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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千馬海 제 1 권 立志 편 지은이: 사마달 卷一 目次 序 一. 어둠(暗). 序 二. 빛(光). 序 三. 二年 後 제 1 장 白雲寺의 神龍들 제 2 장 화려한 거지 제 3 장 春陽 제 4 장 식지 않는 시신(屍身) 제 5 장 惡夢 제 6 장 天機聖子 제 7 장 발을 들다 제 8 장 靈物 제 9 장 熱血 제 10 장 出發 제 11 장 誤判

序 一 어둠(暗) 대륙(大陸) 최후의 꿈이 있었다. 천세광명대전(千世光明大殿)…… 사람들은 그것을 위대한 꿈의 성전이라고 불렀다. <위로는 하늘을 다스리고, 아래로는 대지를 지배한다. 십방세계(十方世界)가 경배하고…… 이 땅에는 영원히 혈겁(血劫)이 종식되리라.> 혼(魂)…… 무림의 위대한 혼(魂)들이…… 수천 년 동안 이 환상의 성전을 세우기 위해 열혈을 불살랐다. 아아…… 허나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꿈. 여기 천세광명대전을 세우기 위해 수천 년 동안 죽어간 영혼들이 있다. <일천세야혼(一千世爺魂).> 대륙 최후의 꿈을 위해 신명을 바친 불멸의 일천영웅(一千英雄)들…… 그들은 태고에서 현세까지 이 땅에서 가장 특출하고 위대했던 초인(超人)들이었다. 이천 년 전 대륙의 지배자였던 창황제(敞皇帝). 그는 일천세야혼 중에서도 그 불멸의 꿈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었다. 혼돈과 방황 속에서 최초로 대륙을 통일한 창황제의 신화(神話)! 그는 하늘이 내려준 태대오대중보(太大五代重寶)를 지니고 만천하를 인(仁)으로 다스렸다. 천하는 태평성대하니 만인이 그를 우러러 칭송했다. -오오…… 위대한 창황제여, 당신께서 이룩한 이 빛나는 업적이야말로 곧 천세광명대전이 아니겠는가? 허나 창황제는 말년에 이르러 고개를 내저었다. 화려한 궁궐을 굽어보며 그는 씁쓸하게 미소했다.


-처음에는 본제도 천세광명대전을 이루었다고 믿었다. 허나 군주의 치민(治民)은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본제가 죽고 나면 화평은 깨어지고 다툼과 분열이 다시 일어날테니 이를 어찌 천세광명대전이라 하겠는가? 허허…… 천세광명대전은 본제의 생에 있어 한낱 환상이었다. 과연 창황제가 죽자, 천하는 다시 찢겨진 채 혼돈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천 사백 년 전, 대륙은 위대한 불세출의 마존(魔尊)을 탄생시켰다. 살가마후(殺迦魔侯) 단목성(檀木聖). 그는 전설의 마교(魔敎)를 창건한 후 십만대산의 정상을 밟고 포효했다. -천하만물의 탄생은 어둠과 혼돈 속에서 이루어졌다. 마(魔)의 이름으로 이 땅에 천세광명대전을 세우리라. 중원대륙(中原大陸)이 무너지고…… 팔황(八荒)이…… 천축(天竺)이…… 막왜(漠矮)와 사해(四海)가 그의 발아래 짓밟혔다. 지상최강의 마공 천절마천공(天絶魔天功)과 일만 마교도의 가공할 힘에 천하는 마침내 피로 통일되었다. 마교의 공포아래 천하의 모든 다툼과 분열은 종식되었다. 허나, 정작 살가마후는 그러한 천하를 굽어보며 탄식하고야 말았다. -어리석었다…… 공포의 마력(魔力)으로 하늘을 지배하고 천하에 군림한들 천세광명대전의 위대한 뜻에는 멀어져갈 뿐이다. 돌아가리라…… 이후 마교(魔敎)는 영원히 어둠으로 묻히리라. 그렇다. 살가마후는 천세광명대전이 하늘과 땅, 만민이 신심을 모두 얻어야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대한 마존은 눈물을 흘리며 물러났다. 구백년전(九百年前), 천하(天下)를 문필로 휘어잡은 대석학 성문대공(聖文大公)과 불력(佛力)으로 구주팔황을 뒤흔든 생불(生佛) 불성노야(佛聖老爺)가 나타났다. 드디어 대륙에는 완벽한 조건을 모두 구비한 두 거인이 동시에 출현한 것이다. 천하만민들이 두 거인을 살아있는 신(神)으로 숭배했다. 허나, 오히려 한 하늘아래 두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오른 것이 불행이 되고 말았다. 천하는 급기야 둘로 양분되고 끝내 천세광명대전은 다시 어둠속으로 묻혀 버렸다. 천세광명대전…… 그것은 진정 한낱 환상에 불과한 꿈인가. 허나, 천하인들은 마지막 꿈을 버리지 않았다. 창황제(廠皇帝). 살가마후(殺迦魔侯) 성문대공(聖文大公). 불성노야(佛聖老爺). 일천세야혼 가운데 가장 위대했던 이 네 거인을 사천황야(四天皇爺)라 이름하고, 언젠가 이 사천황야의 모든 능력을 한몸에 지닌 대영웅이 반드시 탄생하리라 믿었다. 오오…… 사천황야의 모든 능력을 지닌 대영웅(大英雄)! 그 탄생은 곳 이 땅에 천세광명대전이 세워짐을 의미하는 게 아니겠는가?


序 二 빛(光) 쏴아아…… 폭우(暴雨)가 어둠 속의 천지를 적시고 있었다. 이곳은 관제묘(關帝廟). 수천 개의 무덤이 괴괴한 정막속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마시고 있다. 하늘의 저주라도 내린 것일까…… 벌써 칠 일째 폭우는 잠시도 쉬지않고 쏟아졌다. 쏴아아…… 여인(女人), 그녀는 잡초가 무성한 무덤가에서 미친 듯이 맨손으로 땅을 파고 있었다. "죽어야 한다…… 죽어야 한다! 너는 인간이 아니야……" 그녀는 실성한 것처럼 울부짖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는 파낸 흙과 함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쏴아아…… 우르릉! 폭우는 뇌성벽력과 함께 더욱 거세게 쏟아졌다. 아기(兒). 태어난 지 얼마 안되는 아기가 그녀 옆에서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웃고 있다. 여인은 덥석 아기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파낸 구덩이 속에 아기를 밀어 넣었다. "이 어미를…… 원망하지 마라. 이것은 네 운명이다." 아기는 그래도 방실방실 웃었다. 여인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크게 진동했다. "저주받은 놈…… 어미의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울음 대신 그 섬뜩한 웃음을 짓더니……" 쏴아아…… 번쩍! 어느 한순간 번개가 어둠속을 창백하게 밝혔다. 그러자 자세히 드러나는 아기의 얼굴…… 아아…… 그 얼굴의 이마와 턱 부근에는 열 십(十) 자의 혈흔(血痕)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여인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경련했다. "암흑의 저주로 잉태된다는 악마의 표식…… 십자쌍흔(十字雙痕)…… 내 어찌 너를 키울 수 있겠느냐……" 툭…… 투둑…… "너는 아비도 없이 태어난 자식이다. 너를 내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없애려고…… 온갖 독초(毒草)를 먹었으나…… 너는 기어이 태어나고 말았다." 투둑…… 여인은 아기의 몸 위에 흙을 덮기 시작했다. 아기의 입에 흙이 들어갔다. 그래도 아기는 방실방실 웃었다. 순간 여인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아아…… 흑흑…… 못하겠어…… 도저히 못하겠어…… 아가야!" 여인은 발작적으로 아기를 흙속에서 꺼내 왈칵 안았다. 그녀는 한없이 흐느끼더니 문득 정어린 시선으로 아기를 응시했다. "그래…… 너도 하나의 생명(生命)이구나. 이 넓은 천하에 과연 네가 숨쉴 곳은 없더란 말이냐?"


갑자기 여인은 뭔가를 떠올린 듯 아기를 안고 벌떡 일어났다. "그래…… 오직 한 곳,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천마해(千馬海)로 너를 보내주마!" 쏴아아…… 여인은 폭우속을 뚫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네가 천마해에 닿고 못닿고는 하늘의 뜻이다. 이 길만이 너의 숙명(宿命)…… 이 어미 음령요희(陰靈妖姬), 마지막 모정으로 그것밖에 해줄 수 없구나." 꾸구구--뇌성벽력이 야천을 뒤흔드는 가운데 그녀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헌데 음령요희라 했는가. 일찍이 사람들은 그녀를 일컬어 이 시대 최고의 색녀(色女)라는 공언을 한 바 있었다. (저 여인도?) (아…… 저 여인도?) 이곳은 어둠 속에 뒤덮인 남해의 한 바닷가. 두 여인(女人)이 망연히 아기가 든 관(棺)을 안고 서 있었다. 그녀들은 한참동안 서로를 넋잃은 듯 바라보더니 동시에 약속이나 한 듯 관(棺)을 바다 위에 띄웠다. 두 개의 관은 거친 파도에 실려 서서히 멀어져 갔다. 음령요희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안색이 극도로 창백할 뿐이었다. 다른 여인은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더없이 허름한 옷차림의 촌부(村婦)였다. 가난에 지친 듯한 그녀의 얼굴은 피골이 상접하여 마치 병자같았다. "아가야…… 못난 어미를 용서해라.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다 못해 너를 버린 나를 용서해다오."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닷속으로 한발 두발 걸어 들어갔다. "하늘이여…… 나의 불쌍한 아기의 길을 인도하소서." 촤아아…… "아가야…… 너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마해로 가거라. 온갖 영화와 행복이 있는 환상의 섬(島)으로……" 어둠에 물든 검은 바다는 순식간에 가련한 촌부를 삼켜 버렸다. 음령요희는 창백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비(雨)…… 굵은 빗줄기가 벌써 보름째 쏟아지고 있었다. "잘 가라, 나의 아들아." 천마해(千馬海). 그것은 환상의 군도(群島)였다. 일천 개의 섬(島)으로 이루어진 전설의 군도, 그 전설은 이천 년 전 한 어부가 바다 위를 질주하는 일천 마리의 흑마(黑馬)를 보았다는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아…… 파도가 스쳐가는 천마해의 형상은 그토록 장엄한 장관을 이루었다고 했다. 숱한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그 지상의 낙원을 향해 떠났던가. 허나, 이제껏 단 한 명도 천마해에서 돌아왔다는 인물은 없었다. *** 폭우(暴雨). 광활한 대초원에도 폭우는 내린다. 뜨거운 대지(大地)를 식히며 장대같은 빗줄기가 내리고 있다. 이곳은 천성봉(天聖峯)---


대중원을 제왕처럼 굽어보는 절벽의 봉우리, 언제부터인가…… 철탑처럼 단단한 체구의 한 인물이 정상을 향해 걷고 있었다. "……" 저벅…… 저벅…… 죽립인(竹笠人)이었다. 억겁의 세월을 두고 걸어온 듯…… 세상의 종말이 도래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듯…… 한 걸음…… 한 걸음…… 죽립인(竹笠人)은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정상(頂上)에 우뚝 섰다. 두 발로 대지(大地)를 짓누르고 두 어깨로 하늘을 떠받든 채--"……" 쏴아아아--꽈르르르--대초원(大草原), 폭우에 춤추는 광무한(光無限)의 대초원이 보인다. 천천히 위로 죽립을 치켜드는 손 아래로 죽립인의 얼굴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아아…… 이 얼굴을 보라. 네모진 얼굴은 주사빛이요, 사자갈기같은 수염은 어깨 너머 용맹하게 휘날린다. 두 눈은 뇌전(雷電)같고 콧날은 태산(泰山)을 박아놓은 듯하다. 정녕 산악(山嶽)같은 기개가 아닌가. "대초원…… 나의 혼(魂), 광야여…… 내가 돌아왔다." 화염(火焰)처럼…… 죽립인의 두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심혼을 불사르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십 년 전 죽음 속으로 떠났던 노부가 모든 것을 잃고 다시 네게로 돌아왔다." 쏴아아…… 꽈르르르--뇌성벽력과 함께 번개줄기가 천지를 갈랐다. "허나…… 기다려라. 천하여, 앞으로 이십년(二十年)…… 이십 년 후면 이 광야에 위대한 태양이 비칠 것이다." 지옥(地獄) 속에라도 다녀온 것일까? 죽립인의 얼굴에는 온갖 만감이 차례로 스쳐갔다. 그는 문득 품속에서 소중히 무엇인가를 안아들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비단강보에 싸인 아기였다. 아기는 죽립인의 품속에서 나오자, 얼굴 위로 쏟아지는 빗물이 즐거운 듯 방실방실 웃었다. 태어난 지 백일(百日) 가량 되었을까. 아기는 정녕 가슴이 떨릴 정도로 귀엽고 아름다왔다. 그런 아기의 피부는 너무나 희어 투명한 광채마저 발했다. 게다가 은하(銀河)를 담은 듯 영롱하게 반짝이는 두 눈동자란! 실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죽립인은 그러한 아기를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내 아들아……" 꽈릉! 번--- 쩍! 폭우는 더욱 억세게 쏟아지고 뇌성벽력이 잿빛 천지를 진동했다. 돌연 죽립인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


그는 하늘을 향해 아기를 번쩍 치켜 들었다. "아들아, 보아라. 네 눈앞에 보이는 저 드넓은 광야가 모두 너의 것이다." 대초원을 노도처럼 질타하는 포효성이었다. 그리고 그 음성에는 활화산(活火山)같은 울분이 서려있었다. "거응(巨鷹)이 열흘을 날아도 끝이 없고, 표범이 한 달을 달려도 닿지 못하는 저 드넓은 대초원이 바로 너의 것이다." 격동…… 그 음성에는 터질 듯한 격동이…… "아들아, 저 대지(大地)는 바로 너의 혼(魂)이며 너의 심장이다." 죽립인의 전신에서 산악같은 기도가 줄기줄기 뻗어나왔다. 아기는 그러한 아버지와 대초원을 말똥말똥한 눈으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얼굴에 맞으며…… "아들아, 기억해라. 저 광야는 우리의 선조가 하나의 신념을 이루기 위해 투쟁하다 묻힌 선열의 대지(大地)이다. 우리는 결코 그 뜻을 잊어서는 안된다." 꽈르르르르--번--- 쩍! "아들아, 너는 알아야 한다. 네가 태어난 곳은 천마해(千馬海)…… 너는 하나의 완벽한 음모와 안배에 의해 태어났다." 순간 죽립인의 전신에 안개가 소용돌이치듯 기이한 백류(白流)가 서렸다. "이 아버지는 네 모친의 처절한 손길을 뿌리치면서까지 그곳을 탈출했다. 아들아……" 아들아…… "너야말로 지난 천팔백년(千八百年) 간 그 누구도 깨지 못한 죽음의 환상(幻想), 천마해를 벗어난 첫 번째 생명이다." 죽음의 환상 천마해, 죽음의 환상 천마해라고 했다. "아들아,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 광야의 위대한 왕족(王族)으로 운명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이 아비…… 이미 목숨을 걸었다." 죽립인의 전신은 격동으로 인해 심하게 진동했다. 광야에 쏟아지는 폭우(暴雨)도 그의 뜨거운 심장을 식히지는 못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운명과 싸워 이겨 이 위대한 광야의 대업을 이루어야 한다." 웅혼(雄魂)이 깃든 일성…… "이 아비의 이름은 위지단(尉遲丹), 너는 그 자랑스러운 이름의 아들이다." 바로 그때였다. 죽립인과 아기의 바로 위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뇌성벽력과 함께 번개줄기가 일었다. 번-쩍--"으아앙!" 아기는 그 장엄한 하늘의 포효를 망연히 바라보더니 돌연 힘차게 울음을 터뜨렸다. "으핫핫핫…… 광야의 아들답게 저 광야가 터져나가도록 울어라." 쿠구구궁…… 천성봉(天聖峯)이 억겁의 잠에서 깨어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광야여…… 치욕과 모멸에 떨던 너의 가슴을 열고 위대한 나의 아들을 맞이하라!" 쏴아아--폭우(暴雨)! 광활한 대초원에 폭우가 내린다.


…… -아들아…… 너는 장차 구주(九州)와 팔황(八荒)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초인이 될 것이니…… 먼 훗날 이 광야에 너의 찬란한 혼(魂)을 심어라…… 너의 위대한 이름을 알려라…… 序 三 이년(二年) 後…… 동굴(洞窟). 이 동굴 속에는 죽음같은 어둠과 정적이 깔려 있었다. 뭉클…… 뭉클…… 기이한 백색기류가 그 어둠 속을 조용히 유영하는데…… 빛(光)! 갑자기 어둠 속에서 별(星)이 솟아나듯 하나의 빛덩어리가 나타났다. 그것은 야명주(夜明珠), 그리고 야명주를 움켜쥐고 있는 것은 도저히 살아있는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앙상한 손(手)이었다. 손(手), 이 손은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었다. 천천히…… 손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야명주의 빛무리 속에 한 아기가 나타났다. 두 살 가량 되었을까. 눈이 시리도록 투명한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를 소유한 아기는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전하의…… 아기님이십니까?" "그렇다, 혁련노인." "……" "지난 이 년 간 혁련노인, 그대를 찾았다. 어찌할텐가?" "……" 무거운 침묵 속에 고요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야명주를 움켜쥔 해골같은 손(手), 그 손이 문득 심하게 떨림을 일으켰다. "전하, 천마해(千馬海)는 불멸의 마역입니다. 그곳에 도전함은 장차 더 큰 비극만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순간 어둠 속을 뒤흔들며 웅혼이 서린 앙천대소가 터져 울렸다. "천마해가 비록 가공할 죽음의 단체이긴 하나…… 그곳에서 나를 능가할 자는 세 명이 넘지 않는다." "허나, 이인(二人)이 합쳤을 때는 전하를 꺾을 자가 수백입니다." 이 음성…… 이 음성은 마치 형체없는 바람소리처럼 공허하고 음유(陰幽)했다. "그것 때문에 혁련노인 그대를 찾았다." "노신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 아이를 맡아다오." "……!" 순간 야명주를 움켜쥔 손이 벼락을 맞은 듯 심하게 떨렸다. 그것은 갈등인가. 칡넝쿨같은 그 손마디는 어둠 속에서 은은히 붉은 빛으로 광채를 발했다. "전하, 그것은……" "이 아이는 아직 태어난 지 천일(千日)이 지나지 않았다. 생사현(生死玄)과 임독양맥은 이미 내가


타통했다." 오오…… 이 무슨 엄청난 말인가. 보통 무림인(武林人)이 평생을 걸려도 임독양맥을 타통하기는 커녕 상상조차 못할 일이거늘, 태어난 지 천일(千日)도 안되는 아기가 생사현까지 뚫렸단 말인가? "남은 것은 천하(天下)에 오직 그대만이 알고 있는 일천 년 전 고대천축(古代天竺)의 비전…… 불사승만(不死昇卍)의 비법만 이 아이에게 전해주면 된다." "그…… 그렇다면 이 아기님을 영원불사(永遠不死)의 신체로?" 파지직! 순간 야명주가 칡넝쿨같은 손(手) 안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아아…… 밤하늘에 은하(銀河)가 나타났는가. 수백 조각으로 변한 야명주의 파편은 어둠 속에 흩어진 채 각기 영롱한 광채를 발했다. "불가하오. 불사승만의 비법으로 일천 년 간 죽어간 노신의 선조가 수백 명…… 그 저주의 대법은 나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땅속으로 묻힐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을 완강한 어조였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두 인물의 형체가 드러났다. 노인(老人)--그는 도저히 살아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노인이었다. 흘러내린 백발(白髮)과 수염은 그의 몸을 덮다 못해 동굴 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했다. 이제는 이미 석화(石化)되어 버린 것처럼, 노인은 바닥에 꿈쩍도 않고 정좌해 있었다. 자광(紫光), 그러한 노인의 두 눈에서는 은은한 자광이 갈등을 담은 채 서려 있었다. 그러한 노인의 맞은편에는 사자갈기같은 수염에 철탑(鐵塔)처럼 당당한 체구의 노년인이 두 눈에 이글거리는 불꽃을 담고 있었다. "혁련사! 광야에서 스러진 수천의 원혼들이 그대를 보고 있다." 아아…… 이 노성을 기억하는가? 그는 바로 대초원의 폭우 속에서 광야를 향해 활화산(活火山)처럼 포효하던 죽립인이었다. "그대의 가문(家門) 역시 광야의 가문으로 천년의 녹을 받아왔다. 내가…… 이 위지단이 비록 몰락한 왕족(王族)의 후예이나 아직도 그대와 이어진 군신(君臣)의 끈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 "혁련노인, 이십 년 후 나는 내 아들과 함께 그 불멸의 천마해에 도전할 것이다." 위지단은 놀라우리만큼 차분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의 아들이 불사의 신체가 되지 못한다면…… 기회는 한 번 뿐이다." "……" "나는 나의 아들에게 몇번의 기회를 더 주고 싶은 것이다." 위지단은 뜨거운 시선으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아들을 내려다 보았다. 백발노인 혁련사는 두 눈을 스르르 내리감았다. 번뇌(煩惱)…… 그러한 혁련사의 노안에는 숨길 수 없는 번뇌와 갈등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터질 듯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전하…… 노신의 세수 백 칠십입니다. 이제 남은 수명은 이년(二年), 이 년 후에 아기님을 데려가십시오." 혁련사는 드디어 결심한 듯 육중한 음성으로 한자 한자 말을 이었다.


"십 오 년 후에 아기님의 신체에 불사승만(不死昇卍)의 힘이 나올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이 한 마디…… 이 한 마디 말을 흘려내는 것이 그토록 힘들었던가. 혁련사는 갑자기 십 년은 더 늙어버린 듯 보였다. 순간 위지단은 격동으로 인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맙다, 혁련노인!" "천마해의 붕괴가…… 과연 그 정도로 이루어질지 그것만이 의문입니다." 혁련사는 여전히 두 눈을 내리감은 채 무거운 음성을 흘려냈다. 위지단의 두 눈에 줄기줄기 신광이 뻗어나왔다. "그것은 나의 일이다." 위지단은 아기를 한차례 내려다 보았다. "나의 아들을 부탁한다." 스스스…… 순간 그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희미하게 연기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장차…… 나는 나의 아들을 고금유사 이래 가장 강한 고수로 키울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위지단의 신형은 완전히 장내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천지개벽 이전의 고요한 적막이 장내에 내려앉았다. 혁련사는 문득 두 눈을 뜨고 아기를 응시했다. 아…… 언제 잠에서 깨어났는가? 아기는 한 쌍 영롱한 눈동자를 굴리며 혁련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기는 방긋 웃었다. 그 햇살같은 미소! 순간 혁련사의 노안에 감동의 빛이 떠올랐다. 그의 노안에 이미 오래 전에 잊어버린 듯한 미소가 잔잔하게 피어 올랐다. 그는 아기를 안아들었다. 그는 아기의 뺨을 쓰다듬으며 깊게 탄식했다. "아기님은…… 너무도 많은 시련을 안고 태어나셨소." 칡넝쿨같은 그의 앙상한 손마디에 따뜻한 온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이 혁련사가…… 죽기 전에 아기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한 번 같이 연구해 봅시다." 아기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열심히 뭔가를 생각하는 듯 혁련사를 응시했다. 정녕 천진무구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허허……" 백 수십 년을 무감동하게 살아온 노인 혁련사, 그의 주름살 얽힌 눈꼬리에 문득 이슬이 맺혔다. 허허(虛虛)로운 그의 웃음은 한동안 동굴 속을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 "허허……" 제 1 장 白雲寺의 神龍들 유수(流水)……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 산천초목(山川草木)에 백설(白雪)이 내려앉는가 하면, 꽃피는 가춘(佳春)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러기를 몇 개 성상(星霜)이 흘렀을까? …… 파양호(播陽湖)를 끼고 있는 남창부(南昌府)에는 하나의 명소(名所)가 있었다. 세인(世人)들이 일컬어 부르기를 백운사(白雲寺)라고 했다.


백운사(白雲寺). 본래 이곳은 여느 사찰처럼 부처를 모시는 장소였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이 백운사에는 한 인간을 모시는 인물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진대선생(眞大先生)! 이 이름은 남창부 내 뿐만 아니라 천하(天下)에 거의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인재(人才)를 양성해온 국사(國師)였다. 그는 나이 고희에 이르자 스스로 낙향하여 백운사에 은거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당대의 수재(秀才)라는 수재들은 속속 백운사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자금성(紫禁城)의 진주 벽랑공주(碧浪公主)까지 수시로 드나드니…… 백운사(白雲寺)는 바야흐로 어린 용(龍)과 봉(鳳)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 천하제일서원(天下第一書院)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찌르르…… 찡! 찡! 찌르르…… 고색창연한 법당의 거대한 기둥을 배경으로 화원(花園)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춘풍(春風)에 하늘거리는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 그리고 벌, 나비들…… 이 화원은 정녕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왔다. 누구나 이 화원 속에 서서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면 자신이 천상세계(天上世界)에 와 있음을 깨달으리라. 이름하여 여래비원(如來秘苑), 이곳은 바로 백운사 주지승인 다비선승(多悲仙僧)의 보금자리였다. 다비선승(多悲仙僧)은 불법(佛法)보다 화예(花藝)에 더 관심이 있는 괴승이었다. 그는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십 년을 노력한 끝에 이 여래비원을 만들었다. 다비선승은 또한 성격이 급하고 괴퍅했다. 그는 그 누구도 이 여래비원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비선승의 여래비원을 구경하려면 생명(生命)을 걸어야 한다. 이것은 이 백운사의 승려들 사이에 알려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안개(霧)…… 아스라이 깔린 새벽안개 속에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영롱한 이슬을 머금어 여래비원의 아름다운 기화(奇花)들은 한층 더 눈부시게 일렁이고 있었다. 헌데 이때다. "그 노스님 다른건 다 괜찮은데 괜히 고상한 척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후후……" 화원의 한가운데서 청아한 소년(少年)의 음성이 울려 나왔다. 아, 십 오륙 세 가량 되었을까? 백의(白衣)에 준미수려한 용안을 지닌 미소년(美少年)이었다. 소년은 흑단처럼 윤이 나는 머리결을 등뒤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러한 소년의 얼굴색은 너무나 희어 약간 창백해 보일 지경이었다. 허나, 총명한 영기를 담은 두 깊숙한 눈동자는 활기에 차 빛나고 있었다. 어딘가 허약해 보이는 듯한 체구였으나 자세히 보면 딱 균형잡힌 근골, 정녕 신비롭고 고귀한 기운을 지닌 미소년(美少年)이었다. 이 순간 소년은 무엇인가를 찾는 듯 화원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그 고상한 얼굴이 일그러지면 보기가 어떨까?" 소년의 입가에는 선명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얼마 전 북경(北京)에서 칠엽단홍(七葉丹紅)을 가져 왔겠다…… 아무도 모르게 모란화들 속에


숨겨놓고 홀로 감상하고 있었다." 스으윽…… 소년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한 소년의 신비로운 두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흥, 불전(佛錢)을 쓱싹 해서 삼 년 동안이나 모으고 모으더니 그 비싼 칠엽단홍 한 뿌리를 사버리다니…… 그것이 부처님의 뜻인가?" 소년은 영 비위가 뒤틀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때 소년의 두 눈에 문득 이채가 빠르게 스쳤다. "여기 있군." 소년의 시선은 화사하게 만개(滿開)한 모란화(牡丹花)들 사이의 한 잡초에 고정되어 있었다. 잡초(雜草), 그렇다.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별 볼품이 없는 하나의 잡초같았다. 허나, 이 잡초는 매우 특이한 모양이었다. 한 가지에 잎사귀가 똑같이 일곱 개씩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칠엽단홍(七葉丹紅)! 그것은 희대의 성약(聖藥) 만년설지(萬年雪芝)나 천년하수오보다 더 구하기 어렵다고 알려진 칠엽단홍이었다. -칠엽단홍의 향기(香氣)를 맡을 수 있는 인물은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다. 전설(傳說)처럼 내려오는 한 마디였다. 허나 소년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 볼품없는 잡초가 꽃이 피면 그토록 아름답단 말인가?" 갑자기 소년은 칠엽단홍을 홱 낚아챘다. 후두둑! 칠엽단홍은 뿌리째 뽑혀져 나왔다. 아아…… 만약 다른 인물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놀라 눈알이 튀어 나왔으리라. 소년은 정녕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 여래비원의 모든 희귀한 기화이초(奇花異草)를 다 합쳐도 칠엽단홍 하나에는 미치지 못한다. 스윽…… 소년은 맑은 두 눈에 웃음기를 담고 뽑아든 칠엽단홍을 든 채 유유히 걸었다. "그 노스님…… 올 때가 되었는데……" 바로 그때였다. 여래비원 입구에 하나의 비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붉은 가사를 걸친 노승(老僧), 인상이 약간 흉험했으나 형형한 두 눈에서는 불자(佛子)의 자비와 위엄이 완연히 서려있었다. 이러한 풍모의 소유자는 이 백운사에 단 한 명밖에 없다. 그는 바로 백운사의 주지승인 다비(多悲)였다. "음? 너는……" 다비선승은 소년을 발견하자 흠칫 노구를 멈추었다. 그는 노안에 못마땅한 빛을 숨기지 못하며 근엄하게 물었다. "아미타불…… 아침부터 이곳에 웬일이냐? 제강." 종(鐘)이 울리듯 고막을 뒤흔드는 음성……


제강(啼康). 그것이 소년의 이름인가? 소년 제강은 순간 입가에 맑은 미소를 지었다. "스님의 화원에 감탄하여 무례인 줄 알면서도 들어왔습니다." "화원이 아니라 여래비원이다." "후후…… 그렇습니다. 노스님의 화예(花藝) 경지는 정녕 선인지도(仙人之道)를 넘어선 듯합니다." 소년 제강은 새삼 정중히 예를 표해 보였다. 다비선승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조금 흐뭇한 웃음을 머금었다. "당연하다. 헌데…… 네 손에 든 것이……" "아, 이것 말입니까?" 제강은 칠엽단홍을 다비선승의 눈 앞에 번쩍 들어 보였다. 순간 다비선승의 안색은 밀납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치…… 치…… 칠엽단홍!" 다비선승의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것은 전신으로 확산되었다. 제강은 이미 예상했던 일임에도 바싹 긴장했다. (마치 악귀의 얼굴같군! 부처님도 놀라 도망가겠다!) 그때, "네…… 이…… 놈……" 다비선승이 후들후들 노구를 떨며 제강에게 다가왔다. "이--- 노--- 옴!" 적막하고 고요하던 새벽의 공기가 놀라 산산이 흩어졌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그것이 무엇인데 함부로……" "이 잡초가 뭐 특별한 데라도 있습니까?" 제강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애써 태연히 응수했다. 다비선승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잡초?" "모란꽃을 감상하다 잡초를 발견했습니다." 흔들…… 흔들…… 제강은 뽑아든 칠엽단홍의 목부분을 잡고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다비선승은 마치 자신의 목이 부러져 나가는 듯 허우적거렸다. "부…… 부러지겠다!" "하하…… 노스님, 잡초 하나 부러지든 꺾어지든 무슨 상관입니까?" 휙! 제강은 아무렇게나 칠엽단홍을 한옆에 내던졌다. 순간 다비선승은 번개같이 몸을 날려 칠엽단홍을 받아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몸놀림이다. 그 비대한 몸집이 마치 제비처럼 허공을 날은 것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왜 그러십니까? 노스님." "네이놈! 다행히 이 칠엽단홍이 부러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부러졌다면 네 목이 온전치 못했으리라!" "설마하니 그까짓 풀포기 따위에 연연하여 극락(極樂)을 포기하고 지옥(地獄)으로 가시겠단 말입니까?" 제강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재빨리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소생의 잘못이라면 용서하십시오. 허나, 소생은 노스님이 아끼는 화원에……" "여래비원!"


"여래비원에…… 잡초나 벌레 따위가 서식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끄럽다.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라!"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스윽…… 제강은 유유히 몸을 돌려 장내에서 사라져 갔다. 다비선승은 그 뒷모습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러다 그는 황급히 후들 후들 떨리는 손에 들려진 칠엽단홍을 내려다보았다. "맙소사…… 이 천하에 귀한 꽃이 이 모양으로……" 다비선승은 칠엽단홍을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히 감싸들었다. 그때였다. "허허…… 늙은 중, 내가 뭐랬나? 제강, 그와는 친하게 사귀는 게 좋다고 했지 않은가?" 온화한 웃음소리와 함께 선풍도골의 청수한 노문사(老文士)가 나타났다. "그 아이와 싸울 수록 손해보는 것은 자네일세." "아미타불…… 저 아이는 대체 어찌된 아이인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일년(一年)이 넘었는데 글 읽는 소리 한 번 못들었어." 다비선승은 노문사를 보자 허탈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허구한날 단수높은 사고만 치고 다니니…… 천하기재(天下奇才)들만 모여드는 자네 옆에 어찌 저런 소귀(少鬼)가 있단 말인가?" 소귀(少鬼)라는 말에 노문사는 빙그레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나 진대선생(眞大先生)이란 이름이 무불통지(無不通知)는 아닐세. 저 아이에 대해서는 노부도 어떤 제재를 가하고 싶지 않네." 진대선생(眞大先生)이라고 했는가. 그렇다. 노문사는 바로 당대의 석학 진대선생이었다. "늙은 중…… 어서 그 칠엽단홍이나 살펴보게. 저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는 훗날 자네도 알게 될 걸세." "아미타불……" 다비선승은 그제야 잊었다는 듯 황급히 칠엽단홍을 들고 총총히 화원 속으로 사라졌다. "소귀가 커 보아야 대귀(大鬼)로나 변하겠지…… 아미타불……" "허허……" 백운사(白雲寺). 여기는 천하의 영재들이 구름같이 모여있는 이 나라 최고의 서원(書院)인 백운사였다. 제 2 장 화려한 거지 와룡협(臥龍峽). 촤아아아아…… 쿠르르르--- 릉---! 거센 탁류가 천길 낭떠러지 사이를 굽이치며 흐르고 있었다. 포말…… 하얀 포말은 구름처럼 양쪽 천길 벼랑 위로 피어올랐다. 이곳은 파양호 연변의 천연 협곡, 전설(傳說)에 의하면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가 천년한(千年恨)을 품은 채 웅크리고 있다던가? 하여 이곳에는 내노라 하는 뱃사공도 얼씬하지 않았다. 헌데…… 배(船). 한 척의 조그만 목선(木船)이 탁류에 떠내려오고 있었다. 목선은 금세라도 뒤집어질 듯 요동쳤다.


그러한 목선에는 하나의 밧줄이 묶여진 채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대체 누군가? 이 연약한 밧줄 하나에 목숨을 걸고 내려오는 인물은…… 소년(少年), 그는 아름다운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미소년(美少年)이었다. 그렇다. 그는 바로 백운사에 기거하고 있는 제강이었다. 그는 뱃전에 팔베개를 지고 편히 누워 있었다. "……" 자욱한 물보라…… 그 너머로 파란 하늘이 언뜻언뜻 보인다. 콰르르르--격랑하는 급류 속에 배가 뒤집힐 듯 요동쳤다. 허나 제강은 그런 것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했다. 고독…… 제강의 준수한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고독의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죽은 듯 누워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천년거암(千年巨岩)처럼 무거워 보였다. 문득 그의 입가에는 더없이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아버님……) 화창한 봄날…… 하늘의 뭉게구름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영상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철탑처럼 준엄한 영상이었다. (아버님…… 소자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것도 단 하나 뿐인…… 헌데도 당신은 훈훈한 부정(父情) 한 번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콰르르르--격탕하는 탁류 속에 부서지는 포말이 하늘을 덮는다. (소자 굳이 따뜻한 부정을 바라는 것이 아니나…… 당신께서 소자에게 바라는 목적은 대체 무엇입니까?) 제강은 두 눈을 스르르 내리감았다. 문득 그의 준수한 얼굴에 우수어린 미소가 희미하게 스쳤다. (당신께선 늘 말씀하셨지요……) -아들아……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하늘이 내린 운명의 굴레를 쓰고 나온다 한다…… 허나, 그것은 나약한 자들이 자기 도피를 위해 지껄이는 말이다. 너만은…… 너만은 인간이 숙명적이기를 거부해야 한다. 달관하기 이전에…… 그 운명에 도전하여 네 힘으로 그 운명을 네 편에 서게 하라…… -아들아…… 통천문(通天文)을 배우고…… 만사기예(萬事奇藝)를 닦아…… 인간이 익힐 수 있는 것은 남김없이 배워라…… 더 이상 강해질 수 없을 때까지…… 그래서 인간의 한계가 무한함을, 인간이 저토록 위대해질 수 있음을 보여다오…… 콰르르르…… 촤아아……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제강의 맑은 두 눈에 짙은 우수가 번졌다. (운명…… 숙명에의 도전…… 내 나이가 아직 어린 탓인가? 모두가 먼 허공에서 들려오듯 실감이 나지 않는다!) 문득 제강은 고개를 돌려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보았다. (이 와룡협과 백운사에 정(情)을 둔 지도 벌써 일 년…… 이제 떠날 날이 멀지 않았군!)


그때였다. 촤악! 격탕하는 물살을 뚫고 한 마리의 큰 잉어가 튀어올랐다. 제강의 맑은 두 눈에 순간 이채가 빛났다. 동시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 그것은 이미 고독이 아닌 그 특유의 치기어린 미소였다. "이 놈, 자유가 좋다고 내 앞에서 자랑하는 거냐? 고약한 놈…… 너를 잡아서 회쳐 먹고 말겠다." 스윽! 제강은 낚싯대를 드리웠다. 하얀 포말은 뱃전에서 부서지고…… 이 봄날의 오후는 정녕 좋았다. 허나, 제강의 풍류(風流)는 곧 깨어지고 말았다. (음?) 멀리 천길 낭떠러지 위로 비조(飛鳥)처럼 날아가는 두 개의 그림자를 발견한 때문이었다. 추격자들인가? 뒤이어 십여 개의 붉은 그림자들이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은 실로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림인(武林人)들……" 제강은 나직이 되뇌였다. 그는 요 며칠 사이에 종종 백운사와 파양호 연변을 출몰하는 무림인들을 보았다. 허나, 그는 곧 그러한 것들을 뇌리에서 떨쳐 버렸다. "좋은 날씨야…… 후후…… 그러고 보니 내일은 그 맹랑한 거지를 만나는 날이군." *** 거지. 그는 소년(少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고 청년(靑年)으로 보기에는 아직 어렸다. 십 육칠 세 가량 되었을까. 거지 중에도 상거지였다. 비쩍 말라서 우스꽝스러운 몰골인데 몸에 걸친 의복은 화려한 금포넝마였다. 땟국물이 주르르 흐르는 금포넝마는 너무 커서 마치 자루를 뒤집어 쓴 듯했다. "킁킁……" 어슬렁…… 어슬렁…… 금포거지는 남창부의 화려한 밤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는 수백 고서점(古書店)들이 운집한 문성대로를 거닐고 있었다. 물론 금포거지는 이 거리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킁킁…… 이놈의 책(冊) 냄새…… 벌써 골치가 지끈거리는군." 금포거지는 눈썹을 확 찌푸렸다. 그러한 금포거지의 표정은 금세 눈물이라도 쏟아질 듯 슬퍼보였다. 그는 사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곧 큰 고서점 앞에 우뚝 멈추어섰다. <현암고서원(玄岩高書院).> 현판에는 붉은 바탕에 금빛 필치로 그렇게 쓰여져 있었다. 본래 이 현암고서원은 천하에 없는 책이 없다는 유명한 서점이었다. 자금성의 명가(名家)나 황실에서도 종종 찾아오는 곳인 것이다. 구걸을 할 속셈이라면 거지는 제대로 걸음을 멈춘 셈이었다. "저게 어서 오십시오…… 하는 글인가?" 금포거지는 현판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헤벌쭉 웃었다.


"좋아, 좋아…… 처음부터 마음에 드는군." 스으윽…… 금포거지는 성큼성큼 현암고서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점원으로 보이는 중년문사(中年文士)가 황급히 마중나왔다. "손님, 무얼 찾으……"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중년문사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거지새끼!) 금포거지는 시커먼 손을 쓱 내밀더니 대뜸 말했다. "나 책 한 권 주시오." "책? 무슨 책을?" "음, 천하에서 가장 어려운 책." "네가 읽으려고?" "아니, 나는 까막눈이오." "그러면?" "헛헛…… 형님한테 생일 선물로 주려고 하오." (헛헛?) 중년문사는 아까부터 속이 뒤틀리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은자는 가져 왔느냐?" "은자?" 금포거지는 두 눈을 껌벅거리더니 씨익 웃었다. "이런 구두쇠양반 같으니라구. 저 많은 책 중에서 그저 한 권만 뽑아주면 될텐데 거지한테 은자를 내란 말이오?" 금포거지는 말과 함께 중년문사의 옆구리를 꾹 쥐어박았다. "안그래? 구두쇠 양반." "흐흐흑……" 중년문사의 입에서 괴상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하루종일 손님들에게 시달린 탓에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그는 얼굴이 악귀처럼 흉험하게 변한 채 금포거지의 멱살을 홱 움켜잡았다. "이 놈, 썩 꺼져라!" "구두쇠…… 양…… 반?" "꺼져!" 중년문사는 그대로 금포거지를 밀어버렸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쿠다당! 금포거지가 광풍에 날린 낙엽처럼 날아간 곳은 엉뚱하게도 정반대 방향인 내부의 서가쪽이었다. 중년문사는 움찔 놀랐다. (그냥 살짝 밀었을 뿐인데……) 허나, 더욱 놀랄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금포거지의 몸이 닿자마자 엄청난 크기의 서가가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쓰러지는 게 아닌가. 와지끈! 후두두둑…… 수백 권의 책자(冊子)가 일시에 와르르 쏟아졌다. "아…… 아니!"


중년문사는 대경하여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것은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한 수십 명이 밀어도 끄떡없을 서가가 어찌 저토록 쉽게 무너진단 말인가. "아이고…… 골이야. 저 양반…… 정말 너무하는군. 아이고…… 머리통이야." 금포거지는 금세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듯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비틀…… 금포거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으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다른 서가에 한 손을 짚었다. 그러자 이 무슨 괴변인가. 이번에는 그 서가가 그대로 맥없이 넘어갔다. 연달아 그 충격으로 대여섯 개의 서가가 차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소란이 벌어졌다. 와장창! 콰르르--콰지지직! 중년문사의 얼굴은 완전히 핏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건 악몽이다!) 허나 정작 금포거지는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니…… 이것들은 모두 지푸라기로 만들었나?" 금포거지는 두 눈을 꿈벅거리더니 중년문사를 향해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구두쇠 양반, 이건 내 책임이 아니오. 순전히 서가를 허약하게 지은 당신 책임이오." "으……" 중년문사의 전신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세상에…… 세상에……) 중년문사가 넋을 잃고 망부석처럼 서 있는 순간이었다. 쾅! 안쪽에서 문을 왈칵 열고 뛰쳐나오는 노문사(老文士)가 있었다. "이게 웬 소란이냐?" 노문사는 장내의 상황을 살핀 순간 두 눈을 째져라 부릅떴다. "이…… 이런…… 어떤 놈이!" 노문사의 시선이 금포거지에게 옮겨졌다. 순간 노문사의 안색이 누렇게 돌변했다. 그것은 마치 지옥(地獄)에서 뛰쳐나온 악귀를 대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노문사는 허겁지겁 금포거지에게 달려오더니 황망히 두 손을 모았다. "아이고…… 어디 다친 데는 없는가? 자네인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 모습에 중년문사는 또 한 번 넋을 잃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되가는 판국이냐?) 노문사는 원래 현암고서원의 주인(主人)인 현암노사(玄岩老士)였다. 그는 평소 인색하고 냉정하기로 유명했다. 헌데 그러한 현암노사가 쓰러진 책자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한낱 거지에게 정신나간 사람모양 환대를 보이다니…… (노사께서 미친 게 아닐까?) 중년문사의 뇌리에 빠르게 스친 생각이었다. 제 3 장 春 陽 (울면서 웃고 있군.) 금포거지는 현암노사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송송 맺히는건 식은땀이다. 그 얼굴로 현암노사는 누런 이를 드러낸 채 웃고 있는 것이다. 금포거지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날 아시오? 그런 노인장은 누구시오?" "이곳의 주인이라네." "아……" 순간, 금포거지는 깜빡했다는 듯 머리에 손을 가져가며 아픈 시늉을 하더니 힘없이 물었다. "주인장께서는 매우 온정이 많으신 듯하구려……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소?" "공자의 부탁이라면 내 수염이라도 뽑아 주겠네." "나 책 한 권만 주시오. 천하에서 가장 어려운 것으로." "그런 것은 무엇에 쓰려고?" 현암노사는 움찔 당혹성을 흘려냈다. 금포거지는 빙긋 웃었다. "아까도 말했었는데…… 내가 존경하는 형님에게 줄 것이오." "공자에게 형님이?" 현암노사는 믿을 수 없는 듯 재차 물었다. 금포거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반년 전에 만났지. 그의 생일이 오늘이야…… 그래서 선물을 하나 하려고 하오." "공자가 형님으로 모실 정도면 굉장하겠군." 현암노사는 비록 말은 그렇게 했으나 내심으로는 소름이 끼쳤다. (이런 골치덩어리가 형님으로 모실 정도라면 아예 한 술 더 뜨는 괴물일 것이다!) 금포거지는 그러한 상대의 내심을 헤아리려 하지 않았다. "사실이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풍류가 있고…… 지혜가 무한하오. 그야말로 굉장한 거물(巨物)이오." "……!" "그래서 나이가 이 몸보다 한 살이 어린데도 그냥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소." "그…… 랬나?" 현암노사는 가슴에 찬바람이 이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그렇다면 그는 이 소악마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겠군. 그런 악당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이다!) 현암노사가 망연히 말을 잃고 서 있자, 금포거지는 시큰둥한 어조로 물었다. "주인장, 책을 줄거요, 안줄거요?" "아……" 현암노사는 상념에서 깨어나 멈칫 고개를 들었다. 금포거지의 고개가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현암노사는 기겁했다. (어이구……) 그는 재빨리 중년문사를 향해 소리쳤다. "청원(靑元), 어서 화소고답본(華素古沓本)을 가져오너라!" "알겠습니다." 중년문사는 급히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곧 한 권의 낡은 책자를 들고 왔다. 너무나 낡아 군데군데 찢겨지기까지 한 고서(古書)였다. 금포거지는 낡은 고서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지독히 닳아 빠졌군. 이게…… 천하에서 가장 어려운 책이오?" "그렇다네. 고대(古代) 회회문자(回回文字)로 기록한 고본이지."


현암노사는 진중히 말을 이었다. "노부는 물론…… 본 서원이 생긴 오백 년 이래 그 화소고답본을 해독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네." "정말이오?" "물론이네. 그보다 더 어려운 책자는 이 세상에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네." 현암노사가 거듭 그 난해함을 설명하자 금포거지는 비로소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됐소. 주인장, 고맙소. 앞으로 종종 들르겠소." (또 온다고?) 현암노사의 안색이 우거지상으로 변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금포거지는 당당한 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분명 어려워도 한참 어렵다고 했겠다…… 헛헛…… 이번에야말로 형님을 멋지게 골탕먹여야겠군." 스윽…… 그는 순식간에 어둠의 거리로 사라졌다. 현암노사의 얼굴에 그제야 분노가 소용돌이 쳤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중년문사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청원! 이 멍청한 놈, 귀천공자(鬼天公子)도 못알아 보느냐?" 귀천공자(鬼天公子)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중년문사는 불에 덴 듯 뒤로 물러섰다. "귀…… 귀천…… 그가 바로……" "이 눈치없는 놈……" 현암노사의 신색은 점점 더 험하게 변해갔다. "너는 당장 해고다, 해고!" *** 쿠르르릉…… 쏴아아아…… 와룡협(臥龍峽)에서 제강은 하룻밤을 보냈다. 동천(東天)에는 태양이 아스라이 떠오르고 있었으나 제강은 낚싯대를 드리운 채 미동도 않고 누워 있었다. 그가 회쳐 먹겠다고 벼르던 고기는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우니 천지(天地)가 모두 그의 것이라…… 제강은 태양의 양광(陽光)을 받아 금빛으로 물드는 물보라를 보자 문득 시정(詩情)을 느꼈다. "청산유수(靑山流水)야……" 산(山)은 높고 높아 창공을 뚫고, 흐르고 흘러가는 녹수(綠水)는 거침이 없네. 전에는 청산(靑山)은 청산이요, 녹수(綠水)는 녹수더니, 어제는 청산이 곧 녹수요, 녹수가 곧 청산이었다. 오늘에는 어느 것이 산이고 물인지도 모르겠구나. 저 부운(浮雲)에게 묻노니 어느 것이 옳으냐? 아서라, 자연(自然)과 아(我)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을 그 모든 것이 거칠 것 없는 장부의 가슴인가 하노라. 낭랑한 목소리…… 제강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웅지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후후……)


헌데,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싸늘한 코웃음 소리와 함께 소녀(少女)의 옥음(玉音)이 들려왔다. "흥! 별볼일 없는 백수건달 주제에 장부 운운하다니…… 정말 낯짝도 두껍군." "오……" 순간 제강의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가 스쳤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낭랑한 대소를 터뜨렸다. "아하하…… 못난 꼬마색시께서 왕림하셨구나." "이 악당! 말조심 해요. 누가 못난 색시야?" 물보라 건너 멀리 절벽 위의 갈대밭, 한 홍의소녀(紅衣少女)가 허리에 양손을 짚은 채 매섭게 제강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강은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하하…… 운지(雲芝), 암코양이처럼 쏘아대지만 말고 자신 있으면 오빠 곁으로 헤엄쳐 오지 그래." 그러자 홍의소녀는 냅다 코방귀를 날리더니 치마를 둘둘 말아 올리는 게 아닌가. "흥…… 누가 겁낼 줄 알고?" (……!) 제강은 흠칫했다. 설마하니 정말 이 사나운 와룡협의 급류 속으로 뛰어내리려 한단 말인가? 언뜻 햇살에 반사된 그녀의 두 다리가 눈이 부시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슈욱……! 홍의소녀의 가냘픈 몸이 나비처럼 허공에 떴다. 유성(流星)이 떨어지는가. 슈--- 욱! 그녀의 신형은 긴 꼬리를 그어내며 곧장 제강의 배 위로 날아왔다. 그것은 강호 일류고수들도 흉내낼 수 없는 절묘한 신법(身法)이었다. 허나 역시 역부족인 듯, 그녀의 신형은 중간 지점에서 크게 흔들렸다. 제강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운지!" 위기의 순간, 홍의소녀의 신형이 환상처럼 빙글 회전하더니 솟아오르는 물결을 밟고서 다시 날아올랐다. 아아…… 해연약파(海燕躍波)! 그것은 차라리 눈부시게 느껴질 정도의 초절정 신법이었다. 홍의소녀는 솜털처럼 가볍게 제강의 배 위로 내려섰다. 제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응시했다. "못난 색시, 대단하군." 말은 그렇게 했으나 정작 소녀의 미모는 정반대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이제 겨우 십 사오 세 가량 되었을까. 허나 그녀의 아름다움은 완전히 나이를 초월해 버렸다. 알맞게 끼어입은 홍의(紅衣) 사이로 이제 막 부풀어 오르는 몸의 굴곡은 요염하기조차 했다. 극히 도도하면서도 고아한 귀태(貴態)가 은연중 흐른다고나 할까. 백옥(白玉)처럼 투명한 피부, 그리고 섬세한 허리 밑으로 물결처럼 흘러내린 머릿결…… 더욱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두 눈동자는 너무나 유혹적이어서 차라리 서늘해 보일 지경이었다. 날수운랑(捺手雲浪) 지운지(池雲芝). 그녀는 본래 무림(武林)에서 무적방파로 추앙받고 있는 신창무보(神槍武堡))의 보물이었다. 바로 신창무보의 보주 무적천왕(無敵天王) 지대후(池大侯)의 무남독녀인 것이다. 무적천왕 지대후의 창술(槍術)은 천하제일이여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허나 지대후는 무남독녀를 어찌나 귀하게 키웠는지 말괄량이도 그런 말괄량이가 없었다. 더욱이 선천적으로 뛰어난 재질을 소유한 그녀, 열 한 살이 되기도 전에 부친의 무공을 거의 다 익혀버리고 바깥 출입을 하기에 이르렀다. 지대후는 궁여지책으로 결국 그녀를 백운사에 보내게 되었다. 진대선생의 인품(人品)과 학덕으로 그녀가 정숙한 여인(女人)으로 숙성하기를 비는 마음으로…… 허나 그것은 지대후의 바램일 뿐이고, 그녀는 이제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 날수운랑 지운지. 어린 나이에 벌써 날수(捺手)라는 명호를 얻었으니 알만하지 않은가? "어때요? 내 솜씨가…… 천하에서 가장 날렵하고 지혜로운 여인(女人)이 바로 나 운지라구. 흥!" 지운지는 의기양양하여 교구를 가볍게 비틀었다. 제강은 그 모습을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목덜미…… 봉긋한 가슴…… 늘씬하게 뻗어내린 허리의 곡선…… 제강의 시선이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지운지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화난 듯 물었다. "왜…… 그렇게 기분 나쁜 시선으로 자꾸 쳐다보지요?" "……" "왜 자꾸……" "……" "오빠! 정말……" 지운지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폭발하려는 순간이었다. "이건 옷을 입은 게 아니라 몸에다 옷을 붙였군." 과연 그러했다. 지운지의 홍의는 몸에 달라붙어 있어 전신의 굴곡이 아찔하게 드러나 있었다. "기막혀……" 지운지는 투명한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내가 좋아서 입는데 왜 간섭이람?" "걱정되서 그런다." "걱정?" "여인지신(女人之身)으로 그렇게 망아지처럼 행동해서야 어디 시집이나 가겠느냐?" 제강의 표정은 자못 심각한 것이었다. 그는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마도 운지는 데려갈 사람이 없어서 호호백발 할망구가 될 때까지 홀로 지내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 것은 걱정없어요!" 지운지는 재빨리 대답하더니 문득 배시시 웃었다. "만약 나를 데려갈 사람이 없으면……" "없으면?" "선심쓰는 셈치고 오빠한테 시집가면 되지." "왕소름이 돋는군." 제강은 불에 덴 듯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지운지의 얼굴이 언뜻 붉어지더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말 다했어?" "농담이다. 후후……"


"호호…… 내가 아까 했던 말도 농담이었어요." 지운지의 한 쌍 봉목에 웃음이 사르르 번졌다. 제강은 변화무쌍한 그녀의 표정에 어리둥절 했다. (이 말괄량이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구나!) 헌데 바로 그때였다. 팅…… 낚싯줄이 끊어질 듯 갑자기 요동쳤다. "오…… 큰 놈이 걸렸군." "어머나……" 지운지의 눈에도 흥분과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제강이 재빨리 낚싯대를 들어올린 순간이었다. 잉어는 없고 난데없는 백골(白骨) 한 구가 솟아오르는게 아닌가. 촤아아! 백골은 물 속에서 솟아오르자 섬뜩한 괴성을 지르며 무서운 위세로 지운지에게 덮쳐들었다. 콰르르! 창졸간의 괴변(怪變)이었다. 지운지는 엉겁결에 백골을 품에 안고 말았다. 그녀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뾰족한 비명을 내질렀다. "오빠……" 지운지는 안간힘을 다해 백골을 밀어내며 제강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설익은 풋과일의 내음이 이토록 신비로울까. 제강은 백골이 솟아올랐을 때보다 그녀가 자신의 목을 조이며 안기는 것에 더욱 놀랐다. (운지, 너는 역시 연약한 여인(女人)에 불과하다!) 풍덩! 백골은 빠르게 물 속으로 사라졌다. 제강의 눈가에 기이한 이채가 스쳤다. (벌건 대낮에 백골이 살아 날뛰어?) 제강은 느닷없이 낚싯대로 백골이 솟아오른 물 속을 들쑤셨다. 촤아아! "어이쿠……" 비명소리와 함께 물 속에서 곧 하나의 그림자가 솟아 올랐다. (후후……) 제강은 보지 않고도 그가 누군지 알았다. 순간 지운지는 제강의 품 속에서 봉목을 크게 떴다. (이 음성은?) 그녀는 곧 한 인물의 영상을 떠올렸다. 화려한 금포넝마를 걸치고 다니는 비쩍 마른 거지, 지운지는 전신에서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귀천공자……) 지운지는 당장 그의 머리통을 부셔놓고 싶은 분노를 느꼈다. 허나 그 분노보다 앞서는 감정이 있었다. 제강의 품 속……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그녀는 사내의 가슴이 이토록 넓고 포근할 줄은 미처 몰랐다.


파르르…… 제강은 그녀의 섬세한 몸이 떨고 있음을 느꼈다. "운지?" "……" 스르륵…… 지운지는 풀죽은 얼굴로 서서히 제강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에 언뜻 이슬같은 것이 반짝였다. 제강은 그러한 그녀를 응시하며 씨익 웃었다. "후후……" "웃지 말아요! 이를 몽땅 뽑아 버리기 전에…… 흥!" 지운지는 얼굴이 도화빛으로 붉어진 채 소리치더니 몸을 홱 돌렸다. 동시 그녀의 시선에 막 물 위로 솟아오르는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는 바로 귀천공자였다. 그는 육지와 연결된 밧줄을 잡고 이 죽음의 소용돌이 속을 헤엄쳐온 것이었다. 그는 지운지를 향해 히죽 웃었다. "지소저, 안녕하시오?" "올라와." "화났소?" "올라와." "어쩔…… 려고 그러시오?" 귀천공자는 짐짓 겁먹은 얼굴이 되었다. 그의 한 팔에는 바로 좀전에 살아 날뛰었던 백골 한 구가 안겨져 있었다. 지운지는 안색 한 번 바꾸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죽여 버릴테다." "어이구…… 와룡협 밑에 썩은 백골 한 구가 있길래 장난좀 한걸 가지고 뭘 그러시오?" "올라와." 지운지의 아름다운 얼굴에서는 찬 바람이 가실 줄을 몰랐다. 귀천공자는 기묘하게 웃었다. "지소저는 설마…… 제강형님의 생일(生日) 날에 사람을 죽이겠단 말이오?" "……!" 그 말에 지운지는 흠칫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두 눈에 당혹의 빛을 띠고 물었다. "거지…… 방금 뭐라고 했느냐?" "오늘이 바로 제강형님의 생일이오." 촤아아…… 귀천공자는 목선 위로 올라오며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오빠의…… 생일?" "내 생일?" 제강과 지운지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형님, 받으시오. 선물이오." 귀천공자가 깊숙한 시선으로 제강을 응시하며 때묻은 손을 불쑥 내밀었다. 고서(古書)…… 한 권의 너덜너덜한 고서가 그 손에 쥐어져 있었다. (아…… 생일……) 제강의 몸이 가볍게 진동했다.


기억도 할 수 없는 자신의 탄생…… 제강에게는 모친이 없었다. 언제나 준엄하기만 했던 부친의 영상 뿐…… 제강은 생일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다. 언젠가 귀천공자는 자신의 생일을 물었었다. (그때…… 나는 아무렇게나 내 생일을 지어서 말했었지!) 헌데…… 만난 지 반년도 안되는 그가 그 말을 기억하고서 생일선물까지 마련한 것이다. 제강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고마운 녀석……) 제강의 가슴 속으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귀천공자의 손에서 낡은 고서를 받아 들었다. "거지같은 책이군." "헛헛…… 형님, 그 책자가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책자라고 했소." 귀천공자는 엄숙한 표정으로 힘있게 말을 이었다. "무려 오백 년 동안이나 아무도 해독하지 못한 책자라오." "어떻게 구했느냐?" "헛헛…… 그것은 알 것 없소. 아무리 모르는 것이 없는 형님이라 해도 아마 꽤 골치가 아플 것이오." "알만 하군." 제강은 두 눈에 신비로운 광채를 흘려내며 말을 이었다. "네놈은 내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이런 책자를 골라 왔구나." "대강 그런 셈이오." "하하하……" 제강은 유쾌하게 대소를 터뜨리며 고서를 살폈다. <화소고답본(華素古沓本).> 도형(圖形)같은 기이한 문자(文字)들…… 책장을 넘기는 제강의 맑은 두 눈에 번뜩 기광이 스쳤다. "회회문자(回回文字)가 아닌가!" 뜻밖에도 책자는 고대(古代)에 잠시 사용했다가 사라졌다는 회회문자로 채워져 있었다. 그림도 선도 아닌 기이한 형태의 문자가 거미줄처럼 책장마다 가득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백 년 정도가 아니라 수천 년이 지난 것이다." "수…… 수천?" 귀천공자는 흠칫 놀란 음성을 발했다. 그때 제강은 만지면 부서질 듯한 책장 한 곳을 군데군데 짚으며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어둠(暗)과 혼돈…… 폭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늘이 열리니……" 오오, 믿을 수 있겠는가? 이미 수천 년 전에 고대의 전설(傳說)과 함께 묻혀버렸던 회회문자를 제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독하고 있었다. 귀천공자와 지운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쏴아아…… 쿠르르릉…… 와룡협의 격탕하는 물결소리 속에 제강의 음성은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저 어둠 속에서 저주가 탄생…… 악마의 대왕…… 내려오면…… 무덤 속의 자들이


일어나……" "섬뜩하군!" 귀천공자는 흠칫 몸을 떨었다. 제강은 약간 굳어진 얼굴로 책자를 덮으며 말했다. "문자가 많이 삭아 없어져 그 뜻을 제대로 이을 수 없으나 이 화소고답본은 고대의 어떤 인물이 천지개종(天地開宗)에 대해 기술한 예언서같다." "예언서……" 지운지가 나직이 뇌까렸다. 제강은 몸을 일으키며 맑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너무 지체했으니 백운사로 돌아가자. 이 화소고답본은 나중에 자세히 읽어보겠다." "알겠소." 귀천공자는 재빨리 목선에 연결된 밧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촤아아…… 목선은 육지를 향해 서서히 나아갔다. 귀천공자와 지운지의 재치넘치는 말장난으로 인해 배 위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것 뿐이었다. 아무도 더 이상 화소고답본의 내용을 기억하지 않았다. 허나, 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 낡아빠진 화소고답본에 얼마나 엄청난 내력이 담겨 있는지를. 그렇게 강가를 얼마나 나아갔을까. "저들은 형님의 학우(學友)들이 아니오?" 귀천공자가 멈칫하더니 멀리 절벽 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제강은 희미하게 미소했다. "그렇다. 용군성(龍君星)과 소백, 그리고 운지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정숙한 취하(翠霞)다." "뭐라구요?" 지운지의 고운 아미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흥! 백운사의 모든 명문대가 귀공자들이 취하언니에게 상사병이 걸렸다는데 오빠 역시 그렇군요!" "아하하……" 제강은 유쾌하게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절벽 위, 화려한 금포에 비단 문사건을 쓴 두 귀공자가 한 백의소녀(白衣少女)와 함께 서 있었다. 귀공자들은 대략 십 육칠 세, 전형적인 명문가(名門家)의 고귀한 풍도를 소유한 미남자들이었다. 용군성과 소백, 그들은 바로 백운사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수재(秀才)들이었다. 이 순간 그들의 시선은 뜨거운 열정을 담고 백의소녀의 옆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백의소녀는 정녕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왔다. 아아…… 백설(白雪) 위에 피어난 난초(蘭草)인들 이보다 청초할 것인가. 이슬을 머금은 백란(白蘭)인들 이보다 더 미려할 것인가. 대략 십육 세 가량 쯤 되었으리라. 그녀는 한마디로 눈부셨다. 사위의 빛무리가 그녀의 한몸에 모두 모이는 것 같았다. 취하, 그녀의 이름은 취하였다. 백운사의 모든 귀공자들이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취하는 어느 누구와도 대화를 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병적이리만큼 수줍었던 것이다. 그녀는 누구 앞에서나 얼굴을 붉혔다.


상대가 늙고 추한 노인이라도 역시 그녀는 수줍었다. 그녀는 진정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선량했던 것이다. 그녀는 들에 피어있는 꽃(花) 한 송이만 보아도 감동하곤 했다. 우연이었을까? 이 순간 그녀는 멀리 절벽 아래 멀어져가는 제강의 목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강……) 언제부터인지 그녀는 하루종일 제강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밤마다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모두가 그녀를 사모하며 따라다녔으나 단 한 명 제강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제강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지운지가 한없이 부러웠다. 문득 그녀는 옆에 있는 용군성과 소백에게 수줍은 옥음(玉音)으로 물었다. "한 가지…… 제가 부탁한다면 들어 주겠어요?" "물론이오." "무엇이든지!" 용군성과 소백은 뛸 듯이 기뻐하며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취하는 고개를 푹 수그리며 모기소리만하게 말했다. "저를…… 운지처럼 용기있는 소녀로 만들어 주세요." "뭐요?" "……!" 용군성과 소백은 동시에 멍한 얼굴이 되었다. 허나 그들의 안색은 이내 약속이나 한 듯 어두어졌다. 총명한 그들은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취하가 왜 이 와룡협으로 왔는지…… 소백이 한숨을 내쉬더니 의외로 침착하게 말했다. "여인은 한 사내를 사랑하게 되면 언젠가는 용기가 저절로 생기는 법이오." 용군성은 쓰디쓰게 웃었다. "취하, 당신 때문에 나는 제강을 미워하게 될지도 모르겠소." 허나, 용군성과 소백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은 결코 제강을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취하의 아름다운 두 눈에 소리없이 이슬이 맺혔다. 용군성과 소백은 흠칫 놀라 당황성을 내질렀다. "어, 어, 우는거요?" "제발 참으시오. 원한다면 제강, 그 소귀(少鬼)를 당장 데려오겠소!" 제 4 장 식지 않는 시신(屍身) 달도 별도 없는 어두운 밤이었다. 이곳은 갈대숲이 괴괴하게 흐느적거리는 어느 산등성이. 스스슷…… 어둠 속의 갈대숲을 헤치며 돌연 두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몹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지, 너는 하루도 나를 편히 쉬게 놔두지 않는구나." "쉿! 조용하시오." "……!" "형님은 영매(靈媒)를 하는 걸 한 번이라도 본적이 있소?" "영매……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들인다는 그것 말이냐?" "그렇소." 속삭이듯 나직한 목소리……


그들은 바로 제강과 귀천동자였다. 스윽…… 제강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거지! 운지가 모르게 단 둘이서 좋은 것을 구경가자더니 그런 소름끼치는 것을……" "형님, 제발…… 제발 좀 조용히 말하시오. 귀제당(鬼祭堂)이 멀지 않았소." "……" 제강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귀천공자가 정말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리 어디선가 굶주린 늑대들의 포효성이 음산하게 들려왔다. (귀제당이라면…… 대낮에도 누구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 곳이 아닌가?) 귀제당--그곳은 이미 수백 년 전에 폐쇄된 공동묘지였다. 전란시대(戰亂時代)에 굶어 죽거나 원한을 지니고 죽어갔던 자들…… 그 수천 구의 시체들이 매장된 곳에서 지금도 밤에는 호곡성이 들린다고 알려졌다. "그곳에서…… 누군가 영매를 한단 말이지?" "그렇소." "거지, 영매라는 것은 눈속임이다. 어찌 산 사람이 죽은 영혼을 불러낼 수 있겠느냐?" "물론 눈속임도 있소. 허나 간혹 사실도 있는 법이오." 귀천공자는 두 눈에 언뜻 기광을 발하더니 말을 이었다. "무림에 언제부터인가 귀풍랑(鬼風浪)이라는 무당이 하나 나타났었소." "무림…… 귀풍랑……" 제강은 새삼 귀천공자가 무림인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물었다. "그 귀풍랑이라는 무당이 어쨌단 말이냐?" "귀풍랑이 신무(神舞)를 추고 주문을 외우면 구천에 있는 혼(魂)이 다시 돌아와 죽은 시신(屍身)이 되어 살아난다는 것이오." "믿을 수 없는 일이군." 쌔애앵! 쌔앵…… 서늘한 야풍(夜風)이 어둠을 뒤흔들며 장내를 스쳐갔다.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끌려가듯이…… 귀천공자는 긴장어린 시선으로 사방을 숨죽여 살피며 말을 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나도 모르나…… 이 기적같은 일을 보기 위해 내노라 하는 무림고수(武林高手)들이 이곳에 온다는 소문이오." "……" "특히 그들 가운데는 소림(少林)의 노승 반야혜승(盤若慧僧)이 이 일을 불력(佛力)에 거스르는 사술이라 대노하여 직접 나섰으며…… 중원의 위대한 스승 해동거사(海東居士)까지 온다고 했소." 언제부터인가 어둠을 축축히 적시며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강은 자신도 모르게 이 죽음같은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그분들이라면…… 나도 들은 적이 있다. 유명한 책자들을 낸 분들이지……" "이제야 형님도 감을 잡으셨군." "거지, 너무 겁주지 마라." "으흐흐……" "거지, 너 언제부터 그렇게 웃었느냐?" "킬킬……" ……


공동묘지, 어둠 속에서 여기저기 널려있는 해골들이 어슴프레 빛나고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잡초더미에는 귀기(鬼氣)가 흐르고, 부슬비는 흐느낌인 양 무덤들을 적시고 있었다. 스으으으…… 스스스…… 고목(古木), 한 그루의 거대한 고목이 긴 가지를 야공에 드리운 채 서 있었다. 울긋불긋한 오색(五色) 지전(紙錢)들이 가지마다 걸려 흐느적거린다. 바로 그 밑, 다 쓰러져 가는 사당 하나가 괴괴한 적막에 싸인 채 서 있었다. 귀제당(鬼祭堂). 바로 귀천동자가 말한 귀제당이었다. 귀제당의 문(門)은 모두 여섯 개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문들은 제멋대로 흔들거렸다. 삐이꺽…… 삐이…… 꺽…… 귀제당 안, 푸르뎅뎅한 지등(紙燈)의 불빛 아래 하나의 제단이 있었다. 제단 위에는 하나의 검은 관(棺)이 음침하게 놓여져 있었다. 쥐죽은 듯한 정적이 얼마나 흘렀을까. 부스럭…… 한순간 허물어진 벽 사이로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바로 제강과 귀천공자였다. "왜 아무도 안보이지?" "아직 시간이 되지 않은 모양이오." "그렇다면 저 지등의 불은 귀신이 켜놓았단 말이냐?" 어둠 속에서 두 쌍의 눈동자는 부산하게 움직였다. 일각…… 이각……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제강은 이 숨막힐 듯한 적막을 견디기 어려웠다. 문득 그는 귀천공자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소리죽여 말했다. "거지, 저 관을 한 번 열어볼까?" "형님, 미쳤수?" 귀천공자는 흠칫 놀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찜찜한 판국인데……" 허나, 제강은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관을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 영매라는 것이…… 과연 눈속임인지 아닌지 미리 확인해 보아야겠다." 스으윽…… 귀천공자는 그 뒤를 엉거주춤 따르며 물었다. "형님, 괜찮겠소?" "설마 뿔달린 귀신들이 단체로 뛰어나와 우리를 잡아먹기야 하겠느냐?" "설마가 사람잡는 법이오." "사람도 사람 나름이다." 제강은 태연히 응수했으나 어쩐지 떨리는 손을 느꼈다. 그는 관 뚜껑을 잡고 천천히 들어올렸다. 삐그덕……


섬뜩한 괴성과 함께 관뚜껑이 어둠 속에서 입을 벌렸다. 순간이다. "아니!" "어이쿠……" 제강과 귀천공자는 불에 덴 듯 뒤로 물러섰다. 관 속의 시신(屍身)--놀랍게도 그것은 여인(女人)의 시신이었다. 여인의 자태는 환상적이리만큼 아름다왔다. 대략 십 팔구 세 가량 되었으리라. 월궁(月宮)의 항아(姮娥)가 내려와 잠들었는가! 백란화(白蘭花)처럼 고결하고…… 이슬을 머금은 난초처럼 청순하다. 눈이 시리도록 하얀 수의를 걸친 몸은 반라(半裸)에 가까웠다. 봉긋한 가슴, 허리, 대리석 기둥같은 두 다리…… 그것은 정녕 전율스러운 미태였다. 요기(妖氣)! 그러한 여인의 모습은 너무나 창백한 것이어서 처절한 요기를 발했다. 그렇다. 제강과 귀천공자는 그 요사한 미태만으로도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허나, 제강은 곧 안색을 가다듬고 여인의 시신에 다가갔다. 이어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시신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대었다. 귀천공자는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형님, 죽은 게 확실하오?" "……" "형님." "거지, 이 여인이 죽은 게 어제인가?" 스윽…… 제강이 시신의 몸에서 얼굴을 들며 다소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귀천공자는 흠칫 의아한 얼굴로 대답했다. "열흘 쯤 됐을 것이오." "분명…… 심장이 멎은 것으로 보아 죽은 게 확실하다. 헌데……" "헌데?" "아직도 온몸이 따뜻한 체온을 유지하고 있다." "뭐, 뭐라고 했소?" 귀천공자는 불에 덴 듯 뒤로 성큼 물러섰다. 제강은 시신을 한참 동안이나 망연히 내려다 보았다. "이것은…… 들어보지 못한 일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이 여인은 절대 보통내력의 주인이 아니다." "그…… 그 말이 맞소. 그보다…… 우리는 어서 숨을 장소부터 찾는 게 좋겠소." 귀천공자는 재빨리 제강을 어두컴컴한 제단 밑으로 잡아 끌었다. 이어 그는 소리를 죽여 설명을 이어갔다. 일 년 전 중원(中原)에 갑자기 한 미친 소녀(少女)가 등장했다. 그녀는 사내들의 넋을 앗아가리만큼 아름다왔다. 허나 그녀는 항시 머리를 산발한 채 요사(妖邪)스런 주문을 외우고 다녔다. -혈야(血夜)가 열리고 있네…… 번개가 하늘의 심장을 가르는 날……


피안개가 천지를 드리우고…… 태양은 검게 물들리라…… 저주(詛呪)…… 저주의 숨결이 서서히 잠을 깨고 있다. 안개 속에 가려진 일천 개의 섬(島)에서…… 모두 땅 속으로 숨어야 한다…… 혈야(血夜)가 열리기 전에…… 그녀는 아득한 황야, 침침한 계곡 등을 돌아다니며 실성한 광녀(狂女)처럼 중얼거렸다. 그 때문에 그녀에게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곧 광풍신녀(狂風神女)라는 명호가 붙여졌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가 급사하기 전 단 한 번 제정신을 가지고 옷을 단정히 입은 적이 있었소." "……" "그때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수많은 명문대가의 대공자(大公子)들이 상사병에 걸렸다고 했소." 귀천공자의 긴 설명에 제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확실히 아름답다." "그렇소……"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장내에는 다시 괴괴한 적막이 찾아들었다. 제강은 한참 후에야 물었다. "그렇다면 저 광풍신녀와 귀풍랑이라는 무당은 처음부터 아는 사이였느냐?" "아니, 생면부지라고 했소." "그렇다면 귀풍랑이 굳이 영매의 힘으로 광풍신녀를 살리려는 의도가 무엇인가?" "그건 나도 잘 모르오." 귀천공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귀제당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후웅…… 그것은 어찌 들으면 바람소리 같기도 했다. 동시 귀제당 안으로 한 인물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아……) 제강과 귀천공자는 숨을 죽이고 상대를 살폈다. 나타난 인물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눈이 어지럽도록 울긋불긋한 색동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병자처럼 안색에 핏기가 없었다. 무심한 표정 하나하나에는 소름끼치도록 서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특히 너무도 얄팍하여 하나의 붉은 선이 그려진 듯한 입술은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제강과 귀천공자는 첫눈에 그녀가 바로 귀풍랑임을 알아보았다. 귀풍랑은 양손에 하나씩 물건을 들고 있었다. 오색(五色) 수실이 달린 칼(刀), 그리고 은색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방울이었다. 추악한 귀면(鬼面)이 새겨진 방울, 그 방울은 바로 무당들이 쓰는 추면귀령(醜面鬼鈴)이었다. "……" 천천히…… 그녀는 제단의 관(棺)으로 다가오며 사위를 살폈다. 그러더니 그녀는 돌연 입가에 차가운 조소를 담고 말했다. "숨어서 보고 있는 자들은 모두 나오시지."


심장을 후벼파는 듯한 음성! 그녀의 음성은 도저히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사내의 음성도 아니고 여인의 음성도 아니었다. 어찌 들으면 늙은이의 음성같기도 했고,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제강과 귀천공자는 순간 크게 당황했다. (눈치챘단 말인가?) (아무래도 오늘 목숨에 지장이 많겠구나!) 허나 그것은 기우였다. 슥! 스슥! 귀제당의 사방에서 수십 명의 무림인(武林人)들이 허공에서 솟아난 듯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아미타불……" "무량수불……" 승(僧), 도(道), 속(俗)의 인물들…… 대충 어림잡아도 삼십 명 가량이었다. 숨어서 지켜보던 제강은 내심 놀라고 말았다. (저들은 벌써부터 이곳에 와 있었군!) 그때 귀풍랑은 그들을 힐끗 바라보더니 전신에 요사(妖邪)한 기운을 흘려내며 다시 관으로 다가섰다. "누구나 호기심이 많으면 대개 빨리 죽는 법이지……" 귀풍랑은 관을 뚫어지게 한참 바라보았다. 부르르…… 그녀의 몸이 한 차례 크게 진동했다. 동시 그녀는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딸랑…… 딸랑…… 추면귀령의 방울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오겁(五劫)…… 회회(回回)…… 풍사사(風沙沙)……" 알 수 없는 주문(呪文)이 신들린 듯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쿵…… 쿵…… 그녀의 춤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허공에는 온통 울긋불긋한 색동옷의 잔영(殘影)이 난무했다. 더욱이 그녀의 양손에 쥐어진 시퍼런 칼과 추면귀령은 형용할 수 없는 괴기를 자아냈다. 딸랑…… 딸랑…… 쉬이익! 그러한 귀풍랑을 지켜보는 장내 인물들의 표정에 당혹이 스쳤다. 쥐죽은 듯한 침묵, 그들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 "……" 후우웅…… 딸랑…… 딸랑…… 쉬익…… 쉬이익! 귀풍랑의 전신에 땀이 흥건히 배었다. 그녀의 격렬한 신무는 이제 거의 눈으로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그녀의 주문은 마치 원혼(怨魂)의 흐느낌 같았다. "겁화(劫火)여…… 지옥의 겁화여…… 일어나라. 내 몸을 태워라……"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화르르르……


지등(紙燈)의 불꽃이 해일처럼 일어나 귀풍랑의 전신을 감싸는 게 아닌가! 아아…… 신무(神舞)! 춤을 춘다. 울긋불긋한 옷깃이…… 불꽃이…… 칼이…… 영혼을 담고 각기 살아 춤을 추고 있었다. 이 돌연한 상황에 장내 인물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것은 경악이었다. "이…… 이건……" "사술(邪術)이오!" 그들의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불꽃 속에서 처절한 음성이 울려나왔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사자(死者)여…… 구천(九天)의 혼을 찾아 일어나라……" 화르르르르…… 화르르…… "불을 건너…… 유공(幽空)을 지나…… 시해(時海)를 가로질러…… 사혼이여…… 돌아오라……" 그 음성은 아득한 공간 저편에서 울려퍼지는 듯했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스흐으--- 으아아! 심령을 쥐어짜는 듯한 음향과 함께 사위의 공기가 소용돌이쳤다. 동시 귀풍랑의 전신을 감싼 불꽃이 관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 사혼이여…… 여기 영계의 사자가 영명(永命)을 주리니…… 너의 육신을 잠에서…… 깨워라……" 쿵…… 쿵…… 괴변(怪變)은 그 순간에 일어났다. 관 속에서 찢어발기는 듯 처참한 비명이 울려나오는 게 아닌가! "으아악!" 그 비명은 곧 거친 호흡소리로 변해 흘러 나왔다. "흐으으…… 흐윽……" 숨어서 지켜보던 제강과 귀천공자는 넋을 잃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맙소사……) 그것은 장내의 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귀풍랑의 섬뜩한 음성이 고막을 진동하듯 울려퍼졌다. "광풍신녀, 이제 너에게는 관이 필요없다. 일어나라." 순간이다. 쩌억! 관을 가르며 서서히 하얀 수의의 여인이 일어섰다. 바로 광풍신녀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그녀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비록 초점없는 눈동자였으나 전신으로 처절한 요기(妖氣)를 뿜으며…… 경천동지(驚天動地)! 행여나 했던 일은 사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중인들은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진 채 광풍신녀를 바라보았다. 어찌된 영문인가?


되살아난 광풍신녀는 만면에 온통 공포와 두려움의 빛을 띄우고 있었다. "안돼! 나를 깨우지 마…… 나를 내버려 둬!" 그것은 처절한 애원이었다. 귀풍랑은 모든 동작을 뚝 멈추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무심한 일성이 흘러 나왔다. "광풍신녀, 아니 사랑(邪浪)…… 너는 사요천(邪妖天)의 자랑스런 딸……" "사요천……" 부르르--광풍신녀의 전신이 공포로 인해 진동했다. 귀풍랑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섰다. "허나 너는 어리석게도 사요천을 배신했으며 비밀까지 말했다." "아악…… 제발…… 제발 나를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둬요!" "안돼…… 사요천의 율법이다." 귀풍랑의 전신에서 가공할 잠력이 뻗어나왔다. 그것은 곧 시퍼런 마화(魔火)로 변해 노도처럼 사방으로 뻗어갔다. 화르르르르…… 쿠구구궁! 중인들은 대경하여 소리쳤다. "이건 극고의 내가강기(內家 氣)요, 피하시오!" "아미타불……" 허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귀제당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했다. 꽈르르릉! "으아악……" "으윽!" 한꺼번에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눈, 코, 귀, 입에서 핏줄기를 뿜으며 퉁겨 날아갔다. 상황은 명백했다. 귀풍랑, 그녀는 도저히 추측할 수 없는 주술(呪術)을 지닌 무당이었을 뿐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무공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제 5 장 惡 夢 "영계(靈界)를 본 인간은 모두 죽인다." 화르르르르--다시 처참한 비명성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울렸다. "으아아악!" "아아악!" 삽시간에 다시 십여 명의 인물이 시커멓게 탄 채 퉁겨 나갔다. 허나, 그 엄청난 공세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두 인물이 있었다. 붉은 가사에 백미(白眉)가 귀 밑까지 드리워진 노승(老僧), 그리고 신선처럼 청수한 풍모의 육순 자의노인이었다. 그렇다. 그들은 바로 소림의 명숙, 반야혜승과 해동거사였다. "아미타불…… 요물이로다." "마녀, 물러가라!" 두 고인은 경황중에서도 노호하며 노도같은 장력을 뻗어냈다.


쐐애애액! 웅후한 기운을 담고 두 줄기 장력은 해일처럼 귀풍랑을 휘감았다. 가히 쇳덩어리라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듯한 위력이었다. 허나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호호호……" 귀풍랑이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자 그 장력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두 고인이 경악으로 눈을 부릅뜨는 순간이었다. 화르르르! 귀풍랑이 뿜어낸 시퍼런 화염이 무서운 기세로 그들의 몸에 격중되었다. "으흑……" "으아악!" 꽈다당! 그들의 몸이 벽면에 처박히더니 잿더미로 변해갔다. 스스스스…… 스스…… 이제 아무도 귀풍랑에게 달려드는 자가 없었다. 미처 숨을 두세 번 들이쉬기도 전에 모두가 끔찍한 모습으로 몰살해버린 것이었다. 정적(靜寂)…… 쥐죽은 듯한 정적 속에 저주의 불꽃은 사라졌다. 귀풍랑은 천천히 몸을 돌려 광풍신녀를 응시했다. 광풍신녀는 창백한 얼굴로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무토막처럼 서 있었다. "……" 귀풍랑의 소름끼치는 시선이 이번에는 제단 밑으로 향했다. 순간 숨어서 지켜보던 제강과 귀천공자는 정면으로 그녀의 시선을 볼 수 있었다. (숨이 멎을 것 같다!) 제강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때 요기(妖氣)와 살기(殺氣)로 번들거리는 귀풍랑의 얼굴에 소리없이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저주받은 악령의 미소였다. "나와라." (나오라고?) 제강은 흠칫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이미 이런 상황을 본능적으로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절박한 순간 지나간 세월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갔다. (나는 이렇게 죽고마는구나!) 제강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귀천공자는 부지런히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었다. 제강은 그런 그의 뒤통수를 호되게 쥐어박았다. 퍽…… "어이구…… 왜 그러시오, 형님?" "네가 나가서 해결해라." "뭐요?" 귀천공자는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그때 귀풍랑이 백짓장같은 입술을 하얗게 벌리고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


스윽! 우드드득! 그녀의 우수(右手)가 허공을 휘젓자 제단이 통째로 날아갔다. 제강과 귀천공자는 빨려들 듯 귀풍랑의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쿠당! 쿵! 허나 제강은 곧 벌떡 일어서며 크게 소리쳤다. "귀풍랑, 나는 당신이 싫소. 다가오지 마시오." "이제보니……" 귀풍랑은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이마에 피도 안마른 애송이들이었군." "그렇소. 게다가 나는 무공의 무자도 모르오." "무슨 뜻이냐?" "우리 서로 모르는 척 합시다." 제강은 그녀를 향해 우호적인 미소를 보냈다. 귀풍랑의 찢어진 눈가에 순간 시퍼런 살기가 어렸다. "간덩이가 부은 놈. 본녀와 농담을 하자는 것이냐? 절대 너희들을 살려보낼 수 없다." 귀풍랑은 우수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때 제강은 황급히 귀천공자를 떠밀었다. "거지, 네놈은 나보다 훨씬 할 말이 많을텐데, 뭣하고 있느냐?" "무…… 무슨 소리요?" "귀풍랑, 귀천공자, 같은 귀(鬼)자 돌림이 아니냐? 혹시 잃어버린 네 어머님인지도 모른다." "뭐요?" 귀천공자는 또 한 번 넋을 잃었다. 귀풍랑의 눈에 떠오른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미친 놈." 그녀는 우수를 쭉 내뻗었다. 푸르스름한 장력이 제강에게 무서운 기세로 뻗어갔다. 퍼엉! "으윽……" 고통스런 비명이 터져 울렸다. 허나 그 비명은 엉뚱한 곳에서 흘러 나왔다. 귀천공자가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몸으로 제강을 보호한 것이었다. 꽈다당! 귀천공자는 구석에 처박힌 채 축 늘어졌다. 찰나 그의 눈꼬리가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해동거사나 반야혜승도 즉사를 면치 못한 그녀의 공세에 격중당하고도 그는 가벼운 내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내게 주어진 천명(天命)만 없었던들 이런 치욕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하의 골치거리요, 사소한 말썽만 부리고 다니는 신비고수(神秘高手)로 알려진 소년고수, 귀천공자의 진정한 내력은 과연 무엇인가? 그때다. "간 큰 애송이놈, 너도 죽어라." 귀풍랑이 왼손에 든 칼을 치켜들고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제강에게 다가섰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죽은 듯 쓰러져 있던 귀천공자의 입꼬리가 씰룩 움직였다. (안된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형님은 살려야 한다!) 귀천공자가 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쉬이이익! 쉬익! 귀제당 밖에서 쇠를 가르는 듯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오는게 아닌가. 귀풍랑은 흠칫 소리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귀찮은 늙은이들……" 그것은 두 줄기 인영이었다. 오오…… 가공할 속도! 마치 유성(流星)이 암천을 가르듯 순식간에 백 장 안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귀풍랑은 그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제강에게 귀기어린 시선을 돌리더니 기이하게 웃었다. "운좋은 애송이놈, 허나 저들이 아니었어도 어쩐지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 "네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고 할까…… 허나, 대신 너는 사요천의 영원한 종이 되어야 한다." 귀풍랑은 급히 광풍신녀에게 섬뜩한 어조로 분부했다. "사랑(邪浪), 그에게 죽음의 입맞춤을 해주어라." 그러자 넋나간 듯 서있던 사랑(邪浪)의 공허한 눈동자에 돌연 요사스런 광채가 푸르스름하게 어렸다. 스르륵…… 그녀는 미끄러지듯 제강에게 다가섰다. "죽음의 입맞춤을……" 그녀는 춘풍에 나비가 노닐 듯 속삭였다. 그런 그녀의 전신에서는 터질 듯한 요기가 출렁거렸다. "사요천의 이름으로……" 아아…… 혼을 빨아들일 듯한 눈빛…… 창백한 광채로 빛나는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백옥같은 목덜미…… 터질 듯한 가슴…… 아랫배의 능선…… 그녀의 전신 부위가 한꺼번에 되살아나 제강을 손짓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녕 거역할 수 없는 가공할 요기가 아닐 수 없었다. "어서……" "싫다. 다가오지 마라." 제강은 뒤로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물러서라." "저를…… 안아주세요." "싫다. 너는 자존심도 없느냐?" 쿵…… 제강은 벽면에 등을 부딪쳤다. 그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사랑의 입가에 처절하도록 황홀한 미소가 어렸다. 스르륵…… 그녀는 눈깜짝할 사이에 옥수로 제강의 어깨를 잡았다. 제강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허나 그녀는 태산인 양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서서히 그의 입으로 그녀의 입술이 접근해 왔다. 제강은 안간힘을 다해 고개를 내리숙였다. 순간 그녀의 입술이 그의 이마에 닿았다. (헛!) 제강은 이마가 불에 덴 듯 화끈함을 느꼈다. 전율처럼 짜릿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동시 제강은 의식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으음……) 그는 나락 속으로 떨어지듯 몽롱한 상태로 변해갔다. 어렴풋이…… 제강은 그녀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사랑(邪浪)…… 나를 잊지 마세요…… 스르륵…… 사랑은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러자 제강의 이마에 붉은 흔적이 나타났다. 아아…… 그것은 너무도 전율스러운 아수라(阿修羅)의 형상이 아닌가! 그 끔찍한 형상은 곧 뇌수에 박히듯 다시 희미해지더니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귀풍랑은 그 모습에 소리없이 음사한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너는 사요천의 영원한 종이 되었다."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후우웅…… "사랑의 정기로써 사왕신상(邪王神相)은 새겨졌다. 이제 너는 하늘아래 존재하는 그 어떤 병기에도 몸을 상하지 않으리라." 그녀의 신형이 허공에 뜬 자세 그대로 밖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더불어 너는 사요천, 그 위대한 하늘의 추종자가 되었으니 훗날 혈야(血夜)가 열리는 날 사요천의 부름에 따르게 되리라." 휘이이익! 사랑이 그림자처럼 귀풍랑을 따르고, 두 여인의 모습은 눈깜짝할 사이에 장내에서 사라져갔다. 순간 귀천공자는 황급히 제강의 몸을 안고 신형을 움직여 대들보 위에 숨어버렸다. 거의 동시였다. 꽈앙! 귀제당의 서쪽 문이 박살나며 두 인영이 들어섰다. "없다.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노괴, 자네가 중도에서 급한 일을 본다고 지체하는 바람에 놓쳤네." 두 인물! 그들의 용모는 실로 기괴무쌍했다. 오른쪽 인물은 고무공처럼 비대한 체구의 황포노인이었다. 헌데, 그의 팔 다리는 유난히 가늘어 마치 거대한 고무공에 대나무 몇 개를 꽂아놓은 듯했다. 그 팔은 가느다란 대신 매우 길어 거의 바닥에 닿을 지경이었다. 왼쪽 인물, 그는 시체처럼 핏기없는 용모에 등에는 특이한 팔관도(八貫刀)를 메고 있었다. 그러한 노인의 모습은 마치 독(毒)을 품은 거대한 거미처럼 보였다. 스으으…… 그들은 단지 서 있을 뿐인데도 장내의 공기가 무섭게 파동쳤다. 실로 가공할 기도가 아닌가.


한편 재빨리 몸을 숨긴 귀천공자는 그들을 본 순간 내심 크게 놀라고 말았다. (마수괴라(魔手怪羅), 생사일도(生死一刀), 저 귀신들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니!) 마수괴라. 그는 이미 백여 년 전에 이름을 날린 전대마인(前代魔人)이었다. 그의 손은 마수로 불리워졌으며, 수공(手功)에서는 천하무적이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지닌 특이한 체구를 이용, 스스로 천변마수십팔류(千變魔手十八流)라는 극랄한 수공을 창안했다. 그때부터 무림에서는 그 누구도 마수괴라의 손을 보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생사일도. 그는 석년 단 하룻밤 사이에 광동의 삼십여 대소문파를 휩쓸어 버렸던 살인마왕이었다. 죽음을 부르는 지옥의 도법(刀法), 그것이 무림인들이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그는 오래 전에 이미 무림에 흥미를 잃고 은거했었다. 헌데, 그러한 생사일도가 다시 무림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것도 마수괴라와 함께…… (저들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귀풍랑이 낫겠다!) 귀천공자가 더욱 숨을 죽이는 순간이었다. 마수괴라와 생사일도가 나란히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많이도 타죽었군. 누가 이토록 훌륭한 솜씨를 보였는지 궁금하다." "신경을 많이 쓰면 빨리 늙는 법이네." "헛헛……" "어서 다른 곳이나 뒤져보세. 빌어먹을 다륜(多輪)…… 벌써 한 달 열흘이나 헤매었는데도 머리털조차 보이지 않으니……" 마수괴라가 노화를 억누르지 못하겠다는 듯 벽면을 향해 일수를 내뻗었다. 꾸우웅! 오오…… 신기(神技)! 일수에 격중당한 벽면은 시뻘겋게 녹아 흔적도 없이 내려앉아 버렸다. 헌데도 귀제당은 털 끝만한 진동 하나 일지 않았다. 생사일도가 눈썹을 꿈틀했다. "마수, 화를 내면 빨리 늙는 법이다. 게다가 이 주위에는 우리와 같은 목적을 가진 인물들이 무수히 깔려 있다." "……" "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행동은 삼가라." 휘우웅…… 밖으로 나서자 차가운 야풍이 그들을 휘감으며 지나갔다. "기다리는 것이다. 냉정히…… 다륜은 이 근처 백 리 안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찾는 것은 다륜이 아니라 다륜의 위대한 혼(魂) 다륜도엽(多輪刀葉)일세." 아…… 다륜의 위대한 혼(魂) 다륜도엽이라고 했는가? 대체 그것은 무엇인가. 사위의 공기가 갑자기 쥐죽은 듯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달(月). 구름속에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나타내 대지에 은빛의 광채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달빛을 밟고 마수괴라와 생사일도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타나겠지…… 다륜도엽은 분명 조만간 세상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혼란은 가중될 것이고……" 스으윽…… "서로 죽고 죽여 시체가 파양호를 덮을 때 우리는 조용히 나서 어부지리를 얻으면 된다. 헛헛……" "자네는 열흘 전부터 계속 그 소리이군." 마수괴라가 뭉클 노안에 괴소를 머금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흐흐…… 아이들아, 몽상에서 깨어나라." 어둠 속 어디에선가 스산한 음성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그 음성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마수괴라와 생사일도는 섬광처럼 양쪽으로 흩어져 몸을 은신했다. 실로 놀라운 반응이었다. 허나, 어둠 속의 음성은 한심하다는 듯 조소를 날리고 있었다. "귀엽게 노는구나. 흐흐…… 그런 실력으로 다륜도엽을 노리다니. 이 할아버지는 배꼽을 달래야 할 판이다." 놀랍게도 이번의 음성은 귀제당의 대들보 위에서 들려왔다. 바로 마수괴라와 생사일도의 뒤쪽이었다. (어느새……?) (빠르다!) 마수괴라와 생사일도는 흠칫 등을 돌렸다. 허나, 그 순간에도 그들의 표정에는 티끌만큼의 흔들림도 없었다. (빠르다고 사람을 잘 죽이는 것은 아니지!) 그들의 시선이 천천히 대들보 위로 고정되었다. 한 인물이 그곳에서 그들을 내려다 보며 허연 이를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 나이어린 소동의 얼굴에 흰 수염이 탐스럽게 달려있는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 대들보 위의 인물은 그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허나 그 우습기조차 한 용모를 대하는 순간 마수괴라와 생사일도는 오히려 안색이 싹 굳어지고 있었다. (반로환동(反老還童)의 경지!) 놀라움어린 그들의 시선이 곧 난장이 노인의 앞가슴을 더듬었다. 순간 그들의 낯빛은 아예 밀납처럼 핼쓱하게 변해버렸다. 두 개의 도끼--난장이 노인의 몸에는 두 개의 은빛 도끼가 십(十)자로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컸다. 그 때문에 마치 도끼에 노인이 매달려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쌍부(雙斧)…… 천외도부(天外刀斧) 목리중(木里中)!" 생사일도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는 거의 신음성에 가까웠다. 난장이 노인은 기묘하게 웃었다. "흘흘흘…… 가상하다. 아직도 이 할아버지의 명호를 기억해 주는 아이가 있음이……" 천외도부 목리중. 생사일도와 마수괴라가 독수리라면 목리중은 봉황이었다. 백 년 전, 누가 감히 이 이름 앞에서 고개라도 들 수 있었던가. 자신보다 더 큰 쌍도끼를 들고 신주를 질타한 전대미문의 초인! 목리중은 그 당시에 이미 백 이십 세에 가까운 세수를 지니고 있었다. 세인들이 그를 일컬어 도끼 든 신선이라 부르길 서슴지 않았다. 헌데, 그런 목리중이 지금까지도 죽지않고 살아있으니 어찌 경악하지 않으랴. "그…… 그렇다면 선배도 다륜도엽 때문에 백년 은거를 깨셨소?"


생사일도가 안면이 휴지조각처럼 확 구겨진 채 물었다. 목리중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노부의 가슴에 아직도 야망은 살아 있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한 기개였다. 목리중의 신색은 돌연 섬칫하도록 무심하게 가라 앉았다. "천고만유(千古萬有)의 으뜸인 다륜도엽을 얻음은 곧 천하를 얻음이니, 당연히 내 살아생전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다륜도엽을 얻음은 곧 천하를 얻음이다. 실로 엄청난 한 마디, 생사일도와 마수괴라는 망연한 신색으로 목리중을 올려다 보았다. 터질 듯 무거운 공기가 장내에 내려 앉았다. 서서히 동녘에는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 바로 그 시각, 스스스…… 뭉클…… 뭉클…… 새벽안개를 밟고 희미한 여명을 등에 진 채 조용히 귀제당을 향해 올라오는 한 인물이 있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인데…… 섬세하면서도 시리도록 하얀 손에는 독사같은 채찍이 들려져 있다. 그 채찍은 주인의 팔을 칭칭 감은 채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옷차림으로 보아서는 사내인지 여인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머리 위에서부터 발 끝까지 흰 장포를 뒤집어썼기 때문이었다. 장포 밖으로 드러난 건 채찍을 든 손과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차갑게 빛나는 두 눈 뿐이다. 저벅…… 저벅…… 새벽 안개가 그의 발걸음에 좌우로 흩어졌다. 그리고 환청처럼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음성, "다륜을 말한 자는 모두 죽인다." 그것은 전율토록 기이한 마력이 깃든 음성이었다. 또한 그것은 여인의 음성일진대…… 스스스…… 저벅…… 저벅…… 피안개를 몰고 가는가. 한순간 그녀의 망막 속에 귀제당이 나타났다. *** 거의 같은 시각. 이곳은 파양호의 연변, 스산한 바람에 갈대숲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안개가 소용돌이치는 갈대숲은 아직도 어둡기만 했다. 한순간 그 갈대숲에서 흘러나오는 은밀한 대화가 있었다. "야복(夜卜), 틀림없느냐?" "흐흐…… 귀풍(鬼風), 내가 누구냐? 천하가 인정하는 신산(神算)의 일인자이다." "흐흐…… 안다. 나 혈인(血刃)도 그걸 인정하지. 허나 이것은 우리들 삼인(三人)의 일생일대의 승부가 걸린 일, 신중해야 한다." 스스스…… 세 검은 그림자가 영활한 독사의 무리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헌데…… 야복(夜卜). 귀풍(鬼風). 혈인(血刃). 이 무슨 가공할 명호들인가! 만약 누군가 이들의 말을 들었다면 공포에 질려 달아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리라. 천괴삼기(天怪三奇)-! 세상은 이들을 그렇게 불렀다. 그들은 현 무림을 주름잡고 있는 후기 선두고수들이었다. 첫째인 신산야복, 그는 귀신도 탄복한다는 신산묘리의 달인이었다. 둘째인 암사귀풍, 그는 어둠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진다. 어둠 속에서라면 그 누구도 그를 이겨내지 못한다. 이제까지 그는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무적고수였다. 셋째 혈인마도, 그는 삼백년전(三百年前) 도(刀)의 제왕으로 불리워졌던 혈사도(血邪刀)의 직계 후손이다. 혈인십삼마예(血刃十三魔藝)로 불리우는 그의 도법은 현 무림에서 적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천괴삼기! 이들 세 사람은 항시 얼굴을 죽립으로 가리고 다녔다. 그 누구도 이제껏 천괴삼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분명 저 파양호 중간부위이다." 신산야복, 그는 야욕에 불타는 시선으로 파양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본좌가 십 년에 걸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천 년 전에 이 세상에서 사라졌던 다륜도엽은 분명 저 호심(湖深) 속에 있다." 이들 역시 다륜도엽을 찾고 있는가? 암사귀풍이 난감한 신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저 중심부위만 뒤지는 데도 십 년은 걸릴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파양호는 둘레만 해도 수천 리에 달하는 거대한 호수였다. 신산야복이 소리없이 괴소를 흘렸다. "염려마라.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대책을 세워놓고 있다." "그 대책이 무엇…… 으음?" "아니?" 후우우--- 우웅! 갑자기 천괴삼기는 일제히 당혹성을 흘려냈다. 등쪽에서 난데없이 엄청난 기세의 회오리가 몰아친 것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였다. 사위는 순식간에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빌어먹을!" "무슨 놈의 날씨가 이 모양이지?" 그때 그들의 시야에 뭔가 금빛찬란한 것이 멀리서 새처럼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휘리링…… 아…… 깃털! 그것은 금빛으로 빛나는 하나의 깃털이 아닌가! "음?" "아니…… 이게 어디서 날아왔지?"


암사귀풍이 몸을 움직여 금빛 깃털을 잡으려 했다. 그러자 신산야복이 흠칫 그를 제지했다. "손대지 마라." "왜……?" "아까의 그 회오리를 몰고 온 깃털인지도 모른다." "뭐라고? 야복, 너 미쳤느냐? 어찌 이 가벼운 깃털 하나가 회오리를 몰고 온단 말이냐?" 암사귀풍은 냉소를 흘렸다. 그가 재차 금빛 깃털, 다시 말해 금우(金羽)를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괴변(怪變)이 일어났다. 파--- 앗! 금우가 살아있는 듯 갑자기 가공할 기세로 암사귀풍의 얼굴을 향해 폭사되는게 아닌가! "으아아악!" 처참한 비명이 터져울렸다. 이어 암사귀풍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쥔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꽈당! 즉사였다. 그는 이마에 구멍이 난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파르르--암사귀풍의 목숨을 앗아간 금우(金羽)는 시뻘건 혈우(血羽)로 변한 채 허공을 날고 있었다. "이럴 수가!" 신산야복과 혈인마도는 경악 속에서도 사방을 황급히 살폈다. "어느 놈이냐?" 그때 어디선가 한점의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은 무심한 음성이 들려왔다. "다륜을 말한 자는 모두 죽는다." 신산야복은 두 눈에 줄기줄기 살광을 폭사하며 소리쳤다. "허튼소리 말고 나와라." 허나, 상대방에게서는 다시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피로 목욕한 금빛 깃털만이 그들의 주위를 천천히 돌고 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저놈의 깃털을 없애야 한다." 신산야복과 혈인마도는 금우를 무섭게 노려보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순간이다. 슈우우욱! 후우-우웅! 그들의 등 뒤에서 다시 회오리 바람이 일었다. (음?) (또 하나 날아오는 모양이군!) 그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들의 안색이 일순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오오…… 수백 개의 금우가 허공을 새카맣게 덮은 채 가공할 기세로 날아오고 있었다. 파파파파팟! (끄으윽!) (우아악!) 그들은 비명을 질렀으나 목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찬란한 황금빛이 그들의 몸에서 작렬했다. 꽈다당!


나자빠지는 두 몸뚱이…… 그것은 차라리 황홀한 광경이었다. 수백 개의 금우! 그것은 그들의 이마에서부터 목, 가슴부위로 일(一)자의 형태를 이룬 채 정교하게 꽂혀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번에도 즉사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부릅뜨여진 그들의 눈엔 엄청난 경악과 불신만이 떠올라 있을 뿐이다. 쌔애앵! 무심한 바람이 한 차례 장내를 스쳐갔다. 그 바람을 타고 왔는가. 장내에는 어느새 한 미청년(美靑年)이 나타나 우뚝 서 있었다. 화강암으로 조각한 듯 차가우면서도 강인한 인상의 미청년이었다. 흑의(黑衣), 그는 흑의를 입고 있었다. 그 흑의는 더없이 그에게 잘 어울렸다. 아마 이 세상에 흑의가 이처럼 잘 어울리는 사내는 없을 것이다. "……" 스윽…… 흑의미청년은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그리고 나직한 한 마디가 울려퍼졌다. "다륜은 위대하다. 그 영원한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는 모두 죽인다. 나 다륜의 아들(子)…… 금사후(金死侯)에 의해……" 금사후! 금사후라 했던가? *** "냄새나는 계집이 감히!" 이곳은 귀제당, 쌍부 천외도부 목리중의 삼척 단구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우르르릉! 그의 손에서 은빛 거대한 쌍도끼가 산악을 쪼갤 듯 춤을 추었다. 이미 마수괴라와 생사일도는 한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들은 목리중에게 당한 것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장포여인이 그들을 저승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장포여인은 추호도 망설임없이 목리중을 핍박해들었다. 허나, 목리중이 어디 예사인물인가. 우르르르--벽력성을 토하며 허공을 가르는 쌍도끼가 해일같은 경기를 뿌려냈다. "갈(喝)!" 허나, 장포여인의 검은 채찍은 그 틈으로 잘도 움직였다. 파아아앗! 한순간 채찍과 거대한 쌍도끼가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동시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후두두둑…… 쌍도끼가 산산이 가루로 변해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는 게 아닌가. 목리중의 눈꼬리가 확 치켜졌다. "그…… 그건 흑편야우(黑鞭夜雨)…… 허억……" 추리릭--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검은 채찍은 독사처럼 그의 목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채찍은 사정없이 목리중의 목을 조여갔다. (끄으윽!) 우두둑! 목리중은 자신의 목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쿠웅…… 그의 육신은 차가운 대지 위에 쓰러졌다. (아아……) 죽어가는 그의 눈앞에 하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속삭이는 듯 나직하고 무심한 옥음이 희미해져 가는 목리중의 의식 속을 파고 들었다. "나는 다륜의 딸…… 반고일빈(盤古一彬)…… 너는 주제넘게 다륜을 넘본 탓으로 죽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부르는 목소리였다. 목리중의 몸뚱이가 푸들푸들 경련했다. (흑…… 편아우가…… 출현하다니……!) 검은 핏덩어리가 그의 입 밖으로 쏟아졌다. 그것은 그의 몸이 마지막으로 쏟아낸 기운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목리중의 최후였다. 정적이 장내를 무겁게 내리 눌렀다. 스스스…… 장포여인의 신형은 안개처럼 희미하게 장내에서 멀어져 갔다. -나는 다륜의 딸 반고일빈…… 죽음…… 죽음의 행진이 이어지고 있었다. 제 6 장 天機聖子 이슬이 풀잎마다 맺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초목이 우거진 계곡 사이, 찌르르…… 찡! 찡!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참으로 평화로운 숲 속이다. 새들은 창공을 향해 날고, 벌떼들은 윙윙거리며 여기저기 피어있는 야화(野花)들을 찾아 다녔다. 그때였다. 부스럭…… 숲길을 헤치며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바로 제강과 귀천공자였다. 그들은 백운사를 향해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문득 귀천공자가 제강의 눈치를 살피며 침묵을 깨뜨렸다. "형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소?" "사람들이…… 다륜, 다륜하다가 죽어갔다. 대체 그 다륜이 무엇이냐?" 제강은 우울한 신색이었다. 귀천공자의 시선이 먼 허공을 향했다. "그것은…… 아득한 옛 이야기같은 거요." "옛 이야기……?"


"그렇소. 혹자는 전설이라고도 부르오." 제강의 맑은 두 눈에 신비로운 광채가 어렸다. 귀천공자는 새벽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오. 일천 년 전…… 아니 이천 년 전인지도 모르겠소." 기억되지도 않는 아득한 그때…… 광막한 천지를 뚫고서 저 하늘과 지상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십인(十人)의 초인이 탄생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다륜십왕(多輪十王)이라 불렀다. 다륜십왕은 각기 천지에서 가장 위대한 불(佛), 마(魔), 성(聖), 사(邪), 유(儒), 도(道), 음(陰), 양(陽), 귀(鬼), 환(幻)의 정기를 타고났다. 그리고 그들의 힘으로 사상초유의 위대한 성이 세워졌다. 다륜성(多輪城)-! 그 찬란한 광채 아래 천하가 통일되기 직전이었다. 하늘로 솟아 버렸는가, 아니면 땅 속으로 사라져 버렸는가. 다륜성이 어느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전설의 초인들 다륜십왕과 함께……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흐르고 흐르는 세월 속에…… 이제 다륜성은 잊어버려도 그 누구 하나 탓하지 않는 전설이 되었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요. 형님은 믿지 못할 것이오." 귀천공자는 기이하게 미소지었다. 제강은 웃지 않았다. "그 정도는 길가의 거지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헛헛……" 귀천공자는 소리내어 특유의 웃음을 흘려내더니 힘있게 말했다. "무림인들은 분명 중원십팔만리 대륙 어딘가에 다륜성이 신기루인 듯 존재하며 그 위대한 힘이 살아있다고 믿고 있소." "음." "그래서 그들의 가슴에는 하나의 신념과 확신이 서게 되었소. 다륜성을 얻는 것은 곧 천하를 얻는 것이라는……" "과연 그럴까?"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소." 귀천공자는 입가에 선명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는 평소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예리한 것이었다. "다륜성은 지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소. 그것은 최강의 힘, 그 자체이오." 비쩍 마른 전신을 흐느적거리며 귀천공자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륜도엽이란 다륜성의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혼(魂)이며 신물(信物)이오." "거지, 관심있나?" "헛헛…… 형님. 다륜, 다륜하면 죽는다는 것을 모르오? 난 관심 없수다." 귀천공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제강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한 가지…… 그 흰 장포를 뒤집어 쓴 여인과 너는 혹 아는 사이가 아니냐?" "무…… 슨 소리요? 그 반고일빈이라는 끔찍한 여인을 왜 내가 알아야 되오?" "네놈도 금포를 뒤집어 썼고, 그녀도 백포를 뒤집어 썼다." "아니, 같이 뒤집어 썼다고 죄를 뒤집어 씌울 참이우?"


귀천공자는 안면이 확 구겨진 채 되물었다. 제강은 두 눈을 꿈벅거렸다. "이래뵈도 난 눈이 날카롭다고 자부하는 몸이야." "빌어먹을. 형님은 어젯 밤부터 계속 나를 놀라게 하는구려." "그녀는 다륜의 딸이라고 스스로 자처했다. 그녀에 대해 들은 소문이 없느냐?" "전혀 없소." 귀천공자는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하더니 잠시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수천 년 동안 신비에 가려진 다륜의 인물이 불쑥 나타난 것도 이상하고…… 다만 한 가지……" "무엇이냐?" "당금 무림에 대풍운의 조짐이 나타난 것만은 확실하오." "대풍운……" 제강은 나직이 독백했다. 그의 준수한 얼굴에는 담담한 예기(銳氣)가 흘렀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 허나 수 많은 인물들이 죽어갈 것이다!) 허나 제강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 거대한 운명의 굴레가 이미 그를 향해 던져졌음을. 쌔애앵! 상쾌한 새벽바람이 그의 머릿결을 휘날리며 지나갔다. 하나의 섬뜩한 얼굴이 갑자기 제강의 뇌리에 떠오른 건 그때였다. (귀풍랑!) 제강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그를 휩쓸었다. "거지, 또 있다." "뭐요?" "관 속에서 일어난 사랑이라는 여자의 입술에 내 이마가 닿은 순간 의식을 잃었었는데……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글쎄…… 별다른 일은 없었소." 귀천공자는 태연히 대답했다. 허나, 그의 내심은 결코 편한 것이 아니었다. (형님, 그 일이 형님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것이오!) 그가 어찌 잊었겠는가. 사왕신상(邪王神相)---! 제강의 이마에 순간적으로 새겨졌던 끔찍한 아수라 형상을…… (형님 자신을 위해서 말이오!) 그러한 귀천공자의 내심을 알 길 없는 제강은 더 묻지 않았다. 단지 제강은 한차례 씁쓸하게 웃었을 뿐이었다. "그게 이마였기에 망정이지, 입술이었다면 나는 원한을 품었을 것이다." "헛헛…… 느낌이 어땠소?" "처음은 좋았는데 뒤끝이 좋지 않았다." "사랑, 그 여인과 그런 인연을 맺은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오. 그녀는 아름다왔소." 귀천공자는 히죽 웃었다. 제강은 쓴 고소를 지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두 사람이 걸어오는 산로(山路)에 한 인물이 나타났다. 휘청…… 휘청…… 새벽부터 술에 취했는가? 갈지(之) 자로 걸어오고 있는 인물은 거지같은 행색의 중년인(中年人)이었다. 그 초라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중년인은 문사(文士)임을 자랑하려는 듯 때묻은 학건을 쓰고 있었다. (저 자는……!)


귀천공자의 두 눈에 섬전처럼 빠르게 이채가 스쳤다. 그때 중년인이 제강과 귀천공자를 발견하고 흠칫하더니 마치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듯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이게 웬 떡이냐, 아침부터 손님을 만났다." 동시 그는 두툼한 앞섶을 쫙 벌렸다. 그러자 그 속에서 온갖 기이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와르르! 그 내용물은 대충 이러했다. 복번(卜幡), 죽괘(竹卦), 오행패(五行牌), 점통 등등…… 한 마디로 모두 점(占)을 치는 데 필요한 것들이었다. 털썩…… 중년인은 그 앞에 그대로 주저앉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손님들, 어서 오시게. 뭘로 해드릴까? 수상(手相)을 봐드릴까, 족상(足相)을 봐드릴까?" 제강은 이 돌연한 상황에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당신, 점장이오?" "예끼, 이 사람. 점잖치 못하게 점장이가 뭔가!" "그러면?" "큼큼, 이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오행(五行)과 역학지리를 능통하여 천기를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며 주유천하하는 존체로서……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이름, 천기성자(天機聖子)일세." "천기성자……" 실로 거창하지 않은가. 제강은 어이가 없어 새삼 그를 살폈다. (완전히 술에 찌든 평범한 얼굴이군!) 그때 귀천공자가 앞으로 나서며 냉랭한 음성을 흘려냈다. "허튼 수작 그만하고 비키시오. 우리는 점 따위를 믿지 않소." 중년인은 힐끔 그를 돌아다보며 내쏘듯 말했다. "그놈, 복채도 없는 주제에 나서기는…… 큼큼, 네 분수나 알고 나서거라." "내 분수가 어때서?"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 헌데, 네녀석은 너무 엄청난 꿈을 꾸고 있군." 짤랑…… 짤랑…… 중년인은 점통을 흔들며 능글능글 웃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아서라, 몸에 해롭다. 네가 그 일을 계속하면 십중팔구 비명횡사를 면치 못할 것이다." "……!" 귀천공자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중년인은 히죽 웃음지었다. "소귀, 놀랄 필요 없다. 나는 네녀석의 시커먼 속셈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으니까." 그것은 정녕 징그러운 웃음이었다. "말해줄까? 네녀석은 바로……" 그 순간 귀천공자의 입술이 빠르게 달싹 움직였다. 그는 전음(傳音)을 시전한 것이다. 한데, 무슨 말을 들은 것일까? 천기성자는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네. 내 입 다물면 될 게 아닌가!" 그 모습에 제강은 의아하여 물었다. "왜 그러시오?" "아무 것도 아니네. 나는 원래 혼잣말을 잘 지껄이는 편이지."


천기성자는 태연히 능청을 부렸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다시 능글능글한 웃음이 떠올랐다. 허나, 그것도 잠시의 변화일 뿐이었다. "음?" 제강의 얼굴을 무심코 뜯어보던 천기성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무엇 때문인가? 그는 중풍에라도 걸린 듯 온몸을 떨며 신음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노부가 평생동안 신발이 닳도록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상호(相好)가 아닌가!" 천기성자는 전율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저 자가 또 무슨 엉뚱한 수작을?" 귀천공자는 당혹 속에 무심히 제강을 바라보았다. (아……) 순간 그의 입이 딱 벌어졌다. 지금 막 제강의 등 뒤로는 찬란하게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탓인가. 제강의 모습은 하나의 찬연한 빛무리가 되어 성스럽게 빛났다. (아름답다!) 귀천공자는 눈이 부시다고 느끼며 내심 부르짖었다. 허나, 그 신비한 현상은 곧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천기성자는 하늘을 향해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크핫핫핫…… 드디어 노부의 숙원이 풀렸도다. 일백 년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구나. 하늘이여…… 감사하오이다!" (일백 년? 그렇다면 이 중년인은 벌써 일백 살이 훨씬 넘었단 말인가?) 제강은 의혹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게다가 내 얼굴을 보고 죽었던 조상이 살아난 것처럼 기뻐 날뛰다니…… 이 자는 혹시 좀 미친게 아닐까?) 제강이 염려스러운 듯 천기성자를 살피는 순간이었다. 삐이--- 익! 멀리서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천기성자는 흠칫 안색이 굳어졌다. "빌어먹을, 저 찰거머리같은 와혈단(臥血團) 놈들이 벌써 여기까지?" 이어 그는 초조한 신색으로 급히 제강을 향해 돌아섰다. "이제와서 노부가 무엇을 망설이랴!" 스윽! 그는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왼쪽 신발을 벗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 신발을 불쑥 제강에게 내밀었다. "아이야, 너에게 하늘을 주겠다. 자, 받아라." 제강은 상대의 엉뚱한 행동에 다시 멍해지고 말았다. (썩어빠진 짚신 한 짝에 하늘이라니?) 한데, 제강이 얼떨결에 냄새나는 신발을 받아들고 시선을 드는 순간이었다. 슈우우! 천기성자의 신형은 이미 백 장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불가사의하리만큼 빠른 신법(身法)이었다. 동시 제강은 그의 전음(傳音)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야, 우리는 훗날 꼭 다시 만난다. 그때는 너에게 더 큰 하늘을 주마." 그의 신형이 유령처럼 숲속으로 사라지자마자, 그 뒤로 십여 개의 정체모를 괴영들이 나타나 전광처럼 추격해 갔다. 슈욱!


슉! 아마도 천기성자를 추격하는 무리들이리라. 그때 제강은 망연히 천기성자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더 큰 하늘…… 그렇다면 이것보다 더 큰 짚신을 하나 더 주겠다는 말인가?" 제강은 피곤함이 엄습함을 느꼈다. 짚신! 천기성자가 주고 간 짚신은 얼마나 오래 신었는지 악취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고약한 사람, 이런 짚신 한짝을 주고 어이없게도 하늘 운운하다니……" 제강은 귀천공자에게 짚신을 내밀며 말했다. "거지, 이것은 네놈이 들고 있는 게 어울리겠다." "내 어찌 감히 하늘을 들 수 있겠소. 거절하겠소. 헛헛……" "대체…… 그 점장이는 누구냐?" "형님이 들은 그대로요. 천기성자라오." 귀천공자는 기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강은 눈썹을 꿈틀 치켜세웠다. "제정신은 박힌 인물이냐?" "그는 고약한 허풍장이이긴 하나 미치지는 않았소. 강호천지를 제멋대로 휘돌아 다니는 한심한 점장이일 뿐이오." 귀천공자는 빙긋 웃더니 짚신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허나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그가 천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안다는 점이오." "음?" "어떤 인물들은 그를 만사달통의 귀사(鬼士)라고 부른다오. 그러니 그가 내민 그 짚신은 혹 예사물건이 아닐지 모르오." 짚신! 두 사람의 시선이 순간 짚신에 딱 고정되었다. 제강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짚신을 들어올렸다. "자세히 살핀다고 해서 냄새나는 짚신이 옥(玉)으로 변할 리는 만무하다." 허나, 제강의 맑은 두 눈은 곧 크게 뜨여지고 말았다. (음? 이건!) 아침 햇살을 받아 투영된 짚신 속에서 신비스런 보광(寶光)이 새어나오는게 아닌가? 제강은 재빨리 짚신 중간부위를 벌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속에서 종잇장처럼 엷은 은편(銀片)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은편은 한 장이 아니었으며, 차곡차곡 수십 장이 포개어져 있었다. (은책(銀冊)이다!) 제강은 내심 신음했다. 그렇다. 그것은 매미날개보다 엷은 은편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책자였다. 스윽…… 겉장을 넘기자 선명하게 새겨진 일필휘지의 글씨가 나타났다. <남화천리옥경(南華天理玉經).> (아……) 제강은 경이감을 느끼며 다음 장을 넘겼다. 깨알보다 작은 문자(文字)들이 그의 시야에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형님……"


귀천공자는 넋을 잃었다. 그렇다. 천기성자는 결코 미친 인물이 아니었다. 태양의 빛무리…… 그 찬란한 빛무리가 제강의 신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 초우(草雨). 그는 따사로운 양광(陽光)을 받으며 백운사의 뒷뜰을 거닐고 있었다. 그의 나이 올해 이십 세, 백운사의 수 많은 기재(奇才)들 가운데 초우는 수수께끼같은 존재였다. 그는 그 누구와도 친분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 "……" 스으윽…… 고풍(古風)을 드리운 백운사의 팔층 누각이 장엄하게 그의 시야에 나타났다. 초우는 이 뒷뜰의 경치가 좋았다. 백송림(白松林)과 비단잉어가 노니는 연못과 화원, 모두가 그의 취향에 맞는 것이었다. 임풍옥수라고나 할까? 담백한 청삼자락을 훈풍에 표표히 나부끼며 산책하는 초우의 준수한 풍모와 빈틈없는 자세는 귀공자(貴公子)의 전형이었다. 문득 초우는 뒷짐을 진 채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유난히 푸른 하늘이었다. 날카로운 검미(劍眉) 아래 그의 깊숙한 눈빛이 온화하게 일렁였다. "좋은 날씨다. 일 년 만에 바라보는 하늘이군." 그의 입가에 운무처럼 신비로운 미소가 어렸다. "후후…… 그동안 어둠의 공간에서 오직 서책만을 벗삼아 나 자신과 싸워왔다. 힘든 나날이었어. 허나……" 초우의 신색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끝났다. 학예지도는 더 이상 진대선생 밑에서 배울 것이 없다." 실로 광오한 말이 아닌가? 이 백운사에서 어느 누구도 가히 학문이 끝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다. 초우에게는 하나의 특이한 습관이 있었다. 영웅십보(英雄十步)! 열 걸음을 걷는 사이 자신의 새로운 계획과 야망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밖으로 향하는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그러나 하나의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 두 걸음…… "나 초우는 다시 새로운 힘을 찾아 나서야 한다." 세 걸음…… 네 걸음…… "나 초우, 하늘을 두고 맹세했었다. 장부로 한 번 태어난 이상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위업을 세우겠노라고……" 오보(五步)…… 육보(六步)…… "이 땅에 오직 나만의 위대한 발자국을 남기겠노라고……" 칠보(七步)…… "그것은 이 지상에서 가장 위대하며 만고불후의 영원이 담긴 꿈의 대성전(大聖殿)이다."


팔보(八步)…… "천세광명재전(千世光明大殿)! 반드시 해내고 만다." 오오…… 천세광명대전이라고 했는가! 사위의 공기가 일시에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아홉 걸음 째…… "세상을 뒤집고서라도 후후…… 그 첫 단계는……" 초우, 드디어 그가 마지막 십보(十步)를 내딛기 직전이었다. (으음?) 그의 전방에 한 인물이 나타났다. 이것은 불길한 조짐이었다. 그가 영웅십보를 내디딜 때에는 그 누구도 나타나서는 안되었다. (저 얼굴은…… 제강?) 기억난다. 일 년 전,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진대선생 밑으로 같이 입문했던 아름다운 얼굴이……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아니 어제까지도 제강에 대한 그의 평가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허나, 초우는 지금 다가오는 제강을 바라보며 기이한 충격을 느꼈다. (컸다. 단 일 년 만에…… 나 초우가 놀랄만큼……) 그것은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허나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때였다. 제강이 그를 알아보고 먼저 반가운 신색을 지었다. "초우형 아니시오?" "기억력도 좋군. 이른 아침부터 어디를 다녀오는가?" 초우는 담담히 미소하며 물었다. 제강은 입가에 햇살처럼 눈부신 미소를 머금었다. "바람좀 쏘이고 오는 길이오. 헌데…… 초우형은 시심대고(試心大庫)에 든걸로 아는데 언제 나오셨소?" "어젯밤에 나왔네." "그렇다면…… 설마 시심대고에 지겹도록 쌓인 수천 권의 서책을 모조리 독파했단 말이오?" "그런 셈이지." 초우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제강은 나직한 탄성을 흘려냈다. "놀랍소. 이곳에 몰려든 천하의 기재들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시심대고에서 나오는 데는 육 년 이상 걸렸소." 과연 그러했다. 시심대고가 어떤 곳이던가. 그곳은 당금 천하 학문의 최고봉이요, 결정체이다. 진대선생을 위해 황제(皇帝)가 친히 황궁비고(皇宮秘庫)에서 꺼내 보내온 책자만도 기천권에 달했다. 그리고 그 책자 가운데 평범한 것은 단 한 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제강은 신비롭게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책자만 펼쳐도 우선 잠이 쏟아지고 마오. 초우형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오." "……" 초우는 잔잔히 웃었다. 그저 웃었을 뿐이다. 그러다 문득 초우는 제강의 전신을 살피며 물었다. "자네 행색을 보니 아침산책을 다녀온 사람답지 않군. 어젯밤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아니, 그것을 어찌 신통히도 알아 맞추었소?" 제강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초우는 깊숙한 시선을 빛내며 조용히 대답했다. "자네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군." "내 얼굴에?" 제강은 입가에 쓴 고소를 지었다. "그렇군. 아마 세수를 못해서 표시가 나는 모양이니…… 이러다가 진대선생에게 들키는 날에는 난리가 나겠소." 스윽…… 제강은 급하다는 듯 몸을 돌렸다. "후후…… 초우형, 다음에 봅시다." 순식간에 제강은 뒷뜰 안으로 사라져 갔다. 초우는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두 눈에 알 수 없는 광채가 섬뜩하게 어렸다. (제강, 천하의 그 누구도 내 눈을 속이지는 못한다!) 슥…… 그의 손이 이제 막 부풀기 시작하는 석죽화(石竹花)에 닿았다. (거목(巨木)은 크기 전에 미리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뚝! 석죽화가 맥없이 꺾여졌다. *** 천하의 잠룡과 비봉들이 꿈틀대는 백운사. 이곳에도 밤은 찾아들었다. …… 제강은 이미 삼경이 지난 깊은 시각인데도 잠을 못이루고 있었다. 열려진 창 밖으로 밝은 달이 교교하게 월광을 뿌리고 있다. "……" 달을 바라보는 그의 준수한 얼굴에는 언뜻 우수가 어렸다. "이제 삼 일만 지나면 저 달은 만월이 되는군. 그러면 정든 이곳과도 이별이다." 나직한 독백성…… "아버님은 또 어디선가 만월과 함께 불쑥 나타나실 것이다. 나는 다시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인가." 달빛이 그의 더없이 맑은 동공에서 잔잔히 부서진다. "어쩐지 이번에는 아주 먼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고독한 여로(旅路)……" 고독!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제강의 친구였다. 허나, 제강은 단 한 번도 남에게 그것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아버님…… 오늘 밤은 왠지 당신이 몹시도 보고 싶군요. 당신의 강철같은 모습을……" 조수처럼 밀려오는 감회가 제강을 감쌌다. "당신의 당당하신 기개와…… 무섭도록 완벽하신 가슴이 보고 싶습니다." 제강의 입가에 형언할 수 없는 미소가 어렸다. "이렇게 나약한 소자의 모습을 보면 아버님은 불벼락을 내리시겠지요…… 허나, 소자는 솔직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밤공기는 왠지 무겁기만 했다. 그때였다. 푸드득……


날개짓 소리와 동시에 창가 위로 야조(夜鳥)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그 새를 본 제강의 입가에 눈부신 미소가 피어올랐다. "네녀석도 외로운 모양이구나. 이리 오너라. 잡아먹지는 않을테니…… 나와 벗삼아 이 밤을 지새보자." 제강의 부드러운 손짓에, 푸드득…… 야조가 마치 제강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경계심을 풀고 그의 품 속으로 날아들었다. 제 7 장 발을 들다 적미조(赤眉鳥)였다. 이 새는 매우 아름답고 희귀한 종류였다. 적미조는 제강의 손바닥 위에서 나직이 울고 있었다. 끼루루…… (음?) 제강의 맑은 성목에 문득 기광이 스쳤다. (이제보니 이 적미조는 공포에 질려있지 않은가?) 여섯 살 때부터 제강은 이미 새나 짐승들을 다루는 법을 본능적으로 터득하고 있었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새나 짐승들은 유난히 그를 잘 따랐다. 그것은 신기한 일이었으나, 제강 자신은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끼루루…… "심상치 않다." 제강은 문득 두 눈을 조용히 내리감은 채 사방에 청각을 집중했다. 미세하게…… 쥐들이 부산히 움직이며 공포에 젖은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 들렸다. 제강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침입자가 있다. 단지 기도만으로 짐승들을 질리게 하는…… 이 백운사에까지 쳐들어 오다니." 스윽…… (한두 명이 아니다.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군!) 제강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섰다. 바로 그 시각, 다비선승은 아침 예불을 위해 벌써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하고 있었다. 한데, 윗 가사를 걸치던 다비선승은 문득 방문쪽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아미타불…… 밖에 누구시오?" 콰지직! 대답 대신 문이 떨어져 나가고 네 명의 그림자가 눈 앞에 어른거렸다 싶은 순간, "끄윽…… 캑……" 손(手)! 갈고리같은 하나의 손이 어느새 다비선승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아…… 그 빠름이란! "네가 이 절의 주지냐?" 쇳소리같은 음성…… 그 음성의 주인들은 다비선승에게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다비선승의 얼굴을 벽면에 처박은 채 그 음성은 느릿느릿 이어졌다. "대답하라." "그…… 그렇……"


"삼 일 전에 상처 입은 한 여인이 너를 찾아왔었다. 기억하느냐?" "기억하……" "어디 숨겨 주었느냐?" 도저히 이 음성은 다비선승으로 하여금 반박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다비선승의 목에서 피가 맺혀 흐르기 시작했다. "끄윽…… 이 손좀……"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그 여시주는…… 떠났소." "떠났다고? 어디로!" "모…… 르오." "기억해 내라. 기억해 내지 못하면 네가 죽는다." 살기(殺氣)…… 무형의 가공할 살기가 다비선승을 휘감았다. 순간 다비선승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아미타불…… 파양호 쪽으로 가는 것을 얼핏…… 보았을 뿐이오." "파양호……" 쾅! 다비선승의 이마가 벽면에 거세게 부딪쳐졌다. 이마가 깨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땡중, 확실히 해라. 만약 거짓이면 이 백운사는 쥐새끼 한 마리 살아남지 못한다." "으…… 부처의 제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소." "흐흐…… 땡중, 부처나부랑이는 지옥에서나 찾아라." "컥……" 꽈다당! 다비선승의 몸은 엄청난 속도로 벽에 충돌한 후 구석에 무참히 내팽개졌다. 누가 보아도 즉사했음을 의심하지 못할 일격이었다. 스스스…… "가자." 네 개의 그림자가 방 안에서 연기처럼 증발했다. 헌데, 그들이 사라진 직후였다. 시체처럼 누워있던 다비선승이 태연히 일어서는 게 아닌가? 스으윽…… 보통 인물같으면 목뼈가 부러져도 서너 번은 부러졌을 일이었다. 허나, 다비선승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미타불…… 액겁이로다." 순간적으로 그의 노안에 짙은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불자된 몸으로 차마 못할 거짓을 말하고 말았구나. 아미타불…… 아미타불……" 천천히…… 다비선승은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허나, 억조창생의 생사는 물론 천하의 운명이 걸린 순간이었으니…… 세존께서도 이 불쌍한 제자의 마음을 헤아려주실 터." 다비선승은 물가를 걷고 있었다. 그는 얼굴의 흥건한 피를 물로 씻었다. "아미타불…… 아이구 아파라. 그 못된 놈들이 살아있는 염주를 깨어 놓았도다." 어둠(暗)…… 아직도 날이 밝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 제강, 그는 다비선승의 수난도 모르는 채 지하통로를 걷고 있었다. 시심대고(試心大庫), 제강이 들어선 지하통로는 바로 시심대고의 후문으로 연결된 것이었다. 평소 이 지하통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 제강도 호기심 삼아 단 한 번 이 통로를 이용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 제강은 어두컴컴한 통로 한가운데서 멈추어 섰다. (이쯤에 비밀통로가 있었는데……?) 제강은 벽면을 손으로 힘껏 밀었다. 그러자, 크르르--굉음과 함께 벽면이 열리며 하나의 음침한 석실이 나타났다. 거의 동시 제강은 흠칫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피냄새?) 우드득…… 뒤이어 들려오는 건 뼈다귀 씹는 소리였다. 제강이 안력을 돋구어 살펴보니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등을 돌린 채 뭔가를 먹고 있었다. 섬세한 몸매로 보아 상대는 여인이 분명했다. 중상을 입었는가. 여인은 전신을 온통 흰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다. "……" 제강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일까. 그녀는 갑자기 주춤하는 듯하더니 홱 얼굴을 돌렸다. "웬 놈이냐!" 순간 제강은 그녀가 먹고 있는 것이 바로 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血)…… 그녀의 입가에는 핏자국이 묻어있고, 그녀의 손에는 반쯤 없어진 쥐가 들려있었다. 제강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부지중에 황급히 대답했다. "난 사람이오!" "뭐라고! 그렇다면 나는 귀신이란 말이냐?" 스으윽…… 괴여인은 유령처럼 제강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자세히 드러나는 얼굴, 그것은 예상 외로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허나, 붕대로 감은 그녀의 전신에서는 피와 함께 살이 썩어 고름이 군데군데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실로 끔찍한 모습이 아닌가. 제강은 그녀가 어떻게 이러한 몸으로 서 있는지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살기…… 이 여인은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그때 괴여인이 두 눈에 새파란 살기를 흘려내며 속삭이듯 물었다. "누가 보냈느냐, 반고 계집이냐? 아니면 금가 애송이냐?" "나는 반고니, 금가니 하는 인물은 전혀 모르오." 제강은 약간 심기를 안정시키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이 백운사의 문하일 뿐이오." "……" 괴여인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제강의 두 눈을 무섭게 직시했다. 허나, 그녀의 눈빛은 곧 흔들리고 말았다. 제강의 두 눈이 너무나 맑고 신비로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에서 비로소 살기가 사라졌다.


"꺼져라." 비틀…… 긴장이 풀린 탓인가? 괴여인은 허탈한 표정이 되더니 휘청거렸다. "조심하시오." "너는…… 내 모습이 두렵지 않느냐? 귀신도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달아날 것이다." 괴여인은 창백한 얼굴에 의아한 빛을 떠올린 채 물었다. 제강은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 (귀풍랑에 비하면 그래도 당신은 선녀처럼 보이오!) 그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괴여인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버려 둬라, 나는 곧 죽을 것이다." "왜 치료를 받지 않소?" "내 스스로가 못고치는 것은…… 천하의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다." 그녀는 차갑게 대답하더니 돌연 울컥 시커먼 핏덩이를 토해냈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부서진 내장조각까지 섞여 있었다. 제강은 갑자기 그녀가 더없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정 죽고싶다면 당신은 아까 왜 쥐를 잡아 먹었소?" "아무리 죽음이 기정사실이라 해도 인간은 최후까지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법이다." "……" 제강은 순간 기이한 감동을 느꼈다. 그녀가 왜 이런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도저히 그녀를 이대로 놔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 업히시오." "너는 매우 어리석구나, 대라신선이 와도 나를 치료하지 못한다." "그게 아니오. 당신을 이 차가운 구석 바닥에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소." 제강은 그녀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내방은 따뜻하고 깨끗한 편이오. 죽더라도 거기서 죽으시오." "……" 순간 괴여인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의 눈빛, 그녀는 제강의 눈빛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정을 느꼈다. 그녀의 섬세한 몸이 문득 미세한 떨림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의 눈가에 뭔가 반짝 영롱한 것이 맺혔다. 그것은 눈물인가? "당신의 호의를…… 받아들이겠어요." 말투가 변했다. 그녀는 제강이 내민 손을 잡으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 이 손은!" 그녀의 얼굴에 엄청난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제강은 흠칫 놀랐다. "왜 그러시오? 내손이 뭐가 잘못됐소?" "아아……" 금광(金光)! 갑자기 그녀의 두 눈에서 자색의 두 줄기 금광이 뻗어 나왔다. 그 금광이 제강의 손바닥에 닿는 순간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스스스…… 오오……! 제강의 손바닥에서 하나의 장엄한 문양이 꿈틀거리며 나타나고 있었다. 백룡(白龍)! 그것은 금세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백룡의 문양이었다. "아아…… 틀림없다, 백룡흔(白龍痕)." 괴여인은 격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신음했다. 제강은 이 상황에 아연 놀라고 말았다. (내 손바닥에 언제 이런 것이 있었지?) 그때 괴여인은 전신을 쉴 새 없이 경련하며 무릎을 꿇더니 말했다. "발(足)을 보여 주시겠어요?" "발?" 제강은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 간절한지라 지체없이 오른발을 들었다. "보시오, 깨끗이 씻었소." 스슥…… 그녀는 떨리는 두 손으로 제강의 신발을 벗겼다. 이어 그녀는 제강의 발바닥을 향해 아까의 그 기이한 금광을 두 눈에서 폭사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꿈틀…… 발바닥의 용천혈 부근, 오오…… 그곳에서도 역시 똑같은 백룡의 형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게 아닌가. 마침내 그녀는 제강의 발을 두 손으로 움켜안고 실성한 듯이 외쳤다. "사상백룡흔(四像白龍痕)---!" "쓰, 쓰러지겠소! 조심하시오." 제강은 간신히 몸의 중심을 잡으며 급히 말했다. 눈물…… 그의 발 위로 그녀의 영롱한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곧 제강의 앞에 오체복지의 예를 취하며 흐느끼듯 말했다. "소천왕(少天王)이시여……" "……?" 제강은 몹시 심기가 혼란스러웠다. (사상백룡흔은 뭐고 소천왕은 또 뭐란 말인가?) 그가 어찌 꿈엔들 자신의 손과 발에 네 개의 문양이 새겨있다는 것을 예측했겠는가. 괴여인이 그를 향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었다. "소천왕이시여, 다륜의 오십육대(五十六代) 직계제자 금공녀(金公女) 나호영(羅胡英) 인사 여쭈옵니다." "지금…… 다륜이라고 했소?" 제강은 흠칫 두 눈을 크게 떴다. 괴여인, 금공녀 나호영은 눈물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인고와 한으로 얼룩졌던 다륜의 역사를……" "……!" "하늘이여,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급박한 순간에 소천왕을 보내 주시다니……" 나호영의 격동은 좀체로 가라앉을 줄 몰랐다. "이는 다륜이 수천 년 만에 부활함이요, 천하의 운명이 다하지 않았음이라. 아아…… 소천왕이시여!"


제강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었으나, 우선 그녀의 상처가 더 염려되었다. 그는 나호영의 어깨를 감싸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그만 진정하는 게 좋겠소. 눈물을 멈추시오." 차분한 음성, 그 한 마디가 나호영의 격동을 어느 정도 가라앉혔다. 그녀는 제강을 향해 웃어보였다. 그것은 정녕 처연한 웃음이었다. "소천왕, 얼마남지 않은 천녀의 생명이 꺼지기 전에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직한 어조…… 그녀의 음성은 믿을 수 없으리만큼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륜…… 그것은 꺼지지 않는 불꽃이었습니다." 비화(秘話)…… 그녀의 입에서 수천 년 동안 전설 속에 묻혀있던 다륜의 비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륜성(多輪城)! 암흑과 폭풍을 뚫고 이 땅에 세워진 위대한 중원의 성전, 그 이름을 누가 모르겠는가. 다륜성은 다륜십왕(多輪十王)이 있었기에 그토록 위대할 수 있었다. 동서고금, 하늘과 땅을 통틀어 가장 강했다는 십 인의 무왕(武王)들의 면면은 아래와 같았다. 성불존왕(聖佛尊王)-! 불(佛)의 성자(聖者)로서 팔만사천 가지의 지혜와 활력을 안고 태어난 대승불기의 시조(始祖)이다. 금마천세(金魔天世)-! 마(魔)의 대조종으로 지하에 수천 년 동안 스며있던 천마혈기를 흡수하여 백팔마류(百八魔流)를 창안했던 장본인이다. 천사여제(天邪如帝)-! 어둠의 사악한 정기로 태어난 사술(邪術)의 제왕으로서, 미증유 불가사의 일천비사기(一千秘邪技)를 창안해냈다. 태양무제(太陽武帝)-! 태양의 혼(魂)이라 불리워진 인물로서, 팔백양강기공(八百陽 氣功) 육백열사장공(六百熱死掌功)의 시조(始祖)가 되는 인물이다. 풍우금왕(風雨金王)-! 대자연의 정기를 한몸에 안고 태어났다는 거인(巨人)으로서, 고금미증유의 역사(力士)인 동시에 팔천병기(八千兵器)를 창안했다. 한음성녀(寒陰聖女)-! 극한의 북천기류(北天氣流) 속에서 탄생한 그녀는 극빙정(極氷精) 속에서 일백 년 동안 정기를 흡수하여 지상 최강의 음한지공(陰寒之功)을 완성시켰다. 무극도종(無極道宗)-! 도무학(道武學)의 창시자인 그는 변골공(變骨功)의 시조인 동시에 주역 천문(天文)의 시조로 평가된다. 지옥천수(地獄天受)-! 신산귀계(神算鬼計)를 무림최초로 집대성한 그는 독(毒), 의술(醫術)의 시조였으며, 사(邪)의 대조종이다. 천도왕(天刀王)-! 도(刀)의 제왕이며 환무(幻舞)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천좌(天座)의 이치를 터득 천왕일도류(天王一刀流)를 창안했다. 백검(白劍) 철중(鐵中)-! 그는 다륜십왕을 통틀어 가장 돋보인 존재다. 무기가 백검(白劍)이라고 불리워진 것 외에는 온통 신비에 싸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창안한 수많은 검법에 단 하나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극도종이 그의 검법을


일검훼(一劍卉)라 호칭하였다. "십왕에 대해서는 그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더 많습니다." 나호영의 긴 설명은 제강에게는 마치 꿈결처럼 들렸다. 그런 나호영의 얼굴에는 땀이 흥건했다. 말을 하는 것도 힘겨운 듯, 그녀의 안색은 보기에 안타까우리만큼 창백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는 허공을 응시하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허나, 여기에는 아무도 모르는 엄청난 비사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바로 다륜성의 진정한 주인은 다륜십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용노야(龍老爺)라는 분이지요." 그 이름을 말한 순간 희미해져 가던 나호영의 눈빛이 보석처럼 광채를 발했다. 제강은 흠칫했다. "용노야? 그가 누구요." "그분이야말로 다륜성의 위대한 주인이시며…… 또한 다륜십왕을 모두 거두어 키운 대스승입니다." "아……" 정녕 엄청난 비사(秘事)가 아닌가! 전설의 다륜십왕은 개개인이 모두 신(神)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거늘, 그들의 배후에 한 위대한 스승이 있었음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이야말로 천하가 알면 벌컥 뒤집힐 일이었다. 제강은 도저히 이 꿈같은 이야기를 실감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찌 후세인들은 다륜십왕만을 기억할 뿐, 아무도 용노야라는 이름을 모른단 말이오?" "그것은…… 그 분이 공명을 멀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그림자…… 나호영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다만…… 그 분은 다륜성과 자신의 힘을 합쳐 한 가지를 실현하려 했습니다." "……?" "그것은 천고의 세월이 흐르고 시공(時空)이 바뀌어도 영원히 만인의 가슴에 불멸의 혼을 심어주고 삼라에 광명을 비춰줄 꿈의 성전(聖殿)을 건립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제강은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천세광명대전(千世光明大殿)!" "그렇사옵니다. 언제부터인가 후세무림인들이 꿈꾸어 오던 것…… 바로 영원한 불멸의 성전, 천세광명대전이란 말은 최초로 그분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놀랍군." 제강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한 제강을 나호영은 의미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결코 꿈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슨 뜻이오?" "차차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 당시 용노야께는…… 천세광명대전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나호영은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허나, 애석하게도…… 천수, 아깝게도 용노야께서는 천수를 다하고 말았습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인 이상…… 그분에게도 정해진 수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 이것처럼 인간에게 절실한 것이 또 있을까.


그리고 그 단어를 언급한 그녀도 이순간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제강은 기이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나호영의 두 눈은 점점 초점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 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더욱 불행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다륜성의 분열을 예견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륜성의 분열……" 그렇다. 다륜십왕은 너무도 강했기에 스승 용노야가 없는 세상에서 도저히 제 이인자를 용납할 수 없었으리라. 다륜성의 파멸과 천하의 혼돈은 명약관화했다. "그래서…… 그분은 최후의 방편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그렇습니다. 다륜성을 영원히 외부와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나호영의 음성은 순간 가볍게 떨려나왔다.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마음을 결정한 순간부터…… 위대한 힘과 영화의 상징, 다륜성은 영원히 이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제강은 그만 할말을 잊고 말았다. 그렇다. 그것은 더 이상 강해질 수 없도록 위대했던 한 인간의 고뇌가 어린 엄청난 비사였다. 장내에는 갑자기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깨트린 건 제강이었다. "그 엄청난 비사가 나, 제강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이오?" "소천왕……" 나호영은 물기가 반짝이는 시선으로 제강을 올려다 보았다. "지금 소천왕께서 저의 죽음을 지켜보듯이…… 그 당시 용노야의 마지막을 지켜본 분이 있었습니다." "아……" "그 분의 명호는 군마대공 나관충, 바로 천녀의 오십육대 선조입니다." 나호영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지극한 충절과 기쁨의 미소였다. "용노야께서 살아생전 가장 믿었던 분이 바로 저의 선조이신 군마대공입니다. 그 두 분의 마지막 대화…… 그것은 저희 가문(家門)에 수천 년 간 내려왔습니다." 세월(歲月)…… 수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군마대공…… 노부는 평생 남에게 단 한 번도 부탁을 한 적이 없다. 허나, 이제 자네에게 나는 하나의 부탁을 하려 한다. -용노야…… 말씀하십시오. -다륜십왕…… 그들은 노부의 제자이기 이전에 무서운 야망과 무혼(武魂)을 지닌 재왕들이다. -용노야…… -비록 그들은 제세금마대진에 갇혀 영원히 나갈 수 없을 것이나, 그들의 후예는 언젠가 반드시 세상에 나가고 말 것이다. -하오시면……? -그때가 노부 사후(死後) 삼천 년, 허나 안심하라. 그대는 이 다륜도엽(多輪刀葉)을 간직했다가 후손에게 전하여 한 영웅을 기다리게 하라. -한 영웅이라 하심은……? -노부와 같은 능력을 타고난 기재를 말함이다. 그가 노부를 대신해서 다륜을 정리해줄 것이다.


-용노야…… -군마대공…… 자네를 믿는다. 반드시 다륜도엽을 전하게 하라…… -믿으십시오. 제 영혼과 속하의 후손들이 반드시 사명을 완수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림의 세월이 한없이 흘렀다. 군마대공의 후손들은 오직 그 명을 완수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죽어갔다. 그러나 한때 번성했던 군마대공의 후손들은 삼백여 년 전부터 급속히 감소하더니, 급기야는 대(代)가 끊어질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나후영은 군마대공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이르러 기적처럼 소천왕을 찾아낸 것이었다.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이 순간 나호영의 아름다운 얼굴이 서서히 시커멓게 변색되고 있었다. 그녀는 치명적인 내상에다 극독에까지 중독되어 있었다. 허나, 그녀는 끝까지 희미하게 꺼져가는 의식을 놓지 않았다. "소천왕…… 당신께서 바로 용노야가 예언하신 그 기재입니다." "내가?" 제강은 여전히 그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호영은 이미 사물이 시야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사상백룡흔(四像白龍痕)…… 용노야께서는 바로 소천왕과 같은 사상백룡흔을 타고 나셨습니다." 사상백룡흔! 제강의 손과 발에 나타난 그 놀라운 신비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렇다.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허나, 제강은 아직도 꿈을 꾸는듯한 느낌이었다. "믿을 수 없소……" "소천왕……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다륜을 깨우십시오. 당신께서는 진정한 다륜의 후예……" 실낱처럼 가느다란 음성…… 그녀는 마지막 혼신의 힘을 짜내어 품 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받으십시오." "이것은……" "다륜도엽을 소장한 곳이 그려져 있는…… 천존엽해(天尊葉海)입니다." 한 장의 빛바랜 두루마리였다. 제강이 그것을 받아 펼치자, 호수(湖水) 형상과 함께 수많은 선(線)이 나타났다. "이곳은 파양호로군." "잘……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나호영은 다시 떨리는 손으로 한 자루의 소검(小劍)과 소도(小刀)를 내밀었다. 소도에는 인장(忍薔)이라는 글자가, 그리고 소검에는 신룡(神龍)이라는 글자가 겉표면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그 두 가지 물건이 제강의 손으로 넘어가자, 나호영은 비로소 모든 임무를 완수한 듯 힘없이 벽에 몸을 기대었다. "그 두 신물이…… 소천왕의 몸을 보호할 것입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치이익…… 지독한 악취와 함께 그녀의 하반신이 시커멓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원래 그녀는 중상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무서운 독(毒)에 중독된 상태였던 것이다.


제강은 크게 놀라 그녀를 붙들었다. "소공녀, 당신의 몸이……" "소…… 천…… 왕…… 부탁이……" "말하시오! 어떤 부탁이든지 들어주겠소!" "제 손을…… 잡아주십시오." "아……" 제강은 그녀의 죽어가는 손을 힘껏 잡았다. 나호영의 눈가에 순간 영롱한 이슬이 맺혔다. "감사합…… 니다…… 소천왕……"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힘없이 꺾여졌다. 제강은 왠지 울고 싶어졌다. "가엾은 여인……" 스윽…… 그는 그녀에게서 몸을 일으켰다. 그 사이 나호영의 몸은 완전히 핏물로 변해 녹아내리고 있었다. "……" 제강은 끝까지 나호영의 시신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서 슬픈 미소를 남기고 죽어간 여인…… 그녀의 이름은 나호영이었다. *** 제신봉(制神峯). 파양호가 한눈에 보이는 봉우리의 정상(頂上)에는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정상의 한 천년고송(千年古松) 아래서 말없이 파양호를 바라보며 서 있는 한 소년(少年)이 있었다. 그러한 소년의 모습은 한폭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바로 제강이었다. "……" 제강은 하룻밤 새 몰라보게 성숙해진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물처럼 고요했다. 호수를 굽어보던 그는 문득 나직하게 독백했다. "저 바다같은 호수…… 저 검푸른 물결 어딘가에 태고의 혼(魂), 다륜도엽이 잠들어 있단 말인가……" 그는 간밤에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나호영이 죽어가면서 남긴 모든 말이 그의 심기를 크게 흔들어 놓은 것이다. "운명…… 나는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니는 그런 운명 따위는 믿지 않는다." 제강의 두 눈에 한순간 기광이 번뜩 스쳤다. "허나, 천하를 위하는 것이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이 일에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스윽…… 제강은 돌연 품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천존엽해였다. 천존엽해에 호수와 함께 그려진 복잡한 선과 점의 표시는 실로 난해했다. 허나, 제강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한곳을 알아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붉은 원과 함께 천해다림(天海多林)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천해다림…… 짐작이 맞는다면 바로 이곳이다!) 제강은 가슴이 진탕되는 것을 느꼈다. 알 수 없는 태고의 신비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천해다림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매우 험난한 곳이리라.)


제강은 천해다림의 위치를 확실히 머리 속에 새겨놓았다. 이어 그는 품 안에서 화섭자를 꺼내 천존엽해를 태워버리려 했다. (이런 것을 지니고 다니면 목숨에 지장이 많지!) 허나, 그의 손은 곧 흠칫 멈춰지고 말았다. "아니, 이건?" 천존엽해의 뒷면에 몇 구절의 새로운 글귀가 보인 때문이었다. 그것은 손 끝을 깨물어 쓴 혈서였다. 그 필치는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한 듯 급히 휘갈겨져 있었다. (나호영…… 그녀의 필치가 분명하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위급한 상황에서 쓴 나호영의 필치였다. -아아…… 다륜성을 가둔 제세금마쇄진은 이미 깨진 것이 분명하다…… 다륜십왕…… 오늘도 그들의 후예가 나를 추격해왔다…… 반고일빈…… 그녀는 한음성녀의 직계인 한음궁의 딸이 분명하다…… 금사후…… 그는 풍우금왕의 직계이다…… 그리고 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중상(重傷)을 입힌 혈제(血帝)는 지옥천수의 후예일 것이다…… 무서운…… 무서운 일이다. 이대로라면 천존엽해가 없더라도 그들은 천해다림을 찾아내고 말 것이다…… 시간…… 시간이 없다…… 하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아……" 제강은 순간적으로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나호영이 죽어가면서 남긴 그 글귀는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위중한 것인지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환청(幻聽)인가? 제강의 귓가에는 나호영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걱정마시오…… 그대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오." 제강의 두 눈에 단호한 결심의 빛이 서렸다. "운명을 시험하고……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할 것이다." 쌔애앵!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제강의 머릿결을 휘날리며 지나갔다. *** 때는 묘시 무렵, 파양호의 검푸른 물결 위에는 어둠이 소리없이 내려앉아 있었다. 촤아아…… 촤아아…… 어인 까닭인가? 오늘따라 파양호의 수면에 떠 다니는 배들은 평소보다 열 배는 많아 보였다. 허나, 그 어느 배도 불을 켜놓지 않았다. 밤안개와 함께 스멀거리는 건 섬칫한 살기였다. 대체 이 밤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가. 이때다. 촤르르르…… 어둠 속에 한 호면(湖面)이 무섭게 요동쳤다. 동시 물 속에서 뻗어나오는 한줄기 혈광(血光)이 있었다. 그 혈광으로 인해 사방 십 장 반원은 완전히 핏빛 광채로 물들었다. 촤아악! 그 물 속을 뚫고 뒤이어 전신이 핏물처럼 번들거리는 혈인(血人)이 솟아올랐다.


구 척 거구의 혈인은 머리칼과 수염은 물론이고 심지어 두 눈마저 붉은 빛이었다. 그것을 어찌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으랴! 금세라도 한줌 혈수(血水)로 변해 녹아내릴 듯한 혈인은 물 위에 떠있는 대선(大船)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스윽…… 어찌된 영문인지 금방 물 속에서 솟아나왔는 데도 그의 붉은 장포에는 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몸에서 묻어나는 건 음사하기 짝이없는 기운이었다. 사해를 삼켜버릴 듯 공포스런 기도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고 있는 것이다. "벌써…… 한 달 째……" 혈인의 입에서 음울한 독백이 새어나왔다. "이백 리 파양호 호심을 모조리 뒤졌다. 허나, 그 어디에도 천해다림은 없었다." 뭉클…… 그의 몸에서 쏟아지는 혈광에 사위의 어둠이 진저리치듯 부르르 흩어졌다. 두 개의 혈주(血珠)를 박아놓은 듯한 그의 두 눈은 연신 괴기로운 광채를 발했다. "허나…… 반드시 찾는다. 나 혈제(血帝)에게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 아! 혈제라고 했는가. 그렇다. 그는 원래 다륜십왕 중 지옥천수의 직계인 지옥궁의 혈제였다. 바로 금공녀 나호영에게 죽음을 내렸던 장본인인 것이다. "다륜도엽은 반드시 나 혈제의 손에 들어와야만 한다." 무서운 독백이 그의 붉은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위에서 무수한 죽음의 그림자가 몰려오고 있었다. …… 제 8 장 靈 物 소선(小船). 파양호의 야음을 헤치고 천천히 나아가는 한 척의 소선이 있었다. 이 소선은 유별난 점이 있었다. 일부러 켜놓은 것인가? 소선에는 오색(五色) 등(燈)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런 모습이라면 모든 사람의 이목을 끌기에 족하고도 남을 것이다. 소선에는 어부 차림의 두 인물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제강과 귀천공자였다. 그들은 한가히 뱃놀이를 나온 듯 연신 술을 마셔대고 있었다. 촤아아…… 배는 느릿느릿 호심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끄윽……" "끅…… 취한다. 형님, 또 마셔야 되우?" 매홍주(梅紅酒) 세 통--두 사람 사이에는 독하기로 소문난 매홍주가 세 통이나 놓여져 있었다. 제강은 완전히 취한 듯했다. 안개가 서린 듯 몽롱한 눈길에 웃음이 번진다. "거지, 마셔라. 계속 마시고 취하는 것만이 너의 살 길이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 귀천공자는 고개를 뒤흔들더니 술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젖이 화끈하고 위장이 뜨듯해지더니…… 급기야 술기운은 머리 위로 활화산처럼 솟구쳤다. "끄윽…… 좋구나. 헛헛……" 귀천공자는 전신을 흐느적거리다 문득 사위를 돌아보고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니…… 언제 어디서 이토록 많은 무림인들이 몰려들었지? 저 배에 있는 자는


고루혈마( ?血魔)이고…… 저 인물은 고령철제(枯靈鐵帝)…… 마야신우선(魔爺神羽扇)…… 은거했던 노마두들이 모두 출동했군." "알려고 하지 마라. 그것이 거지, 네가 살 길이다." 제강은 술잔을 단숨에 비우며 말했다. 귀천공자는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아까부터 살 길, 살 길 하는데…… 형님, 어디 죽으러 가오?" "모르는 게 좋다. 그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제기랄." 귀천공자는 한탄성을 흘려냈다. 그는 평소 제강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강은 술냄새 맡는 것도 싫어했던 것이다. (분명……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귀천공자는 그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이제보니……) 귀천공자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헛헛…… 형님은 참 머리가 좋으시오. 이렇게 불을 훤하게 켜놓고 가니 아무도 우리를 의심하지 않는구려." "끄윽……" "게다가 술을 미친 듯이 퍼마시고 있으니…… 형님은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오." 과연 그러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선박들…… 당대를 뒤흔드는 거물들이 수두룩한 이곳에서 보란 듯이 유유히 나아가는 소선은 너무 눈에 뜨인 나머지 오히려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았다. "어쨌든…… 사람은 머리가 좋고 볼 일이오." "후후……" 제강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때였다. 촤아아…… 그들 앞에 한 척의 거대한 범선이 나타났다. 일인(一人), 대선의 선미에서 제강과 귀천공자를 지켜보는 한 쌍의 냉혹한 시선이 있었다. (지독한 냉기다!) (아……) 제강과 귀천공자는 그 눈빛을 마주 대한 순간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상대는 흑의(黑衣)의 미청년이었다. 그는 천년 화강암인 듯 차가우면서도 강인한 기도를 전신에 후광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러한 미청년의 손에는 하나의 금빛 깃털(羽)이 쥐어져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어둠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금우(金羽)!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흑의미청년은 제강과 귀천공자를 응시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귀천공자는 그 진저리가 나는 시선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허나, 그는 내심과는 달리 흑의미청년에게 술잔을 높이 쳐들었다. "헛헛…… 이 술이 부럽소? 생각 있으면 이리 내려오시오." "……" 순간 흑의미청년은 칼날 같은 눈썹을 꿈틀하더니 시선을 돌려 버렸다.


(이들은 아니다!) 금우를 쥔 그의 창백한 손이 가볍게 경련했다. (대체 나, 금사후가 노리는 인물은 어디에 있는가……) 오오…… 금사후라 했는가. 원래 그는 나륜십왕 중 풍우금왕의 후예였던 것이다. (반드시 그는 나타날 것이다. 그가 천해다림을 찾고 다륜도엽을 얻었을 때…… 나는 길목을 노린다!) 금사후는 자신의 금우를 금륜마우(金輪魔羽)라고 불렀다. 그는 금륜마우를 자기자신보다 더 믿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금륜마우는 그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었다. (가장 현명한 자만이…… 다륜도엽을 손에 넣는다!) 촤아아--금사후의 대선은 서서히 장내에서 멀어져 갔다. 제강은 그가 사라진 곳을 한동안 예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산(山) 같은 인물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둠이 가장 깊어지는 무렵에 소선은 파양호의 한곳에 조용히 멈추었다. 이곳은 유난히 소용돌이가 심한 와류폭(渦流瀑)이 있는 지점이었다. 꽈르르르르…… 흰 거품을 토해내며 맴돌고 있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보는 이를 두렵게 한다. 제강은 그 검푸른 소용돌이 속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이곳이 분명하다." 그 말에 귀천공자의 안색이 싹 변했다. "이곳이라니? 설마 저 와류폭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건 아닐테고……" "바로 맞추었다." 제강의 태연한 대꾸에 귀천공자는 그만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형님, 미쳤소? 내노라 하는 이 파양호의 대선들도 저 와류폭에 휩쓸리면 순식간에 끝장이오!" 귀천공자는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은 느끼며 급히 말을 이었다. "보시오, 이 주위에만은 어느 배도 다가오지 않고 있소." "이왕 시작한 일이다." 제강은 비록 말은 그렇게 했으나 와류폭의 가공할 소용돌이에 난감함을 느꼈다. (설마…… 금공녀가 죽으러 가라고 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때 그의 뇌리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혹시……" 스윽…… 제강은 재빨리 품 속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냈다. 바로 금공녀 나호영이 남긴 마도 인장과 천검 신룡이었다. 소검과 소도는 어둠 속에서 신비로운 광채를 발했다. 제강은 마도 인장과 천검 신룡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도검의 표면에 미세한 글씨가 나타났다. <도검합일(刀劍合一) 개호지로(開湖之路).> 바로 도와 검을 하나로 합치면 길이 열린다는 뜻이 아닌가? 제강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역시 내 예측이 맞았군."


그는 자세히 마도 인장과 천검 신룡을 살폈다. 과연 마도 인장의 손잡이 부분에는 천검 신룡이 들어갈만한 크기의 틈이 있었다. 제강은 지체없이 천검 신룡을 마도 인장에 합일시켰다. 그러자 기이한 울음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후류류륭! 오색보광(五色寶光)! 마도 인장과 천검 신룡에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찬란한 오색보광이 뻗어 나오는 게 아닌가! 그것은 곧 장엄한 칠채서기(七彩瑞氣)로 변해 제강의 전신을 휘감았다. "아……" 그 모습에 귀천공자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혀…… 형님, 대체 이것이 무슨 조화요?"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촤-악! 와류폭--그 가공할 소용돌이 속에서 뭔가 거대한 물체가 솟아올랐다. 아…… 거북(龜)!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거북이었다. 촤아아아…… 하늘과 땅이 요동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족히 수천 년은 살았을 듯한 그 거북은 큰 눈동자를 굴리며 제강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맙소사……!" 귀천공자는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때였다. 또 한 차례 놀라운 조화가 벌어졌다. 번쩍! 거대한 거북의 등 이끼를 뚫고 찬란한 칠채서기가 뻗어 올랐다. 그것은 제강이 들고 있는 마도 인장과 천검 신룡에게서 뻗어 오르는 칠채서기와 똑같은 것이었다. (아……) 제강이 내심 탄성을 토하는 순간, 두 칠채서기는 허공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제강의 몸이 무서운 흡인력에 이끌려 허공에 날아오른 건 그 직후였다. 후우웅! (윽……) 제강은 자신의 몸이 이끼가 잔뜩 끼어있는 거대한 바닥에 부딪쳤다고 느꼈다. 그 거대한 바닥이 바로 거북의 등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경황 중에도 그는 귀천공자의 짧은 경악성을 들을 수 있었다. 쿠우우우…… 소용돌이치는 물결이 밤하늘을 덮었다. 거대한 거북은 무서운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흐읍……) 제강은 자신의 몸이 파양호의 물결 속으로 가공할 속도로 하강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 와중에도 제강의 뇌리 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나 역시 동물을 좋아하지만…… 용노야…… 그분처럼 이런 끔찍한 놈을 사귀지는 못할 것이다!) 허나, 제강이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삼천 년 전에는 이 끔찍한 거북도 손바닥 크기의 귀여운 놈이었다는 사실이었다.


*** 천해다림(天海多林). 그것은 수천, 수만 개의 암초가 지옥을 연상시키듯 솟아있는 절지였다. 거북은 빛살처럼 그중 암초 사이의 동굴로 들어갔다. 정녕 가공할 속도였다. (만약 어떤 작자가 거북이 느리다고 한다면 그 면상을 패주고 말겠다!) 제강이 생각을 굴리는 사이, 쿠웅--엄청난 진동과 함께 그의 몸이 퉁겨져 날아갔다. 제강은 곧 자신이 이미 물 속을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암흑(暗黑) 천지의 동혈 속이었다. 제강은 온 몸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스윽…… "고약한 놈. 좋게 내려놓을 일이지……" 제강은 사위를 천천히 살폈다. 허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가다 뭔가에 걸려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쿵…… "빌어먹을……!" 제강은 고통어린 신음성을 흘려냈다. 그는 곧 그대로 바닥에 편한 자세로 눕고 말았다. "이럴 때는 차라리 편히 쉬는 게 나을 것이다. 기운을 차리고 나면 좋은 생각이 나겠지." 술을 너무 마신 탓인가. 뒤늦게 취기가 그의 전신을 휩쓸었다. 그때였다. 치익! 허공 위에서 괴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 푸르스름한 불빛이 허공에 나타나 빙빙 맴도는 게 아닌가! 제강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저것은 오래 전에 멸종됐다는 흑광비서(黑光飛鼠)?" 흑광비서(黑光飛鼠). 그것은 박쥐의 일종으로 날개 밑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영물(靈物)이었다. "저놈이…… 나보고 따라오라고 하는 것 같군." 비틀…… 제강은 술기운에 흔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흑광비서를 따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어둠 속을 더 나아갔을까. 석실(石室). 찬연한 광채가 가득한 하나의 원형 석실이 나타났다. 제강은 서슴없이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천정에는 수십 개의 야명주(夜明珠)가 박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허나, 그는 이내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제강은 석실이 텅텅 빈 것을 보며 의아성을 흘려냈다. (아니다. 분명 뭔가 있을 것이다. 내가 술에 취한 탓에 못 본 모양이군!) 제강은 두 눈을 천천히 내리감았다. 이어 그는 두 눈을 확 부릅뜨고 사위를 살폈다. 그러자 과연 하나의 물체가 그의 시야 속에 들어왔다.


"저것이군." 옥갑(玉匣).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옥갑이었다. 거대한 석실 중앙에 그 옥갑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비틀…… 제강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옥갑을 주워들었다. 제강은 옥갑의 뚜껑을 열려 했다. 허나, 아무리 애를 써도 옥갑의 뚜껑은 열리지 않았다. 제강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옥갑을 노려보았다. "뚜껑이 없지 않은가?" 허나, 제강은 곧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역시 내가 술에 취한 탓에 잘못 본 것이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옥갑을 살폈다. 허나, 이번에는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옥갑에는 비단 뚜껑이 없을 뿐만 아니라 미세한 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제강은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독백했다. "피곤하군." 그는 일단 자리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그는 옥갑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그것을 바닥에 가볍게 두드려 보았다. 툭툭……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사정없이 세게 바닥에 두드렸다. 허나, 역시 옥갑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제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방법밖에 없겠군." 스윽…… 그는 옥갑을 두 손으로 쥐고 애절하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제발 열려다오. 어차피 열릴 것이라면 버틸 필요가 뭐 있겠느냐? 부탁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폭소를 금치 못했으리라. 술도 얼큰하게 취한 김에 제강은 넋두리까지 쏟아냈다. "용노야…… 당신은 짓궂은 분이시오. 이곳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오? 그나마 내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오. 게다가 나는 술을 한 통이나 마신…… 탓에…… 아니?" 문득 제강은 흠칫 두 눈을 크게 떴다. 옥갑이 불에 달군 듯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 것이다. (아!) 동시 옥갑에서 찬란한 금광(金光)이 뻗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금광 탓인가? 제강의 두 손바닥에는 다시 사상백룡흔(四像白龍痕)이 꿈틀거리며 나타나고 있었다. "아…… 원래 이 옥갑은 가만히 쥐고 있으면 저절로 열리게 되어 있었군." 제강은 비로소 깨달았다. 사상백룡흔-! 그의 두 손에 숨어있는 사상백룡흔과 금광을 발하는 옥갑은 저절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옥갑은 너무나 뜨거워서 제강은 두 손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허나 제강은 옥갑을 놓지 않았다. 한순간 옥갑의 표면에 미세한 글자가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 -그대는 틀림없이 사상백룡흔을 타고 난 연자(緣者)…… 이 옥갑은 사상백룡흔의 정기(精氣)를 받아야만 열리리라. 연자여…… 기다렸노라.


"알겠소. 빨리 뚜껑이나 여시오. 손이 다 타겠소." 제강은 이마에 식은 땀을 흘리며 신음했다. 순간이다. 텅…… 옥갑의 뚜껑이 기다렸다는 듯 맑은 음향을 내며 열렸다. 잎사귀(葉)! 그 속에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손바닥만한 잎사귀 하나가 들어있었다. 그것의 전체에는 물결모양의 문양(文樣)이 무수히 나 있었다. 언뜻 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그 잎사귀의 가운데에는 선명한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다륜도엽(多輪刀葉).> 아아…… 천하인들이 몽매에도 찾던 그 다륜도엽이었다. 제강은 조수처럼 밀려오는 감동을 느꼈다. "다륜도엽……"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전신을 휩쓸었다. "이 평범해 보이는 잎사귀 하나로 인해 대강남북이 전운(戰雲)에 싸여 있는 것인가……" 스윽…… 제강은 더 이상 살피지 않고 다륜도엽을 품 속에 갈무리했다. 그러자 옥갑 밑에 있는 하나의 양피지가 눈에 띄었다. "……?" 제강은 양피지를 들어 펼쳤다. <이제 그대에게 운명은 주어졌다. 삼천 년 전 노부도 해내지 못한 거대한 운명의 짐이 그대에게 내려진 것이다. 그대는 위대한 다륜의 후예…… 허나, 이제 시작일 뿐이다. 다륜십왕은 노부의 제자이기 전에 가공할 효웅들이다. 그들의 후예는 그보다 더욱 무섭게 변모하리라. 그 어떠한 힘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오직 그대만이 그들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 반드시…… 그대는 수 없이 분열된 다륜을 일통 시키고 그들 위에 서라. 그것은 곧 천세광명대전의 건립을 의미함이다.> "천세광명대전……" 제강은 거기까지 읽자 전신의 피가 뜨겁게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심기를 조용히 가라앉히며 만고불후의 대거인, 용노야(龍老爺)의 글을 계속 읽어갔다. <여기에 그대에게 불멸의 힘을 줄 다륜도엽이 있다. 다륜도엽에는 노부의 모든 영혼(靈魂)이 깃들어 있다. 허나, 이 다륜도엽 속에 숨겨진 비밀은 그대 스스로 풀어야 한다. 오직 그대의 지혜와 슬기만으로 다륜도엽의 비밀을 풀어야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연자여…… 그 때는 그대가 만인 위에 군림하는 시기이리라. 그대와 나는 사상백룡흔으로 이어진 운명의 동반자…… 부디 노부가 못다 이룬 꿈을 그대가 이루기 바란다. 출구는 정삼(正三) 방향의 야명주를 누르면 열리리라. 용노야(龍老爺).> 서찰은 그렇게 끝났다.


제강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또 비밀이란 말인가……" 다륜도엽의 비밀. 제강은 도저히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예측할 수 없었다. 허나, 제강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기로 작정했다. 헌데, 그가 막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우르르릉…… 갑자기 석실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하는 게 아닌가? 동시 왼쪽 석벽에 찬서리가 하얗게 맺히는 듯하더니 석벽을 종잇장처럼 터뜨리며 한 그림자가 빠져나왔다. 꽈과광! 오오…… 한 사람! 여인(女人)이었다. 섬뜩하도록 하얀 장포를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 쓰고, 희디흰 손목에는 소름끼치는 흑편(黑鞭)을 감아쥔 모습이다. 그렇다. 제강은 이미 이 괴여인을 귀제당에서 목격한 바가 있었다. (반고일빈……!) 나호영이 남긴 글을 통해서 이미 그녀의 정체까지 알아낸 제강이었다. 아찔한 현기증이 그를 엄습했다. 다륜십왕 중 한음성녀의 직계인 그녀가 이곳까지 나타날 줄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벽을 뚫고 들어오다니! 저건 인간도 아니다!) 제강은 내심 부르짖음과 동시 추호도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일찌감치 사라지자!"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천정으로 껑충 몸을 날렸다. 정삼(正三) 방위의 야명주가 그의 손 끝에 닿았다. 바로 용노야가 서신에 언급한 야명주였다. 거의 동시 반고일빈의 신형이 환상처럼 제강을 덮쳐왔다. 파앗! "내 앞에서 허튼 수작은 통하지 않는다." 번쩍! 절대절명의 순간 야명주가 벽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동시 반고일빈이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쿠오오오…… 급류(急流)! 엄청난 기세의 물기둥이 천정을 가르며 눈 깜짝할 사이에 석실을 뒤덮어버린 것이었다. 반고일빈의 신형이 휘청하는 사이에 찬란한 칠채보광(七彩寶光)을 뿌리는 거대한 물체가 나타나 제강의 몸을 감싸더니 떠오르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촤아아아! (거북이구나! 이녀석은 정말 대단한 놈이야!) *** 만월(滿月)…… 십오야(十五夜) 천지에 월광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그 월광 아래 한 사람, 철탑같이 강인한 체구에 백의장포를 걸친 인물이 조용히 걷고 있었다. 야풍에 휘날리는 반백의 머리칼과 사자 갈기 같은 수염이 인상적이다. 그러한 그의 풍도는 마치 광야(曠野)를 누비는 용자(勇者)의 야성을 발했다. 그것은 그대로 대종사의


기도가 아니겠는가. 쉬이이잉…… 쉬이잉…… "……" 저벅…… 저벅…… 백의장포인은 고요한 대지(大地)를 울리며 영원히 멈추지 않을 듯 그렇게 걷고 있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 어느 한 순간 그 걸음이 딱 멈추어졌다. 백포인의 발 아래로 하나의 웅대한 사찰(寺刹)이 웅자를 드러내고 있었다. 백운사(白雲寺), 바로 진대선생이 은거하고 있는 백운사였다. "일 년, 노부는 다시 왔다." 묵직한 감회가 서린 음성…… 백의장포인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제강, 너는 많은 성장을 했으리라 믿는다. 광야의 아들답게…… 그래…… 너는 결코 평범해져서는 안된다. 너의 혈관 속에는 뜨거운 광야의 천년혼(千年魂)이 흐르고 있기에…… 그래…… 너는 이 땅의 그 누구보다도 강해질 것이다. 태양이 되고…… 바다가 되고…… 산이 되고…… 하늘이 되어야 한다. 백의장포인의 두 눈이 어둠을 뚫고 활화산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바람…… 거센 바람이 대지를 소리없이 가르고 있었다. 저벅…… 저벅…… -이 아비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세월도…… 야망도…… 만승지존(萬乘之尊)의 권좌까지…… 너는 사자(獅子)의 아들…… 사자(獅子)! 그렇다. 백의장포인이야말로 광야를 포효하는 거대한 사자를 연상시켰다. 한 순간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빠져나오면서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갈기 같은 수염으로 덮인 얼굴에 나있는 무수한 검흔(劍痕), 그것은 타협과 비굴보다는 차라리 투쟁으로 운명을 이겨낸 천년거목(千年巨木)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것은 또한 패왕(覇王)의 위상(威象)이다. 그렇다. 당금 천하에 이러한 기도를 소유한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다. 위지단. 바로 위제강의 부친이었다. 그의 이마에서부터 왼쪽 뺨을 지나 턱 밑까지 그어진 붉은 검흔이 그의 지난 세월을 말해주었다. 쉬이이잉…… 쉬이잉…… 쉬임없는 야풍을 헤치며 그는 보고싶은 얼굴을 향해 걷는다. 그 자신의 모든 것보다 소중한 얼굴을 향해서. -제강…… 나의 아들아……


*** 제강은 쫓기고 있었다. 파양호의 거북은 그를 육지까지 눈부신 속도로 데려다 주었으나 곧 사라지고 말았다. 제강은 뒤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달려야 했다. 그의 뒤에는 이미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군마들이 추격해 오고 있었다. 슉! 슈--- 욱! 그들은 순식간에 제강과의 거리를 좁혀왔다. 그들은 굶주린 야수떼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저 어린 놈이 대체 누구냐?" "나도 들은 이야기지만 파양호에서 난데없이 칠재보광에 휩싸여 솟아나온 놈이다!" "그렇다면 다륜도엽이 저 어린 놈의 손에?" "분명 그럴 것이다!" "믿을 수 없다! 경공도 모르는 새파란 애송이가 어떻게 다륜도엽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흐흐…… 잡아서 뒤져보면 판가름 나겠지." 추격자들은 더욱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가 자신이 다륜도엽을 이미 얻은 듯한 착각에 빠져 들었다. 허나, 세상에 쉬운 일이란 단 하나도 없는 법이다. 욕심에 눈이 먼 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이미 판가름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편 제강은 전신이 완전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뛰었으나 결국 추격자들을 뿌리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절망감을 느꼈다. (도저히 방법이 없구나!) 헌데, 그 위기의 순간이었다. 추격자들의 허공 위에서 한 백영(白影)이 환상처럼 나타났다. 백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추격자들의 사이를 누볐다. "으아아악!" "끄아악!" "웬 놈…… 끄륵!" 아수라지옥도(阿修羅地獄圖)가 펼쳐치고 있었다. 맨 선두의 삼십여 추격자들의 목이 거의 한순간에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추리리릭---! 야공을 가르는 섬뜩한 음향! 들판은 이내 아비규환 속에 혈향으로 진동했다. 제강은 잠시 도주하는 것도 잊고 그 가공할 살륙을 바라보았다. 그는 도저히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어찌, 한 인간이 저토록 빠르고 무서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비명은 정확히 백 열 한 번이 터져 울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백영은 홀로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었다. 백영의 손에 들려진 것은 검은 빛으로 번들거리는 채찍이었다. (모…… 모두 죽었다!) 제강은 내심 신음했다. 죽지 않은 추격자들은 이미 공포에 질려 달아난 자들 뿐이었다. 문득 제강은 백영의 눈길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반고일빈!)


그렇다. 그녀가 아니고 그 누가 이토록 소름끼치는 솜씨를 보일 수 있겠는가! 후다닥! 제강은 이번에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그는 내심 한탄을 금치 못했다. (내 평생 이토록 고달픈 밤은 처음이다!) 그때 반고일빈의 신형이 허공으로 천천히 솟아 올랐다. 그녀의 손목에 감겨진 흑편야우가 독사처럼 살아 꿈틀거렸다. "너는 다륜도엽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무심한 일성과 함께 그녀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제강에게 폭사되었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제강은 갑자기 도주를 멈추고 품 속에서 천검 신룡을 꺼내들었다. 슥! "좋다, 덤벼라. 내 스스로 뛰어보아야 벼룩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달아나지는 않겠다." 제강은 이를 악물고 반고일빈을 노려보았다. 그는 정말 죽을 각오로 그녀와 싸울 결심이었다. 그는 자신이 단 일초도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제강은 뒤통수를 맞고 죽기는 싫었던 것이다. 허나, 제강은 그녀에게 겁주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당신은 비록 나를 죽일 수는 있을 것이나 결코 다륜도엽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 반고일빈은 유령처럼 허공에서 내려서더니 묵묵히 제강을 응시했다. 그녀는 제강의 마지막 말에 약간 충격을 느낀 듯했다. 제강은 빙긋 미소하며 오히려 그녀에게 다가섰다. "눈치가 빠르군. 이 몸은 무공을 모르는 탓에 자폭할 수 있는 폭약을 항시 지니고 다닌다." "……" "당신은 찰거머리를 좋아하지? 나는 정말 당신이 싫다." "……" "진절머리가 나는군. 내 당당한 사내대장부로서 말하지만 이 세상에서 당신같은 여인을 좋아할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제강은 오히려 반고일빈보다 더 침착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용기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제강 자신도 놀랄 일이었다. 그는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 오히려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다. 스윽…… 반고일빈이 천천히 흑편야우를 들어올렸다. "너를 죽이겠다. 연후에 시간이 있으면 네 정체를 알아보겠다." 무심한 음성……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옥음(玉音)이었다. 제강은 준수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영리하군. 허나, 내가 먼저 당신을 찌르겠다." 번쩍! 제강은 검을 내뻗었다. 그 기세는 대단했으나 삼류고수라도 눈감고 피해낼 수 있는 일초였다. 헌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반고일빈이 흠칫 신음성을 흘려내며 황급히 신형을 뒤로 날리는 게 아닌가! "거……검강(劍 )!" 번쩍!


놀랍게도 그녀의 몸을 향해 뻗어나간 것은 가공할 기세의 검강이이었던 것이다. 허나, 반고일빈보다도 더욱 놀란 건 제강 자신이었다. "내게 이런 실력이?" 허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한 그림자가 소리없이 나타나며 전음(傳音)을 보내왔다. "눈을 감으십시오." (아……) 무엇 때문이었을까? 제강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그는 곧 그 음성의 주인이 자신을 안고 허공을 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공중을 훨훨 나는 듯한 느낌 뿐이었다. (대체 누굴까……) 제강은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러자 복면에 가려진 얼굴이 시야에 언뜻 들어왔다. 사방의 경물이 휙휙 옆으로 스쳐가고 있었다. 믿을 수 없으리만큼 빠른 신법(身法)이다. 그렇다. 이 복면인은 반고일빈의 추격을 거짓말처럼 쉽게 벗어나고 있었다. *** "대체 누구였을까?" 그 복면사이의 눈빛은 분명 낯익은 것이었다. 제강은 침상에 누워 있었다. 이곳은 백운사의 거소, 제강은 새벽무렵에 자신의 침소로 돌아왔다. 정체불명의 복면인은 제강을 숲 속에 안전하게 내려놓고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유령처럼 사라져 버렸었다. 제강은 지금도 한바탕 꿈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지난 밤의 일이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문득 제강은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렇다, 진대선생! 그 눈빛은 바로 진대선생의 눈빛과 흡사했다." 허나, 제강은 곧 입가에 쓴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학문밖에 모르시는 그 분이 아닌가. 터무니없는 짐작이다." 털썩…… 제강은 다시 침상에 드러누웠다. 그는 잠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베고 있는 책자(冊子)들을 곤혹스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진대선생은 저녁까지 이 범경칠서(梵經七書)를 독파하라고 아침에 말하셨다." 제강은 슬픈 얼굴로 한탄성을 흘려냈다. "이걸 다 읽자니 졸린 눈알이 빠져 나갈 것 같고…… 안 읽자니 날벼락이 떨어지겠고…… 고민이로다." 허나, 제강은 고민을 오래 하지 않았다. 그는 범경칠서를 베고 벌렁 드러누웠다. 이어 그는 두 다리를 최대한으로 편하게 뻗었다. "이럴 때에는 한숨 푹 자는 게 상책이다. 내 어찌 밀려오는 잠을 사양하겠는가." 열려진 창(窓)가로…… 싱그러운 새벽바람이 불어와 제강의 코 끝을 어루만졌다. 하늘에는 태양(太陽), 따사로운 햇살이 숨결처럼 제강의 전신에 스며들었다. …… 비(雨)…… 천지를 집어 삼킬 듯한 폭우(暴雨)…… 제강은 폭우 속을 헤매고 있었다.


(대체…… 이곳은 어딘가? 내가 언제 이런 곳에……) 제강은 문득 시선을 들어 사위를 둘러보았다. 끝을 알 수 없는 대초원(大草原)이었다. 쏴아아아--장대같은 빗줄기는 쉴 새 없이 제강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잿빛 하늘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악마형상으로 보였다. 제강은 그 잿빛 하늘이 무서운 속도로 빙빙 돌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일시 아무런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번쩍! 천공과 대초원을 가르며 창백한 섬광이 장엄하게 작렬했다. 순간, 제강은 전신의 피가 한꺼번에 역류하는 듯한 충동을 느꼈다. 심장이 활화산처럼 부풀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제강은 갑자기 대초원 위를 뛰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더없이 시원했다. 대초원은 마치 대해(大海)의 파도처럼 살아 출렁이며 그를 영접했다. 쏴아아아--고오오…… 아아…… 움직인다. 거대한 대초원이 진동을 일으키며 서서히 하늘 위로 부상하고 있었다. 제강은 뛰고 또 뛰었다. 땀…… 온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어는 한 순간, 제강은 자신이 한 절벽의 봉우리 위에 당도해 있음을 깨달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곳이다!) 무엇 때문인가? 제강은 다음 순간 자신도 모르게 대초원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대초원…… 광야의 왕(王)이 돌아왔다! 그 순간 놀라운 전경이 벌어졌다. 오오…… 마치 천상(天上)에서 하강한 듯, 수천 수만의 군사(軍士)가 나타나 대초원을 메우더니 금빛찬란한 도검(刀劍)을 쳐들며 일제히 함성을 지르는 게 아닌가! "와……" "군왕천위(君王天威)!" 하늘과 땅이…… 그리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모두 숨죽여 이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때 뇌성벽력이 동천(東天)을 진동하더니 하늘에서 장엄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 아들아…… 제강은 흠칫 고개를 들어 동천을 올려다 보았다. (아니, 아버님이……) 아…… 위지단이 전신에 온통 쇠사슬이 감긴 채 피에 젖은 참혹한 모습으로 하늘 위에 떠있는 게 아닌가? 제강은 부친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제강보다 먼저 위지단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솟구쳐 오르는 두 그림자가 있었다.


반고일빈, 그리고 또 한 명은 어디선가 본 듯한 미청년이었다. 그들은 그대로 위지단의 목을 찔러갔다. 그 모습에 제강은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안돼!" 꽈과과과광! 천붕지괴할 굉음과 함께 놀라운 괴변(怪變)이 벌어졌다. 잿빛 하늘이 반으로 갈라지며 그 속에서 핏물이 흐르는 게 아닌가! "아버님!" 제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악몽(惡夢)이었다. (이상한 꿈을 꾸었군!) 제강은 온 몸이 땀에 흥건히 젖은 것을 느끼며 사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바로 오늘은 아버님이 오시는 날이 아닌가." 실내는 어두컴컴했다. 이미 초저녁이 지난 듯…… 그때 문득 제강은 어두운 방 안의 가운데에 유령처럼 한 그림자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제강은 곧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당신은?" "자네 부친이 아니라서 미안하군." "초우형 아니시오?" 그렇다. 그는 바로 초우였다. 그는 손에 시퍼런 소도를 들고있었다. 제강은 그제서야 꿈 속에서 보았던 정체불명의 미청년이 바로 초우와 흡사했다는 걸 깨달았다. 섬뜩한 전율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내렸다. "그 칼은 무엇이오?" "후후…… 이것 말인가." 초우는 나직하게 미소하더니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가 악몽을 꾸면서 신음하길래 나는 침입자가 있는 줄 알았네. 그래서 칼을 뽑아들고 뛰어들었지." "아……" 제강은 수긍하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구려. 정말 고맙소. 헌데…… 내가 무슨 잠꼬대를 했소?" "부친을 부르더군." 초우는 두 눈에 기이한 이채를 발하더니 문득 밖을 향해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밖에 인기척이 들리는 것 같은데 혹 자네 부친이 아니신가? 부친께선 엄청난 무림고수야……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다." "아……" "제강, 나 초우는 이 길로 백운사를 떠난다. 언젠가 또 만나게 되겠지." 초우는 소도(小刀)를 품 안에 집어넣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제강은 흠칫 성목을 크게 떴다. "이별이오?" "그렇다네, 잘 있게." 초우는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 나갔다. 제강은 그의 등을 향해 맑은 어조로 말했다. "행운을 빌겠소." "고맙네." 삐걱……


초우는 문을 열었다. 순간 그의 시선에 정원의 고목(古木) 아래 조용히 서 있는 철탑같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운좋은 아비로군!) 초우의 손 끝이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제 아들이 죽으려는 순간에 나타나다니……) 그렇다. 초우가 원하는 제강과의 이별은 원래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제강과의 영원한 이별을 위해 이 야심한 시각에 찾아온 것이다. 이윽고 초우의 모습은 입구에서 사라져 갔다. 제강은 곧 고목 아래 서있는 한 산 같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아버님……) 고요한 밤이다. 하늘에는 달이 교교하게 떠 있었다. 제강의 몸은 격동으로 인해 석상처럼 굳어져 갔다. 천년고송(千年古松) 아래 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자는 분명 부친 위지단이었다. "제강……" 부친은 조용히 웃었다. "아버님……" 천천히 제강은 무릎을 꿇었다. 꿈 속에서 보았던 불길한 영상 때문인가. 제강은 부친이 단 일 년 사이에 몹시 늙어 보인다고 느꼈다. "미처 오신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쌔애앵…… 야풍이 무심하게 부자 사이를 스쳐갔다. 위지단은 제강을 굽어보며 무섭게 나무라듯 말했다. "일어서라. 잊었느냐? 너는 누구 앞에서도 무릎을 꿇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하오나……" "일어서라. 설사 대명(大明)의 천자(天子)라 해도 너의 절을 받을 자격이 없다." 제강이 어쩔 수 없이 예를 거두자 위지단의 신색은 더욱 준엄하게 변했다. "묻겠다. 오늘로써 꼭 일 년째…… 너는 무엇을 배웠느냐?"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습니다." 제강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순간 위지단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서책이 없어서냐?" "아닙니다. 이곳에는 황궁서고에서 옮겨온 고금의 기서(奇書)만 해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대선생의 학문이 부족해서냐?" 위지단의 사자안에 서서히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허나, 제강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진대선생은 이미 학식 뿐만 아니라 덕망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당대의 거유(巨儒)이십니다." "……" 장내에 터질 듯한 기운과 함께 숨막히는 적막이 찾아들었다. 위지단은 한참 후에야 웅후성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일 년 동안 무엇을 했느냐?" "심도(心道)입니다." 제강은 맑은 두 눈을 신비롭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본래 학문이란 것은 서책에 있다고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천고학예를 닦은 거유라도 마음이 흐려지면 졸장부가 되고……" -무한한 힘을 지닌 영웅이라도 마음이 탁해지면 소인(少人)이 되니…… 학문이란 마치 변심 잘하는 아름다운 여인같은 것. 믿을 게 못됩니다. 그것이…… 도둑들에게도 열려 있고…… 바보들에게도 열려 있으니…… 도둑이 학문을 알면 큰 도둑이 되고, 바보가 학문을 알면 온통 세상을 바보천지로 만들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심도(心道)를 배웠습니다…… 쌔애앵…… 쌔앵! 교교한 달빛 아래 바람은 잔잔히 불고 있었다. 제강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차라리 무식하고 가난할지언정 곧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천민의 마음 하나가 우선합니다. 그 마음이 바로 심도(心道)입니다." "제강, 너는 인간의 정리(情理)를 과대평가하고 있다." "아닙니다. 아버님…… 마음은 곧 만유(萬有)요, 삼라(森羅)요, 우주(宇宙)입니다." 제강의 맑은 두 눈에 은하수가 흐르듯 신비로운 광채가 서렸다. "하여, 오욕칠정을 먼지처럼 훌훌 털어버리고 명경지수처럼 마음을 다스릴 수만 있다면…… 배우지 않아도 알고, 듣지 않아도 저절로 깨우치며 우주조차 창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아…… 마음의 도(心道)! 위지단은 자신이 마치 성스러운 천상선동(天上仙童)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다고 느꼈다. 그의 분노는 눈 녹듯이 사라져 갔다. (내 아들……) 위지단은 성장한 아들을 대하는 기쁨에 앙천광소를 터뜨리고 싶었다. 허나, 그는 그러한 마음을 억누르고 뚜벅뚜벅 제강에게 다가섰다. 그의 강철같은 손이 뜨겁게 제강의 어깨를 잡았다. "녀석……" "아버님……" 말이 필요 없었다. 이 부자(父子)는 무언(無言)의 대화로 알았다. 따사로운 혈육의 정은 지난 일 년 간의 회포를 일시에 풀어주고 있었다. 제강은 이처럼 부드러운 부친의 눈길을 난생 처음 대했다. 그는 하마터면 눈물을 떨굴 뻔했다. (아버님……) 그는 비록 십 오 세의 소년답지 않게 성숙해 있었으나, 역시 부친 앞에서는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돌연 위지단의 신색에 경악의 빛이 어렸다. (사…… 사왕신상(邪王神相)!) 위지단의 시선은 제강의 이마에 고정된 채 엄청난 당혹과 불신의 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


귀풍랑의 저주---! 관 속에서 부활한 사랑을 통해 제강의 이마에 새겨진 그 저주를 발견한 것이었다. (설마…… 사요천이 이미 모든 비밀을 알고 이 아이에게 저주의 마수를 뻗어왔단 말인가?) 위지단의 철탑같은 거구가 크게 진동했다. (아니다. 노부의 계획은 완벽했다. 제강의 정체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체 어찌된 것인가? 위지단은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느꼈다. 제강은 그러한 부친의 모습을 의아롭게 바라보았다. "아버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이놈!" "……!" "당장 산에 가서 네 몸보다 두꺼운 나무를 베어 오너라." 벼락같은 호통성이었다. 제강은 흠칫 당혹성을 흘려냈다. "어디에 쓰시려고?" "그것으로 네놈을 두들겨 패야겠다." "아…… 아버님, 왜 갑자기?" "이놈." 위지단은 두 눈에 가공할 신광을 폭사했다. "이유는 알 것 없다." "알겠습니다." 제강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준수한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어쩐지 잘 나가더라니……) …… 제 9 장 熱 血 한 칸의 깊숙한 정실(靜室), 실내는 그리 넓지 않았으며 어두운 편이었다. 뭉클…… 뭉클…… 녹향(綠香), 향로에서 안개처럼 녹색 단향이 신비롭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위지단은 태사의에 깊숙이 앉아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딘가 무거운 안색이다. 이때였다. 스르륵…… 실내의 문이 열리며 한 그림자가 조용히 들어섰다. 선풍도골의 자의노문사(紫衣老文士), 그는 나타나자마자 위지단을 향해 정중한 군신례(君臣禮)를 취했다. "천노, 일 년 만에 주군을 뵈오이다." "어서 오시게, 진대(眞大)." 위지단은 천천히 이글거리는 듯한 시선을 들어 상대를 응시했다. 아아……! 어느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진대선생(眞大先生). 그에게 당금 황제 말고도 고개를 숙이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음을.


아니, 당금 황제조차도 감히 그를 진대라고 부르지는 못했다. "진대……" "말씀하시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무슨……?" 진대선생은 노안에 당혹을 담고 위지단의 얼굴을 올려보다 흠칫했다. 위지단의 눈빛이 너무나 무섭게 이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지단의 입술이 천천히 산맥이 꿈틀거리듯 움직였다. "그 아이의 몸에 사왕신상이 새겨져 있었다." "……!" 순간 진대선생의 노구가 벼락을 맞은 듯 진동했다. 그의 노안은 경악과 불신(不信)으로 완전히 탈색되었다. "사왕신상…… 이라 하시었소?" "틀림없다." "주군, 죽여 주시오. 모두가 이 늙은 몸의 불찰이오." 진대선생의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광채가 뻗어 나왔다. 그것은 평소 온유하기만 하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위지단은 무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다." "소군(少君)께서는?" "그 아이는 모르고 있다." "……" 적막! 돌연 실내에 죽음같은 적막이 찾아들었다. 진대선생의 노안에는 어느새 땀이 흥건하게 흐르고 있었다. "명을 내려 주시오, 주군." "이것은 우연이다. 그들은 그 아이의 신분을 모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 "만약 그들이 그 아이의 신분을 알았다면 절대 사왕신상 정도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위지단은 활화산처럼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가차없이 죽였거나…… 유괴하여 노부를 유인했을 터, 상황으로 보아 우리의 행적은 아직 노출되지 않았다." "하오시면?" "대책은 이미 세워두었다." 스윽…… 위지단은 천천히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신색에 순간적으로 어두운 빛이 스쳐갔다. "진대, 문제는 그들이 이미 철저히 금제된 천마해에서 중원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설마……" "그렇다. 수미일천대관(須彌一千大關)은 이미 해제되었다." 묵직한 일성일진대…… 수미일천대관(須彌一千大關)! 그것은 대체 무엇을 뜻함인가? 그 한 마디를 들은 진대선생의 노구에는 또 한 차례 폭풍같은 격동이 일고 있었다. 그는 신음하듯 부르짖었다.


"수…… 미일천대관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씀이시오!" "후후…… 잊었는가? 그 수미일천대관을 최초로 돌파한 인물이 노부임을." "하오나 주군의 능력은 신(神)에 다다랐는데 어찌 그들과 비교할 수 있겠소!" "진대, 자네는 모르는군." 위지단의 시선이 허공에 깊숙이 고정되었다. "그 지옥을…… 그 진저리쳐지는 무서움을…… 인간이되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수백 수천 명의 광신자(狂神者)들이 웅크리고 있는 악마의 군도(群島)가 바로 천마해다." "주군…… 이 늙은 몸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이오이다." 진대선생의 음성은 은은히 떨려 나오고 있었다. "그곳에 맺힌 한과 저주의 가공할 힘…… 만약 한꺼번에 그들이 천년금제를 풀고 세상에 나온다면…… 천하는 종말로 치달을 것이오이다." 종말(終末)……! 정녕 종말이라 했는가. 종말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또한 그것은 악마들의 소관이기도 하다. 악마의 군도, 천마해---! 그렇다. 진대선생은 바로 악마를 말하고 있었다. 실로 소름끼치는 일…… 이 세상에 과연 그런 곳이 존재할 수 있을까? 위지단의 사자갈기같은 수염이 칼날처럼 뻣뻣하게 변했다. "천노." "말씀하시오, 주군." "계획을 수정해야겠다." "수정이라 하심은?" "반 년 후로 예정되었던 불사승만(不死昇卍)의 완성이다." 위지단의 입에서 이 단호한 한 마디가 떨어진 순간 진대선생은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아니되오이다!" "그리할 것이다." "주군!" "설마 아직도 준비가 안되었다는 뜻은 아니겠지?" 위지단의 전신에서 수천 수만의 불꽃이 흘러 나오는 듯했다. 그것은 광야를 질타하는 사자의 포효성이었다. 진대선생은 그러한 위지단을 곤혹스럽게 올려다 보았다. "준비는 이미 십오년전(十五年前) 광야의 수호령 혁련노인에 의해 끝났소이다." 아…… 기억하는가? 혁련노인! 그렇다. 그것은 십 오 년 전 어느 이름모를 동굴 속에서 아기였던 제강을 안고 처음 불사승만의 대법을 논했던 이름이었다. "주군, 소군의 몸은 아직 불사승만의 대법을 완성시키기에는 어리오. 만약 무리해서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다면……" 진대선생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위지단의 시선이 너무도 무서운 집념으로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사 그 아이가 불사승만의 대법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노부는 피 한 방울, 영육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전하(殿下)……"


진대선생의 두 눈에 은은히 물기가 어렸다. 그는 깊숙이 고개숙여 격동을 숨기며 말했다. "전하, 준비하겠소이다." "진대, 잊었는가?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 진대선생은 위지단의 등을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는 깊숙이 예를 표한 후 몸을 돌렸다. 스르륵…… (하늘 같은 권좌(權座)에 계셔야 할 분이시거늘…… 하늘이여…… 저분에게 힘을 내려 주시오!) *** 쿵! "빌어먹을." 쾅! "제기랄." 꽈직---! "우라질……" 이곳은 백운사 뒤쪽의 산중, 한 준수한 미소년이 도끼로 아름드리 나무를 내리치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제강이었다. 그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콰직--한순간 아름드리 거목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제강은 도끼를 내던지고 쓰러진 거목을 노려보았다. "이것으로 날 두들겨 패시겠다고? 흥, 한 대면 내 머리가 날아가겠군." 제강은 밧줄로 거목을 묶고 산 밑으로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급경사의 산이었으나 거목은 쉽게 끌려오지 않았다. "헉헉……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이 세상에 과연 이런 것으로 자식을 두들겨 패겠다는 부친이 또 있을까?" 끼이익--제강은 슬픈 표정이 되었다. "어이구, 내 팔자야……" 그때였다. 산 밑에서 한 꼽추노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다 떨어진 마의(麻衣)를 걸친 비대한 몸집의 꼽추노인이었다. 제강은 그를 보자 반색을 했다. "철타(鐵駝) 아닌가?" "허허……" 마의꼽추노인은 기묘하게 웃었다. 철타, 그는 원래 백운사의 모든 잡다한 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는 노인이었다. 비록 꼽추였으나 사귐성이 좋아 제강과 평소 친하게 지내던 터였다. "소군을 모시러 왔습니다." 진중한 음성…… 순간 제강은 흠칫했다. (소군이라고?) 그는 그제야 철타의 모습이 평소와는 어딘가 다른 것을 느꼈다. "방금 소군이라고 불렀는가?" "허허…… 도련님."


"그렇지, 그렇게 불러야지." "주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군?" 제강은 또 한 차례 당혹스런 표정이 되고 말았다. "주군은 또 뭔가?" "허허…… 소군의 부친 되시는 어른이지요." "철타, 자네 오늘 이상하군. 그냥 내 아버님이라고 하게." 제강은 다시 거목을 질질 끌며 말을 이었다. "안그래도 지금 회초리를 준비해서 아버님께 가는 길이라네." "회초리?" "이 거목 말일세." "……" 이번에는 철타가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입가에 이내 빙그레 미소가 피어올랐다. "허허…… 그것은 이제 필요없습니다." *** 모옥, 철타의 모옥은 백운사의 뒷뜰 깊숙한 곳에 한적하게 세워져 있었다. 모옥은 매우 허름했다. 얼핏 보자면 바람만 가볍게 불어도 날아가버릴 듯한 모습인 것이다. 제강은 아직 한 번도 철타의 모옥 안에 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때는 별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이른 새벽 무렵이었다. "철타, 자네의 모옥 안에서 왜 내 아버님이 나를 기다린단 말인가?" 제강은 의아함을 금치 못하며 모옥 앞에 당도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들어가시기 전에…… 중요한 소지품이 있다면 모두 놔두고 들어가시지요." "음?" "지니고 계시면 모두 손상될 것입니다." "무엇 때문인가?" 제강은 당혹성으로 물었다. 허나, 철타는 그저 소리없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곧 아시게 됩니다." "……" 제강은 잠시 생각하다가 품 속에서 몇 가지 물건은 꺼내었다. 낡은 책자 화소고답본, 그리고 소도, 인장과 소검, 신룡이었다. "철타, 자네가 보관해 주게. 내 친구들에게 받은 소중한 물건들이다." 제강은 화소고답본 사이에 숨겨놓은 두 가지 물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바로 다륜도엽과 천기성자가 짚신에 담아 건네 주었던 남화천리옥경이었다. 그렇다. 만약 철타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감히 받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실 제강은 부친 위지단에게도 다륜도엽을 얻은 사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당분간 그는 다륜도엽의 비밀을 풀 수 있을 때까지 홀로 간직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철타는 제강이 건네준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잘 간직하겠습니다." "자네는?" "저는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철타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의미깊은 말을 이었다.


"소군의 부친에게는 많은 당대의 거인들이 보이지 않게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그렇다면……" 순간 제강의 맑은 두 눈에 신비로운 광채가 일렁였다. "그렇습니다." 철타는 빙그레 웃더니 공손히 말을 이었다. "저 또한…… 그분을 따르는 한 수하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 철타의 신형이 환영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제강은 망연히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철타가 무림고수였다니……" 허나, 제강은 이 수수께끼를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곧 철타의 모옥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는 이 모옥이 밖에서 보던 것과 약간 다름을 느꼈다. "바람에 날아갈 것 같더니…… 하늘이 무너져도 끄떡없겠군." 안의 벽은 뜻밖에도 모두 석벽이었다. 더욱이 바닥은 금강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침상과 의자 하나, 그것이 모옥 안의 모든 것이었다. 위지단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가?) 바로 그때였다. 쿠구궁! 바닥이 크게 진동을 일으키더니 밑으로 급속히 떨어져 내렸다. (기관(機關)이다!) 제강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십 장 가량 내려왔을까? 벽면에 하나의 원형 통로가 입을 쩍 벌리고 나타났다. 제강은 망설임없이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쿠구궁---! 그가 들어왔던 입구는 순식간에 밀폐되었다. 통로 안은 지독히 어두웠다. 제강은 곧 그 원인을 깨닫고 크게 놀랐다. "만년오금석(萬年嗚金石)…… 이곳은 모두 만년오금석으로 이루어져 있군." 그렇다. 통로 안을 이루고 있는 시커먼 빛깔의 석벽은 모두가 금강한모보다 더 강하다는 만년오금석이었다. 얼마나 통로를 나아갔을까? 밝은 유등의 불빛과 함께 하나의 석실(石室)이 나타났다. 석실 중앙에는 한 명이 간신히 누울 수 있을 듯한 돌침상이 놓여져 있었다. 금갑(金甲)! 돌침상 위에는 열 개의 금빛 찬란한 광휘를 뿌리는 열 개의 상자가 놓여 있었다. 허나, 제강이 놀란 것은 그 금빛 서기를 뿌리는 열 개의 상자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님…… 진대선생과 당노인까지……?) 삼인(三人)-! 석실 안에는 세 인물이 제강을 기다리고 있었다. 위지단과 진대선생, 그리고 어부차림의 청수한 풍모를 지닌 육순 노인이었다. 당어수(唐漁 ).


제강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이 파양호 근처에서는 모두가 그를 당어수라고 불렀다. 제강이 기억하는 당어수는 이 파양호에서 가장 한가한 노인이었다. 그는 항시 낚싯대를 파양호 속에 드리우고 꾸벅꾸벅 조는 것이 일과였다. 허나, 제강은 한 번도 그가 고기를 낚아 올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버님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제강은 일시 심기가 어지러워졌다. 그는 직감적으로 진대선생과 당어수가 부친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제강, 가까이 오너라." 위지단이 사자안을 부릅뜨며 분부했다. 제강은 지체없이 부친 앞에 다가섰다. 위지단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들을 정시했다. "이 아비는 너를 죽이려 한다. 너는 따르겠느냐?" "……" 제강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담담한 신색으로 부친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님은 절 태어나게 하셨으니 당연히 죽일 수도 있습니다." "놈, 너는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다. 묻겠느냐?" "제가 물어보아도 아버님은 가르쳐 주지 않을 것입니다." "맞았다." 위지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내에는 더없이 엄숙한 공기가 흘렀다. 제강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뭔가 엄청난 일이 닥쳐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위지단이 돌침상 위에 놓인 열 개의 금갑상자를 응시하며 엄숙하게 물었다. "제강, 너는 혹시 야혼십대마물(夜魂十大魔物)에 대한 전설을 아느냐?" "야혼십대마물의 전설……" 제강의 눈에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전설(傳說), 그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전설이었다. 제강은 만유비전경(萬有秘傳經)에서 그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났다. 제강은 약간 긴장한 눈길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태고적부터 단 한 번도 햇빛이 침범하지 못한 원시(原始)에 얽힌 전설입니다." "말해보아라." "저주받은 어둠의 마물들에 대한 전설…… 그것은 이 하늘 아래 가장 신비롭고 저주스런 열 개의 마물로서……" 제강은 까닭 모르게 입술이 타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야혼십대마물이라고 합니다." 야혼십대마물(夜魂十大魔物)--제강은 문득 만유비전경에서 읽었던 한 구절의 글귀가 떠올라 몸을 흠칫 떨었다. -지옥십팔계가 구천(九天)에 세워질 때, 그 최후의 날에 지하 수만 장에서 어둠과 함께 야혼십대마물이 솟아올랐다…… 제강은 돌침상 위의 열 개 금갑과 부친의 얼굴을 번갈아 응시했다. "설마……" "그렇다. 저 열 개의 금갑 속에는 네 짐작대로 야혼십대마물이 들어있다." 위지단의 두 눈이 뇌전처럼 광망을 뿜었다. 그는 제강을 향해 종(鐘)이 울리듯 장엄한 어조로 분부했다.


"너는 내가 보는 앞에서 직접 금갑(金甲)을 열어 야혼십대마물을 차례대로 꺼내라." "아버님……" "이 아비가 항마쇄옥기(降魔碎玉氣)로 그 마정을 한 시진 동안 잠재웠으니 너는 염려할 것 없다." "알겠습니다." 스으윽…… 제강은 입을 굳게 다물고 다가가 첫 번째 금갑을 열었다. 혈광(血光)! 시뻘건 광채가 제강의 얼굴을 덮치더니 곧 석실 전체를 가득 채웠다. (아아……) 제강은 심장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이럴 수가……) 그때 제강의 고막을 뒤흔드는 위지단의 음성이 진동했다. "무엇이냐?" "마흡취(魔吸鷲)입니다." 제강은 신음하듯 대답했다. 마흡취(魔吸鷲), 그것은 독수리 형상의 핏물처럼 붉고 투명한 모습이었다. 다리가 셋인 삼족마물(三足魔物)로서 일명 혈옥(血 )으로 지옥십팔계의 마정을 흡수하여 살아간다는 저주의 마물인 것이다. 전설에는 마흡취가 그 마정을 한번 토해내면 십방계(十方界)가 사계(死界)로 화한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실재로 존재하다니!) 제강은 섬뜩한 감촉을 느끼며 마흡취를 금갑 속에서 꺼냈다. 하나…… 둘…… 차례로 제강의 손에 의해 기괴한 형상의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뇌전(夜雷電)-! 그것은 검은 박쥐 형상이었다. 흰빛의 번갯불 무늬가 전신에 새겨져 있었다. 지하 일만 장 속에서 음기를 섭취하여 성장하며, 단숨에 서른 여섯 줄기의 악마의 번갯불을 토해낸다는 죽음의 마물이었다. 자린혈와(紫鱗血蛙)-! 자줏빛 비늘로 싸인 두꺼비 형상으로 세 개의 핏빛 눈을 지니고 있었다. 일명(一名) 삼목혈와! 세 개의 눈을 곧 삼살(三殺), 즉 천살(天殺), 지살(地殺), 인살(人殺)을 의미한다고 알려졌다. 쌍두해공(雙頭海蚣)-! 백색 지네의 형상으로 두 개의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쌍두해공은 빛이 들지 않는 깊은 해저 속에 산다고 알려졌다. 한혈잠(汗血蠶)-! 그것은 전신이 옥색(玉色)으로 빛나는 형상의 괴잠이었다. 한혈잠은 언제나 고요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한 번 붉은 땀을 흘리기 시작하면 주위 일백 리의 모든 생물이 독물로 변한다고 알려졌다. 천왕사(天王蛇)-! 머리 부분이 왕관(王冠) 형상인 흑사(黑蛇)였다. 전설에 존재하는 지상의 영물들 가운데 열독(熱毒)이 가장 강하다고 했다. 환혼적주(還魂赤蛛)-!


그것은 둥글고 붉은 알의 형상이었다. 환혼적주는 야혼십대마물 가운데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마물로 알려졌을 뿐, 자세한 것은 불가사의에 가려져 있었다. 구음혈(九陰血)-! 그것은 아홉 개의 마디를 지닌 핏빛 마물로 몸체 부위에 희고 가는 선이 무수히 나 있을 뿐 눈과 입조차 없었다. 전설에는 일만 명의 여인들이 지닌 음기를 모두 합해도 구음혈 하나의 음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악염충(惡炎蟲)-! 그것은 타오르는 불꽃 형상의 괴충이었다. 아니, 불꽃 그 자체와도 같았다. 악염충은 십대마물 가운데에서도 악과 저주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었다. 천익궁(千翼宮)-! 그것은 천 개의 비늘 같은 날개를 지녔다는 도룡사(屠龍蛇)의 형상이었다. 실제로 천익궁은 일천 개의 비늘같은 날개를 지녔으며 그 날개마다 각기 다른 기운을 품은 것으로 전해졌다. "천익궁……" 마지막으로 천익궁을 금갑에서 꺼내는 제강의 전신을 빗물을 뒤집어 쓴 듯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석실 안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야혼십대마물의 울긋불긋한 광채로 가득했다. 제강은 숨이 막힐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부친을 응시했다. "모두 꺼내었습니다." "좋다, 이리 오라." 이윽고 위지단은 다가온 제강의 어깨를 힘있게 잡았다. 그의 얼굴에 길게 그어져 있는 검흔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짧은 순간, 그러한 위지단의 신색에는 어떤 고뇌의 빛이 복잡하게 스쳐가고 있었다. -하늘이여, 이 아이를 굽어살피소서…… 제 10 장 出 發 "잘 들어라. 애초부터 야혼십대마물을 구하는 것부터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 이것은 도저히 보통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이 아비는 해내었다. 그리고 이젠 너의 차례다." 위지단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으로 제강을 직시했다. "너는 죽을지도 모른다." "아버님……" "이 아비를 믿겠느냐?" "믿습니다." 제강은 두 눈에 신비로운 광채를 흘려내며 추호도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위지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침상 위에 누워라." 제강은 돌침상 위에 묵묵히 드러누웠다. 위지단의 신색은 더없이 엄숙했다. "너는 으뜸의 지혜를 지니고 태어났다. 그러나 너는 선척적으로 체질이 연약한 문골(文骨)이었다." "……" "이제 이 아비는 전설의 불사승만(不死昇卍), 그 대법을 펼쳐 네 몸을 고금최강의 신골(神骨)로 만들겠다." 오오……


기억하는가? 불사승만(不死昇卍)! 전무후무한 고금최강의 불사신골(不死神骨)을 말함일진대…… 그렇다. 위지단은 인간의 몸으로 하나의 가공할 신화(神話)를 창조하려 하고 있었다. "진대, 당노, 준비하라." 드디어 위지단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진대선생과 당어수는 신속하게 돌침상의 좌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어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쌍장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이다. 후우웅…… 무형의 잠력과 함께 찬란한 금광이 돌침상을 에워쌌다. 그 내가진기(內家眞氣)로 이루어진 빛무리는 거대한 원의 형상으로 석실을 눈부시게 채웠다. 후류류륭…… 위지단의 백포자락이 폭풍에 휘날리듯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감아라. 취정회신(聚精會神)의 상태에서 조금고 움직여서는 안된다." 천둥같은 위지단의 외침성이 석실을 뒤흔들었다. 연이어 그의 전신에서 자광(紫光)이 투명하게 뻗어 나왔다. 그것은 극상승의 내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현상이었다. 제강은 애써 심기를 안정시키며 두 눈을 감았다. (나는 과연 내일 아침식사를 할 수 있을까?) 두려움……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죽음처럼 인간에게 절실한 것은 또 없다. 허나, 제강은 부친을 위해서라면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욱……) 제강은 갑자기 엄청난 잠력이 자신의 몸을 산처럼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야혼십대마물은 인세에 둘도 없는 마정들이다. 만에 하나 그 마정들이 네 몸에 흡수될 때 수반되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을 잃는다면 모든 것은 끝장이다." 고오오오--- 오오--"항마범륜금(降魔梵倫禁)---!" 번--- 쩍! 석실 전체가 무너질 듯 심한 요동을 일으켰다. 제강은 고막에 벼락이 울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거의 동시, "시작하라." 묵직한 일갈과 함께 진대선생과 당어수의 쌍장에서 섭물이진공(攝物以眞功)의 수법이 펼쳐졌다. 위지단의 소매가 연이어 무섭게 펄럭였다. "풍(風)의 위력을 지닌 마흡취!" 슉! 마흡취가 허공에 붕 떠올라 위지단의 손에 빨려들었다고 느껴지는 순간, 퍼어억…… 그것은 어느새 제강의 용천혈(湧泉穴)에 깊숙이 박히고 있었다. (우아악!) 제강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 고통을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으랴!


그 가공할 고통은 삽시간에 용천혈 부근에서 전신으로 확산되었다. 제강은 자신의 몸 내부가 엄청난 거력(巨力)의 폭발에 의해 산산이 가루로 변해간다고 느꼈다. 후류류륭--진대선생과 당어수가 펼치는 항마범륜금의 보호막도 금세 깨질 듯 흔들렸다. (오오……) (과연 가공스러운 마물이로다!) 그들의 노안이 누런 빛깔을 띠고 말았다. 허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야뢰전(夜雷電)---" 퍼어억…… "자린혈와(紫鱗血蝸)!" 퍼퍽…… "쌍두해공(雙頭海蚣)! 퍼--- 억--위지단의 손놀림에 의해 형용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제강의 몸에 박혀드는 마물들…… 피는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신기(神技)! 눈 깜짝할 사이에 아홉 개의 마정, 전설의 야혼십대마물들이 제강의 몸 속에 침투되었다. 고오오--- 오오--제강의 몸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잠들었던 야혼십대마물들의 기운이 일제히 되살아나며 각기 통천가공할 마정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아아…… 전신의 근육이 제멋대로 불쑥불쑥 뒤틀리며 한꺼번에 요동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때, "천익궁---!" 위지단의 손에 의해 마지막으로 천익궁이 제강의 백회혈 속으로 파고들었다. 동시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다. 꽈우우우우우…… 우두두두둑! 제강의 전신이 순식간에 배로 부풀어 오르며 청(靑), 홍(紅), 적(赤), 흑(黑)의 가공할 경기가 폭발하듯 사위로 뻗었다. "으아아아악!" 드디어 제강의 입에서 울부짖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화르르르…… 시퍼런 불꽃 덩어리가 석실을 온통 메우는가 했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흰 서리가 가공할 음기를 싣고 사위를 휩쓸었다. 고오오오오오…… 진대선생과 당어수의 신형이 퉁겨 날아갈 듯 휘청거렸다. "제어하라! 항마범륜금을 깨뜨리지 마라!" 위지단의 급박한 외침성이 터져 울렸다. 쿠궁…… 만년오금석으로 이루어진 석벽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우욱……"


"끄륵……" 진대선생과 당어수의 입가에 선혈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초인적인 인내가 그들을 지탱했다. 허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항마범륜금은 깨어지지 않았다. (실패하여 열 개의 마정이 소군의 중단전으로 모이지 못하면…… 소군은 대마인이 되거나 폭발해 버릴 것이다!) 그것은 정녕 처절한 사투였다. 허나, 그들의 고통이 어찌 제강이 겪고 있는 고통에 비교되겠는가? 그것은 이미 고통도 아니었다. 심혼이 산산이 까마득한 공간 속으로 흩어지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설사 이렇게 해서 신이 된다 해도…… 제강은 두 번 다시 이러한 고통을 겪고싶지 않았다. 오오…… 목불인견(目不忍見)! 온 전신이 불기둥으로 변하고 얼음덩어리가 되어 쩍쩍 갈라지더니, 다시 형체를 이루어 물에 부풀린 듯 부어오르고…… 급기야는 사지가 각각 제멋대로 살아 꿈틀거리며 광란했다. 그 무서운 광경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한순간 제강의 전신은 투명한 청색의 형체로 변해 뇌전같은 광채를 폭사하기 시작했다. 번쩍! …… 고통…… 그러한 단어는 사치에 불과하다. 무섭게 텅 빈 제강의 뇌리 속으로 자신이 토해내는 처절한 마지막 울부짖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 사투는 무려 일주일 만에 끝났다. 장내는 완전히 폐허로 변해있었다. 만년오금석의 석실은 통째로 터져나갔고, 갈라진 천정 사이로 달빛이 희미하게 스며드는데…… 진대선생과 당어수, 그들은 바람빠진 공처럼 허탈한 신색으로 철타의 부축을 받으며 서 있었다. 위지단, 비록 의복은 갈기갈기 찢어졌으나 오직 그만이 철탑처럼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품 속에는 제강이 죽은 듯이 안겨 있었다. 그러한 제강을 바라보는 위지단의 강인한 얼굴에는 혈육의 정이 깃든 자애로눈 미소가 어려 있었다. "녀석…… 견디어냈구나. 네 모습이 참으로 눈부시다." 과연 제강의 모습은 믿을 수 없으리만큼 눈부시게 달라져 있었다. 그렇다. 단 일주일 사이에 모든 것은 달라졌다. 그의 체구는 십 칠팔 세의 단단하면서도 수려한 근골을 지닌 청년으로 변모해 있었다. 뿐인가! 여인의 그것보다 더 희고 투명하게 빛나는 피부에 더욱 뚜렷하고 선명하게 변한 이목구비의 준수한 얼굴, 그리고 신비로우리만큼 윤이 흐르는 검은 머릿결…… 정녕 조물주가 탄식할 만큼의 절륜한 변신이었다. 미공자(美公子)의 탄생(誕生)이라고나 할까. 제강은 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헌데…… 웬가? 위지단의 입에서는 한순간 씁쓸한 탄식성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허나…… 애석하게도 불사승만의 신체를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다. 단지 오성(五成)의 성취에 그쳤을 뿐…… 이것도 하늘의 뜻인가!"


"주군, 면구스럽소이다." "주군……" 진대선생과 당어수가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 모습에 위지단은 고개를 무겁게 내저었다. "아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하오시면?" "제강의 이마에 침투한 사왕신상이 중단전으로 흐르는 천천맥(川天脈)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아……" "그렇다. 사왕신상이 없어지는 순간 불사승만의 신체는 저절로 완성된다." 위지단의 사자 안에 날카로운 예기가 소리없이 뻗었다. "노부는 이미 마지막 대책을 세워놓았다." 위지단은 신념으로 불타오르는 시선을 제강의 얼굴에 고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불사승만의 성취가 육성(六成)이상 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아무런 힘도 나타나지 않는 다면…… 나는 또 한 번의 모험을 하겠다." "주군……" "이것은 운명에의 도전…… 그 두 번째가 될 것이다." 두 번째 운명에의 도전이라고 했는가? 위지단의 전신에서는 산악같은 기도가 소리없이 뻗어나오고 있었다. "나 위지단은 사요천의 저주가 무적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때는 이른 새벽, 백운사의 웅장한 전각들 사이로 여명이 막 밝아오고 있었다. 그 여명을 밟고…… 이인(二人), 두 사람이 조용히 백운사를 빠져나와 동천(東天)을 향해 걷고 있었다. 철탑같은 체구의 당당한 백포노인, 그리고 눈처럼 흰 백의(白衣)의 준수한 미공자였다. 그들은 바로 위지단과 제강이었다. "……" 제강은 내심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지난 일 년 간 정들었던 이곳, 이제 낯익은 산천과 얼굴들을 뒤로 하고 이별해야 하니 어찌 아쉬움이 없을 것인가? 위지단이 그의 내심을 짐작한 듯 나직이 말했다. "사내대장부는 항시 별리의 순간에는 바다처럼 마음을 넓히고…… 과거를 그 속에 조용히 묻어두는 법이다." "알겠습니다." 제강은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안개…… 새벽안개가 산등성이에 아스라이 맴돌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 제강은 멀리 계곡 사이에서 땔나무를 등에 지고 백운사 쪽으로 사라지는 꼽추노인을 보았다. (철타……) 제강의 맑은 성목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지난 밤 철타는 제강이 맡겼던 물건들을 지니고 그의 처소에 찾아왔었다. 그리고 제강은 철타로부터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철타…… 한 가지만 묻겠다. 내 아버님은 대체 당금 무림에서 어떠한 분이신가? -소군…… -철타, 말해주게. -소군…… 당금 천하에는 가장 위대한 세 이름이 있습니다. 마도의 하늘 신마(神魔) 뇌어양, 대소림(大少林)의 천수괴승(天修怪僧), 그리고 섬마광혼(閃魔光魂)이라는 신비 속의 인물입니다. (아버님……) 제강은 문득 여명을 헤치며 걷고 있는 부친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많은 인물들이 부친을 따른다. 철타, 진대선생, 당어수…… 다비선승은 비록 부친의 수하는 아니었으나 역시 진대선생의 지우(知友)로서 같이 고락을 맹세한 불자였다. 제강은 그 중에 철타를 생각했다. 볼품없는 철타…… 언젠가 제강이 반고일빈에게 쫓기고 있을 때 그를 구해준 복면인도 바로 철타였다. 그러한 철타는 지금 산속에서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땔감을 나르고 있었다. 필경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 게다. 제강은 문득 품 속에 갈무리한 다륜도엽을 만지작거렸다. (다륜도엽……) 그것의 기이한 감촉을 느끼며 제강은 먼산을 바라보았다. 안개가 자욱하게 그의 앞을 막는다. (나는 언제쯤 무공초식을 하나라도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언제나처럼 아버님은 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해지기만을 바랄 뿐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일다경쯤 그렇게 걸었을까. 백운사의 모습도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허나, 제강은 꿈에도 몰랐다. 여명의 언덕에 서서 제강의 뒷모습을 조용히 배웅하고 있는 눈길이 있음을. 금포넝마의 비쩍 마른 거지, 그는 바로 귀천공자였다. 새벽바람이 찬 때문만을 아닐 게다. 귀천공자의 얼굴은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가는구려, 형님…… 잘 가시오. 잡아둘 수 없으니 보내오만은 절대 형님의 그림자는 내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오." 제강의 뒷모습이 산등성이 너머로 희미하게 사라지자, 귀천공자는 천천히 몸을 돌려 와룡협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지소저도 잊지 마시오. 그녀는 아마 당분간 형님을 찾아내라고 나를 들들 볶을 것이오. 후후…… 그녀가 형님의 달라진 풍채를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구려." 멀리서 백운사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형님…… 나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이 있다오. 형님은 모를 것이오. 개왕요총( 王曜塚)의 무서운 집념을……" 개왕요총( 王曜塚)이라고 했는가? 서서히…… 귀천공자의 모습도 안개 속 수림 사이로 사라져 갔다. *** 향기로운 미주(美酒)와 아름다운 여인을 품기 위해 천하의 풍류남아들이 몰려드는 화류항 항주(杭州). 그러한 항주에서도 천하제일 기루(妓樓)로 명성을 날리는 백아소축(白雅小築)이 있었다. 구층 누각의 층층마다 흰 대리석으로 건축된 백아소축인데…… 세인들은 이 백아소축을 논할 때 당연히 한 인물을 입에 담는다.


화운대인(華雲大人). 그는 백아소축의 주인일 뿐 아니라 중원삼대거부 가운데 일 인이었다. 그는 대강남북에 백 오십을 헤아리는 표국과 도박장을 움켜쥔 신비 속의 대부호(大富豪)인 것이다. 그림(畵). 화운대인은 벌써 반나절 동안 태사의에 몸을 기댄 채 벽면의 그림 한 폭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림 속에는 월하(月下)의 미녀가 환상처럼 미소짓고 있었다. 한 폭 월하미인도! 화운대인은 이토록 오래 그림을 감상한 적이 없었다. 원래 그림을 보는 것이 그의 취미였다. 그것은 혈색좋고 풍채 당당한 그의 겉모습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허나, 그림은 그의 모든 낙이었다. "허어…… 과연……" 문득 한숨어린 감탄성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는 마치 월하미인도의 미녀가 취한 자태에 완전히 홀린 것 같았다. 십 팔구 세 가량 되었으리라. 자련(紫蓮)처럼 화사하면서도 백란(白蘭)처럼 요염한 자태이다. 시선을 약간 움직여볼라치면 난초(蘭草)처럼 청초하여 그대로 귀공녀의 우아하면서도 고귀한 품위마저 느끼게 한다. 게다가 머릿결은 금발(金髮)이요, 한 쌍 봉목은 호수처럼 깊고 푸른 벽안(碧眼)이다. 과연 넋을 잃을 만한 그림 속의 자태가 아닌가. 허나, 화운대인은 호색한(好色漢)은 아니었다. 그는 비단 장사 뿐 아니라 화필(畵筆)에도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 그림을 바라보며 즐거움을 느낄 뿐이었다. "온갖…… 잡념과 번뇌로 어지럽던 마음이 명경처럼 가라앉는도다. 허허…… 자신의 모습을 이토록 잘 그릴 수 있다니……" 자신의 모습, 진정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했는가? 그렇다면 월하미인도 속의 절세가인은 그림 속의 떡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일진대…… "동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내고…… 저토록 살아있는 듯 자신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 솜씨…… 그녀는 이미 화예(畵藝)마저 입신지경에 도달했구나." 문득 화운대인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입가에 온화로운 미소를 지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에게 놀라기를 벌써 몇 년인가. 허허…… 이 세상에 과연 그녀 이상가는 천고의 재녀(才女)가 또 있을까?" 아무도 그의 이 자문에 대답하는 자 없었다. 허나, 누군가 있었다 해도 열이면 열, 모두 고개를 완강히 흔들었을 게 틀림없다. 당연 그녀 이상가는 재녀는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혜령(慧玲)…… 그녀는 이제 이 세상에서 더 배울 것이 없다." 혜령(慧玲). 그것이 바로 그녀의 이름인가? 헌데, 그때였다. 딸랑…… 딸랑…… 실내의 동쪽 문 휘장 쪽에서 아름다운 방울소리가 울려퍼졌다. 순간 화운대인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일 년 만에 금문(金門)의 방울소리가 울리는군!" 금문(金門), 그러고 보니 실내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다. 은빛 휘장의 은문(銀門), 붉은 빛 휘장의 동문(銅門),


상황으로 보아 금문으로 들어오는 인물은 매우 존귀한 신분인 듯했다. 그때였다. 스르륵…… "십기(十玘), 아직도 이 방울을 떼어버리지 않았는가?" 휘장을 걷으며 중후한 음성과 함께 철탑같은 인상의 인물이 들어섰다. 위지단이었다. 그를 대하자 화운대인은 놀라 눈을 크게 뜨더니 황급히 태사의에서 일어나 오체복지했다. "주군을 뵈옵니다." 기쁨이 가득 담긴 음성이었다. 위지단은 빙긋 웃었다. "예를 거둬라." "주군." "저 아이가…… 단봉혜령(丹鳳慧玲)이 맞는가?" 위지단의 시선이 월하미인도를 향했다. 화운대인은 빙그레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주군." "음, 마냥 귀엽기만 하던 아이인데 많이 자랐군. 단봉노사가 살아 있었다면 무척 기뻐했으련만……" 위지단은 태사의에 앉으며 화운대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십기, 밀명을 모두 완수한 것을 치하한다." "허허…… 노신은 단지 조언만 했을 뿐입니다. 모든 일은 혜령이 해냈습니다." "……!" 위지단의 신색에 일순 가볍게 놀라움의 빛이 스쳤다. 화운대인은 기이하게 미소짓더니 문득 한옆의 줄을 잡아당겼다. 이어 그는 월하미인도를 응시하더니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혜령, 주군께 인사드리거라." 순간 믿을 수 없는 괴변이 일어났다. "알겠사옵니다." 아름다운 옥음과 함께 월하미인도 속의 미녀가 환상처럼 밖으로 빠져나오는 게 아닌가. 사르르…… "주군을 뵈옵니다." 벽안의 절세미녀는 위지단을 향해 날아갈 듯 절을 했다. 그녀의 그러한 미태는 빛무리처럼 화사하게 장내를 압도했다. 위지단의 두 눈에 기광이 번뜩 스쳤다. (놀라운 일이다. 둔오환술(遁烏幻術)을 거의 완벽하게 펼치다니……) 둔오환술, 그렇다. 그림 속의 절세가인은 처음 그대로 있었다. 그 옆의 또하나 절세가인(絶世佳人), 한치의 틀림도 없이 똑같았다. 그녀는 절묘한 둔오환술의 수법을 이용해 나타난 것이었다. 그녀의 한 쌍 신비로운 봉목에는 하늘 아래의 모든 지혜가 깃들어 있는 듯했다. "주군, 소녀 감히 주군께서 내린 밀명을 완수했사오니 너그럽게 헤아려 주시길……" 빙옥처럼 희고 섬세한 옥수를 들어 그녀는 한 통의 봉서를 위지단에게 바쳤다. "여기 있사옵니다." 공손하나 기품을 잃지 않고, 아름다우나 속되지 않으니…… 그녀의 몸가짐 하나 하나는 위지단으로 하여금 새삼 경이를 느끼게 했다.


위지단은 봉서를 받아 무심한 신색으로 펼쳤다. 지도(地圖), 그것은 어떤 지세를 상세하게 그려놓은 하나의 지도였다. "이곳은 선하령인가?" "바로 보셨습니다." "의외로군. 그 저주받은 암살부(暗殺府)가 선하령 같은 선경지처에 있었다니……" 위지단의 두 눈에 무섭도록 강렬한 신광이 뻗어나왔다. 암살부(暗殺府). 그곳의 공포스러운 내력을 아는 자는 극소수의 황족(皇族)들에 불과했다. 그곳은 역대 황제들을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 불가사의의 마역인 동시 성역이었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부터 그 위치가 철저한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암살부일진대…… 위지단은 대체 무슨 연유로 그 암살부를 찾고 있는 것인가? "……" 위지단은 봉서를 불끈 움켜쥐었다. 츠츠츳…… 그것은 순식간에 재로 변해 흘러내렸다. 이미 내용을 상세히 기억한 듯. 이어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운명에의 도전…… 그 두 번째의 시작이다!) 그가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다. 단봉혜령이 봉목에 기이한 이채를 반짝이며 옥음으로 물었다. "주군, 가시렵니까?" "그렇다." "주군, 한 가지……" "무엇이냐?" 위지단의 사자갈기 같은 수염이 물결치듯 출렁였다. 단봉혜령의 아름다운 얼굴에 순간 은은히 도화빛이 어렸다. "소군께서는……" "보고 싶으냐?" 위지단은 두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그의 그러한 얼굴에는 숨길 수 없이 희미한 미소가 스쳐가고 있었다. 단봉혜령의 옥용은 더욱 붉게 물들었다. "오 년 동안……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기소리만한 옥음…… 허나, 그녀는 끝내 부인하지 않았다. 단봉혜령, 아무리 수줍어도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용기를 내어 해내고 마는 성품이었다. 위지단은 그러한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 년이라……" "주군." "그 녀석도 많이 성장했지. 네 이상으로……" "아……" 단봉혜령의 봉목이 물결치듯 신비롭게 빛났다. 위지단은 위엄있게 말했다. "그 아이는 곧 네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혜령, 너는 그때 그 아이를 잘 보필해야 한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사르륵……


단봉혜령은 깊숙이 섬세한 허리를 굽혔다. 위지단은 그녀와 화운대인을 잠시 응시하더니 몸을 돌렸다. "가겠다." 딸랑…… 딸랑…… 금종이 울리고 그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단봉혜령은 예를 거두지 않은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현명해질 수 없고, 더 이상 아름다워질 수 없는 가인(佳人). 그녀의 이름은 단봉혜령이었다. *** "백운사를 떠난 지도 어느새 석 달…… 그동안 대강남북을 견문하며 시간을 보냈다. 허나, 아직도 백운사가 그립구나……" 제강은 홀로 객잔 빈 방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옛일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의 준수한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문득 하나의 아름다운 얼굴이 연상처럼 떠오른다. (운지……) -흥! 뛰어내리라면 못 뛰어내릴 줄 알고? 천길 와룡협의 낭떠러지를 나비처럼 주저없이 몸을 날리던 그녀였다. 그녀의 옥음이 아직도 귓가를 생생히 울려퍼지는 듯했다. (후후…… 지금은 좀 여인다워졌을까?) 날수운랑 지운지, 그녀의 영상을 뒤로 또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귀천공자의 웃는 얼굴이었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의제(義弟)인 동시에 벗이다. 설령 믿었던 벗에게 칼을 찔린다 할지라도, 그 배신까지 웃으면서 포용하고 죽어갈 수 있는 그런 벗이었다. (아버님은 말했다. 제왕의 가슴은 포용력으로 채워져 있다고…… 그것이 제왕의 길이라고……) 제왕의 길, 그것은 근래 제강이 부친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한 마디였다. (제왕……) 열려진 창 사이로 밤하늘의 별빛이 영롱하게 흐르고 있었다. 문득 제강은 그 수많은 별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향해 떨어진다고 느꼈다. 슈--- 욱! 허나, 그것은 별이 아니었다. 무서운 기세로 창가를 뚫고 들어온 시퍼런 물체! "헛!" 제강이 흠칫 놀라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다. 그 시퍼런 물체는 그대로 폭발하더니 괴이한 연기로 변해 제강을 휘감았다. 퍼펑! (암습이다!) 제강은 본능적으로 호흡을 중지했으나 이미 때는 늦고말았다. 쿵…… 그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거의 동시 창가로 귀면탈을 쓴 두 그림자가 유령처럼 들어섰다. 휘릭! 방금 무덤 속에서 뛰쳐 나왔는가. 그들의 전신에는 흙부스러기와 함께 시체 썩은 듯한 악취가 진동했다.


"성공이다." "가자." 귀면탈의 두 괴인은 번개같이 제강의 몸을 끼고 창문 밖으로 사라져 갔다. 슈욱! 슉! 그로부터 차 한잔 마실 시각도 흐르지 않았을 무렵에 방문이 열리며 위지단이 들어섰다. 그의 안색이 이내 화강암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이 냄새는?" 시체썩은 듯한 냄새다. 위지단의 노안이 순간 무섭게 경직되었다. "유령사(幽靈邪)!" 제강이 보이지 않음을 안 그의 그의 눈에 분노어린 살기(殺氣)가 화염처럼 일어났다. "그놈들이 왜 제강을……!" 그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밤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파아앗! 제 11 장 誤 判 제강은 희미하게 의식을 되찾았다. 그는 머릿속이 부서질 듯 쑤시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가늘게 두 눈을 뜨며 사위를 살폈다. (이곳은……) 절벽 위였다. 어둠에 싸인 까마득한 절벽 위인데…… 사방에는 기이한 혈무가 소리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강은 그 혈무 속에 세 그림자가 유령처럼 자신을 향해 서 있음을 깨달았다. 제강은 두 눈을 원래대로 조용히 내리감았다. 대체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는 등허리가 매우 차갑다고 느꼈다. 허나, 그 차가운 느낌은 오히려 희미한 그의 정신을 맑게 일깨워주고 있었다. 이때였다. 제강의 귓가로 신경질적인 음성이 울려퍼졌다. "이놈이 아니다!" 피칠을 한 듯 붉은 머리칼에 소름끼치는 귀면탈을 쓴 인물이었다. 본래 귀면이란 것이 바로 귀신의 얼굴을 상상해서 멋대로 끔찍하게 만든 것이다. 핏빛 운무 사이에 선 그는 정말 귀신과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나머지 이인(二人)! 그들도 역시 대체로 비슷한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시커먼 묵의(墨衣)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의 장포자락에는 하나의 붉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유(幽).> "이놈이 아니라니…… 웬 말이냐?" "병신같은 놈, 그 녀석은 이처럼 좋은 옷을 입지도 않았고 잘생기지도 않았다." "제기랄…… 나 귀문혈사가 난생 처음 실수를 저지르다니……" 그들의 대화는 온통 당혹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제강은 내심 기가 막혔다. (제길…… 이 작자들도 한심하지만 이들에게 납치되어 온 내 꼴은 뭐란 말인가?) 옛날부터 그랬지만, 제강은 왜 이제껏 부친이 무공 한 초식 가르쳐 주지 않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러다가 이 한심한 작자들에게 죽기라도 한다면……)


제강은 무척 걱정이 되었다. 억울한 건 둘째치고라도 그게 무슨 개망신이겠는가? 그때 처음의 시퍼런 귀면탈이 제강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경악성을 터뜨렸다. "이제보니 이 얼굴은 언젠가 본 적이 있다!" "아는 얼굴이냐?" "그렇다. 귀문, 너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무슨…… 소리냐, 이놈이 염라대왕의 친척이라도 된단 말이냐?" 붉은 귀면탈, 귀문혈사가 못내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푸른 귀면탈은 넋나간 듯한 어조로 신음했다. "친척 정도가 아니다." "음?" "아들이다." "아…… 아들…… 염라대왕의?" "그렇다." "너…… 미쳤느냐?" 귀문혈사는 어이없는 듯 푸른 귀면탈을 바라보았다. 푸른 귀면탈은 순간 버럭 분노성을 내질렀다. "위지단 정도면 네놈이나 나에게는 염라대왕이나 별반 차이 없지 않느냐!" "위지단!" "귀문……" 모귀는 학질에 걸린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살아야 한다!" -우리는 살아야 한다! 제강은 그 순간 하마트면 크게 웃을 뻔했다. 그때였다. 삼인(三人)이 공포로 뒤범벅된 눈빛을 서로 교환하더니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제강의 몸을 들어올렸다. "숨겨야 한다!" "파묻는 게 어떠냐?" "미친 놈, 묻을 틈이 어디 있느냐? 절벽 아래로 던져라!" 제강의 몸이 절벽 밑으로 기울어졌다. (절벽이라고……?) 제강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급히 실눈을 뜨고 절벽 밑을 살폈다. 바닥이 얼마나 깊은지 알기 위해서였다. 허나, 그가 얻은 것은 아찔한 절망감 뿐이었다. 이 절벽은 도대체 얼마나 까마득한지 아예 바닥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던져라!" 모귀의 외침과 함께 삼 인은 일제히 제강을 절벽 밑으로 내던졌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가? 분명 내던졌건만 제강은 여전히 그들의 품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제강의 두 손이 삼 인의 옷자락을 꽉 거머쥐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제보니 이놈이 벌써 정신을!" 삼 인은 무슨 귀신조상이라도 안고 있는 듯 화들짝 놀랐다. 제강은 두 눈을 천천히 뜨며 그들을 향해 빙긋 미소지었다. "안녕들 하시오?"


매우 우호적인 미소, 또한 신비로울만큼 맑고 깨끗한 미소였다. 허나, 삼 인의 눈에는 그 미소가 무슨 사신의 미소처럼 섬뜩하게 보였다. (이, 이놈!) (소름끼치는 놈이다!) 그들의 전신이 사시나무 떨리듯 경련했다. "내 분명히 약속하오만……" 제강은 담담한 어조로 삼 인에게 말을 이어갔다. "당신들이 나를 곱게 내려놓는다면 아무도 당신들을 죽이지 않게 하겠소." 이것은 진심이었으며 확실한 약속이었다. 허나, 세상에는 어리석은 인물들이 의외로 많은 법이다. "던져라!"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강의 몸은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슈우욱…… 제강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아득한 죽음의 공간은 완전히 그를 향해 입을 벌렸다. (아버님……) -빌어먹을…… 결국 이렇게 모든 게 끝나고 마는 건가…… 정신이…… 정신이 혼미해진다…… 아마 한 백여 장 가량 떨어져 내렸을 것이다. 어느 한순간 제강은 희미한 의식 속에서 하나의 눈부신 유성(流星)이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저건……) 그것은 과연 유성이었을까. 그리고 그 순간 제강은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떨어져 내릴 때의 무서운 가속도와 압력이 그를 질식시켜버린 것이다. 거의 동시, 파아아앗! 제강이 보았던 그 유성이 그를 휘감고 가공할 속도로 절벽 위를 향해 비상했다. 그 유성은 제강을 내던졌던 삼인(三人)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더욱이 그들이 본 유성은 벼락 같은 사자후까지 터뜨리고 있었다. "우---" 쏴아아악! 가공할 속도로 절벽 위에 솟아오르는 그 빛무리를 넋나간 듯 바라보던 삼 인의 뇌리에 문득 벼락처럼 와닿는 이름이 있었다. "위…… 위지단!" 말은 느리고 행동은 빨랐다. 어느새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등을 돌리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죽음에서 삶으로의 도주. 허나, 모든 것은 꿈에 불과했다. 그들은 곧 얼어붙은 듯 동시에 몸을 멈추었다. 한 사람, 그는 칠척 거구에 사자갈기 같은 수염을 휘날리며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전방에 서 있었다. 위지단이었다. 그의 품에는 제강이 의식을 잃은 채 안겨져 있었다. 세 귀면인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끝장이다!)


(내 평생 가장 재수없는 날이다……) 평소 거칠 것이 없던 그들이었다. 허나, 위지단의 무서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 그들의 불행이었다. 위지단의 시선이 비수처럼 그들의 몸에 꽂혔다. "유령삼괴(幽靈三怪), 무엇 때문이었느냐?" "시, 실수였소!" 모귀가 쥐어짜듯이 대답했다. 순간 위지단의 두 눈에 살광이 일었다. "이유만 말해라." "소문…… 귀하의 아드님과 흡사한 용모의 청년이 천마해경(千馬海鏡)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소." "천마해경……" 위지단의 사자안에 순간 놀라움의 빛이 어렸다. (유령사가 꿈을 꾸고 있군. 천마해(千馬海)에 있을 천마해경이 세상에 나왔을 리 없다!) 그의 신색이 곧 섬뜩하리만큼 무심하게 변했다. "가라." "정…… 말이오?" "그렇다." "고…… 고맙소!" 모귀는 황급히 두 동료와 함께 위지단의 옆을 지나려 했다. 순간 위지단의 입에서 냉엄한 일성이 흘러나왔다. "그 쪽이 아니다." "아니……" "설마!" 유령삼괴의 몸이 순간 벼락에 맞은 듯 진동했다. 그들의 시선이 불안과 당혹을 담은 채 위지단의 얼굴로 향했다. 허나, 불행하게도 위지단의 시선은 만길 절벽 아래로 고정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어쩐지……) 유령삼괴의 눈빛이 완전히 절망으로 물들었다. 어기적…… 어기적…… 그들은 몸을 돌려 절벽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절벽 끝에 당도한 순간 그들의 몸이 재차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까마득하다. (떨어져 살아날 확률은 만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허나, 이 자리에서 피떡이 되지 않는 것만도 다행……) (유령사…… 본 유령사 전체에 화가 미치지 않음은 홍복이고……) 그들의 절망어린 눈들이 서로 한순간 얽혀졌다. 슈욱! 슈슉---! 유령삼괴는 이어 일제히 절벽 밑으로 몸을 날렸다. 만분의 일의 생명을 찾아서. "으아아아아악!" "우아아아---"


그들의 미친 듯 내질러대는 비명은 한동안 끈질기게 이어졌다. 허나, 이 절벽도 끝은 있었다. 이윽고 어둠 속은 고요한 평온을 되찾았다. 위지단은 별이 빛나는 야천을 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천마해의 천마해경이 중원에 나타났을 리 없다. 이것은 분명 음모이다." 천마해경! 대체 그것이 무엇이길래 위지단의 신색이 이토록 무거운가. "허나,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노부에게 주어진 시간은 더욱 짧아졌다." 슈욱! 그의 거구가 돌풍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동북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 청년은 땔감을 가득 실은 지게를 지고 산길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십 칠팔 세 가량 되었을까. 그 나이에 걸맞는 단단한 체격과 순박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러한 청년의 전신에는 땀이 비오듯 흘렀다. "어서 가자. 해가 지기 전에 땔감을 유대인댁에 팔아야 어머님께 고기국을 마련해 드릴 수 있다." 늙은 노모를 생각하고 있는가. 청년은 석양을 향해 힘차게 걷고 걸었다. 헌데, 그때였다. "음? 왜이리 갑자기 가볍지?" 청년은 돌연 지게가 허전하다고 느끼며 고개를 등 뒤로 돌렸다. 순간 그의 두 눈이 퉁망울처럼 크게 확산되었다. 없었다. 그 많은 땔감이 허공으로 꺼진 듯 감쪽같이 사라졌다. 허나, 땔감 대신 들어있는 것이 있었다. 노인(老人)이었다. 지푸라기처럼 작고 허약해 보이는 노인네가 달랑 지게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귀…… 귀신이다!" 청년은 놀라 부르짖었다. 그는 부랴부랴 지게를 벗어 내팽개치려 했다. 헌데, 이 무슨 해괴한 조화인가? 벗으려는 지게는 왠지 꿈쩍도 않고 대신 그의 전신 옷이 훌훌 흘러내렸다. "아…… 아니!" 창졸간에 청년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노인은 소리없이 히죽 웃었다. 청년은 그 모습에 더욱 놀라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이고! 이 산중에 그것(?)따먹는 귀신이 있다더니…… 사람살려라!" 그때 괴노인은 청년의 옷가지 속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곧 괴노인의 안색이 무섭게 굳어졌다. (없다!) 갑자기 괴노인은 독수리 발톱같은 손을 쭉 내밀더니 청년의 목을 꽈악 움켜쥐었다. "이놈, 어디에 감추었느냐?" "캑…… 크큭…… 무, 무엇……" "천마해경!" 진득하게 괴소를 흘리는 괴노인의 두 눈에 은은히 시뻘건 혈광이 일었다. 청년은 바둥거리며 간신히 되물었다.


"검은 말들이…… 바다 위를 달리는…… 형상이 조각된…… 그 이상한 거울…… 말씀……" "그렇다." "그…… 그건…… 어…… 어젯밤……" "이놈이 목구멍이 막혔나? 왜이리 더듬거려!" "노…… 노인장이 내 목을…… 끄윽……" "내가?" 괴노인은 흠칫 청년의 목을 움켜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더니 멀쓱할 표정으로 손을 놓았다. "너무 늙으면…… 건망증이 심해서." 괴노인은 목을 놓은 대신 청년의 면상을 호되게 쥐어박았다. "어젯밤에 어쨌단 말이냐?" 퍼억…… "어이쿠! 어젯밤에 어떤 무서운 사람이 나타나 빼앗아 갔습니다." "그놈이 누구냐!" "모…… 모릅니다." 청년은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괴노인의 두 눈에서 순간 핏빛 혈광이 쭉 뻗어나왔다. "기억해내라. 놈의 생김새나 조그만 특징같은 것이라도." 꽈악! 그의 갈고리같은 손이 재차 청년의 목을 움켜쥐었다. 청년은 또다시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끅…… 노선비같은 차림에 머리칼은…… 푸른 빛을 띠고……" "계속해라." "손에는…… 붉은 쇠로 만든…… 부채를……" 순간 괴노인의 전신에 폭풍처럼 경련이 일었다. (신마(神魔) 뇌어양(雷漁洋)!) 그의 신색이 곧 악귀처럼 흉험하게 일그러졌다. "흐흐…… 바로 그였구나." "이…… 이제 저를 놓아 주십시오." "애석하지만 너는 죽어야 한다." 청년의 목이 한 바퀴 돌았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허공을 뒤흔들었다. 청년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상황으로 보아 즉사가 분명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멀리 숲속에서 노을빛을 받으며 한 신형이 솟아올랐다. "호호호…… 성숙마대(星宿魔大), 고마워요, 내용은 잘 새겨 들었어요." 눈 깜짝할 사이 그 음성은 장내에서 까마득히 멀어져 갔다. 괴노인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흐흐…… 야화배궁(夜花排宮)의 늙은 여우, 냄새는 정확히 맡았군. 허나……" 스스스…… 그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땅 밑으로 꺼져들었다. "본좌가 백 년 잠마(潛魔)를 깬 이상 누구도 천마해경은 건드리지 못한다." 마지막 음성과 함께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쌔앵! 무심한 것은 바람 뿐……


청년의 시신만이 장내를 지키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꿈틀…… 청년의 시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무슨 괴변(怪變)인가? 청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서고 있었다. 그러한 청년의 표정은 이미 좀전의 순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서천의 핏빛 노을을 응시하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어리석은 노물들, 어린애 장난같은 고육지계에 눈들이 뒤집히다니……" 스윽…… 그의 손이 한 차례 원을 그리자 널려져 있던 옷가지들이 빨리듯 날아왔다. "예상 외로 일이 잘 진행되는군. 그분의 뜻대로 이렇게 무림이 움직여만 준다면…… 천하의 패권은 머지않아 그분의 손안에 떨어진다." 그 분……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 마등(馬登)은 육점(肉店)의 점원이었다. 그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여느 때처럼 웃으면서 고기를 팔고 있었다. 헌데, 그러한 그가 갑자기 죽었다. 벌건 대낮에, 그것도 고기를 썰던 자신의 칼에 심장이 찔려서 절명한 것이다. 저녁 무렵 마등의 시체는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던 한 친구의 손에 의해 마을 뒷산에 묻혀졌다. 그 친구는 빚을 갚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는 커녕 조상에게 감사하며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 어둠이 천지를 덮은 자정무렵이 되었다. 휘이이잉…… 한 줄기 회오리바람이 마등의 무덤 앞에 이는 듯하더니, 이인(二人). 무덤 앞에 해골같은 두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니 그들은 의복만 걸쳤을 뿐 완전한 해골들이었다. 그 중 키큰 해골이 움푹 들어간 두 눈에 파란 귀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시작해라." "크크크……" 작은 해골이 마등의 무덤을 헤치더니 어렵지 않게 관을 빼내었다. 쑤욱…… 연이어 관뚜껑이 박살이 난 채 날아갔다. 두 해골괴인은 흐느적거리며 마등의 시신에 다가섰다. 삐그덕…… 삐그덕…… "크크크…… 우리들 앞에서는 시체가 시체일 수 없고 해골도 해골일 수 없다." 음유로운 냉기가 풀풀 흐르는 음성이었다. 거의 동시 작은 해골괴인의 휑한 눈구멍에서 시커먼 안개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스스스…… 그 검은 안개는 죽은 마등의 코, 입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쿠우우우…… 고루백혈( ?百穴)의 명이다. 마등, 혼을 찾아 일어나라." 작은 해골괴인의 귀기어린 일성이 어둠 속을 섬뜩하게 울려퍼졌다. 동시 믿을 수 없는 전경이 벌어졌다. 마등이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관 속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게 아닌가! 큰 해골괴인의 입에서 음유한 일성이 흘러나왔다.


"마등, 천마해경은 어디에 감추었느냐?" "천…… 천마해경……" "말해라, 마등." "어젯밤…… 어떤 무서운 인물이 나타나 빼앗아 갔소." 마등의 음성엔 전혀 억양이 없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시신이 말하는 것 같았다. 큰 해골괴인의 깊숙한 눈구덩 속에서 가공할 광망이 시퍼렇게 뻗어나왔다. "그가 누구냐?" "노선비같은 차림에…… 푸른 빛을 띤 머리칼…… 쇠로 만든 붉은 부채를 들고……" "신마(神魔), 뇌어양!" "틀림없소!" 두 해골괴인의 전신이 크게 진동을 일으켰다. "이럴 때가 아니다." 번쩍! 버언쩍! 두 줄기 섬광인가. 그들의 신형은 어느새 장내에서 흔적도 없이 멀어지고 있었다. 동시 마등의 입과 코에서 순간 푸르스름한 연기가 새어나왔다. 쿠웅…… 그의 육신은 그대로 차가운 대지 위에 쓰러졌다. 피(血)…… 그의 눈과 코, 귀에서는 곧 시뻘건 피가 가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시 그의 입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음성이 있었다. "그분은…… 나의 하늘…… 나는 그분의 명을 이행…… 했다." 푸들…… 푸들…… 그의 육신은 몇 번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윽고 잠잠해졌다. …… 아무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등, 그가 두 번 죽었다는 사실을…… *** 선하령(仙霞嶺). 검푸른 대해(大海)의 물결을 밑으로 굽어보며 우뚝 천공으로 솟은 이 험령은 참으로 절륜한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까마득한 정상(頂上) 부근에는 항시 구름이 맴돌고, 오색(五色)의 무지개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나타나는 천하절경이다. 대해의 해풍(海風), 창공을 날으는 갈매기 떼…… 지금도 신선(神仙)들이 살고 있다는 선하령의 팔선봉에는 그 누구도 올라가 보았다는 자가 없었다. 여덟 봉우리가 모두 험준하여 날으는 새도 오를 수 없는 탓…… 때는 멀리 수평선에서 눈부신 햇살이 솟아올라 부챗살처럼 번져가는 새벽녘이었다. 선하령의 천자만홍(千紫萬紅)의 신비경 속으로 두 사람이 막 들어서고 있었다. 사자갈기 같은 수염의 노인과 백의미공자, 바로 위지단과 제강이었다. 제강은 주위의 절륜수려한 경관에 도취된 듯했다. (선하령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구나!) 허나, 위지단의 준엄한 신색에는 어딘가 긴장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수 많은 기적과 신화를 창조했던 암살부(暗殺府)……이곳 어딘가에 그 암살부가 숨어있다……)


암살부. 선하령의 절경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이름일진대…… (나의 계획에는 빈틈이 없다. 허나, 천마해경의 출현이 왠지 마음에 걸린다.) 위지단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까마득한 선하령의 절벽 위를 올려다 보았다. 그의 백포자락이 해풍에 표표히 휘날렸다. (높아 보이는군.) 허나, 아무리 높고 험준해도 이 지상에서 위지단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은 없다. 그 절벽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그는 상념에 젖어있었다. (설마 그들이? 아니다. 그들이 그같은 어리석음을 저지를 리 없다. 누군가가 가짜 천마해경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음모. 위지단은 일단 그렇게 결정지었다. 허나, 위지단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그 거대한 음모가 바로 이곳 선하령의 근처에서 혈풍(血風)을 몰고 소용돌이 치고 있음을. 그것은 실로 기이한 운명이었다. (그것이 음모라면…… 그 목표는 대체 누군가?) *** 신마(神魔) 뇌어양! 당금 천하에 이 위대한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는 마도의 태양이며, 마계(魔界)의 신(神)이다. 뇌어양의 위대함과 신화적인 업적을 부정하는 이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과거 그는 갈라지고 흩어져 혼돈과 파멸을 자초했던 마도무림을 하나로 일통시켜 놓았다. 그는 마도의 정기(精氣)를 모아 구천마성(九天魔城)을 창건했다. 구천마성은 이땅 최강의 단일세력이다. 그렇다. 신마 뇌어양. 그는 마도의 살아있는 영광이었다. 또한 그는 천하만마를 거느리는 마도의 하늘이었다. 그는 심지어 정도무림인들에게까지 존경받는다. 신의 능력을 소유한 인간,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위대해질 수 없는 신이 되었다. 신(神)은 이 순간 한적한 산길을 홀로 걷고 있었다. 허나, 그 겉모습은 마치 유람나온 늙은 선비를 연상시킬 뿐이다.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노인의 모습이 그에게 있었다. 아무도 없는 산길, 새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바람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게 울려퍼졌다. 뇌어양은 이 산길이 좋았다. 이 산길을 걸을 때면 그는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는 이것을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 생각했다. 약간 푸른 빛을 띤 머리칼은 단아하게 등 뒤로 흘러내렸고, 손에는 언제나처럼 핏빛의 붉은 철선(鐵扇)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산수(山水)에 도취해 있는 그의 신태는 한 폭의 깨끗한 그림처럼 감동을 느끼게 했다. "허허…… 이 선하령의 여덟 봉우리 사이에 묻혀 세월을 낭비한 지도 벌써 칠 년이군." 칠년(七年)…… 그렇다. 뇌어양은 자신의 거처 구천마성을 떠나 몇 년 전부터 홀로 이 곳에서 신선의 세월을 즐기고 있었다. 따사로운 아침햇살이 여인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그의 노안을 애무했다. 뇌어양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헌데, 어느 한 순간이었다. 뇌어양의 신색이 문득 가볍게 경직되었다. 바람에 실려 들려오는 이 부자연스런 소리는 무엇인가? 바스락…… 고엽(古葉) 하나가 그의 발 아래 떨어졌다. 뇌어양은 피식 웃고 말았다. (노부도 늙었군!) 허나 그것도 잠시, 뇌어양의 신색은 곧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가공할 신법…… 어느새 십 리 밖까지 접근했군. 도합 일곱 명인가……) 뇌어양은 오랜 세월동안 잔잔하게 가라앉았던 피가 무섭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서로가 다른 방향…… 허나, 모두 노부를 향해 날아오고 있다!) 2 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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