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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단 제 3 권 지은이: 사마달·백창렬 - 차 례 제 제 제 제 제 제 제 제 제 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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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었던 사람의 배신 전위상, 그대의 복수는 반드시 해주겠다! 죽는 날까지 후손을 볼 수가 없소 천장비독의 완성 진소저를 쫓아가십시오 떠날지언정 배신할 수는 없다 군검우가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죽기 전에 그 분을 뵈어야 하네 사랑이란 이름 하나에 무너지는 魔門 참으로 좋은 모습

제 21 장 믿었던 사람의 배신 1 휘이이이잉……! 대지는 온통 백색 눈가루에 덮혀 있었다. 그 위를 군검우와 당문연은 말을 타고 달렸다. 달려나가는 군검우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이 고독했다. 그의 옆에서 힘차게 말고삐를 잡고 달려나가는 당문연은 조심스럽게 군검우의 얼굴표정을 살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얼굴표정을 살피는 건 당문연의 버릇처럼 되어 있었다. 그가 즐거운 표정이면 당문연도 즐거웠고, 그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으면 그만큼 당문연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지라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군검우의 포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관까지는 이제 얼마남지 않았어요. 이 상태로라면 한 이틀만 더 가면 될거 같아요." 물어보지도 않았건만 당문연은 군검우를 향해 진관까지의 거리를 설명했다. 군검우에게 그런 식으로라도 말을 붙이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그러한 마음을 알법도 하건만 군검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당문연은 내심 군검우에게 서운했다.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 그런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도중 벌써 이런 경우를 여러번 당한 터였다. 당문연은 약간은 머쓱해진 상태로 앞을 보며 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문득 군검우의 눈빛이 이채를 발했다. "……?" 당문연이 그를 돌아보았다. "앞에 뭔가 있소." "……!"


"지독한 살기요." 군검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슈슈슈슈슉! 돌연 눈바닥 속에서 수십 가닥의 쇠사슬이 허공 중으로 튕겨져 나왔다. 이히히힝! 그 바람에 두 사람이 탄 말의 다리가 쇠사슬에 걸려 전복되고 군검우와 당문연은 허공으로 비상을 하여 간신히 바닥에 착지했다. 그런데 그들이 바닥에 착지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눈 속에서 흑의를 걸친 자객들이 튀어나오며 군검우를 향해 암기를 뿌렸다. 슈슈슈슉! 암기는 지독한 파공음을 토했다. 군검우는 착지하기가 무섭게 다시 허공으로 비상해야 했다. 암기들이 군검우를 노리는 틈을 이용하여 당문연은 자객들을 향해 장력을 쏟았다. 스팟! 그러나 자객들은 당문연의 공격을 교묘히 피하며 다시 눈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이번에는 두 사람의 전면에서 바람처럼 수십 명의 인물이 달려왔다. "……!" 그 중 군검우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바로 쌍검뇌우 천일소와 소림의 홍지, 홍운대사였다. 군검우를 발견한 홍운대사가 이마에 시퍼런 힘줄을 돋우며 빠드득! 이를 갈았다. "군검우! 이번에는 절대 빠져나가지 못한다!" 홍운대사의 뒤를 이어 쌍검뇌우가 소리쳤다. "그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소! 무림맹으로 가 시시비비를 가리도록 합시다!" 군검우는 냉소했다. "이 몸은 내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오. 그러니 구태여 무림맹으로 가 시시비비를 가릴 것도, 그럴 여유도 없소이다." 명백한 거절의 말이었다. "흥! 네놈이 스스로 가지 않겠다면 네 놈의 목이라도 가져가겠다! 공격하라!" 홍운대사는 악을 쓰며 소림 승려들에게 공격을 명했다. 소림승려들이 앞으로 나섰다. 순식간에 대혈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지금의 이들은 지난 번 승려들의 실패 때문인지 훨씬 월등한 실력을 발휘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군검우의 적수는 되지 않았다. 쌍검뇌우는 두 눈을 번쩍이며 군검우의 무공을 살폈다. 쌍검뇌우가 느끼는 군검우의 무공은 과거보다 훨씬 정심해져 있었다. 만약 군검우가 독한 마음을 먹는다면 소림의 승려들은 삼초지적도 되지 않을 것이다. '저런 인물이 혈궁을 도와 소림삼성승을 죽였다는 것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쌍검뇌우는 왠지 군검우의 말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군검우를 믿기에는 한 가지 오류가 있었다. 쌍검뇌우는 슬쩍 시선을 들어 원독에 찬 눈빛으로 소림승려들을 독려하는 홍운대사를 훔쳐보았다. 실상 군검우가 소림삼성승을 죽였다는 것을 보았다는 자는 홍운대사와 그의 제자들 뿐이었다. 군검우가 혜공을 죽이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 홍운대사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바로 쌍검뇌우가 군검우를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런데 이때 문득 쌍검뇌우의 머리로 빠르게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서…… 설마…… 홍운대사가 거짓을…….' 거기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이유도 없으니 추측일 뿐이었다. 쌍검뇌우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군검우를 모함해서 홍운대사가 얻는 이득을 생각해보려 해도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득이 없는 이상 홍운대사가 거짓말을 했을 증거를 찾을 수 없다. 불가피하게 소림승려들과의 싸움판에 뛰어든 당문연은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것은 한 사람만의 말만 믿고 정파 무림을 전부 움직이게 만든 그들 수뇌부에 대한 분노였다. 그녀는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분노에 찬 일갈을 내질렀다. "그대들은 눈이 달렸으나 그토록 사람을 볼 줄 모르니 정파무림이 현재 이 모양 이 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대들이 그토록 정의를 수호한다면 왜 악의 온상인 혈궁과 당당히 맞서지 못하느냐!" "가…… 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는구나!" 홍운대사가 분노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실 당문연의 분노에 찬 일갈은 반대편의 사람이 듣는다면 누구나 울화를 터뜨릴 만한 내용이었다.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니 말이다. "실로 당차고도 매운 혀 끝이로다!" 그런데 이때, 허공에서 껄껄대는 웃음소리와 함께 한줄기 인영이 섬전처럼 나타나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인영은 나타나자마자 군검우를 향해 노도와 같은 강맹한 장력을 발출했다. 그의 장력에 군검우도 장력으로 맞섰다. 퍼엉! 한소리 파공음과 함께 군검우의 신형이 두 발 뒤로 밀렸다. 군검우는 경이를 금치 못했다. 아무리 황망지간이었다지만 자신을 뒤로 밀리게 할 자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타난 자는 바로 개방의 장로인 취선노개였다. "모두들 뒤로 물러나라!" 취선노개는 군검우를 공격하는 소림승려들을 향해 명령했다. "자네들은 저 어린놈의 적수가 되지 못해. 저놈은 이 노개가 상대해 주겠다!" 취선노개의 명령이 떨어지자 소림승려들은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그가 앞으로 나선 이상 군검우의 생포는 안심해도 좋았다. 그런데 이 순간 소림승려들이 취선노개를 보며 안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선노개가 나타나자 당문연의 표정도 환히 밝아졌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취선노개와 절친한 사이였던 것이다. "노선배님! 그는 소림삼성승의 죽음과 무관해요!" 취선노개의 시선이 당문연을 향해 돌았다.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그…… 그것은……." 순간 당문연은 말문이 막혔다. 취선노개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너는 옆으로 빠져라. 네 선친과의 관계를 봐서 너는 그냥 둘 것이다. 허나 저놈은 용서할 수가 없다!" 하지만 당문연은 뒤로 빠질 수 없는 입장이었다. "노선배님! 당시 제가 현장에 있어 상황을 본 것은 아니지만 이분이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요!" 홍운대사는 취선노개가 앞으로 나서자 내심 안심하고 있었는데 당문연이 악착같이 초를 치고 나서자 얼굴색이 수시로 울그락붉그락 변화했다.


쌍검뇌우는 연신 홍운대사의 변화무쌍한 얼굴을 훔쳐보고 있었다. "노선배님께서는 저 계집의 세치 혓바닥에 속지 마십시오." 홍운대사는 노파심이 일어 취선노개를 향해 소리쳤다. 당문연은 또다른 변화가 생기기 전에 얼른 자신의 말을 이었다. "노선배님께선…… 현무림에서 가장 위대한 정도(正道)의 혼(魂)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취선노개가 그녀의 말장난에 끌려들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과 고독하게 홀로 싸우는 백사단주를 정도의 혼이라고 꼽는다면 인정하시겠습니까?" "인정한다." 취선노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분, 군대협께서 바로 백사단주이십니다." "뭐라고?" 순간 모여있는 군웅들 모두가 경악했다. "저자가…… 백사단주라고……?" 기실 이들 중 누구도 백사단주를 본 자는 없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그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노선배님! 거짓말입니다! 믿지 마십시오! 어찌 혈궁과 손을 잡고 우리 소림의 세 분 사숙님을 해한 저 자가 백사단주일 리 있겠습니까!" 홍운대사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방방 뛰었다. 그러나 취선노개의 표정은 엄숙하게 변해 있었다. "백사단주는 정파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투사다. 만약 그가 백사단주임을 증명한다면 이 노개는 그가 혜공선사를 죽이지 않았음을 믿겠다. 그가 백사단주임을 어떻게 증명하겠느냐?" 취선노개가 자신의 말에 흥미를 느끼자 당문연의 입가에 미소가 매달렸다. "간단해요. 백사단주는 항상 한 가지 검법만을 사용하죠. 그 검법은 바로 초형일섬검이죠." 취선노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형일섬검은 천 년 전, 만승불패의 신화를 이룩한 절대천존 천승세의 독문 무공! 당금 무림에서는 오로지 백사단주만이 초형일섬검을 시전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군검우, 저 자가 초형일섬검을 시전한다면 그건 백사단주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취선노개는 군검우를 쳐다보았다. 취선노개를 따라 모두의 시선이 군검우를 향했다. 군검우는 굳은 얼굴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대상을 저자로 해도 되겠소?" 군검우의 손가락이 홍운대사를 가리켰다. "뭐…… 뭣이?" 순간 홍운대사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만일 초형일섬검을 시전하여 이 몸이 백사단주임이 증명된다면 이 몸을 모함한 저 자는 혈궁의 간자라고밖에 생각되어지지 않소이다." 그는 군웅들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함이었다. 군웅들은 모두가 군검우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군검우가 백사단주라면 백사단주를 모함하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답은 뻔한 것이다. 군검우는 등 뒤에 메고 있던 검을 뽑았다.


온통 하얗게 뒤덮힌 백설의 눈부심으로 인해 검신은 오색찬란한 빛을 발했다. "네놈은 무슨 말을 하는게냐? 천대협! 이 무슨 변고요?" 홍운대사는 쌍검뇌우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쌍검뇌우는 그의 요청을 모르는 척 했다. 홍지대사도 의심의 눈초리로 홍운대사를 바라보았다. 군검우의 말대로 그가 백사단주라면 그를 모함한 홍운대사는 누구란 말인가? "홍운, 너무 걱정말게. 만일 저자가 초형일섬검이 아닌 다른 검법을 시전한다면 내 막아주도록 하겠네." 홍운대사를 위하여 취선노개가 그렇게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아…… 안돼……." 홍운대사는 도망치려 하였다. 여기서 초형일섬검을 맞고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다. 홍운대사가 막 뒷걸음질을 치려는 순간, 군검우가 초형일섬검을 전개했다. 쐐애액-! 눈부신 검기가 홍운대사의 가슴팍을 향해 섬전처럼 밀려들었다. "허억!" 홍운대사는 감히 피하지 못하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눈깜짝할 사이에 밀려든 군검우의 검 끝이 홍운대사의 가슴팍 옷자락을 갈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개의 영패가 떨어져 내렸다. <천자일호.> 영패에 쓰여진 이 네 글자는 너무도 선명했다. 군웅들은 경악 속에 사로잡혔다. 소림의 승려가 무슨 영패를 가지고 다닌단 말인가? "초형일섬검이로구나!" 그렇다. 취선노개가 혼잣말처럼 중얼댄 것처럼 군검우는 분명히 초형일섬검을 전개했다. 홍지대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홍운사형…… 당신이 혈궁의 간세라니……." 아직 목숨을 잃지 않은 홍운대사가 도망치기 위해 허공으로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쌍검뇌우에 의해 홍운대사는 완맥이 잡히고 말았다. 그는 소림승려들의 포박을 받았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에 대한 분노는 천하의 어느 것보다도 더한 법이다. 하지만 홍지대사는 소림의 체면을 생각해 애써 그것을 참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집안싸움과도 같은 분노를 터뜨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홍운사형! 여기서 죽이지는 않겠소. 소림으로 가 장문사형 앞에서 모든 진실을 밝히겠소!" 홍지대사가 억지로 분기를 참아내고 있다는 것은 음성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홍지대사는 군검우에게도 사과했다. "소림은 군시주에게 엄청난 죄를 지었소이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알게 되어 여간 다행이 아니오. 노납이 소림을 대신해 군시주에게 정중히 사과하겠소이다." 홍지대사의 합장에 군검우도 따라 합장했다. "억울함이 풀린 이상…… 지난 일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언제고 하남에 오실 일이 있으면 폐사에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다시 한 번 정중히 사과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미타불……." 홍지대사의 사과에 군웅들 모두가 숙연한 얼굴이 되었다. 소림이 군검우에게 엄청난 죄를 지었듯이, 이곳에 모인 모든 자가 홍운대사의 세치 혀 끝에 놀아나


군검우에게 죄를 진 셈이었다. "무림맹을 대신해 쌍검뇌우가 사과를 드리겠소이다." 군검우는 그렇게 한참 동안 여러 군웅으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했다. 당문연은 군검우의 한 발 옆에 서서 그의 늠름한 모습을 지켜보며 남몰래 미소지었다. 2 진관일대 십여 리는 혈궁인들로 인해 물샐틈 없는 포위망이 펼쳐져 있었다. 이들의 지휘자는 바로 원소랑이었다. 원소랑은 능원평이나 군검우 등과 오랜시간을 함께 해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들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 혈궁에서 그들의 체포에 실패한 원인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원소랑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능원평 일행을 잡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시립해 있는 백여 명 혈궁고수들을 바라보며 명령했다. "이번에야 말로 절대로 놈들이 벗어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만약 실수가 있다면 너희들은 목숨으로 보상해야 한다! 알겠느냐?" "명심하여 거행하겠습니다!" 천지를 진동하는 원소랑의 음성에 혈궁고수들은 일제히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부복했다. 원소랑은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각자 위치로 해산시켰다. 원소랑의 옆에는 음울한 눈빛의 진설하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진설하를 향해 밝게 웃었다. 진설하가 의문을 가지고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 동안 혈궁의 대제자 신분으로 관부에서 활동을 하셨는지요?" 원소랑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관부에서 활동한 건 바로 사부의 뜻이었소." "……!" "그 동안 나는 암중으로 황실의 어른이신 난화군주를 비롯한 황실과 혈궁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였소." "그렇다면 능원평 등과 위험을 부릅쓰고 어울린 것에도 이유가 있었겠군요." "물론이오. 내가 능원평과 어울린 것은 그에게서 얻어낼 것이 있었기 때문이오. 그게 뭔지 궁금하오?" "궁금해요." "축융신공이오." "축융신공?" 전혀 의외의 말인지라 진설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렇소. 축융신공은 다라도엽비경의 최고 무공으로 그것을 아는 자는 오로지 능원평 뿐이오. 그 무공을 얻기 위해 나는 놈을 추적하는 당문연을 도와주는 척하며 그에게 접근했소. 그리고 놈과 같은 천룡북보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이용하여 놈의 환심을 샀소. 그리고 결국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사용하여 놈의 안량한 우정심을 자극해 축융신공을 얻어낸 것이오." 듣고보니 놀라운 암계였다. 진설하는 그를 과연 혈궁주인 사부님이 대제자로 삼을만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혈궁의 제자 중 대사형의 정체를 아는 이가 없었으니 자칫했으면 생명이 위험했잖아요. 그리고 축융신공이 아니더라도 대사형은 충분히 강하거늘…… 굳이 생명을 건 모험을 할 필요가 있었나요?" "후후후…… 축융신공은 진사매의 생각보다 대단한 무공이오. 왜냐하면 축융신공만이 구음신공과 구양신공을 하나의 무공으로 합일시킬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오." "……!" "거기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천천히 해주겠소. 그런데 하나만 이야기하자면 사부께선 내가 전해준


축융신공을 연성하셨기에 구음신공과 구양신공을 하나로 이을 수 있었소. 만약 그렇게 하지 못했더라면 그토록 쉽게 환우금성을 이길 수 없었을게요." 진설하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원소랑은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심계가 깊고 무서운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대사형이 천룡북보 출신이라는 것도 거짓말인가요?" 원소랑의 안색이 흠칫거리며 굳어졌다. 그러더니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그건 사실이오. 아버님은 분명 천룡북보의 총관이셨소." "그럼…… 회남성에서의 그 시체는……?" "그건 가짜요. 내 진짜 아버님은 뇌비양, 그 자의 손에 돌아가셨소." 원소랑의 표정이 음울해졌다. 진설하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혈궁주는 그의 어머니였다. 그러니까 그는 천룡북보의 총관인 원화성과 혈궁주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원화성은 혈궁이 천룡북보를 공격할 때, 뇌비양을 암습하다 그의 손에 죽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죽은 뇌비양을 제외한다면 혈궁주와 원소랑 뿐이었다. 원소랑을 바라보는 진설하의 눈빛이 출렁거렸다. 진설하는 사부가 왜 원소랑을 후계자로 여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만한 암계를 가진 자라면 충분히 혈궁주의 뒤를 이어 혈궁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 고봉 위에서 천리경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원소랑과 진설하를 훔쳐보는 하나의 눈이 있었다. 그 눈의 주인은 바로 용미인이었다. 천리경 너머로 그녀의 눈에서 섬뜩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천리경을 원소랑에게 초점을 맞춘 채 원독에 찬 음성으로 씹어뱉았다. "진사매만 주저앉히면 문제없이 후계자가 될 줄 알았거늘……. 대사형이란 자가 돌연히 등장하다니! 만약 원소랑이 후계자가 되어 진설하와 맺어진다면 혈궁에서 나의 입지는 없다. 절대로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절대로……." 용미인은 아프게 입술을 깨물며 원소랑에 대한 전의를 다졌다. 용미인이 이 문제를 상의할 수 있는 자는 혈궁에서 남궁명밖에 없었다. 남궁명은 대낮부터 방 안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가 용미인의 방문을 받자 놀라는 표정을 보였다. 용미인은 남궁명이 홀로 앉아 술을 마시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밤일은 그렇지 않지만 실상 남궁명은 소심하고 나약하다. 혈궁과도 같이 암투와 피로 점철되어 있는 단체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더욱이 남궁명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있지만 진설하를 사랑하고 있음을 용미인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용미인도 남궁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건 그녀가 남궁명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혈궁의 후계자가 누가 되느냐 하는 문제에 있었다. 원소랑이 나타나기 전까지 혈궁의 후계자는 자신과 남궁명, 그리고 진설하와의 압축이었다. 남궁명이 진설하와 혼례를 올리게 된다면 용미인은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남궁명이 자신과 혼례를 올린다면 진설하를 주저앉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사부의 뒤를 잇는 것이었다. 그런데 원소랑이 나타났다. 이것은 전혀 생각해본 일이 없는 변수였다. 용미인은 도박과도 같은 승부를 걸어야 했다. "나는 사형이 진사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잘 알아요. 허나 굴러들어온 돌과도 같은 대사형이


진설하를 노리는 한 남궁사형의 꿈은 영원한 꿈에 불과해요. 허나 남궁사형이 진사매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예요." 용미인에게 있어서는 정말이지 하기 싫은 말이었다. 하지만 승부를 걸어야 하는 용미인은 경우에 따라서 남궁명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 후에 일은 그 후에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남궁명이 술이 오른 얼굴로 용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으로 묻고 있었다. 그 방법이 무엇이냐고? "대사형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되는 것이죠." 남궁명의 눈빛이 흠칫거렸다. 용미인은 말을 끊고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대사형이 사라져……?" 남궁명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만약……." 연거푸 세 잔의 술을 들이킨 남궁명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된다면 사매가 얻는 이득은 무엇이오?" "바로 혈궁이죠." "……!" "사형은 사랑을 얻고, 나는 야망을 얻는 거예요." 용미인은 남궁명을 보며 싸늘한 미소를 보였다. 남궁명은 그녀의 싸늘한 미소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용미인의 제안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남궁명도 진설하를 차지할 수 있는 방법은 원소랑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방법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생사를 가르는 도박이었다. 도박은 언제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리고 가진 모든 것을 잃거나 따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때문에 도박을 할 때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방법은……?" 남궁명은 심한 갈증을 느끼며 물었다. "원소랑은 지관 산신묘에서 능원평을 만나기로 했어요. 아마도 당문연과 군검우도 그를 만나러 가겠지요. 능원평의 종적은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군검우의 흔적은 혈궁에 포착되어 있어요. 그들의 손을 빌린다면 능히 원소랑을 제거할 수 있을 거예요." "……!" "원소랑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군검우와 능원평의 합공을 당할 수는 없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원소랑이 죽은 후 그곳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대공(大功)을 세우면 돼요." "하지만…… 그들을 싸우게 만들 방법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싸우게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지요." "……?" "군검우에게 원소랑의 신분을 알려주기만 하면 돼요." 3 관성량. 진관으로 가는 내내 군검우는 그 이름을 곱씹었다. 동창의 최고 수뇌이자 난화군주의 남편, 그리고 황제로부터 왕위까지 하사 받은 인물! 그 엄청난 인물이 십여 년 전, 천랑객을 시켜 월산장을 멸망시켰다.


거기까지가 군검우의 추리였다. 그런데……. 그 자가 왜 월산장을 멸망시켰을까? 이것이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이번 추리의 화두였다. 그런데 이때 문득 군검우의 뇌리를 스치고 가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만약…… 내 아버지와 관계가 있다면?' 군검우는 자신의 친부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인물의 사람이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검우가 모르는 친부와의 그 무엇으로 월산장이 멸문을 당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혹시…… 당소저는 내 친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소?" 당문연이 거기까지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당문연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예상대로였으니 군검우가 실망할 일은 없었다. 관도를 따라 말을 타고 가는 그들의 앞으로 갈림길이 나타났다. "오른쪽 길로 꺾여진 산길을 따라 십여 리만 가면 산신묘예요." 당문연의 설명에 군검우는 말고삐를 오른편으로 꺾었다. 그런데 산길로 접어들려는 바로 그때였다. 쐐애액! 어디선가 군검우를 향해 날카로운 암기가 날아왔다. 하지만 암기는 살상의 뜻이 없었는지 그다지 강렬하지 않았다. 군검우는 한 손을 휘둘러 암기를 낚아챘다. 암기에는 작은 종이쪽지가 매달려 있었다. 군검우는 종이를 폈다. 순간 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럴 수가……." 제 22 장 전위상, 그대의 복수는 반드시 해주겠다! 1 어둠 속에 잠긴 산신묘는 음산한 모습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길잃은 부엉이의 울음소리는 음산한 산신묘에 그 음산함을 더 해주었다. 군검우와 당문연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적의 기습에 대비하며 산신묘 안으로 들어갔다. 능원평은 산신묘의 한쪽 구석에 음습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군검우의 모습을 보자 능원평의 눈빛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너는 이곳에 왜 왔느냐?" 그는 용미인의 일로 인해 아직까지 군검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여차하면 월영신도를 뽑아 그와의 대결도 불사할 태세였다. 당문연이 황급히 능원평을 말렸다. "능원평! 당신이 천룡북보의 출신임을 인정한다면 절대로 이분께 무례하면 안돼요." "……!" 능원평이 '그게 무슨 소리냐'라는 얼굴로 당문연을 바라보았다. 당문연은 능원평에게 군검우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이분은 월산장의 소장주이세요." 능원평의 눈빛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한동안 망연히 군검우를 응시했다.


"당신이…… 월산장의 소장주라고……?" 군검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전대의 일로 후대인 자네에게까지 짐을 지우고 싶진 않네. 어차피 사라진 월산장이 지금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것은 군검우 스스로 자신이 월산장의 소장주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능원평의 얼굴표정이 연속적으로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마음 속으로 무엇이 어찌된 일인지를 갸늠하는 것 같았다. '이자가 아버님이 말씀하신 인물이란 말인가…….' 불타는 천룡북보, 그 위기의 순간에 능비양은 능원평에게 유언했다. "맹세해라, 평아야. 가문의 원수를 갚겠다고! 그리고 월산장의 유일한 혈육인 소장주를 찾아 너의 인생을 그분께 맡겨라. 우리 능씨문중은 월산장에 많은 은혜를 입었다. 그 은혜를 갚지 않는다면 금수와 진배 없을 터. 허나 우학 대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그분의 혈육이신 군아가씨마저 돌아가셨다. 이 애비는 대선생님의 분부를 받들지 못했다. 영원토록 군아가씨를 보호해 드리겠다는 그 분부를 말이다. 지금 내게는 그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 허나 다행으로 군아가씨는 유일한 핏줄을 남기셨다. 네가 그분을 찾아 그 분을 모셔야 한다. 이 애비가 죽는 지금, 그 약속은 너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능원평은 피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능비양에게 맹세했다. 아버님의 유언을 명심하여 받들어 모시겠다고 말이다. 능비양은 아들의 손을 잡고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능원평의 맹세에 그나마 안심이 된 것이다. 그는 품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내 능원평에게 건네주었다. "이 다라도엽비경이 너의 모든 것을 이루게해 줄 것이다. 이것을 완벽히 익힌다면 너는 천하제일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능비양은 죽었다. 능비양에 대한 회상을 마친 능원평은 망연한 표정으로 군검우를 응시했다. "당신을 좋아하진 않으나…… 부친의 유언을 거역할 마음은 추호도 없소이다." 능원평은 입술을 꽉! 깨물며 군검우를 향해 한쪽 무릎을 꺾었다. "천룡북보의 십사대 제자 능원평이 삼가 주공을 뵈옵니다!" 허리를 숙이는 능원평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능비양의 유언을 들었을 때는 그저 막연한 생각이었다. 자신이 허리를 숙일 일이 있을 거라는 걸 몰랐다. 하지만 지금 능원평은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 엄청난 자존심 덩어리인 능원평이 말이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군검우가 아니었다. 군검우는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능형, 나의 명령을 뭐든지 이행하겠소?" "그렇소이다." 능원평은 모욕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이들에게 지시만 내리고 그 스스로는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을 해왔다. 그런데 다른 이의 지시를 받는다는 기분은 정말이지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선대의 유언으로 인해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군검우가 명령했다. "이 순간부터 수백 년에 걸쳐 내려온 전대의 구속은 모두 백지화가 되었소!" "……?" 순간 능원평의 안색이 변하며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군검우를 올려다보았다. 당문연의 안색도 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당문연이 대들 듯이 소리쳤다. 군검우의 표정은 엄숙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위엄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무릎을 꿇으시오, 당소저!" 당문연이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었다. 군검우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다시 말했다. "그대들이 나를 주공으로 여긴다면 다시 한 번 명령하겠소!" "……!" "……!" "전대의 인연은 오늘로서 모두 백지화되었소!" 능원평과 당문연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군검우를 올려다보았다. 군검우의 표정은 강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두 분은 나의 명령을 받지 않고 무얼 하시오?" "받들어 거행하겠습니다!" 결국 그들은 군검우의 명령을 받들지 않을 수 없었다. 군검우가 무릎을 펴는 능원평을 바라보며 껄껄거리고 웃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친구가 된걸세, 능형." 군검우가 손을 내밀자 능원평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두 사람은 강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영원한 친구가 될 것을 맹세하겠소." 능원평의 진심이었다. 그는 모셔야 될 주공을 잃은 대신 한 명의 친구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문득 군검우의 손을 놓으며 능원평이 탄식했다. "원소랑…… 그놈이 죽지만 않았으면 더욱 좋았을텐데……." 그는 갈대숲에서 죽어갔을 원소랑을 그리워 하였다. "어쩌면 원소랑은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당문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능원평이 의혹의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엄청난 화재 속에서 어찌 살아날 수가 있단 말이오? 당소저, 혹시 원소랑을 만나기라도 하였소?" "이것을 보시면 알 수 있어요." 당문연은 품 속에 갈무리하고 있었던 쪽지를 능원평에게 건네 주었다. 순간 능원평의 표정이 급변했다. "이건…… 말도 안돼……." 그는 서찰의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 근육이 불신으로 일그러졌다. "그 서찰의 진위는 판단키 어려우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원소랑에게 철저히 희롱당한 거예요." "……!" "만약 원소랑이 그 불길 속에서 살아나 이곳으로 찾아온다면 서찰의 진위 여부를 판별할 수 있어요. 그가 죽었다면 서찰의 내용은 가짜겠지요." 세 사람 중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각자 산신묘의 한 구석에 자리잡고 앉아 원소랑이 오기를 기다렸다. 밖에선 돌연히 눈보라가 시작되며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흘렀건만 기다리는 원소랑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자시(子時)요." 능원평은 그 서찰이 거짓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원소랑은 자신을 속이지 않았고, 자신은 원소랑에게 속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혈궁의 첩자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원소랑이 나타나기를 바랬다. 원소랑이 죽었다는 것도 능원평이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그는 살아 있어야 한다. 살아 함께 천룡북보의 복수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휘이이이이잉……. 거센 눈보라와 함께 산신묘의 문이 덜컹!거리며 열렸다. 그리고 눈보라를 등진 채 들어서는 한 인영이 있었다. 원소랑, 바로 그였다. 순간 능원평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소보주! 살아계셨군요." 능원평을 발견한 원소랑은 기쁨에 겨운 음성으로 그를 향해 달려오며 무릎을 꿇었다. 그는 진심으로 능원평이 살아있음을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능원평의 품에서 월영신도가 뽑혀져 나왔다. 월연신도의 서늘한 감촉은 원소랑의 목줄기에 닿았다. 능원평의 안색이 살벌하게 변했다. 반면 원소랑의 얼굴은 경직되었다. "소…… 소보주…… 이게 무슨 일입니까?" "너는 어떻게 그 화재 속에서 살아났느냐?" 능원평의 음성은 싸늘했다. 능원평은 군검우와 당문연에게 원소랑이 혈궁의 첩자가 아니라는 걸 직접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어느새 원소랑의 뒤로는 당문연과 군검우가 자리했다. "그…… 그것은 천우신조(天佑神助)였습니다." "천우신조?" "그렇습니다. 제가 묻혀 있던 곳은 소보주님이 땅을 파주신 관계로 갈대가 흙 속에 파묻혔기 때문에 불이 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피해를 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네가 있던 곳만 불이 붙지않았다고?" 능원평이 느끼는 원소랑의 답변은 너무도 부족했다. 그것은 뭔가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능원평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소보주…… 제가 살아나지 말고 차라리 죽었어야 좋았다는 표정이시군요…….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제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원소랑은 짐짓 억울하다는 얼굴로 능원평을 올려다보았다. 능원평은 당문연에게 받은 쪽지를 원소랑에게 던졌다. "할말이 있으면 해보아라!" 원소랑은 조심스럽게 능원평이 건네주는 쪽지를 받았다. 쪽지를 펴보던 원소랑의 안색이 급변했다. '이 필체는……!' "흐흐흐…… 혈궁주의 대제자이자 혈궁의 후계자라……. 그리고 천자십호란 이름으로 관부에서 첩자로 활동했고…… 내게 접근한 이유는 축융신공 때문이라지?" "……." "원소랑! 이 서찰이 맞는다면 지금 산신묘 주위엔 혈궁의 고수들이 득실대고 네놈의 명령 한마디면 우리는 죽음에 직면하게 되겠지!"


"소보주! 이것은 함정입니다!" 원소랑은 절규하듯 소리쳤다. 자신의 목숨이 능원평의 손에 달려 있는 이상, 그는 철저히 위장해야 했다. "소부주께서는 어떤 증거로 이 서찰을 믿으십니까? 충성을 맹세한 저의 말보다 정체도 모르는 자의 서찰을 더 신뢰하십니까? 저는 억울합니다. 만약 소보주께서 원하신다면 죽음으로 저의 결백을 증명해드리겠습니다!" 원소랑은 극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왜 자신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써야 하는지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너무도 완강한 태도에 능원평의 눈빛이 흔들렸다. 원소랑의 말대로 기실 쪽지 한 장을 보고 그를 핍박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당문연이 두 사람의 말다툼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쪽지가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간에 원포두는 우리에게 한가지 사실을 해명을 해주어야 해요. 만약 원포두의 해명이 맞는 말이라면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겠지요." 그녀는 버릇처럼 원소랑을 원포두라 지칭했다. "말씀해보시오, 당소저. 내가 해명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명하고 누명을 벗겠소이다." "우리는 원포두와 함께 행동하며 여러번 위기를 맞았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소. 당소저의 말씀대로 우리는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을 했는데…… 당소저는 어찌 나를 의심할 수 있단 말이오!"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계속 말씀하시오." "우리가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당신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었어요. 특히 회남성으로 간다는 사실은 우리들 외에 그 누구도 몰랐어요. 그런데 회남성에서는 이미 혈궁의 고수들이 포진하여 우리를 기다렸어요." "……!" "이 서찰의 내용이 진실이라면 회남성에서 죽은 당신의 부친도 아마 가짜일 거예요!" "후후후……." 원소랑은 문득 회한의 웃음을 날렸다. "회남성에 간 사실을 우리들 외에 아무도 몰라 우리들 중 누군가가 혈궁과 밀통하여 그 사실을 알렸다면 하필이면 그게 왜 나요?" "!" "그리고…… 다른 일은 모두 전폐한다 할지라도 내 아버님을 욕되게 하는 일은 참을 수 없소! 당문연! 차라리 나를 불신한다면 구차한 이런저런 말 대신 깨끗이 나를 죽여라!" 원소랑은 능원평의 월영신도를 향해 자신의 목을 밀었다. 능원평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천룡북보의 대총관인 원화성의 아들, 원소랑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원소랑에 대한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원소랑을 겨눈 칼을 치우지 못했다. "칼을 치워주게, 능형." 문득 그들 사이를 지켜보고 있던 군검우가 끼어들었다. 능원평과 당문연이 의문의 시선으로 군검우를 바라보았다. 군검우는 원소랑에게 말했다. "자네가 혈궁의 제자라면 분명 구음신공을 익혔을 것일세. 그런데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구음신공은 최대 약점이 하나 있다네. 그건 바로 염천혈(廉泉穴)일세. 구양신공의 내공을 가진 자가 진기를 운용하여 염천혈을 누르면 음양상극의 현상이 벌어져 구음신공을 익힌 자는 일각 안으로 싸늘한 시체로 변하는 게지. 허나 만약 구음신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아무런 이상도 생기지 않네. 나는 구양신공을


알고 있으니 자네가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다면 염천혈을 개방하게. 이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 아니겠나?" "……!" 군검우의 손가락이 원소랑의 목젖에 있는 염천혈로 다가갔다. 원소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동시에 그의 눈빛은 스산해졌다. 군검우는 원소랑의 목젖을 향해 더 가까이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된 이상 피할 길은 없었다. 그는 다가오는 군검우를 향해 쌍장을 내질렀다. 쿠아아앙! 바로 구음신공이었다. 군검우는 이러한 만약의 사태를 방비하고 있었다. 원소랑, 그가 진실로 혈궁의 첩자라면 순순히 염천혈을 개방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강제로 개방하려드는 군검우를 향해 손을 쓸 것이다. 머리가 상당히 나쁘지 않은 자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수순이었다. 군검우는 구양신공을 전개하여 정면으로 원소랑의 구음신공과 충돌했다. 쿠아아아앙- 콰앙! 원소랑의 신형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그러면서 그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그렇다. 내가 바로 혈궁의 천자십호요, 혈궁주님의 대제자다!" 이제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는 가면을 벗었다. 놈들을 가장 쉽게 죽이려는 방법은 사라졌다. 그러나 산신묘 주위는 혈궁의 고수들로 천라지망이 깔려 있었다. 놈들은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군검우는 무심한 눈빛으로 원소랑을 바라보았다. 그가 염천혈 운운한 것은 오직 원소랑의 가면을 벗기기 위한 계략이었다. 그 계략은 정확히 적중하였다. "네놈을 진정으로 믿었거늘……." 분노로 인해 능원평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네놈을 잡아 지금까지의 죄를 묻겠다!" 월영신도가 싸늘한 예기를 토하며 원소랑을 짓쳐들었다. 당문연과 군검우도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원소랑이 본신의 무공을 감추고 있었다고는 하나 삼 인의 합공을 당할 수는 없었다. 어느 순간 원소랑은 능원평의 칼이 내뿜는 무서운 검기를 피하다가 군검우의 삼환응조공에 부상을 당했다. "크윽!" 답답한 비명성과 함께 원소랑은 품 속에서 부채를 꺼냈다. 그의 손에서 부채가 핑그르! 돌더니 륜(輪)으로 변화했다. "천형륜!" 당문연이 소리쳤다. 휘류류류류! 원소랑이 그녀를 향해 천형륜을 던졌다. 그러나 능원평이 달려들어 월영신도로 천형륜을 막았다. 까까깡!


어둠 속의 산신묘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이어 작렬하는 군검우의 장력에 원소랑은 연속적인 부상을 입었다. 천형륜마저 놓쳐버린 그는 피투성이로 변했다. 능원평이 비틀거리는 원소랑에게 다가왔다. "네놈의 마지막 숨통은 내가 끊어주마!" 다가오는 능원평을 노려보며 원소랑은 이빨을 갈았다. "너같이 우매한 놈의 손에 죽으려고 이 땅에 나오진 않았다!" 원소랑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이놈! 주둥아리를 찢어버리겠다!" 노한 능원평은 정말로 원소랑의 입을 찢어버리려는 것인지 월영신도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그의 얼굴을 공격했다. 원소랑이 피할 길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꽈앙-! 한소리 폭발음과 함께 산신묘의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동시에 빛살같은 인영 하나가 뛰어 내려오며 능원평의 월영신도를 막았다. 인영과 함께 무너진 천장에서 눈보라가 밀려들었다. 나타난 자는 바로 아수라탈을 쓴 혈궁주였다. 2 우르르르릉…… 콰앙! 혈궁주의 뒤를 이어 엄청난 숫자의 혈궁인들이 몰려들며 산신묘의 사방 벽은 초토화되어 날아갔다. "사…… 사부님!" 원소랑은 기쁨에 차 혈궁주를 불렀다. 그러나 그가 기쁨에 찼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공포를 주는 말이었다. '저자가 바로 혈궁의 궁주…….' 능원평의 눈이 빛났다. 쐐애액! 그는 더 이상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월영신도를 치켜들며 혈궁주를 쏘아갔다. 혈궁주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한 손을 허공 중으로 들었을 뿐이다. 능원평의 월영신도가 혈궁주의 손에 잡혔다. "이것이 바로 천하삼보의 하나라는 월영신도인가?" 혈궁주의 음성은 스산했다. 순간, 와지직! 소리와 함께 월영신도가 혈궁주의 손에서 으스러졌다. 능원평은 반으로 잘려진 월영신도를 들고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천하의 월영신도가 인간의 손에 의해 잘려질 수 있다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크하하핫! 너희들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철저히 신분을 위장한 혈궁주는 남자처럼 웃었다. 군검우는 침울한 눈빛을 하고 혈궁주를 향해 나섰다. 그는 백사단주의 신분이었다. 그의 품 속에 소장되어 있는 백사단, 가장 위칸에는 혈궁주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때문에 그는 혈궁주와 숙명의 결전을 벌여야 한다. 하지만 환우금성과 마찬가지로 군검우의 가슴에도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혈궁주의 정체였다.


"진정…… 헌원사부, 당신이십니까?" 한 발 앞으로 나선 군검우의 음성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혈궁주가 군검우를 돌아보며 아수라 탈 속에 감추어진 눈빛을 번뜩였다. "네놈도 환우금성과 같은 질문을 하는군." "……!" "그날…… 환우금성에게도 말했지. 네가 죽는 순간에 본좌의 정체를 말해주겠다고! 네놈 역시 죽는 순간에 그것을 말해주마!" "당신이…… 나의 사부님을 만났단 말이오?" "그렇다! 그는 본좌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 쿵! 군검우는 둔기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크하하하! 더 놀라운 사실을 말해줄까? 네놈이 그토록 애타게 찾는 헌원패성은 이미 수 년 전에 본좌에 의해 구금된 상태다. 놈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처참한 상태로 갇혀 있다." "사실이냐?" 그 말을 듣는 순간, 군검우의 눈빛이 혈광으로 빛났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혈궁주가 헌원패성이 아니라는데 크게 안심하였다. 군검우의 전신에서 엄청난 분노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의 기세를 보는 혈궁주의 눈빛이 흠칫거렸다. 생각 이상으로 군검우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가 가공했던 것이다. '이놈의 기세는 결코 환우금성의 아래가 아니로구나……. 놈을 살려두면 장차 헌원패성과 환우금성을 합친 이상으로 큰 우환이 될 것이다…….' 산신묘로 오는 도중 백사단주는 필히 죽여야한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그 결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군검우를 보는 순간 혈궁주의 결심은 더욱 짙어졌다. 백사단주 군검우를 깨끗이 처리하기로 결정한 혈궁주의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군검우는 등에 메고 있던 검을 뽑았다. 백사단주의 모습이 아닌 군검우 본래의 모습으로 상대에게 검을 겨누기는 처음이었다. 군검우의 전신내력이 검을 잡고 있는 양 손으로 운집되었다. 그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차앗!" 동시에 섬전처럼 군검우의 신형이 혈궁주를 덮쳐들었다. 하지만 혈궁주는 환영처럼 그 자리에서 신형을 변화시키며 군검우의 검을 피했다. 군검우는 마음 속으로 섬뜩해짐을 느꼈다. 혈궁주가 자신의 첫 번째 공격을 피했다는 것은 두 번째, 세 번째 공격도 순조롭게 피할 수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초형일섬검을 전개했다. 슈슈슈슈슉! 가공할 검기가 사방으로 뻗었다. "으윽……." "크으으……."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혈궁인들이 초형일섬검의 검기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죽어랏!" 초형일섬검은 혈궁주의 가슴팍을 갈랐다. 혈궁주는 피하려 하였으나 군검우의 쾌검에 그만 옷이 갈라지고 말았다.


군검우는 초형일섬검을 피해내는 혈궁주에게 경악하고 말았다. '분명히 베었거늘…… 옷만 갈라지고 살 속으로는 검이 침투하지 못하다니!' "크크크…… 그것이 천년무림사상 최고의 검법인 절대천존 천승세의 초형일섬검인가?" 혈궁주의 가슴팍 옷이 갈라지고 그녀의 속살이 보였다. 사내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하얀 속살이 말이다. "여…… 여자……." 당문연이 주춤거리며 소리쳤다. 그렇다. 혈궁주는 겉으로 드러나보이지 않게 자신의 젖가슴을 압박하듯 칭칭 감아놓고 있었으나, 군검우의 초형일섬검에 갈라지며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툭. 마치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처럼 잔뜩 조여져 있던 혈궁주의 젖가슴이 갈라진 헝겊을 헤치며 눈을 찌를 듯이 솟아 올랐다. 그것은 가히 사내의 눈을 현혹시키고, 가슴에 불을 지를 만큼 풍염하고도 아름다운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가슴의 정 중앙에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는 연봉홍빛 젖꼭지는 수줍은 듯 떨고 있어 보는 눈을 더욱 아리게 했다. 군검우는 자신도 모르게 훅! 하고 마른 숨을 삼켰다. 아수라탈 속, 혈궁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크크…… 모두 죽여 눈알을 뽑아버리겠다!" "이제보니 불알없는 계집년이었구나!" 능원평이 조롱하듯 소리쳤다. 원소랑이 겉옷을 벗어 혈궁주의 가슴을 감춰주었다. "그 한마디로 네놈의 양물을 잘라 지나가는 개새끼에게 먹이겠다!" 혈궁주가 양팔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양 손에서 구양신공과 구음신공이 동시에 나타났다. 이 순간 그녀의 상대는 군검우가 아니라 능원평이었다. 쿠아아아아앙……! 구양신공과 구음신공이 합일되어 능원평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듯이 덮쳐들었다. 능원평은 감히 그것에 대적할 수 없었다. 그는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며 축융신공을 전개했다. 몸이 가루가 되어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 이상, 축융신공을 전개하면 죽지 않는다. "능형! 위험하오!" 군검우가 능원평과 혈궁주의 사이를 덮쳤다. 능원평이 축융신공을 전개한다는 생각은 올바른 것이었지만 그것은 내력의 차이가 대동소이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혈궁주와 능원평의 내력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반딧불만큼 엄청난 차이였다. 콰앙-! 군검우의 구양신공이 혈궁주의 구양신공, 구음신공과 맞부딪쳤다. "크으윽……." 과거, 환우금성이 그랬듯이 군검우 또한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군형!" "군공자!" 능원평과 당문연이 벼락같이 몸을 날리며 군검우의 앞을 막았다. 혈궁주의 살벌한 눈빛이 또다시 능원평을 향해 돌았다.


"크크크! 능원평, 모두가 너의 덕분이다!" "……?" "네가 랑아에게 전수해준 축융신공 덕분에 본좌는 두 가지 신공을 하나로 합치는 데 성공했다. 네놈이 조금 전 그런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고통없는 죽음을 선사했을 것이다!" "……!" "하지만 이젠 아니다! 네놈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주겠다!" "계집! 개소리는 집어 치우고 어서 덤벼라!" 월영신도가 부러진 능원평은 빈 손이었다. 그는 그 빈손으로 전신의 내력을 극성으로 끌어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크크크! 어차피 죽을 거…… 네놈의 원대로 떠들어 보았으니 한은 없겠지!" 혈궁주가 한 손을 들며 능원평을 향해 다가왔다. 능원평은 참으로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의 이 상황을 가장 슬기롭게 넘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지 도망갈 길은 없어 보였다. 혈궁주 뿐만이라면 어떻게 버텨 보겠으나 지금 부서진 산신묘 안으로 삼십 명이 족히 되어보이는 혈궁의 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호시탐탐 손을 쓸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들을 뚫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당소저! 군형을 안으시오!' 능원평은 당문연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죽음을 각오하고 저 년을 막아보겠소! 당소저는 그 틈을 이용해 어떡하든 도망가시오!' 썩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능원평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능공자…….' '시간이 없소. 설마 여기서 다 같이 죽자는 것은 아니겠지? 부디 군형을 살리고 당소저도 살아 나를 대신해 천룡북보의 복수를 해주시오! 나는 당소저만 믿소!' 그것은 당문연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능원평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말해놓지 않으면 당문연은 함께 죽자고 덤비지 혼자서 도망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능원평! 잘 보아라! 이것이 네놈의 도움으로 이룩된 구음신공과 구양신공의 합일이다!" 혈궁주의 양 손에서 각기 다른 무형의 광구가 형성되었다. "너희들이 사라짐으로서 이젠 혈궁의 모든 적은 없어지는 것이다!" 광구는 혈궁주의 손 위에서 점점 더 그 크기를 더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직은 장담이 너무 빨라!" 쉬쉬쉬쉭-!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사신묘를 향해 달려오는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사문군과 전위상이었다. 그들은 악양의 정풍객점에서 군검우가 남긴 서찰을 보고 이곳으로 달려오던 중 군검우가 맞이한 최악의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사신묘로 진입해 들어 군검우의 앞을 가로막은 전위상이 낄낄거렸다. "혈궁주! 아직…… 승부가 끝나지 않았다." "크하하핫! 한낱…… 호위무사 놈들이 우리를 어쩌겠다는 거냐!" 혈궁주의 옆에서 원소랑이 비웃었다.


"흐흐흐…… 어린놈! 노부가 과거 마검이란 이름으로 천하를 공포로 떨어울릴 때 네놈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사문군은 원소랑을 비웃었다. 혈궁주는 돌연히 끼어든 사문군과 전위상에 의해 잠시 흠칫거렸으나 이내 다시 양 손을 올렸다. 기실 혈궁주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나타남은 죽일 자가 두 명 더 늘어났다는 것 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크크크! 네가 과연 나를 죽일 수 있을까?" 전위상은 들어올려진 혈궁주의 양 손을 바라보며 상체를 벗었다. "……!" 순간 혈궁주의 손이 멈췄다. 드러난 전위상의 상체에는 엄청난 양의 폭탄이 갑옷처럼 매달려 있었다. "킬킬…… 과거 사천지방의 무림인들이 가장 징그럽게 생각한 것이 바로 노부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이 천폭갑(千爆甲) 때문에 아무도 노부를 건들이지 못했다! 이것이 터지면 주위 백여 장은 모조리 초토화가 된다! 설사 대라신선(大羅神仙)이라 해도 걸레쪽이 되어 버린단 말이다!" "네놈이 감히 본좌의 일을 방해하겠다는 것이냐!" 혈궁주의 음성이 분노로 가득찼다. "흐흐흐…… 똑같은 말을 해주마! 너희놈들이 감히 우리 군공자님을 해하겠다는 것이냐! 사문군! 뭐하느냐? 어서 주군을 모시고 떠나지 않고!" "알았소!" 사문군이 군검우를 부축했다. 혈궁주와 원소랑, 그리고 혈궁의 고수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사문군의 말대로 어린놈, 원소랑은 잘 모르겠지만 강호에서 수십 년 밥을 먹은 노마(老魔)들은 전위상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천폭갑이 터진다면 백여 장 안의 모든 생명체들은 초토화되고 만다. 군검우는 사문군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일어섰다. "전형, 그대를 두고 떠날 수 없소! 함께 살지 못한다면 함께 죽읍시다!" 군검우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비장한 음성을 토해냈다. 전위상은 고개를 흔들었다. "주군! 천폭갑이 있는 한 아무도 저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주군께서는 마음놓고 이놈들의 마수에서 탈출하십시오. 저도 곧 뒤따라 가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주군! 어서 피하십시오!" 사문군은 억지로 군검우를 안았다. 동시에 그들은 혈궁을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혈궁주는 그들을 막지 않았다. 아니, 막지 못했다. 만에 하나 더 이상 퇴로가 없다고 판단하여 전위상이 자폭을 하겠다고 덤빈다면 정말로 대책이 없는 것이다. 이윽고 사신묘에는 전위상과 혈궁의 인물들만이 남았다. "결국…… 네놈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혈궁주가 전위상을 향해 눈빛을 빛냈다. 전위상이 피식 웃었다. "크흐흐…… 주인의 생명을 구함으로써 신하의 의무는 끝나는 것이다. 죽음 따윈 이미 개에게 주어버린 몸이야!" 전위상은 천폭갑으로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일단 군검우 일행이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혈궁주는 초조해졌다. 찰나의 시간이 흐른다 할지라도 그만큼 군검우는 더 멀리 도망가고 있다. 쫓아가서 그를 잡아야할 확률은 그 찰나의 시간만큼 사라지는 것이다. 혈궁주는 자신이 익힌 호신강기라면 천폭갑의 폭발력을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허나 문제는 원소랑이었다. 천폭갑이 터진다면 그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다른 모든 자가 죽는다 할지라도 원소랑은 죽을 수 없는 몸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기 때문이다. 이때, 전위상의 뒷편에서 미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의 등 뒤로 여불해가 나타난 것이다. "꼼짝마!" 전위상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뒤로 돌았다. 그것은 미세한 틈이었다. 그 때를 놓칠 혈궁주가 아니었다. 슝! 혈궁주의 손에서 지풍이 발사되었다. 지풍은 그대로 전위상의 이마를 관통했다. "으윽……." 답답한 신음성과 함께 전위상의 상체가 옆으로 기울었다. 3 꽈앙-! 어둠 속을 달려나가는 군검우 일행의 뒤편으로 산천초목을 진동시키는 가공할 폭발음이 일었다. 달려나가던 그들은 너무도 놀라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저멀리 엄청난 대폭발의 섬광이 산봉우리를 덮치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전…… 위…… 상……." "전형……." 전위상의 천폭갑이 터진 것이라는 걸 짐작하지 못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의 눈에서 피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그들 모두를 살리고 장렬하게 전사한 것이다. 군검우는 오열했다. "전위상…… 그대의 복수는 반드시 해주겠다!" 격동으로 인해 내력이 격탕질치기 시작하자 핏물이 쉴새없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내렸다. 사문군은 군검우의 신형을 안고 더욱 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위상이 죽은 이상, 살아남은 혈궁의 개들은 추격의 고삐를 바짝 당길 것이다. 이대로 도망치다가 잡혀 전위상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는 없었다. 제 23 장 죽는 날까지 후손을 볼 수가 없소 1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그리고 너무나 초조했다. 만약 일이 성공하여 원소랑이 죽었다면 혈궁 전체로 즐거운 조종(弔鐘) 소리가 울려퍼질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용미인과 남궁명이 바라는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입술이 바싹바싹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일지도 몰라요……." 용미인은 자신의 몸 위로 전해지는 남궁명의 체중을 느끼며 말했다. 남궁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센 콧김을 그녀의 헐떡거리는 유방 위로 뿜었다. 용미인의 미끈한 허벅지가 허공에서 작살맞은 물고기처럼 부르르 떨었다. "초조하지 않나요……?" "초조하다!" 그래서일까? 남궁명은 서두르고 있었다. 남궁명이 서두르는 것만큼 용미인도 서둘렀다. "아아……!" 그녀는 남궁명의 등팍을 있는 힘껏 끌어 안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남궁명의 엄청난 힘이 그녀의 몸 속으로 파고 들었다. 용미인의 온 몸으로 절정의 쾌감이 퍼져올랐다. 용미인은 그 쾌감으로 자신의 초조함을 잊으려 했다. 원소랑이 죽지 않고, 군검우 일행이 몰살당했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아아아……!" 초조감이 고조되면 고조될 수록 그녀의 신음성도 고조되어 갔다. 남궁명의 움직임도 그녀의 신음성처럼 빠르고 격렬해졌다. 그들의 정사는 끝을 모른 채 치열하게 변해갔다.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뿐이었다. 숨막히는 초조감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이것 뿐이었다. 용미인은 남궁명을 탐하고, 남궁명은 용미인을 탐하며 그들은 원소랑이 죽었다는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일곱 번째 체위! 남궁명이 용미인의 허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번쩍 들어올려 앞을 향해 앉혔다. 그녀가 두 팔로 남궁명의 목을 끌어안고, 두 다리는 그의 허리를 감았다. "아학…… 아학……!" 그녀는 숨넘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금방이라도 까무라칠 것만 같았다. 그녀의 전신은 쾌락에 사로잡혀 욕망의 덩어리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아하학!" 남궁명의 음성도 높아갔다. 그는 양손으로 용미인의 매끄러운 허리를 잡고 더욱 빨리 움직였다. 용미인도 엉덩이를 들었다놨다 하며 남궁명을 도왔다. 남궁명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구구구구구! 방 안으로 한 마리 전서구가 날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용미인은 아직도 온몸을 사로잡고 있는 쾌락으로 인해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울어대는 전서구를 바라보았다. "진관에서 온 소식일 거예요." 전서구에는 용미인이 기다리는 한 장의 서찰이 매달려 있었다. 용미인은 옷을 걸칠 겨를도 없이 나신으로 전서구에 달려가 서찰을 폈다. 순간 전서구를 든 용미인의 손이 부들두들 떨렸다. "뭐요?" 남궁명이 침상에서 박차고 일어나며 물었다.


그의 양물은 조금전 보여주던 폭발적인 힘은 사라지고 축 처져 있었다. "원소랑이 죽지 않았어요……." "……!" "그가 죽기 직전, 사부님이 나타나 그를 구했다는군요. 군검우는 부상을 입고 도주했구요." 용미인의 입술이 파리하게 질렸다. 두 눈은 텅비었다. "그렇군." 남궁명의 얼굴도 암울하게 변했다. 그는 무척이나 불안하고 초조한지 입술에 침을 바르며 한 손으로 용미인의 젖가슴을 만졌다. "원소랑이 죽지 않았다면 분명 이번 일에 우리가 개입되었음을 눈치챘을 거예요. 이제…… 우리는 끝장이예요." 남궁명의 손에 잡힌 용미인의 젖꼭지가 부르르 떨었다. 남궁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를 원망하고 싶겠군요? 모든 것이 나 때문이니……." 용미인이 물었다. 남궁명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나도 목적이 있었기에 동조를 한 것이오. 죽을지언정 사매를 원망하지 않소. 여한이 있다면 단 하나……." 남궁명은 아련한 눈빛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진사매말인가요?" "……!" "쿡쿡." 용미인은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라는 사람 정말 이상해요. 지금 당신은 제 가슴을 만지고 있어요……. 그런데…… 머리 속으로는 다른 여자 생각을 하는군요." "……." "남자들은 다 그런가요?" "어차피 우리는 좋은 동지일 뿐…… 부부로는 어울리지 않소." "그렇겠지요. 당신은 낭만과 꿈을 먹고 살고, 나는 권력과 야망을 먹고 사니까…… 어울리지 않겠지요." "……!" "그렇게도 진사매를 사랑하나요?" "이제는 모두 다 부질없는 일이오." 남궁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자 용미인은 비통했다. "진설하…… 그녀가 증오스러우면서도 부럽군요.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누구에게도 사랑이란 것을 받아보지 못했어요. 나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었지만…… 그 사람들은 언제나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요……." 절대로 울 것 같지 않은 용미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사매……." 하지만 그녀는 독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우리는 막바지에 몰렸어요. 원소랑이 궁으로 돌아온다면 끝장이예요. 허나 아직 포기하기엔 일러요. 우리가 살아날 방법이 전혀없는 것은 아녜요." "또다른 살아날 방법이 있다고?"


"물론이예요. 그건 너무 큰 도박이기는 하지만." "……?" "사형이나 나나 죽기엔 너무도 이 세상에 미련이 많지 않나요?" "그 방법이 무엇이오?" "혈궁에는 사부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있어요. 누군지 아시겠어요?" "!" "바로 헌원패성이예요!" "그…… 그건 안돼!" 남궁명의 얼굴이 핼쓱하게 질렸다. "그 자야말로 사부를 능가하는 대마인이야!" 그러나 용미인은 전서구에 매달린 서찰을 읽는 순간부터 이미 그렇게 결심이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결연하게 변했다. "헌원패성은 사로갱(死路坑)에 갇혀 있어요. 내가 알기로 사부가 헌원패성을 죽이지 않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가 지니고있는 한 가지 물건 때문이예요. 무림사상 최강의 고수였다는 절대천존 천승세의 세 가지 무공 중 최후의 무공인 파천황신공(破天荒神功)! 우리가 헌원패성을 탈출시킨 뒤 그의 무공을 이어받고 게다가 파천황신공마저 얻을 수 있다면 사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용미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남궁명은 꿀꺽 침을 삼켰다. 2 휘이이이잉……! 엄청난 눈과 바람으로 인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속을 기다시피 빠져 나가는 군검우 일행은 참으로 비참했다. 당해도 철저하게 당했다. 군검우는 사문군의 부축을 받지 않는다면 자신의 의지로 단 한발자국도 걸어나갈 수 없었다. "이 상태라면 더 이상 견디기 어렵소." 능원평이 코 앞의 눈보라를 헤치며 말했다. 쌓인 눈은 벌써 그들의 무릎까지 차올랐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도망간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사문군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쉬지 못하고 이렇게 눈 속을 전진한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군검우는 탈진하고 말 것이다. 사문군은 허리를 굽혀 한움큼의 눈을 뭉쳐 군검우의 목을 축이게 하였다. 이때, 일행과 떨어져 멀찌감치 걷고 있던 당문연이 돌아오며 소리쳤다. "저쪽을 보세요! 동굴이 하나 있어요!" 동굴은 예상 외로 상당히 넓었다. 족히 일백 평은 넘을 것 같은 지하광장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잠깐이나마 눈보라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도 있었다. 동굴은 막혀 있어 만약 혈궁의 무리들이 쫓아 들어온다면 도망갈 길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 하나 거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일단은 동굴의 안락함에 몸을 묻었다. 그런데 이리저리 동굴을 살피다가 일행에게 돌아온 사문군이 이상한 듯 말했다. "특이하게도 이 동굴에는 아무런 생물도 없소이다. 그 흔한 들쥐나 박쥐조차도……." "아무렴 어떻소. 이 눈이 조금이라도 그친다면 우린 나가야 할 것이오. 어차피 여기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 능원평은 죽은 듯 자리에 누워 있는 군검우를 돌아보았다. 군검우의 얼굴은 백납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쉬는 동안 일단 그를 치료해야 해요." 당문연이 그의 품을 뒤져 여의환혼주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군검우의 가슴에 올려 놓았다. 여의환혼주에서 찬란한 광채가 발산되었다. "상처를 치료할 수가 있을까요?" 당문연은 근심어린 신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여의환혼주는 생명이 붙어있는 한 반드시 살려내는 기물이오." 사문군이 당문연의 뒷편에서 군검우를 바라보며 그녀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그런데 왠지 광채가 흐려지는 것 같아요……." 그녀의 얼굴이 더욱 근심으로 젖어 들었다. "흐려지는 것 같은게 아니라 흐려지고 있소이다……." 사문군의 얼굴도 음울하게 변했다. "여의환혼주는 무한한 물건이 아니오. 원래 그 물건은 천교신룡(天蛟神龍)이라는 영물의 몸 속에 있는 내단(內丹)이오. 수천 년 동안 생성된 것으로 생명력을 이어주는 놀라운 효능을 발휘하오. 허나 생명을 살리면서 그 물건 또한 점차로 그 효능이 상실 되어가는 것이오. 그리고 어느 순간에 가서는 그 빛을 완전히 잃게 되오. 지금 빛이 약해지는 걸로 보아 이미 그 효능이 한계에 달한 모양이오. 수백 년에 걸쳐 수많은 생명을 구했으니… … 하필이면 이제 그 물건도 역할을 다한 셈인가 보오. 상태로 보아 이번이 마지막인 듯싶소……." 지난 번 동굴에서 당문연은 여의환혼주를 이용하여 군검우를 살려낸 적이 있었다. 당시 군검우의 몸은 모조리 투명한 빛으로 감싸여져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 투명한 빛이 겨우 그의 상체를 가릴 정도였던 것이다. 당문연은 군검우의 앞에 무릎꿇고 앉아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그 어떤 절대신(絶大神)에게 간절히 기원했다. 그를 반드시 완치시켜 달라고…….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으으……." 군검우는 의식이 돌아오는지 가느다란 신음성을 토해냈다. "군공자!" "주군!" 당문연과 사문군이 화들짝 달려가 군검우의 손을 잡았다. 능원평은 그들의 뒤에서 군검우를 내려보았다. 그들의 외침을 들었는지 군검우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내…… 내가…… 아직 죽지 않았구려……." 군검우는 사문군과 능원평을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요…… 당신은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어요……." 당문연은 흥분하고 있었다. 그 어떤 절대신에게 보냈던 자신의 기원이 효력을 발휘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소리내어 펑펑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군검우가 다시 깨어났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이제 그녀는 아무런 소망도 없었다. 그가 깨어났으니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 한쪽에 서 있던 능원평의 신형이 움찔거렸다. 돌연 그의 콧속으로 지독한 비린내가 풍겨왔다. "이게 무슨 냄새냐?" 능원평이 비린내를 맡음과 동시에 동굴 안의 다른 삼 인도 능원평이 맡았던 그 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그들의 안색이 일제히 홱! 변했다. 그때였다. 스스스! 어둠 속에서 뭔가 기는 듯한 소리가 났다. 능원평이 화섭자를 꺼내 불을 밝혔다. 주위의 사물이 어둠을 뚫고 일시지간에 그 모습을 드러났다. "아악!" 동시에 당문연이 날카로운 비명성을 내질렀다. "헉!" "허억!"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능원평과 사문군도 비명성을 토했다. 그들의 전면, 거대한 독거미가 나타났다. 놈은 말 그대로 거대했다. 크기가 보통 사람의 세 배는 됨직했다. 단언컨데 이들은 지금까지 이렇게 큰 괴물 독거미를 본 적이 없었다. "마…… 만황지주(蠻荒蜘蛛)예요……." 당문연이 뒤로 주춤거렸다. 하지만 꽉 막힌 동굴 안에서 빠져 나갈 길은 없었다. 독거미가 동굴의 입구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동굴이 바로 만황지주의 거처였구나. 그래서 동굴 안에 살아있는 생물이 없었던 거였어!" 능원평은 거대한 독거미 앞에 우뚝 섰다. 비록 놈이 천하삼대독물(天下三大毒物) 중 하나였으나 그것을 겁낼 능원평이 아니었다. 검은색으로 된 놈의 표피는 윤기가 흘러 반들반들할 지경이었다. 쐐애액-! 만황지주의 입이 쩌억 벌어지며 그 안에서 어른의 팔뚝만한 거미줄이 뿜어졌다. 극독을 함유하고 있는 놈의 거미줄에는 스치기만 해도 즉사였다. 능원평의 신형이 펄쩍 허공 중으로 뛰어올랐다. 동시에 그의 쌍장이 만황지주를 향해 거침없는 장력을 토했다. 쾅! 천지를 진동하는 파공음이 동굴 안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만황지주는 끄떡없었다. 아니, 놈은 능원평의 장력에 성이 났는지 더욱 요동치며 거미줄을 뽑아냈다. 놈의 거미줄에 부딪친 동굴의 석벽이 퍼억!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내리며 독기에 진득한 액체가 되어 녹아 들어갔다. 독가루조차 녹여버리는 참으로 지독한 독이었다. 사문군이 능원평을 돕기 위해 검을 뽑았다. 당문연이 소리쳤다. "소용 없어요! 만황지주는 웬만한 무기로는 상처를 입히지 못해요. 약점은 오직 두 눈 뿐이예요. 눈을 찔러 놈의 방향감각을 흐트러놓아야 해요!" 비록 깨어났다고 하나 군검우는 아직 몸이 성치 못했다.


당문연은 군검우를 보호하며 만황지주의 거미줄에 대항했다. 쐐애애액! 거미줄은 마치 그들을 사방으로 가둬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종횡(縱橫)으로 그어졌다. "아악!" 어느 사이 당문연이 거미줄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당소저!" 당문연의 뒤에 있던 군검우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는 그 한 번으로 혼절하고 말았다. 극독이 실려있는 거미줄에 맞은 그녀의 옷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입술은 파랗게 질려들었다. "당소저! 정신 차리시오!" 그러나 혼절에 빠진 당문연이 깨어날 리 없었다. 군검우의 두 눈에서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되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군검우는 검을 뽑았다. 그의 몸은 아직 완전치 않았다. "주군! 위험합니다!" 하지만 사문군의 만류는 이미 늦었다. 슈슈슈슈슉! 군검우는 초형일섬검을 전개했다. 그의 단전은 폭발해버릴 듯 고통에 차 올랐다. 파앗! 검신합일(劍身合一)의 자세로 날아간 군검우의 검이 만황지주의 눈에 박혔다. 순간 만황지주의 눈에서 시뻘건 액체가 튀었다. 군검우는 순식간에 놈의 눈알에서 튄 시뻘건 액체를 뒤집어 쓰고야 말았다. 파스스스스……. 군검우의 의복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아악!" 군검우는 정면으로 놈의 시뻘건 액체에 노출되버린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급박한 비명성을 내질렀다. 눈알이 찔린 거미도 고통을 참지 못하고 요동쳤다. 쐐애애액! 이때, 사문군이 수중에 들린 검을 던져 만황지주의 다른 한쪽 눈을 관통시켰다. 능원평은 축융신공을 끌어올렸다. 확…… 확확확! 그의 양손이 불타올랐다. 그는 그 상태로 신형을 날려 만황지주의 등을 밟았다. 등 위로 올라간 능원평은 양손을 연속적으로 갈겼다. 콰앙! 쾅! 만황지주의 등이 터져나가며 축융신공에 의해 불이 붙었다. 이 엄청난 공격 속에 만황지주의 발이 꺾였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놈이 죽었다. 허나 군검우 일행의 피해도 막심했다. 당문연과 군검우는 거미의 독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한 상태였다. 천하삼대독물 중 하나인 이 만황지주의 독은 어떤 것으로도 치료할 수 없었다. "……!"


"……!"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는 능원평과 사문군의 얼굴은 망연자실, 그 자체였다. "어서 여의환혼주를!" 그제서야 사문군이 정신을 차린 듯 군검우의 품에서 여의환혼주를 꺼냈다. 사문군은 그것을 군검우의 가슴에 놓았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 여의환혼주에서 빛이 나지 않았다. 효력이 다한 것이다. 사문군은 절규했다. "제발…… 광채를 발해라! 제발……." 하지만 그의 피끓는 염원도 소용이 없었다. 여의환혼주는 지난번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효능을 상실한 것이다. 사문군의 피끓는 절규를 내려다보는 능원평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주군! 이대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주군! 눈을 뜨십시오!" 그의 충정에 하늘도 감동할만 하건만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문군의 신형이 눈에 띠게 부르르 떨렸다. 이대로 군검우를 죽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설사 천하의 명의(名醫)에게 보여 군검우를 살릴 수 있다 할지라도 이 눈덮힌 산을 내려가야 한다. 능원평의 한 손이 사문군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들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오." 사문군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는 능원평을 향해 눈물젖은 시선을 홱! 돌렸다. "어떻게 말이오?" "독은 독으로 치료하는 것이오." "독으로 독을……?" 능원평은 불에 타 들어가는 거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미의 눈에 박힌 검을 뽑아 놈의 배를 갈랐다. 그곳에는 만황지주의 쓸개가 있었다. 바로 놈의 모든 독이 담겨 있는 독담(毒膽)이었다. 능원평은 그것을 검 끝으로 들어올렸다. 검이 타들어가는지 검 끝에서 시퍼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언청난 악취가 능원평의 코를 찔렀다. '만황지주의 독담! 이것이라면 충분하다!' "다라도엽비경에는 세 가지의 무공이 적혀 있소." "……?" "천월도법과 축융신공, 그리고 천장비독(千藏秘毒)이오." "천장비독?" "그렇소. 천장비독에는 독으로 독을 치료하는 이독치독의 방법이 적혀 있소이다. 이 독담과 천장비독이라면 군형과 당소저를 살릴 수 있을지 모르오." "그렇다면 그것을 시전해 주시오!" "허나…… 천장비독은 극히 위험하여 성공의 확률이 거의 없다고 전해지고 있소. 게다가 설사 성공하여 살아난다 하더라도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 될 수도 있소이다." 능원평은 무거운 얼굴로 천장비독의 방법을 사문군에게 설명했다. 사문군의 얼굴이 핼쓱하게 질렸다. "때문에 나는 임의대로 결정할 수가 없소. 사형은 군형과 오랜 시간을 함께 했으니 당신이


결정하시오."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의미는 무엇이오?" 능원평은 슬쩍 군검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만약 성공해서 살아난다면 그는 피 한방울까지도 지독한 독으로 변해 버리오. 때문에 영원한 독인(毒人)이 되는 것이오. 그 누구와도 가까이할 수 없소. 접근한 자는 여하를 막론하고 그가 뿜어내는 독기운에 죽음을 당할 것이오. 그리고…… 죽는 날까지 후손을 볼 수가 없소." "……!" 지독한 상황이었다. 사문군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울 길 없었다. 그는 이빨을 깨물며 군검우를 바라보았다. "시술해주시오……. 주군께서도 능대협을 원망치는 않을거라 믿소이다." 3 휘이이이잉……. 혈궁에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었다. 희미한 편월마저 구름에 가리워져 사위는 천지분간을 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스슷……. 그 어둠 속에서 용미인과 남궁명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들은 야음(夜陰)을 틈타 헌원패성이 갇혀 있는 사로갱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실패하면 우리는 사로갱에 갇혀 나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 남궁명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생명을 도외시한 지 오래요." "일단 사로갱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궁주가 지니고 있는 열쇠가 필요해요!" 궁주의 거처로 가는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산책을 하듯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경비를 서고 있는 몇 명의 경비병들이 그들을 발견하곤 인사를 하며 지나쳤다. 용미인과 남궁명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궁주의 거처 주변에도 몇 명의 부하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하지만 혈궁의 내부를 자신의 손바닥보다 더 잘 들여다 보는 이들 두 사람에게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인 경비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대전의 지붕을 넘어 현판을 타고 궁주의 거처로 진입했다. 그리고 방향을 궁주의 서재가 있는 쪽으로 잡았다. 용미인은 서재에서 과거 혈궁주가 사로갱의 열쇠를 꺼내는 걸 본 일이 있었다. 혈궁주가 서 있었던 서가(書架) 앞에서 몇 권의 책을 뽑으니 그 안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용미인은 그 구멍 속으로 손을 넣었다. 가느다란 줄 하나가 그녀의 손에 부딪쳤다. 줄을 당겼다. 그그그그긍. 순간 서가가 갈라지고 그 안의 은밀한 비밀상자가 나타났다. 용미인의 얼굴이 희열로 빛났다. "여기에 사로갱의 열쇠가 있을 거예요!" "빨리하시오! 빨리……." 남궁명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용미인을 재촉했다. 용미인이 상자를 열었다. 사로갱으로 진입할 수 있는 열쇠 꾸러미가 보였다. 그런데 그 상자 안에는 열쇠 말고 또 다른 물건이 들어 있었다.


책자였다. 용미인은 호기심에 책자를 살폈다. 궁주가 이곳에 감추어둘 정도의 책자라면 보통 책자가 아닐거라는 생각이었다. "오!" 그런데 책자를 보는 순간, 용미인의 얼굴이 경악과 희열로 불붙었다. 그것은 모두 두 권이었다. 그 중 하나는 구양진경이었고, 또 하나는 구음진경이었다. 바로 혈궁주가 알고 있는 최고의 무공인 것이다. "이런 엄청난 행운이……." 용미인은 구양진경과 구음진경을 품 속에 갈무리했다. 궁주의 거처를 나온 그들은 사로갱이 있는 곳으로 몸을 옮겼다. 혈궁의 뒷편에는 천장단애의 절벽을 등지고 흑빛 건물이 한 채 세워져 있다. 현판에는 '혈존궁(血尊宮)'이라는 핏빛 세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건물의 벽은 온통 강철로 되어 있고, 조그마한 빛이 통과할 창문도 없다. 그래서 열쇠가 없다면 천하의 어느 누구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용미인은 문 앞에 서서 열쇠로 혈존궁의 문을 땄다. 끼끼끼끽. 문이 열리는 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오싹 소름이 끼칠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혈존궁의 내부는 생각 외로 불빛이 있었다. 벽에 몇 개의 등잔불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등잔불로 길을 인도하듯 용미인의 눈 앞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까마득한 원형계단이 놓여져 있었다. "휴……." 용미인은 그 계단을 내려다보며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전신 모든 세포는 긴장으로 곤두세워져 있었다. 남궁명이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떨리는 손을 얹었다. "만약…… 하지 못하겠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갑시다……." 용미인은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할 수 있어요. 당신이 내 손을 한 번만 잡아주면 돼요." 남궁명이 용미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땀에 젖어 축축했다. 용미인은 주위의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원형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를 전진했을까? 원형계단의 끝이 보였다. 그 계단의 끝에는 거대한 통로가 이어져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사로갱이었다 용미인은 다시금 침을 삼키며 남궁명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남궁명의 얼굴은 평소 때보다 더욱 창백했다. "이제 다 왔어요.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돼요!" 그녀의 한 발이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그때였다. "크크크크크!" 어디선가 음산한 괴소가 용미인과 남궁명의 귓전을 때렸다. 용미인은 긴장했다.


"감히 궁주의 열쇠를 탈취하여 들어오다니…… 실로 대담한 놈들이로다!" 스스스스! 용미인과 남궁명의 눈 앞에서 환영처럼 핏빛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드러나는 것은 다섯 명의 혈의노인이었다. '혈궁오존(血宮五尊)!' 그런데 무엇인가? 이들은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몸에는 온기도 흐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죽은 시체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몸에서 뿜어지는 지독한 마기와 살기는 그들이 살아있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혈궁오존…… 사부에게 말로만 들었으나 이토록 무서운 고수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 기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이들의 신위를 판단할 수 있었다. 이때, 혈궁오존을 돌아보며 남궁명이 황급히 말했다. "다섯 분은 살기를 거두시오! 우리는 궁주님의 명을 받들어 헌원패성을 만나보러 온 것이오." "크크크…… 개수작을 하고 있구나! 사로갱은 궁주님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스으읏……. 핏빛 안개 속에서 혈궁오존이 유령처럼 신형을 움직였다. "사로갱에 들어온 이상 살아있는 생명체는 설사 개미새끼라 할지라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 혈궁오존은 용미인과 남궁명을 포위한 채 그 포위망을 좁혀왔다. 용미인은 포위되었다는 것 자체 하나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차피 싸움이 벌어진다면 선제공격이 최선이다!' 그녀는 지체없이 쌍장을 들어 혈궁오존을 공격해 나갔다. 순간 혈궁오존의 존재가 희미해지며 순식간에 용미인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허억!" 이와 때를 같이하여 그녀의 등 뒤로 두 줄기 예리한 지풍이 찔러왔다. 용미인은 자전신공을 이용해 그것에 맞대응했다. 퍼펑! 폭발음과 함께 지풍을 날린 혈궁오존 중 하나가 뒤로 밀려났다. "자전신공!" 동시에 그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혈궁오존이 알고 있는 자전신공은 혈궁주의 독문무공이었다. '어찌 저 계집이 자전신공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이때, 그들이 주춤하는 틈을 타 남궁명이 용미인을 향해 외쳤다. "이들은 내가 막을테니 사매는 어서 안으로 들어가!" 용미인도 그것이 옳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헌원패성만 꺼내 나온다면 이 따위 구차한 싸움은 필요가 없다. 용미인이 사로갱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딜!" 혈궁오존이 그녀를 막았다. "너희들의 상대는 나다!" 남궁명은 미친 듯이 장력을 쏘아대며 혈궁오존을 막았다. "네놈부터 죽여주마!" 혈궁오존은 악착같이 자신들의 바지가랭이를 잡고 늘어지는 남궁명을 향해 장력을 내질렀다.


남궁명이 그들을 막기에는 불가항력이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용미인이 헌원패성을 불러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볼 참이었다. "남궁사형! 조금만 기다려요!" 용미인은 사로갱의 통로를 미친 듯이 달려나갔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용미인의 앞으로 나타나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그 문의 정 중앙에는 악마의 모습이 양각되어 있었다. "이곳이다!" 용미인은 악마의 입 안으로 열쇠를 넣었다. 그그그그긍!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 뎅뎅뎅뎅! 혈궁에서는 비상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누군가 궁주의 거처에 잠입해 들었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4 용미인은 열린 문 안으로 조심스럽게 신형을 밀었다. 그녀의 도톰한 가슴은 긴장감으로 인해 마구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한 발이 문 안으로 막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크하하하핫!" 으스스한 전율을 불러 일으키는 가공사악한 앙천광소성이 용미인의 귓전을 때렸다. "민자란(閔紫蘭)! 네년이 또다시 나타났느냐?" 엄청난 앙천광소성 뒤로 무서운 내공력이 실린 음성이 터져나왔다. 용미인의 내공력이 그 음성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이 음성의 주인이 헌원패성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금 천하에 헌원패성이 아니라면 누가 있어 음성 하나로 자신을 패배시킬 수 있단 말인가? 용미인은 내력을 진정시키며 황급히 소리쳤다. "이…… 이 몸은 노선배님을 구하러 온 사람입니다!" 용미인은 소리가 나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 한 사람이 묶여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을 한 사람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허허백발인 이 노인은 전신이 혈수(血水)에 빠진 듯 온통 핏칠이 되어 있었다. 또한 정수리에서 귓등까지 머리가 찢겨져 있어 허연 뇌수(腦髓)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저히 생명이 붙어 있는 인간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는 석실의 중앙에 앉아 있었는데 수십 가닥의 쇠사슬이 앞에서 뒤로 그의 몸통을 관통한 채였다. "……!" 용미인은 헌원패성의 몰골을 보는 순간 너무나 놀라 뭐라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팔과 다리, 어깨와 갈비뼈 사이를 뚫고 나온 쇠사슬은 그 끝이 사방의 벽과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그냥 묶은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의 골육(骨肉) 속에 쇠사슬을 집어 넣어 그 끝을 사방의 벽과 연결시켜 놓은 것이다. 그가 조금만 몸을 움직인다면 뼛속에 관통한 쇠사슬이 출렁이며 인간의 의지로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고통을 줄 것이다. 그 때문인지 헌원패성의 얼굴은 너무나 초췌했다.


이 고통을 수 년 간 참고 견뎌왔을 테니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초췌한 몰골과는 달리 그의 눈빛은 가공무쌍한 혈광을 발하며 무서운 증오에 빛났다. "네년이 나를 구해주러와?" 헌원패성은 가소롭다는 음성이었다. "민자란! 그년이 이번에는 무슨 계략을 준비했는지 몰라도 본좌는 속지 않는다!" "저…… 정말입니다. 저는 노선배님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크하하하핫! 가소로운 년! 네년을 갈가리 찢어 죽여버릴테다! 크하하하핫-!" "으윽!" 헌원패성의 앙천대소성은 용미인의 내력을 격탕질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쇠사슬에 몸이 묶여 있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가공할 앙천대소성 하나로 능히 백 명의 무사를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노…… 노선배님! 잠시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크하하하핫!" 용미인의 얼굴이 고통에 차 일그러졌다. 그것은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저는 군검우, 군공자가 보내서 왔어요!" 그녀는 악을 쓰듯 소리쳤다. 순간 거짓말처럼 헌원패성의 앙천대소성이 그쳤다. 용미인은 후들후들 떨리는 하체로 간신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다. 헌원패성이 혈광을 번뜩이며 용미인을 노려보았다. 동시에 그의 한 손이 용미인을 향해 뻗었다. 츄파파파팟! 그의 손바닥에서 가공할 내력이 쏟아져 나왔다. "허억! 허공섭물신공(虛空攝物神功)!" 용미인의 신체가 마치 자석에 빨려 들어가듯이 헌원패성의 수중에 잡혔다. 허나 이 순간 헌원패성은 도무지 인간의 모습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오만상을 찌푸렸다. 한손을 뻗음으로 인해 출렁거린 쇠사슬이 그의 전신을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들쑤셔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원패성은 고통을 참으며 소리쳤다. "네가 우아를 어찌 아느냐?" "그는 제 약혼자였어요!" 용미인은 거짓말을 했다. "약혼자였다고?" 용미인의 말은 과거형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약혼자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우아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 그는……." "우아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용미인의 목덜미를 잡은 헌원패성의 손가락에 힘이 가해졌다. 용미인은 숨이 탁! 막혔다. 그녀는 켁켁거리며 말했다. "그…… 그는 죽었어요!" "죽어?" "그래요. 이곳에 오는 도중 혈궁의 독계에 걸려……. 저는 이 복수를 하고 싶어요. 복수를 하는 방법은 오직 노선배님을 구하는 길 뿐이라 생각하고 제 생명을 도외시한 채 이곳으로 침투해 들었어요." 그녀는 실감나게 눈물까지 흘리며 연기했다.


"우아가 죽었다고! 으아아아- 민자란! 이년-!" 헌원패성의 노안에서 처절한 고통성과 함께 분노의 눈물이 흘렀다. '사부의 이름이 민자란이란 말인가?' 용미인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러한 것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용미인은 품 속에서 열쇠를 꺼냈다. "이것이면 노선배님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풀 수 있어요!" 벽과 천장에 붙어 있는 쇠사슬에는 각각의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다. 용미인은 혈궁주의 서재에서 가지고 온 열쇠를 하나하나 대조하면 서 쇠사슬을 풀렀다. 이윽고 모든 쇠사슬이 풀렸다. 이제 헌원패성은 용미인을 의심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민자란의 명을 받고 온 계집이라면 이처럼 쉽사리 그를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네가 우아의 약혼녀라면…… 내게는 친자식이나 다름이 없다." 헌원패성의 음성은 그만큼 부드러워져 있었다. 용미인은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노선배님께서는 저…… 저의 복수만 해주시면 돼요.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아요……." "기다려라! 이제 내가 풀려난 이상 민자란을 찢어 죽여 오늘의 이 복수를 하고 말겠다!" 열쇠로 쇠사슬이 고정된 것을 풀었다고 하나 그의 전신은 여전히 쇠사슬에 감겨져 있었다. 아직 몸 속에 관통된 쇠사슬을 뽑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헌원패성은 이곳에서 한가하게 쇠사슬을 뽑고 있을 틈이 없었다. 또한 수 년간 그의 몸에서 살아온 쇠사슬을 뽑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은 이곳을 나가고 볼 일이었다. 그가 한 발 한 발 걸음을 뗄 때마다 철커덕거리며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한편, 혈궁오존과 혈전을 벌이고 있는 남궁명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 혼자의 힘으로 혈궁오존을 상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승산없는 싸움이었다. 그저 용미인이 모든 일을 마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런데 이제 그 역할도 끝이 났다. 남궁명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점점 더 정신이 아득해지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혈궁오존들이 뿜어내는 핏빛 혈무 뿐이었다. 혈궁오존은 더 이상 남궁명을 상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 년을 쫓자!" 그들은 용미인이 사라진 사로갱쪽으로 신형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철커덕! 소리를 내며 헌원패성과 용미인이 사로갱을 뛰쳐 나오고 있었다. 용미인이 남궁명을 보며 경악했다. "남궁사형!" 헌원패성을 발견한 혈궁오존의 얼굴이 급격히 변모했다. 그것은 바로 공포였다. "허…… 헌원패성!" 이때, 용미인은 죽어가는 남궁명을 부축했다. 남궁명이 용미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힘겹게 눈을 떴다. "사…… 사형! 죽지 말아요……." 남궁명이 어렵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용미인의 눈물이 흐르는 뺨을 향했다. 용미인은 그가 자신의 뺨을 좀더 쉽게 만질 수 있도록 얼굴을 숙여주었다. 핏물이 흥건한 그의 손이 용미인의 뺨을 어루만졌다. "진사매……." 남궁명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매달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용미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죽기 전에 당신을 보게 되다니……." "……!" "영원히 저 멀리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이렇게 가까이 있구려……." 툭.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궁명의 고개가 옆으로 떨구어졌다. 용미인의 양 어깨가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하게 와들와들 떨렸다. '진설하…… 너는 남궁사형을 죽는 그 순간까지도 네 것으로 만들고 말았구나…….' 용미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와는 어떤 사이냐?" 헌원패성이 용미인의 뒤에서 물었다. 용미인이 증오의 눈으로 혈궁오존을 응시했다. "이분은 군공자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저의 사형입니다. 저들이 죽였어요! 노선배님! 저들을 죽여주세요! 가장 잔인하게!" 손가락으로 혈궁오존을 가리키는 용미인의 두 눈에선 폭발적인 살기가 쏟아졌다. "우아의 친구라고……!" 헌원패성의 혈광 가득한 눈빛이 혈궁오존을 향해 돌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허공 중으로 곤두섰다. 혈궁오존은 고양이 앞의 쥐새끼처럼 공포에 젖어 주춤거렸다. 쐐애액-! 헌원패성은 그들을 향해 쌍장을 뻗었다. 그의 몸에 매달린 쇠사슬이 엄청난 힘으로 출렁거렸다. 그것은 곧 그의 무기가 되었다. 혈궁오존은 감히 헌원패성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일제히 피보라를 뿜으며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용미인이 남궁명의 시체를 놓고 일어섰다. "어서 가요, 노선배님……." "저자의 시체는 두고 가느냐?" 헌원패성이 남궁명을 가리켰다. 용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말했다. "그는 이곳이 더 행복할 것입니다." 헌원패성과 용미인은 빠르게 사로갱을 벗어났다. 5 군검우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한 원소랑과 여불해, 혈궁의 고수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왔을 땐 그곳에는 만황지주의 시체만이 남아 있었다. "……!" 여불해는 조심스럽게 만황지주의 시체를 살폈다. "죽은지 하루가 지났을 것 같소이다……." 그 말에 원소랑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놀라운 놈들…… 그 경황에 불사의 독물이라는 만황지주까지 죽이고 도망치다니……." "놈들은 철저히 흔적을 지우며 도망치고 있소이다. 게다가 밖에는 계속 눈이 내리고 있어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하오." 여불해는 만황지주의 시체에서 허리를 펴며 말했다. 허나 원소랑은 냉소했다. "비록 만황지주가 죽었지만 놈들 역시 대단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오. 추적하면 며칠 안으로 잡을 수 있소이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소!" "……!" "더욱이 다른 놈은 모르지만 군검우, 그 놈 만큼은 반드시 죽여야 하오!" 그는 추격을 명령하며 동굴 밖으로 신형을 돌렸다. 원소랑의 모습을 보며 여불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조적인 웃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동굴을 나갔을 때, 한 마리 전서구가 여불해를 향해 날아왔다. 전서구의 다리에 매달려 있는 혈궁주의 서찰을 받아본 순간, 여불해는 경악했다. <헌원패성 탈출! 급히 회궁하라!> '헌원패성이 탈출했단 말인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궁주의 전서구가 직접 날아 온 이상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원공자! 모든 일을 멈추고 회궁해야 하오!" 여불해는 서찰을 원소랑에게 보였다. 원소랑은 서찰을 보지도 않고 버럭 소리부터 내질렀다. "여기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원공자! 서찰을 보고 이야기하시오!" "아무도 돌아가지 못해! 어서 놈을 추격하라!" 여불해는 차가운 눈으로 원소랑을 노려보았다. "나는 혈궁의 대총사요. 원소랑, 당신이라도 내게는 명령할 권한이 없소!" 순간 원소랑의 얼굴에 한가닥 살기가 어렸다. 그는 들고 있던 섭선으로 여불해를 겨누었다. "여불해! 거역하면 죽인다! 나는 너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여불해의 눈빛이 차갑도록 무심해졌다. 한 조직의 수뇌로 있으면서 저토록 막무가내인 자가 어디있단 말인가? "나는 돌아가겠소." 여불해는 몸을 돌렸다. 섭선을 든 원소랑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는 여불해를 베지 못했다. 홀로 회궁하는 여불해의 얼굴에는 우울함만이 가득했다. '흉폭함과 잔인함이 궁주보다 높으니…… 무엇으로 혈궁의 미래를 기대한단 말인가……? 무너지고 있다. 진정한 마도의 길이 무너지고있어…….' 6 번쩍! 우르르르릉…… 콰앙! 암흑천지의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몰아쳤다. 그 뒤로 무서운 바람이 휩쓸며 폐허로 변한 혈궁의 잔해를 날려보냈다. 그 위로 혈궁주는 우뚝 서 있었다.


함께 회궁한 부하들은 혈궁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사태파악에 여념이 없었다. 그 중 한 명이 보고했다. "궁에 남아있던 육백 명 중 생존자는 불과 오십여 명 뿐입니다." 혈궁주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수십 년에 걸쳐 이룩한 조직이 이토록 허망히 무너질 수가 있단 말인가?' "헌…… 원…… 패…… 성……." 그녀의 얼굴에 잔인무도한 살기의 그림자가 어렸다. 우르릉…… 콰앙! 천둥벼락은 계속해서 폐허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제 24 장 천장비독의 완성 1 성숙해(聖宿海). 사방으로 하늘을 가릴 듯한 고산(高山)이 즐비했다. 그리고 고산과 고산을 이어주는 준령(峻嶺)들은 끝간 데 없이 이어져 있다. 그 중 한 곳. 정상에는 사방으로 십여 리는 족히 됨직한 호수가 잔잔한 물결 위에 일렁이고 있다. 그 위로 이름모를 물새 몇 마리가 한가하게 날개짓을 하며 물장구를 쳤다. 그때였다. 푸왓! 물 속에서 하늘로 비상이라도 할 것 같은 엄청난 물보라가 일었다. 물새들이 화들짝 놀라 퍼드득! 거리며 허공을 날아가려 했다. 물보라 속에서 빛살처럼 빠른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는 그대로 한 마리 물새를 두 쪽으로 갈라버렸다. 휘리릭! 그리고 허공에서 회전하며 착지했다. 바로 사문군이었다. 짝짝짝! 사문군이 착지하자마자 그 뒤편에서 박수소리가 터졌다. "훌륭한 초형일섬검이오. 하하하!" 능원평이었다. "지난 일 년 동안 사형의 검법은 진정으로 놀랄 만한 발전을 보이고 있소이다. 그 정도라면 검으로서는 천하에 적수를 찾기가 극히 어려울 것이오." "하하하. 모든 것이 주군의 가르침 덕분이지요." 그렇다. 지난 일 년 간 이곳 성숙해에서 군검우는 사문군에게 초형일섬검과 구양신공을 전수해 주었다. "하지만 능대협의 축융신공과 천월신도의 발전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입니다." "하하하. 서로서로 발전하면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군형과 당소저가 암굴로 들어간 지 반 년이 넘었는데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정말 궁금하오." 문득 사문군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혔다. "자시만 되면 암굴 속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신음소리에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오. 진정…… 견디기 어려운 고통일 겁니다." 능원평의 얼굴도 음울하게 변했다. "요즘은 가끔 후회를 하고 있소이다. 천장비독의 독공을 공연히 가르쳐준 것이 아닌가 해서 말이오."


일 년 전, 군검우와 당문연이 생사의 경지를 헤매일 때 능원평은 두 사람에게 천장비독을 가르쳐 주었다. 천장비독은 아무리 초일류 고수라 할지라도 절대 익힐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익히기 위해선 전신의 피를 독으로 만들어야 한다. 군검우와 당문연은 만황지주의 독담으로 인해 전신의 피가 극독으로 변했다. 천장비독을 익힐 수 있는 몸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그들은 독인이 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천장비독의 위력을 천하에서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수백 년 동안 독문(毒門)의 괴인(怪人)들이 천장비독을 연마하다가 모두 죽었다. 그래서 천장비독의 힘은 전설로만 전해질 뿐이었다. 천장비독을 익히게 되면 하루 중 자시가 되는 시각에 전신의 근육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웬만한 사람들은 죽음을 택할 정도의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래서 군검우와 당문연은 암굴 속으로 몸을 피했다. 자신들의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사문군과 능원평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자시만 되면 들려지는 그 고통에 찬 비명성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벌써 일 년 동안이나 그러한 고통 속에서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2 북경(北京) 관천부(冠天府). 은은한 은빛 주렴 사이로 영롱한 빛을 발하는 오색진주가 어지러이 박혀 있다. 그 주렴 너머로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미모의 여인이 배를 밑으로 향한 채 누워 있었다. 그 여인의 옆으로 몇 명의 아리따운 시비가 시중을 들었다. 이 여인은 당금 황제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인 난화군주였다. 주렴의 건너편에는 황금빛 탁자가 놓여져 있는데, 그곳에는 혈궁주가 앉아 있었다. "그래, 아직도 군가놈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고?" 난화군주는 시비가 들고 있는 황금쟁반 위의 포도를 입에 넣으며 물었다. 혈궁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일 년 간 대륙십팔만 리를 이잡듯이 뒤졌습니다. 그러나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 톡. 난화군주의 입에서 포도씨 하나가 황금쟁반 위로 떨어졌다. "자란아…… 십여 년 전에도 월산장으로 보낸 너의 천랑객이 실패했다. 그때, 너는 네게 무어라고 했느냐?" "……." "절대 실수는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장담을 했지만 너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네가 실수를 하는 동안 군가, 그 어린놈은 엉뚱한 기연을 만나 오히려 무공이 급상승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내 잠을 설치는 골칫거리로 성장하지 않았느냐?" 혈궁주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천하를 혈수로 물들일 수 있는 혈궁주이지만 눈 앞의 난화군주 앞에서만은 작고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반 년의 시간을 더 주신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놈을 제거하겠습니다." "반 년이라……?" "이번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


난화군주의 눈이 게슴츠레해지며 혈궁주를 쏘아보았다. 혈궁주는 감히 그녀의 시선을 맞상대할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그 동안 나는 너를 도와 혈궁을 만들었으며 또한 황실무고에 있는 구음진경까지 넘겨주었다. 허나 너는 나의 가장 큰 문제인 군가놈에 대한 문제보다 오히려 무림의 장악에 노력하였다." "……!" "그리고 헌원패성을 살려두었다가 그가 탈출하는 실수도 범했다. 이게 말이 되느냐?" "죄…… 죄송합니다. 모두가 저의 불찰입니다." "좋다. 네 말대로 너에게 반 년의 시간을 더 주마. 그 동안 군검우를 제거하지 못하면 내가 네게 준 모든 것을 거두어 들이는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라." 순간 혈궁주의 얼굴표정이 흠칫거렸다. "자란아…… 너는 너무 자신을 과신하는 듯한데…… 극히 조심하는 게 좋을게다. 구음신공과 구양신공을 익혀 천하에 적수가 없는 듯하지만 황실 신비각의 고수들 중에는 너 못지않은 고수들이 즐비하다. 네가 익힌 구음진경도 황실무고에 있는 몇 개의 무공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간과하지 마라." "……." 너는 내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다는 엄중한 경고였다. 혈궁주의 표정은 더할 수 없이 무거워졌다. "이제 그만 나가보아라……." 난화군주는 더 이상 할말이 없다는 듯 혈궁주를 향해 돌아누웠다. 시비들이 돌아누운 그녀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오십이 넘은 그녀의 나이였지만 그녀의 피부는 이제 갓 십 팔 세가 된 소녀의 그것처럼 매끈하고 팽팽했다. 돌아누운 그녀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군예령(軍藝玲)…… 그 옛날 입술을 깨물고 맹세했듯이 너의 모든 것을 소멸시켜 이 땅에 단 하나도 남겨놓지 않을 것이다. 너는 죽었지만 아직 너의 자식은 살아있다……. 허나 그 놈도 결코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죽일 것이다. 반드시…….' 난화군주의 거처를 나오는 혈궁주는 매우 침통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당금 황제의 여동생이란 신분으로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쥐고 있다. 때문에 그녀는 허언(虛言)을 할 필요가 없다. 그녀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니 말이다. 더욱이 그녀는 황실 신비각의 고수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물론 혈궁주가 은밀히 탐문해본 결과, 신비각의 고수들은 난화군주의 말처럼 혈궁주를 능가할 실력을 갖춘 것은 아니다. 그들을 꺾을 수는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숫자가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볼 때, 그들 십여 명이 일제히 덤빈다면 혈궁주는 그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또한 그것 뿐이 아니다. 난화군주의 남편인 관성량은 동창의 수반으로서 대륙 제일의 정보력을 장악하고 있다. 더욱이 동창에 있는 고수들 또한 그 개개인이 일류급이라 할 수 있었다. 난화군주의 힘은 그처럼 막강하였다. "어머니……." 관천부를 나오자 원소랑이 혈궁주를 맞았다. "무슨 일이라도……?" 원소랑은 혈궁주의 무거운 안색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혈궁주는 원소랑을 향해 관천부에서 난화군주와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으음." 원소랑의 안색도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하지만 신비각의 고수들보다 더 부담스러운 자는 헌원패성이다." "……!" "일 년 전, 혈궁이 멸망할 당시 놈이 전개한 무공은 바로 파천황신공이었다. 그것 때문에 놈을 살려두었는데…… 그것 때문에 이런 화근을 겪게 되다니……." "하지만 어머니도 구음신공과 구양신공을 완전히 합일하시지 않았습니까?" "아직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 두 가지 신공을 한꺼번에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완전히 하나로 묶을 수는 없다. 그저 완벽히 양 손에서 두 가지 신공이 발출되는 것 뿐이다. 만약 그 두 가지를 섞어 일시에 시전할 수 있다면 그 위력은 폭발적일 것이다. 아직 거기까지는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만약 그것을 이룰 수만 있다면 천하의 그 누구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게다." "……!" "지금 우리가 가진 적은 모두 네 갈래다. 정도무림맹과 헌원패성, 군검우, 그리고 난화군주……." "난화군주는……?" 원소랑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혈궁주가 그 말을 제지했다. "지금은 난화군주가 우리의 적이 아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가상의 적이다. 언제가는 필히 우리와 반목할 것이다. 너도 한 번 생각해 보아라. 난화군주가 우리와 손을 잡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으음." "군검우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난화군주는 더 이상 우리가 필요치 않을테고…… 오히려 부담이 될게다." "그렇다면 그녀는 우리의 가장 큰 적이 되겠군요." "그렇다. 그녀는 당금 황제의 친동생이며 황실의 최고 실력자이니까." 만약 혈궁이 그녀와 갈라진다면 혈궁의 운명은 그녀의 생각 여하에 따라 결정되어질 수 있었다. "어머니, 이제 더 이상 그런 부담을 가지면서까지 난화군주를 따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 "우리는 이제 강호에 적수가 없을 만큼 커다란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난화군주를 제거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당금 무림에서 우리 혈궁을 간섭할 자는 없어지는 겁니다." "그건…… 생각처럼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녀를 제거한다면 소리없이 끝내야 하는데…… 그녀의 주위에 포진되어 있는 고수들만 하더라도……." 혈궁주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원소랑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매달렸다.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 "이런 식의 암계는 제가 관부에 몸담고 있을 때, 수 없이 보아왔습니다. 힘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난화군주에게 한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깨끗하게 해결하겠습니다." 3 허공 정 중앙에는 어둠을 밝히는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능원평은 한 손에 칼을 움켜쥔 채 운기조식 중이었다. 그의 전신에 무서운 집념의 빛이 어렸다. 그가 알고 있는 축융신공과 천월도법은 천고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혈궁주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그는 지난 일 년 간, 그 두 가지 무공을 하나로 합일시키는데 주력했다. 축융신공을 전개한 상태에서 천월도법을 사용한다면 그 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확…… 화화확! 서서히 칼을 들어 올리는 능원평의 몸에서 무서운 불의 기운이 일었다. 그의 전신에서 이는 불기운은 칼 끝으로 이전되며 칼에서 불길이 일었다. 쇄애액! 그의 불칼이 섬전처럼 움직였다. 사방으로 수십 개의 도영(刀影)이 일었다. 그것은 모조리 불길에 사로잡힌 도기(刀氣)였다. 파파파팟! 불칼에서 뿜어진 도기는 맞은편 고목을 향해 작렬해 들었다. 순간 엄청난 연기와 함께 거대한 고목이 쩌억!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능원평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성공이다. 이것이면 혈궁주, 그 년도 갈라버릴 수가 있다!" 그런데 이때 문득 능원평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인기척을 들은 것이다. "누구냐?" 그의 눈빛이 인기척이 들려온 곳을 향해 작렬했다. 이때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쌍의 야수같은 눈이 보였다. 능원평은 오싹 소름이 끼쳤다. '저…… 저것이 인간의 눈이란 말인가?' 어둠 속의 괴인이 주르르 미끄러지듯 능원평에게 다가왔다. "드디어 완성했구려, 능형." 나타난 자는 군검우, 바로 그였다. "군형!" 능원평은 반색하며 군검우에게 달려가 그를 포옹하려 했다. 허나 군검우는 신형을 옆으로 비틀며 그의 포옹을 피했다. 능원평은 의아한 얼굴로 군검우를 바라보았다. 군검우는 쓴 웃음을 지었다. "미안하네…… 능형." "……?" "내 몸은 이미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네. 손을 대는 자는 여하를 막론하고 큰 곤욕을 당할 수 있네……." 능원평의 얼굴이 망연해졌다. 군검우의 발 밑, 그에게서 뿜어지는 독물에 의해 흙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독으로 뭉쳐진 인간이 된 것이다. 때문에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조금 더 수련을 한다면 내 몸의 독성을 갈무리할 수는 있을 걸세. 하지만 아직까지 그렇게는 되지 않았네." 그렇게 보아서 그런 것인지 군검우의 모습은 예전과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구릿빛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독물에 가득찬 눈빛은 혈광에 번뜩였다. 군검우의 모습을 보며 능원평은 이번 일로 자신이 평생을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군검우가 미소지었다. "염려말게, 능형. 나는 절대로 자네를 원망치는 않아." "……." "하하하. 나는 능형 덕분에 천장비독을 완성하였네. 비록 몸 안으로 제대로 갈무리하지를 못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지만 말일세."


"당소저는 어디 있나?" 문득 능원평이 물었다. "아까부터 두 분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당문연이 군검우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당문연 역시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전신에 흐르는 기운은 사이롭기 그지없었다. 또한 군검우와는 달리 그녀의 눈은 까만 눈동자가 사라지고 백색 안광이 번뜩였다. '당소저가…… 바로 곁에 있었거늘 눈치채지 못했다니……. 당소저의 무공도 상상을 못할 만큼 강해졌구나…….' 능원평은 천장비독의 가공함에 다시 한 번 경이를 표했다. "그런데…… 눈은 왜 그렇게 되었소……?" 당문연이 쓰게 웃었다. "군공자님보다 내공이 약했기에 체내의 독성을 이기지 못해서 시력이 극도로 감퇴되었어요." "미…… 미안하오. 공연히 나 때문에……." 능원평은 진심으로 미안해 했다. 일 년 전, 그들에게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줄 수도 있다는 말이 증명된 셈이다. 능원평은 이들의 이러한 모습이 바로 자신의 선택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조금 더 좋은 방법을 생각했다면 이들을 좀더 완전하게 회생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후후…… 위로하실 필요는 없어요. 대신 청각은 예전과 비교도 못할 만큼 예민해졌으니까요." "우리는 내일 중원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암굴을 나왔소이다." "중원으로?" 능원평이 되물었다. 군검우의 눈빛이 더욱 시뻘겋게 빛나며 이글거렸다. "능형의 도움으로 나는 일 년 전의 군검우가 아니오! 이제…… 백사단에 이름이 적힌 악의 무리들을 모조리 지워버릴 것이오!" 4 미풍조차 불어오지 않는 호수의 물은 잔잔했다. 진설하는 호수의 중앙에 자리한 정자에 등을 기댄 채 망연한 얼굴로 호수에 일렁이는 잔물결을 내려다보았다. 일 년이란 세월이 덧없이 흘렀다. 그녀는 시간이 지날 수록 삶의 애착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었다. 살아가고 있는 순간순간이 몸서리쳐지도록 두려웠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로 언제나처럼 군검우의 환한 얼굴이 환영처럼 흘러갔다. '검…… 우…….' 군검우를 생각하기만 하면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저 아득해지는 느낌 뿐이다. 이때, 호수의 끝에서 그녀를 훔쳐보는 눈이 있었다. 바로 원소랑의 눈이었다. 지난 일 년 간 원소랑은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원소랑에게는 진설하가 필요했다. 혈궁주의 말도 말이지만 둘이 함께라면 혈궁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원소랑이 애를 써도 진설하의 얼굴에서 그늘이 지워진 날은 없었다. 원소랑이 다가서기만 하면 그녀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원소랑이 다가선 만큼 그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진설하를 훔쳐보는 원소랑의 눈빛이 음산하게 변했다. '진설하…… 네가 아무리 그래봐야 놈은 잡히지 않는 허상일 뿐이다. 눈 앞에 어지러운 일들이 정리만 된다면 너는 내 것이 된다. 그 때가 되면 네 머리 속에 있는 놈의 영상을 깨끗이 지워 줄 것이다.' 5 일 년 전, 혈궁주에게 환우금성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군검우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는 환우금성은 하늘이었다. 그 하늘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선로암으로 올라가는 군검우의 걸음은 무거웠다. 아니라고 생각을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혈궁주의 말을 지울 길이 없었다. 휘이이이잉……. 아무 것도 없이 사방이 탁 트인 선로암이 있는 절벽에선 매몰찬 삭풍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에 우뚝 선 군검우는 순간적으로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 것도 없었다. 선로암이 있던 절벽 위에는 그저 빈 공터만이 존재했다. 선로암이 부서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런데 부서졌다 해도 이토록 흔적없이 완전히 부서질 수가 있단 말인가? 선로암이 있던 자리에는 무성한 잡초만이 불어오는 삭풍에 흔들리고 있었다. 군검우는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사문군의 얼굴도 핼쓱하게 질렸다. "이럴수가……." 군검우의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환우금성이 죽지 않은 이상 선로암이 이처럼 폐허로 변할 리가 없다. 선로암이 폐허로 변했다는 것은 환우금성이 죽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환우금성의 죽음을 불신했다. "천애원으로 가봐야겠어……." 군검우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 "목아주머니는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 군검우에게는 생각하고 말고 할 시간이 없었다. 휘익! 그는 무조건 천애원이 있는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사문군 등도 군검우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폐허! 천애원도 폐허가 되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 부서진 채 쓰러져 있는 목부인의 사륜거를 보며 군검우는 더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군검우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군형! 이리로 와 보시오!" 이때, 천애원의 주위를 살피던 능원평이 군검우를 향해 소리쳤다. 군검우는 능원평을 향해 달려갔다. 능운평이 발견한 것은 세 개의 무덤이었다. 무덤의 앞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환우금성지묘(環宇琴聖之墓).


의모 목부인지묘(義母 木婦人之墓). 천애원아지묘(天涯園兒之墓). "이…… 이럴수가……." 세 개의 묘비에 쓰여진 글자를 보는 순간 군검우는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군검우의 전신이 눈에 보이게 떨려왔다. "사…… 부님……, 목아주머니……." 사문군의 얼굴에도 넋이 나가 있었다. "천애원의 아이들까지…… 모두 죽은 듯합니다." "묘비에 의모라는 말이 쓰여있는 걸로 보아 천애원의 원아들 중 누군가 생존자가 있는 것 같아요." 당문연은 시력이 나빠져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조심스럽게 군검우의 안색을 살폈다. 군검우의 몸은 여전히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 상태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혈궁……." 군검우의 음성은 처절했다. 어두운 그림자에 사로잡힌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혈궁-!" 제 25 장 진소저를 쫓아가십시오 1 백사단(百死單). 척살지령(刺殺指令) - 제사십이(第四十二). 척살대상자(刺殺對象者) : 천월삼존(天月三尊). 대상거처(對象居處) : 하북성(河北省) 만빙곡(萬氷谷) 삼월장(三月莊). 무공등급(武功等級) : 초특급(超特急). 따로 알려진 바 없음. 곡(谷). 전체가 투명한 얼음으로 된 천 장(丈) 깊이의 절곡이었다. 곡은 너무나 날카롭게 파여져 있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롭게 보였다. 이름하여 만빙곡이었다. 만빙곡에 이르러 석양은 더욱 짙게 물들어 갔다. 그 만빙곡 입구에 홀연 한 인물이 신쾌하게 날아들었다. 죽립에 흑의로 자신의 진면목을 가린 괴인, 바로 군검우였다. 휘이이이이잉……! 뼛골을 훑어내릴 듯한 차가운 냉풍이 곡을 휘감아 돌며 군검우의 전신을 갈겼다. '이곳인가?' 군검우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만빙곡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빙곡의 중간지점, 한 채의 장원이 지어져 있었다. -월삼장(月三莊). 휘이이이잉……! 빙곡의 칼날같은 바람이 석양 속에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간다!" 대갈성과 함께 군검우의 전신은 맹렬한 폭풍이 되어 월산장을 향해 무섭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휘휘휙-! 한줄기 무서운 흑색의 폭풍이 월산장의 거대한 정문을 향해 짓쳐들었다. 그런데 그가 막 정문에 다다를 직전이었다. "웬 놈이냐!"


슈슈슛- 쐐애액! 돌연 장원 안에서 돌연한 이방인을 향해 무시무시한 암기가 쏟아졌다. 그것은 독전(毒箭), 독정(毒釘), 독표(毒 ) 등 그야말로 독암기의 천라지망이었다. 군검우는 등 뒤에 메고 있던 검을 뽑았다. 파파파파팟! 그것들은 군검우의 털 끝 하나 상하게 하지 못하고 모조리 그의 검 끝에서 튕겨져 나갔다. 꽈아앙! 동시에 두께가 한 자 가량의 만년한철로 된 정문이 박살나 버렸다. 군검우는 섬전처럼 박살난 문을 박차고 안으로 짓쳐들었다. "크아악!" "케액!" 군검우의 침입과 동시에 정문 뒤에 위치한 채 그를 향해 독암기를 발사하던 월산장의 제자 십여 명이 피떡이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번쩍! 군검우의 검이 눈부신 검광(劍光)을 뿌렸다. "크아아악!" "으악!" 처절무비한 비명성과 함께 십여 개의 수급들이 허공에서 피바람을 일으켰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놈은 누구냐?" "막아라!" "침입자를 막아라!" 월산장 제자들의 경악도 일순, 피에 굶주린 아귀(餓鬼)처럼 군검우를 향해 발악적으로 쇄도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은 피바람과 함께 떨어지는 죽음의 나락이었다. 더욱이 군검우는 온몸이 무기였다. 그의 검이 보여주는 죽음의 춤도 그러하거니와 그의 몸에 부딪치는 월산장의 제자들은 모조리 전신에서 푸시시! 연기를 내며 천장비독의 독물에 죽었다. 실로 처참무비한 광경이었다. "으으……." 아무리 간이 부은 월산장의 제자들이라 하더라도 죽음을 부르는 눈 앞의 명부사신 앞에서는 공포와 전율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월산장의 제자들은 치를 떨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군검우는 검을 회수하며 차갑게 외쳤다. "너희들은 내 상대가 아니다! 천월삼존을 불러라!" "……!" 월산장의 제자들은 그저 공포에 떨며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군검우의 죽립 사이로 무서운 신광이 폭사되었다. "천월삼존! 언제까지 수하들 품에 숨어 있을 것이냐! 백사단주가 네놈을 기다리고 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도열해 있는 월산장 제자들의 사이로 세 명의 사이무비한 노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모두 이마에 두건을 쓰고 있었는데, 그 두건에는 의미를 알수 없는 초승달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크크크크! 네놈이 바로 백사단주란 골칫덩이란 말인가?" 듣기에도 거북한 음산무비한 냉갈이었다.


"그렇다! 무정신월(無情新月), 청풍야월(淸風夜月), 북천명월(北天冥月)…… 너희 천월삼존을 백사단의 이름으로 제거할 것이다!" "크하하하하핫!" 삼 인은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오히려 잘 되었다는 표정으로 군검우를 바라보았다. "궁주께서 그렇게 찾으려고 노력해도 나타나지 않아 고심했는데 스스로 모습을 보이다니!" "미친놈! 스스로 묘혈(墓穴)을 찾아 기어들어왔구나!" "네놈을 죽여 대공(大功)을 세우겠다!" 천월삼존은 으스스한 살기를 뿌리며 품 속에서 자신들의 독문무기를 꺼냈다. 두 자루 시퍼렇게 날이 선 초승달 모양의 칼날이 달린 단창(短槍)이었다. 채앵-! 경쾌한 금속성과 함께 그들의 두 자루 단창이 하나로 합쳐졌다. "천월마창(天月魔槍)이로군." 군검우는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그렇다. 이 천월마창으로 네놈을 천참만륙시키겠다!" "과연 그럴까?" "두고보면 알 일! 우리 천월삼존의 위력을 보여주겠다!" 그들 삼 인은 지독한 마기를 뿌리며 수중의 천월마창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휘류류류류류! 숨통을 조이는 마기가 엄청난 마력의 회오리를 일으켰다. 방원 수 장이 그들의 천월마창이 뿜어내는 마기의 세력권에 들며 천월삼존의 신형이 점차 흐릿하게 변해갔다. 군검우는 천천히 검을 치켜들었다. "죽어랏!" 폭갈과 함께 천월삼존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세 개의 천월마창이 그들의 수중을 떠나 허공을 선회하며 군검우의 전신을 짓쳐들었다. 군검우가 천월마창을 피해 신형을 젖혔다. 천월마창은 돌연 방향을 바꾸며 군검우의 뒤편을 향해 무자비하게 휘감아 돌았다. 너무도 돌발적인 공세에 군검우는 흠칫하며 급급히 검으로 천월마창을 쳐냈다. 챙! 고막을 후벼파는 듯한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사방으로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이었다. 한 번 튕겨나간 천월마창이 더욱 가공할 기세로 군검우를 휩쓸어 들었다. 그들, 천월삼존은 엄청난 진기로써 천월마창을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흐흐…… 차근차근 핏조각을 만들어 주마!" 천월삼존은 득의에 찬 괴소를 흘렸다. 군검우는 신형을 움직이며 염두를 굴렸다. '이대로 시간을 끄는 것은 오히려 내게 불리하다!' 생각을 굳힌 군검우는 속전속결로 결판을 내기 위해 초형일섬검을 전개하며 천월삼존을 향해 짓쳐들었다. 이들을 핍박한다면 천월삼존은 천월마창에 진기를 주입할 시간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그들은 빛보다 빠른 군검우의 쾌검에 주춤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파앗! 순간 군검우의 검이 무정신월의 가슴팍에 박혔다.


쏴아아-! 무정신월의 심장에서 화려한 피분수가 터졌다. "이놈! 감히!" 그 순간 천월마창 하나가 군검우의 등에 작렬했다. 군검우의 옷이 그것에 의해 찢겨져 나갔다. 하지만 그는 호신강기를 극성으로 발휘하고 있었기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 군검우는 사악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청풍야월의 머리통을 움켜 쥐었다. "아악!" 청풍야월의 처절한 비명성이 허공 중에 울려퍼졌다. 군검우가 움켜쥔 그의 머리에서 연기가 났다. 머리통이 타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장비독이다!" 군검우의 눈빛이 악마의 불길처럼 타오르며 이글거렸다. "처…… 천장비독!" 북천명월의 얼굴이 핼쓱하게 질렸다. 그는 자꾸만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이제 그는 군검우가 자신의 적수가 아님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의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군검우의 한손이 북천명월을 향해 뻗었다. 그는 피하려고 했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으…… 미…… 믿을 수 없다! 무…… 서운 놈!" 북천명월은 치를 떨었다. 하지만 이미 군검우에게 목줄기가 잡힌 그의 목구멍에서는 말 대신 푸시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역시 천장비독에 의해 한 줌 독물로 화하는 것이다. "으으……." "사…… 살려줘!" 아직까지 살아남은 월산장의 제자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공포에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군검우는 도망치는 그들을 막지 않았다. 피라미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다. 모두가 도망치고 죽어버린 월산장에는 피비린내만이 진동했다. 군검우는 백사단을 꺼내 세 개의 이름을 지웠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2 월산장의 멸망은 곧바로 혈궁에 전해졌다. 주렴 속, 혈궁주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 옆에 선 여불해와 원소랑, 그리고 진설하의 얼굴도 경악으로 굳었다. "누구냐?" 묻는 혈궁주의 음성이 분노로 인해 은은히 떨리고 있었다. 혈궁의 모든 정보를 관장하고 있는 비전(秘殿)의 전주(殿主)인 만리추종(萬里追從) 이여송(李如頌)은 대전의 바닥에 부복한 채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도 되는 양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월산장을 탈출한 자들의 말에 의하면 흉수는 백사단주라 하옵니다." "백사단주!" "백사단주라고?" 혈궁주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킬 뻔하였다. 백사단주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진설하의 얼굴은 눈에 띠게 창백해졌다. '살아 있었어……. 그가…….'


원소랑은 슬쩍 진설하의 얼굴 표정을 훔쳤다. 그는 비틀거리는 진설하의 교구를 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강렬한 질투심을 참을 수 없었다. 혈궁의 모든 정보를 맡고 있는 비전의 정보라면 가장 정확한 것이었다. 하지만 혈궁주는 도저히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빙천곡에 위치한 삼월장이 어떤 곳인가? 혈궁의 지부 중 가장 강한 곳 중의 하나였다. 더욱이 월산장의 삼장주(三莊主)인 천월삼존은 자신이라 할지라도 만만히 상대할 수 없는 극강의 고수들이었다. "사실이냐?" 때문에 혈궁주는 되물었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혈궁주는 이여송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허나 이여송은 냉정했다. "황송하오나…… 사실이옵니다." "!" "그런데…… 한가지 의아스러운 점이 있사옵니다." "의아스러운 점이라니……?" "삼월장의 장주들께선 백사단주의 독문무공인 초형일섬검에 당한 것이 아니라 독에 당했다고 하옵니다." "독? 백사단주가 독을 사용했단 말이냐?" "생존자들의 말에 의하면 백사단주 놈이 사용한 독은 바로 전설의 천장비독이라 하옵니다." 순간 혈궁주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리고 너무나 놀라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났다. "천…… 장…… 비…… 독……?" 그녀의 몸은 심하게 경련했다. 이것은 천월삼존이 죽었다는 소식보다 더욱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천장비독은 수천 년 동안 독의 대가라고 자부한 자들도 감히 익히기를 꺼려한 죽음의 독공이었다. 때문에 그것은 전설일 뿐, 누구도 천장비독을 익혔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천장비독이라니? 그 사실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대전은 천장비독이란 그 한마디로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문득 혈궁주가 고개를 돌려 여불해를 응시했다. "대총사는 이번 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소?" 여불해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골똘한 모습으로 인상을 쓰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각 지부에 백사단주 군검우가 출현했음을 연락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난화군주에게도 군검우가 나타났음을 알려야 합니다!" "난화에게?" 혈궁주는 의외라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혈궁주는 이제 그녀와 관계를 정리를 할 단계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불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차후의 관계야 어찌되든 일단은 그녀가 필요합니다. 난화군주는 군검우를 잡기 위해 반드시 신비각 놈들을 내보낼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기회에 신비각 놈들의 실력을 봐두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양패구상(兩敗俱傷)을 한다면 더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혈궁주는 여불해의 생각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끄덕거리고 있는 그녀의 고개 너머로 잔혹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3 -이 남자는 내 것이다! 난화군주는 잠자리 날개같은 침의(寢衣)을 한올 한올 벗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바로 코 앞, 침상 위에는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남자 관성량이 누워 있었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말이다. 난화군주는 그의 나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점점 더 위로 올렸다. 관성량이 그녀를 올려보고 있었다. 관성량의 눈빛은 오십 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린아이의 그것보다도 맑았다. 난화군주는 관성량의 그토록 맑은 눈을 사랑했다. 그리고 이런 사나이가 자신만의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이 남자……. 천하의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다. 그녀는 이 남자를 위해 한꺼풀의 침의를 벗었다. 그리하여 그녀도 나신이 되었다. 나신이 된 그녀는 관성량이 누워 있는 비단금침 속으로 몸을 집어 넣었다. 관성량도 그녀의 뒤를 따라 비단금침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맑은 눈에 파문이 일었다. 그녀의 눈빛도 흔들렸다. 관성량의 남근(男根)이 서서히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아아……." 난화군주는 섬섬옥수를 밑으로 내리며 그의 남근을 잡았다. 남근은 완전히 발기했다. 그녀의 어깨가 크게 물결치고, 풍만한 젖가슴이 흔들렸다. 관성량도 손을 들어 그녀의 나체 몇 군데를 애무하듯 쓰다듬었다. "아아……!" 난화군주는 익숙한 그의 손길에 야릇한 신음성을 발하며 온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 그녀의 나체는 노련한 낚시꾼에게 잡혀 물 밖으로 나온 장어처럼 연신 꿈틀거렸다. 그것은 관성량에게 더욱 큰 욕정을 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입맞춰줘요……." 그녀는 언제나처럼 관성량에게 재촉했다. 하지만 관성량은 그녀의 입술을 탐하지 않았다. 관성량의 입술은 단 한 사람만의 것이었다. 아니, 관성량의 모든 것은 단 한 사람만의 것이었다. 꿈에서조차 잊을 수 없는 여인……. 하지만 이제 난화군주는 관성량의 모든 것을 지배하였다. 남은 것은 관성량의 입술 뿐이다. 관성량은 그 입술마저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죽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여인이었지만, 훗날 그 역시 죽어 그녀를 다시 만나는 그 날을 위해 한가지만은 남겨 두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입술이었다. 관성량의 손가락이 난화군주의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그것은 입맞춤 대신이었다. '예령…… 이십여 년이 지났으나 그대의 모습은 내 가슴 속에 아직도 아련하오.' 사내는 어찌보면 대단히 이기적인 짐승이었다.


그는 군예령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지며 아직까지 그녀를 못잊고 있었으나, 그의 육신은 난화군주의 매끄러운 피부를 더듬고 있다. 그와 함께 누워 있으라 치면 그녀는 언제나 절박했다. 이렇게 꽉 그를 껴안고 있지 않으면 누군가가 그를 빼앗아 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난화군주는 아무도 그를 빼앗아가지 못하고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하지만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관성량은 메마른 장작과 같았다. 난화군주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그를 재촉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볼일을 마치고 난화군주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와의 정사는 언제나 이랬다. 언제나 그는 난화군주의 몸에 불만 붙이고 꺼졌다. 하지만 난화군주는 단 한 번도 그런 관성량을 원망해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인 관성량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일을 한다할지라도 관성량이란 이름 하나로 난화군주는 원망하지 않았다. "요즘 동창에도 잘 나가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난화군주는 관성량의 넓은 가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몸이 불편하여 조금 쉬고 있소." "몸이 많이 안좋으십니까? 어의(御醫)에게 일러 탕재라도 한 첩 지어 올리라 분부할까요?" "허허…… 나이 탓이오. 그러니 꼭 어디가 안좋다고 말할 수도 없는 입장이오. 군주는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 "일에 조금 더 적극성을 가져 보시지요. 아무래도 바삐 생활하다 보면 좀 나아질 것입니다. 아이들도 요즘 당신 걱정이 많습니다. 너무 기력이 없어 보이신다더군요." "크게 아프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 이르시오." 관성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어 그는 침상에서 부시시 일어나며 벗어놓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의 뜬금없는 행동에 난화군주는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가슴이 답답하여 정원에 나가 바람 좀 쐴까 하오." "제가 함께 나갈까요?" "아니오. 금방 돌아오겠소." 난화군주는 등을 돌려 방을 나가는 관성령의 뒷모습을 근심어린 눈으로 응시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저러시나? 요즘 와서 더욱 심해지셨으니…….'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난화군주는 갈증을 느껴 물주전자가 놓여진 탁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탁자 위에는 한 장의 한지(漢紙)와 문방사우(文房四友)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보는 난화군주의 얼굴에 미소가 매달렸다. "오랜만에 시(詩)를 쓰셨나보군……." 그녀는 주전자의 물을 따라 마시며 한지에 쓰여진 시를 읽어 나갔다. 그런데 시를 읽던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곡칙이실(穀則異室) 사칙동혈(死則同穴). "살아서는 함께 있지 못했으나…… 죽어서는 같은 곳에 묻히고 싶다……." 난화군주의 아름다운 얼굴이 더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손에 들린 옥배(玉杯)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 이십 년이 훨씬 지났거늘……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계시구나. 군예령…… 그 계집을……."


난화군주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치솟아 오르는 것은 군예령에 대한 지독한 질투심이었다. 월산장은 멸망했고, 군예령도 죽었다. 군예령에 대한 모든 흔적은 이 땅,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 하나! 군검우 그 놈이 남아 있었다. 군예령에 대한 질투심은 곧 군검우에게로 이어지고, 그녀는 단 한 번의 얼굴도 보지 못한 군검우를 향해 강렬한 살의를 느꼈다. '찢어 죽이리라! 놈을 발견한다면 기어이 찢어 죽이고 말리라! 그리하야 이 땅, 어디에도 군예령 그 계집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리라!' 4 탁…… 타탁! 희미한 편월도 구름 속에 가려진 어둠 속에서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모닥불 위로 능원평과 사문군은 갓 잡은 토끼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 한쪽에는 군검우가 고독하게 앉아 있었고, 군검우의 옆에는 당문연이 태양을 향한 해바라기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능원평은 다 익은 토끼고기를 들고와 군검우와 당문연에게 권했다. "미안하오." 군검우는 토끼고기를 받으며 말했다. "나 때문에 객점에서 편히 쉬지도 못하고 하루하루가 노숙(露宿)이구려." 그 말에 능원평은 껄껄거리고 웃었다. "우리는 친구가 아니오? 별걸 다 미안해 하는구려." 능원평의 과장된 몸동작에 당문연은 피식 웃었다. 군검우도 담담히 웃으며 능원평의 말에 답례했다. 그들 세 사람의 모습을 응시하는 사문군의 눈에서 어두운 그늘이 졌다. '평생을 누구와도 접촉할 수도 없고…… 죽는 날까지 후손도 보지 못한다. 바라는 것은 오직 복수……. 주군의 삶은 진정 너무도 불행하구나…….' 사문군의 시선이 당문연에게로 향했다. '저 여인 또한 주군과 같은 같은 운명…… 운명의 신은 저 두 사람에게 너무도 가혹하다…….' 사문군은 허리춤에 매어두었던 술병을 꺼내들고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모든 것을 이루고 난 뒤에…… 저 둘은 무슨 의미로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인가? 누구도 대신 들어갈 수 없는 처절한 고독의 벽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봐도 도통 답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일이었다. 그 생각만으로 사문군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한 손을 들어 자신의 눈자위를 눌렀다. 사문군의 그러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군검우는 능원평이 건네준 토끼고기를 맛있게 뜯어먹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전신을 흠칫거렸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소." 그의 말에 능원평 등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풀벌레 소리를 제외한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천 장(丈) 밖에 있소." "천 장?" 천 장이라는 말에 능원평 등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형은 천 장 밖의 소리가 들린단 말이오?" 능원평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모두 이십 명 정도요. 발걸음 소리로 보아 상당한 고수들이오." "……!"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믿고 안믿고를 떠나 더더욱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소이다. 군형의 내공은 이미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강해졌구려. 천 장 밖의 인기척을 듣고…… 게다가 그 숫자까지 맞추다니……. 그 옛날의 절대천존이나 환우금성께서 살아계신다 해도 비교가 안될거요." 이때, 눈을 감고 있던 당문연이 백색 동공(瞳孔)의 눈을 다시 뜨며 말했다. "이제야 들리는군요. 그들은 사백 장까지 접근해 있어요. 상당한 속도로군요." 사문군과 능원평은 아연실색해서 서로를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산 속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무리들은 총 이십 일 명이었다. 그 중 진설하의 모습도 보였다. 진설하의 옆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외팔이의 흑포노인이 자리했다. 노인의 이름은 독비천왕(獨臂天王) 운중산(雲中山). 바로 칠십 년 전 강호에서 은퇴했던 일대괴인(一大怪人)이었다. 사라질 때, 그의 나이가 칠십여 세였으니 지금은 백 사십 세가 넘은 개세적인 노마두였다. 그가 강호를 풍미하며 무림을 혈수(血水)에 잠기에 했을 때가 일백 년 전이었다. 당시 그는 백안천왕(白眼天王), 수라천왕(修羅天王)과 함께 마문삼천왕(魔門三天王)이라 불려지며 강호에서 천하무적으로 군림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헌원패성의 등장으로 천하제일이란 자리를 그에게 빼앗기곤 강호를 은퇴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그들 중 일 인인 독비천왕 운중산이 다시 강호에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진설하의 옆을 달려나가던 독비천왕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것이다. 그가 느낀 이상한 분위기, 그것은 바로 살기였다. 순간, 독비천왕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무슨 일이신지요?" 진설하가 돌연히 걸음을 멈춘 독비천왕을 바라보았다. 대답 대신 독비천왕은 전면을 향해 그대로 일장을 뻗었다. 쿠아아아앙! 쾅! 노도와 같은 장력이 독비천왕의 손에서 발출되며 눈 앞에 보이는 세 그루 고목을 일제히 박살내버렸다. "웬놈들이냐?" 그러면서 그는 소리쳤다. "늙은 놈이 귀가 대단히 밝군. 역시 늙으면 귀가 밝아지는 모양이야. 크크크!" 이죽거리며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는 능원평이었다. 능원평의 뒤로 군검우와 당문연, 그리고 사문군이 모습을 나타냈다. 순간 진설하는 경악하며 그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군검우의 무정한 눈빛이 진설하의 심장을 뚫었다. "네놈들은 감히 누구길래 본좌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냐?" 독비천왕의 우레와 같은 음성에 그들 일행 중 한 명이 독비천왕에게 말했다. "저…… 저놈이 바로 백사단주 군검우입니다." "백사단주?" 독비천왕의 안색이 굳어지며 군검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생각지도 않은 뜻밖의 횡재로군. 백사단주라…… 좋아, 좋았어! 네놈을 죽여 백만 마도인(百萬魔道人)이 두 발을 편히 뻗고 자게 해주겠다!" "네 마음대로 그것이 가능할까?" 사문군이 군검우를 대신해 검을 뽑았다. "네놈에게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려주마!" 쐐애애액-! 사문군은 독비천왕을 향해 지난 일 년 간 배운 초형일섬검을 전개했다. 상상을 불허하는 검기가 독비천왕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왔다. "허억! 초형일섬검!" 독비천왕은 군검우가 아닌 또다른 자가 초형일섬검을 전개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바였다. 때문에 그는 화들짝 놀라며 사문군의 검기를 피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문군을 향해 일장을 내질렀다. "크하하핫! 설사 절대천존 천승세가 환생하여 초형일섬검을 전개한다 해도 나를 어찌하지는 못한다!" 쿠아아아앙-! "으윽!" 그의 일장에 사문군은 피를 토하며 나가 떨어졌다. 능원평이 경악했다. "통비신장(通臂神掌)!" 통비신장은 독비천왕의 독문무공이었다. 군검우 일행은 눈 앞의 이 노인이 통비신장을 전개함으로써 그가 독비천왕임을 처음으로 알았다. 백 사십이 넘은 그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적인 일이었다. "크크크! 어린 놈이 보는 눈은 있구나!" 독비천왕은 능원평을 비웃었다. "우리 마문삼천왕은 칠십 년 간 무림의 일에 관여치 않고 살아왔다. 허나 이번에 혈궁주의 간곡한 청탁을 받고 태상장로의 위치를 받아들여 혈궁에 가입했다." 그 말은 군검우 일행을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우리 마문삼천왕이라니…… 그렇다면 백안천왕과 수라천왕도 생존해 있단 말인가?' 그들이 살아있고, 그들이 혈궁을 돕는다면 그들이 가지는 힘은 논외로 친다하더라도 그 상징성만으로도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게 될 것이다. 때문에 군검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눈 앞의 이 독비천왕을 주저앉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검우는 검을 뽑았다. 파파파팟! 동시에 하늘과 땅이 한꺼번에 짓쳐드는 듯한 신쾌무비한 속도로 독비천왕을 향해 덮쳐들었다. 독비천왕은 우두둑! 소리를 내며 팔을 뻗었다. 그의 팔 길이가 쭈욱 늘어나며 군검우의 가슴팍을 가격했다. 군검우는 이를 악물며 자신의 전신내공을 한 점도 남기지 않고 끌어올렸다. 그것은 천지를 모두 녹여버릴 수 있는 강렬한 독물이었다. 푸스스! 군검우의 가슴팍에 닿은 독비천왕의 손바닥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흐흐흐…… 지독한 독이군. 허나 아쉽겠지만 본좌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백독(百毒)이 불침(不侵)이다! 네놈이 자랑하는 천장비독도 본좌에겐 무용지물일 뿐이다!" 독비천왕은 다시 한 번 군검우를 향해 통비신장을 발출했다. 군검우도 쌍장을 발출하며 독비천왕에게 대항했다.


꽝- 꽈르르- 꽈아앙! 태고 이래로 가장 엄청난 굉음이 터져나왔다. 하늘은 쪼개져 내려앉고 땅은 박살나버릴 것 같았다. "윽!" "크윽!" 그 순간 군검우와 독비천왕은 서로 엄청난 진동을 느끼며 진저리를 쳤다. 독비천왕은 지금의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십이 갓 넘은 놈의 내공이 백수십 년을 살아온 본좌의 내공과 맞먹다니…….' 독비천왕은 놀라움을 넘어서 분노가 일 지경이었다. "진정한 통비신장의 위력을 보여주겠다!" 독비천왕의 손이 핏빛으로 변했다. 팔이 늘어나며 그 그림자가 수십 개로 변모했다. 그것이 군검우를 향해 무섭게 발출되었다. 팍! 파파팍! 군검우는 연속적으로 그의 통비신장을 맞았다. 그의 옷이 갈가리 찢기며 입가에서 선혈이 흘렀다. 그러나 지금 군검우가 흘리는 피는 붉은색이 아니었다. 온통 독물로 이루어진 군검우의 몸에서는 검은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독비천왕은 경악했다. '통비신장에 수십대를 가격 당하고도 서 있다니…….' 검은피를 흘리며 군검우는 음산하게 말했다. "이것이 다인가? 이것이 독비천왕이 자랑한다는 통비신장의 모든 것인가?" 바람은 불지 않고 있건만 걸레조각처럼 찢겨진 군검우의 의복은 미친 듯이 펄럭거렸다. 그의 머리카락 한올한올은 모조리 곤두서고, 눈빛은 지옥의 유황불처럼 이글거렸다. "……!" 독비천왕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자신의 내력을 모조리 끌어올려 통비신장을 전개했다. 쐐애애액-! 가히 하늘도 땅도 놀랄 만한 위력이 실려 있었다. 독비천왕의 손이 군검우의 어깨와 부딪쳤다. 군검우는 자신의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좌수로 독비천왕의 한 팔을 움켜 쥐었다. "……!" 독비천왕은 이 엄청난 사실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나…… 나의 팔을 낚아채다니…….' 그는 자신의 팔을 회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군검우의 힘에 의해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군검우는 독비천왕의 팔을 잡은 좌수에 힘을 주었다. 우두둑! 손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독비천왕은 하나밖에 없는 팔을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우두둑! 순간 그의 손목이 완전히 부러지며 탈골(奪骨)이 되었다. 그의 손이 밑으로 축 처지며 너덜너덜하게 되었다. 그 고통은 머리 끝이 쭈삣쭈삣 설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악으로 뜻을 세운 자…… 악으로 멸하리라!" 파파파파팟! 군검우의 다른 한 손이 독비천왕의 가슴팍을 연속적으로 공격했다. 독비천왕은 막으려고 애썼지만 그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아아아악!" 백독불침이라고 자랑하던 그의 몸이, 그의 머리카락이, 그의 백염이, 그의 피부가 일시에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군검우는 한 발 더 다가가 독비천왕의 목줄을 움켜 쥐었다. "흐흐흐……y 이것이야말로 진짜 천장비독의 위력이다. 백독불침의 몸으로는 어림없다!" 우두둑! 그의 손 아래서 독비천왕의 목뼈가 부러졌다. 그의 얼굴이 경련으로 인해 눈도 감지 못한 채 옆으로 쓰러졌다. 혈궁의 무리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서며 공포에 젖어 주춤거렸다. 마(魔)의 하늘 중 한 명인 독비천왕이 이처럼 무참히 목숨을 잃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킬킬…… 멋있었소, 군형." 능원평이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괴소를 터뜨렸다. "혈궁의 주구라면 어떤 놈이든지 살려줄 수 없다!" 능원평의 사악한 눈빛이 진설하를 포함한 나머지 이십 명 혈궁인들을 향해 돌았다. 죽고 싶지 않은 자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떤 자들은 살려달라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빌었다. 오로지 진설하만이 넋이 나간 듯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군검우의 시선이 진설하를 향했다. "언젠가 우리가 약속한 일이 있었소.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대의 이름 석자를 백사단에서 지우겠다고." "……." 진설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군검우는 검을 뽑았다. 진설하는 눈을 감았다. 이제 그를 다시 만난 이상, 모든 것을 포기하고 초연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목에 겨누어진 군검우의 검 끝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숭산의 어느 기슭. 군검우는 진설하의 목에 검을 대곤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이미 일 년도 훨씬 지난 날의 이야기였으나 그때와 지금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군검우의 뇌리에 그녀와의 행복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첫사랑……. 그것은 이 땅을 떠나는 그 날까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군검우의 가슴에 맺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비가 오는 날이면, 늙어 신경통에 삭신이 쑤시는 노인네처럼 군검우의 가슴 한쪽 구석을 와르르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죽는 그 날까지 영원히 잊을 수가 없는 사랑인 것이다. 쐐애액! 그 사랑을 향해 군검우의 검이 내리쳐졌다. 진설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의 손에 죽는다면 너무도 행복할 것 같았다. 아니, 지금 이 순간도 너무나 행복했다.


하지만 군검우의 검이 벤 것은 그녀의 목숨이 아니다. 군검우의 검은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잘랐을 뿐이다. "이것으로 우리 사이에 얽혀 있는 감정은 영원히 끊어진 것이오." 군검우는 또다시 그녀를 죽이지 못한 것이다. "……!" "나는 영원히 당신이 죽은 것으로 치겠소." "……!" "그리고…… 죽는 날까지……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소." 망연히 그를 올려다보는 진설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갈증을 느꼈다.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그녀는 그 타들어가는 입술을 열었다. "검우…… 당신이 옳았어요. 저는 조그만 감정에 연연하지말고 혈궁을 포기해야 했어요. 허나 이미 늦었군요. 하지만 이제라도 혈궁을 포기하겠어요. 영원히 그곳을 떠나겠어요." "……!" "마지막으로 당신께 한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겠어요. 우리가 가려고 한 곳은 북경성 근교의 용휘산(龍揮山)이예요. 그곳에서 원소랑과 만나기로 했어요. 원소랑은 동창의 수뇌이자 난화군주의 부군(夫君)인 관성령을 납치할 거예요. 그는 관성량을 이용하여 난화군주를 제거할 셈이죠. 독비천왕과 저는 바로 난화군주를 죽이는 데 필요한 응원군으로 가고 있었던 거예요." "……!" 군검우의 얼굴은 굳어졌다. '원소랑이 관성량를 납치한다고……? 관성량이라면 바로 월산장을 멸망시키고 모친을 죽게 한 나의 마지막 원수…….' "이제 저는 가겠어요. 모든 걸 정리하고 누구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겠어요." 진설하는 비틀거리며 걸었다. 군검우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외면했다. 그저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군형……." 능원평이 군검우를 불렀다. 군검우는 고개를 들어 능원평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갔소?" 군검우는 스스로 진설하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지 않고 대신 능원평에게 물었다. "갔소." 능원평은 쓰게 말했다. "그렇군." 군검우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진설하…… 그녀는 이제 떠났군……." 그의 전신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리고 두 눈의 초점은 흐트러졌다. 사무치는 그리움만이 그의 양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주군…… 진소저를 쫓아가십시오." 보다못한 사문군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크크……." 군검우는 처절하게 웃었다. "쫓아가서……?"


"……!" "그래서 어찌하란 말인가? 이 몸으로 무엇을 어찌하란 말인가?" 그는 사문군을 보며 웃고 있었으나 그것은 웃고 있으되 웃는 것이 아니었다. 가슴 속에 사무치는 고통을 애써 감추며 웃고 있는 척할 뿐이었다. 군검우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당문연의 투명한 눈에 눈물이 흘렀다. 그의 슬픔이 그녀의 가슴에까지 이전된 것이다. 제 26 장 떠날지언정 배신할 수는 없다 1 지난 이십여 년 동안 관성량에게는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습성이 있었다. 그것은 매년 삼월(三月) 보름과 시월(十月) 초닷새엔 북경 근처에 있는 웅천산 백랑호(白浪湖)에 가서 하루를 쉬고 온다는 것이다. 난화군주의 엄명에 의해 그가 백랑호에 행차하는 날이면 언제나 수백 명의 군사들이 대동되어 그의 주위를 철통같이 경호했다. 허나 관성량이 그것을 귀찮아 하자 얼마 전부터 난화군주는 수백 명의 경호군사들을 없앴다. 대신 관성량이 알 수 없게 두 명의 고수가 그림자처럼 그의 주위를 호위했다. 바로 난화군주의 사조직처럼 되어버린 신비각의 초일급 고수들이었다. 관성량은 홀로 말을 타고 관천부를 나섰다. 난화군주는 창문에 선 채 그늘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십 년을 살아오면서도 느끼지 못했다. 마음 속으로는 언제나 불안했지만 군예령을 죽이고 난 뒤 나는 성량을 영원히 얻었다고 생각해 왔다. 허나 내가 얻은 것은 그의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의 영혼은 아직도 군예령을 그리워하고 있다…….' 난화군주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삼월 보름과 시월 초닷새에 그가 왜 백랑호를 가는지 알지 못했으니…….' 백랑호(白浪湖). 호반에는 연꽃들이 이리저리 뿌려져 있어 작은 파랑(波浪)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중앙에는 그림같은 정자가 한 채 지어져 있다. 정자의 사방으로는 네 개의 구름다리가 놓여져 있어 그 운치를 더했다. 관성량은 느릿한 걸음으로 구름다리를 거닐었다. 눈부신 하늘 위에서는 그 하늘보다도 더 눈부신 군예령의 환상이 떠가고 있었다. '벌써 이십 오 년 전인가……?' 삼월 보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군예령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 화사한 아름다움이란……. 관성량은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셔 눈을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의 뜻을 관성량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하지만 당시 관성량은 이미 난화군주와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은 후였다. 군예령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난화군주와 이혼을 하는 방법이 있었으나, 난화군주는 황실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었다. 그녀와의 이혼은 관성량의 파멸 뿐만이 아니라 군예령의 파멸까지도 의미한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어디 사람의 마음으로 되는 것이랴! 앞 뒤 돌아보지 않고 자석에 끌리듯 쏜살같이 끌려가는 것이 사랑이 아니던가 말이다. 뜨거운 사랑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사랑은 언젠가는 이별을 기약해야만 하는 사랑이었다.


두 사람은 이별을 하였다. 그날이 바로 시월 초닷새였다. 그들은 생애에서 가장 화려한 칠 개월을 보냈던 것이다. '그대가 없는 나의 삶은 너무나 무미건조하였소. 보고 있으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듣고 있으되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소……. 그저 무료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을 뿐이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어서 빨리 세월이 흘러 내가 그대곁에 가기를 바랄 뿐이오.' 관성량은 한 여인을 죽도록 사랑하고, 또 다른 한 여인에게 죽도록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는 난화군주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싫어서 내심을 감춰야 했다. 그가 속마음을 드러내고 이토록 고통스러워 할 수 있는 날은 일 년에 단 두 차례, 이곳 백랑호를 방문할 때 뿐이었다. '하지만 알아주시오, 예령……. 나의 지난 삶은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었소…….' 구름다리의 난간을 부여잡은 관성량의 손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원소랑은 깨끗한 백의에 머리에는 백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유유자적 세월을 낚는 낙척서생의 모습이었다. 그는 사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관성량이 있는 반대편의 구름다리 쪽으로 올라갔다. 기실 그는 관성량을 신경쓰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그의 예리한 눈동자는 관성량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지켜보고 있었다. "이곳의 경치가 실로 기막히구나……." 그는 들고 있던 섭선을 쫙! 펴며 부채질을 했다. 순간 원소랑은 자신을 향해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살기를 느꼈다. 그것은 관성량에게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더욱 짙어졌다. 관성량의 오 장 앞으로 다가갔을 때는 살기로 인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신비각의 놈들이다. 으…… 말로만 듣던 것보다 더욱 대단한 놈들이로구나.' 그러나 원소랑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관성량을 향해 다가갔다. 관성량은 여전히 구름다리의 난간을 부여잡고 먼 하늘을 올려보고 있을 뿐이다. "이곳이 백랑호가 맞지요?" 문득 원소랑은 관성량을 향해 말을 걸었다. 관성량은 하늘로 향했던 시선을 원소랑의 부드러운 얼굴 위로 돌리며 대꾸했다. "그렇소이다." "소생은 오늘 이곳에 처음 와보는데 소문대로 주위의 경관이 장관이로군요." 관성량은 거기에 대한 대꾸를 할 필요는 느끼지 못하였는지 슬며시 호수가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원소랑의 눈이 가공할 안광으로 번쩍였다. 쐐애액! 동시에 그의 손에 들려있던 섭선이 관성량의 혈도를 찍어나갔다. 그때였다. 푸왓! 물 속에서 두 줄기 시커먼 인영이 솟구치며 원소랑을 공격해 들었다. 바로 관성량을 보호하는 신비각의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원소랑은 관성량의 혈도를 점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자신의 죽음 따위는 도외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콰앙! 지독한 폭발음이 터졌다. 그런데 무엇이 어찌된 일인가?


원소랑을 향해 밀려들던 두 줄기 흑의인영이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구름다리의 양쪽으로 어느 사이 마문삼천왕 중 이 인인 백안천왕과 수라천왕이 나타난 것이다. 이때, 원소랑의 섭선은 관성량의 혈도를 제압했고, 관성량은 맥없이 구름다리 위로 고꾸라졌다. 피를 토하며 나가 떨어진 두 명의 흑의인영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다시 관성량을 구하기 위해 짓쳐들었다. 쉬쉬쉭! 백안천왕과 수라천왕이 구름다리의 양쪽에서 섬전처럼 달려왔다. 흑의인영들은 관성량을 구하는 것이 먼저인지라 그들의 달려옴에는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백안천왕의 눈에서 무서운 백광이 뿜어졌다. 동시에 수라천왕의 양 손이 두 명 흑의인영의 머리통을 찍었다. "켁!" "케엑!" 그들은 너무나 싱겁게 죽음을 당했다. "크하하하하핫!" "으하하하하핫!" 백안천왕과 수라천왕이 일제히 앙천광소를 터뜨리는 사이, 원소랑은 혼절한 관성량을 들쳐 업었다. 관성량을 납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난화군주는 정원을 이리저리 거닐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밤은 깊었고, 관성량이 백랑호에서 돌아올 시간은 이미 지나버렸다. 하지만 관성량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시간은 벌써 자시가 다 되어간다. 너무나 초조한 난화군주는 관천부의 하인들을 시켜 백랑호에 다녀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난화군주가 정원을 다섯 바퀴쯤 돌았을 때 그들이 돌아왔다. "어찌되었느냐?" 하늘이 무너져도 꼼짝하지 않을 것 같은 난화군주가 다급하게 물었다. "대…… 대인께서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정자에는 대인을 호위하던 두 명의 신비각 무사들이 피살된 채 남아 있었습니다." "!" 쿵! 난화군주는 누군가 둔기로 자신의 머리통을 내리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얼굴이 일시지간에 창백해지며 신형은 비틀거렸다. "아…… 아마도…… 대인께서는 괴한들에게…… 납치당한 것 같사옵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화군주의 신형이 뒤로 쓰러졌다. "구…… 군주님!" 시녀 하나가 빠르게 난화군주를 부축했다. "북경 일대를 모조리 수색하라! 동창은 물론 북경수비대를 모조리 동원하여 반드시 범인을 잡아라! 만약 잡지 못하면 모든 책임자들을 참수하리라! 사갈같은 난화군주의 엄명이 떨어졌다. "조…… 존명!" 하인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전서구를 띄워 신비각주를 북경으로 소환시켜라!" 명령을 받은 하인들이 물러났다.


난화군주는 시녀의 부축을 받은 채 부들부들 떨며 다짐했다. "만약…… 그분의 몸에 조금이라도 변고가 생긴다면 반드시 수천만배의 보복을 하리라." 2 객점 안은 이런저런 사람들의 소란으로 매우 시끄러웠다. 그 사이에 세 명의 무림인이 찻잔을 마주한 채 앉아 있었다. 바로 개방의 취선노개와 무림맹의 쌍검뇌우, 그리고 소림의 홍지대사였다. 이들은 일 년 만에 돌아온 백사단주 군검우를 찾기 위해 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가 다시 나타나 천하의 악인들을 상대로 대협행을 시작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오. 실로 정파무림의 보배요, 희망이 아니겠소이까!" "그런 의인(義人)을 사파의 무리로 오해한 노납이 부끄럽소이다." 홍지대사는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쌍검뇌우가 미소지었다. "대사…… 너무 심려치 마시오. 군대협은 이미 그 일을 벌써 잊었을거요." "아미타불……, 군대협께서 무림맹에 한 힘을 보태주신다면 천하의 정도혼(正道魂)은 불처럼 일어나 사파의 무리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가 있을 것이오." "이르다 뿐이겠소. 그러니 이렇게 우리가 군대협을 찾아 강호로 다시 나온 것이 아니오." "허허허…… 군대협은 절대 우리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실게요." 그들이 군검우에 대한 이야기로 화기애애(和氣靄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꿈을 꾸고있군." 어디선가 싸늘한 냉소 한 마디가 터져나왔다. 취선노개의 얼굴색이 홱! 변했다. 그들 삼 인은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죽립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오 인이 한쪽 구석에 자리한 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지독한 살기, 마치 잘 갈아놓은 한 자루 칼날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중 한 명은 몸매로 보아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취선노개는 직감적으로 저들 오 인이 천하를 웅패할 수 있는 무서운 고수들임을 느꼈다. 취선노개는 그들을 향해 히쭉! 웃었다. "우리의 말에 반박하는걸 보니 분명 사파의 도당(徒黨)들인 것 같은데 얼마나 잘나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겐가?" "입이 매우 더럽군." 오 인 중 한 명이 싸늘하게 외치며 탁자를 탁! 소리나게 쳤다. 순간 탁자에 놓여져 있던 접시 하나가 팽이처럼 회전하며 취선노개를 향해 짓쳐들었다. 취선노개는 킬킬거리며 젓가락을 들어 접시를 막았다. 채앵! 헌데 취선노개의 내력이 실린 젓가락이 접시에 맞아 동강나는 것이 아닌가. 그의 젓가락을 부러뜨린 접시는 회전력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날아 객점의 벽에 박혔다. 푸시시! 벽과 접시의 마찰연기가 일었다. "……!" 취선노개는 너무나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한 번의 교환은 분명히 그가 패배한 것이다. 취선노개의 옆에서 쌍검뇌우가 눈빛을 번뜩였다. '이 무공은 분명 선천육양신공(先天六陽神功)이다. 수백 년 전 실전된 무당파(武當派)의 무공인데 어찌 저런 무뢰한 자가 시전한단 말인가?'


취선노개는 경직된 얼굴로 흑의면사인들을 응시하며 저들 중 우두머리는 바로 접시를 날린 여인임을 직감했다. '우…… 대체 저들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강호의 삼류고수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취선노개였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좌중은 순식간에 긴장감이 감돌며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죽립면사인들은 다시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취선노개도 강호의 배분을 생각해 먼저 그들을 건드릴 수 없어 일단은 자신의 노기를 눌렀다. "꽃 사세요, 꽃이요……." 객점 안으로 십 칠팔 세 가량의 꽃파는 소녀가 들어오며 그들의 침묵을 흐트려놓았다. 그런데 꽃을 파는 이 소녀는 과거 천애원에서 살아남았던 단 한 명의 소녀인 평아였다. 그러나 일 년 만에 다시 만나는 이 소녀의 얼굴은 예전의 총기어린 눈빛과 보송보송한 피부는 간데 없고 병색이 완연하고 매우 쇠약하게 보였다. 게다가 콜록콜록 기침까지 해대고 있었다. 평아는 좌석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꽃을 팔았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르는 객점 안에서 평아의 꽃을 사줄 손님은 없었다. 평아는 죽립면사인들이 자리한 오 인의 좌석으로 갔다. "쿨록……. 아…… 아저씨, 부탁이예요. 꽃 한 송이만 사주세요." 그러나 그들 중 누구하나 평아를 거들떠 보는 이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식사를 할 뿐이었다. 취선노개가 코를 후미며 쩝쩝 입맛을 다셨다. "이 노개는 돈이 없고…… 천대협, 돈 좀 투자하시구랴." 쌍검뇌우가 미소를 지으며 품 속에서 은자 몇닢을 꺼내 평아를 부르려고 손을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죽립면사 여인의 눈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그녀는 평아의 목에 걸린 투박한 나무 목걸이를 본 것이다. 순간 그녀는 평아의 손목을 움켜 쥐었다. "너 이 목걸이 어디서 났느냐?" 사갈과도 같은 독랄한 음성이었다. 평아는 공포에 젖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왜…… 왜 이러세요……. 이…… 목걸이는…… 기…… 길에서 주었어요……." "거짓을 말하고 있군." 죽립면사 여인은 평아의 손목을 더욱 세게 움켜 쥐었다. "아악! 노…… 놓아주세요!" 평아는 고통에 찬 비명성을 질렀다. 보다못한 취선노개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는 여전히 코를 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거…… 길에서 주웠다고 하지 않아? 별로 쓸만한 목걸이도 아닌 것 같은데…… 놓아주구려!" 순간 죽립면사 여인의 눈빛이 살벌하게 일그러지며 취선노개를 향해 꽂혔다. 취선노개는 그녀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거렸다. 젊은 여인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강렬한 눈빛이었다. "내 일에 참견하지 마라, 취선노개!" '헉!' 놀란 취선노개는 하마터면 코를 후비던 손가락으로 자신의 콧구멍을 찌를 뻔하였다.


'내 정체를 알고 있었구나.'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내심을 감춘 채 히쭉! 웃으며 말했다. "이 거지가 참견을 한다면……?" "그것은 네 명(命)을 재촉하는 일이다!" 죽립면사 여인의 다른 한 손이 전광석화처럼 취선노개를 찔러왔다. 취선노개는 옆으로 몸을 비틀며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허나 다음 순간, 죽립면사 여인의 손은 뱀의 혓바닥처럼 교묘하게 움직이며 그 자리를 피해선 취선노개의 가슴팍을 쳤다. "허억!" 취선노개는 헛바람을 일으키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아연실색한 쌍검뇌우와 홍지대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죽립면사 여인은 그 순간을 이용하여 평아의 혈도를 찍고는 객점의 문을 향해 나갔다. 나머지 사 인이 그녀를 보호하듯 뒤를 따랐다. "잠깐!" 홍지대사가 선장을 든 채 펄쩍 신형을 날리며 죽립면사인들을 막으려 했다. 순간 죽립면사인 중 한 명이 날아오는 홍지대사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펑! "으윽!" 헛바람과 함께 홍지대사가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가에서 주르륵! 선혈이 흘렀다. "소림반야수(少林般若手)……." 너무도 놀란 홍지대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소림반야수는 달마조사(達摩祖師) 이래 실전된 무공인데…… 어찌 그대가……." 홍지대사를 향해 소림반야수를 전개한 죽립면사인이 비웃음을 보였다. "소림반야수는 노부가 알고 있는 무학의 극히 일부분일세, 땡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죽립면사인은 여인의 뒤를 따라 객점을 나갔다. 쌍검뇌우가 홍지대사를 부축했다. '취선노개와 홍지대사는 무림 최정상고수들인데…… 단 일초에 패퇴시키다니…… 대체 저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의 머리 속에는 죽립면사인들에 대한 의혹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3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밝은 하늘색 천장이었다. 이곳이 어디인가? 평아는 잠시 동안 그것을 생각해야 했다. 객점에서 어떤 여인에게 손목을 잡힌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러나 그 이후의 기억은 아무 것도 없었다. 눈을 뜬 평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침상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평아가 상반신을 세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그녀의 앞에는 예의 죽립을 눌러쓴 면사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이 또 다시 혈도를 짚어 평아를 깨운 것이다. 공포에 젖은 평아를 바라보는 죽립면사 여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 목걸이는 어디서 났느냐?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용서치 않겠다!" 죽립면사 여인은 평아가 깨어나자마자 그녀를 핍박했다.


"저…… 저는…… 이것을 길에서 주웠을 뿐이예요……. 제…… 제발…… 살려주세요……." 평아는 계속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래?" 죽립면사 여인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혹시 너는 알고 있느냐? 이 세상에서 그런 류의 목걸이는 오직 두 개 뿐이라는 것을……?" "……!" 죽립면사 여인은 품 속에서 하나의 나무 목걸이를 꺼내 평아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평아가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와 똑같은 모양의 목걸이였다. 평아는 경악했다. "그…… 그럼…… 아가씨가……?" "!" "목완경…… 목언니이신가요?" "네가 어찌 내 이름을 아느냐?" 그렇다. 죽립면사 여인은 바로 용미인, 목완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여인의 손에 쥐어진 각각의 목걸이는 목완경이 어렸을 적에 그녀의 아버지인 목철주(木鐵株)가 손수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다. "오오!" 평아는 별안간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정말 기적이예요, 정말로……. 목언니를 만나게 될 줄이야." "……!" "제 이름은 평아입니다……. 일 년 전까지 목아주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어요." "목아주머니?" "언니의 어머니를 저희들은 그렇게 불러요." "내 어머니?" "그렇습니다. 그분은 제게 친어머니와 같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저 말고도 수십 명의 고아들을 돌보며 어렵게 키워오셨지요." 목완경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과거 군검우에게서도 들은 바가 있었다. '제 자식은 죽음 속에서 방치하고 다른 핏줄은 키워?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때 느꼈던 배신감이 또다시 그녀의 뇌리 속을 지배했다. "아주머니께 언니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언니를 생각할 때마다 아주머니는 비통의 눈물을 흘리셨어요." "그녀는 지금 어디 계시냐?" 목완경의 음성은 여전히 싸늘했다. "돌아가셨습니다." "……!" 평아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환우 할아버지와 함께…… 원아들도 모두 참변을 당했습니다. 살아 남은 사람은 저 혼자입니다. 흑흑……. 환우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흉수는 바로 혈궁의 궁주라 했습니다." 용미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혈궁주가 환우금성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하나의 고아원이 참변을 당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기실 그러한 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라 당시 선로암을 다녀왔던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던 것이다.


여하간 이 순간 용미인이 느끼는 감정은 참으로 묘했다. 그날 절벽에서 참변을 당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어머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죽음이 용미인에게 어떤 변고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물이 흐르듯이…… 그렇게 잔잔히 흘러가는 일일 뿐이다. 그녀가 살아있든 죽어 있든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용미인은 참으로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지 용미인도 알지 못했다. "저는 그동안 이곳저곳에 꽃을 팔고 다니며 군오라버니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군오라버니는 찾지 못하고 언니를 찾았군요." "군검우 말이냐?" "예……. 혹시 언니는 군오라버니의 소식을 알고 계신가요?" "그를 왜 찾는 것이냐?" "환우 할아버지께서 군오라버니에게 전해주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 때문에 아직 죽지 못하고 힘겨운 생명을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환우 할아버지께서는 월산장을 멸망시킨 자가 관성량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범인은 바로 혈궁의 궁주인 민자란. 관성량은 군오라버니의 친부라 하셨습니다." "뭐…… 뭣이!" 용미인은 너무나 놀라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질 뻔하였다. 그만큼 평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에게 충격이었다. "그…… 그게 사실이란 말이냐?"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냥……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셨어요……." 비운의 사랑이라는 것이 모두 그렇듯이 이룰 수 없었던 관성량과 군예령의 사랑은 허무한 결말을 도출시켰다. 그날, 관성량은 자신의 모든 것을 군예령에게 고백하였다. 그리고 도망가자고 말했다. 관성량은 군예령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심지어 부마의 자리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관성량의 고백은 두 사람이 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군예령은 너무도 쉽게 자신의 사랑을 포기했다. 나만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 군예령이 관성량을 포기한 이유였다. 군예령은 관성량의 주변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 그녀의 뱃속에는 관성량의 핏줄이 자라고 있었다. 군예령은 처녀의 몸으로 군검우를 잉태한 것이다. 거기까지의 불행은 그래도 좋았다. 서로 얼굴을 안보고 살아도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문제는 그 사실을 천하의 모든 정보를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난화군주가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그녀는 관성량을 지극히 사랑했기에 군예령에 대한 증오와 질투가 대단했다. 그녀는 그때부터 사람들을 풀어 군예령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십 년 만에 군예령이 선대의 대학자이자 간신들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우학대선생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며, 지금은 월산장에서 숨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혈궁주를 시켜 월산장을 멸문시켰다. 평아의 말이 진작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용미인은 온몸을 경련시키며 부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용미인은 어머니를 회상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인을 위해 일생을 마쳤다. 하나밖에 없는 핏줄의 죽음도 주인의 핏줄과 바꾸었다. 그리고 자신은 불구가 되어 평생을 살았다. 종국에는 그 일의 연장선상에서 비명횡사하였다.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니, 비참한 종말이 얻은 것이라면 얻은 것이다. 영원히 눈물이라는 것은 모르고 살아갈 것 같은 용미인의 두 눈에서 주르륵!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녀의 눈물을 보자 평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군오라버니에게 알려야 해요……." "……." "그리고 혈궁주와 난화군주에게 이 피맺힌 복수를 해야해요." 용미인은 소매자락으로 자신의 눈물을 닦아내리는 평아를 응시했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올려 평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이 더욱 복받치는 설움인지 평아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용미인은 한참동안 그렇게 소리내어 우는 평아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평아를 바라보는 용미인의 눈빛이 섬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상태로 용미인은 스산한 음성을 토했다. 그녀의 억양이 달라지자 평아는 깜짝 놀라며 용미인을 올려다보았다. "불필요한 과거는 잊는 것이 좋겠어……." 평아의 머리를 잡은 용미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평아는 무엇이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어 불신과 공포의 눈으로 용미인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죽는다면 그 일을 아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겠지?" 더할 수 없는 공포감이 평아의 온몸에 사무쳐 회오리쳤다. "어…… 언니……. 제발…… 안돼요……. 군오라버니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해요……." "잘가거라." 콰직! 용미인의 손이 평아의 천령개를 내려쳤다. 평아는 비명성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즉사하고 말았다. 평아의 몸이 옆으로 주르륵! 기울며 침상으로 쓰러졌다. 용미인은 무심한 얼굴로 죽은 평아를 내려다보았다. "이로써 군검우만 사라진다면 이 땅에서 나의 과거는 완전히 지워진다. 허나……!" 용미인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민자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년만은 내가 죽인다! 반드시……." 입술을 깨물던 그녀는 이내 깔깔거리며 웃었다. "오호호홋! 상상도 못할 것이다! 민자란! 네가 가둔 헌원패성 때문에 내가 그의 모든 내공과 무공을 이어받고, 게다가 네가 그토록 얻으려한 그 자리마저도 내가 차지할 줄은……. 그리고 결국은 너의 생명마저도 내 손에 끊어질 것이다." 4 북경성. 흡사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북경성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깔려 있었다. 그들은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혈안이 되어 북경성의 가가호호(家家戶戶)를 수색했다. 이층 객점의 창문을 통해 그들을 내려다보는 군검우의 눈은 무심했다. "아무래도 북경을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 상태라면 우리가 북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당문연이 조심스럽게 군검우에게 말했다.


기실 그들은 진설하의 말을 듣고 북경으로 온 터였다. 허나 북경은 외인이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한 경계망이 쳐져 있었다. "만약 이대로 일을 진행한다면 분명 관군과 마찰이 생길 거예요." "당소저, 이번 일은 나 혼자 하겠소." 문득 군검우가 입을 열었다. "……?" "기실 이 일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오. 당소저나 능형에게 피해를 끼칠 수는 없소." "군공자께서도 조금 더 시간을 두시고……." 군검우는 손을 들어 당문연의 말을 막았다. "나는 반드시 관성량을 찾아야 하오. 그의 생명을 절대 원소랑에게 맡길 수는 없소." "……!" 당문연은 군검우의 두 눈에서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집념을 읽었다. 이런 집념을 가진 사람은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한다고 해서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다. "휴……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그 옆에서 사문군이 말했다. "난 주군과 운명을 함께 하기로 한 몸이오." "저 역시 달리 생각할 길이 없군요. 군공자를 따르는 수밖에……." 마지막으로 능원평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나도 혼자 놀고 싶지는 않으니…… 이번 일에 참가하지 않을 순 없군. 기실 우리의 적이야 모두 같다고 볼 수 있으니 말이오." 5 진설하는 혈궁주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여전히 아수라탈을 쓰고 있는 혈궁주의 진면목은 드러나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음성이 은은히 떨리는 것으로 보아 혈궁주는 대단히 경악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독비천왕까지 놈에게 당했단 말이냐?" "죄…… 죄송하옵니다. 제자, 불민(不敏)하여…… 당하고만 있었사옵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는지 혈궁주는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진설하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혈궁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번 일의 실패에 대한 죄값을 받아야 한다면 그녀는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혈궁주의 다음 말은 그녀를 깊은 의문 속으로 빠뜨렸다. "알았다. 그만 물러가 쉬어라……." 부복한 진설하의 양 어깨가 흠칫거렸다. '사부님은 역시 묻지 않으신다. 왜…… 나 혼자만 살아서 돌아왔는지를…….' 혈궁주의 말이 있었건만 진설하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혈궁주가 다시 말했다. "무슨 할말이 또 있는게냐?" "……." "할말이 있다면 해보거라." "제자는……." 진설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뜸들이지 말고 말해보거라. 무슨 말이냐?" "혈궁을 떠나고 싶사옵니다." 진설하는 용기를 내 말했다. "!"


"사부님, 이 못난 제자를 용서해주십시오." "너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게냐?" "그동안 많이 생각하고 갈등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그놈 때문이냐?" 혈궁주의 음성이 싸늘하게 변했다. 태사의 팔걸이에 올려져 있는 그녀의 팔목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니옵니다." 진설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를 잊은 지 오래 되었사옵니다." 혈궁주는 망연한 눈빛으로 진설하를 바라보며 천천히 태사의를 걸어나왔다. "설하야……." 그녀는 다정한 음성으로 진설하를 불렀다. "나에게 있어서 너는 친딸 이상이다. 어려서부터 키웠고, 남달리 정을 쏟았다. 그래서 랑아와 맺어주어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었거늘……." "죄…… 죄송하옵니다." 진설하는 그렇게밖에 달리 할말이 없었다. 혈궁주는 부복한 그녀의 뒷모습을 암울한 시선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참으로 닮았다.' 혈궁주는 진설하의 뒷모습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민자란, 그녀에게는 영원히 떠나지 않는 하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진설하의 아비인 진청운(眞靑雲)과의 관계였다. 진청운은 민자란의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민자란은 그를 포기하고 원화성을 택했다. 왜냐하면 민자란에겐 야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곳으로 날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배우자의 신분이다. 천룡북보의 대총관 원화성. 그것은 그녀의 신분을 보장해 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최소한 더 높이 날기 위한 발판으로 그 정도는 되어야 했다. 원화성에 반해 진청운은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낙척서생이었다. 젊은 시절, 민자란은 그가 읽어주는 싯귀에 가끔씩 감동하고 행복에 겨워 하였지만 그것이 그녀의 야망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만약, 당시 진청운을 버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이 자리도 없었을 것이다. 민자란이 원화성과 혼례를 올린 다음 해, 진청운도 눈물을 흘리며 혼례를 올렸다. 그리고 진설하를 낳았다. 혈궁주에게 있어서 진설하는 진청운의 분신이었다. 진청운과 못다이룬 그녀의 사랑은 모조리 진설하에게 이전되었다. 그런데……. 혈궁주는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그런 진설하가 자신의 곁을 떠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없겠느냐?" 천하의 혈궁주가 사정을 하듯 물었다. "죄송…… 하옵니다." 그러나 진설하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완강한 결심을 하고 들어온 터였다. 혈궁주는 점점 더 분노가 끓어올랐다. 진설하를 어떻게 대해주었던가?


울면 달래주었고, 기뻐하면 함께 웃어주었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탓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이렇게 배신할 수가 있단 말인가? "제자, 죽는 날까지 사부님의 은혜는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진설하는 혈궁주를 향해 절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양 손목을 바닥에 눌렀다. 우두둑!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혈궁주는 깜짝 놀라며 진설하의 팔목을 낚아챘다. 그러나 그녀의 양 손목의 혈맥은 끊어지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혈궁주는 처음으로 분노의 음성을 내질렀다. 진설하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담담한 얼굴을 하였다. "손목의 혈맥이 끊어짐으로 해서 다시는 영원히 무공을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사부님의 무공을 누설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무공을 돌려줌으로써 모든 정리를 끊자는 것이냐?" "……." "그럼 내가 너를 그토록 아낀 정은 무엇으로 돌려줄 것이냐?" "용서해…… 주십시오." 진설하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더 이상 무슨 말로 용서를 빌어야 할지를 몰랐다. 천하의 모든 이들이 손가락질하는 혈궁주였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만은 혈궁주는 은혜요, 태산이었다. 망연자실한 혈궁주가 물었다. "떠날려면 그냥 가도 되는 것을…… 무엇하러 이곳까지 왔느냐?" "떠날지언정 배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옵니다." "……!" "저를 보내주십시오." "……!" "사부님, 저를 보내주십시오." "내가 졌다." 혈궁주는 가슴이 에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떠나거라……. 영원히……." 혈궁주는 지그시 두 눈을 감은 채 진설하를 향해 돌아섰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였다. 혈궁주의 말대로 진설하는 그의 친딸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혈궁주는 진설하를 이길 수 없었다. "감사하옵니다……. 평생 사부의 은혜는 잊지 못할 것이옵니다." 진설하는 또다시 혈궁주를 향해 절을 했다. 제 27 장 군검우가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1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진설하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옷가지 몇 개를 제외한다면 혈궁에서 가지고 나갈 것은 없었다. 그 간단한 짐을 꾸리며 진설하는 슬픔에 젖었다. 천지사방은 끝없이 넓건만 자신이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십 년을 넘게 살아오는 동안 정붙인 곳은 이곳 혈궁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어디를 가든지 떠나야 한다. 이곳에는 더 이상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무치도록 사랑하는 군검우와의 약속이기도 했다. 모든 짐을 다 꾸리고 진설하가 마지막으로 아쉬운 듯 방 안을 둘러보고 있을 즈음, 스르르 방문이 열렸다. 진설하의 슬픈 눈이 방문을 향해 돌아갔다. "대…… 대사형……." 그녀의 방을 방문한 사람은 원소랑이었다. 그는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진설하에게 말했다. "궁을 떠나기로 했다고? 어머니께 모든 것을 들었다." "……." "허나 내게 아무 말도 없이 떠나는 건 너무 매정한 일이 아니냐? 우리는 혼례를 올릴 뻔한 사이였는데 말이다." "죄송해요." "군검우, 그 자를 찾아가는 게냐?" 진설하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진심을 믿을 원소랑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진설하가 군검우를 만나러 가기로 약속을 한 채 궁을 떠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터였다. "그와는 다 끝났어요." 원소랑이 냉소했다. "군검우와 다 끝났다고?" "……?" "하지만 나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원소랑의 눈에 사악한 빛이 발했다. 돌연 그는 진설하의 혈도를 찍었다. "사…… 사형!" 낯빛을 굳힌 진설하는 점혈(點穴)을 당해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원소랑의 얼굴이 악마의 그것처럼 사악해졌다. "내가 얻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얻지 못한다! 관성량이 난화를 제거하기 위한 미끼라면 너는 군검우를 제거하기 위한 미끼가 될 것이다!" "……!" "크크크…… 네년은 이미 처녀가 아닐터이지? 군검우 그 자가 가진 몸! 내가 못가질 것이 무어냐?" 원소랑은 나무 막대기와도 같이 뻣뻣해진 진설하의 몸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그의 코 끝으로 성숙한 여인의 체향이 비릿하게 풍겨왔다. "네년에게서 나는 냄새가 무척이나 향기롭구나." 원소랑은 치밀어오르는 욕정을 느끼며 진설하의 겉옷을 벗겼다. 비록 몸은 움직일 수 없으나 사고(思考)는 할 수 있는 진설하였다. 그녀는 진한 수치심과 함께 원소랑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한 꺼풀…… 또 한 꺼풀 그녀의 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드러난 그녀의 탄력있고 매끄러운 피부가 분노와 수치심으로 인해 경련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원소랑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나도 오늘처럼 이런 식을 원했던 건 아니다. 진설하! 나를 원망마라. 이것은 네가 자초한 일이란 말이다!"


그의 둔탁한 손이 진설하의 우윳빛 젖가슴을 움켜 쥐었다. 진설하는 고통을 느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아혈마저 점혈당한 그녀는 비명을 지를 수조차 없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소중한 곳을 원소랑을 위해 모조리 개방하는 것 뿐이다. 원소랑은 나신이 된 그녀를 거칠게 침상에 눕혔다. 진설하의 청초하고 맑은 두 눈은 깊은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원소랑의 손은 그녀의 가녀린 어깨선을 따라 목젖 아래로 동그랗고 탐스런 젖가슴에 매달렸다. 그의 손 움직임에 따라 진설하의 젖가슴은 출렁거렸다. 원소랑의 손은 그녀의 젖가슴을 지나 잘록한 허리로 부드럽게 이어지면서 그 밑, 탐스럽고 아름다운 엉덩이로 향했다. 원소랑은 진설하의 수치심을 극도로 자극하려는 듯 엉덩이와 엉덩이 사이로 손을 꼼지락거리며 그녀의 연한 살을 유린했다. "제법 매끄러운 몸이로군." 원소랑의 손은 이제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갔다. 진설하는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혈도를 제압당한 그녀는 혀를 깨물고 싶어도 깨물 수가 없었다. "이제 시작해볼까?" 원소랑은 진설하의 몸을 거칠게 뒤로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엉덩이를 약간 들어올리면서 그곳을 힘껏 빨았다. '으윽……!' 그녀의 온몸이 수축작용을 하며 허리가 요동치려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마음 뿐, 그녀는 움직이지 못했다. 머리 속이 온통 아득해지며 마음 한 구석에서 짜릿한 쾌감이 전해져 왔다. 그것은 정말이지 미칠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칠게 토해지는 숨결만은 그녀의 이성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육체는 가끔씩 지배자를 배신한다. 진설하는 그 배신감에 또 한 번 치를 떨어야 했다. 원소랑은 나무처럼 뻣뻣한 그녀의 육체를 전면으로 다시 돌렸다. 가랑이를 거칠게 벌렸다. 그녀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원소랑의 시야에 쏘아져 들어왔다. "후후……." 원소랑은 웃었다. 그의 양물이 그녀를 향해 밀려들었다. 그리곤 잠식되었다. 충분한 애무가 없이 진행된 정사는 진설하에게 지독한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온몸이 갈가리 찢겨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역시 비명성은 토해져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원소랑의 몸은 뜨거워졌다. 온몸으로 황홀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원소랑은 팔꿈치를 빳빳이 세운 자세로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헉…… 헉." 숨이 가빴다. 고통을 감내하는 진설하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고통을 참을 수 없음인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원소랑의 허리 운동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는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곳이 하늘인지 땅인지, 극락인지 지옥인지 알 수 없었다. "헉헉……!" 그렇게 원소랑은 무아지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의 가슴팍으로 흐른 땀이 진설하의 유두 끝으로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원소랑은 서서히 극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숨이 컥컥! 막혀왔다. 그럴 수록 원소랑은 미친 듯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진설하에게 부딪쳐 갔다. 그러한 그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살과 살이 부딪칠 때마다 매끄럽고 따스한 쾌감이 전신에 사무쳐왔다. "으으……." 원소랑은 그 상태를 참지 못했다. 그지없는 기쁨과 쾌락과 환희가 그의 전신을 지배하며 그를 폭발시켜 버리고 말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쾅-! 그리고 그는 폭발하였다. 전신의 힘이란 힘은 모조리 빠져나가 버렸다. 원소랑은 견디지 못하고 진설하의 몸 위에 엎어졌다. 원소랑에게 유린당한 진설하의 육체는 땀과 애액(愛液)에 뒤범벅이 되어 침상에 널브러졌다. "쿡쿡쿡." 그 상태로 원소랑이 웃었다. "좋았어." "……." 진설하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군검우, 그 자식이 너를 포기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나도 너를 놓아줄 수 없을 것 같군. 군검우, 그 놈도 난화 계집과 함께 운룡석굴(雲龍石窟)로 불러들여 죽여버리겠다!" 2 용미인을 비롯한 신비각의 고수 십여 명이 일제히 난화군주 앞에 오체투지하였다. 그들은 난화군주의 급명을 받고 이제 막 북경에 도착한 터였다. 이들은 모조리 흑의에 죽립, 그리고 면사를 써서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전신에서 뿜어지는 가공할 기도는 대전 안의 숨통을 막아버리려는 듯 거칠게 죄어들고 있었다. 난화군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설명이 끝날 때까지 누구 하나 기척을 하는 이 없었다. 이윽고 설명을 끝낸 난화군주가 들고 있던 서찰을 용미인에게 던졌다. "이 서찰이 화살에 묶인 채 어젯밤 관천부의 대문에 꽂혀 있었다." 용미인의 바닥에 떨어진 서찰을 조심스럽게 펴들었다. 순간 그녀의 표정이 흠칫거렸다. <관성량을 구하고 싶으면 한 달 후, 군주께서 직접 황금 십만 냥을 가지고 운룡석굴(雲龍石窟)로 오시오.>


철저한 의문 속에 감추어 두려는 듯 보낸 자의 서명은 없었다. 난화군주가 서찰을 내려다보고 있는 용미인을 향해 말했다. "나는 그곳에 가기로 결정했다." "구…… 군주님, 너무 위험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암계가 깔려 있을 것입니다. 저희들이 가서 해결하겠습니다." 난화군주가 용미인을 향해 피식 웃었다. "그들은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 "관대인의 생명이 걸린 일이다. 그곳이 칼산, 불바다라 할지라도 나는 간다." "……!" 결의를 다지는 난화군주의 표정은 차갑게 식었다. "나는 관대인을 구하는 즉시 놈들을 일망타진할 것이다! 반드시……." 대전을 나오며 용미인은 의문을 느꼈다. 너무도 대담무쌍한 놈들이 아닌가! 감히 황실의 최고 실세(實勢)인 난화군주를 상대로 그 따위 수작을 부린다니 말이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그런 일을 저지를 자는 누구인가? 더욱이 관성량을 호위하고 있던 신비각의 고수들을 죽일만한 실력자 중에서 말이다. '그 정도 고수라면 천하에서 손꼽을 수 있을텐데…….' 문득 염두를 굴리던 용미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서…… 설마…….' 그녀는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다른 신비각의 고수에게 물었다. "놈들에게 당한 본각의 고수들 시신은 어디에 있소?" "동창의 지하밀원(地下密院)에 보관 중이라 들었소이다." "보관 상태는?" "방부제를 사용해서 아직 부패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시체를 살펴보았소? 시체의 상흔을 보면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오." 신비각 고수를 죽이는 데 강호에 흔히 알려진 무공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흉수는 분명 자신의 독문절기를 사용하여 신비각의 고수를 해치웠을 것이다. 그것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용미인이라 해도 자신의 독문절기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자신있게 상대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대답은 시원찮았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미 조사를 끝마쳤다고 하오. 그렇지만 그들의 몸에 찍힌 무공의 종류를 알아낼 수 없었던 모양이오." 용미인은 일단 자신이 동창의 지하밀원으로 가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판단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끼이익! 육중한 관 뚜껑이 들리며 두 구의 시체가 드러났다. 용미인은 무거운 표정으로 시체 가까이 얼굴을 갖다대며 살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도무지 무슨 무공으로 흉수가 이들을 해하였는지를 알아낼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을 용미인은 알고 있었다. 그라면 문제없이 시체에 남긴 상흔이 누구의 짓인지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시체를 마차로 옮겨라. 대흥산(大興山)으로 이동하겠다." 그녀는 대동해온 자신의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3 험준한 대흥산으로 오르는 길, 양 옆으로 빽빽히 들어찬 수림은 화려한 비단폭을 풀어놓은 듯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늦가을의 진수를 마음껏 구가하고 있었다. 때마침 지는 석양과 어우러져 천지는 붉은 색의 바다였다. 두두두두! 소롯길의 정적을 깨며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사두마차였다. 그 안에는 용미인이 타고 있었고, 용미인의 뒤로는 두 구의 시체가 담긴 관이 놓여져 있었다. 그렇게 달려간 마차는 잡초가 우거진 소롯길을 지나 산중턱에 세워진 장원(莊園)으로 향했다. 장원은 멀리서 보기에는 괴이하고도 사이로운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두마차가 달려가자 장원의 문이 활짝 열렸다. 용미인은 거침없이 장원으로 진입해 들어 가장 뒤편의 별채로 갔다. 별채 앞에 당도한 그녀는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허리를 숙였다. "사부님…… 완경이옵니다." 음성조차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들어오너라." 안에서 들려온 음성은 웅후한 가운데 패도적인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용미인은 조심스럽게 옷매무새를 갖추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인물은 헌원패성이었다. "사부님,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용미인은 헌원패성에게 절을 했다. 그런데 용미인을 바라보는 헌원패성의 눈빛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용미인의 얼굴에 당혹의 그림자가 스쳤다. "사부님, 제가 무슨 잘못한 것이라도……?" "내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일 년 반이 되었다." 헌원패성의 느닷없는 말은 용미인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나는 네가 검우의 약혼자라는 이유만으로 제자로 삼고 나의 모든 무공을 전수해 주었다. 너는 나의 무공을 배우며 너의 손으로 혈궁을 무너뜨려 복수를 하고싶다고 말했다. 기억하느냐?" "무……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허나 일 년 반이 지난 지금 네가 한 일이 무엇이냐? 혈궁에 대한 복수는 커녕 너는 네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 노력해 왔다. 네가 관부에 적을 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잊었느냐? 과거 월산장을 멸망시킨 것이 관부임을!" "알고 있습니다." "내게 무공을 배워 검우의 가문을 멸망시킨 놈들의 수족이 되다니! 네가 계속해서 그런 행동을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내가 너를 가르쳤으니 내 손으로 모든 것을 거두리라!" 헌원패성의 싸늘한 어조에 용미인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밑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무릎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사부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언제라도 소녀의 생명을 거두소서. 조금도 원망치 않겠습니다." "……!" 그녀가 눈물을 흘리자 헌원패성의 마음이 흔들렸다. 헌원패성이 알고 있는 바로는 그의 사랑스러운 애제자, 군검우는 죽었다. 그리고 그녀는 군검우가 평생을 함께 하기로 한 약혼자였다. 그녀를 핍박하는 일은 곧 군검우를 핍박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용미인의 행동 하나하나는 헌원패성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용미인은 눈물을 찍으며 자신의 입장을 읍소(泣訴)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혈궁의 무리들은 예상 외로 세력이 크옵니다. 그들을 저 혼자의 힘으로 물리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더욱이 그들을 물리친들 그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또다른 원수인 관부가 있습니다." "……!" "결국 저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이옵니다." "차도살인지계?" "저는 혈궁주 민자란과 난화군주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신분을 속이고 은밀히 신비각에 가입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부님이 가르쳐주신 무공으로 신비각의 한 축을 이루는 데 성공했습니다." "……!" "다행히 저의 이러한 계교는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두어 난화군주와 혈궁은 조금씩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난화군주의 힘으로 혈궁을 없앨 것입니다. 그 후 관부 내, 월산장의 흉수를 찾아 처단할 것입니다. 설사 그 자가 난화군주라 할지라도!" 그녀의 설명을 듣고난 헌원패성은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는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내 생각이 짧아 너의 깊은 뜻을 몰랐구나." "아닙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 사부님께 저의 이러한 생각을 먼저 말씀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용미인의 교묘한 언변에 헌원패성은 속아 넘어가는 듯싶었다. 군검우라는 끈 하나로 사제의 연을 맺은 이들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사부님은 내공을 많이 회복하셨는지요?" 용미인이 문득 시선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헌원패성의 눈빛이 음침하게 빛났다. "흐흐흐…… 각고의 노력 끝에 보름 후면 완전히 회복된다!" '그렇게 빨리……. 용미인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 년 전, 그는 혈궁에 갇혀 있었던 지난 세월의 후유증 속에서도 나의 임독양맥과 생사현관을 타통시켜줌으로써 전신의 내공을 모두 소진시켰다! 그런데……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다시 내공을 회복시키다니! 만약 내공을 회복한 후 밖에 나가서 군검우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또 군검우와 만나서 나와의 관계를 알게되면…… 그는 나를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생각만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만약 헌원패성이 예전의 신위를 되찾는다면 당금 천하에서 누가 그의 적수가 되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왔느냐?" 헌원패성이 물었다. 용미인은 그제서야 상념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신비각의 고수 두 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부님께서 시체의 상처를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이 어떤 무공에 당한 것인지……." "시체는 어디 있느냐?" "장원 마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가보자." 두 사람은 방을 나와 관이 놓여져 있는 마당으로 갔다. 용미인은 부하들을 시켜 조심스럽게 관뚜껑을 열게 했다.


헌원패성이 시체를 살폈다. 그런데 시체를 살피던 헌원패성의 얼굴에 은은한 놀람의 기운이 번졌다. "이 자들이 아직도 살아있었구나……." "……?" 용미인이 조심스럽게 헌원패성의 얼굴을 살폈다. "이들은 칠십 년 전 사라진 당시 사파최고의 고수들인 마문삼천왕중 한 명인 수라천왕의 투골음풍수(透骨陰風手)에 당했다!" "마문삼천왕!" 용미인의 표정이 싸늘히 굳었다. 마문삼천왕은 혈궁의 태상장로(太上長老)란 자리를 권유받고 혈궁에 가입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들이 혈궁에 가입을 하고, 관성량을 납치한 자들의 흔적이 그들중 일 인인 수라천왕의 것이라면 관성량을 납치한 조직은 바로 혈궁이 되는 것이다. 용미인의 얼굴에 싸늘한 조소가 맺혔다. '급했군…… 민자란. 배수(背水)의 진(陣)을 사용하다니…….' "흐흐흐! 마문삼천왕! 강산이 일곱 번이나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과거의 야망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로군." 헌원패성이 스산한 괴소를 흘렸다. 용미인의 눈빛이 그런 헌원패성을 훔쳤다. '늙은이!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보름 뒤면 내공이 모두 회복된다고……? 어차피 너는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 이제는 차가운 지하명부에 몸을 눕힐 때가 되었다.' 4 "이번 일은 혈궁이 개입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관성량을 호위하던 신비각의 고수들이 마문삼천왕 중 수라천왕에 의해 죽었다는 것은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그 증거 앞에서 난화군주도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민자란…… 그 년이 흑심을……." 난화군주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자면 혈궁이 받았던 모든 특혜는 난화군주에게서부터 비롯된다. 난화군주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혈궁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혈궁주가 어떻게 자신을 배반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말이 되질 않는다! 난화군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때문에 그녀는 더욱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관대인의 납치에 개입되어있는 자라면 그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참살하리라!" 부복한 용미인은 조심스럽게 난화군주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또 뭐냐?" "백사단주 군검우에 관한 소식입니다!" "군검우? 놈의 흔적을 잡았느냐?" "아직 놈의 흔적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용미인은 말 끝을 흐렸다. "그런데?" "놈의 사부인 헌원패성이라는 자의 위치를 확인하였습니다." "헌원패성! 혈궁에 갇혀 있던 자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속히 사람을 보내 그 자를 주살해야 할 줄 아옵니다. 만약 그 자가 다시 군검우와 만나 힘을 합한다면…… 실로 감당치 못할 것이옵니다." 헌원패성에게 말한 용미인의 차도살인지계는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 지고 있었다. 5 휘이이이잉……. 휘영청 밝은 만월 아래 스산한 밤바람이 불며 그 아래로 낙엽이 굴렀다. 장원은 어딘지 모르게 귀기스러운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사사삿. 스산한 어둠 속에서 일단의 인영들이 움직이며 장원 안으로 접근해 들었다. 헌원패성은 별채에서 한창 운기조식 중이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 허연 기류가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형(無形)의 내공지기가 유형(有形)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그의 머리 위에서 뿜어져 나온 기류는 어느새 헌원패성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헌원패성의 전신 근육은 마치 추위에 떨고 있는 것처럼 무섭게 요동쳐 왔다. 단정하게 머리를 뒤로 넘긴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비가 오듯 맺혀 흘렀다. 전신을 감싼 기류는 소용돌이를 치며 헌원패성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그런데 이 순간 헌원패성의 귀에 들리는 나직한 인기척이 있었다. 흙을 밟는 소리였다. '모두 네 명…….' 다가오는 품새로 보아 하나같이 강호의 초일류 고수였다. 헌원패성의 전신 세포가 긴장으로 일어섰다. 스스스슷……. 이때, 소리없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네 명의 죽립면사인이 있었다. 용미인을 대신해 난화군주가 보낸 신비각의 일류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운기조식 중인 헌원패성을 보며 아연실색했다. '어…… 엄청난 순양진기(純陽眞氣)로다…….' '체내의 오기(五氣)가 하나로 뭉쳐지고 있어!' '이것은 무공의 마지막 단계로 불리우는 바로…… 오기조원(五氣朝元)의 경지!' '운기조식이 끝나기 전에 놈을 죽여야 한다!' 비록 소리내어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헌원패성을 공격해 들었다. 쿠아아아앙-! 천하의 모든 것을 장력 속에 가둬버리려는 듯 그들 사 인의 손 끝에서 일진광풍의 매찬 바람이 몰아쳤다. 순간 헌원패성의 신형이 앉은 채로 허공으로 도약했다. 콰앙! 방 안의 천장이 부서지며 헌원패성의 신형이 밖으로 사라졌다. "허억!" 깜짝 놀란 사 인의 죽립면사인은 헌원패성을 쫓았다. 밖으로 나간 헌원패성은 도망가지 않았다. 죽립면사인이 헌원패성을 포위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헌원패성의 눈이 무거웠다. "웬놈들이냐?"


헌원패성이 방비를 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이들의 무공은 상상 외로 강했다. 아니, 강하다는 것으로 이들의 무공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었다. 이들 죽립면사인은 첫 번째 공격에서 각기 소림의 반야수(般若手), 무당의 선천육양신공, 아미파(峨嵋派)의 천룡적인장(天龍赤印掌), 이제는 실전되어 사라진 마교(魔敎)의 흑마신장(黑魔神掌)까지 사용했다. 이러한 류의 공격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암습을 한 사 인 모두가 각기 다른 문파의 무공을 사용했다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혈궁 놈들이냐?" 헌원패성의 일갈에 죽립면사인들은 말이 없었다. 대신 지독한 살기를 뿜어내며 다시금 헌원패성을 공격해들 뿐이었다. 쿠아아아앙- 콰앙! 이번엔 사 인 모두가 일제히 구음신공을 전개했다. 헌원패성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구음신공이라면 혈궁주와 그의 제자들만이 알고 있는 무공이 아닌가! 그런데 이들은 구음신공까지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놀라고 있을 틈만은 없었다. 이들을 해치우고 난 다음 그것을 알아보면 되는 일이다. 헌원패성은 자신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쌍장이 가슴 부위에서 모아졌다. 쐐애애액-! 웅후하고도 사이한 헌원패성의 장력이 죽립면사인들을 향해 날았다. 콰앙-! 천지를 가를 듯한 폭발음과 함께 죽립면사인 중 한 명이 뒤로 주르륵! 밀려나며 비틀거렸다. 순간 그의 품 속에서 하나의 영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신비각(神秘閣).> 영패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헌원패성은 충격을 받았다. "황실의 신비각! 누가 너희들을 보냈느냐?" 허나 그들은 말을 잃은 사람들인 것처럼 헌원패성을 향해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등 뒤에 메고 있던 검을 뽑았다. 번쩍! 검신은 어둠 속에서도 눈부신 빛을 발했다. "네놈들을…… 목완경이 보냈느냐?"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쐐애애애액! 대신 이들은 검신합일(劍神合一)의 자세를 이루며 태산이라도 관통하려는 듯 짓쳐들 뿐이었다. 헌원패성은 크게 분노했다. 신비각이라면 목완경이 적을 둔 곳이다. 헌원패성은 신비각과 아무런 연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때문에 신비각에서 자신을 공격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헌원패성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천하에서 목완경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분노에 일그러진 얼굴을 한 헌원패성은 구양신공을 전개했다. 쿠아아아아아앙! 헌원패성의 가공할 공세와 흑의면사인들의 싸늘한 검기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아앙-! "으윽!" 헌원패성은 그들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입꼬리로 핏물을 흘렸다. 흑의면사인들이 사악하게 웃었다. "네가 아무리 사파 최고의 고수이라 할지라도 우리 사 인의 합공에는 당해내지 못한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흐흐흐…… 십수 년 전부터 우리는 황실무고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공을 연마하였다. 천하의 어떤 고수도 우리를 꺾지 못한다!" 헌원패성은 연속되는 그들의 공격에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백 년을 넘게 살아오며 이토록 황당한 싸움을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천하에 구양신공으로도 꺾지 못할 자가 있다는 생각을 헌원패성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 들었다. 하지만 헌원패성에게 이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 파천황신공을 사용하는 길 뿐이다! 허나 파천황신공은 몸이 완전하지 못한 관계로 완벽히 시전할 수 없다. 자칫 잘못 사용하면 내 몸이 산화될 가능성도 있다…….' 츠츠츠츠츠! 이 순간 흑의면사인들은 또다시 검신합일의 자세를 이루며 사방에서 헌원패성을 향해 짓쳐들었다. 그런데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그들의 검 끝은 일제히 헌원패성의 거궐혈(巨闕穴)을 노리고 짓쳐드는 것이 아닌가! 거궐혈은 과거 그가 목완경에게 알려주었던 자신의 약점이었다. 콰앙! "커어억!" 헌원패성은 피를 토하며 부르르 몸을 경련시켰다. "그 계집이 노부의 급소까지 알려줬단 말이냐?" 헌원패성은 정말로 분노했다. 그것은 자객으로 스며든 신비각의 고수들이 아니라 목완경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이 구양신공까지 막아내며 자신의 거궐혈을 향해 짓쳐들자 헌원패성은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아니, 사는 길은 없고 죽는 길 뿐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죽는 것보다는 양패구상이다. 그는 쥐어짜듯 자신의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헌원패성의 몸이 엄청나게 팽창되며 그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일었다. "파- 천- 황- 신- 공-!" 츄우우우우우웅-! 흑의면사인들은 헌원패성의 가공할 신위에 경악하며 자신들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헌원패성의 전신에서 천지를 모두 잠재워버릴 듯한 엄청난 열폭풍이 휘몰아쳤다. "죽어랏!" 콰아앙-! 그것은 모든 것을 초토화시킬 듯한 엄청난 흙먼지 바람이었다. 그 속에 지옥의 유황불과도 같은 뜨거움이 일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곳이 없었다. 천지가 모두 헌원패성의 파천황신공에 휘감겨 들었다. 흑의면사인들은 피하기를 포기하고 전신의 내력을 모조리 끌어올리며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공격을 멈추고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크으윽!"


"아아악!" 그러나 그 엄청난 열폭풍(熱暴風) 속에서 그들의 신형은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다. 오직 한 명만이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은 채 피투성이가 되어 남아 있었다. 그 앞에 우뚝 서 있는 헌원패성의 몸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런 그의 두 눈은 혼백이 나간 듯 텅비어 있었다. 주르륵……. 헌원패성의 입가로 핏물이 흘렀다. "목완경에게 전해라." 그는 그 상태로 피투성이가 되어 무릎을 꿇고 있는 흑의면사인을 향해 말했다. "만약 내가 부활한다면…… 지옥(地獄)의 사황(死皇)이라고 불리던…… 이 헌원패성의 무서움을 반드시 맛보게해 주겠다고……." 말을 하는 그의 눈은 여전히 텅비어 있었다.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비틀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피투성이의 흑의면사인만이 움직이지도 못한 채 초토화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6 객점에 방 하나를 빌려 그곳에 모인 군검우 일행은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 북경성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져 있었다. 알아본 바로는 동창 외에도 난화군주의 명령으로 인해 북경수비대 일천 명이 차출되어 곳곳을 방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요소요소를 지키고 있을 뿐, 자리를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관성량이 있는 곳을 파악한 듯합니다." 사문군이 군검우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관성량을 납치한 조직이 혈궁이라는 걸 난화군주가 파악하지 못할 리는 없지 않겠소. 그렇다면 그가 어디 있는 걸 파악하는 것도 난화군주의 입장에서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오." 능원평이 찻물로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군검우는 굳게 입을 다문 채 그들의 말을 경청할 뿐이었다. 당문연은 무엇 때문인지 그들이 삥 둘러 앉아 있는 탁자가 아닌 침상에 홀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매우 음울해 보였다. 지금 그녀는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였다. 군검우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가슴아픈 일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사람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니. 독기운을 이기지 못한 그녀의 시력은 극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관성량이 어디에 있든 그런 건 관계없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내 손으로 제거해야 하오. 원소랑의 손에 맡길 순 없는 일이오." 그들의 말을 모두 들은 군검우는 주먹을 불끈 쥐며 결의를 다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피융! 객점의 창문을 뚫고 짓쳐드는 시커먼 물체가 있었다. 군검우는 한 손을 들어 암기를 잡았다. 동시에 능원평은 자리를 박차고 창문을 뚫고 튀어 나갔다. 그러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암기는 표창이었다. 그런데 그 표창에는 서찰이 묶여 있었다.


군검우는 서찰을 끌렀다. 그런데 그때, 사문군이 다급히 군검우를 말렸다. "주군! 서찰에 독이 묻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군검우가 당황하는 사문군을 향해 웃었다. "천하의 어떤 독으로도 나를 어쩔 수 없다는 걸 잊었소?" 웃고 있던 군검우의 얼굴이 서찰을 보는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진설하를 찾으려면 운룡석굴로 오라!> 서찰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내용이란 말인가? 진설하를 찾으려면 운룡석굴로 오라니? 진설하가 납치라도 되었단 말인가?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그리고 누가 이런 서찰을 내게 보낸단 말이오." 군검우에게 서찰을 건네받아 본 능원평도 황당한 얼굴이었다. 사문군은 염두를 굴리는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염두를 굴린 사문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마도 이 서찰은…… 혈궁에서 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혈궁? 혈궁에서 왜 이런 서찰을 보낸단 말이오." "그 이유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간단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 "진소저는 혈궁을 떠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실천에 옮겼을 것입니다. 혈궁주는 그녀가 주군과 모종의 약속을 하고 혈궁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 "그렇다면 그녀는 아직도 주군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그런 상태의 진소저는 주군을 잡을 수 있는 좋은 미끼감이 될 것입니다." "으음." 사문군의 추리는 거의 사실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서찰에 쓰여진 운룡석굴에는 분명…… 관성량도 있을 것입니다." "!" "혈궁에서는 난화군주와 주군을 동시에 초대합니다. 관성량이 주군의 원수라는 것을 혈궁에서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난화군주는 무조건 관성량을 구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난화군주와 충돌이 있겠군." "바로 그렇습니다. 혈궁에서 암중으로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일 겁니다. 혈궁에서는 주군과 난화군주가 양패구상을 해도 좋고, 둘 중 하나가 사라져도 괜찮은 일이니까요." "재미있는 일이로군." 군검우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운룡석굴로 가는 일만 남았군." 제 28 장 죽기 전에 그 분을 뵈어야 하네 1 황량한 벌판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보이는 것은 온통 돌과 바위, 그리고 사막지대였다. 그리고 양 옆으로는 하늘을 뚫어버릴 듯한 기암절벽(奇巖絶壁)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런데 그 석벽에는 어느 이름 높은 장인(匠人)의 솜씨인지 거대한 석불(石佛)들이 조각되어 있고, 수천 개의 동굴들이 절벽 마다마다에 뚫려 있다. 바로 이곳이 수천 개의 동굴로 이루어진 운룡석굴이었다. 관성량은 사지를 결박당한 채 석벽에 묶여 있었다. 그의 얼굴은 초췌했다. 하지만 두 눈만은 의기를 잃어버리지 않고 불타오르듯 이글거렸다. 관성량의 앞에는 혈궁주가 태연한 표정으로 작은 암석을 의자삼아 앉아 있었다. 혈궁주는 남자처럼 껄껄 웃으며 관성량에게 말을 붙였다. "이제 육 일 후면 난화가 네놈을 구하기 위해 올 것이다. 그날, 이 곳에서 난화와 그 일당들은 전멸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혈궁주의 말에 관성량은 냉소했다. "그녀는 오지 않을 것이다!" "크크크…… 과연 그럴까?" 혈궁주는 암석에서 일어나 관성량을 향해 다가갔다. "그건 대인께서 잘못 생각하시는 것이옵니다. 난화군주는 대인을 지극히 사랑하고 계시옵니다. 설사 난화군주께서는 목숨을 잃는다 할지라도 대인을 구하려들 것이옵니다." 혈궁주는 손가락을 들어 관성량의 초췌한 얼굴을 쿡쿡 찌르며 조롱하듯 말했다. "가증스러운 것! ㅌ!" 관성량은 혈궁주를 향해 침을 뱉았다. 하지만 그 침을 맞을 혈궁주가 아니었다. 혈궁주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관성량의 침을 피하며 안색이 대변했다. "감히!" 짜악-! 혈궁주는 그대로 관성량의 따귀를 날렸다. 관성량의 입에서 피가 토해지며 고개가 옆으로 돌았다. 혈궁주의 표정이 잔인하게 변했다. "네놈은 내 발가락에도 미치지 못해! 그런 놈이 감히 어디다 침을 뱉아!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줄까? 왜 네놈이 내 발가락에도 미치지 못하는지를!" "……!" "남들은 모두들 네놈을 부러워하지. 그도 그럴 것이, 네놈은 다른 놈들이 꿈도 꾸지 못할 최고의 위치에 올라 있으니. 하지만 네놈의 삶은 결국 난화의 꼭두각시에 불과해! 크크크…… 네놈이 꿈에도 생각치 못한 한 가지 비밀을 가르쳐 주지. 네놈이 그토록 사랑하는 군예령에 관한 것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군예령이란 이름이 나오자 관성량의 눈빛이 번쩍였다. "크하하핫!" 혈궁주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인데…… 네놈만 그걸 모르고 있어. 네놈은 아직도 이 땅, 어디선가 살아 있기만 하다면 군예령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녀는 십여 년 전 죽었다!" "뭣이!" 관성량의 얼굴이 대변했다. "기억하는가? 십여 년 전, 월산장이라는 조그마한 장원이 하나 멸망했다는 것을? 하긴 그런 사소한 일까지 존귀하신 대인께서 기억하실 리가 없겠지. 그러나 네놈이 지극히 사랑한 군예령이 바로 그 월산장의 주인이었음은 꿈에도 몰랐을 거야. 크크크크……." "!" "난화는 군예령에 대한 극렬한 질투심으로 인해 그녀의 뒤를 추적, 그녀가 월산장의 주인으로 있음을


알아냈지. 질투의 화신으로 변모한 난화가 월산장을 그대로 두었을까? 당연히 멸망시켰겠지. 그리고 당시 그 책임자가 바로 이 몸이었다네." "거짓말! 거짓말 마라!" "크크크…… 거짓말? 하긴 믿거나 말거날세.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이 있지." "!" "네놈과 헤어지기 전 군예령은 임신 중이었다네. 그녀는 월산장에서 숨어살며 아이를 낳았지. 아들이더군. 하지만 그놈도 네놈처럼 운이 좋아 월산장의 멸문 때 극적으로 생존했어." "예…… 예령이 아이를 낳았다고……." 관성량은 이 놀라운 비사에 거의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놈은 지금 네놈에게 복수의 칼을 갈고 있어. 정말 비극적인 일이지. 그놈은 자신의 부친이 누군지도 모르고, 아니 오히려 네놈이 월산장을 멸망시킨 흉수인 줄 알고 네놈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으니……. 이것이 남의 일이라면 네놈이 생각해도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겠나?" "!" "난화는 이 모든 것도 다 알고 있지. 그래서 그동안 네놈의 아들을 죽이기 위해 물심양면(物心兩面), 최선을 다하더군. 하지만 아직도 죽지 않았지. 더럽게 운이 좋은 놈이야." "사…… 사실이냐? 네가 말한 이 모든 것이 사실이냔 말이다?" "본좌가 시간이 한가해서 네놈과 농담을 하고 있는 줄 아느냐? 조금 있으면 아들을 만날 수 있을게야. 왜냐하면 그놈은 이곳으로 오고 있거든. 아마 네놈도 들은 적이 있을게야. 백사단주 군검우라고……. 그 놈이 네놈의 아들이지." "백사단주…… 군…… 검…… 우……." "크하하하하핫! 이 운룡석굴의 대미는 난화와 네놈의 아들이 서로 상잔(相殘)하고 결국 네놈의 심장에 아들의 칼이 꽂힘으로써 막을 내리는 것이다!" 2 일천 명의 북경수비대와 삼백 명의 동창 무사들, 그리고 오십 명의 신비각 고수들이 도열했다. 그들의 앞에는 황금으로 만든 마차가 있었고, 그 안에는 난화군주가 타고 있었다. 이들은 관성량을 구하기 위해 운룡석굴로 출발하려는 것이다. 마치 한바탕 전쟁이라도 치르러 가는 것처럼 그들의 출정(出征)은 기세등등했다. 오십 명의 신비각 고수들 사이에는 용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모두 오개 조로 나눈 신비각의 제삼조 조장(組長)이었다. 한데 출정을 하기 바로 전, 누군가 용미인에게 달려와 한 통의 서찰을 전했다. 서찰을 보는 순간 용미인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헌원패성이 파천황신공을 전개하고 도망을 쳤다고!" 그녀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그가 알고 있는 헌원패성의 내공은 완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파천황신공을 전개한단 말인가? '게다가 거궐혈을 적중당하고도 생존했다니!' 이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사색이 되어 있던 용미인의 얼굴이 어느 순간 풀어져 버렸다. '그렇다. 내가 그 늙은이에게 속았구나!' 헌원패성은 귀계가 난무하는 사파에서 수십 년 간 최고의 제왕으로 군림(君臨)했던 자였다. 인간을 불신하는 마음이 늘 그의 한구석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 헌원패성이 아무런 정황증거도 없이 용미인의 말을 들으며 그녀를 완전히 신임할 리 없었다. '놈이 자신의 약점이라고 가르쳐 준 거궐혈도 어쩌면 미끼였는지 모른다. 아…… 최대의 후환을 남겼구나! 차라리 내가 직접 나섰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해 보았으나 그것은 한 발 늦은 격이었다. 그녀는 헌원패성으로 인해 마음이 초조해졌으나 지금의 대열을 따라 운룡석굴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3 혈궁주는 원소랑과 여불해, 그리고 수라천왕, 백안천왕과 마주 앉아 있었다. 준비는 완벽했다. 이곳 운룡석굴에는 혈궁에서 차출된 오백 명의 전사(戰士)가 물샐틈 없이 포위 중이었다. 이제 난화군주와의 약속은 사흘 후로 다가왔다. "지금 난화, 그 계집은 어디쯤에 있느냐?" 혈궁주는 원소랑에게 물었다. "백여 리 근처에 여장을 풀었다는 소식입니다. 오늘 하룻밤 그곳에서 묵고 내일쯤이면 이곳으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군검우에 대한 소식은?" 순간 원소랑의 표정이 흠칫거렸다. "아직…… 없습니다." "없어?" "……." "놈이 움직이지 않고 있단 말이냐?" "북경에서 움직였다는 보고는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북경의 경계망이 워낙 철통같아 그 안에서 놈의 종적을 잃어버렸나 봅니다." "무조건 놈을 찾아야 한다! 그놈이 오지 않는다면 계획에 막대한 차질이 생긴다." "알고 있습니다. 놈의 종적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방이 막힌 이곳 운룡석굴에서는 북경수비대나 동창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문제는 신비각의 놈들과 군검우입니다." 여불해가 걱정스럽다는 듯 한 마디 거들었다. 혈궁주가 수라천왕과 백안천왕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두분 태상장로께서 많이 힘을 써주셔야 하겠습니다." "크크크…… 궁주께서는 심려를 놓으시오. 어차피 궁주를 돕겠다고 한 팔을 걷은 이상 있는 힘을 다할 것이오." "난화군주는 황실에서 황제 다음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계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난화를 죽인다는 것은 대단히 큰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난화를 죽이고 진룡왕(眞龍王)에게 몸을 의탁할 생각입니다. 진룡왕은 난화의 동생이지만 난화로 인하여 뒷전으로 밀려 앉은 상태입니다. 그와 힘을 합친다면 혈궁은 더욱 반석을 다지는 격이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두 분께서 도와주신다면 이 은혜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진룡왕과는 이미 사전교감이 있었는가가 궁금하오." "물론 있었습니다. 우리가 운룡석굴을 마지막 장소로 잡은 것도 이곳이 진룡왕부와 그다지 멀지 않기 때문이지요." 진룡왕이 뒤에서 돕고 있다는 말은 모두가 가지고 있던 막연한 불안감을 일시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원소랑도 진룡왕에 대한 소식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 부분은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혈궁주는 이미 이 일을 마치고 난 후의 상황까지 정리를 해놓은 것이다. 그는 어머니 혈궁주가 가진 심계에 다시 한 번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자는 모두 열 개였다. 상자에는 각기 일만 냥의 황금이 담겨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평생가도 꿈도 꾸지 못할 엄청난 양의 황금이었다.


황금마차를 타고 있는 난화군주는 매우 초조한지 마차의 휘장을 젖히고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서는 초조함이 감춰지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을 보며 용미인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난화군주는 대륙십팔만리(大陸十八萬里)를 지배하는 권력의 핵심에 서 있다. 그런 자들은 대개가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매우 냉혹하고 비정하다는 것이다. 난화군주라고 해서 거기에서 예외는 아니다. 만약 그녀가 여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황제의 자리도 노려보았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한 남자 때문에 초조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관성량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짐작해보아도 용미인으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녀가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이 합쳐진다 할지라도 관성량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에 비한다면 반딧불과 태양빛의 차이라 할 수 있었다. 여인으로 태어나 한 가지 뜻을 세웠다면 난화군주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용미인은 생각했다. 지난 일 년 간 그런 난화군주에게 배운 점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의 애정관만큼은 용미인이 풀 수 없는 의문이었다. "이제 곧 운룡석굴에 당도할 것입니다." 초조해 하는 난화군주를 보며 용미인은 그녀의 근심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말했다. 그러나 난화군주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마치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녀의 가슴은 모두 타버려 재만 남아 있는 듯했다. 난화군주 일행의 앞으로 황량한 모래 들판이 나타났다. 모래 들판의 양 옆으로는 기암절벽들이 솟구쳐 올라있다. "바로 이곳이 운룡석굴입니다." 용미인은 허리를 숙이며 난화군주에게 말했다. 난화군주가 마차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츠츠츠츠츠츠! 마차가 당도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수십 명의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들의 정중앙, 초췌한 모습의 관성량이었다. 두 명의 복면인이 그를 포박한 채 양쪽에서 끈을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난화군주는 하마터면 마차에서 떨어질 뻔하였다. '저토록이나…… 초췌한 모습이시다니…….' 다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관성량의 초췌한 모습만이 고통의 화살이 되어 난화군주의 가슴에 와 꽂혔다. "대인…… 모…… 몸은 어떠십니까?" 관성량을 향해 묻고 있는 난화군주의 음성은 지그시 떨리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왔소." 관성량의 음성에서 짙은 가래가 끓고 있었다. 난화군주는 그 음성이 섬뜩하게 와 닿았다.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관성량을 향해 한 발 다가갔다. "가까이 오지 마시오!" 순간 관성량의 양 옆 복면인들이 관성량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난화군주는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관성량의 목에 대인 칼을 보는 순간 난화군주는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천섬지(天閃指)를 시전한다면 저 두 놈을 죽이고 육지비행술(陸地飛行術)을 전개해 대인을 구해낼 수 있다. 하지만 대인의 생명을 담보로 모험을 할 수는 없는 일…….' 원래 그녀는 혈궁주를 능가하는 무림의 고수였다. 허나 그동안 별로 무공을 쓸 일이 없기에 쓰지 않았을 뿐이다. 또한 그것을 자랑할 일도 없고 다른 이들도 궁금해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무공을 할 줄 안다는 걸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대인…… 조금만 참으십시오. 곧 풀려날 것입니다." 난화군주는 그렇게 말을 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먼저 황금을 보내시오." 복면인의 말에 난화군주는 수하들을 시켜 황금상자를 전달했다. 복면인들이 상자를 확인했다. 한 발 뒷줄에 서 있는 용미인은 예리하게 그들을 살폈다. '이상하다……. 저들 중 혈궁주나 여불해는 없다. 이런 중요한 일에 자신들은 빠지고 다른 자들을 보냈단 말인가?' 비록 그들이 복면을 하고 있었지만 용미인은 혈궁주나 여불해의 눈빛은 물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 버릇 등을 모조리 알고 있었기에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혈궁주와 여불해만은 분간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분명히 그들이 없었다. 그것이 용미인에게 의문으로 다가왔다. "황금 십만 냥이 틀림없습니다." 황금 상자를 확인한 복면인이 관성량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복면인에게 보고했다. "우리의 거래가 끝났으니…… 관대인을 보내라." 난화군주가 소리쳤다. "끝나? 후후……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황금을 주지 않았느냐?" "난화군주! 누구를 바보로 아는가? 이 자를 보내면 너희들이 우리를 공격해들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사실. 황금을 가지고 퇴각한 뒤 관성량을 돌려보내겠다!" "뭣이!" 분노한 난화군주가 성큼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복면인이 관성량의 목에 더욱 깊이 칼을 찔렀다. 난화군주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복면인들은 관성량의 목에 칼을 대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신비각의 고수들이 움직일 준비를 갖추었다. 그들은 난화군주의 한 마디 명령만 떨어진다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들의 주위에서 이변이 발생한 것은. 휘류류류류류! 한줄기 일진광풍이 부는가 싶더니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섬전처럼 허공 중에서 쏘아져 내렸다. 군검우였다. "웬놈이냐?" 관성량을 붙잡은 두 명의 복면인이 군검우를 향해 공격의 준비를 갖추었다. 쐐애애애액! 그러나 군검우의 초형일섬검이 그들의 공격보다는 훨씬 빨랐다. "크으윽!" "커억!"


그 두 명이 쓰러지는 틈을 이용하여 군검우는 관성량의 머리채를 잡고 그를 낚아챘다. "놈을 잡아라!" 복면인들이 군검우를 향해 달려 들었다. 군검우는 펄쩍!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군검우가 사라진 곳으로 능원평을 비롯한 삼 인이 대신했다. "크하하하핫!" 군검우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드디어 원수놈을 잡게 되었다!" 복면인들이 군검우를 향해 달려들었으나 그들은 능원평과 당문연, 그리고 사문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한편, 군검우의 등장으로 가장 놀란 이는 용미인이었다. 그녀는 군검우를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돌연한 상황에 당황하기는 난화군주도 마찬가지였다. "누…… 누구냐? 저 자가 누구냐?" 아직까지 군검우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난화군주였다. "저 놈이 바로 군검우입니다!" 용미인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군검우!" 난화군주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난화군주는 군검우에 대한 살의(殺意)를 씹고 있을 틈이 없었다. 상황은 급박했다. 군검우의 검이 관성량의 목을 잘라버리려는 듯 허공으로 향하며 번쩍! 빛을 발했다. "안돼!" 난화군주는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신형을 날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군검우를 향했다. 천섬지를 발출한 것이다. 칙- 치칙! 그녀의 천섬지에 의해 허공으로 들려진 군검우의 검이 반토막이 나며 부러졌다. 그것은 난화군주에게 약간의 시간을 벌게 해주었다. 난화군주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군검우를 향해 쌍장을 뻗었다. 펑-! 군검우는 그대로 자신의 가슴을 내주고 말았다. 찰나지간 군검우는 관성량을 놓치며 뒤로 주르르 밀려나고 말았다. "오오! 대인!" 그 틈을 이용하여 난화군주가 관성량을 낚아챘다. 사문군이 초형일섬검으로 난화군주를 향해 짓쳐들었다. 이미 관성량을 구출해낸 난화군주의 눈이 악독하게 변했다. 이제는 꺼릴 게 없는 것이다. 쿠아아아앙! 그녀의 한 손이 사문군을 향해 날았다. 사문군은 피화살을 뿜으며 실끊어진 연처럼 허공으로 튕겨졌다. "천불장(千佛掌)!" 난화군주의 놀라운 신위에 능원평이 경악했다. 능원평은 빼앗긴 관성량을 다시 되찾기 위해 축융신공을 전개했다. 허나 그 역시 난화군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실로 상상도 못할만큼 막강한 난화군주의 무공이었다. 용미인은 경악의 얼굴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난화군주가 혈궁주 이상 가는 고수였다니……!'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아무도 몰랐던거야. 권력의 그늘 아래에 있었기에 그녀는 무공을 쓸 필요가 없었지만, 그녀는 이미 황실무고의 최고 무공을 모조리 터득한 것이다……. 이 땅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은 헌원패성도 혈궁주도 아닌 바로 난화군주다…….' 이때 난화군주가 독기어린 음성으로 명령했다. "놈들을 모조리 제거하라!" 용미인을 비롯한 신비각의 고수들이 군검우 일행을 포위했다. 군검우는 빠드득! 이빨을 갈았다. '으…… 바로 눈 앞에서 관가 놈을 놓치다니!' 이보다 더 억울하고 재수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용미인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면사 너머의 군검우를 응시했다. 생각해보면 군검우는 그녀에게 있어서 애증(愛憎)과 증오(憎惡)로 점철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그날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용미인도 없었을 것이다. '어쩔 수가 없어, 군검우. 당신이 내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은 내 야망의 제물이 되어주는 것이야!' 신비각 고수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난화군주는 그들에게 싸움을 맡기고는 관성량을 부축한 채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관성량을 묶어놓은 오랏줄을 풀며 감격에 겨워 하였다. "이제는 안심해도 되옵니다, 대인." 하지만 무슨 일인지 관성량은 대답이 없었다. "대인……." 오랏줄이 모두 풀리고 난화군주는 관성량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돌연 관성량의 눈빛이 음산하게 빛났다. 난화군주는 뭔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관성량의 소매 끝에서 섬뜩한 빛이 발했다. 그것은 비수였다. 관성량은 거침없이 난화군주의 등을 쑤셨다. "아악!" 난화군주는 비명성을 토했다. "대…… 대인……." 그녀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관성량을 향해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런 그녀의 두 눈은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차 있었다. 순간 관성량이 그대로 난화군주의 가슴에 일장을 내갈겼다. 퍽! 난화군주의 신형이 처절하게 나뒹굴었다. 그 순간 신비각의 고수들과 군검우 일행의 싸움이 멈췄다. 돌연한 사태에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투…… 투골음풍수……." 관성량이 쏟아낸 장력을 보며 용미인은 더듬거리며 외쳤다. "크하하하하핫!" 관성량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 동시에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인피면구를 찢어냈다. 관성량의 얼굴이 찢겨져 나가고 드러난 것은 수라천왕의 얼굴이었다. "허억!" "네년의 관성량은 아직도 석굴 안에 있다! 급소를 찔리고 투골음풍수에 맞은 이상 네년이 설사 신이라 해도 살아날 수 없다!" 이 돌연한 사태에 누구 하나 입을 벌리지 못했다. 싸움을 멈춘 용미인이 난화군주를 부축했다. 난화군주는 용미인의 부축을 뿌리치며 빠드득! 이빨을 갈았다. 그녀의 눈에 가공할 살기가 어렸다. 난화군주는 전신의 내력을 모조리 끌어올리며 수라천왕을 향해 장력을 내질렀다. 그녀가 얼마나 가공할 내력을 끌어올렸는지 그녀의 등 뒤에 박힌 비수가 뽑혀져 나가며 피화살이 뿜어졌다. 수라천왕은 그녀의 놀라운 신위에 경악했다. 하지만 급급히 그녀의 공격에 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콰앙-! 두 개의 장력이 부딪치며 난화군주는 또다시 피를 뿜었다. 그녀가 아무리 극상승의 내력을 끌어올린다 할지라도 상처입은 몸으로는 수라천왕의 상대가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난화군주의 신형이 허공을 나는 그 순간, 그녀의 소매 끝에서 두 줄기 채대가 날아가 수라천왕의 목을 휘감았다. 기실 그녀는 지금이 이 한 수를 노리고 수라천왕을 공격했던 것이다. 수라천왕의 양손이 난화군주의 채대를 끊어버리기 위해 힘을 썼지만 그것은 끊어지지 않았다. "이…… 이것은 천년교룡대(千年蛟龍帶)!" 천년교룡은 말 그대로 천년을 산 뱀 형상을 가진 용을 일컬음이다. 그리고 천년교룡대는 그 천년교룡의 힘줄을 뽑아 만든 채대인 것이다. 수라천왕이 경악하는 사이 난화군주의 중지(中指)에서 시퍼런 불꽃이 일었다. "천섬멸공(天閃滅空)!" 화아아앙-! 그녀의 천섬멸공은 그대로 수라천왕의 이마에 관통했다. "아아악-!" 수라천왕은 처절한 비명성과 함께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며 새우등 모양을 했다. 바닥에 쓰러져 상반신만 간신히 일으켜 세운 난화군주도 울컥거리며 연신 피를 토했다. 용미인이 다시 그녀를 부축했다. 난화군주의 상태는 대단히 위급했다. 이미 심맥은 끊어졌고, 피를 너무나 많이 흘려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용미인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난화군주가 이렇게 죽어버린다면 자신의 모든 것은 난화군주의 죽음과 함께 소실되어 버린다. "구…… 군주님…… 어서 치료를……." 난화군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이미 틀렸네……. 하…… 하지만 죽기 전에 그 분을 뵈어야 하네. 반드시……. 어서 그 분을 구해…… 내게." 군검우는 능원평 등과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간에 난화군주는 당금 황실에서 절대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자였다. 그런 그녀의


마지막을 본다는 것이 약간은 경건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군검우에게 있어서 지금 중요한 것은 죽어가는 난화군주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속히 석굴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관성량을 비롯한 혈궁의 무리들이 아직도 그 안에 있는 것이다. 군검우 일행은 분분히 신형을 날렸다. 난화군주도 용미인에게 명령했다. "나는…… 너의 야심을 알고 있다……. 너란 아이는 너무도 나와 성격이 비슷하다……. 만약 네가 그분을 구한다면 설사 내가 죽더라도 너의 미래는 보장될 것이다……." 말을 하면서도 난화군주는 계속해서 피를 토했다. "군주님의 명령, 받들겠사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관대인을 구출해 나오겠습니다!" 용미인은 신비각의 고수 몇 명에게 난화군주의 보호를 맡기고 다른 이들과 함께 석굴 안으로 뛰쳐 들었다. 4 운룡석굴 근처의 바위틈에는 북경수비대의 일천 명 군사들이 완전무장을 한 채 매복되어 있었다. 그들은 운룡석굴에서 도망쳐 나오는 모든 자들을 주살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그러한 선택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츠츠츠츠츠- 츠츠! 그것을 가르쳐 주려는 듯 하늘 위에서 괴이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북경수비대원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억! 비…… 비익구(飛翼具)!" 그것은 말 그대로 인간을 태우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기구였다. 하늘 위로 수십, 수백 개의 비익구가 촘촘히 날아들었다. 그들은 바로 혈궁에서 풀어놓은 오백여 명의 혈우전사들이었다. 쾅! 콰쾅! 혈우전사들은 비익구에 몸을 실은 채 화수포를 발사하였다. 땅 위의 북경수비대는 지형의 불리함으로 속수무책으로 화수포에 당했다. "으아악!" "아악!" 흙먼지 바람과 함께 화수포에 의해 박살난 돌가루가 튀며 사방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도가 연출되었다. 하지만 이들 북경수비대는 철저하게 군사훈련을 받은 최정예 군대였다. 처음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금씩 조금씩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혈우전사들이 하늘 위에서 화수포를 사용할 때까지는 속수무책이었으나 땅 위로 착지하면서부터는 그야말로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죽고 죽이는 대혈전이 펼쳐졌다. 동굴 안은 거미줄처럼 통로들이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었다. 얼핏 동굴 안의 통로만 보아서는 이곳은 미로(迷路)와 같아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운룡석굴에는 모두 천여 개의 동굴이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요. 자칫 잘못 들어갔다가는 길을 잃을 수 있어요." 당문연은 흐릿한 눈으로 군검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 상태로 놈들을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오?" 능원평이 말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군공자께서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능원평이 군검우를 돌아보았다. 군검우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 자리에서 좌정했다.


그의 청각은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올라있다. 얼마 전, 천 장 밖에서 오는 인물들의 인기척도 들었던 적이 있지 않았는가. 더욱이 지금은 그때보다도 훨씬 강해져 있는 군검우였다. "군공자의 청각 능력이라면 동굴 안에 있는 놈들의 위치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좌정한 군검우는 청각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능원평과 사문군이 초조한 기색으로 군검우를 바라보았다. 당문연도 군검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일까? 당문연의 눈에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르며 군검우의 모습이 안개처럼 흐리게 보였다. 당문연은 몸을 돌렸다. '모든 것이 안개와 같다. 이제는 군공자의 모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얼마 후면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암흑 속에 묻혀버리겠지. 허나…… 무엇이 두려운가? 이 세상 모든 것이 어둠 속에 갇혀버려도…… 군공자는 내곁에 있거늘…….'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군검우는 번쩍! 눈을 떴다. "놈들의 위치를 찾았소?" 능원평이 다급히 물었다. 군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휘익! 군검우가 앞장 서서 신형을 날렸다. 제 29 장 사랑이란 이름 하나에 1 군검우를 선두에 세운 그들은 한참 동안 동굴을 전진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눈 앞, 전면이 꽉 막혀 있음을 발견했다. "소리는 이쪽에서 들려오고 있소." 꽉 막힌 석벽을 손으로 툭툭 치며 군검우가 말했다. 능원평이 앞으로 나섰다. 쾅! 소리와 함께 그의 축융신공에 의해 석벽은 모래벽처럼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벽이 무너지자 또 다른 동굴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때였다. 쏴쏴쏴쏴-! 뭔가 기괴한 음향이 동굴을 타고 그들의 귓전에 와 부서졌다. "이게 무슨 소리요?" 능원평이 군검우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군검우도 청각으로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능원평과 사문군이 무기를 꺼내들며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불의의 사태에 대비했다. 바로 그때였다. 뻥! 뚫린 동굴의 저편에서 통로를 가득 메우며 시커먼 물체들이 눈알을 번뜩이며 짓쳐들고 있었다. "허억!" "바…… 박쥐들이오! 그것도 흡혈박쥐!" 그렇다.


그것은 엄청난 숫자의 흡혈박쥐떼였다. 군검우 일행이 물러설 곳은 없었다.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할지라도 이곳 동굴에서 흡혈박쥐떼보다 더 빨리 달려 빠져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흡혈박쥐에게 물리면 죽음 뿐이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웁시다!" 츠츠츠츠츠- 콰쾅! 순식간에 흡혈박쥐떼와 인간의 대혈전이 벌어졌다. 허나 이들 사 인이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강호의 초일류 고수라 할지라도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흡혈박쥐떼를 모조리 물리칠 수는 없었다. 흡혈박쥐떼는 죽여도 죽여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흡혈박쥐에게 한 번 물리어 피비린내를 풍긴다면 놈들은 미친 듯이 달려들 것이다. 그 위급의 순간에 당문연이 군검우를 향해 소리쳤다. "군공자! 천장비독을 사용하세요! 천장비독이라면 놈들을 제압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당문연도 천장비독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천장비독은 군검우의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군검우가 마음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휘류류류류류! 순간 그의 몸에서 엄청난 악마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흡혈박쥐떼는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기운에 방향을 잃고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놈들은 칠십팔호 석굴에 들어와 있습니다!" 핏빛 혈의를 입은 혈우전사 하나가 혈궁주를 향해 보고했다. "칠십팔호 석굴에 그동안 키웠던 흡혈박쥐들을 모조리 풀었습니다. 놈들은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혈궁주의 뒤로는 원소랑과, 여불해, 그리고 백안천왕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혈우전사의 보고에 매우 만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다만 그들의 옆, 석벽에 묶여 있는 관성량만이 침울한 얼굴이었다. 남자처럼 껄껄 웃던 혈궁주가 문득 음침한 얼굴이 되어 묶여 있는 관성량을 응시했다. "난화도 죽어가고 있고, 네 아들도 곧 죽음에 이를 것이다. 본좌 역시 타격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정도 타격은 언제든지 복구할 수 있다. 나는 수십 년 동안 잡초처럼 이 땅을 살아왔다. 그런 나에게 황금 십만 냥은 새로운 인생을 가져다 줄 것이다. 지금에 와서 아쉬운 것이 있다면 네놈과 네놈의 아들이 잔상(殘傷)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 뿐! 허나…… 관계없다! 크크크크……." 혈궁주는 미친 듯이 웃었고, 그런 혈궁주를 바라보는 관성량의 안색은 더 이상 일그러질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관성량! 조금만 기다려라! 네놈의 복된 인생도 이걸로 마지막이다! 크하하하핫!" 무엇이 그리 즐거운 것인지 혈궁주의 앙천광소는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너댓 명의 혈우전사들이 우르르 달려오며 혈궁주를 향해 다급한 보고를 올렸다. "크…… 큰일났습니다, 궁주님!" "무슨 일인데 이리 호들갑이냐?" 원소랑이 혈궁주를 대신해 소리쳤다. "흐…… 흡혈박쥐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뭣이!" 그들의 보고가 모두 끝나기도 전이었다. 또다른 혈우전사들이 피투성이가 된 몸을 비틀거리며 석실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구…… 궁주님! 피…… 피하십시오! 흐…… 흡혈박쥐들이……."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어째서 박쥐들이 이곳으로 온단 말이냐?" 혈궁주는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누군가가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하기도 전이었다. 쏴쏴쏴쏴-! 흡혈박쥐들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혈궁주를 비롯한 모두의 안색이 핼쓱하게 질렸다. 어느새 흡혈박쥐들이 동굴을 가득 채우며 시커멓게 날아드는 모습이 보였다. "이…… 이런!" 혈궁주는 황망 중에도 혈우전사들을 일격에 죽이며 그 피를 사방에 뿌렸다. 그들의 피냄새로 흡혈박쥐의 침공을 조금이나마 연기하고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 잔인함을 보며 여불해는 남몰래 치를 떨었다. 원소랑이 관성량을 묶은 줄을 풀었다. 그리고 그들은 석실을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움직일 수 없는 시체가 되어 뜨거운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혈우전사들의 몸 위로 새카맣게 흡혈박쥐떼가 뒤덮혔다. 참으로 황당한 꼴이었다. 어떻게 놈들을 잡기 위해 풀어놓은 흡혈박쥐에게 자신이 쫓길 수 있단 말인가. 도망치는 혈궁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통이 터졌다. 혈궁주의 그 분통은 그동안 흡혈박쥐를 수련한 암흑편복(暗黑 ) 좌홍기(左弘氣)에게로 이어졌다. '이곳을 나가 암흑편복, 그 놈을 만날 수 있다면 찢어 죽이고 말리라!' 하지만 일단은 흡혈박쥐를 피해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까지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흡혈박쥐의 명령체계가 붕괴된 이상,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운룡석굴을 벗어나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가장 앞서 달리던 원소랑의 걸음이 우뚝 멈추어섰다. 동시에 그는 더듬거렸다. "네…… 네놈들이 어떻게 여길……?" 멈춰진 원소랑의 걸음이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시커먼 인간의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의 주인은 바로 군검우 일행이었다. "네놈들이 내 앞에서 흡혈박쥐로 공격을 한 것은 실수였다. 흡혈박쥐는 무서운 독물임에는 분명하다. 허나 나는 천장비독을 익혀 전신이 피 한 방울까지 독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흡혈박쥐의 독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내게는 통하지 않아! 오히려 놈들은 내게 굴복했다." "!" "과거, 나의 사부님은 음공(音功)을 이용해서 어떤 동물이던지 당신의 뜻대로 부리실 수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흡혈박쥐들은 이제 나의 충복이 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역으로 우리를 네놈들에게 안내한 것이다." 츠츠츠츠츠-! 이때, 몰려온 흡혈박쥐떼가 군검우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의 뒤편으로 포진하듯 날아오며 요동쳤다. 그것은 실로 상대에게 무서운 공포심을 유발시킬수 있는 엄청난 광경이었다. "이제…… 아무도 도망가지 못한다!" 군검우의 눈빛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네놈이 감히 천룡북보를 사칭해 나를 농락하다니!"


능원평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원소랑을 노려보았다. 자존심 하나로만 뭉쳐져 있는 능원평은 자신이 원소랑에게 속았다는 것만으로도 느끼는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 원소랑은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한편, 관성량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눈 앞의 흑의사내가 자신의 아들인 군검우임을 알았다. 그의 얼굴이 격동으로 차 올랐다. "네…… 네가…… 예령의 아들이냐?" 허나 그 순간 혈궁주는 관성량의 혈도를 찍어 그의 말문을 막았다. 군검우는 그 한 마디에 가장 뒷편에 있는 사내가 관성량임을 알아차렸다. 살펴보니 조금 전 인피면구를 쓴 수라천왕과 같은 모습이었다. "관성량을 내놓아라!" 군검우의 눈에서 번쩍! 빛이 발했다. 관성량 대신 백안천왕이 군검우를 향해 성큼 걸어왔다. "함부로 날뛰지 마라! 애송이놈!" 그는 다짜고짜 군검우를 향해 무서운 살기를 폭사시켰다. "네놈이 독비천왕을 죽였다는 걸 안다! 그 복수를 하겠다!" "그대가…… 백안천왕인가?" 군검우는 담담하게 물었다. "그렇다!" 쿠아아아아앙! 백안천왕은 군검우를 향해 태산이라도 허물어뜨릴 것 같은 진력을 뿜었다. 그것은 단 한 번에 동굴을 무너뜨릴 것 같은 엄청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군검우는 뒤로 물러나거나 피하지 않았다. 그는 쌍장을 뻗어 백안천왕의 장력을 맞받아쳤다. 콰앙-! "허억!" 두 개의 장력이 부딪치는 순간, 백안천왕은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어지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이럴 수가……! 애송이놈의 공력이 본좌보다 강하단 말인가?' 독비천왕이 놈에게 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백안천왕이었다. 그런데 필유곡절(必有曲折)이라더니, 독비천왕이 군검우에게 당했을 이유는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백안천왕! 당신들…… 마문삼천왕이 놀던 시대는 갔다!" 군검우는 조롱하듯 말했다. 헌데 이 순간, 백안천왕의 눈에서 돌연 엄청난 광채가 일었다. 그것은 마치 태양광선이 정면으로 내리쪼이듯 현란한 빛이었다. "군형! 그의 눈을 보지 마시오. 그것은 놈이 자랑하는 백안마겁(白眼魔劫)이오!" 능원평은 깜짝 놀라 소리쳤으나 그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백안천왕의 눈을 쏘아보던 군검우의 눈은 넋이 나가버린 듯 몽롱하게 변했다. "크하하하핫! 이놈, 함부로 날뛰지 말라고 일렀지 않느냐!" 그 찰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백안천왕은 공격해 들었다. 쐐애애애액! "위험하오! 군형!" 능원평이 군검우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능원평은 백안천왕의 섬전같은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군검우의 가슴 앞에서 백안천왕의 손바닥이 갈쿠리처럼 변화했다. "아악-! 군공자!" 당문연의 희미한 눈에도 이때만큼은 백안천왕의 섬전같은 모습이 쏘아져 들었다. 쾅!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군검우의 눈빛이 돌연 악마처럼 번뜩이더니 돌연 신형을 옆으로 비틀며 짓쳐드는 백안천왕의 천령개를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커어억!" 그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백안천왕은 피화살을 뿜으며 석벽에 가 부딪쳤다. 백안천왕의 칠공으로 주르륵! 핏물이 쏟아졌다. "이럴 수가……!" 그러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백안마겁이 통하지 않다니……." 군검우는 그의 앞에 우뚝 섰다. "나는 이미 그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는 자 치고 네놈의 백안마겁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더냐? 너무도 자신에 찬 네놈이 오히려 역공을 당한 것이다." 백안천왕의 천령개에서부터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군검우의 천장비독에 의해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할 지경이었다. '배…… 백안천왕이 단 일초에 저 모양이 되다니……. 놈의 천장비독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단 말인가?' 원소랑은 백안천왕의 처참한 모습에 공포에 젖어들었다. 혈궁주의 얼굴도 침중해졌다. '예전에 죽이지 못한 것이 화근이다. 이제는 환우금성 이상으로 강해졌다.' 군검우를 죽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아니, 차라리 군검우가 혼자 있다면 어떻게 해볼려고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적은 많고 아군은 적었다. 더욱이 군검우도 군검우지만 군검우의 뒤편에서 웅웅대며 놈의 명령만 기다리는 흡혈박쥐들이 더 문제였다. 물론 혈궁주는 금강불괴지신인지라 저따위 박쥐들의 이빨이 자신의 몸을 물어뜯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원소랑이었다. 그는 한 번이라도 물린다면 끝장이다. 이때, 군검우가 혈궁주를 향해 눈을 돌렸다. 혈궁주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오로지 살기만이 폭사되고 있었다. 월산장의 원수 중 하나! 환우금성과 목부인, 그리고 무고한 천애원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인 원수! 그리고 전위상의 자폭! 혈궁주, 그녀는 백사단의 첫 번째에 그 이름이 올라가 있다! "준비는 되었겠지?" 전신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는 달리 군검우의 음성은 의외로 차분했다. 그는 되도록 분노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군검우에게 있어서 혈궁주는 최대의 상대다. 고수와 고수와의 싸움은 단 한 순간에 판별나는 법이다. 흥분을 해서는 안된다.


분노는 더욱 금물이다. 원소랑은 어머니, 혈궁주를 바라보며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는 마지막 도박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소랑이 혈궁주 대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이 야릇하게 빛났다. "내 품 속에는 혈궁의 연락용 폭죽인 멸혼인화가 있다!" "……!" "그것은 허공 백 장 상공까지 날아가서 엄청난 광채와 함께 폭발한다! 그리고 그 빛은 수백 리 내에선 누구라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군검우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했다. "흐흐흐흐…… 이곳은 폐쇄된 동굴이다. 멸혼인화를 터트리면 능히 이 내부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 더욱이 박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빛! 멸혼인화의 빛이라면 놈들의 감각을 모조리 마비시킬 수 있다." 원소랑은 군검우를 향해 섬뜩하게 웃었다. "군검우, 관성량을 네게 넘겨주겠다!" "……!" 원소랑은 천천히 관성량에게로 걸어갔다. 군검우는 그가 무엇을 노리고 하는 짓인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아 원소랑이 하는 요량을 지켜보았다. 원소랑은 들고 있던 부채로 관성량의 등을 쑤셨다. 그리곤 그를 군검우에게로 집어 던졌다. 군검우가 깜짝 놀라서 그를 받는 순간, 원소랑은 멸혼인화의 죽통을 꺼내 천장으로 던졌다. 파파파팍! 멸혼인화의 죽통이 천장에 박히며 불꽃을 토해냈다. "어머니! 어서!" 그 순간을 이용해 원소랑 모자와 여불해는 빠르게 신형을 날렸다. 능원평이 외쳤다. "멸혼인화요! 어서 피해!" 그러나 도망갈 길은 없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바로 이 자리에서 호신강기를 일으키며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는 길 뿐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 군검우는 몸을 날려 관성량을 보호했다. 놈을 이곳에서 이토록 허무하게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쾅-! 콰앙! 우르르르릉- 콰콰쾅! 순간 대폭발이 일었다. 엄청난 광채와 함께 동굴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 속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동굴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2 모든 것이 폐허가 되었다. 무너진 동굴은 어디가 어디인지 알 길이 없었다. 햇빛이 한 줌 비춰 들었다. 꿈틀……. 무너진 바위들 틈에서 돌덩이 하나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움직임의 폭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리고 한 인영이 몸을 일으켰다. 군검우, 바로 그였다.


군검우는 자신의 몸을 온통 뒤집고 있는 돌가루를 털어냈다. 매캐한 먼지가루가 그의 코 끝을 간지럽혔다. 사방에는 박쥐들의 부서진 육편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능형!" 군검우는 능원평을 찾았다. "당소저! 사문군! 어디 있소?" 군검우의 부름을 듣고 깨어났음인가? 어둠 속에서 능원평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의 전신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사문군 역시 절룩거리며 나타났다. 그의 왼팔은 골절(骨折)되었는지 어깨뼈가 귀 옆에까지 올라와 있었다. "주…… 주군!" 그 상태로 사문군은 군검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문군! 어찌된 일이오?" 군검우는 황급히 사문군의 왼쪽 어깨를 잡았다. "아악!" 순간 참지 못하고 사문군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래도 한쪽 팔이 완전히 절단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죽지는 않았으니……." 사문군은 애써 군검우를 향해 웃었다. "그런데 당소저는?" 능원평이 당문연을 찾았다. 아직 당문연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군검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당소저!" "당소저! 어디 있소?" 허나 아무리 불러도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능원평이 품 속에서 화섭자를 꺼내 불을 밝혔다. 그때였다. "으…… 으……." 어디선가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군검우는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당문연이 자신보다 훨씬 큰 바위 밑에 하반신이 깔려 있었다. "당소저!" 군검우와 능원평은 화들짝 놀라며 힘을 합쳐 바위를 들었다. 사문군은 팔을 다쳤는지라 그들을 돕지 못하고 한 손으로 힘겹게 바위가 들려진 틈을 이용하여 당문연을 끄집어 냈다. 당문연의 양 다리는 피투성이가 되어 무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어느 것이 뼈인지, 어느 것이 살인지, 또 어느 것이 피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또한 정신을 잃어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고, 출혈도 심했다. 게다가 다리상처로 보아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다…… 당소저……." 군검우는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녀가 혼절에서 깨어났는지 간신히 눈을 뜨는 군검우를 올려다보았다. "군…… 검…… 우……." 그녀는 처음으로 군검우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는 군검우를 군검우라고 불러본 일이 없었다. 어쩐지 그렇게 군검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애타게 군검우의 이름을 더듬거렸다. "여기 있소. 내가 당소저의 옆에 있소." 군검우는 당문연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어두워요. 어두워서 당신이 보이지 않아요. 당신은…… 당신은 어디 있나요?" "……!" "……!" 순간 세 사람의 표정은 경직되었다. 무릇 무림인이라면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안력을 돋구어 환한 대낮처럼 볼 수 있다. 당문연은 무림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능원평의 손에 횃불도 들려 있는 터였다. 그런데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니……. '시력을 완전히 상실했구나…….' 당문연의 손을 잡은 채 군검우는 숨죽이며 오열했다. 능원평과 사문군도 망연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이 순간 군검우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그의 선택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관성량을 죽이겠다는 일념 하에 멸혼인화가 터지는 바로 그때, 관성량을 보호했다. 만약 그가 관성량이 아닌 당문연을 보호했다면 지금 당문연은 이 정도로까지 엄청난 피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다. 군검우는 심한 자책감으로 이빨을 빠드득! 갈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사문군의 검을 빼앗아 관성량에게로 다가갔다. 관성량은 여전히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정도의 상처를 입었는지 가슴에서 핏물을 흘리며 거친 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은 네놈 때문이다! 동창에 의해 월산장이 멸망하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의 이 날은 없었을 것이다!" 군검우의 검이 허공으로 치켜 올라갔다. 군검우가 느끼는 이 순간의 분노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다. 관성량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그는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조금 전 혈궁주에게 혈도가 찍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아야…….' 그는 마음 속으로만 애타게 군검우의 이름을 부르며 거친 숨결과 처절한 표정을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관성량의 그러한 처절함은 군검우에게 있어서는 그가 죽기 싫어 보이는 몸짓에 불과할 뿐이었다. "죽어랏!" 군검우의 검이 관성량의 몸을 일도양단(一刀兩斷)을 낼 것처럼 짓쳐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안돼요!"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비표(飛 ) 하나가 군검우의 검 끝을 향해 섬전처럼 날아들었다. 채앵-! 비표는 군검우의 검을 옆으로 쳐내며 가까스로 관성량의 목숨을 살렸다. 나타난 자는 흑의면사로 얼굴을 가린 신비각 고수들이었다. 그 중 비표를 날린 자는 용미인이었으나, 그녀 역시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지라 자신의 진면목이


드러나지 않았다. "웬놈들이냐?" 능원평이 칼을 뽑아들며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군검우는 그 틈을 이용하여 다시 검을 높이 쳐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관성량을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당신은 그를 죽이면 안돼요!" 용미인은 소리치며 잠시 갈등을 하다 면사를 벗었다. "목완경!" 군검우가 그제서야 목완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군검우! 절대 그 분을 죽이면 안돼요!" "왜냐?" 군검우가 비릿한 조소와 함께 물었다. "만약 그분을 죽이면 당신은 살부(殺父)의 업보를 지는 거예요!" 순간 군검우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당신은 저분의 아들이예요!" "!" "저분의 아혈을 풀어주면 당신은 모든 것을 알게될 거예요." "!" 군검우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관성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관성량은 애타는 눈빛으로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되는 소리! 어떻게 내 어머니를 비롯한 월산장의 모든 식솔들을 죽인 사람이 나의 부친이라는 게냐?" "말이 안되는 소리라 해도 그건 사실이예요! 일단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중에 판단하시면 되잖아요! 성급하게 그 분을 죽여 살부의 업을 지고 평생을 살아가실 건가요?" 용미인은 심한 갈증을 느끼며 관성량을 설득했다. 군검우는 주춤거리며 능원평을 바라보았다. 능원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사실을 밝혀본 후 관성량을 죽여도 되는 것이다. 어차피 관성량의 목숨은 군검우의 손아귀에 있었다. 3 번쩍! 마른 하늘에 뇌전(雷電)이 꽂혔다. 우르르릉…… 콰앙! 쏴아아아아아……. 뒤를 이어 천둥소리가 들리며 대지는 엄청난 폭우 속에 사로잡혔다. 군검우는 운룡석굴로 통하는 어느 동혈입구에 몸을 기댄 채 멍하니 비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메말라 버린 입술, 그의 모습은 지극히 염세적(厭世的)이었다. 능원평이 그에게 다가와 술병을 건네 주었다. 하지만 그는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밝혀졌고, 관성량이 그의 친부인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그의 성(姓)은 '군'이 아닌 '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어지러운 시대가 낳은 비극이오." 능원평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부친의 상처가 극심하오. 이제는 부친을 용서하시오. 월산장의 멸망은 난화군주와 혈궁주가 저지른 것으로 판명나지 않았소! 또 다시 후회하지 말고 어서 부친을 만나보시오." "쿡쿡쿡!" 군검우는 자조적인 웃음을 날렸다. 그런 그의 두 눈으로 눈물이 흘렀다. 후두둑…… 후두둑……! 비는 난화군주가 누워 있는 황금마차의 위를 세차게 내리쳤다. 관성량은 눈조차 감지 못하고 누워 있는 난화군주를 애증(愛憎)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내려보았다. 용미인은 혼자서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관성량을 옆에서 부축했다. 신비각의 고수들은 모조리 황금마차 밖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오체복지하고 있었다. 혈우전사들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북경수비대는 이제 그 수가 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황금마차의 주위를 삼엄한 경비망으로 지켰다. "군주님께서는…… 조금 전에 운명하셨습니다……." 용미인은 관성량에게 난화군주의 상태를 설명했다. 그녀의 설명이 아닐지라도 난화군주의 죽음을 관성량도 알 수 있었다. "군주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대인만을 찾으셨습니다." 관성량은 피에 젖은 자신의 손을 들어 난화군주의 눈을 감겼다. 그는 난화군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군주……. 천하가 모두 당신을 손가락질한다 할지라도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소이다. 당신이 그동안 해온 모든 것들이 바로 나 때문에 비롯되었음을 알기 때문이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뭐라한들…… 나까지 그런다면 당신은 너무도 외롭지 않겠소?" 관성량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이 난화군주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난화군주는 미동도 없었다. "군주…… 다시…… 태어나신다면 절대로 나같은 사람은 사랑하지 마시오…… 절대로……." 그 말을 끝으로 관성량은 우욱! 거리며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그는 가슴에 고통을 느끼는지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 쥐었다. "대…… 대인!" 용미인이 경악하며 그의 등을 두들겼다. "검우에게……." 관성량은 연신 피를 토하며 용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것을 전해다오." 그는 자신의 왼쪽 손목에 채워져 있던 퇴색한 구리 팔찌를 빼냈다. 그것은 오래 전, 군예령에게 사랑의 정표로 받은 것이었다. "이것을…… 이십 오 년 간 단 하루도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다오."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관성량은 용미인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상반신이 서서히 옆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대…… 대인!" 용미인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하지만 모든 힘을 잃은 관성량의 신형은 난화군주의 몸 위로 고꾸라졌다. 용미인은 경악했다.


관성량, 그가 죽은 것이다. 그의 죽음에 용미인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난화군주는 말했었다. 그를 구해 무사히 북경으로만 데려가 준다면 자신의 모든 것은 보장된다고 말이다. 충격 뒤에 오는 것은 어이없음이다. 그가 이토록 쉽사리 죽을지는 용미인도 몰랐다. 아마도 난화군주의 죽음을 보는 순간, 그는 이미 죽음을 작정한 것 같았다. 하긴, 이제 더 이상 그는 살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 아주 오래 전에 죽었다.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여인도 이제 싸늘한 시신이 되어 땅 속에 한 줌 흙으로 묻혀 버릴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무슨 의미로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으랴. 생각해보면 인생은 허(虛)와 무(無)로만 가득차 있는 것을……. 4 선친(先親) 관성량지묘(冠聖亮之墓). 쏴아아아아아……! 비는 폭우가 되어 쏟아졌다. 군검우는 갓 만들어진 관성량의 무덤 앞에 망연히 서 있었다. 그의 뒤로 능원평과 사문군, 그리고 다리를 다쳐 급조한 나무의자에 당문연이 앉아 있었다. 군검우의 의복은 비에 젖어 후줄그레하게 변해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단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도 없다. 그리고 그와는 아무런 정(情)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군검우는 그저 관성량이 아버지라고 하니 아버지인 줄 알고 그의 무덤 앞을 지키는 것이다. "관대인께서 당신에게 전해주라고 하더군요." 대나무 우산을 받쳐쓴 용미인은 망연히 서 있는 군검우에게 관성량에게서 받은 구리팔찌를 내놓았다. "당신 어머니가 주신 거랍니다. 이십 오 년 간 단 한 번도 손목에서 풀러본 적이 없답니다." "……!" "나는 이곳 운룡석굴에 와 나름대로 느낀 것이 많아요. 하지만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와도 내가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을 거 같아요." "……!" "이제 나는 난화군주님의 시신을 북경으로 모셔가야 해요. 훗날 우리는 또다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겠죠. 그때는 서로가 또 서로의 가슴에 또다시 칼을 겨누게 될 거예요……." 용미인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신형을 돌렸다. 군검우는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망연한 표정으로 무덤을 바라볼 뿐이었다. 군검우의 손에 들린 구리팔찌가 백팔염주(百八念珠)처럼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돌았다. 5 북경으로 돌아가는 용미인은 심한 허탈감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전쟁에 나가 패배하고 돌아오는 패잔병의 그것과 흡사했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난화군주가 죽음으로 해서 그녀의 날개는 찢어져 버렸다. 이제는 혼자 날아야 한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모두가 적이었다. 혈궁도, 군검우도, 헌원패성도…… 그녀가 넘어야 할 산인 것이다.


북경으로 돌아가는 도중 해가 져 어느 허름한 사당에 노숙(露宿)을 하게된 용미인은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다른 신비각 고수들을 뒤로 한 채 사당을 빠져 나와 밤하늘의 편월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이제 그녀에게 또 무슨 시련을 주시려함인가? 그녀가 바라보는 자신의 앞날은 캄캄한 암흑의 연속일 뿐, 빛이 보이지 않았다. "눈 앞에 권력의 종착점이 잡히는 것을…… 이토록 허망하게 끝내야 하다니……. 그러나 절대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니, 너는 이대로 끝내야 할게야……."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한 남자의 음성이 용미인의 귓전에 와 꽂혔다. 용미인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용미인과는 바로 지척간의 거리였다. 어둠에 동화된 양, 그렇게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를 발견하는 순간 용미인은 주춤거렸다. 그러면서 뒤로 물러났다. "허…… 헌원…… 패…… 성……." 그렇다. 나타난 자는 바로 사도(邪道)의 하늘(天)인 헌원패성이었다. '이…… 이런…… 일행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어!' 용미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도망갈 방향을 잡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목완경…… 너는 분명히 전해 들었을 것이다. 나의 무서움을 똑똑히 가르쳐 주겠다고……." 헌원패성의 음성은 물처럼 고요하며 담담했다. 마치 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마계(魔界)의 지배자이자 천년마도 사상 최강의 고수라는 노부를 너는 너무 녹록히 보았다. 마도의 제일철칙이 무엇인지 아느냐?" "……!" "자신의 모든 것을 다른 이에게 완벽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는 노부의 칠푼만을 알고 노부를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했다. 노부는 누구에게도 노부의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 너는 노부를 너무 쉽게 보았어. 그것이 오늘날 너의 불행을 초래한 것이다." "……." 도망갈 자리를 찾기 위해 헌원패성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용미인은 이빨을 깨물며 어느 한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헌원패성과 일 대 일로 대적하여 이길 수는 없다. "어쨌든 너는 나를 지옥의 사로갱에서 꺼내주었다. 그 대가로 고통없는 죽음을 선사하마." 도망치려는 용미인을 향해 헌원패성은 한 손을 뻗었다. 츄파파파파팟! 순간 그의 손바닥 안으로 도망치려던 용미인이 자석에 끌리듯 끌려 들어왔다. 놀라운 허공섭물신공이었다. 용미인은 지난 날, 사로갱에서 헌원패성의 허공섭물신공에 당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용미인과 지금의 용미인의 무공은 천양지차라 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허공섭물신공을 용미인은 피할 수 없었다. 그녀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헌원패성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용미인도 녹록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끌려가는 와중에도 극성으로 내력을 끌어올리며 헌원패성을 향해 구양신공을 전개했다.


"크하하하핫!" 순간 헌원패성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노부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겠다!" 허공섭물진기를 운용하던 그의 힘이 돌연 멈추며 변화했다. 쿠아아아아앙! 노도와 같은 진력이 용미인이 펼친 구양신공을 뚫으며 그녀에게 밀려들었다. 콰앙! 헌원패성의 진력은 그대로 용미인의 가슴팍에 적중했다. 찍…… 찌찍! 용미인은 전신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아니, 그녀의 전신이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그녀는 살덩이, 핏덩이로 화하며 허공 중에서 뚝뚝 떨어졌다. 참으로 처절하고 비참한 죽음이었다. 6 휘이이이이잉……. 열려진 창문 틈으로 새벽이 찾아오고 있었다. 동쪽 하늘에서는 새벽을 알리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군검우는 창문 사이로 밀어닥치는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그는 그 상태로 창문에 걸터앉아 보드라운 헝겊으로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닦았다. 무엇이든 스치기만 해도 소리없이 베어져 나갈 것처럼 검신은 날카로웠다. -검은 무사의 생명이다. 초형일섬검을 배울 때, 환우금성은 군검우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런 무사에게 있어서 검을 닦는 이 순간만큼은 가장 행복한 시간이리라. 무념(無念), 무상(無想)의 시간에서 오로지 자신의 분신을, 생명을 닦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어떤 의식을 거행하듯이 그렇게 천천히 검을 닦았다. 이윽고 그의 검에는 티끌 한 점 남아 있지 않았다. 군검우는 음울한 시선으로 그것을 살피며 검집 속에 넣었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떠나는 일만 남아 있었다. 군검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륙천하를 모조리 뒤져서라도 혈궁주와 원소랑을 찾아내기 위하여! 능원평이 그의 실종을 가장 먼저 알았다. 아침에 일어나 군검우의 방에 들어가보니 그곳은 텅비어 있었다. 능원평은 직감적으로 그가 떠났음을 눈치챘다. 뒤이어 달려온 사문군과 당문연도 경악했다. 다리를 쓸 수 없어 사륜거에 몸을 기댄 당문연은 짙은 슬픔에 잠겨 들었다. 완전한 백안이 되어버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분은 다시는 오지않을 거예요. 다시는……." 그 옆에서 사문군이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나는 반드시 주군을 찾겠소. 이 세상을 모조리 뒤져서라도……." 군검우가 그렇게 말없이 떠났다 할지라도 사문군은 군검우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일에 나도 동참하겠소. 군형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두고 떠났는지 몰라도 우리가 찾아가는 이상, 우리를 어쩔 수는 없을게요." "……." 허나 당문연은 두 사람의 말에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찾아가고 싶어도 군검우를 찾아갈 수 없는 입장이다. 눈이 멀고, 혼자 힘으로 걸을 수도 없다. 그리고 대륙천하는 끝없이 넓다. 폐인이 된 몸으로 무슨 재주로 군검우의 뒤를 따라갈 수 있단 말인가? 설사 그를 찾는다 할지라도 이제 그에게 당문연은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다. 아니, 도움은 커녕 피해만 줄 뿐이다. 그때, 사문군이 그녀의 사륜거를 잡았다. "당소저도 함께 가는거요." "사대협……나는……." 당문연은 당황했다. "당소저…… 난화군주를 기억하시오? 그녀는 사랑이란 이름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내던졌소이다. 무려 수십 년 간이나 말이오! 사랑 앞에는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소이다." 그 옆에서 능원평도 미소를 지었다. "사형의 말에 나 역시 동감이오. 당소저의 사륜거는 군형을 찾을 때까지 내가 밀어주겠소." "고…… 고마워요…… 두 분……." 당문연은 또다시 눈물을 찍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눈물은 조금 전의 그 눈물과는 판이하게 성격이 다른 것이다. 제 30 장 무너지는 魔門 1 "네놈이 동정호의 쌍귀자(雙鬼子)냐?" 어둠 속에 백사단주 군검우가 서 있었다. 그 맞은 편에는 허연 백발이 얼굴을 가리며 가슴께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어 진면목을 분간하기 힘든 육순의 백발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백발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빛은 극히 사악음독(邪惡陰毒)했다. "네놈은 누구냐?" 백발노인, 쌍귀자의 음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으스스한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사이했다. "백사단주." 그 한 마디와 함께 군검우는 검을 뽑았다. 그가 쌍귀자임을 밝힌 이상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없었다. "배…… 백사단…… 주……." 쌍귀자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스쳤다. 백사단주는 사파인들에게 있어서는 명부사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뒤로 주춤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허나 그를 놓칠 군검우가 아니었다. 쐐애애액! 그의 초형일섬검은 섬전처럼 도망치는 쌍귀자의 등을 그었다. 백사단에서 또 하나의 이름이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꼽추노인 대막신타(大漠神駝). 자신의 본거지에서 애첩(愛妾)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군검우를 만나 백사단에서 그 이름이 지워졌다. 호북검혼(湖北劍魂) 냉하상(冷河想). 자신이 관할하고 있는 은하표국(銀河 局)에서 군검우를 만났다. 그는 수하들을 무수히 살상시키며 도망치려 하였지만 군검우의 검을 피하지 못했다. 천독광마존(天毒狂魔尊) 나천기(羅天氣), 절대천살(絶大天煞) 구여천(邱餘穿), 비룡귀객(飛龍鬼客) 능혈소(陵血逍), 탈천일수(奪天一手) 위사룡(魏巳龍), 혈검신마(血劍神魔) 팽소천(彭沼淺) 등 사파의


거목들이 지난 일 년 간 군검우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휘이이잉……!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가 몰아쳤다. 낡아빠진 흑의에 테두리조차 떨어져 나간 죽립을 깊이 눌러쓴 군검우는 그 눈보라 속을 걸었다. 몰아치는 눈보라에 의해 그가 남긴 발자국은 어느새 지워지고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백사단에서 남은 이름은 이제 혈궁주 뿐. 벌써 일 년 동안 그 자들을 찾아 헤맸으나 어디에도 그들의 흔적은 없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설사 그곳이 지옥의 끝이라도 기어이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악인을 찾아 눈 속을 걷고 있는 군검우의 모습은 한 마리 야수같았다. 2 그 자가 군검우의 앞에 나타난 것은 참으로 의외였다. 어쩌면 그 자는 군검우가 어디로 올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륙천하에서 군검우가 걸어가야 할 길은 딱 한 길, 악인이 존재하는 곳 뿐이다. 지살객(地煞客) 구양린(歐陽麟)을 찾아 하북성(河北省) 용현(龍縣)으로 가는 도중 여불해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여불해는 오랫동안 군검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여불해……." 군검우는 눈에 살기를 띠며 여불해를 노려보았다. 허나 군검우를 바라보는 여불해의 표정은 담담했다. 석상처럼 앉아 눈발을 뒤집어쓴 여불해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군검우에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군대협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군대협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의외의 일일게요." "……!" "나는 군대협에게 혈궁주 모자(母子)의 행방을 가르쳐 주기 위해 이곳에서 군대협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그의 음성은 흐르는 물처럼 담담했다. 대개 이러한 음성으로 말을 할 때는 거짓이 없는 법이다. 허나 군검우는 여불해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대는 혈궁의 모사(謀士)로서 온갖 귀계를 쓴 인물이다. 내가 그대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여불해는 군검우를 향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피식 웃었다. 모든 것을 해탈한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혈궁주와 원소랑은 검설산(劍雪山)에 머무르고 있소. 그곳에서 다시금 천하를 웅패할 계획을 세우기 위해 무공을 수련 중이오. 혈궁주 민자란은 구양신공과 구음신공을 완벽히 합일하고 있는 중이오. 그리고 그녀는 일 년 전과 비교도 안될만큼 막강해졌소이다. 원소랑 또한 그 못지않게 강해져 있소." "……!" "군대협께서 노부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곳에 가지 않으면 그만이오. 허나…… 내가 군대협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그동안 노부가 걸어온 길에 대한 회의 때문이오. 노부는 마(魔)의 도(道)를 추구하는 인물로서 천년마도 사상 아무도 이루지 못한 마도천하(魔道天下)를 보고 싶었소. 허나 혈궁주가 내게 보여준 것은 혈우천하(血雨天下)였소. 그녀가 가는 길엔 오직 피와 죽음 뿐이오. 앞으로 넉넉잡아 한 달 후면 혈궁주 민자 란은 구양신공과 구음신공을 하나로 합친 양극진기를 완성할 것이오. 그것이 완성되면 그녀는 불사지체(不死之體)가 되오. 그렇게 된다면…… 아무도 그녀를 꺾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그녀가 다시 강호로 나오는 날, 천하는 다시 한 번 핏물에 뒤덮힐 것이오. 반드시 그 전에 혈궁주를 죽여야 하오. 허나…… 군대협이 노부를 믿지 못함을 알고있소. 그렇기에 나의 진실을 보여줄 방법은 이것 뿐이오."


여불해는 서서히 한 손을 허공 중으로 들어올렸다. 군검우는 그를 지켜보았다. 여불해의 손이 자신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팍! 그의 정수리가 깨지며 사방으로 뇌수가 튀었다. 그렇게 여불해는 마도천하의 꿈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3 휘이이이잉……. 소리없이 떨어지는 눈보라를 동반한 채 스산히 불어오는 밤바람은 검설산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숨막히는 공포에 전율하며 몸살을 앓게 하였다. 태양빛이 내리쬐이는 한낮이라 할지라도 이곳 검설산은 귀기와 음산함만이 가득하여 사람들의 발길을 거부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명월은 커녕 찌그러진 편월조차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암흑천지의 밤이었다. 스산히 불어대는 일점한풍(一點寒風)만 없다면 이곳 검설산은 있어도 없는 듯 없어도 있는 듯 고요속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소리없이 함박눈이 내리는 밤이라면 길잃은 짐승의 발자국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보이는 것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눈언덕과, 그 위를 황량하게 불어대는 밤바람 뿐이다. 사박…… 사박…….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검설산의 눈언덕 위로 길게 한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갔다. 하지만 그 발자국은 치뿌리는 눈송이들에 의하여 곧 그 자국이 지워졌다. 모옥(茅屋)은 온통 눈 속에 잠겨 있어 커다란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혈궁주는 그 안에 좌정한 채 운기조식 중이었다. 원소랑은 모옥의 밖에서 혈궁주 민자란이 양극진기(兩極眞氣)를 완성하기를 기다렸다. 오늘밤만 지나면 어머니의 백일연공은 무사히 끝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녀가 양극진기를 완성하여 천하제패의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말이었다. 원소랑은 득의의 미소를 피워올렸다. 천하제일의 무공만 뒷받침된다면 혈궁 정도의 세력을 다시 세우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원소랑의 옆으로 거대한 소나무 천지인 송림(松林)이 있었다. 그 송림에 마련된 작은 암반 위에 진설하가 앉아 있었다. 이곳 검설산으로 온 다음부터 언제나 그녀는 그곳에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멍하니 눈 속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원소랑은 진설하에게 다가갔다. "너는 아직도…… 그놈을 생각하느냐?" 언제나처럼 원소랑의 눈가에 질투의 불길이 확! 타올랐다. 그러나 진설하는 초점없는 눈으로 그저 눈내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흐흐흐…… 아무리 그래봐야 이제는 소용이 없다. 너는 이미 내 것이 되었다. 게다가 네 뱃속에는 나의 핏줄이 자라고 있단 말이다." "……." 진설하는 여전히 일점 대꾸없이 눈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듯……. 버릇이 되어서인지 원소랑도 그런 진설하를 개의치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앙천광소와 함께 터뜨릴 뿐이다. "크하하핫! 두고 보아라. 어머니께서 백일연공을 마치시고 출관하시는 날! 가장 먼저 군검우의 목을


따러 갈 것이다." "……." "이제 곧 해시(亥時)! 한 시진만 더 지나면 어머니는 양극진기를 완성한다! 무림사상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최강고수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내가 그것을 완성할 것이다!" "……." "그리고 다음엔 나의 아들이 양극진기를 이을 것이다! 크하하핫! 알겠느냐? 원씨가문이 천하를 장악하는 것이다!" 원소랑은 미친 듯이 진설하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그게 네 마음대로 될까?" 그런데 그때 원소랑의 뒤편에서 음산한 음성 하나가 터져 나왔다. 어둠 속에는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세워져 있었다. 원소랑은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본능적인 살기를 느꼈다. 너덜너덜한 흑의에 테두리마저 떨어진 죽립! 군검우, 바로 그였다. 원소랑은 경악했다. '이놈이 어떻게 이곳에……? 게다가 하필이면 지금 이 시각에…….' 원소랑은 암담함을 느꼈다. 흩날리는 눈발만 바라보던 진설하의 시선이 군검우를 향해 돌았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출렁거리며 경직되었다. "쿡쿡쿡!" 군검우는 그녀를 비웃었다. "혈궁을 영원히 떠나겠다고? 가증스러운 위선자!" '거…… 검…… 우…….' 진설하의 얼굴이 떨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그녀는 이 자리를 도망치고 싶었다. "크하하하핫!" 순간 원소랑이 군검우와 진설하를 번갈아보며 미친 듯이 웃었다. "군검우! 설하는 이미 내 여자가 되었다!" "!" "흐흐…… 어차피 잘됐어. 언제고 네놈을 죽일 셈이었다. 찾는 수고를 네가 스스로 덜어주었군. 일 년 전 같으면 네놈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사정이 틀리다!" 원소랑은 소매 끝에 감추어둔 섭선을 꺼내들었다. 군검우도 검을 뽑았다. 원소랑의 말 때문일까? 검을 들고 대치하고 있는 군검우의 표정은 너무도 허무해 보였다. "크하하하핫! 죽어랏! 이놈!" 앙천광소와 함께 원소랑이 섭선을 앞으로 세우며 군검우를 향해 짓쳐들었다. 군검우는 원소랑의 공격에 맞대응했다. 까깡! 섭선과 부딪친 검 끝에서 시퍼런 불꽃이 눈송이 사이로 튀었다. 단 한 번의 부딪침이었건만 군검우는 은은히 놀란 얼굴을 했다. '이놈의 무공은 일 년 전과 비교가 되질 않는다…….' 그것은 원소랑도 마찬가지였다. '능히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거늘 조금도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니…….' 휘류류류류류! 원소랑의 손에서 섭선이 륜으로 변화하였다.


그것은 바로 천형륜이었다. 천형륜이 섬전처럼 회전하며 군검우를 짓쳐들었다. 깡! 까까까깡! 군검우의 검이 허공 중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며 짓쳐드는 천형륜의 회전공격을 모조리 막았다. 원소랑은 군검우의 놀라운 신위에 경악했다. 진설하도 망연한 표정이었다. 군검우가 음산하게 소리쳤다. "이것이 너의 전부냐?" "……!" "네게 천장비독을 보여주겠다!" 검을 들지 않은 군검우의 한 손이 원소랑을 향해 쏟아졌다. 파악! "으윽!" 원소랑은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이…… 이럴 수가……! 일 년 동안 피나는 수련을 했건만 놈의 일초도 막아내지 못하다니……? 허나…… 조금만 버티면 된다! 조금만 버티면…… 어머님이 수련을 마치고 나오신다!' 원소랑은 이빨을 깨물며 군검우를 향해 천형륜을 던졌다. 군검우가 천형륜을 막을 동안 만큼 원소랑은 시간을 버는 것이다. 휘리리리리릭! 천형륜은 군검우의 전신을 찢어버릴 듯 급격히 회전하며 짓쳐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 팍! 군검우는 회전하는 천형륜을 한 손으로 잡았다. 우지직! 그의 손에서 천형륜이 우르러졌다. "……!" 원소랑은 너무나 황당하여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 일이다. 원소랑은 죽지 않기 위해 대책을 세워야 했다. '나의 양극진기는 아직 미완성이다.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내가 죽을 수 있다. 허나…… 놈의 천장비독을 꺾을 수 있는 것은 그것 뿐…….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내가 죽지만 않는다면 어머님은 나를 살려내실 수 있을 것이다!' 원소랑은 양극진기를 시전하기 위해 전신의 내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우두둑 우두둑! 그의 전신에서 탈골되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옷이 터져 나갔다. '저것이 여불해가 말했던 양극진기인가?' 원소랑의 처음보는 신위에 군검우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여불해의 말을 상기했다. -양극진기를 완성하면 그녀는 불사지체가 되오! 군검우의 시선이 홱! 옆으로 돌아 모옥을 노려보았다. 여불해가 말한 한 달째는 바로 오늘이었다. 그녀는 오늘이 지나면 불사지체가 된다. 그렇다면 아무도 그녀를 꺾지 못한다. 군검우는 모옥이 있는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원소랑이 문제가 아니라 그녀를 죽여야 하는 것이다. 허나 군검우가 모옥으로 가도록 방치할 원소랑이 아니었다. "안돼!" 쐐애액-! 노도와 같은 원소랑의 장력이 군검우를 막았다. 군검우는 신형을 돌려 원소랑의 장력을 막지 않을 수 없었다. 4 한편, 운기조식의 막바지를 치닫고 있는 혈궁주의 전신은 가공할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녀는 무아지경에 빠진 듯 두 눈을 감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부르르 떨고 있었다. 밖에서 일어나는 피튀는 혈전을 그녀 역시 듣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마음은 급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감겨져 있던 혈궁주의 눈이 번쩍 떠졌다. "드디어 양극진기가 완성되었다!" 그녀는 감격에 겨운 얼굴이 되었다.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던 소용돌이 기운이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소용돌이 기운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그녀는 밖으로 뛰쳐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혈궁주의 뒤로 나타나는 시커먼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혈궁주의 눈빛이 흠칫거렸다. 순간 시커먼 그림자의 양손이 혈궁주의 관자놀이를 노리며 짓쳐들었다. 혈궁주는 그것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몸을 날리려 하였다. 파악! 하지만 시커먼 그림자의 양손은 혈궁주의 관자놀이를 수박 터뜨리듯 부숴버렸다. "크윽!" 혈궁주의 입에서 피화살이 날았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 현실에 경악하며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림자는 바로 헌원패성이었다. "흐흐흐…… 아무리 불사지체라 할지라도 노부의 전 내공이 실린 파천황신공의 위력에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길……." "네년이 운기조식을 하고 있을 때 죽일 수도 있었다. 허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네년에게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짧은 시간동안 극명히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 "네년이 가장 행복해 하는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노부는 지금까지 참아왔다. 크하하하핫!" 혈궁주는 부르르 몸을 떨며 신형을 일으키려고 노력하였다. 최소한 자리에서 일어나기라도 해야 헌원패성과 대적할 수 있었다. 일어서려는 혈궁주의 몸이 비틀거렸다. 원소랑에게 있어서 시간은 참으로 더디게 흘렀다. 군검우와 손발을 다투면 다툴 수록 원소랑의 안색은 급변했다. 체내의 진기가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아직 미완성인 양극진기를 무리하게 사용한 부작용이었다. 퍼억!


군검우의 일격이 그의 가슴에 적중되었다. 원소랑은 데구르르 구르며 모옥 앞에까지 나가떨어졌다. 아직까지 자시가 되려면 더 있어야 한다. 그때까지만은 어떻하든 견뎌야 하는데 원소랑으로서는 그것이 용이치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덜컹! 모옥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혈궁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 원소랑은 너무나 기뻐 소리쳤다. 허나 나타난 혈궁주의 두 눈은 혼백이 나간 듯싶었다. 입가로 한줄기 핏물까지 머금고 있었다. "어…… 어머니……." 원소랑은 다시 혈궁주를 불렀다. 조금 전의 기쁨과는 아주 판이한 음성이었다. 원소랑의 음성과 함께 혈궁주의 신형이 옆으로 무너졌다. 혈궁주의 뒤에는 헌원패성이 서 있었다. "허…… 헌원패성……." 원소랑이 공포에 질리며 앉은 자리에서 뒤로 엉덩이 걸음을 쳤다. 헌원패성이 모옥을 나왔다. 그의 표정은 매우 비정하였다. 원소랑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 뒤로 군검우가 있었다. 원소랑은 물러날 길이 없었다. 살려달라고 빌고 싶었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을 살려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가는 것! 원소랑은 이빨을 갈며 군검우를 공격해 들었다. 허나 군검우의 검이 그의 심장을 쑤셨다. "우욱!" 원소랑의 눈이 치켜 떠졌다. 원소랑은 비틀거렸다. "내가 네놈에게 당하다니…… 허나 이 복수는 반드시 한다." 원소랑은 절규하듯 소리쳤다. "나의 핏줄이 설하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다. 네놈은 절대 설하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언제고 내 핏줄은 제 부친과 조모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고 복수를 할 것이다." 그는 핏물을 흘리며 괴소를 보였다. 군검우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설하의 몸 속에 다른 자의 아이가……?' 군검우는 진설하를 돌아보았다. 진설하가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원소랑……." 그녀는 담담한 음성으로 원소랑을 불렀다. "내가 그 더러운 꼴을 당하며 지금까지 왜 살아왔는지 아느냐? 그것은 바로 네놈의 종말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 수모를 참으며 네놈의 곁에 있었던 거다……. 호호호호! 그런데 이제 네놈의 최후를 보게 되었구나!" 진설하는 원소랑을 향해 절규했다.


"모든 것이 네놈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뱃속에 있는 아이도 네놈의 아이로 태어나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게 좋다! 조모(祖母)와 아비와 아들이 동시에 같은 날 제사상을 받게 만들어 주겠다! 제사를 지내줄 자도 없겠지만!" 진설하는 품 속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다. 원소랑의 얼굴이 당황 속에 창백해졌다. "안돼!" 그는 소리쳤다. 허나 진설하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불쌍한 아기…… 태어나봐야…… 어두운 과거 뿐…….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마왕의 핏줄이란 오명을 쓰고 살아가야 한단다…… 이대로 사라지는 게 차라리 너에게 행복할 것이다…….' 비수는 그대로 진설하의 복부를 쑤셨다. 군검우는 굳은 표정으로 진설하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선택을 군검우는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말리지도 않았다. 원소랑이 피를 토하며 고꾸라졌다. 진설하는 군검우에게 단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검설산에서 있었던 이 일을 하얀 눈 속에 묻어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제 31 장 참으로 좋은 모습 1 탁…… 타탁! 쌓인 장작 속에서 진설하의 시체가 타오르고 있었다. 군검우는 그 앞에 극히 초췌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군검우의 옆에는 헌원패성이 자리했다. 그 역시 표정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아프냐?" 문득 지나가는 말처럼 헌원패성이 물었다. "모든 것이 빈 듯합니다. 마치 하나의 기나긴 꿈을 꾼 듯……." 그는 품 속을 뒤져 백사단을 꺼냈다. 백 명의 악인들은 모두 그의 손에 의해 척살되었다. 군검우는 이제는 아무 소용도 없는 백사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그것을 진설하의 몸을 태우고 있는 불길 속으로 집어 던졌다. 잠시지만 그는 백사단을 준 환우금성을 생각했다. 군검우는 백사단이 다 타기를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너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이냐?" 군검우의 뒤에서 헌원패성이 물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머나먼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아무도 저를 알고 있지 않은 그런 곳으로……." 헌원패성이 쓰게 웃었다. "어디를 가든 혼자 가면 너무 외롭지 않겠느냐?" "……!" "아무렴, 혼자보다는 함께가 좋겠지요." 말과 함께 헌원패성의 뒤로 삼 인이 나타났다. 능원평과 사문군, 그리고 사륜거에 앉아 있는 당문연이었다.


순간 군검우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저들은 내가 이곳으로 불렀다. 네가 혈궁주를 찾아 헤매는 동안 저들은 너를 찾아 헤맸다." "……." "너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 모두다." 헌원패성을 비롯한 사 인이 군검우의 주위로 모여 있었다. "군형! 우리도 군형 이상으로 세상에 지쳤소이다. 어딜 가든 함께 가서 쉬도록 합시다. 우리는 영원한 친구가 아니오? 허허허." "전위상이 우리 곁을 떠나던 날…… 저는 마음 속으로 한 가지 맹세한 일이 있습니다. 비겁하게 먼저 떠난 전위상, 그놈과는 달리 저는 영원히 주군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능원평이 미소를 지으며 당문연이 탄 사륜거의 손잡이를 군검우에게 넘겨주었다. "본의 아니게 일 년 동안 내가 끌고 다녔소이다. 아무래도 이제 주인을 찾은 듯하오." 군검우도 미소 지으며 능원평에게서 사륜거를 넘겨 받았다. 그는 당문연을 내려다보았다. "미안하오, 문연……." 군검우는 처음으로 당문연의 이름을 불렀다. "군…… 공자님……." 당문연은 수줍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군검우를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체향, 그의 느낌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당문연은 애써 눈물을 참았다. 2 휘이이잉……. 무심한 한줄기 바람에 갈대들은 허리를 굽히고 흔들렸다. 군검우가 당문연의 사륜거를 밀었다. 당문연의 손목에는 낡은 구리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군예령이 관성량에게, 관성량이 군검우에게 준 것인데 군검우는 당문연에게 주었다. 능원평과 사문군, 그리고 헌원패성은 군검우의 한 발 뒤에서 끝간데 없이 펼쳐진 갈대밭을 천천히 걸었다. 갈대밭의 저 끝에는 황혼이 지고 있었다. 황혼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야." 헌원패성이 앞선 군검우와 당문연을 바라보며 껄껄거리며 웃었다. "우아야…… 남은 여생 동안 이 사부는 평생에 걸쳐 배운 것을 토대로 천장비독에 도전하겠다. 어쩌면 그 독을 해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연아의 실명된 눈도 찾을 수가 있겠지. 대신 그 독공은 소실되겠지만 말이야. 허나 안타까워 마라. 내가 알고 있는 무공 중에도 그 이상 가는 것들이 많으니까 말이야. 대신 조건이 있다. 천장비독이 치유된다면 너희 둘이 혼례를 올려 아들을 낳아야 하고 그놈을 내게 제자로 주어야 한다. 우 아, 저놈을 가지고 환우금성 그 늙은이와 다툰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통이 터진단 말이다. 노부는 맘 편하게 독점할 수 있는 제자가 필요하다." 헌원패성의 말에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 황혼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 갔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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