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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화행 1 권 매설헌 저 차 례 제 1 장 모란도수(牡丹盜帥) 제 2 장 여심탈취(女心奪取) 제 3 장 영웅지회(英雄之會) 제 4 장 기방향연(妓房饗宴) 제 5 장 침만보장(侵萬寶莊) 제 6 장 용수혈주(龍手血主) 제 7 장 신비황야(神秘皇爺) 제 8 장 색인령주(索人令主) 제 9 장 운명상극(運命相剋) 제 10 장 무적오장(無敵五裝) 제 11 장 고아대부(孤兒代父)

서 문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잘 풀릴 때는 황제가 된 기분이지만 안풀릴 때는 자신의 능력부재를 원망하곤 한다. 내 경우 언제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래도 어쩌다 마음에 드는 글을 만들게 되면 그 기분은 하늘을 날아갈 것 같다. 그 기분 때문에 글 쓰는 걸 포기 못하는지도 모른다. 창작이 좋아 글 쓰는 길로 접어든 지도 어연 십삼 년이 흘렀다. 그동안 내세울만한 작품을 써 본 적은 없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 글을 쓴 것 같지도 않다. 글이란 쓰고 나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 법이다. 아니 시간이 흐른 다음에 보면 너무도 창피하여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 된다. 또 하나의 졸작(拙作)을 선보이게 되서 마음이 무겁다. 이번엔 어쩔 수 없었어, 다음에 잘 써야지 하는 변명은 언제나 하게 된다. 하지만 변명은 미진함의 발로이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운동 경기를 볼 때 게임이 끝나고도 힘이 남아 있는 선수들을 보면 짜증이 난다. 그것도 이겼으면 몰라도 졌을 때는 더하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긴 팀의 선수들을 보면 모두 기진맥진해 있다. 이기기 위해선 온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신물이 넘어와야 한다. 피어리드를 찍고 나서 아쉬움이 남는다면 그 작품은 이미 실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작품이 끝났을 때를 생각해 보았다. 울고 싶었다. 헛점도 많고 맛있게 요리하지도 못했다. 역시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악순환을 밟게 된다. 다음에 잘 쓰자. 이번의 미진함까지 다음에 쏟아 붓자. 다음 작품이 끝났을 때도 상황은 똑같겠지만 그래도 다음은 틀릴거라고 위로해 본다. 그건 작가의 숙명이자 업보였다. 누군가 이 보잘것 없는 작품을 봐주시는 분이 있다면 감사드리고 싶다. 그리고 한가지 더 청을 한다면 실망을 했더라도 다음을 기다려 달라는 것이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으면 힘이 나는 법이다. 그리고 또 다시 실망을 시켜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할 것이다. 글 쓰는 것은 괴롭다. 하지만 멋진 자식을 탄생시키지 못했을 때는 더 괴롭다. 아무쪼록 냉엄한 평가를 기다리며 두서없는 변명은 이만 줄이기로 하겠다. 1996 년 6 월백운대가 바라보이는 우이동에서 梅雪軒 拜上. 제 1 장 모란도수(牡丹盜帥) ① 북경(北京)의 저자거리는 언제나 활력이 넘쳐 흐른다. 천하인이 몰려드니 흥청거리지 말라 해도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저자거리의 한 쪽에 취다선(醉茶仙)이란 아담한 주루가 있었다. 삼 층의 목조 건물로 술보다는 질 좋은 차를 주로 파는 조용한 곳이었다. 저자거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삼 층의 창가에 한 소년과 이십 세 가량의 젊은이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소년은 나이가 십오륙 세 가량 되어 보이는데 누가 봐도 준수하고 영민하다고 느낄 만큼 잘 만들어진 오관(五觀)에 예지(銳智)가 빛나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소년이 창 밖의 저자거리로 시선을 보내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만보장(萬寶莊)에서 이번에 극비리에 매입한 보화(寶貨)가 뭔지 알아?" 젊은이도 한 쪽에 앉아 차를 마시는 한 여인에게 시선을 주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몰라! 하지만 그 보화를 위해 특별히 기관장치(機關藏置)의 일인자를 초빙한 걸로 봐서 대단한 물건임엔 틀림없어." "알아볼 수 없을까?" 소년이 여전히 창 밖을 보며 심드렁하게 묻자 젊은이는 괜히 여인하고 눈을 맞추려고 애쓰며 낮고 빠르게 말했다. "어려울 것 같아. 이번만큼은 네가 직접 나서야겠다." 남들 눈엔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두 사람은 지금 매우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보안을 위해 이런 연출을 꾸밀 수 있는 이들은 그동안 여러번 호흡을 맞춰 무슨 일인가를 도모한 숙련자(熟練者)들임에 틀림없다. "좋아. 그럼 넌 넘길 곳이나 확보해둬." "그거야 어렵지 않지." "큰 소리치지 말고. 저번처럼 관부(官府)의 함정인지도 모르고 줄을 댔다간 그걸로 우리 관계는 끝인 줄 알아." 소년의 따끔한 일침에 젊은이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거야 그 때 너무 빨리 장물(臟物)을 처분하려다보니..." 소년은 젊은이의 변명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휑하니 일어나 먼저 취선루를 나가버렸다. 뒤에 남은 젊은이는 입맛을 쩍하니 다실 수 밖에 없었다. "성깔하곤..." 취선루를 나온 소년은 저자거리를 빠져나와 동편 대로(大路)의 뒷 쪽을 찾았다. 이곳은 대로 쪽에서 장사하는 가게들이 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또 오수(汚水)가 도랑을 이루며 흐르는 지저분한 곳이었다. 너무도 지저분하여 쥐생원들만 활개를 칠 것 같은 이곳에 비록 거적으로 만들었지만 움막같은 집들이 여러 채 자리하고 있었다. 천하가 아무리 넓어도 송곳 하나 꽂을 땅 없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고 그런 사람들은 쥐따위나 서식할 곳을 차지해야 겨우 몸뚱아리 하나 눕힐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소년이 움막 중의 한 곳에 들어서자 고소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빛도 안 들어오는 어두운 한 쪽에 한 노인이 앉아 솥에 무엇인가를 끓이고 있었다.


"주노(朱老)! 뭘 끓이고 있는 거요?" 노인이 국자로 솥 안을 휘휘 저으며 군침을 꿀꺽 삼켰다. "태반(胎盤)인데 너도 먹어볼래?" 순간 소년은 헛구역질이 넘어오려는 걸 참았다. "그런 것도 먹습니까?" "끌끌! 이 세상에 못먹는 음식이 어디 있냐?" "그래도 태반을 먹는다는 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노인이 힐끗 소년을 돌아보았다. "이 태반의 진정한 정체를 알면 까무러치겠군." "태반이면 태반이지 진정한 정체는 뭡니까?" 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솥을 저으며 중얼거렸다. "북경성 고관대작들 측간을 치우다보면 핏덩이들이 숨져있는 것을 가끔 발견한다. 부인이나 딸이 하인 놈과 정분이 나서 생긴 원치 않은 생명이지." "그런 날은 푸짐히 얻어먹고 돈까지 챙길 수 있다. 그들로선 내 입을 막아야 하니까." 소년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숨진 핏덩이는 어디에 버립니까? 주노는 오물을 강에 버리니까 수면에 드러날텐데요." "거기에 내가 이 나이가 되도 젊은애들에게 밀리지 않고 측간치우는 일을 계속 맡고 있는 이유가 있다." 그건 소년도 평소에 의아하게 생각하던 일이었다. 노인은 힘이 부쳐 측간을 자주 쳐주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명문대가(名門大家)에선 팔팔한 젊은이로 바꾸지 않고 노인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은 내 입이 무거워서이고 두번째는 핏덩이를 완벽하게 처리해주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처리한다는 겁니까? 땅에 묻는 것도 한 번 쯤은 사람들에게 들킬 수가 있을텐데."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소년이 바싹 다가들자 노인은 조용히 솥을 가르켰다. 그 손짓의 의미를 안 순간 소년은 더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주노! 아무리 그래도..." 소년이 대들듯이 눈을 부릅뜨고 뭐라 하려고 하자 노인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산다는 게 얼마나 치사한 일인 줄 아느냐? 내 밥그릇을 뺏기지 않기 위해선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다." 소년은 더 이상 노인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그건 노인의 생존(生存)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신 역시 생존하기 위해 도둑질도 서슴치 않고 있지 않은가? "내가 주노를 찾아온 건 만보장의 약점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만보장이라? 어려운 곳을 택했군." "어려워야 그만큼 이익이 크죠." "만보장는 워낙 경계가 튼튼해 약점이 없다. 하지만…" 노인은 수십 년간 북경성의 내노라 하는 집안들을 드나들었기에 그들 집안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훤했다. 더구나 밑의 사람들을 상대하기에 집주인보다 더 그 집안의 대소사(大小事)를 소상히 아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소년은 가끔 노인을 찾아와 노리는 집안에 대해 탐문(探問)을 하는 것이다. "그 집엔 여하경(呂霞瓊)이란 딸이 있는데 그 여자를 이용하면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거다. 바람끼가 많아 남자에게 빠지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여자니까." "어떻게 해야 접근할 수 있죠?" "그건 나도 모른다. 네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지." 노인은 더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이 그릇에 국물을 떠담기 시작했다. "너도 맛 좀 볼래."


노인이 그릇을 내밀자 소년은 기겁을 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잘되면 술 한 잔 사드릴께요." 돌아서는 소년의 등 뒤로 노인의 마지막 한 마디가 날아 들었다. "밀막(密幕)이라고 정보를 파는 곳이 있다더라. 그들에게 여하경의 모든 걸 알아내면 길이 보일지도 모르지." ② 소년이 노인의 움막을 빠져나와 성 밖으로 나가는 샛길을 탈 때 그의 앞을 막아서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어깨가 드러나는 짧은 단삼(短衫)하며 얼굴이나 팔의 흉터들이 북경의 흑사회(黑社會)에서 거들먹거리는 인물들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네 놈이 모란도수(牡丹盜帥) 뇌천린(雷天麟)이냐?" 무리들 중 말상(馬像)을 한 얼굴이 길쭉한 녀석이 앞으로 나섰다. '십웅연합(十雄聯合)의 놈들이구나.' 그들을 보는 순간 소년은 이미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 긴장으로 몸이 굳어졌다. 그런데 소년이 모란도수란 말인가? 도둑의 제왕(帝王)으로 불리는 모란도수!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천하에서 훔치지 못할 것이 없으며 또한 가지 못할 곳이 없는 그림자 인간이라 부른다. 그가 마음 먹은 이상 천하의 모든 보화(寶貨)는 결코 주인이 있다고 자부할 수 없다. 언제 어느 때고 귀신같이 훔쳐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더 이름을 날리는 것은 언제나 예고장(豫告狀)을 보낸다는데 있다. 훔칠 물건과 날짜 그리고 시간을 적은 예고장을 말이다. 더구나 그는 물건을 훔친 자리에 언제나 짙디 짙은 모란꽃을 한 송이 놔두고 떠난다. 그 여유와 오만이 더 부자들의 미움을 사고 있는 것이다. "왜 대답이 없어?" 뺨에 깊숙한 칼자국이 있는 녀석이 다짜고짜 소년을 후려쳤다. 소년이 칼자국을 쏘아보았다. 소년의 눈은 어느새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한 대 맞음으로써 당황하기보다는 도리어 차분해진 것이다. "내가 뇌천린임은 분명한데 무슨 용건이오?" "흐흐! 너 요즘 잘 나간다면서? 그동안 관부(官府)의 추격도 안 받고 편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게 누구 덕인 줄 아냐?" "당신들 덕이겠지." 소년 아니 뇌천린의 지체없는 대답에 무리들은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그들은 억지를 쓰려고 왔는데 뇌천린이 미리 선수를 치자 곤혹스러워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누군가? 법(法) 따윈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고 온갖 악행(惡行)을 저질러온 무뢰한(無賴漢)들이 아닌가? 그런 그들이 선수를 뺏겼다고 물러날 리는 없었다. 칼자국이 살기등등한 눈을 희번득거리며 뇌천린을 윽박질렀다. "은혜를 알면 보답이 있어야 할 게 아니야?" "어떻게 보답하면 되는 거요?" 뇌천린의 음성은 갈수록 차분해지고 있었다. 그건 그의 성격이 위급할수록 더 냉정해진다는 걸 뜻한다. "눈치가 없으면 도둑질도 못한다더니 그 말이 맞군. 소문난 대도(大盜)답게 눈치도 일류급이군." 칼자국이 비웃듯이 흐흐거렸다. "우린 많은 걸 요구하진 않아. 네가 챙기는 불로소득(不勞所得) 중 일부만 바치면 되는 거야." "그 일부란 게 어느 정도요?" "매달 황금 백 냥!" 큰 선심쓰듯 칼자국이 말하자 뇌천린은 속에서 열화가 콱 치밀어 올랐다. 사실 뇌천린이 제대로 한


탕을 하면 수 천만 냥은 들어온다. 하지만 그건 어쩌다 있는 일이고 제대로 수입을 따진다면 월 백 냥이 안될 것이다. 애써 울분을 누르며 뇌천린이 다시 물었다. "난 어쩌다 한 건 씩 올리는데 매달 어떻게 세금을 내라는 거요?" 그 대답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이 칼자국이 씩 웃었다. "우리 십웅연합이 없는 돈을 만들어내라 할 정도로 매몰차지는 않지. 없을 땐 송옥전당(宋玉錢堂)에서 빌려내면 된다. 송옥전당엔 우리가 보증을 서줄테니까." 뇌천린은 기가 막혔다. 송옥전당은 십웅연합이 운영하는 곳으로 이자가 높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결국 상대는 꿩 먹고 알먹자는 속셈이었다. "내가 거절한다면?" 뇌천린이 다부진 얼굴로 묻자 그들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중 말상이 옆의 인물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거절이라고? 그게 어느 나라 말인지 알아?" "글쎄! 나도 처음 들어봐서 말이야..." 무리들이 낄낄거리며 뇌천린을 조롱했으나 뇌천린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겐 이들을 물리칠 힘은 없었다. 그리고 이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도 잘 안다. 하지만 쉽게 굴복하기는 싫었다. 남들의 위협에 쉽게 꺾였다면 지금의 그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칼자국이 뇌천린의 멱살을 잡고 후려칠 듯이 한 쪽 주먹을 쳐들었다. "우리를 뭘로 보는 거야? 십웅연합에 대항해서 북망산(北亡山)을 피해간 놈이 있는 줄 알아?" 뇌천린이 피하지 않고 칼자국을 쏘아보았다. "내가 연금술사(鍊金術師)도 아니고 없는 돈을 어디서 만들라는 거요?" 뇌천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자국의 무릎이 복부를 가격했다. 뇌천린이 복부를 움켜쥐고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좋게 말하면 알아듣는 놈이 없어." 칼자국이 사정없이 뇌천린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기실 뇌천린은 이들과 싸워볼 수도 있었다. 여섯살 때부터 혼자가 되어 세상 풍파(風波)를 거친 그다. 건달 몇 명을 상대할 완력(腕力)쯤은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자리를 벗어나는 걸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었다. 더구나 그에겐 자신을 바라보고 사는 여러 형제들이 있지 않은가?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뇌천린을 보며 칼자국이 으르릉거렸다. "다음달 십 일부터 세금을 바쳐라. 만약 그걸 어기면 너뿐만 아니라 인애원(仁愛院)의 꼬마들까지 다치게 된다." 그의 협박에 뇌천린은 눈 앞이 캄캄해졌다. 역시 그들도 자신이 뭘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한 대로 십웅연합은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명심해. 우린 피도 눈물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를 하고 무리들은 뇌천린의 곁을 떠났다. "더러운 놈들!" 뇌천린은 그들이 떠난 방향으로 침을 뱉았다. 마음이야 그들에 반(反)하고 싶지만 인애원의 아이들 때문에 결코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잠시 고민하던 그는 다시 태평한 얼굴이 되어 걸음을 재촉했다. "이봐! 내일 일을 지금 생각해두는 게 어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뇌천린은 멈칫했다. 시선을 돌리니 그의 눈에 한 쪽 나무 뒤에 숨어있다 나오는 한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소년은 뇌천린과 엇비슷한 나이의 소년이었는데 탄탄한 근육과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의 기를 죽이는 예리한 눈빛과 사각진 턱이 보는 이를 압도할 만큼 강인해 보였다. "누구지?" "철수무적(鐵手武敵) 무악강(武嶽强)이라 하는데 들어 본 적이 있냐?" 소년의 신분에 뇌천린은 뜻밖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상대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듣고 있던 터였다. 철수무적 무악강은 북경성의 서단가(西單街)를 잡고 있는 흑사회의 두목이었다. 비록 서단가가 북경성의 중심지인 왕부정(王府井)의 상권 규모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래도 어린 나이에 한 구역의 대형(大兄)이 된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무악강은 이미 열두 살 때 북경 흑사회의 최고 주먹이라는 설산도(薛山道)를 꺾은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십웅연합의 단단한 기반을 못깨트려 그렇지 실질적으로는 북경 흑사회의 최고 실력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뇌천린이 뜻밖이라 생각한 것은 그가 왜 몸을 숨기고 있었고 또 자신에게 접근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내일 일을 지금 생각하자는 게 무슨 뜻이지?" "설마 저 놈들 요구를 들어주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고 싶지만 내게 그만한 힘이 있어야지." "힘이란 모으면 배가(倍加) 되는 거야." 무악강의 말엔 투지(鬪志)와 적의(敵意)가 배어 있었다. 뇌천린은 그가 어째서 십웅연합에 적개심(敵愾心)을 갖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나 십웅연합이나 같은 동류가 아닌가? "너도 그들에게 감정이 있냐?" "감정? 그 놈들은 내 자존심을 건드렸어. 그 놈들은 내 자존심의 값어치를 모르고 있어." 무악강이 화난 듯 소리쳤다. 그가 화를 내자 얼굴이 시뻘개지고 근육이 울긋불긋 솟았다. 그건 그가 얼마나 다혈질인지를 보여주는 일면이었다. "십웅연합의 늙은이들은 늙었으면 물러날 생각은 않고 교활하게 머리만 굴리고 있다. 나보고 자신들의 밑으로 들어오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냐?" 더 없는 치욕을 당한 듯 흥분하는 무악강을 보고 뇌천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이 그냥 들어오라고 하진 않았을 텐데?" "흥! 이인자(二人者) 자리를 준다더라." 뇌천린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가 아는 한 십웅연합의 제의는 파격적이었다. 그건 십웅연합이 그만큼 무악강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십웅연합의 이인자면 대단한 자리가 아니냐?" 무악강이 힐끗 뇌천린을 쳐다봤다. 그 눈빛은 겨우 그 정도냐 하는 조소(嘲笑)의 눈초리였다. "닭의 머리가 될지언정 봉황의 꼬리는 되지 말자는 게 내 신조다. 그리고 나 하나 살자고 부하들을 버리고 그 놈들에게 붙으면 내 의리는 뭐가 되냐?" 그의 말엔 굴강(屈强)한 의지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뇌천린은 그가 자신을 높게 평가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난 내 힘으로 십웅연합을 몰아내고 북경성의 지배자가 될 거다. 그럴만한 자신감도 있고..." 십오 세 소년의 입에서 거침없이 뱉어 나오는 이 광오한 말. 하지만 그걸 허장성세라고 단정할 자신이 지금의 뇌천린에겐 없었다. 그만큼 무악강은 나이에 비해 강렬한 느낌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힘을 합치자면 너하고 나하고 말이냐? 난 너처럼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건 나도 알아. 그리고 우리 둘만의 힘으론 모자른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냐?" "북경성 내의 소년영웅들을 모으는 거다. 영웅의 기도만 있으면 비록 나이가 어리다 해도 십웅연합과 대항할 힘을 갖출 수가 있을 거다."


"이미 점찍어 둔 소년영웅들이 있는 것 같군." "사람 모으는 건 나에게 맡겨라. 단지 넌 참가할 것인지 아닌지만 밝히면 된다." 무악강의 재촉에 뇌천린이 피식 웃었다. "이미 해답이 나왔는데 꼭 물어봐야 하냐?" "이미 해답이 나왔다고?" 무악강이 어리둥절해서 뇌천린을 쳐다봤다. "영웅의 기도가 있기에 날 택했을 게 아니냐? 넌 영웅이라고 자부하는 자가 남에게 굴복당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냐?" "그러고 보니 쓸데없는 질문을 했군." 뇌천린의 반문에 무악강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좋아! 초청장은 내가 발송할테니까 초청장을 받으면 꼭 참석이나 해라." 할 말이 끝나자 무악강은 지체없이 몸을 돌렸다. 결단력있는 자들의 특징일 것이다. 사라져가는 무악강의 뒷모습을 보며 뇌천린이 중얼거렸다. "소년 영웅의 모임이라...? 그거 재미있군." 제 2 장 여심탈취(女心奪取) ① 의무려산(醫巫麗山)은 북경(北京)의 동쪽을 병풍(屛風)처럼 에워싸고 있는 진산(鎭山)이다. 수많은 명승지(名勝地)와 맑은 계류(溪流)로 북경인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는 이곳은 특히 대찰(大刹)인 보화사(寶華寺)로 더욱 유명하다. 천하 대처(大處)에 보화사만한 대찰이 왜 없으며 보화사를 찾는 이만큼 신심(信心)깊은 자들이 왜 없으련마는 보화사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돌을 쌓아올린 석탑군(石塔群) 때문이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돌을 하나씩 올려 모습은 볼품이 없지만 누구든 돌을 올리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미신 때문에 요즘도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보화사였다. 때는 바야흐로 춘삼월. 만산(滿山)에 봄기운이 완연하고 이름 모를 산새들은 따사로운 춘광(春光)을 희롱하고 있었다. 저절로 흥(興)이 났음인가? 푸른 계류들까지 산새들의 지저귐에 화답을 보내고 있었으니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닌듯 싶다. 보화사로 이르는 소로(小路). 하늘거리는 아지랭이를 헤치며 한 인영이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걷고 있었다. 그는 뇌천린이었다. 묵묵히 길을 걷던 뇌천린은 어느 구릉 앞에 당도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 품 속에서 한 통의 검은 봉서를 꺼냈다. ----秘---봉서의 겉에는 붉은 글씨로 선명하게 비(秘) 자가 쓰여 있었는데 그걸로 봐서 봉서는 비밀스런 내용을 담고 있는 듯 했다. 뇌천린은 거침없이 봉서의 한 귀퉁이를 찢어내고 서찰을 꺼냈다. <이름 여하경(呂霞瓊). 나이 열 아홉. 만보장 주인 금산대부(金山大夫) 여불군(呂不君)의 무남독녀(無男獨女). 성격은 오만방자하고 허영심이 많음. 타고난 미모와 가문(家門)의 부귀로 세인들을 우습게 보고 극도의 사치로 자신의 우월감을 만족시키려 함. 그녀의 소원은 오직 하나. 장미회(薔薇會)란 친목단체에 가입하고 싶어하는 것. 장미회는 고관대작의 부인이나 딸들을 회원으로 하고 있는데 그 가입 자격이 워낙 까다로와 장미회의 회원이 되는 건 곧 최고 상류층을 의미함. 여하경은 상인의 딸이라 가입 가격이 안 됨. 그래서 여불군의 재력으로 자격이 있는 신랑감을 사려고 하고 있음. ---위의 사실은 추호의 하자도 없으며 완벽 무비함. 만약 하자가 있으면 사례금의 배로


배상금(賠償金)을 지불할 것을 약속함. 밀막(密幕)> 이제보니 봉서는 비밀을 알려주는 전서(傳書)였다. 그것도 정보에 관한 한 실수가 없다는 밀막에서 보낸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천하엔 밀막이란 비밀을 사고 파는 신비에 싸인 단체가 나타났다. 이들은 천하의 모든 비밀을 수집하며 또한 고객(顧客)이 원하는 비밀은 무엇이든 제공하고 있었다. 밀막이 등장한 이후 천하인에게는 사생활(私生活)의 비밀이란 없어졌다. 이들에게 대금(代金)만 지불하면 그 누구의 신상 명세서(身上 明細書)라도 모두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잠 버릇에서 심지어는 치모(恥毛)의 색깔까지도...... 봉서를 찢어버리며 뇌천린이 나직히 중얼거렸다. "장미회의 회원이 되는 것이 최대의 소망이고 신랑감을 돈으로 사려 한다고?" 문득 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후후! 허영심이 많은 여인을 유혹하기는 쉬운 일이지. 더구나 나에게 있어선." 믿을 수 있는가? 십오 세 소년의 입에서 거침없이 나오는 유혹이란 말을. 하지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봐선 결코 빈 말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뇌천린은 여인을 후리는데 천부적인 소질이라도 있단 말인가? 주위를 둘러보던 뇌천린이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숲 속에 들어간 뇌천린은 품 속에서 조그만 분말 봉지를 꺼내 들었다. 분말을 손에 묻혀 얼굴을 문지르자 얼굴색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영풍수려한 용모는 변함없이 그대로였으나 나이가 대 여섯 살 가량 더 먹어 보이는 게 아닌가? 뇌천린은 이십 세 가량의 미청년으로 탈바꿈해 버린 것이다. 이어 그는 산뜻한 청의유삼(靑衣儒衫)을 갈아입었는데 그렇게 되자 뇌천린은 영락없이 책 속에 파묻혀 지낸 유생(儒生)이 되고 말았다. 뇌천린은 동경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변장은 흠 잡을 데 없고 남은 것은 석탑군에서의 일이다. 그 곳에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해야 하니까' 뇌천린은 숲을 빠져나와 유생처럼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보화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석탑군(石塔群)! 보화사의 뒷뜰에 우뚝 솟아 있는 수많은 돌 무더기로 몇 백년 동안 사람들이 자신의 소원과 함께 정성을 쏟은 믿음의 결정체였다. 세인들이 소원성취를 빌면서 큰 바위 위에 돌을 하나씩 올려 놓은 것이 지금에 와서 커다란 탑(塔)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돌무더기는 그 높이가 무려 삼 장(丈)에 달했으니 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이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 높은 데까지 돌을 올리는 집념은 무섭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용한 정적이 감도는 석탑군 사이에 지금 한 여인이 경건한 얼굴로 석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인(女人)은 대략 십칠팔 세 가량 되었을까? 장미처럼 화사한 용모에 사치와 호사가 극에 달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옷(衣)은 대식국(大息國)에서만 생산된다는 능라비단(陵羅緋緞)이었고 전신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장신구(裝身具)는 하나같이 엄청난 값어치를 지닌 희귀한 보석들이었다. 이러한 여인의 차림새는 그녀가 허영심이 많은 여자라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으며 또한 남을 깔보는 듯한 눈초리와 전신에 감도는 냉랭한 기운은 그녀가 지극히 오만한 여인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태어나 물 한 번 안 묻혔을 것 같은 손엔 반질반질한 조약돌 하나가 들려 있었다. "오늘은 기필코 돌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꼭 소원을 성취할 것이다!" 여인은 엄숙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석탑 옆의 받침대를 딛고 올라섰다. 받침대는 석탑이 너무 높기에 맨 꼭대기에 돌을 올려 놓기 편하게 보화사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이 때, 여인의 뒤 편에서 시비(侍婢)차림의 두 소녀가 간절한 눈빛으로 여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인의 소원을 같이 비는 것일까? 아니면 이 귀찮은 나들이가 그만 그치기를 바라는 것일까? 바라보는 두 시비의 얼굴도 주인 못지 않게 진지했다. 여인은 받침대의 맨 위에 올라서서 긴장된 눈빛으로 석탑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석탑의 꼭대기는 돌이 쌓일 만큼 쌓여 아무리 작은 조약돌을 올려 놓아도 금방 떨어질 것만 같았다. 여인은 이곳에 수십 번 돌을 올려 놓았다가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오늘은 선뜻 조약돌을 올려 놓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이다. 여인은 애절한 눈빛으로 조약돌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조약돌을 석탑 위로 가져갔다. '제발 떨어지지 마라. 부탁이다.' 그녀는 조심스레 조약돌을 올려 놓았다. 조약돌에서 딱 손을 뗀 순간 흔들하며 조약돌이 위태롭게 기우뚱거렸다. 순간 여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며 안색이 급변했다. 그녀는 불식간에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천지 신명이여! 저의 소원은 장미회에 가입할 자격이 있는 신랑감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소용없습니다.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만 제 앞에 나타나게 해 주십시오!' 간절한 염원이 하늘에 통했는가? 위태롭게 흔들리던 조약돌이 뚝 멈춰버렸다. '멈, 멈췄다. 떨어지지 않았다.' 당장 소원이 이루어진 양 여인의 두 눈은 환희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됐다! 됐어! 추향(秋香)! 추국(秋菊)! 이걸 봐라!" 여인은 뒤에 있는 시비를 향해 기쁨에 찬 환호성을 보냈다. 두 시비도 마치 자신들의 일인 양 같이 소릴 질렀다. "아가씨! 성공했군요." "그래! 그래! 이제 내 소원이 이루어 지려는가 보다." 그 때, 여인의 눈에 멀리 단애(斷崖) 위에 서 있는 한 인물의 모습이 들어왔다. 찬연한 햇살을 가슴 한 아름 안고 있는 청의인(靑衣人)이었는데 표표히 나부끼는 장삼자락과 조용히 섭선을 부치고 있는 그의 기태(氣態)는 마치 학(鶴)처럼 고고해 보였다.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학사같은데 벌써 소원이 이루어질 징조가 보이는가?' 석탑의 또 다른 전설(傳說). 그것은 소원성취를 빌고 처음 본 사람과 연분이 맺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인은 이 순간 어째서 다른 곳은 모두 수풀에 막혀 있는데 유독 단애 쪽만 훤히 보이는지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돌연, 받침대가 흔들리며 한 쪽이 무너져 내렸다. "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여인은 바닥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아가씨!" 두 시비는 대경실색한 얼굴로 경악성을 터뜨리며 여인을 향해 달려갔다. 이 때 단애 위에 있던 청의인은 비명 소리를 듣자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청의인은 조금 전 변장을 했던 뇌천린이었다. '성공이군. 이제 남은 것은 치료를 핑계로 날 좋아하게 만드는 일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여인의 낙상(落傷)은 뇌천린의 계책에 의한 것이란 말인가? 뇌천린이 변장한 청의인은 여유있게 섭선을 부치며 단애에서 보화사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낙상을 한 여인은 다행히도 큰 부상은 입지 않고 발목만 삐었는지 두 시비가 당황한 얼굴로 발을 주무르고 있었다. 여인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신경질을 냈다. "아얏! 살살 좀 해라!" "아가씨! 어떻게 하죠? 걸을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장(莊)으로 돌아가야 치료를 할 수 있을 텐데."


두 시비는 난처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했다. 여인은 통증이 더욱 심해지자 울화통을 터뜨렸다. "보화사의 중놈들은 모두 멍청이들뿐인가? 받침대의 나무가 썩은 지도 모르다니." 어느덧 여인의 뒤로 다가온 뇌천린은 고소를 머금었다. '그건 썩은 나무가 아니라오. 여하경 소저!' 낙상한 여인! 그녀는 바로 만보장주의 무남독녀인 여하경이었다. '본인이 소저의 체중(體重)을 계산하여 나무를 반쯤 잘라 놓았소이다. 때문에 체중에 의해 나무가 조금씩 갈라지다 알맞은 시간에 부러진 것이오.' '그것 뿐이 아니오. 그대는 영원히 모르겠지만 석탑의 맨 위에는 접착력이 강한 수액(樹液)이 묻혀 있었소. 그리고 내가 있는 위치가 잘 보이도록 나뭇가지를 쳐 놓았죠.' 치밀한 공작(工作)이었다. 여인을 유혹하기 위한 모든 준비는 사전에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여하경은 행운의 여신(女神)이 자신에게 미소를 보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으니 뇌천린의 심계는 새삼 놀랍다고 아니할 수 없었다. 뇌천린은 얼굴을 걱정스런 빛으로 바꾸고 시비들 너머로 말을 건넸다. "많이 다치셨습니까?"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두 시비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다 보았다. 일순 그녀들의 두 눈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어머! 이토록 멋진 분이.' 그녀들은 마치 천상(天上)의 선인(仙人)을 보는 듯한 착각 속에 빠졌다. 여하경도 뇌천린의 영풍수려한 기태를 바라보며 울렁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고 있었다. '아까는 멀어서 용모를 볼 수 없었는데. 이토록 젊고 준수하다니.' 그녀의 가슴은 더욱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석탑의 전설과 일치하는 상황이니 진정한다는 게 이상한 일인지도 몰랐다. "제가 의술을 약간 아는데 도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우선 신분을 알아야 해. 마음에 든다고 아무에게나 호감을 가졌다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면 곤란해.' 여하경은 벅찬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살짝 입술을 열었다. "공자는 누구신지요?" "보화사로 유람 온 과객(過客)이외다." "그래도 신분은 있을 것이 아닙니까?" "너무 알려하지 마십시오. 말을 해도 모를 테니까요." 뇌천린은 그녀의 궁금증을 고조시키려는 듯 일부러 뜸을 들였다. 여하경은 일순 무시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짐짓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남녀가 유별(有別)한데 치료를 받으려면 신분 정도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허! 난처하구료. 도움을 주기로 했으니 신분을 안 밝힐 수도 없고." 뇌천린이 거듭 난색을 표명하자 여하경의 궁금증은 한층 더 커졌다. '대체 신분이 뭐기에 이토록 주저하는 것일까?' 이 때 뇌천린은 이쯤 했으면 상대의 호기심을 최대한 고조시켰다고 여기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인은 운성림(雲成林)이라 하며 대천성유제학위연사(大天聖儒諸學偉硏士)의 지위에 있소이다." 뇌천린의 대답에 여하경은 의아함과 함께 당혹감을 느꼈다.의아함은 대천성유제학위연사란 이름을 처음 듣는 것이고 당혹감은 모른다 하면 상대가 자신을 무식하다고 비웃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장래가 걸려있는 일이기에 뇌천린의 눈치를 최대한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천성유제학위연사가 어떤 벼슬이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오는 대로 지껄인 것을.' 뇌천린은 내심 고소를 면치 못했으나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소저는 그것도 모르오?" 순간 여하경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붉어졌다. '괜히 물었군. 더 이상 무식한 티를 냈다간 하늘이 점지한 인연도 놓치고 만다.' 그녀는 자신의 무식함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아는 체 하였다. "아, 알아요. 한림원에서도 아주 덕망이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거죠?" '후후후! 자존심은 있어서. 너같은 여자를 골빈 여자라고 하는 거다!' 뇌천린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소. 대명의 유림(儒林)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에게 제수하는 관직이오." 그의 말에 여하경은 뛸 듯이 기뻤다. '석탑의 전설은 정말 신통하구나. 내가 원하는 사람을 만나다니.' 그녀는 마치 천하라도 얻은 듯한 기쁨에 빠져 들었다. 신분만 좋아도 그만인데 인물까지 뛰어나니 그 어찌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니겠는가? 뇌천린은 자신의 계책대로 여하경이 빠져들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내심 득의했다. '후후후! 그럼 좀 더 미끼를 던져 볼까?' 그는 주위를 둘러 보며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소저! 이곳은 남들의 이목도 있고 하니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치료할까요?" "그, 그럴까요?" 여하경은 짐짓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그의 미끼를 덥썩 물었다. 그녀 역시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든 이 사람을 잡아야 해. 유혹하는 거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뇌천린이 바라던 바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뇌천린은 여하경의 이런 애타는 심정까지 계산에 넣었는지도 모른다. ② 여하경은 석탑군에서 멀리 떨어진 수풀로 두 시비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섰다. 이윽고 푹신한 잔디 위에 자리를 잡은 여하경은 두 시비에게 떠날 것을 명령했다. "너희들은 다른 곳에 가 있거라. 불가피한 상황에서 공자께서 날 치료하지만 너희들이 있으면 체면 때문에 신경이 쓰일 것이다." "그건 그렇소. 아무리 치료라지만 남녀가 유별하니 소저의 몸을 만지기가 꺼림칙하오." "공자님 말씀을 들었지? 어서들 가보거라." 여하경의 계속되는 채근에 시비들은 총총 걸음으로 숲을 빠져 나갔다. 뇌천린은 시비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눈길을 여하경에게 던졌다. "상처 부위가 어디오?" "왼쪽 발목이에요." 여하경은 몹시 아프다는 듯 아미를 찌푸렸다. 뇌천린은 짐짓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여하경의 당혜와 버선을 벗겼다. 그러자 뽀얗고 앙증 맞은 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줌도 안될 것 같은 발목은 푸르스름하게 변색된 채 부어 있었다. 뇌천린은 마치 노련한 의원(醫員)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발목을 살펴 보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방법은 오직 하나, 살을 찢어 나쁜 피가 나오면 부기가 가라앉고 삔 뼈를 적당히 맞추면 걸을 수 있다는 것 뿐이다.' 이럴 수가? 뇌천린이 아는 방법이란 세 살 박이도 아는 가장 초보적이고 상식적인 치료법이 아닌가? '아픈 것은 내가 아니라 여하경 자신이다. 여소저! 고생 좀 해 보시오.' 그는 내심 고소를 지으며 품 속에서 조그만 금합(金盒)을 꺼냈다. 이 때 여하경은 금합을 응시하며 약간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공자는 유생이면서 의도(醫道)를 알고 계십니까?"


"선비가 학문을 익히는 것은 경세제민(經世濟民)때문이 아니오. 의도도 사람을 구하는 것이기에 유학(儒學)과 의술은 그 목적이 같소. 유능한 선비는 도(道)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익혀 둬야 하오." 뇌천린의 엄숙한 말에 여하경은 얼굴이 붉어졌다. '아! 어쩜 이토록 멋있는 말을 할까? 정말 대석학(大碩學)인가봐.' 여하경이 사랑스런 눈길로 뇌천린을 주시하자 뇌천린은 뭐가 잘못 됐나 싶어 뜨끔했다. 하지만 그게 쓸데없는 기우란 걸 그는 곧 알게 되었다. "역시 고매한 선비는 틀리군요. 정녕 공자님은 보기 드문 선비예요." "과찬이오. 치료를 합시다." 여하경의 탄복어린 칭찬에 뇌천린은 웃음이 치밀어 올랐으나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금합을 열었다. 금합 안에는 수십 개의 금침(金針)과 날카로운 소도(小刀)가 하나 들어 있었다. '나는 침술(針術)을 모른다. 이건 여하경의 눈을 속이기 위한 눈가림일 뿐이다.' 철저한 위장, 뇌천린은 추호의 빈틈도 없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소도를 집어들며 불안해 하는 여하경을 위로했다. "소저! 고통스럽더라도 참으시오. 나의 의술은 독특해 고통이 심하고 금세 회복이 되지는 않소. 그 대신에 부작용이 없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믿어요. 공자같으신 분이 어찌 남과 똑같은 의술을 쓰겠어요." 여하경의 마음 속에는 어느샌가 뇌천린에 대한 믿음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후훗! 물론 남과 다른 방법을 쓰지!' 뇌천린은 내심 실소를 흘리며 거침없이 소도로 상처 부위를 갈랐다. 싸악하는 거북한 음향과 함께 살갗이 베어지는 순간 여하경은 너무도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뇌천린은 짐짓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만한 고통을 가지고 놀라다니. 난 여인의 부덕(婦德)은 참을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충격적인 말이었던가? 그의 말에 여하경은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입을 꽉 다물었다. '이 분께 실망을 줄 수는 없어. 참아야지.' 그녀는 전신을 엄습해 오는 고통을 어금니를 짓깨물며 참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건 더 큰 아픔뿐이었다. 뇌천린은 조금도 망설임없이 발목의 살을 갈라 헤쳤다. 모르는 이가 보면 그 과감성이 숙달된 의원의 손놀림같지만 의술의 의자도 모르는 뇌천린이고 보면 당하는 여하경의 아픔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아악!' 여하경은 혼절할 것만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으나 그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뇌천린에게 나약한 여인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뇌천린은 여하경의 그런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발목을 아무렇게나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며 피를 빼냈다. 검붉은 피가 흘러 나오는 것과 함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아픈 것도 어느 정도지 이건 숫제 고문이야.' 그녀의 얼굴에 고통의 표상인 굵은 땀방울이 방울 방울 맺혔지만 그녀는 여전히 신음 한 마디 내뱉지 않았다. 장미회를 향한 여하경의 집념은 놀라운 것이었다. "소저! 고통이 심하오?" '고통이 심하냐고? 그걸 말이라고 물어요?' 여하경은 내심 쏘아 부쳤으나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아, 아니예요. 하나도 안 아파요." '그래? 그럼 더 아파봐라.' 뇌천린은 고소를 금치 못하며 이번에는 금침을 집어 들었다.


'어디다 꽂아야 할지 모르니 막 박고 보는 거다.' 남의 고통을 즐기는 악취미를 가졌는가? 뇌천린은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며 사정없이 금침을 발목 부위에 꽂았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침술(針術)이라곤 평생 바느질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뇌천린이었다. 당하는 여하경의 입장에선 정녕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으, 으! 기절할 것만 같다.' 하지만 고통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삔 뼈를 맞추려는 듯 뇌천린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이리 저리 마구 비틀었다. 여하경은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의 극통에 진저리를 쳤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태어나 두 번 다시 없을 곤혹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뇌천린은 모든 시술을 끝마치고 손을 멈추었다. "이제 곧 괜찮아질 것이오." "고, 고마워요." 여하경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적한 바가 없었으면 그녀는 벌써 도망쳤을 것이다. 허영심이 인내를 가져온 셈이니 어찌보면 황당하고 어찌보면 여인의 집념이 무섭다고 해야 할 것이다. 뇌천린은 치밀한 각본을 진행 중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자신의 행동들이 너무 엉터리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측은한 눈빛으로 여하경을 바라보는데 여하경이 환하게 웃으며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을 토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말씀대로 처음엔 아팠는데 지금은 통증이 씻은 듯이 가셨어요." 그녀의 말에 뇌천린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아무렇게나 치료한 게 제대로 들어맞았으니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겸연쩍어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험! 험! 그러기에 내가 뭐랬소? 고통은 심해도 치료는 확실하다 하지 않았소." 여하경은 뇌천린의 얼굴을 그윽히 바라보며 재빨리 염두를 굴렸다. '지금이 기회다. 이런 때 많은 것을 알아둬야 이 사람이 좋아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오늘의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장미회와 인연이 없다는 조급함 때문에 좀 더 과감해지기로 작정한 것이다. "저, 공자께서는 혹시 가정을 이루셨는지요?" "학문을 정진하려다 보니 아직 홀몸이오. 그리고 눈이 높아서 그런지 아직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나지 못했소이다." "어떤 여인을 원하는데요?" 여하경은 기대감이 가득 실린 음성으로 재빨리 물었다. 뇌천린은 짐짓 생각해보는 척하며 뜸을 들였다. "글쎄요. 소저와 같은 분이라면." 지나가는 듯한 말투였으나 그건 여하경을 낚는 최상의 미끼였다. '어머! 벌써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네. 그럼 일이 더욱 쉬워지겠는데.' 누가 여인을 어리석은 동물이라 했던가? 여하경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덫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었다. "저같이 미천한 것이 어떻게 감히 공자님의 눈에 들겠어요." "별 말씀을. 나는 장미회(薔薇會)란 상류층 여인들의 모임에도 참석해 본 적이 있지만 소저처럼 아름다운 분은 처음이오." 순간 여하경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장미회에 참석한 적도 있다고? 역시 인연이란 존재하는구나.' 그녀는 지금 자신의 소원이 성취될 수 있는 기회를 맞아 환희에 떨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뇌천린의 걸작품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뇌천린은 자신이 장미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는 소릴 듣고 기쁨과 동경의 빛을 발산하는 여하경의 두 눈을 보며 내심 쓴 웃음을 흘렸다.


'후후! 완전히 걸려 들었군. 이럴 때는 아무리 적극 공세로 나가도 약한 법.' 뇌천린이 대뜸 여하경의 손을 잡았다. 여하경은 뇌천린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빼지는 않았다. 아니 뺄 수가 없었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顧所願)이라고 그녀가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일이기에 앙큼을 떨고 싶어도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이다. "소저!" 뇌천린의 뜨거운 음성에 여하경은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말씀하세요.공자님!" "소저! 저는 첫 눈에 반했습니다. 소저를 평생의 반려자(伴侶者)로 삼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우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여하경이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녀의 내심은 환희로 벅차 오르고 있었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상대가 먼저 꺼내줬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호호호! 내가 유혹하려 했는데 먼저 넘어가다니. 역시 난 운이 좋은 편이야.' 그녀가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을 때 뇌천린의 두뇌는 여전히 치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먼저 반한 척을 했으니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가졌을 것이다. 여자는 자신감을 가지면 자연히 경계심이 약해진다.' 상대의 심리 상태에 대한 점검이 끝났다 싶자 뇌천린은 슬그머니 여하경의 어깨를 감쌌다. 쇠 뿔도 단 김에 빼고 허점이 보였다 싶으면 사정없이 파고 드는 게 여인공략의 제 일 단계다. 상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건 다 익은 밥을 재차 뜸 들이는 것 같이 어리석은 짓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여하경이 뇌천린을 밀어내는 손짓을 했으나 그 손엔 힘이 없었다. 두 뺨에 물든 홍조로 보아 그녀는 더 깊은 진행도 예상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음은 잡았고. 다음은 나의 체취를 이 여자의 몸에 남겨 놓아야 한다. 그래야 무의식 중에도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느낄테니까.' 그는 조금도 서두르거나 망설이지 않고 계산한 대로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소저! 그대를 보고 있노라니 그동안 쌓은 수양이 모두 헛게 되는구료." 뇌천린이 잔뜩 흥분된 모습으로 여하경을 와락 안자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고 말았다. 이미 분위기의 포로가 되어 몸은 감정에 따라 반사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자신에게 안겨 눈을 감고 있는 여하경의 모습을 본 순간 뇌천린의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이어 그는 여하경의 도톰한 입술을 사정없이 눌러갔다. 여하경도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목을 와락 끌어 안았다. 긴 입맞춤이었다. 여하경은 허공을 붕붕 떠다니는 황홀감을 만끽하고 있었지만 뇌천린은 그저 무덤덤할 뿐이었다. 머리가 냉정하니 손은 지극히 섬세할 수밖에 없는가? 입맞춤의 와중에서 뇌천린은 여하경의 풍만한 몸을 부지런히 더듬고 있었는데 구석구석 손길이 안 미치는 곳이 없었다. "아!" 그의 손길이 전신을 더듬기 시작하자 여하경의 몸은 무섭게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입이 마르고 눈이 충혈됐다. 욕망의 조율사(調律師)인가? 뇌천린의 손길은 가장 자극적인 곳만 공략하고 있었다. '이 여자를 뜨겁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아쉬움을 남긴다. 또한 아쉬움이 남아야 나와 다시 만나기를 기대할테고.' 치마 속으로 들어간 뇌천린의 손이 어딜 만졌는지 여하경의 몸이 펄쩍 튀었다. 순간 여하경이 그를 안고 옆으로 쓰러졌다.그녀는 뇌천린을 올라타고 정신없이 얼굴을 비비다가 혀로 목을 핥기도 하고 심지어는 귓볼을 잘근잘근 씹기도 했다.


뇌천린은 동공 풀린 그녀의 눈과 정신없는 행동에 겁이 더럭났다. '미쳤나?' 그는 필요에 의해 여자에 관한 고금의 모든 서적을 섭렵했지만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소년에 불과했다. 그래서 유난히 욕망이 강한 여하경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하경은 뇌천린이 자신을 확 밀치고 뒤로 물러나자 흥이 깨져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순간적으로 뇌천린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명확히 어떤 부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쉬움과 원망 섞인 여하경의 눈길이 그걸 대변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소저! 미안하오..." 뇌천린의 당황해하는 행동에 여하경은 열기가 식은 짜증을 애써 눌렀다. 지금은 감정보다도 한 가닥 연기가 필요한 때이기 때문이다. "정녕 미안하오. 허나 소저를 향한 나의 마음은 진심이오." '또 한 번의 기회다.' 여하경은 내심 이때다 싶어 눈물을 흘리며 뇌천린을 쳐다보았다. "전 이제 어떡하죠? 청백지신(淸白之身)의 몸에 남자의 손이 닿았으니." "그, 그건." 뇌천린은 일부러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더듬었다. 여하경은 더욱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발딱 쳐들어 그를 빤히 쏘아 보았다. "선비의 몸으로 신의를 지키겠죠? 설마 발뺌할 생각은 아니겠죠?" "물, 물론이오. 소저를 분명히 책임지겠습니다." 그의 말에 그녀는 내심으로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내가 만인이 부러워하는 상류층 중의 상류층이 되는구나.' 그녀는 마치 천하를 얻은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이 깊숙한 함정으로 빠지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 못지 않게 뇌천린도 이 순간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됐군. 이제 만보장(萬寶莊)을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오월동주(吳越同舟)니 동상이몽(同床異夢)이니 하는 말은 이 두 사람같은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서로의 교감이 통했다고 느끼는 걸 보면 인간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지 능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소저! 조만간 그대의 집을 방문하겠소." "기다리겠어요. 빠른 시일 안에 오세요." 여하경은 헤어지기 안타까와 옷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나 뇌천린은 목적한 바를 달성했기에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시비들을 불렀다. "치료가 끝났으니 아가씨를 모시거라." "무슨 치료가 이리 오래 걸렸죠?" "그러게 말이에요. 다리를 삔 것 뿐인데." 기다리기 지루했었는지 시비들이 쫑알거리며 나타나자 여하경은 신경질을 바락냈다. "모르면 잠자코들 있어라. 아무리 작은 일도 최선을 다하는 게 공자님의 성품이니라." 시비들은 여하경의 신경질에 서로를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을 칭찬하다니 그건 지금껏 여하경의 사전에는 없는 일이었다. "또 뵙겠습니다." 뇌천린이 인사를 하고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여하경이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신은 존재하는 거야." 제 3 장 영웅지회(英雄之會) ①


도화원(桃花園)은 북경성의 동편에 자리한 거대한 장원(莊園)이다. 이곳은 당금 황제의 동생인 금릉왕(金陵王)의 별원(別院)이기도 했다. 이맘때면 도화꽃이 만발하여 주위까지 온통 붉게 물들이기에 일명 상하원(常霞園)으로 불리는 이곳은 지금 적막감에 싸여있었다. 아니 이곳은 언제나 고적감에 잠겨 있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금릉왕은 주로 궁내에 기거하기 때문에 어쩌다 이곳을 들르고 여느 때는 관리인만 지킬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관리인조차도 수시로 집을 비우기에 도화원은 사람이 아예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누가 감히 금릉왕의 별원에 함부로 침입하겠는가? 몰래 들어왔다 걸리면 중형(重刑)을 면치 못하기에 세인들은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도화원의 깊숙한 후원(後園). 지금 도화꽃이 흐드러지게 떨어져 내려 마치 연분홍빛 융단(絨緞)이 깔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순간 고즈넉한 적막감을 깨고 한 소년이 모습을 나타냈다. 대략 열다섯 살 가량 되었을까? 갸름한 얼굴에 몸집은 호리호리했으나 키가 껑충하게 컸다. 눈매가 야무지고 동공(瞳孔)이 빠르게 움직이는 걸로 보아 소년은 달변(達辯)의 소유자 같았다. "이곳이군. 역시 철수무적답다. 회합 장소를 침입자는 중죄를 면치 못하는 도화원으로 잡다니." 그렇다! 회합 장소로는 도화원만큼 적합한 곳은 없으리라. 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한 법이니까. 문득 소년의 얼굴에 불만스런 빛이 가득 떠올랐다. "내가 제일 먼저 온 모양이군. 난 기다리는 건 딱 질색인데." 불쾌한 기색은 더욱 짙어졌다. "나 동천변군(動天辯君) 소불진(蘇不眞)이 남들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남이 날 기다려야지." 소년의 투덜거림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하긴 그가 동천변군 소불진이라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동천변군(動天辯君) 소불진(蘇不眞)! 북경을 중심으로 강북 제일(江北 第一)의 사기꾼. 그는 달변가(達辯家)이며 궤변가(詭辯家)였다. 때문에 그 누구든 소불진에게 걸리면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까지 숱한 사기(詐欺)를 쳤지만 한 번도 관부(官府)의 추격을 받거나 현상금(懸賞金)에 걸린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사기를 칠 때 교묘한 방법으로 워낙 거액을 갈취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기의 대상을 주로 거부(巨富)나 명문세가(名門世家)를 잡는데 그들에겐 부(富)의 축적 과정에서 수많은 비리(非理)와 약점이 있기에 사기를 당하고도 감히 고발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감히 나를 기다리게 하다니." 소불진은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자존심이 상해 떠나려는 것이다. 그의 성격상 아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소불진! 그래도 너는 나은 편이다. 나보단 늦게 왔으니까." 약간 냉정하고 묵직한 음성과 함께 도화나무 위에서 한 인물이 뛰어내렸다. 그는 무악강이었다. 소불진은 여전히 불쾌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무악강이다." 소년의 대답에 소불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북경 암흑가의 제이인자답군. 누구든 이 자의 몸에 부딪히면 가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니...... ' 소불진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역시 북경에서 내노라 하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는 이내 입가에 오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상대를 현혹하려면 상대를 낮추어봐야지 상대를 높여봐선 안 되기 때문이다.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가?" "물론이다. 주최자로서의 예의는 지켜야 하니까. 헌데 모두 잘나서 그런지 쉽게 나타나지 않는군." "나 외엔 누구 누구냐?" "걱정 말게. 자네보다 못한 인물이 있다면 언제든지 돌아가도 되니까." 무악강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소불진의 궁금증을 제지했다. 내심을 간파당한 소불진은 약간 의아했다. '주먹에만 달인(達人)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군. 단숨에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다니.' 문득 그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했다. 그것은 어떤 희망을 내포한 열기였다. '좋다. 누구든 상관없다. 무악강 정도만 있어도 천하가 걸린 대사기극(大詐欺劇)을 벌일 수 있으니까.' 이게 무슨 말인가? 천하의 사기꾼답게 초청장을 받은 순간부터 일을 벌릴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또 한 명의 소년영웅(少年英雄)이 등장하는군." 무악강의 억양없는 음성에 소불진이 시선을 돌렸다. 허름한 유삼(儒衫)을 입은 한 소년이 그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관옥(冠玉)같은 얼굴의 소년 유생(儒生). 그런데 묘한 건 그 소년의 몸에선 유생답지 않게 풍류아(風流兒)의 기운이 풍긴다는 것이다. 소불진이 의아한 눈빛으로 무악강을 쳐다보았다. "저 자가 누구지?" "북경성 제일의 석학(碩學)이며 풍류공자인 화옥공자(花玉公子) 도운백(陶雲伯)이다." 그제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소불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네 살때부터 술을 마시고 여섯 살 때 옆 집 아가씨를 보고 욕정을 느꼈다는 유명한 화옥공자가 바로 저 자군." "그래도 그는 천재다. 일곱 살 때 대과(大科)에 장원하고 열 두 살 때 유생들이 꿈에도 그리는 한림원(翰林院)의 평생 대원로(大元老)가 되었으니까." 그런가? 퇴폐적인 분위기를 지닌 유의소년의 내력이 그토록 대단하단 말인가? 화옥공자(花玉公子) 도운백(陶雲伯)! 북경성이 자랑하는 괴인(怪人) 중의 괴인. 그의 학문은 이미 하늘에 닿아 있고 당금에 그를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관계(官界)에 진출한 적이 없었다.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승상직(承相職)이 재수될텐데도 말이다. 문제는 그가 풍류아(風流兒)라는데 있다. 유생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여인을 좋아하는 게 그의 약점이었다. 하늘이 어째서 그에게 천재적인 두뇌와 절륜한 정력을 주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또한 호주가(好酒家)로서 하룻밤에 죽엽청을 두 수레나 먹을 만큼 술고래였다.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낙은 마음에 드는 여인을 유혹하여 정을 통하는 일과 날이 하얗게 샐 때까지 술을 마시는 일뿐이었다. 소불진이 마땅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자도 우리 모임의 일원인가? 유생과 사기꾼이라니......? 썩 마음에 들지 않는군." "그가 누구든 마음만 통하면 된다. 영웅회(英雄會)는 영웅만 원하니까." "영웅회?" "우리가 모이는 모임의 이름이다." 영웅회(英雄會)! 무악강이 생각나는 대로 지은 이 이름이 장차 천하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줄은 이 자리에 참석할 그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어차피 모임이 있으면 두뇌가 필요하다. 나는 유학이 낳은 최고의 사나이를 골랐을 뿐이다." "하긴 그렇군. 도운백 역시 말썽꾸러기란 점에선 우리와 같으니까." 소불진은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앞에 다다른 도운백이 오만한 모습으로 두 사람을 쓸어 보았다. "누가 무악강인가?" "날세!"


무악강이 짤막하게 대답하는 순간 도운백의 주먹이 무악강의 얼굴을 갈겼다. "너?" 무악강은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기에 반격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도운백은 입가에 조소를 머금으며 무악강을 쏘아 보았다. "왜 맞아야 하는지 모르겠나?" "전혀!" 무악강이 도운백을 노려보며 낮은 음성으로 짧게 대꾸했다. "초청장의 마지막에 불참시에는 각오하란 말이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유생이기에 얕보는 것 같아서." 도운백의 말에 소불진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잘 두들겼어. 나 역시 그 점은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이 때 무악강은 얼얼한 뺨을 만지며 빙긋 웃었다. "날 때린 후의 일은 생각해 보았나?"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다음 순간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마음에 거슬리는 것은 풀어야 하는 것이 신조(信條)니까." '괜찮군. 독기도 있고.' 무악강은 씨익 웃었다. 자신이 사람을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좋아! 자존심을 건드렸다면 내가 사과하지." 무악강은 흔쾌한 얼굴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시원해서 좋군. 잘못이란 빨리 뉘우칠수록 좋은 것이니까." 도운백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 후 무악강의 손을 움켜 쥐었다. 순간적으로 무악강의 두 눈에 야릇한 빛이 스쳐 갔다. "이것은 화해의 악수이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악강의 왼쪽 주먹이 도운백의 복부를 강타했다. 도운백의 입에서 짤막한 신음성이 새어 나오고 그의 신형이 크게 휘청거렸다. 다시 한 번 무악강의 매서운 주먹이 날아왔다. "맞는 것은 배로 돌려 주는 것이 나의 신조지." 무악강은 고소하다는 얼굴로 악수했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도운백은 너무도 강한 주먹에 기절했는지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지켜보고 있던 소불진이 재미있다는 듯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터뜨렸다. "좋아! 좋아! 모름지기 남아(男兒)란 화가 나면 행동으로 풀어야 하고 빚진 것은 배로 갚아야지. 내가 두 사람의 경우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 그의 말에 무악강과 도운백은 어이가 없었다. "널 보는 것 같다고? 그럼 넌 우리 두 사람의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는 완벽한 인간이란 말이냐?" "과연 대사기꾼답군. 가만히 앉아 말 한 마디로 우리 두 사람의 우위에 서다니 말이야." 두 사람의 비아냥에 소불진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대꾸했다.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나? 겸손떤다고 없는 말을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소불진의 언변은 실로 교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는 듯이 말을 끌다 끝에서는 부인함으로써 상대를 혼동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었는데 그 교묘한 말투에 천하인이 농락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악강의 언변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어쨌든 좋아. 그런 남자라면 남이 봉변을 당하는 것을 보면 가만 있진 않겠지?" 순간 소불진은 곰 쓸개를 씹은 표정을 지었다. 잘난 척 하다 한 대 맞은 셈이니 그럴만도 할 것이다. '이 자식 보통내기가 아니네. 주먹만 잘 쓰는 돌머리인 줄 알았더니.' 그는 씁쓸한 고소를 머금은 채 혼절해 있는 도운백을 흔들어 깨웠다. "그 자식 주먹 하나는 정말 매운데."


도운백이 머리를 흔들며 일어날 때 도화향보다 더 짙은 향기가 주위를 진동시켰다. 그와 동시에 장난기 어린 여인의 음성이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이곳은 무척 조용하고 아름답군. 금릉왕을 유혹해서 이곳을 내가 차지해 버릴까보다." 한 마리 나비인가? 한 여인이 사뿐사뿐 도화꽃 융단을 밟으며 다가왔다. 여인(女人), 아니 아직 여인이라기보다는 소녀였다. 하지만 그 자태나 미모는 어떤 여인보다도 더 뇌쇄적(惱殺的)이고 요염했다. 삼단같이 말아 올린 머리는 아직 동기(童妓)임을 나타내고 있었고 초롱초롱하니 맑고 빛나는 눈동자는 그녀의 마음이 흐르는 물처럼 시원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걸을 때마다 그녀의 자태가 달라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떤 때는 폭발적인 요녀(妖女)로 어떤 때는 청순 가련한 재녀(才女)로 그러다가는 우아하고 고귀한 귀부인(貴婦人)으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자태가 다른 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실로 그녀는 어떤 사내라도 그 자가 원하는 이상형의 여인으로 다가설 수 있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니 한 마디로 말해 천하의 그 누구의 마음이라도 사로 잡을 수 있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무악강이 소불진과 도운백을 향해 말했다. "저 여자가 장차 고금 이래 최고의 기녀로 주목 받을 벽자란(碧紫蘭)이다." 벽자란(碧紫蘭)은 북경 제일의 기루(妓褸)인 일춘암(一春岩)의 동기(童妓)다. 동기이기에 그녀는 지금 기생수업(妓生授業)을 받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기녀들보다 더 유명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무리 뛰어난 재녀(才女)라도 육 개월이 걸린다는 기녀 교습소(妓女敎習所)인 기녀구방(妓女九房)을 한 달 만에 완벽하게 수료했으며 또한 일춘암이 사상 처음으로 백만관(百萬貫)이란 거금을 들여 그녀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경의 호색가(好色家)들은 내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내년이면 그녀가 정식 기녀로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벽자란은 고혹적인 눈빛으로 세 사람을 쓸어 보았다. '나는 이들이 주시하는 동안 여덟 번 자태를 바꾸었다.' 그녀의 자태가 여러 번 바뀐 건 의도적이었다. 그녀는 소년들의 반응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키가 큰 소년은 귀부인의 자태에서 눈이 빛나고 유생차림의 소년은 백치미(白痴美)의 자태 그리고 다부진 소년은 청순형(淸純形)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벽자란은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세 소년의 이상형을 간파해 버렸다. 이상형을 간파하는 것은 더불어 상대의 성격을 파악하는 일이기도 했다. '처음 본 사내가 어떤 여인을 좋아하는지를 빨리 알아야 그 여인형(女人形)으로 행동해 영원히 내 품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천하제일기녀(天下第一妓女)의 첫째 조건은 바로 이것이다. 미모란 다분히 주관적이다. 당나라 때 양귀비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이 없었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렇지만 현종의 눈엔 양귀비가 최고였을 것이다. 상대의 눈에 예쁘게 보이면 그 여자는 예쁜 여자다. 벽자란은 남자를 유혹하는 가장 기본이자 가장 어려운 일을 이미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여인형에 호감을 나타낸 것은 모두 개성이 강하다는 뜻, 나는 이 자리에서 평상시대로 행동하는 것이 제일 무난하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지를 정한 벽자란은 감미로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소년영웅들만 모인다기에 반신반의했는데 지금보니 틀림없군. 나와 어울릴 자격이 있어." 소불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무악강을 쳐다봤다. "여인이라? 여인도 영웅이 될 수 있나?" "문제는 능력이지. 여인이라고 모두 쓸모없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여자와 큰 일을 한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아."


도운백도 내키지 않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악강은 벽자란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조그만 소리로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천하는 남자가 지배하지만 그 남자는 여인이 지배한다. 벽자란이 장차 북경성의 거물들을 치마폭에 거느릴 때 우리는 원하는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아낼 수가 있다." "정보를 위해서라? 생긴 것보다는 머리가 좋은데." 소불진이 새삼 감탄하자 무악강이 차가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누구든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추운 겨울 날 얼어 붙은 땅에 엎드려 살인할 대상을 기다려 보게. 아무리 돌머리라도 머리가 좋아지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 무악강의 독백에 소불진과 도운백은 흠칫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그 의미를 그들은 알 수 있었다. 무악강이 어린 나이에 거친 뒷골목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비참한 과거와 그걸 이겨낸 강인한 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운백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장난삼아 나와본 이곳에서 그는 생의 목표(目標)를 발견한 것이다. '냉혹한 심성(心性)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후회없는 과감성 그리고 명확한 판단력, 무인(武人)으로서 갖춰야 할 요소를 모두 지녔다.' '그토록 지옥십팔묘(地獄十八墓)를 통과할 기재를 찾아 헤맸는데 내가 초청을 받아 만나다니 세상 일은 우습군.' 지옥십팔묘! 그것은 무엇인가? 단지 지금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은 도운백에겐 또 다른 신분이 있다는 것뿐이다. 도운백의 두 눈 깊은 곳에서 차가운 광망이 번뜩였다. 그건 복수의 염(念)이었다. '용수혈(龍手血)! 조금만 더 기다려라. 낭야릉(浪野陵)이 부흥하는 날 너희들을 모두 동해(東海)의 고기 밥으로 만들어 주겠다.' 누군가 도운백의 내심을 들었다면 기겁을 했을 거다. 낭야릉이라니? 낭야릉은 고금 이래 최고의 살수(殺手) 집단이 아닌가? 살수제일천(殺手第一天) 낭야릉! 무림이 생겨난 이래 수많은 살수 집단이 있었지만 낭야릉보다 더 완벽한 집단은 없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살인에 실패한 적이 없었고 대상자를 놓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백 년 전, 그들은 무슨 영문인지 안개가 꺼지듯 강호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도운백이 낭야릉과 연관이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용수혈(龍手血)은 또 어떤 세력인가? 도운백의 말투로 보아 낭야릉이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는 건 분명한데 그 외엔 아직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도운백은 자신의 감정이 격해있음을 깨닫고 재빨리 본래의 기색으로 돌아왔다. 너무도 짧은 시간의 변화였기에 아무도 그런 그의 기색을 발견하지 못했다. 뭐가 그리 불만인지 시종일관 툴툴거리던 소불진이 다시 무악강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은 손해를 봐도 자신은 손해를 안 봐야 한다는 사기꾼의 생리상 자신이 일찍 온 게 계속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할 사람이 있냐?" "한 명 남았다." "빌어먹을! 아직도 안 나타나는 그 자식은 누구냐?" "모란도수 뇌천린!" 무악강의 대답에 도운백이 불쾌한 얼굴로 냉소를 터뜨렸다. "흥! 훔칠 때는 정확하더니 이런 약속은 잘도 어기는군." 냉소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속 시간은 지켰다. 너희들이 일찍 왔을 뿐이지." 멀리 도화나무 사이로 산책을 나온 듯 유유자적하게 다가오는 소년이 있었으니 그는 뇌천린이었다. 이때 벽자란은 뇌천린을 향해 여러 가지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새로운 인물에 대한 평가를 내리려는


건 그녀의 본능같았다. 뇌천린이 시선을 벽자란의 옥용에 멈추며 싱긋 웃음을 보냈다. 벽자란은 내심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상한 사람이군. 이 자에게도 여덟 가지 자태를 보였는데 그는 모든 여인상(女人象)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그것은 선천적인 호색한(好色漢)이거나 여인에 대해선 백지인 쑥맥임을 나타낸다.' 그녀는 뜻밖의 결과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느 쪽일까? 아니면 모든 일에 달관(達觀)하여 나의 의도를 꿰뚫어 보는 것일까?' 지금까지 그녀가 사내를 보고 이렇게 종잡을 수 없었던 적은 결코 한 번도 없었다. 상대의 성격을 파악 못하면 결국 상대를 자신의 치마폭에 감싸고 요리할 수 없다는 걸 뜻한다. 벽자란이 곤혹스러워하고 있을 때 도운백도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음! 천하에 나보다 더 뛰어난 기재가 있었다니...... 이 자를 지옥십팔묘(地獄十八墓)로 데려가면 낭야릉(浪野陵)의 부흥은 한층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겠다.' 영웅(英雄)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그는 한 눈에 뇌천린이 자신보다 특출한 기재임을 간파한 것이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뇌천린에게 꽂혀 있을 때 무악강은 흐뭇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두 모였군. 불참한 자가 없어 다행이다." "......." "지금부터 이 회합의 취지를 설명하겠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중인들을 쓸어 보았다. "현 북경성에는 십웅연합(十雄聯合)이란 단체가 있다. 각기 한 분야의 거물(巨物)들인 십 인(十人)으로 이루어진 친목회(親睦會)다." 십웅연합이란 말이 나오자 장내는 잠시 긴장감이 돌았다. 좋던 싫던 북경성을 무대로 활동하는 이들로선 언제나 십웅연합의 영향력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십웅연합은 친목 단체나 그 힘은 막강하다. 누구든 그들 중 일인을 공격하면 나머지 구 인(九人)의 협공을 받아 파멸당한다." "그들은 그 힘을 바탕으로 전장(錢莊), 기루(妓樓), 도박장(賭博場),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 등 북경성의 모든 젖줄을 쥐고 흔든다. 다시 말해 그들이 북경성의 실질적인 지배자(支配者)인 것이다." "그거야 모두 아는 사실이고..." 듣기 지루하다는 듯이 소불진이 말머리를 잘랐다. "어떻게 하자는 거냐? 우릴 초청한 것은 그들과 싸우자는 뜻일텐데." "당장 싸우는 것은 세불리(勢不利)다. 뜻만 모아진다면 십웅연합을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을 키우면 된다." "그들과 싸우려면 그들에 버금가는 조직을 키워야 하는데 그들이 기다려 주겠어? 위협이 된다 싶으면 싹부터 잘라버리는 놈들인데." 벽자란이 어림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소불진이 면박을 주었다. "이래서 계집이 끼면 큰 일을 못하는 거야. 시작도 하기 전에 겁부터 먹으니 무슨 일이 되겠어?" 벽자란의 눈꼬리가 새초롬히 올라갔다. 발끈한 것이다. "세 치 혀만 잘 놀리면 영웅이냐? 그렇다면 일춘암(日春庵)을 드나드는 오입쟁이들은 모두 영웅이다." 졸지에 오입쟁이가 된 소불진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이 망할 계집아! 너 함부로 지껄일 거야?" "너 자꾸 계집 계집하는데 너도 계집의 몸에서 낳았다는 걸 알아야지? 도대체 세상 근본도 모르는 놈이 무슨 큰 일 어쩌고 하는 거야?"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자 무악강이 급히 끼어 들었다.


"지금 싸우자고 모인 게 아니잖아? " 두 사람을 말린 무악강이 중인을 둘러보며 자신이 생각한 바를 다시 피력했다. "벽자란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들에 버금가는 조직을 키우기는 힘들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은 살섬지계(殺蟾之計)다." "살섬지계?" 모두의 시선이 무악강에게 쏠렸다. "두꺼비가 스스로 뱀에게 먹혀 그 안에서 새끼를 낳고 그 새끼는 뱀의 영양분을 흡수하여 도리어 뱀을 죽이고 성장하듯 우리도 십웅연합의 속하로 들어가는 거다." "우린 금방 두각을 나타낼 거고 십웅연합 안에서의 힘이 강해지면 자연스럽게 십웅연합을 몰아낼 수 있다." 도운백이 그럴 듯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계책이다." "찬성하는 거냐?" 모두 수긍하는 눈치였으나 소불진이 반대하고 나섰다. "뜻은 좋다만은 서로에 대해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 안에서 대우를 받고 편해지면 배반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남을 등쳐 먹는 놈이라 어쩔 수 없군. 그렇게 사람을 못 믿냐?" 벽자란이 비웃자 소불진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잘난 척 하지마.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인데 기분내키는 대로 행동하란 말이냐?" "이 자식은 빼자. 속이 밴뎅이같아서 앞으로 속 꽤나 썩겠다."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보고 모두 쓴 웃음을 지었다. 천하의 소불진이 말발이 달려 쩔쩔매는 건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그만큼 벽자란의 성격은 당찼다. "너희들 생각은 어때?" "틀린 말은 아니지. 이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니까." 뇌천린의 동조에 소불진의 안색이 다소 밝아졌다. "역시 남자끼리는 얘기가 통한다니까." "우린 처음 만났고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십웅연합을 적으로 두고 있는 것은 일치한다." 뇌천린이 모두를 쓱 둘러보았다. 뜸을 들이는 걸로 봐서 남다른 계책이 있는 것 같았다. "서로 믿기 위해 혈맹(血盟)의 의식을 갖는 거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소년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역시 소불진이 제일 먼저 반박했다. "그건 하나마나한 소리잖아? 의식만 갖추면 마음도 바뀌냐?" "더 들어봐. 그런 뻔한 소릴 할 인간이면 이 자리에 초청받을 자격도 없잖아?" 벽자란이 뇌천린을 두둔하자 소불진은 비위가 더 상했다. "체! 기생은 도둑을 좋아하나 보지? 기둥서방이라도 되는 것 처럼 편드네." 소불진의 비웃음에 뇌천린은 얼굴이 붉어졌지만 벽자란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대꾸했다. "내 마음에 들면 공짜로라도 치마를 벗을 수 있어. 하지만 너같은 놈은 억만금을 줘도 싫어." 벽자란의 거침없는 말에 모두 기가 질렸다. 벽자란과 다퉈선 본전찾기도 힘들 것이다. "그냥 혈맹의식이 아니야. 심고(心蠱)를 복용하는 거다." 뇌천린의 말에 모두 흠칫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고라니? 스스로 독을 먹잔 말인가? 심고는 묘족(苗族)들이 사용하는 독물(毒物)로서 일종의 벌레였다. 이 벌레는 키우는 자의 피를 마시며 자라기에 인간과 영적 교류를 할 수 있다. 키울 때 부터 한 가지 주문(呪文)에 통해 상대에게 심고를 투입시킨 후 주문을 외우면 내부를 마구 갉아 먹는 것이다. "그건 미친 짓이야."


소불진이 기겁을 하고 소리쳤으나 뇌천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무슨 일을 벌이자는 거냐? 배신만 안 하면 심고는 회충이나 다름없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몸 안에 독물을 넣어둔다는 건 웬지 찜찜한 일이었다. "나는 찬성이다." 무악강이 제일 먼저 동조를 표시했다. "나도 찬성이야." 두번째는 벽자란이었다. "너흰?" 뇌천린이 소불진과 도운백을 바라보았다. 도운백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나야 인생에 의미가 없는 자니까 찬성하겠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도운백이 벽자란을 힐끗 쳐다보았다. "벌레를 삼킨다는 건 나같이 깔끔한 인간으로선 참기 어려운 고통이니까 벽자란의 입으로 넣어줬으면 한다." 한 마디로 입을 맞추고 싶다는 노골적인 말이었다. 모두 어이가 없는데 벽자란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못할 것도 없지. 대신에 그렇게 하려면 그 전에 이 쪽이 먼저 입으로 나한테 넣어줘야 한다." 벽자란이 뇌천린을 가리키자 도운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다른 남자와 입을 맞추는 걸 보고 다시 입을 맞춘다는 건 도운백으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벽자란이 등방(登房)하는 날 북경성이 뒤집힐거란 소릴 반신반의했었는데 오늘 보니 틀린 말이 아니군. 내 말은 없었던 걸로 하겠다." 자신의 말을 철회하며 도운백이 뇌천린을 툭쳤다. "친구! 말 한 마디 않고도 어떻게 여자를 녹이는지 그 방법 좀 가르쳐 주겠나?" 뇌천린은 벽자란이 자꾸 자신을 걸고 넘어지자 영 민망했다.그렇다고 농담일 수도 있는데 과민반응을 보일 수가 없어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한 사람 남았나?" 무악강이 소불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많은 사람이 찬동하는 일은 절대 빠지지 말라는 게 우리 어머님 유언이야. 그래야 손해볼 일이 없다는 거지." "그럼 모두 찬성이군." 뇌천린이 품 속에서 조그만 약병과 소도(小刀)를 꺼냈다. "일단 피의 결맹을 맺자." ② 뇌천린이 소도로 거침없이 팔뚝을 그었다. 이어 다른 사람들도 소도를 건네 받아 팔뚝을 갈랐다. 그리고 그들은 차례로 서로의 팔뚝을 엇갈리게 맞대었다. 피(血)에 의한 결맹의식(結盟儀式), 그것은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이윽고 결맹의식이 끝나자 뇌천린이 약병을 열었다. 약병엔 생긴 게 실지렁이같으나 머리 쪽은 송충이같은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뇌천린이 그 중 한 마리를 집어 방금 팔뚝에 그은 상처에 갖다 놓았다. 그러자 심고는 물이 스며들듯 상처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도 뇌천린과 같이 심고를 몸 속으로 넣었다. 심고를 모두 넣자 뇌천린은 주문을 가르쳐 주었다. "누구든 배신을 하면 다른 사람이 주문을 외워 심고를 움직인다." 결맹이 끝난 다섯 명의 얼굴엔 진지한 빛이 가득했다. 그들은 이제 하나가 된 것이다. 피와 죽음으로 맺어진 동지인 것이다.


"결맹이 이루어졌으니 어디 가서 자축연(自祝宴)이라도 열어야 하잖아?" "그 점은 염려놔라. 내가 이미 물색해 놓은 곳이 있으니까." 소불진의 말에 무악강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무악강의 두 눈에 장난스런 빛이 가득한 걸로 봐서 그곳은 기상천외(奇想天外)한 곳인 것 같았다. 이 때 뇌천린이 신중한 얼굴로 들뜬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잠깐!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뭐냐?" "우리를 통솔할 머리를 뽑아야 한다." "그런 게 필요 있을까?" 벽자란이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뇌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마음이 맞아도 수뇌(首腦)는 있어야 한다. 머리 없는 몸뚱이는 아무 것도 못하니까." "그럼 누굴 대장(大將)으로 삼지?" "보아하니 모두 남의 밑에 있기 싫어하는 성격인 것 같으니 투표(投票)로 하자." 뇌천린의 말에 일순 무악강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투표? 지금 할꺼야?" 도운백이 반대하고 나섰다. "아직은 서로가 잘 모르니 누가 더 유능한지 알 수가 없다. 투표는 서로 어울려 본 후에 하자."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 소불진이 얼른 찬성하고 나섰다. 모두 겉으로는 대장 따위엔 별 관심없다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기실 내심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장차 북경성을 이들이 지배하면 대장은 지배자 중의 지배자가 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이들로선 꼭 대장이 되고 싶을 것이다. '음! 주최를 내가 했으니 영웅회는 내가 이끌고 가려 했는데...... 이렇게 된 바에는 어떻게 하든 내가 대장이 되어야 한다!' 무악강은 일이 자신의 뜻과는 달리 진행되자 약간 서운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뛰어난 기재들의 모임인데 자신의 뜻대로 된다면 그게 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뇌천린이다. 다른 자들은 쉽게 탈락시킬 수 있으나 왠지 뇌천린에게는 자신이 없다.' 그는 뇌천린이 자꾸 걸렸다. 뇌천린의 그동안 행각을 보면 자신 못지 않은 담력에 자신이 없는 지모(智謀)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초에 그에게 모임을 제안한 것인데 이젠 그게 도리어 그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된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대장은 기필코 내가 된다. 난 마음 먹은 이상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으니까.' 이 때 도운백이 중인들을 쓸어보며 내심 실소를 흘렸다. '후후후! 눈빛들을 보니 서로 대장이 되려 하는군. 하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다!' 도운백의 관심은 아예 다른 곳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군소리없이 남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운명은 너희를 무림(武林)으로 부르고 있다. 나는 결심했다. 너희 모두를 지옥십팔묘(地獄十八墓)로 데려 가기로.' '몇 년 후 무림에는 다섯 명의 젊은 최강자가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들은 지금보다 더 큰 야망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깊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뇌천린은 다른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황금옥성(黃金玉城)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대장이 되어야 한다.' '장물아비인 이노야(李老爺)에 따르면 황금옥성에는 전 중원의 반에 해당하는 보화(寶貨)가 숨겨져 있다 한다. 그 보화가 있으면 십웅연합을 무너뜨리는 게 더 빨라질 거다. 세상은 돈이 움직이는


것이니까.' 뇌천린은 진작부터 황금옥성을 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위험한 곳이라 혼자의 힘으론 불가능했다. 대장만 된다면 자금비축의 명분으로 이들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황금옥성(黃金玉城)은 이름과는 달리 귀기(鬼氣)가 난무하는 음산한 곳이다. 하지만 달(月)이 없는 그믐 날만 되면 그곳에선 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와 야공(夜空)을 밝혔다. 사람들은 그 빛이 금은보화(金銀寶貨)에 의한 광채라고 믿었다. 그래서 황금에 눈이 먼 수많은 사람들이 황금옥성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다시는 돌아온 자가 없었다. 무악강이 소년들의 상념을 깨뜨린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후였다. "이제 그만 이곳을 나가 자축연을 벌이도록 하자." "그런데 이상하군. 아까 담을 넘을 때도 그랬고 지금 봐도 너무 인적이 없어." 소불진이 의아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무악강이 이내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원래 이곳은 경비 무사가 없다. 괜한 위엄에 세인들이 겁을 먹어 들어 오지 않을 뿐이지. 우리 일은 극비(極秘)가 되어야 하기에 조용한 이곳을 택했던 거다." "용의주도하군. 그것도 모르고 나는 은근히 불안해 한 것도 사실인데......" 뇌천린이 소불진을 보며 나직이 웃었다. "후후후! 나는 미리 주위를 살펴보고 이곳을 왔다. 이곳에는 한 사람 밖에 없음을 알고 자신있게 들어 온 것이다." 뇌천린의 말에 무악강이 흠칫 놀랐다. "한 사람? 나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너는 내실(內室)까지 훑어 보았느냐?" "내실은 금릉왕만 기거하는 곳으로 금릉왕은 지금 황궁(皇宮)에 있을 시기다." "후후후! 그건 너의 생각이다. 금릉왕이 여름에만 이곳에 오고 금릉왕만 꼭 내실을 쓴다고 확신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뇌천린은 야릇한 눈빛을 발하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사람은 종종 자신의 생각을 너무 믿어 실패하는 수가 많다. 나는 무슨 일이고 백지 상태에서 시작한다." 뇌천린의 말에 무악강은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실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일이 매번 같은 결과가 나와도 처음부터 또 시작한다. 이번 일도 너는 통례상 금릉왕이 없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만약 내실에 경비무사라도 있었으면 어찌할 뻔 했느냐?" 그의 논리정연한 말에 무악강은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도운백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음! 자신조차 불신(不信)하는 자세....... 남들은 어쩌면 저런 태도를 소심하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맹수(孟獸)의 왕(王)이라는 사자(獅子)를 봐라! 그들은 꼭 힘이 강해 맹수의 왕인 것은 아니다. 힘으로 따지자면 코끼리보다 못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먹이를 노릴 때 모든 준비를 끝내고 한 순간만 노린다.' '그러기에 사자들은 실패가 없고 자신보다 강한 상대들을 일시에 거꾸러 뜨린다. 뇌천린! 이 자는 사자와 같다.' 도운백은 새삼 뇌천린의 주도면밀한 기질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추호(秋毫)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는 세밀한 관찰력. 그것은 범인(凡人)으로선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무악강이 의아한 얼굴로 뇌천린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너는 사람이 있을 줄 알면서도 이곳에 왔단 말이냐? 여차하면 발각될 것을 알면서." "뭐가 두렵나? 한 사람 정도는 최악의 경우라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는데." "그 자가 금릉왕이라도.?" "금릉왕이 아니라 황제(皇帝)라도 마찬가지다. 어떤 경우든 그 자리를 피할 방도가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지 그 다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뇌천린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무악강은 기가 질려 버렸다. "황제라도 마찬가지라고? 너란 놈은 심장을 두 개 달고 나온 것 같군."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 두려움을 모르는 뇌천린의 기질에 모두들 압도 당하는 듯 했다. "그럼 이만 나가자." 무악강은 중인들을 향해 눈길을 보낸 후 후원을 걸어 나갔다. 다른 사람들도 이내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이 후원에서 막 사라졌을 때였다. 떨어지던 도화꽃이 살짝 흔들리며 유령처럼 한 인영이 나타났다. "후후후! 재미있는 아이군. 철저하면서도 대담하고 낙천적이면서 냉정하다니." 기이한 웃음을 흘리며 도화 숲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대략 서른 살 가량 되었을까? 준미수려한 용모에 웅풍당당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얼굴의 선은 굵어 강렬한 남아(男兒)의 체취를 풍기고 있었으며 전신에선 제왕(帝王)의 기운이 웅위하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는 다 떨어진 남루한 흑의(黑衣)를 입고 있었다. 실로 풍모(風貌)에 걸맞지 않은 차림새였다. 흑의인은 뇌천린이 사라진 방향을 뚫어질 듯 응시하며 나직이 뇌까렸다. "뇌천린이라 했는가? 점점 마음에 든다. 나 금릉왕(金陵王)을 태어나 세번째로 경탄하게 만든 놈이다." 아아! 이게 무슨 말인가? 남루한 차림의 흑의인이 대명황조(大明皇朝) 사상 가장 뛰어난 기재(奇才)라는 금릉왕이란 말인가? 만인이 숭앙하는 황상(皇上)의 동생이 이토록 초라한 차림을 하고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일이었다. "아니, 저 아이는 내가 경탄한 맹사(盲師)나 잃어버린 누이를 찾아 동영(東瀛)에서 왔다는 젊은 무사보다 더 뛰어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저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무공을 모르니까." 맹사(盲師)와 동영의 젊은 무사는 누군인가? 금릉왕같은 기재가 감탄한 걸로 봐서 그들 역시 대단한 인물들임엔 분명했다. "하여간 황실을 영원히 떠나려고 주변을 정리하다 도화원까지 오기를 잘했군. 저런 재목을 만나다니." 문득 금릉왕의 입술 사이로 진득한 회한이 실린 한숨이 터져 나왔다. "주검화(朱劍華)! 너! 웅지(雄志)를 펼 수 없는 대붕(大鵬)아! 한 많은 제왕가법(帝王家法)에 묶여 평생 범인(凡人)으로 지내야 하는 가엾은 놈......" 그의 입가에는 자신에 대한 조소가 공허하게 피어 올랐다. 제왕가법(帝王家法)은 또 무엇인가? 금릉왕 주검화는 그것 때문에 자신의 야망과 웅지를 포기해야 될 몸인 것 같은데...... 주검화는 쓸쓸한 고뇌가 담긴 눈빛을 허망하게 허공에 던졌다. "이제 난 황족의 신분도 신주철객(神州鐵客)의 명호도 모두 버렸다. 하지만 한 가지 삶의 희망만은 남았다." 오오! 이 뜻밖의 사실! 금릉왕 주검화가 신주철객이라니...... 신주철객(神州鐵客)! 이 시대가 낳은 최고의 신비인(神秘人)! 그는 천하무적(天下無敵)이다. 홀연히 무림에 출현했다가 연기처럼 사라진 그는 지금껏 무림초극고수라 칭하는 십일 인(十一人)을 격파함으로써 이 시대의 최강자(最强者)로 불리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금릉왕이었던 것이다. 주검화의 공허한 눈빛은 점차 강렬한 야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뇌천린! 저 아이를 후계자(後繼者)로 삼겠다. 그리고 내가 못다 이룬 야망까지 펼치게 하겠다." 주검화의 야망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은 사랑하는 약려(若麗)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즐거운 날이다. 하하핫!" 주검화는 유쾌한 대소와 함께 후원을 걸어 나갔다.


이제 그의 두 어깨에서는 조금 전에 보이던 허무와 고독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오직 하늘을 웅비(雄飛)할 것만 같은 엄청난 패기(覇氣)가 파도치고 있을 뿐이었다. 제 4 장 기방향연(妓房饗宴) ① 일춘암(一春庵)은 북경성(北京城) 제일의 기루(妓樓)다. 천하의 미인(美人)을 모두 모은 것 같이 기녀들은 하나같이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절세 미녀들이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쾌락(快樂)과 향락(享樂)을 맛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일춘암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천하에서 유명한 거부(巨富)나 권세(權勢)를 떨치는 고관대작(高官大爵)만이 향응을 즐길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세인들은 일춘암에 들어가서 한 잔의 술을 마시는 걸 소원으로 삼고 있을 정도였다. 일출(日出)과 함께 잠이 들고 해가 지는 것과 동시에 열기를 띄는 일춘암은 오직 밤에만 영업(營業)을 하는 조금 특이한 기루(妓樓)였다. 서녘에 걸려 있는 태양이 마지막 휘광을 대지 위에 흩뿌리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 가까와선지 싸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길다랗게 늘어선 그림자를 이끌고 일춘암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사남일녀(四男一女)가 있었다. 제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닌 다섯 인물은 바로 뇌천린 일행이었다. 영웅회 주최자인 무악강은 자축연을 벌이기 위해 일춘암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영업시간이 이른 때문인지 일춘암은 대문이 굳게 닫힌 채 적막 속에 휩싸여 있었다. 일춘암 앞에 당도한 무악강은 거침없이 대문을 두들겼다. "곽총관! 어디 있느냐?" 그의 우렁찬 고함소리가 일춘암을 뒤흔드는 순간, "어느 놈이냐? 아직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느냐?" 짜증 섞인 거친 목소리가 안에서 터져 나왔다. 이어 대문이 살짝 열리며 험상궂게 생긴 삼십대의 장한이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달콤한 잠을 깨운 것에 몹시 화가 났는가? 장한은 흉흉한 눈초리로 대문 앞에 우뚝 서 있는 무악강을 쏘아보았다. 순간 장한은 문을 두들긴 사람이 무악강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사색이 되었다. "아이쿠! 형님! 제가 형님 오신 것도 모르고 그만......" 그는 황송한 얼굴로 두 손을 비비며 어찌할 줄 몰랐다. 장한(長漢)은 일춘암의 총관(總官)인 곽자호(郭子浩)였는데 그는 무악강의 수하였다. 뇌천린은 쩔쩔 매는 곽자호를 바라보며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후훗! 암흑가의 위계질서(位階秩序)는 무섭다. 나이 어린 무악강에게 저렇게도 꼼짝 못하다니.......' 무악강은 당혹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곽자호에게 단호한 음성을 던졌다. "곽총관! 지금 시간부터 일춘암은 문을 닫아라!" "무...... 무슨.......?" "오늘 하루 일춘암을 통채로 내가 세를 논다. 물론 모든 경비도 내가 책임을 진다." 곽자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무악강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럴 일이 있다. 여기 있는 친구들과 오늘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실 생각이다." "그러십니까?" 곽자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아한 눈길로 뇌천린 등을 쓸어 보았다. '이들이 누구지? 통 못 보던 자들인데.......' 그로서는 벽자란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처음 보는 인물들이었다. 그는 이내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무악강을 응시했다.


"형님의 분부니 그대로 하겠습니다." 이때 소불진이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야! 빨리 우릴 안내해라." 일순 곽자호의 두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뭐라고?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누구에게 반말이냐?" "쯧쯧! 정신이 없는 친구군. 형님의 친구는 형님이 아니더냐?" 소불진은 핀잔과 함께 발로 곽자호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 자식을......" 곽자호는 고통으로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소불진을 노려보았다. 분기탱천하여 당장에 박살낼 기세로 두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그런 곽자호를 보며 무악강이 입가에 잔잔한 고소를 베어물었다. 무악강이 곽자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곽총관! 개의치 말고 너는 그만 연회석이나 준비해라. 일춘암 사상 가장 호화판으로 해야 한다." "예.......예........" 곽자호는 마치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허리를 굽신거렸다. "후훗......!" 벽자란이 재미있다는 듯 실소를 흘리며 그의 옆을 지나갔다. 속이 뒤틀린 곽자호의 입에서 분갈이 터져 나왔다. "벽자란! 너는 뭐가 좋다고 생글거리느냐?" "곽총관! 나는 오늘 무악강에게 초대된 손님임을 명심해요. 오늘만큼은 당신도 내 말을 들어야 한다구요." 벽자란의 당당한 일침(一針)은 곽자호를 망연자실(茫然自失)케 만들었다. 곽자호는 화풀이를 하려다가 도리어 당하자 벌레 씹은 듯한 얼굴로 멍하니 벽자란의 뒷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무악강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곽자호의 귀에 나직이 속삭였다. "곽총관! 신경 뚝 끊어라. 그리고 연회석과 함께 여자를 준비시켜라. 아직 청백지신(靑白之身)을 지닌 일춘암의 최고 미녀들을 말이다." "여인을요? 형님은 그동안 갖다 바쳐도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곽자호는 너무도 뜻밖이라는 듯 해연히 놀랐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사나이들이 가장 빠른 시간내에 우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술과 싸움 그리고 여인이 아니겠느냐?" 무악강은 야릇한 눈길로 곽자호를 일별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제일 뒤에 처져 있던 벽자란은 들을 수가 있었다. '다른 사람은 상관없으나 저 사람에겐 희엽(姬葉)이 걸리면 안 되는데......'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앞서가는 뇌천린을 응시했다. '그 어떤 여자도 겁나지 않는데 희엽은 만만치가 않단 말이야?' 이게 무슨 말인가? 벽자란은 뇌천린에게 은근히 호감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 벽자란조차 상대하길 꺼려하는 희엽(姬葉)은 또 어떤 여인인가? 거대한 밀실(密室)이었다. 분홍빛 휘장이 사면(四面)에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었고 사방의 벽에는 화려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산수화(山水畵)와 옥(玉)으로 다듬은 장신물들이 휘황하게 걸려 있었으며 천장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여덟 개의 기둥에는 은은한 화편(火片)을 흩뿌리고 있는 황촉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황궁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극도로 호화스럽고 운치있는 방이었다. 지금 밀실 중앙에 놓여 있는 거대한 둥근 탁자 위엔 황제의 주안상을 옮겨다 놓은 듯한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각 좌석마다 항아리만큼이나 큰 주발이 놓여 있었는데 어디에 쓰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무악강이 좌중을 쓸어 보았다. "자! 즐겁게 한 잔 하자." 도운백이 놀란 듯한 얼굴로 탄성을 발했다. "아! 이 밀실이 바로 하룻 밤에 삼만 냥을 쓸 수 있어야 들어올 수 있다는 연운궁(燕雲宮)이구나. 과연 초호화판이군." "친구 덕에 명사(名士)들도 오기 힘들다는 이곳까지 와보고...... 나쁜 기분은 아니군." 소불진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악강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씩 웃었다. "나는 너희들에게 영웅구락부의 목적만 달성되면 이 따위 연운궁쯤은 우습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데리고 온 것이다." ".......!" "오늘의 주인은 너희들이니까 마음껏 마셔라." 이어 무악강은 그 큰 주발을 술동이 속으로 집어 넣었다. 이제보니 주발은 술잔이었다. 무악강의 의도를 알아차린 다른 소년들도 일제히 술동이 속으로 주발을 넣었다. 벽자란까지도 주발에 술을 담았는데 오직 한 사람 뇌천린만큼은 곤혹스런 눈빛으로 주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큰일이군. 난 술을 마셔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큰 주발에 퍼마시면 견딜 수가 있을까?' 그가 내심 고민하고 있을 때 무악강이 두 손으로 주발을 높이 치켜 들며 우렁차게 외쳤다. "자! 오늘 가장 호화판으로 노는 거다. 영웅회의 영광을 위해." "영웅회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네 사람이 일제히 주발을 입에 가져갔다. 소불진이 빈 주발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뇌천린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뇌천린! 뭐 하는 거냐?" "아... 알았어."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뇌천린은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그도 주발에 술을 가득 담고 남들처럼 쳐들었다. "단숨에 마시는 거다." 무악강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들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갈증에 허덕이던 사람들처럼 입 한 번 떼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뇌천린도 한 번 심호흡을 하고는 술을 들이켰다. "커억!" "끄윽!" 개트림과 함께 빈 술항아리를 내려 놓는 다섯 사람의 표정은 제각기 달랐다. 뇌천린을 제외한 네 사람은 이미 마셔 본 경험이 많은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뇌천린의 안색은 처참하리만큼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쓰다. 속에서 불이 확확 나는구나.' 무악강은 뇌천린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뇌천린! 너는 술을 마셔 본 적이 없느냐?" "무슨 소리! 남아(男兒)라면 모름지기 십 세 때 두 수레(車)의 술을 마셔 본 경력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후훗! 그 기백이 오래 가기를 빈다." 무악강은 실소를 흘리며 또 다시 주발을 술동이 속으로 넣었다. 뇌천린은 무악강이 자신의 내심을 눈치챈 것 같자 오기가 발동했다. '무악강! 어림 없다. 술 따위에 내가 꺾일 것 같으냐?'


그는 오기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주량(酒量)에서 질 수 없다는 듯 계속 술을 마셨다. 오 인(五人)의 소년영웅! 그들은 누구에게 그 무엇이든 꺾일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살인적인 폭음(暴飮)을 사양치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향이 짙어지며 중인들의 취기(醉氣)가 더해갔다. 술동이가 거의 바닥이 날 쯤에는 모두 고주망태가 되었다. 특히 벽자란은 아예 정신을 잃고 탁자 위에 고개를 처박은 채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다른 네 사람 가운데는 뇌천린이 가장 많이 취해 있었다. 그는 정신이 몽롱하고 얼떨떨하여 천장이 자꾸 빙빙 도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젠장! 이대로 가다간 내가 먼저 떨어지겠다. 나가서 정신을 차리고 와야겠다.' 그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밖에 나가 찬바람을 쏘이기로 작정했다. 비틀거리며 그가 위태롭게 걸음을 옮기며 밖으로 나가자 무악강이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물었다. "어디 가냐?" "소변 보러. 끄윽!" 뇌천린은 내심을 감추려는 듯 재빨리 대답하며 휘청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측간이 어디지? 술이 취해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어.' 눈 앞이 흐릿하고 방향 감각을 잃어 뇌천린은 미로를 헤매듯 일춘암 안을 빙빙 돌고 있었다. 끝내 뇌천린의 발걸음은 대문 밖으로 옮겨졌다. 원하는 곳을 못찾다보니 무의식 중에 밝은 곳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② 밖은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뇌천린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비틀거리며 대로(大路)를 가로 질러 갔다. 그는 으슥한 골목의 담벽 앞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었다. 담벽엔 하얀 색으로 날이 예리한 가위가 그려져 있었다. 방뇨를 금지하는 표시였다. 집 주인이 경고를 할 정도면 역설적으로 여기보다 방뇨하기가 더 좋은 곳은 없다는 뜻이다. 정신은 혼미하지만 여기가 목적지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뇌천린은 바지춤을 내렸다. 세찬 물줄기가 벽을 요란하게 때렸다. 뇌천린은 시원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이 금방을 다 뒤졌으나 아직 저곳만은 살피지 않았다." 난데 없이 억양이 몹시 서투르고 탁한 음성과 함께 뇌천린의 등 뒤에 두 사람이 유령(幽靈)처럼 나타났다. 허리엔 장도(長刀)와 소도(小刀)를 꼽고 있고 맨발 차림의 괴이한 인물들이었다. 대략 사순 가량 되었을까? 겉 모습이 중원과 다른 이민족(異民族)의 기질이 엿보였다. 그들은 오척(五尺)의 작은 체구였으나 전신에서는 엄청난 예기(銳氣)가 풍겼다. 고양이처럼 생긴 눈에선 죽음과 같은 회색 광망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일견해도 고도의 훈련을 쌓은 인자(忍子)가 틀림없었다. 그들은 무엇을 찾는지 으슥진 골목 안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돌연 왼쪽의 인물이 한 손으로 코를 움켜 쥐며 고개를 훽하니 옆으로 돌렸다. "크! 악취......! 이제보니 이곳은......" "아니야! 그 자가 이런 곳이라고 숨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오른쪽의 인물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어 그는 등을 보이며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있는 뇌천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친구! 우린 이곳에 볼일이 있으니 잠깐 비켜 주겠나?" 뇌천린은 여전히 거센 물줄기를 내뿜으며 고개만 뒤로 돌렸다.


"그대들도 어지간히 술을 마신 것 같군. 하지만 좀 기다려...... 세상 일엔 아무리 급해도 순서가 있는 거니까......" "ㅋ! 이제 보니 꼬마였군. 중원도 엉망이군. 애들이 술이라니......" 왼쪽의 인물이 뇌천린을 응시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순간 뇌천린의 안색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꼬마라니? 이 놈들이 어른을 희롱하는구나. 아직 말도 배우지 못한 놈들이......" 그는 정신이 몽롱한 탓으로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들의 키가 작고 한어(漢語)가 서툴기에 한창 말을 배우는 어린 아이로 단정해버린 것이다. 단구의 두 사람은 너무도 어이가 없는지 멍한 눈길로 뇌천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기가 막혀 당장 응수할 생각이 나지 않은 것이다. 잠시 후 오른쪽의 인물이 냉정을 추스리며 입을 열었다. "모랑(毛郞)! 그 아이를 밀어내라! 내가 훑어 보겠다." "알겠다. 자랑(紫郞)!" 왼쪽 인물인 모랑이 뇌천린을 확 밀쳤다. "꼬마야! 저리 비켜라!" 술에 취한 뇌천린은 힘없이 넘어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넘어진 곳은 자랑이 살피려는 자신이 볼일 본 그곳이 아닌가? 쓰러져 있는 뇌천린은 술이 취한 와중에서도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데......? 왼쪽으로 넘어가려는 내 몸을 무형의 힘으로 오른쪽으로 끌었다.' 그렇다. 뇌천린이 넘어지려는 순간 벽 쪽에서 뻗쳐오는 무형의 힘이 그를 반대 방향으로 쓰러지게 한 것이다. 자랑은 자신이 살펴 보려는 곳으로 뇌천린이 쓰러지자 모랑을 향해 짜증을 냈다. "모랑! 어디로 밀어내는 거냐?" "빌어먹을......! 술이 취해 저 놈의 몸까지 반대로 쓰러지는군." 모랑은 볼 부은 얼굴로 다시 손을 쓰려 했다. 그 때 쓰러져 있던 뇌천린이 벌떡 일어나며 악을 썼다. "이 자식들이 사람을 치네." 뇌천린이 소매를 걷어 부치고 두 사람을 향해 덤벼들었다. "너희는 오늘 임자 만난 줄 알아라. " 순간적으로 모랑과 자랑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살기(殺氣)로 변했다. "시간이 없다. 어서 처치하고 그 자를 찾아야 한다." 자랑이 다급한 음성을 토하며 살수(殺手)를 뿌리려고 할 때, "엉! 무슨 일이지?" "저기서 싸움이 벌어진 모양인데......" 대로 저 쪽에서 행인들이 호기심에 몰려 들기 시작했다. 모랑의 안색이 급변했다. "이런...... 이 꼬마 놈이 일을 다 망치는군. 자랑! 어서 손을 써라." 그의 채근에 자랑이 번쩍 손을 치켜 들었다. 삐이삑! 난데없이 은은한 호각 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어디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안마사(按摩士)의 피리소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모랑과 자랑의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세인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리지 말라는 명이다. 어서 피하자." 피리 소리는 신호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환영(幻影)처럼 그 자리에서 꺼져 버렸다. 몰려 들던 구경꾼들은 두 사람이 연기처럼 없어지자 해연히 놀랐다.


"어! 도깨비였나? 금세 사라지다니......" 그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여보슈! 당신과 싸운 사람이 누구요?" 중인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뇌천린에게 물었다. "뭘 말하는 거요. 나는 혼자 있었는데......" 뇌천린은 짐짓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인들은 이상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이상하게 생긴 두 사람이 있지 않았소?" "이 사람들이 술에 취했나? 난 아무도 보지 못했는데....... 두 사람이라니......." 무엇 때문인가? 뇌천린은 의도적으로 시치미를 잡아 떼고 있었다. "이상하군. 분명 싸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글쎄...... 난 틀림없이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중인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하지만보이는 것은 어두워지는 땅거미 뿐 인적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들은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자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뇌천린은 중인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야릇한 눈길을 벽쪽으로 던졌다. "어서 나오시오. 난 당신의 부탁을 들어 주었소." 이게 무슨 말인가? 벽을 향해 나오라고 말하다니. 이제 그는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어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허허허......! 냄새 한 번 고약하다." 돌연 벽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한 인영이 환각(幻覺)처럼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벽에서 나온 인물은 나이를 추측할 수 없는 고승(高僧)이었다. 낡은 홍의가사(紅衣袈裟)를 걸치고 있는 노승(老僧)은 뚱뚱한 체구에 백미(白眉)와 백염(白髥)이었으나 얼굴에는 주름살 하나 없었다. 그런데 노승의 가슴을 보라! 뻥 뚫린 구멍이 나 있었는데 노승이 자신의 주먹을 넣어 피를 막고 있었다. 뇌천린은 취기(醉氣)가 싹 달아나고 말았다. '저런 몸으로 살아있단 말인가?'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망연자실한 채 노승을 응시할 뿐이었다. 백염 노승은 안도의 빛이 가득한 얼굴로 뇌천린을 응시했다.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당할 뻔 했다. 철환마탈(鐵丸魔奪)......! 과연 무섭다. 노납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아아! 백염노승의 상처는 철환마탈에 의한 것이란 말인가? 철환마탈(鐵丸魔奪)은 고금(古今)을 통틀어 가장 강한 백대신공(百代神功) 중 서열 오위(五位)의 개세무공(蓋世武功)이다. 오백 년 전, 천하를 피(血)와 공포(恐怖) 속에 몰아 넣은 악마(惡魔)의 집단이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혈라마군(血羅魔軍)이었다. 죽음(死)과 전율(戰慄)의 대명사로 무림 사상 가장 잔인하고 막강했던 악마군단(惡魔軍團)으로 피의 율법(律法)만이 존재했던 흡혈귀(吸血鬼)들이었다. 철환마탈(鐵丸魔奪)은 바로 그 혈라마군의 군주(軍主)인 혈라천자(血羅天子)의 독문무공(獨門武功)이었다. 이것은 손에서 강기(剛氣)에 의해 철환(鐵丸)이 형성되는 것으로, 철환은 천하의 그 어떤 호신강기(護身剛氣)도 파괴하며,빠르기가 빛(光)을 능가하기에 일단 격사(擊射)되면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헌데 철환마탈은 혈라마군이 중원을 독패(獨覇)하려는 순간에 단심천영(丹心天營)에게 멸망됨으로써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대지옥의 악마군단인 혈라마군을 격파시킨 단심천영(丹心天營)! 그 이름도 지금은 전설 속의


신화(神話)로 전해 올 뿐 그 실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토(中土)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불리며 개사(開史) 이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세력으로 존재하지만 오백 년 전 혈라마군이 무림을 피바다(血海)로 만들 때 홀연히 나타나 대혈겁을 종식시킨 후 단 한 번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철환마탈을 쓴 자는 스스로 맹사라고 했던가? 천하에 그토록 강한 자가 존재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불신이 가득 찬 백염노승의 독백. 그런데 맹사(盲師)라니? 그는 주검화를 경탄케 했다던 인물이 아닌가? 그런 그가 철환마탈을 썼다면 그는 혈라마군의 후예(後裔)란 뜻이 아닌가? 문득 백염노승의 노안(老眼)에 허망한 빛이 떠올랐다. "상처만 아니라면 영무이절(影無二絶)같은 인자(忍者)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지도 않았을 텐데......" 영무이절(影無二絶)은 아마도 자랑과 모랑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뇌천린이 노승에게 물었다. "대사님! 당신은 벽에 숨어서 내 오줌을 그대로 맞고 있었습니까?" 백염노승은 쓴 웃음을 지으며 얼굴과 옷자락에 묻어 있는 물기(?)를 털어냈다. "할 수 있느냐? 네가 내 전음(傳音)을 듣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위기를 모면하게 해준 대가로 참아야지." 그랬던가? 조금 전에 뇌천린이 영무이절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던 것은 바로 백염노승의 사주를 받았기 때문이란 말인가? 이제야 비로소 뇌천린이 왜 그렇게 엉뚱한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뇌천린은 의혹어린 눈빛으로 백염노승의 구멍 뚫린 가슴을 응시했다. "상처가 그렇게 심한데도 아직 죽지 않은 것이 용하군요." "허허허......!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란다. 나 녹람(綠藍)은 심장이 가루가 되지 않는 한 죽지 않는 몸이란다." 녹람존자(綠藍尊子)! 그것이 바로 백염노승의 법호(法號)였다. 뇌천린이 검미를 살짝 찌푸렸다. "대사님은 중원의 사람이 아닌 것 같군요." "나는 한 가지 물건을 찾으려고 먼 천축(天竺)에서 왔다. 나는 스스로 하늘 아래 적수(敵手)가 없다고 자부했는데 중원에 오자마자 패하고 말았구나......" 녹람존자의 음성에는 짙은 허탈이 잔뜩 실려 있었다. 하늘 아래 자신의 적수가 없다고 자부했는데 패배를 당했으니 마음의상처가 엄청날 것이다. 이 때, 뇌천린은 녹람존자를 격패시킨 맹사란 인물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분도 범상한 인물이 아닌 것 같은데 맹사(盲師)란 인물은 얼마나 대단할까?' 문득, 녹람존자의 진중한 음성이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아이야! 넌 북경에서 오래 살았느냐?" "물론이죠. 토박이니까요." "그래......?" 녹람존자는 기대감이 어린 얼굴로 품 속에서 새하얀 비단천을 꺼냈다. 녹람존자가 비단천을 벗기자 한 면(面)에 천축문자(天竺文字)가 새겨져 있는 붉은 벽돌이 나타났다. 녹람존자가 벽돌을 뇌천린의 눈 앞에 내밀며 물었다. "넌 이런 벽돌을 본 적이 있느냐?" "벽돌이요? 그건 공사장에 가면 많지 않습니까?" 녹람존자는 뇌천린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너에게 물은 내가 잘못이다. 혹시 알까 싶었는데......" 뇌천린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대단한 것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이건 보통 벽돌이 아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봉명사(鳳鳴寺)의 사보(寺寶)란다." 일순, 뇌천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놈의 절도 이상하군. 진산지보(鎭山之寶)를 삼을 게 없어 벽돌로 삼다니......' 녹람존자는 그의 내심을 간파하고 빙긋 웃었다. "이상할 것 없다. 벽돌의 표면에 쓰인 문자는 무공비결(武功秘訣)이다. 봉명사가 강해질 수 있었던 것도 벽돌에 적힌 무공 때문이다." 뇌천린은 희안한 절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벽돌에 무공을 적어놓다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 아닌가? "벽돌에 적힌 무공들은 하나같이 개세의 무공(武功)이다. 그러니 어찌 사보(寺寶)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런데 그걸 잃어버렸습니까?" 뇌천린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녹람존자는 허탈한 눈빛을 허공에 던졌다. "사람이 아무리 머리를 써도 하늘을 따라갈 수 없는 거다. 무공의 유출을 막기 위해 연무관(練武關)에 이 연화장무전(蓮花藏武 )을 배치하고 누군가 연화장무전을 빼내면 건물 자체가 무너지게 설계를 해놨는데 몇 년 전 큰 홍수에 모든 게 허사가 되고 말았다." '벽돌의 이름이 연화장무전인가 보구나.' "그 때 연무관이 물살에 휩쓸려 무너져 버렸는데 연화장무전 도 유실되고 말았다. 차라리 누군가 보관하고 있었으면 아무 탈이 없었을 텐데 말이다." 뇌천린은 진지한 얼굴로 녹람존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연화장무전이 북경까지 흘러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왔는데 뜻밖에도 연화장무전을 찾는 무리가 또 있을 줄은 몰랐다." 일순, 그의 두 눈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뇌천린은 그가 무엇 때문에 분염에 휩싸였는지를 간파했다. "연화장무전 때문에 맹사란 자가 대사를 공격한 것이군요?" "그렇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도 연화장무전이 북경내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우린 연화장무전을 서로 찾다가 부딪히게 된 셈이다." 녹람존자의 음성은 더욱 침중해졌다. "그는 나에게 연화장무전을 포기하라고 했는데 내가 거절하자 격돌하게 된 것이다." "그는 왜 연화장무전을 찾을까요? 무공때문일까요?" 뇌천린의 질문에 녹람존자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추측하기엔 그도 또 다른 연화장무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니, 연화장무전이 여러 개란 말입니까?" 뇌천린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녹람존자는 진중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에는 다섯 개의 연화장무전이 있다 한다. 그 중 세 개가 본 사찰에 있었는데 우린 홍수로 두 개를 분실하고 말았다." "들리는 소문엔 연화장무전은 무공 외에 또 하나의 신비(神秘)를 간직하고 있다는데 그 신비가 무엇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맹사는 그 신비를 알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지금으로선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다만 그는 다섯 개의 연화장무전을 수중에 넣으려는 포부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어찌 되었건 저와는 먼 이야기들이군요. 친구들이 기다리니 이제 그만 들어가겠습니다." 뇌천린은 별 흥미가 없다는 얼굴로 미련 없이 돌아섰다. 바로 그 때 녹람존자의 다급한 음성이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잠깐! 너에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 주겠느냐?"


"무슨......?" 뇌천린은 의아한 얼굴로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녹람존자는 간절한 애원의 빛이 담긴 시선을 뇌천린에게 꽂았다. "후일 연화장무전을 얻게 되면 꼭 봉명사를 찾아 돌려 줬으면 한다." "그건 가능성이 없는 일입니다. 전 무림인이 아니니까요." 뇌천린은 도움을 주지 못함이 미안하다는 듯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녹람존자는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다. 너는 도천성(盜天星)의 기운을 타고난 몸이기에 장차 천하의 보화(寶貨)가 모두 너에게 집중이 될 것이다." 녹람존자는 확신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뇌천린은 쓴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도천성 운운하는 건 녹람존자가 관상(觀相)을 볼 줄 안다는 뜻이나 다 부질없는 미신(迷信)이기 때문이다. "말이라도 고맙군요. 만약 연화장무전이 저에게 들어오면 틀림없이 전해 드리겠습니다." 뇌천린은 말꼬리가 길어지는 걸 피하기 위해 건성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이 한 마디가 후일 자신의 운명을 바꿀 줄은 지금의 뇌천린으로선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녹람존자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품 속에 넣었다. "나도 너에게 연화장무전이 들어온다고 장담은 할 수 없지만 그 말을 들으니 왠지 안심이 된다. 이걸 받아라." 그는 품 안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내 뇌천린에게 내밀었다. <밀교기환범전(密敎奇幻梵傳)> 책자의 겉표지에는 범어(梵語)로 그렇게 쓰여 있었다. 밀교기환범전(密敎奇幻梵傳)은 밀교(密敎)의 진산지보(鎭山之寶)로 천하제일인의 기환공(奇幻功)의 최정수(最精髓)가 담겨있는 비급(秘級)이다. 이것은 일반 기환술(奇幻術)과는 그 차원이 달랐다. 인간의 신체를 자유자재로 변형시킬 수 있는 유가공(琉伽功)을 기초로 하여 발전된 기공(奇功)으로 만약 이것을 십이성 터득하면 삼라만상(森羅萬象) 가운데 변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뇌천린은 궁금한 눈빛으로 책자를 응시했다. "이게 뭡니까?" "장차 연화장무전을 찾아주는 것에 대한 보답이고, 오늘 노납을 도와준 것에 대한 선물이다." 무공을 모르는 뇌천린은 이 책자가 어느 정도 귀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뇌천린이 멀뚱한 눈으로 받을까 말까 망설일 때 녹람존자가 책자를 품 속에 넣어 주었다. "가지고 있으면 너에게 크게 소용이 될 것이다. 언제든지 봉명사로 오너라." 녹람존자는 그를 일별한 후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이때 뇌천린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를 불러 세웠다. "대사님! 저도 부탁이 있습니다." "뭐냐?" "대사님은 무림고수이니 술에 취하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겠죠?" 부탁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인가? 녹람존자는 일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뇌천린을 응시했다. "술에 안 취하려면 무엇 때문에 술을 먹겠느냐? 무림고수도 그런 것은 연구하지 않을 것이다. 헌데 왜 그러느냐?" "저는 날이 새도록 술을 마셔야 되는데 취하면 안되기에 목하 고민 중입니다." 뇌천린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녹람존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망설이다 녹람존자는 품 속에서 무엇인가 꺼냈다. "무슨 곤란한 경우에 처한 모양인데 노납한테 약이 하나 있으니 복용해봐라." 그는 대추알 크기만한 붉은 환약(丸藥)을 내밀었다.


뇌천린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얼른 환약을 받아 입에 넣었다. 입 속에 향긋한 내음이 번지며 뱃속으로 들어가자 정신이 맑아졌다. 예사로운 영약(靈藥)이 아닌 듯 했다. 녹람존자는 뇌천린이 환약을 복용하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복도 많은 놈이군. 천로영정환(天露靈精丸)을 겨우 술 깨는 약으로 쓰다니.' 이럴 수가? 뇌천린이 방금 복용한 환약이 천로영정환이란 말인가? 천로영정환(天露靈精丸)은 천축무림(天竺武林)에서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는 희세(稀世)의 절세영단(絶世靈丹)이었다. 무림인이 복용하면 단숨에 이갑자(二甲子)의 공력(功力)을 얻고, 범인(凡人)이 먹는다 해도 무병장수(無病長壽)하는 천고(千古)의 영약(靈藥)이었다. 무림인이라면 꿈 속에서조차 얻고자 갈망하는 천로영정환은 봉명사에도 두 알밖에는 없었고 어떤 경우에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녹람존자 자신도 그 큰 상처를 입었는데도 복용을 안 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녹람존자는 술 깨는 약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만큼 그는 뇌천린의 운명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뇌천린이 하늘도 말리지 못할만큼 재수가 좋은 걸까? 어찌됐던 뇌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기연(奇緣)을 얻은 것이다. "난 그만 가보겠다. 또 만나기를 빈다." 녹람존자는 후일을 기약하며 유령처럼 사라졌다. 뇌천린은 망연한 눈빛으로 사라지는 녹람존자의 뒷 모습을 지켜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책자를 뒤적였다. "이제보니 무공비급이군. 나에겐 소용 없는 것인데......" 그는 별 흥미를 못 느낀다는 얼굴로 밀교기환범전을 품 속에 갈무리했다. 하지만 그가 어찌 알겠는가? 훗날 밀교기환범전으로 자신이 얼마나 큰 득을 보게 될지를...... ③ 일춘암의 이층(二層)은 일층(一層)과는 달리 내실(內室)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몹시 조용했다. 시끄러운 발소리와 함께 코를 찌를 것 같은 주향(酒香)이 복도에 번졌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나타난 사람들은 뇌천린을 비롯한 무악강의 일행이었다. 단지 벽자란만 빠져 있었다. 그들은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 정도로 만취(滿醉)되어 있었다. 뇌천린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몽사몽(非夢似夢)간을 헤매고 있었다. 뇌천린은 천로영정환의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뇌천린이 다른 소년들을 쳐다보며 큰소리를 쳤다. "야......! 더 마시자는데 어딜 가는 거냐?" "끄윽......! 너란 놈은 특수체질(特殊體質)이냐? 처음엔 술이 취하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항아리로 부어도 끄떡 없잖아?" 도운백은 도저히 못 당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뇌천린은 내심 득의해 있었다. '녹람존자가 준 약은 역시 효험이 있군. 그토록 마셔도 취하지 않으니......' 이때, 무악강이 질렸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천린! 우린 더 이상 마실 여력도 없다. 그리고 또 다른 예정이 있으니 그만 마시자." "다른 예정......? 헌데 벽자란은 왜 빼놓고 왔지?" 뇌천린이 의아해 하자 무악강이 야릇한 미소를 흘렸다. "이번엔 벽자란이 낄 수 없는 좌석이기 때문이다." "끅......! 벽자란이 낄 수 없다니...... 무척 궁금해 지는데." 소불진은 취중에서도 기대가 가는지 얼른 끼어들었다. "보채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라! 곧 알게 될테니까." 무악강은 세 사람을 차례대로 하나씩 내실(內室)에 밀어 넣었다. 세 사람은 엉겁결에 무악강이 미는 대로 내실로 들어갔다.


내실(內室)은 여인의 규방(閨房)처럼 아늑하고 방향(芳香)이 가득히 넘실거리고 있었다. 한 쪽에는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연분홍빛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안에는 호화로운 침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뇌천린은 무악강에게 떠밀려 내실로 들어왔지만 그 의도가 뭔지를 몰라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곳에......? 그냥 잠이나 자라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이 안 나오자 그는 침상에 몸을 눕혔다. 아무리 영약의 효험을 보고 있지만 술에는 장사가 없는 법, 뇌천린도 기실 피곤했던 것이다. 침상은 참으로 안락하고 푹신하여 심신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드려는 찰라, "나는 안 들어가! 날 화나게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곽총관도 잘 알잖아?" 밖에서 앙칼진 여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곽자호의 당혹한 음성도 뒤따랐다. "오늘은 안돼! 형님의 특별 분부인데 사람 수가 모자른다. 너도 포함되어야 해." 그는 여인을 달래고 있었다. 뇌천린은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이면 이 방 앞에서 시끄럽게 하지? 헌데 기녀(妓女)가 아닌 모양이군. 그렇지 않으면 곽총관이 저토록 쩔쩔 맬 이유가 없잖아?' 이때, 여인의 음성이 더욱 완강하고 단호해지고 있었다. "내가 뻔히 잠자리를 하지 않는데 내실로 들어가면 무슨 소용이 있어?" "그래도 나는 일단 명령을 받았기에 수행해야 돼. 네가 안에서 무슨 짓을 벌이든 상관않겠어. 나는 각 내실에 여인을 넣어 주었다는 것으로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니까......" 곽자호의 사정은 계속되고 있었다. "부탁이다. 앞으로 네가 일춘암에서 가만히 앉아 먹고 살게 할테니 오늘 만큼은 들어가라." "무악강이란 자가 그렇게 무서워?" "넌 암흑가의 율법(律法)이 얼마나 엄한지 모를 거야." "좋아! 들어가겠어. 날 어떻게 할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여인의 다부진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순간 뇌천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 이곳으로 들여 보내려고 싸웠단 말인가? 이제 보니 무악강이 말한 다음 예정은 여인과 동침(同寢)......?' 그는 그제서야 무악강의 의미심장한 미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헌데, 어떤 여인이길래 이토록 당차지? 아직 사내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는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문 앞에 우뚝 서 있는 여인을 살펴보았다. 여인(女人)은 대략, 십칠 세 가량 되었을까? 사내의 간장(肝臟)을 한 순간에 녹여 버릴 것만 같은 엄청난 미모를 갖춘 절세 미녀였다. 팔등신(八等身)의 쭉 빠진 몸매가 시원스러웠고, 보조개가 살짝 파인 도화빛 뺨에는 뜨거운 정열이 담겨 있었으며, 석류를 베어 문 듯한 작은 입술과 가을 날 맑은 호수처럼 청정(淸淨)한 눈망울은 사내의 혼백을 빼앗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전신에는 어딘지 모르게 매서운 기운이 풀풀 날리고 있었으니 가시 달린 장미(薔薇)를 연상케 하는 그런 여인이었다. "흥! 꿈만 잔뜩 부풀어 있다가 봉변을 당할 자가 누군지 궁금하군." 청의소녀가 입가에 경멸의 조소를 한껏 베어문 채 침상으로 다가왔다. 뇌천린은 그녀의 당돌한 말에 어안이 벙벙한 채 두 눈만 멀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청의소녀는 침상 앞에 이르러 우뚝 걸음을 멈추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보니 아이잖아......?" "뭐? 아이......?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오?"


뇌천린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무나 모욕적인 언사(言辭)였던 것이다. 하지만 청의소녀는 그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있었다. "이곳에 너말고 또 누가 있니?" "너......?" 뇌천린은 너무 어이가 없어 아예 말문이 막혀 버렸다. '기가 막힐 일이군.' 너무도 거침없이 자신을 애 취급하니 뇌천린은 뭐라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얘! 너는 어서 침상에서 내려와! 이곳은 너같은 아이가 오래 있으면 정서(情緖)를 해치는 곳이야." "도대체 누가 아이란 말이오?" "흥! 너는 나보다 나이가 어리잖아? 그러면 아이지 어른이냐?" 청의소녀의 핀잔에 뇌천린은 내심 울화가 치밀었다. '빌어먹을......! 천하의 뇌천린이 꼼짝 없이 아이가 되는군. 안되겠다. 오늘 버릇을 단단히 고쳐놔야 겠다.' 그는 잠시 염두를 굴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저는 이곳의 기녀요?" "그런 것은 알 필요 없어. 어서 나가기나 해." "내가 안 나간다면....?" "어른 흉내를 내고 싶은 모양인데 그러다간 혼 나. 좋은 말로 할 때 말을 듣는 것이 좋을 거야." 청의소녀는 두 손을 가냘픈 허리에 척 얹으며 싸늘한 얼굴로 뇌천린을 쏘아 보았다. 뇌천린은 어림 없다는 표정으로 짐짓 근엄한 음성을 토했다. "누구에게 혼이 난단 말이오? 나는 분명 이곳의 손님인데......" "흥! 나를 보통 기녀로 생각하면 오산이야. 나는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놔두지 않아." 청의소녀는 냉랭한 얼굴로 다짜고짜 달려들어 뇌천린의 목덜미를 잡아 끌었다. 그녀의 완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뇌천린은 엉겁결에 그녀에게 끌려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바닥에 벌렁 누운 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청의소녀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렸다. "호호호......! 고분고분 했으면 귀엽게 봐 주려고 했는데...... 그러기에 옛 말에 어른 말씀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거야." 그녀의 득의에 찬 교소는 한동안 그칠 줄 몰랐다. 뇌천린의 검미가 힘차게 꿈틀거렸다. 기분이 상당히 나빠진 것이다. '더 이상 못 참겠다. 아직 여인과 동침을 해 본 적이 없어 그냥 나가려 했는데 이런 봉변을 당했으니 장부(丈夫)의 체면은 세워야 한다.' 드디어 그 누구에게도 굽힐 줄 모르는 그의 오기(傲氣)가 발동했다. 무슨 계책이 떠올랐는가? 그는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소저! 소저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능력이 같다고 생각하오?" 청의소녀는 뇌천린의 엉뚱한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열다섯 살 난 영웅과 육순의 범인(凡人)은 누가 더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그야 열다섯 살 난 영웅이지." 청의소녀은 뇌천린의 의도도 모르고 냉큼 대꾸했다. "후후후......! 그렇소. 소저는 나이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고 있구료." 뇌천린은 기이한 웃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청의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여인은 장부의 나이를 따질 형편이 못 되오. 왜냐하면 혼례를 안 올린 장부는 갓 태어난 여아(女兒)에서 늙은 노파까지 자신의 부인으로 선택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오."


".......!" "즉, 천하의 모든 여인이 혼례를 올리면 장부(丈夫)의 아래가 되기 때문에 소저도 결코 나보다 어른이 아니오." 궤변(詭辯)이었다. 그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맞는 듯한 알쏭달쏭한 논리였다. 청의소녀는 사고에 혼란을 가져온 것을 숨기려는 듯 싸늘하게 냉소를 터뜨렸다. "흥! 조그만한 게 입만 뻔지르르하군." "후후후......! 못 믿겠다면 그 증거를 보여 드리겠소." 뇌천린은 갑자기 그녀의 양 어깨를 잡고 뒤로 확 밀었다. "어머!" 청의소녀는 너무도 갑작스런 행동에 기겁을 하며 침상 위로 넘어졌다. 순간,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뇌천린은 날쌔게 청의소녀의 몸 위로 몸을 덮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어서 비켜!" 청의소녀는 사지를 버둥거리며 교갈을 터뜨렸다. 하지만 뇌천린은 더욱 힘껏 그녀의 몸을 짓눌렀다. "이건 내게 소저를 꼼짝 못하게 할 완력이 있다는 첫번째 증거이고......" 뇌천린의 손이 거침없이 풍만하고 탐스러운 그녀의 젓가슴을 움켜쥐었다. "두번째 증거는 여인 하나 쯤은 가볍게 함락시킬 만큼 나도 어엿한 장부라는 것이오." "손...... 저리 치우지 못해?" 청의소녀는 사색이 된 채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어찌 나약한 여인의 몸으로 사내의 힘을 당할 수 있으랴! 그녀는 안간힘을 썼지만 조금도 뇌천린을 밀쳐낼 수가 없었다. 뇌천린의 손은 그녀가 밀치려고 애를 쓸수록 더욱 그녀의 구석구석을 더듬고 있었다. "망할 자식아! 내가 가만 놔둘 줄 알아?" 그녀가 연신 악을 썼으나 뇌천린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덧 뇌천린의 손은 그녀의 비소(秘所)까지 침범하고 말았다. 수치심을 못 이겨서인가? 한순간 그녀의 몸이 축 처졌다.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뇌천린이 말했다. "이래도 내가 소저에게 어린애 소리를 들어야 하고 반말을 들어야 하겠소?" "내...... 내가 잘못했어......" 청의소녀는 울상이 된 얼굴로 사과했다. "어허! 그래도 정신을 덜 차렸군." 뇌천린이 정색을 하며 빼내려던 손을 다시 치마 속으로 집어 넣었다. "제발...... 그만 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청의소녀는 질겁을 하며 신형을 부르르 떨었다. 뇌천린이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바른 말이 나오는군. 그럼 날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도 알겠군." "이름이 뭔데요?" "뇌천린!" "뇌...... 뇌 공자님......!" 청의소녀는 마지 못해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뇌천린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알겠소. 이게 세상의 순리(順理)요." 청의소녀는 분한 듯 눈물을 글썽이며 일어났다. 그녀는 독기(毒氣)가 가득 찬 눈으로 뇌천린을 쏘아보며 야멸차게 말했다. "당신을 그냥 두지 않겠어요." "나중 일에 겁 먹을 만큼 나약한 내가 아니오. 이만 가보겠소."


뇌천린은 그녀를 비웃으며 신형을 돌렸다. 바로 그 때, 무엇하려는 것인가? 갑자기 청의소녀가 후다닥 창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뭘 하려는 거지?' 뇌천린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깜짝 놀라 소리쳤다. "소저! 무슨 짓이요?" 청의소녀는 창문에 올라가 밑으로 투신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뇌천린은 당혹한 얼굴로 재빨리 달려가 창틀 위에 올라선 그녀의 몸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은 한데 어울려 바닥 위에 나뒹굴었다. 뇌천린은 놓칠세라 그녀의 몸을 꼬옥 부둥켜 안고 있었다. 청의소녀는 두 뺨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발버둥을 쳤다. "놔요! 난 죽어야 해요." "왜...... 왜 이러는 거요?" "몸을 더럽혔으니 더 살아 뭐해요?" 그녀는 정말로 자살하려는 듯 삶을 체념한 기색이 완연했다. 뇌천린은 내심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놀라고 있었다. '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고 살결 좀 만졌기로서니 죽으려 하다니...... 불같은 성격과는 달리 순결한 마음도 있군.' 뇌천린이 그녀를 꽉 찍어 누르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만한 일로 죽으려는 거요? 그대는 기녀가 아니오?" "난 기녀가 아니예요. 지금은 이런 처지에 있지만 동영(東瀛)에서 제일가는 무가(武家)의 딸이란 말이에요." "소저가 동영인이란 말이오?" 뇌천린은 뜻밖의 말을 듣고는 해연히 놀랐다. "그래요. 해변에 나들이 나왔다가 해적(海賊)에게 피납되어 이런 처지가 되었지만......" 자신의 처지가 기구한 게 서러워서인가? 그녀의 두 눈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언젠가는 동영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때까진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 했는데......" 그녀의 두 눈에는 절망의 빛이 가득했다. 뇌천린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언제 몸이 더럽혀졌다고 자꾸 이러는 것이오?" "마찬가지예요. 우리 가문(家門)에선 부군(夫君) 외엔 여자의 살도 보일 수가 없어요. 헌데, 사내의 손이 내 몸에 닿았으니...... 흐흑......!" 급기야 그녀는 서럽게 오열을 터뜨렸다. 뇌천린은 구슬프게 흐느끼고 있는 청의소녀를 응시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난감하게 되었군. 그냥 놔두자니 정말 자살할 것 같고......' 청의소녀의 자존심을 무참히 꺾어 버리겠다는 오기가 뜻하지 않았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뇌천린은 사내대장부로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저! 소저가 자결하지 않아도 좋을 방법은 없소?" 그의 말에 청의소녀는 울음을 그치며 잠시 무엇인가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물기 젖은 두 눈에 이채를 떠 올리며 입을 연 것은 잠시 후였다. "있긴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승낙하지 않을 거예요." "그게 뭐요? 내 힘 닿는 데까지는 노력하겠소." "당신이 죽는 방법이에요." 청의소녀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간단히 말했다. 뇌천린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건 곤란하고...... 다른 방법은 없소?" 뇌천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죽어야 한다니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요구였다. 청의소녀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차가운 얼굴로 냉소를 날렸다. "흥! 그것 봐요. 난 당신이 거절할 줄 알았어요. 지금으로선 그 방법뿐이에요." '빌어먹을......! 그것도 방법이라고 말하고서는 도리어 나를 핀잔 하는군. 죽던 살던 그냥 놔둘까?' 그는 내심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의 억지는 전혀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켜요. 난 다시 뛰어 내릴 수밖에 없어요."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 보시오. 분명 다른 수가 있을 것이오." 그는 초조한 얼굴로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아섰다. 애원을 해야 될 처지가 되다니 주객이 전도된 셈이었다. 청의소녀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에 골몰했다. 이윽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의 두 눈에 야릇한 생기가 감돌았다. "이제 마지막 방법은 한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사람을 죽이다니...... 누구를 말이오?" "동영제일의 인자집단(忍子集團)인 용수혈의 혈주인 야왕(夜王)이에요." 이게 무슨 말인가? 용수혈(龍手血)이라니? 그런데 용수혈이 동영최고(東瀛最高)의 인자집단이란 말인가? 기억하는가? 도운백이 용수혈을 궤멸시키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는 것을....... 그런 용수혈이 지금 청의소녀의 입에서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용수혈은 우리 가문과 숙적(宿敵)이에요. 아버님은 누구든 야왕을 죽이는 사람에게 저를 준다고 공표한 적이 있어요." "야왕을 죽이면 당신은 내 여인이 되기에 살결 좀 만진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군." "그래요." "헌데, 야왕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이오?" "그건 나도 몰라요. 그는 아직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았으니까요." 청의소녀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간 동영에 있을 게 아니오?" "그렇겠죠. 허나 그의 종적을 안다 해도 당신에게는 지금 능력이 없잖아요?" "도대체 나보고 어떻하라는 거요?" 뇌천린은 짜증스러운 듯 퉁명스럽게 쏘아 부쳤다. 허나, 청의소녀는 그의 기분이 어떤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저의 오라버니가 저를 찾아 중원으로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저의 오라버니는 동영의 최고수(最高手)로 불리는 무정지옥도(無情地獄刀) 궁택무본(宮澤武本)이에요." 오라비의 이름을 말하는 그녀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청의소녀의 오라비는 동영 내에서도 이름난 무사인 모양이다. "당신은 오라버니가 이곳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요. 오라버니는 당신을 야왕보다 뛰어난 고수로 만들어 줄 거예요." 뇌천린은 어이가 없었다. 청의소녀는 자신이 죽지 않으려고 자신에게 편한 방법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난 바쁜 몸이오.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당신의 오라버니를 어떻게 기다리란 말이오?" 뇌천린은 말같잖은 소리는 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청의소녀는 앙칼지게 교갈을 터뜨렸다. "제가 죽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 해요." '빌어먹을......! 남의 목숨을 협박하는 경우는 봤어도 자기 목숨을 가지고 남을 협박하는 경우는


처음이군!' 뇌천린은 그녀가 억지를 쓰는 것 같아서 은근히 화가 났다. "난 더 이상 간여하고 싶지 않소. 죽든지 살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그는 차가운 음성을 내뱉으며 미련없이 돌아섰다. 청의소녀가 재빨리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이젠 죽을 마음이 없어졌어요. 대신 당신은 저를 책임져야 해요." "책임......?" "당신이 저의 정조(情操)를 뺏어 갔으니 당연하잖아요." 청의소녀가 뇌천린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엔 절대로 그냥은 보내주지 않겠다는 결의가 역력했다. 뇌천린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아무런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순 억지뿐이군. 몸 좀 만졌다고 정조가 뺏겨? 그나 저나 왜 이리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거지?'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청의소녀의 속셈을 간파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겠다고 난리를 치더니 이젠 그를 어떤 올가미에 옭아매려 야단이 아닌가? 그녀의 의도가 어디에 있던 더 있어봐야 득될 게 없다 싶은 뇌천린은 달아날 결심을 했다. 하지만 청의소녀의 눈치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뇌천린에게 바짝 다가들며 강요하듯 말했다. "설마 자기의 내자(內子)를 버리고 도망가지는 않겠죠?" 그녀의 말에 뇌천린은 기겁을 했다. 이 무슨 황당무계한 말인가? 내자(內子)라니? 그렇다면 청의소녀는 이미 뇌천린에게 일생을 맡기기로 결심했단 말인가? 뇌천린은 어안이 벙벙하여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기가 막히군. 세상을 살다 살다 이런 억지는 처음이군.' 뇌천린이 어이없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청의소녀는 양순한 여인처럼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당신을 믿어요. 결코 내자를 버릴 사람이 아님을....... 일이 있으면 나가 보세요." "도대체 무슨 헛소릴 하는 거요?" 뇌천린이 짜증을 냈지만 그녀의 태도는 막무가내였다. "당신이 내 몸을 만졌으니 난 당신에게 시집갈 수밖에 없어요. 날 버린다 해도 난 당신의 여자로만 남을 거예요." 우기다 못해 이젠 처량맞게 나오자 뇌천린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뇌천린은 선뜻 그녀의 억지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 정말로 자신을 기다린다면 그의 성격상 모른 척 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소저! 억지 좀 그만부리시오. 그리고 이 일은 우리 둘밖에 모르니까 내가 입을 다물면 아무 일도 없는 거요." 뇌천린이 달래려 들자 청의소녀의 입가로 한 줄기 미소가 스쳤다. 그녀는 뇌천린이 어떤 성격인지 파악한 것이다. 뇌천린은 위기를 벗어나려다 도리어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청의소녀에게 자신을 어떻게 다루면 된다는 걸 가르쳐 준 셈이었다. 청의소녀는 생글거리며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나가봐요. 난 남자에게 부담주는 여자는 아니예요. 하지만 당신을 부군(夫君)으로 생각하는 건 변함이 없어요." '미쳐버리겠군.'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처지에 뇌천린은 숨이 막혀왔다. 그 때 난데 없이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린! 아직도 단꿈에 젖어 있냐? 빨리 나와라." 무악강의 우렁찬 고함 소리였다.


'단꿈? 그래 제발 악몽(惡夢)이었으면 좋겠다.' 뇌천린은 내심 투덜거렸으나 기회다 싶어 청의소녀에게 얼른 말했다. "친구들이 부르니 일단 나가보겠소. 그 문제는 다음에 다시 상의 합시다." 그는 그녀가 붙잡을까봐 지체없이 신형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상의할 것도 없어요. 확정된 것이고 불변(不變)한 것이니까요." 그녀의 태도가 조금도 바뀌지 않자 뇌천린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대로 하시오. 난 모르는 일이니까." 뇌천린은 그녀를 쏘아주고는 나가버렸다. 그런 그의 등 뒤로 자신만만한 청의소녀의 음성이 꽂혔다. "내 이름은 희엽(姬葉)이에요. 기억해두세요." '그러지 않아도 머리 복잡한 사람인데 쓸데없는 걸 왜 기억해?' 뇌천린은 마음 속으로 비웃고는 문을 꽝 닫았다. 혼자 남은 희엽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뜻대론 안될 걸." 무엇이 갑자기 그녀를 변하게 했는가? 울고불고 하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의 청의소녀에게는 희망이 넘치고 있었다. '흥! 희엽은 욕심이 많은 여자야. 처음에는 몰랐는데 당신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가 오라버니를 능가함을 알았어. 당신은 필경 대륙제일인(大陸第一人)이 될거야.' 그녀는 스스로 사람보는 안목이 예리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아니 자부가 아니라 그건 사실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뇌천린의 비범함이 발견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태도를 바꾸고 집요한 공세로 나갔던 것이다. '여인의 꿈은 영웅을 부군(夫君)으로 맞이하는 것......!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어요.' 희엽(姬葉)은 뇌천린의 그릇에 대해 단정을 내리고 있었다. '제가 마음 먹은 이상 당신은 나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녀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거센 열정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호호호......! 꼼짝 못할 올가미를 씌워 놨으니 걱정없어. 몸에 만리추종향(萬里追踪香)을 뿌려 놨으니 도망가봐야 금방 들키게 되어 있어.' 그래서 그녀는 뇌천린을 순순히 놓아 주었던 것인가? '어서 오라버니가 와서 저 사람을 데리고 동영(東瀛)으로 돌아가야 할텐데......' 희엽(姬葉)의 가슴은 열정으로 물결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말이다. 제 5 장 침만보장(侵萬寶莊) ① 만보장(萬寶莊)은 북경 제일의 거부(巨富)인 금산대부(金山大夫) 여불군(呂不君)이 살고 있는 거대한 장원(蔣院)이었다. 엄청난 부(富)를 과시하려는 듯 수십 채의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이 웅장하게 솟아 있는 만보장은 천하의 온갖 기진이보(寄珍異寶)가 결집되어 있기로 유명했다. 특히, 장진관(藏珍琯)은 만보장에서도 가장 소중한 기진이보가 소장(所藏)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밤(夜)이었다. 야천(夜天)에 걸려 있는 쪽달이 처량하게 은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된 무사들이 장진관(藏珍琯)의 주위를 순찰하며 빈틈 없는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무사들의 눈빛은 올빼미의 그것처럼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삐익! 삑! 한 순간, 난데 없이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적막한 야천을 찢었다. 이어, 사방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외인(外人)이 장진관을 침입했다." "분명 보화(寶貨)를 노리는 도둑일 것이다. 수색해라."


아우성과 함께 숨어 있던 수 십 명의 무사들이 장진관으로 몰려 들었다. 만보장은 순식간에 대낮처럼 밝아지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백화각(白花閣) 쪽으로 갔다." 어디선가 다급한 외침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휘익! 휙! 경비 무사들이 지체없이 백화각이 있는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백화각은 만보장의 후원 쪽에 있는 누각으로 만보장주의 딸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지금 한 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촉급한 걸음으로 백화각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토록 삼엄한 줄은 몰랐다. 더구나 경보 장치가 기관(機關)에 연결되어 있을 줄이야.' 부상을 입은 인물은 만보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었다. 문득, 질주하던 인영은 신형을 우뚝 멈추었다. 바로 그 때, 구름 속에 살짝 몸을 숨기고 있던 조각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인영의 모습이 한 눈에 드러났다. 뜻밖에도 그는 보화사에 나타났던 청의유생이었다. 아니 그의 진정한 이름은 모란도수 뇌천린이다. 뇌천린은 지금 변장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다. 뇌천린은 고통스런 얼굴로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그의 발에는 화살 하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는 조금 전에 장진관에 접근 하였다가 기관이 작동되어 부상을 입은 것이다. 뇌천린은 이빨을 짓깨물며 지체 없이 화살을 잡아 뽑았다. 촉이 낚시 바늘처럼 휘어진 화살이 뽑히자 시뻘건 핏기둥이 솟구쳤다. 그는 재빨리 지혈(止血)시키며 내심 투덜거렸다. '맹수(猛獸)를 잡나? 그냥 화살도 치명적인데 꼭 뽑히지 말라고 휘어 놓다니.' 문득, 그의 얼굴에 아쉬운 빛이 떠올랐다. '경보장치가 하나는 아닐테고 첫번째는 이미 겪어 보아 암기(暗器)가 나오는 것이란 걸 알았는데 나머지가 뭔지 파악 못한게 아쉽군.' 이제 보니 그는 경보 장치에 연결되어 있던 기관에서 쏟아지는 암기에 부상당했던 것이다. '비록 상처는 입었지만 소득은 있었다. 잠복조의 위치, 경비무사의 수, 그리고 경보 장치의 묘용(妙用) 등을 알았으니까.' '이런 것들은 침투를 해 보지 않으면 파악하기가 힘든 것들이지.' 뇌천린의 침투 목적은 장진관의 경비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수 일이란 극히 드문 법이었다. 그렇기에 비록 다쳤지만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이 고통이 장차 기진이보(奇珍異寶)를 손에 넣는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뇌천린은 이내 상처를 감싸 맨 후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앞에 백화(百花)가 만발한 호화로운 누각이 나타났다. 뇌천린은 안도의 빛이 떠오르는 눈으로 누각을 응시했다. '저곳이군. 여하경의 처소가......' 그렇다! 마치 무릉도원(武陵桃源)같은 화원(花園)의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누각은 바로 여불군의 금지옥엽인 여하경의 처소인 백화각(百花閣)이었다. 뇌천린은 거침없이 백화각을 향해 걸어갔다. '여하경을 이용해 경비 무사들을 쫓고 나머지 경보 장치와 이번에 입수한 물품에 대해 알면 모든 것이 성공이다.' 화려한 내실(內室). 풋풋한 방향(芳香)이 넘실거리는 가운데 황촉불이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사면을 포근히 휘감고 있는 능라비단의 휘장과 실내를 장식하고 있는 기물들이 매우 사치스러웠다. 호화스런 침상의 맞은 편에 놓여 있는 동경(銅鏡) 앞에선 지금 한 여인이 삼단같이 긴 머리를 빗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여하경이었다. 문득, 여하경은 빗질을 멈추며 동경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우수(憂愁)에 가득 찬 두 눈,


그 동공에는 한 인물의 영상이 아로 새겨져 있었다. '한 번 오시겠다는 분에게서 아직 소식이 없으니......' 그녀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요즘 보화사에서 만난 한 남자 때문에 상사병에 걸릴 지경이었다. 자신의 욕망과 허영심을 채워줄 수 있는 그 사람은 꼭 들르겠다고 했지만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이다. 오늘도 그녀는 오지 않는 사람을 그리며 몸 치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치장을 할 때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리며 찬 바람이 휙하니 몰아쳤다. "누구냐?" 여하경은 경악에 찬 교갈을 터뜨리며 황급히 일어섰다. 그녀의 눈에 문을 열고 쓰러져 있는 한 인물이 들어왔다. 쓰러져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꿈에도 그리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머! 운공자님! 이게 어찌된 일이에요?" 그녀는 다급한 얼굴로 뇌천린을 부축했다. 뇌천린은 짐짓 창피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도 여소저가 보고 싶어 창피를 무릅쓰고 월장을 하다가 도둑으로 오인 받아 그만......" "당당히 정문으로 와도 될 일을 어째서 월장을 했단 말입니까?" 그녀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명문(名文)의 자제가 어찌 부모님도 모르는 아녀자의 집을 남의 눈에 뜨이게 드나들 수 있겠소?" 뇌천린이 이미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라 망설이지 않고 대꾸하자 여하경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을 보려다 이 지경이 된 사람을 한 순간이라도 의심한 게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군요. 아무리 그래도 공자님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소? 본분에 충실한 것 뿐인데." "아니예요. 당장 경비 무사들을 단단히 혼을 내주어야 겠어요." 뇌천린에 대한 의심이 풀리자 그녀는 경비 무사들에게 화가났다. 하찮은 경비 무사들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토록 크게 다쳤으니 그녀의 성격으론 참기 힘든 일이었다. 그녀가 펄쩍펄쩍 뛰자 뇌천린은 당황하고 말았다. 정말 그렇게 한다면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고 말 것이다. "아니오. 그렇게 되면 내 존재가 알려집니다. 대천성유제학위연사의 신분인 내가 아녀자의 집이나 월장한 놈으로 소문나서야 곤란하지 않소." "그렇군요." 여하경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듯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들이 오면 침입한 사람이 없다고 말해주시오." "알겠어요." 여하경은 뇌천린이 신분 노출을 극도로 두려워하자 자신이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 일이 누(累)가 되어 장차 관직이라도 박탈당하면 자신도 망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하경이 뇌천린을 침대에 눕히고 소란스러워진 밖으로 나갔다. 침대에선 성숙한 여인의 체취가 느껴지는 방향(芳香)이 풍겨나고 있었다. 뇌천린은 편하게 누워 밖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여하경이 잘 처리할거라고 믿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 최대의 무기는 여하경의 허영심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고 싶은 일념에 눈과 귀가 멀 것이다. 밖으로 나간 여하경이 침소 앞에 늘어서 있는 무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야심한 밤에 웬 소란들이냐?" 무사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본 장에 침입한 괴인이 있는데 이쪽으로 달아났습니다. 혹시 무슨 기척을 듣지 못했습니까?" "아무런 기척이 없었는데." 여하경이 시치미를 떼자 무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이쪽으로 왔는데......" 여하경이 발칵 화를 냈다. "내가 못봤다지 않느냐? 내가 도둑이라도 숨겨주고 있다는 거냐?" "아... 아닙니다." 여하경의 성질을 잘 아는 무사는 더 머뭇거렸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주변 무사들에게 철수 신호를 보냈다. 모두 떠난 걸 확인하고 여하경은 내실로 들어갔다. 침상으로 다가온 여하경이 사랑스런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보냈어요." "고맙소." "고맙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여하경이 짐짓 부끄러운 빛을 띄우며 침상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보다 상처는 어떠세요?" 여하경은 걱정스런 얼굴로 그의 발목을 살펴 보았다. "어머! 이렇게 많이 다치다니......." 그녀는 상처를 감싸고 있던 천을 풀고는 놀라버렸다. 뇌천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하였다. "괜찮소. 며칠 쉬면 나을 거요." "그럼 며칠 간은 이곳에 있어야 겠군요?" "무례한 일이나 그래야 될 것 같소." 뇌천린은 정녕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하경은 내심 뛸 듯이 기뻤다. '잘 됐어. 이 기회에 이 사람을 완전히 사로 잡아야지.' 그녀는 비상약을 꺼내 뇌천린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뇌천린이 며칠 묵는다고 해서인지 여하경은 콧노래가 절로 나오고 상처를 치료하는 손이 경쾌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뇌천린은 여하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여하경을 손아귀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순간, 여하경이 문득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뇌천린을 올려다 보았다. 일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 "......?" 여하경은 그녀답지 않게 수줍은 듯 얼굴이 빨개지며 눈을 예쁘게 흘겼다. "뭘 그렇게 쳐다봐요?" "후훗! 아무리 보아도 여소저는 아름답구료." 뇌천린은 짐짓 황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아 당겼다. "이러면...... 안돼요." 여하경은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으나 아무런 저항 없이 뇌천린의 품에 안겼다. 뇌천린은 그녀의 풍만한 몸을 힘껏 끌어 안으며 귓가에 뜨거운 입김을 쏟아 부었다. "상처가 나으면 부모님께 말씀드릴 작정이오." "정말이세요?" "왜 거짓말을 하겠소. 여소저같은 여인을 어디 가서 또 찾겠소?" 그는 달콤한 말을 주저 없이 속삭이며 그녀의 가슴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팽팽한 수밀도(水蜜桃)가 손 안 가득 들어왔다. 여인은 한 번 스친 사내의 손길에는 약해지는 동물인가? 뇌천린의 손이 애무를 시작하자 그녀는 반항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안겼다. "하아...!" 뇌천린의 손길이 지핀 육체의 열기를 감당못해서인가? 그녀의 고운 입술에선 연신 가쁜 숨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한순간 뇌천린이 여하경의 입술을 빨자 그녀는 정신마저 아득해짐을 느꼈다. 이미 그녀는 뇌천린의 손 안에 든 작은 새였고 뇌천린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치마 속으로 들어간 뇌천린의 손이 그녀의 매끄러운 엉덩이를 끌어 당기자 여하경은 하복부를 바짝 뇌천린의 하체에 밀착시켰다. 그건 모든 걸 허락하겠다는 뜻이었다. '음! 이쯤에서 적당히 멈출까?' 애가 탈수록 집착력이 더 강해지는 법, 그는 천천히 손을 빼며 멋적은 듯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미안하오. 여소저와 있노라면 나는 아예 자제력이 없어지는구료." 결정적인 순간에 손을 빼자 여하경은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아쉬운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다. 자신을 바람끼 많은 여자로 생각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뇌천린이 그녀를 밀어내자 여하경은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단정한 자세를 취했다. 뇌천린이 내실을 둘러보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저의 침실에 머물 수는 없고 어디에 있어야 남들 눈에 뜨이지 않겠소?" 여하경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본 장내에선 여기가 제일 안전해요. 다른 곳은 사람들 이목을 피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남녀가 유별한데 어떻게 한 방에..." 뇌천린이 난감해하자 여하경이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제 한 몸 이미 공자님에게 맡긴 것이나 다름없는데 뭘 그리 따지십니까? 전 혼례만 안 올렸다뿐이지 진작부터 공자님을 지아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하경이 강하게 나오자 뇌천린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는 그녀가 이렇게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티는 못내고 짐짓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너무 체면만 따졌다면 용서하십시요." "괜찮아요. 공자님은 아무 걱정마시고 편히 쉬시기나 하세요." 자신의 압력에 풀이 꺾였다 여겨지자 여하경은 기분이 좋아졌다. 며칠을 묵는 동안 좀 더 요리하면 그녀는 꿈에도 그리는 고관대작의 부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가씨! 아버님 드십니다." 그 때, 난데없이 문 밖에서 시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이? 이를 어쩌지......? 이곳에는 숨을 곳이 없는데......" 여하경은 당혹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뇌천린 역시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숨을 곳이 없단 말이오?" "당신은 어서 이불 속에 숨어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여하경이 재빨리 뇌천린을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뇌천린은 불안한 눈빛으로 얼른 입을 열었다. "대체 어쩔 셈이오?" "걱정 마세요. 제게 생각이 있으니까......" 여하경은 염려 말라는 듯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다. 눈 앞에서 옷을


벗어젖히자 뇌천린은 정신이 아찔했다. 백옥(白玉)으로 빚어 놓은 듯한 성숙한 여체(女體)의 나신(裸身)이 그의 숨을 막히게 했다. 희고 군살 하나 없는 몸매에 터질 듯 팽팽히 부풀어 오른 두 개의 풍만한 젖무덤, 그리고 그 정상에 잘 익은 과육(果肉)처럼 한껏 돌기되어 있는 선홍(鮮紅)의 유두, 그 아래로 쥐면 꺾일 듯 잘록한 한 줌의 허리와 갑자기 부푼 풍만한 둔부와 삼각지대의 은밀한 삼림(森林), 거기에 물을 박차는 인어(人魚)같이 싱싱하고 탄력있는 미끈한 허벅지...... 실로 무엇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나신이었다. 그 나신이 찰라지간이었지만 모조리 뇌천린이 동공 속 가득히 파고 들었던 것이다. 그는 너무도 유혹적인 모습이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바로 그 때, "하경아! 자느냐?" 인자한 음성과 함께 문을 열고 한 인물이 들어섰다. 사순 가량 되었을까? 거부(巨富)답지 않게 비쩍 마른 그 인물이 바로 금산대부(金山大夫) 여불군(呂不君)이었다. 여불군은 방 안으로 들어서다 기겁을 했다. 딸 아이가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모습으로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까악!" 여하경의 비명소리가 방 안을 찢었다. "아버님! 전 지금 옷을 갈아 입고 있는 중이에요." 여하경이 방바닥에 흩어진 옷 자락으로 황급히 나신을 가리며 소리쳤다. "미...... 미안하다." 여불군은 당황하고 놀라 황급히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여하경은 자신의 계책이 성공하자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그녀가 밖을 향해 묻자 여불군은 아직도 벌개진 얼굴로 연신 헛기침을 했다. "험!험! 별거 아니다. 도둑이 침입했다기에 어찌 되었나 해서 와봤을 뿐이다." "전 별 일 없어요. 그리고 피곤해서 그만 자야겠어요." "그러려무나......" 여불군은 민망한 듯 발걸음을 재촉하여 백화각을 떠났다. 여하경은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이불을 들추었다. "이제 나와요." 하지만 뇌천린은 두 눈을 꼬옥 감은 채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직도 여하경은 나신(裸身)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옷을 입으시오." 뇌천린은 재촉하자 여하경은 실소를 흘리며 옷을 입기 시작했다. "수줍어 하긴요. 보기 싫어도 평생 보게 될텐데......" '처음이다. 여인의 알몸은...... 그리고 그토록 자극적인 줄은 몰랐다......' 뇌천린은 냉정을 되찾으며 내심 결심했다. '앞으로 나신을 절대로 보지 말아야겠다. 나 자신도 흥분을 주체할 수 없으니......' 기실 그는 끓어오른 욕망을 참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지금 여하경이 조금이라도 자극한다면 그는 폭발하고 말 것이다. 다행히 여하경도 밖의 동정이 미심쩍었기에 더 이상 뇌천린에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인간이 참을 수 없는 게 식욕과 색욕이라 했던가? 뇌천린은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선 좀 더 감정을 억제해야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지난 사흘은 뇌천린에게 있어서 참으로 곤혹스런 날들이었다. 여하경은 한시도 그를 가만 있게 놔두지 않고 추근댔다. 그녀의 집요한 육탄공세에 뇌천린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어떤 때는 그녀의 바램에 응해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건 그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보화만 빼내면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사인데 한 여자의 일생을 망치긴 싫었던 것이다. 여하경과 같이 차를 마시던 뇌천린은 다리의 상처도 낫고 했으니 슬슬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소저! 내 듣자 하니 이곳 만보장엔 보기 드문 가보가 많다는데 그걸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소?" "그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아직 상처가.......?" "아니오. 아직 먼 길은 못 걸어도 가까운 곳은 다닐 수 있을 것이오." "좋아요!" 여하경은 자신의 재력을 과시할 기회라 싶어 쾌히 승낙했다. 장진관(藏珍館). 만보장의 모든 기진이보(奇珍異寶)와 보화(寶貨)가 소장되어 있는 곳이다. 긴 회랑(回廊)사이에는 수많은 선반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선반 위에는 보기 힘든 고대의 유물(唯物)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금관(金冠), 경덕진(景德鎭)의 도자기, 은 왕조(殷王朝)의 토우상(土偶像) 등 ...... 그야말로 하나같이 진귀한 것들 뿐이었다. 뇌천린은 장진관을 구경하면서 연신 탄성을 터트렸다. "대단하오! 마치 고대(古代)의 어느 황궁(皇宮)에 들어선 느낌이오." 그가 감탄하자 여하경은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의 유물들은 별 게 아니예요. 진짜는 보광실(寶光室)에 있어요." 그녀는 뇌천린을 끌고 다른 곳을 향했다. 뇌천린은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기관장치가 있던 곳이 바로 보광전이었군. 며칠 전에 내가 갔던 바로 그곳이......' 그는 흥분되는 것을 진정시키며 묵묵히 여하경을 따라갔다. 회랑이 끝나자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석실(石室)이 나타났다. 석실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위에 '보광전(寶光室)'이라고 쓰여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보광실 앞에 걸음을 멈춘 뇌천린이 짐짓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곳이 제일 귀중한 곳인 모양인데 어째 지키는 사람이 없소?" "이곳은 경비가 필요 없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기관장치가 있으니까요." "그렇소? 어떤 기관장치가 있기에 그토록 자신만만해한단 말이오?" 뇌천린이 이해가 안가는 표정을 짓자 여하경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물론 그녀로선 뇌천린이 의도적으로 호기심을 나타내고 있다는 걸 알 리가 없었다. "호호호! 보면 놀랄 거예요. 중원제일의 기관제작자가 만든 절묘한 장치니까요." 여하경은 빨리 자랑하고 싶어 경비 책임자를 부르러 갔다. 잠시 후, 그녀는 한 중년 대한과 함께 나타났다. "운공자! 이 사람은 장진관의 경비수장(警備首長)인 성인영(成人永)이에요. 성수장이 당신의 궁금증을 풀어 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성인영은 뇌천린을 훑어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경보 기관은 이곳 보광실의 극비 사항이라 외부인에겐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날 못믿는가 보군요." 뇌천린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하자 여하경의 아미가 바짝 치켜지고 눈매가 표독스럽게 변했다. "이 분이 누군지 알고 그따위 망발을 부리는 거냐? 넌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여대인의 허락이 있어야......"


성인영도 여하경의 성질을 아는지라 그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으나 이미 그녀의 성질을 건든 뒤였다. 더구나 뇌천린이 그녀의 성질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싫다는데 그만 돌아갑시다. 내가 이곳의 기관장치를 구경 못했다고 병나는 것도 아니니까." 뇌천린이 화난 모습으로 돌아가려 하자 여하경은 애가 탔다. 오늘 일이 기분 나빠 자신을 안만나면 큰일이 아닌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지면 되지 않냐? 나도 못믿겠다는 거냐?"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보안상..." 철썩! 성인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하경의 손이 그의 뺨을 가격했다. 여하경이 성인영을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네 놈이 알량한 직책을 믿고 사람들을 우습게 본다며? 내 아버님께 말해 당장 해고를 시키고 말리라." 성인영은 여하경이 왜 이리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녀의 태도가 심상치 않자 겁이 덜컥 났다. 그녀는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해고시킬 것이다. 여불군이 아무리 자신의 태도가 옳았다 여겨도 자식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편하고 월급 많은 이 자리를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여하경을 달랬다.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가 책임진다는데 제가 뭘 망설이겠습니까?" 뇌천린은 성인영이 여하경에게 쩔쩔매는 걸 보고 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쩌면 만보장 사람들은 여불군보다 여하경을 더 두려워하는지도 몰랐다. 성인영이 힐끗 뇌천린을 쳐다보았다. '어디서 기생 오라비같은 놈이 나타나서....' 그런 그의 심사를 눈치못챌 뇌천린이 아니었다. "내가 못마땅하오? 성수장?" 뇌천린의 말에 성인영은 움찔하며 황급히 여하경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여하경의 호통이 이어졌다. "당신 정말 짤리고 싶어?" 움찔한 성인영이 바보처럼 히죽 웃었다. "공자님이 뭘 잘못 아신 거겠죠? 전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그렇소? 그렇다면 다행이고..." 뇌천린의 비웃는 듯한 태도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성인영은 애써 참았다. 시비가 붙어봐야 자신만 손해인 것이다. 성인영은 기관장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모두 이중 경보 장치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기관을 작동시켰으니 위력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성인영은 한참 통로의 바닥을 가리켰다. "바닥을 잘 보십시오. 색깔이 틀리지 않습니까?" "그렇구료!" 뇌천린이 그의 말에 따라 통로의 바닥을 살펴 보았다. 그곳은 다른 곳과는 달리 붉은 홍석(紅石)이 깔려 있었고 그 길이는 무려 십 여장에 달했다. 성인영은 한 쪽 구석에 놓여 있는 작은 돌멩이를 집어 들며 말했다. "십여 장이면 누구든 단숨에 건널 수 없는 곳입니다. 해서 누구든 이곳에 발을 대면......" 그는 말 꼬리를 흐리며 바닥에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가 홍석 위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피피피핑!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사방에서 엄청난 암기들이 쏟아졌다. 그 광경을 보고 뇌천린은 흠칫 놀랐다.


'그랬군. 밤이라서 보질 못했어.' 그는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이 부상 당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큰일날 뻔 했군. 무모하게 들어 왔다가는 고슴도치 신세를 면하지 못하겠군. 며칠 전엔 염탐만 했기에 망정이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성인영은 뇌천린이 놀라고 있는 줄로 생각되어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일차 경보 장치를 해제하라." 그는 밖을 향해 우렁찬 고함을 지르며 걸음을 옮겼다. 경보 장치가 해제되서인지 그들이 홍석을 지나가도 암기는 쏟아지지 않았다. 이윽고, 홍석을 지나자 새하얀 대리석이 깔린 통로가 나타났다. 뇌천린은 그곳에 도달하는 순간 이상한 것을 느꼈다. '갑자기 더워지는 것 같은데......' 그는 전면에 놓여 있는 통로에서 뜨거운 열기가 밀려 오는 것을 발견했다. 성인영은 앞을 가리키며 자신 만만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만약 침입자가 있어 간신히 일차(一次)기관을 통과했다 해도 여기서 숯덩이가 되어버릴 겁니다." '숯덩이?' "이곳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엄청난 열기(熱氣)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증명하려는 듯 또 다시 통로 바닥에 돌을 던졌다. 파파파팟! 바닥에서 새하얀 불꽃이 확 치솟으며 순식간에 돌이 재로 변해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뇌천린은 전신의 맥이 탁 풀렸다. '대단하군. 기관이 작동된 상태에서 이곳을 통과하기란 불가능한 일이겠는데?' 성인영이 자부심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장담컨데 그 누구도 보광실에 침입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성인영이 너무 자신만만해하자 뇌천린은 기분이 틀어졌다. '글쎄? 그것도 사람 나름이 아니겠소? 세상에 완벽이란 없으니까.......' 뇌천린은 그의 말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완벽이란 때로는 가장 허술한 것과 다름없다. 너무 믿기에 방심하고 있을테니까.' 성인영의 지시에 의해 이차 기관도 작동을 멈추고 세 사람은 보광실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뇌천린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기진이보(奇珍異寶)는 모두 이 보광실 안에 집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드넓은 보광전 안, 그곳에는 수많은 수정관(水晶棺)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속에는 갖가지 기보(奇寶)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귀금속들이었다. 그것들은 한 개만으로도 일개 성(城)을 사고도 남음이 있는 진귀한 것들이었는데 여기 있는 보화를 모두 합치면 천하를 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금산대부 여불군이 천하의 제일거부(第一巨富)라는 것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잠시 보화의 규모에 놀랐던 뇌천린의 눈빛이 점차 차분해졌다.눈 앞에 보이는 보물들은 그와는 아무 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기보는 모두 수억 냥의 가치가 있는 것이나 내 눈에는 차지 않는다. 여불군이 근래 입수한 그 물품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자신이 노리고 있는 물품 외에는 결코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욕심은 언제나 패망을 부르기 때문이다. 문득 한 쪽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저것은 최소한 열 겹으로 된 특수 금고(特殊 金庫)다. 문제의 물품은 분명 저곳에 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은 한 쪽 벽에 난 구멍 속에 들어 있는 금고에 꽂혀 있었다. 그것은 크기가 사방 한 자 가량 되어 보였는데, 겉으로 보기에도 특수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뇌천린은 격동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짐짓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여하경을 응시했다. "여소저! 저곳엔 이 보광실에서도 최고의 기보가 있는 것 같은데 볼 수 없겠소?" 뇌천린이 잔뜩 궁금한 표정을 짓자 여하경은 미안한 기색을 띄었다. "저 천쇄금고(天鎖金庫)에는 무엇이 있는지 저도 알 수 없어요. 다만 얼마 전에 아버님이 극비리에 수입한 기보가 들어 있다는 것 외엔......" 일순 뇌천린의 눈빛이 흥분으로 세찬 파랑을 일으켰다. '틀림없군. 바로 저기에 있어.' 그는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음! 여소저도 모르는 것이 들어 있다니 더욱 보고 싶어지는구료." "공자님의 궁금증은 알겠지만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천쇄금고의 열쇠는 오직 아버님만 가지고 있으니까요." 여하경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뇌천린을 바라 보았다. 뇌천린은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눈빛으로 다른 기보들을 구경하는 체 하였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는 천쇄금고를 어떻게 열까로 꽉 차 있었다. 제 6 장 용수혈주(龍手血主) ① 금산대부(金山大夫) 여불군(呂不君)은 지금 긴장된 눈빛으로 한 장의 서찰(書札)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여불군 귀하(貴下)에게, 내일 자정(子正)에 당신의 천쇄금고(天鎖金庫)를 가져가겠소. 모란도수(牡丹盜帥)> 서찰은 모란도수란 도둑이 손을 쓰기 전에 항상 보내는 예고장(豫告狀)이었다. 예고장은 다시 말해 물품의 주인이 바뀐다는 통보장(通報狀)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모란도수의 예고장은 한번도 허언(虛言)으로 끝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불군은 모란도수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을터인데도 조금도 불안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번지고 있었다. '모란도수! 너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만 이번에는 실패할 것이다. 보광실엔 그 누구도 침투할 수 없다.' 그는 보광전에 설치되어 있는 이중경보장치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안색이 갑자기 심각하게 변했다. 한가닥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아니다. 모란도수는 혹시 십웅연합(十雄聯合)에서 보냈을지도 모른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십웅연합이라니? '십웅연합은 항시 나의 재력(財力)을 빼앗으려고 노려왔다. 해서 내가 연화장무전(蓮花藏武 )을 입수했음을 알고 모란도수에게 부탁했다면......?' 의심이 의심을 낳는다고 한 번 의심이 들자 여불군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십웅연합의 위협을 견디다 못해 이번에 큰 모험을 감행했다. 무림인도 아니면서 연화장무전을 입수한 것이다. '조심해야 한다. 연화장무전의 무공만 익히면 십웅연합 쯤은 내 발 아래에 둘 수 있는데 여기서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마치 눈 앞에 적이라도 있는 양 여불군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십웅연합! 나는 너희들이 무림인(武林人)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너희들의 압력에서 벗어나려면 재력(財力) 뿐만 아니라 무공도 있어야 함을 느꼈다. 그래서 연화장무전을 입수한 것이다.' 여불군은 자구책을 모색하다 연화장무전의 소문을 들었고 억만금을 들여 그걸 입수한 것이다.


'틀림없을 것이다. 자신들이 직접 움직였다가 실패라도 하면 마각(馬脚)이 드러나니까 모란도수를 앞세운 거다.' 여불군은 자신의 추측에 자신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모란도수 뒤에 십웅연합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처음과는 달리 안심할 수가 없었다. '기관장치와 경비무사들만 믿을 수는 없다. 나도 또 다른 대비책을 강구해야 된다.' 그는 불안한 얼굴로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둠(暗)! 먹물을 풀어놓은 듯한 암흑이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장진관(蔣珍館)은 세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보화(寶貨)를 간직한 채 어둠 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정중동(靜中動)이라 했던가? 지금 장진관의 주변엔 고요함 속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무거운 긴장감이 팽배해 있었다. 오늘밤에는 여느날과 달리 장진관의 경계는 수십 배나 강화되어 있었다. 곳곳에는 수많은 경비무사들이 잠복해 있었고 순찰무사들도 몇 배나 증강되어 있었다. 모란도수(牡丹盜帥), 그가 천쇄금고(天鎖金庫)를 가져 가겠다고 예고한 시간이 바로 오늘 밤 자정이었던 것이다. 땡----댕----데----엥! 어느 절에선가 삼경(三更)을 알리는 종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그러자, 장진관의 주위에는 긴장감이 한층 더 고조되었다. 이제 모란도수가 나타날 시간이 거의 다 되었기 때문이다. 장진관이 바라보이는 어둠 한 곳에 두 눈을 반짝이며 장진관을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는 괴인영(怪人影)이 있었다. '후후후! 가장 멋있게 해치우는 거다.' 여유만만한 미소를 소리없이 흘리고 있는 인물은 바로 모란도수 뇌천린이었다. 뇌천린은 이미 사전답사(事前踏査)를 통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는지 장진관의 엄중한 경비 따위는 신경도 안쓰는 눈치였다. 그런 그의 옆엔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커다란 자루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아마 이번 거사(擧事)에 긴요하게 쓰일 물건들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뇌천린이 품 속에서 조그마한 활(弓)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시위를 한껏 당기자 화살이 팽팽하게 매겨졌다.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야릇한 고소와 함께 그가 시위를 놓았다. 쌔---액! 화살이 어둠을 가르며 장진관 속으로 쾌속하게 날아갔다. 야천을 찢는 파공음에 주변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무슨 소리냐? 확인해 봐라!" 횃불이 밝혀지고 주변이 대낮처럼 훤해졌다. 무사 몇 명이 화살이 날아간 장진관 안으로 뛰어 들었다. 잠시 후, 장진관으로 들어갔던 무사가 나오며 소리쳤다. "화살이 날아왔습니다." "화살이라고? 어느 쪽이냐?" "저 쪽입니다." 무사들이 화살이 날아온 곳을 가리켰다. "가서 확인해보고 나머지는 자리를 이탈하지 마라." 경비대장의 명령에 몇 명의 무사가 뇌천린이 화살을 쐈던 곳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뇌천린은 이미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긴 뒤였다. "아무도 없습니다." 무사들이 숲을 확인하고 소리치자 경비대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고 있었다. 놈은 우리를 분산시키려는 거다. 거기에 넘어가면 안된다." 경비대장의 지시에 횃불이 꺼지고 주위는 다시 칠흑같은 어둠으로 변했다. " 모두 제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된다. 제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바람이 아닌 이상 발각되지 않을 리가 없다." 경비대장은 장진관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절대 뚫릴 리 없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뇌천린은 자리를 옮긴 후 만면에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장진관을 쏘아보고 있었다. '훗! 화살엔 쥐들이 좋아하는 미효향(迷肴香)이 묻어 있다. 지금쯤 통로에는 미효향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대체 무슨 말인가! 쥐들이 좋아하는 미효향이라니...... 뇌천린은 자루 하나를 풀어놓으며 기이한 눈빛을 발했다. '오늘의 성패(成敗)는 너희들에게 달려있다. 가라.' 그가 자루를 툭툭 치자 자루 안에선 수십 마리의 쥐들이 뛰쳐나오는 것이 아닌가? 찍!찍! 쥐들은 밖으로 나오자 마자 쏜살같이 장진관으로 달려갔다. 미효향의 냄새에 유혹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일은 어둠 속에서 은밀히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경비무사들은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설사 그들이 쥐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모란도수를 잡기 위해 있는 것이지 쥐를 잡기 위해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쥐들은 아무런 제지도 없이 순식간에 장진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갑자기 장진관 안에서 요란한 경적(驚笛)이 울렸다. 순간, 경비무사들 사이에 소동이 일어났다. "일차경보(一次驚報)가 울렸다. 누군가 침투했다." "귀신같은 놈! 어떻게 들어간 거냐?" "흐흐흐! 그러나 독 안에 든 쥐다. 일차기관장치를 해제하라. 확인해야겠다." 경비무사들은 야단 법석을 떨며 장진관으로 우루루 몰려갔다. 헌데, 뇌천린은 언제 경비무사 복장으로 갈아입었는지 그들의 틈에 끼어있는 것이 아닌가? 무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장진관으로 쏠릴 때 슬그머니 섞여버린 것이다. '후후후!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어가는군.' 그가 내심 득의의 미소를 흘리며 다른 무사들과 함께 장진관 안으로 들어갔다. 일차경보장치가 있는 홍석(紅石) 위엔 지금 끔찍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미효향을 맡고 달려온 쥐들이 엄청난 암기에 전신이 밤송이처럼 꿰뚫린 채 피곤죽이 되어 있었다. 일차기관장치의 위력은 바람조차 무사히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가공하고 완벽했다. 경비무사들은 홍석 위의 광경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속았다. 이틈을 노리고 들어오려는 속셈이 분명하다. 빨리 모두 나간 다음 기관장치를 다시 작동시켜라." 다급한 음성과 함께 경비무사들이 황망히 돌아섰다. 바로 그때, 무사들 틈에 끼어있던 뇌천린이 품 속에서 무엇인가 꺼내 바닥에 던졌다. 펑! 요란한 음향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삽시간에 주위는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게 변했다. "주의 해라! 모란도수가 나타난 것이 분명하다!" 경비무사들은 당혹성을 터뜨리며 짙은 연막(煙幕) 속에서 우왕자왕하기 시작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들은 초조해진 것이다. 뇌천린은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머지 자루에서 무엇인가 꺼냈다. 그것은 커다란 호피(虎皮)와 천쇄금고와 똑같은 모양의 금고였다. '후후후! 이 가짜를 만드느라고 며칠 밤을 새웠는지 모른다!' 뇌천린은 호피에 다리에 차고 있던 짚과 육포(肉包)를 구겨넣기 시작했다. 호피 안이 어느 정도 채워지자 그는 가짜 천쇄금고와 함께 이차경보장치가 있는 통로로 내던졌다. 파지지-----직---! 호피는 바닥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가짜 천쇄금고는 쇠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녹지 않았다. 우우웅! 또 다시 경적이 울리자 연무 속에 갇힌 무사들은 기겁을 했다. "이차경보장치가 울렸다. 모란도수가 안으로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경비무사들은 경악성을 토하며 이차기관장치가 있는 통로로 몰려갔다. 이제 연막이 서서히 걷히며 통로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뇌천린이 앞장 서 통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니 저게 뭐야? 천쇄금고잖아?" 뇌천린의 외침에 다른 무사들도 통로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저게 어떻게? 벌써 모란도수가 보광실에 들어갔다 나왔단 말인가?" 경비무사들은 경악과 의혹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천쇄금고를 응시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경비대장이 무사들의 말을 부인하고 나섰다. "그럴 리 없다. 침투했다면 훔쳐 나오다가 가루가 될 리가 없다." 즉, 보광실에 들어갈 수 있다면 기관장치를 피했다는 건데 나올때 당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경비무사들은 호피의 재를 시신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머리 속이 혼란해진 것이다. 시신의 재를 보면 모란도수는 보광실 안으로 들어갔을 리 없는데, 보광실 안에 있어야 할 천쇄금고는 어떻게 해서 통로에 놓여있는 것인가? 경비무사들은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잠시 의견이 분분했다. 뇌천린은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경비무사들의 사고를 혼란시켜 그것을 이용하려고 호피를 재로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뇌천린은 그들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만약 저게 진짜 천쇄금고라면 녹으면 안되잖아?" "그렇군. 어서 이차기관장치를 해제해라. 그리고 장주님을 불러라." "어쨌든 이곳 외에는 빠져나갈 곳이 없으니 우리가 지키고 있으면 모란도수가 귀신이라도 붙잡힐 수밖에 없다." 이차기관장치가 해제된 것은 한 경비무사가 금산대부를 부르러 밖으로 나간 직후였다. 기관장치가 작동을 중지하자 경비무사들은 재빨리 보광실로 몰려가고 통로에는 뇌천린 혼자 남아 있었다. '후후후! 금산대부를 데리러 갔으니 내가 금산대부로 변장하면 되는 거다.' 뇌천린이 손을 모으고 구결을 외자 그의 얼굴이 여불군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동경을 꺼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던 뇌천린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엔 완벽한 여불군이 존재하고 있었다. '녹람존자가 준 책은 정말 대단해.' 기실 그는 여하경의 처소에 있으면서 심심해서 밀교기환범전을 읽어봤었다. 거기서 그는 사람의 형체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구결이 있기에 그대로 따라 해보다가 놀라운 효능을 보자 완벽하게 익혀버린 것이다. 그도 지금껏 많은 변장술을 익혔지만 밀교기환범전의 내용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아무 것도 쓰지 않고 단지 내부의 기운으로 얼굴이나 몸을 바꾼다는 것은 지금까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비록 천로영정환을 복용했기에 가능하다는 것은 몰랐지만 말이다. 여불군으로 변장한 뇌천린은 몹시 다급한 얼굴로 보광실로 뛰어들었다. 그는 무사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연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냐?" "누군가 침투했다 재가 됐는데 그 자리에 천쇄금고가 있었습니다." 뇌천린이 제 자리에 있는 진짜 천쇄금고를 가리키며 호통쳤다. "무슨 헛소리냐? 저기 있는데." "하지만 여기 또..." 무사들이 뇌천린의 눈치를 보며 가짜 천쇄금고를 내밀었다. 가짜 천쇄금고는 뇌천린이 완벽하게 복제한 것이라 진짜와 구분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뇌천린이 일부러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무래도 진짜는 대인께서 제일 잘 아실 것 같아..." "저걸 내려라!" 뇌천린의 추상같은 명령에 한 경비무사가 진짜 천쇄금고를 끄집어냈다. 뇌천린은 두 개의 금고를 앞에 놓고 세밀하게 살피는 척 하였다. 그러다가 진짜 천쇄금고를 집어들며 짐짓 우뢰와 같은 호통을 쳤다. "이게 가짜다! 경비를 어떻게 했기에 놈이 여기까지 침투할 수가 있었느냐?" "그...... 그게......" 경비무사들은 당황하여 말문이 막힌 채 어쩔 줄 몰랐다. '이럴 때는 생각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여유를 주면 여러가지 헛점이 드러난다.' 뇌천린은 더욱 분기충천한 표정을 지으며 대갈성을 터트렸다. "경비를 더욱 철저히 해라. 날이 밝을 때까지는 마음 놓아서는 안 된다. 죽은 놈이 모란도수가 아닐 수도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경비무사들은 송구스런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했다. 귀신도 모르게 천쇄금고가 바꿔치기 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뇌천린은 더욱 차가운 얼굴로 다시 한번 무사들을 다그쳤다. 다그쳐야 심리적 압박 때문에 무사들은 다른 생각을 못할 것이다. 뇌천린은 진짜 천쇄금고를 옆구리에 낀 채 유유히 보광실을 나왔다. 그런데 그가 막 보광실을 나섰을 때였다. "저놈 잡아라! 저놈은 가짜다!" 난데없이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보광실의 어느 탁자 밑에서 여불군이 기어 나왔다. 여불군을 발견한 뇌천린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스쳐갔다. "이런...... 금산대부가 이곳에 숨어있을 줄은 몰랐는데......" 여불군은 나름대로의 대비책을 세운다고 자신이 직접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는 기다리다 지쳐 깜박 잠이 들었는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갑작스런 여불군의 출현으로 경비무사들은 아연실색하였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금산대부가 두 명이라니......" 그들은 너무도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눈 앞에 있는 두 사람은


마치 판에 박은 듯 똑같았기 때문이다. 경비무사들이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여불군의 노한 음성이 보광실을 사납게 울렸다. "뭣들 하느냐? 저놈이 도망가기 전에 어서 잡아라!" 그의 호령이 떨어지자 그제야 경비무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뇌천린에게 달려 왔다. 경비무사들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던 뇌천린의 얼굴에 곤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다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 되었군.' 하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은 임기응변의 천재가 아니던가?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에 번개같이 스쳐가는 한 가지 기지(機智)가 있었다. 그는 지체없이 품 속에서 새파란 죽통(竹筒) 하나를 꺼내 던졌다. 펑---! 요란한 굉음과 함께 또다시 보광전 안에 자욱한 연막(煙幕)이 퍼졌다. 죽통은 조금 전에 사용했던 연막뢰(煙幕雷)였던 것이다. 경비무사들은 짙은 연기로 눈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당황했다. "도망치려 한다. 어서 막아라!" 여불군의 다급성에 경비무사들은 보광실의 입구 쪽으로 몰려갔다. 일단 뇌천린이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하지만 뇌천린은 그들의 예측과는 달리 금산대부 여불군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위기의 타계책은 가짜가 진짜가 되는 것이다.'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천쇄금고를 재빨리 바닥에 내려놓으며 여불군의 옆에 섰다. 하지만 여불군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연기 때문에 바로 옆에 누가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연막이 걷히고 보광전 안의 정경이 한 눈에 드러나자 무사들은 경악성을 터뜨렸다. "아니......!" 경비무사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금산대부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마치 거울 속을 비춘 듯 두 명의 금산대부가 나란히 서 있었다. 실로,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경비무사들은 난처한 얼굴로 망연히 두 사람을 쳐다만 볼 뿐이었다. 여불군은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은 모습으로 대갈성을 터뜨렸다. "구경났느냐? 바라보고만 있게! 어서 이 놈을 포박해라!" "이놈!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더니...... 누구에게 큰 소리냐? 이놈이 모란도수다. 어서 붙잡아라!" 뇌천린은 더 노기등등한 기세로 무사들에게 소리쳤다. 무사들은 너무나 같은 두 사람 때문에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목소리까지 똑같았던 것이다. 밀교기환범전의 변용술엔 목소리의 고저까지 맞추는 방법도 있었던 것이다. 여불군은 미치겠는지 길길이 날뛰었다. "이...... 이 뻔뻔스러운 놈! 이제는 내 흉내까지 내려 하는구나!" "네놈이야말로 가짜가 아니냐? 곧 드러날 일이니 어서 자백해라." 두 사람은 촌보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 삿대질을 하며 싸웠다. 아무리 눈을 까집고 봐야 쌍둥이보다도 더 닮았기에 무사들은 두 사람의 싸움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뇌천린은 두 눈에 야릇한 기광(奇光)이 스쳐갔다. "좋다! 네놈이 가짜가 아니라면 묻겠다. 내 딸 하경이의 몸엔 사마귀가 하나 있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그의 말에 경비무사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러면 되겠군. 딸의 몸에 난 사마귀를 모를 부모는 없을테니까......" "그렇다. 모르는 자가 분명 모란도수다." 경비무사들은 형형한 눈초리로 여불군을 쏘아보았다. 그들은 그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뇌천린은 내심 득의의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 천하의 어느 부모가 딸의 알몸을 볼 수 있단 말이냐?' 뇌천린이 노린 점은 바로 그거였다. 어릴 땐 몰라도 커서는 딸의 몸을 볼 기회가 없다. 그리고 사마귀같은 것은 크면서 생기는 거지 태어날 때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예상대로 여불군은 난처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하경의 몸에 사마귀가 있나?' 아무리 궁리를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것을 이놈이 알 리가 없다. 분명 넘겨 짚은 것일거다.' 그는 자신의 추측에 자신을 가지고 단호하게 말했다. "딸의 몸에 사마귀같은 것은 없다." "틀렸다. 하경의 몸에는 분명 사마귀가 있다. 말하기는 곤란하나 왼쪽 허벅지 깊은 곳에 있다." 뇌천린이 자신있게 소리쳤다. 그는 여하경의 나신(裸身)을 보았기에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하경 아가씨에게 가서 확인해 보자." 한 경비무사가 쏜살같이 밖으로 나갔다. 다른 경비무사들은 바싹 긴장된 눈빛으로 두 사람을 감시하였다. 뇌천린은 이제 여유가 생겼다. 이변이 없는 한 그는 오늘도 성공을 거둘 것이다. '이로써 나의 열다섯 번째 사업은 멋지게 성공한 셈이군.' 뇌천린이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을 때 여하경에게 확인하러간 무사가 달려왔다. 그 무사는 여불군을 향해 삿대질을 하였다. "저놈이 가짜다. 아가씨의 몸엔 분명 사마귀가 있다." 순간, 경비무사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여불군을 포박했다. 여불군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발버둥을 치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이...... 이놈들! 누구를 잡는 거냐? 난 분명 진짜다!" "허어! 그놈! 증거가 명백한데도 오리발을 내미는구나." 뇌천린이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독종 중의 독종 같으니 더 이상 헛소리를 못하게 두들겨 패라." 누구 말이라고 거역하겠는가? 진위가 밝혀진 이상 무사들은 뇌천린의 명에 지체없이 여불군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아이쿠! 아이쿠!" 여불군의 신음소리가 보광실에 가득 울려 퍼졌다. "너무 시끄럽다. 아예 입까지 막아버려라." 뇌천린의 명령에 경비무사들은 지체없이 여불군의 입을 틀어 막았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자 뇌천린은 경비무사들을 쓸어보며 엄중하게 말했다. "아직 저놈의 협조자들이 있을지 모르니 더욱 감시를 철저히 해라." "염려 마십시오. 제깐 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경비무사들이 자신있게 말하자 뇌천린이 호통을 쳤다. "애초에 그 놈 하나 못막아 이 난리를 치고도 큰소리냐?" 무사들이 움찔하며 숨을 죽였다. 뇌천린은 짐짓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천쇄금고를 집어들었다. "에이! 믿을 수가 있어야지. 천쇄금고는 더욱 은밀한 곳에 숨겨야 겠다."


그는 천쇄금고를 옆구리에 끼고 유유히 보광실을 나왔다. 무사들은 송구스러워 그저 고개만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밖으로 나온 그는 성공의 희열을 느끼며 백화각(百花閣)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후후후! 마지막으로 여하경에게 인사나 하고 갈까? 다시는 못 만날테니까.' ② 백화각(百花閣)은 이 순간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뇌천린은 내실의 문 앞에서 여하경을 불렀다. "여소저-----!" 하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나지 않았다. '벌써 잘 리는 없는데......?' 뇌천린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뇌천린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윽! 이 냄새는?' 그는 후각을 파고 드는 짙은 혈향(血香)에 깜짝 놀랐다. 그의 시선이 내실을 둘러보다 침상 쪽으로 간 순간 그는 경악하고 말았다. "누...... 누가 이런 짓을......?" 침상 위엔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하경이 알몸으로 발가벗겨진 채, 칠공(七孔)에서 시뻘건 선혈을 흘리며 죽어 있었던 것이다. 겁간(劫姦)을 당한 듯 하복부에도 선혈이 낭자해 있었다. 뇌천린은 너무도 뜻밖의 상황에 넋을 잃고 말았다. 헌데 바로 그때, "흐흐흐...... 네놈도 만보장의 사람이냐?" 난데없이 등골 저미는 괴소가 그의 등 뒤에서 터져 나왔다. "웬놈이냐?" 뇌천린은 섬뜩한 놀라움에 본능적으로 황급히 돌아섰다. 그의 앞엔 야행복(夜行腹)을 입고 두 눈만 빠끔히 내놓은 십여 명의 괴인들이 살기등등한 기세로 서 있었다. 그들의 두 눈에서 비수처럼 내뻗어지는 안광은 귀화(鬼火)처럼 푸르스름했고 손바닥에서 팔뚝까지는 몸서리쳐지도록 으스스한 용(龍)의 문신(紋身)이 얼룩덜룩하게 새겨져 있었다. 용의 문신, 그것은 괴인들의 몸에서 풍기는 사기(邪氣)와 함께 더욱 보는 이의 심장을 공포로 압박하고 있었다. 뇌천린이 애써 냉정을 찾으려고 애쓰며 물었다. "그대들은....?" "묻지 마라. 너는 죽기만 하면 된다." 한 괴인의 섬뜩한 살음(殺音)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이 뇌천린의 심장을 찔러왔다. 무섭도록 빠르고 잔인한 검세였다. '이들은 왜 아무 이유도 없이 나를......?' 뇌천린은 내심 의아한 생각을 하며 대경실색한 얼굴로 검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상대는 극강한 무공을 지닌 무림의 고수였기에 그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절대절명(絶代絶命)의 순간, 번쩍----! 구원의 빛인가? 난데없이 한 줄기 비쾌한 검광(劍光)이 괴인을 향해 빛살같이 뻗쳐갔다. "크아악-----!"


뇌천린을 죽이려 하던 괴인은 갑작스런 공격에 처절한 비명과 함께 몸이 양단된 채 쓰러졌다. "누구냐?" 괴인들은 경악성을 발하며 일제히 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희들이야말로 알 필요가 없다. 죽기만 하면 된다!" 보이지 않는 공격자의 차분한 음성이 실내에 울림과 동시에, 번쩍-----! 또다시 일섬(一閃)의 검기(劍氣)가 허공에 작렬했다. "크악----!" 단 일검에 다섯 명의 괴인들이 참혹한 단말마의 비명을 토하며 널브러졌다. 나머지 괴인들은 놀람이 가득한 눈으로 공격자를 찾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한 줄기 싸늘한 검광 뿐이었다. 또 다시 검광이 그들의 동공을 파고 들었고 그들은 가슴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저승길로 달려갔다. 괴인들의 시신이 썩은 짚단처럼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경미한 파공음과 함께 한 인영이 유령(幽靈)처럼 나타났다. 뇌천린은 위기일발의 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재빨리 쳐다보았다. 구원자(救援者)는 뜻밖에도 금릉왕(金陵王) 주검화(朱劍華)였다. 물론 뇌천린으로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뇌천린은 금릉왕에게서 절대적인 위엄을 느끼며 황급히 허리를 꺾었다. "누군지 몰라도 구명(救命)의 은혜를 베풀어 주어 고맙습니다." "지금은 인사할 시간이 없다. 만보장은 위험한 곳으로 변했으니 어서 피하자." 주검화는 다짜고짜 의아해하는 뇌천린을 옆구리에 끼고 신형을 날렸다. 뇌천린은 너무도 얼떨떨한 상황인지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나무들이 바람처럼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를 갔을까? 그는 겨우 정신을 추스리며 입을 열었다. "저를 공격한 자들이 누굽니까?" "나도 자세히 모른다. 하지만 그들 단체의 이름이 용수혈(龍手血)이라는 것은 들었다." 순간 뇌천린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용수혈(龍手血)...? 희엽이 말한 인자집단(忍者集團)이잖아? 그들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그는 뭔가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무슨 물건을 찾고 있는 모양인데 만보장의 인물들을 모두 죽이고 있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지." 주검화의 설명에 뇌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죽일 놈들! 증거소멸때문에 무고한 생명을 도륙하다니....' 뇌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용수혈에 대한 적개심(敵慨心)이 솟구쳤다. 문득, 그의 눈길이 옆구리에 있는 천쇄금고를 향했다. '혹시 그들이 찾는 물건이 이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당장 단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는 천쇄금고에서 시선을 거두며 주검화를 올려다 보았다. "당신은 혹시 누가 여하경을 욕보인 후 죽였는지 아십니까?" "나도 늦게 도착해서 떠나는 자의 뒷모습만 봤다. 용수혈의 무리들은 그를 혈주(血主)라 불렀다." 뇌천린의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혈주......? 그렇다면 야왕(夜王)이......' 희엽에 의하면 용수혈의 우두머리는 야왕이라 했었다. 그의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엄청난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야왕! 용서하지 않으리라. 연약한 여인을 그토록 잔인하게 죽이다니......? 언젠가 너에게 지상에서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해주겠다.' 여하경은 비록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던 여인이었으나 자신을 좋아했던 여인이 아니던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도의적으로 분노가 대단할텐데 하물며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들던 여자니 그의 울분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이곳은 만보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야산(野山)의 구릉위였다. 지금 엄청난 기도(氣度)를 내뿜으며 우뚝 서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어둠을 닮아 어둠조차 그의 일부분처럼 느껴지는 기이한 인물, 그의 지독한 살기(殺氣)에 주위의 모든 경물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불타고 있는 만보장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한 순간, 경미한 파공음과 함께 어둠을 가르며 구릉을 향해 몰려드는 괴인영(怪人影)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야행복(夜行腹)차림에 섬뜩한 용문신(龍紋身)을 가진 무리들, 그들은 용수혈(龍手血)의 인물들이었다. 용수혈의 무리들은 구릉 위에 당도하기가 무섭게 웅위한 인물의 등 뒤에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웅위한 인물은 천천히 돌아서며 엄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한 명도 남김없이 처치했느냐?" "그렇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개까지 모조리 도륙했습니다. 혈주(血主)!" 야행복의 인물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들의 앞에 우뚝 서 있는 인물이 혈주(血主)라면 이 자가 바로 야왕이란 말인가? 그런데 몸을 돌려 얼굴을 드러낸 야왕의 모습은 너무 뜻밖이었다. 대략 이십사오 세 가량 되었을까? 이제 불과 약관(弱冠)을 조금 넘은 나이에 빼어난 이목구비를 지닌 훤칠한 헌앙장부(軒仰丈夫)였다. 결코 동영제일(東瀛第一)의 인자(忍者)다운 면모가 아니었다. 하지만 눈매가 날카롭게 치켜올라간 것과 두 눈에 음침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 그가 잔인한 성품(性品)의 소유자임을 여실히 대변해주고 있었다. 야왕이 수하들을 쓸어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건은......?" "연화장무전은 이 안에 있습니다." 맨 앞에 부복해 있던 수하가 천쇄금고를 공손히 받쳐올렸다. "열어라!" 야왕의 명령에 수하가 검을 꺼내 천쇄금고를 갈라갔다. 천쇄금고는 일검에 양분되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야왕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겉보기는 무척 단단해 보이는데 너무 간단히 갈라지는군." 갈라진 금고 안을 보는 순간, 야왕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지금 천쇄금고 안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아니 있기는 있었다. 힌 송이의 모란꽃과 한 통의 서찰이...... 야왕은 실망과 분노가 뒤엉킨 눈빛으로 황급히 서찰을 집어 들었다. <여불군에게, 본인(本人)은 예고한 대로 물건을 가져간다. 모란도수(牡丹盜帥)> 용수혈의 수하들이 가져온 것은 가짜 천쇄금고였던 것이다. 야왕의 두 눈에 가공할 노염(怒焰)이 치솟았다.


"모란도수란 놈이 감히 연화장무전을 가로채다니...." 파직! 야왕의 손에 들려 있던 천쇄금고가 가루로 변해 허공에 분분히 흩어졌다. 야왕으로선 만보장을 괴멸하면서까지 애쓴 노고가 수포로 돌아가자 견딜 수가 없었다. "모란도수를 찾아라! 용수혈의 일을 방해한 대가를 보여주리라!" 그의 살기어린 음성이 야공(夜空)을 진동시켰다. "존명(尊命)!" 용수혈의 무리들도 살기가 가득한 음성으로 우렁차게 복명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환상(幻像)처럼 어둠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수하들이 사라지자 야왕은 난처한 얼굴로 시선을 야천에 던졌다. "군주(軍主)께서 특별히 신임하여 이번 일을 맡겼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군주(軍主)라니......? 용수혈의 뒤엔 또 다른 신비집단이 있단 말인가? 용수혈처럼 패도적이고 막강한 세력을 움직이는 또 다른 세력이 있다면 그 세력은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용수혈의 손에선 벗어날 수가 없었다. 용수혈은 지옥이라도 찾아간다." 야왕의 음성에는 하늘조차 부인할 수 없는 엄청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모란도수! 너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그의 음성이 허공에 채 흩어지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연기처럼 구릉 위에서 꺼져버렸다. 제 7 장 신비황야(神秘皇爺) ① 상강(湘江)은 북경성(北京城) 서쪽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강(江)이다. 강물 위에는 사시사철 수많은 유람선(遊覽船)들이 그림같이 떠 있었다. 오늘도 아지랭이가 하늘거리는 가운데 유람선들이 한가롭게 강상(江上)을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 마리 비조(飛鳥)인가? 등평도수(登平渡水)의 신법을 전개하면서 강물 위를 비쾌하게 날고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바로 주검화(朱劍華)였다. 그는 여전히 뇌천린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다른 유람선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어느 배의 갑판 위에 사뿐히 신형을 내렸다. 그는 뇌천린을 내려놓으며 선실을 향해 외쳤다. "약려(若麗)! 손님이 왔소!" "당신에게도 친구가 있었나요?" 감미로운 옥음(玉音)과 함께 선실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의아한 얼굴로 나왔다. 여인(女人)! 대략 스물 다섯 가량 되었을까? 심산유곡에 홀로 핀 백합(白合)처럼 청초한 미모를 지닌 절세가인이었다. 특히 전신에 은은히 흐르는 고아한 기품(氣品)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여인은 뇌천린을 응시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은 누구죠?" "장차 천하를 훔칠 도둑이오. 인사 하시오." "당신이 칭찬하는 걸 보니 대단한 사람인가 보군요." 여인이 밝게 웃으며 뇌천린에게 인사를 했다. "소협! 저는 유약려(柳若麗)라 하는데 후일 천하를 훔치게 되면 잘 부탁해요." "별 말씀을...... 저는 뇌천린이라 합니다." 뇌천린은 그녀의 농담에 얼굴을 붉히며 포권을 취했다.


이때, 주검화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채근했다. "약려! 손님이 왔으니 음식솜씨를 발휘해 보시오. 난 지금 배가 몹시 고프오." "호호호! 당신은 손님보다 식사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군요." "후후후! 당신의 요리는 천하제일이지만 평소에 시비(侍婢)들에게 음식을 만들게 하는 게 언제나 불만이었소." 주검화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며 뇌천린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해서 나에게 손님이 생기기를 얼마나 바란 줄 아시오?" "호호호! 그런 불만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남아(男兒)란 기름진 음식을 너무 좋아하면 간사해지는 법이에요." 유약려는 예쁘게 눈을 흘기며 사뿐사뿐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뇌천린은 부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자네 덕분에 포식하게 되었군." 주검화는 멍하니 서 있는 그를 선미(船尾)에 놓여 있는 탁자에 앉히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좌정한 뇌천린은 궁금한 눈빛으로 주검화를 정시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굽니까? 저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은데......" "나는 자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네. 단지 이름과 영웅회의 일원이라는 것밖에는......" 주검화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자 뇌천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영웅회까지 안다면 그가 모르는 게 뭐란 말인가? 그는 의아한 눈빛으로 주검화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경황이 없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혹시 당신은 도화원에서 내가 본......?" 뇌천린이 자신을 알아보자 주검화는 나직히 웃었다. "후훗! 결국 알아보는군. 그날 자네가 내실을 훔쳐볼때 묵화(墨花)를 그리고 있던 사람이 바로 나였네." 순간 뇌천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시 짐작이 맞았군. 그렇다면 몸에서 풍기는 이 기도로 봐서.......' 그는 허름한 차림이었으나 주검화의 신분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럼 당신이 금릉왕(金陵王)이란 말입니까?" "그건 잊혀진 이름이네. 자네는 날 그냥 형님이라 부르길 바라네." '설마했는데 사실이군. 그런데 금릉왕이 뛰어난 무림고수라니 의외군.' 그는 너무도 뜻밖의 사실에 아연해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주검화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의아하겠지? 내가 왜 자네의 뒤를 따르는지......" "물론입니다." "남아(男兒)에겐 누구든 야망(野望)이 있네. 그런데 그 야망을 이루는 길이 막혔을 땐 누구든지 자신의 분신(分身)을 찾는 법이지." 주검화의 음성에는 진득한 한(恨)이 담겨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 말 속에 자조(自嘲)가 어려있다.' 뇌천린은 절로 의혹이 생겼다. 천하에서 두번째 가는 신분을 지닌 사람에게 한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절 분신으로 생각한단 말입니까?" 순간적으로 뇌천린을 주시하는 주검화의 두 눈에서 강렬한 신광(神光)이 폭출되었다.


"그렇다. 제이(第二)의 나로 만들어 야망을 펼치고 싶다." "당신의 야망은 무엇입니까?"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는 것이네. 불멸(不滅)의 무적인(無敵人)...... 그게 바로 나의 야망일세." 그렇다. 주검화는 천하제일인이 되고 싶은 야망 때문에 신분을 숨기고 신주철객(神州鐵客)으로 무림에 명성을 날렸던 것이다. 지금 그의 두 눈에선 하늘조차 꺾을 수 없는 굴강한 신념과 야망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뇌천린은 그의 말을 얼른 납득할 수 없는 듯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무적(無敵)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천하는 넓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들 가운데도 강자(强者)는 있으니까요." "물론 그렇다. 하지만 대륙오강(大陸五强)을 꺾으면 누구나 천하제일인으로 추대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음성에는 굽힐 수 없는 불굴의 의지가 실려 있었다. 그런데 대륙오강을 꺾다니? 그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대륙오강(大陸五强)! 무림이 생긴 이래 불패(不敗)의 신화(神話)를 창조한 다섯 세력을 일컫는 말이다. 살수제일천(殺手第一天)으로 불리는 - 낭야릉(浪野陵). 사막(砂漠)의 파괴자(破壞者)로 불리는 - 사망풍(死亡風). 바다(海)를 지배하는 살인태풍(殺人颱風) - 혈폭전함(血暴戰艦). 여인천하(女人天下)를 노리는 여인집단(女人集團) - 화왕봉(花王蜂). 천하의 범법자(犯法者)와 수배자(手配者)의 낙원(樂園)인 악마도(惡魔都). 이들은 하나같이 무림인들에게 공포의 대명사이며 경원(敬遠)의 대상이었다. 그들 대륙오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 직접 부딪혀 겨루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어느 세력이 더 강(强)한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세인들은 대륙오강(大陸五强)을 서슴없이 천하최강(天下最强)으로 꼽는다. 주검화의 말대로 대륙오강을 꺾는 자가 있다면 천하제일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뇌천린은 진중한 얼굴로 주검화를 정시했다. "당신은 제가 후계자(後繼者)가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순간적으로 주검화가 멈칫했다. "자네의 말뜻은......?" "저는 저일 뿐 다른 사람의 모사품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순간 뇌천린의 얼굴에는 확고부동한 의지가 가득 차 있었다. 그건 그의 성격이 남에게 예속 당하기를 싫어한다는 걸 나타내는 것이다. 주검화는 뜻밖의 거부에 약간 당황했다. "자네는 남아의 원대한 웅지(雄志)를 펴볼 생각이 없단 말인가?" "그것은 당신의 야망일 뿐 저의 야망은 아니지 않습니까?" 뇌천린의 단호한 결의에 주검화는 내심 난감해졌다. '그점을 미처 생각 못했군. 이 아이 정도면 자존심이 강하고 대단한 의지가 있다는 걸......' 뇌천린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굳은 심지(心志)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저에겐 저의 인생(人生)이 있고 저의 야망(野望)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떤 경우던 저의 길을 갈 것입니다." 뇌천린의 단호한 말에 주검화는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자신의 후계자가 되려면 이 정도의 자부심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검화는 뇌천린이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면 자네의 야망은 무엇인가?" "나의 천하를 갖는 것입니다." "자신의 천하......?" 주검화는 어리둥절해서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내가 바라는 이상향(理想鄕)을 설립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야망을 토로하는 뇌천린의 음성은 어느새 뜨거운 열기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곳엔 어떤 사람들이 살건가?" "내 목숨 이상으로 사랑하는 인애원(仁愛院)의 아이들과 함께 있을 겁니다." "인애원(仁愛院)?" "고아들입니다." "그렇다면 말이 통하겠군. 자네는 힘없이 자네의 천하를 이루고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주검화의 질문에 뇌천린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물론 그점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그 힘을 만들 능력이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결코 남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 힘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언제든지 그 힘을 만들 능력이 있다. 이 광오하면서도 패기만만한 말. 그것은 뇌천린이란 인간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일면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오만불손하고 안하무인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뇌천린이었기에 조금도 주검화의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광오한 말이군. 하지만 어쩌면 겸손한 말인지도 모른다. 자네에겐 그 이상의 능력이 있으니까.' 주검화는 뇌천린의 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는 뇌천린에게 깊숙히 빠져들고 있었다. 이때, 뇌천린은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은인(恩人)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허나 결코 구명지은(救命之恩)은 잊지 않겠습니다." "자네의 뜻이 정히 그러하다면 나도 말리지는 않겠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인생이 있으니까." 주검화가 뇌천린을 보며 빙긋 웃었다. "하지만 자네와 의형제(義兄弟)를 맺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네." 주검화는 뇌천린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흔쾌하게 포기했다. 그는 매우 호방스러운 영웅이었다. 뇌천린은 그가 격의 없게 나오자 황망할 따름이었다. "저같이 미천한 자와 어찌......" "하하핫! 뜻만 맞으면 그까짓 신분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천하의 영웅은 자네와 나밖에 없는 것 같은데......" 주검화는 기분좋게 웃어젖혔다. 뇌천린도 더 이상 그의 요구를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런 사람과 의형제가 된다는건 그로서도 홍복(洪福)이었다. '왕야(王爺)답지 않게 소탈하고 호방하다. 절로 정(情)이 가는 사람이다.' 그는 벅차 오르는 가슴을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습니다. 형님! 소제(小弟)의 절을 받으십시오." "하하핫! 정말 기쁘다. 자네같은 아우를 가지게 되서 말이다." 주검화는 절을 하는 뇌천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연신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 속에는 뜨거운 희열이 충만되어 있었다. '외로웠었다. 황족(皇族)으로 태어난 그날부터 나는 고독해야만 했고 그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모른다.' 그는 격정에 휩싸인 채 선실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약려! 아직 멀었소? 그리고 아끼던 천일향로주(千日香露酒)를 꺼내 오시오.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야겠소." "너무 채근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가지고 나가는 참이에요." 유약려는 시비들과 함께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안주와 군침이 넘어가는 주향(酒香)짙은 술을 가지고 나왔다. 그녀는 주검화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토록 훌륭한 아우님을 두게 된 것을 축하해요." "하하핫! 당신도 듣고 있었구료. 약려가 보기에도 나의 의제가 멋있소?" 주검화는 몹시 즐거운 듯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유약려는 고혹적인 표정을 지으며 뇌천린을 향해 웃었다. "물론이에요. 만약 당신이 없었더라면 소첩은 반했을 거예요." "하하하! 마음놓고 있다가는 약려를 내 아우에게 빼앗기겠는데......" "별 농담을 " 뇌천린은 얼굴을 붉히며 얼른 술잔을 입에 쏟아부었다. "하하하......!" "호호호......!" 주검화와 유약려는 재미있다는 듯 대소를 그치지 않았다. 뇌천린은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얼른 술잔을 주검화에게 내밀었다. "자! 형님! 소제의 잔을 받으십시오." "뇌아우 ! 진심으로 반갑네. 자네같은 동생을 두게 되다니......" 주검화는 진한 격정이 가슴을 타고 넘어옴을 느꼈다. 그는 강한 사나이였지만 어쩔 수 없이 정에 약한 인간이었다. 이제 정말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아우를 만나자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기뻤다. ② 정이 있고 술이 있는 그런 술자리가 지속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쉴새없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일까? 강심(江心)을 바라보고 있는 유약려의 두 눈 깊숙한 곳에 근심이 어려 있는 것은...... '뇌천린! 내가 보기에는 뛰어난 기재다. 만약 금릉왕의 뜻을 이어 받는다면 우리 일에 큰 방해가 된다.' 아! 이게 무슨 말인가? 유약려의 내면에선 촉촉한 음모가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니...... '이 사실을 위승상(魏丞相)에게 알려야 한다. 우리는 금릉왕을 무력하게 만드는데 그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던가? 금릉왕이 자신의 분신(分身)을 만들게 놔둘 수는 없다.' 위승상(魏丞相)이라니......? 설마 대명(大明)의 제이인자(第二人者)라는 승상 위장청(魏長淸)을 가리킨단 말인가? . 승상(丞相) 위장청(魏長淸)은 황제 다음으로 아니 황제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인물이었다. 대명(大明)의 모든 실권은 그가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유약려와 함께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주검화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가 딴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 순간 그녀는 탁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난간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난간에 기대어 강물을 구경하는 척 하면서 두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한 통의 서찰을 썼다. 이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서찰을 빈 호로병 속에 넣은 후 장난하듯 강물에 던졌다. 호로병은 조그만 파문을 일으킨 채 조용히 강물을 따라 흘렀다. '그 누가 호리병을 전서(傳書)라 생각 하겠는가? 강태공으로 변장해 있는 감시인들이 호리병 속의


서찰을 위승상에게 전할 것이다.' 문득, 그녀는 눈 앞에 한 인물의 영상을 떠올렸다. '운악(雲嶽)에게선 왜 소식이 없을까?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금릉왕의 여인이 되었는데......' 운악(雲嶽)이란 인물을 생각하는 그녀의 눈엔 그리움이 넘치고 있었다. 유약려는 애닯은 눈빛으로 눈 앞에 그려지는 한 인물을 응시했다. '운악! 나의 사랑이며 나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 당신의 부탁을 받고 나는 금릉왕을 유혹했지만...... 허나....' 그녀의 두 눈에는 지금 갈등과 고뇌의 빛이 뒤엉킨 채 휘몰아치고 있었다. '저는 흔들리고 있어요. 금릉왕의 인품과 열정에 저도 모르게 빠져 들어가고 있단 말이에요' 괴로움을 달래려는 것인가? 그녀는 입술을 꼬옥 깨물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운악! 어서 당신의 일이 하루 빨리 끝나 저를 데리고 가세요. 저는 점점 자신이 없어져요......' 유약려는 가슴 속으로 고통어린 외침을 터뜨리고 있었다. 여심(女心)의 갈등! 그것은 소리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유약려의 가슴에도 흐르고 있었다. 부드러운 춘광(春光)이 대지를 부드럽게 애무하고 있었다. 휘이잉! 한 줄기 춘풍(春風)이 강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뇌천린과 주검화는 서운한 빛이 가득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별(離別)의 순간이었다. 그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끝이 나고 이젠 헤어져야 할 시간인 것이다. "아우!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겠나?" 주검화가 아쉬운 심정을 토로하자 뇌천린도 심사가 착잡해졌다. "저는 항상 북경에 있지만 형님께서 먼길을 떠나시니......" 뇌천린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로서도 헤어진다는 게 몹시 섭섭했던 것이다. 그들은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되었지만 수십 년을 사귄 사이처럼 돈독한 정이 흐르고 있었다. 주검화가 일 년 동안 천하를 유람할 계획이어서 그들은 석별(惜別)의 정을 나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 년 후에 다시 이곳에서 만나기를 바라네." "형님! 부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뇌아우! 나는 그 사이에 자네의 뜻이 바뀌기를 바라네. 난 자네에게 더 큰 천하와 더 큰 야망을 주고 싶을 뿐이네." 주검화의 두 눈에는 간절한 염원의 빛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뇌천린의 결심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천년거암(千年巨岩)은 결코 자리를 옮기지 않습니다." "하하! 역시 아우답군. 헤어지는 징표(徵表)로 이거나 받게." 주검화는 더 이상 뇌천린을 설득하는 것을 단념하고 품 속에서 비단으로 싼 물건을 꺼냈다. "이게 뭡니까?" 뇌천린은 의아한 얼굴로 비단에 싸인 물건을 받아들었다. "자네가 어떤 힘을 필요로 할때 그것을 익히면 크게 도움이 될 걸세." "대체 무엇인데......?" 뇌천린은 궁금한 눈빛으로 비단을 풀었다. "이...... 이건...... 연화장무전......." 뇌천린은 흠칫 놀라며 경악성을 터뜨렸다. 비단에 싸여 있던 물건은 붉은 벽돌이었다. 한 면에 천축문자가 새겨진 이 벽돌은 녹람존자가 자신에게 보여준 것과 똑같았다.


이 순간, 주검화는 더 놀라고 있었다. 뇌천린이 연화장무전을 알아본 게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아우가 어떻게 연화장무전을 아는가?" "그보다 이걸 어디서 얻었습니까?" "원래 황궁무고(皇宮武庫)에 있던 것인데 여기에 수록된 무공 때문에 나는 강해질 수가 있었네." 그의 말에 뇌천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것은 봉명사(鳳鳴寺)의 연화장무전은 아니군.' 그는 연화장무전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의아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제가 알기엔 연화장무전의 무공은 입신지경(入神之境)이라는데 이걸 절 주면......" "이젠 나에게 소용없는 물건이네. 나는 연화장무전의 무공을 익힌 다음에 또 하나의 기연(奇緣)을 얻었네." 주검화에게 연화장무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연화장무전의 무공을 모두 터득했으니 이젠 무용지물이 아닌가? "그리고 천하엔 연화장무전의 무학보다 더 뛰어난 무공을 지닌 자가 나 말고 두 명이나 더 있네." "그들이 누굽니까?" "맹사(盲師)라는 괴이한 인물과 동영에서 온 젊은 무사네." 일순, 뇌천린의 두 눈에 짙은 의혹의 빛이 파랑거렸다. '맹사라고......? 녹람존자는 맹사가 연화장무전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했는데...... 그에게 연화장무전의 무공이 큰 소용이 없다면 무엇때문에 그것을 노리는 것일까?' 그는 녹람존자의 말을 되새겨 보다가 궁금한 어조로 물었다. "형님은 맹사란 인물을 봤습니까?" "음! 그는 많은 내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은데 괴이하게도 장님 안마사 행세를 하며 다니고 있다." "안마사라고요?" "가공할 고수가 자신을 감추고 있는 것은 어떤 야심(野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 나는 아무런 연관이 없기에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다." 주검화는 말을 하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자네가 연화장무전을 아는 게 무척 궁금하군." "사실은......" 뇌천린은 얼마 전에 녹람존자와 만났던 일을 상세히 말해 주었다. 주검화는 그의 설명을 들은 후 의혹스런 얼굴을 하였다. "맹사가 연화장무전을 노린다는 게 재미있군. 진실로 연화장무전엔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인가?" 연화장무전의 또다른 비밀(泌密)! 그 말은 녹람존자도 했었다. 하지만 그 비밀의 실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뇌천린이 심각한 얼굴로 연화장무전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연화장무전은 중요한 물건같으니 형님이 가지고 계십시오." "어차피 자네에게 준거니 가지고 있게나. 자네에게 운이 따른다면 연화장무전의 비밀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잖은가?" 주검화는 단호하게 그의 청을 거절하며 미련없이 신형을 날렸다. "뇌아우! 다음에 만나세." 그가 가볍게 지면을 박차는가 싶더니 그의 몸은 어느새 유람선 위에 다다르고 있었다. 뇌천린은 주검화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제 8 장 색인령주(索人令主) ① 얼마를 걸었을까? 뇌천린은 손에 들고 있는 천쇄금고가 거추장스럽다고 느꼈다. '천쇄금고를 열고 기보(奇寶)만 가지고 가야겠다.'


은밀한 장소를 찾으려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이 한 곳에 멎었다. 한 쪽에 숲이 우거져 있고 그 사이로 빈 공터가 보였다. 숲 속 공터에서 뇌천린은 신중한 얼굴로 천쇄금고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가 품 속에서 끝이 살짝 구부러진 철사 하나를 꺼냈다. "후훗! 제법 견고하게 만들었군. 하지만 나에겐 어떤 금고라도 우스울 뿐이다." 뇌천린은 철사를 열쇠구멍에 넣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지만 어떤 금고도 한 식경을 넘기지 않는다는 그의 손기술이 천쇄금고엔 통하지가 않았다. 아무리 손을 놀려도 천쇄금고는 열리지가 않았다. '삼중구조로 되어 있군. 제법 애를 먹이는데......' 뇌천린은 자존심이 상한 듯 더욱 거칠게 철사를 돌렸다. 이마에서 땀이 흐를 정도로 애를 썼지만 천쇄금고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뇌천린은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천쇄금고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내가 열지 못하는 금고가 존재하다니.... 그럼 그림의 떡이란 말인가?" 그가 허탈한 모습으로 멍하니 서 있을때, "친구! 고생하는데 내가 도와줄까?" 난데없이 그의 등 뒤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뇌천린은 흠칫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언제 나타났는가? 그의 앞에 한 늙은 거지가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노개(老 ), 그는 대략 육순 가량 되었을까? 머리는 까치가 둥지를 틀 정도로 봉두난발이었고, 평생 세수를 한 번도 하지 않은 듯 얼굴과 목에는 때가 더덕더덕 하였다. 그리고 칼로 찢어 놓은 듯이 작은 눈과 뾰족한 턱, 그 위에 난 듬성듬성한 수염...... 한 마디로 볼품없는 인물이었다. 백발노개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난 이랑신(二郞神)이라 하는 인정많은 사람이네. 난 남의 고생을 보면 꼭 도와주고 싶은 나쁜 버릇이 있지." 뇌천린은 그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습군. 이랑신(二郞神)이라면 토신(土神)이 아닌가? 그런데 자신을 신(神)에 비유하다니......' 이랑신은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금고를 열고 싶은가? 그럼 내가 열어주지." "당신이 금고 제작자라도 되오? 나도 못여는 금고를 열게?" 뇌천린은 당치도 않은 소리 말라는 듯 퉁명스럽게 쏘아부쳤다. 이랑신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꼭 열어야 금고 안의 물건을 가질 수 있는 것만은 아니지 않는가?" "그럼......?" "비켜라! 뚫으면 되니까." 이랑신은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뭐하려는 거지?' 뇌천린은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랑신이 나뭇가지로 천쇄금고를 찔러갔다. 그러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 벌어지고 말았다. 나뭇가지는 마치 두부를 파고들 듯 간단없이 천쇄금고를 꿰뚫는 것이 아닌가? '저...... 저럴 수가.......?' 뇌천린은 너무도 놀라운 광경에 아연실색한 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푹! 푹! 이랑신은 마치 장난하듯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계속 천쇄금고를 찔렀다. 천쇄금고의 한쪽 면에는 촘촘한


구멍들이 하나의 원을 형성하며 둥글게 뚫렸다. 이윽고 구멍들이 둥근 원(圓)을 이루자 이랑신은 손가락으로 원의 중심부를 가격했다. 그러자 철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가며 금고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뇌천린은 눈 앞에 벌어진 황당한 상황에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알기로 천쇄금고는 워낙 견고하여 간장이나 막사같은 보검으로도 벨 수가 없었다. 그런데 눈 앞의 인물은 나뭇가지로 간단히 천쇄금고를 뚫어버리지 않는가? 그런데 금고 안을 들여다보던 그의 눈은 놀라움에 더욱 커져 버렸다. '저...... 저건...... 연화장무전......?' 금고 안엔 뜻밖에도 연화장무전이 들어 있었다. 이때 이랑신은 담담한 표정으로 연화장무전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대가 그토록 꺼내고 싶어한 게 연화장무전이었군! 가지게." 일순, 뇌천린의 신색이 아연해졌다. '연화장무전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무림인이면서 연화장무전을 보고 이토록 담담하다니...... 믿기지가 않는군.' 개세무공(蓋世武功)이 새겨져 있는 연화장무전을 백안시(白眼視)하는 이랑신. 그의 행동은 세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사생결단을 하면서 연화장무전을 빼앗으려 하리라! 이랑신은 그의 내심을 간파한 듯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연화장무전이 아무리 개세(蓋世)의 기보(奇寶)라 해도 나에겐 무용지물(無用之物)이지." 뇌천린이 그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연화장무전의 무공들은 모두 수준이 비슷하지. 그래서 한 가지를 익히면 다른 것은 별 소용이 없다네." 그렇다면......? 이랑신은 연화장무전의 무공을 익혔다는 뜻이 아닌가? 뇌천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이랑신을 직시했다. "그럼 당신은 이미 연화장무전의 무공을 익혔단 말입니까?" "오래 되었지. 내가 익힌 연화장무전의 무공은 수미이화사공(須彌離火死功)이라는 것인데...... 보여줄까?" 이랑신이 오른손을 살짝 뿌렸다. 그의 손에서 적색 강기(强氣)가 마치 칼날같이 좌측 지면을 향해 폭사되었다. 강기가 땅에 박히는 순간, "큭---!" 난데없이 땅 속에서 처참한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시뻘건 선혈이 번지는 것이 아닌가? 일순, 뇌천린은 흠칫 놀라며 안색을 굳혔다. '누...... 누가 잠복(潛伏)을......' 이때, 이랑신은 입가에 짖궂은 미소를 베어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수미이화사공은 사실 별거 아니네. 단지 쥐새끼를 잡는데는 유용하지."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이랑신은 사방으로 적색강기를 발출했다. "크악-----!" 땅 속에서 처참한 비명소리가 여기저기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지면이 약간 흔들리는가 싶더니 수많은 흑영들이 솟구쳐 나왔다. 대략 오십 명 가량 될까? 흑의인들은 하나같이 흉흉한 살광(殺光)을 폭출하고 있었다. 또한 몸에서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절정고수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랑신은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조금도 놀라는 기색없이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그들을


쓸어보았다. "천마십사(天魔十邪)의 주구(走狗)들인가?" 그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짙은 살기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런데 흑의인들이 천마십사의 수하들이라니......? 천마십사(天魔十邪)--------! 오십 년 전, 무림을 혈해(血海)로 몰아 넣은 열 명의 대마두(大魔頭)들이 있었다. 그들은 잔악한 심성과 독랄한 손속으로 온갖 악행(惡行)을 자행했고 그로인해 무림은 공포의 도가니로 변해 버렸다. 결국, 그들은 무림의 공적(共敵)이 되어 쫓기다 악마도(惡魔都)로 피신하고 말았다. 그런데 오십 년이 지난 오늘에 그들의 수하들이 나타나다니 뜻밖의 일이었다. 이랑신은 가소롭다는 얼굴로 비릿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천마십사는 이미 내 행적을 파악하고 있었군. 하지만 이런 놈들을 보내다니......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군." "뒈질 놈이 잔소리가 많다. 죽어랏-----!" 흑의인들은 살기충만한 폭갈을 터뜨리며 일제히 덮쳐들었다. 파츠츠츳---! 가공할 검기가 그물처럼 이랑신을 향해 뻗쳐왔다. "흐흐흐! 하루살이같은 놈들......" 이랑신은 입가에 한 가닥 비웃음을 베어물며 품 속에서 굵은 단봉(短烽)을 꺼내 들었다. 단봉을 쭉 뽑자 두 자 가량 길어지며 끝에서 수십 개의 예리한 못이 삐져 나왔다. 단봉은 순식간에 가시방망이의 형상으로 변했다. "미친 개들에겐 몽둥이가 약(藥)이다." 이랑신은 덮쳐오는 흑의인들을 향해 단봉을 개 패듯이 휘둘렀다. 퍽! 퍽! 흑의인들은 비쾌하게 날아오는 단봉을 피할 겨를도 없이 머리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렸다. "으악----!" 흑의인들은 이랑신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죽음을 당했다. 뇌천린은 이랑신의 행동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해학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니 손속은 잔인하군.' 실로 그러했다. 흑의인들을 도륙하고 있는 이랑신에게선 조금 전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살인귀(殺人鬼)인 듯 그는 살기등등한 채 무자비하게 살수(殺手)를 전개하고 있었다. "크악!" 단봉이 허공에서 작렬할 때마다 흑의인들은 손 한번 제대로 놀려보지 못하고 머리가 벌집이 된 채 쓰러졌다. 이랑신의 무공은 너무도 극강했다. 그는 삽시간에 오십여 명이나 되는 흑의인들을 완전히 살륙해 버렸다. 그는 참혹하게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 가운데 우뚝 신형을 멈춘 채 살기어린 독백을 흘렸다. "천마십사---! 너희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랑신! 그는 천마십사를 뒤쫓고 있었단 말인가? "그동안 북경성에 숨어 나의 이목을 잘도 피했다만 이번에는 기필코 붙잡아 갈 것이다." 잠시 후, 그는 단봉을 품 속에 갈무리하며 시선을 뇌천린에게 던졌다. "친구! 난 볼 일이 있어 그만 가보겠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세." "지금 당신의 도움을 보답할 길이 없는 것이 아쉽구료." "신경 쓰지 말게. 나는 내가 추적하는 인물 외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니까......"


이랑신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인 후 힘껏 지면을 박찼다. 신형을 날리는 그를 향해 뇌천린이 다급히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악마도(惡魔都)! 그리고 나는 악마도를 도망친 자들을 잡아들이는 색인령주(索人令主)라네......" 이랑신의 신형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채 허공에서 음성만 들려왔다. 일순, 뇌천린은 흠칫 놀랐다. '악마도......!' 그것은 너무도 뜻밖의 사실이었던 것이다. 악마도는 오직 마와 악(惡)이 득실거리는 공포의 도시(都市)로 소문 난 곳이다. 그런데 이랑신이 그곳에서 온 자라니 믿기가 어려웠다. 제 9 장 운명상극(運命相剋) ① 뇌천린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수풀을 헤치며 야산을 벗어나고 있었다. 물오르기 시작한 싱그러운 풀내음이 기분을 한층 더 상쾌하게 만들었다. 휘이잉---! 일진의 미풍이 시원스럽게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흥겨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소롯길을 걷고 있었다. 문득 그의 발걸음이 멈춰지고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길 한쪽에 우뚝 서 있는 고목(古木) 아래에 한 노인이 조롱(鳥籠)을 손에 든 채 앉아 있었다. 대략 육순 가량 되었을까? 전신에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기품(氣品)과 위엄이 서려 있었으며 젊었을 때 뭇 여인들의 호감을 삼직한 준수한 용모였다. 하지만 노인은 애석하게도 한쪽 눈이 없는 애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대학자(大學者)인 양 감히 범접치 못할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조롱에는 한 마리 괴상한 새가 들어 있었다. 괴조(怪鳥)는 전신이 핏빛처럼 붉고 머리에 닭같은 벼슬이 있었다. 지금 홍조(紅鳥)가 두 눈에 사이(邪異)한 청광(靑光)을 내뿜으며 뇌천린을 쏘아보고 있었다. 뇌천린은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새군. 두 눈에서 엄청난 마기(魔氣)를 뿜어내다니......' 새를 바라보던 뇌천린이 자신도 모르게 신형을 부르르 떨었다. '새의 눈빛을 대하고 있노라니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 지는군.' 그는 기이한 느낌을 받으며 더 이상 쳐다 봐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무심한 얼굴로 성큼성큼 금의노인의 앞을 지나갔다. 막 노인을 지나쳐가는데 금의노인이 그를 불러세웠다. "젊은이! 자네의 운명을 점치고 싶지 않나?" 나직하나 함부로 거역할 수 없는 중압감이 실려 있는 음성이었다. "무슨 소립니까?" 뒷덜미를 잡힌 양 뇌천린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노인 쪽으로 돌아섰다. 금의노인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오한 눈빛으로 뇌천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난 지금까지 자네처럼 관상(觀像)이 좋은 사람은 처음 보네. 해서 자네의 미래를 알려주겠네." "노인장은 점장이 이십니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 금의노인은 애매모호한 말을 하면서도 두 눈에서 혜광(慧光)을 발했다. "나에겐 상대의 운명을 예견할 능력이 있으나 아무나 점을 쳐주지는 않는다." "그럼 어떤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말입니까?"


"나의 적(敵)이 될만한 사람이지." 일순, 뇌천린은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이상한 사람이군. 말대로라면 내가 자신의 적이란 말이 아닌가?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가 짙은 의혹에 휩싸여 있을때 금의노인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어떤가? 흥미가 있는가?" "흥미는 있으나 저와는 연관이 없군요. 노인장과 저는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그렇지 않다네. 대륙이 아무리 넓다 해도 영웅은 몇 명 없는 법...... 그리고 한 산에 호랑이가 두 마리 없듯이 그들은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지." 노인의 말대로라면 뇌천린은 영웅이지만 더불어 노인도 영웅이란 뜻이 된다. 자신의 적에게만 점(占)을 봐주는데 뇌천린에게도 권유했기 때문이다. 금의노인의 적이란 곧 자신에게 대적할만한 영웅인 것이다. "때문에 지금이야 모르지만 후일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럼 노인장은 미리 자신의 적이 될만한 사람을 찾고 있단 말입니까?" 뇌천린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지금은 피곤해도 후환(後患)은 없으니까......" 실로 묘한 논리(論理)였다. 뇌천린은 점점 금의노인에게 흥미가 생겼다. "만약 제가 적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의 점술(占術)은 독특하지.... 일단 내 점(占)의 대상자는 적이라 보고 시작을 하네. 그래서 점술의 결과는 항시 두 가지 중의 하나네." 금의노인은 잠시 말을 끊고 뇌천린을 쳐다보았다. 고요한 눈빛이었지만 동공 깊숙한 곳에선 날카로운 신광이 폭사되고 있었다. "죽음이 아니면 삶이지." "제가 보기 싫다면요?" "후후후! 그렇다면 그냥 가면 되네. 나 혼자서 자네의 운명을 점치면 되니까...." 금의노인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나직히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 어린 살기를 뇌천린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자네에게 죽음이 나타나면 지옥(地獄)이라도 쫓아가서 죽이지." "그러면 될 것을 왜 붙잡아 세웠습니까?" 뇌천린은 희롱 당하는 기분이 들자 퉁명스럽게 쏘아 부쳤다. 하지만 금의노인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상하게 자네에겐 본인 앞에서 운명을 가르쳐 주고 싶은 기분이 들더군. 물론 자네의 태도도 궁금하고......" 뇌천린은 노인의 의도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노인은 그를 누군가와 비교하려는 것이다. '내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노인 자신이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예전에 지금과 같은 경우를 당했을 것이다. 노인은 내가 그냥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남이 자신을 시험하려는데 비켜가는 것은 패배이니까.' 그의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강렬한 호승심(好勝心)이 고개를 쳐들었다. "좋소! 나는 운명을 믿지 않지만 당신과 내가 어떤 사이인지는 알아 둘 필요가 있겠죠." "후후후......!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금의노인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싱긋 웃으며 시선을 조롱에 던졌다. "혈점(血点)! 나와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홍조가 머리로 조롱의 문을 밀치고 금의노인의 어깨 위로 날아 올랐다. 금의노인은 홍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랑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새는 천축(天竺)의 설산(雪山)에서만 서식하는 영천마조(靈天魔鳥)라 하네. 들어본 적이 있나?" "금시초문이오."


"영천마조는 그 어떤 동물보다 자신에게 해를 주는 사물과 위험을 식별하는 본능이 뛰어나다네." 금의노인이 영천마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인의 피(血)를 먹고 자라 주인과 영적교류(靈的交流)가 가능한 특성을 지니고 있지. 그래서 영천마조는 자신의 본능으로 주인의 적을 감별(鑑別)하는 것이라네." 그의 말에 뇌천린은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위험과 적을 식별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동물의 본능은 대자연의 순리(順理)와 똑같은 것이니 영천마조가 느끼는 감정은 틀림 없겠구료." "그렇다네. 영천마조는 아직 한 번도 틀려본 적이 없다네. 그리고 덧붙여 말한다면 영천마조의 몸에선 기이한 음파(音波)가 발생되는데 누구든 그 음파를 받으면 마음 속의 말을 감추지 못하네. 내심의 말과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 틀리면 엄청난 두통을 겪게 되니까......" 금의노인의 말은 실로 황당무계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진지한 것으로 보아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천하는 넓고 기이한 일도 많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사람 나름이겠죠. 남아가 고통이 무서워 내심을 모두 보일 수는 없는 일 아니오?" "허허허......! 역시 자네는 내가 본대로 대담한 인물이군." 금의노인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품 속에서 두 개의 옥패(玉牌)를 꺼냈다. 옥패(玉牌)는 중앙에 각각 <死>와 <生>의 글자가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금의노인은 두 개의 옥패를 영천마조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영천마조는 괴상한 울음을 터뜨리며 뇌천린을 쏘아 보았다. 뇌천린이 영천마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같이 쏘아보았다. '새 따위에게 결정될 운명이라면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의 내심에선 오연한 기질이 솟구치고 있었다. 영천마조는 한동안 뇌천린을 살펴보다가 눈길을 옥패로 돌렸다. "끽! 끽!" 영천마조는 두 개의 옥패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순간 금의노인의 두 눈에 놀람의 빛이 치솟았다. "이 옥패에 없단 말이냐?" 영천마조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금의노인은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상념 속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두 눈에 이채를 반짝이며 급히 품 속에서 또다른 옥패 하나를 꺼냈다. <극(剋)>. 옥패의 중앙에는 그렇게 음각되어 있었다. 영천마조는 그 옥패를 보는 순간 더욱 짙은 청광을 내뿜으며 부리로 쪼아댔다. 순간 금의노인은 망연자실한 채 멍하니 뇌천린을 응시했다.도대체 <극> 자의 의미는 뭐란 말인가?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사부(師父)의 예언은 틀린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는 착잡한 얼굴로 의미모를 말을 뇌까리고 있었다. 뇌천린은 일순 커다란 의혹을 느꼈다. '왜 이러지? 무척 당황해 하는 것 같으니......? 헌데 또 사부의 예언이란 무엇일까?' 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뇌천린이 물었다. "어떻소? 당신에게 있어 나란 존재는 무엇이오?" "자네는 살려둘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는 기묘한 점괘(占卦)네." 당황하던 금의노인은 이내 신색을 회복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뇌천린이 금의노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거 이상하군요. 노인장은 분명 생(生)과 사(死)의 두 가지 결과만 나온다 했는데?" "그것은 자네와 노부가 상극(相剋)이기에 운명을 오직 하늘만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네." "상극이라면 당연히 적이 아니오.?" "그게 아니네. 나와 상극인 인물은 나와 똑같은 운명을 타고 태어났기에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네." 금의노인은 난처한 신색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뇌천린은 그의 말뜻을 알 수가 없었다. "같은 운명이라면 강력한 적수(敵手)일텐데 더욱 죽여야 하지 않습니까?" "상극(相剋)의 진정한 의미는 완전한 천하의 웅패(雄覇)네. 두 영웅이 서로 자신의 아성(牙城)을 쌓아가기에......" 금의노인의 음성에는 그 어떤 야망(野望)이 진득하게 배어 있었다. "최후의 승자(勝者)가 상대의 천하까지 흡수할 수 있어 완벽한 군림(君臨)을 할 수 있네. 그렇지 않고 지금 자넬 죽이면 반쪽 천하 밖에 얻지 못하네." 이 뚱딴지같은 말을 믿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금의노인은 자신의 역술(易術)을 진실로 믿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하늘은 두 인재(人才)를 내리고 최후의 선택을 통해 모든 영광을 상대에게 돌려주는 것이네." 금의노인의 진지한 말에 뇌천린은 짖궂은 마음이 들었다.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이 노인을 떠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후일의 결과가 불안하니 지금 나를 죽이면 반쪽이나마 확실히 웅패할 수 있을 게 아니오?" 금의노인은 뇌천린의 말에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그러기에는 나의 야망은 너무 크고 또 적수 없는 군림의 길은 너무 외로워 싫다네." 누가 이처럼 자신감을 피력할 수 있을까? 반쪽의 천하 따윈 원치도 않고 또 적수없는 독주(獨走)는 싱겁다고 생각하는 이 노인. 그는 천하의 웅패를 꿈꾸는 일대거웅(一代巨雄)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뇌천린도 내심 금의노인의 말에 탄복을 하고 있었다. '효웅(梟雄)이군. 자신의 방심을 없애 줄 적수가 존재하기를 바라다니......' 문득, 금의노인이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후후후! 노부의 사부가 그랬다. 노부는 제천성(帝天星)의 시운(時運)을 타고 태어났기에 틀림없이 천하 절대좌(天下絶代座)에 오를 것이라고......" 제천성? "하지만 상극의 기개가 동시대(同時代)에 나타나면 나의 야망은 이미 반은 꺾인 셈이라고." 말하는 노인의 얼굴엔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 눈 앞에 나타난데에 대한 서운함이 어려 있었다. 상극의 기재가 없으면 당연히 천하는 자신의 차지가 될텐데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다. 노부는 자네를 통해 야망을 더 불태우면 불태웠지 결코 하늘의 선택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겠다." '하늘이 자기를 버린다 해도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의지와 정열을 쏟아 후회없는 인생을 살겠단 말이군. 과연 천하를 노리는 대야망가(大野望家)다운 기개다.' 뇌천린은 내심 금의노인의 결의에 감탄했다. 하지만 그 역시 금의노인 못지 않은 패기(覇氣)와 하늘조차 꺾을 수 없는 자존심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뇌천린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오. 만약 당신이 내 앞길을 가로 막는 일이 있다면 하늘이 당신을 선택한다 해도 당신을 죽일 것이오." 뇌천린의 당당한 말에 금의노인은 그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전율을 느꼈다. '어쩌면 이 애의 적이 되는 자는 천하에서 가장 비참해질지도 모른다.' 그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무공도 모르는 것 같은 이 소년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생각하니 괜히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노인장! 우린 안 만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서로의 심장에 검을 박는 일밖에는 없으니까요." 뇌천린이 작별을 고하고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금의노인은 무거운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야! 노부의 이름은 주무웅(朱武雄)이다. 잊지는 말기 바란다." '주무웅......? 황족(皇族)인가?' 뇌천린은 내심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주무웅은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위장청의 연락을 받고 금릉왕의 후계자가 누군지 알려고 왔다가 뜻밖에도 최후의 난적(亂敵)이 누군지 알게 되었군.' 아! 대체 주무웅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정체가 무엇이길래 승상인 위장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지금부터 저 아이의 성장을 내 이목하에 두면 충분히 대책을 강구할 수가 있다.' 주무웅은 깊은 상념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금릉왕을 어느 정도 호적수(好敵手)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겠군.' 문득, 주무웅의 두 눈에 착잡한 빛이 어렸다. '아이야! 나는 네가 무림에 뛰어 들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운명이 그걸 거부하겠지만.' 무엇때문일까? 그의 얼굴 가득히 깔려 있는 통한(痛恨)의 빛이 어리는 것은...... '나의 한(恨)은 너무 크다. 그 한을 풀기 위해선 하늘이 날 막는다면 하늘이라도 깨부술 것이다.' 이 얼마나 굳건한 결심인가? 대체 주무웅의 한은 무엇이길래 이토록 가공할 야망을 품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한이 서린 그의 내면에도 한 줄기 인간애는 흐르고 있었다. 그건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타났다. '천하에서 유일하게 나의 호감을 산 너를 죽이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인간이 인간에게 호감을 느끼면 약해지게 되어 있는 법이다. 냉정한 주무웅이었지만 뇌천린에게 친밀감을 느끼자 안타까워진 것이다. '하지만 너와 내가 대결을 벌여야 한다면 나의 한이 나의 호감을 누를 것이다. 그 결과는 죽음 뿐이니 너는 내 일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 절대자가 느낀 이 조그만 인간애. 이것은 후일 무림혈겁의 가장 큰 변수가 되니...... 지켜볼 따름이다. 제 10 장 무적오장(無敵五裝) ① 백만가(百萬街)는 북경성(北京城) 북문(北門) 밖에 자리한 빈민가(貧民街)이다. 언제부터인지 빈곤과 삶에 찌든 사람들이 하나 둘 이곳에 모여 토담집을 짓고 자리를 잡으면서 백만가는 북경성 최대의 서민 안식처가 되었다. 황혼(黃昏)이 물들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뿌리던 태양이 낙조(落照)만을 남긴 채 사라지자 백만가에는 서늘한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백만가의 사람들은 사라지는 햇살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으려는 듯 양지바른 곳에 웅크린 채 석양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 순간, 긴 그림자를 이끌고 무거운 걸음으로 백만가에 들어서는 한 소년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뇌천린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인지 그의 안색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오늘 이노야(李老爺)에게 만보장의 보화를 넘기기로 했는데 만보장의 보화가 연화장무전이니 큰일이군.' 이노야(李老爺)는 도수(盜帥)들이 훔친 물건을 처분해주는 장물아비였다. 뇌천린이 그와 거래(去來)를 맺은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었다.


뇌천린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인애원(仁愛院)의 운영비가 다 떨어졌을텐데...... 처분할 물건이 없으니......' 뇌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인애원은 그에게 살아가는 의미도 부여하지만 벗겨지지 않은 짐으로 어깨를 누르기도 했다. '이노야에게 사정을 하여 은자를 좀 빌려야겠다.' 그는 다 쓰러져 가는 어느 토담집 앞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본 후 거침없이 토담집 안으로 들어갔다. 토담집의 입구는 다른 곳과는 달리 어둡고 지하로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뇌천린은 계단이 어둠 속에 파묻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익숙해 있는 듯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내려 갔다. 얼마 후, 그는 계단이 끝나는 곳에 자리한 커다란 석실 안에 들어섰다.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토담집 안에 이토록 드넓은 석실이 있을 줄을....... 석실 안엔 세상의 온갖 물건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황궁(皇宮)에서나 볼 수 있는 기보(奇寶)에서부터 일반 집에서 볼 수 있는 숟가락까지 없는 게 없었다. 지금 석실의 한쪽에 놓여 있는 탁자 옆엔 한 백발노인이 졸고 있었다. 다 떨어진 옷에 쭈글쭈글한 얼굴과 삐쩍 마른 몰골의 백발노인. 그가 바로 도수(盜帥)들과 공생관계(共生關係)를 맺고 살아가는 장물아비 이노야(李老爺)였다. 꾸벅꾸벅 졸던 이노야가 인기척을 느끼고 재빨리 눈을 떴다. "누구냐?" "나요." "천린이군. 어서 오게. 그래 물건을 가져 왔나?" 이노야는 뇌천린을 발견하고 반색을 하였다. 뇌천린은 난처한 표정으로 이노야를 응시했다. "그게 일이 좀 묘하게 되었소." "무슨 말이냐?" "점 찍은 물건을 가져오긴 했지만 돈이 될 수가 없는 물건이오." "어째서......?" "그건 말 할 수 없지만 하여간 이노야에겐 소용없는 것이오." 뇌천린은 난감한 얼굴로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이노야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채근했다. "더욱 궁금해지는군. 나에게 소용이 없는 물건이라니...... 여인의 고의까지 사는 내가 아니냐?" 그의 말에 뇌천린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하긴 이노야가 살지도 모른다. 지금 형편으로는 연화장무전이라도 팔 수밖에 없지만...' 그의 눈 앞에 문득 애절한 부탁을 하던 녹람존자의 영상이 떠올랐다. '남아(男兒)의 약속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야 하는 법...... 그분과 약속을 하였으니 봉명사에 돌려줘야 한다.' 비록 농담처럼 한 약속이지만 연화장무전을 녹람존자에게 돌려주기로 한 사실이 생각나자 뇌천린은 마음을 고쳐 잡았다. "죄송합니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뇌천린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난 은자를 빌렸으면 합니다. 물건은 한 달 이내로 갖다 주겠소." "곤란한데...... 우리의 거래가 아무리 오래되었다 해도 난 사람을 신용(信用)하진 않아." 이노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냉정하게 거절했다. 뇌천린은 더 이상 사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처지가 아니었다. 인애원의 아이들이 굶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있는 것이다.


"부탁이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오. 이번 한 번만......" 뇌천린이 계속 사정을 했으나 이노야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자네가 가져온 물건을 팔게. 난 그게 어떤 것이든 살테니까." "다른 사람에게 전해줘야 하는 물건이기에 팔 수가 없소. 그러니 이해해주십시요." "그럼 나에게 보이기라도 하게. 그러면 은자를 빌려 줄테니...... 나는 궁금증은 못 참는 성미라네." 무엇 때문인지 이노야는 집요하게 물건을 확인하려 들었다. 뇌천린은 더 이상 실랑이를 해 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노야는 한 번 뱉은 말은 어떤 경우든 철회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보기라도 하지 않으면 그는 정녕 은자 한 닢 안 빌려줄 것이다. '할 수 없군. 보여주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그는 서슴없이 품 속에서 연화장무전을 꺼냈다. 순간, 이노야의 눈이 찢어질 듯 휘둥그래졌다. "연...... 화장무전......!" 그의 음성은 마치 폭풍이라도 만난 듯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뇌천린도 의외였다. '뜻밖이군. 무림인도 아닌 이노야가 연화장무전을 알다니......' 이노야가 흥분된 음성으로 황급히 물었다. "넌 이걸...... 어디서 얻었느냐?" 이노야는 기운이 없어 항상 졸고 있는 노인답지 않게 이 순간만큼은 힘이 넘치고 있었다. 단순히 흥분했기 때문일까? 뇌천린이 도리어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이노야! 당신과 연화장무전이 무슨 연관이라도 있소?" 찰라, 이노야의 두 눈에서 엄청난 살광(殺光)이 폭사되었다. "말해 봐라! 이걸 누가 가지고 있었느냐?" 뇌천린은 일순 가슴이 섬뜩한 것을 느끼며 흠칫 놀랐다. '이노야가 무림의 고수였다니.' 이 때, 살기등등한 이노야가 번개같이 그의 손목을 나꿔챘다. "말해라......! 빨리......" 이성(理性)을 잃은 듯 이노야의 행동은 마치 미친 사람같았다. 뇌천린은 돌연 전신이 파열되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엄습해 오자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으......! 몸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것 같군.' 이노야는 자신도 모르게 뇌천린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손에 내력을 주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이십 년간 연화장무전을 찾아 헤맸다. 내가 이곳에서 장물아비 노릇을 한 것도 도둑들이 훔쳐온 물건이나 그들이 노리는 물건 중에 연화장무전이 있나 해서다." 뇌천린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더욱 극심해지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악! 이노야! 손...... 손을 놓으시오......" "어......!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흥분했다." 이노야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른 뇌천린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는 냉정을 추스리며 씹어 뱉듯 원독어린 음성을 토했다. "이해해라. 이십 년 전의 피맺힌 원한을 아직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연화장무전을 노리는 무리들에 의해 처참히 죽어간 문도들을......" 그의 두 눈에는 지금 엄청난 통한의 불길이 회오리 치고 있었다. 뇌천린은 그제야 비로소 이노야가 무엇 때문에 흥분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럼 이노야가 예전에 연화장무전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 때문에 멸문(滅門)을 당했고......?' 멸문을 당했다면 원한에 사무친 이노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생사고락을 같이 하던 문도들이


죽었는데 그 누가 견딜 수 있겠는가? 자나깨나 복수의 칼을 갈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이노야가 싸늘한 눈빛으로 연화장무전을 응시했다. "이걸 가지고 있었던 놈이 분명 나의 원수일 것이다" "이노야!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소이다. 이 연화장무전은 당신의 것이 아니오." "무슨 소리냐? 연화장무전이 수십 개라도 된단 말이냐?" 이노야는 말 같잖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는 듯 싸늘한 노갈을 터뜨렸다. '아직 모르고 있군. 연화장무전이 모두 다섯 개라는 것을......' 뇌천린은 이노야가 연화장무전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천하에 모두 다섯 개의 연화장무전이 있다 하오. 그러니 자세히 보시오. 당신에게 있었던 연화장무전과 똑같은 것인지......" 이노야는 뜻밖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연화장무전을 살펴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이내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아니군. 형태는 같으나 무공구결(武功句訣)이 틀리다." 그는 허탈한 눈길을 허공에 던지며 신음하듯 뇌까렸다. "이십 년만에 단서를 얻었다 싶었는데 또 백지라니...... 몸은 늙어가는데 언제 이 원한을 갚는단 말인가?" 이노야의 음성(音聲)에는 심장을 토하는 듯한 통한(痛恨)과 자조가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뇌천린은 처량한 이노야의 모습에서 가슴이 뭉클한 애처로움을 느꼈다. "이노야! 내가 자세히는 몰라도 당신에게 한 가지 단서를 알려줄 수는 있소." "그게 뭐냐?" 이노야는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기도 한 듯 다급히 물었다. 뇌천린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 천하엔 연하장무전을 노리는 무리가 있소. 그 무리의 우두머리는 맹사라 하는 자인데 그들이 이노야의 멸문과 무슨 관련이 있을 것이오." "맹사......?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건 알 수가 없소. 나도 남에게서 들은 소리니까." "그렇다면 아나마나한 일이잖아...?" 이노야의 얼굴엔 실망이 어렸다. "꼭 그렇지만도 않소. 상대가 누군인지를 알았으니 찾아보면 되지 않소? 이름도 모를 때보다는 훨씬 나은 거요." 이노야는 뇌천린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말을 하던 그의 두 눈에서 갑자기 가공할 살기가 폭사되었다. "누구냐?" 대갈성과 함께 이노야는 왼쪽 벽을 향해 비쾌하게 오른손을 내뻗었다. 꽈꽝----! 엄청난 굉음과 함께 벽이 박살났고, "으-----악---!" 한 인영이 피범벅이 된 채 처절한 비명을 터뜨리며 나뒹굴었다. 야행복 차림에 용(龍)의 문신을 가진 흑의인이었다. '용...... 용수혈(龍手血)이다......' 뇌천린은 흑의인을 바라본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때, 이노야는 직감적으로 사태가 위급하다는 것을 느끼고 다급성을 토했다. "천린! 너는 어서 숨어라."


"알겠습니다." 뇌천린은 이노야가 긴장하는 것을 보고 재빨리 뒤쪽 벽으로 갔다. 그곳에는 벽 사이에 약간 빈 공간이 있었다. 그것은 만약의 경우에 관원(官員)들의 기습을 피하기 위한 대피장소였다. 그가 벽 한쪽에 있는 기관을 만지자 벽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뇌천린은 지체없이 벽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 갔다.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슷---! 경미한 파공음과 함께 이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나타났다. 용수혈의 주구들이었다. 이노야는 그들의 출현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조금도 놀라는 기색없이 노갈을 터뜨렸다. "웬 놈들이냐?" "이곳에 모란도수가 왔음을 알고 있다. 그는 어디 있느냐?" 한 흑의인이 냉막한 음성으로 싸늘하게 말했다. 이노야는 내심 흠칫 놀랐으나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모란도수가 누구냐?" "흐흐흐! 시치미 뗄 작정이냐? 그 결과는 죽음 뿐임을 알기 바란다." "흥! 인자(忍者) 따위가 너무 큰 소리군." 이노야는 가소롭다는 얼굴로 용수혈의 무리들을 쓸어보며 냉소를 날렸다. 그도 이들이 누군지 이미 파악한 것 같았다. 이노야의 조소에 용수혈의 무리들은 분기충천하였다. "보잘 것 없는 실력을 너무 믿는군. 죽어랏!" 싸늘한 대갈성과 함께 용수혈의 무리들은 가공할 기세로 이노야를 향해 덮쳐갔다. 이노야는 예리한 검기가 당장이라도 자신을 양단낼 듯 덥쳐오는데도 태연한 신색이었다. "죽어야 할 놈들은 겁없이 날 건드린 네 놈들이다." 폭갈과 함께 이노야는 신형을 번개같이 빙글 돌았다. 순간, 이노야의 몸은 팽이처럼 돌고 전신에서 마치 얼음조각처럼 생긴 수백, 수천 개의 응강(凝 )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으-----악----!" 강기에 궤뚫린 흑의인들이 참담한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리며 썩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아아! 처참하게 죽어있는 용수혈의 무리들을 보라! 그들의 전신에는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린 채 분수처럼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간신히 살아 남은 흑의인들은 경악한 얼굴로 신형을 세차게 떨고 있었다. "으으......! 이런 곳에 이토록 가공할 고수가 있을 줄이야......"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가? 인간의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혹독한 훈련을 받은 인자들이 아니던가? 그들은 이내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다시 이노야를 포위했다. 그들의 두 눈에는 생사(生死)를 도외시한 오직 상대방을 죽여야겠다는 살기만 빛날 뿐이었다. 흑의인들이 다시 이노야를 공격하려고 할 때였다. "물러나라! 너희들은 적수가 아니다." 난데없이 웅혼한 음성이 들리며 한 인물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다른 무리들과 달리 화려한 화복을 입고 있는 인물. 그는 바로 용수혈주인 야왕(夜王)이었다. 야왕은 수하들의 시신을 쓸어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혈우편강(血雨片 )---! 이십 년 전에 멸망한 사망풍(死亡風)의 후예가 살아있을 줄은 몰랐다." 혈우편강(血雨片 )---!


고금백대신공(古今百代神功) 중 서열 팔위(八位)의 절대기공(絶代奇功). 이것은 강기( 氣)를 마치 파편처럼 나누어 격사시키는 무공으로 아무리 경공(輕功)이 뛰어난 자라도 피하기 힘든 필살공(必殺功)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노야가 사막의 파괴자라 불리는 사망풍(死亡風)의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대륙오강(大陸五强)의 하나인 사망풍, 그 무적의 집단이 이렇게 현세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때, 이노야는 놀란 기색으로 야왕을 훑어보고 있었다. '보통 놈이 아니군. 단번에 나의 내력을 알아보다니...... 더구나 은연 중에 나를 누르는 이 기운은 뭔가?' 그는 야왕이 결코 자신의 하수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야왕 역시 이노야가 만만찮은 상대라는 것을 간파했기에 부딪히기를 꺼려했다. "우린 너와 격돌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모란도수를 찾고 있으니 그의 행방만 말해라" "너희들은 모두 다 귀가 먹었느냐? 나는 모란도수가 누군지 모른다 하지 않았느냐?" 이노야의 완강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야왕은 조금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이노야와 뇌천린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이다. 야왕의 입가에 흐릿한 살기가 스쳐갔다. "우린 모란도수에 관해 모든 것을 파악했다. 지금 모란도수의 예상 출현로(出現路)엔 우리의 감시망이 모두 퍼져 있다." "아직 감시망에 모란도수의 행적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 이곳에 있거나 이곳에서 어디론가 간 것이 틀림없다." 그의 음성에는 확고한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더구나 그대가 모란도수의 장물을 처분해 주는 자임을 알고 있다." "난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니 말이다." 이노야는 끝까지 시치미를 잡아뗐다. 야왕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에서 광망을 폭사시켰다. "흐흐흐! 관(棺)을 보기 전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참이군. 수색해라!" "존명!" 이노야를 포위하고 있던 용수혈의 무리들은 우렁찬 복명과 함께 지체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누가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남의 집을 뒤진단 말이냐?" 이노야가 대갈을 터뜨리며 양 손을 휘둘렀다. 엄청난 강기가 흑의인들을 향해 뻗쳐갔다. "으악---!" 다섯 명의 흑의인들이 미처 강기를 피하지 못하고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죽어버렸다. "결국 죽음을 자초하는군." 야왕은 이노야가 손을 쓰자 더는 참지 못하고 손을 허리춤에 가져갔다. 번-----쩍---! 그의 허리춤에서 빛살보다 더 빠른 한 줄기 찬란한 검기가 폭출되었다. '역시 강하다.' 이노야는 그물처럼 덮쳐오는 가공할 검기를 발견하고 대경실색하며 신형을 옆으로 날렸다. 하지만 워낙 빠른 검기여서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앞자락이 십여 군데 베어졌다. 일순, 이노야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태어나 이런 낭패를 당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혈세파천(血世破天)_____!" 그는 대갈성을 토하며 쌍장을 비쾌하게 내뻗었다. 산악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은 웅위한 강기였다. 파파파---팟-----! 이노야의 쌍장에서 발출된 응강(凝 )이 우박 쏟아지듯 야왕에게로 날아갔다. 야왕은 긴장된 얼굴로 검을 단단히 움켜 쥐었다.


"대륙오강의 하나답군. 하지만 본 야왕은 천하에서 나와 겨룰 자가 몇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광오한 자부심이 담긴 고함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야왕은 비쾌하게 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거대한 검막(劍幕)이 형성되었다. 응강이 검막에 부딪히는 순간, 치치치-----칙---! 마치 달구어진 쇠가 물 속에서 식는 것 같은 음향과 함께 응강이 모조리 튕겨나 버렸다. "아니...... 이럴 수가.......?" 이노야는 자신의 혈우편강(血雨片 )이 무용지물이 되자 대경실색하였다. 야왕의 무공이 그의 상상을 뛰어 넘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초극강고수답게 이내 냉정을 되찾고 야왕을 향해 또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두 사람은 신형을 한데 엉킨 채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용호상박(龍虎相搏)이라 하는가? 이노야와 야왕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수백 초의 절초(絶招)를 전개하며 혈투(血鬪)를 벌였다. 한수 한수가 경천동지할 절기요,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마는 가공할 무학이었다. 검기가 난무하고 장력이 폭풍치는 싸움이 한 식경 가량 되었을까? "윽-----!" 누군가의 입에서 짤막한 신음소리가 터지며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멎었다. 이노야, 그는 가슴의 뼈가 허옇게 드러난 채 고통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으으! 내가 당하다니...... 사막의 지배자로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던 내가......" 그는 아직도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야왕을 바라보다 힘없이 쓰러졌다. 이노야는 너무도 원통한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숨을 거두었다. 이때, 주위를 수색하던 용수혈의 무리들이 야왕 곁으로 모였다. "아무 곳에도 흔적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비밀 통로도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부하들의 보고에 야왕은 역정을 냈다. 그로선 반드시 뇌천린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야왕이 두 눈에 형형한 안광을 내뿜으며 사방을 훑어 보았다. 그의 시선이 뇌천린이 숨어있는 벽에 이르렀을 때 그의 두 눈이 빛을 발했다. 순간, 미세한 틈으로 석실 안을 내다보고 있던 뇌천린의 가슴이 섬뜩해졌다. '저놈이 혹시......?' 뇌천린의 기우는 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흐흐흐! 누가 감히 본좌의 이목을 피할 수 있단 말이냐?" 비릿한 조소와 함께 야왕의 쌍수(雙手)가 비쾌하게 벽을 꿰뚫고 파고 들었다. '윽......!' 뇌천린은 양쪽 갈비뼈에 강철같은 물체가 파고 드는 통증을 느끼며 내심으로 비명을 토했다. 야왕의 손이 칼날처럼 그의 옆구리에 박힌 것이다. '요행을 바랬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군.' 그는 야왕의 손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어금니를 짓깨물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뇌천린은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급히 꺼냈다. 야왕은 양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득의의 괴소를 터뜨렸다. "크흐흐흐! 본좌를 우롱할 생각이라면 오산이다." 그가 벽을 향해 강기를 발출했다. 일장에 벽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벽 안을 들여다 본 순간 야왕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벽 안엔 핏물만 흥건할 뿐 사람의 형체는 그림자조차 없었다.야왕은 눈 앞에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분명 내 손에 의해 상처까지 입었는데 그 짧은 시간 내에 도망칠 수 있다니...... 더구나 본좌 앞에서 말이다." 분기(憤氣)를 주체할 수 없음인가? 야왕은 울화통이 치미는 얼굴로 남은 벽도 박살내 버렸다. 순간 야왕의 표정이 밝아졌다. 벽이 허물어지면서 그 뒤로 통로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누가 감히 본좌의 이목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이냐?" 야왕이 수하들을 둘러보며 고함을 쳤다. "피를 많이 흘린 것으로 보아 놈은 중상을 입은 것이 분명하다. 멀리는 못 갔을테니까 추적해라." "존명---!" 용수혈의 무리들은 우렁찬 복명과 함께 지체없이 통로 안으로 신형을 날렸다. 야왕도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모란도수! 네 놈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본좌의 손에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살기등등한 음성이 멀리서 들려오고 석실은 이내 적막감에 휩싸였다. ②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도 그곳에 통로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난데없이 힘겨운 목소리가 석실의 고요를 깨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변고인가? 흥건히 고여 있던 핏물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핏물(血水)은 점차 커지면서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뇌천린이었다. 그의 피묻은 손에는 한 권의 책자가 들려 있었는데 그 책은 밀교기환범전(密狡奇幻梵傳)이었다. 뇌천린은 밀교기환범전을 응시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 책 때문에 여러번 위기를 넘기는군." 그는 조금 전에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밀교기환범전을 생각해내고는 기환술(奇幻術)을 전개했던 것이다. "야왕이 너무 여유를 부렸다. 그가 조금만 빨랐어도 난 비급을 익힐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뇌천린의 독백이었다. 그가 밀교기환범전을 여하경의 처소에서 한 번 훑어 본 적은 있지만 변용술을 빼놓고는 익힌 게 없었다. 그러다 위기의 순간에 책자를 떠올리고 밀교기환범전에서도 최고 어렵다는 환둔기공(幻遁奇功)을 그 짧은 시간에 터득한 것이다. 놀라운 오성(悟性)이며 굉장한 집중력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나 있는 상처를 어루만지며 어금니를 바스러 지도록 으깨물었다. "야왕! 오늘은 내가 도망다녀야 할 입장이지만 언젠가는 네 놈이 내 앞에서 쥐새끼처럼 달아나게 해 주겠다." 뇌천린의 눈에 싸늘하게 식어가는 이노야의 시신이 들어왔다. '불쌍한 이노야! 피맺힌 한을 풀지도 못하고 죽다니.......' 그는 애처로운 눈길로 잠시 이노야를 바라보다 신형을 돌렸다. '이노야! 그 동안의 정분을 생각해 야왕을 죽일 때 당신의 몫까지 복수해 주겠소.' 뇌천린이 석실을 막 떠나려는 순간, "천...... 린......" 갑자기 이노야의 미약한 음성이 뇌천린의 귓전을 파고 들었다. "이노야! 아직 죽지 않았구료." 뇌천린은 황급히 이노야에게로 달려갔다. 이노야는 힘겹게 눈을 뜨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곧...... 끊어질...... 목숨이다...... 자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게 뭡니까?" "자네도...... 많이...... 다쳤군...... 저기 있는...... 옥...... 옥함(玉函)을......


가져오게......." 이노야는 용수혈의 무리들이 뒤지는 바람에 한 쪽에 나뒹굴고 있는 옥함을 가리켰다. 뇌천린은 재빨리 옥함을 가져왔다. 이노야는 극심한 고통이 엄습해 오는 듯 얼굴을 심하게 찡그렸다. "그걸...... 열어라...... 그곳에 상세(傷勢)를...... 치료할...... 약이 있다......." "그렇다면...... 이노야가 복용해야 되지 않소?" "난...... 그걸 먹어도...... 어차피...... 죽는다." 이노야는 사색이 드리워진 눈빛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정순한 내공이 있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불귀의 객이 됐을 것이다. 뇌천린은 착잡한 심정으로 옥함을 열었다. '이건...... 지렁이......?' 옥함 속을 들여다 보던 뇌천린은 흠칫 놀랐다. 옥함 속엔 뿌연 우유빛 액체와 함께 지렁이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약간 특이한 것은 지렁이의 빛깔이 하나같이 온통 하얀색이라는 것이다. 이노야는 의아해 하는 뇌천린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그건 지정소토룡(地精素土龍)이란 것으로...... 상처를 치료할 뿐만 아니라...... 내공증진에도...... 효험이 있다." 지정소토룡(地精素土龍)---! 땅에서 발생하는 정기(精氣)만을 먹고 산다는 영물(靈物)로 한 마리만 먹어도 십 년의 공력이 증진된다고 한다. 더구나 옥함 속의 액체는 만년공청석유(萬年空淸石乳)이니 그걸 먹고 자란 지정소토룡의 효능이 어떤지는 확인하지 않아도 능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뇌천린의 눈에는 지정소토룡이 한낱 소름끼치는 미물로 밖에 안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징그럽게 지렁이를 어떻게.......?" "약한 놈! 남아란 몸에 좋다면...... 구더기라도 먹어야 한다......." 이노야의 핀잔에 뇌천린은 오기가 발동했다. '에라! 구역질나는 게 죽는 것 보다야 낫겠지......' 그는 눈을 딱 감고 옥함을 입에 기울였다. 지정소토룡은 씹히지도 않고 저절로 목으로 넘어갔다. 순간적으로 역한 비린내가 그의 내부를 휘감았다. '우----욱---!' 뇌천린은 토할 것만 같았으나 꾹 참고 견디었다. '뱃 속에서 꿈틀거리니...... 영 불편한 걸......' 하지만 지정소토룡이 들어가자마자 상처가 거짓말처럼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치유력이었다. 그는 옥함에 들어있는 모든 것을 마시고 입을 닦았다. 이노야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 보았다. "천린......! 넌......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놈이다...... 너에게...... 복수를 부탁하고...... 싶다." "이노야! 난 무림인이 아니오. 그리고 강호의 시비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도 없소." "그래도...... 해야 한다...... 곧 죽을...... 내 입장에선......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 이노야는 뇌천린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저기 목각상(木刻像)이...... 보이느냐?" "예......!" 뇌천린은 한쪽 구석에 실물처럼 옷이 입혀 있고 갖가지 장신구로 치장되어 있는 목각상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 저리로...... 옮겨다오." 뇌천린은 이노야를 부축해 그를 목각상 앞에 내려 놓았다. 이노야는 목각상에 입혀 있는 녹색장삼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 옷을 벗겨라......" 뇌천린은 묵묵히 녹색장삼을 벗겨 이노야에게 주었다. 이노야는 녹색장삼을 꼬옥 쥐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것은 잠풍호복(潛風護服)이란 것으로......호신(護身) 외에 두 가지 특성이 있다." 겉보기엔 보통의 옷같았으나 다른 묘용이 있는 옷인가 보다. "우선...... 완벽한 방수(防水)가 된...... 이중 천으로 되어 있어...... 천 사이에 바람을 넣고...... 밀폐시키면 ...... 가볍게 물에서...... 뜰 수가 있다." 그의 말에 뇌천린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잠풍호복을 살펴보았다. 옷단은 모두 단단히 붙어 있었으나 어깨 부분에 조그마한 틈이 있었다. 그곳에 바람을 넣고 밀폐시키면 되는 모양이었다. 이노야는 또 다른 특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또 잠풍호복을 짠 실 속엔...... 만년빙철강모(萬年氷鐵强母)로 만든...... 예리하기가 보도(寶刀)보다 더한...... 열 가닥의 사인(絲刃)이 들어 있다." 열 가닥의 사인(絲刃). 만년빙철강모로 만들었다면 실이라기보다 쇠였다. "급할 때...... 그 사망십승(死亡十繩)을 빼내 쓰면...... 훌륭한 무기가 될 것이다." 뇌천린이 자세히 보니 잠풍호복에 올이 다른 것보다 굵은 열 가닥의 실이 있었다. '이게 사망십승(死亡十繩)인가 보군!' 그는 한 가닥의 실을 살짝 건드렸다. 순간, 손을 얹기만 했는데도 손끝이 베어지는 것이 아닌가? "조심해라! 사망십승은...... 너무 예리한 게 흠이니라......" 이노야는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길을 채대에 던졌다. "채대를 가져와라." 채대(彩帶), 그것은 화려의 극치를 이루는 구룡(九龍)이 수놓아 있었다. 이노야는 채대를 받아들고는 만지작거렸다. "운문옥대(雲紋玉帶)....... 보기엔 평범하나...... 연검(軟劍)이다...... 이걸 빼면......" 이노야는 채대 사이에서 얇기가 종이같은 연검을 뽑아들었다. "십방참마도(十方斬魔刀)......! 공력을 주입하면...... 그 어느 신검보다...... 강하다......." 그는 목각상에 걸려있는 장신구를 하나하나 뇌천린에게 설명해 주었다. 혈후쌍환(血吼雙環)---! 양손에 각각 두 개씩 차는 팔찌로 각 팔찌마다 열 개의 구멍이 있어 쌍환이 날으면 엄청난 파공음이 발생한다. 그 파공음에 의해 상대는 내공이 흩어지고 심지어는 심맥이 파열되어 죽고 마는 것이다. 태양봉안연주(太陽鳳眼連珠)---! 구십구 개의 영롱한 구슬로 만들어진 목걸이이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구슬 하나하나가 태산을 무너뜨리고 사해(四海)를 뒤집어 놓을 가공할 벽력붕폭뢰(霹靂崩瀑雷)였으니, 가히 수만 개의 활화산보다 더 엄청난 위력을 가진 목걸이였다. 지옥홍혜(地獄紅鞋)---! 발에 신는 아름다운 당혜(唐鞋)였다. 하지만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당혜에 아름다운 기관(機關)이 장치되어 있는 것을...... 발 뒷꿈치를 이용해 기관을 누르면 통천경악할 열 가지의 암기를 발출시킬 수 있다. 하나같이 악랄하고


죽음을 부르는 십대암기(十代暗器)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가장 무서운 것은 그 누구도 당혜에서 암기가 폭출되리라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방심을 한다는 것이다. 뇌천린은 목각상에 걸려있는 장신구들이 하나같이 가공할 병기라는 것을 알고 해연히 놀랐다. '이걸 몸에 모두 걸친다면 그야말로 움직이는 무기고(武器庫)가 되겠군!' 이노야가 모든 장신구를 뇌천린에게 건네주었다. "무적오장(無敵五裝)......! 이걸 지니게 되면...... 어떤 극한 상황...... 그 어느 장소에서도...... 자유자재로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무적오장(無敵五裝). 눈에 보이지 않는 가공할 살인무기들...... 그것은 인간의 극한 상황을 대비해 만든 신병이기(神兵異器)들이었다. "무적오장은...... 사망풍(死亡風)의...... 풍주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신물(信物)이지만...... 너에게 주겠다." 순간적으로 뇌천린은 흠칫했다. 이노야에겐 또 다른 뜻이 있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이노야의 말뜻은 뇌천린을 사망풍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뇌천린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이노야! 나는 그럴 처지가 아닙니다......" "말하지 마라...... 나 혼자...... 말할 시간도 ...... 없다." 이노야는 절박한 음성으로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죽는 순간에 억지를 부리니 막을 수도 없고......' 뇌천린은 난감한 얼굴로 우물쭈물하였다. 이노야는 힘겹게 품 속에서 검은 색의 삼각깃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호풍패막기(呼風覇漠旗)다...... 이걸 관외(關外) 오이랍산(烏異粒山)의 정상에 꽂아두면...... 흩어졌던 사망풍의 형제들이...... 다시 모일 것이다." 깃발은 중앙에 <風> 이라는 글씨가 금색 실로 수놓아 있었다. "사망풍은...... 아예 멸문당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아직 잔존세력이 남아 있다...... 난 그들 보기가 미안해...... 홀로...... 중원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는 품 속에서 두툼한 책자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사망진천록(死亡震天綠)> 책자의 겉표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사망풍의...... 모든 비학(秘學)이...... 무적오장의 시전법이...... 적혀 있는 비급이다." 그는 사망진천록을 뇌천린의 손에 꼬옥 쥐어 주었다. 뇌천린은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다간 꼼짝 없이 부탁을 들어줘야 되는 경우가 된다!' 그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이노야! 나는 정녕 무림에 뜻이 없기에 다른 사람에게......."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가 없었다. 이노야의 눈빛이 흐려지며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꼭...... 원한을 갚아다오...... 그리고...... 형제들의 혈한(血恨)을...... 갚지 못한...... 제 이십 팔대...... 사망풍주인...... 혈풍대군(血風大君) 이검상(李劍常)을 ...... 용서해 달라고...... 살아 있는 형제들에게...... 전해다오......" 털썩! 이노야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통한(痛恨)을 가슴에 품은 채 한 평생을 살아온 사망풍주 이검상, 그는 이렇게 한많은 인생의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이노야-----!"


뇌천린은 애통한 울부짖음을 터뜨리며 이노야의 시신을 부둥켜 안았다. 비록 도둑과 장물아비로 만났지만 두 사람 사이엔 끈끈한 정이 있었다. 더구나 이노야는 뇌천린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고 눈을 감지 않았는가? 뇌천린의 애통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제 11 장 고아대부(孤兒代父) ① 연운곡(燕雲谷)은 북경성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심산유곡(深山幽谷)이다. 이곳에는 천하에 버려진 고아(孤兒)들의 천국(天國)이 있었다. <인애원(仁愛阮)>. 천애(天涯)의 고아들이 서로를 의지해 가며 삶을 개척해 나가는 곳이다. 곡 안엔 십여 채의 모옥(茅屋)들이 평화롭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곳곳에는 채소가 심어져 있는 밭들이 널려 있었다. 뇌천린은 인애원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서서 곡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곳에서 인애원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뿌듯했다. 문득, 그의 두 눈에 그 어떤 감회가 물결쳤다. '버려진 나를 데려다 키운 왕 노인이 죽은 후 나는 인애원을 책임지게 되었고 그때부터 모란도수가 되었다!' 그랬던가? 그가 모란도수가 된 것은 인애원의 재정(財政)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인애원은 나의 모든 것이며 내가 쌓아올린 작은 소망이다!' 그렇다! 뇌천린에게 있어서 인애원은 삶의 전부이며 기쁨이었다. '인애원이 있기에 항시 보람을 느끼고 가슴 속엔 희열이 넘친다. 저들을 때묻지 않고 밝게 키우며 또 세파(世波)에 휩싸이지 않게 보호하는 것이 나의 소명(召命)이며 지상과제(地上課題)다!' 그는 비록 도수(盜帥)의 세계에 뛰어들었지만 고아들만은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곡 안을 살펴보던 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상한데......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그러했다. 지금 이 시간에는 아이들이 밖으로 나와 활달하게 뛰어 놀고 있어야 할텐데 곡 안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뇌천린은 불길한 예감이 전신에 엄습해오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용수혈이......? 그들은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았다 했는데...... 그래도 인애원까지는 알지 못할텐데.......' 그는 애써 불안감을 떨쳐 버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품 속에 있던 연화장무전과 기타의 물건을 한쪽 바위 틈에 숨겼다. '이렇게 되면 어떤 경우가 생기더라도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초조와 긴장이 어우러진 얼굴로 촉급하게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모옥에 거의 이르렀을 때였다. "흐흐흐...... 네가 모란도수냐?" 갑자기, 짙은 살기와 함께 등 뒤에서 섬뜻한 괴소가 들려왔다. "누구냐?" 뇌천린은 흠칫 놀라며 재빨리 뒤돌아섰다. '야왕......!' 그는 눈 앞에 우뚝 서 있는 인물이 야왕인 것을 발견하고 대경실색하였다. 더우기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나타나자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이때, 야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모란도수가 이토록 새파란 애송이인 줄 몰랐군. 나를 두 번 씩이나 희롱한 자가......?" "두 번 뿐 아니라 끝내 날 어쩌진 못할 것이다." 뇌천린은 오연하게 야왕을 쏘아보았다.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한 까닭인가? 그는 목전에 위험이 닥쳤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야왕은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뇌천린을 쏘아보았다. "그럴까?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유고 왜 나를 찾느냐?" 뇌천린은 위풍당당하게 야왕의 눈빛을 맞받았다. 야왕은 조금도 겁먹은 빛을 보이지 않는 뇌천린의 모습을 보고 내심 감탄했다. '제법 기도가 있는 녀석이군. 내 앞에서 이토록 침착할 수가 있다니......' 그는 뇌천린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다. 하지만 그 느낌은 더욱 짙은 살기를 동반할 뿐이었다. "만보장에서 가져간 연화장무전을 돌려받기 위해서다." "흥! 연화장무전이 마치 자신의 물건같은 말투군." 뇌천린이 비웃음을 터뜨리자 야왕의 안색이 변했다. "겁이 없는 놈이군." 그는 뇌천린이 자신을 조소하자 화가 난 것이다. "내놓아라!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 받으려면......" 야왕은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손을 쑥 내밀었다. 뇌천린이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헛걸음질 한 걸 생각하면 안됐군. 나에겐 연화장무전이 없다." "대답이 너무 쉽다고 생각하지 않나?" 야왕이 더 참지 못하고 싸늘한 노갈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은 번개같이 뇌천린의 마혈(麻穴)을 제압했다. 뇌천린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라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야왕은 지체 없이 뇌천린의 품 속을 뒤졌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감춘 뒤라서 그의 손에 잡히는 물건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야왕은 실망한 얼굴로 뇌천린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더욱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어디 있느냐?" "난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직 날 모르는군. 나는 인정이라곤 없는 사람이다." "고통이나 죽음 따위가 나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뇌천린은 당당한 기세로 야왕의 협박을 무시해 버렸다. 문득, 야왕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하며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건 동감이다. 나 역시 너에게 직접 고통을 가하고 싶지는 않다. 허나 간접고통이란 게 있지. 그건 직접 고통보다 더 괴로울 것이다." '간접이라니......? 뭘 뜻하는 거지?' 뇌천린은 언뜻 야왕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흐흐흐...... !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질 것이다. 네가 그걸 보고도 버틴다면 나도 연화장무전을 포기하겠다." 야왕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모옥을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시작해라!" 그의 대갈성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한쪽 모옥(茅屋)의 문이 활짝 열렸다. 순간, 뇌천린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 악독한 놈들.......!' 모옥 안엔 삼십여 명의 아이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아이들의 주위에는 용수혈의 무리들이 섬뜩한 살광(殺光)을 뿌리는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이때, 아이들이 뇌천린을 발견하고 공포에 가득한 음성으로 울부짖었다.


"형----!" "오빠----!" 그들의 울부짖음에 뇌천린은 눈 앞이 아득해 옴을 느꼈다. 동시에 뇌천린은 전신이 파열될 것 같은 엄청난 분노에 휩싸였다. "야왕! 비겁하다. 아이들을 풀어줘라." 뇌천린이 야왕을 향해 달려들려 했으나 그는 전신이 마비되어 있어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아이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어서 연화장무전의 소재를 대라." 야왕은 차갑게 대꾸했다. 뇌천린은 갈등하기 시작했다. 놈들의 성격으로 보아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뇌천린이 망설이자 야왕은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피어올리며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아직 입을 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그렇다면......" 그는 모옥을 향해 오른 손을 내뻗으며 엄지 손가락을 밑으로 힘차게 꺾었다. 그것이 신호였는가? 한 흑의인이 열 살 가량의 소년을 끌어내어 꿇어 앉힌 다음 검을 휘둘렀다. 싸늘한 한 줄기 검광이 소년의 몸을 휘감고 허공에 피보라가 분출되더니 소년은 몸이 양단되어 쓰러졌다. "한생(寒生)아!" 소년의 죽음을 목격한 뇌천린의 두 눈이 확 뒤집혀 버렸다. 한생의 고사리같은 손이 꿈틀거리다가 멈추었다. 뇌천린은 자신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모옥 안에 있던 아이들은 너무도 끔찍한 광경에 몸서리치며 처절한 절규를 토했다. "형! 무서워! 살려줘!" "오빠! 우린 죽기 싫어. 이들이 달라는 것을 줘...." 아이들의 울부짖음에 뇌천린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너무도 분노가 컸는가? 뇌천린의 눈꼬리에는 피눈물이 맺혀 있었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왜 죄없는 아이들을 죽이느냐?" 그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야왕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눈빛으로 살인을 할 수 있다면 야왕은 벌써 천갈래 만갈래 찢겨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왕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여전히 싸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흐흐흐......!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 참기만 하면 연화장무전은 너의 것이 된다고..." 그는 또다시 손을 치켜 들었다. "아직 입을 열기 싫은 모양인데 더 구경해라." 이때, 흑의인은 또 한 소년을 끌어냈다. 소년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뇌천린을 쳐다보며 애원했다. "형---! 제발...... 형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고 했잖아......" 소년의 절규는 예리한 비수가 되어 뇌천린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 들었다. 뇌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천하에 그 무엇보다 더 값진 사나이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 아무리 남아의 약속이 중하고 또 연화장무전이 이들의 손에 들어가 천하가 혈풍(血風) 속에 잠긴다 해도 내가 어찌 너희들을 버릴 수 있겠느냐?' 뇌천린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기둥이며 부모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그 누가 자식을 버릴 수 있겠는가?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아이들을 구하겠다고 결심했다. "말하겠다. 아이들에게서 물러나라."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연화장무전의 소재는......?"


야왕이 씽긋 웃었다. 상대를 굴복시킨 승리의 미소였다. 뇌천린은 두 눈에 활화산같은 분염(憤焰)을 폭출하며 이빨을 갈아붙였다. "아이들을 이곳에서 떠나게 하면 말하겠다." "좋다! 아이들을 보내주지." 야왕은 흔쾌히 뇌천린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하들에게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용수혈의 무리들은 아이들을 풀어 주었다. 아이들은 공포 속에서 빠져나와 쏜살같이 뇌천린을 향해 달려왔다. 뇌천린은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개운치 못했다. '너무 순순히 허락하는 게 불안한데....' 그는 달려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웬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때,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를 에워쌌다. "형!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 "오빠! 영원히 못 볼 것만 같아." 그들도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가? 아이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울먹이는 얼굴로 뇌천린를 쳐다보며 선뜻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 머뭇거렸다간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뇌천린이 아이들을 채근했다. "어서 떠나라." 뇌천린은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웃었다. "나를 믿어라! 너희들이 어디에 있든 나는 찾을 수 있다. 가능한 멀리 달아나라." "형! 꼭 찾아와." "오빠! 우린 오빠만을 믿고 사는 것을 알지?" 아이들은 재회(再會)를 굳게 약속하며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뇌천린은 연운곡을 떠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마음이 산란해졌다. '잠시 헤어지는 것 뿐인데 왜 이리 가슴이 답답할까? 마치 사별(死別)을 하는 것 같으니......' 이때, 야왕은 사라지는 아이들에게 묘한 일별을 준 후 뇌천린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자! 이제 안내해라." 뇌천린은 전신이 자유롭게 된 것을 알고도 움직일 줄 몰랐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놈들이다. 가능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는 아이들이 이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왕은 뇌천린이 미동조차 하지 않자 싸늘한 음성으로 재촉했다. "시간이 없다. 연화장무전이 있는 곳은 어디냐? 여기서 머냐?" "물론이다. 어느 멍청한 놈이 그 귀한 것을 주위에 놔두겠느냐?" 뇌천린은 비양거리는 음성을 내뱉으며 여전히 움직일 줄 몰랐다. 야왕은 그의 속셈을 간파하고 묘한 여운이 담긴 말을 하였다. "미리 말해 두겠지만 시간을 끌면 너만 손해라는 것을 알아라." "그게 무슨 뜻이냐?" "곧 알게 된다. 딴 짓을 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야왕의 말에 뇌천린은 입꼬리를 묘하게 말아 올렸다. '그까짓 위협에 내가 동요될 줄 아느냐? 내 비록 힘은 없지만 너희들을 골탕 먹이지 않으면 울화가 풀리지 않을 것이다!' "어서 안내하라니까!" 야왕이 짜증을 내자 뇌천린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발을 다쳐 빨리 걸을 수 없으니까 이해해라." 야왕도 그가 시간을 벌기 위해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독 안에 든 쥐기에 더


재촉을 않고 하자는 대로 내버려뒀다. 시간을 끈다고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야왕은 이미 모든 것을 끝내둔 상태였다. 뇌천린이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며 곡 밖으로 향하자 야왕과 용수혈의 무리들도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뇌천린은 곡 밖을 몇 바퀴 돌다가 다시 연운곡으로 되돌아 오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야왕과 용수혈의 무리들은 화가 극도로 치밀어 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분이 어떻든 뇌천린은 여유만만할 뿐이었다. 더 참지 못하고 야왕이 냉갈을 터뜨렸다. "모란도수! 우릴 희롱할 셈이냐? 도대체 어디까지 끌고 다닐 작정이냐?" "글쎄...... 내 머리가 나쁜 것을 탓하시오.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뇌천린은 일부러 능청을 떨며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한 흑의인이 분통이 터지는지 검을 뽑아 들었다. "이놈을 당장에......" "날 죽이고 싶소? 그럼 죽이시오." 뇌천린은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을 흑의인 앞에 바싹 내밀고 약을 올렸다. "으......으......" 흑의인은 당장이라도 박살낼 듯 검을 치켜들었으나 끝내는 바르르 떨 뿐 내려치지는 못했다. 어찌하겠는가? 힘으로야 간단하게 뇌천린을 박살낼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연화장무전은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가관스러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퍽! 뇌천린이 흑의인의 복부를 힘껏 걷어차며 조소를 보냈다. "능력도 없는 놈이 어디서 큰소리냐?" 이 돌발 사태에 모두들 어이가 없어 멍히 뇌천린을 쳐다볼 뿐이었다. 흑의인은 분통이 터지고 기가 찼으나 꾹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야왕이 아무 말을 않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 뇌천린은 조금 전의 분노가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이때, 야왕이 그의 속셈을 간파하고 일갈했다. "모란도수! 그만 우롱해라. 아이들이 멀리 달아난다고 무사할 줄 아느냐?" 일순, 뇌천린의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야왕! 그들에게 무슨 수작을 부렸느냐?" "아이들은 모두 독(毒)에 중독되어 있다. 이제 남은 시간은 한 시간...... 그 안에 해독하지 않으면 죽는다." "이...... 더러운 놈......" 뇌천린은 분기충천하여 맹렬하게 야왕을 향해 돌진해 갔다. 야왕이 가볍게 손을 내젓자 뇌천린은 힘없이 나가 떨어졌다. 야왕은 잔인한 눈빛으로 나뒹구는 뇌천린을 쏘아았다. "해약(解藥)을 얻고 싶으면 시간을 그만 끌어라." '독사같은 놈! 어째 순순히 아이들을 보낸다 싶더니......' 그는 아이들의 안위(安危)가 걱정되어 초조해졌다. 그는 이제 더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어 연화장무전을 슴겨 놓은 곳으로 급히 갔다. 바위 뒤로 간 뇌천린은 재빨리 연화장무전 한 개를 높이 치켜들며 날카롭게 외쳤다. "야왕! 어서 해약을 던져라. 그렇지 않으면 연화장무전을 바위에 부딪혀 박살내 버리겠다." 이 때 야왕의 시선은 다른 곳에 꽂혀 있었다.


'또 하나의 연화장무전......! 도대체 어디서 얻은 것일까?' 그는 바위 틈에 또다른 연화장무전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흥분을 금치 못했다. '하여간 횡재를 한 셈이군. 두 개의 연화장무전이면 군주께서도 나의 공적을 인정해 줄 것이다!' 야왕은 뜻하지 않게 연화장무전을 한 개 더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때, 뇌천린은 여차하면 연화장무전을 바위에 던질 기세로 단호하게 말했다. "야왕! 시간이 없다. 해약을 내놓아라." 일순, 야왕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소리없이 번졌다. "모란도수! 아이들이 독에 중독된 것은 확실하다. 허나 해약은 없다." "뭐......뭐라고......?" "용수혈에 있어 독(毒)이란 오직 죽음뿐이다. 해약 따위가 있는 독은 사용하지도 않는다." 뇌천린은 뜻밖의 대답에 온 몸이 굳어 버렸다. "으으...... 죽일 놈들......!" 뇌천린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견딜 수가 없었다. 급기야 그는 절망한 빛이 가득한 얼굴로 연화장무전을 바위를 향해 내던졌다. 연화장무전이 바위에 부딪히려는 순간, "너는 나의 몸이 빛보다 더 빠르다는 것을 모르는군." 빈정거리는 조소와 함께 야왕이 연화장무전을 향해 빛살같이 쏘아갔다. 야왕은 막 박살나려는 연화장무전을 비쾌하게 나꿔채며 뇌천린을 향해 다른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바위 틈에 있던 다른 연화장무전이 격공섭물(隔空攝物)에 의해 야왕의 손아귀로 빨려갔다. 야왕은 두 개의 연화장무전을 손에 들고 미친 듯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핫......! 모란도수! 너는 여러 모로 나에게 고마웠다. 소재조차 찾기 힘든 또 하나의 연화장무전을 나에게 선물했으니까 말이다." 돌연, 그의 두 눈에서 몸서리 쳐지는 엄청난 살광(殺光)이 폭출되었다. "그 대가로 너를 고통없이 죽여 주겠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야왕의 손이 가차없이 뇌천린의 심장을 향해 뻗쳐갔다. 절대절명(絶代絶命)의 순간이었다. 무공을 모르는 뇌천린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죽음 앞에 놓여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머! 안돼! 귀여운 사람을 다치게 하면......" 난데없이 경악어린 여인의 다급성과 함께 하나의 연편(軟鞭)이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야왕의 손을 휘감았다. "웬 놈이냐?" 야왕은 연편의 공세가 너무도 날카로웠기에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어 들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안색에 은은한 긴장감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상대는 예사로운 인물이 아닌 것 같았다. '누굴까? 나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위력이었다.' 야왕은 긴장감이 감도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하지만 사람의 모습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그는 조롱 당하는 기분이 들자 거센 분노가 치솟았다. "어떤 놈이냐? 감히 나의 일을 방해하는 겁없는 놈이......." 노갈이 계곡 안을 진동하는 순간, "화취(華翠)! 저 사람 얼굴 좀 봐! 꼭 독오른 늑대같지 않니?" "얼굴은 제법 반반한데 성깔이 더럽겠다. 저런 자를 아내로 삼았다가는 평생 고생하겠다." "그래도 힘은 좋게 생겼으니 밤엔 좋겠는데......." "그게 아니야. 저런 자를 요남(妖男)이라 하는데 색(色)을 너무 밝혀 우리는 피골(血骨)이 상접해 진다고......"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두 여인의 음성이 있었다. 그런데 여인의 대화들은 여인답지 않게 음란하고 직설적이었다. 이때, 야왕은 자신이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대로했다. "하잘 것 없는 은둔술(隱遁術)로 날 놀릴 셈이냐?" 그는 살기등등한 기세로 우뢰와 같은 폭갈을 터뜨리며 쾌속하게 손을 내뻗었다. 엄청난 강기가 한쪽 바위를 향해 맹렬하게 뻗쳐갔다. 꽈꽝! 강기에 닿은 바위는 산산조각이 나고 동시에 두 여인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여인(女人)들은 대략 이십 세 가량 되었을까? 하나같이 꽃같이 화사한 미녀들이었다. 야성미(野性美)가 풀풀 넘치는 그녀들은 전신에 착 달라붙어 몸의 굴곡이 완연히 드러난 가죽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어깨서부터는 팔이 노출되고 있었고, 그 어깨에는 마치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벌(蜂)의 문신(蚊身)이 새겨져 있었다. 또한 그녀들의 허리에는 예리한 표창(標槍)들이 꽂혀 있고 어깨엔 부드러운 채찍을 감고 있었다. '이상한 여인들이군. 몸의 근육질이라니......' 뇌천린은 여인들의 드러난 팔을 응시하며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녀들의 팔은 근육이 울퉁불퉁하게 불거져 있었는데, 그것은 웬만한 사내들보다 더 단단해 보였다. 한 눈에 평범한 여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때, 두 여인의 정체를 알아채린 야왕이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 "너흰 화왕봉(花王蜂)의 수하들이구나." 두 여인. 그녀들은 바로 대륙오강(大陸五强)의 하나인 화왕봉(花王蜂)의 인물이란 말인가? 입술에 점이 있는 여인은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야왕을 응시하며 깔깔거렸다. "호호호! 제법 안목이 있군. 우릴 알아 보다니......" "흥! 너무 기고만장 마라. 내가 화왕봉 따위를 두려워 할 줄 아느냐?" "두려워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한바탕 겨루면 밝혀지니까......" 여인은 야왕을 무시한 채 대담하게 나왔다. 야왕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선뜻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년들이 이무리 대단해도 아직 나의 적수(敵手)는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충돌을 일으키면......' 그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난처한 빛이 파랑거렸다. '화왕봉과 적대관계를 가지면 귀찮은 적(敵)이 한 명 생긴다. 연화장무전을 얻은 이상 일부러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는 그녀들과 불필요한 충돌은 피하기로 마음 먹었다. 야왕은 야릇한 눈길로 두 여인을 쓸어보며 뇌천린을 가리켰다. "너희들은 여기 있는 이 친구가 마음에 있는 모양인데 본인이 양보를 하겠다." "호호호! 왜 갑자기 달아나려 하느냐? 우리 정도는 단 일수(一手)에 꺾을 듯이 떠들다가......" 여인들의 비웃음에 화가 치밀었으나 피하기로 작정했기에 야왕은 말꼬리를 돌렸다. "너희들을 이겨봐야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화왕구매(花王九妹) 정도는 되어야 벗길 맛도 있지." "주제를 모르는군." 여인들이 냉소를 날리는 순간, "화왕봉의 철녀(鐵女)들아! 그럼 다음에 보자." 야왕은 지체없이 신형을 날리며 오른손으로 뇌천린을 공격하고 왼손으로는 무적오장이 들어있는 뇌천린의 보퉁이를 집으려 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기에 꼼짝없이 당할 판국이었다. 하지만 여인들은 이미 예견하고 있었는지 지체없이 채찍을 휘두르며 야왕을 공격했다. "호호호! 진짜 음흉한 자로군. 마지막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하다니......" "호호호! 아직 화왕봉을 잘 모르는군. 화왕봉은 천하의 그 어떤 사내라도 믿지 않는다. 다만 지배할


뿐이지." 그녀들의 독랄한 공격에 야왕은 안색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군.' 그는 지체없이 손을 거두며 비쾌하게 신형을 날렸다. 기습이 실패한 이상 더 싸워봐야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가 신형을 날리자 용수혈의 무리들도 즉시 계곡을 떠나갔다. 뇌천린은 사라지는 야왕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내심 이빨을 갈았다. '야왕! 두고 보자. 지금은 힘이 없어 순순히 보내주지만 후일 기필코 오늘의 빚을 갚아 주겠다!' 그는 두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잠시만 보관해 두어라. 머지 않아 네놈에게 빼앗긴 연화장무전을 반드시 찾고 말겠다!' ② 그가 가슴으로 울분을 짓씹을 때 두 여인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두 여인에게 인사를 했다. "두 분 소저!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급한 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소." "넌 갈 수 없어." 입술에 점이 있는 여인이 섬섬옥수를 허리에 척 얹으며 차갑게 말했다. 뇌천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못 가다니......?" 이때, 점이 있는 여인의 옆에 있던 여인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고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추설(秋雪)아! 아직 세상 물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맹꽁이인가봐. 오늘은 진짜 쓸만한 보물을 얻었는데......" 그녀의 말에 점이 있는 여인--- 추설이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이봐! 너는 이제 우리의 노획물(虜獲物)이야. 그래서 우릴 따라 가야 해." 일순, 뇌천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획물? 내가 무슨 사냥감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는 불쾌한 빛이 떠오르는 얼굴로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농담이 너무 지나치군요. 전 지금 한담(閑談)을 나눌 때가 아니오." "호호호! 아직 화왕봉에 대해서 잘 모르는군. 화왕봉의 여인은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손에 넣는다. 폭력을 쓰든 협박을 하든......" 화취는 차마 여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말을 서슴없이 꺼내고 있었다. 뇌천린은 너무도 기가 막혀 어처구니가 없었다. '맙소사! 도대체 이 여인들이 지금 제 정신이야? 여인이 사내를 약탈하다니......' 이때, 화취는 눈빛을 반짝이며 뇌천린의 얼굴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너는 참 귀엽게 생겼다. 아직 우리에겐 정실(正室)이 없었는데 널 공동 정실로 삼으면 되겠다." 이런 경우를 두고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 하던가? 뇌천린은 사고(思考)에 혼란이 와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화왕봉(花王蜂). 여인집단인 그들은 사내를 약탈하기도 하고, 또한 상식을 넘어 사내를 정실(正室)이나 첩(妾)으로 삼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 세상과는 다르게 철저한 여인(女人)위주의 생활이었다. 뇌천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을때, "피부도 곱고 인물도 쓸만하고 넌 참으로 보기 드문 아내감이다." 추설이 희열에 들뜬 얼굴로 뇌천린의 가슴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뭐! 이런 것들이 있어?' 뇌천린은 화가 잔뜩 난 눈빛으로 그녀의 손을 거칠게 밀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추설의 손이 그의 허리를 감아왔다.


"가만 있어. 넌 묘한 사내야. 나도 모르게 자꾸 흥분이 되는 걸 보면......" 그녀는 상기어린 눈으로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침없이 그의 전신을 더듬었다. 뇌천린은 그녀의 당돌한 행동에 분노와 함께 역겨운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못 참겠다. 천하의 뇌천린이 이런 수모를 받을 수는 없다!' 그는 화가 치밀어 지체없이 추설의 상체를 확 밀쳐내며 대갈성을 터뜨렸다. "이거 보시오. 장부가 여인들과는 다투지 않는 법이지만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 역시 참지 않겠소." "이게 감히 나를......" 추설은 무안을 당하자 살심(殺心)이 치솟았는지 살기등등한 기세로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당장이라도 박살낼 형세였다. 이때, 화취가 다급한 얼굴로 재빨리 그녀의 손을 끌어내리며 진정시켰다. "추설! 밝은 대낮이라 부끄러운가봐. 그래서 앙탈을 부린 셈 치고 용서해라." 추설은 그녀의 만류에 살기를 누그러뜨리며 싸늘하게 뇌천린을 쏘아보았다. "좋아! 이번만은 참겠어. 그래도 정실이 될 몸이니까. 그렇지 않고 그저 스쳐가는 사내였다면 벌써 저승의 고혼이 되었을 것이다." 뇌천린은 그녀들의 황당한 말에 말문조차 막혀버렸다. 그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일반적인 세상과 정 반대의 환경에서 살았기에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조금의 부끄러움이나 어색함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마치 남자들의 세계에서 남자들이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였다. 그게 그들에게는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행동들이었다. "경고하겠는데 화왕봉은 사내를 끔찍히 아껴주는 편은 아니나 욕정을 느끼면 아무 사내나 납치해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즐기곤 한다." 추설은 뇌천린이 자꾸 반항하자 그의 기를 꺾기 위해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다. "때문에 정실(正室)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다만 가정을 가져야 되기에 정실을 삼는 것 뿐이다." 딴에는 뇌천린을 위협하기 위한 설명이었지만 뇌천린은 들을수록 기가 막혔다. 어느 천하에 여자가 남자를 노리개로 삼는 경우가 있단 말인가? '화왕봉......! 구제불능의 여인집단이군!' 그러했다. 화왕봉(花王蜂)은 여인천하(女人天下)를 부르짖는 세력이기에 그들에게 있어선 사내들이란 하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남자들을 지배하는 여인들의 세계(世界). 그들이 갈망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추설은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듯 계속 열변을 토했다. "다만 정실과 스쳐가는 사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운우지락을 즐긴 다음 일회용의 사내들은 그 자리에서 죽이지만 정실은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맙소사! 이건 말도 안 된다. 여인들이 아니라 깡패다!' 뇌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때, 화취가 물기어린 음성으로 은근히 말했다. "추설! 오늘따라 왜 이리 몸이 근질거리지. 우리 어디가서 시원히 몸을 풀자." 그녀는 색정(色情)이 감도는 눈빛으로 추설을 지켜보며 뇌천린의 손을 움켜 쥐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추설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눈길로 화취를 묵묵히 쏘아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두 눈에는 욕정(欲情)이 아닌 그 어떤 의지를 담은 빛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화취는 너무도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의아성을 발했다. "왜 그래? 구화(九花) 아가씨가 오기라도 하면 이 사내를 빼앗기잖아? 빨리 우리 차지로 만들자고."


화취는 안달이 났으나 추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사내와 살을 섞어야 우리의 소유가 된다는 법칙을 잊은 건 아니겠지?" 화취는 구화 아가씨가 당장 나타나기라도 하는 양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재촉했다. 그녀의 말에 뇌천린은 어처구니가 없어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미친 집단답게 법칙(法則)도 괴상하군. 관계를 맺기 전에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마음대로 선택할 권리가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다! 일단 관계를 가지면 그 여자의 것으로 인정을 하지만 그렇지가 않을 때는 누구든 그 남자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뇌천린이 한 가지 모르고 있는 것은 높은 지위의 사람이 마음대로 차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든 관계를 맺기 전의 남자라면 같이 원하는 여자에게 결투를 신청할 수 있다. 단지 지위가 높을수록 무공이 강하기에 지위가 높은 사람이 일방적으로 차지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화취는 뇌천린이 보기 드문 사내라 또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기 전에 빨리 권리를 차지하려고 안달이 난 것이다. 하지만 추설의 태도는 화취와 전혀 달랐다. 그녀는 강한 소유욕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난 싫어! 마음이 변했다. 공동소유(共同所有)는 하기 싫어." "그......럼......?" "이 사내 정도면 진짜 평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해. 나 혼자 사랑해 주기에도 벅차다." 일순, 화취의 이마가 무섭게 꿈틀거리며 두 눈에서 섬뜻한 살염이 치솟았다. "이제보니 혼자 독점할 욕심이었군. 흥! 그렇게는 안될 걸." 그녀가 추설의 의도를 알고는 냉소를 터뜨렸다. "날 막겠다는 거냐? 너에게 그만한 능력이 없을텐데......" "흥! 내가 너 따위에게 질 것 같아. 이 기회에 나도 이 사내를 독점해야겠다." 화취는 살기등등한 기세로 이내 팔뚝에 감고 있던 연편(軟鞭)을 풀었다. "좋다! 화왕봉의 법칙대로 하자." 화왕봉(花王蜂)의 법칙. 그것은 바로 결투였다. 오직 약육강식(弱肉强食)만을 인정하는 비정한 집단. 하지만 그게 있었기에 화왕봉이 이만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했던 두 여인이 한 사내를 놓고 금세 원수 사이처럼 으르렁 거리기 시작했다. 화왕봉 여인들의 행동은 실로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판단할 수가 없었다. 돌연, 화취는 뇌천린의 마혈(麻血)을 찍은 다음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뇌천린은 그녀의 주도면밀한 행동에 쓴웃음을 지었다. '철저하군.' 그는 전신이 마비되어 꼼짝할 수 없음을 느끼며 두 여인을 응시했다. 두 여인은 살기등등한 기세로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기세로 보아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날 것 같았다. 엄청난 살기와 긴장감이 질식시킬 듯이 장내를 감돌고 있었다. 두 여인은 상대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 쉽사리 공격하지를 않았다. 서로의 헛점을 노리는 시간은 마냥 흐르고 있었다. 한 순간, "찻!" 날카로운 기합소리와 함께 화취의 채찍이 마치 독사의 혓바닥처럼 맹렬하게 추설을 향해 뻗쳐갔다. "흥! 그까짓 재간으로 감히......" 추설은 조금도 놀라는 기색없이 지체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그녀의 채찍은 가공하게 날아오는 화취의 채찍을 휘감아 버렸다. "끙......!" 두 여인은 안간힘을 다해 한데 뒤엉킨 채찍을 잡아 당겼다. 채찍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팽창되었다. 서로의 무공이 비슷해 초식으로는 결판이 나지 않을 게 뻔하자 두 여인은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엉킨 채찍에 내력을 쏟아 내공이 약한 자가 굴복하는 방법이다. 여인의 집념은 진정 무서웠다. 두 여인은 촌보(寸步)의 양보도 없이 눈에 핏발을 곤두세우며 사력을 다해 내공을 분출하고 있었다. 여기서 밀리면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튕겨나갈 것이다. "추설! 함께 재미를 보자는데 왜 심통을 부리느냐?" "흥!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추설은 앙칼진 고함을 터뜨리며 더욱 내력을 쏟아 부었다. 돌연, 채찍이 두 동강이 나며 두 여인은 실 끊어 연처럼 뒤로 날아갔다. 먼지를 일으키며 땅에 처박혔던 그녀들이 끊어진 채찍을 내던지며 재빨리 일어섰다. "흥! 죽으려 환장했군." "누가 할 소리를......" 두 여인은 내공 싸움으로도 우열을 가릴 수 없자 다시 살기충천한 얼굴로 대치했다. 이번에는 그녀들의 손이 허리춤의 표창 위에 얹어 있었다. 서로를 노려본 채 그녀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누구든 조금의 빈틈만 보이면 한 순간에 표창이 심장에 박힐 것이다. "차앗!" 두 여인은 날카로운 기합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화취는 쾌속무비하게 십여 개의 표창을 내던졌다. 표창은 빛살처럼 상대방에게 파고 들었다. 하지만 추설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없이 표창 하나를 들고 휘둘렀다. 놀랍게도 그녀의 주위에 가공할 검막(劍幕)이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표창이 검막에 부딪히는 순간 화취의 표창들은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때 화취는 공격을 한 후 미처 방어태세를 갖추지 못했다. 때문에 날아오는 표창을 모두 막아낸 추설이 표창을 날리자 미처 피할 수가 없었다. "으악----!" 화취는 전신에 표창세례를 받고 처절한 비명소리를 터뜨렸다. 표창에 의해 고슴도치가 된 그녀가 땅으로 떨어졌다. 추설은 동정의 빛이라곤 조금도 없는 표정으로 화취의 시신을 쏘아보았다. "흥!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으니 날 원망하지 마라." 조금 전까지만해도 친구처럼 지냈건만 그녀는 시신에 일별도 하지 않고 뇌천린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쪽! 그녀는 서슴없이 뇌천린의 뺨에 입을 맞추며 뜨거운 입김을 토했다. "오래 기다렸지. 이제 곧 우리 둘만의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거야!" '이런......! 벼락이라도 떨어지지 않나......?' 뇌천린은 그녀의 뻔뻔스런 행동에 구역질이나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추설은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생글거리며 뇌천린을 옆구리에 끼었다. 그녀의 몸이 점차 달아오르는 것으로 보아 뜨거운 열풍(熱風)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추설! 어딜 그렇게 급히 가려 하느냐?" 난데없이 앳된 소녀의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순간, 추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 음성은 그녀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실망의 빛이 가득한 얼굴로 천천히 돌아섰다. 언제 나타났는가? 그녀의 앞에 자색경장을 한 십이삼 세 가량의 소녀가 오연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소녀(少女). 아직 치기가 남아 있는 얼굴이었으나 너무도 뛰어난 미모(美貌)를 갖추고 있었다. 한 마리 봉황(鳳凰)이 푸른 창공(蒼空)을 힘차게 날고 있는 것 같은 아미(蛾眉)에 눈이 시리도록 맑은 호수(湖水)에 흑요석을 빠뜨린 것 같은 초롱초롱한 눈(眼), 그리고 그 아래로 백옥(白玉)으로 깎아 다듬은 듯한 콧날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주사빛 입술. 실로,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깜찍하고 어여쁜 소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매는 미모와 달리 너무도 매섭고 날카로왔으며, 입가에 감도는 미소는 만년빙굴(萬年氷窟)에서 불어나오는 한풍(寒風)보다 더 차가웠다. 다만 소녀의 몸에서 부자연스러운 것은 등 뒤에 메고 있는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장검(長劍)이었다. 경장소녀가 차가운 얼굴로 추설을 직시했다. "호호호......! 내가 너무 알맞은 시간에 나타났나? 혼자만 재미를 보려하다니......" "구화아가씨가 오신 줄은 몰랐습니다." 추설은 낭패의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쩔쩔맸다. 경장소녀. 그녀가 바로 화취가 그토록 우려했던 구화아가씨란 말인가? 그렇다! 그녀는 화왕구매(花王九妹) 가운데 가장 총명한 지혜를 가진 막내 구화(九花)인 백연하(白煙霞)였다. 문득, 백연하는 호기심이 잔뜩 어린 눈길을 뇌천린에게 던졌다. "어디 나도 보자! 너희들이 그토록 탐낸 사내가 어떤 자인지......" 추설은 씁쓸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뇌천린을 내려 놓았다. 발각된 이상 피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뇌천린을 살펴보던 백연하가 탄성을 발했다. "호오! 과연 너희들이 죽자사자 탐낼만도 하군. 이만한 사내는 아직 화왕봉으로 끌려온 적이 없다." 그녀가 추설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양보하지 않겠느냐? 나도 이제 슬슬 사내를 거느려야겠다." 그녀의 말은 은근했으나 협박보다 더 무서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거절 뒤에 오는 것은 인정사정없는 죽음(死)이리라! 이때, 뇌천린은 백연하의 당돌한 말에 내심 어이가 없었다. '가가 막히는군. 화왕봉은 나이가 어릴수록 더 대담하고 거침이 없나? 낯 뜨거운 소리를 추설보다 더 거침없이 내뱉다니......' 그는 백연하에 대한 첫 인상이 완전히 구겨졌다. 추설은 마치 고양이 앞에 쥐처럼 당황한 모습으로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가씨가 원한다면야 제가 어찌 거절을 할 수 있겠습니까......?" "호호호! 고맙구나.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내손에 죽어야 할텐데......" 백연하는 흡족한 얼굴로 유쾌하게 교소(嬌笑)를 터뜨렸다. 낭랑하고 듣기 좋은 웃음이었으나 뇌천린은 화왕봉 여인들의 작태를 본지라 그 웃음소리가 귀신의 울부짖음 같았다. 뇌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신형을 미미하게 떨었다. '무섭다. 화왕봉은 모두 사갈미인(蛇蝎美人) 뿐이군. 그러나 저러나 내 신세가 여인의 노리개감이 되었으니......' 그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자 한심스럽기 그지 없었다. 백연하는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으며


추설을 응시했다. "추설! 너는 황금옥성(黃金玉城)에 먼저 가 있어라. 언니들과는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래. 나에겐 과분한 사람이니 일찍 포기하는 것이 좋다......' 추설은 체념한 얼굴로 뇌천린을 힐끗 쳐다본 후 미련없이 신형을 날렸다. 아무리 사내를 밝혀도 목숨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백연하는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눈길을 뇌천린에게 돌렸다. '이 사람을 보면 언니들이 시샘하겠는데...... 화왕구매는 서로에 대한 질시(疾視)와 호승심(好勝心)이 강해 항시 남들의 기를 죽일 사내를 찾아왔는데 말이야.' 그녀는 뜻밖의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아직 뇌천린을 겪어보지 않았으나 어느 정도의 사내인지는 이미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화왕봉의 여인들은 사내를 보는 눈이 정확했다. 그건 그녀들의 사고가 오로지 사내에게만 쏠려있기에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내가 대륙(大陸)에서 제일가는 사내를 찾은 것 같으니...... 화왕구매 중 내가 제일 뛰어남이 다시 한번 입증된 것이다!' 백연하는 야릇한 눈빛을 발하며 뇌천린을 그윽히 응시했다. "어때요? 우리도 어디 가서 정을 나눌까요? 나는 아직 사내를 접해 본 적은 없지만 남들보다 더 능란할 자신은 있는데." 그녀의 말에 뇌천린은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게 이제 소녀의 티도 안 벗어난 입에서 나올 말인가? 뇌천린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런 맹랑한 경우가 있나? 도대체 치기(雉氣)도 벗지 못한 소녀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다니......' 그는 너무도 기가 막혀 두 눈을 멀뚱거리며 백연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백연하는 무엇을 그렇게 망설이느냐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싫다던가 좋다던가 의사표시를 분명히 해요. 난 답답한 것은 딱 질색이니까." "난 싫소. 그리고 그대가 시원한 태도를 좋아한다니 말하겠는데 혈도 좀 풀어 주시오. 갑갑해 못살겠소." "좋아요." 백연하는 주저 없이 뇌천린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것은 너무 뜻밖의 일이었다. 뇌천린은 기대도 걸지 않고 해본 말인데 그녀가 순순히 응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종잡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넌즈시 그녀의 마음을 떠 보았다. "겁나지 않소? 도망 칠까봐...." "호호호......! 아무도 나에게선 달아나지 못해요, 더구나 당신은 무공을 모르는데 뭐가 두려워요." 백연하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교소를 터뜨렸다. '빌어먹을......! 그나저나 아이들이 어찌되었는지 궁금하군.' 그는 아이들을 생각하자 몹시 초조해졌다. 인애원의 고아들이 해독약도 없는 용수혈의 극독(極毒)에 중독되어 있다면 정말 큰 일이었다. 그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는 듯 고통스런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이때, 백연하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무슨 고민이 있는 모양이군요. 어떤 일이죠? 제가 도울 수 있다면 도와 드릴께요." "나의 걱정은 이곳에서 빨리 떠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오." "겨우 그것 때문이에요? 그럼 가세요." 백연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선뜻 그를 보내주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뇌천린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녀를 응시 했다. '도대체 속셈을 알 수가 없으니......'


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재차 확인을 하였다. "정말 가도 된단 말이오?" "물론이죠. 당신이 가겠다는데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백연하는 해맑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뇌천린은 그녀의 마음이 변할세라 재빨리 보퉁이를 집어들었다. "그럼......" 그는 한시바삐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렸다. 그는 아이들이 피신해 있을만한 갈대밭으로 질주해 갔다. 그런데 그가 연운곡을 막 벗어났을 때였다. "가고 싶은 곳이 어디예요? 경공도 없이 그렇게 달리면 지칠거예요." 난데없이 허공에서 영롱한 소녀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뇌천린은 흠칫 놀라며 몸을 멈추고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일순, 그의 검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백연하가 허공에서 방실거리며 뇌천린을 그윽히 응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뇌천린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쏘아부었다. "왜 따라 오는 거요? 나보고 가라고 하지 않았소?" "당신은 분명 그곳을 떠났잖아요! 다만 내가 따라다닐 뿐이고......" 백연하는 예쁘게 눈을 흘기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약군. 하긴 틀린 말은 아니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뇌천린은 백연하가 결코 자신을 놓칠 생각이 아닌 것을 간파했다. 그는 그럴 바에는 백연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이곳을 떠난 일단의 아이들을 찾고 있소. 화급을 다투는 일이니 그대의 도움을 좀 받읍시다." "좋아요.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백연하는 선뜻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뇌천린의 손을 잡고 비쾌하게 허공으로 솟구쳤다. 슈아아___앙! 그녀는 마치 한 줄기 빛살인 양 극쾌한 신법으로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뇌천린은 그녀의 극강한 무공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 비록 무공은 모르지만 저번 날 금릉왕 주형님에게 이끌려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소녀의 속도가 주형님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으니......' 그렇다면 백연하의 무공은 신주철객(神州鐵客) 주검화에 버금간단 말인가? 뇌천린의 의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연하는 한 마리 비조(飛鳥)처럼 비쾌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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