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애정과 혐오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
다. 그래서 애정의 반대는 무관심이고, 혐오는 애정과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그래서 지나친 혐오는 때로 애정보다
강렬한 감정을 도출시킨다고. 리는 이 이야기를 이전에 자신
의 아버지에게 들었지만, 그의 말이 심오하게 느껴져 곧장 이
해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 아버지는 업무로 바빴던 탓
에 리와 이야기를 나누다 금세 거래상대를 만나러 갔었다. 그
래서 그 때 아버지의 표정이 굳어 있었고, 거래상대로 추정되
는 사람은 비굴하게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는 사실 외엔 또렷
하게 기억나는 게 없었다.
어째서 지금 이 이야기를 떠올렸나. 의문을 가질 것도 없었
다. 리의 시야 바로 아래에 보이는 현명한 소녀 때문이었다.
듣기 좋아 오래토록 듣고 싶다는 인상을 주었다. 호와 불호, 둘 중 하나를 그에게 주어야 한다고 한다면 ‘호’를 줄 정도로
‘라’에 대한 리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꼴 생각은 없었다. 미숙한 꼬맹이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범실이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지.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해서는 안 된
다고. 동시에 부모님께서 말씀하셨지. 단어 안에 담긴 함의를
찾아내고, 머릿속에 담아두기만 하라고.
하나는 지키고 하나는 지키지 못 했다. 모든 말을 해버린
탓에 예기치 않은 불화가 발생했고, 함의를 찾아낸 덕에 당신
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당신은 이를 두고
편견이라고 말할 테지만, 편견이라고 하기엔 당신은 지나치게
문학적인 사람이었다. 어휘 하나, 문장 하나에 당신이라는 사
람의 가치관과 기호가 낱낱이 드러났다.
타인의 생각은 읽을 수 없다. 하지만 가치관은 읽을 수 있
다. 언어 및 비언어적인 행동에 의해 조금씩 도출되기 때문에
숨기려고 해도 도통 숨길 수 없었다. 앞에서 꺼낸 이야기를 인
용하자면, 명예와 성취에 조금이라도 눈을 둔 적이 없는 사
람은 포스케리온이 되고 싶은 이유에 ‘명예’와 ‘성취’와 관련
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는다.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
러나, 그것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다면, 조금이라도 거부
감을 가진다면, 사람은 자연히 그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리
는 혐오를 마주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라의 발화를 두고 ‘관
심’이라고 섣불리 판단했지만, 방향 자체는 잘못 잡지 않았
음은 확신한다.
어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치관을 읽을 수 있다
니, 그건 오만이야. 그건 사람을 이야기로 취급하는 것과 다
르지 않아. 틀린 말은 아니다. 리의 추리가 100% 맞으리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을 알아가기 위해서는 서로
의 영역에 조금씩 침범해야만 한다. 약간의 오만과 약간의 편
견이 작용해야 한다. 이윽고, 상대방의 사회를 뒤흔들고 자신
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고로, 완전히 이타적이고 완벽히 상
냥한 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무관심과 다를 바 없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투로 사과하면, 그게 받아들일 수 있
는 의미가 되니?”
“그건 확실히 아니지.”
“넌 내가 네 질문에 답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겠
지. 분명 네 안에서 네 나름대로 해석하고 날 뜯어보려 할 거
야. 그런데도 내가 대답해줘야 하니?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
게 무슨 이득이 있어서?”
“어떤 이득도 없을 거야. 그러니 전부 답하지 않아도 문
제는 없어. 거짓말을 해도 나는 반 이상 알아차리지 못할 테
고.” 리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를 둘러싼 편견과 평가와는 사
뭇 다른 태도였다.
“리, 내가 네게 추한 사람들에 대해 왜 굳이 물었을 것 같
아?” 라는 말한다. 어떤 상황에서건 기품을 유지한다니.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리는 라가 전한 대답과 질문만으로도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투자유치, 상속, 인간관계. 이 단어들로 나올 수
있는 정보는 명료했다. 경쟁. 의욕. 추한 사람들이 자리한 도
시. 당신이 벗어나고 싶던 것. 그리고 아마, 당신이 리와 이야
기하고 싶지 않은 것.
“리, 내가 묻고 싶어. 내게 무슨 답을 바라니? 내게 무슨 배
경이 있기를 바라니?”
“어떤 답을 바라지도 않았고, 무슨 배경이 있길 바라지도
않았어.”
리는 지금 당장 ‘라’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내릴 마음은 없
었다. 눈앞의 상대가 살풋 미소를 지으며 선을 긋기도 했고, 완전히 판단하기에는 함께한 시간이 지나치게 짧기도 했다.
무엇보다 편견이 오고가던 이 현장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다가
는 고정관념으로 굳어버리고 말 것이다.
“완전한 남으로 쳐다보기엔, 나는 네가 조금 좋거든. 항간
의 이야기로 취급하긴, 아무래도 좀.”
그럼에도 한 가지 결론을 내리자면, 당신은 참 문학적인 사
람이다. 개연성과 핍진성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 현명
하고 유능해 어딜 가나 빛을 발할 수 있으나 ‘세계’가 바라는
것과 ‘그’가 바라는 것이 달라 고뇌하게 되는 사람 말이다. 저
런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지 않을 수 있겠나. 리는 감히 생각
했다. 사랑이나 증오와는 당연 다른 맥락이다. 굳이 따지자
면, 아마 이건…….
“이건 확실히 감정적인 맥락이네. 그렇지만, 지금은 감정적
인 맥락을 따를 수밖에 없어. 때로는 이성이 결론을 방해하기
도 하거든. 너는 똑똑하니까 알잖아.”
우정을 전제한 사랑일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