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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호가행 제 5 권 검궁인 저

42 장 뇌정삼식(雷霆三式) 진일문. 그는 마치 긴 악몽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의 수중에서 뇌정도(雷霆刀)가 푸른 예기를 뿜고 있었다. 그는 뇌정도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향해 읊조렸다. "기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으리라. 만일 내 본성이 마세에 대항하고자 하지 않았다면 이런 우연은 만날 수가 없었으리라. 이는 실로 하늘의 뜻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뇌정도가 순간적으로 발도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전자에 경험과는 엄연히 구분이 되었다. 그와 줄곧 의식을 같이 하며 극적인 순간에 환희밀선녀를 양단시킴으로써 마의 대법을 분쇄해 버린 것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진일문은 벅찬 감회를 느꼈다. 우우웅......! 뇌정도는 그의 심중을 알기라도 하는듯 힘찬 검명(劍鳴)을 발했다. 그러자 정기(正氣)가 어려 있는 그 음향으로 인해 법전 안에 있던 사요한 신상들은 쩍쩍 금이 가고 있었다. 진일문은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패기(覇氣)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뇌(雷)-- 정(霆)--!" 그 외침에 따라 그도 알지 못하는 엄청난 힘이 손목을 통해 뇌정도로 뻗어 나왔다. 천지간에 가장 강한 힘, 뇌정지력(雷霆之力)이 발출된 것이었다. 쩌어억--! 천만 갈래의 번갯불이 줄기줄기 뻗었다. 환희밀교의 법전 안은 삽시에 푸른 섬광으로 뒤덮혔다. 백팔개의 신상은 그 무시무시한 섬광에 휘감겨 속속 무너져 내렸다. 뇌정지력을 일컬어 하늘의 심판이라 한들 무리는 없으리라. 스스스스....... 신상들은 종내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그것은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덕분에 신상들로 가득 메워져 있던 석실에는 그 잔재만이 수북히 쌓이게 되었다. 진일문은 최후로 남은 단 하나의 입상인양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뇌정도를 비껴든 그의 모습은 흡사 뇌정신(雷霆神)과도 같았다. 가공할 힘을 발휘해 낸 그의 전신에서는 아직도 무한한 신비지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뇌정심법(雷霆心法)! 바로 이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지력의 비결은 이것이었구나." 그는 감당하기 힘든 희열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뇌정도의 심법을 기어이 쟁취해 냈기 때문이었다. 희대의 기인인 뇌환공(雷幻公). 그는 뇌정도를 얻어 천(天)과 지(地)를 관통하는 뇌정지력을 불어넣은 장본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뇌정도를 움직이는 심법을 그 어디에도 따로 남겨둔 바가 없었다. 가공할 힘을 거머 쥐었으되 지극히 오만했던 뇌환공은 자신이 그러했듯 인연이 닿는 자만이 그것을 얻어 내리라 믿었다. 그는 뇌정삼식(雷霆三式)이라는 도초(刀招)를 창안해 내고도 그것을 비밀스럽게 감추어 두었다. 그리하여 천하제일도인 뇌정도는 그 이후로 대가 끊기고 말았다. 반면에 뇌환공은 괴퍅할지언정 정통을 잇는 도가(道家)의 인물로써 누구도 따르지 못할 협기를 지닌 정인(正人)이었다.


그는 체질적으로 마를 증오했고, 뇌정심법의 심득비결도 결국은 여기에 관건을 두었다. 그것은 실제로 천우신조가 따르지 않는 한 넘을 수 없는 관문이었다. 진일문. 그는 천년의 시공(時空)을 격하여 뇌환공이 터득한 뇌정심법과 만나고 있었다. 요컨대 뇌정도의 발도(拔刀)는 극강의 마성에 대응하기 위한 천명(天命)이라고 하면 옳았다. 이를 깨닫자 진일문은 마치 시야에 끼어 있던 짙은 안개가 걷혀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불현듯 청정한 대기 속에서 그의 망막에 닿아오는 것이 있었다. "뇌정삼식(雷霆三式)! 말로만 전해 듣던 삼초의 도법,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는 그 도법이 여기에 적혀 있었단 말인가?" 진일문은 뇌정도를 수평으로 들어 올렸다. 도신에 실낱처럼 가느다랗고 어지럽게 새겨진 문양을 보며 그는 감격해마지 않았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뇌환공이 남긴 뇌정도법으로써 그 문양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있는듯 진일문으로 하여금 환상의 세계로 빨려 들어 가게 만들었다. 무릇 억겁(億劫)도 일수유(一須臾)와 같다는 말이 있다. 이는 억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도 한순간이나 다를 바 없다는 의미로 지금의 진일문이 꼭 그러했다. 그는 도신에 새겨진 뇌정삼식의 오의(俉意)를 연구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그가 소비한 시간은 억 년일 수도 있고, 찰나지간일 수도 있다. 그 흐름을 잊고 있으므로. 마침내 진일문은 어찌 보면 환영인 듯도 한 그 문양을 따라 허공에서 한 획, 한 획의 도결을 그려 나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느릿하게 움직이던 그의 손이 점차 빨라지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아예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다. 위이이잉--! 도기(刀氣)가 풍차 돌듯 하며 섬뜩한 바람소리를 냈다. 또 어떤 때에는 애초보다 더 느려져 손가락의 움직임이나 손목에 드러나는 혈관의 파동까지도 드러나 보이곤 했다. 도신에 새겨진 문양은 실제로 뇌환공의 정신력이 새겨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일정한 서체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감(靈感)으로써 해독하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때문에 먼저 뇌정심법을 깨우치지 못한다면 그 문양은 끝내 찾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설사 찾는다 해도 풀어 내지 못한다. 문자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림도 아닌 기이한 문양....... 진일문은 그것을 완전히 깨우침으로써 여타의 도객(刀客)들이 천하를 떠돌며 평생에 걸쳐 무수히 연구하고 참오해낸 수준을 능가하고 있었다. 가히 도신(刀神)이라 해도 무방할 경지로 그는 들어서고 있었다. 진일문은 명상에 잠긴 채 그대로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들어갔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짙은 오뇌(懊惱)마저 담겨 있었다. 이 때, 석실의 안쪽으로부터 혈영(血影)이 어른거리더니 그의 앞에 네 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들은 붉은 법의(法衣)를 입은 승려들이었는데, 일견하기에도 중원의 복색이 아니었다. 특히 상의라는 것은 그저 가로로 된 끈 하나를 동여메고 있는 형국이어서 상체의 우람한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그들 네 명의 중은 한인(漢人)이 아니었다. 눈은 푸른 빛을 발하는 벽안(碧眼)이었으며 키가 무려 일곱 척이 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그래도 보아줄 만한 것들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 머리에 계인(戒印)이 박혀 있지 않은 것까지도 괜찮았다. 그 중 두 화상의 벌거벗다시피한 가슴에 새겨진 문신(文身)을 본다면 중원의 승려들은 모두 기절을 하고 말리라. 그 문신은 다름 아닌 미녀도였다. 그것도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음탕하기 그지없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우측 화상의 가슴에는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는 나녀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 자세란 화폭을 이루고 있는 화상과 연결을 지어보면 그야말로 묘한 해답이 나오는 것이었다. 좌측 화상의 문신은 더 노골적이었다. 그의 가슴에는 놀랍게도 두 명의 나녀가 하나의 남근상(男根像)을 사이에 두고 서로 희롱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었다. 정녕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기막힌 춘화도였으나 화상들의 신색은 그것과 심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의 얼굴에는 의외로 장엄한 빛이 어려 있었다. 나머지 두 명의 화상은 각각 핏빛의 륜(輪)과 홀(笏)을 들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은 줄곧 눈을 반쯤 감은 채 석실 안의 광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상체에 문신을 새긴 화상들도 제각기 손에 핏빛의 보리수 가지와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었는데, 그들도 역시 석실 안에 펼쳐진 광경을 보더니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네 사람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진일문에게 향했다. 진일문은 뇌정삼식을 참오하느라 몰두한 나머지 그들이 장내에 출현한 것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찢어죽일 놈!" 노성과 더불어 금강저를 든 법승이 진일문을 향해 거구를 날렸다. 동시에 그는 진일문을 향해 금강저를 무섭게 휘둘렀다. 쉬이익--! 금강저는 진일문의 등뒤 삼초유(三焦兪)를 곧장 찔러갔다. 법승이 지금 펼치고 있는 것은 환희밀교의 상승기공이었다. 과연 금강저가 채 가까이 이르기도 전, 마치 산이라도 뚫어버릴 듯한 강기가 진일문의 삼초유로 쇄도해 갔다. 그러나 언제 의식이 돌아왔는지 진일문의 손이 반원을 그리며 금강저의 날카로운 예봉에 닿았다. "컥!" 공격했던 법승의 입에서 참담한 비명이 터졌다. 금강저 끝을 통해 한 가닥 뇌전이 그의 전신을 관통해 버린 것이었다. 법승은 맥없이 뒤로 나가 떨어졌다. 금강저는 그 사이에 벌써 부젓가락처럼 녹아 휘어지고 말았으며, 그의 천령개에는 시커멓게 그을린 듯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세 명의 법승은 창졸지간에 일어난 이 사태에 저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서 지켜보고도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것은 진일문의 모습이었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설사 태산이 덮쳐 든다 한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광경에 세 명의 법승은 자신들이 정말로 꿈을 꾼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들은 죽은 자와 함께 환희밀교에서 파견된 팔대법왕에 속한 인물들로써 무공이라면 적어도 교내에서는 대법왕(大法王) 다음으로 손꼽혀온 바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상대가 뻗어낸 일초에 즉사를 하게 되자 나머지 세 법승들로서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들 삼인은 뭔가 눈짓을 주고받더니 소리 없이 진일문에게 접근해 갔다. 그가 모종의 무공을 깨우치는 중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이 때를 노려 급습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진일문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뇌정도의 도신에 어른거리는 뇌정도식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죽어랏--!" 세 명의 법승이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위이이잉-- 휘휙--!


화륜(火輪)이 날고 홀이 벼락처럼 뻗쳤으며, 황금보리수는 허공에 어지러운 환영을 일으켰다. 이들의 합격(合擊)에는 가히 경천동지할 위력이 깃들어 있었다. 세 줄기의 막강한 강력( 力)에 석실의 사면 벽이 한 자가 넘게 깎여 나갔다. 아닌 게 아니라 진일문도 이쯤 되자 몸이 천근(千斤)쯤 되는 압력 속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아무 문제없이 움직여지던 그의 손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호흡마저 거북해져 오자 본능적으로 뇌정심법을 운용했다. '아!' 진일문은 내심 탄성을 발했다. 느닷없이 체내에서 진기가 수배나 증폭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진기의 흐름은 생사혈관을 거꾸로 관통하고는 가공할 기세로 뻗쳐 그의 팔을 타고 손목까지 전달되었다. 그런 상태를 맞이하자 그는 지체없이 뇌정도를 떨쳤다. 우우우웅--! 뇌정도가 고막을 찢는 듯한 검명을 울리며 옆으로 휘어졌다. 실상 그것은 도신이 휘어진 것이 아니라 도극(刀極) 부분에서 시퍼런 뇌망(雷芒)이 쏟아져 나와 그렇게 보인 것이었다. 뇌망은 흡사 소용돌이와도 같은 기류를 일으키며 진일문의 전신을 한 바퀴 휘감았다. 삼인의 법승은 그 도세에 휘말려 그만 수중의 무기를 놓지고 말았다. 그들의 법의가 흡사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마침내 그들도 필생의 공력을 끌어 올려 대항을 시도해 온 것이었다. 진일문은 그들이 이룬 삼재(三才)의 방위 한 가운데에 갇혀 있었다. 삼재진 속에서 네 가닥의 각기 다른 기운이 격돌했다. 우르르릉--! 뇌음이 일더니 장내는 삽시에 눈부신 섬광에 휩싸여 버렸다. 그 속에서 허파가 뜯겨 나가는 듯한 비명이 잇달아 울렸다. "크아아악--!" 섬광은 금새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추었다. 진일문이 비로소 긴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떴다. 이어 주위를 돌아본 그는 크나큰 충격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 이럴 수가......." 그가 이렇듯 경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의 주변은 풍비박산이 나 있었다. 석벽이 온통 움푹움푹 파여 있었으며, 그 옆으로 숯덩이 같은 물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물체란 다름 아닌 사대법왕의 시신 조각들이었다. 뇌정삼식의 위력에 그들은 처참한 몰골로 소진된 것이었다. 진일문은 수중의 뇌정도를 내려다보며 탄식을 불어냈다. "뇌정삼식.... 과연 천하제일 도법이다. 기수식에 불과한 전궁일도(電穹一刀)가 이 정도이니 제 이식인 파천일도(破天一刀)라면 능히 천하의 만가지 도법을 말살시킬 것이다. 마지막 삼식인 무극광섬일도식(無極光閃一刀式)은 가히 하늘도 쪼갤 테고......." 진일문. 놀랍게도 그는 짧은 시간 동안 천고에 드문 도법 뇌정삼식을 모두 익힌 것이다. 그렇지 못했다면 이처럼 그 위력에 스스로 놀라는 일도 없었으리라. 실로 누가 들어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대저 무공의 수준이란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밟아 오르는 것이지 단번에 그 극점으로 도약해 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일문은 이러한 통념을 여지없이 깨부수고 있었다. 그의 수중에 쥐어져 있는 천고의 신도(神刀), 즉 뇌정도는 이제 그의 분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원하는 대로 발도는 물론 회수까지도 가능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슷!


뇌정도는 그가 진기를 거두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즉시 뇌정환으로 변신해 그의 손목에 감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은 감정의 동요가 가라앉자 현실로 돌아왔다. '이 곳에 온 지도 꽤 오래 된 것 같은데,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군웅들은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눈에 안쪽의 내전으로 향해져 있는 통로가 들어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 곳을 지나쳐 내전으로 들어갔다.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게 꾸며진 곳. 바닥에는 광택을 자랑하는 천축산의 비단이 깔려 있었고, 벽은 금박으로 도금이 되어 있었다. 기둥에는 해독할 수 없는 문자와 그림들이 잔뜩 새겨져 있어 한층 이색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내전은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그 흔적조차도 ㅊ아볼 수가 없었다. 진일문은 내전을 나와 안쪽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통로는 단순하게 뻗어 있었으며 여러 개의 내전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가 개중 다섯 번째의 내전에 들어섰을 때였다. '맙소사!' 그는 아연해진 나머지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 못했다. 내전에는 수십 명의 여인들이 원형의 진세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얼굴이 하나같��� 밀납인형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녀들은 누군가에게 사혈이 찍혀 모두 죽은 상태였다. 여인들은 숨이 붙어 있지 않을 망정 속살이 환히 비춰 보이는 투명한 망사의를 입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풍염한 몸매는 유감없이 그 굴곡을 과시했다. 진일문은 그런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슴 한 귀퉁이가 써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대체 누가 있어 이 많은 여인들을 죽였단 말인가?' 손을 대 보니 여인들의 몸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죽은지 얼마 안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진일문은 의혹에 싸인 채 다시 안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 때, 느닷없이 석부 전체가 불안스러운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르....... 어디선가 굉음마저 울려 왔다. 진일문의 안색이 일변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형을 멈추며 청력을 기울였다. 이어 석실의 바닥에도 귀를 갖다대어 본 그는 아득한 곳으로부터 연이어 터지는 폭음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석부가 무너지려 하고 있다!' 진일문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만일 석부가 이대로 붕괴된다면 그 결과는 뻔했다. 여하한 고수라도 출구를 찾지 못하는 한 꼼짝없이 생매장되는 것이다.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쾌속절륜한 신법을 발휘해 몸을 날렸다. 어물어물하다가는 목숨을 잃을 판국이되, 그것은 비단 그 자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휘이익--! 바람을 가르듯 통로를 내닫는 동안 진일문은 다시 몇 개의 석문을 만났다. 석문들은 모두 개방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기관장치로 열게 되어 있었으나 기관은 파괴된 지 오래였다. 한참을 달리던 그는 마침내 여러 사람의 호통소리와 병장기 부딪는 소리를 접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약 십여장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는 호통소리 중에서 한 가닥 귀에 익은 음성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저 음성은 황룡보주의 음성이 아닌가?' 진일문은 더 없이 다급한 심정이 되었다. 삼가의 가주들이 있다면 그 곳에는 육선고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을 가능성이 짙었다. 그는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해 갔다. 석부의 한 광장. 그 곳에는 한창 숨막히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삼가의 가주들은 서로 등을 맞댄 채 귀면탈을 쓴 십여 명 괴인들의 협공을 막아내고 있었다. 녹존성군과 그의 수하들도 입장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역시 수십여 명의 괴인들에게 둘러 싸여 분전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육파의 장문인들이 어마어마하게 비대한 체구를 지닌 한 괴인을 맞아 싸우고 있었는데, 그 자는 몸통의 둘레가 보통 사람의 세 배도 넘을 것 같았다. 머리통만 해도 어찌나 큰지 놀라움을 지나 실소를 자아낼 지경이었다. 아마도 어울리지 않게 황금으로 된 작은 관(冠)을 쓰고 있어 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게다가 일신에 걸친 의복까지도 소위 곤룡포(坤龍袍)인 자, 그를 보자 진일문은 심중으로 부르짖었다. '저 자는 바로 천년마등주(千年摩燈主)!' 그의 눈은 크게 부릅떠져 있었다. 천년마등주라면 당금 무림에서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절대마인이다. 진일문은 한 눈에 그의 존재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아들인 보현을 직접 처단했기 때문으로, 보현과 그는 모습이 마치 판에 박은 듯이 닮아 있었다. 격전장의 후미에는 한 채의 가마가 놓여 있었고, 마등을 손에 들고 있는 네 명의 귀면인들이 그 가마를 지키고 있었다. 그 밖에도 또 다른 수십 명의 인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혈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보아 하니 그들 중 한 쪽은 마교의 수하들, 반대 쪽은 거의 벌거벗다시피한 것으로 미루어 진즉부터 이 곳에 감금되었던 무림인들 같았다. 진일문은 작금의 사태에 대해 빠르게 추리해 나갔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미루어 기관은 모두 파괴된 것 같다. 육누님이 멸천삼관을 발동했겠지. 이들은 이 곳의 붕괴를 예상하고는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서로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장내의 난전 중에서도 유독 육파 장문인들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그들이 천년마등주 한 사람에게 연신 몰리는 것을 보자 그는 의아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도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 대 일이라면 몰라도 여섯 사람이 어찌 한 사람을 감당 못한단 말인가?' 물론 천년마등주의 무공은 개세적이었다. 그러나 육파의 장문인들이 모두 합공한 상태에서도 그를 꺾지 못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게 했다. 그는 잠시 관찰한 후,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소림의 원광선사나 화산, 아미의 장문인들이 펼치는 공격에서는 전혀 위력을 느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얼굴에는 일종의 상징성을 띈 자색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진일문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독(毒)!' 상황은 실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진일문의 생각대로 육파의 장문인들은 하나 같이 맹독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렇게 된 경위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광무진인의 교활한 계략과 연결지어 본다면 범인은 역시 그 자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게다가 제대로 신위를 발휘하지 못하면서도 마등주와 싸우는 것으로 보아 육파의 장문인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것 같았다. '안된다! 저들까지 희생되어서는.......' 진일문은 내심 부르짖고는 이를 악물었다. 동시에 그는 육파 의 장문인들을 돕고자 전권을 향해 망설임없이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그것은 마등주의 장력이 막 화산파의 장문인인 비여청의 가슴을 때리는 찰나였다.


"크헉!" 비여청은 피분수를 뿜으며 그대로 삼장이나 날아갔다. 진일문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노호성을 발했다. "마등주! 이 곳은 중원이지, 막북이 아니오." 이 외침은 마등주를 경동시키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로 말하자면 과거에도 중원에 진출을 시도했다가 대패하고 도로 막북으로 쫓겨갔던 위인이 아닌가? 마등주에게 있어 그 기억은 하나의 약점이나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누구의 입에서건 그것이 들추어지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나머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독수를 뻗곤 했다. 과연 마등주의 넓은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어떤 놈이냐?" 그는 분성을 터뜨리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허공에서 눈부신 검광이 쏘아져 내려왔다. "후후... 보현과 이미 상견례를 치룬 자외다." "뭐, 뭣이? 그렇다면 네 놈이 보현을 죽인 그 놈이로구나." 마등주의 분노는 그야말로 극점을 향해 치달렸다. 타인에게는 어떤 존재로 알려져 있던, 독자(獨子)를 잃은 그의 슬픔은 천하의 어느 부모와도 다르지 않았다. "이 찢어죽일 놈!" 결전에 있어 흥분은 절대 금물이다. 특히 고수들의 싸움에 있어서는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목숨을 잃는 수가 허다하다. 간일발의 차이로 이승과 저승을 가름하는 문턱을 왔다갔다하는 판국이니 찰나지간일지라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물론 천년마등주도 평소 같았으면 가장 평범한 이 진리를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들을 살해한 원수가 눈앞에 나타남으로써 그는 이것을 깡그리 잊고 말았다. 하늘이라도 태울 듯한 격분이 마등주의 이성을 마비시켜 버렸다. 천년마등주는 시력을 빼앗길 정도로 눈부신 검광이 쏘아져옴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오히려 이를 부드득 갈며 쌍장을 내밀었다. "지옥만겁수(地獄萬劫手)!" 위이이잉--! 막강한 경풍을 일으키며 시커먼 묵광(墨光)이 마등주의 장심으로부터 뻗어 나갔다. 그러나 지금 그의 공세에는 본신 내력의 절반밖에는 깃들어 있지 않았다. 마음이 지나치게 동요된 상태이고 보니 공력이 제대로 운용될 리가 없거늘, 그 자신만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파앗! 천년마등주는 격타음이 울리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분명 극성의 천비수라마공(天肥修羅魔功)을 통해 전개했던 지옥만겁수가 상대의 검세를 꿰뚫었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그의 입가에 떠오른 웃음기는 승리의 미소이자 아들의 복수를 이룬데 대한 만족감의 표시였다. 고작 그가 입은 상처라야 그저 정수리의 한복판이 잠깐 따끔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틀림없이 그랬다. 그런데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의 미간 정중앙에 한 가닥 세로로 된 혈선이 그어졌다. 그 혈선은 콧등을 타고 점차 아래로 내려가, 입술을 지나더니 급기야 목울대까지 이어졌다. "으헉!" 비로소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비명이 마등주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보통 사람의 세 배가 넘는 그의 거구가 맥없이 쓰러졌다. 그의 몸은 바닥을 나뒹구는 순간에 이미 이등분이 되어 있었다.


진일문. 그는 어느 덧 마등주의 맞은 편에 내려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들려진 비취검, 길이라야 불과 한 척 밖에 되지 않는 단검으로 희대의 대마왕을 양단시켜 버린 것이었다. 진일문도 설마하니 그 일초로 천년마등주를 꺾게 되리라고는 생각치 않았었다. 다만 몇 걸음이라도 뒤로 물러나게 할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여겼을 정도였다. 일찍부터 보현과 마등주의 신체는 다 같이 도검불침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중 공력이 높은 마등주의 호신기공이 보현에 비해 당연히 우위였다. 진일문은 천년마등주와 비취검을 번갈아 바라보며 안면 가득 의문을 떠올렸다. '저 자가 설마 하니 이렇게 쉽게......?' 그 역시도 마등주 만큼이나 자신의 기량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오파의 장문인들은 충격을 입고 굳어져 있었다. 화산파의 비여청을 잃었으되 그들에게는 비통함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그들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으로 인해 온통 경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불과 약관에 지나지 않는 청년이, 그것도 일검으로 마등주를 제거해 버렸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미타불......." 소림의 원광선사가 눈을 내리감고 불호를 외웠다. 인세를 초탈한 승인이었으나 주검에 대한 연민은 그도 늘상 느낀다. 하지만 지금은 결코 그 때문이 아니었다. 놀란 나머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법력(法力)이라도 빌고자 한 것이었다. 그의 불호성에 도움을 입은 것은 오히려 진일문이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든 듯 재빨리 비취검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오파의 장문인들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다들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예를 갖춘 그의 태도에 장문인들은 얼굴을 붉혔다. 명색이 무림에서 정통의 맥을 이어 오던 명문대파의 장문인으로써 일개 젊은 청년에게 구명지은을 입게 되자 그들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다 해서 예를 무시하면 웃음거리밖에는 안된다. 원광선사가 대표격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시주의 무공은 가히 신인(神人)에 가깝구려. 정기가 말살되어 가는 중원무림에 소협과 같은 신성(新星)이 나타났다는 것은 홍복이 아닐 수 없소이다." 치하의 말을 듣자 이번에는 진일문이 얼굴을 붉혔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광무진인은......?"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 때문이었다. 광무진인이 마교의 주구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그들은 간접적으로 마교에 협력한 셈이 되었고, 그런 그들에게 광무진인에 대해 묻자니 부담을 줄 것 같아서였다. 원광선사가 그의 의중을 알고는 되려 장탄식했다. "아미타불.... 진정 수치스러운 일이오. 우리들은 그 동안 허명만 얻었을 뿐이지, 강호의 정세에 대해 너무도 어두웠소이다. 뒤늦게라도 소협이 잘못된 점을 깨우쳐 주지 않았다면 천추의 한을 남길 뻔 했소이다. 이제껏 우리들 손으로 무림의 장래를 망치고자 했으니 이 죄업을 어찌 치뤄야 할지 모르겠소." 아미파의 장문인인 해공선사(海公禪師)가 계도로 땅을 찍으며 통탄해마지 않았다. "광무, 그 도적에게 속아 그렇게 되었다지만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겠소? 그 자의 말마따나 우리가


어리석었던 것을. 신물보전(神物寶典)까지 그에게 내맡겼으니, 크흑!" 그들의 절규는 흡사 피를 토해내는 것과도 같았다. 이를 보자 진일문은 안타까운 심정이 되어 그 이상은 더 물을 수도 없었다. 그는 얼른 화제를 돌려 버렸다. "여러분들의 안색을 보니 독상을 입으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서 요상을 하시는 것이......." 원광선사가 그의 말을 중도에서 막았다. "아미타불... 소협께선 염려하지 마시오. 문자 그대로 자업자득이외다. 그 자는 각파의 신물들을 핑계 삼아 우리로 하여금 아홉 가지나 되는 독물을 복용하도록 강권했소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자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 순간부터 우리의 목숨은 이미 사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소." 진일문은 그 말을 듣자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체 선사께선 무슨 말씀을......? 아니나 다를까? 원광선사는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미타불... 우리는 지금 상태로는 조사의 영전에 감히 얼굴도 내밀 수가 없는 죄인들이오. 아니, 사문으로의 복귀는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외다. 우리는 차라리 이 곳에서 다 함께 뼈를 묻기로 합의를 보았소이다. 그나마 부처님의 가호가 계셔서 도적을 처치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목이 메이는 듯 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불심이 깃든 그의 노안에는 어느새 뿌연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진일문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그를 비롯한 오파의 장문인들을 응시했다. "그것은 아니될 말씀입니다. 중독되셨음에도 불구하고 옥쇄를 감행하시려는 뜻은 훌륭하나 소생은 여러분들께서 좀 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장래 일을 내다 보셨으면 합니다." "소협, 우리는......!" 해공선사가 부정의 뜻을 전하려다 흠칫 하고 멈추었다. 진일문의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의 희생만으로는 결코 마교의 힘을 수그러 들게 하지 못합니다. 각파의 정기가 더욱 움츠러 들어 반대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게 될 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필히 문파로 돌아가 오늘의 이 음모를 알리고, 정도무림을 새롭게 규합해 미구에 닥칠 큰 혈풍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그의 말에는 조금도 그른 것이라곤 없었다. 절절한 충절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써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각 장문인들을 감동으로 이끌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오파의 장문인들은 묵묵히 고개를 떨구었다. 분명한 것은 이 순간 그들이 벌써 수치감에서 일탈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에게 충고를 받았다 해서 자존심이 상한다던가 하는 일도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무거웠던 가슴이 탁 트이는 한편 새로운 목적지가 정해진 항해사인양 투지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노호한 바다라도 능히 헤치고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때였다. 콰르르릉--! 굉렬한 폭음과 함께 느닷없이 천정의 일각이 무너져 내렸다. 덕분에 그 때까지도 도검이나 권장을 나누고 있던 장내의 인물들이 일제히 싸움을 중지하고 놀란 기색을 보였다. 만일 이 거대한 지하 동굴이 무너진다면 격전도, 난전도 모두 필요없게 된다. 양측이 전부 같은 무덤 안에 들게 될 테니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하찮은 승부수 따위가 아니었다. 오직 출로를 찾는 것만이 급선무였다. 꽈르릉--! 재차 폭음이 일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한 쪽의 벽이 무너지며 그 곳으로부터 하나의 왜소한 인영이 뛰쳐나왔다. "육누님!"


진일문은 크게 외치며 그 인영에게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가 막 다가서서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인영은 되려 그에게 맹렬한 일격을 가해왔다. "어림없다! 흉적." 쉭! "누님! 소제, 진일문이오. 진정 하시오." 진일문은 예상치 않았던 공격에 급히 한 손을 뻗어 이를 막았다. 그러나 다른 한 손은 그대로 육선고의 무력해져 있는 육신을 받아 안고 있었다. 그는 멀리서부터 이미 그녀가 전신을 피로 적시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동생!" 육선고는 비로소 그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겨 왔다. "죽어라--!" 무너져 내린 벽 쪽에서 살찬 일갈과 함께 시뻘건 장세가 몰려 나왔다. 진일문은 상황을 짐작했던지라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좌수로 비취검을 휘둘렀다. 츠읏! 비취검에서 푸른 전광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진일문이 무의식 중에서도 뇌정삼식의 기수식인 전궁일도를 펼친 것이다. 물론 뇌정도로 펼쳤을 때와는 크게 차이가 있었지만. "헉!" 다급한 신음성이 울렸다. 이어 벽에서 튀어나온 또 하나의 인영은 바로 광무진인이었다. 그는 가슴에서 솟구치는 피분수를 손으로 막으며 경악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때, 진일문의 가슴에 안겨 있던 육선고가 숨가쁘게 말했다. "나... 나.... 멸천삼관을... 발동시킨지 오래예요. 빨리 서쪽의 통로로.... 시간이 없어, 동생......." 상황은 너무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진일문으로서는 더 이상 무엇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진기를 실어 외쳤다. "모두들 불초를 따르시오--!" 다른 부언도, 피아(彼我)의 구분도 일체 필요치 않았다. 현재의 중인들에게는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돌로 된 사방 벽에 쩍쩍 금이 가고 천정이 곳곳에서 무너지기 시작한 지금, 이끌어 줄 구원자 외에 무엇이 더 요구되겠는가? 휘익--! 진일문은 앞서 신형을 날렸다. 그러자 정사의 모든 인물들이 처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그의 뒤를 따랐다. 우르르르-- 콰콰쾅--! 군호들이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광장이 허물어져 내렸다. 삽시에 광장은 거대한 암석들과 흙더미에 파묻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위기의 순간을 아슬아슬하게 넘긴 군호들은 저마다 진저리를 치며 가슴을 쓸고 있었다. 진일문은 품안에 육선고를 안은 채 계속 그녀가 지시하는 대로 달리고 있었다. 뒤쪽에서는 폭음이 연이어 울렸고, 더러는 뭇군호들의 단말마가 섞여 들려 오기도 했다. '아! 저들은 끝내 이 곳에서 부질없이 산화하고 마는구나.' 진일문은 내심 탄식해마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들로 인해 발길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것은 물론 자신을 따르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의식해서였다. '일월맹! 내 절대로 용서치 않으리라.' 43 장 구주동맹(九洲同盟) 꽤 많은 날짜가 지나고 있었다.


난세(亂世)는 영웅을 부르고 영웅은 다시 난세를 이룬다 했던가? 무림의 정세는 날이 갈수록 더욱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우선 무당산의 천사곡에서 있었던 희대의 사건은 전 무림에 걸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무당의 장문인인 광무진인이 마교의 사주를 받고 무림인들을 몰살시키려 했으니, 이는 실로 기막힌 대사건이었다. 반면에 이로 인해 무림에는 한 명의 걸출한 영웅이 탄생하게 되었다. 전화위복이랄까? 그는 바로 구주신협(九州神俠)이라는 명호로 불리워지게 된 진일문(眞一文)이었다. 사실 그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천사곡의 만겁수라동에 들어갔던 수백 명 무림인들은 한 명도 살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건을 직접 겪었던 강호인들의 입에서는 갖가지 일화들이 흘러 나왔고, 그것은 그 뒤로 계속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 덕분에 당금 무림은 구주신협 진일문의 신화적인 이야기로 인해 온통 흥분으로 들끓었다. "이봐, 자네 진대협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보았나?" "예끼 이 사람! 나는 뭐 귀가 없는 줄 아나? 강호인 치고 진대협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럼 진대협께서 구주대동맹(九州大同盟)의 맹주(盟主)가 되셨다는 소문도 들었나?" "구주대동맹?" "핫핫핫! 내 그럴 줄 알았지. 구주대동맹에 대한 것 만큼은 아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아. 자네는 오늘 나로 인해 꽉 막혀 있던 귀가 뻥 뚫린 줄이나 알게." "어허, 그것쯤은 그만 들이고 어서 말이나 계속해 보게나. 대체 구주대동맹이란 무엇인가?" "험! 공짜로는 안되네. 이 송천도(宋天刀)도 백화주 열 근을 날리고야 간신히 알아낸 것이니 밑천을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빌어먹을! 좋아, 내 백화주 열 근을 사겠으니 어서 말해 보게." 근자에 이르러 주루(酒樓)에서 떠도는 화제란 대충 이런 것들이었다. 강호인들은 둘 이상만 모였다 하면 언제나 진일문의 이름을 들먹였고, 자연스럽게 구주대동맹이라는 단체로 화제의 방향을 옮겨가게 마련이었다. 구주신협 진일문. 이 이름은 무림 최대의 화제거리였으며 명실공히 강호인 모두가 존경과 탄복을 아끼지 않는 일대 기인으로 부상되었다. 무당산의 대음모를 통해 혜성(彗星)처럼 떠오른 것이었다. 그의 무위(武威)는 물론 지혜와 기질에 대한 소문까지도 시간이 갈수록 무림인들의 뇌리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사실 전설의 대마왕인 천년마등주를 단 일초에 양단해 버렸다는 것만으로도 영웅 대접을 받기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필두로 그에 관한 사항들은 얘기하기 좋아하는 강호인들의 첫 잔 술에 무수히 오르내렸다. 구주대동맹. 이는 일종의 결사조직이랄지, 만겁수라동 사건 이후로 정도무림에서 대의(大義)를 기치로 하여 결성된 단체였다. 처음 이를 주창한 것은 다름 아닌 칠대문파였다. 그리고 무림최대의 방회인 개방이 가입함으로써 더욱 구체화되었다. 칠파일방(七派一 )이라면 중원무림의 명실상부한 기둥이다. 중원무림은 장구한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끊임없이 이들 제문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만큼 그들은 중원무림의 근간으로써 저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른바 폭풍전야(暴風前夜)라고나 할까? 당금 무림은 바로 그런 소강상태에 놓여 있었다. 사실상 일월맹이 마각을 드러내고 무림패업을 선언하자 무림의 공기는 그 파고(波高)를 한창 드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외부로 드러나지 않아 일반인들 중에는 더러 무림에 평화가 깃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구주대동맹의 결성은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각기 자파(自派)의 운명을 내걸었다고 할 수 있었다. 칠파일방은 특히 이로 인해 삼성림과 등을 돌리게 되기도 했다. 삼성림의 삼성령(三聖令) 하나면 언제든 무림 전체가 통솔 되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로 구주대동맹을 이룬 것은 어떻게 설명해도 삼성림에 대한 명백한 반기(反旗)였다. 물론 일이 거기에 이르기까지 그 후면에는 구주신협 진일문이라는 존재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칠대문파는 불가능을 뛰어넘어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개방까지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나섰으므로 중원무림의 힘은 어느덧 구주대동맹을 중심으로 서서히 그 체계를 밟아가고 있었다. 개봉부(開封府). 이수(伊水) 연변에는 한 채의 장원이 있었다. 이 장원은 이원외(李員外)라고 불리우는 한사(寒士)의 저택이었는데, 아무도 그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실상 이원외란 개방 소속의 한 장로가 쓰는 가명이었고, 이가장은 비밀리에 설치 된 개방의 한 분타였다. 그러니 내부의 일을 아무도 모르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이가장은 언제부터인가 무림풍운의 심장부가 되어 있었다. 이 곳을 오가는 사람들은 거개가 지극히 은밀하게 행동했다. 왜냐하면 장차 무림의 운명에 생사를 건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염천(炎天). 온갖 꽃들이 만발해 있는 이가장의 화원에도 팔월의 따가운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백일홍이 뜨거운 열기를 감당하지 못해 꽃술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확확 달아오르는 대지, 그나마 열기를 식혀주는 것은 화원 한가운데에 있는 인공의 연못이었다. 연못가에는 정자가 있었고, 그 위에서 한 명의 청년이 뒷짐을 진 채 서성이고 있었다. 약관의 나이로 보이는 청년은 눈썹이 붓으로 그은듯 선명해 매우 강인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지금 연못 위로 이따금씩 솟구쳐 오르는 잉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자 안에는 하나의 탁자가 있었는데, 서신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지필묵이 놓여 있었으며 방금 써 놓은 듯한 밀봉서도 몇 장쯤 보였다. 문득 정자로 오르는 길에 한 명의 청의인이 나타났다. "맹주께 연락이 왔습니다." 청의인의 음성은 웬지 잔뜩 쉬어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내더니 공손하게 내밀었다. 청년은 그를 보자 눈에 이채를 떠올리더니 담담히 입을 열었다. "환사(幻邪), 그런 속임수는 내게 통하지 않는다고 했지 않소? 후후... 아무리 변장을 해도 소용없소." 청년의 말에 청의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맹주께서는 무슨 말씀이신지? 소생은 개방의 하남분타 제 삼십육번째 순검(巡檢)으로써......." 청년은 빙긋 웃으며 그 말을 가로챘다. "분장은 그럴 듯 하지만 음성이 틀렸소. 다음부터는 탁성(濁聲)을 감추도록 신경을 좀 쓰시오. 분장술이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청력까지는 쉽게 속일 수가 없는 법이오." "하하하하......." 청의인은 결국 대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손으로 스윽 문지르자 그는 곧 둥글넓적한 얼굴을 지닌 오순 가량의 노인으로 변했다. "대형에게는 못당하겠소이다. 차라리 하늘을 속이고자 덤비는 편이 쉬울 것 같소." 환사 만생(萬生). 환우오사 중 일인이자 진일문과는 형제지교를 맺은 그였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청년은 물론 진일문이었다. 만생이 이 곳 이가장에서 머무른지도 어언 삼 개월, 환우오사 전원이 모두 진일문의 측근에 모여


있었다. "그래, 이번에는 어떤 소식을 가져 왔소?" "대형께서 직접 뜯어 보시오. 개방의 태산 분타에서 날아온 소식이외다." "그럼 그렇게 하리다." 진일문은 봉서를 뜯었다. 거기에는 깨알같이 작은 문자들이 빽빽하게 쓰여져 있었다. 그것은 태산 분타의 분타주인 삼소풍개(三笑風 )라는 인물이 보낸 것이었다.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진일문은 안색이 약간 달라지고 있었다. 그는 서신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무겁게 중얼거렸다. "일월맹과 삼성림의 싸움은 점차로 본격화 되어 가는군." 그 말에 만생이 눈쌀을 찌푸렸다. "팔공산(八公山)과 기련산(神連山), 그리고 황산(荒山)의 싸움에서 두 세력은 서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을 뿐 어느 측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소이다. 지금 있는 태산에서의 일전은 종전보다 더 큰 싸움이었을 텐데, 무슨 연락이라도 왔소이까?" 진일문은 잠시 묵묵히 있다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이 전서만으로 어찌 전황까지 파악할 수 있겠소? 그러나 삼성림이 지나치게 서두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소." "그것 참....... 화개악은 나이가 들더니 아무래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오." 진일문은 탁자에 가 앉더니 먹을 듬뿍 묻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도 역시 어딘가로 보내질 서신이었다. 이어 그는 서신을 밀봉한 후 만생에게 건넸다. "만리신구(萬里神鳩)를 통해 속히 이것을 전달하도록 하시오. 늦어도 하루 안에는 당도할 수 있을 것이오." 만생은 히죽 웃었다. "대형께서는 개방의 전서법으로 아주 톡톡히 재미를 보시는구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천하만리를 주무를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이까?" 진일문 그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만생의 말은 사실이었다. 진일문은 이 곳 이가장에서 머물며 삼 개월 동안 외부로 한 걸음도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천하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히 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처로 명령을 내리는 것도 용이했다. 개방의 조직은 본시 천하에서 가장 방대하며 소식이 정통하기로도 단연 으뜸이었다. 덕분에 진일문은 이 정자 내에서 전서구를 통해 천하의 소식과 정보를 수시로 접할 수 있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던 것이다. 현 중원의 정세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지세였다. 근간에 일월맹과 삼성림은 자주 충돌을 일으켰는데, 그 속사정이 따로 있는지는 몰라도 표면상의 이유는 만겁수라동에서 회천궁주인 녹존성군이 납치되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이후로 삼성림은 일월맹과 계속 여러 차례에 걸친 혈전을 벌여 왔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싸움은 피차간에 어이없을 정도로 소모전일 따름이었다. 양측 모두가 수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아무런 이득도 취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떼지 못하는 것은 두 세력이 이미 물러설래야 물러설 수 없는 기호지세(騎虎之勢)가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진일문. 그는 칠대문파 장문인들의 적극적인 추대에 힘입어 구주동맹의 맹주가 되어 있었다. 칠대문파를 위해 한 가지 큰 일을 더 해냄으로써 그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그는 만겁수라동이 붕괴되었을 때, 와중에서 광무진인을 사로잡는 쾌거를 올렸다. 당시 광무진인은


칠대문파의 각종 신물 및 비급들을 마교의 본전에 갖다 바친 상황이었다. 진일문은 즉각적으로 마���와 협상을 벌였다. 그는 광무진인과 정도무림 칠대문파의 비전지비를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마교는 물론 이 교환조건에 순순히 응했다. 그것은 광무진인이 교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진일문은 이 사실을 미리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전지비를 돌려 준 그는 그 날로 공히 칠대문파의 구명인사가 되었다. 사실 그들은 자파의 보물을 잃고 나서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있던 중 그것들을 되찾게 되자 진일문을 향해 그야말로 감읍해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여전히 딱한 처지에 놓인 것은 다름 아닌 무당파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광무진인은 아예 마교로 투신해 버렸고, 광해진인은 안타깝게도 만겁수라동에서 생사가 불명인 채 실종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무당은 개파 이후 처음이자 가장 큰 불운을 맞게 되었다. 장문인 자리가 공석이 되어 버렸으니 머리를 잃은 호랑이 꼴이 되어 전전긍긍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본의건, 아니건 천사곡 사건 후로는 무림에 면목이 서지 않아 어떤 일에도 감히 개입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무당이 안고 있는 이런 제반의 문제들을 해결해 준 것도 역시 진일문의 공로였다. 그는 무당이 직면하고 있는 사태에 직접적으로 나섰고, 모두 그의 의견에 호응해 주었다. 만겁수라동에서 보여준 행적도 그렇거니와 그에 대한 신뢰는 가히 부동의 것이었다. 그의 신분으로 치자면 무당 최고의 기인인 현고자(玄古子)의 무기명제자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적어도 무당 내에서는 누구도 거스를 자가 없었다. 이런 입장을 빌어 진일문은 무당의 광자 항렬 중에서 가장 도(道)가 높다고 할 수 있는 광수진인을 장문인으로 추천했고, 이 의견은 무당 내에서 전혀 무리없이 받아 들여졌다. 아울러 진일문은 광수진인에게 무당의 역대 장문인들에게만 이어져 내려오던 태극환허신공과 태극십삼세를 기꺼이 전했다. 그는 과거부터 줄곧 무당의 것은 무당에 돌려 주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해 온 바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것만이 한을 품고 이승을 타계한 현고자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자신과의 오랜 약속을 산뜻하고 명료하게 수행해 냈고, 이로 인해 무당의 대은인으로 부상되기도 했다. 진일문은 돌아섰다. 귓전으로 가벼운 인기척을 느낀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주방주(朱幇主)." 백색의삼을 입은 호리호리한 문사가 얼굴을 은은하게 붉힌 채 서 있었다. 가녀린 선과 아름다운 얼굴 윤곽 때문에 그가 남장소녀라는 것은 한 눈에도 알 수 있었다. 바로 개방의 현임 방주인 주서혜였다. 그녀는 편의상 계속해서 남장을 하고 있었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도 저를 계속 방주라고 부르실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진일문은 담담히 웃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오? 주방주의 위명이 천하를 떨치고 있는 마당에 어찌 감히 사명(私名)을 부를 수 있겠소?" 주서혜는 쓴 입맛을 다셨다. "정말 철저하게 괴롭히시는군요. 저를 이렇게 딱하게 만들어 놓고도 모자라 이제는 놀리시기까지 하다니......." 진일문은 짐짓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지금 딱하게 만들었다고 했소?"


"그래요." "허어, 지존의 자리가 바로 그런 자리라는 것을 진즉 무당파에 알려 주었으면 좋았을 뻔 했소. 하긴, 그래서 불초가 주방주를 더욱 존경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농담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실상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었다. 주서혜가 그것을 못알아 들을 리 없었다. "정말 저로서는 대책이 없군요. 당신 앞에서는 엄살이 도무지 통하지 않으니......." 그녀의 음성은 격동으로 인해 촉촉히 젖어들고 있었다. 주서혜는 내심 진일문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무당의 사태에 비견해 그녀가 지닌 청정한 지존의 자세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녀의 수고에 대한 큰 보상이 되어 주고 있었다. "좋아요, 저도 앞으로 응석 따위는 절대 부리지 않겠어요." 주서혜의 말을 진일문이 곧바로 받았다. "잘 생각하셨소. 그런데 참으로 아쉽구려? 개방의 십만 방도가 모두 그 소리를 들었어야 했는데." "졌어요. 호호호호......." 주서혜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웬지 짙은 공허감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을 감지한 진일문은 내심 쓰린 심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미안하오, 주낭자. 내가 왜 그대의 마음을 모르겠소? 십만을 헤아리는 개방 의개들이 모두 소저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으니.... 그것은 설사 남자일지라도 감당하기 힘든 노릇이거늘, 항차 여인의 몸으로 얼마나 힘겹게 지탱해 나가고 있을지 짐작이 가오. 다수의 주목을 받자면 개인이란 완전히 포기되어야 할진저.......'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심중과는 다른 말을 해야 했다. "불초는 얼마나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지 모르오. 소림의 원광선사와 주방주, 두 분이 각기 구주동맹의 부맹주로서 불초와 짐을 나누어 짊어져 주니 든든하기 그지없소이다." "그야 당연한 일......." 주서혜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녀가 부맹주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구주동맹이 결성되기까지에는 칠대문파보다도 개방의 역할이 훨씬 더 컸다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어떻게든 진일문과 함께 하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이 폭넓게 작용하고 있었고, 그녀는 스스로도 이를 부인하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진일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불초는 두 분 부맹주 덕분에 참으로 마음이 편하오. 설사 내 신상에 이상이 생긴다 해도 두 분이라면 능히 구주동맹을 훌륭하게 이끌어 나가시리라 믿소." 주서혜는 충격을 받은 듯 몸을 가늘게 떨었다. "맹주의 신상에 이상이라니요? 대체 무슨 말씀을......?" 그녀의 눈이 처음으로 두려움을 담은 채 심하게 흔들렸다. 이렇게 되자 진일문도 그녀를 정면으로 볼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는 아예 등을 돌려 그녀를 외면해 버렸다. "이 곳을 떠날 때가 된 것 같소이다. 그 동안 강호정세는 숱한 변화를 거듭하면서도 정작 음모의 근원에는 다가가지도 못한 상태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소? 비록 겉으로는 평화로와 보이나 무림은 일로 황폐해져 가고 있소이다. 저마다 패업( 業)만을 추구하고 있으니 이대로 가다가는 지리멸렬하기 쉽상이오. 더 늦으면 후대에 이르러서도 정기를 회복할 수가 없을 것이오." 늘 그랬지만 진일문의 공적인 입장은 너무도 확실하고 바른 것이어서 주서혜를 슬프게 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꿀꺽 참고 입을 열었다. "그럼... 떠나셔야지요."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또 그... 고맙다는 말......." 주서혜의 음성이 격정을 띄었다. 그녀는 진일문이 떠날 때면 언제나 고맙다고 말해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그녀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섬약한 부분은 여지없이 상처를 입곤 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을 의식했는지 짧게 물었다. "언제... 요?" 진일문도 짧게 대답했다. "사흘 후." 이가장을 방문한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당도하자마자 한 통의 서찰을 이원외의 앞으로 보냈고, 그 서찰은 곧바로 진일문에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진일문은 서찰을 읽자 다소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여인을 데려 오시오." 명을 받은 자는 환우오사 중 색사(色邪) 요미미였다. "그럼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녀는 진일문의 동요를 눈치 채고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이름하여 한림소원(寒林小苑). 이 곳은 진일문이 그 간 줄곧 머물러 오던 거처였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눈에 익숙한 방안의 정경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더니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요미미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여인을 데리고 왔다. "대가가(大哥哥), 손님을 모셔 왔어요." 요미미의 음성에는 평소에 없었던 아양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방문객이 절세미녀라는 것을 알아 차렸으며, 아울러 진일문과 모종의 갈등이 있으리라는 것도 짐작해 냈다. 그리하여 일부러 분위기를 진작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고맙소." 진일문이 답하자 요미미는 짐짓 간드러지게 웃었다. "호호호호... 아무튼 대가의 인기는 만점이군요. 이 분, 귀하신 소저는 또 언제 알게 되었나요?" 진일문은 비로소 바둑판으로부터 고개를 들었다. "미미, 되었소. 그만 나가 보시오." "호호호... 알겠어요. 역시 주방주께는 알리지 말아야겠지요?" "그건 미미의 뜻대로 하시오." "호호호호......." 묘한 웃음의 여운을 남기며 요미미는 사라졌다. 한림소원은 본시 이가장 내에서도 가장 조용한 곳이었다. 후원에 따로 담장을 두른 별원으로써 지난 삼 개월 동안 그에게 명상할 시간을 충분하게 가져다주었다. 진일문은 명상에 잠겼을 때와 마찬가지로 침묵하고 있었다. 면사녀가 서 있는 것은 별로 의식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그의 손만이 습관인양 천천히 바둑돌을 옮겨 놓고 있었다. 딱! 딱....... 대청을 울리는 공명은 더 없이 청량했다. 또한 대청의 한가운데 앉아 태연히 바둑을 두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마치 선승(禪僧)인양 탈속한 기품마저 흐르고 있었다. 그의 침묵은 꽤 길었다. 더 못견디겠는지 먼저 입을 연 것은 면사녀였다.


"오랫만이군요......." 그녀의 음성은 웬지 몹시도 떨리고 있었다. 진일문의 미간이 슬며시 찌푸러 들었다. 역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인의 입술을 통해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알고 있었어요. 저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말에 진일문의 무거운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그건 맞소." 여인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직도 과거의 감정을... 가지고 계신가요?" "과거의 어떤 감정을 말하는 것이오?" "그건......!" 면사녀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제가 진대협께 범했던 무례를 뜻하는 거예요. 그 때는 제가 너무 철이 없어 세상을 몰랐던지라......." 진일문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것은 피차에 마찬가지였을 거요. 당시의 나를 떠올리면 때로 어이가 없어 쓴웃음이 나오기도 하니까." "여전히 저를... 미워 하시는군요." 진일문은 마침내 바둑판에서 손을 떼며 그녀를 정시했다. "그것과는 의미가 다르오. 전자에 어떤 일을 겪었건 그것은 과거지사에 불과하며 나는 그 모두를 잊은지 오래요." 면사녀는 할 말을 잊은 듯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면사 위쪽으로 보이는 그녀의 눈에는 고통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눈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가슴을 베일 정도로 차갑고 아름답기만 했던 눈이 작금에 이르자 어느 정도는 인생을 이해하고 있는 듯 진중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그 동안 실로 많이 변했군. 하긴, 수많은 고초와 그에 따른 인내는 누구에게나 약이 되는 법이지.' 진일문이 내심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면사녀가 눈빛을 부드럽게 풀며 다시 말했다. "이 사영화는... 진대협께는 늘상 죄만 짓게 되는 것 같아요. 이전에 그랬듯 천사곡에서도 구명지은을 입었건만, 제대로 사의도 표하지 못했어요." "그 일도 역시 잊은지 오래요. 과히 괘념치 마시오." 면사녀는 바로 진일문이 가진 쓰린 과거의 일부, 즉 사영화(査瑛華)였다. 사대신가 가운데 황룡사가보의 무남독녀인 것이다. 그녀의 존재란 진일문에게 있어 여전히 연모와 오욕의 잔상을 동시에 떠올리게 만들었다. 물론 이렇다할 악감은 없었다. 그러나 뭐라 정의할 수 없으면서도 종내 착잡함에 이르도록 하는 그 감정을 진일문은 언제부터인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규정지어 버리고 있는 상태였다. 천사곡에서도 그는 그랬다. 초라한 수레에 영어되어 있던 사영화의 모습은 그에게 당시 상당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의 뇌리에서 늘상 화려하고 당당하게 기억되던 그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진일문이 그런 외양으로 인해 실망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사영화의 처참해져 있는 모습에서 오히려 보호본능에 가까운 연민지심(憐愍之心)을 느꼈고, 그 복잡한 감정으로부터 일탈하고자 그녀를 피했던 것도 실은 그 자신이었다. 하지만 진일문으로서도 일부러 찾아온 손님(?)조차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간략하게 용건을 물었다. "그래, 이 곳에는 어떤 일로 오셨소?"


"흑!" 사영화는 느닷없이 오열을 터뜨리더니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무릎이 바닥을 향해 무력하게 꺾이고 있었다. "사낭자!" 진일문은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그에게 또 다른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토록 도도했던 명가의 자존심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도와 주세요!" 사영화의 입에서 튀어나온 절박한 한 마디가 진일문의 가슴에 마치 육중한 둔기인양 세차게 부딪쳐 왔다. "대체 무엇을......?" "저를 뻔뻔스럽다 욕하시겠지요. 아니, 설사 때리신들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그러나 저로서는 이 방법 외에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도 없어요. 가문의 위세를 믿고 그토록 거만을 떨었건만 무림 사대신가의 명예는 땅바닥에 떨어진지 오래이고, 천하에서 저를 도와줄 사람은 누구도 없어요." 일단 말이 터져 나오자 사영화는 일사천리로 내달았다. 어렵사리 입을 떼놓은 만큼 그녀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 와중에 눈물은 비오듯 쏟아져 내려 그녀가 쓰고 있는 면사를 비롯해 온 얼굴을 적셨다. 진일문. 그는 계속 묵묵히 사영화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춤을 추듯 격렬하게 들먹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녀린 어깨는 또한 선명하게 그의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44 장 황룡사가보(黃龍査家堡)의 변고(變故) 최근 황룡사가보에서는 비밀리에 회합이 이루어진 바 있었다. 보주인 사운악이 명첩을 돌려 삼대신가의 가주들을 초빙했다. 그것은 워낙 은밀히 진행되어 천하에서 오직 그들만이 아는 일이었다. 그들 나름의 중요한 관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관건이란 다름이 아니라 천사곡에서의 사건 이후로 고심해왔던 자신들의 입지 문제였다. 사실상 그때부터 그들은 무림 내에서 암암리에 배척을 당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역시 한 때 마교에 협력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마교와 연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비록 당금에 이르러 전락해 버렸다고는 하나 소위 명문정파로써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 온 그들이 아닌가? 결국 그들 중원사대신가는 한 가지로 뜻을 모았다. 그것은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서로 힘을 모아 무림 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차제에 삼성림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들과 동등한 위치로 나아갈 것이며, 칠대문파와도 본래 가지고 있던 적정선의 교류를 되찾아 보자는 것 등이었다. 특히 악가보의 보주인 악군보가 만겁수라동에서 죽은 이후로 그런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악가보에서도 신임 보주인 섬전신검(閃電神劍) 악군혈(岳君頁)이 사대검장(四大劍將)을 대동하고 와 동의를 표했다. 사대신가의 가주들은 이런 취지 아래 한 밀전에 모여 구체적인 논의로 들어갔고,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사안은 극비에 붙여졌던 것이다. 그런데 의문의 괴사(怪事)가 발생했다. 사흘이 지나도록 그들이 밀전에서 나오지 않자 사가보에서는 이상하게 여기고 총관(總管)인 황보인을 밀전 안으로 들여 보냈다. 황보인이 밀전에서 목도한 것은 실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의당 회의를 진행하고 있어야 할 사대신가의 가주들이 놀랍게도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전신을 살펴 보아도 아무런 상처 하나 없었으며, 이렇다할 싸움의 흔적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절명해 있었다.


황룡사가보는 발칵 뒤집혔다. 졸지에 보주를 잃게 된 것도 그렇지만 이 곳에 와서 다른 삼가의 가주들마저 죽었으니, 장차의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총관 황보인은 일단 삼가에 비밀서한을 보내 그 사실을 알리는 한편, 식솔들에게는 이 일에 대해 일체 함구하게 했다. 외부로 흘러나가 봐야 좋을 일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건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삼가에서 속속 고수들이 찾아왔는데, 그들 역시 밀전 안으로 들어가 조사를 하다가 그 도중에 시체로 화해 버린 것이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이 현상은 시체의 숫자를 점점 불려 놓더니 급기야는 자그마치 사십여구에 이르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나중에는 아무도 밀전 안으로 들어가려는 인물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사영화가 이가장으로 달려오게 된 경위였다. 그녀는 진일문과는 달리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악독한 행위들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본시 그런 법이다. 죄를 지은 자가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결국 스스로에게 가하는 형벌, 즉 후회와 자책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영화는 이 곳으로 오는 동안 식음(食飮)은 물론 수면도 제대로 취할 수가 없었다. 또한 진일문과 마주 하게 되자 자신이 너무도 저주스러워 가히 죽고 싶은 심경에 이르러 있었다. 진일문. 그 역시도 사영화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나자 커다란 의혹에 휩싸였다. 그것은 실상 누가 들어도 전대미문의 괴사건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다만 그는 한 가지 강렬한 예감과 만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반드시 모종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사대신가는 비록 명예를 잃었다고는 하나 그 힘만은 아직도 건재하다. 따라서 그들이 뭉치면 재기할 수도 있었거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진일문은 간단히 대답했다. "사낭자의 청원은 일단 접수하겠소. 본인은 공적인 입장을 존중하는 편이니까." "아!" 사영화는 몸을 부르르 떨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도 진일문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했다. 그는 구주동맹의 맹주라는 신분으로써 황룡사가보의 일에 개입할 작정이었다. '사대신가는 마교와의 싸움을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들이다. 아니, 필요 가치를 따지기 이전에 무림의 동도라는 점만으로도 이 일에는 필히 나서 주어야 한다.' 진일문은 어차피 이가장을 떠나 강호로 나갈 참이었다. 그 동안 개방의 정보망을 통해 강호정세를 파악해 두었다면 이제는 직접적으로 처리해야할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황룡사가보의 일도 그 중 하나가 되었다. 이가장의 본전(本殿). 그 곳에는 지금 진일문을 비롯하여 구주동맹의 주요 인물들이 배석하고 있었다. 소림의 원광선사와 개방의 방주인 주서혜, 그리고 각 파에서 파견된 정예고수들 등이었다. 먼저 이 회의의 주재자인 진일문이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여러분의 적극적인 후원과 협조로 본맹의 기반은 거의 완성되었소이다. 강호정세가 나날이 어지러워지고 있다고는 하나 이대로 나가면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오. 특히 주방주께서 개방의 조직을 유효적절히 움직이고 있으므로 당분간은 별 변화가 없을 것으로 사료되오." 누구라서 이의가 있겠는가? 중인들은 모두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임으로써 그의 말에 수긍의 뜻을 표했다. 구주신협 진일문의 한 마디는 그들에게 있어서 거의 좌우명에 가까왔다. 그의 통솔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으되, 그만치 세인들을 감복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사실 그들도 처음에는 불안을 떨치지 못했었다. 아직 약관의 청년인데다가 내놓을 만한 경력도 없는


진일문에게 대임(大任)을 맡기자니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은 이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진일문은 지난 반 년 사이에 가히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일월맹과 삼성림의 대립이 극을 치닫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일체 동요하지 않고 매사를 주관적으로 처리해 나갔다.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칠파일방은 그야말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필경 삼성령에 의해 좋던 싫던 그 싸움에 말려들었을 테고, 지금쯤은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을 것이 분명했다. 진일문은 우선적으로 구주동맹의 조직적인 힘을 강화함으로써 바로 그런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그로 인해 삼성림과의 반목은 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점에 있어서도 진일문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칠대문파에게 자신감을 고취시켜 그들의 내면에 끈끈하게 남아 있던 삼성림에 대한 두려움을 일소시켜 버렸다. 늘상 주지시켰던 바를 진일문은 새삼 더욱 강조했다. "일월맹과 삼성림의 싸움은 마치 정과 사가 양분되어 격돌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소. 애당초 삼성림의 탄생은 여러분들이 서로 반목하여 힘이 미약해졌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오. 삼천공(三天公)이 구대성군을 길러낸 이유도 마찬가지, 여러분들이 강대해지면 그들의 존재는 필요가 없소이다. 진정한 정도의 주인이 여러분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되오." 중인들은 하나같이 숙연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진일문의 뜻은 지난날 무림 삼천공의 훈계와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단 한 가지, 삼천공이 마교의 준동에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면 진일문은 그것을 당면과제로 끌어안은 채 그들을 고무시키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물론 방식의 차이는 컸다. 삼천공은 칠대문파를 향해 경종을 울리고자 구대성군을 길러 냈지만 진일문은 직접 그들의 영수가 되어 일심동체를 이루어 나가고 있었다. 따라서 그 효력은 당년 삼천공의 성가를 능가했다. 즉 칠파일방은 외세로부터 중원무림을 지키겠다는 각오와 더불어 정통의 무맥(武脈)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덕분에 그들이 무한한 긍지를 가지고 나름대로 자파의 무학을 발전시키며 건곤일척의 대회전에 대비하게 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진일문은 이어 각 파의 수뇌인물에게 여러 가지 일을 당부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이가장을 떠났다. 황룡사가보(黃龍査家堡). 이 곳은 지금 철통 같은 수비 속에 살벌한 분위기였다. 드나드는 자는 누구고 명패를 내보여야 했으며, 그나마 특별한 용무가 있지 않으면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보(堡) 내에서의 일이 외부로 발설되는 것을 막고자해서였다. 정문에는 호보무사들이 도검을 착용한 채 늘어서 있었다. 이는 평소에는 없었던 일로써 보내의 긴장도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팔월 열이틀. 미시(未時) 무렵, 두 기의 인마가 정문 앞에 멈추어 섰다. 마상에는 일남일녀가 앉아 있었다. 그 중 여인은 녹의를 입었으며 한창 발랄하게 피어날 나이였으나 안면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바로 사가보의 무남독녀인 사영화였다. 남자는 안색이 거무틱틱한 중년인이었는데, 말 옆구리에 약상자를 매달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의원인 모양이었다. "아가씨께서 돌아오셨다." 호보무사 한 사람이 사영화를 알아 보고 대문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안에서 두 명의 청년이


나왔다. 그들은 모두 준수한 청년으로 사가보의 대제자인 백의유검(白衣儒劍) 성낙수, 이제자인 옥수미랑(玉樹美郞) 독고준이었다. 성낙수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사매, 이제 돌아왔소? 그런데 이 분은 누구시오?" 사영화는 눈인사로 답한 후, 마상의 중년인을 소개했다. "이 분은 만통신의(萬通神醫) 귀불여(歸不如)라는 분이에요. 제가 직접 가서 초빙해 왔지요." 성낙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귀불여를 바라보았다. 강호견식에 무척 밝은 그였으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만통신의라는 별호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영화가 곁에서 보충적으로 설명을 했다. "이 분은 그 괴사의 원인을 반드시 밝혀내실 거예요. 강호에 그다지 이름은 나 있지 않으나 그 방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이니까요." 잠자코 있던 독고준이 한 마디 했다. "지금껏 의원이라는 작자들은 큰 소리만 쳤지, 아무런 성과도 얻어내지 못했소. 귀하는 정말 자신이 있소?" 귀불여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것은 이 자리에서 언급할 바가 아니외다. 천하의 어떤 의원이라도 환자를 보지 않고서야 무슨 말을 하겠소이까?" 그 말 속에는 성급함에 대한 가벼운 힐난이 깃들어 있었다. 독고준이 얼른 이를 알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옳소. 하지만 우리들은 그런 의원 나부랑이로 인해 몹시도 지쳐있는 상태요. 만일 당신이 그들과 똑같이 떠벌였더라면 벌써 내 금검에 의해 혓바닥이 날아갔을 것이오." 그는 어지간히도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는 것 같았다. 사영화가 그를 바라보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형, 이 분은 먼 길을 마다 않고 오셨어요. 무례를 범해서는 안돼요. 또 설사 병명을 밝혀내지 못한다고 한들 탓할 수는 없어요. 어쨌든 이 분은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래도 안된다면 천운으로 돌릴 수밖에 없지요." 초췌해진 그녀의 얼굴에는 한 가닥 비감이 떠올랐다. 이렇게 되자 독고준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성낙수가 대제자답게 그들 사이에 나섰다. "자, 자! 결과도 나오기 전에 마음부터 상해서야 쓰겠소? 우리는 그간에도 충분히 고통을 겪었소. 그러니 환자는 이 분 의원께 맡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다려야 도리일 것이오." 확실히 그의 언행에서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품위가 엿보였다. 이윽고 네 사람은 나란히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보내의 경비는 더욱 삼엄했다. 매 삼보마다 일정하게 보초가 서 있었으며, 칠보 마다에는 매복자들이 숨어 있기도 했다. 황룡사가보는 사대신가 중 가장 역사가 짧은 편이다. 하지만 세력에 있어서는 단연 우위를 점해 왔고, 그것은 지금의 경비상태만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이번 사건이 이 곳에서 일어났다 하여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실 이 곳에는 삼가의 고수들도 대거 몰려와 있었으나 모두 함부로 나다지니 못하고 관례에 따르는 터였다. 성낙수를 비롯한 네 사람은 곧 대청으로 올랐다. 그러자 미리 연락을 받았던 듯 총관인 황보인이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황보인은 귀불여에게 정중히 예를 표했다. "선생께서 도움이 되어 주신다면 우리 사가보는 최선의 예우를 다 할 것입니다. 우선 먼길을 오셨으니


잠시 쉴 곳을 마련해 드리겠소이다." 귀불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외다. 명색이 의원이니 먼저 환자를 보게 해 주시오. 그것이 순서가 아니겠소이까?" 황보인의 허리가 깊숙이 꺾였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정녕 고마운 일입니다. 그럼......." 그가 앞장을 서자 귀불여는 물론 사영화와 성낙수, 독고준 등도 함께 따랐다. 그들이 향한 곳은 후원(後園)이었다. 긴 회랑을 거쳐 다시 두 개의 화원을 지나자 별채로 꾸며진 아늑한 정사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 곳에는 독립된 담장이 둘러져 있었고, 담장의 높이도 여타의 별원과는 달리 이장여나 되었다. 작은 문 또한 동(銅)으로 주조되어 있어 특이한 느낌을 가지게 했다. 만통신의 귀불여는 이 별원에 당도하자마자 사방으로부터 찌르는 듯한 살기를 느꼈다. '이 곳에는 적어도 백 명 이상의 고수들이 매복되어 있다.' 그는 다름 아닌 진일문이었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의원으로 그럴듯하게 변장을 하고 온 것이었다. 본래 중원사대신가라면 무림에서 독특한 세력권을 형성했던 명가들이었다. 그들은 정도를 고수하니만치 칠파일방과 친교를 맺고 있었으나 그 반면에 흑도와도 나름의 교류를 유지했다. 게다가 막후에 존재하는 삼성림은 그들의 배수진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정사인을 막론하고 전 무림인들이 그들 사대신가에는 한 수 접어주는 편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사대신가 가주들은 이런 입장에서 밀려나 참담한 처지에 이르러 있었고, 그 때문에 회동했었다. 아울러 그들은 새로운 입지를 세우려다 도중하차하게 된 것이다. 진일문의 분석과 추리는 계속 이어졌다. '현재의 사가는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단절된 상태다. 이 시기를 노려 역으로 이들을 포섭한다면 세력확장의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을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자존(自存)의 의지를 가진 사대신가의 가주들이 눈의 가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은.......' 그러는 사이에 그는 어느덧 하나의 별원 안으로 들어서고 있 었다. 그는 그 곳에 있는 화청(花廳)으로 안내되었다. 화청의 분위기는 아늑하���서도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상복을 입은 중년의 여인과 한 여승이 앉아 있다가 일행을 맞이했다. "어머니......." 사영화는 중년여인에게 달려가 안겼다. 진일문도 그 여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보주인 설미령(薛美鈴)이었다. "화아(華兒)야." 중년미부는 가만히 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기품이 느껴지는 그녀의 얼굴에도 비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사영화는 모친의 품에서 나와 여승에게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오열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는듯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 반해 여승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못난 것, 아직도 슬픔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니. 어디 괴로운 것이 너 혼자 뿐이더냐?" 말인즉은 지당한 소리였다. 하지만 생김새만큼이나 차가운 그녀의 음성에는 정감이라고는 한 올도 배어 있지 않았다. 그 여승을 보는 순간,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사영화의 사부인 그 여승은 바로 비취암의 암주인 절정사태(絶情師太)였다. 그녀는 과거의 모습 그대로였다. 약간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귀밑머리가 전보다 희어지고 얼굴색이 누렇다는 정도였다.


진일문은 그녀의 누런 안색을 보자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과거 나로 인해 주화입마한 것이 원인이리라.' 그는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녀와는 은(恩)과 원(怨)이 묘하게 겹쳐 있는 것이다. 자신을 해하고자 한 일이나 백하련의 죽음을 떠올리면 여전히 혐오감이 일었으나 그녀로 인해 금정홍의 기연을 취할 수 있었던 사실만은 어떻게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본의 아니게 그녀에게 입힌 피해를 감안한다면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상념에 잠겨 있는 그의 귀로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시주께서 의원이오?" 절정사태였다. 진일문은 내심을 감추고 태연하게 응수했다. "그렇소이다. 여니께서는......?" "빈니는 절정(絶情)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소." 절정사태는 한동안 날카로운 시선으로 진일문을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영화, 너는 이 분을 어찌 알게 되었느냐?" 사영화는 늘상 사부에 대해서는 일말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음성이 다소 떨려 나왔다. "어떤 의원에게 소개를 받았어요. 신묘하기가 화타를 능가한다고 하도 칭찬을 하기에......." "그래?" 다행히 누구에게서 소개를 받았느냐는 질문은 없었다. 절정사태는 무덤덤하게 음성을 흘려 내고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빈니가 안내할테니 그대들은 돌아가도록 하시오." 총관 황보인과 사운악의 두 제자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보인이 대표로 나서서 그녀에게 포권을 했다. "그럼 사태께 맡기고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성낙수, 독고준 등과 더불어 화청을 빠져 나갔다. 독고준이 잠시 고개를 돌려 사영화를 바라 보았으나 사영화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주검이 들어있는 관(棺). 밀전에는 옻칠을 한 마흔다섯 개의 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러한 광경은 결코 유쾌한 것이 못되었다. 사방의 창문은 밀폐되어 있었고, 향로에서는 향이 무럭무럭 피어 올랐다. 관은 꽤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으며, 관 머리에 각기 하나씩의 위패가 놓여 있었다. "아버님......." 사영화는 하나의 관을 붙들고 소리 죽여 오열했다. 그것은 바로 부친인 사운악의 시신이 누워있는 관이었다. 생전의 그가 무남독녀인 그녀를 얼마나 총애했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곁에 있던 사(査)부인도 조용히 눈시울을 붉혔다. 절정사태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뭐라 탓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진일문을 향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이 곳에는 마흔다섯 구의 시체가 있소. 선생께서는 사인(死因)을 조사해 주셔야겠소." 그녀의 냉정함은 예전과 다름없이 진일문을 감탄(?)하게 했다. 그는 내심 고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 많은 분들이 전부 같은 병으로 타계하셨단 말씀이오이까?" 절정사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러나 정말로 병사(病死)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으로 죽은 것인지는 바로 선생이 알아내야 할 문제요." "흐음!" 진일문은 가벼운 탄식을 흘리며 하나의 관으로 다가갔다.


그 앞에는 사천당가(四川唐家) 당이고(唐二姑)라는 이름이 씌여져 있었다. 당이고라면 현 당가의 가주인 당평의 친누이다. 비록 여인이나 무공이 높고 암기수법이 뛰어나 당가에서 서열 이위로 꼽히던 절정의 고수였다. 진일문은 관에 손을 대려다 말고 갑자기 뚝 멈추었다. 그러자 곁에서 절정사태가 추궁하듯 물었다. "왜, 조사하고 싶지 않소?" 진일문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무리 의원이라지만 감히 신니의 면전에서 여인의 옷을 벗길 수가 없어서......." 맞는 말이었다. 검시(檢屍)를 하려면 일단 옷을 벗겨야 한다. 진일문은 절정사태의 안면이 기이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이번에는 도방(刀幇) 팽전수(彭全修)라고 적힌 위패 앞에 가 섰다. 팽전수는 팽가도방의 방주인 팽전위의 셋째 아우다. 마침내 진일문은 관 뚜껑을 열었다. 끼이익! 괴이한 마찰음과 함께 유향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마도 복중(伏中)이라 시신이 썩지 않도록 잔뜩 뿌려둔 모양이었다. 관 속에는 한 명의 중년인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그는 얼굴에 각이 진 인물로 수염이 짧게 나 있었다. 그의 옆에는 긴 장도(長刀)가 놓여 있었는데, 생전의 그가 사용하던 병기인듯 했다. 진일문은 그 시신을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말이 시신이지, 죽은 것이 아니라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단지 호흡만 멎어있을 뿐 혈색도 정상이었고, 반점 같은 것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는 절정사태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분들은 죽은지 얼마나 되었소이까?" 그의 말에 대답한 것은 사영화였다. "한달 쯤 되었어요." "이 유향은 색목국(色目國)에서 온 것이군요. 과연 효력이 탁월합니다. 아직도 시신이 이렇듯 건재하니 말이외다." 절정사태가 그제서야 냉랭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사인이나 조사하시오." 그녀의 음성에는 다분히 위협이 깃들어 있었다.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소이다. 세 분께서는 잠시 밖으로 나가 주십시오." "무엇 때문에?" 절정사태의 물음에 진일문이 오히려 반박하고 나섰다. "아니 그럼 불가의 스님께서, 그것도 여니께서 남자의 벗은 몸을 보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 험한 방도를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거늘......." 그 말에 절정사태의 얼굴에는 일순 모욕감이 스쳤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역시 남자의 알몸을 지켜 보고 있을 용기(?)까지는 없었으므로. "그럼 나가 있겠소." 절정사태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홱 틀더니 승포를 펄럭이며 밖으로 나갔다. 사영화와 사부인도 이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진일문은 씩 웃고는 정말로 시신의 옷을 벗겼다. 시신은 차가웠다. 그는 그 느낌이 손끝에 닿아 오자 가볍게 전율했다. 팽전수의 체격은 몹시 우람한 편이었다. 곳곳에 근육이 불거져 있고 가슴에서 아랫배에 이르기까지 시커먼 털이 덮혀 있었다. 진일문은 그의 시신을 면밀히 검사해 보았다. 구석구석을 두루 살폈으며 심지어는 터럭 사이까지도


헤쳐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아무런 상처나 병, 혹은 독의 흔적도 없었다. 다른 시신도 검사해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진일문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미간을 모았다. '이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자연사(自然死)는 물론 아니겠고....... 대체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그는 시신에서 눈을 떼고 생각에 잠겼다. '최초로 죽은 인물은 사가의 가주들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 사인을 조사하던 고수들도 연달아 죽음을 당했다고 했었지.......'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진일문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사운악의 시신을 꺼냈다. 역시 그 시신에서도 단서라고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를 확인한 진일문은 침착하게 추리해 나갔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무래도 독살(毒殺)이다. 하지만 나중에 죽은 인물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소리다. 그들은 이 곳에서 조사를 하다가 하나 둘 쓰러졌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의 눈이 일순 기광을 뿜어냈다. '바로 여기에 맹점이 있었군. 이 곳에서 사인을 조사하다가 숨진 사람들은 모두 무공이 강한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평범한 인물들인 의원들은 그들과 똑같은 이유로 이 곳에 머물렀어도 모두 멀쩡했다. 과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실상 의원들은 수 차례에 걸쳐 시신들의 곁을 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누가 죽었다는 얘기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 점은 무엇인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진일문은 바로 거기서부터 파고 들어가 보고자 마음을 정한 것이었다. '이 곳에서 시신들만 뒤적이고 있을 일이 아니다. 이 문제는 이것저것 알아본 후에 차분하게 풀어나가야 한다.' 그는 관 뚜껑을 모두 닫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화청 밖. 절정사태를 비롯하여 세 여인이 진일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사영화가 달려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되었나요? 뭘 좀 알아 내셨나요?" 진일문은 그녀의 표정에서 한 가닥 신뢰감을 읽어내고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다소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직은 모르겠소이다. 일단 시간이 필요하오. 다만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이 있어 나왔을 뿐이오." "으음......." 사영화는 맥이 풀린듯 가느다란 신음성을 발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진일문은 이를 애써 모른 척 하며 사부인과 절정사태를 향해 말했다. "앞으로 여러분께서는 소생이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주셔야겠소이다." 이경(二更) 무렵이었다. 사위는 괴괴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굳게 닫혔던 사가보의 대문이 열리더니 두 필의 말이 빠져 나왔다. 마상에는 각기 일남일녀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렸다. 의원인 귀불여, 즉 진일문과 황룡사가보의 천금인 사영화였다. 야심한 시각에 그 두 사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사가보를 나서기 직전, 이런 일은 있었다. "이 밤중에 웬 행차이십니까?"


황보인의 물음에 사영화는 간단히 답했다. "귀선생께서 밤에만 발견할 수 있는 희귀한 약초를 구하러 가신다고 했어요. 귀빈이시니 당연히 동행을 해 드려야죠." "밤길이 위험하거늘, 다른 사람을 시키십시오." "아니에요.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기도 그렇고, 귀선생은 제가 모셔 왔으니 안내도 제가 해 드려야죠." 황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 오십시오." 그러나 두 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기이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귀불여, 어찌 보면 무공이 측량할 길 없이 높은 자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무공을 전혀 모르는 자 같기도 하니......." 그도 곧 몸을 돌렸다. 옥수미랑 독고준. 화원에서 홀로 서성이고 있는 그는 별호답게 여전히 준수했다. 미풍에 금삼자락을 휘날리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어떤 여인일지라도 한 눈에 반해 버릴 정도로 뛰어난 미남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전에 없이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는 최근 들어 생긴 현상으로써 그 이유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정녕 믿지 못할 일이었다. 언제고 손만 뻗으면 어떤 여인이라도 취할 수 있었던 그가 아닌가? 실제로 여인에 관한 한 그는 항상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만은 예외였다.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평범한 여인이었던들 이런 일은 결코 없었으리라. 그 여인이란 바로 황룡사가보의 금지옥엽인 사영화였다. 독고준이 사영화를 소유하고자 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였다. 사영화는 절세적인 미색을 지니고 있기도 했지만 그녀를 얻는 것은 곧 차기의 사가보주가 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의 최대 경쟁자는 아무래도 사형인 백의유검 성낙수였다. 성낙수는 서열상으로 그렇거니와 나이가 위인지라 혼처가 달리 정해지지 않은 이상 의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독고준은 그 경쟁에서 꽤 낙관적인 기분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성낙수가 다른 면이라면 몰라도 최소한 여인의 마음을 끄는데 있어서 만큼은 자신의 적수가 못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품, 언행 등의 감탄할 요소들을 갖춘 성낙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솔직히 매력과는 별개였다. 사영화도 그를 어려워 하기는 했지만 이렇다 하게 관심을 보인 적은 없었다. 독고준. 그는 음울한 얼굴로 사영화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렸다. 따지고 보면 그가 불안해하는 것은 그녀의 마음이었다. 사영화는 마교에 인질로 잡혀갔다 돌아온 후로는 그를 대하는 태도가 싹 바뀌어 있었다. 물론 성격적으로도 많이 달라져 있었으나 유독 그에 대한 감정에서 큰 변화를 보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무례하게 군 적은 없었다. 아니, 전보다 오히려 깍듯하게 사형으로써 예우를 하고 있었다. 독고준은 바로 이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거리감이 생겼다는 뜻이 된다. 또한 이는 그녀의 마음이 혹 다른 곳에 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빌어먹을!" 파앗!


어둠 속에서 검광이 섬전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금검이 탄지지간에 발검된 것이다. 그의 눈은 한 곳에 정지되어 있었다. 그 앞에는 백일홍(百日紅)이 어둠이 무색할 정도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스스스....... 백일홍이 갈라졌다. 한 조각, 두 조각....... 꽃잎은 마침내 정확히 열두 개로 갈라져 떨어져 내렸다. 피처럼 붉은 백일홍의 조각들이 그의 가죽신에 고스란히 얹히는 찰나였다.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그의 고막을 울렸다. "축하하네, 사제. 자네의 구천십지독존(九天十之獨尊) 검법이 십성의 경지에 이르렀다니. 생전의 사부께서 보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겠는가?" 독고준의 몸이 한 차례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돌아섰다. 그의 면전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성낙수가 미소띤 얼굴로 서 있었다. "사형께서는 전에 하지 않던 짓을 하는구려. 언제부터 남의 무공시전이나 훔쳐보는 버릇이 생겼소?" 존대를 표방하고 있었으나 그의 말투는 다분히 시비조였다. 그에 반해 성낙수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고의는 아니었네. 그저 우연히 보게 된 것 뿐이지." 독고준은 상대의 이런 면을 지극히 혐오했다. 그 자신도 어느 정도까지의 위선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성낙수를 보면 대개 구역질이 치밀곤 했다. 그는 더 보고 싶지 않다는듯 수중의 금검을 거두며 홱 돌아섰다. "잠깐만! 사제." "무슨 일이오?" 독고준이 돌아서지도 않고 물었다.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말하시오." 성낙수는 역시 그 특유의 부드러운 어조를 잃지 않았다. "자네, 혹 요즘 사매의 거동에서 느껴지는 것이 없나?" "무슨 뜻이오?" "후후... 내 진즉부터 알고 있었네. 자네가 사매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굳이 나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네." 독고준은 그제서야 몸을 돌려 그와 마주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안심하게. 나는 사매를 사이에 두고 자네와 경쟁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이 사형은 적어도 스스로의 주제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그 말을 하려고 나를 불렀소?" "하하하... 그건 아닐세. 그저 말이 나온 김에 확실히 입장을 밝히려 했을 뿐이네. 나는 다만 사제가 염려되어서......." 독고준은 실소했다. "염려? 사형께서 나를 말이오?" "글쎄, 과장되이 들렸다면 미안하네. 하지만 나는 정녕 한 가지만은 심히 걱정이 되네. 사매의 관심이 자네가 아닌 외부인에게로 쏠리고 있으니 말일세." 독고준의 안면 근육이 비정상적인 꿈틀거림을 보였다. "외부인......?" "그렇네. 아무래도 그 귀불여란 위인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독고준은 파안대소했다.


"하하하핫......!" 그는 만면에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내뱉듯 말했다. "아무리 본보의 명예가 추락해 있다고는 하나 사매가 어찌 그런 의원 나부랑이에게 관심을 가진단 말이오? 그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오." 성낙수는 웃음기를 거두며 정색을 지었다. "사제는 의외로 단순하군. 강호에는 예로부터 숱한 기인이사들이 존재해 왔거늘......." 독고준의 검미가 불쑥 치켜 올라갔다. "그럼 그 자가 변장이라도 하고 있단 말이오?" 성낙수는 묘한 어투로 응수했다. "황보총관이 과거 녹림에서 어떤 별호로 통했는지 아는가?" "흐음?" "백변환요(百變幻妖)! 이 정도면 되었나? 황보총관은 한 눈에 그 자가 변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네." "그렇다면!" 독고준은 흡사 벼락이라도 맞은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낙수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내게 본시 야심이 없었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걸세. 그러나 이 사형은 사부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많은 것을 생각했네. 나는 앞으로 사제가 사매와 잘 되어 본보를 일으켜 주기를 희망하고 있네. 나도 곁에서 돕겠네. 그래야만 억울하게 눈을 감으신 사부의 영령께서도 한을 푸실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성낙수의 음성은 어느덧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독고준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는 태도를 가다듬어 성낙수에게 정중히 포권을 했다. "소제, 부끄럽기 짝이 없소이다. 사형께서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신 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성낙수의 눈이 따스한 감정을 담은 채 그를 응시했다. "자네는 반드시 사매를 얻어야 하네. 그래야만 우리 사형제가 서로 뜻을 합칠 수 있네. 그렇지 않은가?" "사형......." 독고준은 감격한 나머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성낙수가 빙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럼, 나는 이만 들어가 보겠네." 독고준은 출렁이는 시선으로 멀어져가는 성낙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입술을 기이하게 움직였다. "죽인다! 사매에게 접근하는 놈은 모두......!" 스파앗! 검광이 작렬했다. 놀랍게도 백일홍은 삼십육 조각으로 흩어져 그의 발치에 떨어지고 있었다. 45 장 불륜(不倫)의 업(業) 대해약포(大海藥鋪). 이 곳은 황룡산 기슭에 있는 소규모의 약포였다. 그러나 이 약포의 존재는 의외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황룡산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약재 때문이었다. 각 처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대해약포의 주인은 장만생(張萬生)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손익 계산에 그다지 연연해하지 않는 인물로서 손님이 없는 날이면 의례 졸고 있기가 일쑤였다. 이경이 넘어서자 장만생은 점포의 문을 닫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가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을 때였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울리더니 그의 앞에 두 필의 말이 와 멎었다. "오늘은 늦었소. 내일 다시 오시오." 장만생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를 놀라게 했다. "청산(靑山)이 있는 한 땔감 걱정을 하지 않고, 녹수(綠水)가 흐르는 한 기약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지만, 인명(人名)은 한 번 놓치면 다시는 회생할 수 없으니, 우리에게 내일이란 없소." 장만생은 부르르 떨더니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둠 속, 두 필의 말이 서 있고, 그 위에 한 쌍의 남녀가 타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정중한 태도로 닫으려던 문을 활짝 열어 제꼈다. "지극히 옳으신 말씀이오. 내 잠시 의원의 명분을 잊었소이다. 어서 들어 오시오." 약포 안은 전형적인 약재상의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천정에 약대(藥垈)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고, 작은 작두와 바닥에 널린 건초, 그리고 한 쪽 벽에는 약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장만생은 들어선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의원 차림의 한 중년인과 절세의 미녀였다. "두 분께서는......?" 장만생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중년인이 대답했다. "사해가 모두 친구요,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베개 삼으니, 어디를 간들 외롭지 않소이다." 장만생은 더 확인할 것이 없는 듯 손을 모아 잡았다. "이 사람은 황룡분타의 타주인 약개(藥 ) 장만생이외다. 귀하께서는 총타에서 나오셨습니까?" 중년인, 즉 귀불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속에서 자죽신부(紫竹神府)를 꺼내 보였다. 그것은 개방 내에서도 장로 이상의 신분을 가진 자만이 소지할 수 있는 신물이었다. "속하, 장로를 뵈옵니다." 장만생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개방의 제자들이 자죽신부에 대해 취해야 하는 무조건적인 규칙이었다. 약개 장만생. 그는 단지 약포의 주인만이 아니라 개방의 숨은 기인이었던 것이다. 강호상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의술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진일문은 바로 그의 도움을 얻고자 이 곳에 은밀히 찾아 왔다. 개방의 조직은 이렇듯 여러 모로 큰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장만생이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어떤 일이 있어 오셨는지요?" "장타주께 한 가지 자문을 구하려고 찾아 왔소이다." 진일문의 말에 장만생은 하나의 약장을 열더니 그 속에서 열쇠를 꺼냈다. 그는 열쇠를 다른 약장의 구멍에 넣고 돌렸다. 스르르....... 약장들이 놓여 있던 벽이 슬며시 회전했다. 그러자 그 속에는 하나의 밀실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리로 드십시오." 진일문은 그의 용의주도한 면모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일개 분타주가 이 정도로 침착하고 신중하다니! 수백 년에 걸쳐 개방의 성세가 쇠퇴하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밀실의 구조는 매우 간단했다. 두 칸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침실, 또 하나는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진일문은 의자에 앉자마자 품속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냈다. "이것을 감정해 주시오." 그가 내민 물건이란 바로 사영화를 통해 사가보에서 빼내 온 것들이었다. 즉 시신들에게 뿌려졌던


유향(油香)과 밀전에서 계속 연기를 피워 올리던 향(香)이었다. 장만생은 먼저 유향을 코에 대 보더니 탄성을 발했다. "이것은 질이 매우 좋은 물건이군요. 천축산(天竺産)으로 일명 녹유향(鹿油香)이라는 것입니다." 진일문은 담담히 물었다. "효능은 얼마나 가오?" 장만생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이렇게 무더운 날씨라면 아무리 훌륭한 유향이라 해도 한 달을 넘기기 힘듭니다. 이 녹유향도 마찬가지지요. 물론 특수한 방법으로 사용하면 다릅니다. 백일 동안도 가능하지요." "특수한 방법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오?" "그것은 시신의 내장을 전부 긁어 낸 후, 뱃속에 유향을 채우고 칠공(七孔)을 막아 외기와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진일문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 말고는 더 없소이까?" 장만생은 자신이 있는듯 잘라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그 말에 진일문은 안색을 굳혔다. '그 시신들 중에는 죽은지 삼 개월 이상 된 것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유향의 효력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 된다. 대체 어떤 방도로 시신의 부패를 방지시켰을까?' 그의 상념은 일단 거기에서 중단되었다. 그는 다시 암갈색을 띄고 있는 향을 장만생에게 내밀어 보였다. "이것도 좀 보아 주시오." 장만생의 얼굴에 대뜸 놀라는 기색이 어렸다. "아! 극락식골향(極樂飾骨香)......." 진일문은 미간을 슬쩍 지푸렸다. 이름을 들어 보건대 현재의 용도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만생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은 정녕 의외의 것이었다. "이것은 묘강에서 자생하는 극락자웅고(極樂雌雄蠱)의 분비물을 말려 혼합해 놓은 향입니다. 제조비법이 복잡하기도 하지만 효능이 워낙 악랄하여 중원에서는 물론이고, 파생지인 묘강에서조차 금지되어 있는 것이지요." 진일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장만생은 조심스러운 어투로 설명해 나갔다. "극락식골향은 일반 사람이 마시면 해가 없습니다. 그러나 무공을 익힌 사람이 장기간에 걸쳐 맡게 되면 치명적입니다. 당장에는 드러나지 않으나 결국 뼈가 무르고 골수가 녹아 내려 폐인이 되고 말지요. 더구나 이 향에는 중독성이 있어 일단 습관화 되면 죽는 순간까지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토록 지독한 물건이 어째서 그 곳에 있었단 말인가?' 진일문은 충격을 입은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향이 작금에도 황룡사가보의 밀전에서 타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 한 귀퉁이가 써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황룡사가와 유대를 가진 사람이라면 추후로도 계속 분향을 하러 올 테고, 그들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극락식골향에 중독되어 종국에는 목숨을 내놓게 될 판국이 아닌가? '아! 실로 무서운 책략이다. 대놓고 검을 휘두른들 이보다 더 잔악할 수는 없으리라.' 이 때, 장만생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 향은 어디서 나신 것입니까?" 진일문은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여겨져 그에게 황룡사가보에서 벌어진 일을 빠짐없이 얘기해 주었다. "으음, 그랬었군요."


장만생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진일문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녹유향을 들어 보였다. "이 유향은 그저 눈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시신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사상태(假死狀態)에 빠져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어쩌면 죽은 것보다 못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도......." "그럼 역시 극락식골향 때문에......?" 진일문이 묻자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것도 아닙니다." "흐음?"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답답하구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오." 그 사이, 사영화의 안색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그러나 진일문도 장만생도 그녀의 표정변화까지는 살필 겨를이 없었다. 장만생이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들은 극락자웅고에 당했습니다." "극락자웅고?" "그것은 일종의 충고(筮蠱)로써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극독을 지니고 있어 인체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지요. 하지만 극락자웅고의 가장 무서운 점은 신지를 상실하고 꼭두각시가 되어 고주(蠱主)의 명에 따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으음......." 진일문은 부지 중 신음을 흘렸다. "천하의 누구도 이 극락자웅고에는 당해내지 못합니다. 때문에 독물에 대한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만독지왕(萬毒之王)으로 올려 놓기를 주저하지 않지요." 장만생은 연이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극락자웅고. 그것은 이름이 주지시킨 바대로 한 마리에 암수의 기능이 함께 갖추어진 기이한 마물(魔物)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대신 바람을 타고 수백리를 이동할 수 있으며 스스로 분열을 일으켜 번식해 나간다. 그러나 성장만은 숙주(宿主)를 빌어 이루어진다. 즉 짐승의 몸 속에서 기생하되 그 숙주에게는 심각한 독소까지도 끼친다. 원래 이 극락자웅고는 주로 묘강의 도마뱀을 숙주로 삼고 있었는데, 도마뱀을 사육하던 묘강인의 몸에 옮아 오게 됨으로써 인간에게로 그 기생의 범위를 넓혔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확실히 도마뱀 따위와는 달랐다. 극락자웅고에게 피해를 당하는 과정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거꾸로 그 마물들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묘강에는 극락자웅고를 마음으로 부리는 자들이 다수 생겨났고, 그들은 부족 간의 전쟁에 그것을 이용하곤 했다. 그 비법은 극비리에 후대(後代)로 전수되었다. 그것은 주로 어렸을 적부터 고충을 몸 속에 심어 길들이는 무서운 경험을 통해 이어졌다. 물론 그 단계를 거치면 극락자웅고는 고주의 명령을 착실하게 이행한다. 말하자면 타인의 몸 속으로 들어가 발작을 일으켜 죽게 할 수도, 고주의 명을 받들어 꼭두각시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독문(毒門)의 고수들조차도 고술만은 두려워했다. 고술의 본산이랄 수 있는 묘강에서도 극락자웅고는 이미 절전된 지 오래였다. 단지 그와 관련된 얘기들이 간간이 전설처럼 들려올 따름이었다. "속하도 놀라울 뿐입니다. 극락자웅고가 어떻게 당대에, 그것도 중원에서 발견될 수 있었는지......." 장만생은 스스로 말해 놓고도 진저리를 쳤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듯 심호흡을 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장로께서 말씀하신 경우는 아무래도 고술의 대가(大家)가 펼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진일문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그건 ��� 무슨 소리요?" "극락식골향을 쓴 것으로 미루어 능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왜......?" "대가라면 어떤 때, 어떤 대상에게든 마음먹는 즉시 고를 살포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극락식골향을 피운 상태에서, 그것도 숙주를 빌어야만 가능합니다." "숙주를 빌다니?" "이르자면 먼저 고에 당한 자를 이용한다는 뜻입니다." "맙소사!" 진일문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사가보의 밀전에는 사십여구의 시신 아닌 시신이 있다. 그런데 장만생의 말대로라면 그들이 모두 숙주라는 얘기가 되지 않는가? "거기에도 한 가지 제약은 있습니다. 그것은 고주가 숙주, 그리고 새로 해하려는 대상으로부터 반드시 삼장 이내에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 삼장 이내라고 했소?" 진일문의 눈이 번쩍 섬광을 뿜었다. 장만생의 말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캐냈던 것이다. 가까운 거리, 그것은 곧 가까이 접할 수 있은 인물들을 뜻한다고 봐야 했다. "아아!" 곁에서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영화였다. 그녀가 몸의 중심을 잃은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사낭자!" 진일문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생각과 같되 그녀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씁쓸하게 내뱉았다. "그렇다면 결국 범인은 내부에 있었다는 얘기군." 사영화는 안색이 창백해져 가지고는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은은한 달빛이 신비롭게 언덕을 비추고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사위에 은가루가 뿌려진 것과도 같았다. 사경(四更) 쯤 되었을까? 진일문과 사영화, 그들 두 남녀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사가보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해약포를 떠나온지도 꽤 오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진일문은 눈을 돌려 사영화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의 옆얼굴에서 느껴지는 수심이 그의 동공에 아프게 쑤시고 들어왔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짐짓 밝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낭자." "예......?" 사영화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복잡한 상념에 잠겨있다가 그의 음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감회가 새롭지 않소?" "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당황해 하는 그녀를 향해 진일문은 빙긋 웃어 보였다. 진일문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지금 옛일을 생각하고 있었소. 바로 지금처럼 나란히 말을 몰고 가던 때를 말이오." "아! 그......." 사영화도 기억을 떠올렸으되 감히 당시의 일을 말하지는 못했다. 진일문의 담담한 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그 때 낭자는 나를 아문(啞文)이라고 불렀었소." "그, 그것은 제가 너무 철이 없어서......." 사영화는 추궁을 당하는 것으로 알았는지 잔뜩 몸을 움츠렸다. 진일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곧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 당시 내가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은밀히 행복감을 느꼈었다면, 혹 믿을 수 있겠소?" "설마......?" "멸시로 인한 굴욕감이 달콤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때 처음 알았소. 또 사랑이란 감정의 폭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 사영화는 갑자기 추위라도 느낀 듯 으스스 몸을 떨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제가... 얼마나 더 괴로워하면... 만족하시겠어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며 진일문은 씩 웃었다. "내가 낭자를 괴롭히려고 이러는 것 같소?" "네......?" "달빛이 몹시 좋소이다. 그 때 만큼이나." 사영화는 잠시 어리둥절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하하하... 혹시 기억이 나시오? 낭자와 내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백호를 만났던 일을 말이오." 진일문. 그가 굳이 입을 열어 이 일을 말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지금 내부를 완전히 털어내 놓음으로써 마음의 짐을 벗어 버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본시 상대적인 것이 남녀의 감정이다. 사영화도 처음에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내 빠른 속도로 진일문의 의중을 알아가고 있었다. "후후... 그 당시에 입은 얼굴의 상처가 아직도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소." 묘한 감회가 어린 진일문의 음성이 사영화의 가슴에 쓰리게 스며 들어왔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때의 심정... 이제는 알 것 같아요." 그녀의 눈에서 마침내 눈물이 방울져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진일문은 크게 웃더니 다시 물었다. "낭자가 지금 나를 위해 우는 것이 맞소?" 사영화는 고개를 떨구더니 울먹이는 음성으로 답했다. "그래요. 저도 언제부터인가는... 타인을 위해 웃을 수도, 울 수도 있게 되었지요. 예전의 제가 아닌 걸요." "나는 믿소, 낭자의 말을.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과거지사도 새삼 논할 수가 있었을 것이오." "고마와요." 두 사람은 어쩌면 이 순간 진정한 용서의 의미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상 젊다는 이유 하나면 되었다. 언제든 마음만 통할 수 있다면 내면의 앙금 정도는 말끔히 떨쳐 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그들이었다. 사영화가 문득 말고삐를 잡아 당겨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망울이 속눈썹의 그늘에 은은하게 잠긴 채 진일문을 똑바로 응시했다. 달빛은 여전히 은가루처럼 부서져 내렸다.


사영화의 고운 얼굴에도 달빛이 비쳐 은색 음영을 이루어 놓았다. 버선코처럼 갸름하게 뻗어 내린 콧날이 투명해 보인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은 곤혹으로 인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무엇인가 많은 언어들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미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서로의 진심이 교류되고 있는 이상 말이란 차라리 무가치한 장식일 뿐이다. 진일문의 손이 그녀의 양볼을 감싸 쥔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만히 얹었다. '아!' 사영화는 흡사 한 가닥 전류가 전신을 관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로 이어졌다. '정말 좋은 분이에요. 당신은.......' 최초의 입맞춤은 그녀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세울 수 있게 해 주고 있었다. 또한 사랑에 대해서도. "하하하... 이것으로 되었소. 이제 낭자와의 묵은 빚은 모두 정리되었소이다. 바보 아문의 소원이 풀렸으니, 하하하......." 진일문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멀어지면서 감동에 취해 있는 사영화의 고막을 마구 두드렸다. "으음." 그녀는 부지 중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마치 상대의 입술이 남긴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듯. 진일문은 벌써 저만치 앞서 말을 달려가고 있었다. '아! 당신도 이런 마음으로 나를 사랑해 주었나요?' 사영화의 출렁이는 시선은 그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 다. 그녀의 가슴은 바야흐로 생애 최대의 기쁨과 만나고 있었다. 과거의 청산으로 인해 죄책감에서 놓여난 것도 그렇거니와 어느덧 그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사영화는 말고삐를 차며 자신도 모르게 외쳐 불렀다. "진가가!"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온 몸을 부패 시킬 듯 지독한 미향(迷香)이 그녀의 코끝을 스친 것은. '흡......!' 사영화는 질겁을 하여 눈을 크게 휩떴다. 하지만 그녀의 화사하게 빛나던 얼굴은 금새 흑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녀의 날씬한 교구가 마상으로부터 맥없이 굴러 떨어졌다. 그 찰나, 하나의 검은 인영이 나타나 그녀를 낚아챘다. 그는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검도 막대기도 아닌, 이상한 형태의 무기를 꽂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은 의외로 무척이나 준수했다. 그러나 그 얼굴에서는 뭐라 형언키 어려운 허무감과 권태가 진하게 느껴졌다. 그는 정신을 잃고 있는 사영화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썹이 묘하게 꿈틀거렸으나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흑의인은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편. 진일문은 말을 몰다가 문득 멈칫 했다. '왜 그녀가 아직 따라오지 않는 것인가?'


그도 사영화의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달착지근했던 기분은 이제 불길한 예감으로 화해 있었다. 그가 다급한 심정이 되어 말머리를 돌리려 할 때였다. 휙--! 옷자락 휘날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시야가 차단되었다. 쐐애액--! 천지를 뒤덮어 버릴 듯 눈부신 검기가 사방에서 쇄도했다. 그것은 정교하게 짜여진 그물처럼 그의 전신을 조여왔다. 어지럽게 난무하는 빛무리 속에서 한 가닥 외침이 들려왔다. "건방진! 감히 사매를 넘보다니." 그 음성의 주인은 바로 독고준이었다. 아울러 그는 검 끝에 닿는 촉감을 통해 진일문을 베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쉬이익--! 섬뜩한 파공음이 허공을 갈랐다. "헉!" 독고준은 대경했다. 그 순간, 그의 목줄기를 조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말채찍이었다. "으으... 이럴 수가!" 그의 눈이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듯 크게 부릅떠졌다. 실로 절묘한 역습이었다. 독고준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버둥거렸다. 숨이 막히자 진기가 유통되지 않아 몸이 물 속에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어느 새 채찍은 그의 손목마저도 휘감고 있었다. 손목이 부서져 나가는 듯한 고통과 함께 그는 수중의 금검을 떨어뜨렸다. 현격한 내공의 차이는 그를 절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진일문은 마상에 앉은 채 태연하게 물었다. "독고준, 나를 해치려 한 의도는 무엇인가?" 독고준은 눈에 핏발을 곤두세웠다. "괘씸한! 네 놈의 정체부터 밝혀라." 진일문은 씨익 웃었다. "나? 예전에는 아문이라고 불리웠지." 독고준의 얼굴에는 언뜻 의혹이 스쳤다. "아문?" 진일문은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현재의 준미한 모습이 아니라 과거의 처참했던 그 얼굴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독고준은 쉽사리 그 얼굴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것은 당시 독고준과 그의 엄청난 신분 차이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피차에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다. 독고준은 한참 후에야 그를 알아 보고는 기성을 발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때 사매를 겁탈하려고 했던......!" 진일문은 정색을 지었다. "아니, 말은 똑바로 해야 하는 것이네. 나는 사낭자에게 무례했던 적이 없네. 그것은 구경꾼들이 지어낸 소리에 불과하지." 그 다음 말은 뜻밖에도 독고준이었다. "알고 있소. 또... 당신의 본명이 진일문이라는 것도......." 그의 태도는 갑자기 싹 바뀌어져 있었다. "나를 아오?"


진일문이 묻자 독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상 황룡사가보의 인물 치고 진일문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무림의 신성(新星)이자 구주동맹의 맹주로 추대된 자, 그 이름은 이제 사해를 울리고 있었으니 그들이라 해서 모를 리 없었다. 더구나 그는 그 곳에서 마동(馬童)으로 지내며 온갖 학대를 받았으면서도 종내 보주를 위기에서 구하고 그 딸을 마수로부터 건져냄으로써 오히려 은인으로 부상된 위인이었다. 그의 입지전적인 일대기는 황룡사가보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용기를, 혹은 공포감을 선사하기도 했다. 물론 후자의 공포감이란 그를 모욕했던 자에 한해서이지만. 독고준은 상대의 존재를 알게 되자 곧 체념을 떠올렸다. "진즉 당신의 정체를 알았어야 했는데......." 그는 입술을 질겅 씹었다. 반면에 진일문의 표정은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로서는 독고준이 그렇게 나오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적의(敵意) 따위는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독고준을 향해 비교적 정중하게 말했다. "돌아 가시오, 황룡사가보로. 그리고 앞으로는 나를 미행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오. 나는 당신들을 돕고자 왔으니까." 독고준은 돌아서려다 말고 불쑥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말하시오." "당신은 혹 그 때의 원한으로 일부러 사매를......?" 말끝을 흐리는 그의 눈에서 문득 한 가닥 불꽃이 일었다. 그것을 보자 진일문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당신은 사낭자를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구려?" "나를 조롱하고자 한다면 대답하지 않겠소." "대답해야만 하오." "싫소." "후후후......." 진일문은 기소를 흘렸다. "대답하지 않으면 목이 날아가는데도 말이오?" 쉬익! 다시 한 차례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황룡사가보의 후원. 눈부신 햇살 아래 무수산 백일홍이 하나의 군(群)을 이루고 있었다. 덕분에 마치 선혈을 흩뿌려 놓은 듯 뜨락은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꽃밭의 한 가운데에 눈처럼 흰 의삼을 걸친 한 인물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는 바로 독고준이었다. 그의 손에는 지금 막 목이 꺾인 백일홍 한 송이가 들려져 있었다. "사제, 축하하네." 그의 등뒤에서 문득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독고준은 눈썹을 꿈틀 했으나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는 성낙수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축하라니, 무엇을 말입니까?" 표정과는 달리 그의 음성에는 친근함이 깃들어 있었다. "후후후... 연적(戀敵)을 제거했으니 그만큼 사매와 결합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았나?" 성낙수는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나직하게 물었다. "그래, 그 귀불여란 자의 정체는 알아 냈나?"


독고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외다. 나는 단지 놈을 일검에 양단해 버렸을 따름이오." 성낙수의 얼굴에 가벼운 실망이 스쳤다. "그런가? 하긴 사제의 구천십지독존 검법이라면......." 독고준은 성낙수를 바라보며 난색을 지었다. "그런데 소제는 그만 사매를 잃어 버렸소이다. 놈을 죽인 후에 곧바로 사매를 찾아 보았지만......." 성낙수는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더니 곧 빙긋 웃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사매는 벌써 돌아와 있네." 독고준은 흠칫했다. "사매가?" "그렇네." 성낙수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일 때문에 그토록 침울해 있었다면 이제 마음을 풀게. 자네가 그러고 있으니 이 사형도 마음이 영 불편하이." "죄송합니다, 사형." "어서 사매에게 가 보게. 그 귀불여란 작자의 죽음 탓인지 사매는 몹시 우울해져 있네. 영화정(瑛華亭)에서 두문불출이네."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독고준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머리를 잘 써야 할 걸세. 후후후......." 성낙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던지며 사라져 갔다. 뒤에 혼자 남게 된 독고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누군가에게 납치 되었을 텐데.......' 그는 소매 속을 더듬었다. 그 곳에서 하나의 노리개가 나왔는데, 그것은 사영화의 소지품으로써 바로 사영화가 실종된 자리에 떨어져 있던 것이었다. 삼촌살인설(三寸殺人舌). 이는 강호인들이 부르는 백의유검 성낙수의 또 다른 별호다. 성낙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직접적인 살인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그런 별호가 따르는 것은 세 치의 혀로 더 많은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그가 뛰어난 계략가(計略家)라는 뜻이다. 사실 황룡사가보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온 인물은 보주인 사해신검 사운악이 아니었다. 두 사람, 즉 총관 황보인과 성낙수였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보(堡)내의 대소사가 전부 사운악에 의해 관장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은 성낙수가 그 모든 관권을 쥐고 있었다. 성낙수. 그는 십사세에 사가보에 입문해 현재까지 십오, 륙년 간에 걸친 노력 끝에 마침내 사운악의 대제자로써 뿌리를 내렸다. 현재 그의 나이 삼십일세. 성낙수는 늘 입가에 웃음을 짓고 있었으며 좀체로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특히 그가 검은 뽑는 것은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 자양각(紫陽閣). 성낙수의 공식적인 거처다. 미시(末時)가 되자 이 곳으로 한 여인이 방문을 해 왔다. 일신에 상복(喪服)으로 보이는 흑의를 입었으며, 얼굴도 검은 면사로 가린 여인이었다.


"낙수......." 홀로 기보( 譜)를 보며 독국(獨局)하고 있던 성낙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술 꼬리가 야릇하게 말려 올라갔다. "사모(師母)." 그에게 사모라고 불리울 여인은 세상에서 단 한 명 밖에 없다. 보주인 사운악의 부인, 설미령이었던 것이다. "낙수, 어찌 하여 악속을 어기는 건가?" 그녀의 음성에는 은은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현재의 나이는 사십세, 그러나 그녀는 채 마모되지 않은 미모로 인해 아직도 삼십대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성낙수는 몸을 일으키며 그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대낮에 이 곳까지 몸소 행차하시다니, 그러다 남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도저히 사모를 상대로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아울러 그것은 평소의 그를 염두에 둔다면 정녕 상상도 못할 어투였다. 반면에 설미령은 그의 그런 태도쯤은 이미 익숙해져 있는 듯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세류요를 휘청거리며 두 걸음 정도 다가서더니 그에게 따져 물었다. "분명 약속했지 않아? 내 딸에게는 손대지 않는다고......." 설미령은 말하다 말고 제 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낙수가 그녀를 향해 태연하게 대꾸했다. "대체 사모께선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내가 사매를 어떻게 했기에? 공연히 흥분하지 말고 이리 가까이 오시오. 후후... 대낮의 정사(情事)도 나름대로 묘미가 있을 것 같구려." 설미령을 아래 위로 훑어보는 그의 눈에는 한 가닥 기이한 기운이 어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음욕(淫欲)이었다. 그의 눈길을 받자 설미령의 눈이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 크게 동요를 일으켰다. 그녀는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낙수, 이제껏 당신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했어. 그러니 날 보아서라도 딸아이만은......." 성낙수는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설미령의 눈에 언뜻 괴로움이 스쳤으나 그렇다고 피하지는 않았다. 성낙수의 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안더니 와락 끌어 당겼다. "아!" 설미령은 맥없이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타성에 길들여진 육체와 거부하려는 이성 간의 싸움은 벌써 승부가 난지 오래였다. 면사가 걷어지자 설미령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은 지아비의 빈소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애가 깃들어 있었으나 역시 아름다왔다. 이른바 완숙미랄까? 반쯤 열려진 입술 은 희고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기이한 숨결을 뿜어내고 있었다. 성낙수는 모르지 않았다. 사모가 겉보기와는 달리 몸이 쉽게 달아오르는 여인이라는 것을. 아울러 그녀의 격정을 부채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그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주쳐 오는 설미령의 입술을 무작정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혀끝으로 가만히 훑어 주었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그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으음, 향기롭군." 이번에는 그의 손이 설미령의 상복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그러나 그 손의 기교는 거친 정복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마치 감각을 통해 탐미(眈美)라도 하듯 부드럽고 섬세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탄력이 사라지지 않았으면서도 세인들의 호기심에서는 멀어져 버린 젖가슴, 즉 중년부인의 유방은 성낙수의 그런 손길에 즉시 반응했다. 두 개의 유실이 금새 빠릿하게 곤두 선 채 다음 동작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겉으로 비어져 나와 성낙수의 입술이 그것을 베어 물었을 때, 여인은 몸을 활처럼 뒤로 휘었다.


"하아......." 설미령의 입술을 비집고 열락에 들뜬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어느덧 자신의 나이도, 신분도 잊은 채 성낙수를 맞이하기 하기 위해 스스로 어깨를 드러 내고 있었다. "흐음......." 깊은 한숨을 토해내 자신의 침몰을 알려 오는 남자(男子). 설미령이 원한 것은 어쩌면 이것이었다. 그녀는 낡은 육체를 통해 물밀듯 밀려드는 환희와 더불어 자신이 지금도 누군가를 매혹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불륜(不倫)의 야합이 황룡보 내의 자양각에서, 그것도 대낮에 벌어지고 있었다. 두 남녀에게는 기이하게도 남편의 제자라든가 사부의 아내라는 형식 따위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여인의 끝없는 자기만족, 그리고 따로 목적이 있는 한 사내의 욕념은, 그 물고는 세심하게 열었으되 일단 불이 당겨지자 실로 무자비한 행위로 이어졌다. 설미령은 도중에 몇 번이나 까무러쳤다가 깨어나야 했고, 성낙수는 그녀의 손톱에 의해 전신이 난자 당하다시피 한 후에야 그녀로부터 겨우 놓여날 수가 있었다. 한 쌍의 눈. 경악과 회의에 찬 누군가의 눈이 줄곧 얽혀 있다가 방금 전에야 떨어져 나간 두 개의 육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다소 지친 듯한 성낙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후후... 대체 누가 사모더러 사십세의 여인이라고 하겠소?" 그런 말은 언제 들어도 설미령을 기쁘게 하는 말이었다. "만족... 했어......?" 설미령이 바닥에 엎드린 채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물었다. 성낙수의 손이 그녀의 머리칼 사이로 스며들더니 유연하게 두피와 마찰을 이루었다. "그야 이를 말이겠소? 십 년을 안았어도 전혀 싫증이 나지 않는다면 충분한 대답일 것이오." "그렇군. 어느 새 십 년이 지났어......." 설미령이 머리 속을 훑어가는 그의 손길로 인해 아득한 나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읊조리는 그녀의 음성에서는 감회가 반이라면 그만치의 자조도 함께 느껴졌다. 그녀의 내심에서는 설미령은 이런 부르짖음이 일고 있었다. '흥! 내가 이렇게 된 것은 결코 내 탓만이 아니야.' 어쩌면 그것은 맞는 말이기도 했다. 사해신검 사운악. 그는 아름다움과 함께 끓는 피를 가지고 있는 부인으로 하여금 너무도 오랫동안 독수공방(獨守空房)을 하게 만들었다. 사영화가 탄생된 이후로 사운악은 건천소양신공(乾天小陽神功)을 연공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극양지공으로써 기본적으로 금욕(禁欲)을 해야만 연성할 수 있는 기공이었다. 사운악은 그 때부터 극단적으로 아내를 멀리 했다. 잠자리를 일체 끊은 것은 물론 자신의 내부에서 정염이 일어날까 우려한 나머지 다정한 말 한 마디조차도 건네주지 않았다. 설미령은 밤마다 엄청난 욕구와 사투(?)를 벌이다가 종내에는 남편의 철두철미한 이기심에 대해 치를 떨기에 이르렀다. 그 덕분에 성낙수는 그녀를 완전하게 지배할 수 있었다. 비단 그녀의 육체를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정신에까지 깊숙이 파고 들었던 것이다. 그만 하면 정(情)이 들만도 한데....... 문제는 그가 벌이는 여하한 행위에도 진심이라고는 도시 깃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설미령은 불행히도 최근에야 이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아 차리고 있었다.


"낙수, 제발 부탁이야. 나를 치욕스럽게 만들지는 말아 줘. 당신이 딸아이를 어찌 한다면 나는 무슨 꼴이 되지?" 그녀의 애원에 성낙수는 내심 조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대단한 모성애(母性愛)로군.' 그는 끝까지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는 그녀가 경멸스러웠다. 그런 감정은 사부인 사운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그가 일 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성낙수는 곧 상념에서 깨어나 정색을 지었다. "오해하지 마시오. 사매에게 손을 쓴 것은 내가 아니니. 그것은 어차피 내 영역권 밖의 일이었소." 설미령은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럼 누가......?" "바로 금검령주(金劍令主)가 행한 일이외다." 설미령의 안색이 일순 창백하게 변했다. "금겅령주가 이 곳에 와 있단 말이야?" 성낙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도착했소." 그는 이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 곳의 주권도 동검령주(銅劍令主)인 내 손에서 그의 출현과 동시에 그에게로 모두 넘어갔소." "대체 왜...? 어째서 금겅령주가 영화에게 손을 쓴 거지?" 설미령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고조되고 있었다. "사모, 먼저 소리를 낮추는 게 좋을 것이오." 성낙수는 눈쌀을 찌푸려 보이고는 잔뜩 움츠러 들어버린 그녀를 향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것은... 사매가 그 의원에게 마음이 기울었기 때문이오. 아마도 대세를 그르칠까봐 손을 썼던 것 같소." 설미령은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 귀불여라는 볼품 없는 의원에게 화아가......?" 성낙수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 자의 진실한 정체는 아무도 모르오. 다만 황보총관이 그가 변장술을 썼다는 것을 알아냈고, 독고준이 그를 제거했소." "아! 그런 일이......." 놀란 기색을 보이고 있는 설미령에게 성낙수는 계속 말했다. "한 가지 크게 아쉬운 것은 종내 그 자의 배후를 알아내지 못했다는 점이오." 성낙수는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주공(主公)께서는 금검령주를 통해 명을 내리셨소. 앞으로 삼일 안에 사가의 인물들에게 극락고(極樂蠱)를 살포하라고." 설미령은 일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럼......?" "주공께서 때가 왔다고 이르셨소." 설미령은 떨리는 음성으로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그럼, 보주는... 결국 죽게 되는 것이겠지?" 성낙수는 역시 비웃듯 입술 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무슨 뜻이 있어 사부에 대해 묻는 거요? 서로 오래 전부터 이미 부부가 아니었지 않소? 후후... 동정하는 모양인데, 그 자는 장차 묵강시(墨 屍)로 화하게 될 것이오." "으음!" 나긋하던 설미령의 몸이 바위인양 딱딱하게 굳어졌다. 동시에 그녀의 눈에는 알 수 없는 빛이 번뜩


떠올랐다 사라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낙수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자르듯 차갑게 말했다. "고술(蠱術)을 준비하시오. 삼일 후, 내가 기회를 만들겠소." "으음......." 두 남녀의 불륜을 지켜보던 눈이 사라진 것은 그 때였다. 사가보의 대문을 나서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로 보주의 이제자인 옥수미랑 독고준과 사영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들 두 남녀는 누가 보더라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독고준은 우선 보기 드문 미남이다. 무공에 있어서도 사운악의 진전을 십분 이어받아 장래가 촉망되는 후기지수였다. 특히 사대신가의 후인들 중에서는 발군의 인재다. 이 정도라면 사영화와 배필이 되어 황룡사가보를 이끌어 나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랄 수 있었다. 독고준과 사영화.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이 가연(佳緣)을 맺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의 여운만을 남긴 채 두 남녀의 모습은 빠르게 사가보와 멀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누군가가 말했다. "저 두 사람, 혹 이상하게 보이지 않나?" 그것은 감정이 전혀 깃들어 있지 않은 메마른 음성이었다. "무엇이 이상하단 말씀이오?" 반문하는 자는 바로 성낙수였다. 그런데 정녕 기이한 일이었다. 그 자리에는 성낙수 외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예의 음성은 다시 전해져 왔다. "자네, 의외로 어리석군. 사영화는 현재 극락고에 제압된 상태가 아닌가? 자의로는 절대 움직일 수가 없지." 노골적으로 비웃고 있는 그 음성은 바로 지붕 위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성낙수의 안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독고준이......?" "그런 것 같네, 동검(銅劍)." "설마!" 성낙수가 회의를 보이자 신비의 음성은 잘라 말했다. "동검, 자네는 독고준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군." 내심을 들켜서일까? 성낙수의 어깨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독고준은 겉으로는 영민해 보이나 실상 단순한 위인이오. 그는 실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소이다." "후후... 자네처럼 말인가?" 조소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음성의 주인은 성낙수에게 전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했다. 이를 느낀 성낙수의 안면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마구 씰룩이고 있었다. 비정한 살령(殺令)이 그의 귀로 부어졌다. "만사 안전이 제일이다. 동검, 그를 제거하게." 성낙수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입술이 무거운 음성을 토해냈다. "알겠소."


대해약포. 장만생이 침중한 얼굴로 낮게 부르짖었다. "틀림 없습니다. 역시 극락자웅고에 당했습니다." 밀실의 침상 위에는 지금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장만생은 눈썹을 푸르르 떨고 있었다. 독고준은 쓴 입맛을 다셨다. "그랬었군."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죽은듯 누워 있는 사영화의 얼굴은 무척이나 평화로와 보였다. 어제의 사영화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필히 많은 고뇌를 끌어안고 있던 본연의 그녀로 복귀해야만 되었다. "해제할 방법은?" 독고준의 물음에 장만생은 미간을 모았다. "없습니다." 독고준은 흠칫 했다. 그는 장만생의 말이 지나치게 단정적���라고 생각하고는 다소 힐난이 깃든 어조로 말했다. "천하에서 손꼽히는 극랄한 독물이라도 반드시 상극(相剋)이 있게 마련이거늘, 어째서 그렇게 말하시오?" 장만생은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만일 이것이 일반의 독이었다면 벌써 이 장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독시켜 놓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극락고는 독물이면서도 충(筮)이기 때문에 소위 활독(活毒)에 해당됩니다. 즉 고를 푼 자의 의도에 따라 쓰는 양이 각각 틀리니 시고자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해제할 수가 없습니다." 독고준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자 안색을 굳혔다. '금검령주! 성낙수의 말에 의하면 그가 사낭자에게 손을 썼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자만이.......' 성낙수와 설미령의 불륜을 목도했던 눈의 주인, 그가 바로 다름 아닌 독고준이었던 것이다. '아니, 설부인(薛夫人)도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녀 역시 고술을 알고 있다고 했지 않은가?'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녀가 해제할 수 있었다면 자신의 딸을 어찌 그대로 두겠는가? 그녀 역시 능력이 닿지 않았기에 성낙수를 찾아가 졸랐을 것이다.' 그의 미간이 슬며시 찌푸러 들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모종의 가능성은 있다. 어쩌면 해결의 열쇠가 그녀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독고준은 장만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장약사, 그를 만나야겠소." 장만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도 역시 맹주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장만생이 밖으로 나간지 약 일 각쯤 되었을 때였다. 한 청년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사영화를 보더니 만면에 격동을 일으켰다. "사매!" 놀랍게도 그 청년 또한 옥수미랑 독고준이었다. 방 안에는 지금 두 명의 동일인이 있는 것이었다. 먼저의 독고준이 말했다. "독고형, 그녀는 누군가에 의해 금제(禁制)를 당한 상태요. 아무도 알아 보지 못하오." 이제 막 방으로 들어선 독고준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과 똑같은 인물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그 말에 상대방은 손으로 씨익 웃더니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이어 손을 내리자 그의 얼굴은


바뀌어져 있었다. 독고준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또 당신이었구려." 그는 맥빠진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후기인들 가운데서는 스스로가 제일이라고 믿어 왔던 그였다. 그런데 이렇듯 번번이 기세에 눌리고 보니 입맛이 더 할 나위 없이 썼다. 처음의 독고준, 즉 진일문은 담담히 말했다. "독고형, 당신이 나설 차례요." 독고준의 눈은 다시금 사영화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 눈은 쓰린 심정을 대변하듯 몹시도 흔들렸다. "내 힘으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오? 나는 이미 자신감을 잃었소이다, 진대협." 진일문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를 설득했다. "황룡사가보의 사활이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되오. 그것은 사낭자의 생명도 마찬가지외다." 독고준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소이다." 진일문은 빙긋 웃었다. "무슨 말이오? 당신이라면 능히 해낼 수 있소." 그러자 독고준은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말아 쥐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소. 내 본보와 사매를 위해서라면 분신쇄골하는 한이 있더라고 전력을 다 하겠소이다." "고맙소. 나는 독고형이 꼭 그렇게 나와 주리라 믿고 있었소." 46 장 천마(天魔)의 후예(後裔) "헉......!" 다급한 신음성과 함께 수급이 어깨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도합 육인이었다. 그들은 바로 독고준과 사영화가 사가보를 나섰을 때부터 줄곧 미행해오던 자들로써 독고준을 살해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되려 그의 손에 목이 날아갔던 것이다. 여섯 구의 주검 위에 담담한 독백이 떨어졌다. "누구든 남을 죽이려는 자는 먼저 자신이 죽는 법이다." 진일문이었다. 그는 발끝으로 한 시체의 허리춤을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그 곳에서는 하나의 동패(銅牌)가 삐죽 튀어 나왔는데, 동패의 전면에는 검(劍)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동패를 집어 든 진일문은 안면을 굳혔다. "일월맹도 아니고, 삼성림도 아니다. 그렇다고 천의회도 아니라면....... 설마 제 사의 세력이 있단 말인가?" 중얼거리는 그의 눈에서는 강렬한 신광이 타오르고 있었다. 자양각. "으음!" 다급히 들어서는 총관 황보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성낙수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영주, 황하육귀(黃河六鬼)가......." 성낙수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실패했군. 그래, 모두 죽었나?" "그렇습니다." "정녕 뜻밖이군. 황하육귀라면 정면 대결은 몰라도 암습으로는 충분히 그를 죽일 수 있는


자들인데......?" 황보인의 눈에 언뜻 두려움이 스쳤다. "혹시 그가 미리 눈치를 챈 것은 아닐까요?" 성낙수의 안색이 무겁게 가라 앉은 채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오. 어찌 그가......?" 이 때,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그의 귀로 들려왔다. "사형은 끝내 소제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려. 겨우 황하육귀 따위로 옥수미랑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이오?" 허리에 금검을 차고 들어오는 미청년, 바로 옥수미랑 독고준이었다. 성낙수의 얼굴에 찰나적으로 경악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곧 태연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제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그럼 우형이 사제를 해치려 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백의유검 성낙수의 무서운 면이었다. 그에게는 여하한 때라도 침착을 잃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독고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 아니란 말이오?" 그는 피식 웃더니 품 속을 뒤졌다. "사형께서는 먼저 이것이 무엇인지 대답해 주셔야겠소." 휙--! 파공성과 함께 바닥에 여섯 개의 동패가 떨어졌다. 그것을 보자 성낙수와 황보인은 동시에 안색이 싹 변했다. "그것이 대체 무엇인가?" 그의 질문은 독고준으로 하여금 조소를 금치 못하게 했다. "아마 두 분께도 그것과 비슷한 물건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어떻소이까? 시치미 떼지 말고 시인하는 것이." 성낙수는 재빨리 안색을 바꾸며 손을 저었다. "하하.... 사제가 무엇을 심각하게 오해했나 보군." 그 순간, 독고준은 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내젓고 있는 성낙수의 손톱에서 미세한 분말이 살포되는 것을. "흠! 사형은 더 이상 나를 우롱하지 못하오." 번뜩 하고 검광이 일직선으로 뻗었다. 단 일식에 해당 되는 발검이었으나 거기에는 무려 삼십육가지의 변화가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십이성에 이른 황룡사가 비전의 구천십지독존검법이었다. "자네의 경지가 이 정도에 이르렀을 줄이야......!" 성낙수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니, 애초부터 정통의 무학에 있어서는 독고준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그였다. 그의 넓은 소맷자락이 나부끼자 허공에서 일순 남빛이 점멸했다. 땅! 따땅--!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더니 끝이 갈고리처럼 휘어진 갈미침(蝎尾針)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남색의 빛이 번들거리는 것으로 미루어 거기에 극독이 발리워졌다는 사실쯤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독고준의 굵은 눈썹이 무섭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언제부터 사형이 흑도의 암기를 사용했는지 궁금하구려?" 파앗--! 수십 가닥의 검광이 성낙수를 향해 쏘아져 갔다. 찬란한 검기가 삽시에 하나의 거대한 빛덩어리를 이루어 내고 있었다.


곁에 있던 황보인은 그 위력을 아는지라 뒤로 급급히 물러났다. 하지만 벌써 그는 옷자락이 갈기갈기 찢긴 상태였다. "우우......." 그의 얼굴에는 공포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땀에 젖은 손으로 재빨리 소매 속에서 자신의 애병(愛兵)을 꺼냈다. 그것은 구(銶)의 형태로써 상대의 검이나 도를 부러뜨리는 외문병기였다. 그는 격전을 벌이는 성낙수와 독고준을 지켜 보았다. 하시라도 독고준이 헛점을 보이면 그 틈을 타 암격을 가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황보인은 좀체로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 사이에 섣불리 뛰어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전신이 가루가 되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릴 테니까. 독고준과 성낙수. 그들 동문의 사형제는 한 덩어리가 된 채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응시하며 황보인은 연신 끌탕을 했다. '소란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곤란한데.......' 그는 불안한 듯 바깥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청력을 돋우었다. '휴우! 아직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군.' 황보인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편, 다시 전세를 가늠하며 수중의 병기를 꼬나 쥐었다. 옥수미랑 독고준. 그는 성낙수와의 일전에 몰두한 나머지 자신을 목숨을 노리고 다가드는 또 다른 위기에는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마침내 황보인의 손이 허공으로 들려지는 찰나였다. 스슷--! 경미한 기척과 함께 그의 등 뒤로 하나의 괴영이 나타났다. 그가 그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끄으......." 짓눌린 신음과 더불어 황보인은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뒤로 쓰러졌다. 가느다란 끈이 그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그는 괴영에 의해 그대로 질질 끌려 가더니 휘장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 사이, 독고준과 성낙수의 싸움은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급기야 전황을 가름하는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몸이 각기 상대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허억!" "음......." 주인이 다른 두 마디의 신음 소리가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다시 대치를 이루고 선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금검을 쥐고 있는 독고준의 안색은 섬ㅉ하리만치 창백해져 있었다. 그의 앞가슴 옷자락이 길게 찢겨져 너덜거렸다. 성낙수의 몰골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긴 흑발은 땀에 젖은 채 멋대로 풀어 헤쳐져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평소에 보이던 안정된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독고준을 가리켰다. "내... 내가 네 손에 당하다니......." 쿵! 쓰러지는 성낙수의 등뒤로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독고준은 그의 주검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사형마장(蛇形魔掌)을 사용하다니....... 대체 마도의 절기를 언제 익혔단 말인가?" 문득 그의 무릎이 바닥을 향해 힘없이 꺾였다. 그러더니 그의 몸은 앞으로 서서히 쓰러져 갔다. 바로 그 때였다.


예의 괴영이 섬광처럼 빠르게 날아와 그를 부축했다. 진일문이었다. 그는 진땀이 흐르는 독고준의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쯧! 감정이 앞선 나머지 검법에 허(虛)를 노출시켰군. 독고형, 당신은 절정의 검도를 익히기에는 앞으로 난관이 많겠구려. 이렇듯 늘상 지나칠 정도로 감정이 풍부하니......." 진일문은 독고준을 반듯이 눕히고 나서 가슴을 헤쳤다. 그의 가슴에는 검게 변색 된 장인(掌印)이 찍혀 있었다. 그것은 괴이하게도 사형(蛇形)을 이루고 있어 섬뜩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진일문은 낮게 중얼거렸다. "이런 독장(毒掌)을 사용하는 자는 대개가 반드시 그 해독약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지." 과연 그는 성낙수의 품을 뒤져 손가락 크기만한 청색의 옥병을 찾아냈다. 뚜껑을 열자 세 개의 환약이 나왔다. 그 중 한 알은 으깨어 타액과 섞은 후 독고준의 환부에 발라 주었다. 그리고 한 알은 진기를 이용해 내복하게 했다. 이윽고 진일문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기이한 광망이 일었다. "이제부터 시작이군. 제 사의 마세(魔勢), 너희들은 불원간 꼬리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진일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성낙수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영락없는 성낙수로 변했다. 그는 휘장 뒤쪽으로 가서 축 늘어져 있는 황보인을 끌어냈다. 그의 입에서 싸늘한 읊조림이 흘러 나왔다. "황보인, 당신과 거래를 시작해야겠군. 아무쪼록 순조로운 협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오." 진일문은 십지를 연달아 튕겨냈다. 황보인의 몸이 꿈틀 했다. 순식간에 십육 개 요혈로 창날 같은 지력이 침투된 것이었다. 황보인은 부르르 진저리를 치더니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성낙수로 변장한 진일문을 보고는 얼른 무릎을 꿇었다. "영주, 속하가 미거하여......." 그러나 황보인은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으로 인해 심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성낙수의 시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황보인은 성낙수와 진일문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곧 그의 얼굴에 짙은 절망이 깔렸다. "으으... 너는......." 폐부를 쥐어짜는 듯 탁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다음 순간, 그의 눈에서 살기가 뭉클 피어 올랐다. 진일문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소, 황보총관. 나는 성낙수가 아니오. 하지만 백변환요라 불리우던 당신도 내가 누구인지까지는 알아 내지 못할 것이오. 이 정도면 내 역용술도 꽤 쓸만하지 않소?" "어, 어떻게 나를......?" 어느 새 황보인의 이마에서는 진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감히 본 신궁(神宮)의 대사를 방해......." 말하다 말고 그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은 빙긋 웃었다. "신궁이라....... 알려 주어 고맙소. 그러나 그 한 가지 만으로는 본인을 만족시키지 못하오. 나는 당신과의 거래를 위해 삼십육 가지의 독형(毒形)을 준비해 두었소. 자, 하나씩 교환합시다." "으으......." 황보인은 안색이 시커매지더니 손으로 자신의 천령개(天靈蓋)를 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신의 혈도가 폐쇄되어 있어 그는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황보인의 얼굴에는 갈등을 거쳐 곧 체념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초점이 없어진 눈을 진일문에게로 향했다. "무엇을 알고 싶소? 묻는 대로 답해 주겠소. 대신 고통 없이 죽여준다는 약속을 해 주시오."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황보인. 나도 당신에게 지나친 결례는 하지 않겠소." 그의 표정은 물처럼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물론 사실대로 답해 준다면 말이오." 중추(中秋)의 전야(前夜). 그러나 황룡사가보 내의 분위기는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중추라면 원단(元旦)과 더불어 중원 최대의 명절이건만 누구도 들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기분을 내기에는 저마다 가슴이 납덩이에 짓눌린 듯 무거워져 ���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솔들은 물론이려니와 이 곳 사가보에 모여 있는 사천당가, 화북팽가, 산동악가의 인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벌써 삼 개월이 지났는데도 의문의 괴사(怪死)에는 이렇다할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각 가의 고수들은 지금 황룡전(黃龍殿)에서 회합을 가지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대안은 나오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적막만이 좌중들 사이를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누군가가 탄식을 터뜨렸다. "이젠 정녕 지쳤소. 이번 일은 아무래도 우리들 자체적으로는 해결하기가 어려울 것 같소이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바로 당가의 당현종(唐顯宗)이었다. 그는 가주인 당평의 다섯째 아우였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당형." 팽전위의 셋째 아우인 팽우(彭宇)가 그 말에 응수했다. 그는 우람한 체구에 눈썹이 유난히 짙은 인물이었다. 당현종은 잠시 대답을 미루고 술잔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뭣하오만... 아예 공식적으로 구주동맹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소?" 장내에 있는 삼십여 명의 인물들이 일제히 안색을 굳혔다. "구주동맹이라니! 하필이면 왜 그 쪽이오?" 제일 먼저 들고 일어난 사람은 악가에서 네 번째 서열을 차지하고 있는 악초겸(岳超鎌)이었다. 그는 다소 흥분이 깃든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어찌하여 삼성림이 아니고 구주동맹이 거론되는 것이오?" 당현종은 쓴 입맛을 다셨다. "글쎄, 우리의 요청은 그렇다 치고 삼성림 측에서 어떻게 나올지가 오히려 문제 아니겠소? 솔직히 무당산의 일이 있은 후로 삼성림에서는 우리 사가를 경원시 하고 있소. 또 차제에 구주동맹과도 교분을 터놓으면 나쁠 것도 없지 않소이까?" 그는 말을 하며 중인들의 표정을 살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구주동맹은 지금 한창 떠오르는 기세요. 벌써부터 무림 내에서 삼성림과 대등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니 향후로는......."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것은 이미 중인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결국 침묵을 지키며 제각기 상념에 빠져 들었다. 사실 이전 같으면 그들이 이런 일로 고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삼성림에 통고하여 도움을 받았을 것이므로. 그러나 그들을 대하는 삼성림의 태도가 달라짐으로 해서 그것은 그저 한낱 흘러간 과거지사가 되고 말았다. 삼성림에 대한 불만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삼천공의 폐관 이후, 광명총궁의 화개악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삼성림의 동향은 어딘가 패도적인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사대신가의 입장에서는 설사 이번 일에 도움을 받는다손 쳐도 그것이 스스로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결과가 될까봐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구주동맹에 의존하는 것에도 문제는 있었다. 중원 사대신가로 말하자면 삼성림과는 달리 칠파일방과는 예로부터 상호 공존의 관계였다. 그러므로 상황이 이렇다 하여 고개를 숙이고 들어 가자니 굴욕적인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깊은 침묵과 한숨이 황룡전의 분위기를 더욱 가라앉혔다. "준비는 다 끝났어, 낙수." 설미령의 음성에는 의외로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이 며칠 사이에 그녀의 안색은 무척 초췌해져 있었다. 그것은 무남독녀인 사영화가 실종 되었기 때문이었다. 독고준이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간 이후로는 종무소식이었던 것이다. 성낙수는 차갑게 응수했다. "사모,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는 말이 있소. 조금치라도 실수가 있으면 그 날로 모든 것이 끝장이오." 이 곳은 황룡사가보의 후원에 위치한 내실(內室)이었다. 보주의 부인인 설미령의 거처로써 과거 이 곳을 드나들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사운악과 사영화 뿐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내밀한 곳은 설미령과 성낙수의 불륜 장소로 쓰여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그들 두 남녀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설미령은 하늘하늘한 침의(寢衣)를 입고 있었다. 덕분에 몸의굴곡이 완연히 드러나 성장을 한 것보다 더 육감적으로 보였다. 성낙수는 침상에 걸터앉은 채 술잔을 채우고 있는 설미령을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란 마치 제 방에 든 것처럼 더 없이 여유롭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설미령은 두 개의 금배(金杯)에 술을 따라 가지고는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얇은 비단 침의를 통해 윤곽을 드러낸 풍염한 젖가슴이 마구 출렁거렸다. 성낙수의 눈이 차마 그 장면을 정시하지 못하고 아래로 떨구어졌다. 왜냐하면 그는 진짜 성낙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문득 뭉클한 감촉과 함께 강렬한 육향이 느껴졌다. 설미령이 그의 옆으로 바짝 기대 앉은 것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며 고혹적인 음성을 흘려냈다. "자아, 내일의 거사(巨事)를 위해 축배를 들어야지?" 금배에는 호박색의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설미령의 눈빛처럼 은근히 색정이 느껴지는 빛깔이다. 진일문은 묵묵히 술잔을 받았다. 설미령의 입가에 언뜻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한 모금 마신 뒤, 서로 잔을 바꾸는 거야." 진일문은 흠칫 했으나 별 도리가 없었다. '하긴, 술 한 잔 바꿔 마시는 정도야.......' 그는 내심 고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대로 먼저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호호호... 낙수, 그 술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 설미령의 도발적인 웃음소리에 진일문은 가슴이 뜨끔했다. "무엇이 들어 있기에......?" 그녀는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어느새 침의는 앞자락이 벌어져 젖가슴을 겉으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미 그녀의 유실이 꼿꼿하게 일어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보자 진일문의 얼굴에는 당황이 스쳤다. '이 여인이 지금 무슨 짓을?' "호호호... 귀공자께서 오늘 따라 왜 이리 점잖을 빼지?" 욕정을 표출하는 것은 비단 젖가슴 뿐만이 아니었다. 설미령은 충혈된 눈을 게슴츠레하게 치뜨며


말했다. "그 술 속에는 바로 십 년 전 당신이 내게 접근을 시도할 때 사용했던 미약(迷藥)이 들어 있어. 호호호... 오늘밤은 거꾸로 낙수가 내게 한 번 당해 봐." 그녀는 바뀐 술잔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진일문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이 여인은 딸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자신이 누리는 쾌락에만은 정녕 철저하구나.' 이어 설미령은 마치 발정한 암짐승처럼 덤벼들었다. 그 바람에 그는 깜짝 놀라 수중의 술잔을 놓여 버렸고, 호박빛 액체는 그만 침상 위로 쏟아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약과였다. 그녀는 진일문을 떠밀어 침상에 눕게 하더니 무서운 기세로 몸을 밀착시켜 왔다. "호호호... 나를 이렇게 미치게 만든 사람이 누구지? 호호... 낙수, 바로 당신이야." 설미령의 부르짖음에서는 몸짓과 마찬가지로 자학적인 냄새가 물씬 풍겼다. 문제는 그녀가 정신이 부서지는 것도 불사할 정도로 이를 최대한 즐기려 한다는 점이었다. 졸지에 여체에 짓눌리게 된 진일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체내에서 일어나는 반응 때문이었다. 그는 의지와는 달리 단전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내가 미약에 당하기는 당했구나.' 그는 다급해진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뱀처럼 감겨드는 설미령을 옆으로 왈칵 밀쳐 버렸다. "낙수......?" 반쯤 이성이 마비된 상태이면서도 그녀는 의혹을 떠올리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진일문은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이 여인을 통하지 않고는 계획을 실행시킬 수가 없다.' 그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설미령이 다시 밀착되어 왔다. 마침내 진일문은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입술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러나 강탈(?) 당하는 그 순간에 그는 미약에 의한 욕구와 처절히 싸우며 태극환허심법의 구결을 암송했다. 태극환허심법은 본시 정통 현문(玄門)의 공부로써 마음을 맑게 가다듬도록 하는데 탁월한 효험이 있었다. 그리하여 태극환허심법을 일주천 하자 무섭게 끓던 욕망도 어느 정도는 사그라졌다. 그는 설미령의 희열에 찬 신음을 들으며 그녀의 네 군데 혈도를 동시에 짚었다. "음......." 해파리처럼 찰싹 달라 붙어 있던 설미령의 육신이 대번에 축 늘어졌다. 그는 얼른 그녀로부터 몸을 빼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어지는 그녀의 동작들이었다. 혼자 허공을 휘저으며 몸부림을 치는등 그야말로 가관을 연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설미령은 아직도 환락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바로 진일문의 특수한 제혈법 때문이었다. 진일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가는 설미령의 몸을 금침으로 덮어버린 뒤, 돌아서서 신색을 가다듬었다. 한 바탕 격전을 치르고 난 사람처럼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길게 심호흡을 하며 중얼거렸다. "무척이나 힘든 순간이었다." 바로 그 때였다. 한 가닥 조소가 깃든 음성이 들려온 것은. "동검, 자네에게 그 일은 가장 쉬운 일이 아니었던가?" '아!' 느닷없이 찬 물을 뒤집어쓴들 이러 할까? 진일문은 너무도 큰 충격으로 인해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천만 뜻밖에도 그 음성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의 것이었다. 진일문은 서서히 음성이 들려온 곳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심중에서는 절로 부르짖음이 일었다.


'이럴 수가! 그대는.......' 흑의(黑衣)가 잘 어울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진일문은 흑의를 입고 있는 그가 무척 멋지게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검(劍)이 있었다. 물론 엄밀히 말한다면 그것은 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도(刀)도 아니고, 굳이 표현하자면 묵봉(墨封) 정도라고나 할까? 그런 것을 허리춤에 비스듬히 꽂고 있는 사나이였다. 흰 얼굴은 비교적 준수한 편이었다. 다만 끝이 약간 처지고 반쯤 감긴 듯한 눈이 늘상 웬지 모를 불안감과 권태로움을 불러 일으켰다. 표정인즉 지루할 만큼 변화가 없었다. '허무영!'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진일문은 설마 하니 금검령주라는 인물이 허무영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상상을 절한 일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무영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었다. 있다면 단 한 가지, 그의 입가에 경멸을 뜻하는 야릇한 미소가 매달려 있다는 것 정도였다. 반면에 허무영은 상대가 진일문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짐짓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동검, 자네는 그 동안 환락산(歡樂酸)의 해약이라도 만들어 냈나? 그것이 아니라면 지금쯤은 저 탕녀와 열심히 어울리고 있어야 정상일텐데......?" '환락산!' 진일문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환락산으로 말하자면 해약이 없는 지독한 최음제 중 하나였다. 물론 허무영의 의도는 단순히 조롱이었지만 그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무영의 눈길이 이번에는 침상으로 향했다. 그는 금침 밖으로 나와 허우적대는 설미령의 다리를 보며 눈쌀을 잔뜩 찌푸렸다. "자네의 통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거늘, 오늘따라 마다하는 데에는 혹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진일문은 미리 생각해 둔 변명을 자연스럽게 끄집어냈다. "특별히 신선한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서 그랬소이다." 허무영은 어깨를 으쓱 했다. "신선한 기분? 호오! 말하자면 새로운 요릿감이 있다는 건가?" 진일문은 기이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소. 더구나 저 여인이 어찌 알고 나를 위해 환락산까지 제공해 주었으니, 흐흐흐......." 그런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색광의 그것이었다. 허무영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기가 싹 걷혔다. 그는 정색을 지으며 진일문을 노려 보았다. "동검, 자네가 설부인을 건드린 일은 주공께서도 알고 계시네. 그리고 그다지 탐탁치 않게 여기고 계시기도 하지. 자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 진일문은 불만스러운 듯 눈썹을 마구 꿈틀거렸다. "그것이 정말이오? 나는 어디까지나......." 허무영이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후후... 대사를 위한 방편이었노라고 말하고 싶은가?" 그의 표정은 더 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럼 사영화는? 그녀까지도 노리는 자네가 아닌가? 고작 여인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입지를 세우려는 자네가 때로는 불쌍한 생각도 들곤 하지. 더구나 딱한 것은 그 두 여인이 모녀 간이라는 사실이야." 듣고 있던 진일문은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매사를 냉소로 일관하는 허무영이 성낙수에게 힐책을......?' 허무영의 눈이 좁아지더니 으스스한 한광을 뿜어냈다. "경고하네만 동검, 적당히 즐기게. 자네의 이런 행위는 본궁(本宮)의 천하정복에 아무런 이득도 주지 못하네."


진일문은 짐짓 안면을 일그러 뜨렸다. "영주께선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이오?" 허무영은 표정을 풀며 히죽 웃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는 더 볼 일이 없다는듯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후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걸세. 이 허무영이라는 사람이 때로는 고지식할 정도로 도리를 따지기도 한다는 것을." 허무영은 등을 돌린 채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물론 그런 경우는 금검령주가 아닌 나 허무영, 개인으로서의 얘기지만......." 스스스....... 그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허무영, 과연 그대는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 진일문은 허무영을 만나면 항상 이런 자문(自問)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제대로 해답을 얻어 본 적이 없었다. 현재도 마찬가지로 내부에서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의문으로 인해 그는 답답함을 느꼈다. 결국 그가 허무영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단지 복잡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것뿐이었다. 아무튼 진일문은 허무영과의 이번 만남을 통해 한 가닥의 추리는 해 나갈 수가 있었다. '허무영은 왕사부 쪽의 인물이지만 이 곳의 음모는 천의회에서 꾸민 것이 아니다. 그도 본궁이라는 표현을 썼거니와 황보인이 이미 천마신궁(天魔神宮)이 계획한 일이라고 실토했다.' 천마신궁. 이는 마교 이전에 존재했던 파황교(破皇敎)의 일맥으로 천년 전의 인물인 천마대제(天魔大帝)가 바로 초대 궁주였다. 그렇다면 허무영은 과연 천의회의 소속인가, 아니면 천마신궁의 사람인가? 문득 진일문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혹 천의회가 천마신궁의 화신이 아닐까?' 하지만 그는 곧 고개��� 저었다. '후후... 그럴 리가! 왕사부가 천마의 후예일 리 없지 않은가? 그 분도 분명 삼성림의 구대성군 중 한 명이었거늘.......' 이른바 중원무림의 맥(脈). 이는 복잡하다면 복잡하고 간단하다면 간단하다.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중원무림의 내력은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다스리던 상고 시대에까지 이른다. 무릇 세상에는 선과 악이 존재한다. 낮과 밤이 따로 있듯 이 선과 악의 개념은 중원의 역사와 더불어 공존해 왔다. 소위 천마대제(天魔大帝). 최초의 마도무림은 바로 이 인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로부터 중원무림은 끊임없는 혈투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마공을 익힌 천마대제의 수하들은 파황교(破皇敎)를 세웠고, 후대로 내려오며 몇 번인가 세상을 지배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마의 지배란 결코 영속적인 것은 못되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진리가 그 때마다 참뜻을 드러내 불세출의 대영웅들로 하여금 속속 마세를 몰아내도록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 파황교가 결정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바로 오늘날 마교라 일컬어지게 된 광명교(光明敎)의 출현으로 인해서였다.


광명교는 파사국의 정교에서 유래되었으며 내세(內世), 즉 미륵불(彌勒佛)을 숭앙하는 종교 집단이었다. 그들은 지닌 바 엄청난 무력(武力)을 발휘해 종내 파황교를 섬멸시켰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후의 광명교도들은 황궁과의 잦은 마찰로 인해 사교(邪敎)로 낙인이 찍혀 토벌대상에 올랐다. 그것은 불의를 용납치 않는 교리의 성격 때문이었다. 어쨌든 광명교는 그 때부터 마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고, 그들의 활동은 어쩔 수 없이 비밀결사(秘密結社)로 발전해 더욱 세인들의 눈에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십여 년 전에는 당시의 교주인 십절천기(十絶千技) 동방절호가 원(元)을 몰아 내고 명조(明朝)를 세우는데 가담하여 마침내 오명을 씻는가 했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동방절호는 중도에 변절해 오히려 무림을 큰 혼란에 빠뜨렸다. 그리고는 그 자신도 수하인 십대천왕(十大天王) 중 삼인, 즉 삼천공에 의해 죽고 말았다. 그 후로 광명교는 아예 천하에서 잠적해 버렸다. 진일문은 내심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천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또 다시 파황교가 출현하다니, 더구나 마교의 후신인 일월맹이 창궐하는 마당에.......' 그의 눈썹 사이에 깊은 골이 패였다. '일월맹, 천의회, 그리고 삼성림까지도 따지고 보면 모두 하나의 맥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오백 년 전의 광명교가 그것이다. 천마신궁만이 별개라고 볼 수 있다.' 진일문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천마신궁은 마의 본체인 천마대제의 후예, 즉 파황교의 후신이다. 그야말로 극마극사(極魔極邪)의 무리들이다.' 그의 눈에 짙은 회의가 떠올랐다. '그런데 천의회와 천마신궁에 각기 양다리를 나누어 걸치고 있는 허무영의 목적은 대체 무엇일까?' 그러다 문득 진일문은 탄식을 터뜨렸다. "아! 쌍기(雙奇) 어르신네들만 가까이 있어도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을텐데......." 쌍기란 물론 파사국으로 떠난 취화상과 만박노조였다. 이렇다할 사문이 없는 진일문에게 있어 그들의 존재는 곧 사부나 다름이 없었다. 아울러 이제껏 그가 만난 고인들 중 진심으로 감동을 준 인물도 바로 그들 두 사람이었다. 무엇인가 난관에 부딪치면 진일문은 예외없이 그 두 기인들을 떠올리곤 했다. 구주동맹의 맹주라는 지고한 위치에 있기는 하나 그도 가끔씩은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쌍기는 파사국으로 떠난 후로 아무런 소식조차 없었다. 언제 돌아올지, 아니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어떤 문제이든 그 혼자 해결을 해야 했다. 진일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우연을 빌어 죽은듯 잠들어 있는 설미령에게 이르게 되었다. '이럴 수가!' 진일문은 그녀를 보자마자 단전어림이 다시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아연실색 했다. '환락산의 춘성은 공력으로도 누를 수 없는 것이란 말인가?' 그의 호흡이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전신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채 금침 밖으로 비어져 나온 설부인의 다리를 응시했다. '안되겠다! 이러다간.......' 진일문은 눈을 질끈 감더니 급급히 태극심법을 운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온몸에 고루 퍼져 있는 환락산의 약성은 더 이상 억제할 수가 없었다. 펑! 와장창....... 진일문은 창문을 박살내며 밖으로 튀어 나갔다. 욕정을 주체할 수가 없자 그의 이성이 그렇게 하도록


종용한 것이었다. 그의 신형은 달빛이 휘영청한 밤하늘을 유성처럼 가르고 있었다. 본능의 충동이 그를 정신없이 내닫게 했다. 휘이이익--! 쏘아진 화살처럼 그어지는 한 줄기의 선(線). 그것은 경신법의 최고봉이라는 어풍비행술(於風飛行術)에 버금갈 정도로 빨랐다.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장만생. 그는 막 잠자리에 들려다가 흠칫 했다. 쾅쾅쾅....... 다급히 문 두드리는 소리에 그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맹주! 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진일문이었다. 그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잔뜩 충혈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입술은 심한 갈증으로 인해 바싹 말라 있었다. "나... 환락산에......." 진일문은 말도 다 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맹주!" 장만생은 급히 그를 부축하여 내실의 침상에 갖다 눕혔다. 이어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환락산이라면 희대의 미약인데, 맹주께서 어찌......?" 진맥을 해 본 장만생은 혀를 내둘렀다. "정녕 놀랍다. 이 지경이 되도록 욕념을 억제하셨다니,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혈맥과 심장이 터져 즉사했을 것이다." 그는 언뜻 미간을 찌푸렸다. "일각만 더 일찍 왔어도 손을 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늦었다. 방법이라곤 오직......." 무엇을 생각했는지 고개를 드는 장만생의 눈에는 한 가닥 결의가 엿보였다. "할 수 없지, 대를 위해서는 소가 희생되어야 하는 법!" 그는 진일문을 안더니 비밀문을 열고 밀실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기이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방의 한가운데에는 장방형의 욕조가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기이한 향기가 느껴지는 약수(藥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약수에는 한 여인이 잠겨 있었다. 바로 사영화였다. 그녀는 반듯이 누워 있는 자세였는데, 숨을 쉴 수 있도록 코 윗부분만이 약수의 수면 위로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나신이었다. 탄력이 넘치는 처녀지신은 조금씩 흔들리며 약수에 잔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장만생은 그녀의 나신을 보고도 일체 동요가 없었다. 그는 의원으로서 이미 그런 방면은 초월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사영화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 보더니 혀를 찼다. "쯧! 모공을 통해 극락고는 거의 배출시켰거늘......." 그러나 장만생의 얼굴에는 곧 엄숙한 기운이 감돌았다. "용서하시오, 사소저. 진대협의 생사는 향후 무림을 좌지우지하게 될 중대사요. 소저의 청백도 중요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소이다." 그는 욕조 안에서 사영화를 안아 올렸다. 유리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살결에서 약수가 방울방울 흘러 내렸다. 힘없이 젖혀진 고개 뒤로는 윤기 흐르는 긴 흑발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장만생은 기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소저에게 그다지 밑지는 장사는 아닐 것이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진대협만한 신랑감은 없을 테니까." 그는 침상 위에 두 남녀를 나란히 눕히더니 탄성을 발했다. "오오! 두 분이야말로 인중지룡(人中之龍)과 인중봉(人中鳳)의 만남이오. 진정 부럽소이다." 장만생은 빠르게 손을 놀려 진일문의 옷을 벗겼다. 이미 그의 전신에는 지렁이 같은 심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장만생은 번개같이 진일문의 십이 개 요혈을 때렸다. 진일문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장만생은 문을 닫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밀실 안으로 그의 음성이 희미하게 스며 들었다. "초야 치고는 초라하지만 두 분께선 용과 봉이 아니시오? 용봉지무(龍鳳之舞) 만으로도 그 방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신방이 될 것이오. 허허......." 흐뭇해 하는 그 웃음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 방안은 열풍이 아닌 일대 광풍(狂風)에 휘말리고 말았다. 두 남녀의 정사는 완전히 일방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그것도 애정이 배제된 채 단지 필요에 의해서인 것이다. 황룡사가보의 천금인 사영화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광란에 가까운 진일문의 율동을 그저 얌전하게 수용해야만 했다. 그녀의 파과(破瓜)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아무런 갈등도, 심지어는 아픔도 없이....... 47 장 결말(結末) "흑흑......." 여인의 흐느낌 소리가 진일문의 의식 속으로 깊이 스며 들었다. 그로 인해 혼몽에서 깨어난 그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풀어진 솜처럼 전신이 나른했으나 기분만은 상쾌했다. 낮게 흐느끼는 소리는 좀 더 가까이에서 들렸다. 진일문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무 장식도 없이 밋밋한 사각의 천정이었다. '여기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이 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왜 이 곳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여 보던 진일문은 깜짝 놀랐다. 곁에서 물컹 하는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엎드려 오열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기다란 머리칼이 매끄러운 등 위로 반쯤 덮혀 있었으나 그 아래로는 놀랍게도 맨 몸이었다. '이럴 수가!' 진일문은 마치 둔중한 물체에 머리를 부딪치기라도 한 듯 심한 충격을 받았다. 비로소 정신을 잃기 전의 정황이 어렴풋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혹시?' 그는 우선 설미령에 의해 환락산을 복용한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내가 설부인을.......' 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허무영과 마찬가지로 그도 성낙수 같은 부류의 인간을 혐오한다. 그런데 자신도 똑같은 인간으로 전락해 버렸다고 생각되자 그는 거의 미칠 듯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 때였다. 그의 기색을 알아 차렸는지 여인이 오열을 뚝 멈추고는 몸을 옹송거렸다. 겁이라도 집어 먹은 것일까? 여인의 등에서 한 차례 미미한 떨림이 일었다.


진일문의 눈에 그런 장면들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설부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예감이었다. 설미령 같으면 당연히 그를 성낙수로 알고 있을 것이되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일 리 없었다. 진일문은 묘한 안도감을 가지며 비로소 여인의 벗은 몸을 자세히 바라 보았다. 곧 군살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가녀린 처녀의 지체가 그를 격동으로 몰고 갔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나를 위한 희생양인가?' 진일문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여인을 불러 보았다. "낭자." 여인은 움찔하더니 다시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 어깻죽지를 드러냈다. 새하얗게 빛나는 동그란 그녀의 어깨가 서럽게 들먹이고 있었다. 진일문은 난감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낭자, 정녕 죽을 죄를 지었소. 비록 본의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낭자에게 차마 못할 짓을 했으니......." 문득 그는 침상 위에 선명하게 피어 있는 핏빛 앵화(櫻花)를 발견했다. 그것은 또 한 번 그를 충격으로 몰고 갔다. '이것은 처녀의 상징......!' 진일문은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목놓아 우는 여인을 향해 더듬거리며 말을 건넸다. "낭자,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어떤 식으로라도 보응을......." "닥쳐요!" 눈물에 젖은 여인의 얼굴이 처음으로 들려졌다. "누가 보응을 바란다고 했어요?" 그 순간, 진일문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사낭자......!" 여인은 물론 사영화였다. 하지만 그로서는 정녕 꿈에도 생각지 못한 대상이었다. "설마 당신일 줄이야......." 진일문은 경악으로 인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편. 대해약포의 주인이자 의원인 장만생은 불안한듯 방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사실 그도 나름대로 일세를 풍미하던 기인으로써 평소 남의 말을 엿듣는 취미 따위는 일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중매를 해 놓았으니 뺨 석 대를 맞지 않으려면 필히 결과가 좋아야만 하는 것이다. 사영화는 지금 극락고의 제어에서 완전히 놓여난 상태였다. 장만생의 약물 비법이 주효해 대부분을 체외로 배출 했으며 그 잔여량은 정사를 통해 체내의 열기로 태워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그녀가 진일문을 맞아들인 것은 여러 모로 복연(福緣)이라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장만생의 생각으로는. 그런데 그녀가 울면서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참! 여인들이란 하나 같이 어리석다더니.......' 장만생은 내심 혀를 끌끌 찼다. 그도 사영화의 미모나 신분을 감안해 어느 정도 이해는 하고 있었으나 진일문을 몰아 부치는 그녀가 영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러기를 한참여. 방 안에서 일던 소요는 의외의 국면을 치달렸다. 사영화의 앙칼진 음성이 어느덧 야릇한 비음으로 화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진일문의 거친 숨소리도 거기에 일조하고 있었다. 장만생은 무엇을 연상했는지 얼굴을 은은하게 붉혔다. 남과 여, 말을 대신한 육체의 언어를 눈치 채기라도 한 것일까?


그제서야 그는 걱정에서 놓여나 돌아섰다. "허허... 젊음이란 좋은 거야. 나도 한 때는 그랬었으니까." 장만생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뺨을 맞는 것이 아니라 술 석 잔을 대접받을 수 있으리라고. 중추절(中秋節)은 중원에서 가장 큰 명절이다. 이를 기해 황룡사가보의 정문에는 오색등롱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외부인으로 하여금 이상한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편일 따름이었다. 사실상 그들로서는 명절이라 해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보내의 분위기는 여전히 무겁기 그지없었다. 총관 황보인은 오늘따라 유난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당가, 팽가, 그리고 악가의 고수들과 잇달아 접촉하고 있었는데, 기이한 것은 그의 행동이 극히 은밀하다는 점이었다. 총관이라는 직책상 황보인에게는 그들을 접대해야 하는 임무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오늘 삼가의 고수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만나고 있는 것은 그런 단순한 이유에���가 아니었다. 진일문. 그는 지금 자양각에서 허무영과 함께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성낙수의 모습으로써 온갖 구실을 다 붙여 허무영을 곁에 잡아 두고 있는 것이었다. "소제는 늘 금검령주를 존경해 왔소이다." 허무영은 무감동한 얼굴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에 반해 진일문은 만면에 미소를 드리우고 있었다. "사실 진즉부터 형님이라 부르고 싶었지요." 그 말에 허무영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성낙수의 기질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말까지 듣게 되니 비위가 상했던 것이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따라서 동검령주가 이러는 데는 뭔가 저의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영은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동검, 좀 더 솔직해지게.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진일문은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섭섭하오이다. 소제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소." 허무영의 권태로운 얼굴에 한 가닥 비웃음이 스쳤다. "나는 감언(甘言)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네." 진일문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소제는 불순한 뜻이라고는 조금도 없소이다. 형님께서는 뭔가 오해를 하셨소." 진일문의 태도는 누가 보아도 실로 그럴싸 했다. 생전의 성낙수가 그렇게 철저히 내심을 속여왔듯. 허무영은 고소를 지었다. '능구렁이 같은 놈!' 같은 시각. 내원에서는 두 여인이 만나고 있었다. "어머니......." "화아야!" 설미령은 떨리는 손으로 사영화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반면에 모친의 손에 얼굴을 내맡기고 있는 사영화의 심정은 착잡하기 짝이 없었다. 묻고 싶은 말은 태산같이 많았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영화. 그녀는 진일문을 통해 모친과 성낙수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얼마나 충격을 입었는지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결해 버리겠노라며 혀를 깨물려 하기도 했고, 스스로 벽에 머리를 부딪쳐


실신하기도 했다. 한 쪽은 모친이고 다른 한 쪽은 남매나 다름없이 지내오던 사형이다. 그러니 그녀가 느낀 배신감이란 설사 눈앞에서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그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부친을 잃은 마당에 그런 사실까지 접하게 되자 그녀는 잠시 동안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사영화가 곧 자신을 수습하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진일문으로 인해서였다. 애틋한 위로와 더불어 그는 황룡사가보에 대한 그녀의 의무감을 일깨워 놓은 것이었다. 모친을 바라보는 사영화의 눈이 몹시도 흔들렸다. '지금은 오히려 어머니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담(私談)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 모든 일들을 지시한 인물도 역시 진일문이었다. 그가 황보인을 통해 알아 낸 사건의 전모는 이러했다. 천마신궁. 그들은 중원무림을 장악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천하 제문파에 세간(世間)들을 심어 놓았다. 아울러 그들은 최근 들어 사대신가가 독립적인 성격을 띄게 되자 이 기회에 사가의 세력을 포섭해 전면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황보인으로부터 황룡사가보에서 비밀회합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는 극락자웅고를 풀어 각 가주들을 제압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바로 완벽한 꼭두각시였다. 이 일에는 황보인보다도 사실상 성낙수의 활약(?)이 더 컸다. 백의유검 성낙수. 황룡사가보의 대제자란 표면상의 신분일 뿐, 입문시부터 그는 천마신궁의 인물이었다. 최근까지 보주인 사해신검 사운악을 위시하여 보내의 인물들을 감쪽같이 속여 온 것이었다. 그 뒤에는 천마신궁의 금검령주, 즉 허무영이 있었다. 그는 천마신궁과 황룡사가보를 오가며 명령을 하달하는 한편 세간들의 모든 활동을 총관하고 있었다. 이들의 음모를 분쇄하려는 진일문의 계획은 차곡차곡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결정적인 순간에 대세를 전복시키는 것뿐이었다. 진일문은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심정으로 그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만일 일을 그르치게 되면 그의 신분상 구주동맹에까지 영향이 미쳐 엄청난 희생을 각오해야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역시 고독의 시술자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래야만 해고(解蠱)할 수가 있었으므로. 이와 더불어 허무영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품어왔던 진일문은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사로운 감정을 떠나 그를 제압해 천마신궁의 내막을 파헤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황보인으로 변신한 독고준, 그리고 사영화가 각각 사가의 인물들과 설미령을 만나 일을 꾸미는 동안 그는 그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허무형을 잡아 두고 있었다. 만월(滿月)이 솟아 올랐다. 중추의 만월은 마치 대지를 포용하듯 어두운 밤하늘의 한 가운데에서 부드러운 빛을 뿌려냈다. 황룡전(黃龍殿). 이 곳에는 지금 수십 명의 군웅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가(四家)의 절정고수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침중했다. 간단한 연석(宴席)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술잔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모이도록 통지한 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을 청한 인물은 다름이 아니라 보주인 사해신검 사운악의 미망인(未亡人) 설미령이었다. 그래서일까?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는 웬지 비감이 감돌고 있었다. 마침내 내전으로부터 검은 상복을 입고 면사로 얼굴을 반쯤 가린 중년미부가 걸어 나왔다. 바로 설미령이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들은 우선 그녀가 무엇 때문에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인지에


대해 궁금함을 표했다. 설미령의 옆에는 중년의 한 여승이 시립해 있었다. 비취암주인 절정사태였다. 물론 냉혹한 성격을 지닌 이 여승의 얼굴은 습관인양 여전히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설미령은 좌중을 향해 공손히 절을 했다. 육감적인 그녀의 몸매도 검은 상복에 갇히자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원근 각처에서 찾아 주신 여러분들께 그 동안 인사도 제대로 올리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망부(亡夫)에 대한 슬픔 탓일까? 그녀의 음성이 다소 떨려 나왔다. 그로 인해 좌중의 분위기는 더욱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이 기회를 빌어 여러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 사가보에서 벌어진 변사를 밝히기 위해 한결같이 헌신해 주셨으니 어찌 보답을 해야할지 난감할 지경입니다." 설미령은 계속하여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불행하게도 아직 이렇다할 원인 규명은 되지 않았으나 이 망녀(亡女)는 그 동안 보여주신 여러분들의 노고를 지켜보며 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애잔한 음성은 중인들의 가슴을 축축하게 파고 들었다. 그들은 침음한 채 그녀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설미령은 다소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부군을 위시하여 여러 고인들이 타계하신지도 벌써 삼개월이 지났습니다. 이 상태로 가면 유체가 훼손될까 두렵습니다." 중인들은 저마다 탄식을 불어냈다. 그녀의 말인즉 시신의 부패를 뜻하는 것으로써 이는 그들도 걱정해 오던 바였다. 더위가 한 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한낮으론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최고급의 유향을 썼다 해도 더 이상 그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망녀는 여러분들께서 동의하신다면 그만 장례를 치를까 합니다. 이 점에 대해 여러분들의 고견은 어떠신지요?"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무언의 승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설미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그럼... 그리 알고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녀는 총관인 황보인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부인의 하명에 따르겠습니다." 황보인은 공손하게 대답을 한 뒤, 이내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약 일각쯤 흘렀을까? 대전의 앞마당으로 사가보의 식솔들이 무엇인가를 어깨에 메고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장례를 치르기 위한 관(棺)들이었다. 마당에는 곧 사십오 개의 관이 열을 지어 즐비하게 놓였다. 이렇게 되자 황룡전의 분위기는 더욱 더 침통해지고 말았다. 왜 안그렇겠는가? 중인들은 누구고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망자(亡者)들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결국 설미령은 더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흑......." 그녀는 오열과 더불어 이렇게 말했다. "이 망녀, 고인들을 떠나 보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과 이별주를 나누고 싶습니다." 설미령은 술잔에 스스로 술을 따랐다. 누구라서 이를 거절할 수 있겠는가? 중인들도 모두 그녀와 같은 심정이 되어 말없이 자신들의 잔에 술을 따라 부었다.


술잔이 전부 채워지자 설미령은 잔을 치켜 들었다. "그럼 망녀가 먼저......." 서서히 그녀의 입술로 잔이 기울어졌다. 그 광경에 중인들도 하나 둘 술잔을 비워 갔다. 술은 마치 폐부를 도려낼듯 쓰디 썼다. 그것은 하례주가 아니었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중인들이 모두 술잔을 내렸을 때였다. "호호호홋......!" 느닷없이 설미령이 고개를 젖히더니 날카로운 교소를 발했다.영문을 모르는 중인들은 그녀가 미쳤나 싶어 아연해 했다. 그 사이, 설미령은 소매 속에서 요령( 鈴)을 꺼내더니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딸랑딸랑......! 이른바 구혼령음(九魂靈音), 즉 지옥의 유부에서 혼을 부르는듯한 방울 소리가 중인들의 고막을 때렸다. 그 소리에 그들은 멍한 표정이었으나 곧 하나, 둘씩 연회석 위로 엎어졌다. "이, 이럴 수가! 우리가 속았소이다." "이건... 사기극이었......." 장내에는 바야흐로 엄청난 소요가 일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었다. 구혼(九魂)의 요령소리가 반복되는 가운데 그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무력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황룡전에는 괴괴한 침묵만이 남게 되었다. 그 속에서 마녀의 부르짖음과도 같은 설미령의 음성이 울렸다. "호호호호... 어리석은 자들이여! 고수를 자처하는 너희들도 극락고에는 당해 내지 못하는구나. 호호호호......." 그녀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덕분에 면사 위로 드러난 그녀의 눈에 기광이 스치는 것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문득 장내를 울리는 또 하나의 음성이 있었다. "좋아! 아주....... 나무관세음... 나무랄 데 없는 성공이야." 만족한 웃음과 함께 불호를 외운 사람은 바로 절정사태였다. 설미령이 교소를 거두고 고개를 홱 돌렸다. 부릅떠진 그녀의 눈에는 회의와 불신이 교차 되고 있었다. "사태께서 그럼, 고주(蠱主)였나요......?" 절정사태의 얼굴에 얼음장같이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이제는 더 이상 감출 필요도 없어졌군. 그래요, 설부인. 빈니는 고주이자 천마신궁의 삼봉령(三奉令) 중 하나인 구혼봉령주(九魂奉令主)이지." "맙소사! 상상도 못했거늘......." 설미령은 두려운듯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흥! 머리가 잘 돌아갔으면 진즉에 알 수도 있었어. 하기는 애송이와 놀아 나느라 자신의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었겠지." 절정사태는 냉소하며 소매 속에서 괴이한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구리로 만들어진 세 개의 핏빛 방울이었다. "이것은 심고(心蠱)를 조종하는 영령이야." 딸랑딸랑......! 섬ㅉ한 음향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일어나라! 묵강노(默 奴)들이여." 펑! 퍼펑--! 폭음과 함께 네 개의 관뚜껑이 깨어지며 시신들이 벌떡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사운악, 당평, 팽전위, 악군협 등 중원사대신가의 가주들이었다.


절정사태는 설미령을 힐끗 돌아다보았다. "뭐 해요? 설부인도 어서 나머지 극락노(極樂奴)들을 깨워요." 이를 악무는 설미령의 눈에 한 가닥 비애가 스쳤다. 상대는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었으며 내놓고 비난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설미령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그리고는 절정사태의 지시대로 태연하게 예의 구혼령을 흔들었다. "일어나라, 극락의 노예들이여......." 역시 관뚜껑들이 일제히 날아가며 앞서의 네 구를 제외한 사십일구의 시신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안색이 푸르스름한 청동빛이었으며 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시신이라고 감안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한 형상이었다. 절정사태가 다시 말했다. "이젠 이 노예들을 신궁으로 데려가는 일만 남았다. 금검령주, 나서도 될 것 같네." 스슷--! 천정에서 하나의 묵영(墨影)이 떨어져 내렸다. 일신에 흑의를 걸친 인물, 그는 바로 허무영이었다. 절정사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금검, 자네의 공이 컸네. 그런데 동검은......?" 그때였다. 스팟--! 빨라도 이렇게 빠를 수가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아마도 번개이리라. 하지만 허무영이 허리춤의 묵봉을 뻗어낸 속도는 적어도 그것을 백 개로 쪼갠 듯 했다. 절정사태가 놀라 몸을 날리려 했을 때는 이미 묵봉이 그녀의 목을 꿰뚫고 뒷덜미까지 관통된 후였다. "크윽! 네, 네가......." 믿어지지 않는다는듯 절정사태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런 그녀의 얼굴....... 놀랍게도 그 얼굴은 더 이상 불문에 몸을 담은 비구니의 그것이 아니었다. 흡사 지옥의 야차가 현신한듯 끔찍하게 변해 버린 그 얼굴은 마(魔), 바로 그 자체였다. 딸랑! 절정사태의 손에서 영령이 떨어졌다. 불도를 닦는 대신 죄업(罪業)만을 일삼던 그녀의 육신은 무너지듯 뒤로 쓰러졌다. 츳! 뻗어나갈 때 만큼이나 빠르게 묵봉이 회수되었다. 허무영은 담담한 시선으로 묵봉을 타고 흘러 내리는 선혈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정녕 뜻밖이었소. 사태가 고주였을 줄은......." 문득 창백한 얼굴로 서 있던 설미령이 맥없이 푹 쓰러졌다. "설부인!" 놀란 그에게 밖으로부터 의원 차림의 한 중년인이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설부인은 고주가 죽음으로써 체내의 고독이 자멸하게 되자 탈진했을 뿐입니다." 허무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저들은......?" 말하다 말고 그는 흠칫 굳어졌다. 사십오구의 시신들이 마치 썩은 짚단처럼 속속 쓰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년인, 즉 장만생은 빙긋 웃었다. "저들도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다 같이 앞으로 사십구일간만 자고 나면 모두 원상태로 회복될


것입니다." 허무영은 묵봉을 허리춤에 꽂으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흠! 이제 남은 것은 금검령주인 허무영을 문초하는 일 뿐이군. 정말 이번 음모는 가공스러운 것이었소." 어이없게도 허무영이 그 자신을 문초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알고 보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허무영은 진일문이기 때문이었다. 장만생은 곧 능숙한 솜씨로 삼가의 고수들에게 환약을 복용시켰다. 그들을 다 돌아 보고 난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혹여 이 분 고인들께서 실수라도 하실까 봐 소생이 미리 손을 썼습니다. 특수한 독(毒)을 술에 탔지요." 진일문은 고소를 지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바로 장약사의 묘계였구려. 정말 훌륭했소. 나조차 일이 잘못된 줄 알았으니 말이오." 장만생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장만생은 평생에 걸쳐 약을 잘못 쓴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하하하......." 진일문은 비로소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도 그가 그렇게 웃어보는 것은 황룡사가보에 온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리라. 중추야의 만월이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48 장 이상한 우의(友誼) 시월의 하늘은 맑고 높다. 눈부신 창천에 한 조각 구름이 북을 향해 흐르고 있다. 이수(伊水) 강변의 한 언덕. 소년 목동이 소잔등에 올라탄 채 초적(草笛)을 불면서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몹시도 한가로운 풍경이다. 때는 미시(未時)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나 아직도 날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말없이 흐르는 이수, 그 물줄기는 하남의 기름진 옥토를 적시고 거대한 황하(黃河)로 합류하면서 그 생명을 다 한다. 예로부터 이수의 역할은 중원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강을 끼고 얼마나 많은 전쟁이 벌어졌었던가? 중원을 얻는 것은 곧 천하를 얻는 것이 된다. 이수연변의 옥토를 중심으로 중원이라는 어휘 자체가 생겨났다면......? 쏴아아아-도도히 흐르는 이수의 강물 위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삿갓을 쓴 채 물가에 나란히 앉아 계속 찌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 곳에서 낚시를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같은 시각에 반드시 함께 와서 낚싯대를 물에 담그곤 하는데, 기이한 것은 애써 잡은 고기를 가져 가지 않고 도로 물에 놓아준다는 점이었다. 인근의 주민들 치고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은 꽤 나이차가 있었다. 한 명은 삼십 정도로 보였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이십을 갓 넘은 듯 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그들에게 함부로 말을 걸지 못했다. 그것은 그 두 사람의 기도로 보건대 예삿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수 강변에 있는 이가장(李家莊)의 손님이었다.


이가장의 장주인 이원외는 주변에 널리 알려진데 반해 실체를 드러내지 않아 언제나 신비한 존재였다. 그러한 이원외가 극진히 모신다는 손님이 바로 이 두 청년이기도 했다. 어쨌든 한창 혈기방장한 나이에 한가하게, 그것도 벌써 두 달 여에 이르도록 하루종일 낚시질만 하고 있는 두 사람은 이래저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이때쯤이면 늘 그랬던 것처럼 아마도 두 청년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낚시도구를 챙기리라. 그러나 오늘따라 두 사람 중 누구도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특히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은 더 무심한 기색이었다. 찌는 물 속으로 숨은지 오래였으며 낚싯대 끝이 계속 끄덕이며 그를 부르고 있었다. 필시 고기가 걸려 있는 게 틀림 없건만 그는 낚싯대를 끌어올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옆의 백의청년은 그런 그에게 달리 말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자 고기가 제 풀에 바늘에서 떨어져 나갔는지 찌는 다시 떠올랐다. 아울러 낚싯대도 정상을 되찾았다. 백의청년은 그제서야 비로소 물었다. "허형,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흑의청년이 무감동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소?" 백의청년은 씨익 웃었다. "허형의 생각을 알면 내가 어찌 물어 보았겠소?" "그럼 내가 아무렇게나 꾸며 얘기해도 진형은 모르겠구려?" "후후...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오. 지금 내가 물은 것은 나름대로 느끼는 바가 있어서니까." "그렇다면 진형이 내 속을 들여다 보았단 말이오?" 백의청년, 즉 진일문은 삿갓을 약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석양빛에 그의 준수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입가에는 의미를 감춘 듯 신비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허무영. 그는 진일문과 이가장에 머물면서 이렇듯 낚시로 소일을 하고 있었다. 황룡사가보로부터 곧장 이 곳으로 끌려온(?) 그였다. 실상 허무영으로 말하자면 모든 의혹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늘상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 진일문 측에 막대한 고심을 안겨 주고 있기도 했다. 진일문은 사가보에 닥친 위난을 해결해 준 후로 그 배후 세력인 천마신궁에 대해 궁금한 점이 너무도 많았다. 그리하여 허무영을 추궁하고자 했으나 그동안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고문이라는 수단을 동원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허무영에게만은 절대로 통하지 않을 방법이었다. 삶과 죽음을 희롱하는 냉소주의자에게 어떤 고문인들 제대로 먹혀 들겠는가? 진일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장자(莊子)의 추수편(秋水篇)에 한 일화가 있소이다. 어쩐지 우리들의 대화가 그것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허무영은 입맛을 쩍 다셨다. "재미있겠군. 어디, 들려 주겠소?" 진일문은 빙긋 웃으며 얘기를 꺼냈다. "장자가 혜자(慧子)와 함께 호수에 있는 다리 위를 거닐고 있었소. 그 때 장자가 물을 내려 보면서 말했소. '피라미가 나와 조용히 노네. 저것이야말로 저 고기의 즐거움이네.' 그 말을 듣고 혜자가 말하기를, '자네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라고 했소." 그러자 의외로 허무영이 그의 말을 받았다.


"장자는 이렇게 대답을 했소. '그렇다면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은 또 아는가?' 라고." 이번에는 진일문이 뒤를 이었다. "혜자는 말했소. '본시 나는 자네를 모르네. 마찬가지로 자네도 물고기가 알지 못하네. 그러니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은 확실하네.' 후후후......." 허무영이 또 이어갔다. "장자가 받았소. '그러면 그 근본으로 올라가 봄세. 자네가 내게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고 물은 것은 이미 내가 그것을 안다고 여겨 물은 것이네. 나는 지금 이 호수의 다리 위에서 저 밑의 물고기와 일체가 되어 마음을 통해 그 즐거움을 알고 있는 것이네.' 라고 말이오." 두 사람의 문답은 물론 저 유명한 장자를 인용한 것이었다. 무릇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기(知己)를 얻는다는 것은 다시 없는 즐거움이다. 하지만 쌍방이 적대관계라면 문제는 다르다. 진일문과 허무영. "핫핫핫--!"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대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상대의 마음이 자신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을. 사실 그들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 쪽이 극기(克己)를 통해 완성으로 다가가는 정석적인 인간형이라면 다른 한 쪽은 그런 것에 가치를 두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허무과 권태로 일관하는 인간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결코 부인하지 못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끈질긴 호감이었다. 그것은 작금에 이르자 마치 운명처럼 그들 두 사람을 속박하고 있었다. 진일문. 그는 사가보에서 허무영을 제압할 당시 몇 군데 중수혈을 짚어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 놓았다. 그러나 허무영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인질로써가 아니라 그대로 친구를 대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자유를 허용했으며 요구하는 것이라면 다 들어주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다. 반면에 허무영은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유가 주어졌다 해서 그다지 돌아 다니지도 않았고, 그저 낚시질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때울 따름이었다. 진일문은 구주동맹의 맹주로써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었으나 와중에서도 그와 낚시를 하는 것만은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두 사람의 탐색전(探索戰)은 어느덧 마지막 장에 이르러 상대의 심중 깊숙한 곳에서 종내 자신의 것과 꼭 닮아 있는 감정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 결과로 허무영은 기어이 흔들림을 노출시키고 말았다. 도시 심각하게 여기는 것이라곤 없었던 그가 처음으로 안면에 진한 번민을 매달고 있었다. 실상 이런 변화는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가장에 머물렀던 두 달간 진즉부터 진일문에게 음울함을 목격 당하곤 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 질문을 받아 본 적은 없었다. 사위에 서서히 어둠이 깃들고 있었다. 진일문은 돌아가기 위해 도구를 챙겼다. 하지만 허무영은 여전히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이수의 수면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허무영이 말했다. "진형, 부탁이 있소." 진일문은 미소지었다. "무엇이오?" "내게 술을 사 주겠소?" 군옥원(群玉院).


개봉부의 남문에 있는 기원이다. 이 곳은 술값이 비쌀 뿐더러 기녀의 시중이라도 들게 하려면 엄청난 화대를 지불해야 했다. 웬만한 거부가 아니면 도시 찾아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 그런 곳이었다. 따라서 군옥원을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신분이 보장된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말이었다. 실제로 개봉 일대의 내노라하는 부호나 귀공자들이 주로 이 곳의 고객들이었다. "술!" 허무영의 주량은 애초부터 대단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마신 술의 양은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그는 벌써 독하기 그지없는 백로송엽주(白露松葉酒)를 다섯 항아리째 비워냈다. 진일문은 계속해서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녀들은 아예 질려 버린 듯 그를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그녀들은 허수아비가 된 채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청란, 청하라는 이름을 가진 그 두 명의 기녀는 군옥원에서도 일급에 속하는 명기들이었다. 미모와 재간이 뛰어나 그녀들을 부르려면 하룻밤에 은자 오백 냥이라는 거액을 투자해야 했다. 두 기녀는 이 손님들이 무엇 때문에 비싼 돈을 치르고 자신들을 불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술을 따르라고 시키지도 않았다. 술에 원수라도 진 듯 항아리째 들이붓는 자와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는 자가 바로 오늘의 주객들이었던 것이다. "술!" 백로송엽주는 일곱 항아리째 날라져 오고 있었다. 군옥원의 원주가 와서 인사(?)를 하고 갔다. 매상고가 올라가는 것은 둘째 치고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실 수 있는 인간이라면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위인인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진일문은 줄곧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도 술을 제법 마시는 편이었으나 지금은 꼭 한 항아리에서 그치고 있었다. 취하도록 퍼마실 기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가닥 연민이 깃든 눈으로 허무영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보기에 나쁘지는 않소. 그 술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당신의 공허감이 메워질 수만 있다면.......' 이윽고 열 항아리째의 술을 내보내며 호기심 많은 군옥원의 원주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세상에! 내 이 군옥원을 개원한지 이십 년이 넘었지만 저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손님은 처음이다.' 그는 아마도 그 손님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 "수울......." 허무영은 열 항아리째의 술을 뱃 속에 쏟아부은 후, 또 술을 청하다가 모로 쓰러지고 말았다. 배가 산처럼 불러 있어 몸이 기울자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옆으로 누워 버린 것이다. 진일문은 비로소 긴장에서 놓여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주머니를 만져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계산이 모자랄지도 모르겠군.' "맙소사! 이 분이 사람이에요?" 청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혀를 내둘렀다. 진일문은 씨익 웃더니 간단하게 답했다. "물론 사람이다. 또한 영웅이기도 하지." 그 날 밤, 그는 이가장에 돌아가지 않았다. 허무영이 만취해 뻗어 있으니 움직일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각각 방을 정하고 군옥원에서 외박(?)을 했다. 새벽녘이었다. 군옥원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에이그머니나!" "아이쿠! 어떤 놈이ㄴ?" 기녀를 낀 채 단잠을 이루던 손님들이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방에서 뛰쳐 나왔다. 개중에는 벌거숭이인


사내도 있었고, 또 어떤 기녀는 투실투실한 젖가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도 했다. 진일문도 이 소동에 놀라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러나 내용을 알게 되자 그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범인은 허무영이었다. 그가 각 방의 문을 벌컥벌컥 열어 제끼고는 안에 든 사람들을 향해 힘차게 방뇨를 해버린 것이었다. 이런 괴행은 실로 듣지도, 보지도 못했었다. 진일문은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쯧! 그토록 술을 마셔 대더니만.......' 그의 심정이 이러니 졸지에 변을 당한 손님들은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허무영은 그게 아니었다. "으하하하... 더러운 것들! 오줌 벼락이나 맞아라." 그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이리저리 도망치는 사람들을 쫓아가 아직도 오줌을 내갈기고 있었다. 이 때, 진일문은 볼 수 있었다. 허무영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그것은 좀체로 내비칠 수 없는 사나이의 눈물이자 불운한 영웅의 회한이 깃든 눈물이기도 했다. 허무영. 그는 미쳐 버린 듯 울다 웃기를 거듭하면서 지난 밤에 마셨던 백로송엽주를 오줌 줄기로 만들어 뿌려대고 있었다. "으흐... 으하하하... 으허헉......." 허무영의 발작은 방안에 돌아와서도 그치지 않았다. 그는 백치 같은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흘려 내고 있었다. 진일문은 역시 묵묵히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곁에서 청하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무서운지 몸을 움츠렸다. "저 분... 혹 병이라도 있으셨던 것 아니에요?" 진일문은 담담히 말했다. "아니,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 위한 진통일 뿐이다." 청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다시 태어나요?" 아마도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진일문은 스스로에게 고하는 기분으로 말을 이���다. "숨을 쉰다고 해서 다 사는 것은 아니다. 요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때에 따라 알에서 깨어나는 아픔도 겪어야 한다." 청하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바닥에서 뒹굴고 있던 허무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맞아! 흐흐흐... 나 같은 놈에게는 그런 아픔이 필요하지. 흐흐흐... 그러나 내가 뒤집어 쓰고 있는 이 놈의 알은 너무 단단하단 말이다. 흐흐흐......." 진일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형, 알이 그대로 알로써 머물러 있는 법은 없소. 왜냐하면 그 속에는 비상하려는 몸짓이 들어있기 때문이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기다리겠소. 당신이 스스로 나를 찾아 오시오." 진일문은 말을 마치자 미련없이 자리를 떴다. 그가 막 방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뒤에서 허무영이 그에게 물었다. "자네, 정말 나를 놓아 주는 건가?" 진일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꾸했다. "세상에 지기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는단 말이오?" 고개를 든 허무영의 얼굴이 몇 차례나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에서 기광이 번쩍 일었다.


"좀 더 확실하게 놓아줄 수는 없나?" 진일문은 크게 웃으며 걸어 나갔다. "허형의 금제는 풀어 드린지 이미 오래요. 하하하......." "우우--!" 허무영은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신음을 발했다. 이어 그는 운공을 해보더니 얼굴을 참담하게 일그러 뜨렸다. 아닌 게 아니라 금제는 완전히 풀려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에게 더욱 큰 고통을 안겨 주고 있었다. 그것은 일대 모험이자 도박이었다. 하지만 진일문은 자신의 판단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결국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종용할 수가 없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백 번 낫다. 그것이 또한 내가 할 도리이므로.' 물론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가 이대로 알 속에 도로 묻혀 버린다면 오히려 자신이 타격을 입게 된다. 사실 이가장에 머무르는 동안 허무영은 구주동맹에 관해 환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진일문은 그를 상대로 기밀 누설에 대한 걱정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이는 기질상의 문제로써 이 쪽에서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면 반대 쪽에서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다만 진일문이 우려하는 것은 그가 혹 중도에서 부화(孵化)를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진일문은 하루, 이틀, 아니 열흘이 지나도록 내내 같은 생각을 했다. '그는 내게로 온다! 반드시.' 무림은 겉으로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사대신가에서 벌어졌던 사건은 강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역시 천마신궁(天魔神宮)에 대한 것도 일체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벌어지던 일월맹과 삼성림의 난전도 가을로 접어들자 차츰 잦아드는 추세였다. 오히려 행동 반경이 눈에 띄는 곳은 구주동맹 쪽이었다. 칠대문파와 개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주동맹은 맹주인 구주신협(九州神俠) 진일문의 탁월한 인품과 영도 아래 꾸준히 안정된 기반을 닦아가고 있었다. 강호는 실로 조용했다. 오죽하면 세인들이 수십 년 이래 이렇게 조용한 적이 없었노라고 부르짖을 정도였다. 사소한 시비에도 대뜸 칼부림부터 앞세우는 무림인들의 생리로 비추어 볼 때 이런 평화는 차라리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다. 물론 그 이면에는 구주동맹의 힘이 크게 작용을 했다. 어떤 류의 분쟁이 일건 그들이 중재에 나서면 말끔히 해결되곤 했다. 그것은 흑, 백도에 걸쳐 마찬가지였다. 여하한 사태라도 대부분 미연에 방지되었으므로 크게 비화되는 법이 없었다. 사위는 손가락을 뻗어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이 곳은 황산(黃山) 무무곡(霧霧谷). 평소 유난히 안개가 짙어 그런 이름이 붙어 있는 곳이다. 대낮에도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는 이 무무곡은 밤이 되자 달빛조차 허용하지 않는 흑암의 대지로 화했다. 스스스슥--! 마치 귀영(鬼影)인양 무무곡의 곳곳에서 괴인영이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었다. 무려 수십 명이 떼지어 이동하고 있었는데, 무엇인가를 잔뜩 경계하는 듯 그들의 행동은 극히 은밀하고 조심스러웠다.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것은 병기였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실상 무무곡은 인적이 드문 황지였다. 일 년 가야 이 곳을 찾는 사람이란 고작 한, 두 사람에 불과할 정도였다. 이따금씩 사냥꾼이 짐승을 잡기 위해 들어서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들도 밤낮이 구별 없는 짙은 안개 때문에 대개는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 나가기 일쑤였다. 스스-- 스스슥--! 암흑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차로 불어났다. 그러다 문득 개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이렇게 삭막한 곳에서 집회를 연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받았다. "우리야 알 수 있나? 그저 윗쪽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쩝! 오늘밤은 심상치가 않단 말이야. 오면서 일월맹 놈들을 보지 않았나? 그 놈들이 얼씬거리는 것은 아무래도 수상하다구." 같은 시각. 비슷한 대화는 다른 곳에서도 들려 오고 있었다. "흐흐... 다섯 개 분타의 인원을 모두 집결시키다니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군." "요즘 들어 삼성림 놈들이 뜸하다 했더니 별일도 다 있군. 불원간 큰 충돌이 있을 조짐이던데, 혹 그 일 때문이 아닐까?" "그야 알 수 없지. 하지만 이 곳은 정말 음침하이. 이런 데서 싸워야 한다면 사양하고 싶은 걸?" "그렇지 않아도 양타주께서 미리 말씀이 계셨네. 부근에서 삼성림의 회천궁(廻天宮) 놈들이 출몰하니 주의하라고 말일세." 정녕 기이한 일이었다. 한밤중, 무무곡에 몰려 든 인영들은 각기 다른 집단에 소속된 자들로 하나같이 왜 이 곳에 모이게 되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무무곡은 넓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가장 깊숙한 쪽에는 또 다른 부류의 인물들이 줄곧 침묵을 유지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략 이백여 명쯤 되었는데, 모두 소매에 색색의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 표식은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것으로써 바로 삼성림의 구대신궁 가운데 회천궁 인물들이 신분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었다. 결국 무무곡에는 적어도 삼개 세력이 동시에 운집해 있다는 말이 되었다. 그 중에는 삼성림을 비롯해 일월맹, 그리고 신비에 가리워진 천의회의 고수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달이 떠올랐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달빛은 무무곡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짙은 안개가 모두 차단해 버리기 때문이었다. 불현듯 어딘가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으악--!" 그것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했을 뿐 아니라 섬뜩하고 불길한 예감을 불러 일으켰다. 곡내에서 은잠하고 있던 인물들은 저마다 가슴이 써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각처에서 따로 명을 받고 이 곳으로 왔으며 최고의 수뇌들은 아직 당도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그들은 명령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이로 인해 더 없이 불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크아악--!" 또 한 차례의 비명이 들려 왔다. 그것은 실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되자 인영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 둘 병기를 뽑아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위기에 대한 본능적인 반사 작용이었다. 휘이잉--!


느닷없이 일진광풍이 불었다. 인영들은 그것을 두고 단지 계곡을 지나는 바람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것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광풍이 휩쓰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 패대기쳐지듯 사, 오인이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진 것이었다. "으아악--!" 이 작은 소요는 한 곳에 몰려 있던 삼십여 명의 인물들을 삽시에 혼란으로 이끌었다. 대체 누가, 어디서 기습을 감행해 왔단 말인가? 급기야 그들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서로에게서 가급적 멀리 떨어지며 경계를 취했다. 하지만 사신(死神)은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으아악! 캐액--!" 차창창! 차아앙! 비명이 연이어 터지며 요란한 쇳소리가 일어났다. 공격은 이내 그 반경을 넓혔고, 인영들은 일제히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마구 병기를 휘둘러 댔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실로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이렇듯 시야가 가리워진 곳에서 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가히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피아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헉! 네가......." "으악!" 적이라 여기고 찌른 자는 알고 보니 동료였다. 또한 자신도 종내에는 다른 동료의 칼에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사태는 바야흐로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일단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스스로 죽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가 누구이건 이 쪽에서 먼저 죽여야 했던 것이다. 마침내 무무곡은 죽음의 계곡으로 화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생존을 위해 제각기 칼춤을 추는 군상(群像)들....... 삼성림은 삼성림대로, 또한 일월맹은 일월맹대로, 물론 신비지파인 천의회도 예외 없었다. 삼개파의 인물들은 무무곡의 곳곳에서 정녕 어이없이 피를 뿌리고 있었다. 아비규환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뿐이 아니었다. "흐흐흐... 으핫핫... 죽어라! 그렇게 모두 죽어라--!" 문득 한 가닥 광소성이 중인들의 고막을 때렸다. 광인(狂人). 그 자는 쾌속절륜한 신법으로 이리 저리 쏘아가면서 닥치는 대로 인명을 살상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의 무공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스쳐가는 곳이면 어김없이 비명이 들렸으며 십여 명 이상의 인영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그 자는 마치 피에 굶주린 한 마리의 야수(野獸)와도 같았다. 슈욱! 슈슈슛--! 금속성에 가까운 예리한 파공성이 연이어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무기는 검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도 아니었다. "끄으, 이럴 수가......." 그 괴병에 의해 정확히 목이 꿰뚫려 죽어가는 자만이 알고 있었다. 그것이 다만 끝이 뾰족한 막대기, 즉 하나의 묵봉에 불과했다는 것을. "으핫핫핫--!" 상상을 절하는 무무곡의 이변(異變)은 바로 미친 듯이 웃어제끼는 그 자에 의해 획책된 것이었다.


눈이 내린다. 천지를 하얗게 뒤덮는 눈은 한 해가 다가도록 계속 내렸다. 수십 년 만에 처음 있은 폭설이었다. 그로 인해 산간 마을은 길이 끊어진지 오래였으며, 대시진조차도 교통이 두절되었다. 무릇 눈은 아름다운 것이자 순결의 상징으로도 대변된다. 하지만 천하만물이 다 그러하듯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지나치게 많이 내리면 오히려 인세에 악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눈은 대체 언제 그칠지 알 수가 없었다. 진일문은 그렇게 내리 펑펑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지루한 겨울이로군." "언제고 봄이 올 거예요." 등뒤에서 한 가닥 옥음이 그의 말을 받고 있었다.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음성이었다. 그러나 진일문은 돌아보지도 않고 음울하게 대꾸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오. 대지의 깊은 곳에서 새순이 움틀 때를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다만 아쉽게도 아직은 폭설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구려. 언제쯤 진정한 봄을 맞이하게 될지......." 그의 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자 옥음의 주인은 가볍게 탄식을 흘렸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은 굳이 할 필요도 없겠군요. 본인이 더 잘 알고 계시니......." 진일문은 손을 들어 설매(雪梅)의 가지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후후... 도리를 알면 무엇하겠소? 도고일척(刀高一尺)이면 마고일장(魔高一將)이니, 피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뒤 봄이 온들......." 그의 침중한 읊조림은 도중에서 끊기고 말았다. 문득 어깨에 부드러운 느낌이 깃든 동체가 기대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와 마음을 나누고자 하는 이 여인은 바로 당금 개방의 방주인 주서혜였다. 구주동맹의 부맹주라는 지위를 갖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가장 크게 조력(助力)을 해온 그녀였다. 사실상 개방의 조직은 그동안 구주동맹의 귀(耳)이자 수족(手足)이 되어 왔다. 그것은 단연 주서혜의 공과였다. 때문에 진일문은 그녀에게 늘상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없었더라면 구주동맹이라는 방대한 연맹체를 그 혼자서 이끌어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주서혜의 헌신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며 음으로 양으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바로 지금과 같이....... 사가보로부터 돌아왔을 때, 진일문이 가장 의식한 것은 역시 주서혜였다. 도시 그녀를 볼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의 옆에는 당시 죽자고 따라붙은 사영화가 매달려 있었다. 주서혜로 말하자면 진일문이 대의명분을 위해 끝끝내 거부했던 여인이다. 피차에 감정을 숨기고 자제하는 것으로써 지독하리만큼 예의를 다 해 왔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다른 여인에게도 필히 그래야만 했다. 적어도 주서혜가 보는 앞에서는. 그런데 본의는 아니었다고 하나 진일문은 사영화를 취했고, 주서혜에게는 죄인을 자처하게 되었다. 이 복잡한 감정의 벽을 허물어버린 것도 역시 주서혜였다. 개방이라는 거대 단체를 훌륭하게 다스려온 여장부답게 그녀는 진일문과 사영화를 함께 수용해 버린 것이었다. 미안해하는 마음도 애정의 한 줄기이다. 진일문은 다가오는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고맙소, 주방주. 당신의 위로가 크게 도움이 되는구려." 주서혜는 물기가 흐르는 듯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펑펑 내리는 눈은 그녀의 머리 위에도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진일문이 한 말이란 겨우 이런 것이었다. "날씨가 좋지 않소."


이제 습관으로 굳어져 버린 것일까? 그는 주서혜를 상대로는 도시 애틋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쓸어 주었다. 주서혜의 맑은 눈에 한 가닥 서글픈 기색이 떠올랐다. "정말 당신은......." 그녀의 고개가 떨구어지는 것을 보며 진일문은 눈길을 돌렸다. 그녀를 더 이상 정면으로 대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릴없이 허공을 맴돌던 그의 눈은 이내 한 곳에서 정지 되고 말았다. 건너 편 정자의 기둥에 기대 서 있는 또 다른 한 여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사영화였다. 따뜻한 차라도 가져다 주려고 했었던지 그녀는 손에 자그마한 소반을 받쳐들고 있었다. 그녀는 진일문과 눈길이 마주치자 얼른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진일문은 실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으음......." 그의 입에서 얕은 신음이 새어나올 때였다. 기둥 뒤에 숨었던 사영화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더니 그를 향해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알아요, 당신의 마음을. 하지만 주(朱)언니를 슬프게 하면 안돼요.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사영화는 손을 흔들어 보인 뒤 사라져 버렸다. 진일문은 내심 절로 탄식이 일었다. '아! 내가 무엇이건대 이토록 많은 빚을 지는가?' 주서혜는 방금 전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떼더니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공연히 맹주께 부담을 드린 것 같군요. 애초의 의도는 이것이 아니었는데 그만......." 배시시 웃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언뜻 처연함이 묻어 나왔다. 그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인간도 아니리라. "혜매(慧妹)." "네......?" 주서혜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일문의 입에서 자발적으로 나올 수 있는 호칭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그녀의 눈은 곧 기쁨으로 출렁였다. "혹 실수하신 것은 아니겠죠? 부탁이에요, 다시 한 번만 더 그렇게 불러 주시겠어요?" 마침내 그렇게도 오래 버텨오던 진일문의 진심이 이성의 문을 뚫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후후... 혜매, 나는 아마도 당신을 무척 사랑하는 것 같소." "아아!" 눈발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두 남녀는 오히려 서로의 체온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깊숙이 포옹하고 있는 그들에게 눈도 더 이상 그 잔인성을 발휘하지 못한 채 축복으로 의미를 바꾸어 버렸다. 입술과 입술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며 서로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입맞춤은 뜨겁고도 길게 이어졌다. 곁에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 있는 매화나무와 더불어 그 광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아니, 그들은 그대로 눈밭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설중매(雪中梅)와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차(茶)를 마시며 진일문이 물었다. "무무곡에서의 혈사(血事) 이후로 강호정세는 어떻소?" 그의 앞에는 기사(機邪) 백불범이 서 있었다. 환우오사 역시도 주서혜처럼 언제나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기사는 주로 각처에서 들어오는 소식과 정보를 정리하여 진일문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혼전(混戰)입니다. 서로 간에 추호도 양보가 없습니다." "삼성림이나 일월맹은 그렇다 치고, 가장 힘이 미약한 천의회까지도 그렇단 말이오?"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무무곡에서의 혈전은 배후에서 누군가 조종한 것입니다. 하지만 천의회도 똑같이 당했으니....... 그들은 인원이나 세력에 있어서는 밀리는 편이지만 정보에서만은 가장 빨라 어느 정도 대세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진일문은 뇌리에 한 인물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다시 물었다. "백형께선 지금 무무곡 사건에 배후가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의도가 무엇인지 혹 알고 있소?" "뻔하지 않습니까? 그들 삼개 세력이 서로 부딪쳐 자멸하기를 바라는 자의 소행이겠지요. 어쨌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삼개 세력의 내막을 훤히 아는 자가 아니라면 그렇게 완벽한 이간책을 펴기는 불가능하지요." "그건 맞소."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생각해 둔 인물이 있었다. 아직 확신을 가지지 못할 따름이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당금 무림에서 오직 그, 한 사람밖에 없다. 그가 아니면 대체 누가 그들 삼 개 세력을 동시에 움직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진일문이 떠올린 인물이란 다름 아닌 허무영이었다. 허무영은 본래 천의회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천마신궁에서는 금검령주라는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으니, 일월맹이라 해서 연계가 없으란 법은 없었다. 과거 천년마등이 출현하고 흑수선이 죽음을 당했던 그 때로 되돌아가 보면 이에 밑받침이 되는 그럴 듯한 답이 나온다. 당시 허무영은 증거인멸을 위해 그 자리에서 천년마등을 감쪽같이 치워 버렸다. 물론 그 자는 허무영으로 위장한 다른 인물이긴 했지만 진일문은 내내 의혹을 떨치지 못했었다. 그것은 변장술은 그렇다 치고 허무영과 그렇듯 똑같은 음성과 똑같은 몸짓을 구사해 내려면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허무영. 그는 정녕 신비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기이한 운명을 지닌 인물인지도 몰랐다. 그의 성격은 일반인의 기준으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예측을 불허하는 다중성(多重性)에는 진일문조차도 종종 당혹을 금치 못하곤 했으니까. 이 때문일까? 무림에서 그의 활동은 온통 변화난측이었다. 한 모금 남은 차는 벌써 차게 식어 있었다. 진일문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눈은 아직도 그치지 않은 상태였다. 마당에 쌓인 눈은 계속 그 두께를 더해 가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둔 채 기사에게 지시했다. "다른 소식이 들려 오면 즉시 알려 주시오." "알겠소이다, 맹주." 기사는 그의 기색이 어두워진 것을 눈치 채고는 허리를 숙여 보인 후, 재빨리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진일문은 우울한 심정이 되어 생각을 이어갔다. '대체 그가 무슨 목적으로 삼 개 세력을 이간시켜 피를 흘리게 했단 말인가?' 그는 거의 배신감마저 일 지경이었다. 그로서는 정(正)이든, 사(邪)든 피를 보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는 상대는 자신과 끝내 정반대의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쯤이면 일월맹이나 삼성림도 그렇지만 천의회 역시 그러한 상황을 다 알아 차렸을 것이다. 자신들이 누군가의 농간에 휘말려 쓸데없이 힘을 낭비했다는 것을 말이다.' 진일문은 입술을 질겅 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도 세력의 약화를 불사하면서까지 끊임없는 분전을 벌이고 있다. 이는 결국 누군가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또한 그의 짓이 틀림없다.' 그는 의자에 기대 앉으며 중얼거렸다. "도시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을까?" 진일문의 추리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혹 천마신궁의 금검령주로서 명령을 받고 한 일일까?" 그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정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일이 단순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허형에게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사연이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그들 삼 개 세력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는 갑자기 머릿 속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아! 그렇다. 삼 개 세력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동일한 맥(脈)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모두 마교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파생되지 않았는가?" 진일문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단순한 사실이었으나 그로 인해 허무영이라는 괴이한 인물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허무영은 혹 마교에 대해 불공대천의 원한이라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때문에 마교와 관련된 집단을 전부 무너뜨리려는 것은 아닌지?' 그는 추리는 거기에서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했다. 사실 중원에서 마교에 대해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다. 지난날의 대전(大戰)에서 너무도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으므로 직, 간접적으로 모두 원한을 심어 두고 있었다. 따라서 허무영이 그 중의 한 사람이라면 그의 내력을 파헤치기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망망대해 속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진일문은 가볍게 탄식을 불어냈다. "결과적으로 그 스스로가 말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겠군." 그의 심정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현 무림의 상황은 어느 모로 보나 구주동맹에 유리했다. 삼 개 거대세력은 이미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현저하게 세력의 약화를 보이고 있었고, 구주동맹의 입장에서는 그 사이에서 어부지리(魚夫之利)를 얻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진일문은 낙관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보다 더 엄청난 세력이 아직도 그 실체조차 드러내지 않은 채 이면에서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마신궁, 그들이야말로 무서운 단체다. 천년 전의 파황교를 이어 받았으니 곧 악마의 후예들이 아닌가? 그렇지만 그들은 정작 마세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만일 그들이 준동한다면 강호에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가공할 혈풍이 일어날 것이다.' 진일문은 바로 그 점 때문에 구주동맹을 단속하고 있었다. 물론 구주동맹의 내부에서도 반발이 없지는 않았다. 삼 개 세력이 약화되어 있는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부르짖으며 이 시기를 틈타 일월맹을 타파하고 무림의 정통성을 내세우자며 호전적인 발언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진일문은 고개를 내저었고, 구주동맹이 삼 개 세력의 싸움에 휩쓸리지 않도록 엄중하게 경계해 왔다. 그는 주서혜와 소림의 원광대사등 몇몇 핵심 인물들에게만 천마신궁의 존재에 대해 운을 떼 놓았다. 때문에 구주동맹의 인물들 중에는 그를 일컬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며 불만을 토로하는 자도 꽤 있었다.


반면에 진일문이 천마신궁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그들에 관한 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었다. 병법에도 있듯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필승이거늘, 상대쪽에 대해 모르고서는 승산을 따질 수조차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진일문은 상대방이 이 쪽에 대해 손바닥 들여다보듯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가보의 총관이었던 황보인의 말에 의하면 천마신궁은 천하 각파에 수많은 세간을 심어 놓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구주동맹에도 그들의 세간이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진일문은 그 당시 황보인조차도 천마신궁에 대해 아는 것이 극히 한정적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황보인도 실은 지령을 받아 행동하고 있었을 뿐 신궁의 위치나 궁주의 정체, 조직에 관한 사항 등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진일문은 천마신궁을 놓고 고심할 때마다 허무영을 떠올렸으며 오직 그만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허무영은 실종되었다. 유일하게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이는 그가 진일문과는 너무도 먼 거리에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진일문은 다시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그날밤. 구주동맹의 공사(公事)는 늦도록 진일문을 놓아주지 않았다. 긴긴 겨울밤, 늦도록 잠자리에 들지 못하다 보면 시장기가 돌게 마련이다. 이런 때를 위해 야참이라는 것이 있다. 이가장의 주방은 예전에는 사, 오명의 여인들과 이가장의 식솔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곳이 구주동맹의 임시 거점이 된 이후로는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들의 수효만도 이, 삼십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오늘밤은 별식이로군.' 진일문은 소반에 날라온 야참을 보자 절로 군침이 돌았다. 그것은 사슴의 앞가슴 부위 연한 살을 도려낸 뒤 일곱 가지의 향료를 뿌려 구워 낸 고급요리였다. 그는 한 때 불운한 생을 살아온 만큼 검소한 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들어 주방의 요리가 일급 객점 못지 않게 변한 것을 탓하지는 않았다. 그 점에 있어서는 주서혜의 주장이 주효했다. - 좋은 음식을 드는 것이 꼭 사치라고 할 수는 없어요. 당신도 그렇지만 많은 일은 해내야 하는 사람들은 필히 양질의 식사를 해야 해요. 그녀는 늘상 진일문을 위해서라면 사소한 부분까지도 일일이 개입하여 신경을 쓰고자 했고, 그는 그녀의 세심한 배려를 피부로 느끼며 사슴고기를 맛있게 들었다. 그런데 그가 막 다섯 개째의 고기조각을 씹었을 때였다. '흐음?' 무엇인가 생각지도 않은 것이 이빨에 씹혀 그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언뜻 느끼기에도 분명 고기와는 질감이 틀렸다. 진일문은 얼른 입안에 들어 있던 예의 이물질을 뱉아냈다. '아! 이것은.......' 고기 속에 돌돌 말려 감추어져 있는 것은 둥글게 말려진 하나의 양피지였다. 그는 지체없이 그것을 풀어 보았다. 양피지에는 글씨가 씌여져 있었다. 눈에 익은 글씨체, 활달하면서도 독특한 그 서체를 대하자 진일문은 내심 부르짖었다.


'허무영!' 그 양피지는 바로 허무영이 그에게로 보낸 서신이었다. 허무영은 본시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당대(唐代) 백낙천(白樂天)의 서체를 좋아한 나머지 주로 그 영향을 받고 있었다. 진일문은 반가움과 동시에 일말의 두려움을 느꼈다. 어떤 경로를 거쳐 주방에 잠입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음식 속에 통신문을 넣을 수 있다면 독을 푸는 일은 문제도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허무영이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이가장의 전 고수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독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막상 서신의 내용을 대하자 섬뜩했던 기분은 일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진형(眞兄), 우선 형의 뜨거운 우의를 모른 체 하고 지금까지도 계속 똑같은 삶의 방식으로 머물러 있는 이 허모(虛某)를 욕해 주시오. 인생은 꼭 뜻대로 살아지는 것만은 아니더이다. 운명의 깊은 도랑이란 한 번 빠지면 벗어 나기가 좀체로 쉽지 않소. 이 허모에게 있어 광명천지라는 것은 단지 바라보이는 세계일 뿐, 그 곳에서 숱한 영웅호걸들과 진심을 나누며 마음껏 기량을 발휘하는 진형을 보면 그저 부러울 따름이오. 물론 언젠가는 다시 진형을 졸라 열 항 아리의 백로송엽주를 사 내라고 하겠지만 아직은 그 때가 아닌 것 같소. 일단은 진형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중략(中略)...... 진형이 천마신궁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오. 하지만 이 허모의 입장에서는 답해 드릴 수가 없소이다. 그 대신 형의 우의에 보답하는 의미로 한 가지 길을 일러 드리겠소. 그 후의 일은 진형의 총명함과 기지, ���리고 운에 맡기는 바요.> 여기까지 읽은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불어냈다. '허형,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은 되지 못하고 고뇌만 안겨 주고 말았구려. 내가 형으로 인해 그러하듯 형 또한.......' 서신의 말미에는 이런 글이 씌여져 있었다. <속히 북경(北京)으로 가 보시오.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의 도독에게는 한 명의 여식이 있은즉, 그녀를 만나시오. 그녀의 이름은 반희빈(盤希賓).......> 서명이나 낙인 같은 것은 없었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회의하는 허무영의 기질상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반면에 진일문은 서신을 다 읽고 나자 심중에서 여러 가지 의문들이 구름처럼 피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군도독의 딸? 그녀를 만나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과연 그녀에게서 무엇을 얻으라는 것인지......?' 오군도독부라면 명조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병부(兵部)를 뜻한다. 그리고 도독이란 명실공히 그 곳의 제일인자로써 누구든 아무 때고 접견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더구나 허무영이 만나라고 지시한 것은 도독이 아니라 규중심처에 꼭꼭 틀어 박혀 있을 그의 딸이다. 진일문은 난감하기 그지없었으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적어도 허무영이 그 글을 보낸 데에는 나름대로 깊은 뜻이 있으리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반희빈이라 했던가?' 그는 어느새 허무영의 말에 따르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이가장에는 때아닌 소동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구주동맹의 맹주인 진일문이 먹던 음식에서 극독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의 내공이 심후해 재빨리 독을 몰아냈으므로 별 탈은 없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이가장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주방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이 일제히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환사(幻邪) 만생에게 불려가 출신지에서부터 이 곳에 온 내력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고해야 했다.


그러나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부맹부인 주서혜는 심히 흥분한 나머지 삼십여 명의 요리사들은 전부 해고시켜 버렸다. 결국 이 일단의 사건은 구주동맹의 인물들에게 크나 큰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보이지 않는 마수(魔手)가 한창 올라가던 그들의 기세를 주춤하게 만든 것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길고 지리한 겨울을 매우 은연자중한 가운데 보내게 되었다. 심지어 젊은 맹주의 온건책도 더 이상은 불만의 요인이 되지 못했다. 폭설은 연이어 보름이나 계속 되었다. 그리고 눈이 그치자마자 진일문은 곧바로 이가장을 나섰다. 그에게 어디로, 무엇 때문에 떠나느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호의 동정의 살피기 위한 그의 행차는 이미 전부터 예정된 사항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아쉬워하는 두 여인이 있었다. 한 명은 애원하다시피 이 곳까지 따라와서는 줄곧 그의 시중을 들어주었던 사영화였으며, 또 한 명은 주서혜였다. 지금 진일문이 입고 있는 백삼은 사영화가 며칠 밤을 새워 정성껏 지은 것이었다. 전낭(錢囊)과 그밖의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도 그녀가 모두 마련해 주었다. 반면에 주서혜는 그에게 개방의 어느 분타라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신타령부(神舵令符)를 반강제로 떠맡겼다. 이는 곧 개방의 전권(全權)을 내어준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진일문. 그는 떠나고 있었으나 결코 혼자서 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여인의 지극한 애정이 그의 양어깨에 날개를 달아 주었으므로. 그것에 대한 보답이란 곧 할 일을 다 하는 것이리라. 그는 그런 심정으로 개봉을 벗어나 황하를 건너고 있었다. 49 장 북경제일(北京第一)의 미녀(美女) 일반적으로 여인이란 대개 여인답고 연약하다. 대개 그래야만 남자의 보호본능을 자극시켜 사랑을 얻는다. 여인이 지나치게 거칠고 굳건하다면 사내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여인이 있다.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용모에다 유순(柔順)한 마음씨까지 지니고 있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추한 데다가 성격마저 비뚤어져 있어 타인들로 하여금 고개를 돌리게 하는 그런 여인도 있다. 어쨌거나 온갖 부류에 속해 있는 여인들, 개중에는 일찌감치 노류장화(路柳墻花)가 된 여인이 있는가 하면 부호나 고관의 애첩이 되어 평생 그늘 속에 묻혀 사는 여인도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지극히 불행한 예다. 그 반면에 세상의 축복이란 축복은 한 몸에 다 받은 듯한 여인이 있다. 신이 그녀만을 편애(偏愛)한 것일까? 반희빈(盤希賓). 그녀는 정말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갖춘 여인이다. 미(美)와 가문(家門), 게다가 재능(才能)과 지혜(智慧)까지도 겸비하고 있어 도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오군도독(五軍都督) 반무독(盤武獨). 소위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권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런 자를 부친으로 둔 반희빈은 태어났을 때부터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와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려왔다. 뿐만 아니라 북경의 제일미녀라는 명예가 붙어 있으며 금(琴), 기(碁), 서(書), 화(畵)는 물론 다방면에 눈부신 재능을 지니고 있어 하늘 아래 가장 완벽한 여인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과연 이로 인해 본인이 만족해 하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행복이란 결국 자기만족에서 오는 것이지, 가지고 있는 조건만으로는 잴 수가 없으니까. "또 사냥을 가시려고요?" 시비 아앵(阿櫻)은 발을 굴렀다.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도독부의 천금소저(千金小姐)가 사냥갈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희빈은 화려한 궁장을 벗어 던져 버렸다. 대신 그녀가 걸치고 있는 것은 간단한 흑의경장이었다. 소매가 좁고 몸에 착 달라붙어 활동하기 편한 단삼과 바지 차림이다. 만일 반희빈의 이런 모습을 그녀의 모친이 안다면 당장 날벼락이 떨어질 일이었다. 실제로 아앵은 지난번 똑같은 일로 마님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반희빈을 만류했다. "아가씨, 제발....... 마님이 아시면 어쩌시려고요?" 의장을 갖춘 반희빈은 빙긋 웃으며 돌아섰다. 궁장을 입었을 때와는 전혀 상이해 보이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차림을 해도 그녀의 타고난 아름다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세필로 그려 놓은 듯한 아미(我眉)와 날씬하게 뻗어 내린 콧날, 게다가 도톰하게 맞물린 입술은 짙붉은 색을 띄고 있어 그녀가 뜨거운 정열의 소유자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흑요석처럼 반짝이고 있는 눈은 무엇이든 다빨아들일 것 같은 강렬한 흡인력을 발산해 내고 있었다. 그녀의 키는 여인치고는 꽤 큰 편이었다. 그런데다가 흑의경장을 입고 있자 그녀의 모습에서는 야성미(野性美)라는, 또 다른 매력이 전달되고 있었다. "호호... 이제야 살 것 같다. 아앵, 너만 입을 다물면 대체 누가 알겠니? 그동안 한 달이 가깝도록 방안에 갇혀 수( )만 놓고 있었잖아? 난 갑갑해서 죽는 줄 알았어." "아가씨......!" 아앵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반희빈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불쌍해 보일 정도로 굳어 버렸다. "글쎄, 너만 아무 소리 안하면 된다니까. 호호호......." "아가씨, 사냥같은 건 원래 거친 사내들이나 하는 비천하고 야만적인......." 아앵은 말하다 말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표현이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정작 반희빈은 화를 내기는 커녕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홋! 아앵, 네 말이 맞아. 사냥은 비천하고 야만적이지. 그런데 나는 말이다, 고귀한 척 얌전을 빼거나 방안에 앉아 뭉기적거리며 재미도 없는 수를 놓는 것보다는 그 쪽이 훨씬 좋단다.아! 시원스럽게 야산(野山)을 달리며 활을 쏘는 그 기분이란......." "아, 아가씨께선 어찌 그런 말씀을......!" "호호홋! 어쩌겠니? 원래 그게 나인 걸. 호호호......." 반희빈은 아앵의 창백하게 변한 얼굴을 바라보며 연신 웃어 제꼈다. 아울러 그녀는 벽장 속으로부터 깊이 감추어 놓았던 활과 전통(箭筒), 장검 등을 꺼내 부지런히 몸에 착용했다. 이윽고 준비를 다 마친 그녀는 서슴없이 밖으로 향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누가 이런 그녀의 이런 말투와 행동을 보고 도독부의 천금소저라 여기겠는가? 묘봉산(妙峯山). 굽이굽이 이어지는 계곡이 더 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그 사이로 흐르는 맑고 차가운 계류는 가히 장관을 이루었고, 이로 인해 이 곳은 일찍부터 북경의 명소로 손꼽혀 왔다. 대찰명사(大刹名寺)가 많아 평소에 북경의 관리들이나 귀공자들이 마나님과 더불어 자주 오르내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최근 들어 폭설이 길을 끊어 놓아 누구도 오를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사실 묘봉산은 산세가 수려한 반면 무척 험준했다. 끝을 알 수 없는 까마득한 계곡과 절벽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으며, 때로는 무서운 맹수가 출몰하기도 했다. 휙--! 묘봉산 기슭을 빠르게 날아 올라가는 것이 있었다. 흡사 한 줄기 바람을 연상시키는 그것은 전신이 피처럼 붉은 말(馬)이었다.


가파른 길을 그처럼 빨리 달릴 수 있는 말은 흔치 않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그 말은 희대의 명마임에 틀림없었다. 마상에는 흑의를 입은 한 인물이 타고 있었다. 반희빈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오군도독부를 빠져 나와 홀가분하게 사냥을 즐기고자 하는 것이었다. 어느 새 그녀는 궁장으로 틀어 올렸던 머리도 길게 풀어 내려 검은 끈 하나로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자세히 보기 전에는 그녀가 여인이라는 것조차도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호호호! 홍아, 우리 한 번 신나게 달려 보자." 히히히힝--! 반희빈의 활기 찬 웃음 소리, 그리고 주인의 기분을 아는 듯한 말울음 소리가 허공에서 한 차례 진하게 어우러졌다. 동시에 홍아라는 말은 눈부신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추려! 저 말은 분명 추려다." 한 사내. 행색으로 미루어 그가 사냥꾼이라는 것은 한 눈에도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반희빈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턱밑에 아무렇게나 까칠하게 자라 있는 수염을 제외하고는 제법 영준한 청년이다. 서늘한 빛을 발하는 그의 눈에는 어느 덧 감개무량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정녕 의외다. 이 곳에서 추려를 다시 만나다니......." 그는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매달았다. "반희빈, 매우 특이한 여인이다. 모든 면에서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고 있구나." 청년은 반희빈이 타고 있는 말을 비롯하여 그녀 자체에 대해서도 꽤나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기오한 빛을 뿜어냈다. "그런 여인에게 근접하는 방법이란 한 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상식선을 벗어나서 행동하는 것 뿐이다." 청년은 가볍게 어깨를 흔들었다. 스슷--! 그의 신형은 흡사 행운유수처럼 눈깜짝할 사이에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정말이지, 분통이 터져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것도 한 두번이라면 모를까 벌써 몇 번째인가? 활을 당겼으되 평소와는 달리 실패만을 거듭하고 있으니 말이다. 반희빈은 호흡을 조절하며 십여장 밖에 서 있는 한 마리의 노루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이번에야 설마.......' 핑--! 화살 한 대가 허공을 가르며 쾌속하게 날아갔다. 그러자 명중이 되었는지 노루는 펄쩍 뛰어 올랐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아! 드디어 성공이군.' 반희빈은 희열에 싸인 채 말을 몰았다. 그녀의 활솜씨라면 이미 정평이 나 있는 터였다. 능히 백보 밖에서도 솔방울을 쏘아서 맞출 수 있는 수준이었다. 과연 죽은 노루의 목에는 붉은 깃털이 달린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것은 물론 반희빈이 쏘았던 화살이었다. 반희빈은 미소를 떠올리며 말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화살을 뽑아 내기 위해 노루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그 때였다.


"내 노루에 손대지 마시오!" 무뚝뚝한 음성이 그녀의 동작을 멈추게 했다. 바위 뒤에서 한 청년이 불쑥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걸치고 있어서인지 야만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다. 반희빈은 대뜸 눈썹을 곤두세웠다. "이것이 어찌 당신 것이오? 여기에 꽂혀 있는 화살은......." 그것은 영락없는 남자의 말투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청년이 노루에게로 다가서더니 허리춤에서 박도를 꺼내 세차게 내리쳤던 것이다. 퍽! 미처 말릴 겨를도 없었다. 반희빈은 아연실색했다. "지금 대체 무슨 짓을......?" 노루의 목은 여지없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청년은 잘려진 단면에서 무엇인가를 집어내 반희빈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이래도 우길 셈이오?" "아!" 반희빈은 그만 입을 딱 벌린 채 할 말을 잊었다. 청년이 보여준 것은 별 모양의 자그마한 금속조각, 즉 비표(飛票)였다. 청년은 험상ㄱ어 보이는 얼굴에 한 가닥 비웃음을 담았다. "보다시피 이 노루는 내가 먼저 잡았단 말이오." 반희빈은 잠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으나 금새 표정을 바꾸었다. 그녀가 내비친 것은 강한 호기심이었다. "대체 그것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오?" 화살만을 사용해 온 그녀에게는 청년의 사냥법이 무척이나 희한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소." 청년은 즉시 무쇠로 주조된 강궁(强弓)을 꺼냈다. 그러더니 뜻밖에도 그녀를 향해 겨누었다. "아, 아니!" 반희빈은 기겁을 하여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청년의 동작은 그녀보다 훨씬 더 빨랐다. 탁! 핑--! 청년은 벌써 시위를 놓았고, 무엇인가 예리한 물체가 반희빈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꽤액! 그녀의 등뒤에서 괴성이 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 이런!" 뒤를 돌아다 본 그녀는 아찔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한 마리의 멧돼지가 꼬꾸라져 있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멧돼지가 다가든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니!' 아닌 게 아니라 반희빈은 청년이 출현한 이후로는 무엇에 정신을 뺏겼는지 감각이 둔해져 있는 상태였다. 청년은 히죽 웃었다. "오늘은 수확이 무척 좋군." 그리고는 그녀의 옆을 휭하니 지나쳐 멧돼지에게 다가갔다. 청년이 번쩍 하고 박도를 휘두르자 멧돼지의 가슴팍이 양단 되었다. 그 속에는 예외없이 별모양의 비표가 들어 있었다. 그는 비표를 빼내 다시 반희빈에게 보여 주었다. "간단하지. 나는 화살 대신 이것을 쓰는 것���이야. 하지만 친구, 자네처럼 그렇게 장난감 같은 화살이나 사용했다가는 큰 코 다쳐. 이 산의 대왕인 곰을 만나면 뼈도 못추리니까." 말을 마치자 청년은 두 마리의 짐승을 각기 어깨에 들쳐메더니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녀로부터 몸을


돌렸다. '괘씸한 작자! 나를 놀리다니.......' 반희빈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분명 청년은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청년과 그녀의 차이는 화살이냐 비표냐가 아니라 신력(身力)에 달린 문제였다. 청년이 사용하는 강궁은 언뜻 보기에도 웬만한 힘으로는 당겨질 것 같지도 않았다. 더욱이 그것으로 비표를 탄궁(彈弓)해 맹수를 잡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녀로서는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좌우간 신력 하나는 타고났군.' 반희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두 마리의 짐승을 거뜬하게 메고 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지켜 보았다. 이어 그녀의 심중에서 고개를 쳐든 것은 강한 의혹이었다. '대체 이 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연의 일치였을까? 번번이 내 앞에서 사냥물을 가로채가니.......' 앞서 반희빈이 분노했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의 활솜씨로 실패란 있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실패한 것은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기 때문이었다. 애써 사냥감을 얻으면 꼭 예의 청년이 나타나 자기 것이라며 채가 버리곤 했는데, 증거가 완벽하니 그녀로서는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도 속수무책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반희빈은 청년을 향해 묘한 감정에 휘말리고 말았다. 일종의 오기랄까? 노획물을 빼앗기고 놀림감이 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심정을 들끓게 한 것은 자신이 청년으로부터 무시를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태어난 이후로 이제껏 지나칠 정도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자라난 그녀였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지금은 귀찮아졌을 정도이다. 그런데 가공할 신력 외에는 별볼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게 생긴 작자가 자신을 우습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흥! 두고 보자. 네 의도가 무엇인지 꼭 밝혀내고 말 테다.' 반희빈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청년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휙--! 그녀의 신형은 섬광처럼 허공을 가르며 쏘아져 갔다. 놀랍게도 그녀가 지금 시전한 것은 무림에서도 일류급의 고수들이나 펼칠 수 있는 최상승의 경공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는 종내 청년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근역을 다 뒤졌어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일개 사냥꾼 따위를 따라잡지 못하다니!' 왈칵 짜증이 일었다. 사냥에서 그러했듯 청년을 뒤쫓는 일에서까지 실패하자 그녀의 심경은 그야말로 폭발 직전이었다. 반희빈으로 말하자면 배경과는 별개로 남달리 매사에 적극적이고 승부욕이 강했다. 따라서 그녀가 지금 느끼는 것은 거의 패배감에 가까운 참담함이었다. 일몰(日沒). 산중의 밤은 유난히도 빨리 온다. 반희빈은 절망에 빠져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종일토록 뛰어다녀 피로가 엄습해 오는 데다가 청년은 고사하고 애마(愛馬)인 홍아마저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홍아는 우연히 얻게 된 말이었으나 반희빈과 마음이 잘 맞아 언제부터인가는 그녀의 휘파람 소리만 들어도 즉각 달려오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휘파람을 불어도 소용이 없었다. 사위에 밤이 깃들자 바람이 차가와졌다. 반희빈은 몸을 으스스 떨면서 스스로를 원망하기에 이르렀다. '자업자득이야. 괜히 호승심에 눈이 멀어 이게 무슨 꼴이람?'


그녀는 낙심하여 눈 위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따뜻한 오군도독부의 규방이 이토록 그리운 순간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었다. 떠오르는 얼굴도 있다. '아앵이 얼마나 초조해하고 있을까?' 반희빈은 진기를 끌어 올려 추위에 대항하면서 자신이 여인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절감했다. 아무리 상승의 내공을 익히고 있다 해도 장시간에 걸쳐 이런 식으로 견뎌야할 것을 생각하니 우선은 그녀의 의지가 항복을 선언해 버렸다. 더구나 이 상태에서 맹수라도 만나면 어쩐단 말인가? '무서워.......' 그러다 문득 반희빈은 벌떡 일어났다. 멀리서 한 가닥 가느다란 불빛이 그녀의 눈에 쏘아져 들어온 것이었다. 그 불빛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이었으나 그녀는 그런 점은 채 의식도 하지 못했다. '인가다!' 설사 존경해마지 않는 조상님이 현신한들 이렇게 반가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반희빈은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누르며 불빛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휘익--! 통나무로 지어졌으며 갈대로 지붕을 덮은 한 채의 모옥. 이런 것들은 대개 사냥꾼들이 오랜 여행이나 눈비가 올 때를 대비해 잠깐씩 쉬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집이다. '왜 아무도 없지?' 반희빈은 모옥으로 들어서며 미간을 모았다. 모옥 안은 의외로 아늑했다. 짐승의 가죽이 벽에 부착되어 한파를 막아주고 있었고, 바닥 또한 푹신한 털이 깔려 있었다. 우선 무엇보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듯 정갈했다. 게다가 모옥의 한 가운데에는 모닥불이 지펴져 있었으며, 그 위에서 무엇인지 모를 국물이 진한 향기를 풍기며 끓고 있었다. 그런데도 막상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음식을 만드는 중이었던 것 같은데......?' 반희빈의 시선은 절로 국그릇에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잔뜩 지치고 허기가 져있는 데다가 음식 냄새를 맡자 뱃속에서 때아닌 아우성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목으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양은 넉넉한 듯 하니 조금 먹는다 해서 죄가 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수중에 은자가 있으니 값을 지불하면 될 게 아닌가?' 그리하여 그녀가 막 국그릇으로 손을 뻗어갈 때였다. 밖으로부터 걸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고기가 알맞게 익었겠군. 흠, 양념을 충분히 넣었더니만 향기도 제법 그럴싸하구나." '아! 저 작자는?' 반희빈은 깜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그녀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그 음성은 바로 앞서 보았던 청년의 음성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옥 안으로 선뜻 들어서는 인물은 그녀를 골탕먹였던 그 청년이었다. "어라? 왜 여기에 와 있지?" 청년은 반희빈을 보자 먼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곧 빙그레 웃음을 떠올렸다. "흐음, 갈 곳이 없었나 보군." 반희빈은 은은히 얼굴을 붉혔다. 청년이 말인즉 한 치도 틀림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고귀한 신분 따위는 이 순간에 아무런 도움도 되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부아가 치밀었으나 애써 담담히 물었다. "여기가 당신의 집이오?" 청년이 기이한 시선으로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럼 아니란 말인가?" 정중한 질문에 비해 청년의 말투는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반희빈은 그제서야 청년이 자신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에 대뜸 쌍심지가 돋았다. "누가 아니라고 했소?" 그러자 청년은 되려 그를 비웃듯 말했다. "그럼 뻔한 말을 왜 묻는 것인가? 이 곳이 내 집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여기서 산단 말인가? 그 친구, 얼굴은 번드르르하게 생겼으면서 머리는 영 나쁘군." "뭐, 뭣이?" 반희빈은 대노했다. 살아 오면서 그런 모욕은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화를 낼 기회가 없었다. 청년이 거침없이 그녀의 옆자리에 와 털썩 앉았던 것이다. '맙소사! 이렇게 지저분한 작자가.......' 질겁을 하며 물러나 앉는 반희빈에게 청년이 또 말을 건넸다. "불청객이라도 손님은 손님이지. 대접을 해야겠군." 그는 국그릇에서 손으로 고깃덩이 하나를 건져내더니 돌아 보지도 않고 불쑥 내밀었다. "이봐, 보아 하니 배가 무척이나 고픈 상인데 좀 들지." 반희빈은 하마터면 그것을 넙죽 받아들 뻔 했다. 그러나 명가의 규수답게 그녀는 본능을 제어한 채 따지고 나섰다. "귀하는 어찌 하여 내게 자꾸 반말을 하는 것이오? 우리는 피차에 인사도 나눈 적이 없거늘......." 청년은 그녀에게 주려던 고기를 더 권해 보지도 않고 스스로 뜯어먹고 있었다. 그는 입을 연신 우물거리며 그녀의 추궁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럼 나이도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내가 자네에게 경어를 써야 한단 말인가? 별 이상한 녀석 다 보겠군." '녀석이라고?' 반희빈은 내심 격노하여 부르짖었으나 그것을 차마 입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곳이 오군도독부가 아니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어느 곳에 가든 그 곳의 법도를 따라야 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남의 집에 불쑥 침입해 놓고는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반면에 청년은 벌써 그녀에게 신경을 끊어 버렸는지 혼자서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후루룩거리며 국물까지 열심히 들이키고 있는 중이었다. 음향효과(?)는 반희빈의 허기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녀는 주린 배를 안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정녕 사서 고생이구나! 집에 가면 산해진미가 그득한데.......' 푸르스름하게 질린 그녀의 입가에는 어느덧 고소가 매달렸다. 그런 그녀의 곁에서 청년은 배를 쓰다듬으며 포만감을 과시했다. "아! 이제 더 못먹겠군." 그의 눈이 다시금 그녀를 힐끗 돌아다보았다. "어때? 음식은 마다해도 잠은 여기서 자야할 걸? 귀공자께서 이런 곳에서 자고 싶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이 밤중에 산을 기어 내려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그 말에 반희빈은 눈가에 은은히 살기가 떠올렸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죽거리는 청년의 입을 뭉개놓고 여보란듯 이 곳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살기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깜깜한 밤중에 눈보라 속을 헤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끔직했다. "그렇소. 미안하오만 하룻밤 신세를 져야겠소." "괜찮으이. 침상이 넓어 함께 잘 수 있으니까." '끙! 갈수록 태산이군.'


반희빈은 수치감과 모멸감으로 인해 얼굴을 귀밑까지 붉혔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남자, 그것도 누군지도 모르는 자와 그녀가 어찌 한 침상에 든단 말인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난 상관없소. 아무데서나 자도......." "그런가?" 청년은 역시 더 권하지 않았다. 그는 한 차례 기지개를 켜더니 침상 위로 벌렁 쓰러졌다. 이어 그의 눈이 감긴다 싶자 모옥 안은 금새 코고는 소리로 진동을 했다. '천하에 태평한 작자로군. 어떻게 곁에다 사람을 놔두고 저렇게 빨리 잠이 들 수가 있을까?' 반희빈은 잠시 역겹다는 듯한 시선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위인이 소탈하다는 것쯤이야 능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청년은 너무도 그녀와는 동떨어진 별세계에 존재하고 있었다. '눈을 좀 붙이고 나서 새벽에 여기를 나가자.' 반희빈은 자신과 청년의 다른 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품위있게(?) 바닥에서 팔베게를 하고 누웠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인간의 한계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꼬르륵....... 이는 바로 오군도독부의 천금소저인 반희빈의 배에서 난 소리였다. 기를 쓰고 잠을 청한들 배가 고프니 잠도 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연구해 낸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혹 국물이 좀 남아 있을까?' 반희빈은 한 동안 도둑 고양이처럼 청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청년이 곯아 떨어진 듯 아무 반응이 없자 심히 안도하는 한편, 모닥불로 살금살금 기어가 국그릇을 들여다 보았다. 다행히도 국물은 많이 남아 있었다. 이쯤 되자 더 이상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반희빈은 허겁지겁 국물을 들이키며 내심 탄성을 발했다. '아!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국물이 있었다니.......' 이윽고 어느 정도 배가 차자 그녀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 도래했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수마(睡魔)였다. 허기에서 놓여나니 긴장이 풀어지고, 훈훈한 실내의 공기는 거의 감미롭게 느껴졌다. 즉 졸음이 물밀듯 밀려 왔다는 얘기다. "좋아, 이런 기분은......." 마침내 그녀의 품격과 인내는 다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스르르 혼미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깊이....... 눈을 뜨자마자 반희빈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분명 바닥에 누웠던 것이 기억이 나건만 지금 자신이 누운 곳은 호피가 깔려 있는 부드러운 침상 위였다. '혹시!' 반희빈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동시에 급급히 옷매무새를 살펴보았으나 다행히도 별 이상 없이 입었던 그대로였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자는 어디로 갔지?' 반희빈은 침상에서 내려와 곧장 밖으로 나가 보았다. "아아!"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칼날 같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겹겹이 둘러 쳐진 웅장한 산세는 간밤에 쌓이 눈으로 인해 은빛의 파도를 이루고 있었다. 그 위로 서서히 진홍빛으로 달아오른 해가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고, 그 광경은 일시지간 천지가 온통


홍색으로 물드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 일으켰다. 바야흐로 일출(日出)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다. 반희빈은 이렇듯 신비하고도 장엄한 대자연의 경관에 절로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활짝 펴며 심호흡을 했다. "아아....... 정말 멋진 곳이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스스로도 지난 밤에 비해 훨씬 겸허해져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먹었으며, 어떤 잠자리에 들었었는지는 이제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한 사람의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하얗게 눈 덮힌 대지 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그 발자국은 일말의 신비감을 던져주는 것이었다. 그 주인에 대해서도 역시....... 그의 존재란 적어도 이 한 순간만큼은 무식한 일개 사냥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이 산의 주인(主人)인 것이다. 반희빈은 마치 이끌리듯 그 발자국들을 따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소리가 들려온다. '폭포라도 있는 것인가?' 반희빈은 물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자국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계속 전진했다. 배부르게 먹고 숙면을 취해서인지 더 이상은 피곤하지도, 춥지도 않았다. 빙폭(氷瀑). 폭포수는 거창하게 쏟아져 내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투명하게 빛나는 얼음 가운데 가느다랗게 흘러 내리는 물줄기는 소량에 불과하되 가히 환상적이었다. 반희빈은 말할 수 없이 상쾌한 기분에 젖어 빙폭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무엇을 보았는지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녀의 눈길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누가 목욕을......?' 폭포의 아래 쪽에는 짙푸른 담수(潭水)가 고여 있었다. 그 위에 덮혀 있던 두터운 얼음을 깨고 들어가 한 사람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사냥으로 하루 하루를 이어가는 예의 우직한 청년이었다. '세상에! 빙담에 몸을 담그고 있다니.' 하지만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 그녀는 경악성을 발했다. "앗!" 청년의 몸이 딸려 들어가듯 물 속에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빙담의 물이 얼마나 차가울지는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반희빈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몸이 얼어서......!' 불길한 예감으로 인해 반희빈은 발을 동동 굴렀다. 더구나 한참이 지나도록 청년이 나오지 않자 그녀는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녀는 입술을 악다문 채 담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짙푸른 색깔을 띄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깊이가 최소한 사람의 키를 넘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혹 익사한 것이 아닐까?" 반희빈의 마음은 정확히 상반된 두 개로 나뉘어졌다. "쳇! 무슨 상관이람? 그깟 야만인이 여기서 죽은들......." 그러나 그녀는 확실히 평범한 여인은 못되었다. 국정(國政)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부친을 두어서일까? 그녀는 본시 기개가 있었으며 남자 못지 않은 대범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바보같은 놈! 겁도 없이 한담에 몸을 담그더니만......." 반희빈은 투덜대면서도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어쨌든 그 작자도 인간이다. 이대로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휙--!


그녀의 늘씬한 교구가 마침내 한담으로 뛰어 들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용감무쌍하게 입수(入水)를 시도한데 반해 반희빈의 몸은 물 속으로 빠져 들지 않고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그녀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할 때였다. "하하하... 이 계집애 같은 친구, 자네는 옷을 입고 목욕을 하나? 옷은 벗어서 따로 빨아야지." "놔, 놔라!" 반희빈은 비명을 질렀다. 알고 보니 자신은 청년의 손에 등 뒤 옷자락을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그럼 놓아주지." 청년이 손을 놓았다. 그러자 수치감과 분노로 인해 와들와들 떨던 그녀는 그대로 물 속으로 쳐박히고 말았다. 풍덩! '읍......!' 아무런 대비도 없이 빙담에 빠지게 된 반희빈은 곧바로 깊숙이 잠수(?)해 들어갔다. 당황한 나머지 헤엄은 고사하고 팔다리를 내젓는 것조차 망각해 버린 것이었다. 물을 연거푸 다섯 모금이나 들이킨 후에야 그녀는 수면 위로 겨우 떠오를 수가 있었다. "푸우!" 입속의 물을 내뿜는 그녀를 향해 청년은 혀를 끌끌 찼다. "이런 정신 나간 친구를 봤나? 헤엄도 못치면서 괜히 객기(客氣)를 부렸었군." 반희빈은 약이 올라 뭐라 악을 쓰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종내 뼈를 저미는 듯한 냉기가 그녀의 정신마저 서서히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자신의 몸이 물밖으로 끌어 올려지는 것을 느끼며 혼절하고 말았다. "으음......."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의지와는 관계없이 앓는 소리가 계속해서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반희빈. 그녀는 지금 온몸이 불덩이가 된 채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다. 오싹오싹 하는 한기(寒氣)는 호피 이불을 전신에 둘둘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로 하여금 체면도 잊은 채 이빨을 딱딱 부딪치게 만들었다. 물론 모옥 안은 모닥불의 열기로 인해 후끈거릴 정도로 덥혀져 있다. 청년이 그녀의 곁에서 딱하다는듯 혀를 찼다. "쯧! 도대체 왜 고집인가? 젖은 옷을 벗어 말려야 하거늘, 어쩌자고 싫다는 것이지?" 반희빈은 내심 이를 갈았다. '뻔뻔스러운 놈! 내 일어나기만 하면 너를 그냥 두지 않으리라. 으음, 그런데 너무 춥구나!' 역시 여인은 여인이었다. 일신에 상승무공을 익히고 있었으나 빙담의 냉기를 이기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 반희빈은 그런 상태로 꼬박 사흘을 앓아 누웠다. 멋대로 집을 나와 이런 위경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니 무엇보다 그녀는 비참한 기분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의식이 혼미해져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녀의 이마에 하나의 손이 와 얹혔다. '설마 그 작자가......?' 반희빈은 경황 중에도 도리질을 해 그 손을 피하려 했으나 도중에 스스로 포기해 버렸다.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손길은 지극히 섬세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청년은 천에 찬물을 축여 반희빈의 이마에 배인 땀을 닦아 주었다. 그 느낌이 하도 청량하여 그녀는 내심 부르짖었다. '아아! 시원해.'


덕분에 그에 대한 원한(?)도 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반희빈은 자신이 청년의 손길에 매우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실제로 청년은 정성껏 그녀를 간호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점은 그녀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차츰 의식이 맑아지면서 그런 느낌은 더욱 뼈저리게 전해져 왔다. 무릇 인간의 감정이란 몸이 아플 때 가장 민감해지는 법이다. 그 때에 보살펴 주는 이처럼 고마운 사람은 또 없다. 그래서였을까? 반희빈은 앓아 눕고서야 비로소 청년의 얼굴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저 거친 사냥꾼이라고 생각해 왔던 그의 모습은 가까이서 대하니 약간 의외였다. 우선 그녀를 경탄에 이르게 한 것은 청년의 서늘한 눈이었다. 유난히 크면서도 우수에 젖은 듯한 그의 눈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듯한 묘한 힘이 담겨 있었다. 전체적인 윤곽도 걸친 옷과 턱수염이 선입견을 가져다 주어서 그렇지, 실상은 그런 대로 보아줄 만 했다. 골상(骨相)이 다소 투박해 보이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으나 그것도 다른 관점에서 보니 또 달랐다. '아마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이럴 거야.' 이는 반희빈이 청년에게서 매력을 느끼게 된 첫 순간에 읊조린 말이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또 흘러가매 그녀의 생각은 또바뀌었다. 판단기준이 낮추어져 버린 것일까? 그녀는 청년의 무례한 면에 대해서도 어느덧 이해를 베풀고 있었다. 산중에서의 고독하고도 야수적인 삶, 누구든 그런 생활을 하다 보면 그와 같아질 것이라고....... 일주일이 지났다. 비로소 반희빈의 병세가 차도를 보였다. 열도 내렸고, 기운은 없을지언정 일어나 앉아도 무방할 정도가 되었다. 청년은 죽을 끓여 와 그녀에게 손수 한 숟가락씩 떠 먹여 주었다. 아무 이의없이 순순히 죽을 받아먹던 그녀가 문득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동안 옷을 갈아입지 못하다 보니 자신의 몸에서 땀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청년은 이를 의식하지 못한 듯 편안하게 말을 건네왔다. "친구, 이제 좀 괜찮아졌나? 하하하... 미안하이. 내가 장난이 좀 심했네." 그는 사과에 이어 한 마디 더 덧붙였다. "하지만 기쁘이. 나는 명문가의 자제들이란 하나같이 옹졸하고 제 생각만 하는 줄 알았거든." 반희빈은 열이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멋적게 웃었다. "왜 자꾸 내게 명가 운운하는 것이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럼 아니란 말인가?" "내게 앞으로 그런 식으로는 말하지 마시오. 그럼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자 청년도 의미를 알아 차렸는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알았네. 난 원래 무엇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지. 아마 자네도 그 면에서는 나와 흡사한 것 같군." 반희빈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담담하게 말했다. "내 이름은 반희문(盤希文)이오. 당신은?" "진남호(陣南豪)네." 청년은 시원스럽게 답했다. "자네가 나이가 어린 것 같으니 내 아우라고 부르겠네." "좋소. 나는 진형님이라 부르겠소이다." 여심이란 것은 참으로 기이하다. 반희빈은 철저히 가면을 쓰면서도 어느새 상대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50 장 사랑이라는 이름의 마법(魔法)


반희빈은 요즘 들어 지루해 하거나 따분해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표정이 몹시 밝아졌는가 하면 전에 없이 기분까지도 항상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시비 아앵은 의혹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나면서부터 반희빈의 뒷바라지가 운명이었던 이 소녀는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앵은 자신이 모시는 천금소저를 지켜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씨께선 분명 어딘가 달라졌다. 이전에는 잘 웃다가도 종종 침울해 하곤 하셨는데 저리도 명랑해 지셨으니.... 좋은 현상이기는 하지만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가 그 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반희빈은 보름 전부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냥을 나갔다가 열흘 만에 귀가하고 난 후부터 사람이 변해 있었다. 눈사태 때문에 발이 묶여 일찍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는데, 액면 그대로 믿을 만한 소리인지는 몰라도 다친 데 없이 무사해 모친으로부터의 큰 꾸중은 모면할 수 있었다. 반희빈은 늘상 부자유스러운 규방에서 벗어나 드넓은 중원천지를 마음껏 활보하는 것이 꿈이었다. 사실 강호 상에도 이름을 떨치는 여협(女俠)들이 다수 있었으므로 그녀의 이런 희망을 꼭 망상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오군도독부의 천금소저라는 고귀한 신분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답답한 틀일 따름이었고, 이로 인해 그녀는 가끔씩 심한 우울증세까지도 보이곤 했던 것이다. 그런 반희빈이 느닷없이 정성껏 수를 놓는가 하면 심지어 요리에도 관심을 보이니, 그녀의 모친인 별원 마님은 이만저만 흐뭇해 하는 것이 아니었다. "호호호... 빈아(賓兒)가 이젠 정말 시집갈 때가 되었나 보구나. 하루가 다르게 여자다와지니 말이다." 그 말에도 반희빈은 그저 다소곳한 미소로 답했다. 아앵은 마침내 곁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하나의 예감 같은 것을 느꼈다. '저렇듯 갑작스런 심경의 변화란 어떤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운명처럼 무겁게 다가드는 느낌이었다. 아앵은 일면으로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친자매 이상으로 허물 없이 지내 오던 반희빈이 뭔가 자신이 모르는 비밀을 안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야말로 가슴 한 귀퉁이가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더구나 주인과 시비라는 엄격한 신분의 차이 때문에 드러 내놓고 심경을 표현할 수도 없고 보니, 섭섭한 마음은 못내 안타까움과 더불어 원망으로 이어졌다. 이래저래 아앵은 야무진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꼭 알아내고 말 테야. 이 아앵이 모르는 일이란 절대로 아가씨에게 일어날 수 없어.' 이는 어쩌면 누군가에게 반희빈을 빼앗기고 말 것 같은 기분 때문에 더했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가씨는 잘 되셔야 해. 그리고 나는 그런 모습을 평생 지켜보아 드릴 것이고. 만일 아가씨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한다면.......' 아앵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는 죽어버리고 말 테야.' 그녀의 충정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다음 날. 아앵은 단단히 채비를 하고 기다렸다. 그녀는 반희빈이 경장차림으로 도독부를 빠져 나가자 아무도 모르게 즉시 미행했다. 반희빈이 향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묘봉산이었다. 그러나 아앵의 추적은 중도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껏 도독부 안에서만 생활해 왔던 그녀로서는 우선 체력이 딸려서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원대복귀한 그녀는 낙심하여 중얼거렸다.


'대체 아가씨는 왜 산으로 가셨을까? 역시 또 사냥을......?' 아앵의 추리는 항상 사실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은 그녀도 반희빈이 묘봉산의 모옥을 찾아가 진남호와 어울리고 있다는 것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반희빈이 귀가하는 시각은 언제나 일정했다. 그녀는 최소한 유시(酉時)를 넘기지 않고 그 전에 꼭 돌아오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앵은 번번이 눈쌀을 지푸렸다. 왜냐하면 그 때마다 반희빈의 옷차림은 엉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럽혀진 것은 물론이려니와 매무새도 헝클어져 있기 일쑤였다. 아름다운 얼굴만이 무섭도록 생기를 보였으며, 그런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물론 이에 비례하여 아앵의 걱정과 호기심도 눈덩이처럼 부풀어 갔다. 그리하여 아앵은 다시금 미행을 시도했는데, 그 날의 천금소저는 유독 산으로 가지 않고 저자 거리로 나가고 있었다. 미행은 별 어려움 없이 이루어졌다. '아가씨께서 저런 곳을.......' 아앵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떨려 왔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놀라움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난생 처음 부딪는 인파에 혼란스럽기 짝이 없건만 천금소저는 그 사이를 뚫고 유유히 나아가고 있었다. 소위 시장 한복판이었다. 그 곳에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특히 개중에는 짐승의 가죽들을 쌓아놓고 파는 한 청년이 있었으며,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빙 둘러싼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앵은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말을 통해 그가 묘봉산에서 직접 사냥을 해 싼값으로 가죽을 대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 호피(虎皮)가 한 장에 은자 열닷 냥이오. 질 좋은 흑곰의 가죽은 열 냥에 불과하오." 청년이 크게 외쳐 대고 있었다. 그는 꺼칠한 턱수염이 아무렇게나 자라 있었으며 행색도 너저분하기 그지없었다. 어쨌든 짐승의 가죽으로 된 옷을 걸치고 있는 것이나 거친 음성, 투박한 몸짓 등으로 미루어 전형적인 사냥꾼의 모습이었다. '저럴 수가!' 아앵은 일순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자신이 떠받들어 모시던 천금소저가 더럽고 무식해 보이는 야만인 청년에게 다가가더니 덥석 손을 잡은 것이었다. 아앵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남녀가 유별하거늘.... 그것도 귀족이 아닌, 저런 더러운 사냥꾼 청년의 손을 잡다니!' 경악은 거기서도 그치지 않았다. "자, 가죽이 싸요! 호피가 고작 은자 열 닷냥--!" 반희빈은 서슴없이 소매를 훌훌 걷어 부치더니 청년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장사를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아앵은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 도무지 현실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가죽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으나 워낙 싼값에 내놓은지라 순식간에 다 팔렸다. 그러자 청년과 반희빈은 얼굴을 마주한 채 히히덕거리며 은자를 세기 시작했다. "오늘도 제법 수입이 두둑하군." "후후! 진형님, 그 속에는 내 몫도 들어 있겠지요?" "그야 여부가 있나? 자네가 한 몫 단단히 거들었는 걸. 자, 우리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세. 오늘은 내가 사겠네." 반희빈은 청년과 어깨 동무를 하더니 인파를 헤치고 냄새나는 싸구려 주점으로 나란히 들어갔다. 아앵으로서는 차마 거기까지는 쫓아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앵은 스스로를 향해 무수히 부르짖었다. 자신이 보았던 모든 상황들이 그저 하나의 악몽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현실은 비정하게도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반희빈이 사냥꾼과 만나 즐거워 하던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연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옳은 것인가?' 아앵이 당면해 있는 것은 극심한 갈등이었다. '이 일을 마님께 고한다면......?' 그렇게 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분명 오군도독부가 발칵 뒤집혀질 것이고, 천금소저인 반희빈은 평생 자신을 저주할지도 모른다. 아앵은 반희빈의 분노한 얼굴을 떠올리자 내심 섬뜩했다. '아가씨께서는 아마 나를 보지 않으려 하실 거야.' 불행히도 그녀는 반희빈의 독특한 기질이라던가 남녀간의 감정에 대해서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것이 바로 반희빈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이유가 되고 있다는 것도 그때까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앵은 우선 인내를 발휘하며 기다렸다. 과연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반희빈은 시간을 어기지 않고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술기운으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 자신은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까지 웅얼거리고 있었는데, 의복이 마구 구겨지고 더럽혀져 그야말로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아앵은 급기야 눈가에 눈물방울을 매달았다. 탁! 반희빈의 방문이 무심하게 닫혀 버린다. 그 순간, 아앵의 가슴속에서는 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술을 마셨다! 그 짐승 같은 사내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날 밤, 아앵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갈등은 막을 내렸으되 기이한 분노가 내내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새벽녘에 이르자 그녀의 결심은 요지부동이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아앵은 일어나자마자 내전으로 향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일말의 비장한 기운마저 어려 있었다. '아가씨, 부디 용서하세요. 아앵이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아가씨를 위해서랍니다.' 그녀는 착잡한 표정이 된 채 마님도 아닌, 대마님께 고할 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반희빈. 늘 그랬듯 그녀는 오군도독부를 빠져 나오자 막혔던 호흡이 비로소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창살 없는 감옥, 이것이 바로 도독부에 대한 그녀의 정의였던 것이다. 반희빈은 묘봉산의 기슭에서부터는 경신술을 발휘해 나는 듯이 올라갔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 사이로 그녀의 날렵한 몸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장애물을 넘고 있었다. 멀리 모옥이 보였다. 반희빈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벅찬 느낌으로 인해 스르르 얼굴을 붉혔다. 자유와 더불어 그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가슴은 터질듯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단숨에 모옥 앞으로 달려갔다. "진형님! 앗......?" 반희빈의 얼굴에서 일순 핏기가 싹 가셨다. 놀랍게도 모옥은 거의 폐허로 변해 있었다. 간신히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 내부가 온통 박살이 나 이전의 정겨웠던 모습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이게... 어찌된 일......!" 그녀는 마치 얼어붙은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반희빈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모옥의 주위를 살펴볼 만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아! 이 발자국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녀의 안색이 문득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고개가 푹 떨구어진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잠시 후. 반희빈은 고개를 반짝 쳐들더니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삐익--! 그녀의 휘파람 소리는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히히히힝--! 어디선가 말울음 소리가 그에 답했다. 이어 붉은 빛깔의 털을 지닌 말이 화살처럼 빠르게 달려 오더니 그녀의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 말은 바로 홍아였다. 홍아는 어떤 의사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인지 대뜸 그녀에게 코를 비비며 구슬픈 몸짓을 해 보였다. "아아! 알고 있어, 홍아." 반희빈은 탄식을 발했다. 추수(秋水)와도 같은 그녀의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가슴속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그 몸서리쳐지는 느낌이 무엇을 뜻하는지. "홍아, 가자!" 반희빈은 성큼 말 위로 올랐다. 홍아도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곧바로 힘차게 네 발굽을 굴렀다. 두두두두--! 끔찍한 태형(笞形)이 가해졌다. 그는 꽁꽁 묶인 채 허공에 매달려 있었으며, 채찍이 사정없이 그의 몸 위로 떨어졌다. ㅊ! 촤악--! 오군도독부의 옥리가 밥 먹고 하는 일이란 의례 이런 것이다. 그는 어떤 죄목으로 들어왔던 죄수를 혹독하게 다루는 인물이다. 그의 손에는 인정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었다. 그는 처음 삼일 동안은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죄수를 결박시켜 놓고 무조건 때리는 것이다. 일단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아야 기를 꺾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이력이 난생 처음으로 실패를 보았다. 옥리 전삼대(田三大)는 마침내 스스로 지쳐서 부르짖었다. '이런 독종이 세상에 있었다니! 이 놈의 몸은 무쇠로 이루어졌단 말인가? 내 옥리 생활 이십 년에 아무리 쳐도 눈썹 하나 끄떡하지 않는 놈은 오직 이 놈 뿐이었다.' 심지어는 두려움마저 일 지경이었다. 삼일 전이었다. 전삼대는 황송하게도 도독부의 대마님께 불려갔다. 그는 대마님으로부터 한 명의 청년을 넘겨받았다. "이 놈을 꼭 죽지 않을 만큼만 다루어라. 손에 사정을 두었다간 네가 치도곤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대마님의 불호령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더구나 누구의 명이라고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전삼대는 그 날부터 지금까지 청년을 데려다 그야말로 개패듯 두들겨 팼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청년이었다. 그는 흡사 동장철골인듯 살이 찢어지고 뼈가 드러나도 어찌 된 영문인지 신음소리 하나 내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혼절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삼대도 인간이다. "졌다! 내 네 놈에게만은 두 손 다 들었다." 그는 청년을 향해 고개를 휘휘 저어 보였다.


청년 진남호. 그의 몰골은 처참했다. 몸 어느 한 곳도 성한 데라곤 없었으며, 어느 부분은 살점이 뭉턱 떨어져 나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전삼대가 질려 버렸듯 그의 기세는 변함이 없었다. "후후후... 맞는 사람은 나인데 어찌 네가 더 못 견디느냐?" 전삼대는 허탈한 음성으로 낮게 읊조렸다. "나 전삼대는 너같이 지독한 놈은 처음 봤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차라리 존경심이 일 지경이다." 전삼대는 그 한 마디를 내뱉고는 철문을 닫으며 나가 버렸다. 혼자 남게 된 진남호는 음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과연 이런 고초를 겪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애초부터 도독부의 군사들에게 끌려온 것은 계획의 일부였다. 아앵의 절대적인 공헌(?)까지도 실은 그의 복안에 미리 포함되어 있던 부분이었다. 또 사흘간 밤낮없이 고통을 당했다고는 하나 이런 식의 매질이란 그에게 있어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갖가지 극형을 두루 경험해 보았던 위인이었다. 다만 심중에서 치미는 모멸감이 견디기 힘들 따름이었다. '으음, 어쩔 수 없지. 이미 쏘아진 화살이니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진남호는 이어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반희빈, 대체 그녀가 천마신궁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비록 뇌옥의 사슬에 감겨 있었으나 그의 눈빛은 결코 고문을 당하고 있는 죄수의 그것이 아니었다. 오군도독부로 돌아온 반희빈은 내내 안절부절이었다. 죽어라 연구한 끝에 어느 정도의 추리는 서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그 해결이었다. '만일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녀는 입술을 악물더니 나직히 불렀다. "아앵." 아앵은 그 소리를 듣자 재빨리 방문 밖에 시립했다. "네, 하명하세요. 아가씨." 그녀는 반희빈의 기색이 초췌해진 것을 보고는 벌써부터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경위야 되었든 자신으로 인해 섬기는 아가씨가 괴로와하고 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이리 들어 오너라." "네." 방안으로 들어선 아앵은 반희빈을 마주 대하자 자신도 모르게 잔뜩 움츠러 들고 말았다. 죄지은 있는 만큼 두려운 감정은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었다. 반희빈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아앵, 너지?" "아, 아가씨께선 지금 무슨 말씀을......?" "숨길 필요 없다. 아앵, 너밖에는 그럴 사람이 없어. 대체 이 집안에서 너 말고 누가 나에 대해 있단 말이냐?" 아앵은 일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곁에서 함께 지낸 덕에 반희빈이 영리하다는 사실은 있었지만 설마하니 막바로 여기까지 짚어 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아앵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실상 그녀의 최대 약점은 거짓을 둘러댈 줄 모르는 것이기도 했다. "용... 용서해 주세요, 소비는 다만 아가씨가 걱정되어서......." "알고 있다. 네가 나를 위해서 그랬다는 것을. 또 너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지 않으냐?" "아, 아가씨......."

어찌

것이

알고 알고


"잘 들어, 아앵. 지금까지 너는 내게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헌신해 왔어. 막상 어머니께서도 너처럼 하지는 못하셨지. 그러나 말이다, 그로 인해 집착을 해서는 안돼. 또한 네 방식으로 내 행복을 결정지어서도 안 되고......." 반희빈의 음성은 격정으로 인해 다소 떨려 나오고 있었다. "자,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이 오군도독부 안에서 남들이 얻지 못한 부귀영화를 다 누린다 해서 과연 내가 만족해 하더냐? 또 그럴싸한 귀공자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접근해 온들 내가 한 번이라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느냐?" "아!" 아앵은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앵, 너도 이제 알아야 한다. 누구나 행복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난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할머님이나 어머님처럼 그런 식으로 살지는 못해." 아앵도 그제서야 무언가를 느꼈는지 무너지듯 그 자리에 엎드렸다.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은 울음보였다. "아가씨! 소녀가 철이 없어 그만 죽을 죄를......." 그런 아앵에게 반희빈은 애원인양 말했다. "도와다오, 아앵. 네가 진정으로 나를 아낀다면 이대로 내버려 두렴. 그가 나로 인해 잘못된다면 나도 죽어." "아가씨--!" 아앵은 통곡하고 있었다. 비로소 그녀는 스스로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반희빈은 아앵이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려 그녀를 물리쳤다. 그리고는 혼자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그를 구해야만 한다." 전삼대. 그는 한밤중에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게 되었다. 아내를 끼고 곤히 자다가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한 것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위가 온통 깜깜했다. 단지 음습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으로 미루어 자신이 창고 같은 곳에 갇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한 가닥 으스스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 너에게 한 가지만 묻겠다. 사실대로 말하면 무사하되,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너는 귀신이 되어도 시체조차 보전하지 못하리라." 전삼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뇌옥지기로써 평생 동안 죄수들을 다루어 온 그는 이런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새 알 수 있었다. "다... 당신은 누구요......?" "나에 대해 알고 싶나?" "아, 아닙니다!" 전삼대는 황급히 부인하는 한편, 자신의 실수를 욕해야 했다. 그가 알기로도 지금의 처지에서 상대방을 알고자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재촉하는 일 밖에는 안되었으므로. 예의 음성이 다시금 울렸다. "며칠 전 묘봉산에서 사냥꾼 한 명이 잡혀와 뇌옥에 갇혀 있다. 그는 아직도 살아 있느냐?" 전삼대는 흠칫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 청년 때문에 어지간히 심기가 불편해 있는 그였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인물에게서 그 작자가 거론되다니, 대체 이 무슨 사태란 말인가? 퍽! 무엇인가 날아와 그의 가슴을 때렸다. "우욱!"


전삼대는 혈기가 치밀어 올라 피를 왈칵 토해냈다.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눈앞에서 별이 오락가락할 지경이었다. "살, 살아 있습니다!" 고문을 가하는 데에 가히 이골이 나 있었으나 반대로 당해 보기는 처음인지라 그는 쑥맥처럼 굴었다. "몇 호냐? 그가 갇혀 있는 뇌옥은." "사십팔호......." 전삼대는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허리가 뜨끔하는가 싶자 이내 의식이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마치 아득한 나락으로 추락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새삼 자신이 고문을 가했던 그 청년을 떠올렸다. '대체 그 놈은 어떻게 버텼을까? 크큭... 대단한 놈.......' 뇌옥은 의외로 규모가 컸다. 오군도독부라 하면 병부상서의 아래이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 더욱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명조의 병마(兵馬)를 관장하고 있으니 실세를 거머쥔 셈이라고나 할까? 특히 치안(治安)이나 외침(外侵) 등의 전략적인 면에 있어서는 목소리를 한껏 높인들 황제도 이들을 함부로 제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곳의 뇌옥은 그 숫자만도 수백 개가 넘었고,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수많은 옥리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죄수들은 탈출이란 꿈도 꾸지 못한다. 만일 무모하게 이를 감행했다가는 죽음을 앞당기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는 바야흐로 이경(二更). 임무교대를 하기 위해 군사(軍舍)에서 일어난 아을이(阿乙二)은 먼저 측간으로 가 허리춤을 끌렀다. 그런데 채 물건을 내놓기도 전, 그는 허리가 따끔해 오는 것을 느꼈다. "아!" 아을이는 비명도 아니고, 신음도 아닌 묘한 음성을 발했다. 자신의 몸이 의지와는 관계없이 옆으로 스르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눈을 멀뚱멀뚱 뜬 채 밤하늘을 응시했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냐?' 이때, 싸늘한 음성이 그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오늘 밤 암호가 무엇이냐?" 아을이는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어렴풋이 지난 일을 떠올렸다. 그는 원래 우둔했다. 그리하여 자주 암호를 까먹곤 했는데, 한 번은 그로 인해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도록 얻어 터졌다. 때문에 그 이후로는 절대 암호를 잊지 않았으며, 그를 불쌍히 여긴 수비대장도 가끔씩 그 날의 암호를 상기시켜 주었다. 아을이는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헤헤... 이번에는 잊지 않았습니다. 오늘밤의 암호는 녹장지화(綠藏之畵)라고 하면 화중지병(畵中之餠)이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헤헤... 맞았지요?" 그의 어투는 영락없이 수비대장에게 고할 때의 그것이었다. "후후... 알겠다." 아을이가 들은 소리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무엇이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곧장 망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입고 있던 옷을 몽땅 빼앗겼으나 이 점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웬 늑장이야? 교대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 보초를 서던 한 병사가 안달이 난듯 소리쳤다. 그 앞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병사가 있었다. 몸집이 약간 왜소한 편인 그 자는 상대방을 향해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하이, 갑자기 볼 일이 있어서 그만......." "핑계는 관두고 빨리 암호나 대라." "녹장지화." "빌어먹을! 그림의 떡이다." 화중지병을 풀이하면 바로 그런 뜻이다. 병사는 그 말을 끝으로 열쇠꾸러미를 넘겨주고는 냅다 뛰어갔다. 그는 급했다. 친구들 몇몇이 벌써 기루에서 반반한 계집을 앞에 놓고 주무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염병할 놈! 늦어서 제일 못생긴 계집을 안게 되면 내 내일 아침에는 저 놈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테다.' 반면에 새로 보초를 서게 된 병사는 가슴을 쓸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가 이름을 물었으면 발각 되었을 텐데.' 그는 바로 아을이를 제압하고 옷을 벗겨 입은 자였다. 그가 사십팔호의 뇌옥을 찾는 데에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자물쇠를 따고 들어선 순간, 그는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뇌옥 안의 정경이 너무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한 청년이 피투성이가 된 채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진남호였다. '이럴 수가! 나 때문에.......' 괴인물의 눈에는 금새 눈물이 고였다. 그가 들어서는 기색을 알아 차렸는지 눈을 감고 있던 진남호가 슬며시 눈을 떴다. "후후후... 전삼대, 또 왔군. 그럼 다시 채찍을 휘둘러 보아라. 후후... 관부가 이렇듯 죄없는 사람을 잡아 들여 때리는 곳인 줄은 정말 몰랐다.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보자." "진형님......." 진남호는 부르는 소리에 말하다 말고 움찔했다. "아니, 자네는 반아우가 아닌가? 어떻게 여기를......?"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홱 치켜올렸다. 반희문 즉, 반희빈은 다급한 기색으로 소리를 죽여 대꾸했다. "아무 말 말고 잠시만 기다리시오. 내가 구해 드릴 테니." 그녀는 곧 품속으로부터 하나의 비수를 꺼내 휘둘렀다. 번쩍하고 빛이 스쳐가자 철삭은 거짓말처럼 매끄럽게 잘려 나갔다. 그녀의 손에는 한 자루의 푸른빛이 감도는 비수가 쥐어져 있는데, 그것은 쇠를 무우 자르듯 하는 천고의 보인(寶刃)이었다. 스스슷--! 비수는 점차로 진남호의 몸을 자유로 이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철삭이 모두 제거되자 반희빈은 선뜻 등을 내밀었다. "자, 업히시오." 조금 후면 다시 교대 시간이다. 반희빈으로서는 이것 저것 가릴 틈이 없었다. 이어 사내의 육중한 몸이 얹혀 오자 그녀는 무게보다는 가슴이 마구 요동을 쳐 더 힘이 들었다. 그녀가 진남호를 업고 막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다가오며 이 쪽을 향해 외쳤다. "녹장지화!" 반희빈은 망설이지 않고 즉시 답했다. "화중지병!" 동시에 그녀의 몸이 수직으로 솟구치더니 진남호의 체중을 싣고서도 단숨에 몇 개의 지붕을 뛰어


넘었다. "형님, 어디로 가겠소?" 반희빈은 그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데려다 줄 참이었다.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그만 가슴이 철렁하여 황급히 진남호를 등에서 내려 놓았다. "진형님!" 진남호는 기진한듯 혼절해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의식을 잃고 있는 그의 안색은 그야말로 백지장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아아......." 반희빈은 또 울었다. 그녀는 가슴이 도려내는듯 아팠을 뿐더러 그의 고통을 대신할 수만 있다면 설사 지옥불인들 마다하지 않을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있었다. '이 분이 죽는다면 나는.......' 그녀는 이를 악물더니 다시 진남호를 들쳐 업고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리는 방향이 전혀 달랐다. 그녀가 향하고 있는 곳은 바로 도독부의 안쪽, 깊숙한 위치였다. 잠시 후. 반희빈은 오군도독부 내에서도 유난히 담장이 낮은 한 별원에 당도했다. 그 곳은 다름 아닌 그녀의 처소였다. 51 장 삼성곡(三聖谷)으로 들어가다 "아앵, 따라 오너라." 진남호를 등에 업은 채 반희빈이 말했다. '맙소사! 해도 너무 하셨다, 이건.' 아앵은 자신이 혼절하지 않은 것이 차라리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반희빈의 엄숙한 표정을 보자 그녀는 명령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 폭발적인 면을 보이기는 했어도 지금처럼 무섭게 굳어있는 얼굴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앵은 내심 장탄식했다. '아아! 아가씨의 마음은 도저히 돌이킬 수가 없겠구나.' 이윽고 방에 들어서자 반희빈은 수건을 꺼내 진남호의 피묻은 얼굴을 닦아 주었다. "아앵, 가서 따뜻한 물을 떠 오너라." "네......." 돌아서 나가려는 아앵의 등 뒤로 차가운 음성이 떨어졌다. "아앵! 경고하거니와 또 다시 나를 실망시키면 그 때는 너를 보지 않겠어. 너도 이제 어느 정도는 나를 알 것이야. 그러니 이번 일까지 외부로 누설시키는 일은 없겠지?" 완강함이 깃든 반희빈의 표정과 음성에 그녀는 마치 최면에 라도 걸린양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곧이어 아앵은 넓직한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그 순간, 그녀는 방안이 환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간 사이에 반희빈은 어느 덧 화려한 궁장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아가씨가, 저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가씨가!' 아앵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런 차림으로 앉아 여전히 진남호의 상처와 땟자국을 닦아내고 있는 반희빈을 더 바라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굳어져 있는 그녀에게 반희빈이 말했다. "뭐하고 있는 거냐? 이리 가져 오지 않고." "네......." 아앵은 격정을 억누르며 얼른 물대야를 대령시켰다. 그리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해야 했던 일을 떠올렸다. '이런! 내 정신좀 봐. 아가씨께서 몸소 저런 일을 하시도록 놔두었다니.'


아앵은 얼른 진남호에게 다가섰다. "아가씨, 제가 할 테니 아가씨께서는 그런 험한 일일랑......." 그녀의 말은 반희빈에 의해 도중에서 끊겼다. "이것은 내가 할 일이다, 아앵." 아앵은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은 기세에 눌리기도 했지만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놀란 것은 손수 사내의 상처를 닦아 내고 있는 반희빈의 모습이었다. 그 얼굴에는 힘들다거나 끔직해 하는 기색은 커녕 오히려 흡족해 하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비록 사랑을 해본 일이 없는지라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아앵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천금소저인 반희빈이 이 무지막지해 뵈는 사내를 어느 정도로 좋아하고 있는지. '저 사내가 죽으면 따라 죽는다고 하시더니, 그 말이 이런 뜻이었나? 나는 자책 때문에 그러시는 줄 알았건만.......' 그녀는 소리를 죽여 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군도독부 내의 뇌옥에서 한 죄수가 탈출했다. 그러나 보고가 상부로 올라갔어도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사건은 그대로 어물쩡 넘어가 버렸다. 실상 도독부에서 죄수가 탈출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만치 뇌옥의 경비에 헛점이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사건은 허공에서 소멸되어 버리듯 흐지부지 종결이 되고 말았다. 진남호. 그는 반희빈의 정성 어린 간호 덕분에 빠른 속도로 건강을 되찾아 갔다. 이제는 제법 운신도 가능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연일 찌푸려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묘봉산 일대를 제 집처럼 휘젓고 다니던 위인이 갑자기 방안에 갇혀 죽치고 있자니 갑갑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불편한 것은 반희빈의 지나친 호의였다. 음식을 먹여 준다, 시중을 들어 준다 하여 그녀는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옷도 그녀의 손에 의해 갈아 입혀졌다. "대체 여기가 어디며, 또 당신은 누구요?" 이것은 진남호가 정신을 되찾았을 때, 처음 물은 말이었다. 그리고 반희빈은 생긋 웃으며 태연하게 응수했다. "전 반희빈이라고 해요." "반희빈?" 진일문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그대는 내가 아우로 삼았던 희문과 무척이나 닮았군. 거의 똑같다 싶을 정도야." "그야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 분은 제 오라버니인 걸요." 진일문은 미간을 잔뜩 구겼다. "희문은 어디 있소? 그가 나를 구해 주었는데......?" 반희빈은 그가 속아넘어가 주자 내심 안도했다. "오라버니는 일이 있어서 진가가(陣哥哥)를 제게 맡기고 떠나셨어요. 회복하실 때까지 잘 돌보아 드리라고요." "가가라고? 날더러?" 진남호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가가란 사실 연인 사이가 아니고는 부를 수 없는 호칭이다. 하지만 아무리 놀랐기로서니 그의 이런 반응은 반희빈으로 하여금 얼굴을 붉히게 했다.


민망해져 버린 그녀는 얼른 변명을 했다. "오라버니가 특별히 부탁을 하셔서 저로서는 당신을 간호해 드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러니 마음 편하게 당신의 집이라 여기시고 지내세요. 여기는 제 방이니까요." 그러나 그 말은 역효과를 보였다. "내, 내가 그럼 여인의 방에서 지내야 한단 말이오?" 덕분에 반희빈과 진남호는 다 같이 머쓱해지고 말았다. 반희빈. 그녀는 바로 그런 진남호를 사랑하고 있었다. 너무 진솔해서 이렇듯 종종 자신을 당혹에 빠뜨리기도 했지만 그것은 여느 귀공자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소중한 일면이었다. 뭐랄까? 그들의 위선적인 면에 대해 줄곧 혐오감을 가졌던 그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청신하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마침내 진남호도 더 참지 못하고 심경을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누이, 나는 빨리 묘봉산으로 돌아가고 싶소. 아무래도 이런 곳은 내 체질에 맞지 않소." 반희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안색을 굳혔다. "진가가는 이 곳이 어디인지 아세요?" "당신의 방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래요. 또한 오군도독부 안이기도 하구요. 대명(大明)의 병마를 관장하는 최고 기관이란 말이에요. 가가는 바로 오군도독부의 감옥에 갇혔다가 나온 거예요." 진남호가 이번에는 얼굴을 굳히며 반문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오군도독부의 감옥에 갇혀 있었단 말이오?" 반희빈은 탄식 하며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오라버니 때문이에요." "희문 아우? 그 사람이 뭘 어쨌다는 것이오?" 반희빈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진남호에게 그녀가 가장 미안하게 생각했던 부분, 즉 신분의 차이를 스스로의 입으로 말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 그녀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으나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 그 내용은 그녀가 즉흥적으로 꾸며낸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본래의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오라버니는 관부의 촉망을 받고 있는 인물이지요. 장차 아버님을 이어 큰 몫을 해야 할 입장이었어요. 그러나 관부에는 아무나 오르는 것이 아니므로 문무겸전은 필수적인 조건이지요. 그 전까지 오라버니는 잠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열심히 공부를 했었는데, 진가가를 만나면서부터는 등한히 하여......." 진남호가 노한 음성으로 그 말을 가로챘다. "결국 나 때문에 반아우가 공부를 그르쳤단 말이로군? 그래서 나는 이 꼴을 당한 것이고!" 그의 입가에는 한 가닥 자조가 드리워졌다. "정녕 재미있는 일이구려. 후후... 사람이 사람을 사귀는 것도 죄가 된다니 말이오." 반희빈은 가슴이 쓰려오는 것을 참으며 겨우 대답했다. "그래요, 세상에는 출신성분을 따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진남호의 짙은 눈썹이 불쑥 치켜 올라갔다. "내 그래서 본시 고귀한 위인들과는 상대하려 하지 않으려 했었소. 그런데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이번에는 반희빈이 노기를 띄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최소한 저와 오라버니만은 가가를 진심으로 대했어요." 진남호는 움찔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건 맞소. 확실히 반아우와 누이는 내게 잘 해 주었소. 세상의 관리들이 모두 그러하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지만." 그는 침울한 얼굴로 덧붙여 말했다. "아무튼 대도독 나리께서 누이와 희문의 부친이시니 나는 꼭 닭 ㅉ던 개 꼴이 되어 버렸군. 후후... 그럼 나는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친구를 잃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져 버렸으니 영락 없는 결박 당한 신세가 되지 않았소?" 진남호의 한탄은 대번에 반희빈을 격동으로 몰고 갔다. "가가......." 그녀는 말할 수 없는 자책에 휩쓸리며 자신도 모르게 진남호의 품에 몸을 던졌다. 뜻밖인 것은 진남호의 반응이었다. 그는 나긋한 여인의 몸이 안겨 들자 흠칫하더니 그녀를 밀었다. "가가, 왜......?" 반희빈은 충격을 받은듯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이런 모욕은 난생 처음이었다. 미소 한 번에도 인색했던 그녀가 자청하여 안겼는데도 진남호는 되려 그녀를 밀어낸 것이었다. 그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희문 아우를 잃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오. 어차피 우리는 신분이 다른 사람이니 피차에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나중에 또 마음이나 다치고 말지, 별 수 있겠소?" 반희빈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무지할지는 몰라도 상대에 에 대한 배려만은 누구보다도 지극한 위인이라는 것을. 실상 진남호라는 인물은 그녀의 판단 기준으로 볼 때 가장 남자다운 남자였다. 완벽한 그녀가 바라던 이상형, 즉 교활하지 않으며 변심할 줄 모르고, 또 매사에 초지일관한 데다가 타고난 도량까지 갖추고 있는 남자....... 반희빈은 이런 남자가 눈앞에 앉아 있다는 사���이 꿈만 같았다. 더우기 간호를 하는 동안 그녀는 무수히 그의 맨살과 접했으며, 그 과정을 통해 그와 자연스럽게 가까와져 있었다. 반희빈은 가슴이 벅차 오른 나머지 내심 중얼거렸다. '이 분은 단지 좋은 여건에서 자라나지 못했을 뿐이다. 만일 이 분에게 새로운 환경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녀의 눈이 불현듯 이채를 발했다. 이어 그녀의 입가에는 모종의 의미가 담긴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바보 같은 진가가." 느닷없이 튀어 나온 그녀의 말에 진남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곧 그는 탄식을 불어냈다. "그렇소, 나는 바보요." "정말 바보가 틀림 없군요. 자신이 왜 바보인 줄도 모르는 그런 바보란 말이에요." "흐음?" 멍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반희빈은 와락 달려 들었다. 이번에는 안긴 것이 아니라 그의 목을 얼싸 안고는 입술을 맞추었다. "읍!" 얼떨결에 입술을 도난 당한 진남호는 괴상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피하지는 않았다. 그도 남자다. 그는 반희빈의 입술을 세차게 빨아 들이는 한편 휘감겨 오는 여체를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입술과 입술이, 혀와 혀가 얽히며 남과 여의 본능은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장벽이 비로소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두 남녀는 그렇게 한 몸이 된 채 오랫 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 한 순간이 영원이기를 바라는 그들은 서로의 입술을 탐닉하며 황홀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한참 후에야 두 사람의 입술이 떼어졌다. 반희빈은 여전히 진남호에게 안긴 채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보며 속삭였다. "알겠어요? 내 진심을......?"


서늘한 빛을 발하는 진남호의 눈이 그녀를 정시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군. 어쩌면 반아우보다 더." "호호... 오라버니가 들으면 화를 내겠군요." 두 사람의 입술은 다시 부딪쳤다. 최후의 선까지는 넘지 않았으나 그들은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무릇 인간의 육체란 사랑을 표현하는 훌륭한 도구다. 그들은 그것을 십분 활용하여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외인이 들어올 수 없는 은밀한 곳, 즉 반희빈의 규방에서 그들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서로에게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조용한 침입자(?)가 있었다. '아!' 아앵이었다. 그녀는 차를 끓여 가지고 왔다가 방안에서 벌어진 광경을 목도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전처럼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다만가슴이 마구 쿵쾅거려 내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다행이야. 문을 살짝 열어서.' 그녀는 될수록 빨리 돌아서 나가고 싶었으나 어찌된 셈인지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몹시도 당황했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나름의 용인(容認)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진남호에 대한 반희빈의 마음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아앵은 이미 항거를 포기했었다. 다만 그때까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진남호가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에 비해 너무 격이 떨어지지 않나 싶은 아쉬움 뿐이었다. 하지만 그 면에 있어서도 아앵은 점차 시간이 흐르자 자신과 타협을 보고 있었다. 마치 산짐승처럼 보이던 사내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묘한 매력을 가지고 심중에 부딪쳐 왔던 것이다. 이제 아앵은 진남호가 무섭기는 커녕 그를 대하면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진남호에게서 난생 처음으로 남자를 느낀 것이었다. 그리고 반희빈과 그가 한몸을 이루며 입술을 나누는 광경에 아앵이 흥분한 것도 따지고 보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었다. 중원의 법도상 시비는 항상 주인과 마음까지도 같이 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녀는 반희빈이 느끼는 감동과 희열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단지 아앵은 무척이나 부끄러웠는데, 이는 그녀가 남녀의 육체적인 언어에 대해 너무도 무식(?)했기 때문이었다. '아! 내가 왜 이럴까?' 아앵은 총총걸음으로 반희빈의 처소를 벗어나며 중얼거렸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자신이 찻잔을 방안에 놓지 않고 도로 들고 나와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날 이후로 아앵은 사람이 달라져 버렸다. 걸음도 전처럼 빨리 걷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다소곳 하게 낮추어져 있었다. 심지어 크게 웃는 법도 없었다. 이렇듯 갑작스럽게 요조숙녀로 변해 버린 아앵에게 오죽하면 반희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은 적도 있었다. "아앵, 왜 그래? 너 어디 아프니?" "진형님, 죄송하외다. 소제 때문에......." 반희빈. 그녀는 지금 반희문이라는 가공의 인물이 되어 진남호와 마주 하고 있었다. 장소는 여전히 자신의


처소였고, 그녀의 남장(男裝)은 늘 그렇듯 썩 잘 어울렸다. "되었네. 이미 지난 일인 걸." 진남호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을 따름이다. 반희빈이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 동안 누이가 잘 보살펴 주었소?" 진남호는 히죽 웃었다. "너무 잘 보살펴 주어서 황송할 지경이네." 반희빈이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확인이라도 하듯 궁금해 하는 얼굴을 가장하여 다시 물었다. "그래, 어떻게 해 주었길래 형님이 황송하다는 것이오?" 진남호는 꽤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리며 대꾸했다. "미안하지만 그것까지는 말해 줄 수가 없네. 하여튼 나는 그 동안 무릉도원에서 산 기분이네." 무릉도원이라는 표현에 반희빈은 비로소 얼굴을 붉혔다. 그 말인즉 노골적으로 두 사람이 나누었던 사랑의 밀어와 여러 가지 행위들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색한 나머지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그간 소제는 형님을 위해 한 가지 일을 알아 보고 왔소." "나를 위해?" 진남호는 눈을 크게 떴다. "형님은 이제 산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으니 달리 갈 곳이 있어야 하지 않소이까? 그래서 소제가 형님을 한 곳에 소개할까 하는데, 어떻소?" 진남호의 눈에 언뜻 기광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찰나적인 현상으로써 반희빈은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형님은 선천적으로 근골이 뛰어난 데다가 몸이 날렵해 무공을 익힌다면 장차 대성(大成)할 것입니다. 한 분 고인(高人)을 형님께 소개해 드리겠소." 진남호는 고개를 갸웃 했다. "무공이라면 칼을 쓰는 것 말인가?" 그는 사실 사냥 솜씨가 탁월하며 칼 다루는 법에도 일가견이 있어 웬만한 병사들이라면 한꺼번에 십여 명도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강호에 나가면 아주 초보적인 수법에 불과했다. 반희빈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설명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강호 상에는 상승의 무학이라는 것이 있소이다. 그것을 익힌 기인(奇人)들은 하늘을 날고, 손에서 강한 기운을 뻗어내 바위를 깨며, 검 한 자루로 백보 밖에 있는 사람의 목을 따기도 하지요." 진남호는 진지하게 응수했다. "나도 그런 세계가 있다는 말은 들었네만 이제껏 호기심만 가졌을 뿐이지, 어디 내 주제에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반희빈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시오. 사실 강호에 나가면 신분보다는 실력이 우선이외다. 그러니 어쩌면 형님도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묘봉산이 아니라 천하를 주름잡게 될지도 모르오." 이것은 그녀의 진심이자 희망이기도 했다. 그것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어느새 그녀의 눈에는 기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소제 장담하오만, 형님 정도라면 일 년 안에 그들과 똑같은 기인의 대열에 설 수 있게 될 것이오." 진남호는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더듬거렸다. "내게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후후... 밑져야 본전 아니오? 형님께서는 속는 셈 치고 일단 소제의 말을 따라 주십시오." 진남호는 잠시 고심을 하는 것 같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내 아우의 부탁이니 가보기는 하겠네만, 내게 소개시켜 준다는 그 사람은 누구지?" 반희빈은 문득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오. 형님은 아무에게도 이런 말을 해선 안되오. 자칫하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니까." 그녀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마저 일고 있었다. 진남호의 눈 속에서 또 다시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야!' 반면에 반희빈은 음성을 한껏 낮추어 열심히 무엇인가를 말했다. 그녀의 음성이 워낙 작은지라 진남호는 귀를 그녀의 입가에 바짝 들이댄 채 듣고 있었다. 진남호의 안색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그것은 그로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숭산(嵩山). 중원인 치고 이 산을 모르는 자는 없다. 중원오악(中原五嶽) 중에서도 으뜸인 중악(中嶽)에 해당 되었고, 이 곳에는 고래(古來)의 유적들이 무수히 산재해 있었다. 저 유명한 소림사도 바로 이 곳에 있었다. 또한 소실봉(少室峰)과 태실봉(太室峰)이 마주하며 수려한 풍광을 이루어 냈고, 산세의 웅장함은 시인묵객들로 하여금 수많은 시사(詩詞)를 남기게 하기도 했다. 숭산의 양봉 사이에는 하나의 계곡이 있었다. 본래의 이름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으나 당대에 이르러 삼성곡(三聖谷)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널리 알려진 곳이다. 삼성곡은 성지(聖地)다. 마교지존인 동방절호를 물리치고 중원을 구한 삼천공(三天公)이 은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삼성곡을 모르는 자는 무림인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삼성곡은 거의 요새화 되었다. 그것은 삼성림이 마교의 후신인 일월맹과 곳곳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불가피한 노릇이었다. 삼성곡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소림사가 있다. 하지만 삼성림과 소림사는 요즘 내왕이 전혀 없었다. 중원의 명문대파들과 삼성림 사이의 알력은 어느덧 구체화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림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이는 삼성곡의 곡구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석비만 보아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석비에는 삼천공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곳은 이전부터 관례화 된 하마지(下馬地)였다. 그 관례는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져 지금까지도 버젓하게 시행 중이었다. 정오 무렵. 삼성곡의 곡구에 한 명의 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석비 앞에서 잠시 비문을 훑어 보더니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진입하자 길이 좁아지는가 싶더니 그의 눈에 한 채의 정자가 들어왔다. 정자의 편액에는 삼성정(三聖亭)이라는 글씨가 용비봉무의 웅휘한 필치로 양각되어 있었다. 정자 안에는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운치 있는 다탁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 의자에는 일신에 화복(華服)을 입은 한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정자 아래 쪽에는 경장(輕裝) 차림을 한 여덟 명의 청년무인들이 정자를 중심으로 날개 형상의 진을 치고 있어 몹시도 위엄이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청년은 아무 거리낌 없이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무기도 휴대하지 않았으며 언뜻 보아서는 무림인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다소 투박해 보이는 용모에 입고 있는 옷 또한 평범한 청삼이었다. "서시오!" 여덟 명의 무사 가운데 한 명이 청년에게 말했다. 그 자는 눈빛이 형형하여 일견하기에도 내외공을 겸비한 인물 같았다.


"명첩을 내 보이고 방문목적을 밝히시오." 이것은 앞서의 하마지와 마찬가지로 역시 관례였다. 삼성곡을 방문하는 인물은 여하한 신분을 막론하고 이 곳 정자에서 일단 정체를 밝히고 허락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청년은 자못 흥미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여기가 그 유명한 삼성곡이오?" 무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렇소. 어떻게 왔소?" "곡주를 만나러 왔소이다." 상대하던 무사는 물론이려니와 정자 안에서 장부를 펼쳐 놓고 있던 중년화복인도 흠칫하는 표정을 보였다. 이 곳에서 그런 투로 말하는 사람은 이제껏 전무했기 때문이다. 삼성곡의 곡주라면 의당 삼천공이다. 그러나 그들은 은거한지가 이미 수십 년이 넘었으므로 현재 곡주로 지칭될 수 있는 인물이란 뻔했다. 삼천공의 구대제자 가운데 대제자이자 광명총궁(光明總宮)의 궁주인 화개악, 바로 그였다. 그런데 웬 무지하게 생긴 젊은이가 화개악을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광명궁주 화개악은 명실상부한 삼성림의 총수(總首)다. 구대성군(九大星君)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며 천하무림인이 모두 두려워 하는 일대의 기인이었다. 탐랑성군, 또는 제성(帝星)이라는 명호로도 불리우는 화개악, 그를 찾아 왔다는 청년은 대체 누구인가? "흐음, 자네가 진남호라는 인물인가?" 탐랑성군 화개악은 매우 걸출하면서도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일신에는 번쩍이는 금포(錦袍)를 입고 있었으며, 단정하게 자란 수염을 가슴까지 길게 늘어 뜨리고 있었다. 그는 태사의에 앉은 채 청년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소이다. 소생이 바로 진남호요." 진남호, 아니 진일문은 이 순간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원수일지도 모르는 자와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된 것이었다. 반희빈이 소개시켜 주겠다던 그 기인이 바로 화개악이었다. 이는 실로 엄청난 변수였다. 진일문조차도 설마하니 그녀가 지목한 자가 화개악이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진일문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끊임없이 생각해 보았다. 대체 반희빈과 화개악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그러나 그는 끝내 이를 알아내지 못했고, 직접 부딪쳐 보는 수 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 단정짓기에 이르렀다. 탐랑성군 화개악. 진일문을 응시하던 그의 눈에 얼핏 감탄이 스쳤다. "음, 과연 훌륭한 근골을 가지고 있군." 그는 이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이리 가까이 와 보게, 젊은이." 진일문은 내심 의아했으나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그가 다가서자 화개악이 재빨리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것은 겉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동작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진일문은 그것이 천하의 어떤 수법보다도 완벽한 금나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찰나적으로 그 수법을 파해할 방안을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윽! 이, 이게 웬 조화요?" 그는 심중을 감춘 채 비명을 질렀다. 맥문으로부터 불처럼 뜨거운 기운이 대하처럼 쏟아져 들어오니 걸맞는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그의 이마���는 금새 굵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지독히도 의심이 많은 작자로군!' 진일문은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상태에서도 화개악은 계속 진기를 그의 맥문으로 흘려 넣고 있었다. 이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진일문으로서는 고역도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마치 뜨거운 불꼬챙이가 전신의 혈맥을 따라 달리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물론 진일문의 인내는 이보다 더한 고통이라도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화개악에게 시험을 당하는 처지이니 어쩌겠는가? "우우우......." 진일문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눈을 까뒤집으며 짐승같은 신음을 발했다. 우직한 사냥꾼인 진남호로 보여야 했으므로. 와중에 그는 진기를 역(逆)으로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방법은 뇌정심법(雷霆心法)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써 정상적인 유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시험자로 하여금 능히 체내에 진기가 한 방울도 없는 것처럼 느끼게 할 수 있었다. 잠시 후. 화개악은 손을 놓아 주었다. "허허... 미안하네. 노부가 잠시 자네의 재질을 살피기 위해서 손을 쓴 것이니 오해는 하지 말게." 그는 쓴 입맛을 다셨다. 진일문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자 그는 오히려 가벼운 실망을 느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쓸만한 근골을 가졌다고는 하나 이미 상승무학을 익히기에는 늦었거늘, 어찌 하여 공주(公主)가 그토록 기대를 걸고 있단 말인가?' 화개악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느 때부터인가 명령만 하면서 살아온 그로서는 심히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진일문에 대해 미리 한 통의 편지를 전해 받았는데, 거기에 적혀 있던 모종의 부탁으로 인해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더구나 그것은 일대 모험을 종용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화개악에게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부탁이건 명령이건 그는 소위 공주가 원하는 일이라면 절대로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화개악이 보인 일련의 심리현상은 실로 기이했다. 천하를 휘두르는 광명총궁의 궁주 화개악에게도 고심을 해야 할 일이 있다니, 또 그가 말하는 공주란 대체 누구인가? 화개악은 청년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하게. 먼길을 와 피곤할테니." 진일문은 퉁명스럽게 그 말을 받았다. "소생은 피곤하지 않소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곳에 무공을 배우러 왔지, 쉬러 온 것이 아니오." '그나마 철부지로군.' 화개악은 다소 차갑게 말했다. "무공이란 본시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네. 나를 재촉할 생각은 버리게. 자네가 아무리 공주의 총애를 받고 있다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네." 사뭇 위엄 어린 힐난이었다. 그러나 진일문은 이를 전혀 개의치 않고 나오는대로 내뱉았다. "나는 그런 것은 모르오. 공주가 누구인지도 모르며 목적이 있어 왔으니 하루 빨리 달성하고자 하는 것 뿐이오." 이렇듯 오만방자한 그의 태도는 진남호라는 인물을 의식한 것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는 의도적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에게는 화개악을 존중해 주어야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개악의 얼굴에는 은은한 분노가 드리워졌다. "경고하겠네.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는 것이 좋을 걸세. 노부라고 해서 항상 공주의 체면을 돌볼 수만은 없으니까." 진일문은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심중에서 치밀어 오르는 여러 가지 의문들이 그의 뇌리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공주라니? 설마 하니 반희빈은 아니겠고, 그렇다면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 또 이 자와 반희빈은 어떤 관계일까?' 한편. 진일문이 대꾸하지 않자 화개악은 이를 수긍으로 받아 들였는지 안색을 풀었다. 그는 짐짓 타이르듯이 말했다. "내 자네에게는 공주의 당부대로 무학을 익히도록 손을 쓸 것이네. 하지만 입문이 너무 늦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네.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는." "후후... 얼마나 대단한 모험인지는 몰라도 소생은 원래 두려움 따위는 일체 모르는 사람이오." "핫핫핫! 용기 하나는 가상하군. 하긴, 그래서 공주의 환심을 샀는지도 모르지." 그의 말에는 조롱이 다분히 깃들어 있었다. 진일문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까부터 자꾸 공주, 공주하는데 그게 대체 누구요?" 화개악은 비로소 흠칫 했다. '이 녀석은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무슨 저의로든 공주가 말하지 않은 이상 노부 역시도 알려 줄 필요가 없겠지.' 그는 허공을 향해 껄껄 웃었다. "향후로 알게 될 날이 있을 걸세. 허허... 자네는 스스로가 행운아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되네."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진일문은 삼성곡 내를 자유롭게 나다닐 수가 있었다. 아무도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그는 갖가지 상황들을 눈여겨 보아 두었다. 이 곳을 달리 삼성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마도 곡 전체가 짙은 숲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관목림이 주종이었는데, 그 숲 사이로 여기저기 건물이 흩어져 있었다. 삼성림에 대해 외부로 알려진 것들이란 실상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나마 과거 칠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이 곳에서 구대성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로 외부인들의 출입은 꼭 필요한 상황 외에는 거의 끊겨 버린 상태였다. 삼성곡에는 이백여 명 정도의 인원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진일문에게 공대했다. 사전에 무슨 말을 들었는지 마주치면 의례 길을 비켜 주거나 먼저 공수를 하곤 했다. 진일문은 그들이 모두 일류고수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걸음걸이나 눈빛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삼성림의 조직은 화개악이 이끄는 광명총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광명궁이 산하에 사대궁을 두고 임의로 부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과거 삼성림에는 구대궁이 존재하고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광명궁을 포함해 오대궁밖에 없었다. 그것은 물론 무곡성군 왕중헌의 잠룡궁과 문곡성군의 신조궁, 그리고 거문성군의 칠기궁, 좌보성군의 태양궁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작금의 삼성림이라 명명하는 단체는 광명궁, 혈궁, 현음궁, 회천궁, 비월궁 등의 오대궁일 따름이었다. 사흘이라는 기간 동안 진일문은 대개의 시간을 안내된 별원에서 얌전히(?) 보냈다. 책을 읽고 것도 아니요, 그저 빈둥거리며 소일했던 것이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따라서 그가 어디를 기웃거리던 관심을 두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이런 표면적인 현상을 이용해 그는 삼성곡에 두 곳의 금지구역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일문은 귀빈으로 우대를 받고 있었으므로 어디라도 마음대로 갈 수 있었는데, 유독 그 두 곳만은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그중 한 장소가 바로 그 유명한 무천비동(無天秘洞)이었다. '무천비동, 이른바 삼천공(三天公)이 폐관해 있다는 곳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이하게도 폐관한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나오지 않고 있다. 출입을 통제하는 것은 단지 그 때문일까? 아니면 혹 뭔가 알릴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닌지?' 진일문이 의혹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사실 이런 의혹은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 무림인 거개가 느끼는 것이기도 했다. 삼천공이 무천비동에 입동한지는 이미 이십여 년이 넘었다. 그러나 심지어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아니면 우화(羽化)했는지조차도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른 한 곳은 무천비동의 반대쪽이다. 그런데 그 곳은 또 어찌 하여 출입을 통제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뚝 끊긴 절벽에 대체 무엇이 있길래?' 진일문이 느끼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의 차원이 아니었다. 어렵사리 삼성림에 잠입해 들어온 이상 그로서는 하찮은 것일지라도 놓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마침내 그는 직접 움직여 보기로 결정했다. 52 장 삼성림(三聖林)의 이대금역(二大禁域) 무천비동(無天秘洞). 깎아지른 듯한 석벽의 한 가운데에 뚫려 있는 동굴이다. 과거 에는 선승(仙僧)들이 참오하기 위해 수 년, 혹은 수십 년 간에 걸쳐 면벽을 하던 곳이었다. 스슷! 한 줄기 경미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나 그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한 가닥 인영이 스쳐 지나간 후였다. 무천비동의 입구에는 자의를 걸친 두 명의 무인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소용 없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감도 잡지 못한 채 그저 눈을 멀거니 뜨고 있을 따름이었다. 진일문. 그는 흡사 유령과도 같이 비동의 입구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발휘한 신법은 이른바 천마행공과 환환표묘신법이 혼합되어 있었는데, 후자의 것은 개방 비전의 경신술로써 주서혜로부터 그것을 전수받았다. 무천비동은 단단한 암벽에 수평으로 뚫려 있었으며 그 구조 또한 아주 단순했다. 대략 사오장쯤 들어가자 막바로 한 칸의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의 입구에는 두 명의 노인이 마주 앉아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진일문은 내심 짚히는 바가 있었다. '으음, 이 자들은 아마도 문을 지키는 자들인가 보구나. 저 안 쪽에 필시 삼천공이 있겠군.' 그들 두 노인이 각기 장기수에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그는 또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고는 아연해졌다. 쇠로 된 석실의 문에는 놀랍게도 커다란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다. '이럴 수가! 뇌옥도 아니거늘, 어찌하여 저렇듯 철저하게 폐쇄해 놓았단 말인가? 그렇다면 당년에 삼천공은 자발적으로 폐관한 것이 아니었던가?' 삼천공의 존재는 무림인들에게 있어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들의 비중이란 아직도 가히 절대적이다. 만일 그들이 감금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리라!' 진일문은 마음을 단단히 다지며 석실의 입구로 다가갔다. 두 노인은 그 때까지도 장기판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진일문이 면전에 이르자 그들은 똑같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누구냐?" 오른쪽의 청의노인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진일문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담담하게 응수했다. "소생은 볼 일이 있어 왔을 뿐이외다. 저 철문의 열쇠는 두 분 중 누가 가지고 계시오?" 이번에는 왼쪽의 홍의노인이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 올 수 있었지? 밖에서 제지를 받지 않았었느냐?" 진일문은 빙긋 웃었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소이다." 청의노인이 몸을 일으키더니 꽤 정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궁주님의 명을 받고 왔소?" 진일문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누구의 명도 받지 않았소이다. 그저 내가 오고 싶어서 왔으니, 또한 가고 싶을 때 가면 되지 않겠소?" "뭣이?" 두 노인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들은 뒤늦게야 태연하게 걸어 들어온 자가 침입자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하지만 그들의 경각은 벌써 그 시효를 놓치고 있었다. 진일문의 입에서 기소가 흘러 나왔다. "후후... 두 분께선 두던 장기나 마저 두시오." 스슷! 그의 신형은 두 노인의 눈 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어엇?" 두 노인은 눈을 크게 떴으나 더는 무엇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로 말하자면 광명궁에서도 일류급의 고수들이었다. 일신에 지닌 무공 또한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고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파랗게 젊은 청년에게 꼼짝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그들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최소한 자신들이 이런 경우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차장(車將)이오!" 문득 허공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 왔다. 이와 동시에 과연 차(車)가 움직이더니 왕(王)을 위협해 갔다. 이르자면 장기판의 말이 저절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노인의 안색은 무참할 정도로 일그러지고 말았다. 홍의노인이 천정을 향해 쌍장을 날렸다. "이 놈!" 그는 어느 새 천정에 거미처럼 달라붙어 있는 진일문을 발견해낸 것이었다. 그의 쌍장에서 붉은 기운이 쭉 뻗어 나갔다. 그것은 바로 마도의 악독한 음공인 홍살장(紅殺掌)이었다. "후후... 차장을 받지 않으니 할 수 없이 왕을 취하겠소." 웃음 소리에 이어 장기판에 놓여 있던 왕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 뿐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처참했다. "크헉!" 비명이 터졌다. 그것은 왕이 쏜살 같이 날아가 홍의노인의 배심혈(背心穴)에 박혀 버렸기 때문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공격에 홍의노인은 미처 피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적중 당하고 말았다. 더욱이 그는 온 신경을 천정에 집중시키고 있었으므로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후후후... 이제 상장(象將)이외다." 또다시 예의 음성이 들려 왔다. "으음......." 혼자 남게 된 청의노인은 신음을 흘리며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장기판으로 향했다. 앞서 홍의노인이 당한 예를 똑똑히 본지라 그로서는 의당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장기판의 말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홍의노인은 비로소 속았다는 것을 알고는 급히 신형을 날렸다. 그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상대의 기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연이은 판단착오는 엄청난 사태를 몰고 왔다. "후후후... 당신의 왕도 취해야겠구려." 바로 등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리자 홍의노인은 질겁을 했다. 동시에 그는 몸을 빙글 돌렸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핑--! 장기알이 그의 이마를 향해 날아 들었다. "어림 없다!" 홍의노인은 미리 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머리를 옆으로 틀어 간단히 이를 피해 버렸다. 장기알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교활한 놈! 어디 다른 수가 있으면 써 봐......."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그의 입이 다물렸다가 쩍 벌어졌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는데, 눈알이 앞으로 툭 튀어 나온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크윽!" 홍의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뒤통수에는 놀랍게도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피했다고 생각했던 장기알이 되돌아와 그의 뒤통수를 꿰뚫어 버렸던 것이다. 열쇠는 바로 홍의노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다. 진일문은 그 열쇠를 취하며 나직히 중얼거렸다. "당신들의 무공이 평범한 것인지, 아니면 내 무공이 급증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려." 그는 겨우 장기알 두 개로 기세가 드높았던 두 노인들을 제거하게 되자 일면으로는 무척 놀라고 있었다. 사실 그가 사용한 수법은 강호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암기술에 진기를 가해 중도에 방향��� 틀어지도록 유도한 것으로써 사천당가(四川唐家)의 인물들이나 구사해 낼 수가 있었다. 소위 만류귀종이라고나 할까? 일신의 무학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보니 이렇듯 가끔씩은 유래가 있는 독특한 수법들을 굳이 배우지 않아도 임의로 펼쳐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는 최근 들어 자신의 무공이 발전을 더해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특히 뇌정도를 익힌 이후로 두드러지게 된 현상이다. 뇌정심법 자체가 원래 진기를 역으로 돌리되 그 대신 진원지기의 수십 배에 해당되는 잠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었다. 내력의 소모가 극심하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이로 인해 무도(武道)에 대한 그의 눈은 크게 떠져 있었다. 바로 대해(大海)로 나간즉 어획량이 풍부하더라는 그 이치였다. 이윽고 열쇠를 꽂고 두 바퀴 돌리자 자물쇠가 열렸다. 진일문은 철문을 밀고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코를 찌르는 퀘퀘한 냄새였다. 그리고.......

캄캄했다. 석실 안은 그야말로 손가락을 코앞에 갖다 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마치 태초의 암흑이 고여 있는 듯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으음.... 이 속에 과연?' 내공을 일으켜 안력을 높이자 어슴푸레하게 시야가 트였다. 그 순간, 진일문은 흠칫했다. 이렇다할 장식 하나 없는 장방형의 쓸쓸한 공간에 화석(化石)이 되어 버린 듯한 삼인(三人)이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지 그들 삼인은 흡사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입고 있는 의복도 얼마나 낡았던지 약간만 건드리면 바스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 광경에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긴 탄식을 불어냈다. "아아! 역시 세 분께서는 벌써 오래 전에 우화하셨었구나." 그 삼인이 무림 삼천공이라는 것은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으므로. 걷잡을 수 없는 비감(悲感)이 일순 진일문의 가슴을 쳤다. 삼천공은 명실공히 무림의 구성(救星)이다. 그런데 지금의 그들은 이 적막한 무천비동에서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다. 정녕 인생무상이라는 어휘가 충격이 되어 부딪쳐 오는 순간이었다. 진일문은 그런 느낌을 갖게 되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무림 말학 진일문, 세 분 노선배의 유체를 뵈옵니다." 감정이 동요를 일으킨 탓인지 그의 음성은 다소 떨려 나왔다.그가 막 절을 마치고 일어서려 할 때였다. "아이야, 너는 누구의 문하이길래 이 곳에 들어 왔느냐?" 담담한 가운데 위엄이 서린 음성이 들려 왔다. "아! 이 소리는......?" 진일문은 아연한 얼굴로 새삼 주위를 둘러 보았다. 분명 석실 안에는 그 자신과 세 구의 시신 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그 음성은 대체 어디서 들려 온 것이란 말인가? 세 구의 시신은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석벽을 향하고 앉아 있는 그들이 말을 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진일문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물었다. "방금 어떤 분이 소생에게 말씀하셨소?" 예의 음성이 다시 석실 안을 울렸다. "아이야, 노부는 바로 네 앞에 있느니라." "그럼......?" 진일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음성은 바로 세 구의 시신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의 눈에서 격한 파랑이 일었다. '저 분들이 살아 계셨단 말인가?' 이 때, 마치 그의 심중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듯 다시 음성이 들려 왔다. "허허... 그렇게 놀랄 것 없다. 보다시피 우리는 죽은 사람들이다. 너는 지금 우리의 영혼(靈魂)과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진일문은 전율을 일으키는 한편 직선적으로 물었다. "후배, 우둔한 탓인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음성은 산 자의 그것처럼 자애로운 기운마저 띄었다. "허허... 물론 이 현상은 세속인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야, 너는 네 기준으로 볼 때 과연 세상사는 다 납득하고 있노라고 자부할 수 있느냐?" 가히 선문(禪門)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진일문은 그제서야 의혹을 걷어 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노선배께서는 삼천공 중 한 분이 틀림없으시군요." "그렇단다. 아이야, 너는 만상(萬相)이라는 별호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 노부가 바로 만상군자(萬相君子)니라." "오오!" 진일문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반면에 만상군자는 여전히 침착한 음성을 전해 왔다. "우리는 십 년 전에 스스로 육신을 파쇄시켰다. 지금 너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세 늙은이가 영혼을 하나로 묶어 놓은 채 누군가 이 곳에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굳어져 있는 진일문에게 만상군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아이야, 너는 지금 우리의 몸을 건드려 보겠느냐?" 진일문은 그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심중에 남아 있던의구심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손을 내민 것은 어쩌면 그런 심정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는지도 몰랐다. 그의 손이 우측의 인물에게 가 닿았다. 그러자 시신은 삽시에 가루로 화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옷은 물론이려니와 뼈와 살까지도 완전히 분해되어 버린 것이었다. '아! 이럴 수가.......' 진일문은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그를 향해 만상군자가 음성이 이어졌다. "어차피 육신이란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법, 자연의 이치가 그러할진대 미련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없었다. 다만 유계(幽界)로 귀의하지 못하고 한 점의 영혼을 남긴 이유는 무림의 앞날이 심히 우려되었기 때문이니라." 그것은 생사(生死)를 초월한듯 고고한 음성이었다. 진일문은 그 음성을 듣자 마음이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지만 세 분 노선배께서 자해(自害)까지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육신을 지니고 살아남아 있는 자가 모두 미련이 있어서는 아니지 않습니까?" "허허허... 보기보다 심기가 깊은 아이로고. 네 나이가 아직 젊거늘, 분명 평범하게 살아온 아이가 아닌 게로구나." 진일문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렇습니다. 소생은......." 그가 머뭇거리자 만상군자는 예의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이야.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꺼려 하니 노부가 다시 묻겠다. 너는 누구의 문하이며, 어떻게 하여 이 곳에 오게 되었느냐?" 진일문은 자신을 깨닫게 해 주는 그 음성에 진한 감동을 느꼈다.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신뢰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후배는 따로 사문이 없습니다. 그리고 후배가 이 곳으로 오게 된 것은......" 그의 파란만장한 운명의 행로가 전개 되었다. 대충 골자만 추려 얘기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을 요하는....... 이윽고 그의 말이 모두 끝나자 격동에 찬 만상군자의 음성이 석실 안을 진동시켰다. "오오! 네가 중서(重書)의 혈육이었다니....... 정녕 끈질긴 업연(業緣)이 너와 우리를 이어주고 있었구나." 그 바람에 공기가 극심한 파동을 일으키며 좌측에 있던 인물의 육신을 또 다시 가루로 만들고 말았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가운데 위치했던 한 구의 시신 뿐이었다. 만상군자가 이렇듯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진일문의 부친인 진중서는 다름 아닌 삼천공의 직전제자가 아닌가? "노부가 유계에 들지 못하고 떠돌던 것이 결국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구나. 오오! 하늘은 선(善)을 버리지 않았도다." 한편. 진일문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견딜 수가 없었다. "어르신......." 그는 이제껏 부친의 존재를 떠올리면 막연한 그리움 외에는 크게 다가오는 것이 없었으므로 삼천공이 부친의 사부였다는 사실까지는 거의 염두에 두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듯 만상군자의 격동하는 음성을 듣게 되자 그는 가슴이 북받쳐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실상 부친을 키워 낸 사부라면 그 자신에게는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진일문은 소리 죽여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오랜 세월 동안 가로막혀 있던 정한(情恨)의


실체였다. 만상군자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이야....... 이리 오너라." 진일문은 지체없이 다가갔다. 그의 가슴 속으로는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음성이 파문을 일으키며 울려 퍼졌다. "이것은 명령이니라. 노부의 천령개를 힘껏 쳐라." "어찌 그런 일을......." 너무도 뜻밖의 말인지라 진일문은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힘이 곧 그의 의식을 이끌었다. 진일문은 어느덧 손을 치켜 들어 마지막 남은 시신, 즉 만상군자의 머리를 내리치고 있었다. 손바닥이 시신의 천령개에 닿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맙소사! 이런 불경(不敬)을 저지르다니.' 의외로 시신은 부서지지 않았다. 대신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의 본신 진기가 만상군자의 천령개를 통해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빨려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그것은 도무지 불가항력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 이유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아.......' 진일문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무력감과 더불어 심한 갈증을 느끼며 절망적인 신음을 발했다. 그 사이에도 의식은 점점 흐려져 그는 종내 혼절하고 말았다. 환혼심령전이대법(還魂心靈轉移大法). 이는 선도(仙道)의 전설적인 대법으로써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들일 수 있으며, 다시 그 영혼을 산 사람의 영혼에 전이시킬 수도 있는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선도의 절정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종종 이 대법으로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거나 후세에 유지(遺志)를 남기기도 한다. 반면에 환혼심령전이대법을 사용하려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그 대법을 시전하고자 할 경우에는 먼저 우화등선(羽化登仙)할 수 있는 기회를 깨끗이 포기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만상군자는 평생 잡학(雜學)에 능통했던 기인이었다. 만년에 이르러서야 천하도인과 함께 도학(道學)에 심취했는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반선지경(半仙之境)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만상군자는 스스로 우화등선의 기회를 내던지고 환혼심령전이대법을 시전했다. 이로 인해 진일문은 그가 남긴 유지를 전달 받을 수 있었다. 진일문이 꼬박 하루가 지난 후에야 의식을 회복했다. 그는 마치 긴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앞에는 이제 시신도, 무엇도 없었다. 단지 세 무더기의 흙먼지 만이 작은 봉분처럼 쌓여 있을 뿐이었다. "아아! 어르신......." 어느 새 진일문의 눈은 또 다시 뿌옇게 젖어 들고 있었다. 그는 먼지로 화한 삼천공의 유체를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먼지 아닌 그 세 줌의 먼지를 모아 바닥에 묻었다. "후배 진일문, 목숨을 걸고 어르신의 유지를 따르겠나이다." 진일문은 무엇인가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석실을 빠져 나왔다. 그러다 문득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 곳은 세 분의 유체를 모신 곳이다. 더 이상 그 더러운 자들의 발길이 닿게 할 수는 없다.' 진일문은 돌아 서더니 손바닥을 수직으로 펼쳐 흔들었다. 그러자 무형의 강기가 그의 장심에서 뻗어 나갔다. 다음 순간, 놀랍게도 철문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뿐만 아니라 철문에 이어졌던 천정과 석벽이 미세하게 갈라지는가 싶더니 곧 소리도 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석실은 그렇게 하여 그 입구가 봉쇄되고 말았다. 그것을 보며 진일문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다시 돌아오는 날, 세 분의 유해를 모시겠습니다." 그는 다시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의 발바닥은 줄곧 땅에서 한 치 가량 떠 있었다. 마치 구름이라도 밟는듯 가볍고 여유있는 걸음걸이였다. 동굴 밖. 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 중년인은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그들의 어깨를 두드렸던 것이다. "누구냐?" "아니, 어떻게 안으로......?" 두 사람의 입에서 차례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앞에는 지금 한 명의 청년이 히죽 웃고 서 있었다. 맹세코 그들은 한 순간도 그 곳을 이탈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동굴 안에서 웬 청년이 나왔으니 질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물론 삼천공을 만나고 온 진일문이었다. 진일문은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 "자네들은 더 이상 이 곳을 지킬 필요가 없네." 엉뚱한 말에 두 중년인은 잠시 멍해졌다. 그러다 곧 사태를 파악하게 되자 그들은 안색이 일변하여 외쳤다. "놈! 동굴 안에서도 일을 저지른 모양이구나." 동시에 두 사람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번개같이 뻗어왔다. 파파팟--! 시퍼런 검날이 섬광을 발하며 허공을 갈랐다. 그들 중 한 중년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검에 의해 상대의 몸이 세로로 양단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크윽!" 폐부를 도려내는 듯한 처절한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비명의 주인은 청년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동료였다. "이, 이럴 수가?" 중년인은 정확히 반으로 쪼개진 동료의 시신을 내려다 보며 안색이 흑빛으로 변했다. 마치 도깨비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진일문의 음성이 이어졌다. "나는 여기 있네. 왜 자네들은 상잔을 벌이는가?" 중년인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한껏 부릅떴다. "이... 이... 찢어죽일......!" 쐐액--! 검광이 무지개를 그리며 환상처럼 허공으로 쏘아져 갔다. 진일문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슬쩍 튕겼다. 그러자 중년인의 검은 대번에 기이한 음향을 내며 부러지고 말았다. "헉!" 중년인은 대경실색했다. 부러진 검날이 튕겨와 자신의 미간을 찌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느새 진일문은 절벽 아래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는 이십장이 넘은 허공을 마치 계단을 하나하나 밟는 듯한 신비한 보법으로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전 무림을 통틀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신비한 신법이었다. 곧이어 지면에 이르자 진일문의 신형은 눈깜짝할 사이에 울창한 관목 사이로 스며 들어가 버렸다. "최후로 묻겠네." 화개악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진일문에게 말했다. "자네가 싫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네. 어떤가?" "장부가 되어 가지고 어찌 한 번 마음 먹은 것을 철회한단 말이오? 나는 무엇도 두려울 바가 없으니


귀찮게 ��� 묻지 마시오." 진일문의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그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한 단애(斷崖) 위였다. 마치 도끼로 내리쳐 이루어 놓은 듯한 단애는 빙벽 만큼이나 매끄러웠으며, 그나마 중턱에 짙은 운무가 가리워져 있어 도저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 곳은 무천비동과 함께 삼성림의 이대금역 가운데 하나였다.진일문이 입곡한지 오일 째 되는 날, 화개악이 고심 끝에 그를 직접 여기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화개악은 아직 무천비동에서의 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에게는 현재의 상황이 더 중요할지도 몰랐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살심(殺心)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는데, 이 심리전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것은 최소한 뒷탈을 남기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심을 가장하며 말을 이어갔다. "이 절벽 아래에는 두 명의 괴인(怪人)이 있네. 그들은 성격이 괴퍅하여 자네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기는 커녕 보자마자 죽이려들지도 모르네. 운이 좋아 그들의 무공을 익힌다면 절정고수가 될 수 있지. 그러나 그 반대로 한 줌의 백골로 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네." 진일문은 내심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절벽 아래에 대체 어떤 괴인들이 있기에?' 사실 화개악이 누구인가? 천하무림을 오시하며 발 아래 놓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처럼 길게 변을 늘어놓는 모습이란 아무 때고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더 큰 의문점은 왜 하필 자신으로 하여금 그 두 괴인들에게 무공을 익히도록 안배했느냐는 것이었다. 이 때, 화개악이 그의 심중을 눈치챈듯 껄껄 웃었다. "공주가 자네를 내게 보낸 것은 자네를 시험하기 위해서지. 대성(大成)해서 개명천지를 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잠시나마 공주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네. 이것은 내 의사가 아니라 공주의 부탁이었네. 하핫!" 진일문의 눈이 일순 한광을 뿜었다. '아무래도 좋소. 반희빈을 이용한 죄로 일단은 당신 말에 부응하지만 향후의 일은 그리 장담하지 마시오.' 그가 화개악의 말을 따르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절벽 아래 있다는 괴인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무공에 백지인 한 사람을 일약 절정고수로 만들만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이렇게 되자 그로서는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내려 갈 방법은?" 화개악의 눈에 일순 예리한 광망이 스쳐 지나갔다. "으음, 오만하고 냉엄하던 공주가 왜 자네에게 반했는지 알만 하군. 그럼 행운을 빌겠네." 그는 품속에서 삼각형의 소기를 꺼냈다. "그들이 자네를 죽이려 들면 이것을 내 보이게. 공주가 자네를 위해 특별히 보낸 것으로 한 번쯤은 목숨을 건질 수도 있는 물건이네." 진일문은 소기를 받아 살펴 보지도 않고 품속에 갈무리했다. 화개악이 절벽 끝으로 걸어가며 외쳤다. "바구니를 내려라!" 철삭이 마련 되었으며, 그 끝에는 튼튼한 쇠바구니가 매달려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아까부터 이 기구를 가지고 대기 중이었다. 명령은 즉각 이행되었다. 그 광경을 가리키며 화개악은 미소를 보였다. "절벽의 중간 지점에는 늘상 돌풍이 불고 있어 천하제일의 경공술을 지닌 자라도 오르내리기가 불가능 하네. 이 쇠바구니를 타고 내려가면 안전할 걸세. 바구니 자체가 엄청난 무게를 지니고 있는 데다가 위


쪽으로 줄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지." 진일문은 기소를 발했다. "후후... 그럼 위에서 바구니를 내려 주지 않으면 영원히 올라올 수 없다는 말도 되겠구려?" 화개악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런 셈이네. 왜, 겁나는가?" 진일문은 벌써 바구니 안에 몸을 싣고 있었다. "겁이 났다면 애초부터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오. 실상 섬뜩한 것은 절벽 아래에 있다는 괴인들이 아니라 바로 절벽 위에서 타인의 심리를 뜻대로 조종하려 하는 소인배요." 그것은 실로 노골적인 모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화개악은 전혀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노부가 졸지에 소인배로 전락했군. 헛헛! 아무튼 좋네. 내려 가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나?" "물론이오." "우직하군." 마침내 진일문을 태운 쇠바구니는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대략 이십여장쯤 내려 갔을까? 과연 화개악을 말대로 그 곳에는 무시무시한 돌풍이 일고 있었다. 휘이-- 이잉--! 그 바람에 무쇠로 주조된 바구니조차도 흡사 허공에 뜬 가랑잎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절벽에 가서 부딪치곤 했다. 그러니 맨몸으로 대항하고자 했다면 그 결과는 뻔했다. 진일문은 일단 바구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최대한으로 주의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화개악, 그 자는 내가 이 곳에서 영원히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표면상으로는 공주의 부탁에 따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역이용해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는 것이다. 그는 본래 그런 자다. 후후.......' 환혼심령전이대법이라는 희대의 수법으로 만상군자에게 유시를 전달받은 후, 그는 화개악이라는 인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것이겠지? 그에게는 사부도, 사제도 없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부모라도 해할 수 있는 자가 바로 화개악이다.' 진일문은 심중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를 누를 길이 없었다. 화개악을 처단하는 것은 이제 단순한 복수의 차원이 아니라 그가 지향해야 할 하나의 중대한 목표로 화하고 있었다. '절대로 그를 살려 두어서는 안된다. 더 이상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할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이마제마(以魔制魔)의 수법도 불사하리라.' 그 때까지도 그는 알지 못했다. 세상에서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되, 그것도 이미 무시무시하게 시행하고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또 있다는 것을....... 텅! 쇠바구니가 멈추었다. 그런데 그 곳은 바닥이 아니었다. '아!' 줄이 팽팽해지는 순간, 진일문은 무엇인가 영감처럼 부딪쳐오는 것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쇠바구니는 한 차례 무섭게 흔들리더니 홱 뒤집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진일문은 어느덧 쇠줄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상대의 기대 대로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곧 바구니는 원상태로 돌아와 그를 태우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후후... 나를 떨쳐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차린 모양이군. 화개악, 지금쯤 내심을 들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고 있겠지.' 진일문의 얼굴에는 한 가닥 조소가 스쳤다.


'화개악, 나는 당신 같은 부류의 인간을 경멸하오. 하지만 이제 생각을 바꾸었소. 당신을 동정하기로.......' 마침내 그는 지면에 밟을 수 있었다. 아득한 운해(雲海)를 지나 신비로 가리워져 있던 절벽의 밑바닥에 당도하게 된 것이다. '웃!' 진일문은 갑자기 몸을 날려 십여장 밖으로 피했다. 무엇인가 위에서 괴물체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쿵! 그것은 바로 쇠바구니에 달려 있던 쇠줄이었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지게 된 쇠줄은 가속도로 인한 압력 때문에 아예 땅 속 깊이 파고 들며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진일문은 쓴 웃음을 흘려냈다. "후후... 다시 올라올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뜻이겠지?" 그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주위를 살펴 보았다. "어쨌든 뭔가 방법이 있겠지. 설마하니 이 곳에서 영원히 갇혀 있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때였다. 그의 이런 낙관론을 비웃는 음성이 들려 온 것은. "클클클... 꼭 백여덟 번째로군. 불쌍한 놈, 지난 사십여 년 동안 이 곳에 들어온 것들 치고 네 놈과 똑같은 소리를 하지 않은 놈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누구요? 그대는." 진일문의 외침에 이번에는 다른 음성이 답했다. "우리로서는 다행한 일이 아니냐? 오래간만에 질 좋은 고기를 먹게 되었으니 말이다. 흘흘......." 그들의 음성은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마치 음습한 늪지대에서 서식하는 괴물의 울부짖음인양 무섭도록 사이(邪異)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었다. 심지어 방향조차 알 수 없어 더욱 전율을 불러 일으켰다. 진일문은 내심 짚히는 바가 있었다. '음, 바로 이들이 이 곳에 있다는 괴인들인 모양이구나.' 그는 보이지 않는 상대방을 향해 말을 건넸다. "후훗! 백팔십 명이 할 수 없었던 일이라 해서 나까지도 못하란 법이 어디 있소? 그렇지 않소?" 예의 음침한 음성이 가소롭다는듯 그 말을 받았다. "크ㅋ! 꼬마야,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너는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나 있느냐?" "그야 물론 모르오." "흘흘... 그들은 죽었다. 그것도 전부 희한한 방법으로......." 그 음성에서는 웬지 묘한 여운이 느껴졌다. 이를 감지한 진일문이 즉시 되받아쳤다. "이보시오, 인생이란 어차리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오? 그런데 어떻게 죽던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상대방의 응수도 만만치 않았다. "거 참 좋은 말이구나. 네 말을 들으니 노부는 정녕 안심이 된다. 네 덕분에 마음 편하게 식사를 하게 생겼구나." '대체 무슨 말인가?' 진일문이 의문을 떠올릴 때, 다른 괴인이 그 뒤를 이었다. "흘흘... 내 아까 그러지 않았느냐? 이번에 던져진 고기는 양질이라고. 제법 기름기가 도는 게 벌써부터 군침이 도는군. 그렇지 않느냐? 아라소(兒羅素)." 음성은 가까이서 들리는가 하면 또 멀리서 들려오는 것도 같고, 여전히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럼 빨리 순서를 정하자." "무슨 소리!" 콰르르릉--!


느닷없이 폭음이 울려 지축을 뒤흔들어 놓았다. 절벽으로부터 집채만한 바위가 굴러 내리더니 바닥에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음!" "제법이구나, 아라천(兒羅天)." 진일문은 두 마디의 나직한 신음소리를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두 괴인이 싸우고 있는 모양이구나.' 지친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좋다, 그러나 절대 양보는 하지 않는다." 그 순간, 진일문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는 두 괴인의 격돌로 인해 그들의 현 위치를 파악해 놓고 있는 상태였다. 진일문은 서 있던 자리에서 좌로 약 이십여장 정도 옮겨 갔다. 그러자 하나의 거친 암벽이 나타났고, 바로 그 앞에 마주 서 있는 두 괴인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본 진일문은 흠칫했다. 두 사람 모두가 윤기라고는 전혀 없는 빳빳한 백발을 바닥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우뚝 솟은 코에서는 완강한 고집이 엿보였으나 주름이 엉킨 얼굴은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코와 지나친 대비를 이룰 정도로 움푹 들어가 있는 눈은 벽안(碧眼)이었다. 또한 그들은 누가 누구인지 분간을 할 수 없으리만치 판에 박은듯 닮아 있었다. '색목인(色目人) 쌍둥이!' 실로 의외였다. 이어 진일문이 발견해낸 것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줄이었다. 그것은 불과 손가락 굵기도 되지 않는 쇠사슬로써 괴인들의 비파골(琵琶骨)을 관통한 채 절벽 깊숙히 박혀 있었다. 진일문은 충격으로 인해 가벼운 전율을 일으켰다. '그럼 이들도 누군가에 의해 감금되어 있었단 말인가?' 의혹은 계속하여 일었다. '이들은 이역인들이거늘, 무엇 때문에 중원으로 와 여기에 갇히게 된 것일까?' 이 때, 아라천이라는 괴인이 벌떡 일어나며 큰소리로 외쳤다. "아라소! 다시 시작하자." "흘흘... 아직도 힘이 남았느냐? 쓸데없이 무리하지 말고 그만 양보하는 것이 어떠냐? 아라천." "헛소리 마라!" 아라천은 급기야 우수를 떨쳐냈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그의 손이 갑자기 다섯 자가 넘게 늘어난 것이었다. '아!' 진일문은 탄성을 발했으나 곧 고소를 지었다. 그것은 순간적인 착시현상에 불과했다. 단지 그의 장심으로부터 손의 형상을 한 장력이 뻗어 나갔을 따름이었다. 좌우간 그 괴이한 수법은 으스스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아라천의 수영(手影)은 핏빛을 띄고 있어 금시라도 허공에서 핏물을 주르르 쏟아낼 것만 같았다. 아라소가 안면을 괴상하게 일그러뜨렸다. "빌어먹을! 너의 그 장중장공(掌中掌功)은 이제 낡았다고 했지 않느냐? 멍청하게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려 들지 않다니." 동시에 그는 왼손을 쫘악 펼쳤다. 파파팟! 쇄애액--! 파공음을 울리며 학의 발가락을 연상시키는 주름진 손가락이 서로 색깔이 다른 다섯 가닥의 기류를 뻗어냈다. 그것은 즉시 핏빛의 수영을 뚫고 아라천에게 쏘아져 갔다. 두 괴인. 그들의 싸움은 실로 기기묘묘했다. 좀체로 우열을 가릴 수 없었으되, 그들이 사용하는 무학은


중원에서는 보기 힘든 절학들이었다. 개중에는 상식을 벗어난 것도 수두룩했다. 우우웅--! 그들 사이에서는 바야흐로 무시무시한 내력이 오갔고, 그것이 충돌을 일으킬 때마다 절벽 전체가 굉음과 함께 진동했다. 진일문은 숨을 죽인 채 관전하고 있었다. '놀랍구나! 저들이 사용하는 무공은 희귀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무궁무진한 변화를 담고 있는 기학(奇學)들이다. 누구인지는 모르나 그래서 나를 여기로 보냈었군.' 콰르르르릉--! 한 차례 굉렬한 음향이 울리더니 무지막지한 진동이 이는 가운데 두 괴인은 벌렁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지를 여전히 바닥에 붙인 채 상체만이 뒤로 제껴져 있었다. 그 바람에 은발이 젖혀지고 그들의 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아 벌거벗은 몸 그대로였다. 진일문의 눈이 일순 크게 부릅떠졌다. '저럴 수가!' 놀랍게도 두 괴인의 상체에서 살점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뼈의 형상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내보이고 있어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강시(疆屍)가 따로 없었다. 신지가 건재하다는 것 외에는 말 그대로 뼈만 남아 있는 강시였다. 진일문은 흡사 이끌리듯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를 본 아라소가 괴이한 미소를 떠올렸다. "어린 놈, 너는 며칠 더 살 수 있는 행운을 잡았구나."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진일문이 묻자 그는 기진한듯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본래 나는 너를 오늘 당장 먹으려 했는데 저 영감 때문에 싸우다가 이렇듯 원기를 낭비했다. 그렇지만 원기를 되살아 나면 막바로 너를 잡아 구워 먹을 것이다." 진일문은 비로소 의문에서 해방되는 한편 어이가 없었다. "그럼 이제껏 나를 잡아먹기 위해 싸웠단 말이오?" 식인귀(食人鬼)라는 말은 있으되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실로 어불성설이었다. 그도 예전에 환우오사 중 색사(色邪)를 상대로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연출해 보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협에 불과한 장난이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아라소의 말은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진일문은 구역질이 이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이 곳에 떨어졌던 백팔십 명을 모두 잡아 먹었단 말이오?" 아라천은 벽안으로부터 섬뜩하리만치 짙푸른 광망을 뿜어내며 진일문을 노려 보았다. "흘흘... 넌 그럼 아까 우리의 얘기를 뭘로 알아 들었느냐? 멍청한 놈, 생각해 보아라. 사람 고기를 먹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겠느냐? 이 곳에는 먹을 것이라고는 이끼와 버섯 나부랑이밖에 없다. 흐흐... 이따금 고기를 먹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더우기 우리 같은 신세라면 말이다." 진일문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말인즉 십분 이해가 갔으나 단지 자신이 연명해 가기 위해 타인을 음식쯤으로 여기는 사고 방식만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혐오감을 지나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살기(殺氣)였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아라소가 입술을 야릇하게 비틀며 말했다. "흘흘... 꼬마야, 망상은 버리는 게 좋다. 우리 두 늙은이가 비록 이 꼴이 되기는 했지만 네깟 놈 하나쯤은 능히 처리할 수 있다. 헛꿈 꾸지 말고 목이나 길게 빼고 기다려라." "후후... 아니, 나는 기다리는 데는 소질이 없소." 진일문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그는 우수(右手)를 날카롭게 세우더니 괴인들을 향해 쪼개어


갔다. 파앗! 허공을 가르는 장인(掌刃)이 섬광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 순간, 쓰러져 있던 아라소가 퉁기듯 일어나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쏴아아아--! 길게 늘어져 있던 백발이 흡사 쇠침처럼 솟구쳐 진일문을 향해 뻗어갔다. 그 길이는 무려 일장이 넘었다. 진일문. 그는 졸지에 아라소의 공격권 내에 꼼짝없이 갇혀 버렸다. - 다음 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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