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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총사 3 권 검궁인 저 차례 19 장 20 장 21 장 22 장 23 장 24 장 25 장 26 장 27 장 28 장

대계(大計) 두 얼굴의 남(男)과 여(女) 까마귀와 공작(孔雀) 지상(地上)에서 가장 바쁜 인간(人間) 일만초(一萬招)의 싸움 출천환용(出天幻龍) 악마의 대법(大法), 환혼백팔영시(還魂百八靈屍) 욕망(欲望)의 인간(人間)들 급전(急轉) 기인탑(奇人塔)

19 장 대계(大計) ① - 무간동(無間洞). 그곳은 극락쾌활림 서쪽의 절벽 아래 있었고 지표의 변동으로 형성된 천년동부였다. 지금 대규모의 공사(工事)가 벌어지고 있었고 천여 명에 달하는 노예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전설의 지극천단(地極天壇)의 장소를 발굴하고 있었다. 그 참혹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공사 중에 참혹한 죽음을 당하기가 일쑤였는데 그것은 무간동의 특수한 지형 탓이었다. 말 그대로 지옥의 무간동이었다. 쿵! 쿵! 웃통을 벌거벗은 노예들이 암벽을 파내고 있었다. 찌는 듯한 열기가 동부 속을 메우고 있었으며 노예들은 몽롱한 환각 상태였다. 쿵! 쿵! 와르르르....... 어쩌다 천정의 암반이 일시에 무너져 십여 명의 노예들이 깔렸다. "으악!" 노예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압사한다. 죽음의 공포는 이곳 말고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유황소(硫黃沼). 이글이글 연기를 내며 끓어오르는 유황소 가까이 접근하기만 해도 피부가 타 들어갈뿐더러 그 지독한 유황연은 폐부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더욱 무서운 것은 너비 삼십여 장에 달하는 유황소 위로 한 가닥 외줄의 철삭이 맞은편 동굴로 연결되어 있고 그 철삭에 매달려 노예들이 맞은편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화르륵! 갑자기 유황천이 뿜어져 오르면 노예들은 불꽃에 덮여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유황소에 떨어졌다. 때로는 거무죽죽한 늪이 고여 있는 곳도 있다. 수만 년을 두고 동식물이 썩어 고인 늪이었고 고약한 냄새가 풍긴다. 죄수들은 조심스럽게 늪을 가로질렀다. 파낸 흙과 돌덩이를 밖으로 날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악!" 비명과 함께 한 노예가 쑥 빠져 버린다. 함정과 다름없는 늪 속으로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었다.


무간동의 작업은 수 갈래로 진행되고 있었다. 봉황성주 단목신수는 지리에 통달해 지관(地官)으로 하여금 지맥의 형성과 상태를 연구케하여 몇 방향으로 파 들어가는 것이었다. 실로 수많은 노예들이 작업 중에 희생되고 있었고 또 작업이 끝나면 마뇌향과 여색(女色), 술의 힘을 빌어 죽음의 공포마저도 잊고 뼈를 녹이는 쾌락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소진시키고 있었다. 때로는 탈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여태껏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없다. 그들은 극락쾌활림의 출구를 벗어나기도 전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각종 기문진법과 매복을 뚫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독한 곳이로군!" 무간동을 둘러본 천우는 혀를 내둘렀다. 동시에 가슴속에서는 무서운 분노가 끓어올랐다.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제물로 희생시키다니! 단목신수, 언제고 이 대가를 치를 날이 있을 것이다......!' 천우는 비밀리에 굉천과 수시로 만나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결코 완전한 승산이 없는 상태에서 일을 벌이는 무모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무간동을 철저히 탐사했다. 구석구석의 지형과 특성을 면밀히 파악하는 데만 근 보름이 걸렸다. 그가 부림주로써 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가 온 이후로 단 한 건의 탈출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고 그것은 은밀히 굉천과 하나의 묵계를 설립했기 때문이었다. 굉천은 사실상 노예들의 은연중 지도자였고 그는 노예들 중 몇몇 영향력 있는 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극기(克己)로써 마뇌향의 유혹을 끊은 자들이었다. 마뇌향의 무서움은 그 중독성에 있다. 일단 중독 되면 하루에 한 번 마뇌향을 복용하지 않으면 결코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천우는 그 점을 굉천에게 설명했고 첫 단계로써 노예들이 마뇌향에서 벗어날 것을 알게 했다. 마뇌향을 뿌리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뼈 속 깊이 중독 되어 매일 섭취하지 않으면 전신에 오한이 날뿐더러 미칠 듯이 온 몸에 경련과 통증을 느낀다. 가히 초인적인 의지력이 아니고서는 결코 마뇌향을 끊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천여 명의 노예들은 마뇌향에 중독 되어 의지를 잃은 채 강제 노역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굉천을 노예들에게 마뇌향을 끊도록 설득했다. 뿐만 아니라 당분간 그들의 무모한 탈출을 감행하지 않도록 지시했다. "대를 위해 소를 버려야 하오. 총주." 굉천의 말에 천우는 흠칫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굉호법?" 굉천은 탄식했다. 그들이 비밀리에 만나는 장소. 그들 사이의 대화는 오늘따라 무거워 졌다. "아... 노부는 향후 무림의 운명에 대해 무거운 마음을 저버릴 수가 없소." 천우는 빙긋 웃었다. "호법의 마음을 알고 있소. 그러나 결코 위선자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오." 굉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니오이다. 문제는 단목신수에게만 극한된 것이 아니오." "......?" 굉천의 얼굴에는 진정으로 무림을 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실상 이십 년 전 마왕성(魔王城)의 혈겁을 제외한다면 무림은 수백 년 간 지극히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 "그러나 그것은 단지 미증유의 대겁(大劫)을 위한 잠정적인 평화였을 뿐... 오늘날의 무림은 자칫하면 종말로 치달릴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오." 천우는 담담히 말했다. "홍수(洪水)가 나면 흙으로 막고 싸움이 나면 장수가 나서는 것이오. 너무 비관 할 필요는 없지 않소?" "아아... 노부가 지나친 기우가 아니라는 것은 총주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소이다. 사실 이곳의 일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소이다." 천우는 흠칫했다. "그것은 무슨 말이오?" "대효웅(大梟雄) 단목신수 외에도 지옥삼겁천(地獄三劫天)을 중원으로 진입시켜 혈겁을 조성시킨 막후인물, 그 자야 말로 어쩌면 더욱 가공할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굉천의 음성은 어두웠다. "더구나 무림은 사분오열 되어 있소이다. 정통마도(正統魔道)를 부르짖는 측천환마전(測天幻魔殿)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총주께서는 과거 천중오정(天中五鼎) 외에도 천외사마(天外四魔)라는 무서운 인물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천외사마?" "그렇습니다. 그들은......." - 측천환사제(測天幻邪帝) 철붕우(鐵朋羽). - 만독왕(萬毒王) 묘천(苗天). - 혈우악신(血雨惡神) 탑륭(塔隆). - 녹림대제(綠林大帝). 천외사마라 불리웠던 그들은 실상 천중오정보다 먼저 중원무림에 이름을 날렸다. 그들은 정도(正道)와는 숙적이었으며 개개인의 가공할 무공과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바로 당금무림에 서서히 야망의 발길을 내딛기 시작한 사도(邪道)들, 측천환마전(測天幻魔殿). 독황교(毒皇敎). 고루혈사교( ?血死敎). 녹혈림(綠血林). 그들 사개단체가 바로 그들의 집단이었다. 천외사마는 모두 편격하고 사이(邪異)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최소한 오십 년 전으로 그들은 노마(老魔) 이전에 거마였다. 천우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그토록 고강하단 말이오?" 굉천은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소이다. 실상 그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벌써 중원의 반이 폐허가 되었을 것이오." "......!" "그들 천외사마가 이끄는 사패(四覇)만 해도 무림의 장래를 암담하게 하고 있소이다. 단목신수가 일찍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그들 때문인지도 모르오." 천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옥삼겁천, 사패, 봉황성... 이렇게 삼대 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셈이구료." "그렇소이다. 하나 만일... 사패가 그 어느 쪽이든 기운다면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림은 도탄에 빠져 구제 불능 상태가 될 것이오." "......!" 천우는 얼굴빛을 굳혔다.


굉천은 그의 안색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상 이곳의 일은 극히 작은 일에 불과 하오이다. 문제는......." "......?" "바로 총주이시오. 오직 총주만이 이 난세를 평정시킬 수가 있소이다." 굉천의 말은 확신에 차 있었고 굳은 결의가 엿보였다. 천우는 그를 직시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굉호법의 뜻은 무엇이오? 말씀해 보시오." "이 늙은이의 생각으로는... 고육계(苦肉計)로써 총주께서 단목신수의 신임을 얻은 후... 봉황성으로 들어가 대계(大計)를 행사하셔야 한다는 것이오." "......!" 천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그건 무슨 뜻이오?" 굉천은 신안을 번쩍이며 말했다. "총주께서는 한 가지 중대한 문제를 잊으셨소이다. 그것은... 아직도 과거에 봉황성을 뛰쳐나가신 사모께서 임신했던 총주를 단목신수는 자신의 아들(子)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오." "......!" 천우는 흡사 벼락을 정수리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렇다. 확실히 단목신수는 십지천화가 뱃속에 가지고 있던 어린아이를 자신의 혈육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십지천화에게 무수한 영약지초를 복용시켰다. 또한 십지천화가 화령신군 종자백과 관계를 맺은 시기는 단목신수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 시기와 미세한 차이밖에 없었다. 단목신수는 십지천화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 굳게 믿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 그러나......!" 천우의 안색이 몇 차례나 일그러졌다. "해야하오! 총주! 이 일은 개인의 자존심이나 명예를 따질 일이 못되오! 무림, 전 무림이 오직 총주의 한 몸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굉천은 천우의 앞에 엎드려 간곡하게 부르짖었다. 그의 노안에는 정녕 무림을 위한 충정이 가득 어려 있었다. "총주께서는 그의 아들로 행세하여 봉황성 내부로 깊숙이 파고들어 가셔야 합니다. 그것만이 난세무림을 평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 천우는 갑자기 머릿속이 몹시 헝클어지는 것을 느꼈다. 단목신수는 그의 불공대천지수다. 어찌 눈앞의 원수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해야 하오. 총주, 이마제마(以魔制魔)! 봉황성과 지옥삼겁천을, 그리고 결코 천외사패가 그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도록 총주께서는 각별히 신경을 쓰셔야 할 것이외다." 천우의 얼굴에 숱한 갈등이 아로새겨진다. 그는 결코 그와 같은 계략을 쓸 생각이 없었다. 정정당당히 원수를 붕괴시킬 생각이었다. "그것만이 희생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무림을 지키는 길이오. 만일 정공(正攻)을 지향한다면 설사 중원은 지킬 수 있다 해도 그 희생은 막대할 것이며 중원무림은 회생 불능의 상태에 빠질 것입니다." 굉천의 말은 간곡했다. "결단을 내리십시오. 총주께서 굴욕을 참고 대계(大計)를 세우시는 것만이 호생지덕을 펴는 유일한 길이오!" 천우는 깊은 탄식을 터뜨렸다. "알겠소. 굉호법, 그대의 충정에 감복할 따름이오."


"승낙하시는 것이오?" "그렇소." "고... 고맙습니다. 총주!" 천우는 빙긋 웃었다. "한데 호법의 고육계란 무엇이오?" "그것은 일단 단목신수의 신임을 얻는데 필요한 제 일단계의 계책입니다." "......?" "극락쾌활림에서의 공사는 장장 이십 년을 계속한 것입니다. 그 공사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을뿐더러 그 동안 희생된 고수의 수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천우는 차갑게 말했다. "그는 원혼의 대가를 치를 것이오."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해서는 안됩니다. 작은 희생으로 큰 일을 추진시켜야 합니다." "......?" "일단 노부는 이곳의 인물 중 무림을 위해 희생을 각오할 의기를 지닌 자들을 모아 반란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천우의 안색이 변했다. "그들을 이용한다는 것이오?" 굉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반란 직전에 총주께서 그를 깨끗이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큰 공을 세우는 것이며 필시 단목신수의 귀에도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천우는 침중하게 말했다. "그렇게 되면 반란에 가담했던 자들은......." "허허... 이미 이곳에서 버린 목숨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그들도 웃으며 죽음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호법......." 천우는 가슴이 뭉클했다. 굉천은 비장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 이미 일을 추진했습니다. 총주께서 날짜만 정하시면 됩니다." "그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소?" "허허... 천려일실이라 했소이다. 한 가지만 삐끗해도 만사는 끝이올시다. 노부는 그런 우를 범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그들은......." 천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허허... 총주, 큰 일을 위한 작은 희생에 마음을 두시다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한을 남기시렵니까?" "......!" 천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으며 굉천의 눈에서 활활 타오르는 의기를 보았다. 그것은 확고한 신법이었다. 그는 천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장렬히 바치려는 확고한 결심을 결코 바꾸지 않을 것이다. 천우는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호법......." 그는 다만 굉천의 손을 힘껏 잡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단지 그는 한 마디만을 물었다. "모두 몇 명이오?" "구십 구 명입니다." "구십구... 기억하겠소. 무림에 태평성대의 그날이 올 때 반드시 그들의 값진 희생을 기리는


의사총(義士塚)을 세우겠소." "허허허... 고맙습니다. 총주!" ② "아아......." 태월아는 비음을 토하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채화공자 반준. 이 사내의 여자 다루는 솜씨는 정말 일품이었다. 반준은 그녀의 목을 따라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상아를 깎아만든 것같은 희디흰 목을 따라 내려가는 반준의 표정은 음탕함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태월아의 가슴은 풍만했고 이미 익을 대로 익어 있었다. 반준의 입술이 잘 익은 포도송이를 훑자 그녀는 온몸에 전율이 스치는 것을 느끼며 파르르 떨었다. "아... 흑......." 반준의 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의 손은 쉴 사이 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태월아는 반준에게 완전히 몸을 맡긴 상태였다. 그의 입술과 혀는 마술을 부리는 듯했다. 태월아는 처음 그를 본 순간 그의 음탕함에 정나미가 떨어졌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노골적인 그의 유혹이 잦아지자 그녀의 마음은 자신도 갈피를 잡을 수 없을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태월아는 그가 자신의 생각만큼 음탕하고 사악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는 이따금 반준이 대전 안에서 노예들이 벌이는 환락경을 보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아는 것을 보고 내심 그에게 감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늘 무간동의 일에 대해 상의하러 갔다가 그녀는 그만 반준의 집요한 수작에 걸려든 것이었다. "아......." 그녀는 몸을 활처럼 휘었다. 반준의 입술은 어느새 아무도 열어젖힌 적 없는 그녀의 젖가슴을 점령했고 그의 손은 그녀의 반쯤 흘러내린 고의 속에 침입해 있었다. 태월아의 팔엔 수궁사가 선연하게 찍혀 있었다. 그런 그녀가 반준의 능수능란한 공략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리란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이치였다. 반준은 서두르지 않았고 집요하게 그녀의 육체에 불을 놓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반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활활 타오르는 일만 남아 있었다. "하아... 어서......." 마침내 태월아는 반준의 목에 매달리며 그녀의 도도한 자존심도 다 팽개친 채 애원을 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이제 태월아는 손만 뻗으면 그의 여인이 될 만반의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그러나 반준은 해초 속에서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태월아의 몸 위에서 움직이던 몸을 떼네더니 알 수 없는 괴소를 흘리는 것이 아닌가? "후후후... 월아, 이제 그만 하겠다." "......!" 태월아는 흡사 전신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머리에 갑자기 벼락이라도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수치심이 극도에 달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옷자락은 이미 반나에 가깝도록 벗겨졌으며 애원하듯 반준의 몸에 엉겨붙어 있는 자세 또한 엉망이었다. "당신......." "훗훗... 월아, 이 반준이 바람둥이라지만 보통 난봉꾼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지." "......?" 태월아의 신색은 쉴새없이 변하고 있었다. "이 나으리는 말씀이야.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를 먼저 꺾어야 직성이 풀리거든. 그건 반준의


철칙이기도 하지." 빙글거리는 반준. "누... 누구를 말하는 거예요?" "백봉황(白鳳凰)!" "도... 돌았군요!" 태월아는 날카롭게 외친 후 정신없이 방을 뛰쳐나갔으나 그녀의 얼굴은 무참히 구겨져 있었다. 여인의 자존심이 산산 조각난 것이었다. 그녀는 그와 같은 모욕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웬지 그녀의 마음속에는 야릇한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아아... 왜 이럴까? 그가 도대체 밉지가 않으니......!' 채화공자 반준. 확실히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닌 사내였다. 그는 말썽 없이 극락쾌활림의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고 무간동의 말썽자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그가 온 이후 단 한 건의 사고도 없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태월아는 그런 그에게 차츰 마음이 쏠렸다. 그러나 그녀가 어찌 반준, 아니 천우의 깊은 대계에 대해 알 수 있으랴! 그녀는 다만 야속할 뿐이었다. - 후후... 두고봐라! 이 채화공자는 반드시 큰 공(功)을 세워 백봉황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테니. 후후후... 월아, 백봉황을 차지한 후 너를 제 이 부인으로 삼아 주마! 반준의 그런 말이 그녀의 자존심을 자꾸만 건드리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태월아의 마음은 자신조차 억제할 수 없이 반준에게로 자꾸만 기울어 가고 있었다. 그것이 하나의 늪인지도 모르는 채로....... ③ 쿵! 쿵......! 암벽을 향해 찍어 대는 쇠스랑 소리가 귀에 따갑게 울리고 잇다. 암벽에 박힐 때마다 불꽃과 돌가루가 된다. 통로의 끝에서 십여 명의 노예들이 암벽을 파고 있었다. 그 뒤에 다섯 명의 무사들이 채찍을 쥐고 호안(虎眼)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다. 이때 한 노예가 신음을 내더니 그 자리에 푹 고꾸라졌고 그 바람에 작업이 중단되었다. "뭐야! 빨리빨리 해라! 그깟 놈은 내버려두고......." 무사는 호통을 치다 말을 다하지 못했다. 퍽! 그는 눈은 참혹하게 부릅떠졌다. 날카로운 곡괭이 하나가 그의 정수리에 박힌 것이었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것을 필두로 네 명의 무사가 거의 동시에 비명을 내지르며 유황곡에 몸을 던졌다. "끅......!" 십여 명의 노예들이 전광석화처럼 그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던 것이다. 무사들은 꿈에도 그들이 이렇게 공격하리라 생각지 못했다. 마뇌향에 중독된 자들은 이미 심기를 잃고 그들의 명령에 맹종하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콰르르....... 암벽을 쪼개던 노예들이 천정의 암반에 금이 가게 했던 사실을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그 밑에 서서 채찍을 휘두르던 일곱 명의 쾌활림의 무사들은 신음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압사(壓死)해 버렸다. "으악!" 여기저기서 노예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듯 거의 동시에 적세적소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경비무사들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와-- 아--!" "나가자--!" 백여 명에 가까운 아니 정확히 구십 구인은 함성을 외치며 통로를 내달렸다. 그들은 마뇌향의 유혹을 초인적인 의지로 끊은 자들이었다. 선두에는 굉천이 긴팔을 휘두르며 외쳤다. "노부를 따르시오! 다섯 번째 통로로 빠져나가면 곡구(谷口)를 빠져나갈 수가 있소!" 휘휙휙......! 그들은 등천비룡의 신법으로 젖먹던 힘까지 모두 짜내며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또한 치밀하게 탈출 계획을 세워 은밀히 분지의 곡(谷)을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통로를 오랜 시간에 걸쳐 파 놓았다. 이제 그곳으로 그들은 달리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출구는 도저히 빠져나갈 확률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땅 속으로 동굴을 파 놓은 것이었다. 굉천은 앞장서서 달리며 외쳤다. "이곳을 빠져나가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소! 갑시다!" 구십 구인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자유(自由). 그 얼마나 가슴 벅찬 말인가? 그들은 희열의 미소를 지으며 캄캄한 동혈을 전력을 다해 질주해 갔다. 그들의 얼굴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스승과 사제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렇게 사악하고 음독한 집단의 정체를 폭로해야 한다는 일념이 그들의 초인적인 신법을 전개하게 했다. 그들은 극락쾌활림 같은 사악하고 음독한 집단이 하루빨리 무림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이 탈출에 성공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백 명의 궁수(弓手). 그들은 곡(谷) 밖에서 한쪽 절벽을 향해 강궁을 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세 명의 령주(令主)를 비롯 태월아(太月兒) 그리고 백봉황(白鳳凰) 단목가영이 서 있었다. "백림주! 두고보시오. 그들은 이제 곧 고슴도치의 운명이 될 테니!" 반준. 그는 히죽 웃으며 절벽을 주시하고 있었다. 백봉황은 면사를 얼굴에 드리우고 반준, 즉 천우를 바라보며 미심쩍은 듯 물었다. "어떻게 그들이 이곳으로 탈출하리라는 것을 알았지요?" 천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후후... 내가 맡은 이상 방법이 얼마든지 있소." 그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훗훗... 그들 속에 첩자를 심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요. 그들은 설마 코앞에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채 이곳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을 것이오." 단목가영은 면사 속의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만일 당신의 말이 틀림없다면 큰 공을 세운 것이에요. 그렇게 되면 곧 후한 상이 있을 거예요." 천우는 히죽 웃었다. "상은 필요 없소. 나는 오직......." 그는 음탕한 시선으로 그녀의 아래위를 훑어보았고 그런 행동에 단목가영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이때 절벽이 가볍게 진동했다. 흙과 돌멩이가 막강한 강기에 의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실로 엄청난 강막을 형성한 채 쾌속하게 무엇인가가 육박해 오고 있었다. 궁수들을 비롯한 모든 자들의 안색이 변했다. '정말 이 자의 추측 대로란 말인가?' 단목가영은 눈앞에 쇄도해 오고 있는 상황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후후... 너희들은 천궁을 힘껏 당길 때가 되었다!"


천우는 궁수들을 향해 명령조로 말했다. 그들은 천궁의 시위를 극도로 팽팽하게 당겼다. 언제라도 쏘아질 태세를 갖추고 정면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쾅! 문득 폭음과 함께 절벽 한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렸다. "와-- 아--!" "성공이다......!" 함성과 함께 그 안으로부터 무수한 인영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희색이 만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말 탈출에 성공했다고 믿었다. 광소를 터트리며 그들은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고 서로 감격해서 울먹이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천우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핫핫핫...! 너희들은 훌륭한 사냥감을 얻었다. 쏴라!" 슈슈슈슉--! 빗발치듯 강전(强箭)이 날아갔다. 막 자유를 얻었다는 기쁨에 들떠 절벽 속에서 뛰쳐나오던 노예들은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고 말았다. "으아악!" 앞장 서 나오던 자들은 강궁의 세례를 받고 그대로 강전에 꿰뚫린 채 쓰러졌다. 슈슈슉! 슈슈슉......! 강전은 쉴 사이 없이 발사되었다. 그것은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향해 쏘듯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막 햇빛에 눈이 부셔 비틀거리던 자들은 동굴을 빠져나오자마자 강전을 맞고 채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거꾸러졌다. "하... 함정이다! 으악!" "크아악!" 비명, 비명, 비명....... 그들은 차례차례 죽었다. 참혹한 인간살륙의 현장이었다. 인간사냥꾼들의 눈에는 득의만만한 미소가 박혀 있었다. 그들은 이미 이성을 잃고 오직 한 마리의 짐승을 사냥하듯 강전을 빛살같이 쏘아내고 있었다. 곳곳에서 살점이 튀고 그 자리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아났다. 머리와 목에 구멍이 뚫린 채 죽어가는 자, 시신에 적중한 강전은 무차별하게 구멍을 내고 찢고 있었고, 팔과 다리가 모두 강전에 의해 절단당한 채 땅바닥을 뒹굴며 저주를 퍼붓는 자 또한 부지기수였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지금 이곳이리라. 말없이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반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정말 대계를 위해 이 사람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이고 있는 것일까? 단목가영과 태월아는 사태의 잔혹함이 극에 달하자 잠시 눈을 감았다. 태월아는 반준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흘깃흘깃 훔쳐보는 반준의 모습은 너무도 당당하고 대장부다워 보였다. 그녀는 이미 반준에게 자신의 마음까지 내주었던 것이다. 한편, 강전은 그들의 몸에 수없이 박혔으며 한 사람도 예외는 없었다. 오랫동안 뚫었던 탈출로에서 나오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던 사냥꾼들에게 그들은 표적이 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용서하시오.......' 천우는 비록 겉으로는 득의의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내심으로는 피를 토하기라도 할 심정이었다. 대계(大計)를 위한다는 명분에 무고한 구십 구 인의 목숨을 제물로 삼은 것이다. 순간 그의 눈에 맨 마지막으로 가슴에 강전을 맞고 비틀거리는 한 노인이 들어왔다. 굉천, 바로 그였다.


'굉호법......!' 그의 눈에 뿌연 안개가 서렸다. 그 순간 굉천의 눈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굉천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총주(總主)! 잊지 마시오. 우리들의 희생을....... "으아악!" 비명이 들렸다. 굉천은 강전을 맞은 채 궁수대에 뛰어들어 양팔을 좌우로 날렸다. 그 순간 무수한 암기가 쏘아져 한꺼번에 일곱 명의 궁수가 쓰러진 것이었다. "죽여라!" 삼령주(三令主)가 외쳤다. 그때 천우의 귀에 굉천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총주...! 총주의 손으로 죽여주시오. 더러운 놈들의 손에 죽고 싶진 않소. 빨리.......) 천우는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으하하하하...! 이놈들! 최소한 네놈들을 염라전에 함께 끌고 가마!" 꽈르릉! 펑! 굉천은 정도의 기인이었다. 무공은 비록 많이 줄었다 하나 그래도 무사할 수 없었다. 그의 발악에 다시 다섯 명의 궁수가 쓰러졌다. 그의 긴 두팔로 펼쳐내는 만천화우(滿天花雨)의 암기술은 당금무림에 그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고강하고 위력적이다. 그리고 그의 독문 장법인 만파독장(萬波毒掌)은 독황교의 현 교주인 만독왕 묘천이 창안한 독루혈황장(毒淚血皇掌)과 대뇌음사(大雷音寺)의 육대 사조인 마이선사(魔耳禪師)의 흑마불영장(黑魔佛影掌)과 함께 천하삼대독장 중 하나로 손꼽혔다. 천하무림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엄청난 독강의 위력은 줄었지만 그는 아직도 정파를 수호하는 고수답게 위맹한 장력을 사위로 뻗어내고 있었다. 굉천의 앞을 막고 있는 쾌활림의 고수들이 순식간에 한 줌의 독수로 녹아들고 있었다. "하하핫...! 그 늙은이는 이 반나으리가 처치하겠다!" 휘익! 그는 방약무인하게 외치며 십여 장을 뛰어넘어 굉천의 머리 위에 떠 막강한 장력을 맞받아 쳐갔다. "하하하...! 늙은이! 곱게 죽으면 시체나마 보존시켜 주려 했다! 이 반공자가 네놈의 뼈를 갈아마셔 주마!" 우웅! 공중에 뜬 채 천우가 무서운 장력으로 굉천을 향해 뻗었다. "으하하...! 더러운 주구!" 펑! 굉천의 장력과 부딪친 순간 천우는 반 장 가량 퉁겨 올라갔다. "웩!" 그러나 굉천은 핏덩이를 토하며 땅 속에 무릎까지 박혔다. "하하핫...! 원숭이 늙은이! 이 일장으로 끝내 주마!" 우우웅! 천우의 손이 두 배로 커졌다. 동시에 그의 커다란 장심(掌心)에서 또 하나의 장(掌)이 뻗어 나왔고 순간 굉천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는 다급히 쌍장을 올렸다. 쾅! "크아악......!"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다. 장력이 마주친 순간 참혹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굉천의 두 팔이 문드러졌고 그의 머리는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굉천의 상반신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심하게 손상당했다. 실로 지독한 수법이었다. "으핫핫핫......!" 천우의 광소가 들렸다. 그는 핏덩이가 되어 버린 굉천의 시신을 내려보며 웃고 있었다. "......!" 궁수들 및 중인들은 모두 공포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천우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있었음을 어찌 그들이 알겠는가? 천우는 굉천의 당부를 들었다. '총수... 되도록 잔인하게 죽여주시오. 그럼 이 늙은이 기쁘게 죽겠소이다. 헛헛.......' 무간동의 탈출 사건이 채화공자에 의해 철저히 진압된 후, 반준의 위치는 확고부동하게 되었고 그는 극락쾌활림의 영웅이 되었다. 그의 놀라운 수단과 중인들 앞에서 보인 무서운 무공은 삼령주에게도 커다란 부담을 주었던 것이다. 천우는 삼령주를 은연중 압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노예들에게 공포의 존재가 되었다. 그 이후로는 그는 끝없이 불순분자들을 색출해 내는 무서운 수단을 발휘해 내었던 것이었다. 이제 극락쾌활림에서 그의 존재는 백봉황 다음가는 위치로 부각되고 있었다. 백봉황 단목가영은 생각에 잠겼다. '채화공자 반준... 그 자를 부림주로 삼은 것은 단지 그를 잠시 이용하려는 하고 소용이 없어지면 그도 무간동의 노예로 만들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자의 능력의 상상을 넘어서고 있다.' 그녀는 점차 마음속에 한 가닥 욕심이 생겨났다. '만일 그를 본부(本府)에 끌어들인다면... 잘만하면 훌륭한 인재를 얻는 격이 된다.' 그녀는 애당초 반준, 즉 천우를 보았을 때 기이하게 그에게 끌리는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이성(異性)으로서의 느낌은 아니었다. 처음 그녀는 그에게 남성적인 거친 야성을 느꼈으나 그것이 곧 그녀의 마음속의 정인(情人)을 능가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 우문천릉은 그녀에게 있어 하나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일반 여인과 달랐다. 야망(野望). 일개 여인일지언정 그녀에게는 천하를 향한 원대한 야망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꽃은 꺼지기엔 너무도 크고 강렬했다. 그 야망을 위해서 우문천릉에 대한 연심은 깨끗이 버린 지 오래였다. 더구나 그는 무공을 전혀 모르는 일개 병약한 서생(서생)에 불과하지 않은가? '반준, 만일 그 자의 능력이 세 분 사형(師兄)을 능가한다면 일은 점점 더 재미있어질 거야.' 그녀가 말하는 삼사형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그녀는 도대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세 사형은 모두 천하일인자의 야망을 가지고 있지. 호호... 그들은 나를 얻고 봉황성의 후계자가 되려는 꿈을 꾸고 있어. 그러나 이 가영은 그들 어느 누구에게도 그 꿈을 이루어 줄 수 없어. 가영은 그들은 지배하고 천하를 가질 거야.' 천하제일 미녀인 단목가영. 백봉황은 정도 중원무림의 꽃이었다. 그런 그녀가 여인의 몸으로써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단 말인가? '세 사형은 너무 오만해져 있어. 그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경쟁자가 없기 때문이야. 만일 그들 사이에 반준이 끼여들면 상황은 달라져.' 단목가영은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호호... 그들은 나의 울타리가 되는 거야. 가영은 그들에게 영원한 여신(女神)으로써 군림할 거야.'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태월아!" "네!" 태월아가 나타났다. 단목가영은 명령을 내렸다. "지필묵과 전서구를 준비해 다오." "네, 아가씨!" 태월아는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곧 지필묵을 마련한 뒤 밖으로 사라졌다. 봉황성과 직접 연락하는 특수한 전서용 비둘기가 있었다. 태월아가 사라진 후 단목가영은 붓을 들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 유려한 필체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버님, 어머님께 여식 가영이 한 무서운 신예 고수를 천거할까 하나이다. 그의 별호는 채화공자로서.......> 그녀는 거침없이 써내려 갔다. 채화공자 반준의 성격 그리고 무간동에서의 그의 업적과 치밀한 그의 수단 그리고 무공 등에 관하여... 글을 써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는 날카로운 빛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추가했다. <다만 반준의 출신 내력이 의문스러우니 아버님께서 내사(內事)하시길... 여식의 생각으로는 측근에 두어 활용(活用)하시면 필시 큰 몫을 해내리라 봅니다.......> 단목가영은 글을 모두 적은 뒤 그것을 말아 하나의 죽통에 넣었다. 그때 태월아가 새장 하나를 가지고 왔다. 털빛이 은빛인 비둘기였다. 그것은 특수한 훈련을 받은 영조로써 하루에 수천리는 날 수 있었다. "이 전서를 묶어 본성(本城)에 보내라." "네, 아가씨!" 태월아는 전서를 받은 뒤 문득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단목가영은 미소지으며 물었다. "월아, 할 말이 있느냐?" "네! 아가씨......." "무언지 말해 보렴?" "저어... 그 자에 관한 것인데......." "반준 말이냐?" 태월아는 얼굴을 붉혔다. "네!" "어서 말해 보아라." "그 자가......." "......?" "아가씨를......." 단목가영은 흠칫하여 아름다운 눈을 깜박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순진하고 아름답기만 했다. "나를?" 태월아는 결심한 듯 말했다. "아가씨를 감히... 탐내고 있나이다." "호호호... 호호홋......!" 느닷없이 단목가영은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아가씨......!" 태월아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단목가영은 웃음을 뚝 그치더니 말하는 것이었다.


"내버려두어라. 오히려 바라는 바였단다." "네......?" 태월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단목가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에 뇌쇄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야 그가 내 곁을 떠나지 못할 것이 아니냐?" "......!" 태월아의 눈에 잠깐 절망이 스쳤으나 고개를 푹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그렇군요... 그는 이용가치가 있으니까요......." "호호홋...!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 태월아는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걸어나갔고 순간 그녀의 눈에 이슬이 반짝인 것을 단목가영은 보지 못했다. 태월아는 정말로 천우, 즉 반준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20 장 두 얼굴의 남(男)과 여(女) ① "당신에게 만일 야망이 있다면 본성으로 가세요." 백봉황 단목가영은 매혹적인 눈으로 맞은편의 반준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반준, 즉 천우는 히죽 웃었다. "사내놈 치고 야망 없는 놈이 있소?" "호호... 그럴 줄 알았어요." 천우는 여전히 이죽거리며 물었다. "한데 림주는 어떤 종류의 야망을 말하는 것이오?" "천하(天下), 천하는 무한히 넓고 커요. 당신은 그 천하라는 무대 위에서 마음껏 능력을 과시하고 싶지 않은가요?" 천우는 이상한 듯 물었다. "넓은 천하를 주름잡으려면 당연히 중원으로 향해야지 어찌 좁은 봉황성 따위로 들어가란 말이오?" 좁은 봉황성 따위라니......? 단목가영의 얼굴에 일순 주름이 잡혔다. "당신이 만일 처음 출도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말을 입에서 뱉은 순간 벌써 목이 땅에 떨어져 있을 줄 알아요!" "헤헤... 그 말을 이 반준이 믿을 것 같소? 백봉황은 협박에 능숙하지 못한 것 같구료." 단목가영의 얼굴에 살기가 떠올랐다. 태월아. 그녀는 단목가영의 등뒤에 서 있었고 몸은 지금 식은땀으로 흠씬 젖어 있었다. 그녀는 천우의 태도, 그의 대답 한마디 마디 등줄기에 찬바람이 돌았다. 그녀는 단목가영의 성품을 잘 안다. 비록 겉으로는 부드럽고 따스해 보이나 실은 그녀의 주인 백봉황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여인인 것이다. 그녀는 백봉황이 눈살 한 번 접지 않고 살인을, 그것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하는 장면을 여러 차례나 보아 왔다. 상식적으로 반준의 태도는 벌써 죽어도 열 번은 더 죽고 남았다. "당신은 세상에 대해 모를뿐더러 본성에 대해서도 무지하군요. 본성에 들어가면 다시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거예요." 단목가영의 말은 태월아로서는 뜻밖이었다. 천우는 히죽 웃었다. "뭐 아무래도 좋소, 그런데 말이오......." 그는 야릇한 눈으로 백봉황의 몸을 아래위로 불량스럽게 훑어보며 말했다.


"나 반준의 야망이란 별 것 아니오." "......?" "흰 봉황새(白鳳凰) 한 마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반준의 야망이오." 태월아는 그 말에 심장이 하마터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올 뻔했다. 너무나 모욕적인 말이 아닌가? 그러나 단목가영의 태도 또한 그녀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호호홋......!" 느닷없이 교소를 간드러지게 터뜨리던 그녀는 매혹적인 눈으로 천우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흰 봉황을 잡으려면 보통 그물로는 안돼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마 본 성에 가면 봉황을 사로잡을 수 있는 그물이 있다고 믿어지는데요......?" 언뜻 그녀의 얼굴에는 유혹적인 기운이 서렸다. 천우는 약간 넋 잃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봉황성에 그런 그물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호호... 물론이예요. 하나 쉽게 구할 순 없을 거예요. 그곳에는 그물을 얻으려는 만만치 않은 경쟁자가 세 명 있거든요." 천우는 히죽 웃었다. "그거 괜찮군! 너무 쉬운 일은 싱거우니까." 그는 노골적으로 단목가영의 얼굴을 탐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봉황성에 가는 것이 좋겠소. 그렇게 생각지 않소. 월아(月兒)?" 천우의 느닷없는 질문에 태월아는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태월아의 얼굴은 당황으로 보기에 딱할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그런 그녀가 천우는 귀여워보였다. "저... 저는......." 그러나 정작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이제 막 피어오른 여심이 부르짖고 있었다. '안돼요! 가지 말아요!' 천우는 입맛을 다셨다. "쯧...! 가까운 곳에 봉황을 놔두고 먼 곳으로 돌아가야 하다니......." "호호... 본래 귀한 것일수록 구하는 절차가 까다로운 법이예요." 천우는 기세좋게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 "맞소. 봉황이라면 그 정도 투자가치는 있는 것이오. 한데......." "......?" "그럴리야 없지만 나는 공작인 줄 알고 쫓다가 황작(黃雀:황새)에게 속은 일이 몇 번 있오" "......?" 태월아는 콧등으로 식은땀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단목가영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천우의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녀는 단목가영의 몸이 미세하게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단목가영은 그 순간 탁자의 모서리를 짚었고 그 모서리가 그녀의 섬섬옥수 속에서 곱게 가루가 되는 광경을 똑똑히 본 것이다. 단목가영. 분명 천우의 언동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것이다. 그녀를 한낱 황작 따위에 비교한 것이다. 하나 단목가영은 겉으로는 여전히 우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월아는 전신이 이미 물에 젖은 솜과 같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하하하......!" "호호호......." 천우의 거침없이 방자한 웃음소리와 단목가영의 교태롭고도 기품 있는 웃음소리가 태월아를 다시 한 번 진저리치게 했다. "부림주, 당신은 월아와 함께 본성으로 가세요. 이미 당신에 대한 소개장을 써 두었으니까요. 아버님은


틀림없이 당신에게 섭섭지 않게 대해 주실 거예요." 천우는 히죽 웃었다. "말하자면 내 능력을 시험받는 것이구료?" "호호... 그런 셈이죠." 남과 여. 그들은 각기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상대하고 있으며 대화는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나 정작 그 내부에는 숨막히는 긴장과 살기가 물씬 내포되어 있었다. 태월아는 손등으로 이마에 배인 땀을 훔치며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아... 내 평생 이렇게 긴장하기는 처음이었어.......' ② 휘류륭! 눈보라. 북국(北國)의 황원(荒原)은 끝없이 펼쳐져 있다.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는 설풍(雪風)의 황원을 자욱한 설우가 뒤덮고 있었다. 건곤일색이라고나 할까? 눈(雪)....... 천지사방 그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눈 뿐이었다. 그곳을 한 대의 마차가 설풍을 뚫고 가로질렀다. 마차는 설지(雪地) 위를 달릴 수 있도록 특수하게 설계된 것이었다. 바퀴엔 미세한 철심이 박혀 있었고 바퀴의 안쪽에 다시 철판을 길게 받쳐 눈의 저항을 줄이고 빙판에서 속력을 더 높일 수 있도록 안배한 마차였다. 마차를 끄는 말은 튼튼한 대완산 명마였으며 달리는 속도는 놀랄만큼 빨랐다. 마차는 힘차게 남(南)으로 달리고 있었다. 마차 내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늑했고 훈훈한 훈기가 감돌고 있으며 내부는 화려하고 안락했다. 흔들림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여 흡사 아늑한 정실을 연상케 했다. 마주 보고 두 개의 긴 의자가 있었고 두 명의 남녀가 있었다. 여인은 아름답고 성숙했고 남자는 준수했다. 그런데 남자는 긴 의자에 벌렁 드러누워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아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바로 채화공자 즉 반준으로 위장한 천우였고 맞은편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오래도록 시선을 그에게서 떼지 않고 있는 미녀는 바로 태월아였다.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장백을 떠나온 이후 삼 일 동안 줄곧 눈 앞의 사내는 잠만 자는 것이 아닌가? 태월아는 은근히 봉황성으로 향하는 긴 여로에 대해 벅찬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이 무례하고 건방진 사내에게 그녀는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여로에서 그녀는 그와의 달콤한 밀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그가 구애(求愛)한다면 결연히 거절해야지.... 그러다가 그의 애를 태운 뒤 살며시 그의 품에 안기리라.' 그런데 그녀의 환상은 극락쾌활림을 떠나는 순간부터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반준, 즉 천우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함...! 월아, 날 깨우지 마시오. 나는 한 번 잠자면 몇 날 며칠이고 골아 떨어지는 습관이 있거든." 그것이 끝이었다. 정말 그로부터 삼 일 지난 지금까지 그는 한 번도 깰 생각을 않고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야속하고 괘씸했다. 몇 번이고 그의 콧잔등을 갈겨주고 싶은 심정을 꼭꼭 눌러 참아야만 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또 덧없이 흘러가자 그녀는 그만 비참한 심경에 빠지고 말았다. '내... 내가 그토록 관심 밖이란 말인가? 이 사람의 안중에 태월아는 그저 하찮은 잡화(雜花)로 밖에


보이지 않는 거야......?' 시야가 흐려졌다. 태월아는 사흘 간 잠을 자지 못했다. 피로해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뺨을 뜨끈하게 적시는 것은 무엇인가? "바보 같은 계집애......." 그녀는 소매 끝으로 눈물을 찍어 눌렀다. 여전히 천우는 얄밉게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고 있었다. 마차는 여전히 설원을 외롭게 달리고 있었다. 말은 천리준마여서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수천리 눈길을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며칠 후면 만리장성에 닿으리라.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태월아는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이 며칠 간 속을 태우며 잠을 자지 못한 탓에 일단 잠에 빠지자 그녀는 깊은 수면상태에 이르렀다. 그녀는 불편한 자세로 앉은 채 잠이 들었다. 그것은 꿈이었을까? 어디선가 부드러운 손길이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없이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그녀의 상한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쯧쯧... 바보같이 눈물로 얼룩진 채 잠이 들다니, 고운 얼굴이 많이 상했군." 그녀는 꿈 속에서 그의 음성을 들었다. '아아.......' 그녀는 기뻤다. 그녀는 그의 자신에게 그런 관심을 보여준 데 대해 감격했고 눈물은 더욱 흘러내렸다. 사내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입술로 그녀의 눈두덩이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푹 자 두는게 좋을 거야. 설원의 여행은 지루할 테니 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져 눈거풀이 천 근이나 된 듯 무거워졌다. '깨어야 해... 바보같이... 잠을 자면 어떻게.......' 그러나 그녀의 의지와는 다르게 온몸이 나른해지며 그간의 섭섭함과 나 의지와는 달리 그녀는 온몸이 나른해지며 곧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꿈이었던가, 현실이었던가? 그녀는 그 판단을 그 후에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으로 지금까지 가슴속에 쌓아두었던 천우에 대한 온갖 야속한 감정들이 봄비를 만난 눈처럼 일순간에 다 녹아버린 것이었다. 폭설(暴雪). 몇 십 년 만의 대설(大雪)이라고 했다. 대륙은 온통 폭설로 뒤덮이고 주먹만한 눈보라가 대륙을 흰 눈 속에 아주 묻어 버리려는 기세였다. 길은 끊어지고 산은 자욱한 눈보라에 도무지 보이지조차 않는다. 태극장(太極莊). 칠십 년 전 남북으로 양단된 문도를 규합하여 일문(一門)으로 단결한 후 그 위세를 크게 떨친 태극문(太極紋). 당금 구파일방에서도 큰 힘을 떨치고 있는 천하십문의 일문이었다. 비록 십문(十門)이 궁지에 몰려 있다 해도 여전히 그 위세는 절대적이었다. 태극장의 태극문양이 크게 그려진 장원문은 굳게 잠겨 있다. 폭설 탓에 출입할 수도 없었기 때문일까? 폭설이 태극장을 온통 파묻으려는 듯 쏟아졌다. 장원 안에서는 불빛이 가물거리고 들리는 것은 온통 눈보라의 회오리 뿐, 숨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저벅, 저벅......! 사방으로부터 눈을 밟고 오는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태극문을 암중으로 조여오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눈보라 속에서 그 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죽음을 통고하는 염라사자의 발자국 소리라도 되는 것일까? 어둠 속 자욱한 눈보라를 뚫고 다가드는 그림자들의 수는 수백 명도 넘었다. 그들은 머리 끝서 발 끝까지 온통 흑색 일면도였다. 폭설을 맞으며 그들은 사방으로부터 규칙적으로 다가들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들은 곧 태극문과의 일전을 치를 기세로 주위에 설치되어 있는 태극혜광번안진(太極慧光繁按陳)이 수백명의 흑의인들이 일시에 펼치는 마령구회진(魔靈球回陳)에 의해 삽시간에 파해되는 것이었다. 그 진세는 태극문이 강호에 개문한 이래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리만치 무공이 심오하다고 전해지는 이대 문주인 선화뇌옹(仙華雷 ) 진추하(秦抽河)의 백년 노작이었다. 매 시진마다 음문과 양문이 팔괘의 변화에 따라 서른여섯 가지 생문과 사문을 열고 닫는 오행문진류(五行門陳流)의 총화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장원 문 앞, 사인(四人)의 흑의인이 나란히 섰고 그들의 머리와 어깨에는 온통 눈이 덮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산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 보였다. 모두 중년인이었는데 언뜻 서로 닮아 있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에서는 푸르스름한 귀기마저 어리고 있었다. "크크크... 태극문도 오늘로써 끝장이다. 태극일수(太極一 ) 천인엽(千 葉)과 함께......." 우측의 뺨에 굵은 도상(刀傷)이 찍힌 중년인이 음산한 기운을 내며 말했다. "누구냐?" 대문 안으로부터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나왔다. "크크크... 검은바람(黑風)을 몰고온 지옥사자(地獄使者)다." "어떤 미친 놈이......." 삐-- 익! 문이 열리고 청삼을 입은 중년무사가 얼굴을 내밀다가 그 얼굴이 곧 딱딱한 공포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는 본 것은 시체 같은 네 명의 중년인과 장원 둘레를 포위하고 있는 흑의인들의 그림자들이었다. "너... 너희들은 누구냐?" 그는 그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슥! 네 중년인이 일제히 우수를 치켜 들었고 그 순간 네 개의 손바닥에서 홍광(紅光)이 번쩍인 순간, 쾅! "으아악!" 그의 몸은 곧 하나의 잿덩이가 되어 날아갔다. 네 명의 합공에 그는 어이없이 당한 것이었다. 도대체 상상할 수도 없는 수법이었다. 이렇듯 사이한 무공을 사용하는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남김없이 도륙하라!" 어디선가 지옥의 문을 여는 듯한 괴기한 음성이 들려왔다. 슉! 슈욱! 사방에서 흑영이 폭설을 뚫고 담을 뛰어넘었다. 설원을 가득 덮은 흑영들로 인해 삽시간에 천지는 암흑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쾅! 콰르릉! 폭음이 장원 내에서 일제히 울리고 불길이 솟구쳤다. 그와 함께 처절한 비명소리가 연달아 들리기 시작했다. "적이다... 크-- 악--!"


그것은 지옥도(地獄圖)였다. 흑의인들의 살수는 무정하고 잔악무도했다. 그들이 손을 뻗을 때마다 태극문도들은 그대로 백회혈에서 회음혈까지 양단되어 거꾸러졌다. 퍼-- 엉! 그들이 쓰는 장력은 이제껏 보지도, 듣지도 못한 마공이었다. 장심에서 홍(紅), 청(靑), 흑(黑), 백(白), 자(紫)의 광채가 번쩍일 때마다 태극문도들은 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었다. 아비규환의 대살륙장이었다. 태극문의 무공은 태극신강(太極神 )과 무적혜천태극비모신검류(無敵慧天太極飛矛神劍流)였다. 그러나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그들은 흑의인들의 마공에 속수무책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번-- 쩍! 흑의인들의 도(刀)가 난무하면 그들은 허위적거리며 양단되어 쓰러졌다. 흡사 짚단을 베듯 흑의인들은 간단히 그들을 베어 넘겼다. "아-- 악!"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마구 살수를 뿌렸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피에 굶주린 금수였고 인육에 눈이 뒤집힌 식인귀였다. 번-- 쩍--! 하늘도 노했다. 눈보라 속에서 암천이 갈라지며 뇌성벽력이 천지를 온통 붕멸시킬 듯했다. "허억! 너희들은 북로지옥사살신(北路地獄四煞神)......!" 대전 앞, 사 인의 흑의중년인 앞에 태극무복을 입은 육순 가량의 노인이 대경했다. "쿠후후훗......! 그렇다. 천인엽(千 葉)! 과거 네놈에게 얻은 이 상처를 아직도 기억하겠지?" 북로지옥사살신. 근 육십 년 전 천하를 횡행하던 대마두. 그들은 형제였고 북방(北方)에서 왔다. 당시 천하무림의 공적(共敵)으로 북무림도상에서 백도인들에게 쫓겼으며 그 중 대살신(大煞神) 패황(貝黃)은 태극문주 태극일수 천인엽에서 일검(一劍)을 맞았다. 그 후 생사행방이 묘연하던 그들이 한꺼번에 그 앞에 나타난 것이다. "복... 복수냐?" "복수? 크카카캇...! 네 놈은 스스로 복수할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우리들은 흑룡강(黑龍江)에서 온 흑사풍(黑死風) 사도들이다." "뭐... 뭣?" 천인엽의 흰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마침내 말로만 듣던 죽음의 검은 바람, 지옥삼겁천의 피의 대장정이 태극문에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그는 순간 절망을 떠올렸다. "크핫핫핫......! 받아라!" 번-- 쩍! 네 줄기 붉은 광채가 폭사되었다. "어딜!" 째-- 앵! 태극신검이 발출되고 태극환과 함께 막강한 은빛 검강이 사위로 폭사되었다. "쿠후후......." 네 가닥 홍광과 검강이 격돌한 순간 천인엽은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이어 그는 모든 지각능력을 상실했다.


"으아아악--!" 그의 몸은 잿덩이가 되어 눈보라 속으로 흩어졌다. "크흐흐흐... 깨끗이 쓸어 버려라!" "모조리 불태워라!" "크핫핫핫...! 흑사풍의 선물이니라!" 비명, 절규, 피보라 속에서 태극문의 붕괴는 불과 반 시진 만에 그 수백 년의 전통을 일시에 종지부 찍고 있었다. 무서운 혈겁이었다. 교자. 윗통을 벗은 거한 팔십 일 명이 메고 있는 거대(巨大)한 교자 위에는 온통 흑색의 악마신상(惡魔神像)이 앉아 있었다. 휘류류륭......! 폭설 속에 악마상은 이빨을 드러내 웃고 있으며 여덟 개의 팔에는 각각 인두(人頭)를 움켜쥐고 그 중 하나를 막 입으로 집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두 눈에는 시퍼런 귀화(鬼火)가 타오르고 있어, 정녕 지옥의 염라귀가 환신한 것 같았다. 팔십 일 명의 교자를 멘 장한들의 벌거벗은 웃통에는 흑문신(黑紋身)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악마의 문신인 듯 하나같이 일신에 공포스러운 악귀의 모습과 해골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들은 표정이 없었다. 혼을 빼앗긴 것처럼 눈동자는 초점 없이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교자는 태극장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있었다. 이윽고 활활 시뻘건 화염기둥으로 변한 태극장으로부터 살룩을 마친 흑의인들이 교자를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언덕에 이르자 모두 엎드렸고 지옥사살신이 앞으로 나섰다. "혈우마마천제(血雨魔魔天帝)께 보고 드립니다. 사망자는 오백 팔 인, 전멸입니다." 그러자 묵신악마신상으로부터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생존자는?" "없습니다." 대살신의 음성은 떨려나왔다. "흑사병의 희생자는?" "오... 오십 일 명입니다." "크크크... 그렇다면 곧 채워라." "무... 물론입니다." "크크크... 그 동안 투항자는 모두 몇 명이냐?" "총... 삼천 육백 십 명입니다." "그들을 흑룡강에 보내 지옥연화동(地獄練火洞)에 넣어 연단시킨 후 흑사병에 귀속시킬 것이다. 우리는 계속 남하한다." "하(下)-- 명(命)--!" "크크크... 눈(雪)이 많이 오는군. 그래, 마치 고향에 온 것 같군. 우리가 떠나온 흑룡강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눈이 내리겠지?" 혈우마마천제는 광소를 터뜨렸다. 묵신악마신상 속에서 그 광소가 들렸다. "크핫핫핫핫...! 중원(中原)이여! 이제 너희들은 흑룡족(黑龍族)의 위대한 발길 아래 무릎을 꿇을 것이다! 크하하하......!" 벽력음으로 천지가 진동한다. 번-- 쩍! 뇌전이 묵신악마신상의 정수리에 떨어지자 악마상은 여덟 개의 팔을 일제히 움직이며 저주스런 마소(魔笑)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핫... 크카카캇......!" 죽음의 검은 바람. 지옥삼겁천(地獄三劫天)의 일원인 흑사풍은 동북무림(東北武林)을 철저히 유린했다. 한동안 소강 상태에 빠졌던 무림은 다시 피의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중원은 세 개의 바람 속에 절망상태에 빠졌다. 죽음의 검은 바람, 미친 모래바람, 피바람이 다시 불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북(河北) 석문(石門)에 있던 십대문파의 하나인 태극문(太極紋)의 참화를 시발로 다시 지옥삼겁풍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중원을 휩쓸기 시작했다. 거기에 미친 듯한 설풍(雪風)마저 가세했으니 천지에 뿌려진 정파무림의 피는 더욱 선명했다. 중원의 상황은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여기에 천외사패(天外四覇)마저 그들의 중원 무림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혈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중원무림은 헤어날 수 없는 늪 속에 빠진 것이다. 석문을 떠나온 마차는 그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마차 안. "흐흠... 혈우마마천제란 자는 상상보다 훨씬 더 미개한 자로군. 그 따위 어설픈 신상 속에 숨어 부하들에게 위엄과 겁을 주려 하다니 말야." 채화공자 반준 즉, 천우가 중얼거렸다. 태월아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는 듯 어깨를 떨었다. "그... 전체가 묵빛인 악마상은... 생각만 해도 소름끼쳐요. 보셨어요? 악마상이 들고 있는 여덟 개의 인두는 정말 사람머리였어요. 그 웃음소리는 정말 악마의 웃음소리였어요." 천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히죽 웃었다. "미개인들은 공연히 그런 식으로 허세를 부리는 데가 있지." "흑사풍... 정말 무서운 자들이예요. 그래도 중원 정통의 십대문파의 하나인 태극문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태월아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어렸다. 그녀도 말로만 듣던 지옥삼겁천이라는 가공할 집단의 위력을 실제로 목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태극문의 혈겁. 그들은 마침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천우는 줄곧 냉정히 그들의 혈겁을 지켜보았다. 그도 중원인이다. 그는 몇 번이나 뛰쳐나가 흑사풍의 졸개들을 단숨에 도륙내고 싶었으나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한순간의 호승지심으로 대계를 그르칠 순 없었다. 천우의 가슴 속에는 누구보다 뜨거운 피가 끓고 있었다. 그러나 그 피는 냉철한 이성에 의해 폭발하지 않고 부글거리며 속으로 갈무리되어 있었다. 그는 훗날을 기약했다. 그는 봉황성으로 가야 했다. 그것도 원수를 아버지라 부르기 위해 가는 것이다. 그것은 무림을 위한 일이었고 또한 난세무림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대의(大義)를 위한 것이었다. 천우에게 이미 복수란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는 기인총주(奇人總主)다. 그에게는 천하가 있었다. 천하는 군림하려는 자의 것이 아니라 아끼고 사랑하며 수호하는 다수의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러나 하늘은 이 모든 것의 위에 있다. 그것을 모르는 인간은 야망을 위해 수천 만명의 무고한 인명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죽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무림을 얻기 위해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린 것이다. 천우는 남하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무림은 그의 고향이다. 무림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무를 사랑하는 사람 모두의 것이며, 무림이란 숱하게 반복되어진 의(義)와 협(俠)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했다. 중원의 혈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중원인은 스스로의 힘을 너무 믿었고 지나치게 안일했다. 그 결과 헛된 야망을 품는 무수한 욕망의 화신을 낳았으며 그들은 무림을 그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거침없이 무림을 파괴하고 있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무림을 초토화시키고 나서 그 위에 올라서서 제왕의 관을 쓴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무림이, 수많은 지아비를 잃은 미망인과 고아들과 붕우들을 잃고 치유불가능할 정도로 극심한 절망과 저주의 늪에 빠져 있는 무림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말이다. 무림은 그 누구의 야망에 의해서 정복되어질 곳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천리로서만 다스려지고 수천년을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의에 대한 신념과 완전함에 대한 뼈를 깎는 노력만이 진정한 무림의 주인인 것이다. 그러나 야망의 덫에 걸린 자는 그런 이치를 알지 못할뿐더러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③ 태월아는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나는 정말 이 분을 사랑하는 걸까?' 그녀는 천우와 함께 지내온 시간들 속에서 정말 자신이 평생을 살아 오면서도 깨닫지 못한 많은 것들을 깨우쳤다. 천우의 행동은 하나 하나가 그녀의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는 몹시 괴이했다. 희대의 바람둥이 채화공자라는 이미 그녀에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녀는 그와의 여행을 통해서 그의 본심은 한없이 선량하며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짧은 시간일지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마음속에 두고 있는 정인(情人)과의 여행이란 그녀를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없이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깜박 잠들었다고 생각했었으나 그렇지가 않았다. 설원에서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만리장성을 넘은 뒤였다. 그녀는 주위의 풍경이 중원임에 깜짝 놀랐고 자신이 그토록 며칠간이나 잠속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때천우는 무엇인가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월아, 먹어 두는게 좋을 거야. 배가 꽤나 고플 걸?" 그것은 뜨끈뜨끈한 만두였다. 정말 그 말을 듣자 그녀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허기를 느꼈다. 부끄러움이고 뭐고 없었다. 그녀는 허겁지겁 만두를 먹어치웠다. 천우는 히죽 웃었다. "후후... 월아의 참모습을 보는 것 같군." "......!" 태월아는 멍해졌다. '참모습이라고?' 그녀는 갑자기 가슴이 막막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 나는 너무도 오랫 동안 나 자신을 잊고 살아왔어. 가영아가씨의 곁에 있는 동안은 줄곧 나의 본심을 가식과 위장 속에 묻어 왔었지. 세상은 온통 위선 속에 감싸여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와중에 나 자신은 철저히 본심을 감추며 살아왔어.......' 태월아의 눈엔 뿌연 회상의 막이 쳐졌다. '봉황성이 바로 그 대표적인 추악한 곳이었지. 처음 내가 입성(入城)할 때만 해도 얼마나 꿈에 부풀었던가? 나의 가문은 평범한 검객(劍客)의 가문이었고 본성에 시비로 간택되어 입성했을 때 긍지와 자랑을 느꼈다.' 그녀의 청운의 꿈은 봉황성에서 깨어진 것이다. 그녀는 어릴 적 단목가영을 보필하고 함께 자라면서 얼마나 많은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던가?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남은 것은 위선과 가식적인 행동뿐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차츰 나는 봉황성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그에 편승하여 오히려 가식된 행위 속으로 나를 바꾸어 갔어. 이제는 나 자신이 바로 봉황성의 허위 그 자체가 되어버린 거야.' 천우는 줄곧 쉴 새 없이 빈정거리고 집적댔다. 그는 희대의 바람둥이였고 달변가였다. 긴 여로에 그는 태월아가 보는 앞에서 객점이나 주루에 들를 때마다 많은 여인들에게 주파를 던지고 유혹을 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에게만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태월아는 그 점을 점점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다. 사람이란 묘한 동물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오랫 동안 가까이 있으면 상대의 심성을 읽을 수가 있는 영감을 지니고 있는 동물인 것이다. 태월아는 점점 더 상대방이 희대의 난봉꾼이며 무례한 채화공자가 반준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더 확신하게 되었다. 보이는 그의 모습과 감추어진 그의 내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그녀는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석문을 백 리 정도 못 미친 마을의 주점에서였던가? 마침 두 명의 흑도인들이 주점에서 노래를 부르며 꽃을 파는 한 소녀를 희롱하고 있었다. 보기에 딱할 정도로 그들은 소녀를 능멸하고 있었다. 흑도장한들은 소녀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상스러운 말을 지껄였고 소녀의 옷자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음탕한 폭행을 했다. 그러나 주점의 주객들은 아무도 감히 말릴 생각도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을 때, 채화공자 반준은 히죽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던 것이다. "이봐, 친구들. 자네들은 풍류를 모르는 밥통들이군. 그래, 여자는 그렇게 다루는게 아니야. 훗훗... 자네들은 늙은 창녀의 자루 같은 유방과 축 쳐진 엉덩이나 주무르는게 낫겠군 그래!" 그 말에 두 흑도장한들은 비명 같은 노성을 지르며 덮쳐왔고 반준은 혀를 찼다. "쯧쯧...! 배가 고프면 개처럼 엎드려 짖게나. 그럼 혹시 먹다남은 닭뼈다귀라도 던져 줄지도 모르지." 순간 두 장한은 갑자기 돼지 멱따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중인들은 그 광경에 모두 어리둥절했다. 더욱 이상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정말 두 장한은 엎드린 채 개짖는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그래, 자 이걸 물고 그만 사라지게나." 그가 던진 것은 정말 닭뼈다귀였고 두 장한은 입으로 닭뼈다귀를 덥석 받아문 채 낑낑거리며 네 발로 기어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태월아는 누구보다 그 이유를 잘 알았다. 그들이 무릎을 꿇은 것은 반준이 퉁겨낸 밥알에 무릎의 혈해혈(血海穴)과 양구혈(楊丘穴)이 짚혔기 때문이었고 그들이 개 흉내를 낸 것은 반준이 전음을 사용해 그들을 협박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개망신 당하고 도망간 뒤 반준은 소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후후... 아가씨, 어떻소? 이 나으리를 위해 한 곡조 뽑아주는 것이?" 소녀의 눈은 퍽이나 슬퍼 보였다. 그 슬픈 눈이 반준의 눈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이윽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태월아는 평생 그토록 아름다운 노래는 처음들었다. 그리고 그 소녀도 평생 다시 그렇게 잘 부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녀는 노래를 마친 후 엎드려 반준의 발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그녀의 슬픈 눈은 다시 한 번 반준을 쳐다보았고 곧 그녀는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린 후 사라졌다. 태월아는 느꼈다. 소녀는 반준의 눈에서 그가 결코 악인이 아님을 느꼈고, 그를 위해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난 봉사를 했던 것이라고. 진실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며 소녀는 그것을 읽었다. 그것은 애당초 채화공자 반준이 그런 인물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던가? 태월아는 생각한다.


'이 분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인지도 몰라. 다만 이분의 지금 모습은 자신의 그런 면을 감추기 위함이 아닐까? 아니면 당금 무림이 한 인간의 마음을 그렇게 만들었단 말일까......?' 채화공자 반준. 그는 종잡을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때로는 그런 태월아의 마음을 여지없이 짓밟아 놓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의 행동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었고 그에 대해서는 안심을 할 수도 없었다. 주점에서의 그런 행위와 정반대의 일도 거침없이 그는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정말 정말 기가막힌 일이었다. 생각만 해도 그녀는 얼굴이 화로처럼 달아올랐고 화가났다. 반준은 또다시 한 주점에서는 안주가 신통치 않다고 화를 냈다. 그리고 점원의 따귀를 때리더니 그를 거꾸로 천정의 대들보에 매달았다. 주점 주인이 놀라 달려나오자 그는 주인마저 거꾸로 매달았다. 일대 소동이 일어난 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었다. 더욱 기막힌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반준은 안주가 형평없는 이유는 주인의 마누라 탓이라고 욕을 한 뒤 주인에게 당장 마누라를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마지못해 안채로 들어간 주점 주인의 노성이 들려왔다. 알고보니 그 시간에 그의 부인은 체구가 건장한 외간사내와 정을 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반준은 연신 조소를 입 가득 베어물고 있었다. 마침 잘 되었다는 듯 그 두 남녀를 끌고 와 킬킬거리며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겨 천정에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안주라도 삼은 듯 쳐다보며 흡족해 하며 술을 마셔대는 것이 아닌가? 태월아는 도저히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눈앞에 남녀가 그것도 발가벗겨진 채 거꾸로 매달려 있는 광경을 처녀인 그녀가 어찌 볼 수 있겠는가? 태월아는 그만 그 주점을 뛰쳐나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천우는 연방 웃어대었다. 그녀는 그 일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싫었다. 더구나 반준은 쉴 새 없이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음담패설을 지껄이고 있었음에라! 마차는 계속 남하했다. 태월아는 여전히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태월아야, 너는 정말 이 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니?' 잠든 천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여인이었다. 두 볼에 가득 홍조가 피어 있었고 야속함에 맑은 눈동자엔 물기가 맺혀 있었다. 천우는 처음부터 손바닥 들여다 보듯 환하게 그녀의 심중을 읽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월아, 그대는 비로소 자신으로 돌아왔군. 그래, 후후... 허위와 가식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그대는 잠시 자신을 잃어버렸던 것 뿐이야. 월아, 처음부터 나는 그대가 까마귀가 아닌 흰 비둘기임을 알았거든.' 두 사람은 호북성(湖北省)에 접어들 때부터는 묘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이제 봉황성에 닿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봉황성은 황산(黃山)에 있다. 정도제일지(正道第一地) 봉황대성(鳳凰大城), 가까이 다가갈수록 두 사람은 각기 자신의 생각에 파묻혀 갔다. 태월아는 태월아대로, 천우는 천우대로. 21 장 까마귀와 공작(孔雀) ① 봉황성(鳳凰城)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고 그 영향력은 전 정도무림(正道武林)의 대들보였다. 황산(黃山) 시진봉(始眞峯)에 세워진 봉황성의 규모는 장관이었다. 성벽의 둘레만 해도 근 십리가 넘으며 웅장한 건축물들은 황금 장식을 한 고루거각들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황금성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이십 년 전 정도무림인들이 백세축원의 충정으로 축조하여 현 무황(武皇)인 단목신수에게 헌상한 것으로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증축이 가해져 그 규모는 황성과 버금갈 정도로 방대해졌다. 외성(外城), 내성(內城)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내성의 규모만해도 하루종일 걸어도 그 끝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성벽 주위에는 호보하(護堡河)가 깊게 파여져 있었고 그 넓이는 이십 장, 그 깊이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봉황성은 당금무림의 최후의 보루였다. 궁지에 몰린 중원정도무림이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고 있는 보루로써 최근 들어 십대문파를 비롯한 정도인들이 속속 봉황성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외성(外城)에 배치되었다. 내심은 봉황성주의 봉황성의 고수들이 상주했다. 봉황성은 나날이 비대해져 갔으며 중원무림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끼이익--! 이십 장 길이의 거대한 목교(木橋)가 성루로부터 호보하를 가로질러 내려졌다. 마차(馬車)는 서서히 목교를 타고 활짝 열려진 성문을 향해 굴러갔다. 마차 안에는 천우와 태월아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긴 여로 끝에 봉황성에 닿은 것이었다. 천우는 목교 중간지점 쯤에서 힐끗 검푸른 색을 띈 호보하를 마차 주렴 밖으로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물 속에 식인괴어(食人怪魚)들이 득실거리는 걸 보니 꽤나 신경을 썼군......." 그 말에 태월아는 깜짝놀라 물 속을 살펴 보았지만 식인괴어 따위는 한 마리도 볼 수가 없었다. "호보하 속에 식인괴어가 있다는 소린 처음 듣는 말이데요?" "후후... 그럼 성주가 거금을 들여 식인괴어를 배치한 것을 아무도 모른단 말이군." "정말... 인가요?" "정말이 아니면 시험 삼아 한 번 발을 담구어 보아도 좋지. 아마 일각도 채 못되어 뼈만 남을 걸? 후후... 이런 놈들은 황소라도 삽시에 뼈만 남기고 물어 뜯는 악귀들이거든." "......!" 태월아는 등골이 싸늘함을 느꼈다. 그의 말이 결코 거짓이거나 과장이 아니라고 믿었다. 어느 새 그녀는 그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믿게 된 것이었다. 마차는 이윽고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에는 양쪽으로 백색무복을 입은 고수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십대문파에서 봉황성의 수호를 위해 보내온 젊은 고수들이었다. "영패(令牌)를 보이시오!" 힘찬 음성이 들렸다. 마차는 멈추었고 태월아는 품 속에서 하나의 금패(金牌)를 꺼내어 내밀었다. 마차 곁으로 한 명의 청년검사가 다가와 포권했다. 그를 본 순간 천우는 자신도 모르게 내심 중얼거렸다. '이곳에서 만나는군. 후후... 재미있게 됐군. 형산파(衡山派)의 차기 장문인감이 한낱 문지기라......?' 청년검사. 그는 몹시 강직해 보이는 삼십대 청년이었고 허리에는 드물게 보이는 고검(古劍)을 차고 있었다. 바로 형산파의 대제자 진혼검(震魂劍) 해대웅(海大雄)이었다. 그가 찬 고검은 바로 장문인이나 지닐 수 있는 축융신검이었다. 해대웅은 봉황이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는 금패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곧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외쳤다. "통과!" 그가 손을 흔들자 대열이 일제히 검을 뽑아 하늘을 향해 치켜세웠다. 그것은 무인으로써의 최대한의 경의표시였다.


"호호호... 수고해요. 해대협(海大俠)!" 태월아는 금패를 회수하며 간드러지게 말했다. 이윽고 마차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천우는 중얼거렸다. "대단한 위세로군. 한낱 금붙이에 이런 대우라!" "호호... 이것을 보통 물건으로 생각하면 오산이예요. 봉황금패는 오직 네 개밖에 없는 것으로 아가씨와 세 분 왕야(王爺)께서만 가지고 있어요. 성주께서 직접 현신한 것이나 다름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어요." 천우는 다시 중얼거렸다. "십대문파가 봉황성의 하인 노릇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걸." "호호... 반공자님은 본성의 위대함을 차츰 깨닫게 될 거예요." 태월아는 전처럼 그를 반랑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 속에 그는 하나의 거산(巨山)으로 떠올라 있었으나 더욱 그를 대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진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봉황성이 아닌가? 외성을 통과하는 동안 천우는 많은 정도문파의 고수들을 보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백의를 입고 있었는데 눈빛이나 거동이 예사롭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정도의 정예고수들이 분명했다. 그들은 마차가 지날 때마다 걸음을 멈추며 깎듯이 예를 취하는 것이었다. 성문에서 해대웅이 마차 난간에 조그만 삼각기를 꽂아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깃발을 신물인양 헌신적인 예를 취하는 것이었다. 삼각기는 금색 바탕에 흰 봉황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은 당금 무림의 하늘인 무황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내성을 통과하는 데도 별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천우는 확실히 내성의 분위기가 외성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우선 내성을 지키는 수비무사의 강렬한 눈빛과 그들의 신중하면서도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발걸음에서 그들이 무서운 내가무공의 소유자들이라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봉황성에 감돌고 있는 정도의 기백은 가히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그것은 정도무림의 희망이고 최후의 보루인 봉황성에 대한 무림인들의 기대와 바람의 결집이었다. 천우가 남하하면서 보고 겪은 지옥삼겁천에 의해 유린된 중원무림의 비참하고 암울한 절망의 기운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같이 정도무림의 앞날을 걱정하며 자신들의 무공을 극성으로 연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성문을 지키는 자는 황의(黃衣)를 입고 있는 오순 가량의 뚱뚱한 노인이었다. 얼굴은 둥글고 약간 천진하게 생겼으나 그의 눈은 마치 하나의 빛을 발하는 구슬 같았다. 봉황금패를 받자 그는 곧 무릎을 꿇었다. "봉황령을 받드오......!" 이어 그는 문루의 무사를 향해 손짓을 했다. 순간 무사는 타종(打鐘)했다. 뎅! 뎅! 뎅......! 도합 일곱 번의 타종음이 은은하게 울려퍼졌다. "호호... 고마워요. 황단주(皇壇主)!" 태월아는 금패를 돌려받고 다시 마차를 출발시켰다. 어느 정도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전음으로 말했다. 그녀는 봉황성에 들어온 이후로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이미 천우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극락쾌활림에서 보여준 그의 무공은 고강하기는 하나 봉황성의 삼왕의 무공에는 뒤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봉황성에는 성주(城主) 아래로 삼왕(三王)이 있고 오전(五殿)이 있으며 십단(十壇)이 있어요. 오전주(五殿主) 아래에는 각각 삼대각주(三大閣主)가 있고 십단(十壇) 아래에는 칠향주(七香主)가 있죠.


이것이 본성의 구조이긴 하지만......." 그녀는 신미한 미소를 배어물며 덧붙였다. "어쩌면 그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할지도 몰라요. 그 밖에도 성주 직계의 비밀조직이 있을뿐 아니라 삼왕은 삼왕대로 자신들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니까요." 천우는 성의없게 들으며 빈정거렸다. "그러고 보니 봉황성은 온갖 잡세들이 모여있군. 한 마리의 봉황을 둘러싸고 모두 광대가 되어 있군." "공자......!" 태월아는 그의 말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런 말을 함부로 입밖에 내지 마세요. 공자는 이미 봉황성 내에 있다는 사실을 잊었나요?" 천우는 히죽 웃었다. "나 반준이 겁을 먹을 줄 안다면 그건 너무 나를 우습게 보는 거요. 월아!" "어쨌든... 그들을 적을 만드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되잖아요?" "후후... 그건 그들에게 해당되는 일이지. 나를 적으로 삼으면 그들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을 테니까 말이야. 하하핫......!" "당신이란 분은 어쩜......!" 태월아는 기가 막혀 더 이상 말을 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웅대한 대전과 고루들 사이로 깊숙이 들어갔다. 드디어 천우는 야망이 숨쉬고 있는 거대한 집채 봉황성의 본전(本殿)으로 깊숙이 들어온 것이었다. 뜨거운 물로 긴 여독을 씻어내고 편안히 의자에 앉아 있을 때 태월아가 들어왔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에게는 어떤 옷이든 아주 잘 어울리는군요." 천우는 일신에 유백색 단삼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단정한 차림은 그의 준수한 용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실상 천우는 채화공자 반준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본래의 얼굴은 아니었으나 그의 역용술은 가히 전설적인 것이었다. 천면환마(天面幻魔) 구양충. 칠십 년 전의 무림의 골칫거리였던 천면환마의 역용술은 인피면구나 역용구를 사용하는 흔한 것이 아니라 공력으로 근육을 이동시키는 특이한 것이었다. 따라서 피부색과 움직임이 극히 자연스러워 그 누구도 결코 역용사실을 간파할 수가 없었다. 실상 신안쌍천비공 굉천이 그의 역용을 간파한 것은 그 당시만 해도 천우의 역용술이 능숙치 못한 탓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자유자재로 역용술을 구사할 수가 있었다. "성주께서는 오늘 밤 이경쯤에 공자님을 만나실 거예요." 태월아의 말에 천우는 투덜거렸다. "꽤나 절차가 까다롭군. 사실 나는 형식적인 것은 딱 질색이야." 그는 의자에 벌렁 등을 기대고 누워버렸다. "그럼 그때까지 잠이나 자 둘까?" 태월아는 그의 그런 무심한 태도에 무척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우리는 자주 볼 수 없을 거예요." 천우는 히죽 웃었다. "그거 잘 되었군. 월아는 내가 지겨울 테니까 말야." "정말 그런 말밖에... 못하시나요?" 문득 그녀의 눈시울이 젖어든다. 하나 천우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원래 나란 놈은 말이야, 잠이 많아서... 월아, 또 볼 수 있을 거야. 아함!" 천우는 곧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야속한 사람! 그러나 명심해 두세요. 삼왕을 조심하세요. 그들은 결코 당신을 달갑지 않게 여길


테니까요. 그들은 무서운 분들이거든요. 당신이 예전처럼 방약무인하게 굴면 당신이 다칠지도 몰라요." 그녀는 천우가 듣거나 말거나 말을 마친 후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리고 그의 곁으로 걸어가 머뭇거렸다. 이어 그녀는 결심한 듯 입술을 살며시 천우의 이마에 대었다. "당신은... 정말 얄미워요. 그러나 월아는 당신을 미워할 수가 없어요." 그녀의 뺨에서 이슬이 한 방울 떨어져 천우의 눈 위에 떨어졌다. 옥루(玉淚)는 천우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럼...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태월아는 아쉬운 듯 몇번이고 뒤돌아보면서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간 직후 천우는 눈거풀이 젖은 것을 손으로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월아, 내 생각에는 말이야... 그대는 이곳 인간이 아니란 말씀이야. 어디 평화로운 어촌(魚村)에서 눈빛이 선하고 팔둑이 굵직한 젊은 어부를 골라 시집가는 것이 좋겠어." ② 회랑(回廊). 그것은 길고도 어두웠다. 기나긴 회랑을 걸어가는 동안 천우는 좀체로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힘이 들었다. 중년 관사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장앞 서 걷고 있었다. 몇 개의 크고 작은 대전을 돌아 좀 더 은밀한 곳으로 그들은 들어갔다. 봉황성은 적요에 휩싸여 있었다. 회랑을 지나는 동안 천우는 그 시간이 자신이 태어난 이래 가장 긴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다.이윽고 회랑이 끝나자 화원이 나타났고 잘 손질된 화원이었으나 겨울이라 꽃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의 화원은 적막하다 못해 음산하기까지 했다. 화원 사이로 난 길도 꽤 길었다. 천우는 그 청석판이 깔린 길에서 전신의 피부를 찌르는 듯한 살기를 느꼈다. '무서운 매복이다. 풀 한 포기, 나뭇잎 하나 마다에 가공한 살기가 느껴진다. 최소한 백 명 이상의 고수들이 숨어 있다. 더욱 가공한 것은 그들이 전혀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그 화원은 보통 화원이 아니었다. 일종의 죽음의 길이었다. 단목신수는 자신 외에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런 그의 주위에는 항상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심지어 그는 수십 개의 침실을 사용했으며 침실마다에는 역용을 한 똑같은 단목신수가 잠을 잔다. 그 중 어느 누가 진짜 단목신수인지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그는 철저히 은폐된 생활 속에 묻혀 있었다. 설사 그의 세 제자인 봉황삼왕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상대하고 있는 단목신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정도였다. 화원을 지나자 천우는 전신에 식은 땀이 배어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중년 관사는 줄곧 말도 없이 그를 안내하기만 했다. 그는 좀 이상한 위인이었다. 처음 그가 천우에게 왔을 때 천우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혹 그가 인피면구를 쓰고 있지 않나 생각할 정도였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마디밖에 하지 않았다. "따라 오시오." 천우는 곧 그가 단목신수가 보낸 사람임을 느꼈고 두 말 없이 따라 나섰다. 중년 관사는 무표정한 얼굴에 아무런 빛도 없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아무런 특성도 없는 인간이었으므로 마치 시체를 보는 듯했다. 하나 천우는 그가 상상도 할 수 없이 고차원적인 무공의 소유자임을 직감했었다.


연못이 나타났다. 화원 한 가운데 있는 연못은 인공(人工)으로 된 것이며 그 가운데 정자가 있었다. 정자로 통하는 길은 연못으로 연결된 나무로 만든 구름다리였다. 구름다리에 첫 발을 딛는 순간 천우는 다시 한 번 전율을 느꼈다. '이 운교(雲橋)에는 최소한 백 여덟 개의 기관함정이 있다. 정말 치밀하고 무서운 안배로구나......!' 슬쩍 연못을 내려다 보던 천우는 또다시 한기를 느낀다. 언뜻 보기에 연못은 평범해 보였으나 그는 그 연못들이 무서운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느꼈다. 한천중수(寒天重水). 그것은 비중이 보통 물에 비해 천 배나 더한 것으로 일단 그 속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이 동물이건 식물이건 빨아들인다. 독수(毒水)보다 훨신 위험한 물인 것이다. 목교를 건너는 동안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묵묵히 정자 안으로 들어갔다. 정자 속. 지극히 간단한 구조였다. 정자 한 가운데에 석탁(石卓)이 하나, 그와 마주보는 위치에 역시 석의자가 두 개 놓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정자에 오른 후 천우는 의아한 듯 물었다. "성주는 어디에 계시오?" 그 말에 중년관사는 담담히 말했다. "이미 와 있네." "......?" 천우는 흠칫 놀라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나 없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와 중년관사 외에는 사람은 커녕 개미 한 마리 없었다. "우선 앉게." 중년 관사는 이제까지와 달리 그에게 하대를 했다. 천우는 개의치 않는 듯 두 팔을 슬쩍 들어 보인 후 앉았다. "좋소!" 그러자 중년 관사는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는 것이 아닌가? "......?" 천우가 의아한 눈을 크게 뜨자 담담하고 유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바로 단목신수네." "......!" 천우는 그야말로 온몸에 소리없이 비수가 박혀드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당... 당신이... 봉황성주란 말이오?" "그렇네." 중년 관사. 즉 신단기성(神壇奇聖) 단목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우는 너무도 놀라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약 일다경이 흐른 후에야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어쩐지 일개 하인치고는 지나치게 무겁다 했지......." 그는 곧 몸을 일으켜 간단한 예를 표했다. "불초 채화공자 반준 성주께 인사드리오." 지금 그의 예법은 일반적인 상례에 벗어난 것이 아니라 거의 무례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봉황성주가 누구인가? 그는 당금무림의 하늘이요, 신(神)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무림인이라면 당연히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대례를 치뤄야 마땅한 일이다. 한데 간단한


공수(空手)의 예만을 취하는 천우의 행위는 지극히 오만불순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목신수는 손을 내저었다. "허례는 그만 두게." 천우는 무형의 부드러운 기운이 전신을 가볍게 끌어올리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는 번뜩 영감이 떠올라 지그시 힘을 주었다. 단목신수의 좀체로 변한 것 같지 않은 안색에 가벼운 동요가 어렸다. 천우는 예를 마친 후 히죽 웃으며 말했다. "성주의 예측할 수 없는 변화와 깊은 심기에 감탄했소이다." 단목신수는 신광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물처럼 담담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가영으로부터 자네에 관한 소식을 들었네. 무간동에서 큰 활약을 했다고......." "후후... 단지 장난을 좀 쳤을 뿐이지요." "그런가? 어쨌든 자네 같은 인재를 만나게 되어 기쁜 생각이 드는군. 노부는 천하의 인재를 모으는 것이 낙이라네." 천우는 벙글거리며 말했다. "봉황성 내엔 구름같이 까마귀떼가 몰려 있던데 성주님께서는 그 중에서 얼마나 많은 인재를 발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도의 기라성 같은 기인고수들을 한낱 까마귀에 비견하다니 실로 오만한 말투였다. 그런데 단목신수는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까마귀 속에는 반드시 공작 같은 귀한 새도 한 마리쯤 섞여있기 마련이라네. 예를 들면 바로 자네 같은 경우가 아닐까?" 그 말에 천우는 히죽 웃었다. "불초가 공작이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 그 말에 단목신수의 얼굴이 미미하게 변했고 물같이 담담한 눈에서도 일순 섬광 같은 찰나적인 광채가 거짓말처럼 솟았다가 꺼졌다. ③ "......!" 천우는 문득 온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온몸의 자유(自由)를 잃고 만 것이었다. 갑자기 의자의 팔걸이에서 은사슬이 솟아 그의 두 팔을 묶었고 허리도 하나의 은사(銀絲)가 한 바퀴 휘감았다. 뿐만 아니라 발목에는 무엇인가가 감겨지는 느낌이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는 피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가슴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만년한삭(萬年寒索)으로 만든 포승줄이었다. 물론 그의 호신강기로 쉽게 끊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마음속에 어떤 암계가 벌써 세워져 있는 듯 짐짓 낭패스런 표정을 지으며 단목신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단목신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자네는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는 태연히 말하고 있었다. 마치 천우의 처지는 그 자신의 뜻과는 관계가 없다는 듯이 그는 천우에게 등을 보이고 서서 말했다. 천우는 쓴웃음을 웃었다. "이렇게 제압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단목신수는 빙그레 웃었다. "때로는 그런 유치한 수법이 가장 효과적일 때도 있는 법일세." 이어 그는 천우를 지긋이 내려다 보며 말했다. "극락쾌활림에서 온 자네이므로 이곳이 어떤 곳이며 노부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네."


천우는 히죽 웃었다. "그것은 불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네의 정체는 무엇인가?" 단목신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자 천우는 이상하다는 듯 되려 반문했다. "정체라니요?" "감추려 해도 소용없네. 노부는 전 무림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부하네. 현무림에서 자네같이 강한 청년을 키울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흔하지 않지." "불초를 높이 봐주어 감사합니다만......." "자네의 사부는 누군가?" 천우는 고개를 저었다. "사부는 없습니다." "그 말을 믿을 것 같은가?" "하하... 믿지 않으려면 도리가 없읍니다만 어쩌겠소이까? 그럼 거짓을 말하라면 하겠소이다. 나의 사부는 장자(莊子)......." 단목신수의 물같이 담담하던 눈에서 불꽃이 퉁겼다. 순식간에 그의 우수(右手)가 수평으로 뻗었다. 펑! "윽!" 천우는 손발이 묶여 있으므로 그에 항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호신강기를 펼칠 수조차 없었다. 단목신수의 일격에 격중당하자 그는 가슴이 으깨어지는 듯한 충격과 고통을 느꼈으며 그 순간 입으로 한 사발의 핏덩이를 토해내고 말았다. 무황의 일장(一掌). 그것은 보통 고수의 장과는 다르다. 그의 일장은 만년강모(萬年鋼毛)라 해도 단숨에 가루로 만들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천우는 호신강기를 순간적으로 끌어올렸으나 장력을 맞는 순간 곧 그것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단목신수는 그런 인물이었다. 일단 마음을 먹으면 경고 따위는 하지 않으며 죽이고 싶으면 그저 죽일 뿐이다. 이제껏 그의 뜻이 어긋난 적은 없었다. 처음 단목가영으로부터 전서를 받았을 때 그는 채화공자 반준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었다. 누구나 그와 동류의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일종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를 대한 순간 그는 은근히 분노가 치밀었다. 자신은 천하제일인이다. 그런데 새파랗게 젊은 반준이라는 작자는 도대체가 안하무인이지 않은가? 그는 살기를 느꼈고 무정수(無情手)를 발출했다. 그것으로 그를 죽이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녕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헉...! 저것은...!" 천우의 가슴은 짓이겨져 있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뭉개졌고 옷자락은 가루가 되었다. 피와 살점으로 뭉개진 앞가슴에서 푸른 빛을 발하는 구슬(珠) 하나가 그의 시선을 끄는 것이 아닌가? "천(天)... 목(木)... 신주(神珠)......." 단목신수는 마치 낙뢰에 얻어맞은 것처럼 전신이 뻣뻣해졌다. 그리고 지체없이 그 자리에서 몸을 던지듯 신형을 날렸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었던 그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문(家門)의 수백 년 동안 축적되었던 야망의 화신(化身)이 되도록 강요받았다. 제왕현수신가(帝王玄水神家)는 그의 탄생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제왕(帝王)이 되어야 했다. 어린 그에게 강요된 것은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든 것이었다.


정(情)을 버려야 했다. 어릴 적부터 그는 모든 것을 배웠다. 무공(武功). 병법(兵法). 계략(計略). 기관술(機關術). 용병술(用兵術). 그가 가장 고통을 느낀 것은 무정(無情)을 배우는 일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자라면서 배웠다. 오 세 때 그는 살인(殺人)을 했다. 그의 부친은 그의 손에 거치도록 들려주고 부친이 보는 앞에서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다섯 살의 소동은 울면서 한 사나이의 목을 내리쳤다. 한 번에 목을 끊지 못한 그는 수십 번을 내려쳐야만 했다. 일곱 살 때 그는 홀로 사창가에 버려져야 했다. 그로부터 열 두 살때까지 그는 사창가에서 벌레만도 못한 삶을 배우고 체험했으며 열 살 때 동정을 늙은 창녀에게 빼앗겼으며 그 다음날 그녀를 죽였다. 그 동안 그가 상대한 창녀는 모두 죽었다. 열 다섯 살 때에는 동영(東瀛)으로 건너가 동영 인자마교(忍者魔敎)에 입문(入門)했다. 인자마교에서 인자술(忍者術), 은둔술, 잠입, 추적, 수백 가지 살인술을 익힌 그는 십 팔 세때 인자마교의 교주와 그의 일가를 몰살시킨 후 다시 중원으로 건너왔다. 제왕현수신가에 돌아온 그는 비로소 가공(家功)을 전수 받았으며 또한 만권경서(萬卷經書)를 읽었다. 이십 오 세 때 그는 얼굴 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야망의 길을 걸었다. 중원무림에 처음 출도했을 때 그는 네 명의 기재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과 함께 그는 그 시대 최고의 기재로 일컬어졌다. 천중오정(天中五鼎)이란 칭호는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독보인(獨步人)이 되어야 했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어야 했다. 그는 자신이 배우고 익힌 모든 수법을 총동원했고 마침내 그는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다. 한데 무정(無情)하던 그의 얼음심장이 단 한번 꼭 한번 뜨거운 정열로 녹아버린 적이 있었다. 여인(女人).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여인을 보는 순간 그의 얼음심장은 여지없이 타올랐고 그의 사라졌던 얼굴에는 표정이 되살아났다. 십지천화(十地天花) 송문연(宋文燕). 천중오정의 일원이었던 그녀는 그의 생의 꿈이자 모든 것이었다. 네 명의 기재는 모두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야심도 그는 이룰 수 있었다. 그가 천하제일인이 된 후, 그는 십지천화를 아내로 맞이한다. 그러나 그것이 상상치도 못했던 엄청난 비극을 불러 일으키게 될 줄이야!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십지천화가 미쳐버린 것이다. 그의 핏줄을 잉태한 채 그녀는 미쳐버린 것이다. 그는 그래도 그녀를 사랑했고 자신의 핏줄과 그녀를 위해 천하를 이잡듯이 뒤져 고금의 영약기초란 것은 모두 구해 그녀에게 복용시켰다. 뱃속의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고, 그가 태어나면 천하제일의 기재가 될 것은 틀림없었다. 한데 사라진 것이다. 십지천화는 출산일을 불과 한달여 남기고 돌연 광기(狂氣)가 격발되어 무사 오십여 인을 죽이고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수천 수만의 고수를 풀어 천하를 이잡 듯이 뒤졌다. 그런데 바다에


빠진 바늘이기라도 한 듯 그녀와 그녀가 출산했을지 모를 그의 핏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돌아왔다. 그토록 애타게 찾고 찾았던 자신의 핏줄이 이렇게 바로 자신의 앞으로 스스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단목신수는 격동의 시선으로 천우를 내려보고 있었다. 아방궁을 연상케 할 정도로 화려한 침전. 호화로운 침상에 누워 있었고 그의 가슴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다. 단목신수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천우가 목에 걸고 있는 천목신주를 본 순간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그의 아내 십지천화가 늘상 품고 있던 것이었다. 제왕오대신주의 하나인 천목신주. 그것을 천우가 지니고 있다면 그는 치밀한 인간이었다. 그는 천우 즉, 반준의 피를 찍어 맛보았다. 그 핏 속에는 영약(靈藥)의 신험한 냄새를 느낄 수가 있었다. '오오... 내 아들...! 아들이다!' 그렇다. 과거 그는 십지천화에게 수백 종의 희귀한 영약을 복용시켰다. 그 영약은 태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아이가 태어나면 어미의 핏속에 영약의 기운이 흐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우는 사흘 만에 깨어났다. 눈을 뜬 순간 그는 단목신수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성주, 왜 불초를 죽이지 않으셨소?" 단목신수는 격동을 일으키더니 그의 손을 잡았다. "너는... 너는... 모르겠느냐? 노부가 네 아버지라는 사실을?" "......?" 천우는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성주께서는 사람을 놀리는 각별한 취미가 있으시구료? 후후... 이런 식으로 사람을 끌어 들인다면 성주의 아들은 대체 몇이나 되는 것이오?" 모욕적 언사였으나 단목신수의 얼굴에 분노의 기색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구슬은 너의 것이냐?" 천우는 힐끗 천목신주를 보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그건... 본래 어머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물이오." "그... 그녀는... 아직 살아 있느냐?" 단목신수의 음성이 급격히 떨렸다. 천우는 이상한 듯 물었다. "성주는 모친을 알고 있소?" "사... 살아 있느냐고 물었다......!" "죽었소." 천우의 시큰둥한 말에 단목신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떻게 죽었느냐?" "광증이 재발하여 죽었소." "그녀는... 너에게 부친이 누구냐고 말해주지 않았느냐......?" 천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친은 줄곧 기억을 잃고 있었소. 그녀는 항상 먼 하늘만 바라보는 것이 일이었소." "너는... 누구에게 무공을 배웠느냐?" "모친은 가끔 내게 무공을 전수하곤 했소. 그리고... 우연히 한 산동(山洞) 속에서 기연을 만나 그곳에서 얻은 무명비급(無名秘 )을 통해 나 스스로 익혔소."


"그녀는... 줄곧 혼자 살았느냐?" 천우는 그 말에 히죽 웃었다. "그녀는 몹시 다정다감한 여자였소. 그녀는 한시도 남자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여자였소. 후후... 송령산(松嶺山) 일대의 사냥꾼이라면 그녀와 한 번 자보지 않은 자가 없을 지경이었소." "그... 그게 정말이냐?" 무섭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단목신수는 천우의 거짓말에 흡사 비수로 가슴을 파헤쳐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런 종류의 인간은 자부심이 무척 강하다. 그는 자부심에 큰 손상을 입은 것이었다. 천우는 그의 충격을 받는 모습에 한술 더 떴다. "그녀는 인기가 좋았소. 얼굴이 예뻤을뿐더러 그 방면의 기술도 몹시 좋았던 모양이오. 사냥꾼들은 매일밤 서로 그녀와 자려고 대가리가 터지도록 싸웠으니까......." "그만!" 단목신수의 얼굴에 살얼음이 어린 듯 차가와졌다. "너는... 그 놈들을 그냥 두었느냐?" "후후... 그들은 나의 친구들이오. 내가 채화공자가 된 것도 그들 덕분이오." "송... 령산이라고 그랬느냐?" "그렇소." 천우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원수 단목신수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기 위해 그의 거짓말로 인해 훗날 송령산 일대의 남자란 남자는 모두 처참한 죽음을 당하게 될 줄이야......! 봉황성주 단목신수는 수하들을 시켜 송령산 일대의 사내란 사내는 모두 도륙을 시켜버린 것이었다. "그... 그것이 사실이오......?" 천우는 눈을 크게 떴다. 단목신수는 십지천화가 과거 자신의 아내였다는 것...... 임신을 한 채 미쳐 봉황성을 빠져 나갔다는 사실을 얘기한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네 아비다." "......!" 천우는 너무나 큰 충격에 마치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천부적인 연기의 소질을 타고난 것일까. 그는 너무도 태연하게 단목신수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단목신수는 그런 그를 자애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일장탄식(一長嘆息)을 뱉아냈다. "그간의 일로 너를 탓하지 않으마... 너의 잘못은 아니니까. 너에게 시간을 주마. 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기까지 말이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천우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여전히 큰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듯 멍청한 시선을 천정에 못박고 있었다. 봉황성은 하나의 충격적 사건에 접해 술렁였다. 그것은 봉황성주 신단기성 단목신수가 발표한 전격적인 사실 때문이었다. - 봉황제사왕(鳳凰第四王)의 탄생(誕生). 놀라운 일이었다. 봉황성주에게는 세 제자(弟子)가 있다. 그들을 일컬어 세인들은 봉황삼왕이라 불렀다. 그들은 봉황성의 지주였고, 정도무림을 영도할 세 개의 거목(巨木)이었다. 자면신군(紫面神君) 담세기(覃世奇). 삼절신군(三絶神君) 범고풍(凡古風). 옥수서생(玉手書生) 유세옥(庾世玉).


그들은 정도(正道) 사상 최강의 신진고수들이었다. 자면신군 담세기는 이제 중년기로 접어든 나이로 사실상 봉황성의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었다. 그는 봉황성의 대소사를 단목신수를 대신하여 거의 도맡아시피 처리한다. 정도기인들은 그를 마치 차기 무황으로 예우하고 있었다. 삼절신군 범고풍과 옥수서생 유세옥은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그들은 봉황성의 무서운 행동가였으며 무림에 해결하지 못한 난사(難事)가 발생하면 그들이 출동했다. 이제까지 그들 두 사람이 출동하여 해결되지 않은 일은 없었다. 봉황삼왕은 봉황성의 얼굴이자 중원무림의 미래였다. 그러네 봉황성주는 갑자기 난데없이 나타난 일개 탕아(蕩兒)에게 제 사왕(四王)을 임명한 것이었다. - 채화공자(採花公子) 반준! 그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그의 경박한 언동과 음탕한 행위에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채화공자 반준은 봉황성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그에게 농락당한 여인은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는 점점 정도가 심해져 나중에는 대낮에도 성안의 아녀자들은 반준을 피해 도망을 다녀야 할 판이었다. 정도명문의 소녀들이나 봉황성의 시비들치고 얼굴이 반반한 경우라면 한 번쯤 그에게 둔부를 떡처럼 주물려보지 않은 여인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막상 여인들이 달아올라 그의 허리며 목을 붙잡고 늘어질 때면 어김없이 싸늘한 얼굴로 돌변해 그들의 자존심을 구겨놓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도 반준의 악명은 더욱 극심해졌다. 그를 보이지 않게 사모하는 여인들의 수도 그의 악명만큼 늘어갔다. 그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철없는 망나니 정도로 비쳐질 뿐이었다. 봉황성 내에서는 함부로 반준을 야단치거나 혼을 내지 못했다.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는 타고난 난봉꾼이었다. 그런데 대체 봉황성주는 무슨 마음으로 희대의 탕아를 무림의 희망이자 미래인 봉황사왕야(鳳凰四王爺)로 임명했단 말인가?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을 뿐더러 심지어는 봉황성주의 처사에 불만을 품는 자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감히 그런 일을 드러내 놓고 반박하는 자는 없었다. 무황. 그의 말은 곧 법(法)이기에. 천우는 단목신수의 특별한 배려로 제사왕야가 되었다. 그의 거들먹거리는 모양새는 갈수록 가관이었다. 그는 안하무인이었고 거침없이 지껄여댔다. 그런 그를 단목신수는 자신의 아들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핏줄이라고 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을 위인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천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에게 분명히 말해 두겠다. 너는 노부의 아들이다. 하나 나의 정식 후계자가 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노부에게는 세 제자가 있다. 너를 사왕야로 임명하겠다. 너의 가진 바 능력으로 그들을 누르고 올라설 수 있다면 봉황성과 천하는 너의 것이 될 것이다. 아들아, 그때 나는 너를 정식으로 후계자로 지목함과 동시에 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정식으로 천하무림에 알리겠다." 천우는 사왕야가 된 뒤로 봉황성내에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듯 행동했다. 봉황삼왕은 그의 갑작스런 부상에 처음에는 경계와 질시를 금치 못했으나 차츰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들은 천우에게 다만 경멸만을 느낄 수 있었을 뿐 감히 그가 자신들의 경쟁자라는 생각은 추호도 갖지 않았다. 아무튼 천우는 팔자가 늘어질대로 늘어졌다. 그는 매일 향유로 목욕을 하고 열 두 명의 미녀들에 둘러싸여 생활했다.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고, 허세부리기를 좋아했다. 또한 언제나 화려한 비단옷을 둘렀으며 그가 지나갈 때는 짙은 향수내음이


고수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한달 후. 그는 봉황성 내에서 이름뿐인 사왕야일 뿐 아무도 그를 상대하려 들지 않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 사실은 봉황성주를 실망시켰다. 그는 천우의 일거일동에 대해 한시도 신경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천우가 어디를 가든, 무슨 언동을 취하든, 그것은 낱낱이 그에게 보고 되었다. 그는 마침내 참고 참았던 탄식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게서... 견자(犬子)가 태어났단 말인가?" 22 장 지상(地上)에서 가장 바쁜 인간(人間) ① "너에게 몹시 실망했다." 착 가라앉은 단목신수의 음성에는 은은한 노기가 어려 있었다. 대전은 엄숙한 분위기였다. 천우는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고 단목신수는 태사의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갈등에 사로잡혀 있었다. '저 놈의 뼈(骨)와 피(血)는 상재(上材)다. 그러나 환경이 놈의 뛰어난 기질을 막아버렸다. 안된다. 이대로는 결코 놈을 단목가의 후계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 단목신수는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천우를 향해 말했다. "그 동안 네가 보여준 것은... 고작 그것 뿐이냐?" 버럭 화를 내는 단목신수를 향해 천우는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이곳의 바보 멍청이들은 소자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소자는......." "닥쳐라! 너는 아직 노부의 아들이 아니다." 우우웅! 그의 웅후(雄侯)한 백년 공력이 일시에 뿜어져 나오는 듯한 분노에 찬 외침에 대전이 흔들렸다. 그는 무황으로서의 자존심이 그동안 반준의 천방지축으로 크게 실추된 것이었다. 단목신수. 그가 어떤 인물인가? 그는 극적으로 되찾은 자신의 아들에 대해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나 그 동안 천우가 보여준 것은 그를 실망시키다 못해 분노케 했다. 다시 한 번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용자(龍子)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결과는 어떤가? 수하들의 입으로 전해진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신의 귀와 눈으로 듣고 본 것만으로도 천우는 일개 난봉꾼에 지나지 않았다. 천우에게서 영웅의 자질과 풍모를 기대했던 자신이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결코 쉽게 포기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 자신도 역시 하오문과 창녀촌과 동영의 뒷골목을 떠돌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잡초와 다름없지 않았던가! 천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 "이곳에서는 저의 역량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이곳의 멍청이들은 삼왕만을 받들 뿐 저를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단목신수는 그의 말에 다소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삼왕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길러낸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야망은 자신을 능가하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자신들의 조직을 따로 두고 있을 만큼 봉황성 내에서 그들의 위치란 천우보다 확고한 것이었다. 사왕야의 자리에는 올랐으나 아무런 내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천우는 당연히 필요 이상으로 홀대받을 수도 있었다. 더욱이 천우가 만약 그들 삼왕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판단할 경우 협력하여 천우를 함정에 빠트리려고


할지도 몰랐다. 단목신수는 봉황성 내에서 아무도 신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우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천우는 단목신수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결정체였다. 무수한 영약과 정성으로 잉태된 천우가 아닌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는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천우를 바라보는 눈엔 희망과 근심의 빛이 교차되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강호(江湖)로 나가겠습니다." "강호로?" "후후... 넓은 강호라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소자가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보 같은 자들에게 소자의 능력을 보여 주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그들도 소자를 인정할 것입니다." "으음... 무슨 계획이라도 있단 말이냐?" "강호는 난세가 아닙니까? 난세일수록 영웅은 돋보이게 마련입니다. 다시 회성(回城)하는 날, 후후... 두고 보십시오.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것입니다." 천우는 자신있게 말했다. "믿어도 되느냐?" "훗훗... 기대해도 될 것입니다." 단목신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사자는 자신의 새끼를 절벽으로 밀어 버린다고 했다. 기어오르는 놈만이 새끼로 선택되어 강하게 키운다. 그것은 백수의 제왕이 되어야 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생각을 계속했다. '현 무림의 정세는 곳곳이 위험에 직면해 있다. 놈이 분명치 못하면 결코 살아돌아 올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이놈이 적응해 낸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놈의 공력(功力)과 무공 정도면 어느정도 승산이 있다.' 그는 결정을 내렸다. "좋다. 허락한다. 너는 강호로 나가 마음껏 내키는대로 행동하거라. 이 아비는 기다리겠다." "후후훗... 강호는 몸살을 앓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반준에 의해서 말입니다." 단목신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의 이름은 돌아오는 날 바뀔 것이다. 아비도 생각해둔 이름이 있다." 천우는 히죽 웃었다. "그때 듣겠습니다." "음... 좋을 대로 하라." 단목신수는 이어 차갑게 말했다. "너는 본성에 대해 아무것도 바랄 수 없다. 너의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해내야 한다." 천우는 빙글거렸다. "멍청이들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않았습니다." "좋다, 떠나도 좋다." "오늘 당장 나가겠습니다." "......." 천우가 몸을 돌려 미련없이 대전을 빠져나가자 단목신수는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녀석... 아버지라고 한 마디쯤 할만도 하건만.......' 그날 이후. 봉황성의 고수들은 마치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한 느낌을 맛보았다. 골칫덩이 난봉꾼 사왕야. 그가 출성(出城)한 것이다. 수하 한 명도 거느리지 않고 홀홀단신으로 봉황성을 나갔다. 아무도 그가


나가는 것을 섭섭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천우는 그만큼 그들에게 공포의 존재였던 것이다. 특히 내성(內城)의 소녀들은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불시에 엉덩이를 주물러야 하는 불상사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② 낙양(洛陽). 천년고도의 번화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었다. 무림의 혈겁은 일반인에게는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다만 수시로 벌어지는 대량살인과 방화에 관(官)에서는 골치를 썩힐 뿐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풍문에 들려오는 무서운 얘기거리일 뿐이었다. 천화대숙전(天華大宿廛). 낙양제일의 객점이자 천하제일의 객점은 천화대숙전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최근 들어 천화대숙전은 각종 사업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골동품의 매입과 경매, 무역업에서 심지어는 해운(海運)까지도 손대고 있었다. 낙양인들은 천화대숙전이야말로 천하제일의 부(富)를 쌓은 곳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 대화별원(大和別院). 천화대숙전에서 가장 상원(上院)에 속하는 이곳은 과연 활기와 기쁨에 넘쳤다. 대화별원의 대청에 여러 인물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기쁨과 흥분이 떠올라 있었다. "하하하...! 오랜만이네." 한 가닥 낭랑하명서도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대청의 호화로운 태사의. 그곳에 앉아있는 화삼청년은 바로 천우가 아니고 달리 또 누구이겠는가?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봉황성을 나온 직후 그는 열 여덟 번이나 얼굴을 바꾸면서 그는 미행자를 떨쳐 버렸다. 봉황성주 단목신수는 그의 뒤에 추종술의 영수와 신임하는 내가고수 오명을 따라보내 은밀히 그를 감시하고 보호케한 것이다. 그가 미행을 따돌리고 돌아온 기인총(奇人總)은 상상이상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그것은 기사보(奇士譜)인 이병산(李兵山)의 놀라운 수완 덕분이었다. 천우가 지시한 명령을 모두 그는 수행해놓았을 뿐 아니라 그동안에 천하대숙전의 재산도 다섯 배로 불려놓았다. "하하하... 정말 반갑네." 천우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오랜만에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실로 얼마만인가? 그들과 헤어진 후 그의 나날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비로소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초초는 완연히 성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그가 돌아오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리고 그의 옷을 갈아 입히랴, 음식을 직접 만들랴, 온갖 시중을 드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얼굴에 화사한 화기를 띄운 채 그의 곁에 서 있었다. 대청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기사보 이병산을 위시하여 남천신도에서 온 십무광사(十武狂師) 태을부(太乙夫)도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그 동안 그가 천우의 부탁으로 십무광사가 키워낸 삼십육기인검수(三十六奇人劍手)들과 반가운 미녀들도 있다. 금릉의 도화구(桃花丘) 낙화군방원에서 온 기녀들, 그 중에는 군방사화(群芳四花)도 있었다. 만상화(萬像花). 천문화(天文花).


십전무화(十全武花). 욕망화(慾望花). 그녀들은 여전히 눈부신 미모를 발산하고 있었으나 예전 같은 종이꽃은 아니었다. 천우로 인해 그녀들은 진짜 살아있는 꽃이 된 것이었다. 그밖에도 기사보 이병산의 천거로 기인총에 입총(入總)한 기인(奇人)들과 그들 중 기사위(奇士位)를 받은 기인들은 백 명이 넘었다. 이미 천우는 기사보 이병산으로부터 그들의 명단과 약력을 들은 터였고 만족했다. 모든 것이 흡족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날 밤 대화별원에서는 연회가 베풀어졌다. 천우는 실로 태어난 이래 그처럼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셔보기 처음이었다. 그는 취했다. 마음껏 먹고, 마음껏 취한 것이다. 그는 술잔을 쥐고 쓰러졌으며 그런 그를 부축하여 침상 위로 옮긴 것은 초초였다. 초초는 밤새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놀랄만큼 숙성해 있었고 아름다워졌다. 사랑이 그녀를 그토록 변모케 한 것일까? 그녀는 침상 머리맡에 앉아 밤새도록 천우를 지켰고 불타는 시선은 시종 천우의 얼굴에서 떠나지를 않았으며 그녀의 손은 천우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설삼연자탕(雪蔘蓮子湯)이예요. 어서 드세요. 공자님, 숙취에는 그만이거든요." 천우는 깨어나자마자 감미롭고 달콤한 음성을 들었다. 동시에 향긋한 냄새가 코 끝에 확 풍겨왔다. 초초가 두 손에 김과 향기가 나는 죽그릇을 들고 있었다. 천우는 빙긋 웃었다. "초초, 너는 다 컸구나." 초초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초초는 벌써 큰걸요." "게다가 몰라보게 아름다워졌구나." 초초는 고개를 숙였다. 하이얀 목덜미가 상큼한 육감적으로 천우의 눈에 들어왔다. "웬걸요... 연령언니에 비하면 저는 태양 아래 반딧불인 걸요." 그 말에 천우는 부드럽게 말했다. "너도 연령만 못지 않다." "초초를 놀리시는 건가요?" 초초의 눈에 원망이 서려 있다. 천우는 문득 정색을 하고 말했다. "초초... 연령은 물론 아름답다. 하나 미(美)란 보는 관점에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는 거야. 백합(白合)이 아름답긴 하나 향기가 너무 천박하고, 모란은 고귀한 향기가 없지. 야생화(野生花)는 비록 거치나 그 나름대로의 야성미가 있지. 세상의 꽃이란 꽃은 나름대로의 미를 갖고 있다. 너는 그 이치를 모르느냐?" 그 말에 초초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은 그 동안 언변이 더욱 늘었군요. 그리고 바람둥이가 되셨어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인들을 홀리셨나요?" "하하하...! 글쎄! 초초와 헤어진 후로 나는 줄곧 세상에는 참 값어치 없는 싸구려 꽃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그말... 믿어도 될까요?" 초초의 얼굴에 어떤 열기가 떠올랐다. 그녀의 뺨은 은은한 백향초에 의해 더욱 발그스레하게 보였다.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가히 이제 막 꽃봉오리를 피우는 매화였다.


그녀는 오늘따라 더없이 고혹적으로 보였다. "초초!" "......?" 천우는 초초의 손을 잡아 끌었다. "나는 한시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 왜냐면 그 후 나는 너만큼 좋은 여자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 초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듯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무너지듯 천우의 품속으로 안겨들었다. 그녀의 머리속에는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다. 다만 벅찬 감동과 넘치는 기쁨에 대한 감정만으로 황홀했다. 천우의 입술이 진홍빛 꽃잎 같이 촉촉하게 젖은 초초의 입술 을 눌러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천우의 뜨거운 입술을 받아들이면서 잠시 연령을 떠올렸다. '연령언니... 미안해요.......' 그러나 곧 연령의 얼굴도 그녀의 뇌리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천우의 길고긴 입맞춤으로 인해 그녀는 자신이 거대한 불꽃으로 타오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천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여태까지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보아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초초는 이미 처음 군방원에서 본 그 철부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천우는 초초의 앞섶을 열었다. 천우는 잠시 눈앞이 아찔해져 옴을 느꼈다. 초초는 이미 농염한 여인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에 마른 체구는 색다른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초초의 육봉을 덥석 쥐었다. 그녀의 허리가 전류에 감전이라도 된 듯 꿈틀거렸다. 천우는 익숙하게 그녀의 마지막 고의까지 벗어내렸다. 천우의 뜨거운 손길에 그녀는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초초의 눈에서는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천우는 그녀의 눈물을 받아마셨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조(師組)의 건강은 좋아 보이셨어요." 초초의 말에 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리숙부(萬里叔父)께서 건강하시다니 마음이 놓인다." 황금대총에 있는 만리무외(萬里武外). 그는 천우의 모친 십자천화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인물이다. 천중오정의 인물이기도 하며 동시에 제왕토행신가(帝王土行神家)의 가주이기도 한 만리무외. 그가 바로 자신이 말한 대리화(代理花)의 주인공이었다. 십지천화에게 구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다시 천우의 부친 화령신군 종자백에게 도전했으나 승부를 내지 못하자 잠적했다. 그는 황금대총의 기연을 만나 그곳에 은거하여 스스로 자신의 두 다리를 끊었다.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마왕성의 붕괴소식을 들었다. 실상 마왕성은 그들 천중오정이 마도(魔道)를 묶어두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 결국 화령신군 종자백은 단목신수의 배신과 음모에 희생당했다. 그 소식을 들은 만리무외는 무서운 증오심을 느꼈다. 그러나 복수하기에는 이미 그의 두 다리는 절단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군방원을 세웠고 군방오관을 만들어 인재를 찾았다. 언제고 천하기재를 찾으면 그에게 자신을 대행하여 복수를 꾀하려 한 것이었다. 천우가 그에게 가게 된 것은 천우신조랄 수 있었다. "녹혈림에 침투한 새제갈은?" 천우의 물음에 초초는 대답했다.


"그는 충실히 이행하고 있어요. 그는 천제마검(天帝魔劍)의 환심을 얻어 이미 녹혈림의 군사(軍師)가 되었어요." 새제갈. 그는 이병산과 마찬가지로 군방오관에 들었던 인물이었다. "고루혈사교( ?血死敎)와 녹혈림은 반목하고 있어요. 모두 새제갈의 계책 때문이예요. 조만간 그 두 집단은 크게 충돌할 것이 분명해요." 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제갈의 수완이 놀랍군." 초초는 화사하게 웃었다. "녹혈림은 그의 뜻대로 움직인다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어떻게 그 정도가 됐지?" "호호... 그의 천재적인 병법(兵法)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그가 설단후의 여제자를 사로잡은 것이예요." 천우는 껄걸 웃었다. "미남계(美男計)로군!" "호호... 사실 새제갈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세요?" 천우는 씨익 웃었다. "송옥(宋玉) 쯤 되지 않느냐?" 그 말에 초초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 천우가 어리둥절해 하자 그녀는 한참만에야 웃음을 거두며 이렇게 말했다. "새제갈은 곰보에다 키가 오척에 불과한 추악한 자예요." "그... 그럴 리가!" 천우는 아연실색할 지경이었다. "그럼... 추남계에 넘어가는 여인도 있단 말인가?" "호호... 공자님은 여인의 마음을 잘 몰라요. 여인은 꼭 미남자에게만 마음을 뺏기는 것이 아니예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상대라면 그 어떤 얼굴이라도 상관이 없는 거예요." 천우는 싱긋 웃었다. "그런 경우도 있지. 그런데 새제갈은?" 초초는 약간 숙연해졌다. "그도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해요." 천우는 껄껄 웃었다. "그럼 언젠가 그 두 사람을 성사(成事)시켜 주지." "꼭... 그렇게 해 주어야 해요. 꼭......." 초초의 얼굴에는 진지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일인양 애절하게 천우에게 말했다. 초초는 자신도 천우와 성혼(聖婚)으로 맺어지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문제는 독황교(毒皇敎)예요." 초초의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천우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독수서생(毒水書生)이 실패했단 말인가?" "그는... 현재 독황교의 사대령주(四大令主)의 한 명이예요." 천우는 의아했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는 거지?" "그는 독황교를 다루지 못했어요. 그 이유는... 오독부인(五毒婦人) 때문이예요."


"오독부인?" "오독부인은 만독왕(萬毒王) 묘천(苗天)이 가장 늦게 맞은 부인이예요. 그러나 실제 독황교의 실권은 그녀가 장악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천우는 중얼거렸다. "만독왕을 사로잡다니 대단한 여인이군." 만독왕은 여색을 밝히기로 강호에서 그 악명이 높다. 그는 한 번 취한 여자는 두 번 다시 보지 않는다. 그런 그가 오독부인을 보자 과거의 추잡한 오명을 씻고 그녀를 수제자로 받아들이고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후 여자 문제에 있어서만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문득 초초는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독부인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독황교도 자연히 포섭할 수 있어요." 천우는 장난기 가득한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녀를... 유혹하란 말이냐?" "바로 맞추셨어요. 그녀는 독황교의 실제적 교주나 다름없어요. 지금 그녀는 늙은 만독왕에게 실증을 내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요. 이럴 때 그녀 앞에 젊고 영준한 미남자가 나타나면......." 천우는 싱긋 웃었다. "초초, 나더러 미남계를 쓰라는 것이냐?" "호호... 그래요. 이번에는 추남계가 아니라 미남계죠." "도대체 그녀는 혹 추녀가 아니냐?" 천우의 불안한 질문에 초초는 생긋 웃었다. "안심하세요. 그녀는 정말 아름답고 매력적이예요. 아마 공자님께서 한 눈에 반할 거예요. 나이가 약간 많은 게 흠이긴 하지만요." 천우는 히죽 웃었다. "모르는 소리마라. 여자란 나이가 많을수록 더욱 익어있는 법이다." "호호... 그런 말 나오실 줄 알았어요. 하나 그녀는 이제 삼십 육 세에 불과해요." 천우의 얼굴이 어지럽게 일그러졌다. "한참 누님뻘이군." "호호... 그러나 겉으로는 이십 사오 세 정도로밖에 안 보이죠." 천우는 초초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이미 계획을 세운 듯하구나?" "호호... 모두 준비가 되었어요. 공자님께서는 그저 악양으로 출발하시기만 하면 되요." 천우는 섭섭한 듯 투덜거렸다. "제기랄! 벌써 내쫓는 것이냐?" 초초는 생긋 웃었다. "공자님께선 기인총주라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죠. 오독부인은 기인총에서 꼭 필요한 존재예요." "알았다, 알았어." 천우는 손을 흔들었다. "참! 한 가지 주의할 게 있어요. 그녀는 남자를 혐오하는 습관이 있어요. 초초는 공자님께서 그녀에게 너무 깊이 빠지지나 않을지가 걱정이에요." 그 말에 천우는 히죽 웃었다. "그래? 후후... 그거 재미있군." "아마 보통 방법으로 안 통할 거예요." 천우는 빙긋 웃었다. "두고 보렴. 초초!"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이어 초초는 그에게 여러 가지 무림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그 중 천우는 녹혈림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초초는 현재 녹혈림의 림주인 천제마검(天帝魔劍) 설단후(泄檀侯)의 신분내력과 그에게 반역하는 자들의 무리는 없는지에 대해 소상하게 보고했다. 천우의 머릿속에는 무림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가 세워지고 있었다. 초초의 말에 의하면 설단후는 부패한 환관과 왕공, 권신들을 반대하는 동림당(東林黨)의 사맹린(史孟麟)과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다는 초초의 말에 천우는 대경했다. 동림당은 만력때 황제, 황공, 훈척, 권신으로 대표되는 대지주집단에 반대하여 새롭게 정치를 개선하고 민생을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무리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당시, 몇몇 대지주들의 토지집중은 이미 유례가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대지주들은 미친 듯이 토지를 겸병하였고, 대다수의 농민들은 잇달아 토지를 잃었다. 그 중에서 더욱더 잔혹한 것은 환관들이었다. 그들은 종종 광산을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토지를 강제로 빼앗고 세금을 함부로 징수해 폭리를 취했다. 그리고 그들의 수하에 거느린 건달들은 민가에 들어가 부녀자를 강간하고 마음대로 죽였다. 이에 집을 잃고 거지로 떠돌거나 관(官)에 대항해 죄를 지은 자들은 모두 녹혈림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주와 염세로 이루어진 집단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힘은 강호에서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당금 중원은 부패한 환관들과 탐욕스런 관리들에 의해 민생(民生)은 극도로 피폐해졌고 오륜(五倫)은 땅에 떨어졌다. 의(義)와 협(俠)은 옛말이 된 지 이미 오래였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중원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강호의 도리마저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곳곳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았고 기아와 질병으로 중원의 하늘에는 죽음의 검은 구름이 한시도 떠나지 않고 드리워져 있었다. 이런 난세에 녹혈림의 존재는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관리들을 제치고 백성들에게 자체적인 힘으로 돌보아주었고 림주는 엄격한 내부규율을 세워 약탈과 방화와 필요 이상의 살인을 철저하게 금하고 있어 삼대 림주에 와서는 녹혈림은 어느새 강호 안팍으로 폭넓은 지지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는 측천환마전을 이용해서 나머지 잔당들을 소탕할 계책도 세워두었다. 이제 남은 것은 지옥삼겁천과 그들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기인총을 떠났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홀홀단신이었다. 초초는 그를 위해 한 벌의 유삼을 마련했다. 그 유삼은 보통 유삼이 아니었다. 피독(避毒), 피화(避火), 피진(避塵), 피사(避邪)의 신비한 효능이 있는 천잠사와 교룡피, 그리고 만년한삼으로 싼 보의(寶衣)였던 것이다. 기인총주 천우. 그는 또다시 장도에 올랐다. 무림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난마같이 얽힌 무림의 정세는 나날이 위기로 치닫고 있었고 중원무림은 풍운 속에 부침(浮沈)하고 있었다. 붉은 휘장이 위풍당당하게 드리워져 있는 내전 안. 거대한 태사의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한 인영의 손엔 일장오척의 금환삭편(金幻索편)이 가지런히 말려져 있었다. 금환삭편(金幻索편). 천축의 소뢰음사(小雷音寺)의 전대 기인 불영패장(佛影貝掌) 마소소(磨笑燒)의 이대신물 중 하나로 그 마명(魔名)이 서장뿐 아니라 황실까지 전해질 정도로 독랄하기가 만병(萬兵)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의 일신에서 풍겨나는 예기가 내전 안을 가득메우고 있었다. 그의 범상치 않은 기골과 형형한 안광은 그가 당금 무림에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효웅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바로 녹혈림의 림주 천제마검(天帝魔劍) 설단후(泄丹侯)였다. "허허, 이게 몇 년 만이냐?" 설단후는 반가움에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호호, 오라버니도 그동안 무공이 더 고강해지셨군요." 설단후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바로 군방원의 만지화였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오누이였단 말인가? "네가 보낸 전서구는 이미 받았다. 주군을 무척 흠모하고 있더구나. 천하의 만지화가 한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리라고 이 오라비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거늘......." 그의 얼굴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몇 년만의 상봉인데 얼굴을 보자마자 이렇게 놀리기부터 할 건 가요? 호호......." "하하... 얼굴이 빨개지는 걸 보니 사실인가 보구나. 하하하......." 만지화는 할 수 없다는 듯 뾰루통해져서 쏘아부쳤다. 그러나 설단후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자꾸 그러시면 소매는 그만 돌아갈래요." 내실. 용린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윽한 향기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설단후와 만지화는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부친은 십오 년 전 환관 주철웅(周鐵雄)에 의해 죽임을 당한 무영총령(武營總領) 설강표(泄鋼彪)였다. 역적으로 몰려 졸지에 부친을 잃고 가족이 모두 몰살을 당하게 되었다. 설단후와 만지화는 현숙한 그들의 모친에 의해 두 동생들을 잃고 죽음만은 모면한 채 복수의 칼을 갈며 중원천지를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그러던 중 설단후는 녹혈림의 이대 전주를 만나 지금에 이르렀다. 그리고 만지화는 군방원주 만리무외에게 발탁되어 군방사화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소식이 끊겨버렸다. 설단후는 복수를 위해 무공을 연마하기 위해 잠적했고, 만지화는 그녀대로 복수를 위해 군방원에 눌러 앉은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십오 년을 헤어져 산 것이었다. 그것은 설단후는 녹혈림에 들면서 그의 사부인 이대 림주가 지어진 이름이었다. 그의 원명은 설빈(泄彬)이었다. 만지화 역시 설린(泄 )이라는 그녀의 이름을 잃고 살아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기적적으로 초초에 의해 만나게 된 것이다. 비밀리에 녹혈림과 설단후의 신분내력과 조직을 조사하던 중 자신이 있던 군방원의 사화 중 만지화가 바로 그녀의 누이임을 알아낸 것이었다. ...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뿐인 네 주군을 잘 모셔라. 이 오라비는 조만간 이곳을 떠날 것이다. 녹혈림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전서구를 날리거라. 내 수하들이 목숨을 내놓고 그의 일을 도와줄 것이다. 그럼 태평천하에서 만나자. 만지화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두 오누이가 헤어진 이후 설단후가 겪은 갖은 고통과 외로움에 대해 생각하다 자신도 모르게 설움이 북받친 것이었다. 그녀 또한 만리무외를 만났을 때는 기방에 팔려온 신세가 아니었던가! 그야말로 만리무외와의 만남은 천우신조였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그녀는 아마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천우만을 바라보게 된 것이었다. 그녀 외에도 삼화가 모두 천우를 사모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눈이 보이지 않는 십전무화의 사랑은 그녀가 생각해도 너무도 지고지순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며 평생 천우 곁에서 사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여기게 되었다. ③


악양(岳陽). 수로교통(水路交通)의 요지이자 그 풍물의 수려함은 강남(江南)을 대표한다해도 지나침이 없다. 중원오대호(中原五大湖)의 하나이자 가장 크고 아름다운 호수인 동정호(洞定湖)를 끼고 있는 악양은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찬탄의 대상이다. 만경창파의 벽해처럼 푸르고 맑은 동정호 호변에 세워진 황학루(黃鶴樓)의 절경을 모르는 자가 있을까? 중원의 명소 중에서도 황학루는 손가락에 꼽히고도 남음이 있음은 당연지사다. 어느덧 강남(江南)은 춘색(春色)에 물들었다. 길고 지루하던 겨울은 말끔히 그 잔재를 거두었다. 강남의 봄(江南之春)은 곧 도원경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수향(水鄕)이기에 곳곳에 물이 있고 낮은 구릉과 들판에는 온통 푸르른 수림과 만가지 꽃이 강남의 절경을 환상적으로 끌어 올린다. 선남선녀는 손에 손을 잡고 동정호에 나들이 나와 정담을 나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에는 유람선들이 한가롭게 떠 있었다. 황학루(黃鶴樓). 동정호를 내려다보며 솟아있는 황학루에는 봄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한데 그 중 유난히 눈길을 끄는 사람이 있었다. 미서생(美書生). 그는 일신에 연남빛 문사복을 입고 있는 여인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아름답게 생긴 미서생이었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의 얼굴은 백옥같이 희고 준미했다. 눈은 봉황안(鳳凰眼)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일 듯했다. 미서생은 손에 섭선을 들고 부치며 황학루의 이층 난간에 기대선 채 동정호의 절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약간 호리호리한 체격을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희대의 미서생이었다. 그는 동정호의 경관에 취한 듯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호수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눈은 호수보다 더 크고 맑은 듯했다. "허...! 양귀비 뺨치는 미남인걸?" "내가 계집이라면 발벗고 나서겠어!" 그 말에 미서생은 콧등을 살짝 찡그리며 불쾌한 표정을 잠깐 드러냈으나 곧 다시 동정호를 감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문득 미서생의 곁으로 한 인물이 다가왔다. 유삼 차림의 청년. 그 역시 매우 준수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일신에 걸친 유백색의 유삼이 산뜻하게 어울려 보였다. 하지만 청년의 용모는 미서생만큼 수려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그야말로 남자다운 매력이 물씬 풍겼다. 더욱이 훤칠한 키와 균형잡힌 근육으로 이루어진 그의 몸매는 가히 일품(一品)이었다. 그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허! 세상에 호수같이 아름다운 눈이라는 말은 듣긴 했으나 직접 보기는 생전 처음이로군." 미서생은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 말은 바로 자신을 빗대놓고 하는 말임을 알아 챈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유삼청년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운지고... 만일 조금만 더 키가 컸더라면 천하의 여인들이 다투어 매달릴 텐데......." 빈정대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칭찬하는 것이었을까? 미서생은 아미월 같은 눈썹이 쫑긋 치켜올라 갔다. 그러나 역시 그는 무관심한 듯 그대로 넘겨 버렸다. 유삼청년은 그치지를 않는다. "그래도 내가 만일 여인이었다면 어떻게 해볼 텐데, 쯧......." 이번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미서생의 눈살이 찌푸려지고 말았다.


그는 차갑게 잘라 말했다. "내게 볼 일이 없으면 꺼지시오." 그의 음성은 속삭이듯 낮게 깔렸다. 사내의 음성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옥음이었다. 그의 음성은 타고난 미성(美聲)인 듯했다. 하지만 그 거친 말투는 실로 깜짝 놀랄만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유삼청년의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하하... 형장은 파리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소만 성질은 대단하구료?" 그는 볼상사납게 이죽거리고 있었다. 미서생의 안색은 싸늘하게 굳었다. 이어 그는 냉막한 시선으로 상대를 쏘아보며 말했다. "썩 꺼지지 않으면 이렇게 될 것이오." 그는 섭선으로 슬쩍 난간을 그었다. 치지직......! 난간은 삽시에 시커멓게 타 재가 되고 말았다. 유삼청년은 짐짓 기겁을 한 양 엄살을 부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물러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 그 난간은 이미 썩어 있던 것 같은 데... 어디 나도 한 번 해볼까?" 그는 오히려 미서생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이어 그는 슬쩍 손가락으로 난간을 그었다. 그러자 난간에는 글씨가 나타났다. - 내 이름은 남옥(南玉)이오. 귀하와 사귀고 싶소. 미서생은 흠칫했다. 난간의 글씨에 시선을 둔 그의 눈에는 잠간 이채가 스쳤다. 이때 유삼청년은 다시 난간을 문질렀다. 글씨는 곧 지워졌고 다른 글씨들이 그곳에 새겨졌다. - 첫눈에 귀하를 보고 반했소. 함께 어울리지 않겠소? 내가 좋은 곳을 알고 있소. 미서생의 마음은 서서히 동요되고 있었다. 자신에게 집요하게 질척거리는 인물, 그는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 인물의 손에 의해 단단한 목재(木材)로 이루어진 난간이 두부처럼 주물러지는 것만 보아도 미서생의 판단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서생은 고집적으로 그 인물을 여전히 외면한 채였다. 난간의 글은 또 지워지고 또 다른 글씨가 새겨졌다. - 하하... 인생은 다 그런 것 아니오? 나도 전에는 귀하와 같은 책벌레였소. 그러나 나는 지금 유쾌히 살고 있소. 어떤 쪽이든 모두 가치를 두기 나름아니오? 마침내 미서생은 고개를 돌려 상대를 응시했다. 일순 그의 얼굴에는 동요의 빛이 출렁였다. 반면 유삼청년은 그를 대하자 짐짓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자, 형장. 그럼 어서 갑시다." 그는 다짜고짜로 미서생의 손을 덥석 잡았다. "......!" 미서생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그리고는 황급히 손을 피했다. 그러나 유삼청년은 유유히 그의 손을 잡아 쥐었다. 그 순간 그들 사이에 미묘한 싸움이 벌어졌고 거의 찰나적으로 두 청년의 금나수를 다섯 차례나 바꾸어 시전한 것이었다. 결국 미서생의 손은 유삼청년의 손 안에 잡혀 있었다. "......!" 미서생은 은은한 분노의 기색을 보였다. 유삼청년은 그를 무시한 듯 여전히 유들유들했다. "허! 형장의 손은 마치 여자 손 같구료?" 그는 미서생의 손을 들어 자신의 코 끝에 갖다 댔다. "향기(香氣)가 아주 좋소."


심한 모욕감을 느낀 듯 미서생의 안색이 새파래졌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상대에게 손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미 맥문을 제압당한 것이었다. 이윽고 그들이 나란히 손을 잡고 황학루를 내려오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다정한 붕우(朋友)였다. 악양(岳陽)의 중심가. 인파 속을 헤쳐가며 미서생은 싸늘하게 물었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오?" 그는 앞서가는 유삼청년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아직껏 맥문을 잡힌 상태였다. "하하... 지옥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유삼청년은 태연하게 웃고 있다. "오히려 천국(天國)일 테니까......!" 그는 바로 다름아닌 천우였다. 그리고 그에게 맥문을 잡힌 미서생. 그 미서생이야 말로 그 유명한 독황교(毒皇敎)의 오독부인(五毒婦人)이었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나왔다가 생각지도 않은 변을 당한 것이었다. 오독부인. 그녀의 독공(毒功)으로 말하자면 이미 화극(化極)에 달해 있었다. 또한 그녀의 독공은 특수한 것이었다. 주로 독충(毒筮)에 달통해 있었다. 오독(五毒)이란 바로 그녀가 지닌 다섯 가지 천하절륜의 충독(筮毒)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녀는 진정한 독의 대가였다. 실상 그녀는 천우에게 맥문을 제압 당했다고는 하나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만일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그녀는 즉각 독공을 펼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방법 또한 지극히 간단했다. 그녀가 내공진기를 끌어올려 그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는 발출(發出)신호를 보내면 오독 중 사독(蛇毒)이 그순간 섬전같이 상대에게 쏘아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몸 속에는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독사가 늘 그녀의 발출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미서생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천우가 그녀와 함께 멈춰 선 곳은 하나의 장원이었다.그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아 일반 저택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특별한 손님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게했다. "이 곳이 어디냐?" 오독부인은 갑자기 반말로 물었다. 그 표정은 여전히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들어가 보면 알 것 아니오?" 천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리고는 히죽 웃으며 그녀를 향해 물었다. "한데 형장의 이름은 어찌 되시오?" 오독부인은 잠시 망설이는 듯 싶더니 짧게 대답했다. "묘가수(苗伽水)!" "묘형(苗兄) 이셨구료? 거참 이름 한 번 묘하군......." 천우는 거침없이 장원의 문을 밀고 들어 갔다. 그러자 안으로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노파 하나가 달려 나왔다. "호호호... 남공자께서 납시었구료." 노파의 반색에 천우는 짐짓 호기롭게 말했다. "하하하... 오늘은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다. 특급으로 모셔라." 말과 함께 그는 족히 열 냥은 될 듯한 금자 한 덩이를 던져 주었다.


노파는 금시 입이 쭉 찢어 졌다. "어이쿠... 역시 왕(王) 공자님이세요." 이어 노파는 그들을 안내했다. 아늑한 별원. 아니 그 곳은 별원이라기 보다는 화원(花園)이었다. 화향(花香)이 그윽하게 감도는 별원. 그 곳의 한 방(房)으로 그들은 인도되었고 방 안은 매우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 비로소 천우는 오독부인의 손을 놓아 주었다. 오독부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힘이 모자라 예까지 따라 온 줄 알면 큰 오산이다." 천우는 짓궂게 웃었다. "하하... 알고 있소, 묘형. 묘형의 소매 속에서 요놈이 잘도 까불어 대더군." 그는 자신의 소매 속에서 무엇인가 슬쩍 꺼내 들었다. '악!' 오독부인은 하마터면 소리 내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나 간신히 그것을 억누르고 보니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천우의 손가락 사이에는 한 마리의 뱀(蛇)이 끼워져 있었고 기이하게도 그 뱀은 전신이 녹색(綠色)이었다. 길이는 한 뼘도 채 안 되고 굵기는 겨우 젓가락 만한 것이 눈이 세 개나 달려 있었다. 뱀의 눈은 짙은 주홍색이었다. 일견하기에도 그 뱀은 보통의 뱀과는 매우 달랐다. 그 뱀이말로 희귀한 별종 중에 별종이었다. - 삼목적청비사(三目赤靑飛蛇). 그것은 묘강(苗彊)에서 자생하는 무서운 독사였다. 일단 물리면 코끼리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그러나 그것은 좀체로 잡기 힘든 것이었다. 날아 다니는 비사(飛蛇)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사실은 천우가 가지고 있는 뱀이 바로 오독부인이 지극히 아끼는 오대독물(五代毒物) 중의 하나라는 점이다. 오독부인은 초조한 기색으로 외쳤다. 그러나 천우는 그녀의 그런 기색을 전혀 개의치 않고 연방 싱글거리며 말했다. "묘형이 나와 같은 취미를 가진 줄은 몰랐소. 요런 놈은 그저......." 그는 입맛을 다시며 목청을 돋구었다. "독한 백주(白酒) 한 잔에 날로 씹으면 진짜 제격이오!" 오독부인의 낯빛은 창백하게 질리고 만다. "정말 그렇게 한다면 편히 죽지도 못하게 하겠다!" 천우는 냉큼 그 말을 받았다. "허, 묘형. 얼굴은 고운데 말만은 왜 그처럼 아름답지 못하오?" 오독부인은 정말 화가 난 듯 소리쳤다. "돌려 다오!" "정히 그렇다면 돌려 주지." 천우는 삼목적청비사를 그녀에게 슬쩍 던졌다. 삼목적청비사는 보통 내공으로는 제압할 수가 없다. 그러나 천우는 그것의 안에 내공진기를 주입해 빳빳하게 만든 다음 오독부인을 향해 순식간에 날렸다. 휘-- 익! 오독부인은 즉시 삼목적청비사를 받았다. '으읏......!' 그녀는 내심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마치 손바닥에 구멍이 뚫리는 듯한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그녀 마음 속에서는 분노와 함께 한 가닥 두려움이 일었다. '대체 이 자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강하단 말인가......?'


"호호호......." 내실 밖에서 간드러지는 교소가 어지럽게 들리더니 일단의 여인들이 방 안으로 들어 왔다. 미녀들. 미(美)를 논하자면 모두 일등급에 해당하는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모두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그 중 두 명이 천우의 좌우로 다가갔다. 또 다른 두 명은 오독부인의 곁으로 다가 가고 나머지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주악이 울려 퍼지고 흥겨운 군무(群舞)가 한 바탕 벌어졌다. 천우는 벌렁 드러누워 두 명의 미녀들을 희롱하고 있었다. "아이......!" "흐응... 간지러워......." 미녀들의 교태는 그야말로 간드러졌다. 천우의 손은 미녀들의 몸 속을 어지럽게 들락날락거렸다. "으... 음......!" 그는 사뭇 흥분된 듯 들뜬 신음을 발하며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실로 음탕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오독부인 묘가수. 그녀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그 때 두 기녀가 은근히 기대 왔다. 그녀의 앞섶을 헤치려는 듯 가슴께로 두 개의 손이 육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오독부인은 질겁을 하여 소리쳤다. "저리 가라!" 기녀들은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가까이 밀착되어 왔다. 또 다른 기녀는 오독부인의 다리와 허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아이... 공자님......." "왜 이래요?" 오독부인은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사라져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나가겠다.!" 천우는 거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로 보았다. "허, 묘형은 결벽증이 있는 모양이구료." 이어 그는 슬쩍 손을 들었다. 오독부인의 곁에서 엉거주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기녀들을 불렀다. "이리 와라. 춘란, 추앵." "호호......." 두 여인은 서슴 없이 천우에게로 달려 들었다. 그는 꽃 속에 파묻힌 채 질펀한 유희를 즐겼다. 그 사이 춤은 점점 가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극히 육감적인 춤사위는 노골적으로 여인의 본능을 묘사하는 국면으로 치달렸다. 오독부인은 수치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그녀 역시 여인이거늘 이런 음무(淫舞)에 흥미가 있을 리는 더더욱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남장을 한 이상 그녀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냥 꾹 참고 봐 주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오늘따라 남장을 하고 온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그러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문을 박차고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될 뿐이었다. 천우는 대취했다. 그의 시선은 흐물흐물 했으며 횡설수설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있었다. "으음... 묘허엉... 우리 친구 합시다아... 나는 묘형이 좋......." 그는 말을 맺지도 못하고는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 오독부인 묘가수의 가슴에 얼굴을 박고 넘어지고 말았다. "......!" 오독부인은 기겁을 하여 그의 머리를 치우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거두고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품 속에 안긴 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준수하다고는 여겼으나 평범 이상의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술기운에 달아 오른 그의 얼굴은 그녀에게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녀가 이제껏 보아왔던 사내들과는 또다른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진한 남성의 체취와 함께 강하게 그녀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녀는 가슴이 몹시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 기묘한 흥분이 그녀의 뇌리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그 때 천우의 잠꼬대가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묘형... 음냐... 난 말이오... 원래 계집을 밝히는 위인은 아니오." "......!" 그녀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계집이란 원래... 믿을게 못 된다 말이오. 후후... 내 약혼녀도 그랬소. 딴 사내와 눈이 맞아... 달아나 버렸다오." 그녀는 어느 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천우의 손이 공중을 허위적 거리는가 싶더니 그녀의 목을 휘감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런......!' 오독부인은 당황했다. 대뜸 그녀는 살기를 띄며 손가락 사이의 독지환(毒指環)으로 찌르려 했다. '......!' 그러나 그녀는 그만 정신이 아찔해졌다. 자신의 목으로 부어지는 사내의 뜨거운 입김을 감지한 것이었다. 부르르....... 그녀의 전신이 무섭게 경련했다. 그것은 바로 무르익은 그녀의 육체에 전해지는 충격적인 신호였다. 오독부인 묘가수. 그녀는 불행했다. 남편인 만독왕이 너무 늙은 탓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 부부가 형식적인 관계인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만독왕 묘천(苗天)은 몇 년 전에 특수한 독공(毒功)을 익힘으로써 더 이상 여인을 접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아지껏 순결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었으나 순결 따위는 그녀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조차 없었다. 고독에 지친 수많은 밤들이 오히려 한스러울 뿐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사내를 접해 본 것은 그려로서는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점점 머리가 텅 비며 맥이 탁 풀리는 듯했다. 그는 그녀의 목을 휘감은 채 여전히 잠꼬대를 했다. "난 말이오... 사실은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한다오... 오오... 향령(香鈴)......!" 아예 착각을 해 버린 것일까? 천우는 정말 약혼녀에게 하듯 오독부인을 끌어 당겨 입을 맞추려 하는 것이 아닌가? '앗!' 오독부인은 깜짝 놀라며 그를 뿌리치려 했으나 그만 맥이 다시 풀려 마음먹은 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강하게 죄어오는 그의 손에 이끌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급소를 찔린 듯한 심정이 되어 버렸다.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아버린 것이었다.


"으음......." 뜨거운 사내의 입술을 감지하는 순간 그녀는 신음을 발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는 혼미지경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천우는 다시 여인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향령... 사랑하오... 향령......." 그는 쉴 새 없이 중얼거렸고 그 사이 그의 손은 그녀의 여체를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고 있었다. 실로 무례하기 그지 없었다.그는 그녀의 앞섶을 헤치고 들어가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아아......." 극도의 자제와 아찔한 쾌감의 갈등으로 애처롭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뿐, 어느덧 자제의 벽을 허물어졌고 그녀의 섬섬옥수는 천우의 몸을 끌어 안고 있다. 남자를 모르던 여인으로 평생을 살 뻔한 그녀는 이제야 비로소 성숙한 여인으로서 눈을 뜬 것이다. 그녀의 떨리는 손은 천우의 몸을 더욱 꽉 끌어 안았다. 23 장 일만초(一萬招)의 싸움 ① "묘형(苗兄)! 묘형, 이제 그만 일어 나시오. 이런... 내가 어젯밤 취했었군." 천우는 허둥지둥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는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에 어리둥절 했다. 그러다 곧 그는 빙긋 웃으며 곁에 누워 있는 한 인물을 응시했다. "허, 묘형이 옷을 벗겨 주었소? 고맙......." 그는 상대를 깨우려 금침을 벗긴 순간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묘가수(苗伽水). 그 역시 알몸이었다. 그런데 발가벗은 그의 몸은 사내가 아니었다. 탐스런 젖가슴이 한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묘... 아니 여자였소?" 그 말에 묘가수는 대답 대신 엎드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 곧 그 울음은 대성 통곡으로 변해갔다. 지난밤 그녀는 오랜 고독으로 말미암아 굳세게 닫혔던 여인의 문은 열었고, 참고 참았던 욕망을 뜨겁게 분출했다. 그리고 지금은 한 사내 앞에서 옥루를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천우는 황망히 부르짖었다. "이... 이럴 수가... 그럼 어젯밤의 일은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내 그의 표정이 어이 없다는 듯 멍청해졌다. 그러나 상황은 분명했다. 그와 묘가수는 알몸으로 한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뻔한 상황의 증명이었다. "흑흑......." 묘가수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가 만독왕과 혼인을 한 이후부터 포기해야만 했던 여인으로서의 삶이 느닷없이 나타난 한 사내에 의해 다시 꿈꾸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만독왕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더 잘알고 있었다. 그녀는 두려움과 기쁨에 그동안 서리고 서렸던 한(恨)이 그녀의 가슴에 복받쳐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천우는 문득 부드럽게 말했다. "묘형... 아니 저... 이제 그만 우시오." 천우는 마땅한 호칭을 찾을 수 없는 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더없이 침착했으며 매우 달콤한 것이었다. "......." 묘가수는 그 음성을 듣자 비로소 울기를 그치고 그를 돌아 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눈물로 온통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또다른 매력이 물씬 풍겨났다. "쯧쯧... 바보 같소."


천우는 짐짓 혀를 차며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액체가 그의 손바닥에 묻어났다. 그는 손바닥에 묻은 정인의 액체에 입을 가져갔다. 그런 천우의 모습에서 자신을 아끼는 마음을 읽은 묘가수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천우가 그 말을 막았다. "말하지 마시오. 여자란 말이오." 그는 속을 알 수 없이 신비한 표정으로 묘가수의 농염한 나신을 바라 보았다. "몸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오......." "......!" 묘가수의 얼굴은 금새 새빨개졌고 황급히 자신의 풍만한 유방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나 그 모습이야말로 더욱 자극적이었으니......! 천우는 그녀의 나신을 그대로 안았다. "아......." 묘가수는 무너지듯 그의 품에 안겼고 어느덧 그녀의 팔은 그의 허리를 꽉 죄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불안한 어조로 힘겹게 말했다. "나는... 그대와 어울릴 수 없는 몸이야......." "그건 왜요?" 천우는 그녀를 안은 채 반문했다. "그건......." 묘가수는 정녕 어렵게 말을 이었다. "동생보다... 너무 나이가 많아......." "바보 같으니......!" 천우는 그녀의 뺨을 슬며시 꼬집었다. "여자란 말이오." "......?" "익어야 제맛이 난다는 말이오." 그는 이어 터질 듯 풍만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도... 동생은... 순......." 묘가수의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귓볼까지 강한 쾌감이 번져왔다. 그녀는 허공에 떠오르는 듯한 착가에 빠졌다. 강하게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몸은 달아오르고 있었다. 천우는 숨가쁘게 덧붙였다. "이제 알았소, 묘(苗)누님? 나는 바람둥이라오." "아......." 묘가수는 더 말할 여력이 없었고 온몸에 번지는 숨막히는 열기가 사지를 휘감아왔다. 천우. 그 방면에 기술은 천하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욕망화까지도 욕염에 사로잡히게 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마왕성에서 희대의 색마와 요녀들의 방중술과 섭혼술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오독부인 묘가수. 그녀는 전신 구석구석에 일어나는 불길을 자신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천우의 손길과 입술이 스칠 때마다 그녀는 타버릴 듯한 충격으로 몸부림쳤다. 두 남녀. 그들은 지독한 운우(雲雨)를 즐기고 있었다. 망아지경(忘我之境)에 빠져 해가 다시 지는 줄도 몰랐다. 그들은 오직 상대방의 육체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② 황학루(黃鶴樓). 그 곳에는 두 남녀가 있었다. 바로 천우와 묘가수였다. 그들은 나란히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동정호를 감상하고 있었다. 묘가수, 그녀는 불과 하루 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고 얼굴은 화사하게 피어 올랐으며 그녀의 두 눈은 별처럼 반짝였다. 단 하룻밤의 정사(情事). 그것으로써 그녀는 완전히 생(生)의 의미가 달라져 있는 것이었다. 천우의 손을 부여 안은 채 새삼스런 감회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반면 천우는 오직 동정호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깊은 눈빛이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그는 오독부인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초초의 부탁이 엄청난 고역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은 만연령이나 초초에게서 느끼지 못한 기이한 감정을 느낀 것이었다. 만연령에게서는 고혹적인 한송이 백합의 향기를 맡았고 초초에게서는 거칠지만 그 나름대로의 멋을 지닌 야생화를 보았다. 그는 오독부인에게서는 가시를 품은 장미의 향기를 느낀 것이었다. 그녀의 매력은 실로 천우마저도 사심이 들게 할 정도였다. 그가 떠나오기 전에 한 초초의 염려가 틀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긴 초초만큼 천우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묘가수가 입을 열었다. "동생, 정말 중원은 아름다워요." "......." "남만(南蠻)에서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 "동생을 만난 후 내 인생은 완전히 변해 버린 느낌이예요." "......." 천우는 여전히 대답이 없다. 묘가수는 순간 불안해지고 만다. "동생......!" 그녀의 음성은 다소 떨려 나왔다. 그는 비로소 입을 열었고 그것은 탄식이었다. "사실은 말이오......." "......?" "난 누님을 속였소." "......!" "애당초 누님에게 접근한 것은 계획적이었소. 그것은 누님이 오독부인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 그런 일이......!" 묘가수의 얼굴이 경악과 불신으로 일그러졌다. 천우는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힘주어 말했다. "이해해 주시오. 누님, 난... 누님이 필요했었소." 그 말은 묘가수의 귀에 담겨지지 않았다. "계획적... 이었다고......?"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채 한 걸음 그에게서 떨어져 섰다. 그녀는 백지장 같이 변한 얼굴로 천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젖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천우는 탄식해 마지 않았다. "하나... 지금은 그렇지 않소. 누님은 정말...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오." 묘가수는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왜? 무엇 때문에...? 어째서......?" 그녀는 넋을 잃은 듯 그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안다. 때문에 그는 성의를 가지고 호소하듯 말하고 있었다. 그가 악한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 또한 느끼는 듯 했다. 그러나 이순간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악한이든 무엇이든 그녀는 그에게 완전히 농락당한 것이었다. 그녀는 여자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힌 것이었다. "솔직이 말하겠소. 이름은 천우, 기인총이라는 단체의 총주요." "이름도... 가짜라고......?" 묘가수의 얼굴은 이제 싸늘했다. 녀의 손은 더 이상 머뭇거림 없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새 그녀의 손 안에는 무형지독(無形之毒)이 준비되었다. 단 펴기만 하면 정말 근방 십장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즉사시키고도 남을 극독(劇毒)이었다. "중원은 지금 걷잡을 수 없는 난세에 처해 있소. 나는 기인총을 조직하여 혈겁을 최대한 막으려 했소." 천우는 너무도 진지했으며 그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거짓이나 가식 따위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의 어투는 너무도 절절했다. "하나...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너무도 부족했소. 중원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겹쳐 자칫하면 회생불능의 상태에 빠질 지도 모를 상황이기 때문이오." 그녀는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의 내부에서 들끓는 감정이 소용돌이는 자신조차 걷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날카롭게 쏘아 물었다. "그래서... 나를 이용했었던가......?" 천우는 부인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물론 그랬었소. 하나 지금은......." 그의 눈(眼)은 그가 지금까지 오독부인에게 했던 어느 말보다 절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눈은 바로 진실이었다. 아무리 거짓이 능한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힘주어 말을 이었다. "지금은 말이오. 묘누님께 오히려 협조를 구하는 것이오. 묘누님을 결코...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묘가수는 가슴이 울렁였다. 한 사내의 진심이 그녀의 내부까지 깊숙이 파고든 것이었다. "......." 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믿어 주시오. 누님은... 사랑스런 여인이오." "......." 묘가수는 스스로 주먹에서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이미 천우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마침내 그녀는 탄식을 했다. "나는... 이제 늙었어......." 그것은 여인의 자존심이었다. 간신히 말을 마치고 그녀는 천우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서 자신(自信)이 없다고 느껴질 때 여인의 자존심은 더 할 수 없이 크나큰 상처를 입고 만다. 그리고 급기야는 스스로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묘가수, 그녀가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녀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이 한마디 고백이야말로 그 어느 여인도 할 수 없는 자존심을 내던진 말인 것이다.


쉽게 상처 받을 자존심이라면 아예 정인(情人) 앞에 던져 버리겠다는 것일까......? 천우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끌어 당겼다. 그 손은 그 어떤 위로나 변명 보다 뛰어난 위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조금전의 분노나 자괴감이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음울한 어조로 덧붙였다. "앞으로 불과 몇 년 후면... 나도... 더 이상 예쁘지는 않을 거야." 천우는 그녀의 손을 굳게 쥐었다. 그는 알고 있다. 그녀에게는 지금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나 천우는 그녀의 마음을 풀어줄 방도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누님에게 드리는 것이오." "......?" 그는 의아해 하는 그녀의 가슴께로 자신의 품 속에서 작은 옥갑 하나를 꺼내 놓았다. "이것이 있으면 누님은 영원히 늙지 않을 것이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묘가수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천우는 빙긋 웃었다. "이것은 전설의 주안신과(朱顔神果)로 빚은 주안선단(朱顔仙丹)이라는 것이오. 이것을 복용하면 누님은 죽을 때까지 늙지 않을 것이오." 묘가수의 눈빛이 몹시 흔들렸다. "정... 정말......?" "천우는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소." "아......."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옥갑을 받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봉황안(鳳凰眼)에는 눈물이 어느새 그렁그렁 고이고 있었다. 오독부인 비록 남만의 이녀(異女)이기는 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순수했다. 또한 그녀는 독인이기 전에 한 약한 여인이기도 했다. 천우의 진심이 그녀의 얼어 붙었던 마음을 녹여 준 것이었다. 그녀는 주위의 눈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우의 품으로 달려 들었다. "우(羽)... 정말... 처음이야, 이런 느낌은......." "나도 그렇소, 누님." 천우는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거짓말이다. 최소한 그는 몇 명의 여자를 알고 있다. 그녀들에게도 이와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거짓말은 달콤하다. 천우는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 역시 지금 이 순간 정말 묘가수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주안선단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바로 황금대총(黃金大塚)에서 얻은 것이었다. 목화(木花), 그것이 바로 영생(永生)의 영약이 들어 있는 보고의 열쇠였던 것이다. 그는 황금대총의 지하석부에서 자라는 주안신수(朱顔神樹)에서 주안신과를 얻었다. 그리고 그것을 단전에 고여 있는 혈정원단신주(血精圓丹神珠)의 힘으로 연단을 만들고 다시 만연령에게 부탁해서 남천신수에서 얻은 영과(靈果)와 남천신도의 심해에 자라는 만년설리(萬年雪 )의 조갯살을 갈아 다시 현현묘묘(玄玄杳杳)의 역리(易理)와 연금(鍊金)의 구정십동(九鼎十凍)의 원리로 배합해 만든 것이다. 천우는 오독부인 묘가수의 순결에 놀랐고 그 순수함에 감탄을 했었다. 그런 감정은 자연스럽게 애정으로 바뀌어 가고, 그는 그녀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주안선단을 내놓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결국 초초의 고육계(股肉計)가 성공한 셈이었다. 그는 마침내 오독부인을 끌어 들인 것이다. 그것은 곧 독황교를 수중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독황교주 만독왕(萬毒王).


그는 실상 너무 늙었다. 백 세가 넘은 지 벌써 오래인 것이었다. 인간이 늙는다는 것, 그 이후에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생에 대한 허무였다. 만독왕. 그도 그랬다. 그런 그에게 야심이란 것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독황교가 중원에 진출하게 된 것은 다만 오독부인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런 남편에게는 너무도 젊은 아내였기에 늘 허전했다. 그래서 그녀는 주장했던 것이다. 중원으로 나가 자신이 대신 독황교의 위맹을 온 천하게 떨치게 해달라고. 만독왕과 그녀의 관계는 말이 부부이지 실상은 사제지간(師弟之間)이나 다름없었다. 만독왕은 그녀를 지극히 아끼고 총애했으며 그녀의 말은 무엇이건 수락해 왔다. 사실 만독왕의 야망은 그녀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리 인생에 대한 허무감이 뼛속 깊이 들어찼다고 하더라도 명예욕은 반대로 걷잡을 수 없이 분출되기 마련이었다. 그런 관계 때문에 만독왕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를 아주 경멸하는 빙심의 소유자였기에 만독왕은 이런 그녀는 추호도 의심할 수 없었다. 그것을 빌어 그녀는 천우와 약속했다. 천우를 위해 독황교의 힘을 빌려 주겠노라고.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위해 한 가지 약속을 부탁했다. 그것은 실로 그녀가 천우에게 한 약속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것은 한 달에 한 번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을 만나 주는 것이었다. 그렇다! 사랑 그 힘은 위대했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한 남자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이미 천우의 사랑 이외의 것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천우에게 영혼까지도 빼앗겨 버린 것일까? 천우는 그녀와 헤어지기에 실로 애를 먹어야 했다. 벌써 사흘 밤낮 그녀는 도대체 그를 놓아 주려 하지를 않는 게 아닌가? 뒤늦게야 여인의 기쁨과 행복의 의미를 터득한 그녀는 그리 쉽게 그를 놓아줄 수가 없었나 보다. 덕분에 천우는 사흘 밤낮 동안을 줄곧 객점에 들어박힌 채 달콤한 중노동을 치뤄내야만 했다. 꼭 사흘 만이었다. 그는 간신이 그녀와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객점을 빠져 나왔다. 그의 얼굴이 그처럼 창백했던 것은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치 일만초(一萬招)의 싸움이라도 치른 듯이. ③ 태산(泰山) 낙혼곡(落魂谷). 일명 마성곡(魔聖谷)이라 일컬어지는 당금무림의 마도제일지(魔道第一地). 낙혼곡은 천하마도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었다. 측천환마전(測天幻魔殿). 중원의 정통마맥임을 스스로 주장하는 마도문파가 바로 낙혼곡에 있기 때문이었다. 측천환마전의 전주는 지난 날 천외사마(天外四魔)의 일원이었던 측천환사제(測天幻師帝) 철붕우(鐵朋羽)다. 그는 마맥의 부활을 부르짖고 있었다. 사실상 마왕성의 멸망 이후 중원마맥은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던 것이다. 측천환마전에는 마도고수 육천(六千)이 집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중원마맥을 일으키려는 마도의 절정고수들이었다. 현무림은 난세였다. 적아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얽히고 설혀 지극히 어지러웠다. 그런 와중에서도 측천환마전은 무섭게 팽창했다. 그것은 그들이 어느 입장에도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옥삼겁천이 몰고온 혈풍도 그들은 무관심했다. 이른바 철저히 방관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지옥삼겁천 또한 공연히 불씨를 일으키기를 원치 않아 지옥삼겁천과 측천환마전은 은연중 상호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측천환마전. 마도부활을 꿈꾸는 마도인의 요람은 태산 낙혼곡에서 점차 팽창하고 있었다. 낙혼곡(落魂谷). 일명 마성곡이라 불리우는 낙혼곡은 특수한 지형(地形)이었다. 낙혼곡 안에는 측천환마전이 꼬불꼬불하고 좁았다. 양편으로는 찌를 듯한 절벽이 마주하고 있었으며 곡도의 폭은 불과 수 장에 불과했다. 천군만마라도 몇 명의 장수로 막을 수 있는 천애의 요새였다. 얼마 전부터 낙혼곡의 곡로(谷路)는 차단되고 말았다. 완전히 길이 끊긴 것이었다. 낙혼곡 측천환마전에서 나오는 마도고수들은 곡을 거의 빠져오다가 여지없이 실종되곤 했다. 그리고 빈 말(馬)이 측천환마전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말 안장에는 하나의 흑색기가 꽂혀진 채로. 또한 외부에서 측천환마전으로 들어가려는 자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곡구(谷口)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픽픽 쓰러졌다. 예외없이 그들도 빈 말에 흑기가 꽂혀진 채 측천환마전으로 보내졌다. 그런 일은 연 칠 일째 계속되었다. 측천환마전은 발칵 뒤집혀졌다. 흑기(黑旗). 그것은 바로 지옥삼겁천의 흑사풍의 독문표식이 아닌가? 측천환마전의 마도인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들은 지옥삼겁천과 극력 충돌을 피해왔었다. 한데 흑사풍 쪽에서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셈이 아닌가? 벌써 칠 일째. 측천환마전으로 주인 잃은 빈 말은 팔십여 기나 돌아왔다. 그것은 곧 팔십 명 이상의 환마전 고수들이 흑사풍의 독수에 당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측천환마전의 마도인들은 모두 무서운 분노를 느꼈으며 이를 갈며 출동(出動)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측천환마전주 측천환사제 철붕우는 대노했다. 쾅! 노한 나머지 주먹을 내려치자 단단하기 그지없는 흑오석 탁자에 구멍이 뻥 뚫렸다. "아직도 놈들을 해치우지 못했단 말이냐?" 그의 앞에는 십여 명의 마도고수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철붕우는 구순(九旬)이 넘었으나 여전히 정정했다. 팔 척의 거구와 검은 수염은 그가 용맹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흐흐흐...! 그래... 곡구조차 빠져나갈 수 없단 말이냐?" 그는 그 동안 절정고수를 수 차례나 밖으로 파견했다. 측천환마전의 일급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철봉우가 창안한 새로운 마공을 익힌 자들로 철봉우의 안목으로는 그들과 대결해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자는 강호에 몇 되지 않았다. 그들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리고 그들도 다른 수하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무기(武器)가 잔뜩 실린 말들만 돌려보내졌다. 벌써 다섯 차례나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때마다 더욱 강한 고수를 파견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고 급기야 철붕우는 격노한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벌떡 태사의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번에는 노부가 직접 가겠다! 흐흐흐흐...! 과연 어떤 놈이 감히 본전에 시비를 거는지 보겠다!" 그는 정말 화가 난 것이다. 아직 그는 강호출도 이후 이 같은 모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측천환마전은 중원마도의 요람이 아닌가? 그런데 바로 환마전의 입구를 막고 조롱하듯 놀려대는 것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흑사풍의 표기로 보아 흑사풍이 곡구를 차단시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으하하핫...! 변방의 오랑캐놈들! 감히 본전을 건드리다니 댓가를 치뤄 주마!" 마침내 측천환마전의 문이 열리고 일단의 마도인들이 두 눈에 마광을 번뜩이며 출동했다. 그 위세는 실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수천의 마도고수들이 출동하는 광경은 거대한 산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철붕우의 분노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는 흑사풍(黑死風)을 이 중원에서 영원히 박멸하리라 마음먹었다. 마도인은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자는 해치우지 않는다. 하나 일단 건드리면 그 자에게 수십 배로 갚은 것이 마도의 율법이었다. 지금 그는 마도의 율법에 따라 흑사풍을 섬멸하기 위해 출정한 것이었다. 곡도는 가뜩이나 협소한데다 수천의 고수들이 빠져나가자 그만 발디딜 틈도 없이 빽빽해졌다. 곡도의 길이는 근 십 리나 된다. 애당초 측천환사제가 이런 곳에 마도성지를 세운 것도 바로 이 같은 지형 때문이었다. 방어하기에 더없는 요새지였기 때문이다. "......!" 맨 앞의 오추마에 탄 채 선두를 가고 있는 철붕우는 막역한 불안감을 느꼈다. 양옆으로 솟아오른 까마득한 절벽은 방벽이라기보다 이런 상태에서는 지극히 위험한 함정이었다. '만일 양절벽에서 돌을 굴리거나 화공(火功)을 쓴다면......!' 그는 전신에 가는 경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외부에서는 곡도를 통해 오면 그는 바로 자신의 생각처럼 그 공격을 차단시킬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뒤바뀌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평소라면 양쪽 절벽에 오백인 이상의 마도고수들이 매복하고 있었으나 철붕우는 그들도 이미 능력을 상실했음을 알고 있었다.그가 출동했음을 양쪽 절벽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으음......!' 철붕우의 이마에는 진땀이 배어나왔다. 환마전의 고수들은 좁은 곡도를 따라 꾸역꾸역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곡도를 반쯤 지났을 때 철붕우의 옷은 흥건히 젖어 있었다. '노부 일생 동안 가장 긴 시간이로군.' 철붕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뒤를 돌아다 보았다. 환마전 고수들 역시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철붕우는 침중한 어조로 명을 내렸다. "모두 기습에 대비하라!" 수천 마도인들은 제각기 호신강기를 펼치며 전진해 갔다. 기나긴 시간 동안 아무런 변고도 없었다. 이윽고 한 모퉁이만 돌면 출곡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다. 철붕우를 선두로 해서 마도인들은 모통이를 돌아섰다. "......!" 철붕우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엄청난 광경이 그의 시야에 칼날처럼 날아와 꽂힌 것이다. 곧 출구의 넓은 분지. 그곳에 수만 명의 고수들이 무릎을 꿇은 채 도열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바로 측천환마전의 실종된 제자들이었다. "으......." "아... 아니......!" 뒤이어 출구를 들어선 고수들 역시 당연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순 철붕우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의 시선은 하나의 거암 위에 고정되었다. 음산한 분위기의 청년이 서 있었다. 그의 영준한 얼굴 이면에는 기괴한 사기(邪氣)가 엿보였다. 바로 천우(天羽)였다. 그러나 지금은 채화공자 반준의 모습으로 역용한 상태였다. 그를 응시하는 철붕우의 두 눈에 새파란 노광(怒光)이 번뜩였다. "모두 네놈의 짓이냐?"


천우는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소." "감히 본 전에 시비를 걸다니... 네놈의 간도 어지간히 크구나!" "하하... 그다지 크지는 않소. 다만 겁장이처럼 숨어 있는 당신들 보다는 조금 크다고 생각하오." "......!" "나는 당신들의 고향이 어디인지 묻고자 하오." "......!" "혹 한족(韓族)과 이족(異族)의 잡종이 아니오?" 천우의 어조는 담담했다. 철붕우에게는 그 말이 벼락과 같은 충격으로 들렸다. 철붕우, 대체 그가 어떠한 조재인가? 그의 생애에 이러한 모욕은 단연코 없었다. 심장은 격분과 수치로 폭발할 듯이 부풀어 올랐다. "네... 네놈은......?" 극도의 분노로 말조차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천우는 그러한 그를 응시하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지 않다면 중원이 더러운 오랑캐에게 짓밟히건만 어찌 방관만 하고 있단 말이오? 아니면 당신들은 겁이 나서 그러는 것이오?" "으......." "크으으......." 마도인들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서운 분노에 그들은 피가 거꾸로 솟는 고통에 휘말렸으나 철붕우는 마도의 지존답게 애써 냉정을 유지했다. 격장지계를 쓰는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네놈은 누구냐?" 천우는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중원인(中原人)!"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중원인!" "으음......." 철붕우의 얼굴 근육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는 목구멍까지 치솟은 노기를 씹어 삼키며 부복해 있는 수하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들을 어떻게 했느냐?" "단지 징계를 내렸을 뿐이오." 천우는 흘리듯이 한 마디 던졌다. 철붕우는 뒤에 시립한 수하들을 향해 한 손을 올려 보였다. 이에 십수 명의 수하들이 둥실 떠오르며 부복한 자들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복한 자들에게 채 접근도 하기 전에 풀썩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악--!" "으악--!" 철붕우는 대번에 그 변고의 이유를 파악했다. "독(毒)!" 천우는 간특한 웃음을 흘렸다. "훗훗... 독중지독(毒中之毒)이라 불리우는 무형만리독(無形萬里毒)이요. 그저 가까이 가기만 하면 중독되오." "대체 어찌할 셈이냐?"


철붕우는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고는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것은 당신의 재량에 달려 있소." "......?" "만일 저들이 모두 죽는다면 심정이 어떻겠소?" 천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들 중에는 당신들의 형제와 친구 또는 제자도 있소. 그들이 누군가에 의해 죽는다면 그대로 방관만 하겠소?" 철붕우의 안색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렇게 된다면 너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후후... 그런 위협에 겁을 먹을 나였다면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오." "너는... 흑사풍의 졸개가 아니냐?" "말하지 않았소? 나는 중원인이라고." "그럼 왜 흑풍기(黑風旗)를......?" "그건 귀하에게 일깨움을 주기 위함이오." "......." 철붕우의 미간에 선명한 내 천(川)자가 새겨졌다. "생각해 보시오. 만일 흑사풍에 의해 저들이 모두 죽었다면 그대로 있을 것이오?" "보이지 않느냐? 노부는 그 자들을 죽여 버리기 위해 나온 것이다." 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그렇소. 당신들은 비로소 동료들이 당했기에 출동한 것이오. 하나 세상을 보다 넓고 크게 보시오. 중원에 태어나 중원 무인이 된 이상 중원은 곧 당신들의 터전이 아니오? 같은 중원인의 죽음을 모른 척 한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 생각이오?" 그의 준엄한 질책에 철붕우의 안색이 붉게 달아 올랐다. 그의 논리정연한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남에게 쉽게 수그러들 인물이 아니었다. "본전은 정통마맥이다. 우리는 마도(魔道)의 율법(律法)을 따를 뿐이다." "흥! 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는 한 남을 건드리지 않는다고......? 참으로 현명한 율법이오. 하나 그러한 오만을 지키는 것이 과연 마도의 율법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오? 만일 중원이 이족에 의해 장악된다면 그때는 아마 당신들이 이같은 꼴을 당할 차례일 것이오." "......." 철붕우의 갈등을 간파한 천우는 더욱 세차게 마도의 율법을 공박했다. "아마 그때 가서 당신들은 그들에게 추파를 던져야 할 것이오. 그래야만 마도의 율법이 유지될 수 있으니까." "으으... 닥쳐라!" 철붕우의 폭갈이 우뢰처럼 터져나왔다. 우... 웅웅...... 그 엄청난 마후(魔吼)에 골짜기 전체가 심하게 진동했다. 실로 엄청난 공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 위세에 기죽을 천우였던가? "하하... 나는 할 말을 다했소. 그럼 이만......." 그는 거암을 박차며 신형을 띄우려 했다. 그러나 철붕우의 일갈이 그를 제지시켰다. "잠깐!" "불렀소?" "본좌의 수하들을 저대로 둘 셈이냐?" "나도 모르오. 관심이 없는 일이니까."


천우는 냉담한 어조로 내뱉았다. 철붕우의 안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일전(一殿)의 전주였다. 그런 그를 새까맣게 어린 놈이 안하무인으로 자신의 체면을 엉망으로 깎아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네놈은... 진정 본전과 적이 되려고 하느냐?" 천우는 가슴을 쭉 펴며 여유있게 응수했다. "하하... 한 가지 밝혀둘 것이 있소. 해약은 내가 가지고 있소... 아! 물론 지금은 없소. 만일 나를 죽인다면... 당신의 수하 칠백여 명은 나와 함께 구천으로 향해야 할 것이오." "으음......." 철붕우의 전신이 심하게 전율했다. 그가 애써 마도의 율법을 고수하려 하는 것은 마종(魔宗)으로서의 그 자신만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마도(魔道)를 아낀다. 그리고 마도의 제자들을 자신의 수족처럼 돌보는 인물이었다. 그는 나직이 탄식하며 입술을 뗐다. "좋다... 무엇을 원하느냐?" "하하... 이제야 얘기가 통하는군." 천우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거암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간단하오. 이대로 마성곡을 빠져나가 흑사풍을 그들의 고향으로 몰아내는 것이오." "......." 철붕우의 얼굴에 기이한 화색이 감돌았다. "그것 뿐인가?" "그렇소." 천우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하하하핫......!" 철붕우의 입에서 천지가 떠나갈 듯한 앙천대소가 터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 환마전 제자들은 의아한 기색으로 그를 응시했다. 철붕우의 광소! 그것은 결코 분노에 찬 웃음이 아니었다. 막히던 급류가 뚝을 뚫고 흘러나오는 듯한 통쾌한 대소였다. 이윽고 그는 대소를 뚝 그치며 천우를 응시했다. "멋진 놈이다. 본좌 생애에 너와 같은 남아는 처음이다." 그는 호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승낙한다! 그렇지 않아도 본좌는 이대로 회군할 생각은 없었다." 천우는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하하... 과연 마도대종사(魔道大宗師)답소이다." 그는 거암에서 내려서며 정중히 포권지례를 올렸다. "중원인으로서 전주의 높은 뜻에 감사드리오." 그는 품 속에서 두 개의 약병을 꺼내 격공진기로 건네주었다. 철붕우는 약병을 받아들고는 만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대인(大人)의 풍도. 사나이다운 두 사람의 태도는 정녕 대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천우는 철붕우의 태도에서 역시 중원의 한핏줄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전주의 쾌승을 기원하겠소." 그는 예를 올리고는 가뿐한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잠깐!"


철붕우는 이번에도 그를 저지했다. "......?" "아직 볼 일이 남아 있다." "무엇이오?" 천우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철붕우는 위엄있게 그를 응시했다. "자네는 본 전의 위명에 먹칠했다. 그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천우의 안색이 다소 굳어졌다. "전주는 복수할 생각이시오?" "으하하핫... 복수할 생각이라면 자네는 벌써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본좌는 삼장(三掌)을 친교(親交)의 예우로써 선물하고 싶다." "하하하... 기꺼이 받겠소." 천우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 앞으로 다가섰다. 양인은 삼 장 거리를 두고 대치해 섰다. 철붕우는 천천히 좌장을 올렸다. "제 일 장은 본좌를 놀라게 한 대가일세!" 우-- 우웅-웅후한 파공음과 함께 묵색 기류가 소용돌이 치며 날아들었다. 마도의 절학 굉천파묵영강(宏天破默靈 )! 천우는 넓은 소매를 휘저어 강막을 형성해 냈다. 펑-요란한 폭음이 터지며 세찬 광풍이 휘몰아쳐 올랐다. 두 초강고수는 각기 이 보씩 물러났다. 양인은 각기 서로의 공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두 번째 수하들을 독상(毒傷)케 한 것에 대한 대가일세." 철붕우는 수평으로 일 장을 내질렀다. 흑해잔혼멸(黑海殘混滅)! 콰-- 르르르-대지를 휩쓰는 돌풍인가? 산악이 붕괴하는 듯한 거대한 강류( 流)가 마치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엄청난 공세군!' 천우는 검미를 치켜올리며 쌍수로 재빨리 원을 그렸다. 그의 손바닥에서부터 황금색 원환이 무수히 발출되었다. 토행신가의 극마금불쌍장(克魔金佛雙掌)이 최초로 전개되는 상황이었다. 슈... 슈슈슉....... 푸른 강기와 금색 원환이 무서운 속도로 부딪혀 갔다. 좌중은 입을 벌리고 아연실색했다. 그들이 전혀 알 수 없는 무형의 강기들은 섬전같이 쏘아지고 소멸되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금색의 운무뿐이었다. 콰-- 쾅-대지의 고통에 찬 비명처럼 요란한 굉음이 허공에 메아리쳐 올랐다. 위... 잉...... 대지는 움푹 패였고 허공 가득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양인은 각기 반장씩 미끄러지며 신형을 고정시켰다. 철붕우의 송충이 눈썹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이럴 수가... 감히 나와 평수를 이루다니.......' 그의 경악은 상당했다. "당세 무림에 자네와 같은 젊은 고수가 존재할 줄은 진정 몰랐네."


그는 천우의 막강한 무공에 강렬한 호승지심을 발동시켰다. 마도의 대종사인 그가 한낱 청년 고수와 동수를 이룬다는 것은 여간 자존심이 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ㄸ 그는 다시 쌍수를 치켜들었다. 그의 아미엔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는 지금 자신의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슈.... 슈슈......! 그의 장심에서 담혼색 기류가 피어 올랐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얼굴의 피부가 점점 팽창되고 있었다. 마도종사의 위명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이어 그의 쌍수 전체가 투명한 혈색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의 손은 보통 사람의 다섯 배 정도의 크기로 부풀어 있었다. 혈옥수(血玉手)......! 천우는 검미를 꿈틀거리며 침음성으로 뇌까렸다. "겁륜파천황(劫輪破天荒)--?" 철붕우의 혈옥수가 더욱 투명해져 갔다. "마지막 일장은 본좌의 형제애로 주는 것일세." "감사히 받겠소." 천우는 쌍수를 열십자로 교차하며 가슴에 대었다. 번-- 쩍-철붕우의 혈옥수에서 엄청난 혈광이 폭사되었다. 아... 찬연히 피오으르는 핏빛 무지개가 좌중을 뒤덮였다. 그 강렬한 혈광은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분쇄시킨 듯이 광폭하게 휘몰아쳐 왔다. 마도(魔道)의 절대무적 살인광선(殺人光線)은 천우의 전신요혈을 향해 뇌전같이 광포하게 쏘아졌다. 천우는 신형을 꼿꼿이 세우며 급속히 회전시켰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짙은 담록색 기류가 뿜어지며 두터운 장막을 형성했다. 그리고 그 기류는 점점 주위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땅바닥까지 담록색으로 변해갔다. 실로 괴이한 호신강기가 아닐 수 없다. 혈광과 담록기류의 교차! 분명 엄청난 충돌음이 예상됐다. 그러나 어떠한 폭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철붕우의 공세는 담록기류에 모조리 흡수돼 버린 것이다. 철붕우는 넋잃은 표정으로 망연히 그를 응시했다. 자신의 절정마공이 한 순간에 무산돼 버린 것이었다. "그... 그것은......?" 천우는 담녹기류를 자신의 전신모공으로 일시에 거두며 공손히 포권지례를 취했다. "전주께서 양보해 주셔 감사하오." 동시 그의 전음이 철붕우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전주! 본인의 무공 내력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주시길 바라오. 전주를 믿소이다.) 철붕우도 가볍게 답례하며 전음으로 물었다. (실전된 태을천목강기(太乙天木 氣)를 전개하다니... 그렇다면 자네는 남천신도의 신목가에서 왔단 말인가?) (그렇소. 하나 사정이 있으니 비밀 부탁하오.) 스-- 윽-천우의 신형은 한줌 연기로 화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철붕우는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놀라운 일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군. 그렇다면 오대신가(五大神家) 모두가 나타날 날이 멀지 않았단 말인가?" 멀리서 천뢰회천자음이 메아리쳐 왔다. "본인은 채화공자 반준이란 사람이오. 하하... 전주의 건승을 빌겠소이다."


24 장 출천환용(出天幻龍) ① 쿠쿠쿠쿵-콰-- 르-- 르-기어이 무림의 화약고는 터지고 말았다. 지옥삼겁천(地獄三劫天). 그 지옥의 핏빛 하늘이 중원을 돌모래처럼 휩쓴 지 어언 일 년 반, 철저히 유린된 중원무림은 주검만이 남은 전장(戰場)처럼 황량하게 변모했다. 처절한 호곡성은 하늘에 메아리쳤고 대지는 혈수(血水)로 물들여졌다. 천여 년 간 중원을 향해 야망의 눈을 번뜩이던 지옥삼겁천은 마침내 제 세상을 만난 듯 중원을 짓밟은 것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피에 굶주린 이리떼들의 행진이었다. 눈물겨운 항쟁! 그러나 지옥삼겁천을 물리치기에 중원의 힘은 너무도 미약했다. 의는 반드시 악을 제압한다는 천년 무림 정기의 기치는 땅에 떨어지고, 정문(正門)은 지리멸렬했다. 협사의 절규는 피눈물 속에 쓰러지고 열사(烈士)의 의기는 풍진 속에 볼품없이 산화되어 갔다. 아... 무림의 정기여....... 마도마저 등을 돌려버렸기에 중원 수호의 의기는 영원히 침몰된 듯했다. 그러나 태산에서부터 드디어 암흑을 몰아낼 힘이 폭발했다.드디어 암흑을 몰아낼 힘이 폭발해 올랐다. 중원의 정통마도를 부르짖었던 측천환마전의 노도와 같은 공세가 시작된 것이었다. 쿠쿠쿵......! 측천환마전과 지옥삼겁천, 그 최초의 격돌은 산동(山東)에서 전개되었다. 서북 무림을 초토화시키고 그들의 영토로 삼은 흑사풍은 환마전의 대대적인 기습에 수년 간 쌓아올린 중원진출의 기반까지 흔들리게 되었다. 서북무림 전역에서 정통마맥일 잇는 마도고수들은 흑사풍의 고수들과 엄청난 혈전을 벌였다. 그들은 가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기세로 흑사풍을 휘몰아쳤다. 검은 죽음의 바람 흑사풍, 중토를 유린한 그들의 광오한 진군은 삽시간에 허물어져 갔다. 무수한 패전의 급보가 흑사풍 총단으로 날아들었다. 흑사풍의 사전 계획은 측천환마전의 급습에 여지없이 궤멸되었고, 그들의 세력은 급속히 축소되어 갔다. 그것은 초초가 지옥삼겁천 곳곳에 심어둔 첩자들에 의해 수집된 정보를 다시 분석해서 그들의 기문진과 무공을 거의 파해한 상태이기 때문에 더욱 가능해진 것이었다. 대운은 지옥삼겁천으로 기우는 듯 싶었으나 기인총의 눈부신 첩인술과 기습, 양동작전은 기대 이상의 승과를 올리며 새롭게 중원의 희망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혈란(血亂) 속의 서북무림에 태평성대의 그날은 멀기만 했다. 그러나 무림 정기 회복을 위한 동귀어진의 횃불은 이렇게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중원 무림인들의 장렬한 죽음 속에 기사회생의 길이 열리고 있었다. - 녹혈림(綠血林)의 출동. 중원최대의 녹림단체, 그 푸른 옷의 무인들도 깊은숲속에서 드디어 출진했다. 그들의 모든 작전은 만지화가 맡았다. 그들은 이제 대명천지에서 그들의 위명을 떨치게 된 것이었다. 혈우전(血雨箭)과의 충돌! 녹혈림의 고수들은 그들의 출신성분 답게(?) 전문적인 야습(夜襲)을 벌이며 무서운 혼전(混戰)을 전개해 갔다. 결국 변황의 삼겁천(三劫天)은 중원인들의 공분 속에 휘말렸다. 무림대혈란(武林大血亂).


그 전무후무한 대혈전은 단 하루도 그칠 날이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중원을 집어 삼키려는 이족(異族)의 야망과 중토를 수호하려는 중원정기와의 대격돌이었다. 마침내 파죽지세로 중원을 유린하던 지옥삼겁천의 기세는 주춤해졌다. 중원의 녹림마도의 막강한 반격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녹혈림의 반격은 실로 대단한 기세였다. 그들은 대대로 범죄자, 부랑아 등으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잡초같은 집단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중원정기 회복의 대기치에 그들이 일조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들은 용기백백했고 늘 그늘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자신들의 입지를 변화시키려는 열망도 같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진정 커다란 변수였다. 중원전도(中原全圖), 아니, 그것은 전도(戰圖)였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전도는 온통 수많은 표기로 겹쳐져 있었다. 당금 무림의 전세(戰勢)를 정확하고 꼼꼼하게 모두 표시해 두고 있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그는 당금 무림 정세를 손바닥 안에 놓고 보듯 환히 꿰뚫어 보고 있음을 그 전도를 보는 즉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 그 놀라운 전도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이 섭선으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었다. 우문천릉(于文天凌). 그의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째서 이제껏 잠잠했던 측천환마전과 녹혈림이 삼겁천을 공격한단 말인가?" 그의 아름다운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전도 위에 표기된 밝은 부분은 그 동안 삼겁천이 장악한 지역이었으나 지금의 국면은 위태로우리 만큼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삼겁천의 반 이상이 전력을 상실하는 커다란 타격을 받은 것과 힘들여 얻은 중토의 영지가 실지(失地) 상태에 놓인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일고 있다. 분명히......." 우문천릉의 차가운 음성이 무겁게 흘러나왔다. "이제까지 그들 삼겁천은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었다. 나와의 계약을 제대로 해냈다. 그러나 이제 본가가 나설 때가 된 것 같군." 아니 대체 이 무슨 소리인가? 그렇다면 지옥삼겁천은 여태 그의 조종에 의한 것이란 말인가? 경악(驚愕). 실로 경천동지할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훗훗...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제왕천금신가(帝王天金神家)의 수백 년 숙원을... 이제부터 천하를 무대로 펼치는 것이다." 그렇다. 우문학은 그의 아들 우문천릉에게 실전된 지 삼백 년이나 지난 마물 사영환의 독문무공을 알려주었다. 그는 조화풍운관에서 그의 마공을 수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옥삼겁천을 움직일 수 있는 신물을 얻었으니 그것이 바로 금마불(金魔佛)이었다. 금마불. 포달랍궁의 기인으로 승적에조차 그 이름 석자가 오르지 못할 정도로 광폭하고 괴기스런 삼안선사(森眼禪師) 교파파(巧巴巴)의 시신에서 얻은 영물(靈物)로써 변황마교와 흑도들의 조종임을 나타내는 신물이었다. 그는 조화풍운관의 제 사 연공관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마물 사영환이 자신의 후예를 위해 따로 안배해둔 세 집단, 즉 지옥삼겁천을 움직일 수 있는 신표이자 마물 사영환의 무서운 마공을 연공할 수 있는 무결이 적혀져 있는 마도 최대의 비급이기도 했다. - 제왕천금신가(帝王天金神家). 바로 제왕오행신가(帝王五行神家) 중의 하나가 아닌가? 그 신비의 가문이 그의 입에서 말해진 것이


아닌가? 우문천릉은 섭선을 접으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내뱉았다. "무면자(無面子)!" "옛!" 스스슥....... 마치 유령의 현신처럼 한 명의 중년인이 그 앞에 내려섰다. "때가 되었다. 무혈강시군단(無血 屍軍團)의 출관일은 언제인가?" "백일야(百日夜)!" "계획을 수정하겠다! 측천환마전과 녹혈림의 기습때문이다. 그 변수들을 뒤에서 사주한 세력을 조사하라!" "옛!" "그리고 삼겁천주에게 지시하라! 회군(回軍)을 명한다!" "존명--!" 억양없는 어조에 무표정한 그는 얼굴없는 인간인가? 흑의장포로 머리까지 휘감은 그는 얼굴이 칠흙같이 어두웠다. 스-- 스슥-그는 발끝에서부터 사라져갔다. 무엇인가에 의해 지워지는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순식간에 그의 모습은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무면자가 신묘한 신법으로 사라지자 우문천릉은 다시 중원전도로 시선을 돌렸다. 일순 그의 소매가 가볍게 펄럭였다. 파-- 파락-전도 뒤의 석벽까지 흙먼지를 일으키며 튀어올랐고 잠시 후 전도 위에는 거대한 글자 하나가 새겨졌다. 금(金). 그것은 제왕천금신가(帝王天金神家)의 상징이었다. 중원천하를 천금신가의 이름으로 쟁패하겠다는 뜻일까? 그의 눈에는 무시무시한 폭광이 발출되고 있었다. 중원의 상황급변. 측천환마전과 녹혈림의 출동은 정도무림에게도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대정봉황성(大正鳳凰城). 그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대정의 하늘도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한 것이다. 무황 단목신수는 마침내 중원무림을 향해 대포고령을 내렸다. - 중원의 이름으로 고(告)하노니, 지옥삼겁천을 격멸하라! 그 한마디에 광활한 대륙에 숨죽였던 무림정기가 용트림을 시작했다. 정도고수들은 끓는 가슴을 안고 봉황성으로 몰려들었다. 이제 그들은 숨죽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오직 단목신수만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단목신수의 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왜 아니겠는가? 그는 당금 무림의 무황이지 않은가? 그들은 천군만마를 지닌 것보다 더 든든했다. 그들의 앞에는 오직 쾌승의 날만 올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구파 십방은 흩어졌던 수하들을 모두 모았다. 지옥삼겁천에 의해 그때까지 수하들은 의기와 용기를 모두 잃고 고향으로 산속으로 숨어 있었다. 실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오직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이었다. 수 일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막강한 전투태세가 갖춰졌다. 봉황삼왕이 직접 나서 중원전사단(中原戰士團)을 조직했다. 집결된 고수들의 의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고조됐다. 전사단은 모두 삼단으로 조직됐다. 그 하나하나를 봉황삼왕이 단주가 되어 이끌었다. 환우대전( 宇大戰).


지옥삼겁천과의 대격돌은 이렇게 다가서고 있었다. ② 신비인(神秘人)의 등장! 하나의 혜성이 중원에 출도하며 놀라운 명성을 뿌렸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는 신출귀몰하게 중원천하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그의 초인적인 절학에 지옥삼겁천의 고수들은 속수무책으로 짚더미가 쓰러지듯 죽어갔다. 신비인의 찬란한 광휘는 지옥삼겁천에게 있어 전율스러운 공포였다. 중원인들은 그에게 최고의 찬사와 칭호를 아끼지 않았다. 강호의 공적(共適)인 지옥삼겁천을 통쾌하게 척살하는 그의 업적은 실로 무림개사 이후 최대의 일이었다. 측천환마전과 녹혈림의 출동이 그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상상을 불허하는 무공과 초인적인 기지와 예측할 수 없는 기행(奇行)에 무림인들은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다. 이 시대 새로운 초인의 탄생을 축하하며 천하인들은 입을 모아 그에게 명호를 지어 바쳤다. - 출천환룡(出天幻龍). 그는 중원의 대위기 속에서 찬란히 떠오른 태양이었다. 중원인들은 그 태양이 영원히 꺼지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에 대한 무림인들의 존경과 지지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제 이의 단목신수라고 칭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당금 무림에서 그보다 더 영예스러운 호칭이 어디 있겠는가? 출천환룡, 과연 그는 누구인가? 봉황성(鳳凰城). 중원 정도의 운명이 집결되어 있는 정도제일지(正道第一地). 황산 준령은 의기투합된 정도고수들의 기세에 힘입어 더욱 힘차 보였다. 수만의 정도고수들이 운집되어 있는 봉황성. 정도 기치를 되살리려는 백도의 의지가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하늘은 거울처럼 맑고 청명하기만 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명징한 하늘 아래 한 인영이 봉황성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침내 출천환룡, 그가 돌아온 것이다. 그가 삼 개월 전에 출성할 때만 해도 다시 회성(回城)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않았다. 그는 필시 강호의 혈전에 휩쓸려 죽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알고 난 다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가 아니었다. 그 무례하고 여색잡기에 세월을 허비하며 방약하기 그지없는 반준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무림의 차기 주인으로까지 거명되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돌아왔고 또한 엄청난 명성과 성공을 거둔 채 화려한 회성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엄청난 기쁨이었다. - 출천환룡(出天幻龍). 이 시대 최고의 신성(新星) 새롭게 탄생한 중원의 등불이라는 찬사 속에 그는 돌아온 것이다. 처음 그가 전격적으로 봉황성의 제사왕야가 되었을 때만 해도 그를 비웃고 손가락질하던 자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 사실에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너는... 훌륭히 해냈다. 이 노부는 네가 자랑스럽기만 하구나!" 단목신수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상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천우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히죽 웃어보였다. "뭘요. 다만... 조금 바빴을 뿐입니다." "허허... 이 노부는 단목가의 피가 잘못되지 않았으리라 믿고 있었다. 너는 자랑스러운 단목가문의 후예임을 알아야 한다."


"예, 아버님! 소자는 알고 있습니다." 천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내심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단목가(檀木家)라고...? 웃기지 마시오... 철천지 원수! 너의 목을 당장 베어 버리지 않는 것을 단지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무서울 정도로 냉철한 이성을 유지했다. 원수를 아버지라 호칭한다는 것, 그것은 차라리 죽기보다 더 괴로운 고역이었다. 그는 참았다. 수백 번도 더 단목신수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 온 것이다. 이것은 그가 아니면 도저히 지닐 수 없는 자제력이었다. 그는 어린시절을 마왕성에서 보낼 수 있었다는 것에 새삼 감탄했다. 그는 마왕성에서 인내와 극기를 배웠다. 그 누구도 참아내지 못할 것들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참아내는 법을 배운 것이다. 단목신수는 대견스럽다는 듯이 그를 쓸어보았다. "이제 네가 봉황성의 제사왕야라는 지위에 불만을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천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그에게는 사왕야란 지위는 너무나 미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목신수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 삼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목신수의 두 눈에 은은한 신광이 어렸다. "그 아이들은 느낄 것이다. 단목가의 혈통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 "하나 이 노부는 네가 실력으로 그들을 감복시킬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천우는 그 말을 듣자 문득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소자 아버님을 찾았으나 한 가지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 "가영말입니다. 사실 이곳에 들어온 이유도 가영 때문이었으니까 말입니다." "허허헛......!" 단목신수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받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하나 가영은 너의 이복누이다." "알고 있습니다." "허허... 장차 네가 원하는 모든 여인은 너의 것이 될 수 있지 않느냐?" 천우는 빙그레 웃음을 띄웠다. "이제는 채화공자가 아닙니다. 소자가 출천환룡(出天幻龍)이라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허... 그렇군. 노부가 실수를 했구나!" 단목신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순간 너무도 흡족했다. 반준, 아니 단목준이 자신의 아들임이 자랑스러웠다. "하하하... 아버님께서 실수하실 때가 있으십니까?" "허헛......."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부자간의 대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피보라가 튀고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 듯했다. 천우의 가슴 속에는 무림대의(武林大義)와 원한의 감정이 그 순간에도 수없이 갈등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절신군(三絶神君) 범고풍(凡古風). 천안(天眼), 귀검(鬼劍), 마뇌(魔腦)의 소유자. 그의 이러한 삼절(三絶)의 능력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한 번 본 것은 영원히 잊지 않으며, 천기(天機)를 꿰뚫어 보는 천안(天眼),귀신의 옷자락도 벤다는 귀검(鬼劍) 그리고 세상의 움직임을 앉은 자리에서 판단해 내는 무서운 마뇌(魔腦).......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는 몇일 째 식음을 전폐하고 오직 방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몰라보게 수척해 있었다. 대체 무엇이 그를 고심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가 돌아왔다. 그것도 무섭게 커져서 돌아왔다." 그의 두 눈은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컸다. 그랬기에 천안의 신비한 능력을 지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기이한 것은... 그를 처음 알 때부터 웬지 그가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은 무엇인가에 감싸져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 그의 눈은 바로 천안(天眼)이었다. 천하의 어떠한 역용도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범고풍은 천우를 본 순간 마치 안개에 싸여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에게서는 무언가 수상쩍은 냄새가 난단 말이야."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회자(回子)무늬가 고풍스럽게 장식된 둥근 창문으로 다가섰다. 밤하늘. 암청색으로 맑은 밤하늘에는 긴꼬리를 문 유성이 흐르고 있었다. 명멸하는 별빛이 선연하게 한순간 지상을 내리비추었다. 범고풍은 명성(明星)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 범고풍이 이곳 봉황성에 입문한 지도 어언 십칠 년! 그 수많은 날 동안 나는 한시도 편한 적이 없었다." 그의 안색은 야천을 덮어오는 암운처럼 어두워졌다. "그것은 이곳이 야망의 성(城)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 한시도 야망을 품어보지 않은 적이 없었고 또 그 때문에 단 하루도 잠을 잘 수 없었다." 대체 그의 말을 누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인간이 어찌 십 칠 년 동안 한 번도 잠을 자지 않고 살아올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믿기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그는 정말 잠을 자지 않았다. 그는 아주 잠깐 동안의 휴식으로 기나긴 불면의 피로를 눌러두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의지력의 소산이 아닐 수 없었다. 이윽고 그는 시선을 벽으로 돌렸다. 묵검(墨劍). 한 자루 서기 어린 묵검이 벽 상단에 걸려 있었다. 그의 가늘고 선명한 검미가 가볍게 꿈틀거렸다. "한데 오늘... 나는 비로소 나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최소한 나 범고풍을 능가하는 인물이다." 그는 벽으로 다가서 묵검을 손으로 쥐었다. 맑은 검음을 울렸다. 범고풍을 뽑아들자 묵색 검신이 드러나며 실내에 싸늘한 예기를 발산했다. 그것은 천하의 보검이었다. 귀혼변환검(鬼魂變幻劍). 그는 묵검을 허공으로 치켜 올리며 결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도박이다! 그가 아니면 내가 죽어야 한다!" 옥수서생(玉手書生) 유세옥(庾世玉). 봉황성의 제삼왕야(第三王爺). 그는 미세한 파공음도 내지 않는 절세의 부운지연(浮雲池蓮)의 신법으로 어딘가를 향해 내닫고 있었다. 어둠으로 덮여 있는 성내는 적막하기만 했다. 대전과 거각 몇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이 꺼져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누각들이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어둠 속에서 버티고 있었다. 유세옥은 침중한 안색으로 뇌까렸다. "그는 강하다. 이제껏 나 유세옥이 두려움을 느껴본 상대는 결코 없었다. 하나 그만은 웬지... 두렵다." 그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토로했다. 당세 제일의 미장부로 평가되는 제삼왕야 유세옥, 그는 용모만이 천하제일은 아니었다. 초절한 무공 또한 단목신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적의 경지에 이른 상태였다. 여인처럼 섬세한 손으로 말미암아 옥수(玉手)라는 별호를 갖게 된 그는 그 고운 손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험한 일들을 모두 거뜬히 헤치웠다.


봉황성의 지고한 명성이 어떻게 이룩될 수 있었던가? 그 찬연한 위명의 성세를 이룬 공적의 태반은 그가 삼절신군 범고풍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마의 무림들에게 있어 유세옥의 아름다운 옥수(玉手)는 공포와 죽음의 손(手)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손이 떨리고있었다. 천하의 그 어떤 일도 수행해 낸 그의 옥수가 이번에는 긴장과 두려움 속에 전율하고 있는 것이었다. 출천환룡이라고 불리는 불가사의한 능력의 제사왕야. 그를 뇌리에 떠올리며 유세옥은 그 당당했던 자신감이 스르르 사라져 버리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껏 천하를 주유하며 뇌성처럼 떨쳤던 그의 기백이 맥없이 무너져 내림을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결심한 것이 있었다. "그와의 싸움 이전에 나는 나 자신을 시험해야 한다." 대체 그는 무엇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것일까......? 그의 약점은 그가 지나치게 강한 것임을 그는 알고 있을까? 강한 것은 부드러운 것을 결코 자르지 못한다. 유극강(柔克强)라고 했다. 잠시 후 그는 한 채의 대전 앞에 이르렀다. 그곳은 출천환룡의 거처였다. 그는 무수한 상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 한 순간 정지했던 그의 걸음이 다시 재빠르게 움직였다. 자면신군(紫面神君) 담세기. 봉황성의 제일왕야(第一王爺). 당금 정도무림의 제이인자라 할 수 있는 거목이다. 그가 유세옥의 청원을 들은 순간 놀랍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출정(出征)하겠다고? 그것도 광풍사(狂風沙)를 치겠단 말인가?" 유세옥은 그를 직시하며 결연한 어조로 청했다. "승낙해 주십시오. 사형! 이것은 소제 일생에 있어 가장 중대한 결정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광풍사는 지옥삼겁천 중 가장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네. 우리는 아직 그들을 상대로 출진할 태세가 갖춰져 있지 않네. 왜 그리 서두르는 것인가?" 담세기는 유세옥의 표정을 읽으며 그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유세옥은 나직하면서도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따름입니다. 사형!" "......!" 담세기는 무언가를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의 완고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생각하는 바를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담세기는 유세옥의 생각을 알아차리자 더 이상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두 사형제간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서로의 고충을 서로간에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담세기는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제(四弟), 그 때문인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군... 자네라면 능히 그런 생각을 가질만 하지, 사실은 나도 그렇게 심기가 편하지만은 않다네. 하지만......." 유세옥은 손을 저으며 간곡한 어조로 청했다. "부탁합니다. 사형! 소제는 그의 명성을 부러워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나 자신을 시험해 보고자 할 따름입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 담세기는 잠시 그를 응시하다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놀라운 일일세... 그 자로 하나로 인해 우리 삼왕이 이토록 흔들리고 있다니......." 유세옥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제일왕야인 사형께서도......?' 담세기는 그의 표정을 통해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나도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네." "그렇군요." 유세옥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삼왕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이처럼 자신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갈등에 빠지기는 처음이었다. 천우가 돌아온 이후 봉황성의 모든 관심과 이목은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출천환룡(出天幻龍), 그는 은연 중 봉황성의 제이인자로까지 부상한 것이다. 빛과 그림자처럼 그의 광휘 뒤편에 덮인 그림자에 가려진 삼왕은 불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지난 이십여 년 간 고심 속에 다져온 자신들의 기반이 급속히 추락되는 것을 피부로써 느낀 것이다. 바람(風). 확실한 바람은 불고 있었다. 그것도 천지를 뒤바꿔 놓을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바람은 어떤 자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는 잔인한 바람일 수도 있었다. 또한 어떤 자에게는 희망을 가져다 주는 해빙(解氷)의 훈풍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바람은 하나였다. 그렇건만 그 위용은 온천하를 감싸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 바람은 거대한 회오리를 일으키며 중원을 뒤덮고 있었다. 중원은 그 회오리 속에서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중원전사단(中原戰士團)의 출진(出進). 육중한 봉황성문의 활짝 열리며 수천 필의 준마가 봇물이 터지듯이 짓쳐나왔다. 뽀얀 흙먼지가 운무처럼 피어오른다. 선두의 인물. 그는 다름아닌 봉황성의 제삼왕야 옥수서생 유세옥이었다. 북천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그의 자태는 늠름하기만 했다. 희디흰 백의무복 탓인지 그의 수려한 용모가 한층 더 돋보였으며 얼굴엔 비장의 결의가 굳게 서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봉황성! 흙먼지 속에서도 그 장엄한 웅자는 마치 태산처럼 압도적으로 보였다. 유세옥은 신광을 발하며 힘있게 뇌까렸다. "다시 돌아오리라...! 내가 회성(回城)한다면... 이 유세옥은 지난 날의 유세옥이 아닐 것이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말의 옆구리에 힘차게 박차를 가했다. 히히히힝-준마는 말발굽을 힘차게 놀리며 북으로 치달렸다. 흙먼지가 사방 천여장을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유세옥과 중원전사단의 위용은 가히 태산이라도 허물 듯했다. 혈겁(血劫). 바야흐로 중원과 변황의 운명을 건 한판의 승부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자원하여 선봉에 선 유세옥의 목표는 사천(四川)을 장악하고 있는 광풍사(狂風沙)였다. 지옥삼겁천 중 가장 막강하다는 광풍사의 수는 이 만을 헤아린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들 중 오천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대등한 무공수위를 지녔다고 하니 그들의 힘이 얼마나 절세적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리라. 그들은 그야말로 중원을 황폐화시키는 광란의 모래바람이었다. 과연 유세옥은 그 광풍사를 상대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그는 단목준 못지 않은 혁혁한 전과를 세워 봉황성으로 귀환할 수 있는지 그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리라.


운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25 장 악마의 대법(大法),환혼백팔령시(還魂百八靈屍) ① 지하밀부. "......!" 천우는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밀부 앞에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봉황성 내에 이토록 엄청난 비밀 별부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도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조차 모른다면 천하 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임에 분명했다. 지하궁전(地下宮殿). 단목신수와 함께 지하세계로 들어선 천우는 겨우 마음을 진정 시키며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미로(迷路)는 거미줄처럼 복잡하여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였다. 미로는 한 지점에서 넓어지며 바둑판과 석로로 이어졌다. 석로를 지나면 거대한 지하광장에 이르게 된다. 광장 한편에는 고풍(古風)의 석전들이 축조돼 있었다. 그 옆으로는 가산이 세워져 있었고, 한쪽에는 인공 연못마저 마련돼 있었다. 단목신수는 웅장한 지하궁전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노부는 오래 전부터 이곳을 마련해 두었다." 그는 천우의 의구심을 간파한 듯 지하밀부의 유래를 설명해 주었다. "본래 이곳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한 재상(財相)이 은밀하게 축조해 놓은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탓에 원래의 모습을 잃었지만 노부는 이곳에 다시 거금을 들여 다듬었다." 천우는 그를 따라 내전으로 들어 섰다. 그는 지하궁전 곳곳에 잠복해 있는 수많은 고수들의 종적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고절한 무공의 소유자들이군. 봉황성의 숨겨진 힘이이다.......' 이때 문득 그는 검미를 번쩍 치켜 올리며 나직이 외쳤다. "이곳은 바로... 환천군림부(幻天君臨府)가 아닙니까?" 단목신수는 흠칫하여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아니, 네가 그 것을 어떻게 아느냐?" 천우는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장백에서 들었습니다." "음... 하긴 너의 수단이라면 가능하겠지." 단목신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이제 곧 천하를 지배할 환천군림이다." 그의 두 눈에 강렬한 신광이 폭사했다. "또한 본가의 수백 년 심혈이 어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 "너는 나의 아들! 따라서 필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말씀해 주십시오. 아버님!" 지하궁전을 둘러보는 단목신수의 눈에는 엷은 감회마저 서려 있었다. "환천군림부는 궁극적으로 제왕(帝王)의 도(道)를 실현키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천 수백 년 전부터 무림에는 하나의 신화가 있었다. 지극천단설(地極天壇設)이 바로 그것이다." 지극천단설. 천우는 안광을 빛내며 잠자코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제왕오대신가(帝王五大神家)는 천단오신주(天壇五神珠)가 흩어 나가며 형성된 무가(武家)이다." 단목신수의 말은 계속됐다. "천화(天火), 천금(天金), 현수(玄水), 신목(神木), 토행(土行) 오대신가는 그 뿌리가 하나이다. 나는


언제고 그것이 하나로 모일 것을 믿고 있다." 그의 두 눈에선 은은한 광기마저 서려 나왔다. "하나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천단오신주는 흩어져 있었고, 오대세가는 나름대로의 발전을 거듭해 왔다." "......." 천우는 그의 말을 신중히 뇌리에 새기며 계단을 올라섰다. "지극천단에는 인간이 하늘에 오르려는 집념의 의지로 형성된 초인지학(超人之學)이 비장돼 있다. 그것은 오직 천단오신주, 즉 제왕오대신신주가 합쳐져야만 얻을 수가 있다." 단목신수는 석전의 긴 회랑으로 들어 섰다. "노부는 태어나면서부터 천단(天壇)을 열고 제왕(帝王)이 되려는 야망을 품어 왔었다. 그것은 본가의 오랜 숙원이며, 인간의 극에 이르러 하늘이 되려는 집념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설의 천단은 벌써 천여년 전부터 지상에서 사라졌다. 지각의 변동에 의해 장백의 지하에 영원히 묻혀버린 것이다." "아......." 천우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단목신수가 왜 그렇게 험한 준령을 무림고수들을 색욕으로 현혹하여 납치한 후 마뇌향을 먹여가면서 까지 종유동굴을 파들어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단목신수 한 개인의 야망을 위해 벌인 공사임을 천우는 알게 된 것이다. 단목신수는 천우와 나란히 회랑 모퉁이를 돌며 힘있는 어조로 얘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노부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십여 년 간 줄곧 장백의 무간동(無間洞)을 파 온 것도 그 때문이다." 천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제시했다. "설혹 천단을 발견한다 해도 천단오신주가 없다면 제왕지도의 성취는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아니다!" 단목신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는 분명 그랬다." "......?" "하나 지금은 천단오신주가 필요치 않다." "예예......?" "천단이 지하에 붕괴되어 있다면 필시 그 금제 또한 파괴 되었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오신주가 없어도 초인지학을 얻을 수 있다." 천우는 내심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으음... 충분히 가능하다...! 놀라운 추리로군!' 그는 사태의 급박함을 느끼며 한 가닥 살심을 품었다. '만일 이 자가 천단을 발굴한다면... 세상은 암흑의 수렁 속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주먹이 절로 불끈 쥐어졌다. 손만 뻗치면 단목신수의 후면 급소를 강타할 수 있다. 아무리 천하의 봉황성주라 해도 그의 생명은 천우의 수중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 순간 만큼은 무림대의라는 단단한 자제력을 뚫고 억눌러 두었던 원한의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공력을 운집했다. "이 상태라면 천단을 여는 날도 얼마남지 않았다." 그는 천우에게로 몸을 돌렸다. 천우의 굳어진 안색에 그는 미미한 의혹의 빛을 띄웠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되찾은 자신의 아들, 천우를 신뢰했다. "그러나, 노부는 천단에 모든 것을 걸진 않았다. 비록 천단을 열지 못하더라도 환천군림부의 힘만으로 천하는 일통(一統)될 수 있다." 이윽고 그들은 회랑의 막다른 지점에 이르렀다.


"바로 이 속에 환천군림부의 진정한 힘이 잠재돼 있는 것이다. 본가의 수백 년 염원을 달성시켜 줄 고금최강의 힘이 말이다." "......." 천우는 그가 가리키는 석벽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단지 평범한 석벽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제 너도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단목신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그는 그 자세로 허공에 수평선을 그었다. 기-- 이이이이잉-석벽의 한쪽이 쩍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아......." 천우는 짐짓 감탄의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욱한 묵연(墨煙)과 함께 열려진 석동 속에서 짙은 묵색 운무가 뭉클뭉클 뿜어져 나왔다. 그 속에 엷은 녹색 인광(燐光)마저 번득였다. '부골시독(腐骨屍毒)!' 천우는 그 묵연이 천하에서 가장 극독한 부골시독임을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한 번 맡기만 하면 그대로 전신이 썩어 문드러지는 절대극독이다. "이것을 입에 물어라! 그리고, 동부 안에 들어서면 결코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 차분히 노부의 뒤만 따라오면 안전하다. 이것 만큼은 명심해야 한다." 단목신수는 그에게 푸른색 피독주를 건네 주며 엄중히 당부했다. "예, 아버님!" 천우는 그의 표정에서 석동 안에 잠재된 위험의 정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대체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에 그가 이토록 긴장하는 것일까?' 그는 부쩍 치미는 호기심 중에서도 내심 냉소를 쳤다. '내가 만독불침(萬毒不侵)의 몸임을 알았다면 피독주 한 알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목신수는 묵연을 헤치며 석동 안으로 들어 섰다. 천우는 그의 측면으로 한 걸음 간격을 두고 따라 들어 갔다. 기-- 이이이잉-석동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가 다시 닫혔다. 동시에 정면을 막아선 또 하나의 철문이 활짝 열렸다. 이중문(二重門). 첫째 문이 닫혀야 둘째 문이 열리게끔 설계된 치밀한 차단 장치였다. 묵색의 자욱한 운무를 다시 뚫고 지나가자 둘째 철문의 내부가 드러났다. 그것은 쾌 넓은 원형의 광장이었다. 묵연을 뚫고 저 안에서 핏빛의 광채가 엷게 뿜어져 나왔다. 슈... 슈슈......! 극악한 부골시독이었지만 피독주에 밀려 두 사람에게는 해를 끼치지 못했다. 피독주의 푸른 기운에 밀린 묵연은 그들의 일 장 둘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천우는 걸음을 내닫다 말고 석상처럼 멈춰섰다. "......!"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경악(驚愕), 그리고 전율(戰慄)......! 그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너무도 생생한 엄청난 공포(恐怖)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으으, 사람이 아니다... 이 자는......." 부글... 부글....... 지하 수백 장 밑에서 끌어 올린 용암이 거세게 들끓고 있었다. 무쇠 덩어리라도 이 용암 속에 던져지면 이내 쇳물로 용해돼 버릴 것이다.


그런데 시뻘겋게 끓고 있는 용암 속에 백팔 인이 상반신만을 드러낸 채 앉아있는 것이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 용암 위에 좌정해 있을 수 있다니... 대체 이것이 진정 가능한 일인가? 모두 백팔인이었다. 그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의 상태로 있었다. 그들의 연령층은 다양했다. 중년에서 노년까지, 그리고 여인의 숫자도 족히 삼십여 명이나 되었다. 기이한 것은 그들의 몸에서 뿜어지는 핏빛 광휘, 그들은 마치 핏빛의 수정막에 싸인 듯 이촌 두께의 피부막을 지니고 있었다. 용암 속에서도 그들의 신체가 녹아들지 않는 것은 그 혈강막 때문인 듯했다. 끔찍하게도 그들의 뇌호혈은 일촌 넓이로 갈라져 갔다. 허연 뇌수가 그대로 내비쳐 보일 정도였다. 석부 안의 부골시독(腐骨屍毒). 그 검은 독무는 백팔인의 뇌호혈을 통해 그들의 체내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용암에도 녹지 않고 절대극독인 부골시독마저 체내로 흡수하는 이들 백 팔 인. 대체 이들의 불가사의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단 말인가? 천우는 분노에 치를 떨며 날카롭게 외쳤다. "환혼영시대법(還魂靈屍大法)--!" 그것은 지옥을 옮겨다 놓을 수 있을 정도로 극악한 사술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정도무림의 태양인 대정봉황성의 지하에 이런 가공할 장소가 숨겨져 있다니 실로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환혼령시대법-지금 석부 안에 펼쳐지고 있는 극사한 대법이 바로 악마의 환혼대법이었다. 너무도 극악무도한 시술 방법이기에 마도계에서조차 금지시킨 전설의 악마대법! 단 한 구의 환혼영시를 탄생시키는데만도 일천 구의 시신이 필요하다. 죽은 지 삼 일이 안된 일천 구의 시신에서 뽑아낸 부골시독(腐骨屍毒). 그것을 피시술자의 뇌호혈에 이십 년에 걸쳐 주입시킨다. 동시에 용암이나 반양지(盤陽池)등에 담구어 부골시독을 중화시킨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환혼영시는 한 몸에 천인(天人)의 능력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도검불침의 금강불괴지신을 이루기에 그 어떤 무공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 또한 신지를 상실한 상태에서도 본래의 무학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므로 환혼영시 한 구만 탄생해도 천하는 대혈겁 속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환혼영시의 탄생은 바로 악마(惡魔)의 현신이었다. 이 석부 속에서 그 가공할 마력의 환혼영시 백 팔 구가 탄생 직전에 있었다. 이 얼마나 통천경악할 사실인가? 천우는 한참 동안이나 전율을 금치 못했다. 부...... 붕...... 붕..... 사방의 자욱한 독연 속에서 무수한 독봉들이 쏟아져 내렸다. 녹색 인광이 번득이는 눈, 검은 날개에 붉은 몸체를 한 이촌 길이의 무시무시한 독벌떼였다. 사시독봉(死屍毒峰)-시체의 부독(腐毒)만을 먹고 사는 천하제일의 극독충(極毒筮). 이 사시독봉에 쏘인 자는 삼보를 옮기기도 전에 전신이 문드러져 죽고 만다. "쉿-- 사시독봉을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 단목신수는 전음을 펼쳐 천우에게 주위를 주었다. 천우는 석부 안을 둘러보며 간담이 철렁 내려 앉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해골. 바닥에 산재한 수천 구의 해골들은 벽과 천장에까지 매달려 있어 그 숫자는 실로 수천 수만을 헤아리고도 남았다. 부패될대로 부패된 해골은 시꺼멓게 변색돼 있었다. 석부 안을 가득 채운 부골시독은 바로 이 엄청난 수효의 해골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더욱 몸서리쳐질 광경은 수만의 해골더미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수백 마리의 사시독봉이었다. '으으.......' 천우는 주먹을 불끈 쥐며 터질 듯한 분노를 애써 눌러 참았다. '단목신수! 네가 과연 사람이냐? 악마의 대법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이십 만 팔천 구의 해골들은 대체 어찌된 것이냐? 그리고 대법의 방해자를 죽이기 위해 키워 놓은 사시독봉! 비록 시신이니마 어찌 벌레들의 먹이로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이냐? 이 짐승만도 못한 작자야!' 그의 격분과는 달리 단목신수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용암 위에서 양성되고 있는 환혼백팔영시(還魂百八靈屍)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은 흥분과 열기로 빛나고 있었다. "보고 있느냐? 저 환혼백팔영시의 당당한 모습을......! 저것들은 단목가의 염원과 숙원을 현실화 시켜 줄 절대최강의 힘이다!" 그의 음성은 들뜬 희열로 인해 가늘게 떨렸다. 천우는 대꾸조차 하기 싫었다. 단지 용암의 중화 속에 부골시독을 끌어 들이는 환혼백팔영시들을 묵묵히 쏘아볼 뿐이었다. '아... 저 괴물들이 세상에 풀어진다면 천하는 결단난다. 대체 무엇으로 저들을 막는단 말인가?' 단목신수는 자신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대견스레 응시하며 자랑스레 말했다. "저들 환혼백팔영시들은 대법을 완성하기 위해 용암에 들어 있기 전에도 천하무적의 고수들이었다." "......?" "이십 년 전, 마왕성의 환우겁천백팔마(還宇劫天百八魔)를 상대하기 의해 당대 최고의 고수들 삼백여 명이 규합했다." "제천삼백열협(濟天三百烈俠)--!" 천우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고 말았다. 단목신수는 회상에 젖은 눈빛으로 과거지사를 얘기해 갔다. "그렇다. 제천삼백열협! 그들은 진정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마왕성의 무적군단인 환우겁천백팔마가 그들의 손에 의해 모조리 격멸되었다. 물론 제천삼백열협도 무사하지 못했다. 무려 이백여 명이나 목숨을 잃었고, 겨우 백 팔 인만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아... 그렇다면... 그렇다면......?' 천우는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듯했다. 단목신수는 그의 심적 고통을 더욱 가중 시키려는 듯 유쾌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제천백팔열협! 그들의 부상은 엄중했다. 개중에 태반은 무공이 상실된 채 폐인이 되다시피할 정도였다. 진정 안타까운 일이 아니냐? 만일 너라면 그 열협들을 그대로 죽어가게 내버려 두겠느냐?" 천우는 열혈의 분노를 가까스로 억제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을 네 놈은 하고 있다......!' "노부는 그들의 혁혁한 전공을 생각해서라도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환혼영시로 만든 것이다. 비록 그들은 신지를 상실했지만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무공을 펼칠 수 있다." '악마--!' 천우의 얼굴 근육이 심한 경련을 일으켰고 그의 가슴 속은 극심한 격동으로 폭발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단목신수는 잔잔한 미소까지 머금었다. "진정 아름다운 일이 아니더냐? 마왕성을 깨뜨린 그들의 무공이 이제 본 가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쓰여지게 됐으니 말이다. 그들은 이제 불사지체(不死之體)의 몸으로서, 본가의 충복이 되어 무림을 위해 또다시 충성을 바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극에 이른 분노! 인간이 자신의 감정을 억제 하는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그 극에 이른 분노를 참아낼 수 있다면... 그는 명경처럼 고요한 냉정으로 되돌아 올 수 있게 될 것이다.


천우는 한 순간의 싸늘함 속에서 이성을 되찾았다. 그렇다고 그의 마음 속에 분노가 모두 사그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활화산 같은 분노는 얼음처럼 차디찬 분노로 얼음처럼 차디찬 분노로 변모돼 있었다. 백색의 분노! 천우는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죽이는 것은 그의 악마적 죄과에 비해 너무도 사치스러운 최후를 안겨다 주는 것이다. 좀 더 잔인하게 그리고 좀더 고통스럽게 죽여야 한다. 아니, 천하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서서히... 아주 서서히 죽여야 한다. 그래도 이 악마의 죄과는 용서될 수 없다.' 슈...... 슈슈슉...... 부글부글 끓던 용암에서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짙은 홍무(紅霧). 그와 함께 환혼백팔영시의 전신에 서린 혈강막이 투명한 빛을 발했다. 우-- 우웅-석부 전체가 심한 진동을 일으켰다. 환혼백팔영시의 뇌호혈로 스며들던 부골시독이 엄청난 속도로 빨려 들어 갔다. "오... 마침내, 환혼백팔영시가 탄생된다!" 단목신수는 감격에 겨운 외침을 발했다. 천우는 참기로 했다.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의 폭발로 인해 천하에 끼칠 우(憂)를 상기해서라도 끝내 감정의 충동을 참았다. 이 순간 석부 전체가 빨갛게 달아 올랐다. 석부 안을 가득 채웠던 부골시독은 환혼백팔영시의 몸에 모두 흡수돼 버린 것이다. 용암의 극열지화(極熱之火) 역시 백팔령시의 체내에 모조리 흡입됐다. 번-- 쩍-암흑을 깨고 치솟는 아수라의 마안(魔眼)인가? 그 강렬한 섬광은 눈을 뜬 환혼백팔영시의 안광에서 발로된 것이었다. '으으--! 엄청난 살기!' 한 명의 환혼영시의 안광과 직시하게 된 천우는 심장이 파열되는 고통을 느꼈다. 단목신수는 재빨리 소매 속에서 둥근 금환을 꺼내 들었다. 환 둘레에는 아홉 개의 구리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환혼백팔영시! 이제 너희들은 이십 년의 수련 속에 탄생된 것이다. 어서 일어나거라." 딸랑... 딸랑....... 아홉 개 동령은 제각기 기괴한 음향을 발했다. 이에, 용암에 반쯤 잠겨 있던 환혼백팔영시는 유령처럼 몸을 날려 석부 안으로 내려섰다. 혈강막 때문인지 그들의 피부는 마치 핏빛 유리질에 덮인 듯 매끄러웠다. 섬뜩한 것은 그들의 피부는 마치 핏빛 유리질에 덮인 듯 매끄러웠다. 그 혈안에서는 한 점의 인성과 감정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단지 파괴와 잔혹의 기운만이 뭉클뭉클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쐐-- 애애애액-쏴-- 아아아아-십만 팔천 구의 해골더미 속에 부착해 있던 수백만 마리의 사시독봉들이 녹색 광선이 되어 날아 들었다. 자신들의 먹이인 부골시독이 환혼백팔영시의 몸에 모두 흡수됐기 때문이다. 사시독봉들의 공세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금철을 녹이는 극독과 세촌 두께의 철판도 관통하는 독침을 보유한 죽음의 독벌! 녹색 인광을 발하며 날아드는 그들의 대공세는 철산(鐵山)이라도 대번에 흔적도 없이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단목신수는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이 격돌을 주시했다. 천우는 내심 기원했다. '사시독봉들아! 제발 저 악마의 대법으로 탄생한 악령들을 녹여 버려라!' 파-- 라라라라락-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환혼백팔영시들의 혈강막에 닿은 사시독봉들은 가루가 되어 찢어지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천하제일의 극독을 지닌 사시독봉조차 저들의 혈강막을 관통할 수 없다면 대체 무엇으로 저들을 공략할 수 있단 말인가? 천우는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무시무시한 공격을 받던 환혼백팔영시들이 간단한 반격을 시도했다. 번-- 쩍-그들의 두 눈에서 엄청난 화기를 동반한 섬광이 폭사해 나왔다. 허공을 가득 채운 사시독봉떼는 삽시간에 화공 속에 휘말렸다. 죽음의 독벌 사시독봉의 공포는 환혼백팔영시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허허헛......." 단목신수는 그 광경을 보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그의 가슴 속은 이미 천하를 장악한 듯한 격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하일통! 아... 그것이 내 대에 이르러 드디어 성취되다니... 구천에 계신 선조들이시여, 기뻐 하소서. 본 가의 숙원과 야망의 달성이 이제 목전에 이르게 되었나이다!' 천우는 참담한 비애를 씹어야 했다. 닥쳐올 무림 대파멸 속에서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천우는 최후의 순간가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조만간 자신이 할 일을 생각해 낼 것이다. ② 밤(夜). 잠 못 이루는 밤은 괴롭다. 밤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괴롭다는 것이다. 천우는 가슴 속의 답답함을 지울 길이 없었다. 단목신수로부터 환천군림부의 내막을 구경한 이후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환혼백팔영마... 그들 중 단지 한 명만 무림에 나와도 무림은 피바다가 된다. 한데... 나에게는 그들을 막을 방도가 없다.......' 천우의 가슴은 천근 납덩이에 눌린 듯 갑갑하기만 했다. '기인총(奇人總)의 힘이면 어느 정도 평형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은 크나 큰 오산이었다... 황금대총과 남천신도의 힘, 거기에 독황교(毒皇敎), 녹혈림도 어느 정도 힘이 될 것이기에 무림의 정세에 그다지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었다.' 천우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덮였다. '그러나 환혼백팔영시... 대체 인간도 아닌 그들을 누가 막아낸단 말인가?' 그의 생각은 계속 되었다. '거기에다 지옥삼겁천을 암중으로 조종하는 자의 잠재력은 어느 정도인지조차 모르는 상태.......' 천우는 문득 굉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탄식했다. "굉호법, 그대의 충언이 없었던들 지금쯤 기인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오." 당시 그는 단목신수를 원수로 여겼을 뿐 깊은 생각없이 정공법(正攻法)을 쓰려 했다. 하나 그렇게 되었다면 그야말로 얼마나 어리석고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겠는가? '어쨌든... 기인총에 이 무서운 일의 내막을 알리자.' 천우는 즉시 먹을 갈았다.


슥-- 슥--! 글씨를 써내려가는 손길은 거침이 없었으나 그의 얼굴은 무겁기만 했다. 이어 그는 종이를 접은 후 품속에 넣었다. 전서구를 관리하는 봉황성의 지결단(地結壇)의 단주 호면신부(虎面神斧) 곽청은 제 사왕야의 요구에 응했다. 사왕야는 가장 빨리, 멀리 날 수 있는 특수하게 훈련된 전서용 비둘기를 요구한 것이다. 그는 용도를 묻지 않았다. 출천환룡(出天幻龍) 사왕야라면 필히 중대한 용무가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야산(野山). 거친 죽림(竹林)이 우거진 야산은 봉황성 후미진 곳에 있었다. 천우는 야산 중턱에서 비둘기의 귀에 대고 뭐라 낮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구구구....... 비둘기는 울음을 냈다. 마치 그의 말을 알아 듣기라도 한 듯했다. 실제 천우는 금수제혼술(禽獸制魂術)이라는 금수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전서구에게 낙양 기인총으로 날아가도록 지시한 것이었다. "가거라." 획! 비둘기는 그의 손을 벗어나자 힘차게 야천을 날아올랐다. 막 십여 장쯤 치솟았을까? 번-- 쩍! 난데없이 묵빛 검광(劍光)이 폭사되어 나왔다. 비둘기는 여지없이 양단되었다. 조각이 난 비둘기는 한 곳으로 빨려들 듯 떨어졌다. 그 순간 천우의 신형이 그곳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날아갔다. 검(劍). 자루도, 검신(劍身)도 온통 검다. 묵검(墨劍)은 어둠 속에 수평으로 뻗어 있었다. 그 검선 위에 비둘기가 놓여 있었다. 비둘기는 자신이 두 동강난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듯 파닥거리고 있었다. "이제야 꼬리를 잡았군." 묵검 뒤에 숨은 인영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비둘기 다리에서 종이조각을 끌어냈다. "이제 그만 나오시지." 그는 차갑게 말했다. 그의 맞은편 죽림 속에서 인영이 솟아나왔다. 천우였다. 천우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범형(凡兄)이 아니시오? 이 밤에 검을 연마하기라도 하시오?" 묵검은 여전히 뽑혀진 채 수평으로 뻗어 있었다. 삼절신군(三絶神君) 범고풍(凡古風). 그는 차갑게 말하고 있었다. "나의 눈과 판단력은 정확하다. 너는 누구냐?" 천우는 여전히 빙글거렸다. "봉황성의 사왕야, 이름은 반준이오." 범고풍은 보통사람보다 배나 큰 눈에서 무서운 살광이 뿜어져 나왔다. "꼬리가 잡혔다. 발뺌할 셈이냐?" "그건 무슨 말이오? 꼬리라니......?"


"이것은 무엇이냐?" 천우는 그가 내민 전서를 보았다. 그는 피식 웃었다. "전서가 아니오?" "바로 네가 방금 전 띄운 것이다." "그렇소." "어디로 보내는 것이냐?" "그건 말할 수 없소이다." "흐흐... 보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의기양양하게 전서를 펼쳐보던 범고풍의 안색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이... 이것이 무슨 글씨냐?" "암문(暗文)이오. 아무나 볼 수 없도록 특수하게 쓴 것이오." "으... 교활하군!" "세상은 더욱 교활하지 않소? 한데 범형은 어째서 검을 거두지 않는 것이오? 설마......." 범고풍은 전서를 던졌다. 허공에 뜬 전서를 향해 그의 검이 베어졌다. 단 일초에 전서는 그만 가루가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과연 귀검이라는 별호가 허세가 아니었다. "오호! 정말 왜 범이형의 귀검이 삼절(三絶)에 속하는지 이유를 알겠소이다." 천우는 감탄한 듯 말했다. 범고풍은 여전히 검 끝을 수평으로 천우에게 겨누고 있었다. "반준, 나는 오늘 이 검에 피(血)을 묻힐 생각이다." "벌써 비둘기의 피가 묻었지 않소?" "사람의 피(血)!" 천우는 서서히 안색을 굳혔다. "나를 죽일 셈이오?" "그렇다.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왜? 무엇 때문이오?" 범고풍의 얼굴에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너로 인해 나의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 "나 범고풍은 야망의 나날 속에서 성장했다. 봉황성은 네게 그런 야망을 불러일으켰고 나는 하루 하루를 천하제일인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먹고 살아왔다." 범고풍의 얼굴에는 고통과 절망의 빛이 어렸다. "담사형조차 진정한 나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나는 봉황성의 후계자가 되어야 했다. 그것만이 나의 삶이요, 생(生)의 이유였다." "범이형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그렇게 될 것이오." 천우는 당당히 말했다. "흐흐... 그렇다. 그것은 기정사실이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 "한데 네가 나타난 후 나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너는 맹주의 마음을 얻었고 천하인의 우상이 되었다. 내가...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네가 일순간에 가로챘다." 천우는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기우이오." "흐흐... 반준, 범고풍의 삼절에 마뇌가 있음을 잊었느냐? 나의 판단은 정확하다. 너는 확실히 범고풍의 위다."


천우의 안색이 문득 신비해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이오." 범고풍의 얼굴에 처절함이 부각되었다. "흐흐흐흐... 그렇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나 범고풍은...... 한다면 하는 성격이다." "정녕... 생각을 바꾸지 않겠단 말이오?" "으하하핫... 귀검은 한 범 뽑혀지면 피를 보아야만 한다. 오늘밤 너의 피든! 나의 피든!" 은은하게 범고풍의 묵검이 울었다. 마치 피를 달라고 조르는 듯이 그 검음은 처량했다. 그의 주인의 운명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 그 울음은 천우의 가슴에 이상한 파문을 일으켰다. 범고풍의 묵검에서 은빛 강기가 맹렬하게 쏘아져왔다. 천우는 그와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 결과가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일까? 백호(백호)는 쓸데없이 사냥을 하지는 않는 법이다. 무방비상태의 천우는 전신의 피부가 검기에 의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달이 서서히 시진봉(始眞峯) 너머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묵검은 정지되었다. 그런데 묵검을 쥐고 있어야할 범고풍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어진 것이다. "무종검극(無綜劍極)!" 천우의 입에서 경악성이 토해졌다. 그것은 전설상의 검도(劍道)를 말한다. 과연 그의 말이 어불성설이 아니었다. 담세기가 아무리 절륜한 무공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무종검극의 경지에까지는 이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심공(心功)이어서 천재적인 두뇌가 없이는 무종극검결을 극성까지 연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담세기는 자질은 월등하게 출중하나 범고풍에게는 그것을 뛰어넘는 마뇌가 있었다. 범고풍은 사라졌다. 엄격히 말하면 그의 신체와 영혼은 완전히 검속에 흡수되어 버린 것이었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팍! 천우는 공중에 떠있는 묵검이 번개를 토하는 것을 보았다. 아니 이미 번개가 되어 그의 가슴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동시에 피가 사방 삼 장까지 튀어올랐다. 자욱한 피안개가 막 시진봉 너머로 지려는 달 속을 환상적인 담홍색으로 물들였다. 검은 피(血)를 부른 것이다. 그것이 누구의 피든 검은 관여하지 않는다. 일단 검집에서 뽑힌 검은 반드시 피를 보아야한다. 그것이 검사(劍士)의 불문율이다. "고풍(古風)을 죽인 것은... 너냐?" 단목신수는 무서운 눈으로 천우를 주시하며 물었다. 천우는 담담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의 목소리에는 물기 어린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범고풍은 사실 그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것이다. 이십 년의 심혈을 기울여 키운 삼절신군 범고풍이 죽림 속에서 눈을 부릅 뜬 채 발견된 것은 바로 조금 전이다. 그는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정확히 장(掌)에 의한 구멍이었다. 그의 손에는 묵검이 들려 있었고 부릅뜬 그의 두 눈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이 생생히 맺혀 있었다. 천우는 여전히 말했다. "그가 원했습니다." "고풍이... 스스로 원했다고?"


단목신수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그는 소자가 자신의 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그는 소자이든 자신이든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면 그는 야망을 잃었기에 실상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고풍... 그랬었군, 네놈은 사실 노부와 가장 비슷한 놈이었지......." 천우는 처음보았다. 무림의 대효웅 단목신수. 그의 눈에 어리는 이슬을 그는 처음보았다. 도저히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얼마 전 지하밀부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무릇 과도한 야망 뒤에는 언제나 정에 굶주린 나약한 심기가 숨어 있기 마련인가? '효웅... 당신은 정말 범고풍을 아끼고 있었구료.' 천우는 마음이 울적해졌다. 효웅에게도 따뜻한 인간미가 있었음을 본 탓일까? "책임을 묻지 않겠다. 너는 돌아가도 좋다......." 천우는 단목신수의 음성이 고통에 떨리는 것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그때 그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하나를 얻으니 하나를 잃는구나......." 26 장 욕망(欲望)의 인간(人間)들 ① 혈우성풍(血雨 風)-무림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이 있을까? 무림은 전란에 휩싸여 피의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중원(中原)은 피로 더럽혀지려는가? 곳곳에서 피무지개가 일고 처절한 비명이 대기를 갈라놓는다. 내일이란 말은 이미 이 땅에서 사라져 버렸다. 무림인들에게는 오늘, 그리고 어제만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리고 지금 너는 살아 있더냐?" 대혈륜(大血輪)이 중원을 짓이기고 있었다. 지옥삼겁천(地獄三劫天)은 새로운 양상으로 중토를 공략했다. 그들은 상호 긴밀한 연락과 병법으로 중원무림을 유린했다. 흑사풍(黑死風). 혈우전(血雨箭). 광풍사(狂風沙). 그들은 이족(異族)들이었다. 중원은 그들에게 침략의 대상 외에 그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잔인했고 흉폭했다. 다행인지 그 때문에 중원무림은 실로 오랜만에 한 덩어리가 되고 있었다. - 측천환마전(測天幻魔殿). - 녹혈림(綠血林). 그들은 마도와 녹림의 무리였으나 지옥삼겁천과의 대전에 전력을 기울여 스스로 뛰어들고 있었다. '중원은 중원인이 지킨다.' 그것이 그들의 외침이었다. 다만 예외인 것은 고루혈사교( ?血死敎)였다. 그들은 중원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고 새외변방으로 쫓겨났던 흉신악살들의 무리였다. 그들은 지옥삼겁천과 합세하여 중원을 공격하고 있었다. - 봉황성(鳳凰城)의 출동(出動). 마침내 정도무림인들의 하늘인 봉황성이 출동하였으니... 바야흐로 천하는 혈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고 말았다.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대격돌. 일찍이 이토록 끔찍한 무림전사(武林戰史)가 또 있었던가? 후대인들은 피에 젖은 무림사록을 읽으며 치를 떨게 되리라!


"헉헉......!" "으으......!" 절망에 찬 신음과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일그러진 얼굴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지... 그들은 지쳤다. 하늘은 그 위에 폭우를 뿌리고 있었다. 번-- 쩍-뇌전이 산을 무너뜨리고 폭우는 중원땅을 뒤덮을 기세로 몰아치고 있었다. 사천(四川)이 이토록 험난한 것인 줄 몰랐던 것이 실수라면 대실수였다. 애초에 패주(敗走)하는 광풍사의 무리들을 무리하게 추격하여 촉중(蜀中)으로 깊숙이 들어온 것은 중대한 착오였다. 그들은 피냄새를 따라 미친 이리떼처럼 달려왔다. 그러나 병법(兵法)에도 궁지에 몰린 적은 쫓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그러나 그들은 쫓기는 척 했을 뿐 실상은 함정으로 유인한 것이었다. 꽈르릉......! 사방 그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출로(出路)를 찾을 길이 없었다. 옥수서생(玉手書生) 유세옥. 그의 모습은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 순백의 유삼은 흙탕과 핏물에 젖을 대로 젖은 채 너덜너덜했다. 사방은 깎아지른 듯한 고봉과 절벽이요, 폭우에 급격히 불어난 폭류가 그의 하반신까지 차 급류가 구비치고 있었다. 콸콸콸......! "악!" 어디선가 비명이 들렸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봐야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허위적대며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 가는 수하가 지른 비명임이 뻔했다. 그렇게 비명을 달리한 자가 무려 사십 명을 넘었다. 헛된 죽음이었다. 봉황성을 출성(出城)한 지 두 달여. 그들은 지옥삼겁천 중에도 가장 강하다는 광풍사와 맞붙었다. 유세옥은 무서운 속도로 북상했다. 그에게는 봉황성의 전위대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단숨에 오랑캐들을 사막으로 쓸어버리려 작정한 그는 파죽지세로 밀었다. 광풍사는 그들에게 여지없이 패해 달아난 것이다. 하나 사천의 험역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고 말았다. 그들은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하늘을 뒤덮는 원시림, 병풍같이 둘러싼 절벽, 비만 조금 와도 폭류가 되어 구비치는 계곡, 그 속에 갇힌 그들은 불규칙적이며 악랄하고 집요한 광풍사의 기습에 번번히 치명타를 입곤 했다. 마침내 사천의 오지에 갇힌 그들의 숫자는 애당초의 삼천(三千)에서 대폭 줄어 지금은 불과 오백여 인 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도 중상자를 포함한 수효였다. 패찬병도 이런 패잔병은 없다. 다리를 질질 끌며 동료를 어깨에 메었는가 하면 어떤 자는 팔 하나를 잃은 채 중상자를 입기도 했다. 비참했다. "아아...! 유세옥아! 유세옥...! 결국 너는... 참담하게 이런 곳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느냐?" 유세옥. 그는 폭우가 퍼붓는 암천을 우러러 보며 절규했다. 번-- 쩍-그 순간 뇌전이 암천을 갈랐다. 사방에 기울어 무너질 듯한 깎아지른 절벽 사이... 그곳에 우뚝우뚝 서


있는 무수한 인영, 인영들은 바로 광풍사였다. 일신에 검은 피풍을 걸친 기골이 장대한 막북인들이었다. "으하하하하... 으하하하하......!" 콰쾅! 콰콰쾅....... 벽력음 속에 섞여 들려오는 유세옥의 분노와 절망에 찬 광소는 한동안 여음이 되어 계곡 사이를 메아리쳤다. 그의 광소에는 그 누구에게라기보다 바로 자신에 대한 분노, 실망, 한탄이 섞여 있었다. 사천(四川)의 오지에서 벌어진 일. 바로 그곳에서 봉황성의 전위공격대가 영원히 사라져 버린 비극은 벌어졌다. 무림사에조차 제대로 기술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너무도 어이없이 무너진 것이다. 우문천릉.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승리자만이 누릴 수 있는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눈은 유세옥을 내려보고 있었다. 옥수서생 유세옥. 그는 비참한 모습이었다. 대전 바닥에 누워있는 그의 모습은 시체 같았다. 전신의 의상은 갈가리 찢겨져 있었으며 성한 곳이라곤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예전에는 그토록 아름다운 미남자였던 그의 얼굴도 몇 가닥의 날카로운 흉기에 그어진 흉측한 상처로 그의 얼굴을 괴기스럽게 만들었다. "으으... 죽... 죽여다오......!" 그는 괴롭게 몸을 꿈틀대고 있었다. 꿈틀거릴 때마다 그의 상처에서는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철저히 패했다. 싸움터에서 죽는 것은 무인의 영예다. 그러나 사로잡혀 적지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크나큰 모욕이요, 수치다. 유세옥은 자신을 저주했다. 그는 굴러 떨어질 대로 굴러떨어졌다. 이 이상 비참한 일은 없다. 그는 승리의 미소를 물고 자신을 오만하게 내려다 보는 우문천릉을 짓무른 핏발 선 눈으로 보았다. "죽여다오... 부탁... 우문아우......." 우문천릉. 과거 봉황성주의 회갑연에 나타난 우문천릉을 그는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우문천릉은 닭모가지 하나 비틀 힘도 없는 약골이 아니었던가? 한데 지금의 그는 승리자가 되어 저 높은 곳에서 자신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다. "죽여... 주게......!" 유세옥은 다시 한 번 애원했다. 우문천릉은 빙그레 웃었다. "그럴수는 없지. 나에게는 계획이 있소. 그것은 장차 삼왕을 나의 하인으로 삼는 것이오." "으으......!" 모욕도 이런 모욕은 없다. 유세옥은 너무도 세차게 이를 갈아 마침내 이란 이는 몽땅 입 속에서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자... 잔인하군......!" "잔인? 후후... 내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단목신수가 본가를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그는 무황이 된 후 본가를 여러 차례 섬멸하려 했지. 만일 내가 병서생으로 위장하지 않았다면 본가는 지금쯤 폐허가 되어 있을 것이다." "복... 복수인가?" "후후훗...! 복수? 그건 단지 아주 미미한 부분에 불과하지."


"......?" "본가의 궁극적 목표는 천하를 거두는 것이오." "건... 건방진......." 유세옥은 말을 다하지 못했다. 기력이 탈진하여 그만 그 순간 천지가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끼며 의식을 잃고 만 것이었다. 우문천릉은 고혹적인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무면자(無面子)!" "넷!" 바닥에서 솟아난 것처럼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를 데려가라. 어떻게든 살려라. 당옥교(唐玉嬌)라면 방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넷!" 목소리가 없었더라면 그는 나타났다 사라진 것처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신비스럽게 출몰했다. 어느 새 대전 바닥에는 핏물만 흥건히 고여 있을 뿐 유세옥의 모습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우문천릉은 텅빈 대전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은 마치 절대(絶對)에 도전하는 자처럼 냉랭하고 차갑게 보였다. 그는 확신한다. 자신의 대계(大計)는 완벽했다. 지옥삼겁천은 대대적인 중원무인들과의 혈전 속에 소모되고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단지 이용물에 지나지 않는다. 애당초 우문천릉은 그들이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중원무림에 패배하는 것도 결코 바라지 않았다. 소모전. 그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중원무림과 지옥삼겁천이 다함께 소모전으로 그 전력을 상실케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질 않는가? "이제... 천하가 내 야망의 품에 안길 날도 멀지 않았다." 우문천릉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의 뇌리에는 통일된 천하를 군림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단목신수... 당신이 아무리 교활하고 뛰어나다 해도 내게는 후훗... 비장의 무기가 있소." 그의 음성에는 다분히 조롱기가 어려 있었다. "무혈강시군(無血 屍軍), 그들이 출동하면 천하에 막을 자가 없을테니 말이오." 우문천릉의 얼굴에는 도취의 기색이 역력했다. "후후... 알고 있소? 당신은 이제 모든 것을 내게 넘겨주게 될 것이오. 당신의 세 제자인 봉황삼왕(鳳凰三王)은 물론...... 당신의 딸 백봉황(白鳳凰)까지도 말이오." 그의 말은 지나치게 광오한 것이 아닐까? 흔히 천재(天才)는 자신을 너무 믿는 버릇이 있다. 우문천릉도 천재였다. 그는 자신의 판단력과 두뇌를, 그리고 능력을 믿었다. 아니 그 역(역)도 가능하리라. 그는 자신이 얻으려는 것은 반드시 얻을 것이다. 그의 최대적수는 신단기성 단목신수였다. 그러나 그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정작 그의 운명은 일찍부터 또 다른 한 사나이와 함께 그 기복을 달리하게 되어졌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② 장백. 백봉황 단목가영은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드디어... 천단(天壇)을! 천단을 찾았어!' 극락쾌활림의 무간동(無間洞)의 발초작업은 무려 이십 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동안 희생된 인명은


수만을 헤아린다. 이곳에서 생긴 시신은 다시 대정봉황성의 지하밀실로 비밀리에 옮겨져 환혼백팔영시를 만드는 데 쓰여진다. 그들은 수만 명의 인명을 희생한 대가로 중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가공할 야망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수많은 원혼의 비명을 발판으로 드디어 천단을 찾아내고야 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간동의 한 공구(工口)에서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지하세계에서 찾은 것이다. 그 폭발로 인해 작업하던 자들 백여 명이 깔려 죽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천단의 전설이 실현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아득한 상고무림의 전설 속에 지하로 숨어버렸던 천단. 그 천단이 천 년의 암흑 속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지하에 파묻힌 천단은 또 하나의 완벽히 차단된 지하공간 속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단목가영은 그 놀라운 희열과 벅찬 감동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이 사실을 부친에게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장백의 극락쾌활림을 폐쇄시켰고 태월아만을 대동하고 장백을 떠났다. 이 일은 극비리에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목가영은 모르고 있었다. 태월아는 이미 천우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천단이 발견되는 바로 그날 기인총으로 전서구를 날린 것이다. 그러나 누가 먼저 천단의 기연을 얻을 지는 지금으로서는 예견할 수 없었다. 이런 것을 바로 운명이라고 하는 걸까? 설레는 가슴을 안고 남하한 그녀는 일단 만리장성을 넘자 좀 편한 길을 택하기로 했다. 육로보다는 해로를 택해 바다를 건너 동해로 빠진 후 다시 장강(長江)을 거스러 올라 황산의 봉황성에 닿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그녀는 발해만의 한 포구(浦口)에서 배를 구하기로 했다. 의외로 배를 구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그곳은 대체로 무역보다는 어업에 종사하는 해안이기 때문에 먼 항해를 할만한 거선(巨船)은 찾기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흘을 그곳에서 허비했다. 마침내 그녀는 해도를 포기하고 다시 육로를 택하리라 마음먹었다. 바로 그때 그녀에게 행운이 찾아들었다. 마침 상선 한 척이 풍랑을 피해 그곳 포구에 정박했던 것이다. 단목가영은 크게 기뻐했다. 그래서 선주(船主)를 만났다. 그녀는 그에게 황금 일천 냥을 낼테니 자신을 태워달라고 말했다. 선주는 거금을 보자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승낙했다. 황금 일천 냥이면 해양의 무역을 십 년 해도 건질까 말까한 거액이 아닌가? 마침내 상선은 본래의 목적을 내팽개친 채 두 여인을 태웠다. 동해는 넓었다. 상선은 끝없는 항해를 계속했고 단목가영은 점점 지루함을 느꼈다. 배를 타본 적이 없는 그녀였기에 어디쯤 왔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루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고 마침내 그녀는 선주에게 발칵 화를 내고야 말았다. "대체 가고 있는 거예요, 그냥 떠 있는 거예요?" 그러자 선주는 히죽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보름째 같은 해상(海上)을 열 두 번이나 맴돌았읍죠." 그 말에 단목가영은 너무나도 화가 나고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침내 그녀는 앙칼진 고함을 지르며 장력을 뻗었다. 그녀의 일장은 이미 강호에 그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만 머리가 빙글 도는 것을 느끼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녀의 체내에는 한 올의 진기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쓰러지자 선주는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후후... 이제야 무형산공독(無形散功毒)의 효력이 나타났군." 그는 즉시 손을 번쩍 들어 외쳤다. "돛을 모두 펼쳐라! 사천(四川)으로 돌아간다!" 대체 그는 누구인가? 어째서 그들은 상선으로 가장하여 백봉황을 납치해 간단 말인가? 배는 순풍에 돛을 활짝 펼치고 빠른 속도로 달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칠 일 후 그들은 장강(長江)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황산(黃山)을 그대로 지나쳤으며 무협(巫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대체 어떤 목적으로 백봉황을 납치하는 것인가......? 그들의 목적지는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다. ③ 봉황성(鳳凰城). 이왕야(二王爺) 삼절신군 범고풍의 죽음에 이어 이번에는 전위공격대로 가장 먼저 출성한 삼왕야 옥수서생(玉手書生) 유세옥의 패전(敗戰) 소식은 봉황성을 침울하게 만들었다. 중원은 온통 혈운(血雲)에 뒤덮여 있었다. 전황은 시시각각 변했으나 어느 정도 교착국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옥삼겁천과 중워무림과의 혈전은 극을 치달렸으나 양측이 거의 비슷하게 막대한 희생을 치루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승자도, 패자도 없는 무림의 종말을 초래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천우. 그는 비밀 전서구로부터 자신에게 전달된 밀지를 읽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점점 더 강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녹상(綠桑)을 심문한 결과 이제야 그녀의 배후를 알아냈어요. 뜻밖에도 그녀를 군방원에 잠입시킨 세력은 천기장(天機莊)으로.......> 녹상. 바로 낙화군방원 지하의 황금대총에서 팔대전시의 한 명인 여인이었다. 당시 우연히 그녀의 비밀접선 광경을 목도한 천우는 그녀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놀랍게도 천기장은 암중에서 지옥삼겁천(地獄三劫天)을 조종하고 있는 신비의 장본인임이 드러났어요. 현 천기장의 장주는 우문천릉(于文天凌)이며 그는.......> 기인총의 초초로부터 전달된 비밀전서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천우는 우문천릉이란 인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나 밀전을 읽는 순간 심장의 고동소리를 그는 느꼈다. '바로 이 자다! 이 자야말로 오늘의 무림상황을 만든 자다......!' 천우는 삼왕야 유세옥이 사천에 들어선 이후 패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병법(兵法)에 능하고... 지세에 밝은 자... 그는 광풍사에서 당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문천릉이란 자에게 당한 것이다.' 그의 생각은 바로 그 당시 상황과 여지없이 맞았다. 이미 천우는 어느 정도 모든 것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는 무거운 중압감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천하는 정녕 누구의 것인가? 정말... 그 누군가를 위해 존재한단 말인가?' <... 만기서군 우문학의 독자로 그의 무공은 삼백 년 전에 남천신가의 육대조인 무종선사(武宗禪師) 송영(宋 )에 의헤 철살된 마물 사영환의 흡천대법으로 그의 절맥을 치료하고 금강불괴지신이 된 자에요. 그래서 소녀는 그가 사영환의 마공까지도 알고 있지 않나 염려되어요.......> 천우는 중원의 평화는 아직도 멀고 멀다는 생각에 이루 말 할 수 없이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의 진정한 상대는 바로 우문천릉이라는 확신이 깊어졌다. 여인(女人).


그녀는 세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선천적으로 영리한 두뇌와 그보다 훨씬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주위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했다. 백봉황(白鳳凰) 단목가영. 그녀는 세상에 손만 뻗으면 자신이 얻지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무황의 무남독녀로서 자라났다. 그녀를 거스르는 것도 없었고 그녀가 두려워해야 할 것도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버린 한 사내로 인해 그녀는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야망이 있었다. 한 여인으로서의 삶과 강호의 야심가로서의 삶이 언제나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자신이 도대체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어디지? 또 나는 왜 여기 있는 것일까......?' 그녀는 화려한 방에 있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옷도 그녀가 생전 처음보는 옷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자신이 봉황성으로 가던 중 바다의 배 위에서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나는 암살당했던 거야!'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의 몸에서 아직 무형산공독이 완전히 빠져 나가지 않아서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이때였다. "하하하...! 가영, 이제 일어났소?" 문득 한 가닥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한 청년이 들어왔다. 그 목소리는 그녀가 너무나 애타게 갈망하든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정인의 목소리였다. 우문천릉, 바로 그였다. "앗......!" 이 너무도 돌연한 꿈 같은 사실에 단목가영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문천릉. 이제껏 그녀의 마음을 줄곧 처지해 왔던 이상의 남성이 아닌가? 그런 그가 섭선을 가볍게 흔들며 사랑스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빙그레 웃는 것이었다. "안심하구료. 가영, 이제 이곳에는 오직 당신과 나... 두 사람밖에 없소." "다... 당신... 어떻게...? 그리고 나는......?" "하하... 가영, 내가 당신을 이리 오도록 한 것이오. 이곳이 어딘 줄 아시오? 바로 천기장(天機莊)이오." "......!" 단목가영은 너무나 놀랐다.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녀는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에게 사랑과 야망은 별개가 아니었다. 하나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만 하는 그런 관계였다. 그러나 자신이 꿈속에서도 그리던 사내와 같은 방에 단 둘이 있게 된 것이었다. "하하...! 가영, 나는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오. 이제 더 이상 나는 나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게 되었소. 왜냐면 내게 원하는 모든 일들이 모두 이루어질 것을 자신하고 있기 때문이오." 단목가영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까지 연극을... 했단 말인가요? 당신은 일개 서생이 아니었나요?" "하하하...! 그렇소. 가영, 나는 천하라는 야망을 건지기 위해 그토록 오래도록 준비를 했었던 것이오. 하나 이제는 모든 것을 벗어던질 수가 있소. 가영, 당신과 함께 이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행할 수 있소. 원하는대로 말이오."


우문천릉은 팔을 벌리고 그녀를 껴안기라도 할 것처럼 다가왔다. 단목가영은 문득 발악을 하듯 외쳤다. "어... 어떻게 된 거죠? 내 무공은? 왜 이렇게 힘이 없는 거죠?" 그렇다. 그녀는 자신의 단전(丹田)이 텅 비어 있음을 느꼈다. 단 한올의 진기도 그녀는 끌어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문천릉은 여전히 팔을 벌리고 다가오며 말했다. "가영, 당신에게 무공은 필요없소. 우리는 이제 서로의 과거를 바꾸는 것이오. 사랑하오. 가영, 당신은 나 우문천릉의 아내로써 천하를 굽어 볼 수가 있소." 순간, 단목가영은 태산(泰山)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너무나 급작스럽게 충격을 거듭 받은 것이었다. 그토록 그리던 정인과의 만남과 야망을 실현시켜줄 자신의 무공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폐지된 것이 아닌가? "무... 무공이... 필요없다고? 내 무공을... 폐지시켰나요?" "그렇소. 가영, 당신에게는 무공보다도 훨씬 위대한... 미색(美色)이 있소. 사랑하오. 가영." 우문천릉은 마침내 두 팔을 벌여 단목가영을 껴안았다. 그러나 그 순간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단목가영은 미친 듯이 그를 때리고 할퀴며 부르짖었던 것이었다. "누가! 누가 내 무공을 마음대로 폐지시키라고 했나요? 누가...! 으흐흐흑...! 나쁜 놈! 나를 사랑한다고! 흐으으윽... 차라리 나를 죽여라! 이건... 이건 아니야! 사랑은 내가 하는 거야! 네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구! 흐흐으윽...! 이 나쁜 놈!" 그것은 미친 여인의 발광이었다. 단목가영은 우문천릉의 품안에서 미쳐 날뛰며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옷자락이 찢어지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우문천릉을 꼬집고, 때리고, 할퀴며 욕을 해댔다. 그녀는 정말 미쳐버린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랑. 그것은 그녀가 해야 했다. 우문천릉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이제까지 모든 것을 자신 중심으로만 생각했고 일방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졌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생각하는 사랑도 결국 그녀 본위의 사고방식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사랑은 그녀가 해야했고 그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파괴된 것이다. 그녀는 선택되었고 또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무공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이곳에 납치되었다. 우문천릉은 또 제멋대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도도한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힌 것이다.. "오호호홋...! 호호호... 깔깔깔......." 그녀는 우문천릉의 품에 안겨 입에서 흰 거품을 뿜어대면서 끝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우문천릉 또한 적지않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말을 잃었다. 자신의 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었다. 단목가영과 마찬가지로 그의 사랑 또한 너무도 강렬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여인에게 강호의 피냄새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공을 폐지시키고 자신과 함께 백년해로 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품안에서 그만 미쳐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는 한 순간 모든 것이 허무해짐을 느꼈다. 허무함은 뼛속 깊히 박혔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그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게 될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는 야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기회가 온 거야. 그에게 복수를... 이 당옥교가 당한 복수를 하고 말 거야......." 사천의 명문 당가보(唐家堡). 현 당문의 가주인 천수여래 당옥교는 이를 갈고 있었다. 그녀는 한 사내를 위해 지아비를 버렸으며, 가공(家功) 또한 모두 그에게 바쳤다. 하나 돌아온 것은 무엇인가? 자신은 이미 늙었으며 그녀가 그토록 모든 것을 바쳤던 그 사내는 지금 다른 계집의 치마폭에 있다. "호호호... 천릉, 그 미쳐버린 계집을 그토록 애지중지하다니... 이 당옥교에게 그 반정도만 해 주었어도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지금 발가벗은 채 한 사내 위에 누워 있었다. "흐으윽... 복수할 거야...! 흐윽......." 그녀의 육체는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으며 몸이 쉴 새 없이 율동했다. 그녀의 아래 깔려 있는 사내도 알몸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유세옥이 아닌가? 왜 그가 당옥교의 밑에 깔려 있는 것일까? 그렇다. 옥수서생 유세옥은 내상의 치료를 위해 당옥교에게 맡겨졌다. 지옥삼겁천과의 싸움에서 워낙 지독한 상처를 입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방법으로는 그를 살릴 수가 없었다. 당옥교는 그를 보는 순간 잔인한 복수심이 끓어올랐다. 우문천릉은 그녀를 철저히 이용했다. 정작 그녀를 짓밟고 이용했으나 그가 사랑하는 것은 다른 여인이었다. 백봉황 단목가영. 그녀는 지금 천기장에 있었다. 당옥교는 그녀가 미쳤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우문천릉은 그녀가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한시도 그는 단목가영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옥교도 미칠 것만 같았다. "헉......!" 유세옥은 눈을 떴다. 길고 긴 혼몽 속에 그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 그것은 가도가도 빠져나갈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곡 속에서 쫓기는 꿈이었다. 그는 눈을 떴다. 그 순간 그는 넋을 잃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자신이 누워 있었다. 자신은 알몸이었고 또 자신의 몸 위에 포갠 채 한 여인이 땀을 폭포수처럼 쏟으며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아아... 흑......." 여인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막 열락의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희열에 몸부림치고 있는 한 여인, 그 절정에 오른 표정을 본 순간 유세옥은 갑자기 구토를 느꼈다. 하지만 그의 위장 속에는 구토를 할만한 아무런 내용물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유세옥이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하기까지에는 당옥교의 집요할 정도의 간병이 절대적이었다. 그녀는 무엇에 쫓기듯이 필사적으로 그의 건강이 회복되도록 애를 썼다. 그녀의 그런 집념은 옥수서생 유세옥이 놀랄 정도였다. 그녀는 당가(唐家)의 비전 의술을 총동원시켰으며 영약이란 영약은 그에게 모두 복용시켰다. 그러나 유세옥은 괴로웠다. 그는 하루에 한 번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해내야 했다. 그녀는 밤만 되면 불덩이가 되어 그의 침상에 오르곤 했다. 그녀의 정욕은 무서울 정도였고 밤새워 몸을 불태웠다. 당옥교는 미인이었다. 세상에 미인이 스스로 몸을 던져오는데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러나 유세옥은 그때마다 거의 자학에 가까운 절망과 환멸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은. "아아... 천릉... 천릉......."


당옥교가 절정에 이르러 부르짖는 것은 그의 이름이 아니라 유세옥이 치를 떠는 우문천릉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유세옥은 그때마다 수치와 모멸감에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 아니, 자기 자신의 귓구멍에 말뚝을 박고 눈을 후벼 파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식의 모욕은 남녀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는 인내심이 거의 다 고갈되어 갔다. 유세옥이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것은 그로부터 보름 후였다. 그는 본신 공력의 삼분지 일밖에 발휘할 수 없었지만 그 정도만 해도 기적이랄 수밖에 없었다. 실상 그가 살아날 가능성마저도 희박했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당옥교는 한 자루의 검을 주며 말했다. "가세요! 이제는 도망쳐요! 탈출에 성공하고 못하건 그건 당신의 운(運)에 달렸어요." 유세옥은 검을 받아들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그는 무수히 그녀와 본의 아니게 살을 섞었다. 그는 확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당옥교는 분명 우문천릉을 사랑하고 있었다. 아니,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에게 그의 존재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었다. "왜......?" 그는 물었다. "그를... 죽이고 싶도록 증오해요! 그를 파괴시키는 일이라면... 그가 아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에게서 떠나도록 할 거예요! 가요! 어서 달아나요! 어서! 호호호홋...! 당신이 달아난 줄 알면 아마 그는 미칠 듯이 분노할 거예요!" 번뜩! 피가 튄다. 살점이 낙화(落花)처럼 떨어져 내린다. 사위는 정적에 휩싸여 있었고, 아주 멀고 아득한 옛날처럼 아름다운 사내가 있었다. 그는 수천 명의 장한들에게 둘러싸인 채 눈부신 검무(劍舞)를 추고 있었다. 무(無)의 초식. 그 어떤 검결도 필요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런 극치감(極致感)을 맛본 적이 없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완벽한 순간이었다. 그는 한바탕 질펀한 난무(亂舞)의 춤사위에 녹아들었다. 비명도 없었다. 아니 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감(五感)을 모두 닫고 오로지 본능에 따라 찌르고 베는 단순한 동작만을 지루하게 되풀이 하고 있었다. 본능무학(本能武學). 벌써 삼만 초의 검이 발출되었다. 주위 백여 장은 이미 초토화되었다. 잡풀 한 포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끝없이 몰려드는 인영들은 지칠 줄 몰랐다. 유세옥은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이미 무공이 아니었다. 무공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는 이미 생과 사의 집착에서 벗어나 선인(仙人)의 경지에 들어서 있었던 것이었다. 그를 가로막는 수많은 고수들....... 그는 그들이 누구인지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으면 그는 허공을 베었다. 동작은 지극히 단순했다. 휙! "으아악!" 막 그의 앞길을 가로막던 자는 정수리가 쪼개져 나뒹굴었다. "잡아라--!" 펑! 맹렬한 장세(掌勢)와 함께 엄청난 충격을 느낀 유세옥은 자신이 검을 쥐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맨손으로 병장기들과 맞서야 했다. 유세옥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담담했다. 지금


그의 관심은 생(生)에 있지 않았다. 무의 극치(武極). 그는 팔과 다리에 불어넣었던 공력을 모두 거두었다. 그는 마지막 생에 대한 집착마저도 버린 것이다. 그 사이 사방에서 그에게 달려드는 인영의 숫자는 다시 수천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다시 모욕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가 택한 길은 오직 하나!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으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먹장구름을 뚫고 달빛이 교교하게 빛나고 있었다. 유세옥의 시야는 온통 암흑뿐이었다. 그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뿜어진 끈끈한 핏덩이가 온몸을 덮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피비린내를 맡을 수 없었다. 진한 목단향이 코끝에서 아찔하게 진동했다. 그리고 숨막히는 정적(靜寂)의 순간, 그는 너무도 거대한 환희의 절정을 느ㄲ다. 그는 이로써 모든 것을 이룬 것이었다. 더 이상 고함소리도, 장풍, 검풍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의 완벽에 다다른 정적이 그의 의식을 지우고 있었다. 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너무도 가벼워진 자신이 한편으론 놀라웠다. 그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다 팔꿈치까지 잘려나간 팔로 땅을 콱 찍었다. 그는 두 다리도 잘려나가 너덜거리고 있었으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모두... 죽었느냐?"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크크큭... 크크큭...! 죽었군. 그렇지, 이 유세옥의 앞을 감히 누가 막는단 말이냐?" 유세옥은 잘려나간 팔을 지팡이 삼아 비틀비틀 앞을 향해 무작정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느낌 뿐이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승리의 미소를 지은 채 그는 그렇게 엎드려 있었다. 반이 잘려나간 그의 팔은 땅속에 박혀 있었지만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넋은 힘차게 앞으로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꽃다운 나이 이십칠 세의 옥수서생 유세옥은 그렇게 젊음을 산화(散花)했다. 언젠가 그의 화려하고 아름다왔던 시절을 기억하는 강호인이 있다면 이렇게 그에 대해 말 할 것이다. - 옥수서생(玉手書生) 유세옥. 그는 마치 천상(天上)의 옥인(玉人) 같았다네. 그가 그토록 일찍 죽은 건 아마도 신이 그를 질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 그는 비록 광인이 되어 자신의 손과 다리를 자르고 수천 명의 고수들을 죽인 후 마지막으로 자결을 택했지만 그는 진정한 검사였네... 그는 자신과의 대결에서 이긴 것이었네. 그러나 단 일초에 자신을 제압한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으로 살 수 없었네. 자신의 검으로 자신을 이긴다는 것, 실로 놀랍지 않은가? 그의 검법은 너무도 단순했으나 그것이 바로 검의 완성이었네. 신검합일의 경지를 넘어 무검무아의 경지를 그는 성취한 것이었네. 그는 고금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무인이었네. 하지만 이제 다시는 우리는 그를 볼 수 없네... 다시는! 27 장 급전(急轉) ① 유세옥의 시신이 봉황성으로 돌아온 것은 유월 그믐이었다. 그는 처음 죽은 모습 그대로 봉황성에 운구되었다. 그를 실은 검은 마차는 마부조차 없이 저절로 봉황성으로 돌아왔다. "으으... 으......!" 으지직......!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는데 관뚜껑이 부셔졌다. 단목신수는 관(棺) 뚜껑을 열고 사랑하는 두 번째 제자 옥수서생 유세옥의 시신을 확인한 순간 그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는 거대한 대전기둥에 손을 짚고 있었다. 그 순간 기둥이 부서졌다. 단단하기 그지 없는 강철로 구조된 기둥이 그의 손아귀에 으스러진 것이다. "처음부터... 그 애송이 놈의 연극을... 알아챘어야 했다......!" 그는 자신의 회갑을 축하하러 온 우문천릉의 병약한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천기장을 대표하여 하객으로 왔던 창백한 소년서생이 지금은 무서운 적수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제자 유세옥마저 처참하게 죽였다. "우문천릉이라 했던가...? 으으... 어린 놈이 지독하구나......!" 단목신수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는 범고풍의 죽음에 이어 유세옥을 잃었다. 그들은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 없었다. 그의 야망과 함께 자신들의 야망을 키워왔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서로 운명을 같이 해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들은 혈육보다 더 친밀한 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강호에서 운명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신뢰의 증표였다. 그의 옆에는 자면신군 담세기와 출천환룡, 즉 천우도 있었다. 천우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우문천릉... 나와 비슷한 나이... 그런 그가 이토록 단목신수를 궁지로 몰고 가다니... 정녕 무서운 인물이다.' 담세기의 음성이 들렸다. "사부님! 여기 혈첩(血帖)이 있습니다......." 천우는 곧 시선을 그곳으로 돌렸다. 아닌게 아니라 한 장의 혈첩을 자면신군 담세기가 유세옥의 앞가슴 옷깃 속에서 빼내고 있었다. "이리 다오!" 단목신수는 좀체로 냉정을 잃지 않는 인물이었으나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혈첩을 가로채듯 담세기의 손에서 낚아챘다. 그 속에는 일필휘지로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다. <당신의 사랑스런 제자를 돌려드리오. 원래는 삼왕을 나의 하인으로 삼으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당신의 제자는 이 길을 택했소. 알다시피 이제는 결판을 낼 때가 된 것 같소. 본가는 오래 전부터 오늘을 기다려 왔소. 천하가 넓다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무 좁아 답답해 미칠 지경이오. 또한 이대로 중원의 혈전을 끌고 간다면 아마 당신이나 나 역시 천하를 얻는다 해도 빈 껍데기가 되지 않겠소? 오는 구월 구일 중양일(重陽日) 당신과 본가 의 마지막 회전(會戰)을 해서 주인(主人)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소? 답신(答信)을 고대하겠소. 시(時)와 장소(場所)는 당신이 정해도 좋소... 참, 잊을 뻔했소. 당신의 딸 백봉황은 내곁에 잘 있소.> "으으......!" 단목신수의 얼굴이 다시 한 차례 무섭게 일그러졌다. "건방진 놈! 감히 노부와 천하를 놓고 주인을 가리자고......?" 단목신수는 문득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핫...! 좋다!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대전이 그의 웅후한 외침으로 인해 무너질 듯 진동했다. 야망의 젊은 화신과 인세의 대효웅 사이에 생사결(生死決)의 날이 다가온 것이었다. 천하는 과연 누구의 차지가 될 것인가? 그리고 지극천단의 전설은 과연 이루어질 것인가? 이루어진다면 누가 그 천계의 신공(神功)을 얻어 제왕의 자리에 오를 것인가? ② - 중양대회전(重陽大會戰).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무림사 희대의 대회전(大會戰). 영원히 무림사록에 남을 그 날을 무림인들은 그렇게 불렀다. 천하무림은 흡사 폭풍전야처럼


고요해졌다. 중양대회전은 무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것이다. 놀라운 또 하나의 충격은 무황(武皇) 단목신수의 입으로부터 전 중원무림에 선포되었다. - 환천군림부(幻天君臨府)를 여노라! 무도(武道)에 들어선 자여! 환천군림부는 영원한 무(武)의 제국(帝國)임을 선언하노니 예하에 드는 자 흥할 것이요, 거부하는 자 멸(滅)할 것이다! 폭탄선언! 정도부림이 하늘같이 믿고 우러러 보던 무황(武皇) 단목신수. 그의 선언은 전 무림을 온통 경악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사실상 그는 이미 무의 제왕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환천군림부를 세워 무림을 장악하려 든단 말인가? 무림은 분노하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특히 그를 믿고 따르던 정도무림(正道武林)은 절망감과 회의를 금치 못했다. 이 땅에 의인(義人)이 없단 말이요? 무림의 상황은 급선회했다. 지옥삼겁천(地獄三劫天)과 중원무림의 열전은 잠정적으로 중지되었다. 중양대회전을 위해 전력(戰力)을 일단 다듬기 위해서였다. 천기세가(天機勢家)의 야망의 화신 우문천릉은 십방천(十方天)을 선언했다. 천하의 격의를 없애고 중원과 변방무림이 융합해야 한다는 그럴 듯한 논리를 내세운 것이었다. 무림은 명백해졌다. - 십방천 대 환천군림부(十方天 對 幻天君臨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였던가? 무림의 일각에서 조용히 은밀하게 하나의 거대한 움직임이 대동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위선의 대효웅과 야망의 화신체로부터 환멸을 느낀 진정한 무인들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결성한 하나의 거대한 대동회(大同會)였다. 그들의 움직임은 표면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조용히 지극히 은밀하게 그 거대한 대동맹(大同盟)은 탄생되고 있었다. 그들은 정(正)도 사(邪)도, 흑(黑)도 백(百)도 초월했다. 오로지 진정한 무도(武道)를 추구하려는 자라면 되었다. 그들은 무림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으며 뜨거운 피가 식지 않는 한 무토(武土)를 더러운 욕망이 황폐화시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뭉쳤다. 무림개사(武林開史) 이래 그 같은 일은 단연코 없었다. 그 은밀하고도 뜨거운 열혈의 움직임은 바로 기인총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기인총(奇人總). 아무도 감히 그들이 회천(回天)의 위대한 업을 이루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기인총으로 인해 가능해지고 있는 것이다. 설혹 모를 일이다. 먼 훗날 후세인(後世人)들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할런지도 모르겠다. - 기인총(奇人總), 정말 그런 것이 있었소? ③ - 생사평(生死平). 이제 그곳은 중원무림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장소가 될 것이다. 구월 구일 중양대회전(重陽大會戰)의 결전장소라는 사실만으로 그곳은 무림폐사(武林閉史)의 날까지 회자될 것이다. 하북평원(河北平原)에 위치한 생사평은 사방 백여 리에 걸친 황원(荒原)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때 무수한 군주들이 뒤바뀌어 졌던 전쟁터였다. 생사평. 마침내 팔월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십방천(十方天)과 환천군림부(幻天君臨府)는 대 이동을 시작했다.


생사평으로의 대이동. 십방천은 사로(四路)로 나뉘어 이동을 시작했으며 환천군림부도 몇 조로 각각 출발했다. 무림의 공기는 터질 듯이 긴장되었다. 중원무도(中原武道)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바야흐로 무림의 운명을 결정짓는 최후의 결전상태에 돌입한 것이었다. 그가 돌아온 것은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낙양(洛陽). 기인총의 넓은 대전. 천화대숙전을 개조한 기인총의 총단은 수많은 기인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 대략 세어도 천 명에 달하는 기인들이 대전에 운집해 있었으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단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하늘이다!' 정면의 태사의에 한 명의 화삼청년이 앉아 있었다. 천우(天羽), 바로 그였다. 그는 돌아온 것이었다. 기인총은 무림의 마지막 희망이요, 보루였다. 천우는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에서 그런 열망을 느끼고 있었다. 기인총에 가담한 무림인들은 하루하루 엄청난 숫자로 불어났다. 측천환마전(測天幻魔殿), 녹혈림(綠血林), 독황교(毒皇敎)의 가입은 기인총의 전력(戰力)을 한꺼번에 다섯 배나 신장시켰다. 그 밖에도 봉황성을 지지했던 정도군웅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희대의 효웅(梟雄) 단목신수에게 수십 년 속아온 사실에 분격했으며 무림의 참다운 도(道)를 추구하려는 일념만으로 기인총에 스스로 찾아와 각각 자파(自派)의 영물 신물을 맡겼다. 그것은 즉 기인총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랴? 천우는 이제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팔월 열사흘. 그는 기인총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는 극비리에 돌아왔고 봉황성 사왕야의 신분은 오직 그의 측근 몇 사람만이 아는 사항이었다. "이제 중원무도(中元武道)를 세워야 할 때가 되었소!" 그의 음성은 구구절절 군웅들의 귀에서 가슴으로 뜨거운 피를 통해 전달되었다. "십방천이나 환천군림부는 무림의 이단들이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중원무림을 지켜야 할 때가 온 것이오." "......!" "기인총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오. 수천 년 무림사를 연연이 이어 내려온 기인들의 숨결, 그 숭고한 의기를 말하는 것이오. 이 시대의 기인은 스스로 일어설 때를 알고 있소이다." 천우의 말은 군웅들을 감동시켰다. 실상 그들은 애당초 기인총에 입총하면서 일말의 가벼운 불안감이 없지도 않았다. 기인총주가 누구인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무수한 소문은 오히려 그들의 불안을 더욱 조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제 이의 단목신수를 만드는 것은 아는지 그들은 두려웠다. 그러나 그런 의혹은 그들의 쓸데없는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천우를 보자마자 그들은 그런 불안이 말끔히 씻겨짐을 느꼈다. 기인총은 중원혼(中原魂) 그 자체이며 기인들의 의기(義氣)-- 그 집합체라고 기인총주는 말하지 않는가? 중원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중원은 바로 무(武)였다. 그것이 정도를 지향하든 마도에 의한 것이든 결국 그것은 무의 지극을 향한 강호인들의 의지의 소산이었기 때문에 모든 도는 하나로 모인다, 즉 만류귀종(萬類歸宗)이라고 했다.


그것은 결국 하나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바로 중원 그 자체이다. "이제 일어설 때가 되었소! 기인총은 이 땅에 새로운 무도(武道)를 세우고 중원의 무토(武土)를 경작할 것이오!" "와-- 아--!" "와--!" 기인총의 대전이 떠나갈 듯한 함정이 일어났다. 군웅들은 목청껏 외쳤으며 부르짖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들은 무(武)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또한 무인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함성은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다. 작전(作戰)은 만기서군(萬機書君) 천인보(千忍甫)가 심혈을 기울여 짜내었다. 그는 기인총의 수뇌인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생사평(生死平)에 그들이 당도하기 전 우리들은 그들을 최대한 저지해야 하오." "......." 수뇌들은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측천환마전주 철붕우, 녹혈림의 녹혈대제, 독황교의 만독왕을 위시하여 남천신도의 십무광사의 모습도 보였으며 십대문파의 장문인들도 배석했다. 만기서군의 말은 계속되었다. "총주께서는 십방천, 환천군림부의 고수들이 여러 로(路)로 분산되어 생사평으로 이동하므로 기인총으로서는 다시없는 기회라 하셨소이다."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서 소생은 여러분들께 각 로(路)의 공격지점과 인원배치, 그리고 공격시기와 방법 등을 말씀드리겠소이다." 만기서군은 맞은 편 벽의 휘장을 걷었다. 벽면에는 중원전역도(中原全域圖)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이미 모든 계획이 됐소이다." 이어 그는 중인들에게 일일이 작전의 방법과 각자 맡은 로에 대해 설명했다. 중인들의 얼굴에는 점차 놀라움과 함께 확고한 신념이 떠오르고 있었다. 만기서군이 세운 작전이야말로 완벽한 것이 아닌가? 만일 그대로만 진행된다면 천하는 바로 기인총, 아니 중원의 것이 될 것이 자명했다. 그들은 사기충천한 그들의 수하들을 이끌고 생사평으로 향했다. 맨 선두는 삼십육기인검수(三十六奇人劍手)가 맡았다. 그들은 천하무적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주군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공을 믿지 않았다. 번다(煩多)한 무공초식보다 그들은 천우의 그들에 대한 신뢰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도 잊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강호인들이다. 혈로(血路). 그것은 글자 그대로 피의 길이었다. 피를 흘리지 않고는 단 한발자욱도 더 내디딜 수 없는 죽음의 길이었다. 시신의 산을 넘고 그들은 전진했다. 자신이 다시 시신이 되고 그러다가 마침내 한 사람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전멸했다. 생사평을 향해 각 로로 나누어 대이동을 시작한 십방천과 환천군림부의 고수들 생사평에 닿을 수 없었다. 그들의 목은 생사평에 닿기 전에 무정하게 뒹굴고 말았다. 실로 상상치도 못한 기습과 암습이 곳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편안한 잠은 물론이고 마음놓고 식사조차 할 수도 없었다.


각 로(路)로 나뉘어 대이동을 하던 그들은 설마 생사평에 도달하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었다. 그것도 목숨을 내놓은 중대한 실수 였다. "으아악!" "크아아악......!" 혈로(血路)로 변한 대이동은 중도에서 영문도 모르는 채 그쳐져야만 하였다. 슉! 슈슉! 어둠 속에서 자신의 전신요혈을 노리고 수십 개의 검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무수한 암기들이 발출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땅속에 숨어 있는 기인검수, 기문둔갑술을 이용하여 바위와 암벽,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십방천의 목을 베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불과 삼십육 명이었다. 그들에 의해 십방천 오백여 명의 정예고수들이 차례로 쓰러진 것이었다. 어떤 수법으로 당했는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단 한가지 자신들이 아주 젊고 영준한 청년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도 알 지 못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의혹과 불신으로 커진 눈으로 죽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믿어야 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심십육종(三十六種)의 인간병기(人間兵器)였다. 독(毒). 누구나 독이라면 두려워 하게 마련이다. 처음 몇 명의 고수가 중독되어 쓰러지자 환천군림부의 고수들은 아예 음식과 식수 따위를 직접 장만하고 해먹기로 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이동 중에 앞과 뒤에서 픽픽 쓰러지는 자의 수가 무섭게 증가했다. 어떤 자는 나무에 긁혀서 죽었고, 어떤 자는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어갔다. 끈질긴 독공(毒功). 잠을 자는 사이에 수백 명이 몰살하기도 했다. 그것은 한 마리의 비천오공(飛天蜈公)이 한 것이었다. 하남성을 거의 빠져나갈 때쯤 해서는 팔백 명에 달하는 그들의 숫자는 불과 오십여 명이 채 안될 정도였다. 그나마 그들은 하북의 접경에 접어 들었을 때 모두 죽고 말았다. 그것은 만기서군과 오독부인의 신묘한 합작품이었다. 그들은 하북 만장협곡(萬丈峽谷)을 지날 때쯤에는 기력이 쇠진하여 한 발자국 도 내디딜 힘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로 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살았다!" "하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 그러나 그 비를 맞은 지 반다경도 안되어 그들 모두 전신이 새카맣게 타 시체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들의 비명소리도 폭우 속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다. 먹구름은 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려는 듯 더욱 짙었다. 그들은 혼잡한 시진이나 객점, 주루 따위를 들를 때마다 현저하게 숫자가 감소했다. 객방에서 잠을 자던 어떤 자는 돌연 다음 날 목과 몸통이 분리되어 있었다. 지나가던 노파가 그들의 사혈(死穴)을 쿡 찔렀다. 비명도 제대로 못지르고 죽어갔다. 길가에 울고 있던 어린아이를 달래는 순간 어린아이는 냅다 비수로 그의 가슴을 쑤셨다. 그리고 주위에 몰려 있던 거지 아이들이 그의 등과 목을 찔렀다. 온갖 예측할 수 없는 살인수법이 동원되었다. 그것은 녹림(綠林)의 수법이었고 그들은 너무나 무방비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은 노출되어 있었고 상대는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승부는 뻔한 것이었다. 그들은 사 일을 버티지 못하고 전멸했다. 무림사에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주도면밀했고 그만큼


일방적인 승리였다. 두두두....... 절곡에 들어선 순간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에 그들은 안색이 변했다. 곡구(谷口)를 꽉 메우며 노도처럼 질주해 오는 것은 철갑을 두른 기마대였다. 막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었다. 좁은 계곡은 그대로 짓이겨지고 말았다. 철갑기마대는 측천환마전의 특수 별동대였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피곤죽이 된 시신만이 뒹굴고 있었다. 너무도 허무한 최후였다. 협곡에는 흥건한 피와 살점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혈로는 생사평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 각 도로 흩어져 생사평으로 이동을 시작했던 십방천과 환천군림맹의 고수들은 거의 모두 중도에서 살해되고 만 것이었다. 그것은 모두 기인총(奇人總)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그것은 무림유사 이래 가장 신비한 집합체인 기인총의 쾌거였다. 그들은 통렬히 작전과 기습공격으로 십방천과 환천군림부의 사지를 잘라버린 것이었다. 무림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남아 후인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 줄 너무도 장대하고도 완벽한 승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은 왔다. 당금 무림에 정사의 구별은 너무도 무의미했다. 그들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이라고는 환천군림보에 들어가 천하제일인의 야망을 불태우느냐, 아니면 변황의 무리와 결탁한 십방천에 들어가느냐, 양쪽 다 거부한다면 중원혼의 부활을 부르짖는 기인총에 드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강호인들은 자신의 야망을 찾아 환천군림보로 또는 십방천으로 그리고 기인총으로 향했다. 마도와 정도의 구별도 없어졌고, 오직 승자만이 존재한다는 강호의 비정한 묵계만이 서슬퍼런 기세로 점점 강고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기인총. 그곳은 야망을 위해서 찾아드는 불나비를 반기는 곳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부르짖던 중원혼이야말로 진정한 강호행임을 기억할 것이다. 무간동. 동굴 입구에 한 인영이 서 있었다. 그는 끌어오르는 기대와 호기심으로 긴장한 모습이었다. 동굴 안에서는 상서로운 기운이 밀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 동굴 안 깊은 곳까지 도착한 그는 땅 속으로 깊이 패인 또다른 길이 있음을 발견했다. 은은하고 기이한 기운이 그 속에서부터 솟구치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자신의 몸을 날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도무지 추측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주위의 살폈다. 그리고 자신이 땅속으로 몸을 날렸고, 의식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몸이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졌음을 깨닫고 자신의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을목, 천화, 토행의 세 신주가 없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차근차근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 천단을 재개(在開)한 자여! ...우주는 모두 다섯가지 기운으로 만들어졌나니 그것은 을목(乙木), 천화(天火), 토행(土行), 천금(天金), 현수(玄水)의 다섯가지 본유적(本有的)인 우주심(宇宙心)을 말하노라... 천지만물은 모두 이 우주적 오심(五心)으로부터 생겨났으니 생명 있는 것들의 육성(育成), 변화(變化), 출생(出生), 형금(形禁), 임양(任養)은 모두 이것의 결과이니라.> 천우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자신의 내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신령한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고, 그 뜻을 풀어 자신의 뇌리속에 각인시키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먼저 지극천단의 전설과 그로부터 유래한 오행신주의 내력을 소상하게 밝히고, 그 다음 우주의 본래적 성심(聖心)에 대한 오묘한 설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 속에서 경천동지할 우주적인 성찰과 만나고 있는 것일까? 그 신령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을목, 즉 육성의 기운은 변화를 낳고, 변화의 기운은 출생을 관장하고, 출생의 기운은 형금을 다스리고, 그것으로 임양의 기운을 이루노라. 이 오심(五心)으로 하여금 상생극(相生克)의 원리로 우주를 이루게 하였으니 어느 한 가지 기운에도 치우지지 않음(中庸之道)으로 우주는 만유(萬有)의 중심(中心)이 되고, 그 중심 또한 오심의 현묘한 운행으로 지극(지극)에 이르게 되었노라... 그것으로 우주만물의 역리(易理)로 삼고 천체와 일월성신( 日月星辰)을 배열하였으니 마침내 우주는 항상심(恒常心)으로 불멸(不滅)을 이루게 되었노라.......> 천우는 점점 망아지경에 빠져 우주심(宇宙心)과 일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일장 가량 허공에 솟아올라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자신이 품고 있던 세 가지 신주(神株)가 백회혈을 기준으로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천우의 미간이 조금씩 꿈틀거릴 때마다 백회열로 그 세 신주가 내뿜는 기류들이 서서히 빨려들어 갔다. <...이로써 그대는 정좌(定座)하여 오행(五行)의 지극(至極)을 깨우치기 바라노라.> 천우는 시간과 공간이 없는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점점 높이 치솟더니 신주가 모두 기류로 화해 자신의 몸속으로 빨려들고 나자 다시 땅바닥으로 곤두박칠치고 말았다. 그는 죽은 듯 꼼짝않고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속에서는 바야흐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28 장 기인탑(奇人塔) ① - 중양절(重陽節). 그 날은 푸르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으며 천하명검의 검신처럼 눈부시게 맑았다. 머리 위로 손을 뻗치면 그 서슬에 베여 붉은 피를 뚝뚝 흘릴 것만 같았다. 그 비정하리만큼 눈부시게 맑은 날, 마침내 중원무림에 영원한 사록으로 기록될 중양대회전(重陽大會戰)은 정오와 동시에 개전(開戰)되었다. "와아아아아아!" 한쪽의 함성에 대한 야유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악마의 부르짖음인가? 생사평(生死平)의 까마득한 황원(荒原)의 동(東)과 서(西)로부터 드디어 살륙의 대혈전(大血戰)이 전개되었다. 십방천(十方天)과 환천군림부(幻天君臨府). 그들은 드디어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된 것이다. 애초부터 그들은 극성에 존재하면서 같은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드디어 그 길의 끝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죽음의 사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이 시대가 배출한 희대의 효웅(梟雄)과 야망의 화신체. 그들은 보고 있었다. 생사평의 싸움은 도저히 적아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하나 지금 두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한 가닥 의혹이 일고 있었다. '대체... 이곳에 당도한 수하들은 십분지 일도 되지 않는다... 모두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본부(本府)의 고수들이 어째서 저토록 줄어들었단 말인가?' 우문천릉과 단목신수는 물론 알지 못했다. 아니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리라. 그들이 이미 생사평으로 오는 도중 거의 모두 전멸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기절초풍하리라. 우문천릉과 단목신수는 대략 백 장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한데 그들의 뒤에는 각각 괴인(怪人)들이 도열해 있었다.


우문천릉의 뒤에는 오백여 명의 얼굴까지 검은 천으로 칭칭 감은 자들이 흡사 목상(木像)인양 서 있었다. 반면 단목신수의 뒤에는 백 팔 명의 백포괴인(白袍怪人)들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웬지 눈부시게 맑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흑백의 괴인들로부터는 음산한 귀기(鬼氣)가 감돌고 있었다. "......!" 우문천릉은 오백 여장 거리에 떨어져 있는 단목신수를 뚫어지고 응시하고 있었다. "......!" 그들은 동시에 자신만이 아는 신비한 미소를 지었고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두 효웅은 각자 믿는 것이 있었다. 단목신수는 환혼백팔영마를 믿고 있었으며 우문천릉은 무혈강시군(無血 屍軍)을 믿고 있었다. 무혈강시군은 천기세가에서 수백 년 간 심혈을 기울인 마강시(魔 屍)였다. 일명 지옥강시라 부르며 이미 금강불괴지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체내에는 피(血)가 없다. 도(刀)와 검(劍)은 그들의 몸에 닿으면 퉁겨나가거나 부러진다. 무혈강시군은 완벽했다. 내공이 강한 고수들을 죽기 직전 그 영혼을 금제한다. 아니, 영혼을 빼버린다고나 할까? 그런 후 그들은 수만 종(種)의 약물과 독물에 담구어진다. 그런 상태에서 약물이 피 대신 몸에 꽉 차게 되면 그들은 화(火)와 빙(氷)의 극지기(極之氣)를 번갈아 흡수하여 전신의 피부가 강철처럼 단단해지는 것이다. 우문천릉에겐 자신이 있었다. "후후후... 단목신수, 당신은 아무리 발버둥쳐야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것이오." 단목신수는 아까부터 다소 신경이 거슬리는 일이 있었다. 그는 애당초부터 승부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승리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두 가지 점에서 다소 꺼림직한 느낌이 들었다. 첫째, 아무래도 그는 환천군림부의 수하들의 대부분이 도착하지 않은 점이 마음에 걸렸다. '중도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둘째, 장백(長白)의 극락쾌활림으로 보낸 출천환룡(出天幻龍)이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천우를 장백으로 보냈다. 그것은 이번 중양대회전을 사실상 거의 중요시 여기지 않은 까닭이기도 했지만 그의 딸 단목가영이 우문천릉에게 납치된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서였으며 또한 무간동의 천단발굴작업이 어느정도 진척되었는지 궁금해서였다. 그는 천우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천우를 보낼 리 만무했다. 그러나 그가 어찌 상상인들 하였겠는? 이미 무간동에 천단(天壇)이 발굴되었다는 사실을....... ② 우문천릉은 지루함을 느꼈다. 그는 진기를 돋구어 단목신수를 향해 말했다. "부주(府主)!" 단목신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무슨 일인가?" "이제 이만하면 우리도 승부를 낼 때가 되지 않았소이까?" "건방진 놈......." 단목신수는 말끝을 흐리며 경멸의 표정을 지었다. "어린 애야, 네 명을 네가 재촉한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핫핫...! 부주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고 있는 것 같소. 늙어서 망령이 든 것이 아니오?" 단목신수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어린 놈이 정녕 예의를 모르는 구나. 노부가 너의 나이 어림을 봐주어 이제껏 참아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 문득 두 사람의 얼굴에 한 가닥 경악의 표정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들의 눈은 한 곳으로 가 멎었다. 그곳. 분명 그곳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처절한 비명이 들리던 살륙의 아수라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비명과 병기소리가 사라지고 조용한 것이 아닌가? 그곳을 본 순간 두 사람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없었다. 지금까지 생사를 걸고 미친 듯이 싸우던 십방천의 고수들도 환천군림부의 고수들도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한 명도 없지를 않는가? '이... 이럴 수가?' '......?' 두 사람은 문득 생사평이 한없는 정적에 파묻히면서 무한히 넓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들은 갑자기 가슴이 허전해지며 허탈감을 느꼈다. '내가 꿈을 꾼단 말인가?' '환상을... 보았던가?' 그들은 다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없었다. 생사평의 광활한 대지는 눈부신 햇살이 비치고 있어 그 어느 곳이라도 숨을 곳은 없었다. 대체 근 이전에 달하는 그들이 모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이때였다. 문득 그들의 귓전에 한 가닥 담담하면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대들은 여기서 또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오?" "......!" "......!" 우문천릉과 단목신수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들은 다시 한 번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들이 그토록 비장의 무기로 믿고 있던 무혈강시군과 환혼백팔영마가 감쪽같이 증발하듯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사방은 그저 텅 비어 있고 생사평에 있는 것은 그들 두 사람 뿐이었다. "으으......!" "대... 대체......." 두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이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난생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생각해 보라! 멀쩡한 대낮에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으니 그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가? 도깨비가 장난이라도 친단 말인가? 이때 다시 예의 신비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겠소? 욕망이란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오. 눈 앞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다 보면 그대들은 영원히 허상만 보게 될 것이오." "누... 누구냐?" "너는......!" 두 사람의 반응은 각각 틀렸다. 우문천릉은 살기를 띄며 외쳤고 단목신수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비로소 그는 그 음성의 장본인이 누군인지를 깨달은 것이었다.


그들은 소리나는 쪽으로 신쾌하게 신형을 움직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순간적으로 땅이 움직였다. 돌연 땅에 주름이 잡히듯 움직이더니 땅 속으로부터 한 청년의 얼굴이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그는 천우였다. 천우는 완전히 지면으로 솟아오르더니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땅(地)을 움직이는 신공(神功)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소?" "......!" "......!" 단목신수도, 우문천릉도 그저 경악할 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천우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는 왕왕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일들이 있는 법이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요." 천우는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십방천과 환천군림부의 싸움은 아무런 명분도, 가치도 없는 것이오. 그래서 내가 그들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그들을 지하(地下)에 가두었소." "......!" 단목신수와 우문천릉은 그의 황당무계한 말에 놀라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믿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오. 실은 나 자신도 세상에 이런 신공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니까." 천우는 말을 하며 문득 손가락으로 두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느끼지 못하겠소? 당신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백 장의 거리를 두고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불과 사 오 장 거리에 접근해 있지 않소?" "엇......!" 그 말에 두 사람은 비명에 가까운 경악성을 발했다. 과연 그렇다! 그들은 지처거리에 서 있지 않은가? 천우는 단목신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애당초 나를 무간동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었소." 순간. "너... 너는 바로......!" "후훗... 그렇소. 당신이 아들이라 생각하던 사람이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 화령신군(火靈神君)의 아들이오. 이제 알겠소?" "으으... 그... 그랬었군?" 단목신수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질려버렸다. 천우는 차갑게 말했다. "무간동에 천단(天壇)이 발견되었소. 나는 그곳에서 천단의 세 가지 초인지학(超人之學)을 얻었소. 단목신수, 이제 당신에게 선친의 빚을 받을 차례이오!" "으... 천... 천단을 얻었다고?" 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다행히 나는 천화(天火), 을목(乙木), 토행신주(土行神珠)를 가지고 있었소. 그것으로 세 가지 초인지학을 얻을 수가 있었소." 천우, 그는 기연을 무간동에서 만난 것이었다. "방금 내가 쓴 것은 그 중 지공(地功)이오. 지각을 끌어 당기고 지맥(地脈)을 뒤집을 수 있는 불가사의한 신공이오." 듣고 있던 우문천릉이 돌연 말했다. "흐흐... 무슨 수작을 부리느냐? 세상에 그런 해괴한 절학이 있다는 것은 들은 적이 없다. 너는 기껏 사술(邪術)로 우리를 현혹시키고 있을 뿐이다!" 천우는 그 말에 담담히 말했다.


"믿고 안 믿고는 그대의 자유다. 하나 분명한 것은 그대들은 이제 느낄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미한 동요가 일어났다. 천우는 담담히 말했다. "인간의 야망이란 그 한계가 있는 법이오. 그대들이 천하를 얻는다 한들 천하를 영원히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천하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대지(大地) 그 자체의 한낱 미미한 부분일 뿐이다." 천우는 기이한 눈으로 단목신수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단목신수, 당신은 야망으로 인해 친구를 배신했소. 천중오정은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기재들이었소. 만일 그들이 합심했더라면 무림은 좀더 훌륭한 지상낙토(地上樂土)를 이룰 수 있을 것이오." "......." "그런데 당신의 야망으로 인해 오전은 각각 비극의 길을 걸었을뿐더러 오늘날의 무림은 온통 피비린내와 살륙의 더러운 땅으로 화하고 말았소." 단목신수의 몸이 바람도 없는데 떨렸다. "당신은 나 천우, 아니 종천우(鍾天羽)의 불공대천지수이오. 나는 오직 당신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일념만으로 오늘까지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소." 천우의 말은 담담했다. 더 이상 그의 말에는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우문천릉, 그대는 놀라운 천재적인 두뇌를 지니고 있소." "......!" 천우의 말에 우문천릉은 흠칫했다. "만일 당신이 옳은 일에 그 뛰어난 머리를 사용하였다면 당신의 생은 영원한 것이 되었을 것이오. 다만 욕망에 굴복하여 간지(奸智)만 사용하였기에 당신은 오명을 남기게 되었소. 이제... 이 땅 속에 당신이 묻히고 과연 무엇이 남겠소. 권력? 쾌락? 황금? 그런 것이 정녕 영생과 비유될 수 있다고 믿소?" "으... 으......!" 우문천릉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두 사람, 이 시대의 가장 교활하고 간특했던 두 노소(老少)의 효웅들은 느낀 것이다. 천우의 말은 그들의 영혼과 양심을 거대한 타종음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천단(天壇)의 위력을 보여 주겠소." 천우는 말을 마친 후 문득 두 손을 모았다. 우르르르......!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생사평의 광활한 대지(大地)가 흡사 지진이 일 듯 흔들리더니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 단목신수와 우문천릉은 그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엇다. 그들의 앞으로 새사평이 흡사 절벽의 틈바귀처럼 지면이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속에 바로 그들이 그토록 믿었던 무혈강시군과 환혼백팔영마가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으음......!" "믿을 수 없어......!" 천우는 손 끝으로 천공(天空)을 가리킨 다음 바로 서서히 이동하여 그들 괴물들을 가리켰다. "불(火)의 뜻(意)이다. 그대들은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리라!" 번-- 쩍! 뇌신(雷神)의 분노가 떨어졌는가?


지면 틈에는 삽시에 화염의 불기둥이 솟구쳤다. 그 불길은 이미 금강불괴의 지체들을 종이장처럼 가볍게 태워버렸다. 용암과 극독, 빙(氷)과 화(火)의 지극으로 단련된 그 괴물들이 단 한순간의 불길로 모두 잿더미로 변하는 것이었다. 단목신수와 우문천릉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들이 수십년간 쌓아올린 야망의 결정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도 허탈함에 말을 잃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천우는 다시 쌍수를 접었다 우르르르......! 갈라졌던 지면이 움직이며 다시 원래 상태로 거짓말처럼 돌아갔다. "......." 우문천릉과 단목신수는 아무런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들이 본 것은 자신들의 능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단계였다. 그들도 인정하고 있었다. 천우가 지극천단을 얻었다는 것을, 그로 인해 천우는 신인의 경지에 올라 있다는 것을. 그가 그들 앞에서 해보인 일은 인간이 아닌 초인, 아니 신(神)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천우는 생사평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엔 나무가 너무 없군." 이어 그는 손바닥으로 지면을 향해 서서히 원을 그리듯 벌려나갔다. 그러자 또다시 기적이 일어났다. 생사평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원(荒原)이다. 그런데 그것은 착각이었을까? 우문천릉과 단목신수는 보았다. 광활한 생사평에 끝없이 푸르른 초지(草地)가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풀이 돋아나고 꽃봉오리가 열리더니 온갖 기화요초들이 생사평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열매가 맺고 일향각이 가기 전에 어느 새 고목이 되어 늙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천우는 손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내년 쯤이면 이곳은 당신들도 알아 볼 수 없을 만치 울창한 숲이 될 것이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문득 앞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이제는 더 이상 그들과 아무런 볼 일도 없다는 듯이, "......!" 두 사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천우는 뒤로 돌아보지 않고 황원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단목신수는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이윽고 그는 천우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보더니 고개를 들어 우문천릉에게 말했다. "자네... 천금신주(天金神珠)를 갖고 있는가?" "......!" 우문천릉은 아무말 없이 품 속에서 하나의 검은 빛을 내는 구슬을 꺼내 건네주었다. 단목신수는 자신의 품에서 백색의 구슬을 꺼냈다.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헛... 그는 우리에게도 천단의 한 가지씩을 남겨 주었네. 하나... 자네... 우리들에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문천릉은 고개를 저었다. "허허... 노부도 동감일세. 이제 더 이상 초인은 필요없네. 그 한 사람으로 족한 것이네......." 팍! 놀랍게도 단목신수는 첨금신주와 현수신주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돌아가게나. 자네는 아직 젊네. 오늘 이후... 자네가 할 일은 많아질 것이네. 가능하다면 노부의


봉황성에 불(火)을... 질러주게." 우문천릉은 그의 말에 깜짝 놀라 외쳤다. "노선배님!" 하나 이미 늦었다. 퍽! 일대의 효웅 단목신수, 그는 스스로 천령개를 내리쳐 자결을 해버린 것이었다. 일생을 오직 야망으로 점철시켰던 일세의 대효웅 단목신수, 그는 마침내 스스로 자신의 생을 정리하고 만 것이었다. "노선배님!" 우문천릉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는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자신의 생이야말로 철저히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뇌리 속에는 자신으로 인하여 미쳐버린 단목가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야망이 얼마나 덧없고 허망한 것인가를 다시금 뼈저리게 뉘우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듯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가 우문천릉은 바닥의 흙을 한 웅큼 잡아들고 몸을 일으켰다. "다시 돌아오리라. 그리고 이곳 생사평에서 평생을 살리라. 초원을 가꾸고 나무를 심으면서......." 우문천릉은 단목신수의 식어가는 시신을 안고 서서히 걸음을 옮겨갔다. 그의 등뒤로 저녁놀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생사평은 말이 없다. 모든 것을 지켜보았으나 생사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문천릉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이제 막 피어난 꽃들은 지는 태양을 향해 서서 쏟아지는 저물녘의 햇살을 가득 받아 안고 있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기인총사(奇人總師)는 어디로 간 것이오?" 그 말에 어떤 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떠났소. 초인(超人)이 되어 떠난 것이오. 알겠소? 그는 인간이 해낼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을 해내었으며 인간이면 당연히 누리고 싶어할 모든 것을 서슴없이 버렸소. 그런 그가 어찌 세상에 남아 있겠소? 그는 떠났소. 어디인가 초인(超人)들이 살고 있는 그런 곳으로 말이오." - 기인탑(奇人塔)! 사람들은 하나의 탑을 세웠다. 탑은 생사평 위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올랐다. 기인탑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서명(書名)이 적혀 있었다. 예전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던 생사평에 어느 해부터인가 초지가 형성되기 시작하더니 무성한 숲이 생성되었다. 특히 기인탑 주변에는 더욱 향기롭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자라났다. 그것은 한 이름없는 자(無名人)의 평생에 걸친 피와 땀의 결정체였다. 그는 생사평으로 물줄기를 끌어 들이는 공사를 묵묵히 평생에 걸쳐 해내었으며 그 곳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초목을 가꾸며 살았다고 했다.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기인탑의 한 자리에 그의 이름을 적어 두었다. - 무명인(無名人).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 그가 한때 야망(野望)에 자신의 청춘을 걸었던 천기세가(天機勢家)의 젊은 미서생(美書生) 우문천릉이었다는 사실을.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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