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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무혈하록 제 2 권 검궁인·사마달 공저 11 장 부녀(父女) ① 천성보에서의 첫밤. 영호걸은 목욕을 한 후, 깨끗한 백의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는 반대로 이번에는 그가 오개명과 주성후를 찾았다. 두 사람은 한 방에 모여 바둑을 두고 있다가 영호걸을 맞이했다. 그들은 달라진 그의 용태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더러운 옷에 갇힌 채 덥수룩한 몰골일 때도 준수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에게서 탈속한 기품까지 접하게 되자 그만 아연해진 것이었다. 주성후가 휘이 하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정말로 승형이 맞소? 나는 또 다른 사람인가 했소이다." 오개명이 왠지 꺼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아까보다 훨씬 미남자가 되어 있는 것은 맞는데, 어째 편치는 않구려. 왠지 우리와는 다른 계층의 인물인 것 같아서......." 그러자 주성후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오형은 지금 속 좁은 계집처럼 시샘을 하겠다는 게요? 사람이 그러면 못쓰는 법이오. 칭찬할 것은 나처럼 얌전히 칭찬해 주면 그만이지, 왜 토를 다시오? 토를 달기는." "하하하... 주형의 말이 맞소이다. 내 잠깐 쓸데없는 생각을......." 영호걸은 그들의 말을 듣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들은 정녕 순박한 인물들이로구나. 신분상 경계를 두는 것이야 살아온 바탕 때문에 어쩔 수 없겠고, 두 사람 다 타인을 의심할 줄 모르는 맑은 성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엄살을 피울 수밖에 없었다. "쯧! 주형이 응원해 주지 않았더라면 이 승모는 섭섭할 뻔 했소이다. 내 이제껏 부친의 슬하에서 바깥 세상을 모르고 살다가 이 천성보에 들어옴으로써 강호에 첫발을 내디뎠거늘, 믿고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오직 두 분 뿐이외다." 그의 말에는 실상 진심이 반 이상 내재되어 있었다. "내,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오개명이 곤란한 듯 더듬거리자 주성후가 재빨리 끼어 들었다. "아, 승형은 벌써 이해를 했다지 않소? 자고로 말이 길어지면 사연도 깊어지는 것인즉 이쯤에서 관두고 좋은 얘기나 나눕시다." "맞소이다. 하하하......." 결국 세 사람은 크게 웃는 것으로 이 작은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이어 영호걸이 그들을 향해 물었다. "저, 보내를 돌아 다니며 구경 좀 해도 되겠소? 처음 오고 보니 이것저것 궁금한 것도 많고......." 주성후가 바둑돌을 든 채로 반문했다. "그럼 내가 안내해 드리리까?" 영호걸은 재빨리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오. 두 분은 계속 대국을 하시오. 괜히 중간에 일어서시면 불초가 더 부담이 되오이다." 오개명이 빙긋 웃었다. "승형은 용모 만큼이나 성미도 깔끔한 것 같소." 영호걸은 짐짓 괴로운 시늉을 했다. "아이쿠, 이러다간 또 얼굴이 뜨끈뜨끈해지게 생겼군. 아무래도 빨리 도망치는 게 상책일 것 같소."


"하하하하......." 두 사람은 꽁무니가 빠져라 내빼는 그를 보며 대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아마도 일이 없을 때면 이런 식으로 소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사심없이 농을 즐기거나 머리를 맞대고 바둑을 두는 등. 영호걸. 그는 밖으로 나오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부(下部)에서는 전혀 이상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뭔가 캐고자 하는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 아닌가?' 휘영청한 달빛이 천성보의 관내를 두루 비추고 있었다. 보기 좋게 손질된 수목들이 그 아래에서 각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더구나 잔설(殘雪)이 얹혀 있어 달빛을 받은 나무의 군상들은 가히 신비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때는 이월 초. 눈은 바닥에도 적지 아니 쌓여 있었다. 바람결이 맵고 기온이 싸늘한 덕에 아직 녹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영호걸은 눈을 밟으며 서서히 주변을 거닐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리저리 전각 사이를 돌던 그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비파음(琵琶音)에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띵! 띠딩....... 그것은 이런 밤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곡조였다. 지극히 아름다우면서도 일면 애잔함이 깃든....... 영호걸은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음률에 끌려 들고 있었다. 음(音)이라면 평소 일가견이 있는 그였다. 그의 발길은 벌써 무의식을 빌어 비파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띵띵... 띠디딩....... 비파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영호걸은 나즈막한 담장이 앞을 가로막자 그제서야 발을 멈추었다. 그러나 음률에 도취된 그는 여전히 거기서 서성거렸다. 그곳에는 정교하게 꾸며진 월동문(月洞門)이 세워져 있었다. 비파음은 바로 담장의 안 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대체 누구일까? 야심한 시각에 비파를 뜯는 인물은......?' 영호걸의 심중에서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이는 찰나였다. "누구냐? 어떤 자가 감히 백운각(白雲閣)을 넘보느냐?" 날카로운 고함성과 함께 월동문 안에서 청의을 입은 한 소녀가 튀어 나왔다. 십오 륙 세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소녀였다. 그녀는 영호걸을 보고 다시 뭐라 외치려다 말문이 막힌 듯 도로 입을 닫아 버렸다. 그 대신 그녀의 눈만은 한껏 크게 떠져 있었다. 욕설을 퍼부으려던 기세가 이렇듯 돌변해 버린 것이었다. 멍청하게 서 있는 그녀를 누군가가 불렀다. "소미(少眉), 무슨 일이냐?" 어느새 비파음은 멎어 있었다. 하지만 울려 나온 음성이 비파소리 못지 않게 아름다워 아쉬운 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뭐랄까? 매끄럽고도 청아해 심산의 계곡물을 연상시키는 음성이었다. 아무튼 청의소녀는 그로 인해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얼굴을 약간 붉혔으나 이내 애초의 당찬 기세를 회복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길래 허락도 없이 이 근처에 와서 서성거리죠?" 영호걸은 씨익 웃으며 포권했다. "소생은 승풍이라 하오.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모르고 다만 비파 소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예까지 오게 되었소. 만일 그것이 실수라면 용서하시기 바라오." 청의소녀, 즉 소미라고 불리운 소녀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했다. 그 난경을 즉각적으로


해결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담장 안에서 들려오던 청아한 음성이었다. "소미, 그 분을 이곳으로 모시고 오너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미는 등을 홱 돌렸다. "소녀를 따라 오세요." 영호걸은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월동문을 지나니 그 안에는 한 채의 아담한 누각이 솟아 있었다. 또한 정원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못의 한가운데에는 다시 정교하게 지어진 정자(亭子)가 있었다. 그곳으로 통하는 부교(浮橋)가 연못 위에 그림같이 떠 있기도 했다. '으음, 정말 환상처럼 아름다운 곳이로군.' 영호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며 묵묵히 소미를 따라 부교를 건넜다. 그들은 바로 정자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② 정자 안. 한 명의 백의소녀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달빛이 부서져 내려 그녀의 자태를 신비롭고도 우아하게 비춰 주었다. 무릎에 얹힌 비파의 끝이 뒤에서도 약간 보였다. '아! 이 여인이 바로 음률의 주인이었구나.' 영호걸이 먼저 인사를 청했다. "소저, 실례하겠소이다." 백의소녀가 비로소 몸을 돌렸다. 그러자 영호걸은 눈 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녀의 뛰어난 용모로 인해서였다. 나이는 십팔 구 세 가량. 마치 귀부신공(鬼斧神工)이 다듬어 놓은 듯한 얼굴 윤곽도 그렇지만 특히 눈이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호수처럼 맑게 일렁이는 그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금시라도 침몰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티 한 점 없이 깨끗하고 고운 피부는 붉고 도톰한 입술이 아니었다면 옥으로 빚어 놓은 여인상 쯤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게다가 몸매는 가늘어 절로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정녕 대단한 미색이로구나. 모름지기 이런 여인을 두고 미의 극치라는 것을 논하게 되는 것이 아닐지.......' 영호걸은 무슨 진귀한 보물이라도 감상하듯 그녀의 눈부신 미모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편. 백의소녀는 내심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저 분도 다른 이들처럼 나를 예쁘다고 생각하실까?' 그녀는 사실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 속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익숙해져서인지 어느 때부터인가는 그런 것에 전혀 기쁨을 느낄 수가 없었고, 대신 그녀 스스로가 보고 즐길 수 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었다. 음(音)도 역시 그 일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또 하나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가진 실체, 즉 백의청년을 대하게 되자 그녀는 내심으로 몹시 기뻐하고 있었다. 단, 음률과 인간의 차이는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음을 좋아하듯 일방적으로 좋아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종내 이 탐미주의자를 자극시킨 것은 궁금증이었다. '대체 이 분은 누구일까?' 그녀의 집요한 눈길은 결국 영호걸로 하여금 스스로 몽상에서 깨어나게 했다. 그는 정중히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무례를 양해해 주시오, 소저. 소생은 그저 이곳을 지나다가 아무 생각도 없이......." 백의소녀 역시 현실감을 되찾은 듯 배시시 웃었다.


"참, 그렇군요. 하지만 사과하실 것까지는 없어요. 음률을 이해하시는 분이라 여겨 제 쪽에서 초빙했으니까요. 소녀는 정서(情緖)가 비슷한 분을 매우 흠모하지요." 그녀는 의외로 대담하고 솔직한 편이었다. 그것은 강인하다거나 용감해서라기보다는 그녀 나름의 습관인 것 같았다. 요컨대 그녀에게서는 속기(俗氣)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점은 영호걸의 심중에 절실하게 닿아 왔다. 물론 현재의 그는 반대로 속세를 배워나가는 중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울리는데서 한 발 나아가 일말의 사명감을 가지고 다스리려 한다면 맞았다. 영호걸은 이런저런 이유로 다시 공수해 보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소생은 감사할 따름이외다." 백의소녀가 물었다. "공자께서는 어디서 오신 분인가요? 소녀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소생은 승풍이라는 사람으로서 오늘부로 무사의 자격을 얻고 이 천성보에 머물게 되었소이다." 그 말에 백의소녀의 얼굴에는 언뜻 실망기가 스쳤다. '이다지도 비범해 보이는 분이 겨우 일반 무사였다니.......' 그녀는 곧 내심을 드러내 놓고 말했다. "공자께서는 소녀가 뵙기에 군계일학(群鷄一鶴)과도 같은 분이신데, 어찌 하급의 무사들 틈에 끼이게 되셨습니까?" 영호걸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꿈틀 했다. "죄송하오만 소저의 말씀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소이다. 어찌 인간의 가치를 담겨 있는 직위로 판단할 수 있겠소?" 백의소녀는 잠시 멍하더니 이내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소녀가 정녕 망언을 했군요. 본 뜻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공자께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영호걸 역시 그녀에 대한 자신의 직관이 맞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표정을 풀며 빙그레 웃었다. "소생도 소저를 책하려는 생각은 아니었소이다. 다만 약간의 결벽한 면이 있다 보니 일을 우습게 만들었구려." 백의소녀도 생긋 웃더니 본론으로 들어 갔다. "사실 공자를 이곳에 모신 이유는 따로 있었어요. 음률에 상당히 조예가 깊으실 줄로 믿고 안목을 한 번 높여 보고자 했지요." 영호걸은 다소 당황하여 그녀의 제안을 사양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외다. 소생과 같이 미천한 재주로는 소저에게 아무런 만족감도 드리지 못할 것이오." 그러자 백의소녀는 갑자기 정색을 지었다. "소녀는 늘상 지나치게 겸손하신 분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난감했었지요. 공자께서 거절을 하신다면야 도리가 없겠지만......." '끙! 이번에는 내가 한 방 먹었군.' 말끝을 흐린 것은 그녀이되, 영호걸은 심중을 감추기 위해 입가에 괴상한 웃음을 떠올려야 했다. 이쯤 되니 그로서도 달리 방도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그럼 소생도 부족하나마 한 곡조 연주해 보겠소이다. 그런데 혹 피리는 없소?" 백의소녀가 눈짓을 하자 소미가 얼른 뒤편의 시렁에서 하나의 퉁소를 꺼냈다. 알고 보니 이 정자는 마치 음률을 즐기기 위해 세워진 듯 시렁에 각종의 악기가 총망라되어 있었다. 영호걸은 퉁소를 받아 들었다. 그것은 백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써 그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발하게 했다. "호오! 이 옥소의 재질은 진귀한 온옥(溫玉)이구려. 정녕 보기 드물게 훌륭한 물건이오."


백의소녀는 그 말에 생긋 웃어 보였다. "맞아요, 공자께서는 역시 한눈에 알아 보시는군요." 확실한 것은 어느 순간이건 그녀가 너무도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당황스러울 정도로 직선적이고 때묻지 않은 성품까지도 영호걸에게는 더없는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마침내 옥소를 입으로 가져 갔다. 삘릴리-- 삘릴릴리-옥소에서는 곧 사람의 마음을 축축이 적시는 맑은 음률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감정이 짙게 스며 있는 가운데 진솔한 한 미녀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었다. 심산의 야우(夜雨)인들 이러 할까? 백의소녀는 그 음률의 정취에 흠뻑 젖어 들어 삽시에 넋을 잃어가고 있었다. 예술과의 교감이랄지, 그녀의 정신은 고스란히 음의 지배하에 놓이고 말았다. 그 와중에서 피리음의 음색이 서서히 바뀌었다. 이른바 찬미에서 절대성을 띤 고독(孤獨)에의 표현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그러자 백의소녀는 규중에서 남몰래 한숨을 토해내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의 내면에는 숨겨진 이면이 있게 마련이다. 그녀는 지금 선율에 의해 스스로의 그런 부분들을 조명해 보며 의식도 하지 못한 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하지만 음률은 곧 장중한 색채를 띠어갔다. 이르자면 일세를 풍미하는 영웅의 기상을 불어내고 있었다. 그에 따라 백의소녀의 마음은 무엇엔가 기대어 의지하고 싶은 욕구로 이어졌다. "아아!" 그녀의 매혹적인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바로 이성을 향한 그녀의 첫 느낌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시녀인 소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사내의 억센 팔에 안기기라도 한 듯 몽롱해진 채 이미 황홀경을 헤매고 있었다. 달빛이 흐르는 고요한 밤. 퉁소의 선율은 이렇듯 두 여인에게 전혀 다른 세계를 맛보게 해 주고 있었다. 물론 당사자인 영호걸은 그녀들과는 달랐다. 네 살 때부터 퉁소를 불어 왔던 그는 마치 친구를 대하는 기분으로 그 음에 자신의 심경을 전부 쏟아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그는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여인의 영혼이 음에 의해 무력할 정도로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③ 음이 멎었다. 백의소녀는 그 여운을 음미하려는 듯 눈을 스르르 내리 감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 끝에서 가느다란 떨림이 이는 것을, 가까이 있으면서도 영호걸은 미처 보지 못했다. 이윽고 백의소녀는 다시금 눈을 반짝 떴다. 영호걸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에는 어느덧 모종의 결심이 어리고 있었다. '이 분은 인상과 마찬가지로 범상한 분이 아니다. 음률을 통해 잠깐이나마 들여다보게 된 이 분의 내면은.......' 대개 사람의 정서와 행동양식은 일치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는 기질상 오래 전부터 이런 논리를 굳게 믿고 있는 터였다. 영호걸이 퉁소를 입에서 떼며 말문을 열었다. "소생이 너무 멋대로 음색을 다루어 소저를 실망시키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구려. 이것은 진심이오." 백의소녀는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아니에요. 공자님의 음률에는 마치 혼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것은 소녀가 알기로도 잔재주나


기교 따위와는 다르지요. 덕분에 오늘 소녀는 큰 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영호걸은 쑥스러운 듯 피식 웃었다. "별 말씀을......." 그런 그에게 백의소녀가 갑자기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공자께서는 바둑도 피리를 다루시듯 잘 두시는지요?" 영호걸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사실 바둑이라면 무공 방면보다도 훨씬 더 자신이 있는 그였으나 느닷없이 질문을 받게 되자 약간은 아연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조금 둘 줄은 아오만, 그것은 왜......?" "그럼 되었어요." 백의소녀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그러더니 그녀는 곧 기쁨이 담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소녀의 아버님께서는 원래 바둑의 대가(大家)이시지요. 평생 바둑으로는 남에게 진 적이 없다고 장담하셨으니까요. 소녀는 어려서부터 아버님께 바둑을 배워 왔어요. 하지만 저도 아버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져 본 일이 없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이 기회에 공자님과 한 수 두어 볼 수 없을까요?" 영호걸은 그 말을 듣자 비로소 물었다. "그럼 소저의 부친께서는 어느 고인이신지?" 백의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그것을 여태 몰랐었냐는 투였다. 잠시 후에야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 천성보의 주인 되시는 분이 바로 소녀의 아버님이세요." "아! 그럼 소저께서 유청청 낭자셨소?" 영호걸의 희한한 어조에 백의소녀가 그를 빤히 쳐다 보았다. "그렇습니다만 공자님의 말뜻은......?" "아, 뭐... 소생에게 별다른 뜻이 있을 리 있겠소이까?" 실상 그는 지금 이곳에 오기 전에 주성후, 오개명 등과 주고 받았던 농담을 떠올리고 있었다. 미남계(美男計)를 운운하던....... 아무리 솔직하고 싶다해도 그것까지는 감히 털어 놓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웃음을 삭이며 궁색한 변명을 해야 했다. "소저의 소문은 보내는 물론 외부에까지 널리 퍼져 있소이다. 그런데 무명인이라 해서 어찌 모르겠소이까?" 선의(善意)의 거짓말은 이내 유청청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영호걸은 그녀의 수줍어 하는 표정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 여인이 지금 무슨 생각을......?' 그는 농으로 흘려 들었던 말이 혹시 현실로 변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를 의심하고 있었다. '설마!' 영호걸은 추호도 눈 앞의 아름답고 지순한 여인을 미끼로 천성보의 내막을 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만일 그녀가 유청청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예 이곳에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유청청을 지그시 응시하며 애써 담담히 말했다. "소생도 소저가 청하시니 두어 보고 싶소이다." 유청청의 얼굴에는 희열의 빛이 번졌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는 영호걸이 염려하는 부분을 벌써부터 하나의 구상으로 굳혀 놓고 있는 상태였다. 즉 바둑을 통해 그를 부친에게 접근시킨 다음 강력하게 천거하고자 작정하고 있었다. 각기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두 남녀. 바야흐로 그들의 대국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유청청의 남다른 집착을 실현시키기 위한 장(章)이라고 보아야 했다. 순수한 사람일수록 외곬수인 경우가 많다. 유청청도 그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영호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나머지 어떻게든 곁에 두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바둑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바둑의 진수를 터득해 대가급에 이른 영호걸에 비하면 몇 단계 아래였지만. 그는 실력의 팔푼 정도만을 발휘하여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탄력있게 상대해 나가고 있었다. 와중에서 가장 높이 살만한 것은 역시 그녀의 끈기와 집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몰리는 형국이었으나 그녀는 이마에 구슬땀을 매달고도 열심히 응전했다. 영호걸은 그런 그녀에게서 문득 아찔할 정도로 진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여인 특유의 달콤한 체취가 아니라 그녀의 열정이 발산해 내는 감동적인 내음이었다. 이윽고 대국은 끝났다. 계상(計上)해 보니 영호걸이 다섯 집을 이겨 놓고 있었다. 유청청은 섬섬옥수를 들어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승부를 초월하여 최선을 다한데 대한 만족감이 번지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허심탄회한 것일까? "정말 대단한 실력이군요. 이 정도면 아버님과 겨루어도 능히 평수를 이룰 수 있을 거예요." 영호걸은 마치 그녀의 말이 가슴을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차라리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해 버렸다. "소저, 시간이 너무 늦었소이다. 불초는 이만 가보겠소." 그가 일어서자 유청청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선연한 눈망울에는 섭섭한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녀는 곧 얼굴을 활짝 폈다. 아마도 상대가 천성보 내에 있는 이상 언제라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자위했으리라. 그녀는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당부했다. "공자께서는 시간이 나시는 대로 종종 이곳에 들러 주세요." 영호걸은 돌아다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소저의 호의는 송구하나, 과연 그럴 기회가 또 있을지는 소생도 장담할 수가 없소이다." 이어 그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정자를 물러 나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유청청이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당신은 조만간 나와 만나게 될 거예요." 영호걸. 그는 빠른 걸음으로 백운각의 월동문을 지나 자신의 거처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산란한 탓에 그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가 막 방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한 명의 중년인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 자는 대략 사십 세 가량으로 보였으며, 청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의 눈은 영호걸을 흠칫 놀라게 했다. 마치 금강석을 깎아 놓은 듯 어둠 속에서도 매섭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저 안광에는 헤아릴 수 없는 예지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영호걸은 그 눈에 의해 내부를 모조리 관통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인물이 혹시 신안 나선학 아닐까?' 반면에 중년인은 영호걸을 보고도 그저 무심히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막 양자의 어깨가 스치려는 찰나, 그는 날카롭게 외쳤다. "멈추어라!" 영호걸은 그 말에 따라 일체의 동작을 중지하고 돌아다 보았다. 그러자 중년인은 예의 빛나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너는 어느 당 소속이냐?" 영호걸은 대답하지 못했다. 십이향주의 휘하에 들게 된 것이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어느 당에 속해 있는지는 그도 몰랐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추궁이 떨어지자 영호걸은 할 수 없이 아는 대로만 말했다.


"소생은 제 십이향주께 소속되어 있습니다." "십이향주? 과강룡이라 일컫는 노렴 말이냐?" 중년인은 잠시 영호걸을 아래 위로 쓸어 보더니 약간은 적의(敵意)가 배인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보내에 상주하고 있는 천여 명의 얼굴을 모두 기억한다. 그런데 너는 처음 본다. 언제 노렴이 너를 거두었단 말이냐?" 영호걸은 가능한 한 공손하게 대꾸했다. "소생은 오늘 낮에 무사로 선발되어 들어 왔습니다." 중년인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네가 감히 누구를 속이려 드느냐? 너는 지금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어서 정체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겠느냐?" '발각인가?' 영호걸은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 앉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내색치 않고 일단은 태연하게 응수해 갔다. "대체 어르신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소생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높으신 분께 죄송한 말씀이오나... 무엇 때문에 저를 이리도 핍박하시는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그는 짐짓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중년인이란 그의 짐작대로 이곳의 총관인 신안 나선학이었다. 나선학은 상대의 어리숙한 모습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정녕 사람을 잘못 본 것인가? 평생 실수가 없었거늘.......' 그의 미간에는 굵은 주름이 잡혔다. '만일 내 격장지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면 이 놈의 심계는 실로 추측하기 힘들 정도로 음흉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젊은 놈이 설마 그렇게까지야.......' 나선학은 다시금 영호걸을 뚫어져라 노려 보았다. 그러더니 상대에게서 허점을 발견할 수가 없자 그는 기소를 흘렸다. "클클... 이 놈! 어림 없다." 동시에 그는 오른손으로 영호걸의 가슴을 후려쳐 갔다. 그의 손이 노린 부위는 다름 아닌 유부혈(兪府穴)이었다. 그 순간, 영호걸은 극도의 갈등에 사로잡혔다. '맞느냐? 피하느냐?' 유부혈을 격중당하면 죽거나 중상을 입게 된다. 영호걸의 눈이 저항을 포기한 채 오히려 두려움을 떠올린 것은 그때였다. 나선학의 공세는 단지 경기만으로도 섬뜩한 느낌을 선사할 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우수는 영호걸의 가슴에 닿기 직전에 거짓말처럼 회수되었다. 그 사이, 나선학 자신도 벌써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언제 고함을 치고 출수를 했었느냐 싶게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기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담담한 음성을 흘려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승풍이라고 합니다." "으음, 기억해 두도록 하지. 노부는 이곳의 총관이다." "아! 그럼 신안 노선배셨군요?" "오늘은 본좌가 크게 실수를 한 것 같구나. 다음에 보자." 말을 마친 그는 바삐 돌아섰다. 영호걸은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비로소 축축이 젖어 있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정녕 넘기기 힘든 위기였다. 과연 신안의 위명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구나. 그런데 그가 정말 속아 준 것일까?'


한편. 회의가 일기는 신안 나선학도 마찬가지였다. '진정 내 안목이 흐려졌단 말인가? 분명 신색이나 분위기로 미루어 예삿 인물이 아닌 것 같거늘, 무공 수위는 형편 없으니.......' 그는 모종의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 상태였으나 그 생각만은 중단하지 않았다. '어쨌든 더 두고 볼 일이다.' ④ 십여 일이 지났다. 그 동안 영호걸은 천성보 내의 사정을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천성보주 유화성. 그는 당금 정도무림의 맹주(盟主)격으로서 천성대제(天聖大帝)라는 별호답게 무림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분쟁들을 해결했다. 작금에도 숱한 무림인들이 매일 천성보를 방문해 어려운 일을 부탁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유화성은 시원스럽게 해결해 주었다. 물론 그 자신의 이권 따위는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강호인들은 그를 하늘같이 공경했다. 이는 보내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천성보 소속이라는 사실에 무한한 긍지를 가지고 보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 가운데서도 영호걸은 면밀히 보내를 살핀 결과 몇 가지 보이지 않는 의문점들을 발견했다. 다만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을 뿐, 그는 그것을 가슴 속에 깊숙이 묻어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오후. 영호걸은 오개명과 바둑판을 사이에 둔 채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은 종종 이처럼 대국을 해왔다. 그만큼 보내에서 할 일이 없기 때문으로써, 바둑이란 무료함을 달래주는 좋은 수단이었다. 그런데 밖에서 부르는 음성이 들려 왔다. "흠! 승풍이 어느 분이오?" 방문을 열리더니 한 장한이 고개를 들이 밀었다. 영호걸은 얼른 바둑돌을 내려 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급자들이란 의례 부름이 있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응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요. 대체 무슨 일로 찾으시오?" 장한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보주께서 내당으로 들라는 분부시오." "흐음?" 영호걸은 대강 짐작되는 바가 있었으나 의혹이 깃든 표정으로 그것을 감추었다. 오개명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며 그는 되려 보이지 않게 고소를 지어야 했다. "어서 나오시오." 장한의 재촉에 영호걸은 미적미적 방문을 나섰다. "소생은 잘못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소이다. 그런데 보주께서 왜 몸소 나를 찾으시는지 모르겠구려?" 짐짓 투덜대는 그에게 장한은 싱긋 웃어 보였다. "그거야 가 보면 알겠지만 그렇게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소. 보주께서는 인자하고 너그러우신 분이니 설사 잘못이 있다 해도 크게 나무라지는 않으실 것이오." 영호걸은 오개명을 돌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오형, 그럼 내 다녀 오리다." 오개명이 재미있다는 듯 히죽 웃었다. "다녀 오시오. 승형이 무사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리다." "쯧! 친구도 소용없군. 이 상황에서도 놀리다니......." 이윽고 영호걸은 앞장서 걸어가는 장한의 뒤를 따랐다. 그런 그의 표정은 방금 전과는 영 딴판이었다. '천성보주가 일개 무사인 나를 불렀다면 이유는 하나 뿐이다.'


그의 뇌리에는 유청청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를 본 지 꼭 열흘이 지났구나. 그 동안 부친을 졸랐겠지.' 장한은 긴 회랑을 돌아 몇 개의 전을 거치더니 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이 바로 그가 말하던 천성보의 내당이었다. 그는 안쪽을 향해 정중히 아뢰었다. "보주, 승풍을 데리고 왔습니다." 창노하면서도 위엄이 깃든 음성이 그 말에 응수해 왔다. "그를 들어 오도록 하고, 너는 물러가 있거라."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장한은 영호걸에게 문을 열어 주고 난 뒤 곧바로 사라졌다. 영호걸은 잠시 문 앞에 선 채 내당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곳은 우아하고 품위 있게 장식된 거실이었다. 바닥에는 부드러운 융단이 깔려 있었고, 커다란 탁자와 의자들이 밖에서도 보였다. 영호걸은 가운데의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명의 노인을 의식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 노인은 일신에 황의를 걸쳤는데, 백발에 홍안으로써 일견하기에도 위엄이 엿보이는 인상이었다. 그가 바로 천성보주이자 무림의 일성(一聖)으로 추앙받는 천성대제 유화성이었다. 그의 뒤에는 무남독녀인 유청청이 서 있었다. 영호걸은 그를 향해 공손히 읍했다. "속하, 대령했습니다." 유화성은 가슴까지 늘어진 은빛 수염을 가볍게 쓸었다. "음, 그대가 승풍인가?" "그렇습니다." 유화성은 잔잔한 시선으로 영호걸을 응시했다. 그의 나이 백 세였으나 아직도 만면에 화기가 충만했으며 전신에서는 타인을 압도하는 협골(俠骨)의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칼과 수염이 은백색이 아니었다면 육순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영호걸에 대해 아무런 평도 하지 않았다. 단지 마음에 새겨 두면 그뿐이라는 듯 이렇게 물을 따름이었다. "그대가 그토록 바둑을 잘 둔다면서?" 영호걸은 약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유소저께서 소생을 칭찬한 모양입니다만 속하의 바둑 실력은 보잘 것 없는 수준입니다." 유화성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아니야. 노부는 청아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 이 아이는 절대로 아무나 칭찬할 아이가 아니다."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만, 되었네. 어떤가? 노부와 한 번 겨루어 보겠는가?" 유화성의 관심어린 눈길을 느끼며 영호걸은 빙긋 웃었다. "그것이 보주의 뜻이라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흐음? 무슨 말이지?" "보내의 말직(末職)에 속해 있는 자로서 극히 외람된 말씀이오나, 속하는 유소저의 권유에서라면 사양하고 싶습니다." "호오!" 유화성은 의외라는 듯 새삼 영호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영호걸은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항간에는 우스개 소리가 떠돌고 있습니다. 유소저의 환심을 사게 되면 장래를 보장받을 것이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속하는 솔직히 지금 이 자리가 무척 불편합니다. 인간인 이상 개인적인 영달이야 마다하겠습니까만 늦더라도 진정한 실력으로 달성하고 싶은 것이 속하의 진심입니다." 어느 순간에도 스스로 비굴해지는 것만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영호걸이었다. 그것은 상대가 천성보주인 천성대제가 아니라 당금 명조(明朝)의 황제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한 목적이 있다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는 차라리 도박을 걸지언정 원치 않는 방법으로 이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유화성은 영호걸의 이런 골기(骨氣)에 호감을 보였다. 그는 유청청을 힐끗 돌아본 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노부는 자네가 무척 마음에 든다. 역시 청아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구나." 고개를 떨구는 영호걸에게 그는 담담히 물었다. "자네의 사문은 어떻게 되는가?" "속하 같은 처지에 무슨 사문이 있겠습니까? 가진 것이라야 오직 흉중에 품고 있는 뜻이 전부입니다." 유화성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무사로 들어 왔으니 어느 정도 무공은 할 줄 알겠지? 자네는 어떤 무기를 쓰는가?" 영호걸은 뇌정도를 떠올리며 서슴없이 대답했다. "도(刀)를 씁니다." "흐음, 고지식한 인물답군. 현 무림에서는 주로 검(劍)이 많이 사용되고 있지. 도는 활용도가 떨어져 쇠퇴한 지 오래이거늘......." 유화성은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기이한 웃음을 띄었다. "어떤가? 자네, 지금부터 노부와 내기를 하나 해 봄세." 영호걸은 고개를 들고 새삼 그를 쳐다 보았다. "내기라시면......?" 유화성은 탁자의 한 귀퉁이에 놓여 있던 바둑판을 몸소 한가운데로 끌어 오며 말을 이었다. "노부와 바둑을 두어서 자네가 지면 앞으로 삼 년간 무보수로 노부의 일을 도와야 한다." 영호걸은 비로소 흥미가 당기는 듯 입술꼬리를 말아 올렸다. "반대로 속하가 이기면 어찌 됩니까?" 유화성은 손을 들어 은빛 수염을 쓰다듬었다. "허허... 그렇게 되면 내 자네에게 한 권의 도급(刀 )을 주겠다." "아!" 영호걸은 짧게 탄성을 발했다. "하지만 자네가 져도 그 도급은 줄 작정이다. 삼 년 동안 내 사람이 될 것인즉 절대 손해나는 일이 아닐 테니 말일세." 그 말을 듣자 영호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녕 대단한 인물이다. 심기가 깊은 데다가 그에 못지 않은 배포까지 겸비하고 있구나. 수하들을 이런 식으로 다루니 도대체 누군들 공경하고 따르지 않겠는가?' 이어 그는 다소 막막한 심정이 되어 유청청을 바라 보았다. 그녀의 호수같은 눈망울은 그의 기분을 더욱 암울하게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망설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좋습니다, 보주. 내기에 도전하겠습니다." 이윽고 두 노소(老少)는 탁자를 마주한 채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조용한 가운데 시간이 흘러갔다. 가끔씩 딱딱 바둑돌을 놓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릴 따름이었다. 영호걸도 일단 대국에 임하게 되자 다른 생각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는 바둑판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슬쩍 좁혔다. '음, 과연 유소저가 자랑할 만한 실력이다. 아버님보다도 오히려 한 수 위인 것 같다.'


반면에 유화성은 거의 경악에 이르고 있었다. '허어, 이럴 수가 있나? 아직 약관의 나이인 청년이 어찌 바둑을 이다지도 잘 둔단 말인가? 필경 내가 지금 국수(國手)를 면전에 두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두 사람의 바둑 실력은 그야말로 팽팽한 국면을 이루고 있었다. 흑(黑)과 백(白)이 호각지세를 이룬 가운데 반상을 절반이 넘게 바둑돌로 메워가고 있었다. 그러던 한순간, 영호걸은 흑돌을 들어 한창 접전 중이던 우하변(右下邊)을 벗어나 전혀 엉뚱한 곳에 떨구었다. '엇?' 유화성은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그는 내심 의혹에 싸여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수인가? 지기로 작정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는 잠시 영호걸의 잠잠한 태도와 바둑판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그 뒤를 이은 것은 물론 심사숙고였다. '이 수는 아무래도 너무 엉뚱하다. 혹시 나를 떠보려는 술수가 아닐까? 그렇다면 아예 신경을 꺼 버리고, 우하변의 포진이나 더욱더 완벽하게 구축해 놓자. 그 편이 훨씬 나으리라.' 유화성은 백돌을 집어 생각대로 우하변에 한 수를 첨가했다. 그것을 본 영호걸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다시 시간이 또 흘러갔다. 바둑돌 놓는 소리만이 여전히 사이사이로 정적을 끊고 있을 뿐, 두 사람은 거의 몰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관전하는 유청청조차 숨을 죽인 채 반상의 전투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유화성은 국면이 기이하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엉뚱하다고 여겼던 영호걸의 수가 뜻밖에도 복병이 되었다가 백의 진세를 마구 협살하고 있었다. 결국 그 한 수로 인해 백은 완연한 패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마침내 유화성은 돌을 던지고 말았다. 불계패(不計敗)였다. 그는 사뭇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허어! 노부 평생 처음 당하는 완패로군." 곧이어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감탄의 기색이었다. "정녕 자네의 기도(棋道)는 놀라울 만큼 오묘하군. 노부가 졌네." 유화성은 품 속에서 얇은 책자를 꺼내 내밀었다. "자, 약속한 도급일세." 영호걸은 다소 망설였으나 도급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유화성이 그것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거기에는 다라십팔도(陀羅十八刀)라는 도법이 적혀 있지." 그의 눈은 영호걸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듯 다라십팔도는 중원의 무학이 아니네. 그 도급도 실은 노부가 옛날 천축의 어떤 대사로부터 기증 받았던 것이지. 그러나 노부는 평생 무기를 쓴 적이 없었으므로 이 비급은 보관만 했을 뿐 익히지는 않았다." 영호걸은 책자를 품에 넣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보주." 유화성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인사만은 청아에게 해야 하네. 노부가 알기로 저 아이가 자네를 아끼는 마음은 진심일세." 이쯤 되자 영호걸로서도 달리 이의를 달 명분이 없었다. 그는 유청청을 향해 정중한 음성이되 짧게 한 마디 했다. "고맙소이다, 유소저" 유청청은 그의 인사를 받자 활짝 웃었다. "다라십팔도는 대단한 도법이니 부디 열심히 연마하세요. 그래야 아버님께서도 기쁘실 테니까요."


그 말에 유화성이 호탕하게 웃어 제꼈다. "헛헛헛... 아비까지는 끌어 들이지 않아도 된다. 이미 네가 소개한 저 청년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헛헛헛......." "아이 참......." 유청청은 비로소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녀의 부친인 유화성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자, 승무사. 우리 한 판 더 두세." "여부가 있겠습니까?" 영호걸도 어느새 그들 부녀(父女)의 분위기에 이끌려 호쾌하게 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반상의 싸움에 돌입했다. 12 장 출전(出戰) ① 영호걸.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그는 실로 고심막측이었다. '아무리 봐도 유보주에게는 사악한 구석이 없다. 소위 인의대협(仁義大俠)이라는 명칭조차 부족할 정도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때의 황의노인은 왜 그런 말을 남겼을까? 분명 이 곳이 현음교의 본거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의 생각은 자동적으로 현음교에 미쳤다. '내가 듣기로 현음교란 근자에 등장한 신비문파다. 아직 뚜렷한 악행을 저지른 바는 없으나 사악한 단체인 것만은 확실하다.' 영호걸은 쓴 입맛을 다셨다. '사실 어찌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유보주의 인간 됨됨이는 그렇다쳐도 당금 정파무림의 맹주격인 그가 대체 무엇이 답답하여 현음교에 관계한단 말인가?' 그는 짙은 회의가 일었으나 다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어쨌든 죽어가는 노인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무엇인가 내가 모르는 흑막이 있을 것이다. 내 그것을 반드시 캐어 보리라.' 그러나 상황은 막막하기 그지 없었다. 기본적으로 현음교의 교주가 누구인지, 그 위치가 어디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단서를 잡고자 하니 이렇다할 진전을 볼 까닭이 없었다. 영호걸은 문득 눈을 빛냈다. '혹시 그 노인의 말인즉 천성보가 곧 현음교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유보주가 현음교주라는 말이 되는데......?' 그는 두 개의 신분을 가졌을 인물을 뇌리에 그려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왠지 억지에 가까운 것 같았다. 영호걸은 피식 웃으며 사고의 방향을 틀었다. 그것은 장가촌 너머 그의 집, 불타고 남은 자리의 주춧돌에 새겨져 있던 현(玄)이라는 글자였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으로서는 아버님의 납치 사건도 현음교와 연관을 지을 수 밖에 없다. 그 글자를 넣어 연상되는 무리는 그들 외에 없으므로. 아직 무엇 때문인지 이유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랬던가? 그는 어느덧 자신이 겪은 일들을 하나의 맥락에서 추리해 가며 나름대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여간 이곳에 더 머무르면서 계속 조사를 해 보자. 그러다 보면 뭔가 실마리가 잡히겠지.' 영호걸은 낙관론으로 자위하며 품 속에서 유화성이 준 도급을 꺼냈다. 그것은 역사를 증명하듯 겉장이 누렇게 바래 있었다. 겉장을 넘기자 머리를 깎은 중들의 입상(立像)이 정묘하게 그려져 있었다. 또한 그림 속의 중들은 모두 계도(戒刀)를 들고 있었다. '어째 이름이 그렇더라니 불문(佛門)의 무공이었군.'


그 그림들은 매 동작마다 알아 보기 쉽도록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으며, 비교적 상세한 주석까지도 곁들여 있었다. 덕분에 영호걸은 한 번 읽자 태반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도해에 그려진 도식을 따라 휘둘러 보았다. '으음, 이 도법은 강맹함에 있어서는 풍뢰구도에 비해 한 단계 떨어지는구나. 그 대신 풍뢰구도가 갖지 못한 음유한 맛이 깃들어 있다. 아울러 풍뢰구도가 패도적이고 잔인하다면 이 도법은 불문의 무학답게 활결(活訣)에 가깝다.' 영호걸이 이렇듯 도법에 몰두하고 있을 때, 방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흠칫하여 재빨리 도급을 품 속에 넣었다. "승형, 안에 있소?"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들어섰다. 그들은 바로 오개명과 주성후였다. 먼저 주성후가 넌즈시 물었다. "승형, 대체 보주께서는 무슨 일로 부르셨습디까?" 영호걸은 고개를 흔들며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대꾸했다. "별 것 아니오. 그저 바둑이나 한 판 두자시는 것이었소." 그 말에 오개명이 자못 흥미를 보였다. "그래서 승부는 어떻게 되었소?" 영호걸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그야 물으나 마나한 질문이 아니오? 어찌 이 몸이 보주님의 상대가 될 수 있겠소이까?" 오개명이 짐짓 날카롭게 그를 노려 보았다. "혹시 승형이 응큼하게 겸손을 가장하는 것은 아닌지......? 보주의 실력이야 정평이 나 있지만, 승형 역시 보통 솜씨는 아니지 않소? 내가 일곱 점을 깔고 두어도 늘상 졌었거늘......." 그 말은 주성후의 짓궂은 음성에 의해 무참하게 잘리고 말았다. "쯧! 대단하구려, 오형. 그것도 실력이라고 자랑을 하다니." "하하하하......." 영호걸을 필두로 하여 세 사람은 폭소의 마당을 이루었다. 완연한 봄이었다. 바야흐로 오 월에 접어 들자 천성보가 위치한 이곳 강남(江南) 지역은 온통 춘색(春色)으로 물들어 있었다. 보내에서도 봄기운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잘 가꾸어진 정원수나 화단의 꽃들이 저마다 앞다투어 신록과 개화(開花)를 자랑했다. 연무장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드넓은 바닥에 푸른 잔디가 흡사 융단처럼 깔려 있었던 것이다. 영호걸이 무거운 걸음으로 그 위를 거닐고 있었다. 푸르름이 깃든 도처의 풍광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침중하기 그지 없었다. '벌써 천성보에 든 지도 석 달여가 지났건만 이제까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으니.......' 그가 말하는 시간들이란 정녕 무료한 것이었다. 유일한 낙이라야 백운각에 들러 유청청과 바둑을 두거나 음률을 즐기는 정도였다. 최근 들어 영호걸은 자주 백운각을 드나 들었다. 어떤 날은 그 횟수가 아침과 저녁으로 두 번이나 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유청청이 시녀인 소미를 보내 그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듯 발전을 보기도 했다. 사실 유청청에게는 매력적인 요소가 너무도 많았으며, 영호걸도 이 점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도 남자다. 아름답고 향기 짙은 꽃을 충분히 사랑할 줄 안다. 그러나 그는 유청청을 상대로는 도저히 마음을 허용할 수가 없었다. 이미 정해진 배필이 두 명이나 있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천성보의 내막에 대한 회의지심 때문이었다. 영호걸은 미모와 더불어 순수한 정신을 가진 그녀를 떠올릴 때면 늘상 미안한 생각부터 들었다.


자연스러운 이끌림조차 거부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에 이따금 환멸이 느껴진 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표면상으로는 철석간담(鐵石肝膽)인 사내, 그는 냉혈한인 양 유청청과 같은 절세미녀의 정을 꾸준히 뿌리쳐 오고 있었다. 단지 그가 접수하고 있는 것은 우의(友意)일 따름이었다. 아까부터 유청청의 화사한 얼굴이 뇌리를 점령하고 있었으나 영호걸은 마침내 고개를 흔들어 이조차 털어내 버렸다. 문득 맞은편 전각의 모퉁이에서 한 백의소녀가 나타났다. '유청청!' 영호걸은 자신도 모르게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유청청이 반색을 하며 달려왔다. 그녀는 언제나 이처럼 스스럼이 없었다. "승공자님, 언제 이곳에 오셨어요?" 늘상 느끼는 것이지만 그녀의 맑은 웃음은 작은 감동을 선사하곤 했다. 영호걸도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유청청은 봄에 어울리도록 하늘거리는 천을 몸에 휘감고 있었다. 아울러 산뜻한 향기를 전하는 그녀의 모습은 햇살 아래에 서자 그 어느 봄꽃보다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영호걸은 눈에 보이는 대로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유소저께서는 오늘따라 더욱 수려해 보이는구려. 봄볕과 미인의 조화라....... 정말 인상적이오." 유청청은 희고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내며 생긋 웃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공자님의 찬사가 더 멋지군요." 그녀는 기쁨을 감추는 법이 없었다. 따라서 그녀와 함께 있으면 영호걸도 은연중 그녀의 감정에 동화되어 버렸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즐거운 마음이 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가까운 곳에서 마주쳤다. 하지만 품고 있는 색채는 전혀 달랐다. 한쪽이 은은하게 열기를 띠고 있다면, 다른 한쪽에서는 웃고 있는 가운데서도 냉철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유청청이 스르르 시선을 거두며 물었다. "승공자님께선 다라십팔도는 모두 터득하셨는지요?" 영호걸은 짐짓 난색을 지어 보였다. "소생의 자질이 부족해서 그런지......." 유청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운 시일 내에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미안하오이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영호걸의 음성이 우울하게 느껴졌는지라 그녀는 오히려 얼굴을 활짝 폈다. 그리고는 종전보다 활달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아무렴 어때요? 공자님은 꼭 무공이 아니라도 다방면에 재능을 가지신 분인 걸요. 소녀만은 그것을 잘 알고 있지요." 영호걸은 내심 신음을 발했다. '끙! 못당하겠군.' 사실 유청청은 보기 드물게 선량했고, 이해의 폭도 넓었다. 더구나 영호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이 미인의 사랑을 거절하자니 영호걸로서도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니었다. 그의 심중에서는 절로 한탄이 일고 있었다. '차라리 이 여인이 악독하기라도 했더라면.......' 반면에 유청청은 같은 시각, 이런 독백을 하고 있었다. '아! 이 분은 언제 쯤이면 나를 경계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와 주실까? 내 이 분께 어울리는 평범한 아낙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녀는 심각하게 오해를 하고 있었다. 즉 영호걸이 신분의 차이 때문에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기실 그녀가 영호걸의 무공증진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진전을 이루어 어느 정도 지위가 오르면 거리끼는 장벽도 자연스럽게 허물어지리라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두 남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들 주위의 기류가 풋풋한 춘미(春味)를 자아내며 두근거리는 설레임과 어울려 도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② 잠시 후. 영호걸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발이 푸른 잔디를 밟으며 나른한 음향을 사위에 전달하고 있었다. 유청청은 그 소리를 들으며 내심 부르짖었다. '아아! 나는 어쩌면 저 남자의 그물로부터 영원히 빠져 나갈 수 없을런지도 몰라.' 그것은 바로 영호걸의 뒷등이 그녀의 시야에 유독 크게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불어냈다. "으음......." 미인의 나직한 한숨은 곧바로 대기를 가르고 영호걸의 귓전에 닿아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차라리 애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이곳을 떠나 버릴까? 사건 해결은 고사하고 업(業)만 쌓아가고 있으니.......' 그의 생각이 여기에 이를 때였다. 유청청이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영호걸은 흠칫 했으나 감히 뭐라고 탓하지는 못했다. 그저 들리지 않는 탄식과 더불어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하나의 거대한 둔덕이 그들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인공의 가산(假山)이었다. 걸음은 자연히 멈추어졌고, 두터운 침묵의 장막을 거둔 것은 의외로 영호걸 쪽이었다. "이 가산은 규모가 꽤 거창하구려?" "그래요." 유청청은 금세 환한 웃음을 보였다.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열리자 반갑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묻지 않은 부분까지도 굳이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소녀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 가산은 오십년 전에 아버님의 지시로 꾸며진 것이라고 하더군요." "오십 년 전?" "네. 하지만 소녀도 그 이상은 알지 못해요." 대화는 거기에서 또 끊겼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후, 영호걸이 몸을 돌리며 물었다. "가산을 좀 둘러 보아도 되겠소?" 그 말에 유청청의 안색이 급변했다. "안 돼요! 그건." 영호걸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녀는 강조하듯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천성보 내에서 이 가산만큼은 출입이 허용되지 않고 있어요. 왜냐하면 절대적인 금지구역이니까요." "금지구역? 보내에 그런 곳도 있었소?" 영호걸은 눈썹을 꿈틀 했다. 뭔가 알 수 없는 예감과 아울러 짙은 의혹이 가슴에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곧 유청청의 입을 통해 가산에 대한 언급이 이어졌다. "이것까지는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 가산에는 아버님이 무학을 연마하시는 연공실(練功室)과, 천성보의 기밀서류(機密書類)를 보관하기 위한 석실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 연유로 어느 누구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어요. 심지어 소녀는 물론이고 나총관까지도요." '이것이다! 아마도 사건의 열쇠는 이곳에 묻혀 있으리라.'


유청청의 말은 언뜻 들으면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약간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내 커다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문제점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기밀서류를 보관하는 것이야 워낙 중차대한 일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보주의 연공실까지 절대 금역으로 선포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보아 하니 보주가 일부러 이 가산을 설치하고 숨어든 형국이었는데, 특별히 비밀사항이 있지 않는 한 그것은 정파무림의 지주격인 인물로서는 도저히 할 만한 노릇이 아니었다. 영호걸은 일단 그러한 의문점을 심중에 접어 두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와중에도 그의 가슴은 마구 쿵쾅거렸다. 기대와 흥분같은 것이 온통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드디어 무엇인가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 영호걸의 거처. 경장차림을 한 오개명과 주성후가 그의 방문을 열었다. "승형, 와 있었구려. 아까는 방에 없더니." "무슨 일이 있소이까?" 영호걸이 묻자 오개명이 답했다. "어서 준비 하시오. 드디어 일이 생겼소." "일이라면......?" 주성후가 씨익 웃었다. "그새 너무 놀기는 놀았나 보구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일, 즉 화물을 호송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말이오." "아!" 영호걸이 그를 따라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즉시 장삼을 벗고 간편한 백색의 경장으로 갈아 입었다. "자! 나도 준비를 마쳤소이다." 영호걸은 뇌정도를 잡으며 방문을 나섰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주성후와 오개명은 동시에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들 세 사람은 곧 연무장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이미 그들 말고도 백여 명에 이르는 무사들이 모여 있었다. 맨 앞에는 육순 가량 되어 보이는 두 노인이 서 있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이 일단의 지휘를 담당하는 자들인 것 같았다. 개중 한 명은 등에 커다란 철괴를 메고 있었는데, 오히려 철괴가 작아 보일 정도로 체격이 장대한 인물이었다. 영호걸은 그 자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음, 저 인물이 바로 금강신괴(金剛神拐) 화곤의(和坤義)겠지?' 화곤의는 바로 오대당주 중 한 명이었다. 그와 나란히 서 있는 다른 노인은 양 옆구리에 각기 한 개씩 판관필을 끼고 있었다. '두 자루의 판관필을 미루어 저 인물 역시 오대당주 중 한 사람인 생사필(生死筆) 마자휘(馬子揮)이리라.' 무사들이 전부 모인 듯 하자 금강신괴 화곤의가 입을 열었다. 덩치답게 크고 우렁찬 음성이었다. "자, 지금부터 우리들은 동해(東海) 비응도(飛應島)까지 호송을 맡는다. 모두들 소속된 향주를 따라 승선하도록 하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각 향주들이 스스로 알아서 수하들을 인솔해 대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문득 오개명이 의외라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거늘......." 영호걸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말이오?" "이렇게 두 명의 당주와 다섯 명의 향주가 한꺼번에 동원된 적이 없었단 게요. 대개 기껏해야 그 절반


정도에 불과했었소." 주성후도 동감을 표했다. "아무래도 이번 화물은 굉장히 귀중한 물건인 모양이군." 그들을 관장하는 십이향주 과강룡 노렴이 소리쳤다. "게 무엇들 하고 있느냐? 출발이 임박했거늘." 영호걸 등은 움찔하여 얼른 전면을 주시했다. 이윽고 그들은 노렴의 뒤를 따라 보문을 나섰다. 그런데 이 때, 영호걸의 시야에 하나의 섬세한 인영이 포착되었다.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인영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한 그루의 나무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 '유청청!' 영호걸은 마치 신음처럼 그 이름을 뇌까렸다. 아울러 그는 안력(眼力)을 통해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담겨 있는 한 가닥 애잔한 기운까지도 여실히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은 무엇인가를 외치고자 하는 듯 무수히 달삭 거렸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신형을 돌렸고, 영호걸은 그런 그녀의 뒷등에서 진한 슬픔을 엿보아야 했다. "으음......." 그는 가슴이 답답해진 나머지 긴 한숨을 토해냈다. 오개명과 주성후가 기이한 눈초리를 보냈으나 이유까지는 묻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들 일행은 보문을 통과해 쭉 뻗은 관도로 접어 들고 있었다. 하지만 백여 명에 이르는 인물들 중 누구도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제각기 상념에 잠겨 묵묵히 걸을 따름이었다. '혹시 이번이 마지막 길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대다수 무사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금번의 출동이 다른 때와는 달리 기이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통상 출동명령은 하루 전에 전달되곤 했었다. 그러던 것이 갑작스러운 것으로 돌변했고, 게다가 무공이 고강한 두 명의 당주와 다섯 명의 향주까지 따라 붙게 되니 불안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는 곧 그만치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지나는 길의 양 옆에는 노란 개나리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가끔씩 불어오는 훈풍이 꽃잎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무사들의 가슴은 그야말로 한겨울인양 썰렁하고 스산하기 그지 없었다. '저 꽃잎들이 스러지기 전에 살아 돌아올 수 있었으면.......' 개나리의 꽃잎이 스러진다는 것은 곧 봄이 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사들에게는 봄과 목숨이 다 소중했던 것이다. 그 상태로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의 눈 앞에 웅대한 자연의 경관이 펼쳐졌다. 변함없이 도도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는 장강(長江), 소위 장강대해(長江大海)라는 말도 있듯 그것은 일개 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바다에 가깝다고 해야 옳았다. 천성보의 무사들이 모이게 된 곳은 한 부두였다. 그곳에서는 이미 거선(巨船)이 준비된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합 다섯 척이었다. 무사들은 각기 향주들의 지휘에 따라 묵묵히 배에 올랐다. 영호걸도 오개명, 주성후 등과 더불어 개중 한 배에 올랐다. '음, 다섯 향주가 배 한 척씩을 맡고 당주들이 총괄하는군.' 승선이 완료되자 다섯 척의 배는 장강의 물결을 헤치고 서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무사들은 갑판 위에서 망연한 시선으로 멀어져가는 금릉땅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때, 그들의 앞에 과강룡 노렴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중년의 나이로 고슴도치처럼 온 얼굴에 수염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는 인물이었다. 태양혈이 불끈 치솟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내외공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서 예리한 신광이 폭사되었다. "자! 빨리 빨리 움직여라." 목소리 또한 누구 못지 않게 우렁찼다. "영차! 영차......." 선원들이 그의 호통소리에 놀라 부리나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판 위에는 수십 뭉치에 달하는 짐들이 올려져 있었는데, 그것들을 모두 선실로 옮기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짐들은 흡사 수십 대의 마차로 옮겨 놓은 듯 실로 엄청난 물량이었다. 영호걸이 도우려 하자 주성후가 곁에서 만류했다. "승형, 그런 일은 선원들의 몫이니 그들에게 맡겨 두시오. 각기 맡은 바에 충실해야 기강이 바로 서오. 우리들은 오직 이 배를 호위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오." 영호걸은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는 들었던 짐을 도로 내려 놓았다. 이어 그는 멀리로 시선을 움직여 장강의 도도한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방금 전의 그 화물들은 어떤 물건이었을까? 대체 얼마나 귀중한 것이길래 이토록 엄중한 호위를 요하단 말인가?' 그가 상념에 잠겨 갈 때에도 배들은 여전히 장강의 물살을 가르며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③ 다음 날. 다섯 척의 거선은 진강(鎭江)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식량과 식수를 실은 후, 배는 다시 출발했다. 영호걸은 갑판에 우뚝 선 채 선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흠칫했다. 수평선 저쪽으로부터 십여 척의 함선(艦船)이 나타나 그의 시야에 잡혔던 것이다. 영호걸은 전신에서 가볍게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 함선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예리한 살기(殺氣) 때문이었다. 그가 막 뒤를 향해 뭐라고 외치려 할 때였다. "적이다!" 그를 앞질러 급박한 고함성이 배 안을 울렸다. 이와 동시에 다섯 척의 배에서는 똑같이 일대 소요가 일었다. 요란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무사들이 모조리 갑판으로 모인 것이었다. 아울러 그들은 저마다 다가올 일전(一戰)에 대비하느라 무기를 갖추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서 과강룡 노염이 노성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일이 지저분하게 되었구나. 녹림 십삼 채의 도적놈들이 모두 출동하다니." 이어 그는 수하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모두 전투 태세로 돌입하라!" 오개명이 검을 꼬나쥔 채 영호걸을 돌아다 보았다. "승형, 아무래도 오늘 일은 심상치가 않소이다." 주성후도 옆에서 거들었다. "전에도 습격은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오. 녹림의 무리들이 한꺼번에 십여 척이나 덤벼오다니 의외구려." 두 사람은 불안한 기색이되 그렇다고 겁을 집어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영호걸이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저들이 이 배의 화물을 뺏으려 드는 이유는 무엇이오?" 오개명이 대답했다. "녹림도들이 언제 이유가 있어 도적질을 했소이까? 다만 본보를 상대로는 약간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소. 아무래도 우리 세력이 팽창하면 할수록 그들을 위시한 흑도의 무리들에게는 그만큼 위협이 커질 테니까 말이오."


그는 말하는 도중 안면에 은은한 분노를 드리웠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가 지니고 있는 협기(俠氣)로 인해서였다. "저들은 우리가 출항할 때마다 공격하지 않은 적이 없었소. 보주께서도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매번 고수들을 딸려 보내셨지만 소용이 없었소. 우선적으로 물건을 지키려다 보니 번번이 거기까지는 손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오." "그렇다면 그들의 본거지를 쳐야겠군." 영호걸의 말에 오개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소이다. 저들은 흑도와 보이지 않게 연합이 되어 있어 직접적으로 상대하려 했다간 자칫 정사간(正邪間)의 대전쟁으로 비화될 우려가 있소." "으음, 듣고 보니 그렇겠구려." 영호걸은 낮은 신음과 함께 다시 물었다. "그럼 저들의 총표파자는 누구요?" 이번에는 주성후가 말해 주었다. "녹림십삼채의 총표파자는 바로 혈로음살(血路陰殺) 음무외(陰無畏)라는 악랄한 자요." 혈로음살 음무외라면 영호걸도 알 만한 인물이었다. 그 자는 당금 무림에서 손꼽히는 절정고수로서 우내사괴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의 수하인 녹림십삼채주들의 무공 또한 하나같이 일류고수의 대열에 끼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침내 녹림의 선박들이 일제히 코 앞에 당도했다. 쿠쿵! 쿵--! 둔중한 격타음과 함께 양측의 선박들은 여지없이 충돌했다. 동시에 다섯 척의 선상에서는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와아아! 죽여라--!" 쉬이이익--! 차차창--! 전세는 혼전(混戰)이었다. 이마에 녹건(綠巾)을 두른 침입자들로 인해 선단은 삽시에 아수라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베고, 베이는 와중에 피아 구분없이 무수히 피가 튀고 살점들이 뜯겨 나갔다. "죽어라!" 츳! 녹건의 장한 한 명이 검을 휘둘러 영호걸을 베어왔다. "웃!" 영호걸은 싸늘한 검기가 와닿자 일단 신형을 틀어 이를 피했다. 그러나 녹건의 장한은 자신의 일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분기가 치솟은 듯 이번에는 연속적으로 검화를 피워 올렸다. 츳! 츠츳! 제법 날랜 공세였으나 역시 그 또한 영호걸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의 감각이 움직임을 미리 감지하고 모조리 피해 내니 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과강룡 노렴의 호된 질책이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승풍! 무엇 하느냐? 어서 베어 버리지 않고." 영호걸은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그는 현재 노렴의 휘하에 놓인 천성보의 무사인 것이었다. 결코 국외자로 머물러 있을 입장이 못되었다. '으음! 한 몫 거들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영호걸의 손놀림은 이미 생각을 앞질러 갔다. 어느덧 그의 수중에는 뇌정도가 들려진 채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맹렬한 도기(刀氣)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은 바로 다라십팔도(陀羅十八刀)의 초식이었다. "으아악--!"


두 마디의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영호걸을 덮쳐 들던 두 명의 녹건인의 가슴 한가운데가 쩍 갈라져 피화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들 두 구의 시체를 응시하는 영호걸의 눈이 어두운 빛을 드리웠다. 그로서는 난생 처음으로 살생을 했던 것이다. '꼭... 이래야 하는가......?' 그러나 회의할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천성보의 배들이 불타는 것을 보며 그만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큰일이다!' 천성보 무사들의 분전(奮戰)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금세 급박한 국면으로 흐르고 있었다. 실상 처음부터 역부족이었다. 이쪽은 총 인원이 백여 명인데 반해 상대측은 숫자가 장장 삼백 명이 넘었다. 휘익! 한 가닥 붉은 빛을 띤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영호걸이 있는 배로 날아 들었다. 실로 쾌속절륜한 신법이었다. 아울러 그 자의 출현은 상황을 점입가경으로 몰고 갔다. "크으억!" 섬뜩한 비명이 꼬리를 물듯 연이어 터져 나왔다. 이와 함께 대여섯 명의 천성보 무사들이 피무지개를 그리며 나가 떨어졌다. 의외의 참경을 목도하게 되자 영호걸의 안색이 일변했다. '대체 저 자는 누구길래......?' 그가 노려보는 인물은 일신에 붉은 장포를 걸친 노인으로서 나이는 대략 육순 정도 되어 보였다. 경악에 찬 누군가의 부르짖음이 이 노인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혈, 혈로음살이다!" 그러자 노인, 즉 혈로음살은 스산한 웃음을 흘려냈다. "흐흐... 모조리 죽여 주마!" 그것은 언뜻 듣기에도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음성이었다. 그의 쌍장이 허공에서 느릿하게 움직였다. 아니, 느낌상 그러할 뿐 실제의 속도는 정반대였다. 퍼펑--! "으아악--!" 굉음과 비명이 동시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의 신비한 일 장은 단번에 수 명의 목숨을 끊어 놓았던 것이다. "흐흐... 피래미같은 놈들!" 혈로음살이 득의만면하여 다시 쌍장을 치켜드는 찰나였다. "멈추어라!" 과강룡 노렴이 신형을 솟구쳐 혈로음살의 앞을 가로 막았다. 평소 무뚝뚝하고 차가운 위인이었으되 수하들만은 누구보다도 아끼는 그였다. 따라서 보다 못해 죽기살기로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노렴은 혈로음살의 적수가 못되었다. 그를 보자마자 혈로음살은 대뜸 비웃음을 흘렸다. "클클... 애송이가 어르신 앞에 나서다니, 그 용기 하나는 가상하구나. 네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냐?" "나는 천성보의 제 십이향주인 과강룡 노렴이다." 혈로음살 음무외는 피식 실소했다. "감히 일개 향주 따위와 손을 나눌 수는 없지." 이어 그는 쳐들었던 쌍장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귀찮다! 꺼져라." 위이이잉--! 가볍게 쏟아낸 공격이었으나 위력에 있어서는 그게 아니었다. 노렴이 급히 쌍장을 들어 이를 맞받았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펑--! "크윽!" 노렴은 흡사 가슴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주르르 밀려나야 했다. 그 순간, 혈로음살의 손가락이 슬쩍 퉁겨졌다. 슷! 이번에는 비명도 없었다. 노렴은 이마에서 한 가닥 진홍빛 피화살을 뿜어내며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풍덩! 그의 신형은 그대로 강물에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다. ④ "흐흐... 이제 네놈 뿐이구나." 혈로음살은 천천히 영호걸의 곁으로 다가섰다. "흐음!" 멍하게 있던 영호걸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불쑥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급히 주위를 둘러본 그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과연 혈로음살의 말마따나 배에는 이제 자신만이 달랑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네 척의 배도 침몰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아! 어찌 이런 변고가......." 영호걸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강호 출도 이래 이렇듯 험악한 사태는 처음 맞는 그였다. 그의 눈 앞에서 가장 먼저 어른거리는 것은 역시 벗이나 다름없던 주성후와 오개명의 얼굴이었다. "모두, 모두 죽었단 말인가?" 영호걸은 황당하여 부르짖고 있었다. 그러자 혈로음살이 재미있다는 듯 괴소를 터뜨렸다. "크크크... 그렇게 아쉬워할 것 없다. 염라전에 가면 놈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말과 함께 그는 슬쩍 몸을 뒤로 뺐다. "죽여라." 그의 명령에 다섯 명의 녹건 무사들이 즉시 영호걸을 에워쌌다. "으음." 영호걸의 눈이 일순 한광(寒光)을 뿜었다. 첫 살인은 자의가 아니었으되, 이번 만큼은 스스로 살의(殺意)를 느낀 것이었다. "죽엇!" 녹건 무사들이 수중의 분수도(分水刀)를 휘두르며 영호걸을 덮쳐 들었다. 이로 인해 날카로운 검기가 그의 전신을 조여 들었다. "어림없다!" 영호걸은 신형을 틀어 그들의 공세를 피해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분기를 느끼며 노호성을 발했다. "용서치 않으리라! 생명의 가치를 모르는 귀축(鬼畜)같은 자들." 그의 뇌정도가 처단을 위해 허공을 갈랐다. 츠츳--! "으아악--!" 두 마디의 비명이 울렸다. 단 일도에 두 명의 목이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이 광경에 나머지 세 명의 녹건 무사들은 멈칫했다. 그 틈을 노려 뇌정도가 또 한 차례 예리한 파공음을 전했다. 츠츠츳--! "크헉! 캑--!" 세 명의 가슴이 한 일자로 쪼개지며 제각기 피분수를 뿜어냈다. 피비린내가 강풍(江風)을 따라 선상에


급속히 번졌다. 관전하고 있던 혈로음살이 충격에서 깨어나 부르짖었다. "네놈은 누구냐?" 극도의 경악으로 인해 그의 안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영호걸은 냉소했다. "보다시피 천성보의 일개 무사일 뿐이오." 혈로음살이 흥분하여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닥쳐라! 애송이 놈이 지금 노부를 희롱하고 있구나. 감히 뉘 앞에서 거짓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냐? 혓바닥를 뽑아 버리기 전에 어서 네놈의 진실한 신분을 밝혀라." 그가 이렇게 울화를 터뜨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실상 영호걸이 전개한 다라십팔도는 천성보에서 파견된 두 당주의 무공보다 우위였던 것이다. 영호걸의 준미한 얼굴이 묘하게 씰룩였다. "본인은 그 말에 대답할 의무가 없소. 당신이 신경 쓸 것은 그 문제가 아닐 텐데? 과연 이런 식으로 천성보를 건드려 놓고 향후로 무사할 것 같소?" "크크... 노부가 바보인 줄 아느냐? 유가 늙은이는 결코 지금의 일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네놈만 없어진다면. 흐흐흐......." 혈로음살의 깡마른 손이 소맷자락 속에서 쑥 빠져 나왔다. 물론 그것은 무지막지한 장력을 동반하고였다. 영호걸도 재빨리 수중의 뇌정도를 들어 이에 응수해갔다. 그런데 두어 초식을 주고 받았을 때였다. "흐흐... 이제 보니 네놈은 천축의 다라십팔식을 익혔구나. 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말을 마치자 혈로음살은 쌍장을 가슴까지 치켜 올렸다. 그 순간, 놀랍게도 그의 쌍장은 붉은 기운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이를 목도한 영호걸은 내심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저것은 대체 무슨 장법인가?' "흐흐... 애송이 놈! 노부의 혈음장(血陰掌)이 어떤지 맛좀 봐라." 혈로음살의 양수는 이제 금시라도 선혈을 뚝뚝 흘려낼 듯 피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 손으로부터 전신을 에일 듯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이 바로 그가 자랑하는 성명절학이었다. '으음, 지독한 사공(邪功)이구나. 더구나 이것은 극음(極陰)에 속하는 무공이다.' 영호걸은 내심 중얼거리는 한편, 대응책을 강구했다. '그렇다. 음공에는 극성인 건원신공이 적격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는 즉시 전신에 건원신공을 끌어 올렸다. 극양(極陽)의 진기가 이내 그의 사지백해로 퍼지기 시작했다. "받아랏!" 혈로음살은 마침내 절정에 달한 혈음장력을 발출시켰다. 쉬익--! 핏빛 장영이 음기를 가득 실은 채 영호걸에게로 덮쳐 들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수중의 뇌정도를 휘둘렀다. 펑--! 혈음장의 무시무시한 장세와 뇌정도가 그들의 중간지점에서 격돌했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똑같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이, 이런!" 혈로음살은 대경했다. 설마하니 자신의 공격이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영호걸의 야유가 그의 비위를 더욱 자극시켰다. "그토록 기염을 토하더니 겨우 이 정도였소?"


"이, 이 처죽일......." 혈로음살이 재차 쌍장을 휘둘러 혈선(血線)을 뿌렸다. 영호걸 또한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건원신공이라는 방어막으로 일신을 보호한 채 다라십팔도를 연속적으로 전개해냈다. 실로 거리낌 없는 유연한 공세였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천군만마(千軍萬馬) 속을 누비는 용맹무쌍한 장수와도 같았다. 혈로음살은 잠시 그 기세에 눌려 부르짖었다. '이 놈의 도법은 겉보기에는 매우 평이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힘은 무서울 정도로 강하구나.' 그러나 혈로음살 음무외로 말하자면 녹림십삼채를 총관장하던 대마두였다. 그에게는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초수가 거듭될수록 패색을 띠어가는 것은 영호걸 쪽이었다. '쯧!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간 무엇보다 진력이 고갈되어 이 자보다 먼저 쓰러지겠군.' 영호걸은 숨이 차 오르는 것을 느끼며 힐끗 주변을 살폈다. 그의 눈에 십여 척에 이르는 적선(敵船)의 선단이 눈에 들어왔다. 이쪽이 몰살을 당한 것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아직도 건재했다. 특히 각 배들의 갑판 위에는 혈로음살의 수하들, 즉 수많은 녹건의 무사들이 기세등등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영호걸은 내심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달리 방법이 없군. 이런 때는 도망이 상책이다.' 실전 경험이 미미한 그로서는 정녕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혈로음살이 그의 의중을 눈치챘는지 비웃음을 흘렸다. "흐흐... 네놈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소용없을 것이다. 노부의 손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이어 혈로음살은 뒤를 향해 크게 외쳤다. "각 채주들은 이 애송이 놈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포위하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일단의 노인들이 곳곳에서 신형을 날려 다가왔다. 그들의 숫자는 정확히 열세 명이었다. 그들에게 둘러 싸이게 된 영호걸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으음, 이들이 바로 녹림의 십삼채주들인 모양인데... 일이 갈수록 어렵게 돌아가는구���.' "덮쳐라!" 거친 일갈과 더불어 열세 줄기의 강맹한 장력이 그의 전신대혈을 노리며 짓쳐 들어왔다. 영호걸은 황망한 중에도 본신의 진력을 모두 끌어올려, 좌장을 날림과 동시에 뇌정도를 그어갔다. 콰콰쾅! 엄청난 격돌음이 일었다. 그의 장과 검이 쏟아지는 장력과 맞부딪쳤던 것이다. "윽!" 영호걸은 신음을 터뜨렸다. 한결같이 일신에 초절한 무예를 지니고 있는 십삼채주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합공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이쯤 되자 그의 단안은 좀더 확실시 되었다. '다라십팔도로는 이들의 포위망을 뚫지 못한다. 그렇다면......!' 휘익! 영호걸의 몸이 비상하듯 허공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짧은 외침이 쏟아져 나왔다. "귀천(鬼 )!" 풍뢰구도 중 제일초를 떨쳐낸 것이었다. 쐐애액--! 가공할 위력을 담은 도기(刀氣)가 십삼채주들을 베어갔다. 관전하고 있던 혈로음살이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아니! 놈의 도세가 갑자기 저토록 변하다니.' 13 장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① 영호걸. 그는 다시 일갈했다. "영백(靈魄)!"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풍뢰구도의 제이초식이었다. 아울러 그의 이 일검은 예상을 불허한 급습이기도 했다. 놀랍게도 전권 밖에 있던 혈로음살을 덮쳐간 것이었다. "헉!" 혈로음살이 대경하여 다급히 뒤로 신형을 뺐다. 찌-- 익! 그의 붉은 장포가 뇌정도에 의해 길게 찢겨 나갔다. 바로 그 찰나, 영호걸은 두 발로 갑판을 힘껏 박찼다. "막아라!" 혈로음살의 당황한 외침이 사위를 울렸다. 영호걸의 도세에 밀려 주춤거리고 있던 채주 세 명이 그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리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키시오!" 뇌정도가 또다시 허공을 갈랐다. "탁비(柝飛)!" 그것은 바로 뇌정심법을 동반한 풍뢰구도의 제삼초였다. 번쩍하고 푸른 섬광이 세 채주들에게 쏘아져 나간 것은 그때였다. 꽈르르릉! "으아악!" 느닷없는 뇌성벽력에 이어 세 마디의 처절무비한 단말마의 비명이 뒤따랐다. 믿을 수 없게도 위용을 과시하던 녹림 십삼채의 세 채주들이 일시에 모두 유명을 달리한 것이었다. 털썩! 쿵! 세 개의 신형이 차례로 갑판 위에 길게 나가 떨어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벼락을 맞은 듯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 있었다. "저, 저럴 수가!" 그 광경에 관전 중이던 나머지 열 명의 채주들은 일제히 아연실색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영호걸의 신형이 그들 사이를 비집고 날쌔게 빠져 나가고 난 후였다. 풍덩!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영호걸의 모습은 침몰하듯 그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혈로음살이 갑판 위에서 길길이 뛰었다. "놈을 쫓아라!" 풍덩! 풍덩! 열 명의 채주들은 그의 명을 따라 속속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하지만 해상(海上)의 노략질이 주업이며 수공(水功)에 능통한 그들도 영호걸의 종적을 찾는데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이 물 위로 낙심한 얼굴을 내밀자 혈로음살 음무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염병할! 후환 덩어리를 놓치고 말다니......." 강소성(江蘇省)에 위치한 조그마한 고을. 이 한적한 곳에 한 명의 백의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대략 이십이, 삼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영기발랄한 미공자였다. 그는 조용한 신색으로 한 객잔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 좌석을 차지하고 앉더니 곧바로 상념에 잠겼다.


'내 비록 위기는 간신히 모면했지만 이번 강상에서의 일전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그는 바로 혈로음살 등의 수중에서 무사히 탈출한 영호걸이었다. '대체 유보주는 그 배에 무엇을 실었을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그의 머리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렇다할 결론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여. 영호걸은 대안을 마련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으음, 그렇게 해서라도 일을 풀어나가 보자.'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 은밀한 장소를 찾았다. 그의 안면을 비롯하여 전신근육이 서서히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천환심법을 운용해 다시 모습을 바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후. 영호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승풍이라는 가공의 인물로부터 생사필 마자휘로 탈바꿈 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두번째로 천성보에 잠입하는 셈인가?' 천성보(天聖堡). 여전히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다. 그런데 웅장한 천성보의 호보하에 얼굴은 물론 전신이 피투성이인 한 명의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기력이 탈진했는지 신형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목교를 내려라!" 노인은 보문을 향해 외쳤다. 그야말로 사력(死力)을 다한 것일까? 그의 음성은 흡사 최후의 절규인 양 처절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자 문루를 지키던 두 명의 장한이 대경실색했다. 아마도 그제서야 이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맙소사! 저 분은 마당주가 아니신가?" 스르렁! 덜컥! 즉시로 거대한 목교가 호보하를 가로질러 놓였다. 동시에 두 장한이 목교를 건너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당주!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입니까?" 그들은 황당한 얼굴로 재빨리 생사필 마자휘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마자휘는 손을 휘저어 그들을 물리쳤다. 아울러 그는 사뭇 탄식이 깃든 음성으로 말했다. "비켜라. 내 부끄러워 하늘을 똑바로 볼 수조차 없거늘, 무슨 면목으로 너희들의 부축까지 받겠느냐? 스스로 들어 가겠다." 그는 이어 무력한 발걸음으로 목교를 내딛었다. "당주......." 두 장한도 사태를 직감한 듯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화물 운송의 책임을 맡고 떠났던 자가 혼자서 이런 모습으로 돌아왔다면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천성보의 의사청(議事廳) 앞. 생사필 마자휘는 죄인을 자처하며 오체투지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보주인 유화성이 의사청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부릅떴다. "마당주! 이게 대체 어인 일이오?" 마자휘는 울부짖듯 대꾸했다. "보주, 속하를 죽여 주십시오." 노색(老色)을 띤 채 비통함이 깃든 그 음성은 누가 들어도 영락없는 마자휘의 그것이었다. 따라서


천성대제 유화성조차도 그가 영호걸의 변신이라는 사실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마당주, 진정하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부터 소상히 말하시오. 설사 문책을 하더라도 정황을 제대로 알아야 할 것 아니오?" 유화성은 적지 아니 충격을 받은 듯 했으나 이 순간에도 그 특유의 인자함만은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 영호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마자휘답게(?) 황송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것이... 녹림십삼채의 총공격으로 인해 속하들은 손 한 번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 채 전멸을......." 그가 이처럼 말끝을 흐리고 있을 때, 의사청 안으로부터 유청청의 아리따운 자태가 나타났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어 핏기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유청청은 전신을 가늘게 떨며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마... 마당주님, 방금 무...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더듬거리는 그녀의 음성은 거의 신음에 가까웠다. "정... 정말 전멸인가요......?" 그녀를 응시하던 영호걸의 눈이 찰나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로서도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긴 탄식과 더불어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속하, 미거하여......." "으음......." 유청청의 신형이 옆으로 휘청 했다. "청아야!" 유화성이 그녀를 부축하며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마당주, 그만 일어 나시오.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이윽고 그들 삼 인은 의사청 안에서 마주 앉게 되었다. 영호걸은 그 당시의 일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상세히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마자휘의 죽음과 자신의 행적만은 예외였다. 그런데 그의 얘기가 진행되는 도중, 유청청은 더 견디지 못하고 결국 혼절해 버렸다. 모로 쓰러지는 그녀를 받아 안으며 천성대제 유화성이 난색을 지었다. "으음, 이 아이까지 노부를 어렵게 만드는구려. 미안하오, 마당주. 어서 하던 말을 계속 하시오." 그 순간, 영호걸은 볼 수 있었다. 태연하려 애쓰는 유화성의 미간에 한 줄기 어두운 기색이 스치는 것을. 이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딸을 염려하는 부친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난감하기로 치자면 영호걸이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았다. 그는 내심 안타깝게 부르짖고 있었다. '아! 지금까지 세상 걱정 모르고 귀하게 자라온 여인이 나로 인해 때아닌 고초를 겪는구나.' 이러다 보니 그의 말은 자연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도 인간인 이상 격정을 억누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얘기를 더 하려 해도 말이 되어 나와 주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그 사이, 유화성이 시비들을 불러 의식을 잃은 유청청을 데려 가도록 명했다. 그 뒤로 이 노영웅의 입에서 새어 나온 음성이란 영호걸로서는 실로 의외였다. "정녕 큰 일이 아닌가? 녹림의 무리들까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기승을 부리다니, 항차 무림의 앞날이 걱정이로다." 유화성이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누구도 따르지 못할 대인(大人)의 풍도였다. 공사(公私)가 이처럼 칼로 자르듯 분명한 위인을 영호걸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영호걸의 고개가 절로 꺾였다. 아울러 그는 신색을 가다듬은 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보주,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놈들은 본보에서 화물을 운송할 때마다 어떻게 그 소식을 미리 알아 내고 습격을 감행해 오는


것입니까? 속하는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영호걸의 음성에는 어느덧 비분이 깃들어 있었다. 이는 그의 진심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어떤 생각으로 인연을 맺었건 졸지에 동료들을 잃게 된 그는 실제로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화성의 대답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으음, 실상 노부도 전부터 그 점에 대해 의혹을 느끼고 있었으나 별다른 기미는 발견할 수가 없었소. 그렇다고 보내의 인물들을 일일이 추궁한다는 것도 무리이고......."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침묵 속에 빠져 들었다. 각기 자신의 생각 속에 잠겨 버린 것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유화성이 말문을 열었다. "마당주, 그만 가서 쉬시오. 나머지는 나중에 다시 얘기합시다." 그런 그의 신색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해 보였다. "보주, 속하는 죄인으로서......." 영호걸의 말은 중도에서 잘리고 말았다. "그 일은 마당주의 불찰이 아니오. 자꾸 그러면 사전에 방비하지 못한 노부가 오히려 더 그대를 볼 낯이 없어지오." "보주......." 유화성은 탄식처럼 덧붙였다. "보아 하니 부상이 심한 것 같은데 당분간은 보내의 일에 신경쓰지 말고 요상을 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말하시오. 노부가 아이들을 시켜 보내 주겠소." 영호걸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애초부터 문책은 당연하리라 예상했건만 마치 개선장군(凱旋將軍)과도 같은 대접을 받게 되니 일면으로는 어리둥절해질 지경이었다. "속하, 보주의 도량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영호걸은 공손히 예를 취한 후, 그 자리에서 물러 나왔다. 하지만 의사청을 나오자마자 그는 안색이 일변했다. '아차! 나는 마자휘의 거처를 모르지 않는가?' 다행히도 때마침 한 명의 장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호걸의 기지가 발휘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장한의 눈에 띄도록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신형을 비틀 했다. "마당주님!" 대한이 깜짝 놀라 그를 부축했다. "으음, 몹시 어지럽구나." "상세가 위중하신가 본데 속하에게 기대십시오, 당주.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겠나? 정말 미안하이." "아닙니다." 중년대한은 그를 끌어안다시피 한 채 어느 한 건물로 데려갔다. 뿐만 아니라 친절하게도 방 안의 침대까지 모셔다 주었다. 천성보의 위계질서가 영호걸을 톡톡히 도운 것이었다. "수고했네." "그럼 속하는 물러 가겠습니다." 장한이 멀리 사라지기를 기다려 영호걸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심중은 무겁기 그지 없었다. "우선은 위기를 모면했지만 앞으로가 문제구나." 그것은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독백이었다. ② 밤. 사위가 짙은 어둠 속에 싸여 있을 즈음이었다. 영호걸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백삼을 벗어 버리고 전신을 흑의로 감쌌다. 얼굴에는 역시 검은 복면을 뒤집어 썼다.


'후후... 이 정도면 야행인(夜行人)으로서는 완전히 구색을 갖춘 셈이로군.' 준비가 끝나자 영호걸은 날렵하게 창문을 빠져 나왔다. 곧이어 그의 신형은 흡사 한 마리 비조(飛鳥)인 양 어둠 속을 갈랐다. 이윽고 그가 내려선 곳은 문제의 가산이었다. '저 가산의 비밀을 풀지 않는 한 나는 천성보 내에서 아무런 단서도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생각이었다. 영호걸은 가산의 주변을 누비며 예리한 시선으로 사방을 훑어 보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아! 저곳이 입구로구나.' 그는 시선이 멈춘 곳을 향해 지체없이 몸을 날렸다. 가산의 입구. 영호걸은 새삼 긴장을 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금 주위를 한 차례 살핀 뒤,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가산의 안쪽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영호걸의 안력은 이미 어둠 속을 어렵지 않게 투시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가산의 내부를 샅샅이 관찰해 보았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영호걸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유소저의 말대로 이곳에 연공실이나 석실이 있다면 따로 그 입구가 있어야 하거늘,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그가 이렇듯 의혹에 잠겨 있을 때였다. 문득 가산의 아래 쪽으로부터 경미한 음향이 들려왔다. '인기척!' 사실 그것은 웬만한 청력으로는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조심스러운 기척이었다. 영호걸은 즉각 안력을 돋구어 소리가 들려온 쪽을 응시했다. 과연 그곳에서는 하나의 인영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영호걸은 급히 근처의 나무 뒤로 몸을 감추었다. 인영은 때마침 그가 숨어 있는 쪽으로 날아 들었다. 그 자 역시 가까이서 보니 흑의에다 검은 복면을 한 위인이었다. '저 자는 또 무엇인가? 이 밤중에 무슨 볼 일이 있어 여기까지 숨어든 것일까?' 영호걸은 상대의 느닷���는 출현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그는 호흡을 중단한 채 상대방이 하는 양을 열심히 지켜 보았다. 흑의인영은 하나의 거대한 바위 앞으로 다가가더니 거침없이 손을 뻗어 바위의 어느 한 부분을 만졌다. 우르르릉--! 굉음이 울리며 바위가 옆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뜻밖에도 그 곳에는 어두컴컴한 동혈(洞穴)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흑의복면인은 재빨리 주위를 살핀 다음 그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져 버렸다. 우르릉! 또 한 차례의 굉음과 더불어 바위는 원위치로 돌아갔다. 그 직후, 영호걸은 나무 뒤에서 나왔다. '방금 보았던 자는 이 가산에 대해 환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대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아무리 비밀스러운 곳일지언정 용무가 있으면 당당히 움직일 수도 있을 텐데 어째서......?' 그는 바위 앞으로 다가가 흑의복면인이 손을 대었던 부분을 더듬어 보았다. 그의 손에 곧 돌기같은 것이 잡혔다. 평평해 보이는 바위의 한 귀퉁이에 의외로 돌출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었군.' 영호걸은 그 부위를 힘껏 눌렀다. 우르르릉!


바위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미끄러지듯 이동하더니 그의 앞에 동혈의 시커먼 입구를 드러내 보였다. '되었다!' 영호걸은 내심 환성을 발하며 동혈의 내부로 신형을 날렸다. 그 뒤를 이어 입구는 다시 봉쇄되었다. 동혈 안에는 예상 외로 희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한쪽 벽에 자그마한 등잔불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영호걸은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것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그는 긴장한 가운데서도 침착하게 그 계단을 하나씩 밟아갔다. 휘이익--! 한 가닥 음산한 바람이 그를 향해 불어왔다. 그것은 퀴퀴한 냄새까지 동반하고 있어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덕분에 그는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전진을 계속했다. 이윽고 계단이 끝나는가 싶자 이후로는 좁은 통로였다. 그 길을 따라 잠시 걸어가니 비로소 하나의 석실이 나타났다. 영호걸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전신에 진력을 돋구었다. 그런 연후에야 그는 석실로 들어섰다. "헉!" 그의 입에서 부지중 외침이 일었다. 석실 안. 그곳에는 놀랍게도 십여 개의 관이 놓여진 채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뚜껑이 활짝 열려 있는 상태였다. 영호걸은 잠시 멈추어 서서 가슴을 쓸어야 했다. 아울러 그는 스스로를 향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어리석게도 이 따위 것에 놀라다니! 저 속에 무엇이 들으면 어떠랴? 실상 무서운 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들이다.' 그는 곧 신색을 정비한 후, 관 곁으로 다가갔다. 과연 관 속에는 모두 한 구씩 시체가 들어 있었다. 죽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몰라도 온전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다만 기이한 점이 있다면 전부 푸르스름한 색깔을 띠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역시 기분은 좋지 않군.' 영호걸은 시체들에게서 느껴지는 스산한 기운에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무섭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차분한 눈길로 시체들을 일일이 살펴 보았다. '별다른 느낌은 없는데, 어디.......' 영호걸은 개중 한 구의 시신을 향해 손을 뻗어 보았다. 그러나 채 손이 닿기도 전에 그는 흠칫 놀랐다. 그 시신은 마치 만년 빙굴 속에서 건져온 듯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그의 입에서 부르짖음이 절로 일었다. "그렇구나! 이것들은 강시( 屍)다." 강시라면 죽은 시신을 약물 등의 수법으로 처리해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즉 기괴한 사공(邪功)의 부산물로서 의지를 잃은 채 조종자의 명령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행동하게 된다. 이 사이한 대법(大法)은 지금으로부터 약 오백여 년 전에 배교(背敎)에서 파생되었으나 그 후로 그들이 멸망하면서 함께 실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사공이 놀랍게도 오백 년이나 흐른 이 시점에 재 출현한 것이다. 그것도 정파의 태두격인 천성보의 보내에서. '으음, 정녕 믿기 어려운 일이다.' 영호걸은 심중에 차오르는 회의를 떨치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의 눈 앞에는 광명정대한 인품을 가진 천성대제 유화성의 얼굴이 연신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어쨌든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물며 시신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현재로선 그가 궁금해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먼저 들어온 흑의복면인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영호걸은 일단 석실을 나왔다. '아쉽지만 시간이 너무 흘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기로 하고 다음에 다시 기회를 엿보아야겠다.' 그는 어느새 왔던 길을 되밟고 있었다. 생사필 마자휘의 방. 영호걸은 피식 웃었다. '이젠 꼼짝없이 이곳이 내 거처가 되었군.' 그러나 그는 주위 경물이 낯설다는 사실을 깨닫자 마음을 고쳐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방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아무래도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선 방 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서가에 꽂혀 있는 수많은 무공기서(武功奇書)들이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판관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영호걸은 그것들을 대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아마도 이것들이 마자휘의 명성을 뒷받침해 주었겠지. 특히 저 많은 판관필은 생사필이라는 별호에 잘 어울리는군.' 그는 손을 뻗어 하나의 판관필을 들어 보았다. 그것은 묵직하면서도 몸체에 흐르는 빛이 매우 비범하게 느껴졌다. '명공(名工)의 솜씨로군.' 불과 얼마 전에 사부 천유자로부터 천하제일의 필법인 천절신필법을 전수받은 영호걸이었다. 따라서 판관필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영호걸은 신형을 곧추세우더니 판관필을 들어 필법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천절신필법의 제칠초식이었다. 휙! 휙--! 방 안은 금세 어지러운 필봉의 그림자 속에 묻혀 버렸다. 그의 필법은 전에 비해 한층 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초식의 시전을 마치자 영호걸은 다시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실내를 메우던 필영(筆影)도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스르르 희열의 빛이 번지고 있었다. '아! 이제는 거의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가 있게 되었다.' 크게 만족한 그는 판관필을 원위치에 꽂은 뒤, 무공기서들을 뒤적여 보았다. 본능적인 호기심이랄까? 생전의 마자휘가 그러했듯 무인(武人)의 관심사란 역시 천편일률적인 모양이었다. 영호걸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개중 한 권의 고서를 끄집어 냈다. 그런데 그 제목을 보는 순간,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은......?" <생사혈운필법도해(生死血雲筆法圖解)> 펼쳐 보니 그 책에는 판관필의 역사 내지는 장단점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또한 무림에서 판관필로 성명(成名)하였던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까지도 간단히 요약되어 적혀 있었다. 영호걸은 흥미를 느껴 계속 읽어내려 갔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이 지면(紙面)의 한 구절에서 못박힌듯 정지되었다. <천공학(天空鶴)의 무형천공필(無形天空筆)> 그것은 바로 천무문 육대 장문인의 이름과 그의 독문무공이었다. 영호걸로서는 신경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천공학은 무림사상 필법으로 가장 유명을 떨쳤던 인물이다. 그의 무형천공필은 당대에 가히 무적(無敵)이었다. 즉 무형의 기운으로써 상대를 격살시키는 가공할 수법이다.> "과연......." 영호걸은 입가에 만족한 웃음을 드리웠다. 왜 안 그렇겠는가? 천공학은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사조(師租)이다. 그러므로 그의 위명인즉 막바로 자부심과 직결되었던 것이다.


'본문의 역대 장문인들께서 이처럼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특출나셨다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영호걸은 내심 경외감을 가지며 계속 그 뒷부분을 읽어갔다. 하지만 천공학에 필적할 만한 인물은 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입술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후후... 이 책이 단지 역사를 기록한데 불과한 것이 유감이다. 당대까지 적을 수 있었다면 분명 또 한 인물이 올라 있을 것을.......' 그가 떠올린 인물은 물론 천유자 모용황이었다. 자신이 알기로 모용황의 필법은 이미 무형천공필을 능가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영호걸은 그 한 권의 기서를 통해 많은 도움을 얻을 수가 있었다.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것은 결국 정신일진대, 거기에 긍지가 추가된다면 그 이상 바람직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책은 마지막 부분에 이르고 있었다. <생사혈운필법(生死血雲筆法)> 그것은 바로 마자휘의 독문필법이었다. 영호걸의 눈이 또 다른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실 그가 일신에 지닌 절학들로 이르자면 마자휘의 무공 정도는 몇 단계 하수(下手)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분을 감추어야 하는 때에는 절세의 무학보다 잡학(雜學)이 더 유용하게 마련이다. 더욱이 영호걸은 현재 승풍도 아닌 생사필 마자휘로서 활동하고 있지 않은가? 다행히 생사혈운필법은 나름대로 예리하면서도 강한 위력을 갖춘 수법이었다. 물론 천절신필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공수(攻守) 양면에 걸쳐 그 쓰임새가 다양할 것 같았다. '마자휘 선배에게 정말 감사해야겠군. 신분을 빌린 것도 미안한데 독문무공까지 도용하게 되다니.......' 비록 잠깐이었으나 영호걸은 죽은 자의 존재를 떠올리며 명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는 마치 산 자를 대하듯 낮게 덧붙였다. "내 약속드리겠소. 절대로 당신의 무공이 헛된 곳에 쓰이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영호걸은 책을 덮은 후, 다시 다른 책들을 뽑아 보았다. 그런 와중에서 그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으음?" 그는 급히 책을 몇 권 더 뽑아냈다. ③ 뜻밖에도 책이 뽑혀진 뒤에는 하나의 공간이 있었다. 영호걸은 재빨리 그곳에 손을 들이밀었다. 끼익! 마찰음과 함께 서가 뒷편 벽의 조그마한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몇 장의 쪽지가 담긴 목함이 들어 있었다. 그는 우선 개중에서 한 장을 꺼내 펼쳐 보았다. <마형, 요즘 들어 나선학의 거동이 수상하오. 아무래도 마형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으니 경계하도록 하시오. - 화곤의.> 영호걸의 눈썹이 불쑥 치켜 올라갔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같은 조직에 속해 있는 자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다니.......' 그는 미간이 가늘게 좁히며 다른 쪽지 한 장을 더 꺼내 보았다. <마형, 결국 유화성까지도 우리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 하오. 얼른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가야겠소. 역시 필적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화곤의가 보낸 서신이었다. 이쯤 되자 영호걸도 비로소 짚히는 바가 있었다. '그렇다면 마자휘와 화곤의가 첩자였단 말인가?' 그는 다음 쪽지도 확인해 보았다.


<마형, 일은 글러 버렸소. 유화성이 발톱을 세우기 시작했구려. 아쉽지만 거사를 중단하고 탈출해야겠소이다.> 이제는 더 볼 필요도 없었다. 영호걸은 놀랍기도 했지만 일편으로 실망을 금치 못했다. '무림이란 이런 세계였던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비정한 논리도 모자라 모계(謀計)가 판을 치는구나.' 방금 전까지도 마자휘의 당당한 기개를 떠올리며 그 죽음을 애도하던 그였으나 지금은 나오느니 쓴 웃음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영호걸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그렇다면 혹시.......' 그의 머릿속을 퍼뜩 스치고 지난 것은 다름 아닌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였다. 즉 마자휘와 화곤의는 분명 임무를 띠고 나갔다가 죽었다. 그런데 그것은 천성보주인 유화성의 지시였으니, 이 문제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전혀 뜻밖의 답이 나오는 것이었다. 영호걸은 하나의 짜여진 각본을 추리해낼 수 있었다. '유보주는 이들의 정체를 알아 차리자 실로 교묘하게 손을 썼다. 정파의 지주로서 함부로 살인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되니까 화물호송이라는 명목을 빌어 두 사람을.......' 그는 질려 버린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첩자를 색출해 제거하는 것이야 어떤 단체냐를 불문하고 당연한 일이지만 꼭 이래야 했을까? 첩자 두 명을 없애기 위해 많은 수하들까지도 떼죽음에 이르게 하다니.......' 천성대제 유화성. 그의 인자함이나 대인다운 풍모 뒤에 숨겨진 잔인성이 영호걸로 하여금 전신에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영호걸은 이제야 자신을 둘러 싸고 있던 여러 가지 의혹들이 서서히 걷혀가는 것을 느꼈다. '아! 그 노인이 한 말이 바로 이런 뜻이었구나. 천성대제 유화성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정인(正人)을 가장한 위선자다.' 아울러 그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내고는 다시금 전율을 금치 못했다. '우우! 그럼 내가 열심히 싸웠던 혈로음살 등의 녹림도들은 유보주와 끈이 닿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영호걸은 그야말로 정신이 아찔했다. '그는 내가 마자휘가 아니라는 사실도 벌써 알아 차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조금도 내색치 않고 나를 맞이하지 않았는가?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그는 위기감으로 인해 부지중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자칫 하다가는 천성보의 내막을 캐기도 전에 자신이 당하고 말리라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영호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판사판이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디 끝까지 가 보자.' 그는 마자휘의 판관필 하나를 챙겨 들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는 심중과는 달리 태연한 기색으로 건물의 문을 나섰다. 이때,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다. "마당주, 이 야심한 시각에 어디를 가시오?" 총관 나선학이었다. 영호걸은 내심 움찔했으나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포권지례를 취했다. "나총관, 그 동안 안녕하셨소이까?" 나선학은 기이할 정도로 맑은 눈을 들어 영호걸을 정시했다. "마당주께선 어떠시오? 상처는 괜찮소?" "다들 염려해 주시는 덕분에 별 탈은 없소이다. 이대로 조금만 쉬면 완치될 것 같소." 나선학의 눈이 번쩍 하고 기이한 빛을 발한 것은 그때였다. "마당주는 오늘따라 이상하구려?"


영호걸은 재빨리 반문했다. "무엇이 말이오?" "평소에는 도통 말이 없더니 지금은 대체 어찌 된 영문이오?" '실수다!' 영호걸은 흠칫했으나 역시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기다 보면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오. 새로 태어났으니 이전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소?" "흐음......." 나선학은 침음���을 흘리며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 사이였다. 나선학은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좌장을 휘둘러 영호걸을 공격해왔다. 휘익--! 파공성이 일자 영호걸은 짐짓 아연실색 했다. "나총관! 이게 무슨 짓이오?" 동시에 그는 황망히 신형을 날려 나선학의 장력권에서 벗어났다. "후후... 내가 왜 이러는지는 마당주, 당신이 더 잘 알 것이오." "대체 무슨 헛소리를!" 영호걸은 만면에 노기를 띤 채 계속 날아드는 장력을 피해갔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보통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자는 내 신분을 의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유화성과 나에 대한 얘기가 오갔던 것일까? 아무튼 도리가 없다. 지금으로서는 모험이라도 감행해 볼 수밖에.'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재빨리 수중의 판관필을 들어 나선학을 찍어갔다. 이는 누가 보아도 마자휘의 무기와 독문수법이었다. "금필탈혼(金筆奪魂)!" 나선학이 낮게 부르짖더니 동작을 뚝 멈추었다. 금필탈혼과 더불어 생사혈운필법을 접하게 되자 그도 더 이상은 추궁을 가할 명분이 없어진 것이었다. 그 틈을 노려 영호걸이 싸늘하게 내뱉았다. "나총관, 이제 밤바람 좀 쏘여도 되겠소이까?" 나선학의 눈 가장자리에서 미미한 떨림이 일었다. "마당주, 미안하오. 본인이 요즘 신경이 날카로와서......." 영호걸은 씨익 웃었다. "노부는 그런 일쯤 개의치 않소이다."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나선학은 이를 알면서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영호걸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홱 돌렸다. 심중에 이런 말을 감춘 채. '아직 이 자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구나. 그러고 보면 유화성은 실로 철저한 위인이다. 무슨 속셈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총관인 나선학에게까지 비밀을 가지고 있구나.' 반면에 나선학은 멀어져 가는 영호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곤혹에 잠겨 있었다. '내가 요즘에는 번번이 실수를 하는구나. 분명 저 자의 기도가 마자휘의 그것과는 다르게 느껴졌었는데.......'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후후... 이제 나도 늙어가는 것일까' 결국 나선학은 신안(神眼)이라는 별호를 가지고도 두 번씩이나 밀려 나고 있었다. 그것도 동일인물에 의해....... ④


밤. 어둠이 사위에 짙게 깔려 있었다. 휘익! 한 줄기 신형이 유령처럼 움직였다. 그 자는 흑의에 검은 복면을 두르고 있었는데, 어둠을 조롱하듯 동작이 민첩하기 그지 없었다. 이렇듯 예의 가산 쪽으로 쏘아져가고 있는 인물, 그는 바로 영호걸이었다. 그는 익숙한 걸음걸이로 전에 보았던 바위 앞에 다가서더니 돌출된 부분을 찾아 힘을 가했다. 우르르릉--! 바위가 이동하며 전처럼 하나의 동혈이 나타났다. 이어 그가 안으로 사라지자 바위는 도로 원위치로 되돌아갔다. 영호걸은 조심스레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역시 석실이 모습을 드러 냈고, 열 개의 관이 놓여 있는 것도 이전과 같았다. 주위를 살펴 보아도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우르르릉--! 굉음이 울리더니 한쪽 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영호걸은 놀란 나머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관 사이로 들어가 몸을 눕혔다. 그러는 사이, 석실벽은 완전히 개방되었다. 영호걸은 호흡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열려진 석벽으로부터 두 명의 노인이 나타나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아! 저들은.......' 그의 가슴이 부지중 크나큰 진동을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인물 중 한 명이 천성보주 유화성이었던 것이다. 나머지 한 명은 신분을 알 수 없는 흑의노인이었다. 유화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오? 실수라고는 모르던 혈로음살이 그토록 어이 없는 후환을 만들어 놓다니." 그의 음성은 은은한 노기를 띠고 있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흑의노인이 그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자는 마자휘가 아니었다면서요?" "그러니 내가 더 답답하다는 것 아니오?"" "그럼 신안 나총관도 이 일을 알고 있소이까?" 유화성은 쓴 입맛을 다셨다. "나는 일단 함구했었지만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오. 나선학이 어디 보통 인물이오? 당신도 앞으로 더욱 그를 주의하시오." "명심하겠소이다." 유화성은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아마도 무엇인가 깊은 상념에 빠진 듯 했다. 잠시 후. 그는 신색을 회복하며 흑의노인을 응시했다. "최근 들어 만사교주(萬邪敎主)의 동태는 어떻소?" "아직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소이다." "흐음?" 유화성은 뜻밖이라는 듯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그 자가 이대로 있을 리 만무인데......?" 흑의노인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그 자 또한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외다. 이번의 경우만 해도 놈은 오당주 중 두 명이나 은밀히 포섭해 첩자로 이용하지 않았소이까?" 그의 음성은 어느덧 흥분의 빛을 띠고 있었다. "보주께서 사전에 예측을 하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향후에 이르도록 꽤 골치를 썩을 뻔 했소이다." 유화성이 냉소했다. "내가 눈을 감지 않는 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이제 만사교주 따위는 본 보주의 안중에도 없으니까. 흡혈강시(吸血 屍)들이 완성되었거늘, 무엇이 두렵겠소?" 흑의노인이 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참! 그때 석문(石門)에서 잡아 온 의원은 어떻게 하셨소이까?" "음, 만사교주가 쓸 일이 있다고 해서 그에게 보내 주었소." "괜찮을까요?" "별로 썩 마음에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어쩌겠소? 그런 일 때문에 안면을 붉힐 수는 없지 않소?"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낸 유화성의 이 말에 더 없이 충격을 받은 자가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영호걸이었다. '뭣이? 석문에서 잡아 온 의원이라고?' 그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동요에 휘말려 자신도 모르게 감추었던 호흡을 겉으로 토하고 말았다. 정파 최고의 고수인 유화성의 귀가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누구냐?" 유화성은 대뜸 영호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일갈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흑의노인은 번뜩 신형을 날렸다. "웬 놈이 쥐새끼같이 숨어 든 것이냐?" 사태가 이쯤 되자 영호걸도 더 이상 숨어 있기를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다가드는 흑의노인과 정면으로 마주 섰다. 흑의노인이 기세등등하여 다시 물었다. "용기가 가상하구나. 네놈은 대체 몇 개의 목을 가지고 있길래 감히 이곳까지 침입했느냐?" 영호걸은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유화성을 노려 보았다. "유보주, 정녕 실망했소. 당신이 이렇듯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이리일 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유화성의 안색이 일변했다. "흐음, 그럼 여기서의 일을 모두 보았다는 뜻이겠군?"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되고 말았소. 지금 와선 후회 막급이외다.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을." 돌려 말하고는 있었으나 이는 누가 들어도 신랄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의외인 것은 유화성의 반응이었다. 그는 당황하기는 했으되 노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 담담한 어투에는 오히려 영호걸이 놀랄 지경이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혐오감을 억누르며 차갑게 잘라 말했다. "알 것 없소." "쯧! 하긴......." 유화성은 혀를 차더니 흑의노인을 향해 짧게 명했다. "없애 버리시오." "알겠소이다." 흑의노인이 입가에 괴소를 매달며 우장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쉬이익! 강맹무비한 장력이 발출되어 영호걸을 덮쳐 들었다. 하지만 그도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즉시 우장을 뻗어 마주쳐 갔다. 두 가닥의 경력이 허공에서 무섭게 격돌했다. 펑--! 굉음과 더불어 석실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듯 진동했다. 장세인즉 막상막하였다. 두 사람은 똑같이 두 걸음씩 뒤로 밀려났다. 흑의노인은 진탕된 기혈을 추스리며 경악성을 발했다. "대체 누구냐? 네놈은......?" 영호걸의 대답은 한 가지였다. "당신 역시 알 필요없소." 동시에 그는 선공(先攻)을 시도했다. 금불장법을 전개해 흑의노인의 어깨를 매섭게 후려쳐간 것이었다. 그 광경에 유화성의 흰 눈썹이 한 차례 꿈틀했다. "금불장법! 그대는 마영불의 제자인가?" 영호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번에는 옥면살심 사문기의 천검십이식을 장법으로 변동시켜 구사해냈다. 날카로운 장력이 수많은 장영을 퍼뜨리며 흑의노인을 몰아 부쳤다. 그는 뒤로 신형을 미끄러뜨려 간신히 장력권을 벗어났다. 그의 입에서는 절로 놀란 외침이 일었다. "이, 이것은 뭐라고 하는 장법이냐?" 영호걸의 낭랑한 웃음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하하하... 노인장께서는 이 기회에 견식을 넓혀 보시오!" 이어 그는 소면수라의 독문절기인 비연추혼장을 시전했다. 유화성이 대경한 듯 침음성을 터뜨렸다. "으음, 저것은 소면수라의 비연추혼장......." 그를 향해 다물려져 있던 영호걸의 입이 비로소 열렸다. "과연 천성보의 보주다우신 안목이오. 대체 그런 능력을 어디다 쓰시려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오만." 유화성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시 묻겠다. 그대는 누구인가?" 영호걸은 여전히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알 것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게 궁금하시거든 직접 나를 꺾어 확인해 보면 되지 않겠소이까?" 유화성은 문득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매달았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단, 내가 필요하다고 여기게 되면 그렇게 하겠다." 그는 흑의노인에게 재차 명령을 내렸다. "성전주(成殿主), 만만하게 보아서는 아니 되겠소. 가능한 수단을 다 동원해 저 자를 척결해 버리시오." "흐흐... 저도 그럴 참이었소이다." 흑의노인이 음침하게 웃으며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스르릉--! 결코 예사롭지 않은 검명(劍鳴)이 석실 안을 울렸다. 마침내 그가 병기를 뽑아든 것이었다. 그것을 보자 영호걸은 흠칫 했다. '자신할만 하군. 일견하기에도 저것은 보통 검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흑의노인의 말은 실로 놀라웠다. "흐흐...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네 놈이 이 흑살귀검(黑殺鬼劍)을 무르게 보았다면 지금부터 진짜 맛을 보여 주마." '맙소사!'


영호걸은 내심 전율을 금치 못했다. 흑살귀검이라면 바로 강호의 전대 고수인 우내사괴(宇內四怪) 중 한 명이다. 그렇다면 혈로음살을 비롯해 그 자까지 포섭하고 있는 유화성의 능력은 대체 어디까지가 그 한계란 말인가? '정녕 놀라운 일이다. 천성보를 관장하고 있으면서도 그 이면에 우내사괴 중 두 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다니.......' 그가 이처럼 신음하듯 부르짖고 있을 때였다. "죽어랏!" 흑살귀검의 흑검(黑劍)이 무시무시한 검세를 뿌려냈다. 쐐애액--! '도저히 육장으로는 맞설 수 없다!' 영호걸은 판단이 서자 급히 신형을 뒤로 빼내는 한편, 허리춤에서 재빨리 뇌정도를 빼들었다. 스릉--! 그 순간, 유화성의 고함성이 그의 고막을 때렸다. "그 도(刀)! 승풍, 너였구나." 영호걸은 고소를 지었다. '음,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군.' 그는 일순 착잡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것을 떨쳐내 버리기라도 하듯 사뭇 당당한 음성으로 응수했다. "당신 역시 나를 알아 보지 못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외다." 이와 동시에 그의 수중에 들린 뇌정도가 눈부시게 허공을 갈랐다. 천검십이식을 이번에는 도법으로 변환해 전개해낸 것이었다. 쐐애애액--! 뼈까지 저며낼듯 예리한 도기가 흑살귀검을 베어갔다. "웃!" 흑살귀검도 짧은 기합성과 함께 흑검을 들어 마주쳐왔다. 창--! 차차창! 도와 검이 격돌을 거듭하며 허공 중에 무수히 불꽃을 튕겨냈다. 관전하던 유화성의 눈이 문득 이채를 띠었다. "아직 어린 아이가 저 정도의 경지에 달해 있었단 말인가? 보아 하니 저 도식은 천검십이식과 비슷한데, 천검신군(天劍神君) 장평산과는 어떤 관계일까?" 그러나 그 뿐, 그의 표정은 다시 담담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것은 유현함을 표방하고 있었으되 지금 상황으로 볼 때 가히 태산이 무너진다 해도 꿈쩍하지 않을 기세로 보였다. 그 사이에도 흑살귀검과 영호걸의 치열한 싸움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한 치도 양보가 없는 상호 공방전이었다. 하지만 이 싸움도 역시 장력 대결시와 마찬가지로 도저히 우열을 논할 수가 없었다. 실상 본신의 내공 수위로만 따진다면 흑살귀검이 한 수 위였으나 승부수란 그 외의 것을 요구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건원신공으로 탄탄한 기초를 다지고 있는 데다가 변화무쌍한 공격을 퍼붓고 있는 영호걸은 그의 깊은 내력과 맞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 상태로 초수가 흐르자 흑살귀검은 이를 갈았다. "건방진 애송이 놈! 이제 보니 네 놈이 제법 믿는 바가 있어 까불었구나. 그럼 어디 노부의 흑살무음검법(黑殺無音劍法)도 한 번 받아 보아라." 그의 검세에 변화가 일었다. 흑기(黑氣)를 동반한 섬뜩한 검세가 소리도 없이 영호걸의 전신대혈을 파고 들었다. "웃!" 영호걸은 이를 느끼자마자 즉각 신형을 솟구쳤다. 동시에 그의 도법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엄청난


변화를 구가했다. "귀천!" 풍뢰구도 중 제일초가 시전되고 있었다. 14 장 빙궁(氷宮)을 찾다 ① 가장 놀란 자는 역시 흑살귀검이었다. 그는 급변해 버린 영호걸의 도세에 내심 가슴 한 귀퉁이가 써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과연 범상한 놈이 아니었구나!' 차차차창! 검과 도가 한 차례 무섭게 어우러지며 고막을 찢을 듯한 금속성을 토해냈다. 그 바람에 흑살귀검은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 찰나, 영호걸의 외침이 거듭 허공을 울렸다. "영백! 탁비--!" 이 초식의 풍뢰도법이 한꺼번에 폭출되었다. 쐐애애액--! 혼백을 앗아갈 듯한 파공성과 함께 흡사 그물을 연상시키는 검막이 흑살귀검을 몰아부쳤다. 덕분에 그는 정신없이 신형을 날리며 수비에만 급급할 뿐, 공격이란 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광경을 접한 유화성은 의혹과 더불어 한 가닥 전율을 느꼈다. '실로 보기 드문 절세의 도법이구나. 대체 저 녀석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저렇듯 현란한 도법을 구사해낼 수 있단 말인가?' 충격을 억제하느라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힐 즈음, 흑살귀검과 영호걸의 동작이 약속이라도 한 듯 뚝 멈추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일 장여의 거리를 둔 채 대치하고 있었다. "흐흐흐......." 흑살귀검이 문득 괴소를 흘리며 자세를 묘하게 변화시켰다. 수중의 흑���을 들어 눈높이까지 끌어 올린 것이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전신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무형의 살기가 뿜어져 나와 영호걸을 압박해 갔다. '으음! 이번에는 정말로 심상치가 않구나.' 영호걸은 내심 긴장을 다지며 뇌정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흐흐... 내 이제 네 놈을 끝장내 주겠다." 흑살귀검의 흑검에서 한 가닥 검은 기류가 뻗어 나왔다. 쉬익--! 그것은 마치 날개가 달린 한 마리의 시커먼 뱀이 쏘아져 오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영호걸은 그것을 보자 절로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그 흑색 기류는 쏟아져 나오기가 무섭게 진기를 더해 가더니 삽시에 그의 전신을 둘러싸고 말았다. 그는 숨통이 조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내심 부르짖었다. '우우! 이런 사공(邪功)을.......' 하지만 여하한 난제에 부딪쳐도 당혹이란 잠깐이면 족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영호걸은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덧 비장한 각오가 심중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좋다! 나도 이대로 당하지만은 않으리라.' 타고 난 그의 집념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종의 승부근성으로 화했다고 보면 맞았다. 그는 지체없이 뇌정심법을 운기했다. 곧 그의 단전에서 뜨거운 기류가 형성되었다. 아울러 그 열기는 그의 의지에 따라 금세 합곡혈(合谷穴)로 몰려 들었다. 그 순간, 흑살귀검의 대갈일성이 장내를 울렸다.


휘류류륭--! 검은 기류는 놀랍게도 허공에서 한 덩어리로 뭉치더니 영호걸을 압살시킬 듯 덮쳐 들었다. 그것은 실로 가공할 위력이었다. 마침내 영호걸의 입에서도 짤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소혼(銷魂)!" 이는 풍뢰구도의 제육초로서 그가 근래에 들어 깨우친 도식이었다. 그 뒤를 이어 뇌정도의 검무(劍舞)가 대기를 휘저었다. 쉭--! 쉬쉬쉭! 수십 갈래의 푸른 검광이 일제히 흑살기류와 마주쳐갔다. 쾅! 꽈르르릉--!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리자 관전하던 유화성의 안색이 대변했다. "오오! 어찌 저런 도법이 현존한단 말인가?" 그것은 또한 흑살귀검과 영호걸의 신형이 허공에서 찰나적으로 부딪쳤다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크윽!" "헉!" 두 마디의 답답한 신음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곧 이어 석실을 가득 메웠던 검은 기류가 점차 걷히기 시작했다. 먼저 흑살귀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처참함이 극에 달한 몰골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앞가슴과 복부가 새카맣게 타 있었으며, 입에서는 연신 시뻘건 선혈이 꾸역꾸역 토해져 나오고 있었다. 반면에 영호걸도 그리 온전치는 못했다. 어깨와 복부에 각기 하나씩 검흔이 길게 그어져 있었고, 그곳에서는 진홍빛 선혈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네... 네 놈이......." 흑살귀검은 비틀거리느라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다. 그야말로 손가락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한편. 유화성은 안면을 잔뜩 굳힌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설마하니 우내사괴 중 한 명인 흑살귀검이 일개 청년에 의해 이토록 낭패를 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영호걸이 신형을 위로 뽑아 올렸다. "흑살귀검 나으리, 오늘은 이만 하고 다음에 또 봅시다." "어림없다! 승풍." 대답한 자는 흑살귀검이 아니라 유화성이었다. 담담하던 그의 두 눈에서 비로소 예기(銳氣)가 발산되고 있었다. "괘씸한! 네가 무사히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러나 영호걸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었다. 흑살귀검과 평수(坪數)를 이루고 있으니 유화성과의 일전은 목숨을 포기하지 않는 한 부득불 사양해야 할 입장인 것이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계단을 날아 오르는 한편, 심중으로 외치듯 부르짖었다. '유보주! 아직은 때가 아니나 당신은 반드시 내 손에 징계를 당하게 될 것이오. 그것이 언제이든.......' 그는 유화성이 뒤를 쫓는지 어쩌는지도 알지 못했다. "헉!" 살아 남아야 한다는 일념만이 그를 숨가쁘게 몰아부치고 있었다. 어느 새 그의 신형은 석동을 벗어나 가산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둥! 둥! 둥....... 요란한 북소리가 천성보의 어둠을 모조리 걷어내 버렸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도망자를 추적하라는 신호였다. 우르르르--! 과연 어둠을 뚫고 일단의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더니 이내 수십 명의 무사들이 달려와 영호걸의 앞을 가로 막았다. 영호걸은 조금도 기세를 늦추지 않고 그들을 향해 일갈했다. "물러서라! 막는 자는 베겠다." 동시에 그는 면전으로 날아 내리는 무사 중 한 명의 목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그 광경에 도처에서 흡사 함성과도 같은 외침이 속속 일어났다. "잡아라! 감히 괴한 따위가 천성보에 침입하다니." "우우우......! 대체 어떤 놈이냐? 보 내에서 겁도 없이 살인을 자행하는 자가!" 그러나 영호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추상같은 어조로 다시 외쳤다. "비키라고 하지 않았느냐? 나는 더 이상 내 애도(愛刀)에 무가치한 피를 바르고 싶지 않다." "저, 저런! 되먹지 않은......." 천성보의 무사들이 영호걸의 심중을 알 리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동료의 죽음에 분노한 나머지 이성을 잃어버린 듯 각자 병기를 휘두르며 폭풍처럼 그를 덮쳐 들었다. "저 자를 죽여라--!" 영호걸은 피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르자 급히 건원신공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음을 터뜨려야 했다. "우욱!" 흑살귀검에게 당한 상처 부위에 극렬한 고통이 엄습해 왔던 것이다. 급기야 그는 이를 악물었다. '안되겠다. 최소한의 살상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만 이렇게 되면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그의 좌장이 번뜩 하고 움직였다. "분명 물러나라고 경고했다!" 휘익--! 태극환허장법 중 제일초가 그의 손에 의해 번개같이 전개되었다. 그것은 진기의 소모가 적으므로 바로 이런 때에 가장 유효적절하다고 할 수 있는 한 수였다. 펑! 퍼펑! "으아악--!" 두 명의 무사가 그의 장력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나가 떨어졌다. 그로 인해 무사들이 만들어 냈던 포위망에는 금세 틈이 생겼다. 영호걸은 그 틈을 향해 나는 듯이 쏘아져 나갔다. "놓치지 마라!" 무사들이 황망한 외침을 발하며 다시 그를 앞뒤로 막아섰다. 그의 오른손에 들려진 뇌정도가 또다시 허공에서 난무했다. "귀천!" 쐐애액--! "으아악--!" 한꺼번에 다섯 명의 무사가 가슴을 움켜 쥐며 무력하게 지면 위로 나뒹굴었다. 그러나 이미 신명이 오른 듯한 영호걸의 도는 더 이상 멈추어지지 않았다. 쐐애액--! 챙! 펑--! "크아-- 악--!" 이따금씩 그의 도세에 맞닥뜨려 오는 자도 있기는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무공수준이 따라오지 못하는 천성보의 무사들은 하나같이 신체의 일부를 잃거나 목과 분리된 채 바닥으로 거꾸러져야만


했다. 그 바람에 천성보의 넓은 정원은 일대 아수라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영호걸은 내심 통탄을 금치 못했다. '오오! 신이 존재한다면 부디 나를 벌하기를....... 대체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그는 이런 부르짖음을 씹으며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 물론 그것은 앞을 가로막는 무사들을 베면서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소위 혈로(血路)라고나 할까? 영호걸은 스스로를 지옥의 아수라귀로 규정지으며 어쩌면 자신을 향한 것인지도 모를 강한 분노에 사로잡힌 채 혈로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그의 모습은 흡사 한 마리의 성난 사자와도 같았다. 이제 그도 신색이 말이 아니었다. 어느 결인지 전신에 수십 군데의 자상을 입고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만이 섬뜩할 정도로 스산한 광망을 뿜어낼 따름이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영호걸의 눈에 마침내 천성보의 외담이 보였다. 이어 그 앞에 이르게 되자 그는 기합성을 발했다. "차앗!" 아울러 그는 사력을 다해 뇌정도를 휘둘렀다. 쐐애액--! "으아악--!" 그를 가로 막으려던 무사들이 그 일도(一刀)에 추풍낙엽처럼 맥없이 우수수 쓰러져 버렸다. '이때다!' 영호걸의 두 발이 힘껏 지면을 박찼다. 그러나 그의 신형이 막 허공으로 치솟으려는 그 순간이었다. 휘익--! 하나의 신형이 쾌속하게 그의 진로를 차단했다. 바로 천성보주인 일성 유화성이었다. '웃!' 영호걸은 일순 멈칫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확실히 유화성의 기도는 일반 무사들과는 본질적으로 틀렸다. 더구나 늘상 인자하고 유현한 기운이 감돌던 그의 얼굴은 현재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노기가 등등해져 있었다. "승풍! 네가 이렇듯 무수한 인명을 해치다니, 그러고도 살아서 이 천성보를 빠져 나가려 하느냐?" 그는 어느덧 수하들의 죽음을 애통해마지 않는 노대협으로 변신해 있었다. ② 영호걸은 앙천광소 했다. "으하하하하......." 그의 소성(笑聲)은 야색을 뚫고 밤하늘로 멀리 울려 퍼졌다. 이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맹세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천성대제 유화성! 내 그대를 절대로 용서치 않겠소. 당신의 그 허위에 찬 목숨을 이 손으로 거두겠소이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품 속에서 하나의 판관필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이제 마자휘의 것이 아니었다. 유화성의 안면이 그답지 않게 심하게 씰룩거렸다. "아니! 그것은 천절금혼필......." 그 순간, 천절금혼필은 벌써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휙! 휘익--! 천유자로부터 전수받은 절초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아울러 매 순간마다 천절금혼필에서는 눈부신 광망이 폭사되었다. 그것은 풍뢰구도에 비해 조금도 위력이 떨어지지 않는 살초(殺招)였다. 유화성은 다급히 신형을 날려 그 무시무시한 공세를 피해냈다. 동시에 그는 묘한 떨림이 깃든 음성으로 물었다.


(승풍, 너는 천유자와 어떤 사이냐?) 그것은 전음(傳音)으로서 영호걸만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러자 영호걸도 역시 전음으로 응했다. (자신의 정체가 노출되는 것이 그렇게도 두렵소? 내가 만일 마도쪽 인물의 무공을 썼더라면 상황은 또 달라졌겠지, 안 그렇소?) 그가 이런 비아냥을 전음으로 쏟아낸 것은 작금의 상황에 별다른 대책이 되어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설사 내놓고 말한다 한들 유화성이 오랜 세월에 걸쳐 다져온 신뢰 기반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가 없을 뿐더러, 역으로 그 자신이 미친 사람 취급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대신 영호걸은 수중의 판관필을 더욱 무섭게 휘둘러 갔다. 그것은 천절신필법 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인 천혈무(天血舞)였다. 슈우웅--! 일시지간 천지가 온통 금색 광망으로 뒤덮여 버렸다. 동시에 수백 개의 판관필이 유화성의 전신대혈을 덮쳐갔다. 이는 바로 현란한 현상 가운데 엄청난 살기가 내포된 절초였다. "헛!" 유화성은 나직한 신음성과 함께 급급히 신형을 뒤로 빼냈다. 그러나 절세 고수인 그의 빠른 움직임도 영호걸의 공격을 완전히 피해내지는 못했다. 찌익! 유화성의 앞섶이 길게 찢겨지더니 그 사이로 가느다란 선혈이 배어 나왔다. 휘익--! 영호걸의 신형이 탈출(脫出)을 달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허공으로 치솟기가 무섭게 훌쩍 담을 넘어 어둠 속으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천성대제 유화성. 그는 영호걸을 뒤쫓을 생각도 않고 장승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이어 그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 "천유자에게 저런 제자가 있었던가?" 그 음성에는 언뜻 듣기에는 탄식이 배어 있는 듯 했다. 돌아서는 그의 발걸음 역시도 웬지 잔뜩 무거워 보였다. 영호걸. 천성보를 빠져 나온 그는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머리 속이 난마와 같이 엉켜 지금으로서는 천성보와 더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 외에 아무 것도 떠올릴 수가 없는 그였다. 그런 영호걸의 앞에 문득 하나의 숲이 나타났다. 그는 내심 안도하며 망설임 없이 숲 속으로 몸을 던졌다. 예로부터 무림인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쫓기는 자는 숲을 좋아 한다는. 왜냐하면 숲 속에 숨어 버린 자는 더 이상 쫓지 말라는 불문율(不文律) 비슷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숲이 지닌 속성상 이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반대로 쫓던 자가 오히려 역습을 당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과연 숲 속으로 들어 간 영호걸은 재빨리 은밀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이어 한 곳을 정한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아! 이젠 한 시름 돌려도 되겠구나." 그러나 곧 그의 입가에 피어오른 것은 고소였다. 땀과 피에 흠뻑 젖은 채 살고자 기를 쓰는 자신의 몰골이 너무도 한심하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진 것이었다. '내 손에 죽어간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건만, 나는 이처럼 죽음을 피해 안전한 곳에 숨어 있구나.' 영호걸의 자책은 품 속을 뒤져 하나의 옥병을 꺼내 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 속에는 거의 기사회생에 가까운 효험을 지닌 대라회천신단(大羅回天神丹)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옥병을 열자 향긋한 향기가 순식간에 숲 속을 가득 메웠다. 영호걸은 그 중 한 알을 입 속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복잡한 상념을 털어 버리듯 운공조식에 들어갔다. 영호걸은 곧 단전에서 한 가닥 뜨거운 기류가 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기류는 이어 사지백해로 흘러 들어 가더니 약력과 더불어 전신을 일주천하며 빠른 속도로 그를 정상으로 회복시켰다. 잠시 후. 영호걸은 일신으로부터 날아갈 듯한 상쾌감을 맛볼 수 있었다. 이는 외상과 내상이 말끔히 치유됨으로써 얻어진 현상이었다. "과연 아버님의 비술(秘術)은 천하의 누구도 따를 수가 없으리라. 신단 한 알로 이렇게 효험을 보다니......." 대라회천신단은 원래가 희대의 영약이었다. 게다가 무공을 익힌 인물이 복용하게 되면 더욱 더 커다란 도움을 입을 수 있었다. 영호걸은 이 사실을 몸으로 확인하며 무림에 나온 이후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 회의를 가지기도 했다. '차라리 아버님처럼 한적한 곳에 묻혀 의도(醫道)나 연구하며 평생을 지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 또한 가치있는 일일진대 내가 무엇하러 무림에 뛰어 들었을까? 혹 웅지(雄志)를 표방한 지나친 욕심에서는 아니었을지......?' 그러나 그는 곧 무엇을 의식했는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에 그가 떠올린 것은 다름 아닌 사부 천유자 모용황의 얼굴이었고, 모용황은 이렇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 못난 놈! 너는 고작 여기서 멈추려고 무공을 익혔느냐? 명의인 네 부친을 구할 수 있는 수단도, 또 나아가서 천성보주인 유화성의 가면을 벗기는 것도 현재로선 무력(武力) 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취를 위해서는 이제까지보다 더욱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거늘 잡념이라니....... 영호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맞습니다, 사부. 제자 잠시 감상에 휩쓸려 본분을 잊었습니다만 추후로는 다시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비로소 기력이 충만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되어 신형을 일으켰다. 모름지기 그로서는 아무 것도 회피해서는 아니 되었다. 삶의 향방이 결정지어진 이후로는 줄곧 그래왔지 않은가? 영호걸의 곁에는 뇌정도가 있었다. 그는 새삼 자신의 애도를 힘주어 잡아 본 뒤, 숲 속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얼마나 달렸을까? "아뿔싸! 길을 잘못 든 모양이군." 영호걸은 실소를 금치 못하며 신형을 멈추어야 했다. 워낙 경황중에 들어 왔었던지라 나가는 길을 도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는 엉뚱한 곳에 이르러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것인즉 난데없는 황량한 계곡이었다. "난감하군. 사람 바보 되는 것은 잠깐이구나." 영호걸은 입맛을 쩍 다셨다. "어쨌든 이곳을 벗어나야 할텐데......." 그는 잠시 갈등한 끝에 되돌아가기 보다는 차라리 계곡 쪽을 훑어보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그가 막 계곡으로 들어 섰을 때였다. "으으... 으음......." 어디선가 금시라도 끊어질 듯 미약한 소리가 들려 왔다. '이것은 신음성!' 영호걸은 대번에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 차릴 수 있었다. 경험 탓이었을까? 그는 옮기던 발걸음을 멈추고는 더욱 귀를 기울여 보았다. 이어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분명히 사람의, 그것도 노인인 것 같다.'


영호걸은 판단이 내려지자 즉시 신음성이 울리는 곳을 향해 신형을 쏘아갔다. 이윽고 그의 신형이 멈춘 곳은 하나의 커다란 바위 부근이었다. 과연 그 바위의 한쪽 옆에는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인물은 한 명의 노파(老婆)였다. 노파를 내려다 보는 영호걸의 눈에는 곧 안쓰러워 하는 기색이 담겼다. 그도 그럴 것이, 노파는 지금 기식이 엄엄한 상태로 곁에 누가 다가왔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영호걸은 내심 혀를 끌끌 찼다. '틀렸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생명을 구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는 묵묵히 노파의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노파의 명문혈에 장심을 갖다 붙힌 후,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파의 얼굴에는 약간이나마 화색이 감돌게 되었다. 그것을 본 영호걸은 진기를 더욱 끌어 올려 노파의 몸에 열심히 유입시켜 주었다. "으음......." 다시 한 가닥 신음성과 더불어 노파의 감겼던 눈이 힘겹게 떠졌다. 그녀는 영호걸을 쳐다 보더니 입술을 달싹 거렸다. 아마도 절박하게 해야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영호걸은 노파를 안심시키기 위해 조용히 말했다. "천천히, 편하게 한 자씩 말씀해 보십시오." 노파의 눈가에 언뜻 미소의 기운이 스쳐갔다. 그러더니 그녀는 영호걸이 시키는 대로 입 열기를 시도했다. "이... 계... 계곡....... 빙... 빙궁(氷宮)에......." 영호걸은 노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진력을 더 끌어 올려 그녀에게로 불어넣어 주었다. "계속 하십시오." "빙... 빙궁의 만년빙한로(萬年氷寒爐)를 부숴야....... 꼭... 오늘 안... 꼭 오늘... 오늘 안으로 그... 그것을......." 그것이 노파가 전한 전부였다. 그녀는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꺾더니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영호걸은 또 다시 난데없는 의문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는 열심히 듣기는 했으되 노파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빙궁?' 그것은 어휘 자체가 몹시도 생경했다. 물론 그 뒤로 이어지는 말도 다를 바 없었다. '만년빙한로? 그나마 오늘 안으로 꼭 부수어야 한다고?' 이는 그가 아무리 총명하다 해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대체 무슨 뜻일까?' 영호걸은 노파의 시신을 바라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음, 왜 내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것일까? 잠시도 편히 머무를 짬이 없구나.' 그는 시선을 돌려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계곡을 응시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 계곡 안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리라는 사실이다. 이 노여협(老女俠)은 죽어가면서도 그것을 걱정하는 눈치였고....... 일단 들어가 보자. 어차피 이 계곡을 통해 외부로 나갈 참이었으니 그리 손해날 것도 없지 않은가?" 영호걸은 먼저 노파의 시신을 안장한 뒤, 계곡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그러나 한참을 지나도록 계곡 안에는 누런 황토만 쌓여 있을 뿐, 이렇다 하게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영호걸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발길을 멈추었다. "그 분의 말에 의하면 빙궁이라는 곳이 눈에 뜨일 때도 된 것 같은데....... 어째서 깊이 들어 오도록 아무 것도 없지?" 그는 새삼 주위를 샅샅히 훑어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음, 좀 미진한 기분은 들지만 그만 이곳을 나가야겠다. 여기서 마냥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영호걸이 내심 훗날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리려 할 때였다. 문득 그의 시야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아? 저것은......." ③ "샘물......." 영호걸은 나직히 읊조렸다. 그가 본 것이란 바로 계곡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옹달샘이었다. 그저 지나쳐 버리면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아무 특징도 없는. 하지만 영호걸의 뇌리에는 이미 한 가지 생각이 꽉 들어 차 있었고, 그것은 예외없이 풍부한 독서량(讀書量) 덕분이었다. 그는 옹달샘 앞으로 다가갔다. 옹달샘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도저히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 보였다. 영호걸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샘물에 슬며시 손을 담그어 보았다. 그러자 냉기(冷氣)가 삽시에 뼛속까지 스며 들어 그를 놀라게 했다. "웃!" 그는 다급히 손을 빼내는 한편,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차구나. 이것은 곧 빙궁과의 연관성을 뜻하는 것이다. 언젠가 고서(古書)에서 이와 비슷한 대목을 읽은 적이 있지.' 반면에 영호걸은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극도의 음한지기(陰寒之氣)를 품고 있는 샘물에 몸을 잘못 담구었다가는 영영 기(氣)를 상할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더불어 의가의 후손답게 그 샘물이 신체에 미칠 수 있는 영향까지를 신중하게 계산해 보고 있었다. 그의 고개가 끄덕여진 것은 그가 몇 번인가 손을 더 담갔다가 뺀 후였다. "그래, 극양의 기공인 건원신공을 운공하면 아마도 몇 시진 이내에는 별 탈이 없으리라. 사실 이곳까지 왔는데 되돌아 간다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이윽고 영호걸은 그 자신의 말마따나 건원신공을 체내에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강맹한 열기가 전신 곳곳에 고루 확산되는 것을 느끼는 순간, 옹달샘으로 훌쩍 뛰어 들었다. 풍덩! '우우! 대단하군.' 몸 전체로 감지되는 음한지기란 단지 손에서 느낄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영호걸은 물 속에 잠기자 건원신공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추위로 인해 턱을 덜덜 떨어야 했다. 와중에도 그는 물살을 헤치고 아래 쪽으로 깊숙이 잠수해 갔다. 한참을 내려가도록 밑바닥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혹 내 예상이 빗나간 것은 아닐까?' 추위 외에도 은근한 불안이 줄곧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물 밑으로 내려갈수록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뭐니뭐니 해도 역시 전신을 터질 듯 조여오는 맹렬한 수압이었다. 영호걸은 이를 느끼며 내심 부르짖었다. '과연 건원신공이 아니었다면 나는 벌써 이승과 작별을 고했을 것이다. 음한한 기운이건 압력이건 일반인의 육신으로는 도저히 견뎌내지 못했을 테니까.' 그 상태에서도 그의 신형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그만치 진기의 소모가 크기는 했으나 시간을 끌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빛이다!' 그 직후, 영호걸의 시계(視界)를 점한 것은 하나의 동굴이었다. 마치 그의 입동을 환영하듯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수중동(水中洞). 영호걸은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동굴, 즉 통로를 지나며 흡사 희열과도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발견의 기쁨이란 늘 그런 것이 아닐지? 또한 고통 이후에 맞이했다면 더욱 그러 하리라. 동굴은 생각보다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속을 헤엄쳐가는 동안 빛은 점차 밝아지고 있었다. 잠시 후. 영호걸은 자신에게 말하듯 혼자 읊조렸다. '으음, 다시 위로 향해지는구나.' 그것은 그의 머리 위로 밝은 빛이 쏟아지는 순간의 일이었다. 그는 이어 힘차게 동굴바닥을 차며 빛이 쏟아지는 쪽으로 몸을 솟구쳐 보았다. 파아아아-'과연!' 영호걸의 신형이 수면을 가르며 불쑥 떠올랐다. 그는 허공에서 유연하게 몸을 틀어 곧바로 뭍에 내려 섰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 본 그는 다소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가 튀어 나온 곳 역시 하나의 작은 옹달샘이었고, 통로는 다시 종전에 비해 훨씬 반경이 넓은 또 다른 동굴로 이어져 있었다. '정말 기이한 곳이군.' 아무래도 서적을 통한 간접 경험과 직접 경험이 똑같을 수는 없었다. 영호걸은 사뭇 신비감에 사로잡힌 채 자신이 빠져 나온 옹달샘을 뒤로 하고 동굴을 따라 주욱 걸어 들어갔다. 동굴은 계속 전면으로 뻗어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휘-- 이이-- 잉--! 갑자기 극랭한 한기가 그의 전신을 엄습해 왔다. 그것은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 즉시 얼어 죽고 말 정도의 수준이었다. '우우!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영호걸은 본의 아니게 이를 악물며 걸음을 옮겨야 했다. 건원신공의 도움을 톡톡히 보고는 있었으나 살갗이 얼어 터지지 않나 싶을 만큼 추운 데야 그로서도 어찌 하겠는가? 이윽고 그가 당도한 곳은 드넓은 광장(廣場)이었다. "아!" 영호걸은 부지불식간 탄성을 터뜨렸다. 광장의 풍경이 그로 하여금 추위도 잊은 채 감탄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천정에서 저마다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는 각양각색의 야명주 때문이었다. 이렇다할 장식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설사 있다 한들 이 수려한 빛의 제전(祭典)에는 오히려 방해물이 되고 말리라. '천하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곳이 또 있을까?' 이것이 광장을 바라본 영호걸의 감상이었다. 이어 그의 눈에 띈 것은 광장 맞은편에 나 있는 하나의 문(門)이었다. 그는 곧 황홀한 빛의 세계를 건너 그 문 앞에 이르렀다. 문에는 백옥(白玉)으로 된 고리가 매달려 있었다. 영호걸은 망설이지 않고 그 고리를 힘껏 잡아 당겼다. 우르릉! 굉음과 더불어 문이 열렸다. 그러자 영호걸은 비로소 진력을 끌어 올려 신체를 보호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우르릉--! 그를 통과시킨 후, 열렸던 문은 자동적으로 닫혀 버렸다. 하지만 그는 미처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그의 정신을 모조리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오오! 어찌 이런 곳이.......'


영호걸의 앞에는 지금 한 채의 신비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의 건물과는 양식이 전혀 달랐다. 전체가 수정으로 지어진 듯 투명했으며 정교하기 그지 없었다. '정녕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구나. 흡사 별세계에라도 든 기분이다.' 영호걸은 내심 감탄사를 연발하며 건물로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건물에는 놀랍게도 전반적으로 얼음이 얇게 덮혀 있었다. '이 건물이 아까 그 노여협이 얘기했던 빙궁인가? 으음, 찾기는 제대로 찾아 온 모양이군. 이름이 무척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궁으로 들어가 보았다. 궁의 내부 역시도 모두 수정으로 되어 있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불현듯 진로를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수정으로 된 벽이었는데, 제법 큼직한 현판이 걸려 있었다. 거기에는 단 한 글자가 씌여져 있었다. <금(禁)> 그것을 본 영호걸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이 글자는 아마도 금지구역이라는 뜻이겠지?' 그는 현판을 무시하고 손을 뻗어 가만히 벽을 밀어 보았다. 그러자 의외로 벽은 소리없이 뒤로 밀려났다. '이상하군? 출입을 금한다면서 이토록 쉽사리 열리다니.......' 영호걸은 심중에 의문을 품은 채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갔다. 빙실(氷室). 이곳도 외부와 마찬가지로 한기(寒氣)로 가득 차 있었다. 영호걸의 시선이 방 안을 한 바퀴 쓰윽 훑어갔다. 백무(白霧)와도 같은 흰 기류로 온통 뒤덮혀 있는 방. 개중 영호걸의 눈길을 가장 끈 것은 양쪽 벽에 놓여져 있는 투명한 관(管)들이었다. 그 숫자는 좌우 합해 모두 열두 개였다. '이게 대체......?' 영호걸의 눈은 잠시 그 관에 못박힌 듯 고정되어 버렸다. 관 자체에도 놀라기는 했지만 문제는 그 관에 담긴 내용물(?)이었다. 뜻밖에도 관 속에는 전라(全裸)의 여인들이 누워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절세적인 미모를 갖춘 여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을 대하는 영호걸은 놀라움 외에는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모두 눈을 감은 채 죽은 듯이 누워 있으니, 이는 지극히 당연한 노릇이었다. 응당 보여야 할 가슴의 기복도 전혀 없었다. 아름다운 융기물 또한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자 마치 가슴에 얹혀 있는 두 덩어리의 화석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쯧! 이 많은 미인들이 모조리 시신이었군.' 영호걸은 고소를 짓는 한편, 심중에 차오르는 의혹을 떨치지 못했다. 그 자신조차 여인들을 시신이라 지칭하고 있으되,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즉 죽은 여인들이라면 방금 운명했다 해도 당연히 시신다운 특징들을 보여야 하는데, 그것이 없었다. 그녀들은 다만 정지상태를 고수하고 있을 뿐 모습만은 생시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영호걸의 눈이 문득 번쩍 하고 이채를 발했다. '이런 현상은 어쩌면.......' 그는 내심 짚히는 바가 있었던지라 곧 관 속에 든 열두 명의 미녀들로부터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는 어느덧 빙실의 한쪽 옆으로 나 있는 또 하나의 통로를 향하고 있었다. 영호걸은 통로를 따라 다시 걸어갔다. 이번에는 다른 통로와는 달리 밝았으며 그다지 길지도 않았다. 그리고 통로가 끝나는 곳에는 또 다른 빙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그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일었다. ④ 미인(美人). 빙실 한가운데에는 호화롭기 짝이 없는 수정관이 놓여 있었는데, 미인은 바로 그 안에 알몸인 채 누워 있었다. 죽은 듯 숨을 쉬지 않는 여인에게서 살아있는 어떤 여인보다 더욱 충격적인 미(美)를 느낀다면 모순일까? 아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조롱할 정도로 여인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과연 영호걸조차도 눈에 경이로움을 담은 채 여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수정관 속의 미녀는 거의 마력에 가까운 미로 인해 처음 본 순간부터 그의 시선을 놓아주지 않았다. 칠흑같이 검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은 고운 결을 유지한 채 허리까지 내려와 있다. 그와 대조를 이루듯 새하얀 피부는 가히 투명해 보일 정도로 맑고 깨끗했다. 이목구비 역시 도무지 흠잡을 데라고는 없었다. 반듯한 이마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 내린 콧날과 도톰한 입술, 그리고 수려한 아미와 지그시 감은 눈에서 뻗어 나온 기다란 속눈썹 등은 그 하나하나가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이 일게 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몸매는 또 어떠한가? 동그란 선을 이루면서도 가녀린 어깨, 그곳으로부터 나긋하게 뻗은 두 팔이며 가느다란 허리의 선, 목까지도 학(鶴)처럼 길고 기품이 있었으며, 젖가슴은 마치 두 개의 복숭아와도 같았다. 그 정상에 얹힌 유두(乳頭)는 분홍색의 보석인 양 빛나고 있었다. 유지처럼 매끄러운 아랫배에 귀엽게 패여 들어간 배꼽과 그 아래로 둔덕을 이룬 신비지문(神秘之門)까지도 황홀한 여인....... 그녀 앞에서 매료되지 않을 사내란 천하에 없을 듯 했다. 이 점은 영호걸이 충분하게 입증해 주었다. 그는 홀려 버린 듯 멍하니 수정관과 마주한 채 전라의 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아무튼 영호걸이 꿈에서 깨어나 현실과 직면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그는 정신이 들자마자 심미안(審美眼)을 스스로 질책하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여기까지 오게 된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거늘.......' 실소하는 그의 눈에 수정관 옆에 놓여 있는 백옥향로가 들어왔다. 그것은 높이가 두 자 가량, 넓이는 한 자 정도였다. 백옥향로에서는 작금에도 한창 백무(白霧)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백무는 빙실 전체를 온통 뒤덮고 있었는데, 아마도 방 안을 가득 메운 섬뜩한 냉기는 그로 인한 것인 듯 했다. 아울러 백무는 통로를 지나 방금 전에 보았던 열두 미녀의 빙실에도 끊임없이 유입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자 영호걸의 추리가 서서히 범위를 좁혀가고 있었다. '음, 이것이 바로 만년빙한로라는 것이겠지?' 그는 조심스럽게 백옥으로 만들어진 그 향로 가까이 다가갔다. 과연 극단의 음한지기는 그것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백무를 뿜어내는 향로, 수정관 속에 들어 있는 미녀, 그리고 다시 열두 명의 미녀.......' 이 정도의 자료(?)라면 영호걸로서는 하나의 가설을 세우는데 부족할 것이 없었다. 물론 그런 배경에는 그가 지금으로부터 오, 륙 년 전에 읽었던 괴이지(怪異誌)라는 책이 있었다. 그 책자에는 제목에 걸맞게 전편에 걸쳐 기상천외한 기록들만 실려 있었다. 천하에 둘도 없는 괴인(怪人)들을 위시하여 신기한 물건, 혹은 사이한 대법에 관한 것까지 총망라 되어 있었다. 바로 그 중 한 가지가 현재의 상황과 대충 부합되었다. '그 기록에 의거한다면 이 여인들은 시체가 아니라 모두 살아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른바 극음(極陰)의


정(精)을 흡수하면서 일종의 무공을 터득하는 중일 것이다.' 만년빙한로에 대해 사실적으로 옮겨 보면 이러하다. 그것으로부터 발출되는 백무, 즉 실로 무지막지한 그 한기는 천지간을 통틀어 가장 극음한 기운으로서 일반인이라면 접근 즉시 무조건 목숨을 잃게 된다. 반면에 만일 이 한랭한 기류를 일갑자에 이르도록 흡입해 본신의 진기와 융화시킬 수만 있다면 어떤 보검이나 창칼로도 손상을 입지 않는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몸으로 화하게 된다. 그러나 만년빙한로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성취하게 되는 무공인즉 인성(人性)이 완전히 무시된 악랄한 사공(邪功)이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천하를 뒤엎을 만한 무공을 소지하고 금강불괴지체를 이루면 무엇 하겠는가? 그것을 얻는 대신 심성이 변해 일대 마인(魔人)으로 화하고 마는 것을....... 영호걸이 알고 있는 상식이란 과거의 기억을 모두 끄집어 내어도 이 중에서 단지 일부분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만 가지고도 벌써부터 명확한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내가 만났던 그 노여협은 아마도 이 빙궁의 내막을 잘 아는 사람인 것 같다. 그 분이 오늘 안으로 필히 저 만년빙한로를 부숴야 한다고 했지. 그 말뜻은 결국 향로를 이용한 사공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영호걸은 수정관 속의 미녀와 향로를 번갈아 바라보며 손에 진력을 운기했다. 이어 그가 막 향로를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흐흐흐... 그렇게는 안 된다, 꼬마야." 어디선가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빙실 안에 나타난 인물은 백발이 성성한 한 노파였다. 어찌나 늙었는지 안면에 주름살이 가득한 노파는 적게 보아도 백 살은 훨씬 넘어 보였다. 무엇을 하다 왔는지 그녀의 얼굴에는 온통 서리가 하얗게 맺혀 있었다. 영호걸은 흠칫 놀라서 한 걸음 물러섰다. "당신은 누구요?" 그의 물음에 답하는 노파의 음성은 그야말로 얼음장이었다. "꼬마야, 내가 누군지까지는 몰라도 된다. 단지 네 놈은 이곳에서 뼈를 묻기만 하면 된다." 영호걸은 냉소했다. "자만하지 마시오. 나는 필히 이 향로를 부숴버릴 것이오." 말과 함께 그는 향로를 향해 일장을 격출해냈다. 그 광경에 백발의 노파는 질겁을 했다. "흡! 미쳤구나." 동시에 그녀의 삐쩍 마른 오른손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 순간, 영호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는 자신의 장력이 모래알 흩어지듯 무기력하게 해소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그가 심중으로 부르짖는 사이, 백발노파는 괴소를 터뜨렸다. "ㅋㅋ... 네 놈이 어떻게 해서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죽어줘야겠다." 노파는 다시금 오른손을 내저었다. 휘이잉--! 극랭한 한기가 몰아쳤다. 덕분에 영호걸은 장력이 몸에 닿기도 전에 벌써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는 재빨리 건원신공을 운기해 노파의 장력과 맞닥뜨려갔다. 펑--! 두 줄기 장력이 격돌하자 노파는 중심을 잃은 듯 몸을 약간 휘청거렸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영호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뒤로 네 걸음이나 밀려나간 채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이 노파의 내공은 우내사괴보다도 훨씬 높구나.'


반면에 백팔노파도 눈가에 은은하게 놀란 기운을 띠고 있었다. "애송이 놈의 무공 치고는 제법이구나? 그럼 어디 다시 한 번 받아 보아라." 노파가 오른손을 흔들자 이번에는 손에서 하얀 기류가 쏟아져 나왔다. 영호걸은 순간적으로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보다 더욱 강도 높은 한기가 삽시에 뼛속까지 밀려 들었던 것이다. 영호걸은 내심 염두를 굴렸다. '내공으로 부딪치면 절대 불리하다. 그렇다면.......' 생각이 미치자 그는 즉시 몸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그는 허리 춤에서 번개같이 뇌정도를 뽑아 들었다. 그의 입에서는 곧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탁비(坼飛)!" 섬광이 번쩍 하고 사위를 점령했다. 쿠르릉--! 뇌성이 빙실을 진동시킨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노파는 이 현상에 대경한 나머지 황급히 장을 회수하며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그녀는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도법이냐?" 하지만 영호걸은 침중하게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방금 전 노파가 풍뢰구도의 제삼초인 탁비를 쉽게 피해내는 것을 보자 거의 절망에 가까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뇌정심법을 전개해 뇌정도로 발출해낸 섬광은 단지 빙실 바닥을 때렸을 뿐이었다. 덕분에 빙실 바닥이 쩍 갈라져 있기는 했지만. 이때, 빙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백무가 점차 엷어지기 시작했 다. 만년빙한로에서 새로 발산되어 나오는 것도 현저히 줄어 들고 있었다. 이 현상에 노파는 만면에 희색을 떠올렸다. "아! 성공이다. 드디어 오랜 염원이 달성되는도다." 그 말에 영호걸의 안색이 일변했다. '시간이 없다! 이미 완성 단계에 도달한 모양인데.......' 뇌정도가 다시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소혼(銷魂)!" 짤막한 일성과 더불어 푸른 섬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갔다. 우르릉-- 쾅--! 그야말로 뇌성벽력이 빙실 안을 강타했다. 이 초식은 바로 우내사괴의 한 명인 흑살귀검을 초주검으로 몰아넣은 가공할 살초였다. 노파의 안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녀는 급히 쌍장을 휘저으며 신형을 뒤로 뽑아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녀도 피신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찌익! 옷자락 찢기는 소리가 들린 순간, 영호걸의 좌장이 만년빙한로를 향해 강맹한 장력을 격출시켰다. 노파는 대경실색 했다. "네, 네 놈이 무슨 허튼 수작을!" 하지만 그것은 이미 공허한 부르짖음에 지나지 않았다. 쾅--! 폭음과 더불어 만년빙한로는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에 따라 뿌연 기체도 사방으로 분산되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 이럴 수가!" 노파의 입에서 참담한 부르짖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흡사 넋이 빠져 버린 듯 한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백발노파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분노였다. 그녀는 영호걸을 향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네... 네 놈이 우리의 육십 년 공을 수포로 돌리다니......!" 노파는 이어 전력으로 쌍장을 떨쳐냈다. "죽어랏!" 영호걸은 엄청난 압력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급급히 몸을 빼냈다. 위력으로 미루어 감히 맞받을 수가 없는지라, 환영신법을 사용해 장력의 범위를 벗어나 버린 것이었다. 꽈앙--! 노파의 장력은 그가 피하는 바람에 애꿎은 빙실의 벽을 때렸고, 이로 인해 벽에는 전에 없던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그 사이로는 밖이 내다 보였다. 그런데 그곳은 놀랍게도 허공이었다. 영호걸은 내심 느끼지는 바가 있었다. '아! 빙실의 벽 바깥 쪽은 절벽이었구나.' 끼-- 이익--! 문득 묘한 음향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영호걸과 백발의 노파. 이들 두 사람은 얼른 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 보았다. 그것은 수정관의 뚜껑이 막 열리는 찰나였다. 동시에 그 속에 누워 있던 전라의 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백발노파는 반색을 하며 외쳤다. "오오! 아가씨, 드디어 정신을 차리셨군요." 미녀는 반듯한 자세로 수정관 안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비단결 같은 머리칼이 양 겨드랑이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려 있었다. 15 장 마혜수라경(麾醯首羅經) ① 아름다운 한 쌍의 눈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눈에는 총기가 없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얼굴 역시도 무언가 부족한 것처럼 멍청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것을 느낀 백발노파의 안면이 크게 일그러졌다. "아가씨!" 청력에도 이상이 있는 것일까? 미녀는 그 소리를 전혀 못들었다는 듯 여전히 애초의 모습으로 가만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영호걸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백치미(白痴美).......' 영호걸은 내심 신음처럼 부르짖었다. 아울러 그는 이 모자라 보이는 여인의 미(美)를 통해 심금이 떨릴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색감(色感)이 아닐지?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답되 저항할 줄 모르는 여인이란 대개 남자의 본능을 무섭도록 자극시킨다. 말하자면 그 향기에 취해 그대로 침몰하고 싶은....... 영호걸로서는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여러 명의 미인이 있었고, 개중에는 그가 마음을 두고 있는 여인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 앞의 여인처럼 무력감이 들 정도로 강한 유혹을 던져온 여인은 맹세코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어떤 야릇한 언사나 동작을 취한 바도 없었다. 단지 그녀는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밑도 끝도 없는 늪처럼 그를 끌어 당기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미인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텅 빈 동공 속으로 그를 세차게 빨아 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우우.......'


영호걸은 기이한 부르짖음이 입 밖으로 토해질까 염려한 나머지 오히려 먼저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는 사실 두려웠다. 미인의 현란한 나신으로 자신의 시선이 옮겨갈까봐. 이때, 백발노파의 외침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이 찢어 죽일 놈! 네 놈 하나 때문에 귀하신 우리 아가씨께서 육십 년 동안 쌓아 올리신 공이 일시에 무너져 버렸다. 내 네 놈을 절대 가만 두지 않겠다." 그녀는 노발대발하며 예의 무시무시한 장력을 발출시켰다. 쉬쉭--! 영호걸은 흠칫 놀라는 한편, 천환삼식 중 마지막 초식인 환허일살(幻虛一殺)을 전개했다. 그러자 무수한 장영(掌影)이 가공할 속도로 뻗어 나왔다. 의외의 사태가 발생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니, 네 놈은......?" 노파는 경악성을 토하더니 재빨리 장력을 회수하며 물러났다. 이어 그녀는 더욱 삼엄한 기색이 되어 다그쳐 물었다. "천환장법! 네 놈이 시전한 것이 천환장법 맞느냐?" 영호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렇소만, 그걸 당신이 어찌 아시오?" 노파의 안면이 극도의 분노로 인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이제 보니 네 놈은 현노적(玄老賊)의 제자였구나! 네 놈들 사도가 결국 우리 빙궁(氷宮)을 철저히 쑥밭으로 만들고 마는구나." 그녀의 부르짖음에는 비감과 더불어 통한이 깃들어 있었다. 물론 영호걸이 그 까닭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분위기를 의식하여 자못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현노적이라니, 그게 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오?" 노파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닥쳐라! 이 천하에 다시 없는 악적들! 죽어라--!" 다시금 한 무더기의 백무가 영호걸의 면전으로 왈칵 몰려왔다. "웃!" 무방비 상태였던 영호걸은 그것을 보자 대경했다. 도저히 피할 겨를이라고는 없었다. 따라서 그로서는 전력을 다해 막아내는 것만이 최선책이었다. 펑--! "으윽!" 영호걸은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뒤로 네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는 마치 전신이 얼음 구덩이에 빠진 듯한 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뼈를 에일 것 같은 백무의 세례는 멈추지 않았다. 쉭! 쉬쉭--! 몇 초수를 피하다가 그는 급기야 일격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그것도 하필 치명적이랄 수 있는 가슴 부위였다. "크헉!" 처절한 비명소리에 이어 영호걸의 몸은 흡사 실 끊어진 연처럼 뒤로 날아갔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그를 맞이한 것은 벽에 뚫려 있던 구멍이었다. 그는 결국 구멍 밖으로 내던져진 셈이었다. "으아아악--!" 그의 비명 또한 길게 여운을 끌며 사라져 갔다. 눈은 떴으되 보이지 않는다.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 혹은 현실과 꿈을 가로지르는 길목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는 않으리라. 아무튼 영호걸은 그곳에서 아무 것도 발견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을 뜸으로 인해 그는 아직 자신의 명(命)이 다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그의 내부에서 이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은 복귀에 대한 집념이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념은 실효를 거둘 수 있었다. 서서히 제 정신이 돌아와 시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을 원상태로 돌아 오도록 명령한 것이었다. '이곳은......?' 영호걸이 제일 처음으로 의식한 것은 자신의 지금 처지였다. 다행히도 그는 푹신한 낙엽 무더기 위에 누워 있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것인지, 층층이 쌓여 있는 낙엽군(落葉群)은 흡사 안락한 침상을 연상하게 만들 정도였다. '후후... 살아 있다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군. 이런 운치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니.......' 영호걸은 눈을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까마득한 절벽이 있어 그로 하여금 실소하게 했다. 빙실의 벽을 통해 그가 추락했던 절벽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감상에서 일탈하여 곧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윽!" 그는 비명을 쏟아 내고는 도로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뼈 마디가 부서져 나갈 듯한 통증이 그의 전신에 엄습해 왔던 것이다. 그는 다시금 실소를 흘려 냈다. "후후... 정말 신기하기 짝이 없군. 이러고도 살아날 수 있었다니, 천우신조가 따로 없구나." 하지만 여전히 운신(運身)은 불가능했다. 사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꼼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상 그가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이렇게나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건원신공의 덕택이었다. 건원신공의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일종의 호신강기의 역할과 근육 자체의 경직이나 신축을 도와 활성(活性)을 일으켜 준다는 것도 거기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했다. 즉 어떠한 타격을 입어도 그 충격이 저절로 격감된다는 말이다. 이 점은 현재 영호걸이 스스로의 신체를 통해 여실히 입증하고 있었다. 비록 고통이 심해 금방이라도 혼절할 지경이기는 했지만. 그는 간신히 손을 움직여 품 속에서 대라회천신단을 꺼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 희대의 영단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단전에 기이한 열력을 형성하더니 곧 신비스러운 기운으로 화해 그의 사지백해를 마음껏 휘돌았다. 그 기운이 각 혈도 부위를 스칠 때마다 고통은 조금씩 감소되었다. 그 상태에서 영호걸은 진기를 스스로 움직여 약력을 도왔다. 그로부터 약 반각 후. 영호걸은 비로소 통증에서 어느 정도 놓여날 수 있었다. "휴우......." 그는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주위를 둘러 보니 사방이 온통 울울창창한 원시림(原始林)으로 뒤덮혀 있었다. 어찌나 수목들이 빽빽하게 우거졌는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광경에 영호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 그야말로 수해(樹海)를 이루고 있구나.' 기실 빛이 차단되어 있어 숲 속은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복용해 온 숱한 영약들 덕에 비상한 안력을 소지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경황 중에도 대자연의 경관에 심취할 수 있는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닥에 쌓여 또 다른 지층(地層)을 이루어 가고 있는 낙엽들도 적절히 한몫 했다. 영호걸은 공력을 운행해 몸이 빠져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낙엽 무더기에서 발산되는 묘한 향취에 흠뻑 젖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감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의 진로(進路)에는 실로 의외의 위험이


가로 놓여 있었다. "아! 저것은......." 영호걸은 허공에 붉은 안개같은 것이 끼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가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만엽장독(萬葉 毒)이다.' 일찌기 독에 대해서도 경지에 이르러 있는 그였다. 또한 그가 성장 과정에서 복용해 온 약물에도 대개 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의 몸이 백독불침(百毒不侵)이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영호걸은 붉은 기류의 정체를 알아 차리고도 유유히 그 속을 뚫고 나아갔다. '으음, 이 장독은 일반 장독과는 달리 대단히 지독하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물론 그는 독이 포진하고 있은들 하등의 영향도 받지 않았지만 보통 사람을 염두에 둔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어쨌든 영호걸은 계속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만엽장독의 기류와 수림을 모두 벗어나는 데는 근 반 시진이 소모되었다. '몹시 피곤하군.' 이런 그의 읊조림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때마침 밖은 밤이었고, 지쳐 버린 육신이 그 기회를 빌어 휴식을 종용하고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영호걸의 눈에 한쪽 절벽 모퉁이에 뚫려 있는 천연의 토굴이 들어왔다. 그는 토굴을 향해 몸을 날렸다. ② 토굴 안. 영호걸은 마른 나뭇가지와 낙엽을 모아 불을 피웠다. 그러자 불빛으로 인해 토굴의 내부는 일시에 환해졌다. "아니!" 영호걸은 놀란 시선으로 한곳을 응시했다. 토굴의 한구석. 그곳에는 뜻밖에도 한 구의 해골이 나뒹굴고 있었다. 진즉부터 발견해 내고자 했다면 몰랐으되 밝은 가운데 갑자기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낸 해골은 왠지 으스스한 기분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시간이 약간 지나자 해골을 대하는 영호걸의 기분은 호기심으로 전환되었다. 그는 해골 곁으로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해골에는 살이라고는 한 점도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낡디 낡은 흑의에 감싸여져 있었다. 아마도 육탈(肉脫)이 진행되기 전부터,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인간으로 존재할 때에 걸치고 있었던 의복인 듯 했다. '과연 남들이 왜 인생무상을 논하는지 알겠군.' 영호걸은 다소 허탈함을 느끼며 망연한 시선으로 해골을 바라 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이 기이한 흔들림을 보였다. "저것은......?" 그의 눈에 띈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해골의 손에 쥐어져 있는 조그마한 철갑(鐵甲)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한 가지 결론에 봉착하고는 조심스럽게 철갑을 주워 들었다. '혹시 고인(故人)의 유지라도 들어 있을지 모른다. 보아 하니 내가 들어 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일체 닿지 않았던 모양인데,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당부가 있다면 들어 주자.' 이것이 바로 그의 생각이었다. 철갑은 뻘겋게 녹이 슬어 있었다. 그러나 영호걸은 그런 것쯤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이내 뚜껑을 열어 보았다. 끼익!


불유쾌한 마찰음을 내며 철갑이 열렸다. 그 안에는 의외로 누렇게 색이 바랜 양피 책자가 들어 있었다. 영호걸의 가슴이 진동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양피책자를 집어 드는 그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책자 밑에는 또 한 장의 양피지와 하나의 금패(金牌)가 들어 있기도 했다. 영호걸은 먼저 양피지를 들어 펼쳐 보았다. 일견하기에도 그것이 일종의 서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노부는 남해(南海) 잠룡도(潛龍島)의 도주(島主)이다. 중원에 나와 각처를 주유하던 중 우연히 돈황에서 천축(天竺) 소뢰음사(小雷音寺)의 일대 마승(魔僧)이었던 아달극(阿達克), 그 자가 저술한 마혜수라경(魔醯首羅經)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영호걸은 읽다 말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해골을 응시했다. '이 해골은 평범한 자의 것이 아니었구나. 무심하게 지나쳤더라면 기인(奇人)과의 인연을 놓칠 뻔 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다시 양피지로 눈길을 옮겼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소문이 퍼져 중원의 전 고수들이 노부를 추격해 왔다. 노부는 그들을 따돌리려다 부상을 입은 채 이 숲 속으로 피신했고, 급기야는 이곳에서 수천 년 동안 발효되었던 만엽장독에 중독되어 전신이 썩어 들어가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노부는 이제 더 살지 못한다. 미지(未知)의 후인(後人)에게 부탁하노니, 부디 이곳에 있는 잠룡령(潛龍令)을 남해의 잠룡도에 전해 주기 바란다. 그 대가로 마혜수라경을 기증하겠노라.> 영호걸은 다 읽고 나자 탄식을 금치 못했다. '으음, 정녕 안타까운 최후로군.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한 지역을 호령하던 인물이 이곳에서 혼자 독상(毒傷)과 싸우다 외롭게 산화해 버렸구나.'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금패, 즉 잠룡령을 품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해골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소생, 기회가 닿는 대로 필히 잠룡도에 전하겠소이다." 이어 영호걸은 양피로 엮어진 책자를 펴 보았다. 그것은 한어가 아니라 범어(梵語)로 씌여져 있었는데, 가업을 잇고자 일찍부터 천축의 의서(醫書)들을 공부해 온 그에게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가운 문자들이었다. 그는 책자를 쭉 훑어 보았다. 그 안에는 도합 세 가지의 무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마혜수라공(魔醯首羅功)> 이는 불문(佛門)의 무공이면서도 불도(佛道)와는 전혀 연관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이단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신공이었다. 영호걸은 그 구결을 대하자 내심 의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나. 어찌 하여 불문의 무공이 이토록 사이(邪異)하고도 패도(覇道)적이란 말인가?' 아무튼 그는 대충 읽어 본 후, 두번째의 무공 편으로 넘어갔다. 그것은 경공(勁功)으로서 그 이름인즉 이러했다. <아축신원보(阿 身元步)> 영호걸은 어느덧 반감도 잊은 채 독서삼매경에 빠져 들고 있었다. 무인의 길을 가고자 한 이후로 그의 이런 성향은 거의 습관에 가까웠다. 익혀야 할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뒤에 해도 늦지 않다는 것 또한 그의 생각이었다. 곧이어 무학을 향한 그의 광적인 열정은 세번째의 기공(奇功)편을 훑어가고 있었다. <천지기합분원술(天地氣合分元術)> 위에 열거된 세 가지 무공을 모두 읽은 영호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중원의 무학과는 본질적으로 달랐으며, 심지어 상리를 완전히 벗어난 것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영호걸은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채 마혜수라경 상의 무공진결들을 하나씩 음미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무엇에 놀랐는지 눈을 번쩍 떴다. "오오! 이럴 수가......." 그는 품 속을 뒤져 천무비경을 꺼냈다. 그리고는 급급히 어떤 면을 펼쳐 보았다. 그가 찾아낸 것은 바로 천무문의 제일대 장문인인 천잔노인(天殘老人)의 천잔마공(天殘魔功)이었다. 영호걸은 이어 마혜수라공과 천잔마공의 구결을 비교해 보았다. 그런 그의 입에서는 신음에 가까운 부르짖음이 새어 나왔다. "맙소사! 이 두 가지 무공이 동일한 것이었다니.' 과연 그랬다. 천잔마공과 마혜수라공은 똑같은 무공이었던 것이다. 영호걸의 놀라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일대 사존(師尊)의 무공이 천축의 소뢰음사 아달극의 무공과 같다니, 그렇다면 사존께서는 소뢰음사 출신이셨단 말인가?' 영호걸의 추측 또한 사실이었다. 천무문의 제일대 장문인이었던 천잔노인. 그는 본시 천축 소뢰음사에서 무공을 배운 인물이었다. 소뢰음사란 천축에 있는 사찰로서 불도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를 기리는 절이 아니라 반대로 석가모니의 수행을 방해한 악귀, 즉 아수라(阿修羅)를 모시는 절이었다. 그러므로 소뢰음사의 무공이 불문답지 않게 패도적이고 잔인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었다. 천하의 모든 마공(魔功)이 바로 이 소뢰음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設)도 있고 보면, 그들의 마명(魔名)은 능히 짐작할만 했다. 천잔노인은 중원인(中原人)이다. 그러나 그는 일신에 운명처럼 매달려 있던 복수를 위해 이십세 때 소뢰음사로 갔었고, 그곳에서 무공을 익히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거저 얻어진 행운이 아니었다. 소뢰음사의 주지인 아달극은 그에게 천하에 산재해 있는 일반 사찰들을 파괴하겠다는 맹세를 받고 나서야 무학을 넘겨 주었다. 그때에 전수받은 것이 바로 마혜수라공과 아축신원보였다. 이후로 천잔노인은 중원에 돌아오자마자 거센 혈풍을 일으켰다. 소뢰음사의 무공으로 천하를 휩쓸며 복수를 마쳤던 것이다. 하지만 소뢰음사와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는 그의 심성이 점차로 선량하게 변했기 때문으로, 그는 종내 살업(殺業)과 부덕(不德)을 혐오한 나머지 아예 어딘가로 은신해 버렸다. 이에 분노한 아달극은 즉각 중원으로 건너와 천잔노인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아달극은 다시 소뢰음사로 되돌아갔고, 당시의 일은 역사의 그늘 속에 얌전히 파묻힌 지 오래였다. 영호걸. 그가 앞서 전개한 천 년 전의 고사(古史)를 알 수는 없었다. 그는 단지 천무문과의 연관성에 이끌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마혜수라공과 천잔마공을 일일이 비교해 가며 검토해 보았다. 그 과정 중에서 영호걸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해 냈다. '이제 보니 천잔마공은 마혜수라공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천잔마공에는 마혜수라공에 수록되어 있는 중요한 구결들이 부분부분 누락되어 있었던 것이다. '으음. 이것은 아마도 사존께서 일부러 그러신 것 같다. 천잔마공의 기록은 그 분의 말년(末年)에 이루어졌거니와, 스스로의 살행(殺行)을 후회하셨던 점으로 미루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과연 천잔마공의 원류(原流)라고 할 수 있는 마혜수라공은 천잔마공에 비해 훨씬 음독하고 잔혹성이 두드러졌다. 물론 위력 면에서 월등히 우위라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었지만. 아축신원보만은 천잔노인의 무영비(無影飛)와 동일했다. 이것은 경공이므로 달리 어떤 의식도 요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영호걸. 그는 이어 천지기합분원술을 접하고 있었다. ���것은 마혜수라경 내에서 가장 신비한 무공이었다. 이 기공을 펼치면 인간의 육신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그 대신 열 개의 마존불(魔尊佛)의 상이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그 열 개의 마존불상은 모두 허(虛)가 아니라 실(實)이라는 점이었다. 이것은 정녕 가공할 기공이었다. 열 개의 마존불이 동시에 동일한 힘으로 공격을 가한다면 그 결과는 어찌 되겠는가? 상대는 절대고수 십 인을 맞이해 싸우는 것과 같을 터인즉 가히 천하무적의 기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영호걸은 이 천지기합분원술로 인해 거의 넋을 잃고 말았다. '우우! 이것은 인간의 무공이 아니다. 소위 초마(超魔)의 무학이 있다더니 바로 이런 것을 일컫는 말이었나 보구나.' 구결을 계속 읽어 나가는 동안에도 그의 놀라움은 점차 잦아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증폭되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자 영호걸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비로소 마혜수라경으로부터 시선을 떼었다. '으음, 실로 대단하군.' 현실감을 회복한 그는 예의 해골을 향해 걸어갔다. '먼저 이 분의 부탁대로 잠룡도로 가봐야겠다.' 이윽고 영호걸은 토굴 가까이에 터를 잡고는 해골, 즉 잠룡도주의 유체를 고이 묻어 주었다. 아울러 새로 생긴 봉분 앞에 지력(指力)으로 나무를 깎아 묘비를 세워 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거기에는 역시 지력을 이용해 이렇게 썼다. <남해(南海) 잠룡도주지묘(潛龍島主之墓) - 후인(後人) 영호(令狐) 읍립(泣立).> 그런데 애당초 가졌던 그의 생각이 바뀐 것은 토굴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그는 천성보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무엇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가를 모르지는 않지만 지금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 만일 추적자라도 있다면 여기 누워 계시던 잠룡도주와 비슷한 모습이 될지도 모르니까.' 영호걸은 쓴 웃음을 짓는 한편, 마음을 굳게 다졌다. '어찌 생각하면 좋은 기회가 아닌가? 남의 이목을 피해 이렇듯 한적한 곳에 머무는 것도 쉬운 노릇만은 아니다. 차제에 깨우치지 못한 풍뢰구도의 나머지 삼초식이나 연마해야겠다.' ③ 토굴을 거처로 삼은 자(者). 그의 공부(工夫)는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풍뢰구도 중 제칠, 팔, 구 초식인 절참(切斬), 혈륙(血戮), 뇌살(雷殺) 등은 한결같이 가공스러운 위력을 지닌 도법이었다. 현재 영호걸의 건원신공은 삼성, 뇌정심법은 그 동안의 꾸준한 연마로 인해 사성에 도달해 있었다. 그 이상은 그의 내공이 일 갑자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이룰 수가 없었다. 아무튼 영호걸이 풍뢰구도를 연마하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적어도 제칠초와 팔초를 깨우치는 동안에는. 물론 그 이면에 필사의 노력이 따르고 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보름이 언제 다 지나 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영호걸은 무공 수련에 열중한 나머지 시간은 고사하고 날짜조차 잊고 지냈다. 그러나 그가 정확한 날짜를 계산하며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게 된 것은 제구초식인 뇌살을 연마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뜻대로 되어 주지를 않으니 초조감이 그를 이런 식으로 몰고 간 것이다. 영호걸은 그 이유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더욱 고심중이었다.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극복해 나갈 자신이 있다. 하지만 내공의 한계만은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풍뢰구도란 본래 내공 수위가 팔십 년 이상이어야만 펼칠 수 있는 도법이었다. 사실 육십 년 수위밖에 이르지 못한 영호걸이 제팔초까지 연마했다는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다만 비범한 지혜와 더불어 불꽃같은 집념까지 가세되어도 정복되지 않는 산(山)이 그를 압박해 오고 있는 것이었다. 풍뢰구도의 최후 초식인 뇌살도식(雷殺刀式)을 익히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내공이 이 갑자에 이르러야 했다. 아울러 이것은 단혼일도(斷魂一刀)에 도전하기 위한 최종 관문이기도 했다. 이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검술의 최고봉이라는 어검술(馭劍術)의 경지, 즉 단혼일도가 펼쳐 보이는 세계로 입문할 수 있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뇌살도식이란 단혼일도의 기초가 되는 검법이었다. 아무리 재질이 뛰어나다 한들 이제 육십 년의 내공을 가진 영호걸로서는 어떻게도 연마할 수가 없다고 보아야 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그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답을 찾았다. '그렇지! 대라회천신단이다. 혹시 그것이라면.......' 실상 그것은 천하의 기약(奇藥)들만을 모아 제련했으므로 일종의 선단(仙丹)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영호걸은 난제를 풀어갈 열쇠로써 바로 이 대라회천신단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그 영단을 복용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효험에 대해서는 일체 회의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 덕분에 현재의 내공을 가질 수 있기도 했다. 다만 그가 염려하는 것은....... 영호걸. 그는 나머지 여덟 알의 단약을 전부 입 안에 털어 넣어 버렸다. 이는 어찌 보면 대단한 모험이었다. 그는 내심 부르짖었다. '본시 약이란 남용해서는 절대 아니 되는 것이거늘, 마치 순리(順理)를 역행하는 기분이구나.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 보지 않으면 내게 달리 무슨 방책이 있단 말인가?' 영호걸은 가부좌를 틀고 건원신공을 운기했다. 그러자 단전에서 한 줄기 뜨거운 기운이 불쑥 솟구치더니 이내 대하(大河)처럼 엄청난 기세로 전신을 흐르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석문혈(石門血)을 지나 기해(氣海), 음교(陰交), 신궐(神闕), 하원(下院), 건리(建里)를 거쳐 중원(中院)에 이르렀다. 이 중원에 이른 열력은 똘똘 뭉치더니 다시금 사방으로 치달리려 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절대로 안되었다. 이곳에서부터 새삼 진력을 사지로 풀어 놓게 되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자칫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수도 있었다. 영호걸이 그때부터 애를 쓴 것은 바로 중원혈에 이른 진력을 하나로 통합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그 거대한 진기의 덩어리를 상원부(上院部)로 밀어 올렸다. 그곳에서 진기는 거궐(巨闕), 구미(鳩尾)를 지나더니 가슴의 정중선(正中線)에 위치한 중정(中庭), 옥당(玉當), 자궁(紫宮), 화개(華蓋), 선기(璇璂) 등을 거쳐 목 부위의 혈도를 두루 돌았다. 그리고는 연이어 천돌혈(天突穴)과 염천(廉泉), 입 속의 승장혈(承裝穴)을 통과해 아랫 입술과 이빨 사이의 단기혈(斷基穴)을 빌어 입술 갈래를 관통하고 지나쳤다. 이윽고 윗 입술과 이빨 중앙에서 가느다랗게 모인 진기는 곧바로 화살처럼 독맥(督脈)의 단교혈(斷交穴)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그 힘은 더욱 속도가 가세되더니 임맥(任脈)을 거치자 더욱 엄청난 기세로 증폭되었다. 그 상태로 십이경맥(十二經脈)을 지나온 진기는 드디어 생사현관(生死玄關)에 이르렀다. 이와 동시에 신체 앞 부분의 임맥과 뒷 부분의 독맥이 일제히 문호(門戶)를 열었다. 다음 순간, 영호걸은 전신의 모공(毛孔)이 활짝 열리며 전신이 그대로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갑자기 천지가 온통 눈부신 광휘로 뒤덮혀 버렸다. 그는 이것이 단지 의식 속에서의 일인지, 정말로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지 도시 구별할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단 한 가지, 그것은 구만 리(九萬里)라도 훌훌 날아갈 수 있을 것처럼 신체가 가볍고 상쾌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어느덧 영호걸의 입과 코에서는 흰 기체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울러 그 기체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짙고 풍부해지더니 종내에는 그의 전신을 모두 감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 기현상도 그 뒤에 발생한 사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백색 기류에 싸여 있던 영호걸의 몸에서 금빛광채가 은은히 발산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금광(金光)은 점점 색채를 더해가 잠시 후에는 눈이 부실 정도가 되었다. 그로부터 약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 토굴 안의 정경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백색기류도, 금빛 광채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변화란 변화는 일체 영호걸의 체내로 귀일되어 버린 것이었다. "아! 이것이다." 그는 바야흐로 전신에서 진력이 샘솟듯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벅찬 희열과 만나고 있었다. 내공 수위가 일약 백 년으로 떠오르게 된 그는 감동에 가까운 그 기분을 빌어 뇌정도를 뽑아 보았다. 스르릉--! 다음 순간, 단지 심기(心氣)를 발동했을 뿐인데도 그의 몸에서는 기변이 일어났다. 강맹한 열기가 치솟더니 온몸을 돌아 어깨를 타고 막바로 뇌정도를 거머 쥔 합곡혈(合谷穴)에 모인 것이었다. '이럴 수가!' 영호걸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곧 뇌정심법의 진보를 나타내는 현상으로서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차원이었다. 그는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흡사 연기처럼 토굴을 빠져 나갔다. 숲의 한가운데. 영호걸은 그곳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서서히 뇌정도를 치켜들며 주위의 거목들을 둘러 보았다. 곧 그의 입에서 짤막하고도 낭랑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뇌살(雷殺)!" 푸른 섬광이 줄기줄기 일어나 사방으로 분산되어 날아갔다. 이와 동시에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우르르-- 꽈앙--! 그것은 바로 뇌정도에서 뻗친 수백 줄기의 섬광이 그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섬광이 숲 속을 휘돌자 주위의 거목들은 모조리 숯처럼 타서 쓰러지고 말았다. "오오! 설마 하니 이 정도일 줄이야......." 영호걸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 아연실색 했다. 비록 풍뢰구도가 단혼일도보다 한 단계 아래라고는 하나 뇌정심법이 바탕이 되니 그 내용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더우기 영호걸의 뇌정심법은 이제 십성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 만일 그가 뇌정심법의 십이성 경지에 오른다면 또 달라지리라. 뇌정도에서 뻗치는 섬광만으로도 근처 수십 장 안의 모든 생명을 능히 멸절시킬 수 있었다. 영호걸은 숯이 되어 버린 거목들을 보며 기소를 흘렸다. "후후후... 천성대제 유화성 나으리, 기다리시오." 그제서야 그는 그토록 자신을 조이던 초조감에서 완전하게 해방될 수가 있었다. 해변(海邊). 검푸른 파도가 해변의 바위와 조우하고 있었다. 바위의 날카로운 이빨들이 밀려 드는 파도를 물어 뜯으려 덤비지만 파도는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한 움직임을 통해 오히려 끈기있게 바위를 깎아 내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렇듯 기암절벽은 수만 년에 걸친 파도와 풍상에 패인 나머지 기괴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절벽 안에는 수천 년 묵은 소나무가 웃자라지 못한 채 바다 쪽으로 비스듬히 가지를 뻗고 있었다.


절벽 옆으로는 나직한 구릉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구릉을 지나면 넓고 평평하여 자갈과 모래가 깔린 곳이 나온다. 파도는 전반적으로 온순한 편이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더 그랬다. 그저 스르르 밀려와 자갈과 모래 사이로 물거품을 밀어 넣고는 이내 스르르 달아나 버리곤 했다. 이 해변에 한 명의 백의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잠시 멈추어 서서 바닷물에 발끝을 적셨다. 아니, 파도가 다가와 그를 슬며시 희롱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머나먼 수평선을 향한 그의 눈에서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바다 저편에서 흰구름이 뭉클뭉클 피어 오르고 있었다. 검푸른 바다 위에는 한 척의 배도 떠 있지 않았다. 아름다우면서도 일면으로는 매우 고독한 정경이었다. 그것을 동공에 담고 있는 그 백의청년은 바로 영호걸이었다. 이곳은 남해(南海). 그는 벌써 사흘 동안이나 근역을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은 물론 뱃길에 정통해 있는 어부들에게 물어 보아도 잠룡도의 위치는 끝내 알아낼 수가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가? 남해를 거의 다 뒤져도 잠룡도를 찾을 수가 없으니. 최소한 그 이름을 아는 자도 없었지 않은가?' 영호걸은 사실 풍경에 취해 있으면서도 줄곧 한심한 기분만은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잠룡도라는 섬 자체가 붕괴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다. '대체 어디에 가서 잠룡도를 찾아야 한단 말인가?' 그가 이렇듯 막막한 심정으로 읊조리고 있을 때였다. 칠순 가량된 한 노인이 어깨에 그물을 멘 채 언덕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흐음?' 영호걸은 노인의 걸음걸이에서 순간적으로 무인(武人)임을 알아 보았다. 그는 언덕을 향해 몸을 날리며 크게 외쳤다. "잠깐 서십시오! 노인장." 노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를 돌아다 보았다. "무슨 일이오? 공자." 영호걸은 한눈에 노인의 기도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느꼈다. 늙기는 했으되 신색이 정명했으며, 눈빛은 더없이 형형했다. 영호걸은 포권지례를 취하며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노인장께 한 가지 여쭙고 싶어 청했소이다." "그럼 말해 보시오, 아는 일이라면 답해 드리리다." 노인의 어투 역시 예의 바르고 무게가 있었다. 영호걸은 노인에게 시선을 둔 채 손을 들어 바다 쪽을 가리켰다. "이곳 남해에 오면 잠룡도라는 섬이 있다던데, 도시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아시거든 좀 가르쳐 주십시오." "잠룡도!" 같은 말을 되뇌이는 노인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쩍 빛을 발했다. 그는 한동안 영호걸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물었다. "공자는 무엇 때문에 잠룡도를 찾으려 하시오?" 영호걸은 간략하게 대꾸했다. "그것은 꼭 들러야 할 일이 있어서 입니다." 그러자 노인은 뜻밖에도 굳이 그 이유까지 캐물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는 없소?" 이쯤 되자 영호걸도 짚히는 바가 있었다.


'으음, 이 노인이 필경 잠룡도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죄송하지만 그 이유를 당장 알려 드릴 수는 없소이다. 그 대신 한 가지 보여드릴 것은 있습니다만......." 영호걸은 곧 품 속에서 잠룡령을 꺼내 노인에게 내밀었다. "바로 이것이외다." "헉!" 노인은 질겁을 하여 잠룡령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런 그의 노안(老眼)에는 믿을 수 없게도 금세 습막이 번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약과였다. 노인은 정신이 든 듯 안면 근육을 한 차례 푸르르 떨더니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자 장우진(張雨鎭), 도주를 뵙습니다." 16 장 잠룡도(潛龍島) ① 영호걸이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아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서 일어 나십시오, 장노인." 그는 말 뿐이 아니라 실제로도 장우진이라 이름을 밝힌 노인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럼......." 장우진은 그때까지도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일어섰다. "이것이 잠룡도의 영패입니까?" 영호걸의 물음에 장우진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또한 잠룡령이 현신한 곳에 잠룡도주가 계신 것은 도내의 오랜 관행입니다." 영호걸은 잠룡령을 거두고는 빙긋 웃었다. "아무튼 좋소이다. 도주라는 지고한 신분까지는 어불성설이고, 저는 단지 잠룡도의 위치를 아는 것으로 족합니다." 장우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좌우로 저었다. "아니, 그러시면 안됩니다." 그는 뭔가 말을 할 듯 하다가 이내 화제를 바꾸었다. "제자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는데, 그것을 여쭈어도 될지......?" "물론이외다, 장노인." 영호걸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용기를 얻었는지 장우진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격동의 기색이 역력했다. "제자가 알기로 그 잠룡령은 전도주(前島主)께서 지니고 계셨었는데, 어떻게 승계를 하게 되셨는지......." 말끝을 흐리는 그에게 영호걸은 분명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소생은 도주 자리를 승계한 것이 아니오. 다만 그 분의 부탁을 받고 잠룡도를 방문하려던 것 뿐이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우진은 신중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그 경위를 제게 들려줄 수는 없겠습니까?" "그러겠소이다. 숨길 일도 아니니......." 영호걸은 이어 장우진에게 잠룡도주와 만났을 당시의 일을 차분히 얘기해 주었다. 우연히 만엽장독이 퍼져 있는 숲 속의 토굴에서 해골 한 구를 발견한 일로부터 그에게 잠룡령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일 등이었다. 그러나 마혜수라경에 관한 사항만은 의도적으로 빼놓았다. 그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중원에서 파생된


불씨를 잠룡도로 옮겨가는 행위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마혜수라경은 잠룡도와는 무관한 물건이었다. 그것은 잠룡도주가 영호걸에게 직접 건네준 것이나 진배 없었다. 어쨌든 장우진은 영호걸의 얘기를 듣는 동안 수없이 안색이 변했고, 급기야는 허공을 향해 장탄식을 터뜨렸다. "아! 삼십 년 동안 도주께서 자리를 비우셔서 이상하게는 여겼지만 설마 하니 그처럼 비참하게 운명하셨을 줄이야......." 그의 주름진 뺨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영호걸이 보다 못해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장노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오이다. 그 분과 이렇다 할 인연이 없었던 소생도 그 분을 안장해 드릴 때에는 비감에 젖기도 했었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생사화복이 어디 의지대로 조종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만 진정하십시오. 과거로 인해 상심하다가 자칫 현재를 그르치실까 걱정됩니다." 그 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현재의 일......." 장우진은 나직하게 되뇌이더니 소매로 눈가를 말끔히 씻어 안색을 회복했다. 그는 이어 영호걸을 향해 허리를 굽혀 보였다. "자, 이제 저를 따라 오십시오. 잠룡도로 안내하겠습니다." 그의 돌연한 변화에는 영호걸이 오히려 놀랄 지경이었다. "고맙소이다." 장우진은 앞장 서 휘적휘적 해변으로 걸어 나갔다. 영호걸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한 채의 석옥(石屋). 그것은 해변의 기암괴석 뒤에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석옥의 기둥에는 한 척의 목선이 밧줄로 묶인 채 바다에 떠 있었다. "이 배를 타십시오." "알겠소이다." 장우진은 영호걸이 배에 오르기를 기다려 설명해 주었다. "이 배와 석옥은 잠룡도의 사람들이 생활용품 구입을 위해 마련해 둔 것입니다. 특히 석옥에는 잠룡도의 인물들이 교대로 임무를 띠고 와 머물렀다 가곤 합니다." "그럼 이번 임무 수행자는 장노인이셨겠구려?" "그렇습니다. 잠룡도에서는 대개 물품들을 자급자족하지만 몇 가지 물건은 섬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수시로 이 배로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말씀대로 이번에는 제 차례였지요. 아마도 운이 좋아 도주를 뵈려고 일이 그렇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영호걸은 도주라는 호칭을 듣자 눈썹을 불쑥 치켜 올렸다. 그러나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 장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노부는 엎드려 간청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오." 느닷없는 말에 영호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엇을 말씀입니까?" "자, 우선은 배를......." 장우진은 배와 석옥을 연결시키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 배는 밧줄만을 남긴 채 곧바로 두 사람을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 비록 망망대해를 오가기에는 작은 배였으나 바람을 받자 미끄러지듯 전진하고 있었다. 의외의 순항(順航)이라고나 할까? 장우진이 입을 뗀 것은 이 모든 것이 정비되고 난 후였다. "공자께서는 도주라고 불리우는 것이 정녕 싫소?"


영호걸은 아까부터 장우진의 어투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점에 대해 아무런 반감도 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로서는 필요 이상의 경어보다 훨씬 편했다. "무슨 뜻입니까? 소생은 잘 알아 듣지 못하겠소이다." "미안하오. 그러고 보니 노부의 말이 너무 일방적이었구려." 장우진이 민망한 듯 웃어 보였으나 그의 안색은 어찌 된 영문인지 무척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탄식과 더불어 어렵사리 말을 이어갔다. "사실 잠룡도는 현재 위기를 맞고 있소." "흐음?" 어리둥절해 하는 영호걸을 향해 장우진은 계속하여 무거운 음성을 전해 왔다. "하긴 도주께서 실종되신 지도 벌써 삼십 년이 지났으니 무리도 아닐 것이오. 지금 잠룡도에서는 공석인 도주 자리를 놓고 두 명이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소." "그 말씀을 왜 제게 하십니까?" 장우진은 심각한 기색이 되어 영호걸의 눈을 직시했다. "공자께서 잠룡도주의 신물인 잠룡령을 가지고 있으니 최소한 도주의 계승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영호걸은 고소를 지었다. "후후... 잠룡도의 도주 자리는 그렇게 허술한 자리였습니까? 우연히 알게 된 자까지 개입시킬 정도로 말이외다." 그러자 이번에는 장우진이 기이한 미소를 보였다. "물론 지금까지는 그런 적이 없었소.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노부도 반 시진 전에야 깨달았소." '끙! 졌다.'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노부는 공자께서 잠룡령을 빌어 섬을 평정해 주기를 앙망하고 있소." "제게 과연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물론이오. 노부가 다른 것은 몰라도 안목 하나만은 자신하오. 노부는 우선 잠룡령을 가지고 이 남해에까지 온 것으로 미루어 공자의 인품을 짐작했소. 아울러 공자의 기도로 보건대 일대 기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소." "그만 하십시오. 얼굴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소이다." "후후... 유감스럽게도 한 가지가 더 남아 있소. 장담하건대 노부가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얘기를 듣고 나면 공자는 절대로 청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장우진은 눈썹을 모았다. "잠룡도에서 도주의 직위를 놓고 싸우는 두 사람은 모두 야망이 대단한 위인들이오. 그 중 누가 도주가 되느냐는 실상 별개의 문제이고, 큰 걱정거리는 따로 있소이다. 그들은 잠룡도의 고수들을 이끌고 중원무림을 치려 하고 있소." "뭐, 뭣이?" 영호걸은 대경했다. 그런 사태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그였다. 장우진이 그런 그의 표정을 살피며 다시 말했다. "그렇게 되면 중원무림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잠룡도 측도 엄청난 희생을 치뤄야 하오. 바로 그때문에 노부가 공자께 이렇게 간청하고 있는 것이오." 영호걸의 눈에서 불현듯 기이한 광망이 발산되었다. "장노인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듣고 보니 소생도 뒤로 물러나 구경만 하고 있을 입장은 아닌 것 같소이다." 그 말에 비로소 장우진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고맙소. 허허허... 이 장모는 진즉부터 공자께서 그렇게 나와 주리라고 믿고 있었소." 영호걸은 난색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런데 소생이 꼭 도주가 되어야 합니까? 잠룡도에도 중원 못지 않게 뛰어난 인물들이 있을 것인즉, 다른 사람을 골라 추대하는 것이 옳지 않겠소이까? 더구나 소생은 출신도 그렇고......." 장우진이 그의 말을 중도에서 잘랐다. "그 점은 염려 마시오. 전대 도주께서도 완전한 잠룡도인은 아니셨소. 모친께서 중원인이셨으니까. 또한 잠룡령을 가지고 있는 한 공자의 자격이면 충분하고도 남소." "으음, 정말 장노인께는 못당하겠구려." 영호걸은 가벼운 신음과 더불어 잠시 상념에 잠겼다. '생각지도 않게 인연이 얽히는구나.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다시 얻기 힘든 기회인지도 모른다. 내가 도주가 된다면 결국 내게도 하나의 세력이 생기는 셈이고, 그렇게 되면 훗날 중원에 나가 유화성과 자웅을 결할 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윽고 그는 장우진을 향해 자못 엄숙한 음성으로 물었다. "장노인, 도주 자리를 놓고 쟁탈전을 벌인다는 그 두 사람은 어떤 자들입니까?" 장우진은 그대로 탄성을 발했다. "오오! 그럼 승락하시는 것이오?" 영호걸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비록 힘과 재주, 양면이 모두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소이다." "정말 감사하오, 공자. 잠룡도에서 뿌리를 내린 수천여 명 가족들을 위해 이는 너무도 다행한 일이오." 영호걸은 손을 저어 그의 말을 중단시켜야 했다. "후후... 그런 말은 무엇이든 성과가 있은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어서 그 두 명이 어떤 위인들인지나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소, 노부가 흥분하여 그만......." 장우진은 신색을 가다듬더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 두 명은 도내에서 손꼽히는 고수들이오. 그 중 한 명은 현우신검(玄羽神劍)이라고 하며, 다른 한 명은 천심일기생(天心逸奇生)이라는 자요. 그리고 무공도 그렇지만 지략 면에서도 그 동안 이 두 사람을 능가할 자가 없었소." "음, 그들의 외견상 특징은 어떻소이까?" "현우신검은 항상 현의(玄衣)를 입고 있으며 검을 사용하오. 그 자는 이미 검강(劍 )까지 터득한 초절정고수요." "검강이라......." 영호걸은 침음성을 흘려낸 후, 다시 물었다. "그럼 천심일기생은......?" "그 자는 무기로 섭선을 쓰오. 겉으로는 사십대 쯤의 중년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구십을 넘긴 자요. 따라서 그 자가 지닌 무공의 깊이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바가 없소." 장우진은 그들의 신체적인 특징까지도 덧붙이고는 그 뒤로 간략하게나마 잠룡도의 내력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었다. 영호걸은 그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경청했다. ② 꼬박 하루가 지났다. 영호걸과 장우진, 의기가 투합된 이 두 사람은 배 안에서 함께 밤을 지냈으며 아침 역시도 배 안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이윽고 수평선 상에 한 개의 섬이 나타났다. 장우진이 손을 들어 그 섬을 가리켜 보였다. "도주, 저것이 바로 잠룡도입니다." 그의 말투는 다시 싹 바뀌어져 있었다. 영호걸도 이제는 그것을 심중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하루 사이에 그는 잠룡도의 방문객으로부터 신임도주로 탈바꿈해 버린 것이었다. 영호걸은 섬을 눈여겨 보는 한편,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수평선 위에 길게 늘어서 있는 그 섬은 문자 그대로 마치 한 마리의 용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었다. "잠룡도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곳이군." "그렇습니다, 도주." 장우진의 눈에서는 기이한 광망이 일고 있었다. 그것은 언뜻 느끼기에도 모종의 도전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듯 했다. 그로부터 약 일각이 흐른 후. 그들을 태운 배는 마침내 잠룡도의 도선장에 당도했다. 닻을 내리자 오십대쯤 되어 보이는 뚱뚱한 노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장우진을 향해 공손히 읍을 취했다. "장장로(張長老)께서는 오시려면 아직 보름이나 더 남았는데, 무슨 일로 이렇게 빨리 돌아오셨습니까?" "음, 몹시 화급한 일이 생겼네. 지금 장로청(長老廳)에 가면 장로들을 곧바로 만날 수 있겠는가?"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모두 그곳에 계실 것입니다." "그럼 현우신검과 천심일기생은?" 그 한 마디에 뚱뚱한 노인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안색이 일변했다. 그는 새삼 주위를 둘러본 뒤,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분들은 연일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어찌나 험악한지 그야말로 양자가 일촉즉발의 상태입지요. 장로청에서도 전전긍긍하며 관망하고 있는 중입니다." "으음......." 장우진은 답답한 듯 침음성을 흘렸다. "그런데 이 분 공자는 누구십니까?" 노인이 묻자 그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음, 곧 알게 될 것이네. 일단은 귀하신 분이라는 것만 기억해 두게. 그럼 나는 먼저 장로청으로 가 보겠네." 장우진은 말을 마치자 영호걸을 이끌었다. "가십시다." 그의 공손한 태도에 뚱뚱한 노인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저 젊은이가 대체 누구길래, 평소 그다지도 고고하시던 장장로께서 저렇듯 쩔쩔 매실까?' 장우진과 영호걸. 두 사람은 섬 깊숙이 진입해 들어갔다.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장우진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한결같이 공손한 그들의 태도를 보자 영호걸은 내심 느끼는 바가 적지 않았다. '장노인이 잠룡도의 장로 중 한 명이라는 것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생각 외로 두터운 지지층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는 그만치 그가 도내에서 신망을 얻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는 이미 장우진으로 인해 보이지 않게 수 차례나 감탄한 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런 생각에서였다. '장노인이야말로 진정한 잠룡도인이다. 설사 내가 도주가 된다 한들 그의 충심(忠心)만은 결코 따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두 사람은 섬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목조건물 앞에 이르러 있었다. 그 건물은 중원의 건축양식과는 틀렸으나 대체로 대전(大殿)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대전의 입구를 지키는 두 장한의 복색(服色)도 역시 중원과는 판이했다. 섬이므로 주업이 어업인즉 어부차림인 것이야 그렇다쳐도 거기다 무기를 차고 있으니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공손한 태도만은 중원의 예법에 못지 않았다. 그들은 다가오는 두 사람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속하들, 장장로를 뵙습니다."


"음, 수고가 많네." 장우진은 격려의 말과 함께 그들은 지나쳐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영호걸을 호위한 채. 대청(大廳). 대전 안에 마련되어 있는 일종의 회의석상이다.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탁자가 길게 놓여 있었으며, 그 주위로 품위 있어 보이는 일곱 명의 노인들이 배석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바로 잠룡도의 장로들이었다. 장우진이 들어서자 그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반색을 했다. "오! 장장로, 언제 오셨소?" "반갑소." 장우진은 그들에게 간단한 인사로 답례를 한 뒤, 묵묵히 서 있는 영호걸을 돌아다 보았다. 이어 그는 장로들을 향해 마치 선언이라도 하듯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장로 여러분들께 이 장우진이 귀하신 분을 소개하겠소." 일곱 장로들은 그 말에 시선을 하나로 모아 영호걸을 주시했다. 그들은 백의를 걸친 이 젊은이의 풍모에 저마다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우진의 음성은 그들을 충격으로 몰고 갔다. "이 분은 본 잠룡도의 신임 도주시오." "뭐, 뭣이?" 장로들은 하나같이 아연실색 하여 장우진을 쳐다 보았다. "아니, 장장로!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논의도 없이 누가 그런 결정을 내렸소?" 힐난에 가까운 질문들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상황이 워낙 납득할 수 없는 것이고 보니, 그들은 잠시 체신도 잊은 듯 웅성거리며 장우진의 대답을 촉구하고 있었다. "조용히들 하시오!" 장우진은 그들을 진정시킨 후, 침착하게 영호걸의 존재에 대해 설명을 했다. 특히 그가 역점을 둔 것은 아무래도 영호걸이 잠룡도주의 신물인 잠룡령을 소지하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아! 그런 일이......." 장로들은 크게 동요했다. 그들은 실종되었던 전대 도주의 죽음을 애도해마지 않는 한편, 반포기 상태였던 잠룡령의 현신으로 인해 복잡한 감회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장로라는 신분에 걸맞게 품격을 지키며 살아온 그들이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안정을 되찾아 갔다. 와중에서 한 장로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잠룡령의 권위야 예로부터 절대적이오만....... 야망에 눈이 뒤집힌 그 두 명의 위인들이 과연 쉽게 수긍하려 들지 모르겠소." 장우진이 냉소로써 그 말을 받았다. "어림도 없소! 그들이 무엇이건대 잠룡령을 거스른단 말이오?" 그러자 장로 중에서 다른 한 명이 나섰다. 그는 흰 눈썹이 관자놀이까지 길게 뻗쳤으며, 매우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장장로, 문제는 역시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무력(武力) 아니겠소?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그들의 뜻에 따라 질질 끌려 오다시피 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때문이었소. 그러니 이제 와서 대립하게 되면 향후의 일을 책임질 자는 아무도 없소." 장우진이 날카롭게 응수했다. "백미장로(白眉長老)! 당신의 그 미온적인 태도야말로 그들을 돕는 것이 되오. 내 전에도 누차 말했지만 우리들이 그렇게 겁을 먹고 있으니 그 자들이 더 기세를 올리는 것이 아니오?" "그럼 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이 한 목숨 바쳐 일이 해결된다면 차라리 그렇게 하겠소이다."


백미장로의 음성이 절망을 띠어가는 찰나, 영호걸이 나섰다. "여러분! 잠깐만 저를 보아 주십시오." 장우진을 포함한 여덟 장로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영호걸은 그들을 향해 담담하게 물었다. "그들 두 명의 무공은 어느 정도의 수준이오?" 장우진이 탄식하듯 대답했다. "우리 장로회는 도합 열두 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우신검과 천심일기생도 역시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장로의 일원이외다. 그러나 그들의 무공은 우리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강합니다." 백미장로가 쓴 입맛을 다시며 끼어 들었다. "무(武)로써 그들을 꺾지 않는 한 누구라도 그들로부터 도주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할 것이외다. 부언하자면 그들을 굴복시켜야만 진정한 잠룡도의 통합을 이룰 수가 있소이다." 영호걸은 그 말에도 역시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백미노인께 소생이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겠소?" "말씀해 보시오." 백미장로는 눈에 의문을 담고 있으면서도 고개만은 끄덕여 주었다. 영호걸은 빙긋 웃어 보인 후,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 그들 중 한 명이 백미노인과 정면으로 대결을 벌인다면 그 결과는 어떨 것 같소이까?" 백미장로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것은 매우 거북한 질문으로서, 그를 난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끄럽소만, 그렇다고 무엇을 숨기겠소? 허허... 노부는 그들의 손에서 잘 해야 이십 초 정도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오." 그는 장우진을 바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장장로라면 적어도 백여 초까지는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장장로." 장우진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순한 비무가 아닌 이상 그런 싸움에서의 패배란 곧 죽음이다. 따라서 일단 패하게 된다면 이십 초 후나 백 초 후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심중을 읽어낸 영호걸은 눈썹을 약간 치켜 올렸다. "음, 그들의 위협이 그 정도였소? 그런데 말이오. 만일 내가 그들을 격퇴시킬 수 있다면 어찌 될 것 같소이까?" 백미장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불가능하오." 그의 단정적인 말에 영호걸은 고소를 지었다. "후후후... 그러니까 만일이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백미장로의 미간이 슬쩍 찌푸러 들었다. "웬만하면 공허한 논법은 자제하는 편이 좋지 않겠소? 모두 심기가 상해 있는 판국이니......." 그것은 은근한 질책이었다. 하지만 영호걸로서는 그런 말을 들었다 해서 무력하게 주장을 멈추어 버릴 이유가 없었다. "소생의 말이 공허하게 들렸다면 표현을 정정하겠소이다. 만일 내가 당신을 이십 초 안에 이기면 어찌 되오이까?" "뭣이?" 백미장로는 흰 눈썹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상대방을 억누르려다 되당한 것도 그렇지만 특히 내력도 모르는 젊은 청년으로부터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자 그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나머지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장로 중 한 명이 그런 식으로 취급된다면 자신들도 역시 동일선상에 올려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호걸은 이렇듯 험악하게 돌아가는 분위기 속에서도 일체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음성은 여전히 장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각 장로들의 귀로 전해졌다.


"그렇게 노하실 것이 아니라 직접 확인해 보시면 어떻겠소? 사실상 본인이 시급하다고 여기는 것은 여러분의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잠령도의 명령체계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외다. 그리고 나는 단지 가장 빠른 방법을 제시했을 뿐이오." 백미장로가 그 말의 의미를 알아 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듣고 보니 지당하신 말씀이오." 그가 이렇게 나오자 나머지 장로들도 이의를 달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똑같은 바램을 가지고 신임도주를 바라보게 되었고, 이는 백미장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디 이 늙은이를 이십 초 안에 꺾어 주시오." 이는 바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백미장로의 일언(一言)이었다. 대결(對決). 그것은 단지 표현일 뿐, 실제로는 영호걸이 거쳐야 하는 관문(關門)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백미장로와 대치를 이루고 서게 되자 내부로부터 일말의 자긍심이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미 잠룡도의 신임 도주가 되기로 작정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누구도 내게 반기를 들게 해서는 안된다. 최소한 내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는 한.......' 이렇게 되자 영호걸은 처음부터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즉 왼손으로는 비연추혼장을, 오른손으로는 금불장법을 전개해 백미장로를 사정없이 몰아 부쳤다. 쉭! 쉬쉭--! 백미장로는 그야말로 진땀을 뻘뻘 흘렸다. 그는 두어 초수를 나누어 보고는 벌써 상대의 무위(武威)를 알아 차렸다. 공격은 고사하고 수비만으로도 눈알이 핑핑 돌 지경이니 어찌 모르겠는가? 그는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한 채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영호걸이 천환삼식의 제이식인 환영섬전(幻影閃電)을 전개해 그의 양쪽 견정혈을 가격해 버린 것은 십삼 초 때였다. 퍼퍽! "욱!" 백미장로는 답답한 신음을 끝으로 종내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패배를 시인한다는 뜻이었다. 그 광경에 나머지 장로들은 안색이 일변했다. 장우진이 격정을 이기지 못해 잔뜩 흥분된 어조로 외쳤다. "과연 훌륭한 실력입니다! 그 정도면 능히 두 악도(惡徒)를 꺾고 잠룡도를 평정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영호걸은 그제서야 비로소 환하게 웃어 보였다. "고맙소이다. 장장로께서 그렇게 격려해 주시니 한결 힘이 솟는 것 같소이다." 백미장로 또한 만면에 희색을 띤 채 입을 열었다. "본 장로가 정식으로 신임도주께 인사 드리오이다." 그를 필두로 여덟 장로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영호걸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들 중 누군가가 기쁨에 찬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자! 여러분, 그럼 도주를 모시고 향후의 일을 상의합시다." ③ 드넓은 의사청. 한 흑의노인이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는 약 칠순 가량의 노인으로서 무척이나 차가운 인상이었다. 특히 한 일자로 꽉 다물린 입술에서는 왠지 비정함과 더불어 강한 아집이 묻어 나올 것만 같았다. 형형한 안광이 그가 최상승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한 자루의 검이 놓여져 있었다. 주인을 닮은 것일까? 고색창연한 그 검은 검집에 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줄곧 강한 예기(銳氣)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다른 한 명의 노인이 그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 노인은 팔순 정도 되어 보였으며, 눈에서 신광이 번뜩이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그 또한 내외공을 겸비한 절정의 고수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이 두 노인 사이를 지배하는 것은 깊은 침묵이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에 몰두한 채 서로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후자의 노인이었다. "한(寒)장로, 대체 장우진 그 작자가 갑자기 섬으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 것 같소?" 한장로라 불리운 흑의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묵비권(?)을 향해 앞서의 노인이 같은 맥락의 질문을 또 던졌다. "그것만 해도 수상쩍은데, 더우기 갑자기 장로회까지 개최한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소이다?" 흑의노인의 입이 비로소 열렸다. 약간 권태롭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의 음성은 생김새와 마찬가지로 냉막하기 그지 없었다. "노부도 그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소이다. 나름대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확실하오만......." 그들이 이처럼 이가 맞지 않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두 분 장로의 의문점에 대해서는 노부들도 동감이오." 또 다른 두 명의 인물이 의사청 안으로 천천히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한 노인과 중년서생이었다. 중년서생은 사순 정도로 보였으며, 수중에 금빛 섭선을 들고 있었다. 무척이나 청수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이들이 나타나자 흑의노인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래, 만(萬)장로께서는 달리 아는 바라도 있소?" 내용은 그렇지 않되 말투만은 그다지 호의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장로라는 중년서생은 흑의노인의 그런 어조에 익숙해 있는지 조금도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는 되려 빙긋 웃었다. "노부라고 별 수 있겠소이까? 한장로께서도 아시다시피 장우진은 항상 앞뒤를 경계하며 행동하는 자인지라 속을 들여다 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오." 그는 좌중을 쓰윽 둘러 보며 말을 이었다. "장로청 요주의 인물, 후후후... 그 자만 다스릴 수 있다면 나머지 인물들은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지. 그렇지 않소?" 만장로는 스스로 의자를 당기더니 걸터 앉았다. 그는 어투도 그랬지만 몸가짐에서도 상당히 여유가 느껴졌다. 그는 같이 들어온 노인을 향해서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권했다. "엽(葉)장로께서도 어서 앉으시오." "아, 그러지요." 노인이 얼른 대답하며 그의 옆에 앉았다. 직위로 치자면 동급인데도 두 사람의 태도에서는 기이하게 수직적인 관계가 느껴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장로가 냉소를 흘렸다. "클클......." 나지막한 그 웃음 소리에 의사청 내의 공기는 삽시에 얼어 붙고 말았다. 특히 엽장로는 눈에 띌 정도로 안색을 일그러뜨렸다. 이는 곧 이들 네 명의 묘한 알력을 대변해주는 한 장면이었다. 덜컹! 의사청의 중앙에 부착된 제일문(第一門)이 오랫만에 열렸다. 그것은 막바로 내전으로 통하는 문으로서, 주로 역대의 잠룡도주들이 수행을 거느린 채 드나들곤 했었다. 그 문을 통해 아홉 명의 인물들이 의사청 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영호걸을 앞장 세운 여덟 명의 장로들이었다.


영호걸. 그의 출현은 단번에 의사청의 분위기를 일신시켰다. 그는 눈부신 백삼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 뢰(雷)자가 짙은 청색으로 선명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흰색과 청색의 대비가 가져다주는 산뜻한 느낌이 그의 준수한 용모와 매우 잘 어울려 보였다. 머리에 쓰고 있는 문사건(文士巾)도 역시 흰색이었다. 이마에 취록색 둥근 옥이 박혀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그 모습은 한 마디로 찬탄이 절로 우러나올 정도의 미장부(美丈夫)였다. 게다가 왼손에는 뇌정도를 비껴 들고 있어 단아한 가운데서도 무인(武人) 특유의 기개가 연상되기도 했다. 장내에 있던 네 장로들 모두가 은은하게 놀라는 빛을 보였다. 내심이야 어떻든 그들 또한 하나같이 기남자(奇男子)이자 타고난 무골(武骨)들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정체불명의 미청년을 두고 자신들의 지난 날을 반추하는지도 몰랐다. 동시에 그들은 저마다 한 가닥 의구심을 느꼈다. '저 청년은 대체 누구길래 저 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온 것일까?' 어쨌든 분명한 것은 영호걸을 대하는 그들의 안색이 그리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자! 모두들 자리에 앉읍시다." 장우진이 영호걸에게 자리를 권한 후, 단정하게 착석했다. 그러자 나머지 일곱 명의 인물들도 차례로 자리는 찾아 앉았다. 이윽고 장우진이 엄숙한 신색으로 입을 열었다. "다들 짐작은 하셨겠지만 노부가 이렇듯 예고도 없이 서둘러 임시장로회를 개최하게 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였소이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좌중을 한 차례 돌아 보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장로의 냉막한 표정과 만장로의 입가에 매달린 뜻모를 미소가 유독 신경��� 거슬리는 그였다. '이제부터는 너희들도 별 수 없을 것이다. 잠시 후면 대세의 판도가 뒤집어질 테니까.' 하지만 그는 내심을 감춘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본 잠룡도는 도주의 직위가 공석이 된 지 오래요. 전대 도주께서 중원으로 나가신 지 어언 삼십 년이 지났소이다. 또한 그 분의 소식이 끊긴 것만도 벌써 수삼 년 째요." 그 말에 중인들은 모두 침음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좌우간 우리는 삼십여 성상을 기다려 왔소이다. 그러니 더 이상은 도주 자리를 비워 둘 수 없다는 것이 노부의 생각이오." 한장로가 기민한 반응을 전해 왔다. "서론은 그만하면 되었고, 어서 본론을 말해 보시오." 그 순간, 영호걸의 귀로 한 가닥 전음이 들려왔다. (도주, 저 자가 바로 현우신검 한원성(寒元星)입니다.) 그것은 백미장로의 음성이었다. 영호걸은 여전히 시선을 전면에 둔 채 고개만을 가볍게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인물도 역시 십이장로 중 한 명이며, 한장로를 추종하고 있습니다. 백의마자(白衣魔子) 여필강(余必强)이라고 하지요.) 영호걸의 입술이 은밀하게 달싹였다. 그 역시도 전음술(轉音術)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음! 그다지 영민해 보이는 인물은 아니구려.) (그렇습니다. 한원성도 당장 필요하니 그를 부리기는 하나 대체로 무시하는 편입니다.) (후후... 재미있는 관계로군.) 백미장로는 입가에 미소를 드리우며 연이어 전음을 보냈다. (저 중년 쯤으로 보이는 인물이 천심일기생 만풍우(萬馮雨)입니다. 저렇게 늘 손에 섭선을 들고 있지요.) (맙소사!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구려. 저 자의 나이가 정말로 구십 세가 넘었소?)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의 회춘비술(回春秘術)에 대해서는 속하도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후후후... 원하신다면 내 백미장로께는 더 좋은 방도를 알려 드리리다. 그 방면에 약간의 식견이 있소.) (클클... 그것만은 사양하겠소이다, 도주.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 이 늙은 종복(從僕)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백미장로는 웃음기를 외부로 드러내지 않으려 안면을 괴상하게 굳힌 채 말을 이어갔다. (그 옆의 위인도 십이장로 중 한 명으로서, 만장로의 추종자입니다. 사천호(思天瓠) 엽호준(葉瓠俊)이라고 하는데 끔찍한 자입니다. 계략에 능하고 간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지요.) (그래도 만장로에게는 꽤나 충성스러워 보이는구려?) (그렇습니다. 가히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으음, 어쨌든 고맙소이다. 백미장로.) (별 말씀을.......) 전음으로 오가던 대화는 여기서 끝을 맺었다. 그때는 장우진과 현우신검 한원성의 묘한 눈싸움도 이미 막을 내린 후였다. 이윽고 영호걸의 귀에 꽂힌 것은 장우진의 웅후한 음성이었다. "노부가 원한 것은 이 따위 시시한 설왕설래(說往說來)가 아니외다. 노부는 벌써 신임 도주를 받들고 있는 상태요." 좌중에서는 금세 소요가 일었다. "뭐, 뭣이!" "어떻게 당신 임의로 그런 짓을......!" 그만치 장우진의 한 마디는 충격적이었고, 따라서 그 여파도 클 수 밖에 없었다. 백의마자 여필강이 따지고 나섰다. "장장로!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오? 혹시 그 간에 노망이라도 난 것 아니오?" 장우진의 응수는 그야말로 서릿발 같았다. "내 정신은 지극히 온전하니 염려해 주지 않아도 되오. 그리고 신임 도주 건은 개인의 발상이 아니라 노부를 포함한 여덟 장로가 의논하여 행한 일이외다." "대체 언제 그런 일이......?" 여필강의 의문은 장우진에 의해 그대로 일축되고 말았다. "본 장로회는 누대에 걸쳐 다수(多數)의 의견을 존중해 왔소이다. 이 점 양지하시어 네 분 장로께서도 우리 여덟 명의 결의에 따라 주시기를 희망하오." 천심일기생 만풍우가 실소를 터뜨렸다. "크ㅋ!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간 장장로가 섭정(攝政)이라도 하고 싶어하는 줄 알겠소이다." 그의 비아냥에 장우진은 냉소로 응했다. "노부는 자격도 없거니와 그런 욕심은 품어 본 적이 없소이다. 항상 그랬지만 본분에 충실하자는 것이 노부의 좌우명이오." 천심일기생의 눈썹이 불쑥 치켜 올라갔다. 그 말의 의미인즉 자신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주춤하는 틈을 타 현우신검 한원성이 나섰다. "그래, 당신의 그 훌륭한 좌우명을 실천하게 만드실 신임도주란 대체 어떤 고인(高人)이시오?" ④ 장우진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영호걸을 돌아다 보았다. "바로 이 분 공자시오." "뭐, 뭣이라고?"


현우신검 한원성과 천심일기생 만풍우의 안색이 똑같이 급변했다. 나머지 장로들도 물론 더 없이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받은 충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런 것을 두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하는 것일까? 그들 두 사람의 생각으로는 적어도 둘 중 하나가 도주의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삼십 년 가까이 들여왔던 공이 아까워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일면으로 그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허허허... 장장로, 노부는 가서 귀를 씻고 와야겠소. 아무래도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소이다." 만풍우가 웃은데 이어 한원성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장장로께서는 평소에도 중원을 선망하더니만 이제는 도를 넘어선 모양이구려. 아무리 중원인이라 해도 저런 애송이를 데려다 도주로 모신다는 것은 좀 심하지 않소?" 만풍우가 곧 정색을 지으며 일갈했다. "장장로! 당신의 진실한 속셈을 밝히시오." "물론 그러리다." 장우진은 자신있게 답한 뒤, 영호걸을 향해 정중하게 요청했다. "도주, 어서 저들에게 영패를 보여 주시지요." "알겠소이다." 영호걸이 빙긋 웃으며 품 속에서 잠룡령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보자 한원성 등은 대경실색 했다. "아니, 어찌 저 자가!" 그러나 나머지 두 장로, 즉 엽호준과 여필강의 반응에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누가 도주가 되던 권위에 약한 그들이었다. "오오! 잠룡령이 현신하다니......." 두 사람은 놀라기는 했으되 경외감을 동시에 내비치고 있었다. 장우진은 이것을 미리 예상한 듯 재빨리 분위기에 편승했다. "이제 신임도주는 결정되었소이다. 누구든 이 결정을 어기려 드는 자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이오. 그런 행위는 잠룡령을 거스르는 것이며, 나아가서 조사의 유시를 위배하는 일이기 때문이오." 현우신검 한원성과 천심일기생 만풍우. 두 사람은 모두 넋을 잃은 채 망연자실해 있었다. 사태가 되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화해 버렸으니 그들인들 어쩌겠는가? 잠시 시간이 흐른 후. 현우신검 한원성이 입을 열었다. "으음, 신성한 잠룡령에 노부가 어찌 감히 거역하겠소? 하지만 한 가지 이의가 있소." 격정을 억누르느라 그의 음성은 은은히 떨려나오고 있었다. 반면에 영호걸은 여전히 담담한 신색으로 응수했다. "기탄없이 말씀해 보시오." "본 장로는 당신에게 이대로 복종할 수가 없소.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한들 그것은 잠룡령 때문이지, 당신을 향해서는 아닐 것이오. 혹시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있는지......?" "왜 없겠소이까? 본인도 실은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소. 신물을 핑계로 형식적인 예우나 받는 것은 나도 싫소이다." "으음, 좋소. 그럼 나를 꺾어 보시오." 영호걸은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신비한 미소를 담았다. "어떻게 말이오?" "무력(武力)으로." 이렇게 말하는 현우신검 한원성의 어조에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이를 느끼자 영호걸은 비로소 정색을 지었다. "정녕 그 방도면 당신도 나를 따라줄 수 있겠소?"


"물론이오." "좋소. 이의를 받아 들이겠소. 그리고 지금 나눈 말은 다른 장로분들께서도 모두 들었을 터인즉 증인이 되어 주시리라 믿소." 그 광경에 장우진을 포함한 여덟 명의 장로들은 각기 기쁨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바야흐로 잠룡도의 오랜 숙원, 즉 수뇌급 인물들의 화합이 이루어지려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영호걸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 본인의 치졸한 무공을 시험해 보시오. 무기는 어떤 것으로 하시겠소?" 한원성이 얼굴을 굳힌 채 수중의 검을 치켜 들었다. "노부는 구십 평생을 오직 이 검 한 자루와 함께 살아 왔소. 이 검으로 당신과 겨루고 싶소."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본인도 애도(愛刀)로 그대의 검을 맞아 보겠소." 그 역시 수중의 뇌정도를 들어 보였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 있을 한 바탕의 격전은 불가피한 일이 되어 버렸다. 한원성의 눈썹이 묘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의사청의 중앙부로 나가 대치를 이루고 섰다. "자! 노부가 먼저 공격하겠소. 조심하시오." 한원성의 검이 검집을 빠져 나왔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성이 전율을 불러 일으켰다. 이와 더불어 살벌한 검기가 사방으로 뻗쳤다. 그것을 본 영호걸은 내심 중얼거렸다. '음, 이 자의 검법은 흑살귀검보다도 한 단계 위다.' 이어 한원성의 검기가 전신대혈과 불과 일 촌 가량의 틈을 두었을 때였다. 갑자기 영호걸의 신형이 연기처럼 장내에서 사라졌다. 환영보법을 전개했으되, 마혜수라경 상의 아축신원보를 연구한 이래로 그는 좀더 새로운 경지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한원성의 검세도 찰나적으로 돌변했다. 쉬이익--! 그의 검은 흡사 영사(靈蛇)처럼 방향을 바꾸더니 막바로 영호걸의 정수리를 베어 갔다. 영호걸은 흠칫 했으나 재빨리 수중의 뇌정도를 휘둘러 그의 일검을 맞이했다. "탁비!" 차앙--! 검과 도가 허공에서 격돌하며 무수히 불꽃을 튕겨냈다. '웃! 상상 이상이구나.' 영호걸은 가슴 한 귀퉁이가 써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단 한 차례의 접전으로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놀라기로 말하자면 한원성이 훨씬 더 했다. '말도 안된다! 지금 쯤은 저 애송이의 도(刀)가 가루가 되어 있어야 하거늘, 검강(劍 )이 통하지 않다니.......' 이른바 검강이란 검술에 있어서는 최상승의 경지이었다. 어검술(馭劍術)과 더불어 검객들이 추구하는 검술의 최후 단계인 것이다. 이 경지를 이룩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였다. 한원성도 현재 약 칠성 정도의 수위밖에는 정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수준에서도 그는 가히 무적(無敵)이었다. 이제껏 어떤 병기든 그의 검과 부딪치면 모두 산산조각이 나 버리곤 했었다. 한원성은 이런 전력을 빌어 이 일전에서는 아예 속전속결(速戰速決)을 단행했었다. 즉 처음부터


작정하고 검강을 펼쳐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호걸의 도에는 조금도 손상을 입히지 못했으니,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원성은 모르고 있었다. 뇌정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천하에서 가장 견고한 만년한철로 주조되어 있었다. 게다가 뇌정심법에 견딜 수 있도록 무려 수만 번에 이르는 단련을 거친 바 있었으므로, 설사 극성에 이른 검강일지라도 그것을 부러뜨릴 수는 없었다. 잠시의 침묵을 지나 다시 양측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급기야 영호걸은 마음을 정하기에 이르렀다. '괜한 시간 낭비는 신뢰도를 떨어 뜨릴 뿐이다. 보아 하니 이 자도 빨리 승부를 내려고 했던 모양인데......?' 쐐애애액--! 그의 면전으로 예리한 검기가 밀어 닥친 것은 그때였다. "차앗!" 영호걸의 신형이 한원성의 검을 비껴 허공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그는 뇌정심법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 뇌정도를 떨쳐냈다. "귀천! 영백--!" 두 가닥의 검광이 연속적으로 뻗어 나와 사위에 빛을 뿌렸다. 그것은 그야말로 대항을 불허하는 엄청난 기세였다. 우르릉-- 콰앙--! 천지개벽을 알리는 듯한 굉음이 의사청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이 사태에 한원성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싹 가시고 말았다. '이럴 수가!' 그는 단 두 가지의 도식으로 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사실 영호걸의 진전은 얼마 전 흑살귀검을 상대할 때와는 또 달라져 있었다. 특히 위력면에서는 천양지차라고 할 수 있었다. "헉!" 한원성의 입에서 다급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급히 검을 거두어 들이며 의사청 바닥으로 신형을 내던지고 있었다. 영호걸의 낭랑한 음성이 그의 고막을 아프게 쑤시고 들어왔다. "하하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이다." 이번에도 역시 희대의 절초들이 연이어 탄출되었다. "탁비(托飛)! 예마(刈魔)! 절명--!" 그에 따라 가공할 섬광이 뻗어 나와 한원성의 전신을 에워쌌다. 츠츠츠츠--! 뇌정도가 대기를 가르며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일으켰고, 그 바람에 뇌성벽력이 의사청을 완전히 한 차례 들었다 놓았다. 우르르르-- 콰쾅--! "으음......" 관전하던 천심일기생 만풍우가 신음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심 부르짖었다. '믿을 수 없다. 대체 어찌 이런 일이.......' 늘 초연(超然)으로 무장할 정도로 심기가 깊은 이 위인은 신임도주의 무공이 예사롭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그의 상상을 절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의사청 안을 가득 메우던 도광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어 드러난 것은 지극히 낭패한 한원성의 모습이었다.


"맙소사!" "아니, 저럴 수가?" 중인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경악성을 터뜨렸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 따로 없었다. 한원성이 걸치고 있던 흑의는 갈갈이 찢어져 너울거리고 있었고, 그 틈으로는 무참할 정도로 선혈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얼마나 충격을 입었던지 그는 눈동자가 풀어진 채 몽롱한 정신상태를 엿보게 하기도 했다. 그나마 영호걸이 손끝에 인정을 두지 않았더라면 한원성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필경 육신이 세밀하게 저며져 수십 개의 숯조각으로 화해 있을 테니까. 현우신검 한원성. 그는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설명하자면 영호걸은 최후 초식을 시전할 때 진기를 반 정도 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며, 한원성은 그 사실을 직접 몸으로 경험한 장본인이었다. 한원성은 비로소 눈 앞의 청년이 어떤 인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소위 대인(大人)의 풍도를 확인했다고나 할까? 그는 고개를 떨구며 단 한 마디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다. "졌소." 그는 철저하게 패한 것이었다. 무공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그를 굴복시킨 것은 영호걸의 드높은 기개라고 할 수 있었다. 영호걸은 뇌정도를 거두며 빙긋 웃었���. 그것은 사심(私心)이 일체 배제되어서인지 지극히 신선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향후로 잠룡도라는 섬을 일신시킬 젊은 영웅의....... "양보해 주셔서 고맙소이다." 영호걸은 말하고 난 뒤, 천심일기생 만풍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소? 만장로께서도 이 자리에서 시험해 보시겠소이까?" 만풍우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노부는 덕분에 안목을 넓힐 수가 있었소. 또한 그 동안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소." 그는 말을 마치자 즉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심일기생 만풍우가 신임도주께 인사 드립니다." 만풍우는 어투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무릎을 꺾어 보이고 있었다. 이런 그의 태도에 가장 기뻐한 것은 여덟 명의 장로들이었다. 장우진이 모두를 대신하여 호탕하게 웃었다. "핫핫핫... 한장로, 그리고 만장로, 노부 등은 삼십여 년 동안 줄곧 오늘같은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소이다. 이제야 비로소 잠룡도의 미래에도 서광이 비치는 것 같소." 한원성이 얼굴을 붉힌 채 쓴 웃음을 지었다. "고맙소. 신임도주가 깨우쳐주지 않으셨다면 노부는 아직도 도주의 직위와 더불어 중원정복의 망상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오." 만풍우도 그대로 있지 않고 한 마디 했다. "과연 중원땅은 넓기는 넓은 모양이구려. 도주와 같은 걸출한 인재를 길러, 황송하게도 본 잠룡도에까지 선사해 주니 말이오." "핫핫핫핫......." 분위기는 급전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기등등했던 의사청이 지금은 더없이 화기애애한 자리로 화해 있었다. 십이장로들은 지난 날의 반목을 일소에 붙이고 저마다 희열에 들떠 있었다. 아울러 그들은 이런 계기를 만들어준 자신들의 주군(主君)에 대해 내심 무한히 감사하고 있었다. 장우진이 감회를 이기지 못하는 듯 벅찬 음성으로 말했다.


"자! 우리 이제 잠룡도의 장로로서 신임도주의 취임식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백미장로가 호방한 웃음과 함께 그 말을 받았다. "허허허... 그야 여부가 있겠소? 삼십 년만에 우리 십이장로가 같은 마음으로 같은 일을 하게 되었구려." 17 장 혁신(革新)의 돌풍(突風) ① 이튿날 아침. 잠룡도는 섬 전체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바로 신임도주의 취임식이 거행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잠룡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넓은 광장(廣場). 수백 명의 무사들이 벌써부터 웅성거리며 신임도주의 즉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가운데서도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유지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무사들은 하나같이 전신에 은의(銀衣)를 걸쳤는데, 그들의 은의가 쏟아지는 조일(朝日)을 받아 현란한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정면으로 향해져 있었다. 그곳에는 가로와 세로가 각각 열자 가량 되는 하나의 목대(木坮)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목대 위에는 오, 륙십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인물들이 저마다 지정된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 숫자는 약 스무 명 안팎으로 한결같이 엄숙해 보이는 모습이었으되, 모두 흥분된 기색만은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옆사람들과 나직하게 말을 나누고 있었는데, 가끔씩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는 것도 아마 이때문인 듯 했다. 둥! 둥! 둥!...... 갑자기 웅장한 북소리가 울려와 그들의 웅성거림을 뒤덮어 버렸다. 이때, 누군가 한 사람이 환성을 터뜨렸다. "신임도주시다!" 그 말에 따라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쪽으로 향했다. 과연 그곳에는 한 명의 백의청년이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그야말로 신선같은 풍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소위 인중지룡(人中之龍)이니, 군계일학(群鷄一鶴)이니 하는 찬사들이 중인들의 입에서 쉴새 없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 그 말은 백의청년과 견주어볼 때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우선 절세의 미남인데다가 풍채 또한 비범해 보였다. 특히 감동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것은 그의 출중한 기상이었다. 그대로 말을 타고 나아가면 가히 천하를 질타할 듯한....... 그가 바로 신임 잠룡도주인 영호걸이었다. 영호걸은 고개를 움직여 중인들의 환호에 답례한 뒤, 목대에 마련된 커다란 태사의에 가서 앉았다. 그 뒤를 이어 열두 명의 장로도 각기 그의 후위에 마련된 의자에 착석했다. 식(式)을 주재할 인물은 장우진이었다. 그리하여 장우진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위는 금세 숙연하고도 경건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는 무사들을 돌아 보며 사뭇 감개무량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마침내 삼십 년 동안 기다린 보람을 얻게 되었소이다." 그의 음성이 가볍게 떨려 나오고 있었다. "바야흐로 새로운 도주를 모시게 된 것이외다." 그러자 무사들로부터 이구동성으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그 소리는 잠룡도를 떠내려 보낼 듯 우렁찼다. 이를 대한 장우진은 격동으로 인해 급기야 노안(老眼)에 눈물을 담았다. 그는 눈물을 감출 생각도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즉위식을 거행하겠소이다."


장우진은 하나의 상자를 열더니 그 속에서 잠룡령을 꺼냈다. 그는 신임도주에게 다가가 그것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다. "도주, 전 잠룡도의 이름으로 이 영패를 바치나이다." 영호걸은 묵묵히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지극히 겸허한 자세로 잠룡령을 받아 들었다. 그 순간, 환호의 물결이 또 한 번 잠룡도를 진동시켰다. "와아아--! 도주 천세(千歲)!" "잠룡불멸(潛龍不滅)--!" 영호걸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떠올린 채 그들을 향해 잠룡령을 번쩍 들어 보였다. 영패가 햇살을 받아 눈부신 빛을 발했다. "와아아아--!" 수백 명의 무사들은 환호성을 토해내는 것 외에도 거의 광란에 가까운 몸짓을 보이며 열광해마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자 영호걸은 내심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으음, 앞으로 내 책임이 막중하겠구나.' 그들의 기쁨이란 바꾸어 말하면 지난 삼십 년 동안 지도자 없는 고통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호걸은 그들의 환호를 접하게 되자 일면 뿌듯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들을 향한 의무감을 통감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잠룡정사(潛龍精舍). 이곳은 바로 역대 도주들이 기거했던 방사(房舍)였다. 물론 지금은 현임 도주인 영호걸이 사용하고 있었다. '으음, 잠룡도에 온 지도 어언 열흘이 흘렀구나.' 영호걸은 지금 호화롭게 꾸며진 방 안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눈은 활자를 훑고 있으되, 머릿 속은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이런저런 상념들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동안 잠룡도의 주요인물들을 두루 소개받았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잠룡도의 구석구석을 돌아 보며 풍물을 눈에 익혀 두었다. 이젠 눈을 감아도 잠룡도 전체가 그려질 정도였다. 사실 열흘이라는 기간을 영호걸은 정말로 바쁘게 보냈다. 이렇게 책을 붙들고 한가롭게 앉아 있는 것은 그간에 처음 있은 일로서, 그러다 보니 오히려 글자가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험! 도주, 안에 계십니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이어 그의 방으로 들어선 자는 장우진이었다. 영호걸이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장장로." 장우진은 훈훈한 미소와 함께 다가왔다. "도주께서 어쩐 일로 방 안에 계시는지 모르겠군요?" "후후... 평천하(平天下)도 일단은 수신(修身)이 먼저일진대, 이런 시간도 때로 필요해서요. 의지와는 달리 책이 도통 읽히지를 않아서 문제지만 말이오. 후후후......." 영호걸의 편한 어투는 늘상 장우진을 기쁘게 했다. 그래서일까? 그가 찾아온 이유인즉 바로 이런 것이었다. "속하, 감히 도주께 청하고 싶은데... 오늘 시간이 되시면 제 집에 한 번 들러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흐음? 무슨 긴한 논의라도 있소?" "겸사겸사입니다." 영호걸은 이 의외의 제안에 서슴없이 응락했다. "좋소이다." 사실 그는 의식만 마구 치달렸지, 상당히 무료해 하던 참이었다. 그는 재빨리 겉옷을 걸친 다음 장우진과 나란히 방을 나섰다.


"다녀 오십시오, 도주님." 두 명의 아름다운 시비가 시립해 있다가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영호걸은 미소와 더불어 그녀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그곳을 지나쳐 장우진과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 받으며 계속 발길을 옮겼다. "장장로의 댁은 어디시오?" "섬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영호걸은 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비로소 꺼냈다. "내 한 가지 의문점이 있는데......." 장우진은 의아한 표정을 보이며 반문했다. "의문점이라시면......?" "본도의 주민들은 어째서 중원과 직접적 왕래가 없는 것이오? 물자 구입 등도 총괄적으로 처리하면 불편한 점이 많을텐데." 그 말에 장우진은 언뜻 음울한 기색을 보였다. "이곳 잠룡도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약 사백여 년 전입니다. 그리고 한 동안은 중원과의 교역도 자유로왔습니다만, 언제부터인가 전면적으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건 왜 그리 되었소?" "누군가 멋모르고 중원의 은원시비에 휘말려 도민들 태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구려." "그렇습니다. 이후로 잠룡도에서는 다시 중원에 발을 들여 놓으려는 자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가족이 떼죽음을 당하고 살던 집이 불타 버리는 등 그 사건의 여파가 워낙 컸던지라......." 장우진은 무엇 때문인지 말끝을 흐리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참 후에야 그의 말이 이어졌다. "전대 도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리느라 무척 애를 쓰셨지만, 그 분이 실종되자 작금에는 그 양상이 약간 달라져 있습니다." "무슨 뜻이오?" "그 사건으로 인해 주민들은 중원에 대해 늘상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었지요. 그래서 자구책으로 각자 무공증진에 주력해 왔는데, 그런 심리를 역이용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한장로와 만장로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그 두 사람은 주민들로 하여금 중원에 대한 적대감을 갖도록 꾸준히 유도해 왔습니다. 사실 속하는 도주께서 즉위하실 때도 주민들의 반발이 있을까봐 노심초사 했었지요." "으음......." 영호걸은 나직한 신음을 흘리더니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진 그의 음성에는 확고한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장장로께서는 그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오. 향후로 잠룡도는 중원과 좋은 벗이 될 것이오." "아!" 장우진은 탄성을 발할 뿐,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에 있겠는가? 그는 기대와 더불어 무한한 신뢰가 담긴 눈으로 중원 출신의 젊은 도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 두 사람은 어느덧 하나의 건물 앞에 당도해 있었다. 그것은 소박하면서도 아취가 풍기는 건물이었다. 장우진이 닫혀 있던 대문을 가볍게 밀었다. "도주, 안으로 드시지요." "이렇게 불쑥 찾아가 장장로의 가솔들에게 누가 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소." "무슨 말씀을! 다들 영광으로 알 것입니다."


이때, 집 안으로부터 한 가닥 청아한 음성이 울려 나왔다. "할아버지시죠?" 장우진은 미소 띤 얼굴로 그 음성에 답했다. "오냐, 역시 청미(淸眉)가 제일 먼저 반겨 주는구나." 안쪽에서 중문(中門)이 열리더니 한 소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나이는 약 십사 세 가량, 백옥같은 살결을 청의에 가리고 있는 이 소녀는 무척이나 상냥하고 발랄해 보였다. '귀여운 소녀로군.' 이것이 바로 영호걸이 그녀에게서 느낀 첫 인상이었다. 더구나 가까이서 보니 갸름한 얼굴형에 오관이 반듯했으며, 특히 수정같이 맑은 눈을 가진 소녀였다. 나이 탓인지 그 눈에는 약간의 치기가 매달려 있었는데, 이는 어찌 보면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매력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소녀는 무심코 밖으로 나섰다가 웬 낯선 청년을 대하게 되자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구었다. 숙여진 그녀의 목덜미가 금세 발갛게 물들고 있었다. 장우진이 그런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청미야, 어서 도주께 인사 드려라." "아!" 소녀는 경탄성을 터뜨리는 한편, 얼른 허리를 숙였다. "소녀 장청미, 신임도주님을 뵈옵니다." 영호걸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응수했다. "반갑소, 어린 낭자. 앞으로 만날 기회가 종종 있을 것인즉, 그때에도 이렇게 달려 나와 맞이해 주겠소?" "그, 그야......." 영호걸은 시선을 옮겨 장우진을 바라 보았다. "장장로께서는 매일이 흐뭇하시겠구려? 이처럼 아름답고 귀여운 손녀가 마중을 해 주면 피로가 싹 가실 것 같은데, 어떻소?" "그렇습니다. 착한 아이지요." 장우진의 얼굴에는 정말로 흐뭇한 웃음기가 번지고 있었다. 한편. 장청미는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언뜻 바라본 도주의 인상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팔딱이는 가슴을 부여안은 채 내심 읊조리고 있었다. '정말로 도주님을 종종 뵈올 수 있게 될까? 아니,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것은 일종의 선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곁에서 장우진이 재촉하는 바람에 비로소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자! 청미, 너는 어서 도주를 안으로 모시도록 해라." 장청미는 뺨을 도화빛으로 물들인 채 생긋 웃었다. "도주님! 이리로 오세요." 영호걸은 그녀의 안내를 받아 대청으로 들게 되었다. 그러자 곧 장우진 일가(一家)의 가속들이 대거 몰려 와 잠룡도의 신임도주인 그에게 차례로 대례(大禮)를 올렸다. 그들과의 상견례를 마친 후, 영호걸은 권하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런 형식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그였으나 필요에 따라서는 접수할 수 있는 융통성도 있었다. ② 이윽고 장우진은 가속들을 물리며 유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 주안상 좀 봐 오너라."


"네, 할아버지!" 밖에서 장청미가 냉큼 대답했다. 이어 들려온 소리는 그녀가 어디론가 부지런히 달려가는 듯한 소음(?)이었다. 그들 일가가 보여준 풍경은 영호걸의 심중에 묘한 감동을 전했다. 덕분에 그의 입가에서는 연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부친의 얼굴이 새삼 큼지막하게 떠오른 것도 바로 그때문이었다. '그 동안 아버님께서는 과연 무사하신지.......' 그의 눈이 흐릿해지는 것을 보며 장우진이 물었다. "도주, 혹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신지......?" 영호걸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단지 장장로의 가계(家系)가 부러웠을 따름이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도주의 가계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달리 숨길 것도 없소이다." 곧이어 영호가(令狐家)의 내력이 간략하게 장우진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내친 김이라 생각했는지 영호걸은 강호에서의 일화들, 즉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인연들에 대해서도 털어 놓았다. 그것은 언제고 해결을 위해 다시 투신해야 할 스스로의 입장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전대 도주가 강호에 나갔다 실종되는 사태가 있었으므로 이 과정은 실상 꼭 필요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장우진의 안색은 수시로 바뀌었다. 왜냐하면 그 얘기들은 그저 한 개인의 신상에 관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사건들이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다 듣고 난 장우진은 탄성을 발했다. "허어! 진정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결국 도주의 일신에 중원무림의 안위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까지야......." "아닙니다. 속하, 정말 뜻밖입니다. 도주가 범상한 분이 아니시라는 것은 예상했었지만 그 정도까지는 넘겨 짚지 못했습니다." 영호걸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지금까지와 또 달라졌다. 대기(大器)를 향한 경이와 흠모 등이 잔뜩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하나의 제안을 내놓았다. "도주,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무엇을......?" "우리 잠룡도의 인물들이 도주를 모시고 중원에 나가 도우면 안될지요? 선뜻 나설 자는 꽤 있습니다만......." 영호걸은 의외라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러더니 그는 이내 난색을 표명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것은 안될 말이오. 아무리 내가 도주의 직위에 있다고는 하나 어찌 사사로운 일로 도민들의 희생을 요구하겠소?" "그것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장우진은 만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뜻이오?" "생각해 보십시오, 도주.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잠룡도의 인물들은 중원에 대해 적대감은 둘째 치고 대단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차제에 도주를 도와 중원의 화평에 기여할 수 있다면 오히려 나름의 긍지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도주께서 말씀하셨듯 벗으로서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지요." "정말 장장로께는 못당하겠구려." "그럼 승낙하시는 것입니까?" "아니, 일단 내게 시간을 주시오. 그 문제는 좀더 신중히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소." 장우진은 뭐라 더 말하려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마도 도주의 뜻을


존중한다는 의미이리라. 그러자 이번에는 영호걸이 물었다. "장장로께서는 본래 내게 하실 말씀이 있지 않으셨소?" "네, 그러지 않아도 그 얘기를 꺼낼 참이었습니다." 장우진은 신색을 가다듬은 후, 진중하게 말을 이어갔다. "도주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잠룡도의 도주로서 말이오?" "그렇습니다. 대대로 잠룡도의 도주는 이 섬에 전해져 내려오는 비전의 무학을 터득하셔야만 합니다." "으음......." 영호걸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것은 정해진 관례입니다. 역대의 도주들께서도 모두 거기에 따르셨으니 필히 응하셔야 합니다." 영호걸이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했다. "현재 나의 무학 정도로는 안되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잠룡도가 원하는 것은 비단 강한 무인일 뿐만 아니라 저희들을 다스려 줄 진정한 주군입니다. 도주께서 잠룡비학을 터득하시는 것은 무공 수준을 높이는 데도 의의가 있지만, 곧 잠룡도와 일체(一體)를 이루는 일입니다." "내가 또 졌소. 후후후......." 영호걸은 웃고 나서 다시 물었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해야 하오? 그리고 장소는......?" "그것은 장로회를 거쳐 추후로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소. 내 꼼짝 않고 대기하리다." "핫핫핫... 도주께서는 끝내 사양하고 싶으신 모양입니다만, 그러시면 안됩니다. 그 비학들을 얻지 못해 삼십 년 동안이나 안달을 했던 인물들도 있었으니까요." "어째서 그들은 익히지 못했소?" 그 말에 장우진은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떠올렸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지요. 잠룡비학은 오직 도주 한 분만이 익힐 수 있도록 안배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관례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룡비학은 은밀한 장소에 보관되어 있을 뿐더러 그곳은 열쇠가 없는 한 아무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장소......?" "이름하여 잠룡동(潛龍洞)이라는 동굴입니다." "그럼 그 열쇠는 어디에 있소?" 장우진이 마침내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도주께서 가지고 계신 잠룡령이 바로 잠룡동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영호걸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 그랬었구려." 이어 그는 짐짓 투덜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장로께서는 왜 그리 심술궂으시오? 쉬운 말을 어렵게 하시는 바람에 못 알아 듣고 헤매지 않았소?" "속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핫핫핫......." 그때,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할아버지." 장청미였다. 그녀가 한 명의 하녀를 대동한 채 주안상을 차려 가지고 온 것이었다. 아담한 소반에는 맛갈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이 가득 올려져 있었다.


장청미는 음식들을 부산히 탁자 위로 옮겨 놓았다. "갑작스레 준비한 것이라 도주님의 식성에 맞으실런지......." "하하하... 낭자의 그 상냥한 웃음이 깃들어 있다면 맛이 없을 수가 없지. 안 그런가?" 영호걸의 농담에 장청미의 얼굴이 또 한 번 붉어졌다. "청미야,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도주께 술 한 잔 올려라." "네, 할아버지." 장청미는 부끄러워 하면서도 행동만은 기민했다. 다만 술병을 지탱하고 있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헛헛헛... 그러고 있으니 제법 요조숙녀 같구나. 이 할애비에게 어리광을 피울 때는 여전히 젖먹이로 보이더니만." "할아버지도 참!" 장청미는 술을 따르고 나자 곧 방을 나갔다. 그 뒤로도 영호걸과 장우진은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서야 영호걸은 장우진 일가의 배웅을 받으며 그의 집을 나섰다. 파도가 오락가락하는 바닷가. 영호걸은 혼자 조용히 걷고 있었다. 어제 하루를 쉬고 오늘은 도내 시찰차 나왔다가 이곳을 거닐게 된 것이었다. 머릿 속에서는 여전히 숱한 상념이 교차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이 있었다. 바닷가 저 쪽에서 한 떼의 도민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일까?' 영호걸은 즉시 발걸음을 그 쪽으로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는 그의 귓가로 한 소리 통곡성이 들려왔다. 곧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눈가에 은은하게 연민이 떠올랐다. 한 소년. 아직 안면에서 치기도 채 가시지 않은 소년이 웬 부인을 부둥켜 안고는 몸부림 치듯 흐느끼고 있었다. 소년의 품에 안겨 있는 부인은 삼십대 정도의 미부(美婦)였다. 백옥같은 살결을 지닌 미인이었는데, 그녀의 입가에서는 연신 선혈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보기 딱한 광경이었다. 소년이 아무리 통곡을 해도 미부는 아무 반응도 없이 그저 축 늘어져 있을 따름이었다. 지켜보던 자들이 저마다 혀를 차며 한 마디씩 했다. "쯧쯧! 저 아이는 정말 안됐군. 아비를 잃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거늘, 이제 어미까지 여의게 생겼으니......." "에그, 이번 일은 오히려 미랑(美 )의 잘못이야.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 악착스레 그곳으로 가더니만 결국 저 꼴이 되고 말았군." "아무튼 이 일만은 도내의 높으신 분들께서도 그냥 묵과하셔서는 안돼. 뭔가 대응책이 있어야지." "흥! 장로 어르신네들이야 서로 다투기에 바빠서 어디 이런 하찮은 일까지 신경 쓸 짬이 있으시겠나?" "그런 말 말게. 새로운 도주께서 즉위하셨으니 모를 일이야." "하긴, 어떻게든 달라지기야 하겠지." 영호걸. 그는 뒷전에서 도민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흠! 필경 무슨 곡절이 있는 사건이리라.' 마침내 영호걸은 사람들 틈을 헤집고 사건현장(?)으로 들어갔다. 도민들 중에는 그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다. 한 번도 직접적으로 대면한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었다. 이 점은 영호걸로 하여금 쓴 웃음을 짓게 했다. '그 동안 내가 너무 굵은 줄기만을 바라 보았었구나. 막상 바람을 더 타는 것은 잔 가지이거늘, 생각이


모자랐다.' 그는 도민들에게 사뭇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예의 미부에게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 느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문 채 그의 행동을 주시할 뿐이었다. 영호걸이 손을 뻗어 미부의 맥(脈)을 잡으려 했다. 그러자 흐느끼고 있던 소년이 어느 결에 보았던지 질겁을 하여 외쳤다. "건드리지 말아요!" 소년은 고개를 반짝 쳐들고는 따져 물었다. "당신은 누구인데 감히 우리 어머니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오?" 영호걸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너는 모친의 생명을 구하고 싶지 않으냐?" "아?" 모친을 안았던 소년의 손이 다소 풀렸다. 대신 눈물 어린 그의 눈이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영호걸을 응시했다. '말을 쉽게 알아 듣는 아이로군!' 영호걸은 소년의 빛나는 눈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나이는 대략 십이, 삼 세 정도로 보였다. 검날같은 눈썹에 우뚝 솟은 콧날 등이 그대로 소영웅(少英雄)이라 칭해도 무방할 듯 했다. 반면에 소년은 은근히 놀라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아울러 그의 뇌리에서는 이런 읊조림이 스쳐 지나갔다. '으음, 이 분은 일반 사람들과 뭔가 다르다.' 소년은 그 심리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어 말했다. "정말로 저의 어머니를 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영호걸이 그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럴 생각이다." "그것이 가능합니까?" "음, 네 어머니는 아직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으셨다. 약간이나마 기(氣)가 남아 있는 이상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소년은 이내 초조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그럼 어찌 해야 합니까?" "물론 한시라도 빨리 손을 써야지." 영호걸은 소년의 품으로부터 미부를 빼앗아 안았다. "너희 집이 어디냐? 어서 앞장 서거라." 소년은 두 말 않고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그 즉시 영호걸의 소매를 잡아 끌어 어디론가 안내해 갔다. 비로소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흩어져 갔다. ③ 한 채의 아담한 모옥. 이것이 바로 소년의 집이었다. 그 집은 바닷가에 면한 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리로......." 소년이 재빨리 방문을 열었다. 이렇다 할 장식이라고는 없었으되 방 안은 매우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영호걸의 미부를 조심스레 침상 위에 내려 놓았다. 소년이 곁에서 불안한 기색으로 그의 행동을 지켜 보고 있었다. 영호걸은 서슴없이 미부의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희고 선이 고운 팔이 드러났으나 그런 것에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는 세밀한 진맥에 들어갔다. 잠시 후. 영호걸은 미간을 슬쩍 지푸렸다. '정말 기이한 일이구나. 이 부인의 몸 속에는 지금 정체불명의 열독(熱毒)이 흐르고 있다.' 진맥을 마친 그는 이내 품 속을 뒤져 하나의 옥병을 꺼냈다. 그 속에는 푸른 빛이 감도는 알약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개중 한 알을 꺼내 들더니 다른 한 손으로는 미부의 양쪽 턱 부근을 잡고 가볍게 힘을 가했다. 그러자 꼭 다물렸던 미부의 입이 반쯤 열렸고, 알약은 그 속으로 밀어 넣어졌다. 알약은 즉시 스르르 녹아 미부의 목구멍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뱃 속에서 쿠르륵 하는 기이한 음향이 울려 나왔다. '지금이다!' 영호걸은 재빨리 양손을 치켜 들더니 미부의 전신 혈도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는 추호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거의 엄숙하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소년도 이를 알아 차렸는지 더 이상은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만 안타까움이 깃든 눈으로 자신의 모친인 미부와 영호걸을 번갈아 바라볼 따름이었다. 영호걸은 추궁과혈은 계속 되었다. 그의 손이 미부의 단전(丹田)에서 기해(氣海), 장문(章門), 기문(期門), 그리고 명치 부근의 거궐(巨闕)을 거쳐 그 위의 유근혈(乳根穴)까지도 짚어갔다. 풍만한 미부의 가슴이 손 안에 가득히 잡혀 왔으나 그가 가진 촉각(觸覺)은 이미 남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도주라는 신분조차도 잊은 지 오래였다. 이 순간 그는 단지 대대로 신묘한 의술로써 그 명예를 지켜온 의가의 후손일 따름이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아!" 문득 소년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미부의 입에서 조금씩 시커먼 액체가 배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영호걸의 얼굴에는 한 가닥 희열이 떠올랐다. '음! 성공이다.' 아울러 그는 더욱 진력을 끌어 올려 미부의 전신혈맥을 문질렀다. 그런 상태로 다시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나갔다. 마침내 죽은 듯 고요하던 미부가 기적과도 같은 생환(生還)의 반응을 보였다. "으음!" 그녀의 입에서 가냘픈 신음성이 흘러 나온 것이었다. "어머니!" 소년이 격정을 이기지 못해 울부짖듯 외쳤다. 그 소리에 미부는 눈자위를 파르르 떨더니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오오......." 아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몹시도 흔들렸다. 그것은 물론 해후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대경했다. "악!" 비로소 영호걸의 존재를 의식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전신을 떡 주무르듯이 하고 있으니 오죽 하겠는가? 이어지는 잔잔한 음성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혀를 물고 자결을 했을지도 모른다. "부인, 진정하시오. 나는 의원이외다." "으음......." 미부는 잠시 안도와 수치감 등이 복잡하게 얽힌 표정을 지었으나 곧 체념한 듯 눈을 지그시 내리 감았다.


"이제 되었군." 바쁘게 움직이던 영호걸의 손이 미부의 몸에서 거두어졌다. 그의 준미한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력이 소진되었을 뿐더러 전신이 땀으로 푹 젖어 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어... 어머니......!" 소년이 격정적인 몸짓으로 미부의 품에 쓰러졌다. 그러자 거의 반사적으로 미부의 두 팔이 소년의 몸을 무섭게 휘감아갔다. "기아(奇兒)야!" 그들 모자(母子)의 상봉을 흐뭇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영호걸은 이내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눈을 지그시 내리 감는 순간까지도 그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미���가 소년에게 나직이 물었다. "저 의원 어르신은 네가 모셔 왔느냐?" 그러자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분명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소자는 저 분이 의원이신 것도 몰랐는 걸요? 자청해서 이곳까지 어머님을 모시고 와 치료해 주셨습니다." "오오! 이렇게 고마울 데가......." 그러는 사이, 영호걸이 신색을 수습하고 그들 모자에게로 다가왔다. 미부는 경황 중에도 얼른 허리를 굽혔다.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그녀는 감격해 하면서도 수치감만은 감추지 못했다. 숙이고 있는 그녀의 목덜미가 은은하게 붉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의원이라지만 치료 과정을 떠올리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영호걸은 훈훈한 웃음으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감사는 무슨... 부인께서 너무 그러시면 소생이 오히려 민망하오이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야 인지상정(人之常情)이거늘, 더 이상은 아무 것도 염두에 두지 마시오." 미부가 고개를 들고 처음으로 그를 정시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그득 담겨 있었다. "자! 소생은 이제 그만 가 보겠소이다." 영호걸은 말을 마치자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하, 하지만 이렇게 그냥 가시면......." "볼 일을 마쳤으니 당연히 가야지요. 몸조리나 잘 하시오." 그는 미부가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밖으로 나왔다. 소년이 황급히 따라 나와 허리를 숙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영호걸은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았다. "기아라고 했던가?" "네, 나천기(羅天奇)라고 합니다."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효심(孝心)이 지극하더구나. 앞으로도 더욱 더 어머니를 잘 보살펴 드리거라." 그러다 문득 그는 생각난 듯 덧붙여 말했다. "참, 잊을 뻔 했구나. 너는 지금부터 내가 불러주는 약초들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모친께 매일 달여 드리도록 해라." 그는 몇 가지 약초의 이름을 나열했는데, 그것은 모두 어느 곳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자, 다 알겠지?" "네." 나천기가 총명한 눈을 들어 새삼 영호걸을 바라보았다. 어린 마음에도 아마 그의 처방이 어지간히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영호걸의 눈에는 그런 소년의 모습이 더 없이 귀엽기만 했다. 사실 나천기는 남들이 다 호감을 가질 만큼 준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고, 또 그만치 심성도 바른 소년이었다. 영호걸은 그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년의 거듭되는 인사를 뒤로 하고 영호걸은 그 집을 나왔다. 잠룡정사.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영호걸은 밖을 향해 손뼉을 딱딱 쳤다. 그러자 즉시 방문 밖으로부터 응답하는 소리가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도주님." "음, 물어볼 것이 있으니 잠시 들어 오너라." 문이 소리없이 열리더니 일신에 청의를 걸친 시녀 한 명이 들어왔다. 바로 그의 시중을 드는 설향(雪香)이라는 소녀였다. 그녀는 방 안에 들자마자 나붓이 절을 했다. "무엇이 궁금하신지요? 천비, 아는 대로 다 아뢰겠습니다." 신임도주에 대한 설향의 신뢰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영호걸은 그녀를 보며 담담히 물었다. "설향, 너는 혹시 동쪽 바닷가에 사는 나천기라는 소년이나 미랑이라는 젊은 부인을 알고 있느냐?" 설향은 잠시 생각을 뒤적이는 듯 하더니 곧 대답했다. "네, 알아요. 두 사람은 모자간이지요?" "그래, 맞다." "그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그건 왜 그렇지?" 영호걸이 묻자 설향은 다음과 같은 사연을 들려 주었다. 잠룡도에서 동쪽으로 이백여 리 떨어져 있는 곳에는 또 하나의 섬이 있었다. 그 섬은 온통 검은 바위와 검은 모래로 이루어져 있어 일명 흑사도(黑沙島)라고 불리웠다. 섬은 별로 크지는 않았다. 인구도 많지 않아 약 백여 명 정도 되는 야인(野人)들이 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이 언제부터 그곳에 살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흑사도에서는 고대로부터 유황(硫黃)이 출토되었다. 또한 유황에서는 일종의 무서운 독(毒)이 발산되었는데, 야인들은 그 독을 뽑아내 활용해 오고 있었다. 기질이 거칠고 야만적인 데다가 독까지 잘 다루는 그들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들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잠룡도 역시 나름의 위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양자간에 별 충돌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용운(羅龍雲)이라는 잠룡도의 한 무사가 배를 몰고 가다가 우연히 흑사도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의도적인 접근이 아니었다. 단지 폭우로 인해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어쩔 수 없이 그 쪽으로 가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의 그 무사는 이미 시체로 화해 있었다. 무단 침입자로 간주된 나머지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그 무사의 부인 상미랑(常美 ). 졸지에 남편을 잃은 그녀는 그대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인편을 통해 은밀히 남편의 죽음을 조사한 뒤, 잠룡도의 장로청에 찾아와 대성통곡을 하며 호소를 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 사건은 막바로 장로회의 심의를 거쳐 흑사도 측에 응분의 보상을 요구하는 항의 전문을 띄워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흑사도에서 온 회답은 실로 의외였다. 그들은 그 사건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한편, 되려 위협적인 문구를 보내 왔다. 즉 계속 물고 늘어지면 오랫동안 지켜왔던 상호 불가침의 관계를 깨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잠룡도의 장로청은 어떻게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차제에 그들을 징벌하자는 안(案)도 나왔지만 일곱 명의 장로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하는 바람에 그것도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사건은 그 상태에서 흐지부지 종결이 지어져 버렸고, 상미랑은 십이장로를 원망하며 장로청을 떠났다. 문제는 바로 그 뒤에 벌어졌다. 상미랑 혼자 남편의 복수를 하겠다고 흑사도로 떠났다가 반주검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영호걸은 얘기를 다 듣고 나자 고개를 끄덕였다. '음, 무모하다고 치부하기에는 그 여인의 기개가 실로 아름답구나. 장로청에서도 손을 쓰지 못했던 일을 한낱 여인의 몸으로 혼자 해결해 보겠다고 직접 뛰어 들다니.......' 그의 생각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는 설향이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알겠다, 설향. 넌 그만 나가 보아라." "네, 도주님." 설향이 고개를 숙인 채 문을 나서려 할 때였다. 영호걸이 다시금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네?" "본 도주의 주최로 장로회를 열 것이니, 너는 이 길로 즉시 각 장로들에게 장로청에 집결하도록 연락을 취해라." "네." 설향이 나가고 나자 영호걸은 나직히 침음성을 발했다. "으음, 의외로 곪아 있는 부분이 많군." ④ 장로회의 의사청. 영호걸은 잠룡도의 십이장로를 모두 배석시킨 가운데 엄숙한 신색으로 입을 열었다. "무릇 치도(治道)란 그 의의가 군림(君臨)에 있는 것이 아니오. 민의(民意)를 수렴해 최우선적으로 그들의 복지를 위해 힘써야 할진대, 더구나 그들의 안위를 외면한다면 말이 되지 않소." 그가 내놓고자 하는 안건은 예의 흑사도 문제였다. 그는 십이장로를 쓰윽 둘러본 다음 본론으로 들어갔다. "흑사도가 대체 무엇이오? 본 도주는 우리 잠룡도의 근역에 그런 야만인들이 살고 있는 줄도 몰랐거니와, 이제 그들의 소행까지 알게 된 이상 절대 이대로 묵과하지 않겠소." 장우진이 사뭇 불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도주의 뜻은......?" 영호걸은 얼굴을 굳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을 징계할 작정이오." "으음......." 장우진의 신음성에 이어 장로들은 일제히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중론인즉 이미 결론을 짓고 지나가 버린 문제를 왜 새삼스럽게 들고 나와 소요를 일으키느냐는 것이었다. 급기야 천심일기생 만풍우가 일어나 이의를 제기했다. "도주,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상대방이 가만히 있는 한 우리가 먼저 봉기할 것까지는 없다고 봅니다." 그 말은 장로들 다수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들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여 찬동을 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영호걸의 준렬한 음성이 그들의 온건한 방식에 찬 물을 끼얹었다. "여러분들께서는 지금 무엇 하러 이 자리에 앉아 계시오? 본도의 무사가 타에 의해 피살되었는데도 방관만 한다면 다른 무사들의 사기는 대체 어찌 되겠소? 그들이 누구를 믿고 봉직(縫織)을 하는지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것이오. 더구나 상대는 기독을 사용하는 야만인들이오. 따라서 그들의 위협이란 늘상 각오해야 하거늘, 번번이 이런 식으로 물러날 작정이오?" 장로들은 충격을 입은 듯 갑자기 잠잠해지고 말았다. 영호걸의 눈이 강렬한 빛을 발산해 내며 그들을 일일이 쏘아 보았다. "부끄러운 줄을 아셔야 하오. 본도는 나름대로 오랫동안 무학을 익혀 왔거니와, 무학의 근본 목적이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다 알 것이외다. 그런데 이를 선행해야 할 지도층이 오히려 망설이고 있으니, 이러고도 도민들을 훈계하고 다스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시오? 이는 비단 그들의 안녕을 지켜 주는 범위가 아니라 나아가서 잠룡도내의 질서유지를 위해서도 절대로 회피해서는 안될 일이었소이다." 비로소 십이장로들은 크게 동요를 보이기 시작했다. 호된 질책이기는 했으나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인지라 시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어지는 영호걸의 음성이 더욱 그들을 격동시켰다. "그 동안 실력을 배양해온 만큼 흑사도의 위협 따위를 지척에 두고 꺼림직하게 지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아니, 이는 사실 본도의 수치요. 어떻소? 여러분께서는 아직도 두렵소이까?" 장우진이 마침내 그 말을 받아 한 마디 했다. "도주의 말씀은 백 번 지당하십니다. 속하들이 생각이 모자라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말이 나왔으니, 이번 기회에 그들을 치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그러자 현우신검 한원성도 지지 않고 거들었다. "좋습니다! 도주께서 하명만 하신다면 속하, 언제라도 검(劍)을 들고 따르겠습니다." 그 두 사람의 말을 기화로 십이장로들 모두가 일제히 찬성의 뜻을 표했다. 이렇게 되자 회의는 그때부터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영호걸은 그 끝에 현우신검, 천심일기생, 장우진, 백미장로 등을 위시하여 보내에서 가장 뛰어난 무사 오십 명을 선발해 흑사도의 징벌에 대동하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에 출동하기로 하고 회의를 마감했다. 선단(船團). 그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배웅을 해 주는 가운데 잠룡도의 무사들은 세 척의 선박에 정해진 대로 분승(分乘)했다. 그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위로 패기 넘치는 도주와 막강한 실력을 가진 네 명의 장로들이 지휘를 맡고 있으니 천하의 어떤 적을 상대해도 두려울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을 태운 선단은 흑사도로 향했다. 영호걸. 그는 선두의 뱃머리에 우뚝 선 채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뱃길로 이백여 리는 실상 별로 먼 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동남풍(東南風)이 불고 있어 배는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오후가 되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하릴 없이 반 나절이 흘러 버린 것이었다. 이로 인해 영호걸이 침음하고 있을 때였다. 장우진이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도주, 앞으로 반 시진 정도만 더 가면 흑사도가 나올 것입니다." "음, 생각보다는 그리 늦지 않은 것 같구려."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장장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혹시 흑사도 야인들에 대해서 깊이 아는 바는 없소?" 장우진은 미간을 좁혔다.


"글쎄요, 속하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알고 있는 바라야 단지 수십 년 전에 그들이 흑사도에 몰려 왔고, 그곳에 석조건물들을 짓더니 그때부터 금지구역으로 선포했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들은 이후로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섬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이번처럼 말이오?" "그렇습니다. 하지만 본도는 그 동안 예외였는데......." 영호걸은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야 본도 측이 미리미리 알아서 접근을 꺼려 했을테니, 지극히 당연한 현상 아니오?" 장우진은 움찔하더니 신음하듯 겨우 대답했다. "그건 도주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는 어제부터 내심 매우 당혹해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흑사도 건이 거론된 후로는 그다지도 온유롭던 신임도주가 워낙 강경일변도로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호걸이 다시 물었다. "그들의 무공 정도는 어떻소?" "그, 그것은 뭐라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한 번도 부딪쳐 싸워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러자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현우신검 한원성이 다가왔다. "도주, 그 자들에 대해 문득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영호걸은 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말씀해 보시오." "흑사도의 야인들은 우리와는 종족이 전혀 다릅니다. 키가 불과 오척 밖에 되지 않으며, 생활 방식도 괴이합니다. 이로 미루어 오래 전 묘강(猫疆)에서 살던 나라미족(那羅彌族)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나라미족은 왜소한 것이 특징이며 독을 잘 다룬다고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같이 잔악한 무공을 소지하고 있다는데, 그들이 맞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한장로의 추리가 틀리지는 않을 것 같구려." 이때, 장우진이 전면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 드디어 흑사도가 보입니다." 영호걸도 눈을 들어 그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바다 위에 검게 웅크리고 있는 섬의 형상이 보였다. 그의 비상한 안력은 곧 그 섬 전체가 거무틱틱한 바위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영호걸의 미간이 슬쩍 찌푸러 들었다. '무척이나 황량하고 음침한 곳이로군.' 그는 이어 장우진에게 명했다. "장장로, 지금 즉시 배를 멈추게 하시오." "네?" 장우진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영호걸이 담담한 어투로 설명했다. "아무래도 정면충돌은 피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오. 사상자가 많으면 승리한들 무슨 가치가 있겠소? 마침 오늘은 그믐이니 야음을 틈타서 기습전을 시행해 보도록 합시다." "아!" 장우진과 한원성은 탄성을 발하는 한편, 할 말을 잃었다. 아울러 그들은 그때부터 부지런히 각 배에 연락해 닻을 내리도록 했다. 이제 남은 것은 밤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그믐 밤. 흑사도의 기슭으로 세 척의 배가 소리없이 다가들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잠룡도로부터 출발한 선단이었다.


영호걸은 역시 선두에 선 채 나직하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에 따라 무사들은 하나 둘씩 조용히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배로 가지 않고 헤엄을 쳐 흑사도로 상륙해간 것이었다. 커다란 암반 위. 잠룡보의 무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들을 향해 영호걸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한장로와 만장로, 두 분은 본 도주와 함께 선봉을 맡읍시다. 장장로와 백미장로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연락을 취하면 그때 공격해 오도록 하시오." 이어 그는 지체없이 몸을 날렸다. "갑시다!" 휘익! 현우신검 한원성과 천심일기생 만풍우도 민첩한 동작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 세 사람의 신형은 곧바로 검은 암석들이 난립해 있는 섬의 가운데로 쏘아져 들어갔다. 18 장 다정도주(多情島主) ① 커다란 암벽 아래 두 개의 검은 인영이 보였다. 천지가 온통 먹장이었으나 영호걸은 안력을 통해 그들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역시 키가 작군. 게다가 흑의를 입고 있어 이런 밤에는 은신(隱身)이 용이하겠구나.' 영호걸은 뒤를 돌아다 보며 나직히 속삭였다. "한장로, 저 두 장애물들을 조용히 제거해 버리시오." 한원성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스스스....... 그의 신형이 유령처럼 날아 오르더니 왜소한 두 인영의 머리 위에 가서 멈추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그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허공에서 한 줄기 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쉭--! 두 인영의 목이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졸지에 급습을 당한 그들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목을 잃고 만 것이었다. 현우신검 한원성은 볼 일(?)을 마치자 허공에서 빙글 선회하더니 다시 제 자리로 날아와 가볍게 내려섰다. 일체의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실로 깨끗한 한 수였다. 영호걸은 같은 무인으로서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현우신검이로구나!' 이어 일행은 계속 전진을 시도했다. 얼마쯤 가자 모닥불이 보였다. 그리고 그 주위로는 다섯 명의 왜소한 흑의인들이 둘러 앉아 저희들끼리 뭐라 지껄이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천심일기생 만풍우가 나섰다. "금번 장애물들은 노부에게 맡겨 주십시오." 휘익--! 그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야조(夜鳥)처럼 날아갔다. 이번에는 양상이 약간 달랐다. 다섯 흑의인들이 미리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허공으로 눈을 돌린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눈동자를 움직이는 순간에 그들은 막바로 의식의 단절을 경험해야 했다. 만풍우의 섭선에 의해 일제히 목이 달아나 버렸으니 어찌 하겠는가? 역시 비명도 없었다. 단지 다섯 구의 목없는 시체들만이 무참하게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만풍우의 신형이 그 사이로 사뿐히 내려 섰다. 그런 그의 손에는 잠잘 때도 놓지 않는다는 금빛 부채가


활짝 펼쳐져 있었다. 탁! 그는 부채를 접으며 말했다. "도주, 끝났습니다." "호오!" 영호걸은 낮게 탄성을 발하며 몸을 날렸다. 그의 뒤로는 여전히 두 장로가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잠시 후. 하나의 석보(石堡)가 그들의 전면에 나타났다. 온통 검은 돌로 축조된 그 건물은 어둠 속에서 흡사 괴물인 양 버티고 서 있었다. 영호걸은 그것을 바라보며 내심 읊조렸다. '역시 마굴(魔窟)답군.' 석보의 중앙으로 하나의 커다란 문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문 앞에는 두 명의 흑의인이 지키고 서 있었다. 영호걸은 두 장로를 향해 소리를 낮추어 기소를 흘렸다. "후후후... 이번에는 내가 처리하리다." 그는 옆에서 콩알만한 두 개의 돌을 집더니 두 흑의인을 향해 가볍게 튕겨냈다. 핑--! 다음 순간, 두 흑의인은 자신들이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는 채 짚단처럼 맥없이 쓰러져 버렸다. 그들과의 거리는 자그만치 칠 장여, 두 장로가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미립타혈(米粒打穴)!" 그에 반해 영호걸은 그저 씨익 웃었을 따름이었다. "자, 이제 들어가 봅시다." 그들 삼 인은 곧 석보의 문 앞으로 날아 내렸다. 이윽고 영호걸을 선두로 하여 그들은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의외로 길게 뻗은 통로였다. 양 옆으로는 등잔불이 걸려 있어 통로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의 분위기는 어두운 곳보다 오히려 더 음산했다. 불빛의 작용인즉 웬지 귀기(鬼氣)를 느끼게 할 뿐이었다. 영호걸은 주위를 살피며 통로를 걸어갔다. 한원성과 만풍우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듯 그의 뒤에 바짝 붙어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전진했을까? 문득 영호걸은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인기척......?' 청각을 비롯한 그의 감각들이 뭔가를 감지해낸 것이었다. 그는 잠시 호흡마저 중단한 채 더욱 더 청력을 집중시켰다. 영호걸은 곧 한원성과 만풍우에게 따라 오라는 손짓을 해 보인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상태로 한참을 걷던 그들은 어느 한 석실 부근에서 동작을 정지시켰다. 다행히 석실은 문이 활짝 열려 있어 그 내부가 환히 들여다 보였다. 영호걸은 등잔불 바로 밑의 어둠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예리한 시선으로 석실 안을 살펴 보았다. 석실은 그다지 넓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도합 다섯 명의 인물들이 탁자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은 채 밀담(密談)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네 명의 흑의노인과 한 명의 청의노인이었다. 흑의노인들은 흑사도의 거주민인 듯 하나같이 체격이 왜소했다. 반면에 청의노인은 키가 컸으며, 매우 음침한 인상이었다. 청의노인이 네 명의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만사교주께서는 네 분의 공을 잊지 않으실 것이외다." 흑의노인 중 한 명이 황송한 듯 허리를 숙였다. "영광이오이다. 우리 네 형제는 만사교주께 힘이 된다는 사실에 매우 자부심을 느끼고 있소이다." 청의노인이 어깨에 잔뜩 힘을 넣으며 다시 말했다. "늑형(勒兄), 그 독(毒)은 얼마나 있으면 완성되겠소?" 늑이라 불리운 노인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최소한 보름은 더 지나야......." 청의노인의 안면에 약간의 변화가 일었다. "너무 길지 않소이까?" 그의 말 속에는 방금 전과는 달리 다소 힐책이 담겨 있었다. 상대적으로 흑의노인들은 기세가 팍 죽었다. 그러자 늑이라고 지칭되었던 노인이 재빨리 갖다 붙였다. "누(樓)형, 문제는 기간이 아니지 않소이까? 정작 중요한 것은 효용가치외다. 그리고 우리 사형제 외에는 천하의 누구도 그 독을 만들어 내지 못하니, 이 점을 감안해 참고 기다려 주시오." 다른 한 명이 역시 얼른 그 말을 받았다. "만약 무리하게 시일을 당기려 하면 독력(毒力)이 현격하게 떨어지는 불상사도 있을 수 있소." 그제서야 청의노인은 얼굴을 폈다. "하긴, 늦은들 또 어쩌겠소? 독의 제조야 내 소관이 아닌즉 노부는 그저 늑형들만 믿겠소이다." 이번에는 늑가 형제들 중 한 명이 물었다. "그런데 교주께서 약속하셨던 대금 지불은......?" 청의노인은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염려 마시오. 이미 준비해 왔소이다." "아!" 흑의노인들은 일제히 기대에 찬 눈으로 청의노인을 주시했다. 청의노인은 곧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냈다. 그것은 전체가 황금으로 이루어진 납작한 갑(匣)이었는데, 일견하기에도 상당히 귀중한 물건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흑의노인들은 굳어진 채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어느 새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황금갑에 탐욕의 시선을 꽂고 있었다. 마침내 청의노인이 갑을 열었다. 그 순간, 석실 안이 온통 환해졌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황금갑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롱한 광채로 인해서였다. 그야말로 현란함의 극을 이룬 보석(寶石)들이 거기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크기가 새끼 손톱만한 그 보석들은 모두 청록색을 띠고 있었으며, 그 숫자는 무려 수십 개에 달했다. 청의노인이 그것을 가리키며 으스대는 듯한 기색으로 설명해 주었다. "이 청강옥(靑剛玉)은 한 개가 능히 은자 만 냥을 호가하오. 전부 오십 개이니 오십만 냥의 값어치인 셈이오." 그는 황금갑을 흑의노인들의 앞으로 밀며 덧붙여 말했다. "독을 완성시키고 나면 나머지 오십만 냥이 전달될 것이오." 흑의노인 중 한 명이 그 갑을 품 속에 갈무리했다. "흐흐... 고맙소이다." 그의 웃음소리나 표정 등이 모두 지대한 만족감을 표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궁금한 듯 물었다. "참, 그 독은 대체 어디에 쓰이는 것이오?" 청의노인이 한껏 자부심이 깃든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것은 만사교주께서 천하를 재패하시는데 유용한 도구로 쓰여질 것이오. 우리의 뜻에 거역하는 자들을 모조리, 흐흐흐......." 흑의노인들이 제각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정녕 만사교주께서는 대단하시오. 일찌기 대영웅이신 것은 짐작했었지만 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실 줄이야......!" "그리 되면 우리 형제에게도 뭔가 혜택이 있을 것 같은데....... 흐흐... 우리는 다른 것은 필요없고 단지 금력이면 되오이다." 영호걸. 그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대체 만사교는 마수(魔手)를 어디까지 뻗고 있는 것인가? 이곳 남해의 보잘 것 없는 섬과도 어느새 이렇듯 깊숙한 거래 관계를 맺고 있으니....... 정말 믿기조차 어려운 일이구나.' 영호걸은 만풍우에게 전음을 보냈다. (만장로께서는 어서 가서 장장로와 백미장로에게 전달하시오. 일각 후에 쳐 들어오라고 말이오.) (알겠습니다, 도주.) 만풍우는 즉시 신형을 날려 출구 쪽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영호걸은 한원성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한장로께서는 이곳을 지키고 있다가 만약 도망자가 생기거든 가차없이 해치워 버리시오.) 한원성이 놀라 물었다. (도주! 대체 어쩌시려고......?) 영호걸의 훈훈한 미소가 어둠 속으로부터 전해져 왔다. (고맙소, 걱정해 주어서. 하지만 괜찮을 것이오. 저 자들은 일단 본 도주 혼자서 처리해 보겠소.) (안됩니다! 그러시다 만일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되었소. 그럼 뒤를 부탁하오.) 영호걸은 그의 말을 도중에서 잘라 버리고 석실로 들어섰다. ② "웬 놈이냐?" 다섯 명의 인물들이 그를 보자 아연실색 했다. 청의노인이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냉랭하게 외쳤다. "뭐냐? 네 놈은 무슨 용무가 있어 감히 이곳까지 들어 왔느냐?" 영호걸은 빙긋 웃었다. "실은 중대한 용무가 있소이다. 흑사도를 징벌해야 하니까." "무, 무엇이? 어디다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느냐?" 흑의노인 중 한 명이 노갈을 터뜨리며 쌍장을 날렸다. 쉬이익--! 영호걸은 여전히 냉소를 띤 채 건원신공을 팔성까지 끌어 올렸다. 그 순간, 흑의노인의 장력이 정확하게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펑! "으윽!" 한 차례 고통에 겨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영호걸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흑의노인이 비틀거리며 뒤로 네 걸음이나 물러서고 있었다. 그에 반해 영호걸은 미동도 없었다. 처음 모습 그대로 우뚝 서서 석실 안의 인물들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네, 네 놈은 대체 누구냐?" 흑의노인이 급기야 경악성을 발했다. 그러나 영호걸의 입에서 그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리 없었다. "그런 것은 알 필요없소. 본인은 그저 당신의 그 치졸한 목숨만 거두어 가면 그 뿐이외다." 흑의노인의 안면이 푸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이 찢어 죽일!" 동시에 그는 신형을 솟구치더니 다시금 일장을 날렸다. 쉬이익--!


허공에서 떨쳐내는 그의 장력은 방금 전과는 사뭇 그 위력이 달랐다. 한층 더 강맹한 경력을 품은 채 밀려 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호걸의 일신이 그대로 바수어질(?) 찰나였다. 영호걸의 입에서 짤막한 일성이 터졌다. "탁비!"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콰르릉--! 쾅! "으악!" 굉음과 더불어 소름이 쫙 끼칠 정도로 처절한 비명이 석실 안을 울렸다. 놀랍게도 흑의노인의 가슴이 두 쪽으로 갈라지며 그 자신이 머물렀던 허공에 피보라를 뿌렸다. 촤아악--! 영호걸이 언제 뇌정도를 뽑았는지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죽은 흑의노인의 상처부위가 시커멓게 숯덩이로 변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이 광경은 삽시에 장내를 묘한 침묵으로 몰고 갔다. 영호걸의 신위에 저마다 얼이 빠져 할 말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그들이 극도의 경악으로 인해 사고가 정지되어 있을 때였다. 둥! 둥! 둥....... 밖으로부터 북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그 뒤를 이은 것은 일대 소요에 버금가는 우렁찬 함성이었다. "와아아아아--!" 흑의노인 한 명이 정신이 번쩍 든 듯 부르짖었다. "이, 이게 무슨 난데없는......!" 영호걸이 그 말을 받았다. "후후후... 별 것 아니오. 흑사도의 악행(惡行)이 오늘부로 종말을 고한다는 예고일 뿐이니까." 흑의노인들이 일제히 신형을 곧추세웠다. "애송이 놈! 네 놈의 나불거리는 주둥이를 뭉개고, 네 놈의 육신을 가루로 만들어 아우의 영전에 바치겠다." 그들은 합공(合攻)을 시도했다. 이미 상대의 무위를 확인한지라 삼 인이 한꺼번에 쌍장을 떨쳐낸 것이었다. "고맙소, 세 분께서 함께 환대해 주시니." 영호걸이 싸늘한 음성과 함께 천환삼식 중 제이식을 시전했다. "환영섬전!" 그의 쌍장이 수백 개로 불어났다. 동시에 그 수백 개의 장영이 일제히 섬전같은 장력을 쏟아냈다. 그 바람에 석실 안은 온통 장영과 장력의 소용돌이로 휩싸여 버렸다. "만변화우!" 영호걸의 입에서 또 다시 외침이 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수백 개의 장영이 흡사 스러지는 꽃잎처럼 흑의노인들을 덮쳐갔다. "으악!" 한 흑의노인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퍼퍽! 그의 몸은 둔탁한 음향을 내며 석실의 천정에 부딪쳤다. 그리고는 추락하여 바닥을 나뒹굴었다. 처참했다. 생의 종지부를 찍은 그의 모습은 이제 피떡이 된 한 덩어리의 육괴에 불과했다. 영호걸의 천환삼식은 이전에 비해 한층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이처럼 지극히 불운한 희생자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는 나머지 두 흑의노인을 향해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 웃음이 던지는 충격이란 천하의 어떤 공포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두 흑의노인은 몸을 으스스 떨었다. 영호걸��� 천천히 그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귀천! 영백--!" 예리한 검기가 두 흑의노인의 전신을 세밀하게 엄습해 들어갔다. 그들은 대경하여 황급히 검세를 피해 뒤로 신형을 날렸다. 영호걸의 낭랑한 외침이 그들을 따라 붙었다. "탁비!" 쐐애애액--! 상상을 불허하는 검세가 물러서는 그들의 뒤를 차단해 버렸다. 도시 숨돌릴 여유조차 허용하지 않는 맹공격이었다. 찌이익--! 옷 자락 찢어지는 소리가 석실 안을 스산하게 울렸다. 이어 종전과 마찬가지로 피분수가 허공으로 길게 뿌려졌다. 촤아아악--! 한 명의 흑의노인이 잠시 허공을 휘젓더니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이제 그들 형제 중에서는 단 한 명만이 남게 된 것이었다. "귀천! 영백!" 쐐애애액--! 두 줄기의 검세가 동시에 흑의노인을 몰아 부쳤다. "헉!" 그는 헛바람을 들이키는 한편, 황급히 쌍장을 쳐들어 쇄도해오는 검기를 막아갔다. 그러나 결과는 불문가지였다. 츠츳! 뇌정도가 그의 장세를 뚫고 기묘한 파공성을 울렸다. "크윽!" 그것이 끝이었다. 마지막 남았던 흑의노인의 목이 몸체를 떠나 허공으로 높이 튕겨 오르고 있었다. 영호걸은 몸을 돌렸다. 그것은 물론 청의노인을 향해서였다. "으으....... 나, 난 아니다!" 청의노인은 턱을 덜덜 떨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러자 영호걸이 지극히 태연한 어조로 물었다. "무엇이 아니란 말이오?" "난 흑사도의 인물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만사교......." 영호걸이 차갑게 그의 말을 잘랐다. "알고 있소.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당신이 죽어야 할 이유요." "헛소리!" 청의노인은 비명에 버금가는 외침을 토하며 신형을 뽑아 올렸다. 그리고는 뒤도 안돌아 보고 석실 밖으로 쏘아져 나갔다. 영호걸은 굳이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놀고 있을(?) 한원성의 검에 대한 예우였다. 아니나 다를까? "가랏!" 호통과 더불어 검광이 번쩍 일었다. "으악!" 짤막한 비명 소리가 바깥 통로에 기이한 메아리를 울렸다. 이윽고 영호걸이 석실의 입구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는 이미 한원성이 검을 거두고 난 후였다. "자! 이제 나갑시다." 두 사람은 나란히 신형의 띄워 밖으로 나왔다. 이어 그들이 본 것은 흑사도 전체가 온통 혈풍에 휘말려 있는 광경이었다.


"으음, 이곳에는 우리가 필요없을 것 같소." 영호걸의 음성이었다. 전황을 살펴 본즉 잠룡도 측의 절대적인 우세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한원성을 대동하고 다시 석실 안으로 깊숙이 스며 들어갔다. 얼마쯤 전진하자 그들 앞으로 일곱 명의 흑의인들이 나타났다. "비켜라!" 한원성의 웅후한 외침이었다. 동시에 한 가닥 섬광이 무섭게 허공을 갈랐다. 쉬이익--! 그 일검은 네 명의 흑의인을 그대로 도륙해 버렸다. "우우! 귀, 귀신......." 나머지 세 명의 흑의인들이 기겁을 하여 부르짖었다. 그들을 향해 이번에는 영호걸이 담담하게 말했다. "비키라고 했소." "으응?" 세 흑의인들은 그를 보자 대번에 기색이 달라졌다. 아마도 나이로 인해 그들이 보기에는 영호걸이 현우신검 한원성을 따르고 있는 호위무사 정도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염병할! 애송이 놈까지 설치다니." "우리를 뭘로 보고!" 흑의인들은 분노를 터뜨리며 일제히 공격해 왔다. "쯧! 어쩔 수 없군." 뇌정도의 섬광이 허공에 유성처럼 긴 꼬리를 그었다. "으아악--!" 그것을 마지막으로 통로에는 다시금 정적이 찾아 들었다. 영호걸과 한원성. 두 사람은 계속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의 눈 앞에는 또 하나의 석실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으음, 이곳이 아마 건물의 중심부인 것 같군.' 석실의 문에는 둥그런 쇠고리가 달려 있었다. 영호걸이 다가가 고리를 당기자 석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다음 순간, 영호걸과 한원성은 동시에 경악성을 터뜨렸다. "우우우......." 석실 안. 중앙에 거대한 솥이 불 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그 속에서는 무엇인지 모를 시커먼 액체가 연신 무섭게 끓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솥 주위로 수십 구의 해골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것은 아직도 완전히 부식되지 않아 군데군데 살점들이 그대로 붙어 있기도 했다. "어찌 이런 일이......." 영호걸의 만면에 극도의 분노가 떠올랐다. 애초 독에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이 광경을 보고 대뜸 짚히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발걸음이 이끌리기라도 하듯 솥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솥에서는 시커먼 기류가 뭉클뭉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정말 극악한 독이군."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던 독물일까요?" 한원성은 궁금한 듯 물었으나 몹시도 경계하는 얼굴이었다.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인 후, 그답지 않게 격앙된 음성으로 말했다. "이것은 일명 만사시령독(萬邪屍靈毒)이라 하오. 만년유황에서 뽑아 낸 절독에 부시독(腐屍毒)을


배합하여 만드는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히 백 구의 시신이 필요하오." 한원성이 눈살을 찌푸린 채 또 물었다. "그렇다면 독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영호걸은 마치 신음처럼 내뱉았다. "한 방울만 몸에 닿아도 그 사람은 액체로 화해 버리오." "으음......." 한원성은 아예 말문이 막혀 버린 듯 침음성으로 대신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다시 입을 떼었다. "이것은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만사시령독은 유황에서 추출된 독이 기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약간은 그 성분을 내포하고 있게 마련이오. 따라서 응고되기 전에는 불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소." 영호걸은 말을 마치자 한원성을 돌아다 보았다. "한장로, 당신은 잠시 나가 계시오." "네?" "본 도주는 저것에 불을 붙힌 다음에 나가겠소." "위험하지 않으실지......?" "괜찮소. 염려 마시고 어서 먼저 나가시오." 한원성이 멈칫 거리다 밖으로 나가자 영호걸은 화섭자로 불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것을 솥 안으로 집어 던졌다. 동시에 그의 신형은 섬전같은 속도로 석실을 빠져 나왔다. 쾅! 콰르르릉--! 천지를 진동시키는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 직후,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 도래했다. 콰지직! 콰직--! 석벽 여기저기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서 이곳을 뜹시다." 영호걸이 빙긋 웃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석벽의 갈라진 틈은 눈에 띌 정도로 넓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신형은 전면을 향해 쾌속하게 쏘아져 나갔다. 그들의 등 뒤로는 석벽이 하나, 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콰르르르-- 쾅! 콰르릉--! 마침내 흑사도의 석보(石堡)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그 순간, 붕괴의 잔해들과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분진 속으로부터 두 가닥의 인영이 환상처럼 날아 올랐다. 그들 두 사람은 물론 영호걸과 한원성이었다. 이어 그들이 지면으로 내려서자마자 부지런히 달려와 반기는 인물이 있었다. "도주! 한장로! 두 분 다 무사하셨군요." 그는 바로 장우진이었다. 그 역시도 격전을 치른 듯 전신이 온통 피투성이였으나 안색만은 어느 때보다도 밝았다. "전황은?" "압승(壓勝)입니다." "으음, 모두들 수고하셨소." 흑사도. 그 붕괴의 현장에서는 이제 돌 무더기 사이로 간간이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을 따름이었다. ③ 잠룡정사. 영호걸은 방 안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여전히 하루하루가 바쁘게 흘러 갔으나 흑사도를 징벌한 뒤로 그는 이전처럼 많은 상념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그 당시 워낙 맹위를 떨친 덕에 잠룡도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기쁜 것은 그들과 비로소 일체감(一體感)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영호걸은 지금 한 권의 고서(古書)와 마주하고 있었다. 벌써 두 시진째 홀가분한 기분으로 독서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 방문이 소리도 없이 살며시 열렸다. 영호걸은 문득 코 끝으로 여인의 체취를 느끼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나직이 물었다. "설향이냐?" 그러자 등 뒤에서 토라진 음성이 대꾸했다. "피이! 도주님은 늘상 설향밖에 모르시나 봐요?" "흐음?" 영호걸은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소녀 한 명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장우진의 손녀 장청미였다. 그녀는 대나무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바구니 안에는 각종의 진귀한 과일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영호걸은 잔뜩 부은 그녀의 볼을 보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누군가 했더니 꼬마 낭자였군? 좋아, 내가 잘못했다." 그 한 마디에 장청미는 금세 표정을 풀었다. "도주님께 드릴 과일을 가져 왔어요. 좀 드세요." "고맙다, 청미." 영호걸은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그가 이곳 잠룡도에 온 지도 어느덧 석달이 지났다. 그 동안 그는 이 귀여운 소녀 장청미와 매우 가까와져 있었으며, 그녀를 마치 친동생처럼 아껴 주기도 했다. 또한 소녀 장청미도 영호걸을 무척이나 따르고 있었다. 본시 천품이 상냥하기도 했거니와, 그녀는 늘상 특유의 웃음과 선량한 마음씨를 가지고 도주인 영호걸을 대하고 있었다. 다만 장청미는 가끔씩 야릇한 감정에 휘말리곤 했는데, 그것은 그녀 스스로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뭐랄까? 막상 곁에서 있으면 모르겠다가도 떨어져 있으면 다시 보고 싶어 못견디는....... 아무튼 확실한 것은 영호걸이 그녀의 우상이라는 점이었다. 장청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신임도주보다 잘 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사리분별이 냉철한 반면 성품이 다정다감하여 자신에게 친절하니 그보다 더 고마울 데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영호걸을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그에 관한 한 절대적인 지지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영호걸은 부드러운 눈길로 장청미를 응시했다. "흐음, 그럼 어디 청미가 깎아주는 과일 좀 먹어 볼까?" 장청미는 생긋 웃더니 탁자로 다가가 그와 마주 앉았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곧 고운 손으로 과일을 깎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얼른 한 쪽을 베어 그에게 건네 주었다. "자, 드세요. 도주님." 영호걸은 그녀가 주는 과일을 받아 입에 넣었다. 호수처럼 맑고 깊은 소녀의 눈망울이 그의 모습을 관심 깊게 바라보았다. "맛이 어때요?" 영호걸은 우물거리던 과일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청미같이 예쁜 아가씨가 깎아주는데 맛이 없을 리가 있나?" "호호호... 그야 여부가 있나요?" 오누이와도 같은 두 사람의 대화는 정겹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이런 대화를 통해 영호걸은 오히려


전날에 느껴보지 못했던 가정의 안락함을 얻고 있었다. 문득 밖에서 나직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도주,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백미장로였다. "들어 오시오." 영호걸은 대답과 함께 손에서 책과 과일을 한꺼번에 내려 놓았다. 장청미가 그것을 보고 눈살을 곱게 찌푸렸다. "도주님은 늘상 너무 바쁘세요." 그녀의 볼멘 소리에 영호걸은 빙긋 웃었다.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나는 한가하면 안되는 사람이란다." "피이, 세상에 그렇게 정해져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담?" "바로 여기!" 영호걸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장청미는 까르르 웃더니 탁자 위를 정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백미장로가 방에 들어와 서 있었다. "오랫만에 뵙네요, 할아버지." 장청미는 활기 찬 음성으로 인사를 건네더니 덧붙여 말했다. "그럼 소녀는 이만 가 보겠어요.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이어 그녀는 백미장로에게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할아버지, 도주님을 너무 괴롭히시면 안 돼요?" "흐음? 그게 무슨 소리냐?" 장청미는 문을 나서려다 말고 눈을 상큼 치켜 올렸다. "무슨 소리긴요? 열두 분이나 되시는 할아버지들이 도주님 한 분을 가지고 매일 잔소리를 하시니까 그렇죠." "뭐, 뭣?" "하하하하......." 각기 다른 두 마디의 음성을 뒤로 하고 그녀는 사라졌다. 그러자 백미장로가 눈가에 웃음을 드리우며 입을 열었다. "장장로는 손녀 딸 하나는 정녕 잘 두었습니다. 저 아이를 대하면 늘상 즐거워지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도주." "그렇소. 착한 소녀지요." 이윽고 영호걸이 신색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런데 백미장로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소?" 백미장로도 비로소 정색을 지었다. "도주께서 이 잠룡도에 오신 지도 어언 석 달입니다." 영호걸은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소만......?" "아시다시피 잠룡도에는 전통이 있지 않습니까? 도주께서는 하루 빨리 잠룡동(潛龍洞)에 드셔서 잠룡비학(潛龍秘學)을 이어 받으십시오. 그 동안 도내의 일로 다망하셨던 것은 압니다만 더 이상은 미루시면 안됩니다." 그의 말에는 약간의 서운함이 깃들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영호걸이 현재도 절정의 고수이므로 잠룡도의 비전무학을 경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오, 백미장로." 영호걸은 정중히 사과한 뒤, 자신의 입장을 전했다.


"사실 그 일은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소. 다만 잠룡도에 적응하고 친숙해지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되어 이 쪽에 먼저 신경을 기울였던 것 뿐이오. 설마 하니 도주의 직위를 맡고 있는 자가 전통을 받드는 일에 소홀할 리가 있겠소?" 백미장로는 그 말에 대뜸 희색을 보였다. "그럼 언제 잠룡동에 들어 가시겠습니까?" 영호걸은 여전히 진지한 어조로 응수했다. "무공을 익히려면 일단 무엇보다 정신이 맑아야 하는 법, 내게 한 사흘 동안만 더 시간을 줄 수는 없겠소? 부탁이오, 심신이 모두 정비된 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선처해 주시오." 그가 이렇게 나오자 백미장로는 되려 황송한 듯 허리를 숙였다. "그 무슨 말씀을! 도주께서 생각이 그러 하실진대 누가 감히 왈가왈부 하겠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고맙소. 이해해 주어서." 잠시 그들의 시선이 따스함을 담은 채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사실 백미장로로 이르자면 십이장로 중에서도 가장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호칭은 깍듯이 도주이되, 나이상 은연중 영호걸을 자신의 손자처럼 여기고 있었다. 이 점은 영호걸도 익히 알고 있었다. 감정이란 상대적이므로 그 역시도 백미장로를 혈육과 같은 정으로 대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교통되는 이런 마음이야말로 실은 잠룡도라는 섬의 오늘을 이루어 온 근간이기도 했다. 대륙과 멀리 떨어져 남해에 외따로 존재하는 작은 섬, 그 안에서 이것 외에 달리 무엇이 더 중요하겠는가? 영호걸이 잔잔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그 밖에 다른 일은 또 없소?" "없습니다, 도주. 그럼 속하는 이만 물러가 도주께서 잠룡동으로 들어가실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고맙소." 이윽고 백미장로가 나가 버리자 혼자 남게 된 영호걸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밖을 향해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④ 청명한 날씨였다. 하늘에는 구름 한 조각 떠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해변에서 바라 보니 바다와 하늘이 똑같은 빛깔로서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해면(海面)을 스친 바람이 파도를 밀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파도는 백사장에 닿자 자취도 없이 스르르 소멸되고 말았다. 그 뒤로는 또 다른 파도가 밀려 오고 있었다. 갈매기가 수십 마리나 떼지어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이따금씩 그들은 먹이를 찾기 위해 바다 위로 곤두박질치곤 했다. 영호걸. 그 또한 지금은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모래 사장 위를 이리저리 거닐고 있는 그의 모습은 왠지 우수(憂愁)에 젖어 평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언제나 그랬듯 그가 우울하다면 그 첫번째 원인은 바로 부친 영호천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누구에게? 어디로? 왜?' 거듭되는 이 세 가지의 의문은 현재까지도 고스란히 숙제로 남아 있었다. 단서라야 천성보에서 언뜻 들은 말이 전부였다. 그것도 그 당시로 보아선 만사교(萬邪敎)에 감금되어 있는 것 같았으나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장담할 바가 못되었다. '만사교! 그들은 대체 어떤 단체인가?' 영호걸은 이 점을 생각하면 항시 가슴이 타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무엇도 확실히 아는 바는 없었지만


최소한 천성보주인 유화성까지도 그렇듯 견제하려 드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상대하기가 지난(至難)한 적이리라. 그러므로 만사교의 세력을 일개인의 힘으로 부순다는 것은 차라리 어불성설이었다. 영호걸은 쓴 입맛을 다셨다. '설사 지금 당장에 내가 중원으로 달려간다 한들 만사교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단 말인가? 천성보 한 곳도 제대로 평정할 능력이 되지 않거늘.......' 그는 이렇듯 부친을 구출해내는 일에 관해서 절망적인 느낌을 가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당시 듣기로 영호천은 만사교와 천성보의 사이에서 끌려 다니는 형국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결국 영호걸이 맞아 싸워야 할 상대는 두 곳이 되는 셈이다. 아니, 정체가 모호한 현음교도 또 있다. 그의 뇌리에 문득 한 인물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스승인 천유자(天儒子) 모용황의 인자한 모습이었다. '사부께선 천축으로 가신다고 하셨지. 지금쯤 중원으로 돌아 오셨을까? 아니다, 천축은 멀고도 먼 곳....... 그렇게 빨리 돌아오실 수는 없으리라.' 이어 그의 머릿 속에는 천중삼신(天中三神)과 구혜령, 그리고 사공령과 사공매 등의 얼굴들도 연속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나름대로 그와 정을 나누던 그리운 사람들이었다. '아아! 보고 싶구나.' 영호걸은 다시금 번뇌에 휘감기는 자신을 느끼며 고소를 지었다. '마음을 비우려고 그다지도 바삐 움직였건만.......' 그는 고개를 흔들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온 것은 그때였다. "도주님--!" "흐음?" 그는 몸을 틀어 뒤를 돌아다 보았다. 한 명의 소년이 백사장 끝에서부터 마구 손을 흔들며 달려 오고 있었다. 그 소년은 바로 나천기였다. 그 동안 영호걸은 그들 불운한 모자(母子)와 꽤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로부터 요지부동의 두터운 신망과 함께 지극한 애정을 얻고 있기도 했다. 나천기는 두번째 만났을 적에 영호걸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그때에는 이미 흑사도의 징벌이 끝난 후였으므로 그는 신임도주를 마치 하늘처럼 알고 떠받들려 한 바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그런 충심은 영호걸에 의해 대번에 기각되었다. 그 대신에 요구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권위와 무관한 진심의 교류였다. 이때에 소년 나천기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필설로 형용하기 어렵다. 그는 감격한 나머지 영호걸의 품에 안겨 오열했는데, 하마터면 도주를 형님이라고 부를 뻔 하기도 했다. 소년 나천기는 숨을 헐떡거리며 영호걸의 앞에 와 멈추었다. 영호걸은 소년의 그런 모습을 보자 빙긋 웃었다. "기아, 넌 무엇이 그리도 급했느냐?" 나천기는 여전히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도 반색을 짓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뒷모습을 뵈었을 때부터 저는 도주님이신 걸 알았어요." "하하하... 그래? 무척이나 용하구나." 영호걸은 크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소년은 반짝이는 눈으로 영호걸을 올려다 보며 제법 진지한 투로 말했다. "이제 잠룡도에 사는 사람들 치고 도주님을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어머님께서는 특히 감사 하신다며 밤마다 잠이 드시기 전에 꼭꼭 도주님의 무사안녕을 축수하시곤 하는 걸요?"


그 말을 듣자 영호걸은 웬지 콧등이 시큰해지는 기분이었다. 일찍이 모친을 여읜 그는 여인, 그것도 소년의 모친인 상미랑 같은 부인들을 보면 습관처럼 모친의 영상을 그려 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여인의 축수를 받고 있었다니, 그로서는 천하의 어떤 선물보다 더 고마웠다. "가서 모친께 필히 전해라. 내가 무척 감사해 하더라고." 나천기는 그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그럴 게 뭐 있어요? 도주님께서 직접 가셔서 말씀하시면 될 걸. 저희집에 가세요, 도주님. 네?" "너희집에? 이렇게 불시에 말이냐?" 나천기는 짐짓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네! 어머님께서도 밖에서 뵙기 보다는 도주님을 한 번 집으로 모시고 싶다고 하셨어요. 이전에는 워낙 경황 중이라 대접을 전혀 못해 드렸다고요. 또 저도......." 영호걸은 난색을 지었다. "글쎄, 그건 아무래도 나중에 차차......." 그러나 나천기는 거의 생떼를 쓰다시피 그를 졸랐다. "언제요? 그냥 지금 같이 가세요, 네?" 영호걸도 이쯤 되자 더 사양할 수만은 없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틈을 타 나천기는 아예 그를 껴안고는 씩씩거리며 끌어 당겼다. 영호걸이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 좋다! 너희 집으로 가자꾸나." "정말이죠?" 나천기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결국 영호걸은 소년의 손에 이끌려 바닷가에 면한 조촐한 모옥(茅屋)을 또 한 번 방문하게 되었다. "어머님! 도주님께서 오셨어요--!" 소년의 기쁨 섞인 외침에 이어 모옥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그곳에서 상미랑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무척이나 당황한 듯 아름다운 얼굴을 스르르 붉혔다. 영호걸은 그녀를 향해 포권했다. "부인, 그간 안녕하시었소?" 상미랑은 급히 답례했다. "어서 안으로 드세요, 도주님. 비록 누추하기는 하지만......." 영호걸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즈막한 탁자가 보여 그는 그 앞에 가서 앉았다. 상미랑은 여전히 문 옆에 선 채 움츠린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남녀가 유별한 데다가 신분의 차이마저도 엄격한즉 감히 마주 앉을 생각이란 꿈도 꾸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영호걸도 굳이 자리를 권하지는 않았다. 그는 진즉부터 상미랑이 반듯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禮)로 무장된 그녀의 성(城)을 일체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자리의 공기가 너무 어색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제 삼자에 의해 원만히 해결되었다. "어머니, 도주님을 모시고 왔으니 어서 음식을 장만하셔야죠." 나천기의 청량한 음성이 분위기를 일신시켰다. 그러자 상미랑은 살았다 싶었는지 얼른 그 말에 대답했다. "오! 그래, 나가마." 그녀가 나서고, 대신 방 안에는 나천기가 들어왔다. 영호걸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부인의 음식솜씨가 좋다고 이 녀석이 자랑을 하는 바람에 그만 따라오게 되었소이다." 상미랑은 방문 밖에서 나직하게 응했다. "기아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한 모양이군요." 이어 그녀는 그곳에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도주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비천한 음식이지만 정성껏 차려 올리겠습니다." "고맙소." 영호걸은 그녀가 나가자 방 안을 훑어 보았다. 석달 전에 이미 와 본 곳이었지만 그때는 이처럼 살필 틈이 없었다. 방은 매우 검소하고 깨끗했다. 가구같은 것도 별반 보이지 않았는데, 벽에 걸린 한 자루의 장검(長劍)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그저 일반적인 평범한 청강장검(靑剛長劍)이었으되 무슨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것을 보자 영호걸은 문득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음, 아마도 나용운이라는 무사의 검인가 보군.' 그가 읽어낸 것은 어쩌면 애틋한 부부애(夫婦愛)와 더불어 남편을 길이 기리고자 하는 한 여인의 갸륵한 마음이리라. 나천기의 천진한 음성이 그의 상념을 깼다. "도주님의 고향은 어디시죠?" "고향?" 영호걸은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런 건 갑자기 왜 묻지?" 나천기는 호기심으로 인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 섬을 벗어나면 엄청나게 큰 땅이 있다고 들었어요. 이곳보다 몇 백배나 더 큰 땅 말이에요." 영호걸은 자신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중원을 말하는가 보구나. 그래, 중원은 사실 네가 아는 것보다 수만 배는 더 크단다. 내 고향은 석문(石門)인데, 여기서 그곳까지 가려면 보통 사람 같아서는 반 년쯤 걸어야 하지." 나천기는 놀란 나머지 입을 딱 벌렸다. "그, 그렇게 먼가요?" "후후... 그래." 나천기의 표정에는 문득 동경의 빛이 어렸다. "그곳에는 그럼 사람들도 많겠네요?"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지." 나천기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도주님같은 분들인가요?" 영호걸은 그 말에 대소했다. "하하하... 중원은 광대한 땅이다. 그러므로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훌륭한 영웅호걸들이 존재한단다." 그러자 나천기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요. 아마 중원을 다 뒤져 보아도 도주님보다 위대한 분은 없을 거예요." 소년의 얼굴에는 어느덧 강한 신뢰감이 떠올라 있었다. 영호걸은 단지 미소 띤 얼굴로 그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그러는 사이, 나천기가 낯빛을 엄숙하게 굳히더니 자못 결의에 찬 어조로 부르짖었다. "저는 도주님같은 영웅이 되고 싶어요. 반드시!"


"아니, 너는 나를 훨씬 능가하게 될 것이다." 영호걸은 웃으며 소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런 그의 태도야말로 늘상 소년을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그를 우러러 보는 소년의 눈에서는 총기가 계속 일렁이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며 상미랑이 들어왔다. 그녀는 하나의 선반을 들이 밀었는데, 그 위에는 음식이 가득 차려져 김을 무럭무럭 피워 올리고 있었다. 19 장 인연(因緣)과 불연(不緣) ① 상미랑은 탁자에 음식을 하나 둘 옮겨 놓았다. 그녀의 긴장된 손길을 느끼며 영호걸이 나직이 말했다. "부인께 너무 폐를 끼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소." 상미랑은 가벼운 한숨과 더불어 대꾸했다. "아니에요. 도주님께서 저희 모자에게 베푸신 하해와 같은 은혜를 생각하면 이 정도야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되었소. 그 점은 이제 그만 얘기합시다." 영호걸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아낙으로 살아 왔으면서도 볼수록 현숙하고 기품이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탁자에는 자기로 된 작은 술병도 놓여 있었다. 상미랑이 두 손으로 공손히 술병을 들어 올렸다. "도주님, 제가 한 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영호걸도 사양치 않고 술잔을 들었다. "고맙소이다, 부인." 상미랑은 무명 옷소매가 아무렇게나 걷혀 올라간 손으로 자기술병을 기울였다. 막상 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의외로 매끈하고 고운 옥수(玉手)를 지니고 있었다. 영호걸이 그 손에서 읽어낸 바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으음, 바로 저 하얀 손이야말로 주변을 정갈하게 매만져 놓은 주인공이겠지? 부지런함이라는 지고한 가치를 발휘했겠고.' 혀를 적시며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액체에서도 그는 남다른 맛을 감지해 내고 있었다. '향기가 그리 진하지는 않되 깊고 그윽하다. 마치 이 집안 전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처럼.......' 영호걸은 술잔을 입에서 뗀 뒤 눈길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눈은 상미랑의 눈과 허공에서 마주쳤다. 영호걸은 멈칫했다. 상미랑의 아름다운 눈 속에서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따스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하시라도 훈훈하게 덥혀줄 듯한 눈빛이었다. '으음, 과연.......' 영호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고로 눈은 마음의 창(窓)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심중을 엿보고는 저으기 흐뭇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최근에 남편을 잃은 미망인(未亡人)이다. 설움과 고초가 컸을텐데도 불구하고 이렇듯 고운 심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녕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상미랑의 잔잔한 음성이 그의 귓전에 전해져 왔다. "도주님, 제게도 술 한 잔 주시겠어요?" 영호걸은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술병을 들었다. "자, 받으시오. 부인." "감사합니다." 상미랑은 술잔을 두 손으로 받친 채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셨다. 그러나 막상 잔을 비워 버린 그녀는 술의 쓴 맛에 익숙치 않았던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영호걸은 묵묵히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 보고 있었다. 어쨌든 술이 들어가자 꼿꼿하던 상미랑의 눈빛이 이내 반쯤 풀렸다. 어색해서 제 풀에 붉어질 때를 제외하고는 다소 창백해 보이던 얼굴도 혈색이 돌자 훨씬 좋아 보였다. 상미랑은 이어 눈을 지그시 내리 깔며 입을 열었다. "전에는 일체 술을 들지 못했었는데, 부군(夫君)과 이별한 후로는 이렇게 한 잔 정도는 하게 되었지요."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는 상미랑으로부터 일편 짙은 허무를 감지해 내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고독감보다 오히려 더욱 처절해 보였다. 하지만 이 기개 높은 여인은 도시 헛점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이 유일한 자존(自存)의 수단이자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는 듯. 그녀의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사실 부군의 복수를 염두에 두고 있을 때에는 다른 무엇도 느끼지 못했지요. 심지어는 기아도 심중에서 젖혀 두었었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도주님 덕분에 뜻을 이루고 나자 그 뒤로는 지금처럼 되어 버렸답니다." 영호걸은 정색을 지으며 반문했다. "지금처럼이라니? 그럼 부인의 지금 모습이 어떨 것 같소?" 상미랑은 쓴 웃음을 지었다. "왠지 청승 맞아 보일 것 같아서....... 그저 도주님께 추하게 보이지 않기만을 앙망합니다." 영호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절대로 그렇지 않소. 내 전부터 생각해 왔었지만 부인은 정녕 훌륭한 분이시오." 상미랑은 그 말에 묘한 웃음을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감히 이 자리에서 도주님께 술 한 잔을 청하게 된 것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이유라시면......?"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영호걸은 진지해져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말씀하시오." "주제 넘는 말씀이오나 저는 도주님께서 오래도록 이 잠룡도에 계셨으면 합니다. 가능하시다면 평생이라도요." "으음......." "저는 도주님을 뵈오면 한 가닥 삶의 빛을 느낍니다. 더구나 기아도 도주님을 존경해마지 않으니 저로서는 더욱 절실합니다. 만일 중도에 훌쩍 떠나시기라도 한다면 저희 모자는......." 영호걸은 그녀의 음성이 떨려 나오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잠시 동안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자고로 주군이란 어버이의 위치나 같은 것이라 하나 그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잠룡도에서 얼마나 머물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이들 모자와의 인연 또한 과연 언제까지 지탱해 나갈 수 있을지 예측불허였다. 그는 결국 이렇게 말해야 했다. "부인, 미안하오. 그 점에 대해서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구려. 단지 운명의 힘이 이끄는 대로 행한다고 밖에는......." 탄식과도 같은 그의 음성에 상미랑도 더 조르지는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더니 조용히 덧붙였다. "음식이 식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이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움직여 방 밖으로 나갔다. 구석에서 줄곧 입을 다문 채 쪼그리고 있던 소년 나천기가 다가왔다. "어른들이 나누시는 얘기는 왜 그렇게 어렵죠?"


영호걸은 씁쓸하게 웃었다. "기아, 너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② 사흘. 이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다. 영호걸은 그 동안 잠룡정사에 틀어 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시중 드는 시비들까지도 자신의 방에 드나드는 것을 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장우진이 그를 찾아왔다. "도주, 이제 잠룡동에 들어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오." 영호걸은 시원스럽게 답한 뒤, 방을 나왔다. 그의 얼굴은 지난 사흘에 걸쳐 어떤 묘약을 썼는지 이상하리만큼 청명해져 있었다. "갑시다!" 그 자신이 되려 앞장서듯 말했다. 장우진이 빙그레 웃었다. "알겠습니다. 도주." 두 사람은 잠룡동으로 향했다. 한 석벽 앞. 석벽에는 커다란 철문이 박혀 있었다. 철문에는 꿈틀거리는 금빛 용이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장우진과 영호걸. 두 사람은 그 석벽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었다. 장우진이 자못 숙연한 신색이 되어 영호걸을 향해 말했다. "도주, 잠룡령을 꺼내십시오." 영호걸은 그의 말대로 잠룡령을 꺼내 들었다. 장우진은 새삼 감회 어린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더니 철문의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에 잠룡령을 끼우십시오." 금룡의 몸은 무려 수만 개에 이르는 비늘로 뒤덮여 있었는데, 개중에서 유독 한 개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비어 있었다. 장우진이 지시한 곳은 바로 그 비어 있는 부위였다. "으음......." 영호걸은 무거운 신음을 발하며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우르르릉-굉음과 함께 철문은 마치 환영인사라도 하듯 활짝 열렸다. 그 광경을 보며 장우진은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오오! 삼십 년만에 이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되는구나." 그는 이어 묵묵히 서 있는 영호걸에게 다시 지시했다. "도주, 이제 안으로 들어 가십시오. 일단 들어 가시면 저절로 모든 것을 아실 수 있게 됩니다." 잠룡령은 문이 열리자 도로 튀어 나와 있었다. 장우진은 그것을 회수하여 영호걸에게 공손히 건네 주었다. "고맙소, 장장로." 영호걸은 미소 띤 얼굴로 잠룡령을 받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열려진 철문을 통과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르르릉-그의 뒤로 철문은 다시 닫혔다. 흡사 그를 삼켜 버리듯. 그러나 문은 닫혔으되 동굴의 내부는 환했다. 천정에 주먹만한 야광주가 박힌 채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닫힌 철문의 안 쪽에도 역시 금룡이 그려져 있었고, 바깥 부위와 마찬가지로 비늘 한 개가 빠져 있었다. 아마 나갈 때도 필히 그곳에 잠룡령을 끼워 맞춰야 하는 모양이었다. '음, 생각보다 철저한 안배로군. 결과적으로 잠룡동의 문은 도주 외에는 누구도 출입이 불가하지 않은가?' 영호걸은 내심 읊조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하나의 석실로서, 안 쪽으로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그는 발걸음을 옮겨 통로를 따라 주욱 걸어갔다. 잠시 후가 되자 영호걸의 앞에는 또 다른 석실이 나타났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영호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 정녕 신비롭기 짝이 없구나.' 석실 안은 온통 그림들로 메워져 있었다. 사방의 벽은 물론이고 천정, 심지어는 바닥에까지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짐승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얼마나 정교한지 그대로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이어 감탄은 경악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림을 바라보던 영호걸의 눈이 어느덧 크게 부릅떠져 있었다. '오오! 이럴 수가....... 이제 보니 이 그림들은 모두가 다 무공초식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그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석실을 누가 축조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대단한 기인이다. 무공초식의 다양함도 그렇지만 어떻게 이것들을 일일이 그림으로 표현할 생각을 했을까? 그림을 그리는 공만 해도 가히 엄청난 것이었을텐데.......' 영호걸은 온갖 짐승들이 총망라된 채 각기 희한한 동작들을 취하고 있는 그 그림들을 두루 눈으로 훑어 갔다. 그런 그의 눈에는 거의 감동에 가까운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이윽고 그는 한 구석에서 또 다른 통로 하나를 발견해냈다. '저곳으로 들어 가라는 뜻인가?' 그는 다시금 그 통로를 걸었다. 그러자 역시 또 석실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사방의 석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도합 열두 개로서 수염이 배까지 내려온 한 노인의 입상이었다. 노인상들은 모두 기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되 각기 틀렸다. 천정만은 별개였다. 그곳에는 노인의 좌상도(坐像書)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좌상도에는 진기(眞氣)의 운행(運行)이 붉은 선으로 정밀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영호걸은 그것들을 보자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저 좌상도는 어떤 신공을 나타내고 있는 모양이구나. 혹시 벽면에 그려진 있는 입상들의 무공초식을 익히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벽의 한 모퉁이에 고정되었다. 그곳에서 짤막한 글귀를 찾아냈던 것이다. <잠룡십이장(潛龍十二掌)> '으음, 저것이 아마도 열두 개의 입상들이 표현하고 있는 무공의 이름이리라.' 글귀는 자세히 보니 천정에도 씌여져 있었다. <잠룡공(潛龍功)> '과연 이 두 가지는 상호 연관성이 있었군.' 영호걸은 중얼거림과 더불어 벽과 천정을 재삼 둘러 보았다. 그러더니 곧 한 곳을 보고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음! 또 통로가 있었군?" 그는 입술 꼬리에 묘한 미소를 매달았다.


'저 길을 따라 가면 또 석실이 있을지......? 그렇다면 대체 이곳에는 몇 개의 석실이 마련되어 있는 것인가?' 석실. 그곳에는 한가운데에 돌로 된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한 권의 책자가 올려져 있었다. '저 책은 필경 무공비급이겠지.' 영호걸은 방금 전을 생각하고는 사방을 살펴 보았으나 더 이상의 통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책자를 집어 들었다. 책장을 넘기니 그 안에서 초서체(草書體)로 빽빽하게 씌여진 문구들이 나왔다. 그 글을 읽는 동안 영호걸의 표정은 점차 기이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다음은 책자에 기록된 비화(秘話)이다. ③ 삼백 년 전. 선우진(鮮于鎭)이라는 한 기인이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타고난 무공광(武功狂)이었다. 어려서부터 무공을 익히는 일이라면 거의 침식조차 망각하고 몰두할 정도였다. 선우진의 출신지는 남해의 잠룡도였다. 그런데 나이 십오 세에 이르자 그는 잠룡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평생 좁은 섬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야망은 원대했다. 무공에 대한 끝없는 탐구열로 인해 그의 가슴은 이전부터도 늘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바다를 건너 동경해마지 않던 중원으로 갔다. 그리고는 천하무학의 발상지라는 소림사(少林寺)에 입문(入門)했다. 그로부터 이 년 후. 선우진은 소림사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자진하여 산문(山門)을 나서기에 이르렀다. 그때가 그의 나이 십칠 세. 누구라도 그 나이면 한창 혈기방장하고 도전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었으되 선우진은 그 면에서 가히 필적할 자가 없었다. 그는 천산(天山)에 한 기인이 은거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 먼 곳까지 일로 내달았다. 다행히도 명불허전이었던지, 그 기인은 실존했으며 일신에 고절한 무학을 지니고 있었다. 선우진은 그 기인의 밑에서 꼭 일 년간을 수학(修學)했다. 그러나 그는 무공진전을 모두 이어 받자 다시 그곳을 떠나 버렸다. 또 다시 새로운 무학의 세계를 접하기 위해....... 그런 식으로 선우진은 천하를 유람하며 온갖 부류의 기인이사(奇人異士)를 찾아 다녔고, 닥치는 대로 그들의 무공을 흡수했다. 덕분에 그의 무공은 일취월장(日就月將), 눈부시게 발전해 갔다. 결국 중원에 건너간 지 십 년만에 그는 천하의 모든 무공들을 섭렵하여 이른바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로 떠오르게 되었다. 강호를 종횡무진해도 적수를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불운은 이때부터 파생되었다. 선우진은 정파(正派)의 무공을 모조리 터득하고 나자 종내 허탈감에 빠지고 말았다. 천하제일인이라는 명예도 그에게는 한낱 허울에 불과했다. 그의 천성적인 탐구열은 추구할 것을 잃게 되자 그로 하여금 삶의 의욕마저 상실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일종의 자구책 삼아 슬그머니 눈을 돌리게 된 것이 바로 사공(邪功) 쪽이었다. 때마침 선우진은 천축 소뢰음사(小雷音寺)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소위 마공(魔功)의 총본산(總本山)이라고 알려진 소뢰음사의 위명은 단번에 그의 열정을 사로잡고 말았다.


그는 역시 한달음에 천축으로 건너갔으며, 종내에는 그곳에서 신분을 속이고 제자가 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그도 소뢰음사에서만은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했다. 본시 소뢰음사가 마명(魔名)을 드날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비전마공의 정화인 마혜수라경(魔醯首羅經)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우진이 찾아갔을 때에는 소뢰음사가 마혜수라경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그로 인해 급격히 쇠퇴해 가던 시기였다. 그는 실망만을 안은 채 이 년만에 그곳을 나와야 했다. 그는 도로 중원으로 건너와 천하를 방랑했다. 이는 실로 그에게는 공허한 한때였다. 여전히 그에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었는데, 바꾸어 말하면 배울 사람도 없었다는 얘기가 되므로. 마침내 선우진은 잠룡도로 복귀했다. 타인에게서 무공을 더 이상 배우지 못한다면 스스로 창안해 보겠노라는 발상에서였다. 그는 이른바 광세기학의 창안을 염두에 둔 채 도내에서 오 년 동안 폐관했다. 바로 잠룡공과 잠룡십이장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이래 봐야 당시 선우진의 나이는 삼십사 세에 불과했다. 좁은 땅에서 조용히 은거하기에는 역시 무리였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는 다시 중원의 땅을 밟았다. 그때의 그는 스스로를 잠룡신군(潛龍神君)이라고 칭하기에 이르렀다. 이런저런 과정들을 겪으면서 성품이 변해 버렸던 것이다. 이전의 그라면 지독히 외곬수이긴 해도 나름대로 순수한 면이 있었으나, 지극히 교만해져서 안하무인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황산(黃山)에서 한 명의 초라한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은 선우진을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 쯧쯧! 훌륭한 나무이되 둥치가 기우뚱하니 휘어져 버렸군. 앞으로 제대로 가지를 뻗기는 틀렸어. 선우진은 이 말에 숨은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는 단지 괴노인이 자신을 비웃는 것이라 판단하고는 극도로 분노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도전장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치열한 일전(一戰)을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실로 예상밖이었다. 선우진이 그토록 자신만만해 하던 잠룡공도, 잠룡십이장도 괴노인 앞에서는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불과 십여 초만에 참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선우진은 크게 낙심하는 한편, 괴노인에게 삼 년 후에 재대결할 것을 요청했다. 괴노인은 껄껄 웃었다. - 자네가 나를 찾겠다면 언제라도 좋네. 청산녹수(靑山綠水)가 어디 변하겠는가? 선우진은 잠룡도로 되돌아와 다시 폐관에 들어갔다. 그는 절치부심(切齒腐心), 미친 듯이 무공을 연마했다. 그 결과로 잠룡공과 잠룡십이장은 더욱 무섭게 다듬어졌다. 약정된 삼 년 후. 약속대로 그는 괴노인과 재결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그는 패배하고 말았다. 정확히 이십 초만이었다. 피를 뿌리며 돌아서는 그를 향해 괴노인은 광소를 터뜨렸다. - 핫핫핫... 아직도 땔나무가 많으니 또 오게. 연이은 폐관, 그리고....... 오 년이라는 세월이 눈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버렸다. 이때에 선우진은 반 미치광이가 되어 황산을 찾았다. 괴노인은 여전히 오 년 전의 그 자리에서 그를 맞이했다. 싸움은 재개(再開)되었다. 이른바 공전의 대격돌로서 이번에는 전황이 사뭇 달라져 백여초를 끌었다. 하지만 선우진은 또 졌다. 괴노인의 존재란 그에게 있어 하나의 오르지 못할 산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선우진은 가히 죽음보다 더한 절망에 이르고 말았다. 패배를 모르던 천하제일인의 생애가 정체도 모르는 한 노인으로 인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것도 자그마치 세 번씩이나 참패를 당하지 않았던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에게는 불굴(不屈)의 집념만은 남아 있었다. 그는 극단의 절망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오 년 후를 기약하고자 했다. 괴노인은 이런 그에게 의외의 말을 했다. - 선우진, 노부는 이제 땔나무를 모두 소진해 버렸네. 그것은 바로 수명(壽命)이 다 했다는 뜻으로서 선우진으로 하여금 낭패감을 금치 못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괴노인은 기이한 어조로 그에게 굳이 일언(一言)을 전했다. - 자네는 뛰어났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자네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지. 후후후....... 그때문에 자네는 영원히 노부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네. 그 말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선우진은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오 년 후의 재대결만 가능하다면 자신이 충분히 이길 수 있노라는 강력한 주장을 폈다. 물론 그 덕분에 괴노인의 비웃음을 면치 못했지만. 당시 괴노인은 의도적인 듯 그의 눈 앞에서 한 가지 수단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가벼운 손짓만으로 거대한 바위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절세의 기공이었다. 이로 인해 넋을 잃고 있는 선우진에게 괴노인은 또 말했다. - 자네가 계속 패하는 이유는 노부가 자네와는 달리 정사양공(正邪兩功)에 걸친 무적의 기공(奇功)들을 가지고 있어서네. 이 점을 달리 표현하면 자네의 무공이 그만치 폭이 좁다는 말일세. 이 말인즉 선우진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는 사공을 접하려다 기회를 만나지 못해 실패한 전력이 있었다. 괴노인은 이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두 가지의 기공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 대신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향후 십 년 안으로 예의 기공들을 꺾을 수 있는 새로운 신공(神功)을 창조해 내라는 기이한 주문이었다. 선우진도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노인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는 마침내 정과 사로 나뉜 두 가지의 기공의 구결을 전수받게 되었다. 이때에 그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인정을 하지 않으려 해도 그는 예의 두 기공 중 어느 하나도 꺾을 자신이 없었다. 이는 곧 그로 하여금 얼마나 땅이 두텁고 하늘이 높은가를 알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피차에 볼 일을 마치고 헤어지기 직전, 노인은 십 년 후에 만날(?) 약속 장소를 일러 주었다. 선우진은 그 말을 끝으로 무심을 가장하며 등을 돌렸으나 이번에는 잠룡도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대설산(大雪山)에 틀어 박혀 밤과 낮의 구분도 잊은 채 오로지 새로운 신공의 창안에만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 유수와도 같은 세월이 어느덧 팔 년이 지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별반 성과를 거둔 것이 없었다. 십년지약(十年之約)을 불과 이 년 남겨 둔 그 시점에서 선우진은 실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약속을 지켜내지 못하는 일이란 패배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의 고심은 우연이라는 수단을 빌어 실로 뜻밖의 해결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선우진. 그는 거대한 빙벽(氷壁)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물론 그것은 개세의 신공 창안을 위해 명상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선우진은 그 날도 역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머릿 속만 난마와 같이 엉켜들 뿐 그가 도달하고자 했던 무공의 진결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너무도 답답했던 나머지 발작적으로 하늘을 우러러 고함을 토해냈다. 소리에 내공이 실려 나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 결과는 실로 불문가지였다. 고함성은 대번에 빙벽에 엄청난 소리의 파동을 전했고, 그 바람에 거대한 빙벽은 그대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산더미같은 빙벽이 덮쳐 들자 그는 대경실색 했다. 하지만 무인의 본능은 죽음을 결코 얌전히 수용하지만은 않았다. 선우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력을 다해 거대한 빙벽더미에 대고 쌍장을 격출해내고 있었다. 그의 체내에서 은연중 기이한 잠력(潛力)이 솟구친 것도 바로 그때였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내뻗쳤다. 그리고는 그의 쌍장이 휘둘러지자 아무런 소리도, 형체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빙벽더미가 산산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것은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정녕 뜻밖의 일이었다. 선우진은 경악한 나머지 쌍장을 그대로 뻗은 자세에서 자신의 체내외에서 일어난 변화를 빠르게 검토해 보았다. 먼저 외부적으로 그의 몸은 그때까지도 푸른 기운에 감싸여 있었다. 이와 더불어 내부에서는 기이한 진기의 역도(力道)가 막힘없이 열려 그의 전신 사지백해를 모두 허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천지개벽과도 같은 현상이었다. 즉 새로운 신공(神功)의 탄생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선우진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 즉시 격발되었던 잠력의 흐름을 감각 속에서 되살려 내며 신공을 체계화된 이론으로 정리했다. 이렇게 되자 이 년 후에는 신공의 자유로운 운용까지도 가능해져 그는 마침내 괴노인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④ 선우진은 십 년의 은둔을 깨고 무림으로 나왔다. 그때의 그는 이미 머리에 반쯤 서리가 내려앉은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십 년 전에 괴노인이 일러 준 약속장소로 갔다. 그곳은 황산에 있는 한 고찰(古刹)이었다. 폐허가 되다시피한 고찰에는 인적이라고는 없었다. 선우진은 무너져 가는 대웅보전(大雄寶殿)으로 들어갔다. 한쪽 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녹이 잔뜩 슨 구리불상이었다. 선우진은 불상을 향해 장탄식을 불어냈다. 그것은 앞서 떠나버린 고인(故人)에 대한 추모를 대신해서였다. 괴노인은 그 스스로 예언했듯 정말로 죽었으며, 두 사람의 십년지약이란 결국 일종의 삶과 죽음을 초월한 내기였던 것이다. 선우진은 먼저 괴노인의 영전에 자신의 신공 창안을 고(告)했고, 그 뒤를 이어 구리로 된 불상을 들어냈다. 그 밑바닥에 바로 괴노인이 생전에 말했던 목함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목함을 열자 그 속에는 한 권의 책자와 양피지로 된 서신이 들어 있었다. 선우진은 서신을 읽어 보았다. <노부는 백오십 년을 살아오면서 쇠신이 닳도록 돌아 다니며 제자를 구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황산에서 자네를 발견했을 때, 기쁨과 낙심을 동시에 느꼈다. 어렵사리 만난 자네 역시도 노부와는 인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글귀를 보고 선우진이 얼마나 놀랐을지는 누구라도 짐작하리라. 오죽하면 서신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 푸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론에 불과했다. <노부는 심히 안타까운 가운데 본문의 대(代)를 잇고자 한 가지 방도를 강구했다. 그것은 자네의 심기를 격발시켜 무공 증진에 주력하게 하는 한편, 노부의 십년지약에 응해 오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아마 지금쯤 자네는 그 맹목적인 오기와 치열한 자존심 때문에라도 기어이 노부를 능가하는 개세의 신공을 창안해 냈을 것이다. 이 점은 노부가 굳게 믿는 바이다.> 선우진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야 했다. 이렇게 되면 그는 괴노인에 의해 완전히 꼭두각시 놀음을 벌인 셈이 아닌가? 그는 당장에 편지를 가루로 만들까 하다가 그가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인내를 다 동원하여 계속 읽어갔다. <노하지 말라. 비록 자네의 의지를 무시했다고는 하나 이 일은 노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또한 자네는 분노할 자격이 없다. 평생 동안 그다지도 미친 듯이 무공을 연마했으면서 자네가 천하를 위해 한 일이 대체 무엇인가? 노부는 능력은 있으되 가치 있게 쓸 줄 몰랐던 자네에게 신공의 창조를 위임한 것이다. 그것은 인세에 협명(俠名)을 떨치는 일 외에 본문의 제자들이 준행해야 할 신성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자네는 지금부터 본문의 제자다. 단지 인연이 없는고로 기명제자(記名弟子)일 따름이지, 정식제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네의 생애 자체가 미완성이니 운명으로 알면 그리 섭섭치 않을 것이다.> 이것은 조롱이자 호된 질책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선우진은 오히려 안면을 무섭게 씰룩일 뿐 방금 전처럼 격노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런 말을 평생 누구에게도 들은 바가 없었다. 따라서 충격을 받았으되 일면으로는 얼떨떨한 감도 없지 않았다. 이어지는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자, 지금부터 자네는 이름을 책자의 맨 뒤에 적은 뒤, 십 년에 걸쳐 새로이 창조한 무공을 기록해 놓게. 그것을 마치면 자네는 이름이나마 본문의 제구대 장문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그대는 당대로써 단맥(斷脈)이다. 즉 자네만이 본문의 제자일 뿐 자네의 제자는 본문을 이어갈 자격이 없다. 동시에 자네가 창조한 무공은 자네의 제자에게 전할 수 있지만 당년에 노부가 그대에게 전수한 두 가지 기공은 절대 전수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대는 기 록을 마친 후, 목함을 제 자리에 놓아라. 지금부터 십 년 뒤에 한 명의 연자(緣自)가 있어 이것을 취득하게 되리라. 그 자야말로 진실한 본문의 제십대 장문인이 될 것이다.> 서신은 여기에서 끝을 맺고 있었다. 선우진은 그것을 다 읽고 나자 반 쯤 넋이 나가 버렸다. 괴노인의 의사표현은 흡사 앞뒤를 자로 잰 듯 하여 이의를 달 만한 여지가 도무지 없었다. 덕분에 그는 질린 나머지 허탈한 웃음을 풀풀 날렸을 따름이었다. 그 뒤를 이어 선우진은 무엇엔가 홀린 듯 괴노인이 지시한 대로 책자 뒤에 이름을 적고 자신이 창안해낸 무공을 수록했다. 이런 행위는 곧 그가 가진 전부를 내놓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비록 협의지로(俠義之路)를 걸은 바는 없었으되 그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일세를 풍미하던 영웅이다. 괴노인도 진즉부터 이 점을 간파하고는 그를 반쪽 짜리(?) 제자로 삼았으며 꼭 그만큼만 활용했던 것이다. 고찰을 떠나는 선우진의 마음은 차라리 홀가분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괴노인의 서신을 통해 이미 개안(開眼)해 있었은즉, 후대를 위한 투자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아니, 그는 깨달음이 부족해 생애에 다 하지 못했던 일들이 후대에서나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다. 선우진은 다시 잠룡도로 돌아왔다. 그도 이제 늙어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도내에서 한 명의 제자를 선발해 자신의 무공인 잠룡공과 잠룡십이장을 전수시켰다. 그리고 대설산에서 터득한 개세신공도 전하려 했는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그의 제자는 그 신공을 익힐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선우진이 창안한 무공은 괴노인이 전수해 준 두 가지 기공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먼저 그것을 연마하지 안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 면에서는 선우진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속은 기분이랄까? 그는 그 길로 중원으로 내달아 황산의 고찰을 찾았다. 괴노인이 말하던 문파의 후인이 소중하다면 그 자신의 제자도 그만치 소중하다. 그런데 자신의 무공을 정작 그 후인에게는 희사하면서도 직접 거둔 제자에게는 전수하지 못하게 생겼으니 그가 눈이 뒤집혀 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황산의 고찰. 구리불상도 그대로 있었고, 그것을 밀어젖히니 목함도 역시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목함을 열자 발견된 것은 달랑 한 장의 쪽지일 따름이었다. 이렇게 씌인....... <불연(不緣)> 선우진은 대로한 나머지 그 쪽지를 들어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망자(亡者)인 괴노인의 안배는 살아있는 그를 앞질러 이런 상황에 대한 준비까지 철저하게 갖추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실의(失意)한 채 잠룡도로 되돌아와야 했다. 아울러 그는 그 날로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잠룡동에 폐관해 있으면서 지난 날 창조했던 신공을 능가할 만한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심했다. 그러나 선우진의 뜻은 종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괴노인의 말마따나 불연(不緣)이어서인지 그는 개세의 신공을 두 번씩이나 창안해 내지는 못했다. 대신 그는 생의 불꽃이 사그러지는 것을 느끼고는 한 권의 책자를 남겼다. 영호걸. 그는 선우진이 남긴 책자를 계속 읽어 가고 있었다. 까마득한 고래의 비화(秘話)는 선우진의 염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훗날 제자 중 누군가가 괴노인의 두 가지 기공을 거치지 않고도 자신의 신공을 깨우쳐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미에는 그 신공의 구결을 수록해 놓았다. 영호걸은 실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괴노인도, 또 선우진이라는 분도 모두 대단한 기인들이다. 신념을 관철하고자 하는 양자의 집념은 실로 무시무시하구나. 이런 면에서 두 분은 서로 비슷하다.' 아무튼 그는 이로써 책자의 기록자인 선대(先代)의 잠룡도주, 즉 선우진과 한결 친숙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선우진의 신공을 살펴 보기 위해 책장을 넘겼다. "흐읍!" 영호걸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묘한 울림이 터진 것은 그때였다. 그의 눈 또한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명공살강(冥恐殺 )> "맙소사! 그 신공이 명공살강이었다니......." 그는 잠시 굳어져 있다가는 곧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핫핫핫... 이제 보니 그 괴노인은 본 천무문(天武門)의 팔대 장문인이셨던 천기자(天機子) 사존이셨구나. 그리고 잠룡신군은 구대 사존이신 창허진인(蒼虛眞人), 핫핫핫... 이런 기막힌 일이!" 영호걸은 이 교묘한 우연을 두고 한참을 웃어야 했다. 아울러 그는 감격해마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사문(師門)과의 연계성을 어디서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천무문! 비록 단맥(單脈)이라고는 하지만 가히 천하제일의 문파라 자부해도 되겠군.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이 잠룡도에서까지 이렇게 사존들의 발자취를 만나고 보니 더욱 실감이 나는구나.' 그는 줄곧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더구나 천기사존과 창허사존의 염원이 동시에 내 대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니 정녕 꿈만 같구나.' 영호걸은 품 속을 뒤져 천무비경을 꺼냈다. 그가 이렇듯 자신할 수 있는 이유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기자가 창허진인에게 전수해 주었다는 정사양공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익히고 있는 건원신공과 천잔마공(天殘魔功)이었다. 게다가 그는 현재 천잔마공의 본원무공(本元武功)인 마혜수라공의 진경까지도 함께 소지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그의 도약을 도우려 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 날부터 영호걸은 마혜수라공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끔찍하고 잔인한 마공(魔功)이었다. 하지만 한 달 가까이 연마하면서도 그는 잊지 않고 건원신공과 꾸준히 융합을 시도하여 그 마성(魔性)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만족할 만한 성취를 보게 되었을 때, 영호걸은 문제의 명공살강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와중에서 그는 간간이 씁쓸하게 읊조리기도 했다. '창허사존께서는 명공살강을 건원신공과 천잔마공의 힘을 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익혀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내가 천무문의 현 장문인이라는 걸 아신다면 이해하시겠지. 또한 내게는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창허사존처럼 무공에만 열중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지 않은가?' 영호걸의 사고(思考)는 어쩌면 당년의 천기자가 주장하던 것과 일치하고 있었다. 즉 무공을 익히되 천하를 위해서 사용하라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천무문의 문규(文規)이기도 했다. 반 년이 흘렀다. 영호걸은 지금까지도 내내 밖에서 보내주는 음식을 먹는 일 외에는 전 심력(心力)을 명공살강의 연마에만 쏟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영호걸은 석실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공살강을 운기했다. 그 순간, 그의 전신에서 푸른 기운이 일어나 삽시에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이어 그의 몸을 감쌌던 푸른 기운은 점점 짙어지며 빛을 발산했고, 그 빛 또한 사방으로 급속히 뻗어나갔다. 그 푸른 기운은 석벽에 닿자 괴이한 음향을 울렸다. 파파파팟--! 이윽고 영호걸이 명공살강을 거두고 일어서자 벽을 뒤덮고 있던 푸른 기운도 스러져 버렸다. 그러나 사방의 벽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전체가 한 치 가량 무엇으로 쪼아낸 듯한 모습이었다. "아! 정녕 대단한 신공이다. 명공살강, 이는 극성으로 전개하면 천하만물을 모조리 바수어 버리겠구나." 영호걸은 놀라는 한편 벅찬 희열을 느꼈다. 그는 몸을 빙글 돌리더니 허공을 우러러 크게 웃었다. "핫핫핫핫......." 20 장 무당산(武當山)의 혈전(血戰) ① 관도(官道). 쭉 뻗은 길은 북쪽을 향해 하나의 소실점을 이루고 있었다. 그 점에 접근해가는 두 기의 인마(人馬)가 지면에 정겨운 그림자를 던져 주었다. 마상에는 일남일녀(一男一女)가 타고 있었다. 개중 남자는 약관에 이른 듯한 미청년이었고, 여자는 십사, 오세 가량의 아직 치기가 남아 있는 소녀였다. 그들은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소녀가 맑은 눈망울을 들어 미청년을 바라 보았다. "도주님, 무척 쾌청한 날씨죠?" 그들 두 남녀는 다름 아닌 영호걸과 장청미였다. "청미, 또 도주님이냐? 오누이 사이를 가장해야 한다는데도?" "아참! 내 정신 좀 봐." 장청미는 까르르 웃더니 금세 어투를 바꾸었다.


"오라버니, 할아버지는 언제쯤 이리로 오시게 되나요?" "글쎄, 도내의 대소사를 전부 맡겼으니 나도 장담을 못하겠구나. 최소한 석 달은 걸리지 않을까 싶은데......?" 영호걸은 대답해 주고 나서 새삼 주변을 둘러 보았다. '으음, 일 년만에 밟아보는 중원 땅이로구나.' 감회가 새로운 듯 그의 눈이 몹시도 일렁였다. 이때, 문득 그의 신경을 쏠리게 하는 괴음향이 들려왔다. 그것은 청력을 기울여 보니 틀림없이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였다. 영호걸이 무거운 안색이 되어 장청미를 돌아다 보았다. "청미, 저 쪽으로 가 보자." 그녀는 의아한 기색이었으나 두 말없이 그를 따랐다. 이어 그들은 길가의 나무에 말을 묶어두고는 그 꼭대기로 신형을 날렸다. 영호걸은 안력을 돋구어 소리나는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수십 장 떨어진 곳에 하나의 숲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숲 속에는 공터가 있었는데, 바로 거기서 이십여 명 정도로 추산되는 인물들이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었다. 도(道)와 속(俗)이 한데 엉켜 돌아가고 있었다. 도에 해당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나이가 지긋하고 단아한 풍모였는데, 유감스럽게도 도합 다섯 명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 속인들은 모두 청의를 입은 자들로서 개중에서 두 명만이 유독 황의를 입고 있었다. 이 두 명의 황의인은 도인들과 청의인들이 맞붙어 격렬하게 싸우는 동안 한쪽에 선 채 시종 무표정한 얼굴로 관전하고 있었다. 청의인들은 다섯 도인들을 포위하고는 그야말로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반면에 도인들도 각기 장검을 꼬나들고 분전중이었다. 그러나 전황은 도인들의 열세였다. 워낙 중과부적(衆寡不敵)인데다가 청의인들의 무공수위 또한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황의노인 중 한 명이 도인들을 향해 외쳤다. "무당오검(武當五劍)! 이제 순순히 굴복하는 것이 어떠냐? 더 이상 버텨 보았자 네 놈들은 오십 초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도인들 중 한 명이 오히려 냉엄하게 그를 힐책했다. "닥치시오! 무당의 정기가 쇠하지 않은 이상 이 자리에서 죽을 지언정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또 다른 황의노인이 그 말을 받았다. "크크크... 다 죽어 가면서도 입은 살아 있구나?" "그렇게 보였다면 내친 김에 더 말하리다. 만사교의 힘이 제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정파무림의 의기는 절대로 꺾지 못하오." "크크... 네 놈들이 지금 꿈을 꾸고 있구나. 얘들아! 사정 봐 줄 것 없다. 모조리 도륙해 버려라." 그 잔혹한 살령(殺令)은 청의인들의 공세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종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몰아쳐 온 것이었다. 그에 반해 도인들은 조금도 기세를 높이지 못했다. 몹시 탈진해 있는 듯 이제 공격은커녕 수비에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차하면 황의노인의 말마따나 전부 도륙을 당할 판국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멈춰라--!" 숲 속으로부터 한 가닥 웅후한 외침이 울려 나왔다. 동시에 하나의 인영이 신쾌무비한 신법으로 공지에 날아 내렸다. "웬놈이냐?"


황의노인이 버럭 고함 쳤다. "네 놈은 대체 뭣 하는 놈이길래 감히 우리 만사교가 하는 일에 나서는 것이냐?" 그가 초장부터 만사교를 들먹거린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말하자면 일찌감치 빠지는 편이 신상에 이로우리라는 경고였다. 장내에 불쑥 뛰어든 인영, 즉 영호걸은 냉소했다. "만사교가 그리도 대단하오?" "뭐, 뭣? 네 놈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황의노인 등은 대로했다. 하지만 영호걸은 여전히 태연하게 응수했다. 그로서는 만사교를 겁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신들이 어디에 속해 있던 관심없소. 다만 이 싸움은 너무도 공평하지 못하오. 그래서 잠깐 참견을 하게 된 것이오." "이 찢어 죽일!" 황의노인이 또 다시 펄쩍 뛰듯 노성을 발했다. 영호걸은 살기등등한 그의 기세를 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만일 당신들 중에서도 저 노도장(老道長)들과 마찬가지로 다섯 명만 나서서 싸운다면 본 공자는 즉시 이 일에서 손을 떼겠소." 그 말은 황의노인의 노화에 불을 지른 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더 못 들어 주겠구나! 어디 맛 좀 봐라."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쌍장을 무섭게 휘둘렀다. 쉬이익--! 한 가닥 강맹한 경력이 그의 장심으로부터 발출되었다. 이를 보자 영호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제야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해 주는구려!" 그의 손이 슬쩍 들려졌다. 펑--! "으윽!" 황의노인의 대번에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며 뒤로 주춤주춤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제서야 그는 정색을 지으며 물었다. "네 놈은 누구냐?" 영호걸은 빙긋 웃었다. "후후... 그런 것은 몰라도 되오이다. 내 답례나 받으시오." 그의 손이 다시 들려지더니 금불장법을 시전했다. "엇! 금불장......!" 황의노인이 다급히 신형을 뒤로 제끼며 경악성을 발했다. "그, 그럼 너는 금불신문의 사람이냐?" "하하하... 몰라도 된다고 하지 않았소? 그것을 연구하려면 아마 꽤나 골치가 아프게 될 것이오." 영호걸은 낭랑한 웃음과 더불어 이번에는 천검십이식을 장법으로 변화시켜 펼쳐냈다. 쉬이익! 쉬익--! "크윽!" 황의노인이 가슴을 움켜쥔 채 뒤로 또 한 걸음 물러섰다. "그것은 대체 무슨 장법이냐?" "후후후... 아직도 안목 자랑을 하고 싶으시오?"" 영호걸은 환영일식을 전개해 강맹한 장세를 발출시켰다. "으아악!" 황의노인은 마침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이장 밖으로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영호걸은 공지 전체가


울리도록 크게 외쳤다. "핫핫핫... 이번의 장법은 좀 특별한 선물이었을 것이오. 내 만사교의 인물들을 위해 따로 준비해 두었었으니까." 그의 야유는 사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힘으로 강호를 휩쓸고 있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의노인이 신형을 일으키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네, 네 놈이 감히 우리 만사교와 대적하려 들다니!" 그는 끝까지 만사교라는 배경을 포기하지 않았다. 듣고 있던 영호걸의 눈썹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똑똑히 들으시오! 본 공자는 이 자리에 만사교주가 직접 현신한다 해도 결코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이 점은 정파인(政派人)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이외다."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불현듯 씨익 웃었다. "하물며 당신들 쯤이야 다루지 못하겠소?" "이, 이 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황의노인이 대로하여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왔다. 내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호오! 저 정도면 위세를 부릴만도 하구나.' 영호걸은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강도를 더해 가는 황의노인의 무공은 강호 상에서도 일류급에 속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어 그가 막 손을 들어 올리려 할 때였다. ② "호호... 오라버니는 잠시 쉬세요." 펑--! 한 소리 교성과 함께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황의노인의 공세를 맞받아치는 인영이 있었다. 바로 한 옆에 몸을 숨기고 있던 장청미였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황의노인에게 말했다. "호호... 당신같은 하류를 상대하는데 오라버니가 친히 나선다는 것은 우리 집안의 수치예요. 당신에게는 본 낭자가 적절한 교훈을 내리겠어요." "뭐, 뭣이!" 황의노인은 그제서야 장청미의 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닫고는 노화를 폭발시켰다. "이 발칙한 계집년! 내 네 년을 주둥이부터 뭉개 버리겠다." 그는 당장에라도 장청미를 요절내겠다는 듯 무시무시한 일격을 가해왔다. 쉬이이익--! 그의 장력이 형태를 바꾸어 강한 회오리를 일으키며 장청미의 섬세한 교구를 향해 덮쳐 들었다. 하지만 이미 일장의 격돌을 치루어본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딜!" 실상 그녀의 무공은 대단한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조부인 장우진에게서 어릴 때부터 무공의 기초를 단단히 잡아온 그녀였다. 게다가 영호걸로부터 태극환영장법 등 여러가지 절학들을 전수받아 가히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터였다. 과연 장청미의 쌍장이 허공 중에 날카로운 파공성을 일으켰다. 쉭! 쉬쉬쉭--! 그녀가 전개해낸 것은 다름 아닌 태극환영장법이었다. 그 순간, 천지가 온통 그녀의 손바닥 환영으로 뒤덮혀 햇빛마저도 차단해 버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동시에 그 수백개에 이르는 장영은 저마다 동일한 힘을 지닌 채 전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쾅! 콰르릉--! 뇌성벽력과도 같은 폭음이 그 뒤를 이었다. 황의노인과 장청미, 양자의 장력이 그들의 중간 지점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던 것이다. 연이어 답답한 신음성이 장내를 울렸다. "크윽!" 황의노인이었다. 그의 입가에서는 어느덧 실낱같은 선혈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는 몹시도 낭패한 얼굴로 부르짖었다. "이, 이럴 수가......?" 회의에 찬 그의 눈에 장청미의 배시시 웃는 얼굴이 들어왔다. "어때요? 본 낭자의 솜씨도 쓸만 하죠?" 그녀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치기가 황의노인을 더욱 더 수치와 당혹으로 몰고 갔다. 아울러 그는 노화가 끓어 올라 그야말로 귀에서 연기가 피어 오를 지경이었다. '염병할! 이 어린 계집애를 상대로 내가 패했었다니.......' 그러나 현격한 실력차가 판명이 난 마당에야 어쩌겠는가? 그는 맞상대를 포기하고 청의인들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얘들아! 그 도사놈들은 관두고 저 년놈들부터 짓이겨 버려라." 그 말에 청의인들은 이내 영호걸과 장청미를 빙 둘러쌌다. 그들이 뿜어내는 검기가 무섭게 두 남매(?)를 압박해 갔다. "후후... 이제 다수(多數)로 대접해 주시겠다는 것이오?" 영호걸은 실소와 더불어 전신에 건원신공을 끌어 올렸다. 이어 그는 팔성 정도의 진력이 모이자 조용히 쌍장을 내뻗었다. 스읏--! 한 가닥 미풍과도 같은 기류가 경미한 파공성을 울렸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실로 상상을 절한 것이었다. "크아아악--!" 관전하던 두 명의 황의노인은 모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맙소사! 어찌 이런 일이......." 그들의 동공이 촛점을 상실한 듯 아무렇게나 흔들렸다. 아무런 힘도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은 그 일장에 청의인 열 명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져 버렸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우우우......." 그들 열 명이 쏟아내는 신음이 마치 소리 죽인 함성인 양 공지를 어지럽게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이 사태에 가장 놀란 인물들은 다름 아닌 무당파의 다섯 노검수(老劍手)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곤경에 빠뜨렸던 난적(亂賊)들이 정체 불명의 한 인물에 의해 순간적으로 제압되어 버리자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때, 영호걸의 냉엄한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본 공자는 아직 만사교에 대해 잘 모르오. 그대들은 이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오. 만일 직접적으로 악행을 목격한 바가 있었더라면 징계 또한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의 눈에서 문득 강렬한 신광이 뻗어 나왔다.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폐부를 관통당하는 듯한 충격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눈길을 접한 만사교의 인물들은 저마다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들을 향해 영호걸은 냉랭하게 일갈했다. "모두 썩 꺼지시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칭 만사교 소속을 부르짖던 인물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썰물이 빠지듯 장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한 줄기 공허한 외침만이 들려올 따름이었다. "두고 보자! 오늘의 일은 절대 잊지 않겠다."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읊조렸다. "본인이 ���라는 것도 실은 그것이었소. 그대들이 이로써 교훈 삼기를 원하지만... 후후후......." 그의 음성은 씁쓸한 웃음으로 끝을 맺었다.


③ 그들이 사라지자 무당오검 중 한 명이 다가왔다. 그 자는 퉁방울같은 눈이 특징으로 느껴지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뿜어져 나오는 눈빛만은 시원스러우면서도 정명(正明)했다. 그는 영호걸을 향해 공손히 합장했다. "무량수불... 시주, 정말 감사하오이다. 시주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우리 무당오검은 봉변을 면치 못했을 것이오." 영호걸이 마주 포권하며 빙그레 웃었다. "별 말씀을....... 설사 불초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도 도장들께서는 의기(義氣)를 상하는 일 따위는 당하지 않으셨을 것이외다." 퉁방울 도장은 탄식을 발했다. "시주께서 높이 보아 주시는 것은 감사하나 우리는 지금 겸양하는 것이 아니외다." 그는 침중한 기색이 되어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만사교의 세력은 현재 전 강호를 좌지우지하고 있소이다. 어떤 방파도 감히 그들의 비위를 거스리지 못하고 있소." 영호걸은 납득이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누대에 걸쳐 무림의 정기를 수호해 온 구파일방(九派一幇)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건재하거늘, 다른 분도 아닌 무당파의 노도장께서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그 말에 무당오검 전원이 모두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얼굴을 은은히 붉히는 그들의 표정에서는 수치감이 역력히 드러났다. 퉁방울 도장이 난색을 지으며 설명했다. "시주께서는 현 무림의 정세를 잘 모르시는구려. 심히 부끄러운 말이나 당금 구파일방은 예전의 성세를 지키고 있지 못하오이다. 그들의 횡행을 막기는커녕......." "그럼 그들에게 당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소이다. 지금 만사교와 구파일방은 일촉즉발(一燭卽發)의 상태까지 와 있소. 말하자면 전면전만을 남겨 두고 있는 셈이외다. 이미 부분적인 유혈 사태가 있었는지라......." "오오, 어떻게 그처럼 상상도 못할 일이!" 영호걸이 충격을 표명할수록 퉁방울 도장의 기세는 더욱 움츠러 들었다. 그는 급기야 입가에 고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구파 중 청성파(靑城派)와 곤륜파(崑崙派)가 만사교의 침입으로 인해 막대한 타격을 입었소이다." "맙소사!" "만사교는 만사령(萬邪令)이라는 영패를 앞장 세우고는 각 파에 굴복을 종용한 바 있소. 많은 군소방파들이 그들에게 회유당했거나, 혹은 항거하다가 멸문지화를 당하기도 했소이다." 영호걸의 눈이 마침내 경악을 지나쳐 섬뜩한 광망을 뿜어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만사교! 아버님을 감금시켜 놓아 나를 조롱하더니, 이제는 그 마수(魔手)를 무림 전역으로 뻗치고 있구나.' 통방울 도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만사령은 심지어 열흘 전, 본 파에도 나타났소이다." "설마......?" 영호걸은 회의적인 반문과 함께 안면을 마구 씰룩였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절대 무리가 아니었다. 사실 무당파라면 소림파(少林派)와 더불어 천여 년에 걸쳐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 일컬어져 왔다. 소위 정도무림의 근간을 이루는 양대산맥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 무당파에 어떻게 마세가 위협을


가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어찌 대처하셨습니까?" "그것이....... 빈도를 비롯한 우리 무당오검은 장문사백(掌門師伯)의 명을 받고 소림으로 지원을 요청하러 가는 중이었소." 영호걸의 눈에서 다시금 불꽃이 번쩍 일었다. 아무리 성세를 잃었다고는 하나 무당파의 무력한 대응방식이 그로 하여금 흥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그가 내심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을 때, 퉁방울 도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사교 측이 그 사실을 어찌 알았는지....... 천목쌍살(天目雙殺) 등을 보내 빈도들을 막았소이다." 그것은 바로 방금 전에 있었던 상황과 연결되는 얘기였다. "천목쌍살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방금 전의 두 황의노인이 바로 그들이오." "보아 하니 일류고수들 같던데, 맞습니까?" "그렇소이다." "으음."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중한 기색으로 물었다. "도장, 불초에게 한 가지 청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습니까?" "말씀 하시오.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수용하겠소이다." "불초는 무당산으로 가 보고 싶소이다." "아!" 퉁방울 도장은 대뜸 희색을 떠올렸다. 그는 나머지 무당사검의 눈치를 스윽 살피더니 흔쾌하게 대답했다. "오시오. 그것은 오히려 빈도들이 청하고 싶었던 일이외다." "다른 도인들께 폐가 되지나 않을는지 모르겠군요." "우리 무당오검이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알면 본파의 모든 도우(道友)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외다." 영호걸은 약간 멋적게 웃었다. "그럼 도장의 말씀만 믿고 무조건 가겠습니다." 통방울 도인은 빙그레 웃으며 무당사검을 돌아 보았다. "그럼 빈도들은 예정대로 소림사로 향할 터이니, 시주께서는 다섯째 사제와 함께 본파로 가시오. 우리 오검이 다 같이 모셔야 하는데....... 부디 결례로 여기지는 말아 주시오." 영호걸이 고개를 저었다. "그 무슨 말씀을? 불초는 그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곧이어 네 명의 도인들이 영호걸과 장청미에게 깊숙이 합장을 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 뒤로 두 남녀는 나머지 한 명의 도인을 따라 일로 무당산을 향했다. 무당산(武當山). 호북성(湖北省) 제일의 고산(高山)으로서 당금 무림에서 이 산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일명 도가(道家)의 성지(聖地)라고 불리우는 무당파가 바로 이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래서인지 늘상 숭엄한 기운을 품고 있는 명산이다. 무당산으로 통하는 입구에 문득 세 개의 인영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한 명의 도인과 두 명의 속인이었다. 도인은 오십여 세 가량된 초로(初老)의 노인이었고, 두 명의 속인이란 준수한 용모를 지닌 미청년과 귀여운 인상의 한 소녀였다. 바로 영호걸과 장청미, 그리고 무당오검 중의 한 명인 송학도장(松鶴道長)이었다. 그런데 산어귀에 접어 들자 영호걸은 멈칫했다.


'으음? 이것은!' 그의 귀로 들려온 것은 다름 아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였다. 송학도장이 곁에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영호걸은 굳은 얼굴로 송학도장을 응시했다. "산 위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것 같습니다." "아!" 그는 송학도장의 놀라는 표정을 지나쳐 급히 몸을 날렸다. 휘익--! "불초가 먼저 가 보겠소이다." 그의 신형은 흡사 비조처럼 산 정상을 향해 날아갔다. 송학도장이 침음성과 함께 장청미를 돌아다 보았다. "무량수불... 여시주, 우리도 어서 가 보십시다." "네." 장청미와 송학도장도 곧 영호걸이 날아간 방향을 따라 신형을 뽑아 올렸다. 그러나 언제 사라져 버렸는지 영호걸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송학도장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으음, 청력도 비상하지만 대단한 신법이다.' 이어 그는 어두운 안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무량수불... 제발 별다른 변고가 없기를......." ④ 천여 년 전, 장삼봉진인(張三奉眞人)이 무당파를 개파한 이래 무당산은 이른바 도(道)의 집산지로 추앙되었다. 따라서 무림 내에서도 누대에 걸쳐 명실공히 성역(聖域)시 되어 온 곳이다. 이곳에 오르려면 누구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마(下馬)해야 하는 것은 물론 해검대(解劍臺)에 무기를 맡겨야 한다. 그만치 신성한 장소로서 예(禮)가 요구되는 곳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러한 무당산에 실로 상상치도 못할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불시의 침입자들로 인해 난데없는 일장의 혈투가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여러 채의 도관(道館)이 불타고 곳곳에서 수많은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수신관(修身館) 앞에서는 도인들과 일단의 청의인들이 아직도 처절한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황은 역시 도인들이 계속 밀리는 추세였다. 청의인들은 하나같이 흉폭한 기세로 도인들을 핍박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숫자는 대강 줄잡아도 오백여 명이 넘을 것 같았다. 그 바람에 도인들은 저마다 악전고투를 감수하고 있었다.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일단은 숫자적으로 너무 열세였기 때문이었다. 전장(戰場)의 일각(一角). 가장 난전(難戰)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나이가 지긋하고 근엄한 풍모를 지닌 몇몇의 도장들이 비슷한 연배의 마두(魔頭)들을 맞이하여 필생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개중에서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 온 노도장의 모습이 보였다. 나이는 팔십여 세 가량, 전신에서 도인다운 풍도가 느껴지는 이 인물이 바로 현 무당파의 장문인인 능운도장(陵雲道長)이었다. 칠순 가량의 두 도인이 그를 앞 뒤로 호위하며 분전하고 있었다. 각각 현운(玄雲)과 마운(魔雲)이라는 도호를 가진 이 인물들은 능운도장의 사제이자 무당파의 장로(長老)들이었다. 그들과 대적하고 있는 인물들은 도합 다섯 명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대충 칠, 팔순 가량의 노인들로서 일신에 흑의를 걸치고 있었으며 언뜻 보기에도 하나같이 음산한 인상을 풍겼다. 이들 삼 인대 오 인의 혈투 역시도 무당 측이 연신 밀리는 국면이었다. 흑의노인들의 살벌한 공세는 능운도장 등을 여지없이 난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한 흑의노인이 검을 휘두르며 조소가 깃든 어조로 말했다. "흐흐흐... 능운, 무당산을 피로 씻고 싶으냐? 이제 그만 저항을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그 말에 능운도장의 흰 눈썹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닥치시오! 무량수불... 약속 날짜를 일방적으로 통보해 놓고, 비열하게 예고도 없이 미리 기습을 감행해 오다니......." 그의 말로 미루어 현재 상황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즉 만사교가 날짜를 정해 무당파를 접수하겠노라고 공언을 하고는 예정된 기일을 앞당겨 무당파를 습격한 것이었다. 예의 흑의노인은 여전히 비웃음을 흘렸다. "비열하다고? 흐흐...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현명하다고 하지. 무릇 싸움에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이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곁에서 다른 흑의노인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흐흐... 너희들은 지원군을 부르려고 각 파에 정예고수들을 파견시켰다. 그 덕분에 무당산에는 고맙게도 껍데기들만 남아 있거늘, 우리가 이 좋은 기회를 어찌 마다 하겠느냐?" "크ㅋ! 말똥 냄새나는 도사들이 조호이산지계(造虎移山之計)라는 근사한 병법을 알 리가 없지. 크크크......." 그들의 조롱은 무당의 대표자격인 세 도인을 격분시켰다. "무량수불! 내 그대들을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능운도장은 어느덧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무당의 장문인답게 도(道)가 깊어 이제껏 만인들의 숭앙을 받아 온 그였다. 하지만 그도 인간인 이상 이 순간만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흑의노인의 행태는 점입가경이었다. "핫핫핫... 능운, 기뻐해라! 앞으로 일개 시진 안에 너희 무당파는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쉬이익--! 그의 일검이 능운도장의 면전을 번갯불처럼 후리고 지나갔다. 이와 동시에 나머지 흑의노인들의 공격도 가일층 기세를 높였다. 츠츳! 쉬이익--! 퍼펑--! 잠시 소강상태인 듯 하던 공방전이 다시 속개되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우우우우--!" 웅후한 장소성이 무당산을 뒤흔들며 긴 메아리를 전한 것은. 심후한 내공력이 깃든 그 장소성에 의해 한창 치열하던 전세가 잠시 주춤했다. 정(正)과 사(邪), 양측이 모두 일말의 경외감을 드러내며 자신도 모르게 장소성의 출처를 찾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들은 한결같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오! 저럴 수가......." "저렇듯 신비한 신법을 구사하는 자가 있었다니!" 누구의 입에서 터져 나왔는지는 모른다. 여하튼 중인들의 탄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산 아래 쪽으로부터 하나의 인영이 허공에 높이 뜬 채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오고 있었다. 다섯 명의 흑의노인, 즉 남명오귀(南鳴五鬼)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 중 일귀가 땅바닥에 침을 뱉았다. "ㅌ! 재수없이 웬 놈이 갑자기 뛰어드는 거지?" 말투는 여전했으되 위세만은 확실히 방금 전과 달라져 있었다. 상대의 놀라운 경신술을 보자 절로 풀이 죽어 버린 것이었다. 놀라기는 능운도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슴이 써늘하게 식는 것을 느끼며 내심 불안스레 중얼거렸다. '이들 남명오귀만 해도 상대하기가 벅차거늘, 만일 저런 인물까지도 적이라면......!'


그들이 각기 이렇듯 다른 심정으로 얼굴을 굳히고 있을 때였다. 스슷--! 백색인영이 허공에 수직으로 흰 선을 그리며 사뿐히 날아 내렸다. 그 지점은 정확히 남명오귀와 능운장로 등이 대치하고 있는 곳의 중간 위치였다. 그 백색인영이란 바로 영호걸이었다. "으음, 내가 너무 늦었군." 이것이 지면에 내려서자마자 읊조린 영호걸의 첫 마디였다. 주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무당제자들의 시신이 그로 하여금 탄식을 금치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영호걸은 이어 남명오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서는 어느덧 싸늘한 광망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대들은 만사교 소속이오?" 담담한 어투였으나 그 음성에는 은은한 살기가 배어 있었다. 남명오귀가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평생에 걸쳐 무수히 도산검림(刀山劍林)을 헤쳐 왔던 그들은 상대방의 기색만으로도 벌써 삼엄한 적의(敵意)을 읽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이제 약관에 지나지 않는 청년이다. 남명오귀는 이 사실로 인해 금세 용기를 되찾았다. "그렇다면 어쩔테냐? 새파란 애송이 놈이 겁도 없이 뛰어들다니, 대체 네 놈이 그런 것은 알아서 무엇하려느냐?" "후후... 그것까지는 그대들이 알 바 아니오." 영호걸은 냉소하며 그들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남명오귀는 흠칫 놀라 부지중 뒤로 물러섰다. 상대의 당당한 기도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전해 받았기 때문이었다. 영호걸의 음성은 곧 준엄한 질책으로 바뀌었다. "모름지기 살인이란 인세에서 가장 큰 죄악이오. 더구나 무고한 인명을 해쳤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뤄야 하오." 남명오귀 중 말상을 한 자가 그 말에 응수했다. "네 놈은 지금 제 정신이냐? 감히 우리 남명오귀에게 그 따위 훈계를 지껄이다니." "뭐라 해도 좋소. 당신들은 어차피 내 손에 죽게 될 테니까." "미친 놈!" 말상의 노귀(老鬼)가 더 참지 못하겠다는듯 일검을 날렸다. 쉬익--! 푸른 빛을 띤 섬뜩한 광채가 허공을 갈라오는 순간이었다. 영호걸은 좌수를 들어 슬쩍 휘저었다. 천환삼식 중 제일초인 만변화우를 전개해낸 것이었다. 슈우욱--! 그의 좌수는 대번에 수백 개로 분리되며 제각기 강맹한 장력을 폭사시켰다. 펑--! 폭음이 울리자 답답한 신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크윽!" 말상의 노귀는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며 부르짖었다. "네, 네 놈은 대체 누구냐?" 영호걸은 그를 향해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그것을 묻다니. 후후후... 궁금하다면 알려 주겠소. 본인은 그대들을 징계하러 온 저승사자외다." "뭐, 뭣이! 이 놈이 끝까지 노부를 우롱하는구나." 말상의 노귀는 대로하여 나머지 사귀(四鬼)를 홱 돌아 보았다. 그러자 그 의미를 알아차린 사귀는 즉각적으로 움직임을 보였다. 그들은 삽시에 다섯 방위로 나뉘어 영호걸을 포위했다.


영호걸은 대소했다. "하하하... 남명오귀의 명성을 자랑하다니, 고작 이런 것이었소? 좋소! 합공(合攻)도 사양하지 않으리다." - 다음 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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