, England: Sutton Courtenay, 1970).

학 크라이스트 칼리지의 위대한 청교도 지도자 로런스 채더턴 밑에서 신

앙을 갖게 된 퍼킨스는 대학에 머무는 동안 케임브리지와 잉글랜드 남동

부 간에 벌어진, 예복과 교회 운영에 대한 논쟁을 겪으며 성숙해졌다. 그

가 눈을 감은 때는 청교도들이 더 분명하게 저항했던 시기인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 및 찰스 1세 치세 이전이었다. 퍼킨스는 항상 자신을

영국 국교회의 충직한 일원으로 여겼고 엘리자베스 시대의 안정이나 교

회 통치, 국교회기도서 등을 직접적으로 찬양한 적은 없지만 영국 국교

회에서 이탈한 사람에게는 누구든 조롱을 퍼부었다. 퍼킨스는 국교회를 “하나님의 들판”이라고 여겼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살펴보고 있는 이 청교도 고전의 책 제목인 『

설교의 기술』(Arte of Prophesying, 1592)이라는 말만 봐도 퍼킨스에게 청교도

적인 면모가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3)

여기서 ‘설교’로 번역된 단어인 ‘prophesying’이란 말은 깊이 있는 설 교, 올바른 교리를 전하는 동시에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주권적 은

혜를 찬양하는 설교를 가리키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표현이다. ‘설교 운

2) 예컨대, William Perkins, “The Symbol: An Exposition of the Creed,” The Workes of the Famous and Worthie Divine William Perkins (Cambridge: Legate, 1616〜1618), 1: 310〜312를 보라. 앞으로는 Legate 판 3권짜리 원본은 간단히 퍼킨스의 이름, 논문 제목, 권수 및 쪽수 순으 로 제시할 것이다.

3) Perkins, “The Arte of Prophesying,” 2: 644〜673. 재판: William Perkins, The Art of Prophesying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96), pp. 3〜79. 재판에는 퍼킨스의 “The Calling of the Ministry”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재판이므로 이 글 전체에서는 재판을 언급할 것이다. 재판은 대개 원문을 그대로 따르되 보통 문법을 현대적으 로 바꾼다. 따라서 표현이 현대 독자들에게 맞도록 약간씩 바뀐 곳들이 있다. 삭제된 부분 가

운데 필자가 보기에 그대로 두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대목은 원문 673쪽에 퍼킨스가 자신 의 사상 형성에 도움을 준 이들을 열거한 결어 부분이다. 열거된 면면들을 보면 그 깊이와 폭 이 참으로 놀랍다. “아우구스티누스, 헤밍구스(Hemingus), 히페리우스(Hyperius), 에라스무스 (Erasmus), 일리리쿠스(Illyricus), 위간두스(Wigandus), 야코부스 마티아스(Jacobus Mathias), 테오도레 베자(Theodore Beza), 프란키스쿠스 유니우스(Franciscus Junius).”

동(prophesying movement)’은 엘리자베스가 1560년대 초반에 시행한 ‘종교 2. 설교의 기술 45

법령(settlement of religion)’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자신들의 개혁주의적 말

씀 설교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는 한 방식이었다. 이런 운동은 엘리자베

스의 이복 동생 에드워드 6세의 재위 기간에 나온 ‘설교집(homilies)’을 단

순히 읽는 것만 가지고(이들 자신에게는 아무 상관 없었지만) 살아 있는 설교를

완전히 대체해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국교회 기도서』의 주된

저자인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가 대부분을 쓴 이 ‘설교집’은 설교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록한 설교문이었다. 그 까닭은 크랜머를 비롯해 휴 래티머, 니콜라스 리들리, 존 후

퍼 등 초기의 영국 종교개혁가들이 16세기 중엽의 전반적인 설교 수준을 매우 형편없다

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 설교집의 저자들 자신도 이것을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하다

고 생각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1575년에 ‘설교자들’과 그 밖에 교회의

안녕을 해치는 자들을 근절시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캔터베리 대주교 에

드먼드 그린달을 질책했다.4)

그러나 그린달은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고 설교 초보자들에게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는 그런 집회야말로 스위스와 독일의 개혁 운동에

있어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된 것처럼 영국을 진정으로 개혁된 나라로

만드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5)

그린달은 심지어 엘리자베스에게 기꺼이 이렇게 간언했다.

폐하께서는 공적인 권위로 경건한 설교문들을 읽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 분하다고 생각하시지만 제 생각은 지난번 폐하를 알현했을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설교문을 읽는 것도 나름대로 유용하지만 직접 설교하

4) Patrick Collinson, Archbishop Grindal: 1519━1583 (London: Jonathan Cape, 1979), pp. 219 〜252를 보라.

5) 퍼킨스의 『설교의 기술』 각 장과 더불어 개혁주의적 ‘설교’에 대한 설명을 실은 종교개혁 시대의 설교에 대한 한 흥미로운 연구서를 보려면, Hughes Oliphant Old, The Reading and Preaching of Scriptures in the Workshop of the Christian Church Volume 4: The Age of Reformation (Grand Rapids: Eerdmans, 2002), 그 중 특히 pp. 50〜52, 251 〜269를 보라.

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경건한 설교자는……시대와 장소와

듣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설교 내용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설교

문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권면이나 책망이나 설득의 말을 더 애정

어린 마음으로 할 수 있으니 듣는 이의 마음을 감화시킬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설교집은 폐하의 동생 시대에 설교자가 부족해서 임시 방편으로

경건한 주교들이 고안해 낸 것이니 법으로 이를 권장할 것이 아니라 오

히려 설교에 자리를 양보해야 마땅하며……또 설교집 자체만으로 영국

국교회를 위한 가르침을 충분히 다 담고 있다고 여겨진 적도 없습니다.6)

퍼킨스도 명백히 이 같은 견해에 동감했다. 퍼킨스는 심지어 언젠가

몇몇 자기 제자들이 “루터, 칼빈, 부처, 마터 등과 같은 개혁자 즉, 주님

이 종교개혁을 위해 일으키신 잘 알려진 분명한 빛”을 등한시한다고 탄

식했다.7)

퍼킨스가 개혁주의적 설교 같은 주제를 거론하며 이를 ‘prophe-sying’

이라고 일컬은 것은 권력의 미움을 살 만한 위험을 내포한 일이었다. 사

실, 이 작품이 1590년대에 (라틴어로) 처음 나왔을 때는 그린달은 눈을 감

고 존 휫기프트가 캔터베리 대주교로 있던 때였다. 휫기프트는 교리 면

에서는 칼빈주의자였지만 엘리자베스의 방침을 따라 그녀의 종교 법령

에 완전히 순응하고자 했다.8)

앞에서 지적했듯이, 퍼킨스가 살았던 기간은 엘리자베스 1세의 재위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9)

6) Edmund Grindal, Remains (Cambridge: Parker Society, 1843), p. 382.

7) Perkins, “An Exposition of the Whole Epistle of Jude,” Works, 3: 2: 552.

8) Patrick Collinson, The Elizabethan Puritan Movemen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7), pp. 432〜467; H. C. Porter, Reformation and Reaction in Tudor Cambridg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8), pp. 277〜343을 보라.

9) 현대의 퍼킨스에 대한 전기적 묘사를 보려면, Porter, Reformation and Reaction, pp. 288 〜313과 Ian Breward, “General Introduction,” The Work of William Perkins, pp. 1〜129 를 보라.

2. 설교의 기술 47

그토록 짧은 생애 동안 퍼킨스는 많은 양의 저작을 남겼다. 학문적 연

구에 이용되는 표준 판본인 리게이트 판(초판 1608〜1609, 재판 1616〜1617)은

2절판으로 된 세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케임브리지의 그레이

트 세인트 앤드루스 교회에서 시민과 학생으로 이루어진 청중에게 설교

와 강의로 전해진 이 논문들은 그가 직접 집필한 글과 강의 노트에서 나

온 내용, 사후 유고로 출판된 내용 등을 담고 있다. 1584년에서 1602년까

지 18년간의 사역 기간을 망라한 이 출판된 논문들은 예정론에서부터 가

정을 올바르게 이끌어 가는 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어 그의 놀라우리만큼 다양한 관심의 폭을 보여 주고 있다.

퍼킨스의 명성은 그가 사랑한 조국 잉글랜드의 국경 너머로 널리 확산

되었다. 다른 나라의 성직자들은 그의 논문들을 재빨리 네덜란드어, 독

일어, 폴란드어를 비롯한 수많은 언어로 번역했다. 그의 조국에서는 그

의 저작들이 얼마 안 가 칼빈의 명성을 무색하게 할 만큼 잘 팔려 ‘경건

한 이들’의 서가에 가득 꽂혔다. 그런데 다소 놀라운 점은 광범위한 논의

주제들을 감안하면 퍼킨스 자신의 신학적 해석은 대체로 일관성이 있다

는 사실이다.

퍼킨스와 친숙한 사람은 누구나 아마 17세기에 그의 전기를 쓴 토머

스 풀러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퍼킨스는] ‘저주하다

(damn)’라는 단어를 청중의 귀에 한동안 우울한 메아리를 남길 만큼 아주 힘주어 발음하곤 했다. 크라이스트 칼리지의 한 교리문답 교사가 십계

명을 강해하면서 계명을 뼈에 사무치도록 실감나게 적용하는데……거

의 청중의 마음을 땅에 떨어지게 했다가 다시 똑바로 세울 정도였다.” 이

말만 놓고 설교자 겸 목회 상담가로서의 퍼킨스의 면모를 평가하는 데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풀러는 이 불 같은 젊은 케임브리지의 지도 교수

그레이트 세인트 앤드루스 교회에서 더 성숙한 설교자, 목회자가 되 었다고 곧바로 덧붙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이가 들자 그는 목소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리를 바꾸고 이전의 경직성을 많이 누그러뜨렸으며 종종 은혜를 설교하

는 것이 복음 사역자의 올바른 소임이라고 공언하곤 했다.”10)

참으로 한 세대 전체의 설교자들이 퍼킨스의 영향을 받았다. 해석학과

설교학에 대한 이 작은 논문만이 아니라 퍼킨스의 엄밀하고 가슴을 파

고드는 설교와 더불어 그 자신의 깊은 경건함을 통해서도 그러했다. 페

리 밀러, 내픈 등과 함께 청교도 연구를 다시 학문적 영역에서 되살려 내

는 데 큰 역할을 한 윌리엄 할러는 채더턴과 그의 제자 퍼킨스 같은 이

들의 가르침을 흡수한 이 젊은 세대의 설교자들을 지칭하는 “영적 형제

(spiritual brotherhood)”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11)

사실 ‘출중한 청교도들’의 계보는 직접적으로 퍼킨스의 사역에서 나왔 다. 퍼킨스 자신이 그레이트 세인트 앤드루스 교회의 후임자 폴 베인스

의 영적인 각성에 기여했고, 다음으로 베인스는 리처드 십스의 영적 각

성을 목도했으며, 십스는 존 코튼, 코튼은 존 프레스턴, 프레스턴은 토머

스 셰퍼드와 토머스 굿윈의 회심을 각각 보았다.

퍼킨스는 『설교의 기술』 서문에서 하나님은 설교를 “온 교회를 한데

모으고 주님의 양 우리에서 늑대들을 쫓아내는 데 유용한” 방편으로 사

용하신다고 역설했다. 설교는 영혼을 사로잡아 ‘우리의 고집 센 마음’을

굴복시키고 사람들의 삶을 ‘불경하고 이교적인 생활 방식에서 그리스도

인다운 믿음과 회개의 삶으로’ 변화되게 한다. 따라서 교회가 성령께 받

은 온갖 은사 가운데서도 ‘설교’가 ‘가장 탁월’하다고 그는 믿었다. 더 나

아가 우리는 이 위대한 은사를 결코 소홀히 대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10) Thomas Fuller, The Holy State and the Profane State, ed. J. Nichols (1648; reprint, London: William Pickering, 1840), 2: 81.

11) William Haller, The Rise of Puritanism (New York: Harper, 1938), pp. 49〜82.

으로 영혼들을 목양할 이들의 사명이 내포한 ‘어마어마한 책임’과 어려 움을 깊이 숙고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엄숙하고 공적인 말씀 선포’는 ‘ 2. 설교의 기술 49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 이웃을 구원하는 일’과 관계된다. 이토록 중대

한 은혜의 방편에 대한 논의를 경멸하는 자들은 스스로 ‘경건하고 마음

이 온유한 이들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셈이다.

퍼킨스에게 있어서 그런 설교는 주님께 무언가 새로운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성경 안에 주신 말씀을 정확하게 다루는 것이

다.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볼 내용도 바로 설교에 대한 이런 관점이다.12)

내용으로서의 정경

종교개혁의 표어인 ‘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i),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은 퍼킨스가 생각하는 성경적 설교의 양대 주춧돌 역할을 한다. “말씀 설

교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설교하는 것을 말한다.

설교를 통해 말씀을 듣는 이들은 은혜의 상태로 부르심을 받아 은혜 안

에서 보존하심을 입는다.”13)

많은 성구를 인용하면서 퍼킨스는,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설교의 가장 중요한 기초를 이룬다는 논증으로 자신의 권면을 끝맺 는다. 이를테면 그는 로마서 10장 14절을 인용한다. “그런즉 저희가 믿

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 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이 기회에 책의 형식적 특징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퍼킨스가 계속해서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각각의

정의를 정연하게 구분짓는 모습을 변함없이 보게 될 것이다. 그가 살았

던 시대(이른바 영국 르네상스의 황금기)를 감안해 본다면, 퍼킨스가 튜더 왕

12) Perkins, Art of Prophesying, pp. 3〜5.

13) 같은 책, p. 7.

50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조 시대에 케임브리지에서 받은 교육에는, 비록 때로는 부조화를 이루기

도 했지만 대개 서로 잘 들어맞는 매우 다양한 학문적 방법론 및 형식들, 다시 말해 옛 스콜라 철학과 북구 르네상스의 기독교 인문주의14), 프랑스

의 칼빈주의 논리학자 페트루스 라무스의 철학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퍼킨스는 결코 형식을 바탕으로 내용을 결정하지 않고 오히려 형식이 내

용에 대한 청중의 관심을 유도하도록 배려했지만, 그의 저작들은 실제로

방금 언급한 형식적 요소들 모두를 보여 준다.15)

이를테면 퍼킨스가 『설교의 기술』에서 분류, 정의, 논증 등과 같은 라

무스 논리학의 일정한 기법을 상당히 많이 사용한 사실은 매우 분명하

지만 그의 신학적 인식은 칼빈의 것을 따랐다. 퍼킨스와 라무스 논리학

과의 관계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도널드 매킴은 이 사실을 분명히 인정한

다. “청교도들이 받아들인 라무스 논리학이 청교도 신학의 내용에 영향

을 준 것은 아니었다. 영국 청교도들의 신학의 원천은 파리의 라무스보

다 제네바의 칼빈에게서 더 많이 나왔다.”16)

라무스 논리학이 퍼킨스에게 미친 영향은(적어도 이 책에 있어서는) 논증

내용 전체에 명료성과 설득력을 한층 높인 점이었다.

라무스 논리학의 기법을 활용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퍼킨스는 성경만

이 ‘경건함과 합치되는 진리를 하늘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임을

보여 주기 때문에 ‘설교의 유일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주장했

14) 청교도와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서를 보려면, Margo Todd, Christian Humanism and the Puritan Social Ord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를 보라.

15) 당시의 케임브리지 대학이라는 배경과 관련해서 퍼킨스에 대해 일반적으로 소개한 글을 참 고하려면, Protestant Scholasticism: Essays in Reassessment, ed. Scott Clark and Carl Trueman (Carlisle, U. K.: Paternoster, 1999), pp. 148〜164에 실린 필자의 글 “Protestant Scholasticism at Elizabethan Cambridge: William Perkins and a Reformed Theology of the Heart”를 보라.

16) Donald K. McKim, Ramism in William Perkins’ Theology (New York: Harper, 1987), p. 132.

2. 설교의 기술 51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그런 지혜가 ‘사람의 심령을 꿰뚫고 양심을 구속

하는 능력’이 있는 까닭은 성경 자체가 ‘정결’하고 ‘투명’하기 때문이며 성

령께서 성경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이 ‘성경의 요점과 본질’을 깨달을 수

있도록 감화하시기 때문이다. 이 지혜의 핵심에는 퍼킨스가 다음과 같이

삼단 논법의 형식으로 제시한 지혜, 곧 그리스도가 있다.

대전제: 참 메시아는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일 것이며 다윗의 자손일 것 이다. 메시아는 천부의 품 속에서 나신 분일 것이다. 메시아는 율법을 만

족시키실 것이다. 메시아는 자신을 신실한 자들의 죄를 대신한 희생 제

물로 드리실 것이다. 메시아는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사망을 이기실 것이

다. 메시아는 하늘로 올라가실 것이다. 때가 차면 메시아는 심판을 위해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

소전제: 마리아의 아들 나사렛 예수께서 이 모든 필요조건을 충족하신다.

결론: 따라서 예수님께서 참 메시아이시다.17)

이 삼단 논법에서 대전제는 구약에서 도출된 반면 소전제는 신약에서

도출되었다고 퍼킨스는 주장한다.18)

더 나아가 퍼킨스는 이런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이야말로 사도적 신약

기자들이 구약을 상기할 때 중요한 핵심을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퍼킨스는 논증 과정에서 누가복음 24장 44〜47절을 인용한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 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

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

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

17) Perkins, Art of Prophesying, pp. 9〜11.

18) 같은 책, p. 11.

52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

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따라서 성경은 약속과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메시지, 하나의

은혜 언약을 담고 있다. 구원은 분명 지금 이루어진 구원과 아직 이루어

지지 않은 구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메시지다.19)

퍼킨스는 또한 독자들에게 성경의 정경성에 대한 간략한 논의를 제시

한다. 정경성 문제를 논의한 이후 그는 외경이 왜 정경에 포함되지 않는 지를 설명한다.20)

우리는 당시 영국의 많은 교구에서 설교를 우선 순위에 두지 않았다는 점, 따라서 퍼킨스는 아무것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넘어가지 않았다는 점 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퍼킨스는 정경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 뒤 독자들

에게 정경에 대한 변호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서 비롯되며 그 까닭은 정

통해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그리스도의 음성’을 인 쳐 주시기 때문

임을 상기시킨다. ‘교회의 음성’이나 성경의 ‘오랜 연원’ , ‘각 부분의 조화’

또는 ‘성취된 예언’의 선포 등과 같은 부차적 증거들도 다 성경의 최종적

권위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첫 번

째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주권적이고 최종적인 심판’은 성경

의 증거 ‘그 자체’와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특권’에 달려 있음 이 분명하다. 이런 가르침이야말로 믿음과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 성경의

최종적 권위를 보호하면서도 교회가 성경 해석을 주고받음으로써 기록

된 말씀을 가지고 씨름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한다고 퍼킨스는 믿었다. 심지어 퍼킨스는 질서와 규율을 위해 주님이 교회에 ‘목회적 판단’을 할

19)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독해하는 이와 같은

큰 성과를 이룩한 현대의 저술 가는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의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를 보라.

20) 퍼킨스는 여기서 영국 국교회 신앙고백서인 39개조 신앙고백 제6조의 기조를 충실히 따 른다.

2. 설교의 기술 53

권리를 주셨다고 말했지만 그런 판단은 결코 자의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항상 ‘성경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21)

성경적 권위에 대한 퍼킨스의 가르침은 비록 칼빈의 1559년판 『기독교

강요』에 나오는 설명보다는 짧은 분량이지만 분명 칼빈의 가르침과 견

줄 만하다.22)

문맥에 대한 고려

퍼킨스는 첫 세 장에서 뒤에 이어질 논의의 기초가 되는 교리적 관심

사들을 다루다가 다음 세 장(4〜6장)에서는 성경을 해석할 때 직면하게 되

는 방법론적 문제들로 화제를 전환한다. “성경의 해석”이라는 제목이 붙

은 4장에서, 우리는 ‘오직 성경’에 대한 퍼킨스의 변론 속에서 미묘한 뉘

앙스를 감지하게 된다. 퍼킨스는 전대의 종교개혁자들처럼 성경 연구에

있어서 중세의 4중 해석법을 거부한다. ‘4중 해석법’이란 ‘문자적’이거나

‘가장 평이한’ 의미를 기초로 삼되 그 다음으로 ‘풍유적’ , ‘교훈적(도덕주의

적 금언)’ , ‘영해적(정형화된 묵시적 사색)’ 해석 방법으로 해석의 폭을 넓혀 가

는 성경 해석 방법을 말한다.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은 분명 구약을 (

유월절 어린 양처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표’ 내지 ‘그림자’로 생각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4중 해석법은 지나치게 사변적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고 여겼다.

퍼킨스는 글로서의 성경은 비록 영감으로 기록된 글이지만 그 해석에

있어서는 면밀한 주의를 요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인문적 교양은

21) 이 문단에서 참조한 퍼킨스의 저작은 모두 The Art of Prophesying, pp. 18〜22에서 발췌 한 것이다.

22)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McNeill, trans.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1: 69〜92를 보라.

54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해석의 필수 요소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려면 ‘문

법적, 수사학적, 논리적 분석과 그와 관계된 부수적 학문들’을 익히고, 더

불어 ‘일반적인’ 서적을 늘 참고자료로 곁에 두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

다. 더 나아가 퍼킨스는 신약을 이해하는 열쇠로서 로마서와 요한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이 두 책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 다. 그뿐 아니라, 퍼킨스는 이렇게 역설했다. “우리는 현 시대는 물론이 고 이전 시대 교회까지 망라한 정통 기독교 저술가들에게서 도움을 얻어 야 한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 시대에 시작된 교회의 회복을 지연시키

기 위해 옛 이단을 부활시키기 때문이다.” 이 짧은 책의 한 가지 흥미로

운 특징은 교부들, 그 가운데서도 아우구스티누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

리우스, 요한 크리소스톰 등의 말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23) 퍼킨스는 ‘옷만 바꾸어 입었을’ 뿐이지 이전 시대와 똑같은 이단들이

자기 시대에도 설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교회의 공의회와 기독교

초기 저술가들은 이들 이단을 ‘믿음직하게’ 논박했다. 그래서 퍼킨스는

사도신경도 자신이 이해하는 바 ‘신앙의 유비(analogy of faith)’, 즉 난해한

본문과 마주쳤을 때 해석의 준거로 삼을 내용의 일부에 포함시켰다.24)

‘오직 성경 ’이라는 틀 안에서 그처럼 옛 전통을 활용하는 방법은 현대

의 복음주의자에게는 언뜻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성경의 최종적

규범성을 설명하는 16세기의 가장 기본적인 방식과 부합된다. 16세기의 개혁주의자들이 보기에, 성경 해석자는 결코 유아 독존하는 존재가 아니

라 삼위일체적이고 구속적인 독해 방식을 건전한 이해가 생겨나는 기반 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다.25)

개혁주의자들은 이런 관점이 결코 믿음과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 성경 의 최종적 권위를 빼앗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런 모든 신조

23) Perkins, Art of Prophesying, pp. 23〜25. 24) 같은 책, p. 27.

2. 설교의 기술 55

적 표현들과 인간의 가르침은 결국 최종적이고 유일하며 무오한 권위인

성경의 조명 아래 비춰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르침은, 개별적

인 해석자와 교회 전체가 모두 겸손과 기도로 성경의 확실한 증거를 붙

들 때에만 부차적으로 권위를 갖는다. 퍼킨스 자신의 신앙고백적 기준

이 된 <39개조 신앙고백(Thirty-Nine Articles)>은 이 점을 분명히 표현한 것

이었다.26)

나아가, 퍼킨스는 신조들과 교부들을 도움의 방편으로 인정하면서도

교인들에게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면서도) 이렇게 충고했다. “[우

리는] 철학자든 교부든 인간의 증거에 우리의 믿음을 의존해선 안 됩니

다.”27)

퍼킨스에게 있어서 해석이란 본질적으로 ‘말씀의 단일하고 충만하며

자연스런 의미를 이끌어 내기 위해 성경의 단어들과 진술들을 풀어 내는

것’을 뜻했다. 이 점을 전제로 퍼킨스는 믿음의 기준이 명확한 해석의 범

위를 정하는 한계선이 되어야 함은 물론, 참된 의미를 이끌어 내려고 애

쓰는 이들은 본문을 문맥 자체와 역사적인 맥락, 또 사랑이라는 기독교

적 가치 체계 안에서, 그리고 그 본문의 의미를 밝혀 줄지도 모르는 다른

본문들을 감안해서 종합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

렇게 역설했다. “성경의 주된 해석자는 성령이시다.” 따라서 나머지 성

경 해석 도구들이 다 갖춰져도 맨 처음 성경을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신

성령의 조명하심을 간절히 구하지 않으면, 성경 해석자의 작업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지는 않는다 해도 상당히 위축될 것이다.28)

퍼킨스는 더 나아가 독자들에게 해석 작업에 도움이 될 만한 매우 다

양한 문맥적, 언어학적, 비교 연구적 방편을 제공한다. 이 모든 방편을

25) 이 방면의 훌륭한 연구서를 보려면, Keith Mathison, The Shape of Sola Scriptura (Moscow, Idaho: Canon, 2001)을 보라.

26) 39개조 신앙고백 6조, 8조.

27) Perkins, Art of Prophesying, p. 53.

56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다 다루기에는 지면이 부족하지만 몇몇 관점은 분명 적절하다. 우리는

퍼킨스가 원문 연구 방면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발전적 성과를 참으

로 잘 활용했음을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많은 본문이 대체로 평

이해서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분명한 유비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볼 수 있

지만 어떤 본문들은 좀 더 ‘묵시적이고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

정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명확성이란 것은 결코 모든 본문의 의

미가 분명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구속에 대한 기본적인 가르침 정

도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퍼킨스는 비록 4〜6장에서

해석자는 원어에 능통해야 한다고 언급한 적은 없지만, 그런 지식이 얼

마나 유익이 될 수 있는지를 특히 본문 속에 있는 특정한 언어적, 문화적

뉘앙스를 언급하면서 잘 보여 주었다.29)

궁극적으로 성경의 “올바른 ‘재단’”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을

교훈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dividing, 또

는 재단cutting-퍼킨스의주해)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 15).30)

회중과 대결하는 동시에 회중을 위로해야 할 책무 퍼킨스는 서재에서 연구한 말씀을 강단에서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에

대해 다섯 장(7〜11장)을 할애하며 짧은 논문을 끝맺는다. 그는 말씀 연구

에서 이끌어 낸 교리들을 “공간적, 시간적 상황과 회중 속에 포함된 사람

28) 같은 책, pp. 26〜27. 29) 같은 책, pp. 30〜50. 독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1장을 참고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퍼킨스가 소천한 지 한 세대도 넘어서 씌어지긴 했지만 자연과 성경 해석에 대한 그의 견해를 많이 반영하고 있다.

30) Perkins, Art of Prophesying, p. 48.

2. 설교의 기술 57

들에 적절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말문을 연다. 더 나아가 그는

본문을 적용할 때 그 본문은 율법이나 복음 중 어느 한 범주에 속하므로

회중을 가르치고 바로 세우는 데 도움이 되도록 말씀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적용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칙은 그 본문이 율법을 진술한 것

인지 복음을 진술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31)

이런 관점에서 보면, 퍼킨스는 더 초창기의 개혁자들인 루터, 칼빈과

그들의 후예들의 관심사를 솜씨 있게 잘 결합시켰다고 볼 수 있다.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On Christian Liberty)라는 논문에

서 말한 바와 매우 유사하게32) 퍼킨스도 율법이 “죄의 병폐는 노출시키

지만……그 치료법은 제공해 주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이

렇게 가르쳤다.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성령의 능

력이 그것에 결합되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날 때, 복음을 믿는 동시에

복음이 명하는 바를 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공급받는다. 그러므로 가르

치는 순서에 있어서 율법이 먼저고 복음이 나중이다. 따라서 율법은 ‘완

벽한 본유적 의의 필요성’을 요구하므로 설교자는 만인이 저주 아래 있어

서 자기 노력으로는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데 율법을

활용해야 한다. 다음으로 성도들이 자기 공로의 무익함과 죄에서 비롯된

저주를 분명히 깨달으면, 복음은 ‘그리스도와 그의 유익, 그리고 선행으

로 열매 맺는 믿음에 대해’ 선포하는, 율법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그 빛

을 발할 수 있다.33)

다음으로 퍼킨스는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에게는 율법이 “율법적인”

31) 같은 책, p. 54.

32) Martin Luther, On Christian Liberty (Minneapolis: Augsburg/Fortress, 2003).

58 청교도 고전으로의 초대

성품의 측면이 아닌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복음적인” 성품의 측면에

서 적용된다는 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선행의 위치에 대한 앞의

논지를 이어 간다.34)

이런 복음적 성품은 그 안에 자기 공로를 내포하지 않으므로 구원의

방법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성품은 이제 참된 신자에게 경건한 삶

으로 인도하는 한 안내자를 보여 주는 데 율법을 이용한다. 이런 논지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나오는 ‘율법의 세 번째 용도’에 대한 논의와 잘

어울린다. 이 흥미로운-퍼킨스가 『기독교 강요』를 그 근거로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더 흥미로운-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율법과 복음에 대한 퍼

킨스의 논의는 전체적으로 죄, 은혜, 감사의 3부 구조로 이루어진 하이델

베르크 요리문답(1563)의 기본적인 골격을 따르는 듯하다.35)

교리의 활용과 적용을 다룬 같은 장(7장)에서 퍼킨스는 설교자 지망생

들에게 ‘교인의 범주’를 상세하게 제시한다. 일곱 범주 중 여섯은 개별적

인 교인들에게 적용되므로 각 개인을 권면하는 목회자가 교인의 말을 민 감하게 듣고 전체 회중의 구성을 알아야 할 필요성에 대한 지침을 제공한

다. 일곱 번째 범주는 신자와 불신자가 “혼합된 교회”라는 아우구스티누

스주의적 개념 안에서 회중의 기본적 구성에 대해 요약해 준다.36) “신자와 불신자가 공존하는 교회는……우리 회중의 전형적인 상황이

다. 율법에서든 복음에서든 교리의 성경적 한계와 주의사항만 잘 지킨다 면 회중에게 어떤 교리라도 강해할 수 있을 것이다.”37)

그러면 이런 성경적 한계와 주의사항은 과연 무엇인가? 퍼킨스는 이 대목 전체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 질문에 답한다. 말씀 설교자는 선

33) Perkins, Art of Prophesying, pp. 54〜55.

34) 같은 책, p. 55.

35) Calvin, Institutes 2.7.12 (Battles 판으로는 1: 360〜361)과 The Heidelberg Catechism (Grand Rapids: CRC Publications, 1975)를 보라.

36) 아우구스티누스의 “혼합된 교회” 개념에 대해 살펴보려면, Peter Brown, Augustine of

2. 설교의 기술 59

월리엄 에임스부터 토머스 왓슨까지,

신학을 소개하는 것은 탁월한 생각이다. 최고의 복음주의 학자들이 팀을 이루어 이 일을 해냈다. 여기에 교리적인 정확성과

성경에 대한 충실함, 목회적인 통찰력이 있다. 여기에 지식과 지혜, 알레고리와 시가 있다. 이 책을 들고 읽으라.

폴 헬름(리전트 대학)

참으로 우리가 필요로 했던 17세기 청교도주의 고전에 대한 이 친절한 안내서는 오랫동안 잊혀진 작품들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어 새로운 세대들에게 복음주의적 영성의 진수를 맛보게 해 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존 번연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존 하우에 이르기까지, 이 청교도 작품은 현대 교회를 형성하고 유지하고 있는 우리 개신교 신앙 유산의 막대한 부유함을 보여 준다.

제럴드 브레이(샘포드 대학 신학 교수)

우리 기독교인들의 교리와 삶에 대한 청교도의 심오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청교도 작품에 대한 믿을만한 안내서는 거의 없다. 통찰력 있고, 읽기 쉽고, 학문적인 깊이가 있는 이 글들은 우리 마음을 넓혀 주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도와준다.

스티븐 스펜서(휘튼 대학 신학 교수)

이 책은 아주 탁월하다. 카픽과 글리슨은 아주 중요한 청교도 문헌을 탐구할 수 있는 인상적인 글들을 편집했다. 청교도 고전에 대한 안내서인 이 책은 청교도주의가 신학적, 교회적, 정치적 다양성을 가진, 정의하기 어려운 운동임을 지적한다. 그러나 편집자들과 기고자들은 300년의 시간과 여러 대륙을 관통하는 사상을 연결시키는 어떤 것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책은 일반 대학과 신학 대학 모두에게 모두 환영받게 될 것이다.

프랭크 제임스 3세(리폼드 신학교 역사신학 교수)

www.rnrb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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