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꾸는꿈 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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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성이란 우리 운동가에 있어서, ‘운동론’ 과‘인격’ 과‘가치관’ 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 요소이다.

도 남부 즉 현재의 전남은 쌀 수탈의 중심으로 개발된다. 이렇게 해서 경상도와 전라 남부 지역에 식민 자본이 집중되고 그만큼 이 지역에서 계급분화와 인구이동이 활성화 하면서 저항운동이 활성화 한다. 이러한 양상은 1946년 10월항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대봉동 학원가 대구는 영남의 식민지 교육의 중심지가 된다. 그것이 대봉동 학원가이다. 대구고보(현 경북고), 대구사범(현 사대부고)을 비롯한 수많은 중등교육기관이 계성, 신명 등 일부 학교를 제외하고 거의 대봉동에 집중된다. 이곳 에서 일제는 중등교육 기관을 세워 식민통치의 하수인을 양성하고자 하였지만 오히려 민족운동의 중심을 양성 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한학 대신에 일제 신학문에 부응하여 영남의 지주 집안 아이들이 몰려든다. 출세를 위한 부모의 욕심이 크게 작용도 하지만 그때의 대세는 고리타분한 유학 보다는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열망이 컸다. 비겁한 조선 황실 과 그 사상적 토대인 유학에 대해 환멸을 느꼈던 것이다. 그전에는 일본 유학을 통해 소수의 지주 집안 아이들 이 신학문을 접했지만 이제는 국내에서 신학문의 거대한 흐름이 생긴 것이다. 식민지 교육에 순응한 학생들도 많았지만(이들이 나중 대한민국의 지배 엘리트가 된다) 엄청난 탄압에도 불 구하고 지하 서클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활성화 한다. 이들의 활동은 일본경찰의 사건과 사찰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한다. 수많은 학생들이 엄청난 탄압을 당한다.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 시점에 서 학생운동은 최대화 되다가 일제강점기 말의 전쟁책동으로 운동이 약화되긴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주의 학생운동 학생운동의 지도자들을 양성한 사람은 주로 교사들이 었으며, 이들은 일본 유학파이거나 그에 영향을 받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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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 많았다. 거대 지주의 아들이었던 유학생들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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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가서 일본의 문명에 감탄하면서도 식민지 청년으로서 함 께 하 는 만 큼 변 하 는 세 상

의 서러움을 겪는다. 거기서 그들은 일본의 사회주의자 들을 만난다. 그들에게서 조선이 이 지경이 된 과학적 이유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는 전혀 맞지 않는‘사회주의자’ 가 된다. 이들은 귀국하 여 다양한 활동을 한다. 노동운동, 농민운동에 참여하고 학생들을 서클로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고취시킨다. 개인

1946년 10월 2일 대구역 앞에서 (친일)경찰이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 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시민들은 분노하여 총궐기하게 되고 마침내 항쟁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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