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27-2013. KSNE Vol.14, N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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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한인회보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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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0년대의 미팅문화 60년대 중반, 활발해진 대학가 미팅 60~70년대 봄철 새 학기의 시작 은 대학가에 미팅의 계절이 왔음을 의 미했다. 69년 봄 서울대 신문은 “공 대 주변에 때 아닌 배꽃(梨花)이 만 발했다”는 가십기사를 통해 서울대 생과 이대생 미팅이 활발함을 은근히 자랑했다. 이대학보는 “미팅 신청하 러 온 남학생을 돌려보내느라 진땀을 빼는 교문수위” 얘기를 다루며 ‘몰 려드는 바지씨’를 감당 못한다고 너 스레를 떨었다. 어느 대학에서건 ‘미 팅’얘기가 최고인기란 걸 확실히 보 여준 것이다. ‘4.19 학생혁명 이전세대’와 ‘이 후세대’를 구별하는 방법 중 하나로 “미팅을 해봤느냐, 아니냐?”가 얘기 될 정도로 60년대 중반부터 미팅이 활 발해졌다. 대학 새내기들은 입학식 직 후 학과 별로 과대표 선출행사를 가 졌는데 이때도 “미팅을 주선할 능력 이 있는지”가 투표의 주요변수로 작 용했다. 4인 1실 기숙사에서 4학년은 ‘고문’, 3학년은 ‘실장’, 2학년은 ‘경호 실장’, 그리고 신입생에게 ‘ 미팅추진위원장’을 맡길 정도로 ‘ 남녀 교제’ 바람이 불었다.

람과 파트너가 됐다. 다시는 미팅에 안 나간다”는 얘기들이 대종을 이루 었다. 그러나 불평이 많은 친구일수록 다음 미팅에 더 적극적이었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66년에 대학생의 일상을 가벼운 터 치로 다루는 ‘칼리지 헤럴드’란 주 간지가 창간됐다. 그 첫 호에 미팅과 관련한 중요 정보가 실려 대학가에 화 제가 됐다. ‘미팅 시즌 업’이란 제 목으로 그룹데이트 유형을 분석한 이 기사의 필자는 당시 유행하던 미팅을 “발정기에 놓인 수많은 청춘 남녀 대 학생들의 축적된 에너지 발산”이라 는 낯 뜨거운 언사로 풀이해 눈길을 끌었다.

소린지 알 수 없는 이유 말고 진짜 이 유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6.25전쟁 과 4.19혁명 등 고난과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거대담론에 젖었던 젊음이 서 서히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미팅 이 활발해졌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어렵긴 마찬가지다. 하지 만 ‘남녀7세부동석’ 같은 유교냄새 폴폴 나던 사회의식이 많이 바뀌어 다 방이나 야외에서 젊은 남녀가 ‘밀어 를 속삭이는 것’ 쯤 쉽게 봐줄 정도로 사회가 개방적이 되었다는 얘기일 수 있겠다. 어쨌거나 대학가미팅이 활기 를 띄었지만 그게 바로 어른들이 걱정 하는 풍기문란으로 이어진 경우는 거 의 없었다. 미팅을 학수고대 기다렸던

그시절 미팅, 어떻게 이뤄졌나? 당시 대학가 미팅은 주로 ‘티켓 판 매 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남녀 각 대학 과대표가 만나 인원수와 시간 장 소를 협의했다. 과대표가 안 나서면 미 팅이 절실한 친구들이 ‘미팅 추진위 원장’ 임시직함을 받아 대표로 나서 곤 했다. 대부분 남학생이 여학교로 직 접 찾아가 만남을 제의하는 형식이었 지만 누나, 여동생, 혹은 남녀공학 고 교 동기의 주선으로 그룹미팅을 추진 하기도 했다. 대표 간 회동에서 인원이 확정되 면 그들은 각자 주변에 그만큼 티켓을 팔았다. 일종의 참가비였다. 물론 티 켓 값은 상대측 학교와 학과 인기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남학생들은 대 략 200~500원씩을 냈다. 당시 짜장 면 한 그릇 값이 40원 정도였으니 결 코 만만한 돈은 아니었다. 대표가 어 렵게 성사시킨 미팅일 경우 남학생이 ‘더블’로, 모든 경비를 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땐 티켓이 잘 안 팔려 추진위원장이 덤터기를 쓰기도 했다. 대표들은 티켓을 팔아 모은 돈으로 다방을 전세내거나, 아니면 야외 나들 이 미팅의 교통비로 썼다. 티켓이라니 말은 그럴 듯하지만 대단한 건 아니었 다. 흰 종이에 그저 번호를 적었거나 그림을 그려놓은 게 대부분이었다. 미 팅에 참석한 남녀에게 한 장씩 준 다 음 같은 번호, 같은 그림을 가진 이성 을 찾아내 짝을 이루고 본격적인 데이 트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 조 추첨’ 발표 때마다 미팅 장 분위기 가 미묘하게 바뀌곤 했다. 처음 만나는 이성이라도 대개 첫눈에 호감, 비호감 형이 가려지는 법. 그런데 어쩐 일인 지 “제발 저 사람만은 걸리지 않았으 면…”하고 바라는 상대가 꼭 짝이 되 곤 했다. 미팅 다음날 여학생이건 남학생이 건 친구들과 모여 ‘복기’를 해보기 마련인데 “하필이면 제일 멋없는 사

이도 매 본다.”고 했다. 또 상대가 미 술과 학생이라면 미술에 대한 상식을 늘린다며 시험 때 외엔 좀처럼 안 가 던 도서관에도 들어가 미술책을 보며 얘깃거리를 준비한다고도 했다. “미 팅을 거듭하며 앞으로 맞게 될 이상적 인 여성상을 정립해 나가는 중”이라 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70년대 들어 ‘다방 미팅’ 인기 정점 아무튼 60년대 중반부터 분 미팅 바람은 70년대 들어 완전히 꽃을 피 웠다. 명동의 초원다방이나 광화문 청 자다방 등이 미팅의 명소로 각광받기 시작하며 다른 지역 다른 지방에 같 은 이름의 초원다방, 청자다방들이 우 후죽순 생기기도 했다. 70년대 중반 에는 교외선 미팅, ‘나체팅’(창경 궁 밤 벚꽃놀이 미팅. night cherryblossom meeting을 줄인 말) 같은 것으로 진화해 나갔다. ‘대학생활의 낭만’이며 ‘학점 없 는 교양필수과목’이라던 미팅은 70 년대 중반부터 시들해졌다. 대학생 군 사훈련부터 시작해 유신, 긴급조치 등 엄혹한 시대상황이 학생들을 미팅 같 은 가벼운 문화보다 민주화시위 등 무 거운 현실참여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70년대 중후반 미팅에 나갔던 남자 대 학생들은 종종 “지금이 데모할 때지 이런 미팅에 나올 땐가요”라는 핀잔 섞인 충고를 듣기도 했다. 요즘 말로 ‘개념을 좀 가지라는’ 얘기였다. 미팅열풍, 80년대 이후 중고생에게로 전가

4.19 학생혁명 이전세대’와 ‘이후세대’를 구별하는 방법 중 하나로 “ 미팅을 해봤느냐, 아니냐?”가 얘기될 정도로 60년대 중반부터 미팅이 활 발해졌다. 이는 “6.25전쟁과 4.19혁명 등 고난과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거대담론에 젖었던 젊음이 서서히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미팅이 활발 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발정 운운한’ 이유로 그해 한 여대 신입생의 미팅 회수를 들고 나왔 다. 즉 3월부터 5월 사이 두 달 동안 그 대학 사회생활과는 10회, 자수과가 8회, 정외과와 사학과 각 6회, 영문과 사회사업과 교육과 체육과가 5회씩 미팅을 했다는 것이다. 1주일에 한번 은 보통이요 사흘에 한번 꼴로 미팅을 나간 학과도 있으니 이걸 ‘발정기’ 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이 미팅에 열광한 이유는? 그런데 도대체 왜 그 당시 대학생 들은 그처럼 미팅에 열을 올리게 됐 을까. 뭐, ‘현실억압에서 도피하려는 경향’이라거나 ‘고교시절 무조건 금지의 사슬에서 벗어난 젊음이 이성 의 참모습을 찾자는 시도’ 같이 무슨

새내기들도 막상 해본 뒤 “그거 별 것 아니네”라며 심드렁한 대답을 하 기도 했다. 이른바 ‘미팅 무용론’이다. 대부 분 여학생들은 “대학생 특권이니 해 보자고 해 나가지만 미팅이란 거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거나 “미팅을 통해 애인이나 ‘남친’, ‘여친’( 요즘 용어, 당시엔 ‘바지씨’ 따위) 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99% 없다” 고 단언했다. 또 “여대 1학년은 ‘금 값’, 2학년은 ‘은값’, 3 4학년은 ‘스테인리스 값’ ‘구리 값’ 운운 하니 열심히 미팅을 해보지만 하고나 면 후회하고 ‘본전이 아까운 생각’ 도 든다.”고 했다. 그러나 남학생들 경우는 조금 다르 다. 한 순정파는 미팅 약속이 잡히면 “없던 신사복 빌려놓고 안 매던 넥타

사실 70년대가 꺾어지기 시작하며 미팅은 대학보다는 고등학생의 문화 로 내려가는 경향을 보였다. 80년대 초반 한 지방의 디스코텍에서 남녀 고 교생들이 미팅을 위해 무더기로 입장 했다 화재로 참변을 당한 뉴스가 전 해지면서 중고생의 성모랄 문제가 제 기됐는가 하면 85년 무렵에는 초등학 생들도 빵집에서 미팅을 한다는 보도 가 나와 학부모들을 놀라게 했다. 이때 쯤 초 중 고 모든 학교에서 생활 상담 을 하며 미팅문제를 심각히 다룰 정도 로 미팅 연령의 ‘하향평준화’가 이 루어졌다. 81년 한 신문은 ‘봄철 대학가 열 병 미팅 시들해진다’는 기사를 실었 다. “몇 해 전만 해도 입학 후 첫 미팅 때엔 가슴 설레며 선물을 나누던 예가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낭만이 점점 사 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문은 그 이유로 그해 실시한 졸 업정원제를 들었지만 사실 행간에서 는 ‘서울의 봄’이 무산되고 ‘유 신정권’에 이은 ‘신군부의 강압통 치’가 대학생활의 낭만을 빼앗아 갔 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사실 정치상 황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미팅은 학 생이 티켓을 팔아 모은 돈으로 주선하 는 ‘구멍가게’를 벗어나 ‘만남 알 선회사’가 생겨나는 등 기업화하기 도 했다. 봄철, 갓 스물이 된 젊은 학생들의 마음을 싱숭생숭 사로잡았던 바로 그 미팅은 6, 70년대와 함께 정녕 날아가 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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