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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 위의 춤 쿠로야나기 젠 ⇒ 무츠자와 아키히데 관계 로그

파편처럼 튀는 불꽃 앞에서, 느린 음악이 흐르고,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당신을 이끌었다. 손가락과 손바닥 틈새로 슬며시 파고드는 작은 온기에 당신을 바라보 고, 동그랗게 피어난 벽안에 사로잡혔다. 동떨어진 세계에서 단 둘이 단촐 한 대화를 나누듯이. 우리는 조용히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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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봄. 교토라는 이름에 걸맞게 바깥엔 이른 벚꽃이 즐비했 다. 분홍색 꽃잎 사이를 지나가며 벚꽃놀이를 즐기는 학생들은 벚 꽃나무 아래에서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혹은 벚꽃놀이를 즐기는 화원회 사람들을 몰래 훔쳐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봄 이었다. 이 학원에 들어오고 맞이하는 일곱 번째 봄, 혼자 기숙사 를 찾기도 어려워했던 꼬마 아이는 이제 다른 초등부 학생들을 면 밀히 살펴야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런 입장이라고 해도, 이제 곧 열 한 살이 되는 꼬맹이지만. “쿠로야나기, 이번에 기술반에 새로운 학생이 들어왔단다.”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쿠로야나기 젠, 고작 네 살에 들어와 편견어린 시선을 당돌하게 쫓아내고, 어린 나이에 트리플을 차지한 독한 꼬맹이. 그의 어휘는 성인 못지 않게 단정했고, 그의 행동은 여느 또래와 달리 성숙했다. 학원의 교사 중에 그를 성인처 럼 대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린 아이가 어른인 체 한다며 혀를 내 두르는 교사도 있었다. 하지만 반 안에 성숙한 학생이 한 명 있으 면, 본인들이 번거로운 일을 굳이 도맡지 않아도 그 학생에게 일임 할 수 있기 때문에 교사들 입장에선 편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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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엔 어린 학생들이 많이 들어오잖아요? 이번 학생은 기 술능력반이군요. 저와 동갑인가요?” “아니, 너보다 한 살 어리단다.” 이 말은 곧, 그 학생을 만나면 네가 그 애를 도와달라는 의미다. 구태여 돌려 말하지 않아도 거절할 의향은 없는데. 쿠로야나기는 눈앞의 어른을 바라보며 눈이 휘어지도록 웃었다. “이름만 알려주시겠어요? 만나게 되면, 제가 그 애를 도와주고 싶네요. 학원은 넓어서, 혼자 알아가기엔 어렵잖아요.” 쿠로야나기의 대답에 교사는 그를 쳐다보기만 하다 멋쩍게 웃으 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이 원하는 답을 아이가 간파해 그대 로 읊은 양, 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부터 그걸 바라고, 그런 맥락으로 이끌었으면서. 쿠로야나기는 뒷짐을 지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무츠자와 아키히데. 금년도에 새로 들어와 4월에 편입할 3학년 학생. 검은색 머리카락에 벽안이 인상적이고, 교토지부에 들어온 아이인 만큼 사랑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소극적인 성향 탓에 아이 들과의 교우 관계는 좁은 편. 거기다 3월이면 봄방학이니 아이들과 친해질 기회는 그리 없었을 터다. 거기에 뭔가 더 아는 건 없냐고 선생님께 여쭤봤지만, 그의 답은 기대하지도 않고, 예상하는 수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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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찾아가 만나는 수밖에 없나.’ 쿠로야나기는 손을 올려 자신의 초커를 매만졌다. 기술능력반이 면 적어도 위협적인 앨리스는 아니겠고, 어떤 앨리스라고 특별히 말하지 않은 것을 보아 특이한 류도 아닐 것 같다. 애매한 시기에 들어와 애매한 반경에서 행동하는 아이. 마치, 때아닌 시기에 날아 온 민들레 홀씨 같았다. “아.” 그 때, 고학년 교실 근처에서 헤매이는 아이가 보였다. 곱게 땋 은 검은색 머리카락, 불안함을 대놓고 드러내는 표정, 푸른 눈동 자, 작고 왜소한 여자아이. 이 시기에 길을 잃는 학생이면 당연히 학원에 온 지 얼마 안 됐거나 모험심이 상당히 강한 아이겠지만, 모험심 강한 아이치고 불안해하는 사람은 없으니 당연히. “무츠자와?” 선생님이 말한 아이가 저 아이겠지. 쿠로야나기는 부드러운 미소 와 함께 눈앞의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 무츠자와는 의아한 표정 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연했다. 생전 처음보는, 그것도 저보다 나이가 많을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호명 했으니까. “미안해, 선생님한테 얘기를 듣고 그만 반갑게 인사해버렸네.” 쿠로야나기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무츠자와와 시선을 마주했 다. 아마 이 아이는 선뜻 손을 내밀면 놀랄 테고, 몇 년을 본 사람 처럼 친근하게 굴면 더 크게 놀랄 사람으로 추측된다. 쿠로야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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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아주 짧게, 무츠자와를 관찰하다 입을 열었다. “나는 쿠로야나기 젠이라고 해. 이 학원에 온지 오래되었고, 너 와 같은 기술능력반이야. 새학기가 되면 오후시간에 나를 자주 볼 테니까, 혹시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 나한테 물어봐줘.”

급작스럽게 다가가지 말 것. 부정적인 말은 하지 말 것. 아이의 말을 경청할 것. 쿠로야나기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 주의사 항을 주입했다. 이 세 가지만 지키면 적어도 무츠자와 아키히데는 자신에게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가졌다. “...네.” 착하게도, 무츠자와는 쿠로야나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방금까지 쿠로야나기가 왔다 갔나요?” “네, 이번에 새로 들어온 학생을 부탁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 애가 먼저 그러겠다고 말했네요.” “쿠로야나기가요...? 선생님, 쿠로야나기는 작년 말까지.” “아, 이런. 그렇지만 괜찮을 거예요. 쿠로야나기는, 쿠로야나기잖아요?”

무츠자와 아키히데. 생일은 2월 27일이고 학원에는 생일이 지난 다음에 들어왔다. 교토 출신이며 집은 꽃집을 해 관광지 근방에서 꽃을 팔았다고 한다. 무츠자와는 부모님의 꽃집을 이어 꽃집 주인 이 되고 싶어했고, 그 아이 본인도 꽃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꽃 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그 아이는 그나마 화색을 띄었고, 그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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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에 쿠로야나기도 잘 모르던 꽃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자신의 탄생화는 그 이름처럼 수양버들이라는 사실이라던가, 그밖에 여러 가지들 말이다. 그리고 다행인지, 아니면 기특하게 여겨야 하는 일인지, 무츠자 와는 젠이 가르치는 것은 금세 따라잡는 편이었다. 능력별반 시간 엔 정확히 어떤 것을 하고, 앨리스는 어떻게 활용해야하며, 그밖에 학원에서는 어떤 행사가 있고 하루를 보내는지 등등, 다른 사람과 의 교류를 힘들어하는 것을 제외하면 무츠자와는 혼자 두어도 무 난히 잘 해낼 수 있는 아이였다. 거기다 은근히 사리분별을 하고, 주위 상황을 잘 읽는 아이니, 쿠로야나기가 무츠자와를 싫어할 이 유는 없었다.

“무츠, 무츠는 어때?” “...네?” “별명 말이야. 무츠자와의 무츠, 아름답다는 의미라서 좋아하는 걸. 그렇게 불러도 될까?” “선배가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저는 좋아요. 쿠로...... 선배.”

오히려, 학원 생활에 어색해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무츠자와 에게 눈이 갔다. 어떠한 특별한 의미가 아닌, 단순히, 그래. 사이가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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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여름, 무츠가 학원에 들어온지 몇 달이 다 되어갔다. 다른 학생들과 왕성한 교류를 잇고 있냐고 묻는다면 답 변하기 어렵지만, 전보다는 인상이 조금 밝아졌다. 그밖에 변한 게 있다면, 능력별반 시간에 대화하는 시간이 차츰차츰 늘어나 사담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쿠로야나기 또한 아이에게 자신의 정보를 흘려 주었다는 점이다. 홍차를 좋아하지만 잘은 모른다던가, 간간이 혼 자서 체스를 둔다던가, 같은 것. “그러고 보니, 선배의 가족은... 어떤 분들인가요?” 하지만 무츠에게 그의 가족 얘기는 잘 해주지 않았다. 아이가 가 족 이야기를 하며 슬며시 웃을 때, 쿠로야나기는 그 이야기를 듣기 만 했지 거기에 첨언을 하진 않았다. “가족? 갑자기 왜?” “쿠로 선배의 가족에 관해서는, 잘 못 들은 것... 같아서요.” 무츠는 망설이다 답변했다. 쿠로야나기, 라고 하면 일본의 국민 기업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어린 아이들이 잘 알 리 없었다. 들고다니는 물건에 그려진 검은 버드나무는 본 적 있더라 도, 그 회사가 어떤 곳인지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게 보편적 이었다. 그러니 이 아이도 회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당연했다. 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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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야나기가 그 기업의 자제라는 사실을 포함해서. “우리 가족은 그러네, 다들 워낙 유명해서 나같은 건 따라잡지 못 하겠더라고. 그래도 그분들을 붙잡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쿠로 선배가요...? 저는, 쿠로 선배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을 낮춰 말하면 보통 그것을 부정하며, 상대를 긍정해주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무츠자와 또한 정석적인 답변을 했지만, 쿠로야나기는 순간 목이 따끔거렸다. “내가? 그럴 리 없잖아.”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잘 모른다. 자신이 어떤 책임을 져 야하고, 어떤 무책임한 말을 들어야 하며, 또 어떤 고통을 감내해 가며 말을 하고, 생각하고, 억지로 긍정해야 하는지. 그러면서 아 무렇지 않게 ‘저런 환경에서 태어나다니. 축복이지.’ 같은 말을 한 다. 이쪽의 노력은 생각하지 않으면서, 내가 그 환경을 비난하거나 비교하지도 않았는데. “저...” “뭐라고 했어?” “아뇨, 그..., 미안해요.” “...아.” 하지만 무츠는 그런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두 고 부럽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환경을 책망하지도 않았다. 순수하게 좋아하며, 또 순수한 호의로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 을 쿠로야나기는 그의 방식으로 바라보았다. 쿠로야나기는 처음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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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눈앞의 아이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마치, 같은 류라 생각한 민 들레 홀씨가 결코 자신과 같지 않다며 훨훨 날아가는 것처럼. “아냐, ...방금 대화는 잊어줄래?” 그것이 얄미워 자신이 정한 규칙도 잠시 잊고 말았다.

“젠, 계속 날 좋아해줄 거야?” “물론이야, 키레이. 너는 내 유일한 친구인걸.” “정말이지? 약속해줘. 졸업한 뒤에도, 쿠로야나기에 들어가도, 나를 불 러줘야해. 알았지?” “응, 약속할게.”

최근, 아니 반 년간 종종 같은 꿈을 꾸고 있다. 꿈 속에서는 항 상 그 아이가 나타나 쿠로야나기에게 그의 감정을 물어보았다. 쿠 로야나기는 그 아이의 질문에 항상 같은 대답을 했다. 널 좋아해. 그 짧은 단어를 뱉고, 약속을 한 뒤엔 등을 떠밀 듯 잠에서 깨어난 다. 그러고나면 공허함을 느낀다. 영영 그곳에 갇힐 것처럼, 쿠로 야나기는 그 아이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이곳에 없다. 쿠로야나기에게 후유증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아.” 그러고 보니, 쿠로야나기는 몸을 돌려 룸메이트가 깨지 않도록 물건을 꺼냈다. 편지. 외부에서 온 편지는 아니었다. 매년 여름, 앨리스제가 열리기 일주일 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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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았다. 앨리스제 마지막 날, 라스트 댄스 때 함께 춤을 추자는 약 속이었다. 쿠로야나기는 이곳에 입학한 뒤 매년 그 아이와 춤을 추 었다. 손과 손을 맞잡고 그 아이와 빙글빙글 돌다보면 그 아이와 하나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 아이의 목소리가, 온기가, 하나같이 전부 좋아서. 미묘하게 설렜다. 그 감각은 지금도 잊기 어려웠다. 올해는 누구와 함께해야 하지. 매년 앨리스제는 그렇게 보내왔 고, 그게 당연했기 때문에 특별히 생각해두지도 않았다. 애당초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흥미를 갖지도 않을 앨리스제였다. 거기다 쿠로 야나기는 매년 그 아이와 춤을 춘다, 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잡혀 이번에 새로 들어온 학생이 아닌 이상 쿠로야나기와 춤을 추자고 제안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니, 제안했는데 이쪽이 제대로 안 들었나. 사실상 몇 명을 제외하곤 특별히 춤을 추고 싶지도 않았 다. 그러네, 춤을 추고 싶은 상대를 꼽자면... 무츠자와라던가. ...무츠자와? 무츠, 그 애라면 아직 앨리스제 때 함께할 사람을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전에 낮에 있던 일은 사과해야겠지만. 쿠로야나기는 다 시 침대에 누운 뒤 침대 밑에 편지를 숨겨두었다. 그 날로 모든 게 끝날 것이라 생각한 착각은, 점차 희미해져 현실로 되돌려주었다.

“무츠, 앨리스제 때 함께 출 상대는 정했어?” 쿠로야나기는 어제 그런 대화를 나누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무츠에게 말을 걸었다. 당돌함과 뻔뻔함, 쿠로야나기의 특기 중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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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였다. 마치 결백한 사람인 것마냥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무츠 는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쿠로야나기를 응시했다. 불안한 기색이라 해도 미묘한 수준이지만, 이 아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충 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앨리스제 때요?” “응, 앨리스제는 지난 번에 설명했지? 매년 여름방학 직전에 앨 리스제가 열리거든. 그, 지난 번에 기술반 교실에서 앨리스제 때 뭐할지 얘기를 했었잖아? 그 앨리스제 마지막날엔 캠프파이어와 함께 춤을 춰.” 쿠로야나기 같은 사람의 가장 나쁜 점은, 상대의 이런 점을 잘 파악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며, 이전의 일을 억지로 묻어버린 다는 것이다. 결국 어느 쪽이 상처받는지는 훤히 보이면서도, 쿠로 야나기는 이 나쁜 버릇을 쉽게 고치지 못 했다. “그래서, 네가 나랑 같이 춤을 췄으면 하는데, 괜찮을까?” “...선배가 괜찮다면요. 춤은 배워본 적 없어서, 발목만 잡겠지 만...요.” 무츠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혹 거절할 가능성도 있어 쿠로야나기는 뒷짐을 진 채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지만, 그녀의 답을 듣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다행이야. 그 날 잘 부탁해. 춤이라면, 언제든 가르쳐줄게.” “늘 고마워요, 선배. ...매번.”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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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도와주기만 하니까요. 선배도... 귀찮을 텐데, 항상 상냥하게 대해주시고.” 전날에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이는 사근사근 말해주었다. 그렇게 말해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 했다. 쿠로야나기는 태어나 그녀처럼 상냥하게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짐짓 당황했다. 손을 올려 자신의 입매를 쓸다,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동그랗고, 푸른 눈동자가 걱정어린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다, 곧장 고개를 숙였 다. 쿠로야나기는 고개를 돌려 입술을 말다, 겨우 손을 내렸다. “오히려, 그렇게 말해줘서 내가 고마운걸. ...어제는 미안했어.” “어제...? 아, 아뇨. 그건 제가 실수했는걸요.” “아냐,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뇨... 제가,” 쿠로야나기는 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며 무츠를 바라보다, 또 보 기 드물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리를 숙여 손으로 입매를 가리고, 눈매엔 웃음이 자욱하게 담겼다. “선배...?” “미안, 뭔가 우리 대화하는 게, 좀 웃겨서.” 막연히 그 아이가 생각났다. 마지막날까지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말 한 마디 해주지 않은 그 아이. 눈앞의 아이는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그를 볼 필요도 없지만, 쿠로야나기는 잠시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며 그 아이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 아이도 당신처럼 소극적 이었고, 또 당신처럼 쿠로야나기를 잘 따라주었다. 하지만 둘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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랐다. 당신은 이곳에 머물며 스스로 나아갈 방법을 찾았고, 그 아 이는, 그는. “나랑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워, 무츠. 내일보자.” 이제 아무렴 상관없는 사람이다.

쿠로야나기는 입매에 호선을 그린 채 계단을 내려갔다. 오후 일 정을 마쳤으니 이제 저녁을 먹기 전까지 가볍게 공부를 하고, 선배 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그의 시간은 항상 꼼꼼하게 이루어져 있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쿠로야나기, 요즘 좋아보이네.” 익숙한 목소리, 기술반 소속 교사 중 한 분이다. 쿠로야나기는 고개를 돌려 선생님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이제 곧 앨리스제니까요. 기대되거든요.” “그렇구나, 그것도 있지만. 요즘 무츠자와와 어울리면서 네가 많 이 밝아진 것 같아서.” “...제가요?” 쿠로야나기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요 몇 달, 자신 이 바뀐 게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무츠자와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앨리스를 걸거나, 뭔가 걸지 도 않았다. 쿠로야나기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교사는 입을 열 어 마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좋은 후배가 생겨서 다행이야. 계속 사이좋게 지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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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선생님.” 쿠로야나기는 고개만 끄덕이곤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 어떤 이득을 갈취하기 위해 그 아이를 화제로 꺼냈거나, 아니면 단순한 오지랖일지도. 쿠로야나기가 크게 신경 쓸 사항은 아니었다. 아이 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말을 넘기며 남은 하루를 보내러 갔다.

앨리스제의 밤은 늘 화려하다. 제각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옷 을 입고, 좋아하는 아이, 혹은 친한 친구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춤 을 추며 즐겁게 웃었다. 쿠로야나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쿠로야나 기는 쭈뼛쭈뼛 어색해하는 후배의 손을 잡곤, 무대 중앙으로 들어 왔다. “무츠, 잘 추네.” “...선배가 알려주셨으니까요.” 쿠로야나기는 바닥에 나선을 그리며 무츠자와를 이끌었다. 빈 말 은 아니었다. 무츠는 정말 쿠로야나기의 리드에 따라 잘 움직였다. 앨리스제를 앞두고 포크 댄스를 연습한 보람이 느껴질 정도로. 그 래서인지, 아니면 평소 버릇인지, 쿠로야나기는 무츠자와를 내려다 보며 유하게 웃고 있었다. “내년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계속 이렇게 지냈으면 좋겠어.” “...저도, 요. 선배. 선배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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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영이 원을 그리며, 영원을 반복하고 있다고 착각하 겠지만, 실은 이 선은 단순한 나선이고, 언젠가 두 인영은 떨어져 하나의 선만을 그리게 될 것이다. 선은 가까워지려고 할수록 멀어 지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곡선이 되어 더 이상은 함께하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쿠로야나기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영원한 관계 는 없다. 유일한 애정도 존재하지 않고. 항상 순탄하게만 살 수도 없었다. 억지로 원을 유지하려다 오히려 저주처럼 남은 상처가 쿠 로야나기를 계속해서 괴롭히고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쿠로야나기는 눈앞의 아이와 무난한 관계를 유지 하고 싶어했다. 아이가 언젠가는 자신을 따르지 않게 될지도 모르 지만, 가급적이면 좋은 선배로 남아,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랐다. 만약에 쿠로야나기가 가족이라는 것을 ‘보편적으로 알려진 방향’으 로 알고 있었다면, 비슷한 안정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쿠 로야나기는 이미 엇나간 나선이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은 느끼지 못할 터다. 그래서, 언젠가는 엇물리게 될 두 개의 나선임을, 그는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언젠가 다물릴 미래를, 구태여 무츠자와에게 얘기해주지 않았다.

아직 평온하기만 한 두 사람은 나선 위에서 계속 춤을 추었다. 불꽃이 사그라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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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 위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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