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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통권 90호 2013

3·4


성경적인 가정 변화평 목사(달라스 영락교회 유년부 담당 목사)

박사과정 첫 학기 수업에서 첫 수업 지도 교수 님께서 던지신 과제입니다. 40여 페이지의 Theology of Family를 스스로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 습니다. 성경에서 과연 가정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하는가라는 주제가 바로 Family Ministry를 전공 하는 첫번째 학기의 첫번째 과제였습니다. 성경에는 가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써 놓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 서 창조의 마무리는 인간이 가정을 창조하셨다 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창세기 2장에 쓰여있는 성경말씀을 통해 성경은 가정에 대해 참으로 많은 좋은 말들을 남겼다고 생각하 기 쉽습니다.

섬기는 이들 문서출판부 부장 : 송현경 편집팀 : 최용석, 박윤희 취재,사진팀 : 성혜진, 김정란, 임지현 인쇄, 배부 : 박지영 표지디자인 : 최용석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저는 가장 첫번째로 떠 오르는 질문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럼 성경에서 보 여지는 가정들중 가장 이상적인 가정을 찾아 그 가정을 모델로 삼고 그 가정을 연구해보면 성경 에서 이야기하는 가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 낼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펴서 창세기에서부터 묘사되어 있는 가정 들을 하나씩 살펴보았습니다. 일단 성경해석적인 의미를 다 빼고 현대적 가정 상황에 비교하여 객 관적으로 살펴본 성경에서 제시된 가정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일단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살펴보았습니다. 타 락후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서는 형이 동생을 시 기하여 살인이라는 죄가 있었습니다. 노아의 가정


은 노아의 하나님 사랑함으로 인하여 세 아들과 그들의 세 아내들까지 모두 이상적인 가정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결국은 둘째 아들 함이 술에 취해 누어있는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그의 형제 들에게 알리면서, 노아의 가정에 아버지가 아들( 정확히 말하자면 손자 가나안)에게 저주를 하는 불행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이 99세가 될 때까지 이 가정에는 자녀가 없었습 니다. 이 시절 자녀가 없다는 것은 하늘의 저주 였다는 사실을 안다면 아브라함의 가정은 그렇 게 이상적인 가정으로 볼수가 없습니다. 더군다 나 아브라함은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아 두 아내를 받아들인 지금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정 상적 범주의 가정이라고는 볼수 없으며, 나중에 자신의 아들과 아내를 집에서 내좇은 일까지 하 게 됩니다. 이삭의 가정은 어떻고, 이삭의 아들 야곱의 가 정은 또한 어떻습니까? 모세의 가정은 어떠했고, 다윗왕의 가정은 어떠하였습니까? 사무엘을 낳 은 한나의 가정은 과연 정상적인 범주의 가정으 로 말할까요? 하나님의 선지자 호세아의 가정은 또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렇듯 성경에서 소개 되어지는 가정들의 모습은 지금 현대적인 잣대 로 보아 정상적인 범주의 가정이라 불리울만한 가정을 찾기가 참 힘듭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번 제가 공부하려는 Family Ministry에 대한 공부에 한번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과연 공부를 잘 선택한 것인지, 그리고 이 공부를 통해서 무엇을 준비할 수 있을지라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제가 성경에 있는 가족들 모델 가운데 찾은 가족들이 현대적인 범 주에서 정상적인 가정도 찾기 힘든데, 이상적인 가정을 어떻게 찾아서 바로 이것이 성경에서 말 하는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모델을 내놓을수 있 겠습니까?

또 예수님께서 가정의 관계에 대한 이 한구절 이 저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 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 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 말씀 구 절을 해석함 없이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예수 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 와 자매를 미워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예수님 께서 가정에 대하여 어떤 관심도 없는 분처럼 느 껴졌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여기에서 여러분들에게 질문 하나를 던지고 글을 맺고자 합니다. 다음 호에서는 이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수 있었는지에 대 해 글을 싣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생각 하는 가장 이상적인 (Ideal Family) 가정은 어떤 모습이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라고 생각 되시나요? 그리고 만약 그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에 대한 대답을 하셨다면 그 이상적인 가정 의 모습에 비해 여러분들의 가정은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나요? 그렇다면 이 이상적인 가정이 가 지고 있는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가요? 쉽지 않은 질문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우 리 모두는 지금 어느 가정에 속해 있을 것입니 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가장으로 남편과 아 빠가 되었고 누군가는 아내와 엄마가 되었습니 다. 누군가는 자녀가 되어서 수십년을 사랑하는 부모님과 함께 살아왔고, 장성하여 분가를 하였 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정을 허락하셨을까요? 여러분의 성경을 펴서 한번 가정에 대하여 하 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스스로 공부해 보시길 바랍니다. 다음 호에는 이러한 질문에 대 한 저의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 로 지내고 있기 때문에 다음호에 실리게 될 글은 의미가 있는 글이 실릴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준 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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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 (1) by 마틴 로이드존스

에베소서의 중심 주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입니다 (엡1:10) 2 | 모퉁이돌


서론 에베소서의 중심 주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입니다 (엡 1:10) 1. 하  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활동 (엡 1장 1절 - 14절의 요약) 바울은 제일 첫 번째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관 심을 집중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우리에 게 복 주시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서 모든 것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갔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로 잡으시고 우리에게 복주시고자 함이 하나 님의 계획이요 활동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기억 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하나님의 역 사가 있다. 하나님의 일은 불쑥 혹은 우연히 되 어지는 일은 없다. 이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에 의존한다는 것이 다. 이일은 전적으로 은혜에 속한 일이다. 그래 서 바울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고 백한 것이다. 또한 이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중심에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축복하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 에 놓여 있지 않고 축복하신다고 말하는 사람들 의 이야기를 들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기 업과 상급을 받았다. 2. 영적인 이해력 (엡 1장 15절 - 23절의 요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정으로 누리려면 반드시 영적인 안목이 열려야 한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계획과 활동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안 목이 열려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마음 눈 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기 를” 위하여 기도했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단순히

신학을 나열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하여 기 록하였다. 바울은 이것을 교회의 차원에서 설명 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그 리스도와 유기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다. 이것을 바로 인식할 때 담대함이 있고, 여기서 그리스도 인의 능력이 나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리 스도 안에서 재 연합되고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3. 하나됨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방식 사도 바울은 1장에서 이런 서론적이고 개괄적 인 설명을 하고서 2장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이 일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설명해 나가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그는 이 일을 이루는데 있 어서 부딪치는 난관과 어려움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다는 것 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새 사람을 지으셔서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신다. 이 일을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하 나님의 능력이다. 이 모든 역사하심을 믿고 있습니까? 이것은 굉 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정말로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공중 권세 잡 은 자를 한손으로 부여잡아 저 영원한 무저갱에 집어 넣으실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 께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 새사람으로 재창 조하신 것을 믿습니까? 이 일을 전적으로 믿는 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하고 영광돌리는 것 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하신 이 놀 라운 일에 대하여 놀라고 있습니까? 우리의 찬 송과 감사는 바로 이 놀람, 이 감탄에서 자연스 럽게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모퉁이돌 | 3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전적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 하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증 거하는 일에 기뻐할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 데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을 위하여 기 도할 것이다.

엡 2:1 그러나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었고 엡 2:2 그 때에 너희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그 가운데서 행하니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히는 영 이라 엡 2:3 우리도 전에는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을 따라 행하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여, 다른 사람들 처럼 본질상 진노 의 자녀이었더니

죄 안에 있는 사람 확히 짚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의 위대함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 죄 문제를 간과하고 그저 인간을 하나의 진화적 존재, 진보적 존재로 보는 것이 다. 그들은 인간에게 문제는 오직 시간뿐이라는 것이다.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인간은 완전 해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가장 큰 문제 는 시간의 문제요, 지식의 문제요, 성장과 교육 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에베 소 교인들이 영적인 눈 이 열려져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보기를 간 절히 원했다. 그래서 그가 기도하였고, 기도하였 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편지로 가르침을 주고 있 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만으로 끝내는 사람이 아 니다. 그 다음에는 반드시 행동이 있어야 한다. 1. 하나님의 능력을 측량하는 척도 하나님의 능력을 측량하기 위한 첫 번째 척도 는 우리가 빠져나온 죄의 깊이이다. 복음은 아 주 우리 본질에 대하여 솔직하게 접근한다. 우리 가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기 전에 어떤 자리 에 있었는지를 바로 인식해야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함을 바로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는 죄가 무엇인지, 죄가 가져다 주는 결과가 어 떠한 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죄 에 대해서 듣기를 싫어하지만 이 죄의 문제를 정 4 | 모퉁이돌

2. 죄에 빠진 인간의 상태 성경은 인간의 상태를 아주 정확히 지적해 낸 다. 첫째는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였다. 여기 가장 중요한 말은 ‘죽었던’이란 말인데 이 것은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인 죽 음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매우 심각한 말이다.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한 말은 없다. 그것은 거의 죽어간다는 말이 아니고, 죽을 것이 라는 말이 아니다. 죽었다는 말이다. 죽음의 반대는 생명이다. 성경에서 생명은 언 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의 차원에서 묘사하고 있 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 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요17:3)”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다. 죽음은 그 반대이 다. 죽음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요, 하나님을 온 전히 믿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로 죄에 빠진 인간의 상태는 영적인 일에, 영적 생명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지루한 것이며, 설령 기도회를 참 석했다 하더라도 그의 생각은 온통 기도 이외에 다른 것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의 복음, 기도회, 이런 것에 대해서 아무런 흥미 를 느끼지 못한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영적으 로 죽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일을 좋아하 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미워한다. 지루해 할 뿐 만 아니라 그러한 것을 비난하고 불평하는 것이 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하 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 음이라(롬8:7)” 결과적으로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생명과 하 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비참 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 어디에 행복이 있을까 이리저 리 찾아 헤매고 날마다 돌진하지만 저들의 결국 은 허무요 비참일 뿐이다. 3. 세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결국 세상의 지배를 받고, 세상

의 풍조를 따라 갈 수밖에 없다. 세상이 무엇입 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고방식, 정 신 구조, 삶의 방식이다. 세상이란 물리적인 우 주나 산이나 강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은 하 나님 없는 인생관이요, 하나님 없는 사고방식과 정신이다. (12절) 이 사람은 이러한 세상의 사고 방식에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곧 악한 원리, 사단의 원리에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다. 사실 이 세상의 일에는 매우 강력한 악의 원 리가 있다. 사단은 얼마나 교활하던지 그는 인 간을 지배하면서 동시에 인간은 지배를 받고 있 지 않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성경은 사단을 공 중 권세 잡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공중이란 말은 허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눈 에 보이지 않지만 악한 자들의 세계가 있음을 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악한 권세와 싸워야 한다. 우 리는 아직 쉴 때가 아니다. 편안하려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편하 고 쉬운 것만을 찾는다. 그러나 이 세상은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덤벼들고 있 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 하고 나아가야만 비로소 승리할 수 있다.

원죄 인간은 세상에서 작용하고 있는 악의 원리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것은 바꾸어 말하 면 공중 권세 잡은 자에 의해서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1. 불순종의 아들들 이것은 단순히 불순종하는 자녀들을 나타내 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 너희는 너희의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 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는 말씀

이 정확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제 일 차적인 고통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다. 죄는 소극적이라기보다는 매우 적극적이고 활동적이 고 의도적이다. 그것을 성경은 불순종으로 표현 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 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스스 로 만족하고 충족한 삶을 살수 있다고 주장한다. 모퉁이돌 | 5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전혀 필 요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불순종의 아 들의 특징이다. 2. 인간의 본성 - “본질상” 본질상이라는 말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 악 됨을 설명하는 말이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하였다. 인간은 중성적으 로 태어났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는 선의 가능성도 있고 악의 가능성도 있다고 사람들 은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분명하 게 인간은 본질상 죄인임을 선언하고 있 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단순한 환경 이나 나쁜 영향 때문이 아니다. 인간 은 본질상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 이다. 그러므로 환경을 조금 개선한 다고 해서 인간의 문제가 나아지지 않음은 자명하다. 3. 모두 다 죄인 - “우리도 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은 특별한 권 한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성경에서 모두가 다 죄인이라고 선언해 도 자신들은 예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전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오역한 결과이다. 성경은 유대인이나 헬라인 이나 다 죄인임을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다. 죄 는 자기 만족, 자기 충족, 자기 의로 가득 차 있 는 것은 죄 중에 죄이다. 우리도 결코 이러한 특 권의식을 가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언제든지 하 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을 준비와 자세가 되 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죄악된 상태에서 구출 받을 수 있는 유 일한 길은 하나님의 능력과 무한한 하나님의 은 혜와 사랑 밖에 길이 없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 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때문임을 기 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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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5:5>


성경상고

성경교리를 절대적으로 알아야만 하는 이유

? 왜 우리는 성경교리를 공부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이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믿 는가? 첫째는 성경 자체가 교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 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관심은 특정한 진리들을 우리에게 분 명히 제시하는 것인데, 그 진리들이란 교리입니 다. 따라서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다는 말은 교리 에 대해 숙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 자신이 그 교리를 이해하기 원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성경을 대단히 잘 알 수 있으나, 그 교리 들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 한다면, 성경에 대한 내 지식은 내게 전혀 쓸모 가 없을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에 대해 읽 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던가 요? 선지자들은 교리를, 특히 율법에 대한 교리 를 붙잡고 있었으며 그 교리들을 역설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 대민족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백성 아! 너희는 율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율법이 너 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 사실을 너희는 이해하 고 깨달아야만 한다.” 선지자들은 백성에게 교리 를 설교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 스스로도 이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 까? 주님이 산상설교에서 정말로 하셨던 일이 바 모퉁이돌 | 7


로 이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 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7~28) 주님 은 율법을 취하사 그것을 교리의 형태로 해설하 셨습니다. 주님은 교리를 설명하셨습니다. 주님 은 그저 율법을 일반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아 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정확 하게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윈리들을 뽑아내서는 그것을 적용하고 시행하셨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사도들이 한 일이기도 했습니 다. 사도행전을 읽고 초대 그리스도인 설교자들 의 설교를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들은 본문을 취해 헬라어와 히브리 어로 그본문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 시하고 분석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들이 설교하는 방식은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었 습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지가 있었고 그것을 백 성에게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교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바로 설교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설교의 목적과 기능입니다. 설교는 단순히 사람이 자신 의 생각을 표현하는 기회가 아닙니다. 거듭 말하 건대 설교는 그저 성경 구절의 다른 번역을 제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의 목적은 진리를 회중 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설교의 본질 적인 역할, 그것을 행했습니다. 8 | 모퉁이돌

신약 서신서들을 예로 들어 봅시다. 서신서는 무엇입니까? 이 서신서들에서는 몇몇 위대한 교 리를 강조하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교회 들에는 특별히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 습니다. 그래서 서신서 저자들은 교리를 취해 그것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적용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들이 언제나 교리를 표현하고 설명하는 데 관심 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 이 바로 제가 이 일을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저는 성경이 그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합니다. 성 경 자체가 그렇게 하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 고 권면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 말하곤합니다! 우리 주님 당시 유대인들의 진짜 문제는 그들이 문자에만 얽매여서 그 정신은 결코 깨닫지 못했 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교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을(words) 안다는데 만족 하여 말씀(word)은 결코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 리는 이러한 유대인의 상황에 우리 모두 도처할 수 있다는 위험한 가능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문 자에만 얽매인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유익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자에 얽매이


는 것은 우리 영혼을 저주받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나서도 교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연구가 전혀 유익이 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연구가 대단히 지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성경교리를 연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수십 세 기동안 교회가 언제나 성경 교리들을 강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해 왔기 때문입 니다. 교회의 가장 초창기부터 온갖 희생을 치르 고 예수가 주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교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 만 “예수는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순 간 여러분은 교리적 진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 분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형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례를 받고자 하는 지망생들은 교리 문답을 배웠 습니다. 그들은 몇 가지 질문을 받았으며, 그 질 문에 대답할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 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시지요? 금세 이단들이 일 어나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상당히 진 실하고 진지하긴 했으나, 옳지 않고 해로운 것들 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단 교사들과 거 짓 교사들은 교회 내에 혼란을 야기했을 뿐 아니 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잘못 인도했습니다. 교 회 내에 이교가 발흥함에 따라 초대 교회는 우리 가 보통 신경이라고 부르는 것, 예를 들면 사도 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등을 만들 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너무 많은 오류와 이 단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그런 신경들은 필수적 인 것이 되었으며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다음 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믿지 않 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성경 을 펼쳐서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완 벽하게 진지하고 진실한 사람들도 성경을 읽고

나서 상당히 잘못된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규정해야 합니다..”교리들 에 대한 정의들을 우리는 신경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어떤 의미에서 하나였던 교회가 동방 교회와 서방교회 둘로 나뉘어졌습 니다. 하지만 교리는 대체로 동일했습니다. 교회 가 죽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세 개의 위대한 신경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개신교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새 생 명, 새로운 활력, 새로운 이해가 생겼습니다. 그 리고 다시 한 번 교회는 교리를 정리하는 것과 그것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진술하는 것이 절대 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 서 개신교도 간에 흔히 위대한 신앙고백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 교리들을 함께 열거하고 해설해 놓은 것일 뿐입 니다. 그 지도자들은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성 경을 펼쳐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 리는 그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도 와야 합니다. 그들은 길을 잃기 쉽기 때문에 우 리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믿지 않는지를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 도에 대해, 교회에 대해, 그 외 다른 것들에 대해 말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교회에는 [39개 신조]라는 신앙고백이 있 습니다. 또한 유럽 대륙에도 많은 유명한 신앙 고백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모라비아 교회의 신조와 개혁 교회의 신조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17세기 웨스트민스터에서 작성되어서 [웨스트민 스터 신앙고백]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신앙고백 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교회와 전 세계 모든 곳에 있는 장로교회 신앙고백입니다. 이 모 든 신앙고백들 및 그에 수반되는 교리 문답들은 교회 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하고, 그 믿음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도록 하기 위해 성 경 교리를 진술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세우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모퉁이돌 | 9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교회의 초기 시절에 이 모든 것이 필요했다면, 종교개혁 시절과 17세기에 이것이 필요했다면, 분명 그것은 지금 현재 이 순간에도 긴급하게 필 요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 교회는 사이비 종교 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러분의 문 앞에 와서, 그들 말로는 “성경을 가지고” 말합 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르치는 성경을 자기들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을 하는 순간, 여 러분은 본능적으로 뭐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만, 그들에게 대답을 제대로 하지는 못합니다. 성경 교리를 연구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함께 그런 가르침들에서 잘못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것 입니다. 여러분에게 성경이 정말로 가르치는 것 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알게 되면 우리에게 제시되 는 다른 모든 가르침을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 주변에만 이 모든 오류와 사이비 종교의식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바로 교회 안에도 심각한 혼란이 있습니다. 교리가 존 재하지 않고, 분명한 정의가 없으며, 누구든 자기 좋은 대로 말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리스도인들이 성경 교리를 함께 고찰해 보는 일 이 지금보다 더 긴급하게 필요한 때는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토대에 서 있는 지 알아야 하며,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오는 모 든 원수, 모든 교활한 원수, 우리의 영혼을 멸망 시키기 위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오는 마귀 가 사용하는 모든 계략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 교리를 여러분과 함께 고 찰해 보아야 할 더 고상한 이유가 있습니다. 궁 극적으로 교리 공부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며, 하 나님의 영광스런 임재에 들어가며,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길이 얼마나 경이로운가를 어느 정도 알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속 성경을 읽고 연구하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세부 적인 것들에 매여 헤매지 마십시오. 이 위대하고 도 강력한 교리의 최고봉들을 뽑아내어, 그것들 10 | 모퉁이돌

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의 죄에도 불 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 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합시다. 우리는 하나님 아는 일에 관심이 있습 니다. 이것은 예배입니다. 성경에 고찰은 언제나 예배이며, 성경과 그 가르침에 대하여 다른 교과 서들에 대해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말합니다. “신학 대학들이 대체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내가 아는 많은 훌 륭한 사람들이 신학대학에 들어갈 때는 멀쩡했 는데, 졸업하고 나올 때 모습을 좀 보세요!” 그것 이 언제나 사실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하는 법이니까요. 하지 만 그 말이 간혹 사실이라면 제가 여러분에게 그 렇게 된 이유를 말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의 사람들은 성경을 마치 하나의 교과 서인 양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너무 자주 이 위대한 교리를 마치 그것이 인간의 사상 과 아이디어인 것처럼 접근합니다. 그들은 언제 나 예배와 경외하는 마음으로 교리를 대하지 않 습니다. 그들은 번역과 지적 지식에 관심이 있습 니다. 그것들이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 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교리는 연구 주 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리를 알기를 소망해야 하지만 그 이유는 그것을 배운 후 그 지식으로 교만해지거나 지적 흥분을 느끼려는 것이 아니 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이전에는 알지 못 했던 더 온전한 방식으로 바라보게 됨으로 인해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과 경배로 더 가까이 나아 가자고하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 리로 하여금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시고, 이 교 리들로 인해 우리 모두가 소생하게 되기를 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또한 우리 및 우리와 같은 사 람들을 통해 모든 교회가 소생하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다 시 한 번 목도하기를 소망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의 “교리강좌시리즈” 중에서>


내구주 예수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발표된 통계 자료에 의하면 미국 성인의 75%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 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통계를 별 생각없이 본다면 “미국에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다니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일이다.”라고 생각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통계에 대해서 잠깐 동안만 깊이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 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까?” 라고 질문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인일까요? 미국의 현실을 볼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많 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을까 요? 그것은 대답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 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 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모퉁이돌 | 11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그 리스도인이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라고 대답하셨다면 여러분은 왜 그리스도인이라 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 도인에 대한 개념은 무엇입니까? 그 개념이 성 경에서 말하는 것과 일치합니까? 또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마음 먹었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 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마음을 정한 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출석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 은 자신이 기독교나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모태 신앙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매일 성 경을 읽고, 기도하고, 교회에서 봉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그 렇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학을 배웠 고 기독교에 대해서 공부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 또한 그리스도인이라 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 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면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으 면 굉장히 수준 높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 다.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에 대 해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렇다 면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 그리스도의 사람, 혹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리스도인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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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 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대한 회개는 무 엇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무엇을 의 미합니까?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 면 회개와 믿음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알아야 자기의 회개와 믿음이 진정한 것인지 혹은 거짓 인지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회개와 믿음이 진정한 것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와 믿음이 진정한 것이 아니라면 이런 사람은 자칭 그리스 도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전 한 회개와 믿음을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어 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의 삶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회개하고 믿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의 질은 분명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 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선물을 받 았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 며, 구원을 얻은 사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고, 하나님으 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 이며,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고 하나님의 나 라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 합되어져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다 시 살아난 사람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 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선 물을 받은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는 이러한 일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서 그 사람 속에서 분명 하게 일어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 어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 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러한 일 들이 자신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 달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자 기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드리고 자기의 십 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왜 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이미 과거의 모든 죄를 회 개하고 떠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기로 결심한 사람이기 때문입니 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실제 생활 속에서 사 단과 죄가 요구하는 것을 거절하고 왕이신 그리 스도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며 복종하는 삶을 살 아갑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욕심을 따 라 사는 것을 거절하고 성령의 지시를 따라 살 아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인 세계관 과 가치관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나라의 세계관

과 가치관을 가지고 실제 생활 속에서 그 기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삶을 통해 서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에 게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사 람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 스도의 사람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순 종하며 그리스도의 나라의 가치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 가치 기준을 가지 고 사는 사람들과 삶이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러 므로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는 그 사람의 삶을 통 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16-20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 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 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 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 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 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 모퉁이돌 | 13


리는 나무의 열매를 보고 그가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보고 좋은 나무 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각 사람의 삶의 열매를 보 고 그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열매을 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인지 대적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살피고 판단하 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 판단 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 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다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그 리고 하나님께 구원해 주시도록 간절한 마음으 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열매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열매을 맺는 속도나 과 정이나 열매의 종류는 다르게 나타날지라도 그 의 삶에서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변화하 는 속도가 빠를 수도 느릴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삶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에 보면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 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 에서 어떤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안에서 착한 일을 시 작하셨고, 지금도 그 일을 하고 계시고, 앞으로 도 계속 그 일을 하셔서 그의 때에 그 일을 이루 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목적 가운데 그리스도인 안에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일하시면서 그 사람을 이끌고 계시기 때문에 그 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 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 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 14 | 모퉁이돌


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은 사람은 하 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며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세계 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되기에 그리스도인 의 삶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를 수밖에 없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성질이 나타날 수밖에 없 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 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 기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 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흑암의 권세 즉 사 단의 권세에서 건져져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 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 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사단의 통치 영역 안 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아래 있습니 다. 다시 말해 사단의 통치를 거절하고 그런것 을 싫어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 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 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이로나 육정으로나 사 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 터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 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 녀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의 삶에는 그 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날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갓난 아이들이 생명체 로 태어나는 순간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태 어나는 순간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부모 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어떤 활동이나 일도 하 지 못하고, 심지어는 눈도 뜨지 못합니다. 그러 나 그들은 생명체이기 때문에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울고, 움직이고, 먹고, 배 설하는 등 그가 생명체라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 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도 마찬가 지로 자신이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 게 드러냅니다.

요한복음 3장 3-5절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 르시되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 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 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네 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 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물 과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듭 났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운 신적 인 성질을 가진 존재로 위로부터 영적인 생명체 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그것 이 사실이라면 그 신적인 성질은 그의 삶의 모든 부분에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입니다. 새로운 생 명의 성질을 따라 사는 것이 보이게 된다는 것 입니다. 그것은 거듭나기 전에 좋아하던 것을 싫 어하게 되고,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나 타날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것, 그리 고 행동하는 것이 바뀌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 다. 위로부터 새로운 생명체로 거듭난 사람은 자 기가 거듭났다는 것을 아주 적을지라도 분명하 게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5장 1-7절은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 수를 만나니라.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 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수 없게 되 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 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 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도로 자 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 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데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부르짖 었습니다. 이러한 귀신들린 사람의 언행에는 극 단적인 두 가지 면이 나타나 있습니다. 모퉁이돌 | 15


첫째는, 귀신들린 사람의 예수님께 대한 놀라 운 언행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배에서 나오시게 되었을 때 먼 거리에서 예수님을 금방 알아보았 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을 때 즉시 달려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절 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예의를 갖춘 것입 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지극히 높으 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기 까지의 귀신들린 사람의 행동과 말은 참으 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완벽했습니다. 참으로 부족함이 없는 완벽 한 언행이었습니다. 둘째는, 귀신들인 사람의 예수님께 대한 잘못 된 태도입니다. 그는 놀라운 언행을 한 후에 즉 시 그의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나와 당신 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 “당신과 나는 아무 상관이 없으 니 나를 가만히 두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귀신 들린 사람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귀신 들린 사람은 열정적으로 예수님께 나가서 예배 드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큰 소리로 놀라운 고백 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 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명령을 거 역하고 예수님께 자기를 가만히 두어 달라고, 자 기를 괴롭게 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 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큰소리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종 교적인 행위와 말은 그럴 둣 했고 예수님에 대해 서는 예배하는 태도를 가졌지만 실제 삶은 예수 님의 명령을 거역했고 자기의 뜻대로 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람의 삶 을 보고 그 사람의 고백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귀신의 양면성이 오늘날 그리스도 인이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열정적으로 예 배드리고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하면서 예수님 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은 원 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께 부르 16 | 모퉁이돌

짖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의 종교적인 행 위를 보거나 말을 듣고 좋은 신앙인이라고 평가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 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신이나 타인 의 삶에서 신앙고백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 니다. 그래서 오늘날 귀신들린 사람과 같은 그리 스도인들이 많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 로 우리는 아무리 열성적인 종교인으로 예배를 잘 드리고 큰 소리로 찬양하고 고백한다 할지라 도 그것으로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평가해 서는 안 됩니다. 그의 삶의 열매를 보고 평가해 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의 삶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 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여러분이 그리 스도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어떤 일을 하셨고 하시고 계시고 앞으로도 계 속 일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 님께서 일하셨고 일하고 계시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만일 나타나 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서 그 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만일 그리스 도인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나타나 지 않는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자신을 점검해 보 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기 를 바랍니다. 글·이홍숙 목사


옛 십자가와 새 십자가

(다음 글은 2007 년 6 월호 The Berean Call, Vol. XXII, No.6 에 실린 A. W. Tozer 의 글)

전혀 공식 발표도 없이 거의 눈에 띠지도 않 게 현대의 새 십자가가 복음주의 대중들 사이에 들어왔습니다. 옛 십자가와 유사합니다. 다른 점 이 있다면: 유사성은 피상적이고, 상이점은 심각 한 것입니다. 이 새 십자가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에 새 철 학이 들어왔고, 새 철학으로부터 새 복음주의적 기독교가 탄생했습니다…. 곧 새로운 형태의 모 임들과 새로운 형태의 설교들입니다. 이 신 복음 주의는 옛 복음주의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지 만 그 내용은 상이하고 그 강조점은 변질된 것 입니다.

옛 십자가는 세상과 함께 멍에를 매지 않았습 니다. 아담의 교만한 육신을 인하여 그것은(옛 십자가는) 인생여로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었습 니다. 그것은 시내 산의 율법이 부과한 선고를 집행했던 것입니다. 새 십자가는 인류를 대적하 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친절한 동무로 서, 그것은 깨끗하고 착한 유흥과 순전한 쾌락의 제공자로 이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방해받지 않고 인생을 살게 하는 길을 제 공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인생의 근본적인 목적 이 구태여 바뀌어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여 전히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살 수 있으며, 다른 모퉁이돌 | 17


점이 있다면 야비한 음악이나 강주를 마시는 대 신 새 노래를 부르며 종교성 영화를 보는 정도 이면 족합니다. 강조점은 여전히 즐기는데 있으 며, 다만 좀 더 높은 차원의, 지적이 아니라 할지 라도, 적어도 도덕적으로, 이런 차원에서 즐기면 되는 그러한 것입니다. 새 십자가는 새롭고 완전히 다른 복음주의적 접근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복음전도자는 새 삶을 영접하기 위해서 옛 삶 을 버려야한다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대 조를 설교하기 보다는 유사성을 강조합니다. 그 는 기독교란 불쾌한 의무를 요구하는 종교가 아 니라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대중 생활의 열쇠를 제공하려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본질적으로 동 일한 것을 제공하고 있으며 다른 점이 있다면,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시도하고 있을 뿐입니다. 죄에 미친 세상이 소리 높여 구하는 것이면 무엇 이든지, 바로 그 순간에, 복음도 동일한 것을 제 공하기 위해서 소리치는 모습입니다. 다만 종교 제품이 더 낫다는 주장으로 말입니다. 새 십자가는 죄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방향을 전환할 뿐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자존 심의 체면을 유지해 주면서 좀 더 깨끗하고 재 미있는 삶으로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 다.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자, 오셔 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주장을 견지하시오.” 에고이스트에게는, “자, 오셔서 주 안에서 자랑 하시오.” 감동적 경험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자, 오셔서 기독교의 교제를 체험해 보시오.” 이 렇게 해서 기독교의 교리는 대중의 입맛을 맞추 어 주기 위해서 현대 유행을 좇아 방향을 수없이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이들의 철학은 아마 진지한 의도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지는 허위로 부터 자신을 구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허위이며 그 이유는 그것이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철저히 벗어나 버린 것입니다. 옛 십자가의 상징은 죽음입니다. 그것은 순간 18 | 모퉁이돌

적이고 격렬한 인간의 종말을 뜻하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이미 그 의 모든 친족에게 작별인사를 해버린 사람들입 니다. 그는 다시 돌아 올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삶을 끝내버린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타협하지 않고, 아무것도 변개치 않 고, 아무것도 아끼지도 않은 것입니다. 십자가란 모든 사람을 죽였고, 그죽음은 완전하며 영원한 죽음입니다. 옛 십자가는 그의 희생자와 적당히 조건을 타협하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자비하고 강력한 타격을 가하였고, 끝 나고 나면 그 “희생자”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인류는 모두 다 사형선고 아 래 있습니다. 감형도 없고 출옥도 없습니다. 하 나님께서는 죄의 열매를 묵과하실 수 없습니다. 비록 어떤 열매는 사람 보기에 아름답게 보일지 라도.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옛 사람을) 청산 하시고, 그 다음에야 새롭게 새 사람으로 다시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을 우호적으로 나란 히 제시하는 그러한 복음은 성경에 배치되는 거 짓이요, 듣는 자의 영혼에는 잔인한 것입니다. 그 리스도의 복음은 세상과 우호적으로 나란히 가 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온다는 것 은 보다 높은 차원의 옛 삶을 가지고 나오는 것 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 가에 못박아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하고 있 다면 십자가에 걸려있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 져 죽어야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세상 간 에 우호를 수립하는 공보요원으로 보냄 받은 것 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을 세상의 대기업이나, 스포츠, 혹은 현대 교육에 그리스도가 잘 받아 드려지도록 부름 받은 자들로 생각해서는 안됩 니다. 우리는 외교관이 아니라 선지자들이며, 우 리의 메시지는 타협이 아니라 최후통첩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배우는 심장은 곧


그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을 경험하는 축복을 누릴 것이고, 세상 모든 핍박은 성령의 안식처인 우 리 영혼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거룩한 기쁨을 잠 잠케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심장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개선 된 옛 생명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죽음에서 나온 생명입니다. 그것 은 항상 십자가 쪽에 멀리 있습니다. 이 생명을 소유한 자마다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야 합니다 (겔 20:37, 역자 주). 그는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 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선고에 동의하 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않았다 할지라도, 이 복음이 수 세기를 통하여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한 생명과 능력의 복음입 니다. 이것이 개혁자들과 부흥을 주도한 자들이 강조한 바요,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인하여 표 적과 기사가 또한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인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러한 권세의 유산을 물려받은 우리가 감히 이 진리를 경감할 수 있겠습니까? 산에서 보이 신 하나님의 모형과 설계를 우리의 무딘 연필로 지워버릴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옛 십자가를 전파합시다. 그리할 때 우리 는 옛 권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을 얻은 사람에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 니까? 이 신학이 어떻게 생명으로 전환될 수 있 습니까? 그것은 단호하게 회개하고 믿는 일입니 다. 그는 죄를 버리고 더 나아가서 자신을 버려 야합니다: 아무것도 감추지 말고, 아무것도 방어 하지 말고, 아무것도 변명하지 말고. 하나님과 조 건을 협상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다만 머리 숙여 하나님께 경배할 뿐입니다: 그를 향하여 불쾌함 을 나타내신 그 분 앞에. 그리고는 자신이 죽어 마땅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후에, 그는 다시 사신 구속주를 일 편단심으로 앙망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중생과 정 결과 권세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신 의 생명을 끊은 십자가는 이제 죄인의 것을 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 으킨 권세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그를 새 생명 으로 일으키실 것입니다. 이 복음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그것을 다만 편협하고 개인적인 견해라고 치부해 버리 는 사람에게 나는 하나님께서 이 복음의 정통성 에 대해서 바울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인정하신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진술한 내용 들과 정확하게 같은 용어들이 비록 사용되지는 모퉁이돌 | 19


영락 소식 선교적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눅 10:27)

NEWS

3ㆍ4월 교회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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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4일.............. 세례식 ● 3월 25일~30일..... 고난주간 ● 3월 29일.............. 성 금요예배-성찬식 ● 3월 31일.............. 부활절 연합예배 교구모임 ● 4월 7일............... 총동원 전도주일 -서수남 장로 찬양간증집회 ● 4월 14일.............. 교구모임 ● 4월 21일.............. 교회 대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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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소개 1 (1, 2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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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순장 이철무, 이미주

2

순 순장 김훈, 진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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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소개 2 (3, 4순)●●●●●●●●●●●

3

순 순장 김지섭, 임애경

4

순 순장 권봉주, 한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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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소개 3 (5, 6순)●●●●●●●●●●●

5

순 순장 엄진용, 오정숙

6

순 순장 박찬용, 김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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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교회 유스 오케스트라

영락교회에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한 오케스트라가 시작되었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참여해서 부활절을 위한 첫 연주를 연습 중 에 있다고 한다. 음악에 관심이 있고 악기가 있는 학생들은 누구나 참여가 가능 하며 참가를 위해서는 시작 전 간단한 테스트를 한다고 한다. 지 금은 실력보다는 영락교회 학생이면 연주를 원하는 누구나 참가 가 가능하다고 하니 학생들의 많은 참여를 기대해본다. 오케스트라를 담당하고 있고, 교회 예배를 위해 아름다운 하 모니로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있는 정혜진 자매님은 대구 출신으 로 계명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하였고 대구 오페라 하우스 오 케스트라에 몸을 담고 있다가 2009년 필라델피아에서 석사과정 을 밟고, 2012년 박사과정을 위해 달라스로 왔다고 한다. 현재는 UNT(University of North Texas)에서 전공은 클라리넷 연주학, 부전공으로는 관악기 지휘(Wind Conducting)를 하고있다고 한 다. 또한 기존의 악보를 영락 유스 오케스트라 악기편성에 맞게 편곡을 담당하고 계시는 전문 작곡가 조성옥 사모님이 계신다. 정혜진 자매님은 처음 클라리넷을 접하고 배운 곳이 어린시절 자기가 다녔던 교회라며 교회가 그런 기회를 제공하고 자신이 그

런 기회를 가져서 행복했던 것처럼 다른 학생들에게도 그런 기회 를 주고 싶고 본인 스스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베풀 고 가르칠 수 있다는 마음에 오케스트라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 다. 필라델피아 유학시절에도 섬기던 교회에서 유스 오케스트라 를 창단하여 지도해 왔으며 그간의 연주를 통하여 그 실력을 인 정 받은바 있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 각자가 악기를 가지고 주 님을 찬양하는 그 큰 기쁨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 음이 크다고 한다. 부활절 연주회 이후, 학생들을 다시 모집할 계획을 갖고 있다 고 하며 본격적인 오케스트라 트레이닝을 할 계획을 갖고 있으니 학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달 라스 지역에 많은 교회중 유스 오케스트라가 창단된 교회는 드물 다고 하니 찬양 받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어릴적 부터 기악 으로 함께 찬양을 드리는 일을 즐거이 할 수 있는 영락의 청소년 들이 되기를 바란다. 연습은 매주 주일 본당에서 하며 시간은 1시 30분에서 2시 30 분까지이다.


● 예배안내● 주일 1부 예배....................오전 주일 2부 예배....................오전 수요예배..........................오후 새벽기도회 (주일-금)...........오전 특별새벽기도회 (토요일)........오전 금요기도회.......................오후 청년부 금요모임.................오후 EM예배............................................오전

9시 (본당) 11시 (본당) 8시 (본당) 6시 (고등부실) 6시 (본당) 8시 30분 (본당) 6시 30분 (사역자 가정) 11시 (EM Worship Center)

● 성경공부 ● 화요 Q.T. 나눔 (화요일).........오전 EM 성경공부 모임 (주일)........오후 청년 주일 모임 (주일)...........오후 중·고등부 모임(토요일)...............오후

10시 (새가족실) 1시(EM WC) 12시 30분 (청년부실) 5시 (중고등부실)

달라스 영락 장로교회 / 발행인 : 명치호 / 발행처 : 영락 장로교회 문서출판부 / E-mail : yncdoc@gmail.com 850 Lexington Dr. Plano, TX 75075 · T. 972-424-5400 · F. 972-424-5477 · E. yncdallas@gmail.com · www.dallasyoungnak.net


3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