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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영웅사 3 권 내가위 저

제 20 장 까닭없는 불길한 예감 ① 날카로운 금빛 두 줄기가 허공을 갈랐다. 팍! 흑포죽립객이 던진 금침이 정확히 오십 장 밖의 녹두를 꿰뚫었다. 다음 순간 가벼운 음향이 일면서 백삼인이 던진 금침도 녹두에 꽂혔다. "아니!" "녹두가 맞혀졌네." "어머나!" 이화선자의 주위에 시립해 있던 시녀들이 갑자기 환호성을 터뜨렸다. 이화선자! 그녀는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백삼인과 흑포 죽립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 이럴 수가! 그토록 바라던 인물이 동시에 나타나다니 그러나...... 그러나.......' 차츰 그녀의 눈길에 아쉬움이 감돌기 시작했다. '중원무랑군! 아...... 아...... 중원무랑군! 이 모든 일이 당신을 끌어 들이기 위한 일이었는데.' 이 생각은 무엇을 말하는가. 혹시나 하고 두 사람 중 하나가 중원무랑군이 아닐까 하고 그녀는 눈빛을 반짝이며 예리하게 살폈다. '아...... 제발 저 두 인물 중 한 분이 중원무랑군이어야 할텐데. 어머님.......' 그녀의 마음 속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망사 속의 얼굴은 변동이 없는 무표정이었다. 다만 화려하게 빛나는 눈속에 아쉬움과 까닭모를 암영이 배어났다. 그러나 이제는 망사를 벗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화선자 엄소군은 약간은 수줍게 망사를 걷었다. 눈이 부셨다. 붉은 저녁 해가 막 군산(群山)을 넘어가려하고 있었다. "오!" "과연! 천상제일(天上第一)의 미녀답다."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인물들의 탄성이었다. 감탄은 끊이지를 않았다. 순간 백삼인과 흑포죽립객의 시선이 교환되었다. "음......." 두 사람은 동시에 감탄과 침묵을 지켰다. 이화선자 엄소군의 용모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었다. 어느 누구의 입에서 나온 소리인지 몰랐다. "누가 황성란을 중원제일미녀라 했던가? 아! 나는 저 여인을 황성란의 우위에 두고 싶다." 그 말에 백삼인의 어깨가 들썩였다. '후후...... 저 말이 과장은 아니군. 이화선자! 과연 너는 이만한 일을 벌일만 하구나.' 석양은 그냥 지기 아쉬운 듯 엄소군의 얼굴을 물들인 낙조(落照)가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웠다. 그 낙조에 옆 얼굴이 비추이는 엄소군의 모습은 소리없이 다문 입가에 눈이 시린 아름다움과 요염함을 담고 있었다. 백삼인은 엄소군을 직시하면서 흑포죽립객에게 말문을 때었다. "어떻소? 친구! 과연 우리가 부인으로 삼을만한 미인이 아니오?" 흑포죽립객의 음성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차가웠다. "물론이오. 그러나 나는 저 계집을 첩으로 삼을 수 있을망정 본 부인으로 삼기에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오." 순간 백삼인을 비롯하여 주위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찌 이토록 아름다운 천하에서 아니 천상에서조차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미녀를 단지 첩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인가.


중인들은 그의 고절한 무공만 아니었다면 그의 아가리를 귀밑까지 찢어놓고 싶었다. 특히 엄소군과 그녀의 주위에 있던 시비들은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그녀들의 얼굴은 일제히 치욕과 분노로 물들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흑포죽립객의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저 계집은 일개 기녀일 뿐이오." 그렇다. 옥의 티라고 해야 하나? 이화선자 엄소군이 제아무리 천하절색의 미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그 고결함을 잃어버린 껍데기 뿐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시비들은 안색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시퍼렇게 질려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엄소군은 분노한 채로 아미를 깊게 찌푸릴 뿐이었다. 그러한 표정은 그녀의 모습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어줄 뿐이었다. 속의 핏줄이 들여다 보일 정도로 투명한 살결, 밤하늘 초생달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곱고 흰 아미, 오똑하고 고즈넉한 콧날 아래 꽃의 정화를 모아 놓은 붉디붉은 입술. 그리고 전신에 흐르는 아련한 몸매의 호선은 아찔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몸은 어디 한구석이라도 폭발적인 유혹의 향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흑포죽립객에게는 그 모든 것이 하찮은 것 같았다. "후후후......." 차가운 냉소성이 예리한 비수가 되어 엄소군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내리긁어대는 것 같았다. 엄소군의 시선은 그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분노했다면 당연히 그 대상에게 시선이 가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엄소군의 시선은 백삼인을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눈은 너무 아름다워 차라리 처연할 정도로 슬퍼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백삼인의 맑고 고운 그 눈과 마주치자 잠깐 동요를 일으키는 듯했다. 이것은 엄소군이 흑포죽립객의 말과 행동을 가치없이 여긴다는 뜻이었다. 어디서 똥개가 짖느냐는 식이었다. 오직 금침으로 녹두를 맞힌 사람은 백삼인 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천 개의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백의대협(白衣大俠)께서는 저 흑포죽립객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음성 또한 춤을 추듯 교태롭기 이를데 없었다. 백삼인은 죽립을 벗어 들었다. "엄소저! 나는 저 친구의 말을 수긍할 수 없소. 소저는 나의 눈에는 너무 아름다울 뿐이오." 낭랑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죽립을 벗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아!" "저렇게 잘 생긴 인물이 또 있을까?" 장중에는 엄소군을 향해 터졌던 탄성 이상의 감탄이 터져나왔다. 백색 문사의(文士衣)에 유생건(儒生巾)을 쓰고 있었다. 그 유생건 중심에는 취록색의 비취가 장식되어 있었다. 피부는 여인보다 더 깨끗했으며 체격 또한 미끈했다. 서글서글한 눈, 맑고 깊은 눈동자 속에 담긴 다정한 정감이 무한히 충만되어 있었다. 또한 지혜로움의 정광이 가득찬 두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포근함과 안정감을 갖게 해주는 두 눈이었다. 코와 입, 오관 전체에 배인 그의 따뜻함이 보는 이로 한여름 아예 눈을 돌릴 수 없게 하였다. 누군가가 짧게 말했다. "중원무랑군이다." 그 말은 중인들의 탄성과 감탄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다. 일순 엄소군의 아름다운 눈망울이 준렬하게 떨렸다. 그것은 희열과 더불어 매우 복잡한 감정이 담긴 빛이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너무도 빨리 사라졌다. 그렇다고 주운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중원무랑군 주운빈은 놓치지 않고 그녀의 눈빛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때 엄소군이 붉디붉은 입술을 벌리며 말했다. "소녀는 저 분 흑포죽립객께서 저를 포기하였기 때문에 중원무랑군 주대협께 제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선언합니다." 그녀의 말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급습이었다. 한순간에 일어난 이 일에 중인들은 도대체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의심이 갔다. 주운빈의 입가에 의미 깊은 미소가 배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이때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와아!" "이화선자를 중원무랑군이 차지했다." 그러나 예외의 음성도 있었다. 사람이란 언제나 남이 잘되는 것은 눈뜨고 보아주지 않는 못된 심정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었다. 하늘의 순리가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모든 것을 얻고 있는 중원무랑군에 비한다면 자신들의 처지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같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도 섞인 것이었다. "쳇! 저 반반하게 생긴 놈이 중원의 미녀란 미녀는 모조리 쓸어 가는군!" 당연한 귀결에 찬사와 불만이 동시에 어우러졌다. 그 순간 지극히 냉막한 한 줄기 코웃음이 터졌다. "흥!" 중인들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코웃음은 나직한 것이었지만 그 소리에 담긴 공력은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극고한 것이었다. "헉!" "으헉!" 중인들 중 공력이 조금 떨어지는 인물들이 헛바람 빠지는 소리를 지르며 비칠비칠 뒤로 물러섰다. 주운빈이 이채로운 눈빛을 띠며 흑포죽립객을 바라보았다. '제법 공력이 깊은 고수이군!' 주운빈과 흑포죽립객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러자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격탕되면서 싸늘한 냉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주운빈이 씩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친구! 불만이 있소?" "불만? 후후후...... 중원무랑군! 나는 원래 저 계집에게 흥미가 없었소. 그러나 이제 그대가 계집을 택하자 마음이 달라졌소. 나도 저 계집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야겠소." 그의 어투는 엄소군을 완전히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주운빈은 잔뜩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같은 말은 명백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친구는 권리를 어떻게 주장하겠소?" "그녀를 내가 데려 가겠소." "그렇다면 친구는 필히 나를 거처야 될 것이오." "후후후......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내가 강호의 무명소졸이긴 하지만 중원에 혁혁한 무명(武名)과 명성을 떨치는 중원무랑군 정도야 제치지 못하겠소?" 중인들은 그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중원무랑군! 그가 누구인가. 만무궁 오관을 단 한 시진 만에 박살낸 인물이 아닌가. 지금은 그 어떤 고수도 중원무랑군을 당해낼 수 없으리라는 것이 어느덧 무림의 상식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과연 자신의 말대로 무명소졸인 흑포죽립객이 중원무랑군을 제치고 엄소군을 데려다 희첩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중인들은 너무도 광오한 말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음 순간 더욱 혀를 내두를 소리가 주운빈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친구! 모든 화는 입으로 시작되어 행동에 의해서 받는 법이오. 나의 사부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소. 내가 마음만 먹으면 무림의 어느 누구도 단 일검에 격패시킬 수 있다고 말이오." 그러나 흑포죽립객은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아......." "저런 광오한 말이?" 중인들은 대경하면서도 주운빈의 말을 사실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눈에 지금 주운빈이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산으로 비추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흑포죽립객이 별안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음......." 그 역시 주운빈이 산으로 보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도 절대(絶代)의 무학을 익혔다고 자부하는 무림인이요. 사나이였다. "흐흐흐...... 좋소. 남자라면 그만한 말도 서슴없이 지껄일 수 있는 배포가 있어야지. 친구와 백초를 겨루어 보겠소." "백초? 좋소. 백초가 지난 후에는 단 일초를 쓰겠소. 그 일초는 제룡금나수(制龍禽拿手)로써 친구의 오른손 완맥을 노릴 것이오. 그리고 당신이 백초를 공격하는 동안 나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오직 피하기만 하겠소." 주운빈, 그는 할 수 있는 말이 이런 것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되먹음이 천성적으로 이렇게 태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런 광오한 말이 또 있겠는가. 중인들은 하나같이 이런 생각을 했다. 그의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동시에 그들은 이번 비무에서 흑포죽립인의 승리를 바라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실체를 알지 못했기에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일단 그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믿을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주운빈도 그런 그들의 마음속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변명같은 것이나 하고 있을 만큼 싱거운 사람이 못됐다. 일단 보여준다. 그렇게 된다면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일말의 공포심에 몸을 떨게 될 것이다. 흑포죽립객은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엄소군은 물론 시비들과 중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주운빈의 말에 안색이 대변하여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특히 엄소군의 눈은 뜻모를 흥분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 저 분이 바로 과거 어머니께서 그토록 사랑하던 분의 후예란 말인가? 너무 멋있다!' 흑포죽립객은 금세 심신을 평정시키고 있었다. 주운빈은 맑고 고요한 눈으로 그의 태도를 주시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음, 만무궁 검관주 무위검룡후를 능가하는 고수군! 누가 저만한 고수를 키워냈을까?' 주운빈이 강호출도한 이래 처음보는 고절한 고수였다. 쌔애액! 언제 어떻게 뽑았는지 흑포죽립객은 검을 날렸다. 가공할 검기가 뼈를 저미는 듯한 한기를 품고 발출되었다. 이미 그들 사이에는 금침을 던지기 전 서로 느꼈던 호감같은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흑포죽립객의 빛살같은 검기가 바로 주운빈의 목 한 치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엇?" 흑포죽립객은 이따위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놀라 자신의 목이 달아난 것만 같았다. 섬뜩한 느낌은 공격을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찾아온 것이었다. 또한 그 공격은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적을 죽이기에는 충분했다. '검을 피해도 검기의 파력으로 인하여 목이 잘라졌어야 마땅한데?' 흑포죽립객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론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주운빈은 이미 금강불괴지신을 이루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음...... 저 놈은 강호에 알려진 것보다 더욱 무서운 실력을 지녔나보군.' 번쩍! 갑자기 검기가 돌변하여 수천만의 폭섬을 일으키며 주운빈을 뒤덮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폭섬


속에서도 주운빈은 여전히 태산같이 서 있기만 했다. 그러나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났다. 일시에 단 일초처럼 펼쳐진 십팔초의 쾌검식은 모조리 빗나가는 것이었다. 흑포죽립객은 대경하여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금......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 그의 목소리는 절절이 떨리고 있었다. 금강부동신법! 이는 전설상의 불문 최고신법이다. 움직이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움직이는 신법! 실로 상상할 수도 없는 극상승의 신법이었다. 상대의 공격을 그대로 소화시킬 수도, 또는 반진(反震)시킬 수도 있는 놀라운 신법, 그것은 신법 이전에 하나의 무상신공(無上神功)과도 같았다. 흑포죽립객은 놀라운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신형을 바로 했다. 주운빈은 씩 웃으며 말했다. "친구! 이제 이십초가 지났소. 친구의 가람불영팔십일검(加攬佛影八十一劍)은 과연 당금 제일의 검법이오. 완벽하게 익혔구료." 분명 칭찬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흑포죽립객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은 듣기에는 칭찬하는 ���로 들렸지만 실은 그를 완전히 깔아 뭉개는 속뜻을 담고 있었다. 주운빈은 그의 검법을 이미 파악했고, 게다가 그에게 완벽하게 익혔다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이 당금 최고의 검법이라고 칭찬아닌 칭찬까지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검법에 옷자락 하나 스치지 못하게 만든 주운빈은 무엇이란 말인가. 돌려서 말한 욕이었다. "아......." 엄소군은 점점 주운빈에게 깊이 매료되는 자신을 깨닫게 되자 화들짝 놀랐다. '아...... 저 분의 영상을 마음에 새겨서는 안되는데 그 짐승같은 작자는 지금 어머니의 목을 움켜 쥐고 있지 않은가? 그는 나에게 누구를 보낼 것인가?' 마음과는 달리 볼 위의 홍조와 마음의 흥분은 점점 더 거세어질 뿐이었다. "차앗!" 흑포죽립객은 우렁찬 일갈을 터뜨리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뒤이어 그의 몸이 뒤집어 지면서 동시에 손이 흠칫 움직였다. 번쩍! "혈운(血雲)!" "혈우(血雨)!" "혈섬(血閃)!" 그러자 세 가지 초식이 연달아 펼쳐지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팍――! 그의 검에서 시뻘건 혈광이 폭출되면서 방원 십여 장을 혈광으로 덮어 버렸다. 바로 비혈경혼검강(飛血驚魂劍 )의 삼대 절명검식이었다. 가공할 혈광의 검강은 수천 개의 핏줄기가 되어 주운빈의 전신을 쏘아갔다. 순간 주운빈은 흠칫했다. '음! 이 검법은 바로 만무궁 검관의 서열 이위의 가공할 마검법이 아닌가? 혹시 이 자는 만무궁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 주운빈의 몸은 금강부동신법의 반자결(反子訣)에 의해 자연스레 움직여 갔다. 그의 몸이 수천 갈래로 쪼개지는 것 같은 미미한 움직임이 일었다. 그러나 실상 그의 발걸음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단지 상대의 눈에 그렇게 보이기만 할 뿐인 것이고, 바로 이것이 금강부동신법의 위력인 것이었다. 흑포죽립객은 그만 맥이 빠져 버렸다. 전설로만 듣던 금강부동신법이 이처럼 오묘할 줄은 미처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어느새 백초를 다 펼쳤던 것이다. 그것도 그가 제일 자신하는 초식을 썼던


것이기 때문에 이제 어떤 수를 쓰더라도 주운빈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 백 초를 시전하는 동안 주운빈은 단 한 번의 공세 없이 그저 막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가 공격을 하게 된다면 이미 자신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대결이긴 하였지만 무림인에게 있어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운빈에 의해서 그가 호언한 대로 오른손 완맥을 잡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초가 다 되었다. "비천유영술(飛天流影術)!" 갑자기 흑포죽립객의 신형이 가늠할 수 없는 빠른 시법으로 뒤로 퉁겨났다. 그런데 놀라웠다. 도대체 이곳이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이럴 수가 없는 것이다. 주운빈 이 놈은 인간도 아니었다. "이제 오는가?" 담담한 음성이 그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으헉!" 흑포죽립객은 심장이 터져버릴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분명 그가 뒤로 퉁겨날 때 주운빈은 원래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눈을 피해 등 뒤로 와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휙――! 그는 주운빈이 손목을 뻗는 것을 분명 보았다. 그러나 그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손을 보는 순간 그의 완맥은 이미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승부는 나 있었다. 단지 그 결과를 눈으로 확인시켜준 것 뿐이었다. 주운빈은 그의 완맥을 한 번 움켜 쥐고는 씩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뭐랬소. 나는 단 일초면 누구든 이길 수 있다 말하지 않았소." "으......." 흑포죽립객은 감당할 수 없는 치욕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말은 단 한마디도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만큼 더 보잘 것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는 강한 것이었다. 주운빈이 서서히 몸을 엄소군을 향해 돌렸다. 이때에는 주위의 중인들은 주운빈이 인간인가 신인가 하는 의문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신이 인세에 현신한 것 같았다. 주운빈은 엄소군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엄소저! 이만 돌아가시오. 조금 있다 소저를 방문하겠소." 엄소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예!" 주운빈의 몸이 빙글 흑포죽립객에게 돌려졌다. "친구가 누군지는 묻지 않겠소. 이제 가시오. 그러나 차후 만나지는 맙시다. 왠지 당신이 꼭 적이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구료." 그러나 흑포죽립객은 아무 말없이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런 그의 내심은 치욕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흐흐흐...... 주운빈! 네 말이 틀림없다. 우리는 곧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네 놈은 뼈조각도 추릴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잠시 주운빈을 노려보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주운빈은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도록 그곳에 홀로 남아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하구나!' 갑자기 불안해지는 마음! 무언가 어떤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② 악양(岳陽)! 호남(湖南)의 동정호(洞庭湖) 근변에 위치한 곳이다. 이곳은 수륙(水陸) 양도가 잘 발달된 교통요지여서 상업이 번창하였다. 천하 각지에서 오가는 교역들이 풍부한지라 성내는 다채로운 풍물과 요란스럽게 떠드는 상인들로 붐볐다.


더러는 광동(廣東)에서 더러는 산서(山西)에서 거상(巨商)들이 모여 일확천금을 노렸다. 또 밤이면 술과 여자에 묻혀 마냥 흥청거렸다. 거금이 모이는 곳이기에 각지에서 미인가화들 또한 모여들어 야시장(夜市場)이 성시를 이루었다. 외로운 나그네들이 회포를 풀고 시름을 잊는 술과 여자가 있는 곳, 악양에서 제일 큰 기루(妓樓)인 악양제일루(岳陽第一樓)! 이곳에서도 미녀들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때는 삼경, 악양 제일의 명기루 앞에 한 백의청년이 섰다. 그리고 기루 입구에는 몰려드는 기녀들로 작은 소란이 일었다. 기녀들은 악양제일루 주인 엄소군을 차지하러 오는 중원무랑군 주운빈을 보려고 몰려나온 것이었다. "아...... 정말 잘 생기셨네." "아...... 오늘 밤 저 분을 차지할 수 있다면......." 이때 기녀들 뒤에서 냉엄한 여인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비켜라!" 곧 기녀들이 양쪽으로 갈라서고 한 중년미부가 앞으로 나섰다. "저는 악양제일루 총관입니다." 그녀는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주운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총관! 꽃 속에 파묻히니 매우 쑥스럽구료. 어서 안내하시오." 그러자 총관은 더욱 머리를 공손히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뒤로 돌아서서 가볍게 손을 들었다. 기녀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자 작은 길이 틔었다. 주운빈은 유유한 걸음걸이로 기녀들 사이를 헤치며 기루의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이리로 드시지요." 기루 안의 회랑(回廊)은 악양제일루답게 길고 끝이 없었다. 여러 개의 코고 작은 실내 정원과 작은 문들을 지났다. 이윽고, 주운빈은 총관의 안내를 받으며 무척 크고 화려한 별실 안으로 들어섰다. 별실(別室)은 매우 우아하고도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편히 쉬십시오." "고맙소." 총관이 사라지자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별실은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주운빈은 별실을 둘러보더니 원탁의 교의(交椅)에 다가가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그리고 교의 속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스르륵! 별실의 문이 열리며 달콤한 여인의 육향(肉香)이 확 풍겼다. 주운빈의 눈이 문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남방식(南方式) 칠채단금(七彩單錦)을 걸친 절세미녀가 맨발로 사뿐히 들어섰다.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채 주운빈의 앞으로 다가온 단금미녀(單錦美女)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배례를 올렸다. "천첩(賤妾) 엄소군이 주대가에게 인사올립니다." "주대가?" 엄소군의 스스럼 없는 칭호에 주운빈은 뜻모를 반문을 했다. 유난히 긴 속눈썹과 티 한 점 없이 해맑은 피부, 그리고 깊게 패이는 볼우물이 인상적인 엄소군이었다. 배례를 마친 엄소군이 어떤 기대감이 서린 눈으로 주운빈을 올려다 보았다. 주운빈은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주운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주운빈은 그것을 정확히 직시하고 야릇한 미소를 띠었다. 부드러움 속에 감춰진 남자의 냉정함, 민감한 여인만이 깨달을 수 있는 냉정이었다. 주운빈은 온화하게 물었다. "본 공자가 누구인가?" 엄소군은 가볍게 눈을 내리 깔았다.


"천첩의 부군되실 분입니다." 그녀는 굳은 목소리로 대답햇다. 사뭇 공손한 듯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자조가 섞여 있는 음성이었다. 주운빈은 쾌활하게 웃었다. "본 공자가 천첩의 부군이 되실 몸이라? 하하하...... 필히 본 공자도 천한 몸이겠군." 그러자 엄소군은 고개를 숙인 채 미묘하고 착잡한 기색을 띠었다. 주운빈은 온화한 음성이나 비교적 냉정하게 말했다. "소군! 옷을 벗어라." "네?" 엄소군은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들고 주운빈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녀의 얼굴이 수치심과 놀라움으로 붉게 상기되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넋을 잃고 수려한 주운빈의 얼굴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소군. 너는 나의 부인이 될 여인이다. 부군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워 옷을 벗지 못하는가? 어서 벗어라." 주운빈의 음성은 온화했다. 그러나 그녀가 감히 항거하지 못할 위엄이 서려 있었다.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온 엄소군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아랫입술을 깨물며 스스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스르륵! 그녀의 몸을 감고 있던 칠채단금이 하나 둘씩 발밑으로 떨어졌다. 점점, 갓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여인의 현란한 몸매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주운빈은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유심히 그녀의 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왜 그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일까. 사르륵! 엄소군의 마지막 치부를 가리고 있던 단의(單衣)가 미끈한 다리를 타고 밑으로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물주의 걸작이 별실 안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사방에 환한 빛을 뿌렸다. 보옥의 광채도 이것에 비하면 어둠이었다. 명장(名匠)의 명작(名作)이 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으음......." 주운빈은 깊게 신음을 터뜨렸다. 위대한 걸작품의 몸속에는 따뜻한 피마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주운빈은 심히 만족스러웠다. "으음...... 금침(金針) 한 번 날리고 운수대통하는군." 그는 엄소군의 나체를 세밀히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엄소군의 얼굴은 주운빈의 시선이 거칠 때마다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주운빈의 시선은 한 점의 동요도 일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그녀의 몸을 탐험해 갈 뿐이었다. 실로 철심장을 가진 듯한 그는 천천히 엄소군의 머리 끝에서부터 세심히 살피며 훑어 내려갔다. "훌륭한 육체군." 그의 시선이 엄소군의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에 이르자 일순 그의 눈에 광채가 번져갔다. 죽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무나 큰 치욕에 엄소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한 번도 그녀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이제 부군이 될 사람이라지만 이렇게 발가벗겨 세워두고 마치 관찰이라도 하듯 끈적한 눈빛으로 자신의 몸을 훑어보는 것이 기분좋을 수는 없었다. 주운빈은 시선을 거두고 몸을 일으켜 엄소군에게 다가갔다. 그의 몸이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올 때마다 엄소군의 몸은 떨리기 시작하며 점차 경직되어갔다. 묘한 긴장감이 그녀의 몸을 휩쓸었다. 이윽고 엄소군의 앞에 다가선 주운빈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하얀 가슴을 쓰다듬었다. 수궁사(守窮絲)! 성스러운 숫처녀의 상징인 수궁사, 그 붉은 점이 백옥같이 뽀얀 살결 위에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운빈의 손길이 가슴을 스치자, 엄소군은 몸을 심하게 떨며 불안과 긴장, 그리고 묘한 희망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주운빈은 그녀의 표정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두 팔로 그녀의 몸을 감싸 품에 안았다.


그러자 엄소군의 풍만하나 어딘지 모르게 가냘픈 느낌을 주는 몸이 쓰러지듯 주운빈의 품 안으로 달싹 안겨들었다. "음......." 그녀가 나직이 비음을 터뜨리는 순간, 엄소군의 두 눈이 번쩍 떠지며 손을 주운빈의 등 뒤로 돌려 끼고 있던 반지의 윗면으로 그의 등을 가볍게 눌렀다. 찰칵! 가는 침이 부러지는 듯한 경미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주운빈이 엄소군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것은 동시였다. 이미 그녀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던 듯한 태도였다. "아악!" 엄소군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가 젖혀졌다. 주운빈이 온화한 음성으로 물었다. "누가 시켰지?" 그런데 그녀의 눈에는 공포 대신 맑은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미...... 미안해요. 저희 어머님을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나직이 흐느꼈다. 그러나 이미 무엇을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팔을 풀고 자신의 반지 낀 손을 내려다 보았다. 마디가 없는 것처럼 유연히 보이는 손가락에 끼워진 다홍빛 산호지환(珊瑚指環), 그 윗면에는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는 침이 솟아 있었다. 그런데 그 침은 중간쯤에서 구부러져 있었다. 엄소군은 암습을 감행한 것이었고, 그 암습은 주운빈에게 먹혀들지 않았던 것이다. 산호지환의 침은 주운빈의 살갗을 뚫지 못했다. 이미 그는 그녀가 그런 암습을 행할 것을 알고 대비를 한 것이었다. 아니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런 침따위로 주운빈을 어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주운빈은 여유있는 자세로 뒷짐을 지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는 어디 있느냐?" 엄소군은 대답대신 정녕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침에는 무형지독(無形之毒)이 발라져 있었는데. 이럴 수가?" 그녀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공포서린 눈으로 지환과 주운빈의 미소진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유있는 자세로 서 있던 주운빈은 안면에 미소를 띠우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본 공자는 네가 동정호에서 그와 같은 일을 벌일 때 이미 짐작을 했다. 너에게 이런 위험한 일을 맡긴 자들의 의도를 알지 못하겠다. 그들이 너를 이곳에 잠입시킨 치밀한 안배와 능력을 보면 결코 강호의 하류배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어줍잖은 방���으로 나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 자체가 우습고 또 나를 굳이 죽이려는 자들도 없을 것이다. 소군. 너는 왜 그와같은 짓을 해가며 나를 유인하려 했지?" 주운빈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별실 안을 왔다갔다 하였다. 엄소군은 넋을 잃고 서서 망연히 주운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운빈은 사색에 잠겨 미간을 좁혔다. "필경 이런 수작을 꾸민 자들은 당금 무림의 대단한 고수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너같이 아름다운 처녀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나를 죽이려 하다니. 하하하...... 누구냐? 만무궁주냐? 아니면 원려공주? 혹시 무귀전주이더냐?" 엄소군은 암습이 실패하자 모든 것이 끝장난 듯한 암울함에 휩싸였다. 분명히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당할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이 착각이었던 것이다. 주운빈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하얗게 텅비어버린 눈으로 주운빈을 바라볼 뿐이었다. 주운빈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고 엄소군의 나체를 바라보았다. 차츰 시간이 흐르자 엄소군은 다시 냉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네가 처녀의 몸을 희생해가면서 본 공자의 목숨을 취하는 대가가 무엇이냐? 단지 네 어머니의


목숨뿐인가?" 엄소군은 주운빈의 희롱하는 듯한 눈길을 받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옷을 입기 시작했다. "하하......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냉정을 되찾았다는 뜻인데." 엄소군의 얼굴은 무섭도록 침착해져 있었다. "호호호...... 주대협! 천첩이 당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죠?" "그런 것도 깨닫지 못하고서야 어찌 중원에서 오래 숨을 쉴 수 있겠느냐? 하하...... 만약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아닌 흑포죽립객이 있었다면 너는 벌써 시체로 변했을 것이다." "호호...... 중원무랑군이라는 외호가 저를 살렸군요." 오가는 대화나 웃음소리 모두가 부드러웠다. 그러나 주운빈의 안색은 이미 미소를 거두고 있었다. 엄소군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약간 움찔한 빛을 띠었다. 주운빈의 표정을 읽은 것이었다. "너는 애당초 그런 수단이 본 공자에게 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너를 하수한 인물이 벌써 그것을 지시했겠지. 그리고 그 자는 그 점을 역이용하려 하는 것이지." 주운빈의 눈은 싸늘한 광망을 띠우며 엄소군의 심장을 꿰뚫듯 직시하였다. "그 놈은 간악한 계교로 본 공자의 동정을 사서 너를 완벽하게 본 공자에게 접근시키려 했던 것이지. 이미 그 놈과 너와는 치밀한 안배가 되어 있겠지. 어머니를 납치하여 그 점을 협박하는 암중인! 그 정도 명분이면 본 공자의 동정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니까." 주운빈은 갑자기 말을 끊으며 느긋하게 웃어젖혔다. "하하하......." 엄소군은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이번에는 정말로 새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해부하듯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주운빈 앞에서 느끼는 항거할 수 없는 공포였다. 마치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던 사람처럼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녀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주운빈의 날카로운 비수같은 말은 계속되었다. "그 놈이 그러던가? 본 공자의 환심을 산 후 본 공자의 모든 것을 빼내오라고 말이다." 그것은 온화한 음성이기에 더욱 두려웠다. 차라리 분노띤 얼굴이 나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은 채 주운빈의 여유있는 음성을 듣기만 했다. "본 공자가 너의 값싼 눈물에 현혹되었다면 그 결과는 뻔했겠지. 처녀의 몸까지도 준비하였으니 무슨 준비인들 완벽하게 못하였겠느냐?" 그녀는 할 말을 찾고 있었으나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변명을 한다고 해도 이미 주운빈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심정은 알 수 없는 것이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너를 하수한 인물이 원하는 것은 본 공자의 모든 비밀인가?" 주운빈은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나 엄소군은 진의를 추측할 수 없는 그의 수려한 눈길을 받으면서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는 얼떨결에 그에게 세뇌당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상황은 정리되었고, 결과는 여실히 드러났다. 그녀는 이제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이제와서 주대협께 무엇을 속이겠습니까. 그는 천첩에게 주대협께 시집을 가서 모든 것을 알아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제 어머님이 그들에게 사로잡힌 것은 사실입니다." 그녀의 음성은 체념한 듯 힘이 없었다. 주운빈은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서너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짓을 꾸민 인물은 누구인가?" 그녀는 흠칫 놀라며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말하기 힘든 질문이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리로 오너라. 본 공자가 중원제일에 황성란에 뺨치는 미녀를 다치게 할 것 같으냐? 본 공자는 바로 중원무랑군이다." 중원무랑군!


이제는 무림의 어느 누구에게도 위엄과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대명사였다. 엄소군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방금 전까지 가졌던 두려움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그에게 이끌려 갔다. 주운빈은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혔다. "정말 아름답군." 엄소군은 얼굴을 붉히며 옷섶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무릎 위에 앉은 것이 매우 어색한 모양이었다. 순간 주운빈의 입술이 빠르게 그녀의 입술을 스쳐 귓불로 갔다. 당황한 마음에 그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주운빈은 입술로 가볍게 그녀의 귓불을 물었다. "누군가? 너를 하수한 인물이? 후후......." 그녀는 생전 처음 느끼는 야릇한 흥분에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인물은 벌써 이곳에 와 있으면서도 들어오지를 않는구나." "네?" 그녀는 주운빈의 말에 야릇한 흥분이 일제히 가셨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끼며 주운빈의 무릎 위에서 내려서며 벌떡 일어섰다. 동시에 문이 열리면서 한 인물이 천천히 들어섰다. 제 21 장 천하를 놓고 흥정하다! ① "하하하...... 역시 중원무랑의 적수는 무림에 없구료. 저 아이의 표정만으로 모든 음모를 알아냈으니 어느 누가 당하겠소. 본좌는 탄복하는 바이오." 그는 옥선(玉扇)을 펴서 얼굴을 가린 채 유유한 걸음으로 별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아무 거리낌없이 주운빈의 앞에 와서 앉았다. 옥선이 접혀지고 드러난 그 인물의 모습은, 전신에 고귀한 풍도를 지닌 젊은 무사차림의 귀공자(貴公子)였다. 얼핏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개와 의연하고 고상한 풍도를 느낄 수 있었다. 주운빈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그를 맞이하였다. "어서 오시오. 어느 간 큰 위인이 감히 중원무랑군의 비위를 긁나했더니 상당히 젊은이구료. 하하하...... 친구가 될 수도 있겠소이다." 그의 말에는 조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불현듯 나타난 고귀한 젊은 문사는 전혀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친구? 하하...... 중원무랑군과 친구가 된다면야 무엇을 더 바라겠소." 매우 호탕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이때 주운빈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아무런 감정없이 젊은 문사의 기품있는 얼굴을 주시하였다. 주운빈은 무감각하게 말했다. "물론 본 공자와 뜻이 맞는 조건이라야 되겠지요." 젊은 문사는 흠칫했으나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물론이오. 본좌의 동생을 통하여 중원무랑군의 놀라운 지모(智謀)와 타인을 완전히 압도하는 위풍을 듣고 본좌는 반신반의했으나 이제는 확실히 믿을 수 있소." 문득 주운빈의 두 눈에 날카로운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동생?" "정말 놀랍소. 평소에 음행(淫行)을 즐기며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원려같은 계집애를 망신시킨 중원무랑군 주형이야말로 누가 따를 수 있겠소. 그 덕에 원황실(元皇室)의 체모는 구정물에 처박힌 신세가 되었지만 말이오." 젊은 문사는 진정으로 주운빈에게 탄복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중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 이 젊은 문사는 원려공주를 계집애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자는 도대체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주운빈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다음 황실의 대(代)를 이을 황자(皇子)께서 일개 강호의 무인을 직접 찾아오시다니 정말 의외이구료."


그렇다. 원려공주를 감히 계집애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몇 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중 이런 천한 말을 입에 올릴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이 젊은 문사가 바로 그 단 한 명인 당금 원황제(元皇帝) 순무제(旬武帝)의 적황자(嫡皇子)였다. 그때였다. 미리 언질이 되어 있었는 듯 어린 중노미가 커다란 소반 위에 정갈한 안주와 백자주병(白瓷酒甁)을 담아와 그들이 앉아있는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물러났다. 적황자는 미소를 지으며 백자주병을 들어 주운빈의 잔에 맑은 술을 따르고는 이어 자신의 잔에도 가득 채웠다. "강호출도의 그 짧은 시간에 천하를 놓고 흥정할 만한 인물이 된 주형이 솔직히 부럽소." 적황자의 말은 진심이었다. 아니 천하의 그 누구라도 지금의 중원무랑군 주운빈의 놀라운 아니 있을 수 없는 그의 성장을 부러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과찬이오." "주형의 등장은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오. 설사 어느 누가 주형이 천하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물이 될 줄 알았겠소." "이 또한 과찬이오." 분명 그들은 적이었다. 한 사람은 죽이려 했고, 주운빈은 그 음모에 목표가 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의 음성에는 이상하게도 친밀감이 배어 있었다. 적황자가 잔을 들어 올리며 주운빈 앞으로 내밀었다. "우선 건배 합시다." 그러나 주운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본 공자는 친구가 아닌 사람하고는 술을 들지 않소." 그러나 적황자는 실로 황자다운 풍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전혀 화를 내거나 기분나쁘다는 내색을 하지 않고 오히려 호탕하게 웃으며 재차 잔을 권하는 것이었다. "하하...... 아직은 내가 천하요. 그만하면 친구가 아니라도 같이 술을 들만하지 않겠소?" 주운빈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자세를 바로 하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잠시 당신을 희롱하여 미안하오. 당신은 친구가 아니라도 같이 술을 들어줄만한 인물이오." 실로 목이 열두 개라도 감당하지 못할 광오한 말이었다. 아무리 국세가 기울어지는 원이라 하여도 그는 황제가 될 인물이었다. 하지만 주운빈이 그만한 자격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② 주운빈과 적황자는 잔을 입에 대고 동시에 쭈욱 들이켰다. 이번에는 주운빈이 자신이 마신 술잔을 적황자에게 내밀며 술을 따랐다. 문득 적황자는 주운빈에게 안색을 굳히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설마 주형은 천하를 통째로 취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는 무언가 극히 우려하는 듯 심각한 안색을 지었다. 그러나 주운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적황자는 그가 대답이 없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주형이 나를 돕는다면 중원무림(中原武林)을 주겠소. 물론 대내(大內)의 팔십이만 금군(禁軍) 통령대부(統領大夫)의 지위도 주겠소.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위치에 서게되는 것이오. 본좌와 손을 잡으면 주형의 미래는 오직 영화(榮華)만이 있을 뿐이오." 부드러우면서도 위압적인 음성이었다. 주운빈은 싱긋 웃으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허리를 폈다. "당신은 무언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구료. 현 무림의 상황으로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바로 본인이오. 즉 원(元)의 국세는 내 마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오." 주운빈은 적황자에게 당신이라고 부르는 하대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적황자는 대범한 신색으로 귀를 기울일 뿐, 여전히 화를 내지 않았다. "당신은 이 점을 기억하시오. 본 공자는 오직 천하지상(天下之上)을 원할 뿐이오. 당신들은 그만 사막(沙漠)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이때만큼은 적황자도 주운빈의 말에 숨이 콱 막혔다. 옆에서 조용히 이를 지켜보고 있던 엄소군은 두 인물의 대화에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아...... 저 분 주대협은 어디서 저런 기상이 우러나와 감히 황자에게 저런 언사를 마음대로 뱉어낼 수 있는 것일까?' 적황자는 주운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금 눈 앞의 젊은 강호인은 황자에게 한족(漢族)의 부흥을 선언한 것이었다. 순식간인 것 같았지만 주운빈과 적황자 사이에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윽고 적황자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는 천천히 백자주병을 들어 주운빈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이미 결정이 난 듯했다. "주형이 친구가 못되는 것이 안타깝구료." 그의 얼굴엔 깊은 아쉬움이 번져갔다. 그것은 주운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은 시기를 잘못 타고 태어나 만난 것 같소." 두 사람은 천천히 잔을 들어올렸다. "본좌가 소군을 시켜 주형을 시험하려 들은 것을 사과하오." "아니오. 싸움에서의 권모술수, 암수, 지략은 훌륭한 병법이오. 본 공자는 주위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것 뿐이오. 하하하......." "하하하......." 서로 무언가 통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친구가 되지 못하는 아쉬움, 그것은 지금 그들의 웃음 속에 녹아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으면서 술잔을 들이켰다. 적황자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주형은 칠십 년 전 정사양대종사(正邪兩大宗師)의 진전을 이어 받으셨다고 알려져 있소이다." "그 두 분은 본 공자의 사형(師兄)이오." 여지껏 적황자는 주운빈이 어떤 말을 하던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아니었다. 적황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가 이렇게 놀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과 사의 두 명의 종사, 이들이 주운빈에게 있어서 단지 사형의 관계가 된다는 사실은 아마도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놀라서 기절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형의 사부는?" "제 사부님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오. 다만 그 분은 스님이셨소." 적황자는 이해가 안갔으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던 적황자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주형, 정사양대종사의 무공비급이 본 황궁에도 비장되어 있는 사실을 알고 계시오?" 주운빈은 싱긋 웃었다. 그는 적황자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적황자의 말뜻은 바로 자신도 그 비급을 익혔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주운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만무경전(萬武經典)도 있겠구료?" "그렇소. 양대종사의 비급과 만무경전만은 도난당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당신은 그 비급들을 익혔겠구료?" 적황자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러나 주운빈은 조금도 괘념치 않았다. "무학은 예(藝)와 도(道)의 두 가지 길이 있소. 당신이 말한 네 비급은 바로 무도(無道) 대라반선(大羅半仙)의 경지를 논한 것이오. 어줍잖게 익힌 무도(無道)는 무학의 실용을 따지는 무예(武藝)에 당할 수 없다는 것을 물론 알겠지요? 당신이 그 비급들을 예로 익혔다면 결코 대성하지 못했을 것이오." 적황자의 안색이 굳어졌다. 주운빈의 말은 심오한 무학의 도리였으나 그도 그 점은 깊이 깨닫고 있었다.


주운빈의 짐작은 정확한 것이었다. 자신의 내심을 꿰뚫는 듯한 그의 말에 적황자는 내심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기색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대범한 기색을 보여주었다. "주형의 그 한마디에 새로운 무학의 경지가 열리는 듯하오." "하하...... 적황자, 당신은 영웅이오. 당신은 나의 훌륭한 적수가 될 것이오." 별안간 주운빈의 안광이 무섭게 타올랐다. 역시 적황자의 안광도 무섭게 타올랐다. "그렇소. 주형만이 내 적수요." 이제 천하를 놓고 말하던 두 영웅은 마지막 술잔을 들었다. 이제 헤어지게 되면 이들은 서로 물고 뜯는 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왕왕 사나이들은 주변의 친구보다 진정한 적수에게 더욱 친근감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마지막 술잔을 내려놓은 그들에게 벌써 불타는 안광은 사라지고 서로를 염려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 친근감 배인 뜨거운 눈길이 허공에서 얽매어졌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적황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된 것이다. "가겠소." 주운빈도 일어섰다. "멀리 배웅하지 않겠소." 적황자의 눈길이 엄소군을 향했다. "소군. 네 어머니는 절연암(絶緣庵)으로 돌려 보내겠다." 일순 엄소군의 얼굴이 희열로 물들었다. 이제 그토록 그녀를 괴롭혀오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녀는 얼른 적황자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황태자 전하(皇太子殿下) 감사하옵......." 그러나 적황자는 그녀의 배례를 허락하지 않았다. "소군. 본좌에게 절을 하지 마라." 그리고 그는 주운빈에게 말했다. "어쩌면 무림에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 같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의 예감이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는 이 말을 남긴 채 망설임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주운빈은 교의에 깊이 몸을 묻었다. '음...... 아까운 인물이다. 실로 친구란 어떤 것인지 증명해주는 인물이군. 만약 그가 백년 전에만 태어났더라도 원시조(元始祖) 철목진(鐵木眞)의 영화를 되찾았을 것을.......' 문득 주운빈은 적황자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무림에 아무도 상상치 못한 불행한 사건이 터질 것이오.' 일순 왠지 모르게 전신을 적시는 전율이 스쳐갔다. 그는 다시 눈을 뜨며 엄소군에게 물었다. "소군. 너의 어머니는 속세를 떠나셨느냐?" 엄소군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이렇게 묻자 가련한 얼굴로 주운빈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예......." 주운빈은 유성(流星)을 보면서 느꼈던 고독감을 그녀에게서 볼 수 있었다. 엄소군은 자조어린 음성으로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제 어머니는 매우 불행한 여인이었어요. 어머니는 또한 엄청나게 재화가 많았지요. 그리고 한(恨)도 많았어요.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많았어요. 재화도, 슬픔도...... 어머니에게 없었던 것이라면 사랑하는 정인(情人) 뿐이었지요." 어머니. 주운빈에게도 어머니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엄소군의 어머니란 말은 그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어머니, 너무나 위대했던 아버지의 이름에 파묻혀 별로 생각지 못했던 다정한 말이었다. 엄소군의 눈물은 슬픔 그 자체였다. "어머니...... 제 어머니의 이름은 섭유린이었......." 엄소군의 입에서 채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니 그녀의 입에서 섭유린이란 세 글자가 나옴과 동시였다. "섭유린?" 갑자기 주운빈이 그 이름을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과거 인의대협 주석빈을 너무나 사랑했던 여인 섭유린, 그 여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주운빈은 뜻모를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주운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지금 무한한 원망, 회한, 뜻모를 격랑이 출렁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들릴락 말락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도 제 어머니와 같은 슬픔을 지니게 될까봐 두려워요." 여인의 애심(愛心). 운명이란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다. 같은 모녀 이대가 같은 부자 이대에 의해서 똑같은 슬픔을 지닌 채 살아야 하는가 하는 운명의 기로에 놓여지는 순간이었다. 주운빈은 갑자기 여인이란 존재가 한 남자에 의해서 일생이 좌우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감동을 느꼈다. "어머니는 지금 어느 곳에 계시오?" 그의 말은 경어로 바뀌어 있었다. 최소한 자신이 거두려는 여인한테 하대를 사용하기는 싫었다. 엄소군의 몸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사실 그녀가 황태자의 도박에 자신의 몸을 걸었던 것은 어머니가 이루지 못한 주씨 집안에서의 사랑을 자신이 이루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절연암은 괄창산 운기에 있습니다." "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엄소군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주대협께선 어찌 제 아버님에 대해선 묻지 않으십니까?" 주운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정 사랑했던 사람과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아버지와의 사이라는 것은 뻔했기 때문이었다. "저의 탄생은 어머님에게 있어서 치욕이었습니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주운빈을 올려다 보았다. "그래도 묻지 않으시는군요." "지금 소군의 말은 자조에 물들어 있소. 아마 소군의 아버지를 알게 되면 무척 슬픈 마음이 들 것 같소. 그런 일은 되도록 알지 않는 것이 좋지."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터뜨렸다. "아...... 그렇군요. 제 슬픔을 주대협에게까지 파급시킬 필요는 없겠지요." "아니오. 소군. 나도 차츰 모든 일이 정리되는 대로 소군과 같이 슬픔을 나누겠소." "아......." 그녀는 슬픔 속을 헤매이다가 갑자기 꿈꾸는 듯한 심정이 되었다. 주운빈, 그는 정말 멋진 남자였다. 그의 말 한마디한마디가 그녀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하늘이 되어 그녀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느낌은 그녀의 눈에 그대로 나타났다. 주운빈이 싱긋 웃었다. 눈으로부터 시작되는 그의 정겨운 미소가 전해지자, 엄소군은 그대로 전신이 녹아버리는 듯한 환희에 젖어들었다. 그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어떤 여인이라도 이런 기분에 빠져 들게 될 것이다. "소군.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오. 어느 무엇하나 남에게 뒤지기 싫고 또 뒤지지 않을 능력이 있소. 물론 미인들에 대한 욕심도 크오." 주운빈이 무엇을 얘기하려는지 엄소군은 이미 알 수 있었다. 그의 따뜻한 눈길이 그것을 말해주었고, 엄소군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소군. 나의 가슴에는 소군만 괜찮다면 들어설 자리가 매우 넓소."


만 근의 화약이 터진 것 같은 아찔한 말 한마디, 그러나 그것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생긴 상처라면 죽게 되더라도 좋았다. 소군의 입이 반쯤 벌어졌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탄성이 새어나왔다. 주운빈은 그녀를 무너뜨릴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너무나 결정적이었고, 순식간에 무너지는 그녀는 주운빈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소군. 나는 아버님처럼 미인을 두고 등을 돌릴 만큼 마음이 냉정하지가 않다오. 소군만 허락한다면 나는 소군의 평생 동반자가 되겠소." "아...... 주대가." 그녀는 무너지듯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지금 그녀에게 무슨 말이 더 이상 필요하겠는가. 그 어떤 말의 표현도 그녀의 희열을 대변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는 더할 수 없는 사랑의 감격에 겨워 주운빈의 품 속에서 몸을 떨었다. 주운빈은 포근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부드럽게 두른 그의 팔에는 모든 평안과 고요가 있었다. 엄소군은 더욱 깊숙이 주운빈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주대가, 기뻐요. 소군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그러나...... 그러나......."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주운빈은 흐려지는 어조에서 그녀가 어떤 불행을 예감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계속 말해보시오." 그녀는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아...... 이상하게도 자꾸만 저는 주대가의 영원한 반려자가 될 수 없을 것만 같아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소군?" "아...... 아...... 모르겠어요." 정녕 모를 일인 것이다. 지금 너무나 큰 행복이 눈 앞에 있고, 이제 그것을 껴안아 가슴 속에 채워두면 되는 것이다. 너무 큰 행복이라 가슴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사람의 감정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행복이 찾아왔으나, 이것이 정말 내것인가를 의심하는 것, 이것이 사람의 감정이었으니 그녀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적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까지도 주운빈은 속속들이 알고 이해할 수가 있었다. "후후후...... 소군. 안심하시오. 우리들 사이에 어떤 불행한 일이 생겨도 나는 소군의 행복을 지켜 줄 것이오." "아...... 주대가, 그렇게만 된다면...... 그렇게...... 웁!" 더 이상의 말은 구차했다.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몸으로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주운빈의 믿음직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아! 이게 꿈인가요? 현실인가요? 주가가!' 엄소군은 몸을 부르르 떨며 주운빈의 목을 끌어 안았다. 느껴지는 사랑, 행복 이게 전부 자신의 것이었다. 깊고 깊은 입맞춤이, 두 사람의 입술은 서로의 뜨거운 애정을 더 캐내려는 듯 뜨겁고 진하고 길었다. 혀와 혀는 수없이 서로를 확인하고 또 찾았다. "아아......." 꿈결같은 황홀한 느낌, 엄소군의 가슴은 뜨겁게 파동치며 한없는 사나이의 격정과 사랑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주운빈은 그녀를 안았다. 이어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겨 호화스러운 침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를 침상 위에 살포시 내려 놓았다. 황촉 불빛이 엷어지면서 밀실은 감미로운 육풍(肉風)이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소군...... 오늘밤 당신을 내 여인으로 만들어 주겠소."


"아...... 아......." 주운빈의 부드러우나 열정에 들뜬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일시에 어루만졌다. 이어 엄소군은 자신의 몸에서 옷자락이 하나씩 벗겨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두번째로 그의 앞에서 옷을 벗게 되는 엄소군이었다. 첫번째로 옷을 벗었을 때, 그때는 수치심을 느꼈었다. 그러나 이번은 전혀 달랐다. 수치심 따위가 있을 수가없었다. 잠시 후, 그녀는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솟을 곳에 알맞게 솟아오르고 꺼질 곳은 미묘한 계곡을 이룬 그녀의 나신은 실로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완벽한 여성미(女性美)를 이루고 있었다. 은은한 황촉불속에 드러누운 여체의 신비로움, 황촉불이 가늘게 떨리우며 그녀의 몸을 간지럽히듯 그림자를 흔들어댔다. 그럴때마다 그녀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묘한 흥분이 그녀의 전신을 휩싸고 돌았기 때문이었다. 불빛 아래 드러난 여체의 신비, 그것은 밝은 곳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여체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뜨거운 유혹과 충동을 불러 일으켰다. 학처럼 고운 목의 선은 가슴에 이르러 두 갈래의 굴곡을 일으킨다. 젖가슴, 사내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고향과 같은 곳, 순결한 모성(母性)이 숨어 있는 젖가슴은 둥글게 그리고 육감적인 호선을 그리며 담겨 있었다. 젖가슴 끝에 매달린 두 개의 열매는 미지의 희열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스러운 기대에 미미하게 떨고 있엇다. 아랫배의 현란함, 부드러움과 풍요로운 안식처를 제공하는 여인의 아랫배는 미끈한 곡선과 완만한 구릉으로 진정 남자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있었다. 그녀가 숨을 쉴때마다 조금씩 오르락 내리락하는 아랫배는 입맞추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아래 검게 자라난 초지(草地)는 숨막히는 긴장속에 어둠을 뭉쳐 안고 깊이깊이 전율스러운 호흡을 일으키고 있었다. 두 다리는 대리석처럼 반듯했으며 수려하게 뻗어 있어 남자로 하여금 그것을 더듬어 안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아...... 아......." 엄소군은 눈을 꼭 감았다. 자신이 왜 이렇게 떨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떨림 속에서도 자신의 육체가 서서히 달아 오르기 시작하는 것은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알 수 없는 것이 여인의 마음이요. 여인의 몸이었다. 그녀는 가늘은 신음을 터뜨렸다. "아......." 이때였다. 주운빈의 손길이 그녀의 나신에 닿았다. 이제 서서히 그녀는 침몰되어갔다. 그의 손길에 입술과 감미로운 혀에 차츰차츰 몸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황홀한 침몰이었다. "흑......." 엄소군은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주운빈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 사나이의 우람한 체격이 그녀의 몸에 가득 실렸다. 엄소군은 호흡이 급해지는 것을 느끼며 바르르 전율하며 발끝을 오무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주운빈의 몸이 움직였다. 그때마다 참을 수 없는 희열이 그녀의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고, 그녀는 주운빈의 등을 자신도 모르게 강하게 끌어 안았다. 주운빈의 움직임은 시간이 흐를수록 속도를 높혀갔고, 엄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높아짐을 억제치 못했다. 그녀는 미끈한 팔로 주운빈의 목을 휘감았다. 주운빈은 서두르지 않았다. 이제는 여인의 나신에 익숙해진 탓일까. 그들은 함께 망망대해의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깊은 바다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들 사이의 빈틈이란 단 한 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 음......." 엄소군의 몸속에는 뜨거운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주대가, 이것이 사랑의 확인인가요? 아...... 나는 내몸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답니다.' "흑......." 그녀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파과의 아픔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운빈의 단단한 어깨를 깨물었다. ��� 다물린 치아 하나하나에 희열이 고이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엄소군. 그녀는 온몸에 번지는 무한한 희열에 몸을 떨었다. '아...... 아...... 어머니, 어머니의 슬픔을 제가 씻어드렸다고 말한다면 불효일까요? 아...... 주대가,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되었어요. 이제 그 누구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어요. 아.......' 수없이 명멸하는 성채(星彩)! 수없이 타오르는 밤의 열기로 휩싸인, 그 어느 밤보다 더욱 뜨거운 두 사람만의 밤이었다. ③ 무릉산(武陵山). 산기슭 계곡 입구로부터 시작하여 온 산의 둘레를 덮은 아름다운 기화이초와 기암괴석들은 한눈에 모든 풍경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길게 펼쳐져 있었다. 강호의 명산(名山)이었다. 만세(萬世)에 이름을 떨치는 중원오악(中原五嶽)과는 다른 또 하나의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삼경이었다. 희디 흰 한 줄기 연기가 야천(夜天)을 가르며 무릉산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악양제일루를 떠나 무릉산 중턱을 향해 가는 주운빈이었다. 그의 신형은 마치 빛살과 같아 한 줄기 백광이 야천에다 선을 그은 듯했다. '음! 무릉산 중턱이 멀지 않았군.' 신판자 만소주의 아우들이 알아낸 지점은 무릉산 중턱의 조그만 폐찰이었다. "신판육노! 내 그대들의 충정을 결코 잊지 않겠소." 주운빈은 공력을 끌어올려 더욱 높이 비상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슈욱――! 갑자기 예리하고 가느다란 소성이 울리면서 주운빈을 향해 무언가가 날아 들었다. 암습이었다. 순식간에 주운빈은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지상을 급강하했다. "누구냐?" 냉엄한 일갈이 터졌다. 우르르릉――! 주운빈은 앞뒤 잴 것 없이 왼쪽 수림을 향하여 거대한 장력을 발출했다. 그러자 가공할 암경이 회오리쳤다. "주대협, 노부......." 갑자기 수림 속에서 한 인물이 다급하게 십여 장 옆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꽈꽈광――! 거대한 암경이 수림을 휩쓸자 삽시간에 방원 십여 장과 나무들이 뿌리채 뽑혀 하늘을 뒤덮었다. 주운빈은 몸을 피한 인영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니?" 주운빈은 암습을 한 상대를 발견하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무위검룡후께서 어인 일이시오?" 나타난 인물은 바로 만무궁 검관주 무위검룡후였다. "후......." 그는 주운빈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청수한 얼굴이 무척이나 수척해 보였다. 주운빈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오?" 재차 묻자 무위검룡후의 안색이 더없이 어두워지는 것이었다.


"할말이 많소이다. 주대협!" 주운빈은 침묵을 지켰다. 이런 순간에는 침묵을 지켜야 무위검룡후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장시간의 시각이 흘렀다. 어찌된 일인지 무위검룡후는 얼굴에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후......." 주운빈은 재촉하지 않고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할 뿐이었다. 이윽고 무위검룡후가 땀을 훔치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주대협께서는 만무공주 강옥기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만무공주 강옥기, 사형인 인의대유협 주석빈을 끝까지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그리고 단 한 번 보았던 아버지의 옛 정인이기도 했다. 불현듯 주운빈의 마음속에 자신을 만무궁에 붙잡아 두려했던 그녀의 안타까운 영상이 물밀듯 스며들었다. 주운빈은 무위검룡후의 표정에서 그녀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닥친 것을 예감했다. "그녀의 처지가 지금 매우 불행한 사태에 처한 모양이군요?" "그렇소이다." "자세히 말해주시오." 무위검룡후는 침묵을 지키면서 불타는 시선으로 주운빈을 직시하였다. 두 사람의 노인과 청년의 시선이 얽혔다. 뜨거운 시선이었다. 이윽고 무위검룡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만무공주께서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치욕을 당하고 있소이다." 주운빈은 흠칫 몸을 떨었다. 무위검룡후의 목소리는 감당할 수 없는 분노로 인해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그 분은 지금 지하뇌궁에 갇힌 채 매일같이 수많은 놈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있소이다." 주운빈은 묵묵히 무위검룡후의 얘기를 들었다. 그런 그의 눈은 이글거리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만무궁주 고금제일존 구융천 그 개같은 놈은 주대협이 떠나고 난 후 공주에게 춘약을 먹였소이다. 그리고 잡놈 하나를 데려다가 그녀를 강간시켰지요. 그 후 그 분을 뇌...... 굴에 가두고는 매일 춘약을 복용......." "그만!" 주운빈은 날카롭게 무위검룡후의 말을 끊었다. 일순 무위검룡후는 주운빈의 눈빛을 보고 안색이 백납같이 질려버렸다. 그것은 주운빈의 동공 그 깊이 무저갱같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살기 때문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아 흘러나왔다. "구융천이 그런 짓을 한 이유를 알고 있소?" 젊은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무서운 음성이었다. 무위검룡후는 공포심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그 놈은 누구인가에게 목숨을 금제 당하고 있는 처지인 것 같습니다." 주운빈이 속으로 부르짖었다. '황주(皇主)!' 무위검룡후는 그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소인 놈도 천하를 석권하고픈 야심이 있는지라 그 나름대로 획책을 꾸미게 되었지요. 때를 기다리던 중 대협이 다녀간 뒤가 바로 호기였소이다." "음......." "그는 공주에게서 만무령주라는 신물을 갈취하였지요. 그리고는 그런 금수와 같은 짓을." 무위검룡후는 무섭게 이를 갈아부쳤다. "만무령주는 무엇이오?" "그것은 만무궁의 전대 장로들과 그들의 제자들을 부릴 수 있는 또 다른 만무궁의 신물입니다."


"음......." 주운빈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음...... 잘하면 어부지리는 노릴 수 있겠군.' 그렇다. 고금제일존 구융천은 나름대로 천하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그는 필시 황주와 대항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운빈은 그들이 싸움을 벌이다가 서로의 힘이 약해진 후에 그들을 치면 힘들이지 않고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알았소. 나는 우선 할 일이 있소. 그 일이 끝나면 필히 구융천 그 놈을 이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수단으로 처단하겠소." 주운빈은 살기 서린 음성으로 무섭게 말했다. 무위검룡후는 잠시 안색이 밝아지는 듯했다. "고맙소이다. 대협." "무위검룡후께서는 만무궁에 돌아가 안에서 대응해주기 바라오. 만무궁을 쓸어버리기 전에 먼저 사람을 보내겠소이다." "알았습니다. 대협!" 휙! 그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주운빈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강옥기? 그 분은 나의 사고모(師姑母)가 아닌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운빈은 다시 신형을 돌려 산중턱을 향해 몸을 솟구쳤다. 잠시 후 그는 중턱에 만들어져 있는 황량한 폐찰이 보이는 어느 노송나뭇가지 위에 내려섰다. 그런데 그의 좌우로 만소주, 무언무정수, 만해도가 서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주운빈에 앞서 폐찰을 살피기 위해 먼저 와 있었던 것이다. 만소주가 입을 열었다. "이화선자 엄소군이 그런 짓을 한 이유가 주공에게 있었습니까?" 주운빈은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했다. "그렇소. 나를 끌어 들이기 위하여 그런 짓을 했소." "주공을 노린 것은 목숨이었소이까?" 무언무정수가 질문을 하였다. "아니오. 황제의 적자가 나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소." "아......." 그들은 깜짝 놀랐다. 만소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영웅의 기개를 지닌 인물이었소." "그렇다면 그는 시기를 잘못 탄 인물입니다." "후후...... 만노! 저 폐찰의 동향은 어떻소?" "은밀히 살펴본 바, 폐찰 밑의 무릉산 속으로 엄청나게 큰 지하대전(地下大殿)이 만들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음......." 주운빈은 잠시 침음했다. "사흘 동안 폐찰을 왕래한 인물은 없었소?" "이상하게도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외에는?" "거대한 지하대전이 있을 거라는 추측 뿐, 주공의 명령이 없어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주운빈은 서너 번 고개를 끄덕였다. "됐소. 들어 갑시다. 어쩌면 놈들은 모든 준비를 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요." 주운빈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몸을 날렸다. 휙!


위익! 뒤를 이어 세 사람이 몸을 날려 뒤따랐다. 폐찰은 지금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매우 낡고 황량했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단 한 번도 손질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이 폐찰로 들어서는 순간 어둠 속에서 싸늘한 호통소리가 터져나왔다. "누구냐?" 그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무언무정수의 손가락이 재빠르게 퉁겨졌다. 슈욱! 가느다란 금선(金線)이 발출되고, 동시에 답답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으윽!" 주운빈이 감탄한 듯 칭찬을 했다. "훌륭한 인혼금황지(引魂金黃指)이오." "하하...... 과찬이십니다." 무언무정수는 겸연쩍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 주운빈은 빠르게 폐찰 안을 훑어보았다. 전면에 도조(道祖)를 모신 위패(位牌)가 있고 낡은 제단이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을 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특징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만노, 기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소?" "예 주공!" 만소주는 폐찰 안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주운빈 자신이 기관지학에 문외한이라서 자신에게 일을 맡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잠시 동안, 세세히 주위를 살피던 만소주는 제단의 한 귀퉁이를 눌렀다. 끼이익! 괴이한 음향이 돌출되면서 제단이 빙글 돌기 시작했다. 한바퀴 돌자 그 밑으로 수십 개의 계단이 나타났다. "빨리 내려 갑시다." 네 사람은 소리없이 몸을 날려 그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 밑에는 두꺼운 철문이 가로 막혀 있었다. 그리고 그 철문 위에는 두꺼운 금빛 현판이 걸려 있었고, 그 현판 위에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천제회부(天帝會府)> 네 사람은 동시에 마음 속으로 어떤 기이한 떨림을 느꼈다. "음......." "천제회부?" 그들은 동시에 신음을 터뜨렸다. 주운빈이 검미를 꿈틀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당신들 중 천제회란 명칭을 들어본 적이 있소?" "없습니다." 이곳의 모든 사람들은 그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천제회란 정체가 무엇인가.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주운빈의 수하들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천제회란 명칭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그렇다면 더욱 그 존재가 의심스러운 한편 두려움도 생기게 마련이었다. 주운빈은 담담한 신색으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부딪쳐 보면 모두 알게 될 것이오. 만노, 어서 기관을 찾으시오." "예 주공!" 만소주는 이내 철문을 열 수 있는 기관장치를 찾아내었다. 문을 여는 장치는 바로 천제회부라고 새겨진 글씨의 부(府)의 점(點) 호기에 있었다. 팍! 만소주의 지풍이 점 획을 때렸다. 그러자 우렁찬 굉음이 들리면서 철문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드르르릉――! 그런데 철문이 갈라지고 그 안으로 시커먼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둥굴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들어 갑시다!" 제 22 장 신비한 천제회 ① 네 사람은 빨려들 듯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동굴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주운빈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이 동굴 안에는 백여덟 군데에 기관이 장치되어 있다. 한 발자국 지날 때마다 무서운 장치가 되어 있군.' 이 점은 만소주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물론 무언무정수와 만해도 섬칫한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주운빈이 만소주를 바라보았다. "만노, 무림에 이만한 지하동굴과 절묘한 기관장치를 할 만한 인물이 누가 있소?" 만소주는 침중한 기색으로 대답을 했다. 그는 이곳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부터 한 명의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한 명! 과거 이백 년 전 공공운 사조외에 천장귀영신투(天匠鬼影神偸)만이 이런 기관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음......." 그의 말에 세 사람은 신음만 터뜨릴 뿐이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천장귀영신투! 그는 이백 년 전의 인물이었다. 천하제일의 신투이자 무엇이든지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는 기인이었다. 그는 무공에서는 조금 떨어지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투심술(偸心術)과 경공, 그리고 토목 건축에서는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동굴의 한모퉁이를 돌아가게 되었다. 거기에는 다시 다섯 개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주운빈은 일견 동굴의 배치가 반합역오행진(反合易五行陣)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흐음...... 흉악한 기관장치에다 가공할 진식의 배합이라. 그 위인은 훔쳤던 물건을 꽤나 깊은 곳에 감춘 모양이군.' 다섯 개의 동굴은 더욱 깜깜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문제시 될 것은 없었다. 각자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또렷이 볼 수 있는 안력은 아주 사소한 능력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소주가 조용히 말했다. "주공, 제가 앞장 서겠소이다. 그리고 두 분은 주공의 뒤를 잘따라 오시오. 이곳은 수십 개의 조그만 굴이 진을 이루고 있어 자칫하면 길을 잃고 목숨을 잃기 십상이외다." "알았소." 무언무정수는 약간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만해는 아무말 없이 미묘한 웃음을 띨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들은 칠흑보다 더욱 검은 어두운 동굴 속을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갔다. 어두운 굴 속을 수없이 꼬불꼬불 돌아갔다. 또한 종잡을 수 없이 좌우로도 돌며 앞으로 나아갔다.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석벽 틈으로 흘러 들어오는 빛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앞장 서서 가던 만소주가 짧게 부르짖었다. "절명산공독(絶命散功毒)!" "뭣이?" 무언무정수가 소스라치게 놀라 부르짖었다. 동시에 공력을 운용해보던 그는 등골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공력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만해 역시도 마찬가지여서 이마에 구슬같은


땀방울이 맺혔다. 주운빈이 다급하게 물었다. "만노. 절명산공독이라니? 무슨 말이오?" 만소주는 이미 담담한 신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후후...... 주공, 이 동굴 안에는 절명산공독이 살포되어 있었습니다." 주운빈도 절명산공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절명산공독! 일반 산공독에 중독되면 다만 공력이 흩어질 뿐이지만, 절명산공독에 중독되면 공력이 흩어지면서 공력이 탈진되며 전신이 한 줌의 흑수(黑水)로 변해 버리는 극악(極惡)한 독이었다. 또한 무색무미무취하여 자신도 모르게 중독되는 독중지왕이라 할 수 있다. 주운빈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그의 몸이 이미 만독수화도검불침(萬毒水火刀劍不侵)의 신체였기 때문에 독의 침입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운빈이 낮게 물었다. "판노, 해독할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만소주는 품 속에서 자색 옥병을 꺼내더니 세 알의 단약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드시오. 무형지독(無形之毒)을 해독할 수 있는 해약이오." 무언무정수와 만해는 해약을 받아 들면서 식은땀을 훔쳐내고 있었다. "고맙소." "실로 당신은 없는 것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구료." "과찬이오. 하하......." 네 사람은 주저없이 해약을 삼켰다. 잠시 후 그들은 독이 해독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 십 년은 감수한 기분이었다. 주운빈이 앞으로 나섰다. "계속 갑시다." 그런데 만소주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를 불러세웠다. "주공, 아무래도 이상하외다." "무엇이 말이오?" "우리가 동굴에 들어선 것을 이들이 모를 리 없건만 어찌 아무런 제지가 없었는지 모르겠군요." "후후...... 그들은 아마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어쩌면 이곳을 벗어나기가 무척 힘들 것 같소." "어차피 알게 될 것을 굳이 신경 쓸 것 없소." 주운빈은 앞으로 걸어나갔다. 만소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주운빈의 뒤를 따랐다. '정말 대단한 분이군.' ② 동굴을 벗어나자 동굴 밖은 온통 울창한 숲이었다. 사방으로 암벽이 높이 솟아 있어 커다란 협곡을 이루고 있었다. "으음......." 그들은 이런 갑작스런 풍경의 변화에 은은히 놀란 기색들이었다. 이곳이 도대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만소주가 안색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실로 대단하군!" 그는 문득 내심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음! 그들이 퇴로를 차단하고 우리를 가두려 하면 영락없이 새장 속의 새 꼴이 되겠군." 주운빈이 중얼거렸다. 만소주가 큰 숨을 몰아쉬면서 그의 말에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주운빈의 안색이 급변하며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아니?" 만소주도 때를 같이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니, 이들이 어디로 갔지?" 그들의 얼굴은 참담하게 변해 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던 무언무정수와 만해 두 사람이 감쪽같이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휙! 갑자기 만소주의 신형이 폭사하듯 다시 동굴 속으로 뛰어 들었다. "멈추시오. 만노!" 주운빈이 그를 말렸다. 그러자 만소주는 날아가던 신형을 멈추고 퉁겨지며 쏘아가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왜 그러십니까?" "찾아봐야 소용 없을 것이오." 만소주는 의아한 눈길로 주운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만소주도 잠시 후 그들이 사라진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할 말을 잊어 버렸다. 주운빈이 냉랭히 말했다. "일부러 없어진 것 같소." "그들은 첩자였을까요?" "글쎄, 둘다 첩자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만 그럴 수도, 그것도 아니면 둘다 아닐 것이오. 지금으로썬 속단할 수는 없는 일이오." 어느 틈엔지 주운빈의 안색은 차디차게 굳어져 버렸다. 두 사람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번쩍! 갑자기 알 수 없는 불빛이 빛나기 시작하면서 지세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아니?" "음......."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앞으로 뚫린 협로를 따라 백여 개의 횃불이 일시에 밝혀진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우렁찬 대소가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으하하하하...... 중원무랑군 주운빈 대협이 본 천제회부에 수하 공공문주 신판자 만소주를 대동하고 왕림한 것을 환영하는 바이오. 으하하하핫!"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들이 마음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전신에 황의(黃衣)를 입은 한 청수한 중년선비가 나타났다. 중년선비는 협로 끝에 신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오시오. 주대협!" 이미 주운빈과 만소주는 평온한 기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차피 모든 것이 예상 못한 신비한 일인지라 더 이상 놀랄 필요가 없었다. 다만 갑자기 실종된 무언무정수와 만해의 행방이 꺼림직할 뿐이었다. '제발 그들이 첩자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기를.......' 주운빈의 진정한 바램이었다. '만약 그들이 첩자였다면 나의 기반은 이미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 그들 두 사람은 주운빈에 대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손금 들여다 보듯 알고 있는 것이었다. "만노! 갑시다." 두 사람은 여유로운 자세로 협로를 걸어 들어갔다. 중년선비를 바라보는 주운빈은 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엄청난 내가고수(內家高手)다.'


중년선비는 신광이 담긴 눈으로 예리하게 두 사람을 훑어보고 있었다. "신수패황검(神手覇皇劍) 유세옥(柳世玉)이라 하오." 일순 만소주의 노안에 경악의 기색이 빠르게 스쳐갔다. "그대가 삼십 년 전 무당제일검객(武當第一劍客)이던 신수패황검이란 말이오?" 중년선비는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을 했다. "그렇소이다. 만노대협!" 만소주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천하의 공공문주 신판자 만소주가 이처럼 경악하는 것인가. 신수패황검 유세옥! 나이 십칠 세에 무당 최고 상승검법인 영허태극혜검(靈虛太極慧劍)을 십이 성까지 연성한 천고기재(千古奇才)였다. 또한 천하 각파의 무공을 두루 섭렵하며 무공의 장단점을 밝혀내어 나이 이십에 이르러 무림을 진동시켰던 것이다. 인의대유협 주석빈, 마혼살유협 엄유랑과 더불어 무림삼대 기재 중의 하나였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두 사람의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 뒤 그도 무림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그리고 무림인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 또한 영웅탑을 밟았으나 무림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만소주의 경악은 당연했다. "으음......." 그는 잠시동안 놀란 마음을 전혀 진정치 못했다. 지금쯤은 어느 누구도 감당 못할 대고수가 되어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도 마혼살유협 엄유랑의 한마디 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나를 능가할 만한 친구가 있으니 그가 바로 신수패황검 유세옥이오." 주운빈은 만소주의 설명을 듣고 새로운 시각으로 유세옥을 보게 되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세옥을 응시하였다. "반갑소이다. 유대협!" 신수패황검 유세옥은 옆으로 비켜섰다. "자, 안으로 들어갑시다. 주대협을 기다리시는 분이 있소." "나를 기다린다?" 주운빈은 짧게 반문하면서 유세옥의 뒤를 따랐다. 이곳은 들어온 이래 여지껏 온통 경악할 일뿐이었다. 그가 들어선 곳은 하나의 커다란 대전이었다. 확실히 이곳은 매우 신비스러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비록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천제회! 대전에 걸려있는 호화로운 현판에 천제회란 글씨가 용사비등한 글씨체로 웅장하게 새겨져 있었다. 주운빈이 들어선 곳은 매우 화려한 대청이었다. 대청 안에는 은은한 분홍빛 광선이 감돌고 있었다. 약간 어두웠으나 사람의 마음을 홀리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전면 끝에는 검은 휘장이 쳐져 있었다. 대청 가운데에는 커다란 원탁과 의자 세 개가 놓여져 있었다. "자, 자리에 앉읍시다." "고맙소." 주운빈은 상좌에 좌석을 하고 만소주는 그 옆에 앉았다. 유세옥이 자리에 앉으며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대협! 오늘밤이 일생 중 가장 신비로운 날이 될 것이오." "그렇소.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오. 이곳에 들어서고부터는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 뿐이었소."


"하하하...... 그럴 것입니다. 이곳은 강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이니까. 이곳은 이백 년 전 무림 대기인(大奇人) 천장귀영신투가 설립한 곳이지요." "이미 알고 있소이다." "하하...... 내 그럴 줄 알았소이다. 역시 주대협답구료." 잠시 그들 사이에 말이 끊겼다. 그러나 주운빈은 암암리에 공력을 운집시켜 전신의 청각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음! 이곳은 실로 용담호혈이구나. 지금은 유세옥이란 자만 보일 뿐이지만 이곳에는 가공할 고수들이 모여 있다.' 주운빈의 귀에는 거의 백 명에 다다르는 고수들의 숨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놀라운 것이 그들 백 명의 숨결이 모두 일정한 것이 그들 모두가 초절한 고수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신수패황검 유세옥이 기이한 눈빛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천제회의 인물은 모두 백 명이오. 우리 백 명은 지난 삼십 년 동안 오직 무공만을 익히며 지내왔소이다." 그러나 유세옥의 눈은 말과는 달리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음침하게 변해 있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 천제회의 결성을 주동하신 분이 바로 내 아버님이시란 말이오?" "그렇소." 주운빈은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서히 몸을 유세옥을 향하여 돌렸다. "천제회의 활동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 첫번째가 황궁보고를 훔친 것으로 시작되었겠구료?" 유세옥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소." "음......." "주대협, 이걸 보지 않으시겠소?" "무엇을?" 유세옥은 말을 하며 몸을 일으켜 뒤쪽에 쳐져 있던 휘장을 거두었다. 그러자 주운빈과 만소주의 눈이 갑자기 커지는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가득했다. "아니, 이럴 수가?" "하하......." 그들의 놀람을 보면서 유세옥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음......." 주운빈은 깊은 신음성을 발했다. 도대체 휘장 뒤에 무엇이 있기에 주운빈과 만소주가 그토록 놀란 것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의 위패였다. <천제회주 인의대유협 주석빈 신위(天帝會主 仁義大儒俠 朱錫浜 神爲)!> 그 아래로 은은한 분향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주운빈은 전신에 넘쳐흐르는 격동의 물결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참을, 아주 오랜 동안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앞에 서 있었다. 정녕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괴사의 연속이었다. 무림의 위대한 영웅이기에 앞서 자신의 아버지인 주석빈의 신위, 그것을 뜻밖에도 이곳에서 발견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랐다. 주운빈은 감격하기에 앞서 마음의 혼란이 극심했다. 이윽고 그는 신위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의 자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 단 한 번도 얼굴을 대해본 적이 없는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것을 단 한 번도 슬퍼하지 않았던 주운빈이었다.


주운빈은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유대협! 내 아버지의 위패를 여기에 모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유세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석빈 대협은 바로 천제회의 회주이셨소." 주운빈은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이곳 천제회는 삼십 년 전 그 분이 비밀리에 만든 곳이오." 이때 만소주는 무엇인가 깨닫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삼십 년 전 마혼살유협 엄대협이 나를 청한 것은 천제회를 결성하기 위해서였단 말이오?" 유세옥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만선배! 마혼살유협 엄대협이 바로 천제회의 부회주요." "음......." 주운빈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무언가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 자신들은 황궁보고를 턴 인물들과 신판육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러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상상도 못한 천제회란 무림의 비밀문파에 대해 알게 된 것이었다. 주운빈은 혼란한 머리를 정리시켰다. 모든 것을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천제회란 무슨 목적으로 결성된 것이오?" 유세옥이 짧게 대답했다. "중원복토(中原復土) 한족부흥(漢族復興)!" 두 사람은 유세옥의 엄청난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중원을 되찾고 한민족의 나라를 세운다. 천제회의 결성목적인 것이다. 주운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지난 삼십 년 동안 어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소?" "우리는 그동안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오." "삼십 년이 넘도록?" "주대협! 알고 싶은 것이 무척 많을 것이오. 그러나 본론을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주대협에게 보여드릴 것이 있소." 딱! 딱! 유세옥은 주운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전면의 검은 휘장이 양 옆으로 갈라지는 것이었다. "자, 저곳을 보시오."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주운빈은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니?" 그것은 만소주도 마찬가지였다. 대답을 하던 유세옥은 별안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운빈에게서 쏟아지는 안광! 그것은 안광이 아니라 바로 세월의 위엄같은 것이었다. "천제회는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천하의 정세는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알고 있겠지?" "그렇소." 주운빈이 냉엄하게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이곳에 왔소." "짐작하고 있었소이다."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 믿소. 중원의 정사양도를 몰살시키기 위하여 만든 황궁보고의 함정을 천제회가 간파하고 실물을 훔친 것은 당신들이 함정을 만든 인물과 한 통속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소. 내 말이 틀렸소?" 유세옥은 신비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주대협은 역시 안목이 매우 깊구료." "천제회가 존속하는 이유가 지금도 중원복토와 한족부흥이오?" 유세옥은 주운빈의 신광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도 천하를 오시할 수 있는 고수였다. "아니오. 이제는 바뀌었소." 그는 아무런 부인없이 진실한 대답을 하였다. 그는 부인하지 않았으며 결코 부인하려는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유대협이 내 앞에서 아무것도 감추려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오?" "후후후...... 그만큼 자신있다는 뜻이오. 주대협은 황주란 분을 아실 것이오." "으음...... 황주?" 주운빈은 침음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주! 그가 이 천제회를 관장하는 사람이오?" "그렇소이다." 며칠전 무귀전 살봉영주로부터 들었던 황주! 그 황주란 이름이 신수패황검 유세옥의 입에서도 흘러 나온 것이었다. "천제회가 바로 무귀전이 아니오?" "아니오." 유세옥은 처음으로 부인했다. "이곳은 처음에도 천제회이고 앞으로도 천제회일 것이오." 주운빈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천제회에는 삼십 년 전 무림이 배출했던 절세기재 백 명이 모인 곳이라고 이미 말하지 않았소. 천제회는 살수 집단이 아니오. 내가 호언할 수 있는 것은 전 무림이 힘을 합하여도 천제회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오." "음......."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 유세옥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연히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지금 천제회주가 바로 황주이오." 황주! 그의 존재는 신비집단 천제회에도 있었다. 문득 주운빈은 만전장에서 자신이 한 말이 생각났다. 그는 얼마 전 다음과 같은 말을 했었다. '우리가 장악할 세력은 황궁보고를 턴 인물들과 사파무림이오.' 그런데 이미 엄청난 음모가 무림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서서히 한족부흥을 위하여 태동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누군가가 함정을 판 것이었다. 원황실(元皇室)의 몰락을 꾀하기 위하여 전 재산을 드러냈다. 이 음모에 전 중원이 걸려든 것이었다. 주운빈은 무섭게 유세옥을 바라보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소?" "그렇소. 황주는 주대협이 이리 오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소." "이유는?" "그것은 주대협을 본 천제회주로 모시기 위함이요." 주운빈이 갑자기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그리고 그 웃음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유대협! 당신 말이 우습구료. 그럼 지금 회주인 황주는 어떻게 되는 것이오?" "그 분은 본 회의 태상회주(太上會主)가 되는 것이오." "닥치시오!" 주운빈은 벼락같은 일갈을 내질렀다. 그러나 지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유세옥이었다.


그는 음침한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지금 중원은 혈해로 뒤덮혀 있을 것이오. 주대협이 설 자리는 이제 없소." 순간 주운빈과 만소주는 경악했다. 유세옥의 말이 너무나 실감나기 때문이었다. "그 말뜻은?" "흐흐흐...... 지금 중원 구파일방을 비롯하여 백 개의 문파가 일제히 정복당하고 있소이다." "뭣이......." "이럴 수가......." 두 사람은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그렇다. 주운빈이 이곳 천제회부를 들어서는 순간 무림은 일제히 정체모를 인물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폭풍! 피의 폭풍이 처참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전 무림에 폭풍의 혈운(血雲)이 뒤덮고 혈풍(血風)이 중원 십팔만 리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구파일방(九派一 )! 대륙 전역에 산재한 백여 개의 대소문파! 지금 중원 전역이 박살나고 있었다. 순무제가 중원무림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이유는 간단했다. 정사무림이 힘을 합하여 황궁의 궁중보고를 털은 것이 이유였다. 그것은 명실공히 황궁에 대한 반역 행위였다. 그러나 어찌하랴! 중원대륙의 회복은 한족의 염원이요. 중원무림의 혼(魂)인 것을, 구파일방과 녹림 칠십이채와 천마방(天魔 ), 이 정사양림 세력은 중원대륙의 회복이라는 명제하에 하나로 뭉쳤다가 어이없이 피로 물들게 되었던 것이다. 과연 전 중원대륙을 피로 물들이는 가공할 세력과 이 모든 음모를 뒤에서 조종한 인물은 누구인가. 중원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전 중원이 일시에 공격을 받고 있었다. 중원의 뿌리인 구파일방과 더불어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무림 대소문파, 무림세가들이 일제히 짓밟히고 있었다. 중원무림은 손 한 번 쓸 사이도 없이 이유도 모른 채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③ 주운빈은 후회가 급습했다. 어찌 신판육노의 말과 적황자의 말을 가볍게 흘려 들었을까. 아니 그것을 주의 깊게 들었어도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주운빈과 만소주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본 유세옥은 야릇한 조소를 입가에 걸었다. "지금 전 중원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이오. 중원 구파일방을 비롯하여 모든 문파가 공격을 받아 시체로 산을 쌓고 피로 강을 이루고 있소이다." "음......." "황주는 실로 엄청난 세력을 지닌 인물이오. 천제회와 무귀전은 물론 새외변방 십삼세력을 모두 장악했소이다. 중원무림의 혼이었던 만무궁마저도 그 분의 손아귀에 들어 있소. 이제 중원무림은 만무궁을 위시하여 전부가 황주의 명령을 받아야 할 것이오." 아무도 상상 못한 예상 밖의 변수였다. 정사양도 고수들은 가짜 황실보고를 턴 것이었고, 그것은 원황실에 서서히 고개를 치미는 중원을 짓밟을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또한 황실은 전 중원을 피로 물들일 수 있는 세력을 이미 만들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삼십 년, 이 삼십 년 동안 엄청난 음모를 꾸민 인물이 바로 황주였던 것이다. 새외변방의 패주(覇主). 이들 모두가 황주의 명을 들어 각기 그들의 세력을 이끌고 중원을 휩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앞서 천제회는 다른 곳에 숨겨놓은 진짜 황궁보고를 훔친 것이었다. 주운빈은 서서히 평정을 되찾았다. "유대협, 황주는 분명 황궁의 인물이겠구료?" 의외로 유세옥은 좌우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모르오." 음침한 눈빛이었으나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주운빈은 이제는 완전히 담담한 마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만 어떠한 불가능한 사태에서도 분명 헤어날 길이 있는 것이다. "천제회가 달리 황궁보고를 훔쳐낸 것은 천제회대로 야심이 있었던 까닭이구료. 황주는 황제가 되길 바라는 것이오?" 역시 앞에 앉은 이 젊은 고수는 달리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라 머리 또한 뛰어났다. 유세옥은 움찔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황주께서는 분명 원황실의 다음 황제가 되길 원하고 계시오." 주운빈이 낮은 음소를 터뜨렸다. "어차피 황주는 어부지리를 취하겠지요? 그는 새외변방의 패주들로 하여금 중원을 휩쓴 뒤 분명 만무궁과 충돌할 것이오. 만무궁주 구융천도 가소롭게 천하를 넘보고 있으니까 말이오." "맞소." 유세옥은 대답을 하면서도 마음속이 무섭게 떨려왔다. '결코 그 무엇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는 인재군. 역시 황주의 말이 맞는구나.' 그 다음 이어지는 주운빈의 말은 더욱 그를 놀라게 했다. "새외변방의 세력과 만무궁이 격돌하면 분명 양패구상할 것이고, 그 때를 빌어 황주는 천제회와 무귀전의 고수들을 풀어 원황실과 중원을 다시 장악하려는 속셈일 것이오. 안 그렇소?" "주대협의 말은 조금치도 틀림이 없소." "가소롭게도 나를 천제회주의 자리에 앉혀 자신의 음모를 취한 주구로 삼으려 하다니." 주운빈은 비릿한 눈길로 유세옥을 직시하였다. 서서히, 유세옥은 머리카락이 쭈빗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는 듯 허소(虛笑)를 터뜨렸다. "허허...... 주대협이 만약 천제회주의 지위를 응낙한다면 그 즉시 일신의 영화는 물론 모든 영광이 만대(萬代)에 이를 것이오. 그 분은 주대협에게 영의정의 자리를 약속했소이다." 그는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인가. 주운빈같은 인물이 명예와 부귀영화를 탐했다면 어찌 지금같은 모습일 수 있겠는가. 아마도 주운빈이 마음먹었다면 지금쯤 황실을 장악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것을 탐한다고 해도 최고만을 추구하는 그였다. "황주의 진실한 정체는 무엇이오?" 주운빈의 물음에 유세옥은 갑자기 허리를 숙였다. "죄송하오. 주대협, 아직 자신의 정체를 밝히라는 황주의 명령이 없었소이다." 주운빈은 나직이 탄식했다. "아...... 유대협의 말을 들으니 당신이 황주란 인물을 얼마만큼 존경하고 부러워하는지 알 수 있겠구료." "내 일생 존경한 인물은 두 분뿐이오. 한 분은 인의대협, 그리고 마혼살유협 엄대협이오. 그러나 황주는......." 순간 주운빈이 그의 말을 끊으며 폭갈을 터뜨렸다. "유세옥, 너의 그 더러운 입에 내 아버님의 존함을 담지 마라!" 아무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광채가 주운빈의 눈에서 쏟아져 나왔다. 유세옥의 눈자위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대단한 모욕감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가 무엇이라고 말을 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 주운빈의 호통이 다시 터졌다. "유세옥, 너는 본 공자가 누구의 밑에서 일할 인물로밖에 보이지 않는가?" "닥쳐라! 애송아! 여지껏 본좌가 너같은 애송이를 대우해준 것은 모두 황주의 명령 때문이다. 너는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후후후......." 주운빈은 냉혹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냉소에는 가공할 살기가 담겨 있었다. 이때 여지껏 옆에서


가만히 서 있던 만소주가 나섰다. "유세옥, 과거 마혼살유협께서 너를 고금제일기재라 말한 적이 있었다. 과연 그런지 신판자 만소주가 한번 시험해 보아야겠다." 유세옥은 크게 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만선배, 과거 영웅탑을 밟고 전혀 그 이름을 무림에 밝히지 않는 두 고수가 있었소. 하나는 바로 본좌고 다른 사람은 바로 만선배라고 알고 있소." 만소주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무림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신수패황검과 본 만소주의 진정한 진재실학을 알지 못하지. 자 오너라. 내 아우들의 원혼을 풀어주어야겠다." 말을 마치자마자 만소주의 손이 번뜩이며 순간 만소주는 쌍장을 쫙 내뻗었다. 슈웅――! 새파란 청광(靑光)이 격탕되어 흘러나왔다. 대청 안은 온통 새파란 귀기가 서린 듯 푸르스름한 것이 싸늘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유세옥도 거의 동시에 쌍장을 내뻗었다. 퍼엉! 그들의 장력이 충돌하자 대청 안이 온통 진동하며 광풍이 휘몰아쳤다. "헛!" "헛!" 두 사람은 동시에 짤막한 단음을 토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갑자기 유세옥이 대청 밖으로 퉁겨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전혀 예측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주운빈은 분명 저지할 수 있었을 터인데도 저지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크르르릉―! 예감했던 대로 그가 싸우는 척하며 도망친 것은 바로 이런 계략이 숨어있었던 까닭이었다. 우렁찬 굉음이 들리면서 대청의 모든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툭! 대청 위에서 하나의 물체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제 23 장 음모는 밝혀지다! ① 그것은 바로 신비한 실종을 했던 무언무정수의 수급이었다. 주운빈과 만소주는 동시에 눈을 화등잔만하게 부릅뜨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음......." "이럴 수가?" 두 눈을 부릅뜬 것이 보기에도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나오는 것이다. 첩자는 바로 만해였다는 것이고. 또한 주운빈이 그렇게 바라던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의 수하중 한 명이 첩자였다는 사실은 무언무정수의 죽음 만큼이나 가슴아픈 일이었다. "무언무정수! 으......." "무언......." 주운빈은 꿇어오르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것은 신판자 만소주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사방에서 싸늘한 음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주운빈, 때는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천제회주의 자리를 응낙하라!" 음성의 주인은 다름아닌 만해였다. "만해! 이 놈......." 만소주는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순간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운빈을 향해 무서운 살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주공, 어찌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까? 주공이라면 조금 전 능히 유가놈을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주운빈은 굵은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노, 진정하시오." "진정? 주공, 지금 진정이 됩니까?" 그는 이미 흥분해 있었다.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무언무정수의 죽음이었고, 만해의 배신이었다. 평소의 그같았다면 주운빈이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 그리 했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흥분해 있었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만해의 음침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흐흐흐...... 집안 싸움이라? 볼만 하구나." "닥치거라!" 만소주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음성이 들리는 한쪽 벽을 향해 쌍장을 발출시켰다. 쾅! 꽈르르릉! 고막이 터져나가는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그러나 장력이 부딪친 벽은 거의 손상이 없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운빈과 만소주의 장력에 부서질 만한 벽을 만들 리 없었다. "흐흐흐...... 이곳은 모두 한 자 두께의 철벽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니 아무런 소용이 없지. 괜히 힘빼지 말고 얌전히 있거라." 만소주는 미칠 것만 같았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주먹을 쥐고 벽을 미친 듯이 후려쳤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실성을 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주운빈이 그의 손을 잡았다. "만노, 진정하시오. 지금 저들은 결코 우리와 싸우려 들지 않을 것이오. 놈들이 나를 죽이려면 그들도 몰살을 당하게 됨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어차피 유가놈을 죽여보았자 우리에게 이득될 것은 없소."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선 이곳을 빠져 나갑시다. 그것이 최우선이오." 만소주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크으...... 아우들아." 주운빈이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군자의 복수는 삼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했소." "주공! 으흑......." "후후...... 만노, 내가 누구요? 바로 천하를 두 발로 딛고 서려는 주운빈이 아니오? 주운빈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소. 다 나에게도 생각이 있소. 우선 이곳을 빠져 나갑시다." "주공......." 그는 못난 자신을 원망했다. 주공의 깊은 뜻을 모르고 혼자서 설쳐대기만 했던 것이 너무나 한심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야 주공의 실체를 느꼈던 것은 그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양손을 굳게 잡았다. "흐흐흐...... 하는 꼴들이 매우 보기 좋구나. 허나 주운빈, 이곳을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라." 또 다시 들리는 만해의 음성이었다. 아마도 이들은 만해로 하여금 만소주와 주운빈을 자극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주운빈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차분히 청각을 곤두세웠다. 그의 바램은 깨졌고, 그렇다면 거기에는 응당 보복이 있어야 했다. "만해, 한 가지만 묻겠다. 너의 정체는 무엇인가?" "흐흐흐...... 본좌는 천제회 제이 부회주이다." "음......."


"주운빈, 어린 놈아. 어차피 너를 죽이려 이곳으로 불러들인 이상 이곳을 빠져 나가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라." "후후후...... 걱정하지 마라.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더라도 꼭 너하고는 함께 지옥으로 동행하겠다." "이 놈아. 이곳에는 수십만 근의 화약이 묻혀 있다. 흐흐흐...... 일각이 지나��� 전 무릉산 전체가 날아가버릴 것이다. 그럼......." 만해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사라져 버렸다. "이 악독한 놈!" 만소주는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일순 주운빈의 전신에 말할 수 없는 사기(邪氣)가 감돌기 시작했다. "만해......." 갑자기 견디기 힘든 음산한 목소리가 주운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옆에 있던 만소주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아닌가. 주운빈의 눈빛은 괴이하기 이를데 없는 광망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어 마치 지옥의 음화(陰火)와 같았다. "만해, 돌아와라!" 만소주는 극히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주운빈의 옆을 물러났다. '으...... 천강마라색혼심령대법(天 魔羅色魂心靈大法)! 우...... 말로만 듣던 심령대법이 전정 실존한단 말인가.' "돌아와라. 만해...... 돌아와라!" 음산한 목소리가 예리한 소성이 되어 울려퍼졌다. 휙! 극히 미세한 음향이 대청 밖에서 들려왔다. 그러자 주운빈이 다시금 음산한 목소리로 외쳤다. "만해! 돌아왔느냐?" "예......." 두려움에 물든 만해의 음성이 대청 밖에서 들려왔다. "나는 네 주인이다! 만해, 알겠느냐?" "예......." "너는 내말이면 무엇이라도 순종해야 한다. 알겠느냐? 천하의 그 누구보다도 내 말에 순종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만해가 가볍게 대답했다. 그는 이미 주운빈의 천강마라색혼심령대법에 제압된 것 같았다. 도대체 천강마라색혼심령대법이란 무엇이기에 만해같은 초절한 고수를 단 몇마디 말로 굴복시킨 것인가. 천강마라색혼심령대법! 이것은 천마군림록에 기록된 실로 상상을 불허하는 소름끼치는 사공(邪功)이었다. 이 사공은 인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다. 그야말로 인간의 이지(理智)를 빼앗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사공을 대성하면 십 리 밖에 있는 인물도 음성으로 제압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주운빈이 대청 문 밖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만해, 대청의 문을 열어라." "예! 주인님!" 끄르르릉! 닫혔던 철문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문 밖에 공포와 순종의 빛을 띤 만해가 부복하고 있었다. 만소주가 전신을 부르르 떨며 폭갈을 터뜨렸다. "이 개같은 놈!" 그는 쌍장을 번쩍 치켜 올렸다. 순간 주운빈이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만노, 참으시오."


"주공, 어찌 말리십니까? 이런 개같은 놈은 당장에 쳐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또다시 흥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운빈에게는 또다른 생각이 있었다. "후후후...... 어찌 그런 편안한 죽음을 저 놈에게 내릴 수 있겠소." "그럼?" "나는 내 친구들을 죽인 놈을 편히 죽게 할 수는 없소이다. 자 나에게 생각이 있으니 맡기시오." 이때 갑자기 그들이 나온 대청 중앙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꽝! 꽈르르르릉! 그들은 모두 고막이 터져나가는 듯한 엄청난 폭발음을 들었다. 대청뿐만이 아니라 천제회부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만소주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악독한 놈들! 우리를 죽이기 위해 이곳을 통째로 폭파시키려 들다니." 우르르르릉! 천정이, 석벽이, 바닥이, 이곳의 어느 곳 할 것 없이 쩍쩍 금이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폭발음과 굉음이 울리는 가운데 집채만한 바위와 돌무더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운빈은 다급했다. "만해, 앞장 서라!" "예! 주인!" 만해가 무너지는 돌들을 피하며 앞장서서 몸을 날렸다. 휘익! 그리고 동시에 만소주와 주운빈도 동굴쪽으로 신형을 쏘아갔다. 그들은 칠흑보다 더 어두운, 처음에 이곳으로 들어왔던 그 동굴로 다시 들어섰다. 그런데 만소주가 놀라 부르짖었다. "적염지독(赤閻之毒)!" 동굴 안에는 온통 시뻘건 운무가 깔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피를 뚝뚝 흘릴 것처럼 처절한 붉은빛 운무는 한눈에 보기에도 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음침했다. 주운빈의 안색이 변했다. '이것은 적염지독...... 이것은 남황(南荒)의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데 어째서 이곳 무릉산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만소주는 급히 숨을 멈추고 품 속에 손을 넣어 곧 한 알의 하얀 단약(丹藥)을 꺼냈다. 그는 단약을 양 손바닥 사이에 넣고 가볍게 비볐다. 그럴 즈음, 또다시 굉음이 울리며 동굴 입구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동굴 전체가 흔들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만소주는 안색이 대변하며 양손을 떨구어 내었다. 순간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붉은 불꽃이 허공에서 일어나며 확산되는 것이 아닌가. 화르르륵확! 순식간에 적염지독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만해, 저 불꽃 속으로 들어가라!" 만해는 이미 주운빈의 말은 아무것도 거역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만해가 정신없이 불꽃으로 뛰어든 순간, 그의 전신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크아악!" 마지막 비명소리, 이것이 그의 말로였다. 주운빈은 앞으로 몸을 날렸다. "갑시다. 이제 채 반각도 남지 않았소." 휘익! 두 사람은 빛살보다 빠른 속도로 앞으로 질주했다. 우르르릉 꽈르르꽝!


동굴 안은 계속해서 무너져 내렸고, 어느새인가 폭발은 바로 그들의 뒤를 쫓아 집어 살킬 듯이 입을 벌리고 그들의 뒤를 바싹 쫓았다. 머리끝까지 뻗치는 공포감을 억누르며 전신의 공력을 모두 끌어올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치달렸다. 가끔씩 폭발로 인해 동굴 천정에서 떨어져 내리는 낙석이 그들을 덮칠 때마다 놀라운 신법을 구사해 피해냈다. 얼마를 계속 달렸을까. 어느덧 앞쪽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심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진력을 끌어올려 동시에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② 산 전체가 폭발하면서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순간 그 튀어오르는 산더미를 뚫고 두 인영의 그림자가 번개보다 더욱 빠르게 빠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의 탈출이 못내 아깝다는 듯 폭발은 일시에 일어나며 그들의 뒤를 덮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폭발로 인해 튀어오른 산더미가 두 인영의 주위를 뚫지 못하고 그대로 퉁겨져 나가는 것이었다. 그 엄청난 폭발도 전혀 두 사람을 다치게 하지 못했다. 콰콰콰쾅! 폭발음은 연속적으로 터져나왔다. 무릉산 전체가 완전히 뒤집혀지는 것 같았다. 주운빈과 만소주는 이미 오백여 장 밖을 벗어나고 있었다. 수만 평에 달하던 지하동굴은 완전히 박살이 났다. 그 여세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무릉산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듯했다. "후유......." "후......." 주운빈과 만소주는 산아래에 도착해서는 급하게 숨을 몰아 쉬었다. 힐끗 바라본 무릉산의 모습은 그야말로 오싹할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게 하는 것이었다. 만소주가 참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주공! 조금만 늦었더라도 천추의 한을 남길 뻔 했습니다." "음......." 주운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이 무섭게 격탕될 뿐이었다. 만소주의 얼굴은 암담하기 이를데 없었다. 천하의 만소주요. 공공문주인 그도 전혀 짐작치 못했던 함정에 그저 아연하여 치를 떨 뿐 할 말을 잊어 버렸다. 형제들의 복수! 아직 그 원흉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주운빈과 만소주는 지하동굴에서의 일을 잊지 못했다. 천제회(天帝會)! 회주 인의대유협 주석빈, 이 위대한 인물의 신위는 주운빈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또한 지난 삼십 년 동안 오로지 중원의 회복을 위해 무공만을 닦아온 백 명의 절세기재들, 그들이 삼십 년 전에 비밀리에 결성한 천제회의 출현은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 크나큰 충격이었다. 공공문주인 만소주마저 짐작치 못해던 비밀이었다. 주운빈은 거의 평지가 되다시피한 무릉산을 바라보며 망연히 서 있었다. "천제회의 비밀은 실로 경악할 일이다. 천제회? 황제의 음모는 실로 고절하구나. 아...... 황주." 주운빈의 머리는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만소주도 참담한 표정으로 무릉산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지하 동굴에 있었던 인물들은 천제회의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주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닐 것이오." "황주는 왜 무공이 고강한 천제회의 인물들로 우리들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수십만 근의 폭약이 더 확실했을테니까." "천제회의 인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운빈의 깊은 동공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졌다. "모두 죽었거나 황주의 명령을 받을 것이오."


"그렇다면 차라리 모두 몰살당한 편이 중원을 위한 것이겠군요." 만소주의 말은 실로 무서운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기도 했다. 만소주는 주운빈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황주!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의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요?" 만소주는 두려운 눈으로 야천을 올려다 보았다. "아...... 천하에 두려움을 몰랐던 제가 진정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운빈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만노답지 않구료." 만소주는 쓰게 웃었다. "허허허...... 이제 이 만소주도 늙었나 봅니다. 그동안 두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어이없게 당했습니다." "황주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우리는 그를 모르지 않소. 그것은 당연한 것이오." "혹시?"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말을 하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만소주는 의아한 눈으로 주운빈을 응시했다. "혹시라니요?" 주운빈은 호흡을 크게 하더니 말문을 열었다. "혹시 만노는 은거할 당시 누구에게 거처를 알린 적이 있었소?" 만소주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을 어찌 물으십니까?" 그 순간 주운빈은 자신의 마음이 무섭게 격탕됨을 느꼈다. 왜그런 것일까. 주운빈은 무거운 음성으로 힙겹게 말했다. "누구요? 백의마령객 유노요?" "아닙니다. 천하의 의협(義俠) 마혼살유협 엄대협입니다." 주운빈은 숨이 콱 막혔다. 당연한 만소주의 대답에 숨이 막혔던 것은 아니었다. 전혀 짐작하지도 못했던 아니 짐작을 했더라도 자신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을 그였다. 주운빈의 마음 속은 갑자기 지옥의 무저갱으로 빠진 듯 암담하기 이를데 없었다. '아.......' 그는 마음 속으로 뜻모를 탄식을 깊게 터뜨렸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자신의 암담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 얼른 몸을 돌려 세웠다. 만소주는 갑작스런 주운빈의 태도에 의아심을 금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주공?" "아...... 아니오." 평소에는 절대로 이렇게 말을 더듬는 적이 없던 주공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을 더듬는 것이었다. 어떤 놀라운 일이 있지 않고서는 그가 이런 당황하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만소주의 의아심은 점점 깊어갔다. 밤하늘을 바라보는 주운빈의 눈꼬리가 푸르르 떨렸다. '엄백부! 나의 짐작이 틀리길 바랍니다.' 어쩌면 마혼살유협 엄유랑이 모든 음모와 혈풍의 배후자로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만소주, 그를 찾아 수하로 삼으라고 일러준 엄유랑, 그것이 의구심이 되어 끝없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만소주의 대답은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주운빈의 마음은 더욱 깊이 떨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만노! 만노와 마혼살유협 엄대협과의 사이는 어떤 사이였소?" 만소주의 얼굴에는 금세 존경의 빛이 우러나왔다. "그는 친구를 위해 평생을 희생한 고금제일의 의협입니다. 무림인이라면 과연 누가 인의대유협 다음으로 엄대협을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얼굴은 강한 의지와 그를 향한 존경심이 가득 배어 있었다.


"삼십 년 전 엄대협은 저에게 자신의 한 팔이 되어 달라고 뜻을 전해왔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의 뜻이 아니라 인의대유협 주대협의 뜻을 전한 것이었습니다만." "그런데?" "제가 응낙하기 전 그만 인의대유협 주대협이 사부를 시해한 죄인이 되었고 그 사건으로 인해 마혼살유협 엄대협이 은거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음......." "그 사건은 저에게 강호에 대해 뜻을 잃게 하였습니다." "아......." 이것은 너무도 공교로운 일치가 아닐 수 없었다. "엄대협은 만노가 공공문주임을 그 당시에도 알고 있었소?" "물론입니다. 제 신분은 두 분만이 알고 있었지요. 저는 업대협에게 제가 은거함을 알리고 곧바로 은거하였던 것입니다." "음......." 만소주는 주운빈이 계속 깊은 침음을 터뜨리자 그도 말문을 닫았다. 주운빈은 묵묵히 밤하늘을 주시하였다. '아...... 유성! 유성을 본 지도 오래되었구나.' 차가운 외로움이 자신도 모르게 물밀 듯 밀려왔다. 그는 잠시나마 안정을 찾고 싶었다. "만노! 우리는 모든 일을 다시 시작합시다." 만소주는 매서운 안광을 뿜어 내었다. "물론입니다. 주공, 다시 시작해야지요. 잃은 친구들은 다시 얻을 수 있습니다." "만노는 우선 공공문도를 모아 주시오." 만소주는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럼 주공께서는?" "나는 잠시 쉬고 싶소. 소군을 찾아가겠소." 만소주는 주운빈의 대답에 잠시 머뭇거렸다. "주공! 황부인은 만나지 않으시렵니까?" 주운빈은 중원제일미(中原第一美) 황성란을 만나라는 그의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하하...... 만노! 당신은 잊었소. 나와 접촉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소. 아마 내자(內子)는 실종되었을 것이오." "그렇겠군요." 두 사람은 이번 사건을 참담한 패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전체가 휑하니 뚫린 것 같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만소주는 깊게 읍을 하며 말했다. "주공!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주운빈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럼 만노! 일주일 후 망아루에서 만납시다." "예!" 휙! 뿌연 안개가 서리듯 만소주는 한 무더기 운무가 되어 사라졌다. 주운빈은 오래도록 만소주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다가 다시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소군! 내 짐작이 틀림없다면 내가 떠나게 되면 분명 그대도 누군가에 의해 납치될 것이오. 그리고 모든 친구들을 한군데에서 만나게 되겠지." 일순 주운빈은 광오하게 안색을 변화시켰다. "황주! 나를 건드린 것을 꼭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③ 악양제일루의 별실, 별실은 매우 호화로웠고, 아마도 이곳은 침실인 듯 방의 거의 절반을 침상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복면을 쓴 여인이 침상에 걸터 앉아 있었다. 여인은 속살이 은은히 드러나는 분홍 나삼을 입고 있었다. 복면여인은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났다. 매미날개같이 투명한 속옷, 투명한 나삼 속에 감추어진 복면여인의 신비스런 육체는 보는 이가 있었다면 아마 그의 마음을 뽀얀 안개로 뒤덮을만 하였다. 여인은 얼굴에 쓰고 있던 복면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멈칫했다. 이어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 나왔다. "아...... 주랑(朱郞)! 주랑이 모든 대업을 이루는 날까지 오직 주랑외에는 이 몸의 얼굴을 보이지 않기로 했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끈적끈적한 달콤한 타액같이 흐물어져 있었다. "주랑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소녀의 얼굴을 볼 수 없답니다." 그녀는 경대 앞에 서서 쓰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복면이 벗겨지고 드러난 여인의 얼굴, 그녀는 바로 엄소군이었다. 촉촉히 물기 젖은 입술이 반쯤 벌어져 있었다. 새록새록 새어나오는 그녀의 향기로운 설향(舌香)! 그녀는 칠흑같이 검은 궁장머리를 풀었다. 그러자 머리채는 그녀의 몸 위로 폭포수와 같이 흘러 내렸다. 더없이 청순한 얼굴, 그러나 어딘가에 감추어진 듯 하면서 아련히 뿜어나는 요염함은 더욱 더 사람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아...... 주랑, 소군은 당신이 너무 보고 싶답니다." 우유빛처럼 뽀얗게 빛나는 피부와 애잔함을 간직한 가을날의 호수처럼 차갑고 아름다운 두 눈, 그윽하게 휘어진 눈썹과 오똑 솟은 귀여운 콧날, 그리고 놀란 듯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지런히 보이는 진주알과 같은 치아. 실로 그녀의 모습은 가을 밤 달빛을 받아 초가지붕 위에 피어난 한 떨기 박꽃과 같은 청순하고도 깨끗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애석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너무도 유연하여 한 줄기 소슬바람도 견뎌내지 못할 것 같은 것이었다. 돌연 감미로운 그러나 가녀린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걸쳐져 있던 분홍빛 나삼이 그녀의 발밑으로 흘러내렸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낸 뽀얀 나신, 그것은 활짝 핀 백합을 보듯 화려하여 혼을 빼앗을 것 같은 눈부신 나신이었다. 그녀는 살포시 고개를 젖히면서 애잔한 눈길로 거울에 자신을 비쳐보고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아...... 주랑......." 정녕 세상에 이토록 완전무결한 얼굴과 육체가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보름달같은 미모에는 세월도 도망갈 정도였다. 학의 목과 같은 긴 목에 이어진 우유빛 나신은 참으로 넋을 잃을 만한 탄력과 젊음을 가지고 있었다. 둥글게 선을 그리는 어깨에 이어진 두 개의 젖무덤은 아담한 언덕과도 같이 조금도 쳐지지 않고 하늘을 향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숨쉴 때마다 출렁이는 두 젖무덤 가운데 발그스름한 사랑의 유두(乳頭)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양지옥으로 깎은 듯 매끄럽게 뻗어내린 배와 배꼽 아래의 가볍게 경사진 곳에 짙은 방초가 가볍게 일렁이고 있었다. 이제는 정랑을 그리워하게 된 목마른 몸이건만, 그 옆으로 뻗어나간 두 허벅지는 금방이라도 기름이 흘러내릴 듯 탄력있었다. 눈부시다고밖에는 달리 할 말을 잃게 하는 나신이었다. 그녀는 보드라운 자신의 손으로 풍만한 젖무덤을 가볍게 감아 쥐었다. "아...... 주랑! 저에게도 어머니 섭유린과 같은 욕념의 피가 끓는가 봅니다."


그녀의 물기 젖은 입에서 전신을 녹여낼 듯한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섭유린, 한 남자를 끈질기게 사랑했으면서 육체의 정념을 이기지 못했던 가련한 여인 섭유린, 그녀의 피를 이어받은 엄소군도 역시 그러한 듯했다. "아...... 아...... 주랑! 저의 불타는 마음을 식혀주세요." 그녀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수줍고도 청순가련한 얼굴, 그러나 그 뒤에 감춰진 폭발적인 유혹의 방향은 너무나 짙었다. 그리고 한없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엄소군. 익을대로 익은 그녀의 육체는 언제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 막 육체의 눈을 뜬 여인, 그녀의 한풀 벗겨진 나신은 애타게 주운빈의 손길을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그녀의 등 뒤로 조용히 내려서는 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어떻게 어디로 들어왔는지 신비하게 별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조금은 피곤한 얼굴, 그러나 그 수척한 얼굴이 더욱 사람의 심금을 홀리고 탄복을 자아내게 만들 것 같았다. 주운빈! 바로 그였다. 그는 엄소군의 가슴 속에서 잠시 쉬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경대에 비친 주운빈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전신은 삽시간에 환희로 물들어 버렸다. 이것은 꿈인 것만 같았다. 자신이 그리워 하는지 어찌 알고 나타났단 말인가. 그러나 그녀는 주운빈의 품 속으로 달려들지 못하고 얼굴이 발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아...... 주랑! 조금만 더 일찍 오시지." 그의 품을 그리워하며 나신을 비추어 보던 자신이 부끄러워서였을까. 그녀는 자연스럽게 풍염한 젖가슴과 샘을 감췄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감미로운 자태였다. "소군! 그대의 곁에서 쉬고 싶어서 왔소." 주운빈은 그녀의 뒤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살며시 그녀의 어깨를 감아 쥐었다. 따뜻했다. "따뜻하구나, 소군." 그녀는 달뜬 목소리로 조그맣게 대답했다. "제 마음 속에 주랑이 들어서고 난 후부터 언제나 제 마음과 몸은 따뜻한 걸요." "그 따뜻함을 나눠다오." "모두 가져가세요. 주랑!" 그녀가 대답하는 사이 주운빈은 부드럽게 그녀의 육봉을 쥐었다. "아......." 불붙은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입에서 토해졌다. 주운빈은 젖무덤을 쥔 손아귀에 슬며시 힘을 주었다. 뭉클한 감촉, 뼈없는 야들야들한 촉감과 마음이 편해지는 포근함을 느꼈다. "아...... 주랑." 그녀는 주운빈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은 살결 하나마다 외로움에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엄소군은 그런 그의 외로움을 여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주랑! 외롭군요?" 주운빈은 대답없이 그녀의 귓불을 입술로 살짝 물었다. 그러자 대답처럼 엄소군의 입에서 뜨거운 숨결이 토해졌다. "하아......." "소군! 그대는 부인다운 정숙함과 사람을 홀리게 하는 요부의 매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소." 또한 그녀는 소녀다운 천진스러운 정감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벌써 세상의 풍진을 다 겪은 여인과도 같은 불같은 정열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주운빈은 손길을 그녀의 아랫배로 가져갔다. 그리고 경대를 통하여 숨막히는 그녀의 나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돌아서다오. 소군!" 그녀는 천천히 주운빈을 향해 몸을 돌렸다. 주운빈은 숨을 멈췄다.


"소군! 나를 너의 젖무덤에 묻어다오. 어머니의 냄새를 너에게서 맡고 싶구나!" "아...... 주랑! 사랑해요." 그녀는 무한한 정이 담긴 손으로 주운빈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천천히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얼굴이 안락한 가슴에 묻히는 것은 말과 글로써 표현할 수 없는 뭉클한 것이었다. 포근했다. 따뜻했다. 그리고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솟아 올랐다. "후후...... 소군! 편하구나. 그리고 너무나 좋다." "주랑! 저는 사랑한다는 말밖에 더 드릴 말이 없답니다." "그래, 나도 너를 사랑한다." 주운빈은 그녀의 따뜻한 둔부를 감싸쥐었다. 손아귀에 쥐어지는 그녀의 둔부는 너무나 큰 풍요로움이 간직된 곳이었다. 주운빈은 그녀의 빠알간 열매를 상큼 한 입 깨물었다. 달콤했다. 그리고 혀안에서 구르는 촉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만, 그녀는 주체하지 못하고 그를 뜨겁게 끌어 안았다. "음......."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주운빈의 귓전을 적셨다. 그녀의 품 속은 바로 어머니의 품 속이요. 그의 고향이었다. 엄소군은 끊임없이 끈적끈적한 숨결을 토해냈다. "아...... 아...... 주랑! 옷을 벗겨 드리......." 그녀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주운빈의 웃옷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하나씩 차례대로 그의 옷이 벗겨져 나갔다. 그의 옷은 그들의 발밑에 뜻깊게 널브러졌다. 이윽고 주운빈, 그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게 되었다. ④ 주운빈은 끈끈한 타액을 그녀의 전신에 묻혀갔다. 안락함과 즐거움을 주고 받기 위한 집요하고 강렬한 혀의 난무(亂舞)였다. "아...... 음......." 그녀의 사랑도 가만 있지 않았다. 주운빈을 어루만져 주고 쓰다듬어 보듬고 감싸갔다. 이것이 그 어느 것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의 확인이었다. 주운빈은 점차로 전신의 기운이 빠져나갔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 힘이 빠지기 전, 그들은 불붙는 사랑을 확인하고 재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주운빈은 그녀를 안아올렸다. "아...... 주랑!" 그녀는 매끈하고 부드러운 팔로 그의 목을 휘감았다. 이윽고 그들의 입술이 합쳐졌고 두 사람의 혀는 서로 감겼다. 그것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강렬한 결합이었다. "영원한 사랑을 그리고 생명을 나의 아기를 낳아주오. 소군!" "네 주랑......." 불타는 마음 한 구석 너무도 수줍은 마음 한 조각이 생겨났다. 여인으로서 더 이상 무엇을 베풀 수 있겠는가. 그들의 몸은 뜨겁게 합쳐져갔다. 일렁였다. 그들의 합쳐진 육신이 아름답게 정열적으로 움직였다. "아...... 사랑해요. 주랑......." "헉......." 사랑한단 말에 주운빈은 뜨거운 숨결로 대답해 주었다. 합쳐진 몸은 한 치의 공간도 없었다. 뜨겁고 기나긴 남녀의 사랑의 여정은 힘차고 밝았다. 고요하던 여심(女心)에 일구어진 사내의 밭고랑은 위대하기 이를데 없었다. "아......."


그녀는 너무도 깊은 육체의 환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순 숨이 꽉 막혔다. 주운빈은 자신의 분신을 모두 그녀의 몸 속에 쏟아부었다. "아기! 아기를 갖고 싶다. 소군!" "주랑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거예요 ." 주운빈은 더욱 깊숙이 그녀를 끌어 안았다. 땀에 젖은 육신이 건강하게 빛이 났다. 주운빈! 그는 그녀의 나신을 안은 채 오랜만에 편안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⑤ 싱싱한 여인의 살내음이 밴 이불이 주운빈의 코를 자극했다. 그는 눈을 떴다. 그의 옆에는 엄소군이 평화로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풋풋한 풀냄새 같기도 한 그녀의 숨결이 그의 전신을 감싸는 것 같았다. 주운빈은 빙긋 웃으며 입술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녀의 잠자는 모습은 더욱더 아름다웠다. 길고 부드러운 속눈썹은 마치 창에 드리운 휘장과 같이 그녀의 눈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후후후...... 천생 남자를 위해 태어난 여자로군." 그리고 그녀의 가벼운 숨결을 따라 터질 듯이 풍만한 가슴이 가볍게 기복을 일으키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눈이 살며시 떠지며 입술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느닷없이 그녀는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아버렸다. "흡!" 그녀의 입술이 주운빈의 입술을 점령해 버렸다. 달콤한 타액이 입안 가득 넘쳐 흘렀다. 잠시간의 영롱한 시간이 흘렀다. 그들의 밀착된 입술이 떨어지고, 주운빈과 엄소군은 서로 마주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호호호......." 이어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주운빈의 눈을 감겨주었다. "이제 옷을 입을 거예요. 주랑, 그러니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요. 절대 훔쳐보면 안돼요 아시겠죠?"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말이었다. "알았다." 주운빈은 기이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돌렸다. 사르륵!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운빈은 등을 돌리고 있었으나 등을 돌리나 돌리지 않나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벽에는 거울이, 그것도 그녀의 전신을 다 비칠 수 있는 커다란 거울이 붙어있었다. 그는 거울을 보면서 다시금 넋을 잃었다. '아...... 소군. 아름답다. 그러나 너는 오늘 나를 위해서 고생을 해야 되겠구나. 너에게 말을 해주고 싶지만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구나.' 이것은 완전한 주운빈의 추측이요. 예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감을 지나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주운빈의 마음은 찢어지게 아팠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됐을 거라는 추측은 엄소군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제발 그녀가 무사하기를 바랄 뿐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내가 떠나면.......' 필시 엄소군마저도 납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엄소군의 교태로운 목소리가 그의 귀를 자극해 상념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이제 됐어요. 주랑, 고개를 돌리셔도 돼요." 주운빈은 약간 씁쓸한 고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흘간이 지났다. 뜨거운 사흘이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주운빈은 모든 피로를 깨끗이 풀어 버린 것이었다.


주운빈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가겠다." 일순 엄소군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당연히 예측하고 있었던 말이지만 이 순간 한없이 무정(無情)하게만 들리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었다. 그녀는 처연하도록 슬픈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에 이슬이 맺히더니 갑자기 천 개의 진주를 풀어 놓은 듯 맑고 슬픈 진주 이슬들이 수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찌할 줄을 몰라 고개를 숙였다. 이미 예감했던 이별이기에 그를 보낼 때만큼은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던 터였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었고, 주체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주랑...... 저는 저...... 는 주랑을 위해 태어난 몸이에요." "알고 있다." "그것만을 잊지 말아 주세요. 흑흑......." 주운빈은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너를 안주시켜 주겠다." 그녀는 넓직한 그의 품 속에서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여인의 눈물, 사랑하는 남자와의 이별에 서러워 흘리는 눈물은 언제나 떠나는 남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것이 비록 잠시간의 이별이었지만 이별 뒤에는 그리움이 찾아 오는 것이라 흘리는 눈물이 더욱 서럽다. 엄소군은 정열적으로 주운빈을 껴안았다. 그녀의 전신 어디 할 것 없이 감당할 수 없는 진한 사랑이 배어 있었다. "되도록 빨리 돌아오세요. 흑......." 그녀는 이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은 또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었다. 그녀가 말한다고 해도 들어줄 주운빈이 아니라는 것을 더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목구멍 속으로 가지 말라는 말이 삼켜졌다. "알았다. 소군!" 주운빈은 뜨거운 입맞춤을 그녀에게 퍼부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그쳐라. 소군! 이별은 잠시뿐이다." "그래도......." "네가 조금만 아픔을 참으면 차후 천하 주인이 될 나의 아내가 된다. 너에게 천하를 선물하겠다." 엄소군의 양볼이 홍조를 띠우자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어졌다. 천하를 선물하겠다는 정인, 그 거대한 세월의 위엄을 지닌 사���이의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다. 천하에 그 어느 곳에 여인에게 천하를 선물로 주겠다는 남자가 있겠는가. 엄소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피! 그 말은 중원제일미녀에게도 했잖아요." 가벼운 질투, 독점할 수만은 없는 위대한 정인에게 부리는 가벼운 투정은 너무 귀여웠다. "하하......." 주운빈의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우면서 그는 소리없이 사라져 버렸다. 제 24 장 시련 ① "아......." 그녀는 귀중한 마음이 완전히 빈 듯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주운빈이 사라진 자리에 하나의 인물이 어느틈엔지 유령처럼 나타나 있었다. 일순 엄소군의 동공이 참혹하리만큼 냉혹하게 변했다. 갑자기 풋풋한 정내음이 배어 있던 방 안이 차가운 공기로 덮이며 너무나 썰렁하게 바뀌어버렸다. 그것은 나타난 인물, 전신을 흑의로 뒤집어 쓴 인물과, 엄소군이 내뿜는 가공할 살기 때문이었다. 흑의복면인이 메마른 음성으로 차갑게 말했다.


"왜, 그 놈을 죽이지 않았느냐?" 감정이라고는 한톨도 배어 있지 않은 음성이었다. 엄소군은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걸었다. "사형(師兄)같으면 사랑하는 정인을 죽일 수 있겠어요." 흑의복면인의 움푹 꺼진 두 눈에 엄청난 살광이 폭사되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은 여인이 더욱 잘하는 것이지." "나는 틀려요." "흐흐흐...... 네가 틀리다고? 열두 살 때 살인을 저지른 계집년이 그런 말을 하면 누가 믿겠느냐?" "닥쳐요! 그것은 모든 것이 그 악마같은 놈 때문에......." 거의 발악하던 엄소군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짝! 그것은 흑의복면인이 어느 틈에 다가와 그녀의 뺨을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억!" 그녀는 침상 위로 나뒹굴었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그녀의얼굴은 삽시간에 퉁퉁 부어올랐다. 그러나 흑의복면인은 저주스러운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악마같은 놈이라도 너를 태어나게 하고 길러준 아버지다. 더 이상 그런 개같은 소리를 지껄일 시에는 네년을 분시처참해 버리겠다." 도저히 인간같지 않은 징그러운 목소리, 아마 독사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저런 목소리일 것이다. 엄소군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면서 미친 듯이 대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홋! 아버지? 열두 살 때 살인을 하도록 딸년한테 가르친 놈도 아비란 말이냐?" 짝! 흑의복면인은 또다시 엄소군의 나머지 뺨을 갈겼다. "닥치지 못할까? 삼경에 너를 납치하러 오겠다. 그때까지 죽은 듯 가만 있어라." "흑흑......." 오열을 터뜨리는 그녀를 의미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흑의복면인은 연기처럼 신형을 감춰버렸다. "어머니...... 흑흑......." 엄소군의 어머니는 바로 인의대유협 주석빈을 그토록 사랑하던 섭유린이 아니었던가. 언젠가 그녀는 주운빈에게 자신의 출생은 어머니에게 있어서 치욕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흑흑...... 어머니...... 저는 어떡하면 좋아요." 그녀의 오열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런데 방 안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그 시각 별실의 지붕 위 한 백의인이 팔짱을 끼고 지붕 위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는 주운빈, 바로 주운빈 그가 아닌가. 그는 밝은 태양 아래서 어울리지 않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역시, 엄소군 그녀는 말못할 비밀을 지니고 있었군.' 그 비밀을 실토하려 했던 순간, 주운빈은 그녀의 입을 막았었다. 주운빈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늘밤 삼경, 이미 너희들의 행동을 이 주운빈이 눈치챘다는 것을 짐작한 너희들이 이런 수작을 꾸미는 것은?" "후후후...... 나를 끌어들이려는 수작인가?" 이때 무엇을 생각하는지 주운빈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망아루! 왜 여태 우대붕을 잊고 있었을까?' 주운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황주가 우대붕이 망아루에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것이다. '큰일이다.' 순간 그의 몸은 누운 채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태양속으로 하나의 백점이 박혀 들어가는 듯


싶더니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강렬한 태양만이 악양제일루의 호화로운 누각과 대전들을 밝게 비추일 뿐이었다. ② 휘익――! 주운빈은 빛살처럼 망아루로 날아들었다. 그의 표정은 지극히 창백하였다. 사치와 향락의 상징이었던 망아루였으나 오늘밤은 망아루 전체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추경각(秋鏡閣)! 이곳은 우대붕이 머무르는 전각이었다. 주운빈은 추경각의 대청에 내려섰다. 순간 주운빈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음......." 그는 무겁고도 긴 한숨을 절로 토해내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점차로 참담하게 굳어져갔다. "우노......." 대청 문설주에 한 구의 시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목이 매달린 시체는 바로 천하제일의 갑부요. 주운빈의 오른팔이었던 우대붕이었다. "우노......." 주운빈은 굵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죽은 우대붕의 얼굴에는 아무 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두 눈이 퀭하니 뚫려져 있었고, 코와 귀는 잘려져 나갔으며 혀를 잘랐는지 입이 패어져 있었다. 사지(四肢)마저 잘려나가 완전히 몸뚱아리만 남아 밧줄에 매달려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우노...... 아...... 으흑......." 급기야 주운빈은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이 많은 사나이인 주운빈, 그는 어깨를 심하게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당한 것이었다. 당해도 너무나 깨끗이 당한 것이다. "아...... 우노...... 당신이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비참한 종말을 당하지 않았을 것을...... 흑......." 주운빈은 정중히 우대붕의 시신을 끌어내렸다. 일순 뿌연 서리에 젖어 있는 주운빈의 눈이 섬뜩한 광망을 폭사하였다. 우대붕의 오른쪽 품 속에 한 장의 양피지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재빨리 그것을 펼쳐 읽었다. <중원무랑군! 무엇을 인생(人生)이라 하는가? 편안한 삶! 그것을 인생이라 한다. 네가 택한 중원천하는 너의 마음 속만큼 좁은 것은 아니다. 네가 천하를 택하기에는 중원천하는 너무나 넓다. 주운빈! 네가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에 너의 수족(手足)은 모조리 잘려나갔다. 네가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이미 만전장은 잿더미로 변했을 것이다. 편안한 인생! 이것은 모든 인간의 염원이다. 부디 중원천하를 단념하고 이 길로 은거하여 편안한 삶을 찾도록 해라. 본좌는 너의 편안한 삶을 위하여 우대붕의 재산만큼은 손대지 않았다.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날뛰지 않기를 본좌는 간절히 기원하다. 황주(皇主).> 우대붕, 주운빈은 무엇때문에 그를 이곳 망아루로 보냈던가. 그것은 원황실의 녹을 받아 먹고 있는 한족의 대신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암중의 황주는 그것마저도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주운빈의 안색은 담담한 기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황주,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구나. 네말대로 천하는 넓다. 그것은 천하에 인재가 수없이 많다는 것을 뜻하지. 나의 수족은 천하에 널려 있다. 황주, 너는 나의 목을 졸으며 피를 말려 죽이려 한다만 후후후...... 황주, 승부는 이제부터다." 그렇다. 중원천하는 넓다. 황주가 아무리 굳강한 세력으로 전 중원을 휩쓸어도 중원무림의 혼은 영원한 것이다. 중원무림의 혼, 그것이 영원하듯이 혼을 받고 태어나는 중원무림인들 역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후후...... 황주, 네가 피로 씻은 중원무림이 극히 일부분임을 네 자신이 잊고 있구나!"


무언무정수의 죽음, 우대붕의 죽음, 이보다 더욱 주운빈의 마음을 여리게 한 것은 바로 만해의 배신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황주의 첩자로서 접근한 만해였지만 아무튼 그의 배신에 주운빈은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주운빈은 우대붕의 시신을 정성스레 묻어주었다. 그리고 그가 묻힌 무덤을 향해 두 번의 절을 올렸다. "우노, 미안하구료.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구료. 우노,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당신의 주인인 나 주운빈이 천하를 평정하게 되는 날 당신을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公臣)으로 명하여 만대(萬代)에 걸쳐 천하의 존경과 영명을 얻도록 해주겠소." 주운빈은 일어섰다. 이제는 명실공히 혼자였다. 우대붕 등 모두가 죽거나 실종되었다. "그러나 외롭지 않다. 그들이 나에게 주었던 뜨거운 정과 의리는 내 마음 속에 한결같지 않은가? 그 숨결은 영원한 것이고 나는 숨결과 더불어 영원히 호흡할 것이다." 그렇다. 그는 외롭지 않았다. 하늘이 있고 그가 꿈을 실은 중원 천하가 있는 것이다. 천하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날 그는 그들의 숨결을 더더욱 사랑할 것이다. "우노, 춥겠지만 잠시 이곳에 있으시오. 그럼 이만 가보겠소." 주운빈, 그는 뜨거운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었다. 잠시동안 물끄러미 우대붕의 봉분을 내려다 보던 그는 어디론가 몸을 날렸다. ③ 엄소군은 넋을 잃고 있었다. 경대 속에 비친 그녀의 표정은 비참하리만큼 처참하였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아...... 주랑...... 이 비천한 계집은 당신에게 말해줄 것이 너무나 많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는 처지랍니다.' 그녀가 이렇게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경대의 거울 속으로 전신을 흑의로 칭칭 감은 괴인영이 나타났다. 엄소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주랑!' 흑의괴인은 주운빈이 떠났을 때 나타났던 그녀의 사형이었다. "흐흐흐...... 엄소군! 잠시 고생을 해야겠다. 그러나 차후 너의 앞길에 놓인 영화는 모든 사람이 꿈에도 그리는 것이다." 흑의괴인은 식지를 가볍게 퉁겼다. 슈욱―! 가느다란 지풍이 그녀의 혼혈을 제압했다. "흑!" 엄소군은 답답한 신음을 발출하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흑의괴인은 그녀의 몸을 받아 들었다. 일순 복면 속의 그의 눈동자가 가볍게 떨렸다. 성숙한 여인의 방향! 그 향긋한 살내음이 그의 코를 자극한 것이었다. 그러나 흑의괴인의 눈동자는 다시 죽음같은 잿빛 눈동자로 돌아갔다. 휙! 그는 그녀를 옆구리에 끼고 별실을 나섰다. 눈깜짝할 사이 흑의괴인은 악양제일루를 귀신도 모르게 빠져 나가고 있었다. 한 줄기 검은 빛이 야천을 가로지르며 허공을 헤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검은 빛을 따르는 또 다른 검은 빛이 있었으니 일신에 흑의경장을 입은 바로 주운빈이었다. 그의 안광은 무섭게 불타고 있었다. '후후후...... 황주! 너는 이제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앞으로 네가 노릴 것은 오직 나의 목숨 뿐이겠지. 그러나 황주! 이 주운빈은 천하의 어느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는 무학의 소유자란다.' 주운빈은 소림 실전경공 불광어기류(佛光馭奇流)를 시전하며 흑의괴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한 줄기 바람에 몸을 실어 천 리를 가는 경공! 그것은 어떠한 소음도 흔적도 남기지 않는 초절한 무공이었다. 흑의괴인은 악양을 벗어나 동정호(洞庭湖)를 향해 날고 있었다. 주운빈은 이미 전신이 검은 운무(雲霧)에 휩싸여 흑의괴인의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기척이 없어 흑의괴인은 주운빈이 자신의 머리 위에서 따라오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휘익――! 흑의괴인의 신법은 정녕 날렵한 새와 같았다. 그는 동정호의 서쪽 호반을 향해서 날고 있었다. 휘이이잉――! 동정호변에는 강렬한 서북풍(西北風)이 불고 있었다. 강렬했으나 습기가 배인 축축한 바람이었다. 끼이이익――! 그런데 동정호변에서 듣기 싫은 음향이 가볍게 발출되었다. 그것은 서북풍에 흔들리는 조그만 나룻배가 흔들리면서 내는 소리였다. 나룻배에는 역시 전신을 흑의로 감은 두 명의 흑의괴인이 있었다. 쉬익! 흑의괴인은 나룻배 앞에 도착하더니 엄소군을 던졌다. "빨리 그 계집을 낙양 영웅탑으로 호송하라!" "예!" "알겠습니다!" 삐거덕! 나룻배는 엄소군을 태우자마자 즉시 물결을 가르며 동정호 깊은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흑의괴인은 나룻배가 사라지는 방향을 싸늘하게 주시하였다. 그리고 한참후에야 중얼거리며 입을 열었다. "흐흐흐...... 이제 주운빈, 그 놈만 영웅탑으로 불러들이면 대사(大事)는 끝인가?" "흐흐흐...... 바라공주 설랍봉! 중원제일미 황성란, 엄소군! 흐흐흐...... 주가놈의 계집들은 모두 납치했고 그 놈의 기반은 모두 없앴다. 이제 주운빈, 그 놈만 영웅탑으로 불러들이면 황주의 대사는 끝난다." 순간 그의 머리 위에서 무한정의 냉랭한 냉소가 터졌다. "흥! 그럴 필요는 없다." "누, 누구냐?" 휙! 흑의괴인은 고함을 치면서 십여 장 밖으로 퉁겨나갔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냐?" 그는 정신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사위고, 허공이고, 땅이고 간에 그의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 자신은 깨어있는 것이 확실함으로 꿈은 아니었다. 그리고 헛소리를 들을 만큼 기가 허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분명 누군가 이곳에 있어야 한다. 귀신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미신을 절대로 믿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놈이냐?" "후후후...... 바로 나다." 다시 터진 괴음과 함께 어디선가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인물이었다. 바로 주운빈이었다. 흑의괴인은 나타난 인영이 주운빈임을 알고 대경했다. "아니? 너, 너는?" 주운빈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주운빈이지. 황주가 영웅탑에서 나를 기다리는가?" "으...... 쥐새끼 같은 놈!" 흑의괴인은 어느새 예전의 살기를 되찾고 있었다. "흐흐흐...... 네놈이 제발로 나타나다니. 차라리 잘됐다." "그렇겠지. 일부러 나를 찾아와 영웅탑에서 황주가 기다린다는 말을 전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주운빈은 담담한 시선으로 흑의괴인을 주시하였다. 그런데 주운빈의 두 눈동자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완전한 무심(無心)인 감정없는 눈동자였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는 마치 석고로 만든 동상에다 갖다 붙인 보석과 같았다. 한참 주운빈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던 흑의괴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 주운빈의 눈동자는 마치 신안 위에서의 신좌(神座)가 창생을 내려다 보는 것 같았다. 흑의괴인은 자신도 모르게 위압감에 눌려 뒤로 반 장 정도 물러났다. 주운빈이 차갑게 물었다. "네가 나의 내자들을 납치했는가?" 이미 ���든 것을 알면서 물어보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확인하는 것이고, 죽이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흑의괴인은 아무말도 없었다. 엉겁결에 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얼떨떨하기도 했고, 그의 기도에 눌려 겁에 질려 있던 중이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황주는 나의 내자들을 납치하여 나를 협박하려 했는가?" 여전히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흐흐...... 천하를 피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원흉치고는 대단히 유치한 방법을 썼구나." 흑의괴인은 위압감에 묻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주운빈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후후...... 그러나 황주, 그 놈은 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군! 그가 나의 내자들의 목숨으로 나를 협박한다면 물론 나는 굴복하겠지." 잠시 쓴웃음을 짓던 주운빈은 재차 물었다. "너는 이화선자 엄소군의 사형인가?" 그 말을 들은 흑의괴인의 눈에 커다란 경악이 스쳤다. "네놈은 이미 알고 있었구나?" "그렇다. 알고 있었지. 이제 이 주운빈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바로 황주의 정체도 깨달았지." "무엇이라고?" "그렇게 놀랄 것 없다. 어차피 영웅탑으로 나를 불러들일 그였으니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내가 일찍 황주의 정체를 깨닫지 못한 것일 뿐이다." "음......." "이상이다. 너에게 물을 것은 이제 없다." 흑의괴인의 눈에 의혹감이 스쳤다. 그는 멍청했다. 이 말이 전해졌으니 한시라도 빨리 여기에서 도망쳤어야 했거늘 그는 이유조차 모른 체 멍청히 서 있었다. '저 놈이 왜 저런 말을 할까?' 주운빈은 싸늘한 조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러나 본 공자는 너에게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죽음을 내리겠다."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흑의괴인의 귀에는 벼락치는 듯한 굉음으로 들렸다. "흡!" 그는 비틀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주운빈의 마성에는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극고의 공력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흑의괴인도 만만치는 않았다. "흐흐흐...... 주운빈! 너와 겨루어 보고 싶었던 차에 잘됐다. 황주는 절대 너와 정면충돌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그것은 너의 무공을 당해낼 인물이 하나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인간은 호기심이 많은 동물이고, 때로는 그 호기심이 커다란 화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흑의괴인의 두 손이 서서히 치켜져 올라갔다. 그의 전신에는 서서히 음랭한 광채가 어리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주운빈은 미간을 찌푸렸다. '천마군림존 백사형께서도 꺼려하던 구유잔혼패혈마공(九幽殘魂覇血魔功)이로군!' 구유잔혼패혈마공! 바로 사도대종사인 백파림과 함께 쌍벽을 이루었던 마도(魔道)의 대마두 구유마존(九幽魔尊)의


비전마공이었다. 주운빈의 전신에 푸르스름한 청광이 돌기 시작했다. 때마침 주위는 어둠에 휩싸여 있어 주운빈을 매우 귀기스럽게 만들었다. 순간 그의 전신은 푸르스름한 기체로 휩싸여졌다. 동시에 주운빈의 몸은 서서히 허공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앗! 천강마라백팔난무! 음...... 거기다 어풍무영(馭風無影)까지?" 그렇다. 바람에 몸을 싣는다는 것은 공력이 어느 정도인지 도저히 추측할 수 없는 극고경지였다. 주운빈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 "제법 견식이 높구나. 그러나 어풍무영이 아니라 이것은 불광어기류이다." 흑의괴인의 눈가에는 왠지모를 공포가 떠올랐다. 이제야 그는 황주가 한 말을 실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눈동자는 일시에 사색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흑의괴인은 마도의 대마두인 구유마존의 독문마공을 익힌 몸이었다. 그는 두 눈에서 돌연 음침한 빛을 뿌렸다. "차아앗!" 대기를 찢어놓을 듯한 호통소리와 함께 무섭게 주운빈을 향해 덮쳐왔다. "구유잔혼패혈마공!" 우르릉! 엄청난 굉음을 동반한 가공할 잠력이 주운빈을 향해 휘몰아쳤다. 그것은 마치 바다를 가르고 산을 박살낼 듯한 것이었다. 순간이었다. 장력을 뿌려낸 흑의괴인이 돌연 허공에서 신형을 무섭게 회전시켰다. "패혈마살광(覇血魔殺光)!" 갑자기 그의 양손에서는 두 가닥 핏빛 광채가 뻗어져 나왔다. 쌔애액! 소름이 오싹 끼치는 파공음 속에 주운빈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흑의괴인의 팔목에서 두 가닥의 강기가 뻗어져 나오는 것을 말이다. 주운빈은 냉랭한 조소를 띠었다. 그리고 그의 몸은 무섭게 허공으로 퉁겨졌다. 이어 그는 전신을 팽이처럼 회전시키며 양손을 난무하였다. "천강마라귀류무!" 수백 가닥의 푸르스름한 강기가 일제히 쏘아져 나갔다. 파파파파팟! 괴이한 파공음과 함께 주위는 파란 불꽃이 난무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두 개의 잠력이 부딪치는 순간 동시에 그 굉음속에서 처참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크아악!" 흑의괴인이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비명이었다. 잠력에 휘말린 먼지가 밤하늘을 뿌옇게 흐려 놓았다. 자욱했던 먼지가 사라지고 주운빈의 앞 일 장 정도에는 큼직한 구덩이가 패어 있었다. 그런데 그 구덩이 속에 형체를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뭉개진 육신 덩어리가 묻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흑의괴인의 시신이었다. 어이없게도 흑의괴인은 단 일 장에 박살이 나버린 것이었다. 천강마라귀류무의 위력이 얼마나 엄청났으면 천하를 오시하던 흑의괴인이 요행없이 거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짓뭉개져 버렸겠는가. 주운빈은 뒷짐을 지고 동정호를 응시하였다. "이제껏 나는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겨 되도록 사람을 죽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다르지. 황주, 너는 이제 주운빈을 만난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휘익! 주운빈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의 말로 미루어 그는 이미 황주가 누구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왜 엄소군을 실어간 자들의 뒤를 계속 쫓지 않는 것일까? ④ 만전장!


우대붕의 품 속에 있던 양피지에 쓰여진 글대로 만전장은 잿더미로 덮여 있었다. 삼십만 평의 대지 위를 꽉 채웠던 수많은 고루거각들, 주운빈이 천하를 향해 뜻을 펴기 위한 발원지로 만든 만전장이 기둥뿌리 하나 남김없이 모조리 재로 변한 것이었다. 황산 천검봉 정상, 주운빈은 재로 뒤덮인 공지를 묵묵히 내려다 보았다. 그는 내심 황주란 인물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지금의 무림은 완전히 암흑이로다!" 지금 무림은 피의 암흑이었다. 갑자기 몰아친 저주 담긴 피의 회오리는 중원을 휩쓸며 곳곳을 재로 만들어버렸다. 중원무림의 개사이래로 무림의 백여 개 대소 문파가 일제히 초토화 된 적이 있었던가. 바로 지금이 역사에 남을 시간이었다. 가공할 전율의 공포였다. 중원무림의 초토화는 황제 순무제의 칙령으로 행하여졌다. 관무불가침(官武不可侵)! 원래 관과 무림은 서로 침범하지 않았었다. 서로의 영역을 철저히 인정해주며 지켜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고적부터 지켜오던 무게가 갑자기 깨어져 버린 것이다. 주운빈은 씁쓸히 중얼거렸다. "필연적인 상황이겠지. 중원무림은 한족의 일이고 원황실은 다시 그 황량한 대막 이북으로 쫓겨갈 수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 원황실은 결코 중원대륙을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중원의 뿌리인 무림을 말살시키려는 것이었다. "황주! 네놈은 분명 원황실의 일족이다. 그가 어떻게 원황실의 일족일 수 있는가?" 중원무림의 저주는 일제히 황주에게 쏠리고 있었다. 황주를 죽여라! 중원 십팔만 리 거대한 대륙에서 일고 있는 원성이었다. 황주의 명령은 충분히 저주받을 만한 것이었다. 무공을 사용하는 자는 무조건 죽여라! 이것이 지상명령이었다. 주운빈은 악양에서 황산으로 오는 사이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순무제의 칙령! 특히 원황실은 중원의 거지란 거지는 이잡듯이 죽여 없애버리고 있엇다. 중원인들은 의혹에 빠졌다. 이런 저주받을 처참한 혈겁을 몰고온 황주가 도대체 누군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중원무림인들의 눈은 일제히 만무궁으로 쏠렸다. 언제나 중원을 지켜주던 만무궁이 이번에도 피의 구렁텅이에서 중원을 건져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만무궁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주운빈은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만노! 이번에는 제발 그대에게 아무런 불행한 일도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오." 과연 주운빈은 천하에서 가장 외로운 사나이가 되고 말 것인가. "유성(流星)! 유성이 흘렀으면?" 그러나 결코 유성은 흐르지 않았다. 묵묵히 밤하늘을 응시하던 주운빈이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오신 분은 이제 몸을 드러내시오. 그곳에 있기에는 밤바람이 너무 차갑소이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소가 그의 등 뒤 쪽에서 들렸다. "으하하하...... 주대협, 노부요. 천선비랑미 화무경이오." 천선비랑미 화무경이라면 바로 천룡방주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주운빈은 이미 그가 올 줄을 짐작하고 있었던지 전혀 안색의 변화가 없었다. "어서오시오. 화방주!" 그러자 천선비랑미 화무경의 표정이 흠칫하면서 야릇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는 허소를 터뜨렸다.


"허허...... 주대협! 마치 노부가 이곳에 올 줄 알고 있었던 것 같구료!" 주운빈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의 표정을 발견한 천선비랑미 화무경은 전신이 경직되었다. 그것은 주운빈의 얼굴이 마치 냉동된 것 같이 싸늘하기 때문이었다. 주운빈이 입을 열었다. "나를 불러 오라고 황주가 화방주를 보냈소?" 화무경은 자신의 몸이 더욱 굳어짐을 느꼈다. "화방주! 아니 무귀전주, 천선비랑미 화무경대협!" 화무경은 대경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갑자기 두 사람의 냉랭한 한기서린 침묵이 어둠처럼 덮쳐 들었다. 무귀전주! 그는 황주가 등장하기 전 무림의 공포의 대명사였던 인물이다. 주운빈은 방금 천선비랑미 화무경을 무귀전주라 불렀다. 제 25 장 깨달은 주운빈! ① 천선비랑미 화무경은 깊은 숨을 몰아 쉬었다. 무귀전주, 그는 놀랐던 마음을 평정시키면서 본래의 안색으로 돌아왔다. 그 대신 그토록 청수하고 중후한 기도를 풍겼던 그의 안색이 음침하게 변해가는 것이었다. "흐흐흐...... 주운빈! 이제 모든 것을 깨달았구나!" "그렇소." "네 말이 맞다. 본 방주가 바로 무귀전주다." 주운빈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미 황주가 누구인가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사형, 즉 내 아버님의 의형인 마혼살유협 엄유랑이 황주이면 화무경 당신이 아니면 누가 무귀전주이겠소." 마혼살유협 엄유랑! 그는 친구를 위해 평생을 버린 의협불굴의 사나이요. 천하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의인 중의 의인이 아닌가. 무귀전주 화무경이 얼굴을 고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주운빈! 너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 "그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상황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지. 엄유랑 그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아니면 어느 누가 나의 기반을 모두 없애고 암중으로 목을 조일 수 있겠는가?" "흐흐흐...... 너의 말은 모두 맞다. 너는 여지껏 그의 말대로 행동했었으니까." 주운빈은 냉엄한 광망을 폭사시켰다. "후후후...... 화무경! 너는 황주가 너를 이곳으로 보낸 이유를 알고 있는가?" "이유라니?" "흐흐흐...... 정체를 숨기고 남의 목숨만을 노렸던 노인 놈이라 머리도 역시 둔하구." "닥쳐라! 애송아!" 화무경은 얼굴이 벌개져 대갈을 터뜨렸다. 주운빈은 그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화무경, 밤하늘이 아름답다고 생각지 않는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화무경은 난데없는 주운빈의 엉뚱한 질문에 한동안 대답할 말을 잊었다. "나는 일시간의 자만으로 인하여 음모에 휘말려 모든 기반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식별할 여유가 있다. 그러나 너의 죽은 마음에는 밤하늘의 정경을 감상할 여유가 없을 것이다."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화무경은 그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이제, 황주가 너를 여기에 보낸 이유를 말해주지. 검을 잡아라. 화무경!"


화무경은 자신도 모르게 심신이 압도되어 있었다. 뜻밖에도 주운빈은 나뭇가지 하나를 꺾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차례 그 나뭇가지를 허공에 휘둘렀다. 위잉! 나뭇가지가 휘어지면서 끝이 파르르 떨렸다. "화무경! 너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다." 화무경은 입을 굳게 다물고 주운빈을 주시하였다. 무저갱같은 그의 동공에서 강렬한 광채가 발하기 시작했다. 먹이를 노리는 야수의 눈빛처럼 참혹한 살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축 늘어진 그의 손에는 검집도 없는 서슬이 시퍼런 장검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최상승의 검도를 깨우쳤구나!' 주운빈은 그의 자세에서 풍기는 기도로부터 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무귀전주답군! 그러나 그의 마음이 죽었기 때문에 그의 검도도 죽어 있다. 그것은 그가 오직 검을 살인하기 위해서만 수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화무경! 너는 본 공자의 십초 이상을 견디지 못한다.' 화무경의 자세, 그것이 주운빈에게 그의 모든 검도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화무경의 자세는 필사지검(必死之劍)이었다. 그것은 검집도 없는 검이 잘 말해주고 있었다. 검의 달인(達人)이 검집을 버렸다면 그것은 다시는 이 검을 쓰지 않겠다는 필사의 신념이었다. 그는 주운빈을 대하면서 그가 무서운 상대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로인해 전력을 다하게 된 것이다. 즉, 검을 버린다는 것은 검인이 자신의 생명을 포기했다는 뜻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주운빈은 나뭇가지를 늘어뜨리며 그와 오 장쯤 되는 곳에 마주섰다. 둘 사이에 무서운 안광이 맞부딪치고 침묵이 흐르는 순간, 화무경이 입을 열었다. "본좌는 너를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황주에게서 받았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너를 죽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구나." 주운빈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응시하였다. 두 절대고수의 눈빛이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화무경의 눈빛은 송곳과 같이 날카롭고 신랄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주운빈의 눈빛은 무심(無心), 바로 그것이었다. 무한히 날카로와 마치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 발길 듯한 눈빛과 한없이 교묘한 눈빛이 몹시 대조적이었으나 두 사람은 상대에 대하여 감탄하고 있었다. 무(無) 속의 살기나 살기를 감춘 무(無)나, 그것은 검도의 극상승을 달리고 있는 것에서 결국은 마찬가지였다. 서서히 화무경은 검을 늘어뜨린 채 발을 끌고 있었다. 그의 검은 그에 따라 서서히 아주 서서히 들려졌다. 마치 검이 만 근의 무게는 됨직한 듯 몹시 무겁게 들려 있었다. 주운빈 역시 나뭇가지를 들어 올렸다. "화무경! 마지막 가는 길에 한이 없게 모든 공력을 다 쓰도록 하여라!" 분명 이것은 자신을 엄청나게 내리보며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화무경은 결코 주운빈의 말을 경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동작에 더욱 신중을 기하며 검을 배와 일직선이 되는 중단의 자세를 취했다. 찰나였다. "하합!" 마치 신음소리와도 같은 호통을 내지르며 화무경의 검이 주운빈을 향해 서서히 날아왔다. 그것은 너무도 느려 어린아이라도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주운빈의 눈가에는 놀라움의 경련이 일었다. '생각보다 더욱 무서운 검의 경지를 이루었구나.' 화무경의 검이 마치 태산처럼 느껴졌다. 츠츠츠츠....... 순간이었다. 화무경의 검끝에서 수많은 검강(劍 )이 분산되더니 전광석화와 같이 허공을 누비기 시작한 것이다. 천지는 온통 수천 개의 검강으로 뒤덮였다. 그것은 도저히 허와 실을 짐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녕 환상의 검법이라 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천선삼십육어기검(天仙三十六馭氣劍)! 주운빈이 손에 들린 나뭇가지를 일직선을 뻗었다. "파라이류도(波羅二流刀)!" 쎄에엑――! 나뭇가지를 따라 백광(白光)이 작렬하듯이 퍼져나갔다. 간장이 서늘해지는 마찰음과 함께 검광과 백광이 허공에서 무섭게 난무하였다. 이것은 실로 일대 장관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두 명의 고수는 순식간에 양쪽으로 갈라졌다. 지면에 내려선 그들은 반석처럼 거대한 거붕처럼 늠연히 마주선 채 상대를 응시했다. "으음......." "화무경! 제법이다. 천무일운운의 천극육류의 파라이류도 이식을 막아내다니?" 화무경은 아무런 말도, 심지어 신음소리조차 없었다. 백광이 스치고 간 그 자리는 근육까지 찢겨서 뼈까지 드러나 보일 정도로 상세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주운빈! 과연 황주의 말대로 너의 무공은 천하에 당할 자가 없겠구나. 그러나 그 무공으로는 황주의 상대가 못된다!" "후후후...... 그럴까?" 주운빈은 화무경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화무경! 나는 단 오성(五成)의 공력을 사용했을 뿐이다.' 화무경의 주름진 입가에는 자조의 웃음이 드리워졌다. "그러나 역시 너는 내 평생 처음 보는 강한 상대이다. 역시 정파양대종사의 사제답구나." "이 주운빈 역시 너처럼 강한 상대는 처음이다. 결코 신수패황혈검 유세옥의 하수가 아니다." 화무경은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비파처럼 껴안고 검신을 한 손으로 잡았다. "주운빈! 너와 내가 이제 이번 한 초로 승부가 가려지겠지. 만약 네가 황주의 요구를 승낙하였다면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내세에서나 좋은 친구가 되기로 하지!" 주운빈의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천선이기어살(天仙以氣馭殺)!" 화무경의 한 손이 검신을 무겁게 퉁겨 내었다. 그러자 검이 조각조각나며 섬전같이 주운빈을 향해 날아왔다. 쌔애액――! 가공할 검의 파편들은 살기를 뿌려대며 주운빈을 향해 날아들었다. 화무경이 평생 수련한 그의 최상승의 절학이었다. 이 모습을 본 주운빈의 안색은 무겁게 가라 앉았다. 그런데 그는 서서히 눈을 감아가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천극육류의 우주만물의 변화인 일월이류도(日月二流刀)와 건곤이류도(乾坤二流刀)의 오묘한 변화가 물밀 듯 스쳐갔다. "너의 전신을 차례로 잘라 주겠다! 우안(右眼)!" 번쩍! 너무나 하얀 백광이 작렬했다. 그것은 너무나 밝아 일시간에 눈이 가려지는 강렬한 빛이었다. 주위는 아무런 소음도 없이 오직 찬란한 백광이 일직선으로 뻗을 뿐이었다. 순간 화무경은 자신의 몸이 마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또한 그의 몸이 그 자리에서 땅 속의 무저갱으로 빠져드는 듯한 현기증이 일었다. 팍! 그는 얄팍한 충격을 오른쪽 눈에서 느꼈다. "크억!" 짧은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오른쪽 동공에서 한 줄기 피화살이


일직선으로 뻗어나왔다. "으으으...... 이 놈......." 그는 갑자기 두개골이 깨질 듯한 격렬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주운빈이 들고 있는 나뭇가지, 그 끝에 화무경의 오른쪽 눈알이 박혀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주운빈은 도저히 상상불허의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뭇가지 끝을 얼굴쪽으로 가져가 그의 눈알을 입안에 넣었다. 푸직! 씹었다. 그의 입 안에서 화무경의 눈알이 터지면서 입새로 피가 흘러 나왔다. "후후후...... 화무경! 너의 더러운 눈으로 감히 중원대륙을 훔치려 들다니." "으......." 화무경은 주운빈의 행동에 자신의 아픔같은 것은 졸지에 잊어버렸다. 갑자기 밀려오는 공포는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극심한 공포인 것이다. 그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으...... 주운빈...... 이 악마같은 놈...... 넌 인간도 아니다." "인간도 아니라고? 네놈의 입에서 가증스럽게도 사람의 도리가 흘러나오다니!" 주운빈의 나뭇가지가 다시 허공을 꿰뚫었다. 쌔애액――! 빛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팍! 그의 나뭇가지가 이번에는 화무경의 왼쪽 눈알에 꽂혔다. 순간 그의 손이 홱 뒤집어졌다. "크아악!" "후후후...... 아픈가?" 주운빈은 악마같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 잔혹한 놈...... 같으니라고." "후후후...... 너 자신이 아픈 것처럼 중원대륙의 아픔도 생각해 보았느냐?" 그는 나뭇가지를 화무경의 왼쪽 눈알에 들이밀어 넣고 마구 휘저었다. ② "크악!" 이내 화무경의 전신은 피로 물들어 혈인으로 변했다. 그는 너무나 극심한 통증에 팔짝팔짝 뛰었다. 주운빈은 나뭇가지를 빼냈다. "후후후―! 내가 강호에 출도하여 너를 찾아갔을 때 너는 친구에 대해서 말을 했었지. 그 더러운 입으로 사나이의 우정을 말했다." 퍽! 나뭇가지는 이번에는 화무경의 입 안으로 박혀들었다. "으억!" 화무경은 목구멍이 막히는 비명을 내질렀다. "크어어억!" 주운빈은 나뭇가지를 입 안에서 한 바퀴 돌렸다. 우드둑 우두둑....... 화무경의 이빨이란 이빨은 모조리 부러져 나갔다. 혓바닥마저 잘려져서 나왔다. "후후후......! 이제는 그 더러운 눈으로 중원천하를 볼 수도 없겠고, 그 치사한 입으로 사나이에 대해 말을 못하겠지." "어어...... 어......."


화무경은 혀가 잘려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을 발출하였다.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었다. "너의 발로 따뜻한 중원대륙을 밟지 마라!" 쉬리리릭! 나뭇가지가 화무경의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파팍! 두 발이 순식간에 잘려져 나갔다. "어어...... 억!" 다시 나뭇가지가 한 차례 더 화무경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두 손목이 허공에서 튀었다. "그 지저 분한 손으로 너는 얼마만한 중원무림인들의 고혼(孤魂)을 만들어 냈던가?" "어어...... 억!" 화무경은 바닥에 쓰러져 사지를 바둥거렸다. 간웅의 종말! 노인의 종말이었다. "어어...... 억!" 주운빈은 무심한 눈으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화무경을 내려다 보았다. "화무경! 너는 네 자신의 영화를 위해 엄유랑에게 모든 충성을 다 바쳤지만 너는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었다." 화무경은 그저 공포의 눈으로 주운빈을 쳐다볼 뿐이었다. "화무경! 황주가 너를 내게 보낸 것은 바로 나로 하여금 너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어...... 어......." 화무경은 극심한 고통 중에도 주운빈의 말을 알아 들었다. 그는 손목이 잘려진 뭉툭한 팔을 휘둘러 무엇인가 나타내려 하였다. 그는 부인하는 모양이었다. "엄유랑! 그가 너에게 진정으로 약속을 지킬 줄 아는가?" 화무경은 부르르 떨더니 팔을 내렸다. 잘라진 손목과 발목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피가 다 빠지면 죽겠지." 주운빈은 화무경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를 내려다 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가? 끝없이 바둥대던 화무경도 이윽고 힘없이 축 늘어졌다. 고개가 옆으로 푹 꺾어졌다. 그는 죽은 것이었다. 정체를 감추고 무림에 공포의 존재로 군림했던 살인마왕(殺人魔王)이었던 화무경은 끝내 비참한 종말을 당한 것이었다. "엄유랑! 기다려라. 주운빈이 곧 영웅탑으로 가겠다." 영웅탑! 실로 거대한 영웅탑! 이곳을 밟으면 명예와 미녀와, 황금이 쏟아져 들어왔던 중원영웅의 허상의 상징! 이 영웅탑에는 또 어떤 일이 주운빈을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그리고 주운빈은 혼자 몸으로 어떻게 황주와 대적할 것인가? "엄유랑! 그대가 황주임을 이미 느끼고 있었으나 도저히 그 말을 입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소." 주운빈은 만소주에게 마혼살유협 엄유랑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을 때 무엇인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가 강호출도 후의 주운빈의 모든행동을 좌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엄유랑 그는 애초부터 주운빈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그를 농락한 것이었다. 또한 이화선자 엄소군! 그녀는 바로 마혼살유협 엄유랑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던가? "아! 저의 출생은 어머니에게 있어서 치욕이었어요." 원하지 않았던 생명, 그 생명은 겁탈에 의해서 생산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인의대유협 주석빈의 죽음도


엄유랑의 음모에 의한 것임이 자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③ 낙양(落陽), 옛 고도(古都)에 주운빈은 와 있었다. 주운빈은 문득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무림은 일시간 정적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 정적이 다음에 피를 불어올 일시간의 정적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모두 깨닫고 있었다. 멀리 거대한 괴물처럼 아니면 허허로운 중원 무림인의 허욕을 무한히 채워주는 욕망의 활화산처럼 표표로히 그 위태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영웅탑!" 주운빈은 오늘도 말없이 하늘을 꿰뚫고 서 있는 영웅탑을 주시 하였다. "영웅탑! 이제야 네가 무림에 세워진 이유를 알 수 있겠구나." 영웅탑이 무림에 등장한 이유! "아아! 허울좋은 무림의 표징인 영웅탑! 그 탑에 쌓인 영혼이 몇이었던가? 영웅탑! 너는 얼마나 많은 중원의 정기를 훔쳤더냐?" 실로 영웅탑은 지난 칠십 년 동안 너무나 많은 무림의 고수들의 혼을 양식으로 삼아왔다. 독담에 뼈를 묻은 그들은 정파이건 사파이건 간에 중원인들이었다. 그들은 중원대륙을 지켜주는 중원의 넋이었다. 영웅탑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중원의 정기가 쇄잔되었는지 모른다. 영웅탑을 향하여 주운빈은 천천히 걸어갔다. 이윽고, 주운빈은 영웅탑까지 뻗어있는 대로(大路)의 입구에 섰다. 그는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영웅탑에는 자욱한 안개로 서려 있었다. 짙은 불쾌감을 주는 운무였다. 그 속에 고인 것이 살기라는 것을 주운빈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살기! 그것은 대로 양 옆으로 늘어진 숲 속에 있었다. 영웅탑 주위로 광활하게 펼쳐진 수림 속에선 지금 기이한 살기가 물씬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주운빈의 살을 저며 내기라도 할 듯 뾰족한 대침이 여린 살갖을 마구 파고 들듯, 그 살기는 주운빈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것이었다. 주운빈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표표히 백의자락을 휘날리며 주위를 묵묵히 둘러보았다. 정적! 숲은 고요했다. 속이 울렁이는 야릇한 비린내가 수림을 휩쓸고 지나치는 바람을 타고 물밀듯 주운빈의 코 속으로 스며들었다. 주위는 질식할 듯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무거운 정적을 한겹한겹 제치며 피어오르는 살기가 알 수 없는 끔찍할 정도의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이때 돌연 주운빈과 마주한 위치의 수림 속에서 세 개의 신영이 번뜩였다. 스스스쓱 스스스쓱―! 운무와 같이 피어오르던 연기가 주운빈의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그의 눈 앞에 세 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전신이 칠 척 거구에다 붉은 홍포를 걸친 음침하게 생긴 노승이 보였다. "노납은 천축 소뢰음사의 주지 마혼불존(魔魂佛尊)이다." 가운데 서 있는 인물은 일신에 화복을 걸치고 마치 해골을 연상케 하는 비쩍 마른 몸집의 노인이었다. "노부는 남황패주(南荒覇主) 남황마령검(南荒魔靈劍)이다." 맨 왼쪽에 가공할 사기(邪氣)를 뿜어내면서 섬뜩할 만한 마광(魔光)을 폭출시키는 노인이 서 있었다. "흐흐흐―! 노부는 대막(大莫) 수라궁주(修羅宮主) 수라음존자(修羅陰尊子)다." 주운빈은 별 생각 없는 듯이 무심(無心)한 눈으로 나타난 세 인물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씩 웃었다. 마치 오랜만에 지기를 대하듯한 친밀한 웃음이었다. '황주! 또 나더러 이런 쓰레기를 청소하라 보냈느냐?' 웃고 있는 주운빈이었지만 내심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 앞의 인물들이 누구인가? 바로 중원대륙을 휩쓸은 새외변황의 패주들이자 마의 혈황(血皇)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들이 주운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주운빈은 담담히 말했다. "소생은 중원무랑군(中原武郞君) 주운빈이라 하오." 담담하던 눈길이 서서히 연민과 동정의 빛을 담아가고 있었다. '쯧...... 불쌍한 위인들! 모든 싸움은 다 옳은 목적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영화를 위해 남을 도우는 싸움은 별로 좋은 이유가 못되지. 너와 같이 욕심 많은 돼지들을 엄유랑이 그냥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는 불쌍한 위인들!' 그는 세 명의 마황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그는 저 불쌍한 돼지들을 죽일 것을 생각하니 더욱 분노가 치솟았다. '다른 돼지들은 만무궁을 치러 갔다.' 그들이 주운빈의 눈빛의 감정을 알 리가 없었다. 수라음존자가 자신의 수라마음멸혼공(修羅魔陰滅魂功)을 끌어올리며 음산하게 외쳤다. "애송아! 황주를 만나러 왔는가?" 돌연, 가만히 서 있던 주운빈이 들릴 듯 말 듯한 미미한 탄식(歎息)을 뿜어 내었다. 수라음존자가 주운빈의 탁식에 대한 의미를 몰라서 검미를 치켜떴다. "네가 탄식을 뿜어내는 것은 무슨 연유이냐?" 상대방의 탄식. 그것은 가끔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데 탄식처럼 착실한 것은 없었다. 세 사람들은 동시에 느낀 것이었다. 주운빈이 불쌍하다는 듯이 느릿하게 말했다. "이제 곧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큰소리치는 당신들이 무척 불쌍해서 탄식을 터뜨렸소." "뭣이라고?" 성질급한 남황마령���이 폭갈을 내질렀다. "이 찢어 죽일 놈......." 그러나 늙은 생강이 맵다고 나이가 제일 많은 마혼불존이 발작하려는 두 사람을 말렸다. "잠시 참으시오." 마침 하늘은 구름한점 없이 맑았다. 햇살은 네 사람의 어깨 위에서 잔잔히 무너져 내렸다. 네 사람의 시선이 질식할 듯한 살기를 품은 채 허공에 얽혔다. 순간 주운빈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 화창한 날에 수백 개의 혼을 지옥으로 보내야 하는 내가 매우 서글프구료." "저 놈이......." 주운빈은 알고 있었다. 엄유랑은 세 마왕들을 시켜 주운빈의 진력을 탕진시키려 하는 것을....... 또한 주운빈의 상상불허의 무공을 이용하여 마왕들을 죽임으로써 어부지리를 노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엄유랑의 속뜻을 모르고 있었다. 주운빈이 보기에 그들이 불쌍히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마혼불존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네 앞에 나선 것은 별다른 뜻이 없다. 네가 황주를 만나려는 것을 굳이 막을 필요는 없다. 다만 과거 우리는 제천신군 갈천악과 천마군림존 백파림에게 일장을 갚을 빚이 있다. 우리는 그 빚을 너에게 받아내기 위하여 너의 앞 길을 막은 것이다." 주운빈은 무심히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어서 덤비시오. 내가 손을 쓰기 시작하면 그대들은 손 쓸 사이도 없을 테니까." "이 찢어죽일 놈이 그래도!" 순간 수라음존자의 전신에서 먹물같은 검은 묵빛이 쫙 퍼져 나왔다. 묵광! 그것은 강기( 氣)가 되어 쏟아져 나오는데 기세는 실로 천지를 가를 만했다. 일순 일시에 온 천지가 새까맣게 변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꽈르르...... 우르르르릉......! 마치 일시에 십만대산(十萬大山)이 무너지는 듯한 묵강기였다. 도저히 이것을 인간의 몸에서 발출되는 공력의 힘이라 할 수 없었다. 수라음존자의 수라마음멸혼공은 낙양 전체를 뒤흔들어 놓고 말았다. 이때, 주운빈이 다섯 손가락을 쫙 펴며 일시에 퉁겨내었다. "심극이류도(心極二流道)! 일순 그의 다섯 손가락에서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오색찬란한 다섯 줄기의 채광이 폭사되었다. 슈우욱! 그 다섯 줄기의 영롱한 광채는 너무 밝아 일시에 묵광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순간 종말! 종말을 고하는 비명은 항상 제종과 같은 것인가? "크아악!" 한(恨)이 들끓는, 억울하고 원한이 깊은 처참한 비명이 수라음존자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동시에 그 지겹던 묵광이 씻은 듯이 걷혀졌다. 수라음존자의 가슴에 조그만 구멍이 다섯 개가 뚫려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고 만져 보았다. "으―! 저주의 지극육류(地極六流)...... 아! 나는 이 무공의 파해를 평생 연구해 왔으나......." 그는 억울한 빛으로 주운빈을 응시하였다. 쿵! 그의 시신이 썩은 고목 무너지듯 무너져 내렸다. 남황마령검이 허탈하게 말했다. "제... 천신군이 펼쳤다 하더라도... 그를 단 일지(一指)에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을......." 그러나 그는 천하를 오시하던 일대의 검마(劍魔)인 것이다. "애송아! 본좌는 과거 천마군림존에게 패했었다." "그랬었소?" "나는 평생 단 한 초식만 익혀왔다." "그렇소이까?" "나의 검은 항상 적의 미심혈(眉心穴)을 가른다." "그렇소이까?" 의미없는 싸움! 명예가 무엇인지 그것을 위하여 평생을 사는 무림인! 남황마령검은 그 명예를 위해 지금 검의 기수식을 취하고 있었다. 주운빈은 씁쓸히 고소를 머금었다. '내가 왜 이렇게 허탈해지는 것일까? 아직 엄유랑도 만나기 전인데....' 그러나 그는 고개를 돌려야 했다. 벌써 남황마령검의 일검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금...... 강부동신법 아! 나의 멸천단일식(滅天斷一式)이......." 순간 주운빈의 우장(右掌)에서 귀기 어린 청광이 발출되었다. 꽈르릉― 꽈꽝! 청광은 남황마령검의 가슴에서 산산이 분산되었다. "크아악!" 한 구의 시신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시신은 갈가리 찢겨져 허공에 뿌려졌다. 마혼불존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운빈! 과연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녔구나." 그의 어조는 진정으로 감탄한 음성이었다. 주운빈이 씩 웃었다. "당신은 제법 안목이 깊구료. 나는 무공 뿐만이 아니라, 용모도 지혜도, 그리고 남을 죽일 때의 잔인한 살심(殺心)도 천하제일이오." "아니다. 모든 것이 천하제일일 뿐이라도 지혜만은 황주에게 필적(匹敵)이 되지 않는다." "후후후......! 그럴까?" "너는 정면으로 부딪치지 말아야 했다." "마혼불존! 모든 일은 결과가 말해주오. 아직은 이긴 사람이 없소. 황주의 승리는 일시적인 것일 뿐이오." "노납은 과거 제천신군 갈천악에게 칠천 초만에 반초를 패배(敗北)한 적이 있었다. 노납은 이미 승산(勝算)이 없음을 안다. 허나 명예는 소중한 법!" 마혼불존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몸을 연속으로 회전시키며 십 장을 동시에 격출했다. 으르르르릉....... 은은한 뇌성이 일면서 기공할 자광(紫光)이 회오리쳤다. "자전윤회십팔겁(紫電輪廻十八劫)!" 수르르르륵! 자광이 주운빈의 몸에 이르러 거대한 회오리 기둥으로 돌변하였다. 이미 주운빈의 주위는 온통 자광 천지 속에 갇혀 있었다. 물론 주운빈은 피하려고 생각도 않고 있었다. 다만 그의 전신을 푸르죽죽한 청광이 아스라히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꽈꽝! 우르르르릉....... 회오리 자광과 천강마라백팔무의 청광이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지면이 쪼개지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주위는 온통 흙먼지로 뒤덮여 암흑으로 변하였다. "으억......!" 마혼불존이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뒤로 퉁겨나는 것이었다. 일순간, 쉬이익......! 한 줄기 실낱같은 청광이 자광 사이로 스며들었다. 파팍! 가벼운 소음과 함께 창호지 찢어지는 듯한 소음이 들렸다. 일순간 주운빈의 입가에 잔혹한 살기가 스쳐갔다. "중원을 위해서......." 그의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기합성이 터져나왔다. "천강마라귀류무!"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엄청난 폭갈이 들리더니 주운빈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지고 그 대신 주위에는 백팔 개 천마신(天魔神)들이 나타났다. 하늘은 온통 백팔 개의 천마신들의 어지러운 난무로 뒤덮였다. 그것은 공포요. 마기였고, 지옥의 울부짖음이었다. 파르르르릉! 무엇이 나타나는 듯한 무서운 굉음이 돌출되었다. 주위에 있는 수십 그루의 거목들이 산산조각(散散組各)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크아악!" 창자가 갈가리 찢기는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그러나 비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마혼불존은 백팔 천마신에 의해서 백여덟 조각으로 찢겨져 난도분시(亂刀分屍)되어 죽었다.


그때를 빌어 주운빈의 발걸음은 이내 대로를 들어서고 있었다. 후두두두둑! 쏴아...... 아.......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온 천지가 일시에 뽀얀 우막(雨幕)으로 덮이기라도 한 듯, 비는 신선했지만 가끔 사람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든다. 그러나 비에 씻겨 점점 피비린내가 가셔져갔다. 돌연 아무 기척도 없이 다섯 줄기의 섬칫한 한광(寒光)이 주운빈의 목을 노리고 짓쳐 들어왔다. 검광(劍光)이었다. 한순간 뻗친 다섯 줄기의 검광의 빠르기란 말로 형용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주운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무심히 오른쪽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슈르르르릉....... 자연스러운 경기의 발출이었다. "크으윽!" 다섯 마디의 비명이 빗속을 뚫고 지옥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주운빈을 노렸던 검광은 시작에 불과했다. 전후좌우, 하늘 땅, 발디딜 틈만 있으면 비비고 들어서서 주운빈을 향하여 살광을 뿜어댔다. 쌔애액......! 검이 날았다. 하나같이 치명적인 극랄하고도 악랄한 살초들이었다. 우르르르릉! 약한 힘이 합해져 거대한 태산을 형성하여 물밀 듯 날아들었다. 쉬이익! 암기(暗器), 지풍(指風) 등 갖가지 살기가 온통 주운빈에게로 쏟아졌다. 주운빈! 그는 눈을 감았다. '황주(皇主)! 네가 나로 하여금 살인을 자행케 만들어 내 심신을 허약하게 만들려 하는구나. 엄유랑! 아버님하고 나는 다르다. 나는 장부가 독(毒)해야 할 때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불현듯 가슴 속에서 뭉클하고 하늘이라도 꿰뚫을 듯한 호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야핫!" 그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한 소리 외침이 터져나왔다. 이어 그의 몸은 사라지고 공포어린 천마신들이 나타났다. 푸르스름한 인광을 띤 백팔 천마신들의 모습은 공포, 바로 그것이었다. 난무(亂舞)! 천마신이 춤을 춘다. 미친 듯이....... 아...... 아....... 그립다! 나의 먹이는 오직 인간의 따뜻한 피이니....... 피(血)! 따뜻한 인간의 피야! 어서 나의 메마른 목을 적셔다오! 마치 대해(大海)의 끊임없이 몰아치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천마신의 백팔난무가 드디어 시작된 것이었다. "크으윽! 아악!" 휘몰아치는 푸른 천마신의 저주! 하늘을 으스러뜨릴 듯하고,바다를 통째로 뒤엎을 듯하다. 도대체 이것은 인간의 무학이라 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늘의 저주라고 불러야 적당한 것이었다. 천강마라백팔식! 천축, 남황, 대막의 흉도들은 천마신들이 춤을 출 때마다 삭풍에 눈보라 몰아치듯 사방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쏴아악! 흩어진 살점과 부서진 뼈마디들 사이로 흐르는 피가 폭우에 씻겨져 내려갔다. "으하하하...... 중원의 혼이여! 영원하리라!" "크악!" 피! 생명을 약속하는 피! 그러나 죽음도 불러다 주는 피의 마혼, 그런 피가 튄다.


"아... 아―!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주운빈은 무아지경으로 저주의 난무를 계속했다. 허공을 누비는 천마신의 그림자는 오직 죽음이었다. 절대마공(絶代魔功)! 천강마라귀원무는 아무도 항거할 수 없는 절대마공이었다. 살인은 절로 지루했으나 끝내 끝이 났다. 중원을 휩쓸었던 흉도들은 온 사위(四圍)에 난도분시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주운빈! 그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 다만....... "엄유랑! 너는 나를 잘 모르고 있다." 제 26 장 영원한 패배! ① 주운빈은 영웅탑 전면에 우뚝 섰다. 영웅탑 아래엔 여전히 빛바랜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바람결에 펄럭이는 한 권의 두꺼운 책자 무려 천칠백여 명에 달하는 중원 무림인들의 명호와 이름이 적혀 있는 바로 그 책자였다. 책자 역시 빛이 바래 누렇게 변해 있었다. 쏴아악! 쏴악! 폭우는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수많은 무림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자는 볼품없이 젖어들었다. 희뿌연 비의 장막(長幕)에 가려 있는 영웅탑! 그 속에 담긴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처음 영웅탑을 보았을 때 주운빈은 중얼거렸다. "영웅탑...... 영웅의 허울 좋은 탈을 쓴 허구의 가면아! 너는 나의 발아래 놓일 자격조차 없다." 그 영웅탑을 다시 찾아온 것이다. 주운빈은 묵묵히 주위를 쓸어보다가 이내 한곳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곳에는 바위가 있었다. 시커먼 돌담 앞에 놓인 바위 위에는 일신에 비단 흑의를 걸친 여인 하나가 앉아 있었다. 그 여인의 무릎 위에는 금(琴)이 놓여 있었다. 일견 폭우 속에도 마치 목욕하는 선녀(仙女)처럼 그윽하고 고아한 미태를 풍겨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주위를 감돌고 있는 분위기가 처절한 슬픔과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웬일일까? 주운빈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씁쓸히 뇌까렸다. "소군. 너로구나." 그렇다. 흑의여인은 바로 이화선자 엄소군이었다. 그때, 엄소군은 처연한 눈빛으로 주운빈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에 젖은 한 떨기 가련한 수선화처럼 그녀는 애처로이 떨고 있었다. 폭우 속의 슬픔을 지닌 여인, 그녀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슬픔을 지니고 있었다. "주랑......." 폭우에 젖어 확연히 드러난 그녀의 미려한 자태, 그 섬세하고 육감적인 유혹 덩어리는 극렬한 서러움에 흐느끼고 있었다. "주랑...... 모든 것을 다 아셨지요?" 주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하게도 모두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매우 어이없는 일이었다." 어이없는 일, 중원 무림을 피로 씻은 인물이 바로 자신의 의부였으니 어찌 어이가 없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어이를 넘어서 주운빈에게는 경악이었다. 엄소군은 파랗게 질린 입술을 벌리며 탄식을 했다. "주랑―! 제 아버님을 용서하세요. 흑......." 주운빈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용서(容恕)? 그의 무엇을 용서하란 말인가? 남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싸운다. 소군의 아버지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는데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나는 그를 용서할 일도, 그도 용서받을 짓을 한 적이 없다." 폭우 속의 강렬한 바람이 엄소군의 전신을 싸늘히 휩쓸고 지나갔다. "아버님은...... 목적을 위하여 올바르지 못한 피를 너무나도 많이 강요하셨습니다." "그런 말로 네 아버지를 모욕하지 마라. 암계(暗計)와 술수(術修)는 병법(兵法)의 으뜸이거늘...... 네 아버지를 모욕한다면 어찌 삼국(三國)의 제갈무후를 영웅이라 칭할 수 있겠느냐?" 오히려 주운빈이 엄한 소리로 엄소군을 질책했다. 엄소군은 주운빈의 말을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주운빈의 말은 어딘가 억지요. 궤변으로만 생각됐다. "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영웅이 아니라 효웅(梟雄)이요. 간웅(干雄)이에요." "소군. 더 이상 말하지 마라. 이것은 남자들의 피끓는 싸움이다. 영웅이든 효웅이든 남자의 싸움은 여인네의 입에서 오르내릴 것이 아니다." 주운빈은 냉정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단지 마음을 억제치 못하고 오열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흐흑―! 주랑......." 주운빈은 더 이상 그녀를 주시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영웅탑의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저 꼭대기에 엄유랑이 있겠지? 아아...... 당신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만 하게끔 만들어 놓았구료." 영웅탑!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영웅탑의 정상을 밟아야 할 차례였다. 영웅탑을 주시하는 주운빈의 위용! 그는 진정 사랑을 아는 의인이요. 영웅인가? 아니면, 바보요 천치 덩어리인가? 주운빈은 왼발 끝으로 지면을 차려 했다. 순간 엄소군이 날카롭게 부르짖으며 그에게 정의 끈을 씌웠다. "주랑, 저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아....... 여인은 이런 순간에도 사랑이 이리 중요하단 말인가? 주운빈은 넋나간 음성으로 엄소군을 응시하다가 실소를 터뜨렸다. "웃지 마세요. 주랑......." 그녀는 심각하게 주운빈을 그러나 애절한 빛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주랑, 제 아버님을 만나지 마세요. 당신이 ���의 일을 돕겠다고 응낙만 하면 영원히 그를 만나지 않고도 평화롭게 살 수 있어요." 주운빈은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소군... 주운빈의 부인이라면 최소한 그런 말을 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녀는 주운빈의 부인이라는 말에 기가 죽은 듯 대꾸를 못했다. "이 주운빈이 어떤 인물인데 하찮은 네 아비에게 무릎을 꿇라 애원한단 말이냐?" 엄소군은 안타까이 부르짖었다. "당신은 제 아버님을 당할 수가 없어요. 그는 당신을 폐인으로 만들기 위해 영려미기채양보음대법(靈麗美技採陽普陰大法)을 딸에게 조차 가르쳐준 악인이에요. 또한 저의 거취를 황태자(皇太子)에게 말해 당신을 끌어들이도록 한 음험한 인물이에요."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여인은, 여인은 사랑을 위해서는 부모의 치부도 서슴없이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주운빈은 냉혹한 신광을 뿜어내었다. "소군. 다시금 입을 벌린다면 아예 너를 죽여버리겠다." "저를 죽인다 해도 소용없어요. 주랑...... 당신은 나를 어떻게 하실 건가요? 흑흑―!"


"너를 어떻게 하다니? 소군. 그럼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당신은...... 영원히 제 정랑입니다." "그럼 됐다.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는다. 너와 나의 사이와 네 아버지하고의 일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설사 내가 너의 아버지를 죽인다 해도 너는 확실히 나의 부인인 것이다." "정랑, 제발 흑흑...... 아버지와의 만남을 피해주세요......." "만남은 어차피 숙명이다." "그럼 주랑, 제가 탄주하는 금음을 한 곡 듣고 올라가세요." 그녀는 주운빈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않고 금을 탄주하기 시작했다. 순간, 금의 위에서 엄소군의 희디 흰 손이 춤추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애월하상곡(悲愛月下想曲)! 불행한 남녀의 만남을 노래한 당나라의 악성 백운자(白雲子)가 지은 가락이었다. 한때가 지나가면 다시 봄이 돌아오고 백 년이 지나가도 봄은 백 번 오련만은, 이제껏 백 년을 산 사람 만나본 일이 없구나. 꽃피는 봄을 맞아 몇 번이나 취했는가? 오늘 하루만은 마음껏 취해보네. 돈 없다 말을 말고서 술 사오라 이르소. 그 애처로운 노래와 곡조가 아스라히 사라지기도 전에 주운빈의 입에서 한 소리 날벼락 같은 일갈이 터져나왔다. "불광어기류(佛光馭氣流)!" 불광어기류! 내지른 폭갈의 여운이 금음의 위를 쫓기도 전에 이미 그의 몸은 빛살처럼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아예 그 신형조차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는 빠름이었다. 순간에 펼쳐진 그의 신법은 단순히 몇 장의 하늘을 날거나 또는, 뛰어 오르는 그러한 신법이 아니었다. 아예 그의 몸은 공간(空間)을 초월(超越)한 듯이 보였다. 거리라든가, 시간이라든가 하는 일반적인 것들을 그는 한꺼번에 날아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림 역사상 주운빈의 사부였던 무명노승(無名老僧) 외에 어느 누가 이렇듯 믿기지 않는 신법을 펼칠 수 있었을까? 그는 일직선으로 뻗치는 빛이 되어 순식간에 영웅탑의 정상에 안착하였다. 실로,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릴 절대무쌍(絶代無雙)의 불문신공이 아닐 수 없었다. 위...... 잉! 쏴아악! 강렬한 비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휘감았다. 거대한 종! 영웅탑의 정상에는 주운빈의 세 배나 되는 거대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영웅탑을 밟은 인물을 무림에 알리는 명예와 영화의 종이었다. "현질, 영웅탑을 밟은 것을 축하한다." 그 종 옆에 앉아 있던 인물, 마혼살유협 엄유랑이 창노(倉奴)한 음성으로 말했다. 주운빈은 애써 무심(無心)하려 했으나 마음이 격동됨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무언의 침묵 속에서 두 인물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매어졌다. 순간, 역시 백의를 입은 엄유랑은 가볍게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꽝....... 때애앵! 뎅뎅....... 고막이 파열되는 듯한 엄청난 종소리가 사위로 퍼져나갔다. 종소리의 여운은 길고도 멀었다.


갑자기, 주운빈은 전신에 감당할 수 없는 피로가 일시에 몰려드는 기분이었다. 그는 엄유랑의 앞에 가서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침묵이 생겼다. 침묵은 짧고도 너무나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거의 살이 붙어 있지 않은 메마른 얼굴 그러나 그 누구도 침범못할 위엄과 기품이 서린 모습, 섬뜩하리만큼 고요한 기운이 내포된 동공, 그가 바로 엄유랑이었다. 그 어느 한군데라도 버릴 곳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야망(野望)을 위해서는 무엇 하나 가리지 않는 일대의 효웅이기도 했다. 드디어, 한일자로 굳게 닫혔던 엄유랑의 입이 벌어졌다. "오늘은 처음부터 술을 가져오지 않았구나." "그렇소." "허허...... 어찌 남자끼리 만나는데 술이 빠져서야 되겠느냐? 이번에는 이 백부가 술을 준비했다." 그는 밑에서 두 개의 술단지를 올려 놓았다. 주운빈은 안개가 뿌옇게 서린 눈으로 엄유랑을 주시했다. '실로 당신은 무서운 사람이오.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지게 될 것이오' 엄유랑은 술 한 동이를 주운빈 앞에 놓았다. "자, 호탕하게 마시자." "사양않겠습니다." 두 사람은 술동이를 들었다. 그리고는 한 말들이 술을 입 한 번 떼지 않고 마셨다. 엄유랑은 소매로 술에 젖은 입가를 쓰윽 닦았다. "크윽! 역시 친구와 마시는 술맛은 역시 좋구나." "우리가 아직도 친구였던가요?" 주운빈은 차갑게 물었다. 엄유랑은 잠시 그를 주시하더니 호탕하게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네가 어떻게 생각하던 나는 영원(永遠)히 너를 친구로 생각할 것이다." 그는 특히 영원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우리는 적입니다." "하하하...... 진정한 적수는 진정한 친구이다. 이 넓은 천하에 나의 적수는 오로지 너뿐이다." "저는 패배자일 뿐입니다." 주운빈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엄유랑을 주시하였다. 엄유랑은 약간 의아한 표정을 띠더니 이내 낯빛을 고쳤다. "진정 네가 그렇게 생각할까? 그렇다면 올바른 생각이다. 너는 패배자(敗北者)이다." 그는 단정적으로 주운빈을 패배자로 불렀다. 엄유랑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탑의 가장자리에 가서 섰다. 그는 등을 내보였다. "나의 신분은 네 아버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의 진정한 신분은 당금 황제인 순무제의 아우이다." 이 놀라운 사실! 그러나 주운빈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제는 그가 어떤 말을 해도 놀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부가 모든 일의 원흉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주운빈에게 생긴 현상이기도 했다. 엄유랑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들었다. 밖은 여전히 억수같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선황(先皇)은 엄청난 바람둥이였지. 그는 밤이면 변복(變服)을 하고 강호에 나와 수많은 여인을 섭렵(涉獵)했다. 나는 그 수많은 여인들 중 하나에서 태어났다." "그런 말을 제게 들려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엄유랑은 갑자기 몸을 주운빈을 향해 돌려세웠다.


"너는 알아야 한다. 내 아버님은 붕어하시기 전까지 원황실을 매우 염려했다. 그것은 원의 국력이 점점 쇠약해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지." 주운빈은 그저 담담히 그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그 분은 원황실을 지키기 위하여 중원의 정기를 말살(抹殺)시킬 계획을 세우셨다." "그 첫번째가 영웅탑을 만들은 것이고요?" "그렇다. 무림인들의 허상, 즉 명예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그들의 습성을 이용했던 것이지." 실로 원황실의 치밀하기 그지없는 안배였다. "영웅탑이 건립된 이래 사실 수많은 중원의 절기(絶技)가 사라지고 많은 고수들이 죽어갔다. 그러나 영웅탑만으로는 부족했지. 선황은 그 뒤의 일을 나에게 부탁하고 돌아가셨다." 주운빈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라 전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비천하게 태어난 몸이었지만 위대한 선황을 위해 모든 짓을 다해야 했다." "백부는 진정한 친구까지 죽였으니까, 그 말이 옳군요." 엄유랑은 무섭도록 안광을 폭사시켰다. "그렇다. 네 아버지는 단 하나인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후후후―!" 주운빈은 지극히 차가운 냉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엄유랑은 그것을 무시해 버렸다. "네 아버지는 위대했다. 그는 나에게 중원복토 한족부흥을 위해서 비밀결사대를 만드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천제회(天帝會)였지요." "천제회? 맞아 천제회지. 제 아버지는 인품, 덕망, 무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만인(萬人)을 발아래 둘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 분은 결코 남을 무시하지 않았고, 어떠한 사람이라도 존경해 주었습니다." 엄유랑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나는 미치도록 싫었다. 그가 내 친구였지만 나는 나 자신보다 뛰어난 인물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님에게 치욕의 누명을 씌웠구료." "흥!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나는 다른 것은 그에게 이길 수 없었으나 음모와 계략은 그보다 뛰어났다." "그것이 아버님과 엄백부, 즉 영웅과 효웅의 차이였지요." "나도 내 목적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백부는 아버님과 진정한 승부를 했어야 했습니다." 엄유랑은 분노로 인하여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나보다 뛰어난 것이 죄이다. 나는 그를 위해 지난 삼십년 동안 스스로 내 몸에 족쇄를 채웠다." "그것은 아버님에 대한 패배감을 감추기 위한 백부의 얄팍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닥쳐라!" "아버님은 당신에게 누명을 씌운 사람이 바로 백부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엄유랑은 들끓는 치욕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미칠 듯이 괴로운 표정이었다. 주운빈은 아무런 감정없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님은 단 하나 단점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분 또한 남에게 결코 질 수 없었던 것이 단점이었습니다." "으―!" 엄유랑은 몸부림을 쳤다. 주운빈의 말은 하나도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도피생활 팔 년 동안 백부님을 이기기 위해 고심(苦心)하였을 것입니다." 점차로 엄유랑은 주운빈의 말에 빠져들고 있었다. "결국 그는 죽음으로써 백부님에게서 승리를 받아낸 것이었습니다. 목숨과 친구의 삼십 년 동안 사라지지 않는 패배감! 이것은 결코 손해보는 장사가 아닙니다." 쾅―! 엄유랑은 탁자를 내리쳤다. 꽈다당....... 탁자와 술동이가 산산조각이 났다. 주운빈은 동요없이 냉랭하게 말을 하였다. "아버님은 결코 죽으면서까지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으......." 엄유랑의 입술 사이로 괴로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주운빈! 그는 혀로 메마른 입술을 적시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을 결코 이길 수 없었던 백부님에게 나의 출현(出現)은 희열이었습니다." "그렇다! 네 아버지에게서 받은 패배를 너에게 갚아야 했지. 그것만이 지난 삼십 년 동안의 치욕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후후후...... 엄백부, 나는 돌아가겠습니다. 차후 나는 엄백부에게 진정한 승부를 걸겠습니다. 아직은 누가 승자인지 모릅니다." 주운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으로 백부와 저와의 만남과 우정은 끝입니다. 이제 적수로서 상면할 수 있기만을 바랍니다." "흐흐흐...... 주운빈아! 이 백부는 너를 보내줄 수가 없구나. 어찌 호랑이를 산으로 보낼 수가 있겠느냐? 그러자 주운빈은 그런 대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를 암습할 생각은 마십시오. 백부님은 무공으로 나를 상대하여야 일초지적(一招支敵)도 되지 않습니다. 나를 암습해서 굴복시키면 백부님의 치욕감만 더해질 뿐입니다." 주운빈은 몸을 돌려 세웠다. 이번에는 그가 등을 내보인 것이다. 그들은 한 번씩 서로의 등을 내보임으로써 상대를 시험하는 것이다. 절대고수(絶代高手) 앞에서 등을 내보인다 함은 목숨을 그에게 맡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엄유랑은 차갑게 안색을 굳혔다. "모습을 보여라!" 그는 영웅탑이 무너질 듯이 고함을 쳤다. 순간 영웅탑 주위로 십여 명의 인영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② 주운빈은 어른대는 그 인영들을 묵묵히 주시하였다. 엄유랑은 그의 옆에 서서 밑을 내려다 보았다. "네 아이들을 잠시 내가 데려다 놓고 있었다." "설랍봉이라던가? 바라공주 말이다. 그리고 황성란, 또 신판자 만소주도 데리고 있었다." 만소주라는 말에 주운빈의 굵은 눈썹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아아...... 만노? 그대는 어찌 납치되었소?" 영웅탑 전면으로 늘어진 노송(老松)들! 그 노송엔 어느샌가 세 사람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대감도(大監刀)를 든 흑의대한들이 있었다. 만약 대한들이 들고 있는 대감도를 밑으로 내려친다면 그 즉시 매달린 사람들은 목없는 사람이 되어 버릴 것이다.


매달린 인영은 바로 자신들의 친인(親人)들이었다. "설랍봉! 오래간만이구료. 황성란, 만소주......." 그들의 오랜만의 해후는 영 모습이 좋지 않았다. 그것도 가까이서가 아닌 이백여 장의 높낮이의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주운빈은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라 이내 담담해졌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냉철한 미소를 띠고 있는 엄유랑을 마주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좋은 수법입니다. 엄백부,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제가 패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지. 그러나 최소한 너를 내 곁에 붙잡아 둘 수는 있지." "백부! 나는 아버님과는 틀립니다. 아버님은 백부님에게 평생 치욕을 안겨 드렸을 뿐이지만 나는 오직 죽음을 내릴 뿐입니다." 엄유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주운빈을 바라보았다. 이어 걷잡을 수 없이 커다랗게 대소를 터트렸다. "네가 나에게 죽음을? 크하하하하핫......." 그의 대소를 주운빈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크하하하......." 주운빈은 묵묵히 영웅탑 아래를 주시하였다. 그들은 모두 혼혈을 찍혔는지 정신을 잃고 있었다. 폭우 속의 그들은 가련해 보일 정도였다. 엄유랑은 주운빈을 무섭게 주시하였다. "주운빈! 지금 네 처지가 어떠한지를 알고 있는가?" 일순 엄유랑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슈슈슈슈슉! 엄유랑의 열 손가락에서는 엄청난 경기를 뿜어내었다. 주운빈은 눈을 감았다. 어깨가 맞닿은 너무나 가까운 지척이라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파파파파팍! 엄유랑이 발출한 경기는 주운빈의 십팔 개 대혈(大穴)을 일시에 찍어 버렸다. "우...... 욱!" 열일곱 개의 대혈이 막히고 한 개의 대혈이 폐쇄되었다. 폐쇄된 혈맥은 바로 상곡혈(傷曲穴)이었다. 주운빈은 휘청했다. 삽시간에 비지땀이 흘러내렸다. 그리고는 전신의 모든 힘이 일시에 빠져 버리는 듯한 허탈감과 동시에 엄유랑은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주운빈아, 이제 너는 영원히 무공을 회복(回復)할 수 없게 되었다." 주운빈은 매우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당신은 평생 이런 짓밖에 할 줄 모르는 위인이오." "흐흐흐...... 아무렴 어떠냐? 이제 나는 너를 원려 계집에게 줄 참이다. 그 계집과 너를 혼인시켜 너를 원황실의 부마로 만들어 주지. 그리고 내 딸 엄소군과 저 계집들 모두를 너에게 주지." "으윽―! 그렇게 한다고 내가 굴복할 것 같소?" "굴복하던 안하던 상관없다. 오직 너에게 모멸감과 치욕을 안겨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주운빈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전혀 틀렸다. '후후후...... 엄유랑. 이것은 내가 바라던 바요. 나의 십팔 경락을 끊어놓고 나의 상곡혈을 폐쇄한다고 내가 영원히 무공을 회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당신의 영원한 착각이오.' 그러나 주운빈의 속마음을 엄유랑이 알 리가 없었다. 다만, 그는 절망감으로 물든 주운빈을 바라보면서 득의의 광소를 터뜨릴 뿐이었다.


"크하하하...... 이제 무림의 일은 완료되었다." "착각하지 마시오. 아직도 중원의 혼은 건재하오." "중원의 혼! 흐흐흐......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힘없는 중원의 혼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혼이 있는 이상 힘은 자연히 생기는 법이오." "흐흐...... 주운빈! 더 이상 착각하지 마라. 이제 내가 황제가 되는 일만 남았다." "흥! 진정 경하할 만한 일이군요." "흐흐흐......." 엄유랑은 주운빈을 옆구리에 끼고 영웅탑 아래로 몸을 날렸다. 휘익! 비조가 하강하듯 여유있는 모습으로 엄유랑은 허공을 가로질렀다. "황제? 크하하하...... 황제? 이 자리야말로 나의 비천한 출생을 보상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닌가? 크하하하......." 엄유랑의 광소는 미친 듯이 허공을 뚫고 퍼져 나갔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그의 대소가 허망하게 들리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주운빈은 회심의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당신은 차라리 나를 죽였어야 하는 것인데...... 황제? 황제가 되시오. 후후후...... 당신으로 인하여 황실은 박살이 나고 황실은 더욱 약해지겠지. 바라던 바요.' 엄유랑은 주운빈을 옆구리에 끼고 폭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을 이어 흑의대한들이 노송에 매달려 있던 주운빈의 친구들을 끼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③ 중원인들은 허탈한 심정을 가누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무림인들 마음 속에 영웅으로 부각된 중원무랑군 주운빈! 그가 무림을 피로 적신 황주. 즉 마혼살유협 엄유랑에 의하여 무공이 폐지되었다는 소문이 무림전역에 좌악 깔리었다. 어둠 속의 무림! 이 어둠 속의 빛이 되어야 할 마지막 보루였던 중원무랑군 주운빈이 암흑으로 만들어 버렸다. 만무궁! 지난 오백 년 동안 무림을 지켜왔던 만무궁! 그런 만무궁을 향해 무림인들은 일제히 침을 뱉았다. 만무궁주 고금제일존 구융천! 더러운 놈! 그는 무림에 발을 붙일 수 없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것은 만무궁주의 비열한 음모가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무위검룡후! 그가 주운빈이 당하고 나자 모든 비리(非理)를 폭로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를 못했다. 아직도 이잡듯이 무림을 뒤지며 살생을 벌이는 새외변방의 무리들! 무림의 거두들을 잃은 무림은 그들에 의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아...... 아....... 이 암흑의 무림에 누가 광명을 가져다 줄 것인가? 무림인들은 과연 어찌해야 옳단 말인가? 이런 와중 속에서 만무궁은 여전히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황주? 이 거대한 음모의 주동자인 황주....... 그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구파일방! 그들은 이대로 완전히 무림에서 사라지고 말 것인가? 아무튼 무림은 완전히 암흑의 늪으로 뒤덮여 있을 뿐이었다. 수없는 살생이 도처에서 자행되는 가운데 세월은 말없이 흘러갔다. 백설.


눈은 이미 사흘 전부터 내리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흰빛 일색일 뿐. 항주성(抗州省)의 큰길 모퉁이에 돌연 죽립을 깊이 눌러 쓴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는 몹시 총총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곤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몹시 경계하고 있는 듯했다. 따가닥 따가닥....... 그의 발자국 소리가 조용한 거리의 정적을 깨뜨렸다. 이윽고 급한 걸음을 옮기던 그는 한 커다란 장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 조심스럽게 장원의 문고리를 두들겼다. 타탕! 탕....... 소리가 울려퍼진 잠시 후 철문의 한쪽에 조그만 구멍이 생기더니 한 쌍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혼세무림(混世武林)!" "중원복토(中原復土)! 빨리 문을 여시오." "귀하는 누구신지!" "개방법개( 法 )!" 장원의 문이 열리자마자 죽립인은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었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외팔이 노인이었다. 그는 장원의 한 누각을 가리키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저리로 가보시오." 죽립인은 누각을 들어가기 앞서 죽립을 벗고 몸에 묻은 눈을 툭툭 털었다. 거지, 그는 다름아닌 개방제자였다. 그런데 이 인물은 웬 사연으로 겉에 화려한 장삼을 걸치고 있단 말인가? 거지는 눈을 다 털고 난 후 그 자리에서 공손히 입을 열었다. "제자, 개방법개, 사존(師尊)을 배알합니다." 순간 안에선 창노하면서도 침중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어서 안으로 들라!" 방 안의 팔선탁자 주위엔 지금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몰골이 꾀죄죄한 봉두난발의 늙은 거지였다. 우측 사람은 이마에 계인이 새겨진 고희(古稀)의 중이었다. 늙은 거지는 커다란 호로병을 들어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술병을 떼면서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법개를 바라보았다. "너는 무슨 일로 왔느냐?" 개방법개는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사존(師尊)께 아룁니다. 드디어 중원무랑군 주운빈 사숙조의 거처를 찾았나이다!" 일순, 봉두난발의 노거지는 두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고 찾았다고?" 노거지의 얼굴에는 답답한 기색은 사라지고 희열이 번져갔다. 이 인물이 누구인가? 노거지는 바로 개방의 대사존(大師尊) 무영신룡개(無影神龍 )였다. 바로 법래천륵사에서 그 즉시 주운빈과 의형제(義兄弟)를 맺었던 무영신룡개였다. 법개는 매우 무안한 기색을 띠며 급히 아뢰었다. "그런데...... 본방의 제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주사숙조께서는 매우 타락했다고......." "타락!" 고희의 노승이 매우 짤막하게 되물었다. 이 노승이 누구인가? 바로 소림의 장문인이며 중원십성(中原十聖)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대광선사(大光禪師)였다. 법개는 매우 죄스러운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을 했다. "그 분은 황궁에 계시는데 무공이 폐지당한 이래로 살이 찌고 매우 타락하였다고......." 무영신룡개는 갑자기 탁자를 내리쳤다. "염려마라. 결코 그 놈은 자신을 타락시킬 놈이 아니다. 노부는 안다. 그 놈에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불굴의 의지가 있음을 말이다. 법개 진위명(陳爲名)!" "예, 대사존!" "너는 전 제자에게 명령을 내려라. 은밀히 몸을 숨기고 결코 자신을 내놓지 말라고 말이다." "예! 제자는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러나 대사존, 또 다른 문제가......." "무엇이냐?" "중원을 휩쓸었던 새외변방의 흉악도들이 일제히 만무궁으로 향하고 있답니다." 순간, 무영신룡개와 대광선사의 두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흐흐...... 이제야 우리가 바라던 대로 되는구나. 알았다 물러가라." "예. 대사존!" 법개 진위명이 물러난 후 무영신룡개와 대광선사의 희열의 눈물이 허공에서 어우러졌다. "대사! 이제 바라던 대로 되어가오." 그러나 대광선사의 눈빛이 희열에서 아스라히 암울으로 변해갔다. "아미타불...... 그러나 노선배님! 중원의 힘이......." "괜찮소 대사. 힘은 기르면 되오. 십 년이고 백 년이고 간에...... 힘은 또 생기오." 대광선사는 무어라 말을 할 듯 하다가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대사,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중원무랑군 주운빈 그 녀석은 결코 중원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오." "아미타불......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으련만......." 밤은 깊어만 가고 눈은 점점 더 높게 쌓여야만 갔다. ④ 적지 않은 몇 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의 중원무랑군 주운빈은 어떻게 변해 있는가? 하늘을 찌를 듯한 누각(樓閣)! 날아갈 듯한 처마, 눈이 부실 듯 화려(華麗)한 단청(丹靑),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을 듯한 연이은 낭하(廊下), 정녕, 화려의 극치가 모두 이 한 곳에 모인 듯하다. 이곳을 형용하는 말로 구중궁궐(九重宮闕)이란 말이 있었다. 원황성(元皇成)! 당금 황제 순무제가 기거하고 있는 황궁(皇宮), 그곳이 바로 이곳인 것이었다. 그 자금성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높이 솟은 건물 하나가 서서히 떠오르는 만월(滿月)에 물들고 있었다. 부마전(駙馬殿)! 이곳은 구중궁궐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부마전이었다. 그 부마전 내부 가장 깊숙한 곳에 호화롭기 이를데 없는 방이 있었다. 아니, 방이라 하기보다 대청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정도의 크기였다. 천정을 떠받치고 있는 아름드리 기둥은 서역(西域) 특산의 천향자단(天香紫檀)이었다. 구름을 뚫고 승천(昇天)하는 용의 모습이 정치(精致)하게 조각되어 절로 감탄을 우러나오게 했다. 천향자단은 독특한 향기를 발산하는 그윽한 향나무였다. 어디 그뿐인가? 사방의 벽은 마치 옥을 깎은 듯 투명하고 금을 칠한 듯 휘황했다. 그런데, 거기에 걸린 그림과 글씨들은 모두 보기 드문 절품이 아닌가? 호화로움과 예(藝)의 미(美)가 한데 어울린 곳이었다. "크하하하...... 요것들아...... 네것들이 모두 숨는다고 내가 못찾을 줄 아느냐?"


흰 천으로 눈을 가린 한 인물이 손을 허우적대며 방을 헤매이고 있었다. 매우 비대한 인물이었다. 전신에는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곤룡포를 입고 있었다. 손은 여인보다 더 희었다. 얼굴은 살이 쪘으나 관옥같이 하얗다. 하얀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니 마음이 매우 탐욕으로 물든 인물임을 말하고 있었다. 대청 기둥기둥 사이에서 여인들의 교소가 연이어 들렸다. "호호호...... 부마님! 어서 저를 잡으세요." "호호호...... 취련은 여기 있답니다." "호호호...... 어서 저를 잡으세요. 그러면 제가 오늘 부마님을 즐겁게 해드리겠습니다." 맑은 여인들의 교태로운 교소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부마? 비대한 인영은 음탕(淫蕩)한 괴소를 터뜨리며 계속 대청 곳곳을 누볐다. "흐흐흐...... 요것들아. 모두 나오너라. 내 모두 한꺼번에 너희들을 즐겁게 해주리라. 흐흐흐......." "호호호......." "여기예요....... 호호호......." 서너 명의 여인이 부마의 손길을 피해 구석으로 몰렸다. 궁장차림의 여인들! 그녀들은 모두 황실의 시녀(侍女)들로서 하나같이 경국지색들이었다. "흐흐흐...... 취련아! 이년! 아무데도 가지 말고 그곳에 있거라." "호호호......." 여인들 중 하나가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부마님은 오직 취련밖에 모르시나봐. 여기 월빈(月嬪)이도 있답니다." "취련이고 월빈이고 모두 좋다. 흐흐흐...... 요놈!" "어머낫!" "흐흐흐...... 잡았다." "호호호......." 부마는 동시에 두 명의 여인을 붙잡았다. 그들은 쓰러지듯 넘어졌다. "흐흐흐...... 어떤 계집인지 어디 보자." 그는 눈을 가린 흰 천을 벗겨 내렸다. 얼굴이 나타났다. 살이 찐 얼굴에 흐릿하면서 음탕함이 물들은 두 눈, 개기름이 흐르는 얼굴, 많은 살이 쪄서 알아보기 힘든 얼굴의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옳지. 역시 취련하고 월빈이라는 계집이구나. 흐흐흐......." "어멋! 부마님도......." "호호호...... 간지러워라!" 여인들은 앙탈을 부리는 듯 하면서 그의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흐흐흐...... 언제 만져도 촉감이 뭉클하구나." 그는 거칠게 두 여인의 전신을 더듬기 시작했다. "흐으...... 음......." "아이...... 부...... 마님...... 흥......." 순간, 같이 숨박꼭질을 하던 대여섯 명의 시비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호호호......." "핏! 부마님은 언제나 저 애들만 귀여워 한다니까?" 시비들, 너무나 아름다워 눈이 시린 여인들은 손뼉을 치며 아쉬워했다. "흐흐흐...... 그럼 너도 이리로 오너라!" "어머나!" 한 여인이 다시 쓰러졌다.


"흐흐흐......." "부마님! 저는요!" "저도 즐거움을 주세요. 부마님, 호호호......." 어우러지는 한 남자와 대여섯 명의 여인들. "헉...... 헉...... 요년들아...... 흐흐흐......." 부마는 거칠은 손으로 시비들의 몸을 떡 주무르듯 주물러 갔다. "흐으응......." 여인들은 전신을 비비꼬며 부마의 거칠은 애무를 거침없이 받아갔다. 이 순간,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인물들이 있었으니....... 제 27 장 바보가 된 영웅, 그러나...... ① 만소주! 그는 더할 수 없이 침중한 얼굴로 방 안을 보고 있었다. "아...... 아...... 주공......." 황성란, 그리고 설랍봉! 두 여인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얼굴은 수척하였다. 빛바랜 창호지처럼 핏기없는 메마른 얼굴들이었다. 전 중원의 꽃이었던 화중화(花中花) 중원제일미 황성란, 그녀의 미모는 여전히 아름다왔으나 결코 예전같지 않았다. "아아―! 주... 랑... 흑...... 흑......." 설랍봉! 처음으로 주운빈의 마음을 파고 들었던 천축 여인. 천축 바라궁의 원한도 갚지 못한 채 이곳에 갇혀 무상(無常)한 세월만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정랑이라는 자는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었다. "주랑...... 여... 보...... 흑...... 흑......." 엄소군. 요염한 여인. 사내의 품을 그리워 하면서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자신을 미워하던 여인. 그러나, 오직 한 남자만을 위해 몸과 마음을 열었던 여인! 욕망의 제물이 되었으나 천하에 둘도 없는 영웅의 사랑을 받았던 이화선자 엄소군. 그녀는 덧없음을 한탄하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주랑, 어서 깨어나 저를 죽여...... 주세요. 흑...... 흑......." 그녀는 오로지 오열을 터뜨릴 뿐이었다. 어머니가 받지 못했던 사랑을 그로부터 차지했을 때 그녀는 그 얼마나 희열에 몸을 떨었던가! 그렇다면, 아름다운 시비들과 어우러져 육체의 향락을 누리는 인물은? 비대의 몸뚱이를 마음껏 흔들어대는 저 ���물은....... 바로 주운빈이었다. 눈빛은 초점을 잃었으나 너무나 음탕했다. 전신에 살이 쪘으며 비대하기 이를데 없었다. 지나간 몇 달 동안 주운빈은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웠으며 향긋한 살내음나는 계집들과 어울려 향락의 세월을 보냈었다. 무공이 전폐된 이후 그가 황궁에 이끌려와 한 일이라고는 오직 술과 기름진 음식, 그리고 여인들과 정을 통한 것 뿐이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의백부(義佰父)인 엄유랑에게 혈을 제압당해 황궁(皇宮)으로 끌려 온 지가....... ② 황궁(皇宮). 층층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의 휘어진 처마 끝에 색색의 궁등(宮登)이 불을 밝혔다. 축등(祝燈)이었다. 그 축등은 인륜지대사(人倫支大事)를 알리는 등이었다. 바로 홍등가례(紅燈佳禮)를


의미하는 등이었다. 원앙축수( 鴦祝壽). 바로 주운빈과 원려공주의 혼례식(婚禮式)이 거행된 것이다. 온 황궁(皇宮)이 하객(賀客)들의 축언(祝言)으로 꽃바다를 이루었다. 밤이 되었다. 그렇게 밤이 찾아왔다. 화촉(華燭)의 밤이 되었다. 원앙침실(鴛鴦寢室). 천하의 모든 화려함이 이곳에 모인 듯 극히 화려한 침실이었다. 사르르....... 언제부터인지 화촉(華燭)의 소리없는 은은한 설레임은 화미(火尾)를 사르고 있었다. 주운빈과 원려공주는 간단한 주안상을 마주한 채 잠시 침묵속에 잠겨 있었다. 주운빈. 그는 술잔을 들고 있었다. 이는 바로 화촉동방의 은은한 즐거움을 예고하는 합환주(合歡酒)가 아닌가?. 원려공주의 한쌍의 아름다운 두 눈이 뇌쇄적인 유혹의 빛으로 반짝거렸다. 유혹의 꼬리가 눈빛을 타고 콧등으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콧등에 머물렀던 유혹의 꼬리가 살짝 화려한 몸짓으로 요화(妖花)인 양 되어 있는 붉은 입술로 미끄러져 내렸다. "호호호...... 주운빈 네놈에게 이런 날이 있을 줄이야....... 진정 몰랐을 것이다." 주운빈의 시선이 맥없이 흔들렸다. 원려공주의 교소는 점차 매끄러운 기름기를 머금어 갔다. "주운빈. 이제 전일의 빚을 갚아주마." 그녀의 눈. 전율할 정도로 요염(妖艶)한 음모의 빛을 지니고 있었다. "으음......." 문득 주운빈의 입에서 극히 무거운 침음성이 터졌다. 이 순간 그가 무엇이 어찌 되었단 말인가? 이미 일신의 내력(內力)은 완전히 폐지당해 있고 더욱이 원려공주와 이토록 화촉동방에 이르러 있으니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한심한 지경이군.......' 입꼬리에 참담하도록 허탈한 고소(高笑)가 머금어졌다. "호호호 주운빈...... 아니 이제 본 공주의 하늘같으신 낭군(郞君)이신 주랑......." 오오....... 마지막 한마디 주랑....... 원려공주의 그 한마디를 콧소리인 양 흥얼거렸다. "주랑. 그래 이제 그대는 본 공주의 주랑이지......." 정교하게 다듬어진 옥수를 내뻗었다. 옥수는 거침없이 합환주(合歡酒)를 들었다. "호호호...... 주랑. 그대는 영리하게도 본 공주의 품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요염하게 웃었다. "호호...... 이번 만큼은 본 공주의 품을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합환주를 주운빈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주랑, 이 합환주...... 여기에는 천일취혼환락산(千日醉魂歡樂散)이 들어 있다. 자 마셔라." 끈적끈적한 환락이 감도는 어투. 주운빈은 절망감에 몸부림쳐야 했다. "아...... 아......." 가슴 속의 정한을 토해내는 듯한 탄식이 터져나왔다. 허나 한순간, 주운빈의 눈가에는 뭐라 필설할 수 없는 무서운 섬광이 번뜩었다.


천일취혼환락산이 든 합환주를 주운빈의 턱밑에 가져간 원려공주는 전신을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무공이 폐지당한 채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주운빈이었지만, 과거 주운빈의 위세가 어떠했던가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껴본 그녀였다. 허나, 누가 말했던가?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원려공주는 주운빈이 이러한 표정을 지으면 지을수록 복수의 집념이 더욱 일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복수의 쾌감을 맛보게 하였다. 그녀는 독녀(毒女)요 농염한 요부였다. "흐흐! 주랑 자 어서......." 그녀는 주운빈의 턱에 합환주를 부으려 하였다. 순간 주운빈은 어떠한 생각인지 돌연 합환주를 원려공주의 손에서 나꾸어챘다. 이 돌연한 행동. 원려공주는 의아한 듯이 주운빈을 바라보았다. 주운빈의 입가에 자조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어서 그는 주저하지 않고 천일취혼환락산이 든 합환주를 거침없이 목으로 넘겨 버렸다. 원려공주는 이 뜻밖의 상황에 망연히 주운빈을 응시하였다. 주운빈. 그 역시 원려공주를 응시하며 괴이한 미소를 떠올렸다. "공주, 그대는 아오. 상대가 반항치 않는 복수극의 허망감을......." 원려공주는 잠시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멍하니 주운빈을 응시하였다. 주운빈의 입가에 비웃음이 감돌았다. "네년은 본좌가 반항을 하면 할수록 복수의 쾌감을 만끽하겠지. 그토록 갖고 싶었던 남자를 꺾는다는 재미도 그럴 듯 하겠지....... 후후......." 주운빈은 계속해서 말했다. "허나 본좌는 네년에게 결코 그러한 쾌감만은 줄 수가 없다. 영원히 말이다." 환락과 쾌감에 젖어 있던 원려공주의 안색은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네놈은 대체 무슨 꿍꿍이 속을......." 주운빈의 시선이 점점 음탕하게 변해갔다. "공주는 음양산에 중독되어 쾌락에 몸부림쳤던 과거의 일이 생각나지 않소이까? 나 역시 그러할 것이오. 공주의 뜻대로 말이오." 순간 원려공주는 뭐라 필설할 수 없는 모멸감에 전신을 떨어야했다.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처절한 패배감의 전율로 인하여 뼈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러한 그녀의 마음을 아는 듯 주운빈은 계속해서 조롱했다. "공주, 내 몸뚱이는 벌써 달아오른 것 같소이다. 허나 내 본 정신만은 달아오지 않을 것이오. 난 이젠 천일취환락산의 약효로 인하여 천치로 변할테니까. 으하하하......." 주운빈은 허탈한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마치 백수의 왕인 범의 울부짖음이던가? 그것은 원려공주의 가슴을 산산이 쪼개는 것이었다. "주운빈, 너는 끝까지 본 공주를......." 그녀는 주춤거렸다. 주운빈의 얼굴에 천일취혼환락산의 효력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흐흐흐......." 음탕한 괴소를 흩날리는 주운빈. 이 순간, 원려공주의 눈에는 그렇게 추악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안돼......." 허나 이미 주운빈은 그녀의 무르익은 육체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이어 그의 숨결은 거칠게 그녀의 얼굴 위로 부어졌다. 관능으로 뭉쳐진 요부 원려공주. 그녀는 이 순간 만큼은 처절한 패배감으로 주운빈을 거부하고 싶었다. 정신적으로는 거부하면서도 감응을 일으키는 여인의 육체. 그것은 남자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하나의 신비였으며 여인만이 가질 수 있는 불가사의였다.


뜨거운 숨결이 오갔다. 찌이-- 익! 여인의 신비를 가린 백색 나삼이 여지없이 찢어져 내린다. 깜박거리는 황촛불. 그것은 여지없이 여인의 눈부신 나신을 어루 만진다. 너무도 하얗고 풍염한 나신이다. 우아한 목의 선. 도발적으로 솟아오른 젓가슴. 그것은 너무도 풍만하고 팽팽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그 위에 맺힌 두 알의 버찌빛 열매. 주운빈의 음탕한 시선은 점점 밑으로 흘러갔다. 우유빛 평원, 그곳을 지나, 주운빈은 일순간 천지가 정지되는 것 같은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만월의 호선인 양 둥그런 호선을 그리며 풍염하게 퍼진 둔부. 그것은 손바닥 만한 조그만 천에 의하여 찢어질 듯 부풀어 올랐다. 손바닥 만한 백색 천. 취한 듯 그것을 응시하는 주운빈은 무의식 속에서 생각해본다. 요술이련가? 이 조그만 천으로 어떻게 이토록 풍염한 국부를 가릴 수 있을까? 또 이토록 소중한 곳을 이 조그맣고 귀여운 천으로 가린 여인의 방심, 그것은 너무도 앙큼할 정도로 귀여운 것이 분명했다. 이러한 생각은 더욱 사나이의 관능을 자극케 하였다. 찌이-- 익! 사나이를 거부할 수 없는 욕망에 허물을 벗어내렸다. 이어 사나이는 신선하게 요동치는 여인의 나신 위로 쓰러졌다. 그의 뜨거운 입김이 여인의 앵두빛 입술로 부어진다. 달콤한 타액! 미끈한 감촉, 사나이의 살육은 달콤한 샘물을 찾아 여인의 입속으로 흘러갔다. 그리곤 여인의 뭉클한 혀를 자신의 입 안으로 흡입하였다. 원려공주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도 농염한 교성으로 변하였다. 주운빈의 행동은 더욱 거칠어졌다. 그는 짓궂은 악마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은 점점 밑으로 이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출렁거리는 육봉. 상큼한 유향 내음이 그의 후각을 유혹하였다. 사내는 여인의 육봉 위에 뜨거운 숨결을 부어넣는다. 그리곤 이어 버찌빛 열매를 건드려 보았다. "아...... 아......." 그녀는 갓 잡은 인어처럼 전신을 비틀었다. 그리곤 사내를 자신의 깊은 곳으로 유도하였다. 사내는 말 잘듣는 어린 아이처럼 그녀를 탐닉해갔다. 한순간, "아...... 싫어...... 요." 거부의 교성, 허나 그녀의 두 눈은 꿈속인 양 가느스름하게 떠진 채 도화 빛으로 물들어갔다. 사내는 더 이상 욕망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여인의 바램이기도 하였다. 사내의 건장한 몸이 여인의 육체를 깔아뭉갰다. 잔인한 몸부림이었다. 여인의 눈가에 찬연한 햇살이 가득찼다. 눈이 부셨다. 여인은 살며시 두 눈을 감는다. 사내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연소하며 꺼져버리고 만다. 천지가 정지되는 것 같은 침묵이 신방에 감돌았다. 어느새 방 안의 등촉 불빛은 꺼져버리고, 거칠은 숨결은 고른 숨소리로 변해 있었다. 주운빈은 그녀의 몸 위에서 죽음인 양 깊은 나락의 늪으로 빠져 있었다. ③ 다음 날, 주운빈은 침상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띵 했다. "어! 머리가 왜 이렇게 무거... 울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와 어우러져 질펀하니 육체의 향락을 벌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흐릿한 눈을 들어 주위를 보았다.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방이었다.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자신의 몸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 아닌가!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나도 부끄럽지가


않았다. 이때, 방문이 열리며 화사한 옥용의 궁장미녀가 들어섰다. "호호호...... 부마! 이제 깨어나셨나요?" "어......." 주운빈은 잠시 놀란 듯 멍한 눈으로 들어선 미녀를 주시하였다. "아...... 공주였구료." 들어선 여인은 바로 희대의 탕녀 원려공주였다. "그래요. 바로 당신의 부인인 원려예요." "어서 오시오, 부인!" 주운빈은 히죽 웃으며 바보스런 표정으로 원려공주를 맞아 들였다. "흐응...... 아이, 이게 뭐예요? 다 벗은 알몸으로 말예요. 부끄럽지 않으세요?" "흐흐...... 그게 무슨 상관이오. 부부간에 벗은들 어떻소?" 그는 원려공주의 풍만한 젖가슴을 움켜 쥐었다. "공주―!" "흐응......." 원려는 콧소리를 터뜨리며 주운빈의 알몸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러나 내심은 틀렸다. '호호...... 주운빈! 이 개같은 놈아! 조금 있으면 너에게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주리라.' 원려공주는 속으로 칼을 갈았으나 얼굴은 음탕한 흥조를 띠고 있었다. "공주―! 어서......." 주운빈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그녀의 치맛자락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순간, 원려공주는 매정하게 주운빈의 손을 뿌리쳤다. "치워라!" 주운빈은 움찔했다. "왜! 왜 그러...... 시오...... 공주?" "공주? 호호호...... 모두 이리 들어오너라!" 원려공주가 밖을 향하여 냉랭하게 외쳤다. 순간, 설랍봉, 황성란, 엄소군. 만소주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앗!" "아니...... 주랑!" "주공!" 그들은 각기 놀람에 차 부르짖었다. 알몸으로 원려공주를 껴안고 있는 주운빈! 그 몰골이 얼마나 해괴한가? 그는 몹시 멍한 얼굴로 들어선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려공주는 부드러운 혀로 주운빈의 목덜미를 핥고 있었다. "흐응―! 여...... 보......." "공...... 주......." 주운빈은 그녀의 비릿한 콧소리에 서슴없이 그녀의 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아... 앗! 주랑......." "주랑......." 그들은 일시에 할 말을 잊었다. 지금의 심정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으랴! 그녀들과 만소주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가지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원려공주는 그들을 바라보며 새하얀 웃음을 띠었다. "호호...... 왜들 고개를 돌리느냐? 자, 보아라. 너희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주운빈이 여기 있지 않느냐?"


""흑...... 주랑......." 그녀들은 모두 얼굴을 가린 채 오열을 터뜨렸다. 만소주는 두 눈을 꽉 감은 채 굵은 눈물을 흘렸다. "으―! 주...... 공...... 어쩌다 이런 꼴을 당하셨소이까? 주운빈은 그들이 왜 갑자기 우는지를 몰랐다. "당신들은 왜 우시오?" 원려공주가 주운빈의 목을 껴안으며 말했다. "부마, 당신은 나의 무엇이지요?" 주운빈은 가슴을 딱 펴고 말을 하였다. "그게 무슨 말이요. 나는 어엿한 공주의 남편이 아니오?" "그럼 제 말을 들으셔야지요?" "물론이오." "그럼 당신은 방 안을 기면서 개소리를 내세요." 주운빈은 입을 헤 벌렸다. "흐흐...... 공주! 그거야 어렵지 않소. 공주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내 무슨 짓을 못하겠소." 주운빈은 침상 아래로 내려오더니 벌거벗은 몸으로 방 안을 기기 시작하였다. "멍...... 멍멍멍......." 그는 정말로 입으로 개소리를 내면서 방 안을 기어 다녔다. "주랑!" 황성란은 비명에 가까운 소성을 지르면서 주운빈에게 달려 들었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주랑." 이때 주운빈에게 뛰어들려는 황성란을 향해 원려공주가 일장을 날렸다. 펑! "으악" 황성란은 비명과 함께 피화살을 뿜으며 뒤로 나가 떨어졌다. "주랑......." "주랑! 이러시면 안돼요. 흑......흑......." 설랍봉과 엄소군도 그를 향해 뛰어 들었다. "저리가지 못할까? 더러운 계집들아!" 팍! 원려공주는 가차없이 그녀들의 얼굴을 때렸다. "아...... 악!" "악!" 그녀들은 얼굴을 감싸며 나뒹굴어졌다. 원려공주가 서릿발보다 더 차가운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천한 계집들! 누구를 정랑이라 부르며 껴안으려는 것이냐?" "주랑......." "여...... 보...... 흑흑......." 그녀들은 넋을 잃고 통곡을 했다. 이 비참한 현실! 천하를 내 발아래 두리라던 그 호쾌한 기상은 어디로 가고 한 음탕한 계집의 노예가 되었단 말이냐?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닥쳐라! 어느 안전이라고 울음을 터뜨리느냐!" 만소주는 아랫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주...... 공......."


어찌나 강하게 물었는지 피가 흘러 내렸다. "멍멍...... 멍멍......." 천일취혼환락산은 확실히 무서운 약이었다. 주운빈은 천치가 되어 아무것도 모르고 오직 원려공주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다. 그 약의 무서움이란 이토록 커다란 것일까? 방 안의 상황은 너무나 비참했다. 원려공주! 너무나 지독한 여인. 그녀는 끝도, 한도 없이 계속된 모욕을 주운빈에게 주고 있었다. "부마! 저의 발바닥을 핥아 주시겠어요?" 주운빈은 방 안을 기다말고 원려공주에게로 다가갔다. "헤헤...... 물론이오. 공주! 내 어찌 부인의 청(請)을 마다할 수 있겠소이까?" 원려공주는 새하얗게 웃으며 발을 내밀었다. 너무나 악독하고 잔인한 웃음이었다. '주운빈! 네놈에게 이런 치욕의 날이 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여인의 발! 그녀의 발은 작고 섬세했다. 뽀얀 피부가 보기만 해도 음욕을 돋구었다. 주운빈은 소담스럽게 그녀의 발을 잡으며 혓바닥을 갖다 대었다. 그는 핥았다. 그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친 듯한 교소를 터뜨렸다. "으호호호호...... 역시 당신은 나의 착한 남편이에요....... 호호호......."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걷잡을 수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통쾌했다. 그러나 그녀가 전혀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아니, 그녀뿐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여태까지 멍청하고 흐릿하던 주운빈의 두 눈에 너무나 싸늘한 한광이 번뜩이는 것이었다. 살기! 그 한광은 살기라 말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후후...... 원려, 이 천한 계집아! 내가 누구인가? 나는 바로 주운빈이다.' 그러나 그 한광은 너무나 빨리 사라지고 그는 열심히 그녀의 발바닥을 핥았다. "흐흐흐...... 어떻소? 공주, 기분이 좋소?" "부마! 당연하지요. 호호호......." 원려공주는 지금의 기분을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법래천륵사에서 주운빈에게 당한 망신을 이렇게 풀고 있는 것이었다. "으흐흑...... 주랑! 어찌하여 이런 꼴이 되었단 말입니까? 흑흑......." "주랑! 흐흐흑......." 황성란, 설랍봉, 엄소군 그녀들은 미친 듯이 오열을 터뜨렸다. 이 설움과 고통을 어떻게 다 하랴. 엄소군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악독한 놈......." 그녀가 저주하는 악독한 놈이란! 바로 그녀의 아버지인 마혼살유협 엄유랑이었다. 그는 주석빈에 대한 패배감으로 인하여 그를 열렬히 사랑했던 섭유린을 가차없이 유린했다. 그것은 주석빈에 대한 저주였다. 불행의 씨앗은 그때 잉태되었다. 엄소군! 그 불행한 씨앗이 바로 이화선자 엄소군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엄유랑은 원하지 않았던 자신의 딸마저도 가차없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쓸어 넣은 것이었다. 원려공주가 참혹한 눈으로 그들을 쓸어 버렸다. "호호호...... 부마! 저것들이 매우 시끄럽게 구니 때려 주세요. 아주 힘껏 때려주세요." "알았소. 공주!" 주운빈은 마치 말 잘 듣는 개 이상으로 그녀의 말에 복종을 했다. 천일취혼환락산은 중독된 후 교합을 하고 난 여인만의 말만 듣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주운빈이 오죽


말을 잘 듣겠는가? "이 천한 계집들아! 감히 뉘 앞이라고 이토록 시끄럽게 울고 있느냐?" 찰싹! 찰싹! 그는 개패듯 그녀들을 두들겨 팼다. 비록, 무공이 상실되었다 하나 그의 손길은 매섭기 이를데 없었다. "아...... 악......." "으...... 음......." 그녀들은 너무나 아팠다. 맞아서 아픈 것이 아니라 이지를 상실하여 천한 계집의 노예가 되어 버린 정랑 때문에 마음이 너무나 서러워 아팠다. 찰싹! 찰싹! 짝! 주운빈은 가차없이 그녀들을 팼다. 보다 못한 만소주가 그녀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주공!" 그도 역시 무공을 잃었으나 천하의 공공문주 만소주였다. 그의 지닌 바 위엄은 여전한 것이었다. "어......." 주운빈은 움찔하여 겁먹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가 보는 만소주란 태산과 같은 위엄을 지닌 인물이었다. "주공! 그 분들을 때리려면 차라리 나를 때리시오......." "어......." 주운빈은 완전히 겁을 집어 먹고 비칠비칠 뒤로 물러났다. 순간, 원려공주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걱정할 것 없어요. 저 놈도 당신의 종이랍니다. 저만 믿고 저 놈을...." "그... 그래도...... 괜찮을까?" "호호...... 괜찮고 말고요. 그는 부마가 때려도 전혀 반항하지 않을 거예요." 주운빈은 엄한 표정을 하고 가슴을 딱 폈다. "이 놈! 네가 감히 원황실의 부마인 나에게 호통을 지르다니......." 팍! 그는 주먹으로 만소주의 얼굴을 갈겼다. 그러나 만소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허나 그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서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주공! 어서 더 때리시오." "흐흐흐...... 이 놈이 그래도......." 퍽! 퍽! 그는 만소주의 전신을 가릴 것 없이 때렸다. "주공......." 만소주는 그대로 서서 다만 피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이 정경을 바라보는 인물이 있었다. 엄유랑, 그의 옆에 청수한 모습의 중년 선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매우 고귀한 신분을 지닌 듯 매우 수려한 젊은이가 곤룡포를 입고 있었다. 중년선비는 신수패황검 유세옥이었다. 고귀한 기품의 젊은이는 바로 삼황자(三皇子)였다. 엄유랑은 괴이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흐흐흐...... 주석빈! 네 자식 놈의 몰골이 보이느냐?" 유세옥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삼황자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흐흐흐...... 중원무랑군 주운빈을 일찍 만나보아야 했을 것을......." 그의 어투는 주운빈과 겨루어 보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아쉬운 감정이 들어 있었다. 엄유랑은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흐흐흐...... 어린 놈! 너같이 어리석은 놈이 욕심은 많아 감히 황제의 지위를 노리다니.' 그들은 서로 각기 다른 생각을 하면서 주운빈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운빈은 여전히 알몸이었다. ④ 어둠이 깔린 밀실에 은은한 황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화려한 팔선탁을 마주하고 엄유랑과 삼황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은근한 불빛에 비친 두 사람의 얼굴은 음산하기 이를데 없었다. 삼황자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황주의 다음 계획은 무엇이오?" "흐흐흐...... 황제를 없애는 일만 남았소!" 일순, 방 안에 냉랭하기 이를데 없는 찬바람이 감돌기 시작했다. 삼황자! 이 권력의 욕심이 지대한 인물은 황주의 말에 대경했다. "아니 황주, 황제인 내 아버님을 죽인단 말이오?" "그렇소! 황제를 죽여야만 당신이 손쉽게 황제가 될 수 있지 않겠소?" 이 너무나 엄청난 말에 삼황자는 질려 버렸다. 황주의 음산한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이 비린내나는 애송이가 어떻게 황제의 지위를 노리고 있을까?' 삼황자는 심호흡을 크게 하면서 낯빛을 평정시켰다. "황주! 당신은 황태자(皇太子)만 죽여주면 되오. 그 다음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오." 엄유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삼황자! 황태자가 그리 죽이기 쉬운 인물인 줄 아시오? 그의 곁에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건곤오절(乾坤五絶)이 귀신도 모르게 따라 다니고 있소." "그것은 본좌도 익히 아오. 그러나 황주라면 능히 쉽게 해낼 수 있소." "흐흐흐...... 그거야 물론 그렇지. 삼황자! 우선 본인을 팔십일만 금군총통령으로 봉하시오." 삼황자의 낯빛이 다시금 변했다. 팔십일만 금군총통령! 이 자리가 어느 자리인가? 바로 원의 군(軍)을 총괄지휘하는 구문제독의 자리가 아닌가! 단 한마디면 원의 국운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황주는 상체를 굽히며 말했다. "흐흐...... 삼황자! 황주인 내가 금군총통령이 되어야만 당신이 원하는 황제의 지위를 손쉽게 구해줄 수 있소." "음......." 삼황자의 안면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으...... 늑대인 줄 알았더니 이 놈은 간 큰 호랑이였구나.' 황주는 은근하게 말했다. "당신의 세력인 좌우상을 움직이면 황태자(皇太子)라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오." "음......." 삼황자는 침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엄유랑의 말대로 좌우승상을 움직이면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황주가 병권을 쥐고난 뒤의 후환이 두려울 따름이었다. 엄유랑은 그러한 그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후환이 두려운 모양인데 그 점은 염려 놓으시오. 본좌는 결코 다른 것에는 욕심이 없소." 엄유랑의 눈은 궤계로 인하여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약간 수척한 듯한 얼굴이 귀기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삼황자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였다. 이마에 배이는 땀방울이 더욱


굵어졌다. 엄유랑이 은근히 그를 부추겼다. "그만한 배포 없이 어찌 황제가 될 수 있소?" 이 말이 커다란 힘이 되었는가? 삼황자는 조금 더 깊이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대신 황제를 모살하는 일은 하지 마시오." "시일을 택하겠다면 더욱 좋소." "대신 빠른 시일 안에 황태자를 죽여 주시오." "알았소. 삼황자! 그런데 황태자는 언제 돌아오게 되어...?" 황태자 즉, 적황자는 지금 멀리 서역에 나가 있었다. "적황자는 닷새 후에 돌아오게 되어 있소." 엄유랑의 눈빛이 음산하게 빛났다. "그렇다면 사흘 후 황제가 직접 어전에서 본좌를 금군총통령에 봉직하도록 일을 꾸미시오." 삼황자는 애써 태연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대답을 하는 삼황자는 돌연 싸늘한 살기를 폭사시켰다. "황주! 더 이상 무리한 부탁은 내게 하지 마시오. 그리고 더욱 딴 마음을 품지 않도록 하시오. 본좌는 황주가 생각하는 만큼 어리석지가 않소." "알았소이다." 황주는 소리없는 웃음을 흘리며 삼황자를 주시하였다. 뜻을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삼황자는 가볍게 냉소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는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방을 나가 버렸다. 삼황자가 사라지고 난 즉시 어둠 속에 한 인물이 나타났다. 신수패황검 유세옥이었다. 엄유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주운빈! 그 놈의 감시를 철저히 붙여 놓았는가?" "최고수로 네 명을 붙여 놓았습니다." "음! 잘했다." "이미 폐인이 된 놈에게 어찌 감시를......." "모르는 소리 마라. 주운빈, 그 놈이 그렇게 쉽게 당할 놈이 아니다. 어쩌면 그 놈에게 우리가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세옥은 코웃음을 쳤다. "회주님! 회주님의 계획은 완벽했으며 천일취혼환락산을 복용하고도 우리를 속일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흐흐...... 물론 그렇지! 그러나 안전을 기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자네는 무귀전의 전 고수들로 하여금 황궁을 포위하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회주!" "흐흐흐......." ⑤ 한편,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천일취혼환락산에 중독된 주운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침상에 멍하니 걸터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고통과 슬픔에 찌들은 세 명의 미녀가 그의 앞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만소주는 문 앞에 서서 암울한 눈으로 천정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의 웅대했던 대망과 염원은 이미 천길만야의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린 지 오래였다. '아... 아... 이런 꼴을 당하려고 내가 다시 강호출도를 하였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고 기가 막혔다. 그토록 아끼고 위하던 여섯 형제를 모두 잃었다. 그것 뿐인가? 천하의 만소주라 외치며 호탕하게 천하를 오시하며 살던 자신의 무공이 폐지된 채 이제는 천치가 된 주인을 모시는 쓸모없는 폐인이 된 것이다. 그는 억울했다. 생각할수록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치욕감이 치솟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운빈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히죽히죽 웃기까지 했다. "흐흐... 공주의 살결은 너무나도 야들야들 하단 말이야......." "아...... 아...... 주랑......." "어찌하리오. 저 일을...... 흑...... 흑......." 그녀들은 이제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매는 가련한 처지였다. 차라리 보지 말고 듣지나 않았으면....... 만소주가 어지러운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말을 꺼냈다. "주모(主母)들께서는 다른 방으로 가셔서 쉬십시오. 주공하고 계셔야 더욱 참담한 절망만 느낄 뿐입니다." "흑......." 그녀들은 쉽게 일어나지를 못했다. 특히, 엄소군은 만소주와 황성란, 설랍봉을 마주대할 염치가 없었다. 만소주가 황성란을 부추겼다. "주모, 어서 침소로 드십시오. 모든 일은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우선 주모들께서 기운을 차리셔야 이 난관을 돌파할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만노......." 황성란은 이 충성스런 늙은 수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설주모와 엄주모께서도 일어서십시오." "만노......." "만노...... 흑......." 엄소군은 끓어오르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그들이었지만 결코 누구도 엄소군을 욕하지 않았다. 더구나, 만소주는 엄소군. 그녀를 주모라 부르지 않았던가? "그럼, 주랑을 만노께 부탁해요." "아무 염려마시고 마음의 안정을 찾도록 하십시오." "고마와요. 만노!" 황성란은 역시 강한 여인이었다. 중원제일 미녀로서 주운빈의 인물됨을 보고 흔쾌히 그의 뒤를 따랐던 마음이 커다란 여인. 결코 절망만을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설동생, 엄동생, 만노의 말이 옳아요. 우리까지 이러면 더더욱 절망이 다가올 거예요." "언니......." "언니...... 흑......." 엄소군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그녀들은 쓸쓸한 여운을 남기며 다른 처소로 갔다. 만소주는 아직도 멍하니 있는 주운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아...... 불쌍한 분.......' 무공이 폐지당하고 연이은 불행에 그는 십 년 이상 더 늙어 보였다.


이때, 주운빈이 갑자기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순간, 주운빈은 팔을 벌리며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그런데, 그의 손이 향하는 곳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컥!" "크-- 악!" 그것은 정확히 짤막한 세 마디 비명이었다. 그러나, 무공이 폐지당한 만소주는 전혀 그 비명을 듣지 못했다. 무형지력(無形指力)! 바로 아무런 기척 없이 주운빈이 발출한 무형지력이었다. 주운빈이 감시하는 세 명을 소리없이 해친 것이었다. 만소주는 아직도 불쌍한 눈으로 주운빈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만소주의 귀로 흘러드는 것이 아닌가? (만노, 내 말을 들으면서 전혀 표정에 변화를 주지 마시오.) 일순, 만소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급한 전음이 다시 그의 귀에 들렸다. (처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시오. 만노!) 일순, 나쁘게 말하면 능구렁이라 할 수 있는 만소주는 격동을 참고 처음의 표정을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그의 내심은 이 순간만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 아...... 역시 천하의 만소주의 주공이시로고. 허허허.......' 그의 표정만은 더할 수 없이 침울했다. 주운빈은 길게 하품을 멈추더니 다시 일어났다. (만노, 지금 방 안을 감시하던 놈들의 흔혈을 잠시 제압했소. 십 장 밖에 또 한놈이 있소. 그러니 결코 대답을 하지 마시오.) 만소주는 눈을 깜박거렸다. 잘 알겠다는 표시였다. 주운빈은 히죽 웃는가 싶더니 폭갈을 터뜨렸다. "이 늙은 놈아! 거기 가만히 서 있지를 말고 이리와서 이 부마의 다리를 주물러라. 공주와 밤새 격랑을 치뤘더니 매우 피곤하단 말이다. 허엄!" 주운빈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만소주를 노려보았다. 만소주는 너무나 능청스러운 주운빈의 가장에 이제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소주는 혀를 끌끌 찼다. "쯧쯧......." 만소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가섰다. 그는 주운빈의 전신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 아...... 주모들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안마를 받는 주운빈이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만노, 내가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절대 그녀들에게 알리지 마시오. 여자들은 감정의 변화가 커서 들키기 쉽소.) 만소주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 눈을 깜박였다. 주운빈은 입술을 계속 움직였다. (이제 만노의 무공을 회복시켜 주겠소.) 주운빈은 이미 무형의 진기로 만소주의 맥문을 진맥하고 있었다. (만노, 신수패황검 유세옥이 당신의 무공을 폐쇄시켰구료?) 만소주는 다시 눈을 깜박였다. 그는 무당(武當)의 쇄룡절맥수(碎龍絶脈手)에 무공이 폐지당했다. (만노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고 있소?) 만소주는 눈을 서서히 깜박였다. 순간, 주운빈이 노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개같은 놈의 늙은이! 왜 이리도 힘없이 주물르느냐?"


주운빈의 주먹이 만소주의 백회혈(百會穴)을 가격했다. 퍽! "어이쿠!" 꽈다당! 만소주는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매우 고통스러웠으나 부드러운 진력이 백회혈을 통해 들어왔다. "이 우라질 같은 놈아! 엄살은 무슨 엄살이냐?" 퍼퍼퍽! 퍽―! 주운빈의 주먹은 쓰러진 만소주를 사정없이 두들겼다. 그러나 그의 주먹은 교묘하게도 만소주의 막힌 경혈을 때리고 있었다. "으...... 억!" 만소주는 다급하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주운빈이 전해주는 진기를 고스란히 받아 들이고 있었다. 퍽! 퍽! 주먹이 마구 날랐다. 만소주의 비명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경혈은 하나하나씩 뚫리고 있었다. 주운빈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휴...... 유세옥, 그 놈이 오성의 진력으로 그의 경혈을 패쇄시켜 놓기만 하기가 천만다행이구나' 이것은 유세옥의 방심이었다. 만약, 그가 이성(二成)의 공력만 더 증가시켰더라면 만소주는 영영 무공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유세옥은 일시의 방심으로 천고의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퍽! 퍼...... 억! "어이쿠! 아...... 악! 주공! 다시 잘 안마해 드릴테니 제...... 발......." 만소주는 두 손 모아 싹싹 빌었다. 순간 주운빈의 발이 마지막으로 만소주의 단전(丹田)을 걷어차 버렸다. "으...... 억!" 만소주는 검붉은 피를 토하며 벌렁 나뒹굴어졌다. 순간, 주운빈은 창 밖의 노승을 향하여 가벼이 손바닥을 퉁겼다. 아무런 파공음도 들리지 않았다. '후후...... 무극이류도(無極二流道)! 천고에 다시 없는 절학이지.' 그의 중얼거림이 끝나자마자 기이한 음성이 들려왔다. "끄응!" 주운빈만이 들을 수 있는 미세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때를 맞추어 만소주가 벌떡 일어났다. "주공!" 그는 감격에 겨워 노안(老顔)을 부르르 떨었다. "역시 주공이십니다." 주운빈은 만소주를 향해 씨익 웃었다. "만노,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이오." "알았습니다." 결의에 찬 만소주의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주운빈은 서늘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오늘부터 천치 주운빈은 바로 만노요." 만소주는 능글맞게 웃었다. "주공이 바로 만소주가 되겠군요?" "그렇소. 자, 이제 시작합시다."


변체환용술(變體幻容術)! 그들 각기 상대방(相對方)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제 28 장 속이기 ① 다음날 삼경, 주운빈이 기거하는 부마전으로 한 인영이 미끄러지듯 스며들었다. 누구인가? 일신에 곤룡포를 걸친 삼십대의 위엄있는 인물이었다. 바로 적황자인 황태자였다. 어찌된 일인지 그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감돌고 있었다. '아...... 아...... 황궁에 퍼진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주운빈, 과연 그가 천치가 되었단 말인가?' 순무제의 명령으로 서역을 다녀왔던 황태자였다. 그는 절망적인 당황보다 우선 친구로서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던 주운빈이 처한 소문을 듣고 믿을 수 없어 부마전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방문 앞에 도달했을 때였다. "흐흐흐...... 공주, 이제 무슨 짓을 해서 공주를 기쁘게 해줄까? 요구만 하시오." "호호호...... 발가벗은 몸으로 물구나무를 서세요. 주랑!" 쿵! 황태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틀림없는 친구의 목소리였고 여인은 자신의 동생 원려공주였다. 꽝! 황태자는 치미는 분노를 참을 길 없어 방문을 걷어찼다. "누구냐?" 원려공주의 앙칼진 호통이 들렸다. 황태자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원려공주의 자지러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앗! 오라버니!" 그녀는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는 희대의 요녀(妖女)였으나, 유독 자신의 오라버니인 황태자만은 너무나 무서워했다. 황태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짜고짜 그녀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 더럽고 음탕한 계집! 천하의 대영웅을 이런 식으로...." 퍽! "으...... 악!" 원려공주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벽에 가서 부딪쳐 버렸다. 일순, 그녀의 입 안은 선혈로 물들었으며 대여섯 개의 이빨이 부서져 나왔다. 원려공주는 반항도 못하고 공포에 질려 고개를 수그렸다. "오...... 오라...... 버...... 윽......." 그녀는 다시 피를 토해내었다. 적황자는 이글거리는 살광을 폭사시키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네 이년! 아예 오늘 네년을 죽여버리겠다." 그는 이빨을 부드득 갈며 다가섰다. 주운빈은 그의 모습이 두려운지 겁먹은 얼굴로 한쪽 구석으로 물러났다. 원려공주가 자지러질 듯 비명을 질렀다. "아...... 악! 살려주세요. 오라버니......." "용서할 수 없다." 적황자는 냉혹하게 말하며 손을 번쩍 들었다. 순간, 방문 앞에서 싸늘하고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형님, 손을 멈추시오.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을 진정 죽이려할 참이오?" 그 음성! 바로 삼황자의 음성이 아닌가? 황태자는 그 음성을 듣자 부르르 떨며 돌아섰다. '음, 분노로 인하여 저 놈이 다가온 것도 몰랐다니.......'


방문 밖에는 삼황자와 엄유랑이 서 있었다. "음! 너로구나." 삼황자는 그의 말에 대꾸없이 원려공주를 바라 보았다. "누님은 다른 방으로 가십시오. 형님을 말리겠습니다." 원려공주는 두려운 눈으로 황태자를 힐끗 보더니 꼬리를 내리고 부리나케 방을 빠져나갔다. 일순, 황태자와 삼황자의 적대감에 불타는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황태자는 속으로 침음을 터뜨렸다. '너구리 같은 놈.......' 그러나 겉으로는 억지로 웃고 있었다. 황태자의 눈빛이 엄유랑에게로 향해졌다. 그는 위엄이 가득 서린 음성으로 질문을 하였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러자 엄유랑이 한발 앞으로 나서며 예를 취했다. "신(臣) 금군총통령 엄유랑이 태자전하(太子殿下)를 알현하나이다." 그러나 결코 허리를 굽히지 않는 엄유랑이었다. 황태자는 그의 있을 수 없는 거만한 태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또한, 갑자기 금군총통령이란 말에 의혹이 구름처럼 솟아올랐다. 그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형님, 이번에 부황폐하(父皇陛下)의 어명으로 새로이 금군총통령에 봉직한 인물입니다." 삼황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황태자를 주시하였다. 황태자는 이 안하무인격인 두 사람의 태도에 치를 떨었다. '내가 황궁을 비운 사이 저 놈이 저런 짓을 저지르다니.......' 순간, 분노로 이글거리는 황태자의 귀로 전음이 들려왔다. (황태자, 새 금군총통령이 바로 무림(武林)을 피로 씻은 황주(皇主)란 놈이오.) 이것은 누가 보내는 전음(傳音)인가? 황태자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가지고 몸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저 놈이 바로 황주라니...... 삼제(三弟) 네놈은.......' 삼황자는 능글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형님, 내일은 새 금군총통령의 봉명식(奉命式)이 어전에서 베풀어질 것이오, 내일 뵙겠소이다. 돌아가지요. 통령!" "예, 삼황전하!" "으하하하......." 삼황자는 무엇이 유쾌한지 대소를 터뜨리며 엄유랑과 함께 사라졌다. "으...... 이 놈, 삼제야! 이 태자가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 있는 한 결코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허나 황태자의 입장으로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눈길이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주운빈을 향해졌다. "음......." 그의 입에서는 절로 두 번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황태자의 얼굴에 회의의 빛이 떠올랐다. '과연 저 인물이 악양에서 나한테 천하패권의 칼잡이는 내가 쥐고 있다고 호언하던 바로 그란 말인가?' 그가 이처럼 회의에 물들 때, 주운빈은 바보스런 표정으로 히죽 웃었다. "처...... 남......." 황태자는 눈을 감았다. 주운빈이 천치가 되었다는 소문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이상 더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묵묵히 방을 걸어나갔다. '아...... 아...... 진정으로 마음을 맡길 수 있었던 친구를 잃었도다.' 그가 막 방을 나서는 순간, 처음 들렸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태자, 살고 싶다면 오늘 중으로 황궁을 떠나 만무궁으로 가시오.) 황태자의 몸이 번개같이 돌려졌다. 그러나, 주운빈은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인가? 나에게 전음을 보내는 인물이? 그렇다고 눈 앞의 주운빈은 아닐테고.......' 그의 마음에 구름같은 의혹이 피어오르고 있을 때였다. 다시 그의 귓전으로 전음성이 들려왔다. (태자, 삼황주와 황주는 필히 당신을 죽이려들 것이오. 당신은 결코 내말을 허술히 듣지 마시오. 오늘 중으로 만무궁으로 달려가시오.) 전음이 끝남과 동시에 무엇인가가 날아왔다. 툭! 두루마리 하나가 황태자의 발밑에 떨어졌다. 황주는 재빨리 두루마리를 들었다. 전음은 다시 들려왔다. (태자, 조금이라도 더 황실의 영화를 누리고 싶다면 어서 그 두루마리를 가지고 만무궁으로 가서 공주를 만나시오. 나는 주운빈이오.) "아......." 황태자의 입에서 나직이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서 가시오, 태자! 황궁은 나에게 맡기시오. 당신이 있으면 나의 계획만 틀려지게 되오.)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담긴 음성이었다. 황태자는 아무 영문도 몰랐으나 암중에서 들려오는 주운빈의말을 듣기로 했다. 황태자는 지울 수 없는 의혹서린 눈으로 주운빈을 바라보았다. "히히...... 처남!" 주운빈은 멍청한 웃음을 흘리며 아직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만약 저 모습이 가장이라면 그는 심중(心中)으로 말을 전한다는 전설의 경지인 의형심인전성대법(意形心引傳聲大法)을 익혔단 말인가?' 황태자는 귀신에라도 흘린 듯 고개를 흔들었다. (시간이 없소. 태자! 잘못하면 모든 대사(大事)가 틀어지게 되오.) 황태자는 다시금 주운빈을 응시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면서 사라졌다. 그의 뒤를 쫓아 주운빈의 입가에 야릇한 조소가 고임은 웬일일까? '황태자는 역시 똑똑한 인물이군! 위기를 직감(直感)하고 스스로 떠나다니.......' ② 어전(御殿)에는 고관대작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영의정(領議政)을 비롯하여 좌우승상(左右承相)과 모든 부서의 대신들이 모두 있었다. 엄유랑의 금군총통령의 지위에 오른 황제에 대한 봉명식이 끝난 후, 축하 연회식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으하하...... 엄총통령! 축하하오. 내 술 한잔 받으시오." 영의정이 엄유랑에게 술잔을 권했다. "고맙소. 영상!" 엄유랑은 싸늘한 안색으로 술잔을 받아 들었다. 영의정으로서는 매우 불쾌한 행동이고 언사였지만 그는 꾹 참았다. 아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금군총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은 과거부터 천하제일(天下第一)의 무공을 지니고 있음을 익히 아는 터이다. 영의정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여러분! 우리 모두 새 총통령을 위해서 건배를 하십시다." "와......." "축하하오...... 총통령!" 삼황자와 엄유랑은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같이 들었다. 어전 안의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은 하나같이 비굴한 아부의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그들이 일제히 축배의 잔을 들이키려는 순간이었다. "으하하하...... 오줌이나 처먹어라!" 이게 웬 소리인가? 좌...... 악! 일순, 어전의 대들보 위에서 물 한 줄기가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져 있는 상 위로 떨어졌다. "어느 놈이냐!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아......아니 저......놈이......." 대신들은 일제히 대들보 위를 바라보며 경악을 했다. 대들보 위에는 주운빈이 고이춤을 까고 물건을 드러내놓고 오줌을 갈기고 있었다. 주운빈!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마음껏 오줌을 싸고 있었다. "아니...... 부마가......." "에이......." 오줌세례를 뒤집어 쓴 하석(下席)의 대신들은 질겁을 하며 몸을 피해야만 했다. 이때, 엄유랑과 삼황자는 어이가 없었다. "으하하하...... 이번엔 육탄돌파다. 으하하...... 하핫......." 주운빈은 거침없이 상 아래로 뛰어 내렸다. 꽈...... 꽝! 꽈...... 다...... 당! 상이 뒤엎어지고 접시가 깨지면서 음식과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대신들은 졸지에 당한 봉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삼황자가 정신을 가다듬으며 주운빈에게로 날아왔다. "으하하...... 작은 처남! 이거나 처먹어라!" 주운빈은 육자소백이 담긴 그릇을 날아오는 삼황자에게 집어 던졌다. 삼황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 이 놈이 웬 미친 지랄이지! 원려누님이 시켰단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놈이.......' 그는 접시를 피하며 주운빈의 손목을 움켜 쥐었다. "부마형님! 이게 무슨 짓이오?" "히히히...... 나도 몰라. 공주가 이렇게 하라고 시켰어." 헌데, 엄유랑의 움푹 들어간 눈이 싸늘한 살기를 ���사시켰다.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저 놈이 제압당한 것은 속임수가 아닐까? 원려 그 계집이 저런 일을 시킬 까닭이 없지 않은가!' 이때, 어전 밖에서 만소주가 안으로 들어섰다. "크하하하...... 이것도 먹으시오." 그는 무슨 통인가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좌중에 홱 뿌렸다. 일순, 어전 안에는 감당하기 힘든 구린내가 진동을 했다. 만소주는 통에 오물을 담아와 대신들에게 뿌린 것이었다. "어이쿠! 냄새야!" "저...... 저 찢어죽일 놈이......." 만소주는 원한에 불타는 눈으로 엄유랑을 노려 보았다. 엄유랑의 눈에서도 살광이 폭사되었다.


만소주, 그가 누구인가? 오직, 천하에는 진정한 사나이는 두 명 뿐이라며 엄유랑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며 존경해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모든 것을 알고 난 그는 엄유랑에게 극경의 배신감을 안게 되었던 것이다. "만소주! 이게 무슨 짓이냐?" "개소리 마라! 이 놈아, 너도 먹어라." 만소주는 호통을 치는 엄유랑에게 뿌리다 남은 오물통을 아예 던져 버렸다. 구린내는 점점 심하게 확산(擴散)되었다. 모두들 코를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대내시위들은 뭣들 하는 게냐? 냉큼 저 놈을 끌어가지 못하고!" 영의정이 노발대발하여 외쳤다. 어전은 그야말로 수라장이요. 난장판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봉변에 그들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주운빈과 만소주는 호랑이 간이라도 먹었단 말인가? 삼황자는 붙잡고 있는 주운빈을 무섭게 노려 보았다. 주운빈은 겁먹은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작... 은 처... 남... 나는 다... 만... 공주가 시키...... 는 대로......." "알았소." 삼황자는 싸늘하게 대답했으나 의문투성이었다. '우리가 무엇인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나, 주운빈의 맥문을 움켜쥔 그는 분명 그가 한줌의 진기도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주운빈의 얼굴은 천치 그대로 멍청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때였다. "만소주! 네놈이!" 팍! 엄유랑은 만소주의 얼굴을 갈겨 버렸다. "억!" 만소주는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유랑! 우...... 윽! 차라리 나를 죽여라." "흐흐흐...... 그럴 수는 없지. 네놈은 치욕이란 치욕은 모두 맛본 후에 천천히 죽여주겠다." "으...... 이 악독한 놈! 너같은 놈을 내가 평생 존경했다니......." 일순 엄유랑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만소주의 말은 익히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서너 명의 위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만소주를 끌어내 가려는 순간이었다. "멈춰랏!"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총통령! 오늘 일은 모두 제가 시킨 거예요. 호호호......." 여인은 바로 원려공주였다. "음......." "누님......." 삼황자는 그녀를 무섭게 노려 보았다. 원려공주는 그들의 눈빛을 괘념치 않고 주운빈을 향해 빙긋 웃었다. "주랑! 이리로 오세요. 수고하였으니 오늘밤 주랑을 매우 즐겁게 해드리겠어요. 호호......." 주운빈은 삼황자의 손을 뿌리치며 반색을 했다. "공주, 그게 정말이오? 흐흐흐......." 주운빈은 벼락같이 그녀에게 달려가 마구 입맞춤을 터뜨렸다. 누가 보아도 멍청하면서도 음욕에 물든


돼지 꼴이었다. "아이...... 여기서 이러시면 어떡해요. 어서 우리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가요. 호호호......." 두 사람은 매우 정겹게 껴안으며 어전을 나갔다. 만소주는 그들의 뒤를 따르면서 엄유랑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방을 빠져 나갔다. 엄유랑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천하의 효웅인 엄유랑! '음...... 모든 일을 정말 원려가 시킨 일인가?' 알 수 없는 의구심만 피어 오를 뿐이었다. 세 사람은 긴 회랑을 따라 그들의 처소로 향했다. 순간 원려공주를 껴안고 가는 주운빈의 입술이 달싹였다. (허허...... 역시 주공의 섭혼쇄심심령대법(攝魂碎心心靈大法)은 천고의 절학입니다.) (후후...... 원려 계집이 이제는 말 잘 듣는 개로 변했을 줄이야 누가 알겠소!) 주운빈이 만소주였고 만소주가 바로 주운빈이었다. 그리고, 주운빈은 원려공주의 심령을 제압하여 오늘의 일을 꾸몄던 것이다. 엄유랑이 알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었다. 만소주가 아니, 주운빈이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후후... 만노! 원려 계집년의 속살맛이 어떻소?" "흐흐... 조금 늙었지만 아직도 최고인데요. 이제 늘그막에 이 만소주가 꽃밭에 파묻혀 살게 되었으니... 흐흐흐......." 그들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처소로 들어갔다. 잠시 후. "흐으응......." "헉헉......." 원려공주의 침소에서 격한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③ 어느 밀실 안에 엄유랑과 유세옥이 침중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대내시위 영반에 대한 일은 되었는가?" 엄유랑이 물었다. 유세옥은 공손히 대답했다. "예! 그는 수락했습니다. 이미 만성독약(滿性毒藥)에 중독된 처지이라 응낙 안할 수도 없습니다." "음! 대내위시들을 모두 중독시켰는가?" "예! 회주님. 그들은 영반의 명령 한마디면 목숨도 불사(不辭)하는 놈들입니다." "됐다. 황제와 삼황자 놈을 죽이면 그 즉시 무귀살수들을 불러들여 모조리 죽인다." 엄유랑의 단호한 말에 유세옥은 일순 긴장의 빛을 띠었다. "기일은 언제로 할까요?" "석달 후, 석달 후면 무림은 완전히 평정된다." "그들이 무림인들을 추살함으로써 입은 손실이 더욱 약해지기 전에 만무궁을 없애는 것이 어떨까요?" 엄유랑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다. 황태자 그 놈은 분명 정세(政勢)를 파악하고 만무궁으로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융천과 그 놈은 서로 손을 잡겠지." "하면 더욱 빨리 놈들을......." "아니야. 그들이 힘을 기르고 기력이 쇠진한 새외변방 놈들을 보내면 서로 양패구상하게 된다. 그 놈들이 서로 싸우다 힘이 약해졌을 때 자네는 천제회의 고수들을 이끌고 그들을 모조리 죽인다."


유세옥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져갔다. 득의만만한 미소였다. "역시 회주님의 안배는 아무도 따라올 인물이 없습니다." "철저한 안배를 잊지 마라. 물러가도록 해라." "예, 회주님!" 유세옥은 소리없이 밀실을 빠져 나갔다. 엄유랑은 눈을 감았다. '음! 아무래도 오늘 어전에서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리는군.......' 그러나 그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 없다. 천일취혼환락산! 그 약을 내가 직접 탔지 않았던가?' 일순 아무도 내심을 알 수 없는 효웅 엄유랑의 마음 한구석이 빈 것 같은 쓸쓸함이 전해졌다. '웬일일까? 적수가 없어서 그런가? 그래서 느끼는 허전함인가?' '흐흐흐...... 아니지! 나는 결코 주가 부자를 용서할 수 없다.' 삼황자는 자신의 침소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호안(虎眼)을 지닌 사십대의 중년인이었다. 이 인물이 바로 대내시위의 우두머리인 금의영반(金衣領班)이었다. 삼황자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커다란 고심을 하고 있었다. '음...... 태자가 어디로 갔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군! 그 놈을 죽여야 할텐데.......' 그는 궁에 돌아온 황태자가 그 날로 사라진 것이 못내 마음이 꺼림칙 하였다. 그는 금의영반을 직시(直視)했다. "영반! 요즘 황주의 동태는 어떻소?" "속하가 알기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삼황자가 날카롭게 눈빛을 빛냈다. "그 놈은 분명 적황자가 사라진 것을 빙자로 하여 황제를 죽이고자 할 것이오." 일순 금의영반은 소스라치게 놀라버렸다. "감히 그 놈이......." 삼황자는 음침한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태자가 종적을 감춘 이상 본좌도 그 놈의 일에 동조(同調)할 것이오." 금의영반은 삼황자의 말에 더욱 놀랐다. "삼황전하!" "대신......." 삼황자는 말끝을 흐리더니 전음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영반은 본좌가 그 놈이 거사를 벌이는 날 위사들 중 최절정고수 십여 명을 침소에 잠복시키시오. 그 놈이 황제를 죽이는 순간 우리는 일제히 그 놈을 죽여야 하오.) 금의영반은 얼굴에 식은땀을 흘렸다. "하오나 황주, 그 놈의 무공은 아무도 당할 자가......." "염려마시오. 본좌는 이미 황주와 유세옥에게 무형산공독(無形散公毒)을 중독시켜 놓았소." 금의영반은 자신도 모르게 전신이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영반은 거사날 실수없이 일을 처리하도록 하시오." "알... 알았습니다. 삼황전하!" "흐흐흐...... 일만 거사되면 영반은 그 즉시 영의정 겸 금군총통령이 되는 것이오." 금의영반은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에는 권력에의 욕망이 불타오르는 것이었다. "감읍할 따름입니다. 전하...... 아니 황제폐하!" 그는 적당히 아부할 줄도 알았다. 삼황자는 분명 아부임을 알면서도 결코 그 소리가 듣기 싫지 않았다. "흐흐흐...... 영반! 이 일은 절대 극비이니 실수없이 처리하기 바라오. 흐흐흐......."


"그럼 속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금의영반은 부복한 자세에서 배례를 하고는 그의 침소를 물러 나왔다. 그런데 침소를 나서는 그의 얼굴에는 극히 사악한 미소가 흐르지 않는가? '흐흐흣...... 이 음흉한 놈아! 제발 꿈에서 깨어나거라!' 금의영반은 그 나름대로의 흉심을 흘리며 방을 나섰다. 삼황자는 자신도 모르게 흡족한 마음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금의영반은 그가 제일 신임하는 신하였던 것이다. ④ 서로의 음모가 치밀하게 진행되는 동안, 주운빈은 향락과 쾌락에 빠져 살이 디룩디룩 쪄갈 뿐이었다. 그렇게 삼개월이 흘렀던 것이다. "흐흐흐...... 요것들! 만지만 만질수록 감칠 맛이 돈단 말이야!" 세 여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주운빈은 더욱 손을 빨리 움직여 시비들의 옷을 벗겨갔다. 이때, 한쪽 구석에 있는 만소주는 씁쓸한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 용서하시오.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라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모든 일이 끝나게 되오. 당신들은 잠시만 참아 주시오.' 주운빈은 여전히 만소주로 변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시비들과 어울려 해괴한 짓을 벌이는 주운빈! 바로 만소주였다. 이 많지 않은 사건들이 지난 삼개월 동안 일어났던 것이다. 만소주는 깊은 냉소를 터뜨렸다. '후후후...... 엄유랑! 너는 이제 황실의 모든 전권을 잡았구나. 그러나 너는 결코 황제가 될 야망은 버려야 할 것이다.' 밤은 점점 깊어만 가고 세 여인의 흐느낌만 더해 갈 뿐이었다. 순간, 어디선가 어둠 속에서 대전을 지켜보던 한 인물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절묘한 은신술이었다. 그러나, 만소주가 그곳을 바라보며 빙긋 웃는 것이 아닌가! '이제 내일이면 이 황궁에 한 혈풍(血風)이 불겠지. 이로써 원황실은 풍지박산이 날 것이다.' 밀실! 엄유랑과 삼황자가 술잔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술잔을 높이 들었다. 엄유랑은 술을 들기 전에 입을 열었다. "흐흐...... 삼황전하! 정말 잘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조정대신들은 거의 삼황전하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습니다. 내일 거사만 성공되면 삼황전하는 명실공히 대원제국(大元帝國)의 황제가 되실 것입니다." "흐흐...... 그것은 오로지 금군총통령의 덕이요. 본좌는 결코 총통령의 은혜를 잊지 않으리다. 자, 건배합시다." "그러지요. 허허허......." 두 사람은 단숨에 술잔을 들이켰다. 그러나 둘의 속마음은 엄청나게 틀렸다. '흐흐...... 엄유랑! 네놈은 내가 지난 수개월 동안 네 몸 속에 무형산공독을 뿌린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네놈이 황제를 죽인 후 너는 가장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엄유랑의 생각도 달랐다. '어리석은 놈! 내 몸이 무형산공독에 중독되었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너는.......' 그들은 술잔을 떼면서 득의의 대소를 터뜨렸다. "거사는 내일이오."


"황주만 믿소이다." 그들은 음흉한 눈길을 교환했다. 삼황자가 사라지고 난 후 유세옥이 바람같이 나타났다. "주운빈, 그 놈은 무얼하고 있던가?" "그 놈은 시비들과 어울려 정신없이 쾌락에 빠져 있습니다." "흐흐흐......." "중원을 장악하고 있던 패주들이 모두 태행산 만무궁 밑에 집결했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자네는 즉시 만무궁으로 떠나게!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없애야 하네. 특히 구융천, 그 놈을 절대 놓쳐서는 안되네." "알겠습니다. 회주." 유세옥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흐흐흐...... 이제 내일 밤만 지나면 회주께서는 명실공히 황제가 되시겠군요." "흐흐흐......." 엄유랑의 음침한 괴소만 깊어졌다. 이때, 만소주로 변형한 주운빈은 침소에서 한 인물을 만나고 있었다. "주형! 그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대로 모든 것을 완수했소." "수고했소. 태자!" 그렇다면 주운빈과 마주한 인물은 황태자란 말인가? 그렇다. 바로 황태자였다. 그는 그동안 종적을 감추고 무슨 일을 벌였단 말인가? 주운빈이 감격한 얼굴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정말 고맙소. 태자." 황태자는 빙긋 웃었다. "아니오. 다만 그 구역질나는 만무궁주 구융천으로 변형하여 지난 삼개월을 보낸 것이 아직도 기분 나쁠 뿐이오." "용서하시오. 만무궁의 지하에 꼭 삼십만 근의 폭약을 묻었겠지요?" "그렇소. 꼭 삼십만 근이요." "후후후... 새외변방(塞外邊方)의 놈들이 만무궁을 덮치는 즉시 뼈도 못추릴 것이오." "주형의 계교는 아무도 따르지 못할 것이오." 황태자는 지난 번 주운빈을 찾아왔을 때 주운빈에게서 받은 두루마리를 생각했다. 두루마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태자(太子)! 몇 자 급히 적으니 꼭 이대로 시행하여 주시오. 여기에는 황궁과 무림을 구하기 위한 계략이 적혀 있소이다. 우선 태자는 만무궁주 고금제일존 구융천으로 변용하시오. 구융천은 거의 나와 필적할 무공을 지녔으니 꼭 건곤오절로 하여금 납치토록 하시오. 그 다음 구융천의 부인이었던 만무공주 강옥기를 구출해 주시오. 태자는 구융천으로 변용한 다음 만무궁의 모든 무공비록을 밖으로 옮긴 다음 지하에 삼십만 근의 폭약을 묻으시오. 황주는 몇 개월의 여유를 가지고 황궁을 장악한 다음 새외변방의 무리들을 만무궁으로 보낼 것이오. 황주는 지금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소. 그는 만무궁과 그들이 싸울 때에 천제회의 고수들로 하여금 모조리 도살할 것이요. 이것은, 무림의 사활(死活)이 걸린 문제이니 절대 실수가 없길 바라오. 황궁은, 아무 염려하지 마시오.


나에게는 이미 모든 안배가 꾸며져 있소이다.> 황태자는 모든 것을 그대로 시행하였다. "지금 태행산에서 서쪽으로 오백여 리 떨어진 곳에 구융천이 잡혀 있소. 그 놈은 전대에게 붙잡혀 영웅탑으로 호송당하고 있소이다." "비참한 소인 놈의 말로(末路)일 뿐이오." "그렇소이다." "태자께서도 황궁의 모든 안배를 해놓으신 줄 아오." "하하하......." 주운빈과 황태자는 그들만이 아는 의미있는 웃음을 터뜨렸다. ⑤ 황궁을 벗어나 암천(暗天)을 벗어나는 인물이 있었다. 인물은 밤하늘을 흐르는 유성보다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질주(疾走)하고 있었다. 바로 유세옥이었다. 유세옥은 어둠 속을 뚫고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그는 황주의 명을 받들어 태행산을 향해 가는 것이었다. 그는 태행산을 향하기 전 황궁을 둘러싸고 있는 어느 울창한 수림 속으로 들어섰다. 수림 깊숙한 곳에 죽립을 쓴 한 흑의인이 서 있었다. 흑의인의 전신에서는 사람을 얼려버릴 듯한 살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유세옥은 소리없이 죽립인의 뒤에 내려섰다. "유부회주이오?" 감정이 없는 허망한 음성이었다. 유세옥이 대답했다. "그렇소. 황궁의 포위는 모두 이루어졌소?" "그렇소이다." "실수없기 바라오. 무귀전주(無鬼殿主)!" 흑의인은 주운빈에게 죽임을 당한 천선비랑미 화무경의 뒤를 이어 무귀전주가 된 인물이었다. 무귀전주는 음산한 냉소를 흘렸다. "흐흐흐...... 평생 사람의 목숨으로 먹고 산 우리들이오. 사람 죽이는 일이라면 우리는 결코 실수를 하지 않소." "흐흐흐...... 그럼 부탁하오. 내일 후원에서 화광(火光)이 솟구치면 가차없이 무조건 죽이시오." "알았소." "그럼, 본좌는 이만 실례하겠소." 휘...... 익! 유세옥은 퉁겨나듯 앞으로 쏘아나갔다. 이어, 무귀전주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유세옥은 소리없는 웃음을 흘리며 계속 허공을 가로질렀다. 얼마나 달렸을까? 족히 오십여 리는 날았을 것이다. 일순, 허공을 가로지르는 유세옥의 귓전으로 냉랭한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흥!" 순간, 유세옥은 몸을 부르르 떨며 밑으로 급강하 했다. "누구냐?"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메아리쳤다. 그러나 이미 그는 극심하게 놀라고 있었다. 들려온 냉소에 실린 공력은 유세옥 자신보다 더 높은 것임을 익히 알 수 있었다. '누구인가? 회주 외에는 적수가 없는 나보다 더 높은 공력(功力)을 갖은 인물은?' 유세옥이 땅에 내려서자마자 몸을 한 바퀴 돌렸다. "누구냐?"


그는 공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외쳤다. 순간, 그의 눈 앞이 어른거리더니 한 인물이 나타났다. 인물을 알아본 유세옥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아...... 아...... 니, 너...... 는......." "흐흐흐...... 그렇다. 바로 만소주다." 만소주! 바로 천하의 만소주가 유세옥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만소주는 한발한발 앞으로 다가섰다. "흐흐흐... 유세옥, 천제회 고수들을 만나러 가는가? 태행산! 흐흐흐...." 유세옥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무공을 폐지당한 만소주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건 그렇다 치고, 그가 어찌 자신의 행선지를 알고 있단 말인가?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 놈은...... 무공이 폐지 당하지 않았었는가?" "흐흐...... 물론 무공이 폐지당했지. 그러나 나의 무공을 주공께서 복원시켜 주셨다." "뭣이라고?" 유세옥의 두 눈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져 버렸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 그렇다면...... 주운빈은 그동안 전부 가장(假裝)을......." "흐흐흐...... 이제야 알았느냐?" 유세옥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큰일이다.' 유세옥은 마음 먹기가 무섭게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뒤로 몸을 날려 도주하려한 것이었다. 순간 냉엄한 호통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내려서라! 잡종 놈아!" 허공에서 한 줄기 위엄서린 음성이 터지는 순간, 퍼...... 엉! 엄청난 경력이 유세옥의 가슴에서 작렬했다. "으...... 억!" 유세옥은 입으로 피보라를 뿜으며 밑으로 떨어졌다. "네놈의 최후로구나. 그러나 잠시 살려주겠다." 슈...... 욱! 만소주는 예리한 지풍을 유세옥의 마혈(魔穴)을 향해 날렸다. 팍! 쿵! 마혈이 찍힌 유세옥은 떨어지는 고통을 느끼면서 실신해 버렸다. 만소주가 허공에다 대고 읍을 하였다. '고맙소이다. 건곤오절!' 그러나, 허공에 만소주의 음성만이 들릴 뿐 건곤오절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건곤오절! 이들은 바로 개세절학을 지닌 전대 고수들로서 황태자의 비밀호위가 아니었던가? 만소주의 몸은 그 즉시 유세옥으로 변형하기 시작했다. "천제회! 너희들도 내일로써 끝이다." 만소주는 주운빈으로 변형하고 있다가 이제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황궁을 빠져나온 것이다. ② "호호호...... 아이...... 싫어요...... 호호......." 주운빈은 황태자가 은밀히 사라지고 난 후, 원려공주의 침소에서 그녀와 육체의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흐흐...... 공주! 공주의 몸은 정말 아름답군! 이 젖무덤은 언제 만져도 몽실몽실하단 말이야.


흐흐흐......." 원려공주의 젖무덤을 마구 주무르고 있던 주운빈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음! 역시 놈이 오는군!' 예리했던 눈빛은 사라지고 다시 흐릿하고 음탕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흐흐...... 간지러워......." "흐흐...... 정말 좋구나!" 주운빈이 막 그녀의 위로 올라 타려는 순간,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방문 앞에 엄유랑이 나타났다. "어맛! 금군총통령!" 원려공주가 뾰족한 소성을 발출하며 엄유랑을 불렀다. 주운빈은 두려운 얼굴로 그녀의 뒤로 숨었다. 그는 매우 두려운지 치를 떨었다. '어, 저 사람이 갑자기 여길 왜 나타났지. 무서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엄유랑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웃음 한 줄기가 번져갔다. 원려공주는 옷매무새를 매만지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엄유랑이 환약 하나를 원려공주 앞에 던졌다. 붉은 빛이 감도는 황소 눈알만한 환약이었다. "먹여라!" 원려공주의 눈에 의아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환약은 천일취혼환락산의 해약이다. 어서 저 놈에게 먹여라!" 원려공주는 흠칫 하면서도 표독한 표정으로 엄유랑을 노려보았다. "네가 감히 대원의 공주인 나에게 반말을 지껄이다...... 니......." "아가리 닥치고 어서 그 환약을 저 놈에게 먹여라." 원려공주는 나직이 한숨을 뿜어내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이켰다. 이때, 주운빈은 속으로 끝없이 냉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후후후...... 엄유랑! 네놈이 그런 얄팍한 수작을 펼치다니...... 그 약을 먹은 후의 변화를 보고 내가 가장하고 있는가 어떤가를 시험하려 들다니....' 원려공주는 멍청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주운빈을 향해 환약을 내밀었다. "자, 이 약을 먹어라!" "공...... 공주! 어찌 나에게 약...... 을......." 찰싹! 원려공주는 매섭게 그의 뺨을 때렸다. "잔소리 말고 어서 이 약을 받아 먹어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부드럽던 그녀였으나 지금은 서릿발같은 한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주운빈의 턱을 벌린 다음 환약을 먹였다. 환약은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녹아 그의 목줄기를 타고 들어갔다. "우...... 엑!" 먹은 것을 전부 토할 것 같은 고약한 냄새가 주운빈의 속을 뒤집었다. "캐...... 액! 컥!" 주운빈은 속이 뒤집히는 메스꺼움에 구역질을 계속했다. 그것도 잠시, 주운빈은 구역질을 멈추고 두려운 눈으로 엄유랑을 주시하였다. 길고도 지루한 시각이 흘러갔다. 세 사람 사이에는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여전히, 주운빈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질식할 듯한 엄유랑의 신광에 자꾸 움츠러들 뿐이었다. 엄유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음! 역시 저 놈은 천일취혼환락산에 중독되었구나. 흐흐흐......이제 내일이 오면 지루했던 삼십 년의


모든 계획이 완료되는구나. 황제?' 엄유랑은 황제에 대한 생각이 치밀자 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크하하......." 그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떠나갔다. 황제? 서자출신? 자신의 신분을 보상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 엄유랑에게 있어서는 한이자 거대한 포부였다. 그는 역시 일대의 효웅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를 따라 주운빈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황주! 너는 상대를 잘못 택했다. 너의 상대가 누구인가? 바로 주운빈이다.' 엄유랑이 모든 음모를 완성시키면서 단 하나 실수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주운빈이 얼마만한 무학을 지녔는지 몰랐다는 것이었다. 주운빈의 무학 경지! 그는 모든 만물이 마음 속에서 하나로 형성되는 것을 깨우쳤다. 명(明), 공(公), 허(虛), 무(無), 그리고 원(元)! 원(元)의 진리(眞理)를 깨우친 마음이라 그는 무학 정각(正覺)의 지혜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불가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통달보리심(通撻菩提心) 도가에서는, 무위화성 비상비비상처(無爲化成 非想非非想處)라 한다. 명실공히 이 경지를 이루면 보통 평범한 사람처럼 변하지만 신체는 도검수화만독불가침(刀劍水火萬毒不可侵)의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이 되는 것이다. 이 경지를 이루려면 깨달은 줄 모르면서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을 버리는 것과 동시에 얻으면서 깨어있는 상태에서도 자신마저 잊어야 하는 것이다. 각설하고, 주운빈은 등 뒤에서 원려공주를 껴안았다. '후후...... 엄유랑! 나는 마음만 먹으면 공력을 마음대로 없앴다가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한 것이다. 내몸은 어떤 힘으로든 다치게 할 수 없다.' 원려공주, 지금은 거꾸로 주운빈에 심령을 제압당하여 그의 충실한 노예가 된 원려공주, 그녀는 주운빈의 손길이 스치는 몸구석마다 욕정이 일기 시작했다. "흐응...... 어서...... 요." "비천하고 불쌍한 계집!" 주운빈은 그녀의 수혈을 짚었다. 제 29 장 거사(巨事)는 실패하고 ① 밤! 황제를 죽이려는 거사가 이루어지기 전날 밤이었다. 밤은 오경(五更)으로 기울어졌다. 천지(天地)는 온통 적막한 가운데 묻혔다. 주운빈! 그는 홀로 침상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단번에 모두를 죽여버리면 간단한 것인데...... 후후......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려니 조금 힘이 드는구나.'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내일 엄유랑이 벌일 거사를 생각하면서 잔인한 미소를 띠었다. '아버님! 당신은 죽음으로써 승리를 얻으셨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목숨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은 못됩니다.' 주운빈의 얼굴에는 음영이 얼룩졌다. '아...... 아...... 어머님! 진정 위대한 분은 당신이었건만, 아버지의 영명에 가려 누구하나 받들어 주는 사람이 없군요. 그러나, 어머니! 이 아들은 한시도 어머니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어머니는 천계(天界)에서 아버님과 행복하게 사시겠지요?'


상념(想念)! 주운빈은 탄식하듯이 나직이 뇌까렸다. "부끄럽다. 이룩한 기반을 모두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주운빈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순간, 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예측대로 사냥개들이 몰려오는군.' '삼황자, 그 놈이 거사 전에 나를 죽일 줄 알았지. 흐흐흐...... 하나, 둘...... 다섯! 모두 다섯 명이다.' 주운빈은 아무런 기색없이 누워 있었으나 잠시 놀란 빛이 서렸다. '몸놀림이 극히 경쾌하고...... 소리도 없다. 모두가 절정고수! 금의시위들이군.......' 주운빈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싸늘하게 빛났다. 펑! 파파파파팍! 돌연, 방문과 창문이 박살나며 다섯 줄기 인영이 빛살같이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 순간, 무서운 장력(掌力)과 우박같은 암기(暗器), 그리고 번쩍이는 광채가 주운빈이 누워 있던 침상을 덮쳤다. 삼황자는 폐인이 된 주운빈을 찢어 죽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퍼...... 펑! 순식간에 침상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것은 실로 눈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허나, 침상은 산산조각이 되었으나 주운빈은 그 자리에 없었다. 어느새, 주운빈의 몸은 천정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앗......." "헛?" 다섯 인영은 어리둥절한 듯 주위를 살폈다. 그 순간 냉랭한 음성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너희들은 삼황자가 보낸 개들인가?" "아니!" 다섯 인영은 어스름한 침소에서 모두 대경을 터뜨렸다. 그들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지며 천정을 쳐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주운빈은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다. "네 놈들하고 장난질이나 쳐야겠다." 동시에 그의 좌우 쌍장이 눈부실 정도로 빠르게 번뜩였다. 퍼...... 엉! "억!" 다급한 비명이 연달아 들렸다. 동시에 네 인영은 뒤로 퉁겨지듯 곤두박질치며 벽에 부딪쳤다. 허나 상대는 주운빈이었다. "흥! 아직 멀었다." 주운빈은 냉소치며 다시 신형을 풍차처럼 회전시켰다. 그러자, 그의 좌우 쌍장이 연달아 이십사 장을 내갈겼다. 파파파파팍....... 장풍은 엄청난 태산과 같았다. "크...... 윽!" 다섯 명의 살수들은 견딜 수 없는 압박에 모두 위로 나가 자빠졌다. "으...... 이럴 수가......." "저 놈은 천치이고 무공이 폐지당했다는데......."


"닥쳐라!" 주운빈이 대갈을 지르며 주먹을 반쯤 쥐고는 일권(一拳)을 내질렀다. 쌔...... 애...... 액! 펑! "크...... 악!" 살수 하나가 가슴에 주먹만한 구멍이 뚫린 채 그 자리에서 즉사를 했다. 이어, 주운빈은 잔혹한 냉소를 치며 연이어 사권을 내질렀다. "으으...... 살려줘! 으악!" 삽시간에 다섯 명은 가슴이 으스러져 즉사했다. 삽시간에 피비린내가 방 안을 진동했다. 그 순간이 지나고, 황태자가 유령같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주형, 역시 그 어느 누구도 감탄시킬 솜씨이오." 주운빈은 씩 웃었다. "어디 태자의 공력에 비할 바 되겠소이까?"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들의 마음도 변했다. 두 사람은 더할 수 없이 우정을 느끼고 있었다. 적황자는 허공에다 대고 나직이 외쳤다. "건곤오절, 그대들은 어서 짜여진 대로 행동하시오." 일순, 갑자기 다섯 줄기의 바람이 스쳐가는가 싶더니 다섯 구의 시체가 없어져 버렸다. 주운빈은 적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건곤오절의 명성은 명불허전이오." "별 말씀을......." 이때 적황자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안색이 가볍게 일변했다. "건곤오절, 그들은 금의시위가 되어 내일 황제의 침소를 지킬 것이오. 또한 만무궁의 전대장로들은 황궁을 포위한 무위살수들을 도살하기 위해 지금 와 있소. 모든 일은 완전히 순조롭게 되었소이다. 그러나......." 황태자는 어두운 낯빛으로 변해갔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기 때문에 표정이 변했을까? 주운빈은 그의 마음을 잘 알 수가 있었다. "태자는 앞으로 나와 적(敵)이 될 것이 두렵소?" "그렇소. 솔직이 두렵소." 주운빈은 나직이 탄식을 뿜어내었다. "아...... 아...... 지금은 그것을 생각하지 맙시다. 아직 우리에게는 우정뿐이오." "원의 국력이 기울어가는 이때에 만난 것이 원통하오." "후후후...... 시대(時代)가 요구하고 역사(歷史)가 원하는 적수인 것을...... 당신과 내가 서로 타고난 민족이 서로 원수지간임을 어찌 하겠소." "그렇소. 우리는 서로 좋은 친구이지만, 서로 피할 수 없는 적수이오." "태자!" "주형!" 그들은 양손을 굳게 잡았다. 그들의 눈에는 뜨거운 우정이 흘렀다. 다만 그것이 숙명적인 만남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밤! 음모와 우정의 밤은 이렇게 깊어갔다. ② 엄유랑은 천천히 황제의 침소로 향했다. 그의 옆에는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삼황자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엄유랑을 힐끔 보면서 자신만이 아는 엷은 미소를 띠었다.


침소에는 개미 한 마리 스며들 틈이 없을 만큼 삼엄한 경비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누구라도 제지를 받게 되어 있는 황제의 침소를 두 사람은 거침없이 들어서고 있었다. 이미 그들과 금의영반과는 묵계가 이루어져 있었다. 엄유랑이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은 본좌하고 같이 들어가겠소? 아니면 밖에 있겠소?" "밖에 있겠소." "알았소. 그럼 본좌가 안에서 손뼉을 치면 들어오시오." "흐흐흐...... 알았소." 삼황제는 애써 여유있는 미소를 나타내려 했으나 굳은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다. 황제의 침소는 거대한 대청과도 같았다. 가장 안쪽에 휘장이 드리워진 거대한 침대가 있었다. 서너 사람은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화려한 침상이었다. 침상에는 안색이 창백하여 혈색(血色)이 거의 없는 병안의 노인(老人)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뼈에다 가죽만 남은 것 같은 이 노인의 나이는 오륙십 정도 되어 보였다. 비록 병색이 완연하고 맥 없는 모습이었으나, 가슴까지 수염을 드리운 노인에게는 전신에서 존귀(尊貴)함과 위엄(威嚴)이 흐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 병약한 노인이야말로 거대한 대원제국을 이끌어가는 당금의 황제인 순무제인 것이다. 그가 병석에 누운 지 오 년,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그것은 황실의 안정과 번영을 위하여 전혀 소문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명의가 전심전력을 다했으나 천수를 다해가는지 병은 갈수록 무거워져 이제는 모두가 포기한 상태였다. 그의 옆에는 한 명의 노승이 눈을 감은 채 가벼이 독경을 하고 있었다. 장대한 체구였다. 그러나 마른 편이었으며 눈썹은 서리같이 희어 귀밑까지 드리워져 있는데 그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방 안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감도는데 오로지 마음을 씻어주는 듯한 독경 소리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그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금군총통령께서 독대(獨對)를 원하옵니다." 가늘고 긴 목소리였다. 순무제의 무거운 눈꺼풀이 간신히 열려졌다. "독대를? 들라하라!" 독대란 신하가 황제를 단독으로 알현하는 것을 말한다. 황제의 기운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며 냉막하고 수척한 안색의 엄유랑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싸늘한 광망을 폭사하며 침상 안으로 다가섰다. 그 순간, 들릴 듯 말 듯 독경을 계속하던 노승의 몸에 가벼운 진동이 일어나며 독경 소리가 멎었다. 동시에, 백미로 뒤덮여 거의 눈도 보이지 않는 노승의 눈에서 무서운 신광(神光)이 엄유랑에게 폭사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찰나지간이라서 엄유랑조차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노승의 안색은 차츰 파랗게 질려갔다. 엄유랑은 팔짱을 끼고 황제를 내려다 보았다. "아미타불......." 들릴락 말락한 불호가 노승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병든 황제의 노안이 파르르 떨리더니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이... 이게 무슨 짓... 이냐....... 네 이노... 옴...... 욱...... 콜록 콜록......."


황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호통을 치다가 급하게 기침을 발하였다. "황제! 이것을 알아 보시겠소?" 엄유랑은 품 속에서 하나의 옥패를 꺼내서 순무제에게 던졌다. "이노...옴...... 밖에 아...무도......없느냐?" 순무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순무제가 대노했는데도 불구하고 밖에서는 전혀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이미 모든 묵계가 이루어진 데다가 엄유랑이 공력으로써 소리를 차단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소음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다. "황제, 아니 아우님! 그 옥패를 보시오." 일순, 순무제와 노승의 교구가 파르르 떨렸다. 순무제는 자신도 모르게 옥패를 집어 들었다. "짐에게도 형님이 있었던가? 아니 이것은......." 순무제의 병안에 극도의 경악이 스쳐갔다. 노승도 옥패를 바라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미타불......." 엄유랑은 노승을 힐끔 주시했다. "대법사(大法師)! 오랜만이오. 한 오십 년 되었나......." "아미타불......." 노승은 불호만 외울 뿐 아무런 말도 못했다. 이 노승은 조정의 황사(皇事)의 주지인 마합존불(魔合尊佛)이었다. 마합존불은 황제가 가장 믿는 사람 중 하나로서 황사(皇師)의 지위에 있었으므로 제아무리 황자들이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마합존불은 엄유랑을 보는 순간, 자신이 오십여 년 전 선황을 따라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기억이 섬전불처럼 기억났던 것이다. 그때, 십여 세의 엄유랑은 이렇게 말했었다. "황사! 이 다음에 내가 황제의 자식임을 증명시켜 주시오. 그리고 내가 황궁에 나타났을때는 이미 다음 황제는 나라는 것을 알고 계시오." 십여 세 어린 나이에 토해낼 수 있는 엄청난 말! 마합존불은 그때 엄유랑에게 까닭모를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 엄유랑이 정말로 오십 년이 지난 다음 그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엄유랑은 마합존불의 격동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일순, 그는 차디차게 말했다. "대법사! 만나자마자 이별이구료!" 슈...... 욱! 그의 식지에서 금광(金光)이 폭사되었다. "아미타불...... 으윽......." 대법사는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불호를 외우고는 절명했다. 그의 천령혈에는 손가락 굵기만한 구멍이 생겨났다. 순무제는 지금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으...... 도대체 이...... 게 무슨 해괴한 일이로고......." 순무제는 경악 중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았다. "그대...... 는 누구...... 인가....... 그리고 선황의 옥패는 어...... 디서...... 났는가....... 쿨룩쿨룩......." 엄유랑은 조용히 대답했다. "노부는 너의 형님이며, 선황의 옥패는 노부가 황제의 씨앗을 증명하기 위해서 선황이 준 것이다." "이럴...... 수...... 가......." 순무제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옥패를 쥔 손만이 부들부들 떨렸다.


엄유랑은 차갑게 말을 끊어했다. "너는 매우 오랫동안 황제의 보위를 누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자리를 내놓을 때가 되었다." 순무제는 너무나 기가 막혀 할 말을 잊었다. 고금이래로, 이러한 일이 황제의 침소에서 일어났다는 소리를 그는 결코 들은 적이 없었다. "아우! 네 셋째아들이 너의 자리를 원한다. 노부는 그 놈에게 약속을 했다. 황제의 위를 빼앗아주겠다고 말이다." "이...... 런 반역무...... 도한 놈들 같으니라고......." 딱! 엄유랑은 진기를 거두며 손뼉을 가볍게 쳤다. 휘익! 가벼운 파공성이 들려왔다. 긴장된 표정으로 밖에서 기다리던 삼황자는 일시간에 침소로 뛰어들었다. "총통령! 그를 죽였소?" 그의 음성에 대답이라도 하듯 섬ㅉ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노...... 옴!" 황제의 격노한 호통성이 삼황자의 귓전을 때리는 것이 아닌가? 삼황자는 대경실색했다. "아...... 아버...... 님......." 병약했으나 순무제는 아직도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삼황자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총통령! 이게 어찌된 일이요?" 순무제가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며 손으로 삼황자를 가리켰다. "네...... 놈이...... 이럴 수가 있단...... 으윽...... 쿨룩쿨룩......." 삼황자는 모든 일이 틀려버린 것을 직감했다. 황제는 아직 살아 있었고 엄유랑은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으...... 이제는 죽기 아니면 살기다." 삼황자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밖에다 대고 외쳤다. "시위영반은 위사들과 함께 이것들을 죽여 버려라." 거의 발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그러나 삼황자의 목소리는 대답없는 메아리가 되어 침소 안을 맴돌 뿐이었다. 엄유랑이 삼황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흐흐흐...... 이 놈아! 영반은 이미 본좌가 거두어 들인 지 오래다." 삼황자는 아찔한 현기증이 일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쓰든지 이곳을 벗어나든지 엄유랑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갑자기 삼황자의 안색이 더할 수 없이 밝아졌다. 그것은 잠시 잊고 있었던 무형산공독을 뿌려둔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일순, 눈 앞이 환해지며 광명(光明)이 보이는 듯했다. "흐흐흐...... 네놈이 흑심(黑心)을 따로이 품고 있을 줄 이미 생각하고 있었지. 그러나 네 놈은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다." "흐흐흐...... 어린 놈! 내 몸에 뿌린 무형산공독을 말하느냐?" "아니! 그것을......." 삼황자는 질겁을 했다. 이어지는 엄유랑의 말이 삼황자의 마음을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로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이 놈! 본좌의 몸은 이미 금강불괴다. 그따위 무형산공독이 통할 줄 알았더냐? 멍청한 놈!"


삼황자는 이빨을 악물더니 벼락같이 쌍장을 뻗어내었다. 가공할 장력이 그의 장심에서 뜨거운 열기를 포함하고 발출되었다. 우르르르......릉....... 엄유랑은 지독히도 싸늘한 조소를 터뜨렸다. "그따위 축융문(祝融門)의 태양축융신공(太陽祝融神功)따위로......." 엄유랑은 우수(右手)를 쭉 내밀었다. 순간, 그의 손에서 시뻘건 불덩이가 폭사되었다. 쌔...... 애...... 액! 파공음이 일며 한 줄기 혈광(血光)은 태양축융신공을 뚫고 들어갔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보다도 더 빠른 속도였다. 퍼...... 엉! "크...... 아...... 악!" 삼황자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육신이 산산조각이 났다. 피가 뿌려지고 찢겨진 골육이 튀었다. 허망한 권력에의 욕심이 가져다 준 참사일 뿐이었다. 엄유랑은 산산조각이 난 삼황자의 육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무서운 흉광을 폭사시키며 순무제를 주시하였다. "아우! 노부는 분명 너보다 사 년 빨리 태어났다. 물론 아버지는 선황이었다. 그러나 노부는 황제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노부는 바로 서출이기 때문이었다." 순무제는 아무 말없이 엄유랑을 쳐다 보았다. "서출도 서출 나름이지만, 노부는 황궁에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그것은 선황의 엄명에 의해서였지. 노부는 선황에 의해서 철저한 이용물로 키워졌다." 엄유랑은 갑자기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아무도 모르게 노부는 선황의 명에 의해서 원황실을 지켜왔다." 돌연, 엄유랑의 눈에서는 원한으로 점철된 새파란 한광(寒光)이 줄기줄기 쏟아져 나와 황제의 병안에 꽂혔다.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그 무서운 한광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엄유랑은 손을 들어 황제를 가리켰다. "아우야! 노부는 선황에게 할만큼 다했다. 원(元)제국을 지키기 위하여 수십 년 동안 온갖 계략을 짜내어 전 중원을 말살시켰다. 이제 노부는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할 때가 왔다." 엄유랑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단 일장에 황제를 쳐죽일 기세였다. 그런데, 돌연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순무제가 입을 여는 것이 아닌가? "엄백부! 당신이 말살시켰다고 생각한 중원의 정기(正氣)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오." 너무나 뜻밖에도 황제의 입에서는 맑고 담담한 음성이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닌가? 엄백부! 순무제가 무슨 연유로 엄유랑을 엄백부라 부르는가? 엄유랑은 손을 든 채로 부르르 떨었다. 전신이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너무나 귀에 익은 목소리!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자신이 가장 사랑했으면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친구의 후손!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주운빈이었다. 우드윽...... 우득....... 뼈마디가 탈골되는 소리가 들리면서 병약한 순무제의 노안이 흔들리면서 서서히 서기어린 위엄이 배인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주운빈! 주운빈이었다. 엄유랑, 그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조금 전 자신에게 죽음을 당했던 삼황자의 어처구니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맑고


고요함이 담긴 눈과 끝없이 흔들리는 분노로 일그러진 눈이 허공에서 얽혀졌다. 억겁(億劫)같기도 하고 일수유(一須유)같기도 한 시간이 흐른 후, 지독한 분노가 서린 음성이 엄유랑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너, 너로구...... 나......." 주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엄백부, 바로 주운빈이오." "이...... 이럴...... 수가......." 일시간에 엄유랑의 마음에 견딜 수 없는 허탈감이 회오리쳤다. 눈 앞이 아득했고, 머리 속은 아찔한 현기증이 감돌았다. 주운빈은 담담한 음성으로 그의 절망감을 일깨워 주었다. "엄백부! 모든 것은 끝났소. 만무궁을 없애려던 흉도들은 삼십만 근의 폭약과 함께 사라졌소. 물론 백부가 자랑스러워 하던 천제회도 말이오." "으...... 이럴...... 수가......." 엄유랑은 자신의 머리 속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어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었다. "또한 황궁을 포위한 무귀살수들은 지금 만무궁의 전대장로(前代長老)들과 건곤오절(乾坤五絶)에게 도륙을 당하고 있소. 이래도 중원의 정기가 말살되었다고 말할 수 있소?" "으......." 엄유랑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피가 흘러 내렸다. 흐르는 피를 보니 꿈이 아닌 생시가 틀림없었다. "이...... 이럴 수가......." 엄유랑은 주운빈의 말을 듣고서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단 한순간, 손 한 번만 내리치면 황제가 될 수 있었던 순간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엄유랑! 그 또한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일대의 효웅이었고,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 오십 년을 끈질기게 버텨온 인물이었다. "흐흐흐...... 역시 주석빈의 아들답구나. ���러나 아직 아무 것도 끝난 것이 없다." "그렇소. 백부! 어차피 백부와 나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끝이나는 것이오. 그리고 승리한 사람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오." "그렇구나. 너는 참 잡초처럼 질긴 놈이구나!" "그것은 백부도 마찬가지요." "주운빈아!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시위영반을 뜻하는 것이오? 그는 삼황자의 신하도 백부의 수하도 아니오. 그는 오직 성스러운 황제의 신하일 뿐입니다." "음...... 너는 죽이기에 앞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구나." 급격히 밀려드는 패배감! 엄유랑은 그들 부자(父子)에게서 한 번도 이길 수가 없었다. 엄유랑의 표정은 원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무섭도록 침착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만 묻겠다. 순무제는 네가 죽였느냐?" 주운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아직은 나는 원제국의 황제가 될 마음이 없소. 나는 내 민족의 나라를 세울 것이오." "음......." "황제는 바로 저기에 있소." 엄유랑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침소 입구에 병약한 노구의 황제가 서 있었다. 그 옆에 황태자가 손무제를 부축하고 서 있었다. 그 뒤로 백설(白雪)보다 더 흰 백의를 입고 백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다섯 명의 노인이 서 있었다. 건곤오절! 그들은 바로 전설 속의 고수들인 건곤오절이었다. 황제는 허망한 시선으로 흩어진 자식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의 부질없는 욕심! 특히 권력에의 욕심은 왕왕 핏줄간에도 못할 짓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황태자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엄유랑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감격 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한 눈으로 주운빈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건곤오절은 백미(白眉)로 뒤덮인 두 눈을 일제히 감고 있었다. 엄유랑은 몸을 돌이켰다. "자! 준비해라. 통쾌히 너를 없애주겠다." 그는 즉시 부자에 대한 패배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주운빈의 말대로 확실하지 않은 승부는 누가 이겼다고 결코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주운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백부! 여기는 승부를 낼 곳이 못되오." "그럼 어디가 좋겠느냐?" 주운빈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영웅탑(英雄塔)!" 엄유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이야말로 가장 어울리는 장소이구나. 너의 시신을 영웅탑의 제물로 바치겠다." 엄유랑은 몸을 솟구쳤다. 그 역시 효웅이었으나 사나이의 지닐 바를 모두 지니고 있었다. 주운빈은 담담히 적황자를 주시하였다. "태자! 이 싸움에서 내가 살아난다면 이제 태자와 나의 차례요."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나는 중원의 주인(主人)이 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나 역시 원 황실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오." "하하하...... 태자와 친구로 영원히 지낼 수 없는 것이 진정 안타깝구료." 주운빈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직도 그의 신형이 그곳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적황자는 굵은 눈물을 흘렸다. 우정의 예의였다. "주형! 꼭 이기길 바라겠소. 그리고...... 내 동생 원려를 용서해주기 바라오." 황태자의 공허한 음성이 쓸쓸한 메아리가 되어 황제의 침소를 감돌았다. 오늘 밤은 유성(流星)이 흐르려는가? ③ 영웅탑은 오늘도 묵묵히 괴물처럼 서 있었다. 수없는 중원무림인의 욕망을 삼켰던 영웅탑! 영웅탑 앞에는 두 사람이 대치해 있었다. 주운빈과 엄유랑! 아니, 불세출의 영웅, 중원무랑군과 희대의 효웅 마혼살유협! 휘이...... 이잉! 한 줄기 피를 흠뻑 품은 밤바람이 대지를 할퀴고 스쳐갔다. 문득, 엄유랑의 탄식이 터졌다. "아...... 아...... 주운빈아! 과연 너를 잘못 생각했구나!" "그렇소! 이제 마지막 순간이오. 나는 당신을 죽여야 하고 당신도 나를 죽여야 하오." 주운빈의 음성은 냉혹했다.


엄유랑은 쓰디쓴 웃음을 띠우면서 주운빈을 바라보았다. 저주! 엄유랑의 눈빛에는 형언키 어려운 무서운 저주의 빛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던 원대한 꿈. 철목진처럼 전 세계를 정복하여 대군주(大君主)가 되고 싶었던 야망이 주운빈 하나로 인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이다. 엄유랑의 그런 지독한 저주의 눈빛을 대하는 주운빈은 평온했다. 무심(無心)! 아무런 생각없는 눈길로 흘러가는 구름만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 고인 미소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저절로 포근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고, 그의 맑은 두 눈을 바라보면 누구나 고개를 숙이게끔 되었다. 엄유랑의 살기! 온 천지를 말살시킬 듯한 살기는 그의 미소에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잠시 하늘을 향해 있던 주운빈의 눈길이 엄유랑을 향하더니 문득 한 줄기 미소를 머금었다. 부처님의 자비스런 미소. 바로 광명진신(光明眞身)에서 우러나오는 환한 광채였다. 엄유랑은 그 미소를 대하게 되자 전신이 오그라들며 등 뒤로 식은땀이 배는 것을 느껴야 했다. 만인의 머리 위에 군림했던 엄유랑. 그러나 이제 그는 주운빈 앞에서 하나의 추악한 필부일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 순간, 엄유랑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저 놈의 보잘 것 없는 미소에 마음이 흔들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 놈은 아직 나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 그의 눈에서는 추악한 화염이 폭사되었다. 그는 적룡검(赤龍劍)을 뽑았다. 츠츳....... 검신이 시뻘건 화염에 휩싸인 것처럼 뜨거운 열기를 끊임없이 토해내는 적룡검이었다. 휘...... 잉! 그는 적룡검을 한 차례 허공으로 펼쳤다. 좌...... 르...... 르...... 르....... 적룡검에서 발출된 열기에 의하여 좌우 수풀에 불이 일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사위로 번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냉(冷)......." 불길을 주시하면서 엄유랑이 좌수를 펼치며 나직이 외쳤다. 그의 음성과 함께 거대한 변화가 일었다. 위...... 익! 한 차례 끔찍스러운 한기(寒氣)가 그의 손에서 일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불길을 따라 흘러갔다. 수풀을 태우던 불이 꺼졌다. 엄유랑은 악독한 광망으로 주운빈의 얼굴을 바라보며 적룡검을 천천히 끌어 올렸다. 그는 아수라한(阿修羅寒)의 잔혹한 음성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부터 검도(劍道)의 다섯 단계를 차례로 펼쳐 보이겠다." 그의 잔혹한 음성은 예리한 비수(匕首)가 되어 주운빈을 처참하게 난도질하려 했다. 허나, 주운빈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엄유랑이 무슨 말을 하건 간에 주운빈에 있어서 모든 것은 헛된 것이었다. 도리어 주운빈은 아무렇게나 헛점을 드러냈다. 그의 서 있는 자세부터가 헛점투성이였다. 전혀 무학을 익힌 사람의 자세가 아닌 것 같은....... 허나, 한 사람! 저주를 품은 엄유랑에게 있어선 그보다 더 빈틈없는 자세는 없는 것이었으니.......


엄유랑의 안색은 침중해졌다. "내가 펼칠 이기어검(以氣馭劍)은 모든 무림인이 펼쳤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또 한 번 외쳤으나 주운빈의 자세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아무런 방비도 없는....... 헛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그의 전신에서 발산되는 무형의 힘은 주위를 너무나도 평화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단 하나의 진실! 바로 그 모습인 것이다. 순간, 엄유랑은 한일자로 세운 적룡검을 비스듬히 내뻗었다. 이기어검! 심극귀원(心極歸元)의 경지에서 펼쳐진 엄유랑의 이기어검. 그것은 한 줄기 끔찍스러운 혈광(血光)으로 변화해 섬전과 같은 살기를 폭사하며 주운빈에게 날아갔다. 번...... 쩍! 우르릉! 우릉! 검이 허공을 가름에 따라 밝은 대낮에 뇌성벽력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혈광으로 변한 적룡검이 눈 깜짝할 사이에 주운빈의 허리를 휩쓸었다. 검은 다시 엄유랑에게 돌아왔다. "베었다!" 엄유랑은 웃음을 흘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는 적룡검을 겨누면서 이미 허리가 잘라진 채 죽어있을 주운빈을 상상하였다. 그의 득의에 찬 시선은 천천히 앞을 향했다. 그 순간, 엄유랑의 입가에 걸렸던 냉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싸늘한 한기가 격탕됨을 느꼈다. "나는 실수한 것이 분명 아니다. 분명히 혈검기(血劍氣)가 저 놈을 베었었다." 허나, 혈광이 걷히면서 제자리에 우뚝 선 주운빈이 여전히 고요한 자세로 모습을 드러냈다. 엄유랑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솟았다. '아! 어찌하여 저런 평화로운 고요함이 저 놈을 에워싸고 있단 말인가? 저 고요한 평화가 진정 저 놈의 몸에서 흐르는 것이란 말인가!' 그는 땀방울이 코끝을 적시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럴 수가! 엄유랑은 자신이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나의 심극귀원이 고갈되다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심극귀원의 경지는 진기를 발출하는데 있어 끝이 없는 경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는 점점 몸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탈태환골한 몸마저도 평범한 몸, 어머니의 몸에서 갓 태어난 신생아처럼 순수한 몸으로 바뀐 자신! '아! 마음의 끝을 성취한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엄유랑은 이러한 반문을 끝없이 되풀이 하면서 휘청거렸다. 문득, 그는 주운빈의 미소를 보는 순간 전신을 세차게 떨었다. '아! 바로 저것이다. 저것이 나의 힘을 말려가는 것이다.' 그는 심호흡을 길게 하고는 적룡검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잔혹한 흉광이 다시 그의 눈에서 폭출되었다. 주운빈의 자세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여전한 자세에서 풍기는 힘은 더욱 주위를 평화롭게 만들었다. 허나, 그것은 엄유랑을 무섭게 짓누르는 힘이기도 했다. 엄유랑은 답답한 가슴을 터 놓으려는지 냉엄한 음성을 질러내었다. "신검합일(身劍合一)! 어검제세(馭劍制世)!" 순간, 혈풍(血風), 혈광(血光)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엄유랑과 일치가 된 적룡검이 암흑을 갈랐다. 쐐...... 액! 팍!


묵직하고 둔탁한 부딪침이 검신을 통해 전해졌다. 엄유랑! 그는 마음 속으로 밀려오는 벅찬 희열에 몸부림을 쳤다. "으하하하...... 내가 저 놈을 베었다. 나는 이겼다. 으하하하......." 쿵! 무엇인가가 자신의 가슴을 내리치는 것을 그는 느꼈다. "우...... 욱!" 엄유랑은 울컥 한 모금의 핏덩이를 토해내면서 몸을 비틀거렸다. 경악! 그의 눈에는 오직 이 하나만이 가득 뒤덮였다. 그리고 서서히 그의 전신은 더할 수 없는 공포감에 물들어갔다. 그는 몸을 바로 세우며 심호흡을 했다. 그 순간에 이미 자신의 내상이 깨끗이 치료된 것을 느낀 엄유랑은 적룡검을 다시 쳐들었다. 주운빈은 처음 그대로 변함없이 서 있었다. 헌데, 이번에는 그의 주위에 깔린 힘이 틀렸다. 그의 주위가 무거운 정적으로 휩싸이면서 만 년의 억겁 속에서 이루어온 세월의 힘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엄유랑은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나의 혼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구나!" 그가 이렇게 울부짖을 때, 주운빈의 마음 즉 광명진경의 황활(廣闊)한 마음 속에서 생겨난 위대한 힘이 하나둘 엄유랑을 향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거산(巨山)! 엄유랑의 눈에 비친 그 힘은 하나의 거대한 산으로 보였다. 그는 숨이 콱 막히면서 터질 듯한 두려움이 마음 속에 팽배해 옴을 느꼈다. "으...... 얍!" 그는 한 차례 처절한 고함을 내질렀다. 엄유랑은 단전에서 자신이라도 태울 것 같은 뜨거운 진기가 파도처럼 밀려나오자, "무심무상검강(無心無想劍 ), 천극검환(天極劍環)!" 순간, 선혈로 뭉친 것 같은 둥그런 환이 적룡검의 끝에서 밀려나와 밀려오는 거대한 산의 압박에 마주쳐갔다. 휘......류......류......륭....... 처절하리만큼 훨훨 타오르는 그의 검환은 모든 것을 태우며 파도가 밀려오듯 흘러나왔다. 그것은 주운빈의 근원을 말살해갔다. 약 일 각이 흐르자, 자신을 압박하던 거대한 힘이 사라짐을 엄유랑은 느꼈다. 순간, 그는 자신의 정수를 모은 혈검환(血劍環)을 주운빈을 향해 몰아쳐 내었다. 슈......우......우......웅! 혈검환의 폭풍이 주운빈에게 부딪친 것을 그는 똑똑히 보았다. 그는 미친 한 마리의 늑대처럼 울부짖었다. "크하하하......핫! 이번에는 정말이다. 정말로 저 놈을 벤 것이다. 으하하하......." 그의 울부짖는 광소가 아스라이 멀어져가고 다시 적막한 고요함을 찾았을 때 엄유랑이 발출한 모든 정수는 고요속으로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었다. 다만 여전히 미소띤 주운빈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었다. 엄유랑은 다시 선혈을 토해냈다. 이번에는 엄청난 양이 그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아! 이럴 수가 있는 것인가? 저 놈을 둘러싸고 있는 고요함이 나의 모든 것을 흡수하다니.......' 엄유랑이 세 번의 무정무신의 검도를 펼쳤을 때 주운빈은 적나라한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엄유랑은 울부짖었다.


"이...... 노옴! 너의 힘의 근원(根源)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아...... 아! 마음을 정복한 나, 무심의 무를 이룬 나로서도 깨달을 수 없는 힘이 있었단 말인가!' 돌연, 검을 잡은 그의 손아귀가 힘을 주자 지렁이같이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얼굴엔 송충이보다 굵은 힘줄이 솟구쳤고, 안색은 창백해 갔다. 흐르던 선혈은 멈추었으나 피로 물든 그의 입은 흡혈귀의 입과 같았다. 흉신악살! 일순, 그는 적룡검을 가슴 앞에 세우더니 손가락으로 검을 퉁기기 시작했다. 땅...... 따땅! 땅....... 그러면서 피에 굶주린 배고픈 이리처럼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탄지검음(彈指劍音) 탄지검음아, 어서 그를 꿰뚫어라! 꿰뚫으란 말이다." 그러나 주운빈은 편안한 눈으로 엄유랑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을 뿐, 그의 자세는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땅...... 따따따...... 땅! 따땅...... 따당...... 땅....... 엄유랑은 계속 미친 듯이 검을 퉁겼다. 일순, 그는 자신의 머리가 텅 비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검을 퉁기는 좌수의 다섯 손가락이 찢어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아픔을 모르는 듯하였다. 툭! 툭! 너무 진력을 쏟아 검을 퉁기자 손가락 끝 마디가 부러져 나갔으나 주운빈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엄유랑은 울부짖으면서도 적룡검을 바꿔쥐고는 오른손으로 검을 퉁겼다. 돌연, 엄유랑은 눈을 감았다. '차라리 눈을 감자. 만해(萬海)에 빠져버린 하나의 바늘 같아지는 나의 느낌은 무엇을 나타내는지 도저히 모르겠구나. 저 놈은 어디서 얻은 저런 고요함으로 삼라만상의 정기를 구한단 말이냐?' 엄유랑의 감긴 눈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손을 떨구었다. 수십 수백 번을 퉁겨보아도 소용이 없자 엄유랑은 자신의 행위에 지쳐버리고 말았다. '내 마음이 터질 것만 같고 도저히 안정이 되지 않는구나.' 천지가 온통 노랬다. 평화롭기만한 고요함은 엄유랑에게 있어서 도저히 감당못할 심한 핍박으로 바뀌었다. 억겁의 위세가 그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으...... 으윽...... 이것이 감당할 수 없는 세월의 힘이라 하는 것인가? 그럼 저 놈은 정녕 세월 속에 자신을 파묻었단 말인가? 그......그렇다면 무진기 심극살 의형수형의 반정반심(反精反心)인 천지극 오행합일인의 경지를 저 놈이 이루었단 말인가? 말도 안된다. 말도 안되는 소리란 말이다.' 거산만해(巨山萬海)와 광명진신(光明眞身)인 주운빈의 몸에 서서히 광채가 서리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단지 한 부분, 석가모니께서 성불(成佛)하였을 때 어깨 위에서 찬란히 빛나던 자비의 광명, 그 빛이 주운빈의 어깨 위에서 피어오르며 엄유랑의 암흑의 혈광을 걷어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엄유랑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저 놈은 정녕 세월이란 말인가?' 그는 선혈을 한 모금 쏟아내더니 호흡을 깊이 하였다. 그 순간에 엄유랑의 안광이 점점 고요를 이루었다. 엄유랑의 전신에서 천지를 잠깨우는 암흑의 적막한 고요가 흘러나와 주운빈의 평화로운 고요와 마주쳤다. 천지가 암흑과 공포에 물든 고요함과 풍요로움, 안도감 평화를 주는 고요함. 허나, 엄유랑의 생기없는 적막한 고요함은 어느새 잠식되어 자기 자신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이럴 수는 없다. 저 놈의 고요함과 나의 고요가 다를 게 무엇인가? 저 놈만 없애면 나는 천하에


적수가 없다. 그러면 다시 나의 원대한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의형살검(意形殺劍)!" 드디어, 엄유랑은 검도의 끝인 마음의 검을 발출시켰다. 또 다른 말로 심검(心劍)이라 불리는 의형살검의 무진기가 주운빈을 향하여 발출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주운빈은 걸음을 옮겨 서서히 엄유랑에게 다가갔다. 그는 양 손을 번갈아 들었다 올렸다 하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우수에서 건(乾)이 밀려나왔고 좌수에서는 곤(坤)이 밀려나와, 천지가 움직이며 만물의 모든 힘이 엄유랑의 의형살검, 뜻 속의 살검을 차단시켰다. 엄유랑은 뚫을 수 없는 천지간의 압박에 대항하여 솟구치는 진기로 살검을 발출하였다. 그는 건을 격파하였다고 생각했고 곤을 파괴시켰다고 느꼈다. 허나, 건곤은 또 밀려오고 엄유랑은 재차 살검을 토해내었다. 그는 끊이지 않고 무진기를 발출하여 건곤을 없앴다고 생각했다. 허나 천지만물의 위세는 여전히 그의 생각을 짓눌렀으니, 주운빈은 점점 가까이 다가섰고 엄유랑은 무진기 심극살 의형수형의 의형살검은 여전히 건곤을 파헤치고 있었다. 그러나 건곤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일만겁의 위세에 다시 이만겁의 세월이 겹쳐져 엄유랑에게 짓쳐들었다. 엄유랑은 안색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며 뒤로 밀려났다. 순간, 그의 귀에 광명법음이 들려왔다. "무심무물(無心無物)!" 엄유랑은 무릎을 꺾 으면서 앞으로 쓰러졌다. 그의 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뒤덮였다. 엄유랑의 의형살검은 주운빈의 광명전신에 한 줌의 먼지처럼 흡수된 것이다. 엄유랑은 억조창생의 세월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의 의형살검은 단지 세월 중의 일부분인 것을 어찌하랴! 하늘의 소리인 양 심유무심한 주운빈의 음성이 엄유랑의 귓전을 때렸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아버지를 죽게 만든 흉수를 찾거든 당신의 무공으로 흉수를 죽여달라고 부탁하였지요." "으음......." "이제 당신의 무공으로 당신을 죽여주겠소." 심맥이 파열된 엄유랑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언제나 푸르른 하늘이었다. "아―! 너의 부자에 대한 나의 패배는 주어진 운명인가? 억울하구나...." 순간, "마황파천수라참(魔皇破天修羅斬)!" 슈슈슈...... 슉! 슈우욱! 주운빈의 쌍수에서 은빛 비늘같은 삼백육십 개의 강기가 작렬했다. 그 강기는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엄유랑의 전신에 꽂혔다. "크...... 아악!" 마지막 비명소리, 피가 허공으로 퍼졌다. 바로 효웅의 피였다. 휘......이......익! 강한 바람이 흩어진 엄유랑의 시신 조각들을 쓸어갔다. 주운빈은 묵묵히 자신의 단 하나의 적수였던 엄유랑의 잔재들을 주시하였다. 그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다. 오직, 천하를 향한 불굴의 투지만이 점점 불타오를 뿐이었다.


그의 눈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엄소군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저주하던 아버지의 잔재를 허망한 눈길로 쓸어버렸다. 주운빈은 나직이 뇌까렸다. "미안하다. 소군!" 엄소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쓸쓸한 어조(語調)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괜찮아요. 아버지와 주랑의 숙명인 걸요." 주운빈의 눈에 밝은 웃음을 지며 뛰어오는 여인들이 있었다. 황성란! 설랍봉! 바로 주운빈을 내조할 여인들이었다. 그 뒤를 이어, 요 몇 달 사이 몰라보게 늙은 만소주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주랑!" "주......라......앙!" "주공!" 그들은 감격에 겨워 주운빈을 불렀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대단원(大團圓) 밤이 되었다. 주운빈은 영웅탑 위에 우뚝 서서 서곤륜산(西崑崙山)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홉 번의 절을 올렸다. "사부님, 이 제자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단 한 번도 두 분 사형의 지위를 사용하지 않았던 주운빈, 그렇기 때문에 자랑스럽게 대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품 속에서 하나의 금낭을 꺼냈다. 사부인 무명노승(蕪名老僧)이 준 것이었다. 이제는 금낭을 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소중하게 금낭을 열었다. 금낭 안에서 황금색실로 수놓아진 찬란한 깃발이 들어 있었다. 깃발에는, 대명(大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이라 수놓아져 있었다. 사부의 선물이었다. 영웅탑에 하나의 깃발이 세워졌다. 이것은 대명제국의 효시를 알리는 위대한 출발이었다. 아아...... 주운빈! 아니 주원장(朱元璋)! 그는 원대한 대망을 품은 채 서곤륜산을 향하여 섰다. "귀인(貴人), 천하의 주인이 되실 분이오." 사부의 음성이 그의 귓가에 힘차게 울려퍼졌다. 주원장은 나직이 뇌까렸다. "유성(流星), 유성이 흘렀으면......." 순간, 번쩍! 서천(西天)에 찬란하고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빛이 일어났다. 하나의 커다란 유성이 서천을 가르고 있었다. 그것은 대명제국의 출발을 알리는 하늘의 축하였을지도 모른다. "아아...... 내 위업을 필히 이루리라." 유성은 찬란한 꼬리를 늘어뜨리며 저 멀리 사라져갔다. 삼십 년 후, 주운빈. 이제는 주원장인 그는 중원에 명(明)나라를 세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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