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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마겁(神魔劫) 제 2 권 血洗魔輪 지은이: 司馬達 - 차 례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제 16 장 제 17 장 제 18 장 제 19 장 제 20 장

九劫地獄魔路 邪道의 高手들 죽음(死)과 陰謀 惡魔聖殿 大轉輪의 始作 뉘라서 당신들을 일컬어 英雄이라 부르지 않으리까? 惡魔天下 깜찍한 소녀 화우라 天竺에 부는 바람 불타는 波羅大尊宮

제 11 장 九劫地獄魔路 1 화예상아는 침상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얼굴은 아직도 여윈 상태였으나 이미 백모단(白牡丹)과 같은 아름다움은 되찾고 있다. 정숙함과 청초함이 햇살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저 모습 그 어디에서 어젯밤의 광녀같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때 백리사옥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사(情事)를 끝낸 뒤 그는 밖에 나가 흐트러진 심신을 가다듬었던 것이다. "……!" 화예상아는 다소 발그레한 홍조를 띤 채 그를 맞았다. 말없이 입가에 떠올리는 미소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아름답지 않은가? "몸은 좀 어떻소?" 백리사옥은 다정한 음성으로 물으며 침상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젠 괜찮아요." 조그만 음성으로 대답하는 화예상아의 눈가에 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백리사옥은 보았다. (울었던 모양이군.) 백리사옥은 가슴 속이 기이한 느낌으로 찡 울려오는 것을 느꼈다. 화예상아의 시선은 백리사옥의 영혼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너무도 멋진 분이야.) 그녀의 가슴이 새삼스럽게 달아오르며 소리를 내어 뛰기 시작했다. 화예상아는 들키기라도 할까봐 얼굴을 붉히며 이불깃을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이분이 나를 어젯밤에……) 그러나 이제는 본래의 심신을 회복하여 다시금 그를 바라보는 그녀다. (나는 이미 저분과 한몸이 되었다. 이제 나는 저분에게 일생을 의지해야 한다.) 저렇듯 훌륭한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기뻤다. 허나, 그럼에도 왠지 까닭모를 슬픔이 가슴 속에서 북받쳐 오른다. 그것은 순백(純白)을 잃은 아픔일까? "흑……!" 그녀는 괜히 울었다.


"아니? 아직도 어디 아픈 데가 있소?" 백리사옥은 바보같이 묻고 있었다. "아…… 아니예요." "그럼?" "이…… 이젠 아무데도 아프지 않아요. 단지…… 단지……" "단지?" "흑……! 모르겠어요……" 화예상아는 이불깃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백리사옥은 난처했다. (여자란 참 여러 가지로 복잡한 존재로군.) 그는 가볍게 손을 뻗어 들썩이는 화예상아의 어깨를 잡았다. "울지마시오. 낭자!" "흑……!" 화예상아는 무너지듯 백리사옥의 품으로 상체를 던져왔다. 백리사옥은 그녀를 안았다. 하얀 토끼처럼 포근하고 부드러운 작은 몸뚱이였다. 그는 화예상아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거려 주었다. 화예상아는 고개를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시선으로 백리사옥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아직도 공자님의 성함을……!" "백리사옥이오." "그럼 옥랑(玉郞)이라 부르겠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나도 화매(花妹)라 부르겠소." "제 모습이 밉죠?" 백리사옥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렇지 않소. 화매의 모습이야말로 천하의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답소." 화예상아는 볼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은 마치 천만 송이의 가화(佳花)가 일시에 피어나는 듯 아름다웠다. "정말이세요?" "그렇소, 화매!" "옥랑……" 그녀는 행복에 겨운 듯 다시 백리사옥의 품에 안겨들었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백리사옥은 한 손으로 화예상아의 턱을 가볍게 받쳐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꽃잎 위로 덮었다. "흡!" 뜨겁고 강렬한 전류가 화예상아의 전신을 휘감았다. 어젯밤의 열정과는 달리 그것은 너무도 신비롭고 아름다운 입맞춤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백리사옥의 목덜미를 끌어 안았다. 황홀하고 감미로운 교감(交感)! 그리고, 그 교감의 어느 틈바구니에서 백리사옥의 뜨거운 음성을 그녀는 들었다. "화매! 그대를 언제까지나 내곁에 있게 하겠소." "아아…… 행복해요……" 화예상아는 깊게 깊게 백리사옥을 받아들였다. 2 "아니, 뭐라고 했소, 화매?"


백리사옥은 경악하여 되물었다. 허나, 화예상아는 너무도 잔잔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내일 밤 이곳에서 두 사람을 만나기로 하지 않으셨냐구요?" 백리사옥이 놀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사류혼(死流魂)과 상객(喪客)을 만나기로 한 그 사실을 그녀가 어찌 알고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걸?" 백리사옥이 되묻자 화예상아는 너무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예요. 저도 방금 그걸 알았으니까요." "방금 알다니?" "옥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까 나도 모르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내일 밤 이곳에서 두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는 생각이 말이오?" "그래요." 화예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이상한 일도 있네. 왜 옥랑을 보자 그 생각이 떠올랐을까요?" 그녀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순간 백리사옥은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 화매는 천무신마체를 타고난 여인이다. 정령납밀대법으로 신무지체(神巫之體)가 되었으니 어쩌면 예언(預言)을?) 그렇게 생각되자 그는 다시 급히 물었다. "또 생각나는 것은 없소?" "아! 있어요." 그러면서 화예상아의 눈빛은 기이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잔잔하면서도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았고, 어딘가 먼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그래요. 보이는군요. 바람이 휘몰아치는 절벽이예요. 절벽에는 무수한 동혈(洞穴)이 뚫려있고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그 속에 옥랑과 저도 끼어 있구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그녀는 주문(呪文)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곳은…… 아아…… 무서운 요기(妖氣)가 뿜어나오고…… 아아…… 무서워!" 화예상아는 머리를 움켜쥐고 마구 흔들었다. "화매! 진정하시오!" 백리사옥은 그녀를 부둥켜 안아 정신을 차리게 했다. 화예상아는 정신을 되찾더니 백리사옥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너무 무서웠어요! 어째서 그런 무서운 광경이 내 눈에 보이는 건가요?" "화매!" 백리사옥은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안정을 되찾게 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경과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녀가 천무신마맥을 타고났다는 것, 그리고 정령납밀대법으로 이제는 잠력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신무지체(神巫之體)가 되었다는 것 등이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화예상아는 길게 숨을 토해냈다. "그럼 제가 일종의 무령(巫靈)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 셈이오." "어쩐지…… 무서워요." "무서워할 것 없소. 화매의 능력은 필시 천하를 구하는 데 있어. 특히 악마와의 싸움에서 아주 중요한 힘이 되어주리라 생각되오." "그럴까요?"


화예상아는 조금 안심이 된 듯 고운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지었다. "어쨌든 옥랑께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고 싶어요." "고맙소, 화매!" 백리사옥은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이렇게 해서 백리사옥은 또 하나의 힘을 얻었다. 철혈잠룡 뇌옥풍…… 천풍공자 하후섬…… 살수 사류혼…… 쾌검수 상객에 이어 다섯 번째의 인물…… 신무(神巫) 화예상아(花 霜雅)! 이 다섯 번째의 힘은 장차 악마와의 싸움에서 천하의 운명을 뒤바꾸는 엄청난 진가(眞價)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니…… 3 다음날 밤, 사류혼(死流魂)과 상객(喪客)은 자시(子時)에 백리사옥을 찾아왔다. 백리사옥은 그들에게 겁천악마교와의 싸움에 그들의 힘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사류혼은 늑대같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훗! 만일 내가 악마의 적자라는 자를 벤다면 황금 오백만 냥을 청구해도 좋소?" 직업살수로서의 생리를 잊지 않은 말이었으나, 그 말을 할 때 그의 전신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백리사옥은 놓치지 않았다. 상객은 메마른 웃음을 툴툴 흘렸다. "후후, 어쩌면 이번에는 나 자신이 상문(喪門)에 들게될지도 모르겠군. 허나 혼자서 죽지는 않으리. 적어도 일천마왕(一千魔王) 중에 열 명은 함께 데려간다. 이번 일에 나서는 것은 황금 때문이 아니야. 그대 백리사옥, 제법 괜찮은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 후후후." 백리사옥은 그 두 사람에게 건천삼십삼무상예(乾天三十三無上藝) 가운데 각각 세 가지 절학들을 전수해 주었다. 사류혼(死流魂)에게는 살수로서 적합한 세 가지 절학. 건천광령무벽(乾天光靈無壁)----! 빛(光)의 속도를 따라 잡는다는 천하제일의 경공지학. 건천잠영무(乾天潛影霧)----! 물 한 방울, 바람 한 점에도 몸을 숨길 수 있는 불가사의의 잠형은둔공. 무형극열천강(無形極熱天 )----! 소리도 느낌도 없이 상대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무영(無影)의 극열강. 그것들의 위력은 이미 지옥백팔마와의 싸움에서 충분히 드러났던 터이다. 또한, 상객(喪客)에게는 검(劍)을 위주로 하는 세 가지 절학을 전수했다. 건천열화팔천검(乾天熱火八千劍)----! 섬전일순에 열화검이 팔천 개의 방위를 베어 버리는 불세검학. 일겁수유와선검류(一劫 遊蝸旋劍流)----! 검강(劍 )의 폭풍이 일백 장 방원을 완전히 난도질해 버린다는 검강지학(劍 之學)의 최고봉. 건천절정검(乾天絶頂劍)----! 건천삼십삼무상예 가운데서도 가장 강한 절정삼천예(絶頂三天藝) 중 하나. 단 일검(一劍)에 능히 태산을 베어버릴 수 있다. "지독하군! 한 자루 철검으로 아직까지 적수를 만나보지 못한 나 상객이지만, 하늘 밖에 하늘(天外天)이 있음을 이제야 알았어." 구결을 읽고 난 뒤 감탄과 허탈감이 뒤섞인 음성으로 상객이 내뱉은 말이었다. 백리사옥은 사류혼과 상객을 번천만뇌세가의 제이밀부(第二密府)로 보냈다. "악마와의 결전은 얼마 남지 않았소. 이 무학들을 완벽하게 익히며 때를 기다리도록 하시오!"


4 파궁화화시(巴穹花花市)는 은자 두어 닢 정도만 가지면 하룻밤 여인을 안아볼 수 있는 연경의 뒷골목이다. 이른바 창녀촌(娼女忖)이다. "호호호, 놀다 가세요. 끝내 드린다니깐요?" "아유! 서방님은 어쩌면 수염도 이렇게 멋있을까?" "오세요. 아이…… 상하좌우(上下左右)로 끝이 무엇인지 보여 드린다구요!" 간드러지는 교소(嬌笑)와 갖은 아양스런 몸짓들이 활기를 띠는 파궁화화시는, 핏빛으로 타오르던 황혼이 땅거미와 함께 암갈색으로 바뀌어갈 때부터 더욱 그 색이 짙어진다. "놓아라! 갈길이 바쁜 몸이다!" "호호호…… 아이, 어린애처럼 부끄럼을 타시긴?" "억! 이 계집이 어디를 잡는거야?" "왜? 못잡을 데 잡았나? 들어오라구! 물어준다니까요!" "으흐흐…… 정말이냐?" "정말이야! 우리는 화끈하게 무는 사람이야, 왜 이래." 사내들을 붙들고 늘어지는 야화(夜花)들의 악착스런 손길에 못이기는 척 이끌려 으슥한 골목으로 사라지는 개기름 번들거리는 사내들…… 파궁화화시에는 벌써부터 야시(夜市)가 시작되고 있었다. 일야(一夜)에 은자 두 닢! 그것은 파궁화화시의 최저화대(最低花代)이다. 한데, 은자 한 닢이면 된다! 이렇게 외치는 곳이 있었다. 자연히 사내들은 호기심에 그곳으로 몰려들어 웅성거리는데, 나무로 된 좌단 위에 채의(彩衣)를 입은 한 여인이 올라서서 좌중을 둘러보고 있었다. 한데, 여인의 용모는 달덩이같은 천향국색(天香國色)이 아닌가? "오오! 파궁화화시에 저런 절세미녀가 있었다니……!" "선녀다! 손목이라도 잡아볼 수 있다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 사내들은 침을 흘리며 외쳤다. 그때, 좌중에서 건장한 사내 하나가 불쑥 나서며 외쳤다. "정말 은자 한 닢이면 되는가?" "호호! 물론이죠." 절세미녀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사내의 입이 쭉 찢어졌다. "우흐흐, 당장 가자! 못참겠다!" "어디를요?" "몰라서 묻느냐? 네 화방(花房)이지!" "호호, 안되요." "안되다니?" "은자 한 닢은 화대(花代)가 아니예요." "그럼?" "입 한 번 맞추는데 은자 한 닢." "뭐? 입 한 번 맞추는데?" 사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허나, 그는 이내 곰곰이 생각했다. (하긴 이런 절세미녀와 한 번 입맞추는데 은자 한 닢이라면 아깝지 않다. 내 주제에 언제 이런 미녀와……)


사내는 결정했다. "좋다! 은자를 내겠다." "좋아요. 은자를 저 바구니에 넣고 좌단으로 올라오세요." 사내는 황급히 은자를 던지고 올라섰다. 그리고는 다짜고짜로 미녀를 끌어안고 입술을 탐했다. (우흐흐! 꿀맛이다!) "그만! 이제 끝났어요." 미녀는 입술을 떼며 사내를 밀쳐버렸다. 사내의 눈빛이 아쉬움으로 가득찼다. "한 번만 더 하자." "안돼요. 당신은 저 밑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엉……?" 사내가 고개를 돌리려는데 사람들이 어느새 일렬로 줄을 서서 아우성치고 있었다. "야! 그만 못비키냐?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좀 해라!" "내려와라, 내려와!" 미녀와 한 번 입을 맞춰 보겠다는 무리들이었다. "제길!" 사내는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다음 사내가 은자를 던지고 침을 흘리며 올라섰고, 그렇게 괴이한 행렬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밀지마라, 밀지마!" "새치기 하지 마라!" 5 여인(女人), 누더기나 다름없는 때묻은 흑의(黑衣)를 걸친 채 한쪽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자꾸 기침을 하고 있었다. "쿨럭쿨럭…… 쿨럭……" 두 손과 얼굴을 누런 헝겊으로 칭칭 동여맨 것으로 보아 괴질(怪疾)에라도 걸린 환자인 듯, 연신 숨가쁜 기침을 하면서도 헝겊 틈새로 빠끔히 드러난 두 눈은 지나가는 사내들을 애원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의 야화(夜花)들은 그녀를 힐끗힐끗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쯧쯧…… 또 나왔군, 또 나왔어." "그러게 말야. 저 계집만 보면 밥맛이 떨어진다니까! 재수도 없고. 저 꼬락서니를 보고 어떤 사내가 달려들겠어?" "몇달 동안 한 사내도 받는 걸 못봤다구." "이를 말이야? 저 계집이 걸린 게 바로 천형풍(天刑風:나병)이라 는데 살을 섞었다가 문둥이가 될려고?" "헌데 저 계집 이름이 뭐였더라?" "글쎄? 율향(栗香)이라던가. 병에 걸리기 전에 큰 기루(妓樓)에서 제법 날렸다나봐……" 그때 야화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엇! 왜? 봉이라도 떴니?" 암갈색 황혼을 등에 지고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전신에 걸친 옷은 백설보다 희고 눈부신 백의(白衣), 머리에는 커다란 죽립(竹笠)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비록 용모는 알아볼 길 없었으나 그 전신에 흐르는 기품(氣品)만으로도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 멋져……!" "필시 귀한 신분의 인물일거야!" 그때, 사내는 천천히 담벼락 쪽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율향이 있는 쪽으로 가잖아?" 과연, 사내는 율향의 면전에 이르러 우뚝 발을 멈추었다. "그대가 율향인가?" "쿨럭쿨럭……" 율향은 대답 대신 숨가쁜 기침을 토해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맨 처음 본 것은 몸에 걸친 백의보다도 더욱 희고 아름다운 사내의 손이었다. 이어, 그녀는 죽립 아래 드러난 사내의 흰 턱을 볼 수 있었다. 동시에 은은한 단향(檀香)을 맡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눈이군." "……" "나를 하늘 밖에 있는 산(山)으로 데려다 주겠나?" 사내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순 율향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사내의 흰 손을 잡으려 몸을 일으켰다. "쿨럭쿨럭…… 귀인을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히야! 율향이년 오늘 봉잡았는데……?" "쩝쩝! 부럽다, 부러워." 야화들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허나 단 한 사람의 눈만은 의미심장한 기광(奇光)을 빛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은자 한 닢으로 입술을 팔던 채의미녀(彩衣美女)가 아닌가? (후후,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단 말이지?) 그녀의 입술은 아직도 한 사내와 맞닿아 있었다. 6 노승(老僧). 칠십여 세로 보이는 불그스름한 얼굴에 황금빛 가사(袈裟)를 걸치고 한 손에는 주먹만한 염주알을 굴리고 있었다. 귀 밑까지 늘어진 백미(白眉), 전신에서 풍기는 잔잔한 대해(大海)와도 같은 풍도는 불(佛) 그 자체를 대하는 듯했다. (천허대사(天虛大師)!) 백리사옥은 밀실(密室)에 들어서면서 한눈에 노승의 신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소림장문(少林掌門) 천허대사(天虛大師). 그는 이 환우회천원( 宇回天院)의 밀실에 모인 정파최고수뇌 중의 일인(一人)이었다. (놀랍다. 두 눈의 안광이 조금도 없다. 이는 곧 천불무심안(天佛無心眼)의 경지가 아닌가?) 백리사옥은 공손히 예를 취했다. 백리사옥을 바라보는 천허대사의 눈빛에는 깊은 감탄의 빛이 스쳐갔다. (놀라운 천품(天品)이로다. 강호에 이런 젊은이가 있었던가?) 천허대사는 불호와 함께 답례했다. "아미타불! 이미 혁소저로부터 시주의 말을 들었네. 지옥백팔마의 하나인 환상독존마를 물리친 실력이라면 본 모임에 큰 힘이 되어주리라 믿네." "과찬이십니다. 후배말학으로 감히 노선배님들의 대업에 누를 끼칠까 염려되옵니다." 천허대사는 부드럽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헛헛, 겸손이란 지나치면 때로 오만이 되는 법일세." "……!" "노납이 여기 모인 인물들을 소개해 주겠네." 천허대사는 좌중에 모인 고수들을 한 사람씩 소개해갔다. "이분이 바로 무당제일성검(武當第一聖劍)이신 현정도장(玄頂道長)이시네." 천허대사의 옆자리에 황색도포를 걸친 동안학발(童顔鶴髮)의 노도인이 앉아있었다. 전신에선 인자하면서도 범할 수 없는 위엄이 태산처럼 어려 있었다. 현정도장(玄頂道長). 그는 도가제일고수(道家第一高手)로서 지난날 철혈패천세가의 참사 때도 현장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백리사옥은 내심 감탄했다. (현정도장, 도가제일고수로서 과연 부족함이 없다. 일신내공은 이미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를 넘어선 듯하다!) "후배 백리사옥입니다." "무량수불!" 현정도장은 장중한 도호(道號)를 웅휘하게 흘려냈다. "과연 서기가 안으로 갈무리되었고 태산보다 높은 잠력이 밑바닥에 대해처럼 깔려있으니, 이는 곧 천세영웅의 모습이로다!" 엄청난 칭찬이었다. 허나, 그 말에 좌중에 모인 고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현정도장이 그대로 대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백리사옥은 좌중의 고수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아미파(峨嵋派)의 윤회노불(輪廻老佛). 그는 아미장문 금정노불의 사형(師兄)으로서 아미파 전 제자가 혈겁을 당한 데 분노하여 삼십 년 면벽폐관(面壁閉關)을 깨고 나선 인물이었다. 백 팔십이 넘은 고승이었으나 외모는 칠팔십 세밖에 보이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그의 전신에 어려있는 은은한 금빛 서기였다. 백리사옥은 내심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미파에서 수백 년 이래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금불대승공(金佛大乘功)을 연마했구나. 금광의 강도로 보아 거의 십이성 경지에 이른 듯하다!) 천도황(天刀皇) 헌원적(軒轅赤). 천산(天山)에 있는 천도무황세가(天刀武皇世家)의 가주. 구척(九尺)이 넘는 엄청난 체구의 노인이었다. 허연 구레나룻이 온통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그의 등 뒤에는 적어도 무게가 백 근은 될 듯 싶은 거대한 묵도(墨刀)가 걸려 있었다. "음! 천하십대세가 중 이미 여섯 세가가 참화를 입었네. 노부는 죽음으로 악마들과 동귀어진 하려니와 그대같은 패기어린 젊은 동지를 만나 몹시 기쁘네!" 쇠북이 울리는 듯한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외치며 백리사옥의 손을 잡았다. (매우 직선적이고 호쾌한 성격의 인물이구나!) 백리사옥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대구취허신개(大口醉虛神 ). 개방( 幇)의 최고 배분을 지닌 전대고수(前代高手). 이름처럼 쭉 찢어진 큰 메기입을 지녔고, 처음부터 연신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백리사옥이 인사를 하자 그는 귀찮다는 듯 힐끗 건너다보더니 혼잣말처럼 내뱉았다. "클클, 제법 영리하게 생긴 녀석이 제법 미련하게 생긴 녀석이로군." (이게 무슨 말인가?)


천하의 백리사옥도 그 말뜻을 일순 헤아리지 못해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해학(諧謔)과 독설(毒舌)은 대구취허신개의 취미이자 특기였고, 기실 대구(大口)라는 별호도 그것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다. 천독대군(天毒大君) 사공능우(司空陵宇). 정도 유일의 독문(毒門)인 천독사공세가(天毒司空世家)의 가주. 정도의 인물답지 않게 두 눈에 자광(紫光)이 서린 음침한 인상의 인물이었다. (독공(毒功)이 이미 독신(毒神)의 경지를 넘어섰다!) 백리사옥은 그의 자광만으로도 천독대군 사공능우의 경지를 간파할 수 있었다. 만리추종(萬里追從) 사무외(史無畏). 만 리 밖에서 귀신의 흔적도 추종해낸다는 추종술의 천하제일인. 실팍하게 찢어진 눈에 극히 차가운 인상의 팔순 노인이었다. 그 외에도 진천거검(震天巨劍) 섭가무(攝賈武), 하남(河南) 진천검문(震天檢問)의 문주(門主), 종남쌍기(終南雙奇), 종남파의 양대 장로(兩大長老)인 대혜진인(大慧眞人)과 대선진인(大禪眞人)…… 백리사옥이 여러 군웅들과 수인사가 끝났을 때 방문이 열리며 한 노인(老人)이 천천히 들어왔다. 화려한 금의장삼(錦衣長衫)에 눈부신 백염이 가슴까지 드리워진 중후한 용모의 노인이었다. 허나, 노인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기이(奇異)했다. 언뜻 보기에는 문약(文弱)해 보일 정도로 청수하고 온화함을 풍겼으나, 전신에서 발산되는 무형의 막대한 기운이 마치 한 자루의 칼날처럼 추호의 빈틈도 없다. 더욱 기이한 것은 노인의 두 눈이었다. 괴이하게도 그의 두 눈은 각각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었다. 한 눈은 깊고 깊은 바닷속처럼 심유(深幽)하게 젖어 있었고, 또 다른 한 눈은 기이한 예광(銳光)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의안(義眼)임이 분명했다. 중후하면서도 칼날처럼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이 노인은 대체 누구인가? (우내제일정!)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으나 백리사옥은 느낄 수 있었다. 우내제일정(宇內第一正) 문인혁후(聞人赫候). 이 얼마나 엄청난 이름인가? 그가 들어서자 좌중의 고수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연중 그들은 우내제일정을 정도무림의 영도자로 인정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자, 모두 앉으십시다." 우내제일정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한 뒤 자신은 중앙의 상석(上席)에 자리했다. 그는 일순 백리사옥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의미있는 시선으로 백리사옥을 잠시 바라본 뒤 뭔가 이야기를 할 듯하다가 그만두었다. "백리소협도 앉게." 단지 그렇게만 말했고, 이어 정도최고수뇌회의(正道最高首腦會議)는 시작되었다. "우리는 겁천악마교에 대해 그동안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해 왔소이다." 우내제일정은 이렇듯 서두를 시작했다. "첫째는 그들의 총단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하는 점이었고, 둘째는 왜 그들이 갑자기 혈보(血步)를 중단하였느냐 하는 점이었소." 그는 만리추종 사무외(史無畏)에게 시선을 던졌다. "첫 번째 사항에 대해 사대협께서 그동안 조사한 것을 보고해 주시오." 사무외가 조용히 일어났다. "본인은 문인원주(聞人院主)의 명으로 천하각처를 탐색해 왔습니다. 허나 겁천악마교는 육 개월 전


천하를 짓밟은 뒤 갑자기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 종적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잠시 좌중을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 "의심스러운 곳을 몇 군데 찾아내기는 했으나…… 그 가운데 가장 의심이 가는 곳은 딱 한 곳이었습니다." "……!" 좌중은 일시 마른침을 삼켰다. 사무외는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곳은 십만대산(十萬大山)에 있는 괴이한 동혈(洞穴)로서, 천장단애의 절벽에 수많은 군혈(群穴)이 벌집처럼 뚫려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요기(妖氣)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 "비록 그곳이 겁천악마교의 총단은 아닐지라도 필시 뭔가 관계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생각됩니다." 이때, 우내제일정이 물었다. "그곳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이오?" "십만대산의 깊숙한 곳에 귀령봉(鬼靈峯)이라는 절봉이 있는데 그곳에 올라서면 그 동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음……" "내려오는 길에 산민(山民)들에게 물어봤더니 그곳을 마혈(魔穴)이라고도 부르고, 혹은 지옥같이 무서운 곳이라 하여 구겁지옥마로(九劫地獄魔路)라 부른다 하더군요." 바로 그때, 백리사옥은 내심 크게 경악했다. (구겁지옥마로! 천요(天妖)의 장보도에도 구겁지옥마로라고 쓰여있지 않았던가?) 그는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끼며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리고 그 형태는 화예상아가 환상 속에 보았다는 그 요기서린 동혈의 형태와도 일치하지 않은가!) 뭔가가 꿈틀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심상치 않다!) 백리사옥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좌중의 정적을 깨뜨리는 불호성이 터졌다. "아미타불!" 불호와 함께 천허대사가 일어났다. "노납은 문인원주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문제, 즉 겁천악마교의 혈보가 왜 갑자기 중단되었느냐 하는 점에 대해 조사해왔소이다." "……!" "물론 이것 또한 악마들이 자취를 감춰버린 이상 실로 밝혀내기 어려운 문제였소. 그래서 노납이 조사한 방법은 살해된 자허사제(紫虛師弟)가 남긴 대반야수미항마경(大般若須彌降魔經)과 핏물에 적셔진 종이쪽지에 의해서였소." 그는 죽은 자허선사를 회상하는 듯 잠시 노안을 감았다. "대반야수미항마경은 천축으로부터 가져온 고대불경인데 그 내용과 종이에 적힌 글귀를 면밀히 조사해본 결과 극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오." 천허대사는 소맷자락 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좌중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백리사옥이 태행산의 동굴에서 보았던 악마의 예언이었다. 그 날…… 악마(惡魔)의 뜻에 의해 하늘은 먹구름을 가리웠다. 그것은 악마좌(惡魔座)의 빛을 지계(地界)에 알리지 않으려는 악마의 뜻이었다. 그 날…… 가리워진 암천(暗天)의 깊은 곳에서 천기(天機)마저 숨긴 채 하


나의 녹색성좌(綠色星座)가 빛을 뿌렸다. 그것은 천지간의 모든 극마(極魔)와 극사(極邪)와 극음(極陰)과 극요(極妖)를 지배하는 악마의 성좌였다. 그 날…… 악마의 뜻에 의해 지상 어딘가에서 악마의 적자(嫡子)가 태어났다. 그는 어둠 속에서 태어나 악마를 신봉하는 무리들에 의해 선택되었고 그들에 의해 길러졌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부르짖었다. 천지(天地)는 본시 암흑과 혼돈 속에서 창조되었으니, 천지의 주인은 본시 악마였노라! 우리는 이 아이에 의해 잃어버린 천지를 되돌려 받으리라! 그들은 악마의 뜻에 의해 악마의 성전(聖典)을 기록했다. 그것은 곧 악마의 기록이니, 이를 일컬어 악마전(惡魔典)이라 하였다. "악마의 적자!" "악마전(惡魔典)! 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말들이란 말이오?" 좌중에는 갑자기 소요가 일어났다. 허나, 천허대사는 무거우면서도 침착한 불호를 토해냈다. "아미타불! 대반야수미항마경은 불존(佛尊)께서 직접 기록하신 것이오. 또한 자허사제는 죽어가는 순간에 이것을 남겼소. 결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오이다!" 그의 음성은 웅휘했고 어조는 설득력이 있었다. 좌중의 소요는 곧 가라앉았고, 천허대사는 말을 이었다. "그 예언이 말한 악마를 신봉하는 무리란 바로 겁천악마교를 뜻하는 거요." 이때, 우내제일정이 문득 입을 열었다. "천허장문인의 말씀을 우리는 믿겠소이다. 그렇다면 겁천악마교의 뿌리는 밝혀진 셈이겠는데, 그들이 갑자기 행동을 중지한 까닭은 무엇이겠소?" "그건 확실히 알 수 없소이다. 허나 노납은 한 가지 단서를 찾아내었소." 천허대사는 다시 또 하나의 종이를 꺼내보였다. 천요(天妖)가 반란하여 십귀(十鬼)에 숨었도다. 악마의 적자는 삼령(三靈)을 거느리고 겁세할 것이나, 천요가 반드시 뒤이어 나타나 삼령을 치리라! 대반야(大般若)는 사천왕(四天王)을 두어 항마성(降魔星)을 기르니, 난세(亂世)는 파천(破天)으로 귀결되리라! "이건 또 무슨 말들이오?" "아미타불…… 설명해 드리겠소." 천허대사는 불호를 읊조린 뒤 글귀를 풀어 설명했다. "천요(天妖)가 반란했다 함은 악마의 내란(內亂)이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되오. 즉 극마(極魔), 극사(極邪), 극음(極陰), 극요(極妖) 중에 요(妖)가 분리되어 배반했다는 뜻이오." "……!" "악마의 적자는 나머지 극마, 극사 극음의 삼령(三靈)을 거느리고 겁세를 시작하나 극요의 맥(脈)이 그들과 싸우게 된다는 말인 듯하오." "오! 그렇다면 겁천악마교가 갑자기 혈보를 중단한 까닭은 천요 (天妖)가 등장했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오?" "현재로썬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소이다." "음……!" 우내제일정은 눈빛을 빛내며 뭔가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맨 마지막의 대반야와 사천왕, 항마성 따위는 무슨 뜻이오?" "그것은……"


천허대사는 잠시 좌중을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아마도 맥을 이어오고 있음을 말하는 것 같소. 항마성이란 그 네 곳의 힘을 한몸에 이어받은 천세의 영웅을 뜻함이 아닌가 하오이다." 일순, 천허대사의 시선이 백리사옥을 바라보고 지나갔다. 백리사옥은 가슴에 표현하지 못할 기이한 느낌으로 가득찼다. 네 곳의 힘을 이어받은 천세의 영웅----! 그는 누구인가? 그때, 우내제일정이 다시 말했다. "천의(天意)가 우리에게 있다면 반드시 그 영웅을 만나게 될 것이오. 허나 지금의 당면과제는 십만대산의 구겁지옥마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오." "아미타불……" 천허대사가 다시 나섰다. "노납의 생각으로는 우리들이 그곳을 찾아가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오." "그 까닭은……?" "예언의 첫 구절에 나와 있소이다. 천요는 반란하여 십귀(十鬼)에 숨었도다. 이제 생각해보니 십귀란 십만대산(十萬大山)의 귀령봉(鬼靈峯)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하오." "아! 그렇군!" 군웅들은 하나같이 탄성을 토해냈다. "예언대로라면 천요(天妖)는 악마들의 적(敵)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그와 동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오." 우내제일정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우리는 지금 힘이 부족한 상태이오. 겁천악마교를 물리칠 수 있는 길이라면, 사도(師道)는 물론 요(妖)하고라도 손을 잡아야 할 것이오!" 그는 부르짖듯이 외쳤다. 그것은 여기에 모인 모든 군웅들의 일심(一心)을 대변하는 외침이었다. 이날, 회의의 결론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천요(天妖)를 얻기 위해 구겁지옥마로에 간다! 허나, 그들은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겁지옥마로가 천요의 근거지라는 것은 아직까지 추측에 불과하다. 어쩌면, 천허대사의 해석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곳은 천요의 근거지가 아니라 겁천악마교의 총단(總壇)이나 지단(支壇)일지도 모른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정도의 최강고수들을 십만대산에 집결시킨 다! 최악의 경우 겁천악마교와의 동귀어진(同歸於盡)이라도 불사하리라! 중지(衆志)는 모아졌다. 그리고 그날 밤 수백 마리에 달하는 전서구(傳書鳩)가 천하 곳곳을 향해 힘차게 비산(飛散)했다. 천하정도의 각파고수들은 십만대산으로 총집결하라! 쿠쿠쿠쿠쿠쿵…… 혈륜(血輪)은 다시 구르고 있었다. 7 십만대산(十萬大山). 광동(廣東)과 광서(廣西) 양성을 경계지으며 장장 오백여 리에 걸쳐 뻗어있는 대산맥(大山脈)! 이른바 십만(十萬)의 봉우리를 지닌 그 웅자(雄姿)는 차라리 엄숙장엄하기까지 하다. 귀령봉(鬼靈峯). 사시사철 죽음과도 같은 으스스한 검은 안개(黑霧)에 싸여있고, 언제나 귀곡성(鬼哭聲)같은 삭풍소리가 그칠 날 없다하여 이렇게 명명(命名)된 절봉(絶峰)이 있다.


휘이잉…… 후우우우---- 위이이---- 잉----! 을씨년스런 삭풍이 몰아치는 절봉 위에 대략 이십 명 가량의 인물들이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서 있었다. 환우회천원을 떠나온 정도 최고고수들이었다. 그 속에 백리사옥과 한 청의소녀(靑衣少女)의 모습이 보인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너무도 잔잔하고 아름다운 눈을 가진 미소녀는 바로 화예상아였다. -어쩐지 이번 길엔 제가 따라가야 할 것 같아요. 옥랑(玉郞)의 신변에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그녀는 신무지체(神巫之體)이다. 백리사옥은 그녀의 말을 경시할 수 없었다. 또한, 이번 일에 그녀의 힘이 매우 필요하리라 생각하고 화예상아를 데려왔던 것이다. 화예상아는 선천적으로 무공을 익히지 못할 만큼 몸이 허약했다. 귀령봉의 삭풍을 견디지 못하고 백리사옥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기대어 서 있었다. 지금 군웅들은 귀령봉에 우뚝 서서 전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전면에는 천장단애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헌데 절벽에는 마치 벌집을 연상케 할만큼 무수한 동혈(洞穴)들이 빽빽이 뚫려있는 것이 아닌가? 뿐인가? 위이이잉…… 고오오오…… 휘이이이---- 잉----! 바람이 동혈을 스치며 울부짖는 음향은 마치 지옥 속에서 신음하는 악령들의 호곡소리처럼 음산하고 전율스러웠다. 또한 동혈 내부로부터 물씬 물씬 풍겨나는 요악(妖惡)한 기운은 또 무엇으로 형용하랴? "……!" 군웅들은 표정을 딱딱하게 경직시킨 채 동혈들을 바라보았다. 구겁지옥마로(九劫地獄魔路)! 과연 저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천요(天妖)인가? 겁천악마교(劫天惡魔敎)인가? 휘이우우우---- 웅---- 고오오오---군웅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최후의 결전(決戰)에 임하는 긴장과 엄숙함이 감돌고 있었다. 어느 순간, 천도황 헌원적이 외쳤다. "이렇게 서 있기만 할거요! 일단 들어가 봅시다!" "헌원 어린놈, 빨리 죽고 싶어 환장까지 동하는 모양이구나!" 대구취허신개가 빈정거렸다. 천도황 헌원적의 검미가 무섭게 꿈틀거렸다. "대구(大口)선배! 당신의 독설은 잘 알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시오!" "네놈이야말로 불쑥불쑥 나서지 마라! 우리는 엄연히 문인원주의 지휘를 따라야할 게 아니냐!" "……!" 천도황 헌원적은 말문이 막혀 씩씩거리기만 했다. 대구취허신개의 말은 독설이긴 했으나, 언제나 사리에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이때, 우내제일정이 만리추종 사무외를 돌아보았다. "사대협이 이목(耳目)이 밝으니 앞장서시오!" "알겠습니다." "어차피 모험은 각오한 것, 아무 데고 사대협의 마음에 드는 동혈을 고르시오." "좋습니다!" 슈아앗----!


만리추종 사무외는 구겁지옥마로의 한 동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자! 우리도 갑시다!" 우내제일정은 외치며 몸을 날렸고 군웅들도 이내 그의 뒤를 따랐다. 화예상아는 백리사옥을 올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옥랑! 우리도 가요." 백리사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휙! 그의 신형이 군웅들의 뒤를 따랐다. 헌데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두 줄기 흑영(黑影)이 유성처럼 귀령봉에 날아내렸다. 한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청년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일신에 검은색 장삼(黑衫)을 걸치고 있었다. 노인(老人)은 두 눈이 괴이하게도 흰자위가 하나도 없는 흑색이며 연신 음산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청년(靑年)은 대략 십 구 세 가량으로 절세미녀가 수줍어할 정도의 미청년(美靑年)이었다. "후후! 어리석은 놈들!" 문득, 흑의노인은 음산한 귀소를 흘리며 두 눈에서 괴이한 묵광(墨光)을 번뜩였다. "옛말에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다는 말이 있지!" 흑의청년은 흑의노인의 괴소가 그치길 기다려 말문을 열었다. "비숙(殺叔)! 우리도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흑의노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천요(天妖)의 비학(秘學)은 반드시 우리 포융차랍궁(抱戎借拉宮)에서 취해야 한다." 포융차랍궁(抱戎借拉宮)을 생각하면 우선 새외사패세(塞外四覇勢)라 불리우는 변황(邊荒)의 거대한 세력들을 떠올리게 된다. 새외사패세(塞外四覇勢)! 동해(東海)---- 겁해귀역도(劫海鬼域島)! 천축(天竺)---- 바라문교(波羅門敎)! 신강(新疆)---- 포융차랍궁(抱戎借拉宮)! 막북(漠北)---- 묵풍사사(墨風死社)! 호시탐탐 대중원정복의 야욕을 꿈꾸고 있는 무서운 패자(覇者)들! 그렇다면 새외사패세의 하나인 포융차랍궁이 드디어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흑의노인의 괴소는 이어졌다. "후후후, 대중원의 정복은 본궁의 천 년 숙원이다. 허나 겁천악마교가 득세한다면 그것은 달성하기 어렵게 된다. 겁천악마교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악마와 천적(天敵)이 되는 천요의 비학을 얻는 길 뿐이다!" 흑의노인은 묵광을 번뜩이며 정도고수들이 사라진 동혈에 괴안을 박았다. "후후…… 천요의 비학은 나 귀안사령(鬼眼邪靈) 비류음(殺流音)이 얻는다." 스스스…… 귀안사령 비류음과 흑의청년은 삭풍이 몰아치는 허공을 밟으며 구겁지옥마로로 사라져갔다. 헌데, 그들이 사라진 직후 불쑥 새로운 인물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도저히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냉막한 분위기의 괴노인이었다. 특이한 것은 한쪽 다리가 허벅지께에서부터 잘려져 시커먼 철족(鐵足)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철그럭…… 철그럭……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철족은 거북한 금속성을 발했다. 괴노인은 무거운 침음성을 터뜨렸다. "으음, 설마 귀안사령 비류음까지 나타날 줄은 몰랐었다."


그의 눈에서 차가운 한광이 번쩍 솟구쳤다. (우내제일정, 천사자령종 육도강, 귀안사령 비류음, 이 세 놈이 가장 큰 적수가 되겠군!) "허나 잃어버린 물건은 주인에게 돌아가야 하는 법! 천요의 비학은 초령마국(超靈魔國)이 차지한다." 스스슷……! 일순 괴노인의 신형이 구겁지옥마로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그의 마지막 남긴 중얼거림이 여운처럼 남았다. "그리고 네놈들은 모두 이곳에서 뼈를 묻는다. 나 마각철부(魔脚鐵父)에 의해…… 크흐흐흐……!" 휘이이잉---- 위이잉----!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헌데, 그 바람에 실려 왔는가? 한 채의미소녀(彩衣美少女)가 마각철부가 사라진 방향을 조용히 노려보며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가 움직인다면 동해의 겁해귀역도(劫海鬼域島) 역시 보고만 있을 순 없다." 채의미소녀는 바로 파궁화화시에서 입술을 팔던 그 소녀였다. "나 채혼해화(彩魂海花)는 너희들처럼 어리석지 않아. 구태여 죽음을 무릅쓰고 구겁지옥마로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기다리고 있다가 맨 나중놈을 제거하고 뺏으면 되니까……" 스스스스…… 채혼해화는 구겁지옥마로에 들어가지 않고 바람 속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귀령봉에는 또 다시 하나의 묵영(墨影)이 나타났다. 만년빙담 속의 화강암처럼 지독히도 딱딱한 인상의 흑의중년인은 바로 신비고수 묵풍무정(墨風無情)이 아닌가? "구겁지옥마로에 들지않는 것은 나도 동감이다." 지극히 무심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묵풍무정은 이번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그의 냉막한 시선이 천공을 향했다. "묵풍사사(墨風死社), 내가 몸담아 왔던 곳, 그래서 그곳을 배반하고 싶지는 않으나 이번 일만큼은 간섭하고 싶지가 않아……" 어쩐지 씁쓸하고 허탈한 고뇌의 빛이 그의 눈빛에 어려 있었다. "백리사옥이란 소년, 한 번 보았음에도 왠지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흡사 핏줄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웬일일까?"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느릿느릿 귀령봉을 내려가고 있었다. 묵풍사사(墨風死社)! 겁해귀역도(劫海鬼域島)! 포융차랍궁(抱戎借拉宮)! 이들 새외사패세 중 세 곳의 인물들이 중원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그들 모두가 천요(天妖)의 비탁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신비세력 초령마국(超靈魔國)이라는 이름도…… 바람(風)이 분다. 고오오…… 고오오오…… 휘이이이---- 잉----! 제 12 장 邪道의 高手들 1 우내제일정을 위시한 정도의 고수들은 만리추종 사무외를 선두로 하나의 비혈(秘穴)로 진입해 들었다. 비혈 안은 앞에 선 사람의 뒤통수조차 식별할 수 없는 짙은 암흑이 깔려 있었다. 또한 동굴 특유의


끈끈한 습기가 불쾌하게 피부로 스물스물 기어들었다. 문득, 천도황 헌원적의 불평스런 욕설이 터졌다. "빌어먹을!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으니 이거야말로 이름 그대로 구겁지옥(九劫地獄)이군." 그의 음성이 웅웅 동혈을 울리며 메아리치듯 퍼졌다. 그때, 맨 선두에 섰던 만리추종 사무외가 말을 받았다. "동굴 전체에 빛을 차단하는 괴이한 흑무(黑霧)가 흐르고 있소이다. 무공이 아무리 높아도 전방을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은 그 때문 이오!" 뭉클…… 뭉클…… 동굴 속은 음산하고 칙칙한 검은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본인에게 야명주가 있소이다!" 다음 순간 그의 야명주가 암흑을 걷어내며 빛을 뿌렸다. 허나, 흑무에 가린 십여 보 앞은 보이지 않았다. 푸드득! 돌연 한 덩이 시커먼 괴물체가 중인들의 머리 위에 출몰했다. 번쩍! 언제 어느새 뽑았는지 천도황 헌원적의 도(刀)가 싸늘한 도광(刀光)을 발했다. 눈부신 쾌도(快刀)에 괴물체는 정확히 두 동강이 나 동혈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한 마리 거대한 흑지네였다. 천도황 헌원적은 도(刀)를 거두며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빌어먹을! 별 희한한 게 살고 있군." 아직도 그의 음성엔 희미한 긴장이 내포되어 있었다. 허나, 아무도 입을 열지도 묻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암중으로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인들은 긴장 속에 묵묵히 전진을 계속했다. 어느 순간, 선두에서 만리추종 사무외가 한 손을 번쩍 쳐들었다. "잠깐!" 순간, 중인들은 전진을 멈추며 일제히 긴장의 신색을 띄웠다. 우내제일정은 신광을 번뜩이며 물었다. "사대협! 무슨 일이오?" 만리추종 사무외는 이 순간 예리한 시선으로 전면을 주시하고 있 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 "어디선가 피(血)냄새가 느껴집니다." 만리추종 사무외는 코를 벌름거리며 전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내제일정은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피냄새라면 누군가가 저 안쪽에 있다는 말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혹시 우리들보다 먼저 이곳에 들어온 사람이 있을지도……" "어쨌든 들어가 봅시다!" 얼마나 갔을까? "허엇……!" 만리추종 사무외가 헛바람을 들이키며 우뚝 멈춰섰다. "또 무슨 일이요?"


"모두들 동혈 바닥을 보십시오!" 중인들은 일제히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순간 중인들은 안색이 대변을 일으키고 말았다. 보라! 시커먼 흑무가 흐르는 동혈 바닥에 수십 구(俱)의 시체들이 갈기 갈기 찢겨져 난자되어 있지 않은가? 걸레조각처럼 무참하게 찢겨져 형태마저도 알아보기 힘든 참혹한 시신들은 핏물과 육편으로 변해 지옥도(地獄圖)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이것은 핏물이 마르지 않은 걸로 보아 죽음을 당한 지 일각도 채 지나지 않은 듯하오." "그리고 이들은 어떤 병기(兵器)에 당한 것 같지 않습니다. 마치 어떤 흉폭한 괴수(怪獸)가 무서운 힘으로 찢어버린 듯합니다." "이럴 수가?" 헌데 바로 그때였다. 쿠드드득! 소리와 함께 갑자기 동굴 벽이 뜯겨져 나가며 거대한 핏빛 물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갈(全蝎)!" 쏟아져 나온 것은 어른 팔뚝만한 크기의 시뻘건 전갈떼들이었다. "우웃! 저것들은 사막지대에서 서식하는 혈황시갈(血蝗屍蝎)이오!" 천독대군 사공능우의 가슴 서늘한 경악성이 신음처럼 터져 나왔다. 혈황시갈 떼들은 괴이한 음향을 발하며 중인들 쪽으로 다가왔다. "저것들은 독전갈 중에도 가장 지독한 맹독을 지니고 있고 몸체는 도검불침(刀劍不侵)이오." 천독대군 사공능우는 계속 외쳤다. 중인들은 그제야 처참하게 찢겨진 시신들이 혈황시갈의 양발(집게)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끄으으…… 끄끄으으…… 쏟아져 나오는 혈황시갈의 수효는 적어도 수백 마리는 되어 보였고,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다가들고 있었다. 중인들은 경악 속에 혈황시갈들을 지켜 보았다. "내가 시험해 보겠소!" 번쩍! 외침보다 빠르게 천도황 헌원적의 쾌도가 빛을 뿌렸다. 도기(刀氣)는 그대로 혈황시갈의 몸에 격중되었다. 까깡! 쇳소리와 함께 시퍼런 불꽃이 튀며 헌원적의 도가 퉁겨져 버리는 게 아닌가! "믿을 수 없다! 나의 거도는 능히 바위도 쪼개버릴 수 있거늘……!" 그때였다. 천독대군 사공능우가 외치며 품 속에서 푸른색 옥병을 꺼내들었다. "본인이 한 번 시험해 보리다! 모두 뒤로 물러 서십시오." 중인들은 모두 뒤로 수 장 정도 물러났다. 천독대군 사공능우는 옥병의 마개를 열고 내력을 주입시켰다. 촤악! 짙푸른 청색의 독액(毒液)이 혈황시갈들을 향해 발출되었다. 치치치익! 확! 뿌연 백무가 일며 소름끼치는 음향이 일었다. 혈황시갈들은 뿌연 백무 속에 완전히 가려 버렸다. 동혈 가득 심한 악취가 가득찼다. 중인들은 황급히 호흡을 막고 백무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백무가 가시며 동굴 내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중인들은 기대의 시선으로 재빨리 혈황시갈들을 살펴보았다. 다음 순간, "실패다!" 중인들은 얼굴 가득 실망의 기색을 떠올리고 말았다. 혈황시갈들은 조금 속력을 늦췄을 뿐 오히려 흉광을 더욱 번뜩이며 다가드는 것이 아닌가? 끄으으으…… 꾸우우우…… 끄끄끄…… 천독대군 사공능우는 낭패의 신음성을 흘렸다. "과연 혈황시갈이다. 칠보단장독(七步斷臟毒)에도 끄덕하지 않다니……!" 중인들은 일시 난감해졌다. 절대고수들인 그들은 물론 자신들의 몸을 지킬 자신은 있었으나, 수백 마리가 떼지어 달려드는 혈황시갈에 한동안 혈투를 벌이지 않을 수 없겠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끄끄끄끄…… 끄아으…… 혈황시갈 떼들은 이미 그들의 면전까지 이르고 있었다. "좌우간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소." 우내제일정은 외치며 거세게 일장을 내뻗었다. 쿠콰쾅! 까악---- 악---서너 마리의 혈황시갈이 장력을 얻어맞고 십 장 안쪽으로 날아갔다. 헌데, 날아간 혈황시갈은 죽지 않고 다시 꾸역꾸역 일어나는 게 아닌가? "이럴 수가!" 중인들의 입에서 일제히 경악성이 터졌다. 그 순간 혈황시갈들은 앞발을 내두르며 무서운 기세로 짓쳐들기 시작했다. 끄끄끄…… 까으으으…… 이때, 천독대군 사공능우가 급박하게 외쳤다. "이제 생각났소이다! 혈황시갈의 급소는 지면에 붙이고 있는 배 쪽이오!" "알겠소!" 군웅들의 장력이 무섭게 날았다. 허나, 지면에 밀착된 혈황시갈의 배를 뒤집어 공격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끄으우우…… 끄끄끄…… 혈황시갈들은 집게를 휘저으며 달려들었고, 군웅들은 장력과 병기로 그들을 막아냈다. 허나, 수백 마리에 달하는 혈황시갈과의 싸움은 시간만 끌 뿐 좀체로 승기를 잡을 수 없었다. 뿐인가? 동굴의 벽 속에서는 끝없이 계속 혈황시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니 차츰 지쳐가는 것은 중인들 뿐이었다. 백리사옥은 내심 골몰했다.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겠다! 당분간은 정면에 나서지 않으려 했으나 할 수 없다!) 그는 드디어 건천의 절학을 펼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헌데 그때, 화예상아가 문득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물! 물줄기가 보여요." "물?" "그래요. 동굴 안쪽으로 수맥(水脈)이 흐르고 있어요." 무령지안(巫靈之眼)인가? 그녀는 동굴 바위 속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백리사옥의 뇌리에 영감이 스쳤다. (그렇다! 혈황시갈은 사막에 서식하기 때문에 불(火)에는 강하나 물(水)에는 약하다. 물줄기를 터뜨려 이곳으로 오게 한다면 혈황시갈은 땅바닥에 붙어있기 때문에 수장(水葬)되고 말 것이다!)


생각이 끝남과 동시 백리사옥은 화예상아가 가리키는 벽쪽을 향해 냅다 일 장을 뻗었다. 콰콰쾅! 바위가 통째로 박살나며 벽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순간, 쿠쿠쿠쿠쿠…… 과연 엄청난 물줄기가 뚫린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어디서 물줄기가……!" 군웅들은 놀라 부르짖었고, 천지가 박살나도 움직일 것 같지 않던 혈황시갈들은 물을 보자 어지럽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백리사옥이 외쳤다. "혈황시갈의 천적은 물(水)입니다! 이 틈에 빨리 동굴을 빠져 나갑시다!" "오오…… 과연!" 쿠콰콰콰콰콰…… 물줄기는 더욱 거세게 쏟아져 들어와 동굴바닥을 메우기 시작했다. 혈황시갈들은 꼼짝없이 수장되고 있었다. "갑시다!" 군웅들은 수면(水面)을 박차며 안쪽으로 질주해갔다. 2 어느 때부터인가 동굴은 윗쪽으로 향하며 급격히 좁아지기 시작했다. 물줄기가 더 이상 따라붙지 못하는 것은 다행이었으나, 동굴은 더욱 좁아져 간신히 한 사람 정도가 빠져나갈 정도가 되었다. 휘이이---- 이---- 잉---동굴 안쪽으로부터 한기 어린 빙풍(氷風)이 불어나오고 있었다. "어쨌든 가보는 수밖에 없소!" 우내제일정은 힘있게 외쳤다. 군웅들은 만리추종 사무외를 선두로 좁은 혈로(穴路)로 한 사람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군웅들에 이어 백리사옥은 화예상아를 껴안은 채 신형을 통로 속으로 디밀었다. 통로(通路)는 체격 장대한 남자 한 명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넓이였다. 헌데 백리사옥은 화예상아를 품 속에 끌어안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아……!) 화예상아는 가슴이 크게 진탕되었다. 그들 사이는 한 치의 틈도 없었다. 좁은 통로 속에서 남녀는 어쩔 수 없이 서로의 몸에 자신의 몸을 빈틈없이 밀착시킬 수밖에 없었다. 뭉클! 화예상아의 가슴이 탄력있게 백리사옥의 가슴을 압박했다. "아아……!" 그녀는 부지중 가슴 떨리는 야릇한 신음성을 흘려냈다. 백리사옥은 급히 물었다. "화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소?" 일순, 화예상아는 간신히 두 손을 비집어 백리사옥의 어깨를 휘어감았다. "죄, 죄송해요. 옥랑!" 백리사옥의 목덜미에 그녀의 숨결이 할딱이며 와 닿았다. 훅! 돌연 백리사옥의 전신으로 불꽃이 일었다.


그녀의 눈길은 불꽃이 되어 그의 시선에 부딪쳐 들었다. 백리사옥은 비좁은 동혈을 빠져나가며 그녀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입술로 쓰다듬었다. "화매, 우리는 이미 한몸이 아니오?" "오…… 옥랑……!" 화예상아는 황홀한 비음을 토해냈다. 동혈은 너무도 좁고 어두웠다. 허나 그 거리는 불과 십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백리사옥과 화예상아는 그 짧고 어두운 좁은 동혈에서 다시 한 번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뛰는 가슴과 뜨거운 숨결, 아찔한 육체의 감촉 속에서…… 군웅들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남았던 인물은 곤륜파의 적양자(赤陽子)였다. "내가 마지막인가?" 그는 백리사옥과 화예상아의 뒤를 이어 동혈로 막 진입해 들어가려 했다. 헌데 그때 통째로 폐부를 긁는 듯한 음산한 괴소성이 그의 뒤편에서 조용히 울렸다. "흐흐……!" 적양자는 내심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그 순간 물길을 밟으며 괴영 하나가 안개처럼 모습을 나타냈다. 일신에 마의를 걸친 괴이한 행색의 괴노인이었다. 냉막한 인상의 괴노인은 한쪽 다리가 허벅지부터 잘려져 철족(鐵 足)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구겁지옥마로 입구에 나타났던 마각철부(魔脚鐵父)가 아닌가? (이토록 가까이에 이르도록 눈치를 챌 수 없었다니, 무서운 고수다!) 적양자는 괴노인의 엄청난 무형의 기운을 느끼며 부지중 전율을 일으켰다. "흐흐……!" 마각철부의 괴소에는 물씬 죽음(死)의 스산한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다…… 당신은……?" 적양자는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알 것 없다. 너는 죽어주기만 하면 되니까…… 흐흐……" 마각철부의 한 손이 가볍게 치켜들렸다. 다음 순간 그의 한 손이 앞으로 쭉 내뻗쳤다. 적양자는 황급히 신형을 젖히며 쌍장을 뻗었다. 허나 그의 입에서는 행동보다 더 빨리 숨막히는 비명이 터졌다. "커억!" 귀신보다 빨랐다. 어느새 마각철부의 철족이 적양자의 사타구니에 처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끄…… 이…… 럴 수가……!" 마각철부는 철족을 쑥 뽑았다. 사타구니가 완전히 짓뭉개진 채로 적양자의 신형이 썩은 짚단 무너지듯 침몰해 버렸다. "잠시 후에 죽으나, 지금 죽으나 죽긴 매일반이다." 마각철부는 의미심장한 중얼거림을 흘려냈다.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이 천천히 적양자의 모습으로 바뀌는 게 아닌가? 마각철부는 적양자의 적포(赤袍)를 걸쳐입고 좁은 동혈 속으로 기어들었다. 그것은 불과 눈 몇차례 깜박이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3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자 동굴은 차츰 넓어지기 시작했고, 다시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동혈은 지하(地下)를 향해 끝없이 뚫려 있었다. 내려갈 수록 괴이하게도 뼈골이 에일 듯한 한기가 엄습해 들었다.


"허! 왜 이렇게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진다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지하로 내려 갈수록 기온은 상승해야 하는데 이상한 일이군!" 약 십여 장 정도 더 내려갔을까? 동혈의 겉면엔 하얗게 서리가 맺혀 있었다. 한기는 더욱 전신의 살점을 에일 듯 엄습해 들었다. "그야말로 빙혈(氷穴)이다!" 누군가 나직한 경악성을 터뜨렸다. 동혈은 서서히 투명한 얼음이 뒤덮인 얼음 동굴로 화하고 있었다. "대단한 추위다!" 화예상아는 한기를 견딜 수 없어 몸을 오들오들 떨며 백리사옥에게 꼭 달라붙었다. 잠시 후, 중인들은 어느 한 곳에 이르러 우뚝 전진을 멈추었다. 지하광장(地下廣場)! 동혈이 끊기며 사방 족히 이백 장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지하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 휘…… 이…… 웅……! 뼈를 에일 듯한 한풍은 지하광장을 휘감아 돌았다. 지하광장에는 여러 개의 동혈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지하광장의 맞은 편 몇 개의 동혈 중 하나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다. "아앗!" 군웅들은 그 움직임을 대한 순간 대경하고 말았다. "어헛!" 대경성은 정파군웅들 맞은 편에서도 터졌다. 지하광장의 맞은편 한 동혈에서 한떼의 인물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 지하광장을 사이에 두고 순간 무거운 침묵이 형성되었다. "천사자령종 육도강!" "마라혈종 도음사!" 군웅들은 경악을 추스르며 나직이 외쳤다. 그렇다. 지금 정도군웅들과 대치상태를 이루고 있는 인물들은 바로 사도의 고수들이 아닌가? 백리사옥은 일순 신광을 빛내며 사도 고수들을 살펴보았다. (천사자령종 육도강!) 그의 시선이 멈춰있는 인물은 일신에 자의(紫衣)를 걸친 나이를 헤아릴 수 없는 노인이었다. 두 가닥 교룡의 수염같이 멋들어진 수염은 진한 자색이었고, 얼 굴 또한 짙은 자수빛이었다. 전신에선 태산이라도 굴복시킬 듯한 엄청난 무형의 기운이 폭발할 듯 뻗치고 있었다. 천사자령종(天邪紫靈宗) 육도강(陸刀强). 그 이름을 누가 모르겠는가? 사도무림 최강(最强)의 고수이며, 우내제일정 문인혁후와 더불어 정사쌍정(正邪雙頂)으로 일컬어지는 불세고수! "……!" 백리사옥은 천사자령종 육도강 옆에 있는 청의미공자(靑衣美公子)를 보고 흠칫 놀랐다. 그렇다. 일신에 청삼(靑衫)을 걸치고 손에 백옥선(白玉扇)을 든 한 명 절세미청년이 그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는 바로 연경 자향루에서 만난 적이 있던 미공자였다. (그가 사도의 인물이었던가?)


백리사옥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허나, 청의미공자는 신비스런 미소를 띄운 채 백리사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씩 그의 품에 안긴 화예상아를 훑어보는 그의 안광은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백리사옥은 순간 시선을 돌려 그 옆의 인물을 바라보았다. (마라혈종 도음사!) 그는 일신에 화려하기 짝이 없는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있는 극히 청수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한 쌍의 눈은 심유무심(深幽無心)하여 도저히 심기(心機)를 헤아릴 수 없었다. 마라혈종(魔羅血宗) 도음사(度陰邪). 사도오천(師道五天) 중 하나인 마라혈사부(魔羅血師府)의 부주. 그 일신 무공은 천사자령종 육도강에게만 반수 정도 밀릴뿐 심기는 오히려 더욱 뛰어났다고 알려졌다. (저 무심(無心)의 기운은 천사자령종 육도강의 외기(外氣)보다 현음(玄陰)의 내기(內氣)를 지니고 있다.) 백리사옥의 눈썹이 다시 찌푸러졌다. (현음의 내기, 이는 상대하기가 힘들다. 조심해야 할 상대다!) 이어, 마라혈종 도음사의 곁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인물에게 시선을 주었다. (백골천괴(白骨天怪)……) 백골천괴는 아무리 인간같이 봐주려해도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살아 움직이는 뼈다귀, 바로 그것이었다. 금방이라도 으드득 소름끼치는 음향을 발하며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 같은 살아있는 고루였다. 그는 목과 허리춤에 인두(人頭)로 만들어진 주먹만한 해골 목걸이와 허리띠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움푹 파인 두 눈에서는 인광같은 음광(陰光)이 줄줄 흘러나왔다. (츳! 꿈에 볼까 무서운 모습이군.) 백리사옥은 고개를 흔들며 그 옆의 인물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건곤쌍필(乾坤雙筆)!) 깡마른 체구의 두 노인은 판에 박은 듯이 모습이 같았다. 음침한 면목에 모두들 등 뒤로 팔뚝만한 판관필 한 자루씩을 메고 있었다. (저들이 강호 유사 이래 필법(筆法)의 제일인자들이다!) 백리사옥은 그들을 눈여겨 보았다. 그리고는 이어, 그들 곁에 있는 중년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진천마궁(震天魔弓) 곽천패(郭天覇)! 단 일시(一矢)로 태산을 뚫어 버린다는 대력천궁사 헌원적을 능가하는 천하제일궁(天下第一弓)!) 진천마궁은 이미 팔순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마흔가량의 중년 모습이었다. 흡사 한 덩이 바위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진천마궁 곽천패은 등에 거대한 철궁(鐵弓)을 메고 있었다. 진천마궁 곽천패의 옆으로 일신에 흑의장포(黑衣長袍)를 걸친 사순 가량의 중년인이 있었다. (사독사종(邪毒死宗) 만사염(萬邪炎)! 겁천악마교에 짓밟힌 천독사성의 성주.) 사독사종의 두 눈은 물처럼 고요하여 이미 독공이 어느 경지를 넘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옆에는 역시 사순 가량의 흑의 미부인이 서 있었다. (사독사종 만사염의 부인인 독령부인(毒靈夫人) 요접홍(瑤接紅), 그녀의 독공 역시 사독사종과 비길 정도라 했다!) 이어, 문득 백리사옥의 두 눈이 기이한 빛을 뿌렸다. (괴상한 옷차림이군?) 독령부인 요접홍의 바로 곁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절세미소녀가 있었다. 터질 듯 발랄한 야성(野性)의 미(美)를 지닌 미소녀였다. 헌데 괴이하게도 조끼같은 상의와 짧은 반바지를 걸치고 미끈한 두 팔과 다리를 그대로 드러낸 옷차림새가 아닌가?


대담한 옷차림, 긴장된 분위기 속에 이 신비 미소녀의 미끈한 팔다리는 묘한 분위기를 풍겨주기에 족했다. 그들 외에도 사도 극강의 고수 십여 명이 더 있었다. 정(正), 사(邪)의 대치! 한동안 불꽃튀는 시선들이 오갔다. 문득, 천사자령종 육도강의 입이 열리며 스산한 괴소가 새었다. "후후, 문인형(聞人兄)! 오랜만이군." 우내제일정은 평정된 신색으로 대답했다. "오십 년 만인가? 허나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뜻밖일세." 천사자령종 육도강의 눈에서 자광이 번쩍 일었다. "뜻밖이라고? 그대는 이미 우리가 이곳에 당도할 것을 예상했을텐데?" 우내제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우리들의 행동이 사도측에 발각될 것은 각오했지. 허나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네." "잘된 일?" 쌍방의 대치는 정사(正邪) 최강의 고수들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으나, 마치 오랜 지기(知己)를 만난 듯 그들의 어투만은 사뭇 침착하고 부드러웠다. 우내제일정은 똑바로 천사자령종 육도강을 정시하며 말했다. "그렇네. 우리가 비록 수백 년 동안 세불양립(勢不兩立)의 숙적이었다. 하나 지금은 모두가 겁천악마교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는 입장이네." "그래서 힘을 뭉쳐 보자는 말을 하려는 것인가?" 천사자령종의 어투는 다소 빈정대는 투였다. 우내제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이 그렇네. 지금 이 구겁지옥마로엔 천요(天妖)의 비학이 숨어있다고 알려졌으나 사실은 겁천악마교의 총단인지도 모르네." "……!" "우리는 지금 정사를 따질 때가 아닐세. 힘을 뭉쳐 악마와 싸우지 않으면 안되네." 일순 냉소를 날리며 나서는 인물은 마라혈종 도음사였다. "흥! 본인은 반대하오." "음?" "정도라는 자들은 본시 정의(正義)라는 구실을 앞세우는 교활한 무리들이오. 이 구겁지옥마로가 겁천악마교의 총단이라는 것은 천요의 비학을 독차지하려는 얄팍한 수작에서 조작해낸 말이오." 그의 심유한 눈빛이 무섭게 빛났다. "이곳이 악마의 총단이라면 왜 우리가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단 말이오." 우내제일정은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 일순 말문이 막혔다. 마라혈종 도음사는 다시 외쳤다. "또한 그대들이 우리 사도측과 힘을 합칠 의사가 있었다면 애초에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에 우리측에 통보를 했어야 하오." "……!" "천하에 퍼진 정도각파에는 전서구를 띄우면서 우리에겐 연락할 시간이 없었다는 허황한 변명 따위는 하지 못할 것이오." 마라혈종 도음사는 과연 심기와 언변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우내제일정은 한동안 말을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신음처럼 말했다. "결국 서로 반목한 채 악마들의 제물이 되자는 말인가?"


"반목? 흥! 웃기는 소리마라. 문인혁우!" 갑자기 마라혈종 도음사의 어투가 돌변했다. "본인은 진작부터 문인혁후 네놈의 절학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견식해 보고 싶었다." 완전히 도전이었다. 지하광장 안에 대치한 정사양도 고수들 사이에는 갑자기 숨막히는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마라혈종 도음사는 무시무시한 살광을 내뿜었다. "문인혁후! 천하에서 네놈을 왜 우내제일정이라 부르는지 한 번 견식해 보겠다!" 그는 신형을 솟구쳐 그대로 우내제일정에게 짓쳐들었다. "마라혈섬강(魔羅血閃 )!" 츄파파파파---- 파파---- 앗! 가공할 핏빛 강기가 마치 도기와도 같이 벼락 꽂히듯 우내제일정에게 쪼개들었다. 허나 그 찰나 웅휘한 불호와 함께 천허대사가 나섰다. "아미타불, 도시주의 절학은 노납이 받아보겠소! 대라천불수(大羅天佛手)!" 천허대사의 승포자락이 팽팽히 부풀어 오르며 도음사의 공세에 맞부딪쳤다. 꽈꽝! 고막을 휘잡아 뜯는 천지진동의 굉음이 터지며 광장 전체가 통째로 뒤흔들렸다. 그들은 각기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서 들끓는 기혈을 추스렸다. 막상막하(莫上莫下)였다. 헌데 그 순간, 천사자령종 육도강의 입에서 일성폭갈이 터져나왔다. "쳐랏!" 동시, 사도고수들은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들고 정도군웅들에게 덮쳐들었다. 차차차---- 창---- 창----! "죽여랏!" 정과 사의 고수들은 일제히 혼전(混戰)으로 뒤엉켜 들었다. 꽈꽈꽈꽝----! 정사혈전(正邪血戰)! 비록 숫자는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들은 모두 정사 최극강(最極强)의 고수들이 아닌가! 천지를 뒤집을 듯한 싸움은 수백 년 간의 앙숙이었던 정(正)과 사(邪)의 누적된 감정의 대폭발이었다. "후후후! 본좌의 상대는 아무래도 자네인 것 같네." 천사자령종 육도강은 괴소를 흘리며 우내제일정에게 날아들었다. 우내제일정은 싸늘한 안광을 토해냈다. "이런 쓸데없는 싸움은 피하고 싶었지만 정 원한다면 상대해주지!" 그는 냉혹하게 외치며 일수(一手)를 쭉 뻗어냈다. "정천파극수(頂天破極手)!" 일순, 서릿발과도 같은 삼엄한 은빛 강기가 천사자령종 육도강을 향해 쪼개져 갔다. 육도강은 쌍장을 기쾌하게 움직였다. "자전사풍(紫電邪風)!" 번쩍! 가공할 자색의 장경(掌勁)이 벼락치듯 우내제일정을 후려쳐 들었다. 쿠꽈꽈꽈꽝----! 이때, "허허, 노형! 우리도 가만 있을 순 없지 않겠소?" 휘익! 백리사옥의 앞에 떨어져내린 것은 예의 청의미공자였다.


그는 다짜고짜로 백리사옥의 완맥을 움켜 들었다. "헛! 성질 급한 친구로군!" 백리사옥은 화예상아를 밀어내며 손속을 전개하였다. "흥! 피해?" 청의미공자는 잇달아 기쾌무비의 손속을 전개하였다. 취리리리릿----! 그의 손속은 갈 수록 악랄해져 갔다. 허나 백리사옥은 가볍게 그의 손속을 젖혀낼 뿐 반격을 하지 않았다. 어쩐지 살수를 펼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이십여 초가 지났다. 문득, 청의미공자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역시 무서운 고수다! 옷깃 하나 건드릴 수 없다니……!) 다음 순간 그는 갑자기 장심을 자색으로 물들이며 쌍장을 무섭게 떨쳐냈다. "좋아! 이것도 받을 수 있나 보겠다!" 벼락불 치는 듯한 자색 장경(掌勁)이 백리사옥을 쪼개들었다. "자전사풍(紫電邪風)! 그렇다면 그대는 천사자령종의 제자?" 백리사옥은 감히 소홀할 수 없었다. 그는 신중하게 일수(一手)를 뻗었다. 눈부신 금광(金光)이 자전사풍을 맞받아쳤다. "컥!" 답답한 비명과 함께 청의미공자는 비틀비틀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백리사옥은 물론 어깨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청의미공자의 눈빛이 일변했다. "ㅋ! 죽여버리겠다!" 그는 바락 악을 쓰며 필생의 공력을 다해 쌍장을 휘둘렀다. 조금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지독한 자광(紫光)이 백리사옥을 휘덮었다. (소홀히 볼 수 없다. 살수는 쓰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다.) "빙백쇄혼수(氷魄碎魂手)!" 건천의 절학이었다. 얼음장처럼 투명한 백색 기류가 자광을 맞받아쳤다. 청의미공자가 펼쳐낸 자광이 종잇장처럼 갈라지며 백색기류는 그대로 청의미공자를 휘감아 갔다. "헛!" 그는 다급성을 토했으나 미처 피할 여유가 없었다. 찰나, "위험하다! 상아야!" 우내제일정과 겨루던 천사자령종 육도강이 다급하게 외치며 빛살처럼 날아들었다. 그는 날아듬과 동시 백리사옥과 청의미공자를 향해 한꺼번에 쌍장을 날렸다. 청의미공자는 장력을 얻어맞고 나가 떨어졌다. 허나 완전히 피하지 못한 백색기류가 그의 가슴을 휩싸고 말았다. 순간 그의 가슴은 뿌옇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천사자령종 육도강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애송이! 본좌가 상대해주마!" 그는 다짜고짜로 쌍장을 휘둘러 왔다. 백리사옥은 호승심이 일어났다. (사도최강의 고수! 좋다. 이 기회에 실력을 가늠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는 여유있게 천사자령종 육도강의 장세를 맞받아 갔다. 한편 곤륜파의 적양자(赤陽子)는 아까부터 눈알을 굴리며 정, 사 대회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로 간간이 희미한 득의의 기색이 스쳤다. 그때 음침한 괴소와 함께 한 인물이 그의 전면에 내려섰다. "ㅋㅋ! 적양자! 노부를 잊진 않았겠지?" 적양자는 처음 대하는 인물인 듯 의아한 기색을 떠올렸다. "네놈은……?" 유난히 턱이 뾰족하고 한 팔이 팔목 부분부터 잘려지고 없는 인물이었다. "벌써 잊었느냐? 이십 년 전 네놈과 싸워 승패를 가리지 못했던 독비사신(獨臂邪神)이다!" 허나 그의 말은 계속되지 못했다. 적양자의 신형이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독비사신은 심장 구겨지는 신음성을 흘렸다. "크억!" 그의 사타구니는 어느새 시커먼 철족(鐵足)이 깊숙이 처박혀 있었다. 독비사신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적양자를 바라보았다. "네…… 네놈은…… 적양자…… 아니다…… 그는 이렇게 강할 수가…… 없다……!" 적양자는 음침한 괴소와 함께 철족을 쑥 뽑았다. "흐흐…… 어리석은 놈." 동시 그는 철족으로 독비사신의 머리통을 차버렸다. 퍼억! 독비사신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져 버렸다. 맥없는 죽음이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곤륜파에도 철족을 쓰는 고인이 있는 줄은 몰랐군." 무섭도록 억양없는 한 마디 음성이 적양자의 귓속에 파고들었다. (헛……!) 적양자의 태연하던 눈빛이 찰나지간에 급변했다. 그가 대경하여 음성의 주인공을 찾은 순간, 적양자의 입에서 놀라움의 신음이 터져나왔다. "우내제일정!" 그렇다. 적양자의 뒷편에 나타난 인물은 바로 천사자령종과 겨루던 우내제일정이었다. 우내제일정은 적양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고 있었다. "적양노제! 언제부터 그런 훌륭한 철각(鐵脚)을 익혔는가?" 그 말투는 어떻게 들으면 같은 정파의 동지로서 무학의 성취를 대견하게 여겨주는 말처럼 들렸다. 적양자는 머리를 굴렸다. (본래 적양자와 우내제일정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나 보군!) 그는 다음 순간 씩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문인형!" 순간, 우내제일정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러졌다. "음…… 역시 그랬었군." "……?" 적양자는 의아한 안색을 했다. 그러자 우내제일정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지. 적양자는 본좌와 만나지 않은 지 불과 몇 달도 못되었는데 그 사이에 철족을 달았을 리가 없지. 그리고 적양자는 본좌를 언제나 원주(院主)라고 부른다." "……!" 적양자의 안색이 급변했다.


순간, 우내제일정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싸늘하게 물었다. "벌써부터 네놈을 의심했었다. 대체 너는 누구냐?" 적양자는 부지중 미미한 경련까지 일으켰다. 이 순간, 우내제일정의 다가서는 기도는 흡사 거악(巨嶽)을 방불케 했다. 허나 적양자는 비릿하게 웃었다. "흐흐! 알고 싶거든 나를 꺾으면 된다!" 그의 철족이 허공에서 일곱 차례나 번갯불 치듯 우내제일정을 덮쳐들었다. 헌데 우내제일정은 철족이 무섭게 짓쳐듬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철족이 그의 사타구니 반치 거리까지 이르렀다. 우내제일정의 한 손이 찰나지간 번개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그의 한 손은 비쾌하게 적양자의 철족을 잡아 낚아챘다. "흠! 매우 희귀한 만년오금강(萬年烏金剛)으로 되어 있군!" 우내제일정은 짐짓 감탄성을 터뜨렸다. 순간, 그는 철족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우지지직! 이럴 수가? 천하에서 가장 견고한 만년오금강으로 된 철족은 휴지 구겨지듯 무참하게 구겨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급기야는 완전히 가루로 변하고 말았다. 적양자는 이 가공할 광경에 완전히 기가 질려 버렸다. (어…… 엄청난 내공이다!) 대체 우내제일정의 진정한 무공 깊이는 어느 정도란 말인가? 적양자는 경악에 이어 치욕과 분노가 뒤범벅이 된 이빨을 갈아붙였다. 그는 지금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의 한쪽 다리는 잘라진 것이 아니라 철족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네…… 네놈…… 우내제일정…… 사생결단을 하겠다!" 그의 쌍수가 금시라도 선혈을 뚝뚝 흘릴 것 같은 핏빛으로 변했다. "파황혈겁수(破荒血劫手)!" 막대한 핏빛의 경력이 우내제일정의 심장을 무섭게 맹타해 들었다. 우내제일정은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불나방같은 놈!" 그의 우장(右掌)이 가볍게 흔들렸다. 찰나, 소리도 형체도 없는 한 가닥 극히 음유한 장력이 뿜어졌다.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박살나는 굉음이 터졌다. "큭!" 적양자의 답답한 비명이 터지며 그의 전신이 가랑잎처럼 날아가 석벽에 부딪쳤다. 쿵! 그의 입에서 폭포수같은 선혈이 줄줄 뿜어졌다. "으……!" 그 순간, 적양자의 공력이 감소되며 변신했던 모습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모습은 마각철부(魔脚鐵父)의 얼굴로 바뀌었다. "네놈은……?" 우내제일정의 눈썹이 불끈 휘어졌다. 허나 그때, 마각철부는 고통의 신음을 흘려내며 석벽 한쪽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엔 붉은 돌(赤石)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으…… 좌태상(左太上)께선 어찌하여 아직까지 연락이 없으시단 말인가? 정, 사의 고수들을 이곳에


유인해 넣고, 국왕께서 신호를 하면 저 혈사시적석(血死 赤石)을 뽑아 이곳을 폭파하고 비밀통로로 빠져나오라 하셨거늘……!) 일순 마각철부의 눈빛이 무섭게 빛났다. (도저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마각철부의 신형이 번뜩 적석이 있는 쪽으로 날았다. "어림없는 짓!" 우내제일정의 신형이 그를 빛살처럼 따라붙었다. 허나 그때, 마각철부의 신형은 이미 적석에 이르고 있었다. "크하하핫…… 모조리 죽어라!" 그는 순식간에 문제의 혈사시적석을 뽑아버렸다. 그 순간, 그의 뒤에 따라붙었던 우내제일정의 전음이 마각철부의 귓속에 파고 들었다. "후후! 수고했다. 초령삼호(超靈三號)." 마각철부의 의혹에 찬 시선이 우내제일정을 향했다. "당신이 어떻게 내 정체를……?" "본좌는 우태상(右太上)이다. 본국의 완벽한 대업을 위해 너를 희생시킨 것이다. 가거라!" 우내제일정의 우수가 마각철부의 머리통을 부숴버렸다. 마각철부는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즉사해 버렸다. 우내제일정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정도에 숨어든 첩자를 제거해 버리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허면 그의 정체는……? 이때, 쩍…… 쩍…… 쩍……! 소리와 함께 동굴 전체가 무섭게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벽면이 갈라터지고 천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피해라!" "동굴 무너진다!" 꽈르르르릉---- 쿠쿠쿠쿠---- 꽈르릉----! 광장은 송두리째 붕괴되고 있었다. 갈라진 벽으로 엄청난 물기둥이 휩쓸어들기 시작했다. "피해라! 동굴 속으로 달아나라!" 정사의 싸움은 어느새 그쳐 버리고 서로가 몸을 피하기에 바빴다. 화예상아가 안타깝게 백리사옥을 불렀다. "옥랑!" "화매!" 백리사옥은 마주 외치며 그쪽으로 달려가려 했으나, 무섭게 쏟아지는 바위들과 밀어닥치는 물기둥 때문에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광장은 더욱 더 큰 광란을 일으키며 무너지고 있었다. "아앗!" 중인들은 급급히 주위의 동혈로 살길을 찾아 날아들었다. 꽈르르르---- 콰콰콰콰---- 꽈르르릉----! 동굴은 마지막 몸부림을 하고 있었다. (일단 피해야겠다!) 백리사옥은 급히 한 비혈(秘穴)을 겨냥하여 신형을 날리려 했다. 그때, 그의 눈에 쓰러져 있는 청의미공자의 신형이 비쳐들었다.


"엇! 급하다!" 백리사옥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청의미공자를 끌어안고 미리 지목한 동혈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뒤이어, 꽝----! 꽈르르릉----! 꽈꽈꽈꽝! 지하광장은 완전히 내려앉고 말았다. 제 13 장 죽음(死)과 陰謀 1 똑……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느 깊숙한 동혈 속, 한 여인(女人)의 뽀얀 나신(裸身)이 누워 있었다. 그녀의 전신에서는 뽀얗게 더운 김이 모락모락 뿜어나오고 있었다. "휴우! 이제 곧 깨어나겠군." 백리사옥은 숨을 크게 내쉬며 땀을 닦아냈다. "설마 여인인 줄은 몰랐다." 백리사옥은 청의미공자를 안고 이곳으로 피신한 후 자신의 빙백쇄혼수에 당한 그의 상세를 치료하기 위해 옷을 벗겼었다. 그러자 그는 기이하게도 가슴에 흰 천을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천을 풀자, 퉁! 기다렸다는 듯 하얀 가슴이 솟아 올랐다. 백리사옥은 그제야 그녀가 남장여인(男裝女人)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금침과 무화극열강으로 빙백지기(氷魄之氣)를 치료해 주었던 것이다. "제 이름은 철혈옥봉(鐵血玉鳳) 뇌연상(雷燕霜)이예요." 그녀는 깨어난 뒤 백리사옥에게 자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아버님께서 참사를 당하신 직후 오빠인 철혈잠룡 뇌옥풍은 백리사옥이란 인물을 만나러 가신다고 본가를 떠났어요. 저는 오빠가 돌아오길 기다렸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때 겁천악마교의 혈겁이 일어났고, 저는 혈겁을 피해 심산을 숨어 다니다가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분은 저의 자질을 귀하게 여기시고 제자로 거두어 주셨어요. 그분이 바로 천사자령종 육도강, 그분이시죠. 저는 우연히 연경 자향루에 들렀다 가 백리공자님을 보게 되었어요. 지옥백팔마와 싸우시는 현장도, 그리고 이곳 구겁지옥마로에 정도고수들과 함께 오신다는 것도 알았지요. 사도측에 그 정보를 알린 것은 바로 저예요……" 백리사옥은 비로소 그녀를 처음 자향루에서 봤을 때 어쩐지 낯이 익었었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뇌옥풍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는 뇌연상에게 그동안의 경위와 뇌옥풍이 번천만뇌세가의 제이밀부(第二密府)에서 힘을 기르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뇌연상은 백리사옥을 향해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오빠라고 부를 거예요." 오빠란 말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백리사옥은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란히 동굴을 나섰다. 백리사옥은 무엇보다 화예상아의 신변이 염려되었다. (광장이 폭발했다 해도 대부분의 고수들은 화를 피했을 것이다. 허나 화매는 무공을 모르니 걱정이다.) 화예상아의 행방, 그리고 또 하나는 무섭게 치밀어 오르는 의혹과 분노였다. (누군가가 정사양도의 고수들을 몰살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비록 우내제일정이 미리 첩자를 발각하여 실패에 그치긴 했으나 가공할 음모의 주역, 그는 대체 누구인가?)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 아---- 악!" 처절한 비명이 공허한 동굴 안을 섬뜩하게 울렸다. 백리사옥과 뇌연상은 동시에 서로를 응시했다. 순간, 백리사옥의 눈빛이 침중하게 변했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소. 소저, 따라 오시오!" 그는 급히 신형을 날렸다. 뇌연상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2 동굴은 지옥의 유부(幽府)처럼 끝없이 길었다. 동시에 차츰 그 폭이 넓어지고 있었다. (상당히 먼 곳에서 들린 비명소리였다!) 백리사옥은 계속 달리면서 주위를 훑어 보았다. 동굴은 점차 넓어지면서 그 벽에 이끼나 풀 같은 것이 눈에 띄게 많이 드러났다. 허나 백리사옥은 그 점을 별로 주의하지 않았다. 동굴이 돌연 직각으로 굽어졌다. 백리사옥과 뇌연상은 조심스럽게 동굴을 돌았다. 헌데 뇌연상이 돌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급히 돌리는 게 아닌가? (우!) 백리사옥도 진저리를 쳤다.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대여섯 구의 시체가 서로 얽힌 채 처참하게 죽어있지 않은가? 전신은 갈기갈기 찢어져 거의 형태를 구분할 수도 없었다. 툭 불거진 채 빠져나온 눈, 새끼줄처럼 흘러내린 창자, 그리고 피! 순간이었다. "사…… 살려줘…… 으아아!" 동굴 어디선가 처참한 여인의 비명성이 들려왔다. (가까운 근처다!) 슈아앗! 백리사옥의 신형이 무섭게 퉁겨져 날았다. 3 비명을 지르며 달리는 여인은 바로 독령부인 요접홍이었다. 그녀의 몸에는 동앗줄과도 같은 물체가 마구 휘감기고 있었다. 독령부인 요접홍은 비명을 지르며 양 손을 마구 휘둘렀다. 회색 물체는 잘려져 나갔으나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살아나 꿈틀거리며 그녀의 몸을 휘감아오는 것이었다. 쉬쉬쉬쉬---- 쭈아아---- 츠츠츠---회색 물체들은 숨가쁘게 흐느적거리며 더욱 무섭게 감겨들었다. 그녀의 옷자락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알몸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분기탱천하여 이를 갈아붙였다. "이 귀신 같은 마물(魔物)들아!" 그녀는 품 속에서 급히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수십 마리의 은빛 지네였다. 바로 독령부인의 최고 독물인 은사오공이었다. "모조리 쓸어 버려라!" 휙! 추추추추…… 은사오공들은 주인(主人)의 영(令)에 의해 기쾌하게 회색물체들을 물어뜯었다. 허나 회색물체들은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은사오공이 그것에 부딪치자 맥없이 주르르


녹아 버리는 게 아닌가? "저럴 수가?" 독령부인 요접홍은 이 광경에 입조차 다물 수 없을 만큼 경악했다. 찰나, 또 한 줄기의 회색물체가 그녀의 허리에 휘감겨 들었다. "아앗!" 그녀는 대경하여 황급히 신형을 젖혔다. 허나 이미 때가 늦어 회색물체는 완전히 요접홍의 허리를 껴안고 말았다. "이 쳐죽일……!" 그녀는 대경하여 쌍수를 치켜 섬전 같은 속도로 회색물체를 냅다 후려쳤다. 그녀의 쌍수는 가공할 위력으로 회색물체에 후려패 들었다. 허나 정작 비명은 그녀의 입에서 터졌다. "아악!" 또 다른 회색물체들이 그녀의 쌍수를 휘감아 움켜쥐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쌍수는 완전히 피떡이 되어 으스러져 버렸다. 지독한 파공음과 함께 회색물체는 그대로 그녀의 왼쪽 다리를 휘감았다. 치마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고, 또 다른 회색물체가 채찍처럼 나르며 그녀의 오른쪽 다리마저 휘감았다. 다음 순간, 회색물체에 잡힌 그녀의 양다리가 쫘악 벌어지더니 거대한 회색물체의 기둥 하나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 박혀 버렸다. "아아악----!" 이내 그녀의 양 허벅지는 좌우로 처참하게 찢겨지고 선혈과 내장이 우박처럼 산산이 날았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단 말인가? "늦었다!" 백리사옥과 뇌연상이 뛰어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배…… 백리오빠!" 뇌연상은 그 참혹한 광경에 헛구역질을 하며 백리사옥의 품에 달려들었다. "식인지주삭(食人蜘蛛索)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백리사옥은 신음처럼 뇌까리며 천정을 응시했다. 천정을 가득 메운 채 무섭게 꿈틀거리는 수 없이 많은 회색물체들은 전설상의 마물 혈망식인지주(血 食人蜘蛛)의 흡혈마삭(吸血魔索:거미줄)이었다. 꿈틀…… 꿈틀…… 몇 줄기 회색물체, 흡혈마삭이 백리사옥의 몸을 향해 뻗어왔다. "에잇!" 백리사옥의 좌수가 번뜩였다. 흡혈마삭이 수십 토막으로 잘려져 나가며 시퍼런 청동색 액체가 피분수처럼 튀었다. 헌데, 그 액체 중 한 방울이 튀어 그의 손에 묻었다. 돌연 손이 화끈거렸다. "독(毒)!" 백리사옥은 눈살을 찌푸렸다. "배…… 백리오빠!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시오. 이까짓 독 따위가 나를 어찌할 수는 없으니까!" 그는 팔목에 찬 범천개벽륜(梵天開闢輪)을 급히 풀어들었다. 그 순간 수십 줄기의 흡혈마삭이 다시 움직였다. 슈슈슈슈---"마물! 박살을 내주마!" 백리사옥은 일갈을 터뜨리며 범천개벽륜을 휘둘렀다.


번쩍! 서릿발같은 묵광(墨光)이 일며 흡혈마삭들이 가루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꿈틀거리던 흡혈마삭들이 무시무시한 백리사옥을 향해 덤벼들었다. 허나 범천개벽륜이 번뜩일 때마다 흡혈마삭들은 가루로 변해 사방에 흩날려갔다. 헌데 어느 순간이었을까? "배…… 백리오빠! 저…… 저 소리……!" 끄아아---- 우우우우----! 까아오---심장이 멈춰버릴 듯한 소름끼치는 귀성이 동굴을 휘잡아 뜯었다. 백리사옥의 검미가 꿈틀 치켜졌다. "저것은 혈망식인지주의 소리다!" "어…… 어서 이곳을 벗어나요!" "그렇지! 이 따위 미물들과 싸우려고 온 게 아니니까!" 철컥! 백리사옥은 범천개벽륜을 다시 손목에 찼다. "허나, 가더라도 이들을 놔두고 갈 수가 없소!" 그는 외치며 흡혈마삭을 향해 벼락같이 일 장을 내뻗었다. "건천무상겁화장(乾天無上劫火掌)!" 꽈르르! 백리사옥의 손에서 태산이라도 녹여버릴 듯한 무지막지한 열강(熱 )이 흡혈마삭을 휩쓸어 버렸다. 흡혈마삭은 폭음과 함께 불더미에 휩싸여 재로 화하고 있었다. 4 동굴은 이어지고 있었다. 얼마 쯤 갔을까? 돌연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동굴 한쪽 벽면이 갈라터지며 한 줄기 그림자가 백리사옥을 덮쳤다. "헛!" 예상치도 못했기에 백리사옥은 크게 놀라며 급급히 공격을 피해냈다. 그림자(影)는 놀랍게도 사람(人)이었다. 백리사옥의 맞은 편에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는 괴인(怪人)은 사람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지만 분명 사람이었다. 넉 자도 채 되지않는 체구, 전신에서는 시커먼 고름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움푹 들어간 두 눈에서는 소름끼치는 살광(殺光)이 번뜩이며 전신에서 지독한 악취가 연신 풍겼다. 괴인은 백리사옥을 씹어 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크크크크! 오늘 따라 이곳에 웬 개뼈다귀들이 모여드느냐?"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섬뜩한 음성이었다. 백리사옥은 급히 안색을 추스르며 괴인을 향해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괴인의 눈에 녹광(綠光)이 스쳤다. "크크크…… 내가 누구냐고? 크크크…… 내가 누구냐고? 크크크…… 네놈들이 나를 모르면 누가 날 안단 말이냐?" "……?" "시침 떼지마라! 어린놈, 노부는 이미 숭헌(崇軒)! 그놈이 네놈들을 보냈음을 안다!" 그의 음성에는 원한이 서려있는 듯했다. (숭헌……?) 백리사옥은 내심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노인장, 저는 알지 못하는 일입니……"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다. "닥쳐라, 어린놈! 죽은 뒤에 염라부에나 가서 떠들어라!" 괴인의 양 손이 전광석화처럼 회전하며 백리사옥의 신형을 휩쌌다. "웃!" 백리사옥은 몸을 뒤로 젖히며 그의 공격을 피해냈다. "크악! 어린 놈이 제법이구나!" 돌연, 괴인의 손 끝이 쇠갈고리처럼 구부러지며 녹색으로 물들었다. 순간, 백리사옥은 흠칫했다. (녹혈마조(綠血魔爪)! 지난날 녹림대종사(綠林大宗師)였던 북궁무세(北宮武世)의 독문 절학이 아닌가?) 녹림대종사(綠林大宗師) 북궁무세(北宮武世). 녹림(綠林) 역사상 최고의 불세기재로,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寨)를 일통시켜 녹천(終天)을 사도오천(師道五天) 중의 하나로 끌어올린 사나이! 한데 그는 십칠년(十七年) 전 의문의 실종을 당했다고 알려졌다. (이런 곳에서 북궁무세의 절학을 보게 되다니……!) 백리사옥이 의아심을 품는 사이 괴인의 손 끝은 어느새 그의 목 근처를 스쳐버렸다. "키키키…… 어린놈, 뒈져라!" "윽!" 목이 화끈거렸다. 괴인의 두 눈은 더욱 더 녹빛으로 음산하게 빛났다. "네놈은 이제 죽었다! 노부의 녹혈마조에 맞은 이상 일각을 버티지 못한다!" 옆에 있던 뇌연상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배…… 백리오빠……" 일순, 백리사옥의 눈썹이 꿈틀 치켜졌다. "후훗! 그까짓 녹혈마조로 본인을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괴인은 의혹의 눈으로 백리사옥을 응시했다. 헌데 놀랍게도 백리사옥의 목의 상처는 어느새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지 않은가? "네…… 네놈은…… 대체……" 백리사옥의 눈빛이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그의 전신에 도도한 금광(金光)이 서기처럼 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신에서 해일처럼 뻗어나는 만악을 굴복시킬 듯한 폭풍 같은 기도! "허…… 억……!" 괴인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때, 백리사옥의 오른손이 번쩍 치켜졌다. "뇌벽파천기(雷霹破天氣)!" 번쩍! 눈이 멀어버릴 듯한 금광(金光)이 벽력이 천지를 가르듯 괴인을 내리찍었다. 괴인은 혼비백산하여 피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크아악!" 바람에 날리는 가랑잎처럼 괴인의 신형은 그대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퍽! 내장이 터지고, 머리가 깨졌다. 가슴은 새까맣게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실로 무서운 양강지공이었다. 백리사옥은 괴인을 잠시 응시하고는 고개를 돌려 멍하니 서있는 뇌연상을 바라보았다. "소저, 갑시다."


"네……? 네." 뇌연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대답했다. 그녀는 경악한 표정으로 백리사옥을 주시했다. (이분의 무학은 도대체 깊이를 상상할 수 없어……) "자…… 잠깐만……!" 이때 죽은 줄 알았던 괴인의 몸이 미미하게 꿈틀거리며 희미한 음성이 떨리듯 흘러나왔다. 백리사옥은 괴인을 돌아보았다. "소…… 소협은…… 으으…… 지…… 진정…… 숭헌 그놈이 보낸 것이 아니오?" "숭헌이란 자가 누군지 나는 모르오." 괴인의 눈빛이 처량하게 변했다. "놈에게 꼭 복수를 하고 싶었는데…… 우욱!" 그의 입에서 꾸역꾸역 핏물이 흘렀다. 괴인은 품 속에서 한 개의 옥패(玉牌)를 꺼냈다. "하, 한 가지 부탁이……" 괴인의 시선이 애닯게 느껴졌다. "이…… 이것을…… 황산(黃山) 유풍곡(流風谷)에…… 있는…… 태한공(太恨公)에게…… 전해 주시겠소……?" "황산 유풍곡 태한공?" 백리사옥은 잠시 그 말을 되뇌이며 옥패를 받았다. 필시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되었다. "전해 주시오. 십칠 년 전의 혈사(血事)는…… 숭헌…… 그자의 음모임에…… 틀림없다고……" "……!" "나…… 녹혈천위(綠血天衛) 초문량(楚文亮)은…… 그것을 밝혀냈으나…… 숭헌…… 그 자에게 발각되어…… 중독…… 암습을 피하고 숨어 있다가…… 이곳에서 죽었다고……" (십 칠 년 전의 혈사, 녹혈천위 초문량!) 뭔가 섬뜩한 운명의 예감이 백리사옥의 전신에 휘감겨 들었다. "알겠습니다." 괴인의 고개가 꺾여지고 있었다. "십 칠 년 전에…… 잃어버린…… 아이…… 태무(太武)…… 그가 살았다면…… 소협만큼이…… 훌륭하게…… 성장했을…… 터인데……!" 괴인의 고개가 완전히 꺾여졌다. 백리사옥은 마음이 침중해졌다. (십 칠 년 전의 혈사, 유풍곡의 태한공, 녹혈천위 초문량의 잃어버린 아이, 뭔가 심상치 않은 비밀이 있는 듯하다!) 그는 나직하게 탄식을 토해내며 녹혈천위 초문량을 응시했다. "초노인, 죽어서나마 편히 잠드시기 바랍니다. 이 옥패는 반드시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우수를 들었다. 그의 장심이 붉게 물들었다. 화르르……! 화염(火炎)이 동굴을 뒤덮었다. 녹혈천위 초문량의 시신을 화장한 것이다. 5 동굴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백리사옥과 뇌연상은 침묵을 지킨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죽음처럼 침잠된 침묵이었다. 얼마나 갔을까? 돌연, 백리사옥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시체다!) 누군가가 죽어 있었다. 백리사옥의 입에서 경악성이 신음처럼 터졌다. "만리추종 사무외!" 과연 죽어 나뒹굴고 있는 시신은 추종술의 천하제일인 만리추종 사무외가 아닌가? 만리추종 사무외는 가슴에 피구멍이 뚫린 채 두 눈을 휩뜨고 죽어 있었다. (이럴 수가? 대체 누가 이 사람을……?) 백리사옥은 시신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일격에 깨끗이 당했다. 반항한 흔적은 전혀 없다. 당금 강호에 누가 사무외를 일격에 죽일 수 있는가?) 그는 재차 자세히 살펴보았다. (저 눈(眼)! 짙은 불신(不信)의 빛이 서려있지 않은가?) 과연 만리추종 사무외의 휩뜬 눈에는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신이 진하게 서려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사무외와 잘 알고 있는 인물이 무방비 상태에서 암수를 펼친 것이다!) 뭔가 음습한 흉계(凶計)가 꾸며지고 있다. 백리사옥의 가슴이 답답해왔다. (안개처럼 가려있으나 뭔가 무서운 음모가 일어나고 있다!) 백리사옥과 뇌연상은 만리추종 사무외의 죽음을 뒤로하고 전진을 계속했다. 통로는 끝없이 얼키고 또 설킨 채 펼쳐져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또……!" 백리사옥과 뇌연상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또 한 구의 시신이 나타난 것이었다. (종남쌍기 중 대혜진인!) 백리사옥은 시신을 살펴보다가 갑자기 신광을 번쩍였다. (아직 명(命)이 끊어지지 않았다!) 과연 미약하나마 대혜진인의 가슴이 기복을 보이고 있었다. 백리사옥은 급히 대혜진인의 등 뒤 명문혈에 진기를 주입시켰다. "으……!" 대혜진인은 힘겨운 신음성과 함께 두 눈을 떴다. "노선배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혜진인은 흐릿한 시선으로 백리사옥을 바라보았다. "소…… 소협……!" 백리사옥은 계속해서 내력을 주입시켰다. (심장이 완전히 으스러졌다. 대라신선이 온다해도 반각도 채 버티지 못한다!) 대혜진인은 안타까운 죽음의 그림자를 밀어내며 더듬거렸다. "무…… 무서운…… 으…… 음모(陰謀)……" 그의 전신이 전율에 떨었다. "음모의…… 휴…… 흉수는……" 고개가 꺾여지며 음성이 목 안으로 자꾸만 기어들었다. "노선배님! 흉수는 누굽니까?" "휴…… 흉수는…… 가…… 가증스럽게도…… 그는…… 바로……" 할말을 못다 마치고 대혜진인의 목이 완전히 꺾여져 죽은 것이다. "으음!"


백리사옥은 신음을 토하며 대혜진인의 명문혈에서 장심을 떼었다. (흉수는 만리추종 사무외를 죽인 자와 동일인(同一人)일 가능성이 높다!) 의문의 연속되는 죽음(死)! 그 속에 깔린 음모의 독버섯은 대체 무엇인가? 돌연 어둠 속 어디선가 뾰족한 여인의 다급성이 또 들려왔다. "아악! 물러서지 못하느냐!" 백리사옥과 뇌연상은 두 눈에 불길을 뿜어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쏜살같이 몸을 날렸다. "악! 그 더러운 손 치우지 못하겠느냐?" "흐흐…… 앙탈하지 마라. 어차피 우리는 여기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네년도 처녀귀신이 되고 싶진 않겠지?" 어느 은밀한 동굴 속에 남(男)과 여(女)가 한데 어우러져 엎치락 뒤치락 불 뿜는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사내는 한 소녀에게 광폭하게 접근하며 씨근덕거렸다. "크흐…… 귀여운 계집, 네년이 아무리 앙탈해도 소용없다. 네년의 그 독(毒) 따윈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 소녀는 이내 혈도가 제압된 듯 큰대자로 누워버렸고, 사내는 그녀의 옷을 거칠게 벗기기 시작했다. 헌데 소녀는 바로 독령부인 요접홍의 제자인 그 야성(野性)의 미소녀(美少女)가 아닌가? 조끼같은 상의와 짧은 반바지를 걸친 그녀의 육체는 이미 뭇 사내들의 욕념(慾念)을 불러 일으킨 바 있었다. "흐흐흐, 네년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소녀의 상의를 찢어버렸다. "아…… 안돼……!" 소녀는 질겁하여 외쳤다. 허나, 소녀의 상의는 벗겨지고 있었다. 뽀얀 가슴이 어둠 속에 눈부시게 드러났다. 너무도 예쁘고 소담스러운 가슴이었다. 파르르 소녀의 전신이 두려움에 떨었다. 사내의 욕정에 불타는 두 눈이 홱 까뒤집혔다. "크흐흐…… 산딸기 열매같구나!" 사내는 군침을 흘리며 소녀의 티없이 맑고 깨끗한 나신에 몸을 밀착시켜갔다. "아아……!"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신음과 비명을 토해내는 것 뿐이었다. 허나, 사내의 전신이 묘하게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신음소리도 야릇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으흠……" 사내는 걸신들린 개처럼 정신이 없었다. 동시, 그의 한 손이 아랫쪽으로 움직이며 소녀의 하의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아악!" 하의가 울부짖으며 찢겨져 나갔다. 헌데 놀랍게도 소녀는 짧은 반바지같은 하의 속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미끈한 허벅지와 함께 비림이 그대로 드러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우흐흐흐! 어쩐지 생긴 것부터가 밝히게 생겼더라니……" 사내는 괴소와 침을 흘리며 한 손을 비밀스런 곳에 쑥 집어넣었다. "으악……!" 처녀림이 사내의 손길에 무참하게 유린되었다.


허나 소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괴이한 전율과 쾌감에 전신을 푸르르 떨었다. (아…… 안돼……!) 마음 속의 외침은 이제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거침없이 움직여대는 사내의 손길을 따라 괴이한 신음만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흐…… 어떠냐, 계집! 살맛 나지 않느냐?" 사내는 연신 괴소를 흘려냈다. 어느 순간, 사내의 손이 우뚝 정지했다. "흐흐…… 이제부터 진짜로 극락의 진미를 맛보여 주지." 쓰윽…… 사내는 혀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리고는 소녀의 몸에서 떨어지더니 그녀의 나신을 천천히 뒤집었다. 그리고 바지춤을 끌러내리곤 자신의 양물을 그녀의 은밀한 곳에 대고는 힘을 주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추잡한 노물!" 사내의 뒤통수에서 서릿발처럼 싸늘한 냉갈이 터졌다. 순간, 사내는 대경하여 퉁기듯 신형을 일으켰다. "웬 놈이냐?" 냉갈이 터진 곳으로 시선을 홱 돌렸다. 찰나 사내는 미처 나타난 사람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일권을 얻어맞고는 동굴벽에 처박혀 사지를 버둥거리다 부르르 떨더니 즉사해 버렸다. "……!" 소녀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에 백의와 청의를 걸친 두 미청년의 모습이 비쳐들었다. 두 미청년은 백리사옥과 뇌연상이었다. 소녀는 수치와 당혹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때 한 가닥 부드러운 암경(暗勁)이 날아와 그녀의 제압된 혈도를 풀어주었다. "옷을 입고 따라오시오." 백리사옥과 뇌연상은 일단 밖으로 나갔다. 뇌연상이 나직이 한숨을 토하며 백리사옥을 바라보았다. "치한은 본래부터 음적(淫賊)으로 알려졌던 탐화염라(探花閻羅) 팽두악(彭頭岳)이란 자였어요." "스스로 불러들인 죽음이오." 그들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헌데 어느 순간 어두운 괴소와 함께 한 가닥 자색(紫色) 인영이 그들 앞에 떨어져 내렸다. "흐흐! 너희들이 용케도 살아 있었구나." 순간, 뇌연상은 반색의 외침을 터뜨렸다. "사부님!" 나타난 인영은 사도최강의 고수인 천사자령종 육도강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백리사옥을 바라보았다. "네가 상아를 구했느냐?" "그래요, 사부님. 백리오빠가 아니었더라면 저는 이미……" "오빠……?" 천사자령종 육도강의 자색 눈썹이 일순 꿈틀했다. (이것들이 어느새?) 그는 자광이 번뜩이는 시선으로 한참동안 백리사옥을 노려보다가 음산한 음성으로 외쳤다.


"어린놈! 상아를 봐서 특별히 목숨을 살려주겠다." 헌데 그때, 동굴 안쪽으로부터 한 줄기 담담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허허, 육형! 그대가 그 소협의 목숨을 거두려면 아마 일천초(一千招)는 소비해야 할 것일세." 여러 줄기의 인영들이 그들의 전면에 날아내렸다. 그들은 바로 우내제일정을 비롯한 정도고수들이었다. 천허대사, 현정도장, 운회노불, 천도황, 헌원적, 대구취허신개 등이었다. 단지 종남쌍기 중 대혜진인과 만리추종 사무외만이 보이지 않았다. (역시 무사했구나.) 백리사옥은 안도감과 동시 더욱 화예상아의 일이 궁금했다. 그때 천사자령종 육도강이 우내제일정을 바라보며 다소 빈정거리는 투로 외쳤다. "후후…… 그대들은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나 보군." "허헛! 그까짓 동굴이 무너졌기로 목숨을 잃는대서야 말이 되는가?" 우내제일정이 대답했다. 백리사옥은 그때 천허대사 쪽으로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혹시 제가 데리고온 화예상아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천허대사는 백미를 좁혔다. "아미타불…… 보지 못했네. 그녀 뿐만 아니라 만리추종과 대혜진인도 만나지 못했네. 그들이 화를 입었을 리는 만무한데……" 백리사옥은 그들이 죽었음을 말하려 하다가 급히 멈추었다. (말해선 안된다. 지금 상태에선 누가 흉수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동굴 한쪽이 또 다시 왁자지껄 하더니 일단의 무리들이 걸어나왔다. "오……!" 천사자령종의 안색에 희열이 감돌았다. 나타난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이 마라혈종 도음사를 위시한 사도의 고수들이었다. "흐흐흐, 천허노승! 그대도 지옥에 갈 때가 못되었나 보군." 마라혈종 도음사는 가까이 다가오면서 괴소와 함께 빈정거렸다. 천허대사는 불호를 읊조렸다. "아미타불…… 모두다 무사하셔서 천만 다행이오이다." 그때, 사도고수들 중에서 사독사군 만사염이 백리사옥의 뒤에 엉거주춤 서있는 야성미의 소녀에게 악을 쓰듯 물었다. "야화(野花)야, 사모(師母)를 보지 못했느냐?" 사모란 독령부인 요접홍을 가리키는 말이다. 야화는 고개를 떨군 채 대답했다. "뵙지 못했어요." 사독사군의 두 눈이 열화같은 불꽃으로 이글거렸다. "만일 그녀가 죽었다면 이 귀령봉을 통째로 박살을 내 버릴 것이다!" 그는 이빨마저 부드득 갈았다. 이때 우내제일정은 좌중의 정사도고수들을 둘러보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어쨌든 양측의 피해가 적었으니 천만다행이오. 독령부인이나 우리측의 몇 인물들도 아마 죽지는 않았으리라 여겨지오." "……"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바보였소. 정사양도의 최강고수들을 끌어들여 한꺼번에 몰살시키려는 가공할 음모자를 모르고, 우리는 어리석게도 천요의 비학을 탐하여 서로 피터지게 싸웠던 것이오." "……!"


"만일 우리들의 싸움이 더 오래 계속되었고 서로가 양패구상한 상태였다면 지하 광장의 폭발에서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오!" "……!" 좌중의 그 누구도 반박하는 자 없었다. 우내제일정의 말은 엄연히 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지금도 안심할 형편은 못된다고 본좌는 생각하오. 이 정도 의 무서운 음모를 꾸민 흉수라면 반드시 또다른 제 이(第二)의 안배를 펼쳐 놓았을 가능성이 높소." "……!" "이제야말로 정(正)과 사(邪)를 따지지 말고 우리가 힘을 뭉쳐야 할 것이오. 우리가 분열한다면 스스로 자멸(自滅)만을 초래할 따름이오!" 그의 말은 논리정연했다. 그의 음성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힘과 위엄이 깃들어 있었으며 설득력이 있었다. 정사양도의 군웅들은 모두 마음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때, 천사자령종 육도강이 외쳤다. "좋네, 문인형! 일단은 한데 뭉쳐 난관을 뚫고 나가는 데 동조하겠네!" 그러면서 그는 마라혈종 도음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라혈종!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 마라혈종 도음사는 심유한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어차피 정사양도에게 공동의 대적(大敵)이 나타난 이상 힘을 합치는 게 순서이겠지요." 사도의 고수들 가운데 반대를 표명하는 자 그 누구도 없었다. 결론은 분명히 내려지고 있었다. 정사양도(正邪兩道)의 합력(合力)----! 그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바로 동굴 안으로 들어갈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그 문제를 놓고 찬반양론으로 갈리워졌다. 반대하는 쪽의 의견은 이곳에 천요의 비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암중의 흉수가 우리를 끌어들여 몰살시키려는 음모에 불과하니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의 함정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자초하는 일이라 했다. 그러나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는 의견도 상당했다. 설령 천요의 비학이 이곳에 없다해도 흉수의 음모를 밝혀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더욱이 찬성하는 자들의 말에는 분노까지 어려 있었다. 전 무림을 통틀어 최강자라 불리우는 정사양도의 고수들이 이 자리에 모여 있지 않은가?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설왕설래(說往說來), 한참 동안의 의논 끝에 결국 중지(衆旨)는 이렇게 모아지고 있었다. 물러설 이유가 없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가? 흉수가 나타난다면 흉수를 잡아 음모를 밝혀야 할 것이요, 아무도 없다면 끝까지 가보고 그때 돌아나와도 늦지않다는 결론이었다. 결국 그들은 다시 진입(進入)을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죽음의 길(死路)임을 알지 못한 채…… 6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록 기온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뼛골이 토막날 듯한 삼엄한 한기(寒氣)가 전신으로 밀려들었다. 동굴은 서서히 얼음으로 뒤덮인 통로를 이어가고 있었다. 반 시진 가량을 그렇게 걸었을까? 잠시 후 군웅들은 어느 한 곳에 이르러 우뚝 전진을 멈추었다.


전면에 장애물이 나타난 것이었다. (동혈이 끊겼다!) 과연, 동혈이 끊기며 밑을 헤아릴 수 없는 천애절곡(天涯絶谷)이 펼쳐져 있었다. 대략 십여 장 정도의 폭을 가진 천장벼랑이 그들의 전진을 막은 것이었다. 우우우우우우…… 휘…… 이…… 웅……! 절곡 밑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 밑으로부터 엄청난 한풍(寒風)이 활화산의 분출인 양 거세게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엄청난 냉기류(冷氣流)다.) 군웅들은 하나같이 침음을 삼켰다. 그때, 누군가가 큰소리로 경악하여 외쳤다. "저, 저것을 보시오!"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헉! 저것은!" 그들은 일제히 대경성을 발하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무섭게 빙풍(氷風)이 휘몰아치는 천장단애의 저 편에 하나의 어마어마한 백색거성(白色巨城)이 지면으로부터 서서히 솟아오르고 있지 않은가! 그 크기는 마치 하나의 거악(巨岳)을 보는 듯했고, 수많은 첨탑(尖塔)과 누각(樓閣)들이 마치 검봉(劍峯)처럼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우우우우웅…… 고오오오……! 마치 지면을 뚫고 거대한 얼음산(氷山)이 솟아나듯 장엄무쌍하게 솟아오르고 있는 백색거성의 그 웅자(雄姿)는 실로 하늘(天)과 땅(地)을 짓밟아 버릴 듯했다. 헌데, 거성의 맨 꼭대기를 보라! 하나의 거대한 묵색(墨色) 흉상(胸像)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끔찍한 악마상(惡魔像)이 아닌가? 머리와 목에는 아홉 마리의 인두사(人頭蛇)가 칭칭 감겨있고, 괴이하게도 세로로 쭉 찢어진 세 개의 눈(三目)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마광(魔光)이 뿜어나왔다. 핏물이 흐르는 입에는 제석천과 범왕의 잘려진 머리가 깨물려 있고, 양 손으로는 천상의 옥동인 듯 너무도 아름다운 한 갓난 아기를 받쳐들고 있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억겁의 한과 저주가 담긴 듯하고, 마치 무저갱에 갇힌 악마가 천신을 조소하는 듯한 핏빛 악마상(惡魔像)! "아…… 악마의 성전(聖殿)이다……!" 누군가의 가슴떨린 외침이 군웅들의 뇌리를 울렸다.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백색거성과 악마상에 집중되었다. 백리사옥은 가슴이 섬뜩해져 왔다. (설마 이곳에 악마들의 총단이 있었을 줄이야! 이곳에 겁천악마교의 마인들이 있다면 이미 우리들의 침입을 모르진 않았을 터, 위험하다.) 백리사옥은 절로 긴장되어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휘이이잉---- 우우우웅---- 위이잉---무서운 빙풍은 천지를 휘감고 불어쳤다. 백리사옥, 그리고 정사양도의 군웅들은 머리칼을 빙풍에 휘날리며 서있었다. 그들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여기서 내 뼈를 묻어야 할지도 모른다!) 입술을 피터지게 깨문 그들의 뇌리 속에는 한결같이 그런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위이이잉…… 우우웅…… 휘잉……! 바람(風)이 분다. 겁천악마교(劫天惡魔敎), 악마들은 이미 우리들의 동태를 알고 있다. 지하광장의 대폭발 정도의 소요를 모르고 있을 그들이 아닐테니까! 헌데, 그들은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우리가 이미 그들의 총단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죽음의 성(城)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진천거검(震天巨劍) 섭대협(攝大俠)!" 우내제일정은 말을 뱉았다. 진천거검 섭가무(攝賈武)는 진중한 신색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섭대협은 지금 즉시 동굴을 빠져나가 십만대산에 진(陳)치고 있는 정도고수들에게 가시오." "……!" "정도 삼백이십칠개파(三百二十七個派)의 고수들 중, 각기 서열십위(序列十位) 안에 속하는 절정고수들만을 모아 이곳으로 돌아오시오!" "……!" "우리는 한 걸음 앞서 악마들의 성으로 잠입할 것이며, 기호를 남겨 두겠소! 그대들이 당도할 때는 어쩌면 악마들과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오. 지체해서는 아니되오!" 원병(援兵)을 부르자는 것이다. 진천거검 섭가무의 안색이 돌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명심하오리다, 원주!" "또 하나! 뇌화벽력문(雷火霹靂門)에 일러 귀령봉 전체를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는 폭약을 설치하라 이르시오. 우리들이 만일 내일 아침 진시(辰時)까지 나오지 않거든 귀령봉을 폭파해 버리도록!" "……!" "최후의 길은 악마들과의 동귀어진밖에 없소." 비장한 결심이 담긴 우내제일정의 말이었다. 정사양도의 군웅들 중 아무도 입을 여는 자 없었다. "알겠습니다!" 진천거검 섭가무는 비장한 어조로 외치며 포권지례를 취했다. "그럼……!" 그는 군웅들을 한 차례 휘둘러본 뒤 빛살처럼 반대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백리소협의 말에 의하면 겁천악마교의 고수들 숫자는 적게 잡아도 일천(一千), 더구나 지난 날 지옥백팔마와 버금가는 무서운 마인(魔人)들이오." 우내제일정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에 비해 우리들은 불과 삼십여 명,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않는 싸움이라 할 수 있소." "……!" 군웅들의 눈길은 하나같이 거칠게 흔들렸다. 상대가 되지않는 무모한 싸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싸움을 시작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물러설 순 없소. 악마들에 의해 짓밟힌 천하인의 희생이 너무도 컸기에…… 아니 그들이 다시 일어날 때 또다시 취뤄야할 엄청난 희생을 방관할 수 없기에 우리는 싸워야하는 것이오!" 우내제일정의 음성은 비장했다. 그리고 천하를 위하는 뜨거운 충혼(忠魂)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군웅들의 가슴에는 저마다 뜨겁고 진한 격류가 휩쓸고 지나갔다.


우내제일정의 음성은 계속되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에겐 천하각파의 원군이 있고 또한 만일을 대비하여 본좌가 데려온 비밀군단(秘密軍團)이 있소이다. 필사(必死)를 각오한다면 결코 승산이 없지도 않소!" "아……!" 군웅들은 새삼 우내제일정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내제일정이 준비했다는 비밀군단(秘密軍團)은 과연 어떤 세력인가? 백리사옥 역시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과연 우내제일정이다. 천하무림의 영도자다운 인물이다.) 일순, 군웅들은 열화(熱火)처럼 터져오르는 시선으로 악마들의 백색거성(白色巨城)을 노려보았다. 휘이이우…… 고오오오오오…… 천지를 짓밟아 버릴 듯 빙풍 속에 웅휘장엄한 웅자를 드리우고 있는 거성은 마치 거대한 사신(死神)의 모습이었다. 백리사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단지 좀 더 확실한 준비를 하기도 전에 이들과 부딪치게 되었다는 것이 씁쓸할 뿐이다.) 결전(決戰)의 비장한 각오가 어찌 백리사옥 뿐이겠는가? 철혈옥봉 뇌연상, 아미파의 윤회노불, 사독사군 만사염 등 직접적인 참화를 당했던 인물들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군웅들 또한 무섭도록 비장한 결의와 각오가 넘치고 있었다. 겁천악마교는 천하인 모두에게 밀어닥친 공포(恐怖), 그것이었기에……! 그때, 진천마궁 곽천패가 나섰다. "본인이 길을 열겠소!" 천둥소리처럼 외친 그는 어른 팔뚝만한 굵기의 대시(大矢)에 천잠사를 감고 절벽 건너편을 향해 활을 쏘았다. 쑤아아---- 아---- 앙----! 태산이라도 꿰뚫는다는 일시(一矢)는 무섭게 휘몰아쳐 오르는 빙풍(氷風)을 가르며 건너편 빙벽(氷壁)에 힘차게 박혔다. 순식간에 절벽 사이에는 천잠사의 사교(絲橋)가 만들어졌다. "줄을 밟고 건너갑시다!" 진천마궁 곽천패는 스스로 앞장서서 줄을 밟고 허공을 건너기 시작했다. 군웅들도 하나하나 뒤를 따랐다. 제 14 장 惡魔聖殿 1 어두운 동굴 속을 진천거검 섭가무는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빛나는 두 눈(眼)엔 비장함이 어려 있었다. "일각(一刻)이라도 서둘러야 한다! 천하의 운명이 걸려있다! 그분들의 생사(生死)! 내가 얼마나 빨리 원군을 이끌고 가느냐에 달려있다!" 헌데, 그가 사라져간 뒤 두 개의 흑영(黑影)이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솟아났다. "설마 이곳에 겁천악마교의 총단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음산한 중얼거림을 내뱉은 인물은 바로 구겁지옥마로의 입구에 나타났던 괴이한 묵안노인(墨眼老人)이 아닌가? 신강 포융차랍궁에서 왔다는 고수 귀안사령(鬼眼邪靈) 비류음(殺流音)이었다. 그의 옆에는 예의 흑의미청년이 조용히 서 있었다. 귀안사령 비류음은 다시 중얼거렸다. "천요의 비학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낭설이었단 말인가?"


바로 그때였다. 한 줄기 삭풍같은 괴소가 어둠 속에서 울려왔다. "키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니 어리석구나." 귀안사령 비류음은 일순 등줄기가 서늘해짐을 느끼며 빙글 돌아섰다.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부터 어느 사이엔가 하나의 희끄무레한 잿빛 그림자(灰影)가 나타나 있지 않은가? 일신에 회의(灰衣)를 걸친 꼽추노파(老婆)의 얼굴은 너무도 싸늘하여 얼음조각을 깎아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귓가로 날카롭게 찢겨 올라간 사목(蛇目), 칼날처럼 얄팍한 입술은 지독히 음산해보였고, 어쩐지 그녀의 전신에선 형언키 어려운 요악(妖惡)한 기운이 칙칙하게 어려 있었다. 귀안사령 비류음은 일순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괴이하다. 어찌 인간의 몸에서 저런 요기가 느껴진단 말인가?) 허나, 그는 이내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말했다. "방금 그대가 한 말은 무슨 뜻인가?" 꼽추노파는 문득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괴이한 웃음을 흘려냈다. "킬킬킬! 천하에 노신을 감히 그대라 부르는 미친놈이 남아있었을 줄은 몰랐구나." "미친 놈?" 귀안사령 비류음의 두 눈에서 섬뜩한 묵광이 번뜩였다. "이제보니 정신나간 노파였군. 감히 나 비류음에게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허나, 꼽추 노파는 여전히 괴소를 흘렸다. "킬킬! 어린아이야, 살고 싶거든 얌전히 돌아가거라." 귀안사령 비류음의 눈썹이 일순 곤두섰다. "뭣이! 이 늙은이가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군!" 그는 노갈을 터뜨리며 벼락같이 일 장을 후려쳤다. 엄청난 내력이 실린 경력(勁力)이 꼽추노파를 향해 휩쓸어버릴 듯 밀려갔다. 헌데, 꼽추노파는 여전히 괴소를 흘리며 제자리에 조용히 서있는 게 아닌가? "킬킬……" 귀안사령 비류음의 입가에 잔혹한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헌데 그 순간, 그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보아야만 했다. 그가 날린 가공할 장력은 분명히 꼽추노파를 덮쳤는데도 불구하고, 흡사 텅빈 공간을 지나치듯 그대로 통과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꽈꽈꽝----! 그 바람에 맞은 편 석벽만 폭음과 함께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귀안사령 비류음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가? 아니면 저자가 허깨비란 말인가?) 그때 꼽추노파의 괴소가 다시 들려왔다. "킬킬킬! 그것도 실력이냐?" 그녀는 여전히 제자리에 조용히 서있는 채였다. (비…… 빌어먹을……!) 귀안사령 비류음은 이빨을 부득 갈았다. "좋아! 다시 한 번 받아봐라!" 그는 필생의 공력을 쌍장에 모아 자신의 최고절학을 펼쳐내었다. "아랍파사극인(阿拉波斯克印)!" 그것은 귀안사령 비류음을 신강 포융차랍궁의 십대고수(十大高手)에 들 수 있게 한 최강의 무공이었다. 쿠와아아아---- 아----


형언조차 할 수 없는 해일같은 장세가 폭풍을 일으키며 동굴을 통째로 휩쓸었다. 허나, 꼽추노파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웃고 있었다. "어리석은 놈!" 어느 순간, 그녀는 우수(右手)를 앞쪽을 향해 수평으로 들어 올리더니 좌수(左手)로 우수의 손목을 탁! 베었다. 찰나, 그녀의 잘려진 손목으로부터 한 줄기 피분수가 귀안사령 비류음의 얼굴로 폭사되는 것이 아닌가? 츄아아아……! 핏줄기는 간단히 폭풍같은 장세를 뚫어버렸다. 귀안사령 비류음이 다급성을 토하는 순간, 퍼억! 핏줄기는 그의 면상을 그대로 후려쳐 버렸다. "크아악!" 귀안사령 비류음은 안면이 피떡이 된 채 날아갔다. 퍽! 그의 몸은 석벽에 그대로 부딪쳐 피범벅이 되어 버렸다. (으으으…… 이…… 이건…… 꿈이다……!) 흑의미청년은 이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킬킬킬……" 꼽추노파는 괴소를 흘리며 잘려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손을 집어들어 손목에 붙여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떨고 있는 흑의미청년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너는 어떻게 죽여주랴?" (으으으……!) 흑의미청년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 말문조차 열 수 없었다. 꼽추노파는 킬킬대며 느릿느릿 다가섰다. (주…… 죽었다……!) 흑의미청년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꼽추노파는 한 손을 가볍게 쳐들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혈타요파(血駝妖婆)……" 그녀의 등 뒤쪽으로부터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순간, 꼽추노파 혈타요파는 손을 황급히 내리며 전신을 벼락맞은 듯 부르르 떨며 그대로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좌…… 좌태상(左太上)을 뵈옵니다!" 그때, 어둠의 한켠으로부터 한 인물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일신에 은포(銀袍)를 휘감 듯 걸친 사십대의 중년인(中年人)이었다. 그의 얼굴은 지극히 청수했는데, 피부색은 은은한 은빛을 띠고 있었다. 귓가로 치뻗은 눈썹마저도 은미(銀眉)였다. 따각…… 따르륵…… 은포중년인은 한 손에 은구슬 두 개를 쥐고 손 안에서 문지르고 있었다. "제법 근골이 뛰어난 아이다. 데려가서 본국(本國)의 백팔무정단(百八武精團)에 편입시키도록……" "존명!" 혈타요파는 머리를 처박으며 복명한 뒤 떨고 있는 흑의미청년을 낚아채 사라져 버렸다. 은포중년인은 은광(銀光)이 은은히 서린 눈빛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본국의 대업…… 이제 거의 무르익었다. 이곳, 구겁지옥마로에 천요의 비학이 있음을 알려 정사의 고수들을 끌어들였다. 초령삼호(超靈三號) 마각철부를 희생시켜 정사양도를 뭉치도록 했다." 그렇다면 이 은포중년인이야말로 바로 모든 음모의 주역(主役)이 아닌가?


이제 정사고수들과 겁천악마교의 혈투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정사고수들을 몰살시키기 위한 음모가 아니라 정사고수들이 뭉치도록 하는 계기를 조작한 것이었단 말인가! 그래서 겁천악마교와 혈전이 벌어지게끔 안배했다는 말인가? "겁천악마교의 힘이 감소되었을 때 본 초령마국(超靈魔國)은 그들의 배후를 칠 것이다! 중원무림과 겁천악마교! 이 두 세력은 오늘 이곳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우태상(右太上)인 우내제일정 문인혁후, 그대도 죽는다. 바로 나 을목천군(乙木天君)에 의해……!" 무슨 말인가? 우내제일정 문인혁후가 초령마국의 우태상이었단 말인가? 휘이이잉---- 잉---동굴 속에는 피냄새가 물씬 어린 빙풍(氷風)이 불고 있었다. 2 군웅들은 건너편 절벽에 이르러 있었다. 빙풍에 휘감긴 채 우뚝 솟아 오르는 악마의 거성(巨城)은 가까이 다가갈 수록 심신을 위압해 들었다. 군웅들은 끓어 오르는 기혈을 억누르며 서서히 성쪽으로 다가갔다. 어느 순간, 누군가가 경악성을 토해냈다. "저 성 위 하늘을 보시오!" 순간,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곳으로 꽂혀 들었다. 보라! 암회색으로 뒤덮인 거성위의 천공(天空)에 흡사 무지개의 환영처럼 하나의 거대한 마안(魔眼)이 떠오르고 있지 않은가! 아수라악마에게 눈(眼)이 있다면 그런 모습일 것이다. 마안의 좌우 길이는 족히 삼십 장(丈)은 되어 보였고, 그 색깔은 운무같은 녹색(綠色)이었다. 그곳에서 숨막힐 듯 뿜어나오는 가공할 마기(魔氣)는 대체 무슨 말로 형용할 것인가? "악마의 눈이다!" 군웅들의 입에서는 경악성이 분분히 터져 나왔다. 백리사옥 역시 대경을 금치 못했다. (저것은 바로 지난 번 자령곡 귀곡하에서 보았던 그 마안이 아닌가!) 그때였다. 마안으로부터 갑자기 아수라의 신음소리와도 같은 심장을 헤집는 듯한 마소(魔笑)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크크크크…… 어서 오라…… 친구들이여…… 크크크……" 군웅들은 일순 경악과 의혹에 뒤범벅이 되고 있었다. 친구들이라니, 이 무슨 황당무계한 말인가? 허나, 마소와 마성(魔聲)은 이어지고 있었다. "크크크크…… 그대들을 기다렸다…… 피(血)와 죽음(死)의 향연 을 준비하고…… 크크크……" 우르르르르…… 쩌쩌쩌쩍----! 군웅들이 서있는 절벽이 통째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동시에 딛고 선 지면(地面)이 거북이 등처럼 마구 쩍쩍 갈라졌다. "아앗! 땅이 꺼진다! 함정이다!" 군웅들은 갑자기 소요가 일어났다. 군웅 가운데 한 명이 황급히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순간 마안으로부터 섬뜩한 녹색 광채가 뻗었다. 그러자 몸을 날렸던 인물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땅은 쩍쩍 갈라지고 허공에는 마안이 지키는 진퇴유곡의 절대 위기!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수천 장의 단애 밖에 없었다. 우르르르르릉----! 쩌쩌쩌쩌적!


"으아아아!" 군웅들은 비명과 함께 갈라지는 땅 속으로 추락해갔다. 백리사옥은 이를 악다물며 품에서 천상대정홀을 급히 꺼내들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끝날 수는 없다! 악마! 용서치 않으리라!" 백리사옥은 부르짖으며 막 몸을 날리려 했다. 헌데 바로 그때 퍼펑! 느닷없이 거센 장력이 그를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욱!" 백리사옥은 가슴을 움켜쥐며 암습자를 찾았다. 순간, 그의 눈이 흡떠졌다. 놀랍게도 그를 암습한 자는 우내제일정 문인혁후였던 것이다. "다…… 당신이 왜……?" 그의 외침이 떨어지기도 전 갈라진 지면이 아가리를 벌리며 그의 신형을 삼켜버렸다. 백리사옥은 순식간에 실 끊어진 연처럼 땅 속 어둠 속으로 추락해 갔다. "으악……!" 백리사옥은 떨어지는 순간 사상심광정(四象心光精)으로 전신을 보호했다. 갈라진 지면은 수직으로 끝도 없이 뻗어 있었다. 윗부분은 이미 아가리를 닫아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올라갈 수도 없었다. 그는 급히 건천삼십삼무상예 중 최절정 경공신법인 광령무벽(光靈無壁)을 펼쳤다. 순간 떨어지던 신형이 허공 중에 우뚝 멈추었다. 스스스…… 백리사옥은 천천히 깃털이 떨어지듯 유연하게 날아내렸다. 약 백 장(丈) 가량 떨어져 내렸을까? 그의 발은 무사히 지하 땅바닥에 내려설 수 있었다. (여기는 어디인가?) 안력을 돋구어 예리하게 사방을 둘러 보았다. (이상하군. 분명 인공(人工)의 흔적이 닿아있다.) 과연 그가 내려선 곳은 양쪽 벽면을 인공으로 다듬어놓은 듯한 석굴(石窟)이었다. (이곳은 또 어디인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백리사옥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그긍! 바위가 뒤틀리기 시작하며 굉음과 함께 전면에 하나의 석대(石 臺)가 솟아올랐다. 동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녹색 광채(光彩)가 온 석굴을 뒤덮었다. "허억……" 백리사옥은 눈알이 터져버릴 듯한 고통을 느끼며 눈을 감아야 했다. 동시에, 머릿속을 예리한 비수로 헤집는 듯한 참혹한 고통에 머리를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으으으아……" 그때, 녹색광채 속에서 유부(幽府)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너무도 사악(邪惡)한 괴소가 울려나왔다. "으흐흐흐흐…… 이제 네놈은 악마환령대법(惡魔還靈大法)에 의해 악마의 노예가 된다." 녹색 광채는 점점 짙어졌고, 백리사옥의 고통 또한 더욱 삼엄해갔다. 괴소는 계속되고 있었다. "본교(本校)에서 너희같은 조무라기들을 죽여버리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간단하다. 허나 너희들을 일부러 이 악마대관(惡魔大關)에 떨어뜨린 까닭은 바로 지존마사(至尊魔師)의 목적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겁천악마교가 안배해둔 악마의 관문(關門)이란 말인가?


백리사옥은 머리를 움켜쥔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으흐흐흐…… 악마환령대법에 의해 악마의 노예가 됨을 무상의 영광으로 여길지니라……" 괴소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대신, 수십 개의 거종(巨鐘)이 한꺼번에 울리는 듯 괴룡의 울부짖음 같은 주술(呪術)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악마의 뜻으로 구겁마령(九劫魔靈)…… 혼천혈산(混天血散)…… 만마지혼(萬魔之魂)…… 수라득천(修羅得天)…… 염라비비(閻羅秘秘)…… 멸멸사사(滅滅死死)……" "으아아---- 악----!" 백리사옥은 선혈을 뿜어내려 고통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아---- 아아---- 아---녹색 광채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심장을 휘잡아 뜯는 듯한 무서운 주문소리는 더욱 음산하게 이어져 갔다. "악마의 이름으로…… 악마환령(惡魔還靈)…… 저주마혈(咀呪魔血)…… 광풍우사(狂風雨死)…… 밀밀수수(密密 )……" 그 고통을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을 것인가? 악마환령대법(惡魔還靈大法)! 인간의 심성(心性)과 이지(理智)를 완전히 세뇌(洗腦) 시켜 악마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무서운 사법(邪法)이다. "아아아악---- 으아아아아----!" 백리사옥은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서는 악령(惡靈)의 유혹성이 지배해가고 있었다. -크크크…… 오너라…… 사옥아…… 너는…… 바로 악마의 후예이니라…… "으으…… 아니다! 나는 악마의 후예가 아니다!" 백리사옥은 고개를 무섭게 흔들었다. 그러자, 악령의 음성은 다음 순간 대사형(大師兄) 번천대공의 슬픈 듯한 음성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으으…… 사옥아…… 너는 악마의 자식이란다…… 악마가 버렸던 핏덩이를 사부께서 거두신 것이란다…… 이제 돌아오라…… 악마의 품으로…… 네 고향으로…… "으아----! 아니야! 너는 대사형이 아니다! 악마가 대사형의 음성을 빌어 말하는 것이다!" 백리사옥은 몸부림치며 악을 썼다. 그의 입술은 짓깨물려져서 붉은 선혈이 목덜미까지 흐르고 있었고, 쥐어뜯겨진 머리칼은 마치 광인(狂人)의 모습과도 같았다. 악마의 유혹은 계속되었다. 어떤 때는 사형 공야수문의 음성으로, 혹은 화예상아의 음성으로, 또는 뇌연상의 음성으로 그를 무참히 유린하고 있었다. 아마 보통사람이었다면 여기에 이르기도 전에 악령에 굴복해 버렸으리라! 백리사옥이 버틸 수 있는 것은 천부의 정신력과 몸 속에 흐르고있는 사상심광정의 힘 때문이었다. 허나 그도 차츰 지쳐갔다. (으으…… 더 이상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이 고통만 멈출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승낙하고 싶다. 그것이 악마의 노예가 되는 길일지라도……) 오죽했으면 그의 내심에 이런 생각마저 떠오를 것인가? 악령은 미소 지었다. -크흐흐…… 잘 생각했다…… 그래…… 오너라…… 따뜻하고 포근하게 너를 쉬게 해주리라…… (그래, 너의 뜻을 받아 들이겠다.) 백리사옥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우웅…… 우우웅……


갑자기 그의 품 속에서 장중한 울음소리가 울려나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백리사옥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범천항마탁!) 그렇다. 그것은 바로 범천항마탁(梵天降魔鐸)의 울음소리였다. 그것은 외부에는 들리지 않을 만큼 미약한 소리였으나, 백리사옥의 귀에는 천둥처럼 거대한 음향으로 부딪쳐 왔다. 백리사옥의 정신이 일순 냉정을 되찾았다. (그렇지! 내가 하마터면 천추의 돌이킬 수 없는 유한을 남길 뻔했다.) 그는 급히 전신에 사상심광정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건천삼십무상예 가운데 건천금황천벽(乾天金皇天壁)을 펼치기 시작했다. (너무나 졸지에 당한 일이어서 반격할 틈조차 없었다.) 일순 백리사옥의 전신에서는 서기(瑞氣)와도 같은 눈부신 금광(金光)이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건천금황천벽(乾天金皇天壁)! 그것은 강기( 氣)의 철벽(鐵壁)이다. 어떠한 광채도 음향도 절대 뚫을 수 없다. 파파파파파---- 파파파----! 녹색광채는 금광에 부딪쳐 더 이상 파고들지 못했고, 악마의 주문소리 역시 백리사옥을 더 괴롭히지 못했다. 그런 상태가 반 시진 가량 계속되었다. 어느 순간, 녹색광채와 주문소리가 거짓말처럼 그쳐버렸다. 대신 처음에 들렸던 괴소가 다시 울려왔다. "크흐흐흐…… 어린놈이 제법이구나. 허나 너는 제이관(第二關)을 뚫지 못한다. 악마의 환락(幻樂)이 너를 기다릴 것이다." 괴소가 사라짐과 동시, 그그그긍! 소리와 함께 석대가 굉음과 함께 땅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전면에는 하나의 좁다란 통로가 나타났다. 백리사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물러설 길은 없다!" 그는 두 눈에서 열화같은 신광을 뿜어내려 걸음을 내딛었다. 3 "삼십팔명(三十八名)입니다. 지존마사(至尊魔師)!" "음, 그 중에서 제일관(第一關)을 통과한 자는?" "칠명(七名)입니다. 하오나 제이관(第二關)에서 모두 포섭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칠 명의 명단을 보고하라." "가장 먼저 통과한 자는 역시 우내제일정과 천사마령종이었습니다. 그 뒤로 천허대사 윤회노불, 마라혈종, 현정도장, 마지막으로 백리사옥이란 소년이 통과했습니다." "백리사옥?" "그 아이가 통과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허나 제이관은 뚫지 못할……" "되었다. 그만해라! 본교가 천하겁세를 갑자기 중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까닭은 두 가지였다." "……" "하나는 극중극마(極中極魔)의 등장이다. 놈의 마공(魔功)은 결코 본좌의 아래가 아니다. 허나 놈은 단신(單身)이며 강하되 지혜가 없다. 우리는 놈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 "허나 두 번째 이유은 초령마국(超靈魔國)의 등장! 그것이야말로 본교의 발을 멈추게 만든 진정한 이유이다!" "……!"


"초령마국은 악마의 반도(叛徒)인 천요(天妖)의 맥(脈)을 이어받은 무리들이다. 놈들은 강하다! 능히 본교의 힘에 필적될 만큼……" "……!" "더구나 그들에겐 무서운 두뇌가 있다. 좌태상(左太上) 을목천군(乙木天君)이란 자! 놈의 지략은 과거 천하제일지라 불리웠고 본좌에 의해 제거된 번천뇌후 공야수문, 그자보다 세 배는 뛰어날 것이다. 을목천군이 이끄는 초령마국의 힘! 그것이야말로 본교의 최대의 난적이다!" "……!" "더구나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는 아직도 그들의 우태상(右太上)이 누군지 밝혀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우태상이란 자는 또 하나의 엄청난 힘으로 을목천군과 함께 본교를 양면협공하려 들 지도 모른다." "……!" "본좌가 추측컨대 정사고수들을 이곳에 이끌어들인 자는 분명 을목천군 그자일 것이다. 정사고수의 힘으로 본교의 전력을 다소나마 약효시킨 뒤 초령마국이 총공격을 감행하겠다는 얄팍한 수작이다." "……!" "크흐흐…… 그래서 본좌는 정사고수들을 오히려 본교의 힘으로 거두어 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숫자는 비록 적으나 그들은 천하정사무림을 움직일 수 있는 최고수뇌들이다. 천하무림을 수족으로 부릴 수 있다면 초령마국은 본교의 적수가 될 수 없다." "……!" "악마대관(惡魔大關)을 거치는 동안 정사고수 삼십 팔 인은 본좌의 충실한 수하(手下)로 탈바꿈할 것이다. 크흐흐흐!" 악마의 속삭임 같은 웃음소리는 어둠 속을 울리고 있었다. 4 좁은 통로를 걸으면서 백리사옥은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악마들은 우리를 쉽게 죽일 수도 있었다. 헌데 지존마사라는 자는 죽이지 않고 세뇌시키려 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백리사옥은 눈썹을 찌푸렸다. (결론은 하나다! 그자는 우리를 이용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그는 이때 거대한 의혹이 물밀 듯 밀려옴을 느꼈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이용하려는 것인가? 그들의 힘은 이미 천하를 휩쓸어 버리고도 남을 정도가 아닌가?) 그때 그의 머리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결론은 하나밖에 없다! 우리의 힘마저 이용하여 상대해야 하는 대적(大敵)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악마들의 혈보를 멈추게한 중대한 변수(變數)였는지도 모른다.) 백리사옥은 날카로운 추리로써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 가고 있었다. (뭔가가 있다! 악마의 세력에 필적할만한 거대한 또 하나의 힘(力)이 존재해 있다.) 그는 아직 초령마국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문득 백리사옥의 두 눈에 신광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곳 악마대관! 앞으로 몇 개의 관문이 설치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 힘으로 뚫는 것만이 능사(能事)가 아니다. 좋다! 너희가 나를 이용하겠다는 수작이라면 이용당해 주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지…… 후후후……) 무엇을 결정했음인가? 백리사옥은 눈빛을 무심하게 가라앉힌 채 여유있게 통로로 진입해 들어갔다. 4 통로가 끝난 곳에 또 하나의 석실(石室)이 있었다.


"아……!" 백리사옥은 부지중 가슴이 격탕치는 경탄성을 터뜨려야 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음양화합상(陰陽化合像)! 백옥(白玉)으로 빚은 남녀나신상(男女裸身像)들이 갖가지 형태로 음양교접을 하는 조각들이 쭉 양편으로 늘어서 있지 않은가? 어지러운 군음상(群淫像)! 조각들은 모두 실물 크기였고, 나녀(裸女)들은 한결같이 눈이 번쩍 뜨일만큼 천하절색의 용모와 몸매들을 지니고 있었다. 살아있는 절세 미녀들이 차라리 부끄러울 나녀상들은 사내들과 어울려 갖가지 야릇한 교합(交合)의 자세들을 취하고 있었다. 정상위는 아예 없었다. 허리를 구부린 여인, 양 다리를 교묘하게 벌린 자세, 벽에다 바짝 댄 엉클어진 자세…… 뿐인가? 한 여인이 뱀처럼 세 사내와 엉켜 있었다. 실로 눈뜨고 보지 못할 만큼 음란하고 난잡하며 도발적인 광경이었다. "으음……!" 백리사옥은 심신이 진탕됨을 느끼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번엔 색공(色功)으로 인성(人性)을 빼앗겠다는 수작인가?) 허나, 그는 결심한 바가 있었기에 천천히 조각들 사이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홀연 석실 안에 선정적인 분홍빛 안개(霧)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백리사옥은 괴이한 신음성을 흘리고 말았다. "으음……?" 이럴 수도 있는가? 놀랍게도 석실 안의 군음상들이 움직이며 동작을 연출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정지된 상태로도 능히 혼백을 흔들리게 할만한 음란한 형상들이 움직임을 시작한 것이다. 환각인가? 심장을 휘젓는 야릇한 괴음과 흥분성을 흘리며 그들은 갖가지 괴이한 동작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으으음……!" "아아…… 으으아…… 음……!" 분홍빛 운무는 백리사옥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미혼향(迷魂香) 중에 가장 지독하다는 천미섭혼향(天迷攝魂香)이다. 또한 저들의 군음(群淫)에는 백 년 수양을 쌓은 고승이라도 파계시킨다는 미요사령무(迷妖邪靈舞)가 내포되어 있다.) 백리사옥의 검미가 꿈틀했다. (허나 이 정도에 무너진다면 필시 의심을 받을 것이다.) 그는 의미있는 미소를 떠올리며 다시 발길을 떼놓았다. 순간, 뭉클! 짜릿한 촉감이 백리사옥의 가슴에 부딪쳐 왔다. 짝이 없었던 몇몇 나녀들이 육감적인 입술공세를 퍼붓기 시작한 것이었다. "흐응……!" 야릇한 비음을 뜨거운 숨결과 함께 목덜미에 퍼붓는다.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입술이 부딪치고 부드러운 입김이 백리사옥의 얼굴을 핥아갔다. 등 뒤에서 달려든 나녀들은 아예 가슴을 백리사옥의 등에 비벼댔다. "자…… 보세요……" 윤기 흐르는 희멀건 허벅지가 눈 앞에 대담하게 드러나고, 타오르는 마화(魔火)처럼 여인의 문은 숨가쁘게 헐떡이고 있었다.


엄청난 유혹이었다. (나녀들의 몸에는 마음지기(魔淫之氣)가 깃들어 있다. 누구라도 이들과 정사를 하게되면 마령(魔靈)에 이지(理智)를 잃고 만다.) 그때, 나녀는 백리사옥의 눈 앞에서 전신을 꼬기 시작했다. "으음…… 못참겠어……!" 여인은 열정으로 인해 전신이 붉게 상기되어 갔다. 백리사옥은 갈증을 느꼈다. 그 역시 몸과 마음이 뜨거운 젊은 사내가 아닌가? "당신…… 너무…… 멋져요……" 쑥! 여인의 옥수(玉手)가 하나 그의 장삼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허억!" 백리사옥의 목에서 뜨거운 침 삼키는 신음성이 터졌다. 동시에 여인은 백리사옥을 이리저리 쓰다듬어 갔다. "아아…… 멋져요……" 흡사 광녀(狂女)처럼 여인은 탐닉해 들었다. "으으으……" 백리사옥은 신음했다. 어느 순간 백리사옥은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여인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으으…… 도…… 도저히 못참겠다!" 그는 그녀를 와락 넘어뜨렸다. 순간, 여인의 눈에 반짝! 득의의 빛이 스쳤다. "아아…… 당신…… 드디어!" 여인은 쓰러지며 외쳤다. 백리사옥은 거칠게 그녀를 덮쳤다. 그리고 폭풍의 항해를 시작했다. 허나 그 순간 백리사옥의 눈빛은 의미있게 빛나고 있었다. (정사를 하고서도 마음지기에 이지를 잃지않는 비법은 건천삼십삼무상예 중의 건천이기밀공(乾天移氣密功)이다.) 그는 은밀히 건천이기밀공을 끌어올렸다. 그러는 가운데 그의 몸 아래 깔린 나녀의 흐느낌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아…… 자기 멋져……" 5 "제이관을 뚫은 자는 두 명입니다. 천사자령종 육도강과 천허대사입니다. 그리고 우내제일정은 이관에서 무너졌습니다." "음…… 우내제일정같은 고수가 이관을 뚫지 못하다니? 좀 이상하군." "이상하지 않습니다. 악마대관은 각기 관문의 배열이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내제일정은 공교롭게도 최후 삼관(最後三關) 중 겁멸사관(劫滅死關)을 제이관으로 맞이했던 것입니다." "흠…… 그랬던가?" "……" "백리사옥이란 아이는 어찌 되었느냐?" "그는 미혼색관(迷魂色關)을 통과하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음, 수고했다. 제압된 자들은 악마수옥(惡魔水獄)에 감금하고, 천사자령종과 천허대사 역시 쓰러지는 대로 합류시켜라." "알겠습니다." "만에 하나! 놈들 가운데 거짓으로 제압된 척 위장한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각자 한 명씩 따로 감금하고 경계를 늦추지 말라. 본좌는 내일 아침 그들을 직접 확인하겠다."


"존명!" 제 15 장 大轉輪의 始作 1 어둠(暗), 칠흑같은 죽음의 흑암 속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철벅…… 철벅 철벅…… 그것은 물(水)을 밟고 오는 소리였다. 어느 순간 발자국 소리가 뚝 멈췄다. 그리고 거북한 쇳소리와 함께 천정으로부터 작은 구멍이 나타났다. 희미한 빛줄기가 연기처럼 새어들었다. 직후, 뭔가 시커먼 물체가 휘익 떨어져 내리더니 첨벙! 물 속으로 떨어졌다. "식사다!" 음산한 목소리가 들린 후, 철컹! 천정 위의 구멍은 다시 닫혀버렸고, 사위는 다시 죽음과도 같은 흑암에 뒤덮였다. 백리사옥은 어둠 속에서 물에 떨어진 물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갇힌 곳은 사방 석 자 가량의 철옥(鐵獄)이었다. 밑부분은 무릎 근처까지 물이 차 있었다. 미혼색관에서 제압되어 이곳으로 오는 동안 눈은 검은 천으로 가리워졌고, 혈도를 십여 군데 찍혔다. (놈들이 방심했다. 내가 이혈대법(移穴大法)을 몰랐다면 지금쯤 내 무공은 폐쇄되었을 것이다.) 무공을 잃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떨어져 내린 물체는 어른 팔뚝만한 한 마리 핏빛 전갈이었다. (혈황시갈!) 그 단단하던 껍데기는 벗겨져 있었으나 요리하지 않은 날것이었다. (이것이 식사란 말이지?) 백리사옥은 내심 분노가 치밀었다. 허나, 그는 이내 혈황시갈을 물 속에서 건져내어 우드득 씹어먹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철저한 놈들, 이제야 안심하고 사라지는군.) 그는 천정 위의 인기척이 사라지는 것을 감지한 뒤, 삼매진화(三昧眞火)로 혈황시갈을 재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입 속에 깨물었던 것도 뱉아버렸다. (자, 이제부턴 어떻게 한다?) 지금 그의 무공으로 이 정도 철옥을 부수어 버리고 탈출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문제는 빠져나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경우와 같이 마법(魔法)에 이지를 제압당한 정사고수들을 구출하는 일이었다. 허나 그때 백리사옥은 한 가지 섬뜩한 의혹이 뇌리를 스쳤다. (정도의 인물이었던 만리추종 사무외와 대혜진인을 살해한 흉수는 누구였을까?) 그렇다. 그들의 죽음으로 보아 분명 그들이 잘 알고있고, 믿고 있었던 측근의 인물에 의해 암습되었다는 느낌이 뚜렷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측 인물가운데 혹시 첩자가 끼어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여기까지 이르게 된 모든 것이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적의 첩자는 우리들 속에 숨어 있었고, 우리는 그의 교묘한 인도에 의해 극히 자연스럽게 적의 수중에 들어와 버렸는지도 모른다.) 무서운 의혹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군가? 우리가 모두 믿고, 자연스럽게 인도했던 인물은?)


문득, 그의 눈 앞에 한 사람의 영상이 떠올랐다. (우내제일정!) 설마 정도무림을 대표하는 그가 적의 첩자였단 말인가? 믿을 수 없었다. 허나, 의혹은 의혹을 불러 일으켰고, 그와 함께 백리사옥은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냈다. (첫째, 그는 왜 정도의 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소수의 인원으로 적지에 뛰어 들었는가? 둘째, 내가 적과 싸우고자 했을 때 나를 암습한 자는 우내제일정이 아니었던가?) 걷잡을 수 없는 의혹의 회오리가 백리사옥을 휩쓸고 있었다. 허나 우내제일정이 겁천악마교와 손을 잡았다고 믿기에는 아직 확신을 가질 그 무슨 증거도 없었다. (정사고수들은 아마 이 근처에 감금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령대법(正靈大法)으로 그들의 이지를 되돌릴 수 있다. 허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우리들 가운데 첩자가 끼어 있다면 상태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도록 악화(惡化)되어버릴 것이 아닌가?) 백리사옥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입술을 피나게 악문 채, 어둠 속을 노려보며 고심에 빠져 들었다. 한데 언제였을까? 똑똑…… 또도독…… 어둠 속에서 철벽을 조용히 두드리는 음향이 들려왔다. 백리사옥의 신경이 곤두섰다. (누가 있다!) 백리사옥은 급히 일어나 철벽을 주먹으로 마주 두드렸다. 똑똑…… 또도독…… 그러자 상대편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쪽에 있는 사람은 누군가?" 백리사옥의 머리털이 곤두섰다. (이 음성은 바로 우내제일정!) 과연 철벽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우내제일정 문인혁후의 음성이었다. 순간 백리사옥은 깨달았다. (그는 악마대법에 제압당하지 않았다! 또한 이 두꺼운 철벽을 뚫고 음성을 전할 수 있다면 무공도 잃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또 한 차례 거대한 의혹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허나, 백리사옥은 기혈을 억누르며 공력이 실린 음성을 보냈다. "백리사옥입니다, 노선배님!" 순간, 우내제일정의 감탄어린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오오! 자네 역시 제압되지 않았는가? 무공도……?" "그렇습니다." "음! 내 곧 그쪽으로 가겠네!" 쉭쉭쉭쉭! 쇠를 갉아내는 음향이 한참 동안 이어지더니 퍽! 하며 철벽에 구멍이 뚫리며 우내제일정의 모습이 나타났다. "노선배님!" "오오…… 반갑네, 백리소협!"


그들은 손을 마주잡았다. 맞잡은 손을 통해 뜨거운 피가 흘러 서로의 가슴을 적시었다. 그러나 왠지 백리사옥의 가슴은 이 순간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가슴에 자리한 우내제일정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웃음이 번져 있었다. 백리사옥과 우내제일정은 서로 그동안의 경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백리사옥의 말을 들은 우내제일정은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젊은 나이에 그만한 무공성취와 심기(心機)가 있었다니, 놀라운 일일세." 우내제일정은 문득 기광(奇光)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우선 해야 할 일은 마령에 제압된 정사고수들을 구하는 일이네." 백리사옥은 잠시 생각했다. (이 사람이 겁천악마교의 첩자라면 이런 제안을 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당연한 말이다. 뭣 때문에 애써 사로잡은 정사고수들을 풀어줄 까닭이 없는 것이다. 백리사옥은 문득 이렇게 물었다. "노선배님께서 지난번 제게 일 장을 공격하신 까닭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내제일정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자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네." "……?" "자네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악마들과 정면으로 부딪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백리사옥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우내제일정은 빙긋 미소를 띄우며 말을 계속했다. "젊은 나이에는 왕왕 혈기(血氣)로써 일을 저지르는 수가 있네. 유념해야 할 것이네." 백리사옥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노선배님께선 이미 그들이 우리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단 말씀입니까?" 우내제일정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미 자네도 악마의 거성 위에 떠올랐던 공포의 마안(魔 眼)을 보지 않았는가?" "……?" "그가 우리를 죽이려 했다면 구태여 절벽을 허물어뜨릴 필요조차 없었네. 허나 그는 허공으로 달아나려는 자만 죽였지 않은가?" "……!" "또한 겁천악마교의 마인들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네. 그리고 그자는 우리에게 친구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결국, 우내제일정은 그와 같은 짧은 상황 속에서 겁천악마교는 정사고수들을 포섭하려 한다는 의중(意中)을 간파했다는 것이었다. 백리사옥은 진정 감탄했다. (과연 천하무림을 영도할만한 인물이다.) 그는 눈 앞에 서있는 우내제일정의 모습에서 후광처럼 피어오르는 하나의 거악(巨嶽)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백리사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정도각파의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소수의 인원만으로 이곳에 온 것은……" "인명의 피해를 막자는 뜻이었네. 만일 우리가 수천 명의 인원으로 공격을 취했더라면 거의 대부분이 몰살을 면치 못했을 것이네." "과연……!" 백리사옥은 재차 우내제일정의 치밀한 진의(眞意)에 감탄을 거듭했다.


백리사옥은 말했다. "저는 정사고수들을 구해내는 데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의혹을 품고있는 첩자문제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만리추종 사무외와 대혜진인의 참사에 대해서도 말했다. 헌데, 우내제일정은 돌연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헛헛헛, 그래서 자네는 그 흉수가 본좌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겠군?"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래,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노선배님을 만나뵈니 제 추측이 틀렸다고 판단됩니다." "헛헛헛헛……" 우내제일정은 무엇이 그리 유쾌한지 계속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돌연, 그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백리사옥을 정시했다. "자네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네." "예……?" "자네는 너무도 정확한 판단을 내렸네. 사실 만리추종과 대혜진인을 죽인 사람은 바로 본좌일세." 백리사옥은 한 순간 말문을 열지 못했다. 우내제일정이 흉수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런 사실을 이처럼 스스럼없이 내뱉는 저의는 무엇인가? 이때, 우내제일정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떠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의 의혹을 풀어주자면 지금으로부터 칠 개월 전이네. 그러니까 철혈패천세가가 참화를 당했던 직후부터 이야기를 해야 되겠군……" 우내제일정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우내제일정 문인혁후, 그는 철혈패천세가의 괴이한 참사를 전해 듣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키 위해 나서게 되었다. 그때, 천풍여의세가와 소림사, 북해사자성의 괴사(怪事)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악마들의 혈풍이 천하를 휩쓸다 돌연 종적을 감춰버렸다. 우내제일정은 환우회천원이란 지하비밀조직을 결성, 악마의 종적을 탐색하던 중 우연히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은포를 걸친 중년인이었는데 스스로를 을목천군(乙木天君)이라 소개하였다. "본인은 겁천악마교와 싸우기 위해 하나의 단체를 결성했소. 문인원주 또한 뜻이 그러하니 힘을 합치고 싶소." 우내제일정은 물론 쾌히 승낙했다. 을목천군은 자신이 조직한 단체의 이름을 초령마국(超靈魔國)이라 소개했고, 우내제일정으로 하여금 우태상(右太上)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우내제일정은 승낙했다. 초령마국! 그것이 겁천악마교와 필적할만한 무서운 힘(力)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또한 그들이 악마의 천적인 천요(天妖)의 후예이며, 악마의 혈보를 그치게 만든 장본인임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겁천악마교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이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느날, 을목천군은 우내제일정에게 겁천악마교의 총단을 알아냈다고 말했다. 초령마국과 천하무림이 힘을 합쳐 그들을 치자고 그는 제안해 온 것이다. 양면합공(兩面合攻)! 우내제일정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허나, 문제는 있었다. 정도무림(正道武林)과 사도무림(邪道武林)! 수백 년 동안 상극의 길을 걸어온


양대세력을 어떻게 뭉치게 할 것인가? 또한, 우내제일정은 이 기회를 정사화해(正邪和解)의 계기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자니 당연히 묘책(妙策)이 필요했다. 묘책은 겁천악마교의 총단이 있는 구겁지옥마로에 천요의 비학이 있다는 정보를 퍼뜨림이었다. 그리고, 구겁지옥마로 내부에 어떤 위험을 조성하여 정사양도의 고수들을 자연스럽게 합치도록 하자는 생각이었다. 결국 을목천군과 우내제일정은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그들은 미리 잠입하여 지하광장에 폭약을 장치해 두었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초령삼호(超靈三號)인 마각철부(魔脚鐵父)로 하여금 그것을 터뜨리도록 했다. 거기까지는 우내제일정과 을목천군 양자간에 이견(異見)이 없었다. 허나, 그 이후부터 동상이몽(同床異夢)은 시작되었다. 을목천군은 정사고수와 겁천악마교를 먼저 부딪치게 해 힘을 뺀 후, 초령마국은 승기를 잡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우내제일정이 그것을 모를 까닭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초령마국과 겁천악마교를 동시에 상대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으니…… "겁천악마교 역시 초령마국을 최대의 적수로 여기고 있는만큼 그 교주(敎主)인 지존마사(至尊魔師) 나흘탑격(羅 塔格) 정도의 인물 이라면 우리가 침투해 오는 것을 보고 그 정도 판단을 못할 리가 없지." "……!" "본좌는 필시 나흘탑격 또한 정사 고수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이용하려 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네. 삼십 팔 명의 소수인원으로 악마의 총단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지." "……!" "이제 우리는 그 둘 겁천악마교와 초령마국의 움직임을 역이용해야하네. 두 세력이 맞부딪치도록 상황을 만들 수만 있다면 천하무림은 별다른 상처없이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네." 백리사옥은 일시 말문을 잊었다. 놀라운 심계(心界)요, 무섭고도 치밀한 지략전(智略戰)이 아닌가? (과연……!) 백리사옥은 다시 한 번 우내제일정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고 동시, 내심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이런 의인(義人)을 내가 의심했었다니……) 그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만리추종 사무외와 대혜진인은……?" "그들은 초령마국의 첩자였네." "아……!" "그 둘은 을목천군 그자가 본좌를 감시하기 위해 붙여놓은 자들이었지. 본좌의 계획과 천하를 위해서는 미리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네." "그랬었군요." 백리사옥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가져왔던 모든 의혹들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림을 느꼈다. 그의 가슴 속에는 신선하고도 뜨거운 투지(鬪志)가 활화산처럼 치솟고 있었다. "본좌는 본래 혼자서 일을 추진하려고 했네. 허나 자네와 둘이 되었으니 한결 쉽게 되었군." 우내제일정은 백리사옥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자, 시작하세!" "좋습니다, 노선배님!" 그들의 마주잡은 손은 진정으로 뜨겁고 힘찼다. -겁천악마교의 교주 지존마사(至尊魔師) 나흘탑격(羅 塔格)은 교활하며 의심이 많은 자이네. 그는


반드시 스스로 우리를 확인하기 위해 뇌옥(牢獄)을 찾을 것이네! -우리는 정사고수들을 구해내고, 나흘탑격이 뇌옥으로 내려온 사이 그의 지존전(支尊殿)을 폭파해야 되네! -을목천군과 본좌는 약속했네. 지존전에 불길이 오르면, 그것을 신호로 초령마국의 고수들은 총공격을 감행할 것이네! 2 스스스…… 지하수옥의 물 속에 흐릿한 그림자가 흐르고 있었다. 그건 건천잠영무(乾天潛影霧)를 펼치고 있는 백리사옥이었다. (물길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 악마성의 내부에 이른다 했다.) 그는 수옥의 밑바닥을 막고있던 만년한철을 간단히 뚫어버리고 수로(水路)를 통해 악마성으로 잠입하는 중이었다. (시간이 없다! 수옥을 지키는 자가 다시 확인해보러 오기 전에 끝내야 한다!) 그는 속도를 빨리했다. 3 한칸의 정실(靜室), 호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화려무쌍한 침실이었다. 방향(芳香)이 은은히 진동하며 황촉불이 욕정처럼 사르르 타올랐다. 분홍빛 휘장에 가려진 침상이 보였다. 헌데 이 무슨 가슴 울렁거리는 소리인가? "아…… 아……!" 정사(情事)인가? 아니었다. 한 명의 풍만하여 터질 듯한 나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미녀(美女)가 밧줄에 발목을 묶인 채 천정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헌데, 그녀의 나신에는 한 마리 주먹만한 핏빛 거미(血蜘蛛)가 스물스물 기어다니고 있지 않은가? 실로 섬뜩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아아…… 으으…… 아아……!" 고통인가? 희열의 신음인가? 여인은 연신 몸을 비틀며 괴성을 흘려내고 있었다. 그녀의 옆, 침상 위에 한명의 혈포복면인이 걸터앉아 있었다. 그의 한 손은 아랫쪽으로 흘러내린 여인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 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그의 무릎에 올라앉은 또 한 마리의 핏빛 거미를 쓰다듬고 있었다. "흐흐흐…… 자모쌍혈주(子母雙血蛛)의 사랑을 받는 기분이 어떠냐?" "아아……" 여인은 다만 몸을 비비 꼬며 신음을 흘려낼 따름이었다. "흐흐, 이번엔 더욱 색다른 맛을 보여주겠다. 나 지주사왕(蜘蛛死王)이 특별히 널 위해 개발해 낸 방법이지……" 지주사왕(蜘蛛死王). 그는 겁천악마교의 일천마왕(一千魔王) 중의 하나였다. 이때 지주사왕은 품 속에서 한 움큼의 흰 벌레(筮)들을 집어냈다. "흐흐흐흐…… 이건 바로 내 사랑하는 자모쌍혈주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인 백엽충(白葉筮)이다." 그는 음침한 괴소를 흘리면서 백엽충을 여인의 허벅지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 벌레들을 여인의 몸 가까이 올려놓는 게 아닌가? "흐억!" 여인의 신음보다 빠르게 섬칫한 음향과 함께 두 마리의 자모혈지주가 백엽충 쪽으로 날아 덮쳤다. 순간


자모혈지주는 먹이를 향해 그녀를 덮쳤고, 백엽충들은 겁난을 피해 숨었다. 헌데 백엽충이 숨어 들어간 곳은 여인의 신비지문 안이 아닌가? 자연 자모혈지주 역시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여인의 그곳으로 머리를 들이밀 수밖에 없었으니…… "아아악! 흐으윽!" 그 광경을 무슨 말로 표현하랴? "으흐흐흐흐, 어떠냐? 재미있는 방법이지?" 지주사왕은 여인의 가슴을 연신 쓰다듬으며 괴소를 흘려냈다. 순간이었다. "벌레보다 추한 놈!" 섬뜩한 한 마디 음성과 함께 형체조차 보이지 않는 한 줄기 바람이 지주사왕을 스쳐갔다. "헉!" 지주사왕은 당혹성을 뱉으며 한 손으로 흰 물체를 뿌렸다. 그것은 수천 가닥의 거미줄이었다. 쐐쐐쐐쐐---- 쐐애---- 애---- 액----! 거미줄의 그림자가 정실 안을 어지럽게 휘감았다. "발칙한 놈! 감히 본 지주사왕의 침전에 숨어드는 놈이 있다니!" 푸스스스스…… 주르르르…… 거미줄이 스친 곳엔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고 순식간에 독수(毒水)가 되어 흘러내렸다. "사망지주삭(死亡蜘蛛索)은 천하제일의 독병(毒兵)이다! 스치면 죽는다!" 사망지주삭의 공세가 밀려드는 바람을 그물(網)처럼 휘감았다. 허나 그 순간 지주사왕은 보이지도 않는 엄청난 장력을 얻어맞고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크아악!" 바람소리는 다시 그를 따라붙었고, 순간 지주사왕은 혈도를 찍힌 채 축 늘어져 버렸다. 그때 바람결이 뿌연 운무의 형태로 변하며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그는 바로 백리사옥이 아닌가? 그는 여인 쪽을 바라보았다. 두 마리 자모혈지주는 여인의 몸에서 뭔가를 씹어대고 있었고, 여인은 이미 독이 전신에 퍼진 듯 새까맣게 변해가고 있었다. "발칙한 미물들!" 그의 손에서 두 개의 금침(金針)이 날았다. 자모혈지주는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고, 백리사옥은 그것들을 집어 소매 속에 담았다. (완벽한 바꿔치기를 하려면 아마 이것이 필요하겠지?) 다음 순간 그는 지주사왕의 늘어진 몸뚱이를 옆구리에 끼었다. "건천잠영무! 이 무공의 특징은 십성(十成)에 달하면 타인(他人)마저도 바람 속에 숨길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스…… 그의 몸은 뿌옇게 운무처럼 흐려지더니 이내 자취를 감춰버렸다. 4 백리사옥은 지주사왕을 지하수옥으로 데려왔다. 그때 우내제일정은 천도황 헌원적의 심신을 회복시키는 일을 막 끝내는 참이었다. "헛헛, 빨리 오는군." "노선배님이야말로 빠르시군요. 언제 그런 회령대법(回靈大法)을 익히셨습니까?" "자네만 익히라는 법 있는가?" 그들은 말을 주고 받으며 작업을 시작했다. 지주사왕의 모습은 천도황 헌원적으로 바꿔 수옥에 앉혀놓고, 헌원적은 지주사왕의 모습으로 바꾸어 지주사왕의 정실로 데려다 놓았다.


완벽한 바꿔치기였다. 정실에 이르러서야 헌원적은 깨어났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난 분명 괴상한 마수(魔獸)들과 싸우다 쓰러졌는데?" "하하……" 백리사옥은 웃으며 그간의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천도황 헌원적은 분통을 터뜨리며 외쳤다. "빌어먹을! 내일은 악마놈들에게 진정한 쾌도(快刀)를 맛보여 줄테다!" "여기서 지내시면서 이것을 익히도록 하십시오." 백리사옥은 헌원적에게 건천의 절학 중 건천열화구도식(乾天熱火九刀式)의 구결을 알려주었다. 헌원적은 그 구결을 두세 차례 음미해 보더니, 감격하여 부르짖었다. "고맙네, 백리공자! 노부는 이제야 진정한 도정(刀頂)의 경지를 알게 되었네!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네!" 백리사옥은 방을 나왔다. 천도황 헌원적의 무릎 위에 독기를 떼버린 두 마리 자모쌍혈주를 올려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5 바람결에 몸을 숨긴 채 백리사옥은 악마성 내부를 누비고 있었다. 문득 하나의 웅장거대한 첨전(尖殿)이 백리사옥의 시선에 비쳐들었다. (지존전(至尊殿)이다. 겁천악마교의 교주(敎主)이며 악마들의 최고수뇌인 지존마사(至尊魔師) 나흘탑격(羅 塔格)이 있는 전각!) -천공에 떠올랐던 거대한 마안(魔眼)은 바로 지존마사 나흘탑격의 변신이네. 또한 그 마공의 이름은 마교(魔敎) 최고최후의 마학인 천년악령마혼안(千年惡靈魔魂眼)이라는 것이네. 그것은 펼치기 전에 꺾지 못하면 일단 펼친 후에는 천하에 상대할 무공이 전무(全無)한 절대마공(絶代魔功)이네! 이 순간 우내제일정의 말이 떠올랐다. (허나 내일이면 이 지존전은 폭파되고 악마성은 불길에 덮일 것이다.) 백리사옥은 신광을 빛내며 계속 신형을 날렸다. 어느 순간, 그의 눈에는 또 다시 열 개(十個)의 웅장한 흑전(黑殿)이 비쳐들었다. 흑전들은 지존전에 비해 높이는 조금 낮았으나 웅장함은 결코 지존전에 못지 않았다. (십천마왕전(十天魔王殿)!) 겁천악마교의 진정한 강자(强者)들은 바로 열 명의 십대천마왕(十大天魔王)이다. 십대천마왕(十大天魔王)! 그들의 내공은 이미 오갑자(五甲子)를 넘어섰으며, 내력을 무형지기(無形之氣)나 음파(音波)로 바꾸어 십 리(里) 밖에 있는 상대를 살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들이다. 철혈무정검 뇌천악을 찢어죽인 자는 십대천마왕 중의 마종천마왕(魔鐘天魔王)이다. 또한 천풍여의세가의 모란부인을 죽인 자는 금천마후(琴天魔后)이었으며, 그 외에도 악마의 능력을 지닌 자들이 여덟 명이 더 있었다. (오늘 밤은 모험을 하지 않는다. 허나 내일이면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스스스스스스…… 백리사옥의 보이지 않는 신형은 또 다시 어둠 속을 뚫었다. 6 겁천악마교의 마인들은 언제나 복면을 벗지 않는다. 그것은 천 년 동안을 어둠 속에 짓눌려왔던 마교의 혈한(血恨)을 잊지않는 길이며, 악마지혼(惡魔之魂)을 되새기는 행위라고 믿고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들은 언제나 이 복면을 벗을 수 있는 날이 온다고 했다. 그것은 악마의 존체(尊體)가 적자(嫡子)의 몸을 빌어 현신(現身)하는 그날이라 했다.


그리고 그날은 이미 며칠 후로 임박하고 있었다. 고루사왕( ?死王). 그는 인골(人骨)을 깎아 나녀상을 조각하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 사각…… 사가각…… 그는 지금도 큼직한 백골을 쥐고 정성들여 칼질을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고루사왕은 뼈다귀를 쥐어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일어났다. "크ㅋ!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한쪽 벽에 있는 문을 드르륵 열었다. 그곳에는 십여 구의 시체들이 악취를 풍기며 매달려 있지 않은가? "크크…… 이게 좀 쓸만하겠군." 고루사왕은 시체 하나의 넙적다리를 툭툭 두드리더니 발목을 쥐고 뜯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제자리로 가지고 와서 다시 칼질을 시작했다. 슥슥…… 스가각…… 이때였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한 줄기 바람이 창문 틈 새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조각에 열중해 있는 상태가 아니었더라도 고루사왕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컥!" 고루사왕의 입에서 폐부가 틀어막히는 답답한 신음이 터졌다. 어느새 그의 앞가슴 앞에는 등 뒤로부터 쑤셔박힌 흰 손 하나가 심장을 뚫고 삐쭉 나와 있었다. "커억…… 어…… 어떤 놈…… 크아아악……!" 고루사왕의 말은 계속되지 못했다. 흰 손이 가슴 속에서 그의 심장을 비틀어 버렸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가 깎고 있던 뼈다귀가 그의 입 속에 처박혀 버렸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와 동시 백리사옥은 모습을 드러냈다. 고루사왕의 가슴에서 뽑아낸 그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후후, 네가 여섯 번째다." 혈우사왕(血雨死王). 그는 침소에 들기 전에 반드시 한 잔의 음료수를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그가 마시는 음료수는 인간의 생혈(生血)이었다. 허나 그는 그 습관으로 인해 비명 한 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생혈을 마시려 했을 때 핏물 속에서 튀어나온 희디흰 백옥수(白玉手) 하나가 그의 목덜미를 뜯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손의 임자가 누구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7 구겁지옥마로(九劫地獄魔路)의 동굴 속을 무한한 인물들이 동굴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승(僧), 도(道), 속(俗)의 갖가지 복장을 한 대략 삼천(三千) 가량의 인물들이었다. 그 맨 선두에는 진천거검 섭가무(攝賈武)가 군웅들을 인도하고 있었다. "서둘러야 하오! 지금쯤 이미 격전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오!" 그런데 그들의 뒷편에서 황망히 움직이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는 눈(眼)이 하나 있었다. 그 눈은 기이하게도 은빛을 띠고 있었고 입가엔 득의의 괴소가 어려 있었다. 그는 을목천군(乙木天君)이었다. "후후후…… 가거라. 불나방 같은 무리들, 피와 죽음의 제물(祭物)이 되기 위해……" 일순, 그의 괴소가 뚝 멈추며 짤막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혈요(血妖), 사요(死妖), 궁요(弓妖)!" 순간, 어둠 속 깊은 곳에서 너무도 요기(妖氣)서린 세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복명했다.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좌태상!" "준비는 완벽한가?" "물론입니다. 겁천악마성의 지존전(支尊殿)에 불길이 오르면 본국 오천 최고정예가 총공세를 시작할 것입니다." 을목천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듯 미소를 떠올렸다. "후후…… 놈들의 최고 심장부인 지존성이 폭파될 정도라면 겁천악마성은 이미 상당히 유린되고 있다는 뜻!" 따락! 그의 손에서 은구슬이 거칠게 뒤틀렸다. "속전속결(速戰速決)! 그것이 승부의 관건이다. 일거에 총공세를 퍼붓되, 고삐를 늦추지 말라!" "존명!" 구겁지옥마로의 또 다른 동굴 속에 또 다른 일단(一團)의 인물들이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흑의무복(黑衣武服)으로 무장하고 있는 일천(一千) 가량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눈부신 용모의 절세미소녀가 달리고 있었다. 일신에 자의(紫衣)를 걸친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떨기 자목련(紫木蓮)과도 같았다. 그녀는 바로 혁유사란(赫悠思蘭)이 아닌가? "외할아버지이신 우내제일정께서 비밀리에 기르신 일천무적군단(一千無敵軍團)이 간다. 겁천악마교와 초령마국이 양패구상했을 때 배후를 칠 것이다!" 8 휘이이잉---- 잉----! 십만대산(十萬大山) 귀령봉(鬼靈峯)에는 쉴새없이 거센 삭풍(朔風)이 휘몰아치고 있다. 스스슥…… 스스스슷……! 귀령봉 주위를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땅을 파헤치고 나무상자를 묻기도 하고 선(線)을 연결하며 점검하기도 하면서 귀령봉 전체를 누비고 있었다. "우내제일정과 천하의 고인들께선 최후의 결전에 임하셨다. 그분들은 마지막으로 악마들의 동귀어진(同歸於盡)까지도 각오하셨다." "폭약을 묻어라. 한 치의 실수가 있어서도 안된다!" "내일 진시(辰時)까지 그분들이 돌아오시지 않으면 귀령봉 전체를 통째로 폭파해 버려야 한다!" 그들은 바로 뇌화벽력문(雷火霹靂門)의 고수들! 우내제일정의 최후명령에 의해 귀령봉 전역에 수십만 근의 화약(火藥)을 매설하고 있는 것이었다. 귀령봉 전체를 날려 버릴 수 있는 엄청난 화약이다. 대반전(大反轉)의 무서운 바람은 이곳에서도 불고 있었다. 9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둠이 깔린 이곳은 지하(地下) 수천 장의 깊은 곳이다. 그곳에서 두 사람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클클클……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고 있다. 소주군(小主君)께서는 나 오색존자(五色尊者)의 예상대로 반드시 이곳으로 드시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이놈아! 일이 이렇게 되는 데까진 색두광도(色頭狂道)의 힘이 컸다는 것을 잊지마라!" "빌어먹을 놈! 우리는 다같이 천마제천쌍위(天魔帝天雙衛)가 아니냐? 공치사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공치사냔 말이다. 사실 네놈이 한 일이래야 품 속에 귀갑(龜甲)을 넣어준 것밖에 더 있느냐!" "거지놈아! 그럼, 네놈은 뭐 잘난 일을 했느냐?" "나는 동굴 속에 쓰러져 있는 이 계집애를 구해왔다!"


"뭐? 계집애? 이 배워먹지 못한 놈아! 이분은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 마땅히 주모(主母)라 불리워야 할 분이 아니냐?" "배워먹지 못한 놈이라고? 이 입을 찢어서 절구통같은 대머리에다 붙여 놓을 놈아!" "이 죽일 놈이!" 그들은 으르렁거렸으나 진짜로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후, "에이, 빌어먹을! 술이나 마셔야겠다." "술? 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어둠 속에서는 이내 벌컥벌컥 술 들이키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10 뚜벅…… 뚜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정실(靜室)을 울렸다. 이어 금포인(金袍人)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호화스러운 금의(錦衣)를 걸친 인물 하나가 정실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한쪽으로 걸어가는 게 아니라 뒷짐을 진 채 제자리를 왔다갔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얼굴은 금빛 복면에 가리워져 알아볼 수 없었으나, 녹색의 귀화(鬼火)가 일렁이는 눈(眼)만으로도 심장이 조여들 지경이었다. 또한, 그가 걸친 금포의 가슴엔 끔찍한 악마흉상(惡魔胸像)이 새겨져 있지 않은가? 악마성 내에 이런 복장을 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지존마사(至尊魔師) 나흘탑격(羅 塔格). 겁천악마교의 총수뇌이자, 교주인 바로 그가 아닌가! "나 나흘탑격은 을목천군 네놈을 안다! 뱀처럼 영리하고 늑대같이 약삭빠른 놈.! 그래서 본사(本師)로 하여금 겁세(劫世)를 보류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놈…… 네놈은 정사 고수들로 하여금 본교를 치게 한 뒤 본교가 뒤흔들릴 때 총공세를 퍼붓겠다는 생각이겠지, 허나 너는 어리석은 놈이다. 본사는 정사고수들로 하여금 네놈과 먼저 부딪치게 할 것이다. 그 후에 네놈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주겠다!" 스스스…… 그의 두 눈에서 귀화(鬼火)가 뿜어지더니 맞은편 빙벽이 주르르 녹아버린다. 눈빛만으로도 철판을 녹여버릴 수 있는 경지! "네놈을 제거한 뒤 보류되었던 천하겁세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비록 악마임세(惡魔臨世)의 날까지 본 성(城)을 나서지 말라는 천(天)의 명(命)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천(天)의 명(命)! "천하를 짓밟아 천만인(千萬人)의 생혈(生血)을 악마임세의 제단(祭壇)에 바칠 것이다." 나흘탑격의 음성에는 물씬 피내음이 서려 있었다. "모든 것은 나 나흘탑격의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다. 헌데!" 뚜벅! 나흘탑격의 발길이 돌연 딱 멈췄다. "이상해……?" 그는 고개를 쳐들어 천정쪽을 응시했다. "계획은 완벽하다. 내 스스로도 감탄할 만큼…… 헌데 이상한 예감이 느껴진다. 너무나 완벽하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스럽게 느껴진단 말이다." 일순, 나흘탑격은 고개를 홱 젖혔다. "마뇌(魔腦)!" 그의 음성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나의 회색 그림자가 그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단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부복해 있을 따름이었다.


"우내제일정의 무공은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 생각하느냐?" "침투한 삼십팔인의 정사고수 중 단연 최강일 것입니다." 회색복면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흘탑격은 일순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그런 자가 제이관 정도를 뚫지 못하고 무너졌단 말이지?" "그렇습……" "마뇌!" 나흘탑격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는 이제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가공할 귀광(鬼光)이 폭사되고 있었다. "앞장 서라. 지하수옥으로 가겠다!" 헌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나흘탑격과 회색복면인이 정실을 빠져나간 지 얼마 후 연기가 스며나오듯 하나의 인영이 벽면으로부터 나타났다. "그렇겠지, 나흘탑격. 의심 많은 그대가 반드시 그것에 의혹을 품으리라고 짐작했었다." 나직이 중얼거리는 인물은 바로 우내제일정이 아닌가? "지금쯤 정사의 원군은 이미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헌데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지." 우내제일정의 의안(義眼)이 문득 기이한 빛을 뿌렸다. "본좌가 제 이관에서 무너진 것처럼 보인 것은 정사고수들을 구출함에도 목적이 있었으나 나흘탑격, 그대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만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랬던가? "후후후, 그대는 본좌의 예상대로 의심을 품고 지하수옥으로 내려갔다. 마치 말 잘 듣는 귀떨어진 개(犬)처럼…… 정사원군이 도 착하기 전에…… 지존전을 폭파하여 초령마국의 침공을 불러들여야 한다." 그는 품 속에서 큼지막한 봉지를 꺼내더니 그 속에서 가루를 끄집어내 이곳저곳에 뿌렸다. "한 줌의 가루로도 천근 화약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뇌정신화산(雷精神火散)! 이것이 초령마국의 불나비들을 불러들일 것이다." 다음 순간, 그는 허공 어딘가를 향해 외쳤다. "가세, 백리소협!" "좋습니다, 노선배님!" 바람 속에서 대답이 있었다. 이내 우내제일정의 신형은 다시 연기처럼 벽 속으로 빨려들어 사라져 버렸다. 휘리리리링…… 한 줄기 바람이 뒤이어 창문 틈 사이로 빠져나갔다. 꽈꽈꽈꽈---- 꽈꽈꽝---- 꽈꽝! 천지를 뒤집는 대폭발음(大暴發音)! 만 장으로 충천하는 화염의 불기둥…… 꽈꽈꽈꽝----! 꽈꽝! 그 소리는 지존전(支尊殿)이 박살이 나는 소리였다. 또한 대반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굉음이었다. "적이다----!" "적이 침입했다." 슈파파파파---- 파파---- 파아아아---광폭한 외침소리와 함께 수백 개의 혈영이 악마성 곳곳에서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버…… 벌써 대전(大殿)이 벌어졌소----!" 진천거검 섭가무는 뒤따르는 군웅들을 돌아보며 목터지게 부르짖었다.


"갑시다! 그분들을 도와야 하오!" "좋소! 목숨을 바쳐 악마들과 싸우다 죽으리라!" "갑시다!" 제 16 장 뉘라서 당신들을 일컬어 英雄이라 부르지 않으리까? 1 "쳐라!" 을목천군의 입에서 싸늘한 호통이 터졌다. 수천 가닥의 빛줄기가 야천(夜天)을 찢어발기며 악마성으로 날아들었다. 번쩍! 번쩍! 추아아아아---- 아---"겁천악마교! 너희들이 설 자리는 하늘 아래 없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요기(妖氣)어린 음성들이 허공을 난자했다. 하늘(天)과 땅(地), 그것이 창조된 이래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끔찍하고 무서운 싸움은 시작되었다. "으아아악!" 취리리리리릿---- 차차창----번쩍! 버---- 번쩍! 콰르르릉---- 쿠콰콰쾅---- 꽈꽈꽝----! "읏! 이 소리는……?" 나흘탑격은 수옥에 막 들어서려는 순간 그 폭발음을 들었다. "이것은 지존전 쪽입니다!" "어떤 죽일 놈이!" 이빨을 무섭게 갈아붙이는 나흘탑격의 두 눈에서 악마와도 같은 마광(魔光)이 활화산처럼 터져나왔다. 우우우우웅……! 움직이지도 않건만 그의 주위에는 회오리바람이 거칠게 일어났다. "을목천군! 그놈이 이토록 빨리 급습을 감행할 줄이야!" 부르짖음이 터지는 순간, 그의 신형은 청석으로 된 돌천장을 종잇장처럼 뚫어버리며 허공으로 무섭게 치솟았다. "이놈! 뼈를 짓뭉개 주겠다!" 지면(地面)이 갈라터지며 거대한 고목(枯木)이 솟아올랐다. "쿠카카카카! 본좌는 고목사왕(枯木死王)이다!" 고목에 달린 수백 개의 나뭇가지들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정사군웅들을 휩쓸었다. 콰우우우우---- 우우---"크아아악----!" 한꺼번에 세 명의 고수가 나뭇가지에 맞아 피떡이 되며 날아갔다. "악마! 함께 죽으리라!" 군웅 중 하나가 검을 빳빳이 세운 채 고목으로 뛰어들었다. 허나 검은 쇳소리와 함께 무참히 부러져 버렸고, 그는 고목가지에 휘어감긴 채 과육(果肉)처럼 짓터져 버렸다. 그 순간이었다. 허공에 돌연 요기(妖氣)가 물씬 어린 교갈이 터짐과 동시 요악(妖惡)한 방울소리가 허공을 짓쳐들었다. "오호호호호, 고목사왕! 네 상대는 여기 있다!" 딸랑딸랑딸랑…… 순간, 고목사왕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흐억! 네년은 요령차혼녀(妖鈴借魂女)!" "호호홋홋! 마(魔)는 요(妖)를 꺾지 못한다." 투두두두두둑----! 요령차혼녀의 손가락 열 개가 동시에 끊어지며 빛살처럼 고목사왕을 향해 날았다. 손가락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 곧추세워지며 고목사왕의 전신을 찢어버렸다. "으아아악!" 시퍼런 녹색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고목사왕은 허물어지듯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오호호호홋…… 돌아와라!" 요령차혼녀가 외치자, 고목에 박혔던 손가락들은 끈 달린 것처럼 되돌아와 그녀의 손에 다시 달라붙는 것이었다. 군웅들은 믿어지지 않는 요공(妖功)에 넋을 잃었다. "오호호홋! 겁천악마교를 도륙할 때까지 네놈들은 살려주겠다!" 요령차혼녀는 교갈을 터뜨리며 허공으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헌데 그 순간, 어디선가 마기(魔氣)가 물씬 어린 묵직한 종소리 가 들려왔다. 뎅----! 요령차혼녀의 안색이 홱 변했다. "십대천마왕(十大天魔王) 중의 마종천마왕(魔鐘天魔王)!" "으흐흐흐…… 잘 아는구나, 계집!" 음사무비한 괴소와 함께 한 명 회포복면인이 앞에 솟아났다. 요령차혼녀는 다급성을 삼키며 급히 요령(妖鈴)을 거칠게 흔들었다. 딸랑딸랑딸랑…… 심혼을 통째로 앗아갈 듯한 무서운 방울소리였다. 허나, 마종천마왕은 비릿한 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으흐흐흐, 어리석은 계집! 그따위 어린애 장난감으로 뭘 하겠다는 것이냐!" 슈슈아---- 악----! 마종천마왕은 마조(魔鳥)처럼 두 팔을 벌리며 요령차혼녀에게 달려들었다. 요령차혼녀는 입술을 앙물었다. "쉽게 당하진 않는다!" 투두두두둑----! 요령차혼녀의 손가락이 다시 끊어지며 무서운 속도로 폭사되었다. "으흐흐…… 절지사요공(絶指邪妖功)?" 마종천마왕은 괴소를 흘려뱉음과 동시에 날아드는 손가락들을 입 속으로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우드득! 씹어 삼켜버렸다. "흐억!" 요령차혼녀의 안색이 흑빛으로 변하며 뒷걸음질 쳤다. "으흐흐…… 어림없는 수작!" 꽈꽈꽝----! 수백 개의 거종(巨鐘)을 한꺼번에 때려부수는 듯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상상할 수도 없는 거력(巨力)이 요령차혼녀를 후려쳐 버렸다. "아아악!" 요령차혼녀는 피범벅이 되어 날아갔다. 마종천마왕은 그녀를 따라붙어 낚아채더니 두 손으로 발목을 잡고 가랑이를 거칠게 찢어 버렸다. "한 놈도 살려두지 않는다!"


슈아아---- 앙---그의 신형은 다시 허공으로 치솟아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2 여기저기서 혼전(混戰)은 계속되고 있었다. 겁천악마교와 초령마국! 그 양대세력의 사이에 끼인 정사원군들은 마치 새우등 터지듯 무참하게 도륙당하고 있었다. "으으…… 더 이상은 두고볼 수가 없습니다!" 백리사옥은 뛰쳐나가려 했으나, 우내제일정은 억지로 그를 붙들었다. "참게! 지금은 참아야 할 때이네!" 그들은 지금 구출해낸 정사고수들과 함께 어둠 속에서 난전(亂 戰)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미타불! 문인원주의 말이 옳네. 수천 군웅의 생명은 안타깝지만 그들은 헛된 죽음을 하고있는 것이 아닐세." 천허대사도 이렇게 말했다. 천사자령종 육도강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양패구상의 기회를 기다려야 하네. 지금 우리가 나선다 해도 전국(戰局)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을 것이네." "백리소협, 수천의 죽음으로 수천만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작은 인정보다 대의(大義)를 생각해야 되지 않겠는가?" 우내제일정의 말(言)은 꼭 백리사옥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정사고수 모두에게 다짐하는 말 같았다. "겁천악마교와 초령마국의 싸움은 내일 아침이면 끝날 것이네. 승자는 아마 겁천악마교 쪽이 될 것이나 삼분의 이 가량의 막대한 손상을 입은 후일 것이네. 우리는 노려야 하네!" 이때 천허대사가 물었다. "문인원주께서 말씀하신 비밀군단은 어찌 되었소이까?" 우내제일정은 곧 대답했다. "이미 이 근처에 도착하여 잠복하고 있을 것이오. 본인의 신호가 있으면 우리와 합공(合功)하게 될 것이오!" "오……!" 정사고수들은 한결같이 감탄성을 토했다. 이때, 누군가가 외쳤다. "저…… 저길 좀 보시오!" 핏빛 회오리가 풍차처럼 휘돌며 쓸어가는 속에 군웅들의 목이 낙 엽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카카카카카! 마륜천마왕(魔輪天魔王) 앞에서는 하늘조차 고개를 들지 못한다!" 풍차처럼 휩쓰는 핏빛 회오리는 십대천마왕 중 하나인 마륜천마왕의 혈륜(血輪)이 일으키는 강기의 마풍(魔風)이었다. "카카카카카……!" 무적행(無敵行)! 혈륜의 마풍 앞에 적수는 없었다. 헌데 그때다. "우후후후후후…… 네놈은 우리 오행요사존(五行妖邪尊)이 상대한다!" 다섯 개의 그림자가 마륜천마왕 앞에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청(靑), 홍(紅), 자(紫), 남(藍), 적(赤)의 다섯 가지 색깔의 복장을 걸친 오인(五人)의 난장이 노인들이었다.


"카카카카…… 웬 버러지 잡종들이냐!" 핏빛 강륜( 輪)은 더욱 가공할 기세로 오행요사존을 휩쓸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다섯 개의 수급이 낙엽처럼 잘려져 날아갔다. "카카카카카!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 뉘 앞이라고 감히!" 마륜천마왕은 통쾌한 앙천광소를 우박처럼 내뱉았다. 헌데 그의 입에서 갑자기 다급성이 삼켜지고 있었다. "우후후후…… 어리석은 놈!" "으흐흐흐…… 우리 오행요사존이 그렇게 쉽게 당할 줄 알았더냐!" 이럴 수도 있는가? 분명 강륜에 의해 수급이 달아난 오행요사존이다. 헌데, 땅에 떨어진 수급들이 일제히 마륜천마왕을 노려보며 웃고 있지 않은가? "우흐흐흐흐……" "낄낄낄낄…… 죽여주마!" 다섯 개의 잘려진 머리들이 일제히 마륜천마왕을 향해 폭사되었다. "카캇! 그따위 요공(妖功)으로…… 흐억!" 마륜천마왕은 다시 강륜을 휘두르려다 말고 다급성을 토했다. 목을 잃은 오행요사존의 몸통들이 뒤에서 달려들어 그의 팔과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게 아닌가! "이…… 이런 일이……!" 그가 일순 뒤를 돌아본 것이 실수였다. 앞에서 폭사되어 오던 오행요사존의 수급들은 일제히 입에서 핏물의 혈전(血箭)을 뿜었고, 그것은 마륜천마왕의 전신을 피곤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크아악----!" 마륜천마왕의 육신은 걸레조각처럼 난자되며 풀풀 날아갔다. "우헤헤헤헤……" "낄낄낄낄……" 오행요사존의 수급들은 다시 잘려진 몸통에 가서 붙었다. 믿어지지 않는 요공(妖功)이었다. 허나 그때였다. 악마의 울부짖음같은 마기어린 종소리와 함께 한 명 회포복면인이 오행요사존의 면전에 솟아났다. "마종천마왕(魔鐘天魔王)!" 오행요사존들이 놀라는 사이 고막을 휘잡아 뜯는 듯한 금음(琴音)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띵띵띵띵띵띵---- 띠띵……! 그와 동시 한 줄기 날렵한 인영이 어둠 속에서 날아내렸다. 회포에 복면을 하고 있는 것은 마종천마왕과 같았으나 섬세한 체구로 보아 여인(女人)임이 분명했다. "금천마후(琴天魔后)까지……!" "오호홋! 아예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가루를 만들어 주겠다!" 띠띠띠띠띵----! 괴이했다. 금천마후는 몸을 날렸는데, 그녀의 손에는 금(琴)을 들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천지를 진동하는 것이었다. "이기어음(以氣於音)! 이미 최고의 경지에 달했구나!" 오행요사존은 경악성을 지르며 주춤 물러섰다. "크하하하, 천 갈래로 찢어주마!" 마종천마왕은 두 팔을 벌린 채 마조(魔鳥)처럼 날아들었다. 오행요사존은 그들 이대천마왕 앞에 적수가 되지못했다. 요공(妖功)을 미처 펼치기도 전에 그들의 전신은 걸레조각처럼 휘잡아 뜯겨졌고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크하하하핫……!"


"오호홋홋홋……!" 마종천마왕과 금천마후의 득의의 마소(魔笑)가 야천을 진동했다. 바로 그때다. 번쩍! 버---- 번쩍----! 촤아아아아---눈조차 뜰 수 없을 만큼 휘황찬란한 은빛 섬광이 그들을 뒤덮었다. 찰나 마종천마왕과 금천마후는 가슴을 움켜쥐며 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누…… 누구……?" 마종천마왕은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며 경악과 불신의 눈빛으로 천공을 바라보았다. 야천(夜天)을 밟고 하나의 은빛 그림자가 둥실 떠있었다. 눈부신 은포를 휘감 듯 걸친 얼음같은 인상의 중년인(中年人)이었다. "으…… 을목…… 천군……!" 을목천군은 천천히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늘 아래 마교(魔敎)가 설 자리는 없다!" 두 가닥 은빛 광채가 마종천마왕과 금천마후를 휘덮었다. 그들의 안색이 사색으로 일변했다. "헉! 그것은 마공(魔功)의 최대천적(最大天敵)인 사은광우령(死銀光雨靈)!" "지존마사와 버금가는 수준이다!" 그들의 경악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 은빛 광채는 그들의 전신을 꿰뚫어 버렸다. 비명소리조차 없었다. 마종천마왕과 금천마후의 신형이 일순 날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이어 그들의 몸은 흡사 바위가 부서져 피모래로 변하는 것과 같이 느릿느릿 잘디 잘게 부서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처참한 죽음(死), 그리고 믿어지지 않는 을목천군의 신위(神威)였다. "……!" 을목천군은 서릿발같은 눈빛으로 사위를 휩쓸어 보았다. 헌데 그때였다. 우우우웅---- 웅---- 우웅----! 지축(地軸)을 뒤흔드는 듯한 굉음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이 음 산한 괴소가 악마의 음성처럼 울려퍼졌다. "크크크크……" 동시에 시커먼 야천에 녹색 운무를 뿌려놓은 듯한 거대한 마안이 나타났다. "크크크크…… 을목천군! 제법이구나." 을목천군의 안색이 일순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의 입술이 떼어지며 신음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왔구나, 나흘탑격!" 동시에 그의 신형은 운무처럼 흐려지더니 은빛의 덩어리로 변했다. "후후후, 네놈의 천년악령마혼안(千年惡靈魔魂眼)이 결코 무적의 마공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리라!" "크크크크…… 그 따위 사은광우령(死銀光雨靈)이 본사에게도 통하리라 믿느냐?" 마안(魔眼)의 녹광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순간, 을목천군의 몸을 휩싼 은광 또한 더욱 눈부신 광채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휘이이---- 잉---- 잉----! 고오오오…… 바람은 숨막히도록 불었다. 짓터질 듯한 무서운 정적이 마(魔)와 요(妖), 두 효웅의 결전(決戰)을 준비했다. 어느 순간,


"가라!" 번쩍! 마안으로부터 섬뜩무비한 시퍼런 녹광(綠光)이 섬뢰(閃雷)처럼 뻗었다. "어림없는 짓!" 츄파파파파---- 파아아---을목천군의 몸에서 수천 수만 가닥의 은광(銀光)이 온 하늘을 뒤덮으며 폭사되었다. 쿠꽈꽈꽝---- 꽈르르---- 꽈꽝! 대폭음으로 천공은 갈가리 난자되고 무수한 불꽃들이 폭죽처럼 천지에 퍼부어 내렸다. 그것은 인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이름 그대로 마신(魔神)과 요신(妖神)의 천상전쟁(天上戰爭)을 보는 듯했다. 승부는 쉽게 나지 않았다. 번쩍! 츄아아아아----! 꽈르르릉---- 꽈꽈꽝! 나흘탑격과 을목천군의 일전(一戰)은 무려 수 시진 동안 계속되었고, 아침이 되기까지도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 겁천악마교와 초령마국의 혈전(血戰)은 계속되었고, 그 속에 휩쓸린 정사군웅들은 전멸(全滅)을 면치 못했다. 물론, 겁천악마교와 초령마국의 피해도 거의 결정적인 것이었다. 양패구상(兩敗具傷)! 굳이 따지자면 겁천악마교 측의 우세라 할 수 있었으나, 그것을 승리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참담했다. 지옥도(地獄圖)! 악마성은 풍비박산으로 핏물에 씻기우고 있었다. 3 여명(黎明), 먼 동이 터오고 있었다. 허나 아직도 죽고 죽이는 처참한 살육전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일천무적군단(一千無敵軍團)!" 우내제일정의 입에서 쩌렁한 일갈이 터지며 불화살이 움터오는 천공으로 솟아올랐다. "와아아---- 아----!" 일천무적군단(一千無敵軍團)! 그들은 우내제일정이 이날을 위해 피땀을 쏟으며 길러낸 비밀군단이었다. 그들 일인(一人)의 무공은 이미 강호절정고수와 맞먹을 정도였고, 우내제일정으로부터 사사받은 기환무예(奇幻武藝)도 익히고 있었다. 그들의 기습(奇襲)은 처참만륙된 악마성에 퍼부어내리는 또 하나의 폭우와도 같았다. "모조리 도륙하라!" "천하무림의 원수를 갚으리라!" 전세(戰勢)는 순식간에 역전되고 있었다. 일천 무적군단과 초령마국의 합공은 겁천악마교가 아무리 강하다 하나 이런 상태에서야 어찌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자! 지금이네!" 우내제일정의 호령이 떨어졌다. 때를 기다렸던 정사 최고고수들! 눈 앞에서 군웅들이 짓이겨지는 광경을 보면서도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던 그들의 분노는 드디어 폭발했다.


"가자!" "용서하지 않으리라!" -마교(魔敎)여! 너희들이 설 땅은 하늘 아래엔 없다! 4 겁천악마교(劫天惡魔敎)는 쓰러져 갔다. 유래없이 끔찍한 공포를 가져다 주었고, 천하를 피로 씻어 악마의 제단에 바치겠다던 그들은 이제 무너져가고 있는 것이다. 헌데, 어느 순간이었을까? 끄아아아---- 오오오---- 오----! 천공을 휘잡아 뜯는 괴성의 울부짖음과 함께 돌연 천공에 수만 마리의 흑조(黑鳥)떼들이 나타났다. 거대한 묵운(墨雲)이 밀려오듯이 허공을 시꺼멓게 덮쳐 날아오는 엄청난 새떼들! 그 선두의 거조(巨鳥)는 천년묵악(千年墨顎)이었다. 그리고 천년묵악의 등 위엔 한 혈포마인(血袍魔人)이 우뚝 올라서 있지 않은가! "쿠하하하핫! 본좌는 밀령쌍법왕(密靈雙法王) 중의 천년마왕(千年魔王)이다! 모조리 피떡을 만들어 주리라!" 밀령쌍법왕(密靈雙法王)은 교주 나흘탑격의 직하(直下)이며 십대천마왕의 직상(直上), 이른바 태상양대호법(太上兩大護法)에 해당하는 강자들이다. "앗!" 열전을 거듭하던 정사군웅들은 물론 초령마국의 고수들도 경악의 부르짖음을 터뜨렸다. 어찌 아니겠는가? 일천무적군단과 정사최고 고수들의 합세로 단숨에 승기를 잡았던 전국(戰局)이 다시 뒤집힐 지경이었으니. 뿐인가? 천년마왕이 나타남과 동시에 어디선가 허공을 박차며 밀려드는 듯한 거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방이 모두 깎아지른 절벽이다. 넓은 땅이라곤 없다. 헌데, 마치 수천 수만의 기마대가 질주해오는 듯한 무서운 말발굽소리, 그것은 바로 지난 날 백리사옥을 뒤쫓던 그 저주의 말발굽소리가 아닌가? 말발굽 소리에 섞여 허공을 짓이기는 듯한 음산한 괴소가 울려퍼졌다. "우후후후! 밀령쌍법왕 중의 저주마왕(咀呪魔王)이다. 개미새끼들처럼 짓밟아 버리겠다!" 저주마왕! 그렇다면 드디어 밀령쌍법왕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이 아닌가? 전국(戰局)은 일시 삼엄한 긴장에 휩싸여 들었다. 쓰러져 가던 겁천악마교의 잔병들은 환성을 울렸고, 정사고수와 초령마국 쪽은 침통한 신음을 토했다. 순간, 나흘탑격은 득의의 광소를 터뜨리며 을목천군을 향해 무서운 공세를 퍼부었다. "푸하하하핫! 보았느냐, 을목천군! 네놈들은 시체 하나도 온전히 보존치 못할 것이다!" 을목천군은 이를 바득 갈았다. (빌어먹을! 교활한 나흘탑격! 일부러 저자들은 최후의 순간을 위 해 아껴 두었구나!) 그는 나흘탑격의 공세를 받아쳤다. 백리사옥의 눈빛이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왔느냐!"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잊지 못한다. 그 날, 억수같이 광풍폭우가 몰아치던 광야에서 저주의 말발굽소리와 흑조들의 공격에 피떡이 되어 쓰러져갔던 번천철갑단 무사들의 참혹한 죽음을……! "천만배로 갚아주리라 맹세했었다!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는 품에서 두 가지의 물체를 동시에 꺼내들었다. 왼손엔 범천항마탁(梵天降魔鐸)! 오른손엔 범천번뇌주(梵天煩腦珠)! 범천삼보(梵天三寶)가 드디어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이다. 백리사옥은 두 가지 기보를 굳게 쥐고 천공을 노려보았다. 한 순간, 그의 입에서 웅휘한 일갈이 쩌렁! 울렸다. "가거라! 범천번뇌주(梵天煩腦珠)!" 범천번뇌주(梵天煩惱珠)! 백팔개(百八個)로 된 염주는 내공을 주입하면 스스로 날아 허공 만 장을 뒤덮는 천고제일의 암기가 된다. 귀영(鬼影)도 이를 피할 수 없다. 츄츄츄츄츄츄츄----! 수십 수백 가닥의 묵섬(墨閃)이 천공으로 솟구치는가? 빛(光)의 그물(網)이 하늘을 덮는가? 백팔 개의 염주알이 천공을 휘덮으며 무서운 속도로 휘날았다. 범천번뇌주가 나르는 곳마다 흑조떼들은 한꺼번에 수십 마리씩 떼주검이 되어 낙엽처럼 떨어졌다. 범천번뇌주는 공력을 주입하기만 해도 스스로 암기로 변해 적을 공격하는 천고의 기병이었다. 헌데, 백리사옥은 그것을 건천삼십삼무상예 중의 최고암기수법인 건천폭비무(乾天瀑飛舞)를 운용하여 전개했다. 염주 한 알은 허공을 선회하며 한꺼번에 서너 마리씩을 꿰뚫어 버렸고, 하늘에서는 흡사 흑조 떼들의 주검이 비오듯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정사고수들과 초령마국의 인물들은 사기충천했다. "하하핫! 별것 아니다!" "카캇! 쓸어버리자----!" 그들은 힘을 내어 흑조떼들을 물리쳤고 순식간에 전국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허나 이때 천년묵악이 가공할 속도로 백리사옥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육시랄 놈! 걸레 조각을 만들어 버리겠다!" 천년마왕은 광소를 터뜨리며 덮쳐들었다. 순간 백리사옥은 싸늘한 비웃음을 날렸다. "흥! 어림없는 수작!" 그는 날아드는 범천번뇌주를 회수하며 그대로 천년묵악을 향해 폭사시켰다. "가거라, 건천폭비무(乾天瀑飛舞)!" 추아아아아---- 아아아----! 순간, 천년마왕은 백팔 개의 염주가 갑자기 백팔 개의 불존상(佛尊像)으로 변하며 자신을 향해 덮쳐드는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환각이었을까? 천년마왕은 일시 주춤했다.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항거불능의 제마지기(制魔之氣)가 백팔 개의 불존상에서 뿜어져 나온다고 느낀 순간, 퍼퍼퍽! 범천번뇌주는 천년마왕과 천년묵안의 몸뚱이에 백여덟 개의 구멍을 뚫어버리며 날았다. "으아악!" 두 개의 시신이 피떡이 되어 지면으로 추락했다. 새와 사람이 갈기갈기 찢기는 끔찍한 최후였다. 백리사옥은 입술을 굳게 깨물며 범천번뇌주를 회수했다. 그것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아아악!" 그의 주의에서 비명이 몸서리쳐지게 터지며 무수한 고수들이 피곤죽이 되고 있었다. 우두두두두---- 두둑----! 콰두두두둑----! 저주의 말발굽 소리가 밀어닥친 것이었다. 머리가 깨지고 창자가 짓이겨지는 참혹한 주검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모조리 짓밟아 버리리라!" 쿠두두두두두두---- 우두두두두---- 두두---"크악!" 백리사옥의 검미가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저주마왕!" 그는 순간 범천항마탁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백리사옥은 자신의 전 내력을 범천항마탁에 주입했다. 범천항마탁(梵天降魔卓)! 오갑자 내공을 주입하면 스스로 탁음(鐸音)이 울리며, 탁음은 백리(百里)에 퍼져 능히 마음(魔音)을 제압하리라. 우우우우웅…… 우우웅…… 은은한 탁음(鐸音)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바라(婆 :징 모양의 악기)를 천천히 두드리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웅장한 탁음은 점점 거대한 해일(海溢)처럼 확산되기 시작했다. "……!" 군웅들은 일시 그 탁음에 정신이 청량해지는 것을 느꼈다. 반면, 밀려들던 말발굽소리 가운데서 경악에 찬 저주마왕의 신음소리가 내뱉아지는 것이었다. "허억! 항마대법음(降魔大法音)!" 쿠우우웅…… 쿠우웅…… 웅……! 하늘의 북(天鼓)을 두드린다면 이런 소리가 날 것인가? 조그만 목탁에서 어찌 이렇듯 웅휘장엄한 마음(魔音)이 들릴 수 있단 말인가? 군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싸움을 멈추고 백리사옥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 백리사옥의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저주마왕의 마음(魔音)과 싸우기 위해 진력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두두두두…… 두두…… 말발굽 소리는 점차 약해져가고 있었다. 쿠우우웅…… 우우웅…… 웅웅…… 웅! 탁음은 점점 웅휘해져 갔고, 마음(魔音)은 사그러지고 있었다. "크윽!" 어느 순간, 허공 어디에선가 폐부가 막히는 듯한 신음성이 들려왔다. 동시, 안개가 걷히듯 한 혈의인영(血衣人影)의 모습이 드러났다. 저주마왕(咀呪魔王)이었다. "크으으으…… 네놈이 항마대법음을 시전할 줄이야!" 이빨저린 신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허나, 백리사옥은 묵묵히 범천항마탁을 울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느 순간 엄청난 거종(巨鐘)을 후려치는 듯한 탁음이 저주마왕을 향해 짓쳐들었다. 찰나, 저주마왕의 두 눈이 공포로 휩떠졌다. "아…… 안돼! 크아아악----!" 그는 두 손과 발을 허우적거리더니 처참한 비명과 함께 퉁겨지듯 붕 떠올랐다. "크아아악----!" 그의 신형은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에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헌데 그의 몸뚱이는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거북이등처럼 갈라지고 있지 않는가? 지면에 부딪쳤을 때는 이미 그의 몸뚱이는 수십 토막으로 찢겨져 있었다. 무섭고 끔찍한 최후였다. "으드드득……!" 나흘탑격은 이빨을 몸서리치게 갈아붙였다. 허나 천년마왕과 저주마왕의 참혹한 최후를 뻔히 바라보면서도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그에게는 을목천군이라는 생애 최대의 대적(大敵)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이 순간 놀라기는 을목천군도 마찬가지였다. (저놈이 대체 어떤 놈이기에……) 그는 백리사옥의 가공할 무공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은은한 공포마저도 느끼고 있었다. (우내제일정의 능력으로는 결코 저같은 인물을 길러낼 수 없다. 그렇다면……) 그의 눈빛이 당혹이 스쳤다. (일이 잘못 된다면 겁천악마교는 제거할 수 있겠으나 본국 또한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헌데, 그때였다. 츄아아아---- 아----! 한 줄기 금영(金影)이 지면으로부터 섬전처럼 치솟아 올랐다. "좌태상! 합공(合攻)을----!" 사자후(獅子吼)같은 쩌렁쩌렁한 일갈을 터뜨리며 솟아오르는 자는 바로 우내제일정이었다. 순간, 을목천군의 두 눈에 은광이 번쩍 빛났다. "좋소! 우태상!" 취리리리릿---그의 손에서 또 다시 엄청난 은빛 무지개가 마안을 향해 뿜어졌다. 동시, 우내제일정의 쌍장(雙掌)에서 휘황찬란한 금광(金光)이 마안으로 폭사되었다. "금천제일강(金天第一 )!" 일순, 마안(魔眼)의 거대한 그림자가 당혹한 듯 부르르 떨렸다. "크흐흐…… 버러지같은 놈들…… 좋다!" 녹색 광채가 다시 무섭게 불을 뿜었다. 꽈꽈꽈꽝---- 꽈르르르---- 꽈꽈꽝! 일순, 천지는 무지막지한 강풍( 風)과 빛의 회오리에 뒤덮였다. 암천(暗天) 그 깊숙한 어느 곳에서 그 순간 한 줄기 섬광(閃光)이 그 속으로 내리꽂힌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크아아아!" 두 마디의 비명성이 폭음 속에서 동시에 터졌다. 우내제일정의 입에서 피분수를 내뿜으며 지면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헌데, 천공을 보라! 은빛에 휘감긴 천공의 마안(魔眼)은 서서히 나흘탑격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시퍼런 녹수(綠水)가 되어 주르르 녹아버리고 있지 않는가! "크으으으…… 네…… 네가…… 등후린(登侯鱗)…… 네가 나를 죽이다…… 니……" 한(恨)이 뚝뚝 사무치는 뇌까림을 신음처럼 뱉으면서 나흘탑격은 시퍼런 물이 되어 최후를 마쳤다. 천하를 피로 씻겠다던 겁천악마교의 교주이며, 희대의 효마 나흘탑격(羅 塔格)의 최후는 너무도 허무했다. 헌데 그가 마지막으로 뇌까린 한 마디는 무슨 뜻인가? -등후린(登侯鱗)…… 네가…… 나를 죽이다니……! 이때 우내제일정은 거칠게 지면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지면에 곤두박질치며 하반신이 피떡이 되어 버렸다. 허나 그는 무서운 눈초리로 을목천군을 노려보았다.


"으으으…… 네…… 네놈이 비겁하게 암습을……!" 그렇다. 그들이 나흘탑격을 합공한 직후 을목천군은 우내제일정을 뒤에서 암습한 것이다. 을목천군은 득의의 괴소를 흘리며 천천히 지면에 내려섰다. "후후후, 어차피 네놈을 제거하려고 했었다." "교활한 놈!" "웃기는 소리! 영광은 언제나 승자에게 돌아가는 법이다. 어쨌든, 나흘탑격을 제거할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군!" 을목천군은 돌연 하늘을 우러르며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후핫핫핫! 나흘탑격이 제거된 이상, 천하에 본좌의 적수는 없다! 모조리 죽여라!" 그는 광소를 터뜨리며 마구 쌍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촤촤촤촤---- 추아아아---- 아----! 무섭게 천지를 휘감는 은광(銀光)에 의해 일천무적군단의 고수들과 정사 고수들이 한꺼번에 십여 명이 핏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허나 바로 이때 우렁찬 천룡후(天龍吼)가 터졌다. "우우우우---- 우우----!" 이어 한 줄기 백영(白影)이 섬전처럼 내리꽂혔다. "천상대정천(天上大正天)----!" 천지가 완전히 금광에 뒤덮이며 무지막지한 강기의 폭풍이 을목천군을 덮쳐 들었다. 을목천군은 한눈에 그것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어떤 놈이냐!" 섬뜩한 일갈이 터지며 은빛 광망이 전면을 향해 날았다. 꾸꽈꽝----! 꽝----! 가공할 폭음과 함께 바람기둥이 하늘로 치솟고 지면이 쩍쩍 갈라졌다. 이윽고, 먼지와 바람이 가라앉으며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을목천군은 가볍게 어깨가 흔들린 채 전면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감히 어떤 놈이기에 이 정도 실력을 가졌단 말이냐?) 순간, 그는 눈부신 백의를 바람에 휘날리며 황금빛 홀(笏)을 움켜쥔 채 태산처럼 우뚝 선 절세미장부를 보았다. 백리사옥이었다. 내상을 입은 듯 그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허나 그는 표정을 굳히며 싸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천하는 마(魔)와 요(妖)가 발붙일 곳이 아니다!" 을목천군은 일순 백리사옥을 주시했다. (천년마왕과 저주마왕을 제거한 놈이 바로 이놈이다.) 그는 이 순간 내심 또 하나의 경악을 터뜨리고 있었다. (천고대재(千古大才)다! 천하에 이런 인재가 있었던가?) 을목천군은 백리사옥을 적(敵)이라 느끼면서도 가슴 속에서 무럭무럭 솟구치는 탐심(貪心)을 누를 길 없었다. (그렇다!) 번쩍! 그의 눈이 신광을 내뿜었다. (저 녀석 정도라면 능히 초령마국의 후계자가 될만한 놈이다!) 을목천군은 일순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군가?" "백리사옥."


백리사옥은 간단히 대꾸했다. "음, 본좌는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 "너는 본좌의 평생 처음으로 만난 절대기재(絶代奇才)의 근골을 지니고 있다. 네가 본좌의 후인이 되겠다면 너를 살려주겠다." 백리사옥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입가에는 지독히도 싸늘한 냉소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당신은 교활한 여우다. 여우의 간교함이 두려워 여우의 새끼가 되란 말인가!" 백리사옥의 한 마디는 을목천군의 뇌리를 헤집어놓을 만한 독설(毒舌)이었다. 허나 그는 효마였다. 을목천군은 화를 내기보다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너는 죽음을 선택하고 있다. 사자(獅子)도 자라기 전에는 여우에게도 물려 죽는 법!" 그러면서 그는 느릿느릿 한 손을 가슴 앞에 끌어올렸다. 백리사옥은 진기를 끌어올렸다. "어차피 승부는 실력이 판가름해 주는 것!" 그 역시 천상대정홀(天象大正笏)을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건천삼십삼무상예! 그 가운데 세 가지의 절정천예(絶頂天藝)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고봉은 건천절정벽(乾天絶頂壁)! 그것에 승부를 걸어본다.) "사은광우령(死銀光雨靈)----!" 을목천군의 입에서 나직한 폭갈이 터지며 은빛 광채가 폭풍처럼 쏟아져 들었다. 백리사옥 역시 굉량한 외침을 발했다. "건천절정벽(乾天絶頂壁)----!" 수십 마리의 금룡(金龍)이 한꺼번에 용틀임하여 천상으로 날아오르는 듯한 황금빛 강벽( 壁)이 태산처럼 밀려갔다. 건천 최고최후의 절학! 천지를 도륙할 듯한 무지막지한 굉음 속에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짓터졌다. 쩌저---- 쩍! 콰드드득----! 꽝꽝! 회오리와 빛무지개에 두 사람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크윽……!" 답답한 신음과 함께 하나의 그림자가 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는 백리사옥이었다. 반면, 을목천군은 한 발자국만 물러섰을 따름이었다. 승패는 뚜렷했다. 백리사옥은 울컥 핏덩이를 토해내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으윽! 건천최고의 무공으로도 당할 수 없단 말인가! 저주마왕과의 싸움에 너무나 많은 진력을 소비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때였다. "죽음을 각오하거라! 후후." 을목천군은 기소를 뱉아내며 백리사옥에게 다가들었다. 이 순간, 죽음(死)은 이제 확실한 모습으로 백리사옥의 면전으로 다가들고 있는 것이다. 백리사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백리사옥의 뇌리에 불현듯 한 가지 영감이 섬전처럼 떠올랐다. (천상천부(天象天府)의 최고무학은 천상대정독존(天象大正獨尊)! 건천의 최고무학은 건천절정벽! 기이하게도 두 가지 무공에는 하나의 공통된 맥(脈)이 있다! 그 두 가지를 합쳐 하나의 무학으로 만 들 수 있다면……?) 찰나 불세의 두 가지 절학이 백리사옥의 뇌리 속에서 합쳐지고 있었다. "가거라!"


을목천군의 입에서 짤막한 냉갈이 터지며 엄청난 은빛이 백리사옥의 전신을 뒤덮은 것과, 백리사옥의 생각이 끝나며 그의 몸이 빛살처럼 천공으로 치솟은 것은 완전히 동시였다. (두 가지를 합쳐 건천대정독존벽(乾天大正獨尊壁)이라 한다!) 제 17 장 惡魔天下 1 "건(乾)---- 천(天)---- 대(大)---- 정(正)---- 독(獨)---- 존(尊)---- 벽(壁)----!" 고오오오오…… 굉음은 없었다. 허나 인계의 것이라 볼 수 없는 찬연무쌍한 금빛서기가 천상천하를 뒤덮었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을목천군의 신형은 금빛 광채 속에서 산산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효마(梟魔)의 최후였다. "으윽!" 백리사옥은 나무토막처럼 천공에서 떨어져 내려 지면에 뒹굴었다. 그의 안색은 핏기를 찾아볼 수 없었고 거의 한 사발이나 되는 핏덩이를 토해냈다. 피 속에는 으깨어진 내장 부스러기가 섞여 있었다.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가 순간적으로 창안한 건천대정독존벽을 무리하게 펼쳐 엄중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와아---- 아----!" 군웅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으나, 백리사옥의 귀에는 그것이 메아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때, 구우구우웅…… 구우우우…… 웅……! 갑자기 천공에서 우뢰소리와 같은 굉음이 들리며 먹구름(黑雲)이 덮이기 시작했다. 떠올랐던 태양은 빛을 잃어가고, 하늘은 암천(暗天)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살겁을 노여워하는 하늘(天)은 폭우라도 퍼부으려는가? "아앗! 저…… 저것은!"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부르짖음이 터졌다. 암천이 밀려나듯 갈라지며 그 위로부터 너무도 황홀한 녹색(綠色) 광채가 폭포처럼 퍼부어져 내리고 있었다. 촤아아아아…… 마치 빽빽한 숲 속의 나무 틈으로 퍼부어져 내리는 양광(陽光)처럼 너무도 신비롭고 아름다운 녹색 광채가 지면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녹색 광채에 싸여 천상(天上)으로부터 세 개의 인영(人影)이 천천히 하강하고 있었다. "처…… 천신(天神)이다!" 누군가가 외쳤다. 진정 그렇게밖엔 여겨질 수 없을 정도로 그들 삼 인은 신비롭고 아름다웠으며 장엄했다. 맨 앞엔 한 명 눈부신 미소년(美少年)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도저히 필설로 형용할 수도 없었다. 미소년의 뒤로 양 옆에는 두 사람의 백발노인들이 시립하듯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풍모 또한 신선(神仙)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부---- 복---- 하---- 라----!" 벽력음같은 음성이 천공 어디선가 울림과 동시, 군웅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마음 속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무릎을 꿇지 않은 자는 죽은 자(死者)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쓰러져 있는 백리사옥과 우내제일정은 경악의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헉……! 저 얼굴은……!" 백리사옥은 대경을 금할 수 없었다. "저것은 악마상(惡魔像)에 새겨져 있던 갓난아이! 그렇다면 저 미소년이 바로 악마의 적자란 말인가?" "그, 그렇네! 저 얼굴은 분명히 악마상에 새겨져 있던 그 갓난아기의 얼굴이네!" 우내제일정은 숨을 헐떡이며 뇌까렸다. "악마의 적자가 드디어 현신(現身)을……?" "우리는 아무도 살아날 수 없네." 이때 그들 삼인(三人)은 허공을 밟으며 천천히 귀령봉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백리사옥은 탄식을 토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것이 악마의 실체(實體)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우내제일정이 말했다. "악한 것이 곧 추한 것이라는 인간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네. 또한 겁천악마교의 악마들의 한 집단에 불과했을 뿐, 악마의 진정한 힘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았네." 겁천악마교는 악마들의 한 집단에 불과했다! 얼마나 엄청난 말인가? 그때 백리사옥의 머리에는 천허대사가 보여주었던 종이의 글귀가 떠오르고 있었다. -악마는 삼령(三靈)을 거느리고 천하를 겁세(劫世)하니…… 그렇다면 겁천악마교는 그 중 일령(一靈)에 불과했단 말인가? (이제는 저들을 상대할 일푼의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이런 때 악마의 적자가 나타났으니 이제는 정말 끝인가?) 그렇다. 살아날 길은 없었다. 뉘 있어 악마의 적자를 상대할 수 있으랴? 헌데, 이때 우내제일정은 꺼져가는 음성으로 헐떡거리며 물었다. "배…… 백리소협…… 지금의 시각은……?" 백리사옥은 의아했으나 곧 대답했다. "이제 막 진시(辰時)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 우내제일정의 꺼져가던 눈에 번쩍 기광이 솟구쳤다. (신이여…… 제게…… 마지막…… 한줌의 진기(眞氣)를……!) 돌연 우내제일정은 한 손을 들었다. "가거라----!" 그는 벼락같이 외치며 백리사옥을 냅다 후려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으악!" 백리사옥은 그대로 영문도 모른 채 일 장을 얻어맞고 천장단애 밑으로 떨어져 갔고, 온 천지(天地)를 완전히 통째로 뒤집는 듯한 대폭음(大暴音)이 귀령봉을 쪼개버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진시(辰時)다!" 꽈꽈꽈꽈---- 꽈꽈꽝! 꽈꽈꽝! 꽝! 아아, 그것은 귀령봉에 설치했던 수십 만근의 화약을 벽력문의 고수들이 폭발시켜 버린 것이었다. 쿠꽈꽈꽈---- 꽝꽝! 쿠꽈꽈꽝----! 마치 화산(火山)이 폭발하듯 귀령봉 전체가 통째로 터져버리고 있었다. 그것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대장관(大壯觀)이었다. 십만대산 아래에서 진을 치고 있던 천하각파의 고수들은 모두 그 엄청난 광경을 보았다. 쿠꽈꽈꽈꽈---- 꽈꽈꽈꽈---- 꽈꽈꽈꽈꽝----! 그것은 귀령봉과 함께 천하의 영웅들이 함께 산화(散花)해 버리는 통렬한 음향이었다. 최후의 방법은 악마들과의 동귀어진밖에 없다!


천하각파의 고수들은 일제히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신(神)이여!" "……!" 목이 메어 울음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서는 핏물이 뒤섞인 뜨겁고 뜨거운 물줄기가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신들은 영웅이었소. 영원히 꺼지지 않을 천하무림의 혼(魂)들 이셨소이다. 아아! 뉘라서 당신들을 일컬어 영웅(英雄)이라 부르지 않으리까…… 천하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악마들과 함께 산화하신 그 열혈(熱血), 그 충정(衷情), 천만 년이 지난들 어찌 당신들의 이름을 잊으오리까…… 허나 그 엄청난 폭발 속에서도 세 인영은 천신처럼 솟구쳐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갔음을 그들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천하는 완전히 겁세(劫世) 되리라는 것을 지금은 깨닫지 못했다. 2 십만대산의 어느 고봉(高峯).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선 채 귀령봉의 대폭발을 조용히 주시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작달막한 체구에 별로 특징이 없는 평범한 인상의 노인(老人). 그러나 눈빛만은 비수처럼 날카로워 한눈에도 무한한 간지(奸智)를 엿볼 수 있는 섬뜩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흡사 독수리의 눈빛과도 같다 할까? "……!" 그 섬뜩한 시선으로 노인은 무너지는 귀령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맹수(猛獸)라도 그 눈빛을 대한다면 꼬리를 늘어뜨리고 슬금슬금 물러날 듯한 무서운 눈빛! 문득, 그의 입술이 떼어지며 지독히 무심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훌륭하다. 등후린(登侯鱗), 숭헌후량(崇軒吼良), 좌초백(佐焦伯)!" 등후린…… 숭헌후량…… 좌초백……! 알아들을 수 없는 이름들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나흘탑격, 그자는 너무 컸다. 나 사공청이었더라도 그자를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 사공청(司空靑). 기억하는가? 귀곡하(鬼哭河)의 절봉 어둠 속에서 공야수문의 뒷그림자를 주시하던 눈동자의 주인! 대체 이자는 누구인가? 사공청의 중얼거림은 나지막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나흘탑격, 너는 너무도 몰랐다. 네가 길렀고 네가 천하를 움켜쥐는데 하나의 도구로 이용하려 했던 등후린의 능력을 너는 너무도 경시(輕視)했다. 그리고 숭헌후량과 좌초백의 심계(心計)는 적어도 너 나흘탑격보다 세 배는 뛰어났음을 너는 몰랐다. 너의 죽음은 너의 오만함과 어리석음이 스스로 불러들인 자업자득의 결과!" 사공청은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을 흘려내고 있었다. 허나 분명한 것은 겁천악마교의 멸망에는 뭔가 무서운 음모와 암계(暗計)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며…… 사공천은 그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장 무서운 놈은 숭헌후량, 너는 모든 것을 주도(主導)했고, 안배(安配)했다. 겁천악마교를 제거하는 데 있어, 초령마국과 정사최고고수들을 이끌어들여 공사(共死)시킨 너의 계획은 너무도 치밀하고 완벽했다. 박수를 보내주고 싶을 정도로……!" 무슨 말인가?


숭헌후량! 그가 대체 누구이기에…… 사공청의 두 눈이 시퍼렇게 번뜩였다. "네놈은 교활한 여우다." 그는 뒷짐을 진 한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뭔가가 그의 손에서 가루가 되 푸스스 흘러내렸다. "너 숭헌후량은 대하(大河)의 흐름을 역행(逆行)하려는 우(愚)를 스스로 자초하고 있음을 모르리라.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네가 죽게 된다는 것도……!" 휘이잉…… 잉……! 거친 삭풍은 사공청의 옷자락을 찢어버릴 듯 휘몰아쳤다. "나 사공청을 제외하고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오직 두 명 뿐이다. 하나는 악마의 적자로 태어났으며 장차 악마천자(惡魔天子)라 불리게 될 그 아이 북궁태무(北宮太武), 아니 등후린(登侯鱗)……!" 등후린! "두 번째는 항마성으로 태어나 번천만뇌세가에서 길러진 아이 천무옥(天武玉)!" 사공청의 눈이 또다시 시퍼런 광채를 뿜어냈다. "천기(天機)는 그릇됨이 없다. 저 엄청난 귀령봉의 대폭발에도 천무옥, 그 아이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천무옥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천하의 등후린의 악마지력(惡魔之力)을 상대할 수 있는 자, 오직 천무옥 뿐이다." 바람을 맞으며 사공청은 천천히 어디론가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대하(大河)는 바다(海)로 흐른다. 도중에 어떤 험난과 우여곡절이 있다해도 결국은 바다로 흘러든다. 이것이 바로 대하(大河)의 의미(意味)……!" 대하의 의미! "나 사공청은 대하의 흐름을 역행하는 우(愚)를 자초하지 않겠다. 그것은 어리석고 쓸데없는 헛수고임을 알기에…… 다만 지켜볼 뿐이다. 조용히…… 그리고 끊임없이……!" 사공청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의 진정한 목적과 의도는……? 허나, 그 모든 것들이 아직은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삭풍은 더욱 거세게 불고, 귀령봉에서는 마지막 잔폭발이 여운처럼 울리고 있었다. 3 백리사옥의 신형은 실 끊어진 연처럼 천장단애(千丈斷涯)로 무섭게 추락해 가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라면 그가 아무리 천상대정지체를 지녔다해도 피곤죽이 되버리고 말 것이다. 헌데 그의 몸이 거의 지면에 이르렀을 찰나였다. 두 줄기 괴영(怪影)이 어디선가 빗살처럼 나타나 백리사옥을 받아냈다. 그들은 천붕협에서 백리사옥을 귀찮게 하며 주군(主君)이 되어달라고 졸랐던 거지노인 오색존자(五色尊者)와 연경 자향루에서 백리사옥의 품에 귀갑을 넣어주고 사라졌던 괴노인 색두광도(色頭狂道)였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절벽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떨어지는 백리사옥을 상처 하나없이 받아낸 것이다. "클클……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는데 이제야 확실히 붙잡았군." "흠흠흠! 악마의 적자가 나타나는 것까진 몰랐지만, 어쨌든 예정대로 된 셈이군, 그래……" 그들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응시했다. 백리사옥이 눈을 떴을 때 그가 맨 처음 볼 수 있었던 것은 한 송이 백모란과도 같은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화예상아(花 霜雅)였다. "지하광장이 폭발할 때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보니 이 두 분이 계셨어요." 그녀는 지하동굴에서 혼란한 틈에 오색존자에 의해 구출되었던 것이다. "천마제천부(天魔帝天府)는 본래부터 귀령봉 지하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천마제천부를 지켜온 천마제천쌍위(天魔帝天雙衛)였습니다." 오색존자와 색두광도는 비로소 백리사옥에 대해 주종지례(主從之禮)를 엄숙하게 취했다. "주군께서는 이미 천기(天機)에 의해 이곳에 드시도록 안배되어 있었습니다." 오색존자는 말했다. "허나 주군께서 고집을 부리셨기 때문에 이렇게 어렵게 일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색두광도는 거대한 머리를 긁었다. 그가 귀갑을 백리사옥에게 넣어주었던 것은 천요의 비학에 관심을 가져 백리사옥이 이곳에 오도록 하려던 것이었다. 허나, 그 역시도 그것이 가짜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천요의 장보도라는 귀갑(龜甲)은 우내제일정 등이 정사고수들을 귀령봉으로 집결키 위한 안배에 불과했던 것이 아닌가? 백리사옥은 비로소 지난날 환우회천원 무사들과 혁유사란(赫悠思蘭) 등의 납득되지 않던 의문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혁유사란과 무사들은 천요의 장보도를 유포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것을 환상독존마 등이 추적했던 것이고, 환상독존마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던 까닭도 천요의 장보도를 취하기 위해서였다!) "……" 한 동안의 침묵이 있었다. 어느 순간, 오색존자는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제 주군께선 천마제천부에 드셔야 합니다." 색두광도도 덧붙였다. "천하는 이제 악마의 적란에 의해 겁멸(劫滅)될 것입니다. 진정 천 하를 악마의 손에서 구해내실 구성(救星)은 주군 외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백리사옥은 천마제천부에 들었다. 3 나, 천마대천존(天魔大天尊)이 적는다. 건천무상인(乾天無上人), 천상대정종(天象大正宗), 범밀율태사(梵密律太師), 그리고 나, 사인(四人)은 본시 대반야(大般若)의 후예였느니라. 물론 처음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각자 연업(緣業)에 의하여 절학을 얻어 무학을 익혔으나, 우리가 겁천악마교를 막기 위해 만났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동문(同門)이라 할 수 있다. 그대가 이곳에 들었다면 이미 나머지 삼천(三天) 중 하나 정도는 인연이 닿았었으리라 해서 내가 생전에 익혔던 천마(天魔)의 무학 가운데 가장 애착이 닿았었고, 임종에 이르기까지 깨달은 바를 합친 오직 한 가지 절학만을 전하겠다. 태양천마제천폭(太陽天魔帝天暴)!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존재하는 극양과 극열의 최강체인 태양의 힘(太陽之力)! 그것은 능히 빙산(氷山)이라도 태워버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건천, 상문, 천마, 범천의 최고절학으로도 그대의 당대에 나타날 악마의 적수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방법은 오직 한 가지다. 그대가 네 가지 절학을 모두 얻어 진정한 대반야능력(大般若能力)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니라. 만일 그대가 이곳에 들기 전에 악마의 무리와 부딪쳐 보았다면 나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알리라.


네 가지 절학들은 본시 한 가지 원류(原流)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상통하는 맥(脈)이 하나로 흐르고 있다. 그대가 해야할 급선무는 악마와 싸우는 일보다 네 가지 절학을 합쳐 대반야능력을 성취하는 일임을 명심할 지니라! 천마대천존(天魔大天尊)이 남긴 유지(遺旨)를 불태우면서 백리사옥의 두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천하를 위해 죽어간 수많은 고수들의 얼굴이 하나씩 하나씩 그의 시야에 떠올랐다. 천허대사, 윤회노불, 현정도장, 천도황 헌원적, 대구취허신개, 천사자령종 육도강, 마라혈종 도음사, 건곤쌍필, 사독사종 만사염, 진천마궁 곽천패…… 뿐인가? 천하제일의 의인(義人)이었고,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을 절벽으로 떨어뜨려 목숨을 구하게 했던 우내제일정 문인혁후! 눈물이 흐른다. 사나이의 뜨거운 피눈물이…… "당신들은 죽지 않으셨습니다. 저의 가슴과 천하만민의 가슴속에서 살아 계십니다. 영원히……!" 백리사옥은 일어섰다. 그때 그의 등을 조용히 감싸안은 부드러운 팔이 있었다. 화예상아였다. "옥랑, 우리 모두는 그분들에게 너무도 큰 빚을 진 거예요." 백리사옥은 부르르 떨리는 손길로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갚을 것이오. 그 빚을! 나 백리사옥의 혼(魂)을 바쳐서라도……!" 다음 날 백리사옥은 천축(天竺)으로 떠났다. 사천(四天) 중의 마지막 범왕대천부(梵王大天府)를 열기 위해 머나먼 여정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화예상아에게 당부했다. "내가 떠난 뒤 악마의 혈겁이 천하를 휩쓸더라도 제이밀부(第二密府)에 있는 뇌옥풍 등은 절대 나서지 말라 이르시오.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 "그들은 악마와 싸울 수 있는 최후의 힘이오. 화매 역시 그들과 합류하여 비밀리에 고수들을 모아 주시오. 많은 숫자보다는 정예(精銳)들을……!" 그리고 그는 떠나갔다. 4 십만대산 귀령봉에서 천하의 영웅들이 뼈를 묻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천하에는 경악과 공포의 소식이 전해졌다. -악마(惡魔)가 돌아왔다! 그 말 한 마디만으로도 천하는 떨었다. 악마들의 수뇌가 수천 년 전에 이미 예약된 악마의 적자(嫡子)이며, 겁천악마교라는 것이 그들의 일령(一靈)에 불과했다는 말이 전해졌을 때 천하는 더 이상 놀랄 기력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뉘 있어 그들을 막을 것이냐? 천하무림을 영도하던 최고 수뇌고수들이 십만대산의 고혼이 되어 버린 지금 악마의 힘을 막아낼 자,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천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둠 속에 숨어 숨소리마저 죽인 채 벌벌 떠는 일 뿐이었다. 무림(武林), 무인(武人), 이제 이런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십만대산에서 귀령봉을 바라보며 영웅들의 죽음을 애도했던 무림인들은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지하(地下)로 숨어버렸다. 그런 공포와 정적 속에서 악마는 당당히 천하에 입성(入城)했다. -악마천하(惡魔天下)가 도래했다! 오악(五嶽)의 으뜸인 태산(泰山)에 장엄무비한 악마대성(惡魔大城)이 세워지고, 천하전역에 수천 개에 달하는 악마의 지단(支壇)이 세워졌다.


그와 함께 천하를 지배하는 새로운 주인의 이름이 알려졌다. 악마천자(惡魔天子). 그는 천하를 피(血)로 씻지 않았다. 천하를 혈세하지 않아도 이미 천하는 그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본 천자에게는 천하를 겁세하려는 뜻이 없다. 겁천악마교는 단지 악마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니라! 그는 단 한 가지의 율법(律法)만을 정했다. -천하의 주인이 악마임을 거부하는 자, 악마의 뜻을 어기는자는 구족을 참(斬)한다. 물론 구족이 참수되는 자는 없었다. 율법을 어기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길 가는 코흘리개 어린애를 붙들고 천하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라. 어린애조차 천하의 주인은 악마천자라고 말을 하는 세상! 천하에는 믿어지지 않는 평화(平和)가 찾아왔다. 혈겁은 종식되고 분란은 뿌리를 감춰버렸다. 후세(後世)에 사가(史家)가 있어 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것은 무서운 평화였다. 숨마저 몰아쉴 수 없는 공포 속의 침묵이었다. 칼을 든자 없으되 사람들은 문 밖에 나서려하지 않았고 크게 소리내 말하는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공포 속의 평화! 겉으로 보기에 천하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깊은 잠 속에 억지로 빠져든 거대한 짐승처럼…… 헌데, 바로 그러한 시기에 악마천하(惡魔天下)를 거부하는 네 개의 세력이 나타났다. 그들을 일컬어 천하는 회천사풍(回天四風)이라 하였다. 하늘을 되찾겠다는 네 개의 바람, 회천사풍(回天四風)! 그 첫 번째 바람---- 단혈풍(丹血風)! 모든 것이 신비에 가려진 철저한 지하살수조직(地下殺手組織). 비록 악마대성에 전면전(全面戰)을 선언할 정도의 힘은 없었으 나, 기상천외의 암습(暗襲)과 암살(暗殺)로 악마대성의 지단(支壇)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혹은 정사무림(正邪武林)이 지하에 숨어 조직한 비밀결사(秘密結社)라고도 했고, 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또 다른 신비세력(神秘勢力)의 출현이라고 했으나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악마천자의 척살령(斥殺令)이 떨어졌으나 단혈풍의 꼬리는 잡히지 않았다. 두 번째 바람---- 사새연합(四塞聯合)! 이것은 거의 악마대성에 육박할 만큼 거대한 힘(力)이었다. 호시탐탐 대중원정복의 야욕을 꿈꾸던 새외사패세(塞外四覇勢). 동해 겁해귀역도(劫海鬼域島)! 천축 바라문교(波羅門敎)! 신강 포융차랍궁(抱戎借拉宮)! 만북 묵풍사사(墨風死社)! 그들이 악마의 위협을 의식하여 하나의 연합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악마의 혈보(血步)가 언제 자신들의 영토를 짓밟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들은 바람이었으되 움직이지 않는 잠풍(潛風)이었다. 악마대성이 그들을 치지않는 한 스스로 악마대성에 선전포고 할 생각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분명 악마대성의 적(敵)임엔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언제 어떻게 돌풍(突風)이 되어 밀어닥칠지 모를 거대한 변수(變數)임엔 틀림없었다. 세 번째 바람---- 극중극마(極中極魔)! 그는 단신(單身)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마대성은 이를 최대의 난적(亂敵)으로 여겼고, 직접 부딪치는 것을 꺼려했다. 그는 악마대성의 반도(叛徒)라 했다. 그의 힘은 지난날 겁천악마교주 지존마사 나흘탑격을 능가한다


했다. 그 단 일인(一人)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버린 악마의 지단만도 무려 수십 개에 달했다. 그는 난폭한 한 마리 마수(魔獸)였다. 그리고 악마대성의 최대 적임에 틀림없었다. 네 번째 바람---- 황궁(皇宮)! 또 하나의 거대한 잠풍(潛風). 수천 년의 관례는 무림(武林)과 황궁(皇宮)의 상호불간섭을 유지해왔다. 그런 까닭에 황궁은 아직까지 일어서지 않은 것이다. 또한 첫 번째 겁천악마교의 침공 때와는 달리 천하에 뚜렷한 혈겁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허나 북경(北京) 구문제독부(九門提督府)의 깊숙한 밀실에서는 구문제독 궁무독(宮武獨)의 침중한 노성이 뱉아지고 있었다. -악마천자는 실로 교활한 자이다. 황궁과의 정면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무혈(無血)의 공포(恐怖)로 천하를 움켜쥐었다. 허나 황궁은 결코 잠자는 사자(獅子)가 아니다. 결정적인 시기에 천하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힘으로 악마대성을 짓밟아 버릴 것이다! 천하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힘은 아마 오백만황군을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것이다. 회천사풍(回天四風)! 악마가 천하의 주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네 개의 바람! 그들에 의해 무서운 평화에 눌려 있었던 천하에 다시 서서히 혈풍이 불기 시작했다. 악마천하(惡魔天下)는 이룩될 것인가? 또한, 악마의 적자로서 태어났고, 악마의 뜻에 의해 천지(天地)의 주인이 되리라던 악마천자(惡魔天子)! 회천사풍(回天四風)의 존재를 알면서도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수십 개의 지단이 초토화되었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거대무비한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묵묵히 앉아있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조용히 떠오르는 사악하리만큼 아름다운 마소(魔笑)가 보인다. 그 섬뜩한 웃음이…… 허나, 천하는 알지 못한다. 진정한 천하의 운명은 결코 그들 회천사풍(回天四風) 정도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으되, 진정한 천하의 운명을 가늠할 무서운 이름들도 천하는 모르고 있었다. 등후린(登侯鱗)! 숭헌후량(崇軒吼良)! 좌초백(佐焦伯)! 이제 그들은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암중인(暗中人) 사공청(司空靑)! 이 이름들을 기억하자. 그리고 제삼(第三)의 힘을 준비하겠다던 한 사람의 이름도…… 번천뇌후 공야수문(公冶秀文).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한 사람, 악마대성을 꺾을 최후의 안배를 얻기 위해 수만 리 이토(異土) 천축(天竺)으로 떠나간 사나이의 이름을 기억하자. 백(百)…… 리(里)…… 사(査)…… 옥(玉)……! 제 18 장 깜찍한 소녀 화우라 1 찰극랍파이(察克拉巴爾). 이(爾)라는 것은 중원의 현(縣)에 해당하는 천축의 지명(地名)이다. 천하의 지붕이라 알려진 애불륵사봉( 佛勒斯峯 : 성모봉, 에베레스트)을 넘어서면 북천축(北天竺)의 소읍인 찰극랍파이에 이르게 된다.


휘이이잉…… 잉……! 모래바람이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불고 있었다. 찰극랍파이의 어귀로 모래바람에 실려 온 듯 한 줄기 백영(白影)이 산로(山路)에 모습을 나타냈다. 눈부신 백의에 죽립을 목덜미까지 내려쓴 사내였다. 그는 바로 백리사옥이었다. 범왕대천부(梵王大天府)를 얻기 위해 천축으로 떠나온 그는 이제 북천축의 입구에 들어선 셈이었다. 찰극누그라(察克鹿舍). 여자가 있는 주루를 하라(花舍)라 부르고, 일반 주루와 객잔을 겸한 곳을 누그라(鹿舍)라 부른다. 찰극누그라는 찰극랍파이에 있는 유일한 객잔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헤헤……" 앞머리를 밀어 뒤로 묶어내리고 천(市)을 둘둘 감은 듯한 복장만이 다를 뿐, 객잔에서 손님을 받는 자세는 중원의 점소이와 다를 바 없다. "간단히 요기할 것을 주게." 백리사옥은 자리에 앉았다. 천축어(天竺語)는 이미 달통한 지 오래인 그였다. "중원에서 오신 것 같은데 본국어를 유창하게 하시는군요…… 헤헤." 점소이는 아부섞인 웃음을 흘리며 음식을 가지고 왔다. 보리떡(천축인의 주식임)과 콩을 불려 우유에 담근 음식이었고, 술(酒)도 한 병 곁들여져 있었다. 백리사옥은 음식과 술을 들기 시작했다. 그때 옆 자리에 앉은 주객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붙들렸네." "그래서 구족(九族)이 참수되었다는군……" "범천밀교(梵天密敎)는 이미 이단(異端)이라 하여 잡히면 참형을 당하는 줄 알면서도…… 쯧쯧." 백리사옥의 신경이 곤두섰다. (범천밀교……) 그는 술잔을 들이키면서 신중하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주객들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미 단맥(斷脈)된 줄 알았는데 아직도 뿌리가 남아 있었던가?" "허허, 단맥이라니? 무서운 탄압을 받으면서도 아직도 지하에서 회합을 계속해오고 있다는 거야." "아……!" "그들은 수십 년 전에 실종된 살라무합(殺羅武合)이란 교주가 언젠가는 돌아와 반드시 범천밀교를 일으켜 주리라고 믿고 있다는군." 일순 백리사옥의 가슴에는 형언키 어려운 감회가 밀려들었다. 그것은 살라무합이 죽어가며 말한 잃어버린 범천(梵天)의 영광을 그에게 부탁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깊은 감회였다. (범천밀교의 지하교도들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선 그들을 만나봐야 한다. 그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백리사옥은 천천히 찰극누그라를 나섰다. 2 백리사옥은 산로(山路)를 걷고 있었다. (바라문교의 핍박을 피해 지하에 숨어있는 조직이라면 극히 찾아내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그는 생각에 잠기며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그때, 그의 검미가 꿈뜰거렸다. (음?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생각이 끝나기도 전 백리사옥은 근처에 서 있는 나무 위로 신형을 묻었다.


나타난 인영은 한 명 흑의인이었는데 펼치는 경공신법으로 보아 범상한 고수같지 않았다. 그는 숲 속으로 재빨리 들어오더니 백리옥상이 숨어있는 나무쪽으로 다가들었다. (이자가 눈치를 챘나?) 백리사옥의 추측은 빗나갔다. 흑의인은 나무에 이르러 사위의 동정을 살폈다. 아무런 동정이 없음을 깨달았는지 돌연 그는 손톱으로 그 나무의 한 곳에 무엇인가를 그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다시 사위를 살핀 후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다. 헌데 잠시 후, 또 다른 흑의인 한 명이 그 나무 밑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역시 주위를 살핀 후 어느 한 곳에 무엇인가를 손톱으로 그렸다. 아니 먼저 흑의인의 남긴 것을 지우고 그 밑에 다른 표기를 남기는 것이었다. 이어 그 흑의인 역시 조심스럽게 사라졌다. 나무에 은신하고 있는 백리사옥은 뇌리를 굴렸다. (뭔가 심상치 않다! 어쩌면 또 다른 자가 나타날 것이다!) 그의 눈빛이 일순 빛났다. (역시!) 세 번째의 흑의인이 어디선가 나타났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나타난 그 흑의인은 다른 두 명보다 훨씬 뛰어난 고수인 것 같았다. 불룩 튀어나온 태양혈과 섬뜩한 눈빛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흑의인은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나무에 그려진 표시들을 예리하게 살폈다. 이어 품 속에서 붓을 꺼내 종이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품 속에서 전서구 한 마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전서구의 발에다가 자신이 쓴 서찰을 묶었다. 푸드드득……! 전서구는 힘차게 나래를 치며 일직선으로 날아 올랐다. "흐흐! 이것으로 너희들은 완전히 씨가 마를 것이다!" 흑의인은 득의의 중얼거림을 흘리며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백리사옥은 그가 사라진 뒤 나무에서 날아내렸다. (너희들?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그는 천천히 자신의 한 손을 펴들었다. 헌데 어느새 그의 손에는 흑의인이 날린 전서구가 들려있지 않은가? 전서구의 발목에 묶인 종이를 끌어보았다. <명일(明日) 자시(子時) 사반단사(沙般檀寺).> 단지 그렇게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사반단사라면 무슨 사찰(寺刹)의 이름인 것 같은데?) 그때 백리사옥은 그 글귀에서 몇 가지 사실을 추측해낼 수 있었다. (내일 자시에 어떤 회합이 있다. 그들 속에 잠입한 첩자가 상대편에게 알리는 연락!) 백리사옥의 눈빛이 일순 신광(神光)을 발했다. (씨를 말린다. 그렇다면 혹시 그 회합이란 범천밀교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그는 종이를 태워버리고 전서구만을 날려 보냈다. (그렇다면 사반단사(沙般檀寺)라는 곳을 찾아봐야 한다.) 백리사옥은 오던 길을 돌이켜 찰극누그라로 향해 발길을 떼놓았다. 점소이에게 사반단사의 위치를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백리사옥의 걸음이 뚝 멈췄다. (신음 소리?) 그렇다. 어디선가 미약한 여인의 흐느낌같은 신음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숲 속에 한 소녀(少女)가 쓰러져 의식을 잃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십 사오 세 가량이나 되었을까?


천축 여인들이 주로 입는 위오차(委五叉=평상복)를 입고, 이마에는 비야리(毘耶離=붉은 홍점)를 찍었는데, 필설이 따르지 못할만큼 아름다운 용모였다. 막 애티가 벗어지며 여인의 단계로 접어드는 풋과일 같은 소녀였다. 특히 두 뺨은 잘 익은 사과보다 더 발그레하여 싱싱한 약동의 미(美)를 느끼게 했다. (대단한 미모다!) 소녀는 깊은 혼절에 빠져 있었다. 백리사옥은 그녀의 맥문을 잡고 진맥을 해보았다. (대단한 상처는 아니다. 단지 출혈이 너무 심했다!) 소녀의 한쪽 어깨부분이 완전히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우선 지혈(止血)부터 시켜야겠다!) 백리사옥은 어깨부분의 옷자락을 헤쳤다. 그러자 피에 젖은 속살이 드러났다. 백리사옥은 품 속에서 수건을 꺼내 상처부위의 피를 말끔히 닦으며 지혈을 시켰다. 수건이 금시 피에 푹 젖었다. 백리사옥은 피를 닦아낸 뒤 금창약을 꺼내 상처부위에 발랐다. 순간, 백리사옥의 전신에 아찔한 전율이 일었다. (이…… 이럴 수가……?) 그는 살며시 소녀의 속살을 쓰다듬어 보았다. (어찌 인간의 살결이 이토록 부드러울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소녀의 속살은 부드러운 햇살처럼 너무도 부드럽고 포근 하기 짝이 없었다. (으음 진정 기이한 일이다.) 백리사옥은 다시 한 번 살결을 쓰다듬어 보았다. 손가락으로 기막힌 촉감이 전해지며 전신으로 확 퍼져 들어왔다. 그는 이미 세 여인의 피부, 그것도 은밀한 속살의 촉감을 직접 느껴본 적이 있었다. 혁유사란…… 화예상아…… 뇌연상…… 허나, 이 자의소녀 만큼 가슴 떨릴 정도로 기막힌 촉감을 주지 못했었다. 잠시 후, 그는 어깨부분의 상처를 치유한 뒤 내력을 주입시켜 주었다. 그의 쌍장은 소녀의 양쪽 유근혈(乳根穴)에 바짝 밀착되어 있었다. (신비한 살결이다.) 비록 옷을 사이에 두고 있으나 그의 장심은 충분히 소녀의 신비한 살결을 감촉할 수 있었다. 앞가슴은 어깨부분 보다 더욱 기막힌 부드러움이 전해 들었다. 한데 문득, 찰나지간에 표현치 못할 무서운 열정(熱情)이 불꽃처럼 그의 단전(丹田)부위에서 화르륵 피어올랐다. (으헛!) 백리사옥은 일순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의 양 손이 부지중 소녀의 앞가슴을 움켜쥐었다. 혼(魂)까지 태워버릴 것 같은 황홀한 전율이 전신을 휘감았다. 허나 그것은 극히 찰나지간, 백리사옥은 급히 정신을 추스리며 신색을 평정시켰다. (이 무슨 실태인가?) 이어 자신의 장강과 같은 막힘없는 진력을 주입시켰다. 잠시 후 소녀는 천천히 혼절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헌데 이것은 무슨 일인가? 소녀는 자신의 앞가슴 위에 낯선 남자의 손이 바짝 밀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생긋 미소까지 짓는 게 아닌가? 소녀의 이 신비하고도 화려한 미소에 백리사옥은 하마터면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의 가슴은 진탕을 일으키며 충격을 받았다.


소녀는 문득 말문을 열었다. "아저씨가 저를 구하셨나요?" 티 한 점 없다. 이토록 순수하고 깨끗한 음성이 있을 수 있는가? 백리사옥은 그제야 그녀의 앞가슴에서 두 손을 떼어냈다. 괜스레 손바닥이 근질거렸다. 백리사옥은 부지중 자신의 죽립을 끌어내렸다. 소녀는 천천히 신형을 일으키더니 양 팔을 몇 번 움직여 보고는 기쁨의 외침을 터뜨렸다. "어머! 다 나았네?" 이어, 그녀는 맑은 눈에 반짝 호기심의 눈빛을 떠올렸다. "아저씨는 의원인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는 백리사옥의 죽립 밑으로 바싹 고개를 디밀었다. 스스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 때문에 백리사옥의 죽립이 약간 뒤로 젖혀지며 용모가 드러났다. "야……! 아저씨 너무 예쁘다!" 소녀는 그러면서 두 손을 가슴에 대고 까르르 웃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백리사옥은 절로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어째서 그런 심한 상처를 입게 되었지?" "호호호……!" 소녀는 종달새 우짖는 듯한 교소를 터뜨렸다. 사과빛 양볼에 두 개 볼우물이 패였다. 볼우물이 그녀의 교소보다 더 예쁘고 매력적인 유혹을 자아냈다. 어디 하나 귀엽고 사랑스럽지 않은 데가 없었다. 소녀는 이어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놓았다. "실은 이것 때문이예요." 살짝 혀를 쏙 내밀며 치마 속에서 뭔가를 꺼내보였다. 그것은 호두알만한 하나의 묵주(默珠)였다. "얼마 전에 범천밀교를 믿는다는 사람들 몇 명이 붙들려 죽었어요. 그들의 시체는 모두 목이 잘린 후 불태워졌거든요? 전 그걸 구경하다가 문득 불태워진 재 속에서 이 구슬이 떨어져 있는 걸 봤어요. 제법 값이 나갈 것 같아서 주었는데 어떤 검은옷 입은 아저씨가 따라와서 내놓으라고……" "음……" "전 모른다고 딱 잡아뗐죠! 그러자 화를 내며 절 때렸는데 그 뒤론 기억이 없어요. 치마 속에 숨긴 걸 못찾았나 봐요." 백리사옥은 좀 이상한 의혹이 없지 않았으나 소녀의 순진무구한 태도에 믿지않을 수도 없었다. 소녀는 미끈하고 섬세한 손으로 머리결을 뒤로 쓸어넘겼다. "쳇!" 그녀는 꽃잎같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시체 옆에 있던건데…… 임자도 없는 걸 주워온다고 뭐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티없이 맑은 시선을 백리사옥에게 주었다. "안그래요, 아저씨?" 한쪽 눈을 찡긋 하면서 백리사옥의 앞에 바싹 다가앉았다. 백리사옥은 짐짓 정색을 하며 소녀에게 물었다. "낭자는 집이 어딘가?" 순간 소녀의 티없이 해맑은 두 눈에 얼핏 이채(異彩)가 스쳤다. 허나, 그녀는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호…… 낭자? 전 낭자가 아니라 하우라(花雲)예요. 꽃구름이란 뜻이죠. 제가 지은 이름이예요." "이름을 지었다고?"


"호호…… 아무도 지어줄 사람이 없으니까 제가 지었죠, 뭐!" 백리사옥은 일순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름을 지어줄 사람이 없었다. 그럼 고아였다는 뜻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심성과 밝은 웃음을 지닐 수 있다니……!) "꽃구름이라…… 정말 예쁜 이름이군." 문득 백리사옥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사반단사(沙般檀寺)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있느냐?" 하우라는 생긋 웃으며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전 여기저기 안다녀본 곳이 없는데 왜 사반단사를 모르겠어요?" "위치를 좀 말해주겠느냐?" "여기서 동쪽으로 십 리(十里)가량 쭉 가면 돼요." "알겠다. 그럼……" 백리사옥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하우라는 급히 일어서더니 쪼르르 뒤를 따랐다. "왜 따라오지?" "저도 마침 그곳으로 가던 중이었거든요?" 깡총 뛰어 백리사옥의 등에 매달렸다. "사반단사는 향화가 끊어진 폐찰(廢刹)이예요. 하지만 저같은 사람은 그곳에서 바라비(波羅備)를 해도 상관없어요." "바라비……?" "예. 바라문교(波羅門敎)의 최고축제일(最高祝祭日)인 바라대보절(波羅大寶節)이 사흘후로 다가왔거든요? 모든 사람들은 사흘 전부터 몸을 씻고 소원을 빌 준비를 하지요. 그것은 바라비라고 하는 거예요." "음……! 그렇다면 동행하는 게 좋겠군." 이렇게 두 사람은 동행이 되었다. "호호……!" 하우라는 진정 한 덩이 꽃구름처럼 숲을 누비며 날아갈 듯 빙글빙글 춤까지 추었다. 가을 숲을 뚫고 스며드는 가을 햇살 속에서 하우라는 정말 꽃구름이 되었다. 그녀는 마치 숲의 요정(妖精) 같았다. 하우라는 문득 들꽃 한 송이를 땄다. "아저씨, 이 꽃 예쁘지 않아요?" 그녀는 백리사옥을 향해 예쁘게 웃으며 물었다. "예쁘다." 하우라는 들꽃(野花)을 자신의 머리에다 꽂았다. "아저씨, 이 꽃하고…… 나하고…… 누가 더 예뻐요?" 백리사옥은 빙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기묘한 늪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허나 그다지 기분나쁜 늪은 아니었다. 3 얼마쯤 걸었을까? 문득 전면에 하나의 석탑(石塔)이 나타났다. 삼층(三層)으로 된 탑의 크기는 거대한 전각(殿閣)처럼 크고 웅장했다. "우리들은 저것을 삼도계보탑(三道階寶塔)이라고 불러요." "음……" 백리사옥은 알 수 있었다.


(석존(釋尊)이 도리천(刀利天)에서 삼도보계(三道寶階)를 밟고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는 탑이로군.) 그때였다. "크아악----!" 처참한 비명소리와 함께 한 줄기 청영(靑影)이 탑 내부로부터 퉁겨져 나왔다. 쿠쾅! 청영은 땅바닥에 처박혀 몇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 무서운 계집……!" 그 말만을 남기고 그대로 숨을 거두어 버렸다. 그의 목줄기에는 예리한 검흔(劍痕)이 세로로 쭉 그어져 있었고, 그 곳에서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백리사옥은 시체를 살피다 탑의 문(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놀라운 검흔이다. 예리하고, 무섭도록 깨끗한! 이 정도 검술을 펼칠 수 있는 자라면……?) 하우라는 몸을 가늘게 떨며 백리사옥의 팔을 붙들었다. "무서워요." "가만!" 백리사옥은 그녀의 손을 밀어내며 탑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반단사는 여기서 멀지 않다. 이런 곳에서 싸움이 일어났다면 혹시 범천밀교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백리사옥은 탑문을 발 끝으로 열었다. 순간, "죽엇----!" 날카로운 고함소리와 함께 섬뜩한 백광(白光)이 어둠 속에서 날아들었다. 백리사옥은 신형을 비틀어 백광(白光)을 피해내며 전면을 바라보았다. 탑 안의 석탁(石卓)에 홍의여인(紅衣女人)이 그림같이 조용히 서 있었다. 나이는 대략 이십 세 가량 되었을까? 몸에 착 달라붙은 경장 차림의 전신에선 몹시 냉막하고 차가운 냉기(冷氣)가 뿜어지고 있었다. 허나 그녀의 화려한 미색(美色)을 보라! 태양조차 부끄러워할 황홀한 천하절륜의 미녀(美女)였다. 전신에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뇌쇄적인 미(美)의 기운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허나 미간에는 짙은 수심의 그늘이 서려있어 표현키 어려운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홍의미녀는 차가운 시선을 백리사옥에게 던졌다. "흥! 당신도 그 대발율(大勃律) 가비라(迦毘羅)가 보낸 자객인가요?" 백리사옥은 흠칫 놀랐다. (대발율 가비라, 그는 바라문교의 제 이인자(第二人者)가 아닌가!) 허나, 이내 그는 안색을 추스리며 진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소저! 무엇인가 오해하신 것 같소이다. 본인은 단지 이 근처를 지나다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홍의여인은 냉소를 날렸다. "흥! 시침떼지 말아요. 가비라 그자가 이젠 중원의 고수까지 불러들일 줄은 몰랐군." 완전한 억지였다. 백리사옥의 검미가 한 차례 꿈틀거렸다. "소저! 함부로 사람을 핍박하지 마시오. 나는 자객이 아니오!" "흥! 속지 않는다!" 홍의여인은 허리에서 한 자루 연검(軟劍)을 뽑아 들었다. 눈이 시리도록 백색의 투명한 검신 가운데로 한 줄기 붉은 선(線)이 흐르고 있었다. 홍의여인은 연검을 백리사옥을 향해 기이한 자세로 겨누었다. (무서운 검기(劍氣)!)


백리사옥은 전신을 압박해 드는 무형의 막대한 검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미 검신합일(劍身合一)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내게 살수를 펼치겠다는 것이오?" "흥! 본녀를 쫓던 가비라의 자객들은 모두 죽었다. 비밀을 유지 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자객이 아니라 해도 죽어야 한다!" 백리사옥의 눈빛이 빛났다. (바라문교의 적이라면 범천밀교의 고수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일단 따끔한 맛을 보여 주는 게 좋겠군.) "정, 그렇다면 좋소." 그의 우수(右手)가 가볍게 치켜 들렸다. 바닥에 뒹굴고 있던 나뭇가지 하나가 그의 수중으로 날아 들었다. 홍의여인의 눈빛이 기이한 빛을 뿌렸다. "이 연검은 천축의 보병(寶兵), 만년한철이라도 무처럼 벨 수 있는데 나뭇가지로 상대하겠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자살행위나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나뭇가지! 이게 마음에 드는구려." 백리사옥은 빙긋 미소 지으며 나뭇가지를 들어 올렸다. 백리사옥과 홍의여인은 삼 장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뒤늦게 들어온 하우라는 한켠에서 턱을 괴고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의미심장한 빛이 빛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긴장 속에서 백리사옥과 홍의여인은 상대의 눈을 주시했다. 무서운 기(氣)의 대결을 벌이는 것이었다. 문득 홍의여인의 이마에 몇 방울의 땀이 스며났다. 백리사옥은 태산인 양 우뚝 서 있고, 홍의여인의 이마에선 땀방울이 떨어졌다. 순간 그녀의 교구가 물찬 제비처럼 날았다. 연검의 가공할 검기가 백리사옥의 좌우 견정혈을 무섭게 베어 들었다. 백리사옥은 가벼운 놀람을 보였다. (대단하다! 평범한 무학으로는 상당한 고전(苦戰)을 면치 못하겠군!) 허나 백리사옥이 누군가? 그는 애초에 홍의여인이 범천밀교의 인물이라고 생각했기에 부드럽게 대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난다 한들 백리사옥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 백리사옥은 나뭇가지를 가볍게 쭉 앞으로 내뻗었다. 번---- 쩍! 은은한 푸른빛 지영(枝影)이 홍의여인의 연검에 부딪쳐 들었다. 쌍방 모두 번갯불같은 수법! 귓청을 휘잡아 뜯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터지며 무수한 불똥들이 폭죽 터지듯 터졌다. "아아!" 돌연 홍의여인은 대경성을 터뜨렸다. 무엇인가를 격타하는 짤막한 둔탁음이 들렸다. 홍의여인의 입에서 고통의 비명이 터지고, 그녀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녀의 수중에서 연검이 떨어졌다. 그녀는 당혹의 시선으로 백리사옥을 바라보았다. 백리사옥은 반토막 난 나뭇가지를 들고 의연담담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연검과 부딪쳐 반이 잘라져 버림과 동시, 잘린 부분이 홍의여인의 팔꿈치 곡지혈(曲池穴)을 격타한 것이다. 진정 백리사옥다운 신기(神技)였다.


"……!" 홍의여인은 고통과 경악으로 인해 연검을 집어드는 것조차 잊어 버렸다. 백리사옥은 나뭇가지를 던져 버리고 하우라를 돌아 보았다. "하우라, 가자." 순간, 하우라는 환호성을 질렀다. "호호! 아저씨의 무공은 정말 멋져요. 훌륭하다구요." "쓸데없는 소리!" 그는 하우라의 등을 밀며 산신묘 밖으로 신형을 돌렸다. 그때, 홍의여인이 다급하게 백리사옥을 불렀다. "자…… 잠깐만……!" 백리사옥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빙글 신형을 돌려 세웠다. "아직도 내가 가비라의 자객이란 의심이 풀리지 않았소?" "하…… 한 가지만 물어볼 게 있어요." 홍의여인의 눈에 애절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말해 보시오." "조금 전 펼치신 그 일검(一劍)은 어디서 배우셨나요?" 백리사옥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내가 펼친 일검은 범천개벽륜(梵天開闢輪)에 적혀 있었던 범천다라검(梵天多羅劍)의 제 일식이었다. 역시 이 여인은 범천밀교의……!) 백리사옥은 홍의여인의 신분을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범천밀교의 무학을 펼쳐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과연 그녀는 그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백리사옥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범천삼보(梵天三寶)를 지니고 계셨던 분에게 배웠소." 순간, 홍의여인의 전신이 날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경련했다. "그…… 그분께선…… 어디 계십니까?" 백리사옥은 가슴이 쓰라렸다. (범천밀교의 후예라면 누구나 살라무합이 돌아올 것을 신앙처럼 믿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의 신분은 무엇이오?" 홍의여인은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 허나, 백리사옥을 한 차례 주시하더니 곧 대답했다. "범천밀교의 제 이십 팔대(二十八代) 제자 울리향(鬱利香)입니다." "역시……" 백리사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홍의여인은 애타는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대인(大人)께서는 살라종정(薩羅宗正)을 만나셨습니까?" "만났소.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범천삼보를 물려 받았소." "그렇다면 종정께서는……!" "열반하셨소." 홍의여인, 울리향의 신형이 꺾어지며 바닥에 무너졌다. "그…… 그게…… 진정이옵니까?" 백리사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울리향은 한참동안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녀는 품 속에서 흰 천을 꺼내더니 바닥에 넓게 깔았다. 그리고 신발을 벗고 그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더니 동(東)쪽을 향해 천천히 구배(九拜)를 올렸다. 구배가 끝나자 하늘을 우러르며 통곡같기도 하고 목젖에서 울려 나오는 휘파람 소리같기도 한 괴이한 소리를 한참이나 부르짖는 것이었다. "호우우우…… 호우우우우……" 그녀의 두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볼을 타고 목덜미로 흘러 내리 고 있었다. 그때, 하우라가 백리사옥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것은 범천밀교의 교도들이 사자(死者)의 영혼이 극락에 들도록 빌어 주는 소리래요. 저도 그때 처형장에서 그들이 죽기 전에 일제히 저런 소리를 내는 걸 봤어요." 백리사옥은 일순 가슴에 뜨거운 격정이 휘몰아침을 느꼈다. (살라무합 어르신, 편히 잠드십시오. 당신의 염원, 잃어 버린 범천의 영광은 반드시 되찾게 될 것입니다!) 울리향은 호곡을 마친 뒤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 "대인, 범천삼보를 제게 보여 주실 수 있으신지요?" 백리사옥은 품에서 범천삼보를 꺼냈다. 범천항마탁, 범천번뇌주, 범천개벽륜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울리향은 찬찬히 그것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다시 그것들을 백리사옥에게 되돌려 주고는 무릎을 꿇었다. "제 이십 팔 대 제자, 울리향이 삼가 종정(宗正)을 뵈옵니다!" 백리사옥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조금 당황했다. "우선 일어 나시오. 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 주리다." "명을 받습니다." 울리향은 조용히 일어나 백리사옥의 옆에 시립(侍立)했다. 4 가을밤(秋夜)이 깊어지고 있었다. 나무들을 꺾어 모닥불을 피우고, 그들 세 사람은 어둠 속에 둘러 앉아 있었다. 뚜르르르…… 뚜르르…… 어디선가 늦가을을 알리는 귀뚜라미들이 목놓아 울고 있었다. "그랬었군요." 무릎을 끼고 앉은 채 울리향은 입을 열었다. 모닥불에 익었는지 그녀의 차갑던 옥용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모두들 그분이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있는데 쓸쓸한 중원땅에서 숨을 거두셨다니……" 그녀는 백리사옥으로부터 살라무합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백리사옥이 범천밀교의 종정(宗正)이 아닌, 협조자로서 도움을 주게 될 신분임도 알게 되었다. 백리사옥은 문득 물었다. "범천밀교의 비밀 집회가 내일 사반단사에서 모이기로 되어 있소?" 순간, 울리향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떻게 대인께서 그걸?" "그건……" 백리사옥은 흑의인들의 동태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울리향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그것은 거짓 정보예요." "거짓 정보라니?"


"저희들은 이미 본교내에 첩자가 있음을 이미 알고 있어요. 해서 여러 차례 시간과 장소를 바꾸죠. 제가 알기로 바라대보절(波羅大寶節) 안에는 집회가 없어요." "흠, 하긴 그만큼 신중을 기하지 않는다면 바라문교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기 힘들 것이오." "그래요." 울리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저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명제(命題)는 대인께서 어떻게 범왕대천부의 진전을 얻으시느냐 하는 일과 차대 종정이 되실 살라미형(薩羅美馨)을 어떻게 구출해 내느냐 하는 것이로군요." "그렇소. 울리향 소저의 의견을 듣고 싶소." 울리향은 잠시 침묵하더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범왕대천부에 드시는 일에도 역시 두 가지 난점(難點)이 있어요. 첫째, 범왕대천부(梵王大天府)는 바라문교의 총단인 바라대존궁(波羅大尊宮) 안의 어딘가에 계세요. 그들의 총단에 잠입하여 그 위치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모험이지요. 둘째, 범왕대천부를 열 수 있는 것은 범천개벽륜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위치를 알아낼 수 없어요. 범왕대천부의 위치를 알려면 범천쌍주(梵天雙珠)라는 두 개의 구슬이 있어야 해요. 저희들은 오 랜 노력 끝에 간신히 범천쌍주를 입수할 수 있었어요. 허나 그때는 범왕대천부의 진전을 이을만한 인재(人材)가 없었죠." "……!" "분실될 것을 우려하여 하나는 좌교위(左敎衛)인 제가 보관하고 다른 하나는 우교위(右敎衛)인 마갈타(摩 陀)가 보관했었는데, 마갈타가 지난번에 붙잡혀 처형 당하는 바람에 분실되고 말았어요." 백리사옥은 이때, 기이한 영감이 떠오름을 느꼈다. "그럼 하나는 아직 그대에게 있소?" "예, 이거예요." 울리향은 품에서 호도알만한 묵주(默珠)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순간, 백리사옥은 급히 하우라를 바라보았다. "하우라, 네가 주웠다는 그 구슬을 내놓아 보겠느냐?" "예." 하우라는 서슴없이 묵주를 꺼내 놓았다. 순간, "아! 어쩌면……!"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두 개의 묵주(默珠)는 완전히 똑같지 않은가! "범천쌍주예요! 틀림없어요!" 울리향은 기뻐서 부르짖었다. "하하, 이것으로 두 번째 문제점은 완전히 해결된 셈이군." "그래요! 이젠 어떻게 바라대존궁으로 잠입해 들어 가느냐 하는 것만 남았군요." 사실, 이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백리사옥이 잠입해 들어가지 못할 곳이 어디에 있는가? 허나, 그는 울리향의 말을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사실 지금 바라대존궁에는 이상한 바람이 불고 있어요." "……?" "바라대존궁이 신강, 동해, 막북 등과 함께 악마대성에 대항키 위한 사새연합(四塞聯合)을 결성한 뒤 바라문교의 교주인 바라대천존(波羅大天尊) 비어륭(殺御隆)은 무슨 까닭에선지 비밀리에 고수들을 끌어 모으고 있어요." 백리사옥의 눈빛이 빛을 발했다.


"비밀 고수들을 끌어 모은다?"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여요. 그래서 저희들은 그 이유를 밝혀보려 했지만 실패했고, 단지 바라대보절까지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 두 명의 고수(高手)만을 알아냈어요." "음, 그들은 누구요?" "서장(西藏) 제일의 고수라 알려진 대황라마(大荒喇 )와 하토율천문(蝦土律天門)의 문주인 율천벽사(律天壁邪) 호천곡(昊天曲)이예요." "대황라마…… 율천벽사……!" 백리사옥의 눈에 경악이 솟구쳤다. (서장과 하토의 최강고수들을 불러들이고 있다면 다른 비밀 고수들도 역시 그 정도에 버금가는 고수들일 것이다. 여기엔 필시 중대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중대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일순, 백리사옥은 눈빛을 빛내며 울리향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잠시 후, 울리향은 반색을 하며 손뼉을 쳤다. "됐어요! 그것이야말로 정말 묘책(妙策)이군요!" "그렇소. 우리는 그 방법으로 당당하게 바라대존궁에 입궁(入宮)하는 것이오." "좋아요! 그래서 범왕대천부도 찾고, 그곳 어디엔가 감금되신 살라미형 소주(小主)도 구출해야 겠어요." 그녀는 어느새 살라미형을 소주(小主)라 부르고 있었다. 휘이잉…… 야풍(夜風)이 불었다. 타닥…… 타다닥……! 모닥불은 점점 사그러들고 있었다. 하우라(花雲)는 어느 사이엔지 백리사옥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어 있었다. 백리사옥과 울리향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교차되는 시선은 이 순간 남녀간의 애정보다는 하나의 동지애(同志愛)로써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일, 그들이 향하게 될 바라대존궁(波羅大尊宮)엔 과연 무엇이 그들을 기다릴 것인가? 제 19 장 天竺에 부는 바람 1 목리하분지(木里河盆地). 천축의 한 지방(地方)이다. 휘이---- 이---- 이---- 잉! 야풍(夜風)이 불고 있다. 살을 에일 듯한 삭풍(朔風)이었다. 그리고 그 삭풍에 휘말려 모래들이 눈을 못뜰 정도로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다. 광활한 대분지(大盆地), 험준한 계곡으로 빙 둘러싸인 이곳에 거대한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천축에서는 좀처럼 보기힘든 광경이었다. 천축인들은 천막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막과 산악에서나 볼 수 있는 천막이 이곳에서 보이니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천막 주위에는 수십 명의 인영들이 석상인 양 우뚝 선 채 천막을 호위하고 있었다. 모두 회색 털옷과 두터운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휘---- 이---- 잉! 매서운 바람이 몰아쳐도 그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털모자 밑으로 한 쌍의 눈만이 음산하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때, 두두두두----! 한 필의 말이 눈 속을 뚫고 천막으로 질주해 왔다. 말 위에는 한 명의 흑의무사가 타고 있었다. 천막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천막을 지키는 한 명에게 다가갔다. "바라대존궁(波羅大尊宮)에서 온 사자요. 대천존의 명을 받고 율천벽사(律天壁邪) 호(昊) 문주께 첩지를 전하러 왔소이다." 천막 호위무사는 여전히 음산한 눈빛으로 그를 한번 훑어보았다. "영패를 보여 주시오." 차갑고도 짤막한 음성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흑의무사는 품 속에서 금빛 영패를 꺼내 그에게 전해주었다. 천막 호위무사는 영패를 한차례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시오." 천막 안은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안은 무척 화려했다. 바닥에는 두터운 호피(虎皮)가 깔려 있었고, 상당한 장식품이 사방에 걸려 있었다. 일견하여 몽고풍(蒙古風)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중앙에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태산과도 같은 우람한 체구에 네모진 각진 턱, 머리는 반들반들하게 밀어 뒤로 땋아내린 변발(辨髮)이었고, 일신의 금의(錦衣) 또한 몽고인의 복장이었다. 구릿빛 얼굴에 패도적(覇道的)인 기운이 물씬 풍겨나는 인물이었다. 사나이의 앞에 흑의무사가 공손히 부복했다. 사나이는 문득 그를 응시했다. "바라대존궁에서 왔다고?" 그의 음성은 마치 메마른 낙엽을 비비는 것처럼 탁하고 거칠었다. "그렇습니다. 호(昊) 문주님!" "대천존께선 매우 친절하군. 그래, 문주님께 전할 말이란 무엇이냐?" 여전히 탁한 음성이었다. 흑의무사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호문주님이 아니십니까?" "음, 나는 호문주님을 보좌하고 있는 수석시위 융발(戎發)이다. 문주께선 침소에 계시니 전할 말이 있거든 내게 말하라." "하오나……" 흑의무사는 약간 망설이는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대천존께선 호문주께 직접 첩지를 전하라고 하셨……" "시끄럽다!" 사나이, 융발의 호통이 흑의무사의 말을 무토막처럼 잘라 버렸다. 그 바람에 흑의무사는 질린 듯 경련마저 일으켰다. "어떠한 첩지라도 나 융발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문주님께 전달될 수 없다. 싫다면 물러가거라!" "알겠습니다." 흑의무사는 손을 가늘게 떨며 품 속에서 한 장의 서신을 꺼내 융발에게 내밀었다. 융발은 그것을 펴보았다. 서신으로 인해 융발과 흑의무사의 시선이 일순 차단되었다. 바로 그 순간, 흑의무사의 눈빛이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살기(殺氣)였다. 그와 동시 흑의무사의 등 뒤에 있던 검(劍)이 순식간에 융발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헌데, 아! 이럴 수가?


융발의 가슴을 찌른 흑의무사의 검이 그대로 퉁겨나 버리는 게 아닌가? "이…… 이럴 수가?" 융발은 천천히 서신을 내리며 괴이한 표정으로 흑의무사를 응시했다. "백지의 서신에다 검(劍)이라…… 바라대천존 비어륭이 아무리 친절하다 해도 이렇게까지 친절하진 않다. 후후, 너는 누구냐?" 그러다가 융발의 눈이 더욱 괴이하게 빛났다. "계집이군!" 흑의무사의 안색이 홱 변했다. 문득 융발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이상하군. 밖에 있는 아이들이 귀가 먹지도 않았을 텐데 왜 이런 소란에도 조용하지?" 그때, 천막의 천정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바로 내가 그들의 혈도를 잠시 제압했기 때문이다." 융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 평생 이렇게 놀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음 순간 그의 거대한 체구가 빛살처럼 움직였다. 허나, 그보다도 빠르게 번쩍! 천정에서 한 가닥 금광(金光)이 번갯불처럼 내리 꽂혔다. 순간 융발은 자신의 머리가 화끈해짐을 느꼈다. "크윽!" 천지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의 머리 백회혈에는 어느 사이 한 자루 금도(金刀)가 깊숙이 박혀 있지 않은가? 핏물이 금도를 타고 주르륵 흘렀다. 그때 한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눈부신 백의에 주립을 턱 밑까지 눌러쓴 사내는 백리사옥이었다. 융발은 부들부들 떨리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너…… 너는…… 누…… 구냐?" "그것은 알 것 없다. 단지 율천벽사 호천곡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대부터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지." "무…… 문주를……?" "그렇다." 융발의 안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너…… 너는 어떻게…… 나의 급소가 백회혈임을…… 알았느냐……?" 백리사옥은 담담히 말했다. "저자가 그대를 공격할 때 그대는 가슴을 막지않고 무의식적으로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게다가 저자의 검이 그대의 가슴을 뚫지 못함을 보고 나는 그대가 외문유가진공(外門宥伽眞功)을 익혔음을 알았지." "무…… 무서운…… 놈……!" 융발의 무릎이 꺾였다. 쿵! 그의 거대한 체구가 고목처럼 쓰러져 버렸다. 백리사옥은 일순 흑의무사를 바라보았다. "울리향 소저,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시오." "알겠어요, 대인." 흑의무사는 바로 울리향이었다. 2 분홍빛 휘장에 가려진 침상에서는 지금 한창 열락의 도화경이 열리고 있었다. "아…… 아……!"


건장한 체격의 노인과 요염하고 도발적인 이십대 여인, 그들은 한치의 틈도 없이 맞붙은 채 침상을 축축히 적셔갔다. 사내의 거친 숨결이 여인의 목덜미에 쏟아졌다. 출렁! 한 차례 침상이 비명을 토하는 순간, 여인의 흑발(黑髮)은 파도처럼 춤을 추었다. 사내의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를 타고 가슴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터질듯 풍만한 여인의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여인의 전신에 잔파랑이 일며 등이 활처럼 휘어졌다. "아…… 아……!" 단내가 물씬 풍기는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여인의 자지러지는 듯한 교성이 비음으로 흘렀다. 한 순간, 사내의 몸이 불에 달구어진 듯 급격히 뜨거워졌다. 온통 숨막힐 듯한 열기가 휘몰아쳤다. 여인의 섬섬옥수가 왈칵 비단 금침을 움켜쥐며 부르르 떨었다. 어느새 사내의 입김은 그녀의 가슴을 벗어나고 있었다. "아…… 으…… 음……!" 여인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춘정이 넘실거리는 두 눈에 희열과 쾌락의 빛이 넘실거렸다. 사내는 철저하도록 집요하게 여인을 탐닉했다. "아…… 아……!" 순간, 여인의 나신이 불에 덴 듯 펄쩍 퉁겨 올랐다. 동시에 그녀의 백사(白蛇)같은 두 팔이 사내의 목을 칭칭 휘감았다. 사내는 만족한 듯 괴소를 흘리며 서서히 여인의 나신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이제 서서히 항해는 시작되었다. 여인은 스스로 일엽편주(一葉片舟)가 되었다. 사내는 거친 노도(怒濤)였다. 거칠게 집채만한 파도가 일엽편주를 덮쳤다. (아아……!) 일엽편주는 힘겹게 허공으로 솟구쳤다 떨어져 내렸다. 파도는 쉴새없이 몰아쳤다. 일엽편주는 파도에 휘말리며 차츰 다급해지고 있었다. "아…… 아……!" 숨가쁜 교성이 파도를 밀치며 흘러나왔다. 사내의 숨결 또한 차츰 높아졌다. 여인의 눈까풀에 격정이 넘칠 듯 실려 파르르 떨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사라랑…… 흡사 미풍처럼 한 줄기 백영(白影)이 휘장 사이로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백의인의 죽립 틈에서 한 차례 칼날같은 신광이 뿜어졌다. 허나 그 뿐, 백의인은 미세한 기색조차 남기지 않은 채 천정에 찰싹 달라붙었다. 농염한 황촉불에 드러난 그 모습은 백리사옥이 아닌가? (저자가 바로 율천벽사 호천곡, 하토율천문(蝦土律天門)의 문주!) 지금 침상에서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노인이 바로 하토(蝦土) 최강의 고수 율천벽사(律天壁邪) 호천곡(昊天曲)이었단 말인가? "……!" 백리사옥은 침상을 주시했다. 순간, 그는 가슴 한곳에 화르르 불길이 치솟으며 전신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만큼 침상 위의 열기는 뜨거웠다. (저자의 무공은 이미 입화(入化)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몹시도 색(色)을 밝히는 인물이라 들었다. 과연


듣던대로군.) 그의 시선이 기광을 발하며 호천곡의 목덜미에 꽂혔다. (나 백리사옥은 불필요한 살인을 저지르고 싶지 않다. 저자가 악마대성의 인물도, 그들의 동조자도 아닌 이상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이 옳으리라!)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연인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토하던 여인의 눈까풀이 사르르 떠지는 게 아닌가? 찰나, 우연치고는 기막히게도 백리사옥의 시선과 여인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백리사옥은 예기치 못한 일에 흠칫하며 어색한 미소를 띠웠다. 허나 이미 여인의 두 눈은 경악으로 찢어질 듯 부릅떠지고 있었 다. 교성을 내뿜던 여인의 붉은 입술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허억!" 허나, 경악성은 여인의 입 속에서 희열에 찬 교성으로 변하고 말았다. 어느새, 사내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찍어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호천곡의 탄탄한 동체는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그 우람한 동체가 움직임을 해갈 때마다 여인은 백리사옥의 존재를 잊기나 한 듯 자지러지는 비음을 쏟았다. 여인은 극치의 희열을 느낀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부르르 한 차례 몸을 떨던 여인의 몸으로부터 힘이 빠져나갔다. 바로 그 순간이다. 파---- 팟! 한 소리 둔탁음이 파생되며 진정 상상도 못할 괴변이 일어났다. 여인의 몸을 누르고 있던 호천곡의 신형이 팽그르르 회전하며 그대로 여인의 나신을 박차고 솟아오르는 게 아닌가? 츄앗----! 호천곡은 솟아오르는 기세 그대로 벼락같이 쌍장을 뻗어 백리사옥을 덮쳐가는 것이었다. 실로 촌각지간에 벌어진 이 놀라운 사단! 백리사옥은 예기치 못한 변괴에 놀랐다. 허나 다음 순간, 그는 무서운 기세로 덮쳐드는 호천곡을 향해 전광석화같이 일 장을 격출했다. 퍼펑! 엄청난 격발음이 터지며 호천곡의 신형이 반탄되었다. 백리사옥은 가볍게 허공을 찍으며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뒤늦게 호천곡은 지면을 밟으며 냉혹하게 소리쳤다. "네놈은 누구냐?" 두 눈은 날카롭게 쭉 찢어져 신광(神光)을 발했고, 왼쪽 뺨에 그어진 길다란 검상(劍傷)이 더없이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그의 전신에는 어느사이 뿌연 강막( 幕)이 솟아나 그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우고 있을 정도였다. 백리사옥은 호천곡의 말에 아랑곳 없이 태연하게 반문했다. "당신이 율천벽사 호천곡인가?" 호천곡은 가볍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자가 누구기에 나를……?) 허나 그는 이내 냉정을 회복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백리사옥의 입가로 싸늘한 조소가 어렸다. "호천곡! 당신은 어떻게 내가 천정에 있음을 알았소?" 그 말에 호천곡은 힐끗 침상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침상 위의 여인은 천으로 나신을 가린 채 겁먹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천곡은 괴소를 베어물며 천천히 시선을 백리사옥에게 돌렸다. "흐흐흐…… 번화(蕃花)의 눈에 네놈의 모습이 보였다." 백리사옥은 감탄했다는 듯 검미를 찡긋했다. "대단한 안목이오. 하토 최강의 고수로 손색이 없소이다." 호천곡의 입가로 잔혹한 살기가 묻어났다. "크흐흐…… 이제는 본좌가 묻겠다. 네놈은 누구길래 함부로 본좌의 침실에 침입하였느냐?" "백리사옥!" 백리사옥은 짧게 대꾸했다. "백리사옥?" 호천곡은 일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 물건을 빌리려고 왔소." "한 가지 물건……" "바라대존궁에서 보낸 초빙서(招聘書)!" "뭣이?" 호천곡의 시커먼 눈썹이 불끈 솟구쳤다. "네놈은 바라대존궁으로 잠입하려는 놈이었구나!" "그렇소." "크흐흣…… 이정도 소란이 일어나도록 천막 밖의 아이들과 융발(戎發)이 달려오지 않음은 필시 네놈이 그들을 제압했다는 뜻!" 호천곡의 두 눈에 핏발이 곤두서며 무서운 살기가 피어올랐다. "네놈은 본좌마저도 제압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로구나!" "그렇소." 백리사옥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순간, 호천곡의 안색이 무섭게 일그러지며 전신이 살기로 뒤덮였다. "건방진 놈!" 일갈의 노성과 함께 호천곡은 벼락같이 일 장을 후려쳤다. 험악한 한강(寒 )이 격출되며 일시 백리사옥을 덮쳐갔다. 허나 그것이 호천곡의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그는 일시 자제력을 잃어 백리사옥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백리사옥의 입가로 싸늘한 조소가 스쳐갔다. 다음 순간 그는 몸을 활처럼 휘며 가볍게 장력을 흘려보냈다. 이어 반탄되는 기세 그대로 호천곡을 향해 폭사되며 단숨에 그의 완맥을 움켜잡아 버렸다.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 놀라운 반전이었다. "헉! 네…… 네놈이…… 이럴 수가?" 호천곡은 졸지에 손목을 움켜잡힌 채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백리사옥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자! 이제는 초빙서를 내놓을 수밖에 없겠지?" 호천곡의 안색이 창백하게 급변했다. "내…… 내가…… 네놈을 너무 얕보았다." "호천곡! 승부란 변명이 필요치 않은 법이 아니겠소?" 백리사옥은 호천곡의 완맥을 지그시 누르며 냉랭하게 말했다. 호천곡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대체 네놈은 무슨 목적으로 바라대존궁에 잠입을……"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겠지."


"으으…… 초빙서만 있다고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으……" 허나, 호천곡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이 순간 백리사옥의 모습은 호천곡과 똑같은 또 하나의 율천벽사 호천곡으로 서서히 변하고 있지 않은가? "무…… 무서운…… 놈……!" 팟! 백리사옥은 그의 마혈(麻穴)을 찍어 버렸다. 그리고 지풍을 날려 겁에 질려있는 여인도 제압했다. 그는 호천곡의 몸에 대충 옷을 걸쳐준 뒤, 밖을 향해 소리쳤다. "울리향 소저, 들어오시오!" 울리향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이들을 범천밀교의 비밀교단(秘密敎壇)으로 옮깁시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바라대존궁으로 들어가는 것이오." "그럼 저는?" 울리향이 묻자 백리사옥은 의미있는 미소를 떠올렸다. "소저는 율천벽사 호천곡의 수석내위(首席內衛) 정도로 위장하는 것이 좋겠소." "수석내위라 하시면?" "호천곡은 본시 대단히 여색을 밝히는 인물이었다 하오. 내위(內衛)라고 해두면 바라문의 인물들은 스스로 알아서 짐작할 것이오." "아……!" 울리향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위(內衛)의 의미는 실로 야릇한 것이 아닌가? 범천밀교의 비밀교단은 사파자대고원(娑播慈大高原)이라 불리는 고원지대의 지하 깊숙한 동굴에 위치해 있었다. 백리사옥은 율천벽사 호천곡을 그곳에 감금한 뒤 울리향과 함께 바라대존궁으로 떠났다. 허나, 그때 백리사옥으로서도 단 한 가지 사실만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우라(花雲), 그 깜찍한 소녀는 웬일인지 백리사옥을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백리사옥은 그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을 뿐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백리사옥이 떠나는 순간 섬뜩한 살광(殺光)을 뿜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왜? 그녀의 눈빛은 무엇을 뜻함인가? 어쨌든, 바람은 불기 시작했다. 3 신두대강(辛頭大江=인더스강)은 중원의 황하(黃河)나 장강(長江)에 비길 수 있는 천축의 젖줄이다. 신두대강을 굽어보는 사파자대고원(娑播慈大高原) 위에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거대한 대궁(大宮)이 있다. 바라대존궁(波羅大尊宮). 바라문교도들의 성지(聖地)이며, 천축의 패자(覇者)인 바라대천존(波羅大天尊) 비어륭(殺御隆)이 머무는 곳. 그것은 중원의 황궁인 자금성(紫禁城)과도 비길 만한 곳이다. 야풍(夜風)이 분다. 바라대존궁이 멀리 바라보이는 어느 산어귀에 삼인(三人)이 어둠 속에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청색(靑色) 라마승복(喇 僧服)을 휘감듯 걸친 중년승인(中年僧人)으로, 그는 전면의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고 있었다. "빈승은 대발율사(大算律師)의 명을 받고 귀빈을 모시러온 사탁간(娑鐸幹)이라 합니다." 사탁간은 바라대존궁의 인물이었다.


"하토(蝦土)의 최고고수이신 율천벽사(律天壁邪) 호(昊) 영웅을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전면에 갈색장포(褐色長袍)에 건장한 체격의 노인(老人)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머리엔 갈색 털모자를 눌러쓰고, 두 눈은 날카롭게 쭉 찢어져 신광(神光)을 발했고, 두툼한 입술은 태산처럼 꽉 다물려져 있었다. 왼쪽뺨에 그어진 길다란 검상(劍傷)이 더없이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한 마디로 패도적(覇道的)인 막대한 기도와 위엄이 물씬 풍겨나는 인물이었다. 율천벽사(律天壁邪) 호천곡(昊天曲). 하토(蝦土)의 패자(覇者)인 하토율천문(蝦土律天門)의 문주이며 바라대천존이 초대한 비밀고수 중 일인(一人). 그의 무공은 추측불가라 전해진다. 그의 옆에 절세미녀가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전신에는 백색(白色)의 가죽털옷을 걸쳤는데, 이국적(異國的)인 이목구비가 천상옥녀(天上玉女)를 방불케 하리만큼 아름다웠다. 또한, 그녀의 전신에서는 은은하면서도 도발적인 염기(艶氣)가 느껴졌다. 문득, 그녀는 과육(果肉)과도 같은 붉은 입술로 말문을 열었다. "대발율사의 친절에 감사드려요. 저는 문주를 모시고온 수석내위(首席內衛) 염리향(艶利香)이라 해요." 음성 또한 염기가 뚝뚝 묻어났다. 사탁간은 일순 내심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듣기로 율천벽사 호천곡은 무공은 무적지경에 이르렀으나 색(色)을 몹시 밝히는 위인이라 들었다. 저 계집이 내위(內衛)라면 잠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온 모양이군.) 그는 물론 그런 내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공손히 말했다. "호영웅께선 어서 본궁으로 드시지요. 천축에도 호영웅께서 실망하지 않으실 가화(佳花)들은 적지 않습니다." 순간, 태산처럼 다물려 있던 율천벽사 호천곡의 입에서 기소가 흘러나왔다. "흐흐…… 정말인가?" "물론입니다. 대발율사께선 결코 호영웅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좋아, 안내하라." "예." 사탁간은 몸을 돌려 길을 앞장 섰다. 그 순간, 율천벽사 호천곡과 염리향의 시선이 의미있게 마주쳤다. 천축은 수십 개의 소국(小國)들로 이루어진 나라다. 토사국(吐社國), 도란달라국( 蘭達羅國), 오장국(烏長國), 신두고라국(新頭故羅國), 소발율국(小勃律國)…… 허나, 그들의 각국은 대교(大敎)인 바라문교(波羅門敎)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국왕(國王)이 되려는 자는 바라대천존의 인가(認可)를 얻어야 한다. 그 정도로 바라대천존의 위치는 천축의 절대자이자 살아있는 신(神)적인 존재였다. 수십 개국의 국왕들이 일 년에 한 차례씩 바라대존궁에 모이는 날이 있다. 그것은 바라문교의 최대축일인 바라대보절(波羅大寶節)이었다. 지금, 바라대보절을 하루 앞둔 바라대존궁은 완전히 술렁이는 축제(祝祭)의 분위기였고, 천축 각국에서 온 방문객들로 가득차 있었다. 펑! 펑! 촤아아아…… 파파팟! 펑! 퍼펑---- 추아아아----! 밤하늘(夜天)을 찬란무쌍하게 수놓는 불꽃놀이도 시작되고 있었다. 4 휘이잉…… 휭……!


야풍(夜風)이 몰아치는 사파자대고원의 어느 봉우리에 언제부터인지 인영(人影) 하나가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일신에 곤룡포를 걸치고 턱밑의 교룡(蛟龍) 수염이 멋들어진 엄청난 기도(氣度)의 노인이었다. 휘이이잉…… 휭……! 거센 고원풍(高原風)마저 그 노인에 이르러 드높은 기도에 굴복한 듯 기세를 수그렸다. 곤룡포 노인은 야천을 수놓은 불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대존궁(波羅大尊宮)!" 노인은 깊이를 추정할 수 없는 무심(無心)의 시선을 던졌다. "내일, 바라대보절을 기해 사새연합(四塞聯合)의 하나인 바라대존궁이 사라진다! 그리고 천하는 나 숭헌후량(崇軒吼良)의 위대한 이름을 알게 될 것이다." 숭헌후량(崇軒吼良). 이 이름을 기억하는가? "천하는 악마천자(惡魔天子)의 것이 아니다. 진정한 천하의 주인은 나 숭헌후량! 모든 안배는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진정한 천하의 주인! 숭헌후량은 악마천자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듯한 말투가 아닌가? 광언(狂言)이라 할텐가? 휘리링……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슬쩍! 숭헌후량의 한 손이 가볍게 치켜 들렸다. 순간 한 덩이 잿빛 물체가 그의 수중으로 섬전같이 날아 들었다. 전서구(傳書鳩)였다. 숭헌후량은 전서구의 발목에서 한 통의 서찰을 찾았다. 번갯불같은 신광이 서찰을 훑었다. 다음 순간, 그는 서찰을 움켜쥐며 싸늘하게 외쳤다. "때가 되었다!" 그의 수중에서 서찰이 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숭헌후량은 차갑게 외쳤다. "지옥삼자(地獄三刺)!" 소리없이 세 개의 괴영이 숭헌후량의 뒤쪽에 나타났다. 세 명의 중년인(中年人)이었다. 헌데, 이들에게선 도무지 인간의 감정이라곤 손톱만큼도 풍기지 않았다. 묵의인(墨衣人), 그는 일신에 먹물을 뒤집어 쓴 듯한 묵포(墨袍)를 걸치고, 수중엔 한 자루 묵홀(墨笏)을 들고 있었다. 백의인(白衣人), 그 역시 무표정한 모습으로 특이하게 왼손엔 보기에도 섬뜩한 백색의 고루편( ?鞭)을 동여감고 있었다. 금의인(金衣人), 그는 메마른 분위기의 인물로 두 눈자위가 퀭하게 뚫린 장님이었다. 기이하게도 가슴부분에 한 송이 화려한 황금 빛 꽃이 달려 있었다. 일견키에도 그것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금화임이 분명했다. 삼인(三人)의 분위기는 하나같이 심유(深幽)했으며 이미 초극입성(超克入聖)의 경지에 이른 내가고수(內家高手)임을 쉽사리 알아볼 수 있었다. 또 하나 공통점이라면 그들 전신에 지옥의 숨결처럼 묻어있는 지독한 죽음(死)의 냄새였다. 숭헌후량은 뒷짐을 진 채 나직하게 외쳤다. "바라대천존 비어륭에겐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는 구인(九人)의 비밀시위고수가 있다. 파밀구령자(播密九靈者)."


"……" "죽여라! 흔적을 남기지 말고!" 그 한 마디 뿐이었다. 다음 순간, 지옥삼자는 복명조차 하지 않고 소리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숭헌후량은 재차 나직이 외쳤다. "마면무영(魔面無影)!" 그러자 이번에도 소리없이 괴영 하나가 나타났다. 헌데 괴이하게도 형체가 나타났을 뿐 그 뚜렷한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 단지 사람의 크기만한 뿌연 운무덩어리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라대존궁은 파괴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밀리에 장악되어야 한다. 네가 해야할 일은 극히 중요하다." "……" "너의 마면천변공(魔面千變功)으로 바라대존궁의 인물들을 하나 하나 바꿔치기 하는 것이다." "……" "가거라!" 희뿌연 그림자, 마면무영은 역시 아무런 대답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휘이잉…… 휘이잉…… 바람이 조금씩 거세어지고 있었다. 반면, 바라대존궁의 폭죽소리는 더욱 신나게 터뜨려지고 있었다. 숭헌후량의 전면에 괴인 한 명이 유령처럼 솟았다. 일신에는 시커먼 상복(喪服)을 걸치고 얼굴엔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복면 밑으로 어깨에까지 흑발이 치렁치렁 내려와 있었다. 헌데 전신에선 흡사 사신의 그림자와도 같은 음유(陰柔)한 사기(邪氣)가 죽음처럼 피어나고 있지 않은가? 복면 속에서 은은하게 녹광이 이글거렸다. 숭헌후량은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바라대천존 비어륭의 목숨은 그대에게 맡긴다." "……" "그대 사황(邪皇)이라면 능히 그를 벨 수 있을 것이다." "흐흐흐…… 고맙소." 사황은 썩은 살점이 떨어지는 듯한 괴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내 그는 그 자리에서 유령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숭헌후량의 심유한 눈빛이 다시 신광을 뿜었다. "무혼(無魂)! 악마대성(惡魔大城)의 동태는 어떠하더냐?" 순간, 모습은 보이지 않고 허공 어디에선가 대답이 있었다.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태음(太陰)께선 계속 겁세(劫世)를 주장하시나 천자(天子)는 여전히 천전(天殿)에 틀어 박혀 계실 따름입니다." 숭헌후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너는 성(城)으로 돌아가거라." "존명!" 더 이상 허공에서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휘이잉---- 잉----! 숭헌후량은 바람 속에 천천히 사라져 갔다. "내가 설혹 용(龍)을 키웠다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어차피 너는 소모품에 불과하니까…… 훗훗훗!"


5 율천벽사 호천곡과 염리향이 안내된 곳은 말할 수 없이 호화로운 별실(別室)이었다. 귀빈실이리라. "그럼 편히 쉬십시오." 사탁간은 그들을 안내한 뒤 물러갔다. 율천벽사 호천곡은 방문이 닫히는 것을 보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리향아, 이리와서 다리 좀 주물러다오. 피곤하구나." 염리향은 눈빛을 빛내며 잠시 머뭇거렸다. 율천벽사 호천곡은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어허! 뭘 하고 있느냐? 이국땅에 오니 갑작스레 부끄럼이라도 생겼느냐?" 그는 거칠게 염리향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면서 염리향의 귀에 전음(傳音)을 보내는 것이었다. "울리향 소저. 아직 사탁간의 눈길이 방문 밖을 떠나지 않고 있 소. 내가 시키는대로 응하시오." 그렇다면 이들은 바로……? "우리가 제압하여 범천밀교의 비밀교단(秘密敎壇)에 묶어둔 율천벽사 호천곡이란 인물은 본시 색(色)을 밝히는 위인이라 들었소. 눈치 채게 행동하면 안되오." "아…… 알겠어요." 울리향은 역시 전음으로 대답한 뒤 호천곡, 즉 백리사옥이 이끄는 대로 침상으로 주저앉으며 교태어린 음성으로 외쳤다. "호호호…… 아이, 문주님두 성급하시긴?" "성급하다니? 다리 좀 주물러 달라는데 너야말로 이상하게 받아 들이는구나!" 백리사옥이 여유있게 웃으며 울리향을 끌어안자, 그녀는 염기어린 동작으로 허리를 비틀었다. "아이, 몰라요." 허나, 이때 울리향의 볼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가슴은 소리내어 뛰고 있었다. 아무리 위장을 위해서라 하나, 사내의 품 안에 안겨보기는 처음이었다. (아아……! 이런 기분은 정말…… 처음이……!) 그때, 백리사옥은 전혀 엉뚱한 곳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다니 지독히 의심이 많은 놈이군.) 백리사옥은 내심 입맛을 다시며 울리향의 가슴을 슬쩍 어루만졌다. "헛헛, 언제봐도 네 가슴은 탐스럽구나!" "헉!" 울리향의 전신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허나, 그녀는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에라, 이렇게 된 바에야 나도 몰라! 하긴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이분에게 안겨볼라구?) 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능동적으로 백리사옥에게 휘감겨갔다. "호호호, 문주님이야말로 아직도 삼십대 장한보다 더 멋지세요." 그러면서 백리사옥의 가슴을 옥수로 어루만졌다. 백리사옥은 익숙한 솜씨로 그녀의 속살을 주무르며 그녀의 몸을 침상에 뉘여갔다. "아아…… 아음……" 울리향은 자신의 전신 구석구석에서 화드득 불길이 일어남을 느끼고 신음했다. 입술이 겹쳐졌다. "흡……!" 울리향은 생애 최초로 맛보는 입맞춤의 감촉에 전율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백리사옥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적극적으로 입맞춤에 응했다. "으음…… 음…… 아음……"


(이것이 연극이 아니고 현실이었다면……!) 그녀는 꿈 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백리사옥의 진면목을 처음 보았을 때 자신은 얼마나 놀랐던가? 그는 얼마나 눈부신 모습으로 자신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가? (내가 진정으로 이렇듯 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때였다. "됐소, 소저." 백리사옥이 나직이 그녀에게 말했다. 울리향은 눈을 감은 채 행복에 겨운 음성으로 꿈꾸듯 대답했다. "그래요, 됐어요. 우린 원앙새가 된 거예요." "원앙새?" "그래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저, 사탁간 그자가 이제야 감시를 풀고 돌아갔단 말이오." "그래요. 그자는 돌아갔……!" 울리향은 전신을 화득 떨며 눈을 번쩍 떴다. 일순, 그녀는 자신의 황홀한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잔인한 음향을 들었다. "나쁜 놈, 벌써 가다니……!" "무슨 말이오?" 백리사옥은 의아하여 물었다. 울리향은 순간 얼굴이 새빨개지며 황급히 대답했다. "아, 아니예요…… 사탁간, 그자는 정말 나쁜 놈이죠?" "나쁘다고만 할 수 없지. 그자도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려는 것일 테니까." 울리향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어쨌든 나쁜 놈이예요." 한 시진쯤 후 그들은 대발율사(大算律師) 가비라(迦毘羅)의 방문을 받았다. 천축 바라대존궁의 제이인자(第二人者)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비대한 몸집을 지닌 인물이었다. 마치 거대한 고깃덩어리가 굴러 다니는 듯했다. 허나, 그의 청광(靑光)이 섬뜩하게 빛나는 두 눈을 대하는 순간, 백리사옥은 그가 무서운 심계(心計)를 지닌 고수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헛헛헛…… 원로에 수고 많으셨소이다, 호문주(昊門主)!" 이렇게 너털웃음으로 인사를 꺼낸 그는 울리향을 옆방으로 데려가도록 수하에게 지시했다. "워낙 극비(極秘)의 중대사(重大事)이기 때문이오. 호문주께서 양해해 주시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대신 조금 후엔 본국의 미녀(美女)들로 하여금 특별한 봉사를 해드리도록 하겠소." "흐흐…… 특별한 봉사? 거 구미당기는 말이구려." 백리사옥 또한 기소를 흘리며 눈빛을 탐욕스럽게 번들거렸다. 그리고, 대발율사 가비라는 이른바 극비의 중대사라는 본제(本題)를 꺼냈다. "이번에 특별히 문주를 청한 것은 신강(新疆)과 하토(蝦土) 사이의 천 년 숙한(宿恨)을 해결해 드리고자 함이오." 신강과 하토의 천 년 숙한은 무엇인가? 신강(新疆). 십 팔만리 대중원의 서북(西北) 쪽 수만 리 떨어진 이토(異土). 그곳은 본래 웅장한 천산산맥(天山山脈)을 중심으로 남북(南北)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남쪽은 하토(蝦土)라 부르고, 천산 북쪽의 땅을 융새(戎塞)라 불렀다.


남북으로 나뉘어진 신강에는 역시 남북의 양대세력(兩大勢力)이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며 천년을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남(南)---- 하토율천문(蝦土律天門)! 북(北)---- 포융차랍궁(抱戎借拉宮)! 그들은 각기 천 년 동안 서로의 영역을 불가침(不可侵)하며 신강을 지배해 왔다. 그것은 서로의 힘(力)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그 균형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북(北)의 포융차랍궁에 한 위대한 기재(奇才)가 출현하면서부터였다. 포융대제(抱戎大帝) 아율파(阿律巴). 그는 포융차랍궁 역사상 최고의 대재(大才)인 동시에 야심만만한 효웅(梟雄)이었다. 그가 나타남으로 인해 포융차랍궁의 세력은 점차 남쪽으로 뻗어났고, 반면 하토율천문의 힘은 점차 쇠퇴해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융대제 아율파는 융새와 하토를 합친, 전 신강의 거의 대부분을 점령하는 패자(覇者)가 되었고, 급기야 포융차랍궁은 천축, 동해, 막북과 함께 새외사패세(塞外四覇勢)의 하나로 부상되기에 이르렀다. 대발율사 가비라가 말한 천 년의 숙한이란 포융차랍궁에 짓눌려 있는 하토율천문의 원한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문득, 백리사옥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본문의 원한을 풀 수가 있단 말씀이오?" 대발율사 가비라는 빙긋 득의의 웃음을 지으며 간단히 대꾸했다. "간단하오. 포융대제 아율파를 제거하면 되오." 놀라운 말이었다. 허나, 대발율사 가비라는 그 엄청난 말을 대수 롭지 않게 내뱉고 있었다. 대발율사 가비라의 설명은 이러했다. 이번 바라대보절을 맞아 사새연합의 수뇌회의(首腦會議)가 이곳 바라대존궁에서 열리기로 된 것이었다. 새외사패세의 지존(至尊)들은 각기 친위고수(親衛高手)들만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고 있다. 곧, 중원을 제외한 새외의 최강자들이 천축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말이다. 백리사옥은 진정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새외의 바람이 천축으로 불고 있다……!) 대발율사 가비라는 득의의 미소를 떠올린 채 말을 이었다. "헛헛…… 물론 그들이 온다는 사실도, 언제 어떤 길로 오는가 하는 것도 극비사항이오. 허나 포융대제 아율파가 오는 길과 시각을 본인도 호문주께 알려드릴 수 있소이다." "……!" "그들은 소수(小數)요. 오는 길목을 막아 급습한다면 충분히 도륙해 버릴 수 있소." 백리사옥은 감탄과 의혹을 동시에 느꼈다. (옳은 말이다. 내가 호천곡이었다 하더라도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헌데 이자가 이런 말을 하는 진의(眞意)는 무엇인가?) 백리사옥은 말했다. "물론 본좌에겐 다시없는 천기(天機)요. 헌데……?" "헛헛헛…… 왜 그런 정보를 말해주느냐 하는 말씀이시오?" "솔직히 그렇소." 대발율사 가비라는 잠시 침묵한 뒤 대답했다. "문주께만 말씀드리는 말이지만 사실 본궁은 새외일통(塞外一統)의 야망을 갖고 있소." "새외일통……!" 백리사옥은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말인가? 바라대존궁은 새외사패세를 일통시켜 새외전역의 패자(覇者)가 되겠다는 것이다. (바라대천존 비어륭, 이런 야심을 지닌 인물이었던가?) 백리사옥은 인식을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에 오는 세 지존들을 모두 제거하겠다는 말씀이오?" 대발율사 가비라는 서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호문주께서 포융대제 아율파를 제거한다면 하토, 융새를 합친 신강 전역의 지배가가 되게 해주겠소. 물론 본궁의 약간의 간섭은 받아야겠지만……" 약간의 간섭은 곧 휘하(麾下)가 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백리사옥은 짐짓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무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나 백리사옥은 이 바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그는 침잠된 어조로 물었다. "만일 본좌가 당신들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헛헛헛, 본궁은 호문주께서 하토율 천문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을 이런 절대의 기회를 포기하리라 믿지 않소." "……!" "허나 만일 거절한다면……" 일순 대발율사 가비라의 시선이 방의 한켠을 향했다. 그곳에는 큼직한 옥향로(玉香爐)가 놓여 있었다. "저것은 만년한철보다 세 배는 강하다는 묵령한옥(墨靈寒玉)으로 만든 향로이오." 말하는 순간, 대발율사 가비라의 두 눈에서 섬뜩한 청광(靑光)이 빛났다. 헌데 이럴 수도 있는가? 그의 눈빛을 받은 부분이 마치 반죽을 해놓은 것처럼 일그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백리사옥은 흠칫 놀랐다. (가공하다! 단지 눈빛만으로 묵령한옥을 종잇장처럼 구겨버리다니……!) 진정 공포스런 신기였다. 대발율사 가비라는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헛헛헛, 오늘 밤 자시(子時)에 떠나실 준비를 하시오. 호문주!" 그리고는 비대한 몸집을 흔들며 방문을 나가 버렸다. (거절하면 죽인다 그말인가?) 그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어렸다. (허나 묵령한옥을 종잇장처럼 구기는 것보다 구겨진 것을 펴는 게 세 배는 힘들지.) 일순, 백리사옥의 두 눈에서 두 가닥의 부드러운 빛줄기가 옥향로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러자 그의 눈빛을 받은 옥향로는 천천히 펴지며 원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아닌가? 대발율사 가비라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얼굴빛이 어떻게 되었을까? 백리사옥은 생각했다. (자신들의 능력으로 암습할 수도 있는 것을 일부로 외부인(外部人)에게 시킨다는 것은 만일의 경우 철저히 발뺌을 하겠다는 수작이다.) 그의 입가에는 다시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허나 너희들은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율천벽사 호천곡이 아니라 백리사옥이라는 사실이다.) 이때다. 우우우웅…… 벌레가 몰려드는 듯한 기이한 음향이 울리며 별실의 한쪽 벽면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벽면은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 멈추었고, 그 순간 놀라운 광경이 전개되었다.


선정적인 붉은 조명이 비치는 곳에 네 명의 미녀(美女)가 조용히 그림처럼 서 있었다. 그녀들은 두 명씩 좌우로 서 있었는데, 천축 양탄자로 둘둘 감은 길쭉한 물체를 받쳐들고 있었다. 백리사옥은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드디어 특별봉사가 시작되는가?) 그때, 미녀들은 천천히 미끄러지듯 백리사옥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들은 속살이 은은히 들여다 보이는 검은 나삼(羅衫)을 걸치고 있는 선정적인 차림이었고, 다가오는 걸음걸이 또한 염기(艶氣)를 뚝뚝 흘려내고 있었다. 그녀들은 백리사옥의 앞에 다가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양탄자에 싸인 물체를 내려놓았다. "천비들이 귀인(貴人)을 뵈옵니다." 그녀들은 한 목소리로 말하며 절을 했다. 언뜻언뜻 내비치는 가슴과 허벅지가 백리사옥의 눈을 자극했다. 백리사옥은 자신의 현재 입장을 재인식했다. "헛헛헛헛…… 그래, 그 양탄자에 싸인 물건은 무엇이냐?" "귀인께 바치는 선물이옵니다." 그녀들은 양탄자의 한쪽 끝을 잡고 들어 올렸다. 감겨져 있던 양탄자가 풀려지며 그 속에서 하나의 흰 물체가 나타났다. 한데 놀랍게도 그것은 한 명의 나녀(裸女)가 아닌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육체는 푸들푸들 뛰는 물고기 같았고, 얼굴은 아찔한 현기증이 일만큼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다움이 지나쳐 차라리 요기(妖氣)스럽다고나 할까? 눈은 짙푸른 벽안(碧眼)이었는데 사내의 혼을 빨아들일 듯했고, 관능적이면서도 신비스런 미소를 짓고 있는 타는 듯 붉은 입술에는 입술보다 더 붉은 장미 한송이가 물려 있었다. 그 요염한 미소를 머금고 나녀는 방바닥에 비스듬히 누운 채 백사같은 한 팔을 들어 올렸다. "좀 일으켜 주시겠어요?" 백리사옥은 무의식 중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치 솜털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나녀는 완전히 일어나지 않고 백리사옥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옷을 벗겨 드리겠어요. 제 이름은 자화(慈花)예요."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백리사옥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가슴이 백리사옥의 허벅지를 압박했다. 정성스럽게 마치 조각을 어루만지듯 자화는 백리사옥의 옷을 벗겨냈다. "목욕을 하셔야지요." 백리사옥의 몸이 나신이 되었을 때 자화는 조용히 말했다. 백리사옥은 욕실로 인도되었다. 자화를 비롯한 나머지 네 명 미녀들도 나삼을 버리고 욕실로 따라 들어왔다. 그녀들은 백리사옥의 전신에 향유(香油)를 바르기 시작했다. "호호…… 나이답지 않게 탄탄하고 멋진 몸이세요." 자화는 웃음소리도 나직했다. 그녀는 마치 길들여진 순한 양 같았다. 다섯 미녀들은 정성스럽게 백리사옥의 전신에 향유를 바른 뒤 젖은 헝겊으로 말끔히 닦아냈다. 그리고는 다시 향유를 바르고…… "이젠 탕 안으로 드실 차례예요." 뜨거운 물이 가득 채워진 욕탕 안에 백리사옥은 몸을 뉘였다. 욕탕은 그의 몸이 눕자 약간의 공간이 남았는데, 그 속으로 자화가 따라들어왔다. 물 속에서 여인의 맨살이 닿는 감촉은 말로 형언키 어려운 것이었다. 나머지 네 여인들은 백리사옥의 두 팔과 두 다리를 주무르고, 자화는 그의 몸을 그녀의 나신으로 누르며 문질렀다.


"기분 어떠세요?" 자화는 백리사옥의 몸 위에서 현란한 미소를 흘리며 물었다. "괜찮구나, 헛헛……!" 어찌 괜찮은 정도겠는가? 허나, 그때 백리사옥은 정신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현란한 감촉 속에서도 뇌리를 굴리고 있었다. (자시(子時)까지라면 아직 두 시진 가량 남았다. 그 동안에 범왕대천부의 위치를 확인해 두어야겠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자화를 향해 말했다. "헛헛…… 기분이 좋으니 잠이 오는구나." "그럼 한숨 푹 주무세요. 자시가 되기 전에 저희가 깨워드릴 테니까요." "음…… 알겠다." 백리사옥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니 잠이 든 것이 아니었다. (이기분체환령술(以氣分體幻靈術)! 이럴 때 쓰이게 될 줄은 몰랐군!) 이기분체환령술(以氣分體幻靈術)! 그것은 기환무학(奇幻武學)의 최고경지로, 기(氣)를 이용하여 육체로부터 영(靈)이 빠져 나오는 불가사의한 절학이었다. 건천삼십삼무상예의 절정삼예(絶頂三藝) 가운데 하나. 허나, 이것을 펼치는 동안 육체가 훼손되거나, 어떤 사정으로 인해 한 시진 이내에 귀환하지 못하면 생명을 잃고 마는 것이다. 또한, 육체에서 빠져나온 영은 사고(思考)와 시청각(視聽覺)만을 활용할 수 있을 뿐, 무공을 펼치거나 하는 행동기능(行動機能)은 할 수 없다. 스스스…… 백리사옥은 이기분체환령술을 펼쳐 몸으로부터 빠져 나왔다. 그의 잠든 육체는 여전히 다섯 미녀의 특별봉사를 받고 있었다. 제 20 장 불타는 波羅大尊宮 1 스스스스…… 백리사옥은 바라대존궁의 내부를 탐색하고 있었다. (범천쌍주에 의하면 바라대존궁이 세워진 이 터의 지하 깊숙한 곳에 혈천(血川)이 흐르고 있다 했다. 그 혈천의 밑바닥에 범왕대천부의 입구(入口)가 있다.) 백리사옥은 일순 청각(聽覺)을 곤두세웠다. (건천의 절학 가운데 천리통청공(千里通聽功)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펼치면 능히 백리(百里) 밖에 흐르는 물소리도 듣는다.) 천리통청공을 펼친 채 백리사옥은 귀를 기울였다. 지하(地下) 어디엔가 흐르고 있을 혈천(血川)의 흐름을 들으려는 것이다. 헌데 어느 순간 백리사옥은 뜻밖에 기이한 대화(對話)가 들려오는 것을 감지했다. (이것은 분명 대발율사 가비라의 음성이 아닌가!) 어디선가 과연 대발율사 가비라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모든 일은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막북, 신강, 동해의 지존들은 삼로(三路)에서 모두 제거될 것입니다." "……" 상대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허나, 백리사옥은 그가 바라대천존 비어륭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대발율사 가비라의 음성은 계속되었다.


"신강의 패자 포융대제 아율파를 제거하는 데는 호천곡과 대황라마 둘을 보낼 생각입니다. 호천곡은 본래부터 아율파에게 원한이 깊으며 대황라마 역시 아율파의 세력이 서장(西藏)으로 남하(南下)해 오는 것을 몹시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 둘은 반드시 아율파를 제거하리라 믿어집니다." "……" "만일 그들이 실패한다 해도 제이(第二)의 복병을 매복해 두었습니다. 삼로(三路)의 암살계획은 완벽합니다." "음……" 그제야 상대는 낮은 신음성을 흘려내고 있었다. "본존(本尊)은 그대 가비라를 믿는다. 그대가 세운 계획이라면 한 번도 실패해 본 예가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천존(天尊)!" 과연 보고를 받고 있는 인물은 바라대천존 비어륭임이 분명했다. "본존은 그들 세 사람을 제거한 뒤 수하들을 그들로 위장시켜 돌려보낼 것이다." "……!" "동시 그들 내부로부터 하나씩 중요인물들을 제거하여 피(血)를 흘리지 않고 삼패세(三覇勢)를 고스란히 손아귀에 넣는다. 그들의 전력(戰力) 또한 하나도 다치지 않고……" "그렇습니다." 대발율사 가비라는 득의의 음성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무혈(無血)로 새외일통(塞外一統)을 이룩하는 귀계(鬼計), 호안취계(虎眼取計)입니다." 호안취계(虎眼取計)----! 범(虎)의 눈(眼)을 취해 버린다는 뜻으로, 아무리 사나운 맹수라도 눈을 뽑아버리면 스스로 무너진다는 계략이다. 적의 세력을 그대로 두고, 수뇌인물을 암살, 교체해 버린다는 말이다. "후후후…… 과연 그대 가비라의 머리는 천축제일지(天竺第一智)라 불릴만 하군." "감사하오이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백리사옥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서운 계략이긴 하나 그것은 실로 간교한 수작! 나 백리사옥이 그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 백리사옥의 눈빛이 흠칫 빛났다. (음? 이상한 일이다. 어디선가 엄청난 마기(魔氣)가 느껴지지 않는가?) 마기(魔氣)! 형체도 소리도 없으되, 한 줄기 막대한 마(魔)의 기운이 다가서고 있음을 백리사옥은 느꼈다. (나로서도 섬뜩함이 느껴지는 가공할 마기! 이것은 지난날 겁천악마교의 무리들에게서 느꼈던 마기와 흡사하다! 이곳에 악마의 손길이 뻗쳐오고 있단 말인가?) 백리사옥은 일순 긴장했다. 그리고 범왕대천부를 찾는 일을 잠시 보류하고 상황을 주시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대발율사 가비라는 바라대천존 비어륭과 밀담(密談)을 마치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후후…… 새외일통을 실현하면 그들 세곳 중 하나 정도는 나 가비라가 다스릴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곳에서 힘을 길러 바라대천존을 무너뜨리고 내 손에 새외천하(塞外天下)를 움켜쥘 것이다." 대발율사 가비라는 마음 속 깊이 이런 또 하나의 암계(暗計)를 꾸미고 있었던가? "나 가비라가 언제까지고 천축의 제이인자(第二人者)로 만족할 줄 알았다면 잘못된 생각이지. 후후후……" 그는 입가에 괴이한 웃음을 흘려내며 중얼거렸다. 이때 그의 비대한 체구는 더욱 디룩거리는 것 같았다. 헌데, 그때였다. 어디선가 어둠 속에서 말할 수 없이 사악한 한 줄기 음성이 그의 고막을 파고 들었다. "으흐흐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바로 네놈이다." "……!"


대발율사 가비라의 비대한 체구가 우뚝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의 두 눈에서 시퍼런 청광(靑光)이 섬뜩한 빛을 뿜었다. "웬 놈이냐?" "으흐흐흐, 삶은 통돼지같은 놈!" 지독히 사악한 마소(魔笑)가 어둠을 찢으며 그의 전면에 한 덩어 리의 뿌연 운무(雲舞)가 피어 올랐다. 사람 같은 형상을 하고 있을 뿐 얼굴도 모습도 알아볼 수 없는 운무! 대발율사 가비라의 두 눈에 당혹의 그림자가 일순 스쳐갔다. "헛! 네…… 네 놈은……?" 운무 속에서는 사악하고 짤막한 대답이 있었다. "마면무영(魔面無影), 그렇게만 알아라." "마…… 마면무영…… 그렇다면 네놈은 혹시 악마대성의……" "흐흐흐, 죽을 놈이 말이 많구나!" 마면무영의 괴소가 대발율사 가비라의 음성을 잘라버림과 동시, 스팟! 한 줄기 가느다란 혈선(血線)이 꿰뚫 듯 가비라의 정수리를 향해 폭사되었다. "어림없는 수작!" 가비라의 짤막한 부르짖음이 터지며 그의 비대한 체구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허공으로 치솟았다. 다음 순간, 그는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빙글 선회하며 만면무영을 향해 일수(一手)를 내리 찍었다. "바라와선수(波羅蛙蟬手)! 바다도 뚫는다!" 휘류류류류---- 류륭! 폭풍과도 같은 강기가 와선형으로 또아리를 틀며 마면무영을 후려찍었다. "흐흐흣! 어리석은 놈……" 마면무영의 조소가 흩날리는 순간, 그의 뿌연 신형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대발율사 가비라는 순간 당황했다. "헉……! 네놈이 사술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흐흣! 죽어라----!" 가비라의 좌, 우, 후방 삼면(三面)에서 섬뜩한 세 가닥 혈선(血線)이 무서운 속도로 꿰뚫어 들었다. "헉! 피…… 피할 시간이……. 으아악----!" 퍼퍼퍼퍼퍽----! 대발율사 가비라는 처참한 비명과 함께 머리통이 세 조각으로 짓터져 버렸다. 너무도 어이없는 최후였다. 순간 마면무영의 뿌연 그림자는 가비라의 뒤쪽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고, 이내 완전한 진면목이 드러났다. 헌데, 그의 모습은 바로 대발율사 가비라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지 않은가! 완벽한 위장! 마면무영은 품에서 뭔가 흰 가루를 꺼내 가비라의 시신에 뿌렸다. 스스스…… 시신은 이내 녹아내려 흔적이 없어져 버렸다. "흐흐흐흐…… 바라대천존 비어륭의 접수, 그것은 오늘밤이 새기 전에 마무리 된다." 마면무영은 괴소를 흘리며 천천히 사라져 갔다. 그의 디룩거리는 모습은 영락없이 죽은 가비라의 그것과 똑같았고, 그가 향하는 방향은 바라대천존 비어륭이 거처하는 천존각(天尊閣) 쪽이었다.


(마면무영, 악마대성의 인물이 분명하다!) 백리사옥의 빛나는 눈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음을 마면무영은 알지 못했다. (철저한 자! 비명소리를 막기 위해 주위 십 장 방원에 무형강막(無形 幕)을 펼친 상태로 암습했다!) 백리사옥은 마면무영의 뒤를 밟았다. (어차피 악마대성과 바라대천존 비어륭은 내게 있어 모두 적이라 할 수 있다. 허나 바라대천존 비어륭 전체를 악마대성의 손에 넘겨 줄 수는 없다!) 2 한편, 사파자대고원(娑播慈大高原)의 지하 동굴에 위치한 범천밀교의 비밀교단(秘密敎壇)에 실로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으악!" "큭! 네놈들이 바라문의 첩자들이었을 줄이야!" 수백 명에 달하는 범천밀교의 마지막 후예들은 매몰살의 참화(慘禍)를 당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숨어 있었던 십여 명의 첩자들이 난동을 일으켜 교단에 불(火)을 지르고 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첩자들은 바라문교 내에서도 정상급에 속하는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교묘하게 범천밀교의 교단에 침투하여 범천밀교를 초토화시킬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때, 결정적인 점화(點火)가 된 것은 바로 천축소녀 하우라(雲花)였다. "호호호홋…… 모조리 짓밟아 버려랏!" 그녀는 섬뜩한 교소와 냉갈을 터뜨리며 범천밀교의 교도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청초하고 해맑기만 하던 그녀의 모습이 어떻게 이렇듯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 허나 이것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호호호홋!" 그녀가 교소를 터뜨리며 검(劍)을 휘두를 때마다 서너 개 씩의 수급이 날아가고 있었다. "으아악----!" 그와 함께 바라문교의 고수들은 교단 전체를 질풍처럼 누비며 전 교도들을 남김없이 도륙하고 있었다. 일방적인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크아아---- 아---- 악----!" 마지막 처절한 비명이 밤공기를 찢으면서 대살겁은 막을 내렸다. 이로써 범천밀교의 마지막 잔도(殘徒)들은 완전 섬멸된 것이었다. "호호호홋! 이로써 이 땅에서 범천밀교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하우라는 야천(夜天)을 우러르며 교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교소를 뚝 그치더니 그녀 앞의 십여 명의 흑의인들을 내려다 보았다. "살아남은 자는 없겠지?" 흑의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굽히며 대답했다. "쥐새끼 한 마리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소궁주(小宮主)!" 하우라는 아름다운 입가에 섬뜩한 한소(寒笑)를 피어올렸다. "호홋! 수고했다. 허나, 이까짓 잔당들을 제거하기 위해 나 비화 우련(殺花又連)까지 나서게 한 그대들의 행동은 몹시 무능했다!" "죄…… 죄송합니다, 소궁주!" 흑의인들은 음성과 함께 몸도 떨었다. 하우라, 아니, 비화우련은 야천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차갑게 냉소했다. "흥! 천축의 위대한 신(神)이신 바라대천존의 손녀인 나 비화우련은 얼마 남지않은 범천밀교의 잔당들을 섬멸하지 못하고 거짓 정보 따위에나 농락당하는 그대들의 하는 짓에 비위가 상해 견딜 수 없었다!"


바라대천존 비어륭의 손녀! "나는 이들의 심장부에 침투하기 위해, 처형당한 반도 마갈타(魔 陀)에게서 범천쌍주를 빼내어 울리향(鬱利香)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 "도중에 백리사옥이란 중원인(中原人)이 끼어들어 시간이 좀 지체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셈이다!" 일순, 비화우련은 다시 흑의인들에 시선을 주었다. "감금된 율천벽사 호천곡(昊天曲)은 어찌 되었느냐?"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렁한 앙소와 함께 두 줄기 인영이 야천을 가르며 날아내렸다. "후하하핫! 본좌는 이미 풀려나왔네." 한 사람은 바라문의 고수 흑의중년인, 그리고 앙소를 터뜨리며 내려선 사람은 건장한 체격의 갈포노인(褐袍老人)이었다. 그는 바로 율천벽사 호천곡이었다. "후하핫…… 고맙네, 소궁주!" 율천벽사 호천곡은 포권으로 비화우련에게 사의(謝意)를 표했다. 비화우련도 나직이 웃었다. "호호…… 본궁에서 초빙한 호영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이 본궁에도 있으니까요. 그보다 우리는 빨리 본궁으로 돌아가야 해요. 백리사옥이란 자와 울리향, 그 계집이 더 이상 수작을 꾸미지 못하도록……!" 율천벽사 호천곡은 이빨을 부드득 갈며 눈에서 신광을 내뿜었다. "좋네! 그 두 년놈을 죽이고 말겠네!" ㅆ아아---- 앙----! 율천벽사 호천곡의 신형이 말보다 빠르게 야천을 갈랐다. "가자!" 비화우련도 흑의인들을 향해 날카롭게 외치며 몸을 날렸다. 예기치 않은 바람이 바라대존궁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3 "으아악!" "컥! 이렇게…… 강하다니!" 심장을 휘잡아 뜯는 두 마디 비명성이 야천(夜天)을 흔들었다. 다음 순간, 퍼퍼퍽! 엄청난 강력이 또 한 인물의 머리통을 후려쳤고, 하나의 인영이 피떡이 되어 풀풀 나가 떨어졌다. 휘이잉---- 잉---삭풍이 몰아치는 황야(荒野)에 전신에 묵의(墨衣)를 휘감 듯 걸친 한 위맹한 노인(老人)이 자신 앞에 쓰러진 세 구(俱)의 시체를 쓸어보며 우뚝 서 있었다. "쿠후후후…… 바라대천존 비어륭, 네놈은 나 사사천왕(死社天王)을 너무나 얕잡아 봤다!" 묵의노인, 사사천왕의 묵의는 여러군데가 찢겨지고 가슴과 어깨에서는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허나 그의 눈빛은 화산이라도 태워버릴 듯 무섭게 뻗어나고, 전신에서 내뿜는 막중한 기도(氣度)는 대하(大河)라도 밀어버릴 듯했다. 이처럼 막강한 기도를 뿜어낼 수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막북(莫北)의 패자이며 묵풍사사(墨風死社)의 대지존인 나 사사천왕이 이따위 인물들에게 암살당하리라 여겼다면 오산이다!" 새외사패세의 하나인 막북 묵풍사사의 지존 사사천왕!


그는 사새연합(四塞聯合)의 수뇌회의를 위해 바라대존궁으로 오던 중에 암습을 당했던 것이다. 지금, 그의 발 아래에는 수십 구의 시체들이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고, 지금도 한켠에서는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순, 사사천황은 발 아래 쓰러진 시체 한 구를 한 발로 짓밟았다. 우드드득……! "등격리사막의 사신이라는 사막혈사존(沙漠血死尊)!" 또 하나의 시신이 그의 발 아래 밟히고 있었다. "파라오랍산(婆羅烏拉山)의 늑대, 파라천귀랑(波羅天鬼狼)!" "그리고 서왕부(西王府)의 서왕천모(西王天母)!" 우드득……! 마지막에 밟힌 시신은 여인(女人)의 것이었다. "이들 세 고수가 비어륭의 사주를 받아 본왕을 암습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허나 너희들은 그로인해 지옥(地獄)행을 재촉한 것이다!" 사사천왕은 발에 힘을 주어 시신을 문질러 버리며 차갑게 내뱉았다. "크아아아아---- 악----!" 수십 줄기의 비명성이 천지를 뒤흔들며 피분수와 육편들이 야천을 뒤덮었다. 휘리리링…… 소용돌이처럼 휘도는 가공할 묵풍(墨風)이 황야를 휩쓸며 사사천왕에게 다가들었다. 허나 묵풍은 사사천왕의 삼 장 전면에서 우뚝 멈추었고, 차차 바람이 약해지면서 사람의 형체가 드러났다. 바람 속에서 나타난 것도 전신에 묵의(墨衣)를 걸친 화강암처럼 냉막한 인상의 중년인(中年人)이었다. 그는 바로 신비고수 묵풍무정(墨風無情)이 아닌가! 구겁지옥로에서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흘리며 사라졌던 그는 사사천왕을 수행하고 바라대존궁으로 향하던 중이었는가? 일순, 사사천왕의 입가에 득의의 냉소가 어렸다. "훌륭하다, 묵풍무정! 언제봐도 네 솜씨는 믿음직스럽구나. 후후후……" "과찬이십니다, 지존." 묵풍무정은 감정이 실려있지 않은 음성으로 짤막하게 대꾸했을 뿐이다. 사사천왕의 두 눈에 순간 기광이 흘렀다. (본왕마저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얼음장같은 놈!) 허나 그는 이내 신색을 싸늘하게 굳히며 외쳤다. "가자, 묵풍무정! 바라대존궁을 피로 씻고 비어륭, 그자를 찢어 죽이고야 말겠다!" 휘이---- 익----! 사사천왕의 신형이 빗살처럼 야천을 갈랐다. 묵풍무정은 그의 뒷모습을 침중하게 한 차례 응시하고 나서 곧 그의 뒤를 따랐다. 휘이이---- 이---- 잉----! 또 하나의 바람은 이렇게 바라대존궁으로 밀어닥치고 있었다. 4 "연(連)아를 보냈으니 범천밀교의 잔당들은 이제 완전히 섬멸될 것이다." 바라대천존 비어륭(殺御隆)의 살집 좋은 노안(老顔)에는 잔혹한 득의의 웃음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또한 가비라의 호안취계(虎眼取計)로 새외일통(塞外一統)을 이룩하면 이제 본존의 적수는 악마대성(惡魔大城)밖에 없다!" 비어륭의 두 눈에서 번쩍 섬광(閃光)이 솟구쳤다.


"악마대성, 난적(難敵)이긴 하지만 깨뜨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흐흐흐……!" 그때였다. 똑똑! 방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천존, 가비라입니다." "음? 아직 돌아가지 않았더냐?" "한 가지 중요한 말씀을 드린다는 것을 잠시 잊었습니다." "들어오라." 문이 열리며 대발율사 가비라의 씰룩거리는 비대한 체구가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예, 그것은" 가비라는 뚜벅뚜벅 비어륭의 전면으로 다가왔다. "지난번 범천밀교의 우교위 마갈타를 죽일 때 한 가지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가비라는 무릎을 꿇고 한 통의 봉서(封書)를 받쳐 올렸다. "중요한 정보?" 비어륭은 봉서를 받아 천천히 펴들었다. 헌데, 봉서에는 단 한 글자만이 적혀져 있는 게 아닌가? <사(死).> "무슨 뜻이냐, 가비라!" 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대발율사 가비라의 엄청난 장력이 밑에서 위쪽으로 비어륭을 후려쳤다. 워낙 급습이었고 무서운 기세였다. 허나, 비어륭은 천축이 살아 있는 신(神)이라 불리는 불세고수(不世高手)! 츄팟----! 쿠쾅! 그는 앉아있던 태사의와 함께 뒤로 넘어지며 가비라의 공세를 피 해냈다. 찰나, 비어륭의 신형은 다섯 차례나 급선회하며 한켠 바닥에 우뚝 자리했다. 그의 표정은 이때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가비라, 미쳤느냐?" 가비라의 입에서 섬뜩한 괴소가 날았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뿌옇게 운무처럼 흐려지고 있었다. "크흐흐흣! 가비라는 이미 본좌의 손에 제거되었다. 다음은 너 비어륭!" 비어륭의 두 눈에 경악과 불신이 폭죽처럼 터졌다. "네…… 네놈은?" "마면무영, 악마대성에서 왔다!" "악마대성!" 비어륭은 신음처럼 내뱉었다. 허나, 다음 순간 그의 전신에서는 태산처럼 웅휘한 절대종사(絶代宗師)의 기도가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가소로운 놈! 악마대성이라 하더라도 감히 본궁(本宮)에 난입하여 헛수작을 부릴 수 있으리라 여겼더냐?" 우우우웃……! 바람도 없는데 비어륭의 승포(僧袍)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대해(大海)처럼 밀려나오는 위엄과 기도에 마면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있었다. (과, 과연 천축의 제일인자답다! 대발율사 가비라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때, 비어륭의 입에서 싸늘한 호통이 터졌다. "파밀구령자(播密九靈者)는 어디 있느냐!" 파밀구령자(播密九靈者)! 그들은 바라대천존 비어륭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호위하는 구인(九人)의 비밀고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찰나 천장과 바닥, 좌우 벽면이 종잇장처럼 짓터지며 아홉 줄기의 흑영(黑影)이 비어륭의 전면으로 날아 떨어졌다. 헌데, 그 순간 비어륭의 안색은 참혹한 대경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허억…… 율! 이…… 이게 도대체……!" 파밀구령자들은 하나같이 뻣뻣한 시신(屍身)들이 아닌가! "쿠쿠쿠쿠…… 그 대답은 우리가 해주지." 무섭도록 냉막한 음성과 함께 세 명의 인영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묵의(墨衣)에 묵홀을 든 자가 입을 열었다. "본인은 악마대성의 지옥삼자(地獄三刺) 중 지옥묵령자(地獄墨靈刺)라 한다." 백색 고루편( ?鞭)을 왼손에 감아쥔 백의인이 뒤를 이었다. "본인은 지옥고루자(地獄 ?刺)!" "지옥금화자(地獄金花刺)라 한다!" 마지막 인물은 장님이었고, 금의(金衣)에 금화(金花)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그들 삼인(三人)은 하나같이 악마의 숨결같은 사악하고 음습한 죽음(死)의 냄새가 물씬 묻어 있었다. "파밀구령자는 이미 우리에게 제거되었다!" 바라대천존 비어륭의 안색은 참혹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으으…… 이런 죽일……!" 이때, 마면무영의 사악한 조소가 날았다. "크흐흣! 바라대존궁은 오늘밤 우리가 접수한다!" "우우우우우……" 비어륭의 입에서 짐승의 울부짖음같은 괴성이 터져나왔다. 그의 백발이 분노로 하늘을 향해 빳빳이 곤두섰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비어륭은 폭갈을 내뱉으며 거칠게 일장(一掌)을 마면무영을 향해 후려쳤다. 콰우우우우…… 노도와도 같은 무서운 경력(勁力)이 가공할 기세로 쏟아져 나갔다. "흐흐흐…… 네 목숨은 내가 맡았다!" 어디선가 또 다른 음성이 들려옴과 동시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강력이 비어륭의 강세를 맞받아쳤다. 천장과 벽이 통째로 날아가고 바닥은 쩍쩍 갈라졌다. 비어륭은 두 팔이 은은하게 저려옴을 느끼며 한 발자국 크게 물러섰다. (보통놈이 아니다. 도대체 웬 놈이 또……?) 경악에 물든 비어륭의 시선에 어느 사이엔가 한 괴인(怪人)이 나타나 있었다. 일신에는 시커먼 상복(喪服)을 걸치고 얼굴엔 검은 복면을 쓰고 있다. 복면 밑으로 어깨에까지 흑발이 치렁치렁 내려와 있었다. 전신에선 흡사 사신(死神)의 그림자와도 같은 음유(陰柔)한 사기(邪氣)가 죽음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복면 속의 두 눈에서 터질 듯 뿜어나는 이글거리는 녹광(綠光)! "비어륭, 네 목숨은 이미 내가 맡아 두었다." "네…… 놈은……!" "사황(邪皇), 악마대성의 태사천(太邪天)에서 왔다." 악마대성의 태사천(太邪天)!


"가거라----!" 사황의 입에서 폭갈이 터짐과 동시 그의 몸은 갑자기 세 개로 늘어났다. "사령분신폭(邪靈分身暴)!" 세 개로 나뉘어진 사황의 몸은 전좌우(前左右) 삼면에서 동시에 비어륭을 덮쳐들었다. 순간, 비어륭은 뼛골이 사무치도록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버러지같은 놈들! 모조리 죽여주마!" 비어륭의 신형이 팟! 허공으로 치솟으며 사황의 공세를 맞받아쳤다. 한편 그들의 격전을 바라보고 있는 눈 하나가 있었다. 바로 백리사옥이었다. (급하게 되었다!) 백리사옥은 내심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다음 순간, 팟! 그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자화를 비롯한 천축 미녀들의 특별 봉사를 받으며 잠들어 있던 백리사옥의 몸이 욕실을 박차며 일어났다. "앗! 귀인께서 왜 갑자기……" "왜 그러세…… 흑!" 그들 다섯 미녀들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혈도가 제압되어 버렸다. 다음 순간, 백리사옥은 급히 옷을 주워입고 별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바라대천존 비어륭은 악마대성 고수들의 협공(合功)을 당해내지 못한다! 내가 나서지 않을 수 없다!" 휘류류류류륭……! 백리사옥의 몸은 달리면서 바람 속에 감춰지고 있었다. 건천의 불가사의한 절학, 건천잠영무(乾天潛影霧)를 펼치는 것이었다. - 3 권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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