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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마겁(神魔劫) 제 1 권 惡魔到來 지은이: 司馬達 - 차 례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始 作 악마의 숨결 梵天密敎 惡魔의 洞窟 魔手의 追跡 완벽한 죽음을 위한 按配 血劫의 暴風 네 목숨을 사겠다 天妖의 藏寶圖 天巫神魔脈

제 1 장 始 作 1 그 날…… 악마(惡魔)의 뜻에 의해 하늘은 먹구름을 드리웠다. 그것은 악마좌(惡魔座)의 빛을 지계(地界)에 알리지 않으려는 악마의 뜻이었다. 그 날…… 가리워진 암천(暗天)의 깊은 곳에서 천기(天機)마저 숨긴 채 하나의 녹색성좌(綠色星座)가 빛을 뿌렸다. 그것은 천지간의 모든 극마(極魔)와 극사(極邪)와 극음(極陰)과 극요(極妖)를 지배하는 악마의 성좌였다. 그 날…… 악마의 뜻에 의해 지상 어딘가에서 악마의 적자(嫡子)가 태어났다. 그는 어둠 속에서 태어나 악마를 신봉하는 무리들에 의해 선택 되었고, 그들에 의해 길러졌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부르짖었다. -천지(天地)는 본시 암흑과 혼돈 속에서 창조되었으니, 천지의 주인은 본시 악마였노라! 우리는 이 아이에 의해 잃어버린 천지를 되돌려 받으리라! 그들은 악마의 뜻에 의해 악마의 성전(聖典)을 기록했다. 그것이 곧 악마의 기록이다. 이를 일컬어 악마전(惡魔典)이라 하였다. 악마의 적자가 탄생한 지 십칠년(十七年), 곧 악마력(惡魔歷) 오천구백구십칠년(五千九百九十七年) 사월(四月)! 악마의 뜻에 의해 악마의 족적(足跡)은 시작되었다. 2 그곳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화려한 대전(大殿)이었다. 대전의 내부는 하나의 광장(廣場)을 방불케 했고, 황궁(皇宮)에 비견될 만큼 호화롭고 웅장했다. 길이가 십 장(十丈)에 달하는 길다란 탁자가 십이열(十二列)로 쫙 늘어서 있었다. 탁자 주위엔 대략 일천 명 가량의 인물들이 좌우로 둘러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온갖 미주(美酒)와 가효(佳肴)들이 차려져 있었다. 문득 한 마디 호쾌한 음성이 대전을 울렸다. "오늘 회갑연(回甲宴)의 주인이신 뇌가주(雷家主)께서 나오십니다." 그 말이 끝나자 환성과 박수소리가 폭죽처럼 터졌다. "와아----!" "오오!" 대전 안쪽으로부터 세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와 단상(壇上)으로 올라섰다. "뇌대협이시다!" 좌중의 인물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경의(敬意)를 표했다. 단상에 올라섰던 삼인(三人) 중, 중앙의 금포노인(金袍老人)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포권했다. "불초 뇌모(雷某)의 갑일(甲日)을 잊지 않으시고 왕림하신 여러 군협(群俠)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그의 음성은 마치 쇠북을 쾅쾅 울리는 듯 굉량했다. 군웅들은 마주 포권하며 외쳤다. "천하무림의 대주(大柱)이신 뇌맹주의 갑연을 경하하며 만수(萬壽)를 축원드립니다!" "하하하, 감사하오이다!" 금포노인은 위맹한 너털웃음으로 답했다. 철혈무정도(鐵血無情刀) 뇌천악(雷天岳). 천하 십대세가의 하나인 철혈패천세가(鐵血覇天世家)의 십사대 가주이며 산동무림맹주(山東武林盟主), 철혈패천세가를 일으킨 대가조(大家祖)였던 철혈대제 뇌천붕(雷天崩) 이래 가장 걸출한 기재 로 평가된다. 가학(家學) 철혈천섬백팔도(鐵血天閃百八刀)는 당세에 적수를 만나보지 못했다는 극강절학. 또한, 철혈금강벽(鐵血金剛壁)이란 외문기공으로 그의 몸은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이 된 지 오래였다. "여러 군웅들께 뇌모의 미거한 자식 놈들을 소개해 드리겠소." 뇌천악은 외치며 옆자리에 우뚝 선 남의청년(藍衣靑年)을 돌아 보았다. "풍아, 인사 올리거라." "예, 아버님." 남의청년은 뚜벅뚜벅 걸어나와 군웅들을 향해 포권했다. "무림말학 뇌옥풍(雷玉風), 선고군협(先高群俠)께 인사드립니다." 그의 음성은 정중하면서도 당당했다. 또한 패기 넘치면서도 결코 오만해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시커멓게 쭉 뻗은 힘찬 검미(劍眉), 타오르는 듯한 호목(虎目)과 각진 턱에서는 천하를 짊어질 소년 영웅의 기개와 웅풍이 넘쳤다. "오오, 바로 철혈잠룡(鐵血潛龍)이 아닌가?" "천하를 짊어질 대재로다!" 여기 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어, 단상에는 어느 사이 한 명 자의궁장(紫衣宮裝)을 걸친 미소녀(美少女)가 조용히 자리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용모는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그 위로 드러난 크고 서늘한 눈동자와 늘씬한 자태만으로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소녀 뇌연상(雷燕箱), 여러 고인들께 인사드려요." 그녀의 음성은 은옥(銀玉)이 은쟁반 위를 또르르 구르는 듯 맑고 청명했다. 일순, 군웅들은 다시 탄성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철수옥봉(鐵手玉鳳)!" "과연 천하삼미(天下三美)라 하더니 명불허전이로다!" 철혈잠룡(鐵血潛龍) 뇌옥풍(雷玉風). 철수옥봉(鐵手玉鳳) 뇌연상(雷燕箱).


그들은 다같이 삼군칠영팔추(三君七英八鄒)라 칭하는 당대 최강의 후기지수 십팔인(十八人)에 속해 있었다. 뇌옥풍과 뇌연상을 일컬어 강호에서는 이렇게 노래했다. 鐵血天中龍鳳舞 철혈의 하늘에 용과 봉황이 함께 춤추도다. 뇌천악은 아들딸을 향해 군웅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자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어 그는 단상에 놓인 여섯 개의 태사의를 바라 보았다. "다음은 이 자리에 특별히 왕림하신 몇 분 귀빈(貴賓)들을 소개해 드리겠소이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여섯 명의 인물들이 위엄스럽게 앉아 있었다. "소림(少林)에서 자허선사(慈虛禪師)께서 오셨소이다!" 뇌천악의 말이 떨어지자 맨 좌측에 있던 백염노승(白髥老僧)이 천천히 일어났다. "아미타불, 뇌맹주의 갑연을 진심으로 경하드리오." 자허선사(慈虛禪師). 소림장문 천허대사(天虛大師)의 사제이며 장경각주(莊經閣主)이기도 한 그는 무공만으로 논한다면 소림장문을 오히려 능가하는 불문제일고수(佛門第一高手)였다. "무당(武當)에서는 현정도장(玄頂道長)께서 오셨소." 뇌천악의 말에 이번에는 자허선사의 옆자리에서 황색 도포를 걸친 노도인(老道人)이 일어났다. "무량수불, 뇌맹주의 천수를 비오." 현정도장(玄頂道長). 무당장문 천현신도(天賢神道)의 사숙. 그의 인물됨과 무공은 도가제일성검(道家第一聖劍)이란 말로 대변할 수 있다. 이어, 뇌천악은 차례로 네 인물을 소개했다. 무적제검(無敵帝劍) 사마흠(司馬欽). 천하 십대세가의 하나인 제검무적세가(帝劍無敵世家)의 십삼대 가주인 그는 천하십대세가의 영도자(領導者)격인 인물이었다. 대력천궁사(大力天弓邪) 헌원추(軒轅秋). 대력천궁세가(大力天弓世家)의 십이대 가주. 그의 일시(一矢)는 태산도 꿰뚫는다고 알려졌다. 황금대인(黃金大人) 금위천(金威天). 황금만적세가(黃金萬積世家)의 십 오대 가주인 그의 재물은 천하의 절반을 사고도 남는다 했다. 번천뇌후(飜天腦侯) 공야수문(公冶秀文). 번천만뇌세가(飜天萬腦世家)의 부가주(副家主)이자 총관인 그의 지혜는 가주인 번천대공(飜天大公)보다 뛰어나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로 알려졌다. 번천뇌후는 좌중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가주(家主)께선 와병(臥病) 중이시라 본인이 대리참석케 되었음을 양해 바랍니다." 번천뇌후 공야수문은 다소 침중한 어조로 말하고 천천히 정좌했다. 여인(女人)처럼 흰 피부에 지극히 청수한 얼굴의 인물이었다. 헌데 그의 얼굴엔 짙은 고뇌(苦惱)의 그림자가 어둡게 깔려 있었다. 대체 천하제일의 지혜를 지녔다는 그의 얼굴을 어둡게 하는 고뇌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때, 철혈무정도 뇌천악은 위맹한 음성을 터뜨렸다. "자! 이제 다같이 마음껏 즐겨주시기 바라오!" 그가 좌중을 둘러보며 외치자 군웅들은 환성을 지르며 일제히 일어났다. "하하! 뇌맹주의 천수를 축하하는 뜻에서 모두 건배합시다!" "좋소이다! 뇌대협의 무운(武運)을----!" "하하하하!"


군웅들은 일제히 단상의 뇌천악을 향하여 잔을 치켜들어 부딪쳤다. 쨍! 쨍쨍! 술잔이 부딪치는 가운데 뇌천악은 군웅들을 향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잔을 들었다. "하하하, 고맙소! 고맙소!" 아들 철혈잠룡 뇌옥풍이 두 손으로 술잔을 잡아 아버지에게 몸을 돌려 잔을 올리며 말했다. "아버님! 단숨에 비우셔야 하옵니다." "으하핫, 오냐! 이 아비가 그렇게 늙지는 않았느니라!" 그는 뇌옥풍을 돌아보며 껄껄 웃었다. 그리고 술잔을 성큼 입으로 가져갔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뎅----! 갑자기 대전 밖으로부터 웅장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음?" 뇌천악의 시커먼 눈썹이 꿈틀 치켜졌다. 대전의 군웅들도 일제히 손을 멈추었다. "웬 종소리지?" "글쎄 말이오?" 군웅들이 가볍게 놀라는 사이 두 번째 종소리가 들려왔다. 뎅----! 그것은 마치 괴룡(怪龍)의 울부짖음과도 같았다. 뎅----! 세 번째 종소리가 들렸을 때 군웅들은 경악과 전율을 동시에 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악마(惡魔)의 신음성과도 같다!) 종소리는 마치 죽음보다 깊은 흑암(黑暗)의 귀퉁이 속에서 퍼져오는 듯했다. 천만 년의 유한(幽恨)이 서린 듯 귀기(鬼氣)스러웠다. 흡사 무저갱에 갇힌 악마가 몸부림치며 신음을 토해내는 듯 너무도 끔찍하고 음산한 종소리였다. "마…… 마종(魔鍾)이다!" 일순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을 때다. 뎅…… 네 번째 종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으아아악!" 몸서리쳐대는 처절무비의 비명성이 대전을 찢었다. 군웅들의 시선은 비명성이 울린 곳으로 화살처럼 꽂혀들었다. "아앗!" "저, 저럴 수가!" 그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우박처럼 터졌다. 보라! 철혈무정도 뇌천악은 손에 들었던 술잔을 내동댕이친 채 머리를 양 손으로 움켜쥐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크아아---- 아---- 악----!" 그는 흡사 광인(狂人)처럼 몸부림치며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다음 순간,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괴사(怪事)가 발생했다. 쭈---- 악! 뇌천악의 가슴이 마치 칼(刀)로 후려친 듯 길게 찢어지는 게 아 닌가? 십 장까지 내뿜어지는 피보라……


선혈과 내장이 피범벅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뇌천악의 몸뚱이는 마치 난도질을 당한 것처럼 어지럽게 찢겨져 나갔다. "크아아악!" 걸레조각처럼 처참하게 찢겨지는 육편(肉片)들! 분명 뇌천악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헌데, 그의 전신은 마치 누군가가 형체없는 칼로 난도질하듯 난자되고 있지 않은가? 괴사(怪事)! 믿어지지 않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아버님!" "뇌…… 뇌맹주!" 뇌옥풍을 위시한 군웅들은 전율했다. "이…… 이런 해괴한 일이……?" "으으……" 철수옥봉 뇌연상은 까무라쳐 버렸다. 뇌옥풍이 보다못해 울부짖으며 달려들어 뇌천악의 몸을 껴안았다. 순간, 퍼퍼퍽! 마치 폭죽이 터지듯 뇌천악의 육신은 산산조각으로 폭발해버리지 않는가? "으아아----!" 뇌옥풍은 육편과 핏물을 우박처럼 뒤집어 쓴 채 십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대전 단상은 순식간에 난자(亂刺)된 육편과 핏물이 바다를 이루었다. "으으…… 아…… 아버님……!" 뇌옥풍은 신음과 함께 혼절해 버렸다. 대전의 군웅들은 너무도 경악하여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아…… 아미타불……" 자허선사마저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염주를 더듬었다. (믿을 수 없다!) 자허선사는 자신의 눈을 불신했다. 분명히 흉수(凶手)는 없었다. 설혹 있었다한들 철혈무정도 뇌천악이 누군가? 당금 천하에 그를 죽일 수 있는 고수는 열 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철혈금강벽을 익힌 그의 금강불괴지신은 웬만한 보검(寶劍)으로는 흠집 하나 낼 수 없지 않은가? 더구나, 자허선사를 비롯한 일천여 명의 군웅들이 빤히 바라보는 면전에서 그의 육신이 찢겨지지 않았는가? (종소리! 악마의 신음 같은 종소리! 네 번째 종소리와 동시에 뇌천악은 머리를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육신이 천참만륙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눈 몇 번 깜빡거릴 순간이었다! 천하에 이런 해괴한 일이……!) 자허선사는 신음했다. 도저히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끔찍한 괴사(怪事)였다. (마치 형체가 없는 악마가 그의 앞에 버티고 서서 마도(魔刀)로 육신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아미타불……!" 자허선사는 또 다시 신음처럼 불호를 되뇌이며 대전을 휩쓸어 보았다. 그때 군웅들은 넋이 빠져버린 사람들처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한데, 오직 한 사람만은 달랐다. 번천뇌후 공야수문(公冶秀文), 그만은 석상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의 청수한 얼굴에 드러워진 고뇌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일까?


마치 뇌천악의 참사를 미리 예견이라도 했던 것처럼 그는 침착한 태도로 널브러진 뇌천악의 주검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문득 자허선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 사람은?) 그가 막 번천뇌후 공야수문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다. 돌연 공야수문은 자리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적제검(無敵帝劍) 사마흠(司馬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마대협, 소제가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밖으로 나가실까요?" "그럽시다. 도저히 이게 어찌된 일인지…… 바람이라도 쐬여야 할 것 같군. 허어……" 이윽고 공야수문과 사마흠은 천천히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자허선사의 눈엔 암영(暗影)과 의혹이 함께 떠오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인가?) 자허선사의 주름진 노안에 깊게 드리워지는 암영, 그것이 항차 만천하에 밀어닥칠 무섭고 끔찍한 대혈풍(大血風)의 전조(前兆)였으며 시작(始作)임을 어찌 알았으랴? 또한, 이곳 철혈패천세가만이 아닌 또 다른 천하각처에서도 악마의 족적(足跡)은 시작되고 있었으니…… 3 모란부인(牡丹夫人). 그녀에게 있어 오늘처럼 기쁜 날은 없었다. 천하십대세가의 하나인 천풍여의세가(天風如意世家)의 가모(家母)인 그녀는 오늘의 기쁨으로 인해 십년전(十年前)의 슬픔조차 잊었다. 오늘,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며 천풍여의세가의 소가주(小家主)인 천풍공자(天風公子) 하후섬(夏侯閃)이 성혼(成婚)을 했다. 상대는 구문제독부(九門提督府)의 무남독녀이며 재색(才色)을 겸비한 아름다운 처녀 궁하령(宮霞玲)이었다. 휘영청 만월(滿月)이 그들의 성혼을 축복이라도 하듯 야공(夜空)에 걸려 있었다. 창문을 반쯤 열어놓은 채 모란부인은 자신의 거실에서 창 밖의 야천(夜天)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녀의 나이 사십 이 세, 과거 절세가녀라 불리웠던 그녀의 얼굴에도 이제는 깊은 잔주름이 새겨지고 있었다. (아아, 그분께서 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회한(悔恨)이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우수에 젖은 눈빛이었다. 기실, 그녀는 과부였다. 그녀의 남편이며 가주(家主)였던 여의대 공(如意大公) 하후염(夏侯炎)은 십 년 전 그녀의 곁을 떠났다. 허나 죽은 것은 아니었다. -놈의 종적이 천산(天山)에 나타났소. 급히 다녀와야겠소. 그렇게 말하고 떠났던 여의대공 하후염은 십 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모란부인은 생과부의 쓰라린 세월을 살아온 것이었다. 한데, 그 당시 여덟 살이던 하후섬이 십 팔 세가 되어 오늘 결혼식을 올렸다. 더구나 황군(皇軍)의 권력을 한손에 쥐고 있는 구문제독 휘천대장군(輝天大將軍) 궁무독(宮武獨)의 여식과 화촉을 밝혔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이제는 섬아로 인해 본가가 지난날의 영광(榮光)을 다시 회복할 수 있으리라.) 지난날의 영광이란 천풍여의세가가 당당히 천하십대세가의 수좌(首座)로 군림했던 것을 말한다. 사실 천풍여의세가는 여의대공 하후염의 실종으로 인해 그 위세가 퇴락되고, 이제는 간신히


천하십대세가의 명목만의 일석(一席)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잃어버린 세가(世家)의 영광(榮光)! 그것을 되찾는 것이 모란부인의 염원이었다. 모란부인의 눈가에 물기가 번졌다. (그리고 그분만 돌아오시면……!) 여의대공 하후염은 결코 죽지 않았으리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 가슴까지 늘어진 미염(美髥)을 휘날리며 그녀의 곁 으로 돌아 오리라는 사실을 신앙처럼 믿고 살아온 모란부인이었다. 문득, 열려진 창문으로 야풍(夜風)이 밀려들었다. 휘잉……! "문을 닫아야겠다. 밤바람이 아직도 몹시 차구나." 모란부인은 창문을 닫기 위해 일어섰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띵…… 띵…… 어디선가 야풍을 타고 처량한 금음(琴音)소리가 들려왔다. "이 밤중에 웬 금음(琴音) 소릴까?" 모란부인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띵띵…… 띠…… 띵…… 금음(琴音)은 연이어 들려왔다. 흐느끼는 듯, 애절하면서도 왠지 음산한 귀기(鬼氣)가 금음에 서려 있었다. 금음은 점점 음사(陰邪)스럽게 변해갔다. (금음에 요기(妖氣)가 깃들어 있다!) 모란부인은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서움이 그녀의 전신으로 와락 덮쳐 들었다. 믿어지지 않게도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무…… 문을 닫아야 한다.) 허나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띵……! 또 한 차례 금음이 들려옴과 동시 그녀는 머릿속을 비수로 헤집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으아아악----!" 4 초야(初夜)의 잠자리에 들었던 천풍공자 하후섬은 벌떡 일어섰다. "이것은 어머님의 비명소리다!" 그는 잠옷 바람으로 방문을 걷어차며 모란부인의 처소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쾅! "어머님----!" 천풍공자 하후섬은 문을 박차며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그는 대경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헉!" 보라! 실내를 진동하는 피비린내 속에 모란부인의 신형은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것도 머리가 아랫쪽, 두 발이 천정을 향한 형태로 떠 있었다. 뿐인가? 천풍공자 하후섬이 막 뛰어든 순간 모란부인의 가랑이가 통째로 찢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거인(巨人)이 방 안에 있어 모란부인의 양 발목을 움켜쥐고 반으로 찢어버리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크아아악!" 모란부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터진 것은 당연했다.


천풍공자 하후섬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어머님----!" 겨우 입을 연 그는 모란부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채 몇걸음을 떼기도 전이다. 퍼퍼퍼퍽----! 모란부인의 육신은 마치 폭죽이 터지듯 처참하게 폭발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아악----!" 육편과 핏물에 범벅된 채 하후섬은 방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부릅떠진 눈 속으로 모란부인의 육신이 마구 찢겨 날아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으으…… 이…… 이럴 수는…… 없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핏물 속에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휘이잉---- 잉---아직도 채 닫혀지지 않은 창문으로 음풍(陰風)이 하후섬의 몸을 휘감았다. 그것은 피냄새가 물씬 어린 귀기(鬼氣)스런 바람이었다. …… 보이지 않는 저 어둠 속 깊은 곳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무섭고 엄청난 일이……! 5 철혈패천세가의 밀실 안,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밀실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다름 아닌 번천뇌우 공야수문과 무적제검 사마흠이었다. "그가 진정 그토록 뛰어난 인물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믿기 어렵구려.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라 일컫는 번천뇌후(蒜天腦侯) 공야수문(公冶秀文) 형께서 그토록 찬탄하는 인물이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는군. 대체 그의 나이는 어떻게 되며 공야형과는 어떤 관계시오?" "동문사제(同門師弟)입니다. 나이는 십 칠 세." "그렇다면 겨우 소년이 아니오?" "사마대협." "……?" "천하십대세가의 영도자이신 무적제검(無敵帝劍) 사마흠(司馬欽) 대협답지 않으신 말씀이군요. 어찌 천하의 영웅을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의 지혜가 공야형을 능가한단 말씀이오?" "능가하다 뿐이겠습니까? 그가 비록 나의 사제이긴 하나 소제와 비교한다면 달빛과 반딧불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가?" "그는 하늘이 내린 천고(千古)의 대재(大才)입니다. 학문과 지혜는 말할 것도 없고, 육예(六藝)와 병학(兵學) 또한 천인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 "무도(武道)에 뜻을 두지 않아 무공은 깊이 익히지 않았으나 천하에 존재하는 무공의 구결(口訣) 거의 대부분이 그의 머리에 들어있을 정도입니다."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환술지학(幻術之學)의 달인(達人)이라는 사실입니다."


"환술!" "천하의 모든 기환술(奇幻術)이나 영혼대법(靈魂大法), 기문둔갑(奇門遁甲), 어느 것 하나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오오! 그라면 뇌천악 가주의 괴이한 참사(慘死)를 밝혀낼 수 있겠구려?" "물론입니다. 그가 나서주기만 한다면." "나서주기만 한다면이라니?" "그는 본시 세속(世俗)을 싫어하는 성품입니다. 초야에 묻혀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사는 게 그의 삶이지요. 헌데 무림의 혈사(血事)에 선뜻 끼어들려 하겠습니까?" "사형인 공야형의 부탁이라도 나서주지 않는단 말이오?" "소제는 감히 그를 움직일 수 있는 능력도 자격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움직이게 할 방법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제게 그 방법이 있습니다." "……!" "그는 반드시 몸을 일으킬 것입니다. 마치 천붕(天鵬)이 날개를 펼치듯……!" "그가 사는 곳은 어디이오?" "태행산(太行山) 황택관(黃澤關) 깊은 곳에 천붕협(天鵬峽)이란 계곡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초막을 짓고 밭을 일구며 살고 있지요." "천붕협, 천붕이 숨어사는 계곡이란 뜻인가?" "그렇습니다." "흠, 한데 그의 이름은 무엇이오?" "그러고 보니 그 이름을 불러본 지도 삼년(三年)이 넘었군요. 그의 호는 야헌(野軒), 백리(百里)라는 복성에 이름은 사옥(査玉)이라 합니다." "야헌 백리사옥……" 무적제검 사마흠은 조용히 그 이름을 뇌까려 보았다. 6 황택관(黃澤關). 산서(山西)와 하북(河北) 두 개 성(省)을 경계짓는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어귀에 있는 협관(陜關). 그 깊은 곳에 천붕협(天鵬峽)이라 이름 붙여진 절곡이 있다. 계곡 양편으로 솟은 기암(奇岩)의 형태가 마치 붕(鵬)의 날개(翼)같다 하여 명명된 이름이다. 이른 새벽에 김을 매어 밭을 손보고 달빛을 몸에 받으며 괭이를 메고 돌아온다. 길은 좁은데 草木은 자라서 저녁 이슬이 내 잠방이를 적시누나. 옷이야 젖더라도 대수로운가. 봄바람에 흐르는 꾀꼬리 소리가 아름다운 걸…… 소년(少年). 눈부시게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을 등에 지고 소년은 괭이질을 하면서 시(詩)를 읊조린다. 밭을 일구는 모양이었다. 몸에는 헐렁한 모시옷을 걸치고 이따금씩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내면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십 칠팔 세나 되었을까? 약간 구릿빛으로 그을린 팔목과 얼굴이 더없이 신선하고 건강해 보였다. 소년이 일구고 있는 밭은 산등성이를 개간하여 만든 것이었다. 콰콰콰콰---계류(溪流)는 한쪽에서 폭포처럼 울며 흐르고, 뾰르릉…… 뿅!


이름모를 산새들은 지저귀며 소년의 엎드린 등과 어깨에 내려앉는다. 산중별경(山中別境)이다. 문득 소년은 괭이질하던 손길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휴우! 좀 쉬었다 하자." 괭이를 한쪽으로 던져놓고 털썩 밭 가운데 주저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순간 소년의 용모가 환히 드러났다. 약간 구릿빛으로 그을린 소년의 얼굴은 마치 천인(天人)이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태산준령처럼 쭉 뻗은 콧날, 꽃잎을 베어문 듯한 붉디 붉은 입술, 붓으로 힘차게 그은 듯한 선연한 검미(劍眉), 특히 눈(眼)은 만경창파 구비치는 대해(大海)를 보는 듯하다. 아니, 끝없이 펼쳐진 만리창천(萬里蒼天)을 보는 듯 너무도 심유(深幽)하면서도 신비롭지 않은가? 단언컨대, 천하의 누구라한들 소년의 눈빛을 한 번 보면 영혼마저 빨려들고 말리라! 그러면서도 얼굴 전체에서 풍기는 인상은 굽힐 줄 모르는 기개와 의지(意志)를 내포하고 있었고, 감히 범접키 어려운 위엄과 기품(氣品)이 은은하게 서려 있었다. 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에게선 왠지 따스한 인간미(人間味)와 친밀감이 느껴진다. 무엇 때문일까? 허름한 모시옷을 걸치고 밭을 일구는 소박한 모습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입가에 어린 봄날처럼 부드러운 미소(微笑) 때문일까? 소년은 산등성이로 불끈 솟아오르는 찬란한 조양(朝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하, 떠오르는 해를 보는 건 언제나 즐겁다. 일할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많으니까." 소년은 자못 유쾌하다는 듯 낭소를 터뜨렸다. "사람들은 흔히 새로 일어나는 힘(力)을 떠오르는 태양에 비유하지만 그건 잘못이지. 떠오른 해도 여섯 시진이 못되어 서산에 지고 만다는 이치를 왜 모를까?" 소년의 독백은 유유자적(悠悠自適), 만물의 이치를 이미 깨달아 세속(世俗)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 "자, 일어나볼까? 오늘 안에 밭 일구는 일을 모두 마쳐야 한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괭이를 찾아 잡았다. 백리사옥(百里査玉). 이 소년의 이름이다. 그가 스스로의 호를 야헌(野軒)이라 짓고 이 천붕협에 살기 시작한 것은 이년(二年)쯤 전부터였다. 그는 주경야독으로 야인(野人)의 삶을 즐겼으나 산어귀에 있는 무안현(武安縣)의 농민(農民)들과는 가끔 유대를 갖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무안현에 들렀을 때 중병으로 숨이 끊어져가는 환자노인을 보게 되었다. 백리사옥은 금침(金針)으로 노인을 살려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가끔 환자를 돌보아 주었다. 약방 하나도 변변이 없는 소읍(小邑) 무안현의 농민들에게 있어 백리사옥은 의신(醫神)과 같은 존재였다. 백리사옥은 계속 밭을 일구고 있었다. 이때, 한쪽 숲 속으로부터 걸걸한 대소성이 터져나왔다. "컬컬컬…… 날씨 한 번 빌어먹게 좋다!" 동시 숲 속으로부터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헌데 사람보다 먼저 부근 십 장 방원에 지독한 술내음(酒香)부터 번져왔다. 웬만한 사람은 그것을 맡기만 해도 취해버릴 만큼 지독한 술냄새였다. 나타난 사람은 걸인(乞人)이었다. 넝마를 연결시켜 만든 듯한 꾀죄죄한 누더기, 바늘 귀같이 작은 눈에다가 군데군데 웅덩이가 패인 주먹코, 키는 오척단신(五尺短身)인데 비대하기란 살찐 암퇘지와도 같았다. 천하에서 가장 추하고 못생긴 늙은 거지였다.


헌데 기괴한 것은 수세미 같은 봉두난발의 머리에 색동으로 만든 예쁜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비틀 비틀---형편없이 취한 갈짓자 걸음을 내딛으며 그는 백리사옥에게 다가왔다. "컬컬컬…… 소주군(小主君), 바쁜 모양이군. 이른 아침부터 빌어먹을 괭이질이라니……" 백리사옥을 향해 소주군이라 칭하는 걸인의 입에서는 지독한 악취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는 백리사옥보고 소주군이라 칭하지 않는가? 주군(主君)이라면 마땅히 경어(敬語)를 써야 될터인데 그가 반말을 하는 건 무슨 경우인가? 백리사옥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 것이 그때였다. "하하, 오색존자(五色尊者)께선 이른 아침부터 취하셨군요." 백리사옥은 여전히 괭이질을 계속하며 웃었다. 오색존자(五色尊者)란 이름이 이 걸인의 이름인가? 걸인은 눈을 게슴치레 뜨며 말했다. "흘흘흘! 본 존자야말로 장강(長江)을 몽땅 술로 만들어 마셔버리고 싶은 게 소원이네만, 소주군은 청승맞게 이 코딱지만한 밭이나 일구다가 허리 부러져 죽는 게 소원인가?" 오색존자는 말을 내뱉고는 한쪽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백리사옥은 여전히 손을 놀리며 대답했다. "장강이나 이 작은 밭이나 다 천하(天下)에 있기는 마찬가지이지요." "……!" 일순, 오색존자의 취기어린 두 눈에서 순간적으로 섬뜩한 광채가 빛났다. (으음…… 볼 수록 탐나는 녀석! 진정한 천마(天魔)의 후예가 될 수 있는 자는 천하에 오직 저 아이 뿐이다.) 진정한 천마의 후예란 무슨 뜻인가? (이미 일 년 전에 저 아이를 발견하고도 아직까지 설득을 못했으니 진정 안타까운 일이로다!) 오색존자는 속으로 끙끙 앓았다. (제천(帝天)의 유시(遺示)만 아니라면 당장 어떡해 했을 텐데…… 빌어먹을! 정말 빌어먹을이다.) 제천의 유시! 후인(後人)을 발견했더라도 무력(武力)으로 심신을 제압하여 데려와서는 안된다. 첫째는 후인 스스로의 이지(理智)로써 천(天)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너 따위가 감히 그의 존체를 상하게 할 자격이 없는 까닭이니라! "빌어먹을……" 오색존자는 술병을 다시 입 속에 처박았다. (더구나 이젠 그 일 때문에 다시는 찾아올 수도 없게 되었으니……!) 문득, 그는 백리사옥을 향해 바락 악을 썼다. "빌어먹을 소주군아! 기어이 본 존자의 주군(主君)이 되지 않겠단 말이냐!" "하하하……!" 백리사옥은 웃으며 허리를 펴고 오색존자를 돌아보았다. "오색존자, 답답하군요." "답답하다니?" "보다시피 이 밭에서 나는 식량으로 나 혼자 먹고 살기도 빠듯합니다. 어찌 존자를 수하로 거두어 먹여 살린단 말씀이오?" 그러자 오색존자는 시꺼먼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쾅쾅 쳤다. "아이고! 답답하다, 답답해!" "어디 체하셨습니까?" "그게 아니고, 이 답답한 소주군아! 네가 본 존자의 주군이 되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천하제일의 무공과


천하제일의 부(富)와 그리고……" "천하제일의 명예를 주시겠단 말씀이지요?" "그래! 이젠 아주 외웠구나!" "서른 여섯 번이나 들은 말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순간, 오색존자는 술병을 휘휘 내저었다. "안다, 알아! 우히히…… 나도 외웠다. 본인은 본시 무(武)에는 뜻이 없으며, 부와 명예를 구하기보단 한낱 야인(野人)으로서 초야에 묻혀 살기를 원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말하려고 그러지?" "훌륭하십니다." "으으……!" 오색존자는 바늘귀만한 눈으로 백리사옥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끝까지 거절하겠단 말이냐?" 백리사옥은 빙긋 웃었다. "존자께서 금주(禁酒)를 약속하신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용의는 있습니다." "금주?" 오색존자의 눈이 찢어질 듯 휩떠졌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끙끙거리며 뭔가를 생각하더니 불쑥 외쳤다. "그건 안된다! 술은 본 존자의 인생이며 기쁨이며 이상이다. 그것을 끊으라는 건 죽으라는 말과도 같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너를 주군으로 모신단 말이냐?" 오색존자는 다시 술병을 입에 대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다면 더 얘기할 게 없군요." 백리사옥은 다시 괭이를 잡고 밭일을 시작했다. 오색존자는 괴이한 신음을 흘리며 벌떡 일어섰다. "으으…… 더 이상은 못참겠다! 제천의 유시를 어길 순 없지만 네 콧대만은 꺾어놓고 말테다!"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색존자의 신형이 가볍게 움직였다. 움직였다 싶은 순간 그는 이미 이십 장 허공을 날아 백리사옥의 옆에 내려서고 있었다. 아니 내려선다 싶자 이미 백리사옥의 완맥을 시커먼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오색존자의 신법은 섬전(閃電), 바로 그것이었다. 백리사옥은 도리없이 오색존자에게 완맥을 붙잡히고 말았다. "우히히…… 소주군아, 넌 이제 나와 함께 가야한다!" 오색존자는 득의하여 외쳤다. 허나 백리사옥은 그저 담담하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오색존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웃어? 본좌는 널 죽일 순 없지만 무지무지하게 고통스럽게 해줄 순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재미있군요." "뭐가 재미있단 말이냐?" "오색존자께서 유감이 있다면 저에게 있지, 왜 죄없는 괭이자루를 붙들고 괴롭히십니까?" 순간, 오색존자의 안색이 홱 구겨졌다. "으잉?" 그는 황급히 자신의 손아귀에 쥐어진 물체를 바라보았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그가 야무지게 움켜쥐고 있는 것은 백리사옥의 괭이자루가 아닌가? "이럴 수가? 분명 내 손 끝에 맨살의 감촉이 닿았는데?" 오색존자는 당황성을 터뜨렸다. (또 당했다.) 그렇다. 오색존자가 처음 움켜쥔 것은 분명 백리사옥의 팔목이었다. 헌데,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사이


백리사옥은 빠져나가고 대신 괭이자루를 그에게 쥐어놓은 것이 아닌가? 귀신이 곡할 괴학(怪學)이었다. 오색존자는 또 다시 내심 신음했다. 벌써 몇번 째 이렇게 당했는지 모른다. (제천의 유시가 아니더라도 도대체 저놈을 붙잡을 수가 있어야 데려가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니냐!) "비, 빌어먹을! 이건 사기다!" 오색존자는 이빨을 부드득 갈며 괭이자루를 내팽개쳤다. 순간 백리사옥이 싱긋 웃었다. "하하, 힘으로 저를 제압하기보단 금주(禁酒)를 결심하는 편이 훨씬 빠를 겁니다." "빌어먹을……!" 오색존자는 잡아먹을 듯이 백리사옥을 노려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 불꽃이 열탕처럼 끓어 넘쳤다. "두, 두고보자. 오늘은 그냥 가지만, 기어이 널 천마의 후계자로 만들고 말겠다! 아니 네 스스로 천마제천부(天魔帝天府)를 찾아오게 만들 것이다!" 부르짖음이 끝나는 순간 그의 볼품없는 체구는 마치 빛살처럼 천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본 존자는 결코 금주를 하지 않을 것이다!" 다짐이라도 하는 듯 그의 외침이 허공을 울렸다. 그의 신형은 이미 수백 장 저쪽 하늘로 사라지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을 최극의 경공술이었다. 순식간에 오색존자의 신형은 허공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때 괭이질을 계속하던 백리사옥의 눈빛에 가벼운 경이가 스쳤다. "천하에 짝을 찾을 수 없는 경공술이다. 저 하나만으로도 이미 그는 무학의 조화지경(造化之境)에 이르렀음을 알겠다."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상대의 무공을 간파해 냈단 말인가? "천하에 나 백리사옥이 모르는 무공이 있었을 줄이야……"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는 말이었지만 실로 광오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문득 그의 검미가 가볍게 좁혀졌다. "천마의 후예, 천마제천부, 대체 어떤 곳인가? 오색존자는 분명 뭔가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말하는 그곳 또한 필시 범상한 곳은 아닐 것이다." 허나, 그는 이내 안색을 추스렸다. "그곳이 어떤 곳이든지 나와는 상관이 없다. 어차피 무림(武林)에 뛰어들 생각은 없으니까!" 백리사옥은 다시 작업을 계속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산어귀로부터 뾰족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이어 한 소녀(少女)가 헐레벌떡 산길을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백리사옥은 문득 일손을 멈추고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소녀는 이내 가까이에 이르렀다. 대략 열 두 살쯤 되었을까? 모시로 짠 베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부유하지 않은 농가의 아이가 분명했다. 가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에 유난히 커다란 두 눈은 마치 흑요석(黑曜石)을 박아놓은 듯했다. 웃지 않아도 양볼엔 옴폭옴폭 보조개가 패이는 것이 깜찍하고 귀엽기 짝이 없었다. 그런 소녀의 머리엔 이름모를 들꽃을 한 무더기 꽂았다. 한데, 지금 그녀의 얼굴은 긴장과 불안한 기색이 넘치고 있었다. "헉헉……! 오빠!"


소녀는 숨을 할딱이며 백리사옥에게로 황급히 달려왔다. 백리사옥은 급히 물었다. "연화(燕花)로구나. 웬일이냐?" "흑흑흑…… 오빠, 큰일났어요!" 연화는 백리사옥을 보자 왈칵 울음부터 터뜨렸다. "큰일이라니?" "흐흐흑…… 하…… 할아버지께서……!" "자세히 말해 보아라. 할아버지가 대체 어찌 되셨단 말이냐?" "예, 흑흑…… 산에 다녀 오시다가 그만……" 연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리사옥은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어서 가보자!" 그는 연화를 품에 안고 몸을 날렸다. 제 2 장 악마의 숨결 1 휘이이잉…… 살을 에일 듯한 삭풍(朔風)과 그 바람에 휘말려 백설(白雪)이 어지럽게 천지에 날린다. 여기는 수천 리에 달하는 광활한 북방(北方)의 빙지(氷地)!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빙(氷)과 설(雪) 뿐이다. 이곳이 바로 중원과 이만 리(二萬里)를 격한 북해(北海) 빙하도란지(氷河圖蘭地)이다. 북해에서도 가장 빙설한지(氷雪寒地)인 이곳에 하나의 거성(巨城)이 우뚝 세워져 있다. 북해사자성(北海獅子城)! 문자 그대로 사자(獅子)의 위용처럼 웅휘하게 축조된 수천의 대소전각(大小殿閣)들이 사방 수 리(里)에 걸쳐 거대한 빙성(氷城)을 이루고 있다. 하늘에 닿을 듯 우뚝 솟은 웅장무비의 거성(巨城)! 허나, 북해사자성이 위대한 것은 그 웅장무비한 규모때문이 아니었다. 이곳 북해의 패자(覇者)로 군림하고 있는 한 위대한 거인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었다. 북해사자존(北海獅子尊) 갈천사(葛天邪). 북해사자성의 지존(至尊)이자, 북해최강(北海最强)의 고수! 그 일신내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허나 분명한 사실은 그는 북해의 제왕(帝王)이며 그의 한 마디는 곧 북해전역에 있어 율법(律法), 그 자체라는 사실이었다. 밤(夜)이 깊어지는 시각이었다. 조용한 정실(靜室) 안에 두 명의 노소(老少)가 대작(對酌)을 하고 있었다. 일신에 화려한 금의(錦衣)를 걸친 백발노인은 술잔을 입에 갖다대고 있었다. 거의 투명하리만큼 흰 피부에 칼날같은 콧날과 입술은 면도날같이 얇았다. 특히 두 눈은 푸른 벽안(碧眼)이었으나 한 덩이 얼음인 듯 투명하게 얼어 있었다. 전신에선 오싹한 한기가 무형 중에 발산되어 냉혹함과 으스스한 분위기를 함께 발산하고 있었다. 이 노인이 바로 북해사자성의 지존인 북해사자존 갈천사다. 갈천사의 맞은 편에는 일신에 화의(花衣)를 걸친 준수한 용모의 미청년이 술벗을 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에 절륜무쌍한 미청년이었다. 허나 부드럽고 온화한 내심엔 얼음보다 차가운 빙심(氷心)과 독사보다 날카로운 독심(毒心)이 숨겨져 있음을 모르는 자 북해에는 없다. 빙천화사(氷天花死) 냉천유(冷天柔). 약관을 갓 지난 나이에 북해사자성의 제이인자(第二人者)에 오를만큼 무서운 심계(心計)를 지녔으며 천하제일의 암기명인으로 일신에 항상 칠백 이십 가지의 암기를 지니고 있다. 어쩌면 그는 북해사자존


갈천사보다 더 무서운 인물인지도 모른다. 지금 북해사자존 갈천사는 연신 술을 입 안에 털어넣고 있었다. 한데 왠지 모르게 그는 폭주하고 있었다. 갈천사는 다시 술잔을 냉천유 앞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화연(華娟)에게선 아직도 연락이 없느냐?" "예, 아직……" 냉천유는 조심스럽게 갈천사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수하들에게 찾아보도록 지시를 내려 놓았으니 곧 무슨 연락이 올 것입니다." "으음!" 갈천사는 그의 말을 들으며 또 한 잔의 술을 비웠다. (화연, 그 녀석은 대체 어디로 행방불명이 되었단 말인가?) 빙옥소수(氷玉素手) 갈화연(葛華娟). 그녀는 갈천사에게 있어 생명보다 소중한 외동딸이었다. 갈천사가 이룩한 모든 영광과 북해사자성 전부와도 화연을 바꿀 수 없다하는 장중보옥(掌中寶玉)! 한데 그녀가 행방불명 된 것이다. (벌써 사흘 째 북해 전역을 이잡듯 뒤져도 찾아내지 못했다.) 턱! 또 한 잔의 술이 거칠게 비워졌다. 문득, 냉천유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성주님, 약주가 너무 과하신 듯합니다." 갈천사의 시선이 냉천유의 안면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번쩍! 갈천사의 안광이 음산무비한 광망을 터뜨렸다. "후후…… 천유, 이제 너까지 본좌를 늙었다고 보느냐?" 순간, 냉천유마저 갈천사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성주께서는 아직 정정하십니다. 하지만……" 그때 갈천사는 안광을 더욱 빛내며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투명한 혈옥(血玉)으로 만들어진 한 자루 소검(小劍)이었다. "천유!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갈천사의 어조는 더욱 음산해졌다. "마혈검(魔血劍)!" 냉천유는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그렇다. 천하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자를 수 있다는 마혈검이다." 말을 하는 갈천사의 안광이 문득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일순, 그의 입가에 스치듯 득의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마혈검의 검날(刀)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 순간, 냉천유의 안면에 짙은 의혹이 드리워졌다. "흐흐흐, 이것이 바로 닿기만 해도 백련정강(百鍊精綱) 정도는 무우처럼 잘라 버린다는 마혈검이다!" 갈천사는 차갑게 말을 뱉음과 동시, 마혈검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 빠---- 지---- 직! 백련정강도 무우처럼 자른다는 마혈검이 이 순간 갈천사의 손아귀에서 장난감처럼 부서지며 가루가 되어 버렸다. 냉천유는 박살이 나 가루로 흩날리는 마혈검의 잔해들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잊었다.


(엄청난 내공이다! 이미 인간(人間)의 경지가 아니다! 무섭다!) 그는 갈천사의 가공할 내공에 전신에 소름마저 끼칠 지경이었다. "크흐흐흐…… 본좌의 전신은 이미 마혈검조차도 상처 하나 낼 수 없다. 또한 본좌의 내공은 천하의 그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다!" 외치듯 내뱉는 그의 말 속에는 득의의 광오함만이 서려 있었다. 일순, 그의 하얗게 센 은염이 부르르 꿈틀거렸다. "본좌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란 말이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기도(氣度)가 실내의 공기를 동결시켜 버렸다. 문득, 갈천사의 엄청난 신광이 냉천유의 동공을 꿰뚫었다. "천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 동감입니다." 냉천유는 말아쥔 손 안에 촉촉하게 배이는 땀을 느꼈다. 갈천사의 커다란 대소성이 실내를 폭발시킬 듯 흔들었다. "으하하하하하핫----!" 헌데 바로 이때였다. 다급한 발자국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한 명의 장한이 두 사람 앞에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성주님……!" 파직! 순간 갈천사의 수중에서 파열음이 일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술잔에 힘을 주었던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무슨 일이냐?" 그의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섬뜩하게 빛을 뿜었다. 장한은 마른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과, 관(棺)이……" "관? 그게 무슨 말이냐?" "관 하나가 본성 앞에…… 그 속에 실종되신 아가씨의 시신이……" "무엇이!" 갈천사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 절대 그럴 리 없다!" 동시에, 그의 신형은 퉁기듯 정실을 박차고 나갔다. 2 "이…… 이럴 수가……" 북해사자존 갈천사는 망연자실한 채 땅바닥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면전(面前)에는 하나의 시커먼 관(棺)이 뚜껑이 벗겨진 채 놓여 있었다. 관 속에는 전라가 된 여인(女人)의 시신이 누워있었다. 갈화연(葛華娟). 북해사자존 갈천사가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그녀였다. 그녀의 나신은 끔찍했다. 특히, 그녀의 하체는 둔중한 무기로 짓이겨 놓은 듯 참혹하게 너덜거렸다. 짐승의 울음같은 괴성이 갈천사의 목젖을 가르며 흘러나왔다. "크아아…… 이…… 이럴 수가…… 누구냐? 누가 이렇게 하였느냐?" 포효성이 터졌다. 그의 백발은 올올이 허공을 향해 치솟고 그의 두 눈에 피눈물(血淚)이 흐르고 있었다. "화…… 화연아……" 갈천사의 신형이 허물어지듯 관 앞에 주저앉았다. 그의 어깨가 심하게 들먹거리는 것은 처절한 오열을


삼키는 까닭이리라. "크흐흐흐……" 갈천사는 갈화연의 시신을 왈칵 품에 안았다. "죽인다! 너를 죽인 놈이 저 구천지옥에 있다해도 찾아가 찢어버 리고 말리라!" 그는 갈화연의 시신을 안은 채 야천을 노려보며 부르짖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삘리리…… 삘리리리…… 삘리리…… 어디선가 괴이한 피리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 빙천화사 냉천유의 전신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어디서 난데없이 이런 사이(邪異)한 피리소리가?) 그의 시선이 피리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날카롭게 훑었다. 허나, 그 소리는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삘릴리리…… 삘리리…… 삘리…… 삘리리…… 피리소리는 더욱 더 요기(妖氣)를 띤 채 압박하듯 들려오고 있었다. 냉천유의 시선이 다시 북해사자존 갈천사에게 향했다. 그러나 갈천사는 피리소리조차 듣지 못할 만큼 격동되어 오열을 퍼붓고 있었다. 그때였다. 번쩍! 갈천사의 품에 안겨있던 갈화연의 시신(屍身)이 소리없이 눈을 뜨는 게 아닌가? 갈천사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냉천유의 입에서 대경한 경악성이 터졌다. "서, 성주님!" 허나, 그의 부르짖음보다도 먼저 갈화연의 우수(右手)가 그대로 갈천사의 가슴에 쑤셔박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컥----!" 피하고 자시고가할 틈이 없었다. 갈천사는 갈화연의 시신을 내동댕이치며 비틀비틀 물러났다. 그의 가슴에선 홍수처럼 피분수가 솟구치고 있었다. "이…… 이런 일이…… 믿을 수 없…… 끄으으…… 윽……!" 그의 두 눈은 경악과 불신으로 휩떠져 있었다. "어떻게 본좌의 절대무이한 유일한 급소인 흉곡혈(胸曲穴)을……" 흉곡혈은 북해사자존 갈천사를 죽일 수 있는 오직 하나 뿐인 치명혈이었다. 이 순간, 갈화연의 입에서는 마치 괴수(怪獸)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광소가 터졌다. "카카카카----!" 그녀의 신형은 갈천사를 향해 날아 들었다. "성주----!" 냉천유의 입에서 다급한 폭갈이 터졌다. 파파파파팟---- 파파팟----! 그의 손에서 흡사 소나기 퍼붓듯 은빛 암기들이 갈화연을 휘덮었다. 허나 갈화연은 온몸에 암기를 그대로 맞으며 갈천사의 흉곡혈을 다시 한차례 후려쳐 버렸다. 쿠쾅----! "끄억!" 휘청!


북해사자존 갈천사의 신형은 거칠게 흔들리더니 반 바퀴를 빙 돌아 썩은 고목처럼 무너져 버렸다. "이…… 이럴 수는…… 없…… 다!" 갈천사는 이 한 마디만을 남기고 고개를 떨구어버렸다. 죽음(死)이었다. 북해를 한 손에 움켜쥐었던 절대고수 갈천사는 외동딸의 죽음으로 인해 이지(理智)를 잃을 만큼 격동해 있었고, 더구나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갈화연의 급습으로 흉곡혈이 뚫린 까닭에 이미 공력이 흩어진 상태였다. 헌데, 그 위에 다시 한 번 흉곡혈을 격파당했으니 아무리 절대고수라 한들 어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으카카카카……!" 갈화연은 벌떡 일어서며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헌데, 그녀의 음성은 여인의 음성이 아니었다. 사내의 것이었다. 그것도 인간의 그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사악(邪惡)한 마성(魔性)에 젖은 끔찍한 목소리였다. "으카카카카! 내가 돌아왔다. 천만 인의 피(血)로 천년지한(千年之恨)을 갚아 주리라!" 그녀는 광소를 터뜨리며 자신의 가슴에 우수를 쑤셔넣었다. 푹! 그리고는 자신의 심장을 꺼내 우걱우걱 씹어먹는 게 아닌가? 전신은 걸레처럼 너덜거린 채 짓뭉그러진 입으로 피를 뚝뚝 흘리며 그것을 씹어먹는 갈화연! "으크크크…… 겁세(劫世)는 이미 예정되었다. 이는 바로 악마의 뜻이라! 카카카카……" "으으……" 냉천유는 처참할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때였다. 괴이한 피리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삘릴리리…… 삘릴리리…… 삘리…… 그와 동시 갈화연의 전신은 폭죽처럼 터져 산지 사방으로 흩날려져 버렸다. 그리고는 정적(靜寂)! 피리소리도 그쳤고 사위는 거짓말처럼 정적에 휘덮였다. 휘이이이---- 이---- 잉---비수보다 예리한 빙풍(氷風)이 북해사자성을 통째로 날려버릴 듯 무섭게 불어닥쳤다. 냉천유의 입에서는 참혹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대…… 대체…… 이 현실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허나, 믿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겁세는 이미 예정되었다. 그것은 바로 악마의 뜻!"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그 말만을 중얼거렸다. 괴사(怪事)! 북해에 몰아친 괴사였다. 3 소림사(少林寺). 천하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이자 영원한 정의(正義)의 가람(伽藍)! 먹구름이 잔뜩 끼인 암천(暗天)이 귀귀한 정적을 뿜어내고 있는 시각, 소림장문인 천허대사(天虛大師)는 장경각(藏經閣) 쪽으로 무 거운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장경각주 자허선사(紫虛禪師)는 사미승을 통해 서찰을 그에게 보내 왔다. <장문사형(掌門師兄)께 긴히 상의 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철혈패천세가의 참사에 관한 건(件)입니다.


소제는 그 사건에 대해 은밀히 조사를 착수해 왔던 바, 오늘에 이르러 한 가지 단서(端緖)를 발견했습니다. 비록 극히 미미한 단서이기는 하나 그 중대성에 비추어볼 때 장문사형과 더불어 의논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여겨집니다. 이 비안(秘案)은 천하의 위난에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경각 내에 있는 소제의 처소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편지를 읽은 천허대사는 자허선사를 만나기 위해 장경각으로 향하고 있었다. (음, 자허사제가 발견했다는 한 가지 단서란 무엇인가?) 천허대사의 안색은 무겁기 그지 없었다. 철혈패천세가의 참사가 일어난 지 며칠 뒤에 그는 천풍여의세가의 가모인 모란부인의 참사 소식을 들었다. 불심(佛心)이 깊고, 천하만학을 두루 섭렵한 천허대사였지만 그 일들은 그로서도 도저히 납득키 어려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괴사(怪事)였다. (악마, 그것이 실재한단 말인가?) 천허대사는 악마의 존재를 부인해 왔다. (허나 그것이 인간의 행위라고 보기엔 너무나 납득할 수 없는 점 이 많으니……) 천허대사는 무거운 발걸음을 장경각 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뎅----! 한 줄기 묵직한 종소리가 어디선가 야공에 울려퍼졌다. "본사(本寺)의 제자들이 종을 칠 시각이 아닌데?" 천허대사의 백미(白眉)가 가볍게 좁혀졌다. 뎅----! 뎅----! 두 번의 종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천허대사의 표정이 흠칫 굳어졌다. (저 종소리에는 엄청난 마기(魔氣)가 깃들어 있다!) 다음 순간, 그의 뇌리에 한 가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혹시 이것이 철혈패천세가의 참사 때 들렸다는 마종(魔鍾)이 아닐까?) 천허대사의 눈빛이 번쩍 솟구쳤다. (그렇다면 자허사제의 신변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어느새 천허대사의 신형이 야천을 빛살처럼 뚫으며 날았다. 뎅----! 그런데 네 번째 종소리와 함께 장경각 안쪽으로부터 처절참혹한 비명이 터지는게 아닌가? "으아아아악----!" "사제!" 천허대사는 부르짖으며 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순간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비틀비틀 물러나야 했다. "이…… 이럴 수가!" 천허대사의 눈 앞에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의 사제인 자허선사가 참혹한 비명과 함께 전신을 난도질 당하듯 찢겨지고 있지 않은가? "사, 사제!" 그 참혹한 와중에도 자허대사는 천허대사의 목소리를 들었던 모양이었다. "시…… 사형…… 이…… 이것을……!" 자허선사는 손에 움켜쥔 피범벅이 된 물체를 내던졌다.


그 순간 자허선사의 머리가 동체에서 뜯겨지며 솟아올라 천정에 부딪쳤다. 그것은 마치 땅에 박힌 나무뿌리를 뽑아 던져버리는 것과도 같았다. 퍼퍼퍼퍽----! 자허선사의 머리를 잃은 동체는 그대로 천만 조각으로 찢겨져 터져버렸다. 온 방 안에 우박처럼 흩뿌려지는 피보라와 육편, 진동하는 피비린내가 가득찼다. "……!" 천허대사는 한 동안 말문이 막힌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무리 불심과 수양이 깊은 천허대사였지만 이 순간 밀어닥친 경악과 공포만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자허선사가 누군가? 무공(武功)만으로 논한다면 장문인 자신보다 뛰어났다는 불문제일고수! 그런 그가 손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이토록 어이없게 당할 수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상대 흉수는 분명 방 안에 없었다. 흉수가 설혹 투명인간(透明人間)이라 해도 기척은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천허대사쯤 되는 고수라면 백 장 밖에 구르는 낙엽소리도 듣는다. 또한, 방의 유일한 입구인 방문을 그가 가로막고 있지 않았는가?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만일 빠져나가려 했다면 흉수는 천허대사와도 한 차례 격전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헌데, 결과는 어떠했는가? 보이지 않는 흉수는 종소리와 함께 나타나 소림사 최대금역인 장경각의 내실에서 불문제일고수인 자허선사를 처참하게 난도질 하고 유유히 없어져 버리지 않았는가? "아…… 아미타불……" 한참 후에야 천허대사의 입에서는 신음과도 같은 불호가 흘러나왔다. 그는 노안을 감고 떨리는 손으로 쉴새없이 염주를 굴렸다. "불존(佛尊)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아미타불……" 천허대사는 한동안의 염불 끝에 경악과 공포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문득 그는 자허선사가 내던졌던 피범벅이 된 물체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한 권의 낡은 불경(佛經)이었다. 손바닥으로 핏물을 쓸어내리자 범문(梵文)으로 된 표지 제목이 드러났다. <대반야수미항마경(大般若須彌降魔經).> 천허대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은 천축(天竺)에서 들여온 고대불경(古代佛經)이다. 자허사 제는 왜 이것을 남겼을까?) 불현듯 그는 자허선사의 말을 떠올렸다. "자허사제는 편지에 한 가지 미미한 단서를 잡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죽기 전에 이것을 내게 남겼다. 뭔가 있을 것이다!" 천허대사는 급히 책자를 펼쳐 보았다. 그때 핏물에 젖은 종이쪽지 하나가 책갈피에서 떨어졌다. <그 날! 악마(惡魔)의 뜻에 의해 하늘은 먹구름을 드리웠다. 그것은 악마좌(惡魔座)의 빛을 지계(地界)에 알리지 않으려는 악마의 뜻이었다. 그 날! 가리워진 암천(暗天)의 깊은 곳에서……> 그 뒷부분은 핏물에 적셔져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 한 귀절 만으로도 천허대사의 피는 싸늘하게 식은 느낌이었다. "아미타불…… 이것은……" 천허대사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아아! 밀려들고 있다. 악마의 발길은 좀더 분명한 형태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시체를 짓밟고 서서 야천을 향해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소리처럼…… 4 황택관(黃擇關). 산서(山西)와 하북(河北) 두 개 성(省)을 경계 짓는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어귀에 있는 험관(險關). 두두두두두---태행산에서 무안현(武安縣)으로 통하는 관도(官道)에 세 필의 인마(人馬)가 질주하고 있었다. 말이 달리는 속도도 급박하려니와 마상(馬上)의 인물들의 초조한 표정만으로도 사뭇 긴장감이 감돌았다. 기마 중앙엔 여인처럼 흰 피부에 지극히 청수한 인상의 삼십대 문사(文士)가 말을 몰고 있었다. 바로 번천뇌후 공야수문이었다. 그의 얼굴엔 짙은 고뇌와 수심의 그늘이 깔려 있었다. 그의 좌측엔 청의(靑衣)를 걸친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 타고 있었다. 길고 세모진 턱, 끝부분이 휘어진 매부리코와 귓가로 날카롭게 쭉 찢어진 두 눈에서 차가운 한광(寒光)을 뿜어내는 인물인 그는 천하 십대세가의 영수(領首)로 군림하는 무적제검 사마흠이었다. 그런 그의 등 뒤에는 한 자루 거검(巨劍)이 비스듬히 메어져 있었다. 무적제검 사마흠의 반대쪽엔 건장한 체구에 횃불처럼 타오르는 호목(虎目)을 지닌 청년무사가 타고 있었다. 등 뒤에는 두 자루 패도(覇刀)를 교차시켜 메고 있었다. 철혈잠룡 뇌옥풍(雷玉風)! 부친의 참사를 밝혀내기 위해 공야수문을 따라나선 것이었다. 두두두두두…… 그들 삼인(三人)은 밤새워 천리길을 달려온 듯 의복과 말(馬)은 황진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직 멀었소, 공야형?" 무적제검 사마흠이 외치듯 물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사제는 좀체로 산을 떠나는 일이 없으니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어서 갑시다!" 사마흠은 외치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세 필의 인마는 흙먼지를 걷어차며 더욱 급박하게 질주해갔다. 두두두두---- 두두두---5 휘이잉…… 바람(風)이 분다. 잡초들은 바람을 따라 마구 울어대고 있었다. 태행산의 어느 고봉(高峯). 한 노인(老人)이 느릿느릿 산길을 걷고 있었다. 전신에는 허름한 마의(麻衣)를 걸쳤다. 용모 또한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촌로(村老)의 모습이었다. 허나, 그의 눈동자는 기이하게도 벽안(碧眼)이었고, 눈빛은 놀라우리만큼 투명하면서도 심유(深幽)하지 않은가? "……!" 천공을 향하는 그의 벽안에는 무수한 세월의 그림자와 짙은 회한(悔恨)의 그늘이 서려 있었다. 또한, 그에게서는 어딘지 중원인이 아닌 이국인(異國人)의 분위기가 풍겼다. 그의 손에는 승인(僧人)들이 사용하는 검은색 염주(念珠)가 들려 있었다. 문득, 노인의 입술이 떼어지며 탄식어린 음성이 바람을 타고 흘렀다. "바람…… 운명…… 백 이십 년의 세월이 이토록 허무할 수가 있는가?" 낙엽처럼 메마른 허무한 음성이었다.


"범천(梵天)의 후예를 찾아 중원천하를 주유한 지 팔십년(八十年)…… 본교(本敎)의 맥을 이을 천고대제는 진정 만날 수 없단 말인가?" 노인은 허무한 중얼거림을 흘려내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헌데, 그의 걸음을 보라! 분명 잡초 위를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풀잎 하나 건드리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이 노인의 일신절학이 이미 어느 경지를 넘어 섰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때였다. 휘이잉…… 잉! 바람이 조금 세차게 불었다. 순간 마치 환영이 솟구치듯 세 개의 인영(人影)이 노인의 전면에 소리없이 자리했다. 하나같이 전신을 황금색 법의(法衣)로 감싼 노승(老僧)들이었다. 그들의 복색은 서역(西域)의 라마승(喇 僧)의 것이었다. 맨 선두에 선 청미청염(靑眉靑髥)을 지닌 노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살라무합(乷羅武合)." 음성은 낮았으나 터져 버릴 듯한 위엄과 살기가 배어 있었다. 살라무합이라 불린 예의 마의노인은 담담하게 청미노승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삼십 년 만이던가?" 청미노승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오랫동안 너를 찾았다. 너를 살려둘 수는 없기에……" 결국 죽이기 위해 추적해 왔다는 말이 아닌가? 살라무합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여러 말은 필요 없겠지. 그대들 바라문(波羅門)과 범천밀교(梵天密敎)는 어차피 공존할 수 없으니까……" 따락! 그의 손에서 묵주 한 알이 돌려졌다. 순간 그의 두 눈에서는 천천히 신광(神光)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에서는 무형 중에 엄청난 위엄과 기도가 은은히 뻗어나기 시작했다. 변신(變身)! 그것은 마치 웅크리고 있던 사자(獅子)가 갈기를 세우려 일어나는 모습이라 할까? 우우우웅…… 수수수숫……! 살라무합의 근처에 서 있던 나무들이 폭풍에 휩쓸린 듯 거세게 흔들렸다. 청미노승 등 삼인(三人)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이단(異端)의 마지막 수괴(首魁)이며 천축제이고수(天竺第二高手)인 살라무합답다. 허나, 너는 이제 늙고 지친 한 마리 사자일 뿐!" 사사사사…… 삼 인의 신형이 풀잎 위를 미끄러지며 품자(品字) 형으로 갈라졌다. "우리 바라삼존(波羅三尊)의 합공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곤 믿지 않는다!" 황의라마승들은 자신들을 바라삼존이라 칭했다. "수만 리 이국의 땅, 이곳 태행산에서 너, 살라무합은 뼈를 묻는다!" 추우…… 청미노승의 신형이 거조(巨鳥)처럼 허공으로 치솟았다. "가라!" 왼쪽에 서 있던 회염노승(灰髥老僧)이 짤막한 외침을 터뜨리며 일장(一掌)을 쭉 뻗었다. 쿠쿠쿠쿠쿠---해일과도 같은 무지막지한 경력(勁力)이 살라무합을 향해 터질 듯 밀려 나감과 동시, 오른쪽에 서 있던


자염노승(紫髥老僧)의 신형이 팍! 꺼져 버렸다. 살라무합의 입가에 쓰디쓴 웃음기가 피어 올랐다. "그래, 어차피 하늘(天)은 노부의 편에 있지 않았다." 슥! 알 수 없는 중얼거림과 함께 그는 조용히 한 발을 내디뎠다. 순간 사위의 공기가 일시에 경직되었다. 천지는 숨을 죽였다. 바람도 그쳤다. 그리고 싸움은 시작되었다. 6 엽노인(獵老人), 그는 무안현의 사람들과는 달리 수렵(狩獵)과 약초(藥草) 따위를 캐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는 노인이었다. 태행산 깊은 골짜기 어디고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드물었다. 그런 그가 방(房) 안에 누워 있었다. 별로 크지 않는 방에는 말린 약초들과 짐승가죽같은 것들이 벽에 매달려 있었다. 사냥할 때 쓰이는 활(弓)과 전통(箭筒)도 보인다. "이제 곧 깨어나실 것이오." 백리사옥은 엽노인의 몸에서 금침(金針)을 회수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드려야 할지…… 공자님이 아니셨다면…… 흑!" 연옥(燕玉)은 아직도 울음이 채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연옥은 연화(燕花)의 언니다. 금년 나이 십 육 세, 연화와 마찬가지로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녔으나 산골소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서글서글하면서도 커다란 눈, 오똑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 제법 부풀어 오른 가슴과 넓어진 둔부에서는 벌써 성숙한 여인(女人)의 방향(芳香)마저 풍겨 났다. 이때, 연화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오빠! 그럼 할아버지는 다 나으신 건가요?" 백리사옥은 연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대답했다. "그렇단다. 내가 믿기에 할아버지께선 별 상처가 없으시다. 단지 뭔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으시고 쓰러지신 것 같다." "정신적 충격? 그게 뭔데요?" "글쎄, 그건 알 수 없지. 심장 부위에 열기(熱氣)가 심한 것으로 보아 어쩌면 어떤 공포스런 물체를 보셨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연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할아버진 전에 무서운 호랑이도 잡으신 적이 있으셨 다고 했는데? 산중에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게 있나요?" "글쎄, 어쨌든 할아버지께서 깨어나시면 물어 보렴." 백리사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오빠는 가봐야겠다. 밭일이 밀렸다." 연화는 금새 입술을 뾰로퉁하게 내밀었다. "에이! 난 오빠랑 함께 있는 게 좋은데……" "하하, 나중에 네가 놀러오면 되지 않느냐?" 백리사옥은 웃으며 방문을 나서려고 했다. 그때, 연옥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저…… 늘 은혜만 입고…… 죄송해요." "괜찮소. 이런 산골에 같이 살면서 서로 돕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이 아니겠소?" "그래도……"


연옥은 사르르 볼을 붉혔다. 이어 그녀는 장농문을 열더니 뭔가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꺼내 백리사옥에게 내밀었다. 백리사옥의 눈에 의아함이 번졌다. "이게 무엇이오?" "끌러 보세요." 백리사옥이 보자기를 풀자 그 속에서는 한 벌의 백의(白衣)가 나왔다. "이것은……?" "공자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고 제가 지은 옷이예요.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백리사옥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연옥의 따뜻한 마음씨에 가슴 속이 찌르르 울려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얼굴도 마음도 비단결처럼 고운 소녀다.) 이때, 연화가 쓱 나섰다. "호호, 오빠! 받지 않으시면 벌받아요. 언니가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우면서 지은 거라구요!" "연화야!" 연옥은 얼굴이 새빨개지며 외쳤다. 백리사옥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고맙게 받겠소. 내가 받지 않으면 또 연옥낭자가 우느라고 며칠 밤을 새우게 될 테니까. 하하……" "아이, 공자님께서도 그러시기예요?" 연옥은 곱게 눈을 흘겼으나 마음 속은 기쁨으로 설레이고 있었다. (공자께서 저 옷을 걸치신 모습은 얼마나 눈부실까?) 그녀는 콩콩 뛰는 가슴을 억누르느라 무진 애를 썼다. 그때 백리사옥은 옷을 다시 보자기에 싸려다가 문득 이상한 물체를 발견했다. "이것은?" 백리사옥의 눈에 띤 물체는 작은 불상(佛像)이었다. 검은 윤기가 흐르는 불상은 기이하게도 어린아이의 모습을 조각한 동자불상(童子佛像)이었다. 그는 연화에게 물었다. "엽노인께서 불신자(佛信者)셨던가?" "아니예요. 할아버지께선 지난 날 우연히 산중폐찰(山中廢刹)에서 그것을 얻으셨다는데 필시 범상한 물건이 아닌 듯하다 하시며 기회가 있거든 공자께 전해 주라 하셨어요." 백리사옥은 자세히 동자불상을 살펴 보았다. 동자불상은 만지고 있기가 힘들 만큼 섬뜩한 한기(寒氣)가 전해져 왔다. (불상은 분명 묵령한옥(墨靈寒玉)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천축(天竺)의 일부지방에서만 토출된다는 극히 귀한 보옥(寶玉)이 아닌가!) 묵령한옥의 가치는 황금보다 세 배는 값진 보옥이었다. 아마 엽노인은 그것의 가치를 알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런 귀한 물건이 산중폐찰에 뒹굴고 있었다면……!) 백리사옥의 눈이 번쩍 신광을 발했다. (뭔가 있을 듯한 예감이 든다. 이것은 분명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백리사옥은 동자불상을 품에 넣었다. "좀 연구해 보고 돌려 드리겠소." "아니예요. 저희에겐 아무 소용도 없는 물건이니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음, 어쨌든 연구해 보고나서 다시 생각합시다. 그럼……" 백리사옥은 보자기를 들고 방문을 나섰다. 헌데 그때, 미약한 신음성이 흘러나오며 엽노인의 몸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 깨어나시려나 봐요!" 연화와 연옥은 동시에 부르짖으며 엽노인에게 달려들었다. 백리사옥은 나가려던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으으으…… 으으음……!" 엽노인은 계속 신음을 흘리며 몸을 꿈틀거렸다. 어느 순간, 번쩍! 그의 눈이 뜨여졌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번쩍 뜨인 엽노인의 두 눈에서는 섬뜩하고 사이(邪異)한 광명이 흘러 나오는 게 아닌가! 폐부를 도려낼 듯한 무서운 사광(邪光)! 그는 사광이 흐르는 눈빛으로 천정을 응시하더니 돌연 괴이한 웃음을 흘려냈다. "크크크크……!" 그 순간 엽노인의 입가로 침이 질질 흘러 내렸다. "크흐흐흐…… 보았다…… 나는 보았다…… 악마…… 악마의 존체(尊體)를……" "할아버지!" 연옥이 달려들어 엽노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순간 엽노인의 상반신이 퉁겨지듯 꼿꼿이 일으켜졌다. 끼끼끼끽----! 엽노인의 동체는 벽을 향한 채로 뼈마디가 뒤틀리는 음향과 함께 고개가 연옥을 향했다. "크흐흐…… 네년은 누구냐……?" "허억!" 연옥과 연화는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백리사옥이 보다못해 달려들었다. "엽노인! 정신 차리십시오! 여기는 바로 엽노인의 댁입……" 백리사옥의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너무도 놀라 다급성을 삼켜야 했다. (저 눈! 이미 초점을 잃었다! 그렇다면 미쳤다는 말이 아닌가!) 이때 엽노인의 괴소는 이어지고 있었다. "쿠흐흐흐…… 네놈은 또 누구냐……" "엽노인!" "치워라!" 퍽! 엽노인의 손이 백리사옥의 가슴을 그대로 후려쳤다. "으윽!" 백리사옥은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벽에 곤두박질쳤다. 그런 그의 입가로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 나왔다. (괴력(怪力)이다! 미친 사람은 범인이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을 발휘한다 하더니!) 이때, 엽노인의 두 눈에서는 사광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는 마기(魔氣)가 흐르는 눈으로 연옥과 연화를 쓸어 보았다. "크크크…… 제법 토실토실한 먹이가 여기 있었구나. 흐흐흐……" 그는 게침이 질질 흐르는 입술을 핥으며 연옥과 연화에게 덮쳐 들었다. "아악!"


"살려줘! 할아버지!" 순간이었다. 백리사옥의 두 눈이 번쩍 섬광을 발했다.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 그는 품 속에서 뭔가를 꺼내 엽노인에게 힘껏 던졌다. 팍! 그 물체는 엽노인의 머리에 정통으로 맞아 터뜨려졌다. 순간, 더할 수 없는 기이한 향기(香氣)가 온 방 안에 퍼졌다. "으으…… 윽……!" 엽노인은 그 향기를 맡자 그대로 신음을 토하며 쓰러져 버렸다. 연옥과 연화도 마찬가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제령마혼향(制靈魔魂香)이라는 거요. 허나 안심하시오. 제령마혼향은 의식을 잠시 잃게할 뿐 몸에 지장을 가져오는 마취약은 아니니까……" 백리사옥은 혼절한 연옥과 연화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고는 엽노인에게 다가갔다. (제령마혼향의 약효는 반 시진, 그 안에 엽노인의 광증(狂症)을 치료해야 한다!) 그는 급히 엽노인의 손을 잡고 진맥을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의 검미가 잔뜩 좁혀졌다. (실로 이상한 일이다! 분명 진맥상으로는 단순한 심장발작 정도로만 여겨질 뿐인데 내가 익힌 의술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었다. 그가 익힌 의술은 유사 이래 화타나 편작을 십배 능가한다는 불세천수옹(不世天手翁)의 비전(秘傳)이 아닌가? 백리사옥의 진맥이 잘못될 리는 절대 없었다. 헌데 어떠한가? 엽노인은 분명 광증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진맥상으로는 범인(凡人)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납득이 가지 않는다.) 백리사옥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품 속에서 금침(金針)을 한 무더기 꺼냈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제령환주대법(制靈還呪大法) 으로 우선 광증의 근본 원인부터 살펴야 한다!) 그의 손이 일순 바쁘게 움직였다. 파파파파팟----! 순식간에 엽노인의 머리에는 칠십이개(七十二個)의 금침이 빽빽하게 꽂혔다. …… 얼마나 지났을까? "으으음……" 엽노인은 신음을 흘리며 서서히 눈을 떴다. 이 순간 그의 눈빛은 다소 졸린 듯한 정상인의 눈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반 시진 이내 끝내야 한다!) 백리사옥은 눈빛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묻겠소. 사실대로 대답해야 하오." "……" "당신은 누굽니까?" "으으…… 나는 엽노인……" "쓰러지기 전에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러자 엽노인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마음 놓고 말씀하십시오."


백리사옥은 그의 등을 두드려 진정시켜 주었다. 엽노인은 신색이 평정되며 입을 열었다. "나는 사냥을 하다가 만나기 힘든 청록(靑鹿)을 보게 되었소. 그래서 청록을 뒤쫓다가 태행산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나로서도 난생 처음 가본 기이한 골짜기였소. 그곳은 하나의 계곡, 그리고 깊은 계곡 속에 혈무(血霧)가 뭉클뭉클 흘러나오는 괴이한 동굴을 보게 되었…… 으으……" 엽노인의 입에서는 신음성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제 3 장 梵天密敎 1 "으으으…… 그곳은 너무도 무서운 끔찍한 마기(魔氣)가 흘러나오는…… 그곳 동굴벽에는 너무도 무섭고 저주스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 으으……" "무섭고 저주스런 글귀?" "그…… 그것은…… 악마의 예언……" "글귀가 기억 나십니까?" "크으으으……" 그때부터 엽노인은 괴로운 듯 연신 신음을 부르짖으며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백리사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령환주대법은 천고기학(千古奇學)이다. 이 노인의 뇌리를 어떤 무서운 힘이 지배하고 있기에 이렇게 고통스러워 한단 말인가!) 팟팟팟팟……! 백리사옥은 급히 손을 놀려 금침을 한 치(寸) 정도씩 더 깊이 박았다. "으으으……" 엽노인의 신음성은 조금 가라 앉았다. 백리사옥은 급히 외쳤다. "글귀를 말씀해 보십시오!" "으으…… 그 날…… 악마의 뜻에 의해 하늘은 먹구름을 드리웠다. 그것은 악마좌의 빛을 지계에 알리지 않으려는 악마의 뜻이었다." "계속하십시오." "으으으…… 그날 가리워진 암천의 깊은 곳에서 천기마저 숨긴 채 하나의 녹색…… 노…… 녹색……" "녹색…… 그 다음은?" "노…… 녹색성좌가…… 아아악!" 돌연 엽노인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노인장!" "아아아악!" 엽노인은 처참한 비명과 함께 머리를 흔들며 몸부림쳤다. (안되겠다!) 백리사옥은 급히 엽노인의 혼혈(昏穴)을 짚었다. "으으으……" 엽노인은 신음을 흘리며 혼절해 버렸다. 백리사옥의 검미가 잔뜩 찌푸려졌다. (뭔가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이 노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엽노인이 보았다는 괴이한 동굴, 악마의 예언이라는 글귀, 그것은 또 무엇인가?) 연속되는 의문이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엽노인을 완전히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의 뇌리를 지배하는 힘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


백리사옥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다! 그 괴이한 동굴을 찾아가 보자!)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결정(決定)! 이 순간의 결정이야말로 백리사옥의 운명을 뒤바꾸고 천하의 운명을 결정 짓는 것이었다. 백리사옥은 종이를 꺼내 급히 글을 썼다. <연옥에게, 할아버지께선 혼수상태에 드셨으니 깨우지 말도록 하시오. 깨우지 않아도 칠일(七日) 동안은 절대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이니 안심하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시오. 나는 할아버지를 치료할 영초(靈草)를 구하러 가오. 허나, 속히 돌아오겠소.> 잠시 후면 정신을 차릴 연옥과 연화에 대한 배려였다. 백리사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보자! 엽노인을 구해야 한다." 2 석양(夕陽)! 저녁놀은 악마의 혓바닥처럼 천공에 핏칠을 하고 있었다. 태행산의 깊은 산 속을 백리사옥은 헤매고 있었다. 근 하룻동안 발 닿는 대로 태행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으나 엽노인이 말한 계곡은 찾아낼 수 없었다. (실수다! 엽노인에게 대강의 위치만이라도 물어보는 건데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미처 묻지 못했다. 태행산은 넓다. 이런식으로 찾다가는 한 달을 헤맨다 해도 찾을 수 없겠다.) 문득 백리사옥은 시뻘겋게 핏칠을 하는 서천(西天)의 황혼을 응시했다. 휘이이잉----! 바람(風)이 불었다. (악마의 동굴…… 그곳에 있었다는 알 수 없는 글귀…… 무엇을 뜻함인가?) 지금, 타오르는 시뻘건 저녁놀은 백리사옥에 있어 특별한 느낌을 부여하고 있었다. (악마(惡魔)? 그것이 실재한단 말인가?) 천하만학(天下萬學)이 그의 머리 속에 있다. 이교(異敎)의 기환사술(奇幻邪術)이라든가, 마령대법(魔靈大法) 따위엔 이미 달통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나 백리사옥은 근본적으로 악마의 존재를 부인해 왔다. (헌데 이 느낌은 무엇인가?) 느낌! 뭔가 엄청난 운명(運命)이 자신을 무섭게 휘감아드는 듯한 이 예감(豫感)은 무엇이란 말인가? "……!" 황혼은 시뻘겋게 불타오르고 바람은 그의 옷자락을 찢어버릴 듯 거칠게 부는데 백리사옥은 태행산의 산봉을 딛고 서서 황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느낌, 이 예감(豫感)은 무엇인가?. 수천 수만 년, 아니 억겁(億劫)의 아득한 세월 저편으로부터 밀어닥치는 듯한 이 무서운 예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휘이이이잉…… 백리사옥의 머리칼이 바람에 거칠게 흩날렸다. (이 느낌은 내게 마치 보이지 않는 숙명의 적수가 나타났음을 말해 주는 것만 같다. 그럼 그가 악마인가?) 아직은 확실치 않으나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거대한 운명의 바람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였다. "소시주! 말 좀 묻겠네." 백리사옥의 등 뒤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백리사옥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엔 아홉 명의 라마승(喇 僧)들이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홍포(紅袍)를 구름처럼 둘렀다. 두 눈의 신광이 바위라도 꿰뚫어버릴 듯한 인물들이었다. 또한, 그들의 전신에서 뿜어나는 막대한 기도는 태산이라도 밀어버릴 듯했다. 백리사옥은 직감했다. (고수다! 이들 하나하나의 기도는 능히 일파의 장문지존에 비길 정도이다!) 백리사옥이 감탄할 만큼 그들 구인(九人)의 위세는 엄청난 것이 었다. 이때, 맨 좌측에 서 있던 사목(蛇目)의 라마승이 입을 열었다. "소시주, 혹시 이 근처에서 부상을 입은 노인 하나를 보지 못했는가?" "보지 못했습니다." 백리사옥이 대답하자 또 한 명의 라마승이 불쑥 나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놈은 마의(麻衣)를 걸쳤으며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엄중한 부상을 입고 있네!" 백리사옥은 순간 생각했다. (놈이라? 그렇다면 부상을 당했다는 노인을 뒤쫓고 있는 사람들이군!) "본인은 이곳에서 사람이라고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맨처음 사목의 라마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런가? 헌데, 소시주는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백리사옥은 간단히 대답했다. "본인은 이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빈승은 소시주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고 물었네." 그의 말투는 정중했으나 아무래도 백리사옥에 대해 의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백리사옥의 검미가 가볍게 좁혀졌다. "그것은 대사(大師)들과 관계없는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라마승의 사목이 일순 치켜졌다. 그는 백리사옥이 그런 대답을 하리라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었다. 허나, 따지고 보면 백리사옥의 대답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는 그제야 백리사옥의 용모를 다시 한 번 주시해 보고는 내심 경악성을 터뜨렸다. (호오! 중원에도 이런 천품(天品)의 근골이 있었다니!) 그의 눈빛이 짧은 순간 여러차례 흔들렸다. (본 바라문의 소종사(小宗師), 그 분의 천품이 천지제일이라 여겼거늘 이런 산중에서 잠룡(潛龍)을 보게 될 줄이야!) 일순 그의 눈빛이 탐심(貪心)으로 물들었다. (살라무합, 놈을 쫓는 일만 아니라면 천축으로 데려가고 싶을 정도다.) 허나, 그에게는 임무가 있었다. 사목의 라마승은 눈빛을 평정시키며 가볍게 미소를 떠올렸다. "빈승은 홍의대존불(紅衣大尊佛) 찰라목(察羅木)이라 하네. 빈승 등 구 인을 홍의구존불(紅衣九尊佛)이라 부르지." "……" "소시주 이름을 말해 주겠나?" "백리사옥입니다."


"백리사옥…… 기억해 두겠네." 홍의대존불은 고개를 끄덕이며 암중으로 일지(一指)를 퉁겼다. 무형의 지력(指力)이 백리사옥의 견정혈(肩井穴)에 적중했다. "!" 백리사옥은 일순 어깨가 뜨끔함을 느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홍의대존불의 입가에 의미있는 웃음기가 떠올랐다. "후후, 소시주! 아마 우리는 또 만나게 될 것이네." 그는 몸을 돌렸다. "가자!" 파파파팟! 파아아…… 그들 홍의구존불은 순식간에 빛으로 화하여 어디론가로 사라져 갔다. 일순 백리사옥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홍의대존불 찰라목! 보기보단 소심한 위인이군. 암수로 극음지기(極陰之氣)를 심어 놓으려 하다니……" 그는 중얼거리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허나, 그대는 나 백리사옥을 잘못 보았다. 내가 익힌 환술지학(幻術之學) 중에 혈도의 위치를 옮기는 이혈대법(移穴大法) 정도는 극히 기초적인 것에 불과하지." 이혈대법(移穴大法)! 그렇다면 그는 홍의대존불의 지풍이 닿는 순간에 혈도의 위치를 이동시켜 버렸다는 말이 아닌가? "어쨌든 천축 바라문교의 인물들이 등장하다니 뭔가 심상치 않군." 백리사옥은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어둠이 깃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에 그 동굴을 찾는다는 건 무리다. 우선 쉴만한 곳을 찾아 밤을 지낸 뒤 날이 밝는대로 다시 찾아봐야겠다!) 3 졸졸졸…… 산곡(山谷)에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종일 돌아다녔더니 목이 마르군." 백리사옥은 개울로 다가가 물을 마시기 위해 엎드렸다. 순간 그의 검미가 꿈틀 치켜졌다. "아니? 개울물에 핏물이 섞여 있지 않은가?" 그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벌떡 일어섰다. "핏물이 흘러 내려온다면 필시 상류(上流) 어딘가에 시체나 상처입은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백리사옥은 급히 상류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참혹하게 가슴이 짓뭉개진 시체 십여 구가 상류쪽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들의 복장은 라마승복이다. 그렇다면 모두 바라문교의 인물들이 아닌가?) 백리사옥의 두뇌가 급회전하였다. (이들은 조금 전 홍의구존불이 찾던 그 마의노인에 의해 죽은 것이 틀림없다! 그럼 마의노인은……?) 그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건너편 절벽 바위 밑에 입을 벌리고 있는 동혈의 입구가 백리사옥의 눈에 비쳐들었다. (동혈(洞穴)이다!) 동혈은 깊지 않았다. 몇 걸음 진입해 들어가자 곧 하나의 석굴(石窟)이 나타났다. 석굴은 대략 사방 스무자 가량의 넓이였다. 헌데 석굴의 한켠에 전신이 허옇게 얼어붙은 한 인물이 쓰러져 있지 않은가? 일신에 마의(麻衣)를 걸친 괴노인(怪老人)이었다. 그는 극심한 중상을 입은 듯 가슴과 복부가 짓터져


시뻘건 내장이 흘러나왔는데 그 내장과 핏물까지도 얼어붙어 있었다. (홍의구존불이 찾던 바로 그 노인이다!) 백리사옥은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들어 괴노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음! 막중한 상처를 입은 데다 엄청난 빙공(氷功)에 의해 전신십팔경락(全身十八經絡)이 모조리 얼어붙고 말았구나!) 그는 괴노인의 현재 상태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헌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바라문교의 인물들이 이 괴노인을 쫓고 있다면 필시 중상을 당한 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말인데? 어쩌면 숨이 끊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백리사옥은 입술을 물었다. (구하고 볼 일이다!) "환령십팔비화침(還靈十八飛火針)!" 번쩍! 열 여덟 개의 금침이 괴노인의 전신 십팔경락을 향해 섬전처럼 쏘아졌다. 파파파파파팟----! 이어, 열 여덟 개의 비침(飛針)은 정확히 괴노인의 십팔경락(十八經絡)에 꽂혔다. 순식간에 금침이 꽂힌 혈도에서 허연 김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꽁꽁 얼어붙은 경락들이 녹아들고 있는 것이었다. 뿜어진 백무(白霧)가 석굴 안을 가득 메운 것은 약 반각 가량이 지난 후였다. 어느 한 순간 괴노인의 전신을 뒤덮었던 백무가 씻은 듯 사라졌다. "으……!" 괴노인의 입에서 극히 미약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살아났다!) 백리사옥이 내심 희열의 외침을 터뜨리는 순간 괴노인의 신음성이 조금 커지며 굳게 닫혔던 두 눈이 서서히 떠졌다. 괴노인의 시선에 백리사옥의 모습이 잡혀들었다. "자…… 자네는……?" 백리사옥은 금침을 회수하며 대답했다. "저는 백리사옥이라 합니다." 헌데 그 순간 노인의 전신에 벼락같은 충격의 경련이 일어났다. "아…… 이 소리는……!" 우우웅…… 웅……! 괴노인의 품 속에서 기이한 음향이 떨려나오는 것이 아닌가? "범천항마탁(梵天降魔鐸)이 스스로 울다니!" 괴노인은 품 속에서 급히 시커먼 물체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묵색(墨色)의 작은 목탁(木鐸)이었다. 우우우웅……! 검은 목탁은 한참동안 울다가 점차 소리가 그쳐갔다. 순간 노인은 경악의 시선으로 백리사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는 약 일다경(一茶頃) 가량을 그렇게 백리사옥을 주시하고 나 더니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하늘이 열리는가? 범천의 하늘이 드디어 칠백 년 만에 열리는가?" 백리사옥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괴노인은 격동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백리사옥에게 내뻗었다. "노부의 손을 잡아줄 수 있겠나?"


백리사옥은 의아했으나 이내 괴노인의 두 손을 마주잡아 주었다. 마주잡은 손은 또 하나의 운명의 만남이었다. 괴노인은 백리사옥의 손을 잡은 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따뜻한 손이야. 이런 따뜻한 손을 잡아본 지가 언제였던가?" 그의 음성에는 짙은 회한과 고독감이 허무하게 깃들어 있었다. "미형…… 그 아이의 손도 이렇게 따스했었지……" 괴노인의 노안(老眼)에 희미한 물기가 서렸다. 백리사옥은 괴노인이 진정되기를 기다려 말문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누구십니까?" 괴노인은 어느정도 진정이 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노부는 살라무합. 천축범천밀교(天竺梵天密敎)의 후예 제 이십칠대(二十七代) 종정(宗正)이네." 백리사옥은 흠칫 놀랐다. (이 노인이 천축 양교(兩敎) 중 하나인 범천밀교의 후예! 종정이라면 바로 교주를 말하는 칭호가 아닌가?) 백리사옥은 지난 날 천축양교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다. 천축(天竺)에는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하나의 대교(大敎)가 있 었다. 범왕천교(梵王天敎)! 조화(造化)의 신(神)인 범왕(梵王)을 숭배하는 범왕천교는 사실 근세 바라문교(波羅門敎)의 시조라 할 수 있었다. 허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범왕천교는 그 뿌리가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 범천밀교(梵天密敎)와 바라문교(波羅門敎)! 헌데, 언제부터인가 범천밀교의 힘은 차츰 약화되고 바라문교의 힘은 날로 융성해지기 시작했다. 근자에 이르러 천축은 완전히 바라문교의 천하가 되고 말았다. 범천밀교는 점차 지하(地下)로 잠식해 들었고 이제는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허나 본교의 맥(脈)은 결코 끊어지지 않았네. 바라문교의 탄압에 못이겨 숫자는 극소수에 불과하게 되었으나, 그 천 년의 뿌리를 잃지는 않을 것이네." 살라무합의 얼굴에는 긍지가 깃들어 있었다. 백리사옥은 물었다. "범천밀교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교의 교리와 무공(武功)이 너무도 뛰어났기 때문이라네." 이 무슨 궤변인가? 너무도 뛰어났기에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니? 허나, 백리사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리와 무공의 뛰어남을 뒷받침해 주는 인재(人材)의 부족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겠군요?" "과연 그러하네." 살라무합은 감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범천밀교! 그 교리(敎理)와 무공(武功)은 정통적이며 심오했다. 극히 까다롭고 엄격했으며 무공 또한 단시일에 대성(大成)을 이룰 수 없는 심오막측한 것들이었다. 반면, 바라문교의 교리는 융통성과 보편성이 많이 부여되었고, 무공 또한 심오난해한 부분들을 속화(俗化)시켜 익히기에 까다롭지 않았다. 자연 편한 쪽을 쫓는 인간의 심리는 바라문교를 선택했고 범천밀교를 외면했다. 세월의 흐름은 양교(兩敎)의 격차를 심화시켰다. 범천밀교는 점점 인재의 결핍으로 몰락일로를 걷게 되었다. "천축에서 본교에 입문(入門)함은 곧 이단(異端)으로 취급되어 구족참수(九族斬首)의 극형을 받게되네.


이런 상황에서 천축 내에서 본교의 부흥을 꾀하기란 거의 불가능이라 할 수 있었네." 살라무합의 말은 계속되었다. "노부는 범천밀교의 마지막 종정(宗正). 범천(梵天)의 진정한 힘을 얻어 본교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아 줄 수 있는 천고대재(千古大才)를 찾아 중원으로 왔네. 노부 평생을 바쳐 중원땅 십팔만리(十八萬里)를 주유하며 인재를 찾았으나 진정한 천고대재를 만날 수 없었네." 백리사옥은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으려는 범천밀교의 마지막 후예…… 실로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는 진중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노인장을 공격한 인물들은 바라문교의 고수들이군요?" "그렇다네." 살라무합은 무겁게 탄식을 토해냈다. "노부는 그들의 끊임없는 추격을 받아왔네. 그동안 노부의 손에 죽어간 자 수천, 허나 그들은 결코 추격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네. 이번에 온 자들은 바라문교의 최절정고수인 바라삼존(波羅三尊)과 홍의구존불(紅衣九尊佛), 바라십팔차사(波羅十八差使). 노부는 그들의 손길을 간신히 벗어났으나 그때 정체불명의 괴인(怪人)이 나타나 엄청난 빙공(氷功)으로 노부를…… 노부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우욱!" 살라무합은 울컥 핏덩이를 토해냈다. 그리고 백리사옥의 손을 잡은 채 전신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자…… 자네는…… 노부의 상세가 이미 회복불능임을 알겠지?" 백리사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오장육부가 완전히 짓이겨졌고 전신혈맥은 이미 팔할 이상이 파괴되었다. 대라신선이 온다해도 반 시진을 넘기지 못한다.) 그때 살라무합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칠백 년 전, 본교의 제 십삼대 종정이셨던 살붕성(薩崩星) 조사(祖師)께선 예언하셨네. 본교는 향후 칠백 년 후에 부활되리라고……" "……!" "본교의 부활은 중원의 한 신인(神人)에 의해 이루어지리라고…… 그 신인이 나타나면 범천항마탁(梵天降魔鐸)이 스스로 울 것이라고……" 백리사옥은 놀랐다. 범천항마탁이 스스로 울 때 범천밀교를 부활시킬 신인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일순, 살라무합은 백리사옥의 손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자네는 이 범천항마탁의 울음을 들었겠지?" "들었습니다." "노부의 숨이 다하기 전 자네를 만난 것은 실로 하늘의 뜻이라 생각되지 않는가?" 부르르…… 살라무합의 전신이 경련하고 있었다. "……!" 백리사옥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범천밀교의 장래를 맡아달라고 말하려 함이 아니겠는가? 살라무합은 격동어린 눈빛으로 백리사옥을 정시했다. "스…… 승낙해줄 수 있겠는가?" 백리사옥은 일순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선뜻 승낙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은 더욱 아니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동굴 밖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후후, 그 대답은 우리가 해주겠다." "……!" 백리사옥의 고개가 휙 젖혀졌다. 동굴 입구에 구인(九人)의 홍포라마승들이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홍의구존불(紅衣九尊佛)이 아닌가? 선두의 사목(蛇目) 홍의대존불이 조소섞인 음성을 내뱉았다. "후후…… 소시주, 또 만나게 되었군." 그러면서도 그는 시선을 쓰러져 있는 살라무합에게 꽂았다. "살라무합! 이제 더 이상 네가 살 길은 없다." 살라무합의 시선이 거칠게 흔들렸다. (노부는 어차피 죽을 몸이다. 허나 이 소년을 죽게할 수는 없지 않은가?) 허나 생각만 그러했을 뿐 그는 현재 몸조차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백리사옥은 이때 현재의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기환술! 그것이면 내 몸 하나는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 노인은…… 방법은 오직 하나 뿐!) 순간이었다. 파파파파파파---- 파파파----! 백리사옥의 손에서 한 무더기의 금침(金針)이 홍의구존불을 향해 벼락같이 쏘아졌다. 홍의대존불의 사목에 불똥이 튀었다. "헛! 저놈이 암기를!" 그는 외치며 냅다 일장(一掌)을 내뻗으려 했다. 헌데 그 순간 쏘아오던 금침들이 갑자기 그들의 전면에 뚝뚝 떨어져 내리며 땅바닥에 꽂혀버리는 것이 아닌가? 파파파팍! 파파파팍! "헉! 이럴 수가?" 홍의구존불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보라! 갑자기 눈 앞의 풍경이 일변하며 짙푸른 망망대해(茫茫大海)가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진(陣)이다!" 홍의대존불은 경악하여 외치며 벼락같이 일 장을 내뻗었다. 쿠우우우우---태산이라도 날려버릴 듯한 무지막한 장력이 진세를 향해 몰아쳐 갔다. 허나, 이게 웬일인가? 홍의대존불의 엄청난 장력은 망망대해에 부딪치자 잔잔한 해풍(海風)처럼 소멸되어 버리지 않는가? 몇 번을 거듭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이……" 이빨을 갈았으나 방법이 없었다. 한편, 금침을 날려 순식간에 기진(奇陣)을 펼쳐낸 백리사옥은 가볍게 미소지으며 살라무합을 돌아다 봤다. "이제 당분간은 안전할 것입니다." 살라무합의 두 눈에 경탄이 솟구쳤다. (과연! 노부의 눈이 잘못 보지는 않았음이로다! 이 소년이 본교를 맡아준다면 범천의 영광을 반드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급히 입을 열었다. "노부의 부탁을 들어 주겠는가?"


백리사옥은 가슴이 아팠다. 자신의 사명을 일으키기 위해 평생을 고독과 적수(敵手)와 싸우다 이토(異土)의 차디찬 땅에서 죽어가는 살라무합은 죽는 그 순간 까지 사명만을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한 그의 모습에 백리사옥은 왠지 모를 뭉클함을 느껴야만 했다. 이때 백리사옥은 살라무합의 모습 위로 또 하나의 인자한 노안(老顔)이 추억처럼 겹쳐져 떠올랐다. 4 "저 거암(巨岩)을 보아라." 노인은 천길이 넘는 거대한 바위를 가리키며 말하고 있었다. "저 거암을 보면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느냐?" 소년은 그때 불과 다섯 살 소동(小童)이었다. "크다. 세상에서 저보다 큰 바위는 없을거야!" 노인은 웃었다. "허허허…… 그렇구나. 아마 천하 어디에도 저보다 큰 바위는 없을 것 같구나." "대사형(大師兄)! 난 저 바위처럼 큰 사람이 될거야!" 대사형은 소년에게 있어 부모나 할아버지와도 같았다. 문규(門規)의 엄격한 배분으로 노인은 소년의 사형(師兄)이었다. 소년은 어렸을 때 노인을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었다. 허나, 그렇게 부르면 야단을 맞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대사형이라고 불러야 했다. "사옥(査玉)아, 저 바위처럼 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응." "그렇지. 바위는 크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이 있단다." "치이! 그런 게 어딨어?" "허허, 저 산(山)을 보아라. 바위가 아무리 크다해도 저 산의 일부밖에 아니질 않느냐?" 소년은 시무룩해져 버렸다. 소년은 한참동안 뭘 생각하다가 눈을 반짝 빛내며 외쳤다. "치이! 그럼 산보다 더 큰 것도 있어." "그게 뭔데?" "하늘이지. 저 하늘은 끝도 안보이잖아?" "허허, 그렇구나. 사실 저 산 따위야 하늘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지. 허나, 저 하늘보다 더 큰 것도 있단다." "하늘보다 큰 것?" 소년은 열심히 생각해 보았으나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칫! 그런 게 어디 있어?"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소년을 번쩍 들어 안았다. "허허허…… 하늘보다 큰 것을 가르쳐 줄까?" "응." "그건 바로 사람의 마음이란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에 따라서 하늘보다도 크고 넓을 수 있단다. 때로는 벌레보다 작아지기도 하지만……"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이야? 난 잘 모르겠어." 노인은 소년의 뺨에 자신의 볼을 부볐다. "언젠가 네가 크면 그 말을 알 수 있게 된단다. 머지않아 너는 벌레보다 작고, 더러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도 보게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무서운 사람들이지." "무서운 사람들?" "그래, 천하의 역사가 생겨난 이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아주 무서운…… 두렵고 끔찍한 악마의


후예들이 나타난다." "악마의 후예? 그게 뭔데?" "아직은 몰라도 된다. 중요한 것은 네가 하늘보다 큰 마음을 기르는 일이야." "정말! 하늘보다 큰 마음을 가지면 벌레보다 쬐그만 마음을 가진 사람들 쯤은 문제가 아닐거야!" "그렇고 말고! 허허허……" 노인은 큰 소리로 웃었다. 허나, 그때 그 웃음이 어린 소년의 귀에도 몹시 슬프고 공허하게 들렸었던 기억을 소년은 가지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백리사옥…… 대사형인 노인의 이름은 우문성곡(宇文聖梏)이었다. (대사형!) 그는 어린시절 백리사옥에게 있어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천하인은 그 누구도 대사형을 흠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대사형은 천하무림의 성자(聖子)였다. 백리사옥은 대사형과 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다. 허나, 그가 열 다섯 살이 되던 해 대사형은 백리사옥을 문(門)에서 떠나보냈다. -하늘보다 큰 마음이 무엇인지 깨닫기 전에는 돌아오지도, 무림(武林)에 나서지도 말아라. 하늘보다 큰 마음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백리사옥은 산 속에 은둔했다. 백리사옥은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하늘보다 큰 마음의 경지를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허나 죽어가는 이 노인의 아픔과 고뇌, 그 처절하고 쓰라린 유한(幽恨)을 외면할 용기가 제게는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인간(人間)인 까닭입니다!) 일순, 백리사옥은 살라무합을 똑바로 정시했다. "한 가지 약속해 주겠습니까?" "……!" "저는 중원인(中原人)입니다. 결코 천축의 교도(敎徒)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단지 범천밀교의 부활을 돕는 협조자이며 귀교가 부활되면 언제든지 귀교를 떠날 것입니다. 약속하시겠습니까?" 살라무합의 눈빛이 열망(熱望)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약속 하겠네. 자네는 결코 본교의 교리(敎理)에 구속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네." 백리사옥은 조용하나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귀교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살라무합의 전신이 폭풍을 만난 듯 거세게 경련했다. "하하하하!" 그는 천정을 우러르며 앙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기쁨에 겨워서인가? 그의 노안(老眼)에서는 어느 사이 물기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인다! 범천의 잃어버린 하늘이……" 그 웃음은 기쁨에 넘쳐 있으면서도 왠지 허무하고 황량하게 백리 사옥에게 들렸다. 어느 순간 살라무합은 거짓말처럼 웃음을 뚝 그치더니 백리사옥을 정시했다. "고맙네. 노부는 구천에서라도 자네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네." 그는 품 속에서 하나의 물체를 꺼내 백리사옥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받게. 이것이 바로 범천밀교의 하늘(天)인 범왕대천부(梵王大天府)를 열 수 있는 범천개벽륜(梵天開闢輪)이네." 범천개벽륜은 팔찌(環) 크기의 작은 묵륜(墨輪)이었다. 살라무합은 이어, 범천항마탁과 묵주(默珠)를 건네주며 설명했다.


범천삼보(梵天三寶)----! 범천항마탁(梵天降魔鐸)! 그것은 태고(太古)에 범왕(梵王)이 제석천(帝釋天)과 더불어 아수라(阿修羅)를 구겁무저갱에 떨어뜨릴 때 사용했다는 전설을 가진 범천교의 지보였다. 오갑자(五甲子) 내공을 주입하면 탁음(鐸音)이 울린다. 탁음은 백리(百里)에 퍼져 마기(魔氣)를 굴복시킬 수 있다. 범천번뇌주(梵天燔腦珠)! 백팔개(百八個)로 된 염주(念珠)로 내공을 주입하면 스스로 날아 허공 만 장을 뒤덮는 무서운 암기(暗器)가 된다. 귀영(鬼影)이라도 피할 수 없다. 범천개벽륜(梵天開闢輪)! 내공을 주입하면 거대한 륜(輪)으로 변하며 만년철벽이라도 두부처럼 베어버리는 광세 신병(神兵)이다. 또한, 범천밀교의 최고비부(最高秘府)인 범왕대천부(梵王大天府)를 열 수 있는 비밀이 감춰져 있다. "범천개벽륜의 비밀은 칠백 년이 흐르도록 풀려지지 않았네. 그로인해 범왕대천부의 길은 막히고……" 살라무합은 많은 말을 한 탓인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는 밀려드는 사신(死神)과 억지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보…… 본교는…… 더욱 쇠퇴일로를…… 걷게…… 욱!" 그의 입에서 또 다시 핏덩이가 터져나왔다. 살라무합은 감겨드는 눈을 안간힘을 다해 부릅떴다. "마지막 부탁이 있네." 꽉! 그는 백리사옥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노부의 손녀…… 미형…… 그애는 바라문교에 끌려가 감금되어 있네. 그 애를 구해 주게. 그 애로 하여금 본교의 맥(脈)을 잇게 해 주겠나?" "알겠습니다!" 순간, 살라무합의 전신에 안도의 기운이 넘치듯 흘렀다. "고…… 고맙네, 사옥!" 그는 사옥이라 불렀다. (아아, 이제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다. 잃어버린 범천의 영광! 그 찬란한 부활이 보인다!) 살라무합의 두 눈은 드디어 감겨졌다. "죽기 전에 자네를 만난 것은 노부의 일생 최대의 기쁨……!" "노인장!" 그의 고개가 툭 꺾여졌다. 푸스스스…… 기이하게도 그의 몸뚱이는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죽음(死)이었다. 천축범천밀교의 마지막 후예 살라무합은 이렇게 죽었다. "……!" 백리사옥은 천천히 일어섰다. 범천개벽륜은 팔목에 차고 범천항마탁과 범천번뇌주는 품 속에 간직했다. 헌데,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돌연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석굴 전체가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백리사옥은 흠칫 놀라 급히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백리사옥이 펼쳐놓았던 진세(陣勢)는 안쪽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 지금 진세 밖에 있던 홍의구존불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폭갈같은 고함성이 들려왔다. "놈들을 살려두어선 안된다! 아예 폭약(爆藥)으로 석굴 전체를 통째로 날려버려라!"


꽈꽈꽈꽝----! 엄청난 폭발음이 터지며 석굴 전체가 미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릉…… 우두두두…… 쩌쩍쩍! 석벽과 천정에서 바위들이 무너져 내리고 석굴 바닥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백리사옥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지독한 자들! 어느새 폭약까지 준비해왔을 줄이야!" 허나 어떡할 것인가? 그가 펼친 기진(奇陣)이 아무리 놀랍다 해도 석굴 전체를 폭파해 버리겠다는 데야 별 수 없었다. (길을 찾아야 한다!) 백리사옥은 황급히 석굴 전체를 휩쓸어 보았다. (흙으로 된 부분이 있다!) 그의 눈에 이채가 빛났다. 과연 석굴의 한쪽 구석에 흙으로만 이루어진 부분이 있었다. (바위라면 모르지만 흙 속이라면 잠형지둔술(潛形地遁術)을 펼칠 수 있다!) 생각이 끝나기도 전 어느새 그의 신형은 그곳에 이르렀다. 푸우우---- 욱----! 백리사옥은 그대로 잠형지둔술을 펼쳐 흙 속을 뚫고 들어갔다. 꽈꽈꽈꽝----! 꽈르르릉----! 꽈꽈꽝----! 천지를 뒤집을 듯한 굉음과 함께 온 석굴이 통째로 박살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제 4 장 惡魔의 洞窟 1 계곡(溪谷), 양쪽으로 괴이한 형상의 괴암(怪岩)과 단애(斷涯)가 우뚝우뚝 솟아있는 절곡(絶谷)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괴암과 난석(亂石)들은 마치 유계(幽界)의 마군상(魔群像)들을 보는 듯했다. 휘이이---- 잉---- 잉----! 야풍(夜風)이 계곡을 빠져나가는 음향은 마치 귀신의 울부짖음처럼 들린다. 천공에는 한 조각 편월(片月)이 떠 있어 푸르스름한 귀광(鬼光)을 계곡에 내리붓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악령이 솟구칠 듯한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푹! 한데 문득 계곡 한쪽에서 한 사람이 지면을 뚫고 솟아나왔다. 일신에는 흙투성이가 된 헐렁한 모시옷을 걸쳤다. 허나 어둠마저도 그 눈부신 용모를 가리지 못하는 절세미소년이었다. 그는 백리사옥이었다. 잠형지둔술로 석굴을 탈출한 그는 땅 속을 한참 동안 누비다가 지금 이곳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백리사옥은 지면에 나서자마자 주위의 경물을 휘둘러 보았다. "마치 악마가 살고있는 듯한 음산한 계곡이군. 태행산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그는 발길을 옮기며 계곡을 찬찬히 살펴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백리사옥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저것은 혈무(血霧)가 아닌가?) 계곡 안쪽으로부터 뭉클뭉클 핏빛 안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핏빛 안개! 그렇다면 혹시 이곳이 엽노인이 말한 괴이한 계곡이 아닐까?) 백리사옥은 갑자기 가슴 속이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확인해 보자!) 그는 뚜벅뚜벅 계곡 안쪽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뭉클…… 뭉클……


핏빛 혈무는 점점 짙어졌다. 2 (동굴이 있다!) 과연 핏빛 혈무가 흘러나오는 곳에 시뻘건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혈무로 인해 핏빛으로 보이는 동굴의 입구는 마치 거대한 괴수 (怪獸)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뿐인가? 동굴 속으로부터 뭉클뭉클 뿜어나오는 지독한 요기(妖氣)는 무슨 말로 형용하랴? 유계의 입구가 있다면 저런 모습일 것인가? 지옥문(地獄門)의 모습이 저러할 것인가? 고오오오…… 바람(風)인 듯 악마의 신음성인 듯 괴이한 음향마저 계곡을 감싸고 들렸다. 백리사옥은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좋다! 이왕에 내친 걸음, 진정 악마가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물러서지는 않겠다!) 그는 뚜벅뚜벅 동굴 안으로 발길을 들여놓았다. 헌데, 백리사옥이 막 동굴로 사라졌을 때다. 휙! 휘익----! 휙휙휙----! 계곡 입구에 구인(九人)의 그림자가 날아내렸다. 그들은 바로 홍의구존불이 아닌가? "음? 저 녀석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니 놀랍군!" 홍의대존불의 사목(蛇目)이 시퍼런 섬광을 뿜었다. "저 녀석이 살아있다면 살라무합도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오!" 홍의구존불 중의 하나가 외쳤다. "그렇다! 뒤를 추적해 보자!" 슈우웃……! 홍의대존불의 신형이 동굴쪽으로 거조처럼 날았다. 나머지 팔인(八人)도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동굴(洞窟)은 아래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혈무는 들어갈 수록 점점 짙어졌다. 흘러나오는 요기(妖氣) 또한 더욱 음산해지고 있었다. 아마 보통사람 같았으면 이미 심장이 열 번도 더 얼어 붙었으리라. (뭔가 엄청난 것이 여기에 있다. 허나 그것이 악마라고는 믿지 않는다!) 백리사옥은 입술을 굳게 물고 안쪽으로 진입해갔다. 얼마쯤 들어갔을까? 거대한 석문 하나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헉……!" 백리사옥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악마상(惡魔像)! 마치 무저갱에 갇힌 악마가 천신(天神)을 조소하는 듯한 끔찍한 핏빛 마면상(魔面像)이 석문에 부조되어 있지 않은가? 억겁(億劫)의 한과 저주를 담고 있는 듯 머리와 목에는 아홉 마리의 인두사(人頭蛇)가 칭칭 감겨있고, 괴이하게도 새로로 쭉 찢어진 세 개의 눈(三目)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마광(魔光)이 뿜어나왔다. 핏물이 흐르는 입에는 두 개의 머리가 깨물려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제석천(帝釋天)과 범왕(梵王)의 잘려진 머리였다. 백리사옥조차도 그 모습에 전신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엽노인이 본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미쳐버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한낱 조각이 그에게 이토록 공포를 안겨줄 수 있단 말인가? "으으…… 음……!" 백리사옥은 신음을 흘리며 한참동안 심호흡을 했다. 땀이 흘렀다. 그는 얼마만에야 간신히 평정을 회복하며 악마상을 살펴보았다. (괴이하지 않은가?) 악마상은 괴이하게도 두 손으로 갓난 아기를 받쳐들고 있는 형상이었다. 헌데 갓난아기의 용모를 보라! 백옥보다 흰 살결과 그린 듯한 오관(五官)은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너무도 아름다워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니 무섭도록 아름다운 아기의 얼굴! 아기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데 그 미소는 인간의 혼백을 송두리째 앗아갈 듯 너무도 아름답지 않은가? 그 아기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스스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앙복(仰伏)하고 싶은 충동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다. 백리사옥도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껴야 했다. 허나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비릿한 피가 입 안에 고여지며 정신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문득 그의 시선이 아랫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몇 줄의 글귀가 있었다. <그 날…… 악마(惡魔)의 뜻에 의해 하늘은 먹구름을 가리웠다. 그것은 악마좌(惡魔座)의 빛을 지계(地界)에 알리지 않으려는 악마의 뜻이었다! 그 날…… 가리워진 암천(暗天)의 깊은 곳에서 천기(天機)마저 숨긴 채 하나의 녹색성좌(綠色星座)가 빛을 뿌렸다. 그것은 천지간의 모든 극마(極魔)와 극사(極邪)와 극음(極陰)과 극요(極妖)를 지배하는 악마의 성좌였다. 그 날…… 악마의 뜻에 의해 지상 어딘가에서 악마의 적자(嫡子)가 태어났다.> 글은 거기서 끝나 있었다. 백리사옥은 흠칫했다. (그렇다면 이 아기가 바로 악마의 적자란 말인가?) 믿을 수 없었다. 갓난아기는 악마의 적자라 불리워지기엔 너무도 아름답지 않은가?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우우웅…… 웅…… 석문이 갑자기 진동을 일으키며 굉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굉음 속에 한 줄기 음사(陰邪)한 목소리가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크크크크…… 들어오너라…… 너를…… 기다렸다…… 들어오라…… 석문을 열고……" 그것은 악마의 음성 같았다. 얼핏 들으면 나지막한 것 같았으나 정작 백리사옥은 고막이 터져버릴 듯한 충격을 느껴야 했다. 동시에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압력이 그의 뇌리로 밀려들었다. 백리사옥은 자신도 모르게 그 마음(魔音)에 이끌려 석문을 밀었다. 그그그그긍----! 석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촤아아아……! 빛(光)!


한 가닥 휘황찬란한 금광(金光)이 백리사옥에게 쏘아져 왔다. 그 빛에 백리사옥은 퍼뜩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저것은!) 그는 전면에 우뚝 세워진 하나의 철비(鐵碑)를 볼 수 있었다. 철비의 높이는 일 장(丈) 정도다. 그 중앙에 황금빛 찬연한 금판(金板)이 박혀 있었다. 눈부신 금광은 그 금판에서 뻗어나오는 것이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석굴 안을 가득 채우다시피 뭉클거리는 혈무(血霧)는 철비의 근처에만은 조금도 근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 백리사옥은 금판을 주시해 보았다. 금판에는 범어(梵語)로 된 다섯 개의 글자가 웅휘하게 새겨져 있었다. <금마대금인(禁魔大金人)! 무력(武力) 일천이백오십팔년(一千二百五十八年), 극중극마(極中極魔)를 대법력(大法力)으로 이곳에 감금한다.> (무력 일천 오십 팔 년이라면 지금으로부터 삼백년(三百年) 전이 아닌가?) 백리사옥은 모든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군. 이곳엔 누군가에 의해 감금된 엄청난 마인(魔人)이 있다. 이곳의 마기(魔氣)는 그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허나, 그는 다시 의혹을 느꼈다. "사람이 삼백 년을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곳에 감금되었다는 극중극마란 자가 바로 악마의 적자일까?" 이때였다. 휘! 휘익! 석실 안에 붉은 그림자들이 날아들었다. 홍의구존불이 나타난 것이다. "어린놈! 살라무합 반도(叛徒)놈을 어디에 숨겨 놓았느냐?" 아마 그들은 석문이 이미 열려 있었기 때문에 악마상을 보지 못한 듯했다. 백리사옥은 대답했다. "그분은 돌어가셨소." "뭣이?" 홍의대존불의 사목이 번쩍 빛났다. 허나, 그는 비릿한 고소를 흘렸다. "흐흐, 교활한 놈! 본좌가 그 말을 믿으리라 생각하느냐?" "믿고 안믿고는 당신의 마음이오." 홍의대존불은 괴소를 터뜨리며 한 손을 가볍게 쳐들었다. "푸흐흐흐…… 버릇없는 놈! 네놈이 본좌의 손에 잡혀서도 큰소리를 칠 수 있는지 보겠다!" 슈우웃----! 홍의대존불은 다짜고짜로 백리사옥의 어깨를 움켜쥐어 들었다. "미리환종보(迷離幻宗步)!" 백리사옥의 외침이 터지며 그의 신형이 좌측으로 기이하게 미끄러졌다. 미리환종보! 그것은 무공이라기 보다는 환술(幻術)에 가까운 보법(步法)이었다. 홍의대존불의 일수(一手)는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사목에 불똥이 튀었다. "엇! 네놈이 무공을? 어린놈이 어디서 한 수를 얻어 배운 모양이다만 어림없는 수작이다!"


홍의대존불은 외치며 냅다 일 장을 거칠게 뻗어냈다. "받아봐라!" 콰우우우우…… 노도와 같은 엄청난 장력이 폭풍처럼 백리사옥을 뒤덮어왔다. 홍의대존불의 분노가 섞인 이 일 장의 기세는 형언할 수조차 없으리만큼 가공할 것이었다. 백리사옥의 눈빛이 흔들렸다. (도저히 맞받을 수 없다. 피하는 수밖에!) 그의 신형이 다시 빙그르르 회전하며 장세를 젖혀냈다. 헌데, 백리사옥이 서 있던 곳은 공교롭게도 금마대금인이 있는 철비 앞이었다. 백리사옥이 몸을 피하자 홍의대존불의 무지막지한 장력은 그대로 철비를 후려치고 말았다. 꾸꽈꽝----! 철비는 장력에 의해 통째로 박살나며 안으로 날아갔다. 백리사옥은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우우…… 엄청난 장력이다. 저걸 만일 정통으로 맞았다면 그 즉시 온몸이 뭉개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홍의대존불은 노갈을 터뜨리며 다시 쌍장을 한꺼번에 휘둘렀다. "쥐새끼 같은 놈! 얼마나 잘 피하는지 보겠다!" 쿠쿠쿠쿠----! (급하다!) 백리사옥은 지면을 황급하게 굴렀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석굴 안쪽으로부터 인간의 소리 같지않은 잔혹음산한 괴소가 터졌다. "카카카카카……" 꽈꽈꽈꽈---- 꽝! 석굴 전체가 통째로 박살나며 지면에서 엄청난 불기둥이 치솟았다. "헉! 이런 일이……" "이게 도대체!" 홍의구존불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지는 사이 치솟는 불기둥 속에서 시뻘건 혈무(血霧) 덩어리가 솟아났다. 혈인(血人)! 그의 전신에서는 심장을 짓뜯어버릴 듯한 엄청난 마기(魔氣)와 사기(邪氣)가 숨막힐 듯 뻗어나왔다. "크카카카카! 삼백 년 동안 본존을 금제했던 금인(禁印)이 깨어졌다. 우우우우……" 쿠쿠쿠쿠…… 쿠르릉……! "허억! 이…… 인간이 아니다!" "고막이 뜯겨져 나가는 것 같다!" 홍의구존불은 자신들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때, 혈무괴인은 홍의구존불을 돌아보았다. "크크크크크! 웬 버러지들이냐?" 그는 홍의구존불이 뭐라 대답할 사이도 없이 다짜고짜로 한손을 휘둘렀다. 번쩍! 시뻘건 혈광이 혈뇌(血雷)처럼 홍의구존불을 뒤덮었다. "으악!" "크아악!" 홍의구존불 중 이인(二人)이 피곤죽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믿을 수 없었다. 바라문교의 절정고수들인 홍의구존불 중 두 명이 혈무괴인의 일수(一手)에 반항 한번


못해 보고 즉사해 버린 것이다. 엄청난 경악과 공포가 홍의구존불을 휘감았다. (저놈은 인간도 아니다! 악마다!) 순간, 홍의구존불은 일시 서로의 눈을 찾았다. (살아날 길은 오직 하나! 합공(合攻)을……!) 순식간에 그들은 일치된 결론을 찾았다. 그들 칠인(七人)은 일제히 쌍장을 휘두르며 혈무인에게 덮쳐들었다. "바라대천장(波羅大天掌)!" "바라혈불수(波羅血佛手)!" "대폭바라인강(大暴波羅印 )!" 칠 인의 합력(合力)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공할 폭풍의 회오리가 되어 혈무괴인을 향해 휘몰아쳐 들었다. "카카카카카----! 버러지들!" 혈무괴인은 무서운 광소를 터뜨리며 한 손을 수평으로 쫙 그었다. 츄아아악----! 석실 전체가 경력의 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며 거석(巨石)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동굴 바닥이 지진을 만난 듯 무섭게 갈라지고, 그 순간 홍의구존불 중 살아 있는 일부 사람은 자신들의 엄청난 경력의 회오리가 방향을 잃고 흐뜨러지며 그 속에서 하나의 핏빛 혈수(血手)가 자신들의 가슴을 수평으로 베어드는 것을 보았다. "크아악!" "크엑!" 그들 칠 인은 가슴이 동강나 몸뚱이가 상하(上下)로 쪼개지며 피범벅이 되어 날아갔다. 그리고 그들의 육신은 석면에 부딪쳐 완전히 피떡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단 일수(一手)! 너무도 엄청난 혈무괴인의 마력(魔力)이었다. "크크크크……" 혈무괴인은 다음 순간 한쪽에 주저앉아 있는 백리사옥을 바라보았다. "크크크크! 아직도 버러지가 남아 있었느냐?" 그는 볼 것도 없이 그대로 일수(一手)를 백리사옥에게 내뻗었다. 절대절명(絶代絶命)의 순간이다. 백리사옥은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허나 그 순간, 백리사옥은 자신의 바로 옆에 쩌억 갈라진 지면의 틈을 발견했다. 그것은 경력이 휘몰아치는 진동으로 인해 갈라진 바닥의 틈이었다. (어차피 죽기는 매일반이다!) 백리사옥은 황급히 몸을 굴려 갈라진 바닥 틈으로 굴렀다. 순간 혈무괴인의 경력이 그의 등판을 후려쳤다. "아아악!" 백리사옥은 처참한 비명과 함께 그 속으로 떨어졌다. 바닥이 갈라진 곳은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시커먼 암흑의 무저갱(無底坑)이 아닌가? "으…… 아……!" 백리사옥의 신형은 시커먼 암흑 속으로 여운처럼 사라져 갔다. 혈무괴인은 심장이 터질 듯한 괴소를 터뜨리며 선 채로 신형을 뽑아올렸다. "카카카카카……!" 쿠콰콰쾅! 꽈꽈꽝----! 석굴 천정이 그대로 박살나며 그의 혈무에 감싸인 몸은 바위를 뚫고 허공으로 치솟았다.


꽝---- 꽈르르르릉---- 꽈꽈꽝----! 악마의 동굴이 자리했던 절봉은 엄청난 굉음과 함께 통째로 붕괴되고 말았다. 완전히 봉우리 전체가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그 대폭발 속에 혈무괴인의 신형은 흡사 불기둥을 하늘로 쏘아올리듯 무섭게 치솟았다. 그리고 그가 천공에 이르자 그의 몸은 뿌옇게 흩어지며 피구름(血雲)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피구름 속에서 무서운 괴소는 이어지고 있었다. "크카카카카! 배신자 천요(天妖)! 그리고 천상사외(天象四外)! 용서하지 않으리라! 카카카카카!" 피구름은 죽음 같은 암천(暗天)을 누비며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3 마치 무저갱(無底坑) 속으로 빠져드는 듯이 백리사옥은 균열의 틈 속으로 끝없이 떨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백리사옥은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서 전신이 녹아드는 듯한 화기(火氣)와 흡인력(吸引力)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정신을 잃었다. 백리사옥이 떨어지는 곳은 마치 초열지옥(焦熱地獄)을 연상할만큼 시퍼런 불꽃이 이글거리는 화염(火炎)의 구덩이였다. 화르르르르…… 화르르르……! 철나한(鐵羅漢)일지라도 순식간에 쇳물로 변할 만큼 무시무시한 열기의 화염갱(火炎坑)에 백리사옥은 떨어졌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은 화염갱 속에 갇히고 말았다. 악마(惡魔)의 혓바닥같이 널름거리는 불꽃은 순식간에 그의 몸을 감쌌다. 헌데, 실로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가 화염갱 안에 떨어진 순간 이글거리는 화염이 돌연 그의 몸 주위에서 싸악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백리사옥의 주위로는 일점의 불꽃도 없었다. 그리고 허공 어디에선가 한 줄기 푸른 빛(靑光)이 백리사옥의 몸을 감쌌다. 지독한 화염의 불꽃은 바로 그 청광에 의해 밀려나는 것이었다. 쓰으으으…… 백리사옥의 몸은 빛줄기 속에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의 신형은 허공 일 장 가량의 높이로 떠오른 채 우뚝 멈추었다. 그 상태에서 그의 의복은 하나씩 벗겨져 이내 완전한 나신(裸身)이 되었다. 동시에 방향을 분간할 수 없는 곳에서 쇠북을 천천히 두드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호라! 천기(天機)는 과연 그릇됨이 없도다! 극중극마(極中極魔)를 감금한 지 삼백년(三百年)이 흐르는 날, 한 인간의 손에 의해 금제(禁制)가 풀리리라 천기는 예언했도다. 인간의 손에 의해 금마대금인(禁魔大金印)이 깨어지고 극중극마는 탈출하나 그를 다시 거둘 신인(神人)이 있어 천상천부(天象天府)에 들 것이라 하였느니…… 기이한 음성은 노인(老人)의 음성으로 짐작되었다. 그리고 그 음성은 의식을 잃고 있는 백리사옥의 잠재의식(潛在意識) 속으로 빠짐없이 흡입(吸入)되어 갔다. 그것은 비사(秘事)였다. 우리 사인(四人)은 본시 파사국(巴斯國)의 현인(賢人)들로 별호는 천상사외(天象四外)라 불리웠다. 우리들은 파사국 천상문(天象門)의 공동문주(共同門主)였다. 우리들은 어느날 천기를 살핀 결과 한 가지 무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악마의 예언! 악마의 적자(嫡子)가 탄생하리라는 무서운 예언이었다.


허나 그 시일은 알아낼 수 없었다. 천기(天機)는 기이하게도 그것만은 알려주지 않았다. 촤아아아…… 청광에 싸인 백리사옥의 몸에는 기이한 변화(變化)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나신이 완전히 청색(靑色)으로 변하더니, 몸의 피부가 서서히 벗겨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뼈마디가 우둑우둑 소리를 내며 쭉쭉 늘어나더니 그의 몸은 무려 십 척(十尺)이 넘는 거구로 변했다. 그러다가 서서히 몸이 정상의 크기로 줄어들고 다시 피부가 벗겨져 나갔다. 탈태환골(奪胎換骨)! 백리사옥은 무의식 상태에서 상상키 어려운 천고의 비연(秘緣)을 만나고 있음이 아닌가? 몸이 늘어나고 줄어들기를 아홉 차례, 피부가 벗겨지고 아물기를 아홉 차례, 청광(靑光)은 그 생명이 다한 듯 꺼져 버렸다. 다음 순간, 촤아아아…… 이번에는 서기(瑞氣)어린 자광(紫光)이 백리사옥의 몸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의 나신은 자색으로 물들었다가 피부가 벗겨지고 뼈마디는 늘어났다가 다시 줄어드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는 가운데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조금 전의 음성과는 또 다른 노인(老人)의 음성이었다. 우리들은 파사국을 떠나 천하를 주유했다. 그것은 악마의 예언을 막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함이었다. 물론 악마의 적자가 태어났다면 그를 죽이려는 뜻도 있었다. 헌데 우리들이 중원에 이르러 이곳 태행산에 이르렀을 때 형언키 어려운 엄청난 마기(魔氣)가 하늘에 뻗치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그대가 들어왔던 동굴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들은 악마의 조각상을 보았다. 우리들이 읽었던 천기의 예언(豫言)을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서운 마인(魔人)을 만났다. 그는 스스로를 극중극마(極中極魔)라 일컬었다. 팍! 자광(紫光)이 꺼졌다. 촤아아아아…… 이번에는 휘황한 홍광(紅光)이 백리사옥을 뒤덮기 시작했다. 아홉 차례씩의 탈태환골은 계속되었고, 또 다른 노인(老人)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악마의 적자는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악마의 시종(侍從)이라 했다. 우리들이 도착했을 때 극중극마는 천일폐관(千日閉關)을 마치고 출도하려는 시기였다. 우리들 사인(四人)은 극중극마와 싸웠다. 싸움은 무려 일백주야(一百晝夜) 동안 치뤄진 혈전이었다. 일백주야 만에 우리들은 간신히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는 무서운 마인이었다. 만일 우리들이 합공(合攻)을 펼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일천초(一千招)를 감당치 못했을 것이다. 우리들은 가까스로 그를 지하에 감금하고 금마대금인(禁魔大金印)으로 인봉(印封)했다. 극중극마는 자력(自力)으로는 탈출할 수 없었다. 팍! 홍광(紅光)이 꺼지며 빛은 다시 황색(黃色)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또 다른 네 번째 노인(老人)의 음성이 들려왔다. 허나 천의(天意)를 어찌하랴? 우리들은 삼백 년 후, 한 인간의 손에 의해 금마대금인이 깨어지고 극중극마가 탈출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어찌하랴? 우리들이 없는 마당에 뉘라서 그를 저지할 수 있으랴? 우리들은 탄식했다. 허나 천의는 무심치 않았다. 삼백 년 후, 극중극마의 탈출은 막을 수 없으되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신인(神人)이 이곳에 오리라는 것을 노부들은 알았다. 우리들은 이곳에 천상천부(天象天府)를 만들고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물론 우리가 삼백 년 후까지 살아있을 수는 없는 일, 우리들은 우리의 전신내정(全身內精)을 네 개의 빛(光)에 담아 여기 남긴다. 후인(後人)은 이것으로 서른 여섯 번의 탈태환골을 겪으며 천하에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도 해침을 당하지 않는 천상대정지체(天象大正之體)가 되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사상심광정(四象心光精)이라 칭하느니라! 그대는 천상대정지체가 되는 순간 일신에 삼갑자(三甲子)의 공력을 지니게 된다. 허니 사상심광정이 차츰 그대의 몸에 흡수됨에 따라 그 배인 육갑자(六甲子)에 이르게 되리라. 그대의 지혜(智慧)가 하늘을 놀라게 할 정도라면 천상천하유일병(天象天下唯一兵)인 천상대정홀(天象大正笏)도 얻을 수 있으리라! 후인이여, 우리들은 임종에 이르러서야 악마의 적자는 바로 그대의 당세에 태어나리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경계하라! 그들은 무서운 자들이니라! 허나 두려워하지는 말라. 천의(天意)가 대정(大正)에 있으매 악마는 무저갱으로 귀속되리로다. 후인의 무운을 빌겠다! 음성은 그쳤다. 그리고, 팍! 황색(黃色) 불빛이 순간 꺼졌다. 그때, 백리사옥의 몸은 마지막 서른 여섯 번째의 탈태환골을 마치고 있었다. 보라! 그의 전신이 눈이 부실 듯한 백옥같은 피부에 마치 서기(瑞氣)처럼 은은한 광채가 어리고 있지 않은가? 스스스스…… 그의 몸은 천천히 바닥에 뉘여졌다. 허나, 불꽃들은 그의 근처에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서기에 화염이 스스로 굴복함인가?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백리사옥의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그의 눈빛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가? 내가 살아 있었단 말인가?" 그는 중얼거렸으나 이내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지. 이곳은 천상천부(天象天府)라 했지. 나는 꿈결처럼 노인들의 음성을 들었다. 허나 그것은 현실보다 뚜렷한 음성이었다." 백리사옥은 이미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전면에는 하나의 석탁(石卓)이 있었다. 그 위에 네 개의 구슬(珠)이 놓여 있었다. 청(靑), 자(紫), 홍(紅), 황(黃)…… "고승(高僧)의 시신에는 사리(舍利)를 남긴다 들었다. 천상사외(天象四外)! 이분들은 천하를 염려하여 사상심광정(四象心光精)을 남기신 것이 아닌가?" 백리사옥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는 석탁을 향해 배사지례(拜師之禮)를 올렸다. 천상사외 또한 백리사옥에게 있어 스승(師)이 아니겠는가? 부스스스……


순간 네 개의 구슬은 먼지로 화해 버렸다. 이미 그 정기(精氣)가 백리사옥의 몸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그그긍----! 문득 석탁 앞에 하나의 육중한 석문(石門)이 솟아 올랐다. 합지인득천병(合智因得天兵)! 지혜와 인연이 닿는다면 천병(天兵)을 얻을 것이다. 지혜가 없는 자, 어찌 천하를 구할 것인가? 그대가 이 관문을 해결한다면 천상문(天象門)의 무상천병(無上天兵)인 천상대정홀(天象大正笏)을 얻으리라. 그와 함께 이곳을 나가는 출구(出口)도 열리게 된다. 달리 이곳을 나가는 방법은 없다. (이곳을 나가기 위해서라도 관문을 뚫어야겠군.) 백리사옥은 석문을 주시했다. 석문에는 수천 마리의 군상도(群象圖)가 조각되어 있었다. 크기와 형태도 가지가지다. 자세와 동작, 색깔들도 모두 다른 코끼리떼가 어울려 있는 조각이었다. 이 코끼리의 숫자는 정확히 사천사백사십사(四千四百四十四) 마리이다. 단 한 마리만이 열쇠이며, 잘못 눌렀을 때는 십일(十日)이 지나야 기관이 원상으로 복귀된다. 한 번 잘못 누르면 꼼짝없이 십 일을 갇혀 지내야 하는 것이다. (단 한 마리를 골라야 한다. 필시 뭔가 열쇠가 있으리라!) 백리사옥은 열심히 뇌리를 굴렸다. 공야수문이 천고의 대재라 칭찬했던 그의 지혜가 아닌가? 어느 순간, 군상도를 살피고 있던 백리사옥의 두 눈이 번쩍 기이한 빛을 뿌렸다. (코끼리란 본래 군집생활(群集生活)을 하는 짐승이다. 그렇다면 군집의 무리에는 반드시 우두머리가 있는 법! 이 관문의 열쇠는 그 우두머리를 찾아내는 데 있다!) 그의 뇌리가 무섭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백리사옥의 불타는 시선이 군상도의 그림 속을 샅샅이 훑었다. 어느 순간 그의 눈이 다시 번쩍 빛났다. (천상사외는 네 분이셨다. 내게 심어준 대법 또한 사상심광정(四象心光精), 사상(四象)에 뜻이 있지 않을까?) 그는 석문에 시선을 꽂은 채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백리사옥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무릎을 탁 쳤다. (이것은 바로 사상(四象)의 이론을 가리킨 것이다! 태극(太極)은 양의(兩儀)로 나뉘고 양의는 다시 사상(四象)이 된다. 이치는 건곤감리(乾坤坎離)! 그것은 또한 천지일월(天地日月)을 뜻한다. 그렇다면!) 순간, 그의 시선이 어느 한 마리 코끼리에 비수처럼 꽂혔다. "하하핫! 만물의 으뜸은 당연히 하늘(天)이 아닌가!" 펑----! 백리사옥은 천(天)의 방위(方位)를 점하고 있었던 코끼리를 향해 일 장을 날렸다. 찰나, 번---- 쩍! 한 줄기 강렬한 황금빛 광채(金光)가 석문으로부터 섬전처럼 쏘아져 나왔다. "천상대정홀이다!" 백리사옥은 신속하게 황금빛 광채를 낚아채 들었다. 그것은 손바닥 정도의 크기인 황금빛 홀(笏)이었다. 그 위에 붉은 색으로 힘차게 새겨진 글자!


천상제일병(天象第一兵)---- 대정(大正). 천고기병(千古奇兵) 천상대정홀이 백리사옥의 손에 쥐어진 것이었다. 우우우웅……! 천상대정홀은 찬란한 금광을 뿜어내며 힘차게 울었다. 그 뒷면을 살펴보니 깨알 같은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천상대정삼식(天象大正三式)----! 제일식 천상대정혼(天象大正魂)! 제이식 천상대정천(天象大正天)! 제삼식 천상대정독존(天象大正獨尊)! 천상(天象)의 힘이 하늘에 닿으니 능히 대정(大正)은 악마를 누르리라! (구결은 외웠으나 차차 익히도록 하라!) 백리사옥은 천상대정홀을 품 속에 간직한 뒤 석문을 밀었다. 그그그긍----! 석문은 쉽게 열렸다. 순간 눈부신 태양빛이 그곳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석문 밖은 태행산 어귀의 절벽이었다. 이미 밤(夜)이 지나고 날이 밝은 것이다. 여명(黎明)은 오늘 따라 왜 이리도 찬란하고 아름다운가? "가자!" 슈아---- 아---- 앙---백리사옥의 신형이 거조(巨鳥)처럼 아침햇살을 박차고 날았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백리사옥은 어느새 상상도 못할 만큼 그 능력이 뛰어나 있었다. 4 천상대정홀은 본시 마(魔)를 억누르는 힘을 지닌 모양이었다. 엽노인을 금침으로 회복시킨 뒤 천상대정홀의 금광(金光)을 비추었더니 이내 바른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뛸 듯이 기뻐하는 연옥과 연화 자매를 뒤로하고 백리사옥은 자신의 초막으로 향했다. 헌데, 그의 마음은 왠지 무겁고 답답했다. 범천밀교의 후사(後事)! 극중극마를 찾아내야 하는 일! 그 두 가지 과제가 그의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은 없다.) 백리사옥은 검미를 찌푸리며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 세 개의 인영이 그의 면전에 떨어져 내렸다. "사제!" 부르며 달려오는 사람은 번천뇌후 공야수문이었다. 그의 뒤를 무적제검 사마흠과 철혈잠룡 뇌옥풍이 따르고 있었다. 초옥(草屋). 어둠의 장막이 내리덮인 백리사옥의 초옥 안에는 가물거리는 작은 유등(油燈)을 둘러싸고 네 사람이 앉아있었다. 공야수문은 철혈패천세가의 참사에 대해 백리사옥에게 말해 주었다. "사제, 자네의 의견은 어떤가?" 공야수문은 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백리사옥은 잠시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인간의 행위와 악마, 어느 쪽도 속단하기는 어렵습니다. 허나 분명한 것은, 보통의 상식적인 방법으로는 그들을 찾아낼 수도, 싸워 이길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공야수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악마의 존재를 믿지않는 우형이네만 흉수의 살인방법과 끔찍함이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라 여겨지네." "……" "우형이 판단하기로 이 사건을 해결할 인물은 천하에 오직 사제밖에 없다고 생각하네. 자네의 지혜를 빌려 주겠는가?" "……" 백리사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편, 무적제검 사마흠은 내심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소년을 처음 보았을 때 물론 천하에 찾기 힘든 기재임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 허나 막상 이야기를 나누고보니 그도 별다른 뾰족한 수는 없어 보이지 않는가?) 이때, 공야수문이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우형의 생각으로는 사제가 이 초려를 떨치고 일어나 천하의 근심을 해결해 주리라 믿네." 백리사옥이 침묵하자 공야수문은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우형의 설득으로 사제를 움직일 수 있으리라는 자신은 없네." "……!" 공야수문의 눈에서 이채가 빛났다. "하지만 사제가 그분의 참사마저도 외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네." 순간, 백리사옥의 눈빛이 일변했다. "호…… 혹시 대사형(大師兄)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휴우……" 공야수문은 천근 납덩이처럼 무거운 탄식을 길게 토해냈다. "그렇네. 대사형께선 이미 타계(他界) 하셨네." "그, 그런 일이!" 백리사옥은 자리를 박차며 벌떡 일어섰다. 공야수문은 탄식어린 어조로 말했다. "대사형께선 철혈패천세가의 참사가 발생하기 며칠 전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셨네. 우형은 그날 밤 대사형의 서재에서 학문에 대해 담론(談論)하고 있었네. 헌데 갑자기 괴이한 금음(琴音)이 들려왔고, 대사형께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처참한 죽음을…… 우형은 뻔히 바라보면서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네." 이때, 무적제검 사마흠이 불쑥 외쳤다. "공야형! 그렇다면 공야형이 말하는 대사형이란 혹시 번천만뇌세가의 가주이신 번천대공(飜天大公)을 말함이 아니오?" 공야수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순간, 사마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그 어르신께서 참변을 당하셨단 말씀이오?" 그의 얼굴에는 더할 수 없는 경모의 빛과 아울러 경악과 불신의 그림자가 무섭게 엇갈렸다. 번천대공이 누구이기에 무적제검 사마흠조차 어르신이라 칭하는 것인가? 번천대공(飜天大公) 우문성곡(宇文聖梏). 이 시대 최고의 현인(賢人)이며 의인(義人)이자 성인(聖人)으로 숭앙되는 인물. 천하무림인은 누구라도 그의 이름만 들어도 경모의 예를 취했고, 그가 나타난 자리에는 백 년의 숙한으로 싸우던


원수들일지라도 스스로 싸움을 그쳤다. 무림의 살아있는 성자(聖者)가 바로 그였다. 삼십 년 전, 천하를 혈풍으로 휩쓴 백팔인(百八人)의 절세마두들이 있었다. 지옥백팔마(地獄百八魔)! 천하에 그들 일인(一人)의 십초지적(十招之敵)이 될 수 있었던 자 없었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피(血)의 폭풍이 그칠 날 없었다. 천하는 그들의 마수(魔手)에 그대로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이때, 천외(天外)로부터 한 기인(奇人)이 나타났다. 그는 무공이 그다지 출중한 것은 아니었으나 하늘을 뒤엎을만한 지략(智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지략으로써 지옥백팔마를 분열시켰고, 그들끼리의 싸움을 조장시켰다. 천하무적을 자랑했던 지옥백팔마는 서로 피터지게 싸우다 스스로 자멸(自滅)했다. 칠십 이 명이 죽고 삼십 육 명이 남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이 자중분란지계(自中分亂之計)에 빠진 것을 알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들의 배후를 들쳐낸 정사연합군(正邪聯合軍)의 공격에 그들 대부분은 추살(追殺) 되었고, 간신히 구인(九人)의 최강마두(最强魔頭)들만이 살아 도망치다가 기인이 안배해 놓은 구천마뇌(九天魔牢)로 떨어지고 말았다. 무림은 구원되었다. 그제야 천하를 구해낸 기인의 이름이 밝혀졌다. 우문성곡(宇文聖梏). 그와 함께,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천외세가(天外世家)가 알려졌다. 번천만뇌세가(飜天萬腦世家)! 허나, 알려진 것은 단지 이름 뿐 그 내력과 규모, 진정한 실력 등은 전혀 신비에 가려졌었다. 확실한 것은 번천만뇌세가의 힘이 무공(武功)보다도 지략(智略)을 중시하며, 그 진정한 잠력(潛力)은 세인의 상상을 불허할 정도이리라는 것 뿐. 번천대공 우문성곡은 자신을 천하무림맹주로 추대하려는 천하인의 요청을 물리치고 번천만뇌세가에 은거해 버렸다. 천하가 평화로울 때는 더 이상 본가(本家)의 힘은 필요 없다는 말만 남긴 채…… 이후, 번천만뇌세가는 전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엔 번천만뇌세가를 일컬어 천하인들은 천외일가(天外一家)라 불렀으나, 차츰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명성이 조금씩 잊혀진 지금은 천하십대세가(天下十大世家)의 일석(一席)으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간혹 강호의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부가주인 번천뇌후 공야수문이었다. 무림에선 공야수문 외의 번천세가 인물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지금까지도 번천대공 우문성곡의 이름은 천하인의 가슴에 경모(敬慕)의 성자(聖者)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를 존경하지 않는 자 천하에는 없었다. 헌데 그가 죽었다니…… "미, 믿을 수 없소! 누가 그 어르신을 죽일 수 있단 말이오?" 무적제검 사마흠은 주먹을 움켜쥔 채 눈썹마저 부르르 떨었다. 공야수문은 신음했다. "음! 허나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상식을 납득할 수 없는 괴사(怪事)와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시선을 백리사옥에게 주었다. "사제……" 백리사옥은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야천(夜天)은 오늘따라 별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휘이잉……! 차가운 야풍이 밀려 들었다. (대사형!) 백리사옥의 눈 속에는 너무도 짙은 슬픔의 그림자가 깔려 들었다. 머지 않아 너는 무서운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천하의 역사가 생겨난 이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아주 무서운, 두렵고 끔찍한 악마의 후예들이란다. (대사형, 당신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백리사옥은 우울한 눈빛으로 야천을 응시했다. 그때 공야수문이 다가와 백리사옥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대사형을 생각하고 있는가?" "……" "그분은 배분상으로 사형이 되시지만 우리에게는 부모나 사부(師父)와 같은 분이셨네." "사형." 백리사옥은 야천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대사형의 장례는……" "아직 치르지 못했네. 단지 가장(假葬)만 해두었을 뿐이네. 사제가 없이 대사형의 장례식을 치룰 수 있겠는가?" "……" "또 한 가지 이유는 대사형의 살해현장을 보존시켜 자네로 하여금 뭔가 단서를 찾아낼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네. 흉수가 제일 먼저 노린 대상이 대사형이었다면 이것에는 필시 중대한 이유가 있을 것이네." 백리사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대사형께서는 이미 뭔가를 짐작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곳에서부터 조사를 착수해야 합니다." "동감이네. 우선 본가(本家)로 돌아가야 하네." "좋습니다." 백리사옥은 확실하게 외쳤다. "대사형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제 손으로 그분의 장례를 치뤄 드림은 너무도 당연한 도리입니다. 또한 뭔가 단서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의 눈이 뜨겁게 타올랐다. "천하의 위난,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허나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대사형의 죽음, 그것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공야수문의 눈빛 또한 격동으로 일렁였다. "고맙네! 우형은 자네가 반드시 일어서 주리라 믿었네." "사형!" 백리사옥은 공야수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마주 잡은 손은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운명(運命)! 숨어 있던 천붕(天鵬)이 날개를 털고 일어나는 떨림이었으며, 장차 천하의 운명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될 백리사옥과 악마(惡魔)와의 대전쟁(大戰爭)의 선전포고(宣戰布告)이기도 했다. 휘이잉…… 드디어 바람(風)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5 휘이잉……


번천뇌후 공야수문은 잠시 후 초옥에서 상당히 떨어진 어느 고봉(高峯)에 우뚝 서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그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사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본가(本家)에 무사히 도착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나 공야수문이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끝냈다." 문득 그는 품 속에서 몇 마리의 전서구(傳書鳩)를 꺼내 야천으로 날렸다. "이제 남은 것은 천운(天運) 뿐!" 푸드드득…… 푸드득……! 전서구는 칠흑같은 야천을 박차며 힘차게 날아 올랐다. 순간 공야수문의 입가엔 만족의 웃음기가 피어 올랐다. "후후…… 천면종(天面宗)!" 그의 짤막한 외침이 떨어지자 어둠의 어디선가 대답이 있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군!" "준비는 완벽한가?" "물론입니다. 변장술이라면 천하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이 천면종입니다!" "그대를 믿겠다. 마음의 준비 또한 되었겠지?" "믿어 주십시오!" 어둠 속의 음성은 결연한 어조로 외쳤다. "지난 날 주군이 아니셨다면 속하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이제 주군을 위해 죽게됨을 오히려 기쁘게 여길 따름입니다!" 공야수문은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 "천면종, 그대의 죽음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겠다. 천하는 그대들의 희생으로 부활될 것이다." "먼 훗날 구천(九天)에서 뵈오리다!" 스스…… 어둠 속에서 사라져가는 인기척이 들렸다. 일순, 공야수문은 가볍게 어깨를 흔들었다. 주르르르…… 그의 신형이 갑자기 핏물처럼 녹아내리는 것이 아닌가! "혈수환령밀공(血手幻靈密功)!" 녹아내리는 핏물 속에서 짤막한 외침이 들려옴과 동시에 핏물은 땅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져 버렸다. 혈수환령밀공! 믿어지지 않는 기학(奇學)이 아닌가? 휘이이---- 잉! 바람은 폭풍을 예고하듯 더욱 거세게 불어쳤다. 바람 속에 천하제일지 공야수문의 마지막 말이 여운처럼 실려 있었다. "후후…… 사제, 기환술은 자네만이 달인(達人)이 아니라네. 우형 또한 악마의 정체를 대충은 짐작하고 있네. 자네가 짐작하는 것처럼…… 그리고 내일, 악마와의 제일전(第一戰)! 나 공야수문의 완벽한 지략(智略)을 보여주겠네." 악마와의 제일전(第一戰)! 드디어, 무서운 싸움은 시작되는가? 제 5 장 魔手의 追跡 1 두두두두두---어슴푸레한 미명(未明)의 대지를 박차며 네 필의 인마(人馬)가 천붕협을 떠났다.


번천뇌후 공야수문, 무적제검 사마흠, 철혈잠룡 뇌옥풍, 그리고 야헌 백리사옥(百里査玉)! 그들의 목적지는 운중산(雲中山) 번천만뇌세가(飜天萬腦世家)였다. 두두두두---- 두두두---얼마나 달렸을까? 돌연, 무적제검 사마흠이 전방을 가리키며 외쳤다. "공야형! 전방에 인마(人馬)가 나타났소!" 과연, 황진을 박차며 네필(四匹)의 인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빙긋! 공야수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두두두두…… 네 필의 인마는 순식간에 가까이에 이르렀다. 순간 사마흠은 흠칫 놀랐다. 놀랍게도 네 필의 말에 타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은 백리사옥의 일행과 어김없이 똑같은 모습이 아닌가? 타고 있는 말과 의복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 모습 또한 거의 비슷하여 조금만 떨어져서 본다면 도저히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공야형! 어찌된 일이오?" 공야수문은 빙긋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소제의 수하들이죠. 혹시 만일을 위해 변장시킨 것입니다." 사마흠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머리를 탁 쳤다. "분산지계(分散之計)로 적의 이목을 속이자는 뜻이구려!" "바로 그렇습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우리도 극히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사마흠은 감탄했다. (우리들만 온 줄 알았더니 어느새 이런 준비를 해놓았을 줄이야!) "역시 공야숙부님다우신 준비시군요!" 시종 말이 없는 철혈잠룡 뇌옥풍도 감탄성을 발했다. 허나 백리사옥은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때 네 필의 인마는 면전에 이르렀다. 그 중 공야수문의 복장을 한 인물이 큰소리로 외쳤다. "주군(主君)의 분부를 기다립니다!" 공야수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동(東)쪽으로 우회하며 운중산으로 가거라!" "존명!" 네 인물은 동시에 외쳤다. 다음 순간 그들은 동(東)쪽을 향해 질주해 갔다. 두두두두…… 일순, 사마흠은 의혹이 일었다. (주군? 어떠한 인물들이기에 공야수문에게 주군이란 칭호를 쓰는가?) 허나, 그는 캐묻지 않고 그대로 말에 박차를 가했다. "가자!" 두두두두두---얼마쯤 달렸을까? 또 다시 네 필의 인마(人馬)가 나타났다. 그들 또한 일행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서(西)쪽으로 우회하여 운중산으로 오너라!"


"존명!" 두두두두두…… 이어 거듭 나타난 세 번째와 네 번째 인마는 각기 남(南)과 북(北)으로 우회하여 운중산으로 향했다. 공야수문은 사방으로 수하들을 분산시킨 연후 조용히 뇌까렸다. "놈들이 속아주길 바랄 뿐이다." 2 암천(暗天). 시커먼 먹구름이 덮인 하늘은 해를 가리워 금방이라도 폭우(暴雨)가 쏟아질 것 같았다. 휘이잉---- 잉---- 잉----! 거센 바람(風)이 천지(天地)를 휘감으며 불었다. 귀기스럽고 음산한 분위기였다. 두두두두두---군진야(群盡野)라 이름 붙여진 황야를 네 필의 인마가 숨가쁘게 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야수문의 명령을 받고 동(東)쪽으로 우회하는 인물들이었다. 휘이이---- 잉----! 음산하고 귀기스런 바람은 군진황야에 싯누런 황토구름을 일으키며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빌어먹을! 날씨 한번 되게 음산하군!" "그러게 말일세! 꼭 악령(惡靈)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기분나쁜 날씨야!" 네 사람의 무사(武士)들은 그렇게 주고받으며 황야를 질주해갔다. 헌데, 어느 순간이었을까? 두두두두…… 전면 멀리서 희미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응? 이게 웬 말굽소리지?" "글쎄? 누가 이쪽으로 달려오나본데?" 무사들은 눈썹을 좁히며 전방을 주시했다. 말발굽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두 마리 정도라 여겼던 것이 나중에는 수십 마리가 질주해오는 소리로 들렸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엉? 이게 뭐야? 소리는 들리는데 보이지 않다니!" 그들 중 누군가가 부르짖었다. 그렇다. 분명히 수십 마리의 말발굽소리가 짓쳐들어오는데 말(馬)의 형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럴 수가?" "세상에 이런 해괴한 일이?" 무사들이 놀라 외치는 사이 말발굽소리는 순식간에 가까이에 이르고 있었다. 헌데 이번에는 전면(前面)에서만이 아니었다. 사면팔방(四面八方)에서, 아니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여러 곳으로부터 수십 수백, 아니 수천 마리의 말떼가 질주해 드는 말발굽소리! 말(馬)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데 말발굽소리는 사인(四人)의 무사를 덮쳐들고 있는 것이다. 환청(幻聽)인가? 순간, 형언할 길 없는 엄청난 공포가 무사들에게 밀어닥쳤다. "이, 이런 일이!" "아, 악령(惡靈)이다!" 찰나였다. 키히히히힝----!


그들이 타고있던 네 마리의 말이 일제히 울부짖으며 땅에 무릎을 꿇었다. 자세히 보니 말들은 목에서 핏줄기를 내뿜으며 나동그라지 고 있지 않은가! 두두두두두---- 두두두---- 두두---- 둑! 말발굽소리가 거센 폭풍처럼 무사들에게 덮쳐드는 그 때, "크아아악!" "아아아악!" 무사들은 손 하나 써 보지도 못한 채 처절하게 나동그라졌다. 그들의 가슴에 쪼개지고 머리가 두부처럼 으깨진다. 짓이겨지고 갈라 찢어지는 살점들과 핏물들은 마치 피로 반죽을 해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마치 수천 마리의 보이지 않는 말떼가 그들을 짓밟아 버리는 듯한 처참한 광경이었다. 무공도 무기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순식간에 사인(四人)은 피떡이 되어 버렸고, 귀풍(鬼風) 같은 바람 속에 악령의 말발굽 소리는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우두두두---- 두두---- 두두두두두---3 휘이이이---- 이이---- 잉----! 음양파(陰陽坡)란 이름을 지닌 이 고개는 망량산(望凉山)을 등 뒤에 병풍처럼 두른 높은 고개마루였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운에 네 필의 인마가 고개를 넘고 있었다. 서(西)쪽으로 우회하여 운중산으로 달려가는 무사들이다. 휘이이---- 잉---- 잉----! 귀기(鬼氣)스런 바람과 먹구름으로 뒤덮인 암천(暗天)에 그들은 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간직한 채 질주하고 있었다. 문득, 선두에서 달리던 무사 하나가 외쳤다. "어엇! 저, 저게 뭐지?"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향하는 천공(天空)에 무지개처럼 둥그런 형태의 운무(雲霧)가 걸려 있었다. 그 둥그런 운무는 구름이 모여들 듯 축소되며 하나의 형태를 이루어갔다. 헌데 이럴 수가? 눈(眼)! 운무는 하나의 거대한 눈의 형태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시커먼 먹구름에 뒤덮인 검은 하늘에 환영처럼 떠올라 있는 거대한 눈의 형상은 공포스런 광경이었다. 눈은 어찌보면 거대한 괴수(怪獸)의 눈과도 같았고, 어찌보면 악령(惡靈)의 눈과도 같이 보였다. 눈에서 뿜어나는 엄청난 사기(邪氣)와 요기(妖氣)는 심장을 통째로 얼려버릴 듯했다. "허억! 저…… 저!" "악령의 눈이다!" 네 무사들이 공포성을 지르는 순간, 달리던 말(馬)들이 일제히 피거품을 물고 쓰러져 버렸다. 버---- 언---- 쩍! 천공의 마안(魔眼)으로부터 한 줄기 녹색 광채(綠光)가 그들에게 폭사되었다. "헉!" "흡……!" 피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떠올릴 틈도 없었다. 녹광은 네 줄기로 갈라지며 그대로 무사들을 꿰뚫었다. 푸스스스…… 녹광이 격중된 순간 비명조차도 질러보지 못한 채 그들의 몸은 말과 함께 가루가 되어버리지 않는가!


휘이이잉---- 잉---바람은 더욱 거칠게 불었다. 가루가 되어버린 그들의 몸은 마치 타버린 재(灰)가 흩날리듯 바람에 휩쓸려 버렸다. 그리고 천공에 나타났던 거대한 마안은 흡사 환영이 꺼지듯 사라졌다. 4 계곡(溪谷), 남(南)쪽으로 우회하는 무사들은 계곡을 통과하고 있었다. 헌데 어느 순간, 키히히히힝---- 힝----! 말들이 갑자기 몸부림치며 제자리에 멈춰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옆구리를 걷어차고 채찍을 휘둘러대도 소용이 없었다. 말들은 뭔가 공포에 질린 듯 전진하려고 들지를 않는 것이었다. "왜 이러지?" "이상한데? 한 번도 놀라본 적이 없는 말들인데?" 그때 돌연, 무사들의 입에서 대경성이 터져나왔다. "아앗! 저, 저것은?" "땅이 갈라진다!" 쩌저적! 쩌저---- 저---- 적! 갑자기 계곡의 밑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동시 계곡 양쪽의 절벽들이 무너지며 무수한 바윗덩어리들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 지진이다! 피해라!" 무사들은 급박하게 부르짖으며 다급하게 말을 몰았다. 그 순간 밑바닥 지면이 아가리를 벌리며 한 무사가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크아아악!" 그와 때를 같이하여 굴러 떨어지는 바위에 또 한 무사가 깔려 피떡이 되어버렸다. "으아아아악!" "피해라! 계곡을 빠져나가야 한다!" 나머지 무사들은 목청껏 부르짖었다. 하지만 계곡 양쪽이 통째로 무너지며 그들은 바윗속에 깔려버렸다. "크아악!" "아아아아악!" 단말마 비명이 생의 최후를 알렸고, 계곡은 대폭음과 함께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우르르르릉…… 꽈꽈꽈꽝---- 꽝! 몰살이었다. 5 같은 시각, 북(北)쪽으로 우회해가던 무사들은 하늘에 닿을 듯한 거목(巨木)들이 빽빽이 들어선 밀림지대(密林地帶)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두두두두…… 그들 사인(四人)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밀림을 통과해가고 있었다. 한데 어느 순간이었다. "어엇! 저걸 봐라!" 그들 중 누군가가 부르짖었다. 사 인의 시선이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하는 순간, 그들은 대경성을 토하고 말았다. "헉!" "저, 저것은?"


꿈틀꿈틀…… 무수한 거목(巨木)의 가지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무수한 뱀(蛇)떼가 엉켜붙듯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령식인목(死靈食人木)이다!" 두두두둑……! 무사들은 일제히 말고삐를 잡아채며 오던 길로 돌아가려 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푸욱! 지면으로부터 뭔가 거대한 시뻘건 물체가 솟아나왔다. 그것은 손(手), 거대한 집채보다도 큰 시뻘건 핏빛 비늘이 뒤덮여 있는 괴수(怪獸)의 손이 아닌가! 그것은 솟아나자마자 그대로 타고 있던 말과 함께 한 무사를 덮쳐 움켜쥐었다. "크아아악!" 우드드드득……! 움켜쥔 손 안에서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음향과 함께 사람과 말이 피범벅이 되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것은 마치 한 손에 포도송이를 쥐고 비틀어 버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공포가 나머지 삼 인에게 무섭게 밀어닥쳤다. "다, 달아나자!" 그들 세 무사는 죽어라고 질주했다. 허나, "으아아악!" "케에엑!" 그들의 몸은 움직이는 나무, 사령식인목에 휘감기며 처절한 비명과 함께 핏물로 녹아 내리고 말았다. "이, 이럴 수는…… 없……!" 푸욱! 마지막 무사의 경악성이 끝나기도 전에 지면에서 솟아나온 또 하나의 손이 그를 움켜쥐었다. "아아악!" 무사는 발버둥쳤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우드드득! 그의 몸과 그가 타고 있던 말은 통째로 마수(魔手)에 움켜쥐어져 비틀어져 버렸다. 낭자하게 흘러내리는 핏물과 육편(肉片), 피비린내와 악취가 온 밀림을 뒤덮었다. 어느 한 순간 두 개의 마수는 솟아나온 지면 속으로 다시 파묻혀 버렸고, 움직이던 나무들도 거짓말처럼 뚝 움직임을 멈추어 버렸다. 휘이이잉----! 귀기스런 바람만이 숲 속을 을씨년스럽게 휘몰아칠 뿐이다. 6 용천관(龍泉關). 산서(山西), 하북(河北) 두 개 성(省)의 경계이며, 오대산(五臺山)의 입구에 있는 험관(險關), 태행산(太行山)에서 운중산(雲中山)으로 가는 길에 필히 통과해야 하는 험로(險路)였다. 두두두두…… 백리사옥과 공야수문, 사마흠과 뇌옥풍은 급박하게 용천관의 험로를 통과하고 있었다. 때는 묘시(卯時), 이미 해가 뜰 시간이 지났건만 천지는 암회색의 어둠에 깔려 있었다. 휘이이---- 이---- 이---- 잉! 금방이라도 악령(惡靈)이 음산한 괴소와 함께 솟아나올 듯한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빌어먹을 날씨로군!" 사마흠이 말 옆구리를 연신 걷어차며 내뱉았다.


"만일 흉수가 악마라면 이런 분위기에 나타나기 안성마춤이 아니겠소? 공야형!" 공야수문은 묵묵히 말을 몰았다. 어느 순간, 그는 고개를 홱 돌리며 외쳤다. "그들은 이미 나타났습니다." "뭣이?" 사마흠의 눈빛이 번쩍 한광을 토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까아아! 까아아아---- 오오----! 갑자기 천공으로부터 괴조(怪鳥)의 울부짖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엇!" 중인들의 눈길이 그쪽을 향했다. "저…… 저것은!" 백리사옥의 입에서 대경성이 터져나왔다. 새(鳥)떼! 수천 수만 마리의 흑조(黑鳥)떼들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몰려오고 있지 않은가? 까아아오! 까아아---- 오---- 오! 울부짖음은 마치 천공을 휘잡아 뜯는 듯했고, 새떼들이 날아오는 광경은 마치 거대한 흑운(黑雲)이 하늘을 뒤덮으며 쏘아져 내리는 듯했다. 백리사옥의 검미가 번쩍 솟구쳤다. "음? 저것은 분명 마령환물대법(魔靈幻物大法)!" 사마흠이 급히 그를 돌아다보았다. "아니, 백리공자! 마령환물대법이라니…… 그게 무엇이오?" "마령환물대법이란 자신의 영력(靈力)으로 자신 외의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마법(魔法)입니다. 저것은 천 년 전에 실종된 마교(魔敎)의 비학인데…… 여기서 보게 되다니!" "……!" "허나, 저 정도의 새떼들을 움직인다는 것은 그의 영력은 이미 악마지경(惡魔之境)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 사마흠이 경악성을 발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까아오---- 깍----! 십여 마리의 흑조들이 빛살처럼 그들에게 쏘아져 들었다. "어림없다!" 추아아악----! 어느새 뽑았는가? 사마흠의 거검(巨劍)이 흑조들을 베어버렸다. 눈부신 쾌검술! 켁! 켁! 끄윽……! 흑조들은 가랑잎처럼 너덜거리며 날아갔다. 까아오----! 까아---- 아아---- 까아오오----! 한꺼번에 수십 마리의 흑조들이 그들을 무서운 기세로 덮쳐왔다. "놈들은 독조(毒鳥)이오! 발톱이나 부리에 스치기만 해도 죽습니다." 공야수문이 외치며 일 장을 휘둘렀다. 펑! 퍼퍼퍼퍽! 몇 마리의 흑조가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거검환비(巨劍幻飛)!" 취리리리리---- 리리릿----! 사마흠의 벼락 같은 외침이 터지며 천공에 검기(劍氣)가 뒤덮였다.


"철혈무쌍(鐵血無雙)!" 철혈잠룡 뇌옥풍의 두 자루 패도가 춤을 추었다. 퍼퍼퍽! 켁! 끄윽! 케케---- 켁! 수십 마리의 흑조들은 몸뚱이가 수십 토막으로 쪼개지며 우수수 떨어졌다. 괴사(怪事)! 인간과 새(鳥)들의 괴이한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쉴새없이 흑조들을 베어넘기며 계속 질주를 거듭했다. 열 마리를 죽이면 백 마리가 달려들고, 백 마리를 처치하면 수천 마리가 떼몰려 덮쳐들었다. 두두두두---- 두두---그러는 가운데 전면에 하나의 밀림(密林)이 나타났다. 일순, 공야수문이 외쳤다. "저 밀림으로 들어 갑시다! 본인이 준비해 둔 것이 있소이다!" 그는 외치며 숲쪽으로 말을 치달렸다. 일행은 급급히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흑조들을 연이어 후려치며 숲어귀에 이르렀다. 공야수문은 숲 속을 향해 벼락같이 외쳤다. "번천궁사대(飜天弓士隊)는 어디 있느냐!"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숲 속으로부터 백여 명의 은의무사(銀衣武士)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허리에 하나같이 패도(覇刀)를 차고 손에는 은궁(銀弓)을 들고 있었다. 맨 선두에 섰던 자가 외쳤다. "주군의 전서구를 받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공야수문은 자르듯 명령했다. "숲을 나가지 마라! 숲 속에 몸을 숨긴 상태에서 흑조들을 제거하라!" "존명!" 복명이 떨어짐과 동시 마치 땅에서 소나기가 천공으로 퍼부어지듯 무수한 화살들이 흑조떼를 뒤덮었다. 휘휘휘휘---- 휘휙! 휙! 휙! 휘익! 켁! 켁! 우수수수…… 한꺼번에 백여 마리의 흑조들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백리사옥 일행은 그들을 뒤로하고 숲 속으로 질주해 들어갔다. 휘휘휘---- 휙! 휙휙휙! 번천궁사대의 화살들은 연속 흑조떼들을 공격했다. 흑조떼들은 한꺼번에 백여 마리씩 떨어져 내렸다. 허나, 흑조떼들의 숫자는 무려 수만 마리! 번천궁사대의 화살이 소나기처럼 퍼부어져도 그것은 거대한 모래산을 삽으로 퍼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까아아악! 쐐쐐---- 액----! 흑조들은 밀림 나무사이로 낮게 날으며 동굴 속의 박쥐들처럼 번천궁사대 무사들을 덮쳐들었다. "지독한 것들!" "활로는 안되겠다. 패도를!" 차차차창! 무사들은 활을 던져버리고 일제히 패도를 뽑아 들었다. 취리리리---- 리리릿! 쐐쐐쐐---- 애----! 패도의 은빛 강막( 幕)이 그물처럼 밀림을 뒤덮었다.


케켁! 끅! 끄악----! 흑조떼들의 주검이 우박처럼 우수수 떨어지고 나무들도 덩달아 베어져 밀림 속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헌데, 이때였다. 끄아아---- 오오----! 돌연 천지를 휘잡아 뜯는 듯한 엄청난 울부짖음과 함께 무지무지하게 거대한 흑영(黑影)이 밀림으로 날아들었다. 우드드득---- 와지직----! 아름드리 거목들이 흑영에 부딪치자 종잇장처럼 뜯겨져 날아갔다. 다음 순간 그 흑영은 번천궁사대의 한 무사에게 덮쳐들었다. 쐐애애애---- 액----!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무사의 머리와 몸통이 걸레처럼 뜯겨져 버린 것이 아닌가! "저, 저것은!" 무사들은 경악의 비명을 내지르며 괴흑영(怪黑影)을 바라보았다. 거조(巨鳥)! 그것은 적어도 사람의 세 배가 넘는 거대한 흑조가 아닌가? "천년묵악(千年墨 )이다!" "흑조떼들의 우두머리다!" 무사들은 질겁하고 있었다. 천년묵악(千年墨 )! 그것은 천년괴룡(千年怪龍)과 대악(大 ) 사이에서 출생하는 마물로서 그 몸은 도검불침(刀劍不侵)이며, 그 날개 힘은 능히 대호(大虎)를 일순에 찢어죽일 수 있다 했다. 슈아아아---- 아---- 악! 천년묵악은 또다시 괴성을 토하며 무서운 속도로 무사들에게 덮쳐들고 있었다. "마, 막아라!" "피해라!" 무사들은 다급성을 내지르며 전력을 다해 패도를 휘둘렀다. 허나, 천년묵악을 빼어든 패도들은 가공할 쇳소리와 함께 토막나 버렸다. "크아아악!" 천년묵악의 날개에 한꺼번에 세 명의 무사가 피떡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천년묵악은 승리의 괴성인 듯 더욱 끔찍하게 울부짖으며 무사들을 덮쳐 들었다. 까아오----! 끄악! 흑조떼들 또한 더욱 기세를 높여 무사들을 공격했다. "으아악!" "끄악!" 여기저기서 처참한 주검들이 줄을 이었다. 머리가 짓터지고 피가 솟구쳤다. 새의 발톱과 부리에 눈알이 뽑히고 목덜미가 찢어진다. 인간이 새떼들에 의해 짓밟히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죽어랏, 마물!" "하나라도 더 죽이리라---- 으윽!" 번천궁사대의 무사들은 이를 악물고 피를 토하며 패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어찌하랴?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달려드는 흑조떼들 앞에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불과 일다경(一茶更)도 못되어 백여 명의 번천궁사대는 흑조떼들과 천년묵악에 의해 무참히 몰살되고 말았다. 밀림 속은 처참한 시신들과 부러진 패도, 활과 화살들만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때 허공 어디에선가 귀청을 찢을 듯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신호였는가? 까아아아---- 오오----! 천년묵악은 또다시 괴성을 토하며 밀림 속으로 날았다. 끄악! 까아악! 쐐쐐쐐---- 애---- 액----! 흑조떼들 역시 동굴 속을 헤치듯 천년묵악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새떼들이 날아가는 방향은 바로 백리사옥 등이 빠져나갔던 쪽이 아닌가! 7 한편, 백리사옥 일행은 그때 밀림 깊숙한 곳을 통과하고 있었다. 사마흠이 공야수문을 돌아보며 외치듯 물었다. "공야형! 번천궁사대가 흑조떼들을 막아낼 수 있겠소?" 공야수문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대답했다. "그들은 막지 못합니다." 사마흠의 검미가 부르르 경련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쯤 새떼들에 의해 전멸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비통하게도 그들의 죽음의 대가로 일다경이란 시간을 벌었을 따름이지요." 사마흠은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그…… 럴 수가……! 그렇다면 우리가 달아나기 위해 그들의 목숨을 희생시켰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들 백인(百人)의 죽음으로 백만인(百萬人)의 생 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들은 결코 자신의 희생을 값없다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사마흠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천하를 구하기 위한 희생! 대체 우리가 상대하는 적의 정체는 무엇인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더 치뤄야한단 말인가? 허나, 사마흠 역시 오늘 천하대계(天下大計)를 위한 희생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사마흠은 물었다. "공야형! 대체 그들은 어떤 자들이기에……" 허나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공야수문의 침통한 한 마디가 그의 말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전면을 보십시오, 사마대협!" 사마흠의 타오르는 시선이 전면을 향했다. 그들의 앞엔 무수한 나뭇가지들이 마치 살아 있는 물체처럼 꿈틀거리며 요동치고 있지 않은가? 꿈틀꿈틀…… 무수한 뱀떼가 엉겨붙듯, 흡사 먹이를 기다리는 사신(死神)의 혓바닥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것은!" 사마흠은 격앙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공야수문은 침통하게 대답했다. "사령식인목입니다!" "아니? 식인목이란 본시 남만(南蠻)이나 묘강(苗疆) 일대에만 서식하는 희귀한 식물이 아니오? 어찌 이


중원땅에 저 괴목들이 나타 날 수 있단 말이오?" "백리사제가 말했던 마령환물공(魔靈幻物功)입니다! 이것은 평범한 나무들이지만 마령(魔靈)에 의해 식인목으로 변한 것이오. 마치 조금 전의 괴조(怪鳥)들처럼!" 사마흠의 눈이 휩떠졌다. "들어보지 못했던 괴사(怪事)로군. 어찌 이런 마공(魔功)이 있단 말이오?"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죠.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밀림을 빠져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방법이 있겠소?" 공야수문은 눈빛을 빛내며 품속에서 시커먼 물체를 꺼내 들었다. "이 정도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천하제일지라는 본인의 이름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는 자신있게 호언하며 시커먼 물체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뇌정화신탄(雷精火神彈)이죠. 한 알로도 능히 십 장 방원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다!" 사마흠은 감탄했다. (오호분산지계, 번천궁사대, 뇌정화신탄, 과연 번천뇌후 공야수문다운 준비로군!) "모두 물러서시오!" 공야수문은 외치며 뇌정화신탄을 앞으로 내던졌다. 꽈꽈꽈꽝----! 천지를 뒤집을 듯한 굉음과 함께 밀림 한켠이 통째로 날아갔다.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져 하늘로 치솟았고, 모래바람이 천지를 뒤 덮었다. 이윽고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일행은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오오!" "과연 뇌정화신탄이다!" 그들의 전면 십장(十丈) 방원은 완전히 폐허로 화해 있었다. 꿈틀대던 사령식인목들은 잿더미로 화해 널브러져 있었다. "갑시다!" 공야수문이 외쳤다. 그때였다. 푸---- 욱----! 지면을 뚫고 하나의 거대한 핏빛 손(血手)이 솟구치는 게 아닌가? "혈린교룡(血鱗蛟龍)이다! 뇌옥풍, 피해랏!" 공야수문의 부르짖음이 터지는 것과 동시, 콰악! 핏빛 손은 철혈잠룡 뇌옥풍의 몸뚱이를 그대로 움켜쥐었다. "으억!" 뇌옥풍의 신형이 빛살처럼 퉁겨지며 손가락 하나 정도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혈수를 벗어났다. 대신 피하지 못한 말(馬)의 몸뚱이가 혈수에 움켜쥐어졌다. 키히히히힝! 우드드득……! 말의 몸뚱이가 통째로 쥐어짜지며 핏물과 살점들이 과육(果肉)처럼 쏟아져 내렸다. "뇌형! 여기로!" 백리사옥이 외쳤다. 뇌옥풍은 허공에서 몸을 선회하여 백리사옥의 말 뒷잔등에 내려앉았다. "가자!" 두두두두---- 우두둑----! 순간, 공야수문의 손에서 또 하나의 뇌정화신탄이 혈수를 향해 던져졌다.


휘---- 익! "이 틈이오! 어서 밀림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가자!" 두두두두두---- 두두두---말은 치달렸다. 꽈꽈꽈꽈꽝---- 꽈꽝----! 그들의 뒷편에서 뇌정화신탄의 엄청난 폭발음이 들림과 동시, 천지가 통째로 뒤틀리는 듯한 처절 끔찍한 비명이 밀림을 휘잡아 뜯었다. 그것은 혈린교룡의 비명소리였을까? 허나, 일행은 뒤를 돌아볼 틈도 없었다. 그들은 밀림의 잿더미를 박차며 질주에 질주를 거듭했다. 그들은 계속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밀림(密林)을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또 얼마쯤 달렸을까? 후두두두…… 두두둑……! 먹구름이 뒤덮였던 암천(暗天)에서 기어이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람(風)! 휘이이---- 이---- 이잉---- 잉---천지(天地)가 온통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바람은 광풍(狂風)으로 변해갔고, 쏟아지는 빗방울은 금새 폭우 (暴雨)로 바뀌어갔다. 쏴아아아! 휘이이---- 잉---- 잉----! 사위는 먹물을 풀어놓은 듯 어둡고 쏟아지는 폭우는 광풍과 함께 대지를 휩쓸었다. 하늘(天)과 땅(地)마저도 공포에 떠는 듯싶었다. 번쩍! 어느 순간 몸서리쳐지도록 시퍼런 뇌광(雷光) 한 줄기가 흑암의 천공을 마검(魔劍)처럼 찢었다. 우르르르…… 꽈아---- 앙! 대지를 찢어 발기는 엄청난 벽력음(霹靂音)에 천지가 뒤흔들렸다. 벽력음이 잦아들었다 싶은 순간, 갑자기 번천뇌후 공야수문의 일갈이 대기를 갈랐다. "번천철갑대(飜天鐵甲隊)는 어디 있느냐!" 그의 일갈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의 전면, 어둠 속에서 불쑥불쑥 시커먼 그림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견하여 이백 명(二百名) 정도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전신을 시커먼 철갑(鐵甲)으로 중무장했고, 말(馬)에도 철갑을 씌웠다. 손에는 사람의 두 배가 넘는 거대한 철방패를 움켜쥐고 있었다. 번천철갑대(飜天鐵甲隊)! 공야수문의 밀명(密命)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공야수문은 외쳤다. "자령곡(紫靈谷)을 거쳐 귀곡하(鬼谷河)로 간다! 대오(隊伍)는 사열(四列)! 좌우를 호위하라!" "존명!" 우두두두둑---이백 명의 번천철갑대는 오십 명씩 사열(四列)로 나뉘어졌다. 곧이어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좌우로 이열(二列)씩 각각 갈라섰다. 백리사옥 일행은 철갑대에 의해 이중(二重)으로 엄밀히 호위된 상태다. "출발!" 두두두두두---- 두두두두---- 우두두---광풍폭우를 걷어차며 그들은 질주를 거듭했다. 사마흠이 외치듯 물었다. "공야형! 이쪽 길은 운중산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지 않소?"


"자령곡을 빠져나가면 귀곡하(鬼谷河)에 이르게 됩니다. 수하들이 배(船)를 준비해 놓고 기다릴 것입니다!" "배?" "배로 귀곡하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귀곡하의 상류(上流)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바로 운중산 중턱에 이르게 됩니다." "오! 그런 지름길이 있었구려!" 사마흠은 갈 수록 공야수문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 가지 거센 의혹이 일어났다. (헌데 이상하군. 이 사람은 적(敵)의 동태에 대해 이미 많은 걸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적들이 어떻게 공격해 오리라는 걸 몰랐다면 어찌 이런 방비를 해놓을 수 있었으랴! (그럼에도 자신의 역량을 드러내지 않고 이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굳이 백리사옥을 끌어내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또 한 가지 의문은 번천대공의 죽음을 알려 백리사옥을 데리러 왔다면 혼자서 비밀리에 올 수도 있었다. 헌데 무엇 때문에 우리를 동반했을까?) 겹치어 밀려드는 의문(疑問)에 사마흠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나 오늘의 이 사건 속에는 세인이 상상키 어려운 너무도 치밀한 안배(按配)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그가 어찌 알 것인가? 문득, 사마흠은 고개를 돌려 백리사옥을 바라보았다. 그때 우연이었을까? 백리사옥은 사마흠을 바라보았고, 알 수 없는 의미있는 미소를 보내는 것이었다. 마치 모든 일을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듯한 그런 미소였다. "……!" 사마흠은 머리가 혼란스러워짐을 느끼며 뭔가 입을 열려고 했다. 바로 그때, 돌연 빗줄기 속에서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음! 무슨 말발굽 소린가?" 사마흠은 검미를 불끈 치켜뜨며 공야수문을 바라보았다. 공야수문은 일순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그들이 왔습니다!" 그때였다. 까아아아아---- 오오----! 천공을 휘잡아 뜯는 괴성이 뒤쪽으로부터 들려왔다. 동시에 빗줄기를 가르며 암천에 날아드는 어마어마한 흑조떼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천년묵악이 이끄는 괴조떼들의 추격이 아닌가? "어느새 따라왔구나!" 공야수문은 침통하게 내뱉으며 철갑대(鐵甲隊)를 돌아보았다. "전속력을 다해 자령곡(紫靈谷)으로 달린다! 어떤 일이 있어도 속력을 늦추지 말라!" "존명!" "죽음(死)으로 명을 받으오리라!" 우두두두두두---- 두두두두---그들은 퍼붓는 빗줄기를 걷어차며 무서운 속도로 치달리기 시 제 6 장 완벽한 죽음을 위한 按配 1 우두두두두---- 두두두둑---멀리 거산(巨山)의 중앙을 칼로 쪼개놓은 듯한 계곡의 형상이 폭우 속에 나타나고 있었다.


괴이한 말발굽소리가 더욱 거세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마리 정도로 생각되었던 것이 지금은 수백, 수천 마리의 굉음(轟音)으로 들려온다. 그것도 한 방향에서가 아니라 사면팔방(四面八方)에서 대군(大軍)이 물밀 듯 짓쳐드는 듯한 굉음이었다. 그것은 바로 군진야의 황야에서 무사들을 짓밟아 버리던 그 마(魔)의 말발굽소리가 아닌가! 철혈잠룡 뇌옥풍의 눈빛에 경악이 솟구쳤다. "공야숙부!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분명 대군이 몰려드는 것 같 은데 인마(人魔)는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 "그것은 지금 설명할 틈이 없네! 중요한 것은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이네." 두두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둑! 마(魔)의 말발굽소리는 드디어 그들에게 덮쳐들었다. "막아라!" 철갑단은 일제히 외치며 철방패의 벽을 만들었다. 허나 무지막지하게 밀려드는 말발굽소리에 철방패가 박살나고 인마는 몸부림치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콰콰콰---- 우드드득----! "크아아악!" "아아악!" 키히히힝! 사람의 비명과 말의 비명이 어지럽게 터지며 피보라가 폭우 속을 충전했다. 까아아…… 오오……! 천년묵악과 흑조떼들이 공중에서 덮치는 것도 이때였다. 피가 터지고 육편이 난다. "크악"! "케에엑!" 키히히힝! 켁! 꺄아악----! 지옥도(地獄圖)가 따로 없었다. 위에서는 괴조들의 습격, 사방에서는 보이지 않는 저주의 말발굽소리! "달려라! 계곡으로 들어가면 살 수 있다!" 공야수문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앞으로!" "전진! 계곡이 멀지 않았다!" 우두두두두---- 두두두두---- 둑----! 철갑단은 순식간에 삼분의 일 이상이 처참하게 짓밟히며 숨져갔다. 그나마 철갑으로 중무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었다. 처절했다. 피와 육편이 우박처럼 터지고 나는 무서운 죽음의 행진이 계속되었다. 그 속을 백리사옥 일행은 숨가쁘게 달려갔다. 이빨이 갈리고 그들 네 사람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범벅으로 흘러내렸다. 백리사옥의 가슴은 비수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으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잊지 않으리라. 그대들의 죽음, 나 백리사옥이 천배로 갚아주겠다. 반드시!) 그는 이를 악물며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다. 번천철갑단의 반수 이상이 피떡으로 화하는 가운데 백리사옥 등은 계곡으로 들어섰다. 헌데, 그들이 계곡을 지나는 순간이었다. 쩌저적! 쩌저---- 저---- 적----! 갑자기 계곡의 밑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꽈르르릉---- 쿠쿠쿠쿠---- 쿠쿠---계곡 양쪽의 절벽들이 무너지며 만근거석(萬斤巨石)들이 우박처럼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악마는 이들을 기어이 사장시키고야 말겠다는 심산인가? 키히히힝---- 푸르르르…… 달리던 말들이 피거품을 물며 쓰러진다. "피, 피하라! 아악!" 살아 남았던 철갑단의 무사들은 갈라진 지면에 추락해 죽고, 바위에 맞아 피떡이 되어 죽어갔다. "크악!" 목불인견(目不忍見)!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지옥도(地獄圖)가 계곡 아래 펼쳐지고 있었다. 숨조차 가눌 틈도 없다. "피하시오, 공야형----!" 츄악! 사마흠의 신형이 퍼부어지는 바위의 소나기를 헤치며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공중으로!" 공야수문이 외치며 치솟았다. "갑시다, 백리형!" 철혈잠룡 뇌옥풍은 백리사옥의 허리를 안고 천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는 백리사옥의 무공이 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슈아아악! 그들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순간 한 덩이 무지막지한 바윗덩어리 하나가 그들을 덮쳤다. "헛!" 뇌옥풍은 다급한 헛바람을 삼키며 신형을 뒤틀었다. 바윗덩어리는 아슬아슬하게 그들을 비껴 떨어졌다. 뇌옥풍은 간신히 바위를 피했으나 그 바람에 진기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아앗!" 그의 신형이 중심을 잃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큰일이다!) 뇌옥풍은 사색이 되었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느닷없이 하나의 부드러운 손이 뇌옥풍의 손목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닌가? (백리형!) 손의 임자는 백리사옥이었다. 그는 떨어지려는 뇌옥풍의 손목을 잡고 천공으로 몸을 날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속도는 가히 전광석화(電光石火)! 백리사옥은 천하제일의 경공술이라는 광령자(光靈子)의 광령무상비(光靈無上飛) 구결(口訣)을 알고 있었다. 거기다 천상천부에서 얻은 삼갑자(三甲子)의 내공이 있었으니 이 정도는 그에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추아아아…… 철혈잠룡 뇌옥풍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백리형이 이런 고수였을 줄은 몰랐다!) 그때, 백리사옥은 뇌옥풍을 이끌며 계곡 한 절봉(絶峯)에 내려섰다. 사마흠과 공야수문 역시 몸을 날려 그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때였다. 일순 계곡 전체의 진동이 거짓말처럼 뚝 그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삐이---- 익---폐부를 찢는 듯한 휘파람소리가 야천을 흔듬과 동시, 허공을 덮었던 새떼들마저도 빛줄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 "……?" 일행은 의아심을 금치 못하고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또 뭐가 나타나려는가? 콰콰콰콰콰…… 절봉 밑 까마득한 아래로 귀곡하(鬼谷河)의 급류(急流)가 소리치며 흘러가고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까닭이다. 쏴아아아---- 아---번쩍! 꽈르르르릉---- 쿠쾅! 섬전(閃電)과 벽력음(霹靂音)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스스스스…… 광풍폭우가 몰아치는 암천에 거대한 환영(幻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눈(眼)! 시퍼런 마광(魔光)을 내뿜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마안(魔眼)이었다. 그 눈에서 몸서리치게 뿜어나는 가공할 사기(邪氣)! 그것은 바로 음양파(陰陽坡)에서 무사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던 그 공포의 마안이 아닌가? 공야수문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드디어 왔는가? 마중마(魔中魔)! 네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대계(大計)의 승부는 바로 이 순간에 달려 있기에……) 번쩍! 공야수문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그때, 일행의 시선도 그것을 발견했다. 흡사 악령(惡靈)의 그림자처럼 출현하는 마안에 뇌옥풍이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고…… 공야숙부! 저것은……" 순간이었다. "피해랏!" 공야수문은 느닷없이 뇌옥풍과 백리사옥을 향해 쌍장을 내뻗었다. "헉!" 뇌옥풍과 백리사옥이 장력에 퉁겨지며 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진 것과 동시, 번쩍! 마안(魔眼)에서 한 줄기 섬뜩한 녹색 광채(綠光)가 빛을 뿜었다. "아아악----!" "크아악----!" 처절한 두 마디 비명과 함께 녹색 광채는 공야수문과 사마흠의 몸뚱이를 꿰뚫었다. 푸스스스스…… 천하를 오시하는 최강의 고수들인 공야수문과 사마흠이건만 그들은 손 한 번 움직여보지 못한 채 가루가 되어 버린다. 이 현실을 믿어야 할 것인가? (이럴 수는 없다!) 철혈잠룡 뇌옥풍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이때 백리사옥의 눈에서 이채가 번득였다. (피할 수는 도저히 없다!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다.) 그는 급히 품 속에서 천상대정홀(天象大正笏)을 꺼내 들었다. (천상사외(天象四外)께서 내몸에 베푸신 사상심광정(四象心光精)이 완전히 용해되지 않은 상태다. 허나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순간, 백리사옥은 좌수(左手)로 뇌옥풍을 향해 일 장을 내뻗으며 우수(右手)에 천상대정홀을 천공으로 쳐들었다. 펑----! "아아악!" 뇌옥풍은 영문도 모르는 상태에서 백리사옥의 일 장을 얻어맞고 절곡 아래로 떨어졌다. 백리사옥의 웅휘한 일갈이 천공을 흔들었다. "천(天)---- 상(象)---- 대(大)---- 정(正)---- 천(天)!" 버언쩍! 마안에서 다시 녹색광채가 백리사옥을 향해 빛을 뿜었고, 천상대정홀로부터 눈부신 금빛 광채가 그 녹광을 향해 마주쳐 갔다. 콰콰콰콰콰---- 꽈르르르릉! 천지가 한꺼번에 짓뭉개지는 듯한 무지막지한 굉음이 대기를 찢어발겼다. 그때, 절곡 아래로 떨어지던 뇌옥풍은 보았다. 하늘(天)과 땅(地), 천지간에 보이는 모든 것이 녹색과 금색! 두 가지 광채로 뒤덮이는 광경을…… 그리고 백리사옥의 신형이 피투성이가 된 채 절곡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한 줄기 악마의 음성이 천공을 짓뭉개며 떨어져 가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 "크크크크! 건천(乾天)과 상문(象門)이 나타났다면 제마(帝魔)와 범후(梵後) 또한 머지않아 나타나리라! 허나 겁세(劫世)는 이미 예정되었느니라! 크크크!" 건천(乾天)과 상문(象門)! 제마(帝魔)와 범후(梵後)! 이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뇌옥풍은 알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그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몸뚱이가 귀곡하(鬼谷河)의 급류에 무참히 내팽개쳐지는 감촉과 물소리와 몇 사람의 외침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과연 주군(主君)의 예측대로군! 어서 구하세! 본가(本家)와 천하의 운명이 달렸다 하셨네! 그리고 뇌옥풍은 정신을 잃었다. 백리사옥과 뇌옥풍이 귀곡하로 떨어졌을 때, 그들을 구한 사람들은 공야수문이 배치해 두었던 번천만뇌세가의 무사들이었다. 휘이이잉---- 쏴쏴쏴쏴---- 쏴쏴---광풍폭우는 여전했으나 악마의 움직임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헌데, 그때였다. 스스스…… 계곡의 높다란 봉우리에서 스멀스멀 핏물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핏물은 차츰 한 덩어리로 뭉치더니 사람의 형상을 이루었다. 놀랍게도 그 모습은 바로 번천뇌후 공야수문이 아닌가? 공야수문은 신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귀곡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무사들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천의(天意)는 나 공야수문 쪽에 있었다!"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여기까지의 결과를 그는 모두 예측하고 있었단 말인가? "사마흠, 당신의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오. 또한 오늘 죽어간 수많은 수하들, 특히 그대 천면종(天面宗)의 죽음을……!" 천면종의 죽음…… "본좌를 대신한 그대의 대행(代行)은 완벽했다. 이로써 나 공야수문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그랬던가? "적(敵)도, 아(我)도 모두 본좌의 죽음을 확인했다. 사마흠과 뇌옥풍을 구태여 대동했던 것은 천하에 나의 완벽한 죽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쏴쏴쏴쏴---무섭게 퍼부어지는 빗줄기! 허나 그것은 공야수문의 몸 가까이 이르기도 전에 모조리 증발해 버린다. "대사형께서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시고 두 가지 밀지(密旨)를 남기셨다. 하나는 나 공야수문에게…… 또 하나는 사제 백리사옥에게……" 번쩍! 그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솟았다. "최후의 결전을 위해 나는 제삼(第三)의 힘(力)을 준비해야 한다. 악마의 후예 겁천악마교(劫天惡魔敎)! 너희들은 천하에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스스스스…… 공야수문의 몸은 다시 핏물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땅 속으로 스며들어 버렸다. 휘이이잉---- 잉----! 쏴쏴쏴…… 쏴…… 헌데, 어둠 속 어디선가 공야수문의 모습을 지켜보는 한쌍의 눈이 있었다. 섬뜩하리만큼 무심(無心)하고 잔잔하면서도 무서운 간지(奸智)가 빛나는 눈이었다. "후후후…… 대하(大河)는 흐르고 있다. 나 사공청(司空靑)의 예상대로……!" 사공청(司空靑), 이 사람은 또 누구인가? 그리고 그가 중얼거리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후우, 나흘탑격(羅 塔格), 숭헌후량(崇軒吼良), 좌초백(佐焦伯) 너희들은 뛰어났다. 천하에 그 누구도 너희들의 앞길을 막지 못할 것이다." 나흘탑격…… 숭헌후량…… 좌초백…… 알아들을 수 없는 이름들이 계속 거론되고 있었다. "허나 너희들은 착각하고 있다. 아니, 모르고 있는 것이다. 줄기차게 흐르는 저 대하(大河)의 의미를……!" 대하의 의미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아직은 아무것도 분명한 것은 없었다. 허나 확실한 것은 뭔가 무섭고 두려운 일이 어둠 속 깊은 곳에서 악마의 숨결과 함께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2 대이수사(大耳秀士) 추엄능(秋奄能). 그는 천하제일통(天下第一通)이라 불리워지는 사람이다. 천하에 일어나는 대소사(大小事) 어느 것 하나 그의 이목(耳目)을 벗어나지 못한다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귀(耳)는 보통 사람의 그것보다 족히 세 배는 컸다. 그는 번천만뇌세가(飜天萬腦世家)의 부총관(副總官)이다. 지금, 그는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번천만뇌세가의 한 정실(靜室) 침상 위에 누워 의식을 잃고 있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건장한 체격에 굴강한 인상을 지닌 청년무사였다. (철혈잠룡 뇌옥풍, 당대최강의 후기지수 삼군칠영팔추(三君七英八雛)의 하나라 하더니 과연 뛰어난


근골이다.) 대이수사 추엄능은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내상은 가볍다. 반각 후면 곧 깨어나게 될 것이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한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이 부실 듯한 흰 피부에 절세준미한 미소년이 누워 있었다. (문제는 소공자에 있다!) 대이수사 추엄능이 소공자라 칭하는 미소년은 바로 백리사옥이었다. 백리사옥의 얼굴은 완전히 핏기를 잃었고, 온몸은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전신이 사백 오십여 개의 상처로 난자(亂刺)되었다. 보통사람, 아니 설혹 금강불괴에 가까운 몸이었더라도 이미 전신이 걸레처럼 찢겨 숨이 끊어졌어야 옳다.) 대이수사 추엄능은 고개를 젓는다. (기이한 일이다. 저토록 엄중한 중상을 입었음에도 목숨을 잃지않고 스스로 내부에서 상처가 치유되고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백리사옥은 의식을 잃었으나 알 수 없는 기이한 힘이 그를 치유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백리사옥의 몸은 천상대정지체(天象大正之體)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대이수사 추엄능이 어찌 알 것인가? 백리사옥의 몸이 사상심광정(四象心光精)에 의해 천하에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도 해칠 수 없는 천상대정지체(天象大正之體)가 되었음을. 그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경악 뿐이었다. (나 추엄능이 들어보지 못한 괴사! 허나 어쨌든 소공자께서 죽지 않으심은 본가(本家)와 천하(天下)를 위해 더없이 다행한 일이다.) 대이수사 추엄능은 문득 한 가지 영상이 추억처럼 떠오름을 느꼈다. 그것은 번천만뇌세가의 전가주(前家主)셨던 건천태노(乾天太老)의 품에 안겨 이곳에 왔던 십 칠 년 전의 핏덩이 갓난아기의 모습이었다. "운중산(雲中山) 계곡에 이 아기가 버려져 있었다." 건천태노는 아기의 자질이 극히 출중함을 알고 자신의 문하(門下)에 거두어 들였다. 당시 건천태노에겐 두 제자가 있었다. 우문성곡(宇文聖梏). 공야수문(公冶秀文). 그 중에 대제자(大弟子)인 우문성곡은 이미 천하에서 번천대공 (飜天大公) 천하제일성자로 추앙받는 위치에 있었다. 사부인 건천태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기는 우문성곡, 공야수문과 더불어 사형제간(師兄弟間)이 되었다. 허나, 아기가 두돐을 지나기도 전에 건천태노는 운명했다. 아기는 대사형인 우문성곡에 의해 길러졌다. 아기의 자질은 천고대재(千古大才)였다. 십 세가 되었을 때, 이미 두 사형의 성취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십 오 세가 되었을 때 번천대공 우문성곡은 그를 가(家)에서 떠나 보냈다. 그 이유는 대이수사 추엄능 자신조차도 모르는 것이었다. 단지 번천대공은 추엄능에게 이렇게만 말했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간에 사옥(査玉)이 다시 본가에 돌아오거든 지하대서고(地下大書庫)에 들도록 하게." 그랬던 것이 번천대공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백리사옥 또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오리라고는 그로서는 생각지 못했다.


(천하에 몰아치는 악마의 혈보(血步), 그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화라락…… 황촉불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3 그그긍…… 석문(石門)이 굉음과 함께 밀려났다. 동시, 사방 벽면을 빈틈없이 빽빽하게 메운 대서고(大書庫)가 나타났다. 지하대서고는 번천만뇌세가의 가통(家統)을 이을 직전제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비고(秘庫)였다. "소공자의 큰 성취를 빌겠습니다." 대이수사 추엄능은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백리사옥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본가는 이 시각부터 일단 봉문(封門)할 것입니다. 보총관께선 본가의 남은 제자들을 이끌고 제이밀부(第二密府)로 가셔서 저를 기다려 주십시오." 추엄능의 눈빛이 섬광을 토했다. "봉문이라 하셨습니까? 그렇게까지 사태가 심각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언제 또다시 본가를 급습할지 모릅니다. 현재 우리에겐 그들을 막을 힘이 없습니다." "그들이라면?" "곧 아시게 될겁니다." 백리사옥은 이어 철혈잠룡 뇌옥풍을 돌아보았다. "뇌형께선 저와 함께 들어갑시다." "나는 외인(外人)인데 괜찮겠소?" "지금의 상황에서 뇌형은 외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사로(死路)를 함께 한 몸,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가 아닙니까?" 철혈잠룡 뇌옥풍은 일순 뜨거운 피가 가슴 속에서 치솟음을 느꼈다. (이 사람, 이렇게 큰 그릇이었던가!) 자신이라면 가문의 비고(秘庫)를 이토록 스스럼없이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라 말한 그 한 마디 말이 어찌하여 내 가슴을 이처럼 뜨겁게 끌어당기는가? (멋진 자다. 그의 능력보다도 그 인간미(人間味)가 더더욱 멋지다.) 뇌옥풍은 자신도 모르게 백리사옥에게 매료되어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좋소, 백리형! 나 뇌옥풍 역시 백리형을 외인(外人)으로 생각지 않을 것이오!" "갑시다!" 백리사옥은 뇌옥풍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대서고 안으로 들어섰다. 수천 수만 권은 되어보이는 엄청난 책자들이 빈틈없이 꽂혀있는 대서고를 백리사옥은 살펴보았다. 허나, 보이는 것은 온통 서책(書冊)들 뿐 뭔가 특별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대사형께서 이곳을 찾으라 하셨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런 서책들과 씨름하라는 뜻은 아니셨을 것이다!) 백리사옥은 더욱 면밀히 서고 구석구석을 조사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백리사옥의 눈에 이채가 빛났다. 천정 한 구석에 피로 쓴 듯한 붉은 글귀들이 비쳐든 까닭이었다. 浮雲終日行, 游子久不至. 三夜頻夢君, 情親見君意.


부운(浮雲)은 종일토록 흘러가고, 길 나간 사람은 오래도록 오지 않는다. 이 사할은 밤마다 그대가 자주 꿈에 보이니, 그대 정(情)을 이제야 알았노라. 이것은 당대시인(唐代詩人) 두자미(杜子美)가 이백(李白)을 그리워하며 읊은 시구였다. 백리사옥은 눈빛을 빛내며 그 시구를 주시했다. 한편, 철혈잠룡 뇌옥풍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번천대공께서 백리형을 그리워하신 심정을 시구에 빌어 적어 놓으신 것인가?) 허나, 그렇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뇌옥풍의 눈에도 그것은 뭔가를 암시(暗示)하는 글귀같았다. (무슨 뜻인가?) 그는 나름대로의 염두를 굴려 보았으나 도무지 뜻을 알 수 없었다. 뇌옥풍은 백리사옥을 바라보았다. 백리사옥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눈썹을 찌푸리기도 하면서 심사숙고에 빠져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군!" 백리사옥은 벌떡 일어서더니 서가(書架)로 가서 한 권의 책자를 쑥 뽑았다. <암천망국회한록(暗天亡國悔恨錄).> 백리사옥은 그 책자를 빼낸 자리로 손을 넣어 뭔가를 만지는 듯했다. 순간, 그그그긍…… 한쪽 서가(書架)가 굉음과 함께 회전하며 어두운 통로가 나타나지 않는가? (기관장치!) 뇌옥풍이 감탄하고 있을 때 백리사옥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갑시다, 뇌형!" 4 통로는 어두웠으나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길은 계단으로 이루어져 아랫쪽으로 계속 뻗어 있었다. 그 통로를 내려가면서 뇌옥풍은 백리사옥에게 물었다. "백리형께선 어떻게 기관장치가 있는 곳을 알아냈소?" 백리사옥은 가볍게 미소지었다. "물론 그 시구(詩句)를 보고 알았지요." "나도 그것이 뭔가를 암시하는 줄은 짐작했지만 도저히 그 뜻을 풀 수 없었는데?" "그것은 대사형과 나만이 아는 것이오." "설명해줄 수 있겠소?" "그러지요." 백리사옥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사형께선 내게 하늘보다 큰마음을 기르라고 말씀하셨소.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아마 이 밀고(密庫)를 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라 생각되오." 그는 자신이 추리(推理)해낸 경로를 간단히 설명했다. 두자미의 시구는 평범했다. 허나, 백리사옥은 첫눈에 그것이 암시문(暗示文)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시구를 이런 곳에, 그것도 핏물로 적어놓을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이때, 그의 뇌리에는 대사형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하늘보다 큰 마음을 길러라…… 하늘보다 큰 마음은 곧 승천지심(勝天之心)이다.


勝…… 天…… 之…… 心. 백리사옥은 고심한 끝에 시구가 모두 네 구절로 되어 있음을 깨닫고 맨 머리글자를 각각 교체해 보았다. 勝雲終日行 종일 흘러나는 구름을 넘어서면, 天子久不至 천자는 오래도록 오지 않는다. 之夜頻夢君 밤이 다하도록 주군을 꿈 속에 그리니, 心親見君意 마음은 이미 주군의 뜻에 이르렀어라. "그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뇌옥풍이 묻자 백리사옥은 미소를 띄며 설명했다. "각 구절마다 그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소." 종일토록 구름이 흐르고 나면 찾아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두운 밤하늘, 곧 암천(暗天)이다. 황제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음은 곧 나라가 망했음이니, 곧 망국(亡國). 밤마다 꿈 속에 주군을 그리니 그 마음에 어찌 한(恨)이 없으랴의 의미는 회한(悔恨). 떨어져 있음에도 뜻이 통할 수 있는 길은 곧 심중을 붓에 옮김이로다는 곧 기록이니, 록(錄). 암천망국회한록(暗天亡國悔恨錄)! "이것은 지난 날 촉한(蜀漢)이 멸망되었을 때 강유(姜維)가 피눈물로 기록한 책자라 하오. 기관을 여는 장치는 이 책자 뒷벽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오." "아!" 뇌옥풍은 감탄성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교묘한 안배가 아니랴? 이때, 백리사옥은 그 책자를 뇌옥풍에게 건네주었다. "차후에 한 번 읽어 보시겠소?" "좋소이다. 강유(姜維)라면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진전을 이어 받았다는 지장(智將), 그가 피눈물로 적었다는 책자라면 반드시 읽어보고 싶소!" 뇌옥풍은 그것을 받아 품 속에 간직했다. 허나 어찌 알았으랴? 그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넣은 이 책자로 말미암아 훗날 뇌옥풍의 생명이 사지(死地)에서 구원될 줄은…… 5 웅장한 석문 하나가 그들의 발길을 막아섰다. 용사비등한 글씨 밑으로 몇 줄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건천문(乾天門). 이곳은 본문의 조사동(祖師洞)이다. 본문의 제자된 자, 삼가 옷깃을 바로 하고 석문을 열 것이다.> 백리사옥은 신색을 엄숙하게 가다듬고 나서 문을 밀었다. 그그긍! 석문이 열리자 하나의 석실(石室)이 나타났다. 사방 일 장 가량의 석실에는 단지 석탁(石卓) 하나만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석탁 위에는 금지(金紙)로 싸인 한통의 봉서(封書)가 놓여져 있었다. <사랑하는 사제 사옥에게.> 그것은 분명 대사형 우문성곡의 필적이었다. "……!" 백리사옥은 일순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억누르며 봉서를 뜯었다. <녀석, 하늘보다 큰 마음의 뜻을 좀 깨달았느냐?


네가 이 글을 읽을 땐 우형은 이미 세상을 등진 후겠구나. 허나 너무 슬퍼할 건 없다. 우형은 천하대의(天下大義)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니까…… 궁금한 것이 많겠지. 이제부터 하나하나 이야기해 가도록 하자. 천 년 전에 존재했던 겁천악마교(劫天惡魔敎)의 존재는 너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겁천악마교(劫天惡魔敎)----! 천 년 전, 이렇게 이름지어진 공포의 마교(魔敎)가 존재했다. 악마(惡魔)와 악령(惡靈)을 신봉하며 그 최종목적은 천하멸세(天下滅世)에 있었다. 그들은 모든 기환사술(奇幻邪術)과 악령대법(惡靈大法)의 원조였으며, 인간이 상상치도 못할 엄청난 악마의 무공(武功)들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가공할 힘으로 천하를 멸절시키려 했다. 헌데, 그들이 세상에 나오려는 순간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스로 자멸(自滅)하고 말았다. 때문에 겁천악마교는 천하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고, 그 공포의 존재를 아는 자 또한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자멸하지 않았다면 천하는 이미 천 년 전에 멸세(滅世)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힘을 상대할 자, 천하에는 없었으므로…… 허나, 겁천악마교는 결코 이유없이 무너진 것도, 스스로 자멸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너는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천외(天外)에서 나타난 네 분의 신인(神人)에 의해 제거된 것이었다 건천무상인(乾天無上人). 천상대정종(天象大正宗). 천마대천존(天魔大天尊). 범밀율태사(梵密律太師). 그 분들은 각기 천외(天外)로부터 마교의 창궐을 예지(豫知)했고, 뜻을 합쳐 마교를 물리쳤다. 신마밀전(神魔密戰)! 장장 일천주야(一千晝夜)의 처절한 사투 끝에 마교는 괴멸되고, 마교의 교주였던 나흘차랍은 한을 품은 채 도주했다. 하나 그는 무서운 저주를 남겼다. 끝이 아니고 단지 시작일 뿐이며 훗날 악마의 뜻에 의해 악마의 적자(嫡子)가 세상에 태어나 마교(魔敎)는 천만 인의 피(血)를 마시며 다시 부활하리라는 끔찍한 예언이었다. 네 분의 신인은 그 저주의 예언을 믿지않을 수 없었다. 그 분들은 후세를 염려하여 각기 하나씩의 밀부(密府)를 남겼는 바, 그 중 건천무상인(乾天無上人)께서는 건천문(乾天門)을 창설하여 대(代)를 이으며 무림의 위난에 대비케 하셨다. 그 분이 바로 본 건천문의 개파조사이며, 번천만뇌세가의 초대가주(初代家主)셨느니라.> 그때, 백리사옥은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네 분의 신인들이 각기 남겼다는 네 곳의 밀부!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이라면 나머지 세 곳은……?) 아아! 그 순간이었다. 백리사옥은 자신의 뇌리에 밀어닥치는 세 사람의 음성을 동시에 들었다. -우리들은 천상문(天象門)의 공동문주였다. 그대는 천상천하유일병인 천상대정홀(天象大正笏)을 얻게되리니! -오늘은 그냥 가지만, 기어이 널 천마의 후계자로 만들고 말겠다! 아니 네 스스로 천마제천부(天魔帝天府)를 찾아오게 될 것이다! -이것은 범천개벽륜! 범천밀교의 하늘(天)인 범왕대천부(梵王大天府)를 열 수 있는 열쇠! 첫 번째 음성은 천상사외(天象四外)의 목소리…… (그렇다! 천상사외는 분명 천상대정종(天象大正宗)의 후예다. 그렇다면 천상대정홀은 바로 그가 남긴


밀부를 열 수 있는 지보(至寶)였다!) 두 번째 음성은 걸인 오색존자(五色尊者)의 목소리였다. (천마제천부는 바로 천마대천존(天魔大天尊)의 밀부를 가리킴이 아닐까?) 세 번째 음성은 죽은 범천밀교의 후예 살라무합(乷羅武合)의 목소리였다. (범왕대천부란 범밀율태사(梵密律太師)가 남긴 밀부?) 쿵쿵쿵쿵…… 백리사옥의 가슴은 거세게 뛰놀았다. 건천(乾天)의 계승자! 천상(天象)의 후인! 천마(天魔)의 후예! 범천(梵天)의 후사! 이것은 숙명(宿命)인가? 천의(天意)인가? 허나 악마는 부르짖었지 않은가? 크크크! 건천(乾天)과 상문(象門)이 나타났다면 제마(帝魔)와 범후(梵後) 또한 머지않아 나타나리라! 허나 겁세(劫世)는 이미 예정되었느니라! 제 7 장 血劫의 暴風 1 천 년 전, 마교(魔敎)는 비록 패퇴했으나 교주(敎主) 나흘차랍의 혼(魂)은 죽지 않았다. 그들은 어둠 속에 숨어 혈한(血恨)을 짓씹으며 마교의 부활을 획책했을 것이며, 마교의 맥(脈)은 분명 끊임없이 이어져 왔을 것이다. 허나, 그들은 천 년이 흐르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두 가지라 볼 수 있다. 첫째는 그들이 네 분 신인(神人)들의 후예를 의식했기 때문이며, 둘째는 악마의 예언대로 악마의 적자가 탄생되는 것을 기다려왔기 때문이었다. 헌데, 그 저주의 예언이 당세(當世)에 이르러 실현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 백리사옥은 놀랐다. (천상천부에서도 똑같은 말을 들었다. 악마의 적자는 바로 당세에 태어나리라 하지 않았던가?) 허나, 그의 놀라움은 다음 구절에 이르러 경악으로 변하고 말았다. 우문성곡의 밀지는 무서운 말을 기록하고 있었다. <악마의 예언은 실현되었다. 무력(武歷) 일천오백사십일년(一千五百四十一年) 사월(四月) 어느날 악마의 적자는 이 땅 어딘가에 태어났다고 천기(天機)는 말하고 있다. 그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음은 괴이하게도 그해 사월 한 달 동안 내내 하늘에 암운(暗雲)이 덮여 있었던 까닭이었다.> "무력 일천 오백 사십 일 년이라면 바로 십칠년(十七年) 전이 아닌가?" 백리사옥은 부르짖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뇌옥풍도 경악하여 외쳤다. "그럴 수가! 악마의 적자가 백리형과 같은 해에 태어났단 말이오?" 백리사옥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졌다. 그는 어떤 무서운 예감이 뇌리에 몰아쳐오는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핏덩이였을 때 운중산에 버려져 있었다고 했다.) 휘이이잉…… 삭풍(朔風)의 차가운 바람소리가 그의 머리칼을 곤두세우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착각이었을까? 우우우우우…… 우우우…… 저 어둡고 황량한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한(恨)서린 호곡성(號哭聲)이 귓전을 휘감았다. "백리형!" 뇌옥풍이 그의 어깨를 흔들었을 때에야 백리사옥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오?" "아, 아니오." "혹시 백리형은 설마……?" "아니오!" 백리사옥은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밀지를 읽어 내려갔다. <우형은 이미 마교의 부활과 천하의 혈겁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맨 처음 공격대상이 본가(本家)가 되리라는 것도 예감했다. 본가는 그들을 무너뜨렸던 건천무상인의 후예다. 허나, 현재 본가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그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우형은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우형과 본가의 몇몇 제자들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본가의 전멸(全滅)을 막자는 것, 둘째는 사옥, 너로 하여금 조사(祖師)의 진학(眞學)을 익혀 천하를 구하자는 생각이었다. 조사의 진학을 익힐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사람은 사옥, 너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사형!" 백리사옥의 입에서 신음 섞인 부르짖음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모든 걸 아시면서도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셨던 겁니까." 주르르…… 그의 양볼을 타고 뜨거운 물기가 흘러내렸다. "저를 본가에서 미리 떠나보내신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까?" <탁자를 누르면 조사전(祖師殿)이 나타난다. 그곳에 조사께서 남기신 천고비학(千古秘學)이 있다. 건천삼십삼무상예(乾天三十三無上藝)! 오직 그것만이 마교의 가공할 마공(魔功)을 상대할 수 있다. 익혀라. 그리고 천하의 위난을 구해다오. 녀석, 슬퍼하지 마라. 천하를 위해 죽을 수 있음도 장부의 기쁨이 아니겠느냐? 네게 있어 중요한 것은, 우형의 죽음을 슬퍼함보다 천하를 위해 일어서는 것일지니…… 사옥아! 이젠 작별을 말해야겠구나. 무운(武運)과 천의(天意)는 반드시 네편에 있을 것을 우형은 믿는다.> "대사형……!" 백리사옥은 무릎을 꿇은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번천대공……!" 뇌옥풍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의인(義人)! 이 시대 최고의 현자이며 무림의 성자였던 번천대공 우문성곡의 유지(遺旨) 앞에서 그들은 울었다. 그리고 마교(魔敎), 그들을 결코 이 하늘 아래 두지 않으리라! 그들은 다짐했다. 2 석전(石殿). 흡사 대광장을 방불케 하리만큼 거대하고 음사(陰邪)한 요기(妖氣)가 터질 듯 감도는 석전에 지금 일천인(一千人)의 혈포괴인(血袍怪人)들이 오체복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전면엔 단상(壇上)이 놓여 있었다. 큼직한 태사의라도 놓여 있음직한 단상 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탁자도 태사의도 놓여있지 않았다. 단지 보이는 것은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청석(靑石)의 덩그런 벽면(壁面) 뿐이다. 기이한 것은 벽면 높다란 곳에 새겨진 악마상(惡魔像)! 머리와 목에는 아홉 마리의 인두사(人頭蛇)가 또아리 틀며 칭칭 감겨있고, 괴이하게도 세로로 쭉 찢어진 세 개의 눈(三目)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마기(魔氣)가 뿜어 나오는 핏빛 마면상(魔面像). 핏물이 뚝뚝 흐르는 입에는 두 개의 잘려진 수급을 물고 있고, 두 손에는 필설로 형용치 못할 너무도


아름다운 갓난아기를 받쳐들고 있는 끔찍한 악마상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오오! 일천 명의 혈포인들은 그 악마상을 향해 성체배례(聖體拜禮)라도 취하고 있단 말인가? 석전 안은 숨통을 짓누르는 정적 속에 폭발할 듯한 사악한 기운이 휘감겨 있었다. 어느 순간, 뎅----! 악마의 울부짖음 같은 귀기서린 종소리가 석전을 울렸다. 찰나, 일천 인의 혈포인들은 일제히 돌바닥에 머리를 내리찍으며 외쳤다. "겁세천하(劫世天下)----!" "앙배마사(仰排魔師)----!" 뎅----! 종소리는 다시 들려왔고, 종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맨 앞에 부복했던 십인(十人)의 혈포인들이 우뚝 일어섰다. 비로소 그들 모두가 혈포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헌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십 인의 혈포인들은 한 소리로 외친 뒤 스스로 자신들의 머리를 감싸쥐고 머리를 쭈욱 뽑는 것이 아닌가? "악마의 성전(聖戰)을 치름에 앞서 속하들의 피(血)를 마전(魔殿)에 바치나이다!" 우드드득---- 쭈아악----! 뼈가 부서지며 그들의 머리는 마치 나무뿌리가 땅에서 뽑히듯 몸체를 떠났다. 추아아아아---- 아----! 그들의 목에서 뿜어나오는 열 줄기의 핏기둥이 허공으로 치솟으며 악마상의 입(口) 속으로 빨려드는 것이 아닌가? 저주스러울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괴이하게도 목이 뽑혔음에도 혈포인들의 동체는 쓰러지지 않았고, 한동안 자신들의 수급을 허공으로 치켜든 채 우뚝 서 있었다. 추아아아아…… 핏기둥은 일각 정도 그렇게 빨려 들어갔다. 어느 순간, 쿵…… 쿠쿵…… 쿵…… 쿵……! 해골처럼 변해버린 혈포인들의 몸뚱이는 썩은 장작들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뎅----! 마기서린 종소리가 다시 들리는 순간, 인간의 육성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극사(極邪)의 괴소가 석전을 뒤흔들었다. "크크크크크……" 스스스스스…… 악마상의 밑, 벽면에 환영처럼 거대한 마안(魔眼)이 소리없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온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마(魔)의 눈(眼)! 보는 이의 심장을 난도질할 듯한 어마어마한 마기(魔氣)와 요기(妖氣)가 마안에서 해일처럼 뿜어 나왔다. "천(天)의 명(命)이 내리셨느니라. 악마의 뜻으로 천하(天下)를 피(血)로 씻을지어다."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는 자 없었다. 혈포인들은 단지 전신을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며 부르짖었다. "존(尊)---- 명(命)!" 3 대도(大都) 남창(南昌).


강서성제일도(江西省第一都)이며 강남천하 문물(文物)의 집산지(集散地), 그 규모는 필설이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남창의 남쪽 교외(郊外), 그 둘레를 한 바퀴 돌아보는 데만 꼬박 사흘이 걸린다는 어마어마한 대장원(大莊院)이 우뚝 서 있다. 황금대장원! 달리 황금만적세가(黃金萬積世家)라고도 칭한다. 무공의 강함보다는 천하의 절반을 사고도 남는다는 엄청난 재력(財力)으로 당당 천하십대세가(天下十大世家)의 일석(一席)을 차지한 곳이다. 그 웅장화려함은 능히 황궁을 압도했고, 세가가 거느린 가솔(家率)의 숫자는 무려 삼만(三萬)에 달한다 했다. 황금대인(黃金對人) 금위천(金威天). 그는 천하 상계(商界)의 대부(代父)이자 살아있는 재황(財皇)이었다. 때문에 그의 신변과 황금만적세가에 어떤 변고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곧 천하의 전 상계(商界)가 흔들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천하 상계의 흔들림은 바로 천하라는 거목(巨木)의 뿌리가 흔들리는 위난이 아니겠는가? 악마의 혈보(血步)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먼동이 뿌옇게 움터오르는 이른 새벽에…… <황금대장원(黃金大莊院).> 어슴푸레한 미명(未明)을 받으며 그 웅대한 경관(景觀)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황금참마도(黃金斬魔刀) 형천후(荊天吼). 황금만적세가의 수석무장(首席武將)이며 오천(五千)의 호천무사대(護天武士隊)를 이끌고 있는 인물인 그의 황금참마구검(黃金斬魔九劍)은 이미 도신(刀神)의 경지에 들었다는 절정고수였다. "……!" 그는 지금 횃불처럼 타오르는 시선으로 뿌옇게 밝아오는 동편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서있는 곳은 황금대장원의 망루(望樓), 그의 뒤에는 이십여 명의 건장한 금의무사(金衣武士)들이 버티고 서 있었고, 망루 밑에는 수천 명의 무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호천무사대(護天武士隊)의 눈빛은 하나같이 임전(臨戰)의 결의와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임전(臨戰)의 태세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무서운 적을 맞이하려 하고 있음인가? 고요한 파양평야( 陽平野)의 새벽 공기는 더없이 맑고 신선했다. 허나 황금대장원은 터질 듯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 황금참마도 형천후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그의 뇌리에는 어제 밤 황금만적세가에 날아들었던 혈지(血紙)의 글귀가 어지럽게 떠오르고 있었다. <악마의 뜻으로 황금만적세가를 접수한다.> 혈지에 쓰인 글귀는 단지 그 뿐이었다. 허나, 그것으로 몰아닥친 공포는 너무도 컸다. 그것은 혈지가 내전밀실(內戰密室)에 있던 황금대인의 금지옥엽 금예랑(金 娘)의 가슴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근래에 들어 연속적으로 발생한 괴사! 철혈패천세가…… 천풍여의세가…… 북해사자성…… 소림사…… 악마(惡魔)의 행위라고밖에 판단할 수 없는 참사의 공포가 아직 도 세인들의 뇌리에 생생한 까닭이었다. 허나, 황금참마도 형천후는 죽음(死)으로 본가를 지키겠노라 황금대인에게 외쳤다. 문득, 동천(東天)을 노려보던 형천후의 입술이 떼어지며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녹검풍(綠劍風)."


"네." 바로 좌측에 서있던 젊고 준수한 금의무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마음이 흔들리느냐?" "……?" "심장이 빨리 뛰고 있다. 호흡 또한 세 배는 거칠어지고 있고……" 금의무사 녹검풍의 눈빛이 일순 짧은 파랑을 일으켰다. 허나 다음 순간, 녹검풍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속하가 아직 어린 탓이옵니다." 그 말에 황금참마도 형천후는 신음섞인 음성을 내뱉았다. "구태여 진심을 숨길 필요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자신도 역시 두렵다. 너는 내가 지난날 대명황군의 무장이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천군만마(千軍萬馬)의 백만대군과 맞서 싸울 때도 이런 공포를 느껴보지 못했었다." "장군." "허나 명심해라. 무인(武人)은 죽을지언정 비겁하게 몸을 사리지 않는다." "……!" "오늘의 적! 그들이 비록 악마라 해도, 나 형천후는 죽음으로 본 가를 지킬 것이다!" 녹검풍의 피는 뜨겁게 끓어 올랐다. "속하, 구천(九天)이라도 장군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그때, 뒷편의 무사들 입에서 급박한 대경성이 터져나왔다. "장군! 저…… 저곳을……" 황금참마도 형천후의 불타는 시선이 전방을 휩쓸어 보았다. 순간 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경악의 빛이 솟구쳤다. 움직이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파양평야의 지평선, 여명을 마주하여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기나긴 그 지평선이 통째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형천후의 얼굴에 심한 경련이 일어났다. 그는 분명히 보고 있었다. 움직이는 것은 지평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헤아릴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혈랑(血狼)떼! 핏빛 늑대들의 대군(大軍)이 지평선을 동서로 가득 메운 채 피물결(血波)처럼 밀려오는 것이었다. 우우우우우……! 들린다. 그것은 처음에는 매우 미약한 것으로 시작되었으나, 눈 몇번 깜짝거리는 사이에 우뢰와 같은 굉음으로 들려왔다. 우우우우우! 쿠우우우…… 우……! 그것은 바로 죽음을 몰고오는 악마의 음성이었다. "왔느냐, 악마의 무리!" 형천후의 입술 사이로 신음에 가까운 부르짖음이 새어나왔다. 그의 눈은 마치 활화산(活火山)처럼 터져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쉬아아앙----! 돌연 귀청을 찢는 듯한 무서운 파공성이 허공에서 일었다. 동시에, "으악!" 갑자기 녹검풍의 신형이 허공으로 펄쩍 퉁겨오르더니 십여 장 밖으로 나가 곤두박질쳤다. 운무처럼 자욱이 뿜어오르는 피(血)!


녹검풍의 피떡이 된 가슴에는 어른의 머리통만한 핏빛 혈조(血爪)가 틀어박혀 있었다. 황금참마도 형천후의 안색이 급변했다. "악마혈조(惡魔血爪)! 지옥백팔마 중의 혈조마라존(血爪魔羅尊)이 돌아왔단 말인가!" 지옥백팔마! 그 엄청난 이름을 뉘라서 잊을 수 있으랴? 삼십 년 전(三十年前), 공포의 마수로 천하를 휩쓸었던 그들은 번천대공 우문성곡에 의해 대부분이 추살되고, 그들 중 구인(九人)만이 구천마뇌(九天魔牢)에 갇혔다. 그런데 그들이 탈출한 것이란 말인가? "으악!" "컥!" 참담한 비명이 무더기로 터지는가 했더니, 망루 위의 금의무사 십여 명이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형천후의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바로 그때 쇳가루를 긁는 듯한 음산한 괴소와 함께 두 개의 혈영(血影)이 어디선가 솟아났다. "크흐흐, 네가 형천후라는 어린아이 인가?" 이인(二人), 하나같이 핏물에 적신 듯한 혈포(血砲)에 혈의복면을 뒤집어 쓴 괴인들이었다. 왼쪽의 혈포인의 손엔 핏물이 뚝뚝 흐르는 혈조(血爪)가 쥐어져 있었다. "혈조마라존(血爪魔羅尊)!" 오른쪽의 혈포인은 핏빛 채찍(血鞭)을 움켜쥔 채 괴소를 흘렸다. "크크, 마편염제(魔鞭閻帝)의 이름도 기억하겠구나." 형천후의 안색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마편염제 또한 지옥백팔마 중 살아남은 구 인 중 하나가 아닌가? "그렇다면 네놈들은 이미 구천마뇌를……?" 혈조마라존이 냉소를 흘려냈다. "푸훗훗! 그까짓 우문 애송이가 본좌들을 천 년이나 감금할 수 있을 줄로 여겼던가?" "그럴 수가!" 형천후의 신음성이 흘러나오는 순간 마편염제의 혈편이 빛줄기처럼 날았다. "가거라!" 슈아아앙----! 심장을 토해낼 듯한 가공할 파공성이 허공을 무섭게 찢었다. "웃!" 형천후는 고수다. 그는 다급한 헛바람을 삼키며 수중의 금도(金刀)를 위맹하게 떨쳐냈다. 취리리리리릿! 허공에는 순간 수백 가닥의 금광(金光)이 그물망처럼 뒤덮였다. 마편염제의 혈편은 금광에 부딪치며 어지럽게 되퉁겨졌다. 허나 다음 순간, 퍼억! 소리와 함께 형천후의 전신이 급살맞은 사람처럼 부르르 떨었다. 어느새 그의 등판에는 혈조마라존의 거대한 혈조가 복부를 꿰뚫고 틀어박혀 있지 않은가! "헉! 이…… 이럴 수가……" 형천후의 몸뚱이가 비틀거리며 빙글 돌아갔다. 슈아아악! 마편염제의 혈편이 대기를 찢으며 그의 정수리를 쪼개버렸다. "크아악----!" 퍼퍽! 쭈아아악----! 형천후의 뇌골이 으깨지며 그의 몸은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정확히 반쪽으로 갈라져 버렸다.


즉사(卽死)! 도저히 상대가 안되는 싸움이었다. 혈조마라존과 마편염제는 광소를 터뜨리며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카하하핫핫핫! 모조리 짓뭉개 버려라!" 카아아! 쿠아아---- 우우우우우----! 수천 수만 마리의 혈랑떼가 황금대장원의 문과 담벼락을 짓밟으며 몰려 들었다. "쿠카카카카! 겁세(劫世)는 악마의 뜻으로 시작되었다. 혈랑들아! 마음껏 인간의 생혈(生血)을 마셔라! 쿠하하!" 캬아오오---- 쿠아아아---- 오오! "으악!" "아아아악----!" 혈랑떼의 습격은 마치 둑 터진 노도(怒濤)와도 같았다. "막아라!" "죽어랏, 미물! 으악!" 호천무사대와 혈랑떼의 처절을 극한 싸움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지옥도(地獄圖)! 엄청난 피가 격랑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인간과 혈랑의 주검들이 시산(屍山)을 이루어갔다. 호천무사대들은 형천후의 말대로 한 명도 굴하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그들은 최후의 일인(一人)까지 싸우고 또 싸웠다. 허나, 해일처럼 노도처럼 끝없이 밀려드는 혈랑떼들과 가공할 마인(魔人) 혈조마라존과 마편염제의 마수를 어찌 막아낼 수 있으랴? 그리고, 문제는 또 다른 곳에 있었다. 무공을 모르는 이만오천(二萬五千)의 황금대장원 식솔들! 호천무사대를 짓밟고 지나가는 혈랑떼들은 이미 그들에게도 덮쳐들었다. 혈랑의 발톱에 가슴과 배가 터지고 이빨에 몸통이 뜯겨나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인(女人)의 가슴이 물어뜯기고, 몸뚱이가 걸레조각처럼 찢겨져 나갔다. 인간의 생혈을 맛본 혈랑들은 발톱으로 시체들을 찍어누른 채 광기 어린 포효를 부르짖었다. "우흐흐흐…… 하늘(天)이여! 당신은 뭘 하고 자빠져있단 말이오? 크흐흐흑……" 황금대인은 울부짖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채 미치광이처럼 통곡했다. "저주하오! 세상의 천의(天意)란 다 말라비틀어진 것이란 말이오? 우흐흐흐!" "여보! 우리라도 이 자리를 피해야……!" "미친 소리! 나를 따르던 수많은 가솔들의 죽음을 보고 나만 살 길을 찾으란 말인가!" 그때였다. 그들 부부의 등 뒤에서 너무도 잔혹한 괴소가 흘러들었다. "크크크…… 옳은 생각이지." 퍼억! 혈조(血爪)와 혈편(血鞭)이 동시에 황금대인과 그의 아내 금부인(錦夫人)의 머리통을 부숴버렸다. "푸흐흐흐! 천의(天意)란 없다. 있다면 그건 악마의 뜻이겠지." 4 금천사사궁(禁天邪邪宮). 감숙성 대반산(大盤山)에 우뚝 솟은 대궁(大宮) 금천사사궁은 사도무림(邪道武林)을 장악한 사도오천(師道五天) 중 하나이다. 금천사효(禁天邪梟) 탁도해(卓度海).


금천사사궁의 지존이자, 사도최강고수 중의 일인(一人). 그의 절학인 사명청후강(邪冥靑吼 )은 귀영(鬼影)이라도 천참만륙을 면치 못한다는 가공의 무학이었다. 서실(書室) 안, 굵은 황촉불이 눈물을 흘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황촉불 아래, 한 명의 백발노인이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파리하도록 창백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허나, 그의 두 눈에서 뻗치는 형형한 신광은 섬전보다 예리하였다. 백설(白雪)처럼 빛나는 새하얀 귀밑머리가 어깨까지 드리워진 특이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그런 그의 가슴에는 금천(禁天)이란 글이 검은 색의 천잠사로 선명히 수놓아져 있었다. 이 글은 금천사사궁의 궁주만이 가슴에 새길 수 있는 휘호다. 노인은 바로 금천사효 탁도해였다. 스슥! 붓(筆)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실내에 고즈넉하게 퍼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황촉불의 촛농이 제법 많이 쌓여갈 때 문득, 곧게 타오르던 황촉불의 불꽃이 한 차례 일렁거렸다. 그 순간 탁도해의 눈빛 역시 황촉불처럼 한차례 흔들렸다. 탁도해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빠르게 스쳤다. 파---- 파---- 팟----! 강렬한 파공음이 일며 그가 쓰고 있던 붓과 종이가 천정으로 쾌속하게 날았다. "악!"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폭죽처럼 터졌다. 동시에 두 구(俱)의 시체가 천정에서 떨어져 내렸다. 음침한 인상의 흑의대한들이었다. 그들의 이마와 목에는 각기 탁도해가 쓰던 붓과 종이가 박혀 있었다. 실로 귀신도 통곡할 신기였다. 탁도해의 귀밑머리가 바람도 없는데 절로 흔들렸다. (감히 노부가 있는 이 금천사사궁에서 나 탁도해를 노리는 놈들이 있다니!) 헌데 그 순간 탁도해의 안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것은!) 그는 급히 밖으로 통하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일순, 그의 입에서는 쥐어짜는 듯한 침음성이 터져나왔다. 불바다(火海)! 금천사사궁의 중심부에서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거센 화마(火魔)가 충천하고 있지 않은가? 탁도해의 안색은 무섭게 굳어졌다. 그의 눈썹이 하늘을 향해 곤두섰다. 숨통을 터뜨려버릴 듯한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무섭게 폭사되었다. "감히! 어떤 놈이 본궁을 농락한단 말이냐!" 콰쾅! 그의 신형은 벽면을 그대로 뚫어버리며 밖으로 날았다. 그때였다. 한 차례 살기 띤 폭갈성이 사방에서 터졌다. "쳐랏!" 동시, 살을 에일 듯한 엄청난 강기가 탁도해의 전신을 물샐 틈없이 휘감았다. 탁도해의 두 눈에 벽력 같은 살광이 떠올랐다. "불나방 같은 놈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는 눈부시도록 강렬한 청광(靑光)이 번뜩였다. 츠츠츠츠츠---- 츠----! 기이한 파공음이 일며 그의 전신에서 발산된 청광은 암습자들을 휘감았다. "헉! 으---- 악----!"


"컥!" 어지러운 비명성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실로 믿기 어려웠다. 탁도해를 암습했던 자들은 열 명이 모조리 허공에서 가루로 변해 죽어버린 것이었다. 불세신공인 사명청후강(邪冥靑吼 )이 펼쳐진 것이다. 탁도해는 더욱 가공할 살기를 띠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금천삼후(禁天三侯), 사사팔천위(邪邪八天衛)는 어디 있느냐!" 그의 노성은 수하들을 찾았다. 허나 그 순간 가슴 섬뜩한 괴소가 탁도해의 귓전에 쑤셔박혔다. "키키키키, 그 버러지들은 이미 네가 죽였지 않느냐?" "켈켈, 웃기는 놈이군." 스스스…… 암천(暗天)으로부터 두 개의 혈영(血影)이 느릿느릿 떨어져 내렸다. 둘 다 핏빛 복면을 하고 있어 용모는 알아볼 수 없었으나, 하나는 강시처럼 비쩍 마른 몸집에 키가 십척(十尺)에 달했고, 다른쪽은 오척단구에 놀랍도록 비대한 몸집이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탁도해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키가 작고 뚱뚱한 혈포인이 괴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킬킬킬, 혹시 초령차사(招靈借使)라고 들어보았는지 모르겠군?" "뭣이!" 탁도해는 경악성을 터뜨렸다. 초령차사(招靈借使). 그 역시 지옥백팔마 중의 마인으로 무서운 섭혼마공(攝魂魔功)의 달인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극강한 자라도 그의 섭혼마공에 걸리면 그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했다. "그렇다면 네놈들이 노부의 수하들을……?" "킬킬킬, 그렇다. 본좌는 그들을 암습하여 심신을 제압한 뒤 너 탁도해를 공격하게 했느니라." 그렇다면 탁도해는 자신의 손으로 수하들을 죽인 셈이 아닌가? 탁도해의 백발이 하늘을 향해 빳빳이 곤두섰다. "이런 죽일 놈! 네놈들의 뼈를 갈아 마시리라!" 그는 극도의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냅다 일 장을 후려치려 했다. 그 순간, 강시처럼 마른 혈포인이 한 손을 치켜들었다. "잠깐! 본좌 등은 네놈과 손장난을 하고 싶지 않다. 너를 상대해줄 것은 따로 있느니라!"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그는 한 손을 흔들었다. 딸랑딸랑…… 딸랑…… 그의 손목으로부터 요기(妖氣)서린 방울소리가 울려퍼졌다. 순간 흑암을 뚫고 날아드는 무수한 괴물체들이 있었다. 괴물체들은 다 썩어드는 목불인견의 시신(屍身)이 아닌가? 이미 반 이상의 살점이 썩어 문드러지고 허연 뼛골이 군데군데 엿보였다. 주르르…… 움직일 때마다 두 눈알이 흘러나오고 시커먼 썩은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끼끼끼끼…… 끼…… 강시( 屍)인가? 아니다. 분명히 살이 썩어 들어가는 송장들인 것이다. 허연 뼛골이 드러나고 칠공(七孔)에선 구역질나는 시혈(屍血)을 주룩주룩 흘려내는 송장들은 남(男)의 시신이 있는가 하면, 여(女)자, 그리고 아이들의 시신까지도 있었다. "허억!"


탁도해는 경악의 다급성을 삼키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것은 시신들의 모습이 공포스러워서가 아니었다. "저…… 정(貞)아야! 사군(邪君)아! 내 아이들아…… 이…… 이런 일이……!" 그렇다. 탁도해에게 다가오는 시신들은 바로 그의 가족들이 아닌가? 딸과 사위, 심복수하들과 사랑스러운 손자들이 산송장이 되어 자신에게 덮쳐오는데 어찌 대경치 않으랴? 그러나 그 경악은 곧 무시무시한 살기로 변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콰우우우! 탁도해의 전신에서 무지막지한 청광(靑光)이 혈포괴인들을 휘덮어갔다. "키키키, 어림없다. 네놈의 상대는 저것들이라니까!" "켈켈!" 혈포괴인들은 빛살처럼 허공으로 치솟으며 손목을 흔들었다. 딸랑딸랑…… 순간, 시신들은 일제히 쌍수를 치켜들며 탁도해에게 덮쳐드는 것이었다. "이, 이런 천인공노할…… 부드득!" 탁도해는 이를 갈았으나 우선은 시신들의 공격을 피해야만 했다. 그때 혈포괴인들의 신형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남긴 한 마디 괴소만이 그의 귓전을 흔들었다. "키키키키! 본 시령저주마(屍靈詛呪魔)의 시령마혼시(屍靈魔魂屍)로 변한 네 가족들과 함께 영원히 잠들어라!" 5 혈겁천하(血劫天下)! 혈풍(血風)은 천하를 움켜쥐고 휘잡아 뜯었다. 악마들의 혈보(血步)는 정(正)과 사(邪)를 구분하지 않고 덮쳐들었다. 하나같이 처절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황금만적세가와 금천사사궁의 멸겁(滅劫)을 위시하여 아미파(峨嵋派)의 장문 금정노불(金頂老佛)을 위시한 삼천 제자가 난도질 당했다. 사도오천 중 하나이며 독(毒)의 조종(祖宗)인 천독사성(天毒邪城)이 독수(毒水)에 잠기고 종남파(終南派), 대력천궁세가(大力天弓世家), 곤륜파(崑崙派)가 멸문지화를 당했다. 대혈륜(大血輪)은 무섭게 전율했다. 천하는 피(血) 속에서 울부짖고 귀곡성(鬼哭聲)은 하늘에 사무쳤다. 그리고 악마는 정체를 드러냈다. 겁천악마교(劫天惡魔敎)! 그것이 천 년의 맥(脈)을 혈한(血恨)으로 이어온 마교임을 아는 자, 천하에는 거의 없었으나 지옥백팔마의 최고수뇌였던 구마인(九魔人)이 겁천악마교의 일개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천하인은 충분히 경악했다. 믿어야 하는가? 허나 믿지않을 수 없는 엄청난 현실은 천하도처에서 참혹하게 벌 어지고 있었으니…… 천하는 떨었다. 하늘(天)을 저주했다. 하늘이여! 천하는 이제 악마의 수중에 멸세(滅世)됨인가? 천하각파는 뭉쳐 싸우기보다 봉문(封門)으로 숨기에 급급했고, 시산혈해(屍山血海) 속에서 만인은 울부짖었다. 구성(救星)은 없는가? 악마의 혈수에서 천하를 구할 신인(神人)은 없는가?


허나 그것은 응답하는 자 없는 헛된 울부짖음에 지나지 않았다. 천하 어디에도 악마의 적수는 없었다. 천하는 악마들의 뜻대로 난도질당하고 끝내 그 종말을 고하는가 싶었다. 헌데 어느날 갑자기 천하각파를 무자비하게 도륙하던 악마의 혈수(血手)가 뚝 멈춰버린 것이었다. 거대한 의혹이 다시 한번 천하를 강타했다. 악마들은 또 무슨 가공할 흉계를 꾸미고 있는가? 혈풍(血風) 뒤의 정적은 오히려 혈풍이 불어닥칠 때보다 십 배는 더 무서운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허나, 악마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무엇 때문인가? 어떤 엄청난 변수(變數)가 그들의 혈보를 멈추게 했는가? 숨막힐 듯한 의혹과 긴장 속에 세월(歲月)은 흐르고 있었다. 한 달, 두 달, 그리고 육개월(六個月)! 겨울(冬)을 예고하는 가을바람(秋風) 속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회오리가 황도(黃都)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제 8 장 네 목숨을 사겠다 1 황도(皇都) 북경(北京). 대명황부(大明皇府) 자금성(紫禁城)이 있고, 천하문물(天下文物)의 중심지인 이곳의 번화함과 웅장한 모습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연경의 중심가엔 자금성과 버금갈 만큼 웅대무비한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우뚝 서 있다. <구문제독부(九門提督府).> 당금 대명의 백만황군(百萬皇軍)의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있고, 항시 기치창검(旗幟槍劍)이 오악부복(五岳付伏)의 두려움을 보이는 엄엄한 기운이 뻗쳐나는 곳이다. 때는 초추(初秋), 안개처럼 뿌우연 부슬비가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비가 내리는 까닭에선지 커다란 죽립(竹笠)을 목덜미까지 눌러 쓴 사내 하나가 구문제독부 정문에 나타났다. 사내가 걸친 옷은 백의(白衣)였다. 정문의 수호무사(守護武士)들이 그를 막았을 때 사내는 묵묵히 하나의 묵패(墨牌)를 내밀었다. 입은 백의보다도 더 희고 투명한 여인처럼 아름다운 손(手)에 들린 묵패를 보자 무사들은 두려움에 찬 표정으로 길을 열었다. 사내는 묵묵히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사들은 수군거렸다. "놀랍군. 어떻게 저자가 천휘쌍패(天煇雙牌)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글쎄? 천휘쌍패는 본 구문제독부의 무상영패로 금패(金牌)는 구문제독께서 지니시고 묵패(墨牌)는 천풍여의세가로 출가하신 궁하령 소저께서 지니셨던 것인데?" "궁소저의 사자(使者)일까?" "글쎄. 어쨌든 그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와 위엄으로 보아 무림의 절대고수(絶代高手)같더군." 수문위사들이 수근거리고 있을 무렵, 구문제독부 안 정실에선 예의 백의사내와 구문제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공자의 말은 십분 납득하겠네. 그렇지 않아도 겁천악마교(劫天惡魔敎)의 악행(惡行)은 황궁으로서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네. 본 제독은 공자에게 적극 협력하겠네." "구문제독(九門提督)께서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출가하자마자 참화를 입은 령아를 생각해서라도 이 일은 본 제독이 나서지 않을 수 없음이네." "그럼……"


백의인은 구문제독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였다. 연후 그는 시위의 안내를 받으며 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구문제독부의 특별수옥(特別囚獄)이었다. 2 철컹! 죽음보다 깊고 안개처럼 축축한 어둠 속에서 무거운 쇠사슬을 풀어내는 금속성이 들렸다. 끼이이익----! 둔중한 철문(鐵門)이 안쪽으로 열리는 거북한 음향과 함께 한 가닥 희미한 빛줄기가 어둠을 밀어냈다. 죽립을 쓴 사내는 희미한 빛줄기를 등으로 지고 어둠 속에 천천히 들어섰다. 동시 그는 수옥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어둠의 분신(分身)처럼 웅크리고 앉아있는 한 소년을 보았다. 십 칠팔 세나 되었을까? 나이는 비록 어렸으나 죽립인은 그 소년을 처음 본 순간, 한 마리의 늑대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소년은 지독한 무심함과 자신 이외의 것을 절대 용납지 못하는 철저한 고독(孤獨)을 온 몸 가득 쓸어안고 칠흑같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반쯤 드러난 용모는 준수하다못해 처절하도록 아름답 기까지 하였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면 안색이 희다 못해 검푸를 정도로 창백하고 표정이 얼음처럼 싸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방을 사정없이 빨아들이는 기이한 매력이기도 했다. 죽립인은 가슴에 어떤 슬픔 같은 것이 부딪쳐옴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질문은 받지 않겠다." "……!" "성명, 출신은 불명(不明). 살수명 사류혼(死流魂). 이백 삼십 팔 회의 청부살인을 완벽하게 성공시켰고, 황금이라면 어떠한 살행도 거절하지 않는다는 초특급직업살수(超特急職業殺手), 맞는가?" "……" "대답하라." 죽립인이 나직하게 말했을 때, 소년 사류혼은 대답대신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칼날처럼 하얗게 웃었다. "또 심문자(審問者)가 바뀌었소?" "질문은 하지 말라고 했다." 죽립인의 음성은 차갑고 무심(無心)했다. 허나 그러면서도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실려 있었고, 기이하게도 거부감(拒否感)이 들지 않았다. 사류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이백 삼십 구 회 째, 구문제독 궁무독(宮武獨)을 암살하려다 실패, 종신형에 처해졌다. 맞나?" "……" 사류혼은 대답 대신 죽립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은 철문을 짚고 있는 사내의 백옥수(白玉手)였다. 그것은 여인(女人)의 그것보다도 희고 아름다웠으며, 신비로웠다. 또한 죽립인의 몸에서는 한 가닥 은은한 단향(壇香)이 느껴졌다. 백의와 흰 손, 그리고 단향은 화음(和音)처럼 한데 어울려 상대의 기품과 신비감을 북돋아주고 있었다. (뭔가 다르다. 이자는……!) 사류혼은 직감했다. 그동안 자신의 범행을 취조하기 위해 찾아왔던 몇몇 무장(武將)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상대는 보여주고 있다. (이자는 나에게 일을 맡기러 왔다!)


직업살수로서의 본능적인 육감은 그것을 느꼈다. 일이란 살인청부다. 허나, 죽립인의 말은 그의 예측을 엉뚱하게 빗나가고 있었다. "사류혼, 네 목숨을 사겠다." 지독히 무심한 한 마디였다. 허나 그것은 사류혼의 뇌리에 엄청난 충격으로 와닿았다. "살인청부가 아니다. 이후의 네 목숨을 내가 사겠다는 뜻이다." 사류혼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당신은……?" "질문은 하지마라." "……!" "한 가지만 말해주겠다. 네가 나의 요구를 수락한다면 네 잃어버린 자유와 무공(武功), 그리고 황금 일백만냥(一百萬兩)을 대가로 지불한다." "황금 일백만 냥!" 사류혼의 눈빛이 야수(野獸)처럼 빛났다. 죽립인의 말이 이어졌다. "이것은 거래다. 너는 내 정체나 신분을 물을 권리가 없다. 필요한 것은 너의 승낙 여부 뿐." 침묵이 흘렀다. 어느 순간 사류혼은 나직하게 물었다. "황금 백만 냥, 선불이오?" "직업살수다운 질문이다. 허나 그것은 후불(後拂)이다. 대신 이 특별수옥을 벗어날 수 있는 십팔관(十八關)의 열쇠와 네 무공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선금(先金)으로 하겠다." 죽립인은 뭔가 묵직한 물체를 사류혼에게 던졌다. 쩔그렁! (열쇠!) 사류혼은 한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십팔관을 열 수 있는 열쇠와 잃어버린 무공의 회복은 지난 삼년(三年) 동안 그를 지배해왔던 흑암(黑暗)에서의 광명(光明)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와락! 늑대가 먹이를 낚아채듯 사류혼은 열쇠꾸러미를 움켜쥐었다. "좋소!" 순간, 그는 철문을 짚고있던 상대의 흰손이 떼어지며 가볍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와 동시 자신의 양교맥(陽 脈)과 교회충맥(交會衝脈)을 가로막고 있던 답답한 쇄혈강막(鎖穴 幕)이 종잇장처럼 터져버리는 것을 피부로 깊숙이 느꼈다. (폐쇄된 무공이 풀렸다.) 죽립인의 음성이 사류혼의 귀에 밀려왔다. "네 능력과 그 열쇠로 이곳을 충분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이오. 후후……" "탈출하는 즉시 이것을 익히도록 해라." 파라락! 하나의 종이쪽지가 느릿느릿 사류혼의 면전에 날아내렸다. <대정일혼검보(大正一魂劍譜).> 사류혼의 눈빛이 흔들렸을 때, 죽립인은 밀옥(密獄) 문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다만 그의 무심한 한 마디가 여운처럼 남았을 뿐이다. "사흘 후 자시(子時)! 자향루(紫香樓) 청월헌(淸月軒)으로 오너라."


3 휘이잉----! 바람(風)이 불었다. 초추(初秋)의 부슬비에 젖은 갈대들은 머리를 풀어헤치며 귀곡성(鬼哭聲)처럼 울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청년(靑年) 한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다. 전신에 걸친 옷은 괴이하게도 상복(喪服)이었고, 머리에도 상건(喪巾)을 쓰고 있었다. 청년의 얼굴은 귀면탈을 뒤집어쓴 듯 추악했다. 그런 그의 품에는 한 자루 녹슨 철검(鐵劍)이 껴안 듯이 안겨 있었다. "……" 묵묵히 잿빛 하늘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는 마치 초겨울의 삭풍처럼 황량하고 메마른 고독감(孤獨感)이 짙디짙게 어려 있었다. 휘이이잉---- 잉---파라락! 바람은 청년의 마의상복을 찢을 듯 휘날렸다. 일순, 시체가 일어서듯 갈대밭 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솟구쳤다. 하나같이 죽음과도 같은 흑포(黑袍)를 뒤집어쓴 자들의 낯빛은 푸르뎅뎅했고, 얄팍한 입술과 찢겨진 눈자위는 시체처럼 음사(陰邪)했다. "그대가 상객(喪客)인가?" 청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흑포인들은 좌우 양쪽에서 동시에 덮쳐 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어느새 검이 들려 있었다. 아무런 파공음도 없이 흑포인들의 검은 상복청년이 전신에 파고 들었다. 일체의 변식(變式)을 삭제해버린 완전한 살초(殺招)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생을 포기해버린 사람처럼 청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흑포인들의 검세(劍勢)가 청년의 몸 반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청년은 비로소 발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이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있었다. 어허라…… 저승이 어디냐고 묻지를 말게. 상문(喪門)이 이미 그대 눈 앞에 있거늘…… 번쩍! 서럽도록 희고 투명한 한 가닥 광채가 사내의 가슴을 떠났다. 단지 그뿐이었다. 청년은 걸었고, 흑포인들은 서로 신형을 교차시킨 채 갈대밭에 내려섰다. 휘이잉…… 흑포인들은 떨어져가는 청년의 등을 바라보았다. "무…… 무서운…… 놈……!" 츄우우! 피를 뿌리며 그들의 몸뚱이는 정수리부터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실로 극쾌의 살검이 아닐 수 없었다. 무심한 듯 서 있는 청년의 눈에 다시금 이채가 일렁였다. 그와 동시 또 하나의 인영이 갈대밭에 나타났다. 그는 얼음장 같은 은포(銀袍)를 휘감듯 걸친 중년인(中年人)이었다. 칼날처럼 쭉 뻗은 눈썹 또한 은빛이었고, 두 눈에서 뿜어나는 안광(眼光) 역시 은빛이었다. "그대는 이미 삼십육명(三十六名)의 자객들을 죽였다." 은포중년인은 얼음조각을 씹어내는 듯한 음성을 청년에게 던졌다. 청년은 말이 없었다.


"허나 나 은목사령(銀目死靈)은 다르다. 이 시대 최고의 쾌검수(快劍手)라는 너 상객(喪客)! 이 가위평(可葦坪)에서 뼈를 묻을 것이다." 청년은 역시 응답이 없었다. 그저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걸음만 떼어놓고 있을 뿐이다. 그의 그런 모습에 은포중년인의 은미가 부르르 떨렸다. 휘익! 문득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호각성이 갈대밭을 찢었다. 스스스스스…… 스스슥……! 일단의 인물들이 갈대밭에서 솟아나 청년을 에워쌌다. 하나같이 은의(銀衣)를 걸친 백인(百人)의 은의인들 수중엔 모두 거대한 은도(銀刀)를 움켜쥐고 있었다. 은목사령의 입에서 괴소가 터져 나왔다. "쿠후후후! 은사지옥단(銀死地獄團) 앞에 적수란 없다." 그의 오른손이 번쩍 쳐들렸다. "은사귀형진(銀死鬼形陳)!" 스스스슷…… 백인(百人)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리고 청년은 계속 걸었다. "쳐랏!" 위이이---- 이---- 이잉----! 심장이 짓터질 듯한 압력이 천지(天地)를 휘감았다. 번쩍! 번쩍! 현란무쌍한 은빛 도화(刀花)들이 청년을 난도질하듯 휘감아 들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 한치의 틈도 찾을 수 없는 천라지망의 가공할 도세(刀勢)였다. "크후후! 귀영(鬼影)이라도 살아남지 못한다!" 은목사령의 득의가 천공에 울려퍼졌다. 바로 그 순간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상객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황량한 눈빛으로 천공(天空)을 응시했다. "저승에도 하늘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저런 잿빛이겠지." 메마르고 차가운 삭풍 같은 음성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부운처럼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허라…… 인생은 돌이켜도 초로(草露)인 것을 어찌 스스로 상문(喪門)을 재촉하는가…… 츠츠츠츠…… 파아아아…… 그의 가슴으로부터 환상(幻像)처럼 창백하고 투명한 빛더미가 무지개처럼 드리워졌다. "컥!" "믿을 수…… 없…… 흑!" 상객의 손짓에 따라 십여 개의 수급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고, 동시 상객은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며 또다시 빛의 무지개를 만들어 냈다. "크큭! 상대가 안된다!" "너…… 너무 강하다……!" 쿵! 쿠궁! 썩은 고목처럼 무너져 내리는 은의무사들의 시신을 뒤로하고 사내는 다시 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상문(喪門)이 어디인가? 이미 그대 앞에 있거니……


"이럴 수는 없다! 정도최강의 고수라는 우내제일정(宇內第一頂) 문인혁후(聞人赫候)라도 이렇게 강할 수는 없다!" 은목사령은 불신(不信)으로 경련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의 은목(銀目)이 처절한 살광(殺光)을 뿜어냈다. "용서할 수 없다! 동귀어진(同歸於盡)하리라!" 그의 신형이 그대로 상객의 등줄기를 덮쳐갔다. 그의 손에 움켜쥔 은사령도(銀死靈刀)는 자신의 죽음마저 도외시한 채 상객의 몸뚱이를 처참분시할 기세였다. 허나, 상객은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미 은목사령의 은사령도는 상객의 등판에 닿고 있었다. 은목사령의 입가에 득의의 빛이 잔혹하게 스쳐갔다. 그의 은사령도는 사내의 등판에 그대로 쑤셔박혔다. 헌데, 까깡! 섬뜩한 쇳소리와 함께 시퍼런 불꽃이 산지사방으로 튀며 은사령도는 절반으로 무참히 무너져 버리지 않은가? "그…… 금강…… 불괴……!" 허나 은목사령의 경악성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번쩍! 한 가닥 창백한 빛이 상객의 등너머에서 빛나는가 싶더니 은목사령의 몸뚱이는 정확히 절반으로 쪼개져 갈대밭에 나뒹굴었다. 휘이잉…… 바람은 여전히 불었고, 상객은 묵묵히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이때였다. "훌륭한 쾌검이다." 어디선가 극히 무심한 한 줄기 음성이 상객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상객의 발길이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고개가 돌려졌다. 갈대밭을 헤치며 한 죽립인(竹笠人)이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눈부신 백의(白衣)에 투명하리만큼 희고 아름다운 손(手), 바 람결에 은은히 전해지는 단향(壇香)…… (고수다!) 상객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고수는 걸음걸이만으로도 상대를 알아보는 법이다. "그대도 도황(都黃)의 자객인가? 그렇다면 나 상객 필생 최강의 적수를 만난 것 같군." 죽립인은 잠시 침묵했다. "나는 그대와 거래를 하고싶다." "음……?" "그대의 목숨을 사겠다." 상객의 검미가 꿈틀했다. "무슨 뜻인가?" "이후 그대의 목숨을 내가 관리하겠다는 뜻이다. 대가는 황금 이백만냥(二百萬兩)." 죽립인의 흰 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파라락! 바람을 타고 한 장의 종이가 날아들었다. "건방진!"


상객은 이빨서린 뇌까림을 내뱉았다. 번쩍! 한 줄기 섬뜩한 빛줄기가 그의 가슴에서 뿜어졌다. 그것은 날아드는 종이조각을 베어버리며 그대로 죽립인의 면상을 파고들었다. 허나, 언제 손을 놀렸는가? 죽립인의 희디흰 손은 상객의 검날을 부드럽게 쥐고 있었다. "헛!" 상객의 입에서 헛바람이 삼켜지는 찰나, 죽립인이 날려보낸 종이조각은 비수처럼 그의 어깨에 박혀있지 않은가? 상객은 경악했다. (맨손으로 내 쾌검을 받고, 지도(紙刀)로 금강불괴인 내 몸에 상처를 낸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다. 허나, 현실이 아닌가? 그때 죽립인은 지극히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검(劍)은 쾌(快)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 속에 정심(定心)이 없다면 마(魔)를 베지 못한다. 천하의 위난(危難)은 그대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악마들에게 상문(喪門)을 열어주지 않겠는가?" "그대는 누구냐?" "쓸데없는 질문!" 죽립인은 상객의 검을 놓아주며 몸을 돌렸다. 휘이잉----! 그는 바람부는 갈대밭으로 느릿느릿 사라지며 마지막 한 마디를 흘려냈다. "생각이 있다면 사흘 후 자시(子時), 자향루의 청월헌으로 오라." 상객은 불신의 표정으로 죽립인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의 어깨에 박힌 종이조각을 빼냈다. 그것은 연경의 만보천금장(萬寶天金莊)이 보증하는 황금 백만 냥짜리 전표였다. 4 황도 북경의 시가지가 바라보이는 한 산 언덕 위에 죽립인은 석상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문득, 그는 품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내 펼쳐들었다. <성명 : 하후섬(夏侯閃). 별호 : 천풍공자(天風公子). 나이 : 십팔세(十八歲). 내력 : 천하십대세가의 하나인 천풍여의세가의 소가주. 그의 천풍마선팔식(天風魔扇八式)은 능히 강호의 절정고수로서 손색이 없음. 특기사항 ; 모친 모란부인의 참사로 겁천혈마교에 대한 원한이 깊으며, 그 아내인 궁하령을 통해 구문제독부를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 쫘악! 죽립인은 그 지면(紙面)을 찢어냈다. 이어 다음 장이 나타났다. <성명 : 미상. 별호 : 사류혼(死流魂). 나이 : 미상. 내력 : 강호 초특급직업살수(超特級職業殺手). 언제나 혼자서 행동하며 이백 삼십 팔 회의 살수행을 완벽하게 성공시켜……> <성명 : 미상. 별호 : 상객(喪客).


나이 : 이십삼세(二十三歲). 내력 : 출신이 불명. 강호에서 이 시대 최고의 쾌검수(快劍手) 라 불리움. 살행을 할 때마다 상문가(喪門歌)를 부르는 괴이한 습성이 있음……> "철혈잠룡 뇌옥풍을 합하여 네 명(名)…… 아직 부족해." 죽립인은 중얼거리며 천천히 죽립 끝을 들어올렸다. 순간, 그의 용모가 드러났다. 천인(天人)이 지계에 내려왔는가? 태고의 암흑이라도 그의 용모를 가릴 수 없을 만큼 눈부신 절대미장부(絶代美丈夫)는 바로 백리사옥이 아닌가? 건천밀고(乾天密庫)에서 대사형 우문성곡의 안배를 얻고, 철혈잠룡 뇌옥풍과 함께 절학들을 익힌 그는 뇌옥풍으로 하여금 번천만뇌세가의 무사들을 모처(某處)로 데리고 가 훈련시킬 것을 지시한 뒤 곧장 북경으로 왔다. 황군(皇軍)은 이 사태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알고자 함이 첫째 목적이었고, 둘째는 악마들과 싸울 수 있는 절대고수들을 규합키 위함이었다. "결정적인 기회가 오기까지는 지략(智略)으로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한다. 그것이 인명(人命)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다!" 지략(智略)과 암전(暗戰)을 위해 백리사옥은 고수(高手)들을 모으고 있는 것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최소한 십명(十名)은 되어야 한다!" 쫘악----! 또 하나의 지면이 찢겨져 나갔다. 다음 장에 또 한 인물의 내력이 적혀 있었다. <성명 : 미상. 별호 : 화예상아(花 霜雅). 나이 : 십칠세(十七歲). 내력 : 연경 자향루(紫香樓) 제일의 기녀(妓女). 천하삼미(天下 三美)의 하나. 특징 : 자향루에 있으나 아직 누구도 그녀의 본 얼굴을 본 사람 이 없음. 짐작키로 무림기녀(武林奇女)가 아닌가 생각되나……> "좋아." 백리사옥은 지면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어차피 모두를 자향루 청월헌으로 불렀으니 이 여인부터 만나보는 게 순서겠군." 백리사옥은 북경으로 향하는 관도(官道)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런 그의 뇌리에는 한 가지 거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고 얽혀있었다. (겁천악마교! 그들은 왜 갑자기 혈보(血步)를 멈추었는가? 그들의 힘은 능히 천하를 단숨에 쓸어 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헌데 왜? 어떤 엄청난 변수가 그들의 길을 막았는가?) 휘이잉…… 한 차례 거친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휘날렸다. 그때, 일진의 말발굽소리가 백리사옥의 상념을 깨뜨렸다. 두 필의 흑마(黑馬)가 바람처럼 관도를 질주해 들었다. "……?" 마상(馬上)엔 두 명의 기재걸출한 청년들이 타고 있었다. 흡사 쌍둥이인 듯 판에 박은 듯이 모습이 같았다. 한 명은 홍의(紅衣)에 일극(日戟)을 등에 메고, 다른 한 명은 남의에 월극(月戟)을 등에 메었다. "워어!"


두 필의 흑마는 백리사옥의 곁에 이르러 멋지게 멈추었다. 감탄할만한 기마술(騎馬術)이었다. 문득, 홍의청년이 백리사옥을 향해 정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노형! 잠시 말씀 좀 묻겠소이다!" 백리사옥은 죽립 끝을 가볍게 치켜들어 그의 물음에 답했다. 홍의청년은 사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혹시 이곳으로 오시는 도중 자의소녀(紫衣少女) 한 명을 못보셨소이까?" 백리사옥은 담담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본 적이 없소." 순간, 남의청년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노형!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본원(本院)의 금지옥엽이신데 엄중한 독상(毒傷)을 입으셨소이다!" (본원? 북경 근처엔 원(院)으로 칭하는 무림방파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백리사옥은 재차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본 적이 없소이다." 그것은 조금도 거짓이 없는 사실이었다. 두 명의 청년은 마상에서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실례했소이다!" 그들은 말꼬삐를 낚아채어 바람같이 가던 방향으로 질주해갔다. 찰나간에 그들은 관도 저편으로 점이 되어 사라졌다. 백리사옥은 그들이 사라진 곳으로 시선을 주며 내심 나직한 경탄성을 터뜨렸다. (매우 걸출한 기도의 인물들이다! 저런 고수들을 수하에 두고 있을 정도라면 원(院)이라는 곳은 필시 범상한 방파가 아니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백리사옥은 계속 발길을 옮겼다. 얼마쯤 걸었을까? 문득, 관도 한켠에 제법 울창한 숲 하나가 나타났다. 그 순간, 백리사옥은 눈빛이 가볍게 빛났다. "음? 신음 소리?" 숲 속으로부터 미약한 여인의 신음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백리사옥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5 어느 한 그루 고목(枯木) 밑에 인영 하나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 그들이 찾던 자의소녀다!) 과연 쓰러진 인영은 일신에 자의를 걸친 소녀였다. 나이는 대략 십 육칠 세나 되었을까? 헌데 그녀를 바라본 순간, 백리사옥은 내심 주체할 수 없는 경탄성을 터뜨려야 했다. (대단하다! 도저히 뭐라 형용할 수조차 없는 미모다!) 자의미소녀의 용모를 어떻게 형용할 것인가? 경국지색(傾國之色)…… 화용월태(花容月態)…… 단순호치(丹脣皓齒)…… 침어낙안(沈魚落雁)…… 미녀(美女)를 표현하는 말은 많다. 허나, 이 소녀를 표현함에 있어 그런 구태의연한 어휘들을 사용한다면 도리어 모독이 될 것 같았다. 진정 속세의 여인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도 있을 것인가? 조화(造化)의 신(神)은 이 여인에게 천하의 모든 아름다움(美)을 주었단 말인가? 천하제일의 화공(畵工)이라 하더라도 이 여인의 미(美)만큼은 결코 화폭에 재현시킬 수 없으리라! (아름답다!)


백리사옥은 오직 그 한 마디밖에 할 수가 없었다. (뭐라할까? 이 소녀, 마치 한 떨기 자목련(紫木蓮)이라 해야할까?) 그러나 자의미소녀의 안색은 지극히 창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창백함조차도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미(美)의 일부분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닌가. 그때 자의미소녀의 얼굴은 창백함을 지나 차츰 검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렇지! 독상(毒傷)을 입었다고 했다!) 백리사옥은 급히 그녀의 맥문을 잡아 보았다. 순간, 그의 죽립 끝이 가볍게 떨렸다. (상태가 위중하다!) 백리사옥은 급히 주위를 휩쓸어 보았다. (어디 편안한 장소를 찾아야 한다!) 그는 축 늘어진 자의소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기쾌하게 신형을 솟구쳐 바람같이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6 산신묘(山神廟). 북경 교외에 자리한 인적이 끊어진지 오래된 산신묘였다. (이곳이 적당하겠다!) 백리사옥은 산신묘 안으로 들어와 자의소녀의 몸을 산신묘의 신탁(神卓)에 눕혔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상세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자의소녀의 얼굴은 완전히 흑면(黑面)으로 변해 있었다. (부골시독(腐骨屍毒)! 이미 독의 기운이 전신혈도에 퍼졌다!) 백리사옥은 급히 뇌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곧 낭패한 신색을 하였다. (부골시독을 치료하는 방법은 단 하나, 나의 순양진기(純陽眞氣)로 극음의 일종인 시독(屍毒)을 전신 팔만사천모공(八萬四千毛孔)으로 뽑아내야 한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여인(女人)은 나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잠시지간 갈등하던 그는 입술을 물었다. (의술을 베푸는 자 어떤 경우에도 의원(醫員)으로서의 정심(定心)을 잃어서는 안된다!) 백리사옥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어, 그녀의 옷을 천천히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의 손 끝이 떨렸다. 백리사옥으로서는 생애 최초의 경험이 아닌가? "……!" 이윽고 여인의 나신(裸身)이 꽃봉오리처럼 열리기 시작했다. 상의(上衣) 옷고름을 끌렀다. 허나 그 상태만으로는 옷을 벗길 수 없었으므로 그녀의 상체를 들어 가슴에 안았다. 뭉클! 가슴과 어깨에 탄력있는 육봉의 감촉이 닿는다. "……!" 팔을 빼내고 상의를 벗기는 동안 매끄러운 어깨와 목덜미가 백리사옥의 볼을 해어(海魚)처럼 스쳐갔다. 그것은 놀랍도록 신선한 감촉이었다. 가슴에 젖가리개를 남겨둔 채 백리사옥의 손길은 자의소녀의 하의(下衣) 허리춤에 닿았다. 우선 팽팽한 탄력있는 둔덕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받쳐들고 허리띠를 끌러내렸다. 치마는 힘없이 미끌어지고 인어(人魚) 같은 다리 사이에 연분홍색 고의만이 달랑 남았다. 백리사옥의 손길은 더욱 떨렸고 가슴은 거세게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침착해라! 너는 지금 의원으로서 환자를 치료하고 있음이 아니냐?) 그는 스스로를 달래며 소녀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툭…… 젖가리개의 매듭이 끊어졌다. "……!" 그러자 놀랍도록 아름다운 가슴이 눈부시게 활짝 솟아났다. 가슴 한쪽에서 바르르 떠는 유실은 조그만 연살구빛이었다. 한 입 베물고 싶은 너무도 강렬한 유혹이 백리사옥을 흔들었다. 그는 입술을 굳게 깨물며 손을 하체로 가져갔다. 마지막 고의를 벗겨내는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둔부가 역시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손을 고의 속으로 넣어야 했다. 둔부를 한 손으로 받쳐들고 다른 한 손으로 고의를 벗겨내렸다. 그러자 고의가 허벅지에 걸리며 수줍고 앙증스럽게 드러나는 여인의 문(門)! 한쪽 발을 빼내자 그녀의 다리는 자연히 넓게 벌려졌고, 여인의 문이 백리사옥의 시선에 잡혀들었다. 그것은 가슴 떨리는 유혹이었다. (침착해야 한다. 우선 유근혈부터 시작한다!) 백리사옥은 내력을 쌍장에 모았다. 이어 백리사옥은 자의소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십지(十指)는 젖가슴의 유근십태혈(乳根十太穴)을 짚고 있었다. 움켜쥐었다가 가볍게 풀어주고 또다시 꽉 움켜쥐기를 수차례…… 부드럽고 뭉클한 가슴이 백리사옥의 수중(手中)에서 마음껏 유린되고 있었다. 허나, 이 순간 백리사옥의 표정은 진중하기 그지없었고, 이마엔 송글송글 땀방울까지 맺혀 있었다. 그의 손은 가슴을 떠나 전신 구석구석을 바쁘게 누비기 시작했다. (신궐(神闕), 구미(嶇眉), 옥장(玉掌), 단전(丹田)을 통해 삼음경(三陰經)을 해경시키고 상맥(上脈)을 타통시킨 후……) 백리사옥의 쌍장은 제 철을 만난 듯 그녀의 속살을 쓰다듬으며 누볐다. "으…… 으음……"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어떤 기이한 느낌이 전달되었는가? 자의소녀의 나신은 그의 손길을 따라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제 하맥(下脈)의 독기(毒氣)를 몰아내야 한다.) 그는 잠시 주춤거렸다. 단전 바로 아래서부터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신비지처가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으음!" 백리사옥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서서히 쌍장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소녀의 아랫배에서 그의 쌍장은 바짝 밀착상태로 이동되었다. (관원(關元), 석문(石門), 회음(會陰)……!) 어느 한순간 백리사옥의 쌍장이 여인의 문을 열었다. 그곳엔 백리사옥의 사심(私心)이 실려있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백리사옥은 긴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나신에서 손을 떼었다. (성공이다!) 이때, 자의소녀의 전신에서는 희미하게 시커먼 색의 기류가 뿜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팔만사천모공으로 부골시독의 독기가 배출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내 그녀의 전신피부는 흑기(黑氣)가 씻은 듯 사라졌다. 이윽고 은은한 홍조가 피어오르며 화려한 나신으로 변했다. 그리고 희미하나 정상을 되찾는 그녀의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순간, 백리사옥은 내심 다급한 외침을 터뜨렸다. (아뿔싸! 이대로 깨어나게 하면 큰일이다!) 그는 다급히 그녀의 의복을 집어들었다. 분홍빛 손바닥만한 천조각으로 된 속옷부터 입히기 위하여 손을 뻗어 그녀의 다리를 잡았다. 헌데, 한쪽 발에 천조각을 막 끼우려는 순간 자의소녀의 두 눈이 반짝 뜨였다. (허전해……!) 그녀는 깨어나는 순간 전신이 허전하다는 기분부터 느낀 것이었다. 그녀는 급히 전신을 살폈다. 다음 순간, "아앗!" 그녀의 입에서 대경의 비명이 터져버렸다. 백리사옥은 이 순간에 그녀의 두 다리를 치켜들고 이상야릇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백리사옥은 내심 절망의 외침을 터뜨렸다. 자의소녀는 대경하여 황급히 외쳤다. "누…… 누구냐……?" 백리사옥은 잡았던 그녀의 두 다리를 급히 놓았다. "소…… 소저…… 고정하시오……" 자의소녀는 신형을 일으키며 급히 가슴과 신비지문을 가렸다. 허나 한 손으로 가리기엔 너무 풍만한 가슴이었고, 비밀스런 곳이었다. 그녀는 눈 앞의 사내를 향해 새파란 불꽃이 튀는 시선을 던졌다. "네놈이 감히 나를……?" 그녀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백리사옥은 급히 말문을 열었다. "소저! 본인은 단지 소저의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결코 사심은 없었소이다." 자의소녀는 한참동안 백리사옥을 노려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잠깐 돌아서 주실까요?" 백리사옥이 돌아서자 그녀는 부시럭대며 옷을 입었다. 이윽고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젠 됐어요. 돌아서세요." 천하의 백리사옥이라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잠깐 죽립을 벗어 보시겠어요?" 그녀의 음성은 놀라우리만큼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백리사옥이 죽립을 벗는 순간, 드러나는 절세의 용모! 자의소녀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이토록 잘난 사내가 천하에 있었던가?) 쿵쿵쿵! 그녀의 가슴이 소리내며 뛰기 시작했다. 두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허나, 그녀는 이내 입술을 깨물며 신색을 가라앉혔다. "저…… 부탁이 하나 있어요." 백리사옥은 의아심이 들었으나 시키는대로 고개를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순간, 짝! 자의소녀는 느닷없이 백리사옥의 뺨을 후려갈기는 것이 아닌가? 백리사옥은 어이가 없었다.


자의소녀는 생긋 그를 향해 웃었다. "호호,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잘생긴 사람! 은혜는 꼭 갚겠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 그녀는 빛살처럼 몸을 날려 산신묘를 빠져나가 버리는 게 아닌가? 백리사옥은 정신이 없었다. 구해주고, 뺨 맞고, 적반하장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이름인가? (생긴 것과는 달리 실로 맹랑한 아가씨로군.) 그때였다. "아악!" 뾰족한 비명소리가 산신묘 밖에서 터졌다. (이것은 바로 그 소녀의 음성이다.) 백리사옥의 신형이 밖으로 날았다. "아악!" 자의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비틀비틀 물러서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경악과 공포를 띤 채 전방 지면(地面)을 노려보고 있었다. 헌데 보라! 지면(地面)의 사면팔방으로 시꺼멓게 흑수(黑水)가 물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마치 먹물이 번져오듯 자의소녀를 에워싸고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스스스스스…… 스스슷…… "아아……!" 자의소녀는 사색이 된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백리사옥의 신형이 그녀의 옆에 날아내렸다. "독(毒)이다!" 자의소녀는 백리사옥을 발견하자 다짜고짜로 그의 품 속에 매달렸다. "무서워요! 조금 전 나를 해친 것도 바로 저거예요!" "침착하시오!" 백리사옥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지면을 살펴보았다. (저것은 분명 부골시독(腐骨屍毒)! 헌데 독을 펼친 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독수(毒水)만 공격해 온다면……) 그의 눈빛에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지옥백팔마 중의 독마(毒魔)인 환상독존마(幻想毒尊魔)!" 백리사옥의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공 어디에선가 음침한 괴소가 울려퍼졌다. "클클클, 쥐새끼 같은 놈! 제법 아는 것이 많구나." 백리사옥의 눈에 살광(殺光)이 폭사되었다. "잘 만났다, 겁천악마교의 주구! 살려두지 않으리라!" "클클클클, 젖비린내 나는 놈! 뒈질 일이 급해 미쳐버린 모양이구나." "흥! 잔소리!" 백리사옥은 냉갈을 터뜨림과 동시 자의소녀를 한 팔로 끼어안고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나왔다. "무릇 독공(毒功)에는 불(火)이 약이다. 건천무상겁화장(乾天無上劫火掌)!" 건천무상겁화장! 드디어 건천(乾天)의 절학이 첫선을 보이는가! 꽈르르르릉----! 백리사옥의 한 손에서 태산이라도 녹여버릴 듯한 무지막지한 열화장강(熱火掌 )이 지면을 강타했다. 꽈꽈꽝---- 쿠콰콰콰---- 꽝----! 엄청난 대폭음과 함께 십 장 방원이 통째로 뒤집히며 무서운 열풍(熱風)의 회오리가 수십 장이나 치솟았다.


이 가공할 위력에 백리사옥의 품에 안겨있던 자의소녀는 그 열기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하핫! 네놈이 숨을 곳이라곤 반대편 땅 속이겠지!" 순간 백리사옥은 호쾌하게 외치며 냅다 일지(一指)를 뻗었다. "천섬천화지(天閃天火指)!" 번쩍! 벼락이 내려 꽂히는가? 한 줄기 시퍼런 뇌광(雷光)이 허공을 찢으며 지면에 내리꽂혔다. 그 위치는 독수가 밀려들던 정반대쪽 방향이었다. 꽈지지지직---- 꾸꽈꽝! 지면이 걸레쪽처럼 뜯겨져 나가며 무지막지한 진동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찰나, 땅 속으로부터 답답한 비명이 터졌다. "컥!" 백리사옥의 입가에 싸늘한 냉소(冷笑)가 번뜩였다. "훗! 네놈이 도망을?" 츄웃! 그의 신형이 자의소녀를 내려놓은 채 그대로 땅 속으로 빨려들었다. 꽈꽈꽈꽈꽈---- 꽈지지직----! 땅 속으로부터 무서운 폭음이 터지며 지면이 쩍쩍 갈라져 나갔다. 자의소녀는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이렇게 무서운 싸움은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었다. (도…… 도대체…… 이런 무공이란……) 그때였다. 꾸꽈꽈꽝---- 꽝----! 무지막지한 폭발음과 함께 한폭 지면이 화산처럼 터져오르며 두 줄기의 그림자가 빛살처럼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가라! 뇌벽파천기(雷霹破天氣)!" 번---- 쩌---- 억! 눈이 시릴 듯한 청광(靑光)이 허공을 뒤덮었다고 느낀 순간, 하나의 핏빛 그림자(血影)가 수십 조각으로 찢겨지며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휘리릭! 백리사옥은 허공을 멋들어지게 선회하며 자의소녀의 옆에 날아 내렸다.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환상독존마의 시신을 바라보며 그는 차갑게 내뱉았다. "나는 이미 맹세했다. 이 하늘아래 너희들이 디딜 땅이 없도록 만들겠노라고!" 그의 입가에는 얼음보다 싸늘한 한소(寒笑)가 서려있었다. 자의소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전신이 얼어버릴 것 같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때, 그녀의 어깨에 손 하나가 얹혀졌다. 화득! 그녀는 전류에 감전된 듯 파르르 떨었다. 허나 그 순간 백리사옥의 부드러운 음성이 그녀의 귓전으로 다가섰다. "소저, 놀라셨소?" 백리사옥의 입가에는 어느새 냉소가 사라지고 봄날처럼 훈훈한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자의소녀는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자의소녀는 순간 어깨에 얹힌 백리사옥의 손을 뿌리쳤다. "고마워요! 두 번씩이나 신세를 입었군요." 본래 타고난 성품인지 그녀의 말투는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도 하 나도 감사를 느끼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백리사옥은 내심 실소를 머금었다. "소저의 방명(芳名)은 무엇이오? 어쩌다가 환상독존마 같은 거마(巨魔)에게 쫓기게 되었소?" 백리사옥의 물음에 자의소녀는 힐끗 고개를 돌렸다. "공자의 영명(英名)은 무엇이죠? 어쩌다가 환상독존마 같은 거마를 물리칠 정도로 고강한 무공을 익혔나요?" 그녀는 백리사옥의 말투를 똑같이 흉내내어 말했다. (역시 재미있는 아가씨로군.) 백리사옥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백리사옥이라 하오. 겁천악마교를 제거하고자 함이 나의 뜻이오." 자의소녀의 눈빛이 반짝 기광(奇光)을 발했다. "저는 혁유사란(赫悠思蘭)이예요. 그러고보니 우린 동지군요." 백리사옥의 눈이 빛났다. "놀랍소. 천하각파가 봉문(封門)으로 자신의 안전만을 급급해하는 이때 겁천악마교와 대항하려는 단체가 조직되었다니…… 대체 어떤 조직이오?" "본원은 환우회천원( 宇回天院)이라 해요. 악마들로부터 하늘을 되찾자는 뜻이지요." 백리사옥은 감탄성을 토했다. "아, 원주(院主)는 어떤 분이시오?" 그때 혁유사란의 두 눈에는 자부심이 역력하게 빛났다. "아실 거예요. 우내제일정(宇內第一頂)이라면!" "우내제일정!" 백리사옥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어찌 모르겠는가? 우내제일정(宇內第一頂) 문인혁후(聞人赫候). 정도무림 최강(最强)의 고수. 사도최강자인 천사자령종(天邪紫靈宗) 육도강(陸刀强)과 함께 정사쌍정(正邪雙頂)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번천대공 우문성곡이 천하의 성자(聲者)라면 우내제일정 문인혁후는 이 시대의 무성(武聖)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평소에 무림에 나서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헌데, 그가 드디어 비밀리에 회천(回天)의 깃발을 치켜들었단 말인가? "그분은 제 외할아버지시죠." 혁유사란은 자못 자랑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우내제일정의 외손녀…… 기이한 인연이로군!) 백리사옥은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헌데 어쩌다가 환상독존마에게 쫓기게 되었소?" 혁유사란은 냉소를 날렸다. "흥! 오랜만에 가을비가 내리니 괜히 마음이 심란해지지 않겠어요? 그래서 바람이나 좀 쏘일까하고 교외로 나왔는데 그 귀신이……" "그랬었군." 백리사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 순간, 그는 한 가지 커다란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환상독존마의 부골시독에 당했다면 왜 그는 혁유사란의 숨을 완 전히 끊어놓치 않고 달아나게 했는가? 그녀의 뒤를 밟아 환우회천원의 위치를 알아내려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일월극(日月戟)을 멘 청년무사들은 어떻게 그녀가 독에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는가?) 쉽게 납득되지 않는 의문이었다. 백리사옥은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꼈다. 그때, 혁유사란이 눈빛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공자는 본원에 들러주실 의향이 있나요?" "……?" "이건 극비사항이지만 며칠 후에 본원에서 정도최고수뇌들의 비밀회합이 있게 되있어요." "비밀회합!" 백리사옥은 나직이 부르짖었다. (역시 무림의 혼(魂)은 죽지 않았다. 외부로는 붕파 봉문을 선언했으나 이런 비밀조직이 결성되고 있었다!) "좋소. 반드시 참석하겠소." "공자정도의 고수라면 필시 환영을 받을 거예요. 닷새 후에 연경 시내에 있는 파궁화화시(巴穹花花市)로 오세요." "파궁화화시라면?" "흥! 본원이 그런 뒷골목에 있진 않아요. 단지 연락장소로 이용할 뿐이죠." 혁유사란은 지레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제 9 장 天妖의 藏寶圖 1 파궁화화시(巴穹花花市). 이곳은 은자 두닢 정도만 있으면 하룻밤 여인을 안아볼 수 있는 뒷골목을 가리킴이다. 그녀는 술을 저주하고 있었다. 디룩디룩한 볼에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는 쥐눈에서는 독기(毒氣)가 빛나고, 하늘을 향해 힘차게 뚫린 들창코는 연신 콧김을 씩씩 내뿜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의 술. 아니야, 빌어먹을 놈은 술이 아니지. 바로 저놈이야.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서 고주망태가 되어 헛소리를 지껄이는 저 괴물 같은 자 때문이다.) 돈화가 노려보고 있는 자는 분명 괴물이었다. 체구는 십세소동(十歲小童)만한데 머리는 무려 절구통만큼이나 컸다. 윗부분의 머리는 완전히 대머리인데 반해 얼굴은 흡사 고슴도치처럼 빽빽한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수염에 파묻혀 눈과 코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좌우 귀까지 쭉 찢어진 메기입과 싯누런 이빨 뿐이다. 그가 앉은 탁자에는 족히 수십 개에 달하는 술병들이 엎어져 있었으며, 그는 지금도 연신 술병을 입에다 꽂고 있었다. 그리고 술병이 입에서 떨어지는 사이에는 괴이한 헛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사람이나 돼지나 몸의 부위(部位)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돌출부(突出部)라 솟아나온 곳을 어루만지는 것이 비술(秘術)의 첫 번째 과정이다. 꿀꺽꿀꺽! 둘째는 곡강부(曲腔部)라, 자고로 굽혀져 오목하게 들어간 곳 또한 도외시하면 안되느니 비술은 그곳에서 천상에 오르는 기분이 된다. 꿀꺽꿀꺽!" "자식!" 돈화는 기어이 분통이 터져버렸다. 문 옆에 놓인 거대한 쇠탁자(鐵卓)를 번쩍 집어들더니 그대로 괴물에게 내던졌다. 허나, "흘흘…… 그 다음엔 설(舌)의 활용에 대한 묘법(妙法)인데……"


둥실…… 괴물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중얼거리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쇠탁자는 보기좋게 헛탕을 쳤다. 꽈쾅! 쇠탁자에 맞은 애꿎은 벽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 돈화는 분노가 극에 달해 심장을 토해낼 지경이었다. "내가 십 년만 젊었더라면 저 괴물쯤은 허벅지 사이에 끼고 짓뭉 개 버렸으련만!" 허나 괴물은 여유작작, 술을 들이키며 외쳤다. "흘흘흘, 네년이 십 년만 젊었더라면 본 도인(道人)을 죽자사자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괴물이 걸친 옷은 걸레조각 같은 도포(道袍)였다. "흘흘…… 본 도인은 이미 백 년 전에 색도(色道)의 심오무쌍한 도리를 깨우쳤다. 꿀꺽꿀꺽! 뭇 중생들의 극락지학(極樂之學)에 노심초사 오늘에 이르렀느니라. 자고로 색도란 처음에는 익히기가 쉽……!" 갑자기 괴물의 말이 뚝 그쳤다. "……?" 돈화는 의아하여 문득 입구쪽을 바라보았다. 입구(入口)로 막 한 사내가 들어서고 있었다. 전신에는 눈보다 흰 백의를 걸치고 죽립을 목덜미까지 눌러쓴 사내는 백리사옥이었다. "어…… 어서 오십……" 돈화가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백리사옥은 뚜벅뚜벅 괴물이 있는 탁자로 걸어갔다. "소…… 손님, 그 자리는……" "달리 앉을 곳이 없지 않은가?" 백리사옥은 간단히 말하며 괴물의 앞자리에 앉았다. 당연했다. 자향루 일층에 있는 탁자와 의자는 모두 부서지고 난장판이 되어 있었으니 달리 자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백리사옥은 천천히 죽립을 벗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순간, 괴물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돈화의 눈빛도 거세게 흔들렸다. (오오! 세상에 저렇게 잘난 미공자가 있었다니…… 내가 십 년만 젊었다면……!) 십년(十年), 그것이 언제나 문제였다. 그때, 돈화의 귓전으로 백리사옥의 조용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간단한 요리와 차(茶)를 주게." 그때였다. 갑자기 괴물이 부르짖었다. "공자! 본 도인은 이미 열흘동안 술밖에 먹지를 못했다네. 늙은이를 위해 먹을 것을 좀 시켜주겠나?" 백리사옥은 돈화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 "갖다 주게." "알겠습니다." 돈화는 독기어린 눈으로 괴물을 노려본 뒤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요리가 나왔다. "쩝! 허어…… 진수성찬이로다!" 괴물은 외쳤으나 그래도 좀 미안한지 백리사옥을 힐끔 바라보았다. 백리사옥은 고소를 지었다. "드시지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괴물은 입을 쭉 찢으며 부르짖었다.


"우훌훌훌, 훌륭하네! 자네는 진정 노인을 공경할 줄 아는 예의바른 젊은이로군. 글쎄 요즘 것들은 장유유서를 통 모르는데……" 말보다 손이 먼저 먹음직스런 찐닭을 통째로 들고 있었다. "우선 좀 먹고나서 천천히 이야기하세!" 뭘 이야기하자는 것인가? 하여튼 괴물의 손과 입은 흡사 섬전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 열 번이나 깜박거렸을까? 족히 열 개가 넘는 그릇과 대접이 깨끗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 사이 백리사옥이 한 일은 괴물의 손과 입을 번갈아 바라본 것 뿐이었다. 괴물은 개걸스런 트림을 하며 배를 퉁퉁 두드렸다. "꺼억! 오늘은 입맛이 없어서 더 못먹겠군." 그는 대나무 젓가락을 부러뜨려 이빨을 쑤셔대며 백리사옥을 바라보았다. "자, 이제 그런대로 배가 채워졌으니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세." "무슨 이야기를……?" 백리사옥이 묻자 괴물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흘흘, 어른이 하자면 하는거야. 참 자네는 무림인인가?" 백리사옥은 짐짓 괴물의 언행에 장난기가 생겼다. "저는 무(武) 자도 모르는 한낱 백면서생(白面書生)입니다." 하긴, 백리사옥의 현재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서생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괴물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 도인은 평생 천하를 돌아다닌 까닭에 사람 보는 안목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나다 자부하네. 본 도인은 이미 한눈에 자네가 영락없는 책상물림 글서생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였네." "그, 그렇습니다." 백리사옥은 터지려는 웃음을 참느라 말까지 더듬었다. 괴물은 털로 뒤덮인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자네 이름은 무엇인가?" "백리사옥이라 합니다." 괴물의 눈빛이 또 괴이하게 빛났다. "자네의 준수한 용모를 보니 영락없이 본 도인의 젊은날을 연상케 하는군. 물론 자네쪽이 다소 부족한 감이 있지만 말일세." "노인장의 젊은 시절 존안이 얼마나 훌륭했던가를 능히 짐작할만 합니다." 백리사옥은 슬쩍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자 괴물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쭉 찢어졌다.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사람 보는 안목이 지극히 놀랍네." "저 뿐만 아니라 노인장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 괴물은 음성을 가다듬으며 털복숭이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흠! 흠! 자네야말로 본 도인이 이제까지 만난 인물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친구일세. 특별히 본 도인의 이름을 말해주겠네." "호오…… 존함까지?" "영웅은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는 법, 그까짓 이름이 문제겠는가?" 괴물은 일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실눈을 엄숙하게 떴다. "본 도인은 색두광도(色頭狂道)라 하네." (색두광도? 진정 인물만큼이나 괴이한 이름이로군!)


백리사옥은 쓴웃음이 절로 나왔으나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대꾸했다. "과연 풍채에 지극히 어울리는 존함이라 사료됩니다." "우흐흐흐……" 색두광도의 입이 또 찢어졌다. "역시 자네는 본 도인의 유일한 지기(知己)이네." "헌데 도인께선 어디로 가시는 중입니까?" 색두광도는 씩 웃었다. "본 도인은 지금 북경제일의 기녀이며 천하삼미의 하나라는 화예상아(花 霜雅)라는 계집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거보(巨步)를 내딛었네." "아!" 백리사옥은 탄성을 질렀다. (분명 이자는 숨은 고수다.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다. 헌데 화예상아를 찾아왔다?) 화예상아를 만나보기 위해 백리사옥도 이곳 주향루에 들른 것이 아닌가? "도인께선 무슨 목적으로 그녀를……" "흠…… 거야……" 색두광도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계집에게 색도(色道)의 진수를 깨우쳐주기 위함일세. 무릇 색도란 결코 추한 것이 아니네. 혐오나 질시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네. 색(色)은 엄연한 인족번영의 근본이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돌연 색두광도의 말문이 뚝 멈추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그의 눈빛마저 가볍게 떨림을 보였다. 백리사옥은 의아해하며 무심코 객잔의 입구쪽을 바라보았다. 입구(入口)로 막 새로운 인물 하나가 객잔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극히 냉막한 인상의 흑포중년인(黑袍中年人)이었다. 흡사 천 년을 만년빙담 속에 묵혀둔 한 덩이 화강암같이 소름끼칠 정도로 딱딱한 인상의 인물이었다. 순간, 색두광도의 안색이 침중하게 일변했다. (저자가 다시 중원에 모습을 나타내다니 놀랍군!) 무슨 말인가? 허나, 흑포중년인은 색두광도를 향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을 뿐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으로 미루어 흑포중년인은 색두광도를 전혀 알고 있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다음 순간 색두광도는 마른 기침을 토했다. "흠, 흠! 본 도인은 잠시 급한 볼일이 있어 그만 실례해야겠네." "그럼 화예상아는 어쩌시려 하십니까?" "그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네. 또 만나게 될 것이네." 색두광도는 한 마디를 던지고는 급히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헌데 그때, 색두광도는 당황했던 탓인지 옆자리의 의자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쿠!" 그는 공교롭게도 백리사옥이 있는 곳으로 쓰러졌다. 그 순간, 색두광도의 손이 빛살보다도 빠르게 백리사옥의 품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미, 미안하네! 늙으면 힘이 없어서……" 색두광도는 급히 일어나 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백리사옥은 놀랐다. (색두광도는 내 품 속에 뭔가를 집어넣었다. 심상치 않다!) 그는 내심 생각하며 문득 흑포중년인을 돌아보았다. 그때, 우연이었을까? 흑포중년인 역시 이층의 기루(妓樓)로 올라서다가 백리사옥을 바라보았다.


"……!" 무심냉막한 그의 시선이 희미한 기광(奇光)을 번쩍였다. 허나 그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뚜벅뚜벅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한편, 백리사옥은 내심 나직한 중얼거림을 흘렸다. (무서운 고수(高手)다! 저자의 전신에선 흡사 칼날과도 같은 무형의 지독한 예기가 뻗어나고 있다!) 그는 직감적으로 흑포중년인의 내력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또한 중원인이 아니다. 이역(異域)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바로 그때였다. "저……" 백리사옥의 곁으로 돈화가 다가오며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공자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아가씨?" "저쪽 내문(內門)으로 들어가시면 시비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백리사옥은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어차피 화예상아를 만나러 왔던 길이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헌데, 그때였다. "하하…… 이거 엉망진창이로군." 맑으면서도 차가운 웃음소리와 함께 입구에 또 한 인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미공자(美公子)의 나이는 대략 십 팔구 세 가량이나 되었을까? 일신에는 청삼(靑衫)을 걸치고 머리엔 같은 색의 유건(儒巾)을 썼다. 창백한 안색이 흠일 뿐, 눈이 번쩍 뜨일만큼 극히 전륜한 용모의 미청년(美靑年)이었다. 약간 유약해 보이는 체격이었으나 전신에서 풍기는 범상치 않은 기도(氣道)는 그 유약함을 능히 감춰버리고도 남았다. 수중엔 한 자루의 백옥선(白玉扇)를 든 채, 덥지않은 가을날씨 인데도 불구하고 가볍게 섭선을 부치고 있었다. 미공자의 또렷한 시선이 일순 백리사옥에게 던져졌다. "……!"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조용히 맞닿았다. 미공자는 그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보이는 것 같았다. 허나 그는 이내 몸을 돌려 이층 계단으로 올라가 버렸다. 백리사옥의 뇌리엔 기이한 느낌이 스쳐갔다. (이상하군. 꼭 어디선가 본 듯한 눈빛인데? 생각이 나질 않는다.) 허나 백리사옥은 금새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오늘따라 이상한 인물들을 잇달아 만나게 되는군.) 일순 그는 생각을 돌렸다. (어쨌든 아가씨라는 사람을 만나보자……) 그는 천천히 안쪽의 문을 향해 발걸음을 떼놓았다. 2 시비가 백리사옥을 인도한 곳은 묵향(墨香)이 흐르는 단아한 정실이었다. 술과 웃음을 파는 기루(妓樓)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아한 향취가 감돌았다. "아가씨께선 곧 나오실 것입니다." 시비는 차(茶) 한 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조용히 물러갔다. 백리사옥은 정실을 휘둘러보았다. (아가씨란 화예상아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나를 만나자고 청했을까?)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은옥(銀玉)을 굴리는 듯한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 오시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한 여인(女人)이 들어왔다. 일신에 걸친 옷은 백설처럼 흰데 그 얼굴과 피부는 옷보다도 더 희었다. 너무도 흰 옥부(玉膚)는 만지면 뽀얀 분가루가 묻어날 듯했다. 별빛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에는 지혜가 넘쳐 보였고, 앙증스럽게 다물린 붉은 입술은 만지면 터져버릴 듯한 과육(果肉) 같았다. "소옥(素玉)이라 불러주세요." 백의여인은 백리사옥의 앞자리에 그림처럼 앉았다. "백리사옥이오." "존함은 이미 알고 있어요. 아까 색두광도와 이야기하시는 걸 들었어요." 백리사옥은 가볍게 찻잔을 들며 물었다. "나를 만나자고 한 분이 낭자였소?" "호호……" 소옥은 옥같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가만히 웃었다. "화예상아, 아니, 루주(樓主)가 아니어서 실망하셨나요?" 백리사옥은 다소 놀랐다. "그랬었나? 화예상아가 자향루의 루주였다니? 짐작치 못한 일이라 놀랍구려." 소옥은 일순 나지막한 탄식을 토해냈다. "루주께선 천하삼미로 불리실만큼 천상의 미모를 타고 나셨으나 선천적인 지병이 계신 까닭에 밖으로 나오시는 일이 극히 드물어요." "지병이라니?" 백리사옥이 묻자 소옥은 두 눈에 기광(奇光)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건 곧 말씀드리겠어요. 기실 소녀가 공자님을 뵙자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니까요." "……?" "외람되다 나무라지 않으신다면 제가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요?" "말씀해 보시오." "공자께선 스스로 학문(學文)의 깨우침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다 생각하시나요?" 예기치 않았던 질문이었다. 백리사옥은 의아했으나 무슨 까닭이 있으리라 여겨 곧바로 대답했다. "약간은 깨우침이 있었소." 물론 겸손의 대답이었다. 천하에 그 누가 있어 백리사옥에게 학문을 논(論)할 것인가? 소옥은 눈빛을 빛냈다. "그렇다면 소녀가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시험이오?" "언짢으시다고 여기진 말아주세요. 실은 루주의 생명이 걸린 일이랍니다." 백리사옥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깨달았다. "좋소." 백리사옥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옥은 질문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학리(學理)와 육예(六藝),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등 문(文)에 관한 광범위한 질문들이었다. 물론 백리사옥은 막힘없이 대답했으나 내심으로는 놀라고 있었다. (소옥, 평범한 여인이 아니다. 이 여인의 지식과 학문은 이미 대학사(大學士)를 훨씬 능가하고 있지 않은가?)


한편 소옥의 놀라움은 더욱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자운성궁(紫雲聖宮)의 문상(文相)의 지위에 있는 내가 이 공자의 학문을 따를 수 없다니…… 막히는 것이 없다.) 대화가 거듭될 수록 백리사옥의 끝없이 깊은 학문과 지식에 경악감복해 버리는 그녀였다. (이 분 공자야말로 우리가 기다려왔던 분이다. 내가 잘못 보지는 않았어.) 소옥은 내심 외치며 길게 한숨을 뿜어냈다. "졌어요. 도저히 공자의 학문의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군요." "과찬이오." "공자께선 의술(醫術)도 익히신 적이 있으신가요?" 백리사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깨우친 바가 있소." 소옥의 얼굴에 안도와 감격의 표정이 짙게 떠올랐다. "아! 됐어요." 이 순간, 그녀의 두 눈에서는 주르르 옥루가 흘러내렸다. "이제 루주는 살아나실 수 있어요." 백리사옥은 도저히 의혹을 참을 수 없었다. "속시원한 얘기를 듣고 싶소." 소옥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대답했다. "사실 주루께선 얼마 전에 괴이한 병(病)에 걸리셨어요. 우리는 백방으로 의원과 약을 구했으나 병명(病名)조차도 알아내질 못했어요." 백리사옥의 검미가 약간 찌푸러졌다. "대체 어떤 병이길래……?" 그러자 소옥은 조용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말씀드리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럽시다." 백리사옥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헌데 그때다. "아아---- 아---- 아----!"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소리가 밤공기를 찢으며 들려왔다. 순간, 소옥의 안색이 급변했다. "루…… 루주의 비명소리예요!" "뭣이!" 콰쾅! 부르짖음이 끝나기도 전에 백리사옥의 신형은 창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순간, 백리사옥은 후원에 솟은 한 누각(樓閣)의 지붕이 우박처럼 짓터지며 한 줄기 청영(靑影)이 허공으로 치솟는 것을 보았다. 쿠콰콰쾅----! 츄아아아…… 그 청영은 결코 경신술을 펼치는 것이 아니었다.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어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力)에 낚아채어지듯 허공을 치솟아 날아가는 것이었다. "아아악----" 소옥이 뒤에서 부르짖었다. "루주예요!"


"알았소!" 백리사옥의 신형이 백색 무지개처럼 청영을 뒤쫓았다. 3 콰쾅! 날아가던 청영이 내동댕이쳐진 곳은 연경 교외의 야산(野山)이었다. 백리사옥은 신속히 청영의 옆에 내려섰다. "과연 소녀(少女)로군!" 쓰러진 청영은 청의궁장(靑衣宮裝) 차림의 소녀였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자세한 용모는 알아볼 수 없었으나, 상큼한 이마와 긴 속눈썹에 덮인 눈자위만으로도 빼어난 미모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청의소녀는 죽은 듯 눈을 꽉 내리감고 있었는데, 입에서 피를 토해냈는지 면사는 핏물로 범벅이 되있었다. "……!" 백리사옥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카카앗! 돌연 귀청을 뒤흔드는 예리한 괴성이 터졌다. 동시 한 줄기 흑영(黑影)이 무섭게 백리사옥에게 짓쳐들었다. 백리사옥은 흠칫 놀라며 엄습해 드는 흑영을 젖혔다. 카카카아앗! 휙! 수도 셀 수 없는 엄청난 숫자의 검은 그림자들이 폭우 퍼붓듯 백리사옥을 향해 짓쳐들었다. "인두흑사(人頭黑蛇)!" 백리사옥의 입에서 대경성이 터졌다. 흑사(黑蛇)! 수백, 수천 마리는 족히 됨직한 엄청난 숫자의 검은 뱀떼들! 뿐인가? 흑사의 머리부분은 마치 사람의 얼굴과도 같은 형상이 아닌가? (인두흑사! 남해의 절해해저(絶海海低)에서만 서식한다는 마물이 아닌가!) 인두(人頭) 형상의 머리는 어린아이의 머리 크기만 했고, 몸통의 굵기는 사람 허벅지만큼이나 굵었다. 캬캬아아! 캭! 캭! 인두흑사들은 쇳소리같은 괴성을 질러대며 그에게 덮쳐들었다. 인두흑사들의 입에서 시커먼 흑수(黑水)가 화살처럼 뿜어졌다. 백리사옥은 급히 그것을 피했으나 흑수가 닿은 뒤쪽의 거암(巨岩)은 순식간에 주르르 녹아내리는 게 아닌가? (지독한 독(毒)이다!) 백리사옥은 급히 경악을 추스르며 무섭게 쌍장(雙掌)을 휘둘렀다. 가공할 위력이 담긴 장력이 전후사방으로 폭풍같이 뻗쳤다. 퍼---- 퍼---- 펑! 장세는 정확히 인두흑사들을 강타했다. 허나 흑사들은 잠시 주춤하였을 뿐 더욱 맹렬한 공세를 발동하는 게 아닌가? 몇번 더 시도를 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캬오오옷! 휘리리릭----! 수천 마리의 흑사떼들은 마치 훈련이라도 받은 듯 질서정연하게 번갈아 백리사옥을 공격했다. (보통의 무공으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그의 입술이 깨물어졌다. "발칙한 마물들!" 백리사옥의 입에서 싸늘한 호통성이 터졌다. 다음 순간, 그의 전신에 은은한 은광(銀光)이 어리기 시작했다. "건천은섬빙마벽(乾天銀閃氷魔壁)!" 최촤최촤촤! 촤아아아! 백리사옥의 전신으로부터 마치 은무지개 같은 빛살이 폭풍처럼 산지사방을 뒤덮었다. 콰우우우우…… 우우……! 얼어버린다(氷). 은무지개에 휩쓸린 십 장 방원, 존재하는 물체들은 모조리 꽝꽝 얼음덩이로 화해버린다. 풀도, 나무도, 만근 거석도 얼음덩어리로 화하는가 싶더니 인두흑사들은 고통의 괴성을 내지르며 얼음가루로 화해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은파섬(銀波閃)!" 번쩍! 번쩍! 가공할 은광이 검기(劍氣) 퍼부어지듯 사면팔방으로 폭사되었다. 끄악! 케엑----! 흑사떼들은 순식간에 추풍낙엽이 되어 얼음산(氷山)을 이루어갔다. 가공할 건천절학의 위력이었다. 순간이었다. 우우우우우…… 어디선가 괴수(怪獸)의 울부짖음 같은 장소성이 터졌다. 스스스스스…… 어디서 나타났는가? 어둠 속에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우뚝 자리했다. 괴인(怪人)! 이것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키는 무려 십 척(尺)을 넘고 전신에는 시뻘건 핏빛 비늘(血鱗)을 쓴 뱀(蛇)의 형태인데, 주먹만한 두 눈은 벽광(碧光)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쿠우우우! 오너라, 귀여운 내 아이들아!" 괴인이 음산하게 울부짖자 인두흑사들은 무더기로 괴인의 입 속으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우걱…… 우거걱…… 괴인은 날아든 인두흑사들을 마구 씹어먹었다. 그러더니 핏물과 살점들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입가를 혓바닥으로 핥으며 백리사옥을 노려보았다. "젖비린내 나는 놈이 제법이구나." 그는 한 발을 안쪽으로 내딛었는데 발이 닿는 지면은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졌다. "놈! 천요(天妖)의 장보도(藏寶圖)를 내놓아라!" 천요(天妖)의 장보도는 또 무슨 말인가? 백리사옥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천요의 장보도? 혹시 조금 전에 색두광도가 내 품 속에 넣어준 괴상한 물건을 말하는 것인가?) 그가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 괴인은 느릿느릿 백리사옥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백리사옥은 뇌리를 굴렸다. (그렇다면 이자는 색두광도가 내게 그것을 넣어주는 것을 보았고, 나를 이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화예상아를 이용했단 말인가?) 돌연, 다가오던 괴인은 백리사옥의 삼 장 거리에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음산한 음성을 내뱉았다. "놈이 환상독존마(幻想獨尊魔)를 죽였느냐?" 백리사옥의 검미가 꿈틀 치솟았다. "그렇다면 네놈도 겁천악마교의 주구인가?"


괴인은 느닷없이 광소를 터뜨렸다. "쿠카카카, 그렇다! 본좌는 겁천악마교의 일천마왕(一千魔王) 중의 하나인 인두사왕(人頭蛇王)이다." 순간, 백리사옥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의 기도로 보아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헌데 겁천악마교에는 저런 자들이 일천 명씩이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위에는 또 어떤 가공할 마인들이 있단 말인가!) 절로 근육이 떨려왔다. 허나, 백리사옥이 누군가? 그는 이내 표정을 얼음장보다 차갑게 굳히며 싸늘하게 내뱉았다. "좋다. 어차피 너희들을 하늘 아래 두지 않기로 했으니까!" 슥! 백리사옥은 한 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품 속에서 하나의 금홀(金笏)을 꺼내들었다. 천상대정홀(天象大正笏)이었다. 눈부신 금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순간, 인두사왕의 벽안이 시퍼런 살광을 토해냈다. "네놈이 상문(象門)의 후예였을 줄이야. 쿠쿠쿠! 뜻밖의 수확이다!" "하하하핫! 어리석은 놈!" 한소리 낭소와 함께 백리사옥의 신형이 야천(夜天)으로 솟아올랐다. "대정(大正)의 뜻으로 마(魔)를 참(斬)한다!" 야천 위에서 그는 천상대정홀을 쭉 내뻗었다. 동시에, 번쩍! 번쩍! 천상대정홀이 가공할 속도로 회전하며 일시에 황금빛으로 뒤덮였다. 휘황찬란한 황금빛 번갯불이 수천 가닥으로 작렬하며 뇌성과 폭풍의 회오리는 천지를 통째로 휘말아 올릴 듯 터졌다. 콰우우우우우---- 우드드득----! 땅이 쪼개지며 바위와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하늘로 비산했다. 오오, 이것이 인간의 무학인가? 일순 인두사왕은 안색이 급변하며 전신을 격렬하게 떨었다. "네…… 네놈이…… 감히!" 다음 순간 인두사왕은 그 자리에서 미친 듯이 신형을 회전시켰다. 핏빛 비늘(血鱗)! 그의 전신에 붙어있던 핏빛 비늘이 암기로 화하여 소나기처럼 백리사옥에게 덮쳐들었다. 일시에 천공에는 혈우(血雨)로 뒤덮였다. 콰콰콰쾅! 카아앙! 카카카캉----! 도무지 인간의 힘이 부딪쳤다고 믿을 수 없는 무지막지한 굉음과 함께 시퍼런 불꽃이 미친 듯이 피어올랐다. "흐억!" 답답한 비명을 토해내며 인두사왕의 거구가 비틀비틀 물러났다. "끝내주겠다! 건천열화팔천검(乾天熱火八千劍)----!" 건천열화팔천검(乾天熱火八千劍)! 열화(熱火)의 검강(劍 )이 섬전일순에 팔천방위(八千方位)를 베어버린다. 귀영(鬼影)이라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건천삼십삼무상예(乾天三十三無上藝)의 하나! 취리리리릿----! "크아악!" 인두사왕의 몸뚱이가 종잇장처럼 터지며 날아갔다. 그의 온몸은 걸레처럼 찢겨지고 허리의 살점이 뭉텅 잘려나갔다. 허나,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 "으으…… 이렇게 강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그 순간 백리사옥은 허공에서 신형을 선회하며 지면에 우뚝 내려섰다. 휘이잉…… 바람에 휘날리는 눈부신 백의, 한 손에 황금빛 천상대정홀을 움켜쥐고 우뚝 서있는 백리사옥의 모습은 태산(泰山)이었다. "하늘아래 너희들이 설 땅은 없다." 뚜벅! 그는 인두사왕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때 쇳가루를 비벼대는 듯한 괴음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크크! 인두사왕마저 당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백리사옥의 검미가 꿈틀했다. 파파파---- 아앗----! 땅거죽이 뒤집히며 도합 열 개의 핏빛 강륜( 輪)이 솟구쳐 나왔다. 그 빠르고 지독한 기세를 무엇으로 형용하랴? (우웃!) 백리사옥은 대경하여 전광석화처럼 뒤로 퉁겨나갔다. 그러는 순간, 꽈---- 꽈---- 꽝! 꽈드드득----!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땅거죽이 뒤집히고, 흙먼지가 비산하며 한 인영이 땅 속에서 솟구쳤다. 그 인영은 실로 찰나간에 허공으로 날아간 열 개의 혈륜(血輪)을 회수하고 인두사왕의 옆에 내려섰다. 섬광(閃光)을 방불케하는 신법! 혈포복면인! 복면 속에서 빛나는 눈빛과 전신에선 지독히도 사악한 죽음(死)의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인물이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의 손에는 단 한 개의 혈륜이 쥐어져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는 분명히 열 개의 혈륜을 모두 회수하였거늘 어찌 한 개란 말인가? 혈포괴인은 내려서자마자 백리사옥을 향해 음산하게 외쳤다. "본좌는 혈륜마사(血輪魔邪)라 한다. 들어보았겠지?" 백리사옥은 움찔 놀랐다. (혈륜마사! 지옥백팔마 중 최고마인 구인(九人) 중의 하나가 아닌가?) 이때였다. 스으으으…… 스슷! 백리사옥의 뒤쪽에서 또다른 인기척이 들렸다. 백리사옥은 안색이 변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이인(二人), 역시 혈포로 몸을 감싸고 핏빛 복면을 쓴 두 명의 인물이 우뚝 서있었다. 왼쪽의 인물은 거대한 혈조(血爪)를 움켜쥐고 있었고, 오른쪽 인물은 혈편(血鞭)을 뱀처럼 감아들었다. (혈조마라존과 마편염제!) 백리사옥은 한눈에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혈조마라존(血爪魔羅尊). 마편염제(魔鞭閻帝). 그들 또한 지옥백팔마의 최고고수로 황금만적세가를 피로 쓸어버렸던 마인들이 아닌가? 백리사옥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림을 보였다. (삼 대 일, 쉽지 않다! 두 명이라면 몰라도 세 명은 솔직히 벅차다.) 그때, 혈조마라존이 핏빛 혈조를 한 손으로 철컥철컥 두드리며 음산한 괴소를 흘려냈다. "크흐흐흐…… 내놔라, 애송이!" 마편염제는 혈사(血蛇) 같은 핏빛 채찍을 한 손으로 거칠게 훑어내렸다.


"천요(天妖)의 장보도만 순순히 내놓는다면 고통없이 죽여 주겠다." 백리사옥은 생각했다. (천요의 장보도가 뭐길래 이자들이 이토록 집요하게 노리는가?) 허나, 그는 이내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나지막하게 외쳤다. "천요의 장보도!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 은 너희들이 이곳에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 뿐!" "뭐, 뭣이!" 백리사옥은 더욱 싸늘한 냉소를 피워올렸다. "나는 이미 말했다. 이 하늘 아래 너희들이 설 땅은 없다고!" 혈륜마사가 느닷없이 광소를 터뜨렸다. "푸흐흐하핫핫…… 미친 놈! 몇 수 잔재주를 얻어 배웠다고 간덩이가 부었구나! 네놈이 우리 셋을 함께 상대해 보겠다는 것이냐?" "물론!" 백리사옥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이 순간 그의 뇌리는 무섭게 회전하고 있었다. (시간을 끌면 불리하다! 속전속결만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때, 혈조마라존은 다시 혈조를 철컥거리며 외쳤다. "삼대일(三對一)이다. 우리 셋의 합공은 천신(天神)이라도 찢어 버릴 수 있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그러나 삼대이(三對二)라면 문제는 다르겠지." 어디선가 황량한 삭풍과도 같은 음성이 허공을 울렸다. 차갑다. 그리고 극히 무심(無心)했다. 혈조마라존 등은 흠칫하며 빙글 고개를 돌렸다. 아! 언제 나타났는가? 한 조그만 바위 위, 하나의 흑영(黑影)이 유령처럼 소리없이 우뚝 서 있었다. 만년빙담 속의 화강암처럼 지독히도 딱딱한 인상의 흑포중년인(黑袍中年人)은 바로 자향루에서 색두광도로 하여금 황급히 달아나게 만들었던 그 인물이 아닌가? 혈조마라존은 내심 경악했다. (고수다! 이토록 가까이 접근하기까지 몰랐다니……) 허나 그는 눈빛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네놈은 또 웬 버러지냐?" 흑포중년인은 무심한 어조로 간단히 대답했다. "묵풍무정(墨風無情)." 혈조마라존은 일순 냉소를 흘려냈다. "크훗! 젖비린내나는 놈이 이름 하나는 그럴 듯하구나. 어디 실력은 어떠한가 좀 볼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쉬아아앙! 혈포(血砲)가 터뜨려지듯 그의 손에서 거대한 혈조가 대기를 찢으며 날았다. 혈조는 나선형의 또아리를 만들며, 어마어마한 회오리와 함께 흑포중년인을 통째로 찢어 버릴 듯 덮쳐 들었다. 빙긋! 순간 묵풍무정의 입가에 기소가 떠올랐다. 갑자기 그의 몸이 제자리에서 급회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콰우우우우…… 우우……


오오, 그것은 바람(風)! 묵풍무정이 선 자리에는 거대한 검은 바람(黑風)이 회오리처럼 수직으로 휘감겨 올랐고, 묵풍무정의 모습은 검은 바람 속에 파묻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까까깡! 검은 바람에 부딪친 혈조마라존의 혈조는 시퍼런 불꽃과 함께 거 칠게 퉁겨져 버렸다. 혈조마라존의 안색이 급변했다. "네놈이 사술(邪術)을?" 묵풍 속에서 무심한 대답이 들렸다. "후후, 사술이 아니다. 묵풍와선기(墨風蝸旋氣)라는 무학이지." "ㅋ! 또 받아봐라!" 혈조마라존은 바득 이빨을 갈아붙이며 허공으로 신형을 떠올렸다. "혈조뇌우(血爪雷雨)!" 일갈을 터뜨리며 혈조를 허공으로 쭉 뻗어 올렸다. 그러자 혈조로부터 수십 가닥의 핏빛 혈선(血線)들이 부챗살처럼 퍼지며 묵풍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혈우(血雨)와도 같았다. 아니 핏빛 폭죽이 터져내리는 것 같다 할까? 백리사옥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훌륭하다! 비록 적이지만 과연 거마(巨魔)로서 손색이 없는 무공이다!) 그때였다. "헛……!" 묵풍 속에서 다급한 헛바람 소리가 터지며 급히 회오리가 잦아들었다. 이내 회오리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헌데, 묵풍무정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지 않은가? 퍼퍼퍼퍽! 혈우(血雨)는 애꿎은 지면만을 강타하며 갈라놓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츄악! 십 장 가량 떨어진 지면 속에서 빛살처럼 한 줄기가 치솟으며 혈조마라존을 덮쳤다. "묵풍참(墨風斬)-!" 쎄애애---- 애---- 액----! 도(刀) 형상을 한 시커먼 묵색강기(墨色 氣)가 혈조마라존을 휩쓸었다. "커헉!" 혈조마라존은 급한 비명을 토해내며 허공에서 십여 차례나 신형을 선회시켰다. 순간이었다. "크ㅋ! 아이야. 우리도 한 번 놀아보자!" 마편염제가 외치며 백리사옥을 향해 혈편(血鞭)을 쭉 뻗어냈다. 쐐애애---- 취리리릿! "카캇! 뒈져라!" 혈륜마사의 손에서 열 개의 혈륜(血輪)이 한꺼번에 날았다. 파츠츠츠츠---- 츠츠츳! 이대거마(二大巨魔)의 합공은 상상을 불허하는 무지막지한 기세였다. 허나, 백리사옥은 싱긋 웃었다. "둘 정도라면 한꺼번에 상대해줄 수 있다!" 그의 신형이 소리없이 떠오르며 수평으로 허공에 빳빳이 뉘어졌다. "건천잠영무(乾天潛影霧)!"


스스…… 백리사옥의 신형이 마치 안개(霧)처럼 뿌옇게 흐려지더니 이내 허공에서 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휘류류류륭----! 바람이 좁은 계곡을 빠져나가는 듯한 기이한 음향과 함께, 퍼억! 마편염제는 무엇인가 거대한 힘(力)에 가슴을 얻어맞고 날아갔다. "커억!" 휘류류류---- 류---- 륭----! 바람소리는 날아가는 마편염제를 따라 붙었다. "가거라, 건천열화팔천검!" 취리리리릿----! "크아악!" 허공에서 마편염제의 몸뚱이는 수십 토막으로 쪼개지며 피보라가 만장을 뒤덮었다. 건천잠영무(乾天潛影霧)! 건천삼십삼무상예의 하나인 잠형은둔공의 최고 절학. 십이성(十二成)에 이르면 심지어 물 한 방울, 바람 한 점에도 몸을 숨길 수 있다는 믿어지지 않는 기학(奇學)이었다. "헉!" 혈륜마사는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경악성을 토해내며 주춤 물러섰다. 허나 그 순간 바람 속에서 백리사옥의 외침이 터졌다. "무영극열천강(無影極熱天 )----!" 찰나 혈륜마사는 갑자기 전신이 열화지옥(熱火地獄)에 빠진 듯한 엄청난 열기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헉! 부…… 분명 아무런 장세(掌勢)도 없었는데……" 동시, 그는 완맥이 마비되며 전신의 공력이 흩어짐을 느껴야 했다. 백리사옥의 모습은 혈륜마사의 옆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느새 혈륜마사의 완맥을 움켜쥐고 있지 않은가! "가거라!" 우드득! 혈륜마사의 손목 뼈가 부서지며 무지막지한 열기가 그의 전신 내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아악!" 화르르르…… 그의 전신에서 시퍼런 불꽃이 일며 혈륜마사의 몸은 시커먼 숯덩이가 되어 버렸다. 무영극열천강(無影極熱天 )! 역시 건천의 절학으로 소리도 기척도 없이 덮쳐드는 화강(火 )이다. 백리사옥은 건천잠영무로 신형을 숨긴 상태! 그때 소리조차 없이 덮쳐드는 무영극열천강을 혈륜마사같은 절대고수라도 어찌 막아낼 것인가? 허나, 지금 백리사옥의 이마에선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기습이었고 이자들이 나의 무공을 알지 못했기에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한 명만 더 합세했어도 결과는 장담키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굳게 입술을 깨물었다. (건천삼십삼무상예! 이제 팔성(八成) 수준에 불과하다. 시간이 나는대로 좀더 연마해야 되겠다.) 그때였다. "크아아악!"


폐부를 쥐어짜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백리사옥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혈조마라존의 몸뚱이가 상하로 두 쪽이 난 채 지면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묵풍무정은 몸을 날려 인두사왕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그는 내려서자마자 그대로 인두사왕의 머리통을 발로 짓밟아 버렸다. 우드드득----! "크아악!" 인두사왕은 두개골이 뽀개지며 즉사해 버렸고, 묵풍무정은 그의 죽음을 확인한 뒤 천천히 백리사옥에게 다가왔다. (무서운 고수다! 혈조마라존을 가볍게 베어 버리다니…… 어쩌면 이자는 본 실력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는지 모른다!) 묵풍무정은 말했다. "일이란 확실히 해두는 게 좋지." 묵풍무정은 백리사옥의 앞을 그대로 천천히 지나쳐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중원에서 그대 같은 괜찮은 친구를 만날 줄은 몰랐군. 허나 보물을 가진 자는 몸을 조심하는 게 좋아." 백리사옥은 흠칫했다. (저자도 이미 천요의 장보도라는 것이 내게 있음을 알고 있는가?) 허나, 그는 종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묵풍무정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묻혀가고 있었다. 휘이잉…… 야풍(夜風)이 산 능선을 휘감으며 묵풍무정의 흑포자락을 찢을 듯 휘날렸다. 백리사옥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떤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어떤 운명(運命)의 느낌이랄까…… (누군가? 묵풍무정,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이곳에 나타났는가?) 휘이이잉……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백리사옥은 일순 시선을 한쪽에 주었다. 그곳엔 아직도 의식을 잃은 채 청의미소녀 화예상아가 누워 있었다. 제 10 장 天巫神魔脈 1 백리사옥은 화예상아를 살펴보았다.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 의식을 잃었으나 중태는 아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괴이한 질병에 걸렸기에 의원들이 병명조차 알아낼 수 없었을까?) 이렇게 생각한 백리사옥은 그녀를 진맥(診脈)해 보기로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백리사옥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신체에는 아무런 병세도 없다. 그러나 소옥이 내게 쓸데없는 거짓말을 했을 리도 만무하다.) 그는 더욱 면밀히 좌우혈도의 진맥을 해보았다. 어느 순간 백리사옥의 눈빛이 번쩍 경악의 빛으로 물들었다. (이럴 수가?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무엇을 발견했는가? 갑자기 그의 손이 화예상아의 전신혈도를 샅샅이 더듬어갔다.


물론 여인(女人)의 몸이라는 의식은 있었으나 그는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틀림없다." 백리사옥은 한참 후, 화예상아의 몸에서 손을 거두며 나직이 신음했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것으로 알았는데 실제로 천무신마맥(天巫神魔脈)이 존재할 줄이야!" 천무신마맥이 무엇이기에 백리사옥을 이처럼 당황하게 만드는가? 일순, 백리사옥의 눈이 신광을 발했다. "이것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서둘러야 한다!" 그는 급히 화예상아의 몸을 들쳐 안았다. 슈아아----! 그의 몸은 야천(夜天)을 박차고 빛살처럼 날았다. 헌데, 하나의 눈이 어둠 속에서 백리사옥의 사라져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흘흘흘, 그동안 무섭게 자랐군. 설마 지옥백팔마를 그토록 간단히 물리칠 줄이야……" 그 눈은 빽빽하게 뒤덮인 털 속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았으나, 안광(眼光)만은 철판을 꿰뚫어버릴 정도로 강렬했다. 마치 절구통을 보는 듯 무지하게 큰 머리에 비해 어린 소동만큼 작은 몸집이 어둠 속에 희끗희끗 엿보였다. 그리고 어둠 속의 다른 한켠에 또 하나의 눈(眼)이 조용하면서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백리사옥, 분명히 백리사옥이라 했다." 그 눈은 여인처럼 아름다웠고, 손에는 한 자루 백옥선(白玉扇)이 들려 있었다. "얼마나 그 이름을 찾았던가, 허나 지금은 만날 수 없다. 내겐 해야될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그 나직한 음성은 묻혀 들었다. 2 "역시 그랬었군요. 소녀의 짐작이 틀렸기를 바랬건만 결국 루주의 지병이 천무신마맥(天巫神魔脈)이라니……" "그렇소. 따지고보면 화예상아 소저의 천무신마맥은 질병이 아니오. 낭자도 알고 있겠지만 천무신마맥이란 태초이래 단 세명(三名)도 타고난 적이 없다는 천고의 무령지맥(巫靈之脈)이오." "……" "천 년 이상을 내려온 무령가(巫靈家)의 피(血)와 하늘이 시샘할 정도의 완벽지신(完璧之身)이 갖추어졌을 때에만 천무신마맥은 나타나게 되오. 그것을 타고난 사람은 남자인 경우에 만 십오세(十五歲), 여자인 경우에는 만 십칠세(十七歲)가 되면 변혼환령기(變魂還靈期)를 맞게 되오." "……" "그것은 평범한 인간에서 무령지신(巫靈之身)으로 탈바꿈하는 과도기(過渡期)인데, 그 기간은 정확히 백일(百日)간 계속되며 인간이 납득하지 못할 괴이한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 시기이오." "공자님의 말씀대로예요. 루주는 금년에 만 십칠 세가 되시지요. 헌데 백 일쯤 전부터 갑자기 이상해지기 시작하셨어요. 주무시다가 갑자기 일어나 산길을 배회하다 오시기도 하고, 느닷없이 알아듣지 못할 괴이한 말들을 중얼거리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광증(狂症)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겠구려." "그래요. 천무신마맥은 변혼환령기에 들어서기까지는 전혀 징후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처음엔 혹시 광증이 아닌가하고 의원도 불러보고 무당(巫堂)을 불러보기도 했어요." "결과는 어떻게 되었소?" "의원은 병명을 알 수 없다 돌아갔고, 무당들은 루주가 나오시면 벌벌 떨면서 달아났어요. 그제야 저도 혹시 전설상의 천무신마맥이 아닌가 생각했었지요." "음……" "그래서 소녀는 고서(古書)를 찾아 천무신마맥에 대해 연구해 왔어요. 천무신마맥은 병이 아니기


때문에 고칠 수 있는 길은 전무하다는 거예요. 하지만……" "당연히 정령납밀대법(正靈納密大法)을 생각하게 되었겠구려." "바로 보셨어요. 천무신마맥을 타고난 사람은 변혼환령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결정된다고 했어요." "……" "그 시기에 만일 정령(正靈)을 접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악령(惡靈)을 접하게 되면 무서운 마령지체(魔靈之體)가 되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했어요." "……" "다행히도 아직까지 루주는 악령에 접하지 않았어요. 허나 백 일이 지나도록 영(靈)에 접하지 못하면 천무신마맥은 죽고 말아요. 체내에 타고난 잠력을 스스로 억누를 길이 없어 전신혈맥이 터져버리기 때문이죠. 루주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령납밀대법밖에 없어요." "……" "공자께선 물론 아시겠으나 정령납밀대법이란 루주에게 정령(正靈)을 심어주는 대법이죠." "……" "대법을 시행하는 자는 루주보다도 뛰어난 천품(天品)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안되요. 루주의 잠력에 오히려 둘 다 목숨을 잃고 말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나를……?" "공자님은 소녀를 평생 처음으로 경악시킨 분이예요. 인물, 무공, 학문, 지혜, 루주를 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공자님밖에 없어요." "……" "허니 루주만은 구해 주세요. 으흐흐흑……!" 3 창백하고 여윈 안색의 소녀(少女)는 누워 있었다. 부챗살 같은 속눈썹 아래로 한 쌍의 봉목(鳳目)엔 짙은 우수를 담고 그녀는 조용히 누워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눈은 떴으되 의식은 없었다. 그녀의 형용할 수조차 없는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눈부신 나신(裸身)에는 도합 일천팔십개(一千八十個)의 금침(金針)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후우……" 백리사옥은 그녀를 바라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백모란(白牡丹), 이 소녀는 마치 백모란 한 송이를 보는 듯하다. 혁유사란을 자목련(紫木蓮)에 비한다면 이 소녀, 화예상아는 백모란이라 해야 옳으리라. 천하삼미의 하나로 꼽히는 화예상아의 미모는 청초하면서도 해맑았고 너무도 아름다웠다. 백리사옥은 가슴이 조금 답답해져 왔다. 절세미녀의 나신을 보고, 어루만지면서도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리라. (오늘이 꼭 백 일째! 이 소녀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음은 다행이었다.) 그의 가슴이 답답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고서에 전하기를 천무신마맥이 나타나면 천하는 무서운 난세(亂世)가 되리라 했다.) 그는 문득 대사형 번천대공이 남긴 유지를 기억했다. -무력 일천 오백 사십 일 년 사월(四月) 어느 날, 악마의 적자가 이 땅 어딘가에 태어났다! (악마의 적자 탄생, 천무신마맥의 등장, 난세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때, 그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대체 천요의 장보도란 무엇일까?) 백리사옥은 품 속에서 색두광도가 넣어 주었던 물체를 꺼내보았다. 그것은 한 조각의 귀갑(龜甲)이었다. <구겁지옥마로(九劫地獄魔路).> 귀갑에는 과두문자( ?文字)로 이렇게 쓰여있고, 그 밑으로 몇줄의 글귀가 또 있었다. <천요(天妖) 지옥(地獄)에 들다. 구겁(九劫)이 하늘(天)에 이르면 왕(王)은 열천(熱川)에 묻히다.> (괴상한 말들이군. 이것이 장보도란 말인가?) 백리사옥은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쨌든 나중에 연구해 보기로 하고 귀갑을 품 속에 다시 넣었다. 한데 그때였다. "으음…… 음……" 화예상아의 몸이 미미하게 꿈틀거리며 약한 신음성을 흘려내기 시작했다. 동시, 그녀의 전신 곳곳 금침이 꽂힌 부위에서는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백리사옥의 눈이 빛났다. "시간이 늦으면 안된다!" 그는 급히 손을 놀려 금침을 회수하며 옷을 벗었다. "천무신마맥의 신체에는 인간이 상상키 어려운 엄청난 잠력(潛力)이 사리고 있다.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잠력을 욕정(慾情)으로 발산케 하여 힘을 누른 뒤 제령환주대법(制靈還呪大法)과 음양합일(陰陽合一)로 정심(正心)을 불어넣어 신무지체(神巫之體)로 만드는 것이다." 이윽고 백리사옥은 태어난 그대로의 나신(裸身)이 되었다. 그리고 정신에 사상심광정(四象心光精)을 운기시켰다. -천상의 힘이 하늘에 닿으니 대정은 마(魔)를 누르리라! 어느 순간, 침상에 누워있던 화예상아의 몸이 거칠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으으…… 으으으으…… 으……" 그녀의 몸이 빳빳이 누운 채 퉁겨지듯 일어섰다. 헌데, 그녀의 눈(眼)에 화염같이 시뻘건 욕화(慾火)가 무섭게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백리사옥이 금침으로 그녀의 잠력을 불러일으킨 때문이었다. 돌연, "우우우우우……" 화예상아는 벽을 노려보며 괴수(怪獸)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녀는 울부짖으며 욕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방 안을 휩쓸어 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백리사옥의 알몸에 딱 멈추었다. 일순, 그녀의 전신이 욕정을 못이겨 푸들푸들 떨었다. "오호호호호홋…… 오호호홋……!" 그녀는 갑자기 광녀(狂女)처럼 머리를 흔들며 웃어젖혔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그녀는 광소를 터뜨리며 빛살처럼 백리사옥에게 덮쳐들었다. 음욕(淫慾)은 원시적 본능의 욕구이다. 음욕에 뒤덮인 그녀의 언행은 광기서린 어린아이와 같았다. "흡!" 그녀는 덮쳐들기가 무섭게 백리사옥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며 거칠게 입술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리사옥의 얼굴은 고요했다. (정심의 싸움이다! 정심을 잃으면 둘 다 살아나지 못한다!) 그녀가 천성적으로 타고난 엄청난 잠재력과 백리사옥은 싸움을 시작한 것이었다. "아우우…… 으으흠…… 흐흐흡……!"


그녀는 백리사옥의 전신을 빨아들이려는 듯이 무섭게 입술을 탐닉했다. 백리사옥은 몸의 어느 한 부분이 뜨겁게 팽창되는 것을 느꼈다. (참아야 한다!) 그때, 화예상아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입술을 백리사옥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상반신을 거칠게 더듬어갔다. 가슴의 돌기에 그녀의 입술이 닿았다. 그러자 그녀는 그것을 무섭게 흡입하기 시작했다. 순간, 무서운 쾌락의 전류가 백리사옥의 전신을 휩쓸었다. "날, 날 어떻게 해달란 말야!" 허나, 사내는 반응이 없었다. 그녀의 눈이 광기(狂氣)를 띠어갔다. 그녀는 거칠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백리사옥의 하반신에 닿았다. 화드드드득! 전류가 튀었다. 여인의 머리칼은 백리사옥의 아랫배 부근을 짜릿하게 휘감아들고, 여인의 입술은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허나, 그것은 태초의 본능이 아니랴? 여인은 흡사 광녀처럼 돌변했다. "으으……!" 백리사옥은 신음했다. (참아라! 참아라! 참아라!) 어느 순간 그는 그녀의 신궐혈(神闕穴)을 일지(一指)로 찍었다. 그러자, 여인의 욕망은 더욱 거센 폭풍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나신을 그 앞으로 밀착했다. 사내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달려들어 백리사옥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나를 가져! 어떻게 해보란 말야! 우우우우----" 그녀는 울부짖으며 백리사옥의 전신을 할퀴고 물어뜯었다. 백리사옥은 고통을 참으며 다시 그녀의 천돌혈(天突穴)에 일지를 찍었다. "오호호호홋……!" 그녀의 광기는 거의 극치에 달한 듯 흥분하기 시작했다. 괴성을 토하며 그녀는 백리사옥을 덮쳤다. 순간, 부드럽고 뜨거우면서도 뭉클한 감촉이 백리사옥에게 전해졌다. 뭉클! 음(陰)과 양(陽)이 막 겹쳐지려는 순간이었다. (이때다!) 백리사옥은 드디어 그녀의 혼혈(昏穴)을 찍어버렸다. "흑!" 화예상아는 한 마디 신음과 함께 몸을 푸르르 떨더니 쓰러졌다. 백리사옥은 눈을 떴다. 그의 얼굴, 아니 온몸에서는 땀이 비오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정말 참기가 힘들었다. 생명을 구하는 일이 아니었다면!" 그는 화예상아의 몸에 다시 금침을 꽂았다. "아홉 번을 되풀이해야 한다."


얼마쯤 지나자 화예상아는 다시 신음을 흘리며 전신을 뒤틀기 시작했다. "다시 시작이다!" 백리사옥은 다시 정좌하고 눈을 감았다. 화예상아는 눈을 떴고, 또 다시 괴성을 울부짖으며 백리사옥에게 덮쳐들었다. 그리고 싸움은 또 시작되었다. 그것은 흡사 전쟁(戰爭)이었다. 온밤이 새도록, 엄청나게 거대한 고래를 낚은 어부가 혼자의 힘으로 파도와 싸우며 고래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듯, 한 가닥 밧줄을 부여쥐고 무섭게 요동치는 고래를 낚아내려는 그런 싸움과도 같다 할까? 만일 백리사옥의 정신력이 조금이라도 약했더라면…… 그리고 그의 몸이 천상대정지체(天象大正之體)가 아니었더라면 두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뿌옇게 먼동이 움터오는 어슴푸레한 햇살이 창문에 비쳐들 무렵에야 화예상아는 완전히 힘이 꺾였다. "헉…… 헉……" 백리사옥은 그제야 지쳐버린 몸을 일으켜 그녀를 안고 침상으로 갔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를 안았다. 음양합일(陰陽合一)! 그것은 정령납밀대법의 마지막 과정이었다. 그는 소중하게 자신을 화예상아의 몸 속에 밀착시켰다. 그것은 아침햇살 만큼이나 신선하고 귀한 소유(所有)의 감촉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녀의 귀에 속삭임을 전해 넣었다. 이제 그대는 완전한 인간이 되었고, 또한 완전한 여인(女人)으로 태어나는 것이오. 나는 그대의 주인, 내가 악령의 손에 쓰러지지 않는 한 그대는 결코 악령의 범접을 받지않을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싸우는 것이오. 악마와 그를 추종하는 사악한 무리들…… 그리고 우리는 사랑해야 하오. 영원히…… 창으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 한 가닥이 그들의 나신 위에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 2 권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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