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월호 모퉁이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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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통권 94호 2013

돌 11·12


영락의 목양실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 명치호 목사(달라스 영락교회 담임 목사)

섬기는 이들 문서출판부 부장 : 송현경 편집팀 : 최용석, 박윤희 취재,사진팀 : 성혜진 인쇄, 배부 : 박지영 표지디자인 : 최용석

무엇이 벌인가? 개 견(犬)자를 큰 대(大)자라고 우기는 친구와 큰 대 자를 큰 대자로 바로 읽고 아는 친구가 서로 자기가 맞는다고 싸우다 스승에게 가서 진위를 가리기로 했다. 진 사람이 점심을 사는 조건이었 다. 스승은 두 사람 주장을 다 듣고 난 후, 큰 대자를 개견이라고 틀리 게 알고 있는 친구의 편을 들어 주었다. 바르게 알고 있는 친구는 스승 의 판단에 의해 억울하게 점심을 사고 말았다. 그 후 스승에게 와서 “ 왜 틀린 글자를 맞는다고 하셨습니까?” 밥을 산 것이 하도 억울해서 스 승에게 따져 물었다. 그때 스승이 너털 웃으면서 말했다. “예야 친구를 위해 점심 한 끼 사는 것이 벌로 아느냐? 친구를 위해 점심 한 끼 대접 하는 것은 벌이 아니라 상이니라 그러나 개 견자를 큰 대자로 알고 남 에게 평생 무시당하면서 살아가는 그 친구가 불쌍하지도 않냐?” 사랑이란? 그 문제의 답이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 으로 그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귀해야 합니다. 그리 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화목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1-5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무엇에든지 다툼이 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 뿐만 아니라 각자가 또한 다른 사람의 일도 돌 아보라. 실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니.” 골로새서 3:12-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 하고 사랑받은 자들로서 자비로운 마음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 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고 더욱이 이 모든 것들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마태 복음 20:26-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 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


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무로 주려 함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3 “그들의 사역을 위하 여 사랑 안에서 저희를 더욱 더 존귀히 여기고 너희끼 리 서로 화목하라.”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항 중 하나는 자신의 생각에 갇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과 거의 경험으로 말미암는 자신의 생각에 갇힙니다. 자 신의 위치나 자신이 원하는 이익 때문에 자신이 원하 는 생각에 갇힙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 지기 보다는 나의 생각에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영 어로 out of box라는 말을 합니다. 그 갇힌 데서 이제 는 나와서 사랑해야 할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귀 하게 여길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하며 화목해야 할 사 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는 하 나님과 우리 사이를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케 하신 그 리스도를 바라볼수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2:13-14 “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는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 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룬 우리는 당연히 사람들을 향해서 화목하며 사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로마서 13: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 는 모든 사람으로 더블어 화목하라.” 요한일서 4:9-11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내신 바 되었 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게 하신 것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 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우리의 죄를 위 한 속죄제물로 보내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 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 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무엇으로 결정할까요? 대 부분의 사람들은 유행을 따라 삽니다. 누가 미니스커 트를 입으면 따라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롱 커트 머리 를 하면 자신도 롱 커트를 합니다. 누가 부동산 투기 를 통해서 돈을 벌었다고 하면 나도 해야지 하며 유행 과 세속주의를 따라 갑니다. 또 한 부류는 집단의식에 끌려갑니다. 사람을 나눌 때 내편을 나눕니다. 아군이 냐 적이냐를 나누는 것이죠. 그래서 그 사람이 내 그 룹에 속하면 아무리 틀려도 옳다고 합니다. 상대가 아

무리 옳은 말을 해도 내편이 아니면 틀리다고 합니다. 꼭 정치인들의 모습 같습니다. 이런 것을 그룹의식, 갱 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어디 출신 이냐? 어느 학교 출신이냐? 를 묻습니다. 이것도 저속 한 문화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문화나 풍속을 쫏는 자들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 들입니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 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 별하도록 하라.”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행동을 자신의 이익에 둡니 다. 이러한 사람들은 나에게 이익이 돌아와야 합니다. 교회 봉사도 이익을 따집니다. 손해 볼 것 같으면 하 지 않습니다. “그런 것, 나는 못합니다.” 딱 잡아뗍니 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분 들은 물질에 대해서 아주 사리가 밝습니다. 때로는 물 질의 노예가 되어서 따라 갈 때가 많습니다. 이익이냐 손해냐 그것이 판단의 기준입니다. 좀 더 성숙한 사람 들은 선이냐 악이냐에 따라 행동합니다. 남들이 다 틀 렸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이 선이고 정의이면 따 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같은 사람입니다. 흑인 을 노예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악이라고 판단하고 그 악과 싸웁니다. 동족 간에 남북이 전쟁을 하더라도 선을 지키기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행동합니다. 좀 더 발전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 동의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 의 말씀안에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8-10 “무엇보다 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 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맏은 선한 청지기같 이 서로 봉사하라.” 고린도 전서 13:4-5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 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지 아니 하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품지 아니하며.” 요한일서 4:19-21 “우리가 사랑 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 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 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 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 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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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결혼 변화평 목사(달라스 영락교회 유년부 담당 목사)

가정의 시작은 결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러면 우리는 어떻게 결혼을 하였습니까? 중매를 통해서 결혼을 하였을 수도 있게고, 연애를 해 서 결혼을 하였을 것입니다. 한번 기억해보세요. 어떤 경로가 되었던지 두분은 만남이 있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함께 사랑을 하게 되었겠죠. 더 많이 알고 싶어지고 헤어지기 싫게 되었을 즈음 에 결혼을 계획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 러가지 이슈들이 생기는 결혼 준비 과정을 거 쳐 드디어 결혼식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 게 적고 보니 마치 제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 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가정 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가정에 대해서는 지난 모퉁이돌 연재 를 통해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가정에 대한 이 야기를 우리는 배워왔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그 가정의 시작인 결혼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참으로 많이 발견할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우리는 결혼 전에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얼마나 결혼이 성경 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고민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결혼을 통해 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 깊은 의미를 우리는 발견해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 사랑하였고 그 사랑의 결과로 결혼을 하게 되었 지만 그 이전에 결혼을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과 비밀을 알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정을 더 2 | 모퉁이돌

욱 소중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뿐만하니라 하 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허락하신 그 분명한 목적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결혼 in 창조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그 첫번 째 결혼식 의 장면을 창세기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창세 기 2:18-2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결혼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정을 허락해주셨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 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 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 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 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 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 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 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 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 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 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 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 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 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 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 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 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 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니라.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천지창조를 마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 로 창조한 아담을 보고 심히 좋아하셨습니다(창 1:31). 그런데 그 아담을 보시고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위하 여 돕는 배필을 지을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 19절부터 20절은 문맥상 깔끔하게 연결 되는것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19-20절을 생략하고 18절 후에 21절을 바로 읽으면 하나님 께서 아담을 위해 창조하신 하와의 이야기가 더 매끄럽게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 왜 굳지 창세기에서 동물들의 이름을 짓 는 장면을 그 중간에 기록하였을까요? 이 장면 을 통해서 우리는오히려 당신 형상으로 창조한

창조물인 인간을 다른 짐승처럼 본능으로 살아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깊이 배려하시는 장면을 관찰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담의 필요를 스스로 깨닫도록 일을 허락해주신 것입 니다. 그 일은 이름을 짓는 일입니다. 히브리 문 명에서는 이름을 짓는 일은 단순히 이름을 짓는 것만 뜻하지 않고 소유권과 다스리는 권리를 가 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즉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 어줄 수 있는 사람은 왕과 같은 권위자라는 것 입니다. 이 이름을 지어줄수 있는 권위는 현대에 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어느 건물 하나라 도 자신의 이름으로 지어줄수 있는 사람이 얼마 나 많이 있습니까? 즉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 신 다스리라는 그 권위를 아담에게 사용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담은 그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자 신을 도울 베필이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마치 자신을 경배하기만 하는 로봇처럼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굳이 하나님께서는 이런 과정을 아담에 게 주실 필요가 없이 그냥 아담을 자게 만들고 하와를 만드시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 신의 형상으로 창조한 아담에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를 주시며 또한 우리가 깨 닫기를 바라십니다. 그럼 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완벽한 상 태에 있는 아담에게 돕는 베필이 필요했던 것일 까요? 그리고 모든 창조물을 보시며 심히 좋아하 셨던 하나님께서 왜 홀로 있는 아담을 보시며 좋 지 못하다 하시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바로 하나 님, 삼위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창 세기의 창조 기사부터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사 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이성으로 는 완벽하게 이해하기 힘든 삼위일체의 하나님 의 그 친밀한 관계성을 선 이해로 볼수 있게 된 다면 삼위의 하나님께서 홀로 있는 아담이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 이 좋지 아니하니...) 좋지 아니하시다고 말씀하 신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모퉁이돌 | 3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그 삼위의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귐의 관계가 있 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렇게 질문할수도 있겠네요.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는 독신주의자는 이 말씀에 위배되는 것인 가요? 이렇게 생각하면 안될 것이 신약 성경에 는 예수님께서도, 사도 바울도, 하나님 나라를 위 하여 독신으로 살수 있는 은혜가 있으면 독신으 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심을 읽을수 있습니다 (마 19:10-12, 고전 7:38-40).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 은 일차적으로는 가정 안에서 부부의 하나됨의 관계를 경험함으로서 더욱 깊이 하나님께서 한 분 하나님이심을(신 6:4)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 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서 로 사랑하는 관계를 통해 하나됨을 경험해야 한 다는 것입니다(엡4:1-3).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명령하셨던 그 사랑함의 관계를 통해서 교회 안 에 있는 성도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하나됨을 경 험하는 관계로 이 구절을 해석해야함이 성경적 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홀로 있는 아담을 보시고 좋지 않다하신 그 의미의 해석을 가정과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바라 본다면 하나님의 형 상으로 창조된 우리가 어떻게 가정과 교회안에 서 어떻게 살아가야 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계성은 첫번째로는 인간 과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성을 기초로 삼아야합 니다. 에덴동산을 거니는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 를 듣고 친히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아담의 그 친밀한 관계를 상상해봅시다. 이 관계가 무너짐 이 바로 죄악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아담과 하와의 그 친밀한 관계, 이 관계는 단순히 육체 의 관계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형 상으로 지어진 영혼과 육체가 완벽하게 친밀해 지는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하와를 보며 이렇 게 아름답게 고백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이라” 즉 내 몸이라는 것입니다. 4 | 모퉁이돌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나님께서는 가정 안에 있는 남자 여자를 둘 로 바라보지 않고 한 몸으로 바라 보신다는 것 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왜 냐하면 원래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던 아담 에게서부터 하와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아 담과 하와는 근원적으로 하나 였습니다. 이 원리는 성경에서 나타나 있는 믿 음의 가정에서 언제나 나타나는 원 리 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한 번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을 불러 내셨지만 아브라함만 불 러 내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만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 아 니라 사라까지 삼으신 것을 우리는 볼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앞에 서는 가정에서 부부는 한 몸으로 바라 보시지 각기 두 몸으로 바라 보시지는 않 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창 세기를 인용하시면서 그 한몸을 임의로 나눌수 없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마 19:5-6말씀하시 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 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 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셨습니다. 잠들 게 하셨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잠들게 하셨다라 는 뜻도 되지만 히브리 문학에는 잠들었다는 문 학적 표현은 언제나 죽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돕는 베필 하와를 창조하시기 위 해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의 옆구리를 뚫고 갈 빗대 하나를 뽑았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예수님 을 생각나게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의 옆구리에 깊은 창이 뚫고 들어와 흘리신 물과 피를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으로 탄생한 교회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


수 그리스도 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성도 는 지체가 되어 한 몸이 됩니다(엡 1:21-23). 결혼? 계약(Contract), 성례 (Sacrament), 언 약 (Covenant) 그렇다면 결혼 관계를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 각하고 계시나요? 세상의 시각에서 결혼 관계 는 계약(Contract) 관계로 이해를 합니다. 하나 님 없는 세상에서는 너무 당연한 관계입니 다. 너와 나의 구별이 있고 그 구별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을 이해할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 안에 서 서로 죽고 자신을 부인하는 그 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한것입니다. 계약 관계 안에서의 결혼은 너무 쉽게 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 간의 불완전한 죄악된 본성은 서로의 욕구를 서로에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욕망이 배우자를 통해 충족되지 않는다면 그 결과 계약은 해지 하면 끝입니 다. 세상은 거짓된 사랑으로 사랑을 포장하지 만 그 사랑은 너무 불완전한, 단지 호르몬의 장난처럼 여겨, 결혼의 그 심오한 진리를 깨 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천주교에서는 결혼의 의미를 성례(Sacrament)로 끌어 올렸습니다. 즉 교회 안에서 행하여야 하는 예식중에 하나로 여기고 치뤄지 는 성스러운 예식으로 행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정하신 성찬과 세례, 이 두 예 식만이 교회의 성례로 받아들이는 개혁교회의 교리와는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그리고 이 결혼의 관계를 언약(Covenant)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개혁교회 안에서 흔히 받 아들이는 관계입니다. 즉 언약은 하나님과 맺 는 약속으로서 두 남녀가 한 몸이 되어서 언약 의 관계를 하나님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렇기 때문에 진실된 그리스도인 안에서 행하여 진 결혼의 의미를 하나님 앞에 맺은 언약으로까

지 끌어 올린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가 정에 펼쳐진다 하더라도 쉽게 이혼할 생각을 하 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불가능한 일임을 이해할 것입니다. 결혼은 전도의 도구?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비 그리스도 인들과 결혼하려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를 해야 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많은 그 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과 결혼을 하게 되 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로 비그리스도인 배우자가 신실한 그리스도인 배우자를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경우도 보 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의 목적은 결코 전도가 아님을 우 리는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믿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 지 말아라는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고후 6:14-16절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 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 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 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 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 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 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이 경고를 굳이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넣어 한정시킬 필요는 없 지만, 16절에서 하나님의 성전된 인간의 몸을 일 치 시키는 관점에서 볼 때에 결혼의 관계에서 해 석해도 그렇게 멀리간 해석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청년들의 남녀 성비가 불균 형되어 있는 상황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 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결혼이 많이 발생됨 은 우리 안에서 너무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됩니 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은 그 결혼이 잘못되었다 고 절대 헤어지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멍에가 너무 크므로 그 멍에를 절박하게 지며 갈것을 말합니다(고전 7:13-16). 모퉁이돌 | 5


즉 전도는 교회에 명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결혼을 통해 서 복음 전파가 일어날수는 있으나 원래 결혼 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전도가 아니 라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즉 결혼을 통해 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바로 하나 됨을 경험하며 그 하나됨의 경험(쉽게 될수 없 는 경험이죠. 사실을 어쩌다가 한번 될까말까 하 지 않나요? 죄악된 본성으로 각자의 욕구를 체 우기 위해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그 욕망이 체워 지지 않을 때마다 경험되는 단절들이 서로를 좌 덜하게 만들지 않나요?)을 확장시켜 삼위 하나 님의 그 친밀하신 교제의 관계를 어렴풋이 남아 알게 되고, 감격하며, 성령 안에서 하나되게 하 시는 은혜를 가정에서 먼저 경험하며 그 경험으 로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 안에서도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에덴 동산에서 이루어졌던 이 결혼 이야기는 죄로 인하여 더렵혀진 현재의 우리의 삶의 공간 안으로 끌고 들어오기에는 서로 동일하게 적용 하기 어려운 간격이 존재합니다. 원래 한 몸이었 던 아담과 하와의 상태와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의 몸은 하나가 아닌것 처럼 보입니 다.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진 죄가 없는 상태의 아담과 하와의 상태와 현재 우리와

의 상태를 비교할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수 있 는 그 상태를 지금 우리의 죄악으로 더러워진 이 몸(비록 거듭난 영으로는 친밀히 교제할수 있으 며,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 되었 다 할지라도)으로 하나님의 현현 앞에 떨수 밖에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결혼을 통해 가정을 아담과 하와에게 허락하시는 말씀을 통 해서 우리는 결혼에 대한 원리를 배울수 있습니 다. 그것은 결혼을 통해서 생긴 가정안에서 바로 친밀한 관계성이 경험 되어지고 실행되어져 진 정한 하나됨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 친밀한 관 계는 바로 먼저 한 몸이 된 부부와 하나님의 관 계를 의미하고, 부부의 친밀한 영혼과 육의 하나 된 관계를 말합니다. 이 원리를 깨닫고 가정 생 활을 할 때에, 우리는 나의 욕망을 앞세우는 계 약 관계로서의 결혼 생활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엄중하게 맺어진 언약의 관계로서의 결혼 생활 을 누리며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지면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두번째 결혼식(이 삭과 리브가)의 장면은 다음 호에 연재합니다. 창세기에서는 결혼을 창조의 기사를 통해서 이 상적이고 원리적인 결혼을 가르쳐주고 있으며 인간의 타락한 후에 두번째 모범된 결혼의 모습 을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마태복음 19:10-12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 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 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 고전 7:38-40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 아내가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내 뜻에 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 엡 4:1-3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엡 1: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 고전 7:13-16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 제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 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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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5) by 마틴 로이드존스

그는 우리의 평강이시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자기 몸으로 원수 된 것 곧 법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폐하사,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을 지어 화평을 이루시고 또 십자가로 한 몸 안에서 이 둘을 하나님께 화목되게 하려 하시니 이로써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시고 (에베소서 2: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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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성경의 메시지는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 오, 그의 독생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또 그 안에서 화평과 평강을 이루 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 의 진수입니다. 1. 죄의 결과 11절에서 13절 사이에서 죄가 언제나 분열을 가져 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는 사람들을 분 리할 뿐 아니라 서로 원수관계가 되도록 만듭니 다. 사람 상호간에 적대감정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도 적대감정을 일으킵니 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큰 난 제는 평화의 문제입니다. 죄는 고통의 근원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 여금 적대감정을 가지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중 심적이고 이기적인 상태로 만듭니다.최고의 비극 8 | 모퉁이돌

은 세상이 자신이 죄 가운데서 얼마나 비참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은 모든 문제가 근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점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세상은 지 적으로 발전되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의 영향을 받고 그 속에 역사하는 악한 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먼저 치료받아야 하고 새로 운 생명을 공급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면에서 우 리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주님 은 화평을 만드실 뿐 아니라 주님 자신이 화평 이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화평의 복락을 누릴 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어야 합니 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3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화평을 이루십니까? 진정한 화평이 있기 전에 본질적으로 두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화해해야 되며 사람들이 반드시 서로 간에 화해를 해야됩 니다. 바울은 먼저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는 것부 터 다룹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중간에 있는 담을 허셨다고 표현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은 서로 상대를 향하여 담을 쌓아버렸습니다. 유대 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중간에 막힌 담으로 만 들어 버렸고 미워하는 것과 원수되는 것의 문제 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서

로 사랑하고 서로 돌보라고 주신 은혜와 은사들 을 오히려 원수되는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 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이런 적대감을 제거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담을 허 셨는데 두 번째로 하나님을 향한 담을 허셨습니 다.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 하여 의를 이루기 위해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이루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 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온전하고 깨 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 히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화평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방식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하나 님의 능력과 사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 다. 1. 화평 우리는 먼저 부정적인 측면에서 본문을 살펴 보면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는 것만으로는 화평 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전 쟁이 그치면 평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 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서로의 목을 겨냥하 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평화의 개념은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포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화평을 이루시는 방식은 그리스 도의 교회를 생성하고 만드시고 또한 존재케 하 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절대적으로 새로운 존재 입니다. 전에는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교회는 그 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물론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세상의 조 건들을 싹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중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고 배운 자도 있고

못 배운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형성 가능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몸은 그저 지체들만 모아 놓았 다고 해서 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하 나의 유기적인 몸으로 연결되어지고 생명의 결 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말 나뉘어지고 분열되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하나되게 만든 예 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입니 다. 어떤 면에서 교회는 하나의 새로운 몸이라 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곳은 거듭난 사람들 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옛사람은 사라지고 새로 운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지난날 자랑하 던 모든 것은 다 지나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무언가 새로운 것이 되었기 때 문에 이러한 새로운 관계에서 우리 모두는 동 일한 사람입니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이제 모퉁이돌 | 9


는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3. 새로운 차원의 시각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옛 방식으로 또 모든 방면 에서 옛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 의 지체들로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서로 를 민족성의 차원에서 세상적인 차원에서 생각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새 로운 원리를 우리에게 제시하였습니다. “너희 중

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 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 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 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7-28). 이것은 세상과는 완전히 거꾸로 된 것 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 나되는 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하 여야 합니다. 화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 과 정신이 교회를 주장하게 하여야 합니다.

유일한 중보자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나 아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에 대하여 살펴보 고 있습니다. 1. 화목케하다 화목케하는 것은 적대 감정에서 우정있는 관 계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간질이 없어진 다음에 나타나는 우정을 의미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로 둘을 다시 재연합하고 다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행동의 완벽성을 강조함입니다. 이제 적 대감정이 너무나 철저히 없어졌기 때문에 완전 한 친밀함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논쟁과 다툼에서 또는 서로 고통을 당하고 있 는 양편들이 서로 합하기로 새로 결심한 것만이 아닙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양편들 가운데 한 편에서 완전히 일치되고 친밀한 위치로 인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전에 있던 하나됨 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죄로부터의 분리 죄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법을 어기는 것을 10 | 모퉁이돌

의미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순종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가장 비참하고 가장 파괴적 인 것은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려 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세 상은 마귀를 위해서 지음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 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어졌는데 죄는 바로 그러한 원초 적인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러한 분리의 관계에서 회복 되어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는 사람이요 하나 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 상 하나님과 동반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하나 님과의 교제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 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미 화목의 큰 발걸음을 떼셨습니다. 그때 이미 이 방인들과 화목될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 니다. 3. 하나님과 화목하는 방법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대해서 화목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화목되는 것은 유일하게 한 가지 방법뿐 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


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 스도 예수라”(딤전2:5) 화목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며 산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도 자신의 노력과 공로와 힘에 의해서 이루어질수 없는 것 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언덕의 십 자가의 죽으심을 떠나서는 어떠한 화목의 가능 성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해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사랑 이시라서 독생자를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았음 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화목케 하셨다고 주장합 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획이요 생각이었 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화평을 이루신 것도 십자 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일 십자가 가 아니라면 화평 또한 없는 것입니다. 참된 화목은 제일 먼저 우리 편에서 무슨 행동 이 있기 전에 하나님 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주시기 이전에 원수된 것이 없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같은 방식으로 화목됩 니다. 여러분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야만인 이든 미개인이든, 자유인이든 종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선한 자이든 악한 자이든, 높은 사람 이든 낮은 사람이든 여러분은 이 길로 나아와야 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 목시킬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은 십자가를 통 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그 것이 원수된 것을 멸했습니다. 또한 모든 죄를 도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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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하프타임 점검하기

얼마 전에 한 대중가요 가수가 『하프타임』 이란 노래를 선보였다. 소위 575세대랍시고 7080 노래에나 겨우 아는 체를 하는 탓인지 그 곡 조는 낯설었지만 그 가사 내용만은 제법 신선하 게 다가왔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그냥 앞만 보며 미친 듯이 정신 없이 달린 내 인생의 뜨거웠던 전반 전. (생략) 전반전 끝을 알리는 휘슬소리 자 이제 하프타임 이 경기를 이겨줄 결승골이 일찍 터져 서 편안한 마음으로 남은 경기 신나게 뛸 수 있 게 해답을 찾고 찾아보니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 어 문제는 그게 오직 머리로만 받아들여지지 마 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질 않아 (생략) 대중가요 가사라기 보다는 무슨 철학가의 논 조를 듣는 듯하다. 하프타임이란 제목부터 뭔가 그럴듯한 풍미를 엿보이기 때문이다. 본시 하프 타임(Halftime)이란 시간제 운동경기 중간에 선 수들의 휴식과 전술점검을 위하여 잠시 짬을 내 12 | 모퉁이돌

어주는 시간으로 순수한 우리말 표현은 없는 듯 하다. 하프타임이 모든 운동경기에 다 있는것은 아니지만 개인경기가 아닌 팀경기 대부분은 중 간에 어느 정도간격(Interval)을 두어 그 효과를 충분히 활용하게끔 되어 있다. 이러한 하프 타 임을 아예 규정으로 정해놓은 경기는 축구, 미 식축구, 농구, 폴로, 필드하키, 게일식축구(Gaelic football), 네트볼, 럭비 등이있다. 그외에 아이스 하키나 배구, 크리켓 등은 중간에 어느정도 간격 을 둠으로써 하프타임과 유사하게 활용하는 경 기들이 되겠다. 대중의 인기가 높은 축구경기를 보자. 축구 경기는 전반과 후반사이에 15분의 하 프타임이 주어진다. 비록 경기시간 90분에 비하 면 짧은 15분 이지만 이시간을 잘 활용함으로 써 얻어지는 효과는 이루표현하기 어렵다. 간신 히 이긴 상태로 전반을 마쳤거나, 아니면 형편없 는 점수차로 뒤진 채 하프타임을 맞이한 감독은 차라리 후반전이 없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하지 만 골목축구나 군대축구 등 몇몇의 경우를 제외 하고는 하프타임이 게임아웃이 되는 경우는 있


을수 없다. 비록 점수는 졌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경기를 마쳐야 하는 것이다.

잘 활용함으로써 남은 인생의 후반은 각각 커다 란 의미를 간직하며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프타임이 우리의 인생에도 있다고 한다. 아니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은 연세 가 95세로 아주 지긋하신 어른이 계신다. 이 분 이 젊었을 때는 매사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노력 함으로써 누구 보다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음 을 뿌듯해 했다. 이윽고 65세에 이르러 다른 분 들처럼 은퇴를 하게 된다. 아주 편한듯, 여유로 운듯 보이는 은퇴 생활은 사실 이분에게는 덤으 로 사는 인생 같았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흘러 어느덧 95세가 되었다. 은퇴후 30년을 더 사신 것 이다.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하는 마음으로 살아 온 30년의 삶을 돌이켜 보니 그것이 주는 인생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었다. 더구나 인간의 평균 수 명이 늘어난 시대이니만큼 이분은 앞으로도 10 년 이상을 더 살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안 타깝게도 이 어른은 그저 은퇴와 동시에 경기 종 료휘슬이 울린것으로 착각을 했던 것이다. 만약 이분이 하프타임의 의미를 알고 훌륭하게 보낸 전반전의 토대위에 남은 후반전을 잘 보냈다면 ‘ 전반은 성공에, 후반은 의미에’라는 멋진 인생을 보냈을 것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내 인생의 하프타임을 잘 점검 하고 있는가? 전반을 감성적으로 선택하며 살아 왔다면 이제 후반전에는 그 선택한 것들을 이성 적으로 정리해나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는가? 많 은 것을 가지기 위해 전반전을 뛰었는가? 그렇 다면 이제는 소유보다는 존재의 의미를 더 생각 하며 후반을 뛰어보자. 학력과 재산과 지위 등을 더하기 위해 전반을 살아왔는가? 후반에는 그 무 거운 것들을 하나 둘 내려놓으며 살아보자. 쉽지 는 않겠지만 언제 경기종료 휘슬이 울릴지는 아 무도 모르는 일이다. 자녀들의 뛰어난 교육을 위 해 전반의 모든 것을 보냈는가? 그렇다면 이제 는 ‘더 많이 아는 것’보다 ‘더 깊이 아는 것’을 깨 우치도록 관점을 바꿔보자. 우수한 성적이나 재 능 보다는 좋은 성품이나 인성이 자녀의 인생에 훨씬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 닫지 않았는가? 남들의 칭찬을 구하며 살아왔는 가? 아무리 듣기 좋은 칭찬일지라도 그 모든 것 이 얼마나 빨리 잊혀져 가는 것이거늘. 남들을 제치고 앞선 채로 살기를 원했는가? 그런 것은 한낱 얘깃거리도 되지 않는 것을. 나 자신의 느 낌과 판단만을 말하며 살아왔는가? 이제는 남들 의 말을 들어줌으로 그 마음을 얻을 때도 되었거 늘. 왜 이리 부족함 투성이란 말인가?

사실 인간의 수명은 정해진 바가 없으니 자신 의 하프타임이 대체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구 태여 가늠하자면 물리적인 나이로 보아 알 수 있 겠다. 시편이 기록될 당시로 치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했으니35세에서 40 세만 돼도 하프타임임을 자각해야 할듯하다. 하 물며 이제는 100세 시대라고 하지 않는가? 따라 서 연장 된 평균 노동수명을 충분히 고려해보면 넉넉잡아 50세 전후가내인생의 하프타임이라 해 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운동 경기와는 너 무도 다르게 인생은 하프타임에서 경기가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비록 인생의 전 후반 경기시간은 다를지언정 알맞은 하프타임을

‘하프타임’의 저자 밥버포드(Bob Buford)는 인 생을 운동경기에 비유하여 정리한 그의 저서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인생에는 3단계가 있는데 먼저자신의 인생에 충실한 전반전, 다음은두번 째 삶을 준비하는 하프타임, 그리고 신앙과 하나 님의 뜻에 따라 사는 후반전이 그것이다. 한번 쯤 되새겨 볼만 하다. 모든 이의 인생 후반에 극 적인 명승부를 계획하시고 연출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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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심 로보트 맥췌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 14)

빌립이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전 파하자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행5:8). 또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 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고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여러분의 영 혼에 평안을 베풀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뿐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 사실을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들은 큰 실책을 범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은 자신 속에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찾 아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피조물에게서 안식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피조물 안 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헛 되이 죽으셨음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오늘 본 문은 너무도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두 려움과 떨림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 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본문을 택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헛되지 않음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확신하거니와 만일 여러분 14 | 모퉁이돌

이 평안을 얻었다면 그것은 바로 그분의 영광 을 볼 때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 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볼 때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밝히 드러나는 으뜸가는 진리는 하 나님의 아들의 겸손입니다. 이 점을 두 부분으 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 (2) “그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사실. 1. 하나님의 아들의 겸손은 “그분이 육신이 되 셨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저는 그분이 “말씀”으로 불리시는 이유를 물 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말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하 나님의 마음을 표현하시기 위해 말씀으로 계 시되셨습니다. 그분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 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그분이 영혼 없 이 육체만 취하셨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 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을 때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곧 사랑하시는 인간의


영혼]도 함께 지니신 상태였음을 알고 있습니 다. “지금 내 마음(영어성경에는 ‘영혼’이라 되 어 있음-편집자 주)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 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 에 왔나이다”(요12:27). 나는 “마음”이라는 말보다는 “무슨 말을 하 리요”라는 표현에 더 강조점을 두고자 합니다. 이것은 인간 영혼의 연약성을 나타낸 표현입 니다. 외경스러운 마음으로 말하는데 그분의 마음속에 거룩한 고뇌가 일어났던 것 같습니 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영어성경에는 ‘ 영혼’이라 되어 있음-편집자 주)이 심히 고민 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38). 또한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그분이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지니 고 계셨음을 보여 줍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 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러한 구절들로 미루어 보 건데,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신성이 영혼을 배제한 채 인간의 육체와만 결합되셨

음을 의미하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아울러 여러분은 그 육신이 죄악된 몸을 가 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육신” 이라는 말은 종종 이런 의미로 사용됩니다. 예 컨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갈 5: 17)라는 내용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항 상 이런 뜻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에 스겔 36:26에서는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는 약속 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 도께서 거룩하신 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의 탄생 시에 천사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 으리라”(눅1:35). 또한 그분은 인성에 있어서도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셨습니다(히7:26). 그분을 다른 인생들 과 확연히 구별시켜 주는 한 가지 사실인즉 그 분께는 죄가 없으셨다는 점입니다(히4:15). 그 분은 죽으심을 통해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히9:14). 그가 하나님께 드리신 모퉁이돌 | 15


것은 바로 인간으로서의 자기 영혼과 몸 전부 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인성이 거룩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상고할 때 가 되었습니다. 신성에 있어 제2위격이신 분 이 거룩한 인간의 영혼과 더불어 그리고 갈증 과 고통과 눈물과 피곤과 수난 따위를 당하기 마련인 연약한 육신과 더불어 하나가 되셨습 니다. “육신”이라는 말 속에는 이러한 연약성 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 습니다.” 이는 우리의 유약함을 언급한 내용입 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경건의 비밀은 참 으로 지대합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통해 스스 로를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이 왜 육신을 통해 계 시되셨을까 하고 의문을 갖는 이들이 있을 것 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하나님의 율법을 어겼던 인생과 동일한 성 품을 입고서 그 율법에 순종하시기 위함입니 다. 마귀가 인간을 꼬드겨서 율법을 짓밟게 했 을 때 그는 율법이 다시는 머리를 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율법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 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 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갈4:4,5). 그분이 율법 아래 나신 것은 율법에 순종하시기 위함이었고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것은 그 저주를 참아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 상황에서 그 리스도는 율법에 순종하실 수 있었고 그래서 율법을 더욱더 존귀하게 여기게 하셨던 것입니 다. 그분이 육신이 되신 큰 이유들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그 때문이 아니었 다면 그분은 이 땅을 단 한 시간정도만 방문하 16 | 모퉁이돌

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그토 록 오랫동안 머무신 것은 율법이 참으로 선한 것임을 보여 주시기위 함이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세상을 돌아본다면 하나님 의 거룩한 율법의 빛으로 세상을 비춰 본다면 그 율법이 얼마나 끔찍스 러울 정도로 범해져 왔는지 를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주일을 범하는 일들, 온 갖 도적질과 허탄한 맹세와 간음 등 이 모든 악한 일들 이 세상에 가득 하여 말하자면, 율법을 파괴하 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겸 손히 낮아져 육신을 입으 사 사람들과 천사들과 마 귀들에게 그 분의 율법이 참으로 존귀하 다는 사실을 보 여 주셨는데 이로 써 율법은 그것이 전혀 범해지지 않았 을 때보다 그 존귀성을 더욱 밝히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2)죽음을 당하시기 위함 [즉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 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


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 2:9).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 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 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 귀”를 없이하시며(히 2: 14). 이 두 구절을 통해 분명해지 는 것은 말씀이 죽음을 당하 기 위해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만일 그 분이 아버지의 품 에 계셨다면 고난 을 당하실 수 없 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성 은 고난당하 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 은 죽음을 당 하기 위해 육 신이 되셔야 했습니다. 그 분이 육체를 입 으신 것은 저주 를 감당하기 위해 서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저주 아래 있 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 저주를 감당하기 위해 스 스로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3)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 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 려 하심이라”(히 2: 17).

우리와 같은 심정을 지녀본 자들이 우리를 가장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법입니다. 아시다시 피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나그네들을 친절하 게 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애굽 땅 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 느니라”(출 23:9).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 너는 인생의 마음을 잘 아느니라”고 말씀하십 니다. 이것이 그분이 육신이 되신 또 다른 이유 입니다. 고난당하는 신자들은 자신과 같은 시 련에 처한 친구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겸손은 “그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 셨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는 “마치 천막 속에 거하듯 우리 가운데 장막 을 치셨다”는 뜻입니다. 신학자들은 광야에서 의 성막이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성막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였듯이 그리스도 는 죄인과 하나님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그분이 이리저리 다니 셨음을 암시합니다. 성막이 그러했기 때문입니 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겸손의 한 부분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낮은 상태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분의 삶은 가난한 삶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 셨을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고난을 성결케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나 는 교회에 입고 갈 만한 옷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머리 둘 곳도 얻지 못하셨음을 모릅니까? 그분이 마치 천막 속에 거하듯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입을 만한 옷이 없어 교회에 가지 못한다고 하 는 변명일랑 버리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궁전 을 택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하셨 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겸손을 통해 풍성히 드 러나는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모퉁이돌 | 17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 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혹자는 “그분이 육신이 되셨을 때 하나님 되심을 중단하셨습니까?”하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자신의 영광을 완전히 감추셨습니까?” 그렇지 도 않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그 영광 을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분을 믿지 않은 어떤 사람들도 그분의 영 광을 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기억 하시겠지만 천사들이 그분의 영광을 보았을 때 즉 그분이 탄생하셨을 때 별이 나타났으며 [육 신적인 사람들도 육안으로 그 별을 볼 수 있 었습니다. 또한 그분이 성전에 앉아 박사들과 논쟁하셨을 때 그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습 니다.] 온 세상이 그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때 물을 포 도주로 변하게 하셨고 사람들은 육신적인 눈 으로도 그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모든 이적들이 마찬가지 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영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것은 모든 영광은 아 닙니다. 그러면 그 영광이란 무엇일까요? 그것 은 하나님의 완전성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지 혜와 사랑의 영광이었습니다. (1) 하나님의 지혜의 영광이 예수님을 통해 나 타났습니다. 영안이 열린 자들 외에 누가 그 영광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분은 매사에 많은 사람들 의 고난을 짊어지셨습니다. 이 영광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 니다. 여러분은 이 영광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성육신하신 말씀을 통해 비추인 영광 입니다. 그것은 단지 별이나 성전에서 보여 주 신 지혜, 혹은 이적들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18 | 모퉁이돌

그것은 구속의 계획 [곧 그분이 “다 이루었다” 고 말씀하심으로써 완수하신 바로 그 계획] 이 었습니다. 그분의 지혜를 통해 바로 그분의 영 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2) 아버지의 독생자의 사랑이 거기에 담겨 있 었습니다. 그분이 베들레헴의 어느 말구유에서 탄생하 신 사실 자체가 아버지의 독생자의 사랑을 보 여 줍니다. 여러분은 그 사랑을 본 적이 있습 니까?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묻고자 합니다. “ 그 영광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요한은 이르기 를,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고 합니다. 죄 인이 처음으로 평안을 얻게 되는 때는 신성을 지니신 분이 자기를 대신하여 죄의 저주를 짊 어지셨음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때 그 영혼 은 “내가 여기서 안식하리라”고 말합니다. 여 러분은 그 영광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 영광 은 여러분의 눈이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야 볼 수 있습니다. 3. 그리스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 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영광스러우시다면 나는 감히 그분께 나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단지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 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아버지의 모든 완전성이 그리스 도 안에 거한다면 나는 그분께 나아갈 수 없 다 - 내가 어찌 감히 그분께 나아갈 수 있겠 는가?”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대 답할 수 있는 말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분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이 말의 뜻을 보다 명쾌하 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분이 은혜로 충만하심 [그분은 진노 를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십니


다.]을 뜻합니다. 한번은 그분이 레위인의 집에 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으셨습니다. 어떻 게 그들이 그분 곁에 앉을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분이 은혜로 충만하셨기” 때문입니 다! 우리는 그분보다 더 적합한 구주를 상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진리로 충만하십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 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율법은 그림자였고 그리스도는 본체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진리입니다. 그 분이 베푸시는 용서는 참된 용서입니다. 그분 이 주시는 평안은 참된 평안입니다. 그분께 나 아가지 않으렵니까? 이제 나는 무거운 죄짐을 진 모든 이들을 그 분께 나아가도록 초청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주께 나아가야 하는 두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 습니다. 첫째, 그분이 은혜로 충만하시기 때문 입니다. 둘째, 그분이 진리로 충만하시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은 신성을 지니신 구주를 필요 로 합니다. 아울러 여러분은 은혜로 충만하신 구주를 필요로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구 주로서 적합하시지 않다면 다른 어떤 구주를 생각해 낼 수 있겠습니까?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 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만일 여러분이 나아오지 않으면, 그분이 여 러분에게로 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 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 20).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 에게 소리를 높이노라”(잠 8:4)고 말씀하신 분 은 참으로 은혜로 충만하신 분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오랫동안 그분 없이 살며, 그분의 보혈을 무시하고, 또한 그분의 초청을 경멸하였고, 여러분은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 음으로써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죄를 깨달은 후에도 얼마나 오랫동안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얼마나 오랫동안 참 으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으로 충만하시지만 또 한 은혜로 충만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토 록 은혜로우신 구주를 거부한다면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면 그 보응을 어찌 피하 리요”(히2:3)? 그리스도의 보혈을 멸시한 자들 에게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도 과하지 않을 것 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 기를 당부드립니다.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곁길 로 나아가는 자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십니까? 우리는 그토록 자애로우실 뿐만 아 니라 그토록 크신 권능을 지니신 구주를 멸시 하는 죄악이 얼마나 중하고 위험한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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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귀중성과 그것을 아끼는 것의 중요성 조나단 에드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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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장 6절 “시간을 아끼라(redeeming the time).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유익함과 다른 사람들 을 악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그들의 기회들을 사 용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시간은 대단한 가치를 가지며 지혜로서 활용되어야만 한다. 1. 왜 시간이 귀중한가? (1) 왜냐하면 우리의 영원한 복락이 그것의 올 바른 사용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귀중성은 그것의 중요성에 의존한다. 시간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으로서 우리가 영 원한 불행을 피할수 있거나 영원한 행복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2) 왜냐하면 시간은 짧기 때문이다. 일용품은 부족할때에 가치가 올라간다. 시간 은 적고 짧다. (3) 왜냐하면 시간이 계속 주어질지 불확실하 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모른다.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 만약 어떤 여행 자의 식량이 부족하다면 그는 그것들을 가치있 게 여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간이 곧 끝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그것을 소중하게 여길 것 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기에 그 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4) 왜냐하면 시간은 지나가면 다시 찾을수 없 기 때문이다. 물건은 잃은후에도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한번 가면 다시 찾을수 없다. 회개해도 그것을 다시 얻을수 없다. 사용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 뒤로 지나가 버린다. 죽음이 오면 시간은 끝난다. 그러므로 영원한 복락을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파산선고를 받을 것이다. 2. 지나간 시간 사용에 대한 회상 당신은 많은 것을 잃어왔다. 아마도 당신의 모 레시계 속에는 몇 개의 모레 알갱이만 남아 있

을수도 있다. 당신의 태양이 저물어 가고 있다. 어떻게 당신 은 시간을 활용해 왔는가? 당신은 순간들, 날들 을 해들을 헛되이 보내왔는가? 당신 인생의 날들 을 판단해 보라. 매 순간이 귀중하다. 그러한 날 들이 헛된가? 하나님이 당신에게 시간을 주셨다. 만약 그가 그것에 대하여 물어본다면 무엇이라 답할 것인 가? 당신의 젊음, 여가, 주일날들에 무엇을 해 왔 는가? 당신의 양심이 답하게 하라. 3. 시간 남용자를 향한 질책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시간은 솔로몬의 은과 같이 가치가 없다. 돈을 하찮은 것이라 하여 던 져 버리는 사람은 미친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럼에도 돈보다 더 귀중한 시간은 많은 사람들 에 의하여 낭비된다. 당신이 가진 것을 낭비하면 줄 것을 아무 것도 가질수 없을 것이다. (1) 게으른 자들 나태한 자들은 몸이나 영혼, 가족들, 이웃들, 나라를 위하여 어떠한 선도 행 치 않는다. 그들에게 시간은 술과 사회생활, 무익한 잡담 을 위하여 허비하는 장애물이다. (2) 악인들 그들은 악한 목적, 즉 그들 자신들 과 다른 사람을 헐뜯으면서 시간을 소비한다. 그들은 마시고 흥청거리며, 잡담하고 깨끗지 못한 일을 행하며, 나쁜 동무를 사귀고, 다른 사 람들을 고통으로 이끌며, 영혼들에 상처를 주고, 다툼을 일으킨다. 그들이 회개한다면 그들은 허비한 시간들을 후회할 것이고 행하였던 나쁜 일들을 되돌리기 위하여 크게 힘을 써야만 할 것이다. 시간을 잘 못 사용하여 후회하면서 사는 것보다 어떠한 시 간도 가지지 않는 것이 더 낫다. (3) 세상적인 사람들 그들은 부지런히 일하여 이윤을 얻는 것들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영혼을 잃으면, 시간도 잃 을 것이다. 모퉁이돌 | 21


왜냐하면 시간은 이기적인 사용을 위하여 주 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 이상 없다면 당신이 얻은 어떠한 것 도 당신에게 유익되지 못할 것이다. 4. 어떻게 시간을 활용하는가. (1) 시간에 대하여 하나님께 해명해야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라. 시간은 달란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다. 끝날에 그는 우리를 불러서 회계하라 고 할 것이며 어떻게 우리가 시간을 사용했는지 를 물을 것이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당신이 어떻 게 그것을 사용해 왔는지를 생각하라. (2) 당신이 이미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잃어버 렸는지 생각하라. 남아 있는 시간들을 올바로 사용하라. 잃어버 린 시간들을 구속하라(redeem). 허비한 시간에 비추어보아, 그것의 사용에 더 욱 근면하라. 왜냐하면.. (a) 당신의 기회는 더욱 더 짧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다. 당신이 잃어버린 해들을 생각할 때에 인생은 더욱 짧다. 그리고 기회들은 더욱 없다. (b) 당신의 일은 더욱 더 크다. 당신은 더 적은 시간을 가지고 있음에도 여전 히 회개의 그 일은 동일하다. 시간을 허비함으로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일을 도모해 왔다. 모든 힘을 다하여 이제 회개하라. (c) 당신은 당신의 시간중에서 최상의 시간을 잃어버렸다. 지나간 어린 시절들이 가장 최상의 것들이다. 젊음을 죄악가운데 살아온 것은 일생의 가장 최 상의 부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낙심하지 말라. 사단은 젊음 속에 있 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들어 그들에게 여전히 시간이 있음을 말하고 말년에는 너무 늦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심지어 늦은 시간에도 하나님은 회개하도록 부르시며 만약에 당신이 진지하다면 회개하게 하실 것이다. 22 | 모퉁이돌

(3) 몇 몇 사람들은 죽을때에 시간을 귀중하 게 생각할 것이다. 죽음의 침상에 있는 죄인들은 시간의 귀중성을 보며 일초의 시간을 위하여 부르짖는다. 당신이 눈이 멀었고 속고 있기에 그들이 죽음의 때에 깨 닫게 되는 시간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4) 이미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들의 시간에 두는 가치를 생각해 보라 저주받은 자들은 영생 얻을수 있는 기회를 다 시 가지는 시간을 갈망한다. 당신은 동일한 갈망을 가지는가? 적용 1. 지체없이 귀중한 시간을 활용하라 그렇게 하 지 않는 것은 당신에게 시간이 어떠한 가치도 없 음을 증명한다. 2. 가장 귀중한 시간의 부분들을 활용하라 일 반적인 시간이 있는 반면에 거룩한 시간도 있다.  당신의 주일을 활용하라.  특별히 공예배를 활용하라.  거룩한 의식아래서 부주의 하지 말라.  당신의 젊음을 올바로 사용하라.  당신과 함께 애쓰시는 성령의 시간을 가치 있게 하라. 왜냐하면 그때 하나님이 가까우시며, 그 시간 이 귀하기 때문이다. 3. 당신의 여가시간을 활용하라 모든 사람은 얼마간의 여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당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 라. 여가는 세속적이거나 영적인 것에 종속된다. 시간이 더 이상 없을 그 날을 생각하며, 당신 의 모든 달란트와 장점 그리고 기회들을 최대로 사용하라. ◈


그리스도의 죽음과 표적 존 라일(J. C. Ryle)

“45 이에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46 제 구시 즈 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 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이들이 듣고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하고 48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지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은 ‘그냥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 를 구원하나 보자’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홀연히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또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 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 보고 있었으니 56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 대의의 어머니도 있더라” (마 27:45-56). 모퉁이돌 | 23


본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결말 에 대한 말씀이다. 6시간 동안의 지극한 고통이 지난 후 주님은 죽음에 순종하여 “영혼이 떠나 시게”되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세 가지 요점에 특 히 주의를 두게 된다. 이것들에 우리의 주의를 집 중시키도록 하자. (1) 우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하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 셨나이까?”라는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말씀 속에는 어떤 인간도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신비가 담겨 있다. 틀림없이 그 말씀은 주 님이 단순한 육체적 고통 때문에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그런 설명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며 우 리의 거룩한 주님께도 불명예스런 것이다. 그보 다 그 말씀은 세상 죄가 주는 거대한 짐이 주님 의 영혼에 미치는 압박감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 된다. 그리고 그 말씀은 진실로 그리고 문자 그 대로 주님이 우리의 대리인이 되어서 죄인이 되 었고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사 이 세상의 죄 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를 주님 자신의 몸 으로 받으셨던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 두 려운 순간에 우리들의 모든 죄악을 주님 위에 극 도로 쌓여지게 된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 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 다(사 53:10). 주님은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 의 불법을 지켰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인 주 님이 자신을 한 동안 버려진 자로 말씀하실 바 로 그때에 그 짐은 틀림없이 무거웠을 것이며 주 님께서는 실제로 그리고 문자 그대로 우리를 대 신하셨을 것이다. 이 표현을 깊이 명심하고 잊지 말도록 하자. 주 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친 것 보다 더 강하게 죄의 죄됨과 그리스도의 고통의 대속성을 증거해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 외침을 듣고 우리는 죄를 미워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도록 해야 한다. (2) 우리 주님의 최후를 묘사하는 말씀 속에 24 | 모퉁이돌

는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 살펴보도 록 하자. 성경은 간단히 “주님의 영혼이 떠나시다”라고 말한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마지막 순간은 결코 없었다. 그처럼 많은 것이 좌우된 사건은 없었다. 로마 병사들과 십자가 둘레에 서서 멍청히 바라 보고 있는 군중들은 이 속에서 눈에 띄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 람들처럼 십자가 위에서 죽는 사람들과 별다를 것없는 고뇌와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것을 보 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과정 안 에 포함되어 있는 영원한 중요성에 대해서는 전 혀 알지 못했다. 그 죽음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큰 빚을 갚아버렸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문 을 열어놓았다. 그 죽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 이 요구하는 의를 만족시켜 주었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되실 수 있게 했으며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로운 자라고 인정하실 수 있게 하였 다. 그 죽음은 단순한 자기 희생의 본보기가 아 니라 모든 인류의 조건과 앞날에 영향을 끼치는 인간의 죄를 위한 완전한 속죄와 화해의 본보기 가 되었다. 그 죽음은 하나님이 어떻게 완전하게 거룩하시며 어떻게 완전하게 자비로우실 수 있 는가 라는 어려운 문제에 해답을 주었다. 그 죽 음은 전 세계에 모든 죄와 부정(不淨)을 씻을 샘 을 열어놓았다. 그것은 사단에 대한 완전한 승리 였고 공개적으로 그 사단을 망쳐놓은 사건이었 다. 그것은 모든 죄악을 멈추게 하고 그 죄악에 대한 화해를 가져왔으며 영원한 의로움 또한 가 져왔다. 그것은 그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 같은 희생이 필요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 죄가 얼마 나 무서운가를 증명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 신의 아들을 속죄하기 위해 보냄으로써 죄인들 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해주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러한 죽음은 과거에도 결코 없었고 미 래에도 다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 리 대신에 그 저주받은 나무 위에서 돌아가셨을 때에 땅이 진동한 것은 조금도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세상의 굳건한 토대가 흔들리고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사53:10). (3) 우리 주님이 돌아가시는 순간에 유대 성전 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기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성소 휘장이 둘이 되었다라는 말씀을 읽는다. 지성소를 성전의 나머지 부분과 분리시 켜서 그를 통하여 대제사장만이 통과할 수 있었 던 그 휘장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우리 주님의 죽음에 수반하여 일어났던 모든 놀라운 표적 중에서도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은 없다. 세 시간 동안의 대낮의 어둠도 놀랄 만 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바위를 터지게 했던 지진 도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휘장이 위 로부터 아래까지 갑자기 나누어진 사건 속에는 지적인 모든 유대인들의 마음을 찌른 의미가 담 겨 있었다.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양심은 그 둘 로 나뉜 휘장에 대한 소식을 듣고 참으로 당황 하였을 것이다. 휘장이 나뉜 것은 의식법의 종결과 사라짐을 선포하였다. 그것은 희생제물과 의식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표적이었다. 그 일은 이제 완성 되었다. 그 일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순 간부터 사라져버렸다. 지상의 대제사장과 언약궤 의 뚜껑과 피를 뿌리는 일과 향을 드리는 일, 그 리고 속죄의 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참 된 대제사장이 마침내 나타나셨다. 하나님의 참 된 어린양이 도살을 당하였다. 참된 언약궤의 뚜 껑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림자나 어렴풋한 윤곽 은 이제 더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이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제단을 세우는 일, 희생제, 제 사장은 이제 환한 대낮에 촛불을 켜는 일처럼 소 용이 없게 되었다. 그 휘장이 나뉜 일은 구원의 길이 모든 인류에 게 열려졌음을 선포하였다. 그리스도가 죽을 때 까지 하나님의 임재의 방법은 이방인들에게는 알 려지지 않았었고 오직 유대인들에 의해서만 희미

하게 보였었다. 그러나 완전한 희생제물로서 이 제 자신을 드리고 영원한 구원을 성취하신 그리 스도로 인하여 그 어둠과 신비는 사라지게 되었 다. 초대받은 모든 사람은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 로써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와 자신 있게 하나 님께 다가간다. 한 문이 열려졌고 생명의 길이 전 세계 앞에 펼쳐있다. 이것을 우리 모두 기억하도 록 하자. 예수님께서 죽으신 때로부터 평화의 길 은 결코 신비로 덮여 있지 않게 되었다. 어떤 제 한도 없다. 복음은 시대와 세대를 걸쳐 숨겨져 온 신비에 대한 계시가 되었다. 이제 신앙을 신비 로 덮어 싸는 것은 기독교의 장엄한 특성을 잘 못 이해하는 것이다. 십자가상의 죽음에 대해 읽을 때마다 찬미하 도록 하자. 그것이 우리가 자신 있게 용서함에 대 한 소망을 두게 하는데에 대해 하나님을 찬송하 도록 하자. 우리의 죄는 많고 또한 아주 크지만 우리의 위대한 대리자가 치루신 댓가가 그 모든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케 해줌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자.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은 확실히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자신을 믿는 모든 백성들에게 동정을 베푸시는 예수님 을 인하여 하나님을 크게 찬송하자. 주님은 우리 의 연약함을 체험하셨던 분이다. 주님은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 주님은 이 악한 세상에서 연약한 몸과 마음을 가진 자들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구세주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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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를 용납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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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의 윤리적 문제들 중 또 다른 하나는 교회들이 동성애를 용납하는 것이다. 동성애(同 性愛)는 동성 간의 성행위를 말한다. 275)오늘날 사회에는 동성애를 용납해야 한다는 소리가 강 해지고 있고 교회들 안에서도 동성애를 용납하 려는 움직임이 널리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276) 교 회가 동성애를 용납할 수 있는가? 1972년, 미연합그리스도교회(UCC)는 윌리암 존슨의 안수를 허락하였다. 그는 대교단에서 안 수받은 첫 번째의 공공연한 동성애자이었다.277) 1980년, 미연합그리스도교회는 현행적 남녀 동성 애자들을 목사로 봉직하도록 공식적으로 허용한 최초의 유일한 대교단이 되었다.278) 1985년, 2년마 다 모이는 미연합그리스도 교회 총회는 동성애자 들을 목사로 허락하는 것을 압도적 표수로 결정 하였다.279) 1988년, 카나다 연합교회(UCC)는 카나 다에서 동성애자들의 목사 안수를 합법화한 최 초의 교단이 되었다.280) 1993년 11월,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리-이메이징 대회를 후원하였 다. 그 대회 연사 중 다수는 여성 동성애를 조 장하였고 약 100명의 여성 동성애자들은 동성 애를 자축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와 기립 박수 를 받았다. 그 대회에서 미 장로교회에서 스스 로 동성애 여목회자라고 공언한 제인 스파는 말 하기를, 그의 신학 지식은 무엇보다도 그의 동성 애 파트너인 “코니와 사랑을 함”으로써 얻었다 고 하였다.281) 1997년 9월,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의 제 일연합감리교회의 지미 크리치 목사는 그의 교 인들 중 두 명의 여자 동성애자들을 위해 결 혼식을 거행하였다.282) 1998년 1월, 연합감리교회 (UMC) 목사들 일부가 동성애를 옹호하는 성명 을 발표하였다.283) 1999년 1월 16일, 한 여성 동성애 부부가 미

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 1500명의 사람 들 앞에서 95명의 연합감리교회 목사들에 의해 서 ‘축복’을 받았다.284) 그들은 그 의식을 동성애 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동성애자들의 결합에 대 한 그들 교단의 금지 조치에 항의하기 위해 사 용하였다.285) 미국의 대표적 동성애교회인 메트로폴리탄 커 뮤니티교회 세계협회의 지도자 그윈 깃보드는 1999년 미국교회협의회(NCC) 총회에서 연사로 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회집된 교회협의회 대 표들 중 회소한 절반은 서서 그 여자에게 갈채 를 보내었다.286) 2001년, 그 여자는 캘리포니아 교 회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287) 1999년,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는 동성애 전도자 제인 스파를 그 해의 ‘신앙의 여성’ 수상 자로 지명하였다. 두 명의 자녀를 둔 이 이혼모 는 그 교단을 섬기는 첫 번째 공공연한 동성애 자이었다.288) 1999년, 미합중국장로교회 총회는 동성애자 안 수금지를 규정한 ‘정절과 순결’ 헌법조항 삭제를 주장하는 교회직제 목회위원회의 ‘다수파’ 보고 서 대신, 동성애자에 대한 목사 장로 집사 안수 여부를 놓고 2년간 연구와 토론을 하자는 ‘소수 파’ 보고서를 지지하였다. 다수파 보고서 지지 총 대는 198명(38%)이었고 소수파 보고서 지지 총 대는 319명(61%)이었다.289) 미합중국장로교회 총회재판국은 2000년 5월 노스이스트 대회재판국의 판결에 불복하여 올 라온 두 건의 상소 사건을 다루면서, 목사의 동 성애자 결합식 주례를 인정하며 동성애자 목사 후보생을 인정하는 대회 재판국의 판결을 정당 하다고 판시하였다.290) 2001년 6월, 미합중국장로교회 총회는 동성애 성직자 안수에 관한 금지조항을 제거하도록 317 모퉁이돌 | 27


대 208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전국 노회 투표에서 부결되었다.291) 2000년 2월 12일, 미감독교회(ECA)의 올림피 아 교구 세인트 마크 대성당에서는 공공연한 동 성애자 로버트 테일러 주교의 수석주교 임명식이 거행되었다. 200명에 달하는 교구 대표들과 세계 각지에서 온 수백명의 성직자와 교회 대표들이 그 의식에 참석하였다.292) 2003년 6월 7일, 미국 뉴햄프셔주 관구는 미 감독교회 역사상 최초로 공공연한 동성애자 진 로빈손을 주교로 선출하였다. 로빈손은 13년 전, 결혼서약을 깨뜨리고 그의 아내와 두 어린딸을 버리고 그의 남자 파트너와 함께 이사한 자이 었다.293) 심지어, 일부 복음주의자들도 동성애를 옹호한 다. 랄프 블레어가 인도하는 ‘관심 있는 복음주의 자들’ 이라는 친 동성애 단체는 연례 여름수련회 들을 가진다. 여러 해에 걸쳐서 그 단체의 주요 강사들의 명단에 플러신학교 윤리학 은퇴교수 루 리스 스미즈 등도 포함되었다.294) 1992년11월, 라틴아메리카선교회(LAM)의 토 마스 행크스는 복음 주의신학회 연례 모임에서 회원들에게 동성애에 관한 그들의 부정적인 사고 를 수정하라는 도전적 강연을 하였다.295)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 안에 동성애를 용납하 는 경향은 현대교회의 배교의 한 증거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동성애를 사형에 해당하는 가증한 죄로 여기신다. 그것은 다른 큰 죄와 같이 하나 님의 교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오직 철저히 회개해야 할 죄이다. 성경에서 맨 처음 동성애를 말한 것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이야기에서이다(창 19장). 소돔성의 사람들은 그 날 저녁에 롯의 집에 들어 온 사람 28 | 모퉁이돌

들과 성관계를 갖기를 원하였다. 어떤 이는 소돔 성의 이야기가 동성애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해석이다. 그 성 ‘남자들’( 안쉐) 곧 소돔 ‘남자들’(안쉐)은 “네게 온 그 ‘남 자들(하이나쉼)이 어디 있느냐? ‘그 남자들을 이 끌어 내라’(호치엠). 우리가 ‘그 남자들과’(오담) 상관하리라”고 말했다(창 19:5). 이것은 분명히 남자들이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를 갖겠다는 뜻 이다. ‘상관한다’는 말(야다)은 성경에서 17번 이 런 의미로 쓰였다. 사사 시대에도 소돔성의 일과 비슷한 일이 있 었다. 그것은 기브아의 이야기이다(삿 19장). 기브 아의 불량배들은 거기 살던 노인의 집에 유숙하 기 위해 들어온 레위인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하며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고 말했다(삿 19:22). 그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벨리알의 ‘아들들’(베네) 인 그 성의 ‘남자들’ (안쉐)은 말하기를, 네 집에 들어온 ‘남자’(하이쉬)를 끌어내라. 우리가 ‘그 남 자와 상관하리라’(웨내다엔누)” 이다. 그들이 동 성애 관계를 원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성애는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큰 죄 악이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연합 케 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위배될 뿐만 아니 라 또한 “간음하지 말라”는 제 7계명을 위반하는 음란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악하고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 하셨다. 또 사사 시대에 심히 음란했던 기브아와 베냐민 지파 전 체는 거의 전멸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었다. 율법은 부부 관계를 벗어난 성 행위, 즉 결혼 전 혹은 결혼 외의 성 행위를 음란으로 정죄하 며, 특히 동성간 성 행위를 가증한 죄악으로 간 주한다. 레위기 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신 명기 23:17,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카데쉬, 동 성애자)이 있지 못할지니.” 열왕 시대에도 남색(동


성애)은 큰 악으로 정죄되었다(왕상 14:24, 15:12, 22:46, 왕하 23:7). 동성애 죄에 대한 형벌은 사형 이다. 레위기 20:13,”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 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 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신약성경도 동성애를 큰 죄로 간주하며 그 죄 를 짓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분 명히 증거하였다. 로마서 1:26-27,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 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 어 역리로 쓰며(매춘, 동성애), 이와 같이 남자들 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 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 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난 술 취하는 자라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

275) 김효성, 기독교 윤리, 146-151쪽에서 가져옴. 276)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자료집, 100-122쪽 277) Christian News, 27 October 1997, p.5 278) Christian News, 13 April 1992. 279) Christian News, 29 April 1985, p.3 280) Christian News,27 October 1997, p.5 281) Christian News,27 October 1997, p.5 282) Christian News, 24 November 1997, p.11 283) 크리스챤신문, 1998. 1.26, 2쪽 284) Christianity Today, 1 March 1999. 285) Calvary Contender, 15 March 1999. 286) National Liberty Journal, February 1999; Calvary Contender, 15 February 1999

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디모데 전서 1:10, (불법한 죄의 예들) “음행하는 자며 남 색하는 자며.” ‘탐색하는 자’(말라코스)는 남색의 상대자를 가리키고, ‘남색하는 자’(아르세노코이 테스)는 ‘남자 동성애자’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동성애가 죄악이라는 것은 신구약성경에서 너무 나 명백하다. 또한 오늘날 동성애를 통해 에이즈 전염병 (AIDS, 후천성 면역결핍증)이 많이 퍼지고 있 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여야 한다. 1985년의 한 보도에 의하면, 미국의 에이즈 환자 12,067명 중에 남성이 92%인데, 그 중 78%가 동 성애자라고 한다.296) 유엔 에이즈 계획(UNAIDS) 에 의하면, 2002년 7월 현재 에이즈 바이러스 (HIV) 감염자수는 세계적으로 4천여만명이며, 향후 20년가 약 7천만명이 에이즈로 사망할 것 으로 예상하고 있다.297)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리 시는 시대적 재앙이다. 동성애는 죄악이다. 참 교 회는 이 죄로부터 성별되어야 한다.(김효성 목사 의 “현대교회문제 자료집”중에서) ◈ 287) Calvary Contender, 15 April 2001 288) Calvary Contender, 1 April 1992. 289) 기독신문, 1999. 6.30, 16쪽 290) 기독신문, 2000. 5.31, 8쪽 291) Huntsville Times, 16 june 2001; Calvary Contender, 1 Jul 2001; 크리스챤 신문, 2002. 3.4, 2쪽 292) 기독신문, 2000. 3.15, 8쪽 293) ENI, 10 June 2003; Friday Church News Notes, 13 June 2003; Christian News, 23 June 2003, p.2. 294)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8 295) Calvary Contender, 1 July 1993. 296) Times, 12 August 1985. 297) 조선일보, 2002. 7. 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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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에 대하여 조지 휫필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후 5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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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중생,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태어남’ 이라는 교리는 거룩한 우리 종교의 가장 근간이 되는 교 리의 하나이다. 이렇게 중요한 교리를 성경에는 아주 평이하게 그리고 매우 빈번하게 기록되어 “뛰어가는 자도 읽을 수 있을” 정도다. 중생이 우리 각자의 구원을 결정하는 핵심이고 각 종파의 모든 신실한 크리 스찬들이 동의하는 구원의 요점이지만 소위 전문가들이라는 분들이(신학자) 일반적으로 중생을 거의 언급 하지도 않고 실험적으로 (경험적으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과장이 아니다. 스스로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사람 대부분이 중생과 같은 내용이 있는지 조 차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리상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유일신 하나님 한 분을 믿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하는 한 분의 중재자를 믿고 인간으로 육화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을 믿는다.”고 하는데 이 말 자체는 사실이다. 자신들을 구원할 이름은 예수님이라는 이름 말고는 하늘 아 래 달리 없다. 그러나 이들은 중생하지 않았으며 거듭나지 않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은 그리스도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예수님 보혈의 분깃에 참여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니고데모와 함께 외쳐야 할 처지이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한가?”라고 말이다. 아니면 사도 바울이 아테네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의 경우처럼 대꾸 할 처지이다. “이 말더듬는 자가 뭐라고 말하는고? 이 자는 이상한 교리를 세우는 자 같군.”이라고 말이다. 이들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설파하고 새롭게 태어나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나는 미력이나마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는데 힘을 보태고자 한 다. 이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연합해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는 것과 자기 자신이 성 화되지 않고 자신의 본성이 변화되어 거룩하게 되지 않고도 그리스도에 의해 의롭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죄가 사함을 받았고 자신들은 완벽하게 순종하는 자가 되었다고 헛된 망상을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음과 같이 확대하여 해석해 보겠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살펴보도록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본다. 둘째, 새로운 피조물이란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했다. 셋째, 바울 사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주장을 덧붙이겠다. 넷째, 먼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것 이상 추론해 볼 수 있는 내용 몇 가지를 도출해서 언급하고 한두 마 디 권면의 말로 결론을 짓겠다.

1. 그 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를 다음 두 가지 방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1) 외적인 공언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기독교인이라 불리거나 기독교회에서 침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

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런 의미로만 이 구절을 말한 것이 아님은 분 명하다. 당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거나 현실 의 기독교회에서 침례를 받은 자는 모두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천부당 만부당하다. “물로 태어난” 자가 “성령으로 태어 모퉁이돌 | 31


난” 자인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이 사실은 너무 나 쉽게 확인되며 분명히 그렇다. 다시 말해 많 은 사람들이 물로 침례를 받았지만 성령으로는 전혀 침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는 단 순히 외적 공표 내지 주의 이름을 따르도록 부 름을 받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도 했다. “외형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다. ” 이 말을 우리 기독교에 적용하면 명목상 크리스찬이 다 참 크 리스찬은 아니다. 크리스찬이기는 커녕 그 근처 도 못 온다. 우리 주님은 이와 관련해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 이름으로 예언하고 설교하고 또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많 은 기사를 행하여도 마지막 심판날에 버림받을 것이라고 했다(마 7:21-22). 그때 우리 주님은 “ 나를 떠나라.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라 이 불의 의 일꾼들아”(마 7:23)라고 하실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보다 내밀한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이 당한 고난 의 은총에 참여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 안 에 있다는 것은 외적 공표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내적 변화와 마음의 정화를 통해 주님의 성령과 함께 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즉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신비롭게 연합하 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부터 영적 덕성 (virtue)을 받는다. 이는 마치 머리와 우리 몸 각 지체의 관계,또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와 같 다. 사도 바울이 자신에 대해 말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안다”고 했고, 즉 참된 크 리스찬을 안다고 할 때처럼 그렇게 주님 안에 거 하는 것을 말한다. (고후 12:1-3 참조) 또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보낸 서신 서(빌 3:8-9)에서 간절히 소망하듯이 자신은 그 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지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 정도 수준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준이 다. ) 오늘 본문의 말씀은 분명 이상 살펴본 바대로 32 | 모퉁이돌

다. 그런 차원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할례에 관해 언급한다. 이 주제는 오늘 본문의 주제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외 적인 크리스찬이 참 크리스찬이 아니다. 육신에 외적으로 표현되는 침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내적이며 침례를 마음으로 받고 단순히 물이 아닌 성령의 침례를 받은 자는 참된 크리 스찬이다. 이런 자에 대한 칭찬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 한다. “할례든 무할례든 그것만으로는 새로운 피 조물이 되는데 전혀 유용하지 않다. ” 사도 바울 이 염두에 두고 선언하는 바는 누구든지 진정으 로 그리고 온당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명심하 고 이제 두 번째 논의로 가보자. (2) 새로운 피조물이란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여기서 먼저 확실히 짚고 넘어갈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이 말을 우리가 육 체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뜻으로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마치 원시적인 어 떤 보잘것없는 존재로 돌아가 재창조되어 형태 를 이루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니 고데모가 무지하게도 상상했던 것으로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해서 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의미 에 어떤 유익이 되겠는가? “육체로 난 자는 여전 히 육체로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늘 그 랬듯 세속적인 인간으로 남게 된다. 세속적인 부 모로부터 나와 결과적으로 모든 죄악과 부패의 씨를 부모로부터 물러 받았다. 간단히 말해 육적 인 상태에서 극적인 변화를 겪어 정신적 품성과 기질을 함양해야 하고, 옛 사람의 방식을 전적으 로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금광석 한 덩어리가 있다고 했을 때 이 금광석을 가공하여 다듬으면 전혀 다른 금으로 변하게 된다. 또 쓰 레기 더미에 덮여 있는 빛나는 유리를 닦아 투명


하고 깨끗하게 만들면 이 유리는 새 유리가 된 다. 문둥병에서 나은 나아만의 경우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이 문둥병 환자의 살은 어린 아이의 살처럼 회복되었고, 이 자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 다. 이렇듯 우리 영혼도 야만적이기 이를 데 없 지만 성령의 축복된 영향을 받아 온갖 더러운 것 과 쓰레기와 문둥병에서 정화되고 깨끗하게 된 다. 이 사람이 새로워졌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 는 것이다. 이런 영광스러운 변화가 우리 심령 속에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쉽게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 자신 말고는 아무도 성령 의 주권적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리 에 반박하는 주장 자체가 필요 없다. 우리의 복된 주님께서는 니고데모가 바로 성 령에 관해 물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 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 그리 고 우리는 자연 현상에 관해 들었을 때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성 령의 역사를 우리가(보통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 문 제의 진리를 정리해 보자. 중생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남 을 말하는 이 교리를 자연인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있으며, 우리 각자는 영적 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주장한 것이다. 2. 중 생의 문제에 대해 보다 상세히 언급하겠 다. 이 정도면 충분히 확증할 정도의 논의는 될 것이다. (1) 하나님 자신이 성경에서 이 점을 말했다. 구약에서 이와 관련된 구절들을 상당히 많이 뽑을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선생이었고 그 래서 율법의 영적 의미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했던 니고데모가 중생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 기 이하게 여겨진다. 니고데모는 중생을 이야기할 때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한가? 라고 우리의

복된 주님께 묻고 있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시편 기자가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또 “제 안 에서 온전한 영으로 새롭게 하소서”라고 하나님 께 너무나 자주 간청했던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선 지자들도 다같이 백성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가 지라고 경고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하 나님인 주님께 돌이키라고 했다. 구약에 있는 중 생의 교리와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와 관련된 내용은 신약에 서 너무나 자주 그리고 너무나 평이하게 인용되 고 있어 달리는 자도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또 한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요 선생님 자체 이셨던 분(곧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았던가? “사 람(자연적으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물 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 ” 우리가 이 주장을 간단히 무시해 버리지 못하 게 하려고, 즉 우리가 중생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해 니고데모와 같이 이 교리를 거부하지 않도 록 하려고 우리의 복된 주님은 맹세로 이 주장 을 확언하고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 니,”라고 말이다. 이 말은 이렇게 해석해 읽어도 된다. “아멘인 나, 진리 자체인 나는 네게 이르 노니 이것은 내 하나님 아버지가 하신 변할 수 없는 약속이니, 곧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 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가 된다. 이런 류 의 말씀을 사도들의 여러 서신에서 무수히 만나 게 되는데, 그때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질 것” 을 요청받는다. 이는 우리 마음 가장 깊은 품성 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부패한 옛 사람을 벗고 참 된 의와 거룩함 안에서 하나님을 따르도록 창조 된 새사람을 옷 입는 것이다. 옛 것은 마땅히 지 나가야 하고, 모든 것은 새로워져야 한다. 우리 는 “중생이라는 씻음으로, 곧 성령의 새롭게 함 으로 구원될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을 오늘 본 문에서 뽑은 말씀을 적절하게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굳이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사도 바울은 확고하게 다짐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 모퉁이돌 | 33


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 조금씩 다르게 표현된 여러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보자. 다시 태어나는 것(중생, 새 롭게 태어남)과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옷 입 는다는 것, 우리 마음의 영이 새롭게 되는 것, 새 피조물이 되는 것, 이런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하 고 실제적인 마음의 내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앞에서 열거한 표현들이 실제적 이지도 않고 확고한 의미도 없는 빈말이고 단순 한 비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가? 개중엔 이렇 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 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불행하도다. 이들이 이 렇게 비유로 해석하는 것은 전혀 부러운 일이 아 니다. 또 이들이 자신들을 구원하는 관점에서 해 석하는 게 아니라면 할 말이 없다. 이 구절들 외 에 수많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찾아봐도 똑같은 진리를 확증할 뿐이다. 앞에서 인용한 구절들은 너무나 평이하고 확실한 내용이라 아무도 그 내 용을 부인할 수 없다. “회심하지 않으려고, 그리 34 | 모퉁이돌

스도가 자신을 치유하지 못하게 하려고, 눈이 있 으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되 듣지 못하며, 자 기 마음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귀로 들으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도 있다. (2) 하나님은 성결하시고 인간의 현 상태는 부패 하고 오염되어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하나의 영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금 이야기는 성경을 안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다. ) 즉 하나님은 무한히 성스러운 존재로 “너무나 순결한 눈을 지니셨기 때문에 불의를 볼 수 없다. ” 정말 초월적으로 거룩한 것이다. 그래서 “천국조차도 하나님 눈에 는 깨끗하지 않으며 천사들조차도 흠이 있어 보 인다. ” 한편 인간은 전적으로 “죄로 잉태되고 태어난” 피조물로 묘사되어 있다. (모든 중생한 사람은 이 사실을 자신의 경험으로 알 것이다. ) 그래서 인간에게는 “조금의 선한 것도 거하지 않는다. ” “세속적이고 죄악 아래 거래를 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하나님에 대적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존재이다. 이렇듯 하나님 과 인간 사이에는 영원히 합치하기 어려운 차이 가 있다. 더럽고 부패하고 오염되어 곤고한 자인 인간이 변화하여 어느 정도나마 하나님같이 되 기 전에 어떻게 무한히 성결하고 거룩하신 하나 님과 함께 거할 수 있다고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겠는가? 불의를 볼 수 없는 성결한 눈을 가진 하나님이 불의와 거할 수 있는가? 천국마저도 깨 끗하지 않게 여기시는 분이 불결함 자체와 함께 거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빛이 어둠과 교 통하고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합치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3)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께서 예비하신 행복이란 어떤 것인지 고려해 보 자. 천국을 세부적으로 특별하게 묘사하기란 헛되 고 주제넘은 짓일 수 있다. 왜냐하면 “거룩한 예 수님의 신실한 추종자들에게 예비된 것들을 인 간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마 음으로 생각하지 못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다가올 미래의 천국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이 세상에서조차 우리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대 략적으로나마 윤곽을 그려보겠다. 하나님은 영이 시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닦아놓은 행 복도 영적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우리의 세속 적 마음이 변하여 영적으로 되지 않는다면 빛 속 에 있는 성도들이 향유할 유업에 절대 참여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패역한 자질을 그대로 유지 하고 우리의 모든 탐욕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천국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그 런가 하면 이슬람교도들이 생각하는 천국에서처 럼 감각적 즐거움을 최대로 누릴 것이라고 생각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직 영적인 관 계로 깨끗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이 축복된 집에 들어갈 수 없다. 천국의 향취를 조금이라 도 맛보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우리가 변화되어 야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타락한 우리

의 본성을 총체적으로 혁신해야 하는 것이다. 그 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전능한 하나님의 돌이 킬 수 없는 교리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거룩함이 없이는 (중생으로 성결하게 되고 그 럼으로 심령에 인침을 받아 하나님의 모습을 갖 게 되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 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거룩한 주님께서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사람이 거 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shall not 이 아니라 cannot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모 든 이치를 보더라도 우리가 어떤 것을 누리려고 할 때 거기에 합당하게 우리 기질과 여타 조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 안에서 우리가 어떤 편안함이나 만족함을 전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음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을 귀머 거리에게 들려준들 무슨 기쁨을 누리겠으며, 가 장 뛰어난 그림을 소경에게 보여준들 무슨 즐거 움을 얻겠는가? 미각을 잃은 사람이 산해진미를 즐길 수 있겠는가? 또 더러운 돼지가 꽃이 만발 한 아름다운 정원에서 기뻐할 줄 알겠는가? 그 럴 수 없다. 왜 그런가? 주어진 즐거움을 감지할 수 있는 합당한 마음의 기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심령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죽음으로 심령 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더 깊 은 차원의 즐거움이나 고통을 감지하는 능력이 확대된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즐겁다면 하 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과 함께 그 즐거움이 표 출될 것이다. 그리고 땅에서 성도들과 교통하는 것이 즐거웠다면 거룩한 천사들과 교통하고 사 귀는 것은 더욱 무한히 즐거울 것이다. 천국에서 인간의 영은 완전해진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 로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상태라면 우리의 영혼 은 전혀 행복할 수 없을 것임을 우리 자신이 잘 안다. 하나님 자신이 이 축복받은 자의 영역으로 그런 자를 허락지 않을 것이다. (4)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면 그리스도 의 구원은 우리 안에서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복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첫 번째이 모퉁이돌 | 35


자 주된 목적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우리 죄를 대 신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죄 값으로 내놓은 것이다. 하 지만 우리 구주의 죽음으로 단지 우리 죄 사함 만을 받은 것으로 끝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크게 기뻐할 이유는 별로 없는 셈이다. 저주받은 불쌍 한 죄인인 우리는 숙명적인 질병으로 멸망하도 록 예정되어 있는데 구주의 죽음으로 그의 심판 에서 용서함을 받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자로서 복락에 이르기에 법적 장애가 있다는 것은 물론 본성상 도덕적 불순함 때문에 어떤 강력한 변화 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기까지 (이미 앞에서 입증 되었듯이) 천국을 향유할 수 없음을 안다. 따라 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온전케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켜야 한 다. 그래야 우리의 구주께서 자신의 보혈로 산 복락을 우리가 향유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며, 자신 의 완전한 순종을 덮어 씌우며 우리의 부패한 본 성을 성화하고 정화하며 깨끗이 하고 전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또 “그 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롭게 하심과 성화와 구원 이 된다.”고 하였다.

로 다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이 정확한 사실을 안다면 모든 제도화된 방법들, 예를 들어 은총의 방법(기도, 금식,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 기, 성찬을 받는 것 등)은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 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내적으로 더 나아져야 하는 것이다. 심령 속에 영적 생명이 옮겨져야 한다. 종교적 의식은 수단 일 뿐이요, 종교의 전체가 아니라 부분일 뿐이다. 바리새인보다 더 종교적인 자들이 누가 있는가?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자기가 소 유한 전부의 십일조를 냈다. 하지만 우리 구주께 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셨듯이 이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지 않았다. 어쩌면 당신도 바리새 인과 같이 자주 금식하고 오래 기도하고, 헤롯 과 같이 기쁘게 좋은 설교를 듣는 자인지 모르 겠다. 그러나 당신이 여전히 헛되고 하찮은 것에 집착하고 부도덕하거나 세속적인 마음이라면 그 저 간신히 교회나 오가고 외적 의식이나 지키는 데 급급한 사람들과 좀 다르다고 해서 당신이 그 런 사람들보다 뭐가 더 나은가? 오히려 당신이 그런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쁘다. 당신이 거룩한 종교적 수단을 이용하고 남용하는 것을 보면 사 람들은 그런 것들이 별개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다. 따라서 당신이 그들보다 더 큰 아니 최대의 저주를 받게 된다.

3. 본 문 말씀에서 더 추론할 수 있는 것 몇 가지 만 더 언급하겠다.

(2)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형식적 종교 활동에 열심인 자와 다른 어떤 부류의 집단을 분별하는데 유용하다. 사람들 중 에는 근거도 없는 가정에 기초하여 약간의 도덕 적 덕목을 잘 지키는데 안주하여 자신이 훌륭한 크리스찬이라고 거짓 상상을 하는 사람이 있다. 사업적 거래를 공평하게 하고 식사에 절제하 고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폭력을 가하지 않으면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크리스찬이 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옛 이교도 들은 훌륭한 크리스찬이 되지 않았는가? 이들은 선량한 도덕적 미덕을 지키는 부분에서는 상당 히 뛰어났는데도 말이다. 또 성 바울이 개심하기

(1)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라는 말씀을 마음속에 어떤 실제적인 내적 변화 를 인식하지 못하고 외적인 종교적 의무만 그저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책망의 말씀으로 적용해도 되겠다. 우리 주변에 공적이든 사적이든 정규적 인 기도 모임에 정확히 시간을 지켜 참석하고 성 찬식을 받을 때도 그러하며 때때로 금식을 하는 등 종교적 열심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 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은 종교적 제도에 순응하 면서 종교적 방법에 단지 안주할 뿐이며 이것으 36 | 모퉁이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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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모든 선한 양심에 따라 살았다고 말하지 않 았는가? 그런데도 바울은 그런 인간적 본성의 일 에 의존하는 모든 것을 비난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바라고 부활의 권능을 알고 성령 을 받았다는 경험적 증거를 갖고 주님의 죽음으 로 자신을 산 것이며 이러한 것들은 예수 그리스 도의 부활로 바울 자신에게 확증되고 적용되었 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전체적으로 정리해 보 자. 은총에는 이성적 행위도 포함되어 있다. 기 독교에는 당연히 도덕성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 만 우리가 단지 도덕주의자라면, 즉 성령의 강 력한 작용으로 내적으로 이루어진 변화가 없다 면 우리의 도덕적 행위는 어떤 새로운 본성의 원 칙에서 나와야 한다. 내적 변화가 없다면 우리 가 아무리 스스로 크리스찬이라고 말한다 할지 라도 심판날에 벌거벗은 자로 나설 수밖에 없다. 즉 심판의 현장에서 의롭다함을 받기 위한 그리 스도의 의를 옷 입지 않은 자의 무리에 속하게 된다는 말이다. 의의 옷을 입지 못했으니 당연 히 자신의 심령에 거룩함이 충만하지 않을 것이 고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복락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3) 부분적인 변화만으로 안주하는 사람. 즉 철저하고 실제적이며, 내적인 마음의 변화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저주가 좀 덜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세상과 조금만 친 해도 세상적인 특징들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과 거에는 내놓고 세속적이던 사람이 자신의 악행 의 결과를 보고 또 그로 인해 세속적으로도 많 은 좋지 않은 일들이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을 알고 말하자면 어느 날 갑자기 교양 있게 되었다 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도 않지만) 그래서 자신들이 매우 종교적이라고 뻐긴다. 왜 냐하면 과거의 자기들 모습과는 조금이나마 다 르고 한때 드러내놓고 사악했던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숨겨 진 애착의 범죄 등을 지니고 있게 될 것이며 몇 38 | 모퉁이돌

가지 집착하는 세속적인 모습이 있어 이것과 완 전히 결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완전히 죽이 지 못한 어떤 숨겨진 탐욕, 힘들여 뿌리 뽑지 못 한 어떤 못된 습관과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허탄한 인간아 알고나 있느냐? 당신이 누구든 하나님 우리 주께서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 엇인가?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철저하 고 건전한 회심이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되면 당 신은 하늘나라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속 된 것에서 문화적인 것으로 돌이키는 것으로는 안 된다. 당신은 문화적인 것에서 거룩함으로 돌 이켜야 한다. 당신의 심령 안에서 일부만이 아 니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단 하나 만 부족해도 당신에게 유익하지 않다. 간단히 말 해, 당신은 거의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 완전 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전적으로 새로 운 피조물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신은 크리스 찬이라고 자랑해봐야 자기 자신의 헛된 속임에 빠져 있는 것이다. (4)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 물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적용 되는 규정이라 하겠다. 교파와 나이와 기타 그 사람 자체를 판단할 수 있는 학위나 자질 등에 관계없이 말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유일하게 확고한 구원의 기초이다. 이 기초 위에 죄 사함과 평안 과 행복의 굳건한 토대를 확고하게 세울 수 있 다. 우리는 외적인 공표라는 부러진 갈대(믿을 수 없는 것)에 참으로 의존하려 한다. 우리는 이 교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술 마시지 않고 정직 하며 도덕적인 삶을 사는 한 그 정도면 충분히 선량하다고 생각한다. 공적인 종교 집회에 참석 하고 골방에서 꾸준히 기도하는 것으로 안전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을 개혁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고,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키지 않고, 오로지 거룩한 은총의 무수한 표출 방식으로 이용되지 않는다 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금 또 반복하여 말하면


당신은 기독교와 아무 관계가 없다. 자! 우리 모두 심각하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 마음속에 던져 보자. 우리가 믿을 때 성령 을 받았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 운 피조물인가?, 아닌가? 지금 현재 새로운 피조 물이 아니라면 적어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 해 일상적으로 노력하고 있는가? 새로운 피조물 이 되는데 필요한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쉬지 않 고 의식적으로 활용하고 있는가? 금식하고 깨어 기도하는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게으르 게 굴지 않고 수고하여 애써 노력하고 있는가? 한 마디로 우리 자신의 의를 부인하고 우리의 십 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가? 그렇다면 우 리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에 들어서 있다. 좋은 씨앗이 우리 마음 밭에 뿌려져 정규적이고 지속적인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 적절하게 물과 영양을 공급받으면 영생으로 자라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성령에 관한 말씀을 듣 기만 하고 경험적으로 그 말씀을 알지 못하면, 전혀 금식하지도 깨어 기도하지도 않고 모든 영 적 헌신을 하지 않으면, 즉 그 길이 옳은 길인 지 아닌지 한 번 돌이켜 살펴보지도 않고 많은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우리도 넓은 길로 행하는 것에 만족하게 되면, 단적으로 말해 우리는 그리 스도에 대해 이방인이요, 세속적 마음과 감각적 쾌락으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적 하는 자가 된다. 이렇게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 고 다른 사람들은 기독교라는게 껍데기 이름뿐 이요 벌거벗은 형식적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이런 지경이라면 그리스도는 헛되 이 죽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여전히 우 리의 죄짐 아래 있는 것이요, 참되고 철저한 회 심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낙망하지 말지어다. 구원 길을 내가 말하고 있다. 내 이야기를 신실 하게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 는 사람은 절대 그리스도의 소유가 아니다. 예수 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령이 여기 당신 안에 거하지 않으면 썩어질 당신 육체는 내세에

서도 성령과 함께 거하지 못하게 된다. 내가 진 지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 하노니 성경에서 명령하고 있는 대로 (구원에) 확실한 것에 적합하게 행동하고 참된 크리스찬 으로 살기 바란다. “옛사람과 관련된 대화를 벗 어버리고 새사람의 옷을 입어라. 새사람은 의로 참된 거룩함으로 하나님을 쫓아 된 것이다.” 새 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분명 엄청난 일이요, 힘든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수많은 심령들이 거룩한 권능으로 도움을 받았다. 왜 우리가 성공하지 못 해 절망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 할 수 없는가? 우리 선조들의 하나님이 또 그 후 손들의 하나님이 되시지 않은가? 그렇다. 의심할 바 없이 그 후손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단 약간의 고통을 겪게 된다. 탐욕과 결별하지 않으 면 안 되고 세상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게 되기도 하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열정을 죽이기도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지나치게 귀히 여기 기 쉬우며 거기서 떠나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치 오른손을 자르거나 오른쪽 눈을 뽑아 버리 야 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렇 게 했을 때 어떻게 되는가? 그리스도의 지체, 즉 하나님의 자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가 되어 지금 받는 고충을 풍성히 보상받게 되지 않는가?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 이면서 엄청난 일이다. 그 와중에 어쩌면 아니 분명히 생각없는 몇몇 인간으로부터 조롱을 받 게 될 것이다. 이 자들은 우리가 왜 자기들과 더 불어 광란의 일에 몰두하지 않는지 의아해 할 것 이다. 우리의 죄를 짓는 성질을 죽이고 세상의 풍속을 따르지 않으며 성경에서 명령한 대로 하 려고 하고 천국의 대화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우리의 삶을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요 우 리의 끝은 별 볼일 없는 것이 되리라고 생각한 다. 하지만 성도가 되고 영원히 별처럼 빛나게 되는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조 롱과 비방과 비난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모퉁이돌 | 39


남지 않은가? 철저한 회심에 따르는 보상은 사 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안이다. 회심 의 결과로 하나님의 평안이 반드시 온다. 이 평 안은 이 세상에서도 누리게 된다. 이 평안은 우 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이며 우리는 그 기 쁨을 누릴 마땅한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생 각해 보라. 이 평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을 위해 예비한신 자비 로운 일들 중 최소한의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연속적으로 전개될 복락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 다. 죽음의 날에 회심하지 않고 새롭게 되지 않 은 죄인들은 너무나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요 새 로 태어날 우리에겐 새 생명의 첫날인 이 날에 영원한 행복과 안락의 장면이 우리에게 열릴 것 이다. 중생하고 다시 태어난 자들은 복음의 모 든 영광된 약속들에 실제로 참여할 자격자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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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 이것은 전지전능하고 모든 은혜에 풍성하신 하 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자기의 귀하고 멸하지 않는 영혼의 구원에 최소한의 관심이라 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앞에 주신 약속 과 소망과 영원한 행복을 소유하기 위해 자기 마 음속에 참되고 내적인 구원에 이르는 변화가 이 루어지기까지 쉬지 않고 깨어 기도하고 애써 노 력할 것이다. 참된 내적 변화를 통해 진리를 알게 되고 그리 스도 안에 자신이 있음을, 자신이 천국의 유업을 받을 자가 이미 되었음을, 아니 이미 오래 전에 하늘나라의 실제적 소유자의 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무 한히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설 교시리즈 “피난처이신 그리스도” 중에서)◈


영락 소식 선교적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NEWS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눅 10:27)

11ㆍ12월 교회행사 ● 11월 3일.......창립 29주년 기념주일, 영락 찬양제 ● 11월 15일(금) ~17일(주일)........................ 부흥회 ● 11월 17일(주일)....................................... 순장모임 ● 11월 17일(주일)....................................... 유세문답 ● 11월 23일(토).................................학습/세례 문답 ● 11월 24일(주일)....... 추수감사 예배(연합)/세례식 ● 12월 1일(주일)............................................. 제직회 ● 12월 7일(토).................................... 새가족 환영회 ● 12월 14일(토).................................. 한글학교 종강 ● 12월 24일(화)...........................성탄전야 축하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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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안내● 주일 1부 예배....................오전 주일 2부 예배....................오전 수요예배..........................오후 새벽기도회 (주일-금)...........오전 특별새벽기도회 (토요일)........오전 금요기도회.......................오후 청년부 금요모임.................오후 EM예배............................................오전

9시 (본당) 11시 (본당) 8시 (본당) 6시 (고등부실) 6시 (본당) 8시 30분 (본당) 6시 30분 (사역자 가정) 11시 (EM Worship Center)

● 성경공부 ● 화요 Q.T. 나눔 (화요일).........오전 EM 성경공부 모임 (주일)........오후 청년 주일 모임 (주일)...........오후 중·고등부 모임(토요일)...............오후

10시 (새가족실) 1시(EM WC) 12시 30분 (청년부실) 5시 (중고등부실)

달라스 영락 장로교회 / 발행인 : 명치호 / 발행처 : 영락 장로교회 문서출판부 / E-mail : yncdoc@gmail.com 850 Lexington Dr. Plano, TX 75075 · T. 972-424-5400 · F. 972-424-5477 · E. yncdallas@gmail.com · www.dallasyoungna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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