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dream 0303(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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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박연희, 실로 거의 매일 밤을 한 가족처럼 만나 차를 마시 고, 술을 마시고, 술과 고독과 우정에 취해서 서울 수복 후의 부 스러진 명동을 살았던 거다. 이해랑씨의 말대로 그것은 하나의 <호적이 없는 가족들>이었다. 호적이 없는 가족들, 가족 이상으 로 가족처럼 인생을 같이 살던 실로 가난한 시절의 즐겁고 풍요 로운 가족들이었다. 그 호주가 김광주 씨였다. 돈들이 없어도 김광주 씨를 만나면 술을 마시게 되었다. 한 번도 돈 없는 내색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냥 술집으로 들어가는 거다. 그리고 만취가 되는 거다. 그리고 외상을 긋는 거다. 그리고 그 이튿날이 되는 거다. <반 되만 더> 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 말은 돈이 떨어져도, 통행금지시간이 거 지반 다 되어도, 술자리에서 일어서질 않고 ‘우리 반 되만 더 마시 자’ 하여 주모보고 하는 말이 ‘반 되만 더, 반 되만 더……’ 김광주 씨가 버릇처럼 하던 말이 명동 일대에 퍼진 거다. 끝까지 반 되만 더 마시자는 아쉬운 밤을 매일매일 술과 정과 고독과 방황으로 조지훈 시인 (사진: 지훈문학관 제공)

보냈던 거다. 그 씁쓸하던 폐허의 시절을 명동에서.

아버님은 조지훈 시인를 통해 많은 대학 교수들과도 가까 이 지내셨습니다. 다음은 조지훈 시인에 대한 회상입니다.

조지훈 씨도 문인들하고만 얼려 다니는 게 아니라 학자・교수 들하고 얼려 다니는 수가 많았다. 그 단골손님이 황학수씨였다. 술이 들어가면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고 나중에 고함소리로 변한 다. 노래도 나온다. 독일어도 나온다. 하나도 악의가 없는 그 천 진난만한 학생 기분, 아 지금도 그 청춘들이 그립다. 어느 술집에서나 술에 취해 들어갈수록 입에서 큰 소리로 터져 나오는 그 철학, 그 문학, 그 예술, 그 인생, 그 노래, 그 뜨거운 생 명에 주석의 모든 친구들은 도취해 들어가곤 했다. 조지훈도, 이한직도, 조영암도, 이하윤도, 이헌구도, 이명온 여사도, 조경희 여사도, 조애실 여사도, 때론 양주동 박사도, 김광섭 시인도, 때론 김광주・김환기・박연희・한노단・이봉 구・이해랑・윤용하・이진섭・유호・박인환도, 때론 이인범・ 전봉초・김광수도. 이러한 장면이 저녁마다, 밤마다, 명동 구석구석 술집마다 벌 어졌던 1950년대의 한국 예술가들의 황금시대, 지금도 꺼지지 않는 먼 추억의 등불들이다. 돈은 없었어도. 실로 그것은 술집이 아니라, 고급한 예술 토론장이었다. 그 세 미나 장소였다, 그리고 외로운 존재들의 생존의 아지트들이었 다. 문인들・화가들・연극인들・영화인들, 모두가 함께 모이던 그 명동, 그 술집들, 지금은 그 자리들이 모두 신발가게, 아니

1960년 덕수궁에서 김광주와

면 옷가게, 아니면 화장품가게, 아니면 증권회사들로 우글거리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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