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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 수 영 웅 전 [ 박 영 창 ]

1... [옛것은 사라져도 버드나무는 여전하구나. 진눈깨비만 펄 펄 날리우고 가는 길이 주저되니, 목 마르고 배 고프구나. 내 마음 비통하고 애통하니 누가 이 슬픔 알아 주리오.]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애가(哀歌)가 회색빛 허공에서 감돌 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자는 열 다섯쯤 된 소년이었다. 그는 낙양성(洛陽城)에 있는 3 백 마지기나 되는 전답을 모두 내팽개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소년의 부모는 그 소년이 열 살 되던 해에 일찍 죽었으며, 그와 삼백마지기의 전답을 모두 그의 숙부에게 맡기고 그가 장성한 후 그 전답을 그에게 돌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재산이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또 사람을 죽일 수도 있 다는 것을 소년은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의 몸에는 3 천 군데의 채찍 자국이 있었다. 3 백 마지기의 전답이 3 천 군데의 채찍 자국을 남겨 주었던 것이다. 소년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것을 한탄했고 그의 부모가 남긴 전답을 원망했다. 이 전답이 없었더라면 숙부가 그의 몸에 3 천 군데의 채찍 자국을 남겨 놓지 않앗을 것이다. 그가 사라져버리기만 한다면, 3 백 마지기의 전답을 원하지 않는다면, 매를 맞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떠 문에 그 소년은 도망쳐 나왔던 것이다. 그의 숙부는 그가 귀곡(鬼谷)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귀곡자 (鬼谷子)라고 불렀다. 귀곡자는 길이 있으면 길을 걸었고, 강이 있으면 강을 건넜 으며, 산이 있으면 산을 넘었다. 그는 달이 떠오를 때부터 해가 떠오를 때까지 걸었고, 또 해가 뜰 때부터 달이 질 때 까지 걸었다.


그는 수중에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배가 고프면 야생 의 과일을 따먹고 목이 마르면 시냇물을 마셨으며, 걷는 것 이 싫증나면 그 채미가(采薇歌)를 을조렸다. 점점 귀곡자는 자기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지도 모르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가파르고 험한 산봉오리에 올라 산 아래를 내 려다 보았다. 저 멀리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만을 볼 수 있을 뿐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가 어디로 갈까 주저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차례 광풍이 불 어왔다. 광풍이 지나가자 숲속에서 표연히 회색 도포를 입은 백발 노인이 나타났다. 귀곡자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 노인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왔기 때문에 마치 땅에서 솟아난 듯했다. 몸은 고목처럼 비쩍 말랐으나 탐스러운 흰수염을 가슴까지 길게 드리우고 얼굴색은 잘 익은 대추처럼 붉고 어린애 피부 처럼 윤기가 흘렀다. 학발동안(鶴髮童顔)의 그 노인은 인자하면서도 근엄한 눈빛 으로 그 소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노인을 한번 본 순간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위축되면서 영문을 알 수 없는 경외감 과 신비감이 느껴졌고, 숨이 막힐 듯이 긴장되었다. 한참 후에 소년은 폭발할 듯한 긴장감을 더 참을 수 없어 입 을 열었다. [할아버지, 당신은 산신령이신가요, 아니면 신선이신가요?] 그러자 그 백발 노인은 껄껄 웃으며 인자한 어조로 대답했 다. [나는 노자(老子) 이이(李耳)라고 하며, 신선의 술법을 익힌 선인(仙人)이란다.] [신선 할아버지, 인사 올립니다.] 소년은 공손히 허리를 급혔다. 노자 이이는 껄껄 웃으며 다 가와 그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한 애로구나. 역시 내가 헛걸음을 하지 않았어. 아이야, 나는 너를 찾기 위해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단다.] 소년은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신선 할아버지, 저를 찾으셨다구요?] [그렇단다.] 소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는 신선 할아버지를 모르고, 신선 할아버지도 저를 모르 시는데, 왜 저를 찾으셨나요?] 백발 노인은 엄숙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바로 귀곡자가 아니냐?] 소년은 더욱 놀랐다. [귀곡자는 제 별명인데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아셨어요?] [귀곡의 아들이, 바로 네가 앞으로 천하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것이니라. 너는 앞으로 혼란에 빠진 열국(列國)을 좌지우 지하고 천기(天機)를 헤아리게 될 것이다. 천하의 유명한 영 웅 호걸들이 모두 너의 손에 의해 나오게 될 것이다. 위로는 천기(天機)를 움직이고 아래로는 대지(大地)에 숨어 있는 잠 룡(潛龍)을 찾아내 이 세상을 네 마음대로 변화시킬 것이다. 너는 나를 만난 이 순간부터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전무후무한 불세출의 기인(奇人)이 될 것이다. 넌 믿느냐, 믿지 않느냐?] 소년은 백발 노인의 말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저 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숙부님과 숙모님 께 밥 먹듯이 매를 맞고 자랐으며, 인생의 무상함과 환멸을 느끼고 이 세상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몸인데, 저 같은 것이 무슨 능력이 있어 불세출의 기인이 될 수 있겠으며, 천 하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수 있겠습니까?] 백발 노인은 돌연 입을 크게 벌리고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너는 믿지 않는구나. 물론 내 말이 황당하게 들


릴 것이다. 그러면 너에게 묻겠다. 너는 열국의 흥망을 좌우 하는 불세출의 기인이 되고 싶으냐, 되고 싶지 않느냐?] [저는 본래 세상살이에 염증을 느꼈고 삶에 연연하지 않아 왔습니다. 하지만 정말 큰뜻을 펴서 이 세상을 아름답고 살 기 좋게 바꿀 수만 있다면... 불세출의 기인이 되고 싶습니 다.] [좋다. 너는 어린애답지 않게 옳고 큰 뜻을 품고 있구나. 과 연 내가 헤아린 바가 틀리지 않았구나. 정말 장하구나. 아이 야, 너는 기공(氣功)을 수련한 적이 있었느냐?] 소년은 대답했다. [기공을 수련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기공을 수련하면 초 능력이 생겨 인간의 운명을 투시할 수 있고, 장생불사하며,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변화시켜 하늘을 새처럼 날 수 있고, 병을 고칠 수 있고, 무술의 대가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들 은 적은 있었습니다.] [맞았다. 그 뿐만 아니라 땅속을 투시하여 땅속에 숨어 있는 용(龍)을 찾아낼 수도 있다. 용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천하 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첩경이란다.] 소년은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물어보았다. [용이라는 동물은 전설속의 동물인데, 원래는 땅속에서 살고 있나요?] 백발 노인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내가 말하는 용은 그 용이 아니란다. 천하의 운 명과 개인의 운명을 바꾸게 하는 땅의 맥(脈), 바로 용맥(龍 脈)을 말하는 것이란다. 하늘과 땅에 가득 차 있는 생기를 천지기운(天地氣運)이라 하는데, 천지기운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가는 기운이 바로 땅 속에 숨어 있는 용기(龍氣)란다. 용기는 주로 산맥을 타고 흐르고 있다. 산의 형세를 보면 용 맥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데, 산세가 용처럼 굴곡이 있고 생동감이 있어야 훌륭한 용기가 그 산세 속에 깃들 수 있는 것이란다. 산세의 흐름이 변화막측하기 때문에 산룡(山龍)이 라고도 부르는 것이지.] [네, 그렇군요.]


백발 노인은 흰수염을 천천히 쓸어 내리며 근엄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노도(老道)가 근래 새로운 기공을 창안했는데 그 이름을 심 룡신공(尋龍神功)이라고 하지. 숨어 있는 용을 찾는 신기한 기공이라는 뜻이지. 내가 찾으려는 것은 진짜 용이 아니고, 건곤(乾坤), 곧 하늘과 땅의 정화가 모여 있는 대지(大地)의 잠룡(潛龍)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공을 일명 건곤결 (乾坤訣)이라고도 한다. 또한 형체가 없기에 일명 무위신공 (無爲神功)이라고도 부른다.] 소년은 호기심이 생겼다. [이 심룡신공 건곤결에는 무슨 장점이 있습니까?] 노자 이이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평범한 속인들이 잠룡을 찾아내면, 그 도움을 얻어 선도(仙 道)를 수련하여 완성에 이를 수 있고, 거지가 만나면 갑부가 되고, 촌부(村父)가 만나면 제왕이 될 수 있다. 어디 네가 말해 보아라, 장점이 있느냐, 없느냐?] 소년은 그 말을 듣고 얼굴빛이 변했다. [그렇게 엄청난 장점이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좋은 기 공을 저에게 전수해주신다는 것인가요?] 노자 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 오직 너 한 사람만이 심룡신공 건곤결 을 배울 수가 있다. 이 심룡건곤결(尋龍乾坤訣)은 배우기 쉬 운 것이 아니다. 첫째로 근(根), 둘째로 기(基), 세째로 명 (命), 이 세가지가 모두 갖추어진 사람만이 익힐 수 있는 것 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섣불리 배우려고 하다가는, 가벼 우면 병신이 되고, 심하면 당장 죽게 된다.] 소년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요?] 노자 이이는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몸을 날려 공중으로 치 솟아 오르더니 허공에서 빙글빙글 선회하면서, 열 손가락으 로 열 줄기의 도가(道家) 진기(眞氣)를 동, 남, 서, 북의 네 방위로 쏘아 보냈다.


노자 이이는 우렁차게 허공에서 외쳤다. [건곤의 넓고 넓음이여, 사방의 잠룡이여, 주인이 이미 나왔 으니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나타날지어다!] 노자 이이가 큰 소리로 외치자마자 동, 남, 서, 북의 네 방 위에서 갑자기 네 줄기의 백(白), 자(紫), 청(靑), 녹(綠) 사색의 안개가 피어 올라 용의 형상으로 뭉치더니 귀곡자를 에워쌌다. 순식간에 네가지 색깔의 안개로 주위가 자욱해지 면서 귀곡자를 덮어 씌워 귀곡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백발 노인은 소리쳐 물었다. [아이야, 이것이 바로 기분이 어떠냐?]

심룡신공 건곤결의 위력이다. 지금의

용의 안개 속에서 귀곡자의 놀람과 기쁨에 얽힌 음성이 들려 왔다.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져 금방이라도 하늘을 훨훨 날아 갈 것 같고, 힘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느낌이 들어요.] 백발 노인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과연 너는 진정한 심룡신공 건곤결의 주인이구나!] 백발 노인 노자 이이는 기뻐하며 연달아 열 개의 손가락을 튕겨 열 줄기의 무위신기(無爲神氣)를 그 사색의 안개를 향 해 내쏘았다. 핑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색의 안개가 갑자 기 흩어졌다. 그러자 귀곡자가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 는 모습이 드러났다. 소년은 멍하니 서 있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희한한 일이군요. 제 몸이 날아갈 듯이 가뿐하고, 몸 에서 힘이 샘솟듯 합니다.] 노자 이이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야, 지금 너의 내공(內功)은 이미 평범한 사람들이 삼 백 년 쯤 연공해서 축적한 내공과 맞먹게 되었다. 그것은 너 의 근본(根)과 기본(基), 그리고 명운(命運)이 대지 잠룡을


찾아내는 시조(始祖)가 다. 심룡신공 건곤결의 을 굴러 보아라.]

될 운명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 천부적인 주인인 까닭이지. 한번 발

귀곡자는 힘껏 발을 굴렀다. 뜻밖에도 체내에서 거대한 기운 이 발동되어 자기도 모르게 땅을 박차고 뛰어 올라 노자 이 이의 눈앞까지 날아오게 되었다. 그는 너무 놀라 소리쳤다. [앗,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노자 이이는 귀곡자가 뛰어 오르려는 것을 보고 지금 그의 공력이 이미 보통이 아닌 것을 알았다. 마음이 움직이는대로 기(氣)가 움직이니, 비록 구름과 안개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 니는 신선만큼은 못하다 해도,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급히 손가락 을 뻗어 무위신지(無爲神指)의 수법으로 귀곡자의 몸을 붙잡 고 기쁜 듯이 말했다. [놀랄 것 없다. 이미 심룡신공의 기공이 네 몸에 서렸기 때 문에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니라.] [너는 이제야 네가 불세출의 기인이 될 수 있다고 한 내 말 을 믿겠느냐?] 소년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네, 저는 한 점의 의심도 하지 않고 믿습니다.] [그 속에 담긴 오묘한 비밀을 더 알고 싶으냐?] 귀곡자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고 싶습니다!] 노자 이이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나를 따라 오너라!] 노자 이이는 말을 하면서 갑자기 귀곡자를 향해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귀곡자는 이 때 몸이 제비처럼 가벼워져서 노자 이이가 이끄는대로 몸을 위로 솟구쳐 뛰어 올라, 노자 이이 를 따라 북쪽의 한 산봉오리로 날아 오르기 시작했다. 노자 이이는 귀곡자를 이끌고 순식간에 산봉우리 위로 뛰어


올랐다. 그 산은 높고 험준하며 기세가 웅장하고 화려하면서 도 변화가 많아, 정말 장관이었다. 귀곡자는 산 꼭대기에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황하가 도도히 멀리 동쪽으로 흘러가고, 숭악(嵩岳)의 모든 봉우리가 겹겹이 쌓여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산 아래는 바 로 동주(東周)의 수도였던 낙양(洛陽)으로, 높고 커다란 성 곽과 웅장하고 위엄있는 궁궐과 유달리 아름다운 전원의 경 치와 화려한 누각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모색(暮色)이 창망 (蒼茫)한 지금, 고목이 빽빽히 줄지어 늘어서 있고, 수천 수 만의 인가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오르고 있어서 장관을 이루 고 있었다. 귀곡자의 선친은 글 읽기를 좋아하는 선비였다. 그런 까닭에 그 역시 어려서부터 시서를 가까이하여, 꺼내는 말마다 풍아 (風雅)한 맛을 지니고 있었다. 귀곡자는 이 장관을 보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읊었다. [낙양을 허리띠 삼고, 숭산을 옷깃 삼고, 굽이치는 황하를 베개 삼아 눕네. 고원(高原)은 빽빽한 산림으로 울창하니, 정말 주나라 황제의 수도로 손색이 없구나.] 노자 이이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어째서 갑자기 감상에 젖어 있느냐?] 귀곡자가 탄식하며 쓴 웃음을 짓고 말했다. [저는 주(周)나라 왕조의 수도였던 낙양성 출신입니다. 안타 깝게도 현재는 그 곳이 망해가는 주나라 왕조의 마지막을 장 식하는 것처럼 허전하고 쓸쓸해 보여, 그것을 바라보는 제 가슴이 아파서 그랬습니다.] [오오! 어린 나이에 천하의 안위를 근심하다니, 대견한지 고...] 노자 이이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이 기회에 천기(天機)를 알 려 주고자 했다. [주나라 황실은 천하를 다스렸는데, 지금은 나라가 무너져 뿔뿔이 흩어지고, 열국이 서로 다투어, 천하에 대란(大亂)이 일어나게 되었다. 큰 나라가 이토록 어지러워지는데 하물며 너 하나의 고향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주나라 왕


실의 쇠퇴 역시 대지 잠룡의 작용, 곧 풍수(風水)의 영향이 라고 할 수 있느니라.] 귀곡자는 공손히 입을 열었다. [삼가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곤륜산(崑崙山)은 천하 모든 산맥의 근원이며 뿌리가 된다. 곤륜산맥이 크게 세 갈래로 뻗어나가 천하의 산세를 이루는 데, 그 세 갈래의 큰 산맥을 간룡(幹龍)이라고 한다. 간룡은 북룡(北龍), 중룡(中龍), 남룡(南龍)으로 나뉘어진다. 낙양 성은 바로 중룡 가운데 위치해 있는 제왕의 도읍지, 곧 제도 (帝都)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낙양은 천하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지만 지켜주는 큰 산이 주변에 없어서 오로지 인 의와 덕으로만 통치할 수 있으며 제후들의 조공만 받을 수 있을 뿐, 위엄은 갖추기 힘든 땅이란다. 그렇기에 덕을 잃으 면 의지할 힘이 부족하므로 자연히 쇠퇴하게 되는 것이란다. 땅은 하늘의 이치를 본받은 것으로, 하늘의 별자리가 모여 이룬 성좌(星座) 가운데서도 으뜸이 바로 북극성(北極星)이 자리잡고 있는 자미원(紫微垣)이 되는 것이다. 자미원 다음 가는 성좌는 태미원(太微垣)이고, 그 다음의 성좌가 천시원 (天市垣)이 되는 것이다. 각각의 성좌마다 제왕의 별자리가 있고 제왕의 별이 없으면 성좌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좌의 영향에 의하여 형성된 도음지 가운데 도 제대로 된 제왕의 곳이 있고, 그렇지 못한 곳이 있는 것 이다. 낙양은 주나라의 도성이긴 하나 자미원의 정기를 이어 받은 자미원국(紫微垣局)의 도성이 되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따라서 천하를 통치할만한 지리적 형세를 갖추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주나라의 쇠퇴가 어찌 우연이겠느냐? 더 자 세한 것은 심룡신공을 다 익힌 후에 다시 설명해주겠다.] 귀곡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단순히 땅의 형세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알아야 하겠군요. 낙양성에 도읍을 잘못 정했기 때문에 주나라 왕실이 쇠퇴하고 열국이 서로 다투는 대혼란 이 일어났군요. 무고한 백성들은 고통을 당하고, 집에는 성 한 벽돌 한 장 남아 있지 않고, 길엔 굶어 죽은 사람의 시체 로 가득하고, 승냥이 같은 무리가 이빨을 갈며 백성들의 피 를 빨아 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정말 그 참혹함 이란 말로 형용하기 힘들군요.] 노자 이이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너는 보면 볼수록 기특하구나. 나이도 어린데 이미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고 있고, 또 세상 사람을 구하려는 포부도 가 지고 있구나. 네 근기(根基)가 이토록 선량하니 대지 잠룡을 찾아내는 시조로서 손색이 없다.] [네, 할아버지께서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노자 이이가 흔쾌히 말했다. [물론이다! 네가 이 노자를 따라 어떤 곳에 가서 자세히 생 각해 본다면, 모든 이치를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노자 이이는 말하면서 귀곡자의 어깨를 툭 쳤다. 귀곡자는 순간 한 줄기 엄청난 경력(勁力)이 자신의 몸을 하 늘 높이 솟구치게 하여 어떤 곳으로 날려 보내는 것을 느꼈 다. 질풍처럼 빨리 던져지는 순간에도 귀곡자는 빠르게 주변을 살펴 보았다. 자기는 지금 어떤 암벽 속의 오래 된 동굴로 보내지는 중이었는데, 그 앞을 스치는 순간 동굴 입구에 옛 전서(篆書)로 반고반룡고동(盤古盤龍古洞)이라는 여섯 글자 가 쓰여져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돌연 귀곡자의 눈 앞이 깜깜해졌다. 그는 자신이 동굴 안으 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를 이 곳까지 날려보낸 그 무형의 경력이 갑자기 약해지면서, 귀곡자를 조용히 땅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눈을 들어 사방을 살펴 보았으나, 주 변이 칠흙처럼 깜깜하고 그저 휘휘 부는 바람 소리만 기이하 게 들려올 뿐이었다. 마치 태고적의 절곡(絶谷)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귀곡자는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어 천문, 지리, 제자백가 의 학설을 모두 머리에 꿰고 있을 정도로 시서(詩書)에 아주 정통한 편이었다. 그는 이 때 갑자기 태초에 하늘과 땅을 나누었다는 반(盤古) 와 태고 시대에 존재했다고 전설로 내려오는 거대한 용이 생 각나, 마음속으로 놀라 중얼거렸다. [이 동굴의 이름이 반고 반룡고동이니 정말로 태고적의, 천 지가 하나로 뭉쳐서 형성된 그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그 거 대한 반룡이라는 괴물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귀곡자는 심성과 언행이 단정했지만, 지금은 자꾸 생각이 어 지러워졌다. 이 때, 눈 앞에 갑자기 전광(電光)이 번쩍하더 니 주위의 사물이 즉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귀곡자는 자기가 망망한 허공에 떠 있다는 것과, 먼 허공에 거대한 계란 모양의 물건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물건은 흑회색인데, 허공 도로 돌고 있었다. 귀곡자는 놀랍기도 하고 다.

속에서 빙글빙글 계속 빠른 속

기이한 생각도 들어 속으로 생각했

(이 계란 모양의 거대한 물건은 마치 건곤(乾坤)이 혼돈되어 있는 것처럼 이 망망한 공중 속을 빙빙 돌며 날고 있구나... 정말 반고가 천지를 나누기 전의 모습과 흡사하구나. 눈 깜 짝할 사이에 일만 팔천번 정도를 도는 것 같은데 여전히 계 속 돌고 있군... 만약 사람이 건곤이 혼돈되어 있는 가운데 있고, 사방이 칠흑처럼 깜깜하다면 분명 답답해서 미치고 말 테지... 그런데 이 혼돈된 건곤을 깨뜨렷다는 반고는 얼마나 위대한 신이란 말인가?) 귀곡자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갑자기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혼돈되어 있던 건곤이 갑자기 찢어지면서 그 속에서 엄청나 게 거대한 용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앗! 저것은 바로 혼돈의 천지 속에서 살았다는 반룡이 아닌 가?] 그 용은 건곤 속에 장엄한 기세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이 반룡은 처음에는 몸을 웅크리고 꼼짝도 않고 있어서 마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용이 벌떡 머리를 들어 올리며 혼백을 놀라 게 할 정도의 엄청난 울음 소리를 내었고, 혼돈되어 있던 건 곤 역시 한바탕 진동하며 흔들렸다. 용의 울음소리가 들린 후, 반룡은 갑자기 하늘을 향해 치솟 아 올랐다. 등에 지고 있던 가벼우면서도 깨끗한 물체가 유 유히 올라가 점차 우주의 허공에 도달하더니 건(乾)을 이루 었고 발에 달려있던 무거우면서도 탁한 물건은 점차 아래로 하강하더니 곤(坤)으로 변했다.


반룡은 그렇게 건의 하늘을 지고 곤의 땅을 밟은 형상으로 고개를 들어 한 번 길게 울었는데, 그 소리는 사람의 혼백을 놀라게 할 정도로 기세가 드높고 충만하였다. 귀곡자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 모습을 계 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무섭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그 반룡을 지켜 보면서 놀람과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반룡은 건곤 중간, 우주의 허공에 떠 있다가 갑자기 마치 장 대비라도 내리듯이 곧장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귀곡자는 저도 모르게 또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이렇게 붙어있던 무수한 사물들이 갈라지고 찢어지면 서 건곤이 둘로 나뉘고 사람이 그 안에 있게 된다면 기분이 아주 짜릿할 것 같구나.) 귀곡자가 그런 생각을 막 떠올리자, 반룡은 마치 그의 심경 과 일치하는 듯이 거대한 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오금편(烏金鞭)처럼 곧장 사방의 물건들을 휙 쓸어버 렸다. 한바탕 금속이 찢어지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반룡의 주변에 있던 것들을 깨끗이 쓸어내버렸다. 이 때 건의 하늘(乾宇)이 갑자기 용의 등에서 더욱 치솟아 올라, 눈 깜짝할 새에 까마득한 하늘 끝에 도달하였다. 이렇 게 하여 건의 하늘과 곤의 땅(坤土)이 완전히 깨끗하게 나뉘 게 되었다. 건곤이 분리되자 천지가 그에 따라 생성되기 시작했다. 위으 로는 건이 있고, 아래로는 곤이 있으며, 아래에는 땅이 있 고, 위로는 하늘이 있게 되었다. 혼돈되었던 건곤속에서 나온 반룡은 천지를 개벽하는 엄청난 대업(大業)을 완수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순간에 만족할 만큼 멋지게 대업을 이루어낸 반 룡은 땅의 곤토(坤土)에 웅크리고 있었다. 귀곡자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곤토가 바로 반룡이고, 용이 바로 대지가 되었구나. 넓디 넓은 건과 곤에 이러한 비밀이 숨어 있을 줄이야!] 귀곡자가 한참 감탄하고 있을 때, 곤토에 웅크리고 있던 거


대한 용이 돌연 망망한 안개 속으로 몸을 솟구치더니 그 망 망한 안개 속에서 기이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반룡이 내뿜은 기운은 변하여 바람과 구름이 되었고, 울음 소리는 변하여 하늘을 진동하는 천둥 번개가 되었으며, 용의 왼쪽 눈은 오른쪽으로 날아가 태양이 되었고, 오른쪽 눈은 서쪽으로 날아가 달이 되어, 이로써 천상(天象)이 움직이게 되었다. 풍운(風雲)은 기이하게 변하고, 천둥 번개는 비를 내리게 하였으며, 태양과 달이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반룡의 네 다리는 곤토의 사극(四極)이 되었고, 몸은 변하여 높고 큰 산맥이 되었으며, 혈맥은 변하여 망망한 강과 호수 와 사해(四海)를 이루었다. 또 힘줄과 근육은 길이 되었으 며, 피부는 변하여 전토(田土)가 되었고, 껍질은 변하여 꽃 과 풀과 나무가 되었고, 골격은 변하여 번쩍이는 금속, 돌, 진주, 벽옥이 되니, 이로써 곤토의 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건과 곤이 변하여 천지가 되는 것을 바라보던 귀곡자는 너무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고 그 변하는 모습을 지켜 보려고 애 썼다. 그 변화의 형상, 그 변화의 과정은 이제 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귀곡자는 저도 모르게 손과 발을 흔들며 그 변화의 모습을 흉내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혼돈건곤(混沌乾坤)에서부터 시작하여 몸을 거대 한 알처럼 만들고 계속 빙글빙글 돌리다가, 이어서 다시 반 룡건곤(盤龍乾坤)으로 넘어가 몸을 용의 형상처럼 만들고 하 늘을 떠받치고 땅 위에 우뚝 선 모습을 따라하였다. 이어서 다시 용파건곤(龍破乾坤)으로 넘어가 몸을 천지 만물 과 삼라 만상을 망라하는 여러가지 형태로 변화시켜 보았다. 모방하는 연습이 이쯤 되자, 귀곡자의 내공은 이미 온 세상 을 깜짝 놀라게 할만한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어, 마치 더 이 상 수련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로 이 때, 한창 연습에 몰두하던 귀곡자의 눈 앞에 갑자기 무수한 형상이 나타났다. 용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한 기인(奇人)이 음양(陰陽)이 변 화하는 이치를 여덟개의 부호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는 바 로 복희(伏羲)였다. 복희가 팔괘(八卦)를 만들고 문왕(文王) 이 주역(周易)을 만들어, 천지의 위치가 제 자리를 찾고, 번


개와 바람이 서로 융화하고, 물과 불이 교융(交融)하여 천지 가 기이한 모습으로 변화하며 윤회(輪廻)하기 시작했다. 귀곡자는 이 때 이미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고, 심령이 가장 총명한 절정에 이르러 있다가, 돌연 좀 더 광대하고 심오한 경지를 깨닫게 되어, 이제는 무궁무진하 게 살아 숨쉬며 천지와 융합되게 되었다! 그는 입으로 중얼중얼 무엇인가 읊으면서 몸을 급속히 변화 시키기 시작했다. [건곤이 윤회하여, 건(乾)이 한번 변하여 손(巽)이 되고, 두 번 변하여 간(艮)이 되고, 세번 변하여 곤(坤)이 되고, 곤이 한번 변하여 진(震)이 되고, 두번 변하여 태(兌)가 되고, 세 번 변하여 건(乾)이 된다. 이렇게 건곤이 운행하며 만물이 변화되고, 대지가 변화 발전하여 순환 왕복하면서 살아 끊임 없이 숨쉬니 무궁무진하게 영원히 계속되는구나.] 귀곡자는 이 경지에 대해 점점 깊이 추구하고 탐닉하게 되 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하늘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평 범한 사람이라면 백 년 동안 애써 수련해도 도달하지 못할 신통력의 절정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이것에 깊이 사로잡 혀, 스스로 억제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귀곡자는 그 스스로 더욱 심오한 경지를 창조해내지는 못했 지만, 그래도 배운 것만큼은 계속 열심히 연습하였다. 점차 그의 심맥(心脈)은 지나치게 힘을 많이 소모하게 되어, 완전 히 지쳐 쓰러질 정도가 되었다. 천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하 는 이러한 기재(奇才)가 이제는 요절할지도 모르는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때, 귀곡자는 어디에선가 아주 날카로운, 무엇인가 읊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구구부진(九九不盡)이요, 육육무궁(六六無窮)이라, 사람에 게는 비환이합(悲歡離合)이 있고, 달은 흐리고 맑고 차고 기 우는 것이 있으니, 세상 일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나, 어찌하 여 지나치게 그것에 빠져 그만 둘 줄을 모르는가?] 귀곡자는 수련에 깊이 빠져 있다가 이 말을 듣고는 저도 모 르게 깜짝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건곤은 넓고 넓어서 원래 영원토록 끝나지 않는 것 이니, 이렇게 애써 가며 그것에 대해 단번에 알려고 할 필요


가 없지. 하나씩 하나씩 배워 가면 그만일 거야.) 귀곡자는 이 때 이미 마음이 움직이면 몸도 따라 움직이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하자마자 몸이 저절로 움직여 번개처럼 쏜살같이 동 굴 입구에 도달하였다.

동굴 밖의 태양은 찬란히 빛나고, 넓디 넓은 들에는 백화가 만발해 있어서 색다른 경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노자 이이가 어느새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띄고 그의 앞 삼장 쯤 되는 곳에 서 있었다. 귀곡자는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제가... 제가 까?]

동굴에 들어간지 얼마나 되었습니

노자 이이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동굴에 들어 갔을 때는 기러기가 남쪽으로 떼지어 날 아가고 있었는데, 지금은 백화가 만발하였으니, 생각해 보거 라. 얼마나 지났을 것 같으냐?] 귀곡자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렇다면, 설마 제가 씀인가요?]

동굴에서 백팔십일 동안 있었다는 말

노자 이이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백팔십일 동안에 건곤이 만 팔천 년 동안 변화되는 모습을 보았으니, 네가 반룡고동 안에서 보낸 하루는 이 세상의 백 년과 맞먹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어떠냐, 만족스럽지 않 느냐? 즐겁지 않느냐?] 귀곡자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갑자기 깨닫는 바가 있어 말했다. [전 즐겁습니다!] 노자 이이가 말했다. [어째서 즐겁다고 하느냐?]


귀곡자가 말했다. [저 자신에 대해 알고 만족을 느끼게 되었으니 즐겁습니다!] 노자 이이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좋다! 좋아! 과연 가르칠 만한 인재로구나!] 노자 이이가 잠시 후 다시 숙연한 태도로 말했다. [너는 어떤 것을 알고 만족을 느끼게 되었느냐?] 귀곡자는 노자 이이의 얼굴이 돌연 숙연해지는 것을 보고는 그 역시 정색하고 대답하였다. [저는 건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제 몸이 그 변화를 모방하여 수련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매 천 년에 초식 한가지씩, 모두 열 여덟 가지 건곤이 변화하는 초식을 익혔습니다. 그러니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고, 제 자신에 대해 알고 만족스럽지 않겠습니까?] 노자 이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주 좋다. 너의 깨달음은 이미 범상한 경지를 넘어서 있구 나. 과연 천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기재로다. 너는 그 십 팔 초식을 이 노자에게 좀 보여줄 수 있겠느냐?] 귀곡자는 잠시 주저하며 생각했다. (그러다가 잘못해서 틀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할아버지 는 신통력이 엄청나니, 만약 잘못해서 조금 틀리기라도 하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귀곡자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이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있을 때, 갑자기 노자 이

[얘야, 걱정할 필요 없다. 너의 그 십팔 초식 중에 그저 한 가지 초식이라도 제대로 보여 줄 수가 있다면, 이 넓고 넓은 천지와 오호(五湖), 사해(四海)에서 너는 자유롭게 뜻을 펼 수 있을 것이다.] 귀곡자는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라 입을 딱 벌리고 말했다.


[할아버지, 당신은 어떻게 점 치듯이 사람 속마음을 그렇게 잘 알지요? 이것은 또 무슨 법술인가요? 어떻게 제 속마음의 비밀을 들여다 보시는지요?] 노자 이이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마음속 생각이란 겉으로 드러나게 마련이고, 운명이란 미간 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 노자의 문하에 들어 오기만 한다 면, 이러한 명리(命理)의 심오한 학문에 저절로 능통하게 될 것이다.] 귀곡자가 아주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할아버지, 그럼 명리의 학문까지도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 오.] 노자 이이가 말했다. [그걸 왜 배우려고 하느냐?] 귀곡자가 말했다. [세상의 인심이 너무 험악하여 착하디 착한 사람조차 남에게 잡아 먹힐 수 있는 세상이니, 그것을 배워 강호를 돌아다니 며 세상 사람들을 교화시킬 수 있다면, 즐거운 일이 아니겠 습니까?] 노자 이이가 그 말을 듣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그건 바로 이 노자 이이도 바라는 바이다. 그 모든 것은 너의 그 십팔 초식을 근거로 삼아야 하니, 자, 어서 과 감하게 그 초식들을 내게 보여 주거라!] 귀곡자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심이나 걱정 없이, 일심으 로 어떻게 십팔 초식을 펼칠 것인가만 생각하였다. 그가 한번 마음을 품자, 그 십팔 초식이 저절로 펼쳐지기 시 작하였다. 귀곡자는 우선 혼돈건곤(混沌乾坤)의 초식을 펼쳤다. 몸을 구부려 거대한 알처럼 만들고 공중으로 치솟아 허공에 매달 리자, 천지가 즉시 혼연일체 되어, 몸이 허공 속에서 빙글빙 글 돌기 시작했다. 그 다음으로 몸을 점점 아래로 떨어뜨리며 다시 반룡건곤(盤


龍乾坤)을 펼쳤다. 몸을 천지 속에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용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키자, 아주 위엄있는 기세가 강하게 뻗 어나와 마치 팽팽한 활 시위에 올려진 활처럼 되었다. 계속하여 이번에는 용파건곤(龍破乾坤)의 초식을 취하였다. 몸을 웅크린 용처럼 변화시켜 건곤을 깨뜨리며 그 속을 뚫고 나와, 한번에 하늘 끝까지 도달하는 듯하니, 그 기세는 사람 의 혼백을 놀래킬 정도였다. 다시 용화건곤(龍化乾坤)으로 변화시키니, 몸이 갖가지 기이한 형상으로 변하여 천지가 되 고 만물이 되어 삼라만상을 망라하여,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 을 불러 일으켜, 투지를 소멸시켜 싸우지도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킬 만한 기세였다. 노자 이이는 눈빛을 형형히 빛내며 주목하고 있다가, 이에 이르러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어린 소년이 이제 반룡고동에 들어가 제사식인 용화건곤의 이치를 깨달았으니, 정말 세상에 다시 없을 일이구나. 이 경 지에 도달하는 자라면 이 인간 세상에서는 적수가 될만한 자 가 아무도 없는데, 놀랍게도 이 아이는 정말로 이 최고의 경 지에 이르렀구나. 엇?) 계속하여 노자 이이는 더욱 깜짝 놀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왜냐하면, 노자 이이조차도 제사식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기 까지는 반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거기에서 다시 전진하기 가 상당히 어려웠던 것이다. 노자 이이는 비록 절정 고수라 해도 결국 범인의 경지를 초월하여 성스러운 경계로 들어가 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이 관문 을 넘는데 무려 십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간신히 이 용 화건곤이라는 천고에 깨기 어려운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때 귀곡자는 이 관문에서 잠시 멈칫하더니, 곧장 삼천 척(尺)에 가까운 거리의 허공을 가르며 몸을 급속히 기 이하게 변화시켜 용화건곤에서 건곤윤회(乾坤輪廻)로 변화하 더니, 계속 건변위손(乾變爲巽)로, 다시 이변위간(二變爲艮) 으로, 다시 삼변위곤(三變爲坤)으로 변화시켰다. 건곤이 이 미 윤회하는 경지에 도달하여 이미 범인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노자 이이는 너무나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귀곡 자가 돌연 몸을 다시 변화시키니 곤변위진(坤變爲震)에서 다 시 이변위태(二變爲兌)로, 삼변위건(三變爲乾)을 거쳐 건곤 이 마침내 두번째 윤회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가히 성계(聖界)로 접어드는 것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자 이이도 삼십년이나 걸려 서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2..... 귀곡자는 이때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 단숨에 모든 초식 을 펼쳤다. 건곤의 두번째 윤회 후 마침내 건곤운행(乾坤運 行)에 이르니, 만물이 변화하고 대지가 변화 발전하여 순환 왕복하면서 살아 끊임없이 숨쉬니 무궁무진하고 영원히 계속 되었다! 이에 이르자, 노자 이이가 수련하는 망산(邙山)의 상청궁(上 淸宮)의 만물이 모두 고요해지고 천지가 뿌옇게 되면서 아주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노자 이이는 저도 모르게 얼굴에 놀라는 빛을 띄고는 중얼거 렸다. (이 노자는 스스로 견식이 박식하고, 깨달음의 경지가 높아 천하에 상대가 될만한 자가 아무도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는 데, 뜻밖에도 재능이 뛰어나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너같은 어린 아이가 나의 후계자가 되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 을 정도로구나!) 이것은 노자 이이의 속마음으로, 그는 속으로만 생각했을 뿐,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귀곡자는 초식을 거두고 단정한 자세를 취하며 노자 이이에 게 말했다. [할아버지, 제가 깨달은 무공은 이러합니다. 제대로 연마한 것인지요? 이렇게 연마하면 강호를 돌아다닐 수 있겠습니 까?] 노자 이이가 그 말을 듣고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만 팔천 년간의 건곤의 변화가 모두 너의 십팔 식 속에 녹 아 있는데, 넌 지금 그걸 가지고 강호를 돌아다닐 수 있느냐 고 묻는 것이냐?] 귀곡자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반룡고동에서 변화해 나온 이 십팔 초식이 정말 그렇게 대 단한 것인가요? 할아버지, 이것의 이름은 무엇이지요?] 노자 이이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굳히며 숙연하게 말했다. [망산(邙山)의 반룡고동은 바로 화하씨(華夏氏)의 발원지(發 源地)요, 천하 만물의 시조이니라. 인연이 닿아 이 동굴에 들어갈 수 있었던 자가 몇 없었고, 그나마 이 동굴에 들어가 서 착란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만분의 일도 안 된다. 반 초 식이나마 깨우칠 수 있어도 이 천하를 깔보고 살 수도 있는 데, 네번째 초식인 용화건곤까지 익힐 수 있다는 것은 백 년 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기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고, 십 팔 초식을 전부 깨닫는 것은 천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기 인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네 생각에는 대단해 보이느냐, 대단해 보이지 않느냐? 그것의 이름은 그 초식의 원래 건곤이 기이하게 변하면서 생겨난 것인 고로, 나는 그 것을 건곤결(乾坤訣), 혹은 심룡결(尋龍訣)이라 부르기 때문 에 합쳐서 심룡건곤결(尋龍乾坤訣)이라 한다.] 귀곡자는 그제서야 노자 이이가 고심 참담하게 심혈을 기울 여 그를 양성하려고 애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귀곡자를 친아들처럼 대해 준 것이었다. 사실 친아버지 가 그에게 남겨 준 것이라고는 그를 괴롭게 만든 전답밖에 없었지만, 노자 이이가 그에게 전해 준 것은 천하무쌍의 절 학이었다. 귀곡자는 그 은혜를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노자 이이의 앞에 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제자가 스승님께 절을 올립니다!] 노자 이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매우 기뻤으나, 일부러 고개 를 외면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 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 내력도 모르면서 나를 스승으로 삼겠다고 절을 올리는 것이냐?] 귀곡자가 말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스스로 노자 이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 니까? 스승님의 이름을 알면 그것으로 족하지, 내력이나 신 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노자 이이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좋다! 너의 지금 그 말은 정말 이치에 맞는 말이구나. 하지 만 난 너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으니, 내가 어찌 너를 제자로 거둘 수 있겠느냐?] 귀곡자가 말했다. [전 귀곡자라고 합니다. 귀신 귀(鬼)자와 골짜기 곡(谷)자, 그리고 아들 자(子)자를 쓰지요. 이것은 스승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노자 이이가 말했다. [귀곡자라는 것은 다.]

알고 있다. 나는 본명을 묻고 있는 것이

[저의 본명은...] 노자 이이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됐다. 말할 필요 없다. 그냥 한번 해본 소리이니 신경쓰지 말거라. 좋다, 좋아. 귀곡의 자식이요, 잠룡을 찾는 시조라. 스승이 있으면 스승이 있게 마련이니, 이 노자가 한바탕 심 혈을 기울였던 것도 헛된 것은 아니구나. 좋다, 오늘부터 나 는 너를 정식으로 제자로 삼도록 하겠다.] 귀곡자가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제자 귀곡자가 스승님께 절을 올립니다!] 노자 이이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좋다.] 그는 손을 뻗어 귀곡자를 안아 일으키면서 기쁜 듯이 껄껄 웃었다. 귀곡자는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제자가 된 몸으로 스승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제자에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노자 이이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나의 내력에 대해서는 이 세상의 어 느 누구도 감히 묻지 못하는데, 네가 그것을 묻는구나. 좋 다. 노자가 너 한 사람에게만 특별히 말해주마!] 귀곡자가 얼른 말했다. [제자가 공손히 경청하겠습니다.] 노자 이이는 미소를 띄더니 갑자기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보 며 중얼거렸다. [북명(北冥)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으니 그 이름은 곤(鯤)이 라 한다. 곤의 크기는 수천 리에 이를 정도로 큰데,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새의 이름은 붕(鵬)이라 한다. 붕은 수천 리에 이를 정도로 커서 한 번 날아 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의 구름을 뒤덮을 정도이다. 구만 리 긴 하늘을 날아서 천지(天池)에 나래를 내리고 사는데...] 노자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추었다. 귀곡자는 뭔가 잘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스승님의 그 말씀에 무슨 깊은 뜻이 담겨 있는지요? 스스로 를 비유하신 것인가요?] 노자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네 녀석의 깨달음의 경지는 정말 천하에 비할만한 자가 없 는 것 같구나. 이 스승 노자인 나로 하여금 열등감을 느끼게 만드니 말이다. 너는 이미 깨달음을 얻었으니 앞으로의 비밀 은 그저 조금씩 깨닫다 보면 어느새 모두 깨닫는 날이 올 것 이다.] 귀곡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북명의 물고기가 변하여 곤붕(鯤鵬)이 되었는데 하늘을 떠 받치고 땅에 닿을 정도라 하니, 분명 천지의 정기가 모여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곤붕이 다시 수천 년이 지나면서 사람 이 되었다면 그 사람이 분명 스승님이실 것입니다. 그렇지 요?] 노자 이이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부지역지(不知亦知)요, 지역부지(知亦不知)로구나.]


귀곡자가 황급히 말했다. [스승님, 제자가 그 속에 담긴 비밀을 알겠습니다.] 노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무엇을 알겠다는 것이냐?] 귀곡자가 말했다. [만약 천지의 정(正)과 원기(元氣)의 정(精)을 타고 무궁한 곳을 떠돌며 노닐게 되면, 지인(至人)도 사라지고, 신인(神 人)의 공이 없어지고, 성인(聖人)의 이름도 사라져 모두 건 곤의 천지에 녹아들게 되는 것이지요.] 노자는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쳐들고 껄껄 웃었다. (이 아이의 수련은 이미 범인의 경지를 뛰어 넘어 어느새 성 스러운 경지에 도달해 있으니 조금만 잘 이끌어 준다면 심룡 의 대도를 깨우쳐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에 아주 기뻐하고 있었다. 노자는 이런 생각을 하 고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귀곡자에게 말했다. [제자야, 이 스승을 따라 다시 가 볼 곳이 있다.] 노자는 귀곡자를 산을 등지고 지어져 있는 한 묘궁(廟宮)으 로 데리고 갔다. 궁 안의 모든 곳은 신비한 안개로 뒤덮여 있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노자는 이곳이 바로 그가 수련하는 곳으로 망산의 상청궁이 며, 이미 3 천 년 동안이나 존재해 온 곳이라고 알려 주었다. 귀곡자는 상청궁에게 3 년간 머물렀다. 노자는 이 3 년 동안 귀곡자에게, 매일 심룡건곤결의 십팔 초식만 연마하고 다른 것은 절대로 생각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첫해에는 심룡건곤결의 첫번째 초식에서 여섯번째 초식을 연 마했고, 이듬해에는 심룡건곤결의 일곱번째 초식에서 열두번 째 초식을 연마했고, 3 년째 되는 해에는 심룡건곤결의 열 세 번째 초식에서 열 여덟번째 초식을 연마했다. 심룡건곤결의 각 초식의 이름은 기괴하고 이상한 것이었다. 첫해에 연마한 것은 혼돈건곤(混沌乾坤), 반룡건곤(盤龍乾


坤), 용파건곤(龍破乾坤), 용화건곤(龍化乾坤), 건곤윤회(乾 坤輪廻), 건변위손(乾變爲巽)이었다. 이듬해에 연마한 것은 이변위간(二變爲艮), 삼변위곤(三變爲 坤), 곤변위진(坤變爲震), 이변위태(二變爲兌), 삼변위건(三 變爲乾), 건곤운행(乾坤運行)이었다. 3 년째 되는 해에 연마한 것은 만물변화(萬物變化), 대지연연 (大地演衍), 순환왕반(循環往返), 생생불식(生生不息), 무궁 무진(無窮無盡), 영무지경(永無止境)이었다. 첫해가 가자 노자는 귀곡자에게 이렇게 한마디 하였다. [너는 이 여섯가지 초식을 의지하여 천하를 깔볼 수 있을 것 이다.] 이듬해에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미 건곤결의 열 두 초식의 요체를 익혔으니 이 세상 에 네 적수가 없을 것이다.] 세번째 해의 마지막 날, 귀곡자는 노자를 향해 절을 올리고 관례대로 노자의 말씀을 듣고자 했다. 노자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건곤의 십팔 초식을 네가 이미 완전히 수련했구나. 이 세상 에 너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너는 이 미 범인의 경지를 벗어나 성스러운 경지에 다달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자, 이제 넌 무엇을 더 배우고 싶으냐?] 귀곡자가 말했다. [십팔 초식의 이름은 전부 심룡건곤결이지요. 건곤결에 대해 서는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심룡이라는 이 두 글자에는 무 슨 뜻이 있나요?] 노자가 그 말을 듣고는 절로 기쁜 듯이 웃음을 띄며 중얼거 렸다. (이 녀석이 건곤결의 수련을 끝마쳤으니 이제 진일보할 시기 가 온 셈이구나.) 노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그의 의혹을 풀어줄 실마리를 알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혼돈건곤, 반룡건곤, 용파건곤이라 함은 눈 깜짝할 새에 용 이 건곤이 되니 건곤과 만물은 모두 반룡이 만들어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지 속에 반룡이 숨어 있으니 이것이 바 로 잠룡(潛龍)이다. 건곤은 모두 반룡에 의해 만들어져 세상 과 하나가 된 것이니, 한 나라, 한 군주는 말할 것도 없고, 한 성과 한 토지, 천하의 모든 중생 가운데 잠룡이 주재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 속의 길훙화복이나, 미래의 영욕 모두 그러하다. 소위 심룡이라는 것은 바로 천지 건곤 속에 숨어 있는 잠룡을 찾아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귀곡자가 물었다. [천지 건곤 속의 잠룡을 찾아내면 무슨 좋은 까?]

점이 있습니

노자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다 알면서 묻는구나.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뜻으로 알고 설명해 주겠다. 건곤과 천지는 모두 반룡이 만들어낸 것이니 건곤과 만물 가운데 잠룡이 된 반룡의 용기(龍氣)와 용맥(龍 脈)의 주재(主宰)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귀곡자는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 기운의 오묘한 이치나 한 나라의 국운 의 흥망 성쇠나, 한 사람, 한 사물의 영욕 화복 모두가 잠룡 이 된 반룡의 용기와 용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요?] 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바로 그렇지!] 귀곡자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잠룡의 용맥, 용기가 과연 그렇게 값진 것이라면 어떻게 찾 아내야 하는지요?] 노자가 말했다. [소위 잠룡의 용맥과 용기는 바로 반룡이 건곤이 되는 요체 이기도 하다. 용이 변화하여 만들어내는 것은 아주 활발하고 씩씩하고 힘차게 활동하며 예측할 수 없게 변화한다. 갑자기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며, 갑자기 커졌다가 갑자기 사라


지고, 갑자기 심연(深淵) 속에 숨었다가는 또 갑자기 구천으 로 날아오르고, 갑자기 머리가 보이고 꼬리는 보이지 않다 가, 갑자기 구름을 불러 비를 뿌리게 되는 것이다. 풍수(風 水)의 모든 것이 바로 그러하다. 그런 까닭에 숨어 있는 용 (龍), 즉 잠룡을 찾아내는 기술은 바로 풍수학의 요체가 되 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풍수를 잘 아는 사람이면 잠룡의 맥 을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은 것이지.] 귀곡자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풍수학을 잘 알 수 있는지요?] 노자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반룡이 건곤이 된 후에 복희가 팔괘를 만들고, 문왕이 주역 을 변화시켰다. 팔괘란 건, 곤, 진, 태, 간, 손 감, 리의 여 덟 가지를 말하는 것이고, 주역이라는 것은 하늘을 보고 천 문(天文)을 알고, 고개를 숙여 지리(地理)를 알아 그 속의 만물에 통달하고 우주의 비밀을 탐색하며 인생의 오묘한 범 칙을 탐구하는 것이다. 팔괘에 정통하게 되면, 주역이나 풍 수학은 저절로 일목요연하게 알게 된다. 건곤결은 천지와 건 곤, 만물의 요결을 모두 포괄하고 있고, 심지어는 팔괘와 주 역까지도 모두 그 속에 들어있다. 내 말이 이해가 되느냐?] 귀곡자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닫고 말했다. [맞습니다. 스승님, 건곤결 속에는 건변위손, 이변위간, 삼 변위곤, 곤변위진, 이변위태, 삼변위건의 6 가지 초식이 있지 않습니까? 복희가 만들어낸 팔괘는 이미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요?] 노자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렇다. 주역의 오묘한 이치 중에는 잠룡물용(潛龍勿龍), 견룡재전(見龍在田), 항룡유회(亢龍有悔), 군룡무수(群龍無 首), 용전어야(龍戰於野)의 여섯 구절이 있는데, 이 모두 반 룡의 오묘한 비밀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귀곡자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말했다. [그렇다면 심룡건곤결은 팔괘를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역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군요. 건곤결의 십팔 초식을 완 전히 깨우친다면 팔괘와 주역에 정통하게 되는 것이니, 심룡 의 풍수학도 저절로 깨우칠 수 있겠습니다!]


노자가 저도 모르게 기뻐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과연 너는 잠룡을 찾아내고 발맥(發脈)하게 만드는 발맥 시조에 손색이 없구나. 깨달음의 경지가 이토록 높고, 이미 심룡건곤결의 중심되는 요결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귀곡자가 말했다. [잠룡의 발맥 시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자세히 설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자가 어찌하여 잠룡의 발맥 시조가 될 수 있는지요?] 노자의 얼굴빛이 갑자기 엄숙하게 변하더니 숙연히 말했다. [천기가 변할 조짐이 보인다. 천하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 날 것이다. 악한 것이 상서로운 것이 되고, 흉한 것이 길한 것이 되고, 화가 복이 되는 것은, 바로 네가 어떻게 심룡건 곤결을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위로는 천기에 순응하고 아 래로는 민심을 따라야 한다. 건곤 잠룡은 모두 숨어 있으니 네가 그것을 찾아내 어떻게 발맥하게 하느냐에 천하의 운명 이 달려 있다. 이렇게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위대한 인 물이 바로 너이니, 네가 바로 잠룡의 발맥 시조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귀곡자는 그 말을 듣고 노자가 그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산시킬 마음을 먹고

그는 이미 망산의 상청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자연 (無爲自然)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하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황급히 말했다. [바깥 세상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는 추악한 세상입니다. 제자는 그 세상에 발을 들여 놓고 싶지 않습니다. 가급적이 면 이 산에서 살면서 스승님을 모시고 살게 해주십시오.] 노자는 그 말을 듣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얘야, 어찌 그리 바보같은 소리를 하느냐? 스승 노자가 널 이 망산 상천궁으로 데리고 온 것은 오로지 네가 잠룡의 발 맥 시조가 될 운을 타고 났기 때문이었다. 너 또한 천하를 위하는 큰 뜻을 품고 나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었더냐? 네가 산에 머무른다면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느냐? 어찌하여 네 가 이 스승 노자의 기대를 저버리려고 하느냐?]


귀곡자가 말했다. [네, 알겟습니다. 저는 그저 영원히 스승님을 모시고 싶었을 뿐입니다!] 노자가 숙연히 말했다. [스승 노자의 근본은 모두 무위라는 이 두 글자에 달려 있으 니 어찌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기대하겠느냐? 얘야, 스승 노 자의 말을 듣고 어서 하산하여라. 네가 잠룡의 발맥 시조임 을 잊지 말고, 억조 창생을 위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바로 이 스승 노자에게 보답하는 길임을 명심하여라.] 귀곡자는 그 말을 듣고 노자의 뜻이 이미 굳어졌으며, 그 결 정은 다시 번복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제자가 스승 노자님께 작별의 절을 올리겠습 니다. 언제 스승님을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노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앞 길에는 숱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늘에서 네게 커다란 임무를 맡길 것이니, 반드시 전력을 다해 힘써야 할 것이다. 분명히 기억해 두도록 하여라. 단단하면 훼손되고 날카로우면 부러지기 마련이다. 항상 사물의 이치를 잘 살펴 가장 옳은 길을 행하도록 하여라. 모든 것은 전부 무위라는 이 두 글자에 달려 있다. 알겠느냐?] 귀곡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자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각골명심하겠습니다!] 노자는 귀곡자와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그 역시 마음이 허전 했다. [네가 숱한 고생을 겪고 대성하는 날이 바로 이 스승 노자와 만나는 날이 될 것이다. 스승는 네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 구나. 너는 빈 손으로 이 곳에 왔으니, 빈 손으로 돌아가도 록 하여라!] 귀곡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스승님, 이 제자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좋을까


요?] 노자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천지가 제 아무리 넓고 넓다 한들 너의 능력으로 어디를 못 가겠느냐?] 노자는 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번쩍 하면서 어디론가 사 라져 버리고 말았다. 귀곡자는 무릎을 꿇고 노자가 앉았던 곳을 향해 세 번 절을 올리고 몸을 날려 상청궁을 떠났다. 그는 그저 망연한 마음 을 안고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귀곡자는 험한 산길을 따라 망산을 반쯤 내려왔다. 처음에는 터벅터벅 걸어 내려왔으나, 한 반시간 쯤 걸었을 때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벌써 날이 저물고 있는데 만약 하산을 서두르지 않는다면 잠잘 곳도 찾지 못하고 이 험한 산 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겠 구나.) 그는 이런 생각을 들자 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마음이 급 해지자 뜻을 따라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자 진기 (眞氣)가 발동되어 갑자기 몸이 땅에서 솟구쳐 올라 마치 대 붕(大鵬)이 날개를 편 것처럼 험준하고 가파른 산길을 날듯 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산길이 끝날 무렵, 다시 몸을 날려 순식간에 산 아래에 도달 했다. 귀곡자는 그제서야 그가 지니고 있는 심룡건곤결의 기 학(奇學)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었다. 그는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너무 기뻐서 큰 소리로 웃었다. 귀곡자는 잠시 웃고 나자 허기를 느꼈다. 귀곡자는 그제서야 3 년 동안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 게 되었다. 귀곡자가 망산 상청궁에서 살면서 노자에게서 3 년 동안 심룡 신공을 배우는 동안 상청궁 밖에 널려 있는 아주 조그맣고 이상하게 생긴 과일들을 먹고 허기를 면했던 것이다. 이제 그러한 과일도 없으니,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사람이 사는 곳에 가야 했고, 밥을 먹기 위해서는 은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귀곡자는 망산에 오를 때도 빈털털이였고, 망산에서


내려온 지금도 빈털털이였다. 그는 은자는 커녕 은냥 쪼가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은냥 이 없으면 밥을 먹을 수가 없고, 밥을 먹지 못하면 언젠가는 굶어 죽고 말 것이다. 죽게 된다면 스승 노자의 소망, 강호 를 돌아 다니며 의협(義俠)을 행하는 것과, 천기를 보고 사 람들을 인도하는 것과, 잠룡을 찾아 잠룡의 발맥 시조가 되 는 것 등을 어떻게 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귀곡자는 비로소 밥 먹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기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때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졌고, 사방은 적막했다. 귀곡자 는 어떻게 하든 우선 배를 채우고, 그 다음에 은냥을 구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었다. 귀곡자의 마음이 움직이자 또 다시 진기(眞氣)가 요동하여 그의 몸이 화살처럼 멀리 불빛이 보이는 곳까지 쏜살같이 날 아갔다. 귀곡자는 눈 깜짝할 새에 그 멀리 불빛이 보이던 곳에 도착 하였다. 알고 보니 그것은 인가의 불빛이 아니라, 3 백 장 정 도 되는 산봉오리에서 훨훨 치솟고 있는 불길이었다. 밤중에 훨훨 타오르는 불빛은 정말 장관이었다. 귀곡자는 그것을 보고는 기이한 생각이 들어 중얼거렸다. (산봉오리 꼭대기에 사람의 종적은 전혀 없는데, 어떻게 사 람이 지폈음이 분명한 불길이 훨훨 타오르고 있는 것일까?) 그는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것을 보자 배고 픈 것조차 다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의 마음이 막 움직이자, 몸이 저절로 그 산 꼭대기를 향해 날아가게 되었다. 보통의 소년이라면 그 산봉오리를 오르는 데 반나절은 걸리겠지만, 귀곡자는 건곤결의 세번째 초식인 용파건곤을 펼치자 몸이 가벼워져서 잠시 후에 나는 듯이 산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비록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으나 귀곡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백주 대낮처럼 똑똑히 보였다. 그것은 그의 내공(內功)이 이 미 몇백 년을 수련한 고수와 맞먹을 정도가 되어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귀곡자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두루 살펴 보았다. 대나무 숲이 울창하고, 샘물 옆에는 높은 폭포가 흐르고 있어서 한 여름의 날씨인데도 마치 가을처럼 서늘하여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귀곡자는 돌연 그가 예전에 배웠던 한 수의 시가 생각났다. [높디 높은 누각이 산 봉오리에 솟아 있는데 반은 안개에 덮 여 있고 반은 나무에 가려져 있네. 길 옆에는 샘물이 흐르고 높은 폭포가 쏟아지고 있는데, 사방의 산색(山色)은 깊은 대나무숲 그늘에 잠겨 있구나.] 그는 이 시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혹시 여기가 바로 그 시에서 읊은 곳이 아닐까? 만약 그렇 다면, 이 곳은 분명 오나라의 덕청군(德淸郡) 지역이 틀림없 을 것이다.) 귀곡자는 어려서부터 천문과 지리에 대한 글을 많이 읽은 데 다가, 노자를 쫓아 건곤결을 수련한 후에 생각이 더욱 많이 진보되었고 머리가 아주 활발하게 움직여서 한가지 이치를 알면 백가지 이치를 깨닫게 되어 천하의 대세를 마치 손바닥 에 올려 놓은 듯 훤히 알 수가 있었다. 강호를 돌아다닌 경 험도 이러한 천문 지리학의 견문을 넓혀주었다. 귀곡자는 잠시 그 곳에 멈춰 서 있다가 다시 막 그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남녀가 대화하는 소리 가 훨훨 타오르는 불길 저편에서 들려 왔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이미 삼 개월이나 화로에 불을 지폈는데도 어째서 쇠 가 전혀 녹지 않지요? 오왕(吳王)이 정한 기한이 얼마 안 남 았는데, 보검을 아직 만들지 못했으니, 이제 간씨(干氏) 집 안은 끝장이 났군요.] 그러자 남자의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생각해 보니, 나의 은사께서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소. 만약 쇠가 녹지 않는 경우 사람이 그 화로 속으 로 뛰어들면 된다는...] 그 여자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상공(相公), 당신 뭘 하려는 거에요? 당신이 화로에 뛰어들 면 당신의 생명은 어쩌구요?] 그 남자가 탄식하며 말했다. [쇠가 녹지 않을 때는 사람을 화로에 집어 넣으면 된다고 하


지 않소? 내가 만약 화로에 들어가 보검이 주조되기만 한다 면, 비록 나는 죽어도 당신 두 모자의 생명은 보존할 수 있 소. 내가 화로에 들어가지 않고 보검이 완성되지 못하면, 오 왕이 정한 그 날에 우리 간씨 가족은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하 게 될 것이오! 부인, 내가 화로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누구를 화로에 집어 넣는단 말이오?] 그 여자가 울면서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정말 화로에 들어가야 보검이 주조된다면, 소첩이 들어가게 해 주세요! 상공께서는 생명을 보존하셔야 해요!] 그 남자가 결연히 말했다. [그건 절대로 안 되오!] 그 여자가 말했다. [어째서 절대로 안 된다는 건가요?] 그 남자가 말했다. [부인은 이미 뱃속에 간씨 집안의 핏줄을 잉태하고 있지 않 소. 만약 부인이 죽는다면, 우리 간씨 집안은 대를 잇지 못 하게 될 것이오... 부인은 더 이상 날 막지 마시오. 내가 화 로에 들어간 후에 당신은 절대로 슬퍼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즉시 화로에 불을 더 지피도록 하시오. 검이 완성되기만 한 다면 당신 두 모자의 생명은 보존할 수 있을 것이오.] 그 여자는 그 말을 듣고는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목 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이를 꽉 악물고는 몸을 돌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귀곡자는 이 때 그 화로에서 한 5 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와 있었는데, 그 남자는 정말 화로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 아 닌가? 귀곡자는 속으로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사람의 육신이 저렇게 활활 타오르는 화로 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살겠는가? 아마 뼈조차 전부 타버리고 말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이 움직 이자 심룡건곤결의 제 4 식인 용화건곤이 즉각 발동되어 그의


몸이 마치 구천에서 내려오는 비룡(飛龍)처럼 순식간에 5 십 여 장을 단번에 가로질러, 화로 곁의 그 남자를 막아서며 손 을 휘둘렀다. 그 남자는 영문도 모르고 3 장 정도 밀려 날아갔다가 어느새 그 여자의 곁까지 다시 반 장 정도를 비틀거리며 뒷걸음 질 쳤다. 그는 기우뚱거리며 억지로 중심을 잡으려고 했다. 귀곡자는 단숨에 그 남녀의 앞으로 다가와 크게 웃으며 말 했다. [형님은 좋은 사람 같은데 어째서 저 활활 타오르는 화로 속 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겁니까? 뼈까지 전부 타버릴지도 모릅 니다!] 그 남자는 귀곡자를 노려보았다. 그는 귀곡자의 내공에 의해 영문도 모르고 뒤로 밀려났으나 조금도 감격하지 않고 도리 어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이러느냐? 네가 내 생명을 구하면 이 두 모 자의 생명이 끝나고 만단 말이다!] 귀곡자가 멍해져서 물었다. [이 부인은 사지가 멀쩡한데 왜 죽게 된다는 겁니까?] 그 남자가 한숨을 쉬며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이 곳이 오나라 영토라는 것은 알고 있느냐?] 귀곡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압니다. 여기는 확실히 오나라의 땅이죠. 그런데 그것이 뭐 가 어떻다는 것입니까? 천지는 만물을 만들고, 만물은 모두 살아 숨쉬며 번성할 권리를 가지는 법인데 누가 감히 사람의 생명을 없애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그 남자가 말했다. [천하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가? 왕이 신하가 죽기를 원하면 신하는 죽지 않을 수 없고, 신하가 백성을 죽이려고 하면 백성은 죽지 않을 도리가 없 다. 우리 간씨 집안을 없애려고 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오왕 합려(闔閭)이니, 어떻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귀곡자가 말했다. [그 오왕 합려는 어째서 당신들 간씨 집안 사람들을 죽이려 고 하는지요?] 그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세상에 신검 시조(神劍始祖)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귀곡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래는 몰랐었지만, 스승 노자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나라에 검을 주조하는 기술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만든 보검 앞에서는 천하의 어떤 검이라도 빛이 안 날 정도라구요. 형님은 그 신검 시조와 무슨 연관이 있습 니까?] 이 때 그 여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의 얼굴에 정기(正氣)가 가득하여 해로운 짓을 하지 않을 사람 같으니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말씀드 리겠어요. 제 남편의 성은 간(干), 이름은 장(將)인데, 그 신검 시조의 수제자였지요. 그 때문에 이렇게 목숨을 위협 당하는 일을 겪게 된 것이구요!] 그 남자가 장탄식하며 말했다.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말하겠네. 나는 바로 그 신검 시조 의 수제자로 성은 간이고 이름은 장(將)이라 하네. 이 여자 는 내 아내로, 성은 막(莫)이고 이름은 야(邪)라고 하지. 우 리 두 부부는 검을 주조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네. 비 록 가난하게 하루 하루를 보냈지만, 우리가 주조하는 검은 모두 평범하지 않아서 천하에서 우리의 명성을 익히 알게 되 었기 때문에 그것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네. 불행히 우리 부 부 두 사람이 만든 검이 오왕의 궁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오왕 합려가 직접 그 검을 조사해 보고는 이음새가 전혀 없 고 다른 검에 비해 월등히 예리한 것을 알고 명령을 내려서 우리 부부를 오왕의 궁궐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네. 아아, 화 근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었지.] 귀곡자가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그 오왕 합려는 듣자하니 무인(武人)이라 하던데, 형님께서 검을 만드는 솜씨가 아주 신기하여 오나라의 백성으로 맞아 들여 살게 한 것인가 본데, 그것이 어째서 화근이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 남자, 간장(干將)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왕 합려는 무인이지만, 성격이 아주 제멋대로라네. 천하 만물을 모두 자기 멋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이네. 그는 우리 부부가 만든 검을 한번 보고는 영원히 자기 혼자만 소유하려 고 마음 먹고는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과연 너희 두 부부의 보검 만드는 솜씨는 천하 일품이다. 너희 두 사람은 오나라의 백성이 되어 오직 오나라를 위해서 만 검을 만들도록 해라. 과인이 명하노니 너희 두 부부는 반 년 내에 쇠를 진흙처럼 깍을 수 있고 훅 불면 머리카락을 자 를 수 있고 단 칼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보검을 만들도록 해라. 만약 만들지 못하면 과인이 너희 간씨 문중의 모든 사 람의 목을 베겠다.> 이렇게 말했다네! 이제 그 약속한 기한이 가까웠으니, 만약 그러한 보검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간씨 문중의 생명을 어떻 게 건질 수 있겠나? 자네가 한번 말해 보게나. 이 간장이 저 화로 속에 들어가, 나 한 사람의 몸으로 가족 전체의 생명을 구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말이네!] 간장의 아내인 막야(莫邪)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남편께서는 소첩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자기의 몸 을 바쳐서 검을 만들려는 결심을 더욱 굳히신 거예요! 아아, 남편은 일생 동안 검을 만드는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셨었 는데, 뜻밖에도 그가 결국 그 검을 만드는 일로 인해 죽게 되었으니...] 막야는 말을 할수록 슬퍼져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귀곡자는 여자가 우는 소리를 가장 무서워했다. 왜냐하면 그 가 어렸을 적에 숙모의 울음소리에 놀란 적이 있었기 때문이 었다. 숙모는 채찍으로 그를 때릴 때마다 항상 울면서 큰 소 리로 외치곤 했었다. [맞아라! 맞아라! 이것은 네 숙부가 잘 되길 바라기에 숙모 가 모진 마음을 먹고 너를 때리는 것이다!] 귀곡자는 숙모가 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반항하고픈 생각


이 꺽이곤 했고, 결국 그 소리를 참지 못해서 도망쳐 나왔던 것이다. 이 때 다시 막야의 울음 소리를 듣자 즉시 마음이 어지러워 져서 연달아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울지 마십시오! 울지 마세요! 아주머니, 형수님, 울지 마세 요! 우시면 이 귀곡자는 어쩔줄 모르는 바보가 됩니다.]

3.... 간장은 그가 스스로 귀곡자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방금 자기를 구한 사람이 엄청난 신공을 펼쳤던 것을 생각하자 이 상한 생각이 들어 말했다. [소협(少俠)은 알고보니 성이 귀(鬼)씨였군. 이름이 아주 희 한한데? 소협의 사부님은 누구신가?] 귀곡자는 막야의 울음 소리로 정신이 산란해져서 아무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말해주었다. [사부님 말인가요? 그는 노자라는 분입니다.] 간장이 더욱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의 사부님은 바로 자네의 아버님이셨군. 집안 에 내려오는 절학(絶學)을 익혔다니 대단한걸?] 귀곡자는 의아해서 물어보았다. [간 형님, 왜 제 사부님이 나의 아버님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요?] 간장이 말했다. [친아버지를 세상에서는 노자 또는 노친네라고 부르지 않나? 방금 자네의 사부가 노자라고 했으니 친아버지가 아니면 누 구란 말인가?] 귀곡자는 실소를 금치 못하며 말했다. [이 노자는 그 노자가 아닙니다. 그 노자는 그저 일개 문사


(文士)에 불과하고 일찍이 세상을 뜨셨지요. 이 노자는 바로 백 세가 넘도록 장수하고 천지의 일을 꿰뚫어 보는 신선이십 니다. 그러니 내 사부님은 바로 이 노자가 아니고 누구겠습 니까?] 간장은 멍청해져서 중얼거렸다. [소협은 이 노자, 저 노자라고 하니, 도대체 누가 자네의 사 부인 노자란 말인가?] 막야가 이때 돌연 울음을 그쳤다. 그녀는 더 지혜롭고 총명한 구석이 있어서 순간 한 줄기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 희망으로 을 그치고 눈을 빛내더니 귀곡자를 똑바로

간장에 비해 훨씬 깨닫는 바가 있어 인해 그녀는 울음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 협사의 사부님은 혹시 세상에서 득도노조(得道老祖)라 고 칭해지는 노자 이이가 아니신가요?] 귀곡자가 웃으며 말했다. [저의 사부가 그 득도노조이신지는 모르지만, 사부님은 엄청 난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이름은 이이라고 하십니다.] 간장과 막야 부부는 그 다. 간장이 말했다.

말을 듣고 모두 깜짝 놀라는 눈치였

[자네가 말하는 노자란 바로 천지노조(天地老祖)이자 건곤노 조(乾坤老祖)인 그 분을 말하는 거였군! 그렇다면 소협은 바 로 그 노자의 제자란 말인가? 자네가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은 정말 경천동지(驚天動地)할만큼 엄청난 일이네!] 귀곡자가 웃으며 말했다. [뭐가 경천동지할만큼 엄청난 일이라는 것입니까? 제 이름은 귀곡자인데, 별로 대단한 인물은 아닙니다.] 막야는 귀곡자가 노자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는 마음속에 한 가닥 삶의 희망을 품게 되어 슬픔을 순간 잊어버리고 연신 귀곡자를 향해 물었다. [듣자하니 노자의 건곤기학(乾坤奇學)은 깜짝 놀랄 정도로 대단해서, 위로는 천기를 알 수 있고, 아래로는 지리를 꿰뚫 어 보고, 가운데로는 인간 세상의 일을 모두 살펴 볼 수 있 어서 세상의 길흉 화복을 모두 밝혀내신다던데, 소협(少俠)


께서 정말 노자의 제자라면 분명 그 학문에 대해서도 잘 알 고 계실테니, 청컨대 소협께서는 대인대의(大仁大義)하신 마 음으로 저희 부부의 명운(命運)을 살펴봐 주세요. 어떻게 하 면 길한 일이 생기고, 흉한 것을 피할 수 있는지 그 묘법을 알려주시면 저희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은혜를 잊지 않 겠습니다.] 막야는 말을 하면서 다시 슬픔이 밀려와 또 다시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귀곡자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깜짝 놀랐다. (앗! 이 아주머니가 다시 울려고 한다!) 그는 시력이 아주 좋아서 막야의 표정이 변화하는 것을 놓치 지 않았다. 여자가 우는 것을 가장 무서워하는 그는 깜짝 놀 라 전후 사정을 살펴 보지도 않고 황급히 말했다. [아주머니, 제발 울지 마세요, 이 귀곡자가 당신의 점을 봐 드리겟습니다.] 이 말을 하고 나서 귀곡자는 간장, 막야 부부 두 사람의 얼 굴이 기대로 가득 차는 것을 보고는 순간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하여 속으로 생각했다. (사부님은 나에게 점치는 일에 관해서는 가르쳐 주신 적이 없다. 나는 그저 천지 만물 속에 담긴 오묘한 비밀에 대해서 만 깨달았을 뿐이고, 그 모든 것은 건곤결 속에 들어 있을 뿐이다. 안 된다, 안 돼. 어떻게 건곤결 속에서 남의 점을 봐주는 일에 대한 비밀을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귀곡자는 마음이 급해졌다. 마음이 급해지자 갑자기 그의 눈 앞에 건곤결의 열 두번째 초식인 건곤운행의 심오한 묘법이 떠올랐다. 이어 건변위손, 이변위간, 삼변위곤, 곤변위진... 이렇게 건곤이 기이하게 변하면서 만물을 만들어내는 변화가 하나 하나 귀곡자의 눈 앞에 떠올랐다. 그의 눈 앞이 갑자기 밝아졌다. 건곤 만물의 비밀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는데, 한 사람의 길흉이나 운명을 모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귀곡자의 눈에서 갑자기 형형한 정광(精光)이 뻗쳐 나오면서 간장과 막야의 얼굴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미소를 띄며 가볍게 말했다.


[과연 건곤 기학이라더니, 사부님께서 날 속이시지 않으셨 군.] 막야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소협께서는 이미 단서를 찾으셨습니까?] 귀곡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막야가 급히 말했다. [그럼 어서 말씀해 주세요!] 귀곡자가 막야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주머니는 머리가 동그랗고 이마가 평평하며 골격이 가늘 고, 입술이 빨갛고 치아가 새하얗고 머리가 칠흙처럼 까맣 고, 마음이 평화로운 분이시니 장수하며 자손들의 효도를 받 을 상이군요. 그러니 더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 막야는 그 말을 듣고도 별로 기뻐하지 않으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남편은 어떤지요? 해 주세요!]

제발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씀

귀곡자는 그 말을 듣고 간장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무언가 말하기 곤란한 것처럼 보였다. 간장이 그 모습을 보더니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간장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또 무엇을 두려워하겠 는가? 소협은 사실대로 말해도 상관 없네.] 귀곡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간 형님은 인당(印堂)이 검고, 산림(山林)이 함몰되어 있어 서 그다지 좋은 상이 아니군요.] 막야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무엇이 안 좋다는 거지요?] 귀곡자가 말했다.


[죽거나 다치게 됩니다.] 막야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왜 그렇지요?] 귀곡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인당은 바로 사람의 명궁(命宮)인데, 명궁이 검다는 것은 죽지 않으면 다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또 산림은 사람의 복덕궁(福德宮)으로 조상의 풍수나 음덕에 의해 좌우되는데 만약 산림이 높이 솟아 있으면 삼재(三災)의 화가 있다고 해 도 그 화를 길한 것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 풍 수 용맥의 힘이 무궁 무진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산림이 함몰되어 있으면, 그것은 바로 조상의 풍수가 깨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작은 재앙이나 작은 어려움이 있으면 그것 만으로도 사람이 죽거나 다치게 되는 큰 화를 입게 되는 것 입니다!] 막야가 그 말을 듣고는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설마 남편이 지금 끊임없이 재앙을 만나는 것이 원래 하늘 에 의해 정해진 운명이라는 건가요? 이 막야와 앞으로 태어 나 날 아기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소협은 대인대의하시니 제발 천기를 살피시어 이 재앙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 는 방법을 알려 주세요!] 귀곡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아무 말도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하지 않았다. 간장이

[부인은 그렇게 비통해할 필요 없소. 살고 죽는 것은 운명에 정해져 있는 법, 처자식의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 이 간 장은 비록 죽는다 해도 아무런 여한이 없소!] 막야는 계속 흐느끼며 귀곡자를 향해 애걸했다. 이 모습을 보자 귀곡자는 마음이 어지러워져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간 형님 부부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 같은데, 머지 않아 이 세상에 태어날 어린 아이는 가엷게도 친 아버지의 사랑을 한번 느껴 보지도 못하겠구나. 그 오왕 합려는 어쩌면 이렇 게 잔인 무도한 짓을 하는 것일까? 검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한 가족을 몰살시키다니... 정말 악독한 사람이구나.)


막야는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간장은 계속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귀곡자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점점 견 디기 어려워졌다. (비록 사부님께서 나에게 건곤의 운행에 대해 알려 주셨다고 는 하지만, 건곤의 움직임을 바꿀 수는 없다. 사람의 운명은 더더욱 바꿀 수 없다. 지금 내 눈 앞에서 이렇듯 불공평한 일이 벌어지고 있고, 이렇게 불쌍한 부부를 만났는데도 그저 운명에 순응하라는 말 외에는 해 줄 말이 없구나. 그 운명을 깨뜨릴 만한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갑자기 용파건곤, 용화건곤의 초식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갔 다. 귀곡자는 눈을 번쩍 뜨며 중얼거렸다. (반룡은 건곤을 깨뜨릴 수 있다. 그 대지 잠룡으로 명운을 바꿀 수는 없을까? 잠룡지맥(潛龍地脈)으로 간씨 부부의 비 참한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귀곡자가 이렇게 염두를 굴리는 동안 막야는 계속 그에게 애 걸하고 있었다. 귀곡자는 갑자기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아주머니는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이 귀곡자도 신세가 처량했던 적이 있어서 이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 주겠 노라고 맹세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제 그 기회를 만났으니 도와드려야 하겠지요. 저는 건곤대법을 익히고 있으니 그 오 왕 합려와 한번 싸워 보겠습니다! 그리고 간 형님의 액운을 없앨 수 있나 한번 시험해 보겠습니다!] 막야는 그 말을 듣고 연신 귀곡자를 향해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나 간장은 한숨을 쉬더니 쓴 웃음을 지으며 중얼 거렸다. [오왕 합려의 손에는 수천 수만의 군사가 있고, 정예 부대가 구름처럼 모여 있는데 소협이 제아무리 엄청난 신공을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해도, 한 나라의 군주와 싸움이 될 것 같은 가? 또 이 간장의 재앙은 이미 가까운 곳에 이르렀으니, 화 로 속의 영검(靈劍)이 주조되지 않으면 삼일 후에는 삼 개월 의 기한이 끝나 오왕이 간씨 문중의 십여 명의 목을 전부 베 어버리고 말 걸세. 그렇게 되면 액운을 없애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이지. 아아!] 막야는 한 줄기 희망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간장 을 향해 말했다.


[소협은 노자의 제자인데 아무려면 보통 사람과 같겠어요? 분명 우리를 구해줄 좋은 방법이 있을테니 당신은 낙심하지 마세요!] 간장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보잘것 없는 벌레조차 살려고 애쓰는데 하물며 사람이 오죽 하겠소? 하지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살 가능 성은 없소. 오죽하면 내가 이 한 몸을 희생해서 당신들 두 모자의 목숨을 지키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겠소?] 귀곡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막야는 눈물을 잘 흘린다는 여자의 약점을 지니고는 있지 만, 그래도 그의 남편인 간장에 비하면 그녀의 성품이 훨씬 굳세구나. 사람이 죽는 것은 어렵지 않고,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역경을 어떻게 이기고 살아 남는가 하는 것이니, 이 점 에서 보면 막야는 간장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구 나!) 귀곡자는 이런 생각이 들자 간장 부부를 액운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저들을 살릴 시간을 버는 것이 다. 시간을 벌어서 그들이 보검을 완성하도록 도와 오왕 합 려에게 바친 후 그 다음의 일을 진행시키는 것이다.) 귀곡자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갑자기 눈 앞이 밝아지는 느 낌을 받고 간장에게 물었다. [형님, 당신이 방금 말하기를, 만약 쇠가 녹지 않는 경우 사 람을 이용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것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인 지요?] 간장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은 내 은사님께서 임종시에 말해 주신 것이라네. 검을 주조하던 평생의 경험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을 가르쳐주신 것이지.] 귀곡자의 눈 앞에 갑자기 건곤결 중의 용화건곤의 초식이 번 쩍 스치고 지나가면서 마음속의 괴로움이 순식간에 사라져버 렸다. 그는 미소하며 말했다.


[간 형님의 사부님은 분명 검을 주조하는 기인이셨겠지요? 쇠가 녹지 않으면 사람을 사용하라는 그 말은 분명 이치에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수많은 것들이 붙어 있으 니, 사지나 몸통이 그 중의 하나요, 머리카락이나 손톱처럼 작은 것들도 인체의 일부분임에는 틀림이 없지요? 간 형님은 어째서 이 점을 생각하지 않는지요?] 간장은 그 말을 듣고 멍청하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막야는 눈을 번뜩이며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즉시 날카로운 단도를 잡고 자기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화로 속에 던져 넣었다. 쉬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화로 속의 쇠가 즉각 녹아버리고, 얼마 되지 않아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간장은 그것을 보고는 정신이 번쩍 들어 귀곡자를 향해 깊 숙히 머리 숙여 절했다. [소협의 가르침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만약 이로써 보검 이 완성된다면, 우리 간씨 문중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됩니 다!] 귀곡자가 미소하며 말했다. [제게 감사할 것은 없습니다. 모두 아주머니의 지혜와 총명 함 덕분이지요!]

어느새 귀곡자는 간장 부부가 검을 만드는 화로 옆에서 밤을 거의 다 보낸 셈이었다. 그의 마음이 좀 가벼워지자 그제서 야 자기가 원래 먹을 것을 찾아 이리로 왔던 것을 생각해내 었다. 먹을 것을 생각하게 되자 뱃속이 꼬르륵거리며 배고픔 이 점점 더 심해졌다. 마음이 좀 가벼워지자 배고픔으로 인 해 얼굴에 우습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한 표정이 떠올랐다. 간장은 이 때 쇠가 녹는 것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어 화로 곁으로 뛰어가 온 힘을 다해 열심히 풀무질을 하며 화력을 키워 보검을 만드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막야는 심성이 고운데다 성품이 지혜롭고 총명하여, 귀곡자 의 모습을 보자마자 귀곡자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중얼거렸 다. (군자도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 정말 맞구나.) 그녀는 갑자기 말했다.


[여보, 첩이 오늘 남겨 둔 떡 두 조각은 어쩌실 거예요? 드 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먹을 사람이 없으니 아깝지만 내다 버 릴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간장은 이 때 한창 온 힘을 다해 풀무질에 열중해 있는 데다 가, 막야의 소리가 나직해서 듣지 못하고 있었다. 막야는 간 장이 듣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 여러번 말하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이 참, 아깝게 음식을 낭비하다니. 열심히 음식을 만들어 도 쓸데없는 고생이 되고 마는군요.] 막야가 하는 말이 귀곡자에게는 아주 똑똑히 들렸다. 그는 간장이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내게 저 부인과 같은 아내가 있다면, 아니, 저런 누나 라도 있어서 배고플 때 먹으라고 날 불러준다면 얼마나 행복 할까? 간 형님은 복을 지니고 있는데도 자기에게 복이 있는 지 없는지도 모르고 있군.) 귀곡자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점점 더 심해져서 결국 참지 못하고 막야에게 말했다. [아주머니, 정말로 먹을 사람이 없어서 내버려야 한다면 제 가 대신 먹어 드릴께요!] 막야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소협께서는 남을 도우려고 애쓰시는군요. 정말 감사드 립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 귀곡자의 말을 더 기다리지도 않고 즉시 몸을 돌려 화로 옆에 있는 대나무로 만든 집에 들어갔다가 두개의 떡을 들고 돌아왔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떡은 김이 모락 모락 나는 것으로 보아 간장 부부의 저녁 식사였던 것 같았다. 막야는 떡을 귀곡자에게 건네 주고 다시 한 그릇의 쌀죽을 가지고 왔다. 귀곡자는 이 때 너무나 배가 고파서 이 쌀죽과 떡이 먹다 남 은 것인지 아닌지 생각하지도 않고 받자마자 기뻐 웃으며 말 했다.


[아주머니, 남을 돕는 것은 이 귀곡자가 가장 좋아하는 일 입니다!] 말하는 동시에 음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남을 돕는 일 이라서 그런지 이 음식들은 특별히 더 맛있게 느껴졌다. 막야는 그 모양을 바라보며 나직히 한숨을 쉬더니 다시 집 으로 들어가서 두개의 떡을 더 가지고 나와 말했다. [소협께서 그토록 남을 와 주세요!]

돕기를 원하신다니, 아예 깨끗이 도

귀곡자는 먹는 일이 너무나 즐거운 나머지 두개의 떡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것이 부끄럽던 차에, 또 다시 그 <돕는다> 는 말을 듣자 연신 웃으며 말했다. [네! 좋고 말구요! 전 남을 돕고 싶습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돕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군요!] 귀곡자는 재빨리 나머지 떡도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쌀죽도 후르륵거리며 먹어 치웠다. 그는 입을 닦고 배를 두드리며 웃더니 말했다. [아, 이 귀곡자는 삼 년 동안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먹어보 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떡을 왜 간 형님께서는 먹지 않으려고 하는지요? 쌀죽 역시 맛이 기가 막히던데, 왜 간 형님은 자기에게 복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 복을 차내는지 모르겠군요?] 막야는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간 형님은 자기에게 복이 있는 줄 모르고 안 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차마 먹을 수 없어서... 그래요. 먹을 수 없어 서 그러는 거랍니다! 아아, 더 이상 말할 수가 없네요!] 막야는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귀곡자는 원래 똑똑하고 아주 총명한 사람이었다. 조금 전에 는 배고픔을 못 이기고 잠시 정신이 혼미해져서 앞 뒤 일을 생각지 않고 있다가, 이제 막야의 말을 듣고 그녀의 표정을 보자 갑자기 깜짝 놀라며 황급히 말했다. [제가 방금 먹은 것은 먹다 남은 것이 아니라 두 분의 저녁 식사였군요! 당신들은 제가 편안히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 해서 일부러 그런 말을 했군요? 제가 두 분의 저녁을 먹어


치웠으니, 두분은 오늘 저녁을 어쩌지요?] 막야는 귀곡자가 즉각 자기의 속마음을 꿰뚫어 볼 정도로 지 혜로운 것을 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소협은 정말 사람을 놀래게 하는구나. 무엇이든 다 꿰뚫 어 보니, 어떻게 해도 속일 수가 없겠다.) 그녀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소협은 그렇게 난처해 하지 마세요. 저희 두 부부는 어른이 니 적게 먹어도 상관 없어요. 안 먹고 지나가면 그만이에 요.] 귀곡자가 급히 말했다. [그럼 안 돼요. 아주머니, 빨리 가서 다시 만드세요. 화로의 불을 보는 일이라면 제가 대신 하지요.] 막야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소협을 속일 수가 없군요. 사실 저희 부부가 먹을 것 이라고는 아까 그 네 덩어리의 떡과 쌀 죽 한 그릇이 전부였 답니다. 삼일 후에 보검이 완성되어 오왕 합려가 상금이라도 내려주어야 다시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있어요.] 막야는 말을 하면서 슬픔이 솟구쳐 올라 조용히 눈물을 흘렸 다. 귀곡자는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해 멍하 니 있다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단숨에 당신들의 삼일치 식량을 먹어 치웠군 요? 그럼 이 삼일 동안 어떻게 버티려고 그랬습니까? 당신들 은 검을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다면서, 어째서 다른 검 들을 만들어 팔아서 먹을 것을 사려고 하지 않는지요?] 막야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오왕 합려가 명령을 내려서 우리 부부가 만든 검을 아무도 사지 못하도록 막았답니다. 그저 합려 한 사람에게만 팔 수 있도록 강요했지요.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했어요! 이런 명령을 내렸으니 오나라에서 어느 누가 감히 우리 부부가 만든 검을 사려고 하겠어요? 오왕은 사전에 우 리에게 삼개월치의 식량만 준비하도록 하고, 오나라 경내에


방을 붙혀 우리에게 먹을 것을 팔지 못하게 했답니다.] 귀곡자는 놀라 말했다. [그 오왕이 어째서 삼개월치의 식량만을 허락했나요?] 막야가 쓴 웃음을 띄며 말했다. [오왕이 말하기를, 보검을 만드는 기한을 삼개월로 정해 삼 개월 내에 만들면 상을 내릴 것이고, 삼개월 내에 검을 만들 지 못하면 수천 수만 근의 식량이 있다 한들 우리 부부가 먹 을 수 없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귀곡자가 말했다. [어째서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인가요?] 막야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삼개월의 기간이 지나도 검을 만들지 못하면 우리 부부의 목이 떨어지게 될 거라고 말하더군요. 사람의 목이 떨어지고 나면 먹을 수 없을 것이라구요.] 귀곡자가 그 말을 듣고 화를 내며 말했다. [세상에 그처럼 흉악한 왕이 있다니... 이 귀곡자가 두 분을 더 괴롭게 만들어드렸으니 전 죽어 마땅합니다. 단숨에 한 식구의 생명이 달린 음식을 먹어 치워 버렸으니!] 막야가 도리어 귀곡자를 위로했다. [소협께서는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화를 내거나 큰 소리 를 치지도 말구요. 이 산에는 오왕이 보낸 감시자가 저희 부 부를 늘 감시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오왕의 귀에라도 들어가 게 되는 날이면 소협의 생명도 위험해져요. 그저 삼일 내에 검이 완성되는 것이 저희 부부의 유일한 희망일 뿐이랍니 다.] 귀곡자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큰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야 오왕의 감시꾼 따위야 얼마든지 물리칠 자신이 있었지 만, 그러다가 그 화가 간 형님 부부에게 미치게 될까 두려웠 던 것이다. 귀곡자는 생각해 보았다.


(간 형님 부부가 빨리 보검을 완성하는 것을 돕는 도리밖에 없겠구나. 그래야 저들 부부가 살 수 있다니, 할 수 없지.) 귀곡자가 이런 생각을 하자 또 다시 진기가 요동하면서 건곤 결 중의 대지연연의 초식이 저절로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의 눈빛이 빛나더니 중얼거렸다. (대지 잠룡은 한 나라의 운명도 변화시킬 수 있는데 설마 검 하나도 만들어 내지 못하랴!) 갑자기 귀곡자는 사방을 쏘아 보았다. 그는 갑자기 사부 노 자가 예전에 용을 부리는 청룡대법(請龍大法)을 가르쳐 주며 용기(龍氣)가 전신의 경맥을 통하게 하여 백년 간의 고된 훈 련이라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일이 생각났다. 귀곡자는 생각했다. (사부가 청룡대법으로 이 귀곡자가 성공하도록 도와 주셨는 데, 이 귀곡자가 오늘 이 대법으로 간 형님 부부가 보검을 만들도록 도와 액운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할 이유가 뭐람? 이것이야말로 귀곡자가 밥을 얻어 먹은 은혜에 보답하는 길 이 아니겠는가!) 귀곡자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돌연 몸을 날려 단숨에 3 십 장 정도 위에 있는 커다란 바위의 꼭대기로 올라가 화로가 위치한 방위를 기준으로 사방을 자세히 내려다 보았다. 사방을 살피는 귀곡자의 표정이 어느새 점점 어두워졌다. 이 산봉오리는 기세가 웅후(雄厚)하고 물줄기가 산을 따라 흐르고 있어서 아주 아름답기는 했지만, 그저 아름답기만 할 뿐이었다. 대지 잠룡이 북쪽에서 오다가 이 봉우리를 훌쩍 뛰어넘게 되면 이 봉우리는 진룡(眞龍)의 한쪽 측면에 위치 하게 되니 결코 번영할 만한 땅이 될 수 없고, 잘못 사용하 면 패가 망신할 땅이었다! 귀곡자는 다시 화로의 주변을 살펴 보았다. 화로의 입구는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게 놓여 있어서 그는 깜짝 놀라 중얼 거렸다. (심룡건곤결 중에 복희 팔괘의 방위에 따르면 동쪽은 진이 요, 서쪽은 태이니,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놓여 있으면 곧 진에서 태를 향하고 있는 것이 된다. 또 곤변위진이니, 곤의 땅이 만약 진동(震)하면 근본이 흔들리게 된다. 검을 만드는 화로가 하필이면 가장 흉한 절명(絶命)의 위치에 놓여 있구 나.)


귀곡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대격화가(大格花假), 소격패절(小格敗絶)이라 했으니, 간 형님은 이 산을 검을 만드는 장소로 선택하고, 화로가 놓인 위치도 전혀 길흉을 고려하지 않았으니 재앙이 오는 것을 막 을 수가 없겠구나. 설사 요행히 보검을 주조해낸다 해도 그 악한 기운은 분명 간 형님에게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간씨 의 일문은 멸망되고 말텐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 인가?) 귀곡자는 사부 노자가 그에게 천기를 거스르지 말라고 누차 말했던 것을 상기했다. (이렇게 흉하고 위험한 순간, 간씨 문중은 그 기운이 다했음 이 분명한데 만약 그것을 거스르려고 했다가 천조(天條)를 범하기라도 한다면 그 화는 이 귀곡자의 몸에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씻고 아예 상관하지 않는다 면 검을 주조하는 일을 업으로 삼던 간씨 일족은 멸망하고 말 것이다... 이러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귀곡자는 수없이 머리를 굴리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거석 위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아래쪽에서 막야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소협! 저희를 구할 무슨 좋은 방도라도 생각났나요?] 귀곡자는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막야가 임신한 몸이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만약 내버려 둔다면 저 뱃속의 어린 생명은 태 어나지도 못한 채 참혹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귀곡자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 다. (귀곡자야, 귀곡자야! 너는 이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을 돕겠 다고 맹세하지 않았었느냐?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이 세상에 나올 어린 생명이 불쌍하다면 가장 불쌍한데, 너는 자기의 사리사욕만 생각하고 가만히 앉아서 저들을 돕지 않겠다는 것이냐? 그러면서 강호를 다니며 의로운 일을 행한다고? 그러면서 건곤 잠룡의 발맥 시조라고? 그렇다면 너는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담이 작고 가장 자기의 사리 사욕만 채우 는 사람보다도 못한 인간일 것이다.) 귀곡자는 자신을 위해 하늘의 질서를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고 자위를 하면서, 자기 자신의 성품이 이토록 용렬했던가를


저주하면서 몸을 휙 날려 막야의 앞에 이르더니 단단히 결심 한 듯이 말했다. [아주머니, 마음 놓으세요. 정세가 비록 흉악하고 위험하기 는 하지만, 귀곡자가 여기 있으니 절대로 가만히 앉아서 간 씨 일문이 풍지박살나는 것을 보고 있지는 않을 거예요!] 막야는 그 말을 듣고 놀라는 한편 기쁜 마음이 들어 중얼거 렸다. (그는 아주 결연하구나. 정말 대단한 소년이다! 의로운 일을 행하며 강호를 돌아다니는 대협사에 비할만하구나. 과연 득 도 건곤 노조(得道乾坤老祖)의 제자에 손색이 없다. 우리 부 부가 운이 있어 이런 사람을 만났으니 정말 다행이다. 하지 만 그의 말 속에 무슨 근심이 있는 것 같은데, 설마 하늘이 우리 간씨 가족이 위험에서 피하지 못하도록 미리 예정해 놓 은 것은 아닐까?) 막야는 이런 생각을 하며 황급히 말했다. [소협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소협은 어 떤 묘법으로 우리 간씨 일문을 이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 주 시려는 건지요?] 귀곡자는 잠시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갑자기 말했다. [간 형님의 생신팔자(生辰八字)에 대해 알려 주세요.] 막야는 남편의 생신팔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대답했다. [상공은 경왕(景王) 육년(六年) 삼월 초하룻날 칠각시(七刻 時)에 태어났어요.] 귀곡자가 조용이 읊조리듯 말했다. [경왕 육년이면 경인년(庚寅年)이고 범띠로군요. 범은 용을 이길 수 없지요. 올해는 병진년(丙辰年)이고 용에 속하는데 용과 호랑이는 상극이어서, 올해가 간 형님에게는 대흉(大 兇)한 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막야가 놀라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를 구할 수 있지요?]


귀곡자는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아주머니의 생신팔자는 어떻게 되시는지 알려 주실 수 있습 니까?] 막야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녀는 비록 남의 부인된 몸이긴 했으나 나이는 고작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아 귀곡자에 비해 별로 많지 않은데다가, 세상의 계 율대로라면 여자의 생신팔자는 절대로 낯선 남자에게 함부로 알려 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야는 강호에서 자란 여 자였기 때문에 즉시 현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 신의 담대히 알려 주었다. 귀곡자는 조용히 무언가 읊조리더니 갑자기 얼굴에 기쁜 빛 을 띄고 말했다. [원숭이 띠군요. 원숭이는 바로 건곤 대지의 시조이니 바로 대지 잠룡의 기운을 이어 받았다고 할 수 있지요! 이것은 정 말 열가지 흉한 중에 한가지 길조요, 백가지 탁함 속에 한가 지 맑음이라 할 수 있으니, 이 덕분에 간씨의 핏줄은 구원 받을 수 있겠네요!] 막야는 그 말을 듣고 놀라면서도 귀곡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귀곡자는 막야의 반응은 신경쓰지 않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한번 쳐다보더니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곧 자시(子時)가 됩니다! 이것은 병진년 용의 해에 잠룡의 기운이 가장 왕성해지는 시간이니 성패나 득실, 간씨 일문의 길흉 화복이 모두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아주머니, 어서 빨 리 가서 화로의 서쪽 편에서 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가 앉 아 계십시오. 반드시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앉아 계셔야 합 니다. 화로가 놓인 위치와 반대되는 방향으로요!] 막야가 급히 물었다. [왜 반드시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앉아야 하나요? 화로와 반 대되는 방향이라뇨?] 귀곡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쪽은 진위(震位)로, 절명(絶命)하는 대흉한 위치입니다. 서쪽은 태위(兌位)로 생기(生氣)가 가장 활발한 곳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야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막야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말했다. [그렇다면 남편이 지금 화로 입구에 앉아서 풀무질을 하고 있는 방향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고 있으니 바로 대흉한 절 명의 위치에 있는 거잖아요? 어째서 그 역시 서쪽에 앉도록 하여 화를 면하게 하지 않는 거지요?] 귀곡자는 간장과 막야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한숨을 내쉬더니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형님이 위험을 당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운 명이지요. 서쪽이 생기가 가장 왕성한 곳이라고는 하나, 올 해가 용의 해이고 용과 호랑이는 서로 상극이니, 범 띠인 사 람은 서쪽에 앉을 수가 없지요. 원숭이 띠만 가능한 일이지 요. 간씨 일문이 지금 모두 재앙을 만날 수(數)이니, 간씨 일문의 한 점 혈육이라도 보존되어 그 혈통을 이어갈 수 있 을지 없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한 점 혈육을 보존하려고 하니 제발 아주머니께서는 더 이상 주저하지 마시고 빨리 가서 제가 말한 자리에 가서 앉도록 하십시오.] 막야는 이미 귀곡자에게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간장 을 버리고 혼자 살기 위해 서쪽의 생기지위(生氣之位)에 가 서 앉을 수가 없어 그저 멍하니 화로 입구에 있는 간장을 바 라보며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마치 생이별을 하는 순간 같았다. 귀곡자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자시가 이미 다 되어 가니 간씨 일문의 핏줄을 보존하는 일이 위기 일발에 처한 것이었다. 그의 마음이 더욱 급해지자 힘이 움직여 심 룡건곤결 중의 이위변태의 초식이 즉시 발동되었다. 그가 막야를 향해 두 손을 내밀자 막야는 거대한 기류에 휩 싸여 어느새 서쪽의 태위로 옮겨가 있었다!

4...... 귀곡자는 즉시 거석을 향해 몸을 솟구쳐 잠시 운기(運氣)하 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이미 동쪽으로 기울어져 자시 가 가까웠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거석 꼭대기에서 심룡건곤결의 네번째 초식인 용화건곤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여러번 뒤집다가 갑자기 몸을 위 로 날려 허공 속에서 몸을 굽혀 마치 웅크린 용과 같은 모습 으로 화로의 네 방위를 선회하며 허공을 빙빙 돌기 시작했 다! 귀곡자는 선회하면서 한편으로 조용히 읊조리고 있었다. [사방팔극잠룡신기(四方八極潛龍神氣)... 반룡기화건곤만물 (盤龍旣化乾坤萬物)... 천지 만물은 모두 반룡이 변하여 된 것이니 대지 잠룡이 없는 곳이 없도다... 어서 그 모습을 드 러내 이 액운을 없애고 무고한 사람들을 구하라! 명하노니 어서 빨리 모습을 드러내라, 어서...] 귀곡자는 이렇게 읊조리다가 다시 산봉오리의 사방 팔극을 향해 빙빙 돌며 기원했다. 화로의 위, 깜깜한 밤의 허공 속 을 누비는 귀곡자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반룡과 같았다. 바로 이 때, 사방 팔극에서 돌연 여덟개의 자색(紫色) 기운 이 솟구쳐 오르더니 유유히 귀곡자가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또 사방의 잠룡이 서로 다투며 대답하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 다. 그 자색 기운은 유유히 산 골짜기의 이 화로 앞 공중에 이르 더니 갑자기 휘익, 하고 한데 모였다가 다시 사방으로 퍼지 면서 놀랍게도 한 마리의 자색 구름용(雲龍)이 되었다. 자색 구름용은 한 바퀴 선회하더니 갑자기 아래로 떨어지며 막야가 앉은 서방 태위(兌位)를 향해 내려왔다. 이 때 막야는 갑자기 이 구름용이 곧장 그녀의 배를 향해 돌 진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 뱃속의 아이가 만약 이 구 름용과 부딪히게 된다면 그 아이의 생명이 어찌 될 것인가? 그녀는 손을 휘저으며 온 힘을 다해 뱃속의 아이를 보호하려 고 애썼다. 그러나 자색 구름용이 접근해 왔을 때, 막야의 손발이 갑자기 무엇에 붙집힌 듯 움직여지지 않아, 그녀는 슬픔에 겨워 중얼거렸다. (소협이 우리 간씨의 핏줄을 보호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일이 더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자색 구름용이 막야의 배에 부딪히게 되자, 막야는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 없었고, 오히려 배 속으로 뭔가 따뜻 하면서도 평안한 기운이 전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갑자기 아무런 원망이나 슬픔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오직 편안함만을 느끼게 되어, 멍청하게 앉아 더 이상 움직 일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자색 구름용은 막야의 서방 태위에 떨어진지 오래지 않아 또 다시 위로 날아 올라 화로 위의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갑자기 둘로 갈라져 훨훨 타오르는 화로 속으로 쏜살같이 돌 진해 들어갔다. 귀곡자는 그것을 보면서 우렁차게 외쳤다. [용의 기운이 화로 속으로 들어가면 천고에 길이 남을 명검 을 만들게 되리라. 재앙을 없애고, 천하의 요사스런 기운을 모두 없애도록 하여라.] 귀곡자의 외침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공중에서 갑자기 우르 릉, 꽝꽝, 하는 뇌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두 갈래로 나뉘 어 들려왔는데 마치 호랑이가 울고 용이 우는 소리가 섞여 나는 듯했다. 이 때 간장은 한창 온 힘을 다하여 풀무질을 하여 화로의 불 길을 키우면서 어서 보검이 나와 오왕 합려에게 바치기만을 기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곡자와 막야의 행동은 전혀 안중 에도 없었다. 뇌성이 울리자마자, 검을 주조하던 화로 안에서 갑자기 두 줄기의 자광(紫光)이 뻗어 나와 아주 강렬하게 한밤중의 하 늘을 가르면서 저 멀리 하늘로 치솟았다. 그러자 철이 맞부딪히는 쟁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순간 화로 속에서 나던 소리가 아주 잠잠해지고, 훨훨 타오르던 불길마저 결국 꺼져버리고 말았다. 간장은 화로 속의 불길이 꺼져버리자 깜짝 놀라 하늘을 우러 러 보며 탄식했다. [화로 주변에는 바람 한 점 없는데 화로의 불길이 저절로 꺼 져버리고 보검이 만들어지지 못했으니, 이것은 분명 하늘이 우리 간씨 집안을 저버린 것이 아닌가?] 간장이 절망하여 비통한 소리를 다 내지르기도 전에, 갑자기 귓가에 아주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 형님께서는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보검은 이미 완성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간장은 그 소리를 듣고 얼떨떨해서 갑자기 벌떡 일어나 사방 을 둘러 보았으나, 막야가 화로의 맞은편에 멍청히 앉아 있 는 모습과, 귀곡자가 그로부터 한 1 장 정도 떨어진 먼 곳에 서서 그를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알고보니 귀곡자가 간장이 절망하여 한탄하는 것을 보고는 그가 의기소침하게 될까 걱정되어 다급한 마음에 뱃속의 진 기를 움직여 간장의 귓 속으로 자기의 음성을 전달했던 것이 었다. 어느새, 귀곡자는 무림 고수의 전음입밀(傳音入密)의 무공을 펼쳐낸 것이었다. 귀곡자는 간장이 꼼짝 않고 를 질렀다.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소리

[간 형님! 더 이상 주저하지 마시고 빨리 화로를 열어 보십 시오. 그럼 제 말이 맞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간장은 그 말을 듣고도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때 막야가 급하게 화로 옆으로 뛰어왔다. 그녀는 강호의 여인으로 성격이 급했고 행동이 아주 민첩했다. 막야가 급히 간장에게 말했다. [간장 오라버니! 이 소협은 분명 당세의 기인으로 모르는 것 이 없고 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해주려고 하니, 바로 우리 부부가 하늘로부터 받은 복이에요. 그의 말 은 모두 이치에 닿으니, 어서 그의 말을 믿고 그대로 따르세 요!] 간장은 속으로 여전히 반신반의하고 있었지만, 기적이 일어 나기를 바라면서 화로 곁으로 성큼 다가가 거칠게 화로의 문 고리를 잡았다. 화로 안에서 어떤 물건이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탁 탁, 소리를 내며 튀어 나오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간장이 와락 고리를 당기자 화로 문이 활짝 열렸고, 즉시 두 줄기의 자색 기운이 내뿜어졌다. 그것은 튀어 오르면서 날카 로운 쇳소리를 내었고, 그 순간 화로가 흔들리며 쓰러져버렸 다. 간장은 화로의 밑을 살펴 보더니, 아주 기쁜 듯한 표정을 지


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한 쌍의 검이 자광(紫光)을 뿜으 며 화로 안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길이가 두개의 정도로

웅검(雄劍)이요, 하나는 자검(雌劍)이었다. 웅검은 4 척이었고, 자검은 길이가 3 척 5 촌 정도 되었는데 그 검이 내뿜는 자광의 검기는 사람의 혼백을 놀라게 할 상서로운 것이었다.

간장이 훅, 하고 숨을 들이쉬더니 화로에 손을 집어 넣어 그 한 쌍의 검을 끄집어내려고 했다. 바로 이 때, 화로 안의 쌍검이 돌연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 다. 그 모습은 간장이 건드리는 것을 거부하는 듯이 보였다. 쌍검은 공중을 빙빙 돌았다. 한 밤중에 번쩍 번쩍 빛나는 자 광은 마치 암수 두 마리의 자룡처럼 보였다. 쌍검은 마치 굴레를 벗으려고 애쓰는 듯이 몇번이고 하늘로 치솟았다가 다시 지면을 향해 떨어졌다가 다시 하늘로 치솟 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귀곡자는 그것을 보고는 냉정하면서도 재빠르게 공중을 향해 쌍장을 휘두르며 외쳤다. [신검은 영물인데 어찌하여 제 주인도 못 알아 보느냐!] 귀곡자가 내지른 건곤진기(乾坤眞氣)가 한 쌍의 자룡검(紫龍 劍)을 가득 덮었다. 건곤 진기가 이 자룡의 기운을 덮자 마치 뜨거운 검을 순간 적으로 물에 담근 듯이 검이 칙, 소리를 내며 더욱 견고해지 고 날카로워졌다. 이 때 자룡검과 건곤진기가 서로 융합되어 건곤자룡검(乾坤 紫龍劍)이 되었다. 건곤자룡검은 건곤진기 속에서 다시 한번 선회하더니 갑자기 아래로 떨어져 간장의 머리 위를 한번 빙 돌고는 그가 주인 이 아니라는 듯이 그를 내버려두고 다시 막야를 향해 날아갔 다. 막야는 지혜롭고 총명하여 귀곡자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웅검은 막야의 왼 손 위로, 자검은 막야의 오른손 위로 떨어지면서 갑자기 자 기(紫氣)를 거두어 들이고는 얌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드디 어 자기 주인을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귀곡자는 그것을 보고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신검은 영물이라더니, 과연 자기의 주인을 알아보는구나. 이로써 간씨의 후손이 살아 남게 된 셈이다. 하지만 어째서 이 쌍검은 막야 아주머니에게로 날아가고 간장 형님을 피하 는 것일까? 하나가 웅검이고 하나가 자검이라면 아주머니의 뱃 속에 있는 아이가 남자 아이란 말인가?) 간장은 너무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 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절망의 끝에 서 있다가 갑자기 신검이 완성되었다. 신검은 분명히 암수 한 쌍으로 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두 자루 모두 막야에게로 간 것일까? 하늘이여, 이것은 도대체 무슨 징조 란 말씀입니까?] 막야는 손으로 두 자루의 보검을 받쳐 들고 있었으나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녀는 귀곡자의 말이 확실히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깜짝 놀라고 있었다. 영험한 신검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간장과는 인연이 없었다. 이것은 이미 간장의 운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귀곡자의 말 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는 신검과 인연이 닿아 이 뱃속의 한 점 혈육을 살릴 수 있게 된 것이었으나 만약 간장이 목숨을 잃게 된다면 그 아비 없는 자식과 이 과부는 어떻게 살아 가야 좋을 것인가? 막야는 마음이 어지러워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늘이시여, 이 불쌍한 간장 오라버니가 만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이 막야는 어찌해야 하나요?] 간장은 그 말을 듣고 의아해서 말했다. [당신 왜 그러오? 다행히 보검이 완성되었고, 오왕이 말한 기한도 지킬 수 있게 되었소. 이제 이 검을 바치기만 하면 될 텐데 또 무슨 위험이 있다고 그러는 거요?] 막야가 한숨을 내쉬며 쓴 웃음을 짓고 말했다. [소협의 예측은 그 누구보다도 영험한데 간장 오라버니의 운 명이 엄청난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하니 검이 완성되었다고 해 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네요.] 간장이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소협은 분명

노자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신선은 아니잖소?


그러니 어떻게 사람이 죽고 사는 일에 대해 확실히 예측할 수 있단 말이오? 이 간장은 한평생 공명정대하게 살아왔고, 누구와 원한을 맺은 일이 없으니, 그저 기한 내에 검을 바치 기만 하면 오왕 합려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무슨 엄청난 위험이 남아 있다고 그러는 거요?] 막야는 간장이 자부심이 강한 성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 기 때문에 더 이상 그에게 설명하지 않고 귀곡자를 향해 나 직히 말했다. [제 남편은 성품이 너무 강직하여 쉽게 남의 말을 믿지 않는 답니다. 그러니 소협께서는 너무 그를 탓하지 마세요.] 귀곡자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천기의 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모 든 일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막야가 그 말을 듣고 안절부절못하고 더 참을 수 없는지 귀 곡자에게 애걸했다. [소협은 신통력이 뛰어나시니, 대법을 펼쳐서 저희 부부가 이 난관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세요. 남편이 이 흉관(兇關)을 피할 수 있도록 해 줄 수 없나요?] 귀곡자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난관(難關)은 다.]

벗어나기 쉬우나, 흉관은 피하기 어렵습니

막야가 놀라서 물었다. [어째서요?] 귀곡자가 말했다. [난관은 한때의 어려움이기 때문에, 외력(外力)으로 그것을 깨뜨리도록 도와줄 수 있지만, 흉관은 미리 정해진 본명(本 命)이고, 본명은 바로 천명(天命)이며, 천명은 바꾸기 어렵 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막야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확실한 것은 간장의 흉관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들 부부는 정이 깊 었기 때문에 비통해하며 말했다.


[소협의 그 말은 남편이 이미 위험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다 는 건가요? 하늘이여, 제발 저희를 불쌍히 여기세요. 만약 남편이 잘못 되기라도 한다면 이 막야더러 어떻게 혼자 살라 는 말씀인가요?] 그녀는 이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눈에 눈물이 흠뻑 고이기 시작했다. 귀곡자는 그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말했다. [아주머니, 울지 마십시오. 울면 전 바보가 되고 어쩔줄 모 르게 됩니다!] 막야가 흐느끼며 말했다. [남편은 아직 나이도 젊고, 또 나와는 어렸을 때부터 소꼽 친구로 자라났어요. 우리는 같은 해 같은 달에 죽기로 이미 맹세했으니 한 사람만 남는다면 절대로 혼자 살 수 없어요!] 귀곡자는 그 말을 듣고 이를 악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귀곡자야, 귀곡자야. 너는 밥 한 끼 얻어 먹은 은혜를 갚으 려고 다른 사람을 도와 난관을 깨뜨려 주려다가 이젠 이 일 에서 손을 뗄 수가 없게 되었구나. 본명(本命)의 흉관(兇關) 을 피하도록 도와주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천리를 거역하 는 것이니 어쩌면 좋단 말이냐?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막야는 귀곡자가 아무 말도 않고 속으로 곰곰히 무엇인가 생 각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 일이 정말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 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애처롭게 말했다. [소협께서는 너무 어려워하지 마세요. 보아하니 이것은 절대 로 바꿀 수 없는 우리 부부의 운명인가 보네요!] 귀곡자의 마음속이 더욱 심란해졌다. 그는 너무 당황해서 어 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이 난처한 자리를 피할 생각만 하다 가 다시 생각을 돌렸다. (간 형님 부부는 정말 서로간에 정이 아주 깊다. 간 형님의 흉관이 이미 다가와 생명을 보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아 주머니가 목숨을 포기하고, 그 뱃속의 핏줄이 이 세상도 못 보고 죽어버린다면, 이 귀곡자가 심혈을 기울여 익힌 심룡건 곤의 대법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이것은


사부 노자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니 절대로 그럴 수는 없 다.) 귀곡자는 이렇게 생각하자 오기가 불끈 솟아 올랐다. (천명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이 귀곡자는 그것을 바꿔 놓고야 말겠다.) 그는 이렇게 결심하고 막야를 향해 말했다. [아주머니, 천명은 거역할 수 없다고 하지만 아직 그 최후의 순간에 이른 것은 아니니 절대로 미리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저 아주머니와 간 형님께서 침착하게 꼼짝 않고 있을 수만 있다면, 이 귀곡자가 그 운명을 바꿔 놓을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막야는 그 말을 듣고 다시 희망이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기 뻐하며 급히 말했다. [침착하게 꼼짝 않고 있으라니, 무슨 뜻인지요?] 귀곡자가 조용히 말했다.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자기의 위치를 굳게 지키고, 절 대로 이 봉우리를 떠나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제가 즉시 오나라의 고소성(姑蘇城)에 가서 오왕 합려의 동 정을 살펴 본 후, 간 형님을 구할 방법을 생각하도록 하겠습 니다.] 막야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감동하여 귀곡자에게 연신 고맙 다는 말을 했다. [소협은 정의롭고 용감하고 인자하십니다. 만약 저희 부부가 이 흉관을 피할 수만 있다면 저희 부부의 생명을 소협께 바 치도록 하겠습니다!] 간장은 운명이니 천명이니 하는 것을 그다지 믿지 않고 있었 지만, 귀곡자가 자기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오나라의 고소 성에 있는 궁궐로 잠입하려 하는 것을 보자 감격하여 말했 다. [소협의 뜻은 고맙네. 하지만 절대로 혼자 고소성에 들어가 지 말게. 그 오왕 합려는 성질이 난폭하고, 궁중에는 고수들 이 구름처럼 운집해 있어서 용담호혈(龍潭虎穴)과 같으니,소


협이 섣불리 그 속에 뛰어들다가 자칫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네. 그러니 제발 신중하게 생각하게. 만약 자네가 잘못 되기라도 한다면, 이 간장은 영원토록 양심의 가책을 받고 괴로워할 것이네!] 막야는 이때 한껏 희망에 부풀어 있다가, 간장의 말을 듣고 는 오왕의 궁궐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가 새삼 느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소협이 비록 무공이 엄청나게 강하다고는 하지만 혼자 그 곳에 뛰어든다면 새끼 양이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녀는 속으로 귀곡자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이 일기 시작하 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귀곡자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간 형님, 아주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왕의 성이 아무리 용담호혈과 같다고 해도 이 귀곡자는 어디든지 내 맘대로 다 닐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두 분은 절대로 경 거망동하지 말고 꼼짝말고 이곳에 계십시오. 제가 돌아온 후 다시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십시오. 잊지 마세요. 꼭이요. 그 럼 전 가보겠습니다!] 귀곡자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몸을 번쩍 날리더니 주검봉(鑄 劍峰) 저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막야는 잠시 멍청하게 서 있다가 나직히 말했다. [저 소협은 정말 득도노조의 제자에 손색이 없네요. 대인대 의(大仁大義)하고 대지대용(大智大勇)하니 말이에요. 그가 우리를 구해줄 방법을 찾아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입 니다.] 간장은 한숨을 내쉬며 쓰게 웃었다. [저 소협의 신술(神術)은 정말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 하지 만 그가 제아무리 남을 도우려는 의협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 지만 오왕의 궁전 안에는 사자와 호랑이 같은 고수들이 구름 처럼 모여 있고,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으니 귀곡자 혼자 서는 당해내기 어려울 것이오. 그가 무사히 돌아올 수만 있 다면, 그것만으로도 천만 다행한 일이오. 그러니 어찌 위험 에서 벗어나려는 희망을 한 사람에게 걸고 있을 수 있겠소? 모든 것은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법이오!]


막야는 그 말을 듣고는 놀랍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 말했다. [간장 오라버니,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세요?] 간장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오왕 합려가 검을 만들어내라고 한 기한이 아직 3 일이 남아 있소. 오왕의 세력은 엄청나고, 당신과 나는 모두 오나라의 백성이니 기간 내에 입궁하여 검을 바치기만 한다면 아무런 위험이 없을거요.] 막야가 말했다. [하지만, 그 소협이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여러번 당 부했잖아요! 간장 오라버니, 안 되어요!] 간장은 생각한 바가 있는 듯이 말했다. [그럼 삼일만 기다려 봅시다. 만약 귀곡자가 삼일 안에 돌아 올 수 있다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기간 내에 검을 바칠 수밖에 없는 것이오!]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귀곡자는 바람과 같이 달리며 북쪽을 향해 질풍처럼 내달았 다. 그는 심룡건곤결 중의 건곤운행의 경력(輕力)을 운용하면서 나는 듯이 달려갔다. 귀곡자는 절강(浙江) 막간산(莫干山) 지역에 이르러, 월청산 (越靑山)과 호주(湖州), 태호(太湖)를 지나 오나라의 수도인 고소성 부근의 영암산(靈巖山) 위에 도착했다. 이미 진시(辰時) 무렵이 되어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어서 사 방의 전야(田野)가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귀곡자는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오나라에 와 본 것이었다. 그가 동북쪽의 고소성을 바라보니 많은 산들이 이어지면서 우뚝 우뚝 솟아 있었다. 서남쪽에는 사자(獅子), 천평(天平), 금산(金山), 양산(陽 山) 등의 온갖 산들이 솟아 있었고, 태호(太湖)를 끼고는 등 위(鄧尉), 궁륭(穹赦) 등의 산이 있었으며, 가까운 곳에는 횡산(橫山), 칠자(七子)가 있었으며, 먼 곳에는 동동정산(東 洞庭山), 서동정산(西洞庭山)이 있었다.


동쪽에는 호수가 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 이름은 금계호 (金溪湖), 독서호(獨墅湖), 황천탕(黃天蕩), 사호(沙湖), 양 징호(陽澄湖) 등등으로, 모두가 산을 끼고 흐르고 있었으며 아주 뛰어난 기상을 자랑하고 있었다. 귀곡자는 사방의 먼 곳까지 두루 살펴보면서 처음에는 기쁜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점차 눈썹을 찌푸리더니, 결국에는 고 개를 좌우로 흔들며 탄식했다. 그가 심룡건곤결이라는 절학(絶學)으로 살펴본 결과 영암산 은 별로 심취할 만한 풍경이나 형세가 없었고 오나라 수도인 고소성의 형세와 운세도 별로 대단할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 이었다. 그는 이 고소성의 이름난 명산인 영암산을 자세히 살펴 보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산은 소나무가 두루 자라고 있 고 기괴한 암석들이 솟아 있어서 아주 수려하고 운치있게 보 였다. 하지만 뭔가 부족함이 있고 힘이 부족한데다가 약간 요염한 맛이 지나쳐 품행이 바르지 못한 그런 미녀를 연상시 키고 있었다. 귀곡자는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돌연 몸에서 보배를 하 나 꺼냈다. 이것은 작은 원반(圓盤)으로, 위에는 세개의 침 이 꽃혀져 있었는데 그 세개의 침은 천(天), 지(地), 시 (時), 세가지를 살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의 이름 은 천지시신반(天地時神盤)으로, 귀곡자가 망산의 상청궁에 서 3 년 동안 기공을 수련할 때 노자 이이가 특별히 귀곡자에 게 선사해준 것이고, 귀곡자가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유일 한 보물이기도 했다. 그 때 노자 이이는 이렇게 말했었다. [이 천지시신반은 위로는 하늘을 살피고, 가운데로는 시간에 따르는 길흉을 살피고, 아래로는 산천의 형세와 땅의 귀천, 대지 잠룡의 결혈(結穴)을 살펴, 삼라 만상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신중하게 사용하고 아무 때나 사용하지 말도록 해라.] 귀곡자는 그 때 노자 이이의 말을 듣고 이것의 사용을 주저 하고 있었는데, 이제 천지시신반을 꺼낸 것이었다. 천, 지, 시의 세개의 침이 갑자기 착, 소리를 내며 하나의 선을 이루 어 앞으로는 오나라 수도인 고소성을 가리키고, 뒤로는 영암 산을 가리키면서 세개의 침이 하나의 선을 이루어 아주 신비


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귀곡자는 양미간을 깊게 찌푸리더니 오나라 수도 고소성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탄식하다가 갑자기 신반을 집어 넣고 막 몸을 돌려 고소성 방향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의 내공은 절정에 이르렀고 청력도 아주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이때 갑 자기 그의 10 여 장 뒤쪽의 먼 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을 알아챘다. 어떤 남자가 처량하게 탄식하는 소리였다. 귀곡자는 갑자기 움직이려던 것을 멈추고 몸을 돌려 탄식 소 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7 척 장신의 남자가 어떤 묘비 앞에 꿇어 앉아 깊이 탄식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건대 뭔가 아주 애통하고 원망스러운 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귀곡자는 이상하게 생각되어 그 남자 쪽으로 달려가, 가까운 곳에 멈춰 서서 그를 바라 보았다. 살펴보니 그 묘비 위에는 <초대부오사지묘(楚大夫吳奢之墓)>라는 일곱 글자가 크게 쓰 여져 있었다. 귀곡자는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서(史 書)를 많이 읽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초(楚)나라는 묘인 (苗人)이 주(周)나라 왕조로부터 하사받아 세운 나라로, 스 스로 만이(蠻夷)라 칭했으며, 중원의 각 나라들을 공격하여 정벌하는 것을 즐겨, 5 년 동안 출병하지 않으면 군주가 그것 을 치욕스럽게 느낀다고 할 정도로 정복욕이 강한 나라였다. 지금은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패권을 다투는 시대로, 진나라는 오나라와 연합하여 초나라를 정벌하려 하고, 초나 라는 월(越)나라의 도움을 얻어 오나라를 치려고 하고 있었 으니, 진나라와 오나라는 초나라 및 월나라와 서로 원수지간 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초나라의 대부가 오나라 의 땅에 묻힐 수 있단 말인가? 귀곡자가 막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묘비 앞에서 무 릎을 꿇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자기 뒤에 누군가 있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란 듯 벌떡 일어났다. 더군다나 귀곡자가 그 와 1 장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에 서 있는 것을 알자, 그 남자 는 더더욱 경악하는 모습이었다. 원래 그 남자는 무공이 아주 높은 고수였다. 그의 눈빛이 형 형하게 빛나는 것만 봐도 그가 무공의 고수임을 알 수 있었 다. 하지만 귀곡자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어느새 그와 가 까운 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 사내는 귀곡자의 무공이 자기보다 훨씬 대단한 것을 알고 놀라고 말았다. 더군다나 자기보다 내공이 더 높은 그 사람 이 일개 소년이라는 것을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남자는 잠시 멍청히 서 있다가 갑자기 아주 냉정하고 오 만한 태도로 말했다. [너는 누구냐? 감히 이 오나라의 금성(禁城)을 제멋대로 돌 아다니고 있다니, 멸족(滅族)의 벌이 두렵지도 않느냐?] 귀곡자가 그 말을 듣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 남자가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나이도 어린 것이 멸족의 화가 두렵지 않다고? 그건 어째서 지?] 귀곡자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우선 난 멸족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둘째로 원래 집이라 고 할 만한 것이 없으며 친척도 없습니다, 그러니 멸족을 두 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난 이 세상에 내가 갈 수 없는 곳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남자는 놀랍기도 하고 화도 나서 귀곡자를 똑바로 노려 보며 한마디 한마디 또박 또박 말했다. [이 녀석, 정말 대담하기도 하구나! 감히 함부로 오나라의 도성 부근에 들어와서 제 분수도 모르고 까불고 있으니, 그 러다가 오왕이 화를 내기라도 하면 너의 그 작은 머리는 금 새 잘려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귀곡자는 묘비를 잠깐 쳐다보고, 다시 그 남자의 얼굴을 쳐 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 자신의 운명이나 걱정하는 게 좋겠군요. 이십 년 내에 당신 목이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 남자가 화를 내며 물었다. [이 녀석이 무슨 헛소리를 해대는 것이냐?]


[헛소리가 아닙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지요. 나 는 당신의 성이 오(伍)씨이고, 묘에 묻힌 사람은 바로 당신 의 부친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 남자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또 무엇을 알고 있느냐?] [당신은 지금 가슴 속에 슬픔과 굴욕, 분노 등이 가득 차 있 어서 누구에겐가 그 억울한 사연을 하소연하고 싶어하고 있 습니다!] 그 남자는 눈빛을 다.

빛내며 귀곡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

[도대체 너는 누구냐? 설마 나의 원수인 초나라 평왕(平王) 이 오나라의 허실을 탐지하라고 보낸 첩자란 말이냐? 아니면 이 오자서(伍子胥)를 암살하라고 보낸 자객이란 말이냐?] 그 남자는 알고보니 오자서라는 사람이었다. 귀곡자는 저도 모르게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초나라 평왕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초 나라에서 오나라를 염탐하라고 보낸 첩자도 아니고 당신을 죽이러 온 자객도 아닙니다. 내가 첩자라면 어째서 당신의 성이 오씨인 것만을 알고 이름이 자서라는 사실을 몰랐겠습 니까? 그리고 정말로 당신을 죽일 작정이라면, 내가 무엇 때 문에 이렇게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겟습니까? 그저 몰래 다 가가서 당신을 죽여버리면 그만이 아니겠습니까?] 오자서는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하긴 그렇지. 저 애의 공력으로 보아, 날 몰래 죽이려고 했 다면 아마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태도가 이처럼 태연 한 것으로 보아 거짓말 같지는 않구나.) 그는 마음을 좀 놓았지만, 그래도 긴장을 풀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내 성이 오씨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 또 어떻게 묘 안의 사람이 나의 부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느냐?]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묘 안의 사람은 성이 오씨요, 이름이 사(奢)인데, 당신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배하고 있으니 분명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 분명하죠. 또, 당신이 묘비 앞에 무릎 꿇고 있을 때, 묘비에 한 줄기 영광(靈光)이 어려 당신의 정 수리 위의 영기와 서로 얽히고 있었으니 분명 혈육지간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지요. 따져 보면 당신도 알 수 있 는데 당신은 생각을 못했을 뿐이지요. 이 두가지를 하나로 종합해 보면, 당신과 묘 안의 사람이 부자지간이라는 것을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오자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귀곡자의 추측이 아주 옳았음을 인정했다. 그는 눈을 빛내며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내 었지?]

마음속의 생각을 알아맞출 수 있

[당신은 얼굴형이 길쭉하고 뼈가 굵고 힘줄과 근육이 불끈 솟아 있으며, 입술이 두툼하고, 귀가 뒤로 젖혀져 있고 콧구 멍이 넓고, 수염이 가늘고 양미간이 솟아 있으니, 분명 아버 지가 아주 참혹하게 비명횡사할 상입니다. 분명 아버지가 누 구에게 살해당햇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잃었으니 비 통함과 슬픔과 분노, 굴욕감을 느낄 것이 분명하지요. 이 모 든 것을 종합해 보면 제가 말한 그것둘을 알아 맞추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귀곡자의 말을 듣고 오자서는 깜짝 놀랐다. 실제로 모든 것 이 귀곡자가 말한 그대로였던 것이다. 귀곡자의 신통력이 아 주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그는 여러번 귀곡자를 훑어 보며 말했다. [너는 어째서 이 오자서가 이십 년 뒤에 죽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냐?] 귀곡자는 오자서를 주시하면서 표정을 엄숙하게 바꾸고 말했 다. [운명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지금 당신의 변성월각(邊城月角)이 붉은 빛을 띄고 있으니 , 지금의 운명 은 아주 활짝 핀 꽃처럼 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길운이 그다지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왜냐하 면 당신의 오른쪽 눈 아래의 광전(光殿)이 어두운 것으로 보 아 형기(刑氣)가 얽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커다란 재앙을 만나게 됨을 말하고 있지요. 또 오른쪽 눈 아 래의 광전은 43 세에 작용하니까 당신은 마흔 세 살이면 커다


란 재앙이나 위험을 만나게 되지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십 년 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자서가 황급히 물었다. [그리고 또 뭐란 말이냐?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거냐?] 귀곡자가 숙연하게 말했다. [이 산의 형세는 지나치게 요사스런 분위기가 있는데 이것이 오나라 수도인 고소성과 맥이 통하고 있으니, 언젠가 오나라 는 여자의 음기(陰氣) 때문에 그 양기(陽氣)가 손상되어 국 운이 어지러워지게 되어 있지요. 당신은 오나라의 신하이니 당신 역시 위험을 만나게 됨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 아버 지의 묘 왼편에는 사자의 모습을 닮은 봉우리가 있어서 정기 (正氣)를 가지고는 있지만, 위엄이 모자라고 인내력이 부족 해 보입니다. 그러니 분명 후손이 이 지맥(地脈)의 영향으로 순식간에 번성하기는 해도 분명 오래지 않아 그 힘이 모자라 한 대를 유지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이십 년의 세 월 동안만 액운을 만나지 않아도 다행으로 알아야 합니다!] 오자서가 그 말을 듣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오자서 역시 묘를 잘 써야 후손이 길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 묘는 무슨 묘라고 불러야 좋은가?] 귀곡자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이 묘는 뒷 부분이 마치 개의 꼬리처럼 솟아 있고 사방이 구불구불하게 굽어 있어서 마치 네개의 발과 같습니다. 그러 니 천구혈(天狗穴)이라고 부를 수 있지요.] 오자서가 기이하게 여기며 말했다. [천구(天狗)라면 아주 위엄있고 맹렬한 것으로 기세가 웅장 한 것인데, 어찌하여 힘이 부족하다는 건가? 이십 년 후에는 후손이 재앙을 받는다니?]

5.... 귀곡자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천구는 태양을 먹는 짐승이지요. 그러니까 아랫것이 하늘의


것을 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하늘이 그것을 용납하 지 않으니 어찌 되겠습니까? 오대부는 그래도 모르십니까?] 오자서는 저도 모르게 탄식하며 쓰게 웃더니 말했다. [그렇군! 선부(先父)께서는 원래 초나라의 대부로 태자의 스 승이셨지. 그런데 초나라의 평왕에게 태자 건(建)을 폐하지 말라고 간언하다가 그 어리석은 초나라 평왕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하셨네. 결국 우리 오씨 문중의 자손들까지 화를 입게 되었지. 그래서 이 오자서는 어리석은 초나라 평왕과 불구대 천의 원수지간이 되었네!] 오자서는 돌연 한스럽다는 듯이 이를 꽉 악물었다. 귀곡자가 말했다. [그래서 오대부는 오나라로 도망쳐와서 오나라 왕의 힘을 빌 어 복수하려고 하는 것이군요?] 오자서가 깜짝 놀라 말했다.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 귀곡자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오대부의 운수가 변성월각을 지나고 있고 변성월각이 붉은 것으로 보아, 길한 운을 만날 징조입니다. 그러니 오왕인 합 려의 중용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요!] 오자서가 아주 기이하게 여기며 물었다. [분명 오나라 왕은 나를 지극히 대해주고 있다. 하지만 네가 그것까지 알다니, 너는 도대체 누구냐? 어떻게 겉 모습을 보 고 모든 것을 알아 맞출 수 있는 거지? 네 이름이 뭐냐?] 귀곡자가 말했다. [난 성이 귀씨이고, 이름은 곡자라고 합니다.] 오자서가 멍청해져서 물었다. [그렇게 이상한 이름이 어디 있느냐?] 귀곡자가 정색하고 말했다.


[내 과거는 당신보다 더 험난했지요. 여태까지 살아온 시간 이 마치 귀신의 골짜기에서 간신히 기어나온 꼴과 마찬가지 엿습니다. 그런 사람이니 이름이 귀곡자라고 해서 안 될 것 이 있겠습니까? 사실 본명이 따로 있긴 합니다만, 저는 귀곡 자라는 이름이 더 좋습니다.] 오자서의 눈빛이 빛나더니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다가 결국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도리어 돌연 앞으로 달려들며 오른손 으로 귀곡자의 가슴을 향해 일장(一掌)을 내질렀다. 귀곡자가 그 일장을 피하려고 마음먹자 몸이 번쩍 하더니 즉 시 그 일장을 피할 수 있었다. 오자서는 그래도 멈추지 않고, 다시 맹렬하면서도 빠르게 순 식간에 귀곡자를 향해 49 장을 쳤다. 귀곡자는 마흔 아홉번 몸을 변화시켜, 결국 오자서의 맹렬한 장력(掌力)은 귀곡자 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오자서의 초식은 연이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점점 강력해졌 다. 한편 귀곡자의 신법(身法) 역시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점 점 더 현묘(玄妙)해져서 마치 천지 건곤이 무궁무진하게 살 아 끊임없이 숨쉬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오자서가 돌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는 자기 몸은 보호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이기지는 못하는구나.] 귀곡자는 남의 말 때문에 감정이 동요하는 성품이 아니었다. 오자서가 자기를 조롱하는 말을 해도 조금도 성내지 않고 속 으로 중얼거렸다.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야!) 그가 익힌 심룡건곤결은 이 세상의 어떠한 신공에 비해 월등 한 것이었다. 그가 마음 속으로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 다>라고 생각하자 심룡건곤진기(尋龍乾坤眞氣)가 갑자기 요 동하여, 귀곡자는 저도 모르게 용파건곤의 초식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귀곡자의 몸이 순간 하늘로 치솟으며 갑자기 반룡이 천지 건 곤의 혼돈 상태를 깨뜨리는 듯한 기세로 빙빙 돌더니 공중을 가르며 아래로 떨어지면서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라는 그의 마음에 호응하여 오자서의 머리를 후려치려고 했다.


오자서도 무공이 탁월하기는 했지만, 여태까지 이렇게 박대 정심(博大精心)한 건곤신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 안의 오묘한 비밀조차 제대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실력으로는 반격할 도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저 눈을 감으며 탄식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 이와 같은 선계(仙界)의 신공이 있다는 것을 알 았으니, 이 오자서가 오늘 여기에서 죽는다 해도 원망스러울 것이 하나 없도다!] 말을 마치고는 요동도 하지 않은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 다. 그 때 갑자기 어디선가 따뜻한 기운이 오자서에게 밀려들었 고, 그는 평온한 기분이 되었다. 귀곡자가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심룡건곤결은 강할 때는 천 지 건곤도 깨뜨릴 수 있지만, 외력(外力)의 반격을 받지 않 으면 마치 휘어진 버드나무 가지처럼 아주 부드러워지는 성 질이 있었다. 오자서가 어떠한 반항도 하지 않고 손을 거두고 죽음을 기다 리자 이 용파건곤의 초식이 심룡건곤결의 성질에 의해 아주 부드럽게 변한 것이었다. 오자서는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천지가 넓고 넓으니 용이 숨어 있고 호랑이가 누워 있는 듯 하구나. 이 오자서가 이렇게 대단한 기인을 만나게 되었으 니, 이 산에 오른 것도 헛일은 아니었다!] 오자서는 귀곡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협은 하늘이 내리신 기재요. 지금 오왕 합려는 기재를 구 하고 있으니 만약 소협께서 그를 도와주신다면 분명 환영을 받을 것이오. 소협은 나를 따라 고소성으로 가실 의향이 있 으시오? 만약 소협이 가실 의향이 있다면 내가 오왕에게 소 협을 소개시켜 주겠소. 이 오자서가 오나라를 위해 이런 기 인을 얻었으니 실로 기쁘오. 하지만 소협이 싫다고 하면 어 쩔 수 없는 일, 소협은 대단한 고수이니 원하지 않는다면 이 천하에 그 누가 소협을 억지로 끌고 갈 수 있겠소? 모든 것 은 소협의 마음에 달렸소.] 귀곡자는 그의 말을 듣고 흔쾌히 말했다.


[이 귀곡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당하 는 것인데, 오대부께서는 억지로 절 데려가려고 하지 않으시 니 저는 기꺼이 고소성으로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오자서는 아주 기뻐하며 귀곡자를 인도하여 산을 달려 내려 갔다. 얼마 후, 두 사람은 고소성에 도착했다. 귀곡자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오나라의 도 성에는 모두 여덟개의 문이 있는데, 육로와 수로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문에는 창문( 門), 반문(盤門), 서문(胥門), 사 문(蛇門), 루문(婁門), 장문(匠門), 제문(齊門), 평문(平門) 이라는 이름이 붙혀져 있었다. 모든 문은 철통같이 아주 삼 엄하게 경비되고 있었다. 귀곡자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스물 여덟개의 문에는 모두 도로가 나 있고, 오천의 병마가 깃발을 휘날리며 운집해 있군. 과연 드높은 기세를 자랑하고 있구나.] 오자서는 귀곡자를 데리고 창문으로 들어갔다. 수비를 하는 오나라 군사들은 오대부를 보고 저지하지 않고 귀곡자를 데 리고 들어가도록 했다. 그렇다고 오자서의 비위를 맞추려는 기색도 없이, 그저 조용히 당당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귀곡자는 고개를 들어 성문 위에 새겨져 있는 <역사지거부파 천문(力士持巨斧破天門)>이라는 그림을 보고 이상하여 말했 다. [오대부, 힘센 장사가 거대한 도끼로 하늘을 깨뜨리는 이 그 림에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오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오나라의 수도는 이 오자서가 직접 감독하고 있는 곳입니다. 저 그림은 서쪽의 천문(天門)을 깨 뜨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나머지 일곱개의 문에도 모두 제가 이름을 붙혀 놓았지요.] 귀곡자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서쪽에는 초나라가 있으니 창문이란 바로 서쪽에 있는 초나 라의 문을 깨뜨린다는 것입니까?] 오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소협은 과연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단번에 그 안에 담긴 비밀을 알아 맞추시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소협께 서는 반문에 담긴 뜻도 아시겠습니까?] 반문은 고소성의 서남쪽에 위치한 문으로, 성문 위에는 나무 로 반룡을 새겨 놓았다. 귀곡자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반문에서 남쪽으로 백리를 가면 바로 월나라의 땅이고, 초 나라와 월나라는 오나라의 원수이니, 반문과 창문은 바로 서 쪽으로는 초나라를 깨뜨리고, 남쪽으로는 월나라를 정복하자 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자서가 그 말을 듣고 감탄하며 말했다. [소협은 박학다식할 뿐만 아니라, 신통력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데, 그런 소협께서 이제 오나라에 오셨으니 오나 라의 국운은 번성할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귀곡자의 이런 추측 때문에 후에 오나라의 고소성의 창문은 파초문(破楚門)이라고도 불리고, 반문은 진월문(鎭越門)이라 고 불리게 된다. 오자서는 귀곡자를 데리고 고소성의 번화한 거리를 지나 자 성(子城:본성에 부속되어 있는 작은 성. 본성은 모성(母城) 이라고 함)에 도착했다. 자성은 사면의 담이 3 장 정도나 높이 솟아 있고, 성의 주변 에는 육지에서 통하는 문이 세개, 수로에서 통하는 문이 두 개가 있었다. 수비병들은 모두 금의(錦衣)를 입고 엄숙한 표 정으로 서 있어서, 한눈에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정예 부대라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자서는 귀곡자를 데리고 육지에서 통하는 문 중의 한 곳으 로 들어가며 조용히 귀곡자에게 말했다. [이 곳이 오왕 합려의 왕궁입니다. 왕궁의 경비는 아주 삼엄 해서 오나라의 대부(大夫) 이하의 사람들은 왕이 부르기 전 에는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고, 함부로 들어 가려고 하다가는 즉시 사형에 처해지고 마니, 소협께서도 조 심하시기 바랍니다.] 귀곡자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이 귀곡자는 일개 촌놈에 불과해서 아무데나 경솔하게 뛰어 들곤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몸 하나 보호하지 못하겠습니 까?] 오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이 오자서가 모시고 왔으니 오왕(吳王)이 뭐라고 할 리 없 으니 소협께서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궁궐에는 태 자인 부차(夫差) 이하 모든 왕실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경비 가 삼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랍니다. 잠시 후 소협이 오왕 을 만날 때, 오왕이 소협을 마음에 들어 하시면 그 후부터는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됩니다.] 귀곡자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 기회가 닿을지 어떨지 두고 보도록 하지요!] 두 사람이 궁궐 문으로 들어가자 금의를 입은 수비병들이 오 자서의 신분을 알면서도 자세히 두 사람의 몸을 조사했다. 아무런 병기도 지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그제서 야 두 사람을 들어가도록 해 주었다. 궁 안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 다시 성 하나가 있는데 수비가 더욱 삼엄하여 귀곡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왕의 궁궐은 과연 철통같이 수비되고 있구나. 민심을 얻 은 군주라면 이렇게까지 삼엄한 경비를 펼칠 필요가 있겠는 가?) 이것은 귀곡자가 혼자 속으로 중얼거린 말일 뿐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오자서는 귀곡자를 데리고 내성(內城)의 성문으로 들어가 왕 을 뵙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문지기가 아무 말도 않고 왕에 게 알리러 들어갔다가 나와서 오자서에게 말하였다. [오대부, 왕께서 명하시기를, 오대부는 정전(正展)으로 들어 옵시랍니다.] 귀곡자는 오자서를 따라 정전으로 향했다. 궁궐 안에는 넓은 연못이 있었고 연못 안에는 네모난 거석이 놓여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옥과 같았다. 귀곡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뜻밖에도 오나라의 경내에도 재주꾼이 있었나 보군. 이런


명당 자리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있는걸 보니. 설마 오나라가 점점 흥성하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 정전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위풍당당한 수많은 군사들이 운집해 있었다. 제각기 온갖 종류의 병기를 지니고 전 위에 나열하여 창과 방패를 들고 삼엄한 분위기로 서 있었다. 병기는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수백 명이나 되는 시위(侍衛) 들이 마치 나무로 만든 인형처럼 눈을 부릅뜨고 입을 꽉 다 물고 가슴을 편 채 양쪽에 서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귀곡자는 주(周)나라 천자(天子)의 수도인 낙양(洛陽) 출신 으로 이전에 주나라 왕조의 제례 행사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위용보다 훨씬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나라 궁궐의 정전에는 오직 무장만 보이고 문신은 보이지 않으니 오나라는 무(武)를 숭상하는 나라임을 알겠구나.) 귀곡자는 오자서의 뒤를 따라 고개를 쳐들고 성큼 성큼 발소 리를 내면서 걸었으나, 양쪽의 무사들은 보고도 못본 체하며 오로지 왕좌 앞에서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오자서가 급히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말했다. [소신 오자서가 주상을 뵈옵니다. 부디 주상께서는 만수무강 하시옵소서!] [오대부, 듣자하니 경이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기재를 과인 에게 보이러 왔다는데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어서 과인 에게 인사를 시키도록 하게.] 왕좌 위에서 갑자기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여서 왕의 위엄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귀곡자가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니 왕좌의 중앙에 중년의 왕 이 앉아 있었다. 그의 양쪽 귀밑머리는 약간 희끗희끗했고, 긴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별처럼 빛나는 눈빛으로 발 아래에 무릎 꿇고 있는 오자서를 주시하고 있었다. 오자서가 그 말을 듣고 급히 자기 옆에 서 있는 귀곡자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라고 눈짓했다. 그러나 귀곡자는 보고도 못본 체하며 오자서만 듣도록 전음으로 말했다. [이 귀곡자는 일생 동안 오직 두 사람 앞에서만 무릎을 꿇습 니다. 한 사람은 날 낳아주신 아버님이고, 또 다른 한 사람 은 사부 노자님이지요. 그 이외의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릴 수 없습니다.] 오자서는 귀곡자가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말을 하는 것을 알 았다. 그는 더이상 귀곡자에게 강요할 수 없어 다시 왕을 향 해 아뢰었다. [주상 전하, 이 소년은 귀곡자라고 하며, 소인이 주상께 보 여 드리고자 한 바로 그 천하에서 제일가는 기인입니다. 주 상께서 자세히 살펴 봐 주시옵소서.] 오왕 합려는 귀곡자를 주시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의 곁에는 한 청년이 서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하하 웃으 며 말했다. [이 녀석이 감히 스스로 천하 제일의 기인이라고 칭하고 다 닌다는 것이오? 설마 감히 우리를 속이는 것은 아니겠지?] 오자서가 그 말을 듣고 귀곡자에게 급하게 말했다. [저 분은 태자 전하이신 부차님이오. 어서 그에게 절을 올려 예를 표시하도록 하십시오.] 귀곡자가 또 다시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오자서에게 말했다. [오대부, 이 귀곡자는 오왕에게도 무릎 꿇고 절하지 않았는 데 어찌 그의 아들에게 절을 하겠습니까? 이 귀곡자에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 그냥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고 태연하게 계시면 됩니다.] 오자서는 그 말을 듣고는 더 이상 귀곡자를 강요할 수 없다 는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태자 전하인 부차 에게 간곡히 아뢰었다. [그는 출신이 보잘 것 없어 왕궁의 예의 범절에 대해서는 아 는 바가 없으니, 태자 전하께서는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태자 부차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만약 정말로 무언가 배워 아는 것이 있다면 어찌 이렇게 무 례한 행동을 할 수 있었겠소? 만약 배운 것도 없는 무식한 놈이라면 또 어찌 감히 오나라의 궁전에 들어와 왕을 배알하 겠다고 청할 수 있단 말이오? 흐흐, 설사 그가 엄청난 기인 이라 해도 목이 잘리는 형벌을 면할 수 없을 것 같구료.]


오자서는 부차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속으로 깜짝 놀라 황급히 오왕 합려에게 아뢰었다. [주상, 태자 전하께서는 천하에서 가장 용맹하시니 이 소협 이 어찌 감히 태자 전하보다 뛰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에게도 정말 장점이 있어서 소신은 오나라에 큰 이득이 될 것 같아 주상께 천거히러 왔으니, 주상께서는 그를 잘 살펴 주시옵소서.] 오왕 합려는 형형한 눈빛으로 귀곡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 다. 그는 귀곡자가 모욕을 당해도 신경쓰지 않고 아량있는 모습 으로 태연하게 서 있는 것을 보고 마음에 들었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니 오대부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하지만 이 소협이 어떤 능력이 있어 기재라고 하는지 아직 모르겠구료.]

6.... 오자서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위로는 천기를 알고, 아래로는 지리를 살피며, 인간 세상의 길흉화복을 두루 살필 줄 압니다. 천기와 지리와 인간의 길 흉화복에 대해 깜짝 놀랄 만큼 아는 바가 넓으니, 주상께서 그를 잘 살피시어 곁에 두고 쓰신다면 분명 주상의 위업에 큰 이득이 될 것이옵니다.] 오왕 합려가 그 말을 듣고 나직히 무언가 말하려는데 그의 옆에 서 있던 태자 부차가 갑자기 껄껄대고 웃더니 말했다. [그는 대체 누구요? 오대부가 감히 그를 이처럼 과장해서 말 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구료. 하늘에 대해 알고 땅에 대해 알 고 인간 세상의 일까지 두루 안다고? 위로는 천기를 알고 아 래로는 지리를 알고 또 인간의 길흉화복까지 모두 안다고? 흐흐흐, 이처럼 어린 녀석이 그렇게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언제쯤 부왕께서 패업을 달성하게 될 지도 안단 말이 오?] 오자서는 태자 부차가 사람들 앞에서 귀곡자를 일부러 모욕 하려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오왕 합려가 미소를 지을 뿐 그를 막지 않는 것을 보자, 오왕이 태자 부 차를 통해 귀곡자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려는


속셈인 것을 눈치채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귀곡자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겠는걸. 그가 만약 주상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면 당연히 아무 걱정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무사히 이 성을 빠져 나갈 수 있을 지...!) 오자서는 태자 부차의 신공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와 대적하려면 자기 같은 사람 열 명이 함께 덤벼도 절대 로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 궁전 안에 는 수백 명의 고수들이 지키고 있으니 귀곡자의 무공이 아무 리 높다 해도 쉽게 도망가기 어려울 것이었다. 오자서는 속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귀곡자를 오왕에게 데리고 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만약 귀곡자가 오왕의 진노라도 사게 되면 오자서 역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뿐 만 아니라, 귀곡자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었다. 태자 부차는 신공이 엄청나게 뛰어나고 자만심이 너무 강하 기 때문에 여태껏 오자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왕은 부차를 무척 신임하고 있으므로, 부차의 가벼운 말 한마디로 인해 초나라에서 도망온 이 오자서는 또 다시 이 곳을 피해 도망치는 신세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초왕에 대한 복수를 꾸미던 그의 계획 역시 수포로 돌 아갈 수도 있었다! 오자서는 이렇게 생각하자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안절부절 못했다. 부차는 오자서의 표정에 당황함이 가득한 것을 보고 더더욱 귀곡자가 하찮은 인간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이 때 귀곡자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성은 귀씨이고 이름은 곡자라 합니다. 귀곡에서 태어났 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성씨는 지니지 못했습니다.] 부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곡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부차는 귀신을 믿지 않는다. 네가 귀곡(鬼谷)에서 태어 났든, 신곡(神谷)에서 태어났든 상관하지 않는다. 정말 능력 이 있기만 하다면 호곡(好谷)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상관 없 다!] 귀곡자가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태자 전하. 귀곡이든 신곡이든 인재만 태어난다 면, 그 곳이 바로 호곡이라 할 수 있지요.] 그 말을 듣고 부차는 화를 내며 말했다. [귀곡자, 네 이놈, 더 이상 헛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명 하노니, 일곱 걸음을 움직이는 동안에 오나라가 언제 패업을 달성할 수 있는지 대답하도록 하여라. 만약 대답하지 못한다 면, 흐흐흐...] 오자서는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이처럼 엄청난 천하 대사를 알아 맞 추라고 하다니, 신선이 하강해 이 세상에 내려온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귀곡자는 오왕 합려와 태자 부차를 잠시 응시했다. 짧은 시 간 자세히 그들을 살펴 보고 있자, 갑자기 영암산과 고소성 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모습이 생각났다. 그 순간 그는 일곱 걸음을 걸을 것도 없이 아주 낭랑한 목소 리로 말했다. [가을이 오니 오랫동안 앓던 병이 나아 소생하게 되고, 닭과 오리들이 온 정원을 돌아다니며 시끄럽게 울어대네. 칼이 맞 부딪히는 소리가 쟁쟁하게 귀에 울리니, 미인들은 마치 나방 이 불빛을 찾듯이 남쪽을 향해 가누나.] 부차는 그 말을 듣고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몰라 또 다시 화가 났다. 그는 귀곡자에게 매섭게 소리치며 말했다. [헛소리 하지 말아라! 요상한 말로 사람들을 미혹시키려고 들다니, 그것이 오나라의 패업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귀곡자는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차는 더 욱 화가 나서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 때, 오왕 합려가 갑자기 말했다. [잠깐! 귀곡자, 과인이 네게 묻겠다. 과인에게 병이 있는데 가을이 되자 그 병이 다 나은 바가 있다. 이것은 과인 혼자 만 알고 있는 비밀인데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알았느냐?]


귀곡자는 오왕 합려가 태자 부차보다 더 신중하고 점잖은 것 을 보고 미소를 떠올리며 다시 말했다. [대왕의 년운(年運)은 코 아래의 준두(準頭)를 지나가고 있 는데 준두에 잿빛 기운이 서려서 질위궁(疾危宮)을 침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 가을이 되면서 준두에서 보이던 잿빛 이 사라졌으니 척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오왕 합려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좋다! 좋아! 첫 구절, 가을이 오니 오랫동안 앓던 병이 나 아 소생하게 된다는 말은 정말 신통력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 구나. 과인이 다시 네게 묻겠다. 그렇다면 나머지 세 구절에 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느냐?] 귀곡자의 나머지 세 구절은 오나라의 국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 뜻을 설명하기에 적당치 않다고 생각 되었다. 귀곡자는 오왕 합려가 기개가 넓고 부차의 광폭함과 오만함 과는 달리 도량이 넓은 것을 보고는 약간의 실마리를 주기로 했다. [그것은 앞으로의 오나라의 기운에 대해 말한 것일 뿐입니 다. 허황되다고 여겨질 수도 있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 니다! 앞으로 저절로 알게 되실 겁니다.] 오왕 합려가 추궁하듯이 물었다. [오나라의 국운이 도대체 어떻다는 것이냐? 소협은 숨기지 말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도록 하여라. 과인이 삼가 듣 겠노라.]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같이 미천한 것이 아무 것이나 사실대로 말하다가는 그것 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이 미천한 것의 머리를 보 존하지 못할까봐 걱정됩니다. 그러니 이 미천한 것이 어찌 감히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왕 합려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과인의 궁전 안에서 누가 감히 너를 죽일 수 있단 말이냐? 좋다! 과인이 네게 면사(免死)의 금패(金牌)를 내리도록 하 겠다. 그것이 있으면 이 오나라의 경내에서는 아무도 네 목


을 노리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노라.] 오왕 합려는 말을 마치고 정말로 명령을 내려 귀곡자에게 면 사라고 쓰인 금패를 내려주었다. 귀곡자 역시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 품속에 넣은 후에 오왕 합려에게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 [대왕의 운은 준두를 지나고 있는데, 지금 준두에서 붉은 기 운이 나와 천정(天庭)으로 치솟고 있으니 그것은 북방 정벌 이 반드시 승리하며 패업이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 다.] 귀곡자가 말을 말했다.

계속하려는데 오왕

합려가 갑자기 끼어들며

[운이 준두를 지나고 있다고 하니 묻겠노라. 그대는 관상을 보고 과인의 나이가 몇 살인지 알 수 있는가?] 귀곡자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운이 준두를 지나는 때는 꼭 사십 팔 세 되는 해입니다.] 오왕 합려가 그 말을 듣고 미소를 머금고 오자서에게 말했 다. [오대부, 그대는 이 소협의 예측이 정확하다고 생각하시오?] 오자서가 황급히 몸을 굽혀 예를 표하며 말했다. [소신은 주상의 연세를 모르옵니다. 함부로 판단할 수 없으 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오왕 합려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오대부야 당연히 모르겠지. 오대부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 궁궐 안에서 과인 혼자 외에는 과인의 나이를 아무도 모 르고 있소! 그래서 이에 대한 대답으로 소년 협사의 신기와 재능을 알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여 물어 본 것이오. 과연 신통하구료.] 오왕 합려가 이렇게 말하자 오자서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 을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귀곡자는 과연

능력이 대단하구나. 주상의 이런 비밀까지


그의 말 한마디로 밝혀지는구나.) 이 때 오왕이 다시 말했다. [앞 단락에 대해서는 소협이 대단한 신통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하냐?] 귀곡자는 오왕 합려의 일을 처리하는 태도가 기상이 뛰어나 고 도량이 넓은 것을 보고는 마음 속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 어 중얼거렸다. (어째서 이런 사람이 간장과 박했을까?)

막야 부부를 그토록 심하게 핍

그는 계속 이상하게 여기다가 태자 부차를 자세히 한 번 살 펴보고는 갑자기 뭔가 깨닫고 중얼거렸다. (이 자는 기고만장하여 그 했지 못하지 않구나.)

기세가 제 아비보다도 더하면 더

귀곡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말했다. [감히 이 미천한 것이 대담하게 직언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 시오. 오국의 패업은 이미 완성되고 있지만, 그것이 오래 가 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악한 기운 두가지가 도사리고 있어서 그 악한 기운으로 인해 오나라의 국운이 쇠 퇴하게 될 것입니다.] 오왕 합려가 급히 물었다. [어떤 악한 기운 말이냐?] 귀곡자가 말했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악한 기운으로, 그것 이 왕성해지는 날이면 국운이 쇠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외부로부터 오는 악한 기운으로, 외부로부터 오는 악한 기운과 내재되어 있는 악한 기운이 섞이게 되면 국운은 완전히 망하고 말 것입니다!] 오왕 합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자 부차는 참지 못하고 노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무섭게 꾸짖었다. [이런 발칙한 놈 같으니! 네가 감히

오나라 왕궁에서 그런


대역무도한 요상한 소리를 지껄여댄단 말이냐! 너는 멸족(滅 族)의 형벌도 무섭지 않단 말이냐?] 귀곡자는 부차를 쳐다보면서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칼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쟁쟁하게 귀에 울리니 미인들은 마 치 나방이 불빛을 찾듯이 남쪽으로 향해 가누나, 라는 뒷구 절은 바로 부차로 인한 것이다.) 그는 마음 속으로 더 이상 부차의 말에 상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왕 합려는 깊이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차분한 것도 같고 화 가 난 것도 같은 표정으로 귀곡자에게 말했다. [그 외부로부터 오는 악한 기운은 없앨 방도가 없는 것이냐? 소협은 솔직히 말해주길 바란다.] 귀곡자는 그가 면사 금패를 내려주는 것을 보고 그의 태도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오자서를 생각하니 눈 앞에 닥쳐 오는 오나라의 액운을 모른척 할 수가 없었고, 간장과 막야의 일을 생각하니 오왕 합려를 도와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시 조용히 다.

생각하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

[오나라에게 닥쳐올 앞으로의 액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귀곡자는 일부러 말을 멈췄다. 오왕 합려가 과연 급히 물었다. [다만 무엇이란 말이냐? 액운을 피할 방법이 있기만 하다면, 과인이 네게 황금 열 근을 상금으로 내리겠노라!] 귀곡자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부귀란 것은 이 귀곡자의 눈에는 똥과 다름 없습니다! 이 미천한 것은 다른 것은 다 필요 없고, 오직 대왕께서 진심으 로 제 방법에 협조해 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오왕 합려가 말했다. [어떻게 협조하라는 것인가?]


귀곡자가 말했다. [병법에서 말하기를, 다른 곳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가 있는 곳을 평안히 하라고 했습니다. 국운을 떨치는 방법도 이와 똑같은 이치입니다. 즉, 외부로부터 오는 악한 기운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선 내재하고 있는 악한 기운부터 없애야 합니다. 내재하던 악한 기운이 사라지면 외부에서 오 던 악한 기운이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됩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쇠약해져 가는 국운을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 다.] 오왕 합려가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어떻게 해야 내재하고 있는 악한 기운을 없엘 수 있단 말인 가? 과인은 인재들을 보면 모두 등용하고, 안정된 정치에 힘 쓰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민심이 동요된 바 없는데, 어떻게 나라가 망할 악한 기운이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귀곡자는 그 말을 듣고 자기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인하고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악한 기운이란 이미 어디엔가 잠복하고 있습니다. 그저 대왕께서 모르고 계실 뿐이지요! 예를 들어 대왕께서는 명령을 내려 간장, 막야 부부에게 삼개월 내에 보검을 주조하라고 시키고, 억지로 검을 만들도록 위협해서 결국 간장과 막야 부부는 지금 절망에 빠져 살 희망을 잃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묻겠습니다, 그까짓 검 하나 때문에 백 성들을 절망으로 밀어 넣는다면, 이것이 내재하고 있는 악한 기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옳은 길이 무엇 인지 살펴 주시옵소서.] 귀곡자가 이 말을 하자 태자 부차의 안색이 갑자기 일변하더 니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간장과 막야는 오나라의 백성이니 당연히 나라를 위해 일을 해야 한다. 그들에게 보검을 만들어 바치라고 한 것은 초나 라를 무찌르고 월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인데 무엇이 부당한 처사라는 거냐? 네가 감히 그 요상한 것들을 대신하여 무례 하게 지껄이려는 수작이냐?] 귀곡자가 웃으며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없이 태연히 말했다. [억지로 따는

오이는 달지 않고, 강제로 따는 과일은 맛이


없기 마련입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이러한 간단한 이치조차 모르고 계시는가 보군요?] 태자 부차는 화가 날대로 나서 소리를 지르며 귀곡자에게 달 려 들어 계단 아래로 밀치려고 했다. 귀곡자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눈썹 하나 까닭하지 않고 있었다. 오왕 합려가 급하게 부차를 막으며 말했다. [태자는 경거 하겠다!]

망동하지 말아라! 과인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7... 오왕 합려가 다시 귀곡자에게 물었다. [검에 대한 일은 분명 과인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초나라를 정벌하는 일이 눈 앞에 닥쳐 왔는데도 태자에게 아직 보검이 없고, 과인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간장과 막야 부부가 검을 잘 만들기로 소문이 났길래 삼개월 내에 검을 만들어 바치라 고 했을 뿐, 그 일에는 어떤 악의도 없었다.] 귀곡자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하지만 사람이 먹을 양식도 제한하고, 살 길도 막아 놓고 그렇게 검을 만들라고 강요한다면 어찌 좋은 뜻에서 한 일이 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오왕 합려는 그 말을 듣고 태자 부차를 노려보았다. 그 일은 분명 태자 단독으로 조치한 일임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오왕 합려는 태자가 한 일로 인해 기분이 언짢았으나, 초나 라를 정벌하는 일이 눈 앞에 닥쳐왔기 때문에 태자의 기분과 용기를 꺽고 싶지 않아, 어쩔수 없이 그저 속으로 질책하려 는 소리를 억눌러야 했다. 그는 귀곡자를 향해 말했다. [과인이 대의를 도모하려는 성급한 생각으로 간장 부부에게 고통을 주었다니, 검을 다 만든 후 과인이 그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 주면 될 것이다! 어떤가, 그러면 악한 기운이 없 어지게 되는가?] 귀곡자가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간장이 검을 바칠 때, 대왕께선 여전히 넓으신 도량으로 그들 식구가 평안히 살아갈 수 있도 록 보장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오왕 합려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아주 쉬운 일이다! 과인은 지금 당장 그들 부부에게 금패를 내려 아무도 그들에게 무엇을 강요하거나 해치지 못 하도록 하겠노라!] 오왕 합려는 잠시 후 정말로 명령을 내렸다. [무차(無且) 장군! 그대는 면사 금패를 가지고 어서 가서 간 장 부부에게 금패를 전해 주어 안심하고 검을 만들 수 있게 하라!] 무차 장군이 즉시 앞으로 나와 면사 금패를 가지고 궁을 빠 져 나갔다. 귀곡자는 마음이 편해져서 생각했다. (오왕 합려는 뜻밖에도 엄하면서도 사리에 밝은 군왕이로구 나.) 귀곡자는 갑자기 오왕 합려에 대한 호감이 생겨서 그의 질문 을 기다리지도 않고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대왕께서 이처럼 행동하신다면 내재된 악한 기운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미천한 것이 힘이 닿는 대로 오나라 국력 이 장차 쇠퇴하지 않도록 성심껏 돕겠습니다!] 오왕 합려가 그 말을 듣고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소협은 장차 어떤 묘법을 사용하려고 하는가?]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묘법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실제로 현장을 답사해야 합니 다. 그래서 감히 청하노니, 오왕께서 어가를 움직이시어 영 암산에 한번 행차하실 수 있겠습니까?] 오왕 합려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과인이 남정북벌하는 동안 비오는 듯 쏟아지는 화살을 두려 워해 본 적이 없는데, 고작 영암산에 다녀 오는 것을 두려워


하겠는가? 당장 영암산에 갈 차비를 서두르도록 하겠다!] 오왕 합려는 말을 멈추고 다시 태자 부차에게 말했다. [너도 부왕과 함께 산에 다녀오겠느냐?] 태자 부차는 갑자기 눈빛을 빛내더니 말했다. [저는 고소대(姑蘇臺)에서 병마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러 니 고소성에 남아 이 곳을 지키고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오왕 합려는 잠시 생각하더니 오자서에게 말했다. [오대부 역시 영암산에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으니 고소성에 남아 이 곳을 지키도록 하라!] 오자서는 부차가 영암산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잠 시 생각에 잠겼다가 오왕이 전교를 내리자 기쁜 마음으로 명 령에 따르겠다고 대답하였다. 오왕 합려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무사 네 명을 거느리고 귀곡 자와 함께 고소성의 서남쪽에 있는 영암산으로 향했다. 이미 정오 무렵이었다. 영암산 위에는 태양이 찬란히 빛나고 영암산은 마치 미녀와 같은 풍만하고 요염한 자태를 뽑내고 있었다. 오왕 합려는 숱한 곳을 정벌한 경험이 있지만, 오나라의 수 도인 고소성과 가까운 곳에 있는 영암산에는 가 볼 시간이 없었다. 이제 귀곡자와 함께 영암산 정상에 올라 보니 동북쪽으로는 고소성이 안개에 가려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 곳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워 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다. 마치 봉래(蓬萊)의 선경(仙境)인 듯, 신기루인 듯하 여 마음이 설레었다. 오왕 합려는 일평생 여색을 가까이 한 적이 없어 후궁도 고 작 한두 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태자 부차 역시 감히 방종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이 산에 오르니 갑자기 흥분 이 되면서 계속해서 심장이 뛰고 마치 먼 곳에 있는 연인을 그리워하듯 욕정이 들끓어 올라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었다. 마치 눈 앞에 절세 미인이 적나라한 옥체(玉體)를 드러내고 꽃숲 사이에 가로 누워 있는 것을 본 것처럼 흥분되어 음욕 이 불처럼 이는 것이었다.


수행해 온 네 명의 무사들도 모두 얼굴이 벌겋게 되어 불두 덩에서 한 줄기 뜨거운 기운이 솟아 올라, 미녀를 찾아 이 기운을 발산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는 듯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귀곡자는 오왕 합려와 네 명의 무사들의 표정을 보고는 마음 속으로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무섭구나, 무서워! 이 산의 음기(陰氣)가 지나치게 강하구 나. 오왕 합려의 양강(陽剛)한 기운 역시 대단하던데 이 산 의 음기를 만나니 견뎌내지 못하는구나. 만약 이 곳에서 삼 일만 머무르게 되면 성정이 어지러워지고 말겠다!) 귀곡자는 이미 합려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해 를 입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의 마음이 움직이자 진기가 발 동되어 저절로 용화건곤의 초식을 펼쳐내게 되었다. 그의 몸이 갑자기 마치 한 마리의 용처럼 변하여 하늘로 치 솟아 올라 영암봉 봉우리에 서 있는 합려 등 다섯 명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합려는 마음이 어지럽고 미녀와 한 몸이 되어 뒹구는 환상에 빠져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정수리가 뜨거워지더니 눈 앞에 용처럼 생긴 무엇인가가 그에게 뜨거운 열기를 한 줄기 뿜어냈다. 열기는 곧장 그의 체내로 들어왔고, 열기가 느껴지자 여인을 그리던 마음이 즉시 사라지면서 미망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그가 몸을 돌려 보니 네 명의 무사들이 그와 마찬가지로 한 바탕 여인에 대한 미혹에 빠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합려가 다시 몸을 돌려 살펴 보니 어느새 눈 앞에 있던 용이 사라지고 없었다. 귀곡자는 유유히 아래로 내려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아주 상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의 곁에 조용히 섰다. 합려는 얼굴을 붉히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부끄럽구나, 부끄러워! 나는 반평생을 싸움으로 보냈는데, 불혹의 나이가 넘었으나 이 소년보다도 성정이 굳세지 못하 다니! 이 소년은 과연 엄청난 내력을 지녔나 보구나!) 합려는 참지 못하고 귀곡자에게 물었다.


[사실대로 말해 주게. 과인은 방금 흥분이 고조되어 견디기 힘들 정도였는데, 갑자기 눈 앞에 한 마리 용이 나타나 과인 의 정수리를 향해 뜨거운 기운을 내뿜었네. 과인은 그 뜨거 운 기운을 느끼자 마음이 갑자기 맑아지게 되었는데, 이 꿈 은 도대체 무슨 뜻을 담고 있는가? 길조인가, 아니면 흉조인 가? 소협이 알려 주었으면 좋겠군.] 귀곡자는 그저 담담히 웃고만 있었다. 합려가 산맥의 영향을 받아 유혹에 빠졌었고, 또 그가 펼친 용화건곤의 신법을 꿈 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을 보자, 그대로 믿게 내버려 두고 싶 어져 웃으며 말했다. [꿈은 내재된 심령을 보여주는 것인데, 외부에서 어떤 영향 을 받으면 환영을 보기 마련입니다. 꿈은 자신의 흥망 성쇠 에 막대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이 산은 음기가 너 무 강해서 세상 사람들이 이 곳에 오게 되면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대왕께서 여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 겼다고 해도 신기할 것이 없지요!] 합려는 그 말을 듣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이곳은 오나라를 보호하는 산으로 생각하고 오나라의 선조 들과 공을 세운 대신들을 모두 이 곳에 묻어, 오나라의 조종 산맥(祖宗山脈)이라고 불렀는데, 이 곳의 음기가 그렇게 기 이할 정도로 강하다면, 오나라의 국운에 좋지 않은 영향이라 도 끼치지 않을까 염려가 되는군.] 귀곡자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왕의 지금 그 말씀은 오나라의 국운에 대한 핵심을 말씀 하신 것입니다! 대왕께서 한번 이 곳에 서 보십시오. 멀리 동북쪽으로 고소성이 보이는 것 외에 또 무엇이 보이십니 까?] 오왕 합려는 그 말대로 영암산 봉우리의 정상에 똑바로 서서 멀리 동북면의 고소성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다가, 점차 얼굴에 의심이 가 득하더니 이어 그 의심은 놀람으로 바뀌었다. 그는 중얼거리며 말했다. [알고 보니 영암산은 고소성과 하나로 이어져 있군. 아주 기 이한데? 백기(白氣)가 고소성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으니 이 것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네. 고소성이 백기에 의해 뒤덮 이면서 보일듯 말듯한 형상이 되면서 마치 하얀 비단을 입은


아리따운 신선의 모습처럼 보이는군. 이것은 정녕 기이하고 기이한 일이도다!] 귀곡자가 말했다. [그것은 고소산의 맥이 시작되는 이 산의 음기가 너무 강한 탓이옵니다. 그 영향을 받아서 오나라 국운은 처음에는 마치 수많은 미녀가 한 자리에 모인 듯이 화려하고 흥성하지만, 피는 꽃은 결국은 점차 시들게 되듯이 꽃이 떨어지듯, 흥성 함이 사라지면서 그 음기가 고소성을 덮게 되는 까닭이지요. 이렇게 수도의 흥성함이 사라지면 결국 나라의 기운 역시 쇠 퇴하고 말겠지요!] 오왕 합려가 놀라 말했다. [어찌해서 이것이 수도와 국운의 쇠퇴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 인가?] 귀곡자가 말했다. [음기란 여색을 의미합니다. 음기가 만약 고소성을 덮는다면 강양한 기운은 자연히 쇠퇴하기 마련이고, 온갖 독한 것과 사악한 것들이 서로 경쟁하듯 생겨나게 되니, 한 나라를 멸 망시킬 수도 있게 되는 것이지요!] 합려는 다급해져서 물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는가?] 귀곡자가 조용히 말했다. [대왕의 운은 지금 준두를 지나고 있는데, 준두에 붉은 기운 이 있고, 다시 간태(諫台)를 거쳐, 다시 정위(廷尉), 인중 (人中), 선보(仙甫), 식창(食倉), 법령(法令), 부이(附耳), 수성(水星), 승장(承漿), 지고(地庫), 파지(波池), 금루(金 縷)를 지나 저귀(抵歸)로 오게 되면 그 움직임이 중단되니, 바로 대왕께서 예순 여덟 살이 되는 해에 나라가 기울어질 조짐이 보입니다!] 합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과인은 지금 마흔 여덟 살이니 예순 여덟이라면 이십 년 후 의 일이 아닌가? 이것이 영암산의 음기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귀곡자가 미소하며 손을 뻗어 고소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봉우리의 용맥(龍脈)이 곧장 고소성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는데, 그 동안에 스무 번의 크고 작은 기복이 있고, 그 기 복 하나는 일 년의 운을 나타내니, 스무 번의 기복은 이십 년 후에 음기가 고소성을 완전히 뒤덮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 니다.] 합려는 그 말을 듣고 귀곡자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자세 히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백기가 고소성 방향으로 곧장 퍼져 나가고 있는데, 중간에는 정말 스무 개의 기복이 파도치는 듯한 모습으로 숨 어 있군 그래! 이십 년이면 과연 오나라 국운이 끝나게 된단 말이지? 그렇다면 벗어날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인가?] 귀곡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무엇인가 주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합려는 귀곡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 자 그의 속마음을 대강 짐작하고 급히 말했다. [소협은 마음을 놓게. 과인은 이미 오나라에 내재된 악한 기 운을 없애겠다고 약속했고, 또 반드시 그 약속대로 행할 것 이네. 간장 부부의 경우, 그들이 보검을 만들어 오든 그렇지 못하든 과인은 이미 면사 금패를 내렸으니 보검을 만들어 오 지 못한다 해서 사형에 처해질 리가 없네! 과인은 앞으로 더 열심히 정치에 힘쓰고, 백성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백성 들의 즐거움을 과인의 즐거움으로 알고, 백성들의 고통을 과 인의 고통으로 생각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오나라에 내재해 있다는 그 악한 기운은 분명히 없어지고 말 것이네! 소협은 오나라의 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돕기로 약속하고 외부로 부터 오는 악한 기운을 없애겠다고 약속했으니, 소협의 말이 라면 다 따를 준비가 되어 있네.] 귀곡자는 합려의 말에 진실이 깃들어 가득한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있고, 늠름한 기상이

(이 귀곡자는 천하의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데 뜻을 두고 있 는데, 만약 오나라 왕으로 하여금 정치에 힘쓰고 백성을 사 랑하게 하고, 백성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게 하고 백성의 즐거움을 자기의 즐거움으로 여기게 한다면, 곧 수천 수만의 백성들을 돕는 길이 되니, 어떤 한 사람을 돕는 것보 다는 훨씬 나은 것이겠지!)


귀곡자는 이렇게 생각하자 열국(列國)을 주유하며 각 나라의 군주를 도와 천하의 백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찾 아 보아겠다는 큰 뜻을 품게 되었다. 귀곡자는 마음이 정해지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대왕께서 그렇게 백성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지 신다면 외부로부터 오는 악한 기운은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 다!] 귀곡자는 잠시 후 다시 오왕 합려를 향해 물었다. [오왕께서 좀 전에 오왕의 역대 선조들이 모두 이 영암산에 묻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왕릉을 좀 볼 수 있을까 요?] 오왕 합려가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소협은 오나라의 국운을 구하고자 하면서 왕릉은 무엇 때문 에 보려고 하는 것인가?]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왕께서 방금 꿈 속에서 한 마리 용이 대왕의 정수리를 향 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자 정신이 맑아지게 되었다고 말씀 하지 않으셨습니까?] 합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지! 과인은 안 그래도 소협에게 어째서 그렇게 기이한 현상이 보였는지 물어 보려고 하던 참이었네.] 귀곡자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왕께서 보신 한 마리의 작은 용도 거대한 위력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대지에 숨어 있는 잠룡과 비교해 본다면 그 것은 아주 조그만 용에 불과할 뿐입니다. 마치 빛나는 달빛 앞의 반딧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합려가 아주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그 대지 잠룡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 위력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가?]


귀곡자가 정색하고 말했다. [대지 잠룡은 반룡이 천지에 잠복해 있는 것입니다. 크게는 한 나라의 흥망 성쇠를 결정짓고, 좀 작게는 한 성이나 한 일족의 흥망 성쇠를 결정하며, 가장 작게는 한 개인의 득실 이나 성패, 길흉 화복 같은 것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대지 잠룡은 먼 옛날의 선고 반룡(先古盤龍)에서 온 것이기 때문 에 대지 잠룡의 기운을 받는 것은 선인들의 혈맥에서 그 연 원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인들이 만약 대지 잠룡의 비 호를 얻었다면, 그 후손들 역시 은연중에 감화되어 대지 잠 룡의 비호를 받게 되는 것이지요.] 귀곡자는 심룡건곤결의 요체를 오왕 합려에게 간단히 설명해 주어 그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했다. 합려는 흥분하며 말했다. [그렇다! 맞는 말이야! 먼 옛날 헌원(軒轅)께서 처음으로 산 야를 나누고 주(州)를 나눌 때, 지리에 능한 청오자(靑烏子) 가 그 분을 도와주었다는 전설이 있네. 과인 생각에 그것과 소협이 말하는 대지 잠룡은 아마도 동일한 연원을 가지고 있 는 것 같군. 좋아. 아주 좋아! 오나라 선조들의 왕릉은 영암 산 뒤쪽의 왕릉봉(王陵峰)에 있으니, 소협은 과인을 따라 오 도록 하게!] 영암산 뒤쪽에 있는 왕릉봉은 영암산의 자산(子山)으로, 영 암산과 동일한 맥이었다. 귀곡자는 합려를 따라 왕릉봉에 이르자마자 즉시 판단이 섰 다. 오왕 합려는 앞 쪽에 높게 솟아 있는 묘비를 가리키며 말했 다. [과인의 선조들의 묘가 바로 저 앞에 있네.] 귀곡자는 그 곳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묘비가 높이 솟아 있 어서 웅장하면서도 위풍당당하게 보였으나, 묘들이 하필이면 산 봉우리의 꼭대기에 모여 있는데, 그 주위의 사방에는 용 산(龍山)이나 호맥(虎脈)이 없어 보호를 받지 못하고, 또 물 이 없어서 불행하게도 이 봉우리에 홀로 고립되어 있는 형상 이었다. 눈 앞에는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고, 의지할 만한 것은 오 직 뒤쪽의 큰 봉우리인 영암산 하나에 불과했다! 오왕의 선조들의 묘는 전부 이 곳에 모여 있으니, 음기의 영


향만 지나치게 받고 다른 보호는 전혀 받지 못하고 있어서, 후인들이 망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눈 앞에 온갖 패망의 징조가 드러나고 있어서, 천기를 뒤바 꾸는 대법을 쓸 수 있을지 없을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귀곡자는 속으로 이리 저리 생각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오왕 합려가 그 모습을 보고 황급히 물었다. [귀곡자 소협, 과인의 선조들의 묘가 대지 잠룡의 비호를 받 고 있는가?] 귀곡자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쓴 웃음 을 지으며 말했다. [이 봉우리는 영암산의 끝에서 뻗어나온 것으로 영암산의 자 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산(母山)인 영암산의 음기가 너 무 강하여 자산 역시 그 음기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대지 잠룡은 아주 양강(陽剛)한 것인데, 어찌 음기 가 심한 곳에 숨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합려가 놀라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 열조의 묘가 자손들을 비호할 수는 있는가?] 귀곡자가 말했다.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왕의 선조들의 혈맥은 이미 엄청나게 강한 음기에 의해 영향을 받 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후예들이 화를 입게 될 것인데 무슨 비호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합려가 깜짝 놀라 말했다. [그렇게 흉험(兇險)하다면, 무슨 방법으로 벗어나야 하겠는 가?] 귀곡자는 속으로 주저했다. (뜻밖에 이 귀곡자가 이렇게 나게 되다니!)

해결하기 힘든 어려운 일을 만

귀곡자는 결연히 오왕 합려에게 말했다.


[지금은 오로지 심룡대법으로 대지 잠룡의 도움을 구하여 음 기로 인해 입는 화를 없애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합려는 그 말을 듣고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말했다. [소협은 대지 잠룡의 도움을 받아 화를 없애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하니, 소협이 하자는 대로 과인은 따르겠네!] 귀곡자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한 나라의 힘을 다하여 구한다고 해도 기연(機緣)이 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오왕께서 제게 시간을 좀 주시기만 한다면, 제가 자세히 상 황을 살펴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왕 합려가 말했다. [소협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있으면 다 살펴볼 수 있겠나?] 귀곡자가 말했다. [확실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다행히 기연이 닿는다면 하 루 반나절이면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연이 닿지 않는다면 삼 년이 걸릴지 오 년이 걸릴지 알 수 가 없지요. 모든 것은 전부 인연(緣)에 달려 있습니다.] 오왕 합려는 마음이 급했지만 귀곡자가 결연한 태도로 말하 자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음을 알았다. 합려는 속으로 귀곡자의 태도에 감탄하여 자기의 조바심을 억누르고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모든 것을 소협에게 맡기겠네. 과인은 궁으로 돌아간 후, 각 군현에 교지를 내려 오나라의 경내에서 소협이 자유 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주겠네.] 귀곡자는 합려의 말에 성의가 있음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이 미천한 것을 오왕께서 그처럼 믿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 니다! 반드시 일을 성사시킬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 겠습니다!] 오왕 합려가 기쁜 듯이 웃으며 말했다.


[좋네! 그럼 그것으로 결정되었네!] 귀곡자는 합려를 따라 하산하지 않고, 삼일 후 고소성의 왕 궁에서 다시 오왕을 만나기로 약속하고, 몸을 날려 수십 장 밖의 먼 곳으로 날아갔다. 다시 몸을 날려 영암산 꼭대기에 도달하자 귀곡자의 종적이 사라져버렸다.

8... 오왕 합려와 네 명의 무사들은 귀곡자가 보통 사람은 흉내도 못하는 엄청난 경신법(輕身法)을 펼치는 것을 보고 모두 깜 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합려가 감탄한 듯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재주가 엄청나고 모든 이치를 꿰뚫어 보고 있으 니 만약 과인의 적이 되었다면, 과인은 잠도 편안히 자지 못 했겠구나!] 합려는 말을 마치고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네 명의 무사들 과 함께 하산하여 고소성으로 돌아왔다. 오왕 합려와 귀곡자가 고소성을 떠나 영암산에 오르고 있을 때, 고소성에서는 깜짝 놀랄만한 변고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오왕 합려도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통력이 엄청난 귀곡자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원래 태자 부차가 고소대에서 병마를 훈련시켜야 한다고 하 며 영암산에 함께 가기를 거절했던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오왕 합려가 떠난 후에 그는 갑자기 친병(親兵)을 보내, 왕 의 명을 받들고 간장 부부에게 면사 금패를 전하러 가는 무 차 장군의 길을 막도록 했다. 무차 장군은 친병들이 태자 부차의 조병호부(調兵虎符:병력 이동에 사용되는 병부)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 이 태자의 친병을 따라 고소성으로 돌아와 고소대에서 태자 부차를 만났다. 부차는 고소대에서 몸에 철갑을 두르고 손에 영기(令旗)를 들고 한창 병마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가 영기를 한 번 흔들면 천군만마가 즉시 뇌성과 같은 고 함 소리를 질러댔다. 수천의 병사들이 동시에 함성을 지르니 위엄과 기상이 가득 넘치고 있었다. 무차는 태자의 친병을 따라 곧장 고소대로 돌아와 부차를 보 고는 급히 몸을 숙이며 물었다.


[아직 주상의 명을 받들어 면사 금패를 전달하지 못했는데 태자 전하께서 이렇게 급히 저를 부르심은 어인 일인지요?] 부차가 흐흐, 하고 냉소하며 말했다. [무차! 너를 부왕께 천거하고, 너를 장군으로 삼아 십 영 (營)의 병마를 통솔케 한 사람이 누구냐?] 무차가 황급히 몸을 숙이며 말했다. [태자 전하이십니다.] 부차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이 부차가 너를 천거할 수 있었으니, 당연히 너를 쫓아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무차는 깜짝 놀라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부차가 거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현재 천하 제일의 용사는 누구냐?] 무차가 황급히 대답했다. [당연히 태자 전하이십니다!] [좋다! 네가 그래도 알기는 아는구나! 그렇다면 본좌(本座) 가 너에게 묻겠다. 천하 제일의 용사에게는 천하 제일의 검 이 있어야겠지?] 무차가 급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천하 제일검은 오직 천하 제일의 용사인 태자 전하에게만 어울릴 수 있습니다!] 부차가 차갑게 코웃음치며 말했다. [그렇다면 천하 제일검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지금 천하 제일검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간장이지


요.] [만약 간장이 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 그가 다시 천하 제일검 을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다른 멍청한 녀석 들도 천하 제일검을 가질 수도 있을 것 아니냐? 만약 그렇게 되면 천하 제일의 용사가 천하 제일검을 사용한다는 명성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으냐?] 무차가 황급히 말했다. [지킬 수 없습니다!] 부차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간장은 절대로 이 세상에 살아 있어서는 안 된다! 그가 본좌에게 바친 보검이 천하 제일검이라는 명성을 계속 유지하려면 말이다! 너는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무 차!] 무차가 황급히 몸을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면사 금패는 주상께서 간장에게 내리신 것이니, 제가 어떻게 그 교지를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부차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부왕의 뜻은 간장이 안심하고 오나라를 위해 검을 주조하도 록 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그 요망 한 귀곡자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다! 부왕께서는 그런 교지를 내리면 오나라에게 손해를 입히게 되리라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하신 거야. 간장이 만약 세상 에 살아 있으면 다른 나라를 위해 검을 만들지도 모르고, 그 러다가는 열국이 모두 간장이 만든 검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 지. 그렇게 되면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되고, 오 나라의 패업은 언제 이루어질지 기약할 수 없다! 그러니 간 장은 오나라를 위해 죽는 수밖에는 없다!] 무차는 속으로 한기를 느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태자 전하... 하지만 만약 이 금패를 전하지 않았다가 만약 주상께서 추궁이라도 하시면, 전 목숨을 부지 하지 못하게 됩니다!] 부차가 그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누구든지 면사 금패를 가지고 있으면 죽음을 당하지 않는 다. 네가 면사 금패를 몸에 지니고 있다면 쓸모가 있을 것이 다. 누가 널 죽일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 이제 초나라를 정 벌할 시기가 눈 앞에 다가왔는데, 부왕께서 그까짓 간장 한 사람의 일로 장군인 너를 해치시겠느냐? 내가 장담하건대 그 럴 리가 없다!] 무차는 그 말을 듣고 그럴듯하게 생각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자 전하의 가르치심에 감사드립니다! 소인은 태자 전하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부차는 무차를 자기 앞으로 소리로 말했다.

불러 귀에 가까이 대고 낮은 목

[그렇다면 이제 어서 가서 기회를 보아 일을 처리하도록 해 라. 명심해라, 우선 검을 손에 넣은 후 없애는 거다. 반드시 깨끗이 처리하여 절대로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도록 해라! 자, 어서 가라!] 무차 장군이 급히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명을 받들고 떠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는 무차는 즉시 고소대를 떠나 열 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말을 타고 질풍처럼 주검봉을 향해 달려갔다. 귀곡자는 영암봉을 떠난 후, 번개처럼 고소성을 둘러싸고 있 는 산 봉우리로 날아가 지세를 살펴 보았으나, 특별히 살펴 볼 만한 것이 없었다. 귀곡자가 지니고 있는 심룡건곤결 중의 용화건곤은 그의 마 음과 대지 잠룡의 기를 일맥상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그의 마음이 움직이기만 하면 심령으로 반은 예 측할 수 있고, 나머지 반은 그저 실제 지형을 자세히 조사하 면 알 수 있는 것이므로 준비에 차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귀곡자는 고소성 서창문에서 10 리쯤 떨어진 곳까지 몸을 날 려 달려왔는데, 그 곳에 갑자기 장공교(長拱橋) 하나가 강물 위를 가로지르고 있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누런 담과 푸 른 나무가 서로 어우러진 사원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귀곡자는 시력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도 그 사원의 산문(山門) 현판 위에 <묘리보탑원(妙利普塔 院)>이라는 금칠을 한 다섯 글자를 볼 수 있었다. 저녁의 어둑어둑한 경치 속에 사원 주위에는 안개가 감돌고 있어서 그 곳에 가자마자 아주 상서로우면서도 고요한 느낌 을 받을 수 있었다. 귀곡자는 발길을 멈추고 그 곳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달빛이 교교히 떨어지고 저녁 까마귀가 울고 있는데 안개가 더욱 옅어지면서 이제는 하늘의 반 정도에만 안개가 깔려 있 었다. 장공교 아래의 어스름빛속에 고기잡이 배 몇 척이 정박해 있 었고, 고기잡이 배 안에서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고소성 창문 밖의 묘리보탑원에서 갑자기 종소리가 들렸다. 종소리는 아주 깨끗하면서도 청아한 울림으로 오나라 수도 고소성의 주위를 감돌았다. 귀곡자는 아주 유청(幽淸)한 경치를 접하자 마음이 저절로 감동되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세상을 이처럼 조용하고 한적하게 만들어 백성들의 얼굴 에 웃음이 가득해진다면 이 귀곡자가 강호를 떠돌며 유랑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동안 받은 고통이나 고난 따위는 모두 잊어버려도 좋다!) 이 순간, 귀곡자의 마음은 바로 그의 사부 노자의 무위신공 (無爲神功)의 경지에 성큼 다가갔다. [사부 노자는 견고하면 훼손되기 마련이요, 강하면 꺽이기 마련이고, 감춘 것이 없으면 이로 인해 빈 자리가 생기고, 하는 것이 없으면 이로 인해 탁월한 자가 생기기 마련이라고 했다. 건곤은 반룡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니, 대지 잠룡은 받 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고,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작은 일에 얽매이겠는가?) 귀곡자는 갑자기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가슴이 넓어지게 되었다. 잠시 후, 묘리보탑원의 종소리가 그쳤다. 그 순간 귀곡자의 눈빛이 갑자기 번쩍 빛났다. 원래 고소성 창문 옆에서 7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높지 않은 산 하나가 자 리잡고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호랑이 가 천지 사이에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 던 것이다.


귀곡자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이 호형산(虎形山)은 엄청난 기세로 마치 하늘로 뛰어 오르 려는 듯한 기세를 지니고 있구나.) 귀곡자는 호기심이 생기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일단 그의 마음이 움직이자 몸은 이미 건곤운행의 신법으로 번개 처럼 그 호형산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 되지 않아, 귀곡자는 7 리 정도 되는 거리를 날아가 그 호형산의 앞에 달려가 섰다. 귀곡자는 사방의 지세를 이리 저리 살펴보다가 절로 기쁜 생 각이 들었다. 어둑어둑한 밤빛 속에 호형산은 비록 높지 않아도 산세가 아 주 웅장하고 기이한데다가 깍아내린 절벽도 있었고 바람이 그 계곡 속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맑은 샘물은 아주 고요히 흘렀고 기이한 암벽들이 우뚝 우뚝 서 있었으며 고목이 무성하여 마치 아주 오래 된 천고의 기 이한 짐승이 갑자기 이 세상으로 뚝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먼 곳에는 왼쪽으로 사자산(獅子山)이 있고 오른쪽으로 궁륭 산(穹赦山)이 있었으며, 호형산은 그 두 산 사이에 숨어 있 었다. 궁륭산은 바로 용이고, 사자산은 바로 호랑이이니 바로 좌호 우룡(左虎右龍)인 셈으로 용호(龍虎)가 문을 지키는, 용맥 (龍脈)이 결혈(結穴)된 곳이었다! 귀곡자는 너무 놀랍고도 기뻐서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곧장 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자세히 살펴 보았다. 다시 천지시신반 을 꺼내어 측량하다가 마침내 천지시신반의 세개의 바늘이 하나의 선을 이루는 곳을 살펴보니 그 곳은 호형산 정중앙의 복지(腹地)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에서 마침 나는 듯한 폭포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고, 폭포가 떨어진 자리에서부터 산 계곡을 이루어 구곡십삼회 (九曲十三回)로 구비져서 복지를 감싸듯이 흘러 서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복지의 정 중앙에는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그 곳에서는 쒸 익, 쒸익, 하고 마치 구름처럼 혹은 안개처럼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어서 그 형상이 아주 괴이했다. 귀곡자는 그것을 보자 갑자기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사부 노자가 말씀하기를, 대지 잠룡이라는 것은 무릇 용신 (龍神)이 변하여 된 것으로 아주 활발하고 민첩하며 변화무 쌍하여, 갑자기 사라졌다가 또 갑자기 나타나고 커졌다가는 작아지고 갑자기 심연(深淵)속에 숨었다가 갑자기 구름을 뚫 고 하늘로 치솟고, 갑자기 머리는 보이고 꼬리는 보이지 않 다가 갑자기 구름을 불러 비를 내리게 한다고 했다. 이 산이 비록 높지는 않아도, 기세가 아주 웅후하고 그 모습이 기이 하니 바로 잠룡의 혈이 모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지 형이다! 또 사부 노자의 심룡건곤결을 따르면 이 세상에서 잠룡이 하늘로 솟아 오르는 것을 보는 것은 아주 어렵다고 했다. 이 용신(龍神)이 물을 얻으면 그 모습이 변화되고 바 람과 구름을 얻으면 하늘로 올라가게 되므로, 보통 사람들은 그 곳이 어디인지 알기 어렵다고 했었다. 이 복지는 호형혈 (虎形穴)의 중심이라 할 수 있고, 그 정 중앙에는 또 열기를 뿜어내는 구멍이 있으며, 위에는 폭포가 있고 아래로는 구곡 십삼회(九曲十三回)로 계곡물이 구비져서 흐르고 있으니, 바 로 물이 감싸고 흐르는 명당의 상(象)이라 할 수 있다. 잠룡 이 하늘로 솟아 구름과 안개를 뚫고 올라가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진실로 잠룡이 숨어 있는 용혈(龍穴)이라고 할 수 있 곗구나!] 귀곡자는 자세히 관찰하며 몇번이나 추측에 추측을 더하여 생각하더니 마침내 이 산의 복지의 정중앙이 바로 용혈이 모 이는 곳이라고 단정지었다. 선조들을 만약 이 잠룡의 대혈(大穴)에 매장하게 된다면, 그 후예들은 용맥의 보호를 받아 아주 귀하게 될 것이며 음기를 억제하게 될 것이니 오왕 합려가 이 용혈을 얻게 되면 백 년 동안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었다! 귀곡자는 열기를 뿜어내는 그 구멍의 사방 동, 서, 남, 북의 각 방위에 돌 하나씩을 놓아 표시를 해 두었다. 그런 뒤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몸을 날려 마치 바람처럼 고소성의 창문 까지 질풍처럼 달려갔다. 성문의 감시는 아주 삼엄했다. 이 성의 북쪽으로 백리만 가 면 바로 원수인 초나라 지역이었기 때문에 초나라의 간첩들 이 몰래 들어와 이 곳의 동정이나 군사 기밀을 염탐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금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었던 것 이다. 귀곡자가 그 곳에 들어갈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감시가 삼 엄했으나 문을 지키는 병사는 귀곡자를 한번 보더니 양쪽으 로 비켜서며 그가 마음대로 들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귀곡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참지 못하고 성문을 지키는 관


병에게 말했다. [왜 검문도 안하고 내 맘대로 들어가게 놔두는지요?] 성문을 지키는 병사는 손가락으로 그림 한 장을 가리키며 엄 숙하게 말했다. [오왕께서 명하시기를, 귀곡자님의 모습이 보이면 낮이든 밤 이든 상관하지 말고 언제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귀곡자는 그 그림을 보자 저도 모르게 화가 나기도 하고 우 습기도 했다. 그 그림 속의 인물은 바로 귀곡자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왕 합려는 정말 신용이 있는 사람이구나!) 귀곡자는 이런 생각이 들자 오나라를 중흥시키려는 생각이 좀 더 강해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고 새 벽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오왕에 대해 물어 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오왕의 생활이 검소하고 백성들 이 천재지변을 만나거나 돌림병으로 인해 고생하면 반드시 직접 백성들을 찾아와 구제품을 나눠 주고 고통을 위로하고, 또 현인들을 만나면 그들의 능력을 귀히 여기고 널리 중용하 는 현군이라고 칭송했다. 귀곡자는 계속해서 수십 명에게 물어 보았으나 그들의 대답 은 한결같이 오왕 합려에 대한 칭송 뿐이었다. (한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없고, 두 사람의 말도 의심스럽지 만, 세 사람, 열 사람, 백 사람의 말은 믿지 않을 수가 없구 나! 보아하니 그 호형산의 용혈은 분명 오왕 합려가 얻어야 하는 곳임이 분명하다!) 귀곡자는 마음이 정해지자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당장 몸을 돌려 오왕의 궁궐로 달려가 오왕 합려를 뵙기를 청했다. 궁을 지키는 무사는 귀곡자를 보자마자 그의 말도 기다리지 않고 즉시 그를 오왕의 편전으로 안내하였고, 오왕 합려도 이미 그 곳에서 얼굴에 미소를 띄고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왕 합려는 귀곡자의 앞에서 예의를 따지지 않고 도리어 귀 곡자에게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소협은 고생 많이 하셨네! 분명히 무언가 제게 들려주실 말 씀이 있겠군?] 귀곡자 역시 미소를 띄고 머리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오왕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오왕 합려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소협은 신기하고 예측 불가능한 온갖 재주를 지니셨으니, 소협께서 해주겠다고 약속한 일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것 이 아니겠소?] 귀곡자가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명령을 어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준비가 이 제 갖추어져 있으니, 그저 동풍(東風)이 불기만을 기다리면 됩니다!] 오왕 합려가 그 말을 듣고 급히 말했다. [그 동풍이란 무슨 뜻입니까? 잘 모르겠으니 소협께서 설명 해 주십시오!] 귀곡자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으며 말했 다. [오왕께서 보내신 무차 장군은 무사히 면사 금패를 주검봉에 가져다 주었는지 모르겠군요?] 오왕 합려가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소협이 이처럼 간장을 보호하려고 애쓰시는 것이 이상하오. 그는 그저 검을 만드는 보잘것 없는 백성인데 소협께서 이처 럼 애쓰시니 그 까닭을 알려 주시지 않겠소?]

9... 귀곡자가 엄숙하게 말했다.


[이 귀곡자는 귀곡이라는 험한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 에 이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을 반드시 도와 주어야겠다고 맹 세한 바가 있습니다. 일전에 주검봉에서 우연히 간장 부부를 만났는데, 그들은 보검을 만드는 일로 인하여 엄청난 곤경에 처해 있었고 그 모습이 너무나 불쌍하고 가련해서 그들을 도 와 줄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간장 부부는 저 에게 밥 한 그릇을 준 은혜가 있으니, 전 절대로 그 은혜를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왕 합려가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크게 웃으며 말했다. [밥 한 그릇의 은혜를 소협이 이처럼 마음속에 굳게 새겨두 고 있으니, 만약 과인이 소협에게 황금 만냥을 내린다면 소 협은 과인에게 모든 충성을 다하겠군요?] 귀곡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왕 합려가 의아해서 물었다. [어째서?] 귀곡자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이 귀곡자는 원래 들짐승처럼 강호를 유랑하는 사람이니 황 금 만 냥을 가진다 한들 별로 쓸 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간 장 부부가 제게 나누어 준 밥 한 그릇은 제가 배가 고플 때 저의 허기를 면하게 해 준 것이었고, 더군다나 그 한 그릇은 바로 그들 부부가 삼일을 연명할 수 있는 식량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도와주어야 그 진정이 빛을 발하는 것이지, 풍족함에 또 다시 풍족함을 더해서는 별로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오왕 합려는 아무 말도 않고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갑 자기 귀곡자를 향해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소협이 과인을 깨우쳐 주신 점, 감사드리오.] 귀곡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해져서 물었다. [제가 깨우쳐드리다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오왕 합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도와주어야 그 사람의 마음에 깊이 새겨질 수 있는 것이지, 풍족함에 또다시 풍족함을 더하는 것은 그저 구름이나 연기처럼 스쳐 지나가 버리고 기억되지 않는다는 말이니, 소협의 그 말씀은 바로 한 나라의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소?] 귀곡자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기쁜 마음이 들어서 크 게 웃었다. 오왕 합려가 다시 정색을 하며 말했다. [소협은 마음을 놓으시오. 과인의 면사 금패는 무차 장군이 이미 주검봉에 가져다 주었소! 또 만일을 위해서 과인은 무 차 장군에게 병사들을 데리고 주검봉을 잘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을 전달했소. 그러니 어떤 사람이라도 간장 부부를 괴롭 히거나 귀찮게 할 수 없을 것이오. 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어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였소! 소협이 보시기에 어떠한지? 이만하면 과인의 처사에 만족하시오?] 귀곡자는 그 말을 듣자 또 다시 기쁜 마음이 되어 마침내 마 음을 놓고 속으로 생각했다. (오왕 합려는 과연 한 시대의 현명한 군주로구나. 호형산의 그 잠룡 대혈을 이어받을 만한 사람이구나!) 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자기가 발견한 지형에 대해 알 려 주었다. [다행히 약속대로 이 미천한 것이 고소성 창문 밖 7 리쯤 되 는 산에서 잠룡의 대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곳으로 왕 릉을 이전하면 좋을 것 같으니 오왕께서 결정하십시오!] 오왕 합려는 그 말을 듣고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좋소! 당장 어가를 움직여 과인과 소협이 즉시 함께 그 곳 에 가서 살펴 보도록 합시다.] 이에 왕릉을 옮기는 대사업이 시작되었다. 오자서를 포함한 조정의 대신들도 모두 교지를 받고 이 일에 참여하게 되었 다. 하지만 태자 부차는 여전히 병사를 훈련한다는 핑계를 대며 함께 가기를 완곡히 거절했다. 오왕 합려는 태자 부차가 함께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보


고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초나라와 싸울 때를 대비하여 힘을 아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억지로 권유하지는 않았 다. 오왕 합려 이하 조정의 대신들 및 수백 명의 시위들이 말을 달려 고소성 창문까지 달려갔다. 이 행렬이 창문을 나서 다시 7 리 정도 더 달리자 그 호형산 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귀곡자는 오왕 합려와 오자서 등 조정의 대신들을 데리고 호 형산의 복지로 들어갔다. 기묘하게도 귀곡자가 네개의 돌을 놓아 표시를 해 둔 그 복 지의 정 가운데의 구멍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와 공기 중에 뭉쳤다가 다시 흩어지며 마치 안개처럼 복지의 정중앙 에서 가볍게 흩날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 곳에 도착했을 때, 오왕 합려 이하 모든 사람들 은 전부 몸이 뜨거워지면서 정신이 아주 엄숙하면서도 맑아 지기 시작했다. 아주 침착하고 신중해져서 평소때와 완전히 다른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귀곡자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가 오왕 합 려에게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이 곳이 바로 오나라의 왕릉을 이전할 곳입 니다!] 오왕 합려는 침착한 표정으로 대신들에게 말했다. [이 잠룡 대혈로 오나라의 왕릉을 이장하여 국운이 백 년 동 안 쇠하지 않도록 하려고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지 말 해보시오.] 조정의 대신들은 잠룡 대혈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었고, 또 오왕 합려의 마음이 이미 정해진 데다가, 국가의 백 년 기업을 튼튼히 할 수 있다는 말에 아무도 감히 나서서 반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다들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오자서는 마음 속으로 기쁜 생각이 들어 중얼거렸다. (귀곡자는 과연 신통력이 대단하구나. 잠룡 대혈을 찾았으니 이제 왕릉을 이 곳으로 이전하기만 한다면 분명 오왕이 초나 라를 정벌하려는 마음은 더욱 굳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오자서도 부모님을 살해한 초나라에게 복수할 날이 올 것


이다!) 오자서는 오왕 합려에게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주상께서는 하늘의 복을 받아 이 잠룡 대혈을 얻으셨으니, 오나라의 국운은 반드시 백 년 동안 쇠하지 않을 것이옵니 다!] 뭇 대신들은 오자서가 축하의 예를 올리는 것을 보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다들 분분히 오왕 합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 렸다. 순식간에 오왕이 공덕을 찬양하고 오왕에게 축하하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끊이지 않았다. 오왕 합려는 이제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귀곡자에게 말했 다. [소협께서는 언제 왕릉을 이곳으로 이장하는 것이 좋다고 생 각하시오?]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오늘부터 삼일 동안은 모두 길일이니 왕릉을 이장하는 공사를 하셔도 무방합니다.] 오왕 합려는 그 말을 듣자 즉시 공부(工部)를 담당하고 있는 신하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어서 서둘러 경은 고소성으로 돌아가 공부의 명장(名匠)들 을 데리고 즉시 영암산의 왕릉봉에 가서 선조들의 유해를 판 뒤, 이곳으로 돌아오도록 하시오! 조금의 차질도 없도록 하 시오!] 공부를 맡은 대신이 즉시 명령을 받고 말을 타고 나는 듯이 산을 내려갔다. 오왕 합려는 시위관(侍衛官)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곳에 행궁(行宮)을 설치하도록 해라. 과인은 이 곳에서 왕릉의 이장 작업을 지켜 보도록 하겠다!] 왕궁의 시위관이 명령을 받고 즉시 장막과 음식 등을 준비했 다. 왕이 명령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한 법이다. 반나절도 되기 전에 호형산 위에는 행궁이 설치되었 다. 비록 장막으로 집을 대신한 것이기는 했지만, 왕실에서


사용하는 각종 물품들과 먹을 것이 준비되어 오왕 합려 및 조정 대신들이 보름은 살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마련되었 다. 얼마 되지 않아, 왕릉봉에서 오왕의 선조들의 유해가 운반되 어 왔다. 호형산에서는 공부의 장인(匠人)들이 그 복지의 중앙에 귀곡 자가 가르쳐 주는대로 큰 구멍을 하나 파고 사면에는 묘기 (墓基)를 세웝다. 오왕 합려가 호형산에 머무른지 삼일 째 되던 날, 정오쯤 되 었을 때, 귀곡자는 모든 일이 잘 처리되었다고 생각하고 장 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게 하여 하시오!]

어서 유골을 묘 안에 넣도록

장인들은 즉시 명령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위를 흙 으로 덮고 묘비를 세우는 등의 마지막 작업을 완료했다. 10 여 장 높이의 커다란 묘비가 우뚝 세워졌다. 웅장한 왕릉 은 호형산의 복지 정중앙에 우뚝 솟아 오르게 되었다. 묘비 위에는 마치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한 필체로 귀 곡자가 직접 <대오왕릉(大吳王陵)>이라는 네 글자를 써 넣었 다. 귀곡자가 다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향을 피우고 선조들께 절을 하십시오!] 오왕 합려가 오자서를 포함한 조정의 대신들을 이끌고 대오 왕릉의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향을 피워 예를 올렸다. 귀곡자가 다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절 한번은 건(乾)이요, 절 두번은 곤(坤)이요, 절 세번은 시(時)로, 건곤시의 삼체(三體)가 서로 융화되니, 잠룡은 어 서 빨리 나타나서 조상들의 용맥으로 후손들을 비호하여라! 국운이 흥성해지고 기업(基業)은 영원히 굳어지리라.] 순식간에 대오왕릉의 사방에 향이 피워지면서 기원하는 소리 가 웅웅거리며 끊이지 않았다. 바로 이 때, 대오왕릉의 묘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하얀 연기 가 쒸익, 쒸익, 하고 뿜어져 나왔다. 그 하얀 연기는 점점 더 많아지고, 점점 더 짙어지더니 모였 다가 흩어졌다가 하면서 사방의 향의 연기와 섞여 갑자기 앞


쪽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는 오왕을 향해 날아갔다. 그 하얀 연기는 영혼이라도 깃들어 있는 것처럼 오나라 군신 의 사방을 한바퀴 빙 돌더니 다른 사람들의 머리를 지나 곧 장 오왕 합려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가 돌연 오왕 합려의 머 리를 덮어씌웠다. 이 때 조정의 대신들 중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깜짝 놀라 소 리를 질렀다. [아! 주상의 머리에 백호 한 마리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오왕을 쳐다 보니, 과연 오왕 합려의 머리 위에 모였던 흰 연기가 어느새 위엄이 당당한 한 마리 호랑이의 형상으로 뭉쳐 있었다. 잠시 후 그 백호는 다시 공 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오왕 합려는 망연한 모습으로 절을 마쳤다. 조정 대신들은 꿈에서 막 깨어난 듯한 표정으로 일어나는 오왕 합려에게 축 하의 인사를 드렸다. [주상, 축하드립니다! 주상께서는 하늘의 홍복을 받으셨습니 다! 방금 백호의 형상이 나타났으니 이것은 국운이 흥성하게 되고 기업이 영원토록 굳건해 질 징조입니다!] 오왕 합려는 여전히 망연한 표정으로 좀 전의 일을 알지 못 하고 있다가 조정 대신들이 축하하는 소리를 듣자 그제서야 평상시의 태도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예전에 보이던 희노애락의 감정은 얼굴에 드러나 있 지 않고 아주 담담하고 맑은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국운의 흥성이란, 열 중의 셋은 천운에 의한 것이고, 열 중 의 일곱은 인화(人和)에 의한 것이오. 민심의 향배(向背)가 바로 한 나라의 근본이고, 한 나라를 지탱하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오자서를 포함한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깜짝 놀라 속으로 중 얼거렸다. (대오왕릉이 낙성되고 백호의 형상이 나타나자마자 오왕의 성품이 저렇게 신중하고 침착하게 변하다니, 정말 신기하구 나.) 귀곡자는 오왕 합려가

이미 선조들의 용맥을 이어받기 시작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잠룡 대혈은 과연 엄청난 것 이었다! 그는 오왕 합려에게 미소를 띄고 말했다. [오왕의 선조들께서 이제 용혈에 거하시니, 용맥의 엄청난 힘이 그 후손들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이제 근본을 튼튼히 하셔서 오나라 국군이 흥성되는 날까지 잘 지켜 나가시기 바 랍니다!] 오왕 합려가 기쁜 듯이 말했다. [옳은 말씀이시오. 귀곡 선생의 가르침에 감사를 드립니다. 치국(治國)에 있어서는 백성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과인은 항상 명심하도록 하겠소!] 오왕은 전쟁터에서 반평생을 보낸 사람으로, 수많은 영웅 호 걸을 만났었지만 선생이라고 호칭한 사람은 귀곡자가 처음 이었다! 오왕 합려가 다시 말했다. [귀곡 선생, 대오왕릉은 어떠한 용혈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 까?] 귀곡자가 미소하며 대답했다. [용혈의 이름이라는 것은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형상에 따라 붙히면 그만입니다. 대오왕릉은 백호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백호용혈(白虎龍穴)이라고 하면 되겠지요!] 조정의 대신들이 그 말을 듣고 다시 예를 올리며 말했다.

오왕 합려에게 축하의

[왕의 홍복(洪福)으로 백호용혈을 얻으셨습니다!] 오왕 합려는 담담히 미소지을 뿐이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어떤 물건으로 인해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경지를 초월해 있 었다. 그 뒤로 대오왕릉은 호구(虎丘)라고 불리게 되어 오늘에 이 르고 있다. 오자서는 오왕 합려의 표정을 계속 관찰하고 있다가, 갑자기 마음이 뜨끔해져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귀곡자가 가르쳐 준 이 백호용혈은 과연 엄청난 것이구나. 왕릉을 이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백호가 오왕의 정수리에


모여 들고, 오왕의 성정(性情)이 이렇게 돌변하다니. 그가 초나라를 정벌하려던 야심은 더욱 굳어졌을까, 아니면 약해 졌을까? 만약 약해졌다면 이 오자서가 초나라를 공격하여 아 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는 것이 아닌 가?) 오자서는 마음이 급해져서 결국 참지 못하고 오왕을 떠보려 고 물어 보았다. [축하 드립니다! 백호용혈을 얻으셨으니 이제 국위를 떨치고 초나라를 정벌하여 대업을 달성하게 될 날도 멀지 않았습니 다!] 뜻밖에도 오왕 합려는 평상시의 태도와 달리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아주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렇지 않소, 오대부. 지금 오나라의 국력은 아직 초나라를 정벌할 정도로 튼튼하지 못하오. 그러니 우선 식량을 비축하 여 그 기초를 단단히 닦는 것에 힘써야 할 것이오!] 오자서는 그 말을 듣자 깜짝 놀라 할말을 잃었다. 귀곡자가 기쁜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왕께 축하를 드립니다. 식량을 비축하여 그 기초를 단단 히 닦는다는 것은 확실히 나라를 다스리는 좋은 방법입니다. 오왕께서는 그것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겠다 하시니, 오나라 의 국운은 반드시 나날이 흥성하게 될 것입니다!] 오자서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속으로 생 각했다. (이 귀곡자가 비록 신통력이 대단하고, 오나라를 도우려는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그 덕분에 이 오자서가 초나라를 멸 망시키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겠구나!) 오자서는 이렇게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귀곡자가 미워졌고, 그를 오왕 합려에게 천거한 것이 후회되었다! 한창 귀곡자가 즐거워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동남쪽의 주검봉 방향에서 붉은 빛이 번쩍이더니, 그 붉은 빛이 곧장 하늘을 가로질러 백호구 쪽으로 날아왔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는 흑흑, 하는 슬픈 울음소리가 가득 찼다. 귀곡자는 속으로 깜짝 놀라 즉시 점을 쳐 보았더니, 건(乾)


괘가 나오며 잠룡은 쓰지 못한다는(潛龍勿用) 괘가 나왔다. 귀곡자는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지더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괘는 대흉(大兇)의 징조로 건곤 천기를 뒤바꾸려던 시도 가 실패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설사 대지 잠룡을 찾았다 해도 절대로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 괘는 간장을 위해 오나라에 들어와 심룡 대법으로 천기를 거역하려던 모든 일이 실패했음을 나타내고 있으니, 간장의 생명을 보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천기를 거역하려던 나도 분명히 하늘에 의해 엄청나고 참혹한 형벌을 받게 되겠구 나!) 귀곡자는 처음으로 강호에 나와 아직 경험이 짧기 때문에, 이렇게 사태가 급변하자 속으로 깜짝 놀라며 어쩔 줄을 몰라 당황했다.

10..... 귀곡자가 오왕 합려에게 간장이 무사한지 확인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가슴에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면서 울컥, 하고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내며 천천히 땅에 쓰러졌다. 엄청난 내상(內傷)을 입은 것이었다. 오왕 합려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달려와 그를 부축하 며 물었다. [귀곡 선생! 어찌된 일입니까? 어째서 갑자기 상처를 입게 되셨소? 과인이 즉시 어의를 대령하여 당신을 치료하게 하겠 소!] 귀곡자는 가슴의 통증이 너무 심해 입도 열 수 없을 지경이 었지만 오왕 합려의 말은 똑똑히 잘 들려서 속으로 생각했 다. (이제 나의 내공은 전부 소실되었으니 설사 천하 제일의 명 의가 와서 치료한다 한들, 천기를 거역하다가 받은 형벌을 무슨 수로 치료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왕 합려와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갑자기 귀곡자가 쓰러진 이유를 모르고 급히 그를 둘러쌌다. 오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혼자 그 이유를


짐작하면서 중얼거렸다. (귀곡자는 분명 이 백호용혈을 찾으려고 노심초사하다가 내 상을 입은 모양이구나!) 그는 귀곡자에게 내공을 주입하여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려 고 했다. 하지만 귀곡자가 오나라를 돕게 되면 초나라를 멸 망시키려는 자기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같아 손을 쓰지 않 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아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오왕 합려가 발을 구르며 말했다. [귀곡 선생은 오나라를 위해 과로하여 결국 탈진상태에 이르 렀소. 빨리 어의를 데려오시오.] 바로 이 때, 어전 시위관이 나는 듯이 달려와 당황한 태도로 오왕 합려에게 보고했다. [주상, 태자 부차의 병마가 갑자기 이 백호구의 사방을 에워 쌌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니 주상께서 명령을 내려 주 십시오!] 오왕 합려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표정이 변하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들은 당황하지 마시오! 여봐라, 어서 가서 태자를 데리고 오너라!] 시위관이 명령을 받고 막 떠나려는 순간 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사나이가 손에 한기(寒氣)를 내뿜는 검을 들고 질풍처 럼 달려왔다. 오자서는 그 사람이 바로 태자 부차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오자서는 속으로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혹시 태자 부차가 반역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오왕 합려는 달려 온 사람이 태자 부차라는 사실을 알고 화 난 표정으로 외쳤다. [부차야! 과인이 이곳에 들다니!]

있는데 무엄하게 칼을 빼들고 달려


태자 부차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땅 바닥에 간신히 앉아 있는 귀곡자를 향해 달려들면서 귀곡자를 검으로 냅다 찔렀 다. 오왕 합려는 성큼 앞으로 나가 귀곡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노 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차! 멋대로 소동을 피우지 말아라! 귀곡 선생은 오나라에 공을 세웠다. 과인이 내려준 면사 금패를 가지고 있으니 그 누구도 그를 죽일 수 없다!] 태자 부차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오왕 합려 의 주위를 돌며 검으로 계속 귀곡자를 찔러갔다. 귀곡자는 이미 모든 내공을 소실했기 때문에 반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부차의 검이 자기를 찌르면 단칼에 목 숨을 사라질 것 같았다! 다행히 오왕 합려가 갑자기 자기의 검을 빼어 부차의 검을 막았다. 그 순간, 놀랍게도 오왕 합려의 검이 부차의 검에 닿자 순식 간에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가 차고 다니는 검은 바로 구야자(歐冶子)가 만든 것으로 태아검(太阿劍)이라고 했으며, 보통 검보다 아주 날카롭기 때문에 합려는 그 보검을 아끼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차의 검을 막지 못하고 단번에 잘라진 것이었다! 오왕 합려가 크게 노하며 소리를 질렀다. [오대부, 부차를 사로잡으시오!] 오자서는 조용히 말했다. [신은 감히 하극상의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오왕 합려가 노해 말했다. [무엇이 하극상이란 말이냐? 이것은 과인의 명령이란 말이 다! 귀곡 선생은 네가 청하여 모시고 온 분인데, 가만히 서 서 그가 태자의 검에 죽임을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겠다는 거냐?] 뜻밖에도 오자서는 여전히 출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왕 합려는 탄식하며 갑자기 앞으로 달려나가 두 팔로 부차


를 껴안고 외쳤다. [귀곡 선생, 어서 도망가시오! 과인은 당신을 보호해 줄 수 가 없군요! 그러나 당신이 과인의 면사 금패를 가지고 있는 데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소! 그러니 어서 도망가시오! 훗 날을 기약합시다!] 부차는 부왕이 목숨을 걸고 자기를 잡고 놓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동작을 멈추고 소리를 질러댔다. [부왕! 오늘 저 귀곡자를 죽이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후회하 게 됩니다.] 귀곡자는 도망치고 싶었으나 일어날 힘도 없어 그 자리에 가 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귀곡자가 오늘 하늘의 벌을 받아 죽게 되는 것일까? 안 된다! 나는 사부 노자의 제자이니 죽는다 해도 사부 노자 의 이름을 더럽히면서 죽을 수는 없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간신히 기어 일어나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깊은 계곡으로 몸을 날렸다. 귀곡자는 까 마득한 절곡을 향해 몸을 날렸던 것이었다. 이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면 뼈가 산산조각이 나서 그 누구도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부차는 그제서야 흐흐, 하고 웃으며 칼을 칼집에 집어 넣었 다. 오왕 합려는 너무나 화가 나서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차는 갑자기 오왕 합려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들고 있던 검을 바치며 말했다. [이 검은 천고의 신검이니 부왕께서 살펴 보시옵소서!] 오왕 합려는 정신을 수습하고 부차가 내미는 그 검을 뽑아 들고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는 이 검을 보자 영문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검에서 한 줄기 무형의 검기가 흘러나오자 그의 몸 이 뜨거워지면서 정신이 어지럽더니 침착하게 가라앉았던 정 신이 갑자기 흥분되기 시작하면서 아주 강렬한 투지가 솟아 올랐던 것이다.


그는 당장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르며 곧장 초나라로 달려가 초나라를 멸망시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오왕 합려는 부차가 내민 검을 본 순간 이글이글 타오르는 투지에 태자 부차에 대한 분노마저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는 중얼거리며 말했다. [좋은 검이다! 좋은 검이야! 정말 천하 제일검이라고 할 수 있구나! 부차야, 이 검의 이름은 무엇이냐?] 부차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왕! 이 검은 천하 제일검 간장(干將)이라고 합니다!] 간장에서 나온 검기로 인해 합려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 고 있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며 깜짝 놀라 말했다. [과연 간장이 만든 검이었구나! 그런데 어째서 이름을 간장 이라고 했느냐? 그가 앞으로 다시 보검을 만들게 되어도 간 장이라는 이름을 붙일 작정이냐?] 부차가 거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 간장검(干將劍)만이 천하 제일검일 뿐, 앞으 로 더 이상의 천하 제일검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부차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냐하면 천하 제일검을 만드는 사람이 이젠 더 이상 이 세 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절대로 두번 째의 천하 제일검이 나올 수 없습니다.] 오왕 합려는 그제서야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급히 말했다. [네가! 네가 간장을 어떻게 했단 말이냐?] 부차는 말했다. [천하 제일검이라는 명성을 지키고, 이 세상의 강적들을 물 리치고, 오나라의 패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간장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살아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합려가 깜짝 놀라 말했다. [부차! 네가 간장을 죽였구나. 너는 부왕이 귀곡 선생과 맺 은 약속을 잊었느냐? 과인은 간장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 했단 말이다!] 부차가 그 말을 듣고 펄쩍 뛰며 말했다. [부왕! 간장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 라 그 귀곡 선생인가 뭔가 하는 녀석도 살아 있어서는 안 됩 니다. 그들이 없어지는 것이 바로 우리 오나라에 이익이 됩 니다!] 합려가 놀라서 중얼거렸다. [어째서? 귀곡 선생은 오나라에 공을 세웠는데 어째서 그를 죽여야 한단 말이냐?] [귀곡자는 귀신같은 신통력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그 사람의 심성은 그저 들판을 떠도는 야생 짐승과 같아서 절대로 한 나라에 오래 머무르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그가 부왕에게 잠룡 대혈을 찾아 준 것처럼, 초나라나 월나라 같은 원수의 나라에 가서 그들을 위해 애쓰게 된다면, 적들은 강해지고 우리는 약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곡자는 절대로 이 세상에 살아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야 우리 오 나라의 국세만 홀로 강해져 열국을 재패하는 대업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부디 부왕께서는 잘 생각해 보시옵소서!] 오왕 합려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마음속이 흥분되었다. (부차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만약 귀곡자가 다른 나라를 도 와주면 우리 오나라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황금 만 냥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오나라만을 위해 충성할 사 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 오나라 의 화근이 될 수도 있다!) 오자서는 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오왕 합려에게 말했다.

않고 있다가 그제서야

[주상! 오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월나라를 이겨 열국을 재패하는 대업을 이루기를 운하신다면 태자 전하의 말씀을 뜨르셔야 합니다. 귀곡자와 간장은 분명 이 세상에 살아 있 어서는 안 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주상, 통촉하시옵소 서.]


오자서는 비록 귀곡자의 신통력에 대해 감복하긴 했지만, 이 미 귀곡자가 자신의 목적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자서는 오왕 합려가 신임하는 장수였는데, 지금의 말은 태 자 부차의 마음에도 든 모양이었다. 오왕 합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중얼거렸 다. (귀곡자야, 과인이 무정하고 신용 없다고 너무 탓하지 말아 라. 시대의 흐름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 네가 고집을 피우며 과인의 휘하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탓하도 록 해라!) 오왕 합려는 말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태자의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궁궐로 돌아가 초나라와 월나라를 정벌할 일을 준비하도록 하자.] 귀곡자의 귀에 휙휙, 하는 바람 소리가 들리면서 그의 몸은 백호구의 깊은 계곡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주검봉 방향에서 붉은 빛이 솟아 오르는 것을 보는 순 간 가슴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었다. 그리고 태자 부차가 손 에 들고 있는 검을 보는 순간 그것이 간장 부부가 만든 신검 이라는 것을 알고 간장이 벌써 화를 입었음을 직감했다. (이 귀곡자는 심룡건곤결의 절학으로 천하의 불쌍한 사람들 을 구하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강호에 나오자마자 다른 사람 을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내 생명을 잃게 되는구나. 아아, 사 부 노자가 항상 말씀하시길, 견고하면 훼손되기 마련이요, 강하면 꺽이기 마련이라 했는데, 보아하니 이 귀곡자는 사부 노자의 무위신공을 반도 못 배웠나 보구나!) 그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은 미칠듯이 아프고, 내공 은 전부 소실된 채로 까마득한 벼랑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 다. 허공에서 떨어지면서 귀곡자는 조용히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처럼 고요한 마음으로 조금도 살려고 애쓰지 않았다. 떨어지면서 언뜻 보니 계곡에는 안개와 구름이 날리 고 있어서 마치 무슨 선경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귀곡자는 갑자기 기이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선은 구름과

안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데, 어쩌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 이렇게 죽는다면, 아무런 고통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아주 편안한 느낌을 주니, 죽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마저 들 었다! 그는 그저 가만히 숨을 몰아쉬며 구름과 안개를 타고 신선이 하늘을 날며 솟아 오르는 재미를 자세히 느껴보려고 했다. 귀곡자는 이상하게도 점점 마음이 편해져 조금도 발버둥치지 않고 가만히 숨만 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들어오 는 것은 많고 나가는 것은 적게 되고 체내의 공기가 점점 쌓 이게 되어 일종의 부력이 생기게 되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 역시 점점 느려져 결국에는 날개라도 단 것처럼 깃털처 럼 천천히 아래로 하강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무위신공이 무형유형(無形有形), 이기억체(以氣 抑體)의 절정의 경계로 이미 들어와 있었던 탓에 가능했다. 노자 이이는 본래 북해(北海)의 곤(鯤)이었다. 이 곤의 크기 로 말하자면 몇 천 리에 이를 정도였다. 매번 겨울이 되어 해조가 바뀌면 이 곤은 붕(鵬)으로 변하는 데, 이 붕의 날개 역시 수천 리에 이를 정도로 넓었다. 매번 가을에서 겨울로 바뀔 때면 붕은 나래를 펴고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며 북해에서 남해까지 날아가 남해에 보금자리를 틀게 된다. 노자 이이는 이 와중에 세상에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자신이 지닌 엄청난 힘을 막을 만한 그런 힘이 존 재하지 않았다. 적이 없을 때 가장 적막함을 느끼는 법, 이 적막함 속에서 노자 이이는 감춘 것이 없으면 이로 인해 빈 자리가 생기고, 하는 것이 없으면 이로 인해 탁월한 자가 생기기 마련이며, 견고하면 훼손되고, 강하면 꺽이기 마련이라는 대무위신공 (大無爲神功)을 만들어 무생무사(無生無死), 이기억체(以氣 抑體)라는 대무위신공의 경계를 창안하게 되었다. 노자 이이는 귀곡자에게 대무위신공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 다. 그저 대무위신공이 적이 없어 가장 적막함을 느끼던 중 에 만들었기 때문에 가장 절망적인 지경이 되어서야 이 대무 위신공의 정수가 발휘된다는 것만을 알려 주었었다. 노자 이이는 원래

귀곡자가 심룡건곤결을 터득하고 그 후에


이 세상에 상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때 대무위신공 의 요체를 알려주어 노자 이이가 경험했던 그 과정을 그대로 거치며 수련하게 할 생각이었다. 뜻밖에도 귀곡자는 바탕이 기이하고 특별하여 수련하는데 남 다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심룡건곤결이라는 절학은 이미 이 세상에 싸울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밥 한 그릇을 얻어 먹은 은혜를 갚기 위해 대담하게 천기를 뒤바꾸려고 시도하다가 성공하지 못하 고 도리어 그 벌로 참혹한 고통을 겪고 애써 연습한 건곤결 의 내공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렇게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한 곤경에 빠지게 되어서야 저도 모르게 대무위신공 중 의 무생무사, 이기억체라는 절정의 경계를 깨닫게 된 것이었 으니, 이것은 사부 노자 역시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귀곡자는 아무런 잡념도 없이 두 눈을 반쯤 뜨고 위의 하늘 이 점점 멀어지다가 결국에는 하나의 점으로 변하는 것을 보 고 있었다. 이 때 그의 몸이 갑자기 무엇인가 아주 부드럽고 푹신 푹신 한 물건에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두꺼운 담요 위에 누운 듯한 느낌이었다.

11.... 귀곡자는 그 위에 누워 잠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문 득 자기가 더 이상 떨어지지 않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손을 뻗어 몸 아래를 만져 보았다. 알고 보니 그것은 아주 두꺼운 나뭇잎 더미였는데, 얼마나 두꺼운지 알 수 없 을 정도로 아주 두텁게 층을 이루고 있었다. 분명 이 절곡에 쌓인지 수십 년은 된 것 같았다! 귀곡자는 저도 모르게 실소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뭇잎아, 나뭇잎아. 네가 좋은 마음으로 이 귀곡자의 생명 을 구해 주었지만, 그 덕택에 나는 죽음을 맛보는 재미를 즐 기지 못하게 되었지 않느냐?) 귀곡자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켜 우선 아주 공손하 게 나뭇잎 더미에 절을 세번 올리고, 다시 아주 화가 난다는 듯이 발로 세 번을 짓밟았다. 귀곡자가 발로 짓밟자 뜻밖에도 대무위신공의 유형변무형(有 形變無形), 무형변실유형(無形變實有形)의 초식이 펼쳐졌다.


이 초식은 위로는 하늘을 놀라게 하고, 아래로는 땅을 놀라 게 할 정도록 대단한 위력을 지닌 엄청난 무공이었다. 하지 만 귀곡자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발로 짓 밟았을 뿐이었다. 발 밑에 무엇인가 딱딱한 것이 느껴지면서 저도 모르게 몸이 갑자기 엄청난 반탄력에 10 장 정도나 높이 솟구쳤다. 다시 떨어질 때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방금 전에 발에 닿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급히 발 밑의 두꺼운 나뭇잎들을 헤쳤다. 한참의 시간 이 걸려 나뭇잎을 헤치고 밑바닥에 놓여 있는 그 물건을 보 고 멍청해져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알고 보니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석판(石版)이었군.) 그 석판은 오랜 시간 그 곳에 버려져 있었는지 거무튀튀하 게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귀곡자는 나뭇잎으로 석판 위를 닦다가 또 다시 멍청해지고 말았다. 원래 그 석판 위에는 팔괘(八卦)가 새겨져 있었는 데, 팔괘 옆에는 팔괘가 움직이는 원리가 설명되어 있었다. <건이 변하여 곤이 되고, 곤이 변하여 진이 되고, 진이 잠룡 을 놀라게 하여 그 용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위로 솟 구치면서 화룡(火龍)으로 변하고, 아래로 모이면서 지룡(地 龍)이 되었는데, 화룡은 높은 산봉우리에 살고, 지룡은 심연 깊은 곳에 숨어 있다. 화룡은 지룡을 불태워 없애려고 하지 만, 지룡은 깊이 물 속에 잠겨서 꼼짝도 않고 있다. 진이 변 하여 태가 되고, 태가 변하여 건이 되면 지룡이 하늘로 솟구 쳐 오르게 되고, 화룡은 그 기운이 다하여 땅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렇게 한 바퀴를 순환하는 것이 바로 삼변(三變)이 다.> 그 글은 과두문자( 紗文字)로 쓰여져 있었다. 그 아래에 또 다음과 같은 과두문자가 쓰여져 있었다. <천지가 처음 열리면서 복희가 괘를 기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드니 아주 희귀하고

귀곡자는 도가(道家)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록 자신의 건 곤결의 내력이 전부 소실되긴 했어도 그 중의 초식, 절학만 큼은 모두 머리속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심룡결과 대조해 보자 깜짝 놀라 무엇인가 깨닫는 바가


있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복희씨는 분명 팔괘를 만든 복희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이 글에 담긴 함의를 생각해 보았다. 마치 백호구 산과 이 절곡의 기묘한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곡자는 계속 추측해 보았다. (진이 잠룡을 놀라게 한다는 것은 잠룡이 진을 만난다는 것 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로 솟구치면서 화룡으로 변하고 아래 로 모여서 지룡이 된다는 말은 무엇일까? 위로 솟구치는 것 은 분명 그 백호구 위의 용혈을 말하는 것이고, 아래로 모이 는 것은 이 절곡 안에 지룡이 머무는 곳이 있다는 말일 것이 다. 화룡은 지룡을 불태워 없애려고 하지만, 지룡은 깊이 물 속에 잠겨서 꼼짝도 않고 있고 진이 변하여 태가 되고, 태가 변하여 건이 되면 지룡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게 되고 화룡은 그 기운이 다하여 땅으로 내려오게 된다는 말은, 바로 백호 구 위의 화룡과 이 절곡 안의 지룡이 상생상극(相生相剋)의 관계로 서로 순환 왕복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귀곡자는 이 절곡에 놀랄 만한 지룡혈(地龍穴)이 숨어 있다 는 것을 대충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누가 이 지룡혈을 얻게 될지, 누가 백호구 위의 그 백호화룡혈(白虎火龍穴)을 억제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복수나 원한 등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아 주 싫어하는 데다가, 몸은 절곡에 빠져 있고 자기가 과연 언 제 이 곳을 빠져나가 살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 에, 이런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용혈 역시 싫어지기 시작했 다. 그는 나뭇잎을 다시 모아 이 복희지석(伏羲之石)을 잘 덮어 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곳에서 빠져 나왔다. 빠져 나왔 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저 그가 떨어진 그 작은 협곡을 빠 져 나왔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걷지 않아서 갑자기 그의 눈이 밝아졌다. 알고 보니 앞 쪽에 커다란 숲이 있었는데, 그 나무에는 이상 하게 생긴 과일들이 주렁 주렁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귀곡자는 배가 고픈 것을 느끼고 급히 그 과일나무 숲을 향 해 달려갔다. 바로 그 앞까지 달려오다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밥 한그 릇을 얻어 먹은 은혜로 인해 천기를 뒤집으려고 시도하다 가


그 일이 성공하지 못해 자기는 결국 상처를 입고 이 곳에 떨 어지게 되었다는 일을 상기한 것이었다. 만약 이번에 배가 고프다고 저 과일을 따 먹다가 과일 하나 의 은혜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귀곡자는 이렇게 생각하자 더 이상 그 과일을 따 먹을 수 없 었다. 그는 이런 절곡 안에서 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떤지도 알 수 없었다. 귀곡자는 잠시 멍청하게 설이다가 갑자기 실소를

자라고 있는 과일 나무에 과연 주인 없었고, 먹을 수 있는 과일인지 어 서 있었으나 배가 점점 고파오자 망 터뜨리며 말했다.

[귀곡자야, 귀곡자야! 너는 어쩌면 그리도 바보같으냐? 지금 너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 절곡을 빠 져 나갈 방법이 전혀 없는지도 모르는데, 설사 과일 하나를 얻어 먹는 은혜를 입는다 해도 보답할 길은 전혀 없지 않느 냐? 그런데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이냐? 우선 배불리 먹고 나 서 그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귀곡자는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이름도 모르는 아름답고 향 기가 좋은 과일을 잔뜩 따 가지고 내려와 한입 크게 씹어 먹 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이 과일들을 모두 먹어치웠다. 과일을 배불리 먹고 나자 귀곡자는 훨씬 더 기분이 좋아졌 다. 사람이 일단 배가 불러 기분이 좋아지면 쾌활해지는 법 이고, 사람이 일단 쾌활해지면 잡생각이 나는 법이다. 귀곡 자도 갑자기 온갖 잡생각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의 눈에 갑자기 일곱 색깔 무지갯빛의 환영이 보이더니, 그 환영들은 아주 빨리 여러가지 모습으로 기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귀곡자는 갑자기 사부 노자가 자기를 향해 손짓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사부 노자 옆에는 아름다운 옷을 입은 소녀가 서 있었는 데 아주 아름다운 얼굴이어서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귀곡자는 아주 기뻐하면서 사부 노자의 곁으로 가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구세주처럼 나타난 이 사부 노자의 능력이면 반 드시 자기의 내공도 회복될 것이고 이 절곡에서 빠져 나가는 것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다가 사부의 곁에 서 있는 그 소녀는 분명 사부가 새 로 거둬들인 여자 제자임이 분명했다. 바로 자기의 사매(師


妹)가 되는 셈이라고 생각하니 매우 즐거운 심정이 되었다. 귀곡자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사부 노자가 나타난 그 쪽을 향 해 미친 듯이 달려가면서 외쳤다. [사부님! 다행히 당신이 오셨군요! 빨리 와서 이 제자 귀곡 자를 구해주세요.] 귀곡자는 미친 듯이 달려갔으나 사부 노자와의 거리는 조금 도 좁혀지지 않았다.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시 달려갔 으나, 아무리 뛰어도 그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가 뛰면 뛸수록 눈 앞의 무지갯빛 환영들은 점점 더 많아 졌고 그의 마음 역시 점점 흥분되어 억제하기 어렵게 되었 다. 그는 그렇게 계속 빨리 뛰어가다가 갑자기 온 몸이 털로 뒤 덮인 원숭이 같은 괴물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 괴물이 입을 벌리고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잡아 먹으려고 하 는 것이었다! 귀곡자는 너무나 놀라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부 노자가 이 곳에 계시니 이 귀곡자가 죽을 리가 없다. 하지만 저 원숭이 같은 괴물의 이빨을 보니 물리기라도 한다 면 기분이 나쁘겠는걸!) 그는 계속 미친 듯이 달리며 그 괴물을 피해 달아나려고 했 다. 한참 동안 달리다가 보니 갑자기 그 아름다운 소녀가 보여 귀곡자는 기쁜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사매, 사부님은 어디 계시오? 어서 와서 이 사형 귀곡자를 구해 주라고 하시오!] 귀곡자는 자기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도 모르 게 기뻐서 손과 발을 휘저으며 미친 듯이 웃으며 뛰어갔다. 그는 미친 듯이 뛰고 웃는 일을 멈출 수 없었고, 그러는 동 안 그 무지갯빛 환영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그 무지갯빛 환 영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오로지 웃고 뛰는 일만 생각하게 되었다! 귀곡자가 미친 듯이 웃고 뛰는 동안, 그 원숭이 같은 괴물이 갑자기 번개처럼 그를 낚아챘다.


귀곡자는 가슴에 갑자기 고통이 밀려 드는 것을 느꼈다. (이 괴물에게 붙잡혔으니 이젠 그에게 먹히고 말겠구나!) 귀곡자는 커다란 절망에 빠져 갑자기 더 이상 웃지도 않고 뛰려고 하지도 않은 채 푹 쓰러져 더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귀곡자는 갑자기 과일이라도 먹고 있는 듯 이 입 안이 달콤해짐을 느꼈다. 눈을 뜨고 살펴 보니 입 안에 들어있는 것은 과일이 아니라 아주 빨갛고 농염한 작은 입술이었다. 어떤 소녀의 입술이었 는데, 그 입술로 아주 달콤한 과즙을 그의 입에 흘려 넣어주 고 있는 중이었다! 귀곡자는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얼굴을 빨갛게 물 들이며 말했다. [아! 사매, 당신이 내게 과일을 먹여주고 있었군요? 이 일은 사매가 하기에 적당한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 사부님이 대신 하라고 해요! 어? 내가 어쩌서 과일 하나 먹을 힘도 없지?] 그 작은 입술이 귀곡자가 제 정신도 들고 말도 하는 것을 보 자 갑자기 3 척 정도 떨어진 거리로 비켜서서 부끄러움과 기 쁨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피이! 누가 당신의 사매라는 거죠? 사부 노자는 또 뭐구요? 당신은 정말 바보같은 소리만 하는군요. 정말 우습도록 바보 같아요!] 우습다고는 말을 했지만 소녀는 웃지 않았다. 웃는 대신 얼 굴을 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귀곡자는 이 때 정말 바보가 되어 버린 듯 멍청하게 아무 말 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문득 자기가 그 과일들을 따 먹은 먹은 뒤에 무슨 일이 생겼었는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귀곡자가 중얼거렸다. [나는... 나는 죽지 않았나요?] 소녀가 키득 키득 웃으며 말했다. [바보! 죽었으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죽은 사람이겠어요? 당신은 방금 바보같


이 그 환영과(幻影果)를 잘못 먹고 미친 듯이 뛰고 미친듯이 소리지르게 되었던 거예요! 다행히 원(猿) 할아버지가 당신 을 발견하고 당신의 혼혈(昏穴)을 누르고 다시 당신을 이곳 으로 데리고 와서 내가 당신에게 실심과(實心果)의 과즙을 내어 당신에게 먹여 주고 있었던 거라구요! 아이고, 더 이상 말하지 않을래요. 기껏 구해 주었더니 바보같이 헛소리만 해 대고. 부끄럽지도 않아요?] 귀곡자는 정신이 혼미한 속에서 원숭이 같은 괴물이 몇번이 고 자기를 잡아 먹으려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는 깜짝 놀 라 말했다. [당신 할아버지는 어째서 같은 괴물을 보았는데 그 당신 할아버지는 연세도 하지 못하고 그 괴물에게

보이지 않지요? 방금 전에 원숭이 놈이 날 잡아 먹으려고 했었지요. 많으실테니 그런 괴물을 만나면 피 산 채로 잡아 먹힐지도 모릅니다!]

이 때 갑자기 휙,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공중에서 털로 잔뜩 뒤덮인 물건이 떨어졌다. 알고보니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원 숭이처럼 생긴 괴물이었다. 그 괴물이 손을 뻗어 귀곡자를 움켜 잡으려고 했다! 귀곡자는 너무 놀라 급히 피하려고 했으나 그 원숭이는 번개 처럼 달려들어 귀곡자의 왼쪽 뺨을 때렸다. 귀곡자는 그것을 피하려다가 오른쪽 뺨을 얻어 맞았고, 다시 또 왼쪽 뺨을 얻어 맞았다. 귀곡자는 그것이 자기의 왼쪽 뺨 을 때리려고 하는 것을 보고 필사적으로 피하다가는 또 다시 오른쪽 뺨을 얻어맞고 말았다. 귀곡자는 오른쪽 왼쪽으로 피하다가, 피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난 이제 대성인(大聖人)이 되는 법을 배운 모양이군. 왼쪽 뺨을 얻어 맞고도 화내기는커녕 도리어 오른쪽 뺨을 갖다대 니 말이오!] 원숭이 같은 그 괴물이 또 다시 귀곡자를 때리려 하자 그 소 녀가 웃더니 말했다. [원 할아버지! 이 바보가 헛소리를 했으니 열대 정도 뺨을 얻어 맞아야 하겠지만, 피할 힘이 없다며 왼쪽 뺨을 얻어 맞 고 오른쪽 뺨을 갖다대니 그만 사정을 봐주는 게 어때요? 정 말 그의 말대로 완전히 대성인이 된 모양이에요!]


원숭이 같은 그 괴물은 소녀가 즐거워하며 웃는 모습을 보더 니 자기도 기뻐하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그 괴물은 즐거워서 웃고 뛰느라 뺨을 떠리는 즐거움마저 잊 어버린 모양이었다! 귀곡자는 간신히 기어 일어나 그 원숭이 같은 괴물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그 소녀를 한번 쳐다보았다. 괴물은 정말 이상하고 기묘하게 생겼고, 소녀는 붉게 핀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웠다. [괴물은 정말 괴상하게 생기고 소녀는 정말 아름답게 생겼으 니, 아, 맙소사! 이것 역시 환영인가 보다!] 소녀는 귀곡자를 한번 노려보더니 말했다. [당신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당신이 먹은 환영과 의 독은 이미 실심과의 약성(藥性)에 의해 이미 다 해독되었 단 말이에요. 이 절곡에 잘못 들어온 사람이 만약 그 환영과 를 먹게 되면 미친 듯이 춤추고 웃다가 결국에는 힘이 다 빠 져 죽게 되는데, 그 환영과의 독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이 세 상에서 이 실심과의 과즙밖에 없다구요!] 귀곡자가 말했다. [그럼 내가 먹은 환영과의 독은 이미 다 해독되었습니까?] 소녀가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원 할아버지는 원래 당신에게 실심과를 먹이려고 했었는데, 당신이 미친 듯이 뛰면서 소리지르는 바람에 원 할아버지조 차 당신에게 실심과를 먹여 줄 수 없었대요. 그래서 그는 손 을 써서 당신의 혼혈을 눌렀는데, 그래도 당신의 입이 긴장 된 상태로 열리지 않아서 원 할아버지도 어쩔 수 없어서 당 신을 내가 있는 이곳으로 데려왔던 거예요! 나는... 나는 당 신이 흉악해 보이지 않아서 입으로 실심과를 깨물어 그 과즙 을 당신에게 먹여 주었던 거구요! 아이고, 정말 부끄러운 일 이지요!] 소녀는 말을 하면서 갑자기 귀곡자가 남자이고 자기보다 나 이가 많아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입으로 그에게 과 일을 먹여 주던 것을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창피해서 살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귀곡자는 갑자기 소녀의 얼굴이 빨개지면서 수줍게 웃는 것


을 보고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그는 주검봉에서 간장과 막야 부부가 자기에게 은혜 를 베풀던 일이 생각났다. 그 당시 그는 간 형님의 부인같은 친누나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 이 소녀를 보니 이 소녀가 자기의 누이동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이 드는 것이었다!

12.... 귀곡자는 소녀가 그 작은 입술로 자기에게 과즙을 흘려 넣어 주었다는 것을 알자, 비록 환영과의 독은 다 해독되었다고 해도 그의 마음은 마치 환영과를 먹은 듯이 혼미해지는 것이 었다. 소녀는 귀곡자가 멍하니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보고 부끄러 워서 말했다. [이런...! 당신은 또 바보같이 되었군요? 어째서 말을 하지 않는 거예요? 나는... 나는 원래 당신을 구해 줄 생각이 없 었는데, 이 절곡이 너무 답답하고 심심해서 당신이랑 놀려고 구해준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 다니... 나를 화나게 하면 또 다시 당신에게 환영과를 먹일 지도 몰라요!] 귀곡자는 한숨을 내쉬고 쓰게 웃으며 말했다. [환영과를 먹는다 해도 나는 더 뛰고 소리치고 웃을 수가 없 소. 배가 고파서 그럴 힘이 없다오!] 소녀가 웃더니 말했다. [배가 고프다면서 말은 어떻게 하지요? 이 깊은 계곡 속에 나와 원 할아버지가 있는데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가 뭐 있 겠어요? 날 따라 오세요!] 소녀는 말을 하면서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원숭이 같은 괴물이 귀곡자를 향해 히쭉 웃어 보이더니 그 역시 소녀를 따라 걸어가버렸다. 귀곡자는 우습기도 하고 화도 나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귀곡자는 노자 이이의 큰 제자이신데, 매번 밥을 구걸하 고 다니는구나!) 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그들을 따라갔다. 소녀는 과일나무 숲이 있는 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귀곡자는 따라가다가 갑자기 자기 눈 앞에 사람들이 사는 집 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무로 만든 집 두 채가 있었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아주 작았다. 작은 집은 마치 개집처럼 보였다. 소녀는 그 개집처럼 생긴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곳은 원 할아버지가 사는 곳이에요.] 귀곡자는 소녀를 따라 그 큰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원 할 아버지는 따라 들어오지 않고 갑자기 몸을 휙, 날려 어디론 가 사라져 버렸다. 나무집 안은 믿을 수 없을만큼 정결했고, 도구는 모두 나무 로 만들어졌으며 금속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귀곡자는 생각했다. [밥을 끓여 먹을 때는 나무로 만든 그릇을 사용할 수 없을텐 데... 만약 밥을 해 먹지 않는다면 이 소녀는 매일 무엇을 먹는단 말인가?] 귀곡자가 한참 기이하게 여기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 원 숭이 같은 괴물, 원 할아버지가 손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물 건을 들고 휙, 하고 뛰어 들어왔다. 그 물건의 모습은 아주 기이했고 형태도 여러가지가 뒤섞여 있었다. 원주형(圓柱形), 방추형(紡錘形), 계란형(鷄卵形), 사릉형(四 形), 호로형(葫蘆形) 등이 뒤섞인 모양이었고, 아 주 커다란 알과 비슷했으며 색깔도 빨강, 주황, 노랑, 파랑, 초록, 남색, 자색 등 일곱가지 색깔이 모두 섞여 있었다. 원 할아버지는 그 물건들을 나무 책상 위에 올려 놓고 귀곡 자를 향해 웃어 보이며 먹지 않으면 네 손해다라는 뜻을 전 하더니 휙, 하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이번에는 또 무슨 물 건을 가져 오려고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귀곡자는 책상 위의 물건들을 쳐다보자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리고 놀라고 있었다. 그는 배가 고팠지만 이번만큼은 절대로 이 물건에 함부로 손


을 대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 환영과 때문에 너무 놀라서 지금까지도 계속 환영에 시달리는 것 같았기 때문에 약간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절곡 속에 이런 괴물과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소녀는 귀곡자가 바보같이 입만 벌리고 책상 위의 그 물건들 을 바라보고 도무지 먹으려고 하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했다. [배가 고프다고 하지 않았나요? 왜 먹지 않는 거예요?] 귀곡자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분명히 배가 고픈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일곱 빛깔 나는 과 일은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소녀는 생각을 해보더니 실소하며 말했다. [바보 같군요. 아침에 뱀에 물리면 삼 년 동안은 뱀과 비슷 한 풀만 봐도 놀란다더니, 분명 그 환영과 때문에 너무 놀란 모양이군요! 하지만 마음 놓으세요. 내가 장담하건대 당신은 분명히 그것을 먹을 수 있고, 또 먹지 않고는 못 견딜 거예 요!] 귀곡자가 물었다. [어째서요?] 소녀가 탄식하며 말했다. [왜냐하면 난 이미 십 년 동안이나 그것만 먹고 지내 왔으니 까요! 8 십 년 동안 만약 이것을 먹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굶 어 죽었을 거예요! 이 절곡 안에는 비록 과일이 많기는 하지 만, 먹을 수 있는 것은 몇 종류 안 되고, 이 과일은 그 중에 서 가장 맛있는 과일이에요!] 귀곡자가 말했다. [이 과일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소녀가 말했다. [저도 몰라요. 원 할아버지가 매일 나에게 따다가 먹으라고 주는데, 난 그저 맛이 대추와 비슷하고, 모양은 대추 같기도


하고 대추 같지 않기도 한 이상한 것이어서 기이한 대추, 즉 기조자(奇棗子)라고 불러요. 이 기조자는 아주 신기한 과일 이에요. 맛은 달 때도 있고 쓸 떠도 있는데, 만약 마음이 고 통스러울 때 이 과일을 먹으면 그 맛이 아주 달게 느껴지고, 기분이 좋을 때 이 과일을 먹으면 아주 쓰게 느껴져요. 거기에다가 한 시진(時辰)에 한 개만 먹으면 전혀 배고픔을 느끼지 않게 되어 하루에 열 두개만 먹으면 충분하고, 더 많 이 먹어서도 안 되지요. 하나라도 더 많이 먹게 되면 배가 한 시진 동안 아프게 되니, 정말 신기한 과일이죠?] 귀곡자는 탁자 위의 그 과일들을 세어 보았더니 딱 열 여섯 개가 있었다. 책상에 어리는 태양의 그림자로 계산해 보니, 지금은 신시 (申時) 쯤 된 듯했고, 내일 아침 신시까지 딱 여덟 시진 남 았으니 두 사람이 각각 여덟개씩 먹으면 내일 아침 신시까지 는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정말 그 렇다면 이 과일은 얼마나 신기한 과일인가! 귀곡자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손을 뻗어 그 중 방추형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집어 들고 씹어 먹었다. 짙은 과일즙 이 입 안에 고이면서 아주 달콤한 맛이 났다. 하나를 다 먹 고나자 정말로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는 더 먹고 싶었지만 소녀의 말처럼 한 시진 동안이나 배 가 아플까봐 감히 더 먹을 수가 없었다. 소녀는 귀곡자를 쳐다보면서 그가 과일의 맛을 즐기는 모습 을 보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맛이 어떤가요? 분명 아주 달콤할 거예요. 그렇죠?] 귀곡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확실히 아주 달콤하군요.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 았지요?] 소녀가 말했다. [당신 눈에 뭔가 고민이 있는 듯하니 분명 마음 속은 고통스 러울 거예요. 그렇다면 이 기조자의 맛이 달콤할 수밖에요! 당신은 이 절곡에 떨어진지 얼마 안 되어 습관이 안 되어 있 어서 이것이 아주 신기해 보이겠지만, 차츰 습관이 되면 마 음이 안정되고 기분이 좀 좋아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기조자의 맛은 다시 쓰게 변하고 말 거예요!] 귀곡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기조자가 설마 심룡건곤결 중의 상심술(相心術)이라도 익히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처럼 사람의 마음속을 잘 알 수 있고 그처럼 영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비록 내공은 전부 소실되었지만, 심룡건곤결의 초식과 구결은 모두 상세히 기억하고 있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사 심룡건곤결로 알아본다 해도 반드시 보고, 듣고, 묻 고, 그 다음에야 살펴보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인데, 이 기조 자는 그런 과정 없이 사람의 속마음을 알아차린다니 오히려 더 영험하다고 할 수 있겠구나!) 귀곡자는 이렇게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소녀의 마음속을 자 세히 알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강호에 막 발을 디뎠을 무렵에는 내공이 충만하여 사람 들의 길흉화복을 한번 보면 알아 맞출 수 있었지만, 지금은 내공이 전부 소실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운명을 살펴 보려 면 아무래도 이전보다 몇 배의 시간이 더 걸려야 했다. 그는 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보면서 바보처럼 아무 말 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았다. 소녀는 그가 멍하니 자기의 얼굴만 바라보자 처음에는 얼굴 이 빨개지며 기쁜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가 너무나 오랫 동안 아무 말도 없이 꼼짝않고 자기의 얼굴을 쳐다보자 눈을 흘기며 톡 쏘아붙였다. [바보! 당신은 여자를 처음 봤나요? 왜 그렇게 넋을 잃고 쳐 다보고 있죠?] 귀곡자는 여전히 눈길을 떼지 않고 계속 소녀의 얼굴만 쳐다 보았다. 소녀는 부끄럽고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리려고 했으나, 그가 자기에게 너무나 빠져 정신을 잃고 있다고 여기고 기분 이 좋아져서 결국 뺨을 때리지 않았다. 귀곡자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의 부모님은 모두 이미 세상을 떠나셨으니, 당신은 아 주 불행한 사람이로군요!] 소녀는 그 말을 듣자 아름답던 눈에서 한광이 빛나더니 귀곡 자를 잠시 노려보다가 말했다. [당신이...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안단 말이에요? 당신은 오


나라의 그 간악한 태자가 날 잡아 죽이라고 보낸 사람인가 요? 흥흥...] 귀곡자가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오나라의 간악한 태자는 누구입니까?] 소녀가 이를 악물며 한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 악독한 태자 부차 말고 이 세상에서 누가 그처럼 잔인하 겠어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 것으로도 부족해서 아 예 뿌리를 뽑으려고 이젠 이 절곡 아래까지 자객을 보내 나 를 없애려고 하다니!] 귀곡자가 급히 말했다. [그 부차가 어째서 당신 부모님을 죽였습니까?] 소녀가 이를 갈며 말했다. [우리들은 본래 월나라 사람들인데 오나라가 공격해 왔을 때, 그 간악한 태자 부처가 우리 어머니가 아름다운 것을 보 고는 우리 집 사람들을 모두 끌고 갔어요. 어머니는 그 간악 한 태자가 욕을 보이려고 하자 반항했고, 부차는 화가 나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죽여버렸어요. 그들이 살해당 하기 직전, 아버지가 간신히 이 절곡 쪽으로 달려와 나를 이 절곡에 버리면서 절규하셨어요. <내 딸아, 네가 만약 요행히 살아 남는다면 후에 이 부모를 대신해서 저 악독한 태자 부처를 없애다오!> 결국 그들은 붙잡혀 살해당했구요. 난 그때 불과 여섯 살밖 에 안 되었지만, 아버지가 죽기 직전에 남긴 그 말씀을 아직 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소녀는 말을 하면서 눈시울을 붉히며 울음을 터뜨리려고 했 다. 귀곡자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급한 마음에 자기의 내공이 완전히 소실되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급히 고개 를 젓고 팔을 내저으며 말했다. [울지 마시오! 울지 마시오! 이 귀곡자가 멩세하건대, 반드 시 당신 대신 그 부차를 없애 주겠습니다! 아이고, 그럴 수 없구나!] 그는 너무나 급해서 입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여대다가 갑자기


간장 부부의 밥 한 그릇의 은혜 때문에 지금 이렇게 생사의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내고는, 오늘 만 약 함부로 약속을 하다가 결국 과일 하나의 은혜로 인해 또 어떤 엄청난 화를 불러일으키게 될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 고 그럴 수 없다고 소리친 것이었다! 소녀는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기뻐하다가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나자 화를 내며 말했다. [죽이든 안 죽이든 내가 당신에게 억지로 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귀곡자가 한숨을 쉬며 쓰게 웃더니 말했다. [내가 그럴 수 없다고 한 것은 부차를 죽일 수 없다고 한 말 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그럴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소녀가 말했다. [당신 스스로 그럴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귀곡자가 말했다. [사실 나의 내력(來歷) 역시 당신보다 낫다고 할 수 없지요.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비록 남에게 살해당한 것은 아니지만,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부차의 살수를 피해 이 절곡에 떨어 지게 된 거죠. 이렇게 절곡에 떨어져 앞으로 생사조차 불분 명한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럴 수 없다고 한 겁니다.] 소녀는 멍청해져서 그제서야 이 바보는 아무런 무공도 할 줄 모르며 시골의 촌부보다도 나을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도움을 받아도 사람을 죽이기는커녕 토끼 한 마리 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소녀가 웃음을 터뜨리 며 말했다. [당신이 하는 말을 듣고 당신이 절정 고수라도 되는 줄 알았 지 뭐예요! 당신이 토끼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잊고 있었군요. 그런 당신이 어떻게 그 간악한 태자 녀 석을 죽일 수 있겠어요? 아이고! 당신은 부차 때문에 이 절 곡에 떨어지긴 했지만 생명을 구할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 도 천만 다행한 일이에요! 그런데 왜 주제넘게 저를 대신해 서 부차를 잡으러 간다는 말을 하고 그래요?]


귀곡자는 갑자기 물었다. [당신은 이 절곡에 떨어졌을 때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소?] 소녀가 말했다. [저는 그 때는 사는 것이 무엇이고 죽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 르고 그저 부모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 깨닫고는 목을 놓아 울게 되었죠. 몸이 이미 절곡 밑의 허공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었던 거예요! 그저 차가운 바람이 제 몸 을 찌르듯이 밀려오는 것만 느낄 수 있어서 그 때문에 더욱 악을 쓰며 울었죠! 울다가, 울다가 보니 저는 사지가 찢어질 듯이 아픈 고통을 느끼게 되었고, 그 후로는 무슨 일이 어떻 게 되었는지 모르게 되었어요!] 소녀는 당시의 참상을 얘기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것이었다. 귀곡자가 급히 말했다. [그 후에는요?] 소녀가 깊이 탄식하며 말했다. [눈을 뜨고 주위를 보니 원숭이 같은 괴물의 품 속에 안겨 있었어요. 그는 털이 잔뜩 난 입으로 제게 과즙을 먹여 주었 는데, 그 과즙이 너무나 달콤해서 저는 몇 모금 마시고는 제 정신이 들게 되었어요! 그는 나를 이곳으로 안고 왔어요. 전 이 곳에 집 두 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후에 그 는 매일 저에게 그 달콤한 과일을 따다가 먹게 해 주었고, 저는 매일 열 두개를 먹으면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는 매일 저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는 잎 이 붙어 있는 대나무 가지를 사용했어요. 하지만 그가 한번 그 대나무 가지를 휘두르면 거석이 쫙쫙 갈라지곤 했죠! 처 음엔 전 그것이 너무나 놀랍고 신기했었는데, 그를 따라 십 년을 연습하다 보니, 당신이 이 곳으로 떨어지기 칠일 전에 는 대나무 가지로 거석을 쪼갤 수 있게 되었어요! 그 때 저 는 기조자를 먹었는데 그 때의 기조자의 맛은 아주 쓰게 변 해 있더군요!] 여기까지 말하자 갑자기 그녀의 눈에서 복수의 불길이 피어 올랐다. 귀곡자가 급히 말했다. [어째서 기조자의 맛이 아주 쓰게 변했을까요?]


소녀의 눈빛이 더욱 살기를 띠었다. [저 혼자서도 그 간악한 부차의 목을 벨 수 있다고 믿게 되 었던 거죠! 나는 마침내 부모님의 혈해와 같은 원한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였거든요.] 귀곡자가 말했다. [당신은 복수할 희망이 생기자 기쁜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기쁜 마음이 생겨 기분이 좋아지게 되니까 그 기조자의 맛이 자연히 쓰게 느껴지게 된 것이로군요!] 소녀는 그 말을 듣고 말했다. [그래요! 당신같은 바보가 이젠 갑자기 아주 똑똑한 소리를 하는군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우리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 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죠?] 귀곡자는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기분이 점점 좋아 지고 편안해져서 사람이 이런 절곡 밑으로 떨어져도 절망하 지 않을 수 있고, 절망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희망을 갖게 된 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띄며 말했다. [다행히 전 사람의 관상을 보는 법을 좀 배웠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겁니다. 이건 아주 간단하지요. 당신의 이마 위의 일월(日月) 두 각(角)에 모두 하얀 기운이 어려 있는데, 일 월각(日月角)이 하얗다는 것은 두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 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겁니다. 이렇게 한번 척 보면 알아낼 수 있지요.] 소녀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듯이 눈을 깜빡거리며 말 했다. [당신... 대단한데요? 당신은 또 무엇을 알고 있죠?] 귀곡자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맑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부모님은 딸 하나만 두셨으니 당신은 두 분의 유일 한 핏줄입니다. 당신은 성이 서(筮)이고 이름은 란(丹)이며, 월나라 서호(西湖) 사람이군요, 맞습니까?] 소녀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뛰어 오르며 갑


자기 오른손을 뻗어 재빨리 귀곡자의 목을 낚아채려고 덤벼 들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귀곡자는 내공이 전부 소실되어 건곤결의 초식을 머리로만 기억하고 있을 뿐 어떠한 초식도 직접 펼쳐 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일초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귀곡자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소녀는 갑자기 손을 거두 었다. 그녀는 결국 귀곡자가 무공도 할 줄 모르고, 따라서 간악한 태자 부차가 보낸 자객일 수 없다는 사실을 믿게 되 었던 것이다. [당신은... 당신은 어째서 피하지 않나요?] 귀곡자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피할 힘이 없고, 당신이 정말로 날 죽이려는 것이 아 님을 알고 있었어요. 내가 부차의 앞잡이가 아닌데 무엇하러 피하겠어요?] 소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그 악독한 태자의 앞잡이가 아니라는 것을 믿 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아 맞출 수 있었 나요?] 귀곡자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두 부모를 잃었기 때문에 머리 위에 풀(竹)로 만든 상제의 모자를 쓴 형상이고, 눈에는 부모를 그리워하는 정이 가득합니다. 그리워하는 사람은 두 사람(兩)이니 합쳐보면 서(筮)자가 되지 않겠어요? 또 당신의 입술은 불처럼 붉으니 (丹) 합쳐 보면 서란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지요.] 소녀 서란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어떻게 내가 월나라 서호 사

귀곡자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월나라라고 서 아가씨가 미리 말해 준 것이고, 부차는 자만 심이 강할 정도로 눈이 높은 인물인데 그의 눈에 들 정도의 미인이라면 분명 천하의 절색일 것입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부차의 눈에 들었다고 하니 분명 미인 중의 미인이었을 것이 고, 서호는 예로부터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니 추측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요! 더군다나...] 귀곡자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서란이 말했다. [더군다나 뭐요? 빨리 말해 보세요!] [서 아가씨, 당신 역시 아주 아름다우니, 월나라 서호 외에 이렇게 아름다운 미인을 배출할만한 곳이 또 어디 있겠습니 까?]

13.... 서란의 얼굴이 빨개지면서, 부끄러운 듯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같은 바보가 정말 대단한 신통력을 가지고 있네요. 하지만 마지막 말은 입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이는 쓸데없는 말이에요. 아, 당신의 이름은 뭐라고 하죠?]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내 성은 귀씨이고 이름은 곡자라고 합니다. 이상하게 생각 되지요?] 서란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자기를 귀곡자라고 하면 귀곡자인 것이지, 이상하고 말고가 어디에 있겠어요?] 귀곡자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리고 내 사부님은 노자 이이라고 하십니다. 정말 그 이름 이 이상하지요?] 서란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 데, 노자 이이는 살아 있는 신선으로, 그의 도움을 받은 사 람이면 누구든지 열국을 재패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당신같 은 바보가 스스로 그의 제자라고 칭하다니? 당신은... 당신 은 환영과의 독성이 아직도 다 해독되지 않아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에요!] 사부 노자의 말을 듣자마자 서란이 멍청해질 정도로 놀라는 것을 보고 귀곡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부 노자의 제자라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것인 가? 강호에 나오자마자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렇게 위험에 처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뿐인데!) 귀곡자는 이런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다시 간장과 막야 부부의 일이 생각나서 마음이 괴로워졌다. (간 형님이 살해당한 것은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다. 간 형님 의 부인은 절대로 요절할 운명을 타고 나지 않았으니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내가 청룡대법(請龍大法)으로 간씨의 핏줄에 대지의 용기(龍氣)를 불어 넣었으니, 이 간 형님의 핏줄은 분명 요절하지 않을 것이다!) 귀곡자는 이렇게 생각하자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그가 막 강호에 나와 손을 댄 주검봉의 일은 결국 실패했지 만, 간 형님의 시체라도 찾고 간 형님 부인과 그 자식을 찾 을 수만 있다면 천기를 거역하려던 그 대담한 노력도 완전한 실패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귀곡자는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 하늘의 안배를 거역하고 싶 은 충동을 느꼈고 삶의 의욕 역시 아주 강해졌다. 그는 자기가 꼭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내공 역시 회복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공을 회복해야 이 깊은 절곡을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귀곡자는 그런 결정을 내리자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다. 서란은 입을 약간 벌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곡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노자 이이의 제자인지 아닌지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보다 당신에게 무공을 가르쳐준 사부는 아주 대단한가 봅 니다. 바로 그 원 할아버지가 사부님이신가요?] [당연히 원 할아버지이죠! 절대로 그를 원숭이처럼 생긴 괴 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는 무공도 아주 대단하고 마음 씨도 아주 착해서 이 세상의 못된 사람들에 비하면 정말 비 교도 안될만큼 좋은 동물이에요!]


귀곡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이 귀곡자의 생명 역시 따지고 보면 그가 구해준 셈이죠. 그렇게 보면 그는 당신의 할아버지가 될 뿐 아니라 이 귀곡자의 할아버지도 되겠군요!] 귀곡자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바깥에서 휙, 하고 털로 뒤덮인 그 괴물이 뛰어들어왔다. 그는 귀곡자의 앞에서 즐거운 듯이 깡총깡총 뛰며 뭐라고 알 수 없는 말로 꽥꽥 지껄여댔다. 마치 무슨 말인가 하는 것 같았지만, 귀곡자는 전혀 알아 들을 수가 없어서 멍청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란이 웃으며 말했다. [원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자기도 당신이 좋대요. 그래서 기꺼이 당신의 할아버지가 되겠다는군요! 어때요? 원 할아버 지는 정말 늙은 어린애 같죠? 사실 그의 나이는요, 이미 이 백 삼십 살이나 되었답니다!] 귀곡자가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지요?] 서란이 말했다. [내가 왜 모르겠어요? 나는 그가 먹고 버려둔 기조자의 껍질 을 세어 본 적이 있는데 모두 백 일만 구십 육개더군요. 그는 매일 열 두개씩을 먹으니까 계산해 보면 이백 삼십 년 이 되지 않겠어요?] 귀곡자가 말했다. [그 원 할아버지의 무공은 어디에서 익힌 것이랍니까? 그는 대나무 가지로 바위를 쪼갤 수 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군 요!] 서란이 말했다. [원 할아버지야 당연히 대단하죠! 그러니 당신은 그가 알 수 없는 소리로 꽥꽥 지껼여대기만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있고, 자기의 말을 할 뿐이에요. 처음에는 저도 알아 듣지 못했었지만, 점 점 알아 들을 수 있게 되더군요! 그는 이 두 채의 집 중 큰 집은 원래 월녀(越女)라고 불리는 여자가 살던 곳이고, 작은


집은 원 할아버지의 어머니가 살던 곳이라고 했어요. 그의 어머니가 이 절곡에 떨어졌을 때 원 할아버지를 배고 있었는 데, 월녀가 그들 모자를 구해주었기 때문에 두 모자는 자연 히 월녀에 대해 끝없는 충성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어요. 따지고 보면 보잘것 없는 원숭이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원숭 이의 마음이 사람들의 마음보다 훨씬 더 정이 깊다고 할 수 있죠!] 서란은 감동된 듯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후에 월녀는 원 할아버지에게 검법을 가르쳐 주었대요. 당시 월녀가 가지고 있던 검은 용연(龍淵)이라고 불리는 보 검이었는데, 원 할아버지의 말을 따르면 그 용연검(龍淵劍) 은 월나라에서 가장 검을 잘 만든다는 간장의 사조(師祖)인 복희(伏羲)가 만든 검이었다나 봐요. 그 검 위에는 이상한 도형이 그려져 있는데, 지금까지도 원 할아버지는 그 도형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대요. 원 할아버지가 검법을 다 연마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월녀 역시 막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었다는군요. 월녀는 죽기 직전 원 할아 버지에게 말하기를, 이 검법은 월녀검법(越女劍法)이라고 하 고 월녀검법은 고난 속에서만 연습할 수 있으니, 원 할아버 지에게 이 절곡에 남아 있다가 이 검법을 가르쳐 줄만한 여 자 아이를 만나면 그 애에게 검법을 전수해주고 이 곳을 떠 나라고 분부했대요.]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겠군 요. 이 절곡에 떨어지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다가, 떨어진 사 람이 월녀검을 익히기에 적합할 정도로 어리고 불쌍한 사람 이어야 했을테니, 그래서 결국 서 아가씨 당신과 원 할아버 지가 만나게 된 것이로군요?] 서란이 아리땁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월녀검법은 과연 엄청난 무공으로, 이 세상에서 실 전된지 이백여 년이나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서란이 마 침내 그 월녀검법을 다 익힐 수 있었답니다!] 귀곡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렇게 자신있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월녀검법을 익 힐 수 있으려면 엄청난 기연을 타고 나야 하니까! 다만 서 아가씨의 운명이 걱정이로군!)


서란은 귀곡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

기분이 상해서 말했

[이봐요! 당신은 다시 바보가 되었나요? 나는 월녀검법을 연 마했으니 부모님의 원수를 갚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복수를 해 줄 수도 있는데 왜 그러죠? 간악한 부차는 바로 당신을 이 절곡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이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왜 그렇게 기분이 상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귀곡자는 한숨을 쉬며 쓴 웃음을 짓고 말했다. [나는 아주 기쁩니다. 다만 월녀검을 연마했다고 해도 이 절 곡을 빠져 나갈 수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군요? 만약 빠져 나갈 수 없다면, 월녀검법은 이곳에서 썩고 말텐데요?] 서란은 그 말을 듣자 이 절곡을 빠져 나가지 못한다면 월녀 검법을 연마했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 게 되었다! 그녀는 월녀검법의 연마를 마친지 7 일도 채 되지 않아 계속 흥분하고 있었는데, 귀곡자의 말을 듣자 침통한 심정이 되었 다. 그녀는 갑자기 배가 고픈 것을 느끼고는 책상 위의 기조자를 하나 집어 먹었는데, 이 때의 달콤한 맛으로 변해 있었다. 귀곡자는 말했다. [원 할아버지는 이 절곡을 빠져 나간 적이 있나요?] 원 할아버지가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가 고개를 가로 저으 며 뭐라고 지껄였다. 귀곡자가 물었다. [원 할아버지는 뭐라고 하는 겁니까?] 서란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원 할아버지가 말하기를, 그는 당연히 이 절곡을 빠져 나갈 수 있대요. 내가 사용하는 옷은 그가 이 절곡을 빠져나가 사 람들에게서 훔쳐 온 것이라고요! 그는 정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도둑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혼자서는 이 절곡을 빠져 나갈 수 있어도, 한 사람을 더 데리고 나가


게 되면 자기는 죽어도 할 수 없대요. 원 할아버지는 당신은 별로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니 당신을 잡아 먹자고 하는군요!] 귀곡자는 원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그저 농담에 불과하다 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원 할아버지가 절대로 거짓말이나 헛소리를 하지 않는 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이 심각하게 들렸던 것이다. 누구든 이 절곡을 빠져 나가려면 결국 자신의 노력 밖에 믿을 것이 없는 셈이었다! 귀곡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이 귀곡자의 공력이 아직 남아 있다면, 천하무쌍의 심 룡건곤결의 건곤운행 초식을 이용하여 그녀를 데리고 절곡을 빠져 나갈 수 있었을텐데! 아아, 그녀는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구나!) 귀곡자의 마음속에 서란에 대해 무한한 동정심이 일어났다. 그는 이 세상의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 주겠다던 자 기의 멩세를 기억해내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다지는 것이었다! 귀곡자는 한동안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말했다. [서 아가씨, 당신은 월녀검이 복희씨가 만든 검이라고 했지 요?] 서란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어쨌다는 거예요? 설사 월녀검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대붕으로 변해 우리들을 태우고 빠져나갈 수 있는 것 도 아닌데요!] 귀곡자가 급히 말했다. [당시의 월녀는 월녀검을 가지고 다녔나요?] 서란이 말했다. [아니요! 그녀는 가지고 다니지 않았어요. 원 할아버지의 말 에 따르면, 월녀검법의 최고의 경지는 바로 검을 사용하지 않고도 검기(劍氣)가 열 손가락에서 튕겨나와 마음이 움직이 는대로 움직이는 것이래요. 정말 천하 무적이라고 할 수 있 죠!]


귀곡자가 그 말을 듣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서 아가씨, 제게 그 월녀검을 한번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 까?] 서란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아예 무공을 모르는 사람인데 그 칼을 본다 한들 무 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저 시간만 낭비하고 눈만 버리는 일 일텐데요? 원 할아버지, 어째서 그리 급하게 뛰어 나가는 거 예요?] 알고보니 원 할아버지는 귀곡자가 하는 말을 듣자 급히 몸을 돌려 바깥으로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커다란 대나무통을 들고 들어왔다. 귀곡 자가 이상하게 여기고 있을 때 원 할아버지가 갑자기 그 대 나무통을 향하며 허공에서 한번 손을 뻗어 가르자, 그 통이 두 쪽으로 가라지면서 놀랍게도 그 안에 들어있던 보검이 보 였다! 원 할아버지는 검을 들고 귀곡자의 앞에 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용연검이었다. 귀곡자가 자세히 살펴 보니, 이 검은 외형상으로는 평범하여 특별한 구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귀곡자는 학식이 풍부하 여 한 눈에 이어진 자국이 전혀 없는 보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검은 마치 반룡이 건곤이 되던 시대의 오래된 물건 같았 다. 그의 사부 노자 이이와 마찬가지로 얼마나 오래 되었는 지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오직 그 점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을 숙연케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귀곡자는 손을 뻗어 용연검을 들어 보았다. 무게가 그리 나 가지 않아서 여자가 사용하기에 적합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월녀가 이것을 가지고 월녀검법을 만들었다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구나.) 용연검 위에는 과연 많은 이상한 도형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 도형은 너무나 이상한 형상이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제아무리 학식있고 능력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심지어는 그 검을 가지고 월녀검법을 만든 월녀조차도 무슨 뜻인지 이 해하지 못했다.


귀곡자는 깜짝 놀랐다. 이 세상 사람이라면 이 이상한 도형 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귀곡자는 예외였던 것이다. 그는 심룡건곤결의 유일한 전수자였고, 심룡건곤결에는 복희 생팔괘(伏羲生八卦)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귀곡자는 심룡건곤결의 초식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눈에 용연검 위에 새겨진 그 이상한 도형들이 바로 복희가 만들어낸 팔괘연행도(八卦演行圖)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팔괘연행도는 그것을 깨우치는 사람이 있게 되면 자동적 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팔괘시창도(八卦始創圖)라고도 불린 다. 그 뜻은 처음으로 깨우친 사람이 바로 창시자가 되고 그 후 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그 비밀을 깨우치지 못하기 때문 이었다. 귀곡자는 용연검 위의 팔괘연행도의 비밀을 아직까지 아무도 깨우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귀곡자는 눈알도 굴리지 않고 뚫어지게 이 용연검을 쳐다보 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원 할아버지는 조용히 귀곡자의 곁에 서서 귀곡자와 마찬가 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귀곡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란만이 이런 분위기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지 짜증을 냈다. [그 검을 봐야 소용없을 거라고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았었나 요? 좋아요! 아예 지금부터 벙어리가 되지 그래요!] 귀곡자는 서란의 말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지금 그의 정신은 오로지 이팔괘연행도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예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귀곡자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복희가 팔괘를 만들었다는 것은, 바로 건이 변하여 손이 되 고, 손이 변하여 간이 되고, 간이 변하여 곤이 되고, 곤이 변하여 진이 되고, 진이 변하여 태가 되고 태가 변하여 건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귀곡자는 말을 하면서 입으로 중얼 중얼 무엇인가 외우자 두 발이 저도 모르게 자유 자재로 이리 저리 움직이기 시작했 다. 그는 서북위(西北位)에서

동남위(東南位)로 움직였다가, 또


다시 동남위에서 동북위(東北位)로 움직이고, 다시 동북위에 서 곧장 서남위(西南位)로 가로질러 갔다가 다시 서남위에서 곧장 정동위(正東位)로 방향을 바꾸고, 동위(東位)애서 다시 정서위(正西位)로 갔다가 다시 정서위에서 원래의 서북위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속도가 붙어 빨라지고,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기묘해져서 마침내 그의 몸이 마치 용연검에 새겨져 있는 그 도형의 형상과 점점 일치하면서 서란과 원 할아버지 앞에서 번개처럼 변화하며 이리 저리 움직이고 있 었다. 서란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면서 중 얼거렸다. [바보인가? 멍청이인가? 아니면 미쳤나? 그는 분명히 무공을 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걸으면 걸을수록 힘이 넘쳐나고 속도 가 빨라지고 점점 더 기묘한 보법을 밟을 수 있게 된단 말인 가?] 원 할아버지는 눈알도 굴리지 않고 귀곡자의 신법을 뚫어지 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작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가만히 앉 아 있지 못하고 귀곡자의 동작을 따라하는 것이었다. 원숭이는 본래 따라하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다. 원 할아버지 는 동쪽과 서쪽을 헷갈리며 이리 저리 방향을 잘못 잡아 헤 매다가 점점 귀곡자와 비슷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 넓지 않은 나무집 속에서 사람 하나와 원숭이 하나가 하 나는 빠르고 하나는 느리게, 하나는 앞서고 하나는 뒤에서 발걸음을 내디디다가 나중에는 두개의 기괴한 도형으로 변하 여 집안을 이리 저리 선회하게 되었다!

14..... 서란은 이때 이 나무 집 안에 기가 팽배해 옴을 느꼈다. 그녀의 내공은 이미 높은 수준이었지만, 질식할 것 같은 기 분이 되어 저도 깜짝 놀랐다. (맙소사! 이 바보같은 귀곡자가 검기 때문에 어떻게 잘못 되 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미친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원 할아버지보다도 더 빨리 그리고 더 현묘하게 보법 을 밟을 수 있단 말이야? 사람이 미치게 되자 공력까지 미친 듯이 뻗어 나오는 것이 아닐까?)


급기야 서란은 실내에 가득찬 기에 압박을 받아 숨도 못쉴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몸을 날려 몸을 움직이자 그제서야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귀곡자의 몸을 따라 그 가 하는 대로 보법을 밟으며 동서남북을 이리 저리 움직이게 되었다. 서란은 복희씨의 팔괘연행도가 귀곡자가 배운 심룡건곤결처 럼 반룡이 건곤을 나누던 시기에 나온 일종의 무공이라는 사 실을 모르고 있었다. 귀곡자의 내공은 천기를 거역하다가 소실되고 말았으나, 지 금은 이 복희씨의 팔괘연행도로 인해 점차 내공이 쌓이고 있 는 중이었다! 귀곡자가 한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내공이 차츰 차츰 쌓이 게 되었다. 그는 이 팔괘연행도의 보법을 사용해 걸을수록 내공은 점점 체내에 많이 축적되고 충만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서란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하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이미 익힌 무공의 기초가 있었고,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기를 앞서 걷는 원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갈 뿐이었지만, 조금 지나자 그녀는 원 할아버지와 나란히 방위를 옮겨 다닐 수 있게 되었고, 다시 좀 더 지나자 서란 은 이제 원 할아버지보다 한 발 앞서 방위를 밟게 되었다! 서란은 서북위에서 동남위로 움직였다가, 또 다시 동남위에 서 동북위로 움직이고, 다시 동북위에서 곧장 서남위로 가로 질러 갔다가 다시 서남위에서 곧장 정동위로 방향을 바꾸고, 동위에서 다시 정서위로 갔다가 다시 정서위에서 원래의 서 북위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한번의 윤회를 마치자 서란은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재미를 느꼈다. 걸을수록 더 걷고 싶어지고, 걸을수록 속도 가 빨라져서 마침내는 귀곡자를 따라잡을 정도로 빠르게 되 었다! 서란은 이때 호흡이 더할 나위 없이 편하고 마음도 아주 편 안했다. 그녀는 기뻐하며 말했다. [아주 좋구나! 이 멍청한 귀곡자! 이 놀이는 정말 재미있군 요! 부탁이에요! 절대로 멈추지 말아요! 제발! 제발! 제발


요!] 다시 한 시진 쯤 돌았을 때 귀곡자는 배가 고파 갑자기 멈추 어 섰다. 그가 멈추어 서자 서란 역시 그 뒤를 따라 멈추었으나, 원할 아버지는 멈춰 서려고 하지 않고 계속 동분서주하며 방위를 옮겨 밟고 있었다. 서란이 이상해서 말했다. [원 할아버지는 어째서 멈추지 않는 거지요? 설마 당신이 먹 었던 환영과라도 먹은 것은 아니겠죠? 원 할아버지, 이제 그 만 하세요. 그러다가 힘이 다 빠져 쓰러지고 말겠어요!] 서란은 원 할아버지가 비록 영리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짐승 의 습성을 가지고 있어서 일단 즐거우면 모든 것을 다 잊어 버리고 오직 그 재미에만 빠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 었다. 원 할아버지는 일단 모방에 재미를 느끼자 다른 모든 일은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세상 사람들이 내공 을 연마하다가 자칫 잘못하여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와 흡사 했다. 귀곡자는 원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그가 이미 스스로 억제 할 수 없는 경지에 빠진 것을 알았다. 그의 마음이 발동되자, 심룡건곤결 중의 혼돈건곤의 초식이 갑자기 펼쳐지면서 그의 손바닥에서 원 할아버지를 향해 한 줄기 건곤진기(乾坤眞氣)가 뻗어나갔다. 귀곡자는 지금 내공이 이미 절반 이상 회복된 상태였다. 원 할아버지는 갑자기 엄청나게 강한 진기가 휘익, 하고 자 기를 감싸는 것을 느꼈으나 전혀 반항할 수 없었다. 그는 휙, 하고 단숨에 그 팔괘연행의 원에서 벗어나게 되었 다. 그의 몸은 멈춰서게 되었는데 피곤에 지친 듯 숨을 씩씩 몰아쉬고 있었다. 서란은 귀곡자가 허공을 격하고 원 할아버지에게 손을 뻗는 것을 보았을 뿐인데 원 할아버지가 갑자기 그 원에서 벗어나 며 멈추어 서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귀곡 자를 쳐다보았다! 원 할아버지가 탁자 위에 놓인 용연검을 한번 쳐다보더니 갑 자기 꽥꽥거리기 시작했다. 원 할아버지의 소리는 오직 서란만이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원 할아버지가 하는 말을 듣자 즉시 탁자 위의 보검 을 한번 살펴보더니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래 용연검 위에 새겨져 있던 그 이상한 도형들이 지금은 씻은듯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그저 검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서란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것일까? 어째서 귀곡자가 이곳에 온 후에 이상한 일들만 일어나는 것일까? 아아, 맙소사! 이봐요! 빨리 어떻 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지 않으면 당신을 저주할 거예요!]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아가씨, 당신은 무슨 설명이 듣고 싶으신지요?] 이 때 원 할아버지가 뭐라고 꽥꽥거리며 갑자기 귀곡자의 앞 에 가서 머리 숙여 공손히 절을 올리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귀곡자가 물었다. [원 할아버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서란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을 거예요! 그럼 당신도 무슨 일인지 몰라 답답해 죽겠지요? 흥, 당신은 알기나 해요? 원 할아버 지 말씀이 당신은 그의 사부인 월녀보다 훨씬 더 대단해서 저렇게 절을 올릴 정도로 감복했대요! 그리고 당신은 아직 나이가 어린데 어떻게 그렇게 대단한 무공을 펼칠 수 있는지 모르겠대요! 아,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녀는 말해주지 않겠다면서 모든 것을 전부 말하고 말았다. 귀곡자는 서란의 귀여운 모습을 보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여자에게 느끼는 첫정이라고나 할까? 귀곡자는 자기의 내력(來歷)을 숨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어떻게 하여 곤경에 빠졌다가 우연히 노자 이이를 만 나 심룡건곤결을 체득하게 되었는지, 또 강호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불행하게도 간장과 막야 부부의 흉운(兇運)을 알게 되어 천기를 거역하여 그들을 구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간장 의 생명을 구하지도 못하고 자기 역시 내상을 입고 내력을 모두 상실하고 부차에게 쫓겨 이 절곡에 떨어지게 된 이야기 를 소상히 들려주었다.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 기조자 하나를 씹어 먹었는데, 지금은 아주 쓴 맛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내공이 반 이상 회복되어 이제 이 절곡을 빠져 나갈 희 망이 생긴 데다가 서란과 함께 웃고 떠드는 사이에 기분이 아주 좋아져 있었던 것이다. 그의 기분이 좋아지자, 기조자 의 맛은 자연히 쓰게 느껴지게 되었다. 서란은 넋이 나간 듯이 귀곡자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눈앞의 바보가 바보가 아니며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무공의 고수이자 젊은 청년이라고 느껴졌다! 그녀는 멍하니 귀곡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귀곡 오라버니! 이 검에 사라져버린 것이죠?]

있던 그 이상한 도형은 왜 갑자기

서란의 입에서 아무 생각 없이 갑자기 귀곡 오라버니라는 호 칭이 나왔는데, 이 호칭은 아주 달콤하게 들렸다. 귀곡자는 순간 당황했다. 그는 오라버니라는 호칭이 익숙치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당황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이런 동생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갑자기 기분이 아주 좋아져서 급히 누이동생 대하듯이 친절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 그건 말이야, 이 용연검은 선고(先古)의 기인(奇人)인 복희씨가 만든 것이야. 복희는 팔괘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소 위 내공심법(內功心法)의 사조(師祖)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지. 그는 이 검에 일종의 걸음을 옮기면 자연히 내공이 쌓이 는 내공심법을 새겨 놓고 그 이름을 팔괘연행도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좀 전에 밟은 보법이지. 복희씨의 팔괘 연행도는 아주 기이하고 특이해서, 만약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도형은 여전히 검에 새겨진 채로 있지만, 일단 누군 가가 그 비밀을 깨뜨리게 되면 도형은 스스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일명 팔괘시창도라고도 하는 거야.] 서란이 말했다. [복희노조(伏羲老祖)가 이 팔괘연행도를 만들었다구요? 정말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군요!]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째서?] 서란이 말했다.


[만약 누군가 그 비밀을 깨우치게 되면 도형은 즉시 사라져 버리게 되니, 그 비밀을 깨뜨린 사람이 영원히 창시자가 되 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전무고인(前無古人)이요, 후무래자 (後無來者)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귀곡자는 웃으며 말했다. [맞아! 맞아! 그런 도형의 비밀을 우리가 오늘 우연히 깨우 치게 되었으니, 천 년에 한번 날까말까한 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 서란과 원 할아버지는 기조자를 먹은 후 다시 귀곡자를 따라 팔괘연행도의 보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배가 고플 때까지 연습하다가, 배가 고프면 기조자를 하나 먹고, 또 다시 한 시진 정도를 연습했다. 저녁이 되자, 원 할아버지는 자기의 개집같은 우리 속으로 돌아갔다. 서란이 살고 있는 집에는 침상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서 란은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침대에서 자야 하나?) 서란은 열 여섯 살의 나이로, 남자 앞에 서면 기쁨과 수줍음 을 동시에 느끼는 소녀였다. 같이 있고 싶은 마음과 헤어져 야 한다는 마음이 엉키고 있었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 배워 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귀곡자는 남녀간의 미묘한 일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지 못하 고 있었다. [서란 동생, 피곤할테니 난 상관하지 말고 어서 먼저 들어가 서 자. 난 아무 곳에 앉아 있어도 상관 없어!] 그가 앉는다고 한 것은 사실 반룡건곤의 초식을 연습하는 자 세였다. 반룡은 건곤 속에 기나긴 세월 동안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그것을 깨뜨리고 나온 것이니, 하룻밤쯤 앉아 있는들 뭐가 대수롭겠는가? 서란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럼... 귀곡 오라버니, 모든 것은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하고 말하고는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낮에는 연습하고 밤에는 잠을 자는 생활이 계속되었 다.


매일 아침 원 할아버지는 서른 여섯개의 기조자를 따 왔는 데, 이것은 바로 그들의 하루치 식량이었다. 기조자를 먹으며 팔괘보를 연습하는데, 마지막 기조자를 다 먹고 나면 하루가 지나가는 것이다. 팔괘보를 연습한지 한 달쯤 되자, 서란은 이미 행운유수(行 雲流水)처럼 보법이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내공 이 이전보다 몇 배나 더 강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손에 용연검을 쥐고 팔괘보의 보법을 밟으며 월녀검 법을 연습했는데 그렇게 연습하던 어느날 놀랍게도 검을 들 고 한번 휘두르니 은은히 검기(劍氣)가 발사되어 나왔다. 서란은 그제서야 복희씨의 팔괘보가 정말 천하 내공심법의 기본이 된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원 할아버지의 내공 역시 이전보다 많이 진보했다. 하지만 그는 나이가 들어 기경팔맥(奇經八脈)이 이미 굳어져버렸 기 때문에, 한 걸음 진보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다행히 그는 원숭이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저 호가내를 내는 것 으로 만족하고 이 연습에서 무엇을 얻으려는 생각은 품고 있 지 않았다. 귀곡자는 팔괘보를 연공하자 그의 심룡건곤진기 역시 점점 강해져서, 일개월 쯤 연습하자 그의 내공은 거의 이전의 상 태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이 때 귀곡자가 혼자 절곡을 빠져 나가려고 했다면, 절곡을 나가는 일이 절대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서란 동생의 내공이 아직 백 장 길이의 절벽을 기어 오르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또 한 달이 지나갔다. 귀곡자는 갑자기 서란의 내력 이 더 이상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마음이 어지러워 제대로 연공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 던 것이다. 이것은 팔괘보의 연마에 있어 가장 큰 금기사항 이었다. 조금만 신중하지 못하면, 쉽게 미망의 경지에 빠지 게 되고 혼자 힘으로는 빠져 나오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귀곡자는 그 모습을 보자 참지 못하고 서란에게 말했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절곡을 빠져 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이 절곡에서 영원히 늙어 죽을지도 모르니 정신차려!] 서란은 그 말을 듣자 입술을 깨물며 짜증 내듯이 말했다.


[귀곡 오라버니! 나는 당신의 내공이 이미 회복되어 언제든 지 절곡을 빠져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가세요. 난 당신의 도움은 필요 없어요!] 귀곡자는 소녀의 오묘한 속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도 모 르게 멍청해져서 말했다. [왜 나더러 떠나라는 거야? 왜 내가 동생을 도우면 안 된다 는 거지?] 서란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는... 나는 당신이 언제든지 이 곳을 떠날 수 있다는 것 을 알고 있어요. 나도 이를 악물고 나의 내공을 강하게 만들 어 당신과 함께 이 절곡을 빠져 나가려고 했지만, 난 아무래 도 잘 안 돼요. 나는... 나는 이 절곡의 빠져 나갈 희망이 없어요! 우리 부모님의 원수를 갚을 희망도 점점 사라져 가 고 있다구요!] 서란은 여기까지 말하자 상심되었는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귀곡자는 그 모습을 보자 깜짝 놀라서 손발을 휘저으며 급히 말했다. [서란 동생! 이런, 이런, 울지 마! 내가 너를 데리고 함께 절곡을 빠져 나갈 방법을 생각해 내면 되잖아!] 귀곡자는 마음이 급해져서 서란을 울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란은 그 말을 듣고 즉시 슬픈 마음이 사라지고 기분이 좋 아져서 눈물을 닦고 배시시 웃으며 기쁜 듯이 말했다. [좋아요! 귀곡 오라버니, 당신이 자기 입으로 약속한 것이니 절대로 후회하면 안 돼요!] 원 할아버지는 이 때 그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 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가 있었다. 그는 그들의 말을 듣자 갑자기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가 갑 자기 꽥꽥거리며 뭐라고 떠들어댔다. 귀곡자는 그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서란은 그의 말을 듣자 갑자기 화를 내며 원 할아버지를 쏘아보았 다.


[원 할아버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절대로 나를 데리고 절곡을 빠져나가겠다는 약속을 하지 말라니요? 그렇 지 않다면 나의 목숨이 위험하다니요! 당신은 이 서란이 예 전부터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하던 말을 잊어버리셨나 요? 원 할아버지, 당신이 뭐라고 해도 상관 없어요! 죽어도 좋아요! 만약 부모의 피맺힌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이 안에 서 살아 있느니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구요!] 귀곡자는 서란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말했다. [서란 동생, 원 할아버지는 당신의 안위를 걱정해서 그런 말 을 하신건데, 너무 화내지 마. 아주 상심하고 있잖아!] 서란은 원 할아버지가 그 동안 자기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 가를 상기했다. 친할아버지처럼 자기를 사랑해 주었다. 자기 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도 잘못하다가 생명이라 도 잃을까 염려되어 그러는 것이었다! 그녀는 원 할아버지가 그 동안 자기를 키워준 은혜를 생각하 자 달려가 원 할아버지를 껴안고 목을 놓아 울면서 말했다. [원 할아버지! 절대로 슬퍼하지 마세요. 제가 너무 복수에 골몰하다가 헛소리를 한 거예요! 좋은 원 할아버지, 제발 더 이상 슬퍼하지 마세요! 할아버지가 울면 나도 삼일 밤낮을 두고 울 거예요.] 서란이 이렇게 울부짖자 원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 황급히 고 개를 저으며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하고,털 로 뒤덮힌 손으로 서란의 눈물을 가볍게 닦아 주었다. 귀곡자는 서란이 삼일 밤낮을 정말 울겠다고 말하자 깜짝 놀 라 도망치고 싶어졌다. 귀곡자가 급히 말했다. [원 할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그녀를 안전하게 데리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할께요! 그러니 원 할아버지도 어떻게 하면 서란을 데리고 안전하게 함께 나 갈 수 있는지 생각해 주세요!] 원 할아버지는 이 말을 듣자 정말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며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원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휙 하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잠시 후에 원 할아버지는 종려나무 껍질을 들고 돌아왔다. 원 할아버지는 종려나무 껍질을 끈처럼 만들더니 다시 꼬아 새끼줄을 만들었다. 원 할아버지는 새끼줄의 끝을 자기 허리 에 묶고, 중간을 서란의 허리에 묶은 뒤 나머지 끝을 귀곡자 에게 건네주었다. 귀곡자는 즉시 원 할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렸다. 종려나무 새 끼줄로 세 사람의 허리를 한데 묶어 서란을 그 가운데에 두 면 그녀가 실수를 해도 그와 귀곡자가 그녀를 함께 끌어 올 려 주면 될 것이었다! 귀곡자는 이 방법이 함께 살고 함께 죽는 묘법이라고 생각했 다. 원 할아버지는 서란을 위해 자기의 생명까지 돌보지 않 으려는 것이었다! 그는 사실 원숭이에 불과했지만 이렇게 깊은 정을 가지고 있 으니 잔인무도한 인간들에 비하면 백배 천배 낫다고 할 수 있었다!

15...... 귀곡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절대로 원 할아버지가 이 일 때문에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 다. 그의 공력은 자기 한 몸을 지탱할 수 있을 뿐이다. 서란 은커녕 서란의 반밖에 안되는 짐을 지고 올라간다 해도 분명 절곡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귀곡자는 마음을 정하고 원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원 할아버지, 우선 용연검을 좀 가져다 주고, 그 다음에 계 곡 밖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가져다 주십시오.] 원 할아버지는 귀곡자의 말을 듣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 시 몸을 날려 달려갔다. 잠시 후 용연검과 한 무더기의 기조 자를 가져다 주고 다시 서란이 평소에 사용하는 물건들을 가 져다 주었다. 귀곡자는 원 할아버지가 서란을 대하는 것이 정말 친 손녀를 대하듯이 사랑과 정성이 지극한 것을 보고 서란에 대해 부러 운 마음이 들었다. (이 귀곡자에게 원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절곡 안에 서 한평생을 산다 해도 괴롭지 않을 것 같구나!)


귀곡자는 몸을 돌려 서란에게 말했다. [나는 이 종려나무 껍질로 만든 새끼줄로 동생을 내 등에 묶 고 용연검의 힘을 빌어 이 절곡을 빠져 나가려고 하는데, 괜 찮겠어?] 서란은 그 말을 듣고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급히 말 했다. [내가 뭘 걱정하겠어요? 나는... 나는 귀곡 오라버니가 나 때문에 생명을 잃을까 걱정이에요! 그러니 당신 혼자 이곳을 빠져 나가도록 하세요!] 귀곡자는 갑자기 새끼줄로 그녀의 허리를 먼저 한번 감고 그 녀를 자기 등에 엎고 다시 한번 더 감았다. 귀곡자는 낮은 목소리로 등에 엎힌 서란에게 말했다. [잠시 후 계곡을 오를 때 눈을 감고 편안하게 살아 있는 신 선이 되어 구름과 안개를 타고 하늘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하 면 그만이야. 절대로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 알았지?] 서란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귀곡자의 목을 꽉 껴안으며 그 의 귓가에 입을 대고 말했다. [오라버니! 걱정 마세요! 서란은 당신과 함께라면 살든 죽든 상관없어요!] 귀곡자는 목덜미에 부드럽고 따뜻한 입김이 느껴지자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울렁이는 것을 느끼고 급히 정신을 가다듬 으며 원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원 할아버지! 준비 다 되셨어요? 중간에서 힘이 부치면 그 대로 벽에 붙어 꼼짝 말고 계세요. 그럼 제가 올라갔다가 다 시 내려와서 도와 드리지요.] 귀곡자는 말을 마치고 갑자기 몸을 날려 나무집 곁의 절벽으 로 다가가 용연검의 진기를 내쏘았다. 엄청난 위력으로 한줄 기 검기가 쏘아지며 그 암벽에 작은 구멍을 내었다. 그는 서란을 업고 그 작은 구멍을 발판 삼아 다시 윗쪽으로 몇 장(丈) 더 높은 곳에 구멍을 내어 발판을 만들고 뛰어 올 랐다. 이렇게 계속 반복하며 암벽을 올라갔다.


암벽에는 열 몇개의 작은 구멍이 생겼고, 귀곡자와 서란의 몸은 어느새 수십 장 되는 높이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원 할아버지는 혼자서 뛰어 올랐는데, 수십 장의 높은 거리 를 뛰어 올라가는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이윽 고 그들은 절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란은 세상의 경치를 접하고, 이곳이 오나라 수도인 고소성 과 멀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알자 즉시 얼굴을 붉게 물들이 며 용연검을 꽉 쥐고 고소성을 가리키며 이를 악물고 소리쳤 다. [부차! 부차!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 수! 이 서란이 너의 목을 베지 못한다면 이 돌처럼 만들어 주겠다!] 서란은 말을 하면서 옆의 바위를 향해 용연검을 휘둘렀다. 돌과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거석은 둘로 갈라졌다. 서란은 말을 마치고 귀곡자에게 말했다. [귀곡 오라버니! 서란은 이제 고소성에 들어가 부차의 머리 를 자르겠어요! 서란이 부모의 원수를 갚고 다행히 죽지 않 는다면 다시 당신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귀곡자는 뜨끔하여 속으로 중얼거렸다. (부차의 운명은 마흔 셋까지이고, 거기에다가 그의 선조들이 백호용맥을 얻었으니 이십 년 동안은 잘 나갈 것이다. 그러 니 요절할 리가 없다. 서란은 이번에 가도 그를 죽이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그녀의 목숨할지도 모른다.) 귀곡자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서란의 얼굴을 자 세히 들여다 보았다.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란의 얼굴 을 보고 있자 서란은 얼굴을 붉히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기쁘 기도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 또 바보처럼 되어버렸네요? 귀곡 오라버니! 일단 원 수부터 갚고 올 테니 그 후에 많이 많이 쳐다보세요, 네?] 귀곡자는 서란의 산림골(山林骨)이 높이 솟아 있으니 선조들 이 풍수의 비호를 받을 상인데다가, 그녀의 코가 아름다우면 서도 곧게 쭉 뻗어 있고, 두 눈이 거울처럼 맑아 여장부의 형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절대로 요절할 상이 아님을 알고, 그제서야 한시름 놓았다.


귀곡자는 지금 원수를 갚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이 아주 간절 하여 어떠한 충고나 권고도 듣지 않을 것임을 알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번에 고소성에 들어간다 해도 원하던 바를 이루지는 못하 겠지만, 그렇다고 커다란 위험을 겪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 두어라. 모든 일은 억지로 안 되는 법, 오이 가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고 물은 바다를 향해 흐른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해. 원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 록 주의하십시오. 저는 우선 주검봉에 가서 그 동안 하려고 마음 먹었던 일을 해치워야 하겠군요!] 말을 마치고 두 사람과 원숭이 하나는 헤어졌다. 귀곡자는 주검봉으로 달려가 막야의 행방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3 일이 흐르도록 그들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째서 삼일 밤낮 찾아 다녔는데도 종적을 찾을 수 없는 것 일까? 설마 그녀가 무슨 변을 당한 것은 아니겠지? 그녀의 팔자와 관상을 보니 요절할 상은 분명 아니었고, 거기에다 그녀가 잉태한 아이는 이미 대지 잠룡의 기를 얻었으니 절대 로 어떠한 사악한 기운에 의해 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데 어찌하여 갑자기 종적이 묘연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귀곡자는 부차의 잔인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고 다닐 수가 없었다. 소문이 조금이라도 나면 부차가 간 형님의 부인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었 다. 귀곡자는 계곡에서 가지고 나온 기조자를 입안에 넣었다. 이번에는 맛이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았다. 그는 이상히 여 기다가 곧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지금 내 심정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고 그저 초초할 뿐이다. 그래서 기조자의 맛은 달지도 쓰지도 않구나!] 기조자의 이 오묘함을 생각하자, 귀곡자의 눈 앞에 저도 모 르게 서란의 아리따운 자태가 떠올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복수심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구나. 서란같은 소녀마저도 그러하니... 그녀가 고소성에 들어간지 벌써 삼일이 지나 가 는데 어째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을까?) 귀곡자는 다시

한 시진 정도를 찾아

다니다가 다시 기조자


하나를 먹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 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귀곡자는 깜짝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거친 산야의 어디에서 어린 아이가 울고 있을까? 설마 누구에겐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귀곡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번개처럼 그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울음 소리가 나는 곳은 귀곡자가 원래 있던 곳으로부터 5 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귀곡자는 건곤운행의 신법을 전개 하여 마치 번개가 하늘을 가르듯이 순식간에 그곳에 도착했 다. 그 곳은 암벽 아래에 있는 조그만 동굴이었다. 암벽 아래 쪽 에 위치하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더라면 그 동 굴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귀곡자는 막 동굴로 뛰어들려고 하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 추었다. 그는 가만히 생각해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안에 간 형님의 부인이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구나. 간 형님의 부인이 아이를 낳은 것일까? 이 귀곡자는 남자이니 이렇게 갑자기 뛰어든다면 난처한 일이 생길는지도 모르겠구 나.) 귀곡자는 체내의 기를 운기하여 음성을 동굴 안으로 쏘아 보 내며 말했다. [저는 귀곡자입니다! 이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기로 멩세한 바 있습니다. 만약 동굴 안에 계신 분이 자기가 아주 비참하고 불쌍하다고 생각되면 그저 가볍게 탄식소리를 한번 내주십시오!] 귀곡자는 동굴 안에 있는 사람이 간 형님의 부인인 막야라면 이 말을 듣자마자 누구가 왔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귀곡자가 이 전음을 보내자 즉시 여자의 탄식 소리가 들려왔 다. 귀곡자는 이것이 동굴 안에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하는 표시 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 다. 동굴 안은 칠흙처럼 어두웠다. 동굴 안쪽에 작은 동굴이 하


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미약하나마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 다. 그 불빛만으로도 귀곡자는 동굴 안의 사물을 다 분별할 수 있었다. 그는 자세히 주위를 둘러 보다가 그 여자를 발견하고는 기뻐 서 소리를 질렀다. 과연 그 여자는 그가 그토록 고생하며 찾 아다녔던 간 형님의 부인 막야였던 것이다. 지금 그녀는 어지럽게 널린 풀섶 위에 누워 있었는데, 가슴 에는 간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귀곡자는 몸을 날려 막야의 앞에 가서 섰다. 그는 막야의 비 참한 모습을 보자마자 그 동안의 일을 대강 짐작하고는 마음 이 아파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막야가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소협께서는 어서 뒤로 물러나세요! 이곳에는 더러운 것들이 널려 있어서 몸을 더럽히실까봐 걱정됩니다! 저는 방금 이 불쌍한 어린 아이를 낳았답니다.] 귀곡자는 그 말을 듣고 자세히 바라 보았다. 과연 풀섶 주위 에는 피가 이리 저리 묻어 있었다. 그러나 피비린내는 조금 도 느껴지지 않고 도리에 아주 부드럽고 따뜻한 열기가 이 동굴에 가득 차 있었다. 막야가 안고 있던 어린 아이가 울자 동굴 안이 갑자기 더워 졌다. 산고를 끝낸 막야는 비록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으나 그래도 일어서려고 애를 썼다. 아마 무척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귀곡자는 이런 인생의 대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 만, 배가 고프면 고통스럽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 조자 하나를 막야의 입에 넣어 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아무 말 마시고 우선 이 기조자를 하나 드세요. 이것만 드시면 배가 고프지 않게 될테니 그 때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해요.] 막야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를 부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곡자가 시키는대로 기조자를 다 도 막야는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었다. 귀곡자가 그제서야 말했다.

이런 과일 하나가 어떻게 배 그러나 그녀는 묻지 않고 귀 씹어 먹었다. 정말 이상하게 않고 아주 편안한 기분이 되

[그 과일의 맛은 아주 달콤할 겁니다. 그렇죠, 아주머니?]


막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아주 달군요. 아주 달아요! 저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하다가 방금 이 아이를 낳았어요. 저는... 저는 이 아이를 위해 간신히 힘을 내어 탯줄을 끊어 이 아이의 생 명을 보호했답니다. 힘이 다 빠졌는데도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파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지요!] 귀곡자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갑자기 왼손을 막야의 등에 대고 아주 웅후한 심룡건곤진기를 그녀의 대혈 (大穴)에 주입시켰다. 이것은 기를 보충하고 피를 보충하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막야는 아주 따뜻한 열기가 등에서부터 심장과 폐로 퍼졌다 가 다시 배로 내려와 사지를 골고루 돌아다니는 것을 느꼈 다. 순식간에 그녀는 몸이 아주 편안해져서 산후의 고통마저 잊을 정도였다. 막야는 무림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내공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원기를 보강시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체력이 기적처럼 회복되는 것을 느끼고 급히 말했다. [소협은 이제 내공을 그만 소모하십시오. 저는...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귀곡자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막야에게 진기를 넣어주며 가볍게 말했다. [아주머니, 너무 사양하지 마세요. 어른을 보호해야 아이도 보호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진기를 좀 더 드리면 아주머니께 서는 좀 더 빨리 건강을 되찾게 되실 겁니다.] 귀곡자는 간 형님의 부인과 그 아들의 참상을 너무 동정한 나머지 마음이 급해서 보통 사람이 30 년 정도를 힘들게 연습 해야 얻게 되는 내공을 막야에게 부어주었다. 막야는 순식간에 30 년 내공을 얻자 산후의 허약해졌던 신체 가 다시 건강하게 되었고, 평소보다 정신이 맑아졌다. 그녀 는 더 이상 비참함이나 절망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서 어린 아이를 성인이 될 때까지 강건하게 키우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막야는 일어서면서 품에 안고 있던 어린 아이를 귀곡자의 발


앞에 내려 놓으며 중얼거렸다. [아가야! 네 어미와 너의 생명은 모두 이 소협께서 주신 것 이다. 그러나 너와 네 어미는 그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으니 그에게 머리를 숙여 절하여 우리의 성의를 표시하자!] 막야는 말을 마치고 어린 아이의 작은 머리를 땅에 닿게 하 여 절을 올리는 자세를 취했다. 귀곡자는 그 모습을 모고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릴 뻔했 다. 그는 곧 손을 뻗어 막야와 어린 아이가 절하는 것을 그만두 게 했다. [아주머니, 간 형님은요?] 막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소협께서는 막야 모자가 이런 곳에 숨어 있는 것을 보셨으 니, 당연히 간 형님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도 짐작하셨겠지 요!] 막야는 당시 일어났던 일을 말해 주기 시작했다. 그 당시 무 차 장군은 부차의 명령을 받고 정예 부대를 이끌고 주검봉에 와서 간장 부부를 위협하여 보검을 빼앗았다. 간장은 엄청난 위험이 닥친 것을 알고 보검을 내놓겠다고 하 고 그 중 한 자루를 몰래 막야에게 주면서 그녀더러 도망가 서 어린 아이를 무사히 낳아 그 아이가 자기의 원수를 갚게 하라고 당부했다. 간장은 무차 장군을 유인하며 도망치다가 결국 무차에게 붙 잡혀 오나라의 수도 고소성으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귀곡자가 물었다. [그래서요?] 막야가 말했다. [저는 주검봉에서 동분서주하며 숨을 곳을 찾아 다녔어요. 관병들의 추격을 피해 도망친지 얼마 안 되어 간장이 이미 그 태자 부차에게 살해되었다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죠! 아아, 이 불쌍한 막야는 간장 오라버니의 시체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귀곡자가 결연히 말했다.


[아주머니, 마음 놓으세요. 제가 대신 간 형님의 시체를 찾 아와 편안히 안장하도록 하겠습니다.] 귀곡자는 그 때 갑자기 백호구 절곡 아래의 그 석판에 복희 씨가 남겨 놓았던 과두문자가 생각나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백호구 위의 그 백호화룡혈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절곡 아래 의 지룡혈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구나. 그것만이 그 잔인 무도한 부차를 막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귀곡자는 막야 모자의 비참한 모습을 보자 마음을 정했다. (엄청난 위험을 무릅써야 할지라도 다시 한번 천기를 거역하 는 시도를 해야 하겠구나. 그러지 않으면 부차가 권력을 휘 둘러 백성을 괴롭힐테니 말이다!) 귀곡자는 물었다. [아주머니, 저 아이의 이름은 지으셨습니까?] 막야가 말했다. [간장 오라버니는 헤어지기 직전 남자 아이라면 성을 간씨로 하고 여자 아이라면 성을 막씨로 하라고 했어요. 이 아이는 남자 아이이니 간장 오라버니의 유언을 따라 성은 간씨로 했 는데, 이름은 아직 정하지 못했답니다. 귀소협께서 이 아이 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으시겠어요?] 귀곡자가 그 말을 듣고 사양하지 못하고 생각해 보더니 결연 히 말했다. [이 아이는 신세가 비록 가련하기는 하지만, 앞으로의 발전 할 잠재력이 있으니 잠(潛)으로 하지요!] 이리하여 간장과 막야의 유복자는 간잠(干潛)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간잠이라는 이름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 었지만, 귀곡자는 그 안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 하지 않았다. 귀곡자는 말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두 분 모자가 쉴 곳을 찾아서 간잠을 성인이 될 때까지 잘 기르는 일입니다. 아주머니께서 는 몸을 의탁할 곳이 있으신가요?]


막야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간장 오라버니의 집안은 대대로 오나라에서 살아왔는데 이 제 친척이나 친구들이 모두 우리를 도와 주려고 하지 않으 니, 오나라에 몸을 의탁할 만한 곳이 어찌 있을 수 있겠어 요? 그저 이런 야산에서 숨어 살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소 협께서는 우리 간씨 일문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셨으니 더 이상 우리 모자를 위해 수고하지 마세요.] 귀곡자는 말했다. [이 귀곡자가 어찌 중간에서 아요!]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아, 맞

귀곡자가 갑자기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서로 원수지간이니 월나라에는 몸을 맡길만한 곳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16...... 귀곡자는 갑자기 낸 것이었다.

서란이 월나라의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

그녀는 간장의 사조인 복희씨가 만든 용연검 검법을 전수받 았고 우연하게 복희씨의 팔괘연행도를 배우게 되었으니, 그 근본을 따져 보자면 서란과 막야는 동일한 문파의 제자라 고 볼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 함께 월나라에서 산다면 아 주 좋을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너무 염려 마세요. 제가 우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좀 마련해서 돌아올테니, 절대로 이곳을 떠나지 마시 고 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귀곡자는 말을 마치고 막야의 대답도 듣지 않은 날려 동굴 밖으로 뛰어 나갔다.

채, 몸을

귀곡자는 곧장 오나라의 수도 고소성으로 나는 듯이 달려 갔다. 그는 급히 서란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귀곡자가 고소성의 성문 성 소리가 들려왔다.

앞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의 아우


그는 급히 몸을 날려 성루 위로 뛰어 올랐다. 두 사람이 성루 위를 달려오고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등에 무엇 인가 지고 있었다. 그 짐은 아주 무거운지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은 힘이 빠진 모습이었다. 다행히 그 사람은 손에 검 하나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검을 휘둘러 자기를 잡으려 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또 다른 그림자는 온몸에 털이 잔뜩 난 괴물이었다. 꽥꽥 거리며 맨손으로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 틈을 타서 등에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이 도망쳐서 성벽을 타고 내려가 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로 서란과 원 할아버지였다. 그들을 뒤쫓는 관병 들은 점점 숫자가 불어났고 무공도 훨씬 고강한 병사들이 몰 려왔다. 다시 한번 그들과 맞붙게 된다면 서란과 원 할아 버지는 모두 죽임을 당할 것처럼 보였다. 귀곡자는 갑자기 몸을 위로 날려 눈 깜짝할 사이에 10 장 높이의 높은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허공에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마치 대붕(大鵬)이 하늘에서 내려오듯이 날아 내려오 며 무위신공으로 사방의 관병들을 밀쳐냈다. 수십 명의 관병들은 깜짝 놀라 뿔뿔이 흩어졌다. 귀곡자는 두 손으로 서란과 원 할아버지를 낚아채더니 순식간에 어디 론가 사라져 버렸다. 성루에서 관병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신선인가? 요괴인가? 천마(天馬)인가? 아, 맙소사! 우리가 귀신이라도 만난 것일까?] 서란은 푸우, 하고 웃으며 말했다. [틀렸어! 너희들은 오늘 밤 귀신을 만나긴 했어! 다만 그 귀 신은 너희들이 말하는 그런 귀신이 아닐 뿐이지!] 두 사람과 원숭이 한 마리는 주검봉으로 향했다. 서란이 등 에 지고 있던 것을 원 할아버지가 지고 있었다. 이 짐은 무 슨 보물이 아니라 간장의 시체였다! 원래 서란과 원 할아버지는 고소성에 들어가 오왕의 궁궐에 잠입할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서란은 한참 잠에 빠져 있는 태자 부차에게 접근했다.


서란은 가지고 갔던 용연검을 뽑아 부차의 목을 찔렀다. 그 순간, 뜻밖에도 부차가 자고 있던 침상 밑에서 갑자기 백 호 한 마리가 맹렬히 튀어나오더니 서란을 향해 덤벼 들었 다! 서란은 너무나 놀랐다. 비록 그녀가 익힌 월녀검법이 대단하 기는 했지만, 적과 싸운 경험은 적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백호가 덤벼들자 부차의 목을 찌르던 검을 급히 회수하여 자 기자신을 보호하고 백호와 싸우게 되었다. 정신을 집중하여 그 백호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는데, 뜻밖에도 검은 허공 을 가르는 것이었다! 그 백호는 알고보니 유형무실한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침상에서 자고 있던 부차가 갑자기 목에서 피를 흘리며 비명 을 질렀다. 서란의 그 일검은 분명히 그 백호의 목을 베었는데 왜 부차 의 목에서 피가 흐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귀곡자가 물었다. [그래서?] 서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 너무 놀라 뭐가 뭔지 몰라 당황하고 있다가 간신히 정신 을 차리고는 도망쳐 나오게 되었지요! 제가 막 도망치려는 순간 부차의 침상 한 귀퉁이에 한 사람의 시체가 약수통 속 에 담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 통에는 천하 제 일검이 두번째의 천하 제일검을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라는 글이 쓰여 있었어요. 저는 그 글이 이상하다고 생각하 다가 문득 저 사람이 바로 귀곡 오라버니가 말씀하시던 검을 만드는 간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거예요. 그 래서 전 그 통을 깨고 간장의 시체를 업고 돌아오게 되었죠! 부차의 시위병들을 죽이며 도망쳤는데, 이 병사들은 무공이 대단하더군요!] 여기까지 말하자 원 할아버지가 갑자기 귀곡자를 향해 꽥꽥 거렸다. 서란이 훗,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원 할아버지는 귀곡자 소협께서 우리들을 구해주어 감사하 대요. 오라버니가 도와 주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이백 삼십 일세로 일생이 끝날 뻔했다는군요. 이 원 할아버지는 위험을 벗어나자마자 또 다시 농담을 하네요!]


서란은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듯이 나직히 말했다. [귀곡 오라버니! 당신은 간장의 부인인 막야 모자를 찾겠다 고 했는데, 간장의 부인은 아름다운 분인가요?] 귀곡자가 쓴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막야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분이었지만, 비참하고 참혹한 일 들을 겪으면서 아주 추한 노파같이 되어버렸어! 하지만 그녀 의 아들 간잠은 살결이 하얗고 토실토실해서 정말 귀엽지! 조금 있으면 그들을 만날 수 있을거야.] 서란이 그 말을 듣고 갑자기 걸음을 빨리하며 말했다. [빨리 가요! 귀곡 오라버니!] 귀곡자가 의아해서 물었다. [서란 동생, 갑자기 왜 서두르는 거야?] 서란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간장이 나의 사형 뻘이라고 했으니, 그의 아들은 바 로 나의 사질(師侄)이 되는 셈이 아니겠어요? 이 서란이 고 모가 된다고 하니 어서 빨리 가서 사질을 보고 싶어요!] 귀곡자는 그 말을 듣자 기뻤다. (서란에게 이렇게 깊은 정이 있는지 미처 몰랐는걸. 앞으로 그들은 분명 함께 지낼 수 있을 것 같구나!) 귀곡자는 서란과 막야 모자를 서로 만나게 해 주었다. 서란은 과연 간잠을 너무너무 좋아했고, 막야 역시 갑자기 사매가 생기자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간 잠은 다른 사람이 안아주면 울음을 터뜨리면서 서란이 안아 주면 얌전하게 울지 않았다. 귀곡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똑같은 작자를 원수로 삼고 있어서 마음이 통하게 된 것은 아니겠지? 부차야, 너는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비록 백호용혈의 비호를 받고 백호가 나타나 너를 돕는다고 해도, 너를 영원히 지켜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귀곡자는 원 할아버지가 함께 간장의 시신을 가지고 절곡에 다시 내려갔다. 귀곡자는 복희씨가 글을 남겨 놓은 그 석판이 있는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마침내 이 석판의 바로 아래가 부차의 백 호화룡혈을 억제할 수 있는 지룡혈이라고 추정하였다. 귀곡자는 주저하지 않고 용연검을 삽으로 삼아 구덩이를 파 고 간장의 시체를 그 곳에 매장했다. 원 할아버지는 복희씨가 남긴 그 석판을 묘 앞에 세웠다. 귀곡자는 복희씨가 남긴 과두문자를 지워버리고 그 위에 <검 을 만들던 명장 간장의 묘(鑄劍聖匠干將之墓)>라고 새겨 넣 었다. 이상하게도 귀곡자가 석판으로 만든 묘비 위에 그 여 덟 글자를 다 쓰자 갑자기 묘비가 번쩍번쩍 빛나기 시작했 다. 원 할아버지는 이렇게 신기한 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귀곡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화룡이 하늘을 가로지르면 하늘이 뒤흔들리지만, 지룡이 나 타나지 않으면 그 누구와 최고를 다투겠는가? 이곳은 백호화 룡혈을 억제할 지룡혈이랍니다! 원 할아버지, 이제 그만 가 지요. 묘를 만들어 간 형님의 시체를 안장했으니 이곳에 머 무를 필요가 없습니다.] 원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번개처럼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잠시 후 그는 기조자를 한 웅큼 가지고 돌아왔다. 귀곡자는 기쁜 듯이 웃으며 원 할아버지와 함께 절곡을 기어 올랐다. 귀곡자는 서란, 막야, 간잠 등과 다시 만나 함께 월나라로 향하였다. 귀곡자, 서란, 막야, 간잠 등 네 사람과 원숭이 한 마리는 오나라 관병들의 이목을 피해 먼 길을 떠났다. 관병들의 추 격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산속의 작은 길을 골라 걸 었다. 산이 나오면 산을 넘고, 물이 나오면 물을 건너며 부지런히 걸어서 결국 목적지 월나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월나라에 들어오자 얼마 르렀다.

안 되어 서호(西湖)의 호숫가에 이


서호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서호의 길이는 30 여 리 정도이고, 호수 가운데에 산이 서 있었으며 소영주(小瀛洲), 호심정(湖心亭), 완공돈(阮公墩)이라고 하는 세 섬이 호수 중앙에 떠 있었다. 두개의 방죽이 호수를 가로지르고, 외호 (外湖), 리호(裡湖), 악호(岳湖), 서리호(西裡湖), 소남호 (小南湖) 등 다섯개의 작은 호수로 나뉘어지고 있었으며, 호 수 주변은 남고봉(南高峰), 북고봉(北高峰), 옥황산(玉皇山) 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그 동쪽이 바로 월나라의 수도인 전 당성(錢塘城:杭州)이었다. 삼면은 운산(雲山)으로 둘러쌓여 있고 나머지 한쪽 면이 바로 전당성이었다. 삼면의 산봉우리는 아주 아름답게 말과 같은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天目山)에서 시작되어 용이 날고 전당으로 모여들어 웅대한 기세를

높이 솟아 있었고, 달리는 모든 산봉오리들은 천목산 봉황이 춤추듯한 형세으로 뽑내고 있었다.

호수를 따라 사방에는 꽃과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 있었다. 모든 산들이 샘물과 연못과 시냇물을 끼고 있고, 정자와 누 각, 보탑(寶塔), 석굴 등을 가지고 있어서 아주 빼어나게 아 름다웠다. 호수에 비치는 산의 모습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그러나 귀곡자는 이 곳의 경치에 그다지 미혹되지 않고 속으 로 중얼거렸다. (회계(會稽)의 풍경 중에서 서호의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더니 과연 이 호수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수려하기는 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산의 기운이 좀 유약하고, 물의 기 운 역시 유약한 면이 있구나. 이렇게 유약한 풍수를 지닌 곳 을 한 나라의 도읍으로 삼았으니 어찌 웅대한 국운이 펼쳐질 수 있겠는가? 보아하니 월나라의 국세가 유약하여 국위를 떨 치지 못하는 것은 수도 항주와 막대한 연관이 있는 듯하다! 지맥과 용기는 국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법이니까!) 귀곡자의 이 판단은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후에 수도의 기운에 대해 논한 명사인 서선계(徐善繼)의 이 론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이었다. 서선계는 [지리인자수지 (地理人子須知)]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임안(臨安)은 남룡(南龍)의 차맥(次脈)이다. 그 용맥은 천 목산(天目山)에서 시작하여 전당으로 나누어 들어온다. 감 (龕), 저(楮) 두 산이 용비봉무하는 형세로 전당에 이르러 해문(海門)에 이르러 손(巽)의 방위에서 돌기하고 있다. 애 석한 것은 비록 천시원국(天市垣局)의 자리이지만 염정(廉


貞)이 주인을 투기하므로 필히 대신(大臣)이 권력을 남용하 고 무신(武臣)이 쇠퇴하므로 귀금(鬼金)이 강산을 침략하게 되고, 또한 문곡(文曲)이 많으니 거짓되고 허식이 많으며, 적수(積水)가 적으니 문약하고 사치하게 된다. 형(形)과 국 (局)이 약하니 단지 큰 도시는 될 수 있어도 항구적인 도읍 지는 되지 못한다. 비록 대륙의 한켠에서 안일을 추구할 수 는 있으나 국운이 장구하지 못하다.> 귀곡자가 보기에 월나라는 바로 이 곳을 수도로 삼았기 때문 에 얼마 가지 않아 나라가 망할 것 같았다. 후에 구천(勾踐)이 모욕을 당하고 오랜 고통 속에서 와신상 담(臥薪嘗膽)하며 그 속에서 교훈을 얻어, 운명을 뒤바꿀 노 력을 한 끝에 다행히 국가를 되찾게 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는 것이 바로 수도의 지세(地勢) 때문인 것이었다. 월나라의 수도인 항주는 바로 송(宋)나라 때의 임안인데, 수 도가 될만한 기세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국운이 날로 쇠토 하게 되는 것이었다. 서란은 귀곡자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호의 경치 를 넋이 나간 듯이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을 보자 말했다. [고향에 돌아오니 부모님이 생각나는군요.] 그러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막야가 말했다. [알고보니 서 아가씨는 서호 사람이었군요. 이곳은 인걸(人 傑)이 많고 영험한 땅이라고 말해지는 곳이니, 이런 미인을 배출할 수 있었군요.] 서란은 자기를 미녀라고 추켜주자 기분이 유쾌해져서 웃으면 서 말했다. [막 언니, 이곳이 마음에 드신다면 이곳에서 오래 오래 사세 요. 제 기억에 저의 집은 바로 이 서호의 동남쪽에 있는 오 산(吳山) 기슭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 언니와 간잠은 그곳 에서 살면 되겠네요!] 막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 모자는 이제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니 그저 무사하게 몸을 맡기고 간잠을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울 수만 있다면 만


족하겠어요!] 서란은 간잠을 안아주며 말했다. [막 언니, 저는 아직도 그 길이 기억나니 제가 두 분을 모시 고 가도록 할께요.] 간잠은 서란이 안아주자 하얗고 살찐 손을 내밀어 서란의 목 을 꽉 붙잡았다. 서란은 기뻐 웃으면서 경공을 펼쳐 서호 동남쪽의 오산으로 달려갔다. 막야는 귀곡자가 전해준 건곤진기 덕분에 건강해져서 빠르게 달려갈 수 있었다. 막야는 간신히 서란의 뒤를 쫓아갈 정도였고, 귀곡자와 원할 아버지는 쉽게 서란을 쫓아갈 수 있었다. 잠시 후, 네 사람과 원숭이 한 마리는 대략 40 장 정도 되는 높은 산 앞에 도착했다. 이 산은 네개의 산맥이 이어지다가 하나로 합쳐진 곳으로, 그 산맥들의 정중앙에 솟아 있는 산 하나는 마치 하늘을 찌르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우뚝 서 있 었다. 귀곡자가 서란에게 말했다. [이 산의 이름이 오산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이 네개의 산봉 우리의 각각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겠는걸?] 서란이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 요. 오산은 네개의 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산의 이름은 자양(紫陽), 운거(雲居), 칠보(七寶), 아미(峨嵋)라고 한다 고 하셨어요. 그 중 가장 높이 솟아 있는 산은 천하에서 그 이름도 유명한 오산 제일봉 자양산(紫陽山)이라고 하셨구 요!] 귀곡자는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산은 잠룡의 종적이 남아 있는 것 같으니 가볍게 봐서는 안 되겠구나. 우선 막야 모자가 쉴 만한 곳을 찾는 것이 급 선무이니 그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고나서, 천천히 한번 연구해 보자.)


귀곡자는 서란에게 물었다. [서란 동생은 예전에 어디에서 살았었는지 기억할 수 있어?] 서란은 오산의 중앙에 있는 자양산을 가리켰다. [우리 집은 저 자양산 기슭에...] 그녀는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원 할아버지는 서란이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자 마음이 아픈 지 꽥꽥거렸다. 귀곡자는 원 할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저도 모르게 미소 띤 얼굴로 원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원 할아버지, 당신의 손녀딸이 고향 땅을 보고 마음이 상할 까봐 그러시나 본데,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서란의 인도로 모두들 오산의 가운데에 위치한 자양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산기슭이 나타나자 서란은 다시 부모님이 생각나 슬픔에 젖었다. (이곳이 바로 내가 어렸을 때 살던 그곳이란 말인가?) 귀곡자는 서란이 말한 자양산 기슭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도처에 깨진 기왓장이 널려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폐허였 다. 제법 컸을 부락이 열국이 서로 다투는 화염의 불길 속에 모두 부서지고 망가져서, 몸을 쉴 만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 다. 사람의 종적 역시 전혀 없었고, 들쥐들만 사방을 돌아다 니며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귀곡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열국이 서로 싸우면, 승자는 제왕이 되지만 백성들은 말도 못할 고생만 겪게 되는구나.) 귀곡자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금 심룡대법을 써서 이 전쟁을 멈추게 해야겠다는 웅대한 뜻을 굳히게 되었다. 귀곡 자의 이런 생각 때문에 춘추 열국이 서로 싸우는 대세가 예 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다양하게 변화하게 되어 아주 기이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막야는 도처에 널린 깨짓

기왓장과 벽돌을 바라 보다가, 서


란이 아주 비통한 표정을 짓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오나라의 백성이요, 서란은 월나라의 백성이다. 각각 나라는 다르지만 군주들이 모두 미친듯이 전쟁을 벌이는 바 람에 서란이나 나나 가족을 잃고 살던 고장을 잃게 되었구 나.) 막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란 동생,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비록 살던 고장이 폐허 가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땅은 여전히 남아 있잖아요. 땅만 남아 있다면 살아갈 수 있는 법이에요.] 서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막 언니, 정말 죄송해요. 저는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이곳이 예전처럼 남아 있는 줄 알았어요. 막 언니를 편히 쉬게 하려 고 이곳으로 모셔 온 것인데 도리어 언니가 절 위로해 주시 는군요!] 원 할아버지가 갑자기 앞으로 뛰어가더니 나뭇가지를 잘라와 서 땅바닥에 꽃으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서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원 할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귀곡 자가 원 할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리고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 다. [맞아요! 맞아! 집안이 망하면 다시 일으켜 세우면 그만이고 집이 부서졌으면 다시 지으면 그만이죠! 두 손이 있는데 무 엇을 걱정하겠어요? 원 할아버지, 월녀 기협에게 나무로 집 을 만드는 기술을 배운 바 있고, 이곳엔 나무가 많으니 그 솜씨를 발휘해서 집을 지으시겠다 이거죠? 원 할아버지, 시 작해요. 이 귀곡자가 할아버지를 스승으로 모시고 나무로 집 을 짓는 그 기술을 배우도록 할께요!] 원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듣자 너무 기뻐서 미친 듯이 춤을 추 며 팔짝팔짝 뛰었다. 그는 갑자기 서란의 앞으로 달려가더니 두 손을 내밀고 서란에게 무엇인가 빌려달라는 표시를 했다.

17..... 서란이 웃으며 말했다.


[원 할아버지, 월녀검을 빌려 달라구요? 그 검은 할아버지가 이 서란에게 주신 검이니 얼마든지 가져다가 쓰세요. 빌리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겠어요?] 원 할아버지는 그 말이 맞다는 표시로 급히 고개를 끄덕거렸 다. 서란은 검을 꺼내 원 할아버지에게 주었고, 원 할아버지는 월녀검을 넘겨 받자마자 숲속으로 뛰어가서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숲속에서 주위를 빙빙 감싸며 움직였으며, 어느새 막야는 저도 모르게

갑자기 한 줄기 빛이 솟아 올라 나무들 돌았다. 그 빛은 나무의 밑둥 쪽에서만 십여개의 나무를 감싸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말했다.

[원 할아버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요?] 서란이 웃으며 말했다. [원 할아버지는 지금 나무를 베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나 무를 벨 때 도끼를 쓰지만, 그는 무상신공(無尙神功)을 운용 하여 그 검광(劍光)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는 거죠!] 막야는 또 깜짝 놀라며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원 할아버지가 사용하고 있는 저 검은 무슨 검이죠?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해 보이기만 하는데, 일단 사용하니 엄청 난 검광이 사방으로 뻗어 나오는군요!] 서란이 말했다. [그 검의 이름은 용연이고 복희씨가 만든 검이에요. 복희씨 는 바로 간 형님과 막 언니의 사조라면서요? 그래서 귀곡 오 라버니는 서란이 바로 막 언니와 간 형님의 사매가 되는 셈 이라고 그랬어요!] 막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나와 간장 오라버니는 같은 문파이고, 사부의 사공 (師公)이 바로 복희이니 우리 두 사람의 사조가 되는 셈이 죠. 그렇게 따져 보면, 서란 동생과 이 막야는 동일한 문파 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서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러니 이제부터 이 서란은 언니를 사저(師姐)라고 부르도록 할께요!] 그녀는 마음 속으로 우스운 생각이 들어 중얼거렸다. (내가 배운 팔괘오행의 보법은 복희씨에게서 직접 배운 셈이 니 사실 따져 보면 이 서란이 도리어 막 언니의 사저가 되는 셈이라고 할 수 있구나. 하지만 사저라는 말은 나이가 든 사 람에게 어울리지. 난 그냥 사매가 되는 편이 더 좋아!) 막야가 아주 기뻐하면서 말했다. [그래요. 그럼 나도 이제부터 서란 동생을 사매라고 부를께 요. 자, 잠아야, 어서 고모께 인사를 드려야지!] 간잠은 막야의 품속에 있다가 이 말을 듣자 서란에게 그 작 은 입을 벌리며 웃었다. 서란은 그 모습을 보자 즉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어려 서 두 부모님을 잃고 불쌍한 고아가 되었는데 인연이 닿아 사저도 생기고 사질(師侄)도 생긴데다가, 가끔은 자기를 화 나게 하지만 그래도 사랑스럽기만 한 귀곡 오라버니까지 얻 게 되어 너무나 행복한 기분이었다. 덕분에 서란은 집안이 망하고 살 곳을 잃은 슬픔 따위는 점차 잊게 되었다. 귀곡자는 어느새 그 숲으로 뛰어가 몸을 위로 솟구치더니 허 공에서 갑자기 아래로 떨어지며 두 손으로 나무 기둥을 탁 쳤다. 나무 기둥이 갑자기 잘라지면서 하늘로 튕겨나갔다가, 마치 화살처럼 그 집터로 날아왔다. 원 할아버지는 어느새 검광을 거두고 귀곡자가 대나이신공 (大 移神功)을 펼치는 것을 보자 아주 즐거워하면서 꽥꽥 소 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막야는 너무 놀라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말했 다. [귀곡 소협의 저 무공은 무슨 무공이길래 순간적으로 나무를 잘라낼 수 있을까?] 서란이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우리 귀곡 오라버니는 뭐든지 잘해요. 마치 신선처럼 신통


력 있고 뭐든지 예측 불허라니까요. 그가 펼칠 수 있는 무공 이 얼마나 깊고 웅대한지 다른 사람들은 짐작도 못할 거예 요.] 막야는 서란의 기분을 눈치채고 미소를 띄며 말했다. [사매는 아주 총명하니, 이 세상에서 귀곡 소협을 잘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거예요.] 서란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서란에게 그런 복이 있을려구요... 아아, 말하지 말기로 해 요. 사저, 당신은 사질을 돌보고 계세요. 전 가서 집 짓는 일을 거들도록 할께요.] 서란은 말을 마치고 질풍처럼 달려갔다. 원 할아버지는 과연 집을 짓는 고수라고 할만했다. 그는 우선 사면에 커다란 나무 기둥을 밖아 넣고 그 가운데 에 나무 기둥 하나를 더 밖아 넣어 대들보를 받치는 기둥으 로 삼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귀곡자와 서란은 원 할아버지의 지휘 하에, 나무를 이곳 저 곳에 꽃고 검으로 나무에 구멍을 내어 다른 나무를 또 꽃으 면서, 못 하나 쓰지 않고 집의 골격을 완성해 나갔다. 다시 서란은 원 할아버지가 꽥꽥거리며 지휘하는대로 나뭇잎 이 달린 나뭇가지를 잘라 그것을 모아서 지붕을 덮었다. 그녀는 한창 지붕을 덮다가 말했다. [원 할아버지, 어째서 귀곡 오라버니에게 시키지 않고 서란 이더러 하라고 하는 거예요?] 원 할아버지는 씩씩 숨을 몰아쉬며 귀곡자가 날라온 나무를 받아 들고 있다가 서란의 말에 꽥꽥거리며 대답했다. 서란은 그 말을 듣자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착하게 원 할아 버지가 시키는대로 일을 해나갔다. 막야는 간잠을 나뭇잎 더미 위에 내려 놓고 그들을 돕기 위 해 다가오다가 서란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고 말했다. [사매, 원 할아버지가 뭐라고 한 거예요?] 서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원 할아버지 말씀이, 자기는 할아버지이고 나는 손녀이고 귀곡 오라버니는 손님이고 언니와 간잠은 연약한 부녀자이 니, 나 말고 시킬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했어요. 할아버지는 당연히 자기 손녀를 부려 먹을 수밖에 없다면서요.] 막야가 감탄하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원 할아버지만큼만 생각할 줄 안다면, 분쟁이 훨씬 줄어들었을 거예요.] 정말 원 할아버지는 나무 집을 짓는 고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를 돕는 귀곡자, 서란, 막야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내공이 심후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하루 종일 이 일에 매달릴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일한 끝에 드디어 나 무집이 완성되었다. 그 날 저녁, 네 사람과 원숭이 한 마리는 텅 빈 집안에서 밤 을 보냈다. 다행히 원 할아버지는 절곡에서 가져온 기조자를 약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들 그것을 먹고 버틸 수 있었 다. 간잠은 어린아이였는데도 뜻밖에 이 기조자를 아주 잘 먹었 다. 그는 아마도 이 세상에 태어나 기쁨이나 즐거움 보다는 슬픔 이나 고통을 더 많이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 기조자 의 맛이 달게 느껴지는 듯했다. 다음 날, 원 할아버지와 귀곡자는 나무로 책상과 의자 등의 가구를 만들었고, 막야와 서란은 폐허 속에서 솥과 구리그릇 등 생활 용품을 찾아냈다. 아주 양을 모든 것을

빠른 시간 내에 아무 것도 없던 폐허 속에 그럴듯한 모 갖춘 집이 다시 만들어지게 된 셈이다. 것이 대충 갖추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 가려면 쌀이나, 기름, 소금같은, 먹고 입고 마 실 것이 전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중 한가지라도 부족하 다면 사람은 살 수가 없는데,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반 드시 은냥이 필요했다. 네 사람과 원숭이 한 마리는, 원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기 조자와 서란이 가지고 있는 용연검 외에는 돈이 될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만약 이 기조자를 다 먹어치운 후에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귀곡자는 서란과 막야 모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 었다. (서란은 아직 이 세상 경험이 적고, 막야는 어린 아이라는 짐을 지고 있으니 의논 상대로는 좀 부족하구나. 원 할아버 지는 비록 아주 영리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원숭이에 불과 하니 이런 일 때문에 걱정할 리가 없다. 빨리 무슨 수를 써 야 할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귀곡자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이 곤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나 혼자서 찾을 수밖에 없구나. 하지만 내가 어떻게 은냥을 마련한단 말인 가? 나는 노자 이이의 제자이니 뺏거나 훔칠 수는 없는 노릇 이다.) 사부 노자 이이를 생각하자 귀곡자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나 서 속으로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예전에 말씀하시길, 만약 세상에서 급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풍수 심룡대법(風水尋龍大法) 중의 오귀운재(五鬼運財)의 방법을 운용하여 천지의 재물을 얻어주라고 하셨었다. 지금 막야 모 자나 서란은 모두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이니 모두 이 천지 의 재물을 받을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심 룡대법으로 이들을 이 곤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지도 모 른다.) 귀곡자는 이렇게 생각하자 뭔가 깨닫는 바가 있어 갑자기 원 할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졌다. [원 할아버지, 다시 한번 있겠어요?]

절곡 아래에 내려갔다 와 주실 수

원 할아버지가 대답도 하기 전에 서란이 깜짝 놀라며 말했 다. [귀곡 오라버니, 절곡에 다시 내려간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에요. 원 할아버지는 나이가 많아 쇠약한 몸인데 그를 절곡에 다시 내려 보내서 뭘 시키려구요?]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란 동생은 지금 새로운 가정이 꾸며졌다고 생각해?] 서란이 말했다. [그럼요! 집은 이미 다 지어진 것 아니에요?] 귀곡자가 말했다. [집은 다 지어져서 쉴 수 있게 되었지만 앞으로 살아가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서란이 멍청해져서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니요? 저는 절곡에 있을 때 저것과 비슷한 집에서 아무 문제 없이 십 년을 살았었는데요?] 귀곡자가 한숨을 쉬며 쓴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동생은 아직 세상 사람들의 인심도,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 는 방법도 잘 모르고 있어. 생각해 봐. 이 기조자를 다 먹어 치운 후에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까? 추운 겨울이 닥치면 무엇으로 그 추위를 막아낼 수 있지? 어른이야 쉽게 견뎌낼 수 있다고 쳐도 간잠같은 어린 아이가 어떻게 견딜 수 있겠 어? 비록 집이 지어지긴 했지만 그것을 먹고 살 수는 없는 일이잖아.] 서란은 그 말을 듣자 저도 모르게 막야와 간잠을 한번 쳐다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귀곡 오라버니 말이 맞아. 나와 원 할아버지는 다시 절곡에 가서 기조자를 따다가 먹으면 그만이지만 막 언니와 간잠은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알고 보니 인간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군요. 아!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까요?]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야. 이 방법은 서란 동생이 과 연 원하는가에 달려 있어!]


서란이 멍청해져서 말했다. [무슨 방법인데요? 설마 궁궐이나 부잣집에 들어가서 훔쳐 오자는 건가요? 좋아요! 그거 아주 재미있겠는데요?] 귀곡자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이 방법은 훔치거나 빼앗는 방법이 아니고 그저 서란 동생이 원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은냥이 생기게 되는 방법이야.] 서란은 화도 나고 우습기도 해서 말했다. [귀곡 오라버니, 훔치는 것도 아니고 빼앗는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방법이에요? 설마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기라도 한다는 건가요?]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지는 만물을 만들고, 만물은 모두 천지의 보살핌을 받는 법, 그저 그 안에 담긴 묘결(妙訣)을 운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천지의 재산을 얻어 쓴다고 말할 수 있겠지!] 서란은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훔치지도 빼앗지도 않으면서 우리의 목숨을 부지할 은냥을 얻을 수만 있다면 훔치거나 빼앗는 방법보다 훨씬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죠.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서란이 왜 원하 지 않겠어요? 원해요, 아주 많이 원한다구요!] 귀곡자가 말했다. [이렇게 하면 더 좋을 것 같군. 우선 내일 날이 밝으면 원 할아버지께서 백호구의 그 절곡에 내려가서 서란 부모님의 유해를 찾아 돌아오세요. 어때요, 원 할아버지?] 원 할아버지는 귀곡자의 부탁을 받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알 겠다고 승낙했다. 그는 마치 이미 이 일이 서란에게 매우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서란이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의 유해를 찾아와 고향에 묻어 드릴 수만 있다 면 정말 좋겠지만, 그것과 하늘의 도움을 받아 은냥을 얻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든 것은 내일 아침 자양산에 갔다온 후 다시 이야기 하도 록 하자.] 서란은 귀곡자가 확실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고 계속 빙빙 돌 려서 말하자 속으로 답답해서 약간 화도 났지만, 내일 그와 함께 산에 올라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괜히 재미있는 일 같아 서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 날 아침, 원 할아버지는 귀곡자의 말도 기다리지 않고 오산의 기슭을 떠나 오나라의 백호구로 나는 듯이 달려갔다. 원 할아버지는 비록 원숭이이긴 했지만, 일을 처리함에 있어 서는 이 세상의 어느 사람보다도 더 믿음직했다. 귀곡자는 원 할아버지가 서란의 부모님의 유해를 찾아 오리 라고 믿었다. 그는 태만하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원 할 아버지가 떠나고나자 즉시 오산의 주봉(主峰)인 자양산으로 갔다. 서란은 귀곡자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그의 곁에서 따 라오고 있었다.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동생에게 함께 가자고 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날 따라 오는 거지?] 서란이 말했다. [오라버니가 지금 산에 오르는 것은 서란을 위해서가 아닌가 요?] 귀곡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서란이 말했다. [정말로 서란이 새롭게 가정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 해서 산에 오르는 것인데도 이 서란이 오라버니를 돕지 않는 다면 우리 부모님이 황천에서 저를 불효하고 못된 애라고 생 각하시지 않겠어요?]


귀곡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다. 심룡대법 중의 오귀운재의 용기(龍氣)의 영향 을 입는 방법으로 그 후손을 부자가 되게 만드는 이 방법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씨 집안의 핏줄을 보 호하는 일이니 어찌 되었든 예는 갖추어야 되겠지.) 귀곡자는 이런 생각을 하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좋아, 그럼 함께 가도록 하지!] 귀곡자는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앞을 향해 달 려갔다. 서란의 경공은 매우 뛰어나서 그를 쫓아가는데 조금도 어려 움이 없었다. 두 사람은 얼마 안 되어 오산의 주봉인 자양산 꼭대기에 올 랐다. 이 봉우리는 붓통을 닮아 있었다. 위에서 사방을 내려다 보 니 자양산은 원래 12 개의 봉우리로 나뉘어 있었고 그 형상은 붓통, 향로, 바둑판, 상아, 옥(玉), 거북, 웅크린 용, 춤추 는 학, 우는 봉황, 웅크린 호랑이, 검천(劍泉), 잠자는 소와 비슷했다. 이것들이 정말로 실재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 다. 귀곡자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천지가 만든 자연은 정말 불가사의하구나. 이처럼 뛰어난 형상을 갖추고 있으니 분명 용맥이 숨어 있을 것이다.) 서란은 귀곡자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귀곡 오라버니! 어째서 바보처럼 되어버렸어요?]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란 동생은 예전에 오랫동안 이 오산에 살았던 적이 있으 니 오산 자양봉에 어떤 또 다른 이름이 있는지 알고 있겠 지?] 서란이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자양산은 그냥 자양산이지 무슨 또 다른 이름이 있겠어요?]


귀곡자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서란 동생, 잘 살펴 봐, 우리들이 서 있는 이 봉우리는 마 치 붓통같지 않아?] 서란이 그 말을 듣고 사방을 죽 둘러보며 자세히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봉우리의 꼭대기는 두 부분으로 나뉜 모양을 하고 있는 데 윗 부분은 높고 가운데 부분은 낮은 것이 마치 서가에서 사용하는 붓통 같군요. 확실히 천연적인 거대한 필가봉(筆架 峰)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귀곡자가 또 말했다. [저 봉우리는 또 무슨 모양 같아?] 서란이 응시하며 자세히 살펴 보았더니 이 봉우리는 마치 거 대한 호랑이가 천지 사이에 엎드려 있는 것 같이 보여서 저 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웃더니 말했다. [맞아요! 이젠 저도 알겠어요! 이것은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 모습이네요!] 그녀는 계속해서 사방을 둘러 보며 자세히 살폈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그 경치에 마음을 뺏겨 중얼거리며 말했다. [이것은 마치 웅크린 용 같고, 저것은 잠자고 있는 소 같고, 저 봉우리는 춤추고 있는 학 같군요. 아아! 그러고 보니 향 로도 있고, 바둑판도 있고 봉황새도 있고, 상아도 있고... 아, 모두 12 개군요.] 귀곡자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맞아. 서란 동생은 정말 (十二生肖峰)이야!]

잘 봤군. 이것은 바로 십이생초봉

귀곡자의 이 말 때문에 오산 자양산의 봉우리는 후에 십이생 초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귀곡자는 이 열두개의 봉우리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무슨 말 인가 중얼거리면서 상아의 모양을 하고 있는 봉우리를 주목 하고 있었다.


(이 봉우리는 염정(廉貞)인데 거문(巨門), 파군(破軍), 보성 (輔星)의 삼수(三水)가 모두 명당(明堂)을 바라보고 있으니, 삼원대괘(三元大卦) 중의 오귀운재가 이미 은은하게 드러나 고 있구나!) 귀곡자는 생각에 빠져 있다가 서란에게 물었다. [서란 동생, 함께 저 상비봉(象鼻峰)에 올라가 보자!] 귀곡자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번개처럼 빠르게 몸을 날려 수 십 장 정도 멀리 떨어져 있는 상비봉을 향해 날듯이 달려갔 다.

18..... 서란은 귀곡자의 엄청난 경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귀곡 오라버니는 정말 무엇이든 잘한다니까. 신통력도 대단 하고 무공도 엄청난 사람이 매번 나를 화나게 하다니. 언젠 가 이 서란이 그에게 매운 맛을 보여줘야지.) 서란은 귀곡자를 따라 상비봉으로 올라갔다. 귀곡자는 자세 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봉우리는 정말 상아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늘을 향해 불 쑥 솟아 있는 모습도 그러하거니와 그 끝에는 두개의 동굴이 있어서 마치 코끼리의 콧구멍 같았다. 그 구멍에서는 백기 (白氣)가 김처럼 모락모락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동굴 앞쪽은 탁 트여 있어서 시원하게 맞은편이 잘 보였는 데, 그 맞은편은 와룡봉(臥龍峰)과 복호봉(伏虎峰)이었다. 귀곡자는 그것을 보자 너무나 기뻐서 중얼거렸다. [좋아! 이것이 바로 용호한문(龍虎 門)으로, 염정(廉貞), 파 군(破軍), 삼수(三水)가 모두 명당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 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바로 천연적인 오귀운재의 대용혈 (大龍穴)이다!] 서란은 그 말을 듣자 물어보았다. [귀곡 오라버니, 오귀운재라는 게 뭐예요? 지금 이곳에는 오 라버니와 저, 그리고 두개의 동굴이 있을 뿐, 귀신 같은 것


은 없는데 어떻게 다섯 귀신이 재물을 운반하여 올 수 있어 요?]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 지, 시, 세가지가 잘 배합되기만 하면 오귀운재가 올 수 있는 법이란다!] 귀곡자는 말을 하면서 품속에서 천지시신반을 꺼내 상비봉의 꼭대기에 있는 두개의 동굴을 향해 한번씩 맞추어 보았다. 왼쪽의 동굴은 아무런 반응도 쪽 동굴을 향하니 신반(神盤) 자기 떨기 시작하더니 세개의 운데를 가리켰다. 귀곡자는 그것을 보고 속으로

보이지 않고 조용했지만, 오른 위의 천지시 세개의 바늘이 갑 바늘이 일치되어 그 동굴의 가 중얼거렸다.

(간잠은 이미 백호구 절곡 아래의 지룡맥의 기운의 보호를 받고 있어서 그의 생존과 관계있는 일이라면 저절로 술술 풀 리는구나. 그 덕분에 이 오귀운재의 기혈(奇穴)도 열리게 될 테니, 이제 아무런 힘도 들일 필요 없이 얻어낼 수 있겠다.) 귀곡자는 당장 그 동굴 앞에 가서 네 방위에 돌을 놓아 용맥 의 기운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상하게도 귀곡자가 돌을 네 방위에 내려놓자, 백기가 더 이상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서란은 그 광경을 보자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귀곡 오라버니, 동굴에 오라버니가 돌을 놓자 더 이상 백기 를 뿜지 못하네요. 그러니 이젠 코끼리 코가 아닌 것처럼 보 여요.] 귀곡자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 봉우리는 바로 서란 야.]

누이의 번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서란은 그 말을 듣자 즉시 깨닫고 말했다. [귀곡 오라버니, 상비봉 위의 이 코끼리 콧구멍 같은 동굴이 바로 당신이 우리 부모님의 유해를 안장할 곳인가요? 이것으 로 부를 얻어 오귀운재를 얻으려고 하는 건가요? 아이고, 맙 소사.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힘들여 일할 필요도 없겠네요. 귀곡 오라버니가 이 세


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는 묘혈을 찾아준다면 정말 엄청난 공덕을 쌓는 것이 되지 않겠 어요?] 귀곡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쉽게 부자가 되게 해주는 용혈이 어찌 그리 쉽게 찾 아질 수 있겠어? 상비봉의 이 혈은 사실 너희 서씨 집안이 간잠이라는 이 어린 아이의 조상의 맥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얻게 된 것이야.] 서란이 말했다. [귀곡 오라버니는 간잠의 아버지인 간장의 유해를 백호구 절 곡에 묻었는데 그 곳이 바로 앞으로 부차의 백호용혈을 억제 할 수 있는 지룡의 혈이 있는 곳이라 했으니, 바로 이 상비 봉 위의 이 오귀운재 용혈 역시 간씨 집안의 지룡혈의 비호 를 받아 생겨나게 된 것이라는 거군요?] 귀곡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란 동생은 과연 총명하군. 모든 것을 순식간에 깨달아 알 아맞추니 말야. 간씨 집안의 지룡혈은 옛날 복희가 미리 예 측했던 곳이야. 복희는 음양팔괘(陰陽八卦)를 만들었는데,그 오묘함은 우리 사부님이신 노자 역시 진심으로 탄복할 정도 로 대단하지. 그가 점찍어 두었던 그 지룡혈의 용기(龍氣)는 아주 대단해. 후세 사람들이 이 용맥의 비호를 받게 되면, 복연(福緣)을 얻게 되어 가히 천지와 함께 노닐 수 있게 되 니 구구하게 오귀운재혈(五鬼運財穴)에 의지할 필요도 없게 돼. 만사가 다 갖추어졌으니 이제 원 할아버지가 서란 동생 부모님의 유해를 가지고 돌아오면 모든 것이 결말이 나게 되 겠지!] 귀곡자는 말을 마치고 서란과 함께 하산하여 다시 자양산 기 슭의 새로 지은 집으로 되돌아왔다. 원 할아버지는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서란은 원 할아버지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그 절곡은 아주 위험한 곳인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원 할 아버지를 보내다니, 만약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전 당 신을 원망할 거예요.] 귀곡자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원 할아버지는 이미 천지 선령(仙靈)의 기를 얻어 반쯤은 신선과 비슷하게 되었으니 절대로 요절하지 않을 거야. 설사 무슨 어려움을 만난다 해도 그 어려운 일이 도리어 길한 일 으로 바뀌게 될테니 염려하지 마.] 귀곡자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바깥에서 갑자기 원 할아버 지가 뛰어 들어왔다. 그는 무슨 물건인가를 보따리에 싸서 가슴에 안고 있었다. 서란이 기뻐 소리쳤다. [원 할아버지! 아무 일 없으셨어요?] 원 할아버지는 가슴에 안고 있던 그 물건을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 놓았다. 그런 후에 꽥꽥거리며 떠들더니 손짓 발짓으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막야의 품 속에 있던 간잠은 어린아이의 마음과 원숭이의 마 음이 서로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인지 원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킥킥 웃었다. 귀곡자는 원 할아버지가 하는 말을 반쯤은 이해할 수 있었지 만, 그 속의 세세한 내용은 짐작할 수 없었다. 원 할아버지의 말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역시 그의 손 녀딸인 서란이었다. 서란은 잠시 듣고 있더니 갑자기 깔깔 웃으며 말했다. [원 할아버지, 정말 복도 많으시네요. 간 형님의 음령(陰靈) 이 할아버지를 보호해 주었다니 말이에요!] 그녀는 원 할아버지의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 원 할아버지가 백호구에 숨어 들어 갔을 때, 그 곳에는 오나 라의 왕릉이 있었던 탓에 오나라의 군사들이 마치 왕궁을 경 비하듯 아주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원 할아버지는 백호구에 새로 만든 왕릉의 경비가 이토록 삼 엄한 것을 보고 오나라 군주가 왕릉을 무척 중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삼엄한 경비 때문에 백호구의 절곡으로 내려가 서란 부모의 유해를 찾는 일은 아주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귀곡 자가 시킨 일이기 때문에 원 할아버지는 중도에 포기하지 않 았다.


원숭이는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절대로 중간에서 그만두지 않으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무공을 연마할 때도 사람보다 더 빠른 진보를 보이는 것이다. 원 할아버지는 수많은 병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빠르게 몸 을 날려 그들 앞을 홱 지나갔다. 병사들은 도대체 무슨 물건이 자기들 눈앞을 지나쳐 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털이 잔뜩 달린 물건 같았는데 자기들 앞을 스쳐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원 할아버지는 병사들이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미 귀곡 자가 예전에 검기로 만들어 놓았던 절벽의 그 작은 구멍들에 발을 디디고 절벽에 딱 붙어 있었다. 원 할아버지는 절벽의 그 작은 구멍들에 발을 디디면서 아래 로 내려가 얼마 후 절곡 아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는 서 란을 구해 주었던 곳이 어디였는지 기억을 더듬에 순식간에 서란이 떨어졌던 그 절벽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사방을 살피며 돌아다녔다. 그는 내공이 웅 후하여 시력도 아주 좋았기 때문에 이리 저리 흩어진 두 구 의 유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곳이 서란이 떨어진 곳과 거리가 가까우므로 서란 부 모님의 유해가 분명하다고 단정지었다. 원 할아버지는 흩어져 있는 이 유해를 잘 모아서 보따리에 쌌다. 이 유해는 신기하게도 10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조금 도 바람에 풍화되지 않아 사람보다도 더 무거웠다. 원 할아버지는 자기가 짐을 들고 절벽을 올라 갈 수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하지 않고 이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다시 절벽 위로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절벽을 반 쯤 올라왔을 때 이미 지쳤다. 원 할아버지의 내공이 비록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많은 탓에 인내력이 젊었을 때보다 떨어졌고, 워낙 가파른 절벽을 무거운 짐을 안고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만 다른 것에 신경쓰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 십상이었다. 원 할아버지는 이미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었지만, 억지로 위로 기어오르려고 애썼다. 원 할아버지는 간신히 힘을 내어 절벽의 대부분을 기어 올랐 다. 이제 위에는 구멍이 단 하나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가 짐을 들고 있지 않았다면, 한번에 2 장 정도 뛰어올라 이 구멍까지 올라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짐이 너무 무거 워서 내공을 이미 너무 소모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뛰어 올랐을 때 간신히 구멍을 붙잡을 듯 하다가 몸이 아래로 기 울어지면서 손이 미끄러져 그 구멍을 잡을 수가 없었다. 몸 이 허공에 떨어지면서 백 장 길이의 절곡 아래로 내던져졌 다. 원 할아버지가 만약 가슴에 안고 있는 보따리를 버렸다면 그 의 공력으로 허공 속에서 몸을 돌려 간신히 절벽을 다시 붙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 할아버지는 죽어도 그 보따리를 버리려고 하지 않고 꽉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보따리는 함께 밑으로 떨어졌다. 원 할아버지는 자기의 몸이 산산조각 난다고 해도 이 유해만 큼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도 주저 하지 않고 남은 힘을 짜내어 몸을 돌려 그 보따리를 위로 던 져 올렸다. 그는 자기 한 몸을 희생해서라도 그 보따리에 들어 있는 유 해를 보존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원 할아버지는 계속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바로 절곡 아래에 안장해 놓았던 간장의 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원 할아버지는 저도 모르게 화도 나고 속으로 생각했다.

우스운 생각이 들어

(이곳은 간장의 묘가 아니라 오히려 원 할아버지가 죽은 곳 이라고 이름을 바꿔야 할 것이다. 원 할아버지가 이렇게 절 곡에 내려왔던 것이 바로 이 무덤 주인의 아들을 위한 일이 었다는 것을 무덤의 주인은 알고 있을까?) 원 할아버지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등 아래에 무슨 물건이 자기를 받쳐 주어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가 갑자 기 늦추어졌다. 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자세히 보다가 저도 모르게 꽥 꽥거렸다. 그의 등을 받쳐 준 것은 하얀 연기였다. 바로 간장의 무덤의 묘비가 있는 곳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원 할아버지는 놀라고 기뻤다. (하얀 연기야. 네가 정말 이 원 할아버지를 구해주려고 한다 면 이 원 할아버지를 절곡 밖으로 내보내줬으면 좋겠구나!)


원 할아버지가 이렇게 생각하며 혼자 탄식하고 있을 때 갑자 기 그 하얀 연기가 원 할아버지의 말을 알아 들었다는 듯이 갑자기 짙어지면서 무서운 속도로 위로 솟구쳐 원 할아버지 를 절곡 위로 올려보내 주었다. 서란은 원 할아버지의 말을 여기까지 옮기고 더 이상 말하 지 않았다. 막야는 그 하얀 연기가 간장 오라버니의 묘비에서 뿜어져 나 왔다는 말을 듣고 혹시 간장 오라버니가 신선이 된 것은 아 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급히 서란에게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사매! 어서 계속 이야기 해줘요!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어 요?] 서란은 한숨을 내쉬며 쓴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원 할아버지는 이 서란의 부모님의 유해를 보존하기 위해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만약 서란의 친 할아버지였 다 해도 그럴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 다음 이야기요? 원 할 아버지 말씀이 그는 그 덕분에 아주 편안히 절곡을 빠져 나 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대요.] 서란은 말을 맺는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원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생각난 듯이 급히

[원 할아버지! 백호구 위에 엄청난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는 데, 그들 앞을 어떻게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나요?] 원 할아버지가 손짓 발짓을 하며 꽥꽥거리며 몇 마디 말을 하면서 서란에게 용용 죽겠지 하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서란은 웃었다. 그녀는 슬픔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진 모 양이었다. [원 할아버지, 그만, 그만,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계속 말 한다면 이 서란이는 웃다가 죽어버릴 것 같아요!] 막야가 놀라서 말했다. [원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는 거예요?] 서란이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원 할아버지 말씀이, 그는 그 하얀 연기 덕분에 위로 무사 히 올라와 절곡 밖으로 빠져 나오게 되었는데, 왕릉을 지키 고 있던 그 병사들은 원 할아버지가 갑자기 하얀 연기를 타 고 나타나자 그 광경을 보고 모두 신선이 하강한 것으로 알 고 깜짝 놀라 허둥대며 모두들 무릎을 꿇고 원 할아버지 한 테 절을 올리면서 <원후 신선(猿 神仙)님, 원후 신선님, 저 희들에게 장생불사의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아니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던지요!>라고 말했대 요!] 귀곡자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구름을 타고 나타낫으니, 병사들이 신선으로 착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겠군.] 서란이 말했다. [원 할아버지는 그 병사들이 하는 꼴이 재미있어서 참지 못 하고 원숭이의 본성을 발휘해서 그 병사들에게 말했대요. <누구든지 이 보따리를 향해 절을 올리기만 하면 장생불사의 방법을 가르쳐 주겠노라.> 그랬더니 그 병사들이 모두 얌전 히 이 보따리를 향해 절을 계속 올렸다는군요. 장생불사의 방법을 얻으려는 욕심 때문에 병사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절 을 올리다가 결국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하나 둘씩 쓰러져버 리고 말았대요. 아이고, 정말 우스워 죽겠네요! 원 할아버지 는 그 틈을 타서 이 보따리를 움켜 쥐고 날듯이 달려왔다지 뭐에요!] 서란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 깔깔대며 웃었다. 막야도 이 얘기를 듣자 더 참을 수 없어 웃음을 터뜨렸고, 원 할아버지도 자기의 이야기가 서란을 즐겁게 해준 것을 보 고 역시 기뻐서 어쩔줄 모르며 좋아했다. 귀곡자는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세상 일이란 오묘한 것이군. 수많은 병사들이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니, 그 모습은 바로 만인들이 용맥에게 절을 올린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서란은 한참 웃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귀곡자에게 급히 물 었다. [귀곡 오라버니, 당신은 원 할아버지가 절곡에 다녀 와도 절 대로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했는데, 과연 오라버니 말이 맞


았어요! 당신은 원 할아버지를 구해준 그 하얀 연기가 도대 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하얀 연기가 간장 형님의 묘에서 나왔다고 하니, 그것은 묘 안의 용맥의 기운이 한데 모인 것이었겠지. 그것은 복희 씨가 미리 예측했던 지룡혈이 있는 곳이니 그 용기는 자연히 아주 웅후하고 광대한 것이었을 거야.] 서란이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간 형님의 묘가 누구를 비호할 마음이 있었다면, 마땅히 간 잠을 비호해야지 어째서 원 할아버지까지 그런 복을 누릴 수 있었던 걸까요? 참 이상한데요?] 귀곡자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용맥은 원 할아버지만을 보호해 준 것이 아니라 원 할아버 지가 안고 있었던 그 보따리 속의 유해도 보호해 준 것이야. 이 유해는 비록 서씨 일문의 유해이긴 하지만, 지금 간씨 집 안의 핏줄은 서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결국 따 지고 보면 간잠을 위해 보따리 속의 유해를 보호해 준 것이 고 그 덕분에 원 할아버지 역시 은혜를 입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19...... 서란은 그 말을 듣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말했다. [풍수의 심룡절학(尋龍絶學)이 그토록 위력있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서 이와 맞설 수 있는 신공은 없겠군요?]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건곤 천지는 모두 잠룡이 변해서 된 것이고, 만물은 모두 천지에 의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니 천하에 누가 그런 잠룡의 상대가 될 수 있겠어?] 서란과 막야는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곡자 는 더 이상 자세히 말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일어서면서 말했다.


[자! 이제 유해를 찾았으니, 서둘러 자양산 상비봉으로 가도 록 합시다!] 막야는 속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귀곡자에게 물었다. [귀곡 소협, 저희 모자도 함께 상비봉에 가도 되나요?] 귀곡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일은 간씨 집안의 핏줄을 살리기 위한 일이긴 하지만, 간씨 집안과 서씨 집안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 으니 함께 가도 되겠지!) 귀곡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흔쾌히 말했다. [그럼요! 아주머니도 함께 가십시다!] 서란은 스스로 부모님의 유해를 안고 원 할아버지가 간잠을 안고 길을 떠났다. 막야는 내력이 이들보다 떨어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맨 몸으로 움직였고, 귀곡자는 서란의 복희 연용검을 삽 대신 쓸 목적으로 들고 갔다. 이렇게 네 사람과 원숭이 하나는 자양산의 상비봉으로 향했다. 떠난지 얼마 안 되어 상비봉에 오를 수 있었다. 귀곡자는 서란을 데리고 그 코끼리 코의 콧구멍과 비슷하게 생긴 두 구멍 앞에 가서 용연검을 그녀에게 넘겨 주며 말했 다. [조상의 묘는 그 후손이 파야 하는 법이야. 그렇지 않으면 용맥의 비호를 받는 복을 누릴 수 없지. 서란 동생은 이 검 을 삽으로 삼아 동굴 앞에 넓게 묘혈을 파서 부모님의 유해 를 안장하도록 해.] 서란은 부모님과 함께 지내던 옛 기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눈자위를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시 서 있다가, 용 연검을 넘겨 받아 진기를 운용하여 미친듯이 구멍을 파 내려 갔다. 그녀는 구멍을 파서 부차에게 한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귀곡자는 서란의 속마음을 짐작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복수심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법이니 이렇게라도 풀지 않 으면 더 위험해 질 수 있다. 지금 그녀는 자기의 힘을 모두 묘혈을 파는 일에 마음껏 발산하고 있으니, 오히려 잘 된 일 인지도 모른다.)


잠시 후, 서란은 어느새 아주 넓은 묘혈을 다 팔 수 있었다. 귀곡자는 천지시 신반을 꺼내어 다시 자세히 측정해 보았다. 신반 위의 천, 지, 시, 세개의 바늘이 교차되어 포개지면서 묘혈 앞의 와룡, 복호 두개의 봉우리를 향했을 때 서란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서란 동생, 어서 부모님의 유해를 묘혈에 안장하도록 해.] 서란은 얌전히 그가 시키는 대로 부모님의 유해를 묘에 넣었 다. 귀곡자는 막야에게 말했다. [아주머니, 이제 간씨 집안과 서씨 집안의 혈맥이 하나로 합 쳐졌으니, 간씨 집안의 혈맥이 살면 서씨 집안의 혈맥도 살 고 서씨 집안의 혈맥이 살면 간씨 집안의 혈맥도 살게 되었 습니다. 두 집안은 이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으니 어 서 흙을 덮는 일을 도와 주셔서 자손이 효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막야는 귀곡자의 신통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듣자 꾸물거릴 수가 없어 즉시 앞으로 나가 손으로 흙을 집어 묘혈에 뿌렸다. 그녀가 안고 있던 간잠은 입을 벌리고 무슨 말인가 옹알거리 며 그 작은 손을 뻗어 흙을 쥐더니, 막야와 마찬가지로 역시 묘혈에 흙을 뿌렸다. 귀곡자는 속으로 집히는 바가 있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 였다. (처음에는 하얀 연기가 솟아 목숨을 구해 주더니 이제는 간 씨 집안과 서씨 집안의 혈맥이 서로 서로 도와 주고 있으니 장차 큰 일을 할 수 있겠구나.) 봉토 작업이 끝나고 상비봉에 하나의 무덤이 생겨나게 되었 다. 그 동안 원 할아버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는데, 귀 곡자가 막 묘비로 세울만한 비석을 찾으려고 하는 순간, 커 다란 돌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고 있었다. 알고 보니 원 할아 버지는 갑자기 절곡 아래에 간장의 무덤을 만들 때의 일이 생각나서 묘혈이 완성되면 귀곡자가 묘비로 쓸 석판을 찾아 그 곳에 글을 새길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비석을 찾아 나 섰던 것이었다.


그는 너무나 영리해서 시키지 않아도 벌써 석판을 찾아온 것 이었다. 귀곡자는 웃으면서 진기를 운용하여 석판을 향해 중지로 빠 르게 <서씨 선조의 묘(筮家先人之墓)>라고 쓴 뒤 묘 앞에 세 웠다. 그 앞은 광활하게 트여 있고 멀리 와룡, 복호 두 봉우 리를 마주 보고 있는 위치였다. 묘혈이 완성되자 묘혈 앞은 광활한 천연적인 명당이 되었고, 명당 앞의 와룡, 복호 두 봉우리는 용호가 서로 보호하는 형 국이 되었다. 귀곡자는 서란에게 말했다. [자! 어서 선조에게 절을 올려 이 용맥의 비호를 얻도록 해!] 서란이 그 말을 듣고 묘 앞에 무릎 꿇고 절을 올리기 시작했 다. 귀곡자는 즉시 중얼 중얼 무엇인가 외기 시작했다. [날은 길하고 좋은 시간이니 길하고 길하도다. 길일이 묘를 감싸고 있으니 반드시 그 복을 따라 재산을 얻게 되리라. 앞에는 수많은 뛰어난 봉우리들을 바라보고 있고, 뒤에는 내 룡(來龍)이 수백리로 뻗어가고 사수(四水)가 이 곳으로 향하 니 길한 기운이 많아 모든 것이 이 곳으로 모여 더더욱 길하 게 되도다. 감산(坎山), 감향(坎向), 감수류(坎水流), 오귀 운재는 영원히 그치지 않으리라. 복 있는 사람이 이 곳을 얻 으면 가난한 사람도 부자가 되리라.] 귀곡자는 다 읊고 나서 서란과 막야 모자를 향해 산을 내려 가도 좋다는 표시를 했다. 네 사람과 원숭이 하나가 산 기슭의 나무집으로 되돌아온 시 간은 이미 저녁 나절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기조자로 허기를 면했다. 그 날 밤, 서란이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얼굴이 간지러워 서 잠에서 깨어났다.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붉은색의 여우가 혀를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핥고 있어서 얼 굴이 간지러웠던 것이다. 서란은 그녀의 머리가 그녀는 다.

놀라면서 일장을 뻗어 그 여우를 죽이려고 했다. 이 일장이 정말 여우의 머리에 닿았다면 그 여우는 깨져 죽고 말았을 것이다. 막 출수하다가 즉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손을 거두었


그녀는 그 붉은 여우가 조금의 악의도 없이 그녀를 쳐다 보 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여우는 그저 혀를 내밀어 그녀를 핥아 그녀를 잠에서 깨 어 나게 하려고 했을 뿐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서란은 놀랍기도 하고 이상한 생각도 들어 주위를 자세히 둘 러 보았다. 옆에서는 막야 모자가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 고, 옆 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원 할아버지와 귀곡자는 이미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서란은 우습기도 하고 화도 나서 조용히 말했다. [붉은 여우야, 붉은 여우야. 너는 이렇게 야심한 밤에 나를 깨워 무엇을 하려는 거냐? 네가 뭔가 내게 재미있는 물건이 라고 가져와 보여 주려고 그런 거냐? 만약 날 화나게 하면 일장에 네 녀석을 죽여버리겠다.] 작고 붉은 여우는 그 말을 울더니 문 밖으로 뛰어나가 았다. 그 여우는 서란을 쳐다보며 서란은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듣더니 갑자기 낮은 소리로 한번 서서 고개를 돌려 서란을 바라보 눈을 다섯번 껌벅거렸다. 들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눈을 다섯번 껌벅이다니, 이건 또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겉옷을 걸쳐 입고 그 여우를 따라 나갔다. 바깥에는 달빛이 물처럼 맑게 산야를 비추고 있었다. 아주 조용한 밤이었다. 붉은 여우는 그녀의 앞에서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속 도로 달려갔다. 마치 서란을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 것 같았 다. 서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붉은 여우는 정말 괴상하다. 나를 어디로 데려 가려는 건지 알 수 없는걸?)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며 그 여우를 적당한 속도로 뒤쫓아 갔다. 서란은 월녀검법을 익히고 있었던 데다가, 또 복희의 신검을 지니고 있었고, 귀곡자에게서 복희팔괘 보법을 배웠기 때문 에 아주 대담했다. 무슨 귀신이 나타난다 해도 절대로 자기 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서란이었다.


붉은 여우는 작은 산 구릉을 돌아갔다. 서란은 가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곳에는 달빛을 받으며 붉은 여우 뿐 아니라 우가 한마리 더 나타나 나란히 서서 달려가고 는 붉고 하나는 노란 것이 정말 가관이었다. 서란은 이상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속으로

그 뒤를 쫓아 황색 털의 여 있었다. 하나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여우의 꼬리에서는 악취가 나서 사람들 이 싫어한다고 하던데, 이 붉은 여우와 노란 여우는 아름답 기만 하구나. 아주 사랑스럽군. 사람들의 말이란 느낌에 따 라 다른 법이니 무조건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서란은 왠지 즐거운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빨리 하여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가 이처럼 빨리 몸을 움직이 자 그 두 마리 여우 역시 갑자기 속도를 더 내어 서란과 일 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앞서 달려나갔다. 서란은 아주 재밌는 생각이 들어 중얼거렸다. (좋아! 여우를 쫓는 것은 진짜 재미있는 일이지.) 한참 서란이 쫓아가는데 붉은 여우와 노란 여우가 다시 산 구릉 하나를 돌아갔다. 그 뒤를 뒤쫓아간 서란은 다시 놀라게 되었다. 이번에는 갑 자기 파란 여우 하나가 더 나타났던 것이다. 서란은 이제 아주 즐거워져서 속으로 빨갛고 노랗고 파란 여 우가 나타났으니 이젠 흰 여우와 검은 여우 역시 나타나게 되겠지, 라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홍(紅), 황(黃), 남(藍), 백(白), 흑(黑)의 5 색을 생 각 해내고는 이제 곧 흰 여우와 검은 여우도 나타날 것이라 고 생각했던 것이다. 얼마를 더 뒤쫓아가니 과연 어디선가 흰 여우가 나타나 이제 는 흰 여우, 붉은 여우, 노란 여우, 파란 여우가 함께 달려 가고 있었다. 흰 여우는 달빛을 받아 그들 중에서도 가장 빼 어나게 아름다웠다. 서란은 아직 소녀였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소녀의 본능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우들을 보자 그녀는 너무나 즐거워서 거의 팔짝팔짝 뛸 뻔했다. 그녀는 조용히 그들을 불렀다.


[아름다운 여우들아, 이 서란이 너희들을 따라잡고 말테다. 너희들은 너무 아름다워서 만약 달빛 아래에서 뛰며 춤이라 도 춘다면 아마 이 세상 사람들은 넋을 잃고 말겠구나.] 서란의 이 말이 막 끝나자마자, 붉고 노랗고 파랗고 흰 여우 가 마치 그 말을 알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로 멈춰서더 니 뛰어 오르며 춤을 추었다. 네 마리의 여우가 달빛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 라졌다가, 어느새 왼쪽에 와 있다가 오른쪽에 와 있다가 하 며 움직였다. 붉은 색, 노란 색, 파란 색, 흰 색의 4 색이 이 리 저리 왔다갔다 하자 정말 혼을 빼 놓을 정도로 아름다워, 한 폭의 월야호보무도(月夜狐步舞圖)라도 보고 있는 듯했다. 서란은 너무나 즐거워서 하마터면 그 여우들을 따라 같이 춤 을 출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검은 여우가 나타나지 않 아 홍, 황, 남, 백, 흑의 5 색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며 검은 여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간신히 자기의 충동 을 억제했다. 서란이 이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녀의 눈 앞이 어지러워지더니 4 색의 여우의 움직임이 갑자기 더욱 기이하 면서도 다양하게 변했다. 알고 보니 붉고, 노랗고, 파랗고, 흰 여우들 사이에 갑자기 검은 여우가 끼어들었던 것이다. 네가지 색 사이에 갑자기 검은색 하나가 끼어들며 움직이자 더욱 아름다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서란은 마침내 자기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여 우들의 움직임을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섯 마리의 여우는 서란이 춤을 추는 것을 보자 더욱 높고 아름답게 뛰어 오르며 그녀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달빛 속에서 다섯 여우와 한 소녀가 동서남북으로 이리 저리 춤을 추며 움직였다. 서란은 자기가 이 여우들의 뒤를 따라 어느새 나무 집에서 멀리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와 다섯 여우는 바로 자양산의 상비봉 아래에 와 있었는 데도 그녀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서란은 한참 동안 여우를 따라 춤을 추었는데, 여우들의 움 직임이 너무 빠르고 오묘하여 도저히 똑같이 따라할 수가 없 었다.


그녀는 호승심이 발동하여 저도 모르게 배운지 얼마 안 되는 복희팔괘보를 펼쳤다. 여우들의 움직임이 아무리 빠르고 오 묘하다고 해도 복희팔괘보의 박대정심(博大精深)함에는 미치 지 못했다. 다섯 여우가 마치 이렇게 오묘한 기학은 본 적이 없다는 듯 이 당황하고 있는 동안 서란이 휙, 하고 그들 중간으로 끼어 들었다. 다섯 여우는 갑자기 멈춰 서서 더 이상 춤추지 않고 대신 발 톱을 세우고 발 밑의 흙을 파기 시작했다. 다섯 여우의 스무개의 발톱은 쇠처럼 단단하여 순식간에 하 나의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다섯 여우는 다시 좀 더 파내려가다가 동굴이 다섯 여우 모 두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자 갑자기 파던 것을 멈추고 한꺼번에 서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섯 마리의 눈 열개가 동시에 서란을 향해 다섯번 껌벅였다. 서란은 저도 모르게 즐겁기도 하고 이상한 생각도 들어서 웃 으며 말했다. [여우들아, 여우들아. 그건 또 무슨 뜻이냐? 어째서 이리 저 리 뛰며 춤을 추다가 갑자기 땅을 파고, 땅을 파다가 눈을 껌벅거리며 무슨 신호라도 보내는 것처럼 구는 거냐?] 붉고 노랗고 파랗고 희고 검은 다섯 마리의 여우가 그 말을 듣자 일제히 한번 길게 울더니 그 동굴 안으로 뛰어들었다! 서란은 그 광경을 보자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여우들이 속 좁게도 내가 몇마디 했다 고 구덩이 속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하다니. 이 서란은 너희 들을 비웃은 것이 아니란 말이야!] 그녀는 휙, 하고 그 구멍 안으로 뛰어들었다. 알고 보니 다섯 여우가 뛰어 들어가 죽으려고 한 그 구덩이 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구덩이는 길이가 5 척 정도 되고 깊이 역시 5 척 정도밖에 안 되는데 방금 뛰어 들어간 다섯 마리의 여우는 그림자도 찾아 볼 수가 없으니 어떻게 된 일이지? 도대체 어디로 사라 진 걸까? 땅속으로 꺼진 것일까?) 서란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갑자기 월녀검을 뽑아 들고 구덩


이 밑을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밑에 통로가 있어서 다섯 여우가 그 통로를 따라 도 망가버린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이다. (내가 이 구멍을 다시 10 척 정도 파내려 가면 너희들의 모습 을 볼 수 있겠지.)

20..... 서란은 호기심이 일어나 빠른 속도로 흙을 파내려 갔다. 얼마 안 되어 아래로 3 척 정도 더 파내려갈 수 있었다. 갑자기 파악, 하고 빛이 번쩍했다. 월녀검 끝이 무슨 석판에 닿아 불빛을 일으켰던 것이다. 서란이 그 석판에 붙어 있는 흙을 털어내고 보니 그 석판 위 에는 글자들이 쓰여 있었다. 서란은 그 글을 보자 놀라 기절 할 뻔했다. 석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돌 아래에 황금이 있음을 다섯 마리 여우가 알려 주노라.> 서란은 한참 멍하게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석판을 들어냈다. 과연 석판 아래에 커다란 통이 있고, 그 입구는 진흙으로 단단히 봉해져 있어서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서란은 그 통 안에 무슨 징그러운 괴물이라도 들어있을까봐 멀찍히 떨어져서 월녀검의 끝으로 살짝 그 진흙을 깨뜨렸다. 만약 독사라도 튀어 나온다면 거리를 두고 검으로 상대할 생 각이었다. 진흙으로 밀봉된 뚜껑을 열었는데 통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 도 없었다. 서란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조심스럽게 그 안을 살짝 들여 다 보았다. 놀랍게도 그 통 안에는 빛나는 황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서란은 세상 살이에 익숙치 않았지만, 한 사람이 이렇게 많 은 황금을 가질 수 있다면 죽을 때까지 먹을 것이나 입을 것 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서란은 묵직한 그 통을 메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일부러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발소리를 죽이고 다


가와 귀곡자를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다. 어느새 새벽이 되어 하늘이 차츰 차츰 밝아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었기 때문에, 서란은 귀곡자 와 다른 사람들이 분명히 깊은 잠에 빠져 있으리라 생각했 다. 귀곡자가 놀라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서란은 너무나 즐거워 서 저도 모르게 웃었다. [사매! 뭐가 그렇게 즐거워? 한밤중에 달빛을 받으며 춤을 추어 즐거운 모양이군 그래.] 가까운 곳에서 음성이 들렸다. 서란이 놀라 자세히 보니 새벽 빛을 받으며 귀곡자가 문 앞 에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란은 뜨끔하여 속으로 중얼거렸다. (귀곡 오라버니는 이미 모든 나.)

것을 다 예측하고 있었나 보구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며 말했다. [귀곡 오라버니, 당신은... 당신은 벌써 다 알고 있었나요?]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요한 달빛 아래에서 다섯 마리의 여우가 당신을 인도하여 돌 아래에 있는 황금을 얻게 해 주었지? 바로 그 상비봉에 서...] 서란은 귀곡자가 갑자기 말을 멈추는 것을 보자 급한 마음이 되어 말했다. [오라버니! 어서 계속 말씀하세요! 그 상비봉에서 뭐요? 정 말 바보같은 헛소리로군요!] 귀곡자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상비봉의 오귀운재혈에 사매의 부모님이 묻혀 있지. 다섯 여우가 바로 오귀야. 달빛 속에서 길을 인도하여 황금을 얻 게 해준 것이야. 이게 바로 풍수의 영험한 작용이야. 아직도 모르겠단 말야?]


그녀는 메고 있던 묵직한 통을 귀곡자를 다.

향해 던지며 웃었

[귀곡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모르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오라버니는 뭐든지 한번 보면 다 아는 사람이니까.] 귀곡자는 가볍게 손을 뻗어 그 통을 받았다. 그 통에 번쩍 번쩍 빛나는 황금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귀곡자는 속 으로 중얼거렸다. (심룡술(尋龍術)은 과연 대단하구나. 오귀운재의 용혈 하나 으로 사람이 평생 써도 남을 황금을 얻게 되다니. 막야 모자 는 더 이상 걱정없이 살 수 있겠다.) 귀곡자는 서란과 함께 황금이 가득 든 통을 들고 집으로 돌 아왔다. 막야는 어느새 일어나 있었는데, 이 통에 든 황금을 보자 깜 짝 놀라 말했다. [아주 조그만 황금으로도 한 이렇게 많은 황금이 있다니. 도 못하겠어요.]

식구가 1 년을 살 수 있다던데, 대체 얼마나 큰 재물인지 상상

그 날 오후 막야와 귀곡자, 서란은 함께 시장에 나가 그 황 금 한 덩어리를 수천 냥의 은냥과 바꾸었다. 세 사람은 시장을 다니며 고작 은냥 백 냥밖에 쓰지 않았는 데도 가구와 먹을 것 등을 잔뜩 살 수 있었다. 세 사람은 그 수레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막야 모자는 이 렇게 많은 황금이 생겼으니 더 이상 생활에 대해 걱정할 필 요가 없었다. 귀곡자와 서란은 새 옷을 사서 갈아 입었다. 귀곡자가 새 옷 으로 갈아입자 그 준수한 얼굴이 더더욱 영준하게 보였으며, 서란 역시 더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원 할아버지는 서란이 이처럼 아름답게 변한 모습을 보자 너 무 즐거워서 꽤꽥거리며 기뻐했다. 귀곡자는 막야에게 황금이 들어 있는 그 통을 잘 숨겨 두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 때마다 꺼내 시장에서 은냥으로 바꾸 어 쓰라고 시켰다. 귀곡자는 그곳을 떠날 준비를 했다. 막야는 그가 떠나는 것 이 못내 섭섭했다.


[귀곡 소협께서는 어찌하여 이곳에 더 머무르며 편한 생활을 누리지 않으십니까? 저 황금이면 여러 사람이 함께 죽을 때 까지 써도 남을 텐데요.] 귀곡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이 귀곡자의 것이 아닙니다. 모두 서란 동생과 아주 머니의 복에 의해 생긴 것이죠. 그러니 제가 이곳에 머문다 면 당신들의 복마저 사라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서란은 밉다는 듯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당신이 가든 말든 우리들의 복은 사라지고 말거예요.] 귀곡자가 멍청해져서 물었다. [어째서?] 서란이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왜냐하면 난 당신과 헤어질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요. 당신 이 어디를 가든지 전 반드시 따라갈 거예요. 난 당신과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 설사 내게 무슨 복이 있다 해도 결국엔 다 사라지게 될 것 아니겠어요? 안 그래요?] 귀곡자는 그 말을 듣자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본래 여자가 우는 것을 가장 무서워했는데, 서란이 화 를 내는 모습을 보자 크게 당황하게 되었다. 막야는 눈치 빠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서란 같은 소녀의 속마 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서란이 귀곡자를 자기의 반려자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 막야는 이 사매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와 귀곡자가 좋 은 인연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며 귀곡자에게 말했다. [귀곡 소협, 마음 놓으세요. 저와 간잠은 잘 살아갈 수 있어 요. 저는 반드시 모든 힘을 다해 간잠을 훌륭한 성인으로 키 울 거예요. 사매는 워낙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미이니 이런 곳에서 우리 모자와 살다가는 답답해서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더군다나 사매는 어렸을 때부터 절곡 안에서만 자라 왔으니 이제 세상 구경도 좀 해야 하지 않겠어요? 소협과 함 께 강호를 유랑하면 좋을 거예요. 그러니 너무 우리 모자만


을 위해서 생각하지 마시고 사매를 위해 같이 떠나도록 하세 요!] 귀곡자는 그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 역시 서란과 헤어지 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기 때문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간 형님 부인의 말도 일리가 있다. 서란 동생은 아직 세상 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세상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다면 어떻 게 부모님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겠는가? 그녀를 이곳에 두고 가는 건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녀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막야 역시 자기를 돌볼 수 있는 나이이니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구 나!) 귀곡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흔쾌히 말했다. [나는 월나라의 회계성을 한번 돌아볼 작정인데 서란 동생이 같이 갈 생각이 있다면 함께 갈 준비를 하도록 해!] 서란은 그 말을 듣고 너무나 기뻐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냥 가면 되지 무슨 준비가 필요해요?] 귀곡자는 강호를 돌아다닐 때 은냥이 없으면 하루 하루를 보 내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서란에게 바꿔온 은냥 중 에서 오백 냥을 가지고 가도록 시켰다. 귀곡자가 다시 막야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몇마디 했다.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그의 말을 듣고 막야가 고개 를 끄덕이는 모습만 보였다. 귀곡자의 마지막 말이 들렸다. [이 구결을 아주머니께서 먼저 익히신 뒤 간잠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그가 좀 더 크고 나면 제가 다시 와서 그에게 운 공심법(運功心法)을 전수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막야가 공손하게 말했다. [소협의 은혜에 뭐라고 감사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귀곡자는 웃으며 서란, 원 할아버지와 함께 그 곳을 떠나 월 나라의 수도인 항주성 방향으로 걸어갔다. 주나라 때의 항주는 그저 작은 마을일 뿐이었지만, 춘추시대 구천이 월왕이 된 무렵에는 이미 번성한 도시가 되어 있었


다. 항주성은 오나라 자양산의 동남쪽에서 몇백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귀곡자, 서란, 그리고 원 할아버지의 공력으 로는 반나절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서란은 고향의 경치를 감상하며 천천히 움직이며 빨 리 가려고 하지 않았고, 귀곡자 역시 당장 급히 해야 할 일 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서란이 하자는대로 천천히 길을 가고 있었다. 하루 밤낮을 꼬박 걷고 그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뭇산들 속에 서 산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산의 산맥은 둘로 나뉘어 있어 마치 모산(母山)이 아주 빼어난 자산(子山)을 낳은 듯한 모습이었다. 귀곡자는 생각나는 것이 있어 서란에게 물었다. [서란 동생은 이 산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서란이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부모님께서 말씀하시길, 항주성 북쪽으로 50 리 정도 되는 곳에 회계산(會稽山)이 있고, 회계산 산 봉우리 아래에 모산 이 있는데 그 이름은 저라산(苧蘿山)이라고 한다고 했어요. 이 저라산은 자모산(子母山)이라고도 한다고도 그러셨는데, 저 산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귀곡자는 그 말을 듣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모산이라. 자모산은 어미가 있어야 자식이 있음을 비유하 는 말이니 이 저라산이 있어야 회계산이 있을 수 있음을 말 하는 것인가 보다. 이 안에 무슨 곡절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 구나.) 귀곡자는 의문이 생기면 당장 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였 다. 서란은 귀곡자가 천천히 걸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자 조급해져서 말했다. [귀곡 오라버니! 이렇게 꾸물거리다가 어느 세월에 항주성에 도착할 수 있겠어요? 보이는 것은 그저 황폐한 산들에 불과 한데 뭐가 그렇게 볼 것이 많다고 그러는 거예요? 빨라 성으로 들어가 뭘 좀 마셔야죠. 나는 아까부터 목이 마


르다구요.] 귀곡자가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서란 동생은 이 산이 그저 황폐한 산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만, 그렇지 않아. 이 산의 두 줄기 산맥이 장차 두 나라의 국운을 흥하게 하느냐 쇠하게 하느냐를 결정짓는 관건이 된 다고 말하면 믿을 수 있겠어?] 서란은 국가의 흥망과 관련된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정색을 하고 귀곡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귀곡 오라버니, 정말 놀랍네요. 이 황량한 산이 두 나라의 국세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니. 만약 오라버니에 대해 잘 모 르는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분명 오라버니를 미친 사람 이라고 했을 거예요! 원 할아버지... 저는... 저는 목이 말 라 죽을 것 같아요!] 서란은 어렸을 때부터 원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는 것에 익 숙해 있었기 목이 마르자 저도 모르게 원 할아버지부터 찾았 다. 귀곡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서란은 어째서 갑자기 목이 마르다고 하는 걸까?) 그는 자기의 내공이 심후하여 쉽게 목마름을 느끼지 않지만 서란의 공력은 그에 비해 많이 뒤떨어져 목마름의 참지 못한 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원 할아버지는 서란을 자기의 생명보다 아끼고 있었기 때문 에, 서란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잔뜩 긴장하면 서 뭐라고 소리지르더니 어디론가 뛰어갔다. 잠시 후 헐레벌 떡 뛰어와 서란에게 뭐라고 꽥꽥거렷다. 귀곡자가 이상하게 여기며 물었다. [서란 동생, 원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는 거야?] [원 할아버지 말씀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박밭이 있고 엄청나게 많은 수박이 열려 있대요! 그러니 그것을 먹 으면 갈증을 없앨 수 있다고... 귀곡 오라버니, 어서 원 할 아버지를 따라가요.] 귀곡자도 당황하며 말했다.


[원 할아버지는 그 수박밭이 씀하지 않으셨어?]

주인이 있는 밭인지 아닌지 말

서란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인데, 주인이 있건 없건 무슨 상관이에 요!] 이 말을 다 맺기도 전에 그녀는 원 할아버지가 하는 말을 듣 고 저라산 서쪽으로 달려갔다. 귀곡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다지도 목이 마르단 말인가?]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귀곡자가 달려가 보니 저라산 서쪽 기슭에 과연 수박밭이 있 었다. 원 할아버지와 서란은 어느새 수박밭으로 들어가 각각 하나 씩 따서 깨어 먹고 있었다. 서란은 수박을 반쯤 먹고나자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그녀는 눈을 들어 귀곡자가 여전히 수박밭 바깥에 서서 움직 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우습기도 하고 화도 나서 소리 지르며 말했다. [바보! 거기 서서 뭐 하는 거예요? 먹지 않으려면 맘대로 해 요. 이 수박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아요?] 귀곡자는 서란과 원 할아버지가 너무나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면서 갑자기 자기 역시 목이 말 라왔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목이 마르다 해도 남의 수박을 함부로 먹을 수는 없었다. 서란이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귀곡 오라버니, 수박이 있으면 수박을 먹고 목이 마르면 갈 증을 없애면 되는 거예요!] 귀곡자가 웃으며 말했다. [주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과 다를 바 없지 않겠어?] 서란이 말했다.

맘대로 먹는다는 건, 훔치는 것


[훔치든 안 훔치든 어쨌든 목말라 죽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니 에요. 더군다나 사방에 아무도 없는데, 수박 몇개 먹었다고 해도 누가 알겠어요? 앗, 누가 와요, 빨리 도망가요!] 서란이 말을 하며 먹던 수박을 떨구고 막 도망가려는 순간 귀곡자가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갈 수 없어!] 서란이 화를 내며 말했다. [왜 도망갈 수 없다는 거예요? 누가 우리를 못 가게 막기라 도 한단 말이에요?] 귀곡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먼저 실(實)을 취하고 그 다음에 허(虛)를 취 하는 것이 바로 2 무위신공의 입문 요결이라고 하셨지. 먹은 것은 먹은 것이고 훔친 것은 훔친 것이야. 도망간다면 훔쳤 다는 오명을 영원히 씻을 수 없게 되는 거야.] 서란이 한숨을 쉬며 귀곡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도망가지 않는다면 훔쳤다는 오명을 당장 뒤집어 쓸지도 몰 라요!] 서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 사람은 중년의 농부로 등에 땔감을 지고 수박밭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중년의 농부는 하필이면 서란의 바로 앞을 가로막고 앉아 수 박을 따 먹기 시작했다. 이제는 도망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 게 되었다. 서란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봐요! 귀곡 오라버니, 이젠 꼼짝없이 도둑질한 사람으로 몰 리게 되었어요!] 귀곡자가 그 다.

농부에게 다가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말했

[형님, 말씀 좀 묻겠습니다. 이 수박은 누가 심은 것입니 까?] 중년의 농부는 그 말을 듣자 서란 쪽을 한번 쳐다보더니 껄 껄 웃으며 말했다.


[수박 씨를 뿌리면 수박을 얻고 콩을 심으면 콩을 얻는 법, 이 수박밭은 시(施)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열심히 씨를 뿌려 기른 것이라오!] 서란은 그 말을 듣자 엉겹결에 말했다. [맙소사. 정말 수박 주인이었구나.] 귀곡자가 말했다. [시 형님, 저희들이 목이 너무 말라 견딜 수가 없어서 마음 대로 수박을 따 먹었습니다. 값이 얼마나 하는지 알려주시면 저희가 돈으로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중년의 농부 시씨는 그 말을 듣자 귀곡자 일행을 자세히 쳐 다 보았다. 귀곡자와 서란은 마치 금동옥녀(金童玉女)처럼 준수하고 아 름다와 그들을 자세히 보는 순간 어쩐 일인지 마음이 풀어져 껄껄 웃으며 말했다. [먹었으면 먹은 거지, 뭐가 대수겠소? 이 시모(施某)가 여러 분께 몇개 더 드리도록 하겠소!] 서란은 시씨의 대답이 이상하게 들려서 물어 보았다. [어째서 우리들에게 몇개를 더 주시려는 거예요? 이 수박을 시장에 내다 팔면 비싸게 받을 수 있을텐데요!] 농부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아이들은 수박 먹는 것을 좋아해서 그들이 수박 먹는 모습을 보면 아주 귀엽지요. 안타깝게도 이 시모는 쓸데없이 넓은 수박밭을 가지고 있을 뿐 아이가 없어요. 아이가 맛있 게 수박을 먹는 귀여운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될 정도 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행히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 나 기쁜 일입니까? 그래서 돈을 받기는커녕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을 지경입니다!] 서란은 웃으며 말했다. [귀곡 오라버니, 어때요? 안 먹었다면 괜히 목만 마를 뻔했 잖아요. 먹었어도 도둑의 오명을 쓸 필요도 없고 오히려 고 맙다는 인사까지 받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서란은 의기 양양하며 귀곡이라는 이름을 입 밖에 꺼냈다. 농부는 그 말을 듣자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며 급히 서란에 게 말했다. [아가씨, 당신은 방금 까?]

누구를 귀곡 오라버니라고 부른 겁니

서란이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왜요? 뭐가 이상한가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귀곡자를 가리키며 웃더니 말했다. [그의 성은 귀씨이고 이름은 곡자에요. 그러니 귀곡 오라버 니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르겠어요?]

21..... 농부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요즈음 강호에 불세출의 기인이 한 명 나타났는데 이름을 귀곡자라고 하며, 태상(太上) 노조(老祖)의 유일한 제자라고 한다고 하더군요. 그는 오나라에 들어가서 풍수 심룡대법으 으로 오나라 왕이 국운을 떨치게 도와 준 바 있다고 해요. 왕릉을 이전한지 얼마 안 되어 백호의 모습이 그 산 위에 나 타나 그로 인해 오나라 왕릉이 있는 그 곳은 백호구라는 이 름을 얻게 되었고, 오나라의 태자 부차는 이미 조상들의 용 기(龍氣)의 비호를 받게 되어 설사 자객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 백호가 나타나 자객들은 놀라 도망치게 한다나요. 오나라 를 도와 왕릉을 이전시킨 사람이 바로 천하 무쌍의 기인이사 (奇人異士) 귀곡자라고 하던데...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 진 사람이 이렇게 나이 어린 사람이란 말입니까?] 서란은 시 형님이 귀곡자를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으로 칭찬 하는 것을 보자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를 엄청난 사람인 양 치켜세우지만, 서란 따위는 안중에도 없군.) 그녀는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그를 너무 치켜세우지 마세요. 그는 귀곡자이기는 하지만


무슨 엄청나게 대단한 기인은 아니란 말이에요.] 농부는 갑자기 서란이 화를 내자 그 이유를 모르고 중얼거리 며 말했다. [당신은 그를 귀곡 오라버니라고 부르고, 또 아주 친한 것 같은데, 어째서 다른 사람이 그를 칭찬하는 것을 못마땅해하 는 겁니까? 정말 앞뒤가 맞지 않는군요.] 서란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 자신도 스스로 천하 무쌍의 기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믿지 못하겠다면 그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농부는 놀랍고 이상해서 귀곡자에게 물었다. [정말입니까?]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하는 넓고 넓으니 사람 위에 사람이 있고 강자 위에 다른 강자가 있는 법, 강호의 곳곳에 능력있는 기인들이 숨어 있 는데 어찌 이 귀곡자가 감히 천하 무쌍의 기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귀곡자의 이 말은 틀림없이 이전하여 오나라의 국운을 이었다. 농부는 그 말을 듣자 입을 를 자세히 살펴보며 속으로

그가 바로 오나라를 도와 왕릉을 떨친 그 귀곡자임을 증명하는 것 다물지 못할 정도로 놀라 귀곡자 생각했다.

(그렇게 능력있는 기인이 스무 살도 안된 소년이었다니!) 서란은 시씨 농부가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귀곡자에게 정말 그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줄 알았다. 다른 사람이 귀곡자를 가볍게 본다고 생각하자 그녀 는 또 다시 기분이 상하여 저도 모르게 불쑥 말을 꺼냈다. [그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나요? 그럼 제 가 자세히 말씀드리죠. 그는 명당자리를 찾아내기만 하면 아 침까지 가난하던 사람을 저녁에는 부자로 만들어 엄청난 재 산을 가지게 할 수 있어요. 정말 그 오묘함은 일일히 말하기 어려울 정도라구요!]


농부는 그 말을 듣자 급히 귀곡자에게 말했다. [믿지요! 저는 소협이 정말 아침까지 가난하던 사람을 저녁 에 부자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은 믿습니다. 그렇다면 혹 시 사람에게 자손을 낳게 하여 대를 이어가게 할 수도 있는 지요?] 귀곡자는 그 말을 듣자 농부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얼굴에 정기(正氣)가 가득하여 절대로 간사한 사람이 아닌데다가, 눈빛이 맑고 코가 커서 기세가 높으며, 입이 커서 위엄이 있 었다. 마땅히 하늘의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상이었는데, 자손이 없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귀곡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자 저절로 호기심이 발동하여, 설사 농부가 그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그 이유를 밝혀내고 싶 었다. 귀곡자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농부의 이마 양쪽을 살펴 보 았다. 건곤결 중의 심룡절학이 돌연 가슴에 떠올라 저도 모 르게 깨닫는 바가 있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형님의 이마 양 끝에 툭 튀어나온 부분이 바로 산림(山 林)인데, 이곳이 무기(無氣) 무광(無光)하고, 왼쪽은 잿빛이 요, 오른쪽은 어두우니 조상들이 풍수를 얻지 못한 상이다. 그러니 이처럼 뛰어난 오대귀격(五代貴格)을 가지고서도 자 손이 없을 수밖에 없지!) 귀곡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상을 가지고 있으니, 풍수의 힘을 빌어 자손을 가지게 할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의 귀격(貴格)이 되어, 여기에서 나 오는 자손은 마치 밝은 달처럼 그 한 사람이 백명의 자손을 감당할 정도로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다.) 그는 농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형님께서는 남자 아이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여자 아이를 원하십니까?] 시형님이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아이를 가질 수만 있다면, 제 아이가 수박을 먹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전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남자 아이든 여자 아이든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귀곡자가 결연히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이 귀곡자가 당신에게 아이를 생기게 해 줄 수 있는지 한번 시도해 보기로 하지요!] 시형님은 그 말을 듣더니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소협께 감사 드립니다! 듣자하니 풍수를 살피는 사람들은 그 보수가 대단히 비싸다던데, 소협께서 좀 싸게 해주실 수 있는지요? 너무 비싸면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지불하기 어렵거든요.] 귀곡자가 말했다. [저는 그런 강호의 술사(術士)가 아닙니다. 그냥 도와드리는 것이지 보수는 필요 없습니다.] 시형님이 그 말을 믿지 못하며 말했다. [어째서 보수를 받지 않으십니까? 이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귀곡자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서란이 탄식하며 말했다. [시형님은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복이 많은 사람 중 하나예 요. 당신은 천하에서 가장 멍청한 바보를 만나게 되었으니까 요! 당신은 이 곳에 수박을 심었고, 하필 우리들은 이곳을 지나가다가 목마름을 참을 수 없어서 이곳의 수박 세개를 따 먹었으니 당신은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된 셈이 에요!] 시형님이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어째서요?] 서란이 깊이 탄식하더니 쓴 웃음을 짓고 말했다. [우리 귀곡 오라버니는 말이죠. 다른 사람에게서 밥 한 그릇 을 얻어 먹고는 그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치려고 했던 사람이에요. 밥 한 그릇의 은혜를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다면서요! 그런데 저와 원 할아버지가 수박을 세개 먹었 고, 시형님은 돈을 받지 않으려고 하셨으니, 그는 이 수박 세개의 은혜를 갚지 못한다면 아마 괴로워서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시형님은 그 말을 듣고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고보니 귀곡 선생께서는 아주 정의로우신 분이었군요. 이 시모가 만나게 된 것은 정말 삼생(三生)의 행운인가 봅니 다!] 귀곡자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사소한 일들은 말할 거리도 못됩니다. 이것은 사부님의 바 램을 이루어드리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제 생각에는 우선 시형님 댁에서 잠시 묵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 니까?] 시형님은 그가 소문에 듣던 바로 그 귀곡자라는 사실을 믿었 기 때문에 급히 말했다.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귀곡 선생께서는 저희 집에서 잠 시 묵는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삼년이고 오년이고 우리 부 부 두 사람은 성심성의껏 여러분을 대접하겠습니다!] 시형님은 당장 귀곡자와 서란, 원 할아버지를 데리고 그의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은 벽돌로 지은 네모난 집이었는데 자 못 넓었다. 시형님의 부인은 그들을 아주 성심껏 대접하였고, 서란을 자 기의 친딸처럼 대해 주었다. 서란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이런 따뜻한 대접을 받자 너무 고맙고 기뻐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중에 시형님의 이름은 시전(施全)이요, 나이는 40 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서란의 부모님이 생존해 계셨다면 시형님 부부의 나이와 거의 비슷할 것이었 다. 서란은 그들을 <시 아저씨, 시 아주머니>하고 부르게 되 었다. 그러나 귀곡자는 이상하게도 처음 부른 호칭을 절대로 바꿔 부르지 않고 여전히 그들을 <시형님>, <시형수>하고 불 렀다. 그 날 저녁, 시형수는 통통하게 살찐 닭을 잡아 귀곡자와 서 란을 대접했다. 원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음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시전은 밭에 나가 커다란 수박 몇개를 따와 원 할아 버지가 실컷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귀곡자는 시전과 함께 집을 나섰다. 서


란과 시 아주머니는 마치 모녀지간처럼 친하게 되어 서로 떨 어지려고 하지 않았고, 원 할아버지 역시 귀곡자를 따라 산 에 올라가지 않고 그 집에 남아 있으려고 해서 귀곡자는 그 들에게 억지로 따라 오라고 하지 않고 그들 좋을대로 하라고 했다. 시전은 이 부근의 산에 아주 익숙했기 때문에 귀곡자는 그의 인도를 받아 시간을 절약하며 산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시전의 말을 들으니 이 커다란 산의 이름은 저라산이라고 했 고, 저라산 위에 높이 솟아 있는 것이 바로 회계산이라고 했 다. 귀곡자는 회계산에 서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회계산 봉우리 는 마치 커다란 담낭(膽囊)이 저라산 위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산세가 비록 아주 뛰어나지는 않 아도, 씩씩하고 굳고 강건한 기운이 충만해 있어서 저도 모 르게 탄식하며 말했다. [회계산 봉오리는 마치 담낭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니 과 연 정기를 키우고 예기를 모아 그것을 떨쳐 일으키기에 부족 함이 없는 곳이군요. 만약 이 부근에 수도를 세웠더라면 국 운(國運)은 분명 강건하면서도 후세까지 흥성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시전이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귀곡 선생 말씀은 혹시 지금 월나라의 수도인 항주는 국운 을 떨치고 흥성하게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는 말씀이십니 까?] 귀곡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항주의 지력(地力)은 빼어나고 아름다우나, 웅혼하지 못하 고 기세가 유약하기 때문에, 하나의 고을로 삼는다면 모를까 한 나라의 수도로 삼기에는 역부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전은 월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듣자 저도 모르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럼 월나라는 그곳을 수도로 삼았으니 국운이 오래 가기 힘들겠군요?] 귀곡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기세가 그러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십년 내에 반드시 극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월나라의 기운 이나 백성들의 기운은 천기를 거역할 수 없습니다.] 시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시모는 월나라의 백성입니다. 지금의 주상인 구천(勾踐) 은 민심을 잘 살피고 현인들을 예로써 모시고 백성들을 잘 다스리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월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급변이 일어나 월나라가 적국의 손에 망하게 된다면, 이 월나라의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되겠군요! 그런 사실을 미리 안다 한들 이 시모는 그저 일개 초야에 묻혀 사 는 백성에 불과하니 국가의 근심을 더는데 앞장 설 수도 없 군요!] 시전은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며 탄식을 그치지 않고 있었 다. 귀곡자는 그 모습을 보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산야에 묻혀 사는 일개 초부에게도 이러한 우국 우민의 신이 있다니 뜻밖이구나. 보아하니 월나라의 국운이 비록 하긴 했지만, 월나라 백성들의 기운은 쉽게 꺽이지 않을 같다! 만약 앞으로 월나라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기운이 흥성하게 되면 도읍의 쇠약해지는 기운을 메꿀 수 을지도 모르겠다!)

정 쇠 것 그 있

귀곡자는 이런 생각을 하자 시전을 도와주려는 마음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귀곡자는 회계산 봉우리에 머무르다가 시전의 인도로 회계산 봉우리에서 내려와 회계산 봉우리 아래의 저라산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자세히 살펴 보았다. 저라산의 산세는 그저 평범해서 무슨 기이한 봉우리나 이상 한 물줄기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 크기는 아주 넓었고 산 줄 기기 끊이지 않고 뻗어가고 있었으며, 산 가운데에는 상서으 로우면서도 부드러운 기운이 충만하여, 마치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며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처럼 생각되었다. 귀곡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이 산은 마치 대지의 어머니처럼 웅후하고 넓으니, 이 산이 키워낸 자녀는 분명 아름다울 것이고 마치 제련된 금속처럼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저라산이 회계산을 키워내 고 있고 회계산 봉우리는 우뚝 솟아 마치 모든 고통을 감수


하면서도 꺽이지 않으려는 듯하니, 좌절당하고 쇠퇴하는 속 에서도 다시 그 기운을 떨치고 일어나 반드시 큰 그릇이 될 형세다! 이런 형상 속에 어찌 자녀를 키워내는 용맥이 숨어 있지 않겠는가!] 귀곡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더욱 자세히 시전과 함께 저라산 위의 사방을 한바퀴 봉우리 아래로 되돌아 왔을 때는 어느새 이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어두우면서도 에 펼쳐져 있고, 그 속에 밝은 달이 떠 고요하고 적막했다.

살펴 보았다. 그가 돌고 다시 회계산 밤이 되어 밝은 달 푸른 하늘이 만 리 있었으며, 빈 산은

귀곡자는 내공이 절정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뛰어 다녔어도 전혀 피곤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시 형님은 그를 쫓아다니는 일이 너무 힘들어 더 버티지 못할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형님, 피곤하시면 먼저 뭘 좀 드시고 잠을 주무신 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집에 돌아가 계셔도 괜찮습니다. 후, 내일 아침 다시 산에서 만나

[귀곡 선생께서 우리 시씨 집안을 위해 애쓰고 계시는데 어 찌 이 시모가 먼저 물러설 수 있겠습니까? 마음 놓으십시오. 저는 아직 견딜만 합니다. 묘혈을 찾아 우리 서씨 집안에 자 손을 남길 수만 있다면 이 시모는 피곤해 죽는다 해도 상관 없습니다!] 귀곡자는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늘은 장차 큰 일을 맡기려는 사람의 육체를 고달프게 한 다고 하더니, 정말 이 말이 시형님에게 들어맞는 말 같구 나!) 두 사람은 다시 산을 돌아다니다가 저라산의 서쪽으로 왔다. 커다란 은쟁반과 같은 달이 산야를 두루 비추며 아름다운 빛 을 발하고 있었다. 귀곡자는 시전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말했다. [시형님, 저도 피곤하니 이 어떻겠습니까?]

이곳에서 쉬고 다시 돌아다니는 것

시전은 엉덩이를 땅바닥에 붙히고 앉으며 쓴웃음을 짓고 말 했다.


[이 시모는 산야를 돌아다니는 일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는 데, 귀곡 선생에 비교하니 어린애와 다름없을 정도로군요! 사실 더 이상 돌아다닌다는 것은 무리인가 합니다. 마음은 있는데 힘이 들어서요!] 시전은 말을 하면서 계속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귀곡자는 그 모습을 보고 그가 분명 간신히 버티고는 있지만 이제는 거의 초죽음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그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건곤>, <무위>의 양대신공(兩大神功)을 지니고 있으 니 자연히 피곤을 모르지만, 시형님은 초야의 평범한 남자일 뿐이니 어찌 따라올 수 있겠는가?) 귀곡자는 갑자기 시전의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시전은 갑자 기 등에서 한 줄기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주 세차면서도 따뜻한 기류가 천천히 그의 체내로 들어와 순식간에 피곤이 싹 가시고 몸이 아주 편안하게 되었다. 건곤진기가 일단 체내로 유입되자 혈맥과 서로 융합되어 곧 장 단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정기(精氣)가 왕성해져 서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그 아이는 웅후한 건곤의 정기를 지니게 될 뿐만 아니라, 자라서는 심지가 바르고 곧아 어떠 한 난관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일에 용감하게 맞설 수 있 게 된 것이었다.

22..... 귀곡자가 시전에게 건곤 진기를 주입한 것은 그의 피곤을 덜 어주려는 것뿐 별다른 뜻이 없었다. 후에 시전의 자손이 불 러일으킨 엄청난 영향에 대해서는 귀곡자 역시 전혀 예상 못 하고 있었다. 시전은 순식간에 정신이 맑아지게 되었다. 그가 갑자기 일어 서며 귀곡자에게 말했다. [귀곡 선생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이 시모는 이제 돌아다 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전의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서쪽 저라산의 오목하 게 들어간 부분에서 한줄기 금빛이 번쩍였는데, 그 모습은 마치 달빛 아래에서 활짝 핀 연꽃과 같았다! 귀곡자는 그 빛을 보자 낮은 목소리로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말하였다.


[용맥이 모습을 오.]

드러냈습니다! 자, 어서

저를 따라 오십시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귀곡자는 빛이 번쩍이는 곳으로 달려 갔다. 이상하게도 그 연꽃 모양의 금빛은 멀리서 바라볼 때는 번쩍 번쩍 빛이 나서 꽃 모양이나 줄기 모양을 확실히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점점 빛이 약해 지더니, 귀곡자와 시전이 아주 가까운 곳에 이르렀을 때 그 금빛은 순식간에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금빛이 보이던 곳에 이르렀을 때 그 금빛이 전부 사라져서 그저 물과 같이 맑은 달빛만 흐를 뿐, 사방이 고요하고 적막 할 뿐이었다. 시전은 놀랍고 이상해서 급히 말했다. [어찌 된 일이지요? 금빛이 보이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 까?]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용맥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 용맥이 가는 수밖에 없겠지요!]

있을만한 곳을 찾아

귀곡자는 말을 하고는 항상 가지고 다니던 천지시신반을 꺼 내 동, 서, 남, 북의 사방을 한번 측량해 보았다. 신반 위의 천, 지, 시, 세개의 침이 서로 겹쳐져 하나의 선을 이루는 곳에서 갑자기 딱 멈춰섰다. 그것은 저라산의 오목하게 들어 간 부분을 향해 일치하고 있었다. 귀곡자는 네개의 돌을 앞으로 날려 보냈다. 그 돌들은 앞으 로 뻗어가다가 갑자기 아래로 떨어지면서 중앙의 그 오목한 곳에서 3 척 정도 되는 곳을 기준으로 사면을 둘러싸며 동서 남북의 네 곳으로 떨어졌다. 시전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귀곡 선생, 네개의 돌이 한곳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형님께서는 방금 전에 연꽃의 모양을 요?]

한 금빛을 보셨지


시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멀리서 볼 때는 분명하게 빛나던 것이 가까이 가서 보니 갑자기 사라져버린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귀곡자가 또 말했다. [용맥은 기이한 인연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용기를 뿜어내게 됩니다. 그 용맥은 바로 대지에 숨어 있는 잠룡의 기운으로, 그 어디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 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엔 아주 아름다운 형상으로 나타나 지만, 그저 멀리에서만 바라볼 수 있을 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까이 접근 하자 잠룡이 사라져버리게 된 겁니다.] 시전이 말했다. [용맥의 기운에는 어떠한 장점이 있습니까?] 귀곡자가 웃으며 말했다. [용맥은 아침까지도 가난하던 사람을 저녁에는 부자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한 국가 의 흥망성쇠도 좌지우지 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해서 일일히 말씀드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모는 운 좋게도 용맥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 에 다행히 후손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형님께서는 운 좋게도 이미 직접 눈으로 용맥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복은 다른 사람들은 누리기 힘든 것입니 다. 그저 만 명 중에 한 사람이나 누릴까 말까한 기연이라고 할까요! 네개의 돌 중앙이 바로 용맥의 배(腹)입니다. 이 복지(腹地)에 조상들의 유해를 이장하기만 하면, 조상들 이 이 낙토(樂土)에 거하게 되어 후손들은 그 덕분에 복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 자손을 얻는 복도 얻을 수가 있게 되지 요!] 시전이 그 말을 듣더니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그럼 이 용맥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귀곡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형님께서는 용맥의 모습을 직접 보는 행운을 누리셨는데 도 아직 그 이름을 모르시겠다는 겁니까?] 시전이 생각해 보더니 갑자기 무엇인가 깨달은 듯이 말했다. [그렇군요! 그 금빛은 마치 활짝 핀 연꽃과 같았으니 연화혈 (蓮花穴)이라는 이름이 어떨까요?] 귀곡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용은 그 형상대로 이름을 붙이기 마련입니다. 연꽃 모양으 로 나타났으니, 이 용맥은 연화혈이라고 부르면 되겠지요.] 시전은 매우 기뻐했다. 두 사람은 즉시 산을 내려와 시전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다음 날, 시전은 일을 순서대로 처리했다. 우선 선친의 유해 를 파서 모시고 시형수와 함께 귀곡자와 서란, 원 할아버지 의 호송을 받으며 저라산으로 올라갔다. 저라산 서쪽의 오목한 부분에 이르자, 귀곡자는 유해를 안장 할 정확한 위치를 말해주었고 그 곳에 구멍을 파서 유골을 안장한 후 다시 흙을 덮고 그 앞에 비석을 세웠더니 자못 커 다란 묘가 저라산 위에 생겨나게 되었다. 귀곡자는 다시 시전 부부에게 그 앞에 절을 올리라고 시켰 다. 시전은 절을 마치고 귀곡자에게 물었다. [귀곡 선생, 연화혈은 반드시 자손이 생기게 도와줍니까?] 귀곡자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연꽃이 피면 연방을 맺고, 그 연방 안에는 수백 수천개의 자손이 들어 있습니다. 자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없을 것 같습니까?] 시전은 연꽃이 피면 연방을 맺게 되고, 연방 안에는 수백 개 의 연밥이 들어 있으니 그 연밥은 수백 수천의 자손과 마찬 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저도 모르게 기 뻐 귀곡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게 되었다.


[제가 자손을 얻게 된 것은 모두 귀곡 선생의 은혜입니다! 이 시모는 죽을 때까지 절대로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귀곡자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시형님께서는 너무 과찬하실 필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수 박 세 개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시형수가 불쑥 말했다. [귀곡 선생께 여쭤볼 말이 있습니다. 후에 아이를 얻게 된다 면 그 아이는 남자 아이일까요, 여자 아이일까요?] 귀곡자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낮에 연꽃이 피면 남자 아이를 얻을 것이고, 저녁에 연꽃 을 보면 여자 아이를 얻을텐데, 시형님께서는 달빛 아래에서 연꽃이 활짝 핀 모습을 보셨으니 분명 태어날 아이는 아주 귀한 여아일 것입니다.] 시형수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여자 아이를 가지게 될 것임 을 알았다. 비록 남자 아이는 아니지만 시씨 집안에 한 점 혈육이 남겨진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기뻐서 귀곡자에게 연신 머리를 숙이며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귀곡 선생님의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제발 부탁이오니 선 생께서 그 여아의 이름을 지어 주세요!] 서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일만큼은 저 멍청이같은 오라버니도 해결하기 힘들겠구 나! 그는 아직 나이도 얼마 먹지 않았고, 마누라도 얻지 않 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 대신 아이의 이름을 지을 수 있겠 는가 말이다!) 뜻밖에도 귀곡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씨 집안의 후예를 보호하는 용맥은 저라산 서(西)쪽에 위 치하고 있고, 또 수박(西瓜)을 인연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이로 보아 시씨 집안은 이 <서(西)>라는 글자와 인연이 깊은 듯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얻게 될 여아의 이름은 <서시(西 施)>라고 합시다!]


귀곡자가 연화혈을 찾아낸 덕분에 월나라 경내의 저라산에 살던 서씨 집안에서 천고에 그 이름도 유명한 미녀 서시가 태어나게 된다. 이 여인은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한손에 쥐 고 흔든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 자. 귀곡자는 이렇게 수박 세개의 은혜를 갚고 난 뒤, 더 이상 그 곳에 머무르지 않고 서씨 부부에게 작별을 고하고, 다시 월나라의 수도인 항주를 향해 떠났다.

< 第 一 卷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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