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

서문 총관 황무와 흑령방주 고황 사람의 손은 두 개낙양으로활낙신 영영천지회주 파천열지송하림의 만유 죽다 만월 아래 다섯 개의 죽음천화궁주 선향 만박을 찾다 서문 어지러운 시절이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곳에서 문제가 튀어나와 우리의 생활을 쉽지 않게 만든다. 겁난유세(劫亂留世)-겁난이 세상에 남겨져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복마전(伏魔殿)처럼 곳곳에 혼란의 여지가 남겨져 있기도 하다. 이 소설은 다른 무협과 달리 구성을 차별화해 보고자 노력했다. 특히, 시간 전개가 많이 다르다. 일 권의 배경은 현재이다. 십여 년 전에 있었던 대규모의 혈난, 무혼지겁(武魂之劫)이라는 것에 의해 강호는 많은 부분의 정기를 잃어버렸다. 혈난은 다섯 명의 젊은이들에 의해 해결되었고, 당시 오수(五秀)라 불리던 그들은 현재 오성(五聖)이라는 이름으로 강호 위에 군림하고 있다. 그 와중에 새로운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 권과 삼 권의 배경은 십 년 전, 정확히 말하면 구 년 전의 이야기를담고 있다. 무혼지겁이 일어나는 과정과 그것이 마무리 지어지는 일 년간을 이 권과 삼 권에서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 권은 다시 현재의 이야기. 시간 배경이 연동되기 때문에 독자 제현께서 혼란을 느끼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총 네 권이지만 마지막 권을 제외한 세 권은 어느것부터 먼저 보든지 상관이 없도록 꾸미고자 노력했다. 한 가지 양해 말씀을 드린다면, 등장 인물이 보이는 이상한 행동의 이유가 다른 권에서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일 권은 현재의 이야기! 당연히 이, 삼 권에서 서술하는 과거의 일이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전작(前作)들에 대한 칭찬에는 감사를, 그리고 질책에는 고마움을 나타내면서 서문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무협을 위해 노력하면서...! 1998. 3. 金翅鳥 拜上. 序 지난 백 년간 강호에서 가장 큰 혈겁(血劫)은 무엇인가? 모두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역시 다르게 생긴 입을 열어 하는 말은 한결같다. 무혼지겁(武魂之劫)! 한 명의 광인(狂人)으로 인해 강호에 군림하던 열 명의 절대자가 쓰러지면서 발생한 미증유(未曾有)의


겁난을 칭함이었다. 만일 그때 현재 오성(五聖)이라 불리는 기재들이 때맞추어 강호에 출현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강호는 어떻게 되었을까?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하다 저절로 일어나는 몸서리에 밤잠을 설친 적이 있을 것이다. 광무혼(廣武魂)! 혈겁(血劫)의 주인공이며 강호 십대마인(十大魔人)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 무혼지겁은 오성이 그를 죽임으로써 막을 내렸지만,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를 생각하며 몸서리치는 사람이 많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벌써 무혼지겁을 십여 년이 넘은 옛일로 기억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피의 역사가 반복되지 말란 법은 어디에도 없지 않는가? 지금 강호는 지극히 조용하지만, 어딘가에서 새로운 겁난의 싹이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바로 그대의 옆에서도... 노인과 중년인. 그들은 벌써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때로는 반대하고, 때로는 무릎을 치며 찬성한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어쨌든 힘든 시간이었네." 노인은 탁자 위에 산더미같이 쌓인 기록들을 보면서 말했다. 그는 무척 깊은 감회를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중년인의 감회는 그보다 더한 것 같았다. "처음엔 불가능해 보였는데... 결국은 이루어지는군요." "그래... 이젠 이 내용을 하나로 모으는 일만 남았네그려." 무언가에 대한 기록으로 빽빽하게 쓰여진 종이들을 쓰다듬으며 노인이 말했다. "문제는 그 작업을 벌일 공간이지." "그자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필요하겠군요." "그래, 그 문제만 해결되면 일 년 정도면 충분히 책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네." "혹 염두에 두고 계시는 곳이 있으십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숨는 장소는 나에게 맡기고 자넨 자네가 맡은 바를 충실히 행하게." 중년인은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금의 그로서는 이것이 가장 절실한 긍정의 몸짓이었다. "믿네. 자넨 능력이 있으니..." 노인의 몸은 이제 막 문을 돌아 사라져 버릴 듯했다. 중년인이 급히 물었다. "그런데 어디에 숨으실 생각이십니까?"


노인은 웃었다. 웃으며 말없이 등잔불을 바라보았다. 불꽃이 피어나는 바로 아래쪽에 묘한 음영이 생겨나 있었다. "일 년은 넘기지 않을 것을 약속하겠네." 그리고 노인은 완전히 사라졌다. 등잔 밑. 노인이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시선을 준 곳이었다. 1. 총관 황무와 흑령방주 고황 <비밀스럽게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우선 다른 일을 크게 벌여라. 큰일에 감추어진 작은 일은 보이지 않는 법이므로.> 만박의 말 중에서... 이른 봄의 새벽! 겨울의 한기가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시간이었다. 바람이 제법 쌀쌀한데도 창문을 모두 열어 둔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턱 주위를 덮은 수염과 구레나룻 때문에 실제 나이보다 들어 보이는 얼굴! 왼쪽 눈썹 옆으로 흐릿하게 남겨져 있는 검흔(劍痕)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수염을 모두 제거한다면 서른두 살 먹은 사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내를 본 사람은 누구나 그가 고집스런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사실은 눈빛뿐 아니라 실제 심성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서원의 원주인 만박(萬博)이 실종된 지 벌써 일 년이 지났건만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겠는가? -그는 나의 벗이지만 우상이기도 하오. 그는 결코 남에게 납치당할 사람이 아님을 난 믿고 있소. 사내의 이런 주장은 만박에 대한 그의 믿음이기도 했지만, 또한 자신의 신념에 대한 고집이기도 했다. 어쨌든 만박이 사라진 일 년 동안 춘추서원(春秋書院)이 큰 동요 없이 강호에서 버텨 온 배후에는 그의 공헌이 가장 컸다. 그리고 오늘 그가 도(刀)의 날에 기름을 칠하는 이유도 춘추서원을 위한 그의 공헌을 하나 더 늘리는 데 있었다. 오른손에 힘있게 잡힌 참마도(斬魔刀)는 그의 신분을 뜻했다. 철담마도(鐵膽魔刀) 황무(黃武)! 춘추서원의 총관! 그러나 그의 임무 대부분은 강호의 무력(武力)이 춘추서원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가 앉은 의자 옆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누르스름한 봉서 하나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으나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황무는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그 일이 끝나기 전까진 다른 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봉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하인이 봉서를 전하고 갔지만, 황무는 겉봉조차 읽어 보지 않은 채 탁자 위에 던져 버렸다. 자신의 이름이 겉봉에 쓰여진 봉서를 받으면 궁금증에서라도 읽어 보련만, 황무의 경우는 확실히 달랐다. 한참 동안 정성들여 기름칠한 황무는 도를 도집에 넣은 뒤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되었군. 기다리거라, 고황(高荒)!"


외모만큼이나 딱딱한 말만 남긴 채 황무는 방을 나섰다. * * * 하인들은 보통 아침과 점심 사이와 저녁과 취침 시간 사이에 잠깐씩 들어와 황무의 소제(掃除)한다. 하지만 하인은 오늘, 점심 시간이 지나서야 황무의 방에 들어왔다. 총관이 일이 있어 서원을 비웠음을 알기 때문이다. 두 번의 청소를 한 번으로 끝내려는 생각! 하인은 먼지를 털고 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쓸어 내다가 문득 탁자 위에 놓인 봉서를 보았다.

방을

"아직도 보지 않으셨네." 그는 중얼거리면서 봉서를 들었다. '황무 친전'이라 쓰여진 겉봉은 손을 댄 흔적조차 없었다. 하인은 피식 웃었다. 과연 황무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봉서를 다시 탁자 위에 놓으려 할 때 돌연 방문 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 시간에 네가 총관의 거처에서 무얼 하고 있느냐?"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힘이 있었다. 단심서생(丹心書生) 최오(崔五). 춘추서원의 부총관으로, 황무가 총관이면서도 무력과 관련되는 일을 주로 처리하고 있어, 부총관인 최오가 총관이 해야 할 나머지 일들을 모두 도맡고 있는 것이 실정이었다. 하인은 깜짝 놀라 봉서를 손에서 놓쳐 버렸다. 특별히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으나, 두 번의 청소를 한 번으로 대신하려는 자신의 의도가 들킨 것 같아 불안했기 때문이다. 하인이 대답을 않고 슬그머니 손에 든 봉서만 탁자 위에 내려놓자 최오는 다시 물었다. "그 봉서는 무엇이냐? 총관께 전해진 것이냐?" "그렇습니다요, 나으리." 최오의 눈빛이 약간 강해졌다. 총관에게 전해진 봉서를 일개 하인이 들었다 내려놓은 행위는 확실히 수상했기 때문이다. "감히 네가 총관에게 전해지는 글을 보았단 말이더냐?" 다분히 문책하는 어투였다. 상황이 이리 되면 하인으로서는 서둘러 변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닙니다요. 제가 직접 전해 드린 봉서이온데, 총관께서 읽지 않으신 채 출타하셔서 그저 겉봉만 한번 슬쩍 본 것뿐입니다요. 용서하십시오." 최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서원에 들어오는 모든 서신은 부총관인 자신을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한데 총관에게 직접 전해진 서신이 있었다니...


"봉서는 언제 온 것이냐?" "새벽녘입니다요. 해가 채 뜨기도 전에, 헤헤, 제가 전원(前園)을 쓸러 나갔을 때 복면을 한 사람이 나타나서... 꼭 총관께 직접 전하라면서..." 은자 두 냥을 받았다는 말은 생략하는 하인이었다. 평소의 최오라면 말꼬리를 흐리는 하인의 태도에서 이상한 기미를 눈치챌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다른 생각에 잠겨 있어 그 점은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복면인이라... 외부인이 침입했었단 말이냐?" "절대 아닙니다요. 절 밖으로 불러 내서... 봉서만 제게 전한 뒤, 그는 바로 떠났는뎁쇼. 그래서... 보고드리지 않았사온데... 용서해 주십시오, 나으리." 최오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봉서 쪽으로 손을 뻗었다. 겉봉을 살펴본 그는 다시 하인에게 물었다. "총관께서는 언제쯤 흑령방(黑靈幇)으로 향하셨느냐?" "묘시경이었습니다요. 언제나처럼 굳은 표정으로 참마도(斬魔刀)를 굳게 움켜쥐고 나가셨습니다." 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봉서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분답구나. 일단 임무를 맡으면 그 일이 끝나기 전까지 다른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점이... 언제 돌아오신다 하시더냐?" "저,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요." 문득 최오는 피식 웃었다. 봉서를 살피느라고 하인으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했던 자신의 실태(實態) 때문이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자신이 움직이는 시간을 보고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질문은 항상 대답하는 상대방의 위치를 염두에 둬야만 한다. "이 봉서 말이다, 복면인이 전해 주면서 무슨 이상한 기미는 없었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혹시 서두르거나 초조해 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나 말이다." 하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자꾸만 뒤를 힐끔거리면서... 맞습니다요! 은자 두 냥도 서둘러, 던지듯 건네 주고는... 흡!" 하인은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닫고 안색이 변했다. 놀라서 최오를 바라보니 다행히 그는 자신이 돈을 받고 심부름을 했다는 사실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하인은 최오의 눈치를 살폈다. 상당한 시간 동안 최오는 뭔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윽고 하인에게 물었다. "흑령방주 고황은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다. 그렇지 않느냐?" "그, 그렇습니다만..." "실력이 있으니 감히 우리 서원의 사학사(史學士) 한 명을 죽였겠지." "그, 그것은 저는 잘..." "총관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빨리 돌아오실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 하인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건만, 최오는 계속해서 질문을 퍼부어 댔다. 그 질문은 하인으로서는 대답하기 힘든 질문들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최오의 말투는 질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던지는 일종의 확인 절차였다. 그렇게 몇 번 혼자말인 양 중얼거리던 최오는 왼손을 들어 오른손에 들린 봉서를 함께 잡았다.

모두

부욱! "그, 그러시면... 그건 총관의..." 하인이 말릴 새도 없이 봉서는 찢겨졌다. 봉서의 안에 든 서신을 읽어 가는 최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하인을 보며 말했다. "서원의 연락망을 총동원해서 총관에게 연락을 취하라. 마침 우방(友邦)인, 소림의 대지(大智)와 무당의 창허(蒼虛)가 서원에 계시니 그들에게도 연락을 전하라." 과연 서신의 내용은 무엇인가...? 흑령방이 많은 부(富)를 축적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강호에 아주 많았다. 그 부의 대부분은 전(前)방주였던 고창(高創)에 의해 형성되었음도 세인(世人)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고창이 형성했던 부를 훨씬 능가하는 재보와 전답을 현방주인 고황(高荒)이 모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선부(先父)와는 달리 고황은 치부(致富)를 비밀리에 수행했기 때문이다. 고창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나이 서른둘에 흑령방의 방주 직위를 물려받았던 고황도 이제 사십을 넘기고 있었다. 깡마른 체형에 눈빛이 매서운 사내. 젊은 나이로 방주에 취임한 이래,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매달렸던 자. 흑령방주 고황은 지금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남에게 알리지 말아야 한다. 돈없는 자들은 질시하기를 좋아하거든. 얼마를 벌건 남이 모른다면, 흐흠, 부러워하는 자도 없겠지." 고황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각지에 흩어진 자신의 비밀 기업에 대한 금전적 상태가 새겨진 장부였다. 기루와 주루, 그리고 포목상 등등.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수입을 걷어들이는 건 뭐니뭐니 해도 고리대금업을 주로 하는 전장(錢莊)이었다. 전장의 돈줄은 도박장이었다. 돈을 잃어 눈이 뒤집힌 자들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 주고는 주먹으로 걷어들이면 이익이 쏠쏠했다. "역시 현금 장사다. 기루도 꽤 짭짤하지만 밑천이 많이 든단 말씀이야." 만족스런 미소를 짓던 고황은 장부 사이에서 한 장의 서찰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아직 남아 있었나?" <절심산(切心散)에 대해 아시는지요. 모르신다면 오천 냥을 제게 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서찰을 보내 왔던 구(具)씨 성을 가진 서생 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춘추서원 소속의 사학사(史學士)라 밝힌 구(具)는 지금은 물론 세상에 없다. 과로로 인한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고황과 고황의 고황은 의자의 고황은

만난 지 불과 나흘 만의 일이었다. 오른손이 위로 슬쩍 들리나 했더니 서찰은 곧 한 줄기의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장부를 덮고 몸을 뒤로 기댔다. 폭신함이 전신을 안락하게 감싸 왔다. 구(具)를 만났을 때의 일을 찬찬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참 비옥한 땅이로군요." 갓서른에 접어든 듯한 얼굴의 구(具)는 그렇게 어두(語頭)를 열었다. 고황은 그가 보냈던 서찰을 이미 본 후였으므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선친(先親)께선 한때 이 땅을 원주인에게 되돌려주셨던 적이 있었지요? 무상(無償)으로 말입니다." 고황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소. 하지만 내가 곧 되돌려 받았지. 선부는 당시 임종이 가까웠던 탓에 제정신이 아니셨소." 고황의 아버지 고창이 일 년만 더 살아 있었더라면 흑령방의 재산이라곤 정원에 뒹구는 돌멩이들뿐이었으리라. 고황의 말에 구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임종에 가까워서라니요? 선친께선 돌연사(突然死)하시지 않으셨던가요?" "그렇게 알려졌지만 이전부터 징조가 있으셨소. 피와 땀으로 모은 재물을 그처럼 마구 풀어 버렸던 것도 좋은 예가 아니겠소?"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을 것이다. 고황은 항상 선친의 죽음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얼굴색이 약간, 아주 약간 변하곤 하므로. "당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고황의 말에 구는 기분 나쁘게 웃었다. 어쩐지 비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흑령방의 건물들을 보면서 구는 뭔가 흑심이 깃들인 웃음을 지었다. "건물들이 모두 크고 웅장합니다. 지을 때도 그랬겠지만 유지하기에도 많은 돈이 들겠군요." "내게는 능력이 있소.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물론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선친께서 물려주신 재산이 없었더라도 그게 가능했을까요?" 구가 비웃듯 말하자 고황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는 고함을 지르듯 내뱉었다. "물론이오! 무혼지겁(武魂之劫)을 넘기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나의 기업이오. 선부가 남기신 재산보다 내가 일구어 낸 재산이 훨씬 많단 말이오." "그런가요? 하긴 무혼지겁 당시 당신의 처세는 본받을 만했지요.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이처럼 어리석어졌단 말입니까?" "무슨... 뜻이오?" 고황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구는 또다시 예의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선친께서는 참으로 시기 적절하게 돌아가셨지요. 사인(死因)은 아마 심장 마비셨지요?" '이, 이놈이...!' 고황은 분노해 몸을 떨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내부가 움직였다. 단전(丹田)에서 뜨거운 기운이 한 줄기 흘러나와 둘로 나뉘더니 양손으로 흘러갔다. 손바닥이 불에 덴 듯 달아오름을 느끼면서 고황은 말했다. "당신은 아는 게 너무 많소. 하지만 세상을 오래 살려면 때론 모르고 넘어가야 하는 일도 있음을 몰랐구려." 복용한 사람은 누구나 심장이 멈춰 죽게 되지만, 아무리 사인을 철저히 조사하더라도 심장 마비 외의 징후(徵候)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절독이 바로 절심산(切心散)이었다. 누구라도 이 절심산에 대해서 묻는 자는 고황의 손에 죽어야 했다. 때문에 고황의 손이 앞으로 움직였다. 구 서생의 머리를 노리고서, 매우 빠르게... 터져 오르는 피분수는... 발생하지 않았다. 웃음. 구 서생의 입가에 매달린 웃음을 본 고황은 손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제게는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이 많지요. 제가 이틀 아시겠습니까?" 구의 담담한 말에 고황은 힘없이 손을 내리고 신음했다.

내에

서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얼마... 얼마를 원하는가?" "오천 냥, 그 정도면 큰 부담은 아니 되실 것입니다." * * * 고황은 칠천 냥을 냈다. 하지만 구 서생은 그 돈을 써보지도 못했다. 며칠 후 심장 마비를 일으켜 죽었기 때문이다. 고황의 아버지였던 고창과 똑같은 죽음이었다. "사실 남의 피땀을 탐낸다는 건 나쁜 일이지. 심장이 부담을 느낄 만도 하겠지." 고황이 그렇게 혼자 중얼거릴 때 왈칵 방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사내는 고황의 오른팔인 혈겸(血鎌)이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혈겸은 인사조차 생략하고 급한 어조로 말했다. "호연도방(浩然賭房)에 일이 생겼습니다. 한 놈이..." 고황은 지체없이 몸을 일으켰다. 제정신을 가진 수하가 상전의 방안으로 허겁지겁 들어오는 데는 그렇게 행동할 만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수하 역시 함부로 주인의 생각을 방해해서는 안 됨을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고황의 침착한 질문은 돋보였다. "무공이냐, 아니면 도박술이냐?" 고황이 일을 처리하는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수하를 문책하기에 앞서 일이 일어난 호연도방으로 서둘러 향하는 것도 그 중의 한 예였다. 질문은 걸어가는 도중에 한다. 먼저 알아보고 나서 나중에 문책해도 그다지 늦지는 않을 것이므로. 호연도방은 도박을 하는 곳으로 무림인들이 많이 드나든다. 당연히 도박으로 돈을 많이 긁어 가는 손님이 있다거나, 무공으로 행패를 부리는 자가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고황의 질문에 혈겸 역시 효과적인 답을 했다. "도박입니다. 속임수를 찾아 내지 못해 아직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직'이란 말은 무공에 대한 시험은 하지 않았다는 의미. 혈겸의 대답에 고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연도방은 자신이 관할(管轄)하는 도방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였다.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냐?" "그렇게 보기에는... 꼭 물주(物主)보다 하나 높은 숫자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고황은 속으로 냉소(冷笑)했다. 오랜만에 자신의 도박 실력을 보일 상대를 만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도방으로 들어설 때 고황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고수를 만나 설레는 도박꾼의 심정은 결전을 앞둔 무사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고황의 가슴속을 훑고 지나가는 오랜만의 투지. 그 투지에 감염(感染)된 어조로 고황이 물었다. "지금까지 놈이 따간 돈은 모두 얼마나 되느냐?" "그, 그것이... 만 이천 냥을 상회(上廻)합니다. 제가 떠나올 때 그 정도였으니, 지금쯤은..." 고황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마음속의 투지는 더욱 타올랐다. 여태껏 자신에게 싸움을 건 자는 많았다. 돈을 따려 든 자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살아남지도 못했다. 끼이잉 열리는 문. 멀리, 앉아 있는 도박꾼의 모습을 보면서 고황은 냉정한 어조로 외쳤다. "이만 냥을 준비하라. 내가 나선다!" "와아- 대단하군, 정말!" 구경꾼들의 함성은 더욱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호연도방의 물주를 상대로 스물한 번째 연이은 승리를 기록한 사람은 여태껏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일만 오천 냥이나 되는 돈을 따간 사람도 물론 없었다. 웃음을 띠며 판돈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다 놓는 사내. 얼굴을 온통 덮고 있는 수염 때문에 정확한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좋군, 오늘은 정말 운이 좋아! 자, 한판 더 해봅시다." 사내는 웃으며 이천 냥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사내 앞에 앉은 물주의 얼굴은 이미 사색에 가까웠다. "나, 나는..."


평소 불패도(不敗賭)라고도 불리던 호연도방 제일의 도박사(賭博士)가 바로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손마저 가늘게 떨 정도로 긴장한 상태. 대답조차 명확히 하지 못하고 자꾸만 문 쪽을 힐끔거리는 모습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수염 가득한 사내가 차게 웃었다. "계속할 생각이 없다면 난 이만 일어서겠다." 이 말에 화들짝 놀란 불패도는 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오. 하겠소이다. 하, 하지만 판돈을 조금 내리는 것이... 한판에 배, 백 냥 정도를 하시면..." 사실 판돈은 누가 보기에도 너무 높아져 있었다. 처음에 닷 냥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지금은 삼천 냥을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도박꾼으로서의 필수 조건은 평정심(平定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이 잃은 불패도는 사실 더 이상 마음의 안정을 유지할 수 없었고, 도박을 계속할 여력은 더 더욱 없었다. 꿀꺽 침을 삼키는 불패도. 판돈을 낮추자는 자신의 말에 대한 사내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다. 수염사내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의 승부밖에 벌이지 못하다니... 호연도방이란 이름이 정말 실망스럽다." 사내는 천천히 돈을 쓸어 자루에 넣었다. 그리곤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조소의 빛은 점점 짙어 갔다. 적어도 얼음장같은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절대 그렇지 않소. 불패도는 일반인들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 고용된 사람일 뿐이니... 우리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겠소." 뜻밖의 음성이 정문에서 들려 오자 사람들은 놀라 돌아보았다. 혈겸이 한 사람을 수행하며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입가에 미소를 가늘게 매단 그는 고황이었다. * * * 수근거리는 군웅들. 구경꾼들의 수근거림은 당연했다. 고황이 직접 나타나는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하긴 만 오천 냥이 넘는 돈을 잃었으니... 어쨌든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고황의 주사위 실력을 직접 볼 수 있게 된 군중들의 수근거림은 상당 시간 동안 이어졌다. 다시 자리에 앉는 수염사내의 입가에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어렸다. 처음부터 만나고자 했던 목표가 드디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달그락, 달그락! 통 안에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주사위. "한판에 삼천 냥이라면 상당히 재밌는 도박을 즐길 수가 있는 돈이오."


고황은 눈앞에 놓인 육천 냥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각각 삼천 냥씩 내어 육천 냥을 두고 벌이는 한판의 도박은 중인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탁! 탁! 둘은 동시에 주사위를 탁자 위에 내렸다. 그 위를 통이 덮고 있으니 숫자는 아무도 몰랐다. 구경꾼들 틈에서 들리는 마른침 삼키는 소리. 고황이 말했다. "동시에 엽시다. 숫자가 높은 사람이 이기는 것이오." "좋소, 엽시다!" 둘은 동시에 통을 들어 주사위를 중인들이 보도록 만들었다. "아-!" "와아-!" 중인들은 너나없이 감탄했다. 각각 세 개의 주사위, 합하여 여섯 개의 주사위는 어느것 하나 예외없이 육(六)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황은 싱긋 웃었다. "동점이로군. 그럼 규칙대로 판돈은 배로 올라가오." 망설임없이 고황은 육천 냥의 은하전장(銀河錢莊) 전표를 판돈 안으로 던져 넣었다. 수염사내의 동작 역시 그보다 조금도 늦지 않았다. 말없이 은자를 세더니 육천 냥을 던져 넣었다. 다시 통 안에서 돌아가는 주사위. 달그락! 다다다주사위가 통에 부딪히는 소리는 좀 전보다 더욱 빠른 박자로 들려 왔다. 구경꾼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두 도박 고수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는 손길을 주시했다. 탁! 탁! 마침내 두 손이 주사위통을 탁자 위에 놓았다. 고황은 한 번 더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번에도 동시에 엽시다. 얼마나 높은 숫자를 만들어 냈는지 궁금하군." 그와 수염사내의 손이 치워지자 구경꾼들 사이에서 울려 나오는 감탄성으로 도방 안이 시끄러워졌다. "저, 저럴 수가!" 두 사람이 기록한 숫자는 각각 육십삼 점씩. 각기 세 개씩 돌린 주사위는 하나도 예외없이 깨어져 일부터 육까지의 숫자를 모두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 주사위가 이십일 점이란 숫자를 모두 드러내도록 깨뜨리는 도박술은 확실히 감탄의 경지를 넘는 것이었다. 고황이 얼굴을 굳히더니 말했다.


"자, 다시 판돈을 두 배로 올립시다." 망설임없이 일만 이천 냥에 해당하는 돈을 내놓는 고황이었다. 수염사내는 표정없는 얼굴로 은자를 세어 보더니 말했다. "은자가 모자라는군. 육천다섯 냥뿐이외다." 고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귀하가 도방에서 딴 돈이 일만 오천 냥이니... 그럼 원래의 밑천은 다섯 냥뿐이었단 말이오?" 수염사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황은 차갑게 말했다. "겨우 다섯 냥으로 나와 도박을 했단 말이오?" "그렇지만 내겐 일만 오천 냥이 있었지." "도박으로 딴 돈이질 않소?" "그래도 일단 딴 이상 내 돈이니까." 고황의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웃음인 듯하지만 사실 매우 화가 났다는 표시였다. 그는 수염사내가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칼은 보검이오?" "보검은 아니지만 내겐 소중한 물건이지." "보검이 아니라면 소용없소. 아, 그럼 이렇게 합시다. 당신의 도박 실력은 쓸 만하니 내가 그 손을 사겠소. 당신의 오른손을 걸면 모자라는 돈을 내가 보충해 주겠소." 수염사내는 굳은 어조로 말했다. "내 손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겠소?" "당연히 있지. 철담마도의 오른손은 칠천 냥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소." 중인들이 또다시 술렁거렸다. 춘추서원의 총관, 철담마도 황무! 총관이라기보단 춘추서원에 적대하는 강호 세력과 싸우는 것이 주임무인 그의 이름은 강호에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2. 사람의 손은 두 개 <실수는 용서될 수 없다. 하나, 부지런한 자의 실수는 용서된다. 때로는 그것을 가장하는 자의 실수 또한.> 만박의 말 중에서... 수염사내, 황무는 말없이 눈만 끔벅였다. 한참이 지나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오른팔의 가치는 확실히 칠천 냥을 넘는다 생각되오. 때문에 내 손을 판돈으로 건다면 내가 손해일 것이오." 고황은 비웃듯 말했다.


"당신이 손해 보는 느낌이 든다면 나도 판돈을 더 걸 의향이 있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황무는 왼손을 천천히 들어 고황의 목을 가리켰다. 그 와중에도 오른손은 여전히 참마도(斬魔刀) 주위를 맴돌고 있어 여차하면 도세를 발동할 준비를 갖추었다. 황무의 왼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고황은 잠시 흠칫했다. 그러나 곧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 당신의 손과 내 목숨을 바꾼다면 이번엔 내가 더 손해가 아니겠소? 역시 불공평한 도박인걸." 황무가 지체없이 말을 받았다. "나 역시 목숨을 걸지."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허공에서 부딪치는 두 강호고수, 두 도박고수들의 시선에 불꽃이 튀는 듯했다. 고황의 머리가 천천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좋소, 나도 걸겠소!" 도박에 걸 수 있는 최고의 판돈은 무엇인가? 바로 자신의 목숨이다. 한판으로 생명을 정하는 것이야말로 도박의 끝이 아니겠는가? 도박꾼으로서 생명을 건 도박을 했다면 진정한 한판을 벌였다 자랑해도 좋을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라는 최고의 긴장을 경험하는 도박! 원래 도박이란 인생을 갉아먹는 것이다. 때문에 안락한 삶을 오래 유지하고 싶다면 애초부터 도박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좋으리라. 고황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었다. 황무는 처음부터 고황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 이곳에 왔다. 어렴풋이 그 사실을 짐작한 고황은 목숨을 건 도박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만일 피한다면 상대방은 또 다른 무리한 요구를 해올 것이므로 고황은 도박을 받아들였다. 그는 새로 가져 온 주사위를 천천히 잡아 가며 말했다. "당신의 도는 참마도요. 그런데 혹 당신의 별호에도 '마(魔)'자가 들어가지 않소?" 참마도(斬魔刀)란 마를 베어 버린다는 뜻. 그런데 철담마도(鐵膽魔刀)란 황무의 별호에도 '마' 자가 들어 있으니, 곧 자기 자신을 벨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황무도 그 풍자(諷刺)를 깨달았으련만 안색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그저 주사위를 통에 넣어 천천히 돌리기 시작할 따름. 고황은 그런 황무의 눈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좀 전, 두 판의 도박으로 우린 이미 스스로의 실력을 증명한 바 있소. 원하는 숫자는 무엇이나 만들어 낼 수 있으니 단순히 높은 수를 만들어 내는 승부는 의미가 없소." 황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황을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는 듯. 고황은 속으로 인상을 쓰면서 말을 이었다. "때문에 난 두 가지 규칙을 더 넣었으면 하오. 우선 깨어지거나 변형되는 주사위가 있다면 판을 무효로 하자는 것이오."


"그 점은 찬성하오." "두 번째 규칙에는 보다 큰 묘미가 있소." 이때였다. 돌연 구경꾼들 사이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젠장, 더럽게 말이 많군! 어서 규칙을 말하고 판이나 벌일 것이지! 이 몸께서 술도 마시지 못하고 구경하고 있는 것이 보이질 않소?" 고황은 눈썹을 꿈틀하며 얼굴을 돌렸다. 구경꾼들 사이로 때에 절은 옷을 아무렇게나 걸친 거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고황이 눈짓을 하기도 전에 혈겸이 몸을 날려 그 거지의 멱살을 잡아채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아이쿠! 마, 말로 합시다." 거지는 다급하게 외치며 바닥을 뒹굴었다. 이런 점 때문에 고황은 혈겸을 믿는 것이다.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일처리를 하는 들어오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혈겸이기에,

사전에

전갈없이

벌컥

문을

열고

"우리 대결이 흥미를 많이 유발시키나 보오. 구걸하던 거지까지 들어와 구경하는 것을 보면 말이오." 말하면서 고황은 손을 들어 주사위를 돌리기 시작했다. 다다다다황무 역시 주사위를 돌렸다. 한참 동안 말없이 주사위만 돌리자, 황무의 눈에 초조한 빛이 일어났다. 문득 숨을 짧게 내쉰 뒤 황무가 물었다. "두 번째 규칙은 언제 말할 것이오?" 고황은 속으로 은밀하게 웃었다. 사실 일 대 일의 도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적인 기선 제압이었다. 그는 일부러 두 번째 규칙에 대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황무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때문에 그는 기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 두 번째 규칙의 묘미(妙味) 때문에 우리 도박은 더욱 흥미로워질 것이오." 일부러 천천히 말을 돌려서 했다. 상대방의 마음속에 조급함이 약간이라도 더 만들어지기를 바라면서. "세 개의 주사위를 부수지 않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 점수는 십팔 점이오. 그것은 다른 어떤 수도 이길 수 있지. 하지만 난 그 십팔 점을 최저점인 일 점이 이기는 것으로 하길 제안하오." 언뜻 듣기에 이 두 번째 규칙은 별것이 아니라 여겨진다. 하지만 두 사람은 주사위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이 규칙은 묘미를 갖게 된다. 무조건 높은 사람이 이기도록 한다면 둘 다 십팔 점을 만들어 내 비기게 된다. 즉 삼육십팔 점은 최소한 비김은 보장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일 점, 즉 한 번에 주사위 세 개를 쌓고 가장 위의 눈을 일로 만들어 십팔 점을 이긴다는 규칙을 적용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만일 최소한 비김을 보장받기 위해 십팔 점을 만든다면 상대의 일 점에 지게 된다. 하지만 일 점은 다시 십팔 점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점수에게는 패배하고 마는 것이니... '확실히 이 방법은 절묘하군. 오직 주사위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긴 하지만.' 황무는 속으로 뇌까렸다. 주사위는 쉴새없이 통 안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고황은 몇을 만들까? 열여덟 종류의 숫자 중에서 십팔은 한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이긴다. 반면 일은 십팔을 제외한 나머지 숫자에게 모두 지고 만다. 확률로 따진다면 당연히 십팔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만일 상대가 일을 만든다면... 확률이란 결과를 모를 경우에나 적용되는 말이었다. 만들어 내는 숫자를 정할 수 있다면 확률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황무의 등에 땀이 흘러내렸다. 이 판에 걸린 판돈은 목숨이기 때문이다. 상대는 이길 경우의 수가 가장 높은 십팔을 만들까? 그렇다면 자신은 일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만 상대가 십팔이 아닌 다른 수를 만든다면...? 그때 자신은 십팔을 만들어야만 이기는 것이다. 다다다다주사위는 계속 통 안을 맴돌았다. 긴장된 두 사람의 목숨도 그 통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미루더라도 언젠가는 맞이해야만 하는 순간이 인생에는 존재하는 법이다. 인생처럼 도박도 한자리에서 맴돌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언젠가는 결판이 나야 하며, 언젠가는 주사위를 멈추어야 한다. 결국 통은 탁자 위로 내려졌다. 탁! 탁! 긴장이 끝간데없이 호연도방 안을 헤집고 다녔다. "이번에도 통을 우리가 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생각하지 않으시오?" 고황의 말에 황무는 동의했다. "통을 여는 순간 속임수를 쓸 수도 있으니... 바람직하지 않겠구려. 그럼 어떤 사람을 시켜 통을 열 생각이오?" 고황은 차갑게 웃으며 혈겸을 불렀다. "아까 끌고 나간 거지를 이리로 데려오라." 혈겸은 아직도 호연도방 앞을 기웃거리고 있는 거지를 다시 잡아 끌고 들어왔다.


화려한 탁자 위. 역시 화려한 모양과 색채를 갖춘 호연도방 특유의 주사위통을 응시하며 서 있는 거지의 모양은 그 모든 것들과 부조화스러웠다. "통은 이자로 하여금 열도록 하겠소. 그것이 가장 공평할 것이오." 고황의 말에 황무는 다시 한 번 더 동의(同意)했다. 거지는 손을 가늘게 떨면서 통을 잡았다. 고황은 자신있는 어조로 말했다. "내 것부터 먼저, 가능하면 천천히 열라. 구경하는 사람들이 충분한 긴장감을 맛볼 수 있도록 말이다." 마침내 고황의 주사위는 결과를 드러냈다. "아-!" "아니, 저럴 수가-!" 구경꾼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주사위는 세 개가 하나로 쌓여 있었고, 가장 위의 것은 일(一)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가능한 숫자들 중에서 가장 낮은 숫자였다. 고황은 태연하게 말했다. "가장 낮지만 십팔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지. 자, 이제 다른 통을 열어라. 최대한 느리게." 고황은 태연했지만 황무는 태연하지 못했다. 구경꾼들이 보기에 그는 긴장으로 팽팽하게 굳어 있는 듯했다. 이 한판에는 생명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의 주사위는 어떤 숫자를 나타내고 있을까? 첫 번째 주사위가 드러나자 중인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너무 천천히 움직여 보는 사람을 감질나게 만드는 거지의 손이 처음 드러낸 주사위는 육(六)을 나타내고 있었다. 고황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걸린 것이 목숨이므로 당신은 함부로 모험을 할 수 없었을 것이오.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은 하나지. 십팔이 모든 숫자 중 가장 높으며 상대방이 일(一)만 아니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것. 난 이렇게 목숨을 거는 도박을 수십 번 했지만 상대방의 선택은 언제나 한결같았소." 두 번째 주사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육! 고황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과연 일 점을 만들고도 안심할 수 있을까? 만일 일 점이라면 상대방이 약간의 실수만 하더라도 지게 되오. 대부분의 사람은 목숨을 건 도박에서 상대방이 그렇게 위험한 숫자를 만들 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 하하, 그리고 그것이 내가 노리는 바란 말씀이오. 우린 어떤 숫자든 자유롭게 만들 수 있으니..." 황무의 안색은 더욱 딱딱해졌다. 거지 역시 긴장되는지 손의 움직임이 더욱 더뎌졌다. 심장 뛰는 소리 외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가운데, 마침내 세 번째 주사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 하나 남김없이 감탄음을 내는 구경꾼들. 황무의 안색은 여전히 딱딱했다. 그는 표정보다 더욱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목숨을 건 도박은 마침내 판가름이 났군." 혈겸이 천천히 황무의 뒤로 돌아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고황의 입가에 매달려 있던 미소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죽게 된 사람이 웃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불신의 표정으로 고황은 마지막 주사위를 노려보았다. 오(五)! 황무의 숫자는 육, 육, 오의 십칠 점이었다. "실수? 아니면..." 고황의 질문은 흡사 신음 같았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황무는 고개를 흔들었다. "실수가 아니오. 십팔은 일이 나오지 않으면 일단 지지는 않지. 마찬가지로 십칠도 십팔이 아니라면 일단 지지는 않소. 똑같은 조건이란 말이지." "내가 만일 십팔을 내었다면?" "그럴 가능성이 적다 생각했소. 내기하기 전 당신은 십팔과 일에 대해 규칙을 만들었소." 황무는 표정의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두 숫자, 즉 일과 십팔은 은연중에 뇌리에 남아 있게 되지. 선택할 때 당신은 스스로가 만들었던 규칙을 기억하게 될 거요.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두 숫자를 기억할 거요. 둘 중에는 십팔이 지니, 십팔을 피하고 싶어지겠지. 당신은 역의 역을 찔렀지만 내가 다시 그 역을 노리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오." 황무의 말대로였다. 고황은 황무가 십팔이나 일 중 하나를 택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둘 중에서 높은 일을 만들었던 것인데... 두 번째 주사위가 육을 드러내는 순간까지 고황은 참으로 의기 양양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목숨마저 잃게 생겼다. 도박에서 졌으니 곧 상대방에게 줘야 할 것이다. 고황의 손이 천천히 위로 들려졌다. 스스로 판돈을 변제하기라도 할 셈인가? 목숨을 스스로 끊을 작정인가? 고황의 오른손, 흑령장(黑靈掌)을 담은 그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자살하기 위한 움직임은 결코 아니었다. 꽈앙! 탁자를 덮친 흑령장은 그것을 산산조각냈다. 자연 그 위에 놓여 있던 주사위도 부서졌을 것이다. 놀라 뒤로 마구 물러나는 거지의 모습은 우습기조차 했다.


고황은 잃었던 웃음을 되찾고 난 후 말했다. "이번 판의 묘미는 첫 번째 규칙에도 숨어 있었지." -깨어지거나 변형되는 주사위가 있으면 판은 무효. 황무의 미간이 좁아졌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생각이군." "규칙은 규칙 아니겠소? 주사위는 이미 깨어졌으니 이번 판은 무효요." "고황이 도박과 무공에 제법 명성이 있음은 천하가 알고 있지. 하지만 억지 부리는 솜씨는 더욱 절묘하군." 황무의 야유에도 고황은 입가의 웃음을 풀지 않았다. 사실 야유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죽은 사람은 여태껏 아무도 없었으니까. "철담마도 황무가 이런 도박 솜씨를 지녔음은 나 역시 미처 몰랐소. 시비를 걸었던 건 당신이 먼저였으니 날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그의 양손이 검게 변했다. 흑령장이 기운을 더해 가며 양손에 집중되는 모습. 황무는 곁눈질로 혈겸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차갑게 말했다. "불복하고 날 협공할 셈인가?" "그렇지는 않소. 당신은 한마디 말 속에 잘못된 지적을 두 가지나 했구려." 여전히 흑령장을 돋운 상태로 고황은 고개를 저었다. "첫째, 난 협공을 하지 않소. 이곳은 내 도박장이니 난장을 만들 수는 없지 않겠소? 그리고 두 번째로, 불복이란 단어는 날 매우 불쾌하게 만드는구려." 한 발 앞으로 나서면서 고황은 말을 이었다. 그가 움직이자 바닥에 새겨진 발자국 하나가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그것은 그의 내공이 고강함을 말해 주는 표시였다. 앞으로 나선 행동은 공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무언중의 시위였다. 나의 힘이 이러하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뜻의... "주사위가 깨어졌으니 규칙에 따라 판이 무효가 된 것뿐이오. 판이 무효니 당연히 승부 역시 비긴 셈이지." 황무는 오른손에 잡은 참마도의 손잡이를 힘있게 움켜쥐었다. 많은 사람들이 흥미 진진한 눈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결코 안심하고 구경이나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싸움이 일어나면 무공이 없는 자들은 크게 다치리라. 슬금슬금 밖으로 피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남아서 구경을 즐기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였다. 다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들과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 눈을 끔벅이며 황무와 고황을 번갈아 바라보는 거지는 둘 중 어디에 속할까?


호기심이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하다는 말인가? 거지는 단순히 상황을 쳐다보는 정도에서 벗어나 천천히 그 상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손에는 어느 틈에 구했는지 술병 하나가 들려 있었고, 그 병에 든 술을 마시는 거지의 표정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장내! 고황은 비록 싸움이 없을 것이라 말했으나, 그 말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황무의 손에 들린 도에서도 점점 도기(刀氣)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거지가 상황이 그러함을 알지 못하는 듯 둘 사이에 끼여들었다. 살기가 미친 듯 일어나는 순간, 거지의 입이 열렸다. "이쪽 분에게 물어 볼 말이 있소." 의외의 상황에 접하면 살기가 감소한다. 황무의 살기가 약해졌고 그 점은 고황이 더욱 심했다. 거지는 고황을 가리키며 말했었으니까. 고황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말이냐?" "주사위가 깨져서 판이 무효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거지는 술을 한 모금 더 들이키더니 말을 이었다. "만일 판이 무효가 아니었다면 판돈을 내어 놓을 의향이 있으셨소?" "물론이다. 나 고황은 약속을 지킨다." 이것은 다분히 진실되지 못한 말이었지만 고황은 자신있게 말했다. 이미 깨어진 주사위! 그런데 그 여섯 개의 주사위가 거지의 오른쪽 소매 안에서 떼구르르 굴러 나올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바닥에 놓인 주사위는 호연도방 특유의 무늬를 갖고 있었다. 고황의 얼굴이 가면을 뒤집어쓴 듯 딱딱하게 굳어질 때 거지는 매우 통쾌한 웃음을 지었다. "크헤헤, 이것으로 아까 한 대 맞은 빚을 갚게 되었군. 확인해 보시오, 방주. 아까 당신이 굴렸던 주사위가 맞는지." 고황은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황무가 번개같이 움직여 주사위를 손에 쥐었기 때문이다. 고황이 다시 부수려 들까 겁난다는 듯이. "이제 판은 다시 효력을 갖게 되었군." 황무의 음성은 득의한 감정을 반영하는 듯 낭랑했다. "방주는 어서 판돈을 내게 주시오." 고황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지 따위에게 만들어 준 원한도 이런 식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인가? 한참 후 그는 눈짓으로 혈겸을 불렀다.


여차하면 출수하여 황무를 뒤에서 공격하려던 혈겸은 영문을 모른 채 고황의 곁으로 돌아왔다. 고황은 힘없이 황무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내 목숨을 탐하는 게요? 내가 당신에게 죄를 지었던 적이 있소?" 황무는 차갑게 대답했다. "내겐 없지만 내 수하에게 있었소. 구 서생을 기억하오?" 물론, 고황은 기억했다. 생각이 절심산(切心散)으로까지 미치자 고황은 더 이상의 질문을 포기했다. 계속 묻는다면 자신의 죄를 스스로 천하에 알리는 꼴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좋소. 내가 졌으니 대가를 지불하지. 하지만 조금 늦게 지불하는 건 상관없다고 생각되오." "너무 늦어서는 곤란하오. 판돈의 지불은 하루를 넘기지 말아야 하오." "하루를 넘기지 않겠소. 오늘밤 지불하겠소." 황무는 잠시 생각했다. 이자는 또 어떤 계략을 꾸미고 있는 걸까? "어디서 지불할 생각이오?" "내 집에서. 당신은 흑령방에 와서 판돈을 받아 갈 의향이 있으시오?" 황무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오늘밤 자시에 찾아가겠소. 판돈을 확실히 준비해 두길 빌겠소." 고황은 아무런 대답 없이 몸을 돌려 호연도방을 떠났다. 고황이 구경꾼들 사이로 걸어가자 그들이 분분히 비켜서는 모습은, 마치 바다가 갈라지는 듯했다. "흐흐, 사람은 거지는 황무는

영악한 것! 지금쯤 어떤 수단으로 생명을 연장시킬까 궁리하겠지. 고황의 영악함을 따라갈 천하에 별로 많지가 않지." 고황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거지를 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적어도 당신은 고황을 능가할 것이오." 거지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엥? 무슨 말씀이시오? 난 그저 당신을 도와 주려고 애썼을 뿐인데... 게다가 나 정도로 어떻게 고황을 능가한단 말이오?" "만일 계속 부인하겠다면 당신의 정체를 밝힐 수도 있소. 그것은 당신도 원하지 않겠지요?" 거지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말투마저 전과는 완연히 달랐다. "날 알아보았는가?" "처음부터 알아보았소." "그런데도 날 위협하는가?" "당신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에 한 말일 뿐이오." 거지는 몸을 꼿꼿이 세우더니 말을 이었다.


"난 자네를 도와 주었네. 그런데도 이런 대접밖에 못 받다니, 참으로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군." 황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불패도(不敗賭)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황무는 자신이 땄던 은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은자를 네게 주겠다. 대신..." 불패도는 눈을 크게 뜨고 황무의 말을 경청했다. 은자의 양은 엄청났으므로 누구라도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대신 저분께 스무 동이의 술을 사다 드려라. 가장 향기롭고, 가장 독한 술로 스무 동이다. 알겠느냐?" 황무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거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고함을 질렀다. "술을 사준다고 내가 당신을 도와 줄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오히려 반대요. 절대 도와 주지 말 것을 부탁하는 술이외다." 황무의 음성이 멀리서 들려 왔다. 이 말은 진실이었다. 황무는 정말 거지의 도움을 받기 싫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이자의 도움은 싫었다. 잠시 후 거지는 술독 사이에 파묻혀 흥얼거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다섯 동이의 독주를 비우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거지를 방해하지 못했다. 스무 동이의 술값은 삼만 냥이 넘는 것이었으므로. 거지는 껄껄 웃으며 다시 한 동이의 술을 비웠다. "크하하, 철담마도의 본 모습은 소문보다 훨씬 뛰어나구나! 크하하, 정말 유쾌하구나. 이런 날은 마셔야지. 마구 마셔야지, 아암. 크하하하!" 술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밤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거리는 어둠의 장막에 덮여 앞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흑령방 근처에만 오면 어둠의 장막은 사라진다. 당신은 불야성(不夜城)이란 말의 뜻을 실감하게 되리라. 쾌락을 찾아 오가는 사람들 사이를 황무는 천천히 걸었다. 자시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천천히 걸어야만 흑령방에 당도하는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정확한 시간이군요." 혈겸이 낮과는 딴판으로 황무를 공손히 맞이했다. 황무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안내를 받아들였다. 담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 문득 담장 너머에서 사내와 여인네의 웃음 소리가 까르르 들려 왔다. 황무의 미간이 약간 움직였다. 혈겸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장사를 멈추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방주가 오늘날의 부를 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담장이 왼쪽으로 휘어졌다. 자연 둘의 발길도 왼쪽을 향해 돌았다. "천하인들이 아는 것은 전대 방주 때부터 있었던 주위의 도방과 기루들뿐일 현방주님께서 일구어 낸 비밀 도박장과 기루들이 사실 훨씬 더 많습니다." 황무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는 혈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겁니다.

하지만

"협상인가?" "무, 무슨...?" "재산의 많음을 알려 주는 이유는 무엇이지? 목숨 대신 내어 놓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음을 알려 주자는 의미인가?" 혈겸은 고개를 숙였다. "과연 대단하시군요. 그렇습니다. 만일 대협이 판돈을 다른 것으로 받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춘추서원의... 재정이 좋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황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한숨과 더불어 말했다. "고황은 좋은 수하를 두었군." 황무는 오른손으로 도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리곤 지나가는 말인 듯 물었다. "아까 자네는 내가 묻지 않았는데도 내 마음을 짐작하고 대답을 해주었네.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지." 혈겸은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또 협상 내용을 돌려서 말해 내가 먼저 말을 꺼내게 만들었으니, 이것 또한 능력이 있음이지." "감당할 수 없는 칭찬이십니다." 황무는 고개를 숙인 혈겸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네를 보면서 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네." "무슨 생각이십니까?" "내가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니 틀림없이 대비책을 세웠을 것이네. 지금 같은 회유가 아닌 물리적인 대비를. 그렇지 않나?" 혈겸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서 빛이 크게 일었다. "과연 철담마도!" "역시 준비했군. 자, 어서 시작해 보지. 난 기다리고 있으니." 황무의 말에 혈겸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말뜻은 협상을 거부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정확히 그런 뜻이지." 혈겸은 쏜살같이 뒤로 물러났다. 화려한 주변 건물들과는 대조적으로 수수하게 지어진 작은 삼층건물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혈겸. 황무의 손에서 참마도(斬魔刀)의 도기가 폭풍처럼 일어났지만 혈겸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혈겸이 서 있던 땅바닥에서 폭우정(暴雨釘)이 마구 솟구쳐 올라왔기 때문이다. 황무가 쫓지 못하도록 계산이 있었던 듯. 혈겸을 공격하기 위해 내뿜었던 도세를 폭우정을 제거하는 일에 사용한 황무는 허공에서 몸을 한바퀴 돌렸다. 황무는 사뿐히 바닥에 내려앉으며 크게 외쳤다. "흑령방이란 이름은 강호사에 길이 남겠구나. 고황, 넌 언제쯤 정정당당하게 날 맞이할 생각이냐?" 그의 음성이 웅웅거리면서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으하하하-" 돌연 고황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난 삼 층에 있다. 만일 세 개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을 받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으하하하...!" 사실 이런 경우에 웃음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뻔뻔스러움을 웃음 속에 감추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은 법이다. 황무는 안색을 엄중히 하고는 삼층건물을 바라보았다. 분명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무는 두렵지 않았다. 자신은 결코 고황 따위의 계략에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무는 담담한 신색으로 문을 열고 음모가 도사린 삼층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철컹! 황무를 삼켜 버린 철문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삼 층에 도달했을 때 황무의 옷은 다섯 군데가 찢겨져 있었다. 일, 이 층에 도사리고 있던 위험들이 남겨 준 흔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위험했던 적은 없었다. 옷만 찢겨졌지 살갗은 전혀 상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관문인가?" 굉장히 큰 철문! 중앙에는 손바닥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철문 안에서 고황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곳에 손바닥을 대고 문을 열면 당신은 모든 관문을 통과하게 되오. 단 한 손만 사용할 것. 내가 혼자 열 수 있는 최대의 힘을 계산해 만든 철문이니... 문을 열면 당신의 내공이 나보다 월등함을


증명하는 셈이지." 황무는 차가운 눈빛으로 오른손을 철문에 대었다. 끼이이잉내공을 돋우어 밀자 철문이 울리기 시작했다. 철문의 무게와 인간의 내공이 싸우면서 울려 나오는 소리는 마치 고양이의 울음 소리처럼 날카로웠다. 그리고 잠시 후, 끼이익! 철문은 천천히 움직였으며 마침내 열렸다. 열린 틈 사이로 땅바닥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고황이 보였다. 이제 황무는 마침내 고황에게서 판돈을 받아 내게 된 것이다. 사학사 구의 복수와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의 처형을 동시에 행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황이 과연 저렇게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성격의 인물일까? 이제까지 해왔던 일들로 본다면 결코...!' 황무는 지체없이 몸을 옆으로 날렸다. 휘이잉! 혈겸의 낫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 조금만 늦었더라도 철문 옆에 숨어 있던 혈겸의 낫이 자른 것은 공기가 아니라 황무의 살과 뼈였을 것이다. 황무의 참마도법은 강호에 명성이 높다. 몸을 피한다 싶은 순간, 그의 오른손은 이미 참마도를 뽑아 들고 혈겸의 낫을 노릴 정도였다. 혈겸 정도의 실력으로는 감히 그와 겨룰 수가 없다. 참마도의 공세에 놀란 혈겸이 급히 초식을 바꾸자, 도와 낫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쨍! 두 무기 중 하나가 허공으로 날았다. 부딪치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만 것이다. 황무는 눈을 크게 떴다. 허공으로 날아간 것이 자신이 참마도였으므로. "독을 썼구나!" 황무는 크게 외치면서 공력을 돋우어 오른손으로 침범하는 독기(毒氣)를 막으려고 애썼다. 그 모습을 보면서 고황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것이 바로 마지막 철문의 효용이지. 먼저 두 번의 함정은 사실 마지막 함정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역할에 불과했으니까." 그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혀를 찼다. "쯧쯧, 이제 어쩌겠소? 철담마도의 우수(右手) 도법은 매우 유명하지만 그 손은 이미 못쓰게 되었지. 어떡하시겠소?" 황무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가까스로 오른손에 독기를 억눌러 두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오른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데 어떻게 힘을 주어 도를 잡겠는가? 고황은 황무가 놓쳤던 참마도를 집어 들었다. "무기도 없는 적을 상대로 싸우면 비겁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겠지. 옛소, 도를 주겠으니 어디 한번 받아 보시구려!" 참마도는 빙글빙글 돌면서 허공을 날아 황무에게로 다가왔다. 거의 동시에 고황의 흑령장과 혈겸의 낫이 달려들었다. 평소 참마도를 잡았던 황무의 오른손은 독에 의해 마비된 상태였다. 번쩍! 순간적이지만 눈을 멀게 만들 듯한 밝은 빛이 방안에서 일어났다. 정신을 차린 고황은 자신의 양 어깨가 허전함을 느꼈다. 멀리 허리가 양단된 혈겸의 시체가 보였지만, 그것보다 자신의 어깨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이 우선이었다. "크아악! 내, 내 팔!" 고황이 울부짖자 황무가 차갑게 말했다. "인간에겐 팔이 두 개 있지. 명심하도록 해라." 물론 고황도 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양팔이 동등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오른손보다 왼손이 더욱 빠르다니...! 강호에 황무의 우수(右手) 도법이 유명한 것은 모두 헛소문이었던가? "다, 단 일 초에 나와 혈겸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넌 실력을 숨겨 왔구나...!" 고황은 고통 속에서 가까스로 이처럼 말했다. 황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누군가를 닮았다고 고황은 생각했다. -널 한 번은 살려 둔다. 하지만 다시 만나면 내 손에 죽으리라! 오래 전에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던 사람. 처음 보는 순간에도 고황은 그에게서 죽음의 공포를 느꼈었다. '서, 설마 이자가...!' 문득 무서운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참마도를 들고 있는 황무의 왼손을 쳐다보면서 고황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 당신은 혹시...?" 그러나 고황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황무의 참마도가 그의 목을 긋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데구르르 바닥을 구르는 고황의 수급. 핏속을 뒹구는 그의 얼굴이 담고 있는 표정은 누구라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공포였다.


흑령방주 고황! 그의 악명은 강호에 높았지만 마침내 춘추서원의 총관이며 제일고수인 황무의 손에 죽고 말았다. 구(具) 서생의 복수였다. 3. 낙양으로 <세상은 한 사람의 말은 믿지 않는다. 하나, 세 사람의 말은 믿는다. 세상에 알리고 싶은 일이 있다면 우선 그것을 알릴 사람을 모으라.> 만박의 말 중에서... <무혼지겁(武魂之劫)을 조사하면서 몇 가지 의문점이 생겼네. 그 많은 혈겁들을 광무혼(廣武魂) 한 사람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나로서는 믿기가 매우 힘들었네. 난 더 많은 기록과 숨겨진 비사(秘事)들을 알기 원했으며, 자네도 알다시피 그것들을 얻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었네. ...中略...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무혼지겁에는 확실히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존재하네. 불과 십 년밖에 지나지 않은 일에 대한 기록이 강호에 너무나 적게 남아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러하네. 물론 무혼지겁으로 인해 생명을 잃었던 사람이 너무나 많은 탓에 기록이 망실(忘失)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네만, 난 다른 가정을 세워 보았네. 그 가정을 좀더 깊숙이 파고들려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복면인들에 의해 난 말았지. ...中略... 일 년간 갖은 노력 끝에 한 명을 포섭할 수 있었네. 그를 통해 서신을 보내니, 부디 날 찾아 주게. 내가 있는 곳은 나로서도 도저히 알아 낼 길이 없네. 다만 낙양(洛陽) 근처라는 것만 짐작할 따름일세. 이자들의 힘은 무서우니 부디 조심하게. 난 이들이 아마도 무혼지겁에 얽힌 비밀과 연관이 있는 자들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네.> 황무는 마른침을 삼키며 서신을 내려놓았다. 그의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웠다. 황무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서생, 부총관 최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납치당하고

"감히 제가 먼저 뜯어 보았습니다. 용서하시길... 한 가지 일에 빠지시면 다른 것은 돌보지 않는 총관의 품성을 감히 미리 짐작했습니다." 황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로서는 책망이 아니라 몇십 번이라도 칭찬해야 할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 "누구, 누구에게 이 사실을 알렸는가?" "현재 본 서원에 와 계신 소림의 대지 대사와 무당의 창허 도인에게 알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강호 각파에 보내는 연락은 총관께서 돌아오신 후로 미루어 두었습니다." 황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지 대사와 창허 도인이 모여 있다지?" "그렇습니다. 낙양 근처의 문파에 대한 조사 보고를 제가 할 예정입니다." * * * "원주를 납치할 만한 힘을 갖춘 문파를 선별해 보기 위해선 우선 현무림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최오는 나직하지만 힘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원형의 탁자 앞에 서 있었고, 탁자에는 세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한 명은 당연히 황무였으며, 다른 두 명은 소림의 대지와 무당의 창허였다. 그들은 이십대 중반의 젊은 고수였으며 차기 소림과 무당을 짊어질 인재로 촉망받는 존재들이었다. 패기와 신념을 갖춘 두 젊은 고수! 그들은 십 년 전의 무혼지겁이 끝난 후 새롭게 나타난 후기지수(後期之秀)들의 수좌 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 세 사람 앞에서 최오는 현무림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아는 사실이었지만 최오의 말을 중단시키는 사람은 없었다. 알고 있는 내용도 한 번 더 검토해 보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낼 수도 있는 법이니까. "백 년래 강호에서의 최대 변란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무혼지겁입니다. 그전까지 강호에 군림하던 열 명의 절대고수, 십절(十絶)이 모두 그 무혼지겁으로 목숨을 잃고 오직 한 사람, 무혼지겁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광무혼(廣武魂)만 살아남았습니다. 그에 의해 차후 일 년간 천하는 겁난(劫亂)에 휩싸였습니다..." 십 년 전, 열 명의 절대고수 십절이 이끄는 천하(天下) 오패(五覇)라 불리던 다섯 개의 엄청난 세력이 천하를 독패하고 있었다. 열 명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능히 소림장문인과 무당장문인의 합벽을 당해 낼 수 있다는 십절! 그들이 한꺼번에 만인총(萬人塚)에서 몰사당하는 일이 발생할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음모를 꾸민 광무혼만이 십절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천하를 상대로 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그 후 일 년간 천하는 차마 표현하지 못할 겁난에 휩싸여 몸부림쳤다. 강호의 고수는 과반수가 사상(死傷)당했으며, 특히 절정고수라 일컬어지는 자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마침내 강호가 광무혼의 혈수 아래 떨어지게 될 무렵, 그들이 나타났다. 다섯 명의 젊은 고수들. 갓이십을 넘긴 그들은 오수(五秀)라고 불렸으며, 엄청난 무공으로 광무혼의 세상을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천하인들은 왜 그들이 그토록 큰 힘을 지닐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십절 이전 강호상에 우뚝 섰던 세 명의 고수들. 흔히 삼기(三奇)라 불렸던 기인들의 제자들이 바로 오수였던 것이다. 무혼지겁이 시작된 지 일 년. 광무혼은 천하를 장악하기 일보 직전에 오수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그리하여 무혼지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열흘! 광무혼의 모든 음모를 분쇄한 오수는 삼기가 남긴 모든 힘을 동원하여 광무혼을 추격한다. 마지막 날, 태산 아래에서 광무혼은 이천 근의 폭약과 더불어 자폭하고, 마침내 천하를 덮었던 무혼지겁은 종말을 맞는다. 이들 오수가 바로 오늘날 오성(五聖)이란 칭호로 불리는 다섯 성인의 전신이다. "...이상이 십 년 전 무혼지겁의 개략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강호 세력은 세 갈래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목이 마른지 미리 준비된 물을 한잔 마신 최오가 말을 이었다. "우선 첫째는 오성이 이끄는 오성련(五聖聯)으로, 현강호에서 가장 큰 힘을 자랑합니다. 또한 모두가 아시다시피 당금의 평화기를 주도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소림(少林)의 뇌불(雷佛)! 무당(武當)의 염도(炎道)! 개방( 幇)의 취개(醉 )! 송하림(松霞林)의 만유(慢儒)! 그리고 천화궁(天華宮)의 선향(仙香)! 이들 다섯이 모인 힘을 오성련이라 하며 그 힘과 대적하려는 힘은 강호 어디에도 없음을 천하는 알고 있었다. "두 번째 갈래는 무혼지겁을 겪으면서 살아남은 방파들입니다. 그들은 강성했던 옛모습을 많이 잃긴 했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점차 힘을 기르고 있습니다." 황무가 상대했던 흑령방 같은 경우가 이에 속한다. 이전의 힘이 강했건 약했건, 무혼지겁 같은 대혈겁을 겪으면서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강함을 자랑하는 몇몇 방파라 하더라도 오성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현실. 천지회(天地會)와 금룡궁(禁龍宮), 그리고 유령전(幽靈殿)이 그 중에서도 강했다. "세 번째 갈래는 신생 문파입니다. 십 년 내로 성장할 고수들이 이끄는 세력은, 물론 오성보다는 약하지만 두 번째 갈래의 수좌 격인 천지회 등보다는 오히려 강하다 할 수 있습니다. 무혼지겁을 당하지 않아 힘의 축적이 상대적으로 쉬웠던 까닭이 클 것입니다." 춘추서원도 여기에 속한다. 원래 강호 방파라 하기엔 어색했지만 만박과 총관인 황무가 들어오면서 문파 전체를 새롭게 정비, 단순한 사학사(史學士)들의 모임에서 당당한 강호 방파로 서도록 만들었다. 그 외 광명전(光明殿)과 월곡(月谷)이 강했다. 하지만 신흥 방파들은 기존의 강호 거목들이 무너진 힘의 공백 상태 속에서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자라나고 있는지라, 기실 어느 방파가 강하고 약하고를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웠다. 검증이 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긴 설명이 지난 후 최오는 숨을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설명을 듣고 난 황무가 물었다. "힘을 가진 문파들, 감히 원주를 납치할 담량을 갖춘 문파들이 낙양 주위에 몇이나 있는가?" "낙양 근처에는 강호문파가 모두 열한 개가 있습니다. 하남성까지 범위를 늘린다면 훨씬 많은 숫자가 되겠죠."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최오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그 중 원주님을 소리없이 납치할 수 있는 고수를 지닌 문파는 셋입니다. 아무리 넓게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이나 된다는 말씀입니까?"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대지(大智)가 놀라 최오에게 물었다. 소림의 후기(後期)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재로 평가받는 그였다. 최오는 심각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중 둘은... 솔직히 가능성이 없습니다. 저는 천지회(天地會)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최오는 중간에 약간 말을 끊었다. 그 이유를 황무는 알 것 같았다. 낙양 주위에 존재하는 무림 방파 중 가장 강한 문파를 고르라면 어린아이라도 쉽게 할 수 있으므로. 대지 역시 최오의 말속에 숨은 의미를 짐작하고 말했다. "저희는 개의치 마시고 편안히 말씀하십시오." 수도하는 사람답게 담담한 어조로 대지가 말했다. "가능성이 없다는 두 문파는 혹 송하림(松霞林)과 개방의 낙양분타를 말씀하심이 아니신지요?" 최오는 답하지 않고 조용히 머리만 숙였다. 사실 당금의 강호에서 오성련에 속하는 두 문파를 의심한다는 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지와 창허는 소림과 무당의 제자. 오성련에 속하는 두 문파가 아닌가? 말하기 곤란해 하는 상대의 속내를 대신 짚어 주는 대지의 행동은 그런 면에서 매우 대범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황무가 말했다. "비록 두 분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나, 송하림과 개방의 정대(正大)스러움은 천하가 인정하는 것. 어찌 그 문파를 의심하게 두겠소이까? 만일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세력이 아니라면... 역시 천지회일 것이외다." 말을 마친 황무는 은밀히 최오에게 눈짓을 보냈다. 최오는 급히 다음 말로 옮겨 갔다. "천지회의 회주는 둘입니다. 파천공(破天公)과 열지모(裂地母)란 자들입니다." 최오의 빠른 화제 전환은 국면을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었다. 아무리 대지와 창허의 수양이 깊다 한들 그들은 아직 젊은이에 불과했다. 자신의 문파와 관련있는 이름이 의심의 대상이 된다면 기분이 나빠짐을 피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때문에 최오는 황무의 눈짓을 받자마자 천지회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돌렸던 것이다. 한 가지 목표를 잡으면 그 목표를 일단 철저히 추구해 보는 것이 황무 특유의 일처리 방법이었다. 지금과 같은 경우, 그 방법은 적절했다. 천지회가 의심이 가면 일단 철저히 조사해 보는 것이다. 만일 혐의가 없다면 그때 가서 다른 의심을 가져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단, 춘추서원에서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비밀만 보장된다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천지회에 대한 조사를 마쳐 둔 최오의 솜씨는 그래서 충분히 칭찬받을 가치가 있었다. 이런 인재(人材)가 춘추서원의 살림을 도맡아 주는 덕분에 황무로서도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춘추서원을 위협하는 강호 세력과 싸울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최오의 말이 이어졌다. "아시다시피 이들은 무혼지겁을 겪어 낸 문파입니다. 원래의 천지회는 십절에 속하던 파천제(破天帝)와 열지후(裂地后)가 이끌던, 천하 오패(五覇)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랬다. 하지만 파천제와 열지후가 광무혼의 음모에 의해 죽은 이후 천지회는 지리멸렬, 그 세력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오성에 의해 겁난이 수습된 직후 파천제와 열지후의 제자라면서 나타난 두 인물이 다시 천지회를 소집했다. 신분이 이전 회주보다는 낮음을 상징하기 위해 그 별호조차 파천공(破天公)과 열지모(裂地母)였다. "원주께서는 무혼지겁의 뒤에 음모가 숨어 있는 것 같다고 서신에서 말씀하셨네. 그 음모란 무엇일까?" 천지회에 관한 설명을 모두 듣고 난 황무는 턱의 수염을 매만지며 최오에게 물었다. 하지만 사실 그 질문은 좌중의 세 명 모두에게 던진 것이었다. 여태껏 조용히 있던 창허가 입을 열었다. "혹, 무혼지겁에 관여했던 주모자들이 살아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어쩌면 광무혼(廣武魂)이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모르지." 옆에 앉은 대지가 혼자말인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황무는 실소(失笑)하면서 말했다. "그럴 가능성은 없소. 내 생각으론 무혼지겁이... 광무혼 혼자만의 음모가 아니었다는 의미라고 여겨지오. 그리 되면... 무혼지겁의 모든 책임을 광무혼 혼자에게 물은 셈이니, 다른 음모자는 지금쯤 어디선가 다른 악업을 쌓고 있을 게 아니겠소." 문득 최오를 돌아보며 묻는 황무. 단심서생 최오에 대한 그의 신임(信任)을 알 수 있게 하는 장면이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최오는 고개를 잠깐 숙이며 답했다. 자신의 의견을 물어 준 황무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제 생각도 총관과 동일합니다. 원주께서도 서신의 머리에서 무혼지겁이 광무혼 혼자 저질렀던 일이라고는 보기 곤란하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어쩌면..." 미간을 약간 찌푸리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어쩌면 무혼지겁을 꾸민 것이 광무혼 혼자가 아니었고, 누군가 조력자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이 여태껏 살아 있다면... 그렇다면 원주를 납치할 충분한 이유를 갖게 되겠지요." 대지와 창허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동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그들이 입을 열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대지,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자를 징벌하겠습니다." "창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무혼지겁을 직접 겪지는 않았으나 그때의 처참함을 충분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생명을 바쳐서라도 또 다른 겁난을 막겠습니다." 그들의 안색은 단호한 결심으로 굳게 변했다. 하지만 표정만은 더없이 성결(聖潔)했다.


강호를 겁난으로부터 구해 낸 오성련(五聖聯), 강호 정의를 위한 숭고한 무인 정신의 구현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황무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포권했다. 그들의 말이 만박(萬博)을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해 도와 주겠다는 의미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원주를 대신해 감사드리오, 두 분. 언젠가는 원주께서 직접 두 분께 감사의 말을 하실 수 있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외다." 비록 나이가 자신보다 어리다 하나 소림과 무당의 후기를 노리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 * 구조고도(九朝古都) 낙양(洛陽). 동주(東周)가 처음 도읍한 이래 아홉 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기에 불려지는 말이다. 낙양성 안을 흐르는 낙하(洛河)는 물살이 거셌다. 그렇지만 강바닥이 깊이 팬 탓으로 물이 제방을 넘는 일은 없었다. 그 낙하를 건너는 다리가 바로 그 유명한 천진교(天津橋)였다. 맑은 하늘. 대갓집의 공자로 보이는 두 청년이 천진교를 바라보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이 다리가 낙하의 여신이 지혜를 써서 만들었다는 다리란 말인가?" 멀리서 온 듯, 구경하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청년이 물었다. 덥지 않은 날씨임에도 손에 부채를 쥔 다른 청년이 여유있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여신께서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으로 나타나 강 가운데 배를 대고 낙양의 돈 많은 청년들을 유혹했다네." "수많은 청년들이 그 아름다움에 홀렸겠구먼." "두말할 필요도 없지. 너도나도 여신과 사귀길 원하자, 여신은 그들에게 조건을 제시했다네." "무슨 조건인가?" 멋으로 든 부채를 한 번 탁 치며 시간을 끌어 상대의 감질맛을 증가시킨 청년이 말을 이었다. "강 가운데... 그러니까 저쪽쯤일 걸세. 배를 중간에 정지시킨 여신은 동전을 던져 배 가운데의 막대를 맞추는 자와 사귀겠다고 말씀하셨네." "별로 멀어 보이지 않는데... 나라도 맞출 수 있어 보이는데?" 유람 온 청년의 말에 부채청년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 같은 백면서생은 말할 것도 없고, 제법 무공을 갖춘 자들조차 한 명도 성공하지 못했다네. 아마 여신이 암암리에 손을 쓴 탓일 것이네." "그럼 한 명도 막대를 맞추지 못했는가?" "그래, 단 한 명도." "애꿎은 동전만 배 위에 쌓였겠군." "쌓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배 전체를 덮어 버리다시피 했다고 하네. 여신의 아름다움에 반해 너도나도 동전을 던졌기 때문이지." "그럼... 그 동전은 모두 어찌 되었나?" 유람청년이 묻자 부채청년은 웃으며 손을 들어 천진교를 가리켰다.


"저기 있지 않나? 천진교를 지은 돈은 바로 여신이 마련해 주신 것이라네." 유람청년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신기한 얘기로군. 그 후 여신은 다시 나타나지 않으셨나?"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네." "한번 나타나면 좋겠군. 그럼 이 유(柳) 모(某)가 전재산을 동전으로 바꾸어서라도 막대를 맞춰 볼 텐데..." "정말로 원한다면 내가 정보를 줄 수도 있지." 갑작스레 들려 온 말에 유(柳)라는 서생은 몸을 돌렸다. 손에 술호로를 든 거지 한 명. 술을 얼마나 마셔댔는지 코에 주독(酒毒)이 올라 붉은 반점이 가득했다. 황무가 호연도방에서 만났던 거지였다. 유 서생의 놀란 표정은 곧 화난 표정으로 바뀌었다. "딸기코! 당신이 조금 전 내게 말했소?" 거지는 자신의 뒤를 한번 둘러보더니 말했다. "이곳에는 나말고 아무도 없으니 당연히 내가 말한 것이로군. 그러나저러나 그 딸기코란 명칭은 근사한걸. 앞으로 그걸 내 이름으로 삼아야겠군." 딸기코가 자신의 말에는 제대로 답하지 않고 혼자 중얼거리자 유 서생은 화가 치밀었다. 부유한 집에서 철없이 자란 대부분의 청년은 힘없는 사람을 멸시하는 일에 익숙한 것이다. "감히 거지 놈 따위가 나와 말장난을 해? 죽고 싶은 게냐?" 딸기코는 당연히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에,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멀쩡하게 생긴 놈이, 쯧쯧! 넌 나에게 낙하의 여신을 만날 방법부터 묻는 게 순서가 아니겠느냐?" 그러고 보니 딸기코는 아까...? 유 서생이 화를 참으며 물었다. "정말이냐? 정말 여신을 만날 수 있느냐?" 딸기코는 억지로 화를 참고 있는 유 서생의 표정이 우스워 참기 힘들다는 얼굴로 빙긋이 웃었다. "물론이지. 만날 수 있고말고. 은자를 세 냥 정도만 축낸다면, 당신은 여신을 만날 수 있지." 부채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 서생이 딸기코에게 서둘러 은자를 건네 줄 때도, 그리고 딸기코가 오늘밤 자정에 이곳으로 나오면 여신을 볼 수 있다 말할 때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눈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멀어지는 딸기코의 뒷모습을 눈이 빠지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딸기코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게 되자 부채청년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극도의 긴장감이 해소되는 듯한 안도의 한숨이었다. '나타날 때와 멀어질 때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이 추운행(秋雲行)의 귀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고수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부채를 든 청년, 추운행의 상념은 유 서생이 등을 치는 바람에 깨어졌다. "하하, 은자 세 냥을 들여 좋은 정보를 얻었네. 자네도 밤에 같이 와 보지 않으려는가?" 추운행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는 밤에 와서, 매일 밤 자정 낙하에 나타나는 활낙신(活洛神)을 만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 서생은 그녀를 만나서는 안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를 만나러 올 강호인들을 만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추운행은 유 서생의 어깨를 툭툭 쳤다. "우리가 만난 지 꼭 반나절이 지났군." "그렇군. 낮부터 자네가 안내해 준 덕분에 낙양 구경을 잘할 수 있었네. 정말 고맙게 생각하네." "나 역시 마찬가지라네. 자네 덕분에 입이 심심하지 않았지. 휴우, 하지만..." 유 서생은 추운행이 한숨쉬는 영문을 몰라 눈만 크게 뜰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추운행이 낙하를 한번 둘러보더니 말했다. "활낙신이 밤마다 낙하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벌써 사흘이 지났네." "뭐라구? 그럼 자네는 여신이 나타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물론일세. 하지만 전설 속의 여신과 다른 점은, 그녀가 제시하는 것이 자신과 사귀는 것이 아니라 보검이라는 데 있지." "그, 그런! 그럼 활낙신이란 존재는 강호 여인이란 말인가? 여신이 아니라...?" 추운행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전설상의 여신도 강호인이었는지 몰라. 어쨌든 그 보검은 매우 귀한 것인지라 수많은 강호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고, 더불어 공기도 점점 험악해지고 있네." 유 서생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런 유 서생의 어깨를 추운행은 두 번 두드려 주었다. "세 냥이 아깝더라도 결코 밤에 나오지 말게. 강호인들 중 일부는 생명의 존귀함을 전혀 모르니 말이네." "그, 그럼 자네도 강호인인가?" 추운행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나직하나 힘있는 어조로 유 서생에게 말했다. "많은 강호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으니... 목숨이 아깝다면 결코 밤에는 낙하(洛河)로 오지 말아야 하네." 유 서생은 추운행의 마지막 말을 듣기 위해 목을 길게 빼야만 했다. 어느새 추운행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사라졌기 때문이다. 놀란 유 서생은 고개를 흔들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 날아갔다! 정말로 그는 강호인이었구나!" 다리가 후들거렸다. 멀리서 걸어오는 세 사람의 모습이 유 서생의 시선에 잡힌 것은 그때였다. '저들도 강호인일까? 도사와 승려와 속인이 같이 걸어가다니...! 서둘러 객잔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오늘밤은 꼼짝도 하지 말아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유 서생은 걸음을 서둘렀다. 태평객잔(太平客棧)으로 돌아간 유 서생은 방문을 꼭 닫아걸고는 날이 샌 후에야 밖으로 나가겠다고 결심했다. 절경을 보는 일이 아무리 좋다 하나 생명을 걸 만큼 좋지는 않다. 때문에 유 서생의 이런 결정은 매우 적절했다. * * * 수염으로 얼굴을 덮은 속인(俗人)이 앞장서 걷고, 약간 뒤에서 승려와 도사가 나란히 따라간다. 이런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신기했다. 걷는 길과 추구하는 목표가 확연히 다른 세 사람이 일행을 이루는 경우는 찾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문득 앞장선 사람의 입술을 덮은 수염이 흔들렸다. "앞에 태평객잔이 보입니다. 오늘밤은 저기서 쉬시도록 하시지요."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했기 때문에 숙소를 정할 때가 된 것이다. 황무의 말에 대지와 창허는 두말없이 찬성했다. 방 세 개를 계약하고 황무는 식탁 옆에 앉았다. 대지와 창허도 곧 합석했다. 음식을 주문한 뒤 황무는 문득 생각이 난 듯 말했다. "두 분도 활낙신에 대해 들으셨소? 걸어오다 보니 낙양 성민들이 온통 그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더이다." 무림인은 귀가 밝다.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게 되는데, 말하는 자들이 강호인이 아니라면 더욱 쉽게 들을 수가 있었다. "듣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낙양에 들어서자마자 그 얘기로 귀가 따가웠습니다." "도대체 그 활낙신이란 여인이 갖고 있는 보검이 뭐랍니까?" 창허 도사가 질문했지만 황무는 답할 수 없었다. 들은 바가 없으니 알 리도 없지 않겠는가? 이때 멀리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가 일행의 귀에 들어왔다.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대화였다. "아, 그렇다니까! 틀림없이 그 검이라구. 젠장, 이거 술이 떨어졌잖아!" 바닥에는 술병 대여섯 개가 뒹굴고 있었다. 술병들 사이에서 주독으로 붉게 변한 코를 벌름거리면서 열변을 토하는 거지 하나! 딸기코의 말을 재미있게 듣고 있던 군중들 중 하나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어조로 물었다. "사실이라면 왜 오성련에서 움직이지 않는 게요?" 그의 말에 대답할 생각은 않고 거지는 손에 든 술병을 바닥까지 비워 버렸다. 입맛만 다시며 입을 다문 거지를 보면서 그에게 질문했던 구경꾼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딸기코가 아닌 점원을 향한 고함이었다.


"여기 술 한 병 더 갖고 오너라. 젠장, 오늘 정말 대단한 술귀신을 만났군!" 점원이 준비하고 있었던 듯 바로 술병을 들고 왔다. 그라고 거지가 하는 얘기에 관심이 없겠는가? "꿀꺽, 꿀꺽!" 거지가 목을 축이기를 기다리다 지친 구경꾼이 채근했다. "자, 어서 말해 보시오.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왜 오성련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오?" 만족스런 표정으로 입에서 술병을 뗀 거지가 싱긋 웃었다. 웃으면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오성련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누가 그랬지? 그들은 이미 움직였어. 증거도 있다구." "움직였다고! 정말이오?" "그럼! 믿기지 않는다면 저쪽을 보라구."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황무와 함께 앉은 대지와 창허를 차례로 가리켰다. 중인들의 눈도 그쪽으로 향했다. 대지와 창허의 눈에 놀람의 빛이 어렸으나, 황무만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이 거지를 벌써 만난 적이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저 승려가 바로 소림의 대지 대사이시며, 또 한 명은 무당의 창허 도장이지. 헤헤, 뭐 아직 어린 탓으로 대사니 도장이니 하는 말이 어울리진 않지만, 곧 그 말이 어울리는 재목으로 성장할 기재들이란 강호의 소문은 뭐 여러분도 익히 아실 테고..." 거지의 긴말이 끝나자 대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미타불... 보잘것없는 빈승을 그처럼 쉽게 알아봐 주셨음에도, 저로선 고인(高人)을 알아뵙지 못하고 있으니 부디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누구시온지...?" 거지는 몸을 약간 움직여 대지의 고개인사를 피했다. "난 인사받을 자격이 없는 몸이지. 그냥 딸기코라고 부르면 된단 말이야." "빈승으로서는 고인의 참된 신분을 알 자격이 없다 생각하십니까?" 대지의 음성이 약간 딱딱해졌다. 그 사실을 느꼈는지 딸기코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그건 절대 아니지. 별로 말할 만큼 자랑스런 이름이 아니라서..." 그는 말꼬리를 흐리더니 손으로 황무를 가리켰다. "굳이 알고 싶다면 그에게 물어 보게나. 내 입으로 말하는 건 쑥스러워서..." 황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오?" "당연한 소리지. 그럼 날 모른단 말인가?" "짐작은 하고 있소." "그 짐작이 맞을 것이네." 황무는 입을 다물고 딸기코를 한참 노려보았다. 딸기코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넨 날 흡사 원수를 대하듯 쳐다보는구먼. 한 번 자네를 도와 주기까지 했는데... 너무 심하지 않나?" 황무는 쓰게 웃었다. "삼만 냥에 달하는 은자로 술을 사드렸는데도, 여전히 갚을 은혜가 남았다 생각하시는 게요?" "아니, 그건 아니지. 충분히 보답을 받았다네. 다만... 새로운 은혜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일세."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장담할 수는 없을걸? 이미 한 번 은혜를 입었으니 분명 또 은혜를 입을 것이네. 은혜라는 것은 원래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버릇이 되는 법이거든." 논리적인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딸기코가 황무를 도와 줬던 것도 사실 황무로서는 별다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황무로서는 뭐라 말하기가 곤란했다. 거지의 말은 횡설수설하는 듯했지만 황무의 말을 막아 버리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의 화술과 심기(心機)는 보기와는 달리 대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황무는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검이 탐나서 여기 왔소?" 딸기코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결코 아니야. 탐난다기보다는 그냥 호기심이 좀 일어서... 사실 충천검(衝天劍)이라면 어느 누가 호기심을 갖지 않겠는가?" 황무뿐 아니라 대지와 창허 역시 하나같이 놀랐다. '그 검'이란 칭호가 아니라 검의 정확한 명칭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지와 창허 두 사람을 보니...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을 듯하군. 활낙신의 일은 자네 둘이 처리해 주게." 딸기코는 누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의 신법. 그 와중에도 술이 남은 술병은 잊지 않는 용의 주도함. 그 모습을 본 대지는 누군가를 떠올리곤 깜짝 놀랐다. "설마 그분이란 말이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저런 모습으로 다니신단 말이오?" 황무를 돌아보면서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던지는 대지! 황무로서는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아니면 저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어 말로써 대답했다. "확실히 그 사람이오. 하지만 저런 몰골로 다니는 이유는 나로서도 알 수가 없군요." 4. 활낙신 영영 <음모는 강호 어디에나 있다. 진실로 성공적인 음모란 이미 마련된 남의 계획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천지회에 들어갈 때 황무의 생각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분이 취개(醉 )시라면..." 대지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게다가 그 검이 정말로 충천검(衝天劍)이라면 가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옆에 섰던 창허가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전 대사(大師)처럼 무림의 일에 정통하지가 못합니다. 대체 그 충천검이란 게 어떤 물건이온지..." "명검이며 보검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 검의 주인을 일러드리는 것이 충천검에 대한 가장 빠른 설명이 될 것입니다." "대체 누구이기에..." 대지 대사는 굳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충천검의 주인은 그만큼 유명한 인물이기에. "바로 광무혼이었습니다." 일행은 입을 다물었다. 혈혈수라(血血修羅) 광무혼(廣武魂)! 젊은 시절 옥수검(玉手劍)이라 불렸으며, 절정의 좌수검으로 십절 중에서도 우뚝 섰던 고수. 그러나 너무 뛰어남은 인성(人性)을 망치기도 한다던가? 갓스물을 넘긴 나이로 강호 절정고수로 군림하던 그는 엄청난 음모로 강호를 겁난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썼던 검이 바로 충천검이었다. 잠시 후 충격이 가시자 황무가 입을 열었다. "정말 충천검이라면... 활낙신이란 여인은 광무혼과 연관이 있을 것이오." 그의 표정은 매우 딱딱했다. "만일 광무혼과 관련이 없다면 원주가 서신에서 시사했던 암중 음모자의 존재 가능성이 더욱 커지겠지요. 여인은 둘 중 어느쪽이든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대지는 황무의 말을 듣고 나더니 조금 표정이 풀렸다.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이군요." 황무에게도 밤에 활낙신을 만나러 가야 할 이유가 있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자신과 창허는 취개가 떠나며 활낙신을 찾을 것을 부탁했기 때문에 꼭 자정에 낙하로 나가야만 했다. 그러자면 황무의 일을 도와 주기로 한 처음의 약속을 약간 변경해야 했으므로 망설였는데, 황무가 천지회를 조사하는 일을 미루더라도 활낙신의 충천검에 대해 조사하자 하니 다행이라 말했던 것이다. 창허 또한 황무에게 예를 표했다. "저희의 입장을 헤아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황무는 옆으로 몸을 옮겨 창허의 예를 피하며 창 밖을 보았다. 어두웠지만 아직 시간이 조금 있었다. "그녀는 항상 자정에 나타난다 하니 한 시진 정도의 여유는 있군요. 전 잠깐 밖에 나가 일을 보고 오겠습니다. 제가 돌아오면 같이 낙하로 출발하시지요." 대지와 창허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독안사검(獨眼巳劍)은 하남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당금 무림의 현실이란 게 오성련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독안사검도 송하림 등의 빛에 가려 있기는 했지만, 그의 무공은 그다지 약하지 않았다. 사실 홀로 움직여 약간의 명성이라도 얻었다면 일단 대단하다고 인정해 주어도 좋은 것이 현재의 강호였다. 그 독안사검이 하나뿐인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낙하의 강심(江心)!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배가 위치했다. 배의 중앙에 세워진 막대에는 주변에서 비친 빛을 반사하는 은빛의 종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독안사검은 그 종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노려보고 있었다. 꿀꺽! 마른침이 저절로 목을 넘어갔다. 가까운 거리임에도 독안사검이 긴장하는 이유는 배 위에 조용히 서 있는 경국(傾國)의 미를 지닌 여인 때문이었다. 아니, 그 여인이 조용히 품고 있는 검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충천검은 백 년래의 제일마(第一魔)로 지탄받는 혈혈수라 광무혼이 사용했던 검이었다. 검술의 고하(高下)를 결정하는 것은 검의 날카로움이라기보다는 검을 쓰는 사람이겠지만, 어리석은 인간은 본질보다는 현상에 매달리는 경향이 많은 법이다. 강 주위에 몰려든 수많은 무림인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독안사검은 마침내 은자 한 냥을 은종(銀鍾)을 향해 던졌다. 은선(銀線)이 허공을 수놓으며 힘껏 날아가더니, 딸랑-! 특수하게 만들어져 바람에는 흔들리지 않고 내공을 담아 던진 무거운 물체에 의해서나 흔들리는 은종이 소리를 울려 냈다. 종을 치고 허공으로 날아오른 은자를 하얀 손이 뻗어 나오더니 잡아챘다. 순간, 제방 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환호했으며, 독안사검의 입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어렸다. 그는 여인, 활낙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드디어 내가 맞췄소. 이제 충천검은 내 것이오." 활낙신은 한동안 말없이 독안사검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고갯짓을 하더니 자신의 발 밑을 가리켰다. "여기 쌓여 있는 보화들이 보이나요?" "물론 보이오." "여기 은자가 있나요?" 독안사검은 아무리 안력을 돋우어 보아도 활낙신의 발 밑에서 은자를 찾을 수 없었다. 가끔 금이 눈에 뜨였지만, 그것조차 활낙신이 서 있는 배 안에서는 가치없는 것에 불과했다. 금 수십 냥, 수백 냥의 가치를 지닌 야명주와 각종 이보(異寶)들이 그득했던 것이다. 문득 활낙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당신은 내가 포고했던 글을 읽지 않은 듯하군요. 난 분명 은자 백 냥 이상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 아니라면 던지지 말라는 글을 남겼어요." 독안사검의 미간이 좁아졌다. "난 읽지 못했소." "당신은 변명을 하는군요. 내가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죠." "흥! 검을 주기 싫으니 억지를 쓰려는 것이군. 은자로 종을 맞췄으니 당연히 야명주를 던져도 맞출 수 있소." 활낙신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어렸다. "억지는 당신이 부리는군요. 난 이따위 은자는 필요없으니 도로 가져 가세요." 독안사검은 등뒤의 검을 뽑으며 외쳤다. "어림없는 소리! 여태껏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네 조건을 강호동도들이 존중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억지를 부린다면 무력으로라도 검을 뺏겠다." "무력이라 하셨나요? 한 번 해보세요." 활낙신의 눈빛도 매우 차갑게 변했다. "그 전에 이 은자는 돌려드리죠." 그녀가 오른손으로 은자를 힘껏 움켜쥐자 붉은 기운이 생기더니 은자가 녹아 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어 움켜쥔 힘 때문인지 작은 은덩이가 길게 늘어나더니, 마치 은으로 만든 큰 바늘 같은 모양으로 변했다. 더불어 왼손에선 하얀 기운이 일었는데, 그 기운이 바늘로 변한 은덩이를 스치자 은(銀)은 곧 원래의 고체 성질을 되찾았다. 설명은 길지만 구경꾼들의 눈에는 활낙신이 그저 손을 한번 움켜쥐었다 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앞으로 살짝 뿌려지는 활낙신의 오른손! 오른손이 움직일 때는 왼손이 충천검을 잡고, 왼손이 움직이면 다시 오른손이 돌아와 검을 잡고 있었다. 때문에 충천검은 그녀의 품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듯 보였다. 고수가 아니라면 알아볼 수 없는 짧은 순간, 은자는 순식간에 은바늘로 변해 허공을 날았다. 독안사검은 안색이 대변(大變)해 사검(巳劍)을 휘둘렀다. 은침(銀針)이 만드는 선을 직선으로 연장하면 자신의 목에 닿게 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강호를 누비며 그에게 명성을 안겨 주었던 사검이 은침을 노리며 비스듬히 옆으로 그어졌다. 독안사검은 자신이 있었다. 평인(平人)들이 보기엔 빠르게 느껴지는 은침도 강호인들, 특히 독안사검 정도 되는 자들에게는 그다지 빠른 것이 아니었으므로. 마침내 검과 은침이 허공에서 격돌하려는 찰나! 은침이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꿀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처음부터 강한 회선력(回旋力)과 진기 덩어리를 암기에 주입시켜 원하는 위치에서 암기의 방향을 바꾸는 수법이었다.


암기술의 정화(精華)라 일컬을 만했으며, 또한 익히기 쉽지 않은 술법이었다. 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검의 주인 독안사검의 외눈은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은침은 그 큰 눈을 뚫고 깊숙이 박혔다. "크윽-!" 자지러지는 비명과 더불어 독안사검의 몸은 다섯 걸음 가까이 뒤로 물러났다. 은자는 은침으로 변했다가 다시 살상(殺傷)을 위한 무기로 변한 것이다. "내가 여기 서 있는 이유는 검의 주인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을 고르기 위한 것!" 활낙신의 차가운 음성이 지독한 고통으로 떠는 독안사검의 귀에 꽂혔다. "은자 백 냥의 규정을 정한 것은 너와 같은 하수가 함부로 나섬을 막기 위함이었다. 자신있는 자, 능력이 있는 사람만 나서라. 자기 자신을 알고,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 독안사검은 장님이 된 채, 비틀거리며 멀리 사라졌다. 구경꾼들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독안사검을 신과 같은 고수로 여기는 하수자였기 때문이다. 일부는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조차 했다. 냉엄한 얼굴의 활낙신! 그녀의 아름다운 발을 받치고 있는 나룻배에 낙하의 물살이 살랑이며 지나갔다. 낙하의 빠른 물살. 그럼에도 배는 흘러가지 않고, 약간의 흔들림만 보였을 뿐! 활낙신이 대단한 고수임을 구경꾼들은 그제서야 느낀 것이다. "둘에서 하나를 없애면 반이 남지만, 하나에서 하나를 빼면 남는 것이 없게 되오. 활낙신께서 독안사검의 눈을 없앤 것은 너무한 처사가 아니었나 싶소." 준수한 용모의 청년이 오른손에 부채를 든 채 구경꾼들 사이에서 걸어나왔다. 그를 보는 활낙신의 눈이 반짝거렸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한답니다. 하지만 일벌백계(一罰百戒)란 말도 있으니 공자께서는 이해해 주세요." 이처럼 달라진 활낙신의 말투는 그녀가 청년을 중(重)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추운행의 신분을 아는 것인지, 그가 지닌 무공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추운행은 문득 한숨과 더불어 말했다. "후... 보물은 무릇 사람의 마음을 혹하게 만드니, 독안사검의 행동도 이해할 수 있지 않겠소? 본 공자도 감히 그 유혹에 넘어가 보고자 하오." 추운행의 말에 활낙신은 미소 지었다. "광명전의 광명일수(光明一秀) 추운행(秋雲行) 소협이시라면 당연히 자격이 있겠지요. 어쩌면 은종을 울리는 시험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는걸요." 월곡(月谷), 춘추서원(春秋書院)과 더불어 신생 강호 세력 중 가장 강하다는 광명전(光明殿)의 소전주가 바로 추운행이었다. 그러므로 구경꾼들은 그라면 은종을 울리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활낙신은 달콤한 미소를 띤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추 소협께서 은종을 울리게 되면 다른 분께는 다시 기회가 없을 거예요. 지금 나서지 않으시면... 더 이상 충천검을 차지할 기회가 없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경꾼들 틈에서 태산만큼이나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려 왔다. 뒤이어 승려와 도사, 두 명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활낙신은 그 둘의 신분 또한 단숨에 알아보고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승려가 입을 열었다. "광무혼의 충천검을 가져 오라는 취개(醉 ) 선배의 부탁을 받았소. 감히 빈승의 능력을 시험해 보아야겠으니, 양해 바라오." "호호, 소림의 대지 대사께서 나셨군요. 드디어 오성련도 움직이나요? 호호호..." 소림의 대지! 그 이름을 들은 사람들의 술렁거림은 광명전의 추운행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그만큼 강호에서 오성련의 위치는 거대했다. 활낙신이 탄 배를 사이에 두고 강 양쪽의 제방 위에 대지와 추운행이 서 있었다. 창허는 대지가 먼저 나섰으니 양보하고 구경하는 쪽을 선택했다. 황무 역시 그의 뒤에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은종을 울리는 일에 도전하는 사람! 그것도 은종을 울릴 능력이 충분히 있어 보이는 두 사람이 동시에 나섰던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보다 먼저 종을 울려야 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은종을 울리지 못하도록 방해까지 해야 했다. 게다가 활낙신의 방해까지 가세한다면 은종을 울리는 일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인이라고는 하나, 그녀의 무공 또한 뛰어났으므로. 대지 대사! 명호 뒤에 붙이는 대사란 칭호가 어색할 정도로 젊은 나이였다. 추운행 역시 마찬가지. 무혼지겁 당시 희생된 수많은 고수들을 보충해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하늘은 많은 기재들을 강호에 내려보냈다. 이십을 갓 넘긴 나이. 그럼에도 강호에서 혁혁한 명성을 얻고 있는 두 청년고수들의 대결. 게다가 그들의 중간에 활낙신이란 여고수까지 가세한 형국이었으니 자연 구경꾼들은 숨을 죽일 수밖에. 누가 은종을 울릴 것인가? 아니, 어쩌면 그들 둘 다 은종을 울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독안사검을 단 일 초로 해치운 활낙신의 무공은 대단했던 것이다. 장내의 긴장을 깬 것은 추운행의 부채였다. "순금(純金)으로 만든 살에다 손잡이엔 패옥을 달고, 천잠(天蠶)의 실로 짠 천으로 마무리를 했소. 살 끝에는 천수옹(千手翁)의 소혼화린(燒魂火鱗)이 달려 있으니 능히 백 냥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오." 그의 손을 떠난 부채는 허공에 태극 모양의 호선을 그리면서 은종을 향해 꾸불꾸불 날아갔다.


부채는 그 특유의 모양 때문에 다양한 변화를 연출해 냈다. 그러한 변화는 시전하기가 무척 어려우며 일단 시전되면 상대방이 그 변화를 따라가는 것 역시 지난(至難)했다. 활낙신은 까르르 웃었다. "호호, 과연 광명일수의 반월선(半月扇)은 이름값을 하는군요. 곧 은종을 두드려 울릴 듯이 보이는데요?" 때로는 돌며, 때로는 휘어지면서 반월선은 쉴새없이 은종을 압박해 들어가고 있었다. 방향을 바꿀 때마다 허공에 흩어지는 강기의 흐름 탓에 파박, 하고 불꽃이 튀는 듯한 소리가 끝임없이 울렸다. 기척을 감추어야만 하는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대지 역시 쉬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의 목에서 벗겨져 나온 염주가 어느새 그의 손을 떠났던 것이다. "아미타불... 지심한옥(地心寒玉)으로 이루어진 염주외다. 마음을 차게 하는 효험은 없으나 능히 은자 백 냥 이상의 가치는 보장할 수 있소이다." 염주(念珠)는 대지의 손을 떠나자 한쪽이 끊어지며 길게 펴졌다. 짜르르, 하고 구슬이 끈을 빠져 나오며 흩어지리라 예상했던 것은 구경꾼들의 헛된 앞지르기에 불과했다. 구슬은 여전히 알알이 연결되어 있었다. 길게 늘어서, 마치 막대에 구슬이 묻어 있는 형상으로 끝없이 허공을 돌았다. 활낙신은 더욱 기분이 좋아진 듯 유쾌하게 말했다. "당연히 세심주(洗心珠)라면 자격이 있지요. 옛날 신승 초의께서 만드셨던 금포승(金捕繩)과 보리진기(菩提眞氣)는 비록 대부분이 실전되기는 했지만, 금포승을 본따 만든 세심주는 상당한 위력이 있지요." "아미타불... 어찌 보리금승공(菩提金繩功)에 비하겠소. 하지만 은종을 노리는 일 정도는 가능할 것이외다." 세심주! 지심한옥으로 만든 염주는 허공을 마구 회전하면서 추운행이 던진 반월선을 노렸다. 반월선이 먼저 발동했기 때문에 대지는 일단 반월선을 막은 후 세심주를 돌려 은종을 노리는 방도를 택했던 것이다. 이런 수법은 매우 큰 내공의 소모를 요한다. 일단 던지면 끝나는 하류의 암기수법과는 달리 암기에 진기를 끊임없이 실어 줘야 하기 때문이다. 간혹 이런 수법을 이기어검술(以氣御劍術)과 같은 극상승의 수법과 동일시하는 사람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비록 상승이긴 했지만 엄연히 이기어검술과는 달랐다. 이기어검술에서는 일단 검과 함께 실어 보낸 내공이 마음의 움직임에 반응하면서 적을 공격할 수 있다. 한번 내공을 시전하면 그 내공이 적을 상해할 때까지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것이 이기어검술. 반면 허공섭물(虛空涉物)을 응용하는 이런 암기수법은 끊임없이 내공을 전달해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당연히 위력 면에서도 비교가 불가능했다. 어쨌든 세심주는 은종까지 석 자의 거리를 남겨 둔 지점에서 반월선을 공격했다.


차라라-! 구슬들이 마구 부딪치는 소리는 세심주의 회전이 빨라졌음을 뜻했다. 곧 세심주와 반월선은 부딪칠 것이고, 양쪽으로 튕겨날 것이다. 반월선은 오른쪽으로 빠지겠지만, 지금의 상황대로라면 세심주는 은종 방향으로 튕겨날 것임이 확실했다. 이것은 대지의 계산! 그러나 비등한 고수의 싸움이 어찌 한 사람의 계산만을 따라가겠는가? 오른손만을 앞으로 뻗었던 추운행은 왼손마저 내밀었다. 그 정도의 고수가 두 손을 앞으로 내민다는 것은 전력을 다한다는 의미였다. 때문에 반월선은 갑작스런 역회전을 일으키며 세심주와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회전이 순간적으로 바뀌자 반월선의 경로(經路)가 밑으로 뚝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먹이를 발견한 제비가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는 듯! 아래로 떨어졌던 반월선은 곧 다시 솟아올랐다.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날아가는 반월선의 움직임을 재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강호에서 능히 경공의 일인자로 군림할 수 있을 것이다. 대지의 얼굴 가득 놀란 빛이 떠올랐다. 그 역시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전력을 다한 진기를 세심주로 쏘아 보냈다. 팍! 무엇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더불어 세심주의 양쪽 끝에 달린 한옥구슬 두 개가 허공으로 쏘아졌다. 회전에서 직선으로 바뀐 한옥의 속력은 대단했다. 하나는 반월선을 노리고, 다른 하나는 은종을 노리면서 쏜살같이 날아갔다. 추운행의 양미간에 힘줄이 꿈틀 올라왔다. 동시에 반월선은 한 번 더 역회전을 하며 방향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곧장 위로 솟구치는 변화! 자신을 노리던 구슬을 아래로 흘려 보낸 반월선은 차라락 소리를 내며 최대한 넓게 벌어졌다. 은종을 향해 날아가는 구슬 하나를 품안에 감싸안으려는 형상이었다. 세심주의 다른 구슬들이 그 뒤에서 끈에 꿰어진 채 회전하며 날아오고 있었지만 아직 조금의 여유는 있었다. 반월선이 먼저 막아야 할 상대는 당연히 앞장선 한 알의 빠른 구슬이었다. 푸욱! 구슬이 반월선의 천잠사로 만들어진 부위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호호, 세심주의 속도는 빠르지만 날카롭지는 않았군요. 천잠사를 뚫기에는 무리겠는데요." 외치는 활낙신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 알의 세심주가 비록 반월선을 깊숙이 파고들기는 했지만, 그것을 뚫고 은종 쪽으로 지나가지는 못했다. 천잠사의 반탄력에 튕겨 나간 한옥구슬은 오히려 반월선이 은종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도록 도움을 주었을 뿐이었다.


은종(銀鍾)은 곧 반월선에 의해 울릴 것만 같았다. 대지의 양미간에서 힘줄이 솟아났다. 이내 머리까지 푸른 힘줄이 파르르 돋는 듯 보였다. 파파파파세심주를 이루는 한옥구슬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끈에서 빠져 나와 허공으로 쏘아 나간 것이었다. 허공에서 줄을 지어 날아가는 구슬들의 모습! 눈이 매우 빨라야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나 구슬들이 사방의 불빛들을 반사시키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광경이 뒤이어 펼쳐졌다. 딱! 맨 뒤의 구슬이 바로 앞의 구슬을 쳐서 앞 구슬로 하여금 더욱 빠르게 날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런 모습은 연쇄 반응(連鎖反應)처럼 끊이지 않고 일어나 앞 구슬의 속도를 증가시켰다. 따다다다마침내 가장 앞 구슬을 쳐냈을 때 가장 선두의 구슬이 쏘아지는 속도는 그야말로 빛살과 같았다. 이미 은종에 거의 닿아 가던 반월선과의 격차를 단숨에 만회해 버렸던 것이다. 꽈아앙! 폭음과 더불어 은종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은빛의 조각들은 흡사 연꽃이 피어나는 듯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이것이야말로 만주일통(萬珠一通)! 세심주의 마지막 초식이며 탄공술의 결정적 정화인 만주일통이었다. 은종을 부숨과 동시에 구슬에 전해지던 진기가 끊어져 버렸다. 반월선과 세심주를 이루던 한옥구슬들은 지지해 주던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찌 그 속도가 늦으랴마는 좀 전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던 고수라면 떨어지는 속도 정도는 거의 정지된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활낙신의 어여쁜 손이 허공을 누비며 부채와 구슬을 하나도 남김 없이 잡아 배 위에 실었다. 생각해 보라! 그녀의 손 움직임은 좀 전의 세심주의 움직임보다 훨씬 느렸는데도 불구하고 한 개의 부채와 서른다섯 알의 구슬을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잡을 수 있었다. 이제 대지와 추운행이 전개했던 초식들의 빠르기가 이해되는가? 활낙신은 매우 달콤하게 웃었다. 그리곤 대지와 추운행을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두 분이 동시에 종을 쳤어요. 어느분을 승자로 보아야 할지 저로서는 판단할 수가 없군요." 활낙신의 말에 추운행이 쓰게 웃었다. 그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승자는 대지 대사요. 그가 만일 처음부터 마지막과 같은 초식을 사용했다면 난 막을 수가 없었을 것이오." 대지 대사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추 소협이 승리하시었소. 난 다급하여 세심주를 분리하여 사용했으니... 다수로 하나를 상대한 형상이 되니 빈승의 패배가 확실하오." 대지 대사와 추운행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뒤에 서 있는 창허와 황무 역시 감탄의 빛을 띠고 추운행을 쳐다보았다. 승리를 주장하는 일은 무척 쉽지만, 패배를 시인하기란 무척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한동안 서로만 쳐다보고 활낙신을 주목하지 않자 그녀는 짤막한 웃음으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호호, 대단하군요. 과연 서로 넋을 잃고 감탄할 만한 무공이요, 도량(度量)이에요. 해서 제가 진정한 승자를 가릴 방법 한 가지를 제시하겠어요." 그녀는 손을 흔들어 반월선과 세심주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어떤 방법이 있소?" 추운행이 나직이 묻자 활낙신은 그를 보며 웃었다. "당장 알려 드리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저를 따라오시면 진짜 승자를 가릴 방도를 말씀드리겠어요." 황무가 돌연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나와 창허 도장도 함께 갈 수 있겠소? 난 당신이 허락할 것으로 믿고 있소만." 그가 갑작스럽게 나타나 말했기 때문에 활낙신은 머리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말이군요.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죠? 전 분명 종을 울리신 분만을 청하고 있어요. 혹 당신도 충천검에 욕심이 생겼나요?" 황무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믿어 줄지 모르겠소만 난 전혀 관심이 없소. 다만 그 검의 배후에 숨은 의미에 관심이 있을 따름이오. 활낙신이 비웃듯 웃었다. "숨은 의미라... 그런 게 과연 있나요?" "당연히 있을 것이오." "모두 그런 식으로 말을 돌리죠. 하지만 당신이 나를 따라오려는 것에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면 어떡하지요? 난 허용(許容)하지 않겠어요." 황무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허용할 것이오. 게다가 나뿐만 아니라 창허 도장이 같이 가는 것마저 허용할 것이오." 활낙신의 아미가 위로 올라섰다. 화가 난 표정. "이상한 말이군요. 나는 이미 안 된다고 말했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끝까지 우길 셈인가요?" "우기는 것이 아니오. 난 그저 내가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의향이 있다는 말을 하려 했을 뿐이오.


게다가 능력 또한 충분히 있음을 알려 주고 싶소." 활낙신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황무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당신이 누군지 알 것 같군요. 하지만 소문과는 다르군요. 과연 강호의 소문이란..." "그렇소. 믿을 것이 못 되지. 항상 믿을 것이 못 되었소." 황무는 심각한 어조로 활낙신이 하려는 말을 반복했다. 활낙신은 감탄이 어린 눈으로 황무를 쳐다보았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상관없소. 대신 당신은 내 질문에 몇 가지 솔직한 답을 주어야 하오." "충천검을 줄 수는 없어요." "이미 욕심내지 않는다고 말했소." 활낙신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녀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배를 박차 추진력을 얻은 활낙신은 몸을 위로 띄워 올리며 전음으로 세 명에게 동시에 외쳤다. "좋아요. 따라오세요." 활낙신의 몸은 물을 찍고 다시 한 번 도약했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그녀의 뒤를 대지와 추운행이 다급하게 쫓았다. 황무와 창허 역시 지체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구경꾼들 중에는 제법 만만치 않은 고수들이 있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충천검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때문에 활낙신을 따라가고 싶어했지만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일 황무와 창허가 조금이라도 지체했다면 그들 역시 활낙신을 따라가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활낙신이 위로 떠오름과 동시에 그녀가 발을 딛고 있던 배가 작은 폭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배는 그 동안 모아 놓았던 보화들로 가득했고, 그 보화들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작은 폭발! 배 위에 실렸던 보화들을 위로 날리기에는 충분하지만, 그것들을 파괴하기에는 한참 모자랄 정도의 힘이었다. 원래부터 폭발력이 조절되어 있었나 보다. 때는 깊은 밤! 그러나 사방에는 휘황한 불빛들. 그 불빛을 반사하며 보화(寶貨)들이 강 위를 뒤덮고 눈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러나 구경꾼들에겐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누가 욕심이 나지 않겠는가? 구경꾼들은 앞다투어 낙하로 뛰어들었다. 물살의 빠름과 자신의 수영 실력이 별 볼일 없음을 재어 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활낙신의 배 위에 놓여 있던 보석들. 하나같이 은자 백 냥이 넘어가는 물건들이 아닌가? 한 개라도 더 잡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은 곧 활낙신이 사라진 방향을 차단해 버리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녀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배를 터뜨렸을까? 어쨌든 인간의 욕심이란 어쩔 수 없나 보다. 아수라장이 되는 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으니까. 사람들로 가득 차 버린 낙하(洛河) 주변이었다. 지금 아무리 빠른 경공을 가진 자가 활낙신의 뒤를 쫓고자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보석과 욕심이 어울려 만들어 낸 인간의 장애물! 추적자가 보물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 해도 다른 인간들의 욕심이 저절로 장애물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 * * "이 방향은...!" 문득 창허가 말했다. 황무 역시 활낙신이 달려가는 방향에 대해 무언가 감(感)을 잡고 있었으므로 창허를 보았다. "도장도 그리 생각하시오?" "그렇습니다. 이 방향은 틀림없이 천지회가 위치한 방향입니다." 조금 앞서 달리던 대지가 속도를 늦추어 뒤로 처졌다. 황무, 창허와 얘기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이 길은 천지회로 향하는 길이...?" 황무와 창허는 고소(苦笑)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말을 하고 있던 참이었소." 창허는 말하면서 앞서서 달리는 활낙신의 신법을 유심히 보았다. 능히 강호의 일류고수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과연 그녀의 목적지는 천지회일까? 활낙신은 천지회와 어떤 관련이 있으며, 또한 그녀의 부탁이란 무엇일까? 황무가 입을 열었다. "광명전에는 광명일수라 일컬어지는 청년 영웅이 있고, 그 이름은 추운행이지요." "...?" "마찬가지로 천지회의 파천공(破天公)과 열지모(裂地母)에겐 여걸이라 일컬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딸이 있음을 모두 알고 계실 것이오. 친딸은 아니지만 애정은 친딸에 전혀 못하지 않음도 강호에 소문나 있소." 대지와 창허가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아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십여 장 정도 앞장서 달리던 활낙신이 문득 고개를 돌려 황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맞아요. 제가 바로 영영(瓔瓔)이에요. 당신은 정말 소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군요. 철담마도 황무 대협!" 황무는 즉시 경신술을 풀고는 그녀에게 가만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5. 천지회주 파천열지 <우회하여 접근하라. 돌아서 들어온 진실일수록 사람들은 쉽게 믿는다.> 만박의 말 중에서...


사방 벽이 온통 검은 천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무엇으로 만들어진 천인지 자르르한 윤기가 흘러,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사방의 벽마다 검은 바탕 위에는 각각 해와 달을 상징하는 문양이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천지회(天地會)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우선 앉으세요. 영광스럽게도 여러분과 같은 고수를 모시게 되는군요." 영영은 벽에 그려진 문양을 바라보며 서 있는 네 사람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추운행이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고, 황무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뒤를 따랐다. 영영은 황무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다른 분들은 모두 젊으신 분들이지만 황 대협께서는 그래도 경륜(經綸)이 있으시겠군요. 무혼지겁을 직접 겪으셨나요?" 황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이 깊은 곳에서 약간 떨렸다. "기억하기 싫은 시절이었소. 아직 약간의 상처가 남아 있다오." 그제서야 영영은 황무의 왼쪽 눈에 검흔이 새겨진 것을 발견했다. 오랜 시절이 지났건만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상당한 고수의 솜씨였나 보다. "혈혈수라(血血修羅)의 짓이었나요?" 황무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생각하기 싫은 추억이 떠오르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 실력으로는... 당치도 않소. 그때는 너무나 많은 강자들이 존재했지." 영영의 눈빛도 아련해졌다. 그녀의 고운 목소리도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했다. "전 그때를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의부님과 의모님으로부터 많은 설명을 들었지요. 당시의 천지회는 고수가 가히 구름처럼 모여 있어... 누구도 감히 그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했어요. 그때는..." 지난 시절의 영화(榮華)를 그리워하는가? 영영은 고개를 숙인 채 나직이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대협(大俠)께서는 당시의 강호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셨나요?" 황무는 뜻밖의 질문에 당황했는지 잠시 눈만 끔벅였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강호에 출도한 것은 무혼지겁의 막바지였소. 당시 난 스물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았었소. 그다지 큰 겁화에 휩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상처를 입고 말았소. 만일 황산 깊은 곳에서 학문을 연구하던 만박(萬博)... 원주님을 만나 몇 년간 산속에서 은거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큰 겁화에 휩싸였을지도 모르오." 그의 대답은 길었다. 하지만 중인들은 그 말을 듣고 한 가지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당금 강호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철담마도 황무!


그의 뛰어난 무공으로도 무혼지겁으로 쇠잔(衰殘)해지기 전의 무림에서는 큰 빛을 발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영영이 눈을 빛냈다. "죄송하오나 한 가지 더 묻겠어요. 만일 대협께서 당시 강호를 쟁패하던 십절(十絶)과 상대하신다면 어느 정도의 승부를 장담하시겠어요?" 황무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지켜보던 추운행과 대지, 창허 등의 안색도 역시 변했다. 영영의 이런 질문은 매우 당돌하며 또한 무례한 것이었다. 황무가 차가운 음성으로 되물었다. "매우 무례하군. 만일... 내가 질문에 답한다면 아가씨도 내 질문에 솔직히 답할 의향이 있는가?" "물론이에요, 대협! 부디..." 영영의 눈빛이 애잔한 빛을 띠자 황무는 노기가 저절로 사라짐을 느꼈다. 뭔가를 호소하는 듯한 여인의 이런 눈빛이야말로 울화를 잠재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황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이 손으로 전개하는 참마도법으로 난 강호에서 제법 명성을 얻고 있다고 자부하오." 그의 이런 자부는 결코 자만이 아니었다. 춘추서원이 신생(新生) 강호문파를 선도하는 세 세력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것은 사실 황무 혼자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므로. 그가 아니었다면 춘추서원은 강호문파라기보다는 강호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집단쯤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황무의 오른손을 보면서 중인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황무가 침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참마도법으로 십절 중 한 명을 상대한다면 난 십 초 이상을 버틸 자신이 없소." 모두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모두 비슷한 공력의 소유자였다. 굳이 따지자면 영영의 공력이 조금 떨어지는 정도일까? 싸워 보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황무가 십 초를 장담할 수 없다면, 자신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무혼지겁이 있기 전의 강호는 정녕 그 정도로 힘이 팽창되어 있었단 말인가? "아미타불...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십여 년 전의 강호는 참으로 험난했겠군요." 대지의 이 말은 모두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영영은 대지의 혼자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물었다. 무척 집요한 음성이었다. "마지막으로 여쭈어요. 만일 오성(五聖) 중의 하나와... 싸우게 된다면 승부를 어떻게 점치시나요?" "또 질문인가? 그대는 정말...!" 황무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얼굴을 폈다. 이왕 대답을 시작했으니 끝까지 답해 주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백여 초가 지나기 전에는 승부가 나지 않을 것이네. 그 정도는 내


장담하지." 또다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오성은 강호에서 가히 신과 같은 존재였다. 황무의 말로써 십절과 오성의 무공이 간접적으로 비교되었으니 어찌 감탄하지 않겠는가! 영영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추운행 등을 돌아보며 말했다. "전 여기 계신 다른 분들의 무공 또한 황 대협과 비견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무량수불, 당치않소. 난 전혀 자신이 없소이다." 창허가 겸양하며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강호의 후기지수를 대표한다는 네 명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영영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전 젊어요. 여러분께서도 젊으시지만 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뛰어난 성취를 이루셨죠."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던 추운행이 싱긋 웃었다. "하하, 삼봉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시는 영영 소저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 또한 성취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의 얼굴은 매우 준수하여 여인들로 하여금 한 번 더 돌아보도록 만들 지경이었다. 영영은 그의 얼굴을 힐끔 보다가 양 볼이 약간 붉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영영이 돌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안색 또한 처연하게 변해 그녀는 울먹이는 어조로 말했다. "황 대협께서는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다고 이미 약조하셨어요. 여러분들도 부디 이 가련한 여인의 부탁을 들어주시길 간청(懇請)드려요." 갑작스럽게 미녀가 절을 하자 네 명의 남자들은 모두 당황했다. 게다가 미녀의 눈가에 눈물마저 고였으니... 추운행이 급히 오른손을 펄럭여 부드러운 진기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영영의 몸이 둥실 떠오르듯 일으켜졌다. "이것만 보아도 추 소협의 공력이 저보다 월등함을 알겠어요. 부디 부탁을 들어주세요!" 그녀의 말은 어느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모두를 향한 것이었다. 어떤 부탁이기에 이처럼 많은 고수가 필요하단 말인가? "난 이미 허락했네만, 다른 사람들은 부탁이 무엇인지 알아야 들어줄 것이네. 먼저 내용을 말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 황무가 냉정을 잃지 않고 말했다. 영영은 그제서야 눈 주위의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해 추한 모습을 보였어요. 어떤 부탁인지 말씀드릴 터이니 저를 따라오세요." 그녀는 손을 뻗어 진기 한 줄기를 우측 벽을 향해 뻗어 냈다. 진기가 벽의 특정 부위를 건드리자 벽면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어느 틈에 생겨난 거대한 입구! * * * "보여 드릴 분들이 계세요. 그분들을 보면 제 부탁이 무엇인지 아시게 될 거예요." 걸어가는 복도는 꽤 긴 듯 앞선 영영의 목소리는 사방에서 메아리쳐 울렸다. 황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입구는 또다시 기관음을 내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우웅-! 텅 빈 공간에 남은 메아리가 허무했다. 사방이 돌로 쌓인 침침한 복도를 걸어가는 건 그다지 기분좋은 경험은 아닐 것이다. 평소 어떤 일이 닥치건 나이답지 않은 수양(修養)으로 마음의 침착함을 좀처럼 잃지 않던 대지와 창허였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 긴장되는 듯 굳은 표정이었다. 사실 강호에서 천지회에 대한 평가는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영영을 너무나 갑작스럽게 만났고, 또 천지회로 오게 되었다. 만박을 납치해 간 자들이 천지회인지를 알아보려던 처음의 목적과는 달리 상황은 예상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영영에게 다른 생각이 있다면... 영영이 음모를 꾸미고 것이라면...?'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던 대지는 황무를 보았다. 아까부터 생각해 오던 궁금증을 해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리들을

사지(死地)로

유인하는

"황 대협! 아까 낙하(洛河)에서 말이외다..." 대지는 머릿속으로 낙하에서 있었던 상황을 정리하며 황무에게 물었다. "영영 소저께서 우리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는 사정을 어찌 아셨소이까?" "당시 배 위에는 많은 재물들이 놓여 있었소. 하지만 영영은 재물에 관심이 없었지요." "그 말은...?" "대사의 세심주와 광명일수의 반월선은 모두 평범한 물건이 아닙니다. 한데 그녀는 아무런 갈등의 빛도 없이 그 두 가지를 되돌려주었잖습니까?" "과연 그렇군요. 해서 영영 소저의 뜻이 재물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음을 짐작하셨군요." "게다가 독안사검의 일은... 무공이 무척 강한 사람을 찾지 않는다면 그런 일을 벌일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지요." 과연... 이라는 생각에 대지는 머리를 끄덕였다. 결론을 알면 쉬워 보이지만 단서만 가지고 상황을 종합해 내기란 쉽지 않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보석도 마다하고 강호고수를 찾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보통 사람은 이루기 불가능한 어려운 부탁이 있다는 것뿐이리라. "그렇지만 이상하오. 고수라면 멀리 나갈 필요 없이 천지회주인 파천공과 열지모가 있는데, 왜 그녀는...?" 황무는 고개를 약간 흔들었다.


그 문제라면 황무 자신도 답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계속 걸어가는 길. 문득 황무가 손을 치켜 들더니 말했다. "아, 저길 보시오. 빛이 나타났소!" * * * 얼마나 걸었는지 몰랐다. 아래에서 불어오는 공기는 습기 찼고 또한 매우 서늘했다. 대개 지하의 공기는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하기 마련 아닌가? 지금은 여름보다는 겨울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공기가 서늘하다는 것은...! "지하에 한음정(寒陰井)이 있어요. 그곳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지하수때문에 공기가 서늘하죠." 영영이 묻기 전에 먼저 설명해 주었다. 지하를 밝혀 주는 횃불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힘차게 타오르는 모습으로 보아 환기(換氣)가 잘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지하 특유의 축축한 냄새도 별반 느껴지지 않았다. "따로 통풍을 시켜 주는 모양이군요. 이 정도면 어두운 것만 빼곤 전혀 지하라는 느낌을 가질 수 없군요." 사방을 둘러본 추운행이 말했다. 영영은 그의 말을 듣고 혼자말인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철담마도 황무뿐 아니라 광명일수의 머리 회전도 소문을 훨씬 능가한다. 무공까지 더해지니 어쩌면 내 소원은 성취될 수 있으리라..." 그녀의 말은 매우 낮았다. 너무 낮아 일반인이라면 들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일행은 일반인이 아니었다. 적어도 영영 가까이 서 있던 추운행과 황무는 영영의 말을 들었다. 모퉁이를 한 번 더 돌자 눈앞에 거대한 석문이 나타났다. 그 석문 앞에는 역시 거대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엄청난 내공으로 돌을 파내 만든 글씨였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힘이 실려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글씨. <천지회주(天地會主) 파천열지(破天裂地)> 전대의 천지회주! 십절 중의 두 명, 파천제(破天帝)와 열지후(裂地后)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황무는 문득 십 년 전의 강호를 생각하며 회상에 젖었다. 소위 세인들이 말하는 무혼지겁! 그것이 일어나기 전의 강호! 그 강호를 질타하던 한 쌍의 부부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천지회주는 전통적으로 부부가 승계하는 자리. 파천제와 열지후는 어쩌면 천하에서 가장 강한 부부였을 것이다. 하늘을 갈라 버리는 개세의 파천도(破天刀)! 땅을 찢어발기는 천지번복의 열지수(裂地手)! 만일 그들이 만인총에 갇히지 않았다면...?


죽지 않고 살아서 강호를 누비고 다녔다면 지금의 강호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지금 강호는 평화로웠다. 강자들이 모두 몰락한 뒤 발생한 힘의 공백이 가져다 준 씁쓸한 평화! 그들이 살아 있다면, 아니 십절의 몇 명이라도 살아남았다면 강호는 아직도 싸움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황무가 생각에 젖어 있을 때 영영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헤집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황 대협." 이미 여러 번 불렀던 듯, 그녀의 음성은 약간 높았다. 석실의 문은 열린 채였고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안으로 들어갔구나.' 황무는 자신의 실태(實態)를 깨닫고는 서둘렀다. 그를 마지막으로 기이잉 소리를 내며 석문이 닫혔다. 그리고 어둠. 석실 안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살을 엘 듯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매캐한 약향(藥香)이 코를 찔렀다. 그 약향과 어둠을 뚫고 황무의 안광이 강해졌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황무는 똑똑히 보았다. 무덤에서 올라오는 인광(燐光)처럼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네 개의 점을. 그것은 분명 사람의 눈이었다. 중인들의 전신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두 쌍의 눈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게다가 그 파르스름한 빛은... 발광하는 눈의 주인은 중년의 남자와 역시 중년의 여인! 그러나 이미 생기(生氣)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은 자의 눈이 어떻게 빛날 수 있을까? * * * "놀라셨죠? 하지만... 똑똑히 보아 주세요. 이분들은 바로..." 영영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마음까지 담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손이 가늘게 흔들리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는가? "...제, 제... 의부모님들이세요." "파천공과 열지모! 당금 무림에서 그들을 쉽게 여길 자는 드물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소. 아니, 여기 계신 모든 분들도 알고 계실 것이오." 황무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금의 천지회주인 파천공과 열지모! 누가 그들 부부를 동시에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까? "두 분은 상대의 장력에 의해 숨지셨어요. 믿기지 않게도... 일장을 감당하지 못하셨어요. 제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숨이 거의..." 고개를 숙인 영영의 어조는 울먹거림으로 떨렸다. 황무가 뭐라고 위로하려는 순간, 영영의 얼굴이 들려졌다. 좀 전까지의 슬픔은 간곳없고 원독의 빛이 서리서리 어려 있는 얼굴이었다.


"두 분은 마지막 내공을 두 눈으로 몰아넣으셨어요. 눈만은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서..." 황무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네 알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듣지 않아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깊은 원한을 가진 사람이 죽음에 이르르면 그 원한만 생각할 것이다. 복수를 꼭 보고 싶은 염원이 있다면 당연히 눈을 남겨 자신을 해한 자의 최후를 보고자 할 것이다. "원한의 내용이 무엇이건 두 분 선배님의 의지가 참으로 감탄스럽소. 영영 소저의 부탁이란... 두 분의 복수를 말함입니까?" 추운행은 젊었다. 해서 추운행의 감정이 가장 쉽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황무는 달랐다. 겨우 십 년 정도의 차이라곤 하지만 강호에서 경험은 매우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구하는 바를 잊지 않고 영영에게 말했다. "난 이미 승낙했지만 조건이 있네. 먼저 내 질문에 답해 주게." 영영이 고개를 숙였다. "무엇이든지 물어 보십시오. 혹, 춘추서원의 원주이신 만박에 대한 것이 아닌지요?" 황무의 눈이 약간 커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한데도 영영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분명... '원주에 대해 알고 있구나!' 서둘러 묻고 싶었지만 황무는 서두르지 않았다. 어떤 일은 묻지 않아도 상대방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아는 황무였다. "제 양부모님을 이렇게 만든 자를 아시면 저절로 만박 어른에 대한 것도 알게 되실 거예요." 이때다 싶어 추운행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서 두 분의 시신을 자세히 보여 주시오. 당금에 어떤 고수가 있어 두 분을 그리 만들 수 있었는지... 난 전혀 짐작할 수가 없군요." "천만에요. 짐작하실 수 있을 거예요.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죠." 영영이 확신한다는 듯 말하자 황무를 비롯한 네 사람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했다. 파천공과 열지모의 몸을 덮고 있던 천을 벗기며 영영이 말을 이었다. "강호에는 그런 사람이 다섯이나 존재하니까요." 큰 바윗덩이에 눌려진 과육처럼 짓물러진 가슴 부위. '틀림없이 장력에 당한 상처!' 추운행뿐만 아니라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중인들은 단박에 상처를 만든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이 흐른 후 황무가 떨리는 어조로 겨우 말했다. "만압장(萬壓掌)! 만유(慢儒)의 만압장이구려!" 오성(五聖)의 일인! 송하림(松霞林)의 림주 만유!


현강호에서 오성의 위치는 어떠한가? 그야말로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 오성의 공훈을 생각하여 그들에게 적대(敵對)하는 강호인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무공을 당해 낼 사람도 없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다섯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오성련은 현강호의 고수를 거의 망라하고 있어, 그들과 적대하는 것은 곧 강호 전체와 적대하겠다는 의미였다. 오성(五聖)의 명성은 여태껏 강호를 풍미했던 어느 호걸들 못지않았고, 그 광명 정대(光明正大)함으로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데... '그런 오성 중 하나인 만유의 만압장에 의한 상처라니... 이것은 도대체...?' 자신의 눈을 먼저 의심하는 추운행이었다. "아미타불! 정녕 믿기 힘드오. 만유 어른의 만압장이라니! 이것은 정녕... 이것은... 아미타불!" 대지는 몇 발 앞으로 나서서 천지공의 가슴을 자세히 살폈다. 결과는 좀 전처럼 눈을 감고 불호만 읊어대는 상황. 창허 역시 몇 번을 더 살폈지만 만압장의 흔적을 재삼 확인했을 뿐이다. "무량수불... 만유 어른의 행동은 익히 아는 바이거늘... 무량수불, 대체 이런 일이..." 창허의 혼자말을 들은 영영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유가 있었죠." 그녀의 손이 가슴에 안긴 충천검(衝天劍)을 슬쩍 쓰다듬었다. "일 년 전 만박 어른께서 이 충천검을 가지고 저희를 찾아왔어요. 무혼지겁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지 물어 보기 위함이었죠. 그때 의부님께서는..." 일 년 전! 만박은 천지회를 찾아왔다. 무혼지겁에 대한 자료를 분석하던 중, 무언가 미심쩍은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혼지겁 전부터 명맥을 잇고 있던 천지회에 남겨져 있는 기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 만박은 천지회주가 내어 주는 기록들을 충천검과 교환했다. 그리고 자신이 조사한 내용에 대해서 파천공에게 일부 설명해 주기까지 했다. 만박이 돌아간 후, 파천공은 나름대로 무혼지겁에 대한 조사를 행하기 시작했다. 천지회가 몰락한 원인이 된 대겁난! 그곳에서 파천공 또한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날 밤! 먼 곳으로 심부름을 갔던 영영이 돌아왔을 때 파천공과 열지모는 보이지 않았다. 영영이 미미한 신음 소리를 듣고 달려간 곳, 지하에 지어진 비밀 석실 안에서 거의 숨이 끊어져 가는 파천공과 열지모를 발견하였다. "그 사건이 벌써 일 년이나 지났다는 말이군요?" 영영의 말을 듣고 난 후 추운행이 물었다.


"그래요." "왜 좀더 빨리 이 일을 강호에 알리지 않았소?"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랬다면... 아마 전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을 거예요." 영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파천공과 열지모를 해친 자가 영영 또한 해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해서 낙하의 일을 벌여 고수를 소집하였소?" "맞아요. 그리고 제 앞에 계신 네 분이 선발되셨죠." "왜 일 년이나 기다리다 이제서야... 이유가 있소?" "고수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아요. 하물며 상대는 오성의 일인인 만유(慢儒). 큰 이득을 주지 않는다면 어떤 고수가 그와 적대하려 들겠어요?" 영영은 가슴의 충천검을 한 번 더 쓰다듬었다. "의부님께서 워낙 깊숙이 숨겨 두셨는지라... 이 충천검을 이제서야 발견했어요." 추운행은 여태껏 약한 빛을 발하고 있는 두 사자(死者)의 눈을 곁눈질로 보았다. 일 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한 빛. '원한이 얼마나 깊었으면...' "그래요. 아시다시피 낙양 일대에서 만유가 이끄는 송하림(松霞林)의 영향을 벗어나 존재할 수 있는 강호문파는 하나도 없죠. 저희 천지회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송하림과 천지회의 연관을 묻는 황무의 대답에 영영은 이렇게 간접적으로 대답했다. "관련이... 깊었소?" "매우 깊었죠. 무척 친한 사이셨어요. 어쩌면 의부님은 당신께서 알아내신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만유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있어요." 누가 들어도 이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확연했다. 대지가 불호를 외며 말했다. "아미타불... 낭자께선 흉수로 만유 어른을 확신하고 계시는군요. 그렇지 않소?" 영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상처를 보고 무공내력을 짐작한다면 다른 어떤 결론이 나올 수 있겠어요? 소림 또한 오성련 소속이지만 편을 들지는 않으시리라 믿어요." 대지는 답할 말이 없었다. 그 자신도 만유의 만압장이 틀림없음을 확인한 터이니까. 그렇지만 믿을 수도 없지 않는가? 만유의 성품으로 어찌 이런 일을 벌인다는 말인가? 답답한 마음의 대지와 창허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할 때, 여태껏 눈만 끔벅이고 있던 황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유! 모든 행위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오." 어느덧 그의 말은 좌중을 조정하는 힘을 얻고 있었다. "만일 이 살인의 흉수가 만유... 라면 무슨 이유로 이런 짓을 한 걸까? 그가 군자임은 전강호가 다 아는 사실 아니겠소? 과연 그에게 살인할 이유가 있었을까?" "어쩌면... 가능하죠." 영영이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답했다.


"의부님은 무혼지겁에 일장(一場)의 음모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어요." "무혼지겁은 물론 음모였지. 만인총에서 십절을 비롯한 무수한 강호의 고수를 죽이려던 음모!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닌가?" "그걸 지칭하는 게 아니에요. 무혼지겁의 주모자가 혈혈수라 광무혼이 아닌, 다른 사람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추운행은 이 말에 놀라 입을 벌렸고, 황무를 비롯한 세 명은 큰 신음성을 발했다. 만박 역시 서찰에 이런 종류의 의심을 밝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눈만 크게 뜰 뿐 별다른 말이 없자 영영은 말을 계속했다. "만일 또 다른 음모가 숨겨져 있었다면, 음모를 꾸민 자는 누구일까요? 음모에서 음모자는 가장 큰 보상을 받는 법이죠. 그렇다면 누가 무혼지겁으로 이득을 보았나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황무는 말하고 싶지 않았고, 대지와 창허는 말할 수가 없었다. 추운행이 가까스로 말했다. "믿기지 않는 일이긴 하오만... 그래도 답은 하나밖에 없군. 오성(五聖)이라고 해야... 할 것이오." "맞아요. 바로 오성이죠." 중인들이 내는 신음 소리가 더욱 커졌다. * * * "정말 영영 소저는 가지 않을 테요?" 황무가 말에 오르며 영영에게 물었다. 추운행과 대지, 창허는 이미 말을 타고 있는 상황이었다. 말은 영영이 준비했으며, 매우 좋은 근육을 가진 놈들이었다. 이런 말들이라면 송하림까지 가는 데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황무는 생각했다. "그래요. 전 남겠어요. 네 분은 부디 이 일을 공평히 살펴 주시길... 부탁드려요." 사람들을 전송하는 영영의 표정은 지하 밀실에서 격론을 나누던 지난밤과 다름없이 무척 차갑고 긴장에 차 있었다. 지난 일 년간 그녀는 오로지 이 순간만을 생각하며 살아 왔을 것이다. 양부모의 복수! 처절한 원한! 자신의 원한은 아무도 몰랐고 오직 죽은 자와 자신만의 공유물이었다. 그러나 이제 네 사람이 더 알게 되었다. "만일 오성이 음모자라면! 아니, 그들 중 누군가가 음모와 관련이 있다면... 우린 간과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오." 말고삐를 잡으면서 황무가 굳센 어조로 영영에게 말했다. "아미타불! 아닐 것이오. 결코 오성은 음모 따위를 꾸밀 성품들이 아니외다." 대지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러나 영영의 음성은 지난밤보다 더욱 차가웠다. "흥! 저희 의부님도 그리 생각하셨겠죠. 그래서 먼저 만유에게 알린 것이겠지만..." 그녀의 눈이 똑바로 대지와 창허를 향했다.


"결과는 어떤가요? 말해 보세요. 이 결과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셨나요?" 차갑던 그녀의 눈동자는 점점 피어오르는 살기(殺氣)로 인해 충혈되어 갔다. 대지와 창허 역시 당혹감과 의구심이 혼재되어 어지러운 마음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정말 무혼지겁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이중(二重)의 음모가 숨어 있는 것일까? 서로를 노려보는 영영과 대지 등의 사이에는 말하기 힘든 긴장감이 흘렀다. 팽팽한 고무줄 같은 긴장은 황무가 말을 달림으로써 비로소 해소되었다. 송하림으로 향하는 네 필의 말. 그 말에 타고 있는 네 사람의 가슴속은 너나없이 의구심과 긴장이 혼재되어 있어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멀어지는 네 필의 말을 전송하는 영영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당신들은 곧 진실을 알게 될 거예요. 만유에 대해서, 그리고 저에 대해서도..." 6. 송하림의 만유 <너는 이 일로 인해 죽을지도 모른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살인한 후 후회하는 일은 십 년 전의 그 한 번으로 족합니다.> 일 년 전 천지회에서 만유의 말 중에서... 학인(學人)은 부지런해야만 한다. 보통의 유사(儒士)라면 새벽녘에 일어나 정갈한 물에 얼굴을 씻은 후 학문에의 뜻을 다짐이 정상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만유(慢儒)는 결코 정상적이질 못했다. 그는 늘 누워 있었고 늘 잠을 잤다. 자연 그의 몸은 엄청나게 부피가 늘어났다. 심지어 그의 몸을 씻겨 주는 하인들은 목욕할 때마다 겹겹이 쌓인 지방을 헤집으며 배꼽을 찾아 다녀야 했다. 정말 그 정도일까? "너무 뚱뚱한 탓에 자신의 물건을 본 지가 너무 오래된, 만유라는 사람이 살았었어." 말하는 자는 영락없는 하인 차림이었고, 듣고 있는 자도 그와 다를 게 없었다.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수근거리는 모습이 비밀스런 얘기를 하고 있는 모양. "해서 그 물건의 생김새는커녕 쓰임새조차 기억이 나질 않았거든. 그 사람은 매일 밤 고민했지. 내 물건이 어떻게 생겼더라?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킥킥, 그래서?" "마침 그 사람은 학자였는지라 학문을 하는 사람답게 자신의 물건에게 장문(長文)의 편지를 보냈어." "자신의 물건에게?" "그래, 배가 너무 나와서 웬만한 사람은 그 배의 산을 넘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걸음이 매우 빠른 하인 한 명이 선발되었지." "킥킥킥, 정말 그 정도로 살찐 사람이 있을까?" "토 달지 말고 얘기나 들어. 선발된 하인은 아침나절 가족들과 한바탕 이별식을 치른 후 편지를 품에 넣고 길을 나섰단 말씀이지. 고생고생 끝에 하인은 가슴의 살 부위는 무사히 넘었어." "으음." "그런데 그만 하인은 넓디넓은 뱃살을 제대로 건너지 못하고 길을 잃고 만 거야. 해서 편지는 끝내


물건에게 전해지지 못했고, 여태껏 그 사람은 총각으로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어." 다 듣고 난 하인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거리고 말았다. "큭큭! 그러니까 그게 림주님이 여태껏 결혼하지 못한 이유로구먼." "그렇다니까. 그게 벌써 십 년 전의 얘기라더군. 킥킥, 어때 재미있지?" 얘기해 준 하인은 뻐기는 듯한 자세로 앞의 동료를 쳐다보았다.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두 하인은 그렇게 해서 자신들 쪽으로 접근하는 네 명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황무 일행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하인 둘을 지나쳐 송하림으로 들어갔다. 황무 일행이 들어간 지 약 일 각의 시간이 지나자 하인 둘 중 키가 크고 얼굴이 검은 대오(大烏)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방금 누군가 지나가지 않았나?" "물론 지나갔지. 정확히 네 사람이었어." 키가 작고 역시 얼굴이 검은 소오(小烏)의 대답이었다. "근데 누굴 만나러 왔을까?" "당연히 림주님을 만나러 왔겠지. 총관 어르신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 오늘 손님이 오실 거라고." "보고드려야 하지 않을까?" 대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알고 계실 거야. 우리에게 이런 농담을 하게 시키신 분도 총관님이시니까." * * *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곧 림주께서 납실 것입니다. 사실 납신다기보다는..." 정갈한 목재의 탁자와 도기 찻잔! 아담하게 꾸며진 방으로 그들을 안내한 하녀는 서둘러 차를 내오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추운행은 잠깐 맛을 보더니 황무에게 소리를 낮춰 물었다. "황 선배님! 이렇게 정면으로 찾아오는 게 과연 잘한 일일까요? 숨어서 은밀히 하는 편이..." 고개를 저으며 황무가 대답했다. "아니, 이게 낫네. 만일 의혹이 사실이라면, 난 믿고 싶지는 않네만, 만유는 영영을 감시하고 있었겠지. 그렇다면 우릴 만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일세. 해서..." 황무는 대지와 창허를 힐끔 보고는 만유에 대한 호칭이 어색한지 잠시 말을 흐렸다. "어쨌든 영영이 함께 오지는 않았으니 한번 추이를 지켜보세." 황무는 슬쩍 말한 후 입을 다물었다. 대지가 대신 입을 열었다. "좀 전, 두 분도 하인들이 농담을 주고받는 소리를 들으셨지요? 그들이 만유 어른을 우스갯소리의 대상으로 삼아도 괜찮다는 것은..." 말꼬리를 흐렸지만 숨은 뜻은 모두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만유의 성품이 온화하지 못하다면 어찌 가당키나 하겠는가? 추운행과 황무도 공감하는 바였다.


게으른 유생 만유! 살집이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뚱뚱한 유생 만유도 사람 좋기로 전강호에 알려져 있었다. 그는 여태껏 무공을 단 한 번 드러냈다고 전해진다. 무혼지겁의 주역 광무혼을 추살했던 때! 그 외에는 함부로 무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한다. 황무가 뜻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휴! 아까 하인들이 주고받은 말의 의도가 어떠하건 한 가지는 확실하군요, 대지 대사." "어떤...?" "그의 만압장(萬壓掌)이 더욱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살이 찐다는 것은 곧 그의 만압층층공(萬壓層層功)의 발전을 의미하니 말입니다." 이때였다.

독문내력인

우지직! 우지지직!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천장에서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방의 나무기둥들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네 사람은 뭔가 석연치 않은 예감을 느끼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설마...!' 긴장된 눈빛으로 소리가 들려 온 위쪽을 올려다보는 네 사람. 그 순간, 와작 소리와 함께 천장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윗덩이가 그 천장을 뚫고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이 네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공격!' ...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지붕을 뚫고 달려드는 엄청난 크기의 바윗덩어리는 처음의 속도감이 거짓이기라도 했다는 듯 사뿐하게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장내의 네 사람은 거대한 바위가 입을 벌려 말하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대지와 창허! 자네들이 날 찾아왔구먼." 음성은 지극히 청아하여 듣기가 매우 좋았다. 거대한 바윗덩어리는 바로 만유(慢儒)였다. "이해하시오. 사실 이 공력은 매우 불편한 것이라서..." 씁쓸한 어조로 말하는 만유의 말에 네 사람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누운 만유의 몸은 흡사 뒤집어진 거북이 이리저리 발버둥치는 것처럼 좌우로 움직였다. 등짝이 살로 가득하다 못해 뒤로 너무 튀어나온 탓에 손과 발이 땅에 닿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공력이 불편하지 않다면 천하의 어디에 불편한 일이 존재하겠는가? 대개 살이란 배나 허벅지에 먼저 찌고 등에는 잘 붙지 않는 법이건만, 만유의 경우는 어디에도 예외가 없었다. "하하, 몸이 너무 크다 보니 마땅히 들어올 문이 없소. 하하하, 천장을 고치는 하인들의 고생이 심하지요." 말하면서 만유의 오른쪽 손바닥이 땅으로 향했다. 그 순간, 슈욱! 손바닥에서 검은색의 기운이 뻗어 나오더니 땅을 눌러 만유의 몸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닌가?


바로라고 해보았자 배를 땅으로 향할 수 있게 뒤집는 간단한 자세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만유는 싱긋 웃었다. 눈앞에 보이는 차를 마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루룩! 보통의 찻잔보다 열 배는 더 큼직한 잔이었지만, 만유의 앞에 놓이자 소꼽놀이의 소도구처럼 귀여워 보였다. 싱긋 웃는 만유의 얼굴은 살 속에 눈과 코가 파묻힐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이분이 춘추서원의 총관 황무 대협이시고, 이쪽 분은 광명전의 추운행이시라... 반갑소, 반가워! 난 만유라고 하외다." 사실 유생이라기보다는 소불(笑佛)이라 부르는 편이 적절할 정도의 얼굴이었다. 말할 때마다 살이 기묘하게 흔들리는 모습은 우습기 그지없었다. 황무는 만유의 웃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돌연 만유의 배를 덮은 살 한 겹을 슬쩍 밀어 보더니 말했다. "정말로 엄청난 비계입니다. 몇 겹이나 접혔는지 셀 수조차 없겠소." 대지와 창허의 안색이 변했다. 더할 나위 없이 무례한 짓이 아닌가? 싸늘해진 공기가 방안을 흘렀다. 모두의 얼굴이 가면으로 덮인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만유의 얼굴 살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말을 하려는 것이다. "나 또한 본 지가 하도 오래라 잘 모르고 있소. 괜찮으시다면 나 대신 한번 확인해 주시겠소?" 만유의 마지막 말은 미소와 더불어 맺어졌기 때문에 대지를 비롯한 세 사람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황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소." 이곳저곳의 살을 헤집으며 황무는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게다가 어디가 배고 어디가 가슴인지... 옛날, 그 하인이 끝내 길을 잃었을 법도 하구려. 길눈이 밝은 나조차 앞을 보지 못할 지경이니..." 만유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혹,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일이 있소?" "그럴 리가! 그런 일 없소이다." "하면 당신은 왜 나의 감정을 자극하는 게요?" 황무의 깊은 눈과 만유의 웃는 듯한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호기심이오!" 만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호기심은 좋지 않소. 생명을 위협하기도 하거든."


"하지만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역시 생명이 위험하오. 답답한 가슴이 터져 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오." "일리가 있군. 당신이 알고자 하는 것은... 혹 만압장이오?" 황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드디어 상대방이 자신의 목적을 알아 낸 까닭이다. 깊숙한 살의 틈을 뚫고 만유의 안광이 날카롭게 변해 갔다. 눈빛이 변하자 사람 또한 달라진 듯 기세가 판이해졌다. "영영이란 아이를 만났음을 알고 있소." "..." "파천공과 열지모의 상처 때문이오, 내 만압장을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은?" 황무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만유의 눈빛은 더욱 강해졌다. "만압장은 일단 시전되고 나면 나조차 거둘 수 없음을 당신은 알고 있소?" "하지만 난 보고 싶소. 아니, 꼭 보아야만 하오." "만압장을 본다는 건 죽음을 의미하오. 나의 만압장을 본 자는 유일하게 혈혈수라뿐이지만 그는 이미 죽었소. 한데도 당신은...?" "그래도 난 보지 않을 수 없소. 꼭 보아야겠소." 황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런 눈빛을 한 자의 결심은 결코 바꿀 수가 없는 법이다. 만유의 눈빛이 사라졌다.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전신을 싸고 있는 살집들이 춤을 추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만압층층공의 징조(徵兆)! 기이한 공력은 기이한 형태로 시전되는 것이 정상이 아니겠는가? "호기심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만학(萬學)은 호기심을 근원으로 출발되니까. 난 학인으로서, 또 주인 된 도리로서 손님의 주문을 맞춰 주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만유의 몸이 춤을 추듯 흔들리더니 검은 기운이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어두운 기운이 아니라 흑운모(黑雲母)처럼 맑은 검은색이었다. 만압층층공이 시전되는 것이다. "조심하시오. 이 압력은 나로서도 거두기 버거우니이!" 순간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그 거대한 몸뚱이가 검은 기운에 감싸이더니 쏜살같은 빠르기로 바닥을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만압층층공(萬壓層層功)! 바닥을 미끄러져 황무를 향하는 만유의 몸! 자세히 보라, 만유의 온몸을 덮은 살들이 마치 지네의 발처럼 꼿꼿이 일어나 바닥을 기고 있는 모습을! 믿을 수 없는 광경!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에 익숙한 사람의 눈에는 이것은 가히 경이롭게 보이는 광경일 수밖에 없었다. 비곗덩이로 이루어진 살들이 마음대로 움직이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그러나 이런 감탄은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는 추운행이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막상 만유의 공격을 맞이하는 황무로서는 참마도(斬魔刀)를 도집에서 빼어 내기에도 급급했다.


창! 맑은 소리와 함께 뽑혀진 참마도! 뽑혀 나오는 기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곧장 만유의 왼쪽 어깨를 노리며 허공을 날고 있었다. 공격은 최상의 방어! 상대방의 어깨뼈를 노려 감히 공격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술수였다. 그러나 과연 지금 만유 앞에서 이런 방법이 통할 것인가? 만유의 지방층은 두껍다는 말로는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황무의 참마도로써도 뚫지 못할 지경이라면 그 두꺼움을 나타내기 위해 새로운 단어라도 고안해 내야 하지 않겠는가? '살이 너무 많다. 황무의 방법은 실패하리라.' 이런 생각이 구경하는 세 사람의 한결같은 중론이었다. 하지만 황무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비계 또한 몸에 붙은 물건이니, 갈라지면 아픈 것은 뼈나 근육과 다름이 없을 것이므로. '만유는 몸을 위로 피하리라.' 이런 황무의 생각은 결코 들어맞지 않았다. 만압층층공이 전개되는 방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였다. 끼이이! 아무리 황무가 힘을 써보아도 도는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다. 심지어 허공에 고정된 상태에서 뒤로 뺄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믿기 힘든 듯 손으로 눈을 비볐다. 놀라움은 황무의 경우가 가장 심했다. 자신의 도가 만유의 어깨를 가르기 직전, 그 순간에... '살들이 부풀어올라 참마도를 잡아 버리다니!' 만 근의 압력이 도를 통해 전해져 왔다. 황무는 하마터면 도를 놓칠 뻔했다. "만압장은 장력이란 뜻을 담고 있지만 손바닥으로 전개하는 것은 아니오. 한번 보시겠소?" 기막혀 하는 황무를 보며 만유가 싱긋 웃었다.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청아한 음성과 더불어 만유의 배를 덮고 있던 살들이 물컹 곤두섰다. 살로 이루어진 몽둥이, 또는 손바닥! 추운행과 대지 등은 만압장(萬壓掌)이 전개되는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의 살로 상대방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은 뒤 다시 배의 살로 장력, 아니 육력(肉力)을 전개하다니! 그야말로 신기하면서도 우스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만압장은 이름 그대로 엄청난 압력을 지닌 공력이었다. 당하는 상대방은 결코 웃고 있을 틈이 없는 것이다. 싸움은 황무가 먼저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참마도가 묶인 상황에서도 황무는 싸움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꿈틀, 그의 왼손이 움직였다. 오른손도 참마도를 놓은 뒤, 양손을 앞으로 여러 차례 번갈아 내밀었다.


묘한 점은 오른손을 놓기 전 전력을 다해 손잡이를 회전시켰다는 점이었다. 패앵, 돌기 시작하는 참마도. 만유의 만압육(萬壓肉)에 의해 곧 정지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강한 내공을 담은 만유의 살덩어리에 스윽, 하고 핏자국을 새겼기 때문이다. 그 순간 만유의 어깨 살 부분이 움찔 움직였다. 기회를 잡은 황무의 양손이 더욱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바바바-방! 순식간에 만유의 뱃살을 아홉 차례 쳐나갔다. 엄청난 반탄력이 방안으로 퍼져 나가는 순간, 황무는 가까스로 만유의 몸을 한걸음 밀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만압장이 다시 전개되기 시작했다. 아홉 갈래의 장력을 무인지경처럼 뚫고 쳐들어오는 만유의 뱃살은... 황무의 가슴을 그대로 때려 버렸다. 퍼퍼펑! "우우욱!" 검은색 핏물이 주르르 입가를 흘렀다. 황무는 뒤편의 나무벽을 일부 부수고서야 튕겨나오는 몸을 가까스로 정지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만압공의 위력은 가공스러웠다. 얼마 전 영영의 질문에 황무는 백 초 정도를 장담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오성을 말함이다. 시간이 흘렀고 더불어 오성의 능력도 변했다. 오늘의 일전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만유는 몸을 바로 세우면서 황무를 보았다. 한참 쳐다보던 그가 싱긋이 웃었다. "당신의 내공은 소문보다 더하군. 아직도 여유가 조금 남은 것처럼 보이오." 허벅지와 다리를 덮은 살들이 삼각형을 이루며 퍼져 바닥에 닿은 모습. 만유의 육중한 몸은 그 덕분에 머리를 쳐든 채 똑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핏물을 게워 내던 황무는 그 모습을 보고 툴툴 웃었다. "당신의 살들은 참으로 쓰임새가 다양하군. 전신에 손을 달고 있는 것과 같으니... 누가 당해 내겠소?" 만유의 몸이 또다시 떨렸다. 왜 황무는 또다시 만유를 격동시키려 드는 것일까? 황무의 배에 달린 살덩이가 이번엔 두 개의 덩어리를 만들어 내며 봉곳 솟아올랐다. 이글거리는 검은 기운! 또다시 시전되는 만압장! 만유의 온유한 성품은 소문이 나 있다. 해서 수하들의 놀림도 처벌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만일 황무의 놀림으로 만유가 화를 참지 못한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유의 성품이 소문과는 다르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물론 결정적 증거는 될 수 없지만, 아주 작은 시험 정도의 의미는 있었다. 만일 다르다면...? '영영의 판단이 사실일 수도 있다!' 지켜보는 추운행과 대지, 그리고 창허는 공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전신에 유통시켰다.


목숨을 걸고 무례한 행동을 저지르는 황무의 노력을 무위로 돌릴 수는 없으므로. 만압층층공의 검은 강기가 감돌던 만유의 뱃살! 공격할 듯 이글거리는 그 살들이 천천히 배로 되돌아갔다. 번쩍 떠진 만유의 눈에는 어느새 분노가 사라지고 없었다. "당신은 이상하게 내 화를 돋우려 하는군. 혹 이것은 시험이 아니오?" 만유의 몸이 천천히 뒤로 돌았다. 바닥까지 늘어진 살들이 꿈틀거리면서 몸을 돌려 주는 광경은 어찌 보면 징그럽기조차 했다. 만유가 한 번 더 물었다. "난 시험을 당하고 당신들은 채점을 하고." 황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어느새 멎어 있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솔직히 말했다. "그렇소. 그리고 다행히 당신은 그 시험에 통과했소." 말하는 황무의 안색에는 다시 핏기가 돌아와 있었다. 좀 전까지 정신없이 패퇴(敗退)하던 모습은 일종의 가장(假裝)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 황무를 보면서 만유는 유쾌한 듯 웃었다. "강호인들은 흔히 당금에는 고수가 드묾을 안타까워하지.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있을 것이오. 강호엔 아직도 우리들 오성(五聖)에 필적하는 고수가 구름처럼 많음을." 만유의 말이 자신의 무공에 대한 칭찬임을 알기에 황무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천만의 말씀. 난 아직도 멀었소." 이것은 물론 겸양의 말이었지만 만유는 그런 것을 따지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무혼지겁으로 이전의 어지럽던 강호가 정리되었지만 때론 너무 활기가 없어진 것 같은 느낌도 갖게 되오." 그는 몸을 받치던 발과 허벅살에 들어갔던 내공을 풀고 뒤로 벌렁 누우며 말했다. "새로운 고수들이 나타나야지. 그래서 더욱 강호를 발전시켜야만 하오." 다시 처음의 상태로 변하는 만유! 그를 보면서 황무도 천천히 내공을 풀었다. 부서진 천장에서 들어온 한 줄기 바람이 방금 지나간 긴장감의 최후를 대변해 주는 듯했다. "아미타불! 난 믿었소. 만유 어른께서 결백하시다는 것을." 대지가 불호를 외며 말하자 만유는 싱긋 웃었다. 살집이 하도 많아 잘 보이지 않는 입이 열리는 것도 같았다. "추운행, 대지, 그리고 창허, 자네들 셋은 우리의 젊은 시절과 많이 닮았군. 하긴 그래 봤자 불과 십 몇 년이 지났을 뿐이로군..." 옛일을 생각하는가?


만유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이때였다. 꼬르륵 소리와 더불어 만유의 뱃살이 마구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은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했던가? 좀 전, 뱃살의 공격을 당한 황무가 흠칫하자 만유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살을 많이 찌워야 하는 만압층층공의 단점이외다. 조금만 움직여도 배가 고프니, 원... 따라오시오. 식사를 담당하는 취앵(翠鶯)이란 아이는 솜씨가 매우 좋다오." 황무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만유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살과 살이 모여 몸의 관절을 보호하더니 마치 동그란 공처럼 변해 버렸다. 그리곤 그대로 벽을 향해 굴러갔다. 우당탕! 조금 전 황무가 부딪쳐 금이 갔던 나무벽! 약해졌던 그 벽이 그대로 부서져 버렸다. 만유의 앞에 놓인 엄청난 분량의 음식! 그 음식에 큰 특징이 있음을 황무는 발견했다. 튀긴 돼지고기와 구운 오리고기, 그리고 뱀과 바다의 만어! 교자와 각종 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 기름기가 많아 먹기만 하면 살이 찌는 음식들뿐이지 않는가? "아까의 일은 이해들 하시오. 난 배가 고프면 참지를 못하는지라..." 만유의 옆에는 이미 오 인분 분량의 뼈가 쌓여 있었다. 황무와 추운행은 몇 번 음식을 손에 대었다가 맛만 본 후 다시 내려놓았다. 대지와 창허는 손조차 대지 않았다. 음식에 기름기가 너무 많아서였다. 쩝! 쩝! 웬만한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크기의 그릇이 만유가 먹고 버리는 닭뼈와 여타의 음식쓰레기로 찼다. 추운행이 슬쩍 전음으로 황무에게 말했다. "저 정도 식성이라면 한끼 차리는 비용만 해도 엄청나겠군요. 게다가 움직일 때마다 벽을 뚫고 다닌다면... 휘유, 송하림은 곧 파산할 것 같습니다." 황무는 대답할 말이 없어 씁쓸히 웃어 버릴 따름이었다. 그릇이 거의 찼다. 그러자 어디선가 호리호리한 여인 하나가 바퀴 달린 작은 나무판 위에 빈 그릇을 싣고 걸어왔다. 돌돌돌돌... 바퀴 구르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여인은 아무런 말 없이 빈 그릇을 내려놓고 가득 찬 그릇을 수레에 실었다. 그리곤 역시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저 애가 취앵이외다."


바쁘게 먹는 와중에도 만유는 설명의 필요성을 느꼈던지 눈짓으로 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의 음식들은 모두 저 애 혼자서 만든 것들이오. 어떻소? 맛이 있지요?" 황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에 놓인 술잔만 세 잔째 기울였다.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런 기름진 음식들이 맛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두 번째 그릇이 가득 차고 세 번째 빈 그릇이 날라져 오자 만유는 손을 저었다. "됐다. 두 그릇이면 족하니 이만 음식을 물리거라." 취앵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더니 손뼉을 몇 번 쳤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 몇이 들어오더니 순식간에 남은 음식을 밖으로 날랐다. 취앵은 말없이 만유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다시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물러났다. 문득 황무가 만유에게 물었다. "저 아이는 언제부터 림주의 식사를 담당하였소?" "대략 일 년 정도 되었소." 마지막 입가심으로 나온 유탕(油蕩)을 단숨에 들이킨 만유가 잠깐 생각한 후 대답했다. "대개의 무림인에게는 기름기 많은 음식이 해롭소. 하지만 만압층층공의 원리는 일반 무공과 전혀 다른지라... " "그녀는 기름요리를 무척 잘하는 모양이로군요." "그렇소. 내 입맛에 꼭 맞는다오." 황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한숨을 길게 내쉰 후, 단숨에 바닥에 부어 버렸다. "대개 변장이란 눈에 보이는 앞모습을 주로 변화시킵니다. 때문에 뒷모습이 풍기는 분위기는 완벽할 수가 없기 마련이지요." 만유의 손이 멈칫했다. 황무의 말은 어떤 의미인가? 황무는 오른손으로 자신이 조금 전 술을 부은 곳을 가리켰다. 술이 닿은 바닥이 푸르스름하게 변색되고 있었다. "무색무미(無色無味), 게다가 향기도 없소. 이런 독은 먹을 때는 이상을 못 느끼지만 양이 쌓이면 공력을 산개(散開)시켜 버리는 효력이 있소. 바로 천지회의 후산(厚散)이오!" 추운행과 대지, 그리고 창허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자신들의 중독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많이 먹지 않아 내공의 큰 손실은 없었지만 그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만유의 당황함에 비하겠는가? 그는 음식을 많이 먹었다. 너무나 많이 먹었던 것이다. 만유의 전신 살들이 꿈틀거리며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내공이 서서히 약해지자 살들이 제 무게를 이겨 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난 덩치에 맞게 가장 큰 효과를 보겠구려." 만유의 말은 담담했다.


그러나 어찌 그 심정까지 담담하겠는가? 문득 황무가 한숨과 더불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무척 힘없이 만유에게 물었다. "림주는 항상 이처럼 식사를 많이 하오?" "그렇소. 비무를 한 후 식성이 좋아지면 더욱 많이 하오." "누가 그 사실을 알고 있소?" "식사 준비를 하는 하인들은 모두 알고 있소." 말을 마친 만유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뜨려 했지만 살에 파묻힌 탓에 갸름한 눈빛만 보일 뿐이었다. 황무가 그의 말을 대신했다. "취앵(翠鶯)은 림주의 이런 식습관을 아주 잘 알고 있지 않소?" "...?" "취앵의 뒷모습은 누군가와 닮았소. 때문에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오." 추운행은 돌연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녀! 황무 등이 이곳에 올 것이며, 만유와 비무를 할 것임을 짐작한 그녀. 무엇보다 만유에게 원한이 깊은 그녀. 황무의 눈이 만년설처럼 푸르게 변했다. 그는 두 번 다시 남의 음모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음에도 운명은 또다시 그의 바람을 무시해 버릴 줄이야... "취앵! 그녀가 영영이었을 줄이야..." "과연 당신들은 자격이 있군요. 영영이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여인의 초롱한 말소리는 문 앞에서 들려 왔다. 취앵! 그녀가 살짝 한바퀴를 돌았고 그러자 곧 영영으로 변했다. "모든 사람에겐 저마다의 약점이 있어요. 만유에게는 음식이 그의 약점이었죠. 어떤 사람이건 일 년간 지성껏 음식을 배운다면 기름요리는 통달할 수 있을 거예요." "과연 그렇구나!" 황무는 인정해야만 했다. 계획을 세우기는 쉽지만 오랜 세월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계획에 인간의 심리를 개입시키는 것은 더 더욱 쉽지 않았다. 때문에 일단 그런 사람의 거미줄에 걸린 나비는 두 번 다시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만유와 한번 싸워 주기만 하면 되는 존재였군." 황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옳은 판단이군요." 이런 경우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사실은 결코 기분좋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황무가 실소하면서 다시 물었다.


"난 내 판단이 틀리길 바랬지만... 그럼 우릴 중독시킨 것도 내가 생각하는 그런 목적 때문인가?" 영영이 생긋 웃었다. "살인멸구! 황무 대협의 생각이 그것이라면... 틀림없어요." 황무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극악한 계집! 내 너의 처지를 동정했었거늘!" 고함은 영영의 등뒤에서 들려 왔다. 그와 동시에 황무의 입가에도 웃음이 되돌아왔다. 실내엔 추운행과 대지, 그리고 창허가 있었던 것이다. 추운행의 반월선이 만드는 회오리의 경력이 영영의 뒷머리를 칼날처럼 베어 버릴 듯했다. 그러나! "호호, 어림없어요." 영영의 몸이 왼쪽으로 한 발짝 움직이자 추운행의 공격은 허공을 헛되이 가르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영영의 몸이 반 바퀴 회전하더니, 살짝 왼쪽 무릎을 굽혔다. 그러자, 파지지직! 마치 정전기처럼 움직이는 황색의 장력이 그녀의 손에서 뻗어 나와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황무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지둔열지(地遁裂地)! 열지수(裂地手) 중의 제삼초 지둔열지로구나!" "우욱!" 추운행이 괴로운 듯 신음을 토하며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힘을 잃은 그의 손이 놓친 반월선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동시에 추운행이 원래 서 있던 자리가 지진을 만난 듯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열지수의 묘용! 땅을 타고 전해지는 공격이 상대방에게 직접 타격을 입히는 것이다. "박산(博散)이란 것이 있어요. 복용해도 평소엔 문제가 없죠. 하지만 후산(厚散)과 만나면 상승 효과를 일으켜요." 그녀의 미소는 무척 만족스러워 보였다. 떨어지는 반월선을 받아 여유있게 바람을 일으키는 영영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까지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살인멸구할 사람들을 어떻게 그냥 보냈겠어요? 옛날 강호인들은 후산과 박산, 이 둘을 일컬어 천지회의 천지이독(天地二毒)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지요." 7. 죽다 <다시는 희생당하지 않으리라. 누구도 날 이용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번 다시는...!> 구 년 전 태산에서 황무의 외침 영영의 눈빛이 빛났다. 반면 황무의 눈은 흐릿했으며 만유의 눈빛은 더욱 흐렸다. 산공(散功)! 무림인에게 있어 내공이란 생명수였다. 생명수가 사라지면 힘이 사라지고 대부분의 목숨도 사라지는 법이었다. 무기력감에 빠진 중인들은 말이 없었다. 네 사람은 떨리는 몸을 자제하면서 영영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지만 네 사람의 떨림을 모두 합해도 만유 한 명의 떨림을 따라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고통은 더 더욱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만유의 전신. 비대한 살집을 충천검이 조금씩 베어 내고 있었다. "살 한 점에 하나의 고통! 다행히 그대는 살이 많으니 고통당할 여지(餘地)도 많겠군요." 영영의 웃음띤 말에 만유는 더욱 몸을 떨었다. 그런 만유를 지켜보는 네 개의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있었다. 파천공(破天公)과 열지모(裂地母)의 처절한 원혼! 눈동자 두 쌍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소리질러라, 만유! 고통에 찬 비명을, 구천(九泉)에 들리도록 크게 질러라!" 영영의 눈이 번들거렸다. 살기(殺氣)와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쾌감, 그리고 처절한 원한! 여러 가지가 범벅이 된 영영의 감정은 묘사하기 쉽지 않았다. 검이 가슴살 한 층을 저며 낸 후 두 번째 층의 피부를 잘라 오자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다. 스며나오는 피의 양도 많아졌다.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 피는 곧 합해져 줄기를 이루며 흘러갔다. 땀 역시 쉴새없이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그러나 만유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는 아예 입조차 열고 싶지 않은 듯했다. 두 쌍의 눈동자가 자꾸만 만유의 시선에 박혀 왔다. 육신의 고통이야 견딜 수 있겠지만 정신의 고통은 정말로 견디기 힘들었다. 천지회의 두 회주는 그와 무척 친했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어서 시인해라! 고통을 줄이고 싶다면 어서 대답하란 말야!" 영영은 소리 높여 외쳤다. 살점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철버덩거리면서 바닥으로 떨어졌고, 만유의 눈에 비치는 푸른 눈동자는 웃는 듯 우는 듯, 시선 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만유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내 손에 죽었다." 충천검은 만유의 살갗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영영이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랬어, 역시 네가 그랬어...!" 마음이 동요하면 몸 역시 동요하기 마련인가? 만유의 심장도 그렇게 떨리고 있었다. 그날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친구를 대접하느라 부산했던 부부의 가슴을 만압장이 후려쳤던 것이다. 그들은 떨리는 눈으로 말했었다. -영영, 그 애만은 꼭 살려 주게.


차마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죽어 가는 친우, 그들을 죽인 사람은 결코 영영을 살려 주지 않을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빌었다. 그래서 영영은 죽지 않았지.' 만유는 툴툴 웃었다.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그 사람이 했던 마지막 말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방죽은 하나의 틈으로 무너진다. 넌 이 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의 말은 항상 틀림이 없었다. 만유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너무 오랜 기간 동안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 왔던 것이다. 만유는 웃었다. 웃으며 자신의 살갗에 꽂힌 충천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두 쌍의 눈동자도. 그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몸을 앞으로 내던졌다. * * * 반짝이며 빛나는 다섯 개의 구슬과 그 구슬들을 쳐다보는 한 쌍의 눈빛이 있었다. 그는 근심이 가득 어린 눈으로 다섯 개의 구슬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그 중 파란 구슬을 천천히 집어 들더니 움켜쥐었다. 팍, 하며 깨어져 나가는 구슬 중앙에서 종이 뭉치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뒤쪽에서 그 광경을 열심히 지켜보던 중년인 하나가 재빨리 달려와 그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성주! 새로운 사람을 찾으실 생각입니까?" 성주라 불린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인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폈다. 그곳에 적힌 글자는 모두 일곱 자였다. <만압층층공(萬壓層層功) 요해> * * * 검(劍)은 무생물이지만 때로는 살아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손잡이를 잡히기만 하면 검(劍)은 생명을 얻어 무서운 살기를 사방에 흘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생명을 얻은 검은 반드시 누군가의 목을 노리며, 때로는 심장을 가르기도 한다. 지금 충천검은 만유의 심장을 갈랐다. 갈라진 심장은 곧 활동을 정지했고, 만유의 생명도 당연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죽음, 그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정신차려! 당신은 이렇게 쉽게 죽어선 안 돼! 더 고통을 당해야 한단 말이야!" 영영의 음성은 듣기에도 섬뜩한 쇳소리였다. 아름다운 그녀의 눈은 지금은 붉은 실핏줄로 가득했다. 음모와 원한은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는다. "이... 이제 되었겠지. 내 모습을 똑똑히 보았으니 만족하시겠지?"


만유의 눈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향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죽은 자의 눈동자를 향하고 있었고 그들을 마치 살아 있는 사람 대하듯 했다. "난, 난 어쩔 수 없었소. 그의 말은 거역할 수 없는...!" 순간 독에 당해 여태껏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황무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의 말이라니? 누가 당신에게 강요했다는 말인가? 그가 누군가?" 비단 황무뿐만이 아니었다. 영영을 비롯하여 실내에 있던 모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있어 천하의 오성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말하라, 악적!" 영영도 채근하고 들자 만유는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동작이 마지막이었다. 매우 편안한 안색으로 눈을 감은 만유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쓰러졌다. 자신의 고뇌를 고백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러한 표정으로 무너지는 만유의 몸. 가까스로 짜낸 듯한 미약한 음성이 마지막으로 실내를 울렸다. "그... 그는 서, 성주!" * * * "우릴 죽이려는가?" 영영이 만유의 가슴에서 충천검을 빼낼 때 황무가 물은 말이었다. 영영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성련은 세력이 커요. 만유를 살인한 것이 나라고 알려지면... 난 위험을 감당할 수 없겠죠." "책임은 일을 저지른 사람이 져야만 한다." 영영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하지만 때때로 다른 사람이 질 때도 있어요." "강호에 곧 사실이 알려질 것이다." 영영은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죽은 자가 입을 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나요?" 물론 황무는 들은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죽어서는 안 되었다. 결코 죽을 수 없었다. 충천검이 허공을 갈랐다. 천수옹이 만든 무기는 지극히 날카로웠다. "당신들의 시체는 죽은 뒤 짓이겨질 거예요. 당신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만유와 싸우다 공멸했어요. 그리고 놀란 취앵은 혼절한 상태로 발견될 거예요." 영영의 음성은 차가웠다. 하지만 충천검의 검기는 더욱 차가워 서리가 어리는 듯했다. 천지이독에 중독된 황무. 그리고 뒤쪽의 세 사람도 마찬가지. 절체절명이란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켜 생겨났으리라. 콰앙!


영영의 충천검이 바닥을 쳤다. 황무를 노리던 충천검이 바닥을 친 이유는 간단했다. 놀랍게도 황무의 신형이 왼쪽으로 반 장 가량이나 미끄러진 탓이었다. 영영은 아주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충천검은 살아 있는 뱀처럼 머리를 돌렸고, 환상처럼 황무의 심장을 재차 노려 왔다. 이것이야말로 파천도법(破天刀法). 검으로 응용된 파천도법상의 회류파천(回流破天)이었다. 순간, 황무의 오른손 부근에서도 뭔가가 반짝거렸다. 휘류루루추운행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을 뒹굴던 부채가 황무의 손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반월선 역시 천수옹의 작품이 아닌가? 참마도법의 로수(路數)를 밟은 황무의 손에 들린 부채와 파천도법을 따라 움직이는 충천검이 허공에서 충돌하고, 꽈르르릉! 폭음이 일어나는 가운데 두 그림자가 폭발하듯 뒤로 멀어졌다.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뒤로 물러나는 황무! 몸의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는 그의 눈에 문득 세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모두 같이 독에 당했지만 일찍 눈치를 챈 자신의 중독 상황이 가장 경미했다. '이들을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다!' 황무는 이를 악물었다. 반월선을 쥔 오른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콰아아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폭음이 황무의 귓가에 들려 온 것은 그때였다. 동시에 하늘과 땅을 양단하는 듯한 눈부신 광채가 영영의 손에서 피어올랐다. 영영의 새로운 공격인 것이다. 파천도법상의 건곤파천(乾坤破天)! 쉬이익! 황무가 몸을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그의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영영은 이를 악물었다. 분명 황무의 내공은 얼마 남지 않았으련만... '너무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자칫 잘못해서 만유의 수하들이 몰려들기라도 하면...' 이를 악문 영영은 눈을 빛냈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 들려 흔들리던 충천검이 그녀의 손을 떠났다. 쐐애액! 황무의 미간을 노리며 허공을 가르는 장검. 그리고 영영의 두 손에 서리서리 피어오르는 것은 열지수의 내공! "두 가지 공격을 동시에 하겠단 의미! 나이답지 않은 응용력이다, 영영!"


외치는 황무의 눈가엔 미미한 감탄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에도 검은 허공을 날아오고, 열지수는 땅속을 내달리고 있었는데... 검을 피하자니 땅속으로 오는 열지수에 당할 것이고, 열지수를 막자니 충천검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 빛처럼 빠른 판단이 황무의 머릿속을 스쳤다. 판단의 결과는 결심. 황무의 눈에 어떤 결심이 서렸다. 동시에 그의 양 발이 바닥을 미약하게 쳤다. 약간 떠오른 그의 몸이 바닥과 평행하게 눕혀지면서 오른손이 충천검을 향해 뻗었다. 오른손을 포기하겠단 의미인가? 파파파파!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날아오는 검날을 옆에서 잡아 가는 황무의 오른손에서 튀겨 오르는 핏물이었다. 피가 많아질수록 충천검의 기세도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크으윽!" 괴로운 신음이 황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바로 그 순간. 쿠르르르영영이 쏘아 보낸 열지수의 공력이 황무의 사방에서 땅을 뚫고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화산이 폭발해 오르듯, 황무의 주위는 온통 황색의 열지수로 뒤덮여 버리고... 일어난 먼지는 장내의 상황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만들었다. "화, 황무 대협!" 추운행이 미약한 음성으로 말했다. 황무는 먼지 속에 휩싸였으며, 시간이 잠시 지났건만 뿌연 먼지는 아직도 가라앉을 생각을 않고 있었다. "흥! 소용없어요. 황무는 이미 죽었으며... 당신들도 곧 죽을 거예요." 영영은 차가운 표정으로 추운행을 쳐다보더니 덧붙였다. "아쉽군요. 당신은 무척 제 마음에 들었지만... 아쉽게도 인연이 모자랐어요." "그렇다. 하지만 모자란 것은 그의 인연이 아니라 너의 인연일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들려 온 말에 영영의 몸이 폭발하듯 뒤로 돌았다. 순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서서히 내려앉는 먼지 사이로 드러나는 황무의 모습을... 영영의 전신이 놀람으로 굳어 버렸다. "사, 살아 있었나요?" 똑! 똑! 떨어지는 핏물은 황무의 오른손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걸레가 되다시피 한 오른손을 보며 영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오른손을 다쳤군요." "그렇다."


"매우 아프겠어요. 참마도법을 쓰기 힘들겠군요." "그렇겠지." 그제서야 영영은 생긋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은 무척 노력했어요. 내공이 거의 사라진 몸으로 이만큼 해내기란 쉽지 않아요. 하지만..." 그녀의 눈빛이 다시 차가워졌다. "하지만 노력은 노력으로 끝나겠군요." 그녀의 양손에서 다시 한 번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열지수. 그리고 입을 뚫고 나오는 차가운 음성. "이제 당신에겐 죽음뿐!" 파아아아열지수가 허공을 갈랐다. 황무는 오른손을 다쳤다. 때문에 충천검을 왼손으로 들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전개하는 참마도법으로 강호에 명성이 자자했던 황무. 그의 얼굴을 향해 열지수의 가공할 수강(手 )이 무엇이건 부숴 버리겠다는 기세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추운행은 차마 황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밑으로 시선을 떨구는 추운행의 눈에 황무의 왼손이 들어왔다. 억센 힘이 들어간 듯 혈관들이 저마다 일어선 모습이었다. * * * -무림인은 자신의 무공으로 신분이 드러나지. 자네는 부디 왼손을 쓰지 말게. -그래, 하나 목숨이 위태롭다면 하는 수 없겠지... * * * 왈칵! 송하림의 총관인 창유(昌儒)는 만유가 가장 아끼는 수하였다. 림주의 거처에 변고가 있음을 듣자마자 달려온 그는 방문을 여는 순간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믿을 수... 믿을 수 없다." 그는 만유의 죽음을 도저히 현실이라 인정할 수 없었다. 오성의 일인이며 온유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군자. 몸은 비록 뚱뚱했으나 마음만은 대해처럼 넓어 항상 주변을 포용해 주던 송하림의 림주 만유. "어찌 된 일이오? 림주는... 누가 림주를 살해했단 말이오?" "누구의 짓인지 곧 알 수 있을 것이오, 창유!" 영영의 목에서 충천검을 빼내면서 황무가 힘없이 말했다. 영영의 혼은 몸을 떠나고 말았다. 아름답던 몸은 고깃덩이로 화해 버렸으며 이 현실은 다시 돌이킬 수가 없었다. 황무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영영의 죽은 몸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전신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툴툴거리며 웃었다.


원래 황무는 영영을 죽이고 싶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가 음모의 와중에 남을 희생시키려 들지만 않았더라도... 황무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녀를 죽이고 말았다.' 황무는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갔다. 중독된 상태에서 억지로 쓴 힘이 마지막 한 올의 활력마저 황무의 몸에서 앗아 간 까닭이었다. 만유의 일은 자신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대지와 창허가 남아 있지 않는가? 황무는 정신을 잃으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영영. 널 이용했지만... 죽이고 말았으니... 관계없는 사람을 죽이려 들지만 않았어도...' "우리도 역시 중독이 되어..." 대지의 설명에 창유는 눈물이 흐르는 두 눈을 꼭 감고 듣고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 순간 겨우 죽였지만... 정말... 죄송하외다. 정말..." 대지가 말꼬리를 흐렸다. 송하림의 제자들은 모두 망연한 상태로 아무 말도 못 했다.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송하림의 깊숙한 곳에서 자신들의 림주가 피살되었는데...! "취앵이 범인일 줄이야. 그녀가 천지회의 영영일 줄이야!" 창유의 눈빛은 더욱 아득해졌다. "이것은... 경계를 소홀히 한 우리의 책임이오. 우리 모두가... 이것은, 이것은..." 말을 잇기가 힘든 듯 같은 말만 계속하던 창유는 문득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 후 가까스로 고개를 든 창유가 힘없이 말했다. "원주의 원한을 갚아 주어 무척... 고맙소, 황무 대협." 황무 역시 말없이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 * * -만박이라는 분! 분명 기억하오. 일 년 전 손님으로 모셨던 기억이 있소이다. -아아, 기억나오. 천화궁으로 간다고 하였소. 분명 그렇게 말씀하시었소. * * * 말을 타고 송하림을 떠나는 네 사람의 표정은 모두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말을 달리는 네 사람. 추운행이 침묵을 참기 힘들다는 듯 말했다. "창유의 말에는 거짓이 없어 보였습니다. 만유의 말도 그랬을까요?" 두 번 말하지 않아도 '성주'란 사람에 대한 질문임을 일행은 알고 있었다. 대지는 만유가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끊어지게 했던 일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때 그의 표정은 고통보다는 만족에 가까웠다. 양심의 괴롭힘을 당해 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두렵군요. 오성의 한 명인 만유를 뒤에서 조종한 '성주'란 자의 존재는... 상상만 해도." 대지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더니 황무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황무 대협?" 황무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굳은 표정으로 말을 몰 뿐. 그도 공포를 느끼는가? "십 년 전, 나는 만유를 멀리서 본 적이 있지. 무혼지겁 당시 만유는 깔끔한 유생복을 차려입은 청년이었네. 전혀 살찌지 않았었지." 한참 후 황무는 이런 말로 어두를 열었다. 침묵이 과하게 흐르던 터라 일행은 모두 황무의 입을 쳐다보았다. "만압층층공은 유가술에서 발전했네. 천축의 유가술은 기존의 근육뿐 아니라 관절과 심장의 근육마저 마음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묘용이 있지." 추운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만압층층공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몸을 덮고 있는 지방과 피부마저 자유자재로 움직이려는 노력이 낳은 결과라 하더군요." "맞아, 때문에 살이 많으면 그만큼 상대와 싸울 때 유리하게 되지. 만유는 그래서 살을 찌웠겠지." 그는 문득 허무한 생각이 들었는지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휴우! 결국 살을 찌우다 죽게 될 줄이야..." 추운행도 인생의 묘한 반전(反轉)에 내심 허무감을 느끼면서 황무에게 물었다. "그럼 젊은 시절 만유는 "아닐세. 만압층층공을 마른 몸이었다는 사실을 추운행이 말없이 고개만

만압층층공을 익히지 않았습니까?" 처음 만들었던 육망(肉網) 선사(禪師)는 전혀 살이 찌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알고 있는가?" 흔들었다.

"육망 선사는 살이 찌지 않았지만 피부를 늘여 마치 그물처럼 사용하여 적과 싸웠다네." 마른 사람의 피부가 죽 늘어나 상대방을 감싸며 공격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추운행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왜 젊은 시절의 만유는 살이 찌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선 살이 쪘을까요?" "살이 찌지 않은 상태에서 만압층층공을 익히려면 무척 힘이 든다네. 엄청난 고통이 따름은 물론이지." 추운행은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한 가지를 깨닫고 말했다. "그렇다면 젊은 시절의 만유는 고통을 이길 만한 충분한 의지가 있었겠군요." "그랬었지." "하면 만유는 왜 그 의지를 잃어버렸을까요? 왜 갑자기 살을 찌워 공력을 늘이는 편한 방법을 택했을까요?" 황무가 빙긋이 웃었다. "그 의문을 자네가 한 번 풀어 보게." * * *


추운행은 황무 등과 계속해서 동행하기로 했다.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그에겐 궁금한 점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천화궁에 위치한 제남에 황무 등이 도착했을 때는 벌써 이월 보름이었다. 낮에는 어느 정도 온화한 바람이 불기도 하는 날씨. 그날 저녁 네 명은 천화궁에서 멀지 않는 곳에 숙소를 정하고 여독을 풀었다. 날이 밝으면 천화궁으로 들어가자는 의견이었다. 황무가 짐을 정리하고 침상에 몸을 누이자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추운행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았습니다. 왜 만유의 몸이 뚱뚱해졌는지를 알아 냈습니다." 황무는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이 젊은이는 매우 똑똑하다. 때문에 언젠가 황무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아 낼 것이다. 그는 만족스러웠다. * * * 만박은 어떤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을 하면서 만박은 생각했다. '이제 원래의 목표는 모두 완수되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모두가 숨을 장소를 찾기 위함이니...' 문득 그는 황무를 생각했다. 이제 곧 그는 자신이 숨은 곳을 찾아 낼 것이다. 그 순간부터 새로운 강호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던 만박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과연 찾았을까? 젊고 패기있으면서도 냉철하여 한눈에 인과를 볼 줄 아는 그런 기재를 찾았을까?' 의문이 생겼지만 곧 잊기로 했다. 황무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만박은 천천히 눈앞에 놓인 붉은 천을 집어 들었다. 붉은 천을 솜에 댄 후 그는 바늘로 그 천을 천천히 기워 나갔다. 눈앞에 놓인 자신의 많은 작품을 보면서 만박은 싱긋이 웃었다. "일 년간 이곳에 있었군. 하지만 이제 곧 떠나게 되리라." * * * "그래, 어떤 이유인가?" 황무가 되묻자 추운행은 딴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용과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어린 시절의 얘기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공을 익힐 때의 얘기. "전 일곱 살 때 제 또래의 아이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월곡의 군무회(軍無回)라는 아이였습니다." "충격이 컸겠군." "그렇습니다. 심지어 열흘 동안 밥도 먹지 않고 운기조식도 걸렀으니까요." "그 일이 만유가 살을 찌운 일과 연관이 있는가?" "전 그때 알았습니다. 한 가지 일에 절망한 사람은 다른 일조차 포기해 버리기 쉽다는 것을." 황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추운행이 핵심에 접근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추운행이 말을 이었다. "만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엔 패기와 야망이 있어 고통을 참았지만 어떤 일 이후론 참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 그는 살이 무척 찌게 되었지." "그는 무언가에 절망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때문에 스스로 자포자기해 버린 것입니다. 살이 찌건 말건 상관 않게 된 것입니다." 황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추운행의 입에서 나올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결론은 하나입니다. 만유로 하여금 절망을 느끼게 한 것은... '성주'란 존재입니다. 만유를 강제하고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한 암중의 존재, 성주란 자는..." 추운행은 마치 상대방이 제대로 듣지 못할까 봐 두렵기라도 하다는 듯 천천히 말을 맺었다. "분명히 존재합니다." 황무는 만족스러웠다. 그는 마침내 만박과 약속했던 그런 젊은이를 찾아 내었기 때문이다. 8. 만월 아래 다섯 개의 죽음 <배신한 자의 눈물, 배신한 자의 한숨. 그건 악어의 눈물과도 같다. 나는 그대들을... 용서할 수 없다.> 혈혈수라 광무혼의 맹서 밤이 깊었다. 보름달이 암공에 떠 있었지만 숲길은 밝지 않았다. 대지와 창허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황무도 입을 다문 채 보름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귓전을 스치는 바람. 그 바람마저 비릿한 혈향을 담아 새롭게 일어날 겁난을 예견하는 듯했다. 일행은 숲을 지나 천화궁으로 향하는 도중이었다. 문득 추운행은 길을 떠날 무렵 객잔의 주인이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조심하십시오, 나으리들. 보름만 되면 저 숲속에선 귀신이 나옵니다요. 벌써 십 년째 보름만 되면요... 주인이 말을 하며 으스스 떨던 모습을 떠올리며 추운행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하나 문득 차가운 바람이 불자 섬뜩한 한기가 느껴지는 것은 왜 인가? 사방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먹구름이 달빛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하늘에는 구름이 무척 많았다. 바람도 불어오는 것이, 금세라도 비가 퍼부을 것만 같은 날씨였다. 추운행은 미간을 찡그리며 하늘을 보았다. '아쉽군. 보름인데도 하늘이 흐려 달을 보기 힘들다니...' 내심 투덜거리던 추운행의 눈빛이 문득 흔들렸다. 그는 다른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세 사람 역시 자신 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피 냄새다!"


누구의 입에서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나온 고함이었다. 황무가 가장 먼저 몸을 날렸고, 추운행이 가장 마지막으로 움직였다. 귀신은 물론 없을 것이다. 추운행은 그런 존재는 아예 믿지도 않았다.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좀 전에 느낀 혈향이 절대 착각은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 * * 둥실둥실 떠다니는 푸른 불. 귀신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귀화(鬼火)가 떠돈다. 그리고 이 숲속에서도 귀신불이 둥실거리며 떠다녔다. 숲속의 좁디좁은 오솔길을 다섯 개의 귀신불이 유영하면서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보통, 귀신불은 푸른색을 띤다. 그러나 이것들은 달랐다. 푸르고, 붉고, 검고, 희고, 노란... 오색(五色)의 귀신불이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추운행의 전음이 황무의 귓가에 들려 왔다. 황무는 말없이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숲속의 조그만 빈터! 귀화들이 그곳에서 정지한 채 맴돌기만을 반복했던 것이다. '저, 저런...!' 귀화들이 한군데로 모이는가 싶더니 한 줄기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잠시 후 귀화는 바람 속에 스러졌고, 그곳에 여인 한 명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아니, 실제로 유령인지도 모르겠다. 전신에 걸친 옷은 더없이 화려했지만, 눈동자는 어둠을 뚫고 번뜩였으고 머리는 산발이 되어 바람에 날렸다. 하늘의 달은 구름에 의해 완전히 가려졌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더욱 음산한 숲속의 공기! 금세라도 한 줄기의 폭우를 쏟아 낼 듯했고, 광풍(狂風)이 더욱 극성을 부리며 여인의 머리칼을 날렸다. 귀녀(鬼女)의 머리가 조금씩 흔들렸다. 그리곤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하는 것이다. "호호호호! 죽었구나, 너희들은 죽었어. 오호호호...!" 살기(殺氣)와 귀기(鬼氣), 그리고 광기(狂氣)가 혼재하며 번들거리는 눈으로 귀녀는 숲이 떠나가라 웃었다. 황무의 미간이 길게 찌푸려졌다. 귀녀의 앞에 검은 그림자 다섯이 쓰러져 있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섯은 분명 사람의 그림자였다. 똑! 똑! 핏방울이 점을 이루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인의 눈앞에 있는 다섯 명의 사람! 그들을 알아보기 위해 추운행은 두 눈에 최대한 공력을 집중시켜야만 했다. 거리는 멀고 또 밤이 아니던가? 다섯 시체의 옷차림을 보면, 승려가 있었고 도사가 있었으며 유생과 거지도 있었다. 그리고 여인! 어두운 와중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의 시체도 보였다. 어떤 신분인가? 피는 그들의 이마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검붉은 피! 피는 생명이 아닌가? 피가 떨어지면 생명 또한 다하는 법이 아니던가? 피는 한시도 쉬지 않고 떨어지건만 다섯 사람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미 죽은 시체란 말인가? 하지만 죽었다면 왜 피가 여태 마르지 않았는가? 추운행은 몸을 조금 앞으로 당겨 다섯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했다. 그 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리 아파도 고통스런 표정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다섯 개의 시체는 본래부터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에 불과했던 것이다. 인형은 감정을 나타낼 수 없다. 피를 흘릴 수는 더욱 없다. 그렇다면 지금 바닥을 적시는 피는 당연히 인형의 것이 아니다. 다섯 인형의 이마에서 직선으로 위로 올라가 보자. 다섯 개의 나무꼬챙이와 그곳에 꿰인 다섯 마리의 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은색의 닭! 그들의 목은 이미 어디론가 달아나고 없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몸뚱이는 버둥거렸다. 그 모습은 생명의 처절한 힘을 보여 주는 듯하여 보는 사람의 마음에 한 줄기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생명이란 이처럼 잔인한 것일까? 심지어 잔혹하기조차 했다. 사방으로 번져 가는 피 냄새는 사람이 아닌 닭의 것이었으나,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차피 피이며 생명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죽음이란 마찬가지가 아닌가? 똑같이 두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닭 피는 정확히 인형들의 머리로 떨어졌다. 흡사 인형들이 흘리는 피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다섯 구의 시체(屍體)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똑! 똑! 똑! 피는 끊이지 않고 떨어졌다. 그리고 귀녀(鬼女)의 광소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숲이 떠나가도록 웃던 소리는 곧 입 안을 맴도는 허탈한 웃음으로 변했다. 이윽고 웃음은 싸늘한 미소로 변해 귀녀의 입가에 정착했다. 피가 많아질수록, 인형들의 처참함이 더해 갈수록 여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짙어만 갔다.


귀녀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다섯 인형을 쳐다보았다. "이제서야 드디어 너희들은 죽었구나!" 뜻 모를 소리를 외치는 여인. 순간 하늘에서 천둥이 크게 울렸다. 번쩍이는 뇌광이 여인의 모습을 비추자 알 수 없는 귀기(鬼氣)가 저절로 일어나 주위를 덮었다. 그리고 인형들의 얼굴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추운행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인형 중 유일한 여자 인형의 얼굴은 분명...! '닮았다! 번개가 다시 칠 때 확인해 봐야겠다.' 인형들을 쳐다보는 귀녀는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다섯 사람을 죽였다. 흐르는 피는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는 닭이 아닌 인간의 것이었다. 싸늘한 한기가 더욱 거세게 피어오르더니, 마치 숲 전체를 덮어 버리겠다는 듯 아우성치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으르렁대는 하늘! 먹구름은 이제 너무 무거워져서 하늘에 머물지 못할 정도였다. 마침내 땅으로 떨어지는 구름의 모습은... 비였다.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 빗물! 어느 순간 물동이로 한 번에 쏟아 붓는 듯한 폭우로 변했다. 사방이 순식간에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수기(水氣)로 덮였건만 여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 앞의 다섯 시체도 당연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인형이었다. 그러나 여인의 눈에는 시체였다. 누군가의 시체! 어쩌면 여인 자신의 시체일는지도 몰랐다. 쏴아아-! 꾸르르릉폭우 속에 들리는 천둥은 평소보다 더욱 시끄러웠다. 귀녀는 천천히 다섯 시체 중 하나의 목을 집어 들었다. "호호호, 옥교(玉嬌)야! 네년이 감히 그를 배신했으니 어찌 더 살기를 바라겠느냐? 오호호호!" 시체를 바짝 앞으로 당겨 보면서 귀녀는 크게 웃었다. 그 순간 억수 같은 비를 뚫고 크게 피어오르는 강렬한 빛! 뇌전(雷電)이었다. 번쩍-! 그리고 추운행은 똑똑히 보았다. 여인이 들고 있는 옥교라 불린 인형, 그리고 귀녀의 얼굴! 마치 거울을 놓은 듯 똑같았으며, 심지어 입고 있는 옷마저 동일했다. 폭우가 더 심해졌다. 그리고 귀녀의 웃음 소리도 커졌다.


추운행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으며 대지와 창허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리고 황무의 표정은 돌처럼 딱딱했다. 무엇을 생각하는가? 황무의 눈은 귀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손은 불끈 쥐여진 채 부들거렸으며 팔뚝과 이마에는 힘줄이 여럿 솟아올라 있었다. 그는 마치 놀라운 것을 보고 굳어 돌이 된 것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너였는가? 네가 여기... 있었는가?' 쏴아아갑작스런 물세례! 수상하던 하늘은 마치 구멍이 뚫린 듯한 폭우를 퍼부어 바닥에 물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바닥에 놓여진 인형 네 개가 물에 떠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귀녀는 그러한 일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꼼짝도 않고 자신이 쥐고 있는 여자 인형 하나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비에 동반된 광풍은 때때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휘말아 올렸다. 퀭한 눈! 어찌나 깊이 들어갔는지 눈이 나쁜 사람은 귀녀에게 눈이 없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입술은 갈라질 대로 갈라져 툭툭 터져 나갔으며, 한밤중에 보는 고양이의 눈과 같이 새파란 인광(燐光)이 한 쌍의 눈에서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면 설사 낮이라도 이런 여인을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런 날은 더욱 만나고 싶지 않으리라. 비가 억수처럼 퍼붓고,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 별이나 달빛 따위의 빛이 일체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하늘에서 천둥이 으르렁거리는 날이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숲속의 황무 등도 밖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호기심이 일긴 했지만 모두 참고 있을 뿐, 나서서 귀녀와 말을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비가 퍼부었다. * * * 귀녀는 인형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은 매우 힘든 움직임으로 보였다. "괴로운가, 옥교! 그를 배반한 것이 괴로운가?" "그래, 난 괴로워!" 인형은 입조차 열지 않고 대답했다. 하나, 사실 그 대답은 귀녀의 입에서 나왔던 것이다. 혼자 묻고 혼자 답하는 귀녀! "괴롭다면 왜 죽지 않는 거지? 왜 살아 있지?" 귀녀가 재빨리 물었지만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인형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며 여전히 무표정했다. 기쁜 듯도 했고 슬픈 듯도 했으며,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침울한 것 같기도 한 인형. 사실 이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인형에는 감정이 없으니...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감정만을 표현할 뿐이다. 우는 표정으로 만들어진 인형은 깨끗이 씻어 주더라도 여전히 울고, 웃는 표정의 인형은 갈가리 찢어지더라도 웃는다. 사람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일 인형이 스스로의 감정을 나타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인형이 아닐 것이다.


"옥교, 넌 인형이 아니다. 왜 대답을 안 하지?" "천만에, 난 인형이야!" "아니, 넌 인형이 아니야. 괴로움을 느끼잖아!" "난 인형이야. 난 감정을 느끼지 않아!" 귀녀의 손에 들린 인형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간혹 인형 중에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있다. 그것들은 미친 인형이 분명했다. 사실 미쳐도 단단히 미치지 않았다면 인형 주제에 감정을 쉽사리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미친 인형을 불속에 던져 버리기 마련이므로. 지옥의 염화(焰火)처럼 악랄한 불! 타오르는 불은 인형의 몸을 삼켜 더 이상 미친 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친 인형에게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간단한 조치였다. 여인의 생각도 그런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을 닮은 인형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으며, 불에 태우고 싶어하는 듯 보였다. 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빗물이 눈 속으로 들어가도 여인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인형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 나는 인형이야. 난 감정이 없어..." "아니! 옥교, 넌 감정이 있어. 분명히 있어!" 인형의 떨림이 강렬해졌다. "그... 그래, 난 감정이 있어. 하지만 이 사실을 알면 그는 날 죽일 거야. 성주는 날 죽이고 말 거야!" 귀녀의 손에 들린 밀랍인형! 그 인형이 애원하듯 귀녀에게 말했다. "나... 나를 죽여 줘! 어서 나를 죽여 줘!" 귀녀의 입이 달싹이면서 계속 인형의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귀녀의 눈이 점점 커지고 인형의 애원은 점점 빨라졌다. "어서 날, 성주가 날 죽이기 전에 어서 나를...!" "죽여 주마!" 귀녀가 목이 터져라 외치며 인형의 목을 졸랐다. 귀녀의 손아귀에서 오색의 광채가 일어나더니 단숨에 인형의 목을 끊어 버렸다. 파아악! 밀랍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허엇!" 지켜보면서 지나치게 긴장했던 탓일까? 추운행은 밀랍인형이 터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살아 있는 여인이 죽어 피가 줄줄 흐르는 듯한 환상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순간 귀녀의 몸이 약간 옆으로 돌아섰다. "누가 숨어 있느냐?" 단숨에 십여 장을 도약하더니 숲 한쪽을 덮쳐 오는 귀녀! 추운행이 있는 곳과 정확히 일치했다. 여인이 돌연 자신을 공격할 줄이야! 십여 장을 한걸음에 줄이며 오른손을 휘둘러 올 줄이야...! 추운행은 자신의 실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얼른 내공을 돋워 여인의 공격을 맞이했다. 여인의 오른손에는 붉은 강기가 꽃처럼 피어올라 빙글거리며 돌아갔다. 그 강기가 달려오는 순간 추운행의 반월선도 우윳빛 강기를 머금었다. 꽈과광! 강기와 강기가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굉음! 답답한 신음성과 더불어 추운행은 정신없이 일곱 걸음을 물러섰다. 반면 귀녀의 몸은 허공에서 한바퀴만을 맴돌았을 뿐이다. 우열이 명백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쥐새끼는 한 마리가 아니구나!" 그녀는 추운행과 부딪치는 와중에 황무를 비롯한 삼 인을 발견한 듯했다. 귀녀는 이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단숨에 삼 장을 발출했다. 목표는 추운행을 제외한 세 명! 추운행은 여태껏 비틀거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송하림의 만유가 몸을 기이하게 움직이며 황무를 공격했을 때 그 쾌속한 움직임에 누구 하나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물며 이 귀녀는 그보다 더욱 빨랐으니! 외침이 끝나는 순간, 그녀의 손은 거의 황무 일행을 덮쳐 들었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손에서 뿜어 나온 경력은 그 빠른 손보다도 한걸음 이상 쾌속했다. 꽈르르-! 폭음과 더불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무가 디디고 있던 발 아래의 대지(大地)가 그대로 터져 나갔다. 대지와 창허의 경우도 마찬가지. 생각해 보라. 추운행을 일장으로 물리친 후 다시 한꺼번에 세 명의 고수를 공격한 귀녀의 움직임을! 고수가 아니라면 감히 피할 엄두도 못 낼 쾌속한 공격! 그렇지만 황무 등은 피해 냈다. 비록 위험하기는 했지만 모두 귀녀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했다. 만일 이들이 고수가 아니라면 천하에 누가 고수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황무는 조금 여유가 있었으며 대지와 창허 역시 그다지 위험스럽지는 않았다. 가장 위험했고 가장 아슬아슬했던 사람은 추운행이었다. 그의 무공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제일 먼저 귀녀의 일장을 정면으로 부딪친 충격 때문이었다. 추운행을 공격한 뒤 나머지 세 명을 동시에 공격했던 귀녀가 다시 추운행을 공격했기 때문에 그가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비록 설명은 길지만 실지 상황은 한 순간에 불과! 처음 맞부딪친 충격으로 추운행이 일곱 걸음을 물러났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가 있다. 물러나는 마지막 걸음이 땅에 막 닿을 무렵, 추운행에 대한 귀녀의 두 번째 공격이 이어졌으니... 감히 상상할 수 있는가? 얼마나 빠른 변화이며 공격인지를. 그리고 그 공격을 맞아야 하는 추운행의 처지가 얼마나 위급한지를. 반월선이 사방을 휘저으며 선풍(旋風)을 일으켰다. 귀녀의 오른손에서 뻗어 나온 붉은 꽃 모양의 강기, 강홍화(强紅花)를 흐트리려는 노력! 까가가강! 쇠와 쇠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피어올랐다. 귀녀의 강기는 부채가 일으킨 바람에 밀려 옆으로 비켜나는 듯 보였다. 붉은색의 강기는 매우 강맹했지만 딱딱한 성질이 있었다. 때문에 추운행의 부드러운 방어에 옆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추운행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어렸다. 한 순간 위기를 넘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은 이때 일어났다. 강기가 갑자기 색채를 바꾼 것이다. 부드러운 황색으로 변한 강기! 그것이 마치 연기처럼 흩어지더니 추운행의 반월선을 감아 오는 것이 아닌가? 추운행은 놀라 한소리를 크게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이미 발출한 진기가 성질을 바꾸다니, 이것은!" 그가 놀라는 것은 매우 당연했다. 노란빛으로 변했던 강기가 다시 흰빛을 띠더니 빛살처럼 쾌속하게 자신의 가슴을 노려 왔기 때문이다. 원래 진력이란 대기 중에 충만한 정기를 일정한 호흡과 복 식에 의해 체내에 축적하여 길러 내는 것이다. 또한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운과 여타 방법으로 채집된 기운들의 축적이 진력이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도인(導引)하고 다스려 자신에게 필요한 성질로 양성하려는 것이 강호인이 내공을 닦는 첫째 이유였다. 강맹한 공력을 쌓은 사람의 체내에 있는 공력은 모두 똑같은 성질을 띠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만일 강한 공력과 부드러운 공력이 섞이게 되면 융합(融合)되기보다는 오히려 크게 반발하는 성질이 일어나는 법이었다. 이것은 음(陰)한 체질의 사람에게 양(陽)의 기운이 강한 약을 억지로 먹이면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 하지만 학문이 발달하듯 강호도 나날이 변화 발전하고 있었다.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무공이 쉬지 않고 창안되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 불가능했던 것을 지금은 너무나 당연히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발전이라는 괴물! 마침내 무인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내공을 몸 안에 담을 수 있는 내공심법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강(强)과 유(柔)를 겸비하는 수많은 무공들이 탄생했다. 또 강한 기운을 유한 기운으로, 다시 유한 기운을 강한 기운으로 전환시키는 방법까지 개발되었던 것이다. 해서 귀녀가 만일 오른손으로 붉은 강기를 내놓고 왼손으로 노란 강기를 발출했다면 추운행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체내에서 진기의 성질을 바꾸는 심법은 드물긴 하지만 존재했으므로. 그러나 일단 허공으로 발출된 내공을 다른 종류로 바꾸는 무공에 대해서는 추운행은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강호의 내공심법은 또다시 발전했는가? 강하고 붉은 강기( 氣)! 이것은 강홍화(强紅花)라 불렸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노란 강기는 유황화(柔黃花)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귀녀가 마지막으로 보인 희고 빠른 성질의 강기는 다름 아닌 쾌백화(快白花)! 귀녀가 손을 뻗고 추운행이 반월선으로 막자 강기의 성질을 변화시켜 그 방어를 흩뜨린 뒤 다시 공격하는 동작은 너무나 빨랐다. 일반인이라면 아예 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앞의 모든 쾌속을 합해도 쾌백화의 빠름엔 그 반도 미치기가 힘들 것이다. 그만큼 흰 강기는 빨리 움직였다. 게다가 노리는 부위는 모두 추운행의 치명적인 사혈!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세 사람의 눈에는 다급함이 떠올랐다. 추운행을 도와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귀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로 날렸다가 다시 추스르려는 순간, 이미 귀녀는 추운행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었다. 세 명은 추운행을 돕고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귀녀의 공격에 비한다면 정지한 듯 보일 정도로 느린 공격이었다. 너무 느린 도움이었다. '늦었다!' 황무가 내심 외쳤다. 그랬다. 정말 그들이 추운행을 도와 주는 동작은 너무도 느렸다. 빛보다 빠른 것은 마음의 움직임이라던가? 황무는 마음 한구석이 약간 저려 옴을 느꼈다. 추운행이란 젊은이는 비록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는 그는 매우 똑똑했고 무공도 강했다. 무엇보다 남의 불행에 슬퍼하고 불의를 보고 분노하는 때문에 황무에게는 꼭 필요한 청년이었다. 처음부터 황무는 추운행이 귀녀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그는 남모르는 방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도는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절대 안 되는 게다가 황무는 이미 귀녀가 누군지를 알았던 것이다. 때문에 황무는 아픈 마음을 억지로 눌렀다. 그는 오직 한 가지만을 바랬다.

아니었지만 무척 그의 마음에 들었었다. 마음이 있었다. 할 수가 있었다. 것이었다.


추운행에게 감춰 둔 한 수가 있기를...! 사실 대부분의 강호인은 한 가지씩의 구명절초를 가슴에 꼭꼭 숨겨 두고 다니지 않는가? 황무는 추운행 역시 그러기를 바랬다. 추운행 자신의 힘으로 오직 한 고비만을 넘기기 바랬다. 귀녀가 전개하는 쾌백화(快白花)만 막아 낸다면 자신은 그를 죽지 않게 해줄 수 있었다. 추운행의 이는 너무 세게 악 다물어져 턱 주위의 근육이 툭툭 불거질 정도였다. 그는 수중의 반월선을 생각했다. 철이 든 후 한 번도 놓은 적이 없던 자신만의 무기! 그것은 단순한 부채라는 개념을 떠나 자신의 친구이며 무행의 든든한 동반자였다. 무인으로서 시작한 자신의 삶에 반월선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강호에 광명일수란 이름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눈앞을 덮쳐 오는 저 백색 꽃의 강기! 그 속도와 힘을 막아 낼 방법이 지금의 추운행에게는 없었다. 그는 반월선의 어떤 부위를 만졌다. 달칵,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매우 힘껏 만졌다. 천수옹(千手翁)이 만든 부채! 천수옹의 작품에는 대개 한 가지씩의 비밀은 숨어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그 비밀은 결코 풀리지 말아야 한다. 만일 풀어진다면 병기가 산산조각나기 때문이다. 파아악! 반월선의 살 끝에 박힌 소혼화린(燒魂火鱗)! 그것들이 살과 동시에 날아오르며 쾌백화를 덮쳤다. 다급한 탓에 내공을 실지 못한 추운행이었다. 막을 방법이 없으니 반월선에 장치된 기관의 힘을 빌릴 도리밖에. 이것은 자신의 무기를 포기하는 행동이었다. 반월선은 기관의 힘으로 스스로 자폭하며 쾌백화와 함께 산화했다. 최후의 힘으로 자신의 주인을 보호한 것이다. 귀녀는 갑자기 일어난 변화에 매우 놀랐고, 그 짧은 순간 마침내 황무와 대지, 창허는 추운행을 도와 귀녀를 공격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물러가라, 귀녀!" 대지의 세심주(洗心珠)가 빙그르르 돌더니 폭발하듯 허공을 일렬로 날았다. 자신이 가장 자랑하고 있는 만주일통(萬珠一通)! 처음부터 세심주의 가장 뛰어난 절초를 전개하는 것이다. 따다다다뒤의 구슬이 앞의 것을 치며 속도를 증가시키는 연쇄 반응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리고 가장 앞의 구슬이 여인의 미간을 향해 쏘아 나갔다. 귀녀는 빙글 몸을 한바퀴 돌렸다.


본능적인 위기감! 귀녀의 눈에 염주 한 알이 가득 확대되고 있었다. 공격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창허가 전개한 면장(綿掌) 역시 귀녀의 허리 부분을 노리고 있었으므로. 대지는 쾌(快)를, 그리고 창허는 지(止)를 선택한 공격!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저절로 조화가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빠르고 느린 공격! 어느것도 만만히 볼 위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귀녀(鬼女)의 눈에는 그 두 공격 모두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느리게 발동하였으되 가장 먼저 자신을 덮쳐 오는 또 다른 공격이 있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참마도법 중에서도 가장 빠르다는 천지분(天地分)! 황무의 손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대기의 저항을 받은 참마도가 금세라도 부러질 듯 휘어졌다. 얼마나 강한 속도와 힘이 어렸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지금 귀녀는 추운행에게 등을 보인 상태였다. 반월선은 부러졌고 추운행은 아무런 무기를 지니지 못했지만 여전히 한 쌍의 손은 건재했다. 그런 추운행을 향해 귀녀의 등이 크게 확대되며 다가왔다. 추운행의 미간에 큰 노기가 어렸다. 이런 귀녀의 반응이야말로 자신을 크게 무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차압!" 추운행의 양손이 엇갈리면서 광명전의 절기 효일장(曉日掌)이 앞으로 쏘아졌다. 정면 좌우에서 날아오는 대지와 창허의 공격! 게다가 위에서는 참마도가 날벼락처럼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등뒤에서 추운행마저 공격하자 귀녀는 피할 방향이 없는 듯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귀녀의 왼손과 오른손에서 푸르고 검은 꽃이 두 송이 피어났다. 설명은 피어났다고 했지만 사실은 벼락처럼 튀어나온 두 가지 성질의 강기였다. 물론 이것은 꽃이 아닌, 경력(勁力)의 결집체였다. 푸른 것은 회청화(回靑花)요, 검은 것은 산흑화(散黑花)! 추운행을 향하는 귀녀의 등이 더욱 빨라졌다. 마치 효일장 정도는 그냥 맞아 주겠다는 듯한 귀녀의 움직임에 추운행의 장력이 극한으로 강해졌다. 분노가 진기의 소모를 극한으로 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때 귀녀와 추운행의 효일장 사이로 무언가 파란 기운이 끼여드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귀녀가 앞으로 뻗어 냈던 회청화가 빙그르르 방향을 틀어 돌아왔던 것이다. 꽈등! 효일장과 회청화의 부딪침! 굉음이 피어오르는 순간 뒤로 쾌속히 후퇴하던 귀녀의 몸이 땅을 박찼다. 땅이 몇 뼘이나 움푹 팰 정도의 반탄력을 이용하여 귀녀는 위로 떠올랐다.


추운행은 휘청이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고, 귀녀가 원래 있던 자리에는 검은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산흑화(散黑花)라는 기운이 아직 남았던 것이다. 귀녀가 원래 위치에서 떠났으니 황무를 비롯한 셋의 공격도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으리라. 대지와 창허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들의 몸 또한 내뿜었던 진기를 흡수하며 나타나는 반발력으로 인해 마구 흔들렸다. 귀녀가 남겨 놓은 검은 진기의 꽃, 산흑화! 그 꽃이 심상치 않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우욱!" 창허의 면장은 가까스로 산흑화를 건드리지 않았지만, 쾌를 위주로 뻗어 간 세심주 한 알이 끝내 약간 스치고야 말았다. 그러자 산흑화는 원래의 성질대로 폭발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파아앙! 회오리가 마구 피어올랐다. 대지와 창허가 양손을 분분히 휘저으며 물러나는 순간, 산흑화를 이용해 벌인 효과적인 공격의 성공을 귀녀가 만족해 하며 웃음을 짓는 순간, 황무의 몸이 허공에서 몇 바퀴 뒤집혔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다른 곳에서 그의 몸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귀녀의 눈에 떠올랐던 웃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9. 천화궁주 선향 <한 사람을 보면 믿지 않는다. 하나, 둘을 보면 믿게 되리라. 셋은 너무 많으니... 약속하게. 날 찾기 전 두 명은 거쳐 올 것을...> 만박의 말 중에서... 한 점을 공격했는데 그 한 점이 움직인다면? 당연히 공격은 실패하리라. 그렇지만 점이 움직이는 순간 공격 또한 따라 움직인다면 공격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대지와 창허의 공격은 귀녀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지만 황무는 달랐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 이상했다. 원래 그는 허공에 몸을 띄운 채 도를 내리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공 중이라 힘을 받을 곳이 없으니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황무의 참마도는 어느새 귀녀를 따라잡아 버렸다. 귀녀가 뒤로 물러나자 원래부터 그 위치에서 도를 내리긋고 있었다는 듯 황무가 새로운 위치에 나타났던 것이다. 대지와 창허, 그리고 추운행은 미처 황무의 그러한 신법을 주목하지 못했다. 그러나 황무는 마치 처음 있던 위치와 새로 나타난 위치 사이의 공간이 갑자기 사라진 양 귀녀를 따라잡았다. 눈을 부릅뜨고 황무의 신법을 노려보는 귀녀의 전신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마침내 귀녀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외쳤다. "축영단공(縮影斷空)!" 이어 귀녀는 몇 마디를 더 외쳤으나 그보다 더욱 우렁찬 황무의 외침이 그것을 묻어 버렸다.


"귀녀-! 물러나거라-!" 그러나 귀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붉고 흰 두 가지 꽃이 좌우에서 거의 동시에 솟아 나와 황무의 참마도와 맞부딪쳤다. 두 고수의 경력은 급기야 허공에서 격돌했고, 그 여파는 시전했던 사람들을 향해 되돌아갔다. 우르릉! 굉음 속에서 담담한 신음 두 줄기가 울려 나왔다. 순간, 그림자 하나가 전권에서 벗어나며 허공 위로 까마득히 치솟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 귀신이 아닌 인간이 어찌 이처럼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인가? 여귀의 웃음 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살아 있었구나. 그대는 살아 있었구나- 오호호호...!" 그 웃음 속에는 기묘하게도 기쁨과 슬픔, 분노와 회한이 모두 스며들어 있었다. 과연 귀녀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녀는 황무를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귀녀는 웃음 소리를 남기고 멀어져 갔다. 숲속에 남은 네 명의 고수는 아무도 귀녀를 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답답한 안색으로 귀녀의 뒷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빗줄기가 더욱 심해졌다. 말없이 비를 맞고 서 있는 네 사람! 그 중 황무를 제외한 세 사람의 마음은 납으로 만든 추처럼 무겁기 그지없었다. 귀녀와 싸우며 입은 내상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처였다. 다급한 상황인지라 합공을 했음에도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던 것이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의외로 마음의 상처를 쉽게 입기 마련이다. 이들 세 명이 자부심이 약하다면 어느 누가 스스로를 자부하겠는가? 어둠 탓으로 사물은 확연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발과 몸에 닿은 빗물의 감촉이 차가웠을 뿐이다. 진흙에 섞여 끈적이는 바닥의 느낌. 침침한 사방은 마치 실의(失意)한 세 청년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였다. 추운행은 머리를 힘껏 휘저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 약해지는 것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오늘 매우 씁쓸한 패배를 당했지만 언젠가 또 다른 기회가 있으리라. 진정한 고수는 무수한 패배 끝에 탄생하는 법이었다. 그는 문득 황무를 돌아보았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생각에 잠긴 그를 보면서 추운행은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흔들며 그만두었다. 지금은 밤이 깊었다. 그리고 그들 네 명 모두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의구심이 드는 것에 대한 질문은 날이 밝은 후에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 비가 그친 후에 하더라도...


* * * 마침내 날이 밝았다. 안력(眼力)이 발달한 무림인은 밤에도 사물을 볼 수 있었지만, 그래도 태양빛으로 보는 사물과는 어딘가 달랐다. 어느새 먹구름은 사라졌고 햇살은 밤새 비에 맞아 차가워진 몸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혈관을 통해 핏물이 흐르고, 약해졌던 피부가 따뜻하게 되살아나는 감촉은 일종의 간지러움이었다. 지극히 기분좋은 간지러움. 추운행은 몸을 돌려 객잔의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간밤에 있었던 일장의 싸움이 마치 악몽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결코 꿈은 아니었다. 밤새 운기조식한 덕분에 몸의 기력은 대부분 회복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지난밤 느꼈던 무기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의지가 강한 청년일수록 쉽게 상처를 입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상처를 입으면 그만큼 회복이 더디기도 한 법이었다. 황무가 천천히 걸어와 추운행의 옆에 섰다. "잘 쉬었나? 자네가 가장 먼저 일어났군!" 추운행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겠죠. 간밤에 어떻게 객잔으로 걸어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허전합니다." "운기조식하며 밤을 새웠군." 추운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운기조식을 하면 정신이 맑아져야 했지만 간밤의 어이없는 패배로 인한 충격이 워낙 컸던 것이다. 추운행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물었다. "사람은 살면서 몇 번의 패배를 당하는 것이 적당할까요?" 이것은 비록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사실 질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황무는 대답해야만 하는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다. "정답은 없네. 다만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것이 몇 번이냐가 중요하지 않겠나?" 추운행은 그것이 적절한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황무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은 도대체 몇 번이나 패배를 당했을까? "휴우!" 마침내 추운행은 소리내어 한숨을 쉬고 말았다. "한 사람이 지닐 수 있는 진기의 성질은 한계가 있습니다. 게다가 밖으로 발출된 진기가 성질을 바꾸기까지 하다니... 전 한 번도 그런 내공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있네." 황무가 말했다. 추운행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십니까?" 황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잠시 쉬었다가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옛날 천화성모라는 여기인(女奇人)은 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 종류의 다른 공력을 지닐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네." 추운행은 황무가 갑자기 다른 말을 하자 이상히 여겼지만 숨은 뜻이 있겠거니 하고 잠자코 듣기만 했다.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그녀는 연구에 들어갔고, 무수한 시행 착오를 거친 끝에 하나의 심법을 완성했지." 황무의 오른손에서 파란 강기가 자그마하게 떠올랐다. 추운행의 눈이 커졌다. 분명 자신의 효일장과 맞닥뜨렸던 푸른 꽃의 강기와 같은 종류였기 때문이다. 황무는 말을 이었다. "오색채화강(五色彩花 )은 예전에는 불가능하다 여겨졌던 한계를 극복한 전설적인 무공 중의 하나지. 모두 다섯 가지의 다른 성질을 지닌 강기가 꽃의 형상으로 피어오른다네. 이것은 그 중 하나인 회청화(回靑花)일세. 마음대로 휘어질 수 있지."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황무가 피워올린 파란 강기는 추운행의 눈앞을 자유자재로 유영하며 떠돌았다. 추운행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당신이 어떻게 그 무공을 펼칠 수 있습니까?' '당신은 귀녀와 연관이 있습니까?' '분명 귀녀는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들을 추운행은 백 번이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추운행은 꾹꾹 참으며 서두르지 않았다. 추운행은 결코 어리석지 않았으며, 채근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낳을 리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없이 황무의 눈을 쳐다보았다. 깊고 힘있는 눈! 나이가 들면 자신도 저러한 눈을 가지고 싶다고 추운행은 생각했다. 그 눈은 많은 고난을 힘겹게 넘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추운행은 묻고야 말았다. "그 무공을 알고 계십니까?" 어떻게 알고 있으며, 누구에게 배웠으며, 귀녀와는 어떤 연관이 있느냐는 여러 질문을 한 번에 몰아 묻자니, 이처럼 어이없는 질문이 되고 말았다. 이미 황무가 펼쳤으니 당연히 알고 있지 않겠는가? 황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배웠을 뿐 일 성도 채 안 되네. 강기조차 내 본신의 내공으로 모사(模寫)한 것일 뿐. 그렇지만 진기의 성질을 내가 조정할 정도는 된다네." 푸른 꽃이 흰빛으로 바뀌더니 맹렬한 속도로 십여 장 떨어진 바위에 부딪혔다. 파악! 불꽃이 피어오르면서 바위의 일부가 부서져 내렸다. "내게 이 무공을 가르쳐 준 여인이 있었지. 그녀는... 휴우!" 추운행은 다그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굽니까? 조금 전 귀녀가 선배님의 그... 분이신가요?" "모르겠네. 난 확신할 수 없네. 그녀를 만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네." "두 분은 연인이셨나요?" "그랬었지." "다정하셨겠군요. 그래서 독문의 무공마저 선배님께 일러주셨군요." "어쩌면 그랬을 것이네." "그리고 어찌 되었습니까? 그분과는 헤어졌습니까?" 황무는 또다시 쓰게 웃으며 추운행을 쳐다보았다. "자넨 귀녀의 정체를 묻고 싶으면서도 애써 화제를 돌리고 있군. 내 입장을 생각해 주는 것인가?" 추운행에겐 확실히 그런 의도가 있었다. 황무는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 기껍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와는 헤어졌지. 그리고 귀녀가 내 옛 여인인지 확신할 수는 없네." 그의 말이 무척 쓸쓸했으므로 추운행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물었다. "오색채화강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익혔습니까?" "오직 한 명이 익혔을 뿐이지." "그렇다면... 역시 귀녀는! 선배님은 옛 여인을 만난 것이 얼마나 오래 전인지요?" "거의 십 년이 넘었군." "아직도 생각나십니까?" 황무의 눈빛이 강해졌다. 놀랍게도 그것은 그리움이 아닌 살기였다. 추운행은 황무의 눈빛이 갑자기 변하자 흠칫하여 뒤로 물러섰다. "생각나지, 생각나고말고! 한시도 잊지 않는다네..." 황무의 왼쪽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 눈 아래의 희미한 검흔을 보면서 추운행은 뭔가를 느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헤어지는 이면에는 분명 말못할 이유가 있는 법이 아니던가? 황무가 말했다. "어쨌든 우린 천화궁으로 가야 하네. 가면 뭔가를 알게 될 것이네. 아, 마침 저들이 오는군." 돌아보니 물기를 머금은 나뭇가지 사이로 대지와 창허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맞이하러 걸어가면서 황무는 나직하게 말했다. "천화궁에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놀라지 말게." 추운행은 의아했다. 황무가 알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그는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자신에게 지난날의 연인에 대한 것까지 설명해 준 것인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설명이라...! 추운행은 황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저 사람의 의도는 무엇일까? 단순히 만박을 찾는 일만이 그의 목적이 아님을 추운행은 느낄 수 있었다. 단아하면서도 조화를 이룬 정원(庭園)과 건물들. 계절을 잊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들. 그 하나하나에는 여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섬세한 감각과 미감(美感)이 배어 있었다. 천화궁은 여인들만의 문파인 것이다. 천화궁의 총관 장미부인(薔薇婦人)의 얼굴은 딱딱했다. 그녀는 사십을 약간 넘겼지만 얼굴에 주름은 거의 없었다. 양미간 사이에 성격이 급한 사람이 가지는 세로 선이 두어 줄 있을 뿐이었다. 황무 등이 천화궁주인 선향과의 면담을 요청한 후 한참이 지나도록 장미부인은 얼굴만 굳히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완고한 중년여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유가 없다면 불가하오. 당신들은 본 궁에 머물 수도 없으니 속히 돌아가 주시오." 이런 대답은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때문에 황무의 표정은 침착했다. "난 돌아가지 않겠소. 궁주를 불러 주시오." 황무는 오른쪽 소매에서 한 줌의 천을 꺼내 장미부인에게 내밀었다. 장미부인의 안색이 대변했다. "이... 이 천은!" "과연 알아보시는구려." 황무가 말했다. 추운행은 황무가 내민 천이 뭔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간밤에 귀녀가 입고 있던 옷 조각! 그리고 인형의 몸에 입혀져 있었던 옷 조각이었다. "화화단(華嬅緞)은 오직 천화궁에서만 만들어지며, 그것을 입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한 명뿐이지. 그렇지 않소?" 분명 그러했다. 해서 장미부인이 벼락을 맞은 듯 놀랐던 것이 아닌가? "이 천을 어디서 얻었소?" "누군가 내게 주었소. 간밤에!"


장미부인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어쩐지 황무의 말투 속에 불결한 생각이 끼여들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함을 지르듯 다시 물었다. "누가 주었냐고 물었소!" "당연히 이 옷을 입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지." 장미부인 주위에 모여 있던 많은 여인들의 입에서 약한 술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장미부인은 탁자를 힘껏 내리쳐 그 술렁거림을 가라앉힌 뒤 말했다. "감히... 당신은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소?" "당연하오. 이젠 궁주를 만날 이유가 생긴 것이오?" "만일 궁주를 만나지 못하게 한다면?" "천은 많이 있소. 모두 이것처럼 갈가리 찢어진 것들이지. 이 천을 세상에 보여 준다면 어찌 생각할 것 같소?" 여인이 걸친 옷의 찢어진 조각이 다른 사내의 수중에 있는 것이 보여진다면 세인들이 무슨 상상을 하겠는가? 설명하지 않아도 뻔했다. 장미부인의 손이 여러 번 쥐여졌다 펴졌다를 반복했다. 이윽고 그녀는 손을 풀고 말았다. "사흘 후! 당신들은 궁주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발을 구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어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서는 장미부인. 그녀가 앉았던 의자가 부스스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황무는 고개를 흔들었다. "송하림보다는 천화궁이 훨씬 무섭지. 총관의 무공을 보면 알 수 있겠군." 추운행은 그 말을 들으며 내심 생각했다. 그렇더라도 궁주인 선향은 장미부인보다 훨씬 강할 것이라고. 그렇다면 춘추서원은 어떤가? 총관 황무의 능력이 이렇듯 대단하다면 과연 그곳이 천화궁보다 훨씬 무섭단 말인가? * * * "이곳이에요." 난혜는 눈을 빛내며 황무에게 말했다. 시녀인 난혜는 윗사람들끼리 오고 갔던 험한 분위기를 전혀 알지 못했다. 때문에 손님들을 숙소로 안내하는 자신의 일에만 충실했다. 별다른 장식이 없으면서도 단아한 인상을 주는 방! 황무는 이런 방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어지러운 장식물을 사용해 방을 화려하게 만드는 일은 사실 그다지 어렵지가 않다. 간단하면서도 단정하게 방을 꾸미는 일이 진정 어렵고 칭찬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황무였다. 문득 그는 물러가려는 난혜를 불렀다. "수고했구나. 이건 수고비란다." 은자 하나를 건네 주자 난혜의 볼이 빨갛게 변했다.


그녀는 붉게 변한 볼을 잘래잘래 흔들었다. "그런 것은 받지 못해요. 만일 총관께서 아시게 되면 전... 혼이 난답니다." "이것은 내 것이며, 내 것을 내가 직접 네게 주는데 왜 총관이 화를 낸단 말이냐?" 난혜는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욕심이 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열흘에 한 번씩 들르는 방물장수가 보여 줬던 노리개를 난혜는 눈독들여 왔었다. 그런데 황무가 건네 주는 돈이라면 충분히 노리개를 살 수 있지 않겠는가? 난혜의 눈 속에 숨어 있는 갈등을 읽은 황무가 빙긋이 웃었다. "넌 내기를 좋아하느냐?" "...?" "난 무척 좋아하지. 너는 이 은자를 걸고 나와 내기하지 않겠느냐?" 그제서야 황무의 말뜻을 이해한 난혜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황무는 눈을 끔벅이더니 말했다. "어제는 보름이었다. 궁주께서는 분명 화원에서 달을 보시기를 좋아하실 것이다. 난 궁주께서 간밤에 달을 보며 화원을 거닐었다는 쪽에 걸겠다." 난혜의 볼이 사과빛으로 발갛게 피어났다. 아까와 같은 당황이 아니라 기쁨의 빛이었다. "호호, 그것이 내기라면 어르신께서 지셨어요. 궁주께선 간밤에 먼 곳으로 출타했다가 돌아오셨어요. 그분은 무척 힘든 일을 하시고 오셨기 때문에 지금은 편히 쉬셔야 하는 거라구요." 그녀의 얼굴에 득의한 표정이 당당히 떠올랐다. 이제 은자는 그녀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황무는 빙긋 웃으며 은자를 건네 주었고, 난혜는 당당하게 그것을 받아 갔다. "넌 내기에서 이긴 대가로 이것을 받았으니 이제 누구도 간섭할 수 없겠구나. 궁주께서 밤마다 외출하심을 몰랐던 것이 나의 패인이었다." "호호, 그렇진 않아요, 어르신. 다만 보름날 밤에만 외출하신답니다. 궁주께서는 예전부터 보름달을 무척 좋아하셨다는데, 아마 그 때문이시겠지요. 호호호..." 난혜는 까르르 웃으며 객방에서 물러갔다. 그녀의 마음에는 기쁨이 넘쳐 흘렀다. 원하는 정보를 손에 넣은 황무의 마음도 밝아야 정상이리라. -어쩌면 궁주는 보름달을 무척 좋아하시기 때문일지도... 황무 자신도 보름달을 좋아했다. 원만한 마음처럼 둥그런 달을 보면서 젊은 시절 그는 달콤한 사랑에 젖었었다. 그 사랑은 보름달 아래에서 시작되어 보름달 아래에서 깨어졌다. 이젠 매우 오래된 추억인지라 잊혀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추억이란 이렇게 질기구나. 잊을 만하면 또다시 떠오르는구나.' 황무는 답답한 가슴을 진정시키고자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추운행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말을 할까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일행은 넷이었지만 대지와 창허는 요사이 거의 말이 없었다. 만유의 일이 있은 후, 오성련에 대해 약간의 의아한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문파! 강호의 성지로 추앙받던 오성련의 내부에 남모르는 음모가 스며들었음을 알고 난 후 그들은 무척 많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의견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자신들과 관련있는 일인 만큼 신중을 기하는 까닭. 때문에 대부분의 대화를 황무와 추운행이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지와 창허도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있으리라. 마침내 추운행이 물었다. "황 선배님의 옛 애인은... 혹 선향 궁주입니까?" 황무는 가만히 있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추운행은 알 수 있었다. 과연 선향은 황무의 옛사랑이었던 것이다. 황무는 대답 대신 말꼬리를 돌렸다. "난 보름달을 사랑했었네. 모두 그녀 때문이었지. 그녀가 달을 사랑하여 나도 사랑했다네." "시녀의 말을 들으니 선향 궁주는 아직도 보름달을 좋아하는 듯합니다." 황무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걸세. 그녀는 결코 더 이상 보름달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네." 황무의 말은 작았지만 확신에 차 있었으므로 추운행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리 확신하십니까?" "지금은 나도 보름달을 증오하게 된 까닭과 같지." 황무는 천천히 왼손을 들어 자신의 수염을 만졌다. 그 수염 아래에는 많은 상처가 있었다. 그리고 왼쪽 눈 아래에 난 검상! "이것은 내가 사용하던 검에 의해 생긴 것일세. 난 그 검을 다른 사람이 함부로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 추운행은 알 수 있었다. 그 다른 사람에 사랑하는 사람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무리 사랑했던 사람이라도 검으로 자신의 눈을 그어 버린다면 사랑이 증오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그날도 보름이었지. 그녀가 내게 검을 들이댔던 날도..." 추운행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굳세 보이던 황무의 눈빛이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젖어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흘이 지났다. 그간 천화궁에서는 아무도 황무 등을 찾아오지 않았다.


약속된 사흘째 날 아침, 장미부인이 보낸 전갈 한 장이 난혜의 손에 들려 황무에게 전달되었다. <두 시진 후, 취옥전(聚玉殿)에서.> 짧은 글이었다. 황무는 쓰게 웃으며 종이를 탁자 위에 놓았다. "총관께 알겠다고 전하거라." 난혜가 물러가고 나자 황무는 곧 몸을 일으켜 동경(銅鏡)을 향해 걸어갔다. 거울을 보는 황무에게 추운행이 물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라 얼굴을 가다듬는 것입니까? 혹 그녀가 알아보지 못할까 봐 두려우십니까?" 황무는 눈을 크게 뜨고 추운행을 돌아봤다. "그 반대라네. 난 그녀가 날 알아볼까 봐 조심하는 것일세." 추운행은 잠시 생각하곤 이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황무가 젊은 시절부터 수염을 많이 길렀을 리 없었다. 자신이라도 배반한 옛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를 바랄 것이다. 추운행은 안으로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전 선배님이 왜 난혜를 통해 보름날 밤 궁주의 행적을 알아 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녀를 의심하시는 거지요?" 황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운행은 계속 말을 이어야만 했다. "드디어 천화성모(天華聖母)란 여기인에 대해 생각해 냈습니다. 그녀는 천화궁을 세웠던 분이 분명합니다. 또 오십 년 전, 삼기(三奇) 중의 한 분이셨습니다. 오래 전에 스치듯 들었던 내용인지라 생각해 내는 것이 늦었습니다." 황무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자넨 또 무엇을 알고 있나?" "황 선배께서 선향 궁주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녀가 귀녀라 생각하시는 것이지요?" "분명히 그런 의심을 가지고 있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몇 가지의 의문이 생기는구먼." "의문이라면...?" 황무는 겉옷을 들어 위에 걸쳤다. "귀녀와 선향이 동일인라면 몇 가지 이상한 점이 생기네. 첫째, 왜 아직까지 나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느냐는 것일세. 그날 귀녀는 분명 나를 알아보았거든." 듣고 보니 그랬다. 만일 귀녀와 선향이 동일인이라면 선향도 황무의 정체를 알고 있어야만 했다. 옛 애인, 그것도 자신이 배신했던 남자가 면담을 신청한다면 분명 좋은 뜻이 아니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왜 선향은 여태껏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던 것일까? 추운행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무는 다시 말했다. "둘째, 선향은 정숙한 여인이지 결코 광인이 아니었네. 귀녀와 같은 행동을 보일 리가 없단 말이지." 추운행은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귀녀와 선향은 다른 사람일까요?" "그렇게 생각하기엔 또 이르다네. 우선 귀녀의 출현 시기와 선향의 실종 시기는 모두 보름으로 일치하네. 오색채화강(五色彩花 )은 선향의 독문무공임에도 귀녀가 능숙히 구사했네. 또 나를 알아보았지. 이 모든 일이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네." 추운행은 머리가 아파 왔다. 그가 손을 이마에 대고 있을 때, 황무는 옷을 모두 걸치고 막 문을 나서고 있었다. 황무가 추운행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모든 의문은 선향을 만나면 풀릴 테니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머리가 덜 아플 것이네." 추운행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 * * "자리에 앉으시지요, 여러분. 제 사정으로 사흘을 낭비하시게 만들어 죄송스럽습니다." 추운행은 약간 힘이 빠졌다. 선향의 목소리가 귀녀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나긋한 손동작과 눈빛, 보름날 밤의 귀녀와 닮은 곳은 전혀 없었다. "그쪽으로 앉으시지요." 선향이 한 번 더 예의를 차렸다. 그 말에 추운행이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황무 등은 벌써 앉아 있었다. 황무의 안색은 매우 평온해 보여 마음속에 격동을 간직한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가 말했다. "걸어오며 정원을 보았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보름달이 뜬다면 더욱 어울리겠지요?" 뼈가 있는 말이었지만 선향의 안색은 추호의 변화도 없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요즘 제가 지병이 생겨 보름달을 잘 보지 못한답니다." 그녀가 침울한 안색으로 말했다. 누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강호 오성 중의 한 명이며 여중제일고수로 생각하겠는가? 갑자기 선향의 얼굴이 밝아졌다. "전 보름달을 무척 좋아해요. 황 대협도 그러신가요?" "물론입니다. 제 옛 여인도 달을 좋아했지요." "그러셨군요. 호호, 전 여태껏 한 번도 사랑의 낭만을 느껴 본 적이 없답니다. 대협이 부럽군요." 그렇게 말하는 선향의 눈빛은 매우 맑았다. 추운행은 기이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눈과 목소리는 인간의 마음을 나타내 주는 가장 직접적인 통로가 아닌가? 저런 목소리와 눈빛으로 거짓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인가? 선향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아니, 거짓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선향이 자신의 옛 여인이라 말한 황무가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황무 역시 그 점을 느꼈는지 눈에 기광(奇光)을 번뜩였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사랑은 그다지 좋지 않을 때도 많답니다. 가끔 배신을 당하기도 하며... 어쩌면 오랜 세월 고통받을 수도 있답니다." 이 말은 무척 통렬한 것이었지만, 여전히 선향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을 뿐이다. "저도 그런 말은 들었어요. 죄송해요, 황 대협. 제가 가슴의 상처를 건드렸나 보군요." 그녀는 황무가 예전에 알던 여인이 확실할까? 잠시 후 맑은 물로 달여 낸 철관음이 날라져 왔다. 그윽한 다향(茶香)을 음미한 후 선향은 비로소 물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란 것은...?" 붉게 물들인 선향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달콤한 내음이 방안에 가득 찼다. 그녀는 벌써 서른을 넘겼지만 전혀 나이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이는 시간과 더불어 가만히 있어도 먹는 것. 하지만 세월이 선향이란 여인만은 비켜 간 듯했다. 황무는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본 원 원주의 행방을 찾고 있습니다." 선향은 생각에 잠긴 듯 잠깐 머리를 숙였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선향이 대답했다. "제가 그분을 모셔 온 것은 사실이에요. 분명 기억해요." 황무의 눈이 빛났다. 어려운 일이란 항상 이러하다. 막막해 보이다가도 실타래의 끝만 잡으면 줄줄 풀려 나가는 것이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선향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전 몰라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황무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다시 물었다. "분명 그분을 이리로 모셔 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궁주께서는 모르신다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황무가 따지듯 말하자 옆에 서 있던 장미부인이 버럭 고함지르며 말했다. "만박 역시 생각을 하는 사람이오. 오고 싶을 때 와서,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니...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장미부인의 목소리는 화난 사람처럼 크고 높았다. 하지만 정말로 화가 난 황무의 목소리는 오히려 낮았다. 화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황무는 오히려 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원주는 언제 천화궁을 떠나셨습니까?" 선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 년 정도 전... 그러니까... 작년 이월 보름이 막 되기 전이었지요."


장미부인이 얼른 덧붙였다. "십삼 일이었어요. 만박 원주는 분명 그날 본 궁을 떠났어요."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장미부인." 황무의 말에 약간 고개 숙여 보이는 장미부인이었다. 황무는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앉아 있었다. 이윽고 몸을 일으키며 그는 말했다. "참... 혹시 궁주께선 만박 원주의 장기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저는 몰라요." "만박 원주에게는 인형을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너무나 정교해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인형을요." "그게... 어쨌단 말이죠?" 선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하나, 황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보이곤 문을 나섰다. 나서기 전 그가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돌리더니 장미부인을 향해 물었다. "장미부인, 혹 궁주께선 인형을 좋아하시지 않으십니까?" "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아녜요. 전 무척 좋아해요. 작은 인형은 정말 사랑스럽다고 여긴답니다." 선향이 말하자 장미부인의 눈이 약간 흔들렸다. 황무는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문을 나섰다. 황무 일행이 나간 문을 장미부인이 닫고 났을 때 장미부인의 눈도 황무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10. 만박을 찾다 <이제 세상은 알게 되겠지. 자네에 관한 진실을. 사람들은 자신의 추리를 훨씬 쉽게 믿으니 말일세.> 만박의 말 중에서... 천화궁을 떠나온 지 반 시진 후, 황무 등은 천화궁에서 십 리 떨어진 객잔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두 병의 술과 다섯 접시의 요리를 앞에 놓은 채 황무가 말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감히 천화궁에 숨어들어 만박 원주를 납치할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겁니다." 당연한 대답이었다. 추운행은 답을 한 후 홀연 느끼는 바가 있어 되물었다. "천화궁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여기십니까?" 황무는 대답 대신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씩 웃었다. "그 귀녀와 궁주 말일세, 무척 닮았지?" "그렇긴 합니다만, 같은 사람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전 두 여인의 눈빛을 모두 보았습니다. 둘은 분명 달랐습니다." 눈빛을 보았다는 의미는 마음을 보았다는 것이며, 눈빛이 다르다는 것은 마음이 다르다는 의미였다. 황무는 추운행의 말뜻을 알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만일 원주가 천화궁 안에서 납치되었다면? 보름마다 나타나는 그 귀녀가 원주를 납치했다면?" "그건... 글쎄요. 귀녀의 무공이 아무리 높아도 천화궁 모르게 일을 추진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설사 천화궁에서 알았다 치더라도 귀녀를 막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어떨까? 가령 천화궁의 제자들은 감히 귀녀와 싸울 수가 없었다면 말이야." "여전히 귀녀와 선향 궁주를 동일인으로 생각하시는군요." 추운행은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의 눈빛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선향 궁주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 그녀가 귀녀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황무는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추운행을 쳐다보던 그는 단숨에 두 잔의 술을 들이켰다. "그녀는 사랑을 한 적이 없다 말했지. 하지만 분명 그녀는 나의 옛 여인이라네." 이 말에 추운행은 할말을 잃었다. 황무가 다시 한 잔을 더 마신 뒤 말했다. "그녀의 손을 보았나?" "...?" "사람이 바꾸기 어려운 부분은 눈 이외에도 많이 있네. 그 중에서 손은 가장 바꾸기 어려운 부분 중 하나지. 난 귀녀의 손을 보았고 궁주의 손도 보았네. 둘은 똑같았다네." 추운행은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은 손까지 볼 생각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는 두 여인의 눈을 보았을 뿐이며, 그래서 그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바꾸기 어려운 것은 눈빛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두 여인의 마음은 분명히 달랐으며 마음은 바꾸기가 아예 불가능합니다." 황무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자네는 혹 심아진이란 여인에 대해 들어 보았나?"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심아진은 변장이 뛰어났지. 매우 뛰어났다네." "어느 정도였습니까?" "그녀가 일단 어떤 사람으로 변하면 남은 고사하고 스스로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네." 이 말은 듣기에 매우 이상했다. 그렇지만 추운행은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너무 심한 훈련과 심적 타격을 경험했네. 덕분에 그녀의 정신은 꺾여지고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되기 시작했지. 말하자면 본래의 그녀와 다른 제이, 제삼의 인격이 마음속에서 자라났다네." 강호는 넓고, 기이한 일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추운행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하나의 몸에 전혀 다른 성격과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 심아진이란 여인은 그럼..." "그렇네. 다중 인격이었지." 추운행은 비로소 황무가 옛일을 끄집어 낸 의도를 알아차렸다. "황 선배의 말뜻은... 천화궁주 역시...!" 황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는 확신은 없었지만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일 뿐이지. 어쩌면 기억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니까." 황무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실내를 이리저리 거닐었다. 다시 추운행을 보는 그의 안색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만유의 정신을 기억하나? 그는 의지를 잃고 자포자기한 상태로 살만 찌우고 있었네." 당연히 추운행은 기억했다. 황무는 달빛을 만져 보려는 듯 왼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를 서로 비볐다. 하지만 달빛이 만져질 리가 없지 않는가? 부드러운 흰빛은 마치 지난날의 추억처럼 소리없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가 버렸다. "어쩌면 그녀도 마찬가지일지 몰라. 숲속의 귀녀는 분명 '성주'라는 이름을 말했었다네." 추운행은 분명히 그 소리를 기억했다. -날 죽여 줘. 성주가 나를 죽이기 전에! 정말 귀녀와 선향은 동일인일까? 추운행은 고개를 흔들더니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결국 한 가지 방법밖에 없군요. 귀녀(鬼女)를 다시 만나는 방법 외에는." "맞아! 그러자면 우리에겐 한 가지 길밖에 없게 되지." 추운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동시에 말했다. "다음 보름을 기다리는 것." * * * 달은 기울었다 사라지는 듯하더니 다시 차 올라 어느덧 보름이 되었다. 이월의 보름과 삼월의 보름은 많이 틀렸다. 밤이 돼도 춥지 않았으며 시원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해는 서산에 뉘엿뉘엿했다. 하지만 천화궁을 쳐다보는 네 사람의 눈길은 하나같이 초롱초롱했다. 순간 천화궁의 정문이 열리면서, 안력을 집중해야만 볼 수 있을 정도의 빠르기로 두 개의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궁주인 선향과 총관 장미부인입니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추운행의 말에 황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대답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 답을 알지도 못했다.


황무는 말없이 몸을 날려 장미부인의 뒤를 따랐고, 추운행 또한 경신술을 전개했다. 네 명은 나란히 장미부인의 뒤를 따랐다. "왜 이곳으로 나를 데려왔나요, 총관?" 선향이 의아한 눈으로 장미부인에게 물었다. "보름만 되면 날 이곳으로 데려오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군요." 장미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궁주님의 병환 때문입니다. 보름만 되면 무척 아파 정신을 잃으시니... 어서 동굴로 드십시오. 이곳에 궁주님의 고통을 덜어 드리기 위한 모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선향은 고개를 저으며 장미부인을 따라 동굴로 들어갔다. 둘이 사라진 동굴은 매우 깊은 듯했다. 그리고 잠시 후, 네 사람이 선향 등이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장소에 나타났다. 유령처럼 나타난 네 사람은 바로 황무 일행이었다. 황무가 하늘을 한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곧 보름달이 떠오르겠군. 과연 내 예상은 맞을 것인가?" 그는 눈을 내려 어둡기 그지없는 동굴을 쳐다보았다. 예상이 맞기를 바래야 할까, 아니면 틀리기를 바래야 할까? "혹 그들이 다른 방향으로 들어간 것은 아닌지...?" 지금까지 대여섯 번 갈림길이 나타났고, 그때마다 황무가 유심히 바닥을 살펴본 뒤 결정을 내렸다. 모든 사람들이 황무의 결정을 따르고는 있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자 대지가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지만 황무는 확신이 있는 듯 흔들림없이 말했다. "틀림없소. 그녀들은 이 길로 걸어갔소." 그리곤 잠시 후 이런 말을 덧붙였다. "장미부인은 아까 보아서 알 듯이 무척 서두르고 있었소. 흔적을 지울 여유는 없었을 거요. 이 길이 틀림없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희미한 빛이 스며나왔다. 일동은 즉시 말을 멈추고 앞을 주시했다. 구불구불 굽이진 동굴의 통로! 그곳의 빛은 분명 사람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동굴을 거처로 삼는 사람은 대개 동굴의 막다른 곳을 넓혀서 석실(石室)을 만든다. 이 동굴에도 그러한 곳이 존재했다. 빛은 바로 그 석실에서 나왔던 것이다. 희미한 빛을 발하는 수정등잔. 그 속에 어떤 심지가 들었으며 어떤 기름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어두운 동굴 속에 존재하는 미광(微光)은 밝음에 익숙한 인간의 마음에 안정을 주었다. 그 빛을 받으며 장미부인이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는 수심(愁心)이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천장 한쪽 구석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돌연 그 구멍으로부터 사람의 몸뚱이 하나가 툭 떨어져 내렸다. 별다른 무게 없이 자그마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쌓이는 시체는 자세히 보니 인형이었다. 밀랍인형! 오직 만박만이 만들 수 있다는 정교한 인형이었다. 바닥은 밀랍인형들로 가득했다. 만유도 있었고 취개도 떨어져 있었다. 뇌불과 염도의 모습을 보자 숨어서 지켜보는 대지와 창허의 얼굴이 납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화려한 화화단으로 단장한 선향 또한 여러 개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석실 안에 널브러진 오성의 인형들은 아무런 불평도 없이 구석구석 처박혀 있었으며 오직 한 순간만을 기다렸다. 귀녀에 의해 피를 뒤집어쓰고 난 후 갈가리 찢겨질 날만을. 장미부인은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돌연 말했다. "그대에겐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이렇게 인형을 찢는 방법 외에는 궁주님의 광기(狂氣)를 줄일 방도가 없어요." 그러자 천장이 대답했다. "난 괜찮소. 가끔 인형을 만드는 것 외에는 불편한 일이 없으니. 오히려 여유를 갖게 되어 지극히 만족하고 있다오." 그 음성은 추운행으로서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알고 있는, 특히 황무는 매우 잘 아는 사람의 음성이었다. 틀림없이 만박이었다. 놀람은 왕왕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어 실수를 조장한다. 황무는 아주 약간만 놀랐으며 그 바람에 만들어진 소리 역시 매우 작았지만, 장미부인이 낌새를 알아차리기엔 충분했다. "누가 숨어 있느냐?" 그녀의 손에서 붉은 강기가 쏘아 나갔다. 그 장력을 맞이하는 사람의 입에서도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강홍화(强紅花)로구나! 오색채화강을 익혔소?" 석실 구석에서 터져 나온 외침은 추운행의 것이 분명했다. 소리와 동시에 쏘아진 장력의 빛이 우윳빛이었기 때문이다. 추운행의 효일장! 그는 오색채화강에 한 번 패했던 적이 있지 않는가? 동일한 무공을 다시 대하자 젊은 피가 끓어올랐던 것이다. 파파팡! 강홍화가 효일장과 부딪친 충격으로 옆으로 흩어졌다. 추운행은 진기가 갑자기 성질을 바꾸어 회전하며 자신을 덮쳐 올까 봐 조심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색채화강은 오직 궁주인 선향만 익혔으며, 제자들은 그 중의 한 갈래만을 수련할 따름이었으므로. 자신감을 얻은 추운행이 한소리 호통을 지르며 오른손을 한바퀴 돌렸다가 앞으로 내밀었다. 당황한 얼굴의 장미부인은 한 번 더 강홍화를 내밀었지만, 퍼펑! 두 장력은 맞부딪쳐 소모되고 말았다. 그 순간, 추운행은 왼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는데, 곧 놀란 얼굴로 손을 거두었다. 장미부인이 급살을 맞은 사람처럼 갑작스럽게 쓰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르르무너지는 장미부인의 몸 뒤로 황무의 수염투성이 얼굴이 나타났다. "자네의 싸움에 끼여들어 미안하네.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은 매우 급하다네." 추운행은 황무의 마음을 이해했다. 좀 전 천장에서 들렸던 목소리! 그것을 듣고 황무의 몸이 떨렸지 않았는가? 바닥에 누운 장미부인이 힘겹게 말했다. "오... 오늘은 보름이오. 곧... 궁주의 광기가 발작할 것이니... 그대들은 서둘러 이곳을 나가시오. 어... 어서!" 하지만 황무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천장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천장을 향해 물을 따름이었다. "원주, 그곳에 계시오?" 황무는 '계시오'란 말을 할 때는 부득이 바닥에 붙을 정도로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그 말과 동시에 황무의 머리가 처음 위치해 있던 곳을 푸른색의 강기가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콰광! 반대편의 벽에 닿아 폭발을 일으키는 푸른색의 강기를 보라! 회청화(回靑花)! 발출된 뒤 마음대로 휘어지는 성질을 지닌 오색채화강의 다섯 꽃 중 하나가 아닌가? 분명 그 강기는 석실의 입구에서 날아왔다. 그리고 숙여졌던 황무의 허리는 용수철처럼 금세 되튕겨 올랐다. 그 반동으로 황무의 몸이 위로 떠올랐는데, 그 이유는 곧 드러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무가 서 있던 땅바닥이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꽈르르-! 언뜻 검은빛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위로 떠오른 황무의 입에서 쩌렁한 외침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 "산흑화(散黑花)! 귀녀가 나타났다-!" 그 말에 답하기라도 하듯 귀녀는 정말로 석실 입구에 나타났다. 꾸불꾸불한 동굴의 길을 통해 먼저 회청화를 날려보낸 뒤, 다시 산흑화로 황무를 공격하는 무공과 그 공격의 악랄함. 귀녀의 모습은 결코 선향 같지가 않았다. 무공은 선향보다 훨씬 강했으며 마음은 몇십 배 더 악독했다.


나타나자마자 잠시의 쉴 틈도 없이 그녀의 손에서 쾌백화(快白花)와 강홍화(强紅花)가 동시에 뻗어 나왔다. 다행히 대지와 창허는 미리 준비를 갖춘 상태! 그들은 가진 바 최고의 절학을 구사하면서 귀녀가 뻗친 강기를 막으려했다. 이 순간, 위로 떠올랐던 황무의 몸은 석실의 천장에 거의 닿아 가고 있었다. 천장이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꽈르르-릉! 대지가 전개한 신령백보신권과 창허의 면장이 귀녀가 뻗어 낸 강기와 어울리자 무수한 회오리가 석실을 가득 메웠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추운행의 효일장(曉日掌)은 귀녀의 등뒤 일곱 군데를 동시에 노렸다. "오호호, 너희가 감히-!" 귀녀의 몸은 바람개비처럼 제자리에서 맴돌며 오색의 꽃들을 사방으로 날려보냈다. 면장을 향해서 쾌속한 쾌백화(快白花)가, 백보신권을 향해서 강한 강홍화(强紅花)가, 그리고 효일장을 향해서는 부드러운 유황화(柔黃花)가 동시에 전개되는 모습! 이런 대응과 동작은 실로 누가 보아도 믿기 힘들 정도의 무공이었다. 광기가 그녀의 잠력을 극한으로 이끌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황무는 막 천장에 닿으려던 몸을 번개처럼 뒤집고 있었다. 머리가 땅을 향하니 발로 천장을 차내는 형상이 된 것이다. 그 동안의 변화는 얼마나 빠른 것이었겠나? 황무의 몸이 실로 빛살과 같은 속도로 되튕겨 나왔다. 그런 속도를 얻기 위해 천장을 찬 발의 힘은 형용하지 않아도 그 강도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돌덩이가 부서질 수 있는 엄청난 충격! 천장이 부르르 떨렸다. 그 충격의 힘과 중력의 힘을 더하며 황무는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니, 이런 경우는 쏘아졌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변화는 눈 한 번 깜박일 시간조차 허용치 않을 정도로 짧았건만 장내의 움직임에는 벌써 새로운 양상이 일어났다. 귀녀가 세 명의 고수를 거의 동시에 격패해 버렸던 것이다. 퍼퍼펑-! "호호호-! 물러낫!" 대지와 창허, 그리고 추운행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바로 그 순간, 그들 사이에서 일어난 경력의 부딪침으로 발생된 회오리가 막 공기를 휘감으려던 바로 그 순간! 황무의 입에서 쩌렁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옥교(玉嬌)! 나를 보아라-!" 꽈드드드-등! 세 고수와 귀녀의 충돌로 일어난 굉음은 그제서야 석실을 휘감았고, 뒤로 물러나던 세 고수의 눈이 찢어져라 크게 떠졌다.


쩌렁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석실 천장으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황무! 그의 참마도가 지금 왼손에 쥐여져 있지 않는가? 왼손에서 전해져 오는 도의 손잡이가 주는 묵직함! 비록 젊은 시절의 애병은 아니었지만 황무는 만족스러웠다. 그는 실로 오랜 기간을 참았으며, 실로 오랜 기간을 오른손만 사용해 왔었기 때문이다. 위기의 순간이 닥칠 때마다 본능적으로 꿈틀대는 왼손을 막기 위해 얼마나 큰 의지의 힘이 필요했던가? 하지만 이젠 때가 되었으며 왼손을 쓰더라도 상관이 없다고 황무는 생각했다. 참마도를 든 그의 왼손이 움직이는 로수는 분명 참마도법과는 한참의 거리가 있었다. 매우 기이했고 또한 매우 빨라 추운행 등은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귀녀만이 황무의 도가 일으키는 변화를 어렴풋이 보았을 뿐이었다. 황무는 지금까지의 그와 전혀 달랐고, 전개하는 무공 또한 같지 않았다. 훨씬 무서우며 대단했다. 귀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옥교! 온옥교(溫玉嬌)! 이 이름이야말로 선향의 본명이었으며, 귀녀의 본명이었다. 과연 누가 이 이름을 안단 말인가? 귀녀는 광기 속에서 황무의 본명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녀의 양손이 거의 동시에 위로 들려져 오색의 꽃들을 토해 냈다. "당신이 나타났군요-!" 그녀의 음성은 처절했으며 오색채화강의 발출은 굉렬했다. 그리고 비틀비틀 물러나면서 그 싸움을 지켜보는 추운행 등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귀녀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쩍! 쩌적-! 황무가 방향을 바꾸면서 발로 찍었던 석실의 천장은 그제서야 금이 가기 시작했다. 번쩍! 너무 강한 힘이 부딪친 탓일까? 일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한 줄기 빛 속으로 흡수되는 착각이 일어났다. 그러나 뒤이어 고막을 찢어 버릴 듯한 소리가 일어나 석실을 무너뜨릴 듯 흔들기 시작했다. 콰콰콰- 꽈드등! 칼날 같은 경기를 담은 회오리바람이 귀녀와 황무 사이에서 일어나 사방으로 마구 퍼져 나갔다. 추운행 등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뒤로 정신없이 물러섰다. 단 한 순간의 부딪침으로 보이는 황무와 귀녀의 대결! 그러나 사실 수십 번이 넘는 초식들이 교환되었으며 적어도 십여 번 이상의 부딪침이 있었던 것이다. "캬악!" "우웃!" 큰 외침과 더불어 두 사람의 몸이 뒤로 떨어졌다. 뒤로 멀어지는 속도(速度)조차 엄청나 발의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오랜 싸움처럼 보였으나 시간은 매우 짧았다. 다만 둘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묘사에 시간이 걸렸을 뿐!


황무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변했고 귀녀의 얼굴에는 화색(和色)이 돌았다. 그렇지만 먼저 힘을 잃고 무릎을 꿇은 것은 귀녀였다. 그녀는 이상한 눈빛으로 황무를 가리키며 뭐라 말하려 했으나 끝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황무 역시 힘이 빠져 무릎을 꿇었으며 그제서야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르르릉! 무너지는 돌 더미 속에 한 사람이 있었다. 낡은 학창의를 걸친 유생 차림의 노인! 그는 천장 위에 있다가 천장이 부서지는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한눈에 그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음을 간파한 추운행이 급히 몸을 움직여 그를 안았다. 돌덩이와 더불어 밀랍인형의 제조에 쓰이는 여러 가지 재료들도 같이 떨어졌다. 추운행은 노인에게 급히 물었다. "누구십니까, 당신은?" 묻긴 했지만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추운행은 단번에 노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모두 노인이 누군지 알았다. 그는 만박(萬博)이었다. 다섯 구슬 중에서 두 번째 붉은 구슬이 깨어졌다. 그 속에서 나온 종이를 펼치자 이번에도 일곱 글자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오색채화강 요해.> 성주는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런 것이지. 십 년이 지났으니 또다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게 되는 것이지." * * * 추운행은 실내를 오락가락하며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를 보면서 황무와 만박 등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대지와 창허는 비록 앉아 있긴 했지만 끊임없이 황무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추운행이 몸을 돌려 황무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이런 질문은 사실 매우 우스웠다. 그는 당연히 황무였으며 춘추서원의 총관이었다. 지난 십 년간 계속 그래 왔다. 이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으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추운행의 질문에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만박조차도 한숨만 길게 내쉴 뿐이었다. 황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복잡한 빛으로 혼절해 있는 선향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전신은 검상(劍傷)으로 빽빽했으며 그것은 모두 황무 자신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약을 발랐으니 흉터는 남지 않을 것이다. 황무는 천천히 선향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쓰다듬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은 변했지만 따스한 손의 감촉만은 그대로였다. 공연히 눈물이 흘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추운행은 가슴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감을 느꼈다. 그는 마침내 황무가 누군지를 알아 냈던 것이다. 단지 추측에 불과했지만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확신은 너무나 무서운 것인지라 추운행 자신도 그것을 믿기가 두려웠다. * * * -서찰을 어떻게 보게 되셨습니까, 대지 선사와 창허 도장? 그 서찰은 원래 총관인 황무 대협이 봐야 하는 것이었을 텐데요. -그렇소. 하지만 그는 서원을 떠나 있었고, 서찰 안에 적힌 내용이 너무 다급하여 최오는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황무 대협은 왜 바빴습니까? -흑령방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흑령방은 춘추서원에서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한데 왜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렸나요, 황무 대협? -나는 할 일이 있었네. -영영이 충천검을 발견한 순간과 황무 대협이 흑령방으로 떠난 때가 일치합니다. 혹시...? 추운행의 질문에 황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내가 영영에게 충천검을 찾아 줬지. 물론 영영은 몰랐을 것이네만..." 추운행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만박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만박은 미소를 띠고 이 똑똑한 청년을 쳐다보았다. 황무는 여전히 선향의 손을 잡은 채 지금 장내에서 오가는 말과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앉아 있었다. 추운행은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만박에게 물었다. "납치를 당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알려졌지. 하지만 힘들지는 않았네. 사실 숨어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니까." "숨어 있었다? 누구를 피해서 말입니까?" "당연히 '그'일세. 성주!" "지금은 왜 모습을 나타내신 겁니까? 아니, 왜 황무 대협으로 하여금 찾도록 하신 겁니까?" "때가 되었기 때문일세. 그 동안 나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제 완성이 되었거든." 만박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겁난유세(劫亂留世)란 이름을 붙였지. 강호사... 특히 세인들이 잘알고 있는 무혼지겁의 진실을 전강호인들에게 알려 줄 책일세." 대지와 창허가 신음 소리를 냈다. 무혼지겁의 진실! 과연 그것은...? 만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은 성주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지. 그는 선향의 광기를 몰랐네. 그래서 그녀가 날 억류하고 있으리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네. 선향 자신조차도 제정신일 때는 내가 있는 곳을


몰랐으니까." "하지만 장미부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그러나 '성주'는 총관 같은 자는 직접 상대하지 않는다네. 그러기엔 일이 너무 많지." 이때 대지가 급히 나서며 물었다. "대체 성주가 누굽니까? 그는 만유와 선향 외의 다른 오성도 지배하고 있습니까? 그는 도대체..." 만유가 급히 손을 흔들었다. 황무가 바닥에 앉은 채로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곧 아시게 될 거요, 그 모든 비밀에 대해. 책을 읽으신다면 곧..." 대지와 창허가 눈을 크게 뜨고 황무를 바라보았다. "황무 대협! 당신은...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대지와 창허의 눈에 깊은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 순간 추운행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바로..." 추운행은 설명을 시작했다. 황(黃)은 광(廣)이란 글자에서 둘레를 없앤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황무는 곧 광무의 변형된 이름이었으며, 그것은 곧...! 황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눈을 빛내며 한 자, 한 자 똑똑히 말했다. "그렇네. 내가 바로 광무혼(廣武魂)이네." < 제1권 끝 >


b37-1  

이 소설은 다른 무협과 달리 구성을 차별화해 보고자 노력했다. 특히, 시간 전개가 많이 다르다. 일 권의 배경은 현재이다. 십여 년 전에 있었던 대규모의 혈난, 무혼지겁(武魂之劫)이라는 것에 의해 강호는 많은 부분의 정기를 잃어버렸다. 무엇보다 재미있...

Advertisement
Read more
Read more
Similar to
Popular now
Just for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