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

■ 마 인 -서 문(序文) ━━━━━━━━━━━━━━━━━━━━━━━━━━━━━━━━━━━

서 문(序文)

우리는 흑백논리(黑白論理)로 인해 상처를 입은 적이 많다. 이데 올로기에 의해 분단(分斷)의 비극을 맞기도 했으며 지금 이 순간 에도 사회 각 계층에서는 흑백논리에 의한 택일(擇一)을 강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다.

오직 하나, 유일무이한 선택은 과연 절대불변한 진리인가?

때에 따라서는 가치관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누누이 실증 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불구하고 당대의 논리는 여전히 흑백논리


마(魔)라 부르는 것의 실체는 옳지 않음이요, 잘못된 가치를 말하 는 것이다. 정(正)은 올바름이요, 당당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의 편에 서기보다는 정도(正道)를 걷기를 원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때 로는 정도라고 믿었던 일이

객관적으로 볼 때 마도(魔道)로 분류

될 수도 있으므로.

<마인(魔人)>은 운명적으로 마도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 사나이 의 일대기다. 하필이면 왜 마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다. 어 차피 삶은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으므로 밝은 쪽이 있으면 어 두운 쪽도 있게 마련이다.

이 소설에서는 천륜(天倫), 인륜(人倫), 도덕(道德) 따위가 무시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그에 반하는 가치관의 소중함을 위해 선택된 모티브인 것이다.


무협소설의 재미는 상상의

자유에 있다. 시공을 초월한 SF 물에서

우리는 시대와 국경과 사상을 뛰어넘는 무한공간의 재미를 느끼듯 이 무협소설도 마찬가지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도구(道具)의 선택일 뿐일 것이다.

무공(武功), 기예(技藝), 기진이보(奇珍異寶), 심산유곡(深山幽 谷)에서 만나는 괴담(怪談)과 고사(故事)들....... 이러한 요소들 이 파란만장하게 얽혀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이 무 협소설이다.

<마인(魔人)>은 아주 단순한 소설일지도 모른다. 뿌리깊은 음모로 인한 강호계의 피바람도 알고 보면 하나로 귀일한다. 그것은 인세 (人世)의 욕망이 불러일으킨 짜집기라는 것이다.

<마인>의 주인공이 철저한 마(魔)의

길을 걸으며 시작되는 한 편

의 소설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대조해 보는 것도 또다른 수확이 될는지도 모른다.


동지를 앞둔 어느 날

검궁인 배상.

■ 마 인 제 1 장 무황성(武皇城)의 비밀(秘密) ━━━━━━━━━━━━━━━━━━━━━━━━━━━━━━━━━━━

세상의 온갖 생명들이 잠든 늦은 시각.

번쩍! 꽈르르... 릉!

섬광에 이어 천지를 가르는

듯한 벽력음이 진동함과 동시에 태산

(泰山) 성인봉(聖忍峯) 위에 우뚝 서 있는 무황성(武皇城)은 거센 폭풍우에 휘말렸다.

폭우와 함께 떨어지는 뇌성벽력에 무황성의 웅장한 모습은 간간이


소름끼치는 푸른빛으로 드러나곤 했다. 이때였다.

"응...애! 응...애!"

돌연 폭우를 뚫고 무황성의 후전(後殿)에서 새 생명의 탄생을 알 리는 힘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기쁨에 찬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 나왔어요! 우리들의 아기가......"

그것은 기쁨에 떨리는 한 부인의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응...애 응...애... 캑!"

갑자기 어린아이의 울음이 그치더니 느닷없이 목이 터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아악! 다... 당신 미쳤어요?

아... 아기를 죽이다니! 아기를 죽

이다니!"

이어 여인의 찢어지는 듯한 절규(絶叫)가 천둥소리를 뚫고 들리는


것이었다.

"흐흐흐흑... 또 아기를 죽이다니... 다... 당신은 악마에요! 악 마!"

여인은 피를 토하듯 울부짖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폭음과 함께 후전의 문이 박살나며 안으로부터 한 금의노인(金衣 老人)이 걸어나왔다.

그는 바로 당금

무황성의 주인인 수명사(守命師) 담광현(譚光賢)

이었다. 육십여 세의 나이에

얼굴에는 위엄이 가득 차 있으며 턱

밑에 탐스러운 백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의 두 손은 지금 온통 시뻘건 피로 물들여져 있었다. 또한 눈에 는 시뻘건 핏발이

서 있는 그의 표정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

다.

그는 피묻은 두 손을 뇌성벽력치는 하늘을 향해 휘저으며 괴성을 발했다.


"우우우우... 벌써... 다섯 번째다. 다섯 번째......!"

바로 그 순간,

콰쾅!

박살난 문을 닫고 한 중년미부가 나타났다.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그녀는 품에 피투성이가 된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있었다. 미부는 수명사 담광현을 바라보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악마! 아기를 또

죽이다니! 당신에게는 진정 부정(父情)이 없단

말인가요?"

"......."

수명사 담광현은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흐흐흐흑... 인면수심의 인간같으니라고! 아기를... 아기를 살려 내요!"


중년미부는 이미 숨진 아기를 안고 몸부림쳤다.

번쩍! 꽈 꽈르르릉......!

시퍼런 섬전과 뇌화(雷火)가

건너편 산봉에서 일어났다. 폭우(瀑

雨)였다. 엄청난 폭우였다.

수명사 담광현.

제 이십대 무황(武皇)인 그의 무공은 역대 무황 중에서도 발군의 개세절학을 지니고 있었다.

홍광천도십이식(紅廣天導十二式).

그가 익힌 무학은 단지 이 한 가지뿐이었다. 그러나 이 무학으로 그는 천하제일고수로 반석 위에 올랐다. 더구나 그가 무황에 오른 후 무림은 사상 유례없는 평화를 구가하고 있었다.

무림의 정도는 물론 사도인들까지 한결같이 입을 모아 그를 칭송


했다. 무림의 오랜 정사대립이 그로인해 종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무황 담광현이 자신의 아기를 죽이다니.......

수명사 담광현은 정녕 미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벌써 5 년째였다. 그는 부인이 아기를 낳기만 하면 계속 자신의 손 으로 죽여왔다. 그리고 마침내 이 괴이한 사실은 전 무림으로 퍼 져나갔다.

...... 수명사가 미쳤다!

...... 그는 자신의 아기를 죽이는 마인(魔人)으로 변했다!

무림인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자식을 죽이는 잔인한 부정(父

情)도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왜? 무엇 때문에 자신의 친자식을 태어나자마자 죽여야 하는가?

그러나 괴이한 것은 단지

그 괴행(怪行)을 제외하고 그는 광명정

대(光明正大)하기 그지없는 대인협(大仁俠)이라는 사실이었다. 또 한 그는 첫번째 임기를 마치고 무사히 도전자를 물리쳐 제 이십칠 대 무황의 자리를 계속 유지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왜 그는 자신의 자식을 낳기만 하면 자꾸 죽이는가? 이것 은 실로 풀 수 없는 의문이었다.

■ 마 인 제 1 장 무황성(武皇城)의 비밀(秘密) -2 ━━━━━━━━━━━━━━━━━━━━━━━━━━━━━━━━━━━

당금 무림에서 가장 신비하고 기이무쌍한 삼인(三人)을 일컬어 강 호인들은 무림삼비자(武林三秘子)라 불렀다.

수명사(守命師).

불각승(不覺僧).

천면인(千面人).


그것은 그들의 행적이 언제나 꼬리를 보이지 않는 신룡(神龍)처럼 은밀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행동이 신비로왔기 때문이었다.

수명사 담광현.

아주 오래 전 그는 강호에 나온 지 삼 년 만에 한 가지 기이한 점 을 발견했다. 그것은 삼백 년 전 정사(正邪)가 극적으로 합(合)쳐 져 생겨난 무황성(武皇城)에 대한 커다란 의문이었다.

무황성(武皇城).

이는 중원무림에 수천 년

간 내려오는 끝없는 혈살(血殺)의 윤회

(輪廻)를 종식시킨 정파와 사파를 합친

빛나는 성좌의 상징이었

다.

무황성이 탄생되기 직전인

당시 정파(正派)와 사파(邪派)를 대표

하는 천하제일인이 둘 있었다.

무아성승(無我聖僧)과 천마(千魔) 사도양(司徒揚).

이들은 끝없는 정사 간의

혈투(血鬪)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천산


(天山) 무애봉(無涯峯)에서 회합을 가졌고 무려 칠 주야(晝夜)의 대결전을 벌였다. 제각기 정파와 사파의 운명을 짊어진 채.

그러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그들의 무공은 완전히 백중지세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힘을 합해 정사(正邪)를 통일시키기로 했다.

그리하여 세워진 것이 무황성이었다.

무황성의 초대 맹주, 즉 무황(武皇)은 무아성승(無我聖僧)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제 이대 무황은 천마(天魔) 사도양이 되었다. 그 들이 무황성을 세우자 끝없던 무림의 혈풍(血風)은 거짓말처럼 종 식되었다. 그로부터 삼십 년 후.

제 삼대 무황은 무아성승과

천마 사도양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공

식적으로 비무대회(比武大會)를 벌였다.

패천검성(覇天劍聖) 황보진성(皇甫眞聖).

수백 년 전통의 황보세가(皇甫世家)의

가주인 그가 수백 명의 경

쟁자를 물리치고 마침내 제 삼대의 무황

위(位)에 올랐다. 그가

삼대 무황에 오르자 무황성의 창시자인 무아성승과 천마 사도양은 은퇴를 선언하고 무림에서 사라졌다.


그후 무황성은 패천검성 황보진성의 탁월한 영도하에 무림을 삼십 년 동안 평화롭게 이끌었다. 그후로부터 삼십 년을 임기로 역대 무황은 제 육대까지 내려왔다.

그동안 무림은 유례없이 평화를 구가했다. 그러나 제 칠대 무황에 이르러 마침내 천마 사도양 이래 처음으로 사파인(邪派人)이 무황 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천절마군(天絶魔君) 구양일(歐陽逸).

그는 천마 사도양 이래 최대의 사파

제일고수였다. 역대 무황의

자리를 계속 정파에서 차지함으로 침체되었던 사도무림은 천절마 군 구양일이 제 칠대 무황이 됨으로써 마침내 활기를 되찾았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는 무황의 위(位)에 오른 지 십년 만 에 스스로 무황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선언했다. 그것은 지금으 로부터 백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그것은 당시 무림에 하나의 커다란 수수께끼이자 충격이었다. 특 히 사도무림은 커다란 의혹과

함께 실망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

러나 천절마군 구양일은 무황의 자리에 물러난 후 곧장 자취를 감


추고 말았다.

제 팔대 무황은 다시 비무(比武)를 통해 정파(正派)의 당시 최고 고수였던 천황도(天皇刀) 임무성(任武成)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천황도 임무성은 무황의 위에

오른 지 십년 만에 돌연 한

명의 사파고수에게 도전을 받았다.

그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대사건이었다. 무황의 임기 전에 도전을 했던 자는 아직 한 명도 없었다.

환영신마(幻影神魔) 위지광(尉遲光).

바로 혜성처럼 나타난 사파제일의 대마성(大魔星)이었다.

제 팔대 무황인 천황도 임무성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무황의 위를 걸고 그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는 당시 천하제일고수로 그 만큼 무공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누가 꿈에라도 생각했으랴?

천황도는 단 십 초(十招) 만에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전 무


림이 충격으로 들끓는 가운데

환영신마 위지광은 약조대로 제 구

대 무황에 올랐다.

그러나 무서운 음모와 경악할 혈겁(血劫)의 회오리는 이때부터 시 작되었다. 제 구대 무황인

환영신마 위지광은 무황에 오른 지 십

년 만에 원인도 모르게 실종되고 말았다.

경악(驚愕)과 전율(戰慄), 공포(恐怖)가 중원무림을 휩쓸었다.

정사를 망라한 중원무림은 이

돌연한 사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왜? 어째서? 제 구대 무황이 실종됐는가?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무황성이 비게 되자 정사무 림은 차츰 서로를 의심하고 질시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이백 년의 평화를

깨뜨리고 중원의 곳곳에서 정사의 혈

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혈세무림(血洗武林).

전 무림은 피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곳곳에서 사파의 방파가 무

림패권을 부르짖으며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근 이십 년 간이나


혈풍은 지속되었다.

급기야 정사파는 다시 무황의 출현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극적으로 정파에서는 구파일방 등이 주동이 되고 사파의 각 파 대 표들이 회합하여 새로운 무황, 즉 제 십대 무황을 선출하게 되었 다.

태산(泰山) 성인봉(聖忍峯)의 무황성(武皇城)에서 드디어 이십 년 만에 무황을 선출하는 비무대회가 재개되었다.

그때부터 무황의 임기는 오 년으로 줄어들었다. 그것은 무황의 무 공이 절세적이어야 한다는데 중론이 모였기 때문에 오 년마다 비 무대회를 열어 도전자가 이길 경우 차기 무황에, 현 무황이 이길 경우 오 년을 더 유임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제 십대 무황은 다시 정파에서 나타났다.

파라천무검(破羅天武劍) 사마궁(司馬弓). 그는 무당파(武當派)의 속가인으로 당시 무당장문인의 사숙뻘이었다.

그후 무황은 계속 대(代)를 이어 현세(現世)에까지 십육대, 즉 총 이십오대를 내려오게 되었다. 그동안 무림은 근근히 평화를 유지


했다.

그러나 여기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팔십 년 전부터 내려온 총 십육인의 무황들이 임기가 끝난 후 차례로 원인 모르게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역대 무황 십육인의 실종.

이 사실은 십육인의 개세고수가 어딘가로 납치되었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가공할 대음모였다. 과연 무황성을 둘러 싸고 벌어지는 이 가공할 음모의 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수명사 담광현은 무황성에 얽힌 이같은 수수께끼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게 되어 마침내 무황의 자리에 뛰어 들었다.

그가 익힌 홍광천도십이식(紅廣天導十二式)은 가공할 개세신학으 로서 그는 무난히 제 이십육대 무황의 위(位)에 올랐다.

그리하여 태산 성인봉의 무황성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 해 서든지 보이지 않는 무서운 마수(魔手), 즉 무황성에 근 백 년 동 안이나 떨치고 있는 음모의 주동자를 가려내고자 했다.


■ 마 인 제 1 장 무황성(武皇城)의 비밀(秘密) -3 ━━━━━└ЕЕЕЕЕЕЕЕЕЕЕЕЕЕЕЕЕЕЕЕЕЕЕЕЕЕ

밀실(密室).

창문도 없이 밀폐된 방에

중년선비 한 명과 노승(老僧)이 침통한

표정으로 탁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중년선비는 전신에 귀(貴)한 인품이 흐르는 청수한 모습이었다. 노승은 팔순(八旬) 정도의 나이로 인자하기 그지없는 생불(生佛) 의 모습에 홍의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중년선비는 무공을 모르는 듯 눈빛이 물처럼 담담한 가운데 이따금

평범했으나 노승의 눈빛은

섬광이 번뜩이는 걸로 보아 적어도

반박귀진(返璞歸眞)의 내공순위에 이른 듯 했다.


"......."

중년선비의 안색은 온통 비통과 괴로움에 싸여 있었다. 노승은 그 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아미타불... 담시주. 자식을 희생시키는 것은 육신을 잘라내는 것 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 일은 무림의 억조창생을 위 한 것이니 부디 승낙해 주시기 바라오."

그 말에 중년선비는 한숨을 쉬었다.

"아아... 애초부터 형님께서 무림에 뛰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비 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을......."

넋두리같은 선비의 말에 노승은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담시주. 시주의 형님인 담무황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일대의 구성(求星)이시오. 비록 그분은 불행 속에 빠져 있으나 무 림의 창생을 구원하기 위해 고 계시오."

스스로를 희생시킬 숭고한 결심을 하


'아... 불각대사(不覺大師)의 말씀은 지당하나.......'

선비는 한숨과 함께 내심 중얼거리며 노승을 바라보았다.

불각대사.

그렇다. 홍의노승은 당금 무림에서

가장 신비한 삼인, 즉 무림삼

비자 중의 일인인 불각승(不覺僧)이었다. 또한 중년선비는 현(現) 무황인 수명사 담광현의 친동생인 담광수(覃光水)였다.

담광수의 얼굴에는 온통 비통함이 어렸다.

"내 아내는 이번 일 때문에 거의 실신지경이오."

"아미타불... 내세(來世)에 이르러 담시주의 아드님은 복연을 받 을 것입니다. 또한 시주 부처도 필시 무림의 구인(求姻)들로추앙 을......."

"대사, 소생은 결코 그런

칭송을 받자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단

지... 형님의 유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불각승은 탄식했다.


"아미타불... 담무황께서도 시주의 충심을 알고 계시오."

다음 순간 담광수는 결심한 듯 이를 악물었다.

"데려가시오, 대사. 내세에서나마 내 아이가 좋은 인연 있기를 바 라겠......."

"아미타불... 부처님께서도 복을 내리실 것이오."

불각승은 감격하며 담광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나 담광수는

노승의 손길을 외면하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밖을 향해 말했다.

"부인, 들어오시오."

잠시 후였다.

"흐흐흑......!"

비통한 울음과 함께 방 안으로 한 명의 미부가 들어왔다. 온통 창 백한 안색이 눈물로 젖어 있는 그녀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여보... 우리 아기를... 꼭 희생시켜야 하나요! 실로 당신이 원 망스럽군요!"

담광수는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향했다.

"부인, 고정하시오. 이것은... 하늘의 뜻이오."

그러나 미부는 머리를 세차게 내저었다.

"무엇이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요? 아기를 희생시키는 것이... 하 늘의 뜻이란 말인가요?"

그 눈물겨운 광경에 불각승은 눈을 감으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슬픈 일이로다... 슬픈 일......."

담광수는 입술을 깨물며 미부에게서 어린애를 안았다.

"흑흑흑... 여보! 우리 아기... 내 아기......!"

미부는 탁자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담광수는 터질 듯이 입술


을 깨물며 아기를 불각승에게 넘겼다.

"대사, 부디... 일이 성사(成事)되어 이 아이의 희생이 헛되지 않 게 해주시오."

불각승은 아기를 두 손으로 받아 안았다.

"아미타불... 부처님의 돌보심이 있을 것이오."

이어 그는 두 부부에게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방 밖으로 나갔다.

"으흐흑......!"

미부는 이윽고 담광수의 품에 몸을 던지며 통곡을 터뜨렸다. 담광 수는 초점 잃은 눈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인, 자식을 잃는 고통은 큰 것이오. 그러나 형님은 벌써... 수 년째 친히 친자를 죽이는 고통을 계속하고 계시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아아... 아무튼 이 한 번의 희생으로 모든 비극이 종결 되었으면 좋겠소."


■ 마 인 제 1 장 무황성(武皇城)의 비밀(秘密) -4 ━━━━━━━━━━━━━━━━━━━━━━━━━━━━━━━━━━━

태산(泰山) 성인봉(聖忍峯)에 우뚝 자리잡고 있는 웅장한 대성(大 城)인 무황성.

성인봉의 방원 오백 장(五百丈)

넓이에 무황성은 그 웅위를 자랑

했다. 주위에는 군봉(群峯)이 즐비했다. 무황성은 군봉을 내려보 며 중원천하에 군림하고 있었다.

수명사 담광현.

3 대째 무황을 역임하면서 무황성에서 중원의 평화를 지키고 있는 그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다.

무황성에 들어온지 3 년 만에 그는 첫

딸 담숙정(覃淑貞)을 낳았


다. 이어 이

년 후 둘째딸 숙화(淑花)를 낳았다. 꽃들이 시기할

정도로 예쁜 딸이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

담숙화를 낳은

해에 두 딸이 감쪽같이 실종되고 말았다. 그것은

그가 무황성에 들어온 지 오 년 만의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무황 성은 벌컥 뒤집혔다.

그러나 웬일인지 담광현은 두 딸의 실종 사건을 크게 소문내지 않 으려 했다. 그 사실을 아는 무림인들은 큰 의혹을 느꼈다. 그러나 누구에게 납치당했는지, 혹은 누군가에 의해 어느 비밀장소로 보 냈는지도 모르는 채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두 딸이 실종된

후부터 수명사 담광현은 미쳐버리고 말았

다. 그때부터 그는 그의

부인이 자식을 낳을 때마다 직접 친자를

죽이는 비정을 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실로 괴사(怪事) 중의 괴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일에 가장 불행 해진 사람은 바로 담광현의 아내인 설문옥(薛文玉)이었다. 무공을 모르는 현숙하기만한 여인.


그녀는 자식을 낳을 때마다 남편의 손에 아기가 죽는 것을 목격해 야만 했다. 그것은 매번 지옥에 빠지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수백 번도 더 앞으로는 결코 자식을 낳지 않으리 라 결심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담광현은 꾸준히 그녀에게 잠자리를 요구해 아 이를 잉태시키는 것이었다.

대체 무황 담광현의 의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석양이 성인봉의 무황성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무렵 거대한 성문 으로 금의를 입고 백염을 기른 한

노인이 걸어나왔다. 다름아닌

무황 담광현이었다.

석양의 붉은 빛이 어려있는 그의 얼굴에는 어떤 알지 못할 우수와 고통이 어려 있는 듯 했다.

그의 뒤에는 흡사 그림자인 듯 두 명의 인물이 따르고 있었다. 각 기 팔순(八旬)의 나이에 흑의와 백의를 모시는 좌우호법(左右護法)이었다.

입은 노인들로서 무황을


음침한 인상의 흑의노인은 귀수마영(鬼手魔影) 종무(鍾武)였다. 과거 그는 한

쌍의 육장(肉掌)으로 강북무림을 휩쓸던 대마두(大

魔頭)였다.

냉막한 인상의 백의노인은 섬전신검(閃電神劍) 소천걸(蘇天乞)이 란 자로 그는 정사지간의 인물로 그의 섬마검칠십이류(閃魔劍七十 二流)는 무림의 일절이었다.

그들은 벌써 십삼 년째 무황을 지키는 좌우쌍호법을 맡고 있었다. 십삼 년 전 제 이십육대 무황을 뽑는 비무(比武)를 할 때 그들은 모두 수명사 담광현에게 패배한 자들이었다. 그후 그들은 자진하 여 좌우호법이 되었다.

지금껏 그들은 담광현을 수행하며 무림의 무수한 대소사를 해결했 으며 충심으로 담광현을 따랐다. 즉 담광현이 있는 곳엔 언제나 좌우호법이 분신처럼 있었다.

"......."

담광현은 붉게 물든 천공을

한동안 응시하더니 시선을 돌려 성문

에 걸려있는 금빛 편액을 바라보았다.


<무황성(武皇城)>

금자(金字)는 황혼 속에서도

찬연히 빛났다. 문득 편액을 응시하

는 담광현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이어 그의 뇌리에 십삼 년 전의 한 인물이 떠올랐다.

제 이십오대 무황 마운노인(摩雲老人).

담광현은 십삼 년 전 바로 무황성에서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 고 그에게 도전하여 무황의 위를 탈취했던 것이다.

그때 마운노인은 물러나면서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었다. 당시 담광현은 그 미소가 패자(敗者)의 고소인 줄로만 알았다. 그 러나 지금 와 생각하면 그 미소의 뜻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담광 현은 편액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마운노인, 나 담광현은 이제야 알았소. 그러나

당신이 지었던 그 웃음의 의미를

나는 당신들처럼 그렇게 나약한 자는 되고 싶지

않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욕한다해도 말이오."


그의 말은 입술 속에서만 맴돌았다. 그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좌우 호법조차 듣지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돌연 무황성 깊숙한 곳에서 한 줄기 어린아이의 울음이 들려왔다.

"응애! 응...애!"

"......!"

순간 담광현의 몸이 흡사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그는 그 자리에 목석처럼 굳어졌다. 잠시 후 성 안으로부터 기쁨에 찬 외 침이 들려왔다.

"성주님! 성주님......! 이번에는 아들이에요."

청의시녀였다. 그녀의 예쁘장한 얼굴에는 온통 기쁨의 빛이 떠올 라 있었다. 그렇다면 담광현이 이제까지 아기를 죽인 것은 모두 딸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이때 담광현은 무심한 눈초리로 시녀를 바라보았다. 시녀는 그의 눈빛을 대하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성주님... 당신은... 또......!"

전신을 부르르 떠는 시녀의

얼굴에는 어느새 공포의 기색이 가득

했다. 그러나 담광현은 무심한 눈으로 이제는 어두워진 하늘을 볼 뿐이었다.

그의 그런 모습에서는 무서운 비정이 어려 있었다. 갑자기 청의시 녀는 발악하듯 외쳤다.

"성주님은 악마에요! 악마! 흐흐흑......!"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다시 무황성 안으로 미친 듯이

뛰어들어갔다.

"악마라......."

성을 바라보며 담광현은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자조 의 쓴웃음이 배어 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성주님! 성주님...! 마님께서... 흐흐흑!"


안으로 달려들어갔던 청의시녀가 울면서 다시 뛰어 나왔다.

"......!"

담광현은 이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리고 탄식했다.

"그럴만도 하겠지. 팔 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니

까......."

그는 중얼거리며 무황성 안으로 들어갔다.

별원(別院).

담광현의 부인인 설문옥이 거처하는 별원 안의 방에는 네 명의 노


파가 얼굴에 고운 잔주름이 진 중년부인과 갓 태어난 듯한 아기를 감싸 안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품에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중년부인은 바로 설문옥이었다.

과거에 그녀의 용모는 무척 아름다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몹시 초 췌해 보이기만 했다. 그녀 옆의 네 명의 노파는 어릴 적부터 그녀 를 보살피던 시종이었다.

어느새 방 안에 담광현이 들어왔다. 그의 전신에서는 찬바람이 감 돌고 있었다.

"......!"

그가 들어온 순간 설문옥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애원하듯 그에게 말했다.

"여보...! 이

아이만큼은 제발... 제발... 부탁... 해요... 저

는... 이미... 틀린 몸......."

설문옥은 가늘게 깃든 지 오래였다.

경련했다. 이미

그녀의 얼굴에는 사신(死神)이


그녀는 해마다 출산을 했고

또 그때마다 담광현이 자식을 죽이는

바람에 크나큰 심적 타격을 받아 몸이 극도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 해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여덟 번째의 아이를 낳고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있 는 것이었다.

"여보... 제... 제발 이 아기만은 죽이지 말아......."

결국 설문옥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결국 사신(死神)이 그녀의 목숨을 거두어버린 것이다.

"마님!"

"흐흐흑... 마님!"

노파들은 방성통곡했다.

"......."

그러나 수명사 담광현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의 눈앞에


서 아내가 죽었는데도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불현듯 그는 우수(右手)를 치켜들었다. 그의 우수에 홍광(紅光)이 번쩍 감돌았다. 바로 그의 성명절학인 홍광천도십이식(紅廣天導十 二式)이었다.

"안 돼요! 성주님!"

노파들은 통곡하다 대경하여 결사적으로 아기를 감쌌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으로 아기를 감싸며 결사적으로 애원했다.

"성주님! 이 늙은 천비들의 목숨으로... 아기를 살려주세요!"

그러나 담광현은 냉혹했다.

휘익!

그가 손을 휘두르자 네 노파는 태풍에 휘말린 듯 사방으로 나가떨 어졌다. 그와 동시에 홍광이 기의 사혈(死穴)을 찍었다.

번쩍 일며 담광현의 수도는 어린 아


밤이었다.

"흐흐흐흑!"

무황성의 뒤쪽에 있는 작은

언덕으로부터 갑자기 진한 슬픔이 어

린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이어 청의시녀 한 명이 흐느끼며 언덕

에 나타났다.

그녀는 품 속에 축 늘어진 아이를 안고 있었다.

"흑흑... 하늘도 무심하지... 또 공자님을 죽이다니......."

시녀는 한동안 흐느끼다가 언덕에 조그만 묘혈을 팠다. 자세히 보 니 부근에는 비슷한 크기의 묘가 일곱 개나 있었다.

시녀는 구덩이를 판 뒤 아이의 시체를 묻었다. 이어 한참 동안 통 곡을 하다가 비틀거리며 무황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약 일 각쯤 지났을 무렵.

휙!


그곳에 붉은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홍의 노승으로 품에 갓낳은 듯한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다. 바로 불각승이었다.

"아미타불......."

불각승은 막 생겨난 묘지를 내려보며 불호를 외웠다.

파파파... 팟!

그가 우수를 가볍게 들자

무덤은 즉시 파헤쳐졌다. 이어 방금 땅

에 묻혔던 담광현의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사색(死色)이 된 채 나 왔다.

불각승은 급히 아이를 꺼내더니

담광현이 찍었던 사혈을 다시 찍

는 것이었다. 그 순간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죽었던 아이가 되살아나듯이 아기가 눈을 번쩍 뜨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불각승은 희색이 만연하여 즉시 아이의 수혈을 찍어 잠들 게 했다. 그는 이번에는 다.

"......!"

품에 안고 온 담광수의 아이를 바라보았


갓난 아기는 어둠 속에서 방글방글 웃었다.

실로 천진무구한 웃음이었다. 불각승은 그 모습에 마음이 침중해 지는지 눈을 감으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아이야, 이 늙은이를 용서해라. 후일 무림이 평화를 되찾게 되면 전 무림인들로 하여금 너의 무덤 앞에 커다란 공적비 를 세우게 하마."

이어 불각승은 손가락을 세워

방글방글 웃고 있는 아이의 사혈을

찍었다. 금세 아이는 안색이 검게 변해 축 늘어졌다. 불각승은 급 히 죽은 아이를 묘혈 속에 넣은 뒤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었다.

이어 신형을 번뜩인 순간 그의 몸은 까마득한 성인봉 아래의 절벽 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가 사라진 직후였다. 또다시 무덤 앞에 유령과 같이 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흑의를 입은 음침한 노인이었다.

그는 급히 막 세워진 봉분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는 어 린아이의 시체를 꺼내더니 자세히 확인했다.


"흐흐흐... 정말 죽었군. 그러나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 했다. 일은 완벽한 것이 좋지."

음침하게 중얼거린 흑의노인은 품 속에서 쇠털처럼 가느다란 독침 을 하나 꺼내더니 아이의 백회혈(百會穴)에 깊숙히 꽂는 것이었 다. 실로 악독하기 그지없는 행위였다.

"흐흐흐......!"

이어 흑의노인은 괴소를 흘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언덕에는 막 생긴 봉분이 처량하게 솟아 있었다. 그 안의 주인이 바뀐 줄은 아무도 모른 채.

■ 마 인 제 2 장 혈영환원대법(血靈還元大法) ━━━━━━━━━━━━━━━━━━━━━━━━━━━━━━━━━━━


옥문관(玉門關)은 중원(中原)의 서(西)쪽 관문으로서 북(北)으로 대막(大漠)과 서쪽으로 천산(天山)을 넘어 아득한 서역(西域)으로 통하는 곳이다.

옥문관에 얽힌 무수한 비화는 장부(丈夫)의 가슴을 들끓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오랑캐 가을(秋)을 틈타 남하(南下)하니

천자(天子)의 군(軍)은 출동하고

장군(將軍)은 동호부 죽사부를 나누어 받고

전사(戰士)는 모래밭에 엎드리네.

달빛에 비친 활그림자(弓影) 변경의 밤을 지키며

북녘 서리에 떨친 칼끝은 더욱 빛나니


외진 옥문관(玉門關)에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

젊은 아낙들은 벌써부터 장탄식하누나.

옥문관의 험세(險勢)는 가히 땅끝과도 같았다. 가도가도 칼끝같은 봉우리요, 뭉턱 베어져 나간 듯한 단애였다.

그런 옥문관의 동쪽에는 범(虎)이 엎드린 형태의 산이 있다. 이름 하여 복호산(伏虎山)인 바 그곳에는 유난히 죽림(竹林)이 울창하 게 우거져 있었다.

이름하여 묵죽림(墨竹林). 이곳에서 나는 대나무는 옥문관의 특산 물로 유명한 묵죽이었다.

깊은 밤.

월광(月光)이 찬란한 복호산 깊은 계곡 등성이에 죽림에 둘러싸인 한 채의 죽옥이 있었다. 그 죽옥은 마치 선인(仙人)이 기거할 듯 이 단아한 모습이었다.

스스스스.......


죽옥을 둘러싼 묵죽이 흔들렸다.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대나무 끝을 스치며 한 홍의인영이 날아왔다. 실로 아연실색할 경 신법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죽옥 앞에 당도한 인영은 홍의화상이

었다.

그는 품에 갓 태어난 듯한 어린 아기를 안고 있었다. 바로 무황성 에 나타났던 불각승(不覺僧)이었다.

불각승은 죽옥의 문을 가볍게 이

회, 세게 삼 회를 두드렸다. 그

러자 즉시 문이 열리며 중년선비가 나타났다. 몹시 청수하게 생긴 중년선비였다.

특히 두 눈썹이 무척 길고

눈동자에는 가늠할 수 없는 지혜가 깃

들어 있었다.

그는 불각승을 보자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난 또 누구라고? 당신이었구려. 오랜만에 이 망심헌 (忘心軒)에 말동무가 찾아왔구려."


중년인은 말을 마치며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그 시간은 매우 짧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는 한 명의 갈의노승 으로 변한 것이었다. 그의 모습은 불각승과 쌍둥이처럼 똑같았다. 만약 갈의(褐依)와 홍의(紅依) 가사의 차이만 없다면 도저히 분간 못할 정도였다.

"아미타불... 천변만화술(千變萬化術). 과연 천면인(千面人)의 절 기는 변함이 없구료."

불각승은 감탄을 했다.

천면인(千面人).

그렇다. 그 중년인이 바로 수명사 담광현과 불각승, 두 사람과 함 께 나란히 이름을 떨치고 있는

무림삼비자(武林三秘子) 중의 한

명인 천면인이었다.

"하하하... 불각승, 그대의 창파답허(蒼派踏虛) 경공술도 더욱 진 전을 보이거늘 어찌 이 천면인인들 그간 잠을 잤겠소?"


천면인이 또다시 몸을 빙글

돌리는 순간 이번에는 등이 꼬부라진

할멈으로 변했다. 실로 기기묘묘한 변장술이었다.

그가 다시 한 바퀴 돌자 그제서야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윽 고, 두 사람은 죽옥 안으로 들어갔다.

불각승은 온통 대나무로 이루어진 단아한 방에서 품 속의 아기를 꺼내어 침상에 눕혔다. 천면인은 흠칫하며 물었다.

"그 아이는 누구요?"

불각승은 탄식하며 말했다.

"담노제 담무황의 아들이오."

순간 천면인은 안색이 변했다.

"그게... 정말이오?"

"아미타불... 그렇소."

천면인은 얼굴에 희비의 쌍곡을 그리며 탄성을 발했다.


"아! 드디어 담노제가 그

어려운 혈영환원대법(血靈還元大法)을

성공했구려!"

혈영환원대법(血靈環元大法).

이것은 상고시대로부터 비밀리에 전해오는 일종의 마공으로써 태 어나는 아기에게 자신의 모든 내력(內力)을 전수하는 괴이한 대법 이었다.

이 대법을 시행하게 되면 시행자는 그 즉시 무공이 폐지되어 일개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마는

반면, 태어나는 아기는 시행자의 전 내

력을 얻어 무공을 익히는데 무궁한 자질을 타고나는 일대 귀재(鬼 才)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대법은 극히 위험했다. 그것은 시행 중에 태어나는 아 기의 자질이 부족하거나 사내가 아닌 여아라면 반드시 목숨을 잃 게 마련이었다. 설혹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해도 평생 불구가 되는 것이었다.

불각승은 어두운 표정으로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담노제는 결국

혈영환원대법을 성공시켰소. 그러

나... 그는 이 한 번의 성공을 위해 자식을 여덟 명이나 희생시켜 야 했소. 그것은 실로 하늘을 거스르는 일이나 그는 무림을 위해 스스로 고육계(苦肉計)를 쓴 것이오."

"......!"

천면인은 가늘게

눈썹을 떨었다. 이어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

다.

"담노제가 구지자엽초(九枝紫葉草)를 복용했는지 모르겠구료."

"아미타불... 복용했을 것이오. 이제 와서 모든 것을 포기할 리가 있겠소? 그는 구지자엽초로써 잃은 무공을 최소한 절반은 보충했 을 것이오."

"......!"

천면인은 침상 위에 세상 모른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어린 아

기를 바라보았다. 그의 깊은 눈에 언뜻 연민의 빛이 스쳤다.

불각승은 입을 열었다.


"이제 담노제의 차례는 끝났으니 다음은 우리 순서요."

그 말에 천면인은 눈에서 번쩍 신광을 발산하며 말했다.

"좋소. 기왕 몸을 던져 무림을 구원하기로 한 우리 세 명이 아니 오? 먼저 당신이

저 아이에게 불문(佛門)의 개정대법으로 벌모세

수시키시오."

벌모세수(伐毛洗髓).

이는 인간의 체질을 완전히 개조시키는 비법이다. 본래 인간은 태 어나서 음식물을 입에 대지

않는 상태에는 임독양맥이 트여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음식과 화기(火氣)를 접하므로 차츰 임독이맥이 막히게 된다. 그러나 그전에 개정대법으로 벌모세수시 키면 음식과 화기를 접하더라도 임독양맥이 막히지 않게 되는 것 이다.

불각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빈승은 최선을 다하겠소. 그 다음에는......."


천면인이 말을 받았다.

"당신과 나, 담노제 세 명이 공동으로 이룩한 대천주심법(大天周 心法)을 전수해야 하오. 대천주심법은 당신이 익힌 불문(佛門)의 대반야선공(大般若禪功), 담노제가 익힌 홍광천도심법(紅廣天導心 法), 그리고 내가 익힌 유문(儒門)의 무극기공(無極氣功)과 또 우 리 세 사람이 공동으로 얻은 선문(仙門)의 선천삼양진기(先天三陽 眞氣)를 합쳐 이룩한 명실공히 불(佛), 속(俗), 유(儒), 선(仙)의 정화라고 할

수 있소. 대천주심법을 익히면 능히 불세기인이 될

것이오."

흥분 탓인지 천면인의 얼굴이 약간 불그스레해졌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불속유선(佛俗儒仙). 사가(四家)의

무공을 합치다니....... 무림

사에 일찌기 없는 괴사였다.

"아미타불... 그런 다음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 아무도 배우지

못했고 아무도 익힐 수도 없었던 마검장도(魔劍長刀)를 가르칩시 다."

마검장도(魔劍長刀).


이는 거의 강호상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기학으로써 언제, 누가 창 안했는지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만 그

위력이 가공하다는 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올 뿐이었다.

마검장도는 검(劍)도 아니고

도(刀)도 아닌 괴이한 무기였다. 길

이가 무려 삼 장(三丈)에 넓이는 반 뼘으로 두께는 종이장같이 얇 았으며 무게는 십여 근에 불과했다.

이 괴병기는 연검(軟劍)처럼

잘 휘어지는 특징이 있었다. 마검장

도는 이같이 괴이한 특징으로 인해 아무도 연성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토록 긴 병기를 어찌 자유자재로 쓰겠는가 말이다.

뿐만 아니라 마검장도경(魔劍長刀經)이라는 비급이 없이는 익히기 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무학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천면인과 불각승은 눈을 빛내며 침상 위의 잠든 아기를 응시했다.

"......!"

그들의 눈에는 복잡한 심사가 어렸다. 기대감인지 앞날에 닥칠 혈 풍영에 대한 두려움인지, 아니면 지극한 연민 때문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문득 천면인이 입을 열었다.

"이제 이 아이는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최강자가 될 것이오. 아무 도 이 아이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오. 당신과 나까지도 말이오."

"아미타불... 아무튼 이번 거사로 근

우리 삼인의 염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소.

백 년 간이나 숨어있던 마(魔)의 세력을 끌어낼

수 있다면......."

천면인의 눈이 빛났다.

"불각승, 당신이 키우고 있는 아이들의 무공은 어떻소?"

불각승은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이 아이가 강호를 나올

때쯤이면 거의 완숙단계에

이르게 될 것이오. 모두가 당신의 공 덕분이오. 당신이 각 파의 비급을 훔쳐오지 않았다면......."

천면인은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런 말 마시오. 이번 일에 누구의 공이 크고 적고가 어디 있소? 모두가 하늘의 뜻에 의한 일이오."

불각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그렇소, 하늘의 뜻이오. 앞으로의 일도......."

이어 천면인은 침상에 눕혀져 있는 아기를 안아 들었다.

"자, 이제 동부(洞府)로 갑시다."

"아미타불......."

죽옥을 나선 그들은 죽옥 후면의 절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하 나의 동혈(洞穴)이 뚫려 있었다.

휘이잉......!

바람이 불자 죽림의 무수한 대나무 잎들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예측할 수 없는 풍운을 품은 채.


■ 마 인 제 2 장 혈영환원대법(血靈還元大法) -2 ━━━━━━━━━━━━━━━━━━━━━━━━━━━━━━━━━━━

불빛 한 점 없는 캄캄한 석실(石室).

손가락을 뻗어 코 앞에 대어도 그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한 석실이었다. 바로 태초의 어둠이었다. 그런데.......

13 세 정도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희고 냉막한 소년이 캄캄한 석실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는 무릎에 한 자루의 괴이한 칼을 놓고 있었다.

길이가 무려 삼

장, 넓이는 반 뼘

정도였다. 다름아닌 마검장도

(魔劍長刀), 바로 전설의 괴병기인 듯 했다.


그러나 지금 소년의 무릎에 놓인 것은 종이장같이 얇지도 않았고, 그 무게도 열 근이 아닌 자그마치 수백 근에 해당하는 거병기(巨 兵器)였다.

소년이 앉아 있는

삼 장 앞에는 거울처럼 매끄러운 석벽이 있었

다.

"......!"

어둠 속에서 오로지 소년의 두 눈만 무섭게 반짝였다.

소년은 바로 수명사 담광현의 아들이었다. 그는 어려서 사물을 보 기 시작할 때부터 이곳 석실에 있었다.

오직 그에게 주어진 공간은 캄캄한 암흑천지인 사방 열 장 넓이의 석실뿐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먹고 잤으며 역시 암흑뿐인 이곳에 서 붓으로 글을 썼고, 책을 읽었다. 실로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는 자아(自我)를 느낄 때부터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보려고 애썼 으며 청각 만으로 미세한 소리도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거의 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

그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이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대낮같이 볼 수 있게 된 것

수백 근이나 나가는 마검장도가 주어졌

다. 그는 그것으로 삼 장 앞의 석벽에 매일같이 한 일(一)자만 그 었다.

■ 마 인 제 2 장 혈영환원대법(血靈還元大法) -3 ━━━━━━━━━━━━━━━━━━━━━━━━━━━━━━━━━━━

소년은 다시 마검장도를 들었다.

석벽을 노려보는 한 쌍의 눈빛은 마치 야행성 동물의 눈같이 빛났 다. 그는 마검장도로 석벽에 좌에서 우로 획을 그었다. 이어 우에 서 좌로, 상에서 하로, 하에서 우로 그었다.


그러나 그같은 일을 반복했지만 석벽에는 일 푼의 흔적도 남지 않 았다. 석벽은 쇠처럼 단단했으며 마검장도의 끝은 돌처럼 무뎠기 때문이었다.

슥......! 슥......!

마검장도가 석벽을 스치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소년의 안색은 시종 무표정했다. 그의 모습은 마치 목인(木人)과 같았다. 그런데 이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의 옆에 한 명의 갈의노인이 모습을 보였다. 다름아닌 천면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무척이나 늙어 있었다.

"......."

천면인은 냉엄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스슥.......

소년은 조금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 채 마검장도를 움직였다. 그의 그런 반복동작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같은 일은


그 누구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길이 삼 장의 마검장도를, 그것도 오백 근 이상이나 되는 장도를 보통 사람은 들지조차 못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소년은 마치 가

벼운 부젓가락 들듯이 한 손에 들고 가볍게 획을 긋고 있는 것이 다.

천면인은 계속 소년의 동작을 주시했다. 바로 이때,

어느 순간 삼 장 앞 석벽에 소년이 그은 획이 뚜렷이 새겨지는 것 이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

천면인의 얼굴에 일순 흥분의

기색과 함께 만족의 웃음이 피어났

다. 찰라지간 소년의 무심하던 얼굴에도 일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소년의 웃음을 보는 꾸짖었다.

순간 천면인은 대뜸 싸늘한 음성으로


"네놈은 겨우 그 정도에 만족하느냐?"

"......!"

소년은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천천 히 마검장도를 거두며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만족하지 않소."

천면인은 차디차게 물었다.

"그런데 네놈은 왜 웃느냐?"

"내 스스로 웃는 것도 안 되오?"

소년의 말투는 십삼세 어린

나이에 비해 실로 오만하고 무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천면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쳤다.

"흥! 아비객(我悲客)! 네놈은 갈수록 오만무도해지는구나!"

소년은 마검장도를 무릎에 놓으며 냉막하게 말했다.


"그대가 날 그렇게 만들지 않았소?"

"오만불손한 놈!"

천면인은 소년에게서 마검장도를 빼앗았다. 이어 그는 맞은편 석 벽에 휘둘렀다.

쉭쉭!

그러자 석벽에는 사방 한

자 정도의 사각형 도해가 그려졌다. 천

면인은 냉랭하게 말했다.

"너는 오늘부터 저 도형 속에 일시에

십만 자(十萬字)의 글자를

써넣어라."

"......!"

말을 마친 천면인은 꺼지듯 석실에서 사라졌다.

소년은 멍하니 석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방 한 자 정도의 도형 안에 일순간에 십만 자의 글자를 써넣으라니....... 그것은 설사 신이라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소년 아비객은 묵묵히

석벽에 그려진 도형을 노려보며 마

검장도를 들어 올렸다.

슥......!

마검장도 끝이

도형을 스쳤다. 그러나 글자를 쓰기는커녕 선 한

개도 긋지 못하고 마검장도는 아래로 처졌다. 그러나 아비객은 실 망하지 않고 계속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 마 인 제 2 장 혈영환원대법(血靈還元大法) -4 ━━━━━━━━━━━━━━━━━━━━━━━━━━━━━━━━━━━

사 년이라는 세월은 억겁의 일 수유(須臾)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또 어느 만큼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확!

십칠 년 동안 단 한 점의 빛도 볼 수 없었던 석실 안에 환한 불빛 이 밝혀지면서 풍경이 드러났다.

아비객(我悲客)은 석벽을 등진 채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은 이제 완전히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투명할 정도로 흰 피부였다. 두 눈은 깊었으나 무심(無心) 속에 깊디 깊은 오뇌 가 담긴 듯 이글거렸다.

검은 눈썹은 붓으로 그은 듯이 선명했다. 입술은 한 일 자로 다물 어진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준수했다.

아니 준수할 정도가 아니라 매혹적일 만큼 영준했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는 오로지 냉막한 기운 만이 풍길 뿐이었다. 그는 빛바랜 남삼을 입고 있었는데 오히려 낡은 의복이 그의 용모를 더욱 빛나 게 만들었다.


그의 앞에는 두 명의 노인이 있었다. 천면인과 불각승이었다. 무 림삼비자의 중의 이인(二人).

그러나 아비객은 그들이 누군지 몰랐다. 단지 그는 그들 밑에서 십칠 년 간

무공을 배우며 살았을 뿐, 자신과 그들에 관한 것은

아무 것도 몰랐다.

불각승이 입을 열었다. 그도 역시 냉막하고 무정한 음성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그동안 배운 바를 펼쳐 보아라."

그 말에 아비객은 묵묵히 뒤로 돌아섰다.

그는 삼 장 거리의 석벽을 향해 마검장도를 들어 한 일 자를 그었 다.

스슥!

기이한 음향과 함께 석벽에는 일정하게 한 치 깊이로 획이 그어졌 다. 이어 몇 번 더 마검장도를 움직이자 사방 한 자의 도형이 그 려졌다.


"......!"

아비객은 그 도형을 노려보았다.

일순 그의 두 눈에서 번쩍 섬광이 일어나는 순간 마검장도가 일직 선으로 쭉 뻗었다. 이어 석벽에 정지했다. 이어 그의 팔이 지극히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아! 이럴 수가!

사방 한 자의 도형 속에 깨알만한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아 무런 음향도 없었다. 단지 마검장도를 쥔 아비객의 팔이 미미하게 진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그의 팔이 진동을 멈추자

도형 안은 글자로 가득 차 있었

다. 천면인과 불각승의 얼굴에 보이지 않는 희색(喜色)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불각승은 냉막하게 말했다.

"좋다. 그럼 이제는 대천주심법(大天周心法)을 운용하고 선천태을 강(先天太乙 )을 이용해

탕마참백인수(蕩魔斬白刃手)를 전개해


보아라."

그 말에 아비객은 아무 말없이 바닥에 주저앉더니 좌정했다. 그러 자 곧 신비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의 머리 위로 각기 청(靑), 홍(紅), 백(白), 자(紫)색의 기운이 어리더니 네 개의 환(環)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이어 네 개의 환 은 하나로 합쳐지더니 눈부신

서기로 아비객의 전신을 감싸는 것

이었다.

"아......!"

불각승과 천면인은 낮은 탄성을 발했다.

'드... 드디어 대천주심법으로 불속유선(佛俗儒仙) 사가의 무공이 합쳐졌도다!'

그들은 내심 똑같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때 아비객의 전신을 감쌌던 서기는 다시 서서히 네 개의 환으로 분리되더니 그의 콧 속으로 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갔다. 이어 그


그의 모습은 장엄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더니 오른 손을 칼날같이 세웠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손끝에서 서릿발 같은 백기(白氣)가 석 자나 뻗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도 현기가 담담한 강기( 氣)가 형성되는 것이었다.

이어 아비객은 오른손을 아무렇게나 쓱쓱 휘둘렀다. 그의 동작은 마치 아무런 형식도 없는 것같이 무질서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의 수도(手刀)는 그 어떤

쾌도식보다 빨랐고 무수한 변화의 수

를 내포하고 있었다.

몇 번 휘두르는 사이에 사방팔방을 포함하여 도합 삼백육십 방위 가 손에서 뻗치는 백강(白 )의 그물로 가득찼다.

아비객은 동작을 멈추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불각승 은 꿈에서 깬 듯이 잠시 멍해져 있다가 다시 차갑게 말했다.

"이번에는 천마십이절(天魔十二絶)을 펼쳐 보아라!"

순간 아비객은 양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그러자 놀라운 현상 이 일어났다.


서서히 그의 손가락부터 붉게 변하는가 싶더니 이어 손바닥, 팔 등이 좌측에서 우측으로 붉게 변했다. 거의 투명한 홍색이었다.

이어 왼쪽 다리가 붉게 변하고 오른쪽 다리에 이어 상체와 머리를 포함한 온 몸이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

아비객을 지켜보는 두 사람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무림의 일절로 알려진 수명사 담광현의 성명절학인 개세기 학 홍광천도십이식(紅廣天導十二式)이었다. 1 단계부터 12 단계까지 펼쳐지는 홍광천도공은 대성하게 되면 전신이 금강불괴지체로 형 성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년의 수명사 본인조차도 상체만 남긴 십 성(成)의 경지 밖에 오르지 못했었다.

그런데 아비객이 십이 성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이미 그는 금강

불괴지신이 된 것이었다. 이제 아비객의 전신은 붉게 물든 채 거 의 투명하게 변했다.


"탓!"

일성과 함께 그가 우수를

가볍게 떨자 일직선으로 홍광이 번쩍였

다.

츠츠츳!

섬뜩한 음향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맞은 편 석벽에 정확히 세 치 깊이의 선이 그어진 것이 아닌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맨손 으로, 그것도 강기만으로 단단하기

그지없는

흑옥석을

베다

니......!

천면인과 불각승의 표정은 온통 경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내면의 생각을 밖으로 노출시키지 않았다. 불각승은 내심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하늘이 내린

기재(奇才)로다. 기재... 과연 앞으로

저 아이가 구성(求星)이 될지 살성(殺星)이 될지... 모든 것은 부 처님 만이 아실 뿐.......'

천면인은 착잡한 표정으로 냉막하게 을 바라보았다. 17 년 동안

서 있는 영준한 청년 아비객

오로지 그는 모든 정열을 아비객을 키


우는데 바쳤다. 그것은 그의

전 생애를 바친 것이나 다름이 없었

다.

이때 불각승이 차갑게 말했다.

"아비객, 이리와 앉거라."

"......."

아비객은 대답도 없이 두

사람의 앞에 앉았다. 잠시 불각승은 수

중의 염주알을 만지작거렸다.

"오늘로써 너의 무공수련은 모두 끝났다."

"......!"

그 순간 아비객의 준미한 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참으로 기나긴 세월이었다. 십칠 년. 그 세월을 그는 오로지 암흑 속에서 고독으로 똘똘 뭉친 채 밤낮도 없이 미친 듯이 무공만 익 히며 지내왔던 것이다.


그 얼마나 정에 굶주려온 삶이었던가? 그에게는 따스한 모정도 자 상한 부정도 주어지지 않았다.

냉혈(冷血).

오직 그가 천면인과 불각승에게 배운 것이라고는 무공과 냉혈함뿐 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참담한 인고가 끝난 것이었다.

"지금부터 네 신세내력을 알려 주겠다."

불각승은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찰나지간,

"......!"

아비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신세내력이라고?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던 나의 내력을...?'

그의 마음은 참담하게 경련했다. 불각승의 염주알이 불규칙하게 굴렀다. 불각승의 심중도 그처럼 불안한 것이었을까?

한동안 염주알만 굴리고 있던 불각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비객, 너의 부모는 녹림(綠林)의 흑도인(黑道人)이었다. 그들 의 이름과 명호는 알길이 없다. 그 이유는 빈승이 너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그들이 죽은 후였기 때문이다."

아비객의 몸은 더욱 크게 경련했다.

"그... 그들이 죽었다고......?"

"그렇다. 그들은 지역의 정패를 놓고

다른 녹림무리들과 싸우다

죽었다."

아비객의 두 눈에서 일순 광포한 살기가 뻗쳐나왔다.

"그... 그럼 그들을 죽인 자들은 누구요?"

"그들도 죽었다. 너의 부모와 그들은 양패공사(兩敗共死)했다."

"양패공사라고......?"

순간 아비객의 표정은 무섭게 일그러졌다. 문득 그는 앉은 채로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

천면인과 불각승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으핫핫핫......"

아비객의 처절한 광소는 약 일 각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핫핫... 핫... 핫... 그들이... 죽었... 다... 고? 나...를 남기 고......?"

아비객의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불각승은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서 너에게는 성(姓)도 없는 것이다. 다만 너는 불행한 객의 운명을 타고났기에 빈승이 너를 아비객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아비객! 으하핫... 핫핫... 아비객! 그건 내게 아주 어울리는 이 름이구려."


아비객의 표정이 냉막하게 되돌아오자 불각승은 차갑게 말했다.

"빈승은 이제 너에게 몇 가지 명을 하겠다."

이제 아비객의 표정은 얼음처럼 굳어져 있었다.

"이것은 그동안 너를 키워온

댓가다. 그 댓가를 받음으로써 우리

와 너는 모든 인연을 끊는 것이다."

한동안 불각승을 쏘아보던 아비객이 마침내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말하시오."

불각승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너는 오늘로 강호(江湖)로 나가거라. 가서 현 무황성의 성주인 수명사 담광현을 죽여라. 그는 이십육대 무황부터 삽십일대 무황 까지 육대 연속 무황의 자리를 지킨

절세고수다. 그러나 그자는

양의 탈을 쓴 위선자다. 오는 삼월 보름은 제 삼십이대 무황을 선 출하는 비무대회가 태산 성인봉의 무황성에서 열린다. 그때 가서 그자에게 도전하여 그의 목숨을 취해라."


"......."

불각승은 다시 말했다.

"그런 다음 낙양(落陽)으로

가라. 낙양에 있는 백화원(白花院)이

라는 기루(妓樓)로 가 화중지화(花中之花)란 여인을 만나라. 그녀 와 하룻밤 자거라."

"......?"

실로 기이한 주문이었다. 그러나 아비객이 뭐라 질문하기도 전에 불각승은 잘라 말했다.

"묻지 말아라. 이유는 없다. 넌 명대로 시행하기만 하면 된다."

불각승은 염주를 가루가 될 듯이 힘주어 움켜잡았다.

"이상이다. 그 두 가지만 하면 너와 우리 사이의 모든 관계는 깨 끗이 청산된다. 그 후로는 모든 일이 너의 자유다. 네 일은 네 스 스로 알아서 행하라."


"......."

아비객은 천면인과 불각승을 노려보았다. 천면인은 언제부턴가 눈 을 감고 있었다. 질끈 감은 눈 밑 늙은 눈주름 끝에 보일 듯 말 듯 물기가 번졌다.

아비객은 시선을 돌렸다.

무(無). 그는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 오직 허공만 응시할 뿐이었 다. 그때 불각승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라."

아비객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그대들의 이름을 알고 싶소."

불각승은 고개를 저었다.

"후에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아비객은 묵묵히 그들을 응시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이만 가겠소."

"잠깐."

천면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어 그는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 었다. 그 휘파람소리는 석부를 길게 메아리쳤다.

끄...... 악!

쏴아아! 하는 날개짓소리에 이어 괴조의 듣기 거북한 울음소리가 연이어 울려왔다.

불현듯 석실 안으로 두

가닥 흑영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두 마리

의 흑응(黑鷹)이었다. 두 마리의 검은 독수리는 각각 발톱에 한 자루의 긴 도를 나란히 움켜쥐고 있었다.

장도의 길이는 무려 삼

장이나 되었다. 따라서 두 마리의 독수리

가 함께 거머쥐지 않으면 붙들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천면인은 차갑고 딱딱하게 말했다.


"네놈에게 독수리와 마검장도를 주겠다."

"......."

그러나 아비객은 조금도 고마운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마검장도 를 힐끗 일견했을 뿐 무정하게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 갔다.

끼윽....... 끄악!

두 마리 독수리는 보통 독수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영물인

듯 했다. 그들은 마검장도를 움켜쥔 채 나란히

아비객을 따라 밖으로 날아갔다.

이제 석실 안에는 천면인과 불각승 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미타불......!"

돌연 불각승은 땅이 꺼질 듯이 침울하게 불호를 내쉬었다.

"과연... 잘한 일인지 모르겠구려."


"......."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천면인도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 다.

"저 아이가 아무리 악인의 길을 걷는다 해도 지금의 무림정세보다 더 하기야 하겠소? 게다가 저 아이의 출현으로 하여 지난 백 년 동안 깊이 숨어 있는

마도들을 끌어내어 소탕할 수만 있다

면......."

그 말에 불각승은 탄식했다.

"아아! 하지만 저 아이가 우리의 깊은 뜻을 모르고 영영 사도(邪 道)를 걷게 된다면 장차 누가 저 아이를 막는단 말이오?"

천면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지난 십칠 년 동안 저 아이는 고독하게 자라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영합할 줄 모르는 유아독존(唯我獨尊) 의 철칙을 배웠소. 설사 놈들이 마수를 뻗친다해도 절대 그들에게 굽힐 아이가 아니오."


"......."

여기까지 말한

천면인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문득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언젠가... 저 아이가 이곳에 다시 돌아오는 날 당신과 나의 생명 은 끝나겠구려."

불각승은 그 말에 빙그레 웃었다.

"그 전에 우리는

저 아이를 위해 천의령패(天義令牌)를 만들어야

되지 않겠소?"

그 말을 듣는 순간 천면인도 활짝 웃었다.

"그래야지요. 천의맹(天義盟). 오직 그것만이 도탄에 빠질 무림을 구하게 될 것이오."

"아미타불......!"

"하하... 핫핫핫핫핫......."


한 가닥 불호와 일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석실 안을 울리며 메아 리쳤다.

■ 마 인 제 3 장 천지무무심법(天地無無心法) ━━━━━━━━━━━━━━━━━━━━━━━━━━━━━━━━━━━

눈(雪).

사방 그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보이는 것은 오직 은백색의 눈밖에 없다. 때는 겨울(冬). 그것도 엄동의 한가운데였다.

옥문관(玉門關)에서 중원으로 통하는 길은 온통 산협(山峽)이다. 그 산협이 건곤일색(乾坤一色), 고 있었다.

온통 백설로 뒤덮여 장관을 이루


휘이잉.......

살갗을 찢을 듯이 매서운 한풍이

이름없는 고봉(高峯)을 휘감고

지나갔다. 고봉 위에는 언제부터인지 한 명의 얇고 빛바랜 남삼을 입은 영준한 청년이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서 있었다.

다름아닌 아비객(我悲客)이었다. 그는 여름에나 입는 얇은 홑옷을 입고 있었다. 강풍에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였으나 그는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먼 하늘에는 두 마리의 흑응이 양쪽에서 마검장도를 움켜쥐고 빙 글빙글 맴돌았다.

"......."

아비객의 눈길은 중원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비록 여인이라면 누구나 꿈에도 그릴 준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전신에서는 눈보라보다 더 음랭한 한기를 풍기고 있었다.

겨울의 짧은 해는 서녘을 붉게 물들이며 스러져갔다.

홀연히 아비객의 몸이 움직였다. 그는 산봉 아래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비록 절정의 경공술을 익히고 있었으나 아주 느릿하게 걸 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주위의 풍경을 눈에

담아두려는 듯 천천히 걷고 있었다. 실

로 십칠 년 만에 세상을 처음보는 것이 아닌가. 그의 마음 속에는 주위의 모든 것이 온통 경이로 다가오고 있었으나 표정만은 한 점 의 변화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홀로 고독하게 살아온 습관 탓일지도 몰랐다. 그로인해 감정을 드 러낸다는 일이 그에게는 아주 어려운 일로 느껴지고 있었다.

'중원. 과연 넓구나. 그런데 넌 나 아비객을 환영해 주겠느냐?'

아비객은 묵묵히 걸었다.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으나 그의 발 밑

에는 발자국조차 생기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서너 개의 산등성이를 넘었을 때였다.

"......!"

불현듯 그의 귓가에 은은한 병장기 부딪치는 음향이 들려왔다.


아비객의 눈썹 끝이 약간

움직였다. 적막한 산중, 눈이 덮여있는

산 속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라니........

스슷!

아비객의 신형이 비스듬이 누운 채 날아갔다. 믿을 수 없을 정도 로 빠른 신법이었다. 그는 마치 눈보라에 실리듯 날아갔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날아가는 그의 예민한 귓전에 문득 앙칼 진 여인의 외침이 흘러들고 있었다.

"중운검성(中原劍聖) 곡굉(曲宏)! 네놈은

진정 관(棺)을 보지 않

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송목(松木)이 울창한 기슭이었다. 그곳에서 한창 숨가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십여 명의 홍의(紅依)를 입은 이십대 여인들이 한 명의 황의노인 을 둘러싸고 여유만만하게 협공하는 중이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는 한 명의 궁장여인이 서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 었다.


궁장여인의 용모는 그야말로

절색이었다. 그녀는 이십칠팔 세 정

도 되어 보였는데 육감적이고도

풍만한 몸매는 사내의 욕정을 유

발시키고도 남았다. 눈같이 횐 피부에

상큼한 눈동자, 고혹적인

입술은 더욱 선정적이었다.

차차차창......!

"윽!"

황의노인은 홍의여인들의 연수합공에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의 좌측 어깨에서 피가 이미 전신에 열

확 뿜어져 백설을 붉게 물들였다. 그는

군데 이상의 검상을 입어 기식이 엄엄한 상태였

다.

그러나 검을 쥔 자세는 아직도 당당했다. 홍의여인들도 모두 검을 쓰고 있었는데 그녀들의 검초(劍招)는 오직 단 한 초식뿐이었으나 그야말로 악랄하고 흉험한 살초였다.

"호호호... 곡굉! 아직도 더 버틸 기력이 있느냐? 곱게 물건을 내 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내놓던가!"


관전하던 궁장여인이 교소를 터뜨리며 다가섰다.

"으... 나

중원검성 곡굉은 결코... 네년들에게 굴복할

없...... 윽!"

말을 채 끝내지도 못했는데 피가 튀었다.

홍의여인들의 검초에 또다시 그의 몸은 세 군데나 검상을 당했다. 홍의여인들은 아직 그를 죽일 마음이 없는 듯 여유있게 가지고 놀 았다.

바로 그 순간 송림 사이로 한 남삼청년이 서서히 걸어 나왔다. 바 로 아비객이었다. 그는 냉랭한 표정에 무심한 눈으로 전장을 바라 보았다.

그가 나타나자 금의 궁장여인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 자는.......'

웬지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청년이 몹시 눈에 익다고 느꼈다. 그

러나 곧 그녀의 신지(神智)는 흐려지고 표독한 마음이 솟아났다.


"홍기당(紅旗堂)의 제자들은 손을 멈추어라!"

그녀는 날카롭게 일갈했다.

그러자 홍의여인들은 즉시 검을 거두며 물러났다. 그 순간 중원검 성 곡굉은 쓰러지고 말았다. 더이상 버틸 힘이 상실된 것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궁장여인은 앙칼지게 아비객을 향해 물었다.

"......."

아비객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무심한 눈으로 중원검성 곡굉을 힐끗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다음 순간 궁장여인의 눈에 살기가 어 렸다.

"네놈은 본 당주(堂主)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아비객은 그녀에게 무심한

눈길을 돌렸다. 그는 궁장여인의 몸에

서 한 가닥 야릇한 기향(奇香)을 맡았다. 그의 입술이 열리고 있 었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냐?"

"......!"

궁장여인은 멍청해졌다. 청년의 음성이 너무나 무정했기 때문이었 다. 적어도 그녀의 앞에서

이렇게 무뚝뚝하게 구는 자는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 아비객의 냉막한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나는 남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그러니 너희들은 볼 일을

보아라."

궁장여인은 마침내 분노를

일으켰다. 그녀는 상대가 자신을 철저

히 무시하는데 대해 참을 수 없는 살기를 느끼며 앙칼지게 명령했 다.

"저 놈을 당장 처치해라!"

"넷!"

홍의여인들은 일제히 대답하며 교신을 날려 아비객을 포위했다.


"참견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아비객은 낮게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다.

우두둑!

그러자 오장 밖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송목가지가 부러지더니 곧장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

그 광경에 궁장여인과 홍의여인들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같은 허공섭물진기는 아무나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 놈을 쳐라!"

궁장여인이 앙칼지게 외쳤다.

"받아랏......."

쉬익!


열 자루의 장검이 섬뜩한 검기를 일으키며 일제히 아비객의 전신 요혈을 찔러 들어왔다. 한결같이 똑같은 초식으로 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흉험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아비객은 태연했다. 그는 수중의 나뭇가지를 들더니 빙그 르 원을 그렸다.

파파파파... 팟!

무수한 나뭇가지의 환영이 사방으로 물밀듯이 뻗쳐나갔다.

"아앗!"

연속 날카로운 비명이 터짐과 동시에

홍의여인들은 모두 장검을

날려버리며 뒤로 사오 장이나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실로 눈 깜 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 저럴 수가......!"

궁장여인의 안색이 핼쓱해졌다.

홍의여인들은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나뭇가지 일 초에 모두 검을


날리고 내상을 입어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궁장여인은 가공할 상 대의 무공에 공포감을 느꼈다.

"네... 네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궁장여인의 물음에 아비객은 무심하게 한 마디 던졌다.

"아비객."

"아... 아비객?"

궁장여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비객은 아무 일도 없 었다는 듯 어둠이 몰려오는 하늘 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궁장여인 은 그 모습에 이를 빠드득 갈며 외쳤다.

"두고 보자! 언젠가 네놈은 크게 후회할 것이다. 가자!"

그녀가 신형을 날리자 뒤를 이어 홍의여인들도 비틀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비객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는 궁장여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했다.


이때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중원검성 곡굉이 꿈틀하더니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잠깐... 공자!"

"......."

아비객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 늙은이의 부탁을... 들어... 주시오."

곡굉의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따 라서 그의 음성은 들릴락말락할 정도로 작았다. 아비객은 잠시 생 각하더니 무심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곡굉은 누운 채 한 손으로 힘겹게 품 속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냈 다. 그것은

피에 젖은 한 권의 양피책자와 푸른색의 자기병이었

다.

"공자... 이 늙은이의 마지막 부탁이오. 이것을... 태백산(太白 山)... 무련곡(舞蓮谷)으로... 부탁이오... 그곳에 사는 성수화타


(聖手華陀) 범(范)... 꼭 전달... 큭!"

끝내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중원검성 곡굉은 고개를 떨구었다.

"......."

아비객은 무심한 눈으로 잠시 그의 시체를 내려 보았다. 잠시 후 그는 곡굉의 가슴에 얹혀져 있는 양피책자를 집어들었다.

<천형비경(天形秘經)>

피로 얼룩진 표지에는 그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아비객은 책자 에 더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병과 함께 품 속에 넣었다. 이어 그는 아무런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그의 등뒤에는 중원검성 곡굉의 시체가 한 많은 눈을 부릅뜬 채 누워 있었다.

■ 마 인 제 3 장 천지무무심법(天地無無心法) -2 ━━━━━━━━━━━━━━━━━━━━━━━━━━━━━━━━━━━


빙산(氷山).

글자 그대로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 산이었다. 옥문관에서 동(東)

쪽으로 오백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산은 일명 천지산(天地山) 이라 불리웠다.

그것은 산의 형태가 하늘에

닿으며 또한 산봉은 대지처럼 평평했

기 때문이었다.

휘윙!

백설을 동반한 강풍이 천지산을 온통 폭설로 뒤덮고 있을 때 눈보 라 속에서 한 남삼(藍衫) 인영이 나타났다.

풍설을 온 몸으로

받으며 어깨와 가슴, 머리에 눈을 잔뜩 인 채

천지산으로 오르는 냉막한 청년은 바로 아비객이었다.

그는 옥문관을 떠난 후

줄곧 험준한 산길만 택해 걸었다. 오랫동


안 고독하게 혼자 살아온 버릇이 그로 하여금 사람이 사는 인가를 피하게 했던 것이다.

옥문관을 떠난 지 사흘째였다.

휘이윙!

폭설과 강풍은 그의 귓전을 스치며 그칠 줄을 몰랐다.

"곧 날이 어둡겠군. 어디 동굴이라도 찾아야겠군."

홀로 중얼거리던 아비객은 문득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눈보 라를 뚫고 한 가닥 연기가 되어 천지산 기슭으로 사라졌다.

천지산 중턱의 깎은 듯한 절벽.

위쪽으로 사오

장쯤 되는 곳에 은밀한

단숨에 동굴 안으로 날아

동굴이 있었다. 아비객은

들어갔다. 여간해서 눈에 띄지 않는 동

굴을 발견한 것은 한 마리 야조(野鳥)가 그곳을 통해 들어가는 것 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아비객이 동굴로

들어가자 두 마리의

흑응도 마검장도를 움켜쥔

채 따라 들어왔다. 흑응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아비객의 곁을 떠나 지 않고 있었다.

동굴 안은 의외로 깨끗했다.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야겠군."

아비객은 중얼거리며 동굴을 둘러 보았다. 동굴은 안으로 길게 뻗 어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해 보니

어딘가 인공(人工)이 가해진 듯한 흔

적이 엿보였다.

"......?"

웬만한 일에는 무관심한 아비객도 을 느꼈다.

'누가 이런 곳을 다듬었을까?'

동굴의 형상에 한 가닥 호기심


그는 동굴 안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갔다.

처음에는 천연의 종유석과 울퉁불퉁한 바닥으로 되어 있었으나 들 어갈수록 통로는 다듬은 기색이 역력했다. 약 십여 장쯤 들어갔을 때였다. 매끄러운 석벽 하나가 아비객의 앞을 가로 막았다.

석벽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인 듯 푸른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다.

그 이끼 사이로 금강지력(金剛指力)으로 쓴 듯한 글귀가 보였다.

- 노부는 천지상인(天地上人)으로 당년의 천하무적인이다. 그대가 노부의 기우를 얻으려면 석벽에 세

번 절한 후 검으로 석벽 중간

을 그어라. 그리하면 석문이 열리고 그대는 무적의 신공(神功)과 영과(靈果)를 취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대가 공경하는 마음을 표시하지 않고 석문을 열면 그 즉시 죽을 것이다.

실로 괴이한 글귀가 아닐 수 없었다.


"천지상인(天地上人)?"

아비객은 고개를 흔들었다.

강호에 대한 일견식도 없는 그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름이었 다.

그러나 어찌 알았겠는가? 만일 일반 무림인들이 그 명호를 들었다 면 실로 기절초풍을 했을 것이다.

천지상인(天地上人).

그는 무려 400 년 전의

인물로 그야말로 전설적인 괴인이었다. 그

는 스스로 상인(上人)이라

칭할 뿐 선문(禪門)이나 도가(道家)의

인물은 아니었다.

또한 성품은 극히 괴팍했으나 정도(正道)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400 년 전, 당시 무림은 무림을 제패하려는 야욕을

품은 세 개의

마(魔)의 단체로 인해 한 시도 피바람 잘 날이 없었다.

제왕문(制王門).


환희궁(歡喜宮).

지옥성(地獄城).

이들 세 마의 단체는

무림을 제패하기 위해 곳곳에서 시산혈해의

대혈겁을 자행했다. 실로 살생이 극에 이르러 무림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 격이었다. 바로 그럴 때

자칭 천지상인이라는 괴인이

나타났다.

그는 가공할 패도지공(覇道之功)으로

나타나자마자 세 집단의 인

물들을 닥치는 대로 주살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혹독한 손속이었다. 마(魔)로써 마(魔)를 제거한다할까? 그는 사정없이 제왕문, 환희궁, 지옥성의 인물들을 피로 씻었다.

결국 그가 강호에 나타난 지 5 년 만에 그들 세력은 참패하여 사라 지고 말았다. 놀라운 일은 그 직후 일어났다. 가공할 무공으로 마 세를 물리친 천지상인은 전 중원을 떠돌며 각 문 각 파를 방문한 것이었다.

그는 각 문파의 장문인들에게 엄청난 요구를 했다. 그것은 그들


문파의 비전무학이 담긴 무공비급을 잠시 빌려달라고 한 것이었 다. 무림제파는 그의 요구에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전지학이 외부로 흘러나간다면 끝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 찌하랴? 천지상인이 아니었다면 무림은 이미 혈세되어 마의 손아 귀에 놀아나지 않았겠는가.

결국 각 파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

다.

그런데 천지상인은 그들 문파에 꼭 한 달여씩 머물며 무공비극을 연구했다.

그리고 미련없이 비급을 돌려준 다음 떠나버렸다. 각 파는 비록 타인에게 자파의

비급을 보여준 것이

꺼림직하기는 했지만 그가

무사히 돌려준 것만으로도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천지상인의 괴행은 그후로도 계속되었다. 그는 명문대파는 물론 강호의 군소문파나 명가도 같은 방식으로 방문하여 비급을 열람한 것이었다.

그러기를 십여 년, 천지상인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는 어느 날


돌연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었다.

그는 실로 고금(古今)에 드문 괴인 중의 괴인이었다. 그런데 그가 은거한 곳이 바로 천지산(天地山)이었을 줄이야.

■ 마 인 제 3 장 천지무무심법(天地無無心法) -3 ━━━━━━━━━━━━━━━━━━━━━━━━━━━━━━━━━━━

아비객은 묵묵히 석벽에 새겨진 글씨를 응시했다. 문득 그의 입에 서 냉막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후후... 나보고 절을 하라고?"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우수를 앞으로 뻗었다.

일순 그의 손이 백색으로 변하더니 서늘한 백기가 뻗었다. 탕마참


백인수(蕩魔斬白刃手)였다.

파파... 팍!

석벽에 돌가루가 어지럽게 휘날리며 정확히 중앙에 한 일 자의 금 이 그어졌다.

우르르르릉......!

그러자 굉음과 함께 석벽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런데 아무런 이상 도 없었다. 석벽에 쓰여진 대로라면 삼배를 하지 않았으니 무슨 무서운 일이 일어나야 하지 않은가?

"훗! 당신 말은 신용이 없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 않소?"

아비객은 냉막한 비웃음을 흘리며 좌우로 갈라진 석벽 안 쪽을 응 시했다. 문득 그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석벽 안 쪽 에는 또 하나의 똑같이 생긴 매끄러운 석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었다.

더더욱 괴이한 것은 그 여있다는 사실이었다.

석벽에도 금강지력으로 새겨진 글귀가 쓰


- 하하하! 노부는 그대의 굽히지 않는

기개에 탄복했노라. 정말

그대가 석벽에 삼배를 치뤄 보물을 탐하는 간심(奸心)을 드러냈다 면 그대는 오히려 무수한 암기에 고슴도치가 되어 황천으로 갔을 것이다. 자, 이번에는 필히

삼배(三拜)한 뒤 똑같은 방법으로 석

벽을 그어라.

실로 글귀를 남긴 주인의 괴팍한 성격을 드러내는 내용이었다.

"후후후......."

아비객의 입에서 야릇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어 그는 또 우수를 뻗었다.

우르르... 릉!

이번에도 굉음과 함께 석벽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러나 역시 아무 런 위험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돌가루가 가라앉는 동안 아비객


은 묵묵히 서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석벽 뒤에 또 하나의 석벽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물론 그 석벽에도 똑같은 필체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 점점 더 이 늙은이의 마음이 흡족해지는구나. 노부는 지기(知 己)를 만난 기분이다. 그대의 꿋꿋함이 마음에 든다. 이번에는 마 지막 관문(關門)이다. 그러니 필히 삼배지례의 예를 갖춘 다음 석 문을 열어라.

"웃기지 마시오. 노인."

아비객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는 태어나서 그 누구 에게도 고개를 숙여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산 사람도 아닌 죽은

자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아비객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그는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우수를 뻗었다.


우르르... 릉!

석벽이 다시 갈라졌다.

이번에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약간 안으로 들어간 곳에 역시 같은 석벽이 나타났을 뿐이었다.

- 진정 이 늙은이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후세(後世)에 노부와 똑같은 성품을 지닌 자가 찾아왔다는 것은 정녕 뜻깊은 일이도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노부의 시험(試驗)은 끝났다. 이제 그대는 정식으로 사도(使徒)의 예를 갖추어 절을 한 뒤 문을 열라.

"......!"

아비객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계속되는 괴사에 그의 무심하면 서도 차가운 눈망울이 기이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 절을 하지 않고 서슴없이 우수를 뻗었다.


우르르르... 릉!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석벽이 갈라지면서 무수한 화살이 사방으로

부터 날아왔다.

쉬쉬쉬... 쉭!

화살은 지척의 거리에서 갑작스럽게 발사되었으므로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아니 좁은 통로상에서는 피할 공간조차 없었다.

"앗!"

아비객은 짧은 비명을 내뱉았다.

그러나 일은 이미 벌어진 후였다. 사실 미리 방비했다면 대천주심 법이나 홍광천도공으로 화살을 모두 튕겨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파파파팍!

"윽!"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전신에 수백 개의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꽂 혔다. 그러나 아비객은 화살을 맞은 채 버티고 있었다.

"......?"

경악으로 물들었던 그의 얼굴에 한 가닥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 순간 후두둑하며 몸에

박혔던 화살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

졌다.

알고보니 화살들은 하나같이

활촉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건

성으로 그의 몸에 꽂혔을 뿐이었다. 실로 이해할 수 없는 괴사였 다.

"......!"

그러나 아비객의 심적 충격은 꽤 컸다. 만일 그 화살에 촉이 있었 다면 아무리 금강불괴의 몸을 지녔다해도 전신이 산적처럼 꿰어 즉사했을 것이 아닌가.

아비객은 한동안 넋을 잃은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러다 문득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핫......!"

광소는 동굴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런데 그 웃음의 여운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우르르... 릉!

앞을 가로막고 있던 석벽이

열리며 그곳으로부터 환한 빛이 쏟아

져 들어왔다.

■ 마 인 제 3 장 천지무무심법(天地無無心法) -4 ━━━━━━━━━━━━━━━━━━━━━━━━━━━━━━━━━━━

아비객의 눈 앞에 드러난 것은 (石府)였다.

사방 다섯 장 넓이의 장방형 석부


천정에는 야명주(夜明珠)가 박혀있어 석부 안은 대낮과 같이 밝았 다. 아비객은 돌변한 풍경에 잠시 멈칫했으나 곧 성큼성큼 석부 안으로 들어섰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석부 중앙의 포단 위에 앉아 있는 한 명 의 황의노인이었다. 그는 앉은 키가 보통 사람의 선 키보다 더 큰 거구의 인물이었다.

나이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늙었으나 체격은 건장했으며 전신 에서 풍기는 인상은 극히 패도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한 채 좌화한 것이 었다.

"......."

아비객은 석부로 들어서자마자

황의 거구노인과 정면으로 시선을

부딪쳤다. 일순 섬뜩한 느낌에 가슴이 진동했다. 그러다 곧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자세히 보니 황의노인이 오른손 식지로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는 금강지력으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 건방진 놈. 끝까지 나 천지상인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구나. 너같은 놈은 구천지옥(九泉地獄)에 떨어져도 염라대왕에게 고개 숙이지 않을 것이다. 핫핫핫! 그러나 노부의 마음에 든다. 여기까 지 온 것도 하나의 인연(因緣)이다. 내 네놈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겠다. 하나는 노부가 평생 강호를 주유하며 적수를 찾지 못했던 광마천지장법(狂魔天地掌法) 삼식(三式)이 적힌 천지장경(天地掌 經)이며, 다른 하나는 노부가 이곳에서 발견한 천년천지영과(千年 天地靈果)다.

천지장경을 익히면 능히 천하독패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명심해라. 천지영과는 필히 양과(陽果)와 음과(陰果)를 남녀가 함 께 복용해야만 한다. 영과를 복용하면 각각 백 년씩의 내공을 얻 을 수가 있을 것이다.

노부 천지상인은 어려서부터 무공 익히기를 밥먹기보다 좋아한 무 공광(武功狂)이었다. 그 결과 무적의 광마천지장법을 창안했다. 당년 노부가 강호를 혈풍에 몰아넣던 제왕문, 환희궁, 지옥성을 몰아낸 후 각 파의 비급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결과 결국 모든 무 공은 오직 한 가지로 귀일(歸一)됨을 느꼈다. 그래서 그 느낀 바


를 천지장경에 남겨 놓았다. 그대는 천지장경을 익혀 난세(亂世) 를 다스려라.

그리하여 노부에 이어 위대한 독인(獨人)이 되기를 기원하노라.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천지상인(天地上人)이 남기 노라.

"......."

바닥에 깨알같이 새겨진 글을

모두 읽은 아비객의 얼굴에는 여전

히 표정이 없었다. 다만 그는 세상에 천지상인과 같은 괴인이 또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작자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잠시 후 그는 석부를 둘러보았다. 천지상인이 남겼다는 물건을 찾 기 위해서였다. 문득 그의 눈에서 강한 빛이 흘러나왔다.

석부의 사방 벽면에 무수히 많은 그림과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무림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각 대문파들의 무

공구결(武功口訣)들이었다. 즉 구파일방(九派一幇)을 비롯하여, 사파(邪派)와 강남북의 각

무가(武家)들의 무공구결이 그림과 글

씨로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무공구결마다 일일이 주해(註解)가 달려있다 는 사실이었다. 각 파 무공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그 파해법(破解 法)이나 약점의 보강법까지 세세하게 주를 단 것이었다.

만일 각 파의 인물이 석벽도해를 보았다면 그야말로 까무라쳤을 것이다. 수백 년 대대로 내려오는 자파의 비전지비가 여지없이 파 헤쳐진 것이었다.

석벽도해를 잠시 살펴본 아비객의 얼굴에도 은은한 변화가 일어나 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한 사람이 이 많은 무공들을 전부 섭렵할 수 있단 말인가?'

아비객은 내심 그렇게 부르짖으며 벽면의 무공도해에 정신을 빼앗 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비객의 두 눈이 무섭게 빛났다. 그는 벽면의 무공을 낱낱이 훑 어보고 있었다. 비록 깨알같은 글귀들이었으나 그의 눈에는 주먹 보다 큰 글씨로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 십칠 년 간을

칠흑같은 암흑 속에서 보냈던 그의 비

상한 안력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짧은 시간 동안에 석벽의 무공도해를 머리 속에 새겨넣고 있었다.

그것은 초인적인 오성(悟性)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아비객은 태어나면서부터 오직 무공을 위해 살아왔다고해도 과언 이 아니었다. 그런 그의 오성은 모래가

물을 빨아들이듯 석벽의

무공도해를 흡수하고 있었다.

말이 짧은 순간이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갔다. 마침내 아비객은 석벽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고 있었다.

문득 도해의 마지막 부분에 하나의 문이 있는 것이 는 무심코 문에 손을 대었다.

그그긍......

눈에 띄자 그


하는 음향과 함께 문이 가볍게 났다. 안으로 들어가자 맨

밀려나며 또 한 칸의 석실이 나타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중앙의 연못이

었다. 연못 한가운데에는 한 그루의 신비하게 생긴 나무가 솟아 있었다.

나무는 높이가 두 자 가량으로 둥치는 녹색이었으며 기이하게도 잎은 황금빛을 띄고 있었다. 그 황금빛 잎사귀 사이로 붉고 푸른 두 알의 열매가 매달려 있었다.

'저것이 천년천지영과인가 보군.'

아비객은 내심 중얼거린 후 석실을 돌아보았다. 연못 옆에는 하나 의 석단이 있었는데 그 위에 양피지로 만든 한 권의 책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서슴없이 걸어가 책자를 집어들었다.

<천지장경(天地掌經)>

양피책자의 겉면에는 전서체(篆書體)로 제목이 쓰여져 있었다.


책자를 살펴보는데 한 장의 종이가 책갈피로부터 떨어졌다. 종이 를 집어 보니 눈에 익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 연못의 물은

천지간(天地間)의 영기가 스며있는 천지영천수(天

地靈泉水)다. 영천수를 복용하면 허기를 잊을

수가 있고 장기간

복용하면 점차 공력이 증진된다. 너는 이곳에서 천지영천수를 복 용하며 무공을 익혀라.

아비객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천지상인은 마치 모든 것을 예 측이나 한 듯 안배해 놓은 것이었다. 그는 종이를 던져버리고 천 지장경을 펼쳐 보았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무학이 수록되어 있었다.

천지무무심법(天地無無心法).


- 천하에 파생되어 있는 모든 심법(心法)은 대부분 단전(丹田)에 기(氣)를 모으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 운공에는 결점이 있으 니 그것은 인간의 진기에는 한계가 있기 끊임없이 진력을

때문이다. 이에 노부는

사용해도 고갈되지 않는 독문심법(獨門心法)을

창안했다. 천지무무심법은 호흡(呼吸)을 통해 기를 섭취하고 내뱉 은 기를 다시 흡수함으로써 끝없이 진기를 활용하는 것이 요체(要 諦)이다. 이 심법은 특히

생사(生死)를 결하는 격전 중에 상대방

이 내뿜는 기(氣)까지도 흡수함으로써 더욱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 니 가히 불세신공(不世神功)이랄

수 있다. 반드시 이 천지무무심

법을 연성한 후 광마천지장법을 익혀라. 왜냐하면 광마천지장법은 진력의 소모가 막심하기 때문이다.

천지무무심법의 설명을 읽은 후 처음으로 아비객의 표정이 변했 다.

'세상에 이런 괴상한 심법도 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구나.'

그는 즉시 다음 장에

적혀있는 천지무무심법의 구결과 도해를 살

펴보았다. 점차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의 안색이 다시 변했다. 일 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던 눈에 경이와 탄복의 빛이 떠오른 것이었


다.

천지무무심법이야말로 천지상인이 광오하게 말한

대로 불세출의

기학이었던 것이었다.

마침내 아비객은 이제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천지무무심법의 구결 에 심취해 들어갔다.

비록 그의 성품은 천지상인에 필적할 정도로 오만하고 편격한 것 이었으나 최소한 무공에 관한

한 무서운 집념의 소유자인 것이었

다.

결국 그는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석실에서 무공 수련에 몰두해 들 어갔다.

광마천지장법(狂魔天地掌法).

- 인혼멸(人魂滅).

- 지살광(地煞狂).

- 천광전(天光電).


천지상인이 그토록 광오하게 자랑했던 광마천지장법은 뜻밖에도 단 삼 식의 장법이었다. 아비객은 처음에는 너무나 간단한 삼 식 의 장법에 실망을 금치 못했으나 그 요의를 깨달으면서 점차 경악 을 금치 못하게 되었다.

삼 식의 장법은 하나같이 하늘 아래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패도적 (覇道的)인 장법이었던 것이다.

- 인혼멸(人魂滅).

제 일 식에 속하는 인혼멸은 허(虛)의 환영(幻影)이 수천 개의 손 바닥 그물을 이루어 상대의

퇴로를 차단하는 순간 하나로 합쳐지

며 상대방의 심장을 관통한

후 검은 장인(掌印)을 남긴다. 이 장

력은 그 어떤 내가강기(內家 氣)나 전문적인 외문기공(外門奇功) 도 여지없이 파괴하는 무서운 장법이었다.

- 지살광(地煞狂).

이는 상대의 장력과 부딪친 후 상대의 진력까지 합쳐 다시 반탄해


내는 것으로 상대방의 무공이 높으면 높을 수록 더욱 무서운 위력 으로 되돌아가는 패도지공이었다.

- 천광전(天光電).

이는 하늘과 땅

사이의 가장 강한 기운인 뇌(雷)를 이용한 것으

로, 전 내공력을 일으켜 하늘의 뇌정지기(雷霆之氣)를 불러 일으 킨다. 따라서 그

위력은 능히 십 장 방원을 재로 만들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장력이었다.

"세상에 이런 장법도 있단 말인가?"

아비객은 천지장경을 덮은

채 중얼거렸다.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

대라고 했다. 그러나 거기에도 일정한 정점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 장법은......."

아비객의 얼굴에 한 가닥 회의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천지장경을 내려다보다 문득 두 손바닥을 비볐다. 순간 천지장경은 가루가 되 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이제 영원히 천지장경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다만 오 직 일인, 아비객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을 뿐이었다.

아비객의 입가에는 한 가닥 냉오한 기운이 서렸다. 그는 우연히 들른 석부에서 무림인이라면 평생을

두고 염원하는 대기연(大奇

緣)을 얻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지상인에 대해 조금도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애당초 그는 인간에 대한 불신(不信)을 운명처럼 강요받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 있을 필요가 없지.'

그는 시선을 돌렸다. 연못 한가운데 자라고 있는 천지영과를 보는 순간 가볍게 우수를 뻗어 움켜쥐는 시늉을 냈다. 그러자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붉고

푸른 두 열매가 허공섭물진기(虛空攝物珍技)에

의해 그의 손바닥으로 날아왔다.

아비객은 망설임없이 두 알의 열매를 입 안에 넣고 삼켰다. 영과 는 입 안으로 들어간 순간 다.

금세 녹아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 윽!"

불현듯 그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배를 움켜쥐었다.

갑자기 뱃속에서 차갑고 뜨거운 기운이

번지더니 순식간에 그의

몸을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닌가? 그의 몸은 가 공할 열기(熱氣)과 한기(寒氣)의 상반된 기운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것은 그의 오만이 부른 결과였다. 애당초 천지상인은 영과를 반 드시 남녀가 나누어 복용하라고 했던 것을 아비객은 무시해 버렸 던 것이었다.

"으으으......!"

아비객은 배를 움켜쥐며 고통의 신음을 발했다. 그것은 인간의 인 내를 벗어나는 지옥의 고통이었다. 결국 그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 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눈에서 무서운 광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난생 처음 어떤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릅떠진 눈에서 무서운 욕정의 불길이 타올랐다. 천지간의 음양의 기운을 띄고 있는 영과의 약력이 그로 하여금 억제할 수 없는 욕정(欲情)을 유발시킨 것이었다.

"으으으......!"

아비객은 전신을 팽창시키는 무서운 욕정에 몸부림쳤다.

파파팍!

비틀거리며 일어서기 위해 짚었던 아비객의 손가락이 석단의 한 쪽을 가루로 만들었다. 터질 듯한 욕망이 그의 전신 혈맥을 툭툭 불거지게 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마침내 아비객은 괴성을 부르짖으며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는 천 지상인이 좌화한 석실을 지나 려가고 있었다.

애당초 들어왔던 방향을 거꾸로 달


"으아아아......!"

아비객은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동굴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미친 듯이 신형을 날리고 있는 그의 몸은 육 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그는 방향도 모른 채 온 몸을 태울 듯한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어 디론가로 날아갈 뿐이었다.

■ 마 인 제 4 장 뜻밖의 정사(情事) ━━━━━━━━━━━━━━━━━━━━━━━━━━━━━━━━━━━

빙담(氷潭).

만년설(萬年雪)이 쌓여 있는 천지산 정상에 하나의 연못이 자리잡


고 있었다. 방원 이십여 장에 달하는 넓이의 연못은 그러나 기이 하게도 물이 얼지 않았다. 극단의 한랭한 기운이 결빙을 막고 있 는 것이었다.

아비객은 그 빙담 속에 있었다.

그는 미칠듯한 욕정을 다스리기 위해 뼈를 에일 정도로 차가운 빙 담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극렬한 한기조차도 그의 광포한 욕정을 식히지 못했다.

"으으... 으......!"

그는 고통에 찬

신음을 발하며 대천주심법(大天周心法)을 운공하

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천주심법을 운기하자 체내의

열과 한의 두 기운은 더욱

미친 듯이 전신 대혈을 치달리기 시작했다.

"으... 음... 음......!"

아비객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은 붉게 충혈되었 다가, 시퍼렇게 변색되는 반복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동시


에 그의 이마 위로는 선명한 청홍백자(靑紅白紫) 네 가지 색의 환 (環)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천주심법을 극도로 운공 한 탓이었다.

정수리에 모인 네 가지 색의 환은 그의 콧속으로 빨려들었다 다시 토출되곤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사색(死色)으로 질려 갈 뿐이었다.

"윽!"

문득 고통의 비명이 터지는 순간 그의 몸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동시에 몸이 좌우로 각각 다른 색으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닌가?

주화입마(走火入魔)!

바로 무인(武人)에게 가장 무서운 주화입마 상태가 아비객에게 닥 친 것이다. 그야말로 행(幸)

속에 불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현

상이었다.

천지동부의 기연을 얻은 댓가로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한 것이었 다. 만일 그가 천지영과의

기운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결국 온 몸

이 반은 타고 반은 얼어 죽게 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휙!

한 가닥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홀연히 빙담가에 백영(白影) 이 나타났다.

나타난 사람은 전신에 눈처럼 흰 백의를 입은 한 명의 절세미녀였 다. 그녀는 대략 십육칠

세 정도 되어 보였는데 그야말로 설중매

화(雪中梅花)를 연상케 할 정도로 청순하고 고아한 인상의 미소녀 였다.

미소녀의 피부는 빙결같이 고왔고, 두 눈은 한 쌍의 보석처럼 영 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칠흑같은 머리는 흰

띠로 묶어 치렁치렁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불면 날아갈 듯 하늘하늘한 몸매에 기이하게도 차가운 품성(稟性)이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백의소녀는 빙담에 내려서자마자 그

속에 몸을 담근 채 몸부림치

고 있는 아비객을 보고 가볍게 안색이 변했다. 이어 그녀는 대뜸 냉랭하게 외치는 것이었다.


"이봐요! 당신은 누군데 허락도 없이 빙천설담(氷泉雪潭)에 몸을 담그고 있는 거죠?"

빙천설담(氷泉雪潭).

그것은 태고(太古) 이래로부터 수만

년 간 얼음이 계속 얼어있는

곳에서 얼음의 정화인 빙기(氷氣)가 흘러나와 고여있는 물로서 보 통 사람은 그 근처에만 가도 얼어 죽는다.

그러나 빙천설담에 몸을 담근

채 무공을 연마하면 전설의 빙혼신

공(氷魂神功)과 빙백강(氷魄 )을 연마할 수 있으며, 또한 전신은 마치 금종조(金鐘早)나

철포삼(鐵袍衫)과 같은 외문공력을 익힌

듯이 단단해진다.

그러므로 고래로부터 무림인들은 빙천설담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 어 있었다.

그러나 빙천설담은 가공할 음한지기를 사방 일 리(一里)에 걸쳐 발산하므로 생물의 접근이 어려웠다. 그런데 천지봉 정상에 그 전 설의 빙천설담이 고여 있을 줄이야.

"......?"


문득 백의소녀는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자세히 보니 빙천설담에 몸을

담그고 있는 사내는 주화입마 상태

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에 놀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봐요, 공력을 풀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주화입마되어 죽

고 말아요!"

그러나 아비객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계속 대천주심법을

운공할 뿐이었다. 사실 그는 전신이 분리되는 고통 중에서도 소녀 의 말을 듣기는 했다. 그러나 타고난 고집과 오만함 때문에 일부 러 계속 공력을 운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몸은 이제 허리까지 두 가지 상반된 기운으로 나뉘어진 상태 였다.

"바보같은 작자!"

문득 백의소녀는 경멸하듯 외치며 빙담에 뛰어들었다. 이어 그녀 는 아비객에게 다가가 신속히 옥장(玉掌)을 휘둘렀다.


파파팍!

그녀의 장심으로부터 음랭한

백색기류가 뻗어나와 아비객의 전신

요혈을 후려쳤다. 놀랍게도 그것은 전설의 빙혼신공이었다.

"으... 음!"

아비객은 전신 혈도가 통제되는

것을 느끼면서 벌렁 뒤로 쓰러졌

다. 그 순간 백의소녀는 그를 가볍게 안고 빙담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아비객을 만년설지 위에 반듯이 눕혔다. 이미 아비객의 몸 은 허리 아래까지 정확히 반쪽으로 분리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

이때 백의소녀는 흠칫하는 표정이었다. 아비객을 살피던 중 그의 용모가 뜻밖에도 영준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특히 영준한 가운데 고독함이 깃들어 있는, 고통으로 인해 잔뜩 찌푸러져 있는 아비객의 미간은 백의소녀의 심장을 새처럼 고동치 게 했다.


'이 사람은 정말... 영준하게 생겼구나.'

백의소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어 그녀는 옥 지(玉指)를 퉁겨 아비객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으음......!"

신음소리와 함께 아비객은 정신을 차렸다. 그 순간 그의 눈에 아 름답기 그지없는 소녀의 모습이 비쳤다.

"우우우......!"

문득 아비객은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또다시 불덩어리같 은 욕정이 전신을 타오르게 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날... 앗!"

백의소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돌연 아비객이 우악스럽게 그녀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짓... 웁!"


아비객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욕정으로 인해 화산 처럼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더군다나 굶주린 이리 앞에 양이 던져졌으니 어찌 그 양이 무사할 리 있겠는가?

아비객의 뜨거운 입술이 백의소녀의 작고 매력적인 입술을 짓눌렀 다. 백의소녀는 그만 혼백이

달아날 정도로 놀랐다. 너무나 창졸

간의 일이라 그녀는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찌익!

창졸지간에 그녀의 백의가 아비객의 손에 의해 사정없이 찢겨져 나갔다.

"아앗... 아!"

백의소녀는 전신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그녀는 공력이 일시에 금세당하는 잔혈(殘穴)을 찍힌 것이었다. 이윽고 설지(雪地) 위에 순결무비한 시작했다.

찌익!

소녀의 나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아비객이 사정없이 그녀의

옷자락을 찢어 던진 것이었다. 마침내

백의소녀는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어 싸늘한 설지 위에 팽개쳐졌다.

실로 하늘도 질투할 만큼

매혹적인 육체였다. 눈보다 더 흰 피부

에 봉긋 솟은 젖가슴은 천도를 닮았으며, 가는 허리에 배는 옥반 처럼 매끄러웠다. 팔다리는 가늘지도 굵지도 않았다. 그녀의 부드 러운 아랫배에 은은히 돋아나

있는 숲은 숨막히는 비밀을 간직한

채 가지런한 두 다리 사이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헉헉......."

더운 김을 뿜으며 아비객은

충혈된 눈으로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

럼 백의소녀의 나체를 노려보더니 급기야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 기 시작했다.

이어 그는 야수처럼 소녀의 몸을 덮쳤다.

이어 숨가쁜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육중한 아비객의 몸이 소녀의 몸을 눌러버린 것이었다. 뒤이어 천지를 재창조하려는 듯 격렬하고 숨가쁜 합일(合一)이 시작됐다.


아비객은 무자비하게 순결한 소녀의 정조를 유린해가는 것이었다.

'으흐흑... 아아!'

잔혈을 찔려 신음은 흘리지

못했으나 비감과 고통섞인 오열은 소

녀의 마음을 산산조각으로 분쇄시키고 찢는 듯한 고통에 하늘을 원망하고 땅을

있었다. 그녀는 하복부를 저주했다. 아니 애당초

이곳에 온 자신을 더욱 더 저주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은 그녀 혼자서만 감내해야 했다. 아비객은 오로지 터질 듯한 욕정을 발산하기에만 급급할 뿐이었다.

마침내 옥반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점점이 아픈 혈화 (血花)를 설지 위에 뿌린 채로.

아비객은 축 늘어진 채 의식을 잃었다.

어느덧 그의 몸을 분리했던 두 가닥의 상반된 기운은 사라지고 없 었다. 의식을 잃고 있는

그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하기까지 해 보


였다.

"아......!"

겨우 몸을 추스린 소녀는 땅이 꺼지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격 렬한 정사로 인해

어느 순간 그녀의 잔혈이 저절로 풀린 것이었

다.

소녀는 걸레쪽같이 찢어진 천으로 몸의 주요한 부분만을 대충 가 린 채 넋을 잃은 듯 서 있었다.

허탈과 비감 만이 그녀의 가슴을 꽉 메웠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 게 당한 일이었다. 이름은커녕 신분도, 그 아무 것도 모르는 사내 에게 무자비하게 순결을 빼앗겨 버렸으니 오죽하겠는가?

"흑흑......!"

그녀의 창백한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문득 그녀는 옥장을 번쩍 치켜 들었다. 일순 매서운 살기가 그녀의 싸늘한 얼굴을 뒤덮었 다.

'죽이리라. 이 자를.......'


그녀는 벌렁 누운 채 눈을 감고 있는 아비객을 노려보았다. 그러 나 그의 영준한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이 바뀌고 말았다.

"아......!"

한숨과 함께 그녀의 옥장에서 저절로 힘이 빠졌다. 이어 그녀는 한맺힌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설봉정(雪鳳精)! 너는 왜

이다지도 마음이 약하단 말이냐? 너를

짓밟은 사내를 왜 죽이지 못하느냐?"

그녀는 다시 아비객을 내려다 보았다.

아비객은 여전히

알몸이었다. 그의

건장한 가슴팍에서는 훈훈한

김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문득 어이없게도 백의소녀 설봉정의 얼 굴에 은은한 홍조가 피어

올랐다. 이어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

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주섬주섬 아비객의 옷을 집어 그의 몸에 덮어 주었다. 그 리고 잠시 망설이더니 곧

한 장의 비단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

의 한 귀퉁이에는 한 마리의 백봉(白鳳)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


었다.

"......."

설봉정은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는 눈으로 아비객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곧 그녀는 아비객의 가슴에 손수건을 내려 놓았다.

"당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훗날 만날 수 있다면 이 설봉정을 결 코 박대할 수 없을 거예요. 만약 그렇게 하면......."

설봉정의 얼굴에 일순 살기가 감돌았다.

"죽일 거예요. 당신을!"

그녀는 싸늘하게 내뱉고서는 몸을 돌렸다. 이어 가볍게 발을 구르 는 순간 그녀의 신형은 쏜살같이 봉우리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 마 인 제 4 장 뜻밖의 정사(情事) -2 ━━━━━━━━━━━━━━━━━━━━━━━━━━━━━━━━━━━


아비객이 정신을 차린 것은 해가 지고 다시 어둠이 지나간 이튿날 아침이었다.

"으음."

한동안 사지를 꿈틀거리던 아비객이 눈을 떴다.

거의 투명할 정도로 맑고 무심한 눈빛이었다. 그것은 내공의 조화 가 안으로 갈무리된, 이른바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를 보여주 는 눈빛이었다.

반박귀진의 경지는 근 삼 갑자(三甲子)의 이상의 공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경지였다. 천지영과의 기운을 체내로 흡수했기에 또다시 이런 대기연을 얻게 된 것이었다.

아비객은 몸을

일으키는 순간 가슴에서

한 장의 비단 손수건을 발견했다.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린


"......?"

그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이어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눈에

얼어붙은 눈 위에 떨어진 몇 방

울의 혈화가 발견됐다. 그것을 본 순간 불현듯 아비객의 머리에 환상처럼 한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은 차갑고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고통스 런 표정으로 변했다. 그녀는 알몸으로 괴롭게 설지 위에서 몸부림 치고 있었다. 그런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른 순간 아비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수중의 비단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 그의 눈썹 끝이 가볍게 흔들리는 듯 했다. 그러나 아비객은 손수건을 바닥에 휙 던져 버리고는 몸을 돌려 서서히 산봉 아래로 걸어 내려가기 시작 했다.

일출(日出)이 설봉들을 신비한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 마 인 제 4 장 뜻밖의 정사(情事) -3 ━━━━━━━━━━━━━━━━━━━━━━━━━━━━━━━━━━━

태백산은 섬서성(陝西省) 서안부(西安府)에서 오백여 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산(大山)이었다.

동서(東西)로 천오백여 리에 걸친 태백산의 위세는 가히 장관이었 다. 섬서제일산이기도 한

태백산에는 수많은 봉우리와 계곡이 산

재해 있었다. 따라서 봉(峯)은 높고 곡(谷)은 깊기로 유명한 곳이 었다.

태백거(太白居).

그곳은 태백산 기슭에 있는 주점겸 객점이었다. 그러나 객점이라 기에 그 규모는 보잘 것이 없었다.

탁자 여섯 개가 전부인 태백거는 그러나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것은 이곳의 특산인 태백천일로(太白千日露)라는 술맛이 일품이 기 때문이었다.

정오 무렵 한 손님이 찾아들었다.

일신에 낡은 남삼을 걸친 냉막한 청년은 다름아닌 아비객이었다. 아비객은 처음으로 사람이 사는 곳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 것은 그가 옥문관을 떠난 지 한 달 만이었다.

"어서 옵......."

태백거의 점원겸 주인인 늙은이는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아비객 의 전신에서 풍기는 냉막한 기운이 그를 질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백거 안으로 들어선

아비객은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곧장 구석진 자리로 가 앉았다.

"손님. 무얼 드시겠습니까......?"

"술."

"아, 안주는?"


"술."

아비객의 말은 짧고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몹시 귀찮아 하는 듯 했다. 그의 냉막한 기세에 도망치듯 황급히 주방으로 사라진 노인 은 잠시 후

태백천일로 한 병을 가져와

다. 그저 비위를 거슬리지 않는 것이

주탁에 조심스럽게 놓았 좋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아비객은 무심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두 개의 주탁에 한 쪽은 장사꾼 차림의 중년인

네 명이 앉아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표사 차림의 장한 두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아비객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비객과 눈빛이 마주친 순간 그들은 웬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급히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아비객은 술이라곤 난생 처음이었다.

특히 지금 주탁에 있는 태백천일로는 독한 술이었다. 그는 술을 따랐다. 무색의 다.

술이 잔으로 쏟아지는 순간 향긋한 냄새가 풍겼


"......."

그는 잠시 술잔을 내려보다가 단숨에 잔을 비워냈다.

순간 그의 짙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독하고 화끈한 맛을 주 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에서만 독하게 느껴질 뿐, 이어 가슴이 뜨 거워지는 것이

그다지 싫지만은 않은 느낌이었다. 그는 다시 한

잔을 따랐다.

바로 그때 우연히 들려온 표사들의 대화가 그의 관심을 끌었다.

"곽삼(郭三). 자네는 이 부근에 유명한 기인이 살고 있는 것을 알 고 있나?"

곽삼이라 불리운 표사가 잔을 기울이며 맞장구 쳤다.

"전이(田二). 성수화타(聖手華陀) 범어경(范御京) 노선배님을 말 하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러나 범노선배의 의술보다 더 유명한 것이 바로 그분이 살고 있는 성수장(聖手莊)에 있네."


전이의 말에 곽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건 또 뭔가?"

전이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강호의 소식통인 이 전이가 모르는 것은 없지. 그것은 바로 범노선배가 뒤늦게 본 딸이라네."

곽삼은 의혹어린 말로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하하하... 자네는 모르네.

그녀의 미모는 벌써 이곳뿐만 아니라

섬서 일대에서 제일미로 일컬어지고 있네."

그 말에 곽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정말인가?"

"암, 직접 눈으로 보면 아마 자네는 그날로 상사병에 걸려 드러눕 게 될 걸!"


"그... 그 정도로?"

"음, 그런데 아깝게도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고 그녀는 오래 살 수 없는 몸이라네."

"아니 왜?"

"자네 선천절음증(先天絶陰症)이란 병을 아나?"

"선천절음증...? 그건 선천적으로 음경(陰經)이 허약해 십육 세를 못 넘기고 죽는다는 고질병이 아닌가?"

"바로 그렇네. 그녀는 바로

그 병에 걸려 있네. 성수화타 노선배

는 신기에 가까운 의술로 수많은 병자를 고쳤지만 유독 자신의 딸 만은 고치지 못했네."

"흠. 저런......."

그때 이미 반 병의 태백천일로를 비운 아비객은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성수화타 범어경이라면 중원검성 곡굉이 부탁한 자가 바로 그 자 가 아닌가?'

그는 아직도 품에

곡굉이 죽으면서 부탁한 천형비경(天形秘經)과

자기로 된 옥병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가 이곳에 온 것도 지나 는 길에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두 표사는 다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범노선배는 백방으로 딸을 고칠 영약을 구하고 있네. 심 지어 그 분은 영약을

구해오는 자에게 딸을 주겠노라고까지 선포

했다네."

"그... 그래서?"

전이는 킬킬거렸다.

"흐흐... 왜?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군?"

"그... 그야......."

"후후... 그러나 꿈일세. 그 영약이 뭔지 알겠나?"


"......?"

"바로 공청석유(孔淸石乳)일세."

"공청석유!"

전이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한 방울이면 능히 십 년의 공력을 얻는다는 전설의 공청석유일 세. 자, 이래도 욕심이 나나?"

"휴......!"

곽삼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로서는 감히 꿈도 못꿀 일이군. 공청석유를 구하기는 둘째치고 설사 구했다해도 내가 마시겠네."

전이는 이죽거리며 잔을 단숨에 비웠다.

"물론이지. 그래서 여태 범노선배는

딸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


이네. 이제 며칠 후면 딸은 십육 세가 다 되어 곧 죽을 텐데..."

아비객은 태백천일로를 모두 마셨다.

'술이란 매우... 좋은 것이군.'

그는 기분이 흡족했다.

적당한 취기가 느껴지자 그는 끈질기게 지난 십칠 년 동안이나 감 쌌던 고독(孤獨)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것 같았다.

아니다. 술로 어찌 고독을 달랠 수 있으랴?

술은 오히려 사람을 더욱 고독하게 만드는 법이 아닌가? 그러므로 독한 고독으로 고독을 다스리는 것에 불과했다.

어쨌든 아비객은 술을 처음 마셨으나

그 즉시 술과 친할 수 있었

다. 약간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는 이어 표사들에게로 걸어갔다.

"친구."

그의 냉막한 음성에 두 표사는 흠칫 했다.


"왜... 왜 그러시오?"

전이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무련곡(舞蓮谷)이 어디에 있는 지 아나?"

아비객이 그렇게 묻는 순간 전이와 곽삼의 안색이 변했다.

"성수장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다."

두 표사는 한순간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그들은 그래도 표사 생

활로 잔뼈가 굵으며 수십 년을 표행한 백전용사였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새파랗게 젊은 아비객에게 기가 눌리고 만 것이었다.

"귀... 귀하, 그곳은 왜?"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 그곳은 바로......."


전이는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무련곡의 위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을 돌린 아비객은 탁자에 한 조각 의 은자를 놓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

전이와 곽삼은 굳어진 채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윽 고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들은 동시에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내 뱉고 있었다.

"제기랄!"

■ 마 인 제 4 장 뜻밖의 정사(情事) -4 ━━━━━━━━━━━━━━━━━━━━━━━━━━━━━━━━━━━


아비객은 태백산으로 들어섰다.

무련곡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러나 무련곡 근방에 다

가갔을 때 아비객은 흠칫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무련곡 쪽으로부터 약 삽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몸에는 선혈이 점점이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아비객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휙! 휙!

신형을 날리던 흑의인들은 마침내 아비객의 앞까지 날아왔다. 그 들 중 우두머리인 듯한 금의인(金依人)이 아비객을 발견하고 음침 하게 외쳤다.

"멈춰라!"

금의인의 일갈에 흑의인들은 일제히 신형을 멈추었다.

"네놈은 누구이며,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냐?"


금의인이 살기띤 음성으로 물었다. 순간 아비객이 냉랭하게 반문 했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냐?"

"뭣이?"

금의인은 분노를 일으켰다.

"본좌의 말에

감히 대꾸를 하다니..... 네놈은 필시 성수장으로

가는 길이겠지?"

"......."

아비객이 묵묵부답이자 금의인의 눈이

무엇을 깨달은 듯 번쩍 빛

났다.

"이제보니 네놈은 곡가 놈의 부탁을 받고 무련곡으로 가는 길이구 나! 옥문관에서 홍기령주를 방해한 바로 그......."

"아비객."


아비객의 말에 금의인은 흠칫했다.

"흐흐...... 좋다! 네놈 스스로가 시인했구나. 그렇다면 네놈은 분명 공청석유를 갖고 있으렸다?"

아비객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금의인은 음흉한 괴소를 흘 리며 다시 말했다.

"흐흐흐!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했더니 여기서 만났구나. 본 흑기당주(黑旗堂主)의 손에 걸린 이상 네놈은 끝장이다!"

그는 흑의인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놈을 죽여라!"

흑가당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흑의인들이 일제히 병기를 뽑아 들었다. 그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아비객에게 쳐들어왔다.

"죽어라!"

위이잉......!


수십 가지 병기와 장력이 아비객을 단숨에 요절낼 듯 몰아쳤다. 그 형세는 가히 노도와 같았다. 그들은 일제히 짓쳐들며 사방에서 아비객을 휘감았다.

바로 그 순간 미동도 않고

서 있던 아비객이 눈 앞으로 짓쳐들어

오는 한 흑의인의 목을 향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

"으악!"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흑의인의 목이 칼로 끊은 듯이 날아갔다. 일순 멈출 듯 하던 아비객의 손이 가볍게 옆으로 뻗어나가자 백색 광선이 칼날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크아악!"

정확히 일 초식마다 한 명의 흑의인들이 황천으로 갔다.

이미 절정에 달한 아비객의 탕마참백인수가 아닌가?


"저... 저럴 수가!"

금의인은 대경했다.

"모... 모두 합공하여 쳐라!"

사색이 된 금의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살아남은 이십 여

명의 흑의인은 벼락같이 아비객을 공격했다.

차차... 창......!

"죽어라! 애송이놈!"

금의인도 월인도(月刃刀)를 뽑아들고 수십 갈래 도광(刀光)을 뿌 리며 아비객을 덮쳤다.

금의인의 도광이 아비객의 몸에 닿기 직전 냉막한 일갈과 함께 아 비객의 신형이 일직선으로 오 장 높이의 허공으로 솟았다. 그때였 다. 허공에서 한 줄기 백색 광선이 떨어졌다.

일순 백색 광선과 아비객의 몸이 일치 되었는가 싶었을 때 눈부신 광채가 사방으로 무섭게 폭사되었다.


츠츠츠츠...... 츳!

"으아... 악!"

사방에서 참담한 비명이 연달아 울려퍼졌다.

눈부신 광채가 장내를 휩쓸자

수십 명의 흑의인들은 미처 엄두도

내지 못하고 허리가 동강나 피바다 속에 뒹구는 것이 아닌가?

어느새 아비객은 손에 삼 장 길이의 종이장같이 얇은 연검을 들고 땅에 내려서 있었다.

"으... 으으......!"

생존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금의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월인도는 이미 동강난 지 오래였 으며 가슴은 일직선으로 갈라져 있었다. 한동안 비틀거리던 금의 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네... 네놈이 펼친 것은... 무... 무슨 무공이냐?"


"마검장도(魔劍長刀)."

연검을 들고 금의인을 주시하던 아비객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마... 마검장도가... 큭!"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내뱉던 금의인이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리고는 곧 절명했다.

바닥에 뒹구는 금의인의 시신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아비객은 마 검장도를 하늘로 던졌다.

찰칵!

두 개의 검은 점이 쏜살같이 내려오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마검장 도가 흑응의 발톱에 회수되었다. 두 흑응은 마검장도를 움켜쥔 채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

아비객은 무심한 눈으로 장내를 둘러보았다.

참혹했다. 끊어진 팔다리와 동강난 지체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내


를 이루고 있었다. 처음 펼친 마검장도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 다. 사실 아비객 스스로도 조금 놀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그 자리를 떠났다.

■ 마 인 제 4 장 뜻밖의 정사(情事) -5 ━━━━━━━━━━━━━━└ЕЕЕЕЕЕЕЕЕЕЕЕЕЕЕЕ

중천의 혈륜(血輪)이 서편 하늘로 막 기울어가기 시작하는 시각.

무련곡 안으로 빛살같은 속도로 비스듬히 날아드는 남색인영이 있 었다. 냉막한 얼굴을 지닌 인영은 바로 아비객이었다.

아비객은 몸을 비틀며 땅

위로 사뿐히 떨어졌다. 이어 주위를 살

피며 걷기 시작했다. 불과 십여 장 정도 걸었을까?


검은 연기와 역한 피비린내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이어 잿더미 가 된 한 채의 무너진 장원이 눈 앞에 나타났다.

"음......."

아비객은 신음을 발했다.

약 일천 평이 넘는 대지에 자리잡고 있던 장원은 완전히 잿더미었 다.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원의 여기저기에 반쯤 불탄 끔찍 한 시체들이 나뒹굴었다.

"이곳이 성수장이란 말인가?"

아비객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대충 짐작이 가기는 했다. 자칭 흑기당주라는 자와 삽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성수장을 이렇게 만들었음이 분명했다. 무슨 까닭인지 는 모르지만 그들의 행위는 잔혹했다.

아비객은 성수장의 잔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쯧. 곡굉의 부탁은 영원히 들어줄 수 없겠군."


정황으로 보아 살아있을 사람은 없는 듯했다. 폐허가 되다시피한 장원 구석구석을 주시하던 그는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이 원수! 받아랏!"

문득 아비객의 등

뒤로부터 한 마디 비분에 찬 날카로운 교갈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음?'

내심 놀라며 아비객은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황의(黃依)를 입은 십육 세 정도의 소녀가 두 눈에 원 독을 품은 채 수중의 단검으로 찔러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 검세는 너무나 미약했다.

아비객은 몸을 비틀며 슬쩍 소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황의소녀는 몹시 허약해 보였다. 얼굴도 창백할 정도로 파리했으


며 격심한 심적 타격을 받은 듯 안색이 파리했다. 아비객에게 손 목을 잡힌 소녀는 한동안 아비객을 노려보더니 급기야 참을 수 없 다는 듯이 오열을 터뜨렸다.

"흐흐흑! 이 원수!"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악을 썼다.

"이 원수! 나마저 죽여라!"

아비객의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 소녀가 바로 성수화타의 딸인가 보군. 그럼 이곳의 유일한 생 존자란 말인가?'

아비객은 무공도 모르는 허약한 소녀가 어떻게 화(禍)를 면했는지 궁금해졌으나 침묵했다.

"원수! 흐흐흑! 나를... 죽여라!"

악을 쓰던 황의소녀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계속 두들 겼다. 그러나 이내 힘이 쭉 빠진 듯

그녀는 털썩 주저앉아 엉엉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아비객은 손을 놓고 잠시

그녀를 내려보다가 품 속에서 천형비경

과 자기병을 꺼내 소녀 앞에 던졌다.

"......?"

소녀는 울음을 그치고 의아한

듯 아비객이 던져준 물건들을 바라

보았다.

"이... 이건......?"

의혹에 사로잡힌 소녀가 고개를 들고서 아비객의 얼굴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가 본 것은 고독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뿐이었다. 어느 틈엔가 몸을 돌린 아비객이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

소녀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소리쳤 다.

"이봐요! 다... 당신... 서요!"


그러나 아비객은 들은 척도 않았다.

황의소녀는 급히 바닥에 떨어진 천형비경과 자기병을 들었다. 이 어 그녀는 흐느끼면서 아비객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 마 인 제 5 장 무황성 비무대회(武皇城 比武大會) ━━━━━━━━━━━━━━━━━━━━━━━━━━━━━━━━━━━

혈세무림(血洗武林)이라고 했던가?

무림의 하루는 피와 음모, 격정과 야망 속에 지나가고 다가온다. 이 끝없는 되풀이는 영웅들의 영고성락 온 것이다.

삼 월 보름.

속에 변함없이 이어내려


이날은 전 중원무림이 온통 흥분으로 들끊는 날이었다. 바로 삼백 년을 내려온 무황성의 무황을 새로 뽑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전기 비무대회가 치뤄진 지 꼭 오 년 만에 이루어지는 비무대회였다.

중원의 무림인들은 오 년마다 한 번씩 비무대회를 열어 새로운 무 황을 선출했다.

당금의 무황성주는 수명사 담광현이었다.

그는 제 이십육대 무황부터 현재 삽십일대 무황까지 무려 육대 삽 십 년 동안이나 무황을 역임했다. 그의 초절한 무공을 누를 수 있 는 고수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번번이 무황의 위를 노리던 도전자들은 그의 개세신학 홍광천도십 이식에 패배해 물러나고 말았다. 수명사 담광현은 가히 명실상부 한 당금무림의 천하제일고수였다.

그를 꺾는 자는 무황의 위에 오를 뿐만 아니라 천하제일인이라는 명예도 함께 얻을 수 있었다.

과연 제 삽십이대 무황을 뽑는 비무대회에서 천하제일고수답게 그


는 또다시 도전자를 물리치고 무황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전 중원무림인들은 호기심과 흥분으로 설레는 가슴을 안고 떼지어 무황을 뽑는 비무대회가 열리는 태산으로 향했다.

■ 마 인 제 5 장 무황성 비무대회(武皇城 比武大會) -2 ━━━━━━━━━━━━━━━━━━━━━━━━━━━━━━━━━━━

태산(泰山) 기슭의 대로는 수많은 무림인들로 인하여 인산인해(人 山人海)를 이루었다.

승(僧), 도(道), 속(俗), 개( ) 등 각양각색의 인물들의 얼굴에 는 흥분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이번 무황의 자리에 대해 갑 론을박하면서 태산으로 향했다.


이들 인파에 섞여 일남일녀가 걷고 있었다.

빛바랜 남삼을 걸친 영준하기

짝이 없으나 냉막한 인상을 풍기는

청년과 그의 뒤를 졸졸 따르듯 쫓고

있는 절색의 황의소녀였다.

그들은 다름아닌 태백산 무련곡에서 온 아비객과 무련곡 성수장의 유일한 생존자인 범문혜(范文慧)였다.

그녀는 성수화타 범어경의 딸로서 선천절음증을 앓고 있어 무공을 익힐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줄곧 침상에서만 생활한 몸이었다.

원래 중원검성 곡굉은 그녀의 부친인 성수화타와는 의형제지간으 로 곡굉은 아우의 딸을 위해 불원천리 천하를 뒤져 마침내 공청석 유(孔淸石乳)를 구한 것이었다.

그가 공청석유를 구한 곳은 바로 중원에서 무려

일만 리 떨어진

변방의 돈황(敦煌) 지방의 한 동굴 속에서였다.

그곳에서 그는 열 방울의 공청석유와 전대기인인 천형자(天形子) 가 남긴 천형비경(天形秘經)을 극적으로

얻었다. 그러나 어떻게

알았는지 곡굉은 신비의 집단인들에게 쫓겨 결국 옥문관에서 참변 을 당하고 말았다.


범문혜는 성수장에 참화가 닥친

날 부친에게 수혈을 찔려 지하서

고(地下書庫)에서 화를 피했다.

그후 그녀는 뒤늦게 나타난 아비객이 원수인 줄 알고 그에게 덤빈 것이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오해를 깨닫고 아비객의 뒤를 따랐 다. 하지만 아비객은 범문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뒤를 힘겹게

쫓다 마침내 쓰러지자 할 수 없

이 그녀를 안고 태백산 밑의 객점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범문혜의 선천절음증을 치료해 주었다.

범문혜는 열 방울의 공청석유를 복용하고 선천절음증이 완치된 것 이었다. 뿐만 불어넣어 주어

아니라 아비객은 약력이 돌게 그녀의 몸에 진기를 무인이면 꿈

속에서도 염원하는 생사현관(生死玄

關)까지 타통시켜 주었다.

그로인해 범문혜는 일백 년의 내공을 얻었음은 물론 무공을 익힐 수 있는 무궁한 기초를 닦게 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범문혜. 그녀는 감동을 금치 못했

다. 아울러 아비객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아비객. 당신은 결코 냉혈인이 아니예요. 아니... 당신은 그 누 구보다도 뜨거운 정을 갖고 있는 의인이에요. 단지 그것을 겉으로 노출시키지 않을 뿐이죠.'

그후 범문혜의 마음은 온통 아비객뿐이었다. 그녀는 그때부터 내 심 결심했다.

'끝까지 따르리라. 이 분이 가는 곳이라면 하늘 끝, 땅 끝, 아니 바다 속일지라도 따라가리라. 언젠가는 이 분의 철심(鐵心)이 열 릴 날이 있겠지.'

범문혜는 인파를

따라 묵묵히 걸어가는

아비객의 옷소매를 잡고

물었다.

"오빠, 이번 무황에 도전하려는 거예요? 정말 그래요?"

아비객은 돌아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말했다.

"말했지 않느냐?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범문혜는 아비객의 차가운

말에 입술을 삐쭉였다. 그러자 그녀의

볼에 아름다운 보조개가 패였다.

"당신은 제가 오빠라는 말만 꺼내면 그러더군요. 흥! 그러나 제가 좋아서 부르는 것이니 당신은 상관하지 말고 대답이나 하세요."

"......."

말이 없는 아비객의 무심한 눈길이 태산을 향했다. 화창한 아침이 었다. 새털같은 구름 하나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범문혜는 고운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몇 번이나 물어봐야 되나요? 도대체 오빠는 이번 무황 선출대회 에......"

아비객은 무뚝뚝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잠시 후면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될 것이다."

범문혜는 그가 입을 열어준

것만이라도 감지덕지한 듯 방긋 웃으


며 다시 물었다. 일부러 그에게 자꾸 말을 시키려는 듯한 의도적 인 행동이었다.

"그럼 오빠께서 무황에 도전한단 말인가요?"

"......."

아비객은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행렬을 뒤따 르며 무황성이 있는 태산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범문혜는 마침내 토라진듯 코웃음쳤다.

"흥! 말하기 싫으면 그만둬요. 하지만 만일 무황에 도전할 마음이 있다면 천형비경에 실린 천형십삼수(天形十三手)와 천형팔선보(天 形八仙步)를 익혀두는 게 좋을 거예요. 어때요?"

"......."

그가 계속해서 말이 없자 범문혜는 졸라대기 시작했다.

"네? 곡백부님에게서 저한테 준 것이니 오빠가 익혀도 되잖아요."


"......."

천하의 냉혈사내일지라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녀의 이같은 교태 에는 간담이 녹아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비객은 전

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듯 묵묵히 태산으로 오르기만 했다.

"흥! 혹시 천형비경을 미리 본 게 아닌가요? 그러길래 보지않으려 하는 것 아녜요?"

그녀는 이같은 말로라도 아비객을 격동시켜 천형비경을 보도록 유 도했다. 그러나 모두가 쓸데없는 일이었다. 아비객은 대꾸도 않고 앞만 보며 걸을 뿐이었다.

"흥! 싫으면 그만둬요!"

마침내 범문혜는 입술을 한 자나 내밀며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아비객의 곁을 한 치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 다. 그녀는 그림자처럼 아비객의 곁에 붙어서 걷고 있었다.


■ 마 인 제 5 장 무황성 비무대회(武皇城 比武大會) -3 ━━━━━━━━━━━━━━━━━━━━━━━━━━━━━━━━━━━

태산 성인봉 분지에 자리잡고 있는 무황성은 정오의 햇살 아래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무황성이 세워진 지 어언 삼백 년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무황성 은 천하무림을 압도할 기상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었다.

- 제 삼십이대 무황위(武皇位).

- 삼산오악(三山五嶽) 집웅비무대회(集雄比武大會).

활짝 열린 성문의 좌우로는 그같이 쓰여진 푸른 깃발이 바람에 펄 럭이고 있었다.

"와아......!"


입추(立錐)의 여지도 없이 몰려든 무림인들로 무황성은 온통 열기 와 함성으로 가득찼다. 방원 일백 장이나 되는 드넓은 연무장에는 이미 구름같은 인파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연무장의 정 중앙에는 사방 십 장(十丈) 정도의 넓은 비무대(比武 台)가 높이 설치되었으며, 비무대를 중심으로 각기 동서남북에는 의자가 놓인 천막이 쳐져 있었다.

천막마다 승(僧), 도(道), 속(俗)을 비롯한 남녀노소의 인물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동쪽의 천막 만은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곳에는 하나의 커다란 태사의가 중심에 놓여 있었으며, 좌우와 뒤로 근엄한 표정의 금의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무황성 의 무황수호무인들로서 정사(正邪)의 들이었다.

팔대성신(八大聖神).

구대금강(九大金剛).

각 파에서 파견된 절정고수


십이지신(十二地神).

삼십육천강(三十六天崗).

칠십이지살(七十二地煞).

팔대성신과 구대금강. 그리고 삼십육천강은 정도무림인들이었다. 반면 십이지신과 칠십이살은 사도(邪道)에서 선출된 고수들이었 다.

그들은 새로운 무황이 뽑힐 때마다 무황의 요구에 의해 오 년 간 무황성에 종사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무황성 고수들은 수명사 담광현이 처음 무황에 올 랐을 때의 인물 그대로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부분 늙어 있었 다.

서쪽 천막 속에는

구파일방(九派一幇)을 비롯하여 정파무림의 대

표자들이 자리잡았으며 남쪽 천막에는 일문이방삼교(一門二 三 敎), 남칠성(南七省) 북육성(北六省)의 녹림맹(綠林盟) 사도 대표 들이 자리했다.


북쪽 천막에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자리했다.

그들은 정사지간의 인물들로서 아무 방파에도 속하지 않은 고수들 이었다.

이제 연무장에는 입추의 여지도 없이

정사무림인들이 빽빽이 서

있었다. 실로 일대 장관이요, 무림사에 남을 대회동이었다.

한편, 서쪽 천막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던 범문혜는 온통 신기 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평생 성수장에서만 자랐으므 로 이같이 많은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아비객도 마찬가지였다.

"......."

수많은 군웅들에게 둘려싸인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일말 의 동요가 일었다.


옥문관(玉門關) 복호산(伏虎山)의 죽림 속 컴컴한 석실에서 고독 과 싸우며 보냈던 세월에

비하면 이같이 시끌벅적한 자리는 생소

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해내야 할 일이 있었다.

- 수명사 담광현을 죽여라. 그는 양의 탈을 쓴 위선자다.

불각승의 명령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담광현이 위선자라는 것은

아비객의 안중에도 없었다. 단지 자신

을 키워준 그들에게 빚을 갚기 위해 명대로 이행한다는 생각 뿐이 었다.

아비객은 이곳으로 오기 전 충분한 수면과 운공조직을 취했다. 명 실상부한 천하제일고수인 수명사 담광현을 죽이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

한동안 비어있던 태사의를 응시하고 있던 아비객의 눈썹이 문득 흔들렸다. 서쪽 천막 속으로부터 대화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청력을 기울였다.

암흑의 석실 벽에 미세한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를 듣고 그들과 무 언의 대화를 나누던 그가 아니던가? 그런 아비객에게 바로 옆

막에서 들려오는 대화소리는 천둥과도 같았다.

"허허.... 이번 무황을 선출하는 비무대회는 유난히 다른 점이 있 는 것 같소."

입을 연 자는 담황색 옷을

입은 육순 정도의 나이에 수염을 기른

노인으로서 두 눈에 신광이 번쩍였다.

바로 당금 황산파(黃刪派)의

장문인 노해창룡(怒海蒼龍) 황서(黃

書)였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인물은 오른손에 불진을 들고 도복을 입은 자 로, 청성파(靑城派)의 장문인 청성일우(靑城一羽) 현우자(玄羽子) 였다.

"무량수불... 그런 것 같소이다. 이번에 무황 위에 도전하기 위해 명부를 제출한 자들 중에는 특히 젊은 고수들이 많소이다."


"허허허... 옛 성현의 말이 맞소이다. 장강(長江)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고 신인(新人)이 구인(舊人)을 밀어낸다는......."

"무량수불... 그러나 옛사람이 없고서 어찌 오늘의 사람이 있겠 소? 영웅은 세월을 타지 않는 법이오. 현 무황이신 담노영웅만 해 도 벌써 육대째나 무황을 지켜내지 않았소?"

노해창룡 황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이다. 담무황이야말로 대영웅이시오."

그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의 대화는 대부분 사담 이었다.

아비객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중천 을 태양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둥 둥 둥 둥......!

웅성거리는 소음을 짓누르며 둔중한 북소리가 연달아 열두 번 울 려 퍼졌다.


북소리가 울려퍼지자 장내는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수천 명의 군웅들이 모였음에도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것은 이곳에 모인 자들이 모두 고수들이라는 것 을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휙!

문득 서쪽 천막 속에서 한줄기 황색 인영이 멋진 일학충천(一鶴庶 天)의 신법으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어 일위도강(一葦渡江) 신 법(身法)을 다시 구사하며 군웅들의

머리를 스쳐 비무대 위로 올

랐다.

"와아!"

"훌륭한 경공이다!"

훌륭한 신법에 넋을 잃은 군웅들은 일제히 함성을 발했다. 그들의 시선은 비무대 위에 오른 황색인영에게 집중했다.

황색가사를 걸친

백미은염의 인자하게 생긴 팔순가량의 노승(老


僧)이 불장을 손에 쥔 채 군웅들에게 합장하며 입을 열었다. 우렁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미타불...! 빈승은 이번

제 삼십이대 무황을 선출하는 참관인

으로 나온 소림사의 제 이십구대 장문인 각원(覺元)이오이다."

"......!"

군웅들은 그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각원선사(覺元禪師).

그는 무림의 태산북두격인 소림사의 방장일 뿐만 아니라 전무림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일대고승이었다.

각원선사는 군웅들을 둘러보며 다시 말했다.

"이제 곧 삼십일대 무황이신 담영웅께서 나오실 것이니 모두들 자 리에 일어나 담무황을 맞으시기 바라오."

둥... 둥... 둥......


연속해서 다섯 번의 둔중한 북소리가 울려퍼졌다.

북소리가 그치자 비무대 뒤쪽으로부터 삼인(三人)의 군웅이 중인 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걸어나왔다. 두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앞장서서 걷는 위풍당당한 금의 백발노인은 당금의 무황인 수명사 담광현이었다.

탐스러운 은염이 가슴을 덮고 있는 그는 무척 늙어 보였다. 그러 나 전광(電光)같은 안광은 그의 위엄과 신위에 변함이 없음을 보 여주었다.

그의 뒤로 좌우 쌍호법인 귀수마영(鬼手魔影) 종무와 섬전신검(閃 電神劍) 소천걸이 그림자같이 따랐다.

그들 또한 담광현을 근 삼

십 년이나 보위했으므로 역시 창노해 있었다.

"와......!"

"무황께서 납시었다.!"

군웅들은 담광현이 나타나자 일제히 일어나며 함성을 보냈다.

"와아!"


함성은 좀체로 그칠 줄 몰랐다.

수명사 담광현은 비무대 위로

올라 군웅들을 향해 깊숙이 포권했

다. 이어 수백 개의 종이 치는 것 같은 웅후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 본 무황성에 이토록 많이 왕림하시어 대단히 감사하오이 다. 이번에는 부디 고인(高人)께서

무황의 위를

받으시기 바라

오!"

그말에 장내는 금세 숙연해졌다. 노영웅의 기개는 변함이 없었으 나 어딘가 모르게 그늘이 엿보였다.

역대무황 중 가장 많은 공적을 남긴 일대영웅 수명사 담광현은 무 림인들의 존경과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대부분의 무인들은 그가 다시 무황의 위를 위임하기 바랬다. 그러 나 일면으로 새로운 변화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당금의 천하제일인이었다.

담광현이 걸음을 옮겨 동쪽

천막으로 들어가 태사의에 앉자 쌍호

법은 그의 뒤에 철신처럼 시립하고 섰다.


비무대 위에 서 있던 각원선사는 담광현을 향해 합장배례한 후 군 웅들에게 우렁차게 말했다.

"아미타불... 자, 그럼 지금부터 제 삼십이대 무황에 도전하고자 하는 분들은 비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기 바라오!"

"와......!"

다시 무황성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연무장의 여기 저기에서 수십 줄기의 인영이 솟구쳐 올랐다.

휘익!

그들은 포물선을 그리며 멋지게 비무대 위로 올랐다. 한결같이 절 정의 경공술을 소지한 기개가 뛰어난 자들이었다.

한편 태사의의 인물을 주시하고 있던 아비객의 마음은 크게 진동 했다. 그의 무심한 눈길은 줄곧 담광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 다.

"......!"


담광현을 처음 본 순간 아비객의 피가 빠르게 흐르면서 이유없이 가슴이 뛰었다. 특히 전광같이 빛나는 담광현의 눈빛을 대하는 순 간 아비객의 가슴의 걷잡을 수 없이 진동했다.

아비객의 눈은 한시도 담광현에게서 떠나지 못했다.

반면 태사의에 앉아서 비무대

위에 오른 인물들을 면밀히 살피고

있던 담광현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내심 초조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천면인과 불각승의 말이 틀렸단 말인가? 왜... 없단 말인가?'

비무대 위를 살펴보던 담광현의 표정에는 초조와 불안의 기색이 어리고 있었다.

소림장문인 각원선사의 말이 장내에 울린 것은 그때였다.

"제 삼십이대 무황위에 도전할 영웅들께서는 관례에 따라 관문을 통과하는 분에게만 도전 자격을 부여하겠소이다."


원래 오 년에 한 번씩 열리는 비무대회에는 세 가지 관문(關門)의 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삼관(三關)의 통과자에 한해서 도 전자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일관(一關).

그것은 독관(毒關)으로 알려진 독중지왕(毒中之王) 만가중(萬加 重)의 극독인 만독단(萬毒丹)을 각기 한 알씩 복용하고 체내의 삼 매진화(三昧眞火)로 체내의 독을 풀어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공 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이관(二關). 그것은 경공(輕功)을 시험하는 관문이다.

무림에서 암기술(暗器術)로는

사천당문(四川唐門)을 첫손으로 꼽

는다.

사천당가의 가주인 천수신환(千手神幻) 당성(唐星)이 나와 그의 독문암기인 만천화우(滿天花雨)로 동시에 서른 여섯 종류의 자오 정(子午釘)을 던지는 것이다.

자오정을 모두 피한 자는 관문통과자로 인정되는 것이다.


삼관(三關)은 실전력(實戰力)을 시험하는 관문이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나와 다. 도전자는 방원 일

각기 전력으로 십초(十招)를 공격한

장의 테두리에서 반격하지 않고 그 십초를

모두 받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 관문은 적어도 각 파 장문인과 대등하거나 월등한 무공을 소유 해야만 통과할 수가 있었다.

■ 마 인 제 5 장 무황성 비무대회(武皇城 比武大會) -4 ━━━━━━━━━━━━━━━━━━━━━━━━━━━━━━━━━━━

드디어 무황의 도전자를 가리기 위한 삼관의 관문통과가 시작되었 다.


먼저 독중지왕(毒中之王) 만가중(萬加重)이 대 위로 올라왔다. 그 는 안색이 푸르스름하고 두 눈에 녹광이 어리는 칠순 가량의 흑의 노인이었다.

"자, 노부가 특별히 제조한 만독단을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리겠 소. 이것은 총

일만 가지 독초와 약초를 배합해 만든 것으로 꽤

위험한 것이오. 후후... 여러분은 만독단을 복용한 후 운공하여 체내의 독을 한 곳으로 몰아 삼매진화로 태워버려야 하오. 그렇지 못하면 전신이 새까맣게 타 죽을 것이오."

"......!"

오십 인의 도전자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러나 무황의 자리에 야심을

둔 고수들이라 첫 관문부터 탈락할

수는 없었다.

이윽고 독중지왕 만가중은 도전자들에게 한 알의 푸른색 단약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도전자들은 대위에 일제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모두 만독단을 복용했다.


군웅들은 숨을 죽이고 도전자들을 주시했다.

일 향각(一香刻), 또 일 향각.......

향 한 자루 탈 시간이 거듭되어 흘러갔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도전자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심각하기만 했

다. 마침내 대략 반 식경이 흐르자 여기저기서 서서히 변화가 일 어났다.

"으... 음!"

쿵!

문득 도전자들 가운데 다섯

명의 얼굴이 검푸르게 변하더니 신음

을 내지르며 벌렁 뒤로 쓰러져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계속하여 여기저기서 연달아 뒤로 넘어간 것이었다.

뒤로 벌렁 쓰러진 그들의 전신은 시퍼렇게 변해 한눈에 보기에도 중독된 현상이 완연히 보였다.

그러나 나머지 인물들은 차츰 독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들이 해독


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손가락 끝으로 독을 몰아

검은 독혈(毒血)을 뽑아내는 자가 있는

가 하면 입김으로 뿜어내는 자, 또는 머리 위에서 검은 기운을 발 출시키는 자 등 다양했다.

이윽고 두 식경이 흐르자 장내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오십일인의 도전자 중 이십인이 중독되어 쓰러진 것이다.

"흐흐... 이것은 그대들 자신의 역량을 탓해야 하오. 누굴 원망할 수는 없는 것이오. 고작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무황에 도전한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니겠소?"

만가중은 쓰러져 신음하는 자들에게 비야냥거리듯 말했다.

"으으...... 제발."

"살려 주시오. 으으......"

쓰러진 자들은 이미 전신이 검게 변색해가고 있었다. 만일 조금만 더 시간이 지체된다면 그들은 전신이 새까맣게 타

죽고 말 것이


틀림없었다.

무황의 야망은 이제 뒷전이었다. 살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마침내 그들은 만가중에게 해약을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만가중은 음침하게 말했다.

"흐흐....... 너무 걱정들

마시오. 노부에게 해약이 있으니 이걸

복용하시오."

만가승은 괴소를 흘리며 품 속에서 백색의 단약을 꺼냈다. 그리고 는 중독자들에게 단약을 한 알씩 복용시켰다.

잠시 후 중독현상이 사라진 자들은 수치감 때문에 얼굴도 들지 못 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비무대 아래로 사라졌다.

반면 서른 한 명의 남은 도전자들은 만면에 득의양양한 빛을 띄우 며 비무대 위에 서 있었다. 소림장문인 각원선사가 나선 것은 그 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미타불... 먼저 일관을 통과한 여러분께 축하드리오!"


"와......!"

장내에 요란한 함성이 울려퍼졌다. 함성은 한동안 그칠 줄을 몰랐 다. 그것에 화답이라도 하듯 비무대 위에 남아 있던 도전자들이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각원선사는 군웅들을 진정시킨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제 이관의 차례요. 여러분들은 준비하시오."

각원선사의 말이 끝나자 비무대

위로 한 청삼의 중년인이 걸어올

라왔다.

그는 서쪽 천막에 있던 사천당문(四川唐門)의 인물로서 바짝 마른 체구에 헐렁한 청삼을 입고 눈빛이 칼날같이 예리한 중년인이었 다. 바로 당금 당가가주인 천수신환(千手神幻) 당성(唐星)이었다.

그는 별호처럼 암기의 제일인자로 한 손을 슬쩍 움직이기만 해도 하늘을 가리는 암기를 우박처럼 떨어트리는 자였다.

만천화우(滿川花雨).


이것은 당가를 명문으로 올려놓은 독문의 절고한 암기법으로 총 서른여섯 종류의 자오정이 동시에 발출되어 상대를 격살시키는 무 서운 암기술이었다.

"하하하... 여러분! 노부는

당성이오. 먼저 여러분의 일관통과를

축하드리오."

당성은 서른 한 명의 도전자들에게 먼저 포권의 예를 취했다. 그 러자 도전자들도 일제히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자신만만했다.

"자, 그럼 시작하겠소."

비무대 위에 즉시 삼 장 정도의 공간이 마련되었다.

"자, 어떤 분이 먼저 시험하시겠소?"

당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갈의(褐依)를 입은 한 육순노인이 나섰다. 노인의 얼굴은

우락부락하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시커먼

구렛나루가 얼굴의 반 이상을 덮고 있었다.

"사해문(四海門)의 문주인 사해신군(四海神君) 사마륭(司馬隆)이


다!"

군웅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사마륭은 나오자마자

당성에게 포권을 취하며 오만하게 말했다.

"당가주, 한 수 가르침을 부탁하오."

"별말씀을. 사마형께 노부의 만천화우는 통하지 않을 것이오."

짐짓 겸손하게 말하고 있었으나 사마륭을 쏘아보는 당성의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실상 당가의 만천화우는 천하절기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 무런 반격도 하지 않고

옷자락에 구멍이 뚫리거나 스치기만 하여

도 관문통과는 실격이 되는 것이었다.

"......."

군웅들이 숨을 죽인 가운데 두 번째 관문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핫!"


사마륭을 노려보던 담성이 마침내 일갈을 터뜨리며 소매를 펼쳤 다. 그 순간 당성의 넓은 소매 속에서 번쩍이는 한성(寒星)이 연 달아 뻗어나갔다.

슈슈슈... 슉!

총 서른 여섯 개의 자오정이 발출된 것이다.

발출된 자오정은 모양이 제각각이듯

속도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전광석화처럼 빨랐고 어떤 것은 눈에 보일 정도로 느렸다.

직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것이

있는가 하면 곡선을 그리며 쏘아들

어가는 것도 있었다. 그것들은 사해신군을 향해 전후좌우에서 쏘 아들어갔다.

"합!"

자오정이 발출되는 즉시 사해신군은 웅후한 외침을 발하며 양소매 를 어지럽게 휘둘렀다.

우르릉... 펑!


웅후한 장력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능히 바다를 엎을 만한 장력 이었다. 그의 사해신장(四海神掌)은 무림의 일절로서 손색이 없었 다.

장력의 폭풍 속에 자오정은 사방으로 휩쓸려 날아갔다. 비무대 앞 뒤로 장력에 휩쓸린 자오정이 떨어져 내리며 꽂혔다. 서른 여섯 개의 자오정의 위력은 사마륭의 장풍 앞에 위력을 잃어버린 것이 었다.

이윽고 폭풍이 멎자 사해신군은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담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핫핫핫......!"

그는 한동안 대소를 터뜨리더니 당성을 향해 오만한 표정으로 입 을 열었다.

"당형이 양보하셨소. 덕분에......"

그 순간 사마륭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뜻밖에도 당성이 빙긋 웃 었기 때문이었다.


"......?"

사마륭이 의혹의 표정을 짓는 순간 당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마형께서 잠깐 방심하신 모양이오."

사마륭은 급히 자신의 신색을 살폈다.

보라. 어느새 사해신군 사마륭의 앞가슴에는 세 개의 구멍이 품자 (品字) 형으로 뚫려있지 않은가?

당성은 담담히 말했다.

"미처 사마형께 말씀드리지 못했소. 본 당문의 자오정은 일반암기 와 달리 외가장풍이나 경력을

뚫을 힘이 있소. 그래서 비록 사마

형의 장력이 대해(大海)를 가를 위력이 있었지만 미처 세 개의 자 오정을 막지 못한 것이오. 실은 나머지

삼십삼 개는 허(虛)였고

세 개가 실(實)이었던 것이오."

"이... 이럴 수가......."

경악과 함께 사해신군 사마륭의 얼굴이 수치로 붉게 물들었을 때


비로소 사실을 알게 된 군웅들이 일제히 함성을 터뜨렸다.

"와......!"

사마륭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만 신형을 날려 대 아래로 사라 져 버렸다.

"과연 당가의 암기는 강호일절이오!"

군웅들의 박수 갈채가 요란하게 터져나왔다. 계속하여 도전자들이 차례로 관문통과를 시작했다.

서른 한 명의 도전자 중

제 이관을 통과한 자는 스물 한 명 뿐이

었다. 당가의 암기는 과연 무림의 일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침내 삼관 도전자가 가려지자 소림장문인 각원선사가 다시 나섰 다.

"자! 이제 마지막 관문이 남았소. 여러분들은 반 시진 동안 운공 조식을 하여 체력을 보충하시길 바라오. 반 시진 후에 삼관을 치 루겠소."


각원선사의 말이 끝나자 스물 한 명의 도전자들은 제각기 흩어져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은 곧 운공조식에 들어갔다.

비무대 위가 조용해지자 사방에 모여 앉아 있던 군웅들이 웅성거 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의 관심은 한 곳으로 모아졌고 대화를 나누는 주제도 동 일했다. 그것은 바로 비무대 곳곳에서 운공조식에 들어간 스물 한 명의 도전자들에 관한 것이었다.

뜻밖에도 스물 한 명의 삼관

도전자 중에는 열한 명의 청년이 있

었다. 그들은 모두 약관(弱冠)의 나이쯤 되는 청년들이었다. 그 중에는 소녀도 하나 끼어 있었다.

십일 인의 젊은 고수(高手)들은 한결같이 기우가 비범하고 영기 (英氣)가 발랄했다.

사해신군 사마륭 같이 일문(一門)의 주인이자 한 지역의 패주(覇 主)인 절세고수조차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는데 불과 약관 전후의

젊은이들이 그것도 열한 명씩이나 통과했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괴이쩍은 것은

그들의 정체를 아는 군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정체모를 약관의 젊은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위명이 크게 알려진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었다.

막북(漠北) 사가보(査家堡)의 보주 사일신검(射日神劍) 사평(査 平), 하북(河北) 진천패웅(震天覇雄) 하기웅(河奇雄), 남해(南海) 비룡장(飛龍莊)의 장주 비룡신협(飛龍神俠) 광유심(廣有心), 운남 (雲南) 독절괴마(毒絶怪魔), 유주(柳州) 팔비참객(八臂斬客), 삼 절마군(三絶魔君) 구양수(歐陽修), 쾌도마수(快刀魔手) 전비(全 飛), 묵룡선인장(墨龍仙人掌) 구성(仇成), 청천금도(靑天金刀) 곽 천우(郭天牛), 혈의살신(血衣煞神) 유명부(柳命府) 등이었다.

실로 하나같이 사해에 위명이 쟁쟁한 정사파의 절정고수들이었다.

아비객은 처음부터 비무대 위의 상황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끔씩 눈을 뜰 때면 아비객은 동쪽 천막의 태사의에 앉아 있는 수명사 담광현 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는 담광현에게 이끌려 들어가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 었다.

태사의에 앉아 있는 담광현을 노려보며 아비객은 살심(殺心)을 키 우려 노력했다. 그러나 냉막하고 무정한 그의 마음 속에서는 이상 하게도 담광현에 대한 살심이 일어나지 않았다.

살심을 가지고 태사의에 앉아 있는 담광현을 노려보다가도 담광현 의 얼굴에 가끔씩 허탈한 표정이

떠오를 때면 그 즉시 살심이 봄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무리 살심을 떠올리려 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이럴까? 저 자는 나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자인데 왜 자꾸 신 경이 걸린단 말인가?'

아비객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며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세 번 울렸다.

북소리가 그치는 즉시 비무대

위에 올라온 각원선사가 입을 열었

다.

"아미타불.... 제한된 시간이 지났소. 이제부터 제 삼관을 시작하 겠소이다."

각원선사의 말에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시행하던 스물 한 명 의 도전자들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미 비무대 위에는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방원 일 장(一丈)의 둥근 원 열 개가 그려진 것이다.

이어 서쪽 천막으로부터 아홉 명의 인물이 걸어나왔다. 먼저 비무 대 위에 오른 소림의 각원선사를 제외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었 다.

"아미타불. 여러분은 각기 한 명씩 원 안에 들어가시오. 십 초의 공격을 반격없이 원 밖으로 것으로 인정하겠소이다."

나가지 않고 받아내면 삼관을 통과한


각원선사의 말이 끝나자 아홉

명의 도전자들이 원 안으로 들어갔

다. 그들은 모두 알려진 절정고수들로서 진천패웅(震天覇雄) 하기 웅(河奇雄)을 위시한 아홉 명이었다.

둥... 둥... 둥......

마침내 둔중한 북소리가 연속 다섯 차례 울렸다.

"시작하시오!"

각원선사의 외침이 터진 순간 비무대 위에서는 실로 볼만한 광경 이 벌어졌다.

구파일방 장문인들의 무공은 실로 강호의 초절정급이었다.

그들이 손을 뒤집으면 하늘이 내려앉고

바다가 갈라지는 위력이

일어났다. 비무대 위는 엄청난 장영(掌影)과 권풍(拳風), 경력의 소용돌이로 휩싸였다.

십초지전은 매우 짧았다. 아홉 명의 장문인들은 흡사 태풍이 몰아 치듯 원 안의 도전자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큭!"

여기저기서 비명과 폭음이 들렸다.

마침내 십 초의 공격을 끝마친 구파일방의 무림고수들이 물러나는 순간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내노라하던 아홉 명의 도전자들은

모두 낭패한 몰골로 원 밖으로

밀려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들은 결국 각 파 장문인들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관문 통과에 실패하고 만 것이었다.

실상 그들 중에

막북 사가보(査家堡)의 사일신검(射日神劍) 사평

(査平)같은 인물은 무공이 각 파 장문인보다 월등했다. 그는 천하 기재로서 스스로 사일검법(射日劍法) 삼 식(三式)을 창안하여 막 북을 제패한 패웅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깝게도 개방방주 대취신개(大醉神 ) 위목천(韋目 天)의 태풍같이 몰아치는 타마광살수(打魔狂殺手)에 간일발의 차 이로 원 밖으로 반 보 밀려나고 만 것이었다.

그의 무공은 오히려 대취신개보다 반 수 높다고 할 수 있었으나


제한된 규칙 때문에 패배한 것이었다.

"와아......!"

상황을 파악한 군웅들의 함성이 성인봉이 떠나갈 듯 울려 퍼졌다. 삼관 도전에 실패한 무림고수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대 아래

로 내려갔다.

곧이어 다시 관문

돌파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청천금도 곽천우

와 여덟 명의 청년고수들이 나섰다. 그들이 원 안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구파일방 장문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우르르릉! 윙!

엄청난 경풍이 비무대를 뒤흔들었다. 관전을 하던 군웅들은 숨을 죽이고 비무대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폭 풍의 소용돌이뿐이었다.

숨막히는 십초지전이 끝나자 드러났다.

"오! 저럴 수가......!"

폭풍이 멎었다. 이어 명확한 상황이


군웅들은 뜻밖의

상황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너무도 놀라운

결과가 그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원 밖으로 밀려난

도전자는 청천금도 곽천우 하나뿐이었다. 그는

원 밖으로 삼 보(三步)나

밀려나 있었다. 나머지 여덟 명의 청년

고수들은 바위처럼 원 한가운데 버티고 있었다.

"와......!"

군웅들은 일제히 경악과 탄성의 함성을 터뜨렸다. 실로 놀라운 이 변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이럴 수가......?'

청년들을 상대한 여덟 명의

장문인들도 경악의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무황(武皇).

무황이란 얼마나 지고무상한 신분인가?


그런 지고무상한 지위를 노린 도전자들 가운데 불과 이십 세 전후 의 약관 청년들이 무더기로 여덟 명이나 삼관을 통과한 것이었다.

경악의 빛을 지우지 못한 각원선사가 불호를 외우며 나섰다.

"아미타불... 여러분들의 삼관 통과를 축하드리오."

팔인의 청년들이 포권을 취하며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 다. 그 순간 각원선사의 두 눈에 일말의 어두운 기운이 스쳤다.

뿐만 아니라 태사의에 앉아 있던 수명사 담광현의 얼굴에도 알 수 없는 그늘이 지고 있었다.

이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삼인의 도전자가 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청의(靑衣)를 입은 청년과 홍의(紅依)를 입은 청순한 소녀 였다. 대략 열여덟 살 정도의 나이에

부용같이 아름다운 절색의

미모였으며 일신에는 취의(翠衣)를 입고 있었다.

이번에는 무당의

장문인 적양자(赤陽子)와 청성(靑城)의 장문인

운현도장(雲現道長), 곤륜(崑崙)의 나섰다.

장문인 일심선사(一心禪師)가


군웅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마지막 십초지전이 시작되었다.

세 장문인의 공격이 광풍을

일으키며 원 안의 도전자들에게 쏟아

져 들어갔다.

콰콰콰콱......!

실로 숨쉴 틈도 주지 않는 놀라운 공세였다.

삼인의 도전자는 짓쳐들어오는 태풍 속에서 신형을 움직이며 아슬 아슬하게 공격을 피해나갔다. 군웅들의 눈에는 허공을 가르는 파 공성(破空聲)과 광폭한 바람에 휘몰아치는 흙먼지 만이 보일 뿐이 었다.

"팔 초... 구 초... 십 초!"

각원선사의 외침이 터지는 순간 파공성이 멎으면서 세 장문인들의 공격이 끝났다. 허공을

부유하던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비무

대 위의 광경이 드러났다.

중인들은 또다시 경악했다.

놀랍게도 삼인의 도전자는 원 안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와아!"

"어찌 저럴 수가? 도대체 무공이 얼마나 되기에......?"

경악과 흥분 속에서 장내는

떠나갈 듯한 함성과 박수소리에 뒤덮

였다. 비무대 한 구석에 서 있던 각원선사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아미타불......."

그는 불호를 외우며 중앙으로 나섰다.

총 열한 명의

삼관 통과자는 모두 약관

전후의 젊은 고수들이었

다. 이것은 그야말로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역대 무황을 선출했던 삼백 년 동안 한 번도 이와 같은 젊은고수 가 출전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꺼번에 열한 명이나 되는 젊은 고수들이 최종 삼관을 통과한 것이었다.

역대 무황위에 오른 자 중 최연소자는 바로 수명사 담광현 현 무 황이었다. 그러나 그도 불혹(不惑)의 나이가 되어서야 무황의 위


에 올랐다.

만일 새로운 무황이 이들 십일인 중에서 생긴다면 그것은 실로 불 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군웅들은 흥분과 함께 한가닥 커

다한 의혹에 휩싸이고 있었다.

'대체 저 청년들의 정체는 무엇이길래 이토록 고강한 무공을 지니 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당장 그 의문을 풀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때 각원선사가 대 앞으로 나왔다.

"아미타불. 드디어 도전자 자격을 얻은 분이 결정되었소이다. 빈 승은 여러 군웅들께 이들

도전자들의 신분과 명호를 규칙에 따라

밝히겠소이다."

각원선사의 말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비무대 위 에서 잠시 군웅들을 둘러보던 각원선사는 품 속에서 한 권의 명부 를 꺼내들었다.

잠시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명부를 훑어보던 각원선사는 떨리 는 목소리로 명부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도 이 뜻밖의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 목소리에 역력히 묻어나고 있었다.

그가 밝힌 십일인의 청년고수들의 신분내력은 그야말로 군웅들에 게 엄청난 충격을 던진 것이었다.

■ 마 인 제 5 장 무황성 비무대회(武皇城 比武大會) -5 ━━━━━━━━━━━━━━━━━━━━━━━━━━━━━━━━━━━

허장성(許長城).

27 세. 제 16 대 무황 비형무선(飛形武仙) 낙천(落川)의 제자.

표상군(票相君).

28 세. 제 17 대 무황 탈명폭우(奪命瀑雨) 경세종의 제자.


매천우(梅天友).

22 세. 제 18 대 무황 벽력신권(霹靂神拳) 백도강의 제자.

진성달(陣成達).

25 세. 제 19 대 무황 패적마장(覇敵魔掌) 원문태의 제자.

선우환(鮮于環).

26 세. 제 20 대 무황 금적묵선(金笛墨扇) 제운상의 제자.

동방휘(東方輝).

29 세. 제 21 대 무황 천수여래(千手如來) 능곡의 제자.

하팽무(河彭武).

22 세. 제 22 대 무황 귀혼부신(鬼魂斧神) 광천의 제자.

승도기(昇道奇).


25 세. 제 23 대 무황 뇌전검(雷電劍) 우신강의 제자.

고어기(高魚旗).

21 세. 제 24 대 무황 사해어부(四海魚夫) 주경의 제자.

백성락(白星落).

27 세. 제 25 대 무황 마운노인(魔雲老人)의 제자.

"아! 저럴 수가......!"

"오오......!"

각원선사의 발표를 듣는 순간 군웅들은 모두 입을 딱 벌리고 경악 을 금치 못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 십인의 청년고수들은 임기를 마친 후 의문의 실종을 당했던 역대 무황의 제자들이었던 것이다.


무림을 공포와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역대 무황들의 실종사건.

백방으로 탐문해도 바다에 빠진 바늘마냥 종적을 알 수 없었던 전 대 무황들. 그런데 그들의 후예를 자칭하는 자들이 한꺼번에 나타 나다니. 실로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각원선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홍일점인 여시주는 제 육대 무황이신 동해일선 (東海一仙) 노선배님의 증손녀 추수련(秋水連) 낭자이시오."

"아.....!"

군웅들은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제 6 대 무황은 일백이십 년 전

의 이인(異人)이었다. 그런 동해일선의 증손녀가 나타나다니?

■ 마 인 제 6 장 절예현현(絶藝現現) ━━━━━━━━━━━━━━━━━━━━━━━━━━━━━━━━━━━


장내는 온통 충격과 경악의 도가니였다.

실종된 역대 무황의 후예들로

밝혀진 열한 명의 청년고수들을 바

라보는 군웅들의 눈길에는 온통 의혹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무황의 마지막 도전자를 가리기 위한 비무대회는 계속되었 다.

잠시 숨을 돌렸던 각원선사가 불호를 외우며 다시 나섰다.

"아미타불! 그럼 규칙에 의해

여러분들 중에서 비무를 통해 최종

일인을 뽑아야 하오."

과연 십일인의 역대 무황 후예들

중 누가 최종 도전자가 될 것인

가? 군웅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자 각원대사는 침중하게 말을 이었 다.

"먼저 각각 두 명씩 비무하여 승자끼리 다시 비무하는 방법을 취


해야 하오. 단 비무 도중에 살인은 절대 금하오. 옷자락이 찢긴다 든가 어느 쪽에서 패배를

시인하면 승부가 결정난 것으로 하겠소

이다."

청년고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원선사가 신호를 보내자 누군가가

솔잎이 담긴 쟁반을 들고 비

무대 위로 올라왔다. 이어 열한 명의 도전자들은 쟁반에 놓인 솔 잎을 하나씩 집어들었다.

비무 상대를 정하기 위해 각자 솔잎으로 추첨을 하는 것이었다. 반토막의 솔잎을 뽑은 자들과 긴 솔잎을 뽑은 자들이 서로 자웅을 겨루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각기 상대자가 정해졌다.

단 제 6 대 무황 동해일선의

증손녀인 추수련만 혼자 남게 되었다.

그녀는 운좋게 일전을 치르지 않고도 두 번째 비무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마침내 대 위에서 다섯 무리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각자


역대 무황의 절기를 눈부시게 전개했다. 이 비무에서 초수의 제한 은 없었다.

군웅들은 숨을 죽이고 눈을 한껏 크게 뜬 채 비무를 관전했다. 실 로 일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천재일우의 관전기회를 어찌

한 순간일인 놓치겠는가.

역대 무황을 지낸

자들은 모두가 당대의 천하제일인들이었다. 그

런 무황들의 후예들이 겨루는

것을 관전하는 것은 군웅들에게 일

평생에 한 번 정도 있을까 말까 한 절호의 기회였다.

기기묘묘한 절학과 묘기가 속출했다. 그야말로 비무대 위에서는 갖가지 절학들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마침내 해가 중천에서 서쪽으로 기울

무렵 오인(五人)의 승자가

결정되었다.

허장성(許長城), 선우환(鮮于環), 동방휘(東方輝), 고어기(高魚 旗), 백성락(白星落) 등이 상대방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이었다.

승부는 깨끗했다. 패배자는 스스로 패배를 시인하고 미련없이 물 러난 것이다.


다시 각원선사의 참관으로 그들은 다시 솔잎을 뽑았다. 그러자 두 번째 비무 상대가 결정되었다.

이번에는 허장성과 추수련이 맞붙게

되었다. 선우환은 동방휘와

일전을 겨루게 되었고, 고어기는 백성락과 담판을 지어야 했다.

"자! 시작하시오!"

이어 세 쌍의 열띤 비무가 시작됐다.

허장성은 비형무선 낙천의

제자로서 경공술(輕功術)의 귀재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경공술은 실로 놀라웠다. 반면 추수련은 허 리에 두른 채대를 뽑아 허공을 휘저었다.

그녀의 채대는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나 실은 가공할 무기였다.

휘리리리릭......!

오색빛의 채대는 허공에 그물을 씌우며 허장성을 가두어갔다

"하하! 낭자, 과연 멋진 자오칠성환대술(子午七星幻帶術)이오!"


허장성은 호탕하게 웃으며 스윽 신형을 움직였다. 그 순간 허장성 의 신형이 어지럽게 흔들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아홉 개의 환영 으로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다름아닌 구구환환신보(九九幻幻神步)였다. 비형무선 낙천의 독문 보법(獨門步法)이었다.

"흥!"

추수련은 차갑게 코웃음치며 채대를 어지럽게 날렸다.

파파파팍......!

채대는 물결치듯 사방으로 휘날리며 오색의 경기를 뿌렸다. 그러 나 허장성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동시에 아홉 개의 환영으로 추 수련의 이목을 속이며 절묘하게 십여 장(掌)을 날렸다.

파파팍!

두 사람의 싸움은 백중지세였다.


한편, 선우환과

동방휘는 어느덧 일백여 초를 교환하고 있었다.

선우환은 금적묵선 제운상의 제자였다. 그는 왼손에는 금적(金笛) 을, 오른손에는 묵선(墨扇)을 쥐고 있었다.

차르륵... 파팟!

금적에서는 괴이한 적음이

났다. 뒤이어 묵선이 접혔다 펴지면서

무수한 선영이 난무했다.

반면 동방휘는 천수여래 능곡의 제자였다. 그의 암기술은 천수여 래를 능가할 정도였다.

촤라락!

그가 소매를 휘두를 때마다 롭혔다. 일백오십여 초를

무수한 암기가 뻗어나와 선우환을 괴 겨루자 전세는 차츰 동방휘에게로 기울

고 있었다.

고어기와 백성락.

그들의 비무는 백성락 쪽의 현저한 우세였다. 마운노인의 절기를 이어받은 백성락이 사해어부(四海魚夫)

주경의 절기를 익힌 고어


기를 계속 몰아가고 있었다.

이때였다.

"윽!"

다급한 비명이 터지면서 허장성이 왼쪽

어깨를 감싸쥐고 물러섰

다. 채대를 거두고 있는 추수련의 얼굴에 고혹적인 미소가 떠올랐 다.

"호호호! 허소협께서 양보하셨어요."

비틀거리며 물러나던 허장성의 얼굴에 쓰디쓴 표정이 떠오르고 있 었다. 그러나 그는 표정을 바꾸고 공손히 포권하며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다.

"아니올시다. 추낭자의 절학에 이 허모는 완패했소이다."

바로 그때였다.

"핫핫핫... 선우형! 양보해 주셔서 고맙소이다."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동방휘가 손을 거두어 들이며 안면에 득 의한 표정을 지었다.

바닥에 금적과 묵적을 떨어뜨린 채 선우환이 얼굴을 붉히고 있었 다. 그의 왼쪽 어깨에는 나란히 두 자루의 혈전(血箭)이 박혀 있 었다. 그러나 혈전은 옷깃에 살짝 박혀 있을 뿐이었다.

"소제가 졌소!"

이때 고어기와 백성락의 비무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바람처 럼 신형을 날린 백성락이 고어기의 오른쪽 가슴 옷자락을 찢어낸 것이었다.

그것으로 삼인의 승자가 가려졌다.

"와......!"

삼인의 승자가 군웅들을 향해

포권의 예를 취하자 군웅들은 휘파

람과 함께 그들에게 우렁찬 박수갈채를 보냈다.

"아미타불......!"


잠시 후 각원선사가 비무대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승자로 결정 된 추수련과 동방휘, 백성락을 향해 먼저 축하의 말을 전했다.

"이제 세 분으로 좁혀졌소이다. 세 분은 어떤 방법으로 최종 승자 를 가렸으면 좋겠소?"

각원선사가 최종 승자인 삼인을 번갈아보며 묻는 순간이었다.

동방휘와 백성락의 눈이 은밀하게 마주쳤다. 그 순간 묘한 표정을 지으며 백성락의 입술이 움직였다. 한 가닥 전음(傳音)이 동방휘 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동제. 이제 그만 물러나게나.'

그 전음을 들은 동방휘가 돌연 각원선사에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대사. 소생은 능력이 부족함을 알고 스스로 패배를 시인하겠습니 다."

"......?"

각원선사는 깜짝 놀랐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동방휘를 바라보았


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스스로 패배를 시인한다니?"

"제가 도전자들을 물리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실력이 아니라 우연이었습니다. 소생의 능력이 어찌 이 두 분의 무공에 비교되겠 습니까? 그러니 여기서 패배를 시인하고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동방휘는 겸손하게 말하며 포권의 예를 갖추었다.

각원선사뿐만 아니라 군웅들은 모두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정 상까지 올라와놓고 스스로 무황의 도전자의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동방휘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군웅들은 온통 의혹에 찬 눈으로 동방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동방휘는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비무대 아래로 뛰어내려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멍하니 동방휘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던 각원선사가 탄식하듯 불호를 외웠다. 그는 곧 돌아섰다.


"자 이제 비무는 두 분 시주로 좁혀졌소. 그럼 시작하시오."

각원선사가 뒤로

물러났다. 추수련과 백성락은 서로를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

그들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완연히 떠올랐다. 한동안 서로를 노 려보던 두 사람은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들은 초식 대결을 펼치지 않았다. 단 일 초. 그 일 초로 자신들 의 최대신공을 펼쳐 판가름을 내기로 한 것이었다.

바람도 없는데 백성락의 백의 옷깃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우웅우웅!

백성락의 몸을 중심으로 위맹한 백색강기(白色 氣)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그 순간 군웅들 사이에서 경악과 탄성이 터져나왔다.

"아! 무위백절와선강(無爲百絶臥仙 )!"


무위백절와선강.

그것은 당대 마운노인의 개세신공이었다. 그는 그 신공으로 천하 제일인의 영예인 무황의 보위를 차지했었다.

추수련의 몸에서도 어느덧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의 취의가 기이하게도 몸에 찰싹 달라붙은 것이었다. 그 바람 에 뇌쇄적인 여체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봉긋 솟은 앞가 슴과 잘룩한 허리를 비롯하여 풍만한 둔부와 두 다리 사이의 미묘 한 부분까지도 그대로 드러났다.

동시에 추수련의 얼굴과 피부가 자색을

띄우고 전신에도 은은한

자색기운이 떠돌았다.

"동해일선의 파란자허신공(波蘭紫虛神功)이다!"

군웅들 속에서 또다시 경악과 간이었다.

파파파... 팍!

탄성이 일었다. 그 말이 떨어진 순


돌연 추수련의 교구가 날면서 그녀의 섬섬옥수에서 자색의 칼날같 은 기운이 번쩍 뻗었다. 그 기운은 그대로 백성락의 가슴에 격중 되었다.

순간 백성락이 쌍장을 뻗자 백색기류가 소용돌이치며 자색강기와 충돌했다.

콰지직!

"음!"

두 사람은 그 일합에 전 내공을 사용했다. 그리고 결과는 선명하 게 드러나고 말았다.

외마디 신음이 터지는 순간

추수련의 매혹적인 몸이 파르르 떨면

서 한 모금의 선혈을 울컥 토해낸 것이었다. 반면 백성락은 안색 이 약간 핼쓱했을 뿐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단 일합(一合) 만에 승부는 결정지어진 것이다.

"와아!"


군웅들 속에서 요란한 함성이 일어났다.

추수련이 내공의 부족으로 패하고 만 것이었다. 백성락은 득의에 찬 미소를 흘리며 추수련을 향해 포권했다.

"하하하! 추소저의 양보로 다행히 이겼소이다."

"......!"

추수련은 입술의 피를 소매로

문지른 다음 말없이 그를 쏘아보았

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는 매서운 살기가 어렸다. 다음 순간 그녀 는 몸을 휙 돌리더니 그대로 신형을 솟구쳐 비무대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백소협의 승리다!"

"와아!"

군웅들의 함성은 태산 성인봉을 뒤흔들 듯 했다.

백성락의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다소 음침한 눈빛으로

군웅들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무황이 될지도 모를 승자의 자부심


때문이었을까?

이때 각원선사가 다시 나섰다.

"아미타불. 제 삼십이대 무황을

가리기 위해 최종 도전자가 확정

되었소. 바로 백성락 소협이시오!"

군웅들은 일제히 백성락을 향해 흥분의 함성을 질렀다. 만면에 흡 족한 빛을 띄운

백성락이 군웅들을 향해 다시 포권의 예를 취했

다.

각원선사는 몇 번 불호를 외우더니 품 속에서 한 알의 단약을 꺼 냈다.

"백시주. 이것은 소림의 회천단(回天丹)으로 내력을 회복하는 효 용이 있소. 이것을 복용하신 후 담무황과의 비무를 준비하시오."

"고맙소이다. 선사."

백성락은 기묘하게 웃으며 회천단을 군웅들을 둘러보며 침중하게 말했다.

받아 복용했다. 각원선사는


"아미타불. 여러분. 빈승의 할일은 여기서 끝난 것 같소이다. 그 럼......."

몸을 돌린 그는 동쪽 천막

속의 태사의에 앉아 있는 수명사 담광

현을 향했다.

"담무황께서는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담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군웅들의 귓전에 한가닥 냉막하기 짝이 없 는 차디찬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잠깐, 멈추시오."

"......!"

막 비무대 아래로 내려가려던 각원선사는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몸 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음성은...! 최소한 이백 이 아닌가?'

년 이상의 내력이 깃든 심후한 음성


그는 대경하여 몸을 돌렸다. 그리고 급히 다시 비무대 위로 신형 을 날려 올라갔다. 각원선사는 흰 눈썹을 꿈틀거리며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때 오른쪽에 위치한 군웅들 사이로부터 물결이 갈라지듯 길이 트여지며 그 사이로 한 인영이 서서히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 마 인 제 6 장 절예현현(絶藝現現) -2 ━━━━━━━━━━━━━━━━━━━━━━━━━━━━━━━━━━━

빽빽하게 들어찬 군웅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면서 침착하게 비 무대 위로 오르는 인물은 다름아닌 아비객이었다.

그의 두 눈은 물같이 고요했으며 신색은 얼음장처럼 차가왔다.


'......!'

각원선사는 그의 모습에 절로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그 러나 각원선사는 역시 일대고승다왔다. 아비객이 비무대에 오르기 를 기다려 그는 엄숙히 합장하며 물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무슨 일로 대 위에 오르셨소이까?"

아비객은 무심한 눈길을 던지며 짤막하게 말했다.

"무황 도전자에게 도전하겠소."

"......!"

찰나지간 각원선사의 안색이 급변했다.

뿐만 아니라 수명사 담광현을 비롯한 수천의 군웅들도 대경했다.

불현듯 나타난 괴청년이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천신만고 끝에 최

종자가 된 백성락에게 도전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아비객의 느닷없는 출현에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다름아


닌 수명사 담광현이었다.

'저… 저 아이다. 아아…...!'

한 줄기 뜨거운 번갯불이 전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만 같은 예감 과 함께 그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한동안 진동하는 가슴 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이때 각원선사가 백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시주. 삼십이대 무황의 도전자는 이미 확정되었소."

선사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아비객의 무표정한 시선이 백성락에게로 향했다.

무심한 눈빛으로 백성락을 응시하던 아비객이 각원선사를 향해 차 갑게 입을 열었다.

"그대는 저런 자로 하여금 무황의 자리에 도전하게 하는가? 내가 보기에 저 자의 무공은 무황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 그래서 보 다못해 나선 것이다."


"뭣이?"

막 운공을 끝낸 백성락의 안색이 분노로 인해 붉으락푸르락해졌 다. 그러나 곧 그도 신색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무황의 도전자로 확정된 이상 흥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각원선사는 아비객을 향해 침중하게 말했다.

"시주, 그대가 설사 그렇게 보았다 해도 이미 도전자가 확정된 이 상 어쩔 수 없는 일이요."

그 말에 아비객의 입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후후... 저 자가 본인에게 도전을 청해도 말인가?"

"그런 경우는... 예외라고 할 수 있소."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각원선사가 중얼거렸다.

"좋다. 그럼 그대는 잠시 물러나기 바란다."

아비객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각


원선사는 할

수 없다는 듯 옆으로 물러섰다. 각원선사를 물리친

아비객은 곧바로 백성락에게 향했다.

"그대는 본인과 손속을 한 번 겨루고 싶지 않은가?"

그 말에 백성락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본인이 무엇 때문에 당신과 손속을 겨뤄야 하오? 정 겨룰 의사가 있다면 오 년 후 이 자리에 다시 오시오."

"와하하......!"

백성락의 말에 군웅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대부분의 군웅들은 뜻밖에

나타난 아비객에게 호감보다는 불유쾌

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아비객의 냉막한 얼 굴과 안하무인격인 태도가 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기 때문이었 다.

문득 아비객의 무표정한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그는 느닷없이 앙 천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졸부같은 놈! 겁이 나면 난다고 할 일이지 오 년 후에 오라고 하다니, 본인이 오 년 후 너같은 졸부를 만나러 오느니 차 라리 당나귀하고 싸우겠다."

실로 엄청난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이어 아비객은 광소를 터뜨리 며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뭐, 뭣이?"

백성락은 대노하여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한동안 얼굴을 씰룩 거리더니 마침내 대갈을 터뜨렸다.

"잠깐! 서라!"

"……."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아비객이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조 소가 가득했다.

"이름이 뭐냐?"

백성락이 거칠게 물었다.


"아비객."

"아비객?"

분기에 찬 백성락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군웅들도 그가 밝힌 괴상한 이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 무리 기억을 짜내어 보아도 강호상에서 아비객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짓던 백성락이 마침내 코웃음을 치

며 냉랭하게 말했다.

"좋다. 아비객, 너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 주겠다."

그때였다.

"후후.... 하지만 본인은 네놈에게 흥미를 잃었다."

뜻밖이었다. 이제껏 싸움을 걸던 아비객이 거절할 줄은 아무도 몰 랐다. 군웅들은 그 광경에 또다시 아연실색했다. 이때였다.


"서라!"

분을 이기지 못한 백성락이 노갈을 터뜨리며 몸을 날렸다. 그는 아비객의 앞을 막아서서는 다짜고짜 외쳐댔다.

"좋다. 본인은 무황의 자리에

도전을 하지 않더라도 네놈에게 먼

저 도전하여 콧대를 꺾어놓고 말겠다."

아비객은 그의 말에 대꾸도 않았다. 그는 바로 옆에 서 있는 각원 선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대사, 이 자의 말을 들었는가?"

각원선사는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이 정체불명의 사내에게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들었소."

"저 자가 도전했다. 따라서 본인은 저 자의 도전을 받아 들이겠 다."


말을 끝마친 아비객이 신형을 홱 돌렸다.

실로 위치가 바뀌어도 어이없이 바뀌고 말았다.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이 상대방의 격장지계에 말려든 것을 깨달은 백성락은 그만 우거지상이 되고 말았다.

군웅들은 예상을 뒤엎은 뜻밖의 사태에 아연실색하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거운 정적이 무황성의 장내를 휘감았다.

아비객이 그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백성락(白星落)이라 했는가?"

표정도 억양도 없는 물음이었다.

"그렇다. 아비객!"

백성락이 순순히 대답하자 아비객은 괴소를 흘렸다.

"후후후… 그럼 네놈 이름대로 떨어진 별(星)로 만들어 주겠다."

"뭣이?"


백성락은 대노했다.

번쩍!

그는 쾌활무비한 손놀림으로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비무를 몇 번 거치는 동안에도 한

번도 뽑지 않았던 검이었다. 그로 미루어

그의 분노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만한 일이었다.

"무기를 뽑아라!"

백성락은 서슬이 희다못해 푸른 보검을 흔들며 외쳤다. 그러나 아 비객은 태연하기만 했다. 오히려 능청스럽게 웃으며 우수를 가볍 게 흔들었다.

"걱정말고 덤벼라. 그대쯤이야 이 한 손으로도 충분하다."

그의 손은 매우 희고 부드러웠다. 냉막한 인상과는 달리 여인의 섬섬옥수같이 아름다운 손이었다.

"이… 이놈이!"


백성락은 마침내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의 심장은 분 노로 인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제 이십오대 무황이었던 천하 기인 마운노인의 제자답게 곧 심신을 안정시킨 그는 검을 곧추 세 웠다. 그러자 한 가닥 담담한 서기가 검끝에서 흘러나와 그의 몸 을 뒤덮었다.

그 광경에 군웅들 사이에서 경악이 터졌다.

"아…! 어검신강(馭劍神 )!"

"저럴 수가…!"

어검신강(馭劍神 ).

그것은 삼백 년 전에 실전되었던 검법의 최상승 절예로 어기어검 술(馭氣馭劍術)과 동등한 것이었다.

전 내공을 검에 불어넣어 몸의 형체가 검에 흡수되어 상대의 여하 한 내가강기도 파괴하며 단숨에 양단시키는 무서운 검학이 바로 어검신강인 것이다.

"죽어랏!"


대갈과 함께 백광(白光)이 탄지지간 환각처럼 무지개를 그리며 뻗 었다. 실로 번개치는 순간을 수백분지 일로 쪼갠 듯한 찰나였다.

그 순간 언제 움직였는지 아비객의 우수가 어느새 백성락의 목에 닿아 있었다. 미처 검기가 뻗기도 전이었다.

"으으......."

백성락은 괴신음을 발했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백기는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그는

검을 부르르 떨며 진땀을 흘릴 뿐이

었다.

"저럴 수가…! 신기(神技)다!"

군웅들의 표정에 경악이 가득했다. 하기는 그럴만도 했다. 군웅들 중 아무도 아비객이 어떻게 손을 썼는 지 본 자가 없었다. 그들이 본 것은 백성락이 어검신강을 발출하는 쾌속무비한 모습뿐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아비객의 날카로운 우수가 백성락의 목에 닿아 있 는 것이었다. 그때 군웅들의 귓전에 아비객의 차디찬 음성이 들렸 다.


"어떤가? 그래도 덤비겠는가? 덤비겠다면 한 수 더 가르쳐 주겠 다."

백성락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다. 그의 낯빛은 몇 번씩이나 변했 다. 그러나 마침내 길게 탄식하며 검을 내렸다.

"졌다. 오늘의 이 치욕은 훗날 백 배로 갚아 주겠다!"

백성락은 이를 간뒤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아비객의 차디찬 한 마디가 그의 몸을 전율케 했다.

"가라. 하지만 한 가지 물건은 남겨두고 가라."

냉막한 아비객의 음성과 함께

문득 그의 우수에서 백기가 칼날처

럼 뻗어나갔다.

"으악!"

참담한 비명과 함께 몸체를 떠난 백성락의 목이 하늘 높이 솟아오 르면서 붉은 피가 분수같이 퍼졌다.


"저… 저…...!"

군웅들은 이 뜻밖의 광경에 대경실색했다. 심지어는 수명사 담광 현마저 안색이 변해 벌떡 일어났을 정도였다. 그는 멍하니 비무대 위를 바라보다가 문득 침중한 한숨을 쉬었다.

한편 아비객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각원선사를 향해 돌아섰다.

"대사, 그대는 이제 본인이

무황에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

"그... 그렇소. 하지만......."

각원선사는 진땀을 흘렸다. 불장을 잡은 손에 너무도 힘을 꽉 주 어서 자단목으로 된 각원선사의 불장에는 손가락 자국이 깊게 패 이고 있었다.

아비객은 차갑게 내뱉았다.

"단서는 붙이지 마라. 승낙하면 그것으로 되었다."

곧이어 아비객은 돌아섰다. 그의 무심한 눈길은 곧장 태사의에 앉


아 있는 수명사 담광현을 향했다.

"……!"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 부딪치는 찰나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가 터져나갈 듯이 팽창되는 듯

했다. 수천 명의 군웅들은 숨을 죽였

고 그들의 눈은 그 두 사람에게 못박혔다.

마침내 담광현이 태사의에서 서서히 일어섰다.

"……!"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는 군웅들의 눈은 당대 무황인 담광 현에게 집중되었다.

담광현은 무거운

걸음을 옮겨 비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그런

그의 얼굴은 물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이때였다. 담광현의 귓전에 한 줄기 장탄식과 함께 창노한 전음이 들려왔다.

'담무황, 못난 천면인 여기에 와있네. 자네의 아우 담광수와 그의


처(妻), 그리고 불각승도

와있네. 이미 일은 시작되었네. 모사재

인 성사재천(謀事在人成事在天)이라, 일은 사람이 꾸미나 성사는 하늘에 달린 일. 담가(覃家)의 희생이 천하창생을 구하게 되었으 니 오직 우리는 자네에게 고개 숙일 뿐이네.'

"……."

담광현은 비무대로 오르며 하늘을 보았다.

■ 마 인 제 6 장 절예현현(絶藝現現) -3 ━━━━━━━━━━━━━━━━━━━━━━━━━━━━━━━━━━━

유시(酉時).

해가 서편으로 기울면서 비무대로 오르는 담광현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그림자를

앞세우고 비무대로 오르는 담광현의 귓가에

천면인의 전음이 계속 들려왔다.

'아비객, 저 아이는 불쌍한 아이일세. 이제 저 아이는 천하무림 정(正)과 사(邪)의 공적이

되겠지. 그러나 저 아이는 천원무개정

지체(天元無蓋頂之體)를 타고 났으니 필히 만난(萬難)을 극복할 걸세. 담무황, 모든 것은 하늘에 맡기세.'

담광현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도 역시

누군가를 향해 전음을 보내는 것이었다.

'천면인, 노부도 알고 있소. 단지... 단지... 가슴이 왜 이렇게 터질듯 답답한 지 모르겠구료…....'

마침내 비무대 위로 오른 담광현은 아비객과 마주섰다.

"와아......!"

군웅들의 함성이 하늘까지 닿았다. 그들의 염원은 이제 한결 같았 다. 냉막하고 잔인한 아비객을 담광현이 눌러 이기기를 바라는 것 이었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으로 아비객을 바라보던 담광현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소협, 그대의 무공에 본인은 탄복을 금치 못하는 바이오. 부디 본인을 꺽고 무황에 오르기 바라오."

그의 음성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마치 세상사를 달통한 달인의 경 지에 이른 목소리만 같았다. 오히려 그 목소리에는 어떤 애정까지 풍겨나고 있었다.

스르릉!

말을 마친 담광현은 왼손에 들고 있던

고검(古劍)을 뽑았다. 그

광경에 군웅들은 매우 뜻밖인 듯 술렁거렸다.

"왜 무황께선 검을 쓰는 것일까? 그의 천하절학인 홍광천도십이식 을 쓰지 않으려는 것인가?"

"글쎄 말이야......."

군웅들은 의아하기 그지없었다.


수명사 담광현을 천하제일인으로 만든 전설의 홍광천도십이식(紅 廣天導十二式). 담광현은 평생 그

무공 외에 다른 무공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이때 아비객도 군웅들의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아비객은 동요하지 않았다. 수명사 담광현이 홍광천도십이 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천면인으로부터 배운 천마절공(天魔絶

功)과 천마십이절(天魔十二絶)을 가지고 있었다.

"그대에게 도전하겠소."

담광현을 응시하고 있던 아비객은 처음으로 반말을 거두었다.

"그대의 무학은 노부 평생 처음 보는 것이오. 자, 시작하시오."

담광현의 말은 따뜻했다.

군웅들은 침을 삼키며 두 사람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담광현 은 고검을 들고 중부(中府)를 겨눈 채 입정하듯 굳었다. 그 주위 를 아비객은 우수를 든 채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파파파팟!

먼저 신형을 날려 공격을 감행한 것은 아비객이었다.

일단 그가 몸을 움직이자 순식간에 신형이 십팔방위로 분산되며 우수로부터 무형의 백색강기(白色 氣)가 담광현을 향해 줄줄이 뻗어나갔다.

차차창......!

귀청 따가운 금속성이 울렸다.

담광현은 풍차처럼 회전하며 를 쳐냈다. 실로 두 개의

고검으로 일일이 아비객의 백색강기

육안으로 미처 다 볼 수 없는 광세절학

이었다.

장내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

아비객과 담광현의 신형은 어지럽게

뒤엉켰다. 누가 아비객이고

누가 담광현인지 군웅들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지경이었다.

세인(世人)들이 알기에 담광현은 검법의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지


금 시전하고 있는 그의 검법은 바다같이 넓고 하늘보다 높은 경지 에 이른 것이었다.

장강대하(長江大河)같은 끊임없는 초식이 담광현의 고검에서 흘러 나왔다.

정녕 그의 검학은 가히 신의 경지에 도달한 듯했다. 그는 한 초식 한 초식을 선명하게 펼쳐냈다.

아비객은 그가 펼치는 검법을 기억했다. 그의 자질이 초인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비객은

몰랐다. 담광현이 펼치는 검법이야

말로 그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라는 것 을.

아비객은 신형을 전후좌우로 섬전같이 날렸다. 그러나 아무리 시 도에 시도를 거듭해도 그는 담광현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놀라운 검법이다…! 모두 십 이식(十二式)! 세상에 이런 검법도 있는가?'

아비객은 정말 감탄했다.


벌써 담광현은 똑같은 검법을

삼 회(三回) 거듭 펼쳤다. 그 바람

에 아비객은 그의 검법을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전혀 검법을 파해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을......!'

휘익!

아비객은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그 순간 창공에서 두 줄기 흑영이 날아들더니 무엇인가 흰 빛살을 떨구었다. 흰 빛살과 아비 객의 신형이 맞닿았다.

번쩍!

천지를 가르는 흰 광채를 군웅들이 느낀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아앗! 저럴 수가......!"

군웅들은 대경했다.

어느새 수명사 담광현은 수중의

고검이 부러진 채 비틀거리고 있


었다. 그와 동시에 아비객은

삼 장 길이의 괴병기를 담광현의 목

에 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군웅들 가운데 누군가 공포에 질린 음성으로 외쳤다.

"마… 마검장도(魔劍長刀)닷!"

"저... 전설의 마검장도가 나타나다니…...."

군웅들은 크게 동요했다.

아비객은 질끈 눈을 감고

있는 담광현에게 냉막한 음성으로 물었

다.

"그대는 패배했음을 시인하는가?"

"졌네."

"그대 이름이 담광현인가?"

"그렇네."


"……."

아비객은 묵묵히 담광현을 주시했다.

하지만 그는 자꾸 망설이고 있었다. 천면인과 불각승의 명령 때문 에 그를 죽이러 나섰지만 죽이려 하는 순간에 마음이 진동하는 것 이었다.

'왜일까? 왜 자꾸 이 자가

나의 가까운 사람일 것같은 생각이 드

는 것일까?'

일순 아비객의 진한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곧 그는 차갑

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소?"

"없네."

담광현의 담담한 말이 들린 순간 마검장도가 번쩍 빛났다.

"……!"


비명도 지르지 않고 쓰러진

담광현의 가슴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

구쳤다.

"아아......!"

군웅들은 경악성을 발했다. 미처 가담하거나 막아설 여유가 없는 찰나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휘익!

담광현을 처치한 아비객이 마검장도를 하늘로 던지는 순간 두 마 리 흑응이 날아내려 마검장도 끝을 물고 다시 눈 깜빡할 사이에 어디론가 날아갔다.

군웅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을 받으며 그는

아비객은 돌아섰다. 붉게 물드는 황혼

비무대를 내려와 군웅들이 터준

무황성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

군웅들은 모두 넋을 잃었다.

길 사이로 걸어


바로 그때 성인봉의 좌측에 나있는 한 거목 뒤쪽에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짓는 세 노인과 소리없이 흐느끼는 한 부인이 있었다.

다름아닌 천면인과 불각승, 그리고 담광수와 그의 부인이었다.

휙! 하고 천면인은 신형을 날렸다. 그는 비무대 위를 스치듯 날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담광현을

낚아챈 후 급히 어디론가로 사라졌

다.

"와......!"

문득 군웅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비객이 사라지는 순 간 아우성치듯 들끓었다. 여기저기서 흥분한 고함소리와 욕설이 튀어 나왔다.

"저런 자를 무황에 앉힐 수는 없소!"

"옳소! 저런 무례한은 무황 자격이 없소!"

"저 자를 무림의 공적(公敵)으로 선언하여 처단해야 하오!"

그러나 아비객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한 번 흥분한 군


웅들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마침내 우르르 산 아래로 달려 내려

가기 시작했다.

"잡아라!"

"살인마를 처단합시다!"

마침내 군웅들은 벌떼처럼 아비객을 추격해가기 시작했다. 삽시간 에 수천의 군웅들이 성인봉 아래로 사라졌다.

무황성은 삽시에 텅 비고 말았다. 그때였다.

고목 아래 서 있던 불각승이 황혼을 바라보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아이야. 이제부터 너의 시련이 시작되었다. 부디 이 시련을 이겨내어 무림만대(武林萬代)에까지 평화가 이뤄지도록 하 기 바란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담광수가 탄식했다.

"아, 그러나 형님께서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담광현은 분명

마검장도에 의해 가슴이

관통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불각승의 대답 또한 괴이했다.

"아미타불…. 부처님께 맡기는 수밖에. 어쨌든 천면인 시주가 손 을 쓰니......."

이때였다.

"으흐흐흑... 여보! 어째서 담가는 이런 희생을 치뤄야 하지요?"

담광수의 아내가 그의 품에 어깨를 묻으며 슬피 울었다. 담광수는 멍하니 타는 서녘의 황혼을 보며 말했다.

"나도 모르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보다도 형님께서 더욱 불행하다는 것이오. 오오… 하늘이여!"

"흐흐흑…...!"

"아미타불......."

서산으로 붉은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 마 인 제 7 장 화중지화(花中之花) ━━━━━━━━━━━━━━━━━━━━━━━━━└ЕЕЕЕЕ

낙양(洛陽).

천년고도(千年古都)인 낙양은 왕가(王家)와 고관대작, 대부호(大 富豪)의 저택은

물론이거니와 상점, 객점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대도(大都)였다.

그런 낙양에서 특히 가장

성시를 이루는 곳은 무수하게 뻗어있는

홍등가(紅燈街)다. 이 홍등가를 일명 즉 기방(妓房)을 말하는

청루(靑樓)라고도 부른다.

것이었다. 낙양의 청루는 지극히 화려했

으며 그곳에서 일하는 기녀들의 미색(美色)과 예(藝)도 일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백화원(百花院).


낙양에서도 특히

가장 유명한 청루를

꼽으라면 사람들은 당연히

백화원을 꼽았다.

백화원에는 이름 그대로 백 명의 꽃같은 미기(美技)들이 있었다.

그러나 백화원이 유명한 것은

그들 백인의 기녀들 때문이 아니었

다.

화중지화(花中之花).

바로 이런 이름이 붙은 한 명의 명기(名妓)가 백화원에 있었기 때 문이었다. 꽃중의 꽃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녀의 미색은 가히 화 용월태(花容月態)요, 폐월수화(閉月羞花)라 할 수 있었다.

문자 그대로 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꽃이 무색해질 정도였

다.

화중지화는 그야말로 인세(人世)의 선녀(仙女)였다.

화중지화를 한 번 본 사람은 몽매에도 그녀를 잊지 못하며 상사병 을 앓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런 화중지화의 명성은 왕가와 사대


부는 물론 강호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화중지화로 인해 백화원은 낙양의 명물이 되었다.

화중지화를 한 번 만이라도 보기 위해 무수한 풍류객들이 줄을 이 었다. 왜냐면 화중지화는 미모뿐만 아니라 학문과 금기서예, 시서 가무에도 능통한 재녀(才女)이기 때문이었다.

백화루(百花樓).

백화루는 낙양 중문부에 자리잡고 있는 백화원 맞은 편에 있는 커 다란 주루였다.

백화원에 들어가고자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백화루가 만들어 졌다. 결국 백화원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백화루에서 애간장을 태우며 술을 마시다 백화원 안에서 흘러나오는 가무음곡에 침을 삼키며 귀를 기울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 마 인 제 7 장 화중지화(花中之花) -2 ━━━━━━━━━━━━━━━━━━━━━━━━━━━━━━━━━━━


정오(正午) 무렵.

관례를 무시하고 백화루를 그냥 지나쳐 막바로 백화원의 높은 대 문으로 걸어가는 남삼인(藍衫人)이 있었다.

아비객이었다.

"저 자가......?"

백화루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차례를 무시하고 곧바로 백화원 으로 들어가는 아비객을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주시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히 대문 앞까지 다가간 아비객은 주 먹으로 대문을 두드렸다.

쿵! 쿵! 쿵......


일곱 번째 두드렸을 때 대문 안으로부터 한 거만한 음성이 들려왔 다.

"누구요?"

대답 대신 아비객은 연신 대문을 두드렸다.

"누구냐고 하지 않소?"

대문 한 쪽이 조금 열리며 사십대의 중년장한이 얼굴을 보였다. 그는 거대한 체구에 고리눈을 한 험상궂은 문지기였다. 대체로 청 루의 문지기는 그같이 험한 인상을 지닌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무슨 일인데 시끄럽게 구는 거요?"

장한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장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히려 아비객이 물었다.

"그대는 누군가?"

"......?"


아비객의 질문이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장한은 멀뚱멀뚱 눈만 굴리 고 있었다. 그러자 아비객이 다시 물었다.

"문지기인가?"

그의 음성은 냉막하기 짝이 없었다.

이때 막 발작을 하려던 문지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 는 아비객의 눈에서 폭사되어

나오는 얼음장같은 살기에 그만 전

신이 얼어붙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 그렇… 소."

"그럼, 날 화중지화에게 안내해라."

그말에 장한은 놀란 표정으로 아비객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느새 아비객의 눈빛은 무심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순간 용기를 얻은 듯 장한은 코웃음치며 일언지하에 잘라 말했 다.


"백화루에 가서 기다리시오!"

그는 문을 닫았다. 그러나 아비객의 행동이 그보다 빨랐다. 그는 열린 문으로 몸을 집어넣으며 차갑게 말했다.

"안내해라."

"백화루에서 기다리라......"

장한의 언성이 높아지는 순간

아비객의 우수가 장한의 목을 곧장

찔러갔다.

"큭!"

장한은 멱따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그는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눈을 무섭게 부릅뜨

고 있을 뿐이었다. 어찌된 셈인지 그는 두 눈 번연히 뜨고 있으면 서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아비객은 쓰러진 문지기를 타넘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떤 놈이 순서를 무시하고 먼저 들어가려느냐?"

"멈춰라!"

문득 대문 앞에 어슬렁거리고 있던 십여 명의 청년들이 일제히 우 르르 달려왔다. 그들은

이제나 저제나 순서를 기다리던 자들이었

다.

그러나 그들이 아비객을 막아서기도 전에 아비객의 모습은 대문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이, 이런......!"

"빌어먹을......."

청년들은 대문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문은 곧 경계선이었 다. 화중지화의 미색을 한 번만이라도 보기 위해 불원만리 찾아온 그들이었으므로 백화원의 규칙을 어길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화중지화는 신분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순서를 지키도록 요구했 던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천만금을 준다해도 그녀는 얼굴을 내 밀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편 아비객은 백화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몇 걸음 가기도 전에 그의 앞을 가로막는 인영이 있었다. 대문 안의 전청으로부터 육순

가량의 금의노인 한 명이 걸어나왔

던 것이다.

금의노인은 화화태세(花花太歲)라는 별호를 가진 백화원의 총관이 었다. 화화태세는 아비객을 막아서며 점잖게 꾸짖었다.

"소협은 누구시길래 이곳에서 행패를 부리시오?"

아비객은 무심한 눈으로 살찐 화화태세를 보며 억양 없는 음성으 로 말했다.

"화중지화에게 안내해라."

화화태세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 되오. 순서대로 백화루에서 기다리시오. 이것은 규칙이오."

"어느 곳의 규칙인가?"


"본 백화원의...…"

순간 아비객의 냉랭한 음성이 백화원을 크게 울렸다.

"본인의 규칙은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안내해라."

"그런 억지를 감히... 억!"

화화태세의 얼굴이 순식간에

썩은 돼지간 빛으로 변했다. 어느새

그의 목에 아비객의 차디찬 옥수가 닿은 것이었다.

"이래도 안내하지 않을 텐가?"

그러나 화화태세는 이 방면에서는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자였 다. 그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규칙이오, 절대로 안 되오!"

"살기가 귀찮아진 모양이군."

아비객의 눈에서 살기가 흘렀다. 그는 우수를 뻗어 그으려 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웅후한 외침이 들려왔다.

"멈춰라. 너는 그 후의 일을 생각해 보고 나서 일을 벌여라!"

아비객은 손을

멈추었다. 그때 문 밖으로부터 경악에 찬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들은 열린 문으로 안 쪽의 정경을 바라보던 자들이 었다.

"금위보(金威堡)의 철나한(鐵羅漢)이다!"

"그렇군! 금위보 나리가 나오셨군."

금위보(金威堡).

당금 무림에서 금위보를 모르는 자는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었다. 하남성(河南省) 일대에서 광범위한 세력을 가진 금위보는 정파에 속하는 집단이었다.

금위보주 금위신군(金威神君) 공손막(公孫莫)은 절정고수로 인품 이 강직하고 악을 원수처럼 미워했다. 특히 그의 4 인의 수하들은 하나같이 강호상에 크게 알려진 고수였다.


금나한(金羅漢), 은나한(銀羅漢), 동나한(銅羅漢), 철나한(鐵羅 漢).

그들은 본래 소림사의 속가(俗家) 출신으로 지닌 바 무예는 도리 어 소림의 승려들보다 뛰어났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들 중 철나한이 나선 것이었다. 그는 별호 그대로 철탑같은 거 구의 인물이었다. 그의 앞에

서면 보통 사람은 어린애로 보일 정

도였다.

아비객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나 여전히 무심한 어투로 물었다.

"방금 그 말은 누구에게 한 것인가?"

철나한은 두 눈을 뒤루룩 굴리며 호통쳤다.

"어린 놈이 무척 오만방자하구나! 감히 노부에게 반말을 하다니!"

"......."

아비객은 화화태세를 놓아주고 철나한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 다.


백화원의 전청으로부터 십여 명의

화려한 옷을 입은 기녀들이 걸

어나왔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뛰어난 미녀들 이었다.

그녀들 가운데는 한 명의 홍의궁장여인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타 는 듯 붉은 홍의를 입은 여인이야말로 주위의 여인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경국지색의 미인이었다.

"화중지화다!"

"과연... 천하절색이구나!"

백화원의 대문은 열려 있었다. 밖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어느덧 대문

안 쪽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홍

의여인을 보자마자 탄성을 발하며 넋을 잃고 있었다.

스물 대여섯쯤 되었을까? 화중지화는 여인으로서는 성숙할 대로 성숙한 나이였다. 무르익은 비연(飛燕)같은 몸매하며, 전신에 흐 르는 육감적이고 뇌쇄적인 매력은 가히 마력(魔力)에 가까운 것이 었다.


심호(沈湖)를 연상케 하는 두 눈과 오똑한 콧날, 꽃잎같은 입술에 학같이 기품있는 목.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의 피부는 마치 옥으 로 빚은 듯 매끄럽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출현하자 주위에 일종의 형언할 수 없는 그윽 한 기향(奇香)이 풍기고 있었다.

아비객도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관심없는 듯 고개를 돌리더 니 곧장 철나한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눈에는 화중지화조차 하나 의 돌멩이로 보이는 듯 했다.

그때 화중지화가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한 음성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공자께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요."

그러나 아비객은 못들은 듯 철나한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방금 그 말은 내게 한 말인가?"

철나한은 대노하여 고리눈을 부릅떴다.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 놈이 어디서 감히......."

철나한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는 안색이 대경하며 급급히 신 형을 날렸다. 번뜩하는 순간 아비객의 우수가 칼날처럼 뻗어와 그 의 목을 쳤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공격이었다. 그러나 철나한도 만만치는 않 았다. 그가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신형을 날린 것이었다.

"제법이군."

그가 간신히 일격을 피해내자 아비객은 차갑게 말했다. 이어 이번 에는 좌수가 뻗었다. 이번 공격은 처음보나 수십 배는 더 빨랐다.

"헉!"

철나한은 기겁하며 또 피했다. 그의 신법은 번개치듯 빨랐으나 이 미 전신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고 있었다. 그것은 아비객의 손 끝에서 진검(眞劍)이나 다름없는 예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단지 스치기만 해도 목이 댕겅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는 두 번째 공격도 간일발의 차이로 피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숨 돌릴 틈도


없이 제 삼의 공격이 날아왔다.

"큭!"

이번에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아니, 그의 신법은 한계를 드러내 고 말았다. 미처 피할 여지도 없이 그의 굵은 목으로 아비객의 우 수가 지나간 것이었다.

쿠웅!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철나한의 거구가 벌렁 쓰러졌다.

중인들은 모두 자신들이 서 있는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 았다.

쓰러지는 순간 아비객의 발이 철나한의 목을 눌렀다. 그로인해 철 나한은 숨도 쉴 수 없었다.

"철나한, 네 목숨은 이미 본인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죽이지는 않겠다."

"......."

철나한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니 입은커녕 전신이 마비된 상태 였다.


"훗날 금위보와 함께 너를 접수하겠다."

아비객은 놀라운 말을 남긴 채 철나한의 목에서 발을 떼고 돌아섰 다. 이어 그는 곧장 화중지화를 향해 걸어갔다.

■ 마 인 제 7 장 화중지화(花中之花) -3 ━━━━━━━━━━━━━━━━━━━━━━━━━━━━━━━━━━━

"그대가 화중지화인가?"

화중지화(花中之花).

천하제일기녀인 그녀는 눈

앞의 냉막한 사나이, 아비객을 바라보

며 가늘게 몸을 경련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운명의 느낌이 그녀


의 가슴을 치고 있었다.

화중지화는 아비객을 보는 순간 화용월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린 그녀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요. 소녀가 바로 화중지화에요."

"......."

묵묵히 화중지화를 바라보던 아비객의 안색도 차츰 흔들리기 시작 했다. 화중지화를 보는 순간 그의 뇌리에는 천면인과 불각승의 말 이 떠오르고 있었다.

- 낙양 백화원의 화중지화와 하룻밤 자거라. 이유는 없다.

아비객은 그들의 뜻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무 황 담광현을 죽이라는 명령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첫 번째 명령을 이행했다. 그리고 이제 두 번 째이자 마지막 명을 이행키 위해 이곳 백화원으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화중지화를 마주한 순간 아비객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운명의 느낌이랄까! 그의 가슴을

치는 이상한 충격이 있었다.

'왜일까? 이 여인은 언젠가

본 듯한 느낌이 든다. 무황 담광현도

그랬다. 왜?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 이유는 없다. 화중지화와 자거라.

또다시 천면인과 불각승의 음성이 뇌리를 쳤다.

아비객의 얼굴은 점점 차갑게 굳어갔다. 이때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던 화중지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자의 성함은 어찌되시는지......?"

아비객의 입술이 열렸다.

"아비객."

순간 화중지화는 넘어질듯 휘청거렸다. 옆에 있던 기녀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아... 아비객......."

화중지화는 넋나간 듯

되뇌였다. 이때였다. 백화원의 여기저기서

경악에 찬 외침이 터졌다.

"아비객! 저 자가 바로 그럼... 담무황을 죽인 자란 말인가?"

"우우......!"

중인들은 공포를 느꼈는지 뒤로 물러섰다. 이어 중인들은 꼬리를 말고 삽시에 백화원 밖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마침내 백화원의 정 원에 남은 것은 아비객과 화화태세, 화중지화 및 그녀를 따르는 십여 명의 기녀들뿐이었다.

아무리 꽃이 좋다지만 목숨보다 중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백화원 에서 하룻밤의 풍류를 즐기려던 자들은

무림의 공적으로 선포된

아비객의 이름만 듣고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아비객과 화중지화는 마치 자석에라도 시하고 있었다.

끌린 듯이 서로의 눈을 응


살풋이 내려감은 눈, 오똑한 코, 꽃잎을 문 듯한 입술, 그리고 매 끄럽게 뻗은 목의 선(線). 게다가 불타는 듯 붉은 홍의를 입은 화 중지화의 농익은 육체에서는 야릇한 육향(肉香)이 은은히 발산되 는 듯 했다.

천하의 어떤 남자라해도 화중지화의 이런 모습에는 욕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소협......."

이윽고 화중지화의 꽃잎같은 입술이 떨어졌다.

"안으로 드시지요."

말을 마친 화중지화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주인의 성품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규방(閨房).

아비객과 화중지화는 간소하나 정갈한 주안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 었다.


"소협......."

"아비객이라 부르시오."

아비객의 음성은 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누가 알랴. 냉막한 음 성과 달리 아비객의 속마음은 무섭게 격동하고 있었다. 처음 마주 하는 여인이었지만 웬지 모르게 그의

마음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다.

"아비객. 천녀의 잔을 받으세요."

화중지화는 떨리는 손으로 옥배를 건넸다.

아비객이 옥배를 받아들자 화중지화는 호박빛의 액체를 가득 따랐 다. 아비객은 잔을 들어 단숨에 잔을 비웠다. 빈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 아비객을 향해 화중지화는 섬섬옥수를 내밀었다.

"저에게도... 한 잔 주시겠어요?"

"그대는 혼자 마실 수도 있소."


냉랭하기 그지없는 아비객의 말에 화중지화는 탄식하며 스스로 술 을 따랐다. 그녀는 천천히 술잔을 들어 불타는 듯한 붉은 입술로 가져갔다.

그러한 화중지화의 동작 하나, 표정 하나가 가히 요염의 극치였 다. 사내라면 그녀가 눈짓 한 번 하는데 따라 애간장이 탈 지경이 리라.

아비객은 눈길을 돌려 황촉을 응시했다. 소리없이 타오르는 불꽃 을 바라보기 얼마쯤일까?

불현듯 아비객은 피가 끓어오르며 단전

아랫 부분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참을 수 없는 정욕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대는... 내게 몸을 허락할 생각인가?"

아비객은 충혈된

눈으로 화중지화의 노출된 목을 쓸어보며 물었

다. 순간 화중지화의 눈이 요염하게 빛났다. 몇 순배 들이킨 술탓 인지 그녀의 볼도 도화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화중지화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이미 내정된 일이에요."

아비객은 흠칫했다.

"내정?"

한 가닥 의문이 아비객의 뇌리를 온통 화중지화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혼란으로 이끌었다. 그는

강한 의문을 담고 있었다. 그

러나 화중지화는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 있었다.

"훗날 알게 될 날이 있을

거예요. 다만 한 가지...... 천녀는 이

미 당신이 올 줄 알고 있었어요."

"......!"

- 화중지화와 자거라. 이유는 없다.

또 다시 불각승의 말이 아비객의 귓전에 맴돌았다. 문득 그는 괴 소를 흘렸다.

"후후! 그대같은 미인과 하룻밤 행운이겠군."

자게 된다면 그야말로 행운 중의


그 말에 화중지화가 발작적으로 웃었다.

"호호호! 아비객, 그대와 같은 일대영웅과 몸을 섞게 되었으니 천 녀 또한 영광이에요."

그러나 웬지 화중지화의 웃음은 처절한 느낌을 주었다. 이어 그녀 는 몸을 일으키더니 주안상을 들었다.

"잠시 후 돌아오겠어요. 기다리세요, 아비객."

"......."

화중지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비객의 눈에서 강렬한 열기가 이 글거렸다. 화중지화는 둔부를

야릇하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것

을 바라보는 아비객은 단전 아래가 무섭게 팽창되고 있었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는 화중지화와 단지 함께 있는 것 만으 로도 이렇게 욕망을 느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화중지화. 희대의 요화(妖花)다. 날 니.......'

이렇게 흥분하게 만들다


그러나 그가 어찌 알겠는가? 사실 그가 마신 술 속에는 강열한 최 음제가 섞여 있었다. 화중지화가 나간 후 아비객은 전신의 혈관이 팽창됨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르륵.......

경미한 옷자락 끌리는 음향이 들린 것은 그로부터 일 다경(一茶 經) 후였다. 서서히 고개를 든 아비객은 일순 숨이 콱 막혔다.

화중지화.

그녀가 눈 앞에 서 있었다. 그것도 전신에 단 한 겹의 얇고 투명 한 망사의 만을

걸친 채였다. 익을 대로

익은 뇌쇄적인 나신(裸

身)이 얇은 망사를 통해 은은하게 투영되고 있었다.

터질 듯 솟아 있는 두 개의 육봉(肉峰)과 부드러운 아랫배에 미묘 하게 자리잡은 배꼽, 그리고 은은한 밀지(密地)를 품고 두 갈래로 늘씬하게 뻗어내린 대리석같은 다리를 아비객의 눈이 샅샅이 훑어 갔다.

한 줌에 쥐어질 듯 잘룩한 허리, 그 아래로 급격히 풍만한 곡선을


그리는 둔부, 그리고 두 다리의 갈라진 부분의 은은한 방림(芳林) 에는 짙은 안개가 어려있는 듯했다.

화중지화의 육체는 폭발적인 유혹을 발하며 아비객의 눈 앞으로 야릇하게 허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화중지화......."

아비객의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문득 그는 벌떡 일어서는 즉시 화중지화의 육체를 와락 껴안았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여체는

이미 뜨겁게 달아있는 것을 느낄 수

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한 팽만감을 주었다. 마침내 아비객의 성난 입술이 화중지화의 꽃잎같은 입술을 사정없이 찍어 눌렀다.

"아!"

화중지화는 몸을 활처럼 뒤로 굽히며 두 팔로 아비객의 목을 휘감 았다.


찌익!

아비객의 손길이 거칠게 한

겹의 망사의를 잡아 당기자 망사의는

여지없이 뜯겨져 나갔다. 망사의 속은 완전한 알몸이었다. 마침내 화중지화는 그의 품 안에서 적나라한 나신이 되고 말았다.

여체(女體)는 풍만했고 뜨거웠다.

아비객은 그녀를 번쩍 들어

침상에 던졌다. 다음 순간 그는 자신

의 남삼(藍衫)을 걸레쪽처럼 벗어 던지고 스스로도 태초의 알몸이 되었다.

동신(銅身)처럼 단단한 몸이었다. 가슴팍의 근육은 강철같고 팔다 리도 강인한 무쇠를 보는 듯 했다.

"아!"

침상에 알몸으로 내던져진 화중지화의 눈이 아비객의 강철같은 나 신을 바라보다 그의 신체 한 부분에 이르러서 그만 가볍게 몸을 떨며 탄성을 내흘렸다. 그녀의 눈은 아비객의 남성의 상징에 못박 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아비객의 남성은 이미 단단히 직립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여체 를 원하고 있었다. 화중지화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녀는 눈을

반개한 채 고개를 뒤로 젓혔다. 그러자 터질 듯 풍만한 유방이 더 욱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순간 그녀는 사나운 힘으로 허리가 들려지는 것을 느꼈다.

"흑!"

숨막힐 듯한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아비객의 강철같은 팔뚝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부러질

듯 당겼던 것이다. 동시에 뜨거운 입

김이 그녀의 학처럼 가는 목에 퍼부어졌다.

아비객의 손은 여인의 젖가슴을 터져라 움켜쥐었고 여인은 뱀처럼 아비객의 허리를 휘어감고 있었다.

남(男)과 여(女). 두 육체는

마침내 한 덩어리가 되어 침상을 뒹

굴었다. 더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얽히고 섞인 육체가 서로를 삼 킬 듯이 뒤엉켰다.

"아아…...!"


후끈한 열기가 침상을 폭풍처럼 뒤흔들었다. 여인은 뱀같이 몸을 비틀며 사내의 불덩이같은 정열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능숙하게 유도하고 있었다. 그로인해 침상은 열기로 인해 타버릴 것같았다.

마침내 아비객의 불덩이같은 중심이 여인의 체내로 깊이 진입했 다. 급했다. 그는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교묘하게 그를 이끌고 있었다. 아비객이 그녀의

깊은 곳에서 폭발할 듯 하면 여

인은 묘하게 자세를 바꾸며 그의 열기를 지연시키곤 했다.

여인은 끝없는 쾌락을 이끌어내려는 듯

했다. 그녀는 대지였다.

대지는 뜨거운 비를 흠뻑 맞을 수록 더욱 더 많은 비를 요구했다. 사내는 태양이었다. 태양은

대지를 녹여버릴 듯 끊임없는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아아아......."

무엇이 그들 두 남녀를 이렇듯 포악한 욕정에 불타게 만들었는가? 아비객은 그렇다고 치자. 그는 강렬한 최음제의 효력으로 인해 인 성(人性)을 잃고 있었다. 그렇다면 화중지화는?


그녀는 희대의 명기요, 천하절색의 우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 사내에게나 육체를 파는 여인은 아니었다. 재주와 예(藝)로 더욱 알려진 그녀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방중술의 기술은 가히 놀 랄만한 것이었다.

그녀는 사내를 어떻게 하면 끝없는 욕해로 이끄는지 했다. 그녀의 행위는 너무나

잘 아는 듯

능수능란하여 희대의 색녀(色女)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마침내 아비객의 전신은 땀으로 젖었다. 이미 그는 수차례나 절정 을 넘었다. 그러나 화중지화는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녀는 아비객의 정혈(情血)을 최후의 한

방울까지 말리려는 듯했

다.

아비객은 또 다시 여인의 비궁(秘宮)을 열고 들어갔다.

"아아......!"

여인은 사내의 목을 휘감은 손에

힘을 준 채 격정에 전신을 부르

르 떨며 하얗게 눈을 뒤집고 있었다.


■ 마 인 제 7 장 화중지화(花中之花) -4 ━━━━━━━━━━━━━━━━━━━━━━━━━━━━━━━━━━━

여인은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숨죽여 흐느끼는 그녀의 오열에는 무한한 비감이 어려 있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침실 건너 편의 또

다른 방. 그곳에서 여인은

가는 어깨를 떨며 오열하고 있었다.

비애에 찬 오열을 터뜨리는 여인의 앞에는 학자풍의 한 노인이 앉 아 있었다. 뜻밖에도 그는

전 무황 담광현의 아우인 담광수(覃光

水)가 아닌가?

문득 오열을 터뜨리던 홍의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아! 놀랍게도 그녀는 화중지화가 아닌가! 지금 옆방에 아비객과 폭풍의 정사를 벌이고 있는 여인과 똑같이 생긴 여인이었다.


세상에 똑같이 생긴 사람은 쌍둥이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비객과 육체를 태우고 있는 여인과 옆방의 여인은 쌍둥이란 말인가?

문득 여인이 고개를 치켜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비맞은 해당화처 럼 젖어 있었다.

"흐흐흑… 숙부님! 이럴 수가 있어요? 그 아이가 정말 동생이란 말인가요? 네?"

화중지화가 처연하게 묻자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담광수는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숙화... 틀림없는 네 동생이다."

그렇다.

담광수와 대좌하고 있는 화중지화는 바로 과거 무황성에서 실종되 었다던 담광현의 두 딸 중 하나인 담숙화였다. 담숙화는 눈물젖은 얼굴로 따지듯 물었다.

"그럼 왜 그 애가… 그

아기가 무림을 위해 희생되야 하죠? 저와

숙정 언니의 희생 만으로는 부족하단

말인가요? 아니, 부모님의


희생으로도 부족하단 말인가요?"

울부짖음. 아니 절규에 가까운 울음이었다.

"숙부! 이 질녀는 저들의 독랄한 흉계로 인해 진흙탕 속에서도 이 렇게 살아왔어요. 그런데 왜? 왜 저 아이마저 희생되야 하는 거 죠? 더구나 아버지를 죽이고 누이와 간통(姦通)하여 전 무림인의 원한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하나요? 왜 저 아이를 천륜(天倫)을 어 긴 악마로 만들어야 하나요? 네? 말 좀 해보세요!"

"숙화야......."

담숙화는 담광수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눈물을 뿌리며 고개를 흔들 었다.

"왜? 왜 그래야 하죠? 저 아이는 사람이 아닌가요? 정(情)이 무엇 인지도 모르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요? 말씀해 보세요, 숙부! 네?

말씀해 보시란 말예요."

"…...."

담숙화의 질책에 담광수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그는 땅이 꺼


져라 한숨만을 쉴 뿐이었다.

"으흐흑…!"

담숙화는 얼굴을 감싸며 오열을 터뜨렸다.

한편, 옆방에서는 한창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두 남녀의 숨가쁜 신음소리는 벽을 통해서도 여실히 들려오고 있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비극적인 한 여인의 오열이 쉴 새 없이 흘 러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두 남녀의 정사는 끝없이 계속되고 있었 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맞이한 듯 온 몸이 폭포수같은 땀에 젖은 채 한없는 쾌락의 나락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 마 인 제 8 장 풀리는 빙심(氷心) ━━━━━━━━━━━━━━━━━━━━━━━━━━━━━━━━━━━


아침이다.

간밤의 어둠을 남김없이 삼켜버린 조양(朝陽)이 낙양을 온통 금빛 으로 물들일 때였다.

아비객은 낙양의 유명한 청루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 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보통 걸음이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항상 그가 지니고 있는 무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백화원에서의 광폭했던 하룻밤 정사는

이미 그의 머리 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순간 그는 홀가분하기만한 심정이었다.

천면인과 불각승, 그 두 사람과의 모든 관계가 매듭지어진 것이었 다. 이제 그는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 듯한 느낌을 누리고 있었

다.

낙양성의 아침 거리는 별로 혼잡하지 않았다. 특히 청루거리는 오 전 중에는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지금 아


비객이 걷고 있는 거리는 그렇지가 못했다.

그를 중심으로 전후좌우에 수많은 무림인들이 은밀히 따르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근 일백여 명이 넘는 숫자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두 눈에 섬뜩한 살기를 품은 채 은밀히 아비객을 미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비객 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자적 걸을 뿐이었다.

인적 드문 낙양성 밖의 황량한 벌판을 아비객은 여전히 무심한 표 정으로 걷고 있었다. 키를 훨씬 넘는 갈대풀이 자라는 넓은 벌판 에는 드문드문 잡목 몇 그루가 서 있을 뿐이었다.

쏴아아!

바람이 갈대를 흔드는 소리 외에는 그 흔하디 흔한 새소리조차 들 려오지 않았다.

"아비객! 멈춰라!"


아비객이 갈대 사이에 나

있는 한 돌무덤 근처를 지나갈 때였다.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수십 명의 인영이 돌연 그를 에워쌌다. 동 시에 그의 앞으로 한 노인이 나섰다.

그는 육순 가량의 나이에 일월쌍극(日月雙戟)을 등에 멘 황의노인 이었다.

일월쌍극(日月雙戟) 도광(陶廣). 이런 명호로 불리우는 그는 하남 일대의 절정고수로 성격이 불같이 급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었

다.

걸음을 멈춘 아비객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대는 누군가?"

도광은 대뜸 외쳤다.

"네 조부다!"

그러나 아비객은 표정 한 기만 했다.

점 변함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무심하


"무슨 일인가?"

"네놈의 목을 가지러 왔다."

도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 서 있던 수십 명의 인물들이 흉흉한 기세로 아비객을 포위했다. 사전 모의된 듯 그들은 신속하 게 움직였다.

그러나 아비객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도광을 주시한 채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묻지 않겠다. 손을 써라. 그대들도 마찬가지

다."

아비객의 무심한 눈이 수십

명의 인물들을 둘러보는 순간 도광이

노성을 질렀다.

"이놈! 과연 소문대로 안하무인이로구나! 너같은 놈을 활보하게 한다면 강호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네놈을 징계하여 무림 정기를 바로잡으러 왔다!"

그 말에 아비객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다시 도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 가닥 바람이 어깨까지 내려온 아비객의 머리카 락을 흩날리게 했다.

머리카락 몇 올이 그의 냉막해 보이는 입술에 달라붙었다. 아비객 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말했다.

"당신은 말이 너무 많군. 손을 써라."

그 말에 도광은 수염을 부르르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로서 는 난생 처음으로 이런 모욕을 당하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문득 끼여드는 자가 있었다.

"노선배님! 더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놈의 목을 베어 무림정의 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합니다! 무황을 선출하는 신성한 자리에서 살인을 자행한 놈에게 무림의 법도를 보여줘야 합니다!"

아비객은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제법 청수한 용모의 백의청년이 등에 보검을 메고 있었다. 대략 삽십 전후의 나이였다. 그 자는 언뜻 보면 준수한 외모였으나 눈 매가 가늘고 눈동자가 자주 움직이는 것을 미루어 심기가 얕고 교 활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디선가 그를 꾸짖는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무슨 개나발같은 소릴 하는 거냐? 설사 그 분이 무황을 죽였기로 서니 뭐가 어떻단 말이냐? 강자는 살고 패자는 죽는 것이 무림의 법칙이 아니냐?"

"뭣이?"

"누, 누구냐?"

중인들은 대경하여 고개를 돌렸다.

왼편 언덕으로부터 한 무리의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 두 일신에 흑의를 입은 자들로써 인원은 대략 삼십 명 정도였다.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매부리코에 허리춤에는 귀면판관 필(鬼面判官筆)을 찬 냉혹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일견하기에도 그 들은 사파 인물들같아 보였다.


그들이 다가오자 장내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아비객을 사 이에 두고 정도 인물들과 사도 인물들이 묘한 대치상태를 이루게 된 것이었다.

이때 아비객은 귀면판관필을 찬 흑의노인을 향해 물었다.

"그대는 누군가?"

흑의노인은 얼른 공손한 자세를 잡으며 대답했다.

"소생은 흑천방(黑天幇) 소속의 하남 분타주(分舵主) 귀면판관(鬼 面判官) 전필우입니다. 이곳에 온 이유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내가 크게 술렁였다. 그것은 바로 흑

천방이란 한 마디 말 때문이었다.

당금 사도무림은 크게 남북쌍맹(南北雙盟)과 일문이방삼교(一門二 幇三敎)로 나뉘어 있었다.

천웅맹(天雄盟).

와룡강(臥龍岡).


이들이 이른바 무림의 쌍맹인

것이다. 천웅맹은 북육성(北六星)

녹림맹을, 와룡강은 남칠성(南七星)의

녹림맹으로서 각기 웅대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혈검문(血劍門).

그들은 일문(一門)에 속하는

집단으로 쌍맹 다음가는 사도문파였

다.

패도방(覇道幇)과 흑천방(黑天幇)은

각기 이방(二幇)으로써 중원

무림의 동서를 분할하고 있었다.

극락교(極樂敎)와 패천교(覇天敎), 혈마교(血魔敎)는 삼교(三敎) 에 해당하는 문파로써 사도세력 중에서 다. 이들 삼교는 지금으로부터

가장 신비한 문파들이었

일백여 년 전에 세워졌으나 그 이

름만 알려졌을 뿐, 아직 확실한 내력이나 활동은 거의 알려진 바 가 없었다.

무림인들은 특히 이들 삼교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삼교의 이름이 상징하는 패도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흑천방이라는 당금

사파를 주름잡는 한 세력이 나타

난 것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중인들에게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 했다.

이때 무심한 눈으로 전필우를

바라보던 아비객이 차갑게 입을 열

었다.

"간단히 말해라."

전필우는 음침하게 웃었다.

"다름이 아니라 본방의 방주님께서 무황을 모셔오라는 분부가 계 셨습니다."

순간 냉막하던 아비객의 얼굴이 기이하게 변했다.

"누가 무황이란 말인가?"

"그야… 담광현을 죽였으니 당연히 삼십이대 무황은......"

"잘못 알았다. 난 무황이 될 생각은 애당초부터 없었다."


아비객의 말에 중인들은 모두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아비 객이 야심적인 흑도인물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말에 한 가닥 기이한 느낌이 든 것이었다.

전필우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공자, 본방은 저들 정파라 자처하는 위선자들의 파렴치한 행동을 보고 공자를 도우러 온 것입니다."

전필우의 말에 정파인들은 한결같이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들을 도매금으로 넘겨버린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때 아비객은 무슨 생 각을 했는지 흑천방의 인물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대들은 본인을 침해했다."

차가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좌우수가 사방으로 칼날처럼

번뜩였다.

"크악!"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비객의 쌍수가 허공을 가로지 를 때마다 새하얀 백기가

뻗어 흑천방도들은 피를 뿌리며 날아갔


다.

아비객의 쌍수가 여섯 번째 뻗었을 때 흑천방도들은 대항도 한 번 못해보고 전멸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귀면판관 전필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목이 맨 먼저 댕강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저… 저럴 수가!"

정파인들은 참혹무비한 광경에 경악하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

다. 이때 흑천방도를 몰살시킨 아비객이 정파인들을 향해 돌아섰 다.

"그대들 역시 본인을 침해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처절한 비명이 하늘을 뒤덮었다.

"으아악!"

아비객이 내뻗는 쌍수에 십여

명의 인물이 선혈을 뿌리며 거꾸러

졌다. 실로 통천경악할 노릇이었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무림인들은 그만 혼비백산하여 사방으


로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이… 이 잔인무도한 놈......!"

일월쌍극 도광은 대노하여 등뒤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자신이 자랑하는 일월쌍극을 채 뽑기도 전에 아비객의 좌수 에 팔이 깨끗이 잘려나가 버렸다. 뒤이어 뻗은 한 가닥 백광은 그 대로 도광의 가슴 한복판을 뚫고 나갔다.

"끄윽! 이런

무공이… 있다니… 대체 이게... 무슨 무공이

냐......?"

비틀거리던 도광이 가슴으로부터 선지피를 쏟아내며 눈을 부릅뜨 고 물었다.

"탕마참백인수(蕩魔斬白刃手)."

아비객이 좌수를 거두며 무심하게 말했다.

"타… 탕마참백인…!"

도광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거꾸러졌다. 그는 끝까지 자신이 죽은


무공의 내력을 알지 못하고 죽었다.

탕마참백인수(蕩魔斬白刃手).

이것은 과거 무림삼비자(武林三秘子)가

뜻을 합친 기념으로 멀리

동해를 유람할 때 동해의 한 무명도(無名島)에서 우연히 얻은 선 문(仙門)의 비경인 선단경(仙丹經)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곳에는 전설의

기공인 선천삼양진기(先天三陽眞氣)를 비롯하여

실전된 선문의 비학이 수록되어

있었다. 탕마참백인수도 그중의

하나였다.

이제 아비객의 곁에는 단 한 명 만이

살아 있었다. 처음 도광의

옆에서 한 마디 했던 백의청년이었다.

"우우......!"

그는 두려움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아비객은 걸음을 옮기며 그에 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대… 대협, 살려주십시오!"

백의청년은 만면에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내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이름을 물었다."

"소… 소인 상명걸(商明傑)이라고 합니다. 제발… 목숨만......."

그는 당금 무림의

뛰어난 후기지수 육인을 가리키는 무림육수(武

林六秀) 중의 마지막 서열인 도룡검(屠龍劍) 상명걸이란 자였다.

무림육수는 모두 이삽십 세

전후의 젊은 고수들로 개개인의 무공

이 출중했다. 그러나 상명걸은 비굴하기 그지없었다.

아비객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명걸, 네가 갈 길은 하나다."

"아, 안돼... 크아악!"

끝이었다. 상명걸은 아비객이 가볍게 내저은 일수에 절명하고 만


것이었다.

차라리 비굴하게 무릎 꿇지 않고 자신의 성명절학인 도룡검법으로 목숨을 걸고 덤볐더라면 설사 죽더라도

명예나마 보존했을 것이

다.

그는 목숨을 잃었을 뿐 아니라 그토록 아끼던 명예에도 먹칠을 하 고 말았다.

아비객은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멀리 떨어진 곳 에서 몇몇 남아 있던 무림인들은 진저리를 치며 급급히 뒤로 물러 났다.

"……."

아비객은 피로 뒤덮인 들판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는 정파 나 사파의 개념이란 없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 동할 뿐이었다.

아비객은 바람을 등에 업고 걸었다. 혈세무림풍(血洗武林風)이 그 의 등 뒤로부터 불어왔다.


■ 마 인 제 8 장 풀리는 빙심(氷心) -2 ━━━━━━━━━━━━━━━━━━━━━━━━━━━━━━━━━━━

낙양에서 북으로 오십 리

떨어진 곳은 끝없는 갈대밭으로 뒤덮여

있다.

휘이이잉! 스스스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밭 사이를 남삼청년이 걷고 있었다. 아비객 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갈대 사이를 일정한 속도로 걸었

다.

일견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그의 심중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내면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아비객! 너는 누구냐? 무엇 때문에 세상에 태어났느냐? 왜? 무엇


때문에 강호를 유랑하는 것이냐? 네 이름 그대로… 슬픈 방랑객이 기 때문이냐?'

스스스......

춤추는 갈대잎이 무심하게 그의 몸을 스쳤다.

'이제 너는 두 가지 일을

모두 마쳤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

이냐? 네가 갈 곳은 이제 어디인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아비객의 눈빛이 번쩍 빛난 것은 석양이 갈대밭을 물들이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렇다. 무림. 무림의 세계는 오직 강자만의 세계다. 강자가 아 니면 살아 나갈 수가 없다.'

아비객은 불현듯 갈대잎 하나를 꺾어들었다. 그의 무심한 눈이 연 약한 갈대를 내려다 보았다.

'이 한 잎의 갈대는 약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들이 한곳에 모여 있으니 오히려 장관을 이룬다.'


그렇다.

붉은 노을이 막 펼쳐지기 시작하는 평원에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 은 그야말로 일대장관이었다.

아비객은 꺾어 든 갈대를 움켜쥐었다. 갈대잎은 소리도 없이 바스 러졌다.

'그렇다. 힘이란 모일 수록

강한 법이다. 이 넓은 중원천하에 고

금(古今)을 통해 수많은 패웅들이 명멸했건만 그들은 모두 찰나적 으로 빛을 발했을 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힘! 힘만이 전부다. 힘을 모으자. 나 아비객의 천하로 이 풍진강호에 한 자리의 웅좌 를 세워보겠다.'

일순 아비객의 두 눈에서 패도적인 기운이 뻗어나왔다.

휘이이잉......!

바람은 거세어지고 갈대는 미친듯이 춤을 추었다.

아비객의 걸음이

빨라졌다. 비스듬히 몸을 누인

그는 갈대 위를

스치듯이 날아갔다. 경쾌하기 짝이 없는 신법이었다. 아비객은 망


설이지 않고 계속 갈대 위를 스치듯 날아갔다.

"으으음......!"

한 줄기 미약한 신음이 그의

귓전에 바람을 타고 들려온 것은 노

을이 절정을 이루며 타오를 때였다. 그것은 나약한 소녀의 고통스 런 신음이었다.

아비객의 신형이

앞으로 나갈수록

신형이 갈대숲의 얕은 분지를

신음소리는 가까와졌다. 그의

스쳐갈 때였다. 갈대숲 속에 한 소

녀가 쓰러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아비객은 그 소녀에게 눈조차 돌리지 않고 지나갔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소녀의 간절한 애원이 들린 순간 아비객은 빙글 몸을 돌리며 땅으 로 떨어져 내렸다.

홍의소녀였다.

열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청순하고 귀엽게 생긴 소녀가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사리같은 두 손으로 가슴을 움 켜쥐고 있었다.

"으… 으음… 저를… 도와주세요......."

아비객이 내려다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홍의소녀가 또다시

가냘픈 신음을 발했다.

소녀를 내려다보며 잠시 눈살을 찌푸렸던 아비객이 허리를 굽혔을 때였다.

슈슈슈슈슉......!

돌연 홍의소녀의 양 손이

활짝 펴지더니 무수한 독침이 아비객의

전신으로 쏘아졌다. 미처 피할 겨를도 거리도 없었다. 창졸지간에 쏘아진 독침은 그대로 아비객의 옷자락을 뚫으며 전신에 박혀 버 렸다.

그러나 아비객의 반응도 빨랐다. 그는 벼락같이 소녀의 한 손을 나꿔챘다.

"......!"


놀란 표정이 역력했지만 소녀의 표정은 깜찍하기만 했다. 흑진주 같은 눈을 크게 뜬 채 그녀는 아비객을 노려보았다.

"놔라!"

홍의소녀는 앙칼지게 외치며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아비객의 손

은 철갑같았다. 소녀가 앙탈을 부리면 부릴 수록 아비객의 손은 더욱 고리처럼 옭죄어 들 뿐이었다.

아비객은 소녀의 손을 움켜쥔 채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누구길래 날 암습하느냐?"

홍의소녀는 이를 뽀드득 갈더니 증오스럽게 내뱉었다.

"난 백성락의 동생이다."

순간 아비객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백성락이라면… 무황대회의 도전자?'


아비객의 변화를

눈치챈 홍의소녀는 살기띤 음성으로 재차 외쳤

다.

"이젠 왜 널 죽이려 했는지 알겠느냐?"

말이 끝나는 순간 아비객은 소녀의 손을 놓으며 옷자락을 툭툭 털 었다.

그러자 아비객의 옷에 박혀있던 독침이 떨어졌다. 그 광경에 홍의 소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 을 동그랗게 떴다.

아비객은 먼지를 털어내듯 독침을 떨구어낸 후 물었다.

"그래서 날 죽이려 했단 말이냐?"

"그렇다. 이 악마!"

소녀는 악을 쓰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아비객은 관심없다는 듯 몸 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날 죽이려면 아직 멀었다. 돌아가라."


홍의소녀는 작은 주먹을 움켜쥔 채 치를 떨었다.

"칠보단혼침(七步斷魂針)을 맞고 끄덕도않다니... 너도 사람이란 말이냐?"

"칠보단혼침이 아니라 그 어떤 것으로도 날 죽일 순 없다."

저만치 걸어가던 아비객의 중얼거림이었다.

"서라! 악적!"

홍의소녀는 펄쩍 뛰며 아비객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아비객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홍의소녀는 씨근거리며 그의 뒤를 쫓아가 며 계속 욕설을

퍼부어댔다. 하지만 우이독경(牛耳讀經)이요, 마

이동풍(馬耳東風)에 불과했다.

아비객은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이 무정한 등을 보이며 걸을 뿐이 었다.


■ 마 인 제 9 장 역천마검(逆天魔劍) ━━━━━━━━━━━━━━━━━━━━━━━━━━━━━━━━━━━

개봉부(開封府)는 역대 황조의 도성이다.

그러나 무림에서 개봉은 남칠성(南七星)과 북육성(北六星)에 걸쳐 가장 방대한 조직과 인원을 가진 개방 총타가 있기에 더욱 유명했 다.

개봉성 밖 십 리쯤 가면 커다란 토지묘(土地廟)가 나온다.

크다는 말보다는 거대하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왜냐하면 토지묘 는 많은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건물 속에는 뜻밖에도 수백 명의 거지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바로 이곳이 천하무림에 가장 ( 幇)의 총타였다.

특이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는 개방


때는 오 월(五月).

햇살이 기울 무렵 토지묘 입구에 한 남삼(藍衫) 차림의 청년이 나 타났다. 토지묘 문 앞에서 두 명의 중년거지가 옷을 벗고 한참 이 를 잡고 있던 때였다.

"......?"

거지들은 이를 잡던 동작을 멈추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남삼청년이 다가옴에 따라 주위가 얼어붙는 것같은 한랭한 공기가 무겁게 깔렸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다름아닌 아비객이었다.

"서시오."

"누구요? 이름을 대시오!"

두 중년거지는 벌떡 일어나 옷을 입으며 외쳤다. 토지묘 입구까지 걸어온 아비객은 걸음을 멈추며 았다.

무심한 눈으로 두 거지를 바라보


순간 의혹의 눈초리로 아비객을 훑어보던 두 거지는 전신을 부르 르 떨었다. 그같이 무심한 눈을 가진 인물은 무림에 오직 단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 역천마검(逆天魔劍)이다!"

그들은 동시에 부르짖었다.

하늘을 거스르는 마검. 그것은 어느새 아비객에게 붙여진 별호였 다. 정작 아비객 본인 만이 그 사실을 모를 뿐 역천마검이라는 그 의 별호는 강호를 온통 진동시키고 있었다.

아비객은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이 그들을 앞질러 토지묘 안으로 들어갔다.

"멈추시오!"

두 중년거지는 재빨리 신형을 날려 그를 가로 막았다.

"비켜라."

행보를 차단당한 아비객이 싸늘한 눈빛으로 두 중년거지를 쳐다보


며 차갑게 말했다. 순간 우측의 중년거지가 물었다.

"역천마검. 당신은 무슨 일로 본타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이오?"

"개방 방주를 만나러 왔다."

"무… 무슨 일로......?"

아비객의 말에 놀란 두 중년거지가 동시에 되물었다. 일순 아비객 의 얼굴에 귀찮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냉막하게 말했다.

"그대들이 알 필요 없는 일이다. 방주를 불러라."

"안 된다! 정식으로 방문첩을… 으악!"

찰나지간 시뻘건 피가 치솟았다. 중년거지는 목을 움켜쥐고 쓰러 지고 말았다. 아비객의 좌수가 번뜩인 순간 한 가닥 백기가 그의 목을 날렸던 것이다.

"헉! 네놈이 감히 본타에서 살생을......!"

또 한 명의 중년거지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목이 반쯤 잘린 채


이미 쓰러진 시체 위에 가로질러 쓰러졌다. 그의 목에서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터져나오고 있었다.

아비객은 성큼성큼 토지묘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토지묘 안의 광 장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다.

"누구냐?"

"어떤 놈이 감히 본방에서 행패를 부리는 거냐?"

여기저기서 노성과 함께

거지들이 떼지어 나타났다. 토지묘 안의

넓은 광장은 삽시에 일백여 명의 거지들로 가득차고 말았다. 거지 들은 아비객을 겹겹이 에워쌌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째지는 듯한 꽹가리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모 여든 거지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한 곳을 향해 무릎을 꿇는 것이었 다.

"방주님!"

무릎을 꿇은 거지들이 만든 길 사이로 한 명의 늙은 거지가 위풍 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봉두난발에 하마같이 큰 입을 가진 자


로써 허리에는 커다란 술호로가 매달려 있었다.

대취신개(大醉神 ) 위목천(韋目天).

바로 현 개방의 방주였다. 나이는 팔십일 세였으며 그의 독문신공 인 주전신공(酒箭神功)과

타마광살수(打魔狂殺手)는 무림의 일절

일 뿐 아니라 개방 절학 중에서도 손꼽히는 절정무학이었다.

비틀비틀 술에

취한 듯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대취신개는 아비객

앞에서 신형을 멈추었다. 이어 그는 호탕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비객. 무황성에서 본 이후 처음이구료. 껄껄! 무슨 바람이 불 어 이 보잘 것 없는 거지소굴까지 왕림하셨소이까?"

아비객의 태도는 냉랭하기만 했다.

"개방을 거두기 위해 왔다."

"뭐... 뭣이?"

"저런 미... 미친 놈!"


너무나도 뜻밖인 대답에 개방 방도들은 대노하며 금세라도 아비객 을 덮칠 듯 각자 무기를 꺼내들었다.

"……!"

대취신개 위목천의 안색도

검붉게 일그러졌다. 감히 개방 총타에

단신으로 찾아와 개방을 거두겠다니? 정말이지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아비객은 개방 방도들을 차디 찬 눈으로 쓸어보며 냉혹하게 덧붙였다.

"뜻을 거스르는 자가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다."

아비객의 다음 말은 개방도들의 가슴에 칼을 박는 것이었다.

"죽음."

아비객의 말에

대취신개는 결국 인내심을 더이상 발휘하지 못했

다. 팔십 평생을 살면서 이만큼 광오한 인물을 본 적이 없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어린애로구나!"

대취신개의 음성이 분노로 인해 떨리고 있었다.


"날 따르는 자는 살고 거부하는 자는 죽는다."

아비객은 얼음장같이 냉랭하게 내뱉고 쌍장을 좌우로 뻗었다. 그 러자 두 줄기 백기가 뻗어나갔다.

"으아악!"

연이어 처절한 비명이 터지며

주위를 둘러싸던 개방도들 십여 명

이 갈대처럼 쓰러졌다. 그러나 그들의 목은 무사했다. 다만 혈도 를 짚혔을 뿐이었다.

그것이 격전의 도화선이었다.

"쳐라!"

"놈을 죽여라!"

일백여 명의 개방 방도들이 일제히 무기를 휘두르며 아비객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차차차창!


개방도들은 숫적으로 월등히

앞섰다. 그러나 애당초 그들은 아비

객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아비객이 가볍게 양 손을 뻗을 때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짚단처럼 쓰러졌다.

신쾌무비한 아비객의 손속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가는 수하들을 보고 있던 대취신개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아비객! 이 미친 광인! 그만 손을 멈추지 못하겠느냐?"

쐐애액!

그가 입을 벌리자 주전(酒箭)이 화살처럼 뻗어나갔다.

무림일절인 주전신공(酒箭神功)으로 바위도 꿰뚫는 무서운 술화살 이 퍼부어진 것이었다.

"위목천. 그대는 끝까지 대항하여 죽음을 부를 셈인가?"

아비객이 소리치며 수도를 내밀었다. 날아오던 주전이 아비객의 손에 부딪쳤을 때였다.


펑!

가죽북 터지는 듯한 폭음이

울리며 주전이 자욱한 술방울로 화해

튕겨나가는 것이 아닌가?

대취신개는 충격을 받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어느새 그의 전신은 자신이 내쏜

술로 흠씬 젖은 후였다. 그러나 대취신

개는 굴복하지 않았다.

"아비객! 노부를 죽인다 해도

결코 개방은 너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아비객이 차갑게 되물었다.

"무엇 때문이냐? 무림은 곧 강자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냐? 수명사 담광현도 강자였기에 그토록 오래 무황을 누렸지 않느냐?"

대취신개는 코웃음쳤다.

"흥! 잘못 생각했다. 담무황께서는 강했지만 그 분이 무황으로 칭 송받은 것은 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놈은 비록 강하지만 덕이 없다. 덕이 없는 강자는 오직 살인마에 불과할 뿐이다."


그 말에 아비객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문득 앙천광소를 터뜨 렸다.

"으하하하......! 덕? 덕이라고? 덕이 없으면 무림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대취신개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아비객이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아비객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편격함 과 광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좋다! 덕 없는 강자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마! 덕이 없이도 무림을

취할 수

있음을 똑똑히 보여 주겠다! 크하하

하......!"

일진광소와 함께 아비객은 양 손을 뻗었다. 섬뜩한 백기가 칼날처 럼 줄기줄기 뻗어나갔다.

손이 뻗칠때마다 선혈이 피무지개를 그렸다. 아비객의 손이 춤출 때마다 개방 방도들은 피를 뿌리며 거꾸러졌다.

삽시간에 개방

방도들의 반수 이상이 쓰러졌다. 그것은 실로 향


한 자루 탈 시간도 안 되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으으... 아비객! 이 저주받을 악마......"

대취신개는 갈라진 복부를 움켜쥐고

비틀거렸다. 그의 노안에는

무서운 원한이 서려 있었다.

아비객은 복부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는 대취신개를 향해 조소를

흘렸다.

"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인간이 아니다... 악마일

뿐... ..."

쿵! 하고 거목이 쓰러지듯 개방의 방주

대취신개는 영원히 눕고

말았다. 그의 눈은 세상을 향한 원망과 한을 품은 채 감겨지지 않 고 있었다.

대취신개의 죽음.

그것은 황하남북에 걸쳐 가장 큰 방파인 개방의 큰 성좌가 떨어지 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죽음은 십만에 가까운 개방 전체를 진동 시키고도 남을 대사건이었다.


대취신개를 향해 뻗었던 최후의

손속을 거두어 들인 아비객은 바

닥에 즐비하게 쓰러진 거지들을 둘러보았다. 그 중에는 죽은 자도 있었으나 혈도를 짚힌 채 살아 있는 자들도 있었다.

냉혹한 눈으로 스산한 풍경을

둘러보던 아비객이 고개를 들어 하

늘을 바라보았다.

서편 하늘에 붉은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 마 인 제 9 장 역천마검(逆天魔劍) -2 ━━━━━━━━━━━━━━━━━━━━━━━━━━━━━━━━━━━

휙!


황혼에 물든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한 섬세한 인영이 나타났다. 뜻밖에도 그 인영은 한 명의 어린 홍의소녀였다.

"역천마검! 정말 잔인하구나! 이... 이런 살생을 이유도 없이 벌 이다니......?"

너무나 큰 분노로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 있던 홍의소녀가 이를 갈 며 소리쳤다.

아비객은 홍의소녀의 말이 들리지도 다. 단지 허리를

않는 듯 뒤돌아 보지도 않았

굽혀 한 개방 방도의

겉옷을 벗겨낸 후 바닥에

고인 선혈을 찍어 천에 썼다.

<오늘부터 개방의 전 방도들은 본인을 따를 것을 명하노라. 이에 불복하는 자 지옥의 겁화(劫火)에 이르리라.

아비객(我悲客)>

아비객은 선혈로 쓴 글을 한 번 읽어본 후 그것을 개방 총타의 입


구에 걸었다. 이어 그는 뒤돌아 보지도 않고 토지묘를 빠져 나갔 다.

그러나 멀리 갈 수가 없었다. 홍의소녀가 앙칼지게 외치며 따라붙 었기 때문이었다.

"역천마검! 어딜 가느냐? 나의 칼을 받아라!"

낙양에서 개봉부까지 오는 보름 동안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붙 어다니며 호시탐탐 그를 죽일 기회를 노리던 소녀였다.

소녀가 앞을 가로막자 아비객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무심한 눈 길로 소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냐?"

"흥! 내 이름은 설홍지(薛紅芝)다. 그건 왜 묻느냐?"

순간 아비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백성락의 동생이라면 설씨가

아니라 백씨여야 했다. 그런데 자신

을 설홍지라고 소개하지 않는가.


아비객은 곧 담담히 말했다.

"좋은 이름이군, 마치 네 모습과 같은 느낌이야."

아비객은 중얼거리며 소녀를

피해 옆길로 걸어갔다. 순간 설홍지

는 다시 그의 앞으로 뛰어들며 어느새 뽑아들었는지 한 척 길이의 소도(小刀)를 매섭게 휘둘렀다.

"받아라! 원수!"

지는 석양빛을 받으며 소도가 붉은 빛을 허공에 뿌렸을 때였다. 아비객의 얼굴에 문득 놀란 빛이 스쳤다.

원래 설홍지는 무공이라곤 초보 단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그 녀가 펼치는 초식은 놀랍게도 정교하여

강호상에서도 보기 힘든

것이 아닌가?

쐐애액!

소도는 두 갈래로 나누어지며 아비객의 가슴을 순간적으로 찔러왔 다.


'이럴 수가?'

아비객은 내심 놀랐다. 설홍지가 펼친 수법은 바로 개방의 독문절 기인 타마광살수(打魔狂殺手)와 비슷했다. 그것을 느낀 순간 아비 객은 불현듯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설홍지는 숨어서 개방에서 일어난 일들을 지켜본 것이었다. 그리 고 대취신개가 펼쳤던 무공을

눈으로 배워 흉내내고 있는 것이었

다. 만일 그의 추측이 맞는다면 설홍지의 자질은 가히 절세적이랄 수밖에 없었다.

팍!

설홍지의 소도는 정확히 아비객의 명치를 찔렀다.

"악!"

그러나 정작 비명을 지른 것은 설홍지 자신이었다. 그녀는 바위를 친 듯 손목에서 어깨까지 찌르르 울려 하마터면 소도를 놓칠 뻔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비객의 전신은 이미 도검이 불침하는 경지로 단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불속유선을 합친 대천주심법으로 전신이 호신강기로 감싸여 있었다.

거기다 천지동부에서 천지음양과를 복용하였으며 또한 천고의 기 담(奇潭)인 빙천설지에 몸을

담구어 가히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

之體)의 몸이었다.

그러니 설홍지의 칼이 그의 가슴을 찌르는 순간 반탄력을 받아 튕 겨나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설홍지는 소도를 축 늘어뜨 린 채 놀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말했지 않느냐? 네 실력으로는 어떤 무기로도 날 상대할 수 없다 고 말이다."

"흑......!"

마침내 설홍지는 섬섬옥수로 얼굴을 가리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어린애처럼 하염없이 흐느껴 울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설홍지는 문득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곁에 있는 줄 알았던 아비객이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울음을 멈춘 설홍지는

급히 다시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

다. 실로 야무지고 끈질긴 집념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덧 석양이 떨어지고 사위에 어둠이 밀려 들고 있었다. 앞 쪽 에는 희대의 마인 아비객이 걸어가고 뒤에는 천진하기 짝이 없는 미소녀가 뒤쫓아가는 기이한 행렬은 계속되고 있었다.

■ 마 인 제 9 장 역천마검(逆天魔劍) -3 ━━━━━━━━━━━━━━━━━━━━━━━━━━━━━━━━━━━

밤이 깊었다.

한 채의 낡은 산신묘(山神廟)가 나타나자 아비객은 하룻밤 유숙을 위해 그곳으로 들어갔다.


산신묘 안은 산짐승들의 놀이터였는지 매우 지저분했다.

신대(神臺) 곳곳이 썩어가는 음식물과 날짐승의 분비물로 어지럽 혀져 있었다. 그것들을 대충

치워낸 아비객은 대 위에 길게 몸을

뉘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잠에 떨어졌다.

"......!"

아비객을 쫓아 산신묘 안까지

따라 들어온 설홍지는 입술을 깨물

었다. 그녀는 오른손에 아직도 소도를 쥐고 있었다.

토지묘의 허물어진 지붕 위로 쏟아져 들어오는 별빛을 받으며 신 대 위에 누워 있는 아비객의 흐릿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설홍지는 별빛을 피해 어두운 구석에 자리를 잡고 쪼그려 앉았다. 잠시 후 그녀는 아비객이 깊이 잠든 낌새를 보이자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까치발로 아비객에게 다가간 설홍지는 소도를 치켜들었다.

'역천마검! 이 자를 죽여야 해! 내 손으로… 내 손으로.......'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소도를 움켜쥔 그녀의 손은 파르르 떨 리고 있었다. 긴장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설홍지는 이를 앙물고 소도를 움켜쥔 손을 더욱 높이 치켜올렸다. 그녀는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소도를 쥔 손에 모았다.

이제 아비객의 심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소도를 내리꽂는 일만 남

았을 때였다.

'아... 안돼! 난 도저히 할 수가 없어.'

내심 절규처럼 중얼거리던 설홍지가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소도를 거두고 말았다. 그녀는 이어 자신에게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이 자는... 무서운 고수야. 필시 자는 척 할 뿐 실제는 내 행동 을 모두 알고 있을 거야. 홍지야, 좀더 기회를 기다리자.'

그러나 정작 설홍지가 소도를 내려꽂지 못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 다.

반듯이 누워 잠든 아비객의

모습은 평소 냉혹하기만 하던 역천마


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잠자는 모습은 그렇게 평온해 보일 수가 없었다.

특히 준수하기 짝이 없는

아비객의 얼굴을 내려보는 동안 설홍지

의 마음은 이상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짙은 검미(劍眉)와 우뚝한 콧날.

한 일 자로 굳게 다물린 사나이

의 입술은 기이하게도 그녀의 방심(芳心)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비객을 따라다니는 보름 동안 남들이 전혀 발견하 지 못한 무엇을 느낄 수 있었다.

여인의 본능이랄까? 바로 그런 감성이 아비객을 철저히 감싸고 있 는 외로움의 냄새를 진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차츰 그녀는 고독하고 냉혹한

사나이 역천마검을 이해할 것도 같

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겨우 십오 세에 불과한 소녀 설홍지가 말이다.

■ 마

인 제 9 장 역천마검(逆天魔劍) -4


━━━━━━━━━━━━━━━━━━━━━━━━━━━━━━━━━━━

눈부신 햇살이 얼굴을 찌르는

순간 설홍지는 눈을 떴다. 순간 그

녀는 놀라 화다닥 일어났다.

없었다. 분명 산신묘 안에

있었던 아비객이 없어진 것이다. 아무

리 둘러보아도 산신묘 안에는 혼자뿐이었다.

"어... 어디 갔을까......?"

설홍지는 넋나간 듯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웬지 모를 쓸쓸함으로 가슴이 텅빈 듯한 느낌에 그녀는 안색이 창 백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설홍지의 눈이 토끼눈마냥 커졌 다.

자신은 지금 처음 누워있던 곳이 아니라 깨끗이 치워진 신상 위에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

그것을 깨달은 순간 설홍지의 가슴 속에서 뜨겁고 뭉클한 것이 치 솟았다.

아비객을 뒤쫓아 다녔던 보름 동안 몇 번씩이나 그녀는 이런 경험 을 했다. 분명 아비객과 한 객방이나 토굴 따위에서 잘 때 항상 아침에 깨어나 보면 자신이 침상이나 풀더미 위에 곱게 눕혀져 있 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나중에는 아비객이 한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이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 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설홍지는 마음이 감미로워짐을 느꼈 다. 문득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산신묘 밖으로부터 구수한 고기굽는 냄새가 흘러들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설홍지는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밖으 로 뛰어 나갔다.


있었다.

산신묘의 앞마당에서 아비객은 두

마리의 토끼를 통째로 굽고 있

었다. 고기를 굽는 향긋한 냄새가 연기와 함께 퍼져나가며 설홍지 의 허기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설홍지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기실 그녀는 얼마나 배가

고픈지 눈알이 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생각을 더듬어 보니 아비 객을 뒤쫓기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변변한 음식

한 번 먹어본

적이 없었다.

설홍지는 입 속에 주책없이 고여드는 침을 소리내지 않고 삼키느 라고 무척 애를 써야만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여인으로서의 참 을성을 한껏 발휘하며 토끼고기가 다 익을 때까지.

그러나 토끼고기가 채 다 익기도 전에 그녀가 보는 앞에서 아비객 은 마파람에 게눈 것이 아닌가?

"끄윽!"

감추듯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다 먹어치우는


아비객은 트림을 하더니 손에

묻은 기름을 옷자락에 쓱 문지르고

는 일어섰다. 남은 것이라고는 바닥에 흩어진 몇 조각의 뼈다귀뿐 이었다.

설홍지의 얼굴이 온통 붉그락푸르락했다.

"돼지같은 작자!

혼자

처먹다니!

욕심꾸러기! 수전노! 악

마......!"

설홍지는 힘껏 목청을 돋구어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발을 동동 굴 렀다.

그러나 아비객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어느새 그는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비객이 시야에서 멀어져 가자

그녀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놓칠

새라 씨근거리며 그를 쫓아 뛰기 시작했다. 초여름의 태양이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 마 인 제 9 장 역천마검(逆天魔劍) -5 ━━━━━━━━━━━━━━━━━━━━━━━━━━━━━━━━━━━


패도방(覇道幇).

당금 사도무림의 일문이방삼교(一門二幇三敎) 중에 일방인 패도방 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특이하다.

패도방은 이름 그대로 매우 패도적인 집단으로써 사천성(四川省) 을 중심으로 서무림을 지배했다. 그들은 대부분 사파인들로 이루 어져 있었으나 엄밀히 말하면

정(正)도 아니고 사(邪)도 아닌 정

사지간이었다.

그들의 행동에 대한 기준은 단지 자신들의 판단 여부에 달려 있었 다. 그저 자신들이 옳다고 느끼면 정사 흑백을 가리지 않았다. 그 러므로 패도방은 정사인들이 다함께 꺼려했다.

패천무군(覇天武君) 사북(査北).


바로 패도방의 현 방주인 그는 일신에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어 타문파를 위협하고 있었다.

패도혈수공(覇道血手功)과 탈천신무도법(奪天神武刀法).

이 두 가지 무공은 그의 독문절학으로 이미 무림에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패도방은 사천성 공래산의 제왕곡(帝王谷)에 위치하고 있었다.

<천하일문(天下一門) 패도방(覇道幇)>

공래산 제왕곡 내에 커다란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정오 무렵, 패도방의 정문 앞에 일남일녀가 나타났다.

남자는 남삼을 입은 준수하나 냉막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반면 그 의 뒤를 따르는

여인은 일신에 홍의를 입은 불과 십오세 남짓한

소녀였다. 그들은 다름아닌 아비객과 설홍지였다.


"……."

아비객은 '천하일문 패도방'이라 쓰여진 깃발을 무심한 눈으로 바 라보았다.

그들의 출현에 문을 지키던 두 명의

흑의장한은 안색이 변했다.

아비객을 본 순간 여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전신이 싸늘히 얼어 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귀하는... 누구요?"

우측의 흑의장한이 아비객을 가로 막으며 물었다.

"……."

아비객이 대답하지 않자 장한은 분성을 질렀다.

"대체 무슨 일로 찾아 왔소?"

아비객의 대답은 간단했다.

"방주를 만나러 왔다."


"무슨 일로 방주님을......?"

장한이 되묻자 아비객은 무심한 눈빛으로 두 장한을 응시했다.

"너희들은 방주에게 내가 왔다고만 전해라."

"……!"

장한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서운 위압감이 아비객에게서 풍 겨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패도방의 인물들은 설사 천자(天子) 앞일지라도 굴복하지 않는 오기를 지닌 자들이었다.

눈이 퉁방울 만한 장한이 가슴을 펴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소. 이유를 말씀해 주시오."

당당하나 결코 예를 잃지 않는 태도였다. 패도방의 일개 문지기가 이럴진대 패도방의 성세가 중원을

진동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

니었다.

아비객은 비웃음이 담긴 말투로 중얼거렸다.


"용기가 가상하구나."

"......?"

"한낱 패도방의 문턱이 이리도 높단 말인가?"

아비객은 입가에 조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퉁방울 눈을 가진 장한이 덧붙였다.

"당신은 잘못 보았소."

"……?"

"본방은 비록 인원이 많지

않고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지는 않지

만 모두 일당백(一當百)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력을 갖고 있소. 설 사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절대 굽히지 않을 것이오. 당신이 무 턱대고 힘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나온다면 나를 베고 넘어가시오."

장한은 말을 마치고 가슴을 도였다.

쭉 폈다. 실로 당당하기 그지없는 태


장한을 잠시 응시하던 아비객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좋다. 너희들이 마음에 든다."

아비객의 말에 두 장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비객은 다시 말했 다.

"전해라. 나 아비객이 패도방을 왼팔로 삼고자 왔다고 말이다."

"뭣이?"

두 장한은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처음 말했던 장한 은 억지로 화를 눌러 참고 말했다.

"좋소. 기다리시오. 방주님께 당신의 말을 그대로 전하겠소!"

바로 그때였다.

"진요(陣要), 갈 필요 없다!"

웅후한 음성이 울림과 동시에 붉은 목문이 좌우로 활짝 열리며 목 문 안으로부터 한 흑의노인이 당당하게 걸어나왔다.


그는 키가 칠 척이었으며 칠순(七旬)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머리 칼과 수염이 검었다. 두 눈은 흡사 용안을 방불케 했으며 감았다 뜰 때마다 번쩍번쩍 안광이 빛났다. 흑의장포의 가슴에는 금룡이 위엄있게 수놓아져 있었다.

패천무군(覇天武君) 사북(査北).

그는 바로 당금 패도방의 방주였다. 패천무군의 뒤로는 근 오백여 명의 고수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용맹무쌍한 자들 이었다.

"……."

오백인 고수들은 밀물처럼 밀려들며 삽시에 그와 설홍지를 포위했 다. 실로 무서운 기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객은 조금도 위축된 기색없이 오히려 패천 무군 사북을 향해 차갑게 물었다.

"그대가 패도방의 방주인가?"


패천무군 사북은

신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그를 훑어보며 소리쳤

다.

"그대가 바로 역천마검인가?"

"나는 그런 이름은 모른다. 내 이름은 아비객일 뿐이다."

사북은 송충이같은 눈썹을 꿈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역천마검이든 아비객이든 상관하지 않겠다. 이곳에 온 용 건을 말해라."

"패도방을 인수하러 왔다."

아비객의 무심한 어조에 사북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러나 곧 어 이없다는 듯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너의 위세에 노부가 굴복할 것 같은가? 그리고 본방이 그토록 호락호락

하단 말이냐? 너의

찌......?"

아비객은 그의 말을 중도에서 끊었다.

한 마디에 본방이


"내겐 따질 시간이 없다. 내가 믿는 것은 오직 이 두 손뿐이다."

아비객은 자신의 흰 손을 없는 그의 태도에 패도방의

슬쩍 들어 보였다. 실로 오만하기 그지 고수들은 모두 분노의 기색을 드러냈

다.

"으핫핫핫…! 실로 광망하기 그지없는 아이로구나. 노부는 너의 그 높은 기개 만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너에 게는 따끔한 맛을 보여 주지 않을 수가 없구나."

패천무군 사북은 앙천광소를 터뜨리다가 검은 장포를 날리며 앞으 로 나섰다. 그 순간 몇 명의 패도방 고수들이 앞을 다투어 그를 가로막았다.

"방주님! 어찌 닭잡는데 소잡는 칼을 쓰겠습니까? 속하가 나서겠 습니다!"

"속하가......!"

아비객의 무심한

눈빛을 노려보면서 팽팽한 시선을 거두지 않던

사북은 손을 저었다.


"물러들 가라.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다."

패도방도들의 얼굴에 역력히

불만의 빛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

들은 방주의 명령 한 마디에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검은 수염을 날리며 아비객을 노려보던

사북이 웅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노부가 너에게 삼 초를 양보하마. 늙은이가 어린아이를 추궁했다 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그대의 그 오만함이 생명을 단축시키는구나."

아비객의 입에서 차갑고 냉혹한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우수

가 번쩍 허공을 갈랐다. 사북은 눈 앞에 백기가 뻗음과 동시에 무 서운 경기를 느끼며 신형을 날렸다.

일 초는 가볍게 그의 옷자락을 스쳤다. 그 순간 다시 아비객의 좌 수가 나갔다. 전광석화(電光石火). 육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빠 른 공격이었다.


"앗!"

"아......!"

관전하던 패도방 고수들은 아찔한 느낌과 함께 경악성을 질렀다. 그러나 패천무군 사북도 결코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간일발의 차 이로 그는 이 초도 피해냈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당장에 침중해 지고 말았다.

'실수다......!'

그는 내심 후회했다. 아비객을 너무나 얕본 것에 대한 후회였다. 그 후회를 미처 마무리하기도 전에 아비객의 우수가 또다시 일직 선으로 뻗었다. 그 동작에는 일체의 군더더기나 변화조차 없었다. 앞의 두 손속보다도 거의 열 배는 빠른 살초였다.

'끝났다!'

사북은 체념했다. 그 순간 차가운 느낌이 그의 목에 닿았다. 아니 체념보다 먼저 차가운 손이 느껴졌다.

"사북, 삼 초가 끝났다."


조금도 감정이 깃들지 않은

아비객의 냉혹한 음성이 패천무군 사

북의 마음을 때렸다.

사북은 눈을 감은 채 허탈하게 말했다.

"역천마검, 노부가 너의 실력을

과소평가 했구나. 할 말이 없다.

손을 써라."

비록 패자였으나 사북의 태도에는 위축감이나 비굴함을 조금도 찾 아볼 수 없었다. 실로

일방의 주인다운 당당한 태도였다. 아비객

의 검미가 한 순간 꿈틀거릴 때였다.

창! 차창! 쨍!

돌연 사방에서 요란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오백여 패도방도들이 일제히

무기를 빼든 것이었다. 그들은 만면

에 비분의 표정을 지은 채 아비객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 들었다.

장검을 앞세운 한 중년인이 비장하게 말했다.


"방주님! 속하들이 방주님의 원한을 갚아드리겠습니다."

흑삼철심객(黑衫鐵心客) 조비(曹飛).

바로 패도방의 부방주로서 철심을 가진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강팍한 얼굴은 다소 음침해

보였으나 번쩍이는 두 눈이 대쪽같은

그의 성품을 보여주었다.

일말의 동요도 없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던 아

비객이 조비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방주를 구하고 싶지 않느냐?"

눈을 감고 있던 사북이 눈을 부릅뜨며 노갈을 터뜨린 것은 그때였 다.

"역천마검! 노부의 생명으로

희롱할 생각은 마라. 본방의 형제들

은 모두 목을 잘려도 굴복을 모르는 호한들이다."

흑삼철심객 조비는 바닥에 털썩 로 말했다.

무릎을 꿇으며 비분에 찬 음성으


"방주님! 속하들이 무능하여 방주님을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그러 나... 기필코 본방 형제의 최후 일인까지 죽는 한이 있어도 저 자 를 죽여 방주님의 원한을 갚겠습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북이 조비의 말을 들으며 껄껄 웃었다.

"헛헛헛… 조비. 내 오래

전부터 자네를 패도방의 후계자로 생각

했네. 노부가 죽으면 전권을 자네에게 모두 맡기겠네."

"방주님!"

"방주!"

패도방도들은 일제히 울분의 외침을 토했다.

그러나 사나이들의 뜨거운 정이 넘치는 광경조차도 아비객을 감복 시키지는 못했다.

"약속대로 네 목을 취하겠다."

그는 무심하게 말하며 우수를 뻗었다. 그때였다.


"원수! 너는 이 분을 죽이기

전에 먼저 나와의 빚을 청산해야 한

다."

갑자기 설홍지가 앙칼지게 외치며 다짜고짜로 단도를 휘둘러 아비 객의 가슴을 찔러오는 것이 아닌가?

"……!"

아비객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야 말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 는 무수한 고수들과 부딪쳤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의 목숨을 노리 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그를 죽이고

천하제일인의 명예를 얻는 것.

무황 담광현을 죽인 아비객이 당금의

제일고수임이 명백한 이상

그를 죽이면 자연히 최고수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머리만 잘 굴린다면 무황의 자리까지도 넘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야망은 한낱

백일몽이 되고 말았다. 그들 모두 아

비객의 손에 귀중한 생명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지금껏 아비객을 따라 다니는 설홍지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아비객에게 달려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의 초식과 무공이 날이 갈수록 눈부시게 진 보한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아비객에게서 죽어간 고수들의 독문무 공을 눈으로 익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번에 설홍지의 초식은 섬월검법(閃月劍法)으로 섬월신검 악초우 의 독문검법이었다. 악초우

역시 아비객에게 도전했다가 죽은 자

였다.

휙!

아비객은 사북의 목을 치려던 우수를 거두고 신형을 날려 피했다. 그 순간 오백여 패도방도들은 한결같이 놀랐다. 그들이 보기에 홍 의소녀의 무공은 보잘 것이 없었는데도 역천마검이 피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설홍지는 일격이 빗나가자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흥! 왜 피하느냐? 어서 받아랏!"

파파팟!


단검이 일곱 개의 환영으로 펼쳐지며 아비객의 목을 찔러갔다.

칠환검법(七幻劍法).

바로 하남의 제일고수인 칠환검객(七幻劍客) 성명기의 절학이었 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신형을 비튼 아비객이 우수를 가볍게 뻗는 순간 그의 손은 검영을 뚫고 들어가 설홍지의 손목을 나꿔챈 것이었다.

손목을 붙잡힌 설홍지는 앙칼지게 외쳤다.

"원수! 어서 이 손을 놓아라! 그리고 다시 정당하게 싸우자!"

"……."

아비객이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자 설홍지는 화가 머리끝까 지 치밀어 오른 듯 발을 굴렀다.

"싸우기 싫으면 마라! 어서 징그러운 이 손을 놔라!"

아비객은 손목을 놓았다.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선 설홍지는 손목을


주무르며 날카롭게 코웃음쳤다.

"흥! 언제고 널 꼭 죽이고 말 것이다!"

설홍지의 앙칼진 음성은 마이동풍에 불과했다. 어느덧 몸을 돌린 아비객이 사북을 향해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사북, 그대의 목숨을 잠시 보류해 주마."

단 한 마디를 내뱉은 아비객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처음에 왔던 그 자세대로 일정한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비객을 에워싸고 있던 패도방도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며 아비객에게 길을 터 주었다.

멍하니 서서 사라져가는 아비객을 눈으로 뒤쫓던 패천무군 사북의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어느 순간 그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드 러났다.

그는 급히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흑삼철심객 조비가 그 의 뜻을 알아챘다.


"방주님, 방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 말에 오백여 패도방도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방주의 뜻이 곧 그들의 뜻이라는 것을 무언중에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사북은 결심한 듯 멀리 사라져가는 아비객을 불렀다.

"공자! 잠시 걸음을 멈추시오."

"……."

사북의 음성이 메아리가 되어

울리는 순간 아비객은 걸음을 멈추

었다. 그러나 돌아서지는 않았다.

사북은 그에게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공자! 당신이 본방을 거두려는 이유를 듣고 싶소이다."

"그대는 무슨 말을 듣고 싶은가?"

억양없는 아비객의 음성이 사북의 귀에 메아리쳤다.


"공자의 속마음 말이오."

"그대의 목숨을 잠시 보류한다고 했다."

아비객은 그 말만 들려주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광경에 사 북은 대노하여 외쳤다.

"공자! 당신은 본방을 거두지 않겠다는 것이오? 공자는 본방이 그 만한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단 말이오?"

사북뿐만 아니라 조비를 비롯한 패도방도들도 격분했다. 아비객은 그들의 격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심한 걸음걸이를 옮기던 아비객이 입을 연 것은 잠시 후였다.

"그대가 무슨 이유에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난 다만 내 뜻을 따르고 싶다면

알고 싶지 않다.

지금 즉시 모든 제자들을 이끌고 흑

천방(黑天幇)을 쳐라. 그리고 하남의 금위보(金威堡)를 방문하여 본인의 뜻에 따르도록 하라."

"……!"


패천무군 사북을 위시한 패도방의

전 고수들은 그 말에 대경하고

말았다. 흑천방이라면 패도방과 함께 동서의 사도무림을 양분하고 있는 무서운 방파였다. 뿐만 아니라 패도방과 흑천방은 서로 불가 침의 불문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흑천방을 치라는 명이 아비객의 입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더구나 금위보(金威堡)는 어떤 문파인가?

하남성(河南省)의 태두인 소림사의 속가고수들인 사대나한(四大羅 漢)과 인의대협(仁義大俠) 금위신군(金威神君) 공손막(恭遜幕)이 세운 문파로서 가히 철벽의 집단이 금위보였다.

더구나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그들을

아비객의 뜻에 따르도록

만들라니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비객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저만치 사 라지고 있었다.

바로 이때 패천무군 사북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조비

와 더불어 오백여 패도방도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패도방은 오늘부터 공자의 뜻을 받들어 수족이 될 것을 맹세하 오! 앞으로 목숨을 바쳐 명을 충실히 이행하겠소이다."

사북의 음성이 우렁찬 메아리가 되어 산골짝을 울렸다.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패도방은 자진하여 강호의 대 살성 역천마검 아비객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아비객이 그들을 핍박한 것도 아니었다. 모든 일은 그들 스스로가 자청한 일이었다. 실로 범인(凡人)이 이해할 수 없는 괴사(怪事) 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패도방, 즉 사도(邪道)의 한 방회는 역천마검 아비객의 수 중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 마 인 제 10 장 진정한 거마(巨魔) ━━━━━━━━━━━━━━━━━━━━━━━━━━━━━━━━━━━


따가닥… 따가닥…...!

서녕(西寧)에서 북로관문(北路關門)인 기련산(祁連山)으로 향하는 평원을 한 대의 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마차는 두 필의 흑마가 끌 고 있었다.

평원은 조용하기만 했다. 관도를 치달리는 말발굽 소리 만이 천지 를 진동하듯 울릴 뿐이었다.

"……"

일남일녀가 나란히 앉아 있는 마차 안도 조용했다. 다름아닌 아비 객과 설홍지였다.

아비객은 눈을 감고 있었다. 설홍지는 총명하고 아름다운 눈을 뜬 채 계속 아비객을 응시하고 있었다.

따가닥… 따가닥...…!


마차는 일정한 속도로 계속 북으로 달려갔다.

아비객이 이미

반나절 전부터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시종일관

말이 없었다.

설홍지는 그를

따라 삼 개월이나 강호를 유랑했다. 그녀는 마치

아비객의 그림자가 되기로 마음 먹은 것 같았다. 그러나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가 아비객을

계속 따르는 것은 오직 그를 죽

이기 위함이었다.

이미 설홍지는 수십 차례나

아비객의 가슴에 단도를 찔렀으나 번

번이 실패하고야 말았다. 그는 정말이지 바늘 끝 만한 빈틈도 없 는 사나이였다.

"……!"

어느새 수중에 단도를 거머쥔 설홍지는 입술을 터져라 물었다. 그 녀의 동공에 아비객의 관옥같은 얼굴이 크게 확대되어 오는 순간 그녀의 눈시울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준미한 검미(劍眉)와 우뚝 솟은 콧날, 굳게 다물린 입술.


강호 최대의 냉혹한 살인마로 알려진

역천마검 아비객은 너무도

영준했다. 만일 그의 성품만 부드러웠다면 필히 그는 일세(一世) 의 풍류남아로써 숱한 여인의 애간장을

태우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었다.

"흐흐흑......."

문득 설홍지는 단도를 떨어뜨리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 다. 그 순간 아비객의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홍지."

"……!"

입술을 앙다문 설홍지는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잔혹 무비한 사나이 아비객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다니?

그녀는 헛소리를 들은 것이 아닌가 하여 급히 눈을 들어 아비객의 얼굴을 살폈다. 세상에! 헛소리가 아니었다. 어느새 눈을 뜬 아비 객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네… 에?"


설홍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 그렁한 눈을 들며 대답했다.

아비객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노여움이 사라져가던 그녀의 마

음을 진동하게 만들었다. 마치 꺼져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 다.

"왜 나를 죽이지 않느냐? 넌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조금 전 나는 운공(運功) 중이었다. 그때

네가 나를 찔렀더라면 이번에는 성공

했을 것이다."

설홍지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 악적!"

비명같은 절규를

내뱉은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집어들고

아비객의 가슴을 찔러갔다. 그러나 눈 앞이 어지럽다고 느낀 순간 그녀는 그만 아비객의 가슴에 안기고 말았다.

"놔라! 놔…! 이… 냉혈한!"

아비객은 그녀를 굳게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후후… 넌 날 죽일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설홍지는 흠칫 놀랐다.

"왜? 왜 못죽인단 말이냐?"

"왜냐면 너는 나를 좋아하니까."

"뭣......!"

설홍지는 전신을 가늘게 경련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비객의 무정한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설홍지가 급기야는 방 성통곡을 터뜨렸다.

"흐흐흑... 엉엉... 원수... 악적! 차라리 나를 죽여라!"

"널 죽이지 않겠다. 네가 날 죽일 능력이 생길 때까지."


"흐흐흑......!"

설홍지는 그만 넓은 아비객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진한 설움이 담 긴 오열을 터뜨렸다. 한동안 아비객은 그녀를 안고 마차의 흔들림 에 몸을 맡겼다. 때로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공허한 눈은 그대로 무(無), 그 자체였다.

마차는 계속 북으로 달려갔다.

히히히힝!

갑자기 요란한 말울음 소리와 함께 갑자기 마차가 멈춰선 것은 그 로부터 한 시각 후였다. 한 가닥 분노에 찬 외침이 마차 밖으로부 터 들려왔다.

"역천마검! 나와서 목숨을 바쳐라!"

"……."

아비객은 흠칫했으나 곧 일어섰다. 그는 마차의 주렴을 걷고 밖으 로 나섰다. 관도에 발을 내딛는 순간 아비객의 안색은 절로 굳어 지고 있었다.


갈대가 우거진 평원에 가히 로 마차를 포위하고 있는

일천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겹겹으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다

거지들이었다.

다름아닌 개방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칼, 타구봉(打狗棒) 등을 꼬나든 채 원한어린 눈으로 아비객을 노려보 고 있었다.

"……."

아비객은 그들을 둘러본 뒤 시선을 한 곳으로 집중했다.

십결(十結)의 매듭을 맨 한

늙은 거지가 눈에

띄었다. 십결(十

結). 그것은 개방장문인( 幇掌門人)보다도 높은 신분으로서 바로 전대장로(前代長老)임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늙은 거지는 눈썹과 머리칼, 수염이 모두 하얗게 센 일백 살이 넘 어 보이는 노인으로써 눈빛이 물처럼 담담했다. 일견하기에도 절 정의 내가고수로 보였다. 그의 뒤로는 팔결의 거지들이 십여 명 늘어서 있었다.


아비객은 늙은 거지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군가?"

어느 누구에게도 그렇듯 반말이었다. 늙은 거지는 백미를 꿈틀했 다.

"무례하구나. 감히 이 노개에게 반말을 하다니! 이 노화자는 풍운 선개(風雲仙 )라고 한다."

풍운선개(風雲仙 ).

그는 사십 년 전 은거한 개방의 단 한 명뿐인 전대장로였다. 그의 무공은 가히 무림에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이며 개방에서 방주 이 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풍운선개, 그대가 앞을 막은 이유는 무엇인가?"

아비객의 말은 여전히 차갑고 오만했다.

일순 풍운선개의 얼굴에 은은한 분노가 어렸다. 그러나 더욱 분노 한 것은 일천여 명이 넘는 개방의 거지들이었다.


"우우…! 저 놈을 죽여라!"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역천마검!"

그러나 아비객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갈대가 무성한 평원은 개방 거지들이 내지르는 분노성으로 흔들렸 다. 그들의 눈에는 온통 복수심이 타오르고 있었다.

개봉부의 개방총타가 아비객

단 한 명의 손에 쑥밭이 되고 개방

방주인 대취신개 위목천이 그에게 죽음을 당한 사실은 개방 역대 에 걸쳐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모두 조용히 해라."

분노하는 거지들을 진정시킨 풍운선개는 담담하나 노기가 섞인 음 성으로 말했다.

"역천마검, 오늘이 있을 줄을 모르지는 않았겠지?"

풍운선개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아비객이 냉소했다.


"풍운선개, 그대는 개방총타에 걸린 글을 읽지 못했는가? 날 따르 면 살고 거스르면 죽는다는 말을?"

"……!"

풍운선개의 백미가 노기를 인해 푸르르 떨었다. 수양이 극히 높은 그로서도 아비객의 방자무도(放恣無道)한 행실을

더이상을 참아

줄 수가 없었다.

"십절(十絶)!"

"넷!"

풍운선개의 등 뒤에 서

있던 십인의 팔결 제자가 나섰다. 그들은

모두 육순 이상의 안광이 형형한 거지들이었다.

"역천마검을 조사(祖師)의 신위 앞에 바쳐라!"

풍운선개의 노성어린 말에 개방십절은 타구봉을 빼들며 삽시에 아 비객을 포위했다. 그때였다. 풍운선개의 귓전으로 한 가닥 전음이 들려온 것은.


'아미타불! 풍운선개 풍마대협, 빈승은 불각승이오. 아무 말 마시 고 노승의 말을 따라주시오.'

'……!'

풍운선개는 뜻밖의 전음에 안색이 변했다.

불각승. 그는 무림에서 가장 신비한 인물인 무림삼비자 중 일인이 아니던가? 풍운선개는 급히 전음으로 물었다.

'무엇을 따르란 말이오? 또한 귀하가 불각승인지 아닌지 이 노화 자가 어찌 알 수 있소?'

불각승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아미타불… 일단

그를 보내주시오. 그런 다음 풍대협과 만나겠

소.'

'당신을 어떻게 믿소?'

불각승의 탄식이 흘러 들어왔다.


'이 일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렵구료. 아무튼 역천마검 아비 객은 담무황과도 관련이 깊은

자이며 장차 무림의 운명도 그에게

달려 있소.'

풍운선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불각승의 전음

이 계속 들려왔다.

'우선 그를 보낸 후 개방의 제자들을 해산시키고 빈승과 만납시 다. 이것은 무림삼비자의 명예를

거는 일이오. 부디... 아미타

불... 빈승을 믿어 주시오.'

풍운선개는 안색이 몇

차례나 변했다. 다시 불각승의 천리전음이

들려왔다.

'기련산 동서쪽에

하나의 협곡이 있소. 그곳은 예전에는 단장곡

(斷腸谷)이라 불렸소. 그곳에서 만납시다. 모든 것은 그곳에서 얘 기해 주겠소.'

풍운선개는 시선을 돌렸다.

한편 개방십절은 점차 아비객에게 좁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도 불구하고 아비객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아비객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풍운선개의 안색이 급변했다.

'이정제동(以靜制動). 저 자는 이미 최상승의 무학이치에 도달하 고 있다. 싸우면 크게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맞는 이야기였다. 만약

상대방이 그의 생각대로 이정제동의 초절

정고수라면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설사 그를 물리친다고 해도 엄 청난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마침내 풍운선개는 결심했다.

'복수는 차후로도 할 수 있다. 한 번 그를 믿어보자.'

풍운선개는 개방문도들을 향해 사자후를 토했다.

"개방 제자들은 들어라. 모두 이곳에서 퇴각한다."

순간 일천여 명의 개방 거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퇴각이라니!"


"장로님!"

개방십절도 어리둥절하여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풍운선개의 음성 은 단호했다.

"명령이다. 모든 제자들은 각

분타로 돌아가 다음 명령을 기다려

라."

말을 마친 풍운선개가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이럴… 수가…...?"

개방의 모든 인물들은 의혹과 허탈을 금치 못했다. 개방십절도 힘 없이 타구봉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복수를 위해 그들은 수십일 동 안에 걸쳐 천황폭진(天皇瀑陣)이라는 개방 비전의 진법을 피땀 흘 려 연성해왔던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이

오직 역천마검 아비객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듯 어처구니 없게 끝장날 줄 누가 생각이나 했 겠는가?


"너희들은 복수를 포기했느냐?"

아비객의 차디찬 음성이 들렸다.

개방십절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금치 못해 전신을 부르르 떨었 다. 하지만 그들은 힘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가... 가라. 그러나 언젠가는... 널 필히 찢어죽이겠다."

십절의 우두머리가 이를 갈며

울부짖은 것은 아비객이 이미 마차

에 오른 후였다.

두두두…...!

마차는 북쪽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마차가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개방 인물들은 모두 발을

굴렀다. 가슴을 치받는 분노를 억누른 채.

■ 마 인 제 10 장 진정한 거마(巨魔) -2 ━━━━━━━━━━━━━━━━━━━━━━━━━━━━━━━━━━━


단장곡(斷腸谷)은 기련산(祁蓮山) 동서쪽에 위치한 천애의 협곡이 다.

계곡의 양단은 깎아지른 단애(斷涯)로 하늘을 가리고 있고 곡로 (谷路)는 간신히 두 사람이 어깨를 비비며 걸을 정도로 협소했다.

그러나 곡 안으로

들어갈 수록 곡은 점차 넓어지며 넓은 분지를

이루었다.

놀랍게도 분지에는 수십

채의 석전(石殿)이 건립되어 있었다. 질

서정연하게 십방(十方)의 방위에 따라 석전이 건립되어 있고 전면 에는 웅장한 운루가 솟아 있었다.

<천의맹(天義盟)>

문루에는 웅후한 금빛 편액이 걸려 있었다.


밀실.

탁자를 마주하고 세 노인이 마주 앉아 있었다.

다름아닌 풍운선개 풍마와 무림삼비자의 인물인 불각승과 회의(灰 依)를 입은 유생차림의 천면인이었다.

불각승이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풍운선개는 만면에 경악의 빛을 감추지 못한 채 귀를 기울였다.

"당금 무림은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소이다. 풍형도 짐작 하고 있겠지만 거대한 마(魔)의

세력이 서서히 무림을 잠식해 들

어가고 있소. 겉으로는 평화로운 것같지만 이미 혈겁의 조짐은 곳 곳에서 나타나고 있소."

불각승의 말에 풍운선개는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도 알고 있소. 무림

전역에서 개방이라면 가장 소식이 정통


한 문파요. 본방의 관찰에 의하면 최근에 들어 삼교가 활동을 시 작하고 있다는 것이오."

그 말에 천면인이 말을 받았다.

"극락교, 패천교, 혈마교 등이 그동안 칩거만 하다가 갑자기 활동 을 시작한 것은 중대한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오. 풍대협, 그들의 구체적인 활동을 알아보셨소?"

풍운선개는 백미를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극락전은 전부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극히 음사(淫邪)한 문파요. 벌써부터 수백 명의 고수들이 그들에게 납치되어 사라졌소. 소식 에 의하면 실종된 고수들은 극락전의 색(色)의 노예가 되어 서서 히 정혈(情血)을 빨려 죽는다는 것이오."

풍운선개의 설명이 끝나자 천면인이 다시 물었다.

"패천교는?"

"패천교는 대막(大漠)에서 서서히 남하하면서 군소방파를 기습하 여 하나씩 무너뜨리고 있소이다."


"혈마교는?"

"휴! 혈마교는 남만, 즉 묘강(苗疆)에 위치하고 있소. 그들은 모 두 묘인(苗人)들로 이루어진 야만족들로 행동의 잔인함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을 지경이오. 혈마교는 혈마기를 앞세워 이미 광서지방 까지 올라오고 있소."

"아미타불… 중원의 각 파는 그를 좌시하고만 있단 말이오?"

불각승의 탄식섞인 불호에 풍원선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 다.

"휴... 당금의 정파무림은 날이 갈수록 침체 일로를 걷고 있소. 특히 담무황께서 죽은 이후로는 오히려 일문이방삼교 등의 사도세 력이 월등히 신장세를 보이고 있소. 특히 구파일방은 자신들의 안 위만을 생각해 좀체로 움직이려 들지 않고 있어 그들 삼교가 세력 을 뻗는 것을 전혀 막지 못하는 실정이오."

그 말에 불각승은 불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무림의 전도는 암담하구료. 더군다나 아직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거마(巨魔)까지 서서히 준동하기 시작했 으니......."

순간 그 말에 풍운선개는 안색이 변했다.

"거마라니오?"

불각승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풍노시주는 백 년 전 제 구대 무황이었던 환영신마 위지광이 실 종된 이후의 무림정세를 어떻게 보시오?"

"......!"

순간적으로 풍운선개의 안색이 대변했다.

"그... 그대는... 역대 무황들이 실종된 사건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

불각승과 천면인이 동시에 대답했다.


"아미타불... 풍노시주는 역대

무황 실종의 배후에 거마(巨魔)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소?"

"설마…...?"

믿지 못하겠다는 풍운선개의 대답에 천면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풍형, 설마가 아니라 그것은

엄청난 음모요. 어찌 총 십육 명이

나 되는 역대 무황들이 모두 실종될 수가 있단 말이오? 그것은 어 느 한 사람의 가공할 음모임이 틀림없소."

"그... 그럼 대체 누가?"

의아해 하는 풍운선개를 향해 천면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역대 무황 가운데 진정한 흉수(兇手)가 있을 가능성이 크오."

"그... 그럼 바로......?"

풍운선개의 안색이 급변하는 순간 천면인이 물었다.

"짐작이 가는 사람이라도 있소?"


"역대 무황 중

사도인은 단 세 명뿐이오. 무황성을 창설한 천마

사도양과 제 칠대 무황인 천절마군 구양일. 그리고 제 구대무황이 며 가장 먼저 실종된 환영신마 위지광이오."

"......!"

불각승과 천면인이 침묵하자 풍운선개가 말을 계속했다.

"천마 사도양은 이미 삼백 년 전 사람이니 제외되고, 그렇다면 구 양일과 위지광?"

"그 두 사람 중 누가 더 혐의가 짙소?"

천면인의 질문에 풍운선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구양일은 백이십 년 전

스스로 무황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실종

되었고, 위지광은 무황에 오른 지 십 년 만에 실종됐소. 그렇다 면?"

풍운선개는 눈을 크게 뜨면서 확신한다는 듯 덧붙였다.


"천절마군 구양일이 아니겠소."

그러나 불각승과 천면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확실히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소."

"아미타불. 구양일은 성품이 강직하고 직선적일 뿐 그렇게 사악한 위인은 아니었소."

"그렇다면?"

"아미타불. 아무튼 흉수는 구양일과 위지광 두 사람 가운데 한 명 이오."

불각승은 한동안 불호를 외우다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 흉수는 무려 백여 년 간이나 깊이 숨어있다가 최근에 활동을 시작했소. 놀라운 사실은 각

대문파의 주요 인물들, 심지어는 장

문인까지도 가짜 인물로 바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오."

"그, 그게 사실이오?"


풍운선개는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불각승의 다음 말 한 마디에 풍운선개는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아미타불... 불행히도 개방조차

예외가 아니오. 얼마 전 역천마

검에게 죽은 대취신개 위목천도 바로 거마집단이 침투시킨 가짜라 면 풍노시주는 믿겠소?"

"……!"

풍운선개는 완전히 얼빠진 듯 멍한 표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파들도 서서히 그들의 마수에 뿌리째 흔들 리고 있소. 이제는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구별할 수 조차 없 는 실정이오."

"……!"

"아미타불. 무림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한 것 같지만 언제 몰아

칠지 모르는 혈풍에 덮여 있는 상태요."


풍운선개는 백미를 꿈틀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이 단장곡에 있는 천의맹(天義盟)이란 또 무엇이오?"

천면인이 그의 말을 받았다.

"천의맹은 담무황의 뜻으로

우리 무림삼비자가 거마집단에대비하

여 이십 년 전부터 비밀리에 키운 세력이오."

"오, 그런 일이!"

감탄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풍운선개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역천마검과 싸우지 말라는 건 또 무슨 이유요?"

불각승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미타불. 풍노시주는 그 아이가 누군지 알고 있소?"

"......?"

"그 아이는 바로 수명사 담광현, 담무황의 친자요."


"뭐, 뭣이...?"

풍운선개는 한동안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럴 수가? 그, 그가 직접 담무황을 죽였는데... 어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일 수가......?"

풍운선개가 경악하며 더듬거리자 불각승은 괴로운 듯 말문을 열었 다.

"아미타불... 더 묻지 마시오. 거기에는 피치 못할 내막이 있소. 차차 밝혀질 날이 있을 것이오."

무거운 침묵이 세 사람을 짓눌렀다. 잠시 후 천면인이 침묵을 깨 고 입을 열었다.

"풍형. 한 가지 부탁이 있소."

"......?"

"그 아이, 즉 역천마검의 말대로 개방을 그의 손에 맡겨 주시오."


순간 풍운선개는 눈을 부릅떴다.

"이유는?"

"그 아이는 무림의 태풍과 같은 존재요. 이미 패도방이 그 아이의 수중에 들어갔소. 개방이 그 아이에게 들어가면 그 아이는 무림에 거대한 힘으로 등장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거마집단에 잠식당한 다른 문파들과 상대적인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될 것이오."

"......!"

"또한 그 아이는 패도적인 성품으로 인해 정사무림의 공적이 될 것이 틀림없소. 그렇게 되면

깊이 숨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

던 거마가 그에게 손을 뻗을 것이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적의 정 체와 그들의 진정한 실력을 알아낼 수 있지 않겠소?"

"아!"

마침내 풍운선개는 모든 것을 이해하겠다는 듯한 탄성을 발했다.

이제서야 모든

일이 확연히 드러나는 듯했다. 그는 눈을 빛내며


힘차게 말했다.

"좋소. 그런 뜻이라면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본방을 그에

게 맡기겠소."

천면인은 감격하여 굳게 그의 손을 잡았다.

"과연 개방은 의혈인(義血人)들이오. 스스로 지옥에 떨어지기를 수락하니 말이오."

"별 말씀을. 담무황과 무림삼비자의 무림을 위하는 충정에 비할 바가 아니오."

"아미타불......."

불각승은 불호를

외웠다. 세 사람은 뜨거운 정이 어리는 눈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 마 인 제 10 장 진정한 거마(巨魔) -3 ━━━━━━━━━━━━━━━━━━━━━━━━━━━━━━━━━━━


천지산(天地山).

북로의 최후 관문인 옥문관

부근에 위치한 천지산은 사시사철 빙

설로 뒤덮여 있는 곳이다.

중원은 완연한 여름이었으나 천지산의 고봉은 눈과 얼음이 녹지 않은 채 원시의 형태 그대로를 드러내고 있었다.

"헉헉…...."

숨이 턱에 찬

가쁜 숨소리가 빙벽 아래서 들림과 동시에 여인의

머리 하나가 불쑥 솟구쳤다.

다름아닌 설홍지였다.

그녀는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하며 험


준한 천지산을 어렵게 기어오르는 중이었다.

그녀의 앞 오 장

거리에는 아비객이 행운유수같은 신법으로 봉우

리를 오르고 있었다.

"헉헉... 아얏......!"

날카로운 암석에 무릎이 깨지고

손바닥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상

태였으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아비객의 뒤를 따라붙는 것이었다.

그녀는 넘어질 때마다 아비객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원수! 거기 서라! 도망가지 마라!"

앙칼진 그녀의 음성이 산등성이를 울리는데도 불구하고 아비객은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는 계속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천지산으로 오를 뿐이었다.

마침내 설홍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흑흑...! 나는 너를 죽도록 미워한다! 흑흑... 하늘 끝까지 도망 가더라도 쫓아가 죽이겠다."


연거푸 넘어져 옷이 찢기고 피를 흘리면서도 설홍지는 악착같이 쫓아갔다.

여섯 개의 산봉을 그렇게 넘는 동안 그녀의 작은 몸은 완전히 피 투성이가 되었고 의식마저 거의 혼몽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 나 설홍지의 인내는 가히 경세적이었다.

"헉헉... 거기... 서라!"

울음소리가 숨가쁜 호흡소리로 변하면서 심장이 터질 듯이 고통스 러웠으나 설홍지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 누가 십오세 소녀의 인내와 의지가 이토록 굳으리라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정말 대단한 소녀로군.'

아비객도 속으로는 놀랐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얼마나 올랐을까? 아비객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아비객의 검미가 살짝 일그러졌다.


설홍지가 한 암석에 걸쳐진 채 의식을 잃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 문이었다.

그는 신형을 날렸다. 이어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듯 가볍게 설홍지 를 옆구리에 낀 그는 창허답파의 절정 경공술로 단숨에 십여 개의 봉우리를 넘었다.

마침내 그가 찾는 절벽이

나타나자 아비객은 땅으로 떨어져 내렸

다. 절벽 중간쯤에 덩굴로 가려진 동굴이 보였다.

'천지동부(天地洞府). 다시 보게 되었구나.'

아비객은 절벽 아래에서 잠시 감회에 젖었다.

다음 순간 그는 비조처럼 뛰어올랐다.

■ 마 인 제 10 장 진정한 거마(巨魔) -4 ━━━━━━━━━━━━━━━━━━━━━━━━━━━━━━━━━━━


"으음......."

설홍지는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그녀는 변한 환경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돌리 던 그녀는 동굴 한 쪽에 앉아 있는 아비객을 발견하자 와락 달려 들었다.

"이 원수야! 널 죽이고 말겠다!"

그녀는 작은 주먹으로 아비객의 가슴을 쿵쿵 때렸다.

아비객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앉은 채로 설홍지의 주먹 세례를

묵묵히 견디어 냈다.

어느 순간 그의 무심한 듯한 리기 시작했다. 아비객은

눈에 서서히 뽀얀 안개같은 것이 서

설홍지를 끌어 당기더니 가볍게 손가락

을 튕겨 마혈(魔穴)을 제압했다.


"……!"

아비객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드는 순간 설홍지는 얼굴을 붉히며 당 황했다.

"너… 너… 이

도둑 놈! 날 내려 놔라!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다

니!"

아비객은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안은 아비

객은 동굴 안으로 깊숙히 걸어 들어갔다. 동굴 안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첫 번째 석벽에 당도하자 그는 즉시 손을 뻗었다.

우르릉!

석벽이 좌우로 열렸다. 이어 여러 개의 석벽이 차례로 그의 손짓 에 따라 열렸다.

마침내 천지동부(天地洞府) 안으로 들어선 아비객은 장방형의 석 부의 바닥에 설홍지를 내려놓았다.


"원수! 이곳이 어디냐?"

설홍지는 겁에 질린 채 사방으로 눈을 굴렸다.

"이곳은 사백 년 전 기인인 천지상인이 남긴 천지석부다."

"천지석부?"

설홍지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아비객은 감정이 깃들지 않은 음 성으로 계속했다.

"이 석부의 사방 벽에는 사백 년 전의 천하 각 문파의 비전무공들 이 수록되어 있다. 널 이곳에 두고 나가겠다. 대신 이곳의 석문을 봉쇄하여 이곳의 무공을 익힌 후 네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가도 록 하겠다."

"......!"

순간 설홍지의 얼굴은 의혹과 경악으로 가득찼다.

"네 이름이 설홍지니 백성락과 친혈육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나 네가

진정으로 그의 원수를 갚고 싶다면


이곳에서 무적의 무공을 익힌 후 나와라. 그때 너의 도전을 받아 주마."

설홍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유는 없다. 단지 나는 무공을 모르는 너의 도전을 받아줄 수가 없다. 차후 실력으로 내가 죽는다면 원망하지 않겠다."

설홍지의 눈에 갑자기 뽀얀 안개가 어렸다.

"도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아비객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나? 나 역시 내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런데 어찌 네가 알

수 있겠느냐?"

말을 끝마친 아비객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몇 군데 혈도를 짚었다.


"지금부터 나는 천지개혈대법(天地開穴大法)으로

너의 전신 경맥

을 틔워주고 아울러 생사현관까지 뚫어 주겠다. 또한 도가(道家) 의 비공인 선천태을심법(先天太乙心法)을 전수하겠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너의 마음에 달려 있다."

설홍지가 의혹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자 아비객은 냉담하게 덧붙였 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너는 주화입마에 걸려 평생 불구가

될 것이다."

설홍지는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열었다.

아비객은 설홍지의 아혈(啞穴)을 재빨리 찍고는 그녀의 옷을 벗기 기 시작했다.

"앗!"

설홍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비명은 그저 목구멍

안에서만 맴돌았다. 더구나 혈도가 짚혀 몸을 움직일 래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스르륵! 하는 경미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작은 몸을 에워싸고 있

던 홍의가 벗겨지는 순간 빙결처럼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십오 세 소녀의 알몸은 순결무비한 미를 발산했다.

유리같이 매끄러운 피부는 마치 눈처럼 희었다. 젖가슴은 이제 막 봉우리를 맺기 시작하여 익지 않은 복숭아를 연상케 했다.

한 손에 덮힐 정도로 소담한 젖가슴 상단부에 맺힌 작디작은 열매 는 연분홍 빛으로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어 매끄러운 아랫배와 쭉 뻗은 두 다리는 인어(人漁)를 연상케 했다.

뿐인가? 여인의 비소(秘所)에는 이제 막 초림이 자리를 잡기 시작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깨끗한 나신이었다.

'이, 이럴 수가......!'

지독한 모멸감과 수치감에 설홍지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타인에게 보인 적이 없는 소녀의 깨끗한 몸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한 사나이 앞에서 그것도 적나라하게 알 몸을 보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때였다. 그녀의 알몸 위에

두 개의 달군 쇠처럼 뜨거운 손바닥


이 접촉되었다.

'아악!'

설홍지는 내심 비명을 질렀다. 아비객은 눈을 감은 채 전신에 선 문(仙門)의 선천삼양진기(先天三陽眞氣)와 선천태을강기를 끌어올 린 후 공력을 두 손바닥에

모은 채 서서히 설홍지의 전신 삼백육

십오대혈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천지개혈대법.

이것은 공력이 삼 갑자(三甲子) 이상인 시술자가 전신의 내력으로 상대방의 전 혈맥을 문질러 경혈을 틔게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쓰면 피시술자는

탈태환골할 뿐만 아니라 즉시 일갑자

(一甲子)의 내공을 얻을 수 있고, 생사현관이 타통되는 반면 시술 자는 일시지간 커다란 내공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서서히 아비객의 전신은 자색 기류에 감싸였다.

그는 자색 기운에 싸인 채

쉬지 않고 두 손바닥으로 설홍지의 나

신 구석구석을 문질렀다. 그때마다 설홍지는 뜨거운 불길이 온 몸


을 지지는 듯한 고통에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내가 하는 구결(口訣) 대로 진기를 유도해라. 선천태을심법은 곧 현문(玄門) 정종심법으로 태극일원(太極一元)에서 출발한다. 중루 에서 시작하여 양팔소음경(陽八小陰經)에서 십이경락을 거쳐 호흡 을 임, 독맥으로 유도해라."

"……!"

설홍지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는 수치감이나 분노같은 것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전신이 화로에 빠진 듯 뜨거운 고통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체내로 터질 듯이 뜨겁고 충만한 기가 밀려들어 그를 다스 리지 못하면 전신이 폭발할 수 없이 그녀는 아비객이

것만 같은 위기를 느꼈다. 결국 어쩔 일러주는 대로 진기를 유도하기 시작했

다.

그러자 놀랍게도 엄청난 양의 열류가

단전에 모이더니 노도처럼

전신혈맥을 통과하여 체내를 도는 것이 아닌가?


열류는 삽시간에 십이 회를 반복했다.

쾅!

한 순간 설홍지는 고막이 터지는 듯한 폭음을 느끼며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설홍지가 의식을 잃는 순간 아비객은 그녀의 나신에 서 두 손을 떼었다.

그의 안색은 백납같이 창백했다. 뿐만 아니라 몸을 감싸고 있던 자무조차 보이지 않았다. 진기를 극심히 소모한 까닭이었다.

아비객은 곧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머리 위에 청홍백자(靑紅白紫)의 네 가지 환이 떠올 랐다. 이어 그것은 곧 그의 콧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후욱! 후욱......!"

그의 가슴이 기복을 일으킴과 동시에 네 종류의 환은 다시 뱉어지 고 또 흡입되기를 거푸 반복하기 시작했다.

천지무무심법(天地無無心法).


천지상인이 남긴 고금미증유의 개세심법이 펼쳐진 것이었다. 토납 을 계속하는 순간 아비객의 몸은 앉은 채로 점차 허공으로 떠올랐 다.

부공삼매(浮空三昧).

그것은 전설적인 무학경지였다.

한참 후 아비객의 전신은 눈부신 오색광채에 가려졌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

그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은 무심(無心) 바로

그 자체였다. 그의 눈에는 아무런 광

채도 없었다. 그저 물처럼 담담하고 고요할 뿐이었다.

■ 마

인 제 11 장 봉녀(鳳女)의 사랑


━━━━━━━━━━━━━━━━━━━━━━━━━━━━━━━━━━━

아비객이 절정의 경공술로 계곡을 치달려 내려올 때였다.

"멈춰욧!"

낭랑한 교음이 들리는 순간 한 줄기 백영(白影)이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나타난 인영은 절세의 백의 미녀였다.

뜻밖에도 그녀는 과거 빙천설지에 나타나 자신의 순결을 빼앗기며 아비객을 구했던 미녀였다.

그녀의 이름은 설봉정(雪鳳情).

그녀를 보는 순간 아비객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가물가물한 기 억 속에서 그의 몸 밑에 깔려 몸부림치던 얼굴이 그때서야 확연하 게 되살아났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비객은 냉담했다.

"무슨 일인가?"

감정이라곤 일점도 들어있지 않은 아비객의 질문에 설봉정의 상큼 한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반가움과 미 움,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아비객."

"아…비객?"

설봉정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괴이한 이름 때문이었다.

"용건은 그것뿐인가? 본인은 바쁘다. 그럼…..."

틈을 주지 않고

아비객이 몸을 돌리자 설봉정은 급히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녀는 앵두빛 입술을 깨물더니 품 속에서 한 장의 손수건을 펼쳐 보였다. 한 마리의 백봉이 수놓아져 있는 비단 손수건이었다.

"당신은 이 손수건을 본 일이 있겠지요?"

아비객의 검미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곧 담담히 반문했다.

"그것과 본인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뭐예요?"

순간 설봉정의 안색에 핏기가

싹 걷혔다. 입술을 악문 그녀의 표

정이 냉랭하고도 살벌하게 변했다.

"네… 네가 감히 이것을 보고도 모른 척 하다니…...!"

그녀는 아비객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비객의 눈에는 아 무런 감정도 깃들여 있지 않은 듯 했다.

마침내 설봉정의 두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진 순간 그녀는


앙칼지게 외쳤다.

"이 파렴치하고 비열한 인간! 내 너를 죽인 후 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받아랏!"

설봉정은 날카롭게 일갈하며 옥장을 뻗었다.

우웅!

그녀의 장심이 투명하게 변하는가 싶자 뼛골을 쑤시는 듯한 한기 와 함께 백기가

뻗었다. 다름아닌 빙혼신공(氷魂神功)이었다. 빙

혼신공에는 슬쩍 스치기만 해도 그 즉시 전신의 피가 얼어붙어 죽 는 무서운 위력이 숨어 있었다.

아비객은 빙혼신공의 위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자리에 선채 가

볍게 우수를 뻗어냈다. 그때였다.

"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했다. 우수 끝으로부터 전신이 얼어 붙을 듯한 한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호호호! 네놈이 감히 빙혼신공을 얕보다니 크게 당할 것이다!"

설봉정은 차갑게 웃으며 즉시 쌍장을 떨쳤다.

파파팟!

한 쌍의 옥장이 마치 수천 개의 눈송이같은 백기를 날려왔다. 더 는 맞고 있을 수가 없다고 판단한 아비객은 빙글 신형을 회전시키 며 좌수를 뻗었다.

위잉!

탕마참백인수의 백기가 칼처럼 뻗었다.

콰쾅!

사방으로 소용돌이가 일며 희뿌연 서리가 방원 오 장을 뒤덮었다. 소용돌이의 위력은 대단했다. 찰나지간 아비객은 뒤로 한 걸음, 설봉정은 세 걸음 물러났다.

한 걸음 뒤로 밀린 아비객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좌수는 물 론 어깨까지 얼어버린 듯한 심한 냉기 때문이었다.


"죽어랏!"

설봉정이 또 한 번 야멸차게 외치며 교구를 어지럽게 날려 공격해 들어왔다. 그녀의 신법은 표표히 나부끼는 눈송이를 연상케 할 정 도로 어지럽고 변화일변했다.

설봉정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아비객은 좌우수를 번갈아

뻗어냈다. 그러나 설봉정의 신법은 영활무쌍하여 좀체로 잡을 수 가 없었다.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휙!

아비객은 갑자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 순간 창공에 떠있던 두 마리 흑응이 쏜살같이 내려오더니 흰빛을 떨어뜨렸다.

흰빛이 아비객과 교차된 순간 눈부신

백광이 천지를 가로지름과

동시에 싸움은 끝나고 말았다. 어느 틈엔가 마검장도의 끝이 설봉 정의 하얀 목줄기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설봉정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마검장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조차 보지 못했다.

단지 자신의 빙혼신공의 틈이

벌어졌다 싶은 순간 어느새 목줄기

가 섬뜩한 것만 느꼈다. 그러나 설봉정은 이내 분노성을 지르며 목을 마검장도 앞으로 내밀었다.

"차라리 나 설봉정을 죽여라! 죽여!"

바로 그 순간 아비객은 흠칫 놀라 마검장도를 거두었다.

찰나지간 설봉정의 아름다운 눈에 한 가닥 희열이 스쳤다. 그녀는 코웃음치며 추궁했다.

"흥! 왜 검을 거두는 거지? 양심이 찔리기라도 한단 말이냐?"

아비객은 허공으로 마검장도를 던지며 담담히 말하고 뒤로 물러났 다.

"그대가 내 목숨을 한 번 구해주었으니 나도 빚을 갚는다."


"흥! 네놈에게 목숨을 구걸받고 싶지는 않다! 죽여라!"

설봉정은 앙칼지게 외치며

무작정 육탄으로 아비객에게 달려들었

다. 그 바람에 뒤로 물러서던 아비객은 엉겁결에 그녀를 안은 꼴 이 되고 말았다. 설봉정은 내처 육탄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한동안 중심을 못잡고 비틀대던 아비객이 그녀를 안고 뒤로 벌렁 넘어졌다.

"어서 날 죽여라!"

설봉정은 두 주먹으로 마구 아비객의 몸을 때렸다. 설봉정의 육체 아래 깔린 꼴이 되버린 아비객은 빠져나오지도 못하면서 싸늘하게 호통쳤다.

"무슨 짓이냐? 죽고 싶은가?"

"흑흑… 죽여요! 죽여!"

갑자기 설봉정은 흐느끼며 계속 아비객을 두들겼다.

설봉정이 다시 손을 드는 순간 재빨리 신형을 빼낸 아비객이 설봉


정을 깔아 눕혔다. 아비객은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마침내 아비객의 육체 아래 깔리게 된 설봉정이 눈물을 펑펑 쏟았 다.

"흐흐흑......!"

아비객은 밑에 깔린 여인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따지고 보면 그녀 는 자기 때문에 희생당한 가련한 여인이

아닌가? 그가 침묵하자

설봉정은 크게 흐느끼며 머리로 그의 가슴을 받았다.

"당신은 왜 나를 죽이지 않지요? 흑흑... 왜...? 난 살고 싶지 않 아요. 살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아비객의 육체에 깔린 채

설봉정은 흐느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

다.

문득 기분이 이상해진 아비객이 그녀의 어깨를 누른 손을 떼었다. 그 순간 설봉정이 막무가내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아비객의 가 슴으로 파고 들었다. 그녀는 오열을 터뜨렸다.

아비객은 멍청해지고 말았다.


뭉클한 여인의 육체가 가슴을 압박해 들어오는 순간 그는 아무 것 도 판단할 수도 결정을 내릴 수도 없었다.

설봉정이 고개를 들며 눈물 그렁한 눈으로 물었다.

"당신… 정말

당신에게는 한 방울의 따스한 피조차 없단 말인가

요?"

아비객은 시선을 내려 설봉정을 응시했다. 눈물이 흘러내린 얼굴 은 한 송이의 백합이었다. 붉은 입술은 살짝 벌어져 하이얀 치아 가 드러났다.

천지산에 석양이 기울며 붉은 황혼이 깔렸다. 황혼에 물든 여인은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었다.

"아름답군."

아비객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설봉정의 눈에 기쁨의 빛이 번졌다.

"당신... 그 말이 정말이에요?"


"그렇소."

아비객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는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덧붙였다.

"나는 눈에 보이는 사물 그대로를 얘기했을 뿐 다른 뜻은 없소."

그 순간 설봉정은 그의 품에 바짝 매달렸다.

"아무래도

좋아요. 어쨌든

당신이

미워하지만 않는다

면......."

설봉정은 정열적으로 자신의

육체를 아비객에게 밀착시키며 흥분

으로 가늘게 몸을 떨었다.

아비객은 가볍게 전율했다. 그도 뜨거운 피를 가진 젊은이었다.

성숙한 여인, 그것도 절세미녀가 그의 품에 밀착돼 오는 감촉은 그에게 한 가닥 욕망을 불러 일으켰다. 아비객은 우수를 뻗어 설 봉정의 나긋한 허리를 억세게 휘어 감았다.

"후회할 것이오."


"아음."

설봉정은 야릇한 신음을 발하며 더욱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결코 후회하지 않아요. 당신의 사랑을 얻을 수만 있다면요."

설봉정은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단풍같은 입술이 사나이 의 뜨겁고 난폭한 입술에 덮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비객은 설봉정의 입술을

깊이 빨아들였다. 설봉정은 자신의 모

든 혼이 빨리는 것을 느끼며 혀를 허용했다.

"아아."

그녀의 육체는 쉴새없이 뜨거운 사랑의 갈망으로 타올랐으며 아비 객의 손이 그녀의 백의를 벗겨낼 때마다 더욱더 뜨겁게 타올랐다.

천지산은 황혼일색으로 물들어 갔다. 물들어가는 황혼 속에서 두 남녀는 서로의 육체에 탐닉해 들어갔다. 마침내 막 건져올린 고기 처럼 퍼득이는 설봉정의 나신 아부었다.

위에 사나이는 뜨거운 불기둥을 쏟


남녀의 간헐적인 신음 소리가 다. 마침내 완전히 두

야성의 세계 속에 뜨겁게 고조되었

육체가 하나로 합일되었을 때 우주는 멎고

삼라만상조차 숨을 죽였다.

■ 마 인 제 11 장 봉녀(鳳女)의 사랑 -2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길고 긴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설봉정은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 조금 전에 맛보았던 행복은 환상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녀가 깨어났을 때 그 행복은 이미 현실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환상은 아니었다.


그녀는 낯선 동굴 속에 누워 있었다. 뿐인가? 설봉정의 슬프게도 아름다운 나신은 아무렇게나 갈대짚 위에 방치되어 있었다.

"갔구나. 그 사람은…...."

설봉정은 자신의 서글프도록 아름다운 나신을 내려보며 중얼거렸 다.

두 번째 정사(情事)였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당했다. 그러나 두 번째는 그녀 스스로가 원했던 정사였다.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에 는 지난 밤의 뜨거웠던 사나이 아비객이 남겨놓은 얼룩진 흔적이 있었다.

설봉정은 자신의 하얀 허벅지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사라졌어. 그리고 난 다시 혼자가 되었어."

아비객은 그녀를 동굴 속에 남긴 후 잠든 사이 사라진 것이다. 물 론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았다.

설봉정의 머리에는 냉막하나 영준한 아비객의 영상이 떠올랐다. 미워할 래야 미워할 수 없는 사나이였다. 그를 떠올리자 설봉정의


입가에는 한 가닥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이렇게 중얼거 렸다.

"그래, 그이를 찾아가는 거다. 나 설봉정은 하늘 끝 땅 끝이라도 그 사람이 있는 곳이면 쫓아가겠다."

설봉정은 백의를 걸치기 위해 일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아야!"

그녀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아랫배를 움켜쥐고 주저 앉았다. 불현 듯 그녀의 얼굴이 도화빛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이 아픔은… 그가 남긴 것......!'

설봉정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중원으로 가자. 어차피 그곳에서 가문의 원한도 갚아야 하지 않 는가?'

설봉정.


그녀는 원래 강호의 명문인 단봉문(丹鳳門) 출신으로 단봉문주 철 선수사(鐵扇秀士) 설한비(雪寒飛)가 그녀의 부친이었다.

그런데 오 년 전 단봉문은 사파의 강대한 문파인 혈검문(血劍門) 의 기습으로 무너졌다. 혈검문주 마심혈검(魔心血劍) 초예랑(草猊 狼)이 그녀의 모친인 단봉성녀(丹鳳聖女) 화미향(花美香)의 미색 을 탐내 벌어진 참극이었다.

결국 철선수사는 처참하게 사지가 잘려

죽고 단봉성녀 화미향도

마심혈검에게 유린당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설봉정은 당시 우물 속에

숨어 있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

리고 그녀는 채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모친 단봉성녀에게 한 가지 뜻밖의 사실을 듣게 되었다.

혈검문이 단봉문을 친 것은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철선수사가 우연히 천지산 부근에서 전설의 무학인 빙혼신 공(氷魂神功)과

빙백강(氷魄 )이 수록된 빙백진경(氷魄眞經)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마심혈검 초예랑은 원래

철선수사와는 동문 사형제였다. 즉 그가

사형인 것이다. 그는 사제가 빙백진경을 얻은 소식을 듣고는 단봉 문을 친 것이었다. 그리고 평소에 탐하던 단봉성녀까지 범한 것이 었다.

설봉정은 그 후 입술을 깨물며 빙백진경을 갖고 천지산으로 왔다. 그리고 그녀는 천지산 정상의 빙천설지수에 몸을 담그고 복수를 위해 주야로 빙백진경을 익혔던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아비객을 만나

그에게 어처구니 없게 순결을 뺏기

게 된 것이었으니.......

'가자! 중원으로, 혈검문을 무너뜨리고 그 사람을 야.'

설봉정은 입술을 깨물며 동굴을 나섰다.

휘익!

그녀는 경쾌한 신법으로 천지산 아래로 사라져 갔다.

찾아가는 거


■ 마 인 제 11 장 봉녀(鳳女)의 사랑 -3 ━━━━━━━━━━━━━━━━━━━━━━━━━━━━━━━━━━━

삼백 년 전 무황성이 건립된

이후 최악의 혼란이 당금 무림을 혈

풍 속에 휘몰아 넣었다.

혈우성풍(血雨腥風)이라고 했던가? 곳곳에서 피바람이 일어났다. 중원의 각처에서 군소방파들이 속속 궤멸되었다. 그러나 그 원인 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혈우성풍의 와중에 삼교(三敎), 즉 사파세력 중

가장 신비 속에

가려져 있던 극락교, 패천교, 혈마교 등도 차츰

그 마수를 뻗기

시작했다.

특히 음탕한 무리들로 이루어진 극락교는 수많은 음행(淫行)을 벌 이며 강호의 수많은 미남미녀, 그리고 고수들을 납치하기 시작했


다.

게다가 패천교가 사파세력 중 가장 강대하다는 혈검문(血劍門)을 제압하고 무림독패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묘

강의 야인들로 이루어진 혈마교는 점차 북상하면서 끔찍한 혈겁을 일으켰다.

이들 삼교의 활동은 전 무림에 온통 긴장과 공포를 불러 일으켰 다. 그런데 최근 들어

무림을 경동시키는 또 하나의 대사건이 일

어났다.

그것은 사파의 이방(二幇) 중 하나인 패도방(覇道幇)의 예상치 못 했던 행동이었다.

패도방이 그동안 상호불침(相互不侵)의

관계를 맺고 있던 흑천방

(黑天幇)을 공격한 것이었다.

실상 패도방과 흑천방은 동도(同道)에 속했을 뿐더러 서로 간에 비슷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로의 세력권을 유지하 며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패도방이 흑천방을 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무림을


온통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두 방회의 싸움은 그 결과를 차치하 고 무림에 피의 폭풍을 예고했던 것이다.

싸움의 결과는 패도방의 승리였다. 미처 공격을 예상치 못했던 흑 천방은 패도방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패도방의 혈보(血步)는 제 이보를 내딛은 것이었다. 두 번째 혈보 는 하남성 쪽이었다. 하남 무림에서 정파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은 금위보(金威堡)였다.

패도방은 두 번째 목표로 금위보를 겨냥한 것이었다. 패도방과 금 위보의 격돌. 그것은 본격적인 정도무림과 사도무림의 충돌이었 다.

결국 금위보(金威堡)도 패도방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패도방의 혈보는 잠시도 멈출 줄을 몰랐다. 흑천방, 금위보에 이 어 여세를 몬 패도방은 수많은 군소방파를 쳐 그들을 굴복시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혈세무림의 서막(序幕)에 불과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 가?

중양절이 가까와지는 구월 초순

무렵 전 중원무림을 송두리째 뒤

흔드는 대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그 사건은 뜻밖에도 개방( 幇)에서 벌어진 것이다.

개방( 幇)이라면 수천 년 무림사를 통해 언제나 정의롭고 의기에 찬 문파로 알려져

있었다. 단 한 번도

개방이 악의 힘에 무릎을

굽힌 적이 없었다.

그런 개방이 마침내 면면한 전통의 기를 꺾고 무림의 대살성(大煞 星) 역천마검(逆天魔劍)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개방의 변절. 이 사건은 전 무림을 경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개방 이 역천마검의 수중에 넘어간 것은 구파일방은 물론이요, 전 정도 무림의 바탕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었다.

기개있는 영웅호걸들은 이 통한의 사실에 발을 구르고 주먹으로


땅을 쳤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저 속수무책일 뿐이었다.

............

무림을 일대 혈풍으로 몰아넣은 아비객은 태산 성인봉에 있었다.

그는 지금 과거의 화려하고

웅장했던 영화와 권력의 주체였던 무

황성에 와 있었다. 무황성은 텅 비어 있었다.

"……."

아비객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황성의 후원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작은 무덤이 여러 개 있었다. 웬지 쓸쓸하고 음산한 느낌을 주는 무덤들이었다.

그 무덤은 과거 수명사

담광현이 스스로 죽인 자식들의 무덤이었

다. 그러나 아무런 비문도

세워져 있지 않아 아비객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다만 그는 기이하게 마음을

잡아끄는 작은 무덤들을 바라보며 멍


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왜지? 이 무덤들이 내 마음을 잡아 당기는 느낌을 주는 것은?'

운명이란 기이한 것이다.

아비객은 무덤 속의 어린

생명들이 자신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었으나 직감적으로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었다.

텅 빈 무황성의 후원에 비석도 없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는 무덤 들. 무황 담광현이 죽은 이후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어 잡초가 무 성하게 뒤덮여 있는 무덤들을 바라보는 아비객의 마음은 쓸쓸하기 만 했다.

이때였다. 문득 그의 등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 가? 아비객은 빙글 돌아섰다.

인자하게 생긴 한 명의 선비노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본 순 간 기이하게도 아비객의 피가 끓었다.

"공자, 그 무덤들이 누구의 것인지 아는가?"


아비객에게 가까이 온 노인이 잔잔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비객은 눈썹을 모으며 반문했다.

"그대는… 누구?"

"허허… 이 늙은이는 담광수라고 하네."

담광수.

담광현의 아우이자 아비객에게는 숙부가 되는 사람이었으나 물론 아비객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담광수? 그럼 수명사 담광현과…...?"

아비객은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 분은 노부의 형님이네."

아비객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는 담광수를 노려보며 물었다.

"복수하러 왔소?"


담광수는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자네는 이 늙은이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다고 보는가? 또 설사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노부는 자네에게 복수할 입장이 못 되네."

아비객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담광수에게서 그는 조금의 적의도 느낄 수 없었다. 담광현의 아우라면 그와는 철천지 원수가 되어야 하거늘 아무런

증오나 한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

다.

아니 도리어 그는 처음

보는 담광수에게서 이상한 친근감을 느꼈

다. 그것을 느낀 순간 아비객은 심금이 떨리는 것을 금치 못했다.

'담무황을 처음 보았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이때 담광수는 기이한 눈빛으로 무덤들을 둘러 보며 물었다.

"자네는 이 무덤들이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

아비객이 대답하지 않자 담광수는 말을 이었다.


"이 무덤들은 모두 크기가

같네. 그리고 그 흔한 묘비조차 없지.

그것은 이 무덤 속의 주인들이 채 이름 석 자를 갖기도 전에 죽었 기 때문일세."

"……."

아비객은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담광수의 말이 계속되었다.

"이 무덤 속에는

모두 태어난 지 불과 하루도 지나기 전에 죽은

어린아이들이 묻혀 있네. 그들은… 모두 무림의 평화를 위해 희생 되었지."

아비객의 안색이 묘하게 변했다.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아이들이 무림의 평화를 위해 죽었다

고?'

이때 담광수는 서서히 걸어 제일 끝에 있는 무덤 앞에 섰다. 담광 수는 떨리는 손으로 무덤을 쓰다듬었다.

"특히… 이 아이는 무림을 건지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


서 대신 죽었지."

"......?"

일순 강한 의혹과 기이한 떨림이 아비객의 가슴을 쳤다. 아비객은 무덤을 바라보고 있었다.

"훗날 무림에 평화가 도래하면 이 무덤은 크게 중흥되어야 할뿐더 러 거대한 공적비를 세워 온 무림인이 우러러 보게 해야 할 것이 네."

그 말을 하는 담광수의 노안에는 뿌연 안개가 서리고 있었다. 아 비객이 물었다.

"그 아이들은 누구의 자식들이오?"

담광수의 젖은 노안이 아비객을 응시했다.

"수명사 담광현의 자식들일세."

"다... 담광현의 자식들이라고?"


뒤통수를 쇠뭉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아비객을 덮쳤다.

"그렇다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모두 담광현 스스로가 죽였지."

"왜? 무엇 때문에 자신의 자식을 죽였단 말이오?"

아비객이 놀라 물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었다. 세상에 자식을 죽이는 아비도 있단 말인가? 비록 무림에서 희대의 마인으로 불리 는 역천마검 아비객이었으나 이 말에는 놀라마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아비객, 그대는 세상에서 어떤 종류의 일은 전혀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해하겠는가?"

"......?"

"형님께서는 역대 무황의 위를 계속 지키면서 무림에 근 백 년 동 안이나 가공할 마(魔)의 음모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셨네. 그 음모의 주동자는 바로 제 십대 무황부터 이십오대까 지 총

십육 명의 무황을 납치해간 장본인이기도 하네. 형님께서

무황성에 뛰어든 것도 바로 그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서였네."

"……!"


아비객의 안색은

무겁게 굳어졌다. 담광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자네는 형님과 나... 우리

담가(覃家)에 얽힌 얘기를 듣고 싶지

않은가?"

순간 아비객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담광수에게서 그는

이상한 예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며 침묵하던 아비객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것을 내게 들려주려는 이유는 무엇이오?"

"이유는 없네. 다만 그렇게 하고 싶을 뿐."

"그럼 얘기하시오."

아비객의 말에 담광수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성내로 들어가 얘기하세. 성내에는 깨끗이 치워진 형님의 거실이


있네."

그가 말하는 형님이란 물론 무황 담광현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비 객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담광수를 따라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 마 인 제 11 장 봉녀(鳳女)의 사랑 -4 ━━━━━━━━━━━━━━━━━━━━━━━━━━━━━━━━━━━

고아한 기품이 감도는 서실(書室)은 과거 천하제일인이란 칭호를 받던 무황의 거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아하고 검박했 다.

전혀 치장되지 않은 등촉이 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깜박이는 아래 담광수와 아비객은 탁


"형님이 마운노인을 물리치고

제 이십육대 무황이 되었을 때부터

얘기를 시작하겠네."

아비객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는 담광현의 서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 다. 알 수 없는 느낌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담광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 은 무림의 일대비사였다.

수명사 담광현은 천하인이 그토록 염원하던 지상최고의 명예인 무 황의 위에 올랐다.

그의 나이 사십일 세. 그는 역대 무황 중 가장 연소자였다.

그는 당당하게 무황성에 입성했다. 전 무림인들은 한결같이 그를 우러러 보았다. 무황의 보위에 오른 직후 담광현은 결혼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무공을

전혀 모르는 양가집 규수인 설문옥

과 극히 간소하게 혼례를 올렸다.


그로부터 삼 년 후 첫딸 숙정을, 그리고 그 이 년 후 두 번째 딸 숙화를 낳았다. 그는 오 년의 첫 무황 임기를 마치고 계속하여 도 전자를 물리침으로써 무황의 위를 계속 지켰다.

그런데 불행의 마수(魔手)는 바로 둘째딸 담숙화를 낳자마자 뻗쳐 왔다. 담숙정, 담숙화 두 자매가 돌연 무황성 내에서 감쪽같이 실 종된 것이었다.

담광현은 이 사실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는 백방으로 두 딸의 행방을 찾았으나 끝내 범인이 누구인지 밝 혀내지 못했다. 결국 그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두 딸 을 납치해간 범인이 바로

역대 무황들을 납치한 마인(魔人)일 것

이라는 추론이었다.

그리고 그의 추측은 불행히도 맞아 떨어졌다.

얼마 후 신비의 마인으로부터 한 통의 협박 편지가 날아들었기 때 문이었다.


<그대의 두 딸은 본좌가 잘 면 본좌의 명을

키우고 있다. 딸을 죽이고 싶지 않으

따라라. 첫째, 그대는 무황을 계속 역임해야 한

다. 매 오 년마다 벌어지는 무황의 도전자를 모두 물리쳐라. 만일 무황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그대의 두 딸도 동시에 이슬로 사라 질 것이다. 둘째는 수시로 그대의 측근을 통해 본좌의 명을 전달 하겠다. 그대는 그 명을 따라야 한다. 만일 거역한다면 딸의 생명 은 물론 인간이 겪을 수 없는 억겁의 치욕과 고통을 받게 될 것이 다.>

편지에는 아무런 서명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 편지가 어떤 경로 를 통해 전달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은 수명사 담광현을 분노케 했다.

결국 거마가 그 꼬리를 드러낸 셈이었다.

담광현은 과연 당대의 무황다운 인물이었다. 그는 딸의 실종으로 인해 이성을 잃을 수도 있었으나 끝내 부동심을 유지했다. 그에게 는 무림의 운명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마침 그에게 두 명의 기인이 찾아왔다. 그들은 다름아닌 불각승


(不覺僧)과 천면인(千面人)이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그와 함께 무림삼비자(武林三秘子)라고 불리우는 기인들이었다.

그들 역시 담광현과 마찬가지로 일백 년 동안이나 깊이 잠적해 있 는 거마(巨魔)를 추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인은 서로 흉금을 털 어놓고 장차의 무림을 위해 대세를 상의했다.

그 자리에서 담광현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바로 그 스스로가 무 림을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설로 내려오 는 마의 대법인 혈영환원대법(血靈還元大法)으로 개세무적의 인물 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정기를 모체(母體)를 통해 자식에게 불어넣는 고금미증유의 마의 대법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주의 대법이 실시되기 시작했다.

총 팔 년 간 여덟 명의 자식을 담광현은 스스로의 손으로 죽여야 만 했다. 그것은 혈영환원대법이 번번히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혈영환원대법을 받으려면 태어나는 아기의 자질이 곧 천원무개정 지체(天元無蓋頂之體)를 타고나야만 했다. 천원무개정지체란 태어


나면서 개부(蓋部), 즉 백회혈(百會穴) 부위가 열려 있는 것을 말 했다.

이러한 체질은 극히 희귀하면서 또한 골상(骨相)으로 보면 정(正) 과 사(邪)의 기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더우기 마법인 혈영환 원대법을 받을 경우 마성(魔性)을 피할 수가 없었다.

즉 그 아이는 자라면서 무수한 혈행(血行)을 피할 수 없는 숙명으 로 지니고 태어나야만 했다. 능히 만인지혈(萬人之血)을 짜내야만 그의 마성을 잠재울 수가 있었다.

만 명(萬名)의 피!

가히 희대의 살인마가 되지

않고서야 어찌 만인지혈을 짜낼 수가

있단 말인가?

결국 이 모든 것은 무림삼비자, 그중에서도 불심이 깊은 불각승이 환히 꿰뚫어 본 것이다. 그는 천기를 살필 혜안을 가지고 있는 선 승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알고도 혈영환원대법을 펼치려는 담광현을 말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천부적으로 마혈성의 기운을 타고 태어난 거마가 출현 할 경우 능히

십만인지혈(十萬人之血)이 중원에 뿌려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어 저주받은 한 인물을 탄생시키기 위한 혈영환원대법이 시행되었다.

그 결과 여덟 명의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눈 뜬 지 하루만에 죽었다. 그리고 아홉 번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원무개정지체의 아이가 태어났다.

담광현은 벌써부터 부인의

태중(胎中)에서 그 아이가 천원무개정

지체임을 알아보았다.

그 사실은 무림삼비자를 흥분시켰다. 드디어 그들의 염원이 성취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무황성에 숨어 있는 첩자의 눈을 속이고 그 아이를 빼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만일 담광현이 이례적으로 아홉 번째 자식을 살려낸다면 틀림없이 마인들은 눈치를 챌 것이 분명 했다.


그때 마침 담광현의 아우인 담광수의 부인이 임신 중이었다.

하늘의 뜻이랄까? 출산일마저 담광현의 아내 설문옥과 똑같았다.

불각승은 담광수에게 호소했다. 아이를 바꿔치기하는 일에 협조해 달라고.

처음 그 말을

듣는 순간 담광수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

다. 자신의 아이를 대신

희생시키다니 그게 있을 법이나 한 일인

가?

그러나 결국 그는 승낙했다. 천하무림의 창생을 위해서 비장한 결 심을 한 것이었다. 그렇게 되어 은밀히 담광현의 아들과 담광수의 아들은 바뀌어졌다.

물론 담광수의 아들은 세상에 태어나 한 번 웃어보지도 못한 채 생매장당하고 만 것이었다.

"......!"

담광수의 긴 이야기가 끝을

맺는 순간 아비객은 얼굴을 일그러뜨


렸다. 이어 그의 가슴은 격렬하게 뛰었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소?"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담광수의 눈썹이 경련했다.

"저주받은 운명을 받고 태어난 아이는 지금... 자신의 운명도 모 른 채 숙명의 혈로를 걷고 있네. 그 아이를 위해 만인지혈이 모두 흐른 날 비로소 마성을 벗겠지."

"그... 그는 지금 중원에 있소?"

"그렇네."

아비객은 돌연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이 무섭게 이글거리는 것을 담광수는 놓치지 않았다.

"그 얘기를 굳이 내게 하는 이유는?"

"그저 이 늙은이가 하고 싶어서 했을 뿐이네."


다음 순간 아비객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얘기는 모두 본인과는 상관없는 얘기요!"

담광수는 연민에 가득찬 눈으로 아비객을 바라 보았다. 그는 아비 객의 슬픈 운명을 가엾게 여기고 있는 듯 했다.

"가시오. 없어지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 손에 죽을 것이오!"

아비객의 눈에서 일순 무서운 살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마침내 담광수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가겠네. 그러나 한 가지 만은 명심하게. 무림에는 그렇게 스스로 를 희생시킨 의인(義人)들도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그렇게 한 이 유는 단 하나, 무림평화(武林平和) 때문이네."

"가시오, 가!"

아비객은 무섭게 호통쳤으나 담광수는 그를 부드러운 눈으로 응시 했다.


'아이야, 네가 바로 그

운명의 아이임을 아느냐? 정말 모른단 말

이냐?'

담광수의 가슴은 뜨겁게 격동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마음 속의 말 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끝내 그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돌 아서고 말았다.

'아아! 하늘이여, 당신은 어찌 그리 무심하단 말이오?'

담광수는 내심 탄식하며 서실을 나가 버렸다.

"……."

아비객은 침상에 반듯이 누웠다. 그의 공허한 눈에는 촛점이 없었 다.

'왜 이런 이상한

기분이 든단 말인가? 담가의 사연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다.'


아비객은 좀체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과거 수명사 담광현이 거처하던 침실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 었다. 그러나 아무리 잠을 이루려 애써도 잠은 오지 않았다.

똑똑똑…....

문득 가볍게 침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아비객은 흠칫했다. 누가 그를

찾는단 말인가? 그는 자리에서 몸

을 일으켜 문 쪽을 바라 보았다.

방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한 명의 여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 를 본 순간 아비객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여인은 전신에 한 겹의 얇은 침의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방 문에 기댄 채 가볍게 몸을 떨고 있었다.

여인의 이름은 범문혜. 바로 성수화타의 딸이었다.


아비객은 너무나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강호에서 만난 두

번째 여인이 바로 범문혜였다. 그런데 그녀가 이곳에 있을 줄이 야.

이때 범문혜는 격동으로 전신을 가늘게 떨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결국 오셨군요. 저는 당신이 꼭 이곳으로 올줄 알았어요. 그래서......."

아비객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이곳을 말끔히 치운 것도 그대의 짓인가?"

"그래요. 전 오빠가 꼭 이곳에 오실 줄 알고 있었어요."

"괜한 짓을 했군."

"오빠......!"

범문혜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깜박이는 황촉 아래 한 겹의 침의만을 걸친 범문혜의 몸은 요요한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과거와는 달라 보였다. 병약했던 육신은 적당히 살이 붙어 한껏 성숙한 미를 발산하고 있었다. 침의를 뚫고 솟아나올 듯한 가슴이며 늘씬한 몸매는 사나이의 욕망을 충분히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다.

"왜지? 왜 날 기다린 거지?"

아비객은 눈을 반개하며 범문혜를 바라 보았다. 범문혜는 두 손으 로 가슴을 살짝 누른 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전...... 오빠 만을 생각했어요. 그동안 아무 것도 저에겐 중요 한 것이 없었어요. 오직 오빠를 생각하는 일밖에는......"

범문혜는 침상으로 다가왔다.

신비로웠다. 황촉의 은은한

불빛에 비치는 범문혜의 모습은 촉촉

히 젖어 있었다. 그녀는 침상 곁에 다소곳이 섰다.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비객은 차갑게 말했다.

"아니예요. 오빠는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다

만...... 오빠는 자기 자신을 모를 뿐이에요."

범문혜의 말에 아비객은 멍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나를 모른다고?"

범문혜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침상 아래 무릎 꿇은 채 아비객

을 응시했다.

"오빠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오빠의 겉모습은

냉혹하고 잔인한 듯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는 뜨거운 정이 흐르는 그런 분이에요."

"네가 잘못 봤다."

아비객은 흔들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려 더욱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 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그의 눈빛에는 동요가 어리고 있었다.

문득 범문혜가 그의 손을

잡았다. 나긋하고 따스한 손이었다. 그


녀는 아비객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었다.

"제 가슴에 뛰는 고동을 느껴 보세요. 이게 바로 진실이에요. 오 빠에게도 진실이 있어요. 그 진실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

아비객은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얇은 침의 사이로 뭉클하고 뜨

거운 여인의 젖가슴이 감지되었다. 그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 뛰고 있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문혜의 모든

걸 오빠께

드리고 싶어

요."

범문혜는 손으로 아비객의 손을 지긋이 눌렀다. 아비객은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을 손바닥 전체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부르르 전 율했다.

"왜? 왜지?"

"그건... 오빠를 사랑하니까요."


범문혜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 에는 한 가닥 결의가 서렸다. 그녀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절 욕하지만 않으신다면...... 오늘밤 제 모든

걸 보여 드리고

싶어요."

범문혜는 침의 자락을 떨리는 손으로 잡았다. 아비객은 놀란 눈빛 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촉이 바람도 없는데 일렁였다. 그리고 사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침의가 매끄러운 동체를 스치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

아비객의 눈꼬리가 경련했다.

뜻밖에도 범문혜는 침의

속에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던 것이

다. 태초의 모습 그대로 그녀의 모든 것이 황촉 아래 드러났다.

늘씬한 교구였다. 피부는 유지처럼 매끄럽고 빛났다. 가녀린 목선 은 날개같은 어깨로 흘러내렸고, 그 아래 풍만하게 솟아오른 젖가 슴이 완미의 곡선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성숙한 여인의 육체는 젖가슴에서 한가운데 은은히 도드라진 두 개의 유두(乳頭)로 맺혀져 강렬한 유혹을 발산하고 있었다.

쥐면 부러질 듯 한 줌밖에 되지 않는 허리, 앙징맞게 패인 배꼽은 생명의 원천인 듯 달처럼 둥근 아랫배에 우물을 이루고 있었다.

갑자기 급격한 선을 부풀리며

굵어지는 둔부의 선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할 듯 풍요롭기만 하다. 대리석처럼 매끄러운 두 다리는 신전의 기둥인 양 곧게 뻗고 있었다.

그리고 아랫배의 은밀한 여인의 밀전에는 심요한 숲이 황촉을 받 아 반짝이고 있었으니.......

'......!'

불현듯 아비객은 목이 말랐다. 그 갈증은 참을 수 없이 그의 가슴 에 뜨거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 범문혜가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아비객의 손 등에 가

볍게 입술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기다렸어요. 오늘같은 날이 오기를."


"……."

아비객은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의 눈은 범문혜의 젖가슴을 내려보고

있었다.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가슴

의 계곡이 환히 들여다 보이고 있었다.

그는 그 계곡에 파묻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생각 하지 않고, 아무 것도 갈등하지 않은 채 계곡에 파묻혀 쉬고 싶다 는 생각이 들었다.

범문혜의 아름다운 눈에 문득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마침내 침상 앞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격정적으로 말했다.

"사랑해요. 당신을. 문혜는......"

"후회할 것이다."

아비객은 입술을 질끈

씹으며 그렇게

反). 그의 말은 그 자체였다.

범문혜는 세차게 도리질했다.

말했다. 이율배반(二律背


"결코 후회하지 않아요. 전 오빠가 죽으라면 죽고, 기라면 기고, 발등을 핥으라면 핥겠어요. 오빠의 충실한 시녀가 되라해도 단지 오빠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아요."

"......."

"저의 작은 가슴은 그날 이후 줄곧 타들어 갔어요. 오빠와 헤어진 이후 한 번도 편히 자지 못했어요. 그날 제가 잘못했어요."

범문혜는 애절하게 말했다.

아비객은 침상에

드러누웠다. 그의

마음은 모순(矛盾)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범문혜는 몸을 일으켰다. 아비객의 눈에 그녀의 육체 모든 부분이 들어왔다. 그러나 범문혜는 가릴 생각도 않은 채 아비객을 그윽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비객의 입에서 나온 것은 여전히 냉막한 말뿐이었다.

"넌 잘못한 것이 없다."


"아니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흑흑! 전 후회했어요. 오빠는 제 생 명의 은인이고 저의 전부에요. 이 넓은 세상 천지에 이 문혜가 기 댈 곳은 오직 오빠의 품 속밖에는......."

"내 가슴은 항상 차다."

"흐흑.... 맞아요. 오빠의 가슴은 언제나 차지요. 마치 북극의 빙 심(氷心)처럼. 그러나 이 문혜의 가슴은 뜨거워요. 마치 불꽃처럼 요. 봐요. 만져보세요. 탈 것만 같아요."

아비객은 흠칫했다. 범문혜가 다시 그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젖가 슴에 대었기 때문이었다.

뜨거웠다. 뜨겁고 뭉클한 젖가슴에 손 끝이 닿자 아비객은 마음이 어지러웠다.

"이 뜨거운 가슴으로 오빠의

얼음같은 가슴을 녹일 거예요. 반드

시......!"

범문혜는 아비객의 손을 자신의 젖가슴에 대고 꼬옥 눌렀다.


쿵! 쿵….

심장의 고동을 아비객은 느꼈다. 사랑의 갈망으로 뜨겁게 뛰는 여 인의 고동소리를. 결국 그의 빙심도 차츰 해빙(解氷)하기 시작했 다.

"너는......"

"문혜라 불러주세요. 아니 혜아(慧兒)라고요."

"혜아."

아비객은 마침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불렀다.

"아! 결국 절 불러주는 군요."

범문혜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아비객의 품으로 몸을 던졌다.

"혜아."

아비객은 그녀의 동체를 거세게 안았다. 뭉클한 여체는 그의 품에 서 녹아날 듯이 감겨들었다. 그리고 더이상 말이 필요없는 행위가


이어졌다.

범문혜의 육체는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그녀는 사랑으로 소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그녀는 모든 것을 준비하고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매끄럽고 팽팽한

여체. 그것은 꺼질 곳에 미묘하게 꺼지고 솟을

곳에 육감적으로 솟아 있었다.

"아아!"

범문혜는 입술을 벌리며 뜨거운 입김을 토했다.

그녀의 나신은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휘어졌다. 아비객의

입술은 그녀의 모든 육체에 뜨거운 불길을 당겼다.

아비객 또한 전에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뇌리에 남아있는 담가의 비극에 대한 상념을 떨구기 위해서일까? 그는 광폭하게 여체를 다루었다. 그의 입이 범문혜의 젖가슴을 물 어 뜯듯이 달려 들었다.


"악!"

범문혜는 고통인지 희열인지 모를 비명을 발하며 아비객의 머리칼 을 움켜 쥐었다. 그녀는 죽어도 놓지 않겠다는 듯 아비객의 머리 칼을 잡고 온 몸을 한껏 뻗었다.

사나이의 거친 공세를 그녀는 모두 받아들였다. 찢기고 할퀴고 매 맞으면서도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흐윽."

뜨겁고 거친 사나이의 어떤 다. 범문혜는 그만 온

부분이 그녀의 성역을 짓밟고 들어왔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사지를 뒤흔들

었다.

그러나 아비객은 인정사정없이 그녀를

짓밟았다. 여체는 끝없이

밀리고 밀리며 산산조각으로 분해되고 있었다.

두 남녀의 거친 율동에 따라 침상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이고 그들 의 몸은 땀으로 푹 젖고 있었다. 여체는 끝없는 고통 속에서도 차 츰 전신 혈관의 구석구석에서 번져나오는 쾌감을 전율하듯 느끼기 시작했다.


고통의 신음인가. 아니면 희열의 흐느낌인가?

범문혜는 아비객의 등을 긁고 또 긁으면서 수도 없이 뜨거운 격랑 의 고비를 넘고 또 넘었다.

아비객은 잔인하리만치 여체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쾌 락의 덫 속에 스스로를 내던져 자학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밤(夜).

무황성의 첫날 밤은 뜨거운

광풍우를 동반한 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다음 권에 계속>

b4-1  

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논리는 여전히 흑백논리 때에 따라서는 가치관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누누이 실증 에도 사회 각 계층에서는 흑백논리에 의한 택일(擇一)을 강요하는 오직 하나, 유일무이한 선택은 과연 절대불변한 진리인가?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