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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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 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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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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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여성의 삶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아직도 상황을 주도하는 주체 적이기 보다는 주어진 상황, 특히 남성에 따른 종속변수일 경우가 많다. 그런 데 이 책의 주인공은 철저히 종속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체적으로 살 아왔다. 지금 70대에 이르는 40년대에 태어난 여성들은 그들이 알고 있었던지 몰랐 던 간에 격동기를 몸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대부분의 농촌 출신들은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업현장에 투입이 되어 소위 공순이가 되어 60 년대 한국 경제가 고도 성장하는 길에 초석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환경 에서 서울에 살았고 특별한 여건에서 일반적으로 가는 길을 걷지 않고 예외 적인 길을 걸을 수 있었기에 다른 어느 누구와도 같은 삶을 살 수 없었던 삶을 살았던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5,000만 한국인 중에 단 한 사람도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 이 없을 정도로 희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일이나 업적 을 이룬 것이 아닌 평범한 인생이지만 마치 타임캡슐에 보관할만한 독특한 이야기이다. 돈, 기술, 가문, 학력 이 모든 것들이 삶에 영향을 미치지만 인격 은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그녀의 인격을 구성하고 있는 뼈대는 어려서 어머 니로부터 받은 가혹하다고 까지 표현할 수 있는 유교적 훈련이었다. 흔히 유 교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억압과 굴레를 씌우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고 그런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글의 주인공은 유교적 바탕이 개인의 인격 안에 내재화 되었을 때 본인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기능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어떻게 3개의 조국을 가 진 코스모폴리턴적인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왔는가 하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냉정한 아버지 같은 나라 한국, 따뜻한 양부모 같은 나라 미국, 전생에 살았 던 것 같은 그리스 3 나라의 삶이 있다.

• 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작가 - 지성수

[들어 가는 글]

아마도 4살 때쯤이다. 우리 집은 영천 근처 서대문 형무소가 보이는 언덕 위 한옥 문간방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주인 남자는 훤칠하게 키가 큰 노인임에도 살결이 마치 갓 태어난 남동생의 피부처럼 고왔고 부인도 귀품이 있어 보이는 미인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었지만 이 특이한 부부는 젊었을 때 조선 왕조가 망하 고 궁궐이 폐쇄되면서 궁에서 쫓겨난 내시와 궁녀 출신이었다. 그들이 궁에 서 쫓겨날 때 퇴직금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그 집에 세를 들었 던 것으로 보아서 집 한 채는 마련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그 집에 세 를 들었던 것은 아마도 할아버지와의 인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할아버지가 이씨 조선 마지막 군대였던 궁을 지키는 별기군 출신이었기 때문 에 어떤 형태로든 궁에서 근무하던 부부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 버지의 살림을 그 집에 차려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보는 것이다. 그 런데 이상한 부부는 궁에서 나온 지가 오래되었어도 궁중 법도를 따지며 살 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런 기억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일 때문이었다. 한 번은 엄니가 옥색 마고자를 고이 차려 입은 내시에게 아침 인사로 “진지 드셨습니까?” 하고 묻자 궁녀 출신의 부인이 “말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 야. ‘수라 저으셨습니까?’ 해야지.”라고 했다. 이런 소리를 들은 후에 엄니는 아버지에게 “자기 남편이 무슨 상감마마나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요?”라고 하면서 불평을 했다.

저자 - 이영재 •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5

[Postscript] We live in a time where two worlds overlap: the ‘online’ world and the ‘offline’ world. A relationship in the online world usually carries little weight, as it is just one click away from termination. However, some relationships lead to extraordinary outcomes. Such was my ‘online’ relationship with Ms. Yeongjae Lee, which is one of the most precious relationships I had in the online world. This book is the result of several hundred, no, thousand hours of online communication I had with her.

While it is true that no two women live the same life, even today, women are often the dependent variables of their lives, whose fate is determined by the given situations or the ‘men’ in their lives. What is remarkable about Ms. Lee, however, is that she was always the master of her life when the world forced her to live a life of servitude.

Her story is so unique. Not one of the 50 million Koreans today would be able to hold a candle against her life story.

It is not that she accomplished something grand, or left an indelible mark in the history. Nonetheless, her life is full of extraordinary stories that deserve their places in a time capsule. Writing a biography usually involves simply rewriting the materials provided by the client. However, writing this book, • 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I had to analyze and interpret her life to understand why she lived the way she lived and which caused which as if solving a puzzle.

A person’s life is influenced by a wide array of factors, such as money, skills, family, education, and personality. Of those factors, personality is by far the most influential factor. What formed the framework of Ms. Lee’s personality was almost harsh Confucianist upbringing from her mother. Confucianism is often criticized as a traditional instrument to suppress and constraint women, and the criticism is supported by a series of undeniable facts. However, the heroine of this story shows how a Confucianist foundation embedded in a person’s personality functions in situations that change regardless of his or her will. That spiritual foundation supported Ms. Lee as she led a successful life of a cosmopolitan, during which she called three countries ‘home’: Korea, a distant father; the United States, a loving and caring foster parent; and Greece, the home country of her previous life.

As I wrote her story, I was reminded of a phrase from The Man 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 by Oliver Sacks, a great writer and a neurologist who passed away the past year.

“For us to exist as ourselves, we must have an identity about •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7

ourselves. We must have the story of our lives, even restore them if need be.”

The impression I received from Ms. Lee’s life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We cannot live just the way we want. On the other hand, it would be deeply unfortunate not to be able to do what we want at all. And it falls solely on ourselves to find a way to do what we want under conditions that prevent us from doing so. In other words, it is a true gift to be able to remain active in a world which imposes passivity.

Obviously, this writer cannot claim that this book exhaustively describes all aspects of Ms. Lee’s life. On a related note, when I was a young student, one of the teachers used to punish the students by having them come out to the front, face the wall, and keep their arms up. What I remember about the punishment is that the major discomfort came from having to show my back to the other students, rather than keeping my arms up.

All people have front sides that they show to others, and backsides that they want to hide from others. The same goes with Ms. Lee and her life: there must be a backside of her life that remains undisclosed.

• 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Nevertheless, in the course of writing this book, I developed a profound respect for this remarkable woman. She did not deviate from the principle of diligence and truth for not one moment in her life, and always lived her life in sincerity.

If this book fails to capture her life properly, it is only because I lack the ability to put her multi-faced and ever-changing life into words. I have been writing for many years now, but never have I been as keenly aware of my incompetence as a writer as I was writing this book.

I wrote this book based on the materials given to me by Ms. Lee, which makes this book her portrait, so to speak. When we see a poor portrait, we blame the painter, not the model.

The same goes with this book: I, not the amazing Ms. Lee, am solely responsible for any inaccuracy or inappropriateness found in this book.

•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9

[차례] ChapterⅠ

1. 소풍 길처럼 떠난 피난길 행복한 피난 생활 아버지의 죽음 후 식모와 같은 원피스를 입다. 성당에 미친 엄니 대한민국 대법원 철 없는 판단

2. 세상 속으로 의도 하지 않았던 가출 귀여운 뇌물 엉터리 교주 사랑도 아닌 것이 무용수의 길로 월남 전선으로 ‘I am Korean’이라는 주문

• 1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차례] ChapterⅡ 3. 탈출 모색 구사일생 그리스 청년과의 재회 낮 선 나라에서의 결혼 악명 높은 그리스 시집살이 우유 전쟁 전생의 나라 그리스

4. 양부모 같은 나라 미국으로 격투 끝에 첫 가게를 열다 스쳐가는 인연, 머무는 인연 빨갱이와 미 제국주의자 직원이라기 보다 가족 나의 엄니와 나의 자식들 신앙의 미로에서 길을 잃다. 오해가 평화를 가져오다. 헤어질 때는 깨끗이

5. 손톱에 인생을 걸다. 며느리와 사위의 결혼 하나님에게 대들다. 온라인 세상에서 길을 찾다. 네일 협회와의 동행. 진상 손님들 그리스인의 오지랖

•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11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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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소풍길처럼 떠난 피난 생활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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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길처럼 떠난 피난 생활 매동 초등학교 2학년 때 6.25 난리가 터지고 피난을 떠나야 했다. 나는 엄니 가 깨소금을 주먹밥 위에 골고루 뿌리는 것을 보고는 소풍을 가는 줄 알고 앞 집에 사는 내 또래의 동무에게 “우리는 시골로 소풍 간다. 너희는 어디로 소 풍을 가니?”라고 물었다. 어린 내 눈에는 동네 모든 사람들이 음식 보따리를 이고, 지고 단체로 소풍을(?) 가는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가벼운 마 음으로 나선 길은 내 평생 사라질 수 없는 기억 속의 행진이었다. 서대문 영천 에서 외가댁이 있는 용인까지 요즘이야 차로 가면 2시간 거리이지만 국도를 따라 걸어서 가야 하는 길은 아주 먼 길이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이 나서 걷기 시작했지만, 점점 다리가 아프고 힘이 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디에 가셨는지 보이지 않았고, 엄니와 나 4 살짜리 남동생과 같이 길을 떠났는데 동생이 엄니에게 업어 달라고 징징 울 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여러 개의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지고 있는 엄 니는 동생을 업어 줄 수가 수 없어서 내가 동생을 업으려고 했지만, 너무 무거 워서 도저히 업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동생은 악착같이 내 작은 등에 매달리 고 나는 너무 힘이 들어 둘이서 함께 엉엉 울어 버렸다. 날이 어두워져서 우리 식구들은 무조건 어느 민가를 찾아 들어갔는데 그 집 에는 이미 마루뿐만 아니라 부엌, 마당까지 사람들이 가득했다. 주인이 사람 이 들어갈 공간이 더는 없다고 하자 엄니가 “이 어린 애들을 불쌍히 여겨주세 요, 또 저도 홑몸이 아닙니다.”라고 사정을 하니까 소 외양간을 가리키며 그 곳이라도 괜찮다면 자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소 없는 외양간에서 하 룻밤을 자야만 했다. 냄새가 고약했지만,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생 각할 사이도 없이 곯아떨어져 버렸다.

• 1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간밤에 있던 많은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다 빠져나가고 우리만 남아 있었다. 엄니가 빈 마당을 쓸고 있었는데 아마도 예의 바른 엄니 가 지난밤을 지내게 해준 보답으로 그랬던 것 같았다. 아침을 먹고 또다시 하 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남동생은 틈만 나면 내 등에 매달리려고 폴짝폴짝 뛰 고 나는 귀찮고 힘이 들어 동생을 피해 뛰다 보니 피난길이 잡기 놀이가 되어 버렸다. 몇 날을 동냥 잠을 자고 먹을 것도 떨어져 가는데 엄니는 남동생에게 만 뭔지는 알 수 없는 것을 먹이고 엄니와 나는 길가에서 만나는 우물물을 마 셔가면서 걸었다. 무슨 풀 뿌리인지 모를 것을 씹으라고 주셨는데 달착지근 한 맛이 나기는 했지만 배는 한 없이 고팠다. 길 가는 중에 운이 좋으면 마차 를 얻어 타기도 하고 민가에 들려 밥을 얻어먹기도 하며 드디어 며칠 만에 완 전 거지꼴이 되어서 외가에 도착했다 그렇게 고생 고생을 해가면서 외가에 도착해서 외가에서 보낸 그 해 여름은 어른들에게는 힘이 들었겠지만 내게는 나름 신나는 시간이었다. 외할머니와 함께 밭에 가서 참외와 수박을 따다가 잘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는 참외 수박 을 찾아내서 할머니에게 “여기 있다. 여기도 있다.”하고 마구 불러대던 재미 가 좋았다. 또 넓은 밭에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목화 꽃송이, 짙은 보라색의 도 라지 꽃들, 또 동글동글한 모양의 양귀비꽃들……. 그 사이 사이를 깡충깡충 뛰어다니거나 빙글빙글 돌다가 꽃 속에 넘어지면 할머니는 남의 꽃밭을 망친 다고 야단을 치셨지만, 할머니는 엄니처럼 무섭지가 않고 온화하셔서 또다시 꽃 속을 휘젓고 다녔다. 왕눈이 소도 있고 오리 식구들, 빨간 눈의 토끼도 있 었다. 또 건넛방엔 누에 벌레들이 삼 층 침대 위에서 뽕잎을 요로 깔고 꿈틀꿈 틀 느릿느릿 춤을 추는 듯했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뽕밭에 가서 자주색으로 잘 익은 오디를 혀가 검붉게 물들도록 맛있게 먹었다. 오리 떼들을 바로 집 앞에 있는 개천으로 몰고 가는 일이 매일 아침 내가 해 •

소풍길처럼 떠난 피난 생활 15

야 하는 일이었다. 어미 오리가 앞장서서 걸어가고 그 뒤를 새끼 오리들이 종 종 일렬로 줄을 지어서 따라가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뒤뚱뒤뚱 어미 오리 흉 내를 내다가 할머니에게 야단을 맞았다. 그래도 할머니가 없으면 또 어미 오 리 흉내를 내곤 했다. 할머니는 내게 버선을 만드는 법 양말을 꿰매는 법 등 바느질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도 해서 밤이면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던 기억이 새롭다. 멀지 않은 곳에 시내가 있어서 매일 시골친구들과 가서 물장난을 치며 놀다 가 맑은 물밑에 있는 소라를 잡아오면 할머니가 된장을 푼 아욱 국 속에 넣어 끓여 주셨다. 소라 꽁지를 따고 쭉 빨면 된장에 간이 밴, 부드러운 속살이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듯했다. 지금도 중국 상점에서 소라를 보게 되면 그리운 외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련해진다. 가을에는 외삼촌과 같이 할머 니네 야산에 밤을 따러 갔었다. 기다란 장대로 나무에 붙어 있는 밤을 내려치 면 밤송이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어떤 때는 내 머리 위로 떨어지기도 했는데 외삼촌이 일부러 재미로 그런다는 것을 알아서 아픈 것을 참았다. 어느 겨울날 동네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동네의 고무래 정씨 일가들이 다 모여서 심각하게 의논을 하는데 엄니가 “나는 더는 피난 못 가요. 여러분 들이나 어서 서둘러 떠나세요.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겠어요. 길에서 아이 를 낳다 객사하는 것보다 집에서 편히 있을게요.” 라고 하자 외할머니가 “그 럼 나도 남겠다.” 고 하셨다. 외할머니는 소달구지에 산더미처럼 짐을 쌓고서 떠나는 외삼촌과 아버지 및 문중 남자들의 등을 떠밀었다.

6.25 난리 통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데 이 때는 아버지가 계셨 다. 나도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비장한 분위기에 눌려 아무 말도 못 하 고 아버지와 외삼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시골친 • 1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구들이 남순이만 남고 다 떠났어도 할머니네 집엔 재미있는 놀 거리가 많아 서 심심하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아마 동네 사람들이 두 번에 걸쳐서 피난 을 갔었나 보다. 처음 용인에 도착했을 때도 친구들이 많이 보이지 않고 몇 명 남지 않았었다. 그래도 가을까지는 그 몇 명 안 되는 아이들과 재미있게 지났 는데 겨울에 한 번 더 피난을 가고 동네가 거의 비니까 남순이와 나만 남은 것 이다. 그 전에는 비행기가 떴었는지 아닌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남순이네 집 안방 에서 이불 속에 다리를 넣고 앉아 있는데 ‘쾅!’ 하는 대포 소리에 창호지가 찢 어질 정도로 집이 흔들려서 이불 속에 한참을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그런데 보통은 구들장 때문에 방바닥만 따듯하고 방의 공기는 차가운 법인데 등이 뜨 뜻했다. 이상해서 이불을 걷고 방문을 열어 보니 대문에 불이 붙어 타고 있었 다. 나갈 수가 없어서 우리 둘이 손을 꽉 잡고 겁에 질려 우는데 밖에서는 ‘남 순아! 영재야! “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도와주세요. 나갈 수가 없어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불길이 점점 나무로 된 담에 번져서 열기가 더해지는데 누군 가가 “이불, 이불을 덮고 나와라.” 하고 소리를 질러서 황급히 이불을 뒤집어 쓰기는 했지만 도저히 무서워서 불길 속으로 뛰어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 무리 어려도 ‘아무 것도 안하고 있으면 불에 타 죽을 수도 있다.’는 것과 또 불 길을 뚫고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문득 이 불에 물을 뿌리고 나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부엌에 들어가서 물통의 물을 이불 위에 마구 뿌려서 이불을 뒤지어 쓰고 둘이 손을 꽉 잡고 뛰쳐나왔 다. 다행히 나는 버선발에 솜 바지를 입고 있어서 아무데도 화상을 입지를 않 았지만 남순이는 자기 집이라서 버선을 신지 않고 있어서 맨발로 뛰어나왔기 때문에 발에 화상을 입어서 한참 동안 고생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동네에 서 제일 부잣집에 폭탄이 떨어져서 집은 형체도 없이 날아가고 가까이 있는 집들까지 불에 타서 남순네는 대문과 울타리가 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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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길처럼 떠난 피난 생활 17

미군이 부잣집 굴뚝에서 연기 나는 것을 보고 인민군들 밥을 해 준다고 판단 하고 폭격을 해서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시체도 찾을 수 없게 날아갔다고 했 다. 그러나 사실은 집주인들은 이미 피난을 가고 난 뒤라서 다른 피난민들이 하룻밤을 묵으며 밥을 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집 에서 불을 땔 수가 없어서 밥을 못하고 밖에서 불을 지펴 조그만 냄비에 밥을 끓였다. 그러다 정찰기가 아주 낮게 떠서 날아가면 할머니가 숟갈로 먹는 시 늉을 했다. 그 말이 정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이후로 다른 폭격은 없었 던 것으로 보아서 전혀 터무니없는 추측은 아닌 것 같다. 겨울이 되고 어느 날 밤에 방문이 덜커덩 열며 총부리를 겨눈 중공군이 들어 왔다. 중공군은 ‘남자! 남자!”라고 소리를 쳤고 외할머니가 출산한 지 며칠 안 되어 누워 있는 엄니와 옆에 누인 여동생 아기를 가리키며 “아기! 아기 낳어! 아기!”하고 소리치자 중공군은 그냥 나가버렸다. 아마도 중공군들은 후퇴하 면서 남자가 있으면 데려가려고 했던 것 같다. 밤새도록 총소리와 대포 소리가 그치지 않더니 날이 밝자 이번에는 미군이 들어왔다는 소문으로 마을이 뒤숭숭했다. 마을에 들어온 미군은 폭격을 당하 지 않고 남아 있는 집 중에서 제일 큰 집이었던 할머니 댁에 잠시 본부를 차렸 다. 나는 처음 보는 미군들이 너무 신기해서 건넛방과 마루에 차려진 사무실 에 드나드는 미군들을 쳐다보는 것으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미 군이 떠날 때 장교 중 한 사람이 나를 귀엽게 생각했던지 데려가고 싶다고 했 지만, 엄니가 완강하게 반대를 했다. 그 후 살면서 힘들 때는 ‘엄니가 반대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미국에 가서 훨씬 잘 살았을 터인데……’ 하고 원망한 적도 있었다. 마을에 묵었던 미군이 어디론가 떠나간 다음 엄니와 동네 사람들은 미군이 • 1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텐트를 치고 있던 곳 의 가서 미군이 땅을 파서 묻고 간 C 레이션 등을 가지 고 왔다. 소고기 통조림, 과일 통조림 등등 그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우리에 게 황홀한 먹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군의 폭격이 무서워서 낮에는 집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방공호를 들락날락하며 생활해야 했다. 방 공호 안에서 내가 오줌이 마렵다고 하면 할머니가 고무신을 주면서 그 안에 다 오줌을 누라고 했다. 더는 비행기가 뜨지 않아서 안심하고 집 안에 들어와 따뜻한 방에서 지내게 되었을 때 갑자기 아프기 시작 했다. 드러누울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아파 앉아서 이불로 등받이를 해서 쪽 잠을 자다가도 조금만 기침을 해도 자지러졌다. 약을 구할 수가 없어서 애를 태우던 할머니가 C 레 이션 상자 안에서 커피를 뜯어서 맛을 보더니 씁쓰름하니까 “미국에도 한약 비슷한 것이 있구나. 맛도 약해서 아이들이 먹어도 좋겠구나.” 하시면서 커피 를 한 대접 타서 주셨다. 그걸 다 먹고 3일 동안 꼬박 잠을 자지 못했다. 그 모 습을 보시고 할머니는 “미국 약이 우리나라 약보다 나쁘구나. “라고 하셨다. 서울이 수복되자 집으로 가기 위해서 길을 나섰지만, 서울은 아직 아무나 들 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일단 안양으로 가서 한 동안 살다가 영등 포를 거쳐서 서울 집으로 왔다. 난리 통에 학교를 세 번이나 옮겼고 피난하러 다니느라고 정상적으로 공부를 못했다. 그런데도 4 학년에 편입되어서 동창 들이 모두 나보다 한두 살 위였다. 당시에는 정상적인 수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무조건 나이대로 학년에 편입되고 선생님이 ‘월반할 사람?”하고 물어 서 손들 들면 무조건 학년을 올려 주었다. 우리 집은 언제나 교통편은 효자동 종점에서 시작되는 거리였지만 사직동을 시작으로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으로 옮겨가며 살았다. 그 중에서 특별히 기 억에 남고 어린 시절에 추억거리가 많은 곳은 단연 사직동이었다. 이사를 자 주 다녔지만 손수레 한 대면 충분한 짐이라 이사를 하기에도 쉬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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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길처럼 떠난 피난 생활 19

사직동에서도 역시 한 채의 집에 네 가정이 살고 있었는데 집 뒷마당에 쪽문 이 있었고 그 문을 열면 바로 사직공원이라 초등학교 다닐 때는 매일 공원으 로 인왕산으로 또는 산을 넘어 자하문 밖 세검정까지 넘어가서 놀던 기억이 아직도 아련하게 남아있다. 전쟁이 끝나고도 엄니는 방학이면 외갓집으로 보내 주셨다. 그때는 서울 운 동장 (지금의 동대문야구장) 앞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는데 용인으로 직 접 가는 버스가 없어서 수원으로 가서 다시 용인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엄니가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나를 수원에서 용인으로 가는 버스에 태워 달라 고 부탁을 했다.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데 길이 포장되지 않아서 덜컹덜컹 뛸 적마다 엉덩이가 공중에 올라갔다 떨어졌다 해서 할머니 집에 도착할 때쯤이 면 엉덩이가 얼얼했었다. 내가 도착하면 할머니는 이미 엿을 만들어 놓고 계셨다. 커다란 가마솥에 감 주를 졸이면 불그스름한 조청이 되고 또 조청이 줄면 엿이 되는데 미리 준비 해 놓은 볶은 콩가루를 상 위에 엷게 깔고 그 위에 물엿을 부어서 식히면 딱딱 한 엿이 됐다. 미리 조청을 자그마한 단지에 덜어 놓고 인절미 떡을 찍어 먹 을 수 있게 하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검은 콩을 볶아서 엿이 굳기 전에 함 께 섞어서 엿 강정을 만들어 겨울 방학 동안 먹을 간식을 넉넉히 준비해 두셨 다. 그뿐인가? 밥 지을 때 고구마를 아궁이 불에 넣어서 구워 주시기도 하고 배추 꼬랑지 한 광주리를 광에다 짚으로 덮어 놓고 겨울 밤 출출할 때마다 먹 던 그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여름 방학 때는 할머니가 심어 놓은 참외, 수박, 옥수수를 쪄서 먹었지만 제 일 재미가 있던 것은 누에고치를 구경하면서 먹는 것이었다. 누에가 고치가 되면 할머니는 마당에서 풍로에 불을 지펴, 물이 끓는 큰 냄비에 누에고치 하 • 2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나하나를 넣어 명주실을 뽑아내었다. 물레방아처럼 생긴 작은 틀을 돌리면 실이 감기는 게 신기했고 실이 다 끝나면 번데기가 톡 튀어나왔는데 나는 할 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고소한 번데기를 받아먹고 또 다음 고치에서 실이 다 나올 때를 목 빠지게 기다렸었다. 그렇게 뽑은 실로 베틀을 이용해 옷감을 짜는 할머니가 요술쟁이같이 생각이 들 정도이었다. 지금은 생각만 해도 도 리질을 치게 되지만 그 때는 번데기뿐만 아니라 메뚜기, 개구리 고기도 맛있 게 먹었었다. 전쟁 중에 집 밖에 나와 서서 있어야 할 경우에는 할머니가 이불을 들고나오 셔서 엄니가 왜 이불을 들고나오시냐고 물었을 때 “나는 늙었으니까 죽어도 괜찮지만 어린 영재는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비행기가 뜨면 할 머니는 이불을 내 몸 위에 올려놓고 나를 가려 주셨다 할머니는 70살이 넘어서 착한 며느리가 해주는 아침밥을 드시고 그 자리에 서 아무런 고통도 없이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영재가 할미한테 무심하구나” 하셨다는데 왜 그 때 달려가서 할머니를 기 쁘게 해주지 못했던가를 생각하면 후회의 눈물이 앞을 가린다. 냉정한 엄니 에게서는 느끼지 못한 사랑을 할머니에게서 대신 받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 고 살았다. 내 삶이 고달프다고 할머니께 소홀했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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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길처럼 떠난 피난 생활 21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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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아버지가 남긴 가위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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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남긴 가위 나는 아버지가 기술을 배운 나사점(양복점)의 일본인 주인이 주고 갔다는 무 쇠 가위 하나를 가보로서 보관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 가위를 가지고 중앙청 서쪽 옆 문 앞에 ‘호산나 라 사’라는 양복점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구정 다음 날 아침, 보통 때처럼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나온 다음 세수를 하면 드릴 수건을 준비 하고 있었다. 매일 야단만 치는 엄니 보다 항상 내 편인 아버지가 더 좋았기 때문에 나는 그 일을 기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나오더니 “앗!”하는 소리와 함께 별안간 두 손 으로 머리를 감싸고 비틀거리셨다. 나는 세수도 못 하고 방에 들어가 눕는 아 버지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그런 나에게 엄니는 학교 가기 전에 양복점 기 술자 아저씨를 아침 식사를 하자고 불러오시라 했다. 엄니의 심부름을 한 다 음에 학교에 가기는 갔지만 온종일 불안해서 공부에 집중하지 못해서 선생님 에게 야단을 맞았다. 보통 때 같으면 선생님의 말씀을 어기면 큰일이 나는 줄 아는 모범생이었지만 그날은 화장실 청소 당번인데도 그냥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도착하니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코를 골며 주무시는 아버지를 둘 러싸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주무시는데 왜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는 거 지…….’하고 의아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나는 남동생과 장난을 치다가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가 깨워서 아버지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아버지가 가쁜 숨을 몰아 쉬시더니 뚝 숨이 끊겼고 동시에 큰어머니의 “아이고! 아이고!” 하 는 곡 소리, 엄니의 통곡에 영문도 모르는 나도 덩달아 울음이 터졌고 그 후로 는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입관해서 관을 밖에 내어놓았는데 엄니가 관 위에 합장한 손을 얹고 사진을 찍으셨다. 그런데 그 광경을 쳐다보는 8살 먹은 남동생이 잔뜩 심통이 난듯한 표정을 하고 있던 모습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나중에 우연히 그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그때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까 동생은 그때 엄니가 사진을 찍는 모습이 정말 싫었다고 했다. 나에게는 아버지의 관 앞에 • 2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서 사진을 찍었던 엄니도 그 광경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8살짜리 동생도 모 두 이상했었다. 더 이상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수건을 들고 서서 아버지를 기다릴 일도 없어 지고 아버지가 밤마다 부르던 노랫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노 래에 소질이 있어서 항상 노래를 부르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가 명곡 이었다.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아버지가 어디서 그 많은 노래를 배웠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버지가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또 밤에 애들 방으로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부득부득 부모님 방에서 자면서 아버지의 발 밑에 누워 냄새 나는 아버지의 발을 잡고 자야 편했는데 더는 그럴 수가 없어 서 허전함이 밀려왔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다음 해에 풍문여중에 입학했다. 성적이 풍문 보다는 한 단계 더 높은 학교를 지원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지만, 집안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공사를 하던 큰아버지가 교장을 알고 있어서 장학금을 탈 수 있을 것 이라며 풍문으로 보냈다. 풍문여중 시절의 유일한 기억은 문선명 부인이 된 한학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나와 같은 학년이었던 학자는 어린 나이에도 고 고하고 아름다워서 같은 반이 아니었어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 럽게도 내가 풍문을 1학년밖에 다니지 못해서 학자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었 다. 중학교 1학년 때 한 번은 엄니 앞으로 봉투가 두꺼운 편지가 왔다. 이상한 생 각이 들어서 햇볕에 비춰보았더니 봉투 안에 종이가 분홍색이었다. 호기심이 생겨 바늘로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어보았다. 놀랍게도 분명히 엄니에게 온 편지였는데 손으로 쓴 글씨가 아니라 인쇄로 된 연애편지이었다. 분명히 ‘정 규월’이라는 엄니에게 연애편지가 인쇄물로 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더 욱 궁금한 것은 엄니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조심스 럽게 봉투를 다시 붙인 다음 엄니가 답장을 쓰는지 쓰지 않는지 신경을 곤두 세워 감시를 시작했다. 엄니는 몇 번이나 답장을 쓰다가 말다가 했다. 나는 마 •

아버지가 남긴 가위 25

치 선생님이 숙제검사를 하듯이 매일 같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오늘은 얼마나 썼나 하고 몰래 서랍 속에 넣어둔 쓰다가 만 답장을 가슴을 졸이며 읽어 보곤 했다. 그러다가 거의 완성된 편지를 보고 안도하기는 했지만 한 편으로는 웬 일인지 실망이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혹시 엄니가 바람이 나서 도망을 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다행이었지만 딱 잘라서 구애를 거 절하는 것이어서 마치 연애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가슴 졸이며 읽었는데 싱겁 게 결론이 나버렸던 탓이다. 그런데 나중에 고교를 졸업한 후 어느 날 신문에 ‘용인 처녀 정규월에게 바치 는 글’이라는 문구로 책 광고가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그 날 떨리 는 마음으로 신문을 가지고 가서 엄니에게 보여주면서 비로소 어떻게 된 일 이냐고 물어볼 수가 있었다. 물론 6 년 전에 편지를 뜯어본 이야기는 하지 않 았지만, 엄니에 대하여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의문이 풀릴 수 있는 순간이어 서 호기심을 가지고 바짝 대들었다. 엄니는 마음속에 아무 감정이 없는 듯이 담담하게 지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니가 어렸을 때 같이 놀던 무당집 아들이 있었는데 커서는 자연히 양반집 인 엄니네 집과는 교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엄니가 결혼해서 나를 낳고 고향 에 갔는데 무당집 아들이 찾아와서 언젠가 엄니를 만나면 사랑을 고백하고 고향을 떠나리라 마음 먹고 엄니가 친정 집에 올 날을 기다렸었고 했단다. 그 는 그 후 고향을 떠나서도 결혼 하지 않고 살았는데 무당 엄마가 임종하면서 점 찍어 놓은 처녀가 있으니 결혼을 하라고 해서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는 소 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안양에서 인쇄소를 하면서 엄니에게 편지 도 보내고 시조로 된 책까지 내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 후 고향을 떠나서도 결혼 하지 않고 살았는데 무당 엄마가 임종하면 서 점 찍어 놓은 처녀가 있으니 결혼을 하라고 해서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안양에서 인쇄소를 하면서 엄니에게 편 지도 보내고 시조로 된 책까지 내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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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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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파란 원피스의 교훈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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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원피스의 교훈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30대에 혼자되신 엄니는 어린 4 남매를 데리 고 아버지가 운영하던 양복점을 맡아서 하시게 되면서 집에는 일하는 식모를 두게 되었다. 그때는 배가 고픈 시절이라 시골에서는 밥만 먹여 주어도 남의 집으로 식모살이 하러 오는 어린 여자아이가 많았다. 엄니는 나보다 2살 많 은 명자라는 식모에게 2살이던 막내 여동생을 돌보는 일과 살림살이를 맡기 고 양복점에 출근은 하셨다. 그러나 성당에서 초상이 나면 모든 일을 제쳐 놓 고 달려가셔서 염을 하고 수의를 갈아 입히는 등 궂은 일을 도맡아 하셨다. 엄 니는 죽은 사람이 조금도 무섭지 않고 사체에서 나오는 오물도 더럽게 느껴 지지 않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시신을 만지고 오면 오히려 몸이 가볍고 건 강해진다고 했는데 아마도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가는 사람을 잘 보내드린다 는 믿음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양복점 일은 재단사 아저씨에게 맡겨놓고 성 당 일에만 열심을 내다가 보니 자연히 재단사가 주인행세를 하게 되었다. 어 느 날 재단사가 그 동안 우리 집의 단골손님들이었던 중앙청 직원들의 외상 대금을 몽땅 받아서 사라져 버렸다. 엄니는 부득이 양복점을 접을 수밖에 없 게 되었다. 양복점의 문을 닫게 되자 외할머니가 용인에 있는 땅을 팔아 돈을 마련해서 양복점 자리에다 미제물건을 팔도록 해주셨다. 가게가 중앙청 옆 문 바로 앞 에 있었고 중앙청 옆 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공보실 건물이 있었다. 당시에는 동시녹음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영화가 촬영 후에 녹음을 따로 해야 해 서 배우들이 녹음을 위해서 공보실로 와야 했다. 왜냐하면 녹음 시설이 공보 실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유명한 영화배우들도 우리 가게에 많이 드나들어서 장사는 잘 되는 편이었다. 깜찍하게 예뻤던 배우 엄앵란이 황정 순 씨와 팔짱을 끼고 와서 미제 껌이나 초콜릿을 샀었고 또 김의향이라는 아 •

파란 원피스의 교훈 29

주 예쁜 배우도 왔었다. 그러나 엄니는 여전히 성당에 초상이 났다 하면 성당 으로 달려갔다. 가게는 중학교 1학년이던 나에게 맡기거나 우리 집에서 유학 중이던 대학생 외삼촌에게 맡기거나 심지어는 식모에게도 맡겼으니 장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어느 날은 엄니가 명자 것과 내 것으로 파란 원피스 두 벌을 만들어 오셨는데 나는 식모와 같은 옷을 입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식사 시간 때 물심부름은 꼭 나를 시키셨다. 내가 싫어서 꾸물거리는 사이에 명자가 일 어서서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하면 엄니는 명자는 앉아 있으라고 하고 나에게 “물을 가져오지 못하고 왜 꾸물꾸물 대냐?”고 야단을 치셨다. 여름이면 그래 도 괜찮지만, 겨울엔 정말 일어나기 싫었다. 하지만 엄니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불만만 쌓여 갔다. 나는 엄니가 왜 딸과 식모를 똑같이 취급하시는지, 아니 오히려 식모인 명자를 더 배려해주고 예뻐해 주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명자가 나보다 더 잘하는 것도 없고 또 눈도 사팔뜨기였는데, 나는 눈이 예쁘 다는 소리를 듣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엄니가 명자를 자식으로 삼고 싶 은 것 같지는 않은데 나에게는 한없이 무뚝뚝한 분이 명자에겐 부드럽게 미 소까지 띠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니가 그렇 게 하니 자연히 명자도 자기가 딸인 양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중에 는 밥하는 일 외에는 청소나 요강 비우는 것까지도 나와 반반씩 하자고 해서 기가 막혔다. 그런 사실을 엄니에게 일러봐야 본전도 못 건질 것 같아 참고 지내자니 명자 에 대한 미움만 점점 더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명자의 보따리를 호 기심에 풀어 봤더니 그 속에 껌과 초콜릿 젤리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 가? 그 동네에서는 그런 물건이 우리 집밖에 없었기 때문에 엄니가 명자에게 가게를 맡기셨을 때 훔친 물건이 틀림 없었다. 나는 “옳다구나!” 하고 드디어 • 3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명자가 호되게 야단맞는 꼴을 보겠구나 하고 고소한 생각이 들어서 엄니에게 얼른 일러바쳤다. 더욱이 명자가 얄미운 것은 명자가 방문에 구멍을 뚫고 맞 은편 방에 세를 들어 사는 대학생들을 훔쳐 보는 것이었다. 나는 틀림없이 명 자가 대학생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초콜릿을 갖다 바쳤을 것이라고 나름대 로 예리하게 추리를 했다. 그런데 세상에! 잔뜩 기대했는데 엄니는 명자를 앉 혀 놓고 “네가 얼마나 먹고 싶으면 그랬겠니? 그럴 네가 아닌데……. 이 다음 부터는 먹고 싶으면 아줌마에게 얘기해.”라고 조곤조곤 타이르시는 것이 아 닌가? 나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어서 눈물이 푹 쏟아졌다. 만약에 내가 그랬다면 1시간은 족히 야단을 맞았을 터인데 명자에게는 나긋나긋하게 단 몇 분 만에 끝내다니? 혹시 내가 정말로 다리 밑에서 주어 온 아이는 아닌가? 사실 엄니와 나는 얼굴도 닮지 않았잖아? 저럴 수가 없어. 엄니는 내 엄니가 아니야. 별 생각이 다 들어서 뒤쪽 마당 문을 열고 사직공원으로 나가서 한참 을 울었다. 명자가 미워서 학교 갔다 집에 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꾀를 낸 것이 아이 들의 머리를 해주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한 울타리 안에 세를 들어 사는 순자 에게 머리를 예쁘게 해 주겠다며 부지깽이를 연탄불에 달궈서 꼬불꼬불하게 만들어 주었다. 순자는 거울에 비친 어른 같은 모습을 보고 좋아했는데 시장 에서 돌아온 순자 엄마가 야단치는 바람에 머리를 감아야 했다. 그러나 다행 히도 평소에 머리를 한 번 감기려면 애를 먹이던 순자가 고분고분 머리를 감 으니까 순자 엄마가 앞으로 자주 머리를 감으면 1 달에 한 번 머리를 볶아도 된다고 허락을 해주셨다. 그렇게 순자는 첫 번째 단골이 되었다. 순자의 머리 를 보고 동네 아이들이 하나씩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많이 하다 보니 제법 기 술이 늘어서 마음 놓고 하다가 그만 한 아이의 머리를 태워 버렸다. 그 아이의 •

파란 원피스의 교훈 31

엄마가 와서 야단을 치는 바람에 한창 인기가 있던 무료 미용실(?)은 강제 폐 업을 당했다. 그 동안 미용실 운영으로 바쁜 바람에 명자와 부딪칠 시간이 적 어서 마음이 편했는데 아쉽게 끝났다. 나는 명자와의 신경전을 피하고자 이 번에는 책이나 읽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오면 책만 붙들고 있었다. 책 은 원래 좋아해서 초등학생 때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동화전집인 ‘떡 배 단배’ 를 시작으로 초등학교 졸업할 때는 이광수 전집을 끝냈다. 어느 일요일 명자가 사촌 언니네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니까 엄니가 명자는 서울 지리를 잘 모르니 같이 갔다 오라고 하셨다. 싫었지만 엄니 말씀이 하나 님 말씀 같았던 때라서 명자를 따라서 같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더욱 질 색하고 팔짝 뛸 일은 명자와 똑같은 파란 원피스를 입고 가라는 것이었다. 주 소와 약도를 받아 들고 길을 나섰는데 모처럼 외출을 하는 명자는 신이 나서 자꾸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것도 싫고 식모와 같은 원피스를 입은 것이 창피 해서 대꾸도 하지 않고 가능하면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걸었다. 그런데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사촌 언니 집은 예상외로 부잣집 이었다. 사촌 언니가 명자를 보더니 매우 반가워하며 내 눈에도 진수성찬으 로 보이는 밥을 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부잣집 마님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명자를 식모라고 무시해 온 것이 속으로 조금 켕겼다. 집으로 돌 아가야 할 시간이 되니까 사촌 언니는 매우 아쉬워하면서 명자에게 용돈까지 주었다. 더욱 놀란 것은 명자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촌 언니로부터 받은 돈 의 반을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사양을 했지만 꼭 받아야 한다고 억 지를 부려서 받기는 받았지만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건 뭐지? 우리 는 서로 미워하는 사이가 아닌가? 명자가 어떻게 돈을 나에게 줄 수 있을까? 그 동안 나 혼자만 명자를 미워한 것일까? 나 같으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집으로 돌아갈 때도 올 때처럼 명자와 나란 • 3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히 걷지 못하고 올 때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뒤에 떨어져서 걸었다. 그 후부터 명자가 식모가 아니라 언니같이 느껴져서(사실은 명자가 2살이 많았다.) 전과는 다르게 사이 좋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시골에서 홀로 사시 던 명자 아버지가 새 장가를 갔는데 새 부인이 착한 사람이어서 명자를 딸 같 이 잘 돌봐 주겠다며 데려가서 우리 집을 떠났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용돈 사건을 생각에 해보니 엄니가 평소에 교육을 그 렇게 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 날 우리가 엄니의 방침 때문에 같은 원 피스를 입었던 것처럼 명자는 항상 나와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고 명자의 사촌 언니가 볼 때도 명자가 우리 집에서 딸과 똑같이 대우를 받는 것 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명자는 엄니가 가르치는 데로 나와 똑같이 요강을 비워야 하는 일처럼 용돈도 자연스럽게 나누게 된 것이었다고 생각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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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원피스의 교훈 33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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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성당에 미친 엄니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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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미친 엄니 엄니의 태만에도 불구하고 미제 물건장사는 그럭저럭 장사가 됐는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경쟁 가게가 생겼다. 엄니는 여전히 성당에 일만 생겼다 하면 가게를 내팽개치고 달려나가고 그들은 부부가 열심히 일하니 결과는 뻔 한 일이었다. 엄니의 광신적인 신앙 때문에 가게가 폐업하게 되고 설상가상 으로 남동생이 다리에 골수염이 생겨서 명동 백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에 같은 성당에 다니셨던 김홍섭 판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우리 집 형편을 잘 알기도 하시거니와 아버지의 대부이기도 하셨던 김홍섭 판사님은 “너는 장 녀이니 이제부터 엄니를 도와야 한다.”고 하시면서 대법원에 사환으로 취직 을 시켜 주셨다. 양복점을 폐업하고 선물 가게도 실패하고 남동생의 병은 점점 심해져서 집 안 형편이 급격히 곤두박질치게 되었다. 우리는 방 두 개짜리 전셋집에서 방 하나짜리 월셋방으로 옮기고 또 월세방도 좀 더 싼 곳을 찾아 이사를 자주 하 게 되었다. 처음에 남동생이 입원했을 때까지만 해도 외갓집과 큰댁에서 동 생의 수술비를 보태 주어서 수술을 마치고 퇴원을 했지만, 그 뒤부터는 나의 쥐꼬리보다 더 가느다란 월급에 의지하는 생활이 되었으니 끼니 걱정이 최대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당연히 나의 월급봉투에서 조금이라도 돈이 비 는 경우에는 엄니에게서 벼락이 떨어졌다. 구내매점에서 국화빵을 팔았는데 팥을 잔뜩 넣은 따끈따끈한 국화빵의 유혹에 넘어가서 무서운 엄니도 잠시 잊 어버리고 외상 장부에 달고 사 먹었다. 구내매점과 구내식당이 모두 경리과와 연결 되어 있어서 월급날, 매점과 구 내식당의 외상값이 공제되어 나왔다. 월급봉투에 기재된 외상 기록 탓에 월 급날만 되면 엄니에게 한 차례 야단을 맞아야 했다. 엄니는 그때마다 돌아가 • 3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신 아버지의 흉, 큰 댁에 대한 서운함 등 한풀이를 1시간 또는 2시간 동안 내 게 쏟아 부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머리를 두 무릎 사이에 박아 놓고 죽을 죄 를 지은 죄인처럼 앉아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앉은 자세까지 꼬투리를 잡힐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머리를 숙인 체 잠들어 있을 때가 많았다. 엄니는 귀한 양반 집에서 태어나 호강 하면서 자랐고 당시 시골에서 대부분 의 여자는 학교를 보내지 않을 때 동네에서 유일하게 심상소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인물만 훤한 아버지에게 시집 와서 호강하기는커녕 술만 취하면 주먹 을 휘두르던 결혼생활이 지옥 같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엄니 얼굴이 어릴 때 구박하던 계모 얼굴로 보여서 엄니를 때렸다고 한다. 나를 낳 고 도저히 못 살겠기에 나를 떼어놓고 친정으로 가려고 길을 나섰는데 젖을 찾아 울고 있을 나를 생각해서 발길을 돌렸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 때문에 아 버지와 헤어지지 못하고 평생 고생만 하고 산 것이 원통해서 한이 맺혔다고 하시면서 내가 아버지를 닮은 것조차 싫다고 하셨다. 내가 조금 더 큰 다음에 어느 날 또 아버지 원망을 퍼 붙기에 답답해서 “도대체 엄니처럼 똑똑하시고 집안도 좋은 친정이 있는데 왜 이혼 하지 않고 사셨냐?”고 여쭈었더니 아버 지가 술만 깨면 무릎을 꿇고 빌고 또 빌면서 제발 떠나지 말라고 애원을 해서 불쌍해 산 것이 결국 세월을 허송했다는 푸념을 늘어놓으셨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일생이 결정된다면 엄니는 아버지를 만나서 운명이 판가름 났고 나는 김홍섭 판사를 만나서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법원에서 일하게 되면서 야간이 있는 동구여중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지만, 덕분에 나는 한국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대법원에서 어린 눈으 로 격동하는 60년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 성당에 미친 엄니 37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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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대한민국 대법원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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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법원

대한민국 대법원의 음산한 이야기가 시중을 떠돌고 있다. 그러나 대법원이 오 손도손 아기자기 할 때도 있었다. 그것도 무려 반세기 전인 60년대였다. 몇 해 전 70대 여성의 자서전을 써 준 일이 있는데 그녀는 60년대 야간 중고등학교를 다 니면서 5년간 대법원의 사환(관청이나 회사, 가게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고용한 사람)으로근무했었다. 사법부가 시끄러운 지금, 그녀의 이야기를 통하여 당시의 대법원은 어땠었는지 시간 여행을 해보자.

내가 가장 나이 어린 사환으로 대법원에 근무할 때 대법원장은 우리나라 사법 역사에서 가장 존경 받는 가인 김병로 원장이었다. 가인은 일제강점기 독립투사 들의 무료 변론을 도맡았었고 민족의 미래를 개탄하며 소석(小石)이던아호를 ‘ 거리의 사람’이란 뜻의 가인으로 바꿨다고 한다. 가인은 대법원장 재임 9년 3개 월 동안 사법부 밖에서 오는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을 뿐 아니라 법관들에게 항상 청렴을 강조하였다. 이따금뵙게 되는 대법원 장님이 퇴청 하실 때 눈에 띄인 것은 영감님께서 구두 대신 검은 고무신을 신으 • 4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셨다는 것이었다.검은 두루마기 역시 반드르르하지 않은 무명천이라서 어린 나 는 속으로 ‘저렇게 높은 분께서 왜 비싼 옷과 멋있는구두를 신지 않으실까?’ 하 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김홍섭 판사님도 역시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다. 한번은 판사님 댁에 심부 름을 갔는데 집도 작았고 반찬도 우리 집과 별반 다름이 없어서 더욱 존경스러 웠다. 한참 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정치 깡패 이정재와 임화수가 다른 죄수 들과 굴비 엮이듯이 엮여 오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죄수인 이정재의 하 얀 비단 한복을 입은 모습이무명옷의 대법원 원장의 모습과 무척 대조되었다. 당시에는 대법원, 고등법원, 지방법원, 그리고 법원 행정처가 모두 한 울타리 안 에 모여 있어서 구내식당, 구내병원,구내 목공소, 구내매점, 심지어 원예사까지 있었다. 목공에겐 법원 안에 기거할 수 있는 관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자녀들이 원하면 사환으로 일할 기회를 주었다. 사환에도 임시사환, 정사환으로 직급이 있 었고 봉급에도 차이가 있었다. 출근부에 올라 있는 이름 순서대로 진급이 되는 터라 출근부만 보면 자기의 순서를 알 수 있었다.

사환들의 세계에서도 나름의 질서와 문화가 있어서 지방법원 사환은 뛰고, 고 등법원 사환은 걷고 대법원 사환은 앉아 있었다. 왜냐하면, 지방법원은 사환 한 명이 여러 판사의 심부름을 해야만 했지만, 대법원에서는 대법관 한 분만모시 면 되었고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 었다.

대법관 실에서 내가 하는 일은 청소와 커피 끓이는 일, 그리고 판결기록을 서기 실로 보내서 정서하도록 하는 일, 손님이 오시면 커피 대접, 대법관님 점심 주문, 판결문을 다른 대법관실에 회람 돌리는 것이 전부였다. 온종일 대법관님과 같은 사무실에서 함께 생활하니까 매사에 행동거지가 조심스럽고 조용할 수밖에 없 • 대한민국 법원 41

었다. 대법관님은 점심을대부분 구내식당에서 시켜 드셨는데 토스트 두 장에 따 듯한 우유 한 잔, 아니면 설렁탕 한 그릇 뿐이었다. 매주 화요일에 대법관회의가 있을 때만 일식집에서 도시락을 주문해서 드셨는데 음식을 깨끗하게 남겨서 서 기나 비서들까지 내게 아부(?)해서 남은 음식을 얻어먹곤 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법원에도 군인이 들어와 법원 내의 모든 행정업무를 군대 시스템으로 바꾸기 시작했는데내가 군인들이 근무하는 방에 배치되었다. 그 방에 여유 있는 한량 같이 생긴 중령과 백범 김구 선생의 젊은 모습처럼 둥 근 테 안경과 대머리 같이 보이는 짧은 머리 스타일을 하고 흡사 로봇같이 정확 히 일만 하는 대위 한 명과 나,셋이 근무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 보 는 일본 순사 같기도 한 대위는 출근을 하면 먼저 전화로 부모님께문안 전화를 짧게 하고 근무 시작을 했다. 법원으로 파견을 나온 것을 보면 법무관이었을 것 이고 당시 가정집에 전화가 있는 집은 매우 드물었던 시대이고 보면 대단한 집 의 아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이 처음에 법원에 들어와서 착수한 일들은 군 미필자를 색출해서 군에 보 내고, 부정 부패한 공무원 찾아내기,모든 문서를 현대화 시키기였다. 예를 들어 세로쓰기 문서를 가로쓰기로 전환하기, 한자를 한글로 전환 등등의 일도 있었다.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대위는 나에게 ‘누가 민원인 접촉을 많이 하는지? 외식을 자주 하는지?’ 등의 직원들의 동향을 물었다. 대위가 왜 묻는지 그 이유를 몰랐 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내가 보고 들은 대로 모든 것을 말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 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군인들은 나에게 들은 자료를 가지고 직원들을 숙청하 는 데 사용한 것 같다. 중령과 대위 단 둘이서 하는 살인적인 업무량 때문에 매 일 야근을 해야 했다. 근무가 끝나면 통금시간이 이미 지났기 때문에 군인 지프 를 태워줬다. 시청 앞부터 효자동까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텅 빈 광화문 거리 • 4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를 질주하는 느낌은어린 나이에도 세상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박 정희가 군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할때, 그날의 그 기분이 떠올 려지면서 그 발표가 전혀 놀랍지가 않았다.

6년간의 나의 법원 생활에서 특별히 기억이 나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10년간 대법원장을 했던 민복기와의하찮은 인연이었다. 당시 법원 행정처 차장 이었던 민복기가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자기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며”너를 보면 10년 전에 먹은 오징어가 다시 올라온다.”고 심하게 나무랐다. 어른만 보면 인사를 하는 어린 10대 소녀였던 나로서는 자기가 눈길을 주지 않아서 인사를 할 기회를 놓친 것인데억울하지만,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행정처 장님이 인사 잘한다고 특별히 나를 지목해서 처장실로 옮긴때였는데 차장님에 게 인사를 안 한다고 찍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는 그 시대 내 또래의 사람들이 전혀 접할 수 없는 세상인 법원을 통하여 세 상을 배웠다. 법원 안에서 많은 일을보고 겪었지만,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충격적 인 일들도 있었다. 그 중에 순간적으로나마 충격을 받은 일은 한국의 소비자 운 동의 대모였던 여기자 정광모 씨를 본 일이었다.

한국일보 법원 출입 기자였던 정광모 씨는 빨간 재킷에 바지를 입고 당시로써 는 보기 드물게 폭스바겐을 타고 다니고 남자 기자들처럼 기자실 문을 발로 차 고 들어오기도 했다. 원래 기자라는 직업이 안하무인으로 건방을 떠는것부터 배 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젊은 여기자의 당돌한 행동은 법원에서도 주목거리가 되 었다. 한 번은 기자실에 보낼 문서가 있어서 들렸는데 정광모 씨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 의자에 앉으면서 자세가 잘못되었는지 손으로 가랑이사이의 국부를 툭 치면서 “아이고 내 보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놀라서 그만 기절할 뻔했 다. 젊은 여자가 남자 기자들 사이에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에 중학교 여학생 이었던 나는 머리에 전기충격을 받는 것 같았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 대한민국 법원 43

판단을 넘어서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임시사환에서 정사환이 되는 순서에서 뒤에 들어온 애가 나보다 먼저 진 급이 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쪼르르 김홍섭 판사님께 달려가 울면서 자초 지종을 일러바쳤더니 판사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책 한 권을 주셨다.

“나도 그런 일을 많이 겪었다. 너도 이번만이 아니라 비슷한 일을 또 겪게 될 거 야. 내가 쓴 이 책이 조금이라도 너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하시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그때 주신 ‘무상을 넘어서’ 라는 책을 소중히 간직했었는데 그만 한국을 떠나며 집에 두고 오는 바람에 어디론가 없어져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사환이 고교를 졸업하면 큰 탈이 없는 한 대부분 임시 서기보 자리나 촉탁, 여 자는 타자수로 진급이 되었다. 그러나마음 깊은 곳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환에서 정식 직원으로 승진된다고 해도 사환 출신의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닐 것이라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나는 평생 이 직장에서 ‘사환 출신’의 꼬리표를 달 고 근무하고 싶지는 않았다.더구나 그 즈음 사환을 채용할 때도 공개 시험을 도 입해서 경쟁률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정식으로 법원 공무원이되는 것이 아니고 공개채용이 아닌 특채로 사환에서 진급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한 편으로 는 내 실력으로얼마든지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어서 나 스 스로 나의 가치를 검증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법원을 그만두었다.

법원을 그만둔 몇 해 후, 친구의 일로 법원에 갈 일이 생겨서 나에 대해서 신경 을 많이 써 주셨던 계장님을 찾아갔더니 점심을 사주시겠다며 고급 그릴로 데려 갔다. 나는 깜짝 놀라서 “너무 비싼 데 왔네요.” 했더니 그 분은 “항상오는 단골집 이야. 지금은 형편이 많이 달라졌어. 왜 기다리지 않고 그만두었어?” 하는 것이 아닌가? 그날 밥은 잘먹었지만 돌아오면서 ‘봉급이 그렇게 갑자기 뛸 수가 없는 데, 군인들이 들어서고 난 뒤에 공무원들이 더 부패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 4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서 씁쓸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뇌물을 받았던 기억이 생각났다.

첫 번째 뇌물은 전도관 박태선 장로 공판이었다. 행색이 초라한 엄니 또래의 아 주머니가 간절한 눈빛으로 복도를지나가는 나를 붙들고 “학생, 여기 근무해요? 나 ㅇㅇ법정 방청권이 긴히 필요한데 얻어 줄 수 없어요?” 하는 것이아닌가? 그 애절한 모습이 마음에 걸려서 나로선 얻기 쉬운 방청권을 몇 장 얻어다 드렸더 니 신앙촌 카스텔라를 한보따리 안겨줘서 얼떨결에 받았다. 두 번째 뇌물은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변호사들로부터 이따금 용돈을 받은 것 이다. 토요일쯤엔 가끔 변호사들이 들려서 일찍 퇴근하니 극장이나 가라고 용돈 을 조금씩 줄 때가 있었다. 그 용돈을 받은 뒤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호사가 부 탁한 대로 그 기록을 맨 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되었다. 그 변호사는 자기가 담당 한 사건의 판결을 조속히 끝내고 싶어서 내게 돈을 주었던 것이다. 대법관님은 내가 놓은 재판기록을 위에서부터 차례로 판결문을 쓰도록 말이다. 돌이켜 보면 나도 권력의 끄트머리에서 힘을 써 본 셈이니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엄격한 대법원에서 제일 직급이 낮은 사환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나중에 미 8군 무대의 무용수가 되 었어도 그 버릇이 변하지 않아서 나이 어린 단원들에도 반드시 존댓말을 썼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이런 태도가 문제가 되었다.

어느 날 연습 도중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나이 어린 단원 둘이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늦게 들어와서 춤도 잘 추지 못하는 주제에 혼자서 교 양 있는 척한다고 흉을 보는 것이었다. 화가 나서 쫓아 나가 “야! 이 년들아! 평 생 욕이나 먹고 살아야 시원하겠냐?” 하고 뺨따귀를 갈겨 버렸다. 그 다음부터 는 태도를 바꾸어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웬만하면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원 래 무용단은 동작 통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규율이 강하고 말이 짧고거칠었다.

• 대한민국 법원 45

엄격한 가정과 엄숙한 법원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탓에 철저하게 예의와 질서 를 지키는 것이 몸에 배 있는 나에게 마치 군대 같은 무용단의 분위기는 완전히 딴 세상이어서 공손하고 상냥한 태도가 전혀 먹히지 않았다.농담으로 너무 저속 한 이야기를 한다든가 약해 보이는 사람을 존중하기 보다는 무시하는 경향 등 법원에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환경이 정말 싫었 다. 법원에서는 대법관님 한 분만 잘 모시면 아무문제 없고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도 있었고 어린 급사의 신분이지만 높은 분들도 반말을 하지 않아 존중 받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말이다. 나라가 거꾸로 돌아가던 시절의 대법원 이야기다. 해도 60년 전, 나름 품격 있 었던 대법원의 분위기가 조금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나라 전체를 후진 기어 넣 고 달리게 만든 대법원이 되어 버린 지금, 우리는 과연 지금이 나아졌다고 얘기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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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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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의도 하지 않았던 가출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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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없는 판단 세상의 파도에 실려 법원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되어서 생각했던 대로 사장, 과장, 나 너무 단출해서 허전하게 느껴지는 작은 회사에 손쉽게 경리로 취직이 되어서 조용한 법원에 비해서 매일 손님이 북적거리고 바쁜 것은 좋았다. 내가 하는 업무는 사환 때나 별다름이 없지만 그래도 정직원이라는 것에 나름 자부감도 느꼈다. 손님 차 대 접, 전화 받기와 간단한 장부정리 등등의 어렵지 않은 업무에 봉급도 나쁘지 않 았고 얼마 안 있으면 나를 도울 보조 직원도 뽑겠다고 하니 열심히 일해야겠다 는 다짐으로 늦게까지 야근을 해도 기쁘기만 했다.

한 달이 지나자 이 직장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장 님에게 물어보면 아버지같이 인자한 얼굴의 사장님은 웃으면서 “아직 신입사원 에겐 알려 줄 수 없는 큰 사업이니……. 이 양은 자기 일만 해.”라고 하는 바람에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한데 드나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내가 항상 보아오던 단 정한 모습의 법원 직원들과는 대조적으로 무언가 불안해 보이고 어쩐지 촌스러 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루는 여느 때와 같이 월요일 아침 출근을 했는데 사무실 앞에 많은 사람이 몰 려 있었다. 출근하는 나를 보자마자 내 팔을 꽉 잡고는 “네 사장 놈 어디 있냐?”고 문초를 하기 시작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나에게 “그 놈 집 알지?” “ 너도 한 패거 리지?” 하고 중구난방으로 여러 목소리로 다구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 을 헤치고 사무실 안에 들어가 보니 모든 서랍이 열려 있고 종이들이 바닥에 나 뒹굴고……완전히 난리 판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날 벼락인지 알 수가 없어서 몸이 후들후들 떨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사장과 과장이 농사 짓는 사람들에게 융자를 해준다고 맡겨 놓은 땅이나 집문서를 저당 잡혀 돈을 • 철 없는 판단 49

빼내서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그들과 한 패거리가 아니라고 이야 기를 해도 그들은 나를 일당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가장 무섭게 만 든 것은 그들이 경찰서로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엄니를 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 5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의도 하지 않았던 가출 고무래 정씨인 엄니의 가문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엄니는 가문 에 대한 자긍심이 매우 강한 분이었다. 엄니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아버님 성 함이 어찌 되는가?”를 묻고는 양반 성씨를 가진 사람과 아닌 사람을 대하는 자 세가 틀려서 나를 항상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어떤 때는 우리에게조차 쌍놈티 가 난다고 해서 평생의 상처가 되기도 했다.

“양반은 냉수를 먹고도 이빨을 쑤신다.” 라는 말처럼 아무리 우리가 가난했어도 엄니는 가난한 티를 조금도 내지 않고 언제나 우아하고 단정한 모습을 유지하 고 말씨나 행동에 품격이 있었다. 나는 스무 살이 넘도록 말대꾸를 한 번도 해보 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엄니 앞에 앉을 때는 항상 무릎을 꿇고 앉도록 교육을 받았다. 나로서는 항상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런 사정을 알 리 가 없는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는 혹시 엄니가 친엄마가 아니냐고 묻기까 지 했을 정도였다. 내겐 엄니는 세상에서 제일 멋있고 똑똑하고 올바른 사람인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무섭고, 또 한 편으로는 싫었던 분이었다.

사정이 이러한 형편이니 나로서는 경찰서 보다는 엄니가 더 무서울 수밖에 없 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차라리 감옥에 보내 주세요. 엄니한테 가면 저는 죽어 요.” 하면서 엉엉 울며불며 사정을 했더니 그들 보기에도 딱해 보였는지 그대로 돌아갔다. 아! 이제 난 어쩌지? 오늘 밀린 월급 두 달 치와 보너스까지 탈 거라고 엄니에 게 자랑하고 왔는데…….’ 나는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흡사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가버린듯한 사무실 구 석에 털썩 주저앉아서 엉엉 울기도 하고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없는 웃 음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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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작정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어둑어둑해질 무렵에 사무 실에서 나왔다. 춥지도 않은 데 몸이 떨렸다. “어떻게 집에 가지? “하는 생각뿐이 었다. 낙담하고 실망하고 화를 낼 것이 틀림이 없는 엄니의 얼굴이 떠올라서 도 저히 집으로 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나?’하고 고민을 하다가 가 장 친한 친구인 초희네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날 받은 충격에, 앞으로의 걱정, 엄 니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듯 한데다가 온종일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해서 힘이 하나도 없었다. 발걸음이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 려 지나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법원에서의 사환 생활이 얼마나 행복 하고 평화로웠던가? 그때는 왜 그걸 몰랐을까? 하는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초희네 집에 들어서자 평소와 전혀 다른 내 몰골을 보고 초희는 깜짝 놀랬다. 그러나 나는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할 틈도 없이 방바닥에 쓰러져 며칠 동안 지 독한 몸살을 앓아 누웠다. 당시 초희가 결혼 후 임신을 해서 집에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사실 초희와 나는 학교 다닐 때는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였는데 졸업식 때문에 친하게 되었다. 당시 졸업식은 꽃다발을 들고 사진 찍고 식구들과 함께 중국집 에 가서 자장면을 먹거나 형편이 좀 더 좋은 집이면 탕수육, 잡채 정도를 더 시 켜 먹는 것이 유행이었다. 졸업식날 시장 바닥처럼 붐비던 학교 운동장이 학생 들과 가족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난 후 초희와 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엄니는 잠깐 들려서 싸구려 꽃과 점심값을 주고 성당 교우 초상집에 간다고 졸 업식이 끝나자마자 힁하게 가버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초희도 나와 비슷한 이 유로 혼자 남아 서성거리고 있던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둘이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을 시켜 먹으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졸 업식 날 부모로부터 바람맞은 서운함은 사라져 버리고 통하는 친구를 얻게 된 • 5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기쁨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중국집을 나온 다음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그 동안 말로만 듣고 선망하던 종로 2가에 있던 음악 감상실 ‘디쉐네’에 가보기로 했다. 교복을 입은 채로 “우린 이제 졸업했으니까 학생이 아니야 “ 하며 들어갔는데 컴 컴해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졸업 축하한다.”는 소리가 들리고 박수도 터져 나왔다. 그날 이후 우리는 시간 날 때마다 가서 입장료에 포함된 홍차를 마 시며 그 당시 유행하던 경음악 green field, 톰 존슨의 디라일라, 폴 앵커의 오 캐 럴 같은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었다. 디쉐네는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공 허한 우리들의 마음에 위안이 되어준 보금자리였다. 우리 집보다는 경제적으로 형편이 좋았던 초희는 어려서부터 후일 국립 무용단 단장이 된 송범씨에게 발 레를 배웠는데 기량이 뛰어나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졸업 후 그 당시엔 발레 전공자들이 설 무대가 거의 없어서 결국 패티 킴, 현미가 소속되어 있었던 미 8군 전속 연예 기획사 ‘화양’ 에 무용수로 스카우트 되었다.

• 의도 하지 않았던 가출 53

귀여운 뇌물 엉겁결에 그러나 결과적으로 가출까지 한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감히 엄 니에게 연락을 할 엄두를 못 내고 엄니 역시 초희네 집을 모르기 때문에 나를 찾 을 수가 없었다. 한 편으로는 일부러 무서운 엄니의 존재를 잊어버리려는 자기 최면의 방법으로 연락을 끊고 살았던 면이 있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동 생이 다시 시립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음은 말로도 글로도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웠지만 발길은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서자 침대 에 누워서 나를 바라보는 동생의 표정 역시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원망과 반가움이 섞인 표정이었으리라.

“엄마는?”

“부엌에”

동생과 단 두 마디를 나누고 환자 가족이 공동으로 쓰는 부엌을 찾아갔더니 무 엇인가 씻고 있는 엄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두려움 때문에 발 길을 돌리려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엄마!”라는 소리가 나와 버렸다. 내 목소리를 듣고 돌아선 엄니는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다가와서 말없이 나를 끌어 앉았다. 그리고선 “밥 먹었니?” 라고 물으셨다.

법원에 있을 때는 시간이 많아서 구내 도서실에서 책을 빌려 많이 읽었다. 사 실은 대법관님이 내가 책을 붙들고 있을 때면 미소를 보내 주시기 때문에 읽지 않아도 책상 위에 늘 책을 놓고 있었다. 법원 구내 도서실에는 법률 서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상계, 자유문학, 현대문학 등의 교양서적과 전국각지의 신문들, 각 대학의 간행물들이 배달됐고 심지어는 우리나라 초창기 시대의 신문까지 다 • 5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양한 간행물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옛날스럽고 촌스러 운 일제 강점기 때의 신문 문체였다. 예를 들자면, “최승희의 무용 발표회가 ㅇ ㅇㅇ 에서 있다더라.”, 혹은 “김 말똥이가 효자라고 동네에 소문이 났다더라.”하 는 식이었다.

토요일 오후에는 교양을 쌓기 위한 시간을 보내자고 초희와 약속을 해서 없는 돈을 털어가며 문화 행사를 찾아다녔다. 덕분에 우리나라의 최초 오페라인 춘희 를 보고 감동을 받고 크고 작은 무용 발표회에도 거의 빠짐없이 섭렵했다. 덕수 궁에서 피카소 전시회가 있어서 내 형편으로는 거금을 지급하고 봤지만, 도대체 내 눈에는 마구 난장판으로 물감으로 떡 칠을 한 그림 같지도 않은 물건이 왜 세 계적으로 유명한 것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막상 추상화에 눈이 떠진 것은 그때로 40년이 지나서였다.

후에 미국에서 아들의 여자 친구가 다니는 미술학원에서 개최한 전시회에 갔 었다. 2,000스퀘어 정도 되는 넓은 공간의 반을 나누어 전시장과 교실로 쓰고 있 었다. 학생들과 학원 선생 화가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우리는 아들 친구의 작품을 보기 위하여 간 것이기 때문에 대충 성의 없이 훑어보다가 학원 선생이 그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추상화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그 동안 추상화를 볼 때마다 늘 어떻게 이해 해야 할지를 알 수 없어서 난감했 는데 그날은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어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추상화는 화 가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는데 어떤 생각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이해 할 것 같 은 느낌이 왔다. 한 마디로 난생 처음 커튼이 열리고 무대가 펼쳐지는 듯한,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림 안에 산과 들, 계곡, 하늘을 나는 천사인지 사람인 지 여러 가지 사물들이 들어 있어서 몇 날을 보아도 실증 나지 않을 것 같은 심 • 귀여운 뇌물 55

정이었다. 흡사 옛날 중국 그림 속에 많은 사람의 각기 다른 삶을 촘촘히 그려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림 안에서 각가지 삶의 모습들이 보여서 보이는 그 림에 따라서 내 감정의 변화가 변화무쌍했다. 그때 꽁지머리에 긴 앞치마를 두 른 전형적인 화가 모습의 백인도 아니고 동양인도(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캐나 다 원주민이었다.) 아닌 화가가 ‘제 그림을 열심히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느낌이 있으신가요?” 라고 물었지만 혹시 내가 느낀 것들이 화가의 생각과 전혀 다른 엉뚱한 것일까 봐 말은 못하고 웃기만 했었다.

쇼 일정이 있는 저녁 시간엔 초희의 일터인 미 8군 영내에 가서 재미있는 쇼도 보고 또 미군 부대에서 주는 햄버거와 감자튀김도 얻어먹었는데 그땐 아직 햄 버거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이어서 당시로서는 대단한 음식이었다. 그러니까 그 시절, 우리는 남들은 알지도 못하고 경험해 보지도 못한 특권층(?) 생활을 했던 셈이다. 초희는 내가 법원에 다니는 걸 자랑스러워해서 단원들에 나를 펜대 잡 는 직업에 종사한다고 소개를 했다. 그래서 단원들은 나를 펜대 잡는 초희 친구 라고 불렀다

하루는 쇼를 마치고 공연단을 태운 버스가 부대 정문을 통과하려는데 미군 장 교가 버스를 세웠다. 미군 장교 하나가 버스에 올라오더니 영어를 할 줄 아는 단 장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했다. 단장은 뒤를 보면서 “누가 이불 받았어요?”라고 물었다. 모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불을 찾기 시작했고 누군가가 “없는데요? 이불을 어떻게 숨겨요?”라고 했더니 단장이 “덮는 이불이 아니고 미 달라 이불!” 이라고 했다. 그러자 뒤에서 한 가수가 “내가 받았는데…… 나는 그 사람이 팁을 주는 줄 알았어요.”라고 했다. 사실 공연 팀은 미 8군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 었지만 아무도 달러화를 볼 일도 만질 일도 없었기 때문에 달러를 이야기하는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내용을 알고 보니 미군은 그날이 동료의 생일이라 밴드 마스터에게 생일 축하 • 5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노래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2불을 준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가수는 무 슨 뜻인지도 모르고 “OK. Thank you!”를 남발했던 것이다. 미군 입장에서는 쇼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도 연주도 해주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떠나가니까 화 가 나서 버스를 세운 것이었다. 화가 난 미군이 돌려받은 달러를 박박 찢더니 가 수의 얼굴에 뿌리고 ‘깟뗌” 하고 소리를 크게 지르고 내렸다. 아무 관계도 없는 나마저도 얼마나 무안하고 창피한지, 그날 나는 영어를 모르면서도 영어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 귀여운 뇌물 57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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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사랑도 아닌 것이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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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교주 사기꾼들에게 걸려 혹독하게 시련을 당하고 나서 초희네로 피신하고 보니 다 른 수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초희 어머니에게서 받는 특수 종교 훈련이 었다. 당시 50대 중반의 초희 어머니는 무학이었지만 계룡산에서 도를 닦고 인 왕산 중턱에 자기만의 교회를 차리고 있는 신흥종교의 교주였다. 예로부터 인 왕산 일대에 소수종교 시설이 모이는 이유를 풍수학계에서는 ‘인왕산의 영험한 기운’ 때문이라고 했다. 초희 어머니는 인왕산 기슭에 30 평 정도의 건물에 교회 를 꾸며 놓고 내가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신앙을 전파하고 있었다. 초희 는 어머니가 하는 일을 싫어해서 반발했지만 식객으로 있는 내 처지에서는 초 희 어머니가 하는 일에 고분고분하게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나는 교회 안 에 있는 쪽 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초희 어머니가 하는 모든 예배에 자동으로 참여해야 했는데 가끔 아주머니들이 몇 사람 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예배 행사에 청중은 나 하나 뿐일 때가 많았다. 가장 우습고도 기가 막혔던 일은 어느 날 초희 어머니가 마치 놀라운 것을 발견이나 한 듯이 호들갑을 떨면서 자 기가 지난 밤에 지구가 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느 라고 혼이 났다.

그녀는 자신이 예수와 결혼을 했다고 하면서 자기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 게 했다. 초희 어머니는 자기 딸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으니까 순순한 나를 제자 로 삼을 작정으로 나를 세뇌시키려고 했다. 남의 집에서 무작정 신세를 지고 있 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이유로 나는 더욱 초희네 집에 오래 있으면 안 되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초희네 집을 떠날 방법을 열심히 탐문 하던 끝에 드디어 기회가 왔다. 원주 1 군 사령부에 가서 문관시험을 치고 합격해서 호원동에 있는 1군 사령부 경리부 대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경리부대에는 나 외에 3명의 여성 문관이 있었다. 그 • 6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런데 내가 받는 5급 공무원 월급이 호원동에서 자취생활을 하기에도 어려울 정 도로 부족했다. 경리단은 돈을 지출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특권이 있었 고 특권이 있는 곳에는 부수입이 있게 마련이다. 마땅히 지출해야 할 돈을 주면 서도 업자들에게 받는 부수입도 있었지만 말단 직원인 나에게까지 그런 혜택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더는 생활을 지탱하기가 어려워서 중령인 부대장에게 내 형편을 이야기했다.

때마침 당시 군의 보험을 담당하고 있는 대한교육보험이 퇴계로에 있었기 때 문에 내 사정을 딱하게 여긴 부대장은 나를 교육보험으로 옮겨주었다. 막상 대 한교육보험에 가보니 정식으로 입사시험을 치르고 들어온 직원들과 나처럼 낙 하산으로 온 직원들과의 보이지 않는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면접을 볼 때 담당 자가 이력서에 생년월일이 적혀 있는데 내 나이를 물었다. 신입사원으로 들어가 기에는 스물셋의 나이가 너무 많은 듯해서 대답하기가 부끄럽기도 하고 기분이 나빴다. 낙하산을 타고 입사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 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그런 이유로 낙하산 직원들은 교육을 시킨 다음에 대기 발령을 냈다.

• 엉터리 교주 61

사랑도 아닌 것이 아무리 배가 고픈 시절이라도 젊은 시절 낭만이 없을 수는 없다. 인간은 죽어 가는 순간에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암울하기만 했던 내 청춘에도 남 들처럼 활기 있는 사건은 아니지만 내 삶의 밑바닥에 언제나 깔렸던 낭만이라 기 보다는 신앙 같은 사랑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사회인으로 변해서 종로 라사에 가서 투피스 정장을 맞추어 입고 금강 양화에 가서 하이힐 을 사서 신고 머리 스타일도 단발머리에서 파마로 바꾸었을 때이다.

디쉐네를 드나들던 어느 날 뒤 좌석에서 “누님 삼고 싶습니다.”라고 쓰인 쪽지 가 왔다. 돌아보니 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바른 대학생이었다. 이 아저씨(?)들이 나를 보고 ‘누님이라고?’. 장난기가 발동하여 “그래.” 라고 써서 쪽지를 돌려줬다. 내가 몇 살로 보이냐고 물었더니 스물두 살이나 세 살로 보인다고 했다. 그 때 나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 하기는 그때 나는 직장인이었기 때문에 노숙해 보 였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이 가볍게 보이는 애송이들이었기 때문에 얼마 안가 서 나이가 들통 나고 말았다. 내가 자기들 보다 어린 것을 알고 난 뒤부터 세 명 의 남자 중에 두 명이 자주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그 중에 경희대학교에 다니는 의사의 아들보다는 성균관 대학에 다니는 가난한 찬의 글이 더 마음에 들어서 찬이와 더 많은 편지를 나누게 되었다.

단 둘이 만나는 일 없이 항상 음악 감상실 안에서만 같이 만나다가 어느 날 찬 이와 둘이서 길을 걷게 되었다. 찬이가 문득 말했다. “앞으로 우리가 결혼하면 어떨까?” 갑작스런 찬이의 말에 조금 설레기는 했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도 그가 좋았지만 우리 집 형편을 알면 실망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 • 6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문이었다. 만난 지 약 3개월 정도 되던 때쯤 삼청공원에 갔을 때 장난기 섞인 마 음으로 찬이가 나를 얼마큼 좋아하는지 확인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우리 그만 만나.”라고 했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찬이는 내 손 등 위에 뜨거운 눈물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말 없이 가버렸다. “이건 아닌데…….”

나는 적어도 찬이가 “왜?” 라고 묻든지 아니면 “그럴 수가 없다.”고 잡을 줄 알았 다. 나는 ‘날 별로 좋아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삼청공원에서 옥 인동 집까지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며 걸었다. 헤어지려고 했던 말이 아니었는데 경솔했던 것이 후회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나에 대한 찬이의 마음이 겨우 이 정도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 광화문 거리에서 우연히 찬이와 마주쳤다. 그때 찬 이의 옆에 예쁘장한 여자가 있었고, 나도 동료 남자와 함께 걷고 있던 참이었는 데, 순간 우리는 서로 놀라서 멈춰 섰고 둘 다 그들을 떨쳐 버리고 다방에 마주 앉아 그냥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 때 나는 그가 많이 나를 좋아했었고 나 역시 그를 많이 그리워했다는 것을 서로의 눈빛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우리 는 또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둘이서만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어 서 서로 좋아하느니 사랑한다는 말을 할 기회도 없었다. 그냥 만나서 얼굴을 보 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런데 어느 날 찬이가 자기 집으로 초대했는데 식구들에게 나를 보여주기 위 한 것이라는 것을 전 것 눈치를 채지 못하고 갔다. 사실 당시 내 형편은 결혼에 대해서 생각을 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식구들과 만난 다음날 만나서 찬이가 머뭇 머뭇 하면서 “누나가 그러는데 영재가 어두워 보인데…….”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더 듣고 싶지 않아서 아니, 더 듣는 게 두렵기도 해서 “됐어. 그만 해.” 하고는 다방을 뛰쳐나왔다. 그것이 그와의 두 번째 결별이었다.

• 사랑도 아닌 것이 63

그러나 그 뒤로 찬이는 남자에 대한 기준이 되어서 누굴 만나든 찬이와 비교 를 하게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함께 있던지 머리에서 찬이가 떠나지 않 았다. 찬이 보다 나은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지배했던 것이 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것이 오히려 쉽게 다가오는 남자들에 대하여 스스로 나를 지킬 수 있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남자에 대하여 육체적으로 끌 림을 받을 때 조차도 마음속의 찬이가 거부하게 만들었다. 찬이에 대한 나의 이 런 생각이 나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었다는 것은 확인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 터 40년이 훨씬 지나고 나서였다. 친구를 통하여 찬이가 중풍을 맞았다는 충격 적인 소식을 들었는데 그 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찬이가 중풍을 맞은 사실을 나 에게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역시 나처럼 오랫동안 나를 지우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서로 상대를 현실 이 아닌 환상적인 존재로 만들고 지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떠난 후 10년 에 한 번 꼴로 만나게 되는 우연이 생기기도 하고, 또 우연을 가장해서 만나기 도 했지만, 마음속의 우상은 깨어지지 않았고. 그 우상이 나에게는 쉽게 흔들리 지 않고 자신의 품격을 지키는 것에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지금도 이따금 좋은 글을 보내주고 있다.

찬희와 헤어지고 허전해 할 때였다. 친구와 함께 모 대학 축제에 갔다가 그 당 시 인기가 높았던 영화배우 토니 커티스를 닮은 미남 파트너를 만났다. 그러나 나는 원래 안경을 쓰고 비썩 마른 지적인 모습을 풍기는, 요즘 말로 하면 초식 남 스타일을 좋아했었다. 그래도 그 남학생과 몇 번의 데이트를 했지만, 도무지 진실성이 없어 보여서 다음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뒤 저녁에 집에 왔더니 그 학생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우리 집에 찾아와서 엄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집을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마당발인 자기 어머니 를 졸라 며칠 동안 수소문을 해서 찾아왔다는 것이다. 엄니는 남학생이 어머니 를 모시고 온 것에 이미 후한 점수를 주고 있었고 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 6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그때 마침 나는 대한 교육 보험회사에서 대기발령을 받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때 우연히 친척 집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쳤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있었고 아 이들도 몰려들어서 한창 과외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우선 그 집에 들어가 동생들 과외 공부를 가르치기로 했다. 그의 집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고급 경 찰 공무원 출신이신 아버지, 남편보다 4살이나 연상인 수단 좋은 어머니, 또한 초등학교 6학년 여동생, 4학년 남동생이 대가족으로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게 살 고 있었다. 엄니는 그 집의 형편이 우리보다 훨씬 좋으므로 마음속으로는 결혼 이 성사되기 바랐다. 결혼을 전제로 그 집에 들어가서 과외공부를 가르치고 조 부모가 맡아 하던 살림살이도 맡아 해주고 장래에 시어머니 될 분의 사업 장부 까지 정리해 주는 만능 며느릿감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 집 식구들도 나에 대하 여 만족해 했고 나 또한 그 집 식구들이 편안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그치지 않는 바람기와 도박 습관이었다. 어르고, 달래고, 화도 내보고, 애원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온갖 머리를 다 써서 그의 바람기를 막으려 하다가 내가 병이 날 지경이 되어 여러 번 멀리 숨어 버리기도 했다. 그 때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찾아와서 빌고 또 빌고, 끝이지 않은 악순환의 연 속이었다. 견디다 못해 미칠 지경이 되어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았더니 그 의 그런 행동은 병이기 때문에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이 었다. 아직 결혼 전이지만 없던 일로 하기에는 그 집 식구들과 이미 끈끈한 정 이 들어버렸고, 그 집의 여유로운 생활도 포기하기에 아쉬웠다. 그러나 그 상태 로 가다가는 내가 먼저 파괴되어 버릴 것 같아서 모질게 마음을 먹고 그의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사랑도 아닌 것이 65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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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무용수의 길로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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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수의 길로

그런 때 미 8군 무대에서 이미 상당한 경력을 쌓고 있었던 초희가 무용을 해 보라고 했다. 한 번도 춤을 추어 본 적도 없었고 이미 나이가 먹어 몸도 굳어 버린 내가 춤을 춘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달리 선택 의 여지가 없어서 초희에게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춤에 대한 기본이 전혀 안 되어 있어서 그저 초희의 동작 하나하나를 열심히 따라 했다. 캉캉, 촬스 톤, 하와이안 댄스 등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연습을 했다. 남보다도 운동신 경이 둔했던 뻣뻣한 몸을 가지고 몸살이 날 정도로 맹연습했다. 무용에 전혀 소질도 경험도 없었던 나를 개인 레슨을 시키는 일은 초희의 입장에서는 짜증 이 날 정도로 힘이 들었겠지만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가르쳐 주었다. 초희는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했지만, 남들이 틀린 짓을 하는 것도 두고 보지 를 못하는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친구도 별로 없었는데 이상하게 나에게만은 한없이 관대했다. 그러면서도 독점욕이 있어서 내가 다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면 나는 너 밖에 친구가 없는데 너는 왜 다른 친구가 필요하냐는 식이었다. 그러나 남에게 주는 것도 받는 것도 꺼리는 까탈스러운 성격의 친 구였지만 죽을 때까지 그녀와의 의리를 지켜야겠다는 맹세를 하게 만든 사건 이 있었다. 그것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그림으로 내 가슴 속에 새겨져 있다. 내가 밑바닥을 헤매고 있을 때 초희는 몸을 풀고 조산원에 입원해 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친구가 해산해서 문병을 가는데 나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것 이 없었다. 춤꾼인 초희는 평소에 운동량도 많았지만 대식가여서 한 번은 고 구마 한 관을 쪄서 둘이서 먹었는데 초희가 나보다 더 많이 먹을 정도였다. 초 희가 입원실에서 아기를 옆에 눕혀 놓고 미역국을 먹으려는데 그만 내 배 속 • 6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초희는 미역국 한 숟가락을 먹고서는 입맛이 없어 서 못 먹겠다며 나에게 먹으라며 그릇을 내밀었다. 젖이 나오기 위해서는 산 모가 잘 먹어야 하는 것인데 배고픈 친구에게 미역국을 양보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양을 해도 초희는 한사코 먹으라고 강요를 해서 마지못해 미역국을 받 아 들은 나는 초희가 눈치 채지 않게 눈물을 흘리며 미역국을 먹었다. 초희와 나의 평생에 걸친 우정은 아마도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내 성격 이 초희를 편하게 해주는 면도 있었겠지만, 우리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생활 하고 있어서 서로 간에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이를 테면 우리는 ‘법조인과 연예인의 만남’ 같은 것이어서 그 또래의 다른 친구들 보다는 서로 대화거리 가 많았었다. 실제로 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법원 생활 6년 동안 19금 이 야기에서부터 고전까지 다른 친구들이 접할 수 없는 온갖 자료들을 많이 접 했기 때문에 이야기 거리가 많은 편이었다. 무용이 웬만큼 몸에 익을 무렵 초희는 8 군 무대에 마침 빈 자리가 생기자 나 를 추천했다. 무용단에서는 내가 초희의 친구이기 때문에 당연히 초희와 비 슷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줄 알고 받아드렸을 것이다. 드디어 피눈물까지 는 아니지만 몇 달 동안 땀을 흘리며 연습을 하고는 첫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연습과 실전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쇼의 시작을 알리는 요란한 시 그널 음악에 맞추어서 뜨거운 조명 불빛 아래의 무대로 뛰어나간 순간 그만 “꽈당!” 하고 넘어져 버렸다. 평소에 초희네 방에서 남들이 들을까 보아 녹음 기도 크게 틀지 못하고 맨발로 연습을 했는데 갑자기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 고 분장을 하고 화려한 무대의상을 걸치고 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 이다. 다음 순간 반사적으로 일어서기는 했지만 도로 들어갈 수도 계속 따라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뒤이어 들려오는 미군들의 야유하는 휘파 • 무용수의 길로 69

람 소리, 폭소, 박수 소리 등이 더욱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어 첫 스테이지 내내 무대 위에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고 하는 바람에 다른 무용수들 까지 제대로 춤을 출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간신히 순서를 마치고 분장실로 나와서 너무 창피해서 비싼 택시를 타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던 잊을 수 없는 첫 무대 경험이었다. 그러나 첫 날의 낭패에 대해서 초희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다시 무교동에 있던 극장식 식당인 월드컵에 소개를 시켜주었다. 무용계는 밖에서 볼 때는 화려하게 보였는데 수입도 적었고 화려하지도 않 았으며 오히려 고된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무용계에서는 이따금 다른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일들이 벌어져서 전혀 심심치가 않았다. 그 중에 하나 가 당시에는 흔히 볼 수 없었던 게이들을 볼 수 있었던 일이다. 내가 가까이서 본 게이만 해도 여러 명이었다. 곱상한 20대의 무명가수와 미남인 30대, 평 범한 아저씨같이 생긴 40대, 또 명동에서 무대의상실을 하는 50대(?) 원장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그 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게이는 40대 아저씨 무용단 단 장이었다. 광주 나이트클럽에서 단기간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경비를 절약하 기 위해서 여관집 커다란 방에 무용수 전원이 함께 자야 했다. 평소에도 생김 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여성스러운 말투와 행동으로 단원들에 웃음을 주었는 데 그는 이상하게 욕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욕이나 하면 안 되고 ‘년’ 자가 들어가야만 좋아했다. 예를 들면 “야! 이 년아 이리 좀 와.” 하면 몸을 비트는 듯한 종종걸음으로 “이년아 바빠 죽겠는데 왜 불러?” 하면 서 냉큼 오지만 “단장님” 하고 부르면 대꾸도 잘해 주지 않아서 거의 모두 그 렇게 불렀지만 나는 도저히 그렇게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의 옆에는 항상 그와 욕 따먹기를 즐기는 사람들 이 북적거렸다. 공연 첫날 밤이 되어서 잠자리를 정해야 하는데 그가 제일 차 • 7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가운 윗목으로 가서 이불을 몸에 돌돌 감고 누웠다. 그래서 왜 이불을 돌돌 말 고 자느냐고 했더니 “네 년들을 믿을 수 없어서 그런다.”라고 했다. 짓궂은 단 원 한 명이 “ 야 이년아 너 안 건드릴 테니 내려와서 같이 이불 덮고 자자. “ 하 니까 “어머머? 저 엉큼한 년, 싫어 이 년아 징글맞아 네 년들은.”이라고 했다. 그의 말투나 몸짓이 TV에서 보는 개그맨들의 연기 이상으로 웃겨서 모두 배 꼽을 잡게 하였다. 그런 모습이 더욱 재미가 있어서 몇몇 단원들이 짓궂게 윗 목으로 가서 짐짓 단장의 몸을 더듬는 척하면 “저리 못 가? 이 미친년들아!” 라고 진짜로 화가 난 듯 소리를 질러서 우리는 모두 자지러졌다. 그러나 미남인 30대 무용수는 절대로 표시를 안 내서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는 아무도 그가 게이라는 걸 몰랐다. 그는 외국 배우처럼 잘 생기고 항상 책을 읽고 있어 모두가 그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함께 공연하던 고전 무용 단장과 결혼을 했는데 얼마 안 되어 이혼했다. 신혼여행에서도 손만 잡고 잠 을 잤고 동생이라는 남자아이를 집에 자주 데리고 와 한 방에서 늦도록 함께 있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한번은 친정에 다녀온다고 거짓말을 하고 밤에 몰 래 집에 와서 방문을 열었더니 둘이 나체로 누워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엄격한 대법원에서 제일 직급이 낮은 사환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모 든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비록 거친 딴따라 세계에 들 어 왔지만, 그 버릇이 변하지 않아서 나이 어린 단원들에게도 반드시 존댓말 을 썼다. 그런데 이런 태도가 문제가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 날 연습 도중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나이 어린 단원 둘이서 내 이야기를 하고 있 었다. 그들은 내가 늦게 들어와서 춤도 잘 추지 못하는 주제에 혼자서 교양 있는 척한다고 흉을 보는 것이었다. 화가 나서 좇아나가 “야! 이년들아! 평생 욕이나 먹고 살아야 시원하겠냐?”하고 뺨따귀를 갈겨 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 무용수의 길로 71

태도를 바꾸어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웬만하면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원 래 무용단은 동작 통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규율이 강하고 말이 짧고 거칠었 다. 엄격한 가정과 엄숙한 법원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탓에 철저하게 예의와 질서를 지키는 것이 몸에 배 있는 나에게 마치 군대 같은 무용단의 분위기는 완전히 딴 세상이어서 공손하고 상냥한 태도가 전혀 먹히지 않았다. 농담으 로 너무 저속한 이야기를 한다든가 약해 보이는 사람을 존중보다는 무시하는 경향 등 법원에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환경이 정말 싫었다. 처음 몇 년간은 철 없이 떠난 법원의 주위를 맴도는 꿈을 꾸고는 했었다. 법 원에서는 대법관님 한 분만 잘 모시면 아무 문제 없고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 도 있었고 어린 급사의 신분이지만 높은 분들도 반말을 하지 않아 존중 받는 느낌을 받았었다. 거칠고 강한 척하는 사람이 더 대우를 받는 연예계 분위기 는 나에게는 정말 적성에 맞지 않았다. 아마도 든든한 초희의 울타리가 없었 다면 며칠을 못 버티고 포기 해버렸을 것이다. 보수는 공무원 시절보다는 조 금 나았지만, 연예계의 분위기는 마치 나에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항 상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무용수 세계의 분위기는 바깥 세계에서 생각 하듯이 전혀 문란하거나 퇴폐적이지 않은 나름의 분위기가 있었다. 가끔은 나훈아, 김세레나, 혜은이, 정훈희 등의 스타들이 함께 출연해서 그들을 가까 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TV에서 청초했던 혜은이의 모습이 푸짐해진 요즘 모습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당시 모든 연예인의 꿈은 8군 무대로 진출하는 것이었지만. 뒤늦게 무용을 배운 나는 8군 무대 진출 첫날에 망신을 떨고 일반무대에 서는 것으로 만족 해야 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워낙 기초가 닦이지 않은 실력이라 항상 논총을 • 7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받았다. 그래도 일단 순서를 외우기만 하면 나름대로 눈에 띄지 않게 각색을 해 춤을 추어서 몇 명 되지는 않지만 팬이 생길 정도로 제법 인기도 있었다.

• 무용수의 길로 73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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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월남 전선으로 - ‘I am Korean’이라는 주문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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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전선으로 6, 70년대에는 누구나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쳤었 다.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아르헨티나 혹은 브라질로 집단 이민의 길을 찾 았고 개인별로는 독일의 광부나 간호사, 노동자들은 중동 건설 현장으로 살 길을 찾아 떠났었다. 심지어는 월남 참전 초창기에는 막연한 외국에 대한 선 망, 돈을 벌어야겠다는 등의 이유로 대부분이 지원했었다. 사실 나는 내성적 이고 차분하지만, 생각은 개척적이라 소위 말하는 ‘조용하게 사고를 치는 형’ 이다. 집이나 일이나 답답해서 질식할 것만 같았던 한국을 떠나 갈 수만 있다 면 어디든지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어느 날 초희가 서독 광부로 갔다가 캐나다에 정착한 오빠가 가족들을 초청 했다고 하면서 나도 같이 갈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그러나 가족이 아닌 내 가 초희네와 같이 캐나다로 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일단 해외로 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월드컵과 제주도 관광호텔 두 군데를 왕복하면서 일을 하다가 드디어 월남에 파병된 국군을 위한 위문공연단에 낄 기회가 왔 다. 한 번 나가면 한 달 이상 월남에 있는 각 부대를 순회하며 공연을 하는 위 문단은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수입도 나았다. 위문단은 동대문 스케이트 장 옆 건물에서 맹연습해서 박재란, 김세레나, 이미자. 조미미, 한명숙, 남성 남, 송해, 이상해 등등과 더불어 69년도부터 3년간 매년 한 달씩 월남에 파병 된 부대들을 위해서 순회공연을 했다. 부대를 옮겨 갈 때마다 우리가 탄 차 앞과 뒤에서 APC(무장경호 차량)가 호 위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식사해야 할 때가 많아서 C 레이션을 먹었는데 갖가지 깡통에 든 음식이지만 먹을 만했다. 연대급까지 순회공연을 했었는데 가장 반가운 것은 한식으로 차려주는 음식과 에어컨디션이 있는 잠자리를 제 • 7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공해주는 부대였다. 숙소 어디에서나 커다란 도마뱀이 벽으로 천장으로 마구 돌아다녀서 처음에 는 놀래서 소리를 쳤지만, 나중에는 익숙해졌다. 그런데도 어느 날 밤 잘 때 이 불 속에서 무언가가 다리를 타고 올라오길래 손을 넣어 잡고 보니 도마뱀이어 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또한 비위가 약한 나는 월남 음식이나 물을 마시지 못 해 이따금 외출해서 목이 마를 때는 길거리에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과일 중 에 코코넛을 사서 그 물을 마시고는 했지만 그것 마저 없으면 목이 아무리 말 라도 부대에서 주는 물 외엔 마시지 못하던 것이 가장 힘이 들었다.

1971년도 이미자 씨와 같은 팀으로 월남 위문 공연을 가게 되어서 그녀를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우리 무용팀은 항상 화장하고 있었지만, 이 미자 씨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수첩에 무언가를 항상 썼는데 아마 일기를 쓰 는 것 같았다. 또한 어린아이 같이 어리광도 많이 부려서 밴드 마스터가 아빠 처럼 그녀를 보살펴 주었다. 유명 가수 같지 않게 겸손하고 자연스럽고 인물 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듯 밉상이 아니고 귀엽게 보였다. 방문한 부대마다 그녀를 귀빈처럼 대우해줘서 꼭 부대장 옆에 앉게 했는데 식사가 끝나고 군 인들이 노래를 청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가수는 밴드 없이는 노래는 부르지 않는 법이어서 그것만은 절대 사양했다. 가까이서 우리의 편의를 봐주는 군인들이 자신들의 무용담(?)을 들려 주었 다. 잔인한 베트콩들의 한국군을 생포해 피부를 벗겨 나무에 거꾸로 메달아 놓은 것을 보며, 눈이 뒤집혀서 똑같은 수준의 복수를 안 할 수가 없었노라고. 그 당시에는 그 어린 사병이 영웅심에서 꾸며낸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많은 부분이 사실이었다. 사이공에 주둔해 있는 한국군의 사령부에서 사복을 입은 키가 훤칠한 군인 • 월남 전선으로 77

이 예쁜 상자를 주면서 주소를 물어 보았다. 우리 단원들에게 그런 일들이 종 종 있었기에 상자를 받아서 숙소에 와서 열어보니 반지가 들어 있었다. 여자 가 없는 전장에서 더욱이 이국에서 잘 알지 못하는 여자에게 환상을 품을 수 가 있다는 것쯤은 알만한 나이였기에 그 반지를 돌려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 군인은 훗날 귀국해서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서 무척 당황스 러웠다. 다행히도 마침 엄니가 집에 계셔서 앞 뒤 전후 사정을 모두 들으시고 난 다음에 군인을 잘 타일러서 보냈었다.

• 7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I am Korean’ 이라는 주문 월남 순회공연에서 경험을 쌓은 후 드디어 초창기 기획사의 원조 격인 김 루 미씨가 모 여대 무용과 학생들로 구성한 유럽순회 공연 팀에 낄 수 있는 기회 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떠나고 보니 순회공연이라고 했지만 제대로 된 공연장소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술집을 전전하면서 공연을 하는 것이 었다. 뒤늦게 사실을 알고 나서 대원들이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외국에서 어린 무용수들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무용단의 실체는 공연 후 손님들의 좌석을 찾아 다니면서 술을 얻어먹게 해서 매상을 올려주는 것이 었는데 될 수 있으면 비싼 술, 예를 들면 샴페인을 터트리게 하는 것이었다. 손님 테이블에 가서 “술 한잔 주시겠어요?”라며 술을 사게 하는 것인데 술집 사장은 강요는 하지 않지만 은근하게 술을 많이 파는 대원은 칭찬을 하고 못 파는 대원에게 눈치를 주는 방법을 썼다. 이런 방법은 술을 한 잔도 못 먹는 나 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가 없어서 궁리 끝에 수건을 가지고 다니면서 술을 받 아 마셨다가 수건으로 입술을 닦는 것처럼 하면서 뱉어내는 방법을 썼다. 손 님의 테이블로 가는 순서도 될 수 있으면 뒤로 미루었다가 맨 나중에 마지 못 해 가곤 했다. 단장은 단원들에게 손님들이 무례하게 행동하면 “우리는 접대 부가 아니라 artist이다”라고 주장하라면서 나름 자긍심을 심어 주기는 했지 만 결국 오십 보 백 보였다. 한 번은 못 먹는 술을 먹은 내가 졸려서 잠깐 손님에 기대어 잠이 들은 것을 보고 술집 사장이 단장에게 내가 그 남자와 잠을 잤다고 했다. 평소에 우리가 artist임을 강조하는 단장이 나에게 와서 남자와 잠을 잤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을 손님과 동침했다는 말로 알아 듣고 펄쩍 뛸 수 밖에 없었다. 사장에게 가서 잘 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내가 언제 남자와 잠을 잤느냐고 따졌다. 그러 • ‘I am Korean’ 이라는 주문 79

면서 “I am Korean”을 외쳤다. 내가 왜 “I’m Korean!”을 외쳤을까? 아마도 ‘한국 여자는 정조 관념이 강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같은 동포에게 속아서 잠시 이 더러운 소굴에 있지만, 우리는 술집 여자가 아니야. 아티스트야. 내가 왜 모르는 외국 놈과 몸을 섞냐?”라는 소리를 하고 싶었는 데 영어로 할 수가 없으니까 불쑥 튀어 나온 말이 I’m Korean’이었던 것이다. 아무 효험도 없는 것이지만 그 때부터 “I am Korean”은 나에게는 급할 때마 다 나오는 주문 같은 것이었다. 사장이 내가 조는 것을 보았다고 한 것이 피차 에 객지에서 영어를 고생 시키는 처지이다 보니 오해가 생긴 것이다. 영어 때 문에 생긴 해프닝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대원들의 영어 실력이 모두 형편이 없어서 일을 하는데 필요한 영어는 머리 를 짜내어 억지로 만들었다. 손님들의 테이블에 앉아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 할 말을 생각하다가 누군가가 “Do you want to make a love with me?”로 하기로 하자고 했다. 다행히도 용기 있는 대원이 처음 그 말을 사용했을 때 손님 중에 영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고나 사용 하느냐?”고 해서 그 뜻을 알고는 혼비백산 했던 일도 있었다. 그녀 의 의도는 “내가 당신을 좋아해도 될까요?” 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붉 어진다. 당시 무용단은 북한식으로 완전 통제된 가운데 운영이 되어서 개별 행동은 전혀 허락되지 않았고 호텔 외부로 나갈 일이 있을 때는 3인 일조가 되어야만 나갈 수가 있었다. 제일 나이가 많았던 나만이 예외적으로 쇼핑을 할 일이 있 으면 잠깐씩 외출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한 번은 현지 안내원과 같이 쇼핑을 가기로 했는데 안내원이 호텔 로비에서 방으로 전화 해서 “Are you ready?” 라고 묻는 것을 ‘Are you lady?’로 알아듣고 일동이 “이것들이 사람을 어떻 • 8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게 보는 거냐? 우리가 lady가 아니면 뭐라는 말이야? ”며 씩씩대던 해프닝도 있었다. 첫 공연이 열린 베이루트 숙소 호텔에서 사장이 내게 살짝 자기 방으로 오 라는 쪽지를 주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나이 어리고 예쁜 학생 들을 두고 왜 사장이 나를 만나자고 했을까? 내가 그렇게 쉬운 여자로 보였 나? 아니면 내 춤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일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 다. 사실 춤으로 따지자면 스무 살도 안 된 학생들의 춤은 감정이 실리지 않 은 그냥 예쁘고 귀여운 춤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단원들보다 춤을 익히기 까지는 시간이 더 많이 걸렸지만 일단 순서를 숙달하고 난 뒤에는 춤을 반 박 자 느리거나 엇박자로 추어서 춤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나 의 감정을 담아냈었다. 군무에서 튀는 행동은 금기였고 학생들이 나의 춤 동 작에 대하여 불평을 해도 단장은 그것이 나에게 잘 어울린다고 그대로 하도 록 내버려두었다. 춤으로서는 늦둥이고 인물로도 다른 풋풋한 학생들에게 뒤 처지는 내가 센터에서 춤을 추는 것이 혹시 사장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지 도 몰랐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나를 호텔 방으로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 각되었고 불쾌해서 무시해 버렸다. 사장은 그 다음 날도 또 오라고 했지만, 여 전히 무시해 버렸다. 그 후 단장이 어떤 말을 하던 끝에 나에게 “사장이 너는 믿어도 된다”고 하더라.”고 해서 “뭘 믿어도 된다는 말이냐?”고 물었더니 그 냥 웃기만 했었다. 사실 당시에 나는 춤을 추면서도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무 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왜 춤을 추고 있는가? 과연 춤으로 내 인생을 개척할 수 있을까?” 등등의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춤사위에 그런 감정이 실릴 수밖 에 없었을 것이다.

• ‘I am Korean’ 이라는 주문 81

베이루트에서 한 달간 공연하다가 내전이 터져서 사이프러스로 갔다. 사이 프러스를 거쳐서 그리스로 왔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점차 시간이 흐르자 단 원 중에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 오히려 그런 자리를 즐기거나 행동이 지나치 거나 술에 취해서 자세가 흐트러져서 해롱거리는 단원들도 생기기 시작한 것 이다. 때마침 인솔 교수는 더는 자기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한국으로 돌 아가버렸다. 그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일행 중에 나이가 제일 많았던 나로서 는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막냇동생 같은 학생들에 대한 책임감이 느 껴져서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조용하고 온순한 내 성격으로서는 나서서 충고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유난히 행동이 안 좋은 학생 하나를 불러서 그 러면 안 된다고 충고를 했다. 그런데 상대방도 술에 취한 탓인지 오히려 “언 니가 무엇인데 간섭을 하느냐?”고 덤벼들었다. 나도 못 먹는 술이지만 조금 이라도 술을 먹은 상태에서 어렵게 꺼낸 말에 말대꾸하니까 순간적으로 흥분 을 했었던지 어린 학생의 뺨을 후려 갈겨버렸다. 학생들이 모두 놀라고 순식 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어 버렸지만 나는 내친 김에 아예 앞으로 학생들을 감 독하는 군기반장 노릇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후부터 매일 저녁 그 날의 일과에서 눈에 벗어나게 행동을 하는 학생이 있 으면 불러서 “네가 술집 여자야? 창녀야?” 하고 혼을 내주었다. 이렇게 되니 까 분위기는 많이 잡혀서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지만, 학생들은 나를 무섭게 생각해서 단장에게 나와 함께 일을 못하겠다고 불평을 했던 모양이다. 대부 분이 나에 대하여 불만을 품었지만 그 중에는 내가 연장자로서 책임감을 느 끼고 감독을 하는 진심을 이해해 주는 학생도 있었다. 하루는 한 학생이 단장 이 학생들의 불만을 듣고 나를 테헤란 팀으로 보내 버리겠다고 약속 하는 것 • 8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을 들었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우리 팀은 대학생들로 키도 고만고만한 어린 팀인 것에 비해서 테헤란 팀은 키도 크고 나이도 많은데다가 오랫동안 외국 생활로 다져진 멤버들이니 내가 가면 적당히 몰매를 맞게 해서 확실히 기를 죽여 놓겠다고 했다는 말까지 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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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ChapterⅡ

• 8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Her story is so unique. Not one of the 50 million Koreans today would be able to hold a candle against her life story. It is not that she accomplished something grand, or left an indelible mark in the history.

Nonetheless, her life is full of extraordinary stories that deserve their places in a time caps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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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85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 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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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ChapterⅡ

3. 탈출 - 모색

•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87

사실을 알게 된 날부터 나는 나대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나로서는 의도 하지는 않았지만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천우신조의 기회를 얻은 셈이었 다. 그러나 평소에 단장은 혹시 있을지 모를 단원들의 이탈을 생각해서 만일 에 이탈하면 한국의 집으로 찾아가서 손해 배상을 청구하겠노라고 엄포를 놓 았었기 때문에 그런 사태에 대해서도 대비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술집에서 사진을 찍어 주고 돈을 받는 직원에게 단원들이 손님들과 술 먹는 장면을 찍 어 달라고 해서 사진을 보관해 두었다. 만일에 내가 탈출한 다음에 우리 집을 찾아가서 행패를 부리면 이 사진을 언론에 공개해서 문제를 삼도록 할 생각 에서였다. 그러나 탈출에 성공하려면 우선 밖에서 도와줄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 다.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손님들을 주의 깊게 보다가 드디어 적당한 손 님 하나를 찾게 되어 샴페인을 터트리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은근하게 내 가 이 곳을 떠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겠냐는 뜻을 나타내 보았다. 다행히도 호의적이어서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런데 난데 없이 금발의 외국 무용수 하나가 와서 자기가 그 사람을 사랑하니까 양보 해달라 고 부탁을 해왔다. 나로서는 그 단계까지 가기 위해서 정성을 많이 기울였기 때문에 조금 실망스럽지만 어쩔 수가 없어서 일단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다 행히도 이번에는 그를 따라왔던 나이가 어리고 순진해 보이는 청년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사실 그는 돈이 많이 드는 그런 종류의 술집에 드 나들기엔 어울리지 않은 젊은이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호텔로 나를 찾아올 수 있겠느냐고 했다. 다음날 그는 내 이름을 새긴 가느다란 은목걸이를 가지고 호텔로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애들 장난감 같은 것을 가져 오다니’하는 생각이 들어서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돌려주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끓어 • 8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서 내가 대단히 난처했다. 그러나 그 사건은 한번 놀아보려는 것 같은 그의 일 행에 비해 진정성이 보여서 오히려 그를 믿을 수 있게 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그리스어도 모르는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은 청년의 도움을 받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그리스어를 모르고 청년은 영 어를 전혀 몰라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손짓 발짓으로 어렵게 상대의 뜻을 이해해야만 했다. 그런 일이 답답할 것 같은데 청년은 철이 없어서 그랬 던지 오히려 그런 방법을 더 재미있어 했다. 어떻든 나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 호기심 많았던 청년은 오히려 나를 돕고 싶어 했다. 청년은 렙테리라는 자기 이름을 알려주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소는 자기 집이 아닌 이모 네 집의 주소를 주었다. 물론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그리스에서의 관광 비자 기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국경을 넘어 터키의 이스탄불로 가서 다시 그리스 입국 비자를 받아 와야만 했다. 비자를 받은 다음에 아테네로 돌아올 경우 혹시 단장 일행에게 다시 붙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렙테리와 나는 이스탄불과 아테네 의 중간에 있는 그리스 제2의 도시인 데살로니가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이 스탄불에서 렙테리는 아테네에서 기차를 타고 데살로니가 역에서 다음 날 만 난다는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며칠 후 드디어 단원들의 여권을 가지고 있었던 단장이 내 여권과 비행기 표 를 주면서 더 나이가 든 대원들이 많은 이란의 테헤란으로 가라고 했다. 보통 의 경우 단원이 이동할 경우 사람이 따라붙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다행히도 이 때는 돈도 더 들게 되고 따라갈 사람이 없어 내 여권을 돌려줄 수밖에 없 었다. 물론 나도 테헤란으로 가게 된 것을 좋아하는 척하며 단장을 안심시켰 다. 아마도 베이루트에 있었을 때 사장이 호텔 방으로 불러도 가지 않았던 일 이 나를 믿게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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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 모색 89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 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ChapterⅡ

구사일생

김루미가 이란의 단장에게 전해 주라고 맡긴 편지를 비행기 안에서 뜯어보 고 기가 막혔다. 내용은 내가 애들하고 불화가 많았으니 잘 알아서 다루라는 것과 월급 $350 중에서 $150만 나에게 주고 $200을 자기 계좌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지독한 착취의 사슬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비행기 표는 이스탄불에서 테헤란 행으로 갈아타게 되어있지만, 타지 않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날이 이미 어두워서 택시를 타고 무조건 그리스 영사관 이 가까운 곳에 있는 여관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택시 운전사는 자기가 잘 아는 곳이 있다며 허술한 여관으로 데려다 주었다. 여관방에 들어와서 어쩐지 불안해서 방 안에 있는 경대와 의자를 옮겨 방문 이 열리지 않도록 막아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밤늦은 시각에 문구멍으로 열 쇠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Who are you?”라고 소리를 지르니까 낮은 목소리 “Taxi driver”라고 대답을 했다. 나는 욕도 할 줄 몰라서 “Go! Go! I am Korean, I am Korean.”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또 다시 “I am Korean.” 이라는 주문을 외운 것이다. 오늘 내가 외친 I’m Korean는 ‘너희 나라와 우리 • 9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나라는 6.25전쟁으로 인한 동맹국이 아니냐? 나 한국 사람이니까 괴롭히지 마. 한국 여자, 만만하지 않다’라고 하는 의미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내가 터키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차근차근 설득했을 텐데… 미친 여자처럼 악 만 써야 하다니, 이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닌데, 아버지를 부르며 엉엉 울다 가 또 “ I am Korean.”를 부르짖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다가도 웃을 일이지만 미국도 아닌 가난한 나라 한국이 자 랑도 아니고 택시기사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기나 할지도 모를 터이지만 그 랬다. 나로서는 다급하기는 한데 다른 말을 생각해 낼 겨를이 없어서 고작 생 각난 이었다. 택시기사는 문을 열려고 하면서 “Please! Let me in”만을 연발 하더니 “I am Korean.”의 주문이 효력을 발휘했던지 밖이 조용해졌다. 그러 나 나는 불안해서 한 잠도 자지 못하고 꼬박 밤을 새웠다. 날이 밝아오자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의 주인 얼굴을 보았지만 터키 말을 못하니 지난 밤의 일에 대하여 따질 수도 없었다. 그저 빨리 여기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우선 엊저녁부터 굶었기 때 문에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주방장이 주방으로 들어오라 고 해서 들어갔더니 흙으로 된 화덕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글자 그대로 중세 기의 주방이었다. 음흉스럽게 생긴 주방장은 나에게 먹을 것을 줄 생각은 안 하고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아래 위를 샅샅이 훑어보더니 손가락으로 내 몸을 꾹꾹 눌러 보는 것이 아닌가? 주방장은 동양여자를 처음으로 보는 모양이었 다. 나는 또 다시 한국말로 욕을 하고 그 길로 여관을 나와 버렸다. 배고픔을 참고 주변의 다른 여관을 찾았더니 멀지 않은 곳에 여자가 주인인 여관을 찾을 수가 있었다. 다행히도 예쁘게 생긴 주인 여자는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아서 또다시 손과 발을 동원하여 지난 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주인 • 구사일생 93

은 친절하게 연실 홍차를 따라주면서 터키 남자들이 질이 좋지 않다며 앞으 로 더 당하지 않으려면 수줍어 보이는 태도를 버리고 강하고 당당하게 보여 야 한다면서 장식용 칼을 주며 옆구리에 보이도록 차고 다니라고 했다. 그 이 후부터는 당장 조심스럽게 걷던 걸음걸이부터 바꾸어 될 수 있는 대로 백인 여자들처럼 당당하게 자신만만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다음 날 아침 그리스 영사관이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열자마자 들어갔지만 담당자가 외출 중이라 2, 3시간 있다가 오라고 했다. 어차피 데살로니가행 기 차를 타려면 많이 기다려야 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어서 거리를 어슬렁거리는데 극장이 보였다. 로맨스 영화 같아 보이는 극장 간판을 보고 들어갔는데 극장 안이 모두 남자뿐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영화 가 시작되고 보니 포르노영화였다. 갑자기 어제 밤부터 더러운 일들을 겪은 내 신세가 처량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극장을 나와 거리를 헤매며 시간 을 보내다가 다시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고 드디어 기차를 타기는 탔는데 내 마음은 급한데 그야말로 자전거 속도로 움직였다. 기차 안에는 행색이 초라한 유랑민들이 가득했는데 알고 보니 내전을 피해 서 우리 팀이 떠나왔던 레바논 사람들이었다. 이스탄불 역에서 도움을 구하 는 초라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기차에 탔던 레바논인들은 그래도 그들보다는 형편이 나은 사람들 같았다. 기차는 영화에서 처럼 칸칸이 방으로 막혀 있고 내가 탄 칸에는 중년 부부와 아테네로 유학을 간다는 요르단 학생과 나, 이렇 게 4명이 타고 있어서 비교적 안심할 만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고 어두 워지자 요르단 학생과 부부가 아랍어로 수군수군하더니 부부가 아무 말 없이 나갔다. 그 때부터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학생 이 나에게 친절하게 차를 마시지 않겠느냐고 물어서 좋다고 하자 밖으로 나 갔다가 차 두 잔을 가지고 왔다.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학생이 옷을 가 • 9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지러 일어서는 사이에 재빨리 찻잔을 바꾸어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에 차를 마신 학생이 나를 보고 “Are you OK? Are you OK? “ 하더니 슬며 시 잠이 들어 버렸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차에 강력한 수면제를 탄 것이었다. 만일 내가 주는 대로 마셨다면 그 꼴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화가 나기는 했 지만,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말도 못하고 하소연할 곳도 없는 처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강하게 먹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 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주정뱅이 건달같이 생긴 기차 승무원 녀석 둘이 얼굴을 디밀었다. 그 순간 나는 온 힘을 다해 한국말 로 욕을 퍼부었더니 기겁을 하고 사라졌다. 그들로서는 당연히 쓰러져 있어 야 할 나는 쌩쌩하고 음모를 꾸민 녀석은 쓰러져 있으니 놀랄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불안한 밤을 새우고 새벽이 되어서 눈을 뜬 학생은 나를 보고서 계면 쩍게 “You are so clever.”라고 했다. 나는 또다시 한국말로 욕을 퍼붓고 그 방에서 나와 짐과 사람이 뒤섞여 있는 화물칸으로 가서 바닥에 앉아서 갔다. 그런데 국경선에 기차가 서자 경찰이 나를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경찰은 이 것저것을 꼬치꼬치 물었지만 의심할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보내 주었 다. 조사를 받는 동안 기차가 떠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신기하 게도 기차는 출발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화물칸으로 돌아왔는데 웬 노인네가 내 앞으로 다가와 서툰 영어로 어떻게 풀려 나왔느냐고 물었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승무원 녀석들이 내가 간첩 같다고 신고를 했다는 것이 다. 노인은 레바논 사람이었는데 보석만 챙겨서 나왔다며 가방에서 돌 같이 생긴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도 아테네로 약혼자를 찾아가는데 약혼자가 대사관에 근무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노인은 아테네에 가면 약혼자에게 비자 를 얻도록 도와달라고 하면서 그때부터 나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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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렙테리는 이미 돌 아가고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렙테리는 나를 금방 만나게 될 줄 알고 돈을 넉 넉하게 준비하지 않고 와서 공원에 가서 물을 마시면서 배고픔을 견디다가 사 흘째 되는 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부모에 게 온다 간다 말도 하지 않고 왔었으니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나는 데살로니가에서 혼자서 아테네로 갈 수 밖에 없었지만, 또 다시 대중교 통을 이용하기가 무서웠다. 더구나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타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길에서 히치하이크를 하기로 했다. 현지에서 보기 드문 젊은 동양 여 자가 차를 세웠기 때문인지 대부분 차들이 서기는 섰지만 함부로 탈 수가 없 었다. 마치 검문소에서 검문을 하는 것처럼 내 앞에 선 차마다 차 내부와 운전 사의 인상착의를 살피고서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보내고 가장 점잖아 보 이는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탔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고르고 고른 보람이 있 었는지 양복에 넥타이까지 맨 신사는 예상했던 대로 매우 점잖았다. 태워주 어서 고맙다고 돈을 주겠다고 했더니 돈은 필요 없다면서 자기는 공무원인데 출장을 왔다가 아테네로 돌아가는 길이라며 자기가 운전을 하면서 졸지 않게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노래라는 노래는 모두 부르고 다 부르면 부른 노래를 목이 쉬도록 다시 불러주었다. 공무원은 아는 노래가 있으면 같이 부르기도 해서 될 수 있으면 그가 알 수 있을 만한 노래를 부르려고 노력을 했다. 이때 나는 항상 명곡을 부르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야간 중고 등학교에 다녔던 내가 학교 음악 시간에 배운 노래는 몇 곡이 되지 않았지만 어려서 아버지가 늘상 불러서 귀에 익은 노래가 많았던 것을 감사했다. 만일 에 내가 한국의 대중가요를 불렀다면 그리스의 공무원이 무슨 노래인지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었지만 실제로 당시의 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국의 대 • 9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중가요 보다는 명곡을 많이 알고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음악감상실 디쉬네를 들락거리며 들었던 외국의 팝송들이 도움되기도 했다. 만만한 여자가 아니고 교양과 격식을 갖춘 여자라고 느끼게 해주려고 일부러 명곡을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면서도 언제 어떻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몰라서 마음 은 여전히 불안했다. 비록 공무원이 점잖아 보이기는 했지만, 완전히 믿고 마 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힘을 주 어 박력 있게 노래를 불러서 만만하게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러나 무 사히 아테네에 도착해서 렙테리를 만나야 하는데 혹시라도 공무원이 마음이 변해서 나를 내려놓지나 않을까 해서 적당하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것도 빼놓 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는 사연을 물어도 약혼자가 정보기관에 있어서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줄 수 없다고 허튼 소리로 은근히 수상쩍어 보이는 분위 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서 온갖 상상과 쇼를 연출 하면서 800km의 멀고 먼 길을 불안과 초조, 안도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 속에서 달려서 아테네 에 도착했다. 헤어질 때 공무원이 명함을 주었지만 무사히 도착했다는 생각 에만 빠져서 제대로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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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 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ChapterⅡ

그리스 청년과의 재회

드디어 택시를 타고 렙테리가 준 이모 집 주소로 찾아갔다. 렙테리로부터 내 가 올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이모네 식구들은 나를 따뜻하게 맞이 해주었다. 짐이라고는 달랑 조그만 여행 가방에 옷 몇 가지 뿐인 나에게 실내 화, 잠옷, 심지어 생리대까지 필요한 물건들을 사다 주었다. 이모는 돌아가시 고 딸 둘과 아들 둘 그리고 장의사를 하는 아버지 다섯 식구가 무료하게 살다 가 외국 여자가 집에 오니 집안에 활기가 돌았던 것 같다.. 함께 생활하면서 가장 놀란 것은 아버지와 자녀들이 대화하는 방법이었다. 어른 앞에서는 눈도 크게 못 뜨는 완고한 유교 사회의 엄격한 집안 분위기에 서 자라난 나로서는 아버지와 삿대질을 하며 싸움을 하는 것 같은 모습은 상 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도 금방 웃고 하는 것이 그리스 말을 모르 는 내게는 미쳤거나 불량한 자식들 같은데 나한테는 친절한 것이 이상한 사 람들은 아닌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은 그렇게 하는 것은 싸우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일상적 인 대화 방법이었다. 일상생활에서 토론이 흔하게 벌어지고 나이 성별 차이 없이 자기의 의견을 마음껏 표현하는 사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의 정 서를 모르는 나는 싸우는 것으로 생각하고 노인인 아버지를 토닥거리면서 자 녀들에게는 그러면 안 된다는 시늉을 하니까 노인이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상황을 잘 모르고 했던 이런 나의 태도가 결과적으로는 나중에 크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이모 집에서 연락을 받고 달려온 렙테리를 만나자 반가워서 끌어안고 눈물 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렙테리와 나는 애정이 생길 사이도 없 이 자연스럽게 연인 관계가 되어 버렸다. 한국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통성명을 하고 난 다음에는 의례 나이를 물어보지만 그리스에서도 미국과 마 • 10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찬가지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나이를 물어보지 않는다. 렙테리는 상냥 하고 발랄한 내 모습을 보고 20대 초반으로 알았고 내 눈에는 키가 큰 그가 어려 보이질 않았다. 그가 결혼하자고 할 때서야 나이를 물었더니 무려 10살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내가 결혼을 해야 합법적인 신분을 취득할 수 있었지만,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물으니까 랩테 리는 철이 없었던 것이지 내가 너무 좋아서인지 “Too late!”이라고 대답했다. 마음을 돌리기엔 너무 늦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결혼 후에 나는 나 이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나를 귀여운 어린아이에게 대하 듯 해서 그가 나보다 나이 많은 아저씨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리스 말을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온 집안 식구들이 선생 노릇을 하기 시작 했다. 큰 아들 요르 고가 퇴근해서 집에 올 때 무언가를 사가지고 와서는 ‘찬 다챤다’ 라고 하며 가방을 주고, 둘째 아들 앤터니는 식사시간에 물을 가리키 며 ‘네로’ 하고, 둘째 딸 스마그라다는 ‘닉띠꼬’ 하면서 잠옷을 내게 주곤 했으 니 학생 하나에 다섯 선생님이 특별 과외를 하는 셈이었다. 렙테리는 퇴근하면 매일 이모네 집에 와서 함께 놀다 갔다. 서로 말이 잘 통 하지 않아서인지 툭툭 치며 장난을 걸어오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가볍 고 철이 없어 보여 “이렇게 고민도 없고 진지하지 못한 사람과 결혼해도 될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찬 밥 더운 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지 만, 인생의 중요한 결정이니 이만 저만 고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친구들과 이모네 형제들이 나를 위한 파티를 해준다고 한국의 나이트클럽과 비슷한 음악을 뜻하는 ‘뮤주까’ 라고 하는 곳에 갔다.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를 하고 사람들은 넓은 홀에서 춤을 추었다. 특이한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 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면 업소에서 파는 접시를 사서 가수 앞에서 접시를 깨 뜨리는 모습이었다. 또 ‘집떼떼리’가 나오면 여자들의 율동이 빨라지는데 가 • 그 리 스 청 년 과 의 재 회

슴을 흔들며 추는 춤이 매우 관능적으로 보였다. 또 다른 느린 박자의 하사비 꼬가 나오면 이번엔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서서히 느릿느릿 흡사 한국의 승무처럼 춤을 추었다. 천천히 돌다가 껑충 몸을 날려 발바닥을 한번 탁 차고 는 또 다시 느린 동작으로 추는 춤이었다. 실제로 그들의 춤을 보고 오히려 영 화 ‘희랍인 조르바’에서 앤서니 퀸이 추던 춤이 서툴렀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 었다. 그리스 남자들의 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의 아픔이나 고뇌, 기쁨 등의 내면이 들여다보이는 듯해서 춤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했다. 그런데 렙테리 가 갑자기 크리스털 술잔을 으스러지게 꽉 쥐어 잔을 깨뜨렸다. 그의 손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나에게 그의 친구가 말했다. “걱정 말아요. 당신 돌아온 것이 너무 기뻐 감격해서 그런 것이니.” 사실 나로서는 그와의 결혼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는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과연 잘 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불안감이 깔렸었다. 그러나 그 순 간 그런 불안감이 살아지고”아! 이 남자의 아내가 되어서 헌신하며 살아야겠 구나.”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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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ChapterⅡ

낯선 나라에서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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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나라에서의 결혼 103

그러나 그의 부모를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들이 말도 없이 5일 동안이나 공장 문을 닫고 사라졌다가 10살이나 나이가 많은 동양 여자를 데 려와 결혼하겠다니 내가 부모라도 까무러칠 일이었을 것이다. 모계 사회 전 통이 남아 있는 그리스에서는 아들이 아니라 딸을 시집 보낼 때 집을 사서 보 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 문화권에서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르는 빈털터리 동양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서 결혼한다는 것은 그의 부모는 물론이 고 동네 사람들에게조차 가히 폭탄 같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몸져누워 버렸고 아버지는 나를 맞이해준 이모부를 나무라고 화를 내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나와 함께 사는 이모 댁 식구들은 모두 내게 호의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했다. 어느 날 이모부가 나를 데리고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서 “이 아이는 나의 다 섯 번째 자식이나 마찬가지이니 믿고 결혼을 시켜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을 했다. 집안에서의 이모부의 위치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인지 인품이 존경스러 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어머니가 마지못해 승낙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시댁에 와서 결혼 전에 살림과 그리스 예절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나를좋아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이모 댁에 있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결 혼 전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함께 살게 되자 렙테리는 싱글벙글 좋아했고 시부모님도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나는 시어머니와 함께 웨딩드레스며 손님에게 줄 답례품을 사러 다녔지만 내게는 돈이 한 푼도 없어서 값을 치를 때마다 송구스럽고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고맙게도 이모부가 자기 자식을 결혼시키는 것처럼 나서서 이부자리나 가전 제품을 사주셨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시어머니와 언니인 돌아가신 이 모와는 뿌리 깊은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미묘한 관계가 있는 집안에 난 데없이 외국에서 온 며느리인 내가 끼게 되었기 때문에 상황이 더 복잡하게 • 10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된 것이다. 시어머니는 내가 이모네 식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해서 내 입 장이 더 미묘했던 것이다. 렙테리 집안은 큰 형은 이혼하고 둘째 형은 미국에 살고 있었다. 남편과 이혼 한 큰 형의 딸인 조카 티나와 부모님이 사는 집에 내가 시집을 온 것이다. 공 처가인 시아버지는 입담이 좋은 호인 형이었고 티나는 통통 튀는 성격에 머 리가 비상해서 가끔 시어머니와 나 사이에 흐르는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 주 는 활력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시댁에 방이 모자라서 나는 티나와 한방을 썼 는데 렙테리가 아쉬워하며 방을 기웃거릴 때마다 시어머니는 자기 방에 가서 일찍 자라고 나무라셨다. 그런데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예기치 못한 또 다른 암초가 기다리고 있었다, 골치 아픈 시어머니만 설득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이번에는 교회를 설득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인은 태어나면 자동으로 국교인 희랍 정교회 교인이 되기 때문에 결혼식은 당연히 희랍정교회에서 해야 한다. 그러므로 외국인인 내가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교회 교인이 되어야만 하는데 희랍정교 회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나는 천주교에서 이미 세례를 받았으므로 영세 증명서가 필요했는데 엄니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큰 고민거리였다. 외국으로 나가 소식이 끊어졌다가 난데없이 알지도 못하는 곳 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 엄니가 얼마나 놀라실까를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어쩔 수 없어 편지를 썼다. 나로서는 그 동안의 사정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는 방법밖에 없었지만, 사 실은 엄니뿐만 아니라 동생들도 나의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되지 않 을 수 없었다. 집에서는 캐나다의 초희네가 최종 목적지인 줄 알고 있었는데 한국을 떠난 지 1년도 안되어서 엉뚱한 나라에서 결혼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가 없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도덕적 결벽증이 심했던 남동생의 반응도 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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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남동생은 결사적으로 반대해서 오히려 어머니가 설득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결혼 후에도 한동안 남동생은 누나라고 부르지도 않아서 나의 결혼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몇 년 후 남동생 이 다시 나를 누님이라고 불렀을 때 ‘다시 가족으로 받아들여졌구나.’ 하는 느 낌이 들어 눈물이 났다. 물론 편지를 보낼 때 김루미 사람들이 찾아와서 난리를 칠 경우를 대비해서 술집에서 찍어 놓았던 사진을 동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나 중에 김루미가 동생이 하는 양복점으로 찾아왔을 때 그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두 말 않고 가버렸다고 해서 사진을 찍어 놓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 다. 다행히도 내 편지를 받고 전후 사정을 이해하신 엄니가 서류와 함께 한복 한 벌을 보내 주셨다. 한복을 입고 시부모에게 큰절을 올리며 결혼을 승낙해 주 셔서 감사하다고 했을 때 시아버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는데 시어머니 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아들과 남편, 손녀까지 내 편을 드는 것 에 대한 질투심(?)이 생긴 것 같았다. 영세를 받은 내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서 다음 단계인 견진성사를 받아야 하는데 견진성사를 받기 위해서 또다시 어려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 주경(주기도문)을 그리스 고어체로 외워야 하는데. 아직 현대 그리스어도 못 하는 내가 고대 그리스어를 외워야 하니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가 없어서 시험공부 하듯이 열심히 공부해서 외웠다. 드디어 이모 딸 스마라그다를 대모로 세우고 그리스 이름 Eftihia(영어로 Happy)를 받아서 결혼 준비가 되었다. 살 집도 장만하고 드디어 결혼식을 올 릴 차례인데 그 동안 결혼식 준비를 잘 해오던 시어머니가 이번에는 갑자기 • 10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해서 또 한 번 애를 먹였다. 또 다시 이모 부가 나서서 시어머니를 설득했지만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결혼식장에 늦게 야 나타났다. 결혼식장에는 이모부가 신부의 아버지가 되어 내 손을 잡고 식 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나중에 사진으로 본 이모부가 울고 있는 모습에서 다 시 한 번 나에 대한 사랑을 기억하게 되었다. 결혼식 날이 공교롭게도 5월 16일이었다. 아마도 결혼식이 나에게는 혁명, 시어머니에게는 쿠데타였는지도 모른다. 결혼식 때문에 남편이 돈을 많이 써 서 신혼여행은 가까운 섬으로 갔다. 2인용 자전거를 타거나 뉘였뉘엿 해가 지 는 바닷가에서 손에 깍지를 끼고 산책을 하며 일주일을 보내며, 그와 가까워 지는 노력을 많이 했다. 나는 그가 좋아하는 장난을 걸어주기도 하고, 나이에 맞지 않는 애교도 부려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가 족들도 없이 치른 이 결혼을 과연 잘 한 것인지 아닌지 하는 것 때문에 그가 잠이 들면 밖으로 나와 바닷가에 혼자 앉아 골똘하게 생각에 빠질 수 밖에 없 었다. 그러나 애정이 미쳐 생기기도 전에 선택한 사람에 대한 미안함도 컸다. 그래 서 마음 속으로 ‘실망 안 시킬게, 많이 사랑해 줄게’하고 다짐하면서, 신혼여 행에서 돌아와 시댁에 들렸더니 시어머니가 이중으로 음식을 할 필요가 있겠 느냐며 요리 만드는 법도 배우고 그리스 예절도 배워야 하니 매일 시어머니 댁으로 출근을 하라고 했다. 결혼했으니 내 집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살게 될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난관에 부딪친 것이다. 나로서는 반대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지만 남편이 순순히 그렇게 하자고 하니 은근히 원망스러웠다. 다음 날부터 남편이 일찍 출근하고 나면 집안 청소를 대강하고 버스를 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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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에 가서 함께 집 안 청소와 점심 준비를 해야 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아 침은 허술하게 먹고 점심을 저녁 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모두 점심 때가 되면 집으로 가서 식사하고 낮잠을 자는 것이 일상이었다. 남편도 점심시간 에는 가게 문을 닫고 집에 와서 식사하고 잠깐 낮잠을 잔 후 다시 출근했다. 시어머니는 매주 수요일에 꼭 생선과 삶은 채소 또 주말에는 양고기 혹은 감 자와 함께 소고기 요리를 했다. 또 다른 날은 콩으로 만든 수프, 또 다른 날은 토마토나 호박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양념 된 쌀을 넣어 오븐에 굽는 요리 등을 했는데 매우 영양학적으로 식단을 짜서 그런 생각을 아직 하기 어려웠던 한 국의 우리 집 식생활과 비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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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story is so unique. Not one of the 50 million Koreans today would be able to hold a candle against her life story. It is not that she accomplished something grand, or left an indelible mark in the history.

Nonetheless, her life is full of extraordinary stories that deserve their places in a time caps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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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 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 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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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악명 높은 그리스 시어머니들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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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그리스 시어머니들 매일 시댁으로 출근해서 음식, 풍습 등 그리스 사람이 되는데 필요한 것을 배 우는 수업이 계속되었다. 시어머니는 옷 차림새까지 하나하나 당신의 취향에 맞추어 나를 교육하기 위해서 헌신적이었다. 물론 감사한 일이기는 했지만, 꼭두각시 같이 움직여야만 하는 내 신세가 괴롭고 처량하기만 했다. 시어머 니는 조금만 늦게 도착하면 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늦었다고 꼭 한 마디 하셨 다. 특이한 것은 정작 자신은 나가지도 않으면서 절기는 꼬박꼬박 지켜 그리 스 정교회의 복잡한 절기에 따라 지켜야 할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하나의 예로 성모님이 백합꽃 향기를 맡고 예수를 잉태하신 날에는 부부관계도 하지 말아야 하고 빨래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이었다. 시어머니와 나는 일하는 습관이 달라서 내 버릇을 버리고 시어머니가 하는 대로 따라 하려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거지할 때 나는 눈에 보이는 것부터 하는데 시어머니는 작은 숟가락에서부터 큰 숟가락. 그릇도 작은 것 부터 큰 그릇 순서대로 닦았다. 옥상에 가서 빨래를 널 때도 치수와 종류별로 양쪽을 족집게로 집어서 반듯하게 널어야 했다. 마른 빨래를 걷을 때도 대강 대강 소쿠리에 담는 게 아니었다. 구겨지지 않게 하나하나 펴서 차곡차곡 종 류별로 단정하게 담아 놓기 때문에 다림질한 듯 구김살이 없었다. 그뿐만 아 니라 마른 세탁물은 수건과 속옷까지도 다림질해야 됐고 침대 시트도 다림질 해야 했다. 또 손님이 올 때는 물 한 잔도 컵 받침이 있는 크리스털 잔에 따라 쟁반에 올려 가도록 살림을 가르쳐 주셨다. 실제로 70년대 한국과 비교하면 그리스가 생활수준이 높았지만, 문화적 수 준의 차이는 더욱 컸었다. 그런 사실을 솔직히 이야기할 수가 없어서 한국에 서 직장생활을 하느라고 살림을 배우지 못했다고 했더니 시어머니는 놀라면 • 11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서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그런 소리 하면 바보인 줄 안다.”고 하 셨다. 사실 보통 그리스 사람 집에 가면 어느 집에 가나 모델 하우스처럼 깨끗 하게 정리정돈이 되어 있고 여자가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집안 살림 못 하는 것은 큰 흉으로 여겼다. 유명연예인들이 아침 마당 같은 프로그램에 나 와서 살림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은근히 비추기도 하는 곳이 그리스였다. 한국에서는 살림을 못 배웠다고 해서 크게 흉 잡지는 않지만, 그리스에서는 살림 못 하는 것이 이혼 사유에 들어간다고 했다. 힘이 들기는 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곧 익숙해질 수 있었다. 임신 중에 남편과 함께 길을 걸어가다가 어느 집 앞을 지나는데 음식 냄새가 좋았다. 지나가는 말로 “맛있는 냄새가 나네.”하고 중얼거렸는데 남편이 가 던 길을 멈추더니 내 손을 잡고 그 집 문을 두드렸다. 나는 당연히 그 집이 남 편이 아는 사람 집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은 주인에게 “아내가 임신 중인 데 당신 집에서 나는 음식 냄새를 맡았습니다.”라고 하고 주인이 반색을 하 며 들어오라고 했다. 주인은 음식이 거의 다 됐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여기가 아는 사람 집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런데 왜 내가 임신한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얘기했어?”라고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편은 “임신 중에 냄새 맡은 음식은 꼭 먹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기가 애꾸눈으로 나올 수가 있어.”라고 했다. 이처럼 그리스 사람들은 임신한 여자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해 주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에 그 집 주인이 접시에 양고기 요리를 내왔는데 나는 그 때만 해도 양고기를 먹어 보지 않아서 못 먹겠다고 했다. 남편은 “여태껏 잘 먹었는데 왜 그래?” 하면서 “여태껏 집에서 먹은 고기가 사실은 소고기가 아니고 양고기이었어.” 하는 것이었다. 내가 양고기는 안 먹 겠다고 해서 소고기라고 속였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고기가 매우 부드럽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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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더니 양고기를 소고기로 알고 먹어왔던 것이었다. 그래도 양고기라는 말 때문에 꺼림칙했지만, 비록 미신이기는 해도 아기가 애꾸눈으로 나올 수 도 있다니 먹지 않을 수가 없어서 다 먹어버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뒤로 는 양고기를 먹는데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이모네 집에 가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던 시어머니는 교묘하게 우 리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일을 꾸몄다. 나를 꼼짝도 못하게 하는 까다로 운 시어머니의 모든 말에 철저하게 순종해서 큰 마찰 없이 지내왔는데 생각 하지 못한 일에서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임신해서 점점 배가 불러오면서 옷 이 맞지 않아 대모인 스마라그다와 잠시 시간을 내어 임신복을 사 입고 시집 에 가자 시어머니가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시비조로 ‘누구와 같이 사러 갔어? “라고 물었다. “노나(대모)와 같이,” 라고 말하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대리석 바닥 에 던져버리면서 “도대체 나는 뭐냐?” 하시며 역정을 내셨다. 기가 막히고 화 도 나서 “옷 한 벌 내 마음대로 사 입으면 안 돼요?”라고 한 마디 했더니 손가 락을 내 코 앞에다 대고 “너 꼭 기억해둬라. 오늘 나에게 아프게 한 것을 후회 할 날이 올 거다. “라고 하는데 그녀의 눈빛과 손가락 끝에서 소름 끼치는 빛 이 내 몸을 뚫고 들어오는 듯했서 섬찟했다. 그리스에서는 이름을 짓는데 일정한 관습이 있다. 첫 아들의 이름은 친할아 버지 이름을 붙이고 둘째 아들은 친정아버지 이름을 붙이고 첫째 딸은 시어 머니 이름을 받고 둘째 딸은 친정어머니의 이름을 쓴다. 그래서 시어머니 이 름과 첫째 시아주버니 첫째 딸 이름과 내 딸 이름이 같은 모두 디나여서 큰 디 나, 작은 디나 라고 부른다. 만약에 길에서 마리아를 만났다고 하면 “누구네 마리아?” 라고 묻고 “첫째 큰아버지네 마리아, 혹은. 세 째네 마리아.” 라고 한 • 11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다. 시아버지는 형제가 여섯이라 다들 첫째 딸 이름을 마리아라고 해서 6명의 젊은 마리아와 6명의 늙은 마리아가 있어서 한 집안에 합해서 7명의 마리아 가 있었다. 이렇게 앤터니도 12명이 있어서 큰 명절 때 모두 모이면 이름 때 문에 난리가 난다. 그래서 이모의 아들 이름도 요르고였다. 임신해서 다니던 병원 의사의 성이 ‘구두쇠’라는 뜻의 징구니여서 “구두쇠 선생님과 예약하겠습니다.” 라고 전화 예약을 할 때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 다. 간호사가 내가 너무 웃는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왜 웃느냐고 묻기에 선생 님 성이 우습지 않으냐고 했더니 한술 더 떠서 의사의 부인 이름은 ‘까꺄’” (나 쁜 년)라고 해서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그네들이 그런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짓고 쓰는 것이 정말로 이상하게 여겨졌다. 하여간에 구두쇠 의사 선생님의 노련한 도움을 받아 딸 디나가 태어났다. 출산 때의 아픔으로 소리소리 지르 는 다른 임산부의 모습을 보고 외국 여자가 소리를 지르는 것은 더 이상할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산통을 참고 나니 얼굴에 붉은 꽃이 피어버렸다. 의사가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잘 참는 임산부는 처음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시어머니 는 속으로 ‘독한 년’이라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에서는 해산 후에 한 달 동안 미역국을 먹고 누워 있는데 미역국을 못 먹는 게 너무 아쉬웠다. 임신 초기에는 콩나물이 하도 먹고 싶어서 콩을 사다 가 시루대신 큰 양푼에 콩을 담고, 옛날 외할머니가 콩나물 기르던 것이 생각 이 나서 콩나물을 기르기로 했다. 검은 천으로 덮고 물을 주니 싹이 자라났다. 너무 기뻐서 정성스럽게 물을 줬는데도 싹만 자라고 더 자라지를 않았다. 그 아기 콩삯을 콩나물 밥을 하려고 쌀과 함께 끓이니 싹은 온데 간데 없이 콩밥 이 되어 버렸다. 콩나물 밥에 간장을 넣어 비벼 먹는 게 소원이었는데, 콩밥 에 어렵게 구한 간장을 넣고 비벼 먹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미역국이 먹고 싶어서 또 눈물이 났다. 그러니까 초희가 해산할 때는 미역국을 먹으면 •

악명 높은 그리스 시어머니들 115

서 울고 내가 해산할 때는 먹지 못해서 울었으니 두 번이나 미역국 때문에 눈 물을 흘린 셈이다. 남편은 사람들이 아들일 것이라고 하는 말을 믿고 암스테르담 맥주를 가게 안에다 잔뜩 사놓고 파티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막상 딸을 낳으니 실망 했다. 시아버지는 한술 더 떠서 병원에도 오지 않으셨지만 나중에는 “하죠 바 바”(바보 아빠) “ 하죠 바뿌 “(바보 할아버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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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 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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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그리스 시어머니들 117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우유 전쟁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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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딸을 낳고도 아기를 데리고 거의 매일 시댁에 가야 했다. 어떻게 아기를 길러야 할지 배운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으니 당연히 시어머니 도움을 받아야 만 했다. 아기를 목욕시키는 것부터 기름으로 아기 몸 전체를 마사지 해주는 일 등 거의 모든 것을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 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병원에 있었던 3일 동안 아기에게 병원에서 준 분유 를 먹였는데 퇴원해서 시댁에 오니 시어머니가 연유를 먹이겠다고 우겼다. 연유는 항상 냉장고에 보관해야 하지만 분유는 냉장고 없이도 보관에 문제가 없고 아기용으로 모든 영양이 골고루 아이에게 맞게 제조된 것이지만 연유 는 아기 위주로 만든 것이 아니어서 영양이 부족할 것 같은 생각이 되어서 분 유를 먹이고 싶었다. 아마도 분유는 외출할 때 좋으므로 우리가 아기와 함께 외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시어머니는 분유를 먹이는 것을 싫어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한 번은 내가 옥상에 가서 빨래를 너는 동안에 살짝 연유를 젖병에 넣는 것을 보고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내 아이는 내 방식으로 키우겠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옆에서 아무 말 안 하고 서 있는 남편에게 아내 한테 쥐어 사는 바보라고 하면서 나에게 또다시 저주를 퍼부었다. “오늘 나를 아프게 한 것을 꼭 그대로 당할 날이 올 거다. 명심해” 라고 하는 시어머니의 표정과 손짓이 또 섬찟하게 느껴졌다. 그날로 아기를 데리고 우 리 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 ‘평생 엄니에게 구속을 당하면 서 살아 왔는데 여기까지 와서 또 시어머니의 압박을 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 는 것이 내 운명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헛소리처럼 “싫다. 정말 싫다. 떠나고 싶다. 떠나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은 내가 살짝 미쳐 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 하는 눈치였다. 사실상 억지 춘향으로 결혼을 했지만, 언어의 장벽과 문화의 차이 때문에 결 • 우유 전쟁 119

혼 생활이 순조로울 수가 없었다. 그리스 여자들이라면 그냥 넘어갈 남편의 행동이 나에겐 모욕적이거나 불쾌할 때가 많았다. 말을 제대로 못 하니 싸울 때도 번번이 나만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어서 기를 쓰고 말을 배우기 시작했 다. 그러나 학원도 없고 사전도 없고 공부에 도움이 될만한 책도 없어서 TV 드라마에서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를 보고 들으면서 배우거나 물건들의 이름 은 어린아이처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익혀갔다. 시어머니와의 갈등 외에도 동네 아낙들과의 관계도 쉽지가 않았다. 내가 처 음 들어온 동양인 여자이니 온 동네가 간섭을 하고 저마다 훈수를 두어서 온 동네가 시어머니였다. 심지어는 시어머니가 미국에 있는 아들들에게 갈 때 시집에 와있으라고 했을 때도 내 집에 있겠다고 했더니 이번엔 동네 사람들 까지 나서서 “시부모 집에 와서 있으면 우리가 동무가 되어 줄 텐데 왜 싫다 고 하느냐? 우리와 같이 노는 게 싫으냐?”라며 극성이었다. ‘아! 이런 여자들 속에서 한 평생을 살아야 하나?’하는 생각에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남편은 너무 어려서인지 시어머니와 동네 여자들에게서 내가 받는 심리적 압박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대신 본인이 나에 게 더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안쓰럽게 느껴 졌다. 요리 한 가지를 해 주어도 감탄하고 고마워하고 행복해하는 그의 모습 과 한국에서 보아왔던 대부분의 남편들이 아내를 대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과연 내가 한국에서 빈털터리로 십 년 연하의 남자와 결혼했다면 이런 사랑 을 받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 마다 “그래, 좀 더 노력하 자. 참아 보자.’하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게 되었다. 시어머니와 동네 여자들의 등쌀이 아무리 심해도 이 사람이 나를 이렇게 사 랑해 주고 귀여워해 주는데 참고 넘어가자고 다짐 하고 있을 때 아이에게 이 • 12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상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기를 안고 있다가 침대에 눕히면 경기를 해서, 아주 조심조심 눕혀도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 일 주일에 한 번 정도 하 더니 다음엔 두 번, 세 번 나중에는 하루에 여러 번 경련이 일어났다. 아기는 파김치처럼 늘어져 결국은 큰 병원에 입원을 했지만 뇌파검사로부터 갖가지 검사를 해보아도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새로운 검사를 할 때마다 아기 팔에 서 피를 뽑는데 하도 많이 뽑아서 온 팔이 상처 투성이어서 나중에는 발등에 서까지 피를 뽑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 아이에게 코티존 주사를 놓아주니 경 련을 멈출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보고 밤에 아기를 데리고 십자로를 지났기 때문이라는 이가 있는가 하면 부모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때에 아기가 이상한 병에 걸린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어서 가뜩이나 힘든데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듯 가슴이 쓰라렸다. 아기는 겁에 질린듯 두 팔로 막는 듯하다가 오므렸다 하는 동작을 온 힘을 주 어 반복하고 나면 축 늘어졌다. 이런 행동을 몇 10분 간격으로 해대니 아기 주위에는 의사와 인턴 등 흰 가운을 입은 의대생들까지 몰려와 동물원 원숭 이 보듯 신기해 했고 담당 의사가 신난 듯 강의를 하는 모습이 원망스러웠다. 이역만리에서 오직 아기에게만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고 있는데…….나는 뼈가 아프도록 오랫동안 하지 않던 기도를 했다. 의사만 보면 우리 아기를 살 려 달라고 매달리고 길을 가다가도 교회가 보이면 미친년처럼 문 앞에 엎드 려 기도를 했다. 아이의 병을 나을 수만 있다면 내 목숨과 바꾸어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그때 어디선가 기도를 해서 병을 고치는 여자가 있다는 소문이 들려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찾아갔다. 원래 신화의 나라인 그 리스는 한국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미신이 기독교와 혼합되어서 어디까지가 기독교이고 어디까지가 미신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자가 성모상 앞에서 같이 기도를 하자고 해서 그녀와 같이 몇 시간을 몸부 • 우유 전쟁 121

림치며 하느님께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녀가 기도를 끝내도 계속 기도를 하는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당신 아기는 병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저주했는데 당신이 너무 강해서 미치지 못하니까 세례를 받지 않은 아기에게 간 거예요. “라고 했다. 그러면서 당장 병원에서 퇴원시켜 세례를 주면 아기 의 증세가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 여자의 말을 듣는 순간 문득 시어머니가 두 번이나 악담을 했던 생각 났 다. 시어머니에 대한 증오심에 몸을 떨면서 시댁으로 달려갔다. 무당의 말을 100% 믿지 않았지만 만일에 무당의 말대로 아기가 죽는다면 시어머니는 평 생 원수가 될 것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집으로 향했다. 그 순간에는 눈에 보이 는 것이 없어서 나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모 두 있는 자리에서 무당 여자에게 다녀온 이야기를 하니까 시어머니가 당황해 서 내 시선을 피했다. 그렇지 않아도 손녀 딸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던 시어 머니가 자기가 뱉은 말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게 된 것이다. 무당의 말은 시어머니에게는 즉각적인 효력이 있었지만, 그녀의 말만 전적 으로 믿고 아이를 퇴원시킬 수는 없었다. 차일피일 미루던 어느 날 아이 얼굴 이 고무풍선처럼 부풀어서 곧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아기를 퇴원시키기로 결 심하고 나가겠다고 했지만 병원 측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아기가 죽을지도 모르니 아기에게 세례를 주어야 하겠다고 주장하니 그렇다면 병원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사인을 하고 퇴원하라고 해서 곧바로 교회에 가서 세례를 받 게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기가 세례를 받는 중에 대모의 품에 안겨서 한 번 크게 경기를 하고 나서는 정말 거짓말같이 경기가 멈쳤다. 확인을 하기 위해 서 다시 병원에 데려갔더니 아이의 완쾌된 모습을 보고 모두 놀라며 ‘기적의 아기’라고 했다. 미신이든 아니든 간에 무당을 찾아갔던 일이 효력을 보아서 아기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 • 12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그리스에서 사는 동안 한국에 대한 인식 때문에 두 번이나 마음이 상한 일이 있었다. 그리스는 아침 식사가 간단해서 아침에도 밥을 먹어야 하는 나로서 는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적응하는데 힘이 드는 이야기를 하니까 선원 출신인 첫째 형이 정색을 하면서 “가난한 나라에서 어떻게 하루에 3끼를 다 먹느냐?”며 마치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말을 해서 몹시 당황스러웠다. 또 한 번은 일본인 부부와 함께 대화하는 중에 부산 이야기가 나와서 내가 “ 한국의 두 번째 도시로 일본으로 따지면 오사카 정도 된다.”고 했더니 “어디 에 감히 부산을 오사카에 비교하느냐?”고 화를 내듯 이야기를 해서 기가 막혔 다. 뉴스로 6·25 이후의 참상만 들어서 알고 있던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한국 은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로 인식되어 있었지만, 선원으로 부산을 다녀온 형 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나로서는 억울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후 역시 선원이었던 시아버지가 마침 한국으로 팔려가는 중고품 배가 있다면서 선원으로 자원을 했다. 시아버지는 도대체 며느리가 어떤 곳 에서 왔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더욱이 내가 은근히 우리 집안은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해왔기에 친정 집에 대하여 알고도 싶었을 것이다. 부산에 도착 해서 우리 집에 갈 때 역시 선원이던 큰 아들로부터 한국이 가난한 나라라는 소리만 듣고 배에서 먹는 식료품 통조림을 선물로 잔뜩 가지고 갔다고 한다. 막상 명동에서 양복점을 하던 동생 집에 가보고는 가지고 간 것을 내놓지 못 하고 그대로 가지고 돌아와서 쓰레기통에 다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한 국을 다녀 온 뒤로 시아버지가 나에게 더 호의적으로 대해 주는 것을 보니 한 국을 얼마나 무시했었는지를 알만 했다. 딸이 회복되고 나서 남편은 그 동안 고생을 너무 많이 했으니 한국에 다녀오 라고 했다. 내가 한국에 간다는 말을 듣고 이모 댁의 큰딸 후루소가 자기도 같 이 가겠다고 나섰다. 나로서는 후루소 에게 신세를 진 것이 너무 많아서 같이 • 우유 전쟁 123

가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녀의 체격이었다. 후루소가 그 당시 한국 에는 그 정도로 뚱뚱한 사람이 없을 정도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한국에 가니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앞뒤를 돌아 가면서 쳐다봐서 정말로 난처했다. 주변에서 뚱뚱하다는 말을 하도 많이 해 서 나중에는 후루소가 ‘뚱뚱하다.’는 말을 알아들을 정도였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음식 문제였다. 출발 전에는 한국에 가서 아무 것이나 먹겠 다고 하더니 막상 도착하니까 비싼 소고기 외에는 안 먹는 것이었다. 한국 사 람들은 소고기가 비싸서 명절에만 먹던 시절이었고, 없는 살림에 간신히 여 비를 마련해서 왔는데 끼니마다 후루소가 먹을 소고기를 사대느라고 허리가 휠 뻔했었다.

• 12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Her story is so unique. Not one of the 50 million Koreans today would be able to hold a candle against her life story. It is not that she accomplished something grand, or left an indelible mark in the history.

Nonetheless, her life is full of extraordinary stories that deserve their places in a time caps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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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전생의 나라 그리스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Pubs.Online • 12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나는 참으로 그리스를 진심으로 더 사랑한다. 아마도 한국 사람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듯한 희랍인들의 모습과 풍습들에서 감동 받은 것이 많았기 때문 일 것이다. 그리스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레코드 가게 앞을 지나가는 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걸음이 딱 멈추어졌다. 노래를 다 듣 고 난 다음에 가게에 들어가 떠듬대는 영어로 판을 달라고 했다. 방금 들은 멜 로디를 흉내 내면서 “Song? Before? I want buy!”를 손짓 발짓을 해가며 산 레코드의 노래는 그리스의 국민가수인 마리넬라가 부른 “오늘(simera)”이라 는 노래였다. 마치 한국에서 이미자의 노래 ‘동백 아가씨’를 듣는 것처럼 음악 도 친숙했지만, 그리스의 음식도 입에 착 붙어서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동네에 닉꼬라는 젊은 거지가 있었는데 그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한결같이 양복을 입고 사람을 보면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지나가곤 했다. 특별한 것은 닉꼬는 알코올중독임에도 주정을 하거나 절대로 구걸을 하지 않았다. 항상 동네 사람들이 먼저 다가가서 말도 걸고 돈을 주기도 했다. 시어머니 말 씀에 의하면 원래는 유산을 상당히 물려받았는데 누나가 다 차지하고 지능이 낮은 동생을 돌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폐차된 스쿨버스 같은 차 안에서 살 았지만, 목욕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항상 깨끗했다. 나에게 더욱 놀라운 것 은 차가운 성격의 시어머니도 이따금 지나가는 닉꼬를 불러서 차 대접을 하 는 것이었다. 거지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 놀랍기도 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나에게 조금만 자유를 주면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드릴 터인데 왜 내게는 그렇게 냉정할까?”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나중에 남편과 아이들이 그리스에 살고 내가 미국과 그리스를 오고 갈 때 어 느 해 니꼬의 차가 보이지 않아서 물었더니 새로 이사를 온 권력층에 있는 사 람이 신고해서 강제철거를 당했다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막으려고 했지 만, 권력층 사람이 집값이 내려간다고 강력하게 추진해서 결국은 쫓겨나 아 • 전생의 나라 그리스 127

마도 홈리스 쉘터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사건 이후 동네 사람들은 그들과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낸다고 했다. 남편도 중학교 밖에 안 나왔지만, 대부분의 동네 사람은 한국보다 교육수준 이 훨씬 낮았다. 신혼 초에 남편이 나에게 구구단을 아느냐고 묻기에 기가 막 혀서 “모른다.”고 했다. 그랬더니 출근 직전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무엇인가 써서 내밀며 외우라고 했다. 퇴근 후에 내가 구구단을 외우니까 깜짝 놀라면 서 “하루 동안에 어떻게 그것을 다 외웠냐? 당신 천재인가 보다.”라고 하고 탄 복을 해서 또 한 번 기가 찾다. 또 한 번은 초등학교 4학년생인 티나가 숙제를 하다가 풀지 못한 수학문제 를 가지고 와서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남편이 몰라서 동네방네 돌아다니며서 물어도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무슨 문제인데 그러냐고 하니 까 나는 모를 것이라며 아예 보여 주려고 하지를 않았다. 내가 강제로 티나에 게 문제를 가져오라고 해서 들여다보니까 문제를 설명하는 지문은 몰라도 문 제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쉽게 풀어주었더니 남편이 또 한 번 놀래 서 아는 사람들에게 모조리 전화를 했다. “아내가 지난 번에는 구구단을 하루 만에 다 외우더니 이번에는 아무도 못 푸는 수학문제를 풀었다.”고 자랑을 했 다. 나로서는 정말로 기가 막힌 일이었지만 내가 그리스 말을 못하니까 지적 으로도 어린 것처럼 본 모양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내가 말을 제대로 못 해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 보다는 높은 사람들과 훨씬 소통이 잘 되었다. 이를테면 남편의 주변 사람보다는 남편 사 업 거래처의 높은 사람들을 만나면 대화가 더 잘 되었다. 물론 외국 여자인 나 에 대한 호기심도 작용했을 터이지만 대화의 내용 자체가 풍부한 편이 나와 맞았다. 내가 비록 제대로 표현은 하지 못하지만 산전수전을 겪어온 나에게 • 12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는 렙테리 주변 사람들의 단순한 세계가 오히려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딸아이를 안고 놀면서 뜻밖에 “너는 좋겠다. 엄마한테 배울 게 많아서”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다. 항상 나를 못마땅해 하던 시어머니도 자기들이 모르는 것을 내가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인정했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동네에 돌아다니면서 내 흉도 보지만 한 편으로는 자기의 자존심 때문에 나에 대한 자랑도 하고 다니는 것 같았다 이모네 식구 중에 최고 학력이 중졸인 둘째 딸이고 큰 딸은 초등학교 출신이 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화의 폭이 넓어서 정치, 예술, 문화 다방면에 걸쳐서 거침없이 자기들이 아는 만큼 열을 띠어 토론 하는 것을 보면 놀랍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그런 자리에 아이들도 반드시 함께해서 자기들의 생각을 어른과 동등하게 발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리스에 외국 여자가 많지 않아서인지 티나는 자기 친구들에 게 나를 소개하고 싶어서 학교에 가보자고 성화를 했다. 그래서 어느 날 학교 를 방문해서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주저 하는 아이들 하나도 없이 선생님이 시키면 벌떡 일어나서 발표하는 것이 한 국의 교실과는 너무나 달랐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 답을 가정교육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여자아이는 10 살쯤부터 집에 손님이 오면 반드시 그 자리에 함께해야 하고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도록 허락했다. 정치 이야기, 축구 이야기, 하다 못해 동네 가십까지 함께 앉아서 듣다가 한마디 하면 어른이 말하는 것처럼 받아 주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다방면의 정보를 습득하여 발표할 수 있는 용 기와 능력을 심어주는 듯 했다. 티나는 이미 시어머니로부터 손님 접대하는 법을 배워서 익숙하게 순서대로 접대해 낼 수 있었다. 일단 손님이 오면 같이 몇 분 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크 • 전생의 나라 그리스 129

리스털 접시에 담긴 초콜릿을 내오고 몇 분쯤 지난 다음에 작은 잔에 달콤한 술을 내온다. 그 다음에 에스프레소 커피를 개인의 취향에 따라 만들어 내고 마지막엔 케이크를 내놓는다.

70년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그리스에서 아무리 살림살이가 어려 운 집에 가도 이런 순서로 손님을 접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점차 아름다운 그들의 삶의 모습에 빠져들게 되었다. 집요한 시어머니의 시집살이 와 동네 사람들의 지나친 간섭만 아니었으면 나는 그리스를 절대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 생활 중에 가장 기다려지는 날은 그리스 남자와 결혼한 일본 여자를 만나는 날이었다. 한국인은 없었고 국제결혼을 한 일본 여자가 있어서 자연 스럽게 우리 내외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녀가 일본 잡지를 보고 한국 오 이소박이 비슷한 음식을 만들었는데 허연 물김치같이 심심했지만 먹을 만했 다. 배추나 고춧가루를 구할 수가 없어서 김치 담글 엄두를 못 내다가 양배추 로 김치를 담아 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고추를 구할 수가 없어 서 궁리하다가 일본 여자의 옆집 베란다에 빨간 고추가 매달려 있던 것이 떠 올랐다. 그래서 일본 친구에게 옆 집에 놀러 가자고 해서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마음 속에 베란다에 있는 고추를 어떻게 얻어갈까 하는 생각뿐이었 다. 그러나 내성적인 성격인 나는 아직 친하지도 않은데 고추를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바람을 쐬는 척하고 베란다에 나와서 작은 고추 몇 개를 따서 호주머니에 얼른 집어넣었다. 지금 생각하면 귀한 것도 아니고 달라고 하면 얻을 수 있었을 터인데 어리석게도 그 때는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따 갈 수 있을 것인가만 생각을 했다. 한일 합동 작전으로 몰래 따온 고추 몇 개를 짓이 겨서 김치를 담갔는데 색깔은 안 났지만 그런 데로 둘이서 맛있게 먹었다. 재 • 13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미가 들려서 그 뒤로도 몇 번 그 집에 가서 고추 서리를 해서 김치를 담가 먹 었는데 꼬리가 길면 잡힌다더니 어느 날 들통이 나버렸다. 옆집 여자가 “이상 해요. 쥐가 고추도 먹나 봐요. 우리 집 베란다에 고추가 자꾸 없어져요.”라고 했다. 찔리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그 쥐가 바로 저였어요.”라고 자백을 했 다. 옆집 여자는 “왜 달라고 하지 그랬냐?”고 하면서 웃으며 나를 안아주는데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나중에 미국에 살다가 남편이 먼저 그리스로 돌아가고 내가 왕래를 할 때 벤 츠를 사서 가지고 간 적이 있었다. 사촌 형제 부부와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 었는데 사촌은 마른 명태처럼 삐쩍 마른 남자였고 부인은 뚱뚱한 거구의 체 격이었다. 사촌 부부는 교양을 겸비했다고 보기엔 어려운 전형적인 그리스의 중하류층이었다. 부인이 우리 차를 보고 농담으로 “좋은 차 타고 왔네. 그 차 우리 주고 가라.”고 하자 갑자기 마른 부지깽이 같은 남편이 몸집이 큰 부인 의 뺨을 후려쳐서 부인이 의자에서 나가떨어졌다. 나는 너무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런 상황은 그리스에서 4년이나 살았던 나로서도 이해 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과연 저 여인이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까 하고 생각 하는데 부인은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남편의 목을 어루만지면서 마치 엄니가 아이를 다루듯이 “피곤해서 신경이 날카로운 모양이구나.” 하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술과 안주를 더 시키며 우리에게 잔을 돌려서 겉으로는 표현 을 하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물론 사촌은 집에 가서 손에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싹싹 빌었다고 한다. 이런 것이 바로 그리스 여자들의 남편을 다루는 전형적 인 방법으로 그리스 특유의 부부관계를 말해 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겉으로는 남편의 체면을 세워주면서도 실제적으로 주도권을 잡는 현명한 처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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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남자들은 집 안에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여자들은 매우 순종 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는 일반적으로 모계중심사회이어서 여성 들의 힘이 강하다. 예를 들면 명절 때도 처가 중심으로 모이고 딸이 연로한 부 모님을 모실 의무가 있고 아들이 아닌 딸이 결혼할 때 집을 사 주는 문화가 있 다. 남자들은 마초 근성으로 공연히 가오만 잡는 것이고 여자들이 그것을 너 그럽게 용인해주는 분위기이다. 한 마디로 “네가 그래 보았자 별수 있겠나? 어디 한번 까불어 봐라.”하는 식인 것이다. 또 한 번은 남편이 훨씬 나이가 많은 집에 놀러 갔던 적이 있었다. 셋이서 이 야기 도중에 내가 그리스 신화에 대해 질문을 해서 부인이 대답을 하려는데 남편이 부인에게 눈을 부라리며 자기가 이야기를 하겠다고 부인의 말을 막 았는데, 그 태도가 가히 위압적이었다. 그러자 그 젊은 부인은 “여보 나야 나, 당신의 아내 안리야”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손님 앞에서 무안 을 준 남편에게 부드럽게 말하는 그녀의 현명함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나 같 으면 그 자리에서 싸움하자고 들었을 텐데, 그 모습이 신선했고 보기 좋았다. 그리스를 대표하는 영화배우이며 국회의원과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정치 인이기도 한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 1920~1994)가 연기한 ‘Never On Sunday(1960)’라는 영화가 그 당시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 를 했다. 창녀 중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진 소위 얼짱 창녀 일리는 다른 창 녀들과는 조금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는데, 고객을 자신이 고른다는 점이다. 그런 일리야에게도 취미생활이 있는데, 그것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열 리는 그리스의 고전 연극을 보는 것이다. 연극이 공연하는 일요일이면, 만사 젖혀두고 꾸미고는 달려간다. 말하자면 일요일엔 영업(?)하지 않는다는 뜻의 ‘Never On Sunday’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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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내가 경험한 그리스 사회는 창녀라고 무시당하지도 않고 무시하지도 않는 깊이가 있는 사회였다. 우리 동네에도 창녀 일을 하는 모녀가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들을 무시하지 않고 직업으로 존중해 주었다. 그 대신 모녀는 절 대로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하지 않고 동네 남자들도 그녀들에게 관심 을 두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리스는 전통적인 가치와 현대적인 문화가 공존 하는 성숙한 사회였다. 그러나 최근에 그리스 경제가 파탄이 나서 그리스 여 자들이 싼값에 몸을 팔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와 안타깝다. 세상 모든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리스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집 착은 비교할 곳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 남자들이 결혼 후에도 어머니와의 심 리적 관계가 정리되지 않아 이혼하게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그 런 환경이다 보니 특별히 막내아들인 남편도 다르지 않아 출근 전, 점심 시간, 퇴근 시간, 하루 3번을 어머니에게 들렀다가 집에 오곤 했다. 올 때마다 시어 머님의 지시사항을 가지고 왔는데 예를 들면 결혼선물로 들어온 예쁜 수건 세트를 걸어 놓으면 “어머니가 그러는데 이 수건은 큰 명절 때만 손님용으로 쓰래.”라든지 예쁜 찻잔에 커피를 타주면 “어머니가 그러는데 이 찻잔은 매일 쓰는 게 아니래.”라고 하는 식이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감독하는 시어머니의 등쌀에 신혼의 달콤함을 누릴 여 유도 없고 일요일이면 꼭 시댁으로 가야 집안이 평온할 수가 있었다. 시어머 니는 번번이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남편 앞에서 나를 나무랐고 그럴 때마다 남편은 고개를 숙이고 끽소리도 못했다. 그리스어가 조금씩 늘어가자 피부 관리를 배우려고 학교에 들어갔다. 비슷 한 또래들이 모이면 어디서나 왕따 현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학교에서도 여러모로 내가 불리한 입장이었지만 그때까지 산전수전 겪으면서 살아온 내 • 전생의 나라 그리스 133

가 비슷한 또래가 모인 학생이라는 평등한 입장에서는 결코 뒤 쳐지지는 않 았다. 실습을 해야 했지만 대상자가 없어서 시어머니를 눕혀 놓고 얼굴에 마사지 를 해주곤 하면 좋아했다. 동네 사람들에게도 한국 할머니들이 하던데로 머 리 관자놀이도 눌러주고 골이 아프다고 하면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주면 매우 신기해 하며 “혹시 병도 고칠 수 있냐?”는 질문까지 받을 정도로 점차 신 통한 며느리로 인정을 받기 시작하는 듯 했다. 어느 일요일에 시댁에 가지 않고 이모의 둘째 딸 스마라그다를 만나러 이모 집에 갔다가 월요일 아침 시댁에 출근하니까 시어머니가 “일요일에 왜 오지 않았느냐?”고 했다. 그냥 피곤해서 집에서 쉬었다고 했더니 닦고 있던 접시 를 내던지며 “어제 너희들 집에 없더라. 티나가 갔다 왔어.”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어느 날 가족들이 모였을 때 시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는 데 증오와 원망이 가득한 시선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저렇게까지 나를 미워하 는데 내가 여기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머니도 괴로울 터이고 나만 없어지면 모두가 편안해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건은 “어 떻게 하든지 떠나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바로 그 즈음 마침 미국에 살고 있던 남편의 둘째 형 요르고가 왔다. 나는 이 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되어 요르고에게 바디샵 기술이 있는 남 편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달라고 통사정을 해서 남편을 먼저 미국으로 보냈 다. 남편이 떠난 후 혹시라도 나를 데려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조바심 으로 애간장을 녹이면서 간절하게 편지를 썼는데 지금 보면 어떻게 그다지도 정성스럽고 예쁜 글씨로 썼는지 나 스스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짐 정리 하다가 발견한 편지지를 자세히 보니 딸 디나의 키스 마스크까지 찍혀 있어 서 얼마나 내 마음이 간절했었던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 13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 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 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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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4. 양부모 같은 나라 미국으로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Pubs.Online • 13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1979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밤 드디어 숨을 죽여 살아야만 했 던 그리스를 떠나 뉴욕 케네디 공항에 상륙했다. 착륙이 아닌 상륙이라고 표 현 하는 것은 비행기는 사뿐히 활주로에 내려앉았지만 나는 미국으로 오기까 지 풍랑과 험한 파도를 넘어서 온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이면 대부 분이 미국으로 올 때 태평양을 건너서 오지만 나는 대서양을 건너서 왔다는 것 자체가 나의 삶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었다. 오색찬란한 크리스마스트리로 장식한 가정 집들과 거리의 광경은 마치 천국 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6개월 먼저 온 남편과 형은 이미 그리스 사람들이 많 이 사는 아스토리아라는 지역에서 정비소를 차려서 일을 하고 있었다. 처음 한 달은 형님 집에서 함께 지냈는데 간호사인 동서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 때문에 가끔 우울해 하기는 했지만, 명랑 쾌활한 성격의 아이리시 혈통이었 다. 짧은 영어와 그리스어, 팬터마임 등을 섞어 소통하면서 같이 쇼핑하러 다 니곤 했는데 어디를 가나 그녀는 만나는 남자들에게 말을 잘 붙였다. 그런 모 습을 보고 나는 ‘유부녀가 얌전하지 못하고 아무한테나 추파를 던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미국인들의 정서와 문화를 전혀 모르던 나는 시아주버 니처럼 미남이고 똑똑한 남편이 있는데 자기 남편보다 훨씬 못난 남자에게 한 눈을 파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시아주버니가 불쌍하게 생각 되었던 것 이다. 그녀의 친구 중에 나도 잘 알고 있는 에이린이라는 여자는 남편과 그리스로 돌아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항상 다툼이 심했었다. 어느 날 그녀가 에이 린과 통화를 하면서 점점 열을 띠더니 “What? You kidding?”하는 것이 아닌 가? 그런 다음에 Police가 어쩌고 하더니 황급히 나가 버렸다. 나는 직감적으 로 “드디어 큰 일이 벌어졌구나! 에이린이 남편을 죽였구나!”하고 판단을 내 렸다. 왜냐하면 “You kill him?”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이 들어 온 • 양부모 같은 나라 미국으로 137

몸이 벌벌 떨려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데 한참 후에 동서가 돌아왔다. 동 서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을 보고 두 여자가 시체 를 어떻게 처리하고 왔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동서가 무서워졌다. 그런데 평소에 산만하다고 할 정도로 가벼운 동서가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행동하는 것이 너무도 이상해서 조심스럽게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 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동서는 뒤집힐 정도로 웃더니 도둑이 들어와 물건을 훔쳐 갔다고 해서 놀라서 “정말이냐?”라고 물은 것이었단다. 첫 번째 난관은 역시 말이었다. 맹훈련으로 겨우 그리스어를 배워서 써먹을 만하니까 또다시 영어라는 험한 산을 넘어야하게 된 것이다. 남편은 내가 집에서 살림만 하기를 원했지만,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씨름하 며 남편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생활이 답답하고 불안해서 견디기가 힘들 었다. 증세가 심해져서 나중에는 우울증까지 찾아왔지만 힘들게 일하고 오는 남편에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공부 를 해보겠다고 했더니 2년만 있다가 돌아갈 것인데 배워서 무엇을 하겠느냐 고 반대했다. 사실 남편은 내가 미국으로 가자고 했을 때 그리스를 떠나기 싫 어했다. 그래서 그렇다면 시어머니와 동네 아낙네들 때문에 병이 날 지경이 니 나 혼자라도 떠나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나 때문에 저렇게 괴 로워하는데, 어머니는 단 한 분이지만 아내는 또 얻어도 되니까 어머니와 살 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러면 2년만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 보면 상황이 달라질 테니 2년 뒤에 다시 돌아오는 조건으로 미국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얼른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 그러마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사실은 나는 그리스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미국에 살 다 보면 남편이 미국 생활에 적응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서 남편 몰래 America European beauty school • 13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에 입학을 했다. 남편이 출근하면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1,000 시간을 이수해야 미용 관리 국가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받는 코스였다. 수업 첫날 시간표에 ‘break time’이 있기에 무엇을 부수어야 하는 줄 알고 ‘이 학교는 공사하는데 학생들에게 일을 시키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따라 나갔다. 그러나 모두 휴게실로 가더니 아무 것도 부수지 않고 커 피를 마셔서 매우 의아했다. 이 정도의 영어 실력으로 공부를 하려니 이론은 처음부터 포기 하고 그리스 에서 피부 관리를 정통으로 배워 실기에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실기만 더 배 워서 써 먹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500시간이 넘어서 시험을 보는데 미국 학 생이 영어를 몰라서 끙끙거리는 내 사정도 모르고 내 시험지를 힐끔거리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아! 나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미국 사람에게도 어려운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끝까지 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사히 1,000 시간의 교육을 끝내고 드디어 시험을 보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가 고 나 혼자 3시간을 채우고 문제를 풀었지만 두 번이나 떨어지고 3번 만에 겨 우 합격을 했다. 남편은 나중에야 자기 몰래 미용 학교에 다닌 것을 알았지만 더 이상 집에서 살림만 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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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격투 끝에 첫 가게를 열다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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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피부관리 미용사 라이선스를 딴 후 체코에서 온 엘레나가 동업을 하 자고 제안을 했다. 미용학교 선생과 의논을 했더니 엘레나는 선생들에게도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다며 같이 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렸지만 ‘내가 조금 양보를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동업을 시작했다. 엘레나는 네일 파트를 하고 나는 피부관리를 하기로 하고 그리스에서 올 때 잔뜩 가져온 피 부 관리 장비와 최신 재료를 가게에 진열해 놓았다.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데 정작 네일 쪽에는 손님이 줄을 서는데 피부 관리를 받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 았다. 하는 수 없어서 나도 학교에서 잠깐 배운 매니큐어 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엘레나는 좋은 손님은 자기가 차지하고 까다롭거나 팁이 안 나올 것 같은 손님은 내게 넘기고 또 이익을 나누는 단계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이 유 없이 사사건건 내 심기를 건드리고 내가 하는 일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역시 선생들의 말이 맞았다. 엘레나는 자기는 마음대로 재료를 사면서 같은 물건이라도 내가 산 재료는 필요 없다고 반품처리를 하라고 했다. 처음 몇 번 은 참았지만 그런 행동이 계속되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나중에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따졌다. 어이 없게도 엘레나의 대답이 “I don’t like it. That’s it.”이었다. 나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했더니 고작 한다는 말 이 “그냥 싫어.”라니 내가 무시 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 치밀어서 따귀를 올려 붙이려고 하다가 그만 엘레나에게 손목을 붙잡 혔다. 그런데 그 순간 밑도 끝도 없이 “이 년이 한국 사람을 우습게 보네?”하 는 난데없는 애국심(?)이 끓어올랐다. 또 다시 나도 모르게 “I am Korean.” 주문에 걸린 것이다. 그 순간은 오직 엘레나를 이겨야겠다는 국가대표 선수 의 심정 뿐이었다. 오늘은 결판을 내고야 말겠다고 생각해서 가게 문을 잠가 버리고 엘레나의 목을 졸랐더니 엘레나가 뾰족구두 굽으로 내 넓적다리를 때 렸다. 나중에 학교에 가서 선생들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동안 엘레나에게 쌓인 • 격 투 끝 네 첫 가 게 를 열 다

것이 많았던 선생들은 모두 고소 하라고 했다. 사실 내가 목을 조른 것은 표시 가 나지 않지만 엘레나가 하이 힐로 때려서 멍이 든 것은 표시가 나기 때문에 고소를 한다면 이길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엘레나와 헤어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처음 투자한 3,000 불만 받고 헤어져서 마침 건너 편에 빈 가게가 나서 남편에게 졸라 계약을 했 다. 그러나 고치고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자기 손으로 가게를 개업하 는 것에 신이 나서 방 하나와 부엌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주었다. 제일 싼 것으 로 매니큐어 테이블 4개를 들여놓고 1985년 4월 11일 간판을 ‘Happy nail’ 이라고 달았다. 막상 내일 기술도 없이 혼자서 가게를 열려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우연히 국제결혼을 해서 커튼 공장에서 재봉일을 하던 O를 슈퍼 에서 만나서 함께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흔쾌히 승낙을 했다. 나도 실 력이 없었지만 해피 네일의 첫 직원이 된 O는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머 리가 좋고 기술 습득이 빨랐고 남편이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말은 나보다 훨 씬 잘했다.

‘Grand opening’ 사인을 붙인 첫날, 첫 손님이 들어와서 의자에 앉자마자 헤롱헤롱 대더니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손을 얌전히 하고 있어야 작업이 되는데 잠결에 팔을 제 멋대로 움직이니 네일링이 제대로 될 수가 없어서 끝 나고 보니 내가 봐도 엉망이었다. 그래도 잠에서 깨어난 손님은 빨간 메니큐 어 색깔만 보고서 좋다고 웃으면서 나갔다. 첫 손님이 약을 먹은 손님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럭저럭 끝나고 계산을 해 보니 $140불을 벌었는데 첫 날치고는 나쁘지 않게 생각되었다. 그 날 번 돈으로 저녁에 한인촌의 좋은 한국 식당에 가서 파티했다. 어느덧 한식을 좋아하게 된 남편도 처음으로 아내가 번 돈으로 맛있는 한국 음식을 먹게 되니 흡족해 하면서 가게를 좀 더 멋있게 꾸며주겠다고 했다. 신문에 광고를 내서 S라는 기술자를 채용했는데 경력도 많고 기술이 좋았 • 14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다. S는 직원 겸 선생으로 O와 나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었는데 몇 달 만에 맨 해튼에 가게를 연다고 그만두고 말았다. 다음에는 아담하고 얌전한 기술자 L 이 들어왔다. 그렇게 연결이 되기 시작하니 그 후부터는 사람을 구하는 일에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한인촌인 플러싱에서 살고 있어서 롱아일 랜드에 있는 가게 까지는 승용차로는 30분, 버스로는 1시간 30분 정도 걸리 기 때문에 내가 직원들의 출퇴근을 도와주어야 했다. 이렇게 되어가다 보니 맨해튼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가게들은 직원들을 출퇴근을 시켜주는 관행이 생겼다.

O는 성격이 아주 강하고 말투가 거칠어서 어떤 때는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기분이 나빠서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일 때가 많았다. 주인인 나에게도 “어 이, 이봐요”라던가 “밥 먹었쑤? “는 보통이고 다른 직원들에게 무조건 다짜고 짜 반말을 했다. 가장 질색인 것은 손님을 앞에 놓고 한국 말을 못 알아듣는 다고 한국말로 함부로 하는 것이엇다. 이를테면 서비스를 하는 중에 “이 년은 왜 이렇게 손이 뻣뻣해.” 하는 식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아침에 출 근하면 ‘당장 해고해야지.’’ 하는 마음을 가졌다가도 출근하면 활짝 웃으며 “ 굿모닝! 언니 점심밥 맛있게 해 왔어요.” 라고 애교를 떠니 그냥 넘어갈 수밖 에 없었다. 놀라운 것은 O가 영어를 전혀 쓸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전표에 본인의 이름 을 써야 하는데 쓰지를 못해서 O 자를 쓰게 했다. 예약 장부에 쓰인 손님 이 름도 읽을 줄을 몰라서 내가 손님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10 시에 마리 아, 11시에는 후렌이 있네…. “ 라고 해서 다른 직원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신경을 썼다. 그런 식으로 매일 아침 그녀의 일정을 알려 주었는데 어느 날 아 침에 그녀가 “어떤 년이 11시에 있던 내 손님 뺏어 갔어? “ 라고 큰소리를 쳤 다. 11시에 예약을 했던 손님이 취소해서 내가 지웠는데 읽을 줄을 모르니까 • 격 투 끝 네 첫 가 게 를 열 다

다른 사람이 가로챈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만약에 그녀가 후렌이라는 글 자를 읽을 줄 알았다면 다른 직원 이름 앞에 후렌이 없는 것을 보고 예약이 취 소된 것을 알았을 텐데 까막눈이기 때문에 오해를 한 것이다. 나는 그녀를 부 엌으로 데리고 가서 처음으로 눈을 똑바로 뜨고 “너 왜 미련하게 스스로 무식 을 폭로하는 거냐?” 라고 야단을 치니 그제서야 태도가 꺾여서 수그러들었다. 또 하루는 아침에 어떤 한국 남자가 들어오더니 “여기 어떤 물건이 내 와이프 를 괴롭혀? 당장 나와! 면상 좀 보자.”라고 큰소리를 쳤다. 어떤 직원이 남편 에게 O의 행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 뒤로 O의 거친 말투가 조금은 부드러워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귀에 거슬렸다. 자랄 때 엄니의 융단폭격 같은 잔소리가 얼마나 지겨웠던지 속으로 ‘엄니가 죽는 날 광화문에 나가서 벌거벗고 춤을 추겠다.’고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잔소리를 계속하시기에 한 번은 이제 좀 그만 하라는 뜻에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엄니는 너무 놀라서 숨을 몰아쉬면서 냉수를 찾 았다. 오히려 말을 한 내가 “저러다가 심장마비나 오는 게 아닐까?’ 겁이 날 정도로 충격을 받으셨었다. 그런 사연 때문에 나는 자식 낳으면 절대로 잔소 리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 잔소리를 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 스트레스 여서 가게에서도 직원들에게도 웬만하면 잔소리를 하지 않고 알아서 하도록 맡겼다. 그러나 가게를 운영하려면 불가피하게 직원들에게 잔소리해야 할 일 이 있는 법인데 잔소리를 하기 싫어하는 나 대신 O가 도맡아 해주는 것도 나 쁘지는 않았다. 또 그녀는 머리가 명석하고 손재주며 음식 솜씨도 뛰어나 내 점심 반찬을 거의 해줄 정도였다. 거슬리는 일이 많은 그녀를 내보내지 못하 는 것은 그녀와 끝까지 함께 하겠다던 처음 결심을 깨고 싶지 않기도 했고 ‘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 동네에서 살 기도 하고 남편이 외국인이라는 공통점도 있어 평생을 함께해야 할 동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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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한 것은 미국 손님들이 그녀에게 인생 상담을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학교 교장이 그녀에게 고민을 얘기하면 명쾌하고 간단한 답 을 줄 때는 나도 감탄할 정도이었다. 반면에 한국에서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했다는 T는 정반대였다. 어느 날 한 손님이 정말 T가 한국에서 교 사 생활을 했느냐고 물었다. 아마도 손님들에게 자기가 한국에서 교사였는데 미국에 와서 수준에 맞지 않는 일을 한다고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손님 은 나름 편히 쉬려고 왔는데 T가 맞지도 않는 영어로 자기 얘기만 하니 좋아 할 리가 없었다. 그 손님은 다음 약속은 O에게 하면 어떠냐고 물어서 대단히 난처했다.

O는 가방끈이 짧아서 한국말은 표현이 부족했지만, 공감 능력이 뛰어났다. 가방끈이 짧아도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손님의 생각과 감정을 잘 이해 해서 쉽게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지만,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가방 끈이 길어도 갈등을 빚어냈다. 네일 일은 학력과 관계가 없다 보니 학력 차이 가 크게 나서 직원들이 무학에서 대학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어서 어떤 경우 에는 서로 간에 이질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학력과 상관이 없이 어떤 직원은 애를 먹였고 어떤 직원들은 활력소가 되기도 했다.

5 개의 가게에 50명이 넘는 직원들을 관리 하는 일에 주먹구구식으로만 해 오던 관행으로는 한계점에 다 달았음을 느끼게 되었다. 경영의 절반이 사람 관리이어서 어떻게 하면 인사관리를 잘 할 수 있을까 해서 경영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어도 네일업의 현장에 도움이 되는 것은 찾기가 어려웠다. 책방에 자주 들려 경영에 관한 책들을 사다 읽다가 책만으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 던 차에 한양 대학교에서 주최한 최고 경영자 코스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 원을 해서 마쳤고 내친김에 외국어 대학 최고경영자 코스도 수료 하는 등, 노 력을 했지만 역시 이론과 현장 사이의 큰 차이가 있었다.

• 격 투 끝 네 첫 가 게 를 열 다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스쳐 가는 인연, 머무는 인연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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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머리 만지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연탄불에 부젓가락을 달구어 서 동네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볶아주었다. 그런 내가 마음 놓고 남의 머리를 만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열심히 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커트와 스타일링 을 할 때 15불을 받는데 1시간이 걸렸다. 1 시간에 두 사람은 해야 수지타산 이 맞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경험부족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더 근본 적인 원인은 유럽과 미국의 미용 문화의 차이였다. 미장원의 시스템이 그리스와 미국이 많이 달랐다. 미국에서는 미용사가 커 트와 스타일링을 다하는 3단계로 끝내는데 그리스에서는 5단계를 거친다. 조수가 헤어드라이어로 미국 미용사 수준의 모양을 내면 고참 미용사가 다시 스타일을 내는데 그리스의 미용사 조수의 실력이 미국의 일류 기술자와 같은 수준이었다. 이미 완성된 상태인데도 고참이 헤어드라이어를 다시 하고 고데 기로 롤을 쓰는 4단계 기법으로 하니 그리스의 더운 날씨에서 일주일을 자 고 일어나도 방금 미장원에서 나온듯한 모양이 되는 것이다. 미국 미용실에 서 한 머리는 다음 날 스타일이 변할 수 있지만 5단계를 거친 그리스 스타일 은 더운 여름에 1 주일 동안 빗질을 하지 않아도 됐다. 디자인 파마가 내 특기여서 손님이 원하는 머리 스타일대로 롤을 말아서 파 마를 하므로 드라이를 하지 않아도 손님이 원하는 스타일을 낼 수 있었다. 손 님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리스 방식을 좋아해서 손님이 점점 늘어났지만, 수익성이 떨어져서 경영상으로는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직원들도 “네일링 을 하면 한 시간에 최소한 40불은 올릴 수 있는데 왜 머리를 꼭 해야 돼요?” 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미국 미용사 세 명을 채용해서 머리 파트를 맡기고 나는 정신없이 바쁜 네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는 머리에 소질 이 있는데 돈이 더 된다는 이유로 머리 손질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 지금도 후 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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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일샵 직원들은 외국인도 있었지만 주축을 이루는 것은 한국인 직원들이었 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2곳을 팔고 다섯 개의 가게를 운영하는데 50명의 한 인 직원들을 관리하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30년 동안 영업을 하 면서 수백 명의 직원이 거쳐 갔다. 어떤 때는 식당에서 만난 사람이 우리 가 게에서 일했었다고 인사를 하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서 곤란할 때도 있 었다. 어느 사업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특별히 주거지역의 네일 가게는 얼마나 롱 런을 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당장의 이익보다는 직원들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그래서 직원들과 회식 을 자주 하고 피크닉도 자주 가고 크리스마스에는 들어온 순서에 따라 선물 을 주었다. 해마다 한 사람씩 밍크코트와 보너스를 주고 각 지점 메니저에게 는 고급 장신구나 반지를 사서 주었다. 또한, 1년 이상 근무 한 사람은 퇴직 금을 지급했더니 소문이 퍼져서 업체들로부터 같이 보조를 맞추지 않고 혼자 만 앞서 나가면 어떻게 하느냐는 원망의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위해서는 나의 노력도 있었지만 물론 직원들의 인내심과 화합을 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직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손님이 100% 미국인인 네 일 가게에서는 필수적인 ‘한국말 하지 않기’와 ‘고자질하지 않는 것’ 뿐이었 다. 그러나 한국말을 하지 않는 것은 내가 가게에 있지 않을 때 얼마나 잘 지 켜지는지를 알 수가 없었지만, 고자질을 하는 것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가 게마다 매니저가 있는데 저녁에 집으로 전화해서 “언니가 전화하는 것을 싫 어하는 줄 알지만, 이것은 언니가 꼭 알아야 돼. 언니를 위해서야.”라고 신고 를 했다. 직원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가 너무 많아서 남편이 제발 전화 좀 못 하게 하라고 불평을 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안 되겠다 싶어서 한 번은 출근해 • 14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서 고자질을 한 직원과 매니저와 삼자대면을 했다. “이 친구가 그러는데 네가 돈에 손을 댔다고 하는데, 솔직히 이야기해 봐.” 물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지만, 그 사건이 있고 난 다음부터는 고자질을 하 는 전화가 뚝 끊어졌다. 어차피 주인이 없으면 수입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을 감수하고 매니저에게 가게를 맡기는 것이다. 나는 한 가게에서 애초에 내가 계획했던 수입 이상만 나오면 가게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신경 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계속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기 때문에 한 가게 에서 벌어지는 자잘한 일까지 신경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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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빨갱이와 미 제국주의자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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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쓸 때 업주 측에서 제일 궁금한 것은 이전 직장을 그만 둔 이유이다. 그래서 물어 보면 대부분은 주인의 불공정한 대우나 ‘갑질’이라고 대답을 한 다. 그런데 연변 출신의 B는 늘 듣던 식상한 레퍼토리가 아니라 한 마디로 “잘 렸어요.”라고 해서 흥미가 생겼다. 그런데 그 스토리가 완전히 만화 같았다. 전 주인이 잔소리가 많고 은근히 연변 출신이라고 무시해서 기분이 나빴다 고 한다. 직원이 자기단골손님이 많아지면 주인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 분위기를 잘 알기 때문에 B도 한 번 ‘곤조’를 부려 본다고 한 방법이 어 처구니가 없었다. 사장이 지나가게 길을 좀 비켜달라고 했는데 일부러 슬쩍 발을 걸어서 넘어질 뻔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당장에 해고를 당했지 만 이번에는 엿을 먹이기 위해서 단골들을 데려 가려고 일부러 건너편 가게 로 들어갔는데 생각처럼 단골들이 따라오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민 하고 있던 중에 누가 해피 네일에 가보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가 차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누가 당신을 쓰겠느냐?”고 했더니 “솔 직히 이야기 할까요?”라고 물었다. 이야기 해보라고 했더니 “한국 사람들은 이중인격자를 원하는 것 같아요.”라고 해서 더욱 의아했다. 나는 이 괴짜를 “ 그냥 보내? 말아?” 하고 한동안 망설이다가 한번 부딪쳐 보자는 심정으로 채 용하기로 결정했다.

B는 촌스러운 티를 벗지 못한 모습에다가 악센트도 다른 연변 사람보다 유 난히 강했다. 그 당시 우리 업소 직원들은 다른 가게와 달리 20년이 넘은 고참 기술자가 많았고 또 최소한 5년 이상 되는 일류 기술자들이었다. 바라의 기 술이 우리 가게에서는 뛰어나지도 않은 처지임에도 십여 명이 되는 고참들과 차례로 돌아가며 충돌을 하기 시작했다. 보통 신입사원은 고참들에게 고분고 분한 편인데 바라는 말대꾸를 하고 심지어는 대들기까지 하니 직원들의 원성 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조금 자제를 하라고 하면 오히려 고참들의 • 빨 갱 이 와 미 제 국 주 의 자

불공평에 이의를 제기한 것뿐인데 오래 묵은 구렁이(그녀가 고참들을 부르는 말)들의 텃세에 입 다물고 있으라는 말이냐고 반문 했다. 하기는 한국 사람과 연변사람이 상호간에(그녀는 이북식으로 호상간이라고 했다) 편견이 있고 상 대를 이해하기보다는 부정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기도 했다. 나는 그 녀의 태도가 자기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나만이라 도 이 골칫덩이와 소통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다른 체제에서 살아왔던 그녀 와 우리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한 번 알아보자는 마음에서 슬슬 유도신 문(?)을 했더니 중국에서의 그녀의 활약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는데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었다.

B는 오랫동안 북한과 시베리아를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했다는데 젊은 여자 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나라에 가서 말도 못하면서 보따리를 끌고 행상 을 했다는 것은 모험을 좋아하는 나도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북한을 드 나들며 보고 들은 실상을 얘기하는데 온통 이북 찬양 일색이었다. 심지어는 “ 김정일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 줄 아느냐?”라고 하고 남한체제에 대해서 매 우 부정적이어서 내가 보기에는 완전 빨갱이이었다. 물론 나도 한국의 현실 에 대하여 개탄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녀의 북한 찬양이나 극단적인 한국에 대한 비판을 동의할 수가 없어서 반박하다 보면 논쟁이 시작되고 언성이 높아 졌다. 보통 출퇴근길에 차 안에서 그런 일이 생겨서 다른 직원들이 듣고서 “사 장님과 B는 꼭 부부싸움 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할 정도이었는데 어떤 때는 토론이 끝이 나지 않아서 B의 집에까지 가서 입씨름이 계속될 때도 있었다.

B는 나를 보고 ‘미 제국주의에 쩐 여자’라 했고 나는 B에게 ‘속까지 빨간 빨 갱이’이라고 놀렸다. B가 내 앞에서도 전혀 가리지 않고 아무 말이나 내던지 는 점을 지적하면 오히려 연변에서는 상사 앞이라 해도 해야 할 말은 해야 한 다고 배웠다고 하면서 한국 사람들은 사장 앞에서는 절절 매면서 뒤에서는 뒷 • 15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말을 하는 이중인격자들이고 인간 차별을 한다고 항변했다. B의 억지와 입씨 름도 귀찮고 직원들의 원성도 높고 해서 해고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 다. 하지만 그렇게 끝이 나버리면 피차에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서 억지로 참고 같이 있는 동안 최대한 소통을 해보려고 애를 쓰는 중에 9.11이 터졌다. 아침 출근길에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고 나니, B가 미국을 비판하 는 것이 갑자기 미워졌다. 그래서 적십자가 희생자들을 위한 모금 운동을 할 때 “너는 미국에 와서 돈 을 벌어 중국에 보내면서 세금을 한 푼 안 내고 있지? 내가 권리가 있으면 너 를 추방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돈을 내!”라고 했더니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놀랐는지 구두쇠가 두 말 안하고 순순히 200불을 내서 함께 돈을 모 아 적십자에 보냈다. 그 뒤로 그녀의 입에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언사를 조심하는 듯했지만 그녀 의 기행은 계속되었다. 예를 들면 손님에게 필요 이상의 서비스를 하고 “내가 꼬여서 손톱 디자인을 해서 $20 받을 것을 $30 받았으니 반반씩 나눕시다.” 라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당당하게 했다. 그럴 때는 도무지 뭐가 옳은 것인 지 오히려 내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뿐이 아니고 새 직원이 필요해서 신문 광고를 내려고 했더니 “내 친구를 소개할 테니 채용해주면 150불을 드릴게 요.”라고 했다. 처음에는 혹시 내가 잘못 들어서 새 직원을 데리고 오면 내가 그녀에게 수고비로 $150불을 줘야 한다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기가 취직을 시켜 주면 소개비로 300불을 받기로 했으니 나와 반반씩 나누 어 갖자는 것이었다. 세상에 돈을 받고 직원을 채용하다니 이건 또 무슨 황당 한 이야기인가? 도무지 계산하는 방법이 우리와 맞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두 손과 발을 모두 들게 하였던 B가 4년을 일하고 자기 가게를 낸다 고 나갔지만 우리의 관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남편과 딸이 더 • 빨 갱 이 와 미 제 국 주 의 자

는 못 살겠다고 미국을 떠나 중국으로 갔는데도, 아직도 미국에 남아 있는 것 을 보면 지금쯤은 나보다 더 미 제국주의자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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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 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 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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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직원이라기 보다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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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을 뽑을 때 이전 직장에서 얼마를 받았는가와 최소한 2년 동안 함께 일 할 수 있는지 두 가지 를 물었다. 대부분 전에 받던 급료를 높이 부르는 것을 알고 있지만 부르는 대로 주어서 시작하고 2주 정도 일하는 것을 보고 난 다 음 조금이라도 올려주었다. 나는 항상 다른 가게 보다 더 나은 환경과 급여로 직원들을 기분 좋게 해주고 함께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비즈니스를 했다. 그 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처음에 2년을 함께 일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놀랬던 이들이 20년 넘게 함께 일하는 사람이 3명이나 된다. 직원 중에 제일 미인인 미자는 스물여섯 살, 긴 생머리를 하나로 곱게 땋아 내린 여리고 고운 새색시로 들어와서 50대 후반인 된 지금까지 30년을 함께 하고 있다. 전형적인 A형인 그녀는 긍정적 사고와 크리스털 같은 섬세함으로 상처도 잘 받지만, 치유도 잘되는 성격이다. 어머니같이 옷차림, 화장법 머리 스타일까지 간섭하기를 좋아해서 그녀의 코디를 따르다 보니 지금은 무엇이 든지 새로 사려면 어쩐지 그녀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 이 들 정도이다. 또한, 그녀도 인생 선배로서의 나의 경험과 생각을 존중해 언 제나 나의 조언을 자기 삶에 적용하여 살아가는 모습이 나로서도 고마운 일 이 아닐 수 없다. 미자는 그 동안 어려움이 많았던 세월 속에서 아들과 딸을 훌륭하게 키운 공조차 내게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30년을 함께 하는데 항상 좋은 감정만 가지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 다.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와 좋은 친구 관계의 균형을 잡는 것이 힘들었을 때도 있었지만, 오늘까지 별 탈 없이 관계가 이어져 온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 이다. 젊어서 기타리스트로 활약하던 미자는 네일 협회 주체로 매년 열리는 구정 파티의 노래자랑에서 가게 식구들로 만든 밴드팀으로 출전해서 대상을 받았는데 그 때 상품으로 탄 TV를 가게에 걸어 놓기도 했다. 한때 연예인이었 던 미자가 지금은 교회에서 찬양으로 역량을 발휘하며 사는 것도 의미가 있 • 직 원 이 라 기 보 다 가 족

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가게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 기술자로 27년 차인 에스더는 다른 직 원들은 한 번씩 다른 직장을 기웃거려 보곤 했어도 한결같이 자기 자리를 지 키고 있었기에 남보다 단골손님이 많다. 단골손님 중에는 에스더의 무뚝뚝한 경상도 기질이나 까칠함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워낙 지극정성으로 손님 의 손을 만져주기 때문에 불평은 하지 않았다. 에스더는 뛰어난 기술과 약속 시각을 칼같이 지켜주는 매너, 자기 주위를 항상 청결하게 정리정돈 하고 등 의 행동에 나무랄 곳이 없었다. 각자에게 배정된 청소 구역이 있는데 다른 직 원들은 내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흐지부지하기 십상이지만 그녀는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서 두 번 이야기할 필요가 없도록 실행한다. 두 번이나 큰 다 툼이 있었지만, 결별 직전에 화해하고 잘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그녀는 머리가 좋아 내가 받아 줄 수 있는 선까지만 까탈을 부렸던 탓이었다. 물론 기술이 좋 아서 조금만 더 부드럽게 하면 손님이 더 많이 몰릴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 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손님이 그녀에게만 몰려서 그녀만 바쁘고 다른 직원 들은 놀게 돼도 좋은 현상을 아닐 것이다.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직원들 사이 에 균형이 맞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해피 네일 본점은 왼쪽에는 가든 시티라는 부촌, 오른 쪽에는 웨스트 햄스 테드라는 유대인 동네, 또 북쪽에는 아이리시 동네, 남쪽으로는 흑인 동네가 있다. 개업 당시 근처에 네일 가게가 하나밖에 없어서 손님이 사방에서 찾아 와서 인종이나 생활수준에 따른 특징을 볼 수 있는 것이 흥미로웠다. 부촌인 가든 시티 손님은 대부분 조용하지만 가깝게 접근하기에는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었다. 남쪽에서 오는 흑인들은 조금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상대하기가 편하고 정겹게 느껴졌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가든 시티 손님이 남쪽 사람보다 팁이 더 후하기 때문에 직원들의 선호도가 높았다. 네일 업계 • 15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에서는 서비스 금액의 30% 이상의 팁을 주는 사람은 우순이, 항상 1불만 주 는 손님은 일순이, 팁의 액수가 적은 손님은 짠순이, 한 푼도 주지 않는 손님 은 꽁순이로 분류가 되었다. 은어도 변해서 요즘은 우순이를 ‘교양 있다’라고 하는데 우순이가 오면 서로 하려고 하다가 싸움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입술이 두툼한 크리스가 들어오고부터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크리 스는 오자마자 남들이 기피하는 꽁순이, 짠순이, 일순이들을 가리지 않고 반 겼다. 나는 “처음이니까 그렇겠지, 좀 더 있으면 다른 직원들처럼 손님을 고르 겠지.” 하면서도 유심히 주시해서 봤다. 보통의 경우는 처음 왔을 때 팁을 안 주고 가는 손님이 다음에 오면 직원들이 손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 거나 딴청을 피우는 현상이 자연스럽기 마련이다. 그런데 크리스는 두 번 세 번 오는 꽁순이와도 반갑게 포옹을 해주었다. 어떤 때는 손님의 이야기를 들 어주다가 손을 마주 잡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되자 꽁순이가 차 차 일순으로, 우순이로 변화되어 갔다. 우리 가게가 팁이 짜다는 소문을 듣지 않게 된 것은 아마도 크리스의 역할이 클 것이다. 크리스가 오고부터는 별안간 손님이 더 몰려와서 직원을 더 늘려야만 했고 매상도 껑충 올랐다. 크리스는 내가 업계에서 후한 주인이라는 소문을 듣게 하여 준 31년 비즈니스 동안 가장 탁월하고 따듯한 직원으로 기억에 남는 사 람이다. 그러나 애틀랜타로 이사를 하자마자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사를 간 지 얼마 안돼 일어난 사고라 장례식이 초라할 것 같아서 5 개의 가게 이름과 내 이름으로 6개의 화환을 보내고 장례식에 참석해서 조사 를 했다. 세상을 떠난 아내를 잊지 못하는 크리스의 남편이 그 후로 매년 6월 이 되면 전화를 했고 나중에는 크리스 보다 더 젊고 예쁜 여자와 재혼을 했지 만 20 여 년간 잊지 않고 전화를 했었는데 크리스가 일하던 1호점을 팔고 난 뒤부터 연락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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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전혀 다른 경우도 있었다. 나는 일단 채용한 직원을 해고 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비록 사람을 구하기 어려운 때일지라도 부득이 해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이 있었다. 내가 지향하는 완벽한 스펙을 가진 직원이 일 을 시작한지 겨우 4 주 만에 팁이 적다고 불평을 한다는 고객들의 항의가 들 어왔다. 매니저를 통해서 해고 통보를 했더니 온통 난리 법석을 치기도 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네일 업소에도 영어를 잘못하는 불법 체류 남미 종 업원들이 들어 오기 시작했다. 한인 종업원들은 기술을 빨리 배워서 기술자 가 되지만 남미 종업원들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매니큐어나 페디큐어 외 에는 더 배우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 종업원들은 임금이 빨리 올라가지만 상대적으로 항상 저임금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수는 능력과 경력에 달린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인 직원이 더 받 아야 하지만 영업 끝나고 하는 청소만큼은 한인도 함께 하도록 못을 밖아 놓 았다. 대부분 다른 가게에서는 청소는 의당 남미인들이 하는 것으로 되어 있 기 때문에 처음에는 한인 직원들의 불만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을 고수 했던 이유는 어렸을 적에 엄니가 식모와 나를 똑같이 대했던 것이 좋은 교훈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30여 년 전에 한국사람 밑에서 일을 했던 남미 사람들은 한국 사람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게 남아 있 는 것이 사실이다. 장사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계산적이 되어 얄팍해지는 경우가 있 다. 해피 네일 1호점 초창기 시절에 Lee 라는 아담하게 생긴 일류기술자가 1 년 정도 일하고 나가서 우리 가게에서 자동차로 20분 되는 거리에 개업을 했 다. 나는 흥분 해서 찾아가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따졌더니 순진한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면서 쩔쩔맸다. 미국 땅이 다 내 땅이 아닌데 쫓아가서 행패를 부린 것이 미안해서 몇 년 뒤에 다시 찾아가 사과를 하고 화 • 16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해를 했지만 지금 생각 도 낯이 뜨거운 일이다. 4 번째 가게를 연지 얼마 안되 었을 때 어떤 남자가 찾아와 롱아일랜드에 있는 헌팅톤에 가게를 내면 어떻 겠냐고 물어 왔다. 나는 경쟁자가 생긴다는 생각에서 비협조적으로 부정적인 이야기만 했다. 그는 나에게 오면서 좋은 조언을 기대하고 왔을 터인데 경계 를 하는 인상만 받고 갔을 터이니 지금 나는 그를 기억 못하지만 그는 나에 대 하여 나쁜 이미지만 가지고 있을 것이다. 미용실에서 전통적으로 미국 상류층을 상대로 해오던 네일링이 내가 가게를 시작한지 2년 정도 지나면서 한국인들에 의해서 네일샵으로 특화되기 시작 되었다. 그 전까지 네일업은 미용면허 범주에 속해 있었지만 상황이 변하자 미국 네일 업계에서는 한국인들의 진출을 막고자 하는 의도에서 네일면허제 도를 추진하는 움직임이 생겼다. 개업을 했던 1985년 가을, 그 당시에는 한국 사람이 하는 재료상이 없어서 미국 재료상의 판매 사원이 직접 찾아와서 물건 주문을 받을 때였다. 롱 아일 랜드 Freeport라는 곳에 Gale 이라는 미국 재료상 직원이 어느 날 자기네 회 사에서 아주 중요한 모임이 있으니 꼭 참석하라고 했다. 내가 조금 늦게 도착 해서 세미나룸에 들어서는 순간 강사가 멈칫 하는 듯하여 둘러보니 1 백여 명 중에 동양인은 나 혼자 뿐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인쇄물을 읽어 보고 서야 강사가 보였던 반응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코리언 네일 살롱 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태’라는 제목으로 한인 네일 가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한인 네일 가게는 더럽고 냄새 나는 음식을 먹으며 조용한 음악 대신 영어 테이프를 틀어 놓는다. 또 한국말로 떠들고 가격도 반 값으로 네일 업계의 품위를 저하시킨다는 내용이었다. 그 모임의 성격은 자 기들의 터전을 위협하는 한인 네일 업소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기 때문에 아 메리칸 네일 협회를 구성하고 라이센스 제도를 도입하자는 모임이었다. 주최 • 직 원 이 라 기 보 다 가 족

측에서는 남편의 성을 따른 Happy Nomikos라는 내 이름을 보고 한국인인 줄 모르고 초청했던 것이다. 참석자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회원 가입을 하고 라이센스를 어떻게 받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한국 사람이 전혀 없는 백인 지역에서부터 이민 생활을 시작해서 한인 네일 가게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었는데 그날에야 이미 다른 곳에 한 인 업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나도 그 뒤로부터 모든 직원에게 세금 보고를 하고 손님과 사진도 찍도록 하면서 차근차근 라이센스 준비를 하 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백인들의 견제가 31년이 지난 지금 한인 네일 업계 에 풍전등화의 위기를 가져올 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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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 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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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나의 엄니와 나의 자녀들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Pubs.Online • 16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피부색이 다른 엄마와 아빠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시기를 보낼 수 밖에없다. 아들 임마누엘이 다섯 살 때 앞집에 사는 여자아이 가 같이 놀자고 했더니 “우리 엄마가 중국 아이랑 놀지 말래.” 라고 하면서 문 을 쾅 닫아 버렸다고 울면서 들어왔다. 말로만 듣던 인종차별을 처음으로 당 하고 보니 그야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아들은 100% 그리스인 의 얼굴을 하고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그때까지는 아들이 놀림이나 차별을 받 을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아니 다.’ 싶어서 그 아이의 집 문을 두드렸지만, 애 엄마는 창문으로 빠끔히 내다 보기만 하고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나중에 남편이 와서 같이 가서 문을 두드 려도 열어 주지 않았다. 흥분한 남편이 문을 더 세게 두드렸지만 그래도 열어 주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돌아왔다. 얼마 후 이번에는 우리 집 벨이 울려서 나 가보니 경찰이 서 있었다. 우리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들은 경찰은 사정은 알 겠지만, 또다시 그 집에 갈 경우에는 법정에 갈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경고 만 해주고 돌아갔다. 이 사건 이후 나는 아이가 앞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에 갈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혹시라도 엄마 때문에 놀림을 받는다고 느끼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은 100% 백인으로 태어난 아들보 다 반은 동양인의 얼굴로 태어난 딸이 더 걱정스러웠다. 딸이 어렸을 때 사람 들과 함께 있을 때는 일부러 나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러나 나는 섭섭함 보다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면서 살았을 딸에 대한 미안함 뿐이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반드시 성공해서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 도록 노력할게.’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 었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디나와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 나 의 엄 니 와 나 의 자 녀 들

못했던 충격적인 사실에 접하게 되었다. 나는 그 동안 막연하게 디나가 비즈 니스에 성공한 엄마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만 있 었는데 현실은 달랐다. 그 동안 디나는 어린 시절 동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 닌 자신이 느꼈던 정체성의 혼란에 대하여 전혀 내게 이야기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학교에 다닐 때 친구가 없어서 점심시간에도 혼자 밥을 먹었고 어려 서부터 단짝인 유일한 친구 한국인 정미 마저 cool club으로 가버려서 혼자 외롭게 학교생활을 했다고 했다. 더욱이 하이 스클 시절 덩치 큰 캐더린이 “ 너 왜 이렇게 못생겼느냐?”고 짓 굳게 놀려서 자기는 자신이 정말 못생겼다 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는 별 문제 없이 평탄하게 십대를 보내는 줄만 알았는데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아파서 “엄마에게 왜 이야기를 안 했니?”라고 했더니 “ 엄마는 항상 바빴잖아? 내가 엄마를 볼 수 있는 것은 아침 일찍 내 방에 와서 허그 한 번 해줄 때 밖에 더 있어?” 라고 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얼마 전에 캐터린이 디나에게 페이스 북으로 친구 신청을 했지만 디나는 거 절을 했다고 했다. 캐터린이 자신은 Born again Christian이 되었다며 용서 를 구하고 거듭 친구 신청을 했지만 디나는 도저히 캐더린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거절을 했다고 했다. 얼마나 그 상처가 깊었으면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도 십대 때의 아픔을 잊지 못할까 싶어서 미안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 었다. 사춘기 시절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 동안 디 나가 그런 고통을 당하는 줄도 모르고 오직 성공해서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 겠다고 바쁘게 뛰어다니기만 했던 지난 날의 단순함이 너무도 부끄러웠었다. 생각해보면 정체성의 혼란은 아이들만 겪은 것이 아니고 나도 마찬가지였 다. 어느 해인가 한국에 갔을 때 막내 여동생이 “언니는 이제 한국사람이 아 닌 것 같아.”라고 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그렇게 느끼게 된 이유 • 16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는 미국에 와서 며칠간 우리 집에 머물 때 내가 “먹을래?” 하고 물어서 “아 니.”라고 대답하면 두 번 다시 권하지 않아서 배가 고팠다는 것이다. 아니라 고 해도 한 번쯤 더 권하는 것이 한국의 정서인데 나는 미국사람들처럼 두 번 다시 물어보지 않았던 것이다. 엄니가 치매로 완전히 나를 몰라보기 전까지 는 적어도 2년에 한 번 꼴로 한국에 나가고, 매일 한국방송을 듣고, 한국 영화 와 TV를 보고 한인사회에서 한국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서 한국적인 정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도 한국 사람의 미묘한 정서를 잊어 버 린 것 같다. 동생은 보통 한국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고맙다, 미안하다’라는 소리를 잘 하 지 않는데 나는 너무 자주 자식들에게 “Thank you, I’m sorry”를 하더라는 것도 지적했다. 나는 그저 보통 미국 사람들처럼 하는 것인데도 동생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하기는 동생과 반대로 나도 한국 드라마를 볼 때 부 모가 자식을 대하는 권위적인 태도가 거슬릴 때가 종종 있었다. 늙어서도 저 렇게 자식에게 당당하게 할 수 있을까 혹은 장성한 자식이 부모의 권위적인 태도를 거부할 때는 어떻게 하려고 그럴까 하는 염려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나만 하더라도 20 대까지는 나에게 가혹하다고 할 정도로 권위 덩어리이었던 엄니의 말에 토씨 하나 달지 못하고 참을 수 밖에 없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 서 엄니의 통제와 권위적인 태도에 반발해서 자주 충돌을 빚었었다. 한참 가게가 바쁠 때 어린 아이들을 돌볼 손이 필요해서 한국에서 엄니를 모 셔와 2년 동안 아이들을 돌보게 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미국에 와서도 나 에 대한 엄니의 집착과 통제를 하려고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내가 남편 보다 늦게 들어 오는 날은 문 앞에 나와 기다리는가 하면 가게에서 들어오는 돈을 당신에게 맡기라고 하셨다. 그래서 엄니가 섭섭해 하시더라도 “40이 넘 은 딸이 하는 사업의 재정을 어떻게 엄니에게 맡겨요?”라고 할 수밖에 없었 • 나 의 엄 니 와 나 의 자 녀 들

다. 그러나 충돌하기 싫으니 자연히 대화를 피하게 되고 사이가 소원해지게 되었다. 엄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거나 죽을 때까지 자식과는 수직관계 여야 한다고 믿으셨는지도 모르겠다. 외국인인 내 자식들과는 엄니와 나처럼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아서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존중해 주고 명령하듯이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 르지만, 지금은 오히려 아이들이 나의 멘토가 되고 있다. 반면에 엄격하고 철저한 엄니는 평생 가져온 자기 생각을 조금도 바꾸지 않 았다. 심지어는 딸보다 아들을 먼저 생각하는 것도 변하지 않아 손녀보다 더 손주를 더 사랑했다. 심지어는 딸의 친구가 벨을 누르면 “디나 없어.” 하고 문 을 쾅 닫는 바람에 디나 친구가 문에 코를 찧을 뻔했다는 에피소드를 지금까 지 이야기 하고 있다. 내가 왜 미국까지 와서 남녀 차별을 하냐고 물었더니 디 나 친구가 전에 왔을 때 냉장고 문을 마음대로 열고 손자에게 줄 쥬스를 남기 지 않고 마셨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결국은 남녀 차별이었다. 2년 전에 한국 에 가서 치매에 걸린 엄니를 뵈었을 때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우리 아들 돈 뜯으러 왔어? 우리 아들 돈 없어.”라고 하셨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도 아들 만 생각하는 그 지독한 본능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놀라울 뿐이다. 엄니의 철저한 신앙생활은 미국에 와서도 변함이 없어서 내가 아침 인사를 드리려고 방문을 열면 항상 성모님상 옆에 촛불을 켜 놓고 묵주기도를 하고 계셨다. 저녁 때도 기도하고 계시는 엄니의 뒤 모습만 보게 되어 나중엔 아예 방문을 열지도 않게 되었다.

• 16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신앙의 미로에서 길을 잃다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Pubs.Online • 신앙의 미로에서 길을 잃다 169

31 년 동안 해피네일을 거쳐간 18명의 미용사 중에 4명을 제외하고는 그리 스, 미국, 포르투갈, 이탈리아, 유대인 등 모두 외국인이었다. 한국 미용사 네 명 중에 남자가 한 명이 있었는데 외모는 남성적이었지만 말투나 하는 짓은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 게이였다. 직원 가족들과 함께하는 야유회나 파티에 서도 여자들 틈에 끼어 수다를 떨었다. 남자들 쪽으로 가라고 하면 “창피해서 어떻게 가?”하고 얼굴이 빨개지며 부끄러워했다. 그 후에 남자 손님이 많이 오는 미용실로 옮겨가서 좋은 짝을 만났으리라 생각된다. 한국인 미용사 중에서 가장 오래된 25 년 차 경력의 베테랑 코코는 나와는 10년 이상이 되는 나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코드가 잘 맞아서 성당도 함께 가고 쇼핑도 함께 다녔다. 코코는 나에게 부족한 여러 가지 장점이 있지만 나 에게는 그녀에게 부족한 부분을 매꾸어 줄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자 신을 위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절제하면서도 주변 지인들의 경조사에는 투덜 투덜 되면서도 절대 빠지지 않는다. 코코는 나의 이혼한 전 남편이 첫 손자 아 담이 아파서 그리스에서 왔을 때, 식구들이 모두 정신이 없어서 아무도 그에 게 신경을 쓰지 못해서 그가 돈이 없는 것을 보고 용돈으로 300불을 준 적이 있었다. 아마도 이혼을 한지 십여 년 만에 나타난 주인의 전남편에게 직원이 용돈을 줄 수 있는 일은 흔치 않을 것이다. 외국인 미용사 중에 가장 충성스럽고 끝까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서 우리 가 ‘순둥이’ 혹은 ‘말자’라고 불렀던 말림이라는 미국인 미용사가 있었다. 그 녀가 자기 가게를 열기 위해서 단골손님들에게 보내는 인사카드에 비즈니스 를 시작하기 위하여 자기의 멘토이었고 훌륭한 보스인 나를 부득이 떠나게 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참으로 사려 깊고 지혜로운 말자가 떠난지도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아직도 가족의 대소사에 함께 하고 있다. 말자가 우리 가게에서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유산해서 아기 • 17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를 갖지 못한다고 해서 마음이 아팠다. 그랬던 말자가 하루는 조용기 목사가 쓴 책의 영어 번역본을 가져와서 보여주었다. 미국인이 한국인 목사의 책을 가져오니 반가워서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엄마가 교회에서 가져 왔다는 것이다. 조 목사의 이름은 들어 알았지만, 관심이 없었는데 조 목사 의 책을 미국 교회 목사가 신자들에게 나눠줬다는 말에 처음으로 조 목사에 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얼마후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집회를 한다기에 한국 말을 모르는 남편과 아이들까지 데리고 참석을 했다. 한국 목사가 타임스퀘 어 광장에서 집회한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 일이어서 설교 후 은혜를 받 은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는 대열에 끼어서 기도를 받았다. 그러나 사실 은 나를 위해서 가 아니라 아기를 못 낳는 말자를 위해서 조 목사의 기도를 받 아 보고 싶었다. 그 후에 한국에 갔을 때 호기심 반, 말자를 위한 기도를 부탁하는 마음이 반 인 심정으로 순복음 교회를 찾아갔다. 비서실에 1,000불을 내고서 연락을 기 다렸다가 조용기 목사와 면담을 하고 말자의 사진을 내놓고 기도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그 다음에 말자가 임신에 성공해서 내 믿음은 더욱 깊어졌고 그 후로도 두 번 더 조 목사의 기도를 받았다. 물론 그 때마다 1000 불씩 헌금을 했다. 그렇게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중에 미묘 한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사람이 싫어지고 돈 만지는 것이 싫어지는 희한한 현상이 일어났는데 그 때는 그것이 우울증 에 접어들었다는 징후였음을 몰랐다. 가령 예약 취소 전화가 오면 전에는 아 쉽게 느껴져야 하는데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고 한 사람이라도 덜 마주치게 되 었다는 생각에 안도하게 되었다. 5개의 가게와 수많은 손님과 이미 50여 명 이 넘는 직원들을 관리하는 일에 심신이 지쳐있던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 증세가 나타났던 91년도 어느 날 고상하게 생긴 여자가 찾아왔다. 자기 • 신앙의 미로에서 길을 잃다 171

꿈에 하나님이 “해피에게 붙어라. 그러면 만사형통할 것이다.”라고 했다며 자 기가 다니는 기도원 원장에게도 기도를 부탁했더니 해피라는 여자와는 동업 해도 좋다는 답을 들었다면서 찾아왔다. 그 여자가 황당한 얘기를 하고 간 다 음에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 뒤로도 수 시로 찾아와서 성경 이야기, 자신의 신상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알고 보니 나 와 경쟁이 될 수 있는 거리에 네일 가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운영이 어려워지자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자기 가게 를 담보로 해서 돈을 꿔 달라고 했다. 가게 위치도 좋고 또 믿음이 깊어 보여 서 20,000불을 빌려주었다. 그러나 그 후 그녀는 나의 동의도 없이 자기 멋 대로 가게 문을 닫고 사라져 버려서 결국 돈을 받지 못했다. 그런 사건이 벌어 지기 전에 자기가 다니는 기도원에 가지 않겠느냐고 해서 호기심에 2박 3일 의 기도원행에 따라 나섰다. 뉴욕에서 비행기를 타고 LA에 있는 기도원으로 갔더니 할렐루야 아줌마로 알려진 김계화 전도사가 한 달에 한 번씩 한국에 서 날아와 집회를 열고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김계화 방에서 잤는데 김계화는 침대에서 자고 나와 그녀 는 방바닥에서 잠을 잤는데 한밤중에 김계화가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그만 잠을 깼다. 김계화가 마귀가 방에 들어와서 쫓아냈다고 했지만 나로선 이해 하기가 어려웠다. 새벽 집회 시간에 김계화가 등장하자 예배당 안의 수많은 사람이 환호와 함 께 우뢰 같은 박수 소리로 맞이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김계화가 다 짜고짜 “예수!” 한마디 하자 열광하는 모습이 내 눈에는 미친 집단 같아 보였 다. 통성 기도 시간에는 넋두리인지 기도인지 말도 안 되는 말들만 되풀이했 다. 나는 귀를 막고 눈을 감고서 “아이고 하나님 심신이 지쳐서 조용하게 기 도와 명상을 하러 주말 3일 장사도 제치고 왔는데 이게 뭡니까?” 라고 기도 • 17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가 아닌 투정을 부렸다. 그래도 호기심이 생겨서 눈을 뜨고 앞을 보니 롱드레스를 입은 김계화가 무 당같이 펄쩍 펄쩍 뛰면서 설교를 하는데 문장이 이어지는 말이 아니라 구호 처럼 한 단어 한 단어가 분절된 외침이었다. 김계화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흡 사 길거리에서 ‘불신 지옥 예수 천당’을 외치는 사람들과 거의 비슷한 투였다. “예수 믿어라” “예수의 피” 같은 외마디 소리일 뿐인데 사람들은 “아멘, 아멘” 하고 화답을 했다. 차를 타고 왔다면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비행기 예약이 되어 있으니 도중에 올 수도 없어서 미친 집단들과 사흘씩이나 함께 있을 생 각을 하니까 정신이 아득했다. 마지막 날에 방에 여러 명이 둘러앉았는데 김계화는 산 위에 기도원을 짓는 데 헌금을 해야 한다면서 개인별로 액수를 정해주며 헌금을 할 수 있느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은 아멘으로 화답을 하는데 나 에게는 은근한 어조로 “집 한 채 바칠 수 있으려나……?” 하면서 말꼬리를 흐 렸다. 그때야 나는 왜 그녀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와서 김계화와 같은 방을 쓰 게 했는지를 짐작하게 되어서 그 순간 어색하지 않게 그냥 웃음으로 넘기고 말았다. 그러나 여하튼 그 경험 이후 한동안은 알 수 없는 종교적 열정에 휩싸였다. 마치 신이 내린 무당처럼 평소의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서 과거 에 문제가 되던 일도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가 하면 지나칠 수 있었던 일도 예민하게 감지가 되는 등의 신비한 경험이 따라왔다. 그 다음 만난 것이 뉴저지 호텔에서 3박 4일 동안 열리는 소위 이명범의 ‘레 마선교회’라는 것이었다. 집회는 세련된 연출을 통해서 벌어지는 감동적 순 간들의 연속이었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집단으로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호텔 대회의실 불을 점점 어둡게 하고 테이블에서 몸을 완전히 떼고서 처음 • 신앙의 미로에서 길을 잃다 173

에는 조용히 천천히 시작하다가 점점 빨리 거세게 “예수 내 구주”를 외치는 장면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박자가 점점 빨라지면서 여기저기서 테이블을 두 드리며 소리,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며 서서히 집단최면 현상이 나타 났다. 나도 그 순간에는 마치 꿈을 꾸는 듯 신비스런 느낌이 들었지만, 피난시 절 여자 아이들이 세 명 이상 모이면 하던 신 내리는 놀이가 생각이 났다. 한 아이가 리더가 되고 나머지 애들은 눈을 감고 손을 합장하면 리더가 뭐라고 주문을 외우는 신 내림 게임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한참을 반복적으로 주문을 외우면 몸이 떨리는 듯한 느낌을 느끼게 되는 놀이였다. 마지막 시간에 방마다 찾아와 얼마를 헌금할 수 있을지를 묻는 것으로 끝난 레마의 프로그램은 김계화 전도사의 할렐루야 기도원보다는 세련되기는 했 지만 결국은 돈이었다. 김계화 전도사와 이명범에게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 운 것은 신비체험에는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삶의 어려운 국면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을 찾지만 나는 삶 의 최고 꼭지점에서 하나님을 찾았다. 사업이 잘되고 돈은 잘 벌렸지만 내 안 에 어딘가 허전함이 있었기 때문에 기도원으로 집회 장소로 쫓아다니고 기분 내키는 대로 즉흥적인 결정을 하면서도 그것을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으로 생 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가족이 그리스로 가고 혼자서 살면서 사업 외에는 온 통 신앙에 몰두했던 탓인 것 같았다. 어떻튼 강렬한 신비체험을 하면서 몇 년 동안 기도원으로 부흥 집회로 정신없이 쫒아다니던 어느 날 문득 “내가 이러 다가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신앙에 대하여 좀 더 잘 알아야겠다는 마음에 신학교를 가기로 했다.

• 17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 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 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Pubs.Online 2020

• 신앙의 미로에서 길을 잃다 175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신앙의 루저들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Pubs.Online • 17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1994년 일하는 곳에서 1시간 거리인 맨해튼에 있는 순복음 신학교에 입학 했다. 그 학교에 가게 된 것은 학장이 뉴욕에서 이름이 나 있는 김남수 목사이 기 때문에 적어도 이단은 아닐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다. 5 개의 가 게를 운영하면서 한 주에 이틀을 왕복 2시간을 소비하며 학교에 다닌다는 것 은 신앙에 목숨을 걸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신학교의 학생은 여자가 5명 그리고 남자가 10여 명으로 모두 나이 지긋한 연령대의 사람들이었다. 여자 3명이 네일업에 종사하고 한 사람은 서독 간호 사 출신이며 또 한 사람은 아무 직업이 없는 사람이었다. 네일 가게 업주들은 내 눈에는 더 깊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왔다기보다는 종업원과 손님 관리 에 지쳐서 힐링 차원에서 오는 것으로 보였다. 매일 수업 전에 예배를 드리고 점심시간에는 당번을 정해서 밥과 국 김치 세 가지로 학생들에게 점심을 제 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시간만 되면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나 타나 점심을 먹었다. 알고보니 이미 졸업한 학생들 가운데 점심 사 먹을 돈도 없는 가난한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먹거리가 풍성한 미국에서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나로 서는 놀랄만한 일이었다. 나는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는 편이기 때문에 처 음에는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따로 시켜 먹곤 했다가 나중에는 내가 많이 시켜서 다같이 먹기도 했다. 입학할 때 신학교에 들어오게 된 동기를 이야기 하는데 남자들의 단골 레퍼 토리가 있었다. 일찍이 사명을 받았는데 전도자가 되지 않고 세상 길로 나갔 기 때문에 하나님이 막아서 실패하고 늦게 다시 사명자의 길로 돌아왔다는 것 이다. 망한 것이 사명에 순종하지 않아서라니...... 나는 도무지 공감이 되지가 않았다. 나중에서야 대학 과정을 마친 후 입학하는 정규 신학대학이 아닌 무 인가나 군소 신학교에는 나이 먹고 사업에 실패한 후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 • 신앙의 루저들 177

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하여간 내가 다닌 신학교는 ‘사명 받은 루저’가 다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러던 중에 이상한 일은 강의를 하러 오는 목사들이 유일하게 직업이 없 는 여학생에게 큰 돈은 아니지만, 돈을 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유학 생 신분이고 중고등학생 딸과 아들이 있는데도 아무 일도 안 하고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기도만 한다고 했다. 한 번은 수업이 끝나서 가는 길에 같이 기차 를 탔는데 이상하게 기차가 내가 내릴 역에서 서지를 않았다. 다음 역이 그녀 가 내릴 역이었는데 그녀가 “이렇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냐? 우리 집에 가서 기도하고 가면 어떻겠냐?”고 했다. 기차가 자주 있지 않기 때문에 다음 기차를 기다리려면 시간도 많이 남았고 그녀 말대로 그럴 것도 같고 그 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그녀를 따라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열쇠로 문을 열지 않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집에 누가 있 느냐니까 자기들은 문을 잠그지 않고 산다고 해서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그 집에는 그녀 부부와 아들과 딸, 부모가 이혼해서 오갈 곳이 없는 딸의 친구가 살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 정신 없이 일을 하면서 살아왔던 나로서는 일도 하 지 않으면서 기도만 하고 산다는 그들의 생활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어쩌 면 그들에게는 내게는 없는 무엇인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내가 스스 로 후원을 하기로 자청했다. 그녀와 같이 기도원을 다니다가 건물을 사서 기도원을 하기로 하고 적당한 물건이 나와서 계약을 했다. 그녀가 중국으로 선교를 가야 한다며 비행기 표 를 사달라고 해서 표를 끊어 주었더니 나중에는 찬양하기 위해서 딸을 데리 고 가야 하겠다며 딸의 것까지 사달라고 해서 사주었다. 얼마 있다가 이번에 는 아들도 데려가야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지나치다 싶어서 사 주지를 않았다. 공산 중국과 수교를 한 지 2년도 안되어 지금처럼 • 17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갈 때도 아닌데 미국에서 중국까지 아들과 딸의 비행기 값까지 대달라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더 황당했던 것은 선교지에서 돌아 오면 자기네가 살 집까지 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하나님의 도움인 지 그녀가 중국을 갔다 한국을 거쳐 돌아올 적에 두 자녀가 미국 입국 비자를 받지 못해서 2년간 못 들어오게 되었다. 더 크게 사기(?) 당할 뻔한 것을 하나 님이 막아(?) 주신 셈이다. 그녀가 자녀들과 중국에 가서 선교하는 동안 위험한 일이 많으므로 남편은 남아서 40일 금식기도를 해야 한다고 해서 그런 줄로 알았는데 얼마 후에 가 게로 찾아온 남편은 전혀 금식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용돈을 주어 보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은혜 받은 초심 자에게는 항상 천사의 가면을 쓴 사기꾼들이 모인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지 금도 다른 주에서 목회한다는데 아마도 그런 식으로 목회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신학교는 모르겠지만 내가 다닌 신학교는 성경에 대하여 배우는 것이 아니고 목회를 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서 2년 만에 휴학계를 내고 나왔지만,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 학교에서 매일 예배를 드 리는데 어느 날 어떤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탐심을 버리라.’는 내용을 강조하 는 순간 내가 사업을 하느라고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든 일이 탐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헛된 물질 욕심에 눈이 멀어 살고 있다는 생 각이 들어서 아무 문제 없이 잘되어 가고 있던 가게를 하나만 남겨 놓고 모두 팔아버렸다.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신앙생활은 마약보다 더 위험한 것이 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너무도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셈이다. 그러나 신앙생 활과 실생활이 일치되기는 어렵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차이는 언 제나 있게 마련이다. 우리 가게는 내가 영적인 일에 관심이 많았던 탓인지 거 • 신앙의 루저들 179

의 전부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어서 직원 가운데는 목사 부인, 선교사 부인, 개신교 열성파, 천주교 열성파가 종합셋트로 모여 있다. 어떻게든 성공해서 한국인 엄마를 자랑스럽게 느끼도록 해주어야겠다는 다 짐은 내가 더욱 비즈니스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세미나마다 빠지지 않고 쫓아 다녔고 무엇이든지 첨단 기계와 재료를 사들여가며 신기술을 열심 히 배웠다. 처음 장사를 시작하고 페디큐어를 할 때는 물통에 물을 받아다 손 님의 발을 씻기고 기술자 무릎 위에 손님의 발을 올려놓고 시술을 했었다. 그 것이 발전하여 1년쯤 뒤에 European 페디큐어 의자가 나와서 두 대를 들여 놨는데 아마 한국 사람으로서는 내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지금처럼 의자에 마사지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떨리기만 했는데도 감탄하던 손님들 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미국 회사의 제품이었는데 어찌나 튼튼하게 만들었는지 10년이 지나도 고장 한 번 나지 않아 회사가 망했다는 후문이다. 요즘의 페디큐어 의자는 모양이 세련되고 기능도 다양하지만 수명이나 고장 나는 횟수가 그 옛날 것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네일 가게에서 하는 일은 손과 발의 서비스 외에 왁싱이라는 메뉴가 있다. 동양 여성들은 꼭 필요한 곳에만 털이 나는 데 비해서 백인들은 온몸에 털이 많아서 없애 주는 것인데 특히 노출이 많은 여름에는 수영복 라인 밖의 털을 제거해주는 비키니 왁싱이 있었다. 어느 때인가부터 은밀한 곳의 털을 몽땅 제거하거나 아니면 하트 모양의 디자인으로 모양을 만드는 브라질안 왁싱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우리 가게에도 왁싱을 해달라고 오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나는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내가 먼저 해보고 시작을 했는데 이 경우에는 조금 곤란했다. 내가 젊다면 모르겠지만, 나이 먹은 여자가 왁싱 을 하기도 그렇고 해서 실습 없이 직접 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같은 여자이지 만 낯선 여자의 은밀한 곳을 만지고 당기고 하는 작업을 하려는 직원이 별로 • 18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없어서 이따금 내가 했었다. 비싼 돈 내고 이를 꽉 깨물며 고통을 참으면서 털 을 몽땅 없애는 것이 유행이라니 그 유행 때문에 돈을 벌지만 참 재미있는 현 상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는 털이 없는 여자를 혐오한다는데 백인들은 털 이 적은 동양 여성을 부러워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업이 번창해서 아이들에겐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어 가고 있었지만, 남편 에게는 소홀해질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아침 커피와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는데 어쩌다 해 주지 못하는 날이면 불평이 쏟아졌다. 처음부터 남편은 2년 뒤에 돌아갈 것이니 영어를 배우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고 꼭 돌 아가야 한다며 아이들처럼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었다. 더구나 남편은 동업하는 형과의 사이가 점점 더 악화하여 갔기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다. 불 평을 들어 주다가 남편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 같아서 지적하면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그리스로 돌아가자고 했다. 또 한편으로 내게 일어난 변화는 그리스어를 잘 모를 때는 남편의 모든 것 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이 자유로워지면서 점점 그의 진면목을 보게 될수 록 실망되는 부분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형과의 동업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 도 항상 문제점을 자기편에서 찾지 못하고 상대편에게서 찾는 습관 때문이었 다. 30대에는 나의 본 모습을 완전히 버리고 남편이 바라는 모습대로 살려고 애를 썼지만 40대에 들어와서 내가 가는 길이 확실해진 후에도 모든 것을 남 편에게만 맞추어 살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가 돌아가자고 닦달을 해도 나로서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시어머니와의 관 계도 좋아지고 비즈니스도 성공적으로 돌아가는데 다시 돌아가서 온 동네 시 어머니들을 섬기며 시집살이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없는 애교도 부리고 자주 여행을 하는 것으로 그의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노력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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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 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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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오해가 만든 평화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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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아들을 났을 때 시부모가 왔다. 위층에는 사막에서 살던 사람들답 게 사촌끼리 부부가 된 아랍인 집주인이 살고 있는 반지하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시부모님은 가장 좋아하던 둘째 아들네 집에 머물기를 바랬지만 둘 째 요르고가 생색을 내듯이 손녀딸이 있는 우리 집에 머무는 것이 더 좋을 것 이라며 떠넘겨 버리는 바람에 좁은 우리 집에서 한 달 동안 있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시부모가 최선을 다해서 아들과 손자 손녀와 즐겁 게 지낼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그런데 시어머니와 나 사이에 변화를 가져올 만한 작지만 의미가 있는 사건이 생겼다. 나보다 10배는 더 상냥한 둘째 며느리가 식사 초대를 해서 시부모님이 들 뜬 마음으로 넓고 쾌적한 집에 도착했더니 이미 식탁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런데 비닐 식탁보 위에 놓인 포크, 컵, 접시가 모두 싸구려 플라스틱이었다. 그 순간 시어머니와 나는 얼굴을 마주치며 “이게 뭐지?”하는 시선을 주고 받 았다. 그리스에서는 손님을 초대하면 식탁보에 풀을 빳빳하게 먹여서 다리미 질은 해서 깔고 크리스털 포도주잔에 최상품의 접시들, 흰 수건 위에 포크와 나이프를 올려놓아 마치 고급 레스토랑의 테이블 세팅에 비교해도 손색 없 이 준비하기 때문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렇게 가르치고 배운 우리는 도 저히 그 날 요르고네 식탁을 즐길 수가 없었다. 그동안 시어머니가 항상 요르 고의 아내를 칭찬했는데 그 날의 식탁은 시어머니의 환상을 철저히 깨어버린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에 나를 바라보던 시어머니의 미움의 레이저 광선이 따듯한 햇 살로 변했다. 지금 회상하면 그들은 미국식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었고 시어 머니와 나는 완벽한 그리스 사람이었기 때문에 벌어졌던 해프닝이었지만 결 과적으로 시어머니와 나 사이의 긴장이 해소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준 셈 이었다.

• 18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이즈음에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겨 두었던 숙제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연락이 끊어진 초희와의 관계를 다시 잇는 것이었 다. 그 동안 초희를 찾지 않았던 것은 내가 무용단을 탈출한 후 캐나다에서 합 류하기로 했던 계획대로 하지 못하고 곁길로 나간 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이제 가정을 이루고 아이 둘을 낳고 사는 마당에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캐나다와 가까운 뉴욕 에 왔으니 만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초희가 캐나다로 떠날 때 주었던 오빠에게 전화해서 초희의 전화번호를 알았다. 초희는 역시 언제나 처럼 아 무 것도 묻지 않고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기만 했다. 초희는 캐나다에서 편의 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넓은 집에 살고 있었다. 마침 시부모님이 계 셨을 때이기 때문에 온 가족이 훼밀리 밴을 타고 가서 9년 만에 재회의 감격 을 누렸다. 국제결혼으로 결합한 가정이 친정 나라도, 시집의 나라도 아닌 제3의 나라 에서 살 때 언어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처음에 나는 한 국말을 가르치고 싶어서 딸 디나를 한국어 학교를 보냈지만 디나가 영어와 한 국말만 할 줄 알고 그리스어를 모르면 남편과 소통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한국어 대신 그리스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어차피 나는 미국에 서 살 생각이니 영어와 그리스어로 아이들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미국생활 36년이 지난 지금도 영어와 그리스 말을 섞어서 대화 하는데 아이들과 깊이 있는 소통을 하기에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는 한국을 갈 때마다 둘째 여동생 미제네 집에 머물 면서 부부의 극진한 환대를 받아 아이들이 크게 감동을 받았었다. 특히 이모 부가 짧은 영어로도 유머를 해서 남편 렙데리를 비롯해 아들과 딸을 즐겁게 해주었다. 통이 컸던 미재 남편은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가 아무리 사양 해도 경비를 모두 부담해 해주었다. 불행하게도 아이들의 우상이었던 이모 • 오해가 만든 평화 185

부가 암에 걸려 투병 중일 때 아들이 이모부를 간호하기 위해서 한국에 가겠 다고 했다. 그러나 미재네가 경황이 없는 터에 한국말도 모르는 아들이 혼자 나가면 도움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짐이 될 것으로 생각해서 만류를 했다. 나 중에 남편이 죽은 후 그 소식을 들은 미재가 “왜 보내지 그랬냐?”고 해서 더 욱 후회스러웠다. 좋아하던 이모부가 세상을 떠날 때도 가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던 아들 은 미국 채널 13에서 ‘김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면서 영어와 한국말 이 되는 편집자를 구한다고 할 때 순전히 이모네 식구들과 엄니(할머니)를 만 나서 늦게라도 위로를 하고 싶은 마음에 이력서를 넣었다. 아들은 한국의 이 종사촌들과 외할머니, 이모들과 좀 더 가깝게 지내고 싶기도 하고 당시 약혼 중이던 아내에게 한국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 말을 못해서 최종 인터뷰에서 탈락 해서 내가 한국어 교육을 포기했던 것을 절절히 후회를 했다.

• 18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 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 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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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헤어질 때는 깨끗이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 18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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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일은 점점 커져갔지만 남편이 하는 일은 별로 잘되지 않았다.

1990년도에 들어서자 끝내 미국 생활을 적응을 하지 못하는 남편의 말을 더 이상 반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편과 아이들은 일단 먼저 돌아가기로 하 고 그리스에 집을 사고 미국에서 모든 물건을 사서 컨테이너에 실어 떠나 보 냈다. 아이들은 국제학교에 다니게 하고 나는 미국과 그리스를 왔다 갔다 하 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 왕복이 잦아지자 내 대신 가게를 돌볼 가게를 돌 볼 매니저가 필요 해서 J를 고용했다. J는 옷도 제멋대로 입고 외적인 모양새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모든 면에서 능력이 뛰어났고 비즈니 스를 운영하는 수단에도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 나중에 그리스로 완전히 돌 아가기로 하고 일단 4개의 가게 중에 중요한 가게 2 곳을 수완이 좋은 J에게 맡기고 갔다.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에 느낌이 이상해서 돌아와 보니 O가 가게를 완전히 자기 것을 만들어 놓았다. 직원들 거의가 자기들에게 불리한 것은 내 가 정한 것이고 좋은 것은 J가 정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오래 떠 나 있기 때문에 나에 대하여 잘 모르는 직원들은 나에 대한 소문과는 전혀 다 르게 J 모든 곤란한 일은 내가 정한 방침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 고 해놓았으니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제멋대로인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단 하나의 조 건을 걸고 두 개의 가게를 맡겼던 것이다. 아침마다 영업을 시작하기 전에 직원들과 잠깐씩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 었다. 그러나 그리스에 얼마 동안 있다가 돌아와 보았더니 가게의 분위기가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J를 불러서 나와의 약속을 지켰느냐고 물 었더니 “언니, 신앙은 자유잖아요?”라고 대답을 했다. 물론 J의 말이 맞다. 신 앙은 전적으로 자유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가게를 맡길 때의 약속을 지키지 • 헤어질 때는 깨끗이 189

않았기 때문에 나는 더는 J를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그녀를 내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 동안의 관계도 생각하고 나쁜 인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가 장 이익이 많이 나는 작은 가게를 헐 값에 제니에게 주겠다고 했다. J의 입장 에서는 당연히 좋은 일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받아들였지만 이것은 신앙 때문 에 잘못 판단한 첫 번째 케이스가 되었고 그 후로도 이어진 어리석은 짓들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 때 내 편에서 서서 도움이 되어서 가게를 되찾게 도와준 2 명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목사 사모인 쥬리였고 또 한 사람은 나중에 목사 사모가 된 T이었 다. 일반적으로 사모의 이미지는 정숙 단정하고 성도들에게나 모든 사람들에 게 친전한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럴 수는 없지만 쥬리는 그런 사 람이었다. 음악을 전공한 남편이 미국에 와서 뒤늦게 신학을 해서 시작한 개 척교회를 하느라고 힘이 들 터임에도 불구하고 가게에서도 헌신적인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사모도 감정이 있는 사람인데 남들이 꺼려하는 청소를 말 없 이 자기가 해야 하는 일처럼 하니까 자연스럽게 쥬리라는 이름 보다 사모님 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생길 정도였다 사실 이민 사회의 개척 교회는 자기 편의 위주로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목 사와 사모에게 이것 저것 요구해서 도움만 받고 안정되면 큰 교회로 떠나버 려서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도 많지만 쥬리가 원망이나 불평을 하는 소 리를 듣지 못했다.

T는 키가 훤칠한 미인으로 미적 감각이 뛰어나고 또한 기계치인 나를 포함 한 전 직원들에게 기계 고장이나 사용법을 알려주고 해결해 주는 멕카이버 역 할도 했다. 성악을 전공한 남편에게 개인지도를 받아 교회 성가대에서 솔로 를 할 만큼 노래 실력도 만만치 않다. 약간의 까칠함도 있지만 나와의 의리를 지켜서 말빨 쎈 메니저에게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T는 그 후에도 잠시 본 • 19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인의 사업을 위해 외도를 하기는 했지만 28년 동안 Happy Nail을 함께 했다.

J의 사건 이후 더는 그리스를 오고 가면서 생활 하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이 되어서 남편에게는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 오도록 설득을 했다. 결국 집은 놓아두고 모든 가족이 결국 미국으로 돌아오 고 말았다. 그러나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남편은 또다시 그리스로 돌 아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가면 먼저 집에 와 있는 그의 얼굴에는 그늘과 무료함이 묻어 있었다. 얼굴에 웃음도 없어졌고 아이들에게 도 예전처럼 다정한 아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자고 할 때마다 먼 저 혼자 가라고 하면 입을 다물던 사람이 이제는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해 서 혼자서도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아이들은 두고 가자는 것이었다. 결 혼이라도 시킨 뒤라면 모를까 나는 전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건 어미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다니던 딸은 이미 남자친구가 있어서 엄마가 원하는데로 하라고 했 지만 아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로 돌아가고 누나와 함께 살면 어떻겠냐고 물었 더니 아무 대답도 안 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남편의 시위가 계속돼서 남 편에게 먼저 가면 가게를 처분하고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그리 던 고향으로 가서 시어머니와 함께 내가 장만해 놓은 집에서 살게 되었고 시 어머니는 아들과 단 둘이 사는 것에 더없이 행복해 했다. 그 후 나는 여건이 되는대로 수시로 그리스로 갔다. 얼굴이 활짝 핀 남편과 이제는 나의 좋은 벗이 된 시어머니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매일 찾아와 서 즐겁게 지냈지만 그때마다 아이들 생각과 가게 일 때문에 오래 있지 못하 고 서둘러 되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2 년이라는 세월을 왔다 갔다 하며 보내 게 되니까 기다리다 지친 남편이 어느 날 더는 혼자서 살 수 없으니 빨리 결 정을 내리라고 했다. 그러나 도저히 결혼도 안 한 아이들을 두고 남편을 따라 • 헤어질 때는 깨끗이 191

갈 수 없는 일이었다. 한 번 갔을 때 남편이 너무 외로워서 말동무를 사귀었다고 하면서 내가 돌아 오기만 하면 얼마든지 끝낼 수 있는 가벼운 친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양다리를 걸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했다. 마음이 복잡했지만 어쩌면 어느 정도 예상하기도 했고 아니면 은근히 그의 일탈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맞을 수 없는 사람끼리 만나서 그때까지 온 것이 신기한 일이기도 했다. 사실 그와 나는 공통된 관심사가 거의 없어서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진지한 분위기보다는 처음 만나서 사귈 때처럼 장난 질이나 아니면 티격태격하는 다툼을 좋아했다. 그 동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쌓여 있어서 내가 아닌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려고 애를 써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더는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살고 싶지 않 은 터에 그의 일탈은 아픔이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해방이기도 했던 것 같 다. 그 다음에 갔을 때 정식으로 그녀를 소개하기에 그 뒤로는 더는 그리스를 오고 갈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다툼 없이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 었고 우리는 지금도 가족 아닌 가족의 마음으로 서로를 배려하며 지내고 있 다. 그러나 헤어질 때에는 항상 정리할 것이 있는 법이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 의 집은 앞으로 내가 은행 빚을 갚으면서 살면 되었지만 내가 그리스에 사 놓 았던 집에 대해서는 조정이 필요 했다. 남편이 8만불을 줄터이니 그리스 집 의 소유권을 넘겨달라고 해서 그럴려고 했는데 이미 대학생이 되어 세상 물 정을 조금은 알 수 있는 딸 디나가 반대를 하고 나섰다. 집 문제를 놓고 디나 와 깊이 있는 이야기는 해보지 않았지만 내가 번 돈으로 산 집을 그렇게 쉽게 남편에게 넘겨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디 • 19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나에게 내가 살기 위해서 철 없는 어린 남편과 결혼을 선택한 것에서 오는 평 생의 부채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의 마음 속에 깔려 있는 심정을 설명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집문제는 아무 것도 결정되지 못 하고 그렇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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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5. 손톱에 인생을 걸다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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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는 것 보다는 사라지는 슬픔 한 곳에서 30년 이상 가게를 하다가 보면 손님이 가족같이 느껴지는 경우 도 있다. 어떤 사람은 정규적으로 서비스를 받으면서 자기들의 사정을 이야 기 하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 않는 가족들보다도 사정을 더 잘 알 수도 있었다. 보통 백인들은 결혼해서 멀리 떠나면 부모에게 1년에 한두 번 전화만 하는 경 우가 많다. 그런 손님들이 한 사람씩 세상을 떠날 때마다 나는 며칠 독감에 걸 린 듯 온몸이 아플 때가 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자기 전에 어느 날 아 침 내가 깨어나지 못할 때 단정하게 발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위를 정 리정돈 해두는 버릇이 생겼다 첫 가게를 열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오던 암에 걸린 60대 초반의 리는 성격이 유달리 까다로워서 직원들이 모두 기피하는 손님이었다. 손톱 하나를 할 때마다 확인을 하고 까탈을 부려서 시간도 많이 걸리기 때문에 비즈니스 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손님이었다. 그녀는 우리 가게에서 가장 기술이 뛰어난 O에게 서비스를 받으면서도 항상 불평이 많아서 O는 리 때문에 담배 가 늘었다고 푸념을 할 정도였다. 그녀 때문에 직원들이 너무 피곤해 해서 나 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녀가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 러나 직원들에게 미안함을 느끼지만 장사하는 사람이 손님을 쫓을 수 없는 일 이었다. 내가 사업이 점점 바빠지면서 첫 가게에 앉아 있지 못하고 1 주일에 하루씩만 들릴 때도 리는 꼭 그 날자를 잡아서 예약을 하고 오곤 했다. 리는 나를 만날 때마다 “해피, 내가 이 가게 오는 것은 너 때문이야. 너를 보 면 정말 행복해.” 하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듣기 어려운 찬사를 쏟아냈다. 직원 들이 모두 싫어할 정도로 무례하고 도도한 그녀가 나한테만 호들갑스럽다고 • 헤어지는 것 보다는 사라지는 슬픔 195

할 정도로 환대를 하니 직원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나는 분에 넘치는 그녀의 환대에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를 몰라서 올 때마다 허그만 깊게 했다. 리는 암이 진전되어 계속 화학치료를 받으면서도 계속 손톱 단장을 받으러 왔지만 까탈스러움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어느 해 몇 주가 지나도 오지 않더 니 그녀의 딸 캐리가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왔다. 단골 손님 중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해서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았지만 그 동안 리에게 서비스를 해주 었던 O는 별로 섭섭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리가 떠난 대신 딸 캐리가 멀리서부터 우리 가게를 찾아 오기 시작했다. 캐 리다 올 때마다 자연히 리와의 추억을 이야기 하게 되는데 캐리는 이미 중년 의 나이였지만 엄마가 그녀에게는 신적인 존재였던 것 같다. 엄마가 얼마나 훌륭하고 따뜻한 어머니이었는가를 이야기하는 캐리의 눈에는 항상 눈물이 고였다. 나는 매번 만날 때마다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캐리에게 아 픔을 주는 것 같아서 이야기 하는 삼가 했더니 오히려 자기 엄마를 잊은 것이 아니냐고 섭섭해 했다. 나는 그때서야 케리가 멀리서 우리 가게에 오는 이유 가 우리 가게에 어떤 특별함이 있어서가 나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나누기 위한 것이었다는 알게 되었다. 그런 내용을 알고 난 후부터 나도 주저하지 않고 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지만 사실은 매번 똑 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20년 간 매주 혹은 격주로 와서 나와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던 캐 리가 이번에는 치매에 걸렸다. 치매에 걸린 케리는 서비스를 받고 돈 세는 것 을 잊어버려 지갑을 내주고는 돈을 집어 가라고 했다. 어떤 때는 돈을 내고 도 얼마를 내야 하느냐고 또 물었다. 이미 지불을 했다고 하면 얼굴이 빨개지면 서도 또 얼마를 내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해서야 그녀와의 계산이 끝났다. 한 해는 몇 달이 지나도 케리가 오지 않아서 전화를 했더니 남 • 19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편이 캐리의 알츠하이머 증세가 심각해서 못 갈 것 같으니 더 이상 기다리지 말라고 해서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솓구쳤다. “아! 또 이렇게 끝나는구 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한 곳에서 오래 장사를 하는 것이 좋은 것만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헤어짐이 아닌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슬픔을 느 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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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며느리와 사위의 결혼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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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년부터 매주 오는 단골 손님 중에 80이 넘은 Cindy가 있다. 아직도 스키 니 진 바지에 소위 칼 힐이라고 하는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인조 속눈썹에, 긴 금발머리, 3 센티미터 길이의 긴 손톱까지 철저히 유행을 따라서 한 주도 빠짐 없이 와서 손톱 손질을 받는다. 또한 그녀의 며느리 역시 매주 오는 단골 손님이다. 그런데 몇 년 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Cindy의 며느리와 사위가 그만 눈이 맞아버린 것이다. 며느리가 사위와 결 혼했으니 법적으로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졸지에 아 들과 딸이 사랑하던 배우자에게 버림 받아 이혼하게 생겼으니 Cindy 의 마 음 고생이 어떠했을까? 보통 그런 경우에는 속된 표현으로 ‘쪽”이 팔려 둘 다 우리 가게로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시어머니만 올 터인데 며느리는 시어머니 가 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우리 가게로 오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그들 둘이 맞닥뜨리는 일이 생길까 보아 노심초사 되어 예약 받을 때 신경을 쓰게 되었 다. 그러나 막상 며느리가 너무 태연하길래 어느 날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니?” 그녀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결혼 전부터 사실은 Cindy의 사위가 자기를 좋아했었다고 덤덤하게 대답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염려하던 사건이 벌 어졌다. 드디어 그 둘이 마주친 것이다. 항상 예약을 하고 오던 며느리가 그 날은 불쑥 나타나서 내가 숨이 탁 막힐 지경이었다. 재빨리 며느리에게 나가 라고 눈짓을 했는데 못 봤는지 그냥 카운터를 지나 가게 안으로 들어오니 서 로 알아 보게 되었다. 모든 사연을 알고 있는 직원들의 시선이 그 둘에게 꽂 혔다. 피곤해서 눈이 풀려있던 직원들의 눈동자도 호기심으로 반짝 빛을 내 는 듯 했다. 내 상상으로는 Cindy가 벌떡 일어나, 아들과 딸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 처를 준 며느리 머리채를 잡아 뜯을 것만 같았는데, 아니 그래야만 내 상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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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떨어지는데, 얼렐레~~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 Hi! Cindy!”, “ Hi! 칼멘!” 인사 정도로 끝낼 줄 알았는데 이제는 한 술 더 떠서 주거니 받거니 미소까 지 보이며 흡사, 옛날에 보여줬던 사이 좋은 고부간의 모습 그대로인 것 아닌 가? 나도 고국을 떠난지 40년이 넘어서, 거의 외국인 정서를 갖고 있지만 그 녀들의 사이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이따금 재혼을 한 티나 엄마가 딸 을 보러 오곤 했는데 그녀는 재혼에서 또다시 실패를 했다. 한 번은 아기를 데 리고 와서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원이던 두 번째 남편이 브라질에 가서 브라 질 여자와 살다가 이혼을 하고 그 사이에서 낳은 아기라고 했다. 아이를 얼마 동안만 봐 달라고 해서 아기를 맡았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웃으면서 태연 하게 하는 티나 엄마가 대단해 보였는데 한술 더 뜨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에서 그리스를 왕래할 때 시아버지가 중풍으로 몸을 못 쓰게 되자 수발 을 들던 시어머니가 목욕 시키는 것을 힘들어 하셨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전 며느리인 티나 엄마에게 시아버지 목욕을 시켜 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티나 엄마는 시아버지의 옷을 홀랑 벗기더니 스펀지에 비누를 묻혀 시아버지의 온 몸을 닦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침없이 시아버지 고추에 비누칠을 하고 다른 몸을 닦을 때와 같이 정성껏 닦더니 탁탁 치면서 하는 말이 “아! 이젠 이 물건 도 쓸모 없게 됐구나. 안됐다.”하는데 고추가 아직 쓸모가 있다고 대답을 하 듯이 슬며시 커지는 것이었다. 시어머니와 내가 희한한 장면을 보고 있는데 티나 엄마는 “야, 너희 세계에는 촌수도 없니? 나야, 나! 어디서 함부로 힘써 “하면서 탁하고 한번 때리니까 고추가 스르르 작아졌다. 그녀의 재치가 어색 한 순간을 웃음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내가 남편과 헤어진 후에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렸을 때 그리스에 있는 전남편의 처는 시어머니를 외면했지만 큰 며 • 20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느리였던 티나 엄마는 시어머니를 운명 하실 때까지 돌봐 줬다고 하니 정말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이런 백인들의 행동은 존경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일이다. 결혼식 때 미국에서는 한국과 달리 신부만이 아니고 들러리도 신부 못지않 게 화장은 물론이고 손과 발 치장까지 한다. 그래서 단골 손님의 결혼식이 있 으면 가게 전체가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데보라가 결혼식을 앞두고 들러리 설 친구들과 본인 가족 10명을 예약했다. 그런데 당일에 예약 취소도 없이 아 무도 나타나지 않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졌다. 한 번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적 이 없는 손님이, 더구나 내일 결혼 한다는 사람이 전화도 없이 나타나지 않으 니 무슨 일인지 궁금하고 초조해서 애가 탔다. 금요일이 제일 바쁜 날인데 결 국 예약한 10명이 나타나지 않아서 손해도 컸지만 손해 보다 도대체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니 답답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한 주간이 지나고 드디어 데보라가 초췌한 얼굴로 나타났다. 사연인 즉은 결혼 이틀 전에 “당신과의 결혼, 자신 없소”라는 쪽지 한 장만 달랑 남기 고 신랑 될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돈만 따져도 결혼 준비로 이미 몇 만 불을 지출했고 아직도 지불해야 할 경비도 있는데…. 절망과 수치, 끓어오르는 분노에 휩싸여 있는 데보라 앞에 내가 입은 손해는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그 후로부터 데보라는 내가 특별히 보살펴 주고 위로 해주고 싶은 애틋한 존재가 되었다. 몇 해가 지나고 이번엔 진짜 결혼할 사람 이라며 덩치가 큰 남자를 데리고 와서 닉이라고 소개를 시켰다. 내가 보기에 는 속은 비어 있는 호인 같아서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어서 염려 반, 축하 반의 마음으로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큰 백화점에서 광고 담당자로 일하는 데보라의 결혼식에 참석한 손님들은 신랑 이 입장하자 일제히 박수와 환호를 보냈는데 내 생각에는 혹시 이번에도 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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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이 또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염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열렬히 박수를 쳤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짐작했던 것처럼 닉은 덩치는 컸지만 대책 없는 무능한 남자여서 아들 과 딸을 날 때까지 제대로 된 직장을 가져보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떠버 리인 데보라가 남편에 대한 불평이 없는 것이 신통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 이런 저런 일거리를 마련해 주려고 애쓰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내 가슴 한 쪽이 싸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왜냐하면 착하고 열심히 사는 그 녀에게 두 번씩이나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비 록 손님으로 시작되어 이어져 온 인연이지만 오랜 세월 속에 쌓여진 정 때문 에 이젠 손님이 아닌 가족 같은 마음인 것이다. 이제 은퇴를 앞두고 그 동안 쌓여진 미운 정, 고운 정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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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 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 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Pubs.Online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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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하나님에게 대들다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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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20년 단골손님 메드린이 암이 전신 곳곳에 퍼져 있다면서 아마 오 늘이 우리가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일 것이라며 내게 깊은 허그를 해줬다. 머리 염색, 매니큐어 페티큐어까지 하고 쓸쓸한 미소를 지우며 떠나는 그녀의 뒷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서서 그녀와 보냈던 애증의 시간들을 떠올려봤다. 그 녀는 직원들이 진상, 밥맛으로 리스트에 올려놓았던 손님이었다. 그런 그녀 가 2년여 전 내게 자신의 병 치유를 위한 기도를 부탁해 왔다. 그 후 하루 두 번씩 1시간을 그녀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는데 그녀를 위해 기도를 멈추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

2014 년 8월 밤이었다. 4살 반의 첫 손자 아담이 갑자기 머리가 아주 아프 다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에 주치의에게 진찰을 받았더니 바이러스에 걸렸 다며 두통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러나 며칠 뒤에 더 큰 고통이 왔다. 구급차를 부르고 기다리는 동안에 아담이 조그만 두 손으로 마구 머리를 치며 고통으 로 몸부림치는 모습은 지옥의 공포였다. 롱 아일랜드에 있는 유대인 어린이 병원에서 매일 피 뽑기와 각종 검사를 하 고도 병명을 알 수 없었다. 결국, 다른 병원에서 초청해 온 의사가 뇌에 물이 차 있으니 뽑으면 괜찮을 거라고 해서 머리에 구멍을 내고 물을 뽑아 치료될 줄 알았지만, 차도가 없어서 다시 뇌 조직 검사를 한 결과 ‘중추신경계 이상’ 으로 진단이 되었다. 최초에 진단은 기이하게도 일종의 중풍이었다. 뇌에서 스트록을 일으키라는 명령을 신경계에 계속 주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 이다. 처음엔 한 쪽 팔이 마비됐고 두 번째 풍에서는 다리 한 쪽, 세 번째는 눈 한 쪽을 뜨지 못했다. 한 번에 오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부분마다 무너뜨리는 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흡사 눈앞에서 자식의 살을 한 점 한 점 도려 내는 잔인한 고문을 당하는 심정이었다.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몸을 하나 씩 움직일 수 없을 때마다 아담이 “왜 안 돼?” 라고 묻는데 대답을 해줄 수 없 • 하나님에게 대들다 205

었다. 오진을 바탕으로 키모 테라피와 스테로이드 주사를 투여하니까 아이가 완전 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증세는 같았지만, 정확한 원인을 진단하는 것에서 는 실패한 셈이다. 아담에게 중풍이 15번이 넘게 오는 4개월 동안 뇌 MRI를 20여 회 찍었던 것은 의사들도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나름대로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담의 엄마 아빠는 제 정신이 아니었고 사위는 새로 잡은 직장도 나갈 수 가 없게 되었다. 언론과 인터넷에 아담의 소식이 알려져서 많은 이들이 격려 를 보내고 염려를 하는 분위기 때문에 당장은 못 자르겠지만, 사람들의 관심 이 덜하게 되면 우선순위로 해고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그 것을 염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도 엄마 아빠 대신 손녀딸 에밀리도 돌봐야 하고 직장 일도 꾸려나가야 하고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몰라서 비즈니스를 제 대로 할 수가 없었고 더욱이 1년 전에 친구와 함께 열었던 스파도 흔들거리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3시간 거리라 자주 갈 수도 없지만 병원에 가서 아담을 보 는 일이었다. 안 갈 수도 없고 보고 나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가 다니는 베이사이드 천주교 안에서도 수백 명 마리아 봉사단체 단원들이 매일 기도를 하고 나도 순간마다 기도를 하면서 오직 “기적이 일어 나겠지. 살려주시겠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병원을 바꿔도, 더 전문성이 있는 의사가 처방한대로 투약하는데도 전혀 호 전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의사가 아담의 발에 생긴 붉은 반점을 주목 하고 조직을 떼어서 미국에서는 아직 할 수 없는 검사이기 때문에 직접 독일 로 검사를 하러 갔다. 독일에서의 진단 결과 환자로 밝혀진 숫자가 전 세계에 150명밖에 안 되는 Degos 라는 유전적 희소병으로 판명되고 현재로써는 치 • 20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약 개발을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수요가 많아져야만 정부나 단체의 기금으로 개발하는 것인데 150명을 위해서 서둘 러 개발을 할 수 없으므로 아직 약이 없고 Degos 전문의도 세계에 단 3명뿐 이었다. 그 3명이 네트워크로 함께 아담의 병세를 지켜보며 치료방법을 모색 하는데 밝혀진 바로는 Degos는 발병 부위에 따라 생존율이 다른데 Adam은 하필이면 뇌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생존율이 다른 환자보다 짧고 통증이 더 극 심하다고 했다. 약을 개발 중인데 2년 뒤에나 나온다니 그때까지 아담이 버틸 수가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15분 마다 아담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울고 불며 아우성을 치다가도 모르 핀을 맞고 고통이 가라앉으면 엄마에게 “마미, 미안해.”라고 해서 더욱 가슴 을 아프게 했다. 죽음이 뭔지 알 리가 없는 아담이 자기에게 나쁜 병이 있다 는 걸 느꼈는지 그렇게 안 먹겠다고 버티던 7가지나 되는 약을 냉큼냉큼 받 아먹기 시작했다. 또 나에게 오레오 쿠키와 지퍼 백을 사달라고 해서 사 왔더 니 움직일 수 있는 한 손으로 쿠키 3개씩을 백에 넣어 의사와 간호사가 오면 나눠주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내게는 “나를 살려 주세요.” 하는 애원으로 보였다. 의사들이 그 동안 아담에게 주었던 치료약이라는 게 결국은 “이것, 저것”이 었던 것이다. 아니면 말고 식의 치료 끝에 아담은 코마에 들어갔지만, 그 코 마 속에서도 통증은 계속된다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지옥의 형벌이 천 사 같은 어린 아담에게 내려졌는지 나는 신에게 항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은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운전하면서 “당신이 존재한다면 이제 겨우 4살 반밖에 안 된 아이가 통증으로 몸부림치는 것쯤은 해결해주셔야 하지 않 느냐? 그것 하나 들어 주시지 못하는 하느님이라면 왜 우리가 당신을 믿어야 하느냐? “고 소리소리 치며 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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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병 4개월 만에 더는 가망 없는 아이에게 고통만 주는 산소 호흡기를 떼기 로 결정한 날 우리는 한 사람씩 아담과 인사를 하기로 했다. 내 차례가 되어 아담이 좋아했던 한국 노래 ‘나비야’를 부르니 말을 못하는 아담의 눈에서 눈 물이 보였다. 산소 호흡기를 떼고도 24시간 동안 딸 내외는 아담을 안고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평소 좋아하던 음악을 틀어주고 딸 이 “아담아. 이제 떠나렴.” 했더니 숨을 멈췄다고 했다 아담이 죽은 후 병원 측에서 희귀병의 원인과 치료제 개발에 도움이 된다고 어렵게 부검을 부탁해 왔다. 세상에 4살 먹은 아이의 몸에 칼을 대기를 바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처음에는 물론 거절했지만 ‘그 방법도 아담의 짧은 삶 이 세상에 빛을 남기는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승낙을 했다. 부검결과는 살았다면 극한의 통증을 평생 안고 살아야 했을 것이고 장 애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통증만 없었다면 장애가 있었던들 어떤가? 아담의 동생 에밀리 앞에서 슬픈 표정을 하지 말자고 해서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고 장례식을 치렀다. 아담을 사랑했던 온 동네 사람들이 슬퍼했고 데일 리 뉴스와 로컬 뉴스도 아담의 기사를 발병 때부터 마지막까지 비중 있게 다 뤘다. 아담의 장례식이 마치 유명한 사회인사의 장례식처럼 많은 사람이 참 석해서 계속해서 단상에 올라가 나도 모르는 아담과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말 하는 것에 아픔인지 슬픔인지 모를 혼돈 속에서도 놀라웠다. 주치의와 담당 의사 두 분이 필라델피아에서 오셨고 간호사들, 유치원 원장. 그 외의 수많은 사람이 각자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얘기 했다. 특별히 유치원장은 아담이 유 치원에서 누구에게나 친절해서 여자 친구가 많았다고 유머를 해서 슬픔 중에 도 웃게 하였다. 장례식 내내 나는 “신문과 인터넷에서 화제를 되기는 했지만, 어린이 희귀병이 하나 둘인가? 수많은 사람이 고작 4년 반 인생을 살았던 아 • 20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담을 위해 이렇게 먼 길까지 올 수 있을까?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움직이게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담은 친화력이 뛰어난 아이였다. 날씨가 좋은 날은 식구 모두 함께 아담 과 에밀리가 타는 세발자전거를 따라서 동네를 한 바퀴 도는데 자전거를 타 는 동안에도 동네 사람을 보면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래서 우리 집 앞을 지 나가는 자동차는 아담이 보이면 속도를 줄이고 손을 흔들어 주곤 했다. 아담 이 좋아하는 던킨 도넛을 살 때, 드라이브 웨이에서 아담이 종업원과 눈을 맞 추고 인사를 하느라고 시간을 끌어서 기다리는 뒷 차에 신경이 쓰여서 항상 안절부절 해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이미 인사성 밝은 아이로 소문이 나서 직 원들은 손을 흔들어 주고 몇 마디 인사말도 나누곤 했다. 일요일에는 아침 식 사를 하기 위해서 베이글을 사러 가는데 아담은 사위 에븐의 어깨에 올라 앉 아 항상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아담은 마치 선거에 나온 후보자처 럼 인사를 했다. 덕분에 덤으로 얻은 미니 베이글을 들고 오는 아담의 얼굴은 항상 기쁨에 차 있었다. 아담을 아름다운 동산에 묻고 와서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추울 터인데, 무서울 터인데, 외로울 터인데…….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아서 가슴 이 아렸다. 집에 오니 옆 집에 사는 로즈가 집안을 말끔히 치우고 음식도 준비 해놓고 유대인의 풍습인 망자에 대한 예의로 집 안에 있는 모든 거울은 천으 로 씌워놓았다. 아담은 그리스인 할아버지, 한국인 할머니, 유대인 아빠의 혈 통을 이어받았지만 법적으로 유대인이었다. 딸과 사위가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동안 로즈와 딸, 사위의 친구, 동네 사 람들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서 나는 손녀 에밀리를 돌보며 직장 일을 할 수 있었다. 아담의 투병을 통하여 30년 넘는 미국생활에서 보지 못한 이웃들의 따듯한 배려를 느끼게 되었고. 유대인 사회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도 많이 알 • 하나님에게 대들다 209

게 되었다. 아담의 일이 알려지자 유대인 사회에서 관심이 집중되어 에본의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 평소에 연락이 없던 친구들까지도 자기들의 사업이나 직장 일을 제쳐놓고 찾아와서 운전도 해주고 음식도 만들어오곤 했다. 누군 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선물과 음식이 매일 집으로 배달되어 왔다. 선물 은 아담의 방을 가득 채웠고 음식은 두 개의 냉장고에 넣어도 넘쳐서 가게에 가져와 직원들과 함께 나눠 먹어야 했다. 장례 후 7일 동안 매일 사람들이 음 식을 가지고 와서 유족들을 위로해 주는 ‘시바’라는 기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한국식으로 그 많은 손님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나 하고 고민했 었는데 손님들이 음식에서부터 접시, 컵 등 모든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해 주고 청소까지 깨끗이 해주고 갔다. 하다못해 서 빙까지 해주니 한국에서 어릴 적 할아버지 초상 때, 상복 입은 엄니와 큰 엄니 가 손님 식사 대접 하랴 곡 하랴 피곤에 젖어 있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한국 여 성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심신이 피로했던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되었던 7일이 지났다. 우리는 어린 에 밀리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여 주지 말자고 약속을 했지만 매일 내 방문을 힘 차게 발로 차며 들어와 안기던 아담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소 리 죽여 통곡하는 밤을 보냈다.

2014년 12월 28일에 아담이 떠났지만 어린이와 부모들, 할머니들이 3월 말 까지 스파게티, 중국음식, 샌드위치, 자이로 등등 사랑과 정성이 담긴 음식을 가져왔다. 그 뿐이 아니고 지금도 아담이 다니던 유치원과 어린이 헬스클럽 에서는 우리가 사양을 했는데도 아담 동생 에밀리의 모든 비용을 무료로 해 주고 있다.

‘Sweet Adam’s fight against degos disease.’에 $43,986이 모금이 되 • 21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었다. 아담이 하늘나라로 이민 간지 11개월 만에 후원 금액 말고 사위와 딸 친구들이 모금해서 타운의 허락을 받아 아담의 이름으로 아담이 자주 놀러 가 던 공원에 벤치를 설치하고 기념식을 가졌다. 아담 친구들이 부모와 함께 풍 선을 가지고 와서 하늘에 있는 사람에게 보낸다는 행사를 했는데 아담의 친 구들은 아담이 혼자서 그 많은 풍선을 가질 수 있어서 기뻐할 것이라고 믿고 들 있었다. 또 유대인 회당에서는 아담이 떠나고 난 다음 1년 6개월 동안에 두 번이나 유대인 커뮤니티 안에서 silence auction, door prizes를 해서 아담처 럼 어린 나이에 희귀병으로 죽은 아이들을 위해 기금을 모아 수입을 degos 의 신약개발을 하는 연구기관에 보냈다. 그 날은 모든 어린이들이 코슘 복장 을 하고 참석을 해서 슬픔 보다는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 가지 슬프지만 재미있는 이벤트는 아담 생일날 아담 친구들이 ‘저녁 식사 전 디저트 먹기’ 행사를 하는 것이었다. 생전에 생일날만은 아담이 좋아하는 디저트를 저녁 식사 전에 먹도록 허락했던 것을 기념해서 아담의 생일날 모 든 아담의 친구들이 저녁 식사 전에 디저트 먹는 인증 샷을 페북에 올리도록 한 것이다. 아담이 떠난 후 두 번 째 생일 때는 새로운 어린이들이 더 많이 참 가해 주어서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에 꺼지는 슬픔 을 당했지만 이런 아름다운 풍습과 사람들 때문에 큰 위안을 받았다.

• 하나님에게 대들다 211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온라인 세상에서 길을 찾다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 21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교회에서 친화력이 뛰어나고 언변도 좋아 배울 점이 많다고 느껴지는 Y를 만났다. 그들은 부부가 모두 예일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평 소에 항상 직원들의 자질 향상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 던 중이었다. 그래서 이미 미국인 매니저가 있었지만 아무 기술도 없는 그녀 에게 최고 기술자보다 더 높은 급료를 지급하기로 하고 매니저 격으로 가게 하나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한 달이 거의 되어가는 무렵에 그녀가 긴히 이 야기할 말이 있다면서 직원들이 총파업을 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고 물어 왔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근무시간이 길어 몸이 아파서 일을 못 하 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오전 9시 30분에서 오후 7시까지 하루에 9시간 30분 영업을 하지만 손님이 몰리면 어떤 때는 10분에서 20분까지 지체되는 수가 있었다. 그것이 미안해 서 종종 늦을 때가 있으니 8시까지 일을 하고 하루 10 시간으로 계산해서 5 일 근무로 6일에 상당하는 주급을 받는 것으로 합의를 해서 다들 만족해했는 데 별안간 마음이 바뀌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전체 미팅을 해서 현재대로 하는 것과 하루에 1시간 일찍 퇴근 하고 6 일 근무에 6 일치 주급을 받는 것을 투표로 하니까 12명 직원 중에 10명은 현재대로 하기를 원했고 단 지 2명만 6 일 근무에 1시간 일찍 퇴근하기를 원했다. 그녀의 주장은 결국 오 버타임을 달라는 것이었지만 당시에 아직 미용업계는 오버타임 수당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 여성 신학, 해방신학 공부를 하고 있던 그녀로 서는 장사가 안될 때 고용주는 손해를 보면서도 임금을 주어야 하는 현실이 보일 리가 없었던 탓에 이론적으로만 접근했던 것 같다. 그 사건으로 우리는 헤어졌고 다시 만나기까지는 십여 년이 걸렸다. 그러나 후에 그녀가 목사가 되어 미국인 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그 교회에 나가서 그 동안 한국교회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보고 인터넷으로 진보적 •

온라인 세상에서 길을 찾다. 213

인 신앙 사이트를 알게 되어 전혀 새로운 것들을 배울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아담이 떠난 것에 대한 풀 길 없는 의문을 품고 하나님을 원망 하는 마음을 가지고 방황하고 있을 때 어느 날 페이스북에서 ‘시절 인연’에 대 한 아주 의미 있는 글을 읽었다. “아들의 죽음 후 황망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누님이 가진 전통적인 기독교 적 해석으로는 자식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해서 나는 종교를 불교로 바꾸어 보라고 권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누님은 “목사가 별소리 를 다한다.”고 하면서 천국에 가서 아들을 다시 만난다는 단순한 믿음을 가지 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때 누님이 종교를 바꾸지 않은 것을 지금도 아쉬워한 다. 왜냐하면, 만일에 종교를 바꾸었다면 인생과 삶에 대하여 ‘더 폭넓은 이해 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글을 쓴 이는 온라인을 통하여 활발하게 글쓰기를 하는 지성수 목사였다. 사 실은 2008년부터 온라인을 통하여 그의 글을 많이 읽어왔기 때문에 만나보 지는 못했지만 비교적 그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졸지에 아들을 잃어 버리고 슬픔 속에 빠진 누님에게 한 이야기는 아담을 생각 하며 슬퍼하고 분 노하는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그 글을 읽 고서 처음으로 그의 글에 댓글을 달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후 페이 스북을 통하여 대화하기 시작했다. 2015년 11월에 미국에 올 일이 있다고 해서 뉴욕에 꼭 다녀가도록 부탁을 했다. 뉴욕에서의 4박 5일 짧은 일정을 지 내는 동안 될 수 있는 대로 지목사와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뜻밖에도 내 이야기를 듣고 지 목사는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고 권유 했다. 나는 한 번도 내 이야기를 글로 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내 삶이 글로 써서 남겨놓을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지 목사 는 해방 전에 태어난 여자로서 어려서부터 남다른 조건 속에서 독특한 경험 • 21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을 하면서 살아온 내 이야기가 소개될 수 있다면 답답한 이 시대를 헤쳐 나가 야 할 젊은 여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꼭 글을 써보라고 강력하 게 격려해 주었다. 지 목사가 뉴욕을 떠난 다음 조금씩 기억을 더듬어 생각나는 사건들을 요약 을 해서 페이스북 메신저로 보내면 지 목사가 완성된 문장을 만들어 보내고 내가 다시 보충하고 하는 방법으로 1 년 동안 매일 같이 교신을 하면서 이 글 이 만들어졌다. 글을 쓰면서 살아온 날들을 다시 곰곰이 되씹어 보면서 당시 에는 느끼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고 성찰할 수 있게 되어서 남들에게 읽히기에 앞서서 인생을 정리하는 단계에 들어선 나 자신에게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서로가 바쁘고 뉴욕과 시드니가 시간이 정반대이어서 대화를 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피차에 글로서 전하는 것이기 때문 에 연애 편지를 보내듯 즐거운 마음으로 매일 글을 주고 받아서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구 반대 편에 살고 있는 우리가 공동의 작업을 할 수 있었 던 것은 오로지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에 살고 있는 덕분이다.

• 오해가 만든 평화 215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네일 협회와의 동행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 21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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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 미국에 왔었을 때, 한인 여성들이 할 수 있었던 직업이라곤 봉제 공장에 취직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일본식당에서 서빙하는 일은 지금으로 보자면 삼성에 취직하는 정도로 선망하는 일이었다. 네일산업은 미장원 한 구석의 테이블 하나에서 일하던 것을 독립을 시켜서 하나의 고소득 전문직으 로 끌어 올려 뉴욕 한인 교민 사회 경제에 한 몫을 단단히 하게 되었다. 또 한 국에서 새로 이민 온 여성들에게 단기간의 훈련으로 직업을 얻을 수 있게 하 고, 홀로 사는 여자의 수입으로도 아이 둘쯤은 무난히 공부시킬만 하던 우리 교민들의 젖줄이었다. 네일업계는 세계 패션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네일 트렌드 메이커 역할을 하 고 있다. 세탁이나 청과, 마켓 등 타 이민 비즈니스 업종에 비해 역사는 짧지 만 세련된 감각과 고급화 전략으로 맨해튼을 포함한 뉴욕시 일대의 주요 상 권을 선점, 뉴욕 네일업계를 주도하고 있다. 네일 살롱 수가 늘면서 서비스도 업그레이드 되었고 단순히 손톱, 발톱을 다듬어주는 서비스에서 페이셜· 마 사지· 왁싱 등 스파의 개념을 더해 고급 살롱으로 진화했다.

70년대까지 세탁소나 채소 장사 등을 제외하고는 주로 한인들끼리 비즈니 스를 하던 한인사회에서 네일업은 완전히 주류 백인 사회를 대상으로 한다 는 점이 큰 차이가 있었다. 물론 한류 열풍으로 한국 연예인들이 타민족들에 게 인기를 끌고, 한인 미용실의 퍼머 기술이 입 소문을 탄 영향도 적지 않다. 지금은 전혀 상황이 변했지만 그 동안 네일업은 여자가 소자본으로도 손쉽 게 열 수 있었던 사업이었기 때문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나서 가격 경쟁도 심 해지고 사람 구하기가 어려워서 성수기에는 직원을 보충하기 위해서 쩔쩔매 야 했다. 기술이 있고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조건으로 옮기려고 하기 때문에 봄부터 초가을까지는 직원들이 기가 살고 업주들은 기 가 죽는다.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관계가 존재하기 마 련인 것은 네일 업계도 예외가 아니다.

• 네일 협회와의 동행 217

나는 돈보다는 한국에서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일만 하고 살 았다. 어느 날 남편이 바디샵을 하는 그리스인 지역인 아스토리아에 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근처에 있는 네일샵에 가서 패티케어를 받으러 가보았다. 한 국 여자 주인이 어디에 사느냐고 묻길레 롱아일랜드에 산다고 했더니 “거기 에 해피라는 여자가 가게를 여러 개 하면서 돈을 긁어 모으고 있다는데 아세 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잘 모른다고 하고 얼버무 릴 수밖에 없었다. 또 가게를 시작한지 10여 년 후 우연히 어떤 모임에 참석했 다가 진행자가 “이 분이 그 유명한 해피 네일의 해피 씨입니다.”라고 소개를 해서 어리둥절했다. 나는 정신 없이 달려오느라고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주 변에서는 나에 대한 소문이 나있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정작 네일협회에 관여하게 된 것은 5~6대 회장을 지낸 이승렬 회장 의 권유 때문이었다. 1990년 다섯 번째 가게를 준비 중일 때라서 단체에 몸담 을 형편은 아니었지만 평소에 존경하던 분의 권유를 마다하기 어려웠다. 당 시 이승열 씨는 네일 협회 수석부회장으로 박종규 회장을 도와서 새로 생긴 네일 면허의 까다로운 조항을 완화 시키는 일과 네일 잡지 창간 등의 일로 애 를 많이 쓰고 있었다. 고대 동문회장을 지내서 뉴욕에서 인맥이 넓은 이승렬 씨는 뉴욕 네일 협회의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적절한 해법을 제시해 주시는 길잡이 노릇을 해주었다. 그때 이후 총무, 수석부회장을 거쳐 2003년에는 이사장을 지내면서 장장 20년 세월을 협회와 함께 울고 웃고 하며 협회는 내 인생의 한 부분이 되었 다. 그런 까닭에 내가 죽으면 ‘네일협회장’으로 해달라고 부탁을 해놓았는데 요즘 같아서는 그 희망이 지켜질지 모르겠다.

2015년 5월에 한인 뉴욕 타임스의 왜곡되고, 날조된 기사 때문에 네일 산업 • 21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이 뿌리까지 흔들리는 날 벼락이 떨어졌다. 처음에 뉴욕 타임즈 기사를 접했 을 때 30 여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 런 말도 안 되는 소스를 얻은 것인지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인 력난에 허덕이는 때에 일당 10, 20, 30 불에 일을 하는 스페니쉬나 중국인이 어디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요즘은 가격경쟁이 심해서 세금과 높 은 임금을 제하고 나면 업주들 대부분이 종업원 수입보다 못한 것이 네일 업 계의 현주소이다.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가게 치고 한인업소만큼 시설에 투자하고 고급재료를 쓰고 임금을 많이 주는 곳이 없는 것이 현실인데 한인 업주들이 폭언과 폭행 까지 하는 일들이 있고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교육의 대가로 주인이 돈을 받 는다는 기사가 마치 한인업소에서 행해지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게 악마의 편 집이 되었다. 이번 기사 때문에 생긴 법령이 현실적 상황에서 100% 실행된 다면 초 대형 업소, 약 10~20%만 버틸 수 있고 나머지는 퇴출될 위기를 맞이 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미국 언론의 의도는 이민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네일업계의 약점을 최대한 부각시켜 네일업계의 생태계의 변화를 유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그러나 네일 산업계가 대자본 위주로 변한다면 당연히 서비스 가격이 상승되어 손님들에게도 부담을 주게 될 것이 고 직업을 잃은 기술자들이 저소득층으로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정부의 도움 을 신청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세금이 지출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생존의 기로에서 위기를 느낀 뉴욕의 3000여 한인 네일 업계는. 2016년 2 월 29일 7개의 대형 버스를, 중국 네일협회에서는 8개의 대형버스를 동원 총 15대의 버스를 타고 1천여명이 올바니 뉴욕주청사 의원 회관 건물 월홀 에 일제히 집결해 대규모 항의 피켓 시위를 가졌다. 이날 1천여명의 항의 시 위 참가자들은 피켓을 통해 △네일살롱 임금보증보험인 웨이지 본드(Wage • 네일 협회와의 동행 219

Bonds)의 철회 △더 이상 네일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지 말 것 △인종차별을 하지 말 것 △이중잣대를 들이대지 말 것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지 말 것 △ 우리는 지금껏 말한 것들을 관철 시키기 위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등의 메시 지를 전하며, 지난 시간 참고 참았던 울분을 토해냈다. 시위에는 브루클린에서 직접 네일살롱을 경영하는 한 업주가 나와서 “주정 부에서 나온 인스팩터가 느닷없이 조사를 나와 문을 잠그고 한 사람씩 다른 방에 불러다가 일대일로 면접을 하고 8000달러의 벌금을 내라고 했다”며, “ 나는 당시 마치 중범죄자 취급을 당한 것 같았다. 열심히 일하고 세금 잘 내고 법을 잘 지키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규정대로 다 지키 니까 환경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울먹였다. 이 밖에도 1천 여명의 시위자 들은 청사 밖으로 나와서 준비해 둔 매니큐어와 네일 싸롱에서 쓰는 연장, 집 기들을 무덤처럼 쌓아놓고 이대로 두면 네일업은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 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해서 절실한 심정을 표현했다. 그날 나는 70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시위를 하느라고 팔을 흔들고 소 리를 질렀더니 집에 와서 녹아 떨어져 버렸다. 힘은 들었지만 억울했던 마음 을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터트리고 나니 일단 속이 시원하기는 했다. 아침 8시 15 분부터 45분까지 30분 동안 뉴욕 한인 밀집 지역인 훌라동(후 러싱)에는 네일 업소 직원들을 픽업하는 미니밴과 15인승 차가 서 있거나 지 나가거나 한다. 길가에는 작은 키, 긴 생머리, 터질 듯 꽉 조인 청바지나 쫄바 지에 쫄티를 입은 어린 남미 여성들이 손에 런치백을 들고 자기들을 픽업할 차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30여 년 동안 거의 매일 아침저녁으로 직원들을 위 한 차량 서비스를 해 온 터라 후러싱의 골목 골목 변천사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돌다 보면 같은 얼굴을 보게 되 어 낯이 익은 얼굴들이 많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얼굴들 중에 차를 기다리 • 22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는 것이 아니라 미니 벤의 운전대 앉아 있는 것을 보면 그녀가 더 이상 종업원 이 아니고 업주가 되었다는 의미일 터이다. 초창기에는 길거리에서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젊은 한인 여성들이었는데 세월이 흘러가며 한인 여성들 자리에 중국 남자나 중국 교포들이 보이기 시 작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여성과 중국 교포 여성들 은 옷차림이나 머리 스타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제는 중국 교포들도 보기 힘들어지고 남미계통 사람 일색으로 바뀌어져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네일 면허를 취득할 수 없어서 안정적 인 직업을 잡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동안은 단속이 심하지 않아서 라이센스 가 없이도 또 불법 체류자도 직업을 갖기 쉬웠는데 2015 년부터 단속이 강화 된 탓에 그들을 채용할 수 없어서 가뜩이나 여름이면 심했던 인력난이 인력 대란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가게도 풀타임으로 일하는 기술자 11명이 필요 했었는데 지금은 절반 가까운 숫자로 떨어졌다. 자격이 있는 기술자를 구하기 힘들어서 나도 하는 수 없이 손님을 받아야 할 판이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아침에 직원들과 차 안에서 함께하는 시간들이 참 귀중하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아침 커피와 샌드위치 를 사서 나눠 먹고 수다를 떨기도 하고, 유익한 정보 교환도 하고, 교양교육 (?)도 하면서 보내는 시간들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 다. 많은 것을 가졌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넉넉함을, 많은 것을 잃어버린 지 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은퇴를 앞둔 나로서는 하루 하루가 감사할 날이지만 한인 네일업계가 위기 를 맞고 있어 진정으로 안타깝다. 중국인들의 저가공세의 영향이 심각한 위 협이 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네일업계 종사하는 인력들이 나이가 많아지 • 네일 협회와의 동행 221

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젊은이들이 더 이상 유입이 되지 않아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중국계나 베트남계는 2, 30대가 주류인데 비해서 한국 기술자 들은 5, 60대가 전반이라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네일업은 특성상 미 국에서 자란 2세들 보다는 한국에서 새로 유입되어 온 사람들이 유입되는 경 우가 많다. 그러나 근래에 오는 한인여성들의 대부분은 유학생이거나 아니면 좀 더 쉽게 돈을 버는 유흥가로 빠진다고 들었다. 주인 편에서 볼 때도 직원 들이 대부분 이민 1 세대이기 때문에 1.5세대나 2세가 이어 받아 경영하기 가 어렵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아우성인데 만일 뉴욕의 네일 업계에 젊은 피가 수혈될 수 있다면 피차간에 좋은 일이겠지만 그러기에는 넘어야 할 기술적인 문제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한국의 젊은이들을 진출시키는 길만이 인력난 해소의 유일한 해결책 이라고 생각된다. 가게를 그만 하고 싶어도 젊은 한인들 보다는 타민족 사람 들이 더 흥미를 보여서 한인 네일업의 미래가 걱정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현상은 30여 년 전 젊은 한인들이 고령의 미국 네일 가게를 흡입하듯 접 수하던 시절의 반복인 것이다

• 22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 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 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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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일 협회와의 동행 223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진상 손님들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 22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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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은 왕이다”. “손님은 항상 옳다.” 라는 말을 성경 구절처럼 알고 31년 동안 장사를 해 왔는데 최근 들어서는 까탈스러운 손님까지 끝없이 친절하 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장사가 잘 되던 예전에도 진상 손님까지 잘 참고 상 대해주었는데 경기가 나쁜 요즘 같은 시절에 더 이상 손님의 무례를 참지 못 하게 된 것이다. 단골손님들은 항상 전화로 예약을 하고 오기 때문에 가능 한 한 정확하게 손님들이 예약을 한 시간에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써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별난 손님들이 있어서 피곤하게 할 때 가 있다. Lynn이 약속시간 5분 전에 와서 자기 손톱을 손질해 줄 마리아가 안 보인다고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마리아는 어디 있지?” 하기에 “10분 후에 waxing 손님이 끝나니 마리아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라고 했더니 “1시에 예 약인데 왜 늦는 거야?” 라고 했다. ‘지금 시각이 12시 55분인데 10분 후면 겨우 5분 늦는 것인데, 얼굴을 붉히 다니……’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불쾌해졌다. 어디를 가든 예약 시간에서 5 분 정도 늦는 것을 문제 삼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우리 업소에서는 오래 된 단골손님 중에 Lynn 같은 사람이 꽤나 있다. 노화현상 중에 인내심이 줄어 드는 것이 있다는데 바로 그런 현상인 것 같다. 그러나 10분 가량 늦을 것 같 으면 꼭 전화를 해 주던 나의 서비스 자세가 손님들의 버릇을 잘못 길들인 것 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우리 가게의 비교적 철저한 시간 관리 때문에 멀리 이 사를 가도 찾아오는 까다로운 단골들이 고맙기는 하지만 그래도 5분 정도 늦 는 것으로 불평하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한 번은 돈 많은 변호사 손님이 30분이나 약속시간에 늦게 와서 자기가 좋아 하는 직원이 기다려 주지 않았다고 불평을 해서 요즘 같은 불경기에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맞받아 쳤다. 돈을 더 내는 것도 아니면서 돈 많다고 특 별대우를 바라는 꼴을 더 이상 봐주기가 싫어서 한 마디 했다. 다행히도 그냥 • 진상 손님들 225

돌아갈 줄 알았던 그녀가 꼬리를 살짝 내려서 무사히 넘어갔다. 평소에도 나 는 직원들이 돈 많고 팁을 잘 주는 손님에게라도 필요 이상으로 비굴하게 친 절을 보이지 말라고 당부를 해왔다. 어려서부터 갑질을 하는 이들 앞에서 머 리를 꼿꼿하게 하라고 가르치신 어머니의 교육 탓일 것이다. 내 삶의 여정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머물기도 하고 스쳐갔지만 그 중 에는 잠시 머물렀을 뿐인데도 내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사람이 있고 긴 세월을 옆에 있었어도 흔적이 남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은혜와 최윤희를 만난 건 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행운이었다. 두 사람은 세상 을 살아온 세월이 나 보다 훨씬 적지만 오히려 여러 가지 면에서 내가 갖추지 못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마름 속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은혜와는 네일 협회에서 회장과 이사장으로 함께 일하면서 일본과 한국을 같 이 여행하기도 했다. 아무리 오래 사귀어도 사람 속을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보게 되 는 것은 어려울 때나 금전 관계를 할 때일 것이다. 그녀가 동업으로 대형 스파 를 하자고 했을 때 나는 전적으로 그 동안 하는 일 마다 성공적이었던 그녀의 사업적 안목을 절대적으로 믿고 망설이지 않고 소위 ‘묻지마’ 투자를 했다. 그 동안 새롭게 사업을 시작할 때는 항상 여유자금을 가지고 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조건이 되지 못했음에도 그녀의 사업적 능력을 굳게 믿었다. 그러나 무 리를 해서 투자를 했기 때문에 적자에 대비할 준비가 안됐고 결과는 완전 실 패였다. 그래도 흔히 동업을 하다 실패하면 사이가 벌어지지만 부푼 꿈을 꾸 는 것부터 꿈이 산산이 깨어지는 과정까지 함께 했기 때문에 우리의 신뢰에 는 조금도 금이 가지 않았다. 그 동안 여성들의 사업장이면서도 계속해서 남성들이 회장을 맡아왔던 네입 업계에 여성으로서 첫 회장이 되었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 • 22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면 그 동안 단체장들이 거의 남성 위주인 뉴욕 교민사회에서 경제적 비중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네일업계의 회장을 여성이 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은혜 회장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더불어 추진력도 있어서 남 성 회장들에 비해서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지금은 협회 일을 떠나서 함께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다른 꿈을 모색하고 있다.

10년 전, 국제결혼여성 모임에서 만난 최윤희는 빨강머리, 화려한 옷차림이 유별난 여자 같아서 처음에 선뜻 다가가기에 어려운 거리감을 느꼈었다. 진 취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의 최윤희는 뉴욕 교포사회에서 작은 일, 큰 일, 부당 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위해서 발벗고 나서서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내가 네일 협회의 이사장으로 재임 중일 때 행사에 초대 하면 잊지 않고 참석하고 또 우리 둘이 두엣으로 장기자랑에 나가서 상을 타기도 하며 우정을 지켜나 갔다. 2016년 2월 29일 한인 네일 업계를 뒤흔드는 지나친 규제에 항의하는 역사적인 시위를 할 때도 직장을 하루 결근하고 우리와 함께 한 의리의 여장 부이다.

• 진상 손님들 227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그리스인의 오지랖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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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할 때 해결하지 못한 그리스에 있는 집의 소유권 문제는 언젠가는 해결 해야 할 숙제로 남겨졌었다. 물론 렙터리로서는 나의 명의가 빠지고 자신의 이름으로 소유권을 변경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재혼을 했고 우리 들에게는 아이들이 있다. 처음에 렙터리가 8만 불을 줄터이니 소유권을 넘겨 달라고 했을 때 디나가 반대를 했던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세월이 흘러서 렙테리는 건강을 잃어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바다가 보 이는 그리스의 집은 값이 떨어지고 그리스는 나라 전체가 경제적으로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재혼한 부인과 살고 있는 렙터리로서는 나에게 공동명의로 되어 있는 집의 소유권을 완전히 옮겨 달라고 요구하기도 어려울 것이고 재혼한 아내 쪽에서 도 순순히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 혼을 하고 앞으로 경제적으로 자립을 해야 할 자녀가 둘이나 있는 내가 과연 아무런 조건이 없이 집을 넘겨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렙테리도 그런 면에서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집에 대한 말을 못 꺼내 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록 내가 번 돈으로 산 집이지만 처 음부터 그에게 주려고 생각 하고 있었다. 딸 디나의 결혼식 때도 오지 못하던 렙테리가 2년 전에 손자 아담이 아프다 고 왔을 때도 집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천 하늘 에 날벼락 같은 아담의 병이 좋아지기는 커녕 점점 나빠져서 집안 전체가 혼 이 빠진 상황이 되어 버려서 말도 꺼내지 못하고 돌아 갔을 것이다. 그런데 2016년 6월에 아들이 그리스로 갈 일이 생기자 이번 기회에 서류를 해달라 고 부탁을 해왔다. 디나도 건강하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심리적 부담 때문인 지 이번에는 반대를 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아들이 권리포기각서를 가 져다 주게 된 것은 렙테리에게는 생애 최대의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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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내가 서류를 만들기 위해서 먼 거리에 있는 그리스 대사관으로 두 번이나 가야 하는 일은 무척 번거로운 일이었다. 대사관의 후진적 행정처 리 때문에 쉽게 처리가 되지 않아 짜증이 났지만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는 심 정으로 참고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공교롭게도 30도의 더운 날씨에 에어컨 이 고장 났는데도 고치러 갈 시간이 없어서 에어컨이 안 되는 차를 타고 한창 바쁜 성수기에 내 집을 주기 위해서 이틀 동안이나 생고생을 하려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급기야는 몇 십 만블 짜리 집을 넘겨 주는 것은 아깝지 않 았지만 고생을 해가면서 수수료를 몇 백 불을 내고 나니 심술이 나서 아들에 게 그리스에 가면 렙터리에게 수수료는 꼭 받아 오라고 했더니 아들이 제가 대신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짜증나는 그리스 대사관의 행정처리와는 전혀 다른 인간적인 그리스 문화를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된 것은 그리스에 대한 많은 추억을 되살리게 해 주었다. 내 일을 처리하던 여자 영사가 고치고치 묻더니 오지랖 넓은 그리스 인답게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라고 충고를 했다. 그녀의 의견은 소유권을 넘 겨 주는 것보다는 세를 주는 것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 여자로서는 10여 년 전에 헤어져 재혼해서 아들까지 있는 전남편에게 집을 준다고 하는 것은 도 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요즘 그리스 집값이 올라가고 있는 데, 그냥 넘겨주면 나중에 틀림 없이 후회할 것’이라면서 거듭 거듭 다시 생각 해보라고 하는 영사를 이해 시키는 일이 오히려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내 뜻을 납득하지 못하면 내가 바보 같은 여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 었다. 하여간에 이틀을 소비해서 일을 처리했지만 전생의 나라 그리스의 문 화를 다시 한번 깊이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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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필 저자의 후기

우리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두 개의 세상이 겹쳐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온 라인 인연은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끝날 수 있기에 가볍게 만들려고 하면 한 없이 가벼울 수 있다. 그러나 온라인을 통한 이영재 님과의 인연은 내 평생 맺 은 인연 중에는 가장 귀한 것이었다. 이 책은 온라인을 통하여 이영재 님과의 수 백 시간, 아니 수천 시간 소통의 결과이다. 여성의 삶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아직도 상황을 주도하기 보다 는 주어진 상황, 특히 남성에 따른 종속변수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영재 님 은 철저히 종속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체적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영 재 님의 이야기는 5,000만 한국인 중에 단 한 사람도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 이 없을 정도로 희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일이나 업적 을 이룬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인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타임 캡슐에 보관할만한 독특한 이야기이다. 자서전을 쓸 때는 집필을 맡긴 이들 이 제공하는 재료를 가공하는 것뿐이지만 이 책을 쓰면서는 그녀의 삶은 왜 그랬어야 하는지 어떤 원인이 그런 결과를 가져왔는지 마치 퍼즐을 맞추듯이 분석과 해석을 해야 했다. 돈, 기술, 가문, 학력, 이 모든 것들이 삶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 중에서 인격 은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그녀의 인격을 구성하고 있는 뼈대는 어려서 어머 니로부터 받은 가혹하다고 까지 표현할 수 있는 유교적 훈련이었다. 흔히 유 교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억압과 굴레를 씌우는 기능으로 평가되고 또 그 • 대필 저자의 후기 231

런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글의 주인공은 철저히 유교적으로 훈련 을 받은 사람이 본인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적응 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녀에게는 냉정한 아버지 같은 나라 한국, 따뜻한 양부 모 같은 나라 미국, 전생에 살았던 것 같은 그리스, 세 나라의 삶이 있다. 그 녀는 육체적으로는 한국인이지만 마음으로는 그리스인 생활은 미국인으로 서 산다. 자녀들이 그리스계 미국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 다. 글을 쓰면서 나에게 신비롭게 느껴진 것은 어떻게 그녀의 마음 속에 그리 스가 그토록 크게 자리잡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서 그리스는 항 상 한국과 대비되는 나라이다. 한국에서 결핍을 느꼈던 것들이 미국이 아니 라 그리스에서 채워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결핍은 물질적인 것을 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쓰면서 지난해 타계한 위대한 작가이자 신경과 전문 의이었던 올리버 색스의 대표작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한 구절이 떠 올랐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 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필요하다면 되살려서라 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이영재 님의 모든 삶을 담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 각난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때 한 선생님은 벌을 세울 때 꼭 앞에 나와서 벽 을 보고 손을 들고 앉아 있게 했었다. 그 때 벌을 서면 손을 들고 있는 것 보다 친구들에게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더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모든 인간 에게는 보이는 앞모습과 보이지 않는 뒷모습이 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나 마찬가지로 그녀의 삶 중에서 밖으로 들어낼 수 없는 부분이 있을 것이어서 • 23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이 영재 님의 뒷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쓰 면서 진심으로 이영재 님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되었 다. 그 이유는 아무리 박하게 평가해도 그녀의 삶에는 단 한 순간도 성실과 진 실이 빠진 적이 없었고 언제나 진지함이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 에서 그녀의 삶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은 다양하고 변화무쌍 했던 그 녀의 삶을 글로서 표현하기에는 나의 재주가 너무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많 은 글을 써왔지만 이번처럼 나의 글쓰기 실력부족의 아쉬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영재 님이 자료를 내 놓고 내가 썼으니 그림으로 본다면 이 책은 이를테면 초상화 같은 것이다. 초상화가 잘못 그려졌다면 인물 탓을 해서는 안되고 그 림을 그린 화가를 탓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혹시 잘못되거나 부 적절한 표현이 있다면 이 영재 님 탓이 아니고 전적으로 글을 쓴 내 탓일 것 이다. 시드니에서 지성수

• 대필 저자의 후기 233

• 23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 무용수의 길로 235

• 23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 무용수의 길로 237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ChapterⅡ

ePubs.Online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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