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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무혈하록 제 1 권 검궁인·사마달 공저 서문(序文) 무협소설은 동양적 환타지라고 한다. 환타지란 어원은 서양에서 나온 것으로 그 의미는 대단히 넓다. 공상과학소설이나 중세 유럽의 신화를 배경으로 그려지는 고전적 환타지 소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추리소설도 가공(架空)의 상황만을 놓고 본다면 이 범주에 속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환타지는 상상, 공상, 환상할 수 있는 모든 상황들에 해당할 수 있지 않을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SF 나 추리소설 등이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어쩌면 물경 300 만 명을 헤아리는 무협소설 매니아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한해서는 무협소설이야말로 가장 환타직한 소설이기 때문인 것이다. 근래 들어 신무협 시대니, 무협의 르네상스니 하는 말이 공공연히 매스컴을 통해 나돌고 있다. 권위주의적인 중앙 일간지나 경제 전문지, 기타 신문이나 잡지들에 무협소설이 연재되고 있는 것이 그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 무협소설은 재미있다. 이같은 평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 무협소설이 가진 마력적인 흡인력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재미있는가? 무협소설 독자들은 그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추리, 액션, 사랑, 처세론, 모험, 환상, 동양적 사유가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고 대하처럼 도도하게 스토리가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협소설은 이제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하고 있다. 신무협의 시대, 멀티미디어 시대에서도 변함없이 사랑받는 무협소설이 가야 할 길은 새로운 이야기의 세계를 개척하는 것이다. 본저 <천무혈하록>은 검궁인.사마달 두 저자가 초창기에 썼던 정통무협소설이다. 이를 개정(改訂)하여 출간하는 것은 신무협의 시대에 거울처럼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버려야 할 낡은 것도 있지만 지켜야 할 골동품도 있는 법이다. 본저는 당시 무협소설 매니아들을 열광시켰던 전형적인 한국창작무협소설의 한 단면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자오정(子午亭)에서 검궁인 . 사마달 배상 서막(序幕) 예로부터 강호에는 수많은 전설이 전해 내려왔다. 그것은 가부(可否)를 막론하고 무림인의 가슴을 끓게 하며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구에 회자(膾炙)되어 왔다. 그러나 숱한 전설들 중에서도 화룡지(火龍池)에 대한 전설 만큼 무림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드물다. 화룡지는 대략 오백 년 전 무허진인(無虛眞人)이란 도인이 남긴 무허록(無虛錄)에 그 첫 기록을 볼 수 있었다. <세상을 온통 녹여버릴 듯이 뜨거운 불줄기를 토해내는 거대한 용(龍)의 입을 들어서면 만상(萬像)이 빛을 잃어버리고, 천지(天地)가 혼돈하여 구천구백구십구 번의 윤회(輪廻)를 거치게 된다. 그 윤회의 억겁(億劫)을 지나 불의 못에 이르게 되면 세 개의 천문(天門)을 만나게 되니... 이 문을 열어 비밀을 푸는 자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하리라.> 무허록에 나오는 기록을 해석하기 위해서 숱한 무림인들이 정력을 기울여 보았지만 아쉽게도 당대에서는 아무도 그 비밀을 푼 자가 없었다. 그리고 백 년, 이백 년....... 세월이 흐름에 따라 화룡지에 대한 전설은 차츰 구전되는 이야기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다 오십 년 전, 화룡도(火龍圖)라는 한 장의 비도가 출현하면서 무림은 온통 들썩이게 되었다. 너나할 것 없이 무림인들은 한결같이 흥분하여 비도에 표시된 화룡도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로 인해 무림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고 말았다. 한 장의 비도가 무림 천년사에 전무후무한 대혈풍을 몰고 온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화룡도를 발견한 자가 없었다. 결국 세월이 흐르면서 그 사건도 흐지부지되고 만 채 다시 전설로 회귀하고만 것이다. 그 두번째의 사건이 일어난 지 어느덧 수십 개 성상이 지난 오늘 누가 알았겠는가? 화룡도의 전설은 또 다른 용트림을 하기 시작했으니.... 1 장 기이한 인연(因緣) ① 장가촌(張家村). 장씨 성을 가진 사람들만 산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인가라야 불과 백여 호 가량 밖에 되지 않는 이 마을은 유유히 흐르는 유심천(柳深川)을 배경으로 그 경치가 무척이나 아름다왔다. 또한 풍광 탓인지 이곳에서 거주하는 마을 사람들의 인심 역시 대단히 좋았다. 초입에서 비껴 북쪽으로 약간 걸어 올라가면 한 채의 아담한 모옥이 보인다. 규모는 작으나 깨끗하게 단장된 모습으로 보아 집주인의 정결한 성정이 그대로 엿보이는 집이다. 때는 삼경(三更). 장가촌은 야음(夜陰) 속에 묻혀 있었다. 삼라만상이 모두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숙면에 들어간 시각이다. 그런데 약간 떨어진 단 한 곳에서만은 장가촌의 정적과는 달리 나직한 말소리와 함께 불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약간 벌어져 있는 창문 틈으로 방 안의 정경이 엿보였다. 일로일소(一老一少). 한 노인과 한 청년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노인은 일신에 깨끗한 백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나이가 대략 오십여 세 정도로 보였다.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칼과 더불어 길게 자란 수염이 몹시도 단아한 풍도를 느끼게 했다. 이 노인은 아까부터 연신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으음, 묘수(妙手)로구나." 그 말은 아마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청년을 향한 것 같았다. 청년은 노인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입술 꼬리를 약간 말아 올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 십팔 세 정도 되었을까? 관옥같은 얼굴에 짙은 눈썹이 검날처럼 쭉 뻗어 올라가 매우 준미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특히 바둑판에 고정되어 있는 눈은 서늘한 가운데 무한한 혜지를 담고 있어 일견하기에도 비범함이 느껴졌다. 마침내 노인이 청년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허허허... 걸아(傑兒), 이 애비는 더 이상 못버티겠구나." 그의 고개가 옆으로 약간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그것 참! 내 바둑 실력도 약한 편은 아니건만 너한테만은 번번이 당하는구나." 혀를 차는 노인을 향해 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아버님, 옛부터 청출어람이청어람(靑出於藍而靑於藍)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아버님께서는 불만을 토로하실 게 아니라 제 발전을 축하해 주셔야 됩니다." 노인은 짐짓 눈을 부라렸다. "예끼, 이 녀석! 네가 이 애비를 아주 하수(下手)로 놓고 말하는구나. 어디 다시 한 번 두어 보자. 내


네 녀석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다." 청년도 지지 않았다. "그럼 여섯 점을 깔고 두십시오." "뭐, 뭐라고?" "하하... 다섯 점을 깔고 지셨으니, 당연히 여섯 점을 깔고 두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인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했으나 곧 돌을 들었다. "좋다, 이 녀석! 내 네 말대로 여섯 점을 깔테니 어디 다시 한 번 두어 보자." 청년은 빙긋 웃었다. "그래도 힘드실 겁니다. 아버님." "이 노옴, 뚜껑을 열기도 전에 큰소리냐?" "하하... 소자는 절대 자신없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아버님께서 저를 꺾으시려면 최소한 여덟 점을 깔아 놓으셔야 될 것입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진행되어 가던 부자(父子)간의 정담(情談)은 노인의 갑작스러운 침묵으로 인해 중단되어 버렸다. 그것은 추억 한 자락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으음, 과거에 국수(國手)였던 서문유허(西門有虛)조차도 나를 이렇게까지 크게 이기지는 못했다. 그러고 보면 저 녀석의 바둑실력은 벌써 그를 능가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노인은 불현듯 시선을 청년의 눈에 던졌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노인의 눈이 흐릿해졌다. '닮았다. 이 녀석의 눈은 그녀의 눈과 너무도.......' 얕은 한숨을 쉬는 이 노인의 이름은 영호천(令狐天), 훌륭한 의술을 지니고 있는 의원이었다. 아울러 그는 이곳 장가촌 근처에서 유일하게 장씨성이 아니면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인물이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십오 년 전. 당시 영호천은 황실의 전의(典醫)였다. 중년에 이르러서야 성혼을 했던 그는 젊고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슬하에는 세 살난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다. 이런 그가 가정에 얼마나 애착을 가졌었는지는 필설로 형용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심한 병에 걸려서 앓기 시작했다. 물론 영호천의 의술이 있어 병세는 악화되지 않고 초장에 이미 어느 정도의 차도를 보였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하필이면 바로 그 때에 황제로부터 궁으로 들어오라는 명이 떨어졌다. 황제가 가장 총애하던 삼공주(三公主)가 갑작스럽게 위급한 병에 걸렸던 것이다. 영호천은 공주와 아내라는 두 환자를 놓고 무척 갈등했으나 별 도리가 없었다.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어찌 개인적인 사유로 황명을 거역하겠는가?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영호천은 황궁으로 들어가서 삼공주의 병을 치료했다. 확실히 그의 의술은 여러 명의 전의 중에서도 단연 발군인지라 공주는 그의 손에 맡겨지자 단 이틀만에 병이 완치되었다. 그리고 영호천이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그를 반기는 것은 한 구의 싸늘한 시신과 어린 아들 뿐이었다. 이로 인해 영호천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맛보았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절규했다. - 속칭 천하제일의 신의(神醫)가 다 무슨 소용인가? 사랑하는 아내의 병도 고치지 못해 죽게 하다니....... 영호천은 아내를 차가운 땅에 묻고는 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며칠을 통곡했다. 그러고 나서 한 달 후, 회의에 빠진 그는 일체의 신변을 정리하고 마침내 북경(北京)을 벗어났다. 애초에는 독자(獨子)를 데리고 천하를 주유할 생각이었으나 산서성(山西省)에 위치한 이 장가촌에 이르자 생각이 바뀌어 근역에 눌러 앉아 버렸다. 그것은 평소 아내가 터전을 이루고 살고자 염원하던 곳이 바로 이런 작고 아늑한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노인 영호천. 그는 어쩌면 현재를 사는 인간이 아니었다. 돌아오지 않을 과거에 파묻힌 채 현재를 잊고 산다면


맞았다. 그리고 그의 이런 면은 일찍부터 어린 아들의 감성(感性)에 녹아 들어 청년의 정신을 일찍부터 숙성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지혜롭기도 하거니와 부친을 닮아 사색가인 청년이 물었다. "아버님, 무슨 심려가 있으십니까?" 노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다. 내가 무슨 걱정이 따로 있겠느냐?" 그는 다소 어색해 뵈는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밤도 깊었으니 자야 하지 않겠느냐? 피곤하구나. 너도 바둑판을 거두고 어서 자거라." 영호천은 말을 마치자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 부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청년은 미간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또 어머님 생각을 하셨던 모양이구나.' 청년은 모친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부친을 통해 늘 모친의 존재를 가까이 느끼다 보니 이제는 부친의 고독을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공감하고 있는 편이었다. '어머니.......' 청년의 애끓는 심정처럼 어디선가 밤새 우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오후. 노인 영호천은 행장을 꾸렸다. 그런 그의 표정은 언제 우울했느냐는 듯 더없이 밝아져 있었다. 청년은 곁에서 묵묵히 부친을 도왔다. 마침내 행장이 모두 갖추어지자 그는 부친을 바라보지도 않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님, 이번에 떠나시면 언제쯤 돌아오실 수 있습니까?" 영호천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글쎄, 아마도 두 달은 족히 걸릴 것이다. 여기서 북경(北京)까지는 그렇게 가까운 거리가 아니니까." 청년이 씨익 웃었다. "그러고 보니 서문숙부님을 만나 뵌 지도 상당히 된 것 같군요. 많이 변하셨을텐데......." 영호천의 어투가 문득 바뀌어졌다. 그의 얼굴에는 사뭇 짓궂은 웃음기까지 어렸다. "허허... 이 녀석, 그만큼 컸으면 너도 좀 솔직해져라. 네가 보고 싶은 사람은 서문유허가 아니라 난아(蘭兒)렸다?" "예엣?" 청년의 얼굴이 금세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변했다. 나이보다 조숙해 보이는 일면 그도 당황하는 부분은 있는 모양이었다. "아, 아버님! 소자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 영호천이 더듬거리는 청년의 말을 잘랐다. "이 노옴, 변명은 필요없다." 그는 막무가내기로 덧붙였다. "하긴 난아, 그 아이도 벌써 열일곱 살이 되었겠구나.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만 해도 코흘리개 계집아이에 불과했는데. 아마 지금 쯤은 곱상한 처녀 아이가 되어 있겠지?" "아버님!" 청년 영호걸(令狐傑)은 얼굴을 붉히는 와중에서도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한 소녀의 영상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녀의 이름은 서문란(西門蘭)이다. 영호천의 죽마고우인 서문유허의 무남독녀였으며, 태어나자마자 양가 부모의 합의 아래 영호걸과 정혼이 된 사이였다. 영호걸은 지금까지 그녀를 모두 세 번 보았다. 첫번째, 두번째에는 그냥 단순히 아름다운 소녀라는


의식밖에 없었으나 이 년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에는 그 느낌이 무척이나 야릇했었다. 아직 사랑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미비한 감정이었으되 웬지 옆에 가까이 두고 싶다는, 본능적인 소유욕에 근접해 갔던 것이다. 어쨌든 뜻하지 않게 내심을 들켜버린 영호걸을 향해 부친인 영호천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네 뜻이 그러하니 내 난아를 만나면 필히 네 녀석의 소식을 자세하게 전해 주마." 영호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다 꾸려진 부친의 짐꾸러미를 괜시리 뒤적였다. 그것을 보며 영호천은 입술 꼬리를 기묘하게 말아 올렸다. 얼핏 그의 눈가에 맺히는 이슬을 아들인 영호천은 미처 보지 못했다. '저 녀석은 이제 헌헌한 장부가 되어 있구나. 이런 모습을 어미인 그녀가 보았더라면.......' 그는 굳어진 표정을 숨기려는 듯 얼른 등을 돌렸다. "날씨가 차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려무나." "아닙니다. 아버님께서 떠나시는 것을 본 후에 들어가겠습니다." "괜찮대도......." 영호천은 다시 아들을 돌아다 보았다. 그의 눈가에는 어느덧 비애를 대신해 대견스러워 하는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거렸다. "자! 걸아, 애비가 없는 동안 몸조심 하거라." 말을 마치자 영호천은 몸을 홱 돌려 곧장 산 밑으로 내려갔다. 영호걸은 그런 부친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부친의 모습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하나의 점으로 화하고 말았다. 잠시 후. 부친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자 영호걸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은 온통 짙은 먹구름으로 뒤덮혀 어둠침침했다. "한 바탕 눈이라도 내릴 것 같군." 영호걸은 부친이 사라진 방향을 재차 힐끗 바라 보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② 다음날 아침. 영호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찍 일어났다. 그는 침구를 정돈한 다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의 입에서 일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 나왔다. "오오!" 산은 어제 오후부터 내린 눈으로 인해 전부 은백색으로 화해 있었다. 이제 막 떠오르는 해가 그 은백의 세계와 더불어 가히 신비경을 창조해 내고 있었다. 영호걸은 대자연(大自然)의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 바람에 그의 입에서는 한 수의 즉흥시가 흘러 나왔다. <간밤에 꿈이 밝기에 아침에 좋은 일이 있을 줄 알았더라 백설(白雪)이 천지(天地)에 가득히 세상(世上)을 덮었노라 그 위에 해가 떠오르니 묵인(墨人)의 마음이 단아해져, 일출(日出)을 마주 하며 실백(實白)의 흥이 솟는도다 아아! 이백(李白)인들 왕유(王維)인들 오늘 아침에, 어찌 시 한 수 읊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 보는 눈이 아니련만 영호걸은 새삼스러운 감흥에 빠져 들고 있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미적 감각의 만족과 함께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가슴 속에 들어와 앉는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재삼 시 한 수를 더 읊으려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찰나였다. 그의 시야에 무엇인가가 쏘아져 들어왔다.


"흐음?" 눈 쌓인 마당에는 놀랍게도 점점이 핏자국이 뿌려져 있었다. 새하얀 눈 위에서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그 색감이 영호걸을 매우 놀라게 했다. "웬 피가......?" 감상이 싹 걷히는 대신 그의 심중에는 일말의 두려움과 함께 야릇한 호기심이 들어 앉았다. 눈은 마당에도 한 자나 되게 쌓여 있었다. 영호걸은 마치 이끌리기라도 하듯 핏자국을 따라가며 의혹을 금치 못했다. '보아 하니 눈이 그친 다음에 떨어진 것 같은데 어찌하여 근처에 발자국이 하나도 없을까?' 확실히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기이한 현상이었다. 마당에는 대강 한 자 간격으로 굵은 핏방울이 떨어져 있건만, 피를 흘릴 만한 생명체가 지나갔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영호걸은 고개를 돌려 핏자국이 지나간 자리를 살펴 보았다. 그것은 산비탈에서 시작되어 마당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는 시선을 거두어 자신의 집 마당으로 들어온 핏자국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핏자국은 뒷뜰에서 끊어져 있었다. '핏자국이 사라져 버렸군.'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영호걸은 마당의 한 구석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해 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 노인이.......' 과연 그곳에는 한 노인이 있었다. 담장에 기댄 채 쓰러져 있었는데, 몸에 걸친 옷이 백색이라서 눈에 잘 띄지 않았던 것이다. 영호걸은 황급히 그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노인은 기식이 엄엄했으며, 맥을 잡아보니 상세가 대단히 위중했다. 그런 상태에서도 여전히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움켜 쥐고 있었고, 그 사이로는 새빨간 선혈이 약간씩 스며 나오고 있었다. 영호걸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노인을 안아 집 안으로 데려갔다. 이어 침대에 누이자 노인은 가느다란 신음을 발했다. "물을......." 영호걸은 얼른 그릇에 물을 따라 노인의 입에다 대어 주었다. 노인은 입 안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자 약간 생기를 되찾는 듯 했다. "으음." 노인은 짤막한 신음을 토하며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 경황에도 주위를 훑어 보는 그의 눈에는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노인장, 좀 어떠십니까?" 낭랑한 음성은 노인의 얼굴에 한 줄기 의혹이 깃들게 했다. 그의 시선이 영호걸의 준수한 얼굴에서 딱 멈추었다. 노인의 눈빛이 일순 이채를 띠었다. '으음, 진정 놀랍구나. 이 한적한 산골에 이렇게 훌륭한 인재가 살고 있었다니.......' 그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윽!" 비명과 함께 노인은 얼굴이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렸다. 영호걸이 깜짝 놀라서 그의 몸을 부축했다. "조심하십시오. 보아하니 상처가 상당히 위중하신 것 같은데." 노인은 안면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채 청년을 응시했다. 그런 그의 얼굴은 비록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기는 해도 한 가닥 희열이 번지고 있었다. "소형제, 자네가 나를 구했나?" "그렇습니다. 어르신은 상처를 입고 저희집 뒷뜰에......."


"이곳이 어디인가?" "장가촌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입니다." 노인은 방 안을 스윽 훑어 보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집 안에 윗분들은 안계신가?" 영호걸은 약간 멈칫했으나 곧 입을 떼었다. "어머님은 제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고, 아버님께서는 친구분께 가셨습니다. 지금 집에는 아무도 안계십니다." "으음....... 소형제, 미안하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물은 것 같군." 영호걸은 밝은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별 말씀을.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 걸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오히려 부담스럽습니다." 이때, 노인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우욱!" "어르신!" 영호걸이 놀라 부르짖자 노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형제, 내 품 속에서... 파란... 자기병을 좀......." 영호걸은 노인의 말대로 그의 품을 뒤져 그 속에서 파란 자기병을 꺼냈다. "거기 들어 있는 알약 하나를... 내 입에다......." 영호걸이 민첩한 동작으로 그의 지시를 따라 주었다. 잠시 후. 노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휴우!" 긴 한숨을 내쉰 그는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오른손을 들어 왼쪽 어깨 부근의 옷을 찢었다. 찌익! 옷이 찢겨 나가자 영호걸은 눈을 부릅떴다. 노인의 왼쪽 어깨에는 세 개의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부근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는 누런 고름이 줄줄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노인의 얼굴에는 암울한 기색이 스쳐갔다. '과연 혈망존자(血芒尊者)의 혈망주(血芒珠)는 지독하구나. 만약 내공(內功)으로 독의 확산을 막지 않았더라면 내 몸은 벌써 한 줌의 독수(毒水)로 화했을 것이다.' 내심 탄식을 불어 낸 노인은 품 속에서 스스로 한 자루의 단검을 꺼내더니 자신의 어깨를 내리치려 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영호걸이 크게 외쳤다. "어르신!" 노인은 손을 멈추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가? 소형제." "왜 팔을 자르려 하십니까?" 노인은 고소(苦笑)를 지었다. "난들 어디 팔을 자르고 싶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다네." 영호걸은 정색을 했다. "본래 저희집은 의가(醫家)입니다. 아버님께서 의원이시거든요. 저도 자라면서 줄곧 아버님의 의술을 익혀 왔는데, 혹시 제가 좀 손을 보면 안되겠습니까?" 노인은 다소 어이가 없는지 입가에 다시 고소를 매달았다. "소형제, 성의는 고맙지만 우선 내 말을 들어보게. 내 상처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굉장히 무서운 절독(絶毒)에 당한 것이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는 그런 독이지. 일반


의원들은 대개 손을 못댄다네. 어설프게 상처를 건드렸다간 나보다 자네가 먼저 죽을 수도 있네." 그의 설명이 끝나자 영호걸은 빙그레 웃었다. "저희 아버님께서는 여타의 의원들과는 다르십니다. 이런 외진 곳에 묻혀 계시기는 합니다만 그 분께선 당대 제일의 신의셨습니다. 의술도 그렇지만 독(毒)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으십니다." 청년의 얼굴에서 내비치는 자부심을 읽으면서도 노인은 반신반의했다. 일단은 그의 안목을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으음, 나도 소형제의 부친이 대단하시리라 믿네. 그러나......." 영호걸이 조심스럽게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럼 어르신께선 제가 아버님 슬하에서 자라면서 일곱 살 때부터 독을 가지고 놀았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흐음?" 놀라는 노인을 향해 영호걸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로 독의 용도는 두 가지입니다. 인명을 상하게 하는 쪽과 살리는 쪽,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제 아버님께서는 의원이시니 후자의 이유로 독술(毒術)을 연구하셨습니다. 즉 예를 들자면 어르신처럼 독상을 입으신 분께는 좋은 약보다 그 독과 상극(相克)의 독을 사용해 중화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일컬어 이독치독(以毒治毒)이라고 합니다." 언변도 유창했지만 그의 논조는 누가 들어도 그대로 명의(名醫)의 그것이었다. 이쯤 되자 노인도 굳이 더 버티지 않았다. "허허... 내가 은거기인(隱居奇人)을 만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는 걸? 자, 그럼 어디 소형제에게 부탁 좀 하겠네." 칭찬을 듣자 영호걸은 슬며시 얼굴을 붉히며 노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손을 들어 노인의 상처를 살피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무거운 음성을 흘려냈다. "이 독을 쓴 사람은 필경 좋은 사람이 아니겠군요. 아니, 누군지 모르지만 매우 악독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자네가 그걸 어찌 아나?" "그것은 용독(用毒)의 내용을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어르신의 상처에 스며든 독에는 무려 세 가지의 맹독 성분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세 가지?" "그렇습니다. 청린사독(靑鱗蛇毒)과 절심금홍초(絶心金紅草), 그리고 천년금와혈(千年金蛙血)까지 배합해 놓았으니까요. 사실 이 세 가지 독은 각기 천하에서 그 짝을 찾기가 힘든 절독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영호걸은 불쾌해진 듯 말끝을 흐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반면에 노인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혈망존자의 혈망주가 무림을 휩쓸어 온 지도 벌써 사십 년....... 그동안 그 독을 풀기는 커녕 내력을 알아낸 사람도 없었거늘!' 그는 영호걸을 정시하며 비로소 진지하게 물었다. "소형제, 그럼 이 독을 해독할 수도 있는가?" ③ 영호걸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네, 가능합니다."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아니, 어떻게 소형제가?" 그는 말해 놓고 실수했다 싶었는지 얼른 덧붙였다. "허허... 다른 뜻은 없네. 기분 나쁘게 생각지는 말게나."


영호걸은 그의 내심을 알아 차렸는지 빙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는 원래 처방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가전(家傳)의 의도(醫道)를 오히려 만천하에 공개하고 싶어 하시지요. 단지 사연이 있어 이렇게 은거하고 계시지만 언젠가는 당신의 의술을 총망라한 의서를 저술해 인세에 남기시겠노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저도 그 뜻에 동감하고 있었던 터라 어르신께서 궁금해하시는 부분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청년은 맹랑하게도 노인의 의구심을 신념으로 받아치고 있었다. 그리고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어조로 설명해 나갔다. "이 독을 치료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와 만년빙잠(萬年氷蠶)을 포함한 열 두 가지의 약초를 사용하는 것인데, 지금으로서는 시술하기가 곤란합니다." "곤란하다니?" "그 열두 가지의 약초 중 열한 가지는 있으나 가장 중요한 만년빙잠은 마침 다 떨어졌거든요." "그럼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또 뭔가?" 노인은 어느덧 자신이 큰 상처를 입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영호걸이라는 의가 청년에게 점점 더 매료되어 가고 있었다. 영호걸의 눈길이 노인의 상처에 조용히 내려 앉았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어르신께서 당한 세 가지의 독과 상극인 세 가지의 독물을 배합해서 복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단한가?" "아닙니다. 설명에 비해 용법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배합의 정도가 조금만 잘못되어도 일을 그르칠 수가 있으니까요. 병을 고치기는 커녕 화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영호걸은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어르신께서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옆 방으로 들어갔다. "호오!" 혼자 남게 된 노인은 마치 무엇엔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울러 그는 이 집에 들어와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고 방 안을 둘러 보게 되었다. 방 안에는 낡은 고서화 몇 점이 걸려 있을 뿐, 장식이라고는 없었다. 다만 한 귀퉁이에 수십 권의 고서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신뢰감이 깃든 탓일까? 노인은 검소해 보이는 방 안의 풍경이 무척이나 편안하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문이 열리며 영호걸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양 손에는 조그마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노인의 눈길은 신기한 듯 계속 그를 따라 움직였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영호걸의 동작은 여전히 차분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 놓더니 그 안에서 조그마한 구슬을 꺼내 노인에게 내밀었다. "어르신께선 제가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필히 이 구슬을 입에 물고 계셔야 합니다." 노인은 거의 어린애 같은 호기심마저 보였다. "그 구슬은 또 무엇인가?" "피독주(避毒株)입니다." "피독주!" "그렇습니다. 하지만 피독주란 본시 독의 확산을 방지할 수는 있으되 독을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으음......." "사양치 마시고 응해 주십시오." 노인은 할 말을 잃은 듯 그대로 입을 벌려 피독주를 물었다. 영호걸이 상자 안에서 하얀 옥도(玉刀)를 꺼내며 말했다.


"아프실 것입니다. 그럼......."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거침없이 노인의 왼쪽 어깨 살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슥! 스슥! "우욱!" 맨살이 도에 의해 베어져 나가는 감촉이란 뻔했다. 노인의 입에서는 절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상처에서는 시커먼 선혈이 주르르 흘러 나왔다. 손바닥 만한 살점이 도려 내어지자 그제서야 붉은 선혈이 솟기 시작했다. 영호걸은 상자 안에서 조그마한 그릇을 꺼냈다. 그 그릇 안에는 진득진득한 액체가 반쯤 담겨 있었다. 그는 이 액체를 노인의 상처에다 조심스럽게 붓기 시작했다. "으음......." 노인은 또 다시 신음을 발했다. 그러나 이번 것은 고통이 수반된 것이 아니라 탄성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실제로 그는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전신이 말할 수 없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몹시 나른해지기도 했다. 그로부터 약 반 시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상처 치료는 모두 끝났다. 노인은 기이할 정도의 안락감에 자신을 내맡기며 내심 찬탄을 금치 못했다. '으음, 실로 당세의 화타나 편작을 능가할 의술이로다. 내 팔 하나를 잃고 영영 불구가 되는가 했더니 뜻밖의 기인을 만나 일신을 온전히 보중하게 되었구나. 저 소형제의 의술이 이 정도이니 부친이라는 인물은 대체 어느 수준이란 말인가?' 영호걸은 주변을 정돈한 다음 노인에게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어쩌다가 그런 상처를 입게 되셨습니까?" 노인의 얼굴이 금세 침중하게 굳어졌다. "으음, 소형제는 무림인이 아니니 자세히 설명해 줘도 완전하게 이해하기는 힘들 걸세." 그는 신광(神光)이 번뜩이는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우선 듣게. 내 이름은 모용황(慕容黃)이고, 별호(別號)는 천유자(天儒子)라 하네." 물론 영호걸은 그 이름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흥미롭게 듣고 있는 그 이름을 만약 무림인들이 들었다면 대경했을 것이다. 천유자 모용황. 그는 당금 무림을 통틀어도 첫손가락을 꼽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고인(高人)이었다. 수십 년간 무림을 행도하며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고수가 바로 그였다. 모용황은 겉으로 보기에는 육십여 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실제의 나이는 이미 백 세를 넘기고 있었다. 그는 영호걸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게 되자 부지중 흥이 일어 무림의 약력을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호걸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모용황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무림사에 심취되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윽고 웬만큼의 얘기가 전달되자 모용황은 안면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의 어투도 종전처럼 침중해졌다. "무림이란 워낙 풍운(風雲)이 만변하는 곳이기 때문에 기이한 소문 또한 숱하게 떠돌곤 하지." "으음." "그러나 내가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수많은 절세기인(絶世奇人)과 영웅호걸(英雄豪傑)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사건으로써, 개중에서도 실로 처절하기 짝이 없다네." 모용황의 미간에는 굵은 주름이 잡혔다. "그러니까 작금으로부터 오백 년 전이었지. 그 당시 강호에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런 구절이 퍼지고


있었다네." - 하늘을 녹일 듯 무서운 불줄기를 토해내는 거대한 용의 입으로 들어서면, 만상이 빛을 잃어버리고 천지가 혼돈하여 구천구백구십구 번의 윤회를 거치게 된다 그 윤회의 억겁을 지나 이글거리는 불의 못에 이르게 되면 네 개의 천문을 만나게 된다. 이 문을 열어 그 비밀을 푸는 자가 있다면 천상천하에 유아독존하리라. 영호걸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떼었다. "저로서는 의미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요." "아마 그럴 것이네. 후후... 저 구절로 말미암아 한때 무림에서는 일대 혈풍이 몰아친 적이 있지." "으음!" 영호걸이 묘한 신음을 발하는 사이, 모용황의 눈에 번뜩 이채가 스쳤다. 그는 잠시 눈을 내리 감더니 홀로 상념에 잠겼다. 그러기를 한참여. 모용황은 모종의 결의가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형제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지가 바르고 굳건한 것 같아 마음에 든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모용황은 눈을 떴다. 그리고는 아연해 있는 영호걸을 직시했다. 그런 그의 눈빛은 흡사 마음 속이라도 꿰뚫어 볼 듯한 날카로운 투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천무문(天武門)이라는 한 문파의 십삼대 제자라네. 우리 천무문은 천여 년 전에 창건되어 그 후로 단맥으로만 이어져 내려 왔지. 그러다 유일하게 우리 십삼대에 와서 두 명의 제자가 생기게 되었다. 그 중 한 명이 내 사형이신 천무문의 창룡선생(蒼龍先生) 현천수(玄千秀)란 분이지." 영호걸은 그의 음성과 어감을 통해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아! 어르신을 포함해 두 분이 무림에서 차지하시는 비중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용황은 씁쓸히 대답했다. "고맙네, 소형제가 그렇게 말해 주어서. 아무튼 그 분은 오십년 전에 실종되셨는데, 그 때까지 무림 내에서 감히 그 분의 뜻을 거스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영호걸이 자못 심각한 투로 물었다. "그럼 그 분은 어찌하여 실종되셨습니까?" 모용황은 울적한 얼굴로 가볍게 탄식을 불어냈다. "그 이유가 바로 전에 말한 화룡지 때문이라면 믿겠나?" 영호걸은 스르르 얼굴을 붉혔다. "우둔한 탓에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모용황은 껄껄 웃었다. "허허... 그건 절대 소형제가 우둔한 탓이 아닐세. 내가 너무 함축적으로 얘기했기 때문이지." 그는 될 수 있는 한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④ "오십여 년 전, 무림에는 어디서 흘러 들어 왔는지 일명 화룡도라는 지도가 나타났지. 그 때문에 전 무림이 발칵 뒤집혔다네. 화룡도에 적힌 지형을 찾아 수많은 절정고수들이 들어 갔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돌아온 사람이 없다네." "어찌 그런 일이......?" "그 당시 나는 청해(靑海) 지방에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에 끼이지 못했다네. 그리고 내가 중원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내 사형을 포함한 수많은 고수들이 실종된 후였다네." "그렇다면 그 화룡도에 적힌 곳은 어디입니까?" "그건 나도 확실히는 모르네. 소문으로 미루어 천태산(天台山) 부근이 아닌가 하는 추측 외에는."


영호걸은 눈썹을 불쑥 치켜 올렸다. "좀 이상합니다." "무엇이 그렇다는 말인가?" "화룡도가 그토록 강호에 혼란을 일으켰다면서 어째서 거기에 적힌 지명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음, 과연 예리하군. 물론 거기에는 까닭이 있다네." "무슨......?" "허허... 소형제, 원래 그 지도는 처음부터 완전한 것이 아니라 반으로 나누어진 것이었다네." "아!" "바로 그 반부를 나의 사형이 가지고 계셨었지." "그럼 나머지 반부는 누가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당시 사도제일(邪道第一)의 고수라 불리우던 마심절도(魔心絶刀) 단합기(丹合奇)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었다네." "사도제일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무림의 국면이란 누대에 걸쳐 항시 그래 왔지. 정과 사로 나뉘어 양립하는....... 즉 나의 사형이신 창룡선생이 천하의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마심절도 단합기도 마찬가지였지." "그 두 분은 양측에서 각자 절대자를 고집하셨겠군요?" "그런 셈이지. 실제로도 두 사람은 능력상 고하(高下)를 가리기가 힘들었으니까. 결국 그 화룡도의 존재는 천하를 양분하고 있던 그 두 명의 고수를 묘하게 유혹했지." "유혹이라시면......?" "후후... 소형제, 자네의 생각으로는 그 두 사람이 화룡도를 보고 어떤 마음을 품게 되었을 것 같나?" 영호걸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이 갑니다. 그 상태에서 두 분이 막상막하이셨으니 만일 어느 분이건 화룡도의 비밀을 풀 수 있다면 그것을 계기로 상대를 능가하게 되리라는 생각을 했겠군요." "허허... 자네의 추리가 꼭 맞았네, 소형제. 그 두 명은 바로 그렇게 생각했지. 그러나 그들은 무공뿐 아니라 자존심과 기개도 그만치 드높아서 서로 먼저 움직이려 들지 않았네. 일단 몸을 사리며 상대의 동태만을 예의 주시했었다네." "그럼 그 두 분 중 어느 분이 먼저 움직이셨습니까?" 모용황의 음색이 다시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사도의 인물인 마심절도 단합기였네. 그리고 소문을 들은 사형도 마침내 일어나 가장 친한 벗이었던 천응객(天應客)과 함께 천태산으로 가셨지. 그것이 마지막 길이 될 줄도 모르고......." "마심절도 단합기라는 분도 거기서 실종이 되셨습니까?" "왜 아니겠는가? 실상 그들 말고도 천태산에서 실종된 사람은 강호 육대기인(六大奇人) 중 다섯 명이나 된다네." "강호인들은 모두 기인 아닙니까?" "허허... 소형제의 말도 맞네만 그런 강호인들이 가장 강한 여섯 명의 고인을 따로 꼽아 강호육기(江湖六奇)라 칭했지." 영호걸이 다시 물었다. "창룡선생과 마심절도, 그 두 분도 강호육기의 일원이십니까?" 모용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럼 나머지 네 분은 누구누구십니까?" 영호걸의 계속되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모용황은 열심히 답해 주었다. 아니, 그는 영호걸이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에 매우 만족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음, 그 넷은 방금 전에 말했던 형님의 친한 벗, 즉 천응객(天應客)과 사도에서 제일 흉악하고


잔인하기로 이름난 마염신무(魔炎神霧) 감백홍(甘百紅), 그리고 정사의 중간에서 신비스럽게 행동하는 천면옹(千面翁), 또......." 그가 말 끝을 흐리자 영호걸이 대신 이었다. "저는 그 마지막 분을 압니다." "흐음?" "사형의 실종 이후 실제적으로 천무문의 문주가 되신 분, 바로 제 앞에 계신 천유자 모용어르신이 아니십니까?" "허허허허......." 모용황은 체신도 잊은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그의 입술 꼬리에는 그 웃음의 흔적인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그렇다네. 이 못난 늙은이도 무림인들 덕에 강호육기의 말석(末席)을 차지하고 있지." "아!" 영호걸은 탄성을 발하며 새삼 눈이 부신 듯 면전의 고인을 응시했다. 그 눈길을 대하며 모용황은 더 할 수 없이 인자한 표정을 띤 채 입을 열었다. "그 다섯 명 외에도 삼십여 명이나 되는 고수들이 그들과 함께 실종되었지. 그렇기 때문에 화룡도가 아무리 무림을 진동시켰을지라도 그 지도에 적힌 지명을 아는 사람은 여전히 없는 것이라네." "으음." 영호걸은 혼란해진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상 그는 바야흐로 엄청난 사실들과 직면해 있었다. 불쌍한 노인 쯤으로 알고 치료해 준 노인이 무림의 일대 고인이라는 것도, 또 그 인물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된 무림의 비사도, 이제껏 의술과 더불어 조용히 살아온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그의 심중을 짐작한 듯 모용황이 다시 말했다. "허허... 소형제가 무척이나 황당해진 게로군. 이 늙은이가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인가?"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지내왔던 것이 되려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이것은 영호걸의 진심이었다. 그는 젊다. 따라서 매사에 호기심이 큰 반면, 환경이 주어지지 않다 보니 억제해 왔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가 의학에 정통해 있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몰랐다. 가업(家業)이니 이어가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혈기와 충동을 누르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모용황은 품 속에 손을 집어 넣더니 한 장의 양피지를 꺼냈다. 거기에는 거미줄같은 선이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 영호걸은 역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지도입니까?" "음, 대강 보아도 알겠지? 맞네. 이것은 어느 지형을 나타내고 있는 지도라네." "그럼......?" "그렇네, 소형제. 이것이 바로 문제의 화룡도라네. 여전히 반쪽 뿐이긴 하네만."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그것을 입수하셨습니까?" "그러니까 오십 년 전이지. 청해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는 곧장 사형을 찾아 뵈었지. 그런데 그 분은 계시지 않고 단지 이 양피지와 편지 한 장만이 놓여 있었네." "아!" "그 편지에 아까 내가 소형제에게 말했던 일들이 적혀 있었다네. 이 양피지는 화룡도의 사본이네. 사형께서 만약을 위해 한 장 더 그려 놓은 것이지. 내가 이렇게 상처를 입게 된 연유도 바로 이 마물(魔物) 때문이라네." 두 노소(老少)의 이야기는 점점 더 열기를 띄어 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계속 흘러 어느덧 정오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를 의식한 영호걸이 대화 도중에 몸을 일으켰다. "어르신, 시장하실텐데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식사를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그는 모용황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막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부엌으로 들어 가려던 영호걸은 갑자기 굳은 듯 뚝 멈추어 섰다. 마당에 점점이 뿌려져 있는 핏자국이 보였던 것이다. 영호걸은 미간을 좁혔다. '으음, 상황을 짐작컨대 저 핏자국은 없애야 한다. 하지만 치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걸음을 옮겨 뒷뜰로 걸어갔다. '옳지, 덫에 토끼가 걸려 있구나.' 과연 뒷뜰에 묻어 놓았던 네 개의 덫 중 하나에 한 마리의 토끼가 물려 있었다. 그는 얼른 그 덫을 풀고 토끼를 꺼냈다. 토끼는 축 늘어진 것이 벌써 죽은 지 한참 된 것 같았다. 영호걸은 문을 열고 집 앞의 비탈진 언덕을 올랐다. 그런 그의 발걸음은 핏자국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핏자국은 한 바위의 구석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잠시 주위를 훑어 보던 영호걸은 그곳에 덫을 묻었다. 다시 집 뒷뜰로 돌아온 그는 여기서도 부산히 움직였다. 토끼의 내장을 발라내 핏자국이 끝나는 곳에다 묻어 버렸던 것이다. 작업(?)이 끝나자 영호걸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토끼를 가지고 부엌에 들어가더니 모용황을 위해 요리를 했다. 잠시 후. 영호걸은 토끼요리를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침대 위에서 모용황이 가부좌를 튼 채 운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영호걸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는 잠시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이때에 모용황의 안색은 더 없이 위엄에 차 있었다. 게다가 그의 몸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이한 광채가 서려 있었다. 믿기 힘든 기현상이 일어난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문득 모용황의 코에서 손가락 굵기 정도의 하얀 기류가 흘러 나왔다. 영호걸의 눈이 절로 크게 떠졌다. '어떻게 하면 인체에서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의도를 깨우침으로써 인체의 신비를 어느 정도 정복했노라고 자부하는 그였으되, 지금 모용황이 보여주는 장면에 대해서는 실로 아연함을 금치 못했다. 모용황의 몸 전체를 뒤덮었던 백색 기류는 그의 콧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용황의 눈이 가볍게 떠졌다. 그의 눈은 종전과는 달리 신광(神光)이 충만해져 있었다. "오! 소형제, 언제 들어 왔는가?" 모용황이 묻자 그제서야 영호걸은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에 들어 왔습니다. 이것 좀 드시라고......." 영호걸은 어색한 몸짓으로 음식을 내놓았다. "허, 내 오늘은 소형제에게 폐만 끼치는 것 같군." "부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누구라도 제 입장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허허... 그야 소형제의 생각이지. 정말로 세상 인심이 그와 같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용황은 낮게 탄식하더니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모용황의 상세는 반 이상 치료되어 있었다. 영호걸은 식사를 끝낸 후, 침대에 걸터 앉아 모용황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대화의 방향이 학문 쪽으로 흐르자 영호걸은 내심 크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황의 지식은 무인으로서는 의외다 싶을 정도로 넓었다. 도시 무엇을 물어도 막히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영호걸의 놀라움도 모용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모용황은 줄곧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녕 믿을 수가 없구나. 이런 곳에서 생각지도 않게 뛰어난 인재를 만나다니.......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않은 아이가 의도에만 밝은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구나.'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깃드는 이유를 영호걸은 전혀 알지 못했다. 2 장 강호제일보(江湖第一步) ① 영호걸이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어르신께서 혼자 명상에 잠긴 듯 앉아 계실 적에는 코에서 하얀 기체 같은 것이 나오던데, 그것은 무슨 연유입니까?" 모용황은 빙그레 웃었다. "별 것도 아니네. 그저 무공의 한 과정이지." "그럼 무공을 익히면 누구나 그런 현상을 겪게 됩니까?" "그렇지는 않네. 내공이 일정 수위에 도달한 몇몇 사람에게만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네." 영호걸은 눈을 빛내며 탄성을 발했다. "아! 그러면 그 말씀은 결국 어르신께서 바로 그 수위에 도달하셨단 말씀이군요? 하긴 어르신의 학문조예에 감탄하다 보니 강호육기 중 한 분이시란 걸 제가 깜빡 잊었습니다." 모용황은 대답 대신 신비한 웃음을 흘렸다. "소형제, 무공을 배우고 싶은가?" 영호걸은 활짝 웃었다. "네, 가능하기만 하다면 꼭 배우고 싶습니다." 젊은이 특유의 거침없는 의사 표현 또한 마음에 들었는지 모용황의 입가에서는 연신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그는 영호걸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노부가 소형제에게 한 가지 선물을 하겠네." 그는 품 속에서 양피지로 된 얇은 책자 한 권을 꺼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영호걸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내 무공이 수록된 책자라네." 쉬운 대답에 반해 영호걸은 크게 놀랐다. "어찌 제게 이렇듯 귀한 것을......." 비록 무림에 몸을 담은 적이 없다고는 하나 적어도 그 책자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을지는 그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모용황은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소형제, 사양만이 미덕은 아닐세. 그 점은 어제 소형제가 내게 말하지 않았었나? 이젠 노부의 차례일세. 더구나 신세를 졌으니 노부에게도 보답할 기회가 필요하네." 영호걸이 다시 뭐라 말하려는 순간, 모용황의 안색이 일변했다. 이를 눈치 챈 영호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르신,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네. 지금 이 언덕으로 세 명의 인물이 올라 오고 있네." 영호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보지도 않고 그것을 아십니까?" 모용황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역시 내공 덕분이지. 웬만한 움직임 정도는 소리만 듣고도 파악해낼 수가 있다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주의를 집중시키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는 음성을 낮추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짐작하건대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인물들은 강호에서도 손꼽히는 절정고수일 걸세. 내가 상처가 완치되었다면 모르지만 현 상태로는 소형제에게 험한 꼴을 보일 것 같은데......." 그의 의중을 알아 차린 영호걸이 씨익 웃었다. "어르신께서는 내키지 않더라도 잠시 자리를 피해 계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저희 집 뒤 쪽으로 백여 장 정도 걸어가면 조그만 석굴이 하나 있습니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풀 숲에 교묘하게 가려져 있지요." 모용황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음, 자존심보다는 일단 목숨이 우선이겠지? 좋네, 소형제가 이르는 대로 따르겠네. 어서 같이 가 보세." "아닙니다. 어르신께서는 혼자 가셔야 합니다." "그건 무슨 뜻이지?" "제가 이곳에 없으면 그들은 분명 근처를 다 뒤지게 될 것이고, 어르신의 안전은 보장하지 못합니다. 제가 여기 남아서 그들을 상대해 보겠습니다." 모용황은 기가 막힌 듯 실소했다. "소형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사실 몸을 숨기는 것만도 수치스러운 노릇이거늘, 노부가 자네에게 이곳을 떠맡기고 혼자 가리라고 믿는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만! 되었네. 자네는 아직 강호가 얼마나 험악한지 모르고 있다. 특히 사마(邪魔)의 무리들은 살인을 파리 새끼 한 마리 죽이는 것 정도로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네." 여기까지 말한 모용황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소형제, 놈들이 이백 장 부근까지 왔다. 어서 피해라." 영호걸은 정색을 지으며 그와 맞섰다. "어르신, 저도 바보가 아닌 이상 함부로 목숨을 거는 짓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저는 애초부터 그들을 상대할 방안을 마련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는 그들을 물리칠 자신도 있습니다." "설마 소형제가 거기까지......?" 영호걸은 빙긋 웃었다. "저는 무림계의 생리까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어르신께서 독상을 당하고 오셨을 때부터 뒤에 추적자가 있으리라는 예상 쯤은 어렵지 않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호오! 볼수록 놀라운 인물이다. 자네는......." "그럼 제가 말씀 드린 장소로 가시겠습니까?" 이쯤 되니 모용황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영호걸의 제안은 어쩌면 신뢰에 대한 질문이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동안 영호걸의 눈을 응시하더니 나직한 탄식을 불어 냈다. "알겠네. 소형제, 그 대신 약속해 주게. 다치지 않겠다고." 영호걸은 활짝 웃어 그를 안심시켰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르신." 모용황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지 뒷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리기까지 몇 번이고 뒤돌아 보곤 했다. 이윽고 모용황이 완전히 자리를 뜨고 나자 영호걸은 재빨리 주위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무렵, 문 밖에서 가벼운 인기척이 들렸다. "집 안에 아무도 없소?" 기척에 비해 매우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영호걸은 신색을 가다듬은 다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는 세 명의 노인이 우뚝 서 있다가 그를 노려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의외라는 기색을 띠고 있기도 했다. 개중 한 노인이 물었다.


"아이야, 이곳에는 너 혼자 사느냐?" 영호걸은 이 불시의 객을 향해 차분한 어투로 대꾸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버님과 함께 기거하고 있는데, 아버님이 출타중이셔서 저 혼자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말을 하며 은연중 세 노인의 모습을 뜯어 보았다. 세 노인은 각기 기이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방금 전 물음을 던졌던 노인은 뚱뚱한 체구에 혈색 좋은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계속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는데, 일견하기에 그리 악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가운데 있는 노인이 세 명 중 가장 두드러졌다. 위풍이 당당하고 얼굴도 상당히 청수한 편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그의 이마에는 푸른 빛을 내는 눈 하나가 따로 더 달려 있었다. 그 눈을 보자 영호걸은 가슴 한 구석이 써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왼쪽에 있는 노인 역시 별개의 인상이었다. 그는 시체를 연상시킬 만큼 창백한 안색을 지니고 있었으며, 눈이 마치 차가운 얼음덩어리 같아서 감정의 변화를 조금도 엿볼 수가 없었다. 그의 왼손에는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도(刀)가 들려져 있었다. 이번에는 삼안(三眼)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이야, 노부가 다시 한 번 묻겠다. 너는 혹시 이 근처로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느냐?" 영호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네,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뚱뚱한 노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래? 그들 중에 노인은 없었더냐?" "그 할아버지는 왜 찾으십니까?" 창백한 안면을 가진 노인이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꼬마, 너는 우리 말에 대답만 하면 된다. 쓸데 없는 말은 더 이상 묻지 마라." 영호걸의 미간이 슬쩍 찌푸러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예의를 잃지 않고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네, 장노인께서는 원래 천식기운이 있으셨습니다. 어제도 저희집에서 약 한 첩을 지어 가셨지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그 집으로 가 보시면 당장 장노인을 만나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실로 멀쩡한 응수였다. 그 말인즉 결국 뼈가 있는 것으로써, 여기서 떠들지 말고 직접 그 쪽으로 가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창백한 노인의 안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아울러 그는 대번에 살기 띈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이 꼬마놈이 우리를 희롱하고 있구나. 너, 죽고 싶으냐?" 노인이 노기를 띈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오자 영호걸은 안색을 굳혔다. 그의 모습에서는 불쾌해 하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이르자면 왜 이유도 없이 핍박을 하느냐는 무언의 시위였다. 삼안의 노인이 재빨리 그들의 중간에 나섰다. "냉형, 잠시 참으시오." 냉면(冷面)의 노인이 걸음을 멈추고는 돌아다 보았다. "왜 그러시오? 사형(謝兄)." 삼안 노인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사형, 이 일은 내게 맡겨 주시오." ② 냉면 노인은 그 말에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 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삼안 노인이 시선을 영호걸에게 돌리며 자못 부드럽게 물었다. "아이야, 네 이름은 무엇이냐?" 영호걸은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영호걸이라고 합니다." "흐음, 좋은 이름이구나. 듣자 하니 부친께서 의원인 듯 한데......?" "그렇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는 근역의 환자들을 모두 무료로 돌보아 주고 계십니다." 그 음성에는 무한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굳이 뛰어난 의원이라 하지 않아도 그 이상의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으므로. 사실 이는 영호걸이 누구 앞에서도 숨기지 않는 유일한 부분이었다. 노인은 그의 심중을 아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다시 물었다. "아이야, 너는 왜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아느냐?"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영호걸의 말투에는 추호의 꺼리낌도 없었다. "음, 우리는 적대관계에 있는 한 노인을 추격 중이었다. 그런데 바로 너희 집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산 기슭에서 그만 자취를 잃어 버리고 말았구나."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단다. 때문에 우리는 실상 너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다. 자, 아이야. 진정 그 노인을 본 적이 없느냐?" "있었다면 처음부터 말씀을 드렸을 것입니다." 단호한 영호걸의 말에 냉면 노인은 마침내 울화를 폭발시켰다. "더 물을 것도 없소이다. 이 꼬마놈의 말인즉 불 생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오? 이런 놈을 다루는 데에는 말보다 고문이 낫소." 그가 손을 들어 영호걸의 완맥을 잡아 채려 할 때였다. "냉형, 조급하면 일을 그르치오." 삼안 노인의 언성이 다소 높아졌다. "상황이 절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강호인도 아닌 일개 청년에게 우리가 어찌 고문을 가한단 말이오?" 그의 음성이 원래대로 낮추어졌다. "더구나 이 아이의 눈을 보시오.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맑고 깨끗하지 않소?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은 대개 스스로 수치라 느껴지는 짓은 하지 못하오. 설사 고문을 가한들 소용이 없을 거란 얘기외다." "흐음, 일리가 있군." 냉면 노인은 곧바로 수긍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뚱뚱한 노인이 기소를 발했다. "후후후... 사형, 노부도 참견 좀 합시다." 삼안 노인이 그를 바라 보았다. "왕형(王兄), 말하시오." 뚱뚱한 노인은 말을 대신해 발로 눈 위를 가볍게 쓸었다. 곧 그들 세 사람의 눈에는 희미한 핏방울 자국이 보였다. 삼안 노인의 눈가에 언뜻 희색이 스쳤다. 증거를 확보했으니 영호걸도 더는 잡아 떼지 못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아이야, 이제 이 핏자국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나 삼안신군(三眼神君) 사굉무(謝宏武)만은 네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 냉면의 노인은 어느덧 수중의 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스산한 읊조림이 흘러 나왔다. "사형, 이 정도면 고문도 무방하지 않소? 그리고 고문이 안 통하면 저 꼬마놈의 목을 날려 버릴 작정이오. 나는 사형처럼 관대하지 못해 고집 센 놈을 아주 싫어하오." 세 노인은 바야흐로 심증과 확증을 통해 영호걸에게 회유와 협박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후로 어떤 태도로 나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영호걸은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세 노인의 가정과 추리는 의외로 정확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는 터럭만치도 틈을 보여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짐짓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물었다.


"세 분께선 대체 무슨 말들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내심이야 어떻든 외견상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은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세 명의 노인들은 모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냉면의 노인이 예리한 눈으로 그를 쏘아 보았다. "꼬마 놈, 잡아 떼기에는 너무 늦었지 않느냐? 우리가 쫓던 자는 몸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이 근처에서 실종이 되었으며, 그 핏자국까지 발견되었다. 더 이상 피곤하게 굴지 말고 순순히 불어라. 그렇지 않으면......." 영호걸이 그 말을 끊었다. "저도 바로 그 핏자국 때문에 이러는 것입니다. " 그의 얼굴이 괴상하게 변했다. 그것은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실망을 시켜 드려 죄송합니다만, 푸훗! 저는 어제 아침 그곳에 덫을 놓아 토끼를 잡았던 일이 있습니다." 냉면의 노인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그것이 토끼의 피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하하하......." 영호걸은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실감 나는 연기(?)에 뚱뚱한 노인이 안면을 일그러뜨린 채 부르짖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어디 입증을 해 봐라. 설마하니 토끼의 가죽까지는 먹지 않았겠지?" 영호걸은 어깨를 으쓱 했다. "그거야 무에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말씀대로 저도 이런 산골에 살면서 봉변을 당할지언정 토끼의 가죽은 먹지 않습니다." 그는 이어 세 노인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모용황이 흘렸던 핏자국은 얇은 눈발에 덮혀 있었으나 절정고수인 그들의 눈에 적나라하게 보여지고 있었다. 그들은 차갑게 얼굴을 굳힌 채 영호걸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문제의 커다란 바위 근처에 도착했을 때였다. 영호걸은 몸을 굽혀 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 속에서는 하나의 덫이 나왔다. 아울러 덫의 날카로운 부분에는 아직도 검은 피가 엉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광경에 세 노인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영호걸이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이래도 제 말씀이 거짓입니까?" 뚱뚱한 노인의 안면근육이 멋대로 뒤틀렸다. "좋다. 그럼 이 핏자국이 끝나는 데까지 가 보자." 핏자국이 끝나는 곳에 토끼의 내장이 들어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삼안신군 사굉무는 급기야 탄식해마지 않았다. "우리 세 사람의 안목이 이토록 한심해져 있었다니......." 냉면의 노인도 한 마디 거들었다. "허어! 나 섬혼도(閃魂刀) 냉염(冷焰)의 최대 수치로다. 육십년 동안 강호를 주유했으면 무얼 하겠는가?" 뚱뚱한 노인의 허허로운 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그만 둡시다. 아마도 이래서 늙으면 갈 곳이 하나로 정해지는 모양이구려. 쯧! 꼬마에게 미안해서 걱정이지." 세 명의 노인은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자 미련없이 발길을 돌려 문을 나섰다. 그들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쓸쓸한 기운은 영호걸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삼안신군이 걸음을 뚝 멈추었다. "왜 그러시오? 사형." 소면수라(笑面修羅)라는 별호를 가진 뚱뚱한 노인이 물었다. 그러자 삼안신군은 침중한 어조로 답했다.


"흑룡문(黑龍門)의 놈들이 이 산 주위로 몰려 들고 있소." 섬혼도 냉염의 싸늘한 얼굴에 한 가닥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흐흐흐... 흑룡문의 졸개 놈들이 아직도 뜨거운 맛을 덜 본 것 같군. 분풀이로는 제 격이야. 흐흐......." 그에 반해 소면수라는 삼안신군을 향해 심각하게 물었다. "그래, 놈들은 몇 명이나 되는 것 같소?" 삼안신군의 이마에 있는 푸른 눈에서 기이한 빛이 번쩍였다. "으음, 줄잡아도 오십 명은 넘을 것 같소." "무공 정도는?" "십여 명 쯤은 일류고수요." 소면수라의 눈썹이 그답지 않게 잔뜩 찌푸려졌다. "음, 아마 놈들도 총력을 기울이는 모양이군." 섬혼도는 여전히 냉소했다. "흑룡신군(黑龍神君) 위한천(威寒天), 그 놈도 죽을 때가 다 되었나 보군. 감히 우리 천중삼신(天中三神)을 건드리려 하다니." 삼안신군의 가운데 눈에서 청광(靑光)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주위를 둘러 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소. 이곳에서 우리가 놈들과 싸운다면, 그것은 한낱 바보 짓에 지나지 않소. 아무리 우리의 무공이 그들을 앞선다고 해도 이 근처의 지세를 보건대 우리 쪽이 불리하오. 또 설사 우리가 이긴다 해도 위험은 계속 따를 것이오." 섬혼도가 눈썹을 불쑥 치켜 올렸다. "그럼 어쩌잔 말이오?" "우선은 피하고 봅시다. 차라리 나중에 흑룡문을 직접 공격하는 편이 백 번 낫소. 냉형도 여기서 무가치하게 다치거나 뼈를 묻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니오?" 소면수라는 물론 섬혼도도 그 이상은 삼안신군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삼안신군은 문득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것은 영호걸의 존재를 의식해서였다. "아이야, 너는 계속 이곳에서 있을 작정이냐?"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삼안신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야, 흑룡문은 악랄하기 짝이 없는 집단이다. 거기에 소속된 자들은 누구라도 눈에 거슬리면 살려두지 않는다." 영호걸은 삼안신군의 의도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짐짓 모르는 척 하고 물었다. "제가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삼안신군은 나직이 헛기침을 하더니 어색하게 입을 떼었다. "흠, 너만 불편하지 않다면 우리와 같이 가는 것을 허락하겠다." '역시 그런 뜻이었군.' 영호걸은 이로 미루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 가지는 그들 세 노인이 결코 악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삼안신군의 권유가 호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등이었다. 사실 그도 어느새 눈 앞의 세 노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감쪽같이 그들을 속인 부분에 대해서는 일말의 자책도 있었지만. 아무튼 영호걸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위험은 피해야 하는데, 집을 비우는 일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석굴에 혼자 남게 될 모용황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머뭇거리자 삼안신군의 권유는 재촉으로 바뀌었다. "아이야, 빨리 결정해라. 시간이 없구나."


이때, 영호걸의 귓 속으로 은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형제, 내 걱정은 말고 천중삼신을 따라 가게나. 그들은 괴퍅하기는 하지만 절대로 소형제에게 해를 입힐 사람들이 아니네." 영호걸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아! 모용어르신께선 방금 있었던 일들을 다 알고 계셨구나. 그렇다면 당신의 처신 정도는 능히 알아서 하실 것이다.' 그는 삼안신군을 향해 선뜻 말할 수 있었다. "좋습니다, 어르신들을 따라 가겠습니다." 영호걸은 집을 나서며 몇 번이고 뒤를 돌아 보았다. 그것은 물론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심정에서였다. 그의 강호제일보(江湖第一步)는 이렇듯 전혀 의외로 출발하게 되었다. ③ 낙양(洛陽). 하남성(河南省)에 위치하고 있는 이 고도(古都)에도 황혼이 짙게 깔렸다. 그리고 네 명의 인영이 석양의 붉은 빛을 받으며 막 낙양성의 성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나이가 구순(九旬)에 이른 듯한 세 명의 노인과 약관이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청년 한 명이었다. 세 노인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도 대단히 기이했다. 맨 오른쪽에 있는 노인은 뚱뚱한 몸에 혈색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눈같이 흰 머리카락만 아니라면 도저히 노인의 얼굴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동안(童顔)이었다. 그는 연신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주위를 둘러 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옆에 있는 노인은 정반대 되는 인상이었다. 비쩍 마른 데다가 키는 후리후리하게 컸으며, 마치 살얼음이 낀 듯 차가워 보이는 얼굴은 그나마 시종 무표정이었다. 그 옆의 또 한 노인은 건장한 체구에 위맹한 모습으로 타인을 압도하는 풍모였다. 이들 세 노인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도 워낙 특이했지만 서로 간의 대비로 인해 행인들 가운데 더 두드러져 보이고 있었다. 어쨌든 마지막으로 소개된 노인은 동행인 청년과 더불어 무엇인가 계속 얘기를 나누며 걷고 있었는데, 풍기는 인상과는 달리 무척이나 자상해 보이는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그 노인과 벗하고 있는 청년은 더욱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유약하게 느껴졌으되, 실로 감탄할 만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관옥같은 얼굴에 먹물로 찍어 그린 듯한 검미(劍眉), 별빛을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눈 등이 더 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다. 이들은 바로 천중삼신과 영호걸이었다. 장가촌을 떠나온 지도 어언 일 개월, 그 동안 천중삼신은 영호걸이라는 한 청년에 대해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모용황과 마찬가지로 영호걸에게서 여러 가지로 뛰어난 부분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천중삼신 중에서도 삼안신군 사굉무는 영호걸을 아예 친손자인 양 아끼고 있었다. 짧지 않은 여행에서 그의 배려가 얼마나 세심했는지는 영호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천중삼신이라면 현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정(正)과 사(邪)의 중간 입장을 고수하며 언제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던 인물들이기도 했다. 이런 그들이 엉겁결에 강호에 따라 나서게 된 한 청년에게 왜 그렇게 정을 퍼붓는지는 그들 자신 외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뚱뚱한 노인, 즉 소면수라 왕상(王尙)이 문득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천유자(天儒子)는 대단한 인물이오. 근 이백여 명이나 되는 고수들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 났으니......." 삼안신군 사굉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왕형의 말이 맞소. 그나마 그가 황산(黃山) 대혈투에서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았더라면 최소한 백


명은 죽었을 것이오." 섬혼도 냉염은 늘 그랬듯 냉소로 일관했다. "노부는 그 작자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소. 모름지기 대장부란 잔인할 때는 잔인할 줄도 알아야지, 그렇게 심약해서야 어디 무림인이라고 할 수나 있겠소?" 소면수라가 사람 좋아 뵈는 미소를 지었다. "만약 모든 무림인들이 냉형처럼 행동한다면 강호무림에 사람이라고는 씨도 안남아날 것이오." 그는 매우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사형, 들리는 말에 의하면 천유자가 황산에서 혈망주에 적중이 되었다던데, 그 말은 확실한 것 같소?" 삼안신군은 섬혼도를 힐끗 바라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으음, 아마 맞는 소리일 것이오. 왜냐하면 당시 그 광경을 본 무림인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오." 섬혼도 냉염이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이, 어느덧 그들의 앞에는 커다란 객잔이 나타났다. "오늘 저녁은 이곳에서 쉬기로 합시다." 삼안신군의 제의에 모두 이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들이 객점문을 열자 나이 어린 점소이가 황급히 달려 나와 허리를 굽신거렸다. "손님들, 어서 오십시오." 소면수라가 물었다. "깨끗하고 조용한 방이 있느냐?" "물론입죠. 그런 방은 얼마든지 있으니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이번에는 삼안신군이 점소이에게 말을 건넸다. "식사는 주루 안에서 할테니 그리 알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요." 세 명의 노인은 채 때묻지 않은 점소이의 친절에 만족한 웃음을 흘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영호걸도 그들과 함께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시선을 돌려 주루 안을 둘러 보았다. 저녁 때가 되어서 그런지 주루는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점소이가 다시 곁으로 다가와 공손히 물었다. "손님들, 어떤 음식을 올릴까요?" 소면수라는 주문도 역시 웃는 얼굴로 했다. "이곳에서 가장 잘 하는 요리 서너 가지하고, 여아홍 두 근만 가져 오너라." "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반면에 영호걸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들의 말을 모두 귓전으로 흘려 보낼 정도로 그는 심정이 착잡해져 있었다. 집의 의미란 타지에 나오면 더 절실한 법이다. 더우기 졸지에 집을 비우게 된 그로서는 간간이 향수병(鄕愁病)에 가까운 느낌에 시달릴 때가 있었고, 바로 지금이 그러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습관처럼 모용황의 존재를 떠올렸다. '모용어르신....... 갑자기 나타나셔서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당신께선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모용황의 범상치 않은 기도와 인자한 모습은 이미 영호걸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비단 그로 인해 이색적인 경험을 하게 되어서만은 아니었다. 영호걸은 자신도 모르게 품 속을 뒤져 보았다. 그러자 모용황이 스스럼 없이 내주었던 무공비급이 손에 닿아왔다. 그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은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껏 기회가 닿지 않아 한 번도 펴 본 일은 없지만, 영호걸은 그 비급이야말로 천유자 모용황이라는 한 기인의 인생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곧 모용황의 잔영조차도 밀어내는 또 하나의 영상이 있었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부친의 다정한


모습이었다. '아버님께서도 두 달 안으로 돌아 오신다고 하셨으니, 그 안에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잘 정돈해 놓고 기다려야지. 그나마 내가 없으면 얼마나 적적하실까?' 소면수라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걸아, 이 녀석! 네가 집 생각이 나는 게로구나. 쯧쯧, 어차피 갈 때가 되면 어련히 가게 될까봐 그러느냐? 쫀쫀하게 굴지 말고 너도 술이나 한 잔 받아라." 영호걸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소면수라를 응시했다. 이어 그는 두 손으로 공손히 술잔을 들며 말했다. "네, 감사히 받겠습니다. 소(笑) 어르신." 그 말에 소면수라는 짐짓 눈을 부라렸다. "이 노옴! 이름을 부르려면 똑바로 불러라. 내가 어째서 소씨냐? 나는 엄연히 왕(王)씨다." 삼안신군이 그 말을 받아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내가 듣기에도 왕형의 성으로는 왕씨보다 소씨가 훨씬 잘 어울리는 것 같소이다." "아니, 사형까지 저 녀석하고 합세해서 날 궁지에 몰아넣기요?" 그의 익살에 잘 웃지 않던 섬혼도 냉염까지도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었다. 영호걸은 세 사람에게 있어 바로 그런 존재였다. 웃음 내지는 기쁨을 선사하여 일종의 활력소가 되어 주는.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영호걸 자신이라 해서 나쁠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굳어있던 그의 얼굴도 약간은 펴졌다. 네 사람은 서로 술을 권하며 연이어 재담들을 늘어 놓았다. 경륜이 있으므로 세 노인은 그 방면에서도 모두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영호걸의 말재간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본시 영민한 기질과 박식한 머리를 가진 사람은 말도 잘 하기 마련이다. 그는 간간이 세 노인으로 하여금 체신도 잊은 채 무릎을 치며 박장대소하게 만들기도 했다. 입구의 주렴이 걷히면서 주루 안에는 다른 세 명이 등장했다. 영호걸의 시선이 부지중 그 쪽으로 옮겨졌다. 세 인물 중 한 명은 나이가 약 육십여 세 정도로 보이는 거지노인이었다. 얼굴에는 때가 지저분하게 끼어 있었고, 일신에 걸친 백의는 몇 년을 안 빨았는지 흑의에 가까워져 있었다. 거지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로운(?) 냄새에 주위 사람들은 모두 콧등을 찌푸렸다. 그러나 당사자인 거지는 무엇이 그렇게도 좋은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연신 히죽거리고 있었다. 거지의 옆에는 청의의 중년인이 있었다. 네모진 얼굴에 짙은 눈썹을 지닌 그는 얼핏 보기에도 고지식한 성정이 느껴졌다. 그의 옆에는 한 명의 늘씬한 녹의(綠衣)소녀가 따르고 있었다. 소녀는 낯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영롱한 눈동자를 굴리며 계속 주위를 훑어 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시선이 미치자 영호걸의 첫 느낌은 이러했다. '무척 아름다운 소녀다.' 실제로 그 소녀는 대단히 아름다웠다. 나이는 대략 그와 비슷해 보였다. 백옥같이 희고 윤기가 도는 살결에 발그스름한 뺨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목구비(耳目口鼻)도 나무랄데 없이 단정했다. 영호걸의 눈은 본능인 양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꽃을 보듯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관심이 더 주효했다면 맞았다. 그의 눈길은 어느덧 그녀의 얼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소녀의 봉긋한 가슴과 섬세한 허리의 곡선이 차례로 영호걸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몸매 또한 용모와 마찬가지로 빼어났다. 이때, 녹의소녀의 눈이 영호걸의 눈과 허공에서 정통으로 마주쳤다. 그런데 영호걸이 다소 어색해 하는데 반해 소녀는 그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흐음!' 영호걸은 눈 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상큼한 볼우물을 만드는 그녀의 얼굴은 가만히 있을 때보다 더욱 아름다왔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그녀는 갑자기 요조숙녀인 양 고개를 푹 숙이더니 동행인 두 사람을 따라 자리에 가 앉았다. 영호걸은 잠시 멍해졌으나 그나마 시선 둘 곳을 잃게 되자 하릴없이 술잔을 들어 한 입에 술을 몽땅 털어 넣었다. 그것을 본 소면수라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그는 입가를 씰룩이며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클클... 안목만 있으면 뭐 하느냐? 기세가 밀리는 것을." 영호걸은 움찔했다. 오해(?)의 여지가 있는 장면을 들켰다고 생각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되면 아예 거두절미하고 시치미를 딱 떼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소어르신께서는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면수라가 짓궂은 얼굴로 그를 힐끔 바라 보았다. "이런 때에는 차라리 솔직한 것이 신상에 이로우니라. 험, 하긴 노부도 너만할 적에는 그 문제가 가장 어려웠지. 너처럼 예쁜 계집아이를 만나면 말도 못붙였거든." 영호걸은 할 말이 없어지자 삼안신군에게 구원(?)을 청했다. "사어르신, 이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소어르신께서는 멀쩡한 저를 가지고 저렇게 몰아치고 계십니다." 그러나 삼안신군은 강 건너 불구경이라도 하듯 딴청을 피웠다. "흐음, 가끔씩은 너도 자신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라. 노부도 그리 한가한 사람만은 아니다. 더구나 쬐그만 계집애 하나 놓고 내 어찌 점잖지 못하게 왈가왈부 하겠느냐?" 그는 의도적으로 크게 떠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녹의소녀를 비롯한 삼 인은 그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녹의소녀는 자신이 지목된 것을 알아 차리고는 잔뜩 굳어진 채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소면수라가 다시 클클 웃었다. "원래 목마른 자가 샘을 파는 법이다만 네 녀석이 용기가 모자라 고민이라면 노부가 중개해 줄 수도 있다. 어떠냐? 보아 하니 잘 구스르면 못이기는 척 하고 끌려 올 것도 같은데." 한 가닥 분노한 외침이 인 것은 그때였다. "닥치시오!" 한창 신나게 웃고 있던 소면수라의 얼굴이 흡사 종잇장 구겨지듯 잔뜩 일그러지고 말았다. ④ 외친 자는 녹의소녀의 옆에 있던 청의중년인이었다. 그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노기 띈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소면수라의 입술 꼬리가 기이하게 말려 올라갔다. "아이야, 너 지금 노부에게 말한 것이냐?" 청의중년인의 짙은 눈썹이 마구 꿈틀거렸다. "그렇소. 웬만하면 본인도 참으려 했었소이다. 그런데 해도 너무 하지 않소? 사람을 면전에 놓고 함부로 지껄여 대다니." 소면수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호오! 네 협기가 정녕 가상하구나. 그래, 안다. 사실 나도 너만할 때는 그랬었느니라. 하지만 너도 한 번 늙어 보아라. 나처럼 이렇게 허허실실 웃고 살게 되느니라." 그것은 농담에 대한 변명과 사과의 뜻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청의중년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는 생김새와 마찬가지로 고지식하게도 초지일관(初志一貫)하려 들었다. "어림없는 소리 마시오. 내 알기로는 나이값을 제대로 하는 노인들이 더 많소이다."


"흐음?" 소면수라는 의사 전달이 안되자 미간을 찌푸렸다. 이때, 그들 사이에 끼어 든 것은 다름 아닌 거지였다. 그는 청의중년인을 옆으로 밀어 내더니 소면수라를 향해 공손히 읍했다. "노선배께서는 혹시 소면수라 왕상 선배가 아니십니까?" 소면수라의 허연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갔다. "허어! 노부가 강호에서 은퇴한 지도 벌써 사십 년이 넘었거늘, 자네는 어찌 노부를 알고 있나? 필경 개방의 인물인 게로군." 그 말에 청의중년인의 기색이 싹 달라졌다. 실상 그는 상대방의 별호를 듣자마자 벌써부터 가슴이 철렁 내려 앉고 있었다. '어이구, 잘못 건드렸구나. 저 푼수덩어리 같던 세 늙은이가 천중삼신일 줄이야! 까딱하다간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되겠군.' 그러나 항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그가 본 천중삼신은 괴퍅하기보다는 짓궂을 따름이었고, 이 점에 대해 그는 새삼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사에 초탈하게 된다는 진리를 이미 소면수라에게 들었으면서, 그때까지도 미처 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그보다 연배가 높아서인지 거지는 몰골과는 별개로 그를 앞서 가고 있었다. 거지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떼었다. "노선배께서는 혹시 저를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소면수라의 입가에도 화답인 양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미안한 말이네만 노부는 자네를 모르겠군.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것 아닌가?" "저는 파의독각개(破衣獨脚 ) 사부의 제자인 노양중(魯陽中)입니다. 사십오 년 전에 개봉(開封)에서 노선배를 뵌 적이 있습니다." "아!" 소면수라는 그제서야 반색을 했다. "그럼 자네가 그때 그 늙은 거지의 옆에 있던 소년이었나?" "그렇습니다." "허허... 세월이 정녕 무상하군." 소면수라는 신기한 듯 노양중을 뜯어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파의 늙은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아직 정정한가?" "네, 사부께서는 현재 개방의 총타에 계십니다. 벌써 이십여 년 간이나 총타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눌러 계시지요." 소면수라의 얼굴에 감회의 빛이 어렸다. "으음, 그 친구를 못 만나본 지도 벌써 사십 년이 넘었군." "사부께서도 늘 노선배를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다행이군. 서로 같은 마음이라니." 소면수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의중년인을 가리켜 물었다. "이 친구는 누구인가? 위세를 보아 하니 범상한 위인 같지는 않은데, 자네가 소개 좀 해 주게나." 그러자 청의중년인은 소개고 자시고 기다릴 것도 없이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포권지례를 취했다. "노선배, 미처 알아 뵙지 못하고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노양중이 재빨리 그를 거들어 주었다. "이 사람은 소림의 속가제자로써 구자명(丘紫明)이라 하며, 일명 철장(鐵掌)이라는 별호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처음 뵌 자리이니 노선배께서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소면수라는 대소했다. "헛헛헛... 용서랄 게 무에 있겠나? 사실 아까는 노부가 좀 지나쳤었지. 자, 두 사람 다 그렇게 나무등걸처럼 서 있지만 말고 이리 와 앉게나. 같이 술이라도 한 잔 드세."


그러면서 그는 내심 부르짖고 있었다. '돌대가리 같은 놈! 소림의 땡중들이 죄다 눈이 멀었나 보군. 저런 멍청한 놈을 제자로 거두어 어디에 써 먹겠다고.' 이를 알 리 없는 구자명은 자못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엉거주춤 합석했다. 삼안신군도 사태를 알아 차렸는지 그에게는 별 관심도 보이지 않고 녹의소녀 쪽을 주의 깊게 응시했다. "저 아이는 누구인가?" 그 말에 구자명이 얼른 녹의소녀를 불렀다. "영아(瑩兒)야, 어서 너도 이쪽으로 오너라." 잠자코 있던 녹의소녀가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녀는 영호걸을 대하자 살짝 얼굴을 붉혔으나 역시 당황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니, 가까이서 본 그녀의 기세는 더욱 당돌해 보였다. 구자명이 자리에서 일어서 삼안신군에게 아뢰었다. "이 아이는 제 조카딸로써 구혜령(丘惠瑩)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어 구혜령에게도 말했다. "영아야, 노선배들께 인사를 올리도록 해라." 구혜령은 기다렸다는 듯 나붓이 절을 올렸다. "소녀, 구혜령이라 합니다. 아까부터 소녀는 노선배님들의 대화를 들으며 심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이 있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소면수라의 눈에 언뜻 이채가 스쳤다. '이제 보니 이 계집아이가 은근히 우리의 뒷통수를 치고 있군. 제 숙부와는 달리 보통 영악한 것이 아니로구나.' 그는 여전히 내심을 감추며 빙그레 웃었다. "반갑구나. 그리고 방금 전의 일은 노부가 사과하마." "그것은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소녀는 한 번 들은 말씀은 꼭 잊지 않고 기억하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저를 잘 구슬러 주시겠구나 하고 오히려 기대에 부풀어 있던 참이었습니다." 삼안신군이 재미있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아가야, 너 참 말 잘 했다. 기왕이면 무슨 수를 가지고 너를 꼬여 내려고 했는지도 물어 보거라." "끙!" 소면수라가 괴상한 신음을 발했다. 구혜령은 삼안신군을 힐끗 보더니 뺨에 볼우물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소녀는 이전부터 노선배님의 존함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은즉, 특히 하신 말씀에는 틀림없이 책임을 지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우시다면 당장에는 시행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삼안신군이 터져 나오려는 폭소를 참고 또 말했다. "호오! 마음도 넓은지고. 왕형이 원래 그렇단다. 언제부터인가 웃으며 살겠다고 일대 선언을 하더니만 정말로 늘상 웃고 다녀 종국에는 소면수라가 되지 않았더냐?" 이어 그는 소면수라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축하하오이다. 왕형이 오늘에야 취향에 맞는 적수를 만났구려." "사형, 내게 정말 이래도 되는 거요?" 소면수라의 얼굴이 무참하게 구겨졌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가 불쾌해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화 속에 빨려 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우둔한 자를 혐오하는 그는 구혜령의 재롱(?)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좋다. 또 네가 들어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만 노부는 말한 것은 즉시 행하는 성격이다. 너를 달래보려 했던 수단이란......." 구혜영이 기민하게 그의 말을 끊고 나섰다. "소녀의 생각으로는 노선배님께서 혹 비연추혼장(飛燕追魂掌)을 가지고 제의를 하려 하시지 않았을까


사료됩니다만......?" "뭐, 뭣?" 소면수라는 물론 일행 모두가 안색이 대변했다. 구자명이 듣다 못해 구혜령을 크게 꾸짖었다. "영아, 네가 지금 노선배께 무슨 무례를 범하고 있는 것이냐?" 그가 이처럼 화를 내며 당혹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구혜령이 말한 비연추혼장이란 소면수라의 독문절기(獨門絶技)로써 그녀는 놀림을 당한 대가로 그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집아이가 맹랑해도 분수가 있지! 너, 이 숙부에게 혼 좀 나 보려느냐?" 구자명은 소면수라의 눈치를 살피며 짐짓 으름짱을 놓았다. 무림인 치고 자신의 절기를 중시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자식이나 제자가 아니면 여하한 친분이 있다 해도 전해 주기를 꺼려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무공이 고강한 인물일수록 더욱 심하기 마련이다. 구자명은 그 순간 내심 간이 오그라 붙을 지경이었다. '저것이 저렇게 철딱서니가 없을 줄이야. 가뜩이나 소면수라의 분노를 살까 조마조마한 판국에 말도 안되는 소리까지 내뱉다니.' 과연 소면수라의 표정은 볼만 했다. 구자명의 예상과 다르다면 노한 것이 아니라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해져 있다는 것 뿐이었다. 반면에 구혜령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의도적인 듯 한 동안 영호걸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본 다음, 다시 시선을 소면수라에게 돌렸다. "노선배님, 소녀에게 그만한 가치가 없습니까?" 소면수라는 구혜령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대뜸 알아 차렸다. '이 계집아이가 단순히 사과를 요구하는 게 아니었군. 걸아를 중간에 놓고 흥정을 벌이려는 심산인 모양인데, 어디.......' 그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고는 영호걸과 구혜령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의 입이 떨어졌다. "아니, 가치는 충분히 있다. 애초부터 그렇게 생각하긴 했다만 코 앞에서 들여다 보니 너는 정말로 똑똑하고 예쁘구나." "아!" 소면수라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구혜령은 탄성을 발했다. 목적이 달성되자 그녀는 누가 시킬 것도 없이 날아갈 듯 절을 올렸다. "할아버님, 정말 감사합니다." 소면수라에 대한 호칭을 노선배에서 할아버지로 바꾸며 그녀는 처음으로 얼굴을 붉혔다. 소면수라는 그녀의 이런 기질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계집이란 모름지기 저래야 사내에게 도움이 되느니, 클클... 겉만 번드르르하고 속이 비어 있다면 내 너를 걸아의 상대로 받아 들였을 것 같으냐?' 그는 어느덧 자신이 어떤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지도 잊은 채 흐뭇한 얼굴로 물었다. "흐음, 네가 나를 정녕 할애비로 받아 들일 작정이냐?" 구혜령은 기탄없이 대답했다. "이미 이 영아는 조부님의 손녀입니다." 3 장 무학(武學)에서 얻은 도리(道理) ① 소면수라의 눈에는 언뜻 감동의 빛마저 일렁였다. 그것은 그가 약삭 빠른 기회주의자인 구혜령으로부터 무엇이든 쟁취해 내고자 하는 강한 열정을 발견해 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더욱 마음에 드는 것은 구혜령의 행동에서 가식이 일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망울에는 영호걸은 물론 천중삼신에 대한 흠모의 빛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 외에도 구혜령에게는 또 한 가지의 재주가 있었다. 그녀는 예의 볼우물을 지으며 즉각 어리광을 부렸다. "아이, 할아버지도! 손녀의 절을 받으셨으면 무슨 말씀이 있어야되지 않나요?" 소면수라는 급기야 그녀의 섬섬옥수를 덥석 잡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는 그답지 않게 다소 격정이 담긴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아이야, 네 덕분에 이제부터는 이 할애비의 여생도 그다지 쓸쓸하지만은 않겠구나." 옆에서 보고 있던 삼안신군이 껄껄 웃었다. "조손(祖孫)간에 죽이 척척 맞는구려. 허허... 내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왕형보다 먼저 덤벼보는 건데, 아깝소이다." 그는 영호걸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걸아, 너는 무엇을 하느냐? 너 때문에 왕형이 손녀 하나를 얻고 구름 위에 떠 있는데, 술 한 잔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 "허허... 그건 사형의 말이 맞소이다." 소면수라도 크게 웃으며 좌중을 향해 영호걸을 가리켰다. "내 이 녀석을 소개하겠네." 그의 입가에는 더 없이 자애로운 미소가 매달렸다. "이름은 영호걸이라고 하며, 우리 세 명의 손자나 다름 없는 아이라네. 자네들도 그리 알고 도와 주기 바라네." 노양중이 그 말을 받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노선배께서 부탁하지 않으셔도 당연히 후배들이 알아서 해야 할 일입니다. 세 분의 의손(義孫)이라니 저희가 능력이 닿는 한 열심히 보살피겠습니다." 그는 이어 영호걸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형제, 우형은 풍운개(風雲 ) 노양중이라 한다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실은 추후로 자네가 이 보잘 것 없는 거지를 보살피느라 애를 먹게 될 걸세." "허허허......." 소면수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더니, 자네는 파의독각개와 조금도 다른 점이 없구면." "아닙니다. 노선배께서 잘못 보셨습니다. 저와 사부 사이에는 커다란 차잇점이 있습니다. 특별히 한 방면에 대해서는 제가 사부보다 훨씬 고명합니다." "그게 뭔가?" 소면수라가 묻자 풍운개는 자못 엄숙한 신색으로 답했다. "술마시는 일입니다. 제 주량으로 말씀 드리자면 당년의 사부보다 최소한 세 배는 더 셉니다." 그 말에 좌중은 금세 웃음바다가 되었다. 구혜령도 손으로 입술을 가린 채 까르륵거렸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영호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녕 모험심이 강한 소녀로구나. 하지만 놀라운 것은 저 소녀 하나로 인해 금세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한참 웃고 있던 구혜령이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눈길을 돌렸다. "호호!" 눈과 눈이 마주치게 되자 구혜령은 스스럼없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교활하다 싶을 정도로 영민한 그녀는 이쪽 방면에서도 가히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영호걸은 머쓱해진 채 또 술잔을 기울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내밀 수 있는 답이란 고작 침묵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때, 소면수라가 풍운개 노양중을 바라보며 물었다.


"참, 자네는 이곳에 무슨 일로 왔는가? 보아 하니 아무 목적도 없이 온 것 같지는 않은데?" 풍운개는 입맛을 다셨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커다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말해 주겠는가?" 풍운개는 입가에 고소(苦笑)를 지었다. "정말 이 사건은 무척이나 우스운 경위로 벌어진 일입니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낙양에서 남쪽으로 백여 리 정도를 가면 한 채의 장원이 있다. 이름하여 청운장(靑雲莊). 장주는 소림의 속가제자로서 비룡검(飛龍劍) 사공영(司空英)이라고 불리워지는 일류고수였다. 어느 날인가 사공영은 골동품 가게에서 한 점의 고불(古佛)을 구입했는데, 뜻밖에도 고불의 뱃 속에는 진귀한 만년한옥(萬年寒玉)이 들어 있었다. 사건이란 바로 그 만년한옥 때문에 일어났다. 흑룡문(黑龍門)의 낙양 분타주인 흑심장(黑心掌) 공표(空豹)가 이 사실을 어찌 알고는 흑룡문의 문주인 흑룡신군(黑龍神君)에게 비합신구를 보내 알린 것이었다. 흑룡신군 위한천은 공표의 연락을 받자 즉시 흑룡문의 오대당주 중 한 명인 옥면살심(玉面殺心) 사문기(史文奇)에게 열 명의 고수를 붙여주어 청운장으로 가 보라고 명했다. 청운장주 사공영은 그들의 방문에 실로 아연실색했다. 만년한옥이란 결코 사도(邪道)의 집단인 흑룡문에 호락호락 넘겨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 가치로 따져 보건대 그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기 때문이었다. 사공영은 일단 사문기 일행을 정중히 맞이했다. 이는 물론 그가 등에 업고 있는 흑룡문의 위세를 의식해서였다. 그는 우선 대화를 통해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부심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사공영은 옥면살심 사문기의 인간성을 파악하게 되었고, 거기서 일말의 희망을 건질 수가 있었다. 사문기는 악랄하고 잔인한 한편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호승지심이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것은 그의 나이가 채 삼십도 되지 않았으니 어쩌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사공영은 이 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딸인 사공매(司空梅)까지도 동원해 설득 작전에 나섰으며, 이렇게 되자 사문기는 종내 자아도취에 빠져 그들 부녀가 내민 모종의 제의를 수락하기에 이르렀다. 사공영의 제의란 비무대회를 개최해 최후 승자에게 만년한옥을 넘겨 주자는 것으로써 실은 정파 쪽에서 누군가 자연스럽게 보물을 인수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램이었다. 사공영은 철장 구자명에게는 사형 뻘이었다. 따라서 그 소식을 접한 구자명은 조카딸인 구혜령과 함께 부랴부랴 청운장으로 달려 갔고, 그 도중에 풍운개 노양중을 만나 합류했던 것이다. 얘기를 듣고 나자 소면수라가 껄껄 웃었다. "사공영보다 오히려 늙은 위가 놈이 안되었군. 몇 마디 부추겨 준다고 넘어가 버리는 놈 따위에게 큰 일을 맡기다니." 풍운개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노선배께서 모르시는 말씀이십니다." 소면수라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달리 내막이라도 있는가?" "그 사문기란 놈은 절대 멍청한 자가 아닙니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천검신군(天劍神君) 장평산(張平山)의 수제자로서 강호의 젊은 고수 중에서는 거의 무적으로 알려진 작자입니다." 삼안신군의 눈살이 약간 찌푸려졌다. "우리가 은거했던 사이에 장평산이 제자를 거두었었나?" "그렇습니다."


풍운개는 계속 말을 이었다. "사공영은 현재 고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우선적으로 위기는 모면했지만 과연 그 자를 꺾을 인물이 있나 해서 여기저기 발을 놓고 있는 중입니다. 더구나......." 소면수라가 물었다. "또 무슨 까닭이 있는가?" "네, 사공영은 만년한옥도 그렇지만 자신의 딸인 사공매 때문에 더 안달이 나 있는 형편입니다." "맙소사! 그럼 그 딸도 비무대회의 전리품으로 걸었나?" "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문기는 벌써 만년한옥을 놓고 청운장과 일전을 벌였을 것입니다. 물론 흑룡방이 전적으로 지원을 했을 터이고, 청운장은 지금쯤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었겠지요." 소면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사공매라는 아이는 미색(美色)이 출중하겠군." "그렇습니다. 바람둥이인 옥면살심 사문기가 홀딱 반해 있으니까요. 그 놈은 아마도 만년한옥과 더불어 죽기 살기로 그 아이를 차지하려 들 것입니다." "헛참, 딱한 일이로군." 소면수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풍운개를 응시했다. "그 비무대회는 언제부터 열리는가?" "네, 사흘 후부터 시작한다더군요." "근역이 몹시 떠들썩 하겠군." "그렇습니다. 한 수 한다는 젊은이들은 이 기회에 사문기를 꺾어 보물도 얻고, 미인도 얻겠다며 일로 벌떼같이 청운장으로 몰려 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실력이지만......." 풍운개는 말하고 나서 영호걸에게 시선을 던졌다. "노선배의 의향은 어떠십니까? 영호소제를 한 번 내보내 보시는 것이.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게 될 호기가 아닙니까?" 그는 영호걸이 아직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은근히 꼬집어 말하고 있었다. 이르자면 강력한 권유였다. 그는 적어도 천중삼신의 의손이라면 무공 방면에서는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의 말은 곧 삼안신군의 실소로 이어졌다. "자네는 잘못 알고 있군. 걸아는 무공을 전혀 못한다네." "네엣?" 풍운개 뿐만이 아니라 구자명과 구혜령도 모두 놀란 시선으로 영호걸을 바라 보았다. 영호걸은 멋적게 웃었다. "사어르신의 말씀대로입니다. 소생은 의가(醫家) 출신으로서 지금껏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채 지내 왔습니다." 구자명은 그 말을 듣고도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세 분 노선배의 의손이라면서 어찌......." 소면수라가 고개를 흔들었다. "흐음, 향후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가 걸아와 만난 지는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았네. 그나마 먼 길을 오느라 무공을 가르쳐 줄 틈도 없었지." ② 구혜령이 아쉬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속았어. 나는 걸오빠에게도 무공을 배울 참이었는데......." 말에 비해 악의가 느껴지는 어투는 아니었다. 되려 그 말 속에는 중인들을 놀라게 할 만한 요소가 심어져 있었다. "걸오빠라고?"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자 구혜령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아 차렸다. 그녀는 몹시 당황했으나 부끄러워 하기는커녕 오히려 중인들을 향해 화를 발칵 냈다. "제가 왕노선배님을 조부로 모셨으니 저 분과는 오누이가 되잖아요?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뭐가 이상하죠?" 그녀의 깜찍한 합리화는 좌중에게 한 바탕 웃음의 소용돌이를 선사했다. 섬혼도 냉염의 입술 가장자리도 어느새 슬며시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크ㅋ! 실로 앙큼한 계집아이로구나. 걸아가 무르게 굴었다간 저 계집아이의 손에 뼈도 못추리겠군." 그의 신랄한 입담에도 불구하고 구혜령은 기왕 말이 나온 김이라 여겼는지 뿌리를 뽑으려 들었다. "걸오빠도 괜찮죠? 소매가 오빠라고 부르는 것 말이에요." 이 순간에도 정녕 어쩔 수 없는 것은 그녀가 가진 분위기였다. 심지어 주공격대상인 영호걸조차도 그녀의 직설적인 언행이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은 바로 친근감 때문이었다. 일찌기 모친을 잃고 소년시절을 산 속에서 외롭게 보냈던 영호걸이었다. 늘상 정이 그리웠던 반면 사람과 가까워지는 일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는 편이었다. 상대 쪽에서 손을 내밀어 주어야 비로소 맞잡아 간다고나 할까? 따라서 구혜령의 방식은 직효를 발휘했다. 다만 아쉽게도 그는 선뜻 그녀와 같아지지는 못했다. 그의 여전한 묵비권(?) 행사에 구혜령이 다그치듯 재촉했다. "좋다는 거예요, 싫다는 거예요? 대답을 하셔야......." 영호걸은 내심과는 반대로 무뚝뚝하게 한 마디 툭 던졌다. "벌써 오빠라고 부르고 있지 않소?"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허용이었다. 그러나 구혜령이 뭐라 답하기도 전, 소면수라가 끼어 들었다. "정녕 못난 놈이다, 넌! 천하에 여동생에게 존대를 하는 놈이 너 말고 또 누가 있느냐?" 삼안신군도 빠지지 않고 맞장구쳤다. "그건 맞소. 가끔씩 옳은 말 하는 것이 왕형의 매력이외다." "사형이 뭘 모르는 모양인데, 그건 내 특기요. 더구나 걸아를 위해서라면 그 이상도 할 수 있소." 소면수라는 걸찍한 응수에 이어 영호걸을 바라 보았다. "어떠냐? 걸아, 너도 나처럼 이 자리에서 화끈하게 나가는 것이. 영아(瑩兒)도 좋고, 영매(瑩妹)도 무방할 것 같은데, 차제에 한 번 불러 보지 그러느냐?" 영호걸은 노인들의 농담에 얼굴을 슬쩍 붉혔으나 역시 그 자신의 성격은 어쩔 수 없었다. 내면의 깊숙한 부분을 쉽사리 드러내지 못하는 성격이 장애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기회가 닿으면, 그때 시행해 보겠습니다." 삼안신군이 이 꼬투리를 놓칠 리 없었다. "허허... 끝내 변변찮은 녀석이로고. 우리 세 늙은이더러 꼬박꼬박 어르신이라고 공대를 하더니만 누이동생에게도 그럴 참이냐?" 옆에 있던 소면수라가 술병을 들어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손등으로 입가를 씻으며 구혜령에게 눈을 부라렸다. "이 계집애야, 우리 늙은이들이야 체신상 저 녀석이 알아서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다지만 너는 어린 것이 그 재빠른 수단은 두었다 뭐 하려느냐?" 구혜령이 생긋 웃었다. "할아버지께서 그리 인정해 주신다면야......." 풍운개도 무엇을 짐작했는지 한 몫 거들었다. "자고로 차지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오래비를 쥐어 뜯건 물어 뜯건 네 소관이니, 이후로는 네 맘대로 하려무나." 그의 응원까지 가세하자 구혜령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영호걸을 향해 나붓이 절을 올렸다. "오라버니, 소매가 인사 드려요."


영호걸도 마지 못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인사는... 나는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데......." 그러나 그의 손은 금세 원 위치로 끌어 당겨졌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이런저런 대화 속에 그들 일행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차가운 바깥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푸근하기 그지 없는 겨울밤이었다. 객점의 방 안. 시각은 이미 삼경을 지나 사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호걸은 탁자에 턱을 괸 채 타오르는 촛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불빛에 어른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얼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구혜령이었다. 추수(秋水)와도 같이 서늘하면서도 상큼하게 치켜 올라간 그녀의 눈이 영호걸을 향해 웃고 있었다. '구혜령....... 정녕 특이한 소녀다. 내가 오히려 배울 점이 많다.' 자신이 품고 있던 여인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는 여인, 영호걸은 그녀의 영상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상으로 다가갔다. 옷을 벗는 순간, 영호걸은 품 속에 들어 있던 비급에 생각이 미쳤다. 그것은 앞서도 말했듯 천유자에게 넘겨 받은 이후로 한 번도 살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비급에 대한 호기심이 불같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왜일까? 영호걸은 마침내 비급을 꺼내 펼쳐 보았다. 겉장은 누런 양피지였고, 거기에는 금빛 글씨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어져 있었다. <천무비경(天武秘經)> 표지를 넘기자 용이 춤추는 듯한 해서체(楷書體)의 글씨들이 그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노부는 천무문(天武門)을 세운 천잔노인(天殘老人)이다. 평생을 불행 속에서 살아 온 노부는 성격이 괴팍하고 잔인해서 수많은 무림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러다가 노부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스스로 죄를 깨닫고 선한 일을 행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는데, 그 때까지도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노부의 이런 심경 변화를 알아주기는 커녕되려 심각하게 오해를 하기도 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한 인물의 고백(告白)으로써, 간단한 문구였으나 거기에는 절절한 비탄이 매달려 있었다. 영호걸은 침음한 채 계속 글을 읽어 나갔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 모든 것이 노부가 저지른 죄의 대가인 것을. 결국 노부는 세사를 떨쳐 버리고 심산유곡에 은거했다. 그러던 중에도 세월이 흘러 나이 이백 세를 넘게 되자 노부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고심해 오던 무학의 현묘한 이치를 뒤늦게야 터득하게 된 것이다. 내 그것을 이 한 권의 비급에 넣어 전하노라. 이 천무비경 상의 무학은 노부조차도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인연이 닿아 이 비급을 얻는 자에게 간곡히 바란다. 그대는 이 무공비급을 취하는 대신 반드시 그 극의에 도달하도록 힘쓸 것이며, 노부의 뒤를 이어 천무문을 계승해 주기 바란다.> '천무문의 계승? 이게 무슨 의미인가?' 영호걸은 의외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글은 더욱 구체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천무문은 일대(一代)에 일인(一人)이면 족하다. 어차피 한 시대를 위한 영웅은 한 명이면 족하기 때문이다. 연자(緣自)여, 그대가 여기에 기록된 무공을 정의롭게 사용하여 노부의 막대한 죄과를 조금이라도 사해 준다면 지하에서나마 그대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겠노라. 천잔(天殘) 서(書).> 의기(義氣)가 절절히 느껴지면서도 한 편으로는 지극히 오만한 문구였다. 여기까지 읽고 난 영호걸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충격을 입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그렇다면 모용어르신께서 임의로 나를 천무문의 십사대 전인(傳人)으로 내정하셨었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것은 상처를 치료한 대가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것이다. 대체 그 분이 아무 능력도 없는 나를 어찌 보시고.......' 영호걸은 가슴의 진동을 애써 억누르며 다음 장을 넘겼다. <건원신공(乾元神功)> 그것은 언뜻 보기에도 무공의 이름 같았다. 그는 커다란 호기심을 품은 채 건원신공의 요결을 읽어 보았다. 읽어내려 갈수록 그 뜻에 심취되는 것은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것은 자자구구가 모두 오묘하고 기이한 의미를 담고 있어 그의 정신을 사로잡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이 신공은 건원(乾元)이란 어휘 자체가 말해주듯 주로 양(陽)을 위주로 한 무공이었다. 도합 십이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육단계부터는 돌파해 나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천잔노인이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도 바로 이 부분부터였다. 그 역시도 죽음 직전에 이르러서야 신공의 오의에 도달했는데, 적어 놓기만 했을 뿐 아쉽게도 연마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완벽한 전수자는 없었다. 천무문 역사 천 년 이래,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창룡선생 현천수도 이 신공만큼은 겨우 칠 단계에서 머물러야 했다. 건원신공 요결의 후속으로는 이런 것이 있었다. <천잔마공(天殘魔功)> 이 무공이야말로 천잔노인의 성명절학으로써 그가 무림을 휩쓸 때 사용했던 것이다. 물론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무공은 절대 정도(正道)의 그것이 아니었다. 천잔노인으로 말하자면 불운한 기재였다. 그는 어린 시절 출신이 비천해 인간 이하의 수모를 받으며 자라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성장과정에서 줄곧 자신을 학대한 사람들을 전부 죽여 버리겠노라고 맹세했으며, 그 증오심에서 창조된 무공이 바로 천잔마공이었다. 천잔노인은 이 마공으로 복수는 물론이거니와, 더 나아가서 천하를 주름잡은 바 있다. 이로 미루어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영호걸은 그것을 대하자 우선 의문이 부쩍 일었다. '흐음, 이 천잔마공의 요결에서는 섬뜩하리만큼 사기(邪氣)가 느껴진다. 과연 모용어르신께서도 이 무공을 익히셨을까?' 모용황의 기질이나 온화한 인품을 떠올릴 때,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상 영호걸의 염려는 기우(杞憂)였다. 십삼대에 걸친 천무문의 제자 중에서 천잔마공을 연마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가 몰라서 그렇지, 창룡선생 현천수 같은 경우에는 이 신공을 아예 들여다 보지도 않았다는 일화도 있었다. 영호걸은 곧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천잔노인의 말씀을 빌지 않아도 확실히 건원신공이 천잔마공보다는 한 수 위인 것 같구나. 아무래도 말년(末年)에 터득한 무공이라면 전 생애의 비학이 집대성 되었다고 보아야겠지. 그런데 천잔노인은 굳이 천잔마공을 무엇 하러 여기에 적어 놓으셨을까?' 그는 다시 다음 장을 넘겨 보았다. ③ <천잔삼식(天殘三式)> 영호걸은 그 초식의 이름을 보자 내심 짚히는 바가 있었다. '겨우 세 개 뿐인 초식,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만큼 그 하나하나가 개세적이라는 의미일 테니까.' 실상 그러했다. 천잔노인이 한때 전 무림을 종횡무진 휩쓸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불과 삼 개 초식에 지나지 않는 이 무공의 위력이 어떠했는지는 능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천잔삼식은 먼저 천잔마공이 기초가 되지 않고는 절대로 연마할 수 없다. 또한 이 삼초식의 무공은


각각 이름에서도 엿보이듯 무서울 정도로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수법이었다. 제일초, 혈혼절(血魂絶). 제이초, 귀령참(鬼靈斬). 제삼초, 마잔멸(魔殘滅). 영호걸은 이들 도식(圖式)을 뇌리에 그려 보며 몇 번이고 치를 떨어야 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고서야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무영비(無影飛)> 이것은 경공술이다. 최고의 경지에 달하면 하늘을 날아갈 정도로 절세적인 경공인 것이었다. 그런데 무영비의 요결이 끝나는 부분에는 전혀 뜻하지 않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인연이 있어 본인의 무공을 얻은 자여, 그대는 항시 스스로가 천무문의 계승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리고 부디 이 무공으로 세상의 도의(道義)를 구하고 만천하에 영명을 떨치기를 빈다. 천잔.> 영호걸은 실로 기이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책의 내용은 반 이상이 남아 있거늘, 어찌 말미에나 달아질 만한 글이 중간에서 튀어 나온 것일까?' 그의 의문은 그 뒷장을 대하는 순간에 깨끗이 일소되었다. "아!" 영호걸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그의 눈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쏘아져 들어 왔던 것이다. <천무문의 제이대 문주인 나운(羅雲)이 남긴다. 천뢰오장(天雷五掌).......> 영호걸은 입가에 기소를 매달았다. '천무비경에는 천잔노인 외에 다른 인물의 무공도 적혀 있었군.' 그는 이어 천뢰오장의 구결을 음미하듯 천천히 읽어 보았다. 그 장법은 양강을 위주로 한 무공이었는데, 절정에 이르면 우뢰가 치는 듯한 소리 가운데 상대방을 단번에 숯덩이로 만들어 버리게 되어 있었다. 실로 끔찍할 정도로 패도적인 장법이었다. 영호걸은 두려움을 지나 회의마저 일 지경이었다. '과연 인간이 인간을 이런 식으로 살상해야 하는가?' 그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으며 비급을 또 한 장 넘겼다. <천무문의 제삼대 문주인 독고령(獨孤鈴)이 남긴다. 단혼일도(斷魂一刀).......> 거두절미하고 그것은 단 일초였다. 하지만 그 도법이야말로 천하의 그 누구도 막지 못할 고금제일(古今第一)의 절학이었다. 천무비경을 들고 있는 영호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고 보니 이 비급은 천무문의 조사 뿐 아니라 역대 장문인들의 무학이 총망라된 비서(秘書)였구나.' 그는 자신이 얻게 된 복연(復緣)에 대해 거의 믿을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천무문의 근 일천여 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 동안 배출되었던 제자들은 가히 절세의 기재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노년에 이르러 하나같이 자신이 익힌 무공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무공을 창조해 냈고, 후대를 위해 한 권의 책자에 맥을 잇듯 적어 놓은 것이었다. 영호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녕 불세출의 기인(奇人)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진 능력상 각자 따로 성명 비급을 남겨도 충분했을 터인즉, 그렇게 하지 않고 이런 수단을 쓴 것은 그만치 자부심이 대단했다는 역설적인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이는 천무문에 대한 충심(忠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후예로써 천무비경을 대하게 된 영호걸은 곧 난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 사람도 아니고 십삼 인이 평생에 걸쳐 연마한 절기들을 어찌 한 사람이 수용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천무문의 제오대 장문인인 경천신검(驚天神劍) 뇌전공(雷全功)이 앞서 기술해 놓은 바가 있었다. 그도 영호걸과 똑같은 고심을 했던지, 육대부터는 천무비경상의 무공 중 체질에 합당한 세 가지의 무공만을 익히도록 권고하고 있었다. 아무튼 천무문이 십삼대를 내려 오는 동안 창출된 무공은 무려 이십 가지에 이르렀고, 그들 중 최고의 인재라는 창룡선생도 그 중 일곱 가지밖에는 터득해 내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마침내 영호걸은 천무비경을 덮었다. 그는 잠시지간에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천무비경을 처음 펼칠 때와는 달리 이 순간에 이르자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마치 노도와도 같은 웅풍(雄風)이 절로 솟구치고 있었다. 영호걸은 격정을 누르기 위해 눈을 지그시 내리 감았다. '기왕 남아(男兒)로 태어났으니, 웅지(雄志)를 가져 보는 것도 좋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기회다.' 그것은 어쩌면 오래 전부터 그의 내부에 늘상 잠재해 있던 부분인지도 몰랐다. 다만 지금까지 그 자신이 걸머져야 했던 환경요인으로 인해 스스로 부인해 왔을 따름이었다. 영호걸은 다시 눈을 뜨고 천무비경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의미의 개안(開眼)이 이루어져서일까? 그의 눈에는 그 표지마저도 이제는 새로운 느낌으로 부딪쳐 왔다. '내 반드시 한 번은 무림을 독보하는 영웅이 되어 보리라.' 그는 바로 이런 심경이 되어 천무비경의 앞장을 다시 펼쳤다. 건원신공. 이 개세의 신공은 글자의 한 획, 한 획이 마치 살아 춤추듯 약동하며 영호걸의 정신 속에 속속 들어와 박혔다. 뜻이 오묘한 만큼 무척이나 난해한 요결이었지만 그의 의지는 이를 점차로 극복해 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입가에는 이따금씩 만족한 미소가 어리기도 했다. '으음, 내 비록 무공에는 문외한이지만 이 신공은 요결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더 없는 공부(工夫)가 되는구나.' 물론 영호걸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그 지점만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의 응용을 위해 건원신공의 요결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다음, 양손을 모아 단전 위에 갖다 댔다. 그리고는 혀를 입 천정에 붙히고 신공의 요결에 따라 진기를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야흐로 영호걸이라는 한 청년이 무학에의 입문(入門)을 시도한 첫 순간이었다. 이른바 벌모세수도 거치지 않았으며, 스승도 없다. 단지 믿을 것이라곤 그 자신 뿐인 것이다. 과연 독학(獨學)은 쉽지 않았다. 체내 진기는 그의 뜻대로 잘 모아지지 않았고, 설사 모아진다 해도 이내 다시 흩어져 버렸다. 그러나 영호걸은 애초부터 각오한 바가 있었던만치 실망하지 않고 계속 주의를 집중하여 진기를 모으기에 힘썼다. 모름지기 인간의 노력 앞에 정복되지 않는 산(山)은 없다. 그야말로 사력을 다한 가운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영호걸은 크게 환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단전에 뭔가 신비한 기운이 쌓이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영호걸은 곧바로 진기를 전신 사지백해로 운행해 보았다. 그러자 그는 한 가닥 뜨거운 기운이 몸 속을 고루 치달리는 것을 느끼며 내심 감격을 금치 못했다. '아! 드디어 성공이구나.' 영호걸은 만면에 희열의 빛을 띠며 진기를 도로 거두었다. 그는 창문 사이로 은은히 스며드는 햇살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꼬박 하룻 밤을 새웠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으음, 벌써 날이 밝았구나.' 그는 밤 사이에 있었던 일이 차라리 꿈처럼 여겨졌다. 그는 가슴을 활짝 열어 그 날의 새로운 받아 안았다. 그때의 느낌이란 마치 새로 태어난 듯한 기분과도 흡사했다. 영호걸은 한껏 기지개를 켠 후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는 또 하나의 기쁨과 조우했다. 몸이 하루 전에 비해 기이할 정도로 가벼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환희에 찬 웃음을 발했다. "하하하... 이 상태라면 하늘이라도 날겠구나."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④ 똑똑....... 조심스럽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는 곧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아름다운 목소리가 이었다. "걸오빠, 일어 나셨어요?" 영호걸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는 재빨리 천무비경을 품 갈무리하고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어 그는 문을 스스로 활짝 열어 젖혔다. "하하... 영매가 왠일이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문 밖에 서 있던 구혜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웬일이세요? 그 호칭은 몇 년 후에나 듣게 될 줄 알았는데." 영호걸은 입가에 사뭇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렸다. "글쎄, 꿈 속에서 개과천선을 했다고나 할까?" 구혜령은 잠시 의아해 했으나 곧 그녀 특유의 야무진 음성으로 대꾸했다. "어쨌든 좋아요. 저로선 고대하던 일이 성취되었으니까요." 그녀는 생긋 웃더니 방 안으로 한 걸음을 떼 놓았다. "안으로 들어가도 괜찮겠죠?" 영호걸이 빙그레 웃으며 응수했다. "벌써 들어오고 있으면서 왜 묻지?" "호호호... 그건 맞군요." 구혜령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 안으로 들어와 섰다. "자, 앉거라. 영매." 영호걸이 자리를 권하자 그녀는 서슴없이 앉았다. "고마와요, 오라버니."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왔지?" "제가 찾아 오면 안되나요?" "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역시 난처한 빛을 띈 것은 영호걸 쪽이었고, 구혜령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배시시 웃었다. "사실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온 거예요." "부탁이라니?" 구혜령은 손을 들어 귀 옆에 흘러내린 머리털을 쓸어 넘겼다. "오라버니도 아시다시피 할아버지께서 오늘 저에게 비연추혼장법을 전수해 주시기로 하셨잖아요?" "그래서?" "그런데 오늘 저녁까지 청운장에 도착해야만 한다고 하시니 저로서는 좀 걱정이 되야죠?" "음, 그러니까 영매의 말은 아침 일찍 비연추혼장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겠군?"

빛을 불과

뒤를

속에


구혜령은 치열이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네, 바로 그거예요. 실상 소할아버지의 비연추혼장은 가히 무림일절(武林一切)로 꼽히는 장법으로써 이를 완전하게 터득한다면 어떤 사람도 감히 얕보지를 못하죠. 저는 이것을 익혀 그 옥면살심이라는 놈을 혼내 줄 작정이에요." 흥분하여 떠들어 대는 그녀의 모습에 영호걸은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좌우간 극성이군.' 그는 심중의 말을 풀어 다시 물었다. "보아하니 영매가 현재 일신에 지니고 있는 무공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웬 욕심이 그리 많지?" 구혜령은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무학을 성취하는데 있어 극점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영매가 익힌 무공은 무엇인가?" 구혜령은 자부심을 나타내듯 눈을 반짝 빛냈다. "그것은 저의 아버님께서 전수해 주신 무공으로 일명 대천검법(大天劍法)이라고 하죠. 아버님께서는 이 검법으로 대천검객(大天劍客)이라는 명호를 얻으셨어요." "흠, 그 검법을 좀 보여줄 수는 없겠나?" 구혜령은 얼굴을 붉히더니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는 이 검법을 완벽하게 연마하지 못했어요." "후후... 그러고 있으니까 훨씬 여자답군. 하지만 나를 대상으로 겸손해 하니 좀 섭섭한데?" "아니, 겸손이 아니에요. 부끄럽지만 그것이 사실인 걸요. 오라버니가 그래도 보고 싶으시다면 보여 드리겠지만요." "후후... 그럼 어디 영매의 솜씨 좀 볼까?" "먼저 흉보지 않는다고 약속하시면요." "내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영매가 더 잘 알텐데? 무공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영매의 능력을 평가한다면 그야말로 웃음거리밖에는 안될 일이지." 구혜령은 더 말하지 않고 등 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고무래 정(丁)자의 방위를 밟으며 검을 미간 사이로 가져갔다. 영호걸은 흥미있는 눈으로 구혜령의 동작을 주시했다. "야압!" 기합성과 더불어 구혜령의 몸이 날렵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검이 찬란한 은광을 뿌리며 기기묘묘한 변화를 일으켰다. 베고, 자르고, 밀고, 당기는 등 그 다양한 변식에 영호걸은 잠시 넋을 잃은 듯 몰두했다. 대천검법은 모두 삼십육초 백팔식으로 나뉘어진다. 단지 이 한 가지의 검법만으로도 구혜령의 부친인 대천검객 구자룡(丘自龍)은 대강남북에 쟁쟁한 위명을 떨친 바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천검법은 그 변화를 더해 갔다. 휙! 휘휙! 날카로운 파공음이 방 안을 진동했다. 어느덧 구혜령은 대천검법의 삼식육초를 모조리 전개해 내고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보다 더욱 생생한 아름다움을 발산해냈다. 영호걸은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영매의 무공이 이토록 강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걸? 옆에서 보고 있자니 가슴이 써늘해지는 기분이야." "정말이에요?" "후후... 물론." 칭찬을 듣자 구혜령은 기뻐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영호걸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그녀가 오히려


부러울 지경이었다. "자, 영매. 어서 소어르신께 가 봐야지? 무공을 구경한 대가로 나도 따라 나가 지원하겠다." "고마워요, 걸오빠." 그녀는 용무를 마치자 몸을 돌렸다. "그럼, 저 먼저 나가 있을테니 금방 나오셔야 해요?" "알겠다." 구혜령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영호걸은 몸을 일으키며 혼자 중얼거렸다. "대천검법은 변화의 묘는 그만이지만 반대로 위력 면에서 떨어지는 것이 흠이로구나." 누구든 이 말을 들었다면 대경할 것이다. 자칭 무공의 무자도 모른다면서 남의 무예를 평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는 정확하게 장단점까지 집어내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변신이었다. 확실히 영호걸은 지난 밤을 통해 재탄생 되어 있었다. 그가 수면을 잊고 몰두했던 천무비경은 과연 천하제일의 무공비급이었고, 그로 인해 그는 은연중 무학의 근본이치를 깨달은 상태였다. 그가 자신의 성격 중 소심한 부분을 쉽게 떨쳐내 버릴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이리라. 그는 어느덧 좀 더 넓은 시야로 천하를 굽어 보고자 마음을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호걸은 탁자 위에서 짧막한 자(尺)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집었다. 그는 두 눈을 지그시 내리 감고는 구혜령이 전개했던 대천삼십육검을 뇌리에 그려 보았다. 이윽고 그의 손에 들린 대자가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비록 내공이 없어 경력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놀랍게도 그가 시전하는 초식은 구혜령의 초식과 한 치도 틀림없이 똑같았다. 만약 구혜령이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어땠을지? 아마도 또 속았다며 그 자리에서 펄펄 뛰었으리라. 잠시 후. 영호걸은 대천검법의 전개가 끝나자 신형을 멈추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한 가닥 아쉬움이 드리워졌다. '흠, 부분부분에 약간씩만 수정을 가하면 가일층 위력이 강해질 것도 같은데.......' 그러나 영호걸의 생각은 유감스럽게도 거기에서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는 마치 형체가 없는 안개를 잡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자 자신을 향해 실소를 금치 못했다. '터무니 없는 욕심이겠지? 갑자기 대가(大家)라도 된 양 우쭐해 있다니....... 분석이 맞는지 어떤지도 모르면서 보완까지 염두에 둔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무리다. 후후.......' 어쨌든 처음으로 실질적인 무공을 접해 본 영호걸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리하여 그는 내심 부르짖었다. '아! 무척이나 상쾌한 아침이군.' 대천검객 구자룡의 딸인 구혜령. 그녀는 지금 한창 소면수라에게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영아야, 너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만 실상 노부는 이 비연추혼장(飛燕追魂掌)을 그 누구에게도 전한 적이 없느니라." 그는 말 도중에 영호걸을 발견하고는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걸아, 이 놈! 너는 어째서 늦도록 잠만 자느냐? 영아를 보아라. 이렇게 일찍 일어나 노부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지 않느냐?" 영호걸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르신께서 제가 일찍 일어났는지, 아닌지 어찌 아십니까? 영아를 편애하시는 것도 좋지만 가시적인 것만을 믿고 저를 책하시면 안되십니다. 새벽녘에 일어나 독서를 했던 저도 좀 칭찬해 주십시오. 조부님을 자처하면서 무공을 모른다고 핍박하시면 소손(小孫)은 매우 섭섭합니다." 소면수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걸아, 너 무엇을 잘못 먹은 것은 아니겠지?"


"예? 전 아직 조반도 들지 않았는데요?" "네가 방금 스스로를 소손이라고 했지 않느냐?" 영호걸은 씨익 웃었다. "마음은 진즉부터 그랬었습니다. 위인이 못나다 보니 표현을 하지 못했을 뿐이지요." 이어 그는 소면수라를 정시하며 진중하게 덧붙였다. "실은 어젯밤, 많이 반성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세 분 할아버님께서 저를 그렇게까지 아끼고 계셨을 줄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그저 세 분을 우연히 따라 나섰고, 그 동안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연구한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소면수라의 안면이 괴상하게 변했다. "내 어젯밤 꿈자리가 몹시도 뒤숭숭하더니만 아침에 네 녀석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려고 그랬나 보구나. 클클......." 그는 웃으려고 하는 듯 했으나 별호답지 않게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것은 물론 가슴 속에서 치미는 격정 때문이었다. "좋다! 너는 잠시 옆에 앉아 구경하고 있거라. 내 빨리 영아에게 무공 전수를 마치고 나머지 두 늙은이에게 네 녀석이 뭐라고 말했는지 전해 주어야겠다. 그들도 나 이상으로 기뻐할 것이다." 결국 표정 관리에 실패한 그는 그 말을 핑계 삼아 얼른 구혜령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구혜령이 영호걸을 향해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녀의 그 한 쪽 눈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축하해요. 자신의 껍질에서 벗어나서. 그건 다 나를 알게 된 덕분일 걸요? 그렇죠?' 영호걸도 답례로 그녀에게 훈훈한 미소를 보냈다. '고맙다, 영매. 내 정말로 사는 이치를 조금은 터득한 것 같구나.' 그는 조용히 곁에 있는 바위에 걸터 앉았다. 4 장 인간(人間)의 군상(群像) ① 소면수라가 물었다. "영아야, 너는 노부의 비연추혼장에 비연(飛燕)이란 말이 왜 들어 갔는지 아느냐?" 구혜령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눈을 반짝 빛냈다. "혹시 이 장법이 경쾌하고 신속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허허... 좋다. 그럼 추혼(追魂)의 의미는?" "그 속에 어떤 무서운 수법이 포함되었다는 뜻인 것 같은데요?" 소면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영아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노부의 비연추혼장은 부드러우면서도 살벌하고, 경쾌하면서도 악독하며, 신속한 가운데 수없이 많은 살초가 숨겨져 있는 수법이다." 불현듯 소면수라의 얼굴에 한 가닥 음울한 기운이 어렸다. "그러나 이 비연추혼장이라는 이름에는 사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연이 얽혀 있다." 이때, 어디선가 창노한 음성이 들려 왔다. "왕형, 무엇 때문에 젊은 아이들 앞에서 가슴 아픈 과거지사까지 들추어 내려고 하시오?" 소리가 난 쪽으로부터 삼안신군과 섬혼도가 걸어 오고 있었다. 소면수라는 그들을 보자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 그리고 냉형, 우리의 나이도 벌써 백 세에 가깝소. 앞으로 산다한들 얼마나 더 살겠소? 그때의 일로 말하자면 벌써 칠십 년이 지난 일, 염려 마시오. 노부는 이제 담담한 심정이오." 섬혼도 냉염의 눈에서 언뜻 기이한 빛이 스쳐 갔다. 그는 비정하게 느껴질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왕형,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소. 그 일은 영원히 당신의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오."


"그만 두시오, 냉형. 이미 소연(少燕)도 죽고, 그 자 또한 실종 상태요. 그저 나는 내 신상의 문제에 대해 이 아이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 뿐이오. 명색이 조손지간인데, 서로를 너무 몰라서야 쓰겠소?" 담담한 투로 말하고 있었으나 안면에서 웃음기가 거두어진 것으로 미루어 소면수라의 심경이 어떤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영호걸과 구혜령을 응시했다. "내 지금부터 비연추혼장에 얽힌 비사를 너희들에게 들려 주겠다. 그러니까 칠십 년 전의 일이다." 소면수라가 말하던 칠십 년 전. 당시 강호에는 무공이 뛰어 나고 용모도 절대 빠지지 않는 네 명의 미공자(美公子)가 있었다. 이름하여 중원사공자(中原四公子).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 그들 네 명은 내심이야 어땠는지 모르지만 표면상으로는 무척 친했다. 창룡신검(蒼龍神劍) 현천수(玄天秀). 무적신도(無敵神刀) 단합기(丹合奇). 마염신무(魔炎神霧) 감백홍(甘百紅). 소면공자(笑面公子) 왕상(王尙). 이들 개개인의 무공은 당시 강호의 젊은 고수들 중에서 최상급에 속했다. 소위 무림에서 떠오르는 별이었던 것이다. 개중 소면공자 왕상에게는 장래를 약속한 아리따운 처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천리비연(天里飛燕) 냉소연(冷少燕), 비극의 시작은 바로 마염신무 감백홍이 냉소연을 본데서부터 시작 되었다. 감백홍은 일명 미염공자(美艶公子)로 불리울 만큼 사공자 중 가장 뛰어난 미남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도 의심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서장의 밀교(密敎)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섭혼신공(攝魂神功)까지 익히고 있어 진즉부터 강호에 숱한 염문을 뿌렸던 전과가 있었다. 그런 감백홍이 냉소연과 같이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으니,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상대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중원사공자의 일인이라는 사실도 망각하고....... 소면수라의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감백홍은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치열한 반항의 흔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녀가 말을 들어주지 않자 사고를 낸 것 같더구나. 그는 엄청나게도 소연을 간살(姦殺)......."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곁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삼안신군이 안타까운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 보았다. 섬전도 냉염은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낮게 부르짖었다. "쯧! 쓸데 없는 소리를 꺼내 가지고......." 소면수라는 그를 향해 억지로 미소지어 보인 뒤, 다시 말했다. "노부는 그 즉시 감백홍에게 달려 갔다. 그리고 우리는 싸웠다. 장장 일천여 초나......." 그의 음성은 흡사 탄식처럼 이어졌다. "노부는 그 싸움에서 패했다. 경과야 어떻든 노부는 지고 만 것이다." 영호걸은 소면수라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했다. '항상 웃기를 즐겨 하는 이 분의 가슴 속에 이토록 처절한 사연이 담겨 있었을 줄이야....... 아마도 별호가 소면공자에서 소면수라로 변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구혜령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마저 고이고 있었다. "그후, 노부는 소연의 독문무공이었던 비연장법(飛燕掌法)을 노부의 추혼장법(追魂掌法)과 접목시켜 오늘의 비연추혼장법을 창조해 내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바로 억울하게 죽어 간 소연과 내 내부에 담긴 한을 씻기 위해서였다. 반드시 그 장법으로 놈을 죽이고 싶었던 것이지. 그러나 그것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뜻밖에도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 전, 놈이 실종되고 만 것이다. 당시 전 무림을


들끓게 하던 화룡도에 연루되어......." 소면수라는 길게 심호흡을 한 뒤 계속 말을 이었다. "노부는 그대로 단념할 수가 없었다. 그 화룡지(火龍池)의 위치를 알아 내어 놈의 뒤를 쫓으려 했었지. 하지만 이후로 수십 년이 지나도록 화룡도는 나타나 주지 않았다. 물론 놈의 자취도......." 삼안신군이 나서더니 무거운 음성으로 덧붙였다. "최근에 들어서야 우리는 천유자가 화룡도를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의 뒤를 쫓았으나 역시 실패했다." 소면수라는 다시 웃음을 되찾은 얼굴로 말했다. "걸아, 알겠느냐? 너는 그렇게 되어 우리 세 늙은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만족한다. 까짓 지난 일에 대한 복수보다야 너를 만나게 된 것이 훨씬 가치있는 일이니까." 영호걸은 그 말을 듣자 못내 가슴이 쓰려 왔다. '아! 내가 이 분들께는 정말 못할 짓을 한 셈이로구나.' 그는 일순 격한 충동에 휘말리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들에게 사실대로 말해 버리고 싶은 것이 그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 뿐이지, 결코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알게 된 천유자 모용황과의 신의관계 때문이었다. 섬혼도 냉염이 자르듯 냉정하게 내뱉았다. "왕형, 과거의 얘기는 그 쯤 해두고 무공이나 전수하시오." 소면수라는 이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부가 있겠소이까? 소연의 친오라버니인 냉형도 흔들리지 않는데, 내 어찌 그 일로 인해 현재의 할 일을 잊을 수 있겠소?" 섬혼도의 입술 꼬리가 기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오해하지 마시오. 노부는 혈연이든 무엇이든 연연해 하지 않소. 그것은 근 백여 년을 살아 오면서 신념처럼 여기던 부분이오." 소면수라 왕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마치 만년한철로 무장된 듯한 냉염의 가슴 속에 활화산과도 같은 분노의 불길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분위기가 침통해지는 것을 의식했는지 삼안신군이 때 아니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왕형, 영아가 기다리다 지쳐 버리겠소.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는 해가 넘어 갈까 걱정이구려." 소면수라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 시작하겠소이다, 사형." 그는 이어 구혜령을 정시했다. "영아야, 비연추혼장은 본시 심후한 내공을 바탕으로 해야만 진실된 위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 그러니 너는 이 무공을 배운 이후로는 종전보다 더욱 노력을 해야 할 것이야." 구혜령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공손히 대답했다. "염려마세요, 할아버지. 영아는 앞으로 할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겠어요." 소면수라는 그녀의 대답에 기분이 매우 좋아진 듯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더 없이 인자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 그럼 노부가 전개하는 초식을 눈여겨 보아 두거라."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양 소맷자락을 떨치며 초식을 전개해 내기 시작했다. 구혜령은 그 전개방식을 빠짐없이 머리 속에 집어 넣으려는 듯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주시했다. 소면수라의 신형은 일견하기에 대단히 느렸다. 하지만 느린 가운데에도 그 변화는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소면수라는 손을 내리며 구혜령에게 물었다. "허허허... 영아야, 너는 비연추혼장의 십이 초 중 몇 초나 기억할 수 있겠느냐?" 구혜령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앞 부분의 오 초밖에는 기억할 수가 없어요. 뒤의 칠 초는 너무 현란하여 도저히 제 눈으로 따라잡을 수가 없었어요." 부끄러워 하는 그녀를 향해 소면수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허허... 진정 훌륭하다. 네 재질은 예상을 웃도는구나. 내 장담한다만 천하에서 노부의 비연추혼장을 한 번 보고 오 초나 기억할 수 있는 자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는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 노부가 다시 시전해 보일테니 자세히 보아라." 소면수라가 막 동작을 취하려는 찰나, 영호걸이 앉아 있던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사뭇 미안해 하는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할아버님. 지난 밤, 거의 잠을 안자서 그런지 피곤해서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방 안으로 들어가서 좀 쉬어야겠군요. 달리 생각지 마시고 떠나실 때가 되면 불러 주십시오." "걸아, 네가 몸이 편치 않은 게로구나?" 삼안신군이 심히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물었다. 영호걸은 얼굴을 은은히 붉히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염려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단지 약간 어지러워서......." "그래? 그럼 어서 가서 쉬도록 해라." 삼안신군으로부터 허락이 떨어지자 영호걸은 몸을 돌렸고, 그의 뒷모습을 보던 소면수라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쯧쯧... 시원치 않은 녀석 같으니! 저렇게 몸이 허약해서야 어디 남자라고 할 수 있담?" ② 방 안. 영호걸은 탁자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찻잔에 물을 따라 마시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불편한 것은 기실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으음, 인간관계란 정녕 어렵구나. 모용어르신으로 이르자면 이제 내게는 사부나 같으시지 않은가? 게다가 본의는 아니나 그 분에 뒤를 이어 천무문까지도 넘겨 받게 되었으니......." 그는 양심상 도저히 비연추혼장을 전개하는 소면수라를 지켜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세 할아버님께서 모용어르신과 그런 관계가 아니었던들 나도 영매처럼 가르쳐 달라고 졸랐을 것이고, 그랬다면 당신도 무척 흐뭇해 하셨을텐데......." 더욱 더 유감스러운 것은 그 자신의 타고난 오성(悟性)이었다. 그의 뇌리에는 은연중 비연추혼장의 초식들이 이미 들어와 박혀 버렸던 것이다. 영호걸은 찻잔을 탁자 위에 놓으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고, 소할아버님께서는 바로 곁에서 자신의 독문절기가 허락도 없이 내게 절도(?) 당하고 있은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셨겠지?"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사이, 비연추혼장의 기묘한 장식(掌式)들이 머릿 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용서하십시오, 할아버님. 저는 비단 오 초 뿐만이 아니라 그 모든 초식을 훔쳐 보았습니다." 다음 순간, 영호걸의 손이 거의 본능처럼 비연추혼장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손은 놀랍게도 소면수라의 비연추혼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전개하고 있었다. 용덕현(用德縣). 낙양성에서 남쪽으로 백 리 정도 떨어진 곳이다. 이 고을은 규모에 비해 길이 사통팔달로 뚫려 있어 상당히 번화한 편이었다. 특히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청운장(靑雲莊) 때문에 이곳은 근역에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기도 했다.


청운장이란 이십여 년 전, 강호에서 위명을 떨치던 비룡검(飛龍劍) 사공영(邪空英)이 말년에 자리를 잡기 위해 세운 장원이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 청운장은 장주의 명성과 더불어 조용한 가운데서도 은근히 위세를 떨쳐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청운장은 뜻하지 않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것은 비룡검 사공영이 만년한옥(萬年寒玉)을 수중에 넣었기 때문으로써, 바야흐로 일대 풍파를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용덕현으로 향하는 관도 위. 수많은 무림인들이 줄을 이으며 걷고 있었다. 개중에는 천중삼신을 위시한 그 일행들도 끼어 있었다. 풍운개 노양중이 관도를 돌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정말 상상 이상입니다. 그야말로 삼산오악(三山五嶽)에서 난다 긴다하는 자들은 모두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면수라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소용없어. 모두 속은 텅 빈 놈들이야." "하하하... 그것은 노선배의 견지시겠고, 저희가 보는 관점에서는 다릅니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인 듯 합니다." 풍운개는 말을 마치자 시선을 돌려 영호걸을 바라 보았다. "영호소제, 으음?" 그의 눈에 구혜령과 나란히 오며 한창 얘기에 열중하고 있는 영호걸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광경에 그는 혀를 끌끌 찼다. "두 사람은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모르겠군." 그 말에 구혜령이 눈을 살짝 흘겼다. "선배님께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핫핫핫... 몰라서 묻나? 질투가 나서 그러지." "참, 왜 자꾸 이상한 시각으로 보시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지금 걸오빠에게 청운장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 중이란 말이에요." 풍운개는 입가를 씰룩이며 히죽 웃었다. "크ㅋ! 요즘 낭자들은 남자에게 설명을 해줄 때 그렇게 옆에 바짝 붙어서 다정하게 하나 보지?" "흥! 뭐라고 하셔도 소용 없어요. 전 멀쩡하니까요." 구혜령은 코웃음을 치더니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졌다! 너같이 뻔뻔한 여아를 건드린 내가 잘못이지." 두 사람의 대화에 천중삼신을 비롯한 일행들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러다 문득 철장 구자명이 웃음을 그치며 말했다. "청운장이 보입니다." 일행의 시선은 일제히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향했다. 과연 그곳에는 청운장의 거대한 누각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그 웅자(雄姿)에 소면수라가 낮게 탄성을 발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대단한 장원이로군." 삼안신군도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위세를 가지고도 흑룡문과 부딪치는 것을 꺼려 했다니, 정녕 의외로구려. 허허......." "아마도 그것은 장주의 인품 때문일 것이오. 개인의 명예보다는 인명(人命)을 중시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내가 하려던 말을 왕형이 다 해 버리면 나는 어찌 하오?" 풍운개가 끼어 들었다. "두 분 노선배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공영은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그를 돕고자 나선


것입니다." 영호걸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내심 느끼는 바가 컸다. '이런 것을 두고 소위 협기(俠氣)라 일컫는가? 무림이 살벌한 곳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면면히 그 맥이 이어져 내려 오게 된 이유를 내 이제야 알 것 같구나.' 그는 시선을 돌려 청운장을 훑어 보았다. 과연 그의 눈에도 장원의 위용은 거창해 보였다. 더구나 이전에는 한 번도 장가촌을 벗어나 본 일이 없으니 가히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영호걸은 벌써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외관이 아니다. 청운장에서 가장 대단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비룡검 사공영이라는 분의 인의지심(仁義之心)이리라.' 대문은 자색(紫色)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용이 나는 듯한 필체로 청운장이라는 이름이 씌어져 있었다. '흐음,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유려한 가운데 강한 힘이 느껴지는 필체다.' 영호걸의 눈길은 이어 대문의 양 옆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석사자에게로 옮겨졌다. 만 근을 넘을 듯한 그 석사자를 대하자 그는 감탄하기보다는 고소를 지었다. '인간들이 굽히는 것은 바로 저런 기세에 대해서겠지? 후후... 실제의 힘은 결코 그것이 아니거늘.......' 대문의 양 옆에는 십여 명의 장한들이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눈코뜰새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호걸의 일행이 다가가자 그들 중 청의를 입은 한 장한이 맞이해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풍운개가 그를 향해 물었다. "장주는 안에 계시는가?" 그 말은 언뜻 듣기에도 장주와의 친분을 암시하고 있었다. 장한도 그것을 느꼈는지 태도가 더욱 공손해졌다. "장주께서는 내빈청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고 계십니다. 제가 그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철장 구자명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내가 이곳의 지리를 대강 알고 있다. 바쁜 것 같은데 자네까지 동행해 줄 필요는 없다." 그는 천중삼신을 바라보며 허리를 굽혔다. "세 분 노선배, 제가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음, 그러는 것이 좋겠군." 천중삼신도 모두 소탈한 위인들답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어 그들은 안내자도 없이 조용히 장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수많은 인파로 인해 벌써부터 들끓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성황이로군." 삼안신군이 말하자 섬혼도는 냉소했다. "그래 봤자 전부 밥통같은 놈들 뿐이지." 소면수라가 섬혼도를 응시하며 씩 웃었다. "후후... 나도 냉형과 생각이 같소." 섬혼도는 그를 힐끗 보더니 여전히 차갑게 대답했다. "나는 왕형과 생각을 같이 하려고 말한 것이 아니오." "쯧! 못말리겠구려. 냉형은 대체......." "천성이오." 딱 잘라 말하는 섬혼도를 보며 소면수라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때, 풍운개가 천중삼신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세 분 노선배, 어서 내빈청으로 들어 가시지요. 사공영이 세 분을 보면 아마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좋아할 겁니다." 삼안신군이 그 말에 문득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노현질, 자네들만 안으로 들어 가게나. 우리는 밖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겠네." "네?" 풍운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아니,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삼안신군은 주위를 살펴 보더니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사공영의 곁에 있다간 필경 군웅들에게 우리의 정체를 알리게 될텐데, 좀 거북해서 그러네. 우리는 전자에 흑룡신군 위한천과 좋지 않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 상황으로서는 가급적이면 얼굴을 나타내지 않는 편이 나을 걸세." "아!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풍운개의 뒤를 이어 섬혼도가 덧붙였다. "이봐, 거지! 사공영에게도 우리 얘기를 하면 안된다. 필요하면 우리가 알아서 나설 테니까. 알겠나?" 그것은 정감이라고는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은 냉랭한 어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운개는 불쾌한 기색을 보이기는 커녕 더욱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알았습니다, 노선배. 그럼 저희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가 몸을 돌리자 구자명도 인사를 하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구혜령은 천중삼신에게 손을 흔든 뒤, 영호걸을 향해 생긋 웃었다. "걸오빠, 나중에 봐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 또한 날렵하게 몸을 날려 숙부의 뒤를 따라갔다. 소면수라가 영호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걸아, 우리도 그만 가 보자." "네. 할아버님." ③ 천중삼신과 영호걸은 인파를 헤치며 청운장의 앞뜰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비무(比武)를 위한 거대한 비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영호걸은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 저 정도면 능히 싸울 기분이 들겠군요." 삼안신군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노부의 생각보다 대회의 규모가 크구나." 그들 일행은 이런 식으로 담소를 나누며 비무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들이 비무대로 통하는 문을 들어서려는 순간, 한 명의 청의장한이 인명부를 든 채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모두 무림인이십니까?" 소면수라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인가?" "무림인이 아니면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십니다. 그저 밖에서 구경만 할 수 있도록 규칙이 정해져 있습니다." 섬혼도가 눈썹을 세우며 냉소했다. "웃기는 수작이로군." 청의장한은 허리를 깊숙이 굽히더니 정중하게 답변했다.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오면 자칫 다치기 쉽상입니다. 그래서 장주께서 이 점을 염려하시어 저희들에게 그런 분들을 설득시켜 밖에 계시게 하도록 분부를 내리신 것입니다." 삼안신군은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흠, 미리부터 짐작은 했었네만 이 청운장의 장주는 매사에 사려 깊은 인물인 것 같군. 그러나 우리는 상관없으니 들여보내 주게." 청의장한이 다시 물었다. "그럼 무림인이시라는 뜻입니까?" "그렇네." "그러시다면 죄송하지만 이 인명부에 명호를 좀 적어 주십시오." 청의장한이 인명부를 내밀자 섬혼도가 입을 떼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쪽이 더 빠를 것이다." 그의 손에 들려진 칼이 갑자기 번뜩 섬광을 뿜었다. "헛!" 청의대한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발했다. 놀랍게도 일순간에 그의 앞섶에는 수십 개의 도흔(刀痕)이 나 있었다. 그 비쾌무비한 일도에 청의장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에! 이런 쾌도(快刀)는 난생 처음 보았다.' 소면수라가 곁에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자, 우린 그만 들어가 보겠네." "네, 물론입니다." 천중삼신과 영호걸은 바짝 얼어 있는 청의장한의 곁을 지나 유유히 안으로 들어갔다. 비무대 가까이에 있는 대부분의 좌석은 어느덧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남아 있는 좌석이라야 비무 광경이 제대로 보일지조차 의문인 하수(下手)의 자리들 뿐이었다. 소면수라가 짐짓 어린애 같은 투로 투덜거렸다. "쯧, 이래서야 어디 앉을 수가 있겠나?" 삼안신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잖게 응수했다. "불평은....... 좋은 곳은 후배들에게 양보하고 우리 폐물들은 아무 곳에나 가서 앉읍시다." "쯧쯧! 천중삼신의 체면이 말씀이 아니군." 소면수라도 말은 그렇게 하고 있으나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일행은 걸음을 옮겨 비무대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영호걸이라 해서 달리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주변의 정경에 주의를 기울였다. 사람들의 북적거림이나 그들이 내는 소음 등이 그에게는 모두 비상한 관심거리가 되어 주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코로 한 가닥 기향(奇香)이 전해져 왔다. "으음?" 의아한 느낌이 든 영호걸은 곧바로 고개를 들어 향기가 풍겨온 쪽을 바라 보았다. 그곳에는 한 명의 백의소년이 섭선을 든 채 그를 응시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옥같이 흰 얼굴에 커다랗고 아름답게 빛나는 두 눈, 게다가 오똑한 콧날과 앵도같은 입술 등이 무척이나 눈에 띠는 모습이었다. 백의소년은 영호걸과 눈이 마주치자 서슴없이 입을 떼었다. "노형(老兄), 옆에 좀 앉아도 되겠소?" 영호걸은 잠시 머쓱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내게 노형이라고? 아직 어린 친구가 제법 호기는 있군. 잘 생기기는 했지만 남자 치고는 너무 선이 가늘구나.' 그렇다고 딱히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비어 있는 자리이니 마음대로 하시오." "고맙소이다." 백의소년은 영호걸의 허락이 떨어지자 포권을 해 보이고는 즉시 다가와 앉았다. 그러자 영호걸은


비로소 기이한 향기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 차렸다. 그는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남자가 무슨.......' 그는 비위가 맞지 않아 곧바로 비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다시 백의소년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노형,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영호걸은 과히 내키지 않았으나 할 수 없이 백의소년을 바라보았다. 백의소년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아니, 그는 한동안 영호걸의 모습을 뜯어 보더니 눈에서 이채를 발했다. "소생은 사영룡(史英龍)이라 하오. 노형께서는......?" "나는 영호걸이오." "아! 영호형이셨군요?" 백의소년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사근사근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친근감의 표현으로 보기에는 다분히 문제가 있었다. 영호걸은 그의 그런 모습에 내심 혀를 찼다. '쯧! 생긴 것도 그렇지만 남자답지 못한 태도는 더 마음에 들지 않는군. 기회를 보아 자리를 옮겨야겠다.' 사영룡이 재차 말을 걸어 왔다. "보아 하니 영호형께서는 강호에 처음 나오신 것 같군요?" 영호걸은 짐짓 무뚝뚝하게 잘라 말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다는 것이오?" 사영룡은 불쾌해하는 대신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응시했다. "후후... 별 뜻은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보였다는 것 뿐이지요." 영호걸의 미간이 다시금 좁혀지려는 찰나였다. 곁에 있던 소면수라가 사영룡을 힐끗 바라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쯧쯧! 드디어 말세(末世)가 도래했나 보구나. 꽃이 나비를 쫓아 날뛰다니 세태도 변해도 한참 변했군." 그 말을 듣자 사영룡의 뺨에 언뜻 홍조가 어렸다. 그것을 본 영호걸은 문득 무엇인가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아! 그렇다면 이 소년은.......' 그러나 영호걸에게는 더 이상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때마침 비무대 위로 한 명의 황의노인이 올라섰던 것이다.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쪽으로 쏠렸다. 영호걸 역시도 하려던 얘기를 미련없이 포기하고는 비무대 위를 주시했다. 황의노인은 대략 오십 세 정도로 보였는데, 일신에서 상당한 위엄이 느껴졌다. 그는 비무대에 오르자마자 우선 품위있는 태도로 군웅들을 향해 길게 읍했다. "만장하신 무림동도 여러분, 바쁘신 중에도 원근각처에서 이렇게 폐장을 찾아주시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단 말을 끊은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떼었다. "본인은 청운장의 총관으로 진상표(陣相豹)라는 사람입니다. 장주님을 대신해 이 비무대회의 진행을 맡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협조 있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군웅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울렸다. "와아--!" 진상표는 만족한 표정으로 군웅들을 바라보더니 소요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든지 나와서 다섯 명을 연속 이기시는 분께는 최종 결선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드립니다. 자! 자신 있는 분은 사양치 마시고 어서 나오십시오."


그는 말을 마치자 비무대 아래로 내려가 자리에 앉았다. 이때, 사영룡이 영호걸을 향해 넌즈시 물었다. "노형께선 혹 진상표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저 인물이 누군지 아시오?" 영호걸은 시선을 돌려 그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진상표가 환갑이 약간 넘어 보이는 한 명의 청의노인과 한창 무슨 얘기인가를 나누고 있었다. "청의를 입은 저 노인장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이다." 난생 처음 보는 인물을 영호걸인들 알 리가 없었다. "저 사람이 누구길래 내게 묻는 거요?" 사영룡은 씨익 웃었다. "저 노인이 바로 청운장의 장주인 비룡검 사공영이니까요." "아! 그랬었군." 영호걸도 그제서야 빙긋 웃어 보였다. 사영룡은 그의 반응이 흡족했던지 미소 띤 얼굴로 계속 말을 붙여 왔다. "그리고 사공영 선배의 곁을 한 번 보시오. 또 누군가가 앉아 있는데....... 어떻소?" 사영룡이 지시하는 곳에는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일신에 자의(紫衣)를 걸친 채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미소녀(美少女), 그녀를 보는 영호걸의 눈이 한 차례 크게 흔들렸다. 그것은 뭐라 형언키 어려운 충격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호걸은 내심을 감추며 짐짓 멀쩡한 척 물었다. "어떻냐니, 무슨 의미요?" 말을 하며 그는 혹시라도 자신의 음성이 떨려 나올까 매우 조심을 해야 했다. 백옥같은 살결에 유난히 크고 아름다운 눈을 가진 그 소녀는 언뜻 보기에도 가히 절색의 미녀였다. "후후.... 실로 아름답지 않냐는 뜻이외다." 영호걸은 사영룡의 야릇한 음성을 듣는둥 마는둥 했다. 그의 심중에서는 이런 부르짖음이 절로 일고 있었다. '으음, 꽃 중의 꽃이랄지....... 미색으로 따지자면 영매와 비슷하지만 저 여인에게는 기이할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구나. 우아하게 느껴지는 저 자태 때문일까?' 그러는 사이, 사영룡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는 영호걸의 어깨를 툭 치며 다시 물었다. "시치미를 떼려거든 철저히 떼시오. 노형은 스스로 너무 넋을 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영호걸은 약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부인하지는 않겠소." 사영룡은 음성을 낮추어 은근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가 바로 사공영의 딸이자 오늘의 주인공인 자의옥녀(紫衣玉女) 사공매(司空梅)요." "짐작은 했었소. 후후... 넋을 빼앗기면서도 말이오." "크큭!" 영호걸과 사영룡이 각자 다른 심정으로 웃음을 주고 받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커다란 소성(笑聲)과 함께 한 명의 건장한 중년대한이 비무대 위로 날아 올라왔다. ④ "하하하하... 첫번째 출진인가?" 그는 오른손에 무지막지해 보이는 구환도(九環刀)를 들고 있었는데, 주위를 의식하는 기세인즉 꽤나 당당했다. "소생은 상문도(喪門刀) 나웅(羅雄)이라 하오. 감히 여러분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이곳에 올라 왔소이다."


그의 위맹한 모습을 보며 영호걸이 사영룡에게 물었다. "사형은 저 나웅이란 자도 알고 있겠구려?" 사영룡은 고개를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죄송하오만 저런 하류배들까지는 기억을 하지 못하오." 거만함이 느껴지는 그 말투에 영호걸은 다소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는 이와 더불어 사영룡의 성격을 웬만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사영룡이란 자는 분명 남장여인이다. 물론 그런 정도야 개인적인 사유가 있을테니 내가 굳이 개의할 바가 아니지만 이 자에게서는 어쩐지 사도(邪道)의 냄새가 풍긴다.' 사영룡은 정체가 드러난 줄도 모르고 여전히 입을 놀리고 있었다. "지금은 비무의 초반이기 때문에 무공이 강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오." "으음." "대개의 고수들은 공연히 일찍 나와 주목당하는 것을 꺼려 하지요. 아마도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가 후에 나올 것이오." 상문도 나웅은 출전자가 없자 큰 소리로 외쳤다. "나올 사람이 없소? 이곳에 온 분들이 모두 가르침에 너무 인색하시니 이 나모(羅某)는 섭섭하오이다." 어디선가 우렁찬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핫핫핫... 소생이 한 번 나형과 맞서 보겠소이다." 비무대 아래로부터 청색의 인영이 번개같이 위로 날아 올랐다. 일학중천(一鶴 天)의 신법으로 솟구친 다음, 평사낙안(平沙落上)의 수로 내려서는 그 모습은 경쾌하기 그지 없었다. "멋진 신법이군." 영호걸은 새로 등장한 자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 자는 삼십대 정도로 보이는 무사였는데, 등 뒤에 쌍검을 십자(十字)로 교차시켜 메고 있었다. 용모도 상당히 청수한 편으로써, 산뜻한 경장까지 입고 있어 무척이나 돋보이는 모습이었다. 사영룡이 의외라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설마 하니 저 자가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은 몰랐군." 영호걸이 곁에서 물었다. "저 사람은 알고 있소?" "직접적인 안면은 없지만 소문으로는 많이 들었던 인물이오." 영호걸은 은근히 호기심이 생겨 다시 물어 보았다. "저 사람은 어떤 인물이오?" 사영룡은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요즘 강호에서 한창 줏가가 오르고 있지요. 청의쌍무검(靑衣雙武劍) 관영천(關影天)이라는 자외다." "관영천?" "영호형은 잘 모르겠지만 저 사람은 바로 당금 무림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십대 후기지수(後期之修) 중의 한 명이오." 영호걸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관영천의 무공은 옥면살심 사문기에 비해 어떻소?" 그 말에 사영룡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는 처음으로 안면에서 웃음기를 싹 거두며 정색을 지었다. "옥면살심은 십대 후기지수 중 첫째이자 당금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절정고수요. 어찌 관영천 따위를 상대로 논하겠소? 이는 옥면살심에 대한 모욕이외다." 영호걸의 눈이 얼핏 이채를 띠었다. '과연! 후후... 옥면살심 사문기와 모종의 관계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구나. 사도적인 분위기에다가 그와 같은 사씨(史氏)....... 어디 한 번 두고 볼 일이다.' 한편.


비무대에 서 있던 상문도 나웅은 관영천을 보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기실 강호에서 잔뼈가 굵어 온 그는 애초부터 이 대회에서 최후승자가 되겠다는 허무맹랑한 욕심 따위는 없었다. 다만 자기보다 상급인 자와의 무위 대결을 통해 몇 수 배워 가고자 했던 것인데, 이조차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명색이 비무이거늘 차이가 나도 어느 정도라야 붙어볼 것이 아닌가? 청의쌍무검 관영천이 그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자, 친구 먼저 공격을 하시오." 나웅은 얼굴을 붉히는 한편 고개를 저었다. "관대협, 불초는 이만 물러가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관영천은 상대의 허탈한 표정에서 금세 심중을 알아 차렸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형께서는 오늘 몸이 좋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좀 아쉽긴 하지만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그때 겨루어 봅시다." 나웅은 내심 크게 감격했다. 관영천이 자신의 체면을 세워 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물러설 망정 상대의 인품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관대협의 도량은 결코 잊지 않겠소이다." 나웅은 말을 마치자 훌쩍 몸을 날려 아래로 내려갔다. 그 광경에 영호걸은 매우 감동했다. 관영천의 대협다운 풍모도 그렇거니와 그의 상대인 나웅의 태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영천과 나웅, 실력을 떠나 두 사람 모두 훌륭하다. 언제라도 사귈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다시 비무대 위로 한 명의 인영이 날아 올라왔다. 그는 체구가 무척이나 왜소한 오순 가량의 노인이었다. 사영룡이 묘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일이 재미있게 되어 가는군. 비천신원(飛天神猿)이 나타났으니." 영호걸은 눈으로 비무대 위를 가리켰다. "비천신원? 저 사람의 별호요?" 사영룡은 해박한 견문을 자랑이라도 하듯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소. 저 자는 무림십괴(武林十怪) 중 한 명으로 강호에서 꽤나 알아 주는 고수요." "관영천과 비교하면 어떻소?" "그도 강한 고수이지만 비천신원에게는 좀 힘들 거요. 왜냐하면 비천신원은 본신의 무공 외에도 그 나름의 특이한 신법과 암기수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오." 그러자 옆에 있던 소면수라가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크ㅋ... 꼬마놈이 알량한 견식을 믿고 아까부터 지나치게 잘난 척을 하는구나. 하지만 네 놈의 판단은 틀려 먹었다. 비천신원이 여러가지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런 잡학(雜學) 따위로는 절대 관영천을 꺾지 못한다. 그의 광명정대한 정통 수법을 우습게 보지 말아라." 그의 말 속에는 웬지 뼈가 들어 있었다. 사영룡도 이를 느꼈는지 분개한 얼굴로 그를 홱 돌아다 보았다. '대체 어떤 늙은이가 감히?' 그러나 막상 소면수라의 얼굴을 마주 대하게 되자 그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소면수라의 눈에서 쏘아져 나오는 강한 신광이 단번에 그를 압도해 버렸던 것이다. 사영룡은 내심 섬뜩한 기분이 되어 부르짖었다. '누굴까? 무림에 저런 늙은이가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는데......? 더구나 저 자와 함께 있는 나머지 두 늙은이들도 보아 하니 예삿 인물은 아닌 것 같구나.' 그의 심중을 알아 차렸는지 소면수라가 히죽 웃었다. "아무리 잔 머리를 굴려 봐야 소용없을 것이다. 노부 등으로 말하자면 네 아비가 강보에 싸여 있을 때 벌써 무림에서 은퇴했느니라. 클클클......."


사영룡의 아름다운 얼굴이 은은하게 붉어졌다. '으음, 어쩐지 기세가 등등하더라니, 무림의 전대고인(前代高人) 들이었군. 벌써 내 정체까지 간파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는 대번에 전의(?)를 상실하는 한편, 무엇을 의식했는지 슬쩍 시선을 돌려 영호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영호걸은 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비무대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영룡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아직 이 사람에게는 들키지 않았구나.' 그가 알 리 없었다. 영호걸이 비무대에 시선을 둔 채로 사영룡의 기색을 모조리 엿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사실 사영룡이 안도할 때, 영호걸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실소하고 있었다. '후후... 유치하기는.......' 아울러 그는 사영룡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거만하고 비뚜러져 있기는 해도 심성이 그다지 악한 것 같지는 않구나. 모름지기 단순한 자는 속속들이 악할 수가 없지.' 영호걸은 여전히 비무대를 보며 나직하게 입술을 떼었다. "사형, 내 물어 볼 말이 있소." 사영룡은 어색함을 감추려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든지 기탄없이 물어 보시오. 소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성의껏 답해 드리리다." "다른 게 아니라, 옥면살심 사문기에 관해서요." 사영룡의 안색이 약간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곧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옥면살심의 무엇을 알고 싶단 말이오?" 영호걸은 그를 힐끗 바라보고는 흡사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내가 듣기로는 옥면살심에게 꽃같이 아름다운 누이동생이 있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이오?" 사영룡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그, 그것은......." 그는 당황했는지 말을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 끝에 영호걸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뜨렸다. "후훗! 역시 헛소문은 아닌 모양이구려. 그 누이동생의 기질이 방만하여 이것저것 참견하기를 좋아한다는 소문도 맞소?" "뭐, 뭣!" 사영룡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잔뜩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제서야 영호걸이라는 청년이 어떤 인물인가를 깨닫고 있었다. 그의 입 안에서는 이런 웅얼거림이 맴돌고 있었다. '응큼한 작자 같으니! 겉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면서도 이미 다 알고 있었구나. 내 성질 같아서는 이 자를 당장.......' 하지만 그것은 결국 말이 되어 나오지를 못했고,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5 장 속속 이어지는 인연(因緣) ① 비무대 위. 이르자면 비무를 예고하는 전초전이랄까? 비천신원과 관영천이 불꽃 튀는 설전(舌戰)을 벌이고 있었다. "흐흐흐... 관가 애송이 놈아, 너는 일찌감치 이곳에서 꺼지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비천신원의 협박에 비해 관영천의 응수는 더없이 침착했다. "소생의 신상까지는 염려해 주지 않아도 좋소. 기왕에 올랐으니 최선을 다해 보고자 하는 것이 본인의 신념이외다." 정중하나 강인한 기개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비천신원의 음침한 눈꼬리가 홱 치켜 올라갔다.


"흐흐흐... 그래서 네 놈은 기어이 노부와 한 바탕 어울려 보겠다는 것이냐?" "그렇소이다." 비천신원은 흡사 기합성인 양 냉랭하게 일갈했다. "건방진 놈!" 그의 양손이 겨드랑이 사이에 들어갔다가 번개같이 휘둘러졌다. 그 순간, 금광이 번뜩 하더니 수십 개의 금전표(金錢 )가 일제히 관영천의 전신으로 덮쳐 들었다. 쉬이익--! "좋은 수법!" 짤막하게 부르짖은 관영천은 즉시 양발을 박차 금전표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곧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믿을 수 없게도 관영천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던 금전표들이 방향을 바꾸어 다시 그를 노리고 쏘아져 갔다. 그것은 실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다. 관영천의 안색이 일변했다. 동시에 그는 내공을 최고로 돋구어 사방을 향해 장력을 떨쳐 냈다. 펑! 퍼펑--! 폭음이 울리자 비로소 금전표는 모두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관영천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마에 배인 땀을 닦았다. 그러는 사이, 비천신원은 잠깐 놀라는 기색을 내비치더니 가일층 흉흉한 기세를 보였다. "애송이 놈! 과연 한 가닥 할 줄은 아는구나. 그럼 어디 이것도 맛 좀 보아라." 그는 이번에는 품 속에서 하나의 긴 쇠사슬을 꺼내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쐐액! 쐐애액--! 쇠사슬은 독이 발려져 있는지 푸른 빛을 띠고 있었는데, 각 마디마다 날카로운 가시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관영천은 급히 등 뒤에서 검을 뽑아 대항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쇠사슬은 길고 검은 짧았다. 쇠사슬이 떨쳐 내는 광망 속에서 그의 검은 무력하게 허공만을 휘저을 따름이었다. 관전하던 사영룡이 소면수라를 향해 비웃듯이 말했다. "관영천의 실력은 정녕 대단하군요. 비천신원이 저토록 꼼짝을 못하니 말입니다." 소면수라는 태연하게 그 말을 받았다. "클클... 꼬마야, 어르신 앞에서 경솔하게 나서면 못쓴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느니라." 사영룡이 냉소하며 뭐라 답하려는 순간, 비무대 위에서 요란한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바로 관영천의 검이 비천신원의 쇠사슬을 검신에 모조리 감아 버리면서 낸 소리였다. 비천신원은 대경하여 다시 품 속을 뒤지려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관영천의 쌍검 중 하나가 이미 그의 가슴에 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음......." 비천신원의 이마에 바야흐로 식은 땀이 맺히고 있었다. 이쯤 되면 싸움의 결과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그의 패배였다. 관영천은 그의 가슴에서 검을 뗀 뒤 검집에 꽂았다. 그리고는 공손한 태도로 포권지례를 취했다. "노선배, 후배에게 양보를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는 영호걸로 하여금 또 한 번 감탄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역시 신지가 곧은 인물이다. 상대가 어찌 나오느냐를 막론하고 시종일관 변함없는 자세로 대할 수 있다니.......' 그런데 정작 문제는 비천신원이었다. 그는 관영천이 끝내 예의를 지켜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마워 하기는커녕 오히려 눈에 살기를 띠며 부르짖었다. "관가 놈! 나중에 이 빚은 이자까지 합쳐서 분명히 갚아 주마." 그는 이를 갈며 비무대 아래로 사라져 갔다. 영호걸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소인(小人)이군." 사영룡이 그 말에 되려 어이 없다는 투로 물었다. "노형은 아무리 무림 정세를 모르기로서니 십괴를 상대로 도량을 논하려 하시오? 그들 모두가 성품이 맹렬하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오. 후후... 본시 강한 자들은 그게 정상이오." 그는 소면수라로 인해 자존심이 구겨진 나머지 은근히 관영천을 비꼬는 것으로써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강자(强者)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소견인지도 몰랐다. 영호걸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 남장 여인은 사고 방식이 뭔가 잘못 되어 있군.' 그는 쓴 입맛을 다시며 화제의 방향을 약간 틀었다. "그럼 무림의 십대 후기지수라는 인물들과 무림십괴의 무공을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더 강하오?" 사영룡은 뜻밖의 질문에 어리둥절해 하더니 곧 대답했다. "글쎄요. 개개인의 능력 차이라면 모를까, 그들 모두를 함께 놓고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외다." 소면수라가 또 참견(?)을 했다. "무림십수(武林十秀)건 무림십괴(武林十怪)건 대충 그렇고 그렇다. 개중 단 한 명만은 예외지만." 영호걸이 물었다. "그가 누구입니까?" "혈영신사(血影神蛇)." "혈영신사요?" "그렇다. 그 자를 빼놓고는 무림십괴도 별 볼 일 없다."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토록 독보적이라면 굳이 무림십괴 내에 포함되어 있을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영호걸이 이의를 제기하자 소면수라는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지. 무림십괴는 비록 특별한 연계는 없으되, 하나 같이 짐승의 이름을 따 별호가 만들어졌다." "흐음!" "그 예를 들자면 혈영신사는 뱀, 비천신원만 해도 원숭이를 이르고 있지 않느냐?" "아! 재미있군요." 소면수라는 흰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런 셈이지. 어쨌든 혈영신사의 배분은 나머지 구괴(九怪)에 비해 한 대가 높다. 또한 그는 십괴 중에서도 유독 구괴와 어울리기를 꺼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호걸이 다시 그를 향해 물었다. "그럼 혈영신사의 나이는 어찌 됩니까?" "노부와 엇비슷한 연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무공이 그토록 강할 수도 있는 것이고."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고, 대회 주관의 참모격인 진상표가 다시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중인들을 바라 보며 큰 소리로 외쳐댔다. "여러분, 오늘의 비무대회는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내일을 기약하며 그만 막을 내릴까 합니다. 여러 군웅들께서는 오늘 밤 청운장의 대청에 마련된 연회에 필히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군웅들이 사방에서 환호를 보냈다. "와아아아--!" 진상표는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보인 뒤, 퇴장했다. 소면수라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자, 우리도 그만 쉬러 갑시다." 그러자 천중삼신과 영호걸도 각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영호걸이 사영룡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형은 어디로 갈 작정이오?" "하하하... 무엇보다 연회에 참석해야지요. 절세미인인 사공낭자가 나오는데, 어찌 남자로서 그런 기회를 사양할 수 있겠소?" 영호걸은 사영룡의 행동에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과장되어 보이는지를 모르고 있구나. 아무나 남자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닐진대.......' 이번에는 사영룡이 영호걸에게 물었다. "영호형은 어떻게 하실 셈이오?" "나도 미인은 몹시 좋아 하오. 다만 몸이 피곤할 때는 제외하고 말이오. 연회에는 도저히 나갈 자신이 없구려." 사영룡은 기소를 흘렸다. "영호형께서는 괜히 너무 빼는 것 아니오? 노형더러 미인을 취하라는 것이 아니지 않소? 후후...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체력이 필요할 줄은 몰랐소이다." '점입가경이로군.' 영호걸은 내심 기가 막혔으나 미소로 답했다. "사형은 보기보다 짓궂구려. 사공낭자가 들으면 펄쩍 뛰겠소." 사영룡은 대소를 터뜨리며 포권일례했다. "핫핫핫... 부인하지 않겠소. 그럼 나중에 봅시다." 그가 사라지자 삼안신군이 피식 웃었다. "비무보다 저 계집아이가 더 재미있군." 영호걸도 입가에 미묘한 웃음기를 매달았다. "사할아버님께서도 벌써 알고 계셨군요." "허허허... 그 정도의 변장술 쯤은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지." 소면수라가 역시 웃으면서 영호걸을 응시했다. "걸아야, 사형이 말은 저렇게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단다. 너도 후에 틈이 있거든 사형에게 변장술을 배우려무나." 영호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말씀은 사할아버님께서 변장술의 대가라는 뜻입니까?" 소면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의 변장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이제껏 삼안신군이라는 명호가 발각이 나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단다." "아!" 그제서야 영호걸은 삼안신군의 이마를 쳐다 보게 되었다. 과연 의식을 하고 보니 그의 이마는 범인(凡人)들과 똑같아져 있었다. 또 하나의 눈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영호걸은 감탄이 깃든 시선으로 삼안신군을 바라보았다. "정녕 대단하십니다. 할아버님께서만 허락하신다면 저도 하루 빨리 그런 변장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삼안신군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예끼, 이 녀석! 내 변장술이 그리 녹녹할 줄 알았더냐? 이것은 단 시일 내에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내 시간이 나는 대로 한 단계씩 가르쳐 주겠다." 그는 이어 묻지도 않은 말까지 덧붙였다. "허허... 걸아, 솔직히 말해 노부의 변장술은 그저 쓸만한 정도이지, 무림에서 최고라 할 수는 없구나." 영호걸은 씨익 웃었다.


"겸손도 지나치면 오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할아버님보다 변장에 능한 자는 찾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후후... 녀석, 체면 세워 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느니라. 왕형이 너무 떠벌이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되었다만, 노부가 알기로도 그 방면에서 내 수법을 능가하는 인물은 두 사람이나 더 있었다." 영호걸은 침착하게 파고 들었다. "그렇다면 사할아버님께서는 전 무림을 통틀어 변장술에는 세번째시라는 말씀이시군요?" "허허... 네 녀석에게는 정말 못당하겠구나. 그래, 시인한다. 더구나 그 두 사람이 현 무림에 남아있지 않으니 노부가 이제는 제일인자라고 자랑이라도 해야겠구나. 허허허......." "물론 그렇게 하셔야지요." 곁에서 소면수라가 짐짓 냉소를 발했다. "안되겠군. 다리를 놓아 주었더니 둘이서만 너무 희희낙락이구나. 내 눈꼴이 시어서 까발린 김에 몽땅 털어 놓겠다." 그는 한 차례 헛기침을 발하고는 말을 이었다. "사형이 콧대 높이는데 지장을 준 두 사람은 바로 이런 위인들이다. 그 중 한 명은 오십 년 전, 천하에 위명을 떨치다 화룡도와 더불어 실종이 되어 버린 천면옹(千面翁)이지." "아! 별호만으로도 짐작이 되는군요." "맞다. 그 자는 문자 그대로 천의 얼굴을 가진 인물이다. 무림인들 중 그의 진면목을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영호걸은 문득 천유자 모용황에게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으음, 천면옹이라면 강호육기(江湖六奇) 중 한 명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해진 나머지 그 스스로가 소면수라를 향해 물었다. "그런 천면옹과 쌍벽을 이룰 만한 인물이 또 있었습니까?" 소면수라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음, 하지만 그 사람은 훨씬 이전의 인물이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지. 지금으로부터 약 이백 년 전, 무림에는 한 명의 괴인(怪人)이 나타났었다. 그는 상상도 못할 만큼 놀라운 무공을 지니고 있었는데, 당시 천하무림을 떨어 울리던 수십 명의 절세고수들을 찾아 다니며 모조리 격패시키고 말았다." 영호걸은 다소 의아한 빛을 띄었다. "그것이 변장술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삼안신군이 그 말을 받아 느긋하게 대답했다. "나타날 때마다 그의 얼굴이 달라졌다면, 믿을 수 있겠느냐?" "어찌 그럴 수가!" "허허...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묘한 것은 그의 모습이 십오, 륙 세 정도의 소년에서부터 백여 살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로 변환되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아리따운 소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던 적도 있었다고 하지." 영호걸은 납득이 가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변장술이 대단하다는 것 아니냐?" "으음......." 영호걸은 침음성을 흘리며 다시 물었다. "그 분의 이름은 어찌 됩니까?" "글쎄, 아직까지도 그의 정확한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단지 그의 신출귀몰한 행적 때문에 무림에서는 그를 일컬어 천환상인(天幻像人)이라 불렀지."


일순 영호걸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스쳤다 사라졌다. 그러나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천운장에서 마련해 준 객실로 각기 들어갔다. 이제 날이 저물어 사위는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다. ② 영호걸. 그는 탁자에 앉은 채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영호걸은 품 속에서 천무비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찾는 듯 한꺼번에 여러 장을 넘겨 보았다. 그러다 어느 장에 이르자 그는 마침내 손을 멈추고 안면 가득 희열의 빛을 띄었다. 그의 눈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오고 있었다. <천무문 제 십일대 장문인인 천환상인(天幻像人) 현중악(玄中岳)이 남긴다.> 영호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결국 무림의 역사 자체가 천무문의 내력을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천환상인이라는 분도 천무문의 인물이었으니.' 그는 천무문에 대해 새삼 경외지심이 일 지경이었다. '누대에 걸쳐 단맥(單脈)으로 이어져 내려 오면서도 걸출한 기인이사(奇人異士)들만을 배출해 냈다. 무림인들이 이를 알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영호걸은 이어 천환상인이 써 놓은 비학들을 읽어 내려갔다. <천환심법(天幻心法)> 이는 오로지 변장만을 위한 신공이었다. 이 신공을 운용하면 골격의 형태를 바꾸는 것은 물론 근육이나 피부까지도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우선 천환심법의 기본은 역시 골격을 크거나, 혹은 작게 만드는 역골공(易骨功)이다. 거기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필요에 따라 음성을 구사할 수 있는 변성술(變聲術)까지 추가된다. 그야말로 완벽한 변장술이다. 이것을 대한 영호걸은 너무도 신기해 도무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현상 같지도 않았다. 그는 내심 탄식처럼 부르짖었다. '내 명색이 의원이 되고자 했던 사람으로서 인체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했건만,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불가사의는 따로 존재하고 있었구나.' 영호걸은 곧 방바닥으로 앉은 자리를 바꾸어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천환심법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현상이 바로 그의 몸에서 일어났다. 골격과 근육이 조금씩 움직이며 점차로 제 위치를 이탈해 갔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호걸의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본래의 반듯하고 단아한 문사풍의 청년에서 날렵하고 건장해 보이는 무인(武人)으로 변해 있었다. 그 과정을 거쳐 영호걸은 다시 천무비경을 읽어 보았다. <천환심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일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이 심법을 연성할 수가 없다. 천환상인.> 그 글을 대하자 영호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갑자? 그렇다면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나는 내공을 연마한 지 겨우 한 달도 되지 않았거늘, 어떻게 천환심법을 연성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는 마치 오리무중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내가 갑자기 무슨 수로 일갑자나 되는 내공을 지니게 되었다는 말인가?' 영호걸은 이어 양손에 내공을 모아 보았다. 건원신공을 운기한 것이었다. 그러자 곧 엄청난 장력이 물


흐르듯이 그의 전신 사지백해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음." 영호걸은 짧게 침음성을 발한 후, 오른손을 들어 탁자를 가볍게 내리쳐 보았다. 팍! 둔탁한 음향과 함께 그의 오른손은 탁자에 깊이 박혀 버렸다. '이럴 수가!' 영호걸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탁자로부터 손을 빼냈다. 탁자에는 그의 일격으로 인해 장인(掌印)이 뚜렷이 찍혀 있었다. '내게 어찌 이런 꿈같은 일이.......' 영호걸은 한동안 신기한 듯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뇌리에 얼핏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 된 기억의 저편, 즉 지금까지는 굳이 반추해 볼 필요도 없었던 과거지사의 한 부분이었다. 영호걸. 그는 어린 시절에 몸이 무척이나 허약했었다. 불행하게도 선천적 질병인 오음절맥(五陰絶脈)을 타고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곧잘 정신을 잃고 쓰러져 부모로 하여금 어지간히도 애를 태우게 했다. 아마도 부친인 영호천이 당세의 신의가 아니었던들 그는 오늘날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실상 오음절맥이란 대부분 십오 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 불치의 병이었다. 따라서 그가 목숨을 연명하고 정상인의 체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친의 의술과 수 년간을 두고 무수히 먹었던 영약(靈藥)들 덕분이었다. 오음절맥을 지닌 사람은 전부가 천하의 기재들이다. 그러나 공평한 신의 섭리 탓인지 이 체질을 지닌 사람은 어려서 죽게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부친을 통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이랄 수 있었다. 영호걸은 이 점을 두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결과적으로 내 삶이란 상리(常理)에서 이탈된 것이었다. 시대를 초월하여 몇백 년의 전통을 잇던 의가(醫家)의 후손, 즉 아버님의 아들로 태어나지 못했다면 나는 다른 오음절맥의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벌써 이승을 하직했을 것이다.' 아울러 그는 당시 부친이 자신에게 시술했던 묘방을 떠올렸다. 이름하여 금침천혈태령대법(金針天血太靈大法). 이것은 영호가문 최대의 가전수법(家傳手法)이었다. 심지어 문중에서도 수백 년 동안 전해져 내려 오기만 했을 뿐, 한 번도 실제로 시전했었다는 기록은 없었다. 그만치 시술이 어렵기도 했지만 무려 수백 가지의 진귀한 영초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의 조상들도 누대에 걸쳐 이론상으로만 알고 있었던 대법이었다. 영호천도 이 대법은 평생에 걸쳐 꼭 두 번을 시행했을 따름이었다. 그것은 아내의 생명과 맞바꾼 격이 되었던 당금 황실의 삼공주(三公主), 그리고 사랑하는 자신의 독자(獨子)에게였다. 영호걸은 묵묵히 생각을 정돈했다. '기억이 난다. 아버님께서는 당시 말씀하시기를, 인간이 나고 죽는 일은 하늘의 뜻이라 하셨다. 아마도 당신께선 내게 금침천혈태령대법을 시전하면서 이미 내 삶에 주어질 명분까지도 염두에 두셨던 것 같다.' 그는 번쩍 눈을 빛냈다. '그것은 바로 내 인생이 힘들게 얻어진 만큼 가치있게 쓰여지기를 바라시는 일종의 기원이 아니었을지......?' 영호걸은 새삼 유약하게 느껴질 정도로 인자하기만 했던 부친의 숨겨진 이면을 발견해 내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마치 단정짓듯 내심으로 크게 부르짖었다.


'그렇다. 아버님께서는 내가 의가의 맥을 잇든, 무인이 되든 결코 개의치 않으실 것이다. 단 한 가지를 약속드린다면!' 영호걸은 부친을 대하듯 허공을 향해 나직하게 읊조렸다. "아버님, 소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천하를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천명(天命)을 숙제로 안고 이행할 것인즉 지켜 보아 주십시오." 바야흐로 운명은 사면에서 소요를 일으켰으되, 뜻하지 않게 단선(單線)을 그리며 그에게 강하게 쏘아져 오고 있었다. ③ 영호걸은 천무비경의 다음 장을 넘겼다. <천환삼식(天幻三式)> 그의 눈썹이 기이하게 움직였다. 이어 천환삼식의 구결(口訣)을 읽는 동안 그의 표정은 점차 감탄으로 물들어 갔다. '으음, 정녕 교묘하기 그지 없는 장법이로군.' 천환삼식은 본시 강(剛)보다는 유(柔)를, 정(靜)보다는 동(動)을 추구하는 장법으로써 무엇보다 변화가 무쌍한 것이 강점이었다. 이 장법을 펼치면 천지가 모두 장영으로 뒤덮혀 어느 것이 실(實)이고, 어느 것이 허(虛)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영호걸은 구결과 도해를 머리 속에 암기한 후, 손을 움직여 시전해 보았다. 그러나 그로서도 이 천환삼식만큼은 쉽게 구사할 수가 없었다. 그의 이마에는 어느덧 구슬땀이 맺히고 있었다. '이것이 내 한계인가? 도대체 복잡하고 어렵기가 비연추혼장법에 비할 바가 아니구나.' 영호걸은 두 시진이 지나서야 간신히 일식(一式)을 터득해 내고는 스스로를 향해 고소를 지었다. '겨우 이 정도라니.......' 하지만 이는 그가 모르는 소리였다. 실상 현재의 내공이 일갑자에 이르러 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지금껏 그가 이룬 성과는 가히 기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아무튼 영호걸은 연마를 마치고 비급을 도로 품 속에 집어 넣었다. 창문이 환해지고 있었다. 어느새 또 날이 밝아 온 것이었다. 그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얼굴을 적시던 땀을 대번에 식혀 버렸다. 무척이나 음랭한 날씨였다. 영호걸은 사위를 둘러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새해도 얼마 남지 않았군." 그는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영호걸이 묵고 있는 곳은 청운장의 후면에 줄지어 있는 방사(房舍)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방사의 전면에는 잎이 다 떨어진 버드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휘이이잉--! 한 가닥 매운 바람이 기다란 가지를 훑고 지나갔다. 영호걸은 그런 풍경이 과히 싫지는 않았다. 아니, 그는 아침 일찍 찬 바람을 들이키니 오히려 폐부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눈에 버드나무에 기대 서 있는 한 인영이 들어 왔다. 호리호리한 그 인영은 일신에 자의(紫衣)를 걸치고 있는 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등을 보이고 서 있었는데, 언뜻 느끼기에도 그 뒷모습에서는 쓸쓸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영호걸은 그녀를 의식하자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여인의 뒷모습이 대단히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자의여인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로 돌아섰다. "아!" 여인의 입에서 짤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시선은 영호걸의 얼굴에 머무른 채 충격을 받은 듯


굳어져 있었다. 한 번 쯤은 가까이 해보고 싶은 젊은 영웅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영호걸의 현재 모습은 본래의 그것이 아니었다. 드러나는 것이라야 그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랄까? 건장한 가운데서도 웬지 문약(文弱)한 일면이 엿보이는 듯한....... 놀라기는 영호걸도 마찬가지였다. '사공낭자.......' 눈 앞의 여인은 자의옥녀 사공매였다. 그가 최초로 여인을 향한 구체적인 감정을 가진 바 있었던 바로 그녀였다. '가까이서 대하니 더욱 아름답구나. 마치 하나의 섬세한 조각품을 대하는 것 같다.' 사공매 역시도 심중에서 이런 읊조림이 일고 있었다. '언제 우리 장원에 이런 공자가 왔을까? 처음 보는 분인데.......' 그러나 그녀는 곧 의지와는 달리 영호걸로부터 몸을 돌리고 말았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에 서글픔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부질없어. 내게는 이미 선택권이 없는 걸?' 사공매는 이어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워 보였던지 영호걸이 되려 마음이 쓰릴 정도였다. 그는 내심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저 여인은 지금 몹시도 비관하고 있다. 하긴 미인이 스스로를 낮추고 사문기를 유혹해 비무대회를 열게 했으니, 괴롭기도 하겠지. 어쩌면 자신을 상품화(商品化) 시켰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영호걸의 눈에 언뜻 이채가 스쳤다. '내가 이번 비무대회에 참석하면 어떻게 될까?' 그는 자신을 부정하듯 고소(告笑)를 지었다. '후후... 무슨 쓸데 없는 생각을.......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만용을 부리려 하는가?' 영호걸은 체념과 더불어 무력하게 느껴지는 육신을 나무에 기댔다. 하늘마저도 방금 전과는 달리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의 입에서 음울한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 "한바탕 눈이라도 쏟아질 것 같군." 그런데 이때였다. 영호걸은 갑자기 발 밑이 근질근질해 오는 것을 느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엇이지? 지하에서......?" 그는 발을 들어 보았다. 밟고 있던 땅의 흙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조금 뒤로 물러나 그곳을 내려다 보았다. 급기야 흙이 일어 나더니 그 속에서 무엇인가 툭 튀어 나왔다. 그것은 시커먼 가죽같은 것을 뒤집어 쓴 왜소한 인영이었다. 얼굴까지도 검은 가죽으로 덮혀 있어 눈만이 유독 반짝이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땅 속에서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는 흙이 전혀 묻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 자는 나오자마자 영호걸을 발견하고는 제 쪽에서 되려 움찔 놀랐다. 그런 그의 눈에는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영호걸이 먼저 침착하게 물었다. "너는 어찌 하여 땅 속에서 나오느냐?" 괴인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호걸은 비상 수단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잔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보니 절도(竊盜)가 주업인 모양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무엇 때문에 남의 눈을 피해 땅 밑으로 기어 다닌단 말인가?" 괴인영은 그 말에 대뜸 노한 빛을 띄웠다. "그대는 청운장의 인물인가?" 말투에 비해 다소 어리게 느껴지는 음성이다. 영호걸은 이를 눈치채자 약간은 오만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다. 그런데 너는 왜 나이도 어리면서 내게 반말을 하지? 청운장의 인물이 아니면 다 그렇게 대하나?" 괴인영은 그 말에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어떻게 내 나이가 그대보다 적다고 단정하는가?" 영호걸은 상대를 직시하며 말했다. "그럴만 하니까. 부인할 텐가?" 왜소한 괴인영은 금세 풀이 죽은 듯 눈빛이 움츠러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어깨를 활짝 폈다. "강호에서 나이가 많고 적고는 문제가 아니지 않소? 그대가 나를 꺾을 수 있는 방법이란 오직 무력(武力)일 뿐이오." 영호걸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쯧! 대결을 하자는 뜻인가 본데, 정녕 난감하게 되었군.'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괴인은 자못 의기양양하게 나왔다. "나는 상대가 누구이건 하수(下手)에게는 공경하지 못하오. 지금부터 나 흑전서(黑田鼠)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겠소." 그는 말을 마치자 다짜고짜 우수를 뻗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영호걸은 뒤로 예닐곱 걸음이나 밀려났다. 자칭 흑전서라는 괴인영은 재미있다는 듯 내뱉았다. "흥! 실력도 없으면서 어른인 체 했다니......." 그는 이제 신명이 났는지 좌우장을 번갈아 떨쳐 내고 있었다. 영호걸은 계속해서 주춤주춤 물러나며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 수법은 바로 그가 비무대회에서 보았던 것이었다. 흑전서는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그 따위 시시한 전화수(剪花手)로 내 공격을 막겠다고?" 이어 그는 교묘한 수법으로 왼손을 내뻗었다. 팍! 급기야 그의 좌장이 영호걸의 어깨에 격중했다. "웃!" 영호걸은 짧게 신음을 발하며 다시 서너 걸음 후퇴했다. 어깨로부터 통증이 전해져 왔으나 그는 이를 내색하지 않았다. 흑전서는 의외라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찌 된 영문인가? 내 공격에는 최소한 칠성(七成)의 내공이 들어 갔는데, 이 자는 맞고도 끄덕을 안하는구나.' 영호걸은 내심 은근히 분노가 치밀었다. 졸지에 공격을 당한 것도 그렇지만 상대의 불손한 태도는 아무래도 그냥 보아 넘기기가 힘들었다. 자신이 강세냐, 약세냐를 떠나 이것은 그의 성격상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문제였다. 그는 얼마 전, 역시 눈대중으로 익힌 바 있던 대천검법(大天劍法)을 장법으로 변화시켜 펼쳐냈다. 실전경험이 전무(全無)인지라 그의 수법에서는 헛점들이 허다하게 노출되고 있었다. 이를 보자 흑전서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저것은 분명 강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대천검법이거늘, 이 자는 어떻게 장법으로 변용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빈틈이 많아 엉성해 보이는 영호걸의 장법은 그에게 더 없이 용기를 주었다. 그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크ㅋ! 그따위 시시한 장법으로 나를 상대하겠다니."


흑전서는 팔성(八成)의 내공으로 다시금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의 우장은 정확하게 영호걸의 거궐혈(巨闕穴)을 강타했다. "크윽!" 영호걸은 답답한 신음과 더불어 아예 뒤로 튕겨 나갔다. 가슴에서 격렬한 통증이 일어 그를 더욱 무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잠시 시간이 지나자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기이한 잠력이 혈도를 맴돌더니 그런 현상을 가져온 것이었다. 반면에 흑전서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것은 영호걸의 몸을 강타한 순간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자신의 주먹을 밀어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급소를 맞고도 끄덕도 하지 않다니, 그럼 이 작자는 금강불괴였단 말인가?' 그러는 사이에도 그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시간은 말없이 흘렀다. 하지만 상황은 처음과는 다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영호걸의 초식이 점차 현란해져 평수(平手)를 이루었던 것이다. 영호걸. 그는 언제 얻어 맞았냐 싶게 놀라운 무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저 보고 들은 초식들을 생각나는 대로 구사하고 있었지만 그 위력이란 가히 상상을 불허했다. 흑전서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갈수록 거세어지는 상대의 공격력으로 인해 그는 이제 숨돌릴 틈도 없었다. '이럴 수가! 내가 깜빡 속았었구나. 고수인 줄도 모르고.......'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대는 내공의 급증은 물론이거니와 초식과 신법에서도 나무랄데 없을 만큼 정묘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영호걸은 비연추혼장(飛燕追魂掌)의 일초를 전개했다. 파팟! 신쾌한 장력이 어깨를 스치자 흑전서는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그, 그것은 무슨 장법인가?" 영호걸은 자르듯 짤막하게 대꾸했다. "몰라도 된다." 아울러 그는 연이어 비연추혼장을 펼쳐 냈다. 그것은 바야흐로 전세가 완전히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되니 흑전서는 공격은커녕 수비에도 바쁠 지경이었다. '이 자의 무공은 분명 어딘가 서투른 구석이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깊이를 도무지 추측할 길이 없구나.' 흑전서는 어느덧 숨이 턱에 차 올라 헉헉 대고 있었다.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영호걸이 현재 내공을 육, 칠성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자, 꼬마! 그만 누워라." 영호걸의 입에서 마침내 나직한 음성이 떨어졌다. 동시에 비연추혼장의 일식이 흑전서의 어깨에 꽂혔다. 펑--! "아이쿠!" 흑전서는 비명과 더불어 어깨를 감싸 쥔 채 지면으로 나뒹굴었다. 그 광경을 보며 영호걸이 씨익 웃었다. "그래야지. 자고로 어린애는 어린애다운 것이 좋다." 그러나 흑전서는 이내 벌떡 일어나더니 악을 썼다. "어림없다! 내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네 따위 작자에게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만은 않는다." 영호걸은 눈썹을 꿈틀 했다. '꽤 충격이 컸을텐데, 어째서 멀쩡한 거지?'


그는 곧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저 검은 가죽옷이 호신갑 역할을 해준 모양이구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영호걸은 기세를 한층 높였다. "이 녀석! 네가 무엇을 믿고 그러는지 다 안다. 내 너를 잡아 그 칙칙한 껍데기부터 제거해 놓아야겠다." 그는 말과 함께 내공을 팔성으로 끌어 올렸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는 다시 비쾌무비한 장력이 발출되었다. 흑전서는 큰 소리를 친데 반해 대책없이 얻어맞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펑! 퍼펑! 폭음이 잇달아 울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흑전서의 몸은 땅바닥 위에서 뒤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급기야 그는 후다닥 일어서더니 다급하게 외쳤다. "하, 항복이오! 항복하겠소." ④ 영호걸은 손을 멈추며 낭랑한 웃음소리를 발했다. "하하하... 항복하겠다니, 나도 이쯤에서 힘을 아껴야겠군." 흑전서는 기가 꺾인 듯 그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는 겁먹은 눈초리로 겨우 이렇게 말했을 따름이었다. "당신은... 우리 누나보다도 더 무섭군요?" 영호걸은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네 누이는 또 누구냐?" 흑전서는 문득 일말의 자부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우리 누나는 흑편복(黑 )이라 하오." "흑편복?" 영호걸의 표정이 퍽이나 괴상하게 변했다. 흑전서란 두더지를 이름이다. 그런데 그 누나까지도 흑편복, 즉 박쥐라니 연원을 따지기에 앞서 웃음부터 치밀었던 것이다. 영호걸은 터지려는 웃음을 참고 다시 물었다. "그래, 너희 누나의 무공이 그리도 강하단 말이지?" 흑전서는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누나의 무공을 내 무공과 비교하려 든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오. 비록 남매지간이지만 나는 누나를 존경하오. 누나의 무공은 무림십괴(武林十怪)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니까." 영호걸은 그제서야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후후... 이제 보니 이 녀석과 그 누나라는 여인은 모두 무림십괴에 속한 인물들이었군.' 그는 짐짓 위협적인 시선으로 흑전서를 노려 보았다. "너는 네 누나가 나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느냐?" "솔직히 당신 쯤이야......." 흑전서는 말하다 말고 찔끔하여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영호걸의 무서운(?) 눈초리를 보자 또 다시 겁을 집어먹은 것이었다. 그런 흑전서의 모습을 보며 영호걸은 내심 짓궂게 중얼거렸다. '이 괴물같은 녀석의 얼굴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그는 흑전서의 눈을 응시하며 입가에 기묘한 웃음을 띠었다. "내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부탁......?" 흑전서는 몸을 움츠렸다. 그도 바보는 아닌지라 영호걸의 표정에서 무엇인가 느끼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영호걸은 가슴을 펴며 점잖게(?) 말했다.


"네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별 것도 아니다. 흠, 내 부탁이란 다름이 아니라 검은 가죽에 싸인 네 얼굴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흑전서는 대경하여 뒤로 물러섰다. "뭐, 뭣! 내 얼굴을?" 그는 황망히 양 손을 내저었다. "안돼! 그것만은 절대 안되오." 그러나 영호걸은 그 말을 못들은 척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흑전서는 계속 뒤로 물러나며 애원하듯 말했다. "당금 무림에서 우리 남매의 얼굴을 아는 자는 없소. 진면목을 들킨다면 흑전서와 흑편복의 명예는 그 날로 물거품이 되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나가 내 얼굴이 드러났다는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십중팔구 나를 때려 죽이려 들텐데......." 울상을 짓는 그에게 영호걸은 빙긋 웃어 보였다. "내 보기에 그것은 조금도 걱정할 일이 아니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알겠느냐?" 흑전서의 눈빛이 홱 달라졌다. "말도 안되는 소리! 명예란 내보이는 것보다 지키는 자의 마음이 더 중요하거늘, 당신은 나이를 자랑하면서 그것도 모르오?" "흐음?" 영호걸의 눈이 언뜻 이채를 띠었다. 흑전서의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인즉 평소 그의 지론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유감스럽게도 영호걸은 흑전서의 진면목이 정말로 궁금해지고 말았다. 기개있는 인물을 흠모하는 그의 성격상 이는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의 태도가 흑전서 못지 않게 완강해졌다. "꼬마, 나는 오늘 필히 네 얼굴을 봐야겠다. 나를 얕잡아 보고 덤빈 대가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심중을 모르는 흑전서는 발악하듯 외쳤다. "누구 마음대로!" 영호걸은 갈수록 흑전서라는 인물이 마음에 들었다. "하하하... 그야 물론 이 어르신의 마음대로지." 그는 크게 웃으며 곧바로 건원신공을 팔성까지 끌어 올려 쌍장을 휘둘렀다. 펑! "컥!" 흑전서는 흡사 공처럼 튕겨 나가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러나 반격이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 자의 내공은 갈수록 강해지는구나!' 그는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영호걸을 올려다 보았다. 영호걸의 비웃는 듯한 음성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어떠냐? 꼬마, 일찌감치 내 말대로 그 시커먼 가죽을 벗어라." 하지만 그 경황에도 흑전서는 기세를 물리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어림없는 소리!" "하하하... 내 지금부터 오초 안에 네 복면을 벗겨 버리겠다." 영호걸의 말에 흑전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오초 내에 나를 제압한다면 내 스스로 당신 앞에서 복면을 벗겠소." 영호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타고난 승부사로군. 강자에게는 깨끗이 고개 숙여줄 수 있다는 말이렷다? 후후... 오기를 부릴 때보다


훨씬 낫군.' 그는 껄껄 웃었다. "좋다. 그럼 꼬마, 제 일초다." 비연추혼장의 칠초가 그의 손에서 떨쳐져 나갔다. 그것은 손바닥이 안보일 정도로 빠른 급공이었다. "헛!" 흑전서는 대경하여 황급히 이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영호걸의 장법은 자유자재로 구사되며 그의 뒤를 집요하게 따랐다. "제 이초!" 이번에는 비연추혼장의 십초였다. "어이쿠!" 흑전서는 어깻죽지가 화끈하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영호걸의 끔찍한(?) 음성이 들려 온 것은 그때였다. "후후후... 그 정도로는 오초는커녕 삼초도 못받아 내겠다. 자! 이제 마지막 초식이다." 그는 지난 밤에 익혔던 천환삼식(天幻三式) 중 만변화우(萬變化雨)를 전개해 냈다. 그 순간, 천지가 온통 그의 장영으로 가득 찼다. 동시에 그것은 마치 폭우처럼 흑전서의 전신을 때렸다. 퍽! 퍼퍼퍽--! "으으윽!" 흑전서는 속수무책으로 얻어 맞고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 광경을 보며 영호걸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꼬마, 어서 약속대로 복면을 벗어라." 흑전서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꼭... 그래야 한다면......." 영호걸은 잘라 말했다. "물론이다." 그는 비연추혼장의 십일초를 금나수법으로 변환시켜 번개같이 흑전서의 복면을 나꿔챘다. 복면은 의외로 쉽게 벗겨졌다. "으음!" 영호걸은 가벼운 탄성을 발했다. 나타난 얼굴은 결코 그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대략 십오 세 정도 된 소년의 모습으로써, 아직 치기가 엿보이는 귀여운 얼굴이었다. 단지 뜻밖이라면 그의 얼굴이 이국적(異國的)이라는 사실이었다. 백설같이 하얀 피부에 금발, 눈동자는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흑전서는 마침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울먹였다. "이제 정말 난 죽었어요. 누나가 이 사실을 알면......." '후후... 역시 어린애로구나.' 영호걸은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너는 중원인(中原人)이 아니구나?" 흑전서는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는 청해(淸海)에서 왔어요." 그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영호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 정말 약속은 꼭 지켜야 해요?" 하지만 영호걸의 장난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음, 그 대신 두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게 뭔데요?"


영호걸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본시 상대방에게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은 하지 않는다. 너와 아까 말한 네 누나의 이름만 알려 주면 된다." 흑전서의 낯빛이 대뜸 창백하게 질렸다. "마, 말도 안되는......." 영호걸은 야릇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뭐, 싫다면 강요하지는 않겠다. 나도 너와의 약속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너 알아서 해라." 흑전서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아요. 그 대신 비밀인 것은 알지요?" "후후... 그야 여부가 있겠느냐?" 흑전서는 그러고도 입술을 질끈 깨물고 나서야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겨우 대답했다. "내 이름은 오랍격(烏拉格)... 누나는 오랍미(烏拉美)......." 영호걸은 그 이름을 뇌이고는 히쭉 웃어 보였다. "네 누나는 지금 몇 살이냐?" 흑전서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까지 말해야 되오?" 영호걸은 무슨 의미에서인지 앞으로 스윽 다가갔다. "역시 말하기 싫은가 보구나?" 흑전서는 뒤로 주춤 물러나며 얼른 대답했다. "열여덟 살이오." 영호걸은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좋은 나이구나. 하지만 네 모습으로 미루어 너희 누나라는 여인도 무척 못생겼을 것 같구나." 흑전서는 그 말에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했다. "웃기지 마시오. 내 장담하건대 우리 누나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제일의 미녀요." 영호걸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한 번 만나 보고 싶구나." "흥! 만났다간 그 날이 바로 당신의 제삿날이 될 거요." "진즉부터 꽃향기에 취해 죽는 것이 내 소원이었지. 더구나 그 상대가 천하제일의 미녀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구나. 하하하......." "자꾸 놀리지 마시오!" 흑전서는 약이 바짝 오른 듯 자신의 처지도 잊고 고함을 질렀다. 영호걸이 그에게 복면을 던져 주었다. "그래, 그만 하지. 이젠 가도 좋다." 흑전서는 복면을 받아 얼굴에 뒤집어 쓴 뒤, 그를 노려보았다. "언제든 이 빚은 꼭 갚고 말겠소." 영호걸은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만난 최고의 승부사! 내 꼭 기다리고 있겠다. 그러나 추후로도 땅 속을 기어 다닐 때는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보다 더 지독한 상대를 만날 수도 있으니까." 흑전서의 파란 눈이 한 차례 크게 출렁였다. "당신은 정말... 미워할 수도 없군요?" 그는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순식간에 땅 속으로 스며들어 버렸다. 영호걸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나도 그렇다네. 두더지군(君)......." 6 장 재회(再會) ①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려왔다. 영호걸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감췄다. 과연 두 명의 인영이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개중 한 명은 삼십 세 정도로 일신에 금의(金衣)를 걸치고 있었다. 다른 한 명도 역시 금의를 입었는데, 나이는 오순 가량이었다. 노인이 나무 곁으로 다가와 서며 먼저 입을 열었다. "막내사제, 이번 일은 반드시 성취해야만 하네." 금의청년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 말을 받았다. "둘째사형,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게 손에 들어올 만한 물건은 아니지 않습니까?" "후후후... 그러니까 양수겹장을 시도하자는 것이 아닌가? 자네가 비무대회에 참가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동안, 나는 따로 은밀하게 만년한옥이 숨겨진 곳을 알아 보겠네." "그런데 둘째사형, 소제는 그들이 왜 그렇게 만년한옥을 차지하고자 아우성인지 모르겠습니다." "흠, 거기에는 물론 큰 이유가 있지."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까?" 금의노인은 잠시 침음했다가 대답했다. "그렇네. 만년한옥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신지(神智)가 정명(精明)해져 난해한 무공도 쉽게 깨칠 수 있지. 그 성취도 몇 배나 빠르다네. 뿐만 아니라 천하의 독을 다 물리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는 음성을 최대한으로 낮추었다. "만년한옥을 지니고 있어야만 화룡지(火龍池)의 비밀을 풀 수가 있다는 사실일세." "넷? 그게 정말입니까?" "쉿! 자네, 목소리가 너무 크네." 금의노인은 주의를 준 후, 다시 말했다. "화룡지란 문자 그대로 불로 형성된 연못이라더군. 웬만한 사람은 그 불길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전신이 숯덩이가 되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전해지지. 그래서 만년한옥이 필요한 것이네. 그것이 있으면 화룡지의 불길에도 몸을 상하지 않는다고 하네." "으음......." "그러니 자네와 나도 총력을 기울여 만년한옥을 탈취해야 하네." "네, 알겠습니다. 둘째사형." 금의노인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막내사제는 비무대회에서 옥면살심 사문기를 각별히 주의해야 하네. 그 놈은 천검신군(天劍神君) 장늙은이의 천검십이식(天劍十二式)을 완벽하게 연성하고 있으니까." "하하하... 둘째사형, 걱정 마십시오. 놈이 천검신군의 제자이건, 흑룡문이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있건 상관 없습니다. 소제 역시도 금불신문(金佛神門)이 뒤에 있지 않습니까?" "허허... 과연 금불신문의 제자다운 소리일세. 그 패기가 일단 마음에 드는군. 내 자네만 꽉 믿겠네." "감사합니다. 둘째사형." "자, 그럼 나는 그만 가 보겠네. 계획이 섰으면 한시라도 빨리 추진을 해야 하지 않겠나?" 말을 마치자 금의노인은 서쪽 방면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뒤를 이어 금의청년도 몸을 날렸다. 하지만 각자 맡은 임무가 달라서인지 그 자는 노인과 반대편인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영호걸이 나무 뒤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눈썹이 절로 찌푸러 들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구나. 저 청년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금불신문의 제자라면 만만치 않겠군." 그는 천중삼신과 함께 지내는 동안 무림의 현황에 대해 얻어 들은 바가 적지 않았다. 당금의 무림은 일선(一仙), 일성(一聖), 일불(一佛), 그리고 쌍신군(雙神君)과 천중삼신(天中三神),


우내사괴(宇內四怪) 등을 소위 일류고수들로 꼽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후기지수(後期之秀)인 무림십수(武林十秀)와 온갖 괴물들이 총망라된 무림십괴(武林十怪)가 있었다. 특히 무림십괴 중 한 명인 혈영신사(血影神蛇)는 무학의 깊이에 대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어 더욱 무서운 존재로 인식되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들 외에도 강한 고수는 부지기수였다. 더구나 은거하고 있는 인물들까지 꼽는다면 밤을 새워도 다 헤아릴 수 없으리라. 영호걸은 이를 염두에 두고 상념에 잠겼다. '금불신문의 장문인인 마영불(魔靈佛)은 무림에서 일불로 칭할 정도이니 무공이 엄청나게 높을 것이다. 천검신군 장평산(長平山)에 비해 강하면 강했지, 결코 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그의 제자들도 역시 고강한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그는 몸을 날려 일단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천환심법을 운기해 본래의 용모로 회복시켰다. 그가 침상에 걸터 앉기가 무섭게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걸아,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느냐?" 이어 방문이 열리더니 천중삼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향해 영호걸은 기지개를 켜며 길게 하품을 했다. "아음....... 할아버님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소면수라 왕상이 기가 막힌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 녀석 보게? 하는 짓이 갈수록 가관이군." 삼안신군 사굉무는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걸아야,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 비무대회가 벌써 시작되었을 것 같구나." "죄송합니다." 영호걸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섬혼도 냉염은 혀를 끌끌 찼다. "쯧! 다 큰 녀석이 깨워야 일어나다니." 이 정도면 냉염으로서는 대단한 애정 표현인 셈이었다. 습관처럼 굳어져 있는 그가 대체 영호걸이 아닌 누구에게 이렇듯 일상적인 말을 자연스럽게 건넨단 말인가? "조반은 드셨습니까? 냉할아버님." 영호걸의 말에 냉염은 등을 홱 돌렸다. "그럼 네 놈처럼 아직 식전일 줄 알았느냐?"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성큼성큼 걸어 혼자서 가 버리는 것이었다. 소면수라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하여간 말을 쏟아내는데는 어지간히 인색하다니까. 허허......." 삼안신군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걸아, 너도 빨리 준비하고 나오너라. 우리는 비무대회장에 먼저 가 있겠다." "알겠습니다, 할아버님." 그들이 가고난 후, 영호걸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② 비무대회는 전날에 비해 더욱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비무대 위에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숱한 고수들이 오르내리며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그에 따라 관전하던 군웅들은 열렬한 환호와 더불어 함성을 터뜨리고 있었다. 영호걸. 그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비무대 위를 주시했다. 지금 그곳에서는 두 명의 인물이 한창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개중 한 명은 수염이 덥수룩한 사십대의 중년인이었는데, 손에 감산도(坎山刀)를 쥐고 있었다. 그


거창한 감산도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무시무시한 경풍이 일곤 했다. 그의 상대는 삼십 세 가량의 은의(銀衣)를 입은 자였다. 양손에 은색의 단창(短槍)을 쥐고 있었으며, 머리에도 은건(銀巾), 신발 또한 은색이었다. 일색(一色)이 주는 통일감으로 인해 외양이 더 없이 멋들어지게 보이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가 휘두르는 쌍창은 기묘한 변화와 함께 날카로운 파공성을 일으키며 중병(重兵)인 감산도를 요리해 내고 있었다. 영호걸은 그 은의청년에게 무척이나 호감이 일었다. '준수한 모습도 그렇거니와 정녕 훌륭한 솜씨다. 저 자의 이름은 어떻게 될까?' 이때, 소면수라 왕상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옥면은창(玉面銀槍) 동방천(東方千)의 무공은 쓸만하군. 그래도 흑도에서 꽤나 이름을 날린다는 거령도(巨靈刀) 팽군산(彭君山)이 일방적으로 몰리다니." 삼안신군 사굉무가 그 말을 받았다. "그럼 괜히 무림십수에 끼었는 줄 알았소?" 왕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벌써 무림십수 중 두 명이나 예선전에서 통과를 했지. 그런 데다가 저 동방천이라는 아이마저 가세하면 이번 대회는 완전히 무림십수가 주름을 잡게 되겠군." 비무대 위에서는 어느덧 승부가 나고 있었다. 도광(刀光)과 창영(槍影)이 난무하는 가운데 승자와 패자가 가려진 것이다. "자, 마지막 한 수외다!" 동방천의 호통과 함께 금속성이 울렸다. 철컹! 팽군산의 감산도가 축 늘어져 바닥에 닿고 있었다. 그것은 동방천의 은창이 그의 어깻죽지를 찢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고통으로 인해 팽군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졌다......." 동방천은 만면에 득의한 웃음을 드리우며 창을 거두었다. "양보해 주어 고맙소." 말은 이렇게 하고 있으나 그의 태도는 오만하기 그지 없었다. 눈빛만 해도 상대를 깔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팽군산도 이를 눈치채고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 비무대 아래로 뛰어 내렸다. 아울러 그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옥면은창 동방천은 그 광경에 앙천대소 했다. "으핫핫핫......." 그러나 그같은 모습에 호응을 보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군웅들은 오히려 그의 방약무인한 태도에 저마다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대놓고 불만을 터뜨리지도 못했다. 당금 무림십수 중 일인인 동방천에게 감히 누가 무어라 하겠는가? 영호걸의 등 뒤에서 문득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이제 한 사람만 더 물리치면 옥면은창도 통과하겠군." 퍽이나 자조적인 음성이 그 말에 응수했다. "쩝! 맡아 놓은 것으로 봐야지. 과연 누가 있어 저 기세를 보고도 그에게 도전을 시도하겠는가?" 그들의 예상이 맞아 떨어진 것일까? 한동안 아무도 비무대에 오르려는 자가 없었다. 옥면은창 동방천은 우뚝 선 채 전면을 굽어 보고 있었다. 청운장의 총관인 진상표가 그에게로 다가 가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더 이상 도전자가 없소이까? 그렇다면 시간 관계상 동방소협이 통과한 것으로 하겠소."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잠깐!" 짤막한 외침과 함께 한 줄기 금빛 인영이 놀라운 신법을 구사하며 비무대 위로 날아 올라왔다. 그를 보자 영호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 저 자는.......' 나타난 사람은 삼십대의 금의인으로서, 영호걸이 이미 나무 뒤에서 모습을 확인한 바 있는 금불신군의 막내제자였다. 군웅들은 아마도 그의 신분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단지 그의 신법에만 놀라움을 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금의청년은 동방천을 향해 포권했다. "소생은 아직 이름도 알려진 바 없는 무림의 소졸이오. 그저 동방형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 용기를 내어 보았소." 동방천의 미간이 슬쩍 찌푸러 들었다. '이 자는 지금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경공으로 미루어 고수가 틀림없거늘, 대체 무슨 저의로 이러는 것일까?' 아울러 그는 기억 속을 뒤져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느라 부심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분명 이름 없는 자는 아닐텐데....... 어째서 나는 무림에 이런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을까?' 그는 더 시간을 끌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비로소 물었다. "친구의 성함은 무엇이오?" 금의청년은 대소를 터뜨리며 대답했다. "핫핫핫... 소생은 무강위(武强位)라 하오이다." 동방천은 신중을 기하려는 듯 한 걸음 물러섰다. "좋소. 어서 무기를 뽑으시오." 그러나 무강위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소생은 원래 무기를 쓰지 않소. 어떤 상대이건 이 한 쌍의 손만 있으면 충분하오." 손바닥을 들어 보이는 그의 모습은 오만하기로 치자면 되려 동방천보다 한 수 위였다. 따라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동방천으로서는 가히 임자를 만난 격이었다. "건방진!" 동방천은 안색이 홱 변하더니 은창을 등 뒤에 꽂아 버렸다. "좋다! 나도 무기의 잇점을 빌고 싶지는 않다." 무강위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매달렸다. "동방천, 어리석구나. 육장(肉掌)도 육장 나름이거늘....... 은창이 배제된 동방천이 힘을 제대로 쓰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뭐, 뭣!" 동방천의 안면근육이 마구 씰룩였다. 연이은 두 번의 모욕으로 인해 그는 흥분한 나머지 거의 폭발 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무릇 감정의 동요란 무인(武人)에게 있어서 최대의 금기였다. 특히 싸움에 임해 흥분한다는 것은 곧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점을 망각한 듯 동방천이 버럭 외쳤다. "받아랏!" 그는 쌍장을 기기묘묘하게 휘두르며 공격을 개시했다. 무강위는 슬쩍 몸을 피하며 비웃음을 날렸다. "내 말하지 않았느냐? 네 장법은 별 볼 일 없다고. 후후......." 이어 무강위도 쌍장을 들어 올리더니 상(上)과 중(中)의 두 방향으로 비스듬히 뻗어 냈다. 펑!


폭음이 울리고 두 사람은 각기 한 걸음씩 물러났다. 하지만 그 순간을 노려 무강위는 기습적인 공격을 펼쳤다.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부려 동방천의 인중(人中)을 긁어 갔던 것이다. 그것은 강호 상에서도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응조공(應爪功)이었으나 이때만큼은 사뭇 달랐다. 그의 응조일식(應爪一式)이야말로 가장 시의적절한 공격법이라 할 수 있었다. "흡!" 동방천은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눕혔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도 그는 두 발로 연달아 무강위의 단전혈(丹田血)을 걷어찼다. 그것은 실로 눈부신 응변이었다. 두 사람은 엎치락 뒤치락 하며 비무대 위에서 숨막히는 접전을 벌였다. 덕분에 십여 초가 순식간에 흘러 갔다. 동방천은 줄곧 가문비전의 독특한 금나수법(檎拿手法)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무강위는 여전히 평범한 초식들로 대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막상막하의 형세를 유지한다면 그 싸움의 결과란 더 두고 보지 않아도 알만한 노릇이었다. 동방천은 약이 바짝 올라 부르짖었다. "내 네놈을 반드시 제압하고 말겠다!" 그는 두 손을 교묘하게 움직여 다시금 무강위의 기문(期門)과 거궐(巨闕), 두 혈도를 잡아채려 했다. "어딜!" 무강위는 이를 피할 생각도 않고 두 손을 비수처럼 세워 동방천의 팔목과 어깨를 내리쳤다. 그것은 일견하기에도 탁월한 공수입백도(空手入白刀)의 재간이었다. "헉!" 동방천은 다급한 신음을 발하며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무강위의 수도(手刀)를 대하고 보니 자신의 수법이 순간적으로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능력상의 열세는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신형이 튕겨지듯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우우.......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다. 고육계(苦肉計)도 불사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단 말인가?' 동방천은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만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른지 알게 되었다. 와중에도 무강위는 흡사 그림자처럼 따라 붙고 있었다. 그가 구사하는 초식은 아직도 변함없이 평범한 것들 뿐이었다. 그러나 미리 계산된 듯 공수(攻守)가 면밀하니 그 효과란 가히 상상을 불허했다. 그 바람에 기고만장하던 동방천은 불쌍해 보일 정도로 숨이 턱에 닿아 헉헉거리고 있었다. "사라져라!" 무강위는 급기야 막강한 장력을 쏟아 냈다. 놀랍게도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괴이한 초식이었다. 펑! 동방천은 비무대 끝까지 주르륵 밀려나갔다. 어디 그 뿐인가? 찌이익! "으윽!" 옷자락이 찢어지는 음향과 비명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동방천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앞섶이 찢어진 채 함부로 너덜거리고 있었고, 가슴에서는 은은히 피가 내비치고 있었다. 무강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만하게 버티고 서 있는 그의 무언(無言)은 어떤 말보다도 심한 조롱이었다. 옥면은창 동방천. 그는 수치로 인해 안면을 붉게 물든인 채 잠시 무강위를 노려 보았다. 그리고는 역시 아무 말도 없이 대 위를 떠나버렸다. 이 일 장의 드잡이질은 관전하던 군웅들로 하여금 무거운 침묵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것을 계기로


무림에 새롭게 등장한 무강위, 비록 옥면은창의 콧대를 꺾어 주었다고는 하나 그의 존재가 가져다 준 것은 통쾌감이 아니라 위기의식이었다. 소면수라 왕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녀석의 무공은 정녕 대단하군. 옥면살심이라는 아이와 붙으면 그야말로 용호상박이겠는 걸?" 섬혼도 냉염이 그 말에 이어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아무래도 좀 수상한 냄새가 나는군." 소면수라가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수상하다니, 무엇이 말이오?" "왕형은 저 자의 마지막 초식에서 느낀 점이 없소?" 그러자 잠자코 있던 삼안신군 사굉무가 무릎을 탁 쳤다. "아! 말을 듣고 보니 그 수법에는 마영불 늙은이의 금불장법(金佛掌法)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소이다." 그제서야 소면수라도 탄성을 발했다. "그렇군. 내 미처 발견해 내지는 못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건대 사형의 말이 틀림없는 것 같소." 영호걸이 사굉무를 돌아다 보며 물었다. "사할아버님, 그럼 저 무강위라는 자와 사문기가 싸운다면 과연 누가 이기리라 보십니까?" 사굉무는 눈썹을 모았다. "글쎄다. 서로 장단점이 있으니 뭐라 말할 수가 없구나." 이때, 총관 진상표의 음성이 그들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다음, 무대협께 도전하실 분은 안 계시오?" ③ 좌중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일지 않았다. 저마다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잠잠히 있을 따름이었다. 그로부터 약 일각이 흐른 후. 비무대 위로 한 인영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 자는 일신에 청삼을 걸친 마흔 가량의 중년인으로서, 안색이 푸르스름했다. 더구나 괴이한 것은 고슴도치처럼 그의 턱을 덮고 있는 수염조차도 푸른 색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인상은 언뜻 보기에 표범을 연상시켰다. 그런 그를 지칭하여 좌하(座下)로부터 누군가가 낮게 부르짖었다. "먼 길을 마다 않고 청운장에 온 보람이 있군. 무림십괴 중 청면표(靑面豹)의 무공까지 구경하게 생겼으니......." 그 소리는 작으나 장내에 꽤 넓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워낙 조용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빚어지게 된 현상이었다. 아무튼 대 위에 오른 중년인은 무강위를 향해 말했다. "꼬마야, 내가 너에게 도전해 보겠다." 무강위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의 시선을 맞받았다. "먼저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청면표." 무강위는 흥미가 인 듯 눈을 크게 떴다. "호오! 그대가 바로 무림십괴 중 한 명인 청면표요?" "그렇다." 무강위는 그의 대답이 떨어지자 지체없이 손을 벌렸다. "그럼 어서 비무를 시작해 봅시다. 나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이 한 쌍의 육장으로 그대를 상대하리다." 청면표는 냉소했다. "꼬마, 나는 동방천과 같이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 네가 무엇으로 싸우던 나는 내 무기를


쓰겠다." 그는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한 쌍의 칙칙해 뵈는 무쇠장갑이었다. 그의 얼굴처럼 전체적으로 푸르스름한 색조에 검날 형상의 긴 손톱이 달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독(毒)이 발리워져 있는지 유난히 새파란 빛깔을 띠고 있었다. 무강위는 그 장갑을 보자 미간을 지푸렸다. '자칫 난전(難戰)이 되겠군. 저 흉칙한 물건때문에.' 청면표가 예의 무쇠장갑을 손에 착용하며 말했다. "꼬마, 이것은 일명 철마갑(鐵魔甲)이라 부른다. 너의 교활한 머리통을 바수어줄 물건이지. 자, 받아라!" 쉭! 쉬익! 두 개의 철마갑이 각기 무서운 기세로 허공을 갈랐다. 이는 단지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상을 각오해야 하는 섬뜩한 공격이었다. 무강위는 뒤로 미끄러지듯 피하며 응수해 갔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또다시 평범한 초식을 구사하고 있었다. 대 아래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소면수라가 실소했다. "ㅋ! 저 녀석이 일반초식으로 맞서는군." 삼안신군 사굉무도 웃었다. "하하...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이오. 청면표의 무공도 일류급인데 금불장법을 쓰지 않으면 저 무가 아이는 아마 이십 초도 안가서 정말로 머리가 부서질 거외다." 과연 그의 말대로 무강위는 계속 밀리기 시작했다. 쉭! 쉬쉭! 경풍이 일 때마다 철마갑의 푸른 빛이 허공을 빈틈없이 메웠다. 무강위는 아직까지는 이를 잘 피해내고는 있었으나 더 이상 몰리면 대 아래로 떨어질 판국이었다. "합!" 무강위는 기합성과 더불어 급기야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의 무공이 그 순간부터 돌변했다. 예의 기이한 장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면수라가 그를 보며 입맛을 쩍 다셨다. "쯧! 역시 마영불, 그 작자의 제자로군." 섬혼도 냉염이 뒤를 이었다. "저 애송이의 장법은 과거 마영불보다 훨씬 정묘한 것 같군." 아닌게 아니라 무강위의 신위는 실로 놀라운 수준이었다. 삼안신군도 곁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영불의 안목이 새삼 존경스러울 지경이군. 정말 훌륭한 무학의 인재(人才)를 골랐어." 영호걸은 그들의 말을 듣고는 무강위의 장법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의 눈은 무강위로부터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집념을 가지고 일거수 일투족을 따라잡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삼안신군 사굉무가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이 녀석이......?' 하지만 정작 영호걸은 비무대 위를 주시하느라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내심 탄성을 연발하고 있었다. '정녕 멋진 장법이다. 비연추혼장과는 또 다른 맛이 있구나.' 무강위와 청면표. 두 사람의 격전은 벌써 사십 초를 넘기고 있었다. 대세는 이제 청면표에게 약간 불리하게 기울어 가고 있었다. 청면표는 이를 악물더니 우수를 쭉 내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끼워져 있던 철마갑이 전면을 향해 무섭게 쏘아져 나갔다.


"웃!" 무강위는 대경했다. 지척간에서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철마갑은 그로서도 도저히 피해낼 방법이 없었다. 찌익! 그의 오른쪽 어깨의 옷자락이 길게 찢겨져 나갔다. 그것을 본 청면표가 득의에 찬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애송이 놈, 죽어라!" 청면표는 이어 철마갑이 벗겨져 나간 빈 손으로 허공을 저었다. 그러자 실로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위이잉! 무강위의 오른쪽 어깨를 쓸고 지나갔던 철마갑이 방향을 급선회하더니 다시 그를 공격해 간 것이었다. '이럴 수가!' 무강위는 아연실색했다. 동시에 그는 이를 피하고자 다급히 신형을 낮추었다. 청면표의 음산한 음성이 그 위로 부어졌다. "흐흐... 네놈은 이제 끝장이다." 청면표는 왼손마저도 벼락같이 떨쳐 냈다. 위이잉! 그의 왼손에 끼워졌던 또 하나의 철마갑이 튀어 나갔다. "헉!" 위기를 느낀 무강위는 더 이상 현명한 대응수단을 강구해 내지 못했다. 그는 체면도 불사하고 뇌려타곤의 수법으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철마갑의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쾅! 철마갑은 간발의 차이로 무강위를 대신해 비무대 위를 쳤다. 그 바람에 바닥에는 졸지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흐흐... 무가 애송이 놈! 너는 수치도 모르느냐?" 청면표는 빙글거리며 채 일어서지도 못한 무강위에게 두 개의 철마갑이 동시에 날아가도록 유도했다. 위이이잉! 그 광경이란 보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쥘 정도로 섬뜩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무강위는 공격은 고사하고 이것을 피해 내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영호걸은 안색이 굳어진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청면표의 수법은 의외로 대단하군." 소면수라 왕상이 그 말을 듣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언뜻 보면 그럴싸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별 볼 일 없 느니라. 청면표 녀석의 철마갑에는 투명한 끈이 매달려 있지." "아! 그랬군요." "클클... 잠시 동안은 무가 아이가 몰렸지만 전세는 곧 뒤바뀌게 될 것이다."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입가에 고소를 지었다. "약간은 실망이군요. 전 격공섭물의 뛰어난 묘수를 보게 되는 줄 알고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청면표의 능력으로 그 수준까지는 어림없다." 그러는 사이, 소면수라 왕상의 예측대로 무강위는 차츰 안정세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두 개의 철마갑이 다시금 나란히 그의 가슴으로 날아 들었다. 쉬쉭! 무강위는 이제 당황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엇인가 결심한 듯 이를 악물더니 양 손을 앞으로 뻗어냈다. 그의 손은 어느덧 휘황한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퍽! 퍽! 철마갑이 차례로 그의 양 손에 잡혔다.


소면수라 왕상이 그 장면을 보고는 탄성을 발했다. "녀석이 저 나이에 금불신공(金佛神功)까지 완벽하게 터득했단 말인가? 허어, 정녕 놀라운 일이로고!" 철마갑이 무강위의 수중에 들어가자 청면표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잡고 있던 투명한 은사(銀絲)에 본신의 전 내공을 주입했다. 철마갑에서 무수한 강철침이 솟아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으윽!" 무강위의 안면이 고통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철마갑을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 같았다. 그의 양 손에서 발출되는 금광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이얍!" 무강위는 일순 철마갑을 그 주인인 청면표에게 내던졌다. "헉!" 청면표는 다급한 신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한 개의 철마갑이 그의 오른쪽 어깨에 격중된 후였다. "크윽!" 그는 자신의 무기에 고스란히 당한 채 비명을 내질렀다. 그 틈을 이용해 무강위는 재빨리 허공으로 치솟더니 내리 꽂히듯 떨어지며 쌍장을 휘둘렀다. 위이이잉--! 웅후한 파공성과 더불어 장력의 경기가 청면표를 향해 소용돌이쳐 왔다. 그는 감히 맞받아 치지 못하고 여섯 걸음이나 후퇴했다. 쾅! 금불장의 장세는 비무대의 바닥을 때렸다. 덕분에 바닥이 움푹 패이며 나무조각들이 가벼운 분진인 양 사방으로 마구 휘날렸다. 그것을 본 청면표는 한차례 진저리를 쳤다. 그는 피가 철철 흐르는 어깨를 움켜쥔 채 곧장 비무대를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무강위를 두고 이를 가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애송이 놈! 두고 보자, 훗날 반드시 복수하겠다." 무강위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사라져가는 청면표의 신형을 노려 보았다. 이어 그는 양 손을 들어 올렸다. 철마갑의 강침(剛針)에 찔린 그의 손바닥은 어느새 검게 물들어 있었다. "후후......." 무강위는 기소를 흘리며 손에 진기를 주입시켰다. 그의 손이 곧 금빛으로 물들더니 상처 사이로 가느다란 핏줄기를 뿜어냈다. 그것은 처음에는 검었으나 이내 붉은 빛깔로 바뀌었다. 그는 철마갑의 독을 순수한 내공의 힘만으로 말끔히 몰아낸 것이었다. 그 광경을 응시하던 군웅들은 한결같이 가슴 한 귀퉁이가 써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공력으로 독상을 치유할 정도의 실력자란 전 무림을 뒤져도 그리 흔치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금 무림의 일불(一佛)이라 일컫는 마영불의 제자 무강위. 그는 대 위에서 느긋한 시선으로 군웅들을 쓸어 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기세는 가히 산악(山岳)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영호걸의 눈이 몹시도 흔들렸다. '무강위.... 정말 대단한 자다. 그렇다면 금불신문의 제자들은 전부 저렇듯 무공이 뛰어난 것일까?' 아무튼 이 날의 대결은 무강위가 그 뒤로 다시 세 명을 더 물리쳐 관문을 통과하고는 끝을 맺었다. ④ 저녁. 영호걸은 방 안에서 홀로 명상에 잠겨 있었다. 불과 하루였다. 하지만 그가 겪었으며, 또한 보고 들었던 일들은 다시 생각해 보아도 하나같이 충격적인 것들 뿐이었다.


사실 무림에 나온 이후로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신기한 상황들과 계속 마주쳤던 그였다. 그러나 유독 오늘에 있은 경험들은 그에게 놀라움과 더불어 많은 깨우침을 가져다 주었다. 일종의 성장을 위한 과정이었다고나 할까? 내외(內外)에 걸친 커다란 변화로 인해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할 무인으로서의 기틀을 점차 확고하게 다져가고 있었다. 영호걸의 입가에 문득 기이한 미소가 매달렸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나무로 된 탁자의 한 모서리를 지그시 눌러 보았다. 그러자 탁자의 단단한 면이 소리도 없이 두부처럼 쑥 들어갔다. 영호걸은 낮게 중얼거렸다. "이게 곧 발전이라는 것이겠지? 후후......." 방문이 스르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소형제, 그간 잘 있었나?" 영호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기쁨의 빛이 충만해 있었다. "아! 어르신......." 나타난 사람은 놀랍게도 천유자(天儒子) 모용황(慕容黃)이었다. 영호걸은 너무도 반가워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모용황은 만면에 인자한 빛을 띄운 채 그에게 다가왔다. 키야 원래 후리후리한 편이었지만 그간에 체력을 완전히 회복한 듯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강건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은백색으로 출렁이는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여전히 은은한 기품을 자아내고 있었으며, 관자놀이까지 뻗어 있는 백미(白眉)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인상적이었다. 깊은 눈 속에서 혜지가 번쩍이는 이 당대의 기협노인(奇俠老人)이 영호걸에게로 다가와 스스럼없이 손을 잡았다. "허허... 자네는 못본 사이에 무척이나 변한 것 같군." "다 어르신의 덕분입니다." 영호걸은 자못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인 후, 다시 말을 건넸다. "그 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건강은 어떠신지요?" 모용황은 탁자 앞에 앉으며 유쾌히 대답했다. "자네에게 치료를 받고는 보다시피 늙은이답지 않게 너무 튼튼해져서 오히려 걱정이네. 자넨 어땠나?" 영호걸은 빙긋 웃었다. "네, 재미있는 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다행이군." 모용황의 눈빛이 문득 기이하게 변했다. 그는 영호걸로부터 무언가를 탐지하려는 듯 한 동안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는 미미하게 안면을 씰룩였다. '이 아이의 기색이나 풍도가 달라진 점으로 보아 내 뜻을 수용한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전에 없이 내공력이 느껴지는 것은 어쩐 일인가? 그것도 일 갑자는 충분히 될 것 같은데......?'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을 두고 진지하게 물었다. "소형제에게 그간 어떤 기연이라도 있었나?" 영호걸은 씨익 웃었다.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천무문과의 인연이야 어르신께서 결정하신 일이니 달리 물으실 리 없고......." 모용황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쪽 방면은 아니지. 노부는 지금 자네의 내공을 말하는 것이네. 자네의 눈을 보니 심상치 않게 느껴져서 말일세." "역시 어르신께서는 그것까지도 한눈에 알아 보시는군요. 그럼 모두 다 솔직하게 이실직고(?) 하겠습니다." "허허... 그래 주겠나?"


영호걸은 차분한 음성으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오음절맥(五陰節脈)을 타고나 십오 세 이전에 죽을 운명이었던 것을 얘기했다. 그리고는 어릴 적부터 부친에 의해 천하의 기약명초(奇藥名草)를 다 복용하며 목숨을 이어 왔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모용황은 나직이 신음을 발했다. "정녕 놀랍군. 자네의 신체가 그런 내력을 안고 있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자네를 살려 놓은 부친이야말로 당세의 화타나 편작을 능가하는 신의(神醫)일세."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호걸의 설명이 다시 이어졌다. 그것은 바로 부친이 그의 체내에 흐르게 된 약력(藥力)을 바탕으로 금침천혈태령대법(金針天血太靈大法)이라는 희대의 대법을 시술해 전신의 경맥(經脈)에 엄청난 잠력을 심어 놓았다는 대목이었다. "오오! 실로 기적과도 같은 일화로군. 그래서 결국 현재의 자네가 만들어지게 된 것인가?" "네, 어르신. 그런 상태에서 건원신공(乾元神功)을 접하게 되자 체내의 잠력은 곧바로 진기(眞氣)로 융합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일 갑자나 되는 내공을 성취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지요." 모용황은 놀라움을 지나 감격에 이르고 있었다. "허어! 하늘의 뜻이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구나. 내 진즉부터 자네를 탐내기는 했어도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자네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모험심이 더 많이 작용을 했었지." 그는 새삼 경이감을 드러내며 영호걸을 주시했다. "소형제는 물론 노부가 천무비경을 내준 이유를 알고 있겠지?" "짐작은 합니다만....... 영호걸은 말끝을 흐렸다. "왜, 내키지 않는가?" "절대로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제 능력이 거기까지 닿을지 의심스러울 따름입니다." 모용황은 그를 지그시 응시하더니 탄식을 불어냈다. "자격을 논한다면 노부가 더 부끄럽다네. 천무비경에 수록된 무공은 하나같이 그 위력이 막강하지. 그 중에서도 특히 네 가지의 무공은 그야말로 풍운이 변색할 정도이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흐음, 벌써 천무비경의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럼 자네가 꼽은 것을 먼저 말해 보게나." 영호걸이 추려낸 사대 비학은 다음과 같았다. 천무문의 이대 장문인인 천뢰노인(天雷老人) 나운(羅雲)이 남긴 천뢰오장(天雷五掌), 삼대인 도신(刀神) 독고령(獨孤鈴)의 단혼일도(斷魂一刀), 그리고 오대 경천신검(驚天神劍) 뇌전공(雷全公)의 경천쌍검(驚天雙劍)과 구대 장문인인 창허진인(蒼虛眞人)이 남긴 명공살강(冥恐殺 ) 등이었다. 모용황은 그의 말을 듣고 나자 격동을 감추느라 안색을 굳혔다. "정확히 짚어 내는군. 맞네, 자네가 나열한 그 무공들이 천무문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지." 영호걸은 얼굴을 가볍게 붉히며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그것을 익히셨습니까?" 모용황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노부가 아까 하려던 말이 바로 그것일세. 그 네 가지의 무공을 익힐 수 있었다면 내가 왜 수치감을 갖겠나?"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씀을......." "허허... 아닐세. 그렇다고 해서 노부가 늘상 비관만 일삼는 것은 아니니까. 내 사부이신 소요자(逍遙子)께서는 사형과 내게 천무비경 상에서 각기 다른 세 가지의 무공을 전수받도록 안배해


주셨네. 그것만으로도 강호행도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지." "으음......." "단지 아쉽다면 사형은 노부보다 자질이 우수하여 그 밖에도 두 가지의 무공을 더 깨우쳤었는데, 그만 강호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는 사실일세. 만일 그 분이 계셨더라면......." 영호걸은 그의 의중을 알아 차리고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그 분을 모릅니다. 하지만 어르신이 그 분보다 못하시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습니다. 무공 방면은 몰라도 저로 하여금 단시일 내에 존경심을 갖게 만드시는 분은 어르신 뿐입니다. 따라서 어르신이야말로 진정한 천무문의 후계자십니다." 이것은 그저 위안이 되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영호걸은 실제로 모용황의 인품이나 기질을 무척이나 흠모해 왔던 터였다. 그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훈훈한 빛을 띄며 모용황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와 마주한 모용황의 노안(老眼)이 몹시도 흔들렸다. "자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물론입니다." 모용황은 격동이 어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소형제, 차제에 노부에 대한 호칭을 바꾸어 주게." "아!" 영호걸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을 귀로 듣게 되자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모용황이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어떤가? 승낙하겠나?" ⑤ 영호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즉시 모용황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마음을 다 하여 구배(九拜)를 올렸다. "제자 영호걸, 사부께 인사 드립니다." 모용황도 절을 받고 나자 지체없이 어투를 바꾸었다. "그래,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명실공히 내 제자니라." "감사합니다, 사부님." 사도지례(師徒之禮)를 치른 두 노소의 시선이 허공에서 뜨겁게 얽혔다. 감격에 찬 모용황의 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허허허... 노부가 비로소 천무문에 체면을 세우게 되었구나. 걸아, 너처럼 출중한 인재를 천무문의 제 십사대 장문인으로 천거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는 품 속에서 하나의 둥그런 영패를 꺼냈다. "이것은 천무문의 상징인 천무령(天武令)이다. 다음 후계자를 구할 때까지는 네 것이니라." 영호걸은 두 손으로 공손히 천무령을 받아 들었다. 그것은 오철(烏鐵)로 되어 있었는데,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졌다. 달리 장식은 없고 웅후한 서체로 천무령의 자휘가 양각(陽刻)되어 있었다. 영호걸의 가슴이 마구 뛰놀았다. 운명의 힘이 양어깨를 짓누르자 그는 일말의 불안감과 더불어 흡사 소용돌이와도 같은 웅풍(雄風)이 내부에서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모용황이 그런 그를 향해 정색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걸아, 앉거라. 이제부터 이 사부가 네게 사부로서 들려 줄 말이 있느니라." "알겠습니다." 영호걸은 신색을 가다듬고는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너도 화룡지(火龍池)에 관한 전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전에 이 사부로부터도 들었으니까."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압니다." "그럼 너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영호걸이 반문하자 모용황은 낮게 탄식을 불어냈다. "말 그대로 전설인즉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것을 이용하려는 자가 있었다면 이해할 수 있겠느냐?" "아!" 영호걸은 눈을 크게 뜨고 사부인 모용황을 바라 보았다. 반면에 모용황은 시선을 천정으로 돌렸다. "여기에는 실로 엄청난 음모가 개입되어 있다." "으음......." "이것은 약간 별개의 얘기다만, 만약 누군가 강호무림을 제패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영호걸은 잠시지간의 침묵을 거져 침착하게 대꾸했다. "제자의 우견(愚見)으로는 먼저 계획에 방해가 될 만한 적수들을 가려내 제거하는 일일 것 같습니다." 모용황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지. 그리고 오십 년 전, 정말로 그런 생각들을 했던 자가 있었다." "제자는 강호견식에 어두워서인지 금시초문입니다." "그럴 밖에. 이 일은 아직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비사란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그 자는 당시 강호육기(江湖六奇)를 노렸지." "아!" "그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화룡지의 전설을 이용해 가짜 화룡도(火龍圖)를 만들었다." "맙소사!" "그리고 그것이 강호육기의 손에 들어가도록 유도했지. 결국 화룡도로 인해 육기 사이에는 암투에 가까운 내분이 조성되었고, 그런 가운데에서 그들은 제각기 화룡지를 찾아 떠났다. 이것이 바로 그들 실종건의 진정한 내막이다." 영호걸은 그야말로 아연실색했다. "어찌 그런 일이......." 모용황은 탄식했다. "나도 물론 처음에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 이후로 오십 년간 각처를 떠돌아 다니며 여러 각도로 조사를 해 보고 나서야 비로소 얻게 된 결론이다." "정말 아찔합니다. 왜 무림을 두고 귀궤가 난무하는 곳이라고들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영호걸의 입술 사이로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모용황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덧붙여 말했다. "노부는 지금부터 천축(天竺)으로 가 봐야 한다." 영호걸은 눈썹을 불쑥 치켜 올렸다. "갑자기 그 먼 곳에는 어인 일로......?" 모용황은 쓴 입맛을 쩍 다셨다. "그것은 다녀온 후에 설명해 주겠다. 아직 말을 꺼내 놓기에는 시기가 이르구나."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너대로 할 일이 있다." 영호걸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명하십시오. 제자, 무슨 분부든 따르겠습니다." "너는 최선을 다해 이 사부를 제외한 강호오기의 실종에 대해 알아 내야 한다. 현재 강호무림에는 모종의 암류(暗流)가 흐르고 있다. 그것은 오기의 실종과 밀접한 관계가 있은즉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항차 무서운 사태로 비화될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사부님."


강호육기 중 오인의 실종이란 기실 전대(前代)에 발생했던 무림 최대의 사건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이제 영호걸이 천무문의 제 십사대 장문인으로서 풀어가야 할 첫번째 과제가 되었다. 모용황은 영호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것은 격려의 의미였다. 그런 연후, 그는 다시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이것은 노부의 신물(信物)이니라. 혹시 도움이 될지 모르니, 네가 간직하고 있거라." 그가 내민 물건은 하나의 금필(金筆)이었다. 필봉 전체에 아홉 마리의 용이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정묘하게 새겨져 있었으며, 그 끝은 날카로운 금사(金絲)로 되어 있었다. 모용황은 그것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 금필은 오십 년 전부터 노부와 운명을 함께 하던 무기이지. 자, 걸아. 노부는 네게 그 금필의 사용법, 즉 노부의 독문무공인 천절신필(天絶神筆)의 일곱 가지 초식을 가르쳐 주겠다." "사부님......." 영호걸은 감동으로 인해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금필을 받쳐든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금필의 길이는 겨우 한자 반, 그러나 거기에는 모용황의 반평생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심중을 알아 차린 모용황이 나직하게 말했다. "달리 생각할 것 없다. 이 못난 사부가 그 외에 제자에게 줄 것이 또 무엇이 있겠느냐? 다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네가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사부를 능가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제자, 신명을 다해 사부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영호걸의 눈에는 어느덧 뿌연 습막이 어리고 있었다. 그는 그리 길지도 않은 기간을 통해 모용황이 자신을 얼마나 신뢰하고 아끼게 되었는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모용황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네게도 언젠가 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오십 년 전 노부가 청해(靑海)에 갔던 적이 있었다고." "네,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그 일로 인해 화룡지의 사건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었지. 당시 노부가 왜 청해에 간 줄 아느냐?" "모릅니다." "그것은 한 명의 마두(魔頭)와 결투를 하기 위해서였다." "아!" 영호걸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그는 한 인물의 영상을 흡사 눈에 본 듯 선연하게 그려낼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하를 주유하며 악을 응징하던, 지금보다 젊었을 사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관록에 비해 습관인 양 겸허함이 몸에 배인 모용황이었다. 그는 전혀 들뜨는 기색도 없이 특유의 조용한 음성을 이어갔다. "당시 청해에는 노부와 가장 친한 벗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우연히 그곳의 한 석동(石洞)에서 전대의 비급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큰 문제가 발생했다." "자고로 기연을 얻으면 반드시 앙화가 따르기 마련인가 봅니다. 역시 현재 이곳 청운장의 사태와 같은 맥락입니까?" "그렇다. 청해를 두루 휩쓸던 청해마존(靑海魔尊)이 그 사실을 어찌 알았는지 그를 찾아와 비급을 내놓지 않으면 멸문지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며 협박을 했었지. 그리하여 노부의 벗은 그 마두를 달래 시간을 끌면서 비합전서로 노부를 청했다." "그럼 사부님께서는 결국 그 친구분을 도우러 가신 것이군요?" "음, 그런 연유로 노부는 청해마존과 일장의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청해를 주름잡던 위인인 만큼 그의 무공은 노부에 비해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노부는 평생 가장 큰 혈투를 치뤄야 했었지. 그를 격퇴시키기 위해 무려 오백 초를 나누어야 했으니까." "으음......." "청해마존이 복수를 다짐하며 달아난 뒤, 노부의 벗은 내게 그 비급을 맡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본시 무공에 뜻이 없는 친구였지. 그런데 받고 보니 그 비급은 삼백 년 전, 한 자루의 판관필로 천하를 휩쓸던 일대 기인의 것이었다." 영호걸은 눈을 반짝이는 한편, 수중에 들려 있는 금필을 내려다 보았다. 모용황의 말인즉 그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노부는 그 비급에 적힌 무공과 본문의 육대 장문사존이 남기신 무형천공필(無形天空筆)을 합쳐 도합 일곱 초의 천절신필법(天絶神筆法)을 만들게 되었다." "아! 그렇다면 사부님의 천절신필법은 오히려 사존의 무형천공필보다도 그 위력이 막강하겠군요?" 그 말에 모용황은 대답 대신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는 곧 영호걸에게 천절신필의 초식들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천유자 모용황의 명성답게 무척이나 현묘(玄妙)한 수법이었다. 익히기도 얼마나 까다롭고 복잡한지 영호걸은 어지간히 진땀을 빼야 했다. 거의 네 시진이 걸려서야 그는 간신히 구결과 동작들을 암기했을 따름이었다. 반면에 모용황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영호걸, 이 아이는 정녕 천생의 귀재(鬼才)로구나.' 7 장비무대회(比武大會)의 최후승자(最後勝者) ① 사흘 째의 비무대회. 영호걸은 기이한 고독감을 안은 채 대 아래 자리잡고 있었다. 모용황은 전날 밤 천절신필을 전수해 준 후, 날이 밝자마자 천축으로 떠났다. 게다가 천중삼신도 지금은 그의 곁에 없었다. 개방의 총단에 잠시 다녀 오겠다며 나선 것이었다. '사부님이야 기약도 없이 가셨지만 세 분 할아버님께서는 이틀 후에는 돌아 오신다고 하셨다.' 무릇 존재의 가치란 마주하고 있을 때보다 떨어져 있을 때 더욱 절실한 법이다. 본시 다감한 성격의 영호걸은 그들 네 기인과의 부딪침을 통해 바야흐로 이 점을 통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이런 심경으로 망연히 비무대 위를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옆에서 한 가닥 향기가 전해져 왔다. '음, 이 향기는.......' 고개를 돌려 보니 그곳에는 익히 알만한 인물이 웃고 서 있었다. 사영룡이었다. 그는 포권을 하며 짐짓 점잖게 말했다. "영호형,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소." 영호걸은 단지 고개를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영룡이 가까이 다가들며 은근히 물어 왔다. "옆자리에 좀 앉아도 되겠소이까?" "앉으시오." 영호걸에게 있어 사영룡이란 천중삼신의 자리를 메울 만한 인물이 결코 못되었다. 그의 미간이 보이지 않게 슬쩍 찌푸려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 여인이 대체 무슨 속셈으로 자꾸 내게 접근해 올까? 더구나 정체를 들킨 후로도 여전히 딴청이니.......' 남장여인 사영룡은 자리에 앉으며 다시 물었다. "세 분 노선배께서는 어디 가셨소?" "그렇소." 영호걸은 이번에는 돌아 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잘라 말했다. 비무는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모두가 만만치 않은 실력들을 가지고 있어 최소한 눈요기 감으로는 충분했다. 영호걸이 그 쪽으로 시선을 뺏기고 있는 사이, 사영룡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영호형, 오늘은 사문기가 나올 것이오."


"사형이 그걸 어찌 아오?" 사영룡은 호탕함을 과시하려는 듯 크게 웃었다. "하하하... 육감이란 것이 있지 않소이까?" 영호걸은 다소 짜증이 일었다. "당신의 육감이 정통하다는 것 쯤은 나도 알고 있소." 그것은 분명한 조롱이었다. 사영룡도 이를 알아 차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아울러 그는 연신 헛기침을 해대며 극구 변명했다. "헛, 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가 있는 법이 아니오? 비록 전날에는 예상이 모두 빗나갔지만 오늘은 다를 거외다." 영호걸은 갑자기 심각하게 응수했다. "맞소, 아무리 직관이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틀릴 때가 있소. 그러니 반대로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도 한 번쯤은 신통한 수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오." "정말 그렇게까지......!" 사영룡은 모욕감으로 인해 얼굴이 붉어지다 말고 창백하게 변했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곧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곁눈질로 계속 영호걸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영호걸은 그가 하는 양을 모두 보았으나 그냥 내버려 두었다. '후후... 불쾌하다면 제 풀에 떨어져 나가겠지.' 이것이 바로 영호걸의 생각이었다. 그는 이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비무 광경을 구경했다. 그런 그의 표정은 무심, 그 자체였다. 물론 와중에서도 그는 응전자들의 초식들을 지켜 보며 연구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그는 현재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경륜이었다. 실상 일신에 지닌 공력과 무공만을 따진다면 영호걸은 당금 강호에서 일류의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류를 이루는 일반적 초식에 있어서는 거의 무지(無知)했다. 강호행도에 있어 중요한 것은 고절한 독문무공 뿐만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잡다한 초식들이 요구되기도 한다. 이 점은 전날에 있은 무강위의 사례가 톡톡히 입증해 준 바 있었다. 따라서 영호걸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으되 정신을 집중해 비무대 위에서 난무하는 숱한 초식들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수확은 비례적으로 점차 늘어갔다. 비무대 위. 삼십 세 정도의 청년과 마흔 살쯤 된 중년장한이 한창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 중 청년은 백의를 걸쳤는데, 그의 앞가슴에는 푸른 거미 한 마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잠자코 있던 사영룡이 어색한 음성으로 물어 왔다. "영호형은 저 청년이 누구인지 아시오?" '꽤나 질기군.' 영호걸은 내심 고소를 짓는 한편 재빨리 두뇌를 회전시켜 한 가지 미리 들었던 바를 떠올렸다. '저 거미표식은 아마도 모종의 상징성을 띠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자는 동물의 이름자를 별호에 달고 있는 무림십괴 중 일인이 아닐까?' 그가 아무 말도 없자 사영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위인은 일명 청살지주(靑殺蜘蛛)라 하오. 바로 무림십괴에 속해 있는......." 영호걸도 이쯤 되자 하는 수 없이 고맙다는 뜻으로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사영룡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무공이 강하다 했더니!' 과연 승부는 보이는 현상대로 결정지어졌다. 중년장한이 장력에 가슴을 격타당하고는 피를 뿜으며 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어렵사리 몸을 일으키더니 풀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졌소."


그가 물러나자 총관 진상표가 나섰다. "네번째 도전자는 속히 나오시오!" 한동안 아무도 나서려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청살지주가 만면에 득의의 미소를 지을 때, 비무대 아래의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한 인물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자는 비무대를 향해 불쑥 몸을 솟구쳤다. "앗! 옥면살심 사문기다." 군웅들 중 누군가가 놀란 외침을 발했다. 마침내 이 비무대회의 동기를 부여한 자가 등장한 것이었다. 이름하여 옥면살심(玉面殺心) 사문기. 그의 신법은 실로 기기묘묘했다. 마치 바람결에 흔들리는 풀씨 같다고나 할까? 그는 허공에 둥실 뜬 채 느릿하면서도 유연하게 비무대 위로 올라서고 있었는데, 그것은 쾌속함을 위주로 하는 신법보다도 훨씬 펼치기 어려운 절기였다. 군웅들은 그의 경공조예에 저마다 가슴이 섬뜩한 일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는 영호걸도 마찬가지였다. "정녕 놀라운 실력이군! 경공이 저 정도라면 다른 무공은 대체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해 있을지......?" 그 순간, 그는 사영룡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일견하기에도 그 미소는 자부심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음, 과연 이 여인과 사문기는 친족 관계인가 보다.' 난색을 표명하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청살지주였다. 그는 사문기가 올라서자 금세 기세가 움츠러 들었다. 사문기는 별호답게 나무랄데 없는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분위기도 더 없이 발랄했으며, 짙은 눈썹과 더불어 그 아래에서 번쩍이는 눈에서는 사뭇 비범함을 묻어 나왔다. 하지만 영호걸의 주의를 끈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약간 올라간 사문기의 입술 꼬리였다. 거기에는 주인의 성품을 증명하는 듯한 차가운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사문기는 청살지주를 바라보며 먼저 말을 건넸다. "오랫만이외다." 청살지주도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았다. 어느 틈에 전의(戰意)를 회복했는지 그 또한 오만하게 맞섰다. "반갑소이다. 그렇지 않아도 근간에 사형의 위명이 워낙 쟁쟁하여 한 번 만나 보고 싶던 참이었소." 역시 준수한 얼굴이되 푸른 기가 감돌아 그에게서는 음산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과찬일 뿐이오." 사문기가 말과 함께 가까이 다가 들었다. 그러자 청살지주는 즉시 두 다리를 이자(二字)로 벌리며 물었다. "사형은 진정 나를 상대하러 올라 온 것이오?" 사문기는 간단히 대답했다. "물론." 청살지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형은 이 대회의 주최자나 다름이 없지 않소? 그러므로 굳이 다섯 명을 물리쳐야 하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아도 될텐데, 무엇하러 몸소 나섰는지 모르겠구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최후의 승자와 대결해서 승부를 가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문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하의 말은 맞소. 그러나 나는 본시 편안하게 앉아서 이득만을 취하는 성미가 아니오. 정당하게 관문을 통과해 떳떳한 승리를 거두고 싶은 것이 내 생각이오." ② 청살지주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내 차례에......?" 그는 말하다 말고 도중에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심중을 말해 버렸으니 어쩌겠는가? 사문기가 그 꼬투리를 놓칠 리 없었다. "왜, 겁나오?" 그 말에 청살지주는 대뜸 노화를 터뜨렸다. "뭣이? 내가 지금 두려워서 이러는 줄 아는가?" 그의 반발은 더욱 더 사문기의 비웃음을 사게 했다. "후후... 아니라니 다행이오. 귀하가 기권하고 물러나기라도 하면 내가 재미없어 지니까." 청살지주의 안면이 분노로 인해 마구 씰룩였다. 그는 품 속으로 손을 가져가며 싸늘하게 내뱉았다. "그대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후회? 후후... 이 사문기, 아직 그런 것은 모르고 살아 왔소." 청살지주는 한 자루의 단검을 꺼내 들고 있었다. 그것은 불과 한 자 두치 밖에 안되는 것이었으나 무척 예리하게 보였다. 또한 검신에는 자주빛 기광(奇光)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사문기의 면전을 향해 그 단검을 치켜 올렸다. "각별히 조심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이 검에는 천하에서 둘도 없는 극독이 무려 다섯 가지나 발라져 있다. 단지 스치기만 해도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 사문기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말없이 등 뒤에서 검을 뽑았다. 스르릉! 검명(劍鳴)을 들으며 영호걸은 내심 중얼거렸다. '두 사람 모두 매력이 있다. 사문기의 당당한 자신감이 그러하고, 청살지주의 성정이 또 그렇다. 특히 청살지주는 독검을 쓰는 흑도의 인물이면서도 스스로 그 내력을 상대에게 일러 주고 있지 않은가? 이는 최소한 그가 비열한 인물은 아니라는 뜻이다.' 마침내 그들 두 사람이 맞붙었다. 그것은 두 줄기의 검광이 대 위에서 찬란한 광휘를 뿜어내는 순간이었다. 으스스한 자주빛 단검의 광채와 사문기의 장검에서 발출되는 검화(劍花)가 실로 묘한 조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시간이 흘렀다. 아울러 전세는 점차 옥면살심 사문기의 우세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애당초 청살지주는 검법에 있어 사문기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한 치가 짧으면 그만큼 생명도 단축된다는 것이 검의 길이일진대, 그의 단검이 사문기의 장검을 능가할 리 만무였다. 아무리 독을 발라 놓았다 한들 장검의 공세에 밀려 시종 변두리만을 맴돌고 있었으니, 청살지주의 단검은 공격다운 공격도 제대로 못해 보는 처지에 이르고 말았다. 사문기는 연이어 위맹하면서도 정묘하기 이를데 없는 검세를 떨쳐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청살지주는 계속 뒤로 밀려났다. 그 광경을 보며 영호걸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 내가 오늘 운이 좋아 흔치 않은 구경을 하게 되었구나. 과연 옥면살심은 무림십수 중 첫째답다." 그것은 일면 사영룡을 의식해서 한 소리이기도 했다. 즉 무림에 처음 나온 백면서생(?)으로서 소감을 피력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영룡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신이 나서 떠벌였다. "그렇소. 영호형은 정말로 재수가 좋소. 저것이 바로 천하제일의 검법인 천검십이식(天劍十二式)이오. " '천검십이식?' 검법의 이름을 알아낸 영호걸은 유심히 그것을 주시했다. '천하제일까지는 뭣하지만 실제로 훌륭한 검법이다.' 그는 만족한 웃음을 흘리며 사문기가 펼쳐내는 초식들을 머리 속에 속속 담아 두었다. 물론 그 세부적인 변화까지도 그는 거의 놓치지 않고 있었다. 한편.


청살지주는 계속 몰리자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는 왼손의 소맷자락을 떨쳤다. 다섯 줄기의 홍광(紅光)이 그의 소매 속에서 빛살처럼 뻗어 나갔다. "헛!" 사문기는 다급한 음성을 발하며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치 그물같은 검막이 그의 신형을 감싸 버렸다. 파파팍--! 그를 덮쳐 들던 홍광은 모두 허공으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동시에 역한 비린내가 확 풍겨왔다. 그것은 홍색을 띤 거미들로서 하나같이 정확하게 반토막이 나 있었다. 아무튼 그 틈을 빌어 청살지주는 번개같이 몸을 빼냈다. 그리고는 품 속에서 하나의 은갑(銀匣)을 꺼냈다. "후후... 사문기, 이 한 쌍의 은령지주(銀靈蜘蛛)에는 그대라 할지도 꼼짝 못하고 당하게 될 것이다." 그는 말과 함께 은갑의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두 마리의 은빛 거미가 들어 있었다. "은주! 어서 가서 저 자의 목을 물어 뜯어라." 청살지주는 은갑을 들더니 홱 뿌려냈다. 그러자 두 줄기 은광이 사문기를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져 갔다. "감히!" 사문기는 노성을 발하며 다시 장검을 휘둘렀다. 휙! 휘익! 은광이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어 버린 것은 그때였다. 그것은 놀랍게도 두 갈래로 방향을 따로 잡더니 사문기를 공격해 갔다. "아니?" 사문기는 그답지 않게 경악해마지 않았다. 설마하니 일개 미물에 불과한 거미 따위가 임의로 공격을 피해가며 덤벼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거미는 검막을 뚫고 사문기의 등과 목덜미로 달려 들었다. 그 순간, 그의 입에서 냉갈이 터졌다. "천라지망(天羅之網)!" 비무대 위에서 그의 형체는 곧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엄청난 은광이 폭사되어 검기의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을 따름이었다. 급기야 은광이 비무대를 완전히 뒤덮어 가려는 찰나, 청살지주가 안색이 대변하며 황망히 고함쳤다. "은주! 돌아 와라." 은광 속으로부터 거미들이 튕겨져 나왔다. 청살지주는 그것들을 은갑에 회수하더니 막바로 비무대를 박차고 신형을 솟구쳤다. "사문기! 후에 다시 보자." 그 말을 남긴 그는 뒤도 안돌아 보고 대회장을 빠져 나갔다. 영호걸. 그는 사문기가 쓴 마지막 검초를 보고는 안색을 굳혔다. '실로 무서운 검법이다. 빈 틈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 같구나.' 영호걸은 전 심력을 기울여 눈으로 확인했던 바를 머리 속으로 옮겨 보았다. 그러자 위력은 물론 미묘한 변화까지 겸비하고 있는 예의 검식이 그의 뇌리에서 속속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이러한 영호걸을 일컬어 타고난 무학의 기재라 한들 별 무리는 없으리라.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와 같은 성취란 자질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요컨대 그는 침몰하듯 깊숙이 빠져 드는 집중력으로 늘상 묘수를 건져 내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 일각이 흐르자 영호걸은 다시 그 검초의 변화들을 어렴풋이나마 연결해 갈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의 빛이 어렸다. 사영룡이 그를 툭 건드렸다. "영호형,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오?" "아!" 영호걸은 씩 웃었다. "생각은 무슨, 아무 것도 아니오." 그의 심중에서는 어느덧 이런 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방금 전, 사문기가 위기에 빠졌을 때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더니 지금은 화창한 봄날이로군.' 그러나 영호걸에게도 미숙하고 서투른 부분은 있었다. 그는 정말로 알지 못했다. 사영룡의 얼굴이 복사꽃처럼 붉어진 이유가 실은 자신이 뚫어지게 쳐다 보아서라는 것을. 그 사이, 사문기는 두 명의 도전자를 더 물리치고 있었다. 이후로는 아무도 그에게 도전하려는 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원하던 바대로 떳떳한 승부를 거쳐 무난히 관문을 통과했다. 대 위에서는 이제 새로운 일전이 개시되려 하고 있었다. 또 다른 통과자가 되기 위해 한 인물이 막 올라섰던 것이다. 영호걸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사영룡이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른 따라 일어섰다. "아니? 왜 벌써 일어 나시오?" 영호걸은 어이가 없는 듯 쓴 웃음을 흘렸다. "설마 하니 객실까지 따라올 참이오? 나는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소. 자, 사형. 그럼 다음에 봅시다." 그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대회장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영룡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목석(木石)도 저런 목석이 없어!' 사영룡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도로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이런 그의 속사정(?)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③ 청운장의 한 객실. 영호걸은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천환심법(天幻心法)을 운기했다. 그의 용모는 삽시에 지난 번의 그 모습으로 변했다. 본래의 분위기와는 달리 활달한 기상을 가진 건장한 청년이다. 영호걸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씩 웃었다. 이윽고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밤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박혀 있었으며, 그 가운데 가느다란 초생달이 걸려 있었다. 스스스....... 영호걸의 신형이 한 줄기 연기로 화해 어딘가로 날아 갔다. 그것은 천환상인이 남긴 환영신법(幻影神法)으로써, 그도 익힌 후로 처음 펼쳐 보는 것이었다. 원래 환영신법은 천환삼식과 배합하여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영호걸은 이 신법을 천환삼식 구결의 말미에서 발견해 내고는 기록된 바에서 이탈해 따로 경공술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호걸이 스며든 곳은 다름 아닌 청운장의 내장(內莊)이었다. 여기저기를 돌며 훑어보던 그는 커다란 전각 앞에서 멈추었다. 한 방. 창문을 통해 환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영호걸은 그 쪽으로 날아가 흡사 박쥐처럼 창틀에 매달렸다. 두런거리는 사람의 말소리가 귓전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러자 영호걸은 조심스럽게 방 안의 정경을 엿보았다. 그곳은 이른바 내청(內廳)이었다. 한 가운데 팔선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탁자를 사이에 두고 청운장의 장주 부녀(父女)가 마주 앉아 있었다. 바로 비룡검(飛龍劍) 사공영과 그의 무남독녀인 자의옥녀 사공매였다.


그들의 얼굴은 무엇 때문인지 침통하게 굳어져 있었다. 사공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 내일이 최종 결전일인데... 어쩌지요?" 사공영은 불과 이틀 전에 비해 한참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근심이 그의 정력(精力)을 알게 모르게 소진시킨 모양이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다. 지금으로서는 이 애비도 어찌 할 방도가 없구나." 사공매의 고운 아미가 잔뜩 찌푸려졌다. "정말 이대로 흑룡방에 만년한옥을 넘겨 주어야 하는 건가요? 옥면살심 사문기는 아예 전면적으로 나서서 군웅들의 심리까지 멋대로 조종하고 있어요. 그의 검법과 용모에 홀려 모두들 그가 어떤 위인인지조차 망각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애비도 그것이 가장 걱정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 자를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공영의 말에 사공매는 답답한 듯 부르짖었다. "소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강호무림의 협의지사 중에 이다지도 인물이 없었단 말인가요? 그런 자 하나를 꺾을 사람이 없어 이렇듯 고심을 해야 하다니, 정녕 뜻밖이에요." 사공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능력있는 자의 대다수가 흑룡문과 대적하기 싫어서 부득불 몸을 사리는 것이지." "그럼 결국......." 사공매는 낙심한 나머지 채 말을 잇지도 못했다. 자의옥녀 사공매. 그녀의 미모라면 이미 무림전역에 널리 알려진 바 있으나, 분명한 것은 이 순간에조차 너무도 우아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사공영은 그런 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쌍한 것!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더니, 애비를 잘못 만나 네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치르게 생겼구나.' 이때, 창 밖으로부터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생이 도와 드리면 어떻겠소이까?" 사공영 부녀는 대경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누구냐?" 대답 대신 창문이 드르륵 열리며 하나의 인영이 내청 안으로 훌쩍 넘어 들어왔다. 키가 헌칠하고 기상이 유독 돋보이는 백의청년, 물론 그는 영호걸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를 보자 사공매는 탄성을 발했다. "아! 소협은......." 사공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매아야, 네가 아는 분이었더냐?" 사공매는 얼굴을 은은히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단지 소녀도 꼭 한 번 뵈었을 뿐인 걸요." "그래?" 사공영은 딸의 기색에서 무엇인가를 눈치챈 듯 이내 시선을 돌려 영호걸을 요모조모로 뜯어 보았다. 그의 노안(老顔)에는 점차 감탄의 기색이 어렸다. '음, 보기 드문 젊은이로군. 용모에 못지 않게 근골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이 정명(正明)하구나.' 그러나 그는 다소 경계를 둔 채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소협은 뉘신가?" 영호걸은 그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소생의 미천한 이름은 승풍(承風)이라 합니다." 사공영도 마주 예를 취했다.


"아, 승소협이셨군. 그런데 방금 전에 하신 말뜻은......?" 그의 안면에는 은연중 일말의 기대감이 드리워졌다. 그것을 읽어낸 영호걸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품 속에서 사부 모용황에게서 받은 금필을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사공영은 금필을 대하자 크게 놀랐다. "그것은 천절금혼필(天絶金魂筆)! 그것을 소협이 가지고 있다니, 그럼 소협은 천유자(天儒子) 노선배와 어떤 관계인가?" 영호걸은 금필을 거두며 역시 웃었다. "그 분은 소생의 사부이십니다." "아! 이럴 수가....... 소협, 미처 몰라 보아 송구하네." 사공영은 만면에 공경의 빛을 떠올린 채 그를 응시했다. 그것은 물론 천절금혼필의 주인인 천유자 모용황을 의식해서였다. 무림인 치고 그 혁혁한 이름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자는 없었다. 오십 년 전에 강호육기(江湖六奇) 중 오 인이 실종된 후, 혼자 남게 된 천유자는 사해에 더욱 그 명성을 날린 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라진 오기(五奇)의 명예를 독차지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몫까지 대신해 일로 종횡무진의 활약상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이르자면 모용황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수고한 대가로써 당금 무림의 제일인자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난경에서 그의 제자를 대하는 사공영의 심경이 어떨른지는 굳이 필설로 형용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자의옥녀 사공매도 부친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거기에 한 가닥 야릇한 감정이 더해졌다고나 할까? 어쨌든 이쯤 되고 보니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사공영은 신색을 가다듬으며 영호걸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 우선 앉게나, 승소협." "고맙습니다."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말게. 내 지금부터 천유자 노선배를 대신해 자네에게 매달릴 작정이거늘......." 영호걸이 자리에 앉자 사공영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는 금번 본장에 닥친 일을 대체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나? 정공(正攻)을 피한답시고 여기까지 밀고 오기는 했지만 진정 후회막급일세. 결과적으로 드러내놓고 흑룡방을 도와주는 격이 되고 말았으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네." "저도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허허... 내 어리석음을 마음껏 비웃어 주게나." 영호걸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닙니다. 그 당시 장주께서 쓰신 방도가 최선책이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 하겠나? 하나밖에 없는 여식까지 싫다는 자에게 억지로 내줄 것을 생각하면 나는 자결이라도 하고 싶다네." "아버님......." 사공매의 떨리는 음성이 영호걸의 마음을 묘하게 흔들어 놓았다. 그는 입가에 고소를 떠올리며 미리 생각했던 바를 얘기했다. "장주께서는 이렇게 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의 음성은 나직하게 이어졌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의 날카로운 추정과 그에 대한 해결책이 고루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사공영의 안색은 점차 밝아지고 있었다. 그의 심중에서는 줄곧 이런 부르짖음이 일기도 했다.


'천유자 노선배가 언제 이렇듯 훌륭한 제자를 거두었단 말인가? 정녕 그 분의 음덕(陰德)이 우리 청운장을 살리는구나.' 그는 영호걸의 말을 경청하느라 미처 사공매의 표정까지는 살피지 못했다. 그녀의 배꽃처럼 희고 고운 얼굴이 촉촉한 기운을 담은 채 영호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면......? ④ 비무대회는 연이어 속개되었다. 마침내 각기 다섯 명씩 적수를 물리친 인물들끼리의 대결을 남겨 놓고 있었던 것이다. 올라온 사람은 모두 여섯 명으로 그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무림십수(武林十秀) 중 일인인 옥면살심 사문기. 반월신도(半月神刀) 학영풍( 英馮). 청의쌍무검(靑衣雙武劍) 관영천(關影天). 무림십괴(武林十怪)의 한 명인 용조(龍爪) 유전강(柳全江). 청성파(靑城派)의 신진고수 청성일검(靑城一劍) 채장의(蔡長義). 금의청년 무강위(武强位). 이들 육 인은 다시 삼개조로 나뉘어 저마다 일대 일의 싸움을 치르게 되었고, 개중 첫번째로 비무대에 오른 자들은 바로 무강위와 반월신도 학영풍이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의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금의청년 무강위가 팔십여 수만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 다음은 옥면살심 사문기와 청성일검 채장의의 차례였다. 이 일전에서 사문기는 오십여 초만에 채장의를 꺾었다. 다음 번에는 청의쌍무검 관영천과 용조 유전강의 대결이 있었는데, 이들의 싸움 역시도 막상막하였다. 근 이백여 초만에 관영천이 겨우 반초 차이로 어렵사리 승자가 되었다. 결국 세 명이 남아 다시 겨루어야 했다. 총관 진상표가 동전을 던져 그들의 싸움 순위를 결정지었다. 그에 따르면 무강위와 관영천이 먼저 승부를 내고, 개중에서 승자가 사문기와 맞붙어 일전을 치르도록 배정이 되었다. 무강위와 관영천. 두 사람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그리고 그 끝에 무강위는 백이십여 초만에 청의쌍무검 관영천을 누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드디어 최후 대결의 순간이 도래했다. 무림 청년들의 여망이던 만년한옥과 사공매라는 절세의 미인을 놓고, 옥면살심 사문기와 무강위가 서로 무공의 고하(高下)를 가리게 된 것이었다. 그들의 싸움인즉 실로 용쟁호투(龍爭虎鬪)였다. 두 사람이 쏟아내는 장풍과 검풍으로 인해 비무대는 삽시에 온통 엉망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그 위에 높이 세워져 있던 깃발이 걸레쪽처럼 찢어져 마구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 광경에 관전하던 군웅들은 저마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울러 그들은 모두 눈을 크게 뜬 채 한 가지 동작이라도 놓칠세라 이 공전의 대격돌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에서는 상상치도 못할 온갖 절기와 비학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덕분에 장장 칠백여초에 이르도록 승부는 좀체로 나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싸움은 비로소 중단되었다. 결투는 어쩔 수 없이 다음 날로 미루어졌다. 밤. 사위가 모두 잠들어 청운장은 더할 나위 없이 조용했다. 장내의 등촉도 대부분 꺼져 차분한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한 줄기 검은 인영이 내장으로 날아갔다. 흡사 야조(夜鳥)인 양 놀라운 신법이었다. 그 자는 이곳의 지리에 꽤 익숙한 듯 거침없이 장주인 비룡검 사공영의 처소로 향하고 있었다. 이어 그는 빼꼼히 열린 창틈을 통해 기척도 없이 전각 안으로 스며 들었다.


컴컴한 방 안. 이곳은 바로 사공영의 침실이었다. 괴인영은 무엇 때문인지 침실까지 잠입해 들어와 유령처럼 움직였다. 침상 위에는 사공영이 반듯이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괴인영은 얼굴에는 검은 복면을, 몸에는 검은 장삼을 아무렇게나 두르고 있었다. 침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살기가 서렸다. 그는 손을 들어 사공영을 향해 지풍을 날렸다. 팍! 지풍은 정확하게 청운장주의 사혈(死穴)에 격중되었다. 비명도 없었다. 흑의인은 곧 민첩하게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밤손님이신가? 무얼 그리 뒤지지?" 흑의인은 흡사 얼어붙은 듯 동작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 뿐이었다. 그는 번개같이 신형을 틀었다. "앗!" 그의 입에서 짧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면전에 서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방금 전 사혈을 찔려 절명했던 사공영이 아닌가? 사공영은 움츠러드는 그의 기색을 보자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천하가 정녕 노부를 우습게 보는구나. 이젠 좀도둑이 침실로 스며 들어 노부에게 암격을 가하다니. 핫핫핫......." 흑의복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눈에 살기를 품고는 사공영을 향해 일장을 후려냈다. 사공영은 신속한 몸놀림으로 가볍게 이를 피해냈다. 동시에 그는 오른손으로 기이한 장법을 사용해 복면인을 가격했다. "앗! 금불장법을 당신이 어떻게......." 복면인은 너무도 놀라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크게 부르짖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 틈을 노려 사공영의 양손이 무수한 환영을 일으켜 그의 몸을 뒤덮어 버렸다. "이, 이럴 수가!" 복면인은 사력을 다해 피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퍼퍽--! "으윽!" 그는 정통으로 가슴을 얻어 맞고는 맥없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제서야 사공영은 손을 멈추고 씨익 웃었다. 때맞춰 방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만일 복면인이 의식을 잃지 않고 그들의 모습을 보았더라면 대경실색 했으리라. 나타난 두 사람은 또 하나의 청운장주와 그의 딸인 사공매였다. 그는 방 안에 우뚝 서 있는 사공영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승소협, 정말 대단한 추리력이네. 눈으로 보면서도 노부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군." "후후후... 저도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사전정보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기소를 흘리는 사공영은 다름 아닌 영호걸이었다. 그는 천환심법의 완벽한 변장술을 이용해 작금의 일을 벌였던 것이다. 그의 얼굴은 다시 승풍이라는 가상의 청년으로 돌아왔다. 사공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녕 기인이로군. 자네는......." 사공매도 작은 소리로 한 마디 거들었다. "놀라워요. 그런 변용술은 이제껏 본 적이 없어요." 영호걸은 그들 부녀의 칭찬에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굽혔다. 그의 손이 복면인의 흑건을


벗겨냈다. 그러자 눈 앞에 나타난 것은 오십대 가량인 한 노인의 얼굴이었다. 둥그스름한 그 얼굴을 영호걸은 익히 알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 그에게 사전정보의 역할을 해 준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역시 이 자였군." 그의 읊조림에 사공영이 궁금한 듯 물었다. "누군가? 그 자는." "금불신문의 둘째 제자입니다." "금불신문?" 사공영은 대번에 노기를 띠며 눈을 부릅떴다. 이른바 인의지협(仁義之俠)이되, 그도 인간인 이상 보물을 탐내 문파의 명예도 저버린 채 암습을 감행하는 무리들에게는 분노가 치민 것이었다. 영호걸은 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장주께서는 그만 노기를 거두시고 서둘러 주십시오." 그 말에 사공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게 되었네. 자네에게 이런 꼴을 보여서......." "아닙니다.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본의 아니게 재촉을 하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우선 이 자를 감옥에 가두어 두십시오." 영호걸은 말을 마친 후, 복면인의 옷을 벗겨 자신의 몸에 걸쳤 다. 그 바람에 드러나게 된 복면인의 복색은 과연 예의 금의였다. 영호걸은 미간을 슬쩍 찌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소생은 다음 계획을 실행하겠습니다." "부탁하네. 아무쪼록......." 사공영은 말끝을 흐리며 만면에 감격의 빛을 띄었다. 영호걸은 그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아까부터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사공매를 건네다 보았다. 두 남녀의 눈길이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강렬하게 얽혀 들었다. 영호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렸다. 흡사 그녀의 잔잔한 눈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 열려진 창문을 통해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 뒤에 남게 된 사공매는 마치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공영의 음성이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승소협은 실로 불세출의 기남아다. 장차 무림을 이끌어 나갈 사람은 저 소협밖에 없는 것 같구나." 사공매는 부친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이 없자 사공영도 비로소 흠칫했다. 그는 이어 자신의 딸인 사공매의 기색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해 내고는 표정을 굳혔다. '역시 이 아이는.......' 사공영이 이런 기미를 눈치챈 것은 처음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못 불안한 시선으로 자신의 눈길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딸의 모습을 응시했다. '저것이 일방적인 감정이 아니어야 할텐데.......' ⑤ 청운장의 외장(外莊). 신쾌하게 허공을 가르는 한 인영이 있었다. 외관상으로는 둥근 얼굴에 금의를 걸친 금불신문의 둘째 제자이다. 잠시 후. 그는 신형을 멈추더니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담장의 후미진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잎사귀들이 스치는 소리와 더불어 나무 위에서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 자는 바로 금불신문의 막내 제자인 무강위였다. "어찌 되었습니까? 둘째 사형."


그의 물음에 상대는 사뭇 거만한 투로 대꾸했다. "이 사형이 하는 일에 실패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무강위는 그 말에 크게 기뻐했다. "아! 성공하셨군요. 그럼 내일의 결투도 필요가 없어졌으니 오늘밤 뜰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의 상대, 즉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 물론이지. 그런데 막내 사제는 혹시 만년한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지 않은가?" 무강위의 눈이 순간적으로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왜 아니겠습니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차지하고자 아우성인데 소제라고 해서 어찌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말과 함께 영호걸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자! 그럼 구경이나 한 번 해 보게." 영호걸은 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러나 다시 꺼내져 나온 것은 빈 주먹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무방비 상태인 무강위의 안면을 보기 좋게 후려 갈겼다. 퍽! "윽!" 무강위는 눈 앞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으나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이내 스르르 의식을 잃고 말았다. 영호걸이 찰나지간을 틈타 번개같이 그의 혼혈(昏血)을 짚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무강위는 흡사 나무토막처럼 굳어져 옆으로 넘어 갔다. 영호걸이 재빨리 그의 몸을 안아 옆구리에 끼었다. 그리고는 그곳으로부터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후후후... 이것으로 일단은 첫번째 계획은 완료다." 날이 밝았다. 비무대 위에는 무강위가 먼저 승부를 가리기 위해 올라와 있었다. 조금 후에 옥면살심 사문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후후후... 무형은 벌써 와 계셨구려." 무강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사문기의 말에 낯빛을 약간 굳혔을 뿐이었다. 이때, 총관 진상표가 두 사람 앞에 나와 섰다. 그는 군웅들 모두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오늘로써 마지막 결투입니다. 여기 오르신 두 분께선 최선을 다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폐장에서는 이 싸움의 승자에게 약속대로 만년한옥을 내드릴 것입니다." "와아아아--!" 군웅들의 함성이 떠나갈 듯이 이어졌다. 마침내 대결은 시작되었다. 사문기가 장검을 뽑아 들더니 비웃음이 깃든 음성으로 한 마디 했다. "내 무형께 부탁이오. 부디 오늘 일로 인해 추후로라도 나를 원망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오." 무강위는 냉소했다.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내 이미 그대의 천검십이식을 파해할 방도를 생각해 두었으니까." "당치도 않은 소리!" 사문기는 대뜸 검을 어지럽게 흔들어 십여 송이의 검화를 피워냈다. 허공에 떠오른 검화는 곧장 무강위에게로 쏘아져 갔다. "후후......." 무강위는 기소를 흘렸다. 동시에 그는 미끄러지듯 신형을 빼내더니 본신의 절학인 금불장법을 전개해 대응해 갔다. 두 사람은 서로 뒤엉킨 채 삽시에 십수 초를 주고 받았다. 비무대 아래에는 볼 일을 마치고 돌아온 천중삼신이 관전하고 있었다. 소면수라 왕상이 무강위의 수법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이 그 사이에 무슨 변고라도 있었나? 금불장법이 이전에 비해 영 정묘하지 못하군." 삼안신군 사굉무 또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 보기에도 그렇구려. 하지만 오히려 위력은 더 강해진 것 같지 않소? 그간 변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내공을 강화시키는 특효약이라도 복용한 모양이오. 허허......." 섬혼도 냉염도 짧게 한 마디 거들었다. "그것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군." 그러다 문득 그는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그런데 걸아는 대체 어디 갔길래 보이지 않는 것이오?" 소면수라 왕상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 아이가 어린애요? 냉형답지 않게 걱정을 하다니." "걱정은 무슨!" 냉염의 차가운 음성에 왕상은 짓궂게 웃었다. "클클... 걸아를 만나면 그리 전해 주겠소. 냉형이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고 단지 애타게 찾기만 했었다고 말이오." "끙!" 섬혼도 냉염의 입에서 괴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삼안신군 사굉무가 보다 못해 끼어 들었다. "설마 하니 녀석에게 별 일이야 있겠소? 필경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을 것이오." 비무는 막상막하의 형국이었다. 그 와중에서 무강위는 내심 중얼거렸다. '금불장법은 손에 익지 않아 제대로 구사하기가 힘드는구나. 처음이니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다른 장법과 혼용해 보면......?' 그가 실제의 무강위였다면 금불장법을 처음 쓴다는 것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그는 바로 무강위로 위장한 영호걸이었다. "차앗!" 영호걸은 기합성과 더불어 멋들어지게 좌수를 쳐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천검법을 장법으로 응용한 수법이었다. 아울러 거기에는 기이한 위력이 담겨 있어 사문기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웃!" 덕분에 그의 검세는 금방 위축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광경에 경악하는 사람은 정작 따로 있었다. "아! 어찌 저런 일이......." 뾰족한 이 음성의 주인은 바로 구혜령이었다. 비무대의 한 쪽에서 관전하고 있던 그녀는 거의 충격에 가깝도록 놀라고 있었다. 원래 구혜령 일가(一家)는 청운장과 오랜 친분을 가지고 있는 터였다. 따라서 그녀는 일행과 떨어져 청운장의 가솔들과 어울려야 했고, 이 때문에 영호걸 등과는 그간 접촉할 기회조차 없었다. 아무튼 놀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구자명도 사뭇 어리둥절해진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허! 정녕 이상한 일이군. 어째서 저 무가 아이의 수법이 형님의 대천검법과 유사하단 말인가?" 줄곧 그들과 함께 있던 풍운개 노양중도 역시 아연해 했다. "그럴 리가? 저것은 분명 검법이거늘......!" 구혜령은 안면을 싸늘하게 굳힌 채 비무대 위를 노려 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의문과 더불어 한 가닥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내심 부르짖었다. '저 작자가 어떤 경위로 아버님의 검식을 도용했는지는 모르지만 내 가만 두지 않겠어.' 하지만 다음 순간이 되자 구혜령은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과연 자신이 그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회의가 일었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저 무강위라는 놈은 인간도 아니야.' 영호걸. 그는 닥치는대로 벼라별 희안한 장법을 다 쏟아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사문기의 천검십이식까지도 그 목록에 들어갔다. 그 잡다한 무공조예에 사문기는 아연실색 했다. '이럴 수가! 이 놈이 어떻게 내 검초를.......' 그는 당혹한 나머지 그만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비무대 아래에서 소면수라가 대소를 터뜨렸다. "허허허... 거참 재미있는 놈이군. 마영불, 그 늙은이가 말년에 어디서 저런 괴물을 데려다가 제자로 거두었지?" 그러나 곧 그는 웃다 말고 괴상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아, 아니? 저것은 노부의 비연추혼장이 아닌가?" "흐음?" 사굉무와 냉염이 놀라서 눈을 휩떴다. 아닌 게 아니라 무강위는 비연추혼장을 거침없이 전개해 사문기를 몰아치고 있었다. 천중삼신의 입이 딱 벌어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러기를 한참여. 소면수라 왕상이 비무대 위를 바라보며 미간을 모았다. "정말 살다 보니 별 일도 다 있군. 내 비무가 끝나면 저 무가 아이놈을 잡아다 족쳐 봐야겠소. 노부의 비연추혼장법을 대체 어디서 훔쳐 냈는지 말이오." 가장 낭패한 인물은 아무래도 옥면살심 사문기였다. 승리를 자신했건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져 버린 것이다. '이 놈의 무공 수준은 어제에 비할 바가 아니구나.' 반면에 영호걸은 한층 더 기세를 높이고 있었다. "사형, 이제 마지막 한 수외다!" 외침과 함께 그의 오른손이 무서운 변화를 일으켰다. 손바닥 환영이 사위를 뒤덮는 순간, 사문기는 마치 비명처럼 부르짖었다. "오오! 저것은 천라지망......." 과연 영호걸이 펼쳐낸 초식은 천검십이식의 최후절초인 천라지망이 틀림없었다. 천검신군 문하(門下)의 독문무공이 그의 손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구사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위력에 관해서는 옥면살심 사문기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내공이 강한 고수들에게 있어 육장과 무기의 차이란 아주 미미한 것에 불과했다. 사문기는 자신을 겹겹이 에워싸고 몰려 오는 장영을 대하자 이를 악물었다. 그대로 멈칫거렸다간 목숨이 위태로울 판국이었으므로. 그는 전력을 다해 장영으로부터 빠져 나왔다. 하지만 다시 그를 기다리는 것은 괴이한 웃음소리였다. "후후... 자! 이번에는 이것을 선사하겠소." 영호걸은 천환삼식 중 제이식인 환영섬전(幻影閃電)을 펼쳤다. 그 순간, 섬광과도 같은 장력이 사문기를 향해 날아갔다. 쨍!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동시에 장검이 사문기의 손에서 벗어나 멀리 날아가 버렸다. "흐읍!" 검을 잃은 그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영호걸이 그를 향해 흰 이를 드러내 보였다. "양보해 주어 고맙소, 옥면살심 나으리."


사문기는 그 말을 듣고도 얼이 빠진 듯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자 그의 준미한 얼굴에는 분노가 깃들었다. "무강위, 네 놈이 나를 철저히 우롱했겠다? 어디 두고 보자, 다음에 만나면 내 네 놈에게 오늘의 빚을 십 배로 갚아 주겠다." 그는 이어 몸을 홱 날리더니 대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총관 진상표의 음성이 장내를 울렸다. "본 비무대회의 최후 승자는 무강위 소협이시오!" 군웅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발했다. "와아아아--!" 이는 물론 무강위의 분전(?)이 그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었다. 8 장 사랑, 그리고 뜻밖의 이별(離別) ① 관도(官道). 한 해가 거의 기울어 정월(正月)도 며칠 남지 않았다. 매서운 한풍이 도상에 쌓인 눈가루를 마구 휘날리게 하고 있었다. 추위 탓인지 행인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두 인영이 나타난 것은 꽤 늦은 시각이었다. 그들은 바로 청운장에 구금되어 있다가 이제 막 풀려난 금불신문의 인물들이었다. 마영불의 둘째 제자인 금의노인과 막내 제자인 무강위. 두 사람의 얼굴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무강위가 격앙된 음성으로 내뱉았다. "놈은 기막히게도 둘째 사형으로 변장해 저를 쳤습니다." 금의노인도 그 말에 이를 부드득 갈았다. "깨끗이 당했다. 어떤 놈인지는 모르나 술수가 보통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 측에서는 그 놈이 누구인지도 모르지 않느냐? 이런 통탄할 노릇이......." 두 사람은 끓어오르는 울화로 인해 얼굴이 퉁퉁 부은 채 관도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어디선가 음산한 괴소성이 들려왔다. "후후후... 무강위, 서라." 세 가닥의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나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운데에 위치한 자는 바로 옥면살심 사문기였고, 그 좌우로 두 명의 인물이 호위하듯 서 있었다. 개중 좌측의 인물은 오십대 쯤으로 보이는 음침한 인상의 회의노인이었으며, 우측 인물은 전신에서 사악한 기운이 역력히 풍기는 사십대의 황의서생이었다. 무강위는 그들 세 사람을 향해 버럭 고함을 쳤다. "사문기! 네가 무슨 볼 일로 우리를 막아 서느냐?" 가뜩이나 화가 나 있는 판국에 진로를 방해하는 자들까지 있으니 고운 말이 나갈 리가 없었다. 반면에 사문기 역시도 그에게 얌전히 응수할 입장이 아니었다. "무강위, 잔소리 말고 어서 만년한옥이나 내놓아라!" 비록 겉으로는 으름짱을 놓고 있었으나 내심으로는 이만저만 초조한 것이 아니었다. 일이 망쳐져 원하던 미인을 놓친 것은 그렇다 쳐도, 현 상태에서 만년한옥마저 탈취하지 못하고 흑룡문에 돌아갔다간 된통 문책을 당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만년한옥?" 무강위는 눈가에 대뜸 살기를 피워 올렸다. 그는 옥면살심 사문기가 지금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것을 왜 내게 와서 달라는 것이냐?" 사문기의 안면근육이 묘하게 꿈틀거렸다. "몰라서 묻느냐? 네 놈이 꿍치고 있는데, 그럼 누구에게 가서 달라고 한단 말이냐?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이렇게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내놓아라." 무강위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미친 놈!" "뭐, 뭣? 이 놈이 끝까지......." 사문기의 기세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무대회에서 패한 것만도 분통이 터지는데, 게다가 욕까지 얻어 먹게 되자 가히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던 것이다. 사문기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입에 거품을 물고 외쳤다. "두 분 당주! 저 놈들을 해치웁시다." 그러자 이제껏 잠자코 있던 금의노인이 흠칫하여 중얼거렸다. '저 왼쪽에 있는 자는 상문마객(喪門魔客) 곽표(郭豹)다. 그리고 황의를 입은 작자는 절명선(絶命扇) 호유강(胡有岡).......' 그들 두 사람은 모두 흑룡문의 외당 당주로써, 무림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상대를 알아 보았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일전을 피할 재간은 없었다. 펑! 콰르르릉--! 차차창! 급기야 뒤죽박죽인 희대의 결투가 벌어졌다. 양측이 뒤섞이니 혼전(混戰)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옥면살심 사문기와 금의청년 무강위는 아예 이성을 잃은 채 광분해서 날뛰고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전세는 대충 판가름이 나고 있었다. 흑룡문의 세 인물은 어느덧 전열을 가다듬고는 번갈아가며 무강위와 금의노인을 몰아 부치고 있었다. 금불신문의 두 사람은 계속 밀리는 추세였다. 그 와중에서 금의노인이 몸을 솟구치더니 무강위를 향해 외쳤다. "사제! 승산이 없다. 가자." 동시에 그는 상문마객 곽표의 머리를 훌쩍 뛰어 넘어 그야말로 빛살같은 속도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무강위도 이미 정신을 차린 듯 그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사문기! 오늘 일은 잊지 않겠다." 무강위의 음성이 여운을 남기는 찰나, 사문기가 분연히 외쳤다. "쫓읍시다!" 삼 인의 흑룡문 추격단도 이어 무섭게 질주했다. 그들이 사라진 직후, 텅 빈 관도에 세 명의 노인이 나타났다. 천중삼신이었다. 소면수라 왕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군가 기묘하게 장난을 쳐 놓는 바람에 일이 커졌군." 삼안신군 사굉무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 비무대회에서 승리한 가짜 무가 아이는 어찌 되었소? 잡아서 족치겠다더니......?" 소면수라는 빙그레 웃었다. "말이 그렇지, 내 어찌 그런 몹쓸 짓을 벌이겠소? 클클... 사실 노부는 그 아이 때문에 여러 모로 즐거웠소이다. 누구인지 무척 궁금하기는 하지만 알아내는 것도 포기하고 있는 참이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강호무림에 그런 괴객(怪客) 하나 있어 나쁠 것은 없지 않소?" "허허허... 하긴......." 섬혼도 냉염이 그들의 대화는 안중에도 없는 듯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걸아는 대체 어딜 간 게요?" 그러자 두 노인도 비로소 약간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이런 적은 없었는데?" "혹시......?" 그 말에 냉염은 쓴 입맛을 다셨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 놈은 떠난 것이오." 소면수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걷혔다. "녀석, 한 마디 전언도 없이......." "걸아는 한창 혈기 왕성한 젊은 아이요. 아마도 우리 세 늙은이가 너무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으니까 조용히 사라진 모양이외다. 자, 우리도 그만 갈 길을 갑시다." 삼안신군 사굉무의 어투가 개중에서 가장 담담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는 섭섭해 하는 기색이 역력히 내비쳤다. 이윽고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관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문득 소면수라 왕상이 나머지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래도 놈은 절대로 우리를 잊지는 않을 것이오. 어떻소? 사형과 냉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섬혼도 냉염이 의외의 대답을 했다. "왕형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손자놈이 되어 가지고 어떻게 제 할애비들을 잊는단 말이오?" 그는 흥분한 나머지 말부터 쏟아 놓고는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그 광경에 두 노인이 대소를 터뜨렸다. "허허허허......." 이어 세 사람은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마침내 관도에는 사굉무의 혼잣 소리만이 긴 꼬리와도 같은 메아리를 남겼다. "장차 금불신문과 흑룡문이 크게 붙겠군." 그들의 모습이 관도의 끝으로 사라진 후, 길 가장자리의 나무 위에서 하나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영호걸이었다. 그는 천중삼신이 사라져간 곳을 바라보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세 분 할아버님.......' 그것은 정녕 영호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천중삼신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헤어지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청운장의 내장에 위치한 방 안. 장주인 비룡검 사공영과 그의 딸 자의옥녀 사공매, 그리고 영호걸이 탁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사공영이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떠난다니 정말 아쉽군. 욕심 같아서는 오래 머물러 달라고 붙들고 싶네만 자네의 뜻이 그러하니......." 영호걸은 빙그레 웃었다. "언젠가는 다시 뵙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사공영은 말하고 나서 자신의 딸을 넌즈시 건네다 보았다. 사공매의 타는 듯한 시선이 줄곧 영호걸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아까부터 뭔가 말할 듯 했으나 그녀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사공영이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매아야." "네? 네, 아버님......." 사공매의 당황하는 모습을 대하자 사공영은 내심 고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내색치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너는 어서 가서 그것을 가지고 오너라." "네, 아버님." 사공매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잠시 후. 그녀는 무엇인가를 소중히 받쳐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것은 붉은 자단목으로 짜여진 하나의 상자였다.


사공영은 상자를 받더니 탁자에 놓고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구리로 만든 고불(古佛)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고불은 볼품이 없을 뿐 아니라 퍼렇게 녹까지 슬어 있었다. 사공영은 고불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이어 그가 그 밑바닥을 열자 그 속에서는 한 개의 투명한 주보(珠寶)가 나왔다. "아!" 영호걸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주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삽시에 넓은 방 안에 청량한 기운을 전했던 것이다. 사공영이 주보를 들고는 빙긋 웃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탐내던 만년한옥(萬年寒玉)이네." "과연 그럴만 하군요." 영호걸은 감탄이 배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의 앞에 그 주보가 내밀어진 것은 그때였다. "자, 이것은 이제 소협의 물건일세." 사공영의 말에 영호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장주께선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소생은 이런 대가를 바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허허... 노부는 비무대회에서 우승한 사람에게 만년한옥을 주기로 약정한 바 있네. 전 무림에 공언한 사실이거늘, 소협이 이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노부의 체면은 무엇이 되겠나?" 그의 말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영호걸은 난색을 띄웠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공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본시 보물이란 인연이 있는 자가 따로 있는 법이네. 노부는 이것으로 인해 환란만 겪었지. 소협이 아니었다면 이번 일의 결과가 어찌 되었을지 뻔하지 않나?" "하지만......." "아무 말 말게. 솔직히 나는 이 마물(魔物)을 곁에 두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네. 지킬 능력도 없을 뿐더러 이대로 조용히 살려면 누군가에게 필히 떠맡겨야할 입장이지." 영호걸은 그 말을 듣자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으음, 이 분은 처음부터 이것으로 인해 피해가 있을까 고심했던 만큼 앞으로도 그 점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구나.' 그는 마침내 만년한옥을 받아 들었다. "그럼, 진정한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소생이 보관하겠습니다." 영호걸은 곧 그것을 품 속에 갈무리 했다. 사공영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를 정시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노부가 약속한 것이 있었네." "으음......." 영호걸은 은연중 얼굴을 가볍게 붉혔다. 아니나 다를까? 사공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를 몹시도 당황하게 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불민한 내 여식이었지." 영호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며 사공영이 일말의 기대가 담긴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의 의향은 어떤가?" 직설적인 그의 질문에 영호걸은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글쎄요, 영애께선 물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구나 혼인이란 결코 일방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닌지라......." 사공영은 잘라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자네의 의향만 말하게." "네?"


영호걸이 아연한 표정을 짓자 사공영은 혀를 끌끌 찼다. "이런 것을 두고 불행이랄지 다행이랄지 모르겠지만 소협은 그 방면에서는 아주 쑥맥이군. 이 사람, 자네는 수박을 꼭 잘라 놓고 속을 열어 보여야 수박인 걸 아나?" 사공매가 먼저 알아 듣고 펄쩍 뛰었다. "아버님!" 그녀는 곧 얼굴을 감싸 쥐며 밖으로 뛰어 나가 버렸다. 영호걸도 그제서야 사공영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아 차렸다. 그는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어떤 남자가 영애와 같은 미인을 마다하겠습니까?" "그럼 되었네." "그러나......." "또 무엇인가?" "소생에게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미인과 더불어 안주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사공영은 서운해 하기는커녕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그야 어디 이르다 뿐이겠는가? 나도 소협처럼 젊은 시절이 있었네. 자네의 기백이 오히려 마음에 드는군." 그는 영호걸이 미처 뭐라 대답할 겨를도 없이 손을 덥썩 잡았다. 그리고는 신뢰가 담긴 음성으로 덧붙였다. "고맙네." "장주......." ② 청운장의 후원(後園). 영호걸과 자의옥녀 사공매가 마주 서 있었다. 은은한 저녁 햇살이 두 사람의 어깨에 고루 비춰져 그들의 싱싱한 젊음을 더욱 빛내 주고 있었다. 영호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생이 낭자에게 가르쳐 드리려는 것은 하나의 장법이오. 금나수(擒拿手)를 겸한 것으로써, 공격에도 유효하지만 수비에 보다 더 많은 묘(妙)가 포함되어 있소." 사랑의 방법도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마련인가? 영호걸은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무공 한 수를 남기고자 했던 것이다. 사공매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우아한 미(美)가 평소의 매력이라면 지금의 진지함은 그보다 몇 배 더 그녀를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두 뺨이 그러했고, 꼭 다물린 앵두같은 입술이 그러했다. 영호걸은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절로 마음이 흐트러져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중을 뚫고 나오는 음성은 더 없이 굳건했다. "이것은 소생이 그간 일반적인 무학의 초식과 실전(實戰) 중의 응변을 기초로 하여 나름대로 꾸며본 무공이오. 이 안에는 진기의 새로운 운행방식이 내재되어 있어, 수비에 치중할 경우 진기의 소모를 극소화시킬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소. 이 장법은 이름은 태극환허장법(太極幻虛掌法)이라 하오." "태극환허장법......." 사공매는 고운 입술을 놀려 이름을 되뇌었다. "이 장법은 모두 십팔초로 이루어져 있소. 매초마다 다음 초를 유도하고 있어 거듭 시전해도 진기가 막힘없이 흐르며 적의 공격을 모두 차단시킬 수 있소." 설명인즉 그녀가 알아 듣기 쉽도록 한 것이었으나 실제로 태극환허장법이란 영호걸이 천무비경 내의 환허삼식과 지난 며칠 간 숙지해 두었던 일반초식들을 융합해 만든 무공이었다. 이윽고 그는 태극환허장법을 시전해 보이기 시작했다.


사공매는 흑백이 분명한 눈으로 유심히 그의 동작을 지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로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실망기였다. 워낙 기대가 컸던 탓이기도 했지만 영호걸이 펼치는 초식은 느린데다가 평범하기 그지 없었다. 열여덟 가지의 초식을 모두 펼쳐 보여도 이렇다 할 특징이라고는 도무지 발견이 되지 않았다. 시전을 끝낸 영호걸이 손을 내리며 물었다. "어떻소? 쓸만한지 모르겠구려." "소녀가 소협의 무학을 어찌 감히 평하겠어요?" 사공매는 입가에 미소를 드리움으로써 언급을 회피했다. 훌륭하다고 하자니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되었고, 그렇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하자니 상대의 성의가 괘씸했던(?) 것이다. 곧 그녀는 영호걸 앞에서 미리 보아 두었던 동작을 흉내내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내심이야 어떻든 매우 진지한 자세로.......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공매는 크나큰 놀라움과 직면해야 했다. 답답하게 여겨질 정도로 느리고 변화가 없는 장법이 뜻밖에도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그녀의 얼굴이 잔뜩 굳어진 것은 제삼초에서 제사초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동작은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예 전신의 기혈이 막혀 유통불능이 되고 말았다. '맙소사!' 사공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초식들이 머릿 속에서는 환하게 그려지는데도 불구하고 손발은 자꾸 엉뚱하게 빗나가니, 이런 현상을 두고 과연 뭐라고 정의해야 하는가? 마침내 사공매는 수치감으로 인해 얼굴을 붉혔다. 명색이 무가(武家)의 여인으로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쯤 되고 보면 자신의 안목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내심 부르짖었다. '아!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숨어 있는 것을 모르고 경솔하게 덤벼 들었구나. 이 분이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여기실까?' 지켜 보던 영호걸이 빙그레 웃었다. "낭자, 이 장법은 매우 쉬운 것 같지만 많은 변화와 역도(力道)를 내포하고 있어 운용이 까다로운 편이오. 지금부터는 요결(要訣)을 파악하며 신중하게 응해 보시오. 자, 다시 한 번 보겠소?" 그는 아까보다 속도를 좀더 늦추어 태극환허장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심하게 시전해 보였다. '미안해요.......' 사공매는 이런 독백과 더불어 영호걸이 시전하는 동작에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곧 차분하고 느린 진행 덕분에 그녀는 하나씩 그 변화들을 터득해 갈 수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점차 기쁨과 감탄의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공매는 또 다시 연마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호걸이 매초식마다 일일이 요결을 설명해 주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세를 시정해 주기도 했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 사방이 어스름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각기 전수와 연마에 몰입해 있는 두 남녀는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심지어 무수히 손길이 맞닿고 몸이 스쳤지만 그것도 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자의옥녀 사공매. 그녀는 절세의 아름다움 외에도 남다른 총기를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두 시진 가까이 지나자 그녀는 생소한 무공의 어려운 변화들을 대부분 성취해낼 수가 있었다. 그녀는 온 몸이 마치 물에 빠진 듯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땀을 통해 건져낸 보람이란 그 어떤 희열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영호걸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공매는 여전히 장법 연마에 여념이 없었으되 편한 경장 차림이었다. 별호대로 그것도 자색이었는데, 허리를 역시 자색의 띠로 질끈 동여 매고 있었다. 그로 인해 그녀의 몸매는 매우 선정적이었다. 아니, 땀에 젖어 들러 붙어버린 얇은 천이 벌써부터 그녀가 지닌 육체의 곡선을 거의 적나라하게 투영시켜 주고 있었다. 영호걸은 흡사 홀린 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런데 거기에다 생동감까지 더해지니 그 느낌이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공매는 왼손을 뒤로 빼더니 오른손은 비스듬히 상단을 겨눈 채 가슴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그 동작은 바로 태극환허장법의 제칠초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영호걸은 내심 읊조렸다. '무녀(舞女)....... 저 여인은 지금 춤을 추고 있구나.'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봉긋한 앞가슴의 출렁임과 허리 아래의 곡선이 흔들리며 보여주는 느낌은 그의 말마따나 무공시전이 아니라 현란한 춤사위에 가까웠다. '후후... 내가 이렇게까지 흔들리다니.......' 영호걸은 은연중 입가에 고소를 매달았다. 사공매의 동작이 바뀐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나긋한 허리를 휘어 상체를 숙이더니 두 팔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연후, 무릎을 꿇듯 반쯤 꺾어 발을 벌리고는 두 손을 다시 무엇인가 떠받드는 듯한 자세로 서서히 들어 올렸다. '으음, 제구초에 해당되는 부분이군.' 영호걸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그녀를 다른 시각으로 보고자 했다. 그러나 움직임에 따라 미묘하게 변화를 더하는 사공매의 몸매는 그를 더욱 매료시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좌우로 상체를 흔들더니 두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몸을 빙글 돌려 한 팔을 휘둘렀다. 덕분에 거리가 좁혀지자 영호걸은 부득불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체향(體香)과 접해야 했다. "으음......."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얕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반면에 사공매는 줄곧 장법의 연마에만 몰두해 있었다. 가히 심신을 모조리 내맡기고 있다고나 할까? 그녀는 신형을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몸이 얼마나 황홀한 파동을 일으키고 있는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영호걸이 꿈을 꾸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도....... '정녕 천상의 우물(尤物)이다. 이 여인은.......' 영호걸이 이런 부르짖음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는 사이, 사공매는 예의 장법 중 두 초수를 남겨 놓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신형은 빨라져 있었다. 그녀는 날렵하게 갈 지자(之字)로 걸음을 반복해 옮기면서 섬섬옥수를 마구 흔들어댔다. 그 모습이란 마치 허공에 꽃을 뿌리는 것과도 같았다. 아울러 그 때마다 그녀의 허리가 유연하게 좌우로 율동했다. 드디어 마지막 초식이 되었다. 이것은 최후의 구명초식으로 열여덟 장(掌)을 뿌린 후, 그 힘을 빌어 몸을 빼내는 형식이었다. 사공매는 이를 구사하기 위해 양손을 현란하게 휘둘러갔다. 이어 그녀의 몸은 미끄러지듯 뒤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 다음을 장식한 것은 그녀의 다급한 비명이었다. "앗!" 사공매는 누군가 자신의 몸을 받아안는 것을 느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면전에서 영호걸이 웃고 있었다. "낭자, 수련에 열중한 것도 좋지만 앞으로는 뒤에 무엇이 있는지도 미리 신경을 써야 할 것이오." "아!" 사공매는 그제서야 영호걸의 등 뒤에 아름드리 나무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귀밑까지 새빨갛게 붉혔다. 만일 그가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꼼짝없이 나무와 충돌했을 것이고, 내공이


사용되었던만큼 적지 않은 부상도 입었을 터였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사공매를 안게 된 영호걸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더 이상은 감정을 억제할 수도 없었거니와, 야릇한 육향과 더불어 뭉클한 느낌을 전하는 여인의 지체는 그의 모든 동작을 마비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사공매도 마찬가지였다. 크게 당황하기는 했으되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일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서로를 통해 강하게 희구해 오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잠시 두 남녀는 그렇게 밀착된 채 서 있었다. "낭자......." 사공매의 목덜미로 영호걸의 부드러운 숨결이 와 닿았다. 그녀는 몸을 가볍게 떨었다. 갑자기 이상한 열류가 전신을 마구 치달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공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자신의 몸이 빙글 도는 것을 의식했다. 동시에 억센 사내의 팔이 전신을 조여 안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신음처럼 부르짖었다. "소협......." 영호걸은 그 음성을 들으며 그녀의 동체가 전하는 충격적인 느낌에 취해 갔다. 급기야 그도 그녀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아무래도 그대에게 홀린 모양이오. 처음 보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아!" 사공매는 탄성을 발하며 그의 탄탄한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얼마나 바라고 고대하던 말인가? 잡힐 듯 하면서도 잡을 수 없었던 소망이 마침내 현실이 되어 그녀 앞에 이른 것이었다. 그녀는 상대의 가슴에서 이제껏 느낄 수 없었던 강렬한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남자, 아니 그녀가 생애 최초로 마음을 열게 된 정인(情人)의 향기였다. 이윽고 사공매는 자신의 턱이 치켜 들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와 더불어 그녀의 두 눈에 가득 담겨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평생을 사랑하고 기다려야 할 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또한 그녀는 볼 수 있었다. 흡사 한성(寒星)과도 같이 냉철한 빛을 발하던 그의 눈에서 한 가닥 뜨거운 열기가 솟구치는 것을. 사공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나 다를까? 영호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스르르 와 얹혔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던 그 움직임은 이내 격렬하게 바뀌었다. 그의 혀가 입 안으로 불쑥 밀려 들어오자 사공매는 전신을 바르르 경련했다. 이어 엄청난 흡입력으로 인해 그녀는 흡사 심혼을 빼앗기고 말 것 같은 충격과 만나야 했다. '아아!' 영호걸은 그 상태에서 손을 움직여 사공매의 등을 쓸었다. 이는 의지와는 무관한, 본능이 시킨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아울러 그는 이 행위를 통해 가히 감동에 가까운 희열을 맛보고 있었다. 첫 입맞춤.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순간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피차에 이성과의 육체적인 접촉은 처음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그 전율스럽도록 황홀한 느낌에서 얼른 놓여나지 못했다. 마치 깊숙한 샘을 찾아 헤매듯 두 남녀는 서로의 입술을 탐닉하며 오랫동안 그렇게 맞붙어 있었다. 날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리하여 허락된 두 남녀의 입맞춤도 어둠 속에 잔잔히 파묻혀 버렸다. ③ 이름 없는 산 기슭. 둥근 만월(滿月)이 천지간에 화기(和氣)를 뿌리고 있다.


사위는 고요하기 이를데 없었다. 한 쪽 산등성이에 동목(冬木)이 밀집해 있었고, 그 아래로는 경사진 벌판이었다. 이틀 전에 쏟아진 폭설로 인해 온누리가 은백의 순수에 잠겨 있었다. 나무들은 저마다 눈덩이를 가득 이고 있었으며, 땅에는 한 자 이상의 눈이 쌓여 있었다. 지나는 바람 한 점 없다. 휘영청한 달빛만이 적막한 산야를 정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듯 가슴이 에일 정도로 고적하고 아름다운 설경(雪景)을 배경으로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눈 위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걷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가 지나간 곳에 발자국이 전혀 찍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쌓였는데도 불구하고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면, 이러한 수법을 일컬어 강호무림에서는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공술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은 결코 흔치 않다. 달빛 아래 그 인물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바로 영호걸이었다. 현재 그는 본래의 용모를 회복하고 있었는데, 그의 용태는 과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여전히 단아하고 준수했으되 은연중 범접하기 어려운 위세와 당당한 기품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간 적지 아니 시일이 지났다. 그가 청운장을 떠나온 것도 벌써 이십여 일 전의 일이다. 그는 낙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 촌락에 머물며 혼자서 불철주야 무공을 연마한 바 있었다. 영호걸에게는 그런 시간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타인의 관심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몰두했었다고나 할까? 무도(武道)를 걷고자 한즉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무공을 깨우치는데 주력했다. 물론 영호걸은 이전에도 벌써 천무비경 상의 천환삼식을 익히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는 비무대회를 기화로 일류고수인 사문기와 일전을 치루면서 자신이 답지한 천환삼식이 껍데기나 다름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천환삼식은 전대의 기인인 천환상인 필생의 절학이었다. 아무리 그가 초인적인 집념과 지혜로 단시간 내에 접근해 갔다 해도 그 안에 내재된 진실된 위력까지는 습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호걸은 바로 그 직후에 천환삼식의 변초(變招)와 일반초식을 융합해 태극환허장법을 만든 바 있었다. 그것은 앞서도 언급했듯 수비가 주(主)로써 진기의 소모가 적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영호걸은 그 선에서 만족하지 못했다. 그것은 시작이자 도약의 한 지점이었을 뿐, 그는 당시에도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발전에의 욕구를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다. 그가 천중삼신과 아무런 기약없이 헤어진 것도, 절세의 미인을 두고 청운장을 떠나오게 된 것도 사실은 모두 이때문이었다. 그 결과로 영호걸은 천환삼식을 더욱 깊이 연구하는 과정 중 태극환허장법에 포함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세 가지의 초식을 창안하게 되었다. 이 삼초는 수비가 아닌 공격 초식이었다. 영호걸은 이를 태극연환삼식(太極連環三式)이라 명명했다. 말하자면 태극환허장법을 보완해 완벽한 장법으로 만든 것이다. 아울러 그는 이것을 기존의 천환삼식 외에 그 자신이 수시로 사용할 수 있는 독문무공으로 정했다. 이 외에도 그는 천환삼식의 꾸준한 연마와 더불어 천무비경에 기록되어 있던 여타의 무공들까지도 면밀히 검토해 갔다. 그리하여 이십여 일에 걸친 그의 무공진보는 가히 눈부신 것이었다. 반면에 영호걸은 무리한 욕심 따위는 부리지 않았다. 그는 천무비경 상의 광세기학을 두루 섭렵했으되, 시간을 가지고 차츰 터득해 나가기로 마음 먹고는 묵고 있던 촌락을 빠져 나왔다. 그는 지금 집이 있는 하북(河北)의 석문(石門)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것은 집을 나온 지도 오래 되었거니와 부친이 돌아오겠다고 한 날짜가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뇌리에 문득 천중삼신과 구혜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심이 교류되어서인지 언제고 따사롭고 정겹게 느껴지는 얼굴들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불어냈다. '그때의 상황으로서는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심중을 일일이 고할 수 있는 입장만 되었어도 예의도 모르는 놈처럼 그런 식으로 떠나 오지는 않았을 것을.......'


영호걸은 고소를 짓는 한편 하나의 다짐을 세웠다. '일단 아버님을 뵈온 후 다시 강호에 나가 그 분들을 찾자. 어떻게 맺어진 인연인데, 후후.......' 심리의 반영인 양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달빛 아래 그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눈 위를 흘러갔다. 그것은 이른바 환영신법이었다. 이때,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밤이 깊은 시각인지라 달은 어느덧 서녘으로 기울고 있었다. 나무가 밀집한 비탈 쪽에 둥실 떠 있었는데, 바로 그 달의 한 가운데로 검은 새 같은 것이 빠르게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흐음?' 언뜻 보기에 그것은 거대한 검은 새였다. 그리고 그 새는 벌써 달을 지나쳐 큰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박쥐......?' 영호걸은 눈을 크게 떴다. 날개가 달렸으니 일단 조류(鳥類)로 보았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박쥐의 형상이었다. 또한 박쥐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그 크기가 너무도 컸다. 이쯤 되자 그는 호기심에 이끌려 나무 근처까지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박쥐의 크기는 거의 사람만 했다. '맙소사! 저런 박쥐도 존재 했었던가?' 그의 놀라움은 비단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박쥐가 그의 눈앞에서 느닷없이 허물을 벗기 시작한 것이었다. '흐읍!' 영호걸은 충격을 받고는 그 자리에서 굳어지고 말았다. 박쥐의 껍질로부터 급기야 허연 물체가 툭 튀어 나왔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전신에 실 한 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여인의 나신이었다. 여인은 일견하기에도 중원의 여인이 아니었다. 눈같이 흰 피부, 게다가 금발(金髮)에 벽안(碧眼).......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 여인이 환상인가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치렁치렁한 금발은 허리까지 늘어져 있었으며, 순백의 피부가 그야말로 빙결처럼 매끄러워 보였다. 용모도 그렇지만 몸매가 특히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가히 뇌살적이랄까? 팔다리가 상식에서 약간 이탈될 정도로 길었는데, 워낙 쭉 빠져서 그런지 몹시도 선정적인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그 뿐이 아니었다. 팽팽한 탄력이 느껴지는 젖가슴은 체격에 비해 지나치리만큼 풍만했으며, 그 반대로 허리는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듯 가늘었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부풀어 오른 둔부는 허리선과의 대비로 인해 아찔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배, 그리고 허벅지로 이어지는 앞부분에는 달빛이 황홀하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 광경이란 흡사 나무 위에 천상의 선녀가 하강해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 일으켰다. 영호걸은 한동안 넋을 잃은 듯 그 미녀를 감상(?)했다. 게다가 박쥐로부터 변신을 했은즉 신비감마저 일조(一助)하는 바람에 그는 어이없을 정도로 그녀의 아름다움에 취해 들고 있었다. 아마 이 상황이 되면 누구라도 그러 하리라. 한밤중의 적요한 산중에서 달빛에 휩싸인 채 미끈한 나신을 드러내고 있는 이국(異國)의 미녀를 본다면, 빠져 들지 않을 사내가 어디 있겠는가? 여인이 문득 나뭇가지 위에서 도약하듯 사지를 좌악 뻗었다. 기색을 보아 하니 그녀는 답답한 허물에서 놓여나서인지 현재의 상태를 몹시도 즐기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두 개의 젖가슴이 출렁하더니 달빛을 밀쳐내듯 도발적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그것을 본 영호걸은 순간적으로 호흡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몸을 돌리려다 그는 그만 옆의 나무를 건드리고 말았다. '실수를!' 나무가 흔들리며 가지 위에 쌓여 있던 눈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 소리에 대한 미녀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누구냐?"


그녀의 뾰족한 고함성이 산중에 메아리를 울렸다. '쯧! 일났군.' 영호걸은 놀라기도 했지만 난감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휘익! 바람 소리를 내며 그의 앞으로 미녀가 내려섰다. 여전히 발가벗은 알몸 그대로인 그녀는 다짜고짜로 일장을 내쳤다. "죽인다!" 펑! 애꿎은 나무가 매서운 장력을 맞아 폭음을 냈다. 영호걸이 재빨리 나무 뒤로 돌아가 피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미녀는 자신의 일장이 수포로 돌아가자 본능인 양 얼른 두 손으로 앞가슴을 가렸다. 숨어 있는 사람이 남자라는 것쯤은 그녀도 이미 보아서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미녀의 가슴은 손으로 가리기에는 너무도 컸다. 그녀는 수치감과 분노로 인해 얼굴을 붉히며 앙칼지게 외쳤다. "괘씸한! 네 놈은 누구길래 몰래 숨어서 남의 알몸을......." 미녀는 말하다 말고 제 풀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알몸을 주장(?)하다 보니 정작 가려야 할 부분이 어디인지 생각난 것이었다. 그녀는 급급히 몸을 꼬며 가슴에서 한 손을 떼내 하초를 가렸다. 그 자태가 얼마나 육감적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무 뒤에서 이를 모조리 보게 된 영호걸은 정신이 산란해졌으나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낭자, 미안하오만 이것은 본의가 아니었소. 그저 우연히......." "닥쳐라!" 여인은 치를 떨었다. 하지만 눈을 밟고 서 있는 그녀의 나신은 흰 빛이 반사되어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산해내고 있었다. 설지(雪地) 위에 핀 꽃인들 이보다 더 매혹적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영호걸은 더 이상 그녀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야 했다. "낭자, 우선 옷부터 입으시오. 그런 연후에 말합시다." 침착을 되찾은 그의 음성에 미녀도 정신이 든 듯 다시금 몸을 날렸다. 비상(飛上)하는 그녀의 나신이 허공에 기이한 향기를 뿌렸다. 그것을 의식하자 영호걸은 내심 탄식처럼 부르짖었다. '허어! 여인의 미색이란 모두 다 덫이로구나.' 그러는 사이, 미녀는 나무 위에 걸쳐 두었던 껍질을 뒤집어 썼다. 그것은 알고 보니 박쥐 모양의 검은 가죽옷이었다. 휙--! 그녀는 다시 날아 내렸다. 그제서야 영호걸은 그녀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예의 가죽옷은 얼굴까지 씌워져 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눈에서는 흡사 섬광과도 같은 푸른 빛이 쏘아져 나왔다. 영호걸은 미녀의 살벌한 눈빛에 잠시 멈칫했으나 곧 그녀의 특별한 외관을 천천히 훑어 보았다. 그녀의 양 팔과 옆구리 사이에는 박쥐의 날개 형상을 한 바람막이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가죽옷은 몸에 찰싹 붙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지닌 육체의 굴곡은 벗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적나라하게 다 보여지고 있었다. 가슴의 융기는 물론 잘룩한 허리와 풍만한 선을 그리는 둔부도 예외 없었다. 영호걸은 민망해진 나머지 그만 관찰을 포기한 채 그녀의 발치께로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반면에 미녀는 옷을 입었다고 해서 그런지 방금 전과는 달리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놈은 오늘 본 낭자의 손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이어 그녀는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다시 일장을 쳐왔다. "웃!" 영호걸은 다급성과 함께 재빨리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낭자! 멈추시오. 소생은......." 여인은 냉소했다. "시끄럽다! 네 놈은 조용히 죽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녀의 한어(漢語)는 발음이 약간 서툴렀다. 그것이 오히려 특이한 매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 듯 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기괴한 수법을 그리며 이번에는 그의 가슴을 긁어 왔다. 영호걸은 내심 고소를 지었다. 그녀가 아무리 적의(敵意)를 가지고 달려든들 그로서는 그 반대의 느낌으로 치달리니 어쩌겠는가? 그는 환영신법을 전개해 전권에서 가볍게 몸을 빼냈다. 눈 앞이 뿌얘지며 상대가 사라져 버리자 미녀는 대경했다. "어멋!" 그녀는 경악성을 발했으나 곧 몸을 팽그르르 돌리더니 사방으로 심상치 않은 장력을 내쏘았다. 쉭! 쉬익--! 그것은 가히 맹렬한 기세였다. 직접 몸에 닿지 않아도 절로 살기(殺氣)가 느껴질 정도였다. 영호걸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미녀가 이렇듯 잔혹한 살수를 쓰다니.......' 물론 환영신법을 쓰고 있는 이상 그는 미녀의 수법에 터럭 한 개도 허용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서 연이어 발출되어 나오는 살초에는 왠지 가슴이 한 귀퉁이가 써늘해졌다. 와중에도 영호걸은 몇 마디 더 변명을 해 보았으나 그녀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는 내심 쓴 입맛을 다셨다. '쯧! 도리 없군. 달아나는 수밖에.' 이윽고 영호걸의 신형은 환영신법을 빌어 밀집된 나무들 사이로 스르르 스며 들었다. 여인의 날카로운 교성이 뒤를 이었다. "흥! 어림없다. 네 놈이 나 흑편복(黑 )의 손에서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양 팔을 활짝 펼치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박쥐 그대로였다. 영호걸은 나무들 사이에 은잠(隱潛)한 채 내심 중얼거렸다. '어쩐지 기세가 예사롭지 않더라니, 저 여인이 바로 무림십괴 중의 한 명인 흑편복이었구나.' 여인, 즉 흑편복은 몇 번인가 나무숲 위 허공을 빠르게 선회했다. 그녀의 신법에 영호걸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별호에 어울리는 경공 수준이군. 여자이면서 무공도 내가 만난 무림십괴 중 누구보다 강했던 것 같다. 저 정도면 십괴 가운데 최고 순위로 꼽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이어 한 나무의 빈 둥지 속으로 연기처럼 숨어 들어갔다. 흑편복은 그를 찾지 못하자 허공에서 마구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자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녀는 찾기를 중단한 채 서쪽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④ 장가촌(張家村). 영호걸은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다. 외곽으로 빠져 언덕 하나를 넘으면 바로 그의 집이었다. 그는 조급히 언덕을 오르며 새삼 깊은 감회에 사로잡혔다. '아! 대체 얼마만인가?' 그는 집을 떠나 있던 두 달여의 기간이 마치 십 년 이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만치 여러 가지 일을 겪었기 때문이리라. 덕분에 그의 귀향(歸鄕)은 나름대로 의의가 컸다. 애초에는 그저 단조롭게만 느껴지던 일상조차 이제는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그의 가슴에 조용히 와 얹혔던 것이다. 영호걸은 언덕 끝을 올려다 보며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 언덕은 그의 집과 장가촌을 잇는 지름길로써 어릴 때부터 그가 수시로 오르내리던 곳이었다. 부친의 심부름을 비롯해 겨울이면 토끼를 잡느라 부산하게 뛰어 다니기도 했었다. 언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늘을 이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는 기대감을 가지고 덫을 놓던 과거의 어느 날과 마찬가지로 금방 눈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후후... 얼마나 떠나 있었다고 이런 생각을.......' 영호걸은 툴툴 웃었으나 그 이유만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전날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몸도, 마음도 완전한 변화를 거쳐 새로 태어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지난 날이란 갖가지 기억들을 포함해 하나의 과정이었다. 바로 오늘이 있게 하기 위한....... 설명하자면 부친의 의술은 물론 과거의 정서가 밑바탕이 되어 그가 현재 일신에 절기신공(絶技神功)을 지닌 무림의 기남자(奇男子)로 변모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영호걸의 입에서 낮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아버님께서는 그 새 돌아오셨을까? 떠나신 날짜로부터 두 달하고도 닷새가 더 지났는데......." 인자하던 부친의 모습을 떠올리면 늘상 미소가 지어지는 그였다. 그는 환영신법을 사용해 순식간에 집 앞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는 곧 아연실색 했다. "앗! 이럴 수가......" 영호걸을 반기는 것은 그가 살던 아담한 집도, 존경해마지 않던 부친도 아니었다. 믿을 수 없게도 화마(火魔)가 남기고 간 잔재, 즉 한 무더기의 잿더미 뿐이었다. 영호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너무도 큰 충격에 그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뜬 채 부르르 몸을 떨어야 했다. '집이 불타다니! 어찌 이런 변고가.......' 그는 그만 맥이 빠진 나머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일시지간에 모든 판단능력을 상실한 듯 그는 한동안 망연자실하여 잿더미로 화해 버린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에 무엇인가 쏘아져 들어왔다. 기둥이 다 타버린 주춧돌에 희미한 글씨가 씌어져 있었던 것이다. "으음......." 영호걸은 즉시 몸을 일으켜 주춧돌로 다가갔다. 가까이 살펴 보니 그것은 돌 따위로 급히 긁은 듯한 흔적이었다. <현(玄)> 단 한 글자 뿐이었다. 하지만 그 서체는 매우 낯익었다.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정신을 가다듬게 되자 차츰 사고의 예지도 회복되었다. 영호걸은 미간을 좁힌 채 그 글씨를 노려 보았다. '이것은 분명 아버님의 필체다. 내게 남기고 가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영호걸은 극도의 분노를 느꼈다. '그렇다면 화재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틀림없이 누군가 집을 태우고 아버님을 납치해 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 쥐었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상대가 누구이건 아버님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


허공을 향하는 영호걸의 눈에서는 그답지 않게 무시무시한 광망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애써 흥분을 가라앉힌 그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호생지덕(護生之德)을 베풀었으면 베풀었지, 타인들과 아무런 원한도 맺은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떤 작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혹시......?' 영호걸은 최근 두 달 동안 자신이 무림에서 활동했던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천환신법으로 역용을 하고 움직였는데 누가 내 행적을 안단 말인가? 천중삼신 세 할아버님은 물론 심지어 사공낭자에게까지도 숨겨온 일을. 그럼 대체 왜......?' 의문은 도시 풀 길이 없었다. 영호걸은 잠시 허탈한 눈으로 잿더미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그 속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잿더미가 치워지자 하나의 석판(石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호걸은 지체없이 석판의 한 귀퉁이를 꾹 눌렀다. 그러자 석판이 옆으로 열리며 어두컴컴한 통로가 나타났다. 영호걸이 안으로 들어가자 석판은 다시 저절로 닫혔다. 그것은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밀실이었다. 아래로 계단이 주욱 이어져 있었는데, 평소 그가 부친과 함께 자주 들어 왔던 곳이었다. 이르자면 그곳은 서고(書庫)와 약실(藥室)을 겸한 장소로써, 먼저 한 방에 이르자 사방에 고서(古書)로 들어 찬 서가가 둘러져 있었다. 고서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풍겨 와 코를 찔렀다. 하지만 이는 고금을 총망라한 의서(醫書)의 진귀본이었으니, 이 밀실이야말로 영호가 의술의 산실(産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호걸은 서가에 꽂힌 그 책들을 대부분 독파한 바 있었다. 그는 또 하나의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약실로 약향(藥香)이 배어 있었다. 한쪽 벽에 수백 개나 되는 문갑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각기 약초의 이름이 씌어져 있었다. 그것은 모두 부친인 영호천이 천하를 뒤져 구해다 놓은 희귀한 약재(藥材)들이었다. 영호걸은 그 벽을 지나쳐 다른 벽으로 다가갔다. 벽에 면한 곳에는 탁자가 있었고, 탁자 위에는 조그만 검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십여 개의 약병이 들어 있었는데, 각 병마다 한결같이 영호천이 평생에 걸쳐 제조한 비약(泌藥)들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진귀한 약은 일명 대라회천신단(大羅回天神丹)이라는 것으로써 무려 서른여섯 가지의 영초(靈草)와 칠십이 가지의 약수(藥水)를 배합해서 만든 영약(靈藥)이었다. 이는 애초부터 도합 열두 알 밖에 되지 않았으며, 개중 두 알은 어릴 적 영호걸이 복용한 바 있었다. 영호걸은 대라회천신단을 비롯한 십여 개의 약병을 아예 상자째 모조리 품 속에 갈무리 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굳은 의지와 더불어 모종의 결심이 엿보이기도 했다. 그는 다시 한 쪽 벽에 매달린 시렁 위를 응시했다. 그곳에는 손바닥 크기의 금갑(金匣)이 놓여 있었다. 영호걸은 그 금갑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부친의 손길이 닿은 가느다란 금침(金針)들이 백 개가 넘게 차곡차곡 들어 있었던 것이다. "으음......." 그는 침중한 신음을 흘리며 금갑을 역시 품 속에 집어 넣었다. 이윽고 밖으로 나오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기어이 눈송이를 펑펑 쏟아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영호걸은 얼굴에 굵직한 눈발을 고스란히 맞으며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는 일말의 공허감을 느끼는 가운데서도 부친의 안위가 걱정되어 마음이 바짝바짝 조여들 지경이었다. "부디 무사하십시오, 아버님. 소자가 찾아 뵈올 때까지......." 휙--!


그는 몸을 날려 잿더미가 된 집을 등지고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갔다. 이후로도 눈은 계속 내려 그의 집터는 금세 한 덩어리의 눈언덕으로 화하고 말았다. 9 장 뇌정도(雷霆刀) ① 제남(濟南). 산동성(山東省)에서 가장 큰 도성(都省)이다. 남서방향으로 천하의 명산인 태산(泰山)이 우뚝 솟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태산은 오악(五嶽) 중 동악(東嶽)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웅장한 산세와 더불어 풍광이 빼어나 예로부터 시인묵객(時人墨客)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태산을 멀지 않은 곳에 둔 제남은 그 북쪽으로는 대강(大江)인 황하(黃河)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황하를 건너야 하는 상인이나 유람객들은 반드시 이곳을 경유하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제남은 수백 년 동안 문물교역의 중심지로써 중원에서 가장 번화한 성도(省都) 중 하나로 손꼽혀 왔다. 바야흐로 해가 기울어갈 무렵. 제남의 북문(北門)으로부터 한 명의 청년이 입성(入城)했다. 나이 십팔, 구 세 가량으로 일신에 청의를 걸치고 있는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영호걸이었다. 부친의 실종 이후로 그는 특별히 지향하는 곳도 없이 마치 나그네처럼 흘러 다녀야 했다. 목적하는 바는 뚜렷하되 이렇다할 목표지점이 없으니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황하를 건너 당도하게 된 곳이 바로 이 제남이었다. 저녁 시간의 제남은 한창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영호걸은 번잡한 대도(大都)의 풍경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점차 깊숙이 진입해 갔다. 부친을 찾아야겠다는 염원은 여전히 그를 조급하게 했지만 이곳에 와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사이, 천중삼신의 자취를 수소문해 보았으나 그 일 또한 쉽지 않았다. 그들이 신분을 감추고 다니는 이상 재회는 우연을 빌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영호걸은 이래저래 무거운 걸음으로 인파에 휩쓸린 채 대로와 작은 골목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후후... 누가 보면 꼭 한가해서 이렇게 쏘다니는 줄 알겠군.'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는 가운데 상가가 밀집한 어느 지역에 들어서게 되었다. 숱한 점포들이 저마다 희한한 물건들을 쌓아 놓고는 그의 공허한 시선을 잡아 당겼다. 무심하게 지나치던 영호걸의 발걸음이 문득 한 전장 앞에서 멈추었다. 그곳은 골동품이나 일용(日用) 잡기 따위를 파는 만물전(萬物殿)이었다. 바로 진열대 위에서 먼지와 함께 나뒹굴고 있는 하나의 도(刀)가 그의 관심을 끈 것이었다. "흐음?" 도를 응시하는 그의 눈썹이 불쑥 치켜 올라갔다. 그것은 뭐랄지, 알 수 없는 느낌이 가슴을 은은하게 진동시켰기 때문이었다. 길이는 약 두자 반 가량, 칼집은 물론 자루까지도 보기 흉할 정도로 잔뜩 녹이 슬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칼자루에 새겨져 있는 전자체(篆字體)의 글씨에 홀린 듯 고정되어 있었다. <뇌정(雷霆)> 영호걸은 자신도 모르게 진열대로 다가가 도를 집어 들었다. "웃!" 도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그의 음성을 들었는지 전장의 점원인 듯한 자가 냉큼 달려왔다. "헤헤... 손님, 그 칼은 비록 겉보기에는 녹이 슨 데다가 볼품도 없지만 감정에 의하면 천 년 이상 묵은 물건입지요. 손님께서는 그것을 사시겠습니까?" 점원의 은근한 음성에 영호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천 년 전의 물건이라고? 흠, 당신의 말이 과연 사실일지?'


그는 내심 고소를 지으며 칼자루를 뽑아 보았다. 하지만 예상 외로 힘을 꽤 주었는데도 도는 뽑혀 나오지 않았다. '그럼 어디!' 영호걸은 두 손에 공력을 약간 돋구어 재차 시도해 보았다. 치익--! 괴이한 음향과 함께 마침내 칼이 뽑혀지긴 했다. 그러자 이와 동시에 시뻘건 녹이 우수수 쏟아져 내려 그를 실망시켰다. "이런!" 영호걸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끌끌 찼다. 이 광경에 점원은 얼굴을 붉힌 채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워낙 오랫동안 손질을 안해놔서......." "천 년이나 손질을 안했으니 오죽 하겠소?" "예?" 영호걸은 점원을 놀려주고 난 뒤, 칼을 도로 칼집에 넣으려 했다. 그의 눈에 도신(刀身)의 한 부분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그곳은 바로 도를 빼내다 녹이 떨어져 나간 부위였는데, 기이할 정도로 청광(淸光)을 뿜어 내고 있었다. '아! 이것이다.' 영호걸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점원에게 물었다. "이 도는 가격이 얼마나 되오?" 점원은 만면에 희색을 띄었다. "아, 예예... 물건이 그래 놓으니 많이 받을 수도 없고... 더도 말고 은자 스무 냥만 내십쇼." "지금 스무냥이라고 했소?" "예, 헤헤......." 영호걸은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값의 고하(高下)는 둘째 치고 수중에 고작 은자 열다섯 냥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어 보였다. "안되겠군. 값이 맞지 않으니 다음에 와야겠군." 이윽고 영호걸은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아 얌전히 진열대 위에 내려 놓았다. 그러자 기겁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점원이었다. "손님! 흥정이나 해 보셔야지, 그대로 가려고 하시면 어쩝니까?" 사실 그 자는 부지런한 일꾼이 못되었다. 주인의 눈을 속여 적당히 게으름을 피워 왔은즉 녹이 슬어 있는 물건이란 단지 골칫거리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런 점원이란 대개 엉터리로 값을 매겨 주인 몰래 슬쩍슬쩍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마련이다. 영호걸은 점원의 기색에서 미리부터 이 점을 눈치채고는 심리를 역이용 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내게는 지금 열 냥 밖에 없소. 그렇다고 물건이 딱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 점원은 그 말에 매우 고심이 깃든 표정을 지었다. 한참 시간을 끈 후에야 그는 크게 인심쓰듯 도를 집어다 내밀었다. "좋습니다, 주인 어른께는 제가 따로 양해를 구합지요. 열 냥만 내시고 빨리 가져 가십시오." 영호걸은 묵묵히 전낭에서 은자 열 냥을 꺼내 셈을 치루었다. 만물전을 나오는 그에게 점원이 한 마디 덧붙였다. "손님, 정말 싸게 사 가시는 겁니다요. 나중에 잘 닦아내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것은 천하에 둘도 없는 보도입지요." 영호걸은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점원이 은자를 몇 푼 따로 챙기며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던지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점원을 향해 웃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로 내게 이 도를 싸게 팔았소. 후후후.......' 어느새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도를 구입한 덕에 그나마 수중에 몇 푼 남지 않게 된 영호걸은 할 수 없이 성내에서 가장 초라한 객점에 거처를 정해야 했다. 특히 그가 묵게 된 방은 유독 작고 지저분 했다. 탁자나 의자는 고사하고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저 나무 침상 하나만이 덜렁 놓여져 있는 방이었다. 영호걸은 시장통을 지나치다 사온 거친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침상에 걸터 앉았다. 그의 무릎에는 거금(?) 열 냥을 치르고 구입한 예의 녹슨 도가 놓여 있었다. 그는 다시금 칼을 뽑아 보았다. 치르륵! 울리는 음향은 아까보다 더욱 고약했다. 뻘건 녹이 방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며 영호걸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헝겊을 꺼내 정성껏 도신(刀身)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냥 닦아서는 녹이 지워지지 않자 공력을 주입해 닦아냈다. ② 잠시 후. 녹이 다 벗겨져 나가자 짐작대로 도신은 푸른 빛을 발하며 영호걸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사뭇 감탄스러운 듯 그것을 응시했다. "아! 과연 훌륭하구나." 영호걸은 도를 치켜 들었다. 도광(刀光)이 촛불에 반사되어 빛을 발했다. 그것은 그다지 예리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푸른 빛이 주는 느낌은 기분이 나쁠 정도로 칙칙한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영호걸은 그 색감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이는 튀는 것보다는 은은한 멋을 선호하는 그의 성정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는 도신을 들여다 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거기에서 거무스름한 문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무엇일까?" 그 문양은 번갯불의 형상으로써 도신의 양면에 각기 세 개씩 새겨져 있었다.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를 위아래로 훑어갔다. '이것은 보아 하니 뭔가 상징적인 의미인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곧 그는 칼자루로부터 뇌정(雷霆)이라는 글씨를 찾아내고는 만면에 희색을 띄었다. '아! 이 도의 이름이 바로 뇌정도(雷霆刀)였군. 후후...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아울러 영호걸은 뇌정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부분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해 내기도 했다. 뜻밖에도 칼자루와 도신 사이에 약간의 틈이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혹시......?' 그의 안색이 일변했다. 불현듯 뇌리에서 무엇인가 한 가닥 영감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내 도신과 칼자루를 따로따로 잡고는 힘껏 당겨 보았다. 쓰윽--! 묘한 소리가 나더니 칼자루가 도신으로부터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 속에 한 장의 비단 두루마리가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영호걸은 이런 식의 보관법을 상고시대(上古時代)의 한 기서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외에 여인의 비녀가 같은 용도로 쓰였다는 사실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비단 두루마리를 꺼내 펼쳐 보니 거기에는 깨알만한 글씨들이 앞뒤로 빽빽히 적혀 있었다. 영호걸은 강한 호기심과 더불어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노부는 뇌정신군(雷霆神君)이라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명호는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부 스스로가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영호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지극히 괴벽한 분이었나 보군. 명호에 걸맞는 자부심을 가지지 않는 한 이런 말은 할 수가 없다.' <노부는 연(燕)나라에서 출생해 무가(武家)에서 자라면서 도법(刀法)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나이가 고희(古稀)에 이르도록 도법의 진수를 터득하지 못했다. 평생에 걸쳐 연구했건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노부는 허탈한 심경이 사로잡혀 벌판에 망연히 서 있게 되었다. 그것은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이었다. 그런데 이때에 노부는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형상을 보고는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천지간(天地間)의 이치를 관통하는 대도(大道)를 낙뢰(落雷)를 통해 알아 냈다고나 할까? 그로부터 노부는 작심하고 폐관에 들어갔다. 비로소 오래 전부터 구상했던 심법(心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였다.> 여기까지 읽은 영호걸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아! 성취는 둘째 치고 이 분의 기질이 정녕 마음에 드는구나. 평생을 도법 하나에 초지일관(初志一貫)한 것도 그렇지만, 때가 이르자 즉각적으로 폐관에 들 수 있는 그 용기가 대단하구나. 이것이 바로 내가 가고자 했던 무인이 길이 아니었을지......?' 그는 이른바 선인(先人)의 향기에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어휘를 떠올리며 다음 구절을 읽어 나갔다. <결국 폐관한 지 삼백 일만에 노부는 의도했던 내가심법을 창안하게 되었다. 노부는 그것을 뇌정심법(雷霆心法)이라 명명했으니, 후인(後人)은 기쁘게 알고 취하라. 이를 운용해 도법을 전개하면 능히 천하무적(天下無敵)이 되리라.> 얼핏 생각하면 광오하기까지 한 문구였으나 영호걸은 충분히 그 심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의없이 두루마리의 내용을 눈으로 훑어 내려갔다. <한 가지 사족(蛇足)을 달겠다. 뇌정심법은 그 위력이 너무도 강해 일반의 도로는 결코 도세를 떨쳐 내지 못한다. 도가 견뎌 내지 못하고 파손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노부도 그로 인해 무려 수백 자루의 명도(名刀)와 보도(寶刀)를 작살낸 전력이 있느니라.> "하하하하......." 영호걸은 부지중 대소를 터뜨렸다. 그것은 시공(時空)을 초월해 무공광이던 한 기인의 괴행각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찰나였다. <생각다 못해 노부는 멀리 해남(海南)의 오지산(五指山)으로 건너가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뇌정심법을 견뎌낼 칼을 스스로 제련해 냈다. 바로 그 칼이 뇌정도(雷霆刀)이니라.> 영호걸은 두루마리를 다 읽고 나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놀랍구나! 뇌정신군, 뇌정도....... 연대(燕代)라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이거늘, 까마득한 세월의 벽이 가로막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세에 이렇듯 친숙하게 느껴질 수가 있다니....... 역사를 일컬어 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고 하는지를 이제야 알겠구나.' 그는 이어 두루마리의 뒷장을 펼쳤다. ③ <뇌정심법요결(雷霆心法要訣)> 영호걸은 이미 뇌정신군에게 커다란 호감을 느끼게 되었으므로 그에 못지 않은 기대감을 가지고 구결을 읽어 갔다. 뇌정심법은 남자만이 익힐 수 있는 심법이었다. 즉 양(陽)의 무공으로써 장력(掌力)이나 기타의


무공으로는 활용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도법(刀法)을 펼칠 때만 운용이 가능한 것이었다. 영호걸은 이 부분에서도 역시 뇌정신군의 고집적인 면과 만날 수 있었다. 반면에 요결을 읽어 본 그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실로 대단하다. 천하에 이렇듯 가공할 위력과 패도적인 기상을 가진 심법이 또 있을까?" 영호걸은 침상에 걸터 앉은 채 곧 구결에 따라 공력을 운기해 보았다. 이내 그는 이 심법이 일반적인 진기의 역도(力道)와는 상이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인체에는 삼단전(三丹田)이 있다. 상단전(上丹田)은 인당(印堂), 중단전(中丹田)은 단중(檀中), 하단전(下丹田)은 궐원(闕元)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대체로 상단전은 기(氣)를 기르며, 중단전은 신(神), 하단전은 정(精)을 생(生)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뇌정심법을 운기하니 상리는 완전히 무시되고 말았다. 양강의 열류가 태양혈(太陽穴)에서 발현하더니 금세 십이경락의 삼양경(三陽經)을 거쳐 뜨겁고 광폭하게 일어났다. 이어 그것은 몸의 정중선(正中線)에 있는 삼관(三關)을 번개같이 내달아 곧바로 풍부(風府), 뇌호(腦戶), 후정(後頂), 백회혈(百會穴)로 솟구쳐 올랐다. 실로 놀라운 현상이었다. 영호걸은 온 몸이 타는 듯한 충격과 더불어 어느 순간에 이르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에서는 흡사 뇌전과도 같은 광망이 뻗어 나왔다. 그는 무의식 중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기이한 열력이 그의 어깨를 타고 내려와 양 손의 합곡(合谷)에 모였다. 아울러 그 신비한 힘은 그가 잡고 있던 뇌정도로 고스란히 흘러 들어갔다. 그 찰나, 영호걸은 자신도 모르게 한 쪽 벽을 향해 뇌정도를 휘둘렀다. 우르릉--! 은은한 뇌음이 울리더니 뇌정도의 끝에서 한 가닥 푸른 섬광이 번뜩 하고 쏘아져 나갔다. "웃!" 영호걸은 대경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이란 다음 순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오오! 이럴 수가......." 검기가 닿은 벽은 흡사 화염이 휩쓸어 간 듯 검게 타 있었다. 그는 안색을 굳힌 채 신음처럼 부르짖었다. "실로 무서운 심법이다. 고작 삼성(三成)의 진력을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저 정도의 위력을 나타내다니." 영호걸은 새삼 눈을 크게 뜨고 수중의 뇌정도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뇌정신군이라는 분은 왜 이 훌륭한 심법을 창안해 놓고도 정작 독문의 도식은 남기지 않았을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는 곧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아! 그렇다. 희대의 기인일지언정 주어진 수명(壽命)만은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분이 뇌정심법을 깨우쳤을 때가 벌써 고희가 넘었은즉, 도법까지 연구할 시간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영호걸은 잠시 모든 인간이 지닌 평등한 한계에 대해 쓴 웃음을 지어야 했다. 이어 그는 품 속에서 천무비경을 꺼냈다. '도법이라면 여기에도 있다.' 그는 천무문의 제삼대 장문인인 도신(刀神) 독고령(獨孤鈴)의 도법을 찾아 펼쳐 보았다. <단혼일도(斷魂一刀)> 그것은 문자 그대로 단 일초의 도법이었다. 그러나 영호걸로서도 그 초식에만은 도저히 접근해 갈 수가 없었다. 이는 그가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게 된 일대 고비였다. 마침내 그는 탄식을 불어냈다. '내 진즉부터 이 단혼일도를 천무비경 내에서 가장 어려운 무공으로 꼽기는 했지만 이토록 낙심을 안겨 줄 줄이야.......' 포기란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영호걸은 능력부족을 절감하게 되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고 다음 장을


넘겨 보았다. 거기에는 도신 독고령의 또 다른 도법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름하여 풍뢰구도(風雷九刀). 이것은 당년의 독고령이 단혼일도를 창안해내기 직전까지 사용했던 도법으로써, 모두 아홉 초식으로 되어 있었다. 이 또한 그로 하여금 천하를 풍미하게 했던 만큼 매 도식마다 실로 엄청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영호걸은 이 풍뢰구도의 이치는 곧바로 터득해 갈 수가 있었다. 대략 두 시진 가량을 몰두하자 그는 아홉 초식 중 삼개 초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성과를 이루었다. 원래 단혼일도는 검술로 말하자면 극고의 경지인 어검술(馭劍術)과 같은 단계였다. 아울러 이는 최소한 내공 수위가 이갑자(二甲子)에는 이르러야 펼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현재의 영호걸이 취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또한 여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즉 진기의 소모가 과다하고 한 번 시전하여 한 명 밖에 죽일 수가 없었다. 물론 역으로 해석하면 심즉필살(心卽必殺)이라는 강점도 있기는 했지만.......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작금의 영호걸에게는 오히려 풍뢰구도와 같은 도법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매초가 다 살수(殺手)이되 많은 적들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었다. 풍뢰구도의 각 초식은 다음과 같았다. 제일초 귀천(鬼 ), 제이초 영백(靈魄), 제삼초 탁비(坼飛), 제사초 예마(刈魔), 제오초 절명(切命), 제육초 소혼(銷魂), 제칠초 절참(切斬), 제팔초 혈륙(血戮), 제구초 뇌살(雷殺). 영호걸. 그는 마치 빨려들듯 이들 도법의 연구에 몰입해 갔다. 그 속에 포함된 심오한 변화와 이치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는 내심 기쁘기 그지 없었다. '실로 우연 치고는 기묘한 우연이다. 지금까지 내가 익힌 무공들이 한결같이 양강의 무공이라니. 건원신공(乾元神功)을 위시하여 뇌정심법도, 또 거기에 이 풍뢰구도까지도 그렇지 않은가? 진보가 빠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 상호간의 융합 때문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영호걸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한시바삐 뇌정심법을 빌어 풍뢰구도를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즉시 뇌정도를 들고 객점을 나왔다. 그리고는 경공술을 전개해 근처의 야산으로 빠르게 숨어 들어갔다. 잠시 후. 영호걸은 개중 평평한 곳을 골라 우뚝 섰다. 동시에 그는 뇌정심법을 운공한 후, 기합성을 발했다. "제일초, 귀천(鬼 )!" 뇌정도에서 푸른 섬광이 뻗어 나오며 뇌성이 울렸다. 쿠르르릉--! 하지만 영호걸은 미처 그 위력이 발휘되기도 전, 놀라서 눈을 크게 떠야 했다. 도식을 펼치는 순간 오른손 합곡혈(合谷穴)에 모여 있던 열화같은 진력이 일시에 뇌정도로 옮겨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섬광이 발출된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콰쾅! 삼 장 밖의 거목(巨木)이 뇌전에 격중당해 폭음을 울렸다. 그 자리는 무참할 정도로 시커멓게 타 있었다. "아! 바로 이것이다." 영호걸은 흥분한 나머지 탄성을 터뜨렸다. 뇌정심법과 뇌정도, 그리고 풍뢰구도가 자신의 것으로 소화되었다고 생각하자 그는 벅차 오르는 희열을 금할 길이 없었다. 영호걸은 뇌정도를 허공으로 치켜 올리며 크게 부르짖었다. "하하하... 이제부터 너는 내 친구이자 내 분신(分身)이다. 장차 이 영호걸과 함께


협의지로(俠義之路)를 걷게 될 것이다." 그는 비로소 여망이 구체화 되어 자신의 수중에 쥐어진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천하에 어떤 적(敵)인들 결코 두렵지 않은 것이 지금 그의 심정이었다. 이어 흥분이 가라앉자 영호걸은 이런 생각을 했다. '이 검은 워낙 고색창연해 누가 보아도 상고신검(上古神劍)이라는 것을 즉시 알아 차릴 것이다. 이대로가 좋기는 하지만 남의 눈길을 끌지 않으려면 아무래도 개조를 하는 편이 낫겠다.' 그는 다음 날로 제남의 한 병기제작소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도신만 남겨 두고 칼자루와 칼집을 다른 것으로 교체했다. 지극히 평범한 도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었다. 이제 그것이 뇌정도라는 사실은 누구도 알아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 개조 작업 덕분에 영호걸은 마지막 남은 은자를 모두 바쳐야 했다. 그는 뇌정도를 옆구리에 찬 뒤 제남의 남문(南門)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면서 혀를 차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쯧! 졸지에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군." 10 장 천성보(天聖堡) 입성(入城) ① 이름 모를 야산(野山). 겨울의 아침은 스산했다. 그러나 따스함이 느껴지는 한 줄기 연기가 숲 속으로부터 가느다랗게 피어 올랐다. 동시에 구수한 냄새도 뒤따랐다. 숲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공지(空地)였다. 한 명의 백의청년이 모닥불을 피워 놓은 채 토끼를 잡아 굽고 있는 것은. 그는 날렵해 보이는 체격에 꽤 준수하면서도 정기발랄한 용모를 가진 인물, 즉 승풍(承風)으로 변신한 영호걸이었다. 모닥불이 점차 사그라져 갔다. 영호걸은 나무 조각을 몇 개 더 얹으며 토끼 고기를 젓가락으로 찔러 보았다. '으음. 아직 조금 더 익혀야겠구나.' 그가 막 토끼를 거꾸로 뒤집고 있는 찰나였다. 숲 속에서 난데없이 한 인영이 튀어 나왔다. 그 자는 육십 가량의 황의노인이었는데, 마치 술에 취한 듯 심하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옷자락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으며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아!" 영호걸이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크윽!" 노인은 비명을 발하더니 기어이 모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는 토끼를 굽던 모닥불을 차면서 넘어졌다. 그 바람에 공을 들이던 영호걸의 아침 식사는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 영호걸은 모닥불에 휩싸여 엉망이 되어버린 토끼고기에는 일별도 하지 않고 급히 쓰러진 노인을 안아 올렸다. 보아 하니 다 죽게 생겼은즉 자신의 한 끼 음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평평한 곳에 뉘어지자 노인은 힘겹게 눈을 떴다. "소, 소협....... 뉘신지는 모르나 감사......." 말도 채 맺지 못하고 그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영호걸은 혀를 차며 노인의 손을 잡아 진맥을 해 보았다. '틀렸구나!' 노인은 이미 회생의 가능성이 전무했다. 심맥이 가닥가닥 끊어져 영호걸로서도 어찌 손을 써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노인의 몇 군데 혈도를 짚었다. 이때, 거친 고함소리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애송이 놈! 그 늙은이를 내놓아라."


이와 동시에 숲 속으로부터 다섯 명의 흑의장한이 나타났다. 영호걸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들이 정인(正人)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는 냉랭한 음성으로 답했다. "친구들의 입이 너무 지저분하군. 먼저 내 그대들의 입부터 좀 씻어 내야겠소." 흑의인들은 안색이 일변했다. 그 중 한 명이 다가서며 예의 거친 입을 다시금 씰룩거렸다. "크크... 네 놈이 아무래도 간덩이가 부었나 보구나." 또 다른 흑의인이 거들었다. "정신 나간 놈, 우리 일에 참견하면 신상에 해롭다. 어서 그 늙은이나 내놓고 이 자리에서 냉큼 꺼져라." 영호걸은 냉소했다. "내 신상 문제는 그대들이 걱정해 주지 않아도 되오." "뭐, 뭣이?" 다가서던 흑의인이 분성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를 잇던 자가 대뜸 앞으로 나서더니 일장을 격출해냈다. 쉬익! 영호걸은 피하지 않고 꼿꼿이 선 채 가볍게 소매를 휘둘렀다. 펑! "어이쿠!" 공격했던 흑의인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대여섯 걸음이나 주르륵 밀려났다. 그제서야 그는 긴장한 얼굴로 외쳐 물었다. "네 놈은 대체 누구냐?" 영호걸은 그 자를 위시해 흑의인들을 쓸어 본 뒤, 씩 웃었다. "이제야 묻는군. 본인은 승풍이라는 사람이외다." "승풍?" 흑의인들은 하나같이 의혹을 보이며 반문했다. "네 놈의 실력을 보건대 결코 무명인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이름은 왜 갖다 붙이는 것이냐?" 영호걸은 묘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천하에 실력자는 부지기수요. 하지만 유명하다고 해서 꼭 실력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소. 그럼 초야(草野)에 묻혀 있는 기인이사들이 억울해 할 테니까. 모름지기 그대들의 모자란 견식부터 넓히는 것이 순서일 것이오." "이, 이제 보니 이 놈이 우리를 희롱하는구나!" 흑의인들은 대번에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노려 보았다. 개중 한 명이 폭발하듯 외쳤다. "찢어 죽일 놈! 네 놈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리 현음교(玄陰敎)의 일에 간섭한다면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이다." "현음교?" 영호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로서는 그런 이름을 가진 문파가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다섯 명의 흑의인들이 틈을 놓칠세라 재빨리 그를 에워쌌다. 하지만 영호걸은 그때까지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후후후... 기어이 일전을 벌이겠다는 뜻이구려." 그의 여유만만한 태도에 한 흑의인이 욕설을 퍼부었다. "미친 놈! 죽어랏--!" 마치 그 말이 신호인 듯 다섯 명의 흑의인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그 기세란 가히 태산이라도 짓뭉개 놓을 것 같았다. 반면에 영호걸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사방에서 장풍이 몰아쳐 오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상태로 그는 소맷자락을 휘둘러 왼손으로는 비연추혼장을, 오른손으로는 금불장법을 전개해 칠, 팔장을 한꺼번에 내쳤다. 펑! 퍼펑--! "컥! 크헉!" 요란한 폭음과 함께 흑의인들은 모두 뒤로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의 얼굴은 어느덧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설마하니 젊은 청년의 무공이 이 정도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영호걸이 그들을 향해 차갑게 잘라 말했다. "가라! 더 이상 머뭇거리면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다섯 명의 흑의인들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이를 부드득 가는 자가 있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이대로 물러가기는 한다만 추후로 우리 현음교가 네 놈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남기고 흑의인들은 차례로 꼬리를 감추듯 사라져 버렸다. 영호걸은 부지중 쓴 입맛을 다셨다. "현음교라......." 그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쓰러져 있는 황의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은 그야말로 기식이 엄엄해져 있었다. 영호걸은 그의 천령개를 가볍게 때려 잠재력을 격발시켰다. 그러자 죽은 듯 하던 노인의 얼굴이 일시지간 화색을 되찾았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그들은... 어찌 되었소......?" 영호걸은 그의 몸을 일으켜 나무에 기대게 했다. "안심하십시오. 모두 물러 갔습니다." "그럼 소협이......?" 노인은 놀라는 표정으로 영호걸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안색이 다시 창백해져 가지고는 숨을 헐떡였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입술이 더듬더듬 말을 쏟아냈다. "내... 미안하지만... 소협에게 한... 가지 부탁......." "무엇입니까? 어서 말씀하십시오." 영호걸은 다급히 노인의 완맥을 잡아 진기를 주입시켰다. 그에 힘입어 노인이 한 말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현... 현음교... 강호의 무서운 암세력....... 그들이... 혈풍을 일으키려....... 그... 본거지는 바로... 천성(天聖)... 보(堡)......." 노인의 고개가 옆으로 꺾이는 것을 보며 영호걸은 탄식해마지 않았다. 곧 그를 사로잡은 것은 거대한 의혹이었다. '대체 이 노인의 말은 무슨 뜻인가? 현음교는 처음 듣는 이름이니 그렇다치고, 천성보라면 당금 무림에서 가장 협명(俠名)을 떨치는 일성(一聖)의 세력권이거늘....... 그가 세운 문파가 어찌 현음교라는 사이한 단체와 동일선상에서 언급된단 말인가?' 영호걸은 일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알기로도 천성보는 가히 정파무림(政派武林)의 대들보 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고는 일단 노인의 시신을 나무 밑에 고이 묻어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뭔가 큰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때, 영호걸이 자연스럽게 떠올린 것은 사부인 천유자 모용황의 얼굴이었다. 인자하면서도 굳은 신지가 느껴지는 그 모습에서 그는 이런 답을 건져내고 있었다. '그렇다. 사부님이시라면 신변에 어떤 위험이 닥치든 이 상황에서 벌써 스스로를 던져 내막을 파헤치고자 하셨을 것이다. 내 그 분의 진전을 이었은즉 어찌 그대로 행하지 않으리?'


그는 더 머뭇거릴 이유가 없자 그대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휘익--! ② 금릉(金陵). 강소성(江蘇着)에 위치한 고도(古都)이다. 또한 문화(文化)와 교역의 중심지인 이곳은 옛 남송(南宋)의 도읍이기도 했다. 정오를 막 벗어난 시각. 이곳에 한 명의 백의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일신에 남루한 백의를 걸친 데다가 머리에도 먼지가 뿌옇게 얹혀 있어 일견하기에도 풍잔노숙을 벗해온 듯한 인상을 풍겼다. 용모만은 여독(旅毒)에도 불구하고 비범해 보였다. 타고난 분위기 탓인지 초라한 차림새 가운데서도 은연중 기품이 엿보였다. 게다가 왼손에 두자 반 가량 되는 평범한 도(刀) 한 자루를 들고 있는 인물, 그는 바로 영호걸이었다. 영호걸은 화려하고 번듯한 금릉의 성내를 걸으며 습관인 양 사방을 두루 살폈다. 뱃 속에서는 쉴새없이 전쟁(?)이 일고 있었다. 그것은 아사(餓死)에 직면한 신체가 그 주인에게 일종의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후후... 벌써 이틀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군.' 무일푼이 되어 버린 지 오래인 그로서는 이런 번화가가 더 괴로웠다. 왜냐하면 배를 채워 줄 사냥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영호걸이 지나는 대로변에는 객점은 물론 주루가 줄을 잇고 있었다. 이로 인해 술향기와 맛난 요리들이 풍기는 냄새가 속속 후각에 전달되니 그야말로 죽을 노릇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예 호흡을 중단하고 그곳을 그냥 지나쳐야 했다. 그렇게 얼마를 더 가자 그의 눈에 곧 심상치 않은 광경이 들어왔다. 하나의 높다란 담장을 앞에 둔 채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두런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영호걸은 호기심을 느끼고는 그 쪽으로 가까이 가 보았다.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건네다 보니 벽에는 방(榜)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방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본보(本堡)에서는 정기적으로 한 해에 한 번씩 보내(堡內)에서 일할 무사와 장정들을 모집하오니 뜻을 가지신 분은 응모바랍니다. 보수는 다른 곳보다 후할 것이며 숙식도 제공합니다. - 천성보(天聖堡)> '아! 이것은.......' 영호걸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는 제남에서 죽어가는 황의노인으로부터 현음교와 천성보의 관계를 들은 후, 천성보를 방문하기 위해 이곳 금릉으로 달려 왔다. 하지만 내내 그는 고심막측이었다. 그것은 어떻게 천성보에 자연스럽게 스며 들어 내막을 캐낼 수 있을지에 대한 부분으로써, 이렇다 할 대안이 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던 중에 예의 방을 보게 되니 영호걸로서는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옆사람에게 넌즈시 물어 보았다. "천성보는 어느 곳에 있소이까?" 함께 방을 보던 중년인이 힐끗 돌아다 보았다. 그는 영호걸을 아래 위로 훑어 보더니 응수해 주었다. "당신, 천성보의 모집에 지원하려고 그러오?" 영호걸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그러자 중년인은 사뭇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마 쉽지 않을 게요. 저 방에 씌여진 대로 해마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원자라 해서 다


채용되지는 않으니까. 우선 무공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영민해야 하오." 영호걸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운이 좋으면 어찌 되겠지요. 일단 부딪쳐 보기라도 하고 싶으니 천성보가 어디에 있는지만 좀 가르쳐 주시오." 중년인은 그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 운수대통을 기대한다니 할 말이 없구려. 나도 지난 해에는 당신처럼 천성보에 들어가려 했으나 실패하고 포기해 버렸소." "으음, 그런 전력이 있었군요." 영호걸은 짐짓 무안한 척 목을 움츠려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중년인은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알려 주었다. "어떻든 마음 먹은 길이면 가 보기나 하구려. 천성보는 남문(南門) 밖으로 십 리쯤 가면 와호령(臥虎嶺)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바로 그곳에 위치하고 있소." "고맙소이다." 영호걸은 중년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이윽고 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금릉의 남문을 나섰다. 이어 그곳에서부터 경공술을 전개하니 그는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중년인이 가르쳐 준 지역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곳의 지형은 과연 이름 그대로였다. 흡사 거대한 호랑이가 엎드린 듯한 형국으로써, 천성보는 바로 그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서 한껏 위용이 넘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높이가 오 장여에 달하는 튼튼한 보벽이 사방을 둘렀으며, 그 아래에 폭이 넓은 호보하(護堡河)가 벽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호보하의 넓이는 대략 보아 칠 장 정도, 깊이까지는 알 수 없었다. 문루 또한 거대하게 솟아 있었다. 그리고 누각의 꼭대기에 걸린 금색의 현판에는 웅휘한 필체로 천성보라 씌어져 있었다. 마침 문루에는 호보하를 가로질러 거대한 목교가 놓여 있었다. 영호걸은 망설이지 않고 목교를 건너갔다. 그러자 문루에 지키고 서 있던 두 명의 청의장한이 그를 가로막았다. "손님께선 어떻게 오셨소이까?" 영호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곳에서 사람을 구한다기에 응모해 볼까 해서 왔소이다." 오른쪽의 장한이 잠시 그를 조심스럽게 훑어 보았다. 눈치를 보아 하니 초라한 행색 따위를 염두에 두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출입 통제를 위해 약간의 경계를 둔다고나 할까? 이는 다시 말하면 소임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것으로 보일 따름이었다. "방을 보고 오신 모양인데, 나를 따라 오시오." 영호걸은 자신의 지금 몰골과 장한의 정중한 태도를 번갈아 생각해 보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으음, 비록 문루를 지키고는 있지만 이 자의 행동거지는 정파 명문의 제자답게 예의 바르고 깍듯하다.' 하지만 이런 면은 되려 그의 가슴을 무겁게 했다. 문제점을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더욱 막막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묵묵히 장한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보내(堡內)는 상상보다 더 넓고 웅장했다. 그들은 수 채의 전각들을 지나 한 웅장한 건물의 대청 앞으로 다가갔다. 대청 위에서는 나이가 오십대 가량 된 두 명의 노인들이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다가 그들을 맞이했다. "무슨 일인가? 전칠(田七)." 전칠이라 불리운 장한은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아뢰었다.


"이 사람이 방을 보고 찾아 왔다고 합니다." 그 말에 방금 입을 열었던 노인이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오! 마침 잘 되었군. 자네는 그만 돌아가 일을 보게. 그 친구의 일은 노부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네, 알겠습니다." 전칠은 허리를 굽혀 보이고는 뒤로 몸을 뺐다. 아울러 그는 물러가기 전에 영호걸에게 한 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 해 보시오, 귀하." 이르자면 그것은 같이 보내에 머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영호걸도 그 의미를 알고 마주 웃음을 건넸다. "고맙소. 꼭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③ 노인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명호가 어찌 되는가?" 영호걸은 정중히 공수하며 대답했다. "소생은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별다른 명호를 얻지 못했습니다. 승풍이라는 이름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승풍이라......." 노인은 나직이 되뇌이며 새삼 영호걸을 쓸어 보았다. 그의 눈에 일순 작은 출렁임이 일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역시도 행색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은 물론, 상대가 무명인이라는 점까지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듯 했다. 노인은 곧 탁자에 놓인 명부를 펼쳤다. 그는 붓을 들어 승풍이라는 이름을 적더니 다시 물었다. "그래, 사문과 본향(本鄕)은 어디인가?" 영호걸은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어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특별히 사부를 모신 적은 없습니다. 부끄럽습니다만 그저 여기저기에서 눈동냥, 귀동냥으로 몇 수 무예를 배운 것이 전부입니다. 집은 하북(河北)의 석문(石門) 부근에 있습니다." 노인은 처음으로 의혹을 보였다. "사부를 모시지 않았다고?" 하지만 더 이상 묻거나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내 담담한 기색이 되어 명부에 몇 자를 더 기록했다. "좋다. 그럼 자네는 무사(武士)를 지원하려는 것인가?" "네, 미거하지만 그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것이 꿈입니다." "음, 그것은 비단 꿈이 아니다. 본인만 열성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절정의 무사로 커갈 수 있지." 노인은 친절하게도 선배로서의 조언까지 덧붙인 후, 맞은편에 앉아 있는 노인을 힐끗 바라보았다. "호제(胡弟). 이 사람을 데려가 시험해 보게." 지칭된 노인은 앞서의 노인보다는 나이가 덜 들어 보였다. "알겠소이다." 그는 대답한 즉시 대청에서 내려왔다. 이윽고 영호걸은 그 노인을 따라 건물의 뒤로 돌아갔다. 이어 그가 이른 곳은 하나의 연무장(鍊武場)이었다. 근처의 다른 건물 속에서 몇 명의 장한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노인을 보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역시 상급자에 대한 예의는 분명하되 개중에서 비굴해 뵈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호부사령(胡副司令)께서 어인 행차십니까?" 한 장한이 그렇게 물었다. 호부사령이라 불리운 노인은 가벼운 눈인사와 더불어 영호걸을 가리켰다.


"방금 이 친구가 무사로 지원했네. 누가 대련해 보겠나?" 그 말에 한 장한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삼십 세가 채 안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영호걸이 먼저 그를 향해 포권했다. "잘 부탁 드리오. 불초는 승풍이라 하오." 청년도 그를 쳐다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은 이대랑(李大郞)이라는 사람이오. 이 대결은 일종의 관문이나 마찬가지이니 모쪼록 최선을 다 하기 바라오." 그 자는 종남파(終南派)의 대산권법(大山券法)을 쓰고 있었다. 휙! 휘휙--! 제법 위력을 갖춘 경력이 쉴새 없이 몰아쳐 왔다. 영호걸도 양 주먹을 말아쥔 채 이를 상대했다. 그 동안 눈여겨 보아 두었던 강호의 일반 초식들을 두루 쏟아냈던 것이다. 덕분에 그의 손에서는 온갖 잡다한 권법이나 각법 따위가 두서없이 튀어 나왔다. 그에 비하면 이대랑의 대산권법은 한층 체계가 잡혀 있어 승부가 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구멍이 뚫려 버릴 듯한 영호걸의 공세는 놀랍게도 장한의 대산권법과 줄곧 대등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백여 초가 흘렀다. 영호걸은 이때에 약 오성 정도의 내공으로 이대랑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한 순간, 호부사령의 외침이 그의 고막을 때렸다. "멈추어라!" 대결하던 두 사람은 각기 일권씩을 갈기고는 떨어져 섰다. "그만하면 되었다. 합격이다. 이대랑, 자네가 새로운 친구에게 거처를 안내해 주게." 호부사령은 판정을 내린 후, 즉시 영호걸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울러 그는 격려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승풍이라고 했던가? 이제 자네도 자랑스러운 천성보의 무사가 되었다. 앞으로 천성보의 이름을 빛내는데 힘써 주게." 영호걸은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호부사령은 빙긋 웃어 보이더니 왔던 길로 총총히 사라져갔다. 영호걸은 시선을 돌려 이대랑을 응시했다. 그러자 이대랑은 대번에 그의 손을 덥썩 잡으며 활짝 웃었다. "승형, 축하하오. 함께 일하게 되어 기쁘기 그지 없구려. 자, 어서 나를 따라 오시오." "고맙소이다." 잠시 후. 영호걸이 안내된 곳은 기다란 방사(房舍)였다. 그는 개중에서 깨끗한 방 하나를 배정받았다. 방은 대체로 검소하게 꾸며져 있었다. 창가를 면해 침상이 놓여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탁자와 의자 등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으음, 이만 하면 기거하기에는 조금도 불편이 없겠군.' 영호걸은 침상에 걸터 앉았다가 곧 뒤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푹신한 감촉이 등에 닿아 오자 그는 눈을 지그시 내리 감았다. '어찌 된 영문인가? 이상한 점이라고는 도무지 발견해낼 수가 없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그는 잠시 침중한 기색이 되었으나 금세 생각을 바꾸었다. '우선은 자중하자. 아직 초장이니 점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뭔가 성과가 있겠지. 무엇보다 현 강호의 정세부터 파악하고 볼 일이다. 어쨌든 이곳은 명실상부한 정파 최고의 세력권이니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될 수 있으리라.'


그러다 문득 방문 열리는 소리에 영호걸은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돌려 보니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서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십대 중반 가량 되어 보이고 체격이 건장한 황의청년, 그리고 청의를 입었으며 그와 비슷한 또래의 다른 한 청년이었다. 황의청년이 먼저 말을 건네왔다. "조금 전에 이대랑 형(兄)으로부터 들었소이다. 그래, 새로 입문하게 되신 분이 맞소이까?" 영호걸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소이다만 형장들은 뉘시오?" 이번에는 청의청년이 대답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일할 형제들이오. 나는 주성후(朱成候)라고 하며, 곁에 있는 이 사람의 이름은 오개명(吳開明)이오." 영호걸은 두 사람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소생은 승풍이라 하오이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리오." 황의청년 오개명이 쾌활한 어조로 응수했다. "아! 승형이었구려. 반갑소이다. 우리는 승형의 옆 방에서 기거하고 있은즉 이것도 인연이라면 큰 인연이니 잘 지내 봅시다."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으로는 다소 아연했다. '신입자에게 일부러 찾아와 아는 척을 하다니 의외로구나.' ④ 아무튼 세 사람은 침상에 나란히 걸터 앉아 계속 대화를 주고 받았고,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금세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영호걸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한 가지 물읍시다. 거리에 붙어 있는 방을 보고 오기는 했소만, 불초가 이곳에서 하게 될 업무는 대체 무엇이오?" 두 청년은 똑같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럼 그것도 모르고 오셨소?" 오개명의 말에 영호걸은 멋적은 듯 씨익 웃었다. "글쎄, 그것이... 강호에는 초출(初出)인지라......." 주성후가 혀를 끌끌 찼다. "쯧! 아무리 그렇다 해도 강호 소식에 그 정도로 깜깜이었소?" 영호걸은 짐짓 쑥쓰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길래 미리 두 분 형장께 가르침을 부탁드렸지 않소?" 주성후는 그 모습에 되려 사람 좋아뵈는 미소를 가득 머금었다. 그리고는 꽤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내 지금부터 간략하게 알려 드리리다. 승형은 이제 우리와 더불어 각처에 화물을 호송(護送)하게 될 것이오." "지금 화물호송이라고 하셨소?" 영호걸이 되묻자 주성후는 헛기침을 발한 뒤, 종전보다 약간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소. 그것은 어찌 보면 대단히 위험이 따르는 일이오. 반면에 받게 되는 보수는 상당하오." "대체 어떤 경로를 거치기에......?" "주로 양자강(楊子江)을 위시한 수로(水路)외다. 이쯤 말하면 승형도 알 것이오. 즉 수로에는 의례 사파의 도적떼가 출몰하게 마련이라는 얘기요. 후후후......." "으음......." 영호걸은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신음을 발했다. 그것을 본 주성후는 그가 겁을 먹은 것으로 알았는지 대뜸 크게 웃었다.


"하하하... 승형, 그렇다고 너무 골치 아프게 생각할 건 없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천성보로 말할 것 같으면 정파무림의 지주이신 천성대제(天聖大帝) 유화성(柳火星) 노선배께서 세우신 문파요. 그 분이 지시하시는 일인데 어찌 문제가 생길 수 있겠소? 우리는 단지 그 분의 명에 따르기만 하면 되오." 오개명이 옆에서 거들었다. "주형의 말이 맞소. 유노선배는 당금 정파무림의 명숙이시며, 일성(一聖)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존경받는 분이 아니시오? 우리는 그 분 밑에서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오." 그들은 말을 하는 중에도 어느덧 숙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성보의 무사라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일종의 긍지인 것 같았다. 덕분에 영호걸은 내심 쓴 입맛을 다셔야 했다. '음, 이들은 천성대제를 정말로 존경하고 있구나. 하긴 일성의 협명이 하루이틀에 쌓여진 것이 아니니....... 그런데 죽어가던 그 노인은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남긴 것일까?' 그는 잠시 생각을 중단하고 다시 물었다. "언제 쯤이면 불초도 그 화물 호송에 따라가게 되겠소?" 주성후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 일은 일정치가 않소. 어떤 때는 한 달에 한두 번, 또 어떤 때는 몇 달 동안 주욱 일이 없기도 하오." "하하... 무슨 걱정이오? 천성대제의 후한 인심 덕에 일이 있으나 없으나 보수는 꼬박꼬박 지불되거늘, 신경 쓸 것 없지 않소?" 오개명의 유쾌한 음성을 듣자 영호걸은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야 불초도 뭐......."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대소를 터뜨렸다. 한참 뒤, 분위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주성후가 입을 열었다. "승형은 이제부터 제십이향주(十二香主)의 휘하에 들게 될 것이오. 물론 우리와 같은 소속이외다." 오개명이 보충해서 설명했다. "천성보의 지휘체계는 엄밀하오. 제일 높은 분은 물론 보주이신 천성대제 유노선배이시고, 바로 그 아래로 총관(總官)이신 신안(神眼) 나선학(羅仙鶴)이라는 분이 계시오." "신안이라면......?" 영호걸이 궁금한 빛을 보이자 구변 좋은 주성후가 이를 받았다. "신안 나총관께서는 사십 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무공이 이미 신의 경지에 도달하셨소. 그 분의 이십사초 절호선법(絶豪扇法)은 강호에서 널리 위명을 떨친 바 있소.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분의 뛰어난 점은 초인적인 기억력과 지혜일 것이오." "아! 그래서 그런 별호를 갖게 되셨구려." 영호걸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연이어 물었다. "그럼 그 분의 사문은 어찌 되시오?" 오개명은 자못 엄숙한 신색이 되어 말했다. "승형은 혹시 학선자(鶴仙子)라는 명호를 들어본 적이 있소?" 영호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떠 보였다. "그 분은 당금 무림의 최고봉이신 일선(一仙)이 아니시오?" "그렇소이다. 나총관께서는 바로 일선 학선자 노선배의 수제자시오. 그 분은 연전에 우내사괴(宇內四怪)의 한 명인 흑살귀검(黑殺鬼劍)과 대결했는데, 양자간의 실력이 막상막하였다 하오." 영호걸은 은연중 가슴이 섬뜩해지는 기분이었다. '흑살귀검은 벌써 백 세에 가까운 노마두(老魔頭)이다. 신안 나운이 아무리 일선의 수제자라고 하지만 어찌 그 자와 평수를 이룰 수 있었단 말인가?'


그의 얼굴에 어린 회의를 눈치 챘는지 주성후는 웃음을 흘렸다. "하하... 아마도 승형으로서는 믿기 힘들 거요. 그러나 그 일은 이미 당시에 전 무림을 경동시킨 바 있소." 영호걸은 한숨과 더불어 짐짓 풀죽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나총관 밑으로는 또 어떤 사람들이 있소이까?" 주성후가 운을 떼었다. "오대당주(五大當主)와 십이향주(十二香主)가 있소." 그러자 오개명이 웃는 얼굴로 그 뒤를 이었다. "우리 세 사람은 모두 마지막인 십이향주, 즉 과강룡(過江龍) 노렴(盧廉) 선배의 지시를 받게 되어 있소이다." 영호걸은 지대한 호기심을 드러내 보였다. "그 분의 무공은 어느 정도요?" "열두 분 향주께서는 하나같이 강호의 일류급 고수들이시오. 물론 노향주께서도 일신에 놀라운 무공을 소지하고 계시오." 영호걸은 갑자기 생각난 듯 불쑥 물어 보았다. "그런데 보주께는 후사나 제자가 없소이까?" 오개명은 고개를 흔들었다. "없소. 다만......." 주성후가 문득 만면에 야릇한 미소를 띈 채 대답했다. "후후...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영애가 한 분 계시오. 유청청(柳晴晴)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저인데, 보기만 해도 정신이 아찔할 정도의 미인이오. 더구나 노보주께 무공을 전수받아 절정의 기예를 익히고 있소. 이르자면 재모(才貌)를 겸비한 일대 기녀(奇女)요." 그는 의식적으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있었다. 곁에서 오개명까지도 은근한 어조로 덧붙였다. "어떻소, 구미가 당기지 않소? 승형의 얼굴도 만만치 않은 미남이니 잘 보여서 유소저의 관심을 끌기만 하면......." "출세야 따놓은 당상이지. 크크큭!" 영호걸은 그들로부터 놀림을 당하자 얼굴을 붉혔다. "두 분께서 자꾸 이러시면 이 신참은 대체 어쩌란 말이오?" "핫핫핫... 서로 웃고 즐기자는 것 아니외까? 하하하......." 세 사람은 농담을 통해 그야말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영호걸은 천성보 하급자들의 동료애(同僚愛)에 생각보다 쉽게 침잠해 갈 수 있었다. - 다음 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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