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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륜공자 제 5 권 검궁인 저

40 장 회생(回生) 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옥잠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얼음장처럼 차던 진우명의 몸은 서서히 온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온기를 되찾음에 따라 푸르게 변해가던 옥잠의 몸도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옥잠은 점덤 더 탈진되어갔다. 마침내 그녀의 몸은 땀으로 흠씬 젖어들었다. 그때였다. 문득 그녀는 진우명의 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할아버지! 가가가 움직였어요!" 밖에서 침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환혼신단을 입에 넣어 녹인 후 그에게 직접 복용시켜라. 그리고 약력이 퍼지도록 계속 추궁과혈해라. 그런 다음......." 구불리의 음성이 멀어졌다. 그는 다른 곳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옥잠은 그런 것에 신경쓰지 못했다. 옥잠은 급히 구불리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녀는 급히 환혼신단을 입 속에 넣었다. 그러자 이루 말할 수 없는 향기와 함께 환혼신단은 곧 녹았다. '어서 이것을.......' 그녀는 다시 진우명의 몸에 자신의 몸을 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옥잠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고 말았다. 그것은 온기를 되찾은 남자의 알몸과 접촉한 전신 피부에서 느껴지는 것이었다. 옥잠은 한 번도 남자 경험이 없는 지순한 처녀지신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전라가 된 모습으로 역시 전라의 사나이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닿아 있었다. 지금까지는 남자라기보다는 차가운 석상을 끌어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진우명이 체온을 되찾자 느낌이 달라졌다. 그녀는 살과 살이 맞닿은 모든 부분에서 뜨겁게 열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은 아찔할 정도의 현기증을 유발시켰다. 동시에 전신의 피가 빠르게 돌면서 알 수 없는 야릇한 쾌감이 일어났다. 특히 진우명과 맞닿은 아랫배 쪽의 느낌은 그녀로 하여금 당혹을 금치 못하게 했다. 그녀는 마침내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옥잠은 급히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는 급히 진우명과 입술을 포개었다. 그녀는 진기를 동원해 환혼신단의 영액을 진우명의 목구멍 깊숙히 밀어 넣었다. 꾸르르륵....... 진우명의 목젖 속으로 영액이 흘러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옥잠은 진우명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이어 혼신의 힘을 다해 추궁과혈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렀다. 옥잠의 나신은 완전히 물에서 건져낸 듯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땀에 젖은 그녀의 육체와 진우명의 육체가 찰싹 맞붙은 채 마찰되고 있었다. '아......!' 마침내 옥잠은 온몸이 불덩이가 된 채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깨물었다. 차츰 그녀는 애욕(愛慾)의 감정에 빠져 들었다.


마침내 그녀는 진우명의 몸을 끌어안고 전신을 비틀어대기 시작했다. 땀으로 미끈거리는 남과 여의 육체가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며 꿈틀댔다.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 기적과도 같은 일이 그 순간 일어나기 시작했다. 칠흑같이 검던 진우명의 피부가 서서히 탈색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지날수록 탈색의 속도는 더 빨라졌다. 한 식경이 지났다. 마침내 진우명의 피부는 백옥같이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하지만 옥잠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채 뜨거운 감정에 빠져 몸부림치고 있었다. "으음. 가가... 진가가......." 그녀는 불타오르는 육체를 억제하지 못하고 사나이의 육체를 끌어안은 채 온몸을 마구 비틀었다. 바로 그때였다. 한순간 진우명의 무심한 듯한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용모가 바뀌었다. 변화된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 옥잠이 알고 있던 진우명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준하면서도 외로움이 가득 차 있는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역용이 풀리면서 돌아온 얼굴은 바로 백천강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 백천강은 눈을 뜬 순간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어 놀람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벌거벗고 있을 뿐더러 그의 몸 위에서 역시 발가벗은 옥잠이 업드린 채 전신을 애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리둥절했던 마음은 순간일 뿐이었다. "흐음!" 백천강은 뜨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일단 의식을 되찾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전신의 혈관이 무섭게 팽창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알몸의 여인이 땀에 젖은 채 온몸을 마찰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수양이 깊은 고승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욕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백천강은 강한 색기가 체내에 내재되어 있는 몸이었다. 마침내 그는 옥잠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아!" 옥잠은 그가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기자 전신을 바르르 떨며 경련했다. 놀랄 사이도 없었다. 아니 그녀는 이미 욕정으로 인해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사나이가 허리를 끌어당기자 더욱 적극적으로 그의 몸에 자신의 육체를 바짝 들이 밀었다. 문득 그녀의 몸이 약간 위로 들려졌다. 백천강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 올린 것이다. 그 바람에 그녀는 백천강의 배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되었다. 문득 옥잠의 입이 딱 벌어졌다. "악!" 짤막한 비명이었다. 순간적으로 옥잠의 아름다운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파과(破瓜)의 아픔이 그녀의 전신을 파르르 떨게 했다. 그러나 백천강은 그녀의 몸을 거칠게 끌어 당기고 있었다. 옥잠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고통의 눈물인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으로 인한 감정이 만든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설마 이렇게까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뗄 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파과의 아픔은 잠시뿐이었다. 차츰 육체의 깊은 곳으로부터 서서히 번져오르는 무서운 쾌락에 옥잠은 신음을 흘리며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옥잠은 육체의 모든 곳에서 터져 오르는 환희의 느낌에 동화되고 말았다. 그녀는 마침내 흐느끼고 있었다. 어느덧 자세는 바뀌어져 있었다. 백천강은 육중한 몸으로 가냘픈 옥잠의 육체를 누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육체는 서로간에 흘린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마침내 옥잠은 육신 깊은 곳으로부터 통렬하게 폭발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느낌은 너무나도


황홀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득한 나락으로 추락하다가 눈부신 빛으로 화해 하늘을 두둥실 날아가는 듯한 환상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다시 끝없는 나락 속으로 불현듯 추락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절정의 끝에 도달했다. 활처럼 휘어지던 두 사람의 허리가 한순간 경직되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축 늘어지고 말았다. 가쁜 호흡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쾌락의 여운은 달콤하면서도 나른하기만 했다. "으음... 가가......." 그녀는 감았던 눈을 파르르 경련하며 진우명을 불렀다. 그리고는 눈을 떴다. 그때였다. "앗!" 옥잠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눈 속에는 공포와 절망이 떠올라 있었다. "악! 다... 당신은?" 옥잠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 급히 주먹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온몸의 피가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아니었다. 상대는 그녀가 생각한 진우명이 아니었다. 진우명 보다 더 영준하기는 했지만 결코 진우명은 아니었다. 이때 백천강은 그녀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 그는 옥잠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옥잠. 그동안 잘 있었소?" "아!" 옥잠은 절망 속에서 바르르 전신을 떨었다. 사내의 얼굴은 분명 낯설었다. 하지만 그 음성만큼은 꿈에서도 잊지 못했던 사내의 목소리가 아닌가? "다... 당신은 누구예요?" 옥잠은 젖가슴을 가리며 일어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역력했다. "하하! 내 음성도 모르겠소?" 백천강의 얼굴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 옥잠은 변화해가는 백천강의 얼굴을 바라보며 얼굴을 수십 번이나 바꾸었다. 어느새 낯선 사내의 얼굴은 진우명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아... 진가가! 흐흑흑!" 마침내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백천강의 품에 안겼다. 백천강은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사악한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그 기운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내면 깊숙히 스며들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백천강은 옥잠을 안은 채 약실을 기이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내심 중얼거렸다. '극락십령에게 이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던 것이 적중했구나. 독심절의가 아니면 그 누구도 나를 되살려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그가 날 구했구나.' 백천강. 그는 정말 치밀한 위인이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극락십령에게 통심술(通心術)로 이런 일을 안배해 두었던 것이다. 문득 백천강의 눈썹은 파르르 떨렸다. '혈천마국주! 그 자의 마공이 그토록 엄청날 줄은 몰랐다. 내 비록 탈진상태이기는 했지만 기환만겁윤회마공이 그토록 무참히 꺾일 줄은 몰랐다.' 백천강은 계속 생각을 가다듬어 갔다. '뜻밖에도 그의 등장으로 대혈륜궁은 패망했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사라졌구나.'


백천강의 담담하던 눈은 서서히 차가운 빛을 발했다. 그것은 살기였다. '갈천기. 네가 어떻게 혈천마국을 장악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당하고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기필코 네 놈에게 복수를 하겠다. 그것도 아주 철저히!' 백천강의 입가에 뼈를 얼리는 냉기가 감돌았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네 놈의 숨통을 조이겠다. 네 놈이 비록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해도 나 백천강이 살아 있고... 내게 십령이 있는 한 어림없는 일이다.' 이때였다. "어맛!" 돌연 옥잠이 비명을 질렀다. 약실 안으로 구불리가 의자를 굴리며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아이... 몰라요. 할아버지!" 옥잠은 적나라한 모습으로 백천강의 품에 안겨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체이기는 백천강도 마찬가지였다. "흐음, 험!" 구불리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헛기침을 연신 발하며 도로 물러나갔다. 백천강은 손을 뻗어 옥잠의 고개를 치켜들었다. "......!" 옥잠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이 들고 말았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가가. 정말 돌아와 주셨군요." 백천강은 묵묵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잠시 후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의 음성은 달콤하기만 했다. "옥잠, 그동안 여인이 다 되었군." "몰라요." 옥잠은 부끄러운 듯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그때였다. 불현듯 그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어멋! 그게 뭐예요?" 그녀는 질겁을 했다. 고개를 숙이다가 백천강의 하체에 달린 우람한 남성을 본 것이다. "하하! 바로 옥잠을 즐겁게 해준 물건이지." 백천강은 웃으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지... 징그러워요!" 옥잠은 금방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도리질을 했다. "하하하......!" 백천강은 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약실이 떠나가듯 마음껏 웃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의 두 눈에는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마가 극에 이르러 오히려 마의 기운이 안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었다. 이제 백천강은 극마지체(極魔之體)가 되어 버린 것이다. ② 독황경(毒皇經). 그것은 독문의 최고지보였다. 독문은 크게 나뉘어 두 갈래로 파생되었다. 북독문(北毒門)과 남독문(南毒門)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남독문은 마도팔곡(魔道八谷) 중 천독곡(天毒谷)으로 계승되었다. 중원무림인들은 남독문을 가리켜 독황문(毒皇門)이라고 불렀다. 그런 독황문의 최고지보가 바로 독황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독심절의 구불리에게도 전승되었다. "......." 백천강은 독황경을 받아들고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구불리의 부름을 받고 내실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것을 왜 제게 주시는 겁니까?" 백천강은 놀란 듯이 물었다. 구불리는 탄식했다. "노부는 이미 늙었네. 그러므로 독황문을 계승해줄 인재가 필요하네. 뿐만 아니라......." 구불리의 눈빛은 돌연 기이하게 빛났다. 그는 백천강을 쏘아보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몸 속에 기이한 암류를 느끼지 않는가?" 백천강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독기(毒氣) 말입니까?" "그렇네. 그것은 만독투골역신대법(萬毒透骨逆身大法)으로 흡수된 만루지기이네. 자네는 독문사상 최고의 경지인 독중성(毒中聖)의 경지에 이미 올라 있네. "독중성!" 백천강은 눈썹을 움직였다. "그러기에 더욱 독황경을 넘기려는 것이네. 독황경을 익힌다면 자네는 독문최고의 고수가 될 수 있네." 그때였다. 백천강의 눈빛이 기이하게 움직였다. '독중성! 좋다. 어떤 방법이든 그 놈을 꺾을 수만 있다면 취하리라.' 백천강은 몸을 일으키더니 절을 했다. "제자 진우명, 사문을 받들겠습니다." 백천강은 여전히 진우명 행세를 하고 있었다. 옥잠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불리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허허! 노부는 네가 범상치 않은 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너의 몸에 흐르는 기도는 너무도 위악적이구나.' 구불리는 옥잠을 바라보며 내심 탄식했다. 그녀는 한쪽에 선 채 정(情)을 담뿍 담은 눈으로 백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단 한순간도 백천강을 떠나지 않았다. '단지 저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널 용납하는 것이다. 어떻게 되든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옥잠이 불행해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구불리는 눈을 감았다. 이어 그는 냉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독황경을 연마해라." "알겠습니다." 백천강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구불리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신세내력에 대해 묻지 않는 지를. 그것은 바로 옥잠 때문이었다. 백천강은 그날부터 독황경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독문의 사람들이 꿈에서도 갈망하는 독중성의 몸이었다. 따라서 독황공을 연마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시독부골천황공(屍毒腐骨天荒功), 묵옥혈독기(墨玉血毒氣), 삼색고루음혈공(三色孤壘陰血功), 천황만독강(天荒萬毒 ), 화혈연혼수(化血煉魂手)....... 독황경에 기재된 독공은 가히 개세무비적이었다. 그곳에는 모두 칠백이십종의 독공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중 한 가지만 익혀도 능히 무림을 독천하 할 수 있었다. 백천강은 그 독공을 하나씩 익혀나갔다. 그러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독공들이 존재하다니! 대체 이 독공들을 지니고도 왜 무림의 대문파(大門派)가 되지 못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백천강이 모르는 소리였다. 독황경상의 독공들은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사 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체내에 필히 만독지기를 지니고 있어야만


대성할 수 있는 절공들이었다. 그러니 웬만한 무공 실력으로서는 독황경의 절세독공들이 빛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독심절의는 평생을 독공보다는 독술과 의술에 전념해 왔기에 독문으로써 이름을 날리지 못한 것이었다. ③ 그로부터 다시 반 년이 흘렀다. 백천강이 극락십령에 의해 황산으로 온 지 어언 일 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초옥으로부터 오십 리 가량 떨어진 동쪽. 오가는 인적 하나 없는 그곳에는 울창한 죽림이 자리잡고 있었다. 푸르른 죽림은 지금 하얀 눈의 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연이어 선 대나무들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대나무들은 결코 부러지지 않았다. 부드럽기 짝이 없는 하얀 눈송이들의 무게와 대나무들의 부드러운 탄력이 이루어내는 절묘한 조화. 그 광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깊으면서 그윽한 수묵화를 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 문득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일까? 느닷없이 한 인영이 죽림 앞에 나타났다. 인영은 마의를 걸친 영준한 청년이었다. 그는 다름아닌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지극히 초탈한 모습이었다. 그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눈으로 뒤덮인 죽림을 바라 보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스스스....... 어느 순간 그의 몸은 묵기(墨氣)에 감싸이는 것이었다. 묵기는 서서히 짙어져갔다. 그리고 백천강은 마침내 하나의 묵기덩어리가 되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천황만독강!" 그의 입에서 무심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찰나지간 한 가닥 무형(無形)의 기운이 죽림으로 뻗었다. 그 기운은 참으로 허무로와 보였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스스스스스....... 처음에는 설빙으로 뒤덮인 죽림 전체가 돌연 시커멓게 타죽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분명 열기도 없었고 바람도 없었다. 죽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아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삽시에 방원 백 장의 죽림은 완전히 녹아버리고 말았다. 단 한 번의 독공 시전으로 백 장 넓이의 죽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스슷! 묵기로 화했던 백천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드러났다. 대단히 만족스런 미소였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독황경상의 모든 독경을 연성했다. 칠백이십종의 진수를 익히는데 칠 개월이 걸렸다." 백천강은 문득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는 하늘을 바라 보았다. 겨울이 물러가려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는 투명한 겨울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떠나야 할 때다. 녹슨 대혈륜을 다시 굴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백천강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환혼신단 덕분에 기환만겁윤회마공이 십 성을 넘어섰다. 갈천기 그 자와 자웅을 겨룰만 하다." 중얼거리던 그의 모습이 유령처럼 사라졌다. "......." 극락십령.


그들은 처음 황산에 당도할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 장승처럼 서 있었다. 백천강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극락십령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십령, 이제 너희들이 마음껏 움직일 때가 되었다. 그동안 잘 참아냈다." "크크크......." 극락십령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일 년여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그들의 마기가 뒤섞인 신음 속에는 뜻밖에도 반가움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 백천강은 잠시 모옥을 돌아보았다. 그런 후 그는 극락십령을 향해 팔을 들었다. "가라. 가서 기다려라." 백천강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스스슥! 돌연 극락십령의 신형이 미동도 없이 떠올랐다. 그들은 망부석처럼 일 년여 동안 서 있던 자리를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그리고는 눈 감짝할 사이에 동편 하늘로 멀어져갔다. "크크크크......." 마기에 찬 극락십령의 울부짖음이 황산 너머로 사라졌다. 그때였다. 모옥의 문이 열렸다. 의자에 앉은 구불리가 모습을 나타냈다. 구불리의 뒤에는 옥잠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가가!" 그녀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옥 안에서 조금 전의 일을 모두 본 것이다. 그 순간 옥잠은 예감했다. 진우명과의 이별이 멀지 않다는 것을. 구불리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떠나려고 하는가?" 백천강의 눈빛이 기괴하게 흘렀다. "그렇습니다." "가가!" 옥잠이 울먹였다. 구불리는 입을 열었다. "자네가 떠난다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네. 하지만 한 가지 약속을 해줘야 겠네." "......?" "언제고 일이 끝나면... 이곳으로 돌아와 주게." "......." 백천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무어라고 입을 열어야 할지 몰랐다. 그로서는 자신의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구불리는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의 후세를 위해 돌아와 달라는 말일세." 구불리의 말이 끝났다. 백천강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의아한 눈빛으로 구불리를 향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구불리는 부드러운 눈초리로 옥잠을 잠시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백천강에게 말했다.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나? 옥잠은 이제 홀몸이 아니네." "......!" 백천강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급히 옥잠을 바라보았다. 옥잠은 그의 눈길을 받자 울음을 터뜨렸다. "흐흑.... 가가!" "......!"


백천강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옥잠은 울먹이며 한동안 어깨를 떨었다. 마침내 백천강의 입이 힘겹게 떼어졌다. "정말이오?" "네." 옥잠은 고개를 떨구며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음!" 백천강은 신음성을 토해내며 비틀거렸다. 그는 구불리의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을 직접 들었을 때에는 그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내게 아이가 생기다니.... 그럼 나는 아버지가 된다?' 백천강은 내심 소리쳤다. 백천강은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막상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사실이 현실로 닥치는 순간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것은 혈천마국주를 무너뜨리고 새로이 혈륜천하를 이룩하는데 커다란 장애물임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게 후세(後世)가 생기다니......" 이때였다. 구불리는 의자를 굴려 백천강 앞으로 다가왔다. 이어 그는 백천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네의 일신에는 복잡한 은원이 얽혀 있네. 노부는 그것을 잘 알고 있네. 그런즉 모든 것을 해결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오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서 말일세." "아버지라고... 내가......?" 백천강은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구불리는 백천강의 손을 놓고 몸을 돌렸다. "기다리겠네. 노부는 자네에게 인성(人性)이 남아있다는 것을 믿네. 꼭 돌아오게나." 구불리는 말을 마쳤다. 그는 백천강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모옥으로 의자를 굴렸다. "......." 백천강은 모옥 안으로 사라지는 구불리를 멍하니 바라 보았다. 그때였다. "흐흐흑! 가가.... 꼭... 꼭 돌아오세요!" 옥잠은 세차게 흐느끼면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모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는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 백천강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41 장 죽음의 신(神) ① 한 마디로 암흑무림의 시대였다. 혈천마국이 중원무림을 장악한 이후 천하정도는 그 정체성(正體性)을 상실하고 말았다. 무림구대세가를 비롯하여 구파일방, 소림사 등의 고유한 문화와 무공은 모두 사라지고 만 것이다. 당금 무림은 오로지 하나의 사고방식과 하나의 법만 있었다. 세인들은 그것을 가리켜 혈사혈법(血思血法)이라고 이름지었다. 이제 모든 중원의 무림인들은 혈사혈법만을 준수하고 따라야 했다. 혈사혈법을 쫓는 자들은 혈건혈대(血巾血帶), 즉 붉은 머리띠와 붉은 허리띠를 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혈천마국의 수하임을 드러내는 표식이었다. 심지어는 명문대파의 인물들도 혈건혈대를 둘렀다. 객점이건, 기루이건, 도박장이건 온통 붉은띠 천지였다. 바야흐로 천하는 온통 적색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태백산(太白山). 태백산은 섬서성의 남쪽에 위치한 산이었다. 태백산은 그 이름처럼 크고 하얀 봉우리를 여럿 가진 산이었다. 봉우리가 하얀 것은 사시사철 눈이 쌓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 산이 여느 산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태백산 꼭대기에 여러 개의 굴로 이루어진 장원이 하나 있었다. 그 장원은 바로 전진파(全眞派)의 본부였다. 전진파는 천오백 년 이상의 전통을 이어받은 도문(道門)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전진파는 인재난으로 인해 서서히 몰락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전진 일맥이 불과 몇 달 전부터 타오르는 불꽃처럼 눈부신 영화를 누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진파가 혈천마국의 속파가 되면서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이제 전진도관이라는 현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새로이 혈천마국의 속파가 된 전진도관에는 새로운 현판이 내걸렸다. 그것은 하얀 대리석에 붉은 글씨로 아래와 같이 새겨진 것이었다. <혈의교(血衣敎) 전진지부(全眞之部)> 전진우사(全眞羽士) 당송우(唐松雨). 그는 당대 전진도관의 관주였다. 당송우는 전진도관을 혈의교에 부속시킨 장본인이었다. 물론 많은 전진도인들의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도대로 밀어붙였다. 당송우가 전진도인들을 설득한 논리는 한 가지였다. 몰락해가는 전진도관을 새로이 일으켜 세우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변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원로 도인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당송우는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살해하기로 마음 먹고 측근을 이용해 서서히 일을 꾸며나갔다. 과연 당송우의 독계는 효과가 있었다. 아무리 지고불변의 도라고 할지라도 목숨과는 바꿀 수가 없는 법이 아닌가? 결국 원로들은 목숨과 노후의 영화라는 미끼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진교는 혈의교의 한 분파가 되고 만 것이다. 당송우의 예측은 적중했다. 전진교는 혈의교로 개명한 혈천마국의 지부가 되면서 위세를 십 배 이상 늘린 것이었다. 이제 전진교는 이전의 몰락해가던 전진교가 아니었다. 중원을 제패한 혈의교의 막강한 한 지부였다. 마침내 전진우사 당송우는 혈의교 전진지부장이 되었다. 그의 위력은 막강했다. 이제 그는 섬서는 물론이거니와 중원 서쪽의 패권을 장악하다시피 한 것이다. 그날 이후 전진도관이 세워진 태백산은 온통 혈의천지였다. 중원 서쪽의 각 대문파는 물론이려니와 각 지방의 패주, 웅주들은 다투어 전진우사 당송우에게 선물 등을 갖다 바쳤다. 그 행렬이 태백산에 줄을 이을 지경이었다. 삼월 초였다. 초춘(初春)의 기운이 태백산 기슭을 연홍빛으로 감싸는 계절이었다. 이제 태백산에도 완연한 봄기운이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햇살이 따사롭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그런 날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 혈의교 전진지부 앞에 괴객들이 나타났다. 괴객들의 등장으로 전진지부 앞은 때아닌 냉기가 감돌았다. 괴인들은 모두 열한 명이었다. 열 명은 죽립을 쓴 흑의인들이었다. 다만 나머지 한 명은 흑의인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는 백의를 입은 서생이었다. 그들의 전신에서는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으스스한 냉기와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멈춰라!" 한 장한이 목청을 높였다. 그는 이마와 허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정문에서 방문객들을 정리하던 차에 그들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지른 것이다. "......." 괴객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씩의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다만 백의서생만이 빈손이었다.


장한은 백의서생에게 윽박지르듯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백의서생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본인은 극락서생이라 하오. 이 자들은 본 서생의 서동(書童)들이오." "극락서생?" 장한은 순간적으로 목을 움추리며 되물었다. 웬지 섬뜩한 느낌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왔느냐?" 장한은 짐짓 거칠게 물었다. 극락서생은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평소에 관주님을 흠모하던 차 지나는 길에 작은 선물을 들고 왔습니다. 전갈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장한은 그때서야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그래?" 장한은 탐욕스런 시선으로 극락서생과 열 명의 흑의인들이 들고 있는 보따리를 힐끔거렸다. "이리 내놓아라. 관주님께 통보하겠다." 극락서생은 빙그레 웃었다. 그의 웃음은 장한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극락서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겸손히 말했다. "워낙 진귀한 물건인지라 관주님께 직접 전달해야 합니다." 장한은 느닷없이 자신의 가슴을 쳤다. "날 못믿는 거냐? 이래뵈도 본인은 섬섬일협으로......." 그때였다. 느닷없이 그의 귓전에 으시시하고 차디찬 음성이 들렸다. "섬서일흉이겠지!" 찰나지간 장한의 안색이 홱 변했다. "뭐, 뭐라고 그랬느냐?" 극락서생은 태연했다. "선물은 반드시 관주님께서 직접 받아보셔야 합니다." 장한은 금방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때였다. 극락서생은 품 속에서 누런 황금 한 알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는 황금을 장한의 손에 쥐어주며 은밀하게 말했다. "부탁입니다. 대협." 장한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조, 좋다. 어르신이 특별히 봐주는 거다. 어서 들어가라." 장한은 급히 황금을 소매 속으로 쑤셔 넣었다. "하하! 고맙습니다." 극락서생은 낭랑한 웃음을 흘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열 명의 흑의인들도 보따리를 받쳐든 채 극락서생을 따라 조용히 들어갔다. "헤헷!" 장한은 입이 찢어진 채 만족스런 웃음을 흘렸다. 이어 그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떠벌였다. "여보게들 오늘 횡재를... 헉!" 찰나지간 그는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출입문을 관리하던 열 명의 동료들이 어느새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츠츠츠.... 어느새 동료들의 몸은 시커먼 흑수로 녹아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 대... 대... 체......." 장한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엄청난 공포 탓이었다. 그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벌벌 떨었다. 장한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꿈이길 간절히 바랬다. 어떻게 멀쩡하던 동료들이 별안간 시커먼 물로 녹아버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였다. "허억! 소... 손이... 으아악!" 장한은 기겁하듯 비명을 내질렀다. 황금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문제였다. 그의 손은 어느새 시커멓게 변색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으흐흑! 사... 사... 사람 살... 으아악!" 장한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어느새 손마디 끝이 흐물거리며 녹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가락에 이어 손바닥이 흐물거리며 녹아들기 시작했다. 뒤어어 팔이 녹아들었다.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광경이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장한은 경악으로 부르짖었다. 그는 더이상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자신의 입마저 녹아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장한은 자신의 몸이 녹아드는 것을 보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쿵! 미처 녹지 않은 몸뚱아리가 벌렁 넘어졌다. 마침내 장한의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줌 독수로 녹아들고 말았다. 그가 애당초 이곳에 존재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괴, 괴변이다!" "으흐흐흐! 귀, 귀신이닷!" 전진도관을 찾아온 방문객들은 혼비백산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다. 마침내 그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② 전진헌(全眞軒). 전진헌은 전진도관을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이하는 장소였다. 지금 전진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언뜻 보기에 방문객들의 표정은 근엄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본다면 그들의 얼굴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비굴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 방문객들은 지금까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섬서성 일대에서 꽤나 영향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정파인도 있었고 흉마들도 있었다. 그들이 찾아온 목적은 간단했다. 혈의교에 가입을 부탁하거나 섬서일대의 이권을 얻으려고 청탁하러 온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진헌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다. 전진헌은 점차로 복잡해져갔다. 그러나 중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오후가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백여 명에 달하는 방문객들은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서서히 중인들의 얼굴에 짜증이 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감히 내색을 할 수 없었다. "......." 그들 가운데 십인의 흑의인들이 서 있었다. 흑의인들은 비단 보따리 하나씩을 든 채 일제히 한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바로 극락십령이었다. 극락십령의 전신에서는 으스스한 냉기가 풍겼다. 그러나 그들을 이끌고 온 극락서생 백천강의 모습은 전진헌에 없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침전 안에서는 요사스러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그것은 남녀의 원초적인 신음성이었다. 비릿한 신음성은 점차로 고조되고 있었다. 벌건 대낮에


터져나오는 열락의 신음성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자명했다. 지금 침상 위에서는 정사에 몰두하는 두 남녀가 있었다. 남자는 다름아닌 전진우사 당송우였다. 당송우는 벌거벗은 채로 풍염한 육체를 지닌 삼십대의 여인을 찍어누르고 있었다. 여인은 연신 신음성을 토해내며 당송우의 팔을 세차게 물어 뜯었다. 그러자 당송우는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 듯 입을 벌리며 신음을 발했다. 자세히 보니 그의 팔뚝에는 여러 개의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당송우는 능숙하게 여인을 공략했다. 그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여인은 자지러질듯한 교성을 발하고 있었다. 여인은 다시 그의 팔뚝을 사정없이 물어 뜯었다. 그러자 당송우는 큰소리를 발하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쾌락의 절정에 도달한 것이다. "휴우!" 당송우는 천장을 향해 벌렁 누운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에는 아직도 몽롱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문득 그는 이빨자국이 여러 개 나있는 팔뚝을 어루만졌다. 그런 그의 표정에는 자랑스럽고도 흡족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흐응...." 여인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묘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당송우와는 달리 아직도 만족을 하지 못한 듯 했다. 여인은 자신의 손톱으로 스스로의 젖꼭지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톱은 기이하게도 검은 물이 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발톱도 마찬가지였다. "호호호......!" 문득 여인은 음탕한 교소를 흘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검은 손톱으로 당송우의 앞가슴을 긁으며 입술을 열어 교태롭게 말했다. "흐흥, 당우사. 본파의 충직한 수하가 되어 이런 환락을 마음껏 누리니 기분이 어때요?" 여인의 목소리에는 비음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음성은 그 때문에 매우 색스럽게 들렸다. 당송우는 황급히 말했다. "적갈선(赤褐仙) 사자(使者). 속하는 교주의 하해같은 은덕에 감격할 따름이오!" "호호호!" 적갈선은 큰소리로 웃었다. 이어 그녀의 손이 당송우의 하체를 향해 뻗어 내려갔다. "으음." 당송우는 눈을 감고 야릇한 신음을 발했다. 풀이 죽어 있던 그의 하초가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표정을 바로 잡더니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만.... 전진헌으로 가야 하오." "호호호! 그 쓰레기같은 작자들 때문인가요? 이번엔 쓸만한 물건이 들어 올까요?" 적갈선은 커다란 젖가슴을 덜렁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옷을 걸치던 당송우의 안색이 약간 일그러졌다. "호홋! 이번에 본교에 돌어가면 당우사의 실적을 보고하겠어요. 그럼 틀림없이 교주께서 상을 내리실 거예요." "고... 고맙소이다. 적갈선. 그럼......." 당송우는 황급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마치 무엇인가에 쫓기는 것만 같았다. "호호호......!" 적갈선은 음소를 흘리며 침상에 벌렁드러 누웠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녹림(綠林)의 일개 탕녀에 불과했다. 그녀는 원래 일곱 명의 남편을 둔 문파족의 여인이었다. 문파족은 원래 모계(母系) 사회로 한 명의 여인이 여러 명의 남편을 거느리는 것이 풍습이었다. 적갈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는 무려 일곱 명의 남편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의 남편들이 모두 도망을 가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이었다. 그녀의 끝도 없는 욕정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하룻밤에 일곱 명의 남편들과 정을 통하고도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들은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대낮에는 사냥을 나가 짐승을 잡아 바쳐야 했다. 뿐만 아니라 집안 청소와 요리, 빨래, 온갖 잔심부름까지도 그들 차지였다. 더구나 밤에는 또 아내의 육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밤잠을 설쳐야만 했다. 그야말로 노예의 생활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적갈선의 남편들은 작당을 했다. 그리고 한 날 한 시에 야반도주를 하고 만 것이었다. 적갈선은 그만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르고 말았다. 마침내 그녀는 도망친 남편들을 잡아온다는 이유로 고향을 떠나 중원에 오게 되었다. 그녀에게 중원이란 곳은 뜻밖에도 삶의 새로운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그녀는 중원에서 새로운 쾌락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 쾌감은 과거 일곱 명의 남편과 나누던 정사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그녀는 녹림당에 들어가 탕녀로써의 삶을 즐기게 된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원하기만 하면 하루종일 만족스런 정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차 결국 혈의교의 사자가 된 것이다. "호호호! 정말 재미있는 세상이야." 침상에 드러누운 그녀는 자신의 젖가슴을 주무르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또다시 쾌감이 밀려들었다. 정말로 타고난 음부였다. 문득 방 안으로 한 가닥 바람에 흘러드는 듯 싶었다. 적갈선은 미세한 경풍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누구... 악!" 적갈선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푹!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새하얀 손 하나가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세상이라고? 극락서생이 널 극락으로 보냈으니 앞으로는 극락의 재미나 맛보며 살아라." 싸늘한 음성을 남기며 한 가닥 흐릿한 백영이 방 안에서 사라졌다. 살랑! 바람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낮의 사신(死神)은 그렇게 찾아들었다. 사신의 흰 손은 전진도관의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것은 춘풍에 꽃잎이 떨어지듯 그렇게 뻗었다. 사신의 손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앵두꽃잎 같았다. 그러나 차가운 꽃잎이 전진도인의 몸에 닿았을 때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 한순간에 시뻘건 피를 토해내거나 목이 꺽여지며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정녕 꿈에서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도관에서, 대전에서, 화원에서, 또는 침실에서 전진도인들은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다. 사신의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손길은 가차 없었다. ③ 전진우사 당송우는 비지땀을 흘리며 전진헌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참으로 소녀(素女)같은 계집이다. 도가의 진전을 이어받은 내가 당할 수 없다니.... 정녕 그 계집은 하늘이 내린 색녀란 말인가?' 원래 전진도관은 불로장생의 비방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새로이 혈의교 전진지부의 책임자가 된 당송우가 하는 일은 불로장생하며 방중술을 즐길 수 있는 명약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그의 연금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그는 도인(導引), 태식(胎息), 벽곡(酸穀), 복식(服食) 등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 그가 혈의교의 사자라는 한 계집의 음욕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그러한 사실이 새나간다면 그야말로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계집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없애는 방법뿐이었다. 물론 가장 손쉬운 방법은 후자쪽이었다. '방법은... 불로장생의 단약(丹藥)을 선물하는 것이다. 독약을 단약이라고 속이고 먹이는 것이다. 제까짓 계집이 안 넘어가고 배겨? 흐흐흐.......' 당송우는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그는 전진헌에 당도했다. 그의 모습이 나타나자 중인들은 앞을 다투어 달려왔다. 그리고는 꿇어 엎드릴 듯이 예를 표했다. "오! 장문인(掌門人)!" "불초의 예를 받으십시오!" 한순간 당송우의 얼굴에는 경멸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게 해 미안하외다. 관중의 업무가 밀려서 늦었으니 양해하시오." "헤헤! 별 말씀을.... 오히려 저희가 송구스럽습니다.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중인들은 다투어 자신들이 가져온 뇌물함들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연신 아첨의 웃음을 웃는 것을 잊지 않았다. "헤헤.... 남해산 묘안옥(苗眼玉) 한 상자 올시다!" "이것은 천잠사로 짠 경장이옵니다." "헤헤! 이것은 명검(名劍) 냉월검(冷月劍)입니다." "천년 묵은 인삼 다섯 뿌리입니다." 중인들은 입에 침을 튀겨가며 각자 선물보따리를 끌렀다. 그들은 모두 당송우의 눈에 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만약 그의 눈에 들기만 한다면 부귀영화는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당송우의 눈빛은 시큰둥할 뿐이었다. 이때였다. 당송우의 시선이 장승처럼 나란히 서 있는 열 명의 흑의인들에게 향해졌다. "......?" 흑의인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들의 피부는 백지장처럼 창백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전신에서는 싸늘한 냉기까지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죽립을 쓴 탓에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당신들은 무엇을 가지고 왔소?" 당송우는 그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스슷! 한 줄기 백영이 바람을 가르는 미세한 파공성과 함께 장내에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당송우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불초는 극락서생이라고 합니다. 평소 당장문인을 흠모하여 찾아왔습니다." "극락서생?" 당송우는 흠칫했다. 상대방이 웃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웬지 기분이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백천강을 주시했다. "하하! 마침 제가 좋은 선물을 구했기에 가져왔습니다." 백천강은 말과 동시에 손을 들었다. 그러자 미동도 보이지 않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보자기에 싼 물건을 풀기 시작했다.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보자기로 향했다. 마침내 보자기가 모두 끌러졌다. "앗!"


"아니... 저것은!" 중인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보자기 속에서 나온 물건은 바로 피투성이인 열 개의 수급이었다. 열 개의 머리통에서는 아직도 뚝뚝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두 눈을 한껏 부릅뜨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 머리통들은 모두 젊은 청년도인들의 것이었다. "으으!" 당송우는 크나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들의 수급이 모두 눈에 익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음을 발하며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바로 그 순간 중인들 가운데 누군가가 외쳤다. "전진십수(全眞十秀)다!" "그... 그렇군!" 중인들은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진십수. 그들은 전진우사 당송우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십대제자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전진문의 후대를 이을 전진후기지수들이었다. 그런 전진십수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으으... 이럴 수가!" 당송우는 이제 제정신이 아니었다. 전진십수의 죽음은 그의 은밀한 야망을 송두리채 꺽어놓고 만 것이었다. 그가 무림인들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감수하면서까지 혈의교의 주구가 되었던 것은 다 속모를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은밀한 비상을 꿈꾸기 위해서 였다. '보... 본문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 나는 혈의교의 주구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 꿈을 이루어 줄 저 아이들이 이토록 어처구니 없이 죽다니... 오오!' 당송우는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그는 이제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때였다. 백천강의 낭랑한 웃음이 그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하하하! 역시 가장 훌륭한 선물이 될줄 알았습니다." 그때서야 당송우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벼락같이 백천강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분성을 질렀다. "누, 누구냐? 내 제자들을 죽인 자가!" 백천강은 태연했다. 그는 당송우를 바라보며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하하! 저들이 전진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길래 소생이 장문인을 대신해 거두었습니다." "뭐, 뭐라고? 네 놈이?" 당송우는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그는 눈 앞에 서 있는 애송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부르르르! 당송우의 전신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너무나도 엄청난 충격 때문이었다. 쾅! 그는 백천강을 노려보며 발을 굴렀다. 그러자 청석바닥에 한 푼도 넘는 깊은 족인(足印)이 찍혔다. 다음 순간 당송우의 입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분노성이 터져나왔다. "네 놈을 찢어 죽이겠다!" 위잉! 그는 쌍장을 뻗으며 전진비학(全眞秘學)을 전개했다. 전진비학은 현묘한 환술(幻術)과 도가비공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파파파팟! 천 개의 손이 황금빛 기류를 뿌리며 뻗었다. 그것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채였다. 바로 그 순간 극락서생도 손을 뻗었다. 극락서생의 반응은 느릿했다. 중인들의 눈에는 극락서생의 손놀림이 완연히 보였다. 더구나 그것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수법이었다. 그러나.......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전진헌을 쨍하고 울렸다. 중인들은 놀란 눈을 부릅뜨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연신 뒤로 물러서고 있는 자는 다름아닌 당송우였다. 아니 물러선다는 말은 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촤아아아! 목구멍에서 피화살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는 선혈 때문에 그는 뒤로 밀려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새 그의 목에는 동전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토록 신비막측하다는 전진비학은 도대체가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뻗어오는 극락서생의 흰 손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 것이다. 당송우는 연신 십여 보나 뒷걸음질쳤다. "크으윽! 이, 이럴... 수... 가... 크르륵......." 마침내 그의 뚫린 목구멍으로부터 한뭉터기의 시뻘건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바로 그의 목숨이 끝났음을 알리는 징조였다. 쿵!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당송우는 고목처럼 쓰러졌다. "사... 살성(煞星)이다!" 휙... 휘익! 중인들은 그만 사색이 되어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대전을 채 빠져나가지도 못했을 때 한 가닥 음산한 웃음소리가 고막을 파고 들었다. "흐흐흐! 모두 극락으로 보내주어라!" 스... 스슷! 그러자 이때까지 장승처럼 서 있던 흑의인들이 돌연 신형을 움직였다. 그들은 바로 극락십령들이었다. 극락십령은 유령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주 짧은 순간에 그들은 중인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중인들 중 어느 누구도 극락십령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케에엑!"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나왔다. 극락십령은 단지 그들을 조금 더 빨리 스쳐갈 뿐이었다. 그러나 그림자가 스쳤다 싶으면 중인들은 여지없이 피를 뿌리며 고꾸라지는 것이었다. 극락십령의 무공은 도무지 인간의 무공이 아니었다. "크아아악!" 사풍(死風)은 그렇게 다시 중원천하를 휩쓸기 시작했다. 극락서생은 죽음을 몰고 다니는 사신이었다. 그에 의하여 첫 번째로 목숨을 잃은 고수는 전진도관의 전진우사 당송우였다. 그들은 혈건혈대를 둘렀다는 이유만으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 것이었다. 또다시 중원천하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④ 암흑무림에 한 가닥 서광이 비쳤다. 그것은 혈의교를 따르는 주구들의 간담을 서늘케 만든 쾌사 때문이었다. 정도무림의 배신자로써 혈의교의 주구 노릇에 앞장을 서온 전진파가 하루만에 피로 씻긴 것이었다. 그것도 환한 대낮에 일어난 일이었다. 극락서생(極樂書生). 단지 그런 이름 외에는 알려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신비서생은 열 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중원무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혈의교 전진지부를 피로 씻어버린 것이었다. 그로 인해 극락서생에게는 사신(死神)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이 주어졌다. 어느새 극락서생은 혈의교


인물들에게는 공포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극락서생의 출현이 가져다 준 변화는 가히 극적인 것이었다. 그로 인해 혈건혈대를 두른 인물만 보면 꼬리를 감추고 어깨를 움츠리던 암적무림에 한 가닥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극락서생의 이름은 삽시간에 중원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를 가리켜 혈의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꺼져가는 중원무림에 횃불을 밝히는 구인(救人)이라고 생각했다. 극락서생의 발길은 점점 남하(南下)하고 있었다. 혈의교 주구들은 전전긍긍하기 바빴다. 극락서생이 남하하면서 닥치는 대로 혈건혈대를 두른 혈의교 주구들을 영원히 잠재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혈의교 철산지부(鐵山之部), 혈의교 북태극지부(北太極之部), 혈의교 형의문지부(形意門之部), 혈의교 대도회지부(大道會之部), 혈의교 흑천방지부(黑天幇之部), 혈의교 천남문지부(天南門之部)....... 극락서생은 남하하면서 정사에 걸친 혈의교 십삼개지부(十三個之部)를 여지없이 궤멸시켜버렸다. 그의 손속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잔혹했다. 그는 단 열 명의 수하들과 함께 혈의교도들을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저승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혈의교도들에게 극락서생은 지옥에서 온 사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 염라대왕을 만날지언정 극락서생을 만나지 마라! 그런 말이 혈의교도들에게 전염병보다도 더 무섭게 퍼지고 있었다. 그런 반면에 의기(義氣)를 감추고 울분을 달래고 있던 무림혈의지사들에게는 극락서생이 중원혼(中原魂)의 상징이 되고 있었다. ...... 오오, 극락서생. 그는 진정한 중원지혼(中原之魂)이다! ...... 극락서생, 그 분이라면 도탄에 빠진 중원정기를 되찾아 주실 수 있을 것이오! 이제 극락서생의 이름은 황제보다도 유명한 이름이 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봄은 보리내음 만큼이나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무르익은 봄과 함께 중원의 일각으로부터 또 다른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대동맹(大同盟)의 탄생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마침내 암적천하를 표방하는 혈의교를 치기 위해 중원의 정도인들이 일어선 것이었다. ...... 의혼(義魂)을 한 가닥 만이라도 지닌 자들이여! 대동맹으로 오라! ...... 중원의 정도지기는 살아 있다. 의협인들이여, 대동맹으로 오라! 극락서생의 출현과 대동맹의 탄생, 그 두 가지 소식은 꺼져가던 중원정기에 활화산같은 힘을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정녕 봄은 봄이었다. 42 장 혈천마국(血天魔國) ① 금릉(金陵). 역대의 왕도(王都)인 금릉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금릉은 색도로써도 유명한 곳이었다. 장강의 지류가 흘러드는 곳마다 사시사철 놀잇배가 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명기요화(名妓妖花)들의 교태와 웃음, 비파소리가 연일 그치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사치의 극을 이루는 금릉의 모습을 보다못한 어느 방랑시인은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다. 주문주육취(朱門酒肉臭) 로유동사골(路有凍死骨) 영고지척이(榮枯咫尺異) 주진난재술( 桭難再述) 물론 이것은 후세의 무림인들에게 무인으로서의 행위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경종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금릉은 쟁쟁한 기루만 해도 수백 곳이 넘게 있었다. 그 중에서 풍류객들이 단연 최고로 치는 기루는 바로 난화소영루(蘭花素影樓)였다. 난화소영루는


천하사대기루 중에서도 으뜸가는 규모를 자랑했다. 때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봄이었다. 봄은 풍류객들의 마음을 한껏 들뜨게 했다. 벌과 나비가 향기에 취해 꽃을 찾아들듯, 풍류객들은 은자와 보화를 수레 가득 싣고 미녀를 취하기 위해 금릉으로 몰려 들었다. 그 중에서도 이름난 사대명기가 있는 난화소영루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풍류객들 속에 안색이 냉막한 한 백의미서생이 끼여 있었다. 그는 난화소영루의 화려한 청문(靑門) 앞에 줄을 선 풍류객들 속에 섞여 있었다. 그러나 몹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는 냉막해 보이는 입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차례가 되었다. 백의미서생은 주판을 정신없이 튕기고 있는 중년인 관사 앞으로 다가갔다. "어떤 미녀를 원하시오?" 관사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물었다. "일잔홍과 모백화." 백의미서생의 말은 짧았다. 그러나 관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모두... 말이오?" 관사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백의미서생이 부른 이름은 하루를 접하는데 황금 일만 냥이나 호가하는 난화소영루의 사대명기들 중 둘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소." 백의미서생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 얼마나 준비했소?" "구리돈 한 문(一文)." "......!" 그 말에 관사는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어 그는 누가 볼세라 급히 음성을 낮추어 물었다. "그... 그 분의 친구요?" 백의미서생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나요." "......!" 관사는 안색이 퍼렇게 변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명호는?" 백의미서생의 입술이 달싹였다. 차례를 기다리던 중인들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백의미서생의 음성은 관사의 귀에는 천둥소리보다도 크게 들렸다. "극락서생." "그... 극락!" 관사는 하마터면 경악성을 지를 뻔 했다. 그는 급히 주먹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을 뻔했다. 백의미서생. 그는 바로 극락서생이었다. 그는 공야운리를 만나기 위해 난화소영루를 찾아온 것이었다. "아... 안으로 드십시오!" 관사는 털석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어 그는 문 안을 향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화중각(花中閣)으로 모시게!" 그 순간 백천강은 이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난화소영루의 낯익은 풍물을 바라보며 잠깐 감개무량한 표정을 했다. '오랜만에 오는군. 모두 그대로일까?'


그는 한 명의 장한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 걸어갔다. 홍의 장한은 백천강을 화중각의 육층으로 안내했다. "......." 무척이나 화려하게 꾸며진 방이었다. 그곳은 과거 석무심이라는 사나이가 옥운생과 함께 왔던 곳이었다. 그런데 다소 풍경이 변해 있었다. 벽의 깔끔한 장식은 사라지고 휘장이 네 벽을 가리고 있었다. 백천강은 혼자 주석에 앉았다. 커다란 주탁 위에는 진수성찬에 미주가 한 병 놓여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일잔홍이나 모백화는커녕 여인이라고는 얽은 곰보녀 한 명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푸풋!" 돌연 백천강의 입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이어 그는 자작으로 술을 따라 마셨다. 술맛은 그런대로 괜찮은 듯했다. 그것은 백 년 이상 묵은 여아홍(女兒紅)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백천강은 여아홍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푸풋! 서투른 장난을 했군. 칠보단장금(七步斷腸金)에다 전갈화혈분이라니.이 정도로는 개미새끼 한 마리 취하게 하지 못하지." 그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문득 어디에선가 달콤하면서도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호호...! 과연 혼자의 힘으로 중원패주인 혈의교(血衣敎)와 맞설만 하군요. 극락서생, 이곳까지 찾아오다니 간담이 열 개라도 되나요?" 그 음성은 여인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귀에 무척이나 낮익은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공야운리의 음성이었다. '공야운리, 너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구나.' 극락서생 백천강의 마음 한구석에서 미묘한 감정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극락서생은 낭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미녀의 부드러운 살결을 취하러 왔건만 독주가 웬말이오? 난화소영루는 손님을 이렇게 대하는 것이 주법이오?" 여인은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호홋! 극락서생, 호굴에 들어와서도 풍류타령인가요? 설마 이곳이 혈의교 천향당인줄 몰랐다고는 말 않겠죠?" 그것은 전혀 뜻밖이었다. 극락서생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고 말았다. '그... 그럴 수가! 그럼 공야운리도 갈천기에게 굴복했단 말인가?' 백천강은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는 곧 여유있게 웃었다. "하하! 천하의 난화소영루 주인이 혈의방의 시녀로 전락할 줄이야 정말 미처 몰랐소이다." 찰나지간 공야운리의 낮은 탄식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백천강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극히 미세한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불현듯 극락서생의 귓가에 공야운리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극락서생, 지금부터 본녀가 하는 말을 새겨들으세요.) 공야운리는 즉시 다시 말했다. "흥! 혈의교가 무림천하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천하무림동도들이 다 아는 사실이에요. 그런데 무엇이 수치스럽단 말이죠?" 이어 다시 그녀의 전음이 조심스럽게 들려왔다. (극락서생, 단신으로 혈의교에 도전하다니 정말 그만큼 자신이 있는 건가요?) 그 순간 백천강은 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호탕하게 입을 열었다. "핫핫핫! 청렴한 선비는 부러질지언정 뜻을 굽히지 않는 법이다. 혈의교가 비록 천하를 장악했다고 하나 도적떼의 무리에 불과하다. 그런즉 어찌 수치스럽다 하겠는가?" 백천강도 말을 끝낸 직후 곧바로 전음을 보냈다.


(후후.... 무모한 짓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어리석은 자의 행동이오. 불초는 혈의교를 숙명적으로 무너뜨려야 하지만 결코 무모하게 덤비지는 않소.) "시끄럽다! 감히 본파를 험구하다니!" 공야운리의 날카로운 음성이 떨어졌다. 뒤이어 그녀의 전음성이 극락서생의 귓전을 파고 들었다. (솔직이 말하겠어요. 나는 지금 어쩔 수 없이 핍박받고 있는 중이에요. 당신과 내가 손을 잡는다면... 어쩌면 혈의교 궤멸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몰라요.) 순간적으로 극락서생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대체 누구에게 핍박받고 있단 말인가? 음, 어쨌든 이런 행동으로 미루어 지금도 감시를 당하고 있음이 틀림없겠군.' 그는 짐짓 광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핫! ��� 극락서생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혈의교쯤은 본 서생의 적수가 못된다!" 그 말에 급히 전음이 돌아왔다. (시간이 없어요. 그대가 뜻을 세운 자라면 협력하는 걸로 알겠어요. 하지만 우선은 이목을 피해야 하니 당하는 척 해주세요. 가짜 몽연향(夢煙香)을 피울 테니 쓰러지는 척 해주세요. 알겠죠?) 다음 순간 공야운리의 노성이 터져나왔다. "발칙한 놈! 널 찢어 죽이겠다!" 스스스....... 돌연 천장으로부터 뿌연 연기가 뿜어졌다. 극락서생은 급히 안색이 변해 부르짖었다. "무슨 짓이냐? 비겁하게!" 그는 짐짓 비틀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연기는 가짜 몽연향이었다. 그러나 설사 그것이 진짜 몽연향이라 해도 극락서생이 당할 리는 만무했다. 그는 이미 독중성의 몸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극락서생은 비틀거리며 부르짖었다. "비... 비겁한 계집!"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고목나무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호호호호! 극락서생! 본교에 감히 대항하다니 그 대가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돌아가는지 보여 주겠다." 공야운리의 교성은 내실을 울릴 정도로 컸다.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두 번째로 들린 여인의 음성은 약간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천향당주, 수고했어요. 본녀는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 하겠어요." 그 음성을 들은 극락서생은 흠칫 놀랐다. '저 음성은 바로.......' 그때였다. 내실의 문이 열렸다. 극락서생은 즉시 숨을 멈추었다. ② 극락서생은 두 시녀에 의해 화중각의 칠층으로 옮겨졌다. 그곳은 예전에 공야운리가 머무르던 곳이었다. 그는 계속 몽연향에 당한 척 하고 있었다. 그를 운반했던 두 명의 시녀가 물러가자 한 여인이 다가왔다. '공야운리다!' 극락서생은 직감적으로 여인이 바로 공야운리임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여인의 몸에서 나는 특유의 기향(奇香)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야운리의 달콤하면서도 도도한 음성이 들렸다. "호호! 극락서생, 꼴 좋게 됐구나." 이때였다. "그 자는 본교 최대 적이에요. 천향당주는 이번 공로를 크게 인정받을 거에요."


차가운 음성과 함께 한 여인이 들어왔다. 공야운리를 뒤따라 들어온 여인의 안색은 그녀의 음성만큼이나 싸늘했다. 침상 위에 누워 있던 극락서생은 순간적으로 실눈을 떴다. 여인은 흑의를 입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대단한 미녀였다. 극락서생은 내심 중얼거렸다. '내 생각이 맞았군. 바로 한한(恨恨) 기검화(奇劍花)로구나.' 그녀는 바로 공야운리의 사대비녀 중의 하나였던 한한이었다. 바로 절검유사 기세광의 딸인 기검화였다. 기검화는 차가운 시선으로 정신을 잃은 척하고 있는 극락서생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군. 이 자가 어떻게 혈륜왕만이 알고 있는 연락방법을 알고 이곳을 찾아 왔을까?" 그것은 백천강이 난화소영루를 찾을 때 과거 공야운리와 약정한 암호를 그대로 썼던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글쎄......." 공야운리는 짐짓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기검화는 돌연 코웃음쳤다. "흥! 어쨌든 제발로 호랑이굴로 찾아 왔으니 잘 되었군. 이 자를 본교로 호송해야 겠어." 기검화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뻗었다. 찰나지간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무형의 강기가 뻗어나갔다. "앗!" 공야운리는 급히 좌수를 뻗어 그녀의 손길을 후려쳤다. "한한! 뭐하려는 거지?" 파팍! 빗나간 경력이 침상 모서리를 후려쳤다. 기검화는 그 반동으로 두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공야운리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부치는 것이었다. "한한이라니! 벌써 잊었느냐? 한한은 과거의 인물이다. 지금 나는 너의 상전인 혈의순찰감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기검화의 말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한순간 공야운리는 고운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아니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검화. 아무리 그렇다해도 과거의 정분을 생각한다면 네가 어찌 그럴......." 공야운리의 말은 곧바로 끊기고 말았다. "과거는 들먹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다시 한 번 그따위 망발을 하면 즉시 보고하겠다!" 기검화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공야운리를 쏘아보며 말했다 "아... 알겠다." 공야운리는 마침내 졌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침상에 누워 있는 백천강을 보는 즉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녀의 음성은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이 자는 몽연향에 중독되었다. 그러니 혈도를 찍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 하지만 기검화는 물러서지 않았다. "흥! 매사에 안전을 기하는 것은 도가 지나쳐도 좋은 법이다." 기검화는 매몰차게 말했다. 이어 극락서생을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공야운리는 아미를 떨었다. 그녀의 두 눈빛이 순간적으로 독기를 내뿜었다. 그녀는 내심 부르짖었다. '지독한 년!' 공야운리는 과거에 기검화를 비녀로 거느렸던 적이 있었다. 싸구려 창녀로 전락하기 일보 직전인 기검화를 구한 것도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은 입장이 크게 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주객이 전도되어버린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혈천마국이 중원천하를 장악하여 혈의교를 세운 지금 그녀의 음양궁은 혈의교의 천향당(天香堂)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기검화는 혈의교의 순찰감이 되어 공야운리를 감시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파팟! 기검화는 무자비하게 백천강을 향해 십지(十指)를 날렸다. '어... 어쩌지?' 공야운리는 그야말로 좌불안석이 되고 말았다. 그때였다. 극락서생의 한 가닥 전음이 공야운리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안심하시오. 본 서생은 안전할 것이오.' 심어전성술(心語傳聲術). 그것은 입을 벌리지 않고도 전음을 펼칠 수 있는 심오한 술법이었다. '아!' 공야운리는 내심 부르짖었다. 그것은 감탄의 부르짖음이었다. 이어 그녀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검화의 십지는 극락서생의 십대 요혈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호호호! 천향당주, 이 자를 오늘 하루만 잘 감시하세요. 내일 아침 내가 본교로 직접 호송해 갈테니까."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리며 돌아섰다. 그때였다. 공야운리는 급히 백천강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되요. 일단 보고를 올리면 혈의교에서 사람이 나올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일은 뜻밖으로.......) 찰나지간 백천강의 오른손 중지가 돌아선 기검화를 향해 슬쩍 뻗었다. "으음!" 기검화는 무형지력에 얻어맞아 그 자리에 쓰러졌다. 백천강의 몸이 침상에서 솟아 올랐다. 동시에 그는 중지를 뻗으며 방 한가운데서 춤추듯 한 바퀴를 도는 것이었다. 그러자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비명은 천장, 벽면의 휘장 뒤, 침상 아래 등 모두 일곱 군데에서 터져나왔다. "......!" 공야운리의 안색은 그 순간 흑빛이 되고 말았다. 극락서생은 낭랑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하하하! 쥐새끼가 일곱 마리나 숨어 있었소." "아!" 공야운리는 안도의 신음성을 토해냈다. 그녀는 일시에 긴장감이 풀린 듯 침상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극락서생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였다. 그는 미소를 흘리며 공야운리를 향해 말했다. 음성도 미소만큼이나 따뜻했다. "천하의 재녀 음양궁주가 혈의교에 굴복했을 줄은 정말 몰랐소." 공야운리는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은 자괴감에서 비롯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러나 당신처럼 용기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예요." "그럼?" "협박을 당했어요." "어떤 협박이오?" "인질을 미끼로 날 제압한 거에요." 일순 극락서생의 두 눈이 신광을 발했다. "인질이라 함은.... 혈천마국의 옛 충신들을 말함이오?"


그의 질문에 공야운리의 안색은 하얗게 변했다. 극락서생이 자신의 내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대체 당신의 실체는 무엇인가요?" 공야운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극락서생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돌려 기검화를 내려보며 물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을 누설할 사람이 또 있소?" 공야운리는 의혹의 눈빛을 지우지 못한 채 대답했다. "있지만.... 그들은 모두 내 심복들이에요." "그럼 다행이군." 극락서생은 기검화를 향해 슬쩍 소매를 저었다. 그러자 기검화의 몸이 무형의 경력에 끌린 듯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침상 위로 던져졌다. 이어 극락서생은 의자에 앉으며 담담히 입을 여는 것이었다. "옛 기환궁의 마공 중에서는 사람의 심령을 제압하는 이령심혼통심대법(以靈心魂通心大法)이란 것이 있소." "그... 그것을 당신이 어떻게?" 공야운리의 안색은 경악으로 더욱더 창백해졌다. 극락서생은 내처 말했다. "그 대법을 시전하면 이 여인의 기억을 지울 수 있소. 또한 어떤 지시든 내릴 수 있소." "대... 대체... 당신은 누군가요?" 공야운리는 떨리는 음성을 발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돌연 전신을 부르르 떨며 다가왔다. "당신은 혹시......." "혹시?" 극락서생은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 아니야, 그 분은 죽었지." 공야운리는 고개를 강하게 가로 저었다. 극락서생은 공야운리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혈의교 순찰감인 이 여인에 대해선 안심하시오. 내가 처리하겠소. 그보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혈의교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로 우리는 한 배를 탔다고 할 수 있소. 낭자의 고견을 듣고 싶소." 공야운리는 안색이 몇 차례 변화를 일으켰다. 잠시 후 그녀는 탄식하며 탁자 앞의 의자에 앉았다. "원래 저는 혈천마국의 공주였어요." "알고 있소." "어... 어떻게?" "하하! 알려고 하지 마시오.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오." 공야운리의 얼굴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의혹의 표정이 일렁였다. 또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극락서생은 공야운리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어지러운 상념을 지우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본국은 대막(大漠)의 혈사평(血砂坪)에서 천육백 년 간이나 평화롭게 살면서 전통을 유지해 왔어요. 그러던 중 이십이 년 전.... 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찾아옴으로써 평화가 산산이 깨어져 버렸어요." 공야운리는 과거를 회상하기가 두려운 듯이 두 눈을 사르르 내려 감았다. ③ 혈천마국(血天魔國).


혈천마국은 대막의 신비지이자 죽음의 땅이라 알려진 혈사평에 세워진 소국이었다. 혈천마국은 천육백 년 전 중원으로부터 대막으로 이주한 인물들이 세운 것이었다. 혈천마국은 원래 마공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혈천마국인들은 하나같이 절세무학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심성이 고왔음은 물론이거니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혈사평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이후 선조의 유언에 따라 중원진출을 엄격히 금지했다. 따라서 개국조(開國祖)의 유시에 따라 한 번도 대막을 떠난 적이 없었다. 아니, 단 한 번 혈천마국인들의 일부가 대막을 벗어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천오백 년 전의 일이었다. 혈성군(血星君) 공야후(公冶候)가 반발하여 집단을 이끌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중원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그때 공야후가 세운 것이 전설의 기환궁이었다. 그날 이후 혈천마국은 대대로 대막에 뿌리를 내리며 고유한 전통을 수호해 왔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이십이 년 전의 일이었다. 중원으로부터 한 청년이 혈천마국으로 건너왔다. 청년의 이름은 갈천기(葛天奇)라 했다. 그는 검에 등을 관통당해 다 죽어가는 목숨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혈천마국의 신술에 의해 구사일생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갈천기는 스스로를 혈서생(血書生)이라 칭했다. 이후 그는 혈천마국의 삼십이대 국왕인 광무왕(曠武王) 공야전(公冶殿)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유는 그의 영특한 지혜와 해박한 학문 때문이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갈천기는 암중에 엄청난 대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원래 혈천마국에는 세 부류의 인물들이 있었다. 한 부류는 전통을 수호하려는 자들로 왕맥(王脈)을 지지하는 국신(國臣)들이었다. 또 한 부류는 혈사평을 떠나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야망을 가진 자들이었다. 나머지 한 부류는 혈서생 갈천기와 같이 중원에서 흘러들어온 낭인(浪人)들이었다. 혈천마국은 낭인들의 과거를 묻지않고 받아들이는 전통이 있었다. 바로 그것이 혈천마국을 송두리째 태워버리는 커다란 불씨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낭인무리들은 어느새 갈천기와 한통속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암중으로 중원진출을 노리고 왕권에 불만을 품은 혈천마국인들을 포섭했다. 어느날 그들은 반역(反逆)을 일으켰다. 갈천기를 비롯한 반역자들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일천 오백년 간 유지되어왔던 혈천마국의 왕조는 그들로 인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광무왕은 누군가에게 살해되고 말았으며 그를 따르던 충신들도 연금되었다. 마침내 갈천기는 혈천마국의 모든 권한을 거머쥔 후 스스로 혈천마국의 국왕이 되었다. 한편 반역이 일어난 직후, 공야공주는 가까스로 혈사평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 후 중원으로 건너온 공야운리는 음양궁을 세우고 혈천마국을 재건하려 했다. 갈천기는 이제 그녀의 철천지 원수가 된 것이다. 때마침 그녀는 혈륜궁의 궁주인 백천강과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혈륜궁주의 위력은 대단했다. 다만 한 가지 흠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혈륜궁주가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야운리는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책략으로 혈륜궁주를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어갔다. 잘만 하면 그녀는 혈륜궁주를 자신의 남편으로 만들어 새로운 혈천마국의 부마로 삼을 수도 있었다. 공야운리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혈륜궁이 무너진 것이다. 그녀가 믿었던 혈륜궁주는 시신조차 남기지 않고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공야운리는 그 모든 것이 갈천기의 거대한 음모의 일환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믿었던 백천강이 죽자 그녀의 용기는 크게 꺾이고 말았다. 마침내 그녀의 음양궁도 갈천기의 조직인 혈의교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애당초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녀는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갈천기는 그녀를 협박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혈사평의 뇌옥에 갇혀 있는 혈천마국의 충신들을 모조리 죽이겠노라고 말한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공야운리는 갈천기에게 굴복하여 혈의교 외삼당(外三堂)의 하나인 천향당(天香堂)의 당주가 되고 만 것이었다. ④ "......." 극락서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공야운리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무림사에도 드러나지 않는 비사(秘事)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 비사는 실로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환대천하를 이루었던 전설의 마궁조차 혈천마국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이 첫 번째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두 번째의 내용은 새로이 혈천마국을 장악한 한 야심가에 의해 중원이 초토화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극락서생이 입을 열었다. "공주는 아직도 혈천마국을 재건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소?" 공야운리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녀는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물론이에요. 이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꼭 혈천마국을 재건할 거에요. 갈천기 그 자는 아바마마를 죽인 불구대천지원수에요! 그 자의 뼈를 갈아마시고 심장을 씹어먹어도 소녀의 한은 풀리지 않을 거에요!" "그럼 되었소." "......?" "공주를 돕겠소." 극락서생의 말은 부드러웠다. 그 순간 공야운리의 아미가 살짝 접혔다. 그녀의 눈은 극락서생의 눈과 맞부딪쳤다. "......!" 두 사람의 시선은 그지없이 따스했다. 어느 순간 공야운리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그녀의 눈에 또다시 한 가닥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이 사람.... 왜 자꾸 친근감이 드는 걸까? 혹시...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 분은 죽었어!' 그녀는 마음 속의 갈등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 바람에 탐스러운 머릿결이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그녀는 흘러내린 머릿결을 매만진 후에 입을 열었다. "그동안 그 자를 꺾기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해왔답니다." "어떤 것이오?" 극락서생이 물었다. 공야운리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극락서생, 당신은 혹 대동맹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이오." "소녀도 대동맹의 일원이랍니다." "으음." 극락서생은 짧은 신음성을 흘렀다. 그는 공야운리의 입에서 대동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그런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극락서생은 공야운리의 입으로 직접 그러한 사실을 전해듣는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신음을 흘린 것이었다. 그는 곧 침중하게 물었다. "대동맹은 어떤 단체요?" 공야운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단 한 조각의 의혼(義魂)만이라도 지닌 자들은 모두 대동맹의 맹도들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흐음. 그렇다면 주요인물은 누구요?" 극락서생은 다시 물었다. 공야운리는 새삼스레 그를 주시하며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의 마음은 정말 진실한 건가요?" "믿을 수 없다면 우리들의 관계는 이것으로 끝을 내도 좋소." 극락서생의 어조는 부드러웠으나 단호했다. 그 말에 공야운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미안해요. 하지만 천하무림의 앞날에 너무도 중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답니다." 이어 그녀는 다시 전음술을 사용하여 말했다. (대동맹은 광명지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각 대문파의 의인들이 주축이에요. 그 중에서 특히 광명회주인 신주제일룡 사대협과 무림구공자, 무림삼옹의 두 분, 제마천문의 문주를 비롯하여.......) 극락서생은 격동을 금치 못했다. 그는 급히 반문하고 있었다. "아니, 광명회주가 살아있단 말이오?" "그래요. 비록 한 팔은 잃었지만 그의 의협심과 무공은 여전하답니다." "그... 그가 대동맹주이겠구료?" 극락서생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공야운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그렇다면?" "대동맹주는 아직 공석이에요. 사대협은 자신을 가책하고 있어요.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라야 대동맹주가 될 수 있다는 거죠." "......!" 극락서생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유성! 네가 살아있다니!'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한편 공야운리는 조심스럽게 그를 주시하며 물었다. "당신은 대동맹에 가입할 생각이 없나요?" 극락서생은 고개를 들며 침중하게 물었다. "대동맹은 어디 있소?" 공야운리의 얼굴에는 기쁨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 "......!" 극락서생은 그녀의 전음을 듣는 순간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는 공야운리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한참 후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혈사평의 위치를 자세히 알려줄 수 있겠소?" 공야운리는 흠칫했다. "어떡하실려고요?" 극락서생은 말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굴로 들어가야하는 법이오." "다... 담이 크군요." 공야운리는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놀란 토끼눈으로 한동안 극락서생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깊은 생각에 빠져든 듯 한동안 침묵을 고수했다. 마침내 공야운리는 입을 열었다.


"좋아요. 알려드리겠어요. 그리고......." "그리고?" "만일 그곳에서 한 여인을 구출해 낼 수 있으면 큰 수확일 거예요." 그녀는 심각하게 말했다. 극락서생이 되물었다. "여인?" 공야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무슨 까닭인지 갈천기라는 작자는 오직 그 여자에게만은 꼼짝도 못해요. 그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갈천기는 오래도록 그녀를 감금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온갖 아부와 협박으로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죠. 만일 그 여인을 우리가 데려올 수 있다면 그 자를 쉽게 굴복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극락서생은 의혹을 금치 못한 채 물었다. "그 여인이 누구이길래?" 공야운리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여인의 정체는 누구도 몰라요. 갈천기는 그 여인을 다만 마야부인(魔爺夫人)이라고만 부를 뿐이예요." 마침내 밤이 이슥해졌다. 극락서생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늦은 인사를 건넸다. "야심한 밤이오. 편히 주무시오." "저, 잠깐만......." 그러나 공야운리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어느새 극락서생은 낭랑한 웃음소리만을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역시 아니었어.' 그녀는 눈물 한 방울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공야운리의 뇌리 속에는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천강......!'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혈륜공자 백천강이라는 사내. 그는 오로지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한 남자였다. 물론 그녀가 이용한 남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라는 소유욕 때문이었다. 공야운리는 극락서생을 보는 순간 죽었다고 믿은 백천강이 다시 돌아온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알지 못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녀와 마주앉아 있던 극락서생이 바로 백천강이라는 것을. 43 장 두 개의 얼굴 ① 두두두두...... 어지러운 말발굽 소리였다. 석양이 핏빛을 토하며 서녘으로 넘어가는 황혼 무렵이었다. 한 대의 화려한 사두마차가 미친 듯이 내닫고 있었다. 덜컹... 쿠쿠쿵! 마차바퀴는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이 덜컹거렸다. 네 마리의 혈리총은 죽어라 발굽을 놓고 있었다. 말들은 마차가 부서질 듯 흔들리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차는 몹시 화려했다. 기둥과 지붕은 황금을 씌운 듯 번쩍거렸다. 주렴은 칠채보주로 꾸며져 있었다. "......." 화려한 비단무복을 입은 장한 하나가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장한은 고삐를 잡은 채 두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있었다. 그러나 어처구니 없게도 그는 죽어 있었다. 거대한 화살 하나가 그를 관통해 마차의 기둥에 박혀 있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장한은 요란하게 흔들리는 마차에서도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쿠쿠쿵... 덜컹... 덜컹! 마차는 거친 돌밭을 달려가며 마구 흔들렸다. 그때였다. 겁에 질린 아름다운 음성이 마차 안에서 다급히 흘러나왔다. "황위사(黃衛士)! 어떻게 된 거예요? 길을 잘못든 것은 아니에요?"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다음 순간 마차 안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흐흑! 위사대 사십팔 명이 모두 전멸하고 이 지경이 되었으니... 그 자는 정녕 국법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덜컹... 쿠쿠쿵! 이제 마차는 관도를 벗어나 거친 벌판을 마구 달렸다. 뽀오얀 먼지가 마차 뒤에서 뭉게구름처럼 일고 있었다. 부서질 듯 덜컹거리며 달리는 마차 사이로 여인의 흐느낌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몸이 태화군주임을 알면서도 이토록 핍박하다니... 대체 그자는 황상(黃上)도 안중에 없단 말인가? 흐흑! 황위사! 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태화군주(太華君主). 그녀는 바로 자금성(紫金城)에 기거하는 황제의 누이였다. 즉 그녀는 황녀였던 것이다. 태화군주는 복잡한 황성을 피해 금릉에 살고 있었다. 그런 태화군주가 지금 누구에겐가 ㅉ기고 있다는 것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화려한 양탄자가 깔린 마차 안은 몹시 넓었다. 그곳에는 궁장여인 한 명이 겁에 질린 얼굴로 비단을 깐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인은 정녕 서시(西施)를 능가할 만한 절세미녀였다. 여인의 피부는 눈보다 희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황녀로서의 고귀한 인품이 은은히 넘쳐 흐르고 있었다. 쿠쿠쿵! 마차는 다시 한 차례 쓰러질 듯 덜컹거렸다. "아악!" 태화군주는 의자 모서리를 잡고 몸을 떨었다. 불현듯 그녀의 뇌리에 사흘 전의 일이 떠올랐다. 천궁공자(天弓公子). 그녀가 탄 마차를 추적하기 시작한 그는 스스로를 천궁공자라고 밝혔다. 언뜻 보기에 천궁공자는 몹시 위풍당당했다. 얼굴도 제법 영준한 청년이었다. 천궁공자가 앞을 가로막는 순간 태화군주는 그야말로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 자는 느닷없이 태화군주를 취하겠다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황녀로서의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이미 정혼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천궁공자는 안하무인이었다. 그는 사흘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추격해 왔다. 마차를 호위하던 사십팔 명의 위사대는 그동안 하나씩 죽어갔다. 천궁공자가 쏜 거대한 화살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천궁공자. 그는 정녕 오만불손하면서 공포스런 무뢰배였다. "흐흑! 황위사, 결국 그대도 죽었나요?" 마침내 태화군주는 황위사가 죽었음을 알았다. 사십팔인의 위사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던 황위사마저도 죽은 것이다. 그때였다. 쿠쿠쿵... 콰쾅! 미친 듯이 앞으로 내달리던 마차가 무엇에 부딪혔는지 거센 충격을 받으며 멈추었다.


"아악!" 태화군주는 마차의 벽에 머리를 부딪히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흐흐흐! 군주 이제 더이상 갈 곳이 없게 되었소. 이제 본 공자의 품에 안기는 것이 어떻겠소?" 흉물스럽기 짝이 없는 사나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태화군주는 정신이 가물거리는 와중에서도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 "가... 감히 어쩔려고 그러느냐?" "흐흐흐......!" 대소와 함께 부서진 마차의 주렴 속으로 손이 하나 쑥 들어왔다. "악!" 태화군주는 질겁을 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가냘픈 몸은 우람한 사내의 옆구리에 안긴 후였다. 팔 척 거구의 사나이였다. 사나이는 불타는 석양을 등진 채 태화군주를 옆구리에 안아 들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호랑이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등에 금궁(金弓)을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호랑이는 아니었다. 허리에는 굵은 활통을 차고 있었다. 사나이의 얼굴은 거구인 외모와는 달리 몹시 영준했다. 그러나 눈빛만은 몹시 포악했다. 사나이는 어딘지 모르게 이국인 냄새를 풍겼다. "클클클! 본 공자가 한 번 점찍은 여인은 설사 공주라해도 벗어나지 못한다. 알겠느냐?" 그는 바로 천궁공자였다. 휘익! 그는 혼절한 태화군주를 옆구리에 낀 채 독수리처럼 허공을 솟구치는 것이었다. 사내의 몸놀림은 생긴 것과는 달리 쾌속무비했다. "클클! 더구나 널 취하라는 명이 있고 보면... 네가 아무리 황녀라 해도 계집은 계집이다. 푸풋! 어쩔 수 없이 너는 내 계집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황권(皇勸)도......." 천궁공자의 말이 멀어져 갔다. 그때였다. 스슥! 마차가 부서진 자리에 한 백영이 나타났다. 백영은 다름아닌 극락서생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부서진 마차를 내려다 보더니 중얼거렸다. "천궁공자는 천마부주 위지경의 제자다. 그가 태화군주를 취하라는 명을 받았다니.... 혈의교는 이제 황궁까지도 손을 뻗었단 말인가?" 천궁공자는 바로 마도제일인인 혼세천마 위지경의 대제자였다. 혈륜궁주였던 백천강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백천강의 무심한 눈이 저물어가는 석양 속에서 번쩍였다. 실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눈빛이었다. ② 산 중턱에 아담한 초옥이 한 채 있었다. 초옥의 창으로부터 어슴프레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그 불빛을 향해 다가서는 백의 인영이 하나 있었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땅 위를 스치듯이 걷고 있었다. 그의 보법은 바람과 같았다. 마침내 백천강은 초옥에 다다랐다. 사위어가는 편월(片月)이 짙은 구름을 뚫고 나왔다. 편월은 으슴프레한 빛을 초옥의 마당으로 흩뿌렸다. 그때였다. "음." 백천강은 불현듯 신음을 흘리며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초옥의 마당에 세 구의 시신이 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 다. 그들은 조금 전 살해된 것이 분명했다. 채 마르지 않은 피가 비릿한 혈향과 함께 마당을 적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냥꾼 부부인 듯한 중년남녀와 한 명의 소년이었다. 그들은 머리가 으스러진 채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그들의 부릅뜬 눈은 경악과 분노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문득 초옥으로부터 천궁공자의 음탕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킬킬! 태화군주. 넌 어쩔 수 없이 본 공자의 계집이 되는 거다. 오늘밤 이후 너는 내 계집이다!" 백천강��� 즉시 모옥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는 창문 곁에 바짝 붙어서서 모옥 안을 들여다 보았다. 낡은 침상 위에 태화군주가 쓰러져 있었다. 천궁공자는 두 눈에 음탕한 빛을 띄운 채 침상가에 서 있었다. 천궁공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크크ㅋ! 이제 본인은 너의 낭군이 되는 것이다." 태화군주는 쓰러진 와중에서도 치를 떨었다. "감히 날 범하려 들다니... 구족(九族)이 참수당하는 것이 두렵지도 않느냐? 더구나 이 몸을 범한다고 해서 어찌......." "킬킬! 네게 정혼자가 있다 그 말이냐? 그 놈은 이미 죽었지 않았느냐?" 천궁공자는 탐광을 흘리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오늘밤만 지나면 넌 어쩔 수 없이 날 섬기게 될 것이다. 그후에는 황실까지도......." 천궁공자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태화군주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다, 다가오지 마라! 아악!" 찌익! 순식간이었다. 천궁공자의 손놀림은 번개같았다. 태화군주의 몸을 가리고 있던 궁장이 무참히 찢겨져 나갔다. 다음 순간 천궁공자는 얼굴색을 바꾸며 냉혹하게 말했다. "내일부터 나와 함께 황궁으로 간다. 그리고 날 위해 황제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다오." 부욱! 다시 옷가지가 찢겨나갔다. "놓, 놓아라! 크흐흑!" 태화군주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느새 그녀는 알몸이 되어 있었다. 천궁공자의 완력은 무지막지했다. 태화군주의 탐스럽게 부푼 젖가슴이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이제껏 어느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나신이 드러났다. 매일 같이 천축산 값비싼 향유(香乳)로 씻은 피부는 눈부시게 희었다. "흐흐흐!" 천궁공자는 두 눈에 탐광을 흘리며 태화군주를 덮쳤다. 바로 그때였다. "풍류를 모르는 친구로군!" 느닷없이 음성 하나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그 음성은 대단히 냉막한 것이었다. 스슷! 찰나지간 천궁공자의 몸이 섬광처럼 회전했다. 동시에 그의 두 팔이 한쪽 벽을 향해 뻗었다. 천궁공자의 손아귀에서 무서운 장력이 뻗어나갔다. 그것은 무척이나 빠른 반응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리조차 내지 않는 가공할 공격이었다. 콰쾅! 장력을 받은 한쪽 벽이 모랫가루처럼 무너져내렸다. "쯧쯧, 너무 느리네." 조소하는 듯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천장 쪽이었다. 천궁공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이 번개처럼 등으로 올라갔다. "헉!" 그는 헛바람을 들이마시며 휘청거리고 말았다. 없었다. 분명히 등에 있어야 할 금궁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때였다. "쯧쯧, 이걸 찾나?"


등 뒤에서 예의 그 음성이 들렸다. "으으!" 천궁공자는 이빨을 앙다물며 서서히 돌아섰다. 그 순간 그는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한 사람이 자신을 향해 금궁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냉막한 얼굴을 가진 백의미서생이었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 장난감으로 많은 사람을 사냥했더군." "으으음!" 천궁공자의 입에서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는 백의미서생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깨달았다. 호수처럼 투명한 그의 눈 속에 어리고 있는 냉혹한 기운을. 그것은 고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자신의 목숨을 체념하기에는 너무나 아쉬움이 많았다. 어느새 천궁공자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백천강은 장난처럼 살기없는 웃음을 흘렸다. "후후, 이번에는 자네가 사냥감이 되어보는 것도 좋겠네." 우... 웅....... 공기가 떠는 진동음과 함께 금궁시위가 팽팽히 당겨졌다. "으으, 정말로 주... 죽일 셈이냐?" 천궁공자는 온몸이 땀으로 젖고 말았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백천강을 향해 말했다. 백천강은 빙긋 웃었다. "글쎄, 이따위 장난감이 자네를 다치게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네만... 한 번 시험해 보고 싶군." "그, 그건 장난감이 아니다. 제발!" "그런가? 내 눈에는 형편없는 장난감으로 보이는데... 글쎄, 어디 시험해 보지." 백천강은 시위를 힘껏 당겼다. 천궁공자는 완전히 사색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 제발 살려 주시오!" 백천강은 혀를 찼다. "쯧쯧! 천하의 천궁공자가 빌다니 송구스럽군." "내... 내 명호를 어찌?" 천궁공자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백천강은 조소하듯 말을 이어갔다. "후후... 네가 위지경의 대제자라는 것도 알지." "어... 어떻게?"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무... 무엇이오?" 천궁공자는 똥줄이 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백천강은 그의 심중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든 금궁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이 금궁은 무척 강하군. 한 번 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군. 그것도 사람을 말이야." "제발!" 천궁공자는 비굴해질 대로 비굴해졌다. 그는 자신의 무기인 금궁의 위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강한 철판이라도 가볍게 뚫는 위력을 지닌 가공할 무기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금궁을 맞는다면 시신인들 온전할 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백천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군주를 범한 뒤 어떻게 하려고 했을까? 그게 궁금하군."


"그건......." "뭐 굳이 듣고 싶은 생각은 없군." "마... 말하겠소!" 천궁공자는 완전히 체념해 버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허탈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황제를 협박하여......." 백천강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서?" "혈의교에 책봉을 내리게 하려고 했소." 놀라운 일이었다. 백천강은 놀람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섬뜩함을 금치 못했다. 그는 멍하니 천궁공자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천궁공자는 더듬거렸다. "물론 힘든 일이나... 지지자가 있으므로......." 문득 그는 실수를 느낀 듯 황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백천강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흉물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크크! 황실 내에 지지자가 있단 말인가? 그가 누구지?" "그... 그건......." 천궁공자는 어물거렸다. 백천강은 금궁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말하기 싫다 그건가?" "아, 아니오! 그는... 바로 대원수인 사광천(査光天)이오" "뭐라고?" 백천강은 정말 크게 놀랐다. 대원수 사광천. 그는 당금 대명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인물로 황제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자였다. 뿐만 아니라 대광명회를 이끌었던 사유성의 부친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혈의교의 앞잡이라는 말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으음!" 백천강은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불현듯 천궁공자를 노려보았다. "그게 정말인가? 그때였다. 백천강의 눈은 두 개의 시뻘건 광구(光球)로 화했다. 그것은 마치 악마의 눈 같았다. "으으으!" 천궁공자는 공포에 사로잡혀 몸을 벌벌 떨었다. 하지만 그는 백천강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백천강은 이령심혼통심대법(以靈心魂通心大法)을 시전한 것이다. 마침내 천궁공자는 혼을 뺏긴 듯 술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 사광천은 가짜요. 진짜는 갇혀 있소. 본교의 천면환요(千面幻妖)가 대신 사광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오." 천궁공자는 심지를 완전히 제압당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놀라운 비밀들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마침내 백천강은 모든 사실을 알아냈다. 더이상 캐물을 것이 없어지자 백천강의 두 눈은 원상태로 돌아왔다. "내... 내가 무슨 말을 한 것이지?" 정신을 차린 천궁공자는 겁에 질려 벌떡 일어났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무 말도!" 그는 부르짖으며 백천강을 덮쳤다. 그때였다.


슉! 금빛 화살이 파공성을 남기며 날았다. "크아악!" 화살은 일직선으로 날아 천궁공자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러고서도 천궁공자의 몸을 이끌고 날아가더니 그대로 맞은 편 벽에 콱 박히는 것이었다. 천궁공자는 화살에 꿰인 채 눈을 부릅뜨고 죽고 말았다. 백천강은 금궁을 버렸다. 이어 그는 천궁공자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혈의교의 손길이 황궁까지 뻗쳤을 줄은 몰랐군." ③ 한편 태화군주는 공포스러운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았다. 그녀는 황궁에서 곱게 자란 황녀였다. 무림인들의 이런 비정한 세계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놀라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도 잊고 벌벌 떨고 있었다. "......." 백천강은 비로소 모옥 안에 그녀도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듯 시선을 돌렸다. 완미한 군주의 나신을 본 백천강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는 태화군주를 향해 다가갔다. "오... 오지 마라!" 태화군주는 비로소 사태를 깨달은 듯 황급히 두 손으로 젖가슴과 아랫배를 가리며 외쳤다. 그러나 그 모습은 더욱 고혹적이었다. 백천강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강렬한 빛을 뿌렸다. "너... 너도 똑같은 치한이냐?" 태화군주는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바로 그때였다. 휙! 무엇인가가 태화군주의 발치 아래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뜻밖에도 백천강의 장삼이었다. 그는 장삼을 벗어 태화군주를 향해 던진 것이었다. "......?" 뜻밖의 행동에 태화군주는 멍청해지고 말았다. 다음 순간 백천강은 정중히 읍하며 말했다. "군주. 일개 강호인에 불과한 천민이 어찌 무례를 범하겠소이까? 우선 아쉬운 대로 옥신을 가리십시오." "......." 태화군주는 그만 맥이 풀리고 말았다. 이어 그녀는 안도의 눈물을 쏟았다. "흐흐흑!"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천우신조가 아닌가? 그녀는 장삼으로 나신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기쁨의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부드러운 손길이 장삼으로 그녀의 몸을 감싸주었다. 이어 그녀의 귀에 사내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군주께서 보신 대로요. 무림의 음모가 황궁까지 뻗치고 있소이다. 소생은 군주의 협조를 바랍니다." "어... 어떻게?" 태화군주는 고개를 들었다. 순간 사나이의 서늘한 두 눈이 그녀의 가슴에 깊이 박혀 들었다. 백천강은 담담히 말했다. "소생은 혈의교를 무너뜨려야 할 숙명이 있소이다. 따라서 그들의 음모를 파괴하려고 하오이다. 군주께서 소생의 뜻대로 따라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 알겠어요."


마침내 태화군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백천강은 짐짓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우선 북경으로 군주를 모시겠소이다." "고마워요. 황상께 대협의 노고를 말씀드리겠어요." "과찬의 말이오. 소생은 그저 한낱 강호인일 뿐이오." 백천강은 이어 말했다. "이곳은 흉한 곳이오. 군주께서 오래 계실 곳이 못되오이다. 용서하시오." 말이 끝나자 그는 태화군주를 안았다. 백천강은 태화군주를 안은 채 몸을 날렸다. 태화군주는 엉겁결에 그의 목에 매달렸다. "......!" 그녀의 후각으로 강렬한 남자의 체취가 숨막힐 듯 밀려들어 왔다. 그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휘휘익!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태화군주는 그만 백천강의 가슴에 옥용을 묻고 말았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알몸을 모두 본 남자였다. 또한 자신을 구한 남자이기도 했다. 이제 그 남자의 모든 것이 태화군주의 마음 깊숙히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정인조차도 지금까지 이런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아아!' 태화군주는 백천강의 목을 감은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었다. ④ 향운거(香雲居). 향운거는 자금성이 있는 북경으로부터 남쪽 백 리 밖에 있는 객점이었다. 만춘의 밤은 그지없이 훈훈했다. 그런 밤 한 남자가 홀로 객점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 백천강은 다구를 마주하고 앉아 묵묵히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태화군주와 함께 먼 길을 온 것이었다. 태화군주는 황족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오만하거나 도도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부드러우면서 온화했다. 그리고 속마음도 깊었다. 세상의 어떤 사내라도 그녀의 행동에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태화군주를 호위하는 백천강의 행동은 뜻밖이었다. 그는 예전의 백천강이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그는 태화군주를 그냥 놔두었을 리 만무했다. 그것은 백천강의 마음이 동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전갈의 독에 의해서 욕정을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태화군주를 만난 후 욕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는 태화군주에게 황족으로서의 예의를 갖추어 주는 것 외에는 어떤 관심도 드러내지 않았다. 정말이지 전혀 딴 사람처럼 행동해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태화군주는 그런 백천강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그것은 신뢰 이상의 믿음이었다. 지금 태화군주는 옆 방에 있었다. "후후!" 한순간 차를 마시던 백천강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흘렀다. 그때였다. 그의 현기어린 담담한 눈빛에 극히 음산한 빛이 찰나적으로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군주. 당신은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들어야 한다. 더 깊이... 도저히 뻐져 나올 수 없도록 말이다.' 그는 찻물을 손가락에 찍었다. 이어 탁자 위에 글씨를 썼다. 그것은 단 한 글자였다. 하지만 글자는


금방 지워지고 말았다. "후후!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가리지 않으리라. 고금초유로 강호와... 황(皇)까지도......." 그의 음성은 너무도 낮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선을 내세우는 길이다. 사람들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제부터는 악은 감추고 선한 얼굴만 내세우는 것이다. 후후! 이것이야말로 고도의 책략이다." 태화군주. 그녀는 천하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여인이었다. 바로 당금 황제의 누이였던 것이다. 바로 그 사실이 지금 그녀를 괴롭힐 줄은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아! 차라리 평민이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태화군주는 침상보를 움켜쥐며 괴로운 듯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황족의로서의 권위따위는 애초부터 없는 듯했다. 그러나 타고난 핏줄만큼은 세상 어느 것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고통의 원인이었다. 태화군주의 괴로움에 찬 몸부림 때문이었을까? 조용히 타오르던 촛불이 파르르 흔들리며 한 줄기 검은 연기를 피워올렸다. "휴우......." 태화군주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돌아누웠다. 이어 그녀는 멍하니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 촛불이 한 사람의 얼굴로 화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에게... 그에게 갈 수가 없는 것이 한이다. 이제 내 마음은 온통 그에게 향해 있건만......." 어느새 태화군주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내일이면 자금성에 도착한다. 그러면 아마 영원히... 다시 그를 만날 수는 없겠지." 그때였다. "그럴 수는 없어!" 태화군주는 부르짖듯 외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침상에서 일어나 멍하니 허공을 바라 보았다. "유성은 떨어졌어. 그렇다고 이 몸이 황녀라는 신분 때문에 외로운 별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아냐! 그럴 수는 없어. 나는 그저 평범한 아낙이 되고 싶어. 그를 마음껏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어." 문득 태화군주의 얼굴에 한 가닥 비장한 결심이 어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가자. 그에게로 가는 거야. 가서 이 몸은 황녀도, 군주도 아니라고... 그저 당신의 여인이면 족하겠노라고 고백하는 거야. 그리고 오늘밤 모든 것을 주어버리겠어."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급히 옷을 걸치고는 객실의 문을 열었다. 팔랑....... 도화꽃잎 하나가 이슥한 봄밤의 훈풍을 타고 창가로 떨어져 내렸다. 44 장 잔인한 심계(心計) ① 이경 말쯤이었다. 백천강은 침상에 누워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올 때가 되었다. 군주. 너는 한낱 여인에 불과하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가볍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여인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백천강의 방으로 들어섰다. 천하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여인, 바로 태화군주였다. "......." 백천강은 짐짓 잠든 척 했다.


사르륵....... 옷자락이 가볍게 끌리는 소리와 함께 향풍(香風)이 다가왔다. 태화군주는 백천강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는 잠든 백천강의 얼굴을 하염없이 내려다 보았다. 한 순간 그녀의 입술이 힘겹게 떨어졌다. "결심했답니다. 당신의 여인이 되기로.... 이 순간부터 이 몸은 태화군주가 아니라 주화령(朱華鈴)일 뿐이에요.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저는... 그저 평범한 여인이 되겠어요. 오로지 당신만의......." 여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를 나무라지 마세요. 저 스스로가 원한 길이니까요. 오늘밤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어요." 주화령은 옷자락에 떨리는 손을 가져갔다. 달빛이 불꺼진 방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교교한 달빛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사르르륵....... 한 겹뿐인 나삼이 가볍게 흘러내렸다. 정녕 황홀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나신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주화령은 나삼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 태고 이래의 나신이 달빛 속에 새하얗게 빛났다. 동그란 어깨로부터 알맞게 부푼 젖가슴이며, 잘룩한 세류요는 가히 천계의 여인을 방불케 했다. "이 몸. 이제부터 당신의 것이랍니다." 주화령은 슬픔에 찬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어 그녀는 완전히 알몸이 된 자신의 육체를 내려다 보았다. 달빛이 흘러내리고 있는 나신은 너무도 아름다왔다. 그녀는 잠깐동안 두 손으로 자신의 젖가슴과 하반신을 가렸다. 그러나 곧 손을 떼더니 몸을 굽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금침을 들고 침상으로 올랐다. 그녀는 깊이 잠든 듯한 백천강의 옆으로 파고 들었다. 백천강은 잠결에 인기척을 느낀 듯 흠칫 눈을 떴다. 그때였다. "아...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여인의 소근거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어 여인의 불타는 듯한 입술이 백천강의 뺨에 닿았다. "아니?" 백천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순간 비단결보다도 매끄러운 여체가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백천강은 아찔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목석같은 사나이라고 해도 주화령의 육체가 불러일으키는 유혹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물론 백천강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주......." 백천강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주화령의 뜨겁게 달아오른 입술이 그의 입술을 덮었기 때문이다. "음!" 백천강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주화령의 몸은 이미 불덩어리였다. 그녀는 뜨거운 나신을 뱀같이 움직이며 백천강의 몸을 감아왔다. 황녀라는 지고한 신분 속에 숨겨져 있던 뜨거운 정열이 일시에 폭발한 듯 싶었다. 그녀는 자꾸만 백천강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아아!" 주화령의 입에서도 신음이 터져나왔다. 백천강의 손이 그녀의 등을 힘차게 끌어 안았기 때문이다. 백천강의 손은 그녀의 매끄러운 등을 쓰다듬다가 아래로 내려가 팽팽한 주화령의 둔부에 이르렀다. 그는 힘껏 둔부를 끌어당겼다. 주화령은 그저 입술을 벌리며 뜨거운 입김을 토할 뿐이었다.


비록 그녀 스스로가 원해서 왔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남자 경험이 없는 그녀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아!" 문득 그녀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흘렸다. 어느새 자세가 바뀌고 있었다. 백천강이 그녀의 몸 위로 올라선 것이다. 주화령은 그만 눈을 꼭 감고 말았다. 사나이의 탄탄하고 육중한 몸이 그녀의 나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온몸이 전율을 일으키는 것을 느끼며 머리 속이 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문득 젖가슴에 우악스런 손길이 느껴졌다. 백천강의 손에 소담스런 젖가슴이 형태를 잃고 이지러졌다. 주화령은 고개를 꺽으며 입술을 벌려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흐으윽!" 주화령은 마침내 흐느낌과도 같은 신음을 발했다. 어찌된 셈인지 온몸이 열탕에 떨어진 듯 끓어 오르고 있었다. 백천강의 손길이 그녀의 육체 구석구석을 애무하고 지날 때마다 그녀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무서운 쾌감에 전율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었나? 아아!' 주화령은 내심 죽어도 좋아! 하고 외치며 온몸을 열었다. 백천강이 그녀의 몸 깊숙히 들어오도록 전신을 개방한 것이다. 백천강은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다가 마침내 마지막 자세를 취했다. 이제 고귀하기로 천하에서 비할 바 없는 황녀가 일개 강호의 무부와 한 몸이 되려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일어났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녀의 몸을 뜨겁게 애무하던 사나이가 행동을 멈추어 버린 것이다. 미지의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눈을 꼬옥 감고 있던 주화령은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백천강이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두 팔로 침상을 짚은 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 보지 마세요. 부끄러워요." 주화령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문득 백천강이 고개를 흔들며 완강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안 되오!" "......!" 주화령은 찬물을 한 바가지 덮어쓴 기분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대번에 열기가 식는 것을 느꼈다. "왜...? 어째서죠?" 그녀는 따지듯 물었다. "이러면 안 되오." "왜죠?" 주화령은 바보같이 재차 반문했다. "당신은 군주이기 때문이오." "그럼 당신은?" "나는 일개 강호무부(江湖武夫)에 불과하오." "왜... 안 되죠? 그것이 무슨 상관이죠?" 주화령의 음성은 애원에 가까웠다. 백천강은 담담하게 말했다. "봉황과 까마귀는 같이 놀 수 없는 법이오. 아니, 같이 놀아서는 안 되는 법이오." 그때였다. 주화령은 문득 날카롭게 웃었다.


"호호홋! 제가 봉황이라고요? 제가?" "그렇소." "호호호홋! 스스로 옷을 벗는 봉황도 있나요?" 주화령은 미친 듯이 웃었다. 그 바람에 눈물이 찔끔거리며 흘러내렸다. 그녀의 나신을 가렸던 금침이 흘러내렸다. 눈부시게 뽀얀 젖가슴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녀는 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실성한 듯이 계속 웃을 뿐이었다. 백천강은 어느새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돌아선 채 담담히 말했다. "군주께서 잠시 마음이 어지러우신 탓이오." "호호홋! 어지럽다고?" 주화령은 연신 눈물을 찔끔이며 웃어댔다. 백천강은 차갑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잊지 마시오. 당신은 황녀요." "황녀, 그까짓 황녀 다 소용없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버릴 수......." 그때였다. 돌연 주화령의 말이 끊어졌다. 그것은 백천강의 입에서 새어나온 뜻밖의 말 때문이었다. "그럴 수는 없소. 왜냐면 군주의 주인이 살아 있기 때문이오." 주화령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주인? 나의 주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군주의 정혼자가 살아 있다는 말이오." 순간 주화령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거,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는 죽었어요. 나만을 남겨두고!" 그녀는 발악하듯 외쳤다. "그는 죽지 않았소." 주화령은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죽... 죽지 않았다고요? 그럴 리가!" 백천강은 침중하게 말했다. "사실이오. 대원수의 공자이신 사유성 대협은 분명 살아 있소. 그는 재기의 일념으로 비밀장소에서 지사들을 모으고 있소이다." "아!" 주화령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흘리며 혼절하고 말았다. 백천강의 말이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② "후후후......." 백천강은 기소를 흘렸다. 주화령은 죽은 듯이 혼절해 있었다. 금침이 흘러내린 주화령의 나신이 달빛에 드러났다. 실로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빙기옥골지신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격렬한 애무에 달아올랐던 여체는 지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 여체는 웬지 슬퍼 보였다. "......." 백천강은 주화령의 나신을 내려다 보았다. 달빛에 그늘진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비인간적이었다. 그런 백천강의 눈에는 뜻밖에도 이글거리는 탐욕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욕정의 불길이었다. 문득 그는 중얼거렸다. "참는다. 널 범하지 않는 것이 범하는 것보다 백 배 더한 고통을 줄테니까. 이로써 너는 영원히 날 잊을 수 없을 테고... 더이상 사유성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후후후!" 백천강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주화령의 젖가슴을 슬쩍 쓰다듬었다. '크ㅋ! 참으로 탐스러운 몸이다. 그러나 이제 넌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


백천강은 흘러내린 금침을 들어 주화령의 옥신을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오늘 밤은 잠들긴 틀렸다. 푸풋!" 스슷! 그의 신형이 연기처럼 어딘가 사라졌다. 깊을 대로 깊은 밤이었다. 기녀 매월(梅月). 매월은 오늘밤따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노류장화의 몸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청백지신(淸白之身)을 지키고 있었다. 같은 기녀들조차 그녀를 비웃었다. 그러나 매월은 웃음을 팔지언정 몸만은 절대로 팔지 않았다. 그녀는 누각의 침실 창문을 열어놓고 멍하니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달아. 너는 알고 있니? 뜨거운 내 마음을.... 나라고 왜 사나이가 그립지 않겠니? 하지만......." 매월은 침의를 뚫고 나올듯한 젖가슴을 제 손으로 만졌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이 매월의 뜨거운 마음을 주고 싶지는 않은 거야." 이때였다. 문득 담담하면서도 매력 넘치는 음성이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나라면 어떨까? 매월." "......!" 매월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몸을 잔뜩 움츠리면서 돌아섰다. 놀랍게도 그녀의 침상 위에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백의미서생이었다. 아니었다. 그녀가 그토록 꿈 속에서도 그리워하던 왕자였다. 백의미서생은 웃으며 팔을 활짝 벌렸다. "매월. 널 안아주러 왔다." "아!" 매월은 온몸에 짜릿한 그 무엇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 뿐이었다. 그 다음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 안아줘요!" 그녀는 뜨겁게 할딱이며 다가갔다. 사르륵....... 그녀는 제 손으로 침의를 벗어 던졌다. 알몸이 된 그녀의 육체가 달빛을 받아 터질 듯한 열기를 발했다. 그녀는 온몸이 타버릴 것 같은 열기와 갈증을 느끼며 그대로 백의미서생의 품 안에 쓰러졌다. 백의미서생은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매월의 무르익을대로 익은 나신을 끌어 안으며 중얼거렸다. "좋은 몸이군." 그는 매월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 매월은 젖가슴이 떨어져 나갈 듯한 아픔을 맛보았다. 그러나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사나이의 무릎에 걸쳐진 채 몸을 있는 힘껏 활처럼 굽혔다. 사나이의 억센 팔이 그녀의 허리와 둔부를 강하게 조이고 있었다. 달빛이 무척이나 고운 밤이었다. 교교한 달빛이 젖어들 대로 젖어 들고 있었다. 그날 밤 매월은 난생 처음으로 여인의 기쁨을 알았다. 그녀는 한 번도 팔지 않은 육체를 그날 밤 고스란히 사나이에게 바쳤다. 그대로 타서 재가 된다해도 그녀는 후회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③ 제독부(提督府). 제독부는 당금 명조(明朝)의 대들보같은 곳이었다.


또한 그곳은 팔십일만 금군통령이자 대원수인 사광천의 부중이기도 했다. 두두두....... 제독부의 정문. 위용을 자랑하는 돌사자가 버티고 서 있는 정문 앞에 한 대의 마차가 당도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사두마차였다. 마부석에는 금의를 입은 청년무장이 힘차게 고삐를 쥐고 있었다. 청년무장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히히힝....... 말은 요란한 울음을 울며 앞발을 치켜들었다. 마차는 제독부 앞에서 멈추었다. 그때였다. 한 명의 노장이 황급히 금군차림의 무사들 사이에서 달려나왔다. 그는 마차 앞에서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군주님의 행차를 받듭니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것은 백의미서생이었다. 뒤이어 미서생의 부축을 받으며 한 여인이 뒤따라 내렸다. 여인은 바로 태화군주였다. 영빈청(迎賓廳). 제독부를 방문하는 사람치고 영빈청에 들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그곳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왕후장상 뿐이었다. 왕후장상이 아니면 대개 외전(外殿)에서 대원수의 하명을 며칠이고 기다려야 했다. 영빈청은 몹시 장엄하면서 정갈했다. 대원수 사광천의 근엄함과 검박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분위기였다. 특히 무장인 사광천의 취미답게 영빈청의 네 벽에는 십팔반 병기를 비롯하여 여러 자루의 명검보도가 걸려 있었다. "......." 태화군주는 장총관의 안내를 받았다. 장총관은 침향목으로 된 탁자로 그녀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장총관의 말투는 극히 겸손했다. 태화군주는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때였다. 태화군주를 뒤따르던 금의청년이 그녀의 뒤에 그림자처럼 섰다. 금의청년의 허리에는 금빛 패검이 걸려 있었다. 금의청년의 얼굴은 준수했다. 눈빛은 기이하게도 물빛처럼 담담한 청년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대원수께서 곧 드실 것이옵니다." 장총관은 황급히 ���례를 하며 사라졌다. 잠시 후 대청 안에서 곧 두 명의 청의시비가 다반을 들고 나왔다. 시비들은 태화군주를 향해 향차를 받들어 올렸다. "......." 태화군주는 옥수를 뻗어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찻잔을 반쯤 비웠을 때였다. "하하하.... 군주께서 어인 행차이시오?"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대청 안쪽으로부터 한 명의 황의노인이 걸어 나왔다. 노인은 턱 밑에 한 자에 가까운 반백의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나이는 언뜻 보아 육순을 넘은 것 같았다. 황의노인의 걸음걸이는 위풍당당했다. 그의 얼굴에는 일면 온화하고 치밀한 성품이 엿보이기도 했다. 가히 대장군의 웅장함과 거인으로서의 풍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노인이었다. 그는 바로 대원수 사광천이었다. 사광천이 나타나자 태화군주는 몸을 일으키더니 다소곳이 일례를 했다. "소녀 대원수님을 뵈옵니다." 사광천은 황급히 마주 일배하며 말했다. "감히.... 군주의 예를 받을 수 없소이다." 겸허함과 기도가 적절한 조화를 이룬 훌륭한 태도였다. 그 광경을 보던 금의청년의 눈이 번쩍 빛났다.


두 사람은 곧바로 침향목 탁자에 마주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태화군주였다. "소녀가 이번에 제독부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유성공자님의......." 그녀의 말은 곧 끊겼다. 사광천의 탄식 때문이었다. "허어! 참으로 할 말이 없소이다. 불민한 자식 놈이 강호에 뛰어들어 허무하게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이까? 황상은 물론 군주께 볼 낯이 없소이다." 태화군주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공자님은 장차 이 몸의 지아비가 되실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 모든 것이 운명이겠지요." "아아! 불효자식같으니!" 사광천의 안색은 비통하게 일그러졌다. 잠시 후 태화군주는 다소곳이 입을 열었다. "소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오! 어서 말씀해 보시오. 군주." 태화군주는 속눈썹을 슬픈 듯이 파르르 떨었다. "사공자께서 비록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지는 못했사오나 이 몸의 부군이 아니옵니까?" "......?" 사광천의 눈에 한 점 의혹이 어렸다. 태화군주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말했다. "소녀는 이곳에 머물며 그 분의 명복을 빌려 하옵니다." 사광천은 깜짝 놀랐다. "아... 어찌 고귀하신 옥체를 그런... 그건 아니될 말씀이오이다. 거두어 주십시오." "아니에요. 소녀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어요. 어찌 일국의 황녀로서 두 지아비를 섬기겠사옵니까? 이 몸은 이미... 사공자와 한몸이옵니다." 태화군주의 음성은 미미하게 떨렸다. 사광천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말은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군주께서 그런 결심을 하셨다면 신으로서는 무한한 영광이오이다. 그러나 군주께는 너무 불행한 일이 아니오이까?" 태화군주는 고개를 떨구며 몸을 일으켰다. "이 몸의 마음은 이미 굳어졌어요. 가능하면 사공자의 처소를 빌었으면 합니다. 그 분의 체취나마 가까이 모시고 싶으니......." 사광천은 그녀를 따라 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를 말이오? 속히 준비하오리다!" 사광천은 곧 시녀에게 뭐라고 지시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태화군주의 안색은 몹시 창백해 보였다. ④ 밤이었다. 태화군주는 사유성의 처소에 들어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서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리( )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그 의자는 평소 사유성이 즐겨 앉던 의자였다. 그녀의 뒤에는 금의청년이 여전히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문득 태화군주가 금의청년을 돌아 보았다. "진공자. 정말 그가 가짜일까요?" 청년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비록 완벽하게 그를 흉내내고 있으나 틀림없이 가짜이오." "그걸 어떻게 알죠?" 태화군주는 의혹이 깃든 음성으로 물었다. "군주는 잘 못 보았을 것이오. 그 자의 얼굴색과 손의 색이 다르다는 것을. 자세히 보면 틀림을 알 수가 있소." "아!"


태화군주는 탄성을 발하며 일어섰다. 그녀는 금의청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당신은 정말 치밀하군요." 청년은 빙긋 웃었다. "강호에서 밥을 먹으면 그 정도쯤은 항상 주의를 기울이는 법이오." 태화군주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때였다. 청년의 음성이 태화군주의 귓전에 전해졌다. 어느새 그의 음성은 모기소리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군주, 침착하시오. 감시자가 있소. 창밖 화원에 둘, 천장에 셋, 방금 도착했소." "......!" 태화군주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문득 그녀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진호장(陳護將).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 겠어요." "알겠습니다. 군주님." 금의청년은 공손히 읍했다. 이어 그는 침착하게 걸어 방을 나갔다. 금의청년은 태화군주의 방문 밖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방문을 지키려는 행동임이 분명했다. 그 순간 태화군주의 눈에는 다시 뿌우연 물안개가 어렸다. 그녀는 내심 중얼거리며 침상을 향했다. '아아! 당신은 정말 내게는 먼 그대인가요?' 금의청년.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목상처럼 태화군주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 돌연 그의 몸에서 한 가닥 기류가 빠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기체는 곧바로 화원으로 스며들었다. 뒤이어 극히 경미한 신음이 두어 차례 들렸다. 화원으로 스며들었던 기류는 다시 천장과 마루로 스며들었다. 백천강이 지금 펼치고 있는 전설적인 분신술인 마령이혼분영대법(魔靈離魂分影大法)이었다. 그것은 과거에 진우명이 석대가(石大家)에서 썼던 술법이었다. 스스스....... 그 기류는 천장과 마루밑에 숨어 있는 자들의 숨을 가차없이 끊어놓았다. 이어 기류는 제독부 깊은 곳으로 유령처럼 날아갔다. 고풍스런 장식으로 꾸며져 있는 침소였다. 그곳은 바로 대원수 사광천이 거하는 곳이었다. "......."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그는 입가에 괴이한 미소를 띄며 침상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음침한 웃음이었다. 그것은 평상시의 사광천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흐흐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진짜 사늙은이가 감쪽같이 바꿔치기 당한 줄은 모두 모르고 있다." 불현듯 사광천은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클클! 과연 하늘을 울리는 권세를 지닌 자리인지라 아무런 불편이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 놈의 늙은이가 평소 여색을 멀리하는 버릇 때문에 벌써 백 일 간이나 굶었으니. 이대로 가면 성불이라도 하겠는 걸?" 그것은 전혀 뜻밖의 내용이었다. 바로 이때였다. 요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호호호! 천면환요(天面幻妖)! 낮말을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걸 모르나요? 영주께서 들었다면 당신은 목이 열 개라도 부지하지 못했을 거예요!" "으읏!" 찰나지간 사광천은 안색이 핼쓱해지고 말았다. 그는 진짜 사광천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혈천마국의 천면환요였다. 천면환요는 파랗게 질려 입을 열었다. "인요(人妖)! 설마 보고는 않겠지?"


스슷....... 촛불이 일렁거렸다. 뒤이어 방 안에 한 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타는 듯한 붉은 홍의를 입고 있었다. 여인의 긴 머리채는 탐스러웠다. 그것은 풍만한 둔부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얼굴에서는 요기가 철철 넘쳐 흘렀다. 인요(人妖). 무림인이라면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 이름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경멸하고 침을 뱉을 강호육요(江湖六妖)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강호육요는 무림의 비겁자들로 불리웠다. 따라서 그들은 정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사도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철면피한들이었다. 바로 그런 자들이 지금 제독부의 침전에 두 명이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사광천으로 변한 천면환요(千面幻妖)였다. 인요는 터져나갈 듯 부푼 젖가슴을 제 손으로 주무르며 음소를 흘렸다. "호호호! 그건 당신의 태도에 달렸어요." 천면환요의 두 눈이 일순 반짝였다. 그것은 바로 탐욕의 눈빛이었다.그는 인요의 말뜻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천면환요는 짐짓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떻게?" 인요는 엉덩이를 흔들었다. "호호! 무척이나 간단해요. 오늘밤 저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장춘신단(長春神丹) 한 알을 나누어 준다면......." 천면환요는 킬킬거렸다. "그대도 인생의 즐거움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모양이군." 그는 품 속에서 밀랍으로 싼 흑색단약 한 알을 꺼냈다. "흐흐! 이것을 원한다는 말이지? 이것 한 알이면 밤새 쾌락을 즐겨도 지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듭할 수록 피부가 윤택해지고 더욱 젊어지지." "호호홋!" 인요는 엉덩이를 흔들며 다가왔다. "후훗! 어차피 서로가 좋은 일이니 그러자구." 천면환요는 인요를 향해 단약을 던졌다. 인요는 재빨리 단약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누가 뺏을 새라 냉큼 밀랍을 벗기고 삼켰다. 천년환요는 욕정 가득한 두 눈으로 그녀를 지켜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흐흐응!" 인요는 몸에 마침내 장춘신단의 약효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온몸을 비비 꼬며 비음을 발했다. "흐응! 안아줘요. 어서!" 인요는 더이상 참을 수 없는 듯 옷을 활활 벗어던졌다. 그녀는 삽시에 알몸이 되었다. 그녀의 젖가슴은 정말 컸다. 커다란 젖가슴이 덜렁거리고 둔부가 묘하게 움직였다. 그야말로 온몸이 색정으로 넘치는 광경이었다. "클클! 갈수록 탐스러워지는군." 천면환요는 덥석 인요의 나신을 안았다. 두 탕남탕녀는 한덩어리가 되어 침상에 나뒹굴었다. 이때였다. 스스....... 침상 위의 천장에 하나의 인영이 어른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마령이혼분영대법을 시전하고 있는 백천강이었다.


두 탕인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불붙기 시작하는 육체의 음욕을 마음껏 불사르고 있었다. 백 일 간이나 굶었다는 천면환요의 공격은 가히 개걸스러웠다. 그는 인요의 육체 구석구석을 핥고 빨기에 여념이 없었다. 백천강은 입가에 비웃음을 띄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후후! 진귀한 구경감이군.' 천면환요과 인요는 미친 듯이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 그들은 온갖 작태를 연출하며 쾌락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백천강은 천장에 매달린 채 그 광경을 내려보고 있었다. 문득 그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두 탕인들의 행위는 자극적이라기보다는 추해보였던 것이다. "허억, 역시 너는......." 천면인요는 연신 요분질을 쳐대는 인요를 누르며 가쁜 숨을 쉬었다. 인요는 그의 두 다리를 허공으로 내두르며 교성을 질러댔다. "좋아요, 좋아!" 두 탕인의 행위로 인해 방 안은 후끈한 열기로 가득차고 말았다. 두 사람의 자세가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이었다. 막 상위(上位)에서 아래로 자세를 바꾸던 인요가 눈을 크게 떴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보고 말았다. 천장에 거미처럼 붙어있는 한 명의 금의청년을. 그녀는 전신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금의청년이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것이 아닌가? "악!" 마침내 인요는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일시적으로 혼절하고 말았다. "억! 왜 그러느냐?" 막 절정을 치닫던 천면환요는 아연실색했다. 이때 그의 뒤통수를 무엇인가가 새차게 때리는 것이 있었다. 천면환요는 그만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는 채 혼절하고 말았다. 스슷! 백천강은 침상 곁에 내려섰다. 그의 입가에는 기소가 어려 있었다. "후후후! 재미있는 광경이군." 그는 혼절한 두 탕인을 내려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백천강은 슬쩍 손을 흔들었다. 천면환요는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인요는 허공을 끌어안은 채 눈을 뜨고 혼절해 있었다. 백천강의 손바닥이 그녀의 백회혈을 눌렀다. "인요. 이제까지의 모든 것을 잊는 거다. 그리고 너는 뜨거운 정사를 벌이는 거다." 다음 순간 백천강의 입에서는 주술과도 같은 괴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바로 섭혼음이었다. "아아...." 불현듯 인요는 베개를 끌어안으며 신음을 흘렸다. 쾌락에 젖은 신음이 점점 높아졌다. 백천강은 다시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혼절해 있던 천면환요는 무엇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벌떡 일어섰다. 백천강은 천면환요를 바라보며 음산하게 말했다. "내 눈을 보아라." 다음 순간 백천강의 두 눈은 시뻘건 광구(光球)로 화했다. 천면환요는 그 눈을 보는 순간 혼을 빼앗기고 말았다. 백천강의 마법에 걸려 든 것이다. 백천강은 담담히 말했다. "대원수 사광천이 갇힌 뇌옥으로 가자." "으으!" 천면환요는 신지를 완전히 상실한 후였다. 그는 꼭두각시처럼 앞장서 걸어 나갔다.


45 장 뜻밖의 인연(因緣) ① 금옥(禁獄). 금옥은 제독부 후부에 위치한 가산 속에 지어진 지하뇌옥이었다. 그곳에는 역신(逆臣)이나 죄인들이 갇혀 있었다. 휘영청 달이 밝은 밤이었다. "대... 대원수께서 어인 일이시옵니까?" 여덟 명의 금의위사들은 경악하며 몸을 굽혔다. 그들은 금옥을 지키는 무사들이었다. 금옥 앞에 사광천이 나타난 것이다. 문득 사광천의 등 뒤에서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대원수께서 금옥 안을 시찰하시고자 한다. 문을 열어라." 백천강이었다. 그는 사광천의 호위무사로 변신해 있었다. 그의 말에 위사들은 어리둥절했다. "아니, 이 밤에?" 그때였다. 사광천이 입을 열었다. "살펴볼 것이 있으니 어서 열어라." 전혀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괴상한 음성이었다. 마치 억지로 짜내는 듯 했다. "넷!" 위사들은 감히 항명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급히 뇌옥의 자물쇠를 끌렀다. 철커덩!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휘이... 잉....... 지하로 이어지는 컴컴한 통로로부터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속에는 역겨운 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 사광천은 전혀 그 냄새를 맡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고 지하통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백천강이 따랐다. "......?" 위사들은 모두 의혹을 금치 못했다. 이 늦은 밤에 사광천이 무엇하러 지하뇌옥으로 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감히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광천은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은 나선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지하는 수직으로 뚫린 것이 분명했다. 얼마쯤 내려가자 침침한 가운에 횃불이 밝혀진 통로가 나타났다. 백천강은 주위를 살펴 보았다. 양쪽으로 늘어선 철창 속은 대개가 텅 비어 있었다. 대원수 사광천은 함부��� 사람을 가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금옥에 갇힌 자의 수는 극히 적었다. 갇혀 있는 자들은 대부분 탐관오리들이었고 중죄인들이었다. 돌연 금옥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게 누구 없느냐? 감히 나 사광천을 가두다니... 어서 풀어다오!" 백천강은 급히 천면환요를 이끌고 소리가 들린 곳으로 갔다. 소리는 맨 마지막 철창 안에서 울리고 있었다. 사광천과 꼭 닮은 노인이 철창 속에 갇혀 있었다. 노인은 몹시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의 두 눈에는 분노가 가득 어려 있었다. 백천강은 천면환요를 앞세우고 철창 앞으로 다가갔다. 뇌옥 속의 노인은 자신의 모습으로 변한 천면환요를 보고는 목이 터져라 노성을 질렀다. "이 놈! 네 놈은 누구길래 감히 본인의 행세를 하는 것이냐? 국법이 두렵지도 않느냐?"


"......." 그러나 천면환요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신지를 상실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백천강은 위사들에게 건네받은 열쇠로 철창을 열었다. 철컹! "이 놈!" 철창이 열리지마자 뇌옥 속의 노인은 가짜 사광천을 향해 표효하며 덮쳐들었다. 그 순간 백천강의 중지가 노인을 향해 뻗었다. "음!" 노인은 백천강에 의해 마혈을 찔려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백천강은 천면환요의 옷을 벗긴 후 노인의 옷과 바꿔 입혔다. 일이 끝나자 그는 천면환요를 철창 안으로 밀어 넣은 후 문을 닫아 걸었다. 그제서야 노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혈도가 잡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이 완벽하게 끝나자 백천강은 비로소 노인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노인은 혈도가 풀린 곳을 어루만지며 의아한 듯이 물었다. "자네는 누군가?" 백천강은 노인을 향해 공손히 포권하며 담담히 말했다. "소생은 황궁의 비밀호장입니다. 대원수를 구하러 왔습니다." "......?" 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다름아닌 진짜 사광천이었다. "내가 바뀌치기당한 줄은 어찌 알았느냐?" 백천강은 천면환요에게서 벗긴 옷을 내밀었다. "우선 옷을 입으십시오." 사광천은 망설이다가 옷을 걸쳤다. 백천강은 철창 속에 멍하니 서 있는 천면환요를 힐끗 본 뒤 입을 열었다. "자, 이제 태연히 돌아가는 것입니다." 백천강은 앞장 서서 출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천면환요의 혼이 그때서야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철창 속에 갇혀 있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는 철창을 마구 흔들며 고함쳤다. "이 놈들아! 날 이렇게 만들다니! 어서 혈도를 풀어라! 어서! 크으윽!" 천면환요의 울부짖는 소리가 지하뇌옥을 메아리쳐 울렸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백천강은 나선형의 계단을 유유히 올라갔다. 동시에 그는 의혹의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사광천에게 담담히 말했다. "강호의 야심가들이 황궁을 넘보고 있습니다. 대원수께서 암중에 당하신 것도 그 자들의 음모입니다." "그... 그럴 수가!" 사광천은 아연실색했다. 백천강은 정중하게 말했다. "이미 황상께서도 아시고 계십니다. 대원수께서는 이제 놈들의 음모를 역(逆)으로 이용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백천강은 사광천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지금부터 과거와 똑같이 행동하시면 됩니다." "......?" "놈들은 대원수가 놈들의 첩자인 줄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역이용하는 것입니다." "옳거니! 그거 병법(兵法)일세!" "하하!" 백천강은 낭랑하게 웃었다. 문득 사광천은 경이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노부가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네. 치밀한 기지와 무공, 남이 따라잡지 못하는 담력을 지닌 자네는 대체 누군가?" 백천강은 담담히 말했다. "소생은 진가라고 합니다." "진?" "그렇습니다. 진우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광천은 궁금함을 떨치지 못했다. 그는 진우명이라는 사내에 대한 궁금증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것을 다 알아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금옥을 나왔다. "볼 일을 보셨습니까?" 한 위사가 불안한 듯 물었다. 사광천은 어느새 평소의 위흥을 회복하여 껄껄 웃었다. "가짜 놈의 망동이 점점 심해지네. 놈을 철저히 감시하게. 감히 본좌를 사칭하는 놈이 있다니." 그 말에 위사들은 황송한 듯 허리를 굽혔다. "놈을 중형으로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허헛.... 좀더 두고 배후를 캐볼 생각이다. 자, 수고하게." "네잇!" 위사들은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사광천은 백천강의 호위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걸어갔다. 백천강은 빙긋 웃었다. "아니, 웬 여인이오?" 사광천은 대경실색했다. 그는 백천강과 함께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침상에는 뜻밖에도 한 여인이 벌거벗은 채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여인은 바로 인요였다. 인요는 베개를 끌어 안은 채 만족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사광천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정말로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 자였다. "여... 여보게 저 여인은 누군가?" 그는 황망히 물었다. 백천강은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후후! 저 여인과 대원수께서는 무척이나 깊은 관계입니다." "기... 깊은 관계?" 사광천은 질색을 했다. 백천강은 싱글거리며 인요와 천면환요에 대한 설명을 했다. 백천강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사광천은 펄쩍 뛰었다. "나, 나보고 저런 더러운 계집과 계속 내통을 하란 말인가?" 백천강은 돌아섰다. "하하!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저 계집이 의심을 품으면 만사는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된다면 황궁은 또다시 위태로워 집니다." 말을 끝낸 백천강은 문밖으로 나섰다. "여, 여보게!" 사광천은 진땀을 흘리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때였다. 문득 인요가 꿈틀거렸다. 그녀는 정신을 차린 듯이 눈을 떴다. "흐응! 당신... 왜 거기 있죠? 으음.... 오랜만에 황홀했어요. 당신의 기술이 갑자기 발전했더군요." 인요는 알몸을 일으켰다. 사광천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묘한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이... 이......." 사광천은 그만 눈 앞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침상에서 일어난 인요는 젖가슴을 덜렁거리며 사광천에게 다가왔다. '아이쿠!' 사광천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호호호!" 인요는 요사스럽게 웃었다. 이어 그녀는 뱀같이 사광천의 몸에 달라붙었다. "흐으응! 한 번만 더......." 그 순간 백천강은 침전을 뒤로 하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훗훗! 사광천, 혼좀 나겠지.' 스슷! 그의 신형은 갑자기 사라졌다. 이 하룻밤 사이 백천강은 귀신도 못할 일을 해낸 것이다. 그것은 그가 아니면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일이었다. ② 불회곡(不廻谷). 그곳은 이름 그대로 돌아올 수 없는 곡이었다. 불회곡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알려져온 신비한 장소였다. 숱한 사람들, 특히 모험을 좋아하고 죽음조차 불사하는 호기심많은 무인들이 그곳을 찾아 길을 떠났다. 그러나 돌아온 자는 전무했다. 불회곡은 사천성(四川省) 백제성(白帝城) 부근에 위치했다. 그곳은 무협(巫峽)의 거센 탁류가 굽이치는 한 계곡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의 발이 끊긴 지 오래였다. 쿠쿠쿠쿵... 콰르릉....... 거센 탁류가 암석 사이를 굽이치며 흘렀다. 바위에 부딪치며 솟아오른 뽀오얀 물보라가 계곡의 풍경을 가리웠다. 휘익! 한 인영이 호리병 모양의 곡구(谷口)가 내려 보이는 절벽 위에 내려섰다. 인영은 백삼의 미서생이었다. 냉막하면서도 풍류 넘치는 영준한 얼굴이었다. 바로 극락서생 백천강이었다. "......." 백천강은 무섭게 파도치는 탁류를 절벽 위에서 내려 보았다. 호리병 모양의 곡구로부터 엄청난 탁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탁류의 기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성 싶었다. 백천강은 어이가 없었다. "저곳이 불회곡이란 말인가?" 그는 넋을 잃은 듯이 중얼거렸다. 백천강의 백삼은 바람에 찢어질 듯이 펄럭였다. 그 바람은 바로 탁류가 흐르면서 일으키는 바람이었다. 백천강이 서 있는 곳과 탁류가 흐르는 거리 사이는 오십 장이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의 위력은 대단했다. 탁류가 엄청난 기세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계곡이 바로 불회곡의 입구였다. 도저히 그곳으로는 배를 띄울 생각을 말아야 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망상이었다. 철갑선이라고 해도 거친 탁류에 휩쓸리면 풍지박산이 날 것이 분명했다. 설사 날개를 단 새가 되어 날아가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흘러내리는 탁류가 일으키는 회오리바람에 의해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탁류는 그만큼 거세었다. 뿐만 아니라 탁류가 흘러내리며 일으키는 회오리바람은 가공한 것이었다. "저곳으로 들어가야 한다니, 과연 불회곡답군." 백천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불회곡으로 들어가야 한다. 공야운리는 저곳에 대동맹이 있다고 했다." 백천강은 어려운 난제에 부딪힌 듯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나 곧 그의 입에서 단호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일단 부딪혀 보자." 휘익! 그의 몸이 날았다. 놀랍게도 그는 오십 장이 더 되는 절벽 아래 탁류로 뛰어내린 것이다. 휘이잉....... 탁류로부터 거센 돌풍이 치솟아 올라왔다. 백천강은 돌풍을 헤치고 쏜살같이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그는 십 장 아래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였다. 빙글! 돌연 그의 신형은 허공에서 한 차례 회전을 하는 것이었다. 뒤이어 백천강은 엎드린 채로 두 팔과 다리를 벌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마치 바람을 타는 매처럼 그의 신형은 유유히 허공을 회전하는 것이었다. 백천강은 그런 자세를 유지하며 서서히 탁류를 향해 하강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선풍구전회륜비(旋風九轉廻輪飛)라는 수백 년 전에 실전된 경공비기였다. 쏴아... 쿠쿠쿵....... 이윽고 백천강은 탁류 가까이 떨어졌다. 탁류는 집채만한 바위덩어리라도 부숴뜨릴 거세게 흘러내렸다. 그곳에 빠진다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백천강은 한 순간 급류에 빠진 듯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는 파도를 차며 미끄러지듯 달리기 시작했다. 파파팟! 백천강은 파도를 밟고 급류를 거슬러 달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신법이었다. 천 수백 년 전 보리달마가 갈대잎 하나로 장강을 건넜다는 일위도강(一葦渡江) 신법도 그것만은 못했다. 파파파팟! 백천강은 파도를 밟고 바람처럼 불회곡 속으로 내달렸다. 얼마나 거슬러 올라갔을까? 백천강은 진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차츰 그의 발목이 급류 속에 빠져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차앗!" 백천강은 일성 기합과 함께 장력으로 급류를 쳤다. 백천강은 그 반동으로 인해 십 장 가량 떠올랐다. 그는 그 기세를 빌어 단번에 오십여 장을 날아갔다. 그러자 마침내 급류의 끝이 보였다. 곡구의 끝에서 급류가 구부러지면서 언덕이 보였던 것이다. 파파파팍! 그는 호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를 향해 바위를 때리는 물방울들이 잘게 부셔지며 떨어져 내렸다. 삽시에 백천강은 온몸이 젖어들었다. "휴우!" 백천강은 마침내 언덕에 다다랐다. 그는 초지에 내려서며 혼탁한 진기를 토하고는 한숨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반듯한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정말 기막힌 곳이군." 그는 혀를 내둘렀다. 언덕은 탁류가 흐르는 계곡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곳에는 부드러운 풀이 깔려있어 몹시 아늑한 기분을 주었다. 정말이지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경험하는 듯했다. 언덕 위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다. 백천강은 숲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


백천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숲을 이루고 있는 괴목(怪木)들 때문이었다. 그것은 난생 처음보는 나무들이었다. 백천강은 즉시 숲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괴상망측한 괴목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어떤 나무는 사람의 모양이었다. 어떤 나무는 잎이 사람의 손바닥 모양이었다. 어떤 것은 온통 가시투성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덩굴이 끝없이 뻗은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생김새 자체가 바위같은 것도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정말 바위로 착각할 정도였다. 백천강은 숲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그는 날아 올랐다. '밟지 않고 넘어버리면 그만이겠지.'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숲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가 십 장쯤 숲을 가로질러 갔을 때였다. 쓰으으읏... 휘리리릭....... 갑자기 숲에서 괴이한 음향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앗!' 백천강은 내심 부르짖으며 눈 아래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숲에서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휘리리리릭....... 괴목들의 줄기가 일제히 춤추며 허공으로 뻗쳐 오르는 것이 었다. 백천강은 꿈에도 예측치 못한 괴변에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괴목들은 한순간에 백천강의 몸을 칭칭 감았다. 우두둑... 두둑....... 백천강의 몸에서 뼈마디가 조여져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은 모두 식인목(食人木)이었던 것이다. "으으윽... 크으......!" 백천강은 살인목에 휘감긴 채 비명을 질렀다.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었다. 식인목의 힘은 엄청났다. 그는 일신의 전 내공을 끌어 올렸지만 헛수고였다. 겨우 몇 개의 가지만 끊어졌을 뿐 식인목들은 더욱 무섭게 그를 조여 들었다. 백천강은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그의 안색은 먹빛이 되었고 입과 귀, 코로 피가 흘러나왔다. 우두둑... 두둑......! 뼈마디 일그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온몸이 마비되었다. 백천강은 얼키설키 뒤덮인 살인목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았다. 일순 하늘이 너무도 멀고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야운리!' 백천강은 갑자기 증오심에 차서 부르짖었다. 공야운리는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며 아무런 경고로 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곧 그가 죽기를 바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한순간에 공야운리에 대한 무서운 증오심에 사로잡혔다. "주... 죽을 수는 없다!" 백천강은 피를 뿜으며 부르짖었다. 다음 순간 그는 체내의 만독지기(萬毒之氣)를 극으로 끌어올렸다. 츠츠츠....... 그의 전신에서 시커먼 묵기(墨氣)가 짙게 일어났다. 그는 절세독공을 펼친 것이다.


치치치... 치칙....... 바로 그 순간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푸르디 푸른 식인목들이 시커멓게 변색되기 시작한 것이다. 곧바로 식인목들은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백천강은 묵기를 내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쓰쓰쓰...... 마침내 식인목들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리고는 힘없이 늘어지고 말았다. 백천강은 전신을 무섭게 조이던 힘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후두둑....... 마침내 그의 몸을 동여매고 있던 식인목의 줄기들이 새카맣게 탄 채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 그는 거의 탈진해 있었다. 그의 눈에 가이없이 파란 하늘이 비쳤다. "살았다. 분명히 나는 살았다." 그는 멍하니 뇌까렸다. 아주 잠깐 동안 그는 죽음의 공포를 체험한 것이다. 이제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죽음이라는 것을 의식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무수한 자들을 죽였다. 그는 살행을 하면서도 죽음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 백천강이 처음으로 죽음을 뼈저리게 체험한 것이다. "흐흐... 흐흐흣... 흣흣흣흣!" 갑자기 백천강은 괴소를 터뜨렸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누운 채 떠올랐다. 백천강은 누운 채로 앞으로 쏘아나갔다. "ㅋㅋ! 얼마나 더 가로막을 것이 있나 보자!" 그의 차가운 웃음이 타죽은 괴목의 숲 사이로 흩어져갔다. 휘청! 한 인영이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인영은 바로 백삼의 미서생이었다. 그러나 미서생은 실로 비참한 꼴이었다. 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백삼은 흔적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걸레가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피까지 배어 있었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불회곡으로 들어선 이후 그는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지독스런 고초였다. 살아있는 식인목의 관문을 거친 후, 그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경험을 수 차례나 더 해야 했다. 두 번째의 관문은 독이 수백 년 간 모여 이룬 독담(毒潭)이었다. 이어 참을 수 없이 뜨거운 화염(火焰)이 이글거리는 불의 동굴을 지나야 했다. 네 번째는 온갖 종류의 독사가 물어뜯는 사동(蛇洞)이었다. 다섯 번째는 날카로운 칼이 새워져 있는 도산(刀山)을 지나야 했다. 이어 백골이 산을 이루고 시독(屍毒)이 흐르는 지옥의 강을 건넜다. 그리고는 뼈를 얼리는 빙수가 흐르는 수중동(水中洞)을 지나야 했다. 실로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험관을 넘은 것이다. "으윽!" 백천강은 초원 지대에서 비틀거렸다. 이제 온몸의 힘이란 힘은 하나도 남김없이 소진되었다. 또 다른 관문을 넘는다는 것은 이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백천강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앞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그의 눈에 불현듯 경이의 표정이 담기기 시작했다. "오오!" 백천강의 입에서 절로 감탄의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뜻밖에도 거대한 분지였다. 계곡 안에 그런 장소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넓은 분지에는 수많은 건물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 앞에는 분지를 향해 청석이 깔린 대로가 길게 뻗어 있었다. 대로 끝머리에 두 개의 석주(石柱)가 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석주에는 굵고 힘찬 지력으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대동지문(大同之門)> "결국... 왔군." 그는 대동지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어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아갔다. 청석이 깔린 길은 한없이 길었다. 백천강은 가물거리는 정신을 애써 추스렸다. 그리고는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걸어갔다. 청석 위에는 피묻은 발자국이 찍혔다. 그것은 백천강의 몸에서 흐르는 피였다. 청석길은 길고도 길었다. 그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대동지문을 넘어서고야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와아!" "대동맹주시다!" 갑자기 함성이 크게 일어났다. 그 함성은 불회곡을 뒤흔들 정도로 크게 울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백천강은 그 함성을 듣지 못했다. 그는 대동문을 넘어선 순간 정신을 잃고만 것이다. "와아!"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비로소 함성소리가 꿈결처럼 고막으로 다가 들었다. 어느새 수많은 인물들이 건물 속에서 쏟아져 나와 백천강을 애워싸고 있었다. 그런 군웅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기쁨과 환희의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백천강은 이미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아주 편안하게 잠드는 것 같았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백천강 특유의 냉막하면서도 부드럽고, 오만한 미소가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③ 의혼전(義魂轉)은 불회곡 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그것은 대리석으로 축조된 석전이었다. 의혼전의 중앙에는 거대한 태사의가 있었다. 그 태사의에 백천강이 앉아 있었다. 백천강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기가 무섭게 중인들에 의해 이곳으로 인도되어 온 것이다. 의혼전의 바닥에는 수많은 군웅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은 새하얀 백발의 노웅으로부터 영기발랄한 청년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 숫자는 이백인이 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의혼전 밖의 넓은 연무장에는 놀랍게도 일만이 넘는 인물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 그토록 많은 인물들이 한곳에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혼전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그야말로 엄숙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였다. 백천강은 중인들을 둘러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언제 대동맹이 이런 엄청난 규모를 이루었단 말인가?' 지금 백천강을 향해 부복하고 있는 중인들은 바로 대동맹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혈의교의 암흑천하를 그냥 볼 수가 없어서 모여든 자들이었다. 즉 땅에 떨어진 의혼(義魂)을 되찾기 위해 모인 의인들인 것이었다. "......." 백천강은 의혼전 안에 무릎을 꿇은 인물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그리고 거듭 놀랐다. 그들은 대부분 알 만한 사람들이었다. 중인들은 바로 천하정도(天下正道)의 수호자들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과거 광명대회주였던 신주제일룡 사유성이었다.


그는 왼팔이 잘려지고 없었는데 일신에는 백의가 아닌 마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밖에도 무림의 구중천이라고 불리우는, 무림구대세가의 새로운 가주들인 구공자가 빠짐없이 있었다. 그중에는 행방불명되었던 섬혼검 악진원의 모습도 보였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제마천문주인 설화영, 무림삼옹 중의 하나인 만검옹과 장천화옹도 있었다. 그리고 구파일방의 살아남은 장문인들도 보였다. 그들은 모두 자파를 혈천마교들에게 빼앗긴 울분을 안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중원 사해오악의 의도방파(義道幇派)의 지존들과 신주(神州)의 패웅, 노협(老俠)들이 부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숨어 살던 정파의협들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변황의 인물들도 그 속에 있다는 것이었다. 혈의교의 마수는 변황까지도 침식한 것이었다. 때문에 변황의 패주들도 사문을 잃고 대동맹에 참여한 것이었다. 문득 중인들의 얼굴을 훑어가던 백천강의 검미가 파르르 흔들렸다. "......!" 중인들 속에서 그가 아는 여인들의 모습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로 무림일비 사운봉과 만검옹의 제자인 여화연, 그리고 석대세가의 석몽화였다. 어떻게 보면 대동맹은 과거 광명회의 인물들이 주축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보다도 더욱 다양한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백천강은 중인들을 모두 둘러본 다음 입을 열었다. "당신들의 뜻은 어떤 것이오?" 신주제일룡 사유성이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본맹의 맹주가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백천강은 내심 놀랐다. 그는 말없이 사유성을 바라보았다. 사유성은 말을 이었다. "본맹은 중원비맹(中原秘盟)의 영주인 공야(公冶) 영주로부터 추천을 받았습니다. 혈의교에 단신으로 대적하는 극락서생이야말로 대동맹주로서 손색이 없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백천강은 놀라며 사유성에게 반문했다. "혈의교의 외삼당 천향당주인 공야운리가 대동맹의 일원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곡구에 설치된 관문들은 무엇이오?" 백천강은 관문돌파의 험경들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사유성은 황송한 듯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저희들은 감히... 맹주의 능력을 시험했소이다. 관문을 모두 통과하면 맹주로 추대하기로 결정을 보았소이다." 백천강은 비로소 공야운리의 뜻을 알았다. 왜 그녀가 불회곡의 상황을 일러주지 않았는지를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 백천강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어 그는 기이한 눈빛으로 사유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본인이 수락할 수 없다면?" 그 말에 군웅들은 술렁거렸다. 특히 의혼전 안의 고수들의 안색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사유성은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외다." "후후.... 하늘의 뜻이 곧 본인의 뜻이란 법은 없소." "그렇다면......?" 사유성은 손에 땀을 쥐었다. 그는 극락서생을 노려보듯 바라보며 물었다. 공야운리가 그랬듯이 사유성도 극락서생이 백천강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절하오."


백천강은 차갑게 말했다. "아니.... 이럴 수가!" 군웅들은 크게 놀랐다. 심지어는 백천강의 말에 분노하여 벌떡 일어서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천하정의를 위해 맹주가 되어달라는 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백천강의 오만에 실망과 분노를 동시에 느낀 것이다. 그러나 사유성은 침착했다.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거절할 수 없소이다." "후훗! 어째서요?" 백천강은 냉소했다. 사유성은 똑바로 그를 주시하며 말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오!" "풋! 난 운명조차 거부하는 사람이오." "하오나 대동맹주만은 거부할 수 없소!" "......." "거부하면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하기 때문이오. 비밀을 지켜야 하므로!" 백천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차갑게 반문했다. "협박이오?" 사유성은 성난 표정을 짓고있는 군웅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생은 감히 당신이 일당만(一當萬)의 능력이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소." 그 말에 백천강은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어 냉혹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후후...! 난 협박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오." 사유성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아연실색했다. 사유성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정녕... 무덤을 팔 생각이시오?" 백천강은 차갑게 대꾸했다. "못할 것도 없지. 일 대 일만이면 손해는 아니니까." 사유성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내심 부르짖었다. '아아!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었던가?' 사유성은 갑자기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다는 것을 느꼈다. '내게도 저런 용기가 있을까? 아니다. 당연코 없다. 없어!' 그때였다. 사유성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이어 그는 백천강을 바라보았다. "......!"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불꽃을 튕겼다. 군웅들은 숨을 죽였다. 그들은 절로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불현듯 사유성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어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례를 올리는 것이었다. "졌소!" 백천강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그대는 비로소 내 마음을 알았군. 나 극락서생은 결코 타의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오." 어느새 그의 음성은 부드러워져 있었다. 군웅들은 극락서생의 목소리가 변한 까닭을 즉시 알아차렸다. "속하들 대동맹주를 뵈옵니다!" 군웅들은 물론이거니와 대전 안의 고수들도 일제히 대례를 올렸다. 일만 명의 배례는 너무도 장엄했다. 그들의 음성은 일시에 불회곡을 뒤흔들었다. "대동의혼(大同義魂)!" "혈의타파(血衣打破)!" "와아!"


백천강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웃고 있었다. '후후훗! 바로 이것이었다. 저들이 스스로 나를 모시도록 하는 것. 이것이 나 백천강의 뜻이다.' 백천강. 그는 실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의 냉혹하면서도 치밀한 책략은 아무도 당할 자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인간이 아니라 이미 절대마신지경에 접어든 마인이기 때문이었다. ④ "이곳 불회곡이 천무대선사의 안배였단 말이오?" 백천강은 놀라 부르짖었다. 그는 의혼전 뒤의 처소에 있었다. 그의 앞에는 사유성과 구공자 등을 비롯한 젊은 고수들이 앉아 있었다. 사유성은 숙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소이다. 사부님께서 오래 전 소생에게 금낭 하나를 주셨는데 그 속에 이곳의 위치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소이다." "으음!" 백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지금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천무! 그 자는 미래조차도 꿰뚫어 본단 말인가? 으음... 정녕 무서운 자다!' 백천강은 가슴 한쪽이 서늘해짐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곧 침착하게 물었다. "과연 절세신승답소. 그런데 그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오?" 사유성의 안색이 그 순간 어둡게 변했다. 그는 근심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소생도 모르고 있소이다. 그 분은 혈륜궁대전 이후 불혼애에서 사라지셨소이다." "그 분의 흔적조차 모른단 말이오?" 백천강은 웬지 가슴 한쪽이 무거워짐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문득 사유성은 백천강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는 있소이다." "무엇이오?" "사부께서는 틀림없이 정도를 부활시킬 대사를 도모하고 계실 것이오." 백천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구공자를 위시한 젊은고수들을 돌아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천무선사를 향한 확고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백천강은 내심 중얼거렸다. '과연 대단하구나. 그러나 언제고 내가 당신을 꺾을 날이 있을 것이오.' 백천강은 차가운 눈빛으로 모여있는 자들을 둘러 보았다. 곧 그는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본인은 그대들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려 생각하고 있소." "......?" 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천강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무림은 강자의 세계요. 강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곳이 무림이오. 오직 강한 것만이 힘이며 곧 법이오." "......!" 중인들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들은 정도의 혼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극락서생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무리 극락서생이 그들을 이끄는 대동맹의 맹주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정도인이라면 마땅히 정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법도가 있는 ���이었다. 그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강한 것만 찾고 무슨 수를 쓰던지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은 정도인이 가져야 할 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백천강의 다음과 같은 말에 그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혈의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한 힘이 필요하오."


그는 사유성의 잘려지고 없는 왼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는 왼팔이 없음으로 인해 중심이 가벼울 것이오. 그 결과 필시 상승무공, 특히 검도를 전개하는데 크나큰 방해가 될 것이오." 사유성의 안색에 놀라움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는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탄식하듯이 말했다. "그렇소이다. 소생은 비록 소림칠십이종 절예를 모두 알고 있지만 약점을 보완할 방법은 찾지 못했소이다." 백천강은 담담히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품 속에서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얇은 양피책자를 하나 꺼냈다. "이것은 며칠 전 적은 것이오. 그대에게는 필시 도움이 될 것이오." "......?" 사유성은 반신반의하여 책자를 받아 펼쳐 보았다. 책자를 넘기는 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잠시 후였다. "오! 이럴 수가!" 사유성은 격동을 금치 못했다. "이... 이것이야말로 내게는 그 어떤 것보다 귀중한 무공이오." 사유성은 감격을 금치 못하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천강이 전해준 양피책자에는 하나의 검결(劍訣)과 심법(心法)이 적혀 있었다. - 부상국대잔검기일해(扶桑國大棧劍氣一解). - 일형무상심결(一形無上心訣). 놀랍게도 검결은 바로 부상국의 검결이었다. 심결은 중원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팔다리가 불구인 자들이 온몸의 기(氣)와 형(形)을 중심으로 모으는 심법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사유성에게는 너무도 알맞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사유성은 한동안 격동했다. 잠시 후 사유성은 가까스로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는 즉시 백천강을 향해 깊숙이 포권했다. "맹주께 충심으로 감사드리오." 백천강은 담담히 웃었다. 그는 또다시 품 속에서 얇은 책자 십여 권을 꺼내어 탁자에 놓았다. "그대들에게도 한 가지씩 준비했소이다." 중인들은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책자에 시선을 던졌다. 백천강은 그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책자를 나누어 주었다. 잠시 후였다. "아아! 이게 꿈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던 무공이다!" 그들은 모두 기쁨을 드러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중인들은 굳이 회열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백천강의 안배는 치밀한 것이었다. 그는 무림구공자를 비롯한 개개인들에게 그들의 무공에 꼭 필요한 책자를 건네 주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들은 다투어 장읍을 했다. "맹주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동할 뿐입니다!" "하하...! 그대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한 일이오." 백천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기실 그에게는 천하의 모든 무학이 망라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쌍봉도의 지하무경고에서 얻은 정파무공과 마공비급들을 비롯하여 기환궁의 마경과 독황경상의 독공들이 고스란히 그의 머리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무학보고(武學寶庫)나 다름이 없었다. 잠시 후 백천강은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이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여러분들은 무공을 열심히 익혀야 할 것이오. 그동안 본인은 이곳을 떠나 있겠소."


중인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백천강은 담담히 말했다. "필히 다녀와야 할 곳이 있소. 그곳을 다녀와야만 혈의교와 상대할 수가 있소." "그곳이라면?" "혈의교의 배후인 혈천마국(血天魔國)이오." "아!" 중인들은 아연실색했다. "안 됩니다. 어찌 맹주께서 호굴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그것도 혼자서." 백천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호굴로 가야 범을 잡는 법이오. 너무 심려들 마시오. 내게도 생각이 있소. 더구나 내게는 누구보다 든든한 수하들이 있소." 사유성이 급히 물었다. "극락십령을 말씀하십니까?" "그렇소."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수가 너무 적습니다." "그들의 무공은 절대적이오. 이미 내 결심은 굳어졌소." 백천강은 몸을 돌렸다. "내일 아침 떠나겠소. 그 전에 여러 가지 안배를 해두겠소이다." "......!" 중인들은 그를 말리지 못했다. 아니 감히 말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는 타의에 의해 움직이기를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성미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극락서생과 처음 대면하던 날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저 멍하니 백천강의 뒷모습만 볼 뿐이었다. 휘익! 한 마리 대붕(大鵬)이 불회곡으로부터 치솟아 올랐다. 대붕은 단숨에 불회곡을 치솟아 오른 후 절벽 위에 내려섰다. 대붕은 키가 일 장이 넘었다. 날개의 길이만 해도 무려 삼 장에 달하는 거대한 영물이었다. 부리는 흑색이었고 눈알은 타는 듯 붉은색이었다. 스슷......! 문득 대붕의 등에서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극락서생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대붕의 부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후훗! 이런 쉬운 방법이 있었던 것을 왜 몰랐을까? 거령(巨靈), 훗날 네 날개 힘을 빌릴 때가 올 것이다. 자, 돌아가라." 백천강은 말을 마친 후 대붕의 부리를 두드렸다. 크아악! 대붕은 한 마디 날카로운 비명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힘차게 날개를 폈다. 휘이이익! 대붕은 쏘아보낸 화살처럼 계곡 아래로 꽂혀갔다. 백천강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수확이 많은 한 달이었다. 이제 또다시 재미있는 일을 벌일 때다." 스슷! 찰나지간 그의 몸은 연기처럼 허물어졌다. 46 장 혈의교(血衣敎)의 멸망(滅亡) ①


공자묘(孔子廟). 서안부(西安府)에서 백 리 가량 못미치는 곳에 다 쓰려져가는 허름한 공자묘가 하나 있었다. 사당은 낡을 대로 낡은 것이었다. 따라서 거센 바람만 조금 불어도 와르르 허물어질 것 같았다. 오랫동안 돌보는 사람이 없었던 탓인지 지붕은 잡초 투성이었다. 담장도 그저 형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밤이었다. 상현달이 기울고 있었다. 스스스슥! 미풍에 따라 갈대잎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초여름의 정취를 북돋울 시기였다. 문득 달빛을 받으며 한 명의 백의서생이 환영처럼 나타났다. 백천강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갈대밭 한가운데 있는 공자묘를 발견하고 눈빛을 번쩍였다. '저곳으로 들어갔다.' 백천강은 내심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한 자 가량 떠서 누웠다. 그는 그 자세를 유지하며 공자묘를 향해 다가갔다. 사흘 전이었다. 백천강은 대막으로 떠나는 길에 혈의교 각 분파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자신말고도 혈의교 분타를 정탐하는 한 인영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백천강은 그 인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인영은 한 마디로 신출귀몰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때는 중이었다가, 또 어떤 때는 거지로 변하기도 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농부로 탈바꿈을 하는가 하면 번화가에서는 장사꾼으로도 위장을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놀랍게도 여자로까지 능숙하게 탈바꿈하는 것이었다. 그 자의 놀라운 변장술에 백천강은 점차 흥미가 쏠리게 되었다. '대체 누구길래 저토록 변신에 능하단 말인가?' 그는 그때부터 그 인영을 따라붙었다. 기묘한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신비의 인영은 사흘동안 무려 서른 번이나 모습을 바꾸었다. 그러나 백천강이 어떤 인물인가? 그는 끈질기게 추적했다. 그런데 상대는 그의 미행을 눈치챈 듯 더욱 교묘하게 둔갑하며 달아나는 것이었다. 지난 사흘 동안 백천강과 괴인영은 물고 물리는 숨바꼭질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곳까지 이른 것이었다. 공자묘 안에는 기묘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자의 화상을 모신 제단 위에 봉두난발의 늙은 거지 한 명이 있었다. 그는 비스듬히 드러누운 채 닭다리를 하나를 으적으적 씹어먹고 있었다.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었다. 그의 머리칼은 완전히 백발이었는데 헝클어진 백발이 얼굴의 태반 이상을 뒤덮고 있었다. 옷은 얼마나 기웠는지 건드리기만 해도 부스러질 듯이 보였다. 게다가 코는 주먹만한 딸기코였다. 그는 또 옆구리에 어린애 몸통만한 술호로를 차고 있었고, 반대쪽에는 구절죽장(九節竹杖)을 꽂고 있었다. 물론 발은 발등이 쩍쩍 갈라진 더러운 맨발이었다. "히히히!" 괴개(怪 )는 연신 입맛을 다시며 닭다리를 뼈다귀째 씹어먹고 있었다. 그는 이따금 기름묻은 손가락을 쭉쭉 빨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기이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제단 아래의 바닥에 네 명의 괴상한 인물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더욱 괴상했다.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늙은이 하나와, 날렵한 몸매를 가진 계집, 절뚝발이 거지, 그리고 점잖은 유생 한 명이었다.


그들은 행색과 용모가 제각각이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었다. 그들은 말없이 괴개를 향해 고개를 박고 있었다. 괴개는 닭다리를 모두 먹어 치웠다. 그리고는 술호로를 들어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잠시 후 그는 게슴츠레한 눈을 뜨는듯 마는듯 들어올리며 물었다. "차례로 말해봐라. 끄... 억!" 그는 트림을 했다. 그 바람에 느끼한 입냄새가 공자묘 안을 진동시켰다. 그때였다.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늙은이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개선( 仙) 사부의 예측대로 놈들은 방약무인했습죠. 천하는 이미 놈들의 붉은 옷이 온통 설치고 다녀서... 헤헤.... 가는 곳마다 구역질이 날 지경입니다요!" "끄윽!" 늙은이의 말에 맞장구라도 치듯 괴개는 다시 트림을 했다. 개선( 仙). 그는 바로 개방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진 삼대 전(前)의 사조(師祖)였던 것이다. 즉 그는 현 개방주 신풍마취개(神風魔醉 )의 삼대 조사였다. 소문에 의하면 개선의 나이는 근 삼백 살에 가깝다고도 했다. 그런 개선이 서안부의 허름한 공자묘에 나타났다는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늙은이는 말을 이었다. "그저 놈들의 꽁무니만 쫓아다녀도 술을 배터지게 먹을 수 있을 정도였습죠. 그만큼 놈들의 위세는 당당했습니다." 두 번째로 입을 연 것은 소녀였다. 청의를 입은 소녀는 꾀꼬리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뿐이 아니었어요. 그 자들은 도처에서 엽색행각을 벌였답니다. 때문에 아녀자들은 공포에 질려 문을 닫아걸고 아예 바깥 출입을 삼가는 형편이에요." 그 옆의 절름발이 거지가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개선사부, 혈의교는 무림사상 최악의 악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요!" 절름발이 거지는 어딘지 모르게 다혈질적인 구석이 있어 보였다. 개선은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며 물었다. "그래? 크음.... 너는?" 그는 유생차림의 선비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중원 칠백 분타 중 절반을 살펴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유생은 어두운 안색으로 말끝을 흐렸다. "크흠! 그래서?" "놈들의 실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혈의교가 중원을 장악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대선은 다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는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그 빌어먹을 비렁뱅이들은 무얼 하고 있지?"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늙은이가 분노성을 터뜨렸다. "그... 그들은 패기를 잃었습니다. 개방총타가 박살난 후 지리멸멸하여 모두 밥 빌어먹는 일 외에는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 개선의 눈이 한 차례 껌벅였다. 문득 개선의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뻗어 나왔다. "크흠.... 개방이 전통을 상실했단 말이지?" 네 인물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개선은 한동안 눈을 껌벅이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크흠! 다시는 나오지 않으려 했는데 다시 나오게 되었군." 이어 그는 물었다.


"그래 정녕 뜻을 가진 놈들이 하나도 없단 말이냐?" 그 말에 소녀가 대답했다. "있어요." "그게 누구냐?" "극락서생이란 자예요. 그는 열 명의 수하들과 함께 정면으로 혈의교와 대적하고 있어요." "극락서생? 놈이 그렇게 강하단 말이냐?" "벌써 그 자는 혈의교의 분타를 스무 개도 넘게 무너뜨렸는 걸요." "또?" "대동회라는 조직이 있어요." "대동회?" "광명회의 후신이에요. 그러나 과거보다 더 비장한 각오로 모이고 있어요." "크흠! 그래도 모두 비겁자는 아니군." 개선은 다시 술을 벌컥벌컥 들이 마셨다. 문득 그는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크흠, 꼬리가 붙어 있었군." 동시에 개선의 손이 천장을 향해 환영처럼 뻗었다. 순간 실같이 가는 은빛 광채가 천장으로 뻗었다. "핫핫핫! 역시 개방 최고배분의 개선 노선배답소이다!" 문득 천장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뒤이어 백영 하나가 바닥으로 빙글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두 손가락 사이에 은빛 머리칼 하나를 쥐고 있었다. "노선배의 머리칼은 바위도 뚫겠소이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때 유생이 놀라 부르짖었다. "네 놈이냐?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던 놈이?" 백천강은 농담이라도 하듯 여유롭게 말했다. "당신을 ㅉ느라 다리가 부르텄소이다." 유생은 두 눈에 불똥을 튕겼다. "분명 떼어버린 줄 알았는데......." 츠팟! 유생은 벼락처럼 소매를 날렸다. 그의 소맷자락은 날 선 칼처럼 백천강을 후려쳐왔다. 그 광경에 개선이 혀를 찼다. "쯧쯧...! 막내야, 네 상대가 아니다." 유생은 코웃음을 쳤다. "흥! 사부, 제자의 실력도 많이 늘었... 아이쿠!" 그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백천강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 그는 손목을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었다. 백천강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개선 선배님께 네 명의 말썽장이 제자가 있다는 소문을 저도 들었습니다. 이 기회에 소생이 선배님을 대신하여 버릇을 고쳐도 되겠습니까?" "뭐, 뭐라고?" "건방진 놈!" "솜털도 가시지 않은 놈이... 호홋!" 유생을 제외한 세 사람이 노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개선은 흥미롭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그는 호로를 기울여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렇게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옳지, 옳지, 이제야 이 노화자 대신 손볼 사람이 생겼군. 이보게 젊은이. 제발 그 놈들 버릇 좀 고쳐


주게." "사부!" "아이고! 사부께서 작당을 하다니......" "이 할미가 너 어린애의 다리를 살짝 비틀어 주겠다!" 세 사람은 한순간 백천강을 덮쳤다. 언뜻 보면 무질서하게 덮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파파파팟......! 그들의 공격은 절묘 무쌍했다. 세 사람은 삼재진(三才陣)에 따라 공수의 배합을 적절히 가미한 공격을 펼친 것이었다. 늙은이는 어느새 가느다란 뱀 모양의 채찍을 꺼내 휘둘렀다. 소녀는 허리춤에서 소도 두 개를 꺼내 찌르고 베는 동작을 동시에 전개했다. 거지는 발길질을 했는데 발끝에서 한 자 길이의 창이 솟아나와 번개같이 아래서 위로 공격했다. 그들의 공격은 섬광과도 같았다. 백천강은 세 방향으로부터 기상천외한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그때였다. 백천강은 문득 그 자리에서 핑그르르 돌았다. "큭!" 뒤이어 짤막한 세 마디의 비명이 들렸다. 그러고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후훗!" 백천강은 팔짱을 끼고 빙그레 웃었다. 세 사람의 몰골은 참으로 기상천외했다. 늙은이의 채찍은 거지의 두다리를 칭칭 감고 있었다. 거지의 신발은 어느새 날아간 것인지 소녀의 옷자락을 벽에 박아 버렸다. 소녀의 소도는 늙은이의 염소수염을 잘라놓는 채 바닥에 뒹구는 것이었다. "크하하... 큭큭큭!" 개선은 그만 배를 움켜쥐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요절복통을 하듯이 웃어댔다. 그 바람에 눈물이 찔끔거리며 흘러나올 정도였다. 이윽고 그는 웃음을 그쳤다. 그리고는 제단 위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꼬마야! 넌 누구냐?" 개선은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것은 돌연한 변모였다. 백천강은 네 괴물에게 두루 포권한 뒤 개선에게 정중히 읍했다. "함부로 날뛰어 송구스럽습니다. 소생을 가리켜 남들이 극락의 글쟁이라고 합니다." 그때였다. "극락서생!" 네 사람은 일제히 부르짖었다. 개선도 눈을 퉁방울처럼 부릅떴다. "네가 그... 담력이 세다는 아이란 말이냐?" 백천강은 빙그레 읏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또한 대동맹주라고도 하더군요." "맙소사!" 노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골치가 아픈 듯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대체 이곳에 뭣 때문에 나타났느냐?" 백천강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아직도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유생을 홀깃 바라보았다. "원래는 호기심 때문에 미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어... 어떻게?" "노선배님의 힘을 빌려야 겠습니다." "크흠!" 개선은 헛기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화가 난다는 듯이 호로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크으! 이 노화자는 몹시 게으르다. 알겠느냐? 너무 게을러서 벌써 오십 년씩이나 목욕도 하지 않았단 말이다. 그런 내가 너의 심부름을 할 것 같으냐?" 백천강은 빙그레 웃었다. "노선배님은 개방을 위해서라도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크흠! 이 녀석아, 개방은 뭐 말라비틀어진 닭뼈다귀냐? 노화자는 상관 없... 어억!" 개선은 눈은 둥그렇게 떴다. 백천강이 느닷없이 하나의 죽부(竹符)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죽부는 마디가 아홉 개였다. 마디 하나마다 불로 지진 듯한 용이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자(紫)색이었다. 구룡자죽신부(九龍紫竹神符). 그것은 개방의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신물이었다. "그... 그걸 갖고 있었느냐?" 개선은 떫은 감 씹은 표정을 했다. 백천강은 히죽 웃었다. 이어 그는 죽부를 소매 속에 거두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더라도 노선배는 이미 무림에 개입했습니다. 그런 이상 어쩔 수 없이 소생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개선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더니 내뱉았다. "꼬마 놈... 청산유수같은 언변이구나. 이 노화자가 어쩔 수 없이 네 놈에게 말려들었다. 하지만......." 푸학! 문득 그의 입이 쩍 벌려졌다. 동시에 무수한 술화살이 폭사되었다. 개선은 바로 주천신공(酒天神功)을 전개한 것이다. 그것은 오래 전에 실전된 개방의 비기였다. 최소한 사 갑자 이상의 공력이 있어야만이 시전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앗!' 백천강은 경악했다. 그는 지척간에 급습한 공력을 피할 수가 없었다. 얼결에 그는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진력을 뿜어냈다. 파파팟....... 허공에서 두가닥 경력이 충돌했다. 일순 주전(酒箭)이 백천강을 향해 밀려갔다. 그때였다. 백천강의 입에서 돌연 시뻘건 삼양진력(三陽眞力)이 뻗었다. 주전과 삼양진력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푸치치칙....... 주전은 그 순간 수증기로 화해 녹아버리는 것이었다. "크흠!" 개선은 앞으로 고꾸라질 듯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상체를 바로 잡았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가득 어려 있었다. "꼬, 꼬마야, 대체 너는 누구의 제자냐?" 백천강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하늘." "하늘?" "땅." "땅?" "그리고 모든 사람이 소생의 스승이오이다." "......!" 개선은 다시 떫은 감 씹은 표정이 되었다. "젠장! 네 놈에게 물은 노화자가 멍청했다."


백천강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되물었다. "승락하시는 겁니까?" 개선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승락하지 않으면 어쩔테냐?" 백천강은 놀리듯이 말문을 열었다. "그럼 노선배가 가는 곳마다 술집을 몽땅 사들여 노선배가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아이쿠! 그... 그것만은 안 된다!" "하하! 그럼 승낙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끄응!" 마침내 개선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때였다. 백천강은 문득 이제까지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버렸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노선배님은 두 가지 부탁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무엇이냐? 이 놈아!" 백천강은 싱긋 웃었다. "간단합니다. 첫째는 노선배님께서 대동맹으로 가 달라는 것입니다." "크흠!" "두 번째는 노선배님의 말썽꾸러기 네 분 제자를 빌려달라는 것입니다." 개선은 그 말에 활짝 웃었다. "저 놈들이라면 빌려 줄 것도 없으니 영원히 네 놈이 가져라!" 그러자 네 사람은 일제히 외쳤다. "사부!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어흐흑! 믿고 따랐던 사부가 저리 매정하다니!" 그들은 마구 소란을 피웠다. 백천강은 그 기회를 이용했다. 그는 개선에게 전음으로 대동맹의 위치와 몇 가지 중요 내용을 일러준 것이었다. "크하하하! 못된 제자들아! 이 사부는 대동맹으로 가서 술이나 실컷 마시겠다. 하하핫...! 지긋지긋한 너희들의 꼴을 보지 않게 되어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다!" 휘익! 개선은 앉은 채로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는 부서진 창문을 통해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사부!" "사아부!" 네 사람은 절규를 토해내며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실로 괴인 중의 괴인들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나이는 모두 이백 살이 가까왔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어린애같은 치기를 잃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쩌면 그런 풍류와 익살로 세상을 흘려보내는데 재미를 붙인 것인지도 몰랐다. 백천강은 바닥에 주저앉아 투정을 부리는 그들을 보며 내심 미소를 흘렸다. '정말 뜻밖의 수확이다. 우연히 개선과 그의 네 제자인 풍진사개(風塵四 )를 만나 거두게 되다니... 이들을 잘 이용하면 오히려 천군보다 더 쓸모가 있을 것이다.' 백천강은 입가에 뜻모를 기소를 담았다. ② 혈의교(血衣敎) 화산지부(華山之部). 그곳은 혈의교의 주요 본거지 중의 하나였다. 화산은 과거 혈륜궁에 의해 멸문을 당한 곳이었다. 그후 혈의교에서는 화산을 재건했다. 그것은 화산의 맥을 잇게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었다.


혈의교는 바로 황하의 상류부분과 서무림을 통치하기 위해서 화산을 재건한 것이다. 당금 혈의교 화산지부의 총책임자는 사월비마문(死月飛魔門) 염천교(閻天蛟)였다. 사월비마문은 마도오문 중의 하나였다. 사월비마문에 종속된 자들은 한 마디로 가장 천대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즉 도살장의 도부들이거나 형장에서 죄인의 목을 치는 망나니들이 사월비마문도들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혈의교 천하가 이룩된 지금 그들은 혈의교 내에서 누구보다도 무서운 존재들로 변신했다. 그들 본래의 직업을 되찾은 것이다. 살수(殺手). 그들은 냉혹무정한 살수로 돌아온 것이다. 혈의교의 화산지부가 된 화산장원은 본래 불타 버렸으나 이제는 과거의 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속의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금 화산장원 속에 거하는 자들은 눈꼽만치의 동정도 가지지 않은 사월비마문의 청부살수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혈의교 일원이었으나 독자적으로 살인청부를 받고 있었다. 언제든 황금기보(黃金奇寶)만 대가로 받으면 그들은 그 누구든지 거침없이 죽여주는 것이었다. 설사 그 대상이 황제일지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황제를 죽여달라고 청부한 사람이 없었다. 그 값이 도저히 치를 수 없는 고가였기 때문이었다. 유월 십오일이었다. 사월비마 염천교 앞으로 하나의 봉서가 전해졌다. 그것은 화산기슭에 설치된 청부석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었다. 청부석은 청부를 원하는 자들이 청부목록과 그 대가를 가져다 놓는 곳이었다. "......." 염천교는 무심히 청부서를 읽어나갔다. 그러던 중 그는 갑자기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는 경악했다. 청부서에는 뜻밖에도 다음과 같은 글이 씌여져 있었다. <무영객(無影客)을 죽여 주시오. 무영객은 형체가 없소. 그러나 그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오. 내일 밤 사일봉(射日峯)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소. 그러나 그는 필히 귀문주(貴門主)가 혼자 있을 때만 나타날 것이오. 성공하면 그 대가로 내 목을 얻게 될 것이오. 그러나 실패하면 그대의 목을 내놓아야 하오. - 청부자 무영객(無影客).> 실로 놀라운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에 자신을 죽여달라고 청부하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열이면 열 그는 머리가 돈 자가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머리가 돈 자의 장난치고는 그 내용이 질서정연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섬뜩했다. "......!" 염천교는 와락 청부서를 주먹으로 움켜쥐었다. 순간 그의 쭉 째진 눈에서 무서운 살광이 흘러나왔다. "어떤 놈이 이런 장난을 한단 말인가?" 그는 놀림을 받았다는 분노심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염천교. 그는 사월비마문의 문주가 되기까지 인간으로 누려야 할 모든 권리를 포기한 자였다. 오직 야수의 그것과도 같은 본능적인 생활만을 추구해 온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남성을 자르기까지 했다. 진정한 살수가 되려면 색마저 끊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어처구니 없게도 발신인도 뚜렷하지 않은 청부서를 보고는 농락을 당했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자존심 하나만은 제대로 끊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염천교는 벽에 걸린 사월검(死月劍)을 노려 보았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살기띈 괴소가 흘러나왔다. "그래, 거절하진 않겠다. 어떤 청부건 받아들이는 것이 내 법칙이다. 오냐, 무영객, 소원대로 널 죽여주마!" 이튿날 밤이었다. 유월 십육일의 밤은 어두웠다. 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일봉 정상에 한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사월비마 염천교였다. 염천교는 한 손에는 그의 애검을, 그가 유일하게 사랑을 느끼는 사월검을 굳게 쥐고 있었다. 휘이잉... 펄럭....... 후덥지근한 밤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나부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기다리다 지친 염천교가 소리쳤다. "무영객! 겁이 나느냐? 네 말대로 청부를 이행하러 왔다. 그런데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이냐?" 바로 그때였다. "오래 기다렸다." 얼음장보다도 차가운 음성이 그가 밟고 있는 바위 밑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염천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번쩍! 놀란 그가 미처 몸을 움직이기도 전이었다. 돌연 바위라고 생각한 검은 물체가 벌떡 일어서더니 검광을 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염천교는 빨랐다. 섬광이 눈 앞으로 폭사되어 오는 순간 사월검이 검기를 뿌렸다. '베었다!' 염천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가 벤 것은 사람의 몸뚱아리가 아니었다. 캉! 바위에 부딪힌 사월검이 비명과 함께 불꽃을 튕긴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푹! 극히 얇고 예리한 물체 하나가 정인의 부드러운 혀인 양 그의 가슴을 뚫고 스며들었다. "크으! 이... 인자술(忍者術)에 화... 환술(幻術)을 쓰다...니......." 염천교의 몸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왼쪽 가슴이었다. 심장을 찢고 예리한 칼날이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흐흐... 흐......." 염천교는 문득 허망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스스로 무릎을 꿇으며 중얼거렸다. "기가... 막힌다. 진짜 살수는... 바로 너......." 쿵! 염천교는 바위에 머리를 부딪혔다. 머리가 으깨어지면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순간 비릿한 피비린내가 확 풍겨났다. 스슷....... 그 자리에 두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늙은이와 백의미서생이었다. 바로 풍진사개 중의 하나와 백천강이었다. 늙은이는 발끝으로 염천교를 톡 차며 웃었다. "헤헤헷!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 하더니 이 자가 결국 그 꼴이군. 살수가 살수에 당하다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군." "이젠 당신 차례요." 백천강은 담담히 말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늙은이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늙은이는 어느새 염천교와 똑같은 옷을 입은 꼴이 되었다. 실상 그는 두 가지의 옷을 한꺼번에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늙은이는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쓰윽 문질렀다. 그 순간 늙은이의 얼굴은 염천교로 화하는 것이었다. 백천강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개방의 환면술은 천하제일이오."


그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먹장구름이 달빛을 가린 캄캄한 하늘에는 별빛 하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백천강의 음성이 들려왔다. "뒷일은 계획대로 하시오. 그럼......." 스슷....... 어느새 백천강은 유령처럼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염천교로 화신한 늙은이는 진짜 염천교의 시신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젠장! 팔자에도 없는 인간 백정노릇을 하게 됐군!" ③ 혈의교 귀주지부. 그곳은 남무림, 특히 남만과 묘강(苗疆) 일대를 장악하는 혈의교의 요충지였다. 귀주지부를 책임진 자는 마면제갈(魔面諸葛) 역호군(易好君)이었다. 그는 과거 대마성 사대군사 중의 하나였을 정도로 심계와 지략이 뛰어난 자였다. 그는 항상 스스로의 박식함을 뽐내길 좋아했다. 역호군은 십만 권의 경서를 읽었다는 것을 가장 큰 자랑거리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회괴한 책이라면 어떤 수단을 쓰든지 구하는 성미였다. 어느날이었다. 그는 서신을 한 장 받았다. 서신을 받고서 그가 기뻐 날뛰는 광경은 측근들까지 놀라게 할 정도로 유별난 것이었다. "핫핫핫! 정말 복이 통째로 굴러들어왔다! 크핫핫핫!" 서신을 손에 쥔 그는 기쁨의 대소를 멈추지 못했다. 그가 받은 서신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마면제갈 역대협께. 예로부터 보검은 열사에게, 명마는 미녀에게 주라는 말이 있소이다. 소생은 본래 역대협처럼 집서광(集書狂)이었소이다. 그러나 이젠 사정상 귀주를 떠나야 할 몸입니다. 그래서 역대협께 소생이 그간 모은 팔만기서를 기증하려 하니 소생의 만경장원(萬經莊園)으로 왕림해 주시기 바랍니다 - 만경서생(萬經書生).> 그야말로 마면제갈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서신이 아닐 수 없었다. "훗훗! 정말 기특한 놈이군!" 마면제갈은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그러나 그는 의심이 많은 작자였다. '만경장원이라면 이십 리 밖에 있는 팔봉장원이 최근 개명한 곳인데 혹시?' 그는 머리를 저었다. 이어 괴소를 흘렸다. "크크! 감히 나를 속인다면... 어림없다." 마침내 그는 몸을 일으켰다. 마면제갈은 열 명의 절정고수들을 대동하고 만경장원에 나타났다. 만경장원의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 그는 의혹어린 눈을 굴리며 만경장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였다. 하인인 듯한 늙은이가 바삐 걸어나와 허리를 숙이며 반갑게 맞아들이는 것이었다. "기다렸습니다. 장주께선 서고에서 기다리십니다." 서고라는 말에 마면제갈은 절로 입이 벌어졌다. "가세!" 그는 하인을 따라갔다. 열 명의 수하들이 그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잠시 후 그는 거대한 창고로 안내되었다. 창고의 문은 열려 있었다. 안으로부터는 고서 특유의 냄새가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그때서야 마면제갈은 비로소 의심이 풀렸다.


"하하! 만경장주는 안에 계신가?" "그렇습니다요." "어디 그럼......." 그는 선뜻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하들도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 창고 안은 산더미같은 책이 가득 쌓여 있었다. "오오!" 마면제갈은 탄성을 발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서고를 살펴나갔다. 오른쪽 구석에 등을 돌리고 고서를 뒤적이는 유생이 보였다. 마면제갈은 급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마면제갈을 그림자처럼 따르던 열 명의 수하들은 그만 자신들의 임무를 잊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그들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서가에 쓰여진 글씨였다. - 천하무학기서(天下武學奇書). "......!" 그들은 모두 두 눈에 신광을 발했다. 이어 그들은 홀린 듯이 서가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 순간 마면제갈은 곧장 유생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하하! 그대가 만경서생이오?" 그때였다. 유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풍진사개의 막내였다. 유생은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기라도 한 듯이 얼굴 가득 기쁨의 웃음을 머금었다. "잘 오셨습니다. 마침 희귀한 책을 한 권 구했습니다. 바로 이것......." 유생은 말을 끝마칠 시간도 없었다. "어디 봅시다!" 마면제갈은 번개같이 유생이 들고 있던 책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는 급히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가며 책을 넘겼다. 그 책은 휘귀한 나뭇잎으로 만든 것이었다. 글씨는 과두문으로 된 것으로 보기드문 고본(古本)이었다. 마면제갈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연신 손끝에 침을 발라가며 책장을 넘겼다. 침을 바르지 않고서는 책장을 제대로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천하... 제... 일......." 불현듯 그의 음성이 흐려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마면제길의 몸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주르르....... 그의 입과 코로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독사하고 만 것이었다. 그가 넘겼던 책장에는 극렬한 독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침을 발라 책장을 넘기는 순간 그 독에 중독되어 죽은 것이다. 유생은 자신의 얼굴을 쓱 문질렀다. 그러자 그의 모습은 감쪽같이 마면제갈로 화신했다. 그는 밖으로 걸어가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정말 고맙네. 내 이 기쁨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네. 수하들을 시켜 곧 이 책들을 옮겨 가겠네." 그는 밖으로 걸어갔다. 그때까지 무공비급을 뒤적이고 있던 마면제갈의 수하들은 급히 몇 권을 품에 쑤셔 넣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은 참으로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스슷! 인적이 끊긴 서고 안에 백천강이 나타났다. 그는 죽어버린 마면제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두 곳이 남았군!" 스스슷.......


다시 그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④ 혈의교 구화지부(九華之部). 구화산의 현음도관(玄陰道觀)은 과거에는 신성한 도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혈의교의 요녀들이 가득 찬 곳이었다. 그곳에는 마도오문 중의 하나인 요화문(妖花門)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화문은 혈의교에서 특수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전령(傳令)과 포상(褒賞)이 그것이었다. 즉 요화문은 혈의교의 모든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다. 또한 교내에서 공로가 큰 자들에게 보상으로 환락을 제공하는데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요화문의 요녀들은 어딘가로 수시로 떠나고 수시로 돌아오곤 했다. 요화낭랑(妖花娘狼) 백간문(白奸紋). 그녀가 바로 현음관주이자 요화문주였다. 그녀는 거의 매일밤 사내를 잠자리로 끌어들였다. 특히 미남자만 보면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거의 매일 현음관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미남자들이 납치되었다. 그것은 요화낭랑의 음욕을 채워주는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서 였다. 그들은 그녀와 정사를 나누는 즉시 비명횡사했다. 요화낭랑 백간문이 그들의 원정(元精)을 고갈시키기 때문이었다. 오늘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구화산은 비록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풍경의 수려함은 가히 으뜸이었다. 특히 아홉 개의 꽃잎 모양의 봉우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구화산 정상은 많은 풍류객들이 즐겨찾는 명소였다. 오늘 오후 그 절승을 구경나온 영준한 서생 한 명이 납치되어 왔다. 요화낭랑은 한눈에 미서생의 뛰어난 용모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호호호... 귀여운 사람!"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열 명이 한꺼번에 뒹굴어도 남을 거대한 침상이었다. 그 위에 발가벗은 나녀가 한 영준한 서생을 올라타고 흥분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요화낭랑 백간문이었다. 그녀는 이미 팔십이 넘은 나이였다. 그러나 주안술과 채양보음술로 인해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팽팽했다. 몸매 또한 풍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산처럼 솟은 유방과 잘록한 허리, 거대한 둔부 등은 하룻밤에 백 명의 사내를 상대하고도 오히려 모자랄 지경이었다. "오늘은 특별한데? 호호!" 요화낭랑은 거대한 젖가슴으로 서생의 얼굴을 문지르며 흥분했다. 그러나 서생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그저 담담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다름아닌 백천강이었다. 지금 그는 요화낭랑의 작태를 바라보며 내심 비웃고 있었다. '더러운 계집같으니. 임자를 잘못 만났다.' 요화낭랑은 서슴없이 백천강의 아랫춤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어 그녀는 백천강의 아랫춤을 더듬어 내려갔다. "엇! 너... 너는... 불구자냐?" 그녀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백천강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백천강은 조금도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글쎄. 낭자의 기술이 신통치 않은 것 같소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요화낭랑은 깜짝 놀랐다.


"그... 그럴 리가?"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아직껏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천강은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거대한 젖가슴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아마 낭자의 피부가 너무 탄력을 잃어 그런가 봅니다." "뭐... 뭣이?"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요화낭랑은 아연실색이었다. 여인에게 그런 말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하물며 색녀에게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녀는 무서운 분노의 기색을 띄웠다. "네... 네 놈이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욕정은 이미 천 리 밖으로 달아난 뒤였다. 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 백천강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퍽! 그러나 으깨진 것은 그녀의 머리통이었다. 비명조차 지를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으깨진 머리통으로부터 흘러나온 선혈이 침상을 붉게 물들였다. 그때였다. 휘릭! 침실 천장으로부터 한 날씬한 인영이 떨어졌다. 그는 바로 풍진사개 중의 하나인 소녀였다. 아니 실상 그는 소녀가 아니었다. 다만 소녀 차림을 즐겨하는 사내일 뿐이었다. 그는 요화낭랑의 처참한 주검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휴...! 끔찍하군요!" 출렁... 출렁....... 대리석 욕조에서 물이 출렁거렸다. 수증기가 무럭무럭 솟아나는 것으로 보아 금방 데워 것 같았다. "호호호!" 간지러운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나왔다. 욕실 안에서는 환락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개방총단 안에 그토록 화려한 욕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긴 했다. "아이! 이러지 마세요." 여인의 간드러진 음성이 들려왔다. 욕실 안에는 모두 여섯 명의 남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남자 하나에 아름다운 계집이 다섯이었다. 한 계집이 사내의 은밀한 경락을 자극했다. "으음!" 사내가 뜨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그는 바로 철수무정개(鐵手無情 ) 호자운(虎紫雲)이었다. 그는 칠순이 넘는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늠름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지금 그는 욕조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다섯 명의 계집들은 모두 토실토실하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계집들이 그에게 매달려 그의 온몸을 구석구석 씻겨주며 까르륵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계집들의 손놀림은 능숙했다. 그녀들은 젖가슴을 호자운에게 부벼대며 온갖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이윽고 호자운은 목욕을 끝낸 후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재빨리 한 계집이 비단옷을 걸쳐 주었다. 호자운은 욕실을 나오며 말했다. "너희들은 침실에서 기다려라. 오늘은 자화(紫花)와 취령(翠鈴)이 시중 들어라." 호자운은 괴소를 흘리며 회랑으로 나왔다. 그는 무척 만족스러운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불현듯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호자운의 머리 위로부터 들리는 것이 아닌가? "호자운. 행복하냐? 개방을 배신한 후?" "헉! 누... 누구냐?" 호자운은 질겁했다. 그때였다. 무엇인가 덜렁 천장에서 떨어지는가 싶었다. 그것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호자운의 코 앞에 사람 머리통 하나가 거꾸로 매달려 히죽 웃고 있는 것이었다.


"으으! 귀, 귀신이냐?" 호자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거꾸로 매달려 히죽이 웃는 얼굴. 그것은 뜻밖에도 자신의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켈켈켈! 너같은 놈은 죽어야 해. 개방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말이지!" 거꾸로 매달린 괴인이 이죽거렸다. 다음 순간 괴인은 번개같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호자운의 목을 조였다. "큭, 끄으......." 호자운은 목이 조인 채 붕 떠올랐다. 어찌된 셈인지 그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호자운은 조금도 반항하지 못했다. 그는 두 발로 허공을 차며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마침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자신이 누구에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고만 것이었다. 스르륵....... 그의 시체가 천장 대들보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그와 똑같은 인물이 천장에서 회랑으로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대들보 위에서 낮은 웃음이 들려왔다. "훗훗.... 당신은 이제 침실로 들어가야 겠구료? 두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기다리니 행복하겠소?" 그것은 바로 백천강의 음성이었다. 그의 음성에는 놀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말에 가짜 호자운은 욕설을 퍼부었다. "제기랄! 이 놈아, 이 늙은이의 나이가 몇인줄 아느냐? 그렇게 피둥피둥한 젊은 계집들에게 시달리면 죽는단 말이다!" 백천강의 웃음이 다시 들려왔다. "푸풋! 회춘의 묘약은 바로 사랑이라오." 그 말에 가짜 호자운은 버럭 외쳤다. "이 놈아! 입 닥치지 못......." 갑자기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스슥....... 흐릿한 기체 하나가 대들보를 빠져 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기체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정말 신비하기 그지없는 놈이야. 감쪽같이 우리들을 바꿔치기 하다니......." 47 장 혈사평(血砂坪) ① 옥문관(玉門關). 옥문관은 감숙성(甘肅省) 서북에 위치한 거대한 석문이었다. 이 문이 만들어진 것은 한(漢) 무제 시대였다. 옥문관은 거대한 암석의 바위에 삼각형 모양의 구멍을 뚫어 만든 것이었다. 서역(西域)의 옥(玉)이 바로 이곳을 통해 한나라로 유입되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이 석문을 옥문관이라고 불렀다. 옥문관을 넘으면 끝없이 펼쳐진 대막이 나왔다. 휘이잉... 스스스....... 바람이 불었다. 자욱한 모래바람이 하늘을 잔뜩 뒤덮었다. 모래바람은 회오리치며 대막을 휩쓸어갔다. 일 장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지닌 바람이었다. 그때였다. 모래바람을 헤치며 옥문관을 넘는 인영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열한 명으로 백천강과 극락십령이었다. 극락십령은 흑의를 걸치고 있었으며 백천강은 백의서생의 모습이었다.


"......." 백천강은 끝없이 펼쳐진 사구를 바라보며 눈빛을 번뜩였다. 그는 중원의 각처를 돌아다니며 풍진사개를 혈의교의 인물들로 바꿔치기했다. 연후 극락십령을 이끌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혈천마국. 드디어 가까이왔다." 백천강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대막의 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지평선(地平線)에 붉은 노을이 어렸다. 대막의 기후는 특이했다. 낮이면 불같이 뜨거운 태양이 작렬했다. 그러나 밤이 내리기 시작하면 곧바로 혹한이 닥치는 것이었다. 백천강은 머리에 쓴 죽립을 내렸다. 그리고는 붉게 타는 노을을 바라보며 나직히 말을 이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초지(草地;오아시스)에 당도해야 한다. 적혈신타(赤血神駝)를 빼앗아야 혈사평(血砂坪)까지 무사히 당도할 수 있을 테니까." 스스스... 휘이잉....... 모래바람이 또다시 휘몰아쳤다. 백천강과 극락십령의 모습은 사구 너머로 사라져 갔다. 바람이 자기 시작했다. 사막의 밤은 한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오늘따라 하늘에는 별빛 한 점 없었다. 그야말로 칠흑같은 암천이었다. 백천강 일행은 해가 떨어진 직후에 초지에 당도했다. 초지는 대막 특유의 나무와 숲이 우거져 있었다. 숲의 중앙에 일 장 넓이의 푸른 샘이 있었다. 이미 백여 명의 사람들이 샘가에 천막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대상을 이룬 몽고족과 아랍의 상인들 한 패, 그리고 풍사단(風砂團) 무리들이었다. 풍사단은 대막무림의 패자들로써 대막의 실력자로 통하고 있었다. "으하핫! 오늘밤은 그럴 듯 한데?" "헷헷! 몽고 대상 속에 이렇게 예쁜 계집이 끼여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군." "그러잖아도 계집의 살결이 그리웠는데 말이야. 크크! 하늘이 우리가 허기진 것을 알았던 것이라구!" 흉흉한 사내들의 말소리가 샘가에서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아악! 흐흑.... 놓아줘요!" 애처로운 비명과 함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여인의 목소리였다. 여인의 음성은 서투른 한어(漢語)가운데 몽고 발음이 뒤섞인 것이었다. "흐흐흑.... 살려줘요!" 애처로운 흐느낌은 빠오 안으로부터 들려왔다. 빠오 곁에는 핏빛처럼 붉은 털을 가진 십여 필의 낙타가 묶여 있었다. 낙타 곁에는 몽고인 이십여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근심과 증오가 가득찬 얼굴이었다. "하악! 제... 제발!" 여인의 음성은 이제 절규에 가까웠다. 여인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는 너무나도 자명했다. 그때였다. 그들 중 한 명이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크윽! 사라오(砂羅吾)를 구해야 해요!" 그는 제법 준수하게 생긴 몽고인 청년이었다. 청년은 빠오 안으로 뛰어들려는 듯이 몸을 비틀었다. "차, 참아라. 저들은 대막의 무법자들이 아니냐?" 몽고인 대상들은 급히 청년을 붙잡았다. 그들은 동정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막무가내였다. "크윽, 놓으시오! 내 동생이 변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으란 말이오?" 그때 빠오 안에서는 여전히 음탕한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흐흣, 고것 제법 앙탈인데?"


"헷헷! 속살이 무척 곱군. 그년 젖통이 제법 무르익었는데?" "아악! 제, 제발 살려줘요!" 빠오 안에서 들리는 소리로 미루어 그 상황이 충분히 짐작될 듯 했다. "크아아! 놔라!" 청년은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막무가내로 몸을 비틀었다. 그 바람에 대상들은 그만 청년을 놓치고 말았다. 쿵, 우지끈! 청년은 두 눈에 쌍불을 켜고 빠오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몽고인 대상들은 모두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 이때였다. "건방진 놈! 어르신이 하는 일에 훼방을 놓다니!" "뒈져라!" 빠오 안에서 분노성이 터져나왔다. "아아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초지에 울러 퍼졌다. 동시에 무엇인가가 빠오 안에서 날아왔다. 후두두둑....... 비릿한 혈향과 함께 끈적거리는 물방울이 대상들의 얼굴을 적셨다. "앗!" 놀란 대상들은 급히 손으로 얼굴에 튀어오른 물기를 닦아냈다. 순간 그들은 놀랐다. 놀랍게도 얼굴에 묻은 물방울들은 핏방울이었던 것이다. 쿵! 뒤이어 시커먼 물체가 땅으로 떨어졌다. 대상들의 시선이 물체에 닿았다. "으으! 이럴 수가?" 그들은 다시 한 번 경악했다. 그것은 바로 조금 전에 의분을 참지 못하고 빠오 안으로 뛰어들었던 청년의 몸뚱아리였던 것이다. 그는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채 죽어 있었다. "으으!" "다... 달아나자!" 몽고 대상들은 공포에 질렸다. 그들은 즉시 흩어져 낙타를 집어타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보따리를 챙길 겨를 조차도 없었다. 밤중에 초지를 벗어난다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막의 지형에 누구못지 않게 익숙한 자들이었다. 무엇보다 다급한 것은 한 시 바삐 피비린내나는 초지를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공연히 얼쩡거리다가 붙잡히는 날에는 그들의 목숨도 온전할 리가 만무했다. 그들이 사라졌을 때였다. 빠오 안에서는 더욱 노골적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헤헷! 몽고 계집치곤 빼어난데? 허리가 한 줌밖에 안 되는군. 게다가 엉덩이가 제법 토실토실해." "크크크! 이 계집은 내가 먼저라구." "뭐라고? 무슨 소리냐? 내가 먼저 발견했으니 당연히 내가 먼저다." 안에서 다툼이 벌어졌다. 이때였다. 빠오 안에서 또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게들! 이 계집에게 드디어 환락춘요산의 효과가 왔네." "흐흐윽... 아아!" 여인의 뜨거운 신음소리가 빠오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어둠을 틈타 빠오 곁으로 다가드는 십일인의 인영이 있었다. 그들은 언뜻 보기에 대식국(大食國)의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터번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용모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푸르스름한 죽음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들의 눈빛은 음산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잠깐! 서라! 무슨 일이냐?" 휘휙! 어둠 속에서 불현듯 솟아나는 인영들이 있었다. 약 서른 명 가량 되는 무리였다. 그들은 재빠른 동작으로 침입자를 포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흑의를 입은 자들이었다. 흑의 앞가슴에는 풍(風)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바로 대막 풍사단의 일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식이었다. 한 명의 중년인이 음침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빠오 안에는 혈천사령(血天司令) 어르신네들이 계신다." 그때였다. 앞장 서 있던 대식국의 사람 중의 하나가 유창한 한어로 말했다. "그들이 혈천마국에서 온 자들이 틀림없느냐?" 중년인은 한순간에 안색이 변했다. 그는 노기어린 음성으로 외쳤다. "사령 어르신들을 함부로 부르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했느냐?" 앞장 선 중년인이 손을 뻗쳤다. 그때였다. "죽고싶어 환장한 자들은 바로 너희들이다!" 섬전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중년인은 대식국인의 손가락이 어떻게 자신의 목까지 도달했는지도 보지 못했다. "아악!" 중년인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어느새 그의 목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뚫린 목구멍으로부터 시뻘건 선혈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헉! 적이닷!" "쳐랏!" 풍사단원들은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병기가 채 휘둘러 지기도 전이었다. "앗!" 그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어느새 대식국인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였다. "케에에엑!" 그것은 삽시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연이어 터졌다. 삼십여 명에 달하는 풍사단원들은 허망하게도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황천으로 간 것이다. 거기까지의 과정은 실로 채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누구냐?" 휙 휘익! 마침내 빠오 안으로부터 십여 줄기의 인영이 비쾌하게 쏘아 나왔다. 그들은 바로 혈천마국에서 파견된 혈천사령들이었다. 풍사단은 본래 대막의 패주였으나 최근들어 혈천마국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들을 지시하는 자들이 바로 혈천사령들이었다. 결국 혈천사령은 대막의 감찰사나 다름이 없었다. "헉!" 혈천사령들은 초지 위에 벌어진 참경에 아연실색했다. 바로 그때였다. "이번에는 너희들 차례다." 어디선가 얼음장같은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어, 어디......?" 혈천사령들은 말을 잇지도 못했다. 아니 고개를 돌릴 시간조차 없었다. 단지 그들이 느낄수 있었던 것은 뒤통수가 으깨지는 것뿐이었다. 퍼억! 비명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단지 수박통이 으깨지는 듯한 소리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쿵! 쿠웅.......


머리통을 잃어버린 몸뚱이가 비릿한 혈향을 퍼뜨리며 어지럽게 쓰러졌다. 스스....... 다음 순간 대식국인들의 신형이 나타났다. 그들의 수법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았다. 앞장 선 자가 하얀 터번을 끌렀다. 그러자 영준한 얼굴이 드러났다. 바로 백천강이었다. 나머지 인물들도 대식국의 복장을 벗어던지자 극락십령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백천강은 싸늘한 눈으로 잠시 경내를 훑어보았다. 그는 빠오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빠오 안을 꽉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 백천강의 검미가 꿈틀거렀다. 그의 눈에 처참한 여인의 나신이 보였다. 그녀는 빠오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에 머리를 부딪힌 채 죽어있었다. 그녀는 강제로 음약을 먹은 채 능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을 선택한 것이다. "......." 백천강은 멍하니 여인의 시체를 내려 보았다. 온기를 상실해가는 여인의 나신은 웬지 슬퍼 보였다. 잠시 후 백천강은 몸을 돌려 빠오를 빠져나왔다. 그는 극락십령에게 말했다. "지금 떠난다. 모두 적혈신타에 올라라." ② 혈사평(血砂坪). 아득한 옛날부터 대막의 한가운데 위치한 혈사평은 죽음의 땅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였다. 대막의 유목민이라도 혈사평 안으로만 들어가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얼마 전 그 이유가 분명히 밝혀졌다. 그것은 바로 혈천마국(血天魔國) 때문이었다. 전설적인 마국인 혈천마국이 바로 혈사평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혈천마국인들은 대막을 벗어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혈천마국에 들어온 사람은 평생 혈사평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혈천마국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혈사평은 죽음의 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혈사평은 무수한 험지를 가로질러 대막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혈사평의 넓이는 광대했다. 일 주야를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곳이 혈사평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끝없이 펼쳐진 모래가 핏빛이기 때문이었다. 태양이 이글거렸다. 불덩이같은 태양은 끝없이 펼쳐진 핏빛 모래의 물결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정오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휘리링... 스스스....... 붉은 모래바람이 회오리쳤다. 창공으로 휩쓸려간 빨간 먼지의 구름들이 태양을 가렸다. 바로 그때였다. 붉은 사구(砂丘) 사이로 열한 필의 적혈신타가 나타났다. 적혈신타는 대막에만 있는 몹시 희귀한 낙타였다. 그것은 영험한 동물로 대막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즉 적혈신타는 다른 낙타에게는 없는 독특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막에는 유사지대(流砂地帶)라는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유사지대는 언뜻 보아서는 평범한 모래언덕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한 번 빠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유사지대는 가벼운 깃털조차도 금세 삼켜버리는 죽음의 늪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공포의 유사지대는 곳곳에 흐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유사지역은 수시로 그 위치를 이동하는 것이었다. 위험은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사막에는 또 다른 위험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모래 속에서 서식하는 극독한 전갈떼였다. 그 전갈의 독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맹독했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그 전갈에 물리는 순간 일 다경을 넘기지 못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아직까지 그


독충에 대한 해약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적혈신타에게는 그런 두 가지의 위험을 감지하고 피해가는 능력이 있었다. 붉은 사구를 넘어온 적혈신타가 점차로 모습을 드러냈다. "......." 열한 마리의 적혈신타에는 백의서생과 열 명의 흑의남녀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백천강과 극락십령이었다. 백천강은 눈 앞에 끝없이 펼쳐진 핏빛의 모래사막을 바라보았다.그리고는 두 눈을 번득였다. "혈사평.... 드디어 왔다. 과연 섬뜩한 곳이군." 맞는 말이었다. 일륜(日輪)은 모든 생명체를 태워죽일 듯이 이글이글 내려쪼이고 있었다. 그 아래 끝없이 펼쳐진 핏빛 모래땅은 적요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적요는 웬지 모르게 숨막히는 공포심을 유발시켰다. 하지만 백천강은 곧 차갑게 말했다. "크ㅋ! 이까짓 모래밭따위가 나를 가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백천강은 혈사평으로 오는 동안 수도 없이 많은 고비를 넘겼다. 풍사단의 추적은 끈질겼다. 백천강 일행이 초지에서 혈천사령과 풍사단을 해치웠다는 소문은 오래 전에 대막으로 퍼져나갔다. 그 때문에 대막 전역에는 풍사단의 고수들이 쫘악 퍼졌던 것이다. 풍사단은 대막의 생리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환히 아는 족속들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추격은 집요했다. 끝없는 암습이 혈사평 곳곳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혈천사령들이 곳곳마다 그들을 가로 막았다. 그야말로 혈로(血路)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이 인생의 법칙이었다. 백천강은 묵묵히 혈사평의 끝자락을 응시하면서 적혈신타의 발걸음에 몸을 흔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백천강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이어 그는 짧게 중얼거렸다. "보인다." 아득한 지평선 끝에 하나의 거대한 성이 나타난 것이다. 성은 안개와도 같은 막에 가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뾰족탑과 반짝거리는 성벽의 모습은 어김없이 드러났다. 그야말로 신비하기 그지없는 성이었다. 어느 순간 백천강의 입술 끝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동시에 그의 입가에는 한 가닥 조소가 어렸다. "저것은 환상일 뿐이다. 햇볕과 아지랑이로 반사된 신기루(蜃氣樓)다. 신기루를 쫓아가면 영락없이 미궁에 빠진다. 혈사평에 펼쳐져 있는 미진(迷陣) 속으로......." 백천강의 말이 끝나자 극락십령의 입에서 마기에 찬 장소가 울려퍼졌다. "크크크... 우우......!" ③ "크아아악!" 죽음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냉혹한 사풍은 천육백 년 동안 대막제일절지(大漠第一絶地)이자 천하제일사지(天下第一死地)였던 혈사평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정녕 유사지대나 전갈의 독보다도 더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두두두....... 사풍은 적혈신타를 탄 다섯 쌍의 흑의괴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혈사평을 찢었다. 그들은 바로 극락십령이었다. 극락십령을 가로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들의 목숨을 빼앗을 자들이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빼앗길 목숨이 없는 불사마령체(不死魔靈體)들이었다. 두두두둑.......


극락십령들은 다섯 방향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은 혈천마국을 향해 달리면서 철저히 혈사평을 유린했다. 혈사평에는 고금제일의 미궁대진(迷宮大陣)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극락십령은 이미 길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진간허(陣間虛)를 파고들며 가공할 죽음의 살수를 펼쳤다. 파파팍! 핏빛 모래 속에서 수많은 고수들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들은 신속한 몸놀림으로 극락십령을 가로 막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들은 더이상의 공격을 감행할 수 없었다. "호호호���!" 극락십령은 괴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는 사람의 혼을 제압하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 그들은 멈칫했다. 극히 짧은 순간의 멈칫거림. 바로 그것이 생과 사의 기로였다. 극락십령은 순간적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크아아악!" 혈천마국의 고수들은 일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그들은 극락십령의 장력에 피떡이 되며 날아갔다. "크크크크!" 극락십령은 혈사평을 더욱 시뻘겋게 물들였다. 그들은 한곳으로 적혈신타를 몰았다. "막아라! 크아악!" "저... 저들은 사람이 아니다. 케에엑!" 때로 죽음이란 그토록 어이없게 찾아오는 법이다. 때문에 오랜 옛날부터 도인들은 이렇게 읊조렸던 것이다. 인생이란 허망한 것이라고. 어쨌거나 혈천마국은 천육백 년의 신비를 이어온 전설의 마국이었다. 그 혈천마국은 마인(魔人)들의 왕국이면서도 평화로왔다. 그것은 그들이 전통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혈사평을 떠나지 못하게 한 오래된 전통이었다. 그러나 그 전통을 그들은 스스로 파괴했다. 이제 그들은 그 대가를 치뤄야만 했다. 무시무시한 혈풍이 마국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성(城)이 보였다. 그것은 핏빛의 모래땅 위에 우뚝 세워진 거성(巨星)이었다. 타는 듯 붉은 석양이 성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철탑이 곳곳에 솟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성벽은 높이가 오 장이 넘었다. 성벽은 천연의 암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견고해 보였다. 태고로부터 휘몰아쳐온 사풍도 그 성벽만큼은 넘나들 수 없었다. 성벽의 주위에는 또 하나의 성벽처럼 붉은 모래가 띠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 폭은 무려 오십 장을 능가했다. 오십 장의 넓이를 가진 붉은 모래의 띠. 그것은 바로 혈사하, 즉 죽음의 유사(流砂)였다. 한 번 발을 디디면 무섭게 빨려드는 유사가 성벽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뎅뎅뎅뎅....... 느닷없이 성 안에서 급격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로부터 일각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끼끼익! 괴이한 음향과 함께 성의 사대문(四大門)이 열렸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유사 속으로부터 철교(鐵橋)가 솟아올랐다. 철교는 유사를 가로질러 성문과 이어졌다. "침입자들을 막아랏!" "크크크! 감히 본국을 침범하다니 간덩어리가 부은 놈들이군!"


두두두두....... 사대문으로부터 적혈신타가 무리지어 쏟어져 나왔다. 적혈신타 위에는 두 눈이 무섭게 번쩍이는 인물들이 타고 있었다. 사대문에서 일시에 쏟아져 나온 고수들은 유사를 이은 철교를 가로질러 사방으로 밀려 나갔다. "핫핫핫! 어떤 놈들인지 마공의 무서움을 보여주마!" "크크크! 피떡을 만둘어 주마!" 두두두두둑! 삽시에 수백 명이 혈사평을 가로질러갔다. 동문(東門) 근처였다. 스스스....... 뻘건 모래가 흩어졌다. 이어 그 자리에 한 인영이 유령처럼 솟아 올랐다.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닫혀진 동문을 바라보았다. 언뜻 그의 입가에 괴이한 미소가 흘렀다. "후후! 십령이 제 할 일을 충실히 이행하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나도 머뭇거릴 수는 없지." 백천강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어 그의 신형이 비스듬히 허공을 가로지르며 누웠다. 스으으....... 놀라운 일이었다. 어느새 백천강은 한 줄기 연기로 화한 것이었다. 연기는 오십여 장의 혈사하를 유유히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이어 그것은 오 장 높이의 성벽을 구렁이처럼 타넘는 것이었다. 백천강은 성벽을 넘은 뒤 주위를 둘러 보았다. 성 안은 광대했다. 거대한 연무장이 있는가 하면 기이한 양식의 대전과 방사들이 줄지어 있었다. 온갖 종류의 가시나무들로 이루어진 화원도 있었다. 가시나무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었다. 대전과 화원의 곳곳에는 철탑들이 줄지어 솟아 잇었다. 언뜻 보기에 그 건축물들은 무질서하게 지어져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으음! 모두가 무서운 현기를 품고 있다. 오행이 그 기본이고, 그 위에 칠성구궁(七星九宮)과 십상(十象)이 교차되어 미로를 방불케 한다.' 백천강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만일 공야운리에게 이곳의 상세한 도면을 얻지 못했다면 크게 낭패할 뻔 했다.' 백천강은 내심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어깨를 흔들었다. 스슥....... 백천강의 모습이 흐려졌다. 그는 한 가닥 연기가 되어 철탑사이를 날아갔다. 어둠이 혈천마국을 음산하게 뒤덮고 있었다. ④ 혈지(血池)였다. 온갖 이화요초가 피어있는 화원 한가운데 핏빛 연못이 있었다. 정자 한 채가 비스듬히 연못에 세워져 있었다. 그곳은 독특한 모양새였다. "......." 인영 하나가 정자에 있었다. 인영은 정자의 기둥에 기댄 채 멍하니 혈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 인영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드러난 옷차림으로 보아 여인임이 분명했다. 혈지 속에는 노르스름한 편월 하나가 빠져 있었다. 여인은 편월을 응시하는 듯했다. 스스스스....... 혈사평을 얼어붙게 만드는 밤바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불현듯 여인의 입에서 탄식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그 아이는 어찌 되었을까... 아직도 검을 만들고 있을까?" 여인의 음성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수심이 깃들어 있는 음성이었다.


스슷....... 정자의 맞은편 이수(異樹)속에 한 인영이 숨어들었다. 인영은 바로 백천강이었다. 그는 정자 속의 여인을 응시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곳이 바로 용화별원(龍花別園)이다. 그렇다면 저 여인이 바로 공야운리가 말한 마야부인(魔爺夫人)이란 말인가?' 백천강은 귀식대법으로 호흡을 차단했다. 그는 안력을 높여 여인을 바라보았다. '앗!' 백천강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급히 주먹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기 때문이다. 백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정자 속에 있는 여인은 중년부인으로 몹시 아름다왔다. 비록 나이는 들었으나 신비할 정도의 매력을 갖고 있었다. 여인의 피부는 눈같이 희었다. 두 개의 눈동자는 진주처럼 반짝였고 특히 초생달같은 아미에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묘한 힘이 있었다. '아! 저럴 수가!' 그는 온몸의 혈관이 팽창되었다. '닮았다. 너무도 닮았다. 어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백천강은 내심 부르짖었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정자 속의 여인은 그를 완전히 홀리게 만들고 있었다. '어찌 저토록 닮을 수 있단 말인가?' 백천강은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정자 속의 중년 여인이야말로 백천강의 모친인 백수련을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러나 백수련은 낙양 외성의 초옥에서 구공자의 검에 찔려 분명 죽었다. 백천강은 자신의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보았다. 그때 죽은 어머니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저럴 수가... 저 여인이 어머니란 말인가? 아니면 공야운리가 말한 마야부인이란 말인가?' 백천강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 듯했다. 이때 한 가닥 호탕한 웃음소리가 주위의 정적을 깨뜨렸다. "핫핫핫! 사매, 왜 아직 잠을 못이루는 거요? 혹시 내 생각이 나서 그러오?" 한 중년인이 화원 사이로 나타났다. 그는 일신에 황제나 입음직한 화려한 곤룡포를 입고 있었다. 백천강은 그를 본 순간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갈천기!' 정말이지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자는 바로 혈천마국주 갈천기였다. 그는 바로 백문선생 우문기로 활동하다가 마각을 드러낸 혈천마국주였다. 백천강은 그와 겨룬 적이 있었기에 대뜸 알아본 것이다. 백천강은 이를 앙다물었다. 서서히 그의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마야부인은 몸을 가볍게 휘청거렸다. 갈천기는 그것을 보고 급히 신형을 날렸다. 그는 정자 안에 내려서며 여인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왜 그러오? 어디가 아프오?" "아... 아니에요. 잠시 현기증이......." 여인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갈천기는 마야부인의 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내 뭐랬소? 사매가 마공심법(魔功心法)을 익히면 그런 어지럼쯤은 가볍게 해소된다고 하지 않았소? 이제라도 늦지는 않았소." "아니에요. 이제 무공을 더 익힌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여인의 음성에는 힘이 없었다. 갈천기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매. 아직도 과거를 잊지 못하고 있소? 이제 잊을 때도 되지 않았소? 더구나 이 사형이 모든 것을 용납하려는데... 깨끗이 잊고 사매와 남은 생을 함께 반려하겠다는데......." 갈천기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마야부인은 흰 손으로 그의 입을 막으며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그만 하세요. 사형, 아직 소매의 마음은 정해지지 않았어요. 좀더 시간을 주세요." 문득 갈천기는 여인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그는 다급하게 외쳤다.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소! 사매를 옆에 두고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은 정녕 참기 힘든 일이오. 오늘밤은 기필코 사매를 취하겠소!" 갈천기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것은 욕정의 불길 때문이었다. 그는 여인의 목덜미로 입술을 가져갔다. 여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만! 사형은 잊었나요? 이 몸은 이미 사형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을?" "그게 무슨 상관이오? 내가 다 용서하겠다는데......." 갈천기는 여인의 허리를 더욱 세게 당겼다. "안 되요. 제발. 사형이 이러시면 차라리 죽겠어요!" 여인의 음성은 절망에 가깝게 들렸다. "음!" 갈천기의 입에서 불만어린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맥이 풀린 듯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의 음성은 한 가닥 노여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아직도 그 놈을 잊지 못한단 말이오?" "비록 약성(藥性)때문이었으나 그는 소매와 몸을 섞은 유일한 남자였어요." "닥쳐라, 사매." 갈천기를 이를 갈며 외쳤다. "정말 그 놈이 밉지 않단 말이냐?" 여인은 오열했다. "흐흑! 하지만 그건 운명(運命)이었어요." "크흣흣! 운명이라고? 그 놈이 이미 죽었는데도?" 여인은 눈물젖은 얼굴을 들었다. "왜? 그를 죽였지요?" "ㅋㅋ! 그럼 사매가 그 놈과 다시 맺어지는 것을 이 갈천기가 용납해야 한단 말이냐?" "그 분은 이미 속인(俗人)이 아니잖아요." "흥! 과거에도 그랬었지." "아!" "단념해라. 사매, 놈은 이미 내손에 죽었다." 갈천기의 음성은 어느새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흐흑!" 여인은 흐느끼며 난간에 얼굴을 묻었다. 갈천기는 여인이 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몸을 돌렸다. 그의 입에서 침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기다리겠소. 사매, 언젠가 당신은 결국 내게로 돌아올 것이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화원 사이로 걸어들어갔다. 한 열 발자국 정도 걸었을까?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침입자들이 혈사평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소. 사매도 조심하도록. 물론 이곳까지 들어올 리는 없지만......." 그는 다시 걸음을 떼었다. "내가 연공관(練功關)에 들 시간만 아니라도 놈들을 처치할텐데... 어쨌든 사흘 후 내가 나올 때는 모든 것이 조용해질 것이오."


그 말에 여인은 눈물을 씻으며 물었다. "이번 입관(入關)이 끝인가요?" 갈천기는 웃으며 걸어갔다. "흣흣! 그렇소. 사흘 후면 나 혈제 갈천기는 마마대공(魔魔大功) 십이 단계를 달성하게 될 것이오. 훗훗훗!" 갈천기는 음침한 괴소를 남기며 사라져 갔다. "......." 여인은 또다시 정자에 홀로 남게 되었다. 여인은 눈물 그렁한 눈으로 다시 혈지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다소 멍청해 보였다. 마음의 상심이 너무 커 혜지가 흐려진 탓인지도 몰랐다. 한편 백천강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뜻밖이다. 천하의 효웅인 갈천기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여인이 있다니.... 더구나 저 부인은 과거가 있는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사랑하고 있다니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구나.' 그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었다. 혈제 갈천기는 혈천마국주이자 당금 천하를 관장하고 있는 혈의교의 교주이기도 했다. 그저 손만 들으면 천하의 모든 미인을 취할 수 있는 그가 한 중년여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이미 과거가 있는 여인을 말이다. 그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마야부인. 아무래도 저 여인은 어머님과 관계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백천강은 잠시 망설였다. '지금쯤 십령은 혈사평을 피로 물들이고 있을 것이다. 그곳으로 주의가 쏠리는 동안 나는 혈천사옥(血天死獄)을 열어야 하지 않는가?' 혈천사옥은 혈천마국에서 죄인을 잡아 가두는 지하뇌옥(地下牢獄)이었다. 백천강이 애당초 혈천마국에 온 것은 갇혀 있는 혈천마국의 충신들을 구하기 위해서 였다. 백천강은 그들을 구출함으로써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이 합세한다면 대동맹의 전력은 그만큼 늘어난다. 반대로 혈천마국은 그만큼 손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그는 결정을 내렸다. '큰 것부터 해결하자, 마야부인은 나중 일이다.' 스슷....... 백천강의 연기로 화한 신형이 다시 전각 사이를 흘렀다. 그는 신형을 날리면서 곳곳에 숨은 매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처처함정이었다. 혈천마국은 전체가 무서운 천라지망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함정은 백천강에게만은 무용지물이었다. 스스슷....... 그는 거침없이 매복자들의 눈 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48 장 드러나는 실체(實體) ① 대전은 혈석(血石)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웅장한 대전은 생각과는 달리 음침한 느낌을 주었다. <혈사형방(血死刑房)> 그런 현판이 핏빛글씨로 걸려 있었다. 이름 그대로 혈사형방은 형(刑)을 집행하는 곳이었다. 혈천마국은 일전 이원 육방 팔교 십이단(一殿二院六房八敎十二壇)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전은 혈천전(血天殿)으로써 국왕인 혈제가 관장하는 곳이었다. 이원은 원로원(元老院)과 호천원(護天院)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곳에 속하는 자들은 혈천마국의 국신들이었다. 육방은 사실상 혈천마국을 이끄는 조직이었다. 그것은 내삼방과 외삼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바로 이곳에 의해서 혈천마국의 대소사가 나누어 처리되었다.


팔교와 십이단은 혈천마국이 최근에 만든 행동조직이었다. 중원천하에 퍼져 있는 혈의교의 조직이 바로 팔교십이단의 예하였다. 혈의형방은 내삼방 중 형방(刑房)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성내의 죄인들을 다스리거나 심문, 투옥, 체형 등을 도맡아 했다. 혈사형방의 방주는 낭심염라도마 추병량으로 그는 사실상 혈천마국에서 가��� 무서운 인물이었다. 그는 잔혹한 성격을 지녀 낭심염라도마(狼心閻羅屠魔)라는 외호로 불리우고 있었다. 어쨌거나 낭심염라도마 추병량은 오늘밤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 그는 넓은 형실에 홀로 서 있었다. 추병량은 의외로 파리한 안색에 깡마른 체구를 가진 자였다. 그는 형실을 둘러 보았다. 여기저기 핏자국이 묻어 있고 꿈에 볼까 두려운 갖가지 형구(刑具)들이 널려 있었다. 추병량은 찢어진 눈으로 형구들을 둘러보았다. 그것은 그가 마음을 안정시킬 때 하는 버릇이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하나의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죄인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이었다. 그는 마음이 심란하거나 우울할 때면 어김없이 형실을 찾아와 음산한 형실을 둘러보거나 형구들을 만짐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되찾곤 했다. 윙! 그는 가시가 달린 채찍을 휘둘러 벽을 치며 중얼거렸다. "으음. 대체 어떤 놈들이 혈사평에 들어와 본국의 고수들을 마구 죽인단 말인가?" 추병량은 연이어 들어오는 보고를 받았다. 보고에 의하면 다섯 쌍의 흑의남녀들이 혈천마국의 고수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쌔액! 다시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채찍의 끝에는 콩알만한 쇳덩이가 달려 있었다. 채찍은 이번에는 형틀에 떨어졌다. 쇳덩이가 형틀에 부딪히는 순간 불꽃을 튕겼다. "흐흐! 혈천살혼대(血天殺魂隊)가 출발했으니 내일 아침까지는 놈들을 잡아올 것이다. 놈들을 쉽게 죽이지는 않겠다." 추병량은 채찍을 연신 휘둘렀다. 마침내 그의 이마에 땀이 배어 흐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그는 기분이 풀린 듯 채찍을 내던졌다. "크ㅋ! 남은 것은 내일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다." 추병량은 형실을 등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그의 거처는 혈천형방 뒤쪽에 있었다. 추병량은 냉혹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그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했다. 그러므로 거처에는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는 잠도 혼자 잘 뿐더러 여색조차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잔혼마유공(殘魂魔幽功)이란 패류의 마공을 익혔기 때문이다. 잔혼마유공을 익힌 자들은 타인과 부대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품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낭심염라도마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곳은 몹시 협소했다. 장식품이라고는 오직 한구석에 놓인 낡은 침상 하나가 전부였다. 실로 삭막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그는 방 안에 들어서자 곧장 옷을 벗고 침상으로 걸어갔다. "......!" 문득 추병량의 몸이 굳어졌다. 침상 위에는 뜻밖에도 한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 자는 어처구니 없게도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인물이었다.


낭심염라도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그는 감정이 완전히 죽은 자였다. 따라서 겉으로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대담한 놈!" 단지 그는 차갑게 내뱉으며 두 손을 뻗었다. 슈슉! 그의 열 손가락에서 차가운 청색지강이 뻗었다. 그 지강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가짜 낭심염라도마의 양쪽 가슴에 열 개의 구멍을 뚫었다. "크크... 간단히 죽는... 윽?" 그는 말을 끝내지 못한 채 눈을 부릅떴다. 의당 침상 위에 있어야 할 상대방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으악!" 추병량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침상 위로 나동그라졌다. 그의 얼굴이 침상에 쳐박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다. 어느새 그의 등 뒤에는 열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또한 그 수법은 바로 그가 침상 위의 괴인을 향해 전개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스슷....... 홀연히 한 줄기 인영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인영의 얼굴은 낭심염라도마 추병량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침상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훗훗! 이제 날이 새면 된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혈사형방의 대전에 수십 명의 인영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혈의인이었다. 혈의인들의 중앙에는 열 명의 흑의인들이 쓰러져 있었다. 낭심염라도마는 쓰러져 있는 흑의인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혈류가 흘러나왔다. "흐흐! 그래 이 놈들이란 말이지?" 낭심염라도마는 혈의인들을 향해 말했다. 혈의인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혈천살혼대의 절반이 이 놈들에게 희생되었습니다. 만일 생포하려 들지만 않았다면 희생을 줄일 수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분노의 빛이 역력했다. 낭심염라도마는 차갑게 말했다. "수고했다. 내게 맡기고 가라." "알겠습니다." 혈천살혼대는 미련을 두지 않고 사라졌다. 그들은 이제 더이상 서 있을 기운도 없었던 것이다. 격전의 와중에서 가까스로 살아남느라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 낭심염라도마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바로 극락십령이었다. 낭심염라도마는 내심 괴소를 흘렸다. '훗훗! 십령, 연극을 잘 했다. 놈들은 설마 너희들이 무혈지체(無穴之體)임을 모르리라.' 낭심염라도마.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안색이 무표정한 혈사형방 소속의 형리들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백천강은 음산하게 말했다. "이 자들의 내력이 심상찮다. 그러나 주상께서 폐관 중이시니 그때가지 기다리겠다. 그동안......." 그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재차 입을 열었다. "이 놈들을 혈천사옥(血天死獄)에 가두겠다." 그 말에 무표정하던 형리들의 안색이 변했다.


"이 놈들의 가공할 무공으로 보아 배후자는 극히 신비한 놈일 것이다. 그런 일은 안전을 기해야 한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형리들의 표정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가자." 백천강은 앞장 섰다. 마침내 형리들은 극락십령을 하나씩 어깨에 들쳐메고 백천강의 뒤를 따랐다. 백천강은 내심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설마 이런 수를 쓸 줄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혈천사옥은 혈천마국 제일의 금지(禁止)였다. 그곳을 임의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두 사람밖에 없었다. 혈제 갈천기와 혈사형방주인 낭심염라도마 추병량뿐이었다. 그만큼 혈천사옥은 엄중히 경비되고 있었다. 그곳은 성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혈사담(血砂潭) 속에 있었다. 혈사담은 천하에서 가장 가벼운 부사(浮砂)로 된 연못이었다. 그 연못 속에 한 번 빠지면 새의 깃털이라도 두 번 다시 뜨지 못했다. 혈사담 한가운데 붉은 석탑(石塔)이 있었다. 높이가 약 십 장에 달했다. 백천강은 혈사담가에 당도했다. 그는 유난히 붉은 빛을 발하고 있는 혈사담을 바라보았다. 혈사담에는 오직 몇 사람만이 아는 비밀통로가 있었다. 그곳 외에 다른 곳을 밟으면 그대로 혈사담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백천강은 내심 중얼렸다. '오늘이 팔월 오일이니 건사우칠현궁보(乾四右七玄穹步)를 시전해야 겠군.' 그는 차갑게 말했다. "따라 와라!" 스슥....... 그는 혈사담 안으로 발을 딛었다. 극락십령을 둘러멘 형리들이 그가 밟은 부분을 밟으며 따라왔다. 그들은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만약에 한 걸음이라도 오차가 있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혈사담 속에 빠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백천강은 건사우칠현궁보를 밟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만약 공야운리에게 도해를 얻지 않았다면 결코 이곳을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마침내 백천강은 혈사담을 건넜다. 그리고는 석탑에 이르렀다. 석탑에는 굳게 닫힌 문이 있었다. 문에는 여덟 개의 구슬이 나란히 박혀 있었다. 백천강은 망설이지 않고 지력을 날렸다. 여덟 개의 구슬이 거꾸로 세 번 반복해 눌러졌다. 쿠르릉! 굉음과 함께 석문이 좌우로 열렸다. 모든 기관장치는 극히 정묘했다. 뿐만 아니라 기관장치는 매일 그 순서가 바뀌게 설계되어 있었다. 백천강이 만일 공야운리로부터 그런 사정을 미리 익히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석문을 열 수 없었을 것이다. 석문이 열리며 드러난 것은 깊이가 드러나지 않는 계단이었다. "......." 백천강은 지하로 끝없이 뻗은 계단을 내려 보았다. 지하로부터는 역한 피비린내가 치밀고 있었다. '정말 음침한 곳이군.' 그는 잠시 지하를 향하는 계단을 내려다 보았다. 계단은 홍황청(紅黃靑)의 세 가지 색깔로 이루어져 있었다. 백천강은 그 중 황색만 밟으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토록 철저히 꾸며져 있다니.......'


그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백천강은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다른 색을 밟는다면 경혼실색할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계단은 백 장 이상을 내려갔다. 벽에는 오 장마다 야명주가 박혀있어 푸르스름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마침내 백천강은 계단을 다 내려왔다. ②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넓은 광장이 있었다. 광장은 바둑판처럼 무늬가 깔려 있었다. 백천강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방원 백 장여 넓이의 지하광장이었다. 광장의 맞은편에는 굵은 철책(鐵冊)이 있었다. '이제 마지막 관문이구나.' 백천강은 내심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어지러운 선이 교차하는 바닥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만상환문혼원미진(萬像幻門混元迷陣)이다. 이곳을 통과하는 방법은 오직 갈천기만이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백천강은 빙글 돌아섰다. 형리들은 여전히 무표정한 안색으로 극락십령을 떠메고 있었다. 그는 형리들을 향해 싱긋 웃었다. "......?" 형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천강은 부드럽게 말했다. "수고했다. 이제 너희들은 쉬어도 된다." 형리들은 영문을 몰라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극락십령의 축 늘어져 있던 손이 일제히 호선을 그리며 떠오르더니 형리들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퍽! 퍼억....... 그것은 찰나지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식간에 피가 튕기며 그 자리에 열 구의 시체가 생겼났다. 형리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횡사한 것이다. 백천강은 광장바닥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날 따라라." 스슷....... 백천강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날아갔다. 그는 바닥을 밟지 않고 허공을 비스듬히 떠서 날아갔다. 슈슈슈슉....... 돌연 천장으로부터 돌화살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백천강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손을 휘저었다. 파파파팟! 돌화살은 그의 경기에 튕겨져 나갔다. 극락십령의 몸에도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혔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화살은 여지없이 튕겨져 나가버렸다. 백천강은 계속 날아갔다. 그가 이십 장 가량을 전진했을 때였다. 갑자기 천장에서 갑자기 시커먼 독수(毒水)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촤아아아! 독수는 그대로 백천강과 극락십령의 몸을 뒤덮었다. 푸치치치칙! 기이한 음향과 함께 푸른 연기가 피어 올라왔다. 그러나 백천강은 이미 독중성이었다. 물론 극락십령도 만독불침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혈천마국의 독수는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다. 그들은 거침없이 독수를 뚫고 날아갔다. 퓽퓽... 슈슝....... 이번에는 천장이었다. 무수한 강창(剛槍)이 벼락처럼 꽂혀내렸다. 강창의 위력은 독수에 비해 한층


강했다. 호신강기조차 강창을 튕겨내긴 힘들었다. 그때였다. 문득 백천강의 몸에서 묵광이 일어났다. 그는 바로 비검을 뽑아 들었다. 카카카카캉! 무수한 불꽃이 일어났다. 강창은 비검(悲劍)에 튕겨져 날아갔다. 극락십령은 양 손으로 강창을 쳐내며 날아갔다. 함정은 숨막히게 이어지고 있었다. 우웅... 쿠쿠쿠쿵! 얼마쯤 가자 이번에는 천장이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찻!" 백천강은 천장을 향해 쌍장을 뻗었다. 꽝! 하는 폭음과 함께 천장이 주춤거렸다. 그 사이 그들은 다시 십 장여를 날아갔다. 그러나 곧 진기가 떨어지고 말았다. 백천강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바닥이 푹 꺼지며 시커먼 함정이 아가리를 벌렸다. 그러나 백천강은 함정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몸이 허공에서 정지했다. 이어 그는 허공을 걸어 앞으로 나갔다. 그는 십 보만에 무사히 함정을 건너갔다. 그러나 극락십령은 곧바로 함정 속으로 떨어져갔다. 그로부터 일각 후였다. "......?" 백천강은 문득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이었다. 콰콰쾅... 콰쾅! 함정 속에서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이어 함정 안으로부터 극락십령의 몸이 불쑥 솟구쳐 올라왔다. 그것을 본 백천강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후훗! 십령은 불사지체다. 결코 죽지 않지." 백천강은 차갑게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이제 철책까지는 불과 십여 장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 왔군, 이번에는 또 무엇이냐?" 그는 서서히 걸어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 마침내 백천강은 철책까지 무사히 당도했다. 철책의 굵기는 오리알만했다. 그는 손을 철책을 바라보다 가볍게 손을 저었다. 스스스....... 그의 장심으로부터 붉은 기류가 뿜어져 나왔다. 기류는 철책을 에워쌌다. 이어 철책은 흐물거리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철책은 시뻘건 쇳물덩어리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들어 가자." 백천강은 극락십령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그는 먼저 철책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펑! 백천강의 가슴을 향해 거대한 장력이 퍼부어지는 것이 아닌가? "윽!" 그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뒤로 주르륵 밀려나고 말았다. "크크크!" 문득 음산한 괴성과 함께 열 명의 괴인이 철책 안으로부터 나타났다. 그들이 나타나기가 무섭게 주위에 시체냄새가 물씬 풍겼다. 백천강은 그들을 본 후 부르짖었다. "염혼강시(閻魂 屍)!" 나타난 괴인들은 앙상한 뼈에 부패되고 짓무른 살가죽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전설적인 마공대법(魔功大法)으로 훈련된 염혼강시들이었다. 바로 그들이 혈천사옥의 마지막 수호자였던 것이다. "이 놈들이 있길래 지키는 자가 없었군." 백천강은 안색이 변해 중얼거렀다. 그 순간 무시무시한 싸움은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강시( 屍)대 강시의 싸움이었다. 콰르르릉....... "끄아아악!" 실로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극락십령과 염혼강시는 가공할 대결을 벌였다. 그들이 부딪힐 때마다 뼈가루가 날렸다. 백천강은 그 광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더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는 즉시 몸을 날렸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더이상 없었다. 지하는 뜻밖에도 수옥(水獄)이었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물이 가득한 수옥 속에서 무서운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저주에 가득찬 음성이었다. "으으! 혈서생(血書生). 널 지옥까지 가서도 저주한다." "크으으윽! 구천지옥에서도 널 저주하리라!" 백천강은 철창을 밟고 수옥 속을 내려다 보았다. "으음." 그의 입에서 절로 무거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수옥 내에 갇혀있는 자는 대략 삼백여 명 가량 되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혈도가 짚힌 채 썩은 물 속에 반쯤 담겨 있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간 갇혀 있어 그들은 전신이 해골같이 말라 있었고 쾡한 두 눈에는 광기만이 번들거릴 뿐이었다. 언뜻 보기에 도무지 인간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혈천마국의 국신들이라는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었다. 백천강은 그들을 향해 물었다. "안에 계신 분들은 혈천마국의 국신들이 아니오?" 수옥 안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어디선가 침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누구요?" 백천강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운리공주의 부탁으로 여러분들을 구하러 온 사람이오." "오오! 공주께서 살아계신단 말씀이오?" "저... 정말이오?" 수옥 안은 금방 희열에 찬 음성으로 술렁거렸다. 백천강은 이어 말했다. "공주도 여러분을 뵙기를 원하오. 그곳의 상황은 어떻소?" 그러자 한 음성이 떨려나왔다. "노부는 과거 원로원의 원주였던 사마후(司馬侯)요. 노부가 대답하겠소." "말해 보시오." "우리들은 혈도를 찍혀 있었으나 오랜 세월동안 대부분 스스로 혈도를 풀었소. 그리고 무공도 되찾았소. 그러나 여전히 나갈 수가 없소." "무엇 때문이오?" 백천강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사마후가 대답했다. "천년교룡피가 우리들의 수족을 묶고 있기 때문이오." 백천강은 밝게 말했다. "하하! 그런 것이라면 문제없소이다. 공주께 그 어떤 것도 자를 수 있는 자뢰비(紫雷匕)를 얻어왔소이다."


"그... 그게 정말이오?" "자, 받으시오." 백천강은 즉시 품 속에서 자뢰비를 꺼냈다. 그는 철창 속으로 자뢰비를 던졌다. 그것은 공야운리가 혈천마국의 지형을 기록한 책자와 함께 준 것이었다. 수옥 안에서 환성이 터졌다. "오오! 드디어 햇볕을 보게 되었다." "혈서생! 네 놈을 능지처참하겠다." 백천강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철창은 으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뜯겨져 나왔다. 휙... 휘휙....... 수옥으로부터 인영들이 솟구쳐 올라왔다. 잠시 후 그들은 모두 수옥을 탈출했다. 비록 해골같은 체구들이었지만 두 눈빛이 형형한 것으로 보아 절정고수들임이 분명했다. 그들은 새로이 얻게 된 자유가 새삼스러운 듯했다. 그들은 모두 흥분하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늙어보이는 괴인이 앞으로 나섰다. 괴인은 백천강을 향해 정중히 포권하며 물었다. "귀하는 누구요?" 백천강은 담담히 말했다. "소생은 극락서생이라고 하오." "극락서생?" 백천강은 진지하게 말했다. "여러분은 소생의 말을 들어야 하오. 지금은 혈천마국의 반도들과 싸울 때가 아니오." 그 말에 괴인들은 모두 두 눈을 부릅떴다. 그들에게 가장 절절한 것은 혈서생에 대한 복수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것이오!" 백천강은 그들을 둘러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것은 공주의 뜻이오. 여러분들은 이곳을 탈출하여 어딘가로 가야 하오. 그곳에 가면 공주를 만날 수 있을 것이오." 그때 원로원주 사마후가 물었다. "그곳이 어디요?" "불회곡(不廻谷)의 대동맹(大同盟)이오." 백천강은 그에게 불회곡의 위치를 자세히 알려 주었다. "여러분들은 지금 즉시 탈출하시오." 백천강의 말이 떨어지자 괴인들은 일제히 괴소를 터뜨렸다. "크핫핫핫! 드디어 햇볕을 보게 되었다!" "와아!" 괴인들은 함성을 지르며 밖을 향해 무섭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기세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백천강은 광풍같은 기세로 빠져 나가는 그들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훗훗! 저들이 나가면 천하대세는 달라질 것이다." 그는 괴소를 흘리며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아미타불......." 문득 아득한 지하수옥 속에서 한 가닥 불호소리가 들려왔다. ③ 백천강은 불호소리에 안색이 변했다. 지하수옥 속에서 아직도 빠져나가지 못한 자가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옥을 내려다 보며 물었다.


"누구요?" 그러자 예의 불호가 다시 들려왔다. "아미타불. 노납은 천무라 하오. 시주를 뵙고 싶소." 순간 백천강은 거대한 쇠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천... 천무라고?" 그의 음성은 떨려 나왔다. 그러자 수옥 속에서 의아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아미타불.... 시주는 노납을 아시오?" 순간 백천강의 몸이 수옥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수옥 아래 석벽에 한 명의 노승이 매달려 있었다. 만년한철의 철삭(鐵索)이 노승의 비파골(琵琶骨)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천무선사였다. 불혼애에서 사라졌던 천무대사가 바로 이곳에 묶여 있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백천강은 너무나 놀라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백천강을 바라보던 천무선사의 흰 눈썹이 푸르르 떨렸다. "너... 너는......." 천무는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단지 격동의 표정으로 백천강을 뚫어져라 응시할 뿐이었다. 백천강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날 알겠소?" 순간 천무의 동공이 흐려졌다. 그는 한동안 흔들리는 표정으로 백천강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떼었다. "아이야... 세상에 자신의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애비가... 있는 줄 아느냐?" 백천강의 뇌리에 천만 근의 뇌정(雷霆)이 떨어졌다. "애... 애비라고?" 백천강의 입에서 절규성이 터져나왔다. 어느새 그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다. 천무선사의 탄식이 들려왔다. "아... 비록 너에게 애비라 불릴 자격은 없지만... 인륜을 어찌 끊을 수가 있겠느냐?" "닥치시오!" 백천강은 분성을 터뜨렸다. 이어 그는 두 눈에 혈광을 흘리며 소리쳤다. "천무! 당신은 내게 원수일 뿐이오. 내게 애비란 존재하지 않소. 크흐흐... 어머니가 죽은 후... 내 가슴에 남아있는 것은 복수 뿐이오! 그런데도 당신이 나의 부친이라고?" 그의 절규하는 듯한 음성이 수옥 안을 울렸다. 그러자 천무선사의 얼굴에는 무한한 자책과 번민이 떠올랐다. 그는 장탄식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아이야. 모두가 노납의 잘못이다. 그러나... 네 어머니는 죽지 않았다. 너는 그것을 알고 있느냐?" "뭐... 뭐라고?" 백천강은 다시 한 번 충격을 느꼈다. "도...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그럴 리가.... 분명 내 손으로 화장시켰거늘." 천무선사는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모든 것은 갈천기의 음모였다. 노납의 말은 사실이다. 네 모친은 분명 살아계시다. 네가 본 그 여인은 가짜였다." "흐흐.... 그럴 리가? 거... 거짓말이다! 거짓말!" 백천강은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머리를 감쌌다. 천무선사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네 모친은 이곳에 있다. 그녀는 지금 마야부인(魔爺夫人)으로 불리우고 있다." "마... 마야부인이라고!"


백천강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뇌리에 용화별원의 정자에서 본 마야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노납은 그 일을 알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무서운 음모임을 알았다. 과거에는 어째서 네 모친이 낙양외성에서 색녀로 등장했는지 몰랐는데......." 천무선사의 음성은 비감했다. "아! 그것이 갈천기의 음모였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이미 그당시 궁우(宮羽)는 갈천기가 죽인 후였다. 결국 궁우의 행세를 하던 자는 갈천기였다. 그때 그는 이미 네 모친을 납치한 후였다. 그리고 가짜 요녀가 네 모친으로 변장해 색기로 천하를 어지럽혔던 것이다." "우욱!" 백천강은 시뻘건 선혈을 울컥 토해냈다. 너무나 격동한 나머지 피가 거꾸로 역류한 것이다. '그, 그럴 리가! 그렇다면 모든 것이 연극이었고 난 꼭두각시처럼 놀아났단 말인가?' 백천강은 비틀거렸다. 머리 속으로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궁가병기점의 궁노인이었다. 뒤이어 어머니인 백수련의 죽음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불타는 초옥과 초옥의 바닥에서 파낸 유물이....... 마지막으로 쌍봉도에서 얻게 된 대혈륜서(大血輪書)가 뇌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져갔다. 백천강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모든 것이 음모였단 말인가? 으으.... 어머니의 유서까지도?" 천무선사는 장탄식했다. "그렇다. 갈천기는 네게 증오심을 품어 세상을 저주하도록 함으로써 무림계에 살성(殺星) 하나를 키워냈던 것이다." "으으....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아미타불. 마야부인을 만나면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불행히도 노납이 이곳에 와서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함정에 빠진 뒤였다. 결국 그 자에게 사로잡혀 이곳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백천강은 뭐가 뭔지 분간할 수 없도록 신지가 어지러워졌다. 그야말로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충격이었다.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백천강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정녕 가공할 음모였다. 그가 지금까지 일으킨 피비린내나는 행로는 모두 갈천기의 음모의 손바닥 안에서 해맨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마침내 그는 치를 떨었다. "으으!" 백천강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그때였다. 문득 천무의 눈빛이 밝은 혜광을 발했다. "아이야." 그는 부드럽게 백천강을 불렀다. "......?" 백천강은 얼떨결에 고개를 들었다. "너는 마공을 버려야 한다. 네가 마공을 익혀 대마인이 된 것이 갈천기의 음모인 이상 이제라도 마공의 저주에서 벗어나야 한다." "......." 백천강의 안색이 수시로 변했다. 천무선사는 내심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이 아이의 마공은 너무 깊다. 그렇다면... 최후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어차피 노납은 이미 끝난 몸, 이 날을 위해 마련해온 대불령법신(大佛靈法身)을 이 아이에게 전해야 한다.' 대불령법신은 불문 최고의 신공이었다. 대불령법신을 이루면 해탈하여 성불하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소림의 달마선사 이래 아무도 이루지 못했다는 대불령법신을 천무는 익히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불도(佛道)일 뿐 무학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으으!" 문득 백천강은 신음을 흘렸다. 갑자기 천무선사의 눈 속으로 자신이 끌려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천무선사는 불호를 외었다. 그 불호는 강하게 백천강의 뇌리로 파고 들었다. "으으으!" 백천강은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천무의 눈빛을 피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는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백천강은 천무선사의 눈 속에서 염화시중의 미소를 띄우고 있는 부처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불혼애에 새겨진 석불의 모습과 똑같았다. "으윽!" 문득 백천강의 체내에서 무서운 마공지기가 일어났다. 그 때문에 그는 엄청난 고통에 휩싸였다. "아미타불! 마를 버려라! 아이야.... 너는 본래의 네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아미타불... 불법무한(佛法無限)......." 천무선사의 사자후는 백천강의 뇌리를 계속 파고 들었다. "으으으!" 마침내 백천강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어 그는 미친 듯이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콰르르르....... 그의 체내에서 마공지기와 불력(佛力)이 무섭게 뒤섞이기 시작했다. 한 가닥은 기환만겁윤회마공의 기운이었다. 다른 한 가닥은 천무선사가 혼신의 힘으로 전달한 대불령법신지기였다. "으아아아!" 백천강은 비명을 토해냈다. 그는 지옥에 떨어진 듯 억겁의 고통을 느꼈다. "아미타불! 부처님이시여.... 힘을......." 천무선사는 전신에서 비오듯 땀을 흘렸다. "으으으아악!" 백천강은 머리를 쥐어짜듯이 움켜쥐었다. 그는 마침내 혼절지경에 이르렀다. 그때였다. 스스스스....... 천무의 몸이 무한한 불광(佛光)에 휩싸였다. 순간 그의 사자후가 천 개의 종소리로 울렸다. "으아악!" 백천강은 구슬픈 비명과 함께 마침내 혼절하고 말았다. 스스스스....... 그와 동시에 천무의 몸에서 불광이 급격히 소멸되어갔다. 때를 같이하여 그의 몸은 축 늘어졌다. 일대선승이자 천하제일인이었던 천무선사는 마침내 숨을 거둔 것이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대불령법신을 전개한 후 온몸의 기력이 다해 숨을 거둔 것이다. 한편 혼절하여 수옥의 물 위에 떠있던 백천강의 몸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신비로운 서기(瑞氣)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불광과 혼연일체가 되어 백천강의 몸을 눈부시게 감쌌다. 마침내 광명대현령기와 대불령법신의 광명정대한 기운이 융합한 것이다. 우우웅....... 백천강의 몸은 서광으로 감싸였다. 이어 백천강의 몸이 물 위에서 떠올랐다. 그의 신형은 정확히 물 위로부터 석 자 위에서 멈추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현듯 감겼던 백천강의 눈이 번쩍 떠졌다. 백천강의 눈에서는 지극히 맑은 신광이 뻗어나왔다. 그 눈빛에는 지금까지의 음사한 기운은 조금도 찾아 볼 길이 없었다. 백천강은 서서히 몸을 세웠다. 그의 발은 물 위에서 한 치 가량 떠있었다. 문득 백천강의 눈에 천무의


시신이 들어왔다. "......!" 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복받쳐오르는 슬픔 때문이었다. 그의 입에서 절규와도 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아... 버... 님......!" 그러나 천무의 시신은 이미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아버님!" 백천강은 울부짖듯 외치며 천무선사를 끌어 안았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오로지 그의 처절한 절규만이 수옥 안을 메아리쳐 울릴 뿐이었다. ④ 마야부인은 멍하니 혈지를 내려보고 있었다. 혈지는 마치 피가 고여있는 것처럼 붉었다. 혈지 속에 떠 있던 달도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문득 마야부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의 눈에 맺혔던 눈물이 고운 뺨을 타고 흐르다가 혈지 속으로 떨어졌다. 잠시 후 그녀의 눈에 또 하나의 눈물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두 번째의 눈물방울을 떨어 뜨리며 중얼거렸다. "아! 천강.... 그 아이는 살아 있을까?" 그때였다. 그녀의 등뒤에서 격동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 살아 있습니다. 어머님!" "......!" 마야부인은 몸을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현기증을 일으킨 듯이 난간을 붙잡은 채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 분명 그 아이의 음성이었어. 아니야.... 그 아이가 여기까지 찾아올 리가 없지......." 마야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눈에 맺혔던 눈물이 또다시 뚝 떨어졌다. 백천강은 격동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 어머니! 소자 천강이옵니다!" 그는 다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자... 잘못 들었겠지... 화... 환청일까?" 마야부인은 더욱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백천강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소자의 음성을 정녕 잊으셨단 말입니까?" 마야부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그때서야 환청같은 목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를 깨달은 것이었다. "서... 설마!" 마야부인은 경악성을 토해내며 급히 몸을 돌렸다. 다음 순간 그녀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꿈에도 그리던 아들의 모습이 그곳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었다. "오오! 신이여.... 결국... 보내주셨군요!" 마야부인은 와들와들 몸을 떨었다. 분명 귀신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한 번도 아들 백천강의 모습을 잊은 적이 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아들은 늠름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특유의 직감으로 그녀는 아들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얘... 얘야.... 네... 네가 바로......."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말보다 먼저 그녀의 손이 뻗어나갔다.


"어머니!" 백천강은 벌떡 일어났다. "아... 아이야!"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뜨겁게 서로를 끌어 안았다. 더이상 말이 필요없었다. 그 순간에는 말이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두 사람의 가슴 속에 깃들어 있던 증오나 저주심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오로지 기쁨과 환희뿐이었다. 두 모자의 가슴은 터져 나갈 듯 했다. 정녕 말로서는 나타낼 수 없는 감정이었다. 49 장 무자서(無字書)의 비밀(秘密) ① 무자서(無字書). 그것은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은 책자였다. 그것은 백천강이 과거 쌍봉도의 지하서고에서 우연히 얻어 간직했던 책이었다. "......." 백천강은 탁자에 피묻은 무자서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대파산(大巴山) 부근의 한 객점이었다. 마침내 백천강은 혈천마국에서 무사히 탈출한 것이다. 물론 그의 모친인 백수련과 함께였다. 혈천마국의 충신들도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다. 그것은 혈제 갈천기가 폐관 중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백천강은 모친인 백수련을 극락십령과 함께 대동맹으로 가게 했다. 물론 극락십령도 무사했다. 그들은 염혼강시들을 물리치고 탈출한 것이다. 백천강은 이제 혼자 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오랜 세월 그는 세상에 대해 증오와 저주를 품고 살아왔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그가 가는 곳에는 늘 살생과 피가 뒤따랐다. 백천강은 과거를 생각하면 할수록 무거워지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 차라리 모든 것이 꿈이었다면 얼머나 좋을까?" 그는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러다가 그는 눈을 반짝였다. 그의 눈 앞에 예의 무자서가 있었다. 백천강은 그것을 벌써 수십 번이나 펼쳐 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런 글도 씌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글이 있었다. 무자서에 보이지 않던 글이 나타난 것은 피 때문이었다. 바로 그가 혈륜궁대전 때 갈천기에 패했을 때였다. 그의 피가 품 속에 간직하고 있던 무자서를 흠뻑 적셨던 것이다. 바로 그때 무자서에 글씨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백천강은 무자서에 나타난 글귀를 읽어보고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무자서에 적힌 내용은 엉뚱하게도 경문(經文)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자서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병자불상지기(兵者不詳之器) 비군자지기(非君子之器) 불득기이용지(不得己而用之) 념담위상(恬淡爲上) 승이불미(勝而不美) 이미지자(而美之者) 시락살인(是樂殺人) 부락살인자(夫樂殺人者) 즉불가득지어천하의(則不可得志於天下矣) 백천강은 갈천기에게 패한 직후 글자가 드러난 처음 무자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그러나 그는 그 뜻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깊은 마성에 빠져 있던 그에게는 그런 경문이 파고 들 여지가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갈천기를 이길 수 있는 가공할 마공이었다. 그런데 무자서에 쓰여진 글귀는 어처구니없게도 무력을 비하하는 글귀였다.


백천강은 처음에 그 무자서를 버리려 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무슨 까닭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무자서가 그의 마음을 묘하게 잡아끌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백천강은 혈천마국을 탈출한 후 다시 그것을 펼쳐 본 것이다. "......." 그는 계속 무자경서를 읽어나갔다. 그때였다. 백천강의 얼굴이 서서히 기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것은 바로!" 그는 놀라운 탄성을 터뜨렸다. 그것은 그가 무자경서의 또 다른 장을 읽어나갔을 때였다. 무자서상의 경문은 언뜻 보기에 평범한 도경(道經)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경문은 뜻밖에도 심오하기 그지없는 심법구결(心法口訣)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익힐 경우 어떠한 사마지기(邪魔之氣)도 물리칠 수 있는 반석같은 심력(心力)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었다. "오! 이럴 수가!" 백천강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실상 그는 본성으로 돌아온 후 괴로음과 번뇌로 인해 늘상 마음이 불안하고 자신감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그럴 즈음에 백천강은 무자서의 청명부동심공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천우신조였다. 백천강은 즉시 구결을 읽으며 청명부동심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어느덧 열흘이 지나갔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백천강은 많은 내심의 변모를 겪었다. 청명부동심공은 그에게 큰 수확을 주었다. 불안하던 마음이 차분히 안정되었다. 그러자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자. 나의 죄악에 대한 심판까지도.... 내가 장차 할 일은 뿌린 씨를 거두는 일이다. 그것은 혈천마국을 무너뜨려 강호의 평화를 되찾는 것이다. 그 후 정도의 심판을 받으리라.' 백천강은 마음을 잡았다. 다시 닷새가 지나갔다. 그동안 백천강은 청명부동심공을 완전히 체득했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마음의 안정이 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이것이 정종심법(正宗心法)과 편격마공의 차이인가? 이전에는 한 번도 이런 편안한 기분을 느껴보지 못했다.' 백천강은 다시 생각했다. '이제 남은 것은 모든 힘을 기울여 무림에서 갈천기가 세운 악을 몰아내는 것이다.' 이때였다. 백천강의 눈에 무자경서의 맨 뒷장이 들어왔다. 뒷장 마지막 구절이 유난히 그의 눈길을 끌었다. 구절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파사현정(破邪顯正) 청명부동(淸明不動). 혈해등룡(血海騰龍) 금궁지공(禁宮之功). 백천강의 눈이 번쩍 빛났다. '혈해란 곧 천하혈세를 말함이 아닌가? 등룡이란 혈세천하를 건진다는 뜻.... 그것은 금궁의 무공에 있다?' 백천강은 여기까지 깨달았다. 다음 순간 백천강은 문득 전신의 피가 세차게 흐르는 듯한 흥분을 맛보았다. 그는 급히 다음 구절을 읽었다. 천하무학만상귀원(天下武學萬像歸元), 소림지공영세불멸(少林之功永世不滅), 소림근본조사지동(少林根本祖師之洞)....... '천하 만 가지 무학의 흐름은 곧 하나(元)로 모이니 그것이 곧 소림의 무학으로 영원불멸이다. 그 소림무학의 근본은 역시 조사동에서 파생한다....... 이게 무슨 뜻인가?'


백천강은 뜻을 새기며 의혹을 금치 못했다. 이때였다. 마지막 구절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부동심자파금궁(不動心者破禁宮). 문득 백천강은 머리 속이 환해짐을 느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자 금궁(禁宮)을 연다. 금궁! 그렇다면!' 어느새 백천강의 가슴은 마구 격동하기 시작했다. 금궁은 바로 금궁지부(禁宮之府)를 일컫는 말이었다. 오래 전에 정도 무림에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던 금궁지부가 바로 금궁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환궁의 마공에 대항하기 위해 정도인들이 세웠다는 신비지궁을 일컫는 말이었다. 백천강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그... 그렇다면 이 무자서는 바로 금궁지부를 일러주는 책이란 말인가?' 백천강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었다. 무자서의 마지막 장에 씌어져 있는 일련의 구절들은 너무나 심상찮은 것이었다. 백천강의 눈이 빛났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 바로... 소림, 소림이다." 불현듯 백천강은 그렇게 외쳤다. 이어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금궁지부는 바로 소림의 조사동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의 음성은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그것은 하늘의 안배랄 수밖에 없었다. '금궁지부가 소림에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이다. 천하무학의 근본이 소림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다니!' 백천강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갈천기와 대적하려면 필히 승산이 있어야 한다. 이미 내 마공은 아버님의 대불력(大佛力)으로 인해 소멸되었다. 지금 상태로는 갈천기의 마공을 당해낼 수 없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백천강은 마공이 완전히 씻어진 상태였다. 천무선사의 대불령법신지기가 그의 체내에 있는 마공지기를 몰아낸 것이었다. 지금 그의 몸 속에는 세 가지 광명정대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대광명현령기(大光明玄靈氣), 대불령법신(大佛靈法身), 청명부동심공(淸明不動心功), 바로 그 세 가지 기운이었다. 그 세 기운은 그야말로 현묘무궁한 기운이었다. 그것은 정도인, 특히 불(佛), 도(道)의 인물이라면 꿈에도 얻고자 하는 현공지기였다. 그 세 가지 기운이 모두 백천강의 체내에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세 가지 기운은 아직 융합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그 기운을 무학으로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뒤따랐다. '이런 상태에서 갈천기를 꺾으려면 새로운 절학히 필요하다. 이제 그 길이 열린 것이다.' 백천강의 눈이 빛났다. '금궁지부. 전설의 금궁지부를 열어 금궁무학을 익힌다면 필히 갈천기를 꺾을 수 있을 것이다.' 백천강의 눈에는 결심이 어렸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② 소림사(少林寺). 정도 무림인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이런 말을 즐겨 사용했다. '소림은 영원하다'고. 그러나 당금에 이르러 그 말은 무색해지고 말았다. 그것은 소림조차도 혈의교의 마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숭산의 소림사는 이제 더이상 불문의 성역이 아니였다. 이제 숭산은 천하제일의 마역이 되었다. 그것은 태실봉이 바로 혈의교의 총단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었다. 태실봉은 천하마도들의 본거지로


화했다. 따라서 태실봉과 마주보고 있는 소실봉의 소림사는 혈의교의 방책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휘이잉....... 메마른 바람이 불혼애를 스치고 지나갔다. 석불(石佛) 하나가 잔뜩 이끼가 낀 채 천하를 굽어보고 있었다. 석불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석불의 입에는 뜻밖에도 자애로운 미소가 없었다. 석불은 염화시중의 미소를 잃은 채 묵묵히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마치 고해의 세상을 견디며 사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는 듯이. 휘이잉....... 또다시 바람이 휘몰아쳐왔다. 불혼애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세인의 혼을 일깨우던 징과 쇠망치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은지 오래였다. 단지 메마른 바람만이 침묵의 영토를 휘돌다 떠나갈 뿐이었다. 스슥....... 문득 불혼애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인영은 백의미서생이었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 그는 미완성의 석불을 올려다 보았다. 거대한 마애불은 슬픈 얼굴로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백천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문득 그의 머리 속에 마애불을 깎고 있는 한 명의 노승이 떠올랐다. 땅... 땅... 땅....... 하염없이 석벽을 쪼고 있는 노승의 환영은 바로 천무대선사였다. 그러나 하나 지금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평생의 숙원이던 마애불을 채 완성시키지도 못한 채 그는 한많은 세상을 등지고 적멸보궁에 귀의한 것이었다. "아버님." 백천강은 눈을 떴다. 문득 그의 눈꼬리에 이슬이 맺혔다. 그는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녹이 잔뜩 슬은 정과 망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백천강은 눈물 그렁한 눈으로 그것을 내려 보았다. 잠시 후 그는 중얼거렸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아버님의 뜻을 이어 마애불을 완성시키겠습니다." 백천강의 눈꼬리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이어 그는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낮게 중얼거렸다. "마애불의 불소(佛笑)가 천하를 굽어보는 날 아버님의 한이 풀리리라." 다음 순간 백천강의 모습은 사라졌다. 혜진(慧眞). 그는 혜자(慧字) 항렬의 승려였다. 혜진의 책무는 소림의 지객당(知客堂)을 맡아 운영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는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있었다. 그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헛허허...! 이거 원, 이렇게나 많이 주시다니......." 혜진의 손바닥에는 금갑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금갑은 뚜껑이 열린 상태였다. 금갑 속에서는 찬란한 보광이 눈부시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혜진 앞에 서 있는 인영은 바로 백천강이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대사, 그것은 성의일 뿐입니다. 소생은 불학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조사동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소림의 불법을 연구하려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입니다." "아미타불, 허허.... 조사동이 비록 금지(禁地)이기는 하지만 시주의 갸륵한 뜻이고 보면 빈승이 어찌 거절하겠소이까? 따라 오시오." 혜진은 급히 금갑을 소매 속에 감추었다. 그의 입가에는 만족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백천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쉽게 조사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소림이 이토록 썩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더군다나 혜자 항렬의 고승이 황금에 눈이 멀어 조사동을 함부로 열어주다니.' "따라오시오. 시주, 부처님께서도 시주같은 분이면 환영할 것이오." 혜진은 서둘러 일어섰다. 백천강은 황급히 포권했다. "대사의 호의에 감사하옵니다." 이어 ���는 혜진의 뒤를 따랐다. 혜진은 소림 경내로 앞장서 들어갔다. 백천강은 경내로 깊숙이 들어가며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소림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단지 승려들의 수가 많이 줄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러나 이따금 스치는 승려들의 눈빛은 출가인답지 않게 속하기만 했다. 더구나 그들 중에는 유난히 눈빛이 흉흉한 인물들이 많았다. 그 광경에 백천강은 내심 개탄을 금치 못했다. '아! 소림은 옛날의 소림이 아니구나. 부처의 탈을 쓴 악인들이 점거하고 말았구나.' 그는 탄식을 금치 못하며 혜진을 따라갔다. 조사동(祖師洞). 소림제일의 금지인 조사동은 자죽림(紫竹林) 한가운데 있었다. 자죽림 속에는 절벽이 있었는데 그곳에 하나의 석굴이 뚫려 있었다. 그 석굴이 바로 소림의 상대 장문인들의 유골이 잠들어 있는 조사동이었다. 혜진은 자죽림 앞에 이르자 백천강을 돌아보며 말했다. "허허! 이제부터 빈승의 발자국을 밟으며 따라오시오. 한 걸음이라도 잘못 밟으면 안 되오." 백천강은 짐짓 두려움의 표정을 지었다. "허허헛! 조사동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이 죽림은 보통 죽림이 아니오. 시주는 모르겠지만 바로 제갈무후의 팔진도(八陣圖)와 같은 기문진법(奇門陣法)이 설치되어 있소이다." "아." 백천강은 놀랍다는 듯이 탄성을 발했다. 혜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따라 오시오, 시주." 그는 앞장서 죽림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죽림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갑자기 풍경이 일변했다. 죽림은 어디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대신 천험절애의 심산유곡이 발 아래 펼쳐졌다. "아니... 이럴 수가?" 백천강이 짐짓 크게 놀라는 척 했다. "허허. 놀라지 마시오." 혜진의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백천강은 그가 옷자락을 끄는 것을 느꼈다. 백천강은 짐짓 그에게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전진했을까? 불현듯 앞이 확 트였다. 어느새 그들은 죽림을 벗어나 있었다. "휴우!" 백천강은 놀랍다는 듯이 이마에 밴 땀을 씻으며 혀를 내둘렀다. 혜진은 의기당당하여 말했다.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오, 시주가 원한다면 소림의 무궁한 절기들을 가르쳐 드리겠소." 백천강은 반색을 했다. "저... 정말 입니까?" "물론이오." 혜진은 탐심을 드러냈다.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럼 조사동을 구경하고 난 뒤 대사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혜진의 입이 다시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허허.... 시주는 영리한 사람이오."


이어 그는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그들은 절벽 아래에 당도했다. 그곳에는 하나의 석동이 있었는데 석동 앞에는 등이 굽은 노승 하나가 비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노승을 향해 다가갔다. "지객당주께서 웬일로.... 쿨룩!" 말이 중이었다. 그는 정식으로 법문에 들지 않은 듯 잡초같은 백발이 성성하게 자란 일개 노인에 불과했다. 노인은 굽은 허리를 더욱 굽히며 그들을 맞았다. 혜진은 거만하게 말했다. "백로(白老). 이 분 시주께 조사동을 구경시켜 드리러 왔네." "조... 조사동을요? 쿨룩.... 어찌 외인에게?" 백로라 불린 노인은 놀란 듯 희멀건 눈을 떴다. 노인의 얼굴은 온통 주름살 투성이었다. 그야말로 만고풍파를 겪은 형상이 역력했다. 혜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분은 귀하신 분이네. 시키는 대로 하면 되네!" "하... 하지만.... 콜록! 장문인의 윤허가 있어야......." 백로는 연신 기침을 했다. 혜진은 짜증을 냈다. "백로가 뭘 안다고 따지는 거냐?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자꾸 잔소리하면 내쫓겠다!" "콜록.... 콜록! 무... 무슨 말씀을.... 이 늙은이가 이곳을 비질하며 산 지 이십 년.... 한데 내쫓으면 어디로 가란 말이오?" 백로는 구슬프게 말했다. "그러게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다. 얼마남지 않은 생을 쓸데없는 참견으로 단축시키지 말고!" 혜진의 말은 불승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한편 백천강은 백로라는 늙은이에게 갑자기 강한 흥미가 생겼다. '이십 년 간 조사동을 청소했다고? 소림의 승려같지도 않은데?' 그는 주의깊게 백로를 관찰했다. 제일 먼저 드러나는 것은 구부정하게 굽은 허리였다. 그의 얼굴은 주름살 투성이었다. 그것은 풍상에 찌들 대로 찌들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마치 말라 비틀어진 고목을 연상케 하는 얼굴이었다. 그의 두 눈은 희뿌옇게 흐려 시력조차 온전치 못할 것 같았다. 격한 기침소리는 마치 내상(內傷)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다 생긴 병같았다. 백천강은 보면 볼수록 백로에게 기이한 점이 있음을 느꼈다. "허허! 시주, 백로를 따라 가시오. 백로는 이십 년 동안 조사동을 청소해 왔으니 그의 안내를 받으면 자세히 구경할 수 있을 것이오." 혜진이 그에게 말했다. 백천강은 급히 포권했다. "대사께서는 심려치 말고 돌아 가십시오. 소생은 이 분과 함께 천천히 구경하겠습니다." 그 말에 혜진은 백로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백로. 이 분을 잘 모시게. 만에 하나 불편하게 하면 자네도 소림에서 더이상 발붙일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게." "콜록... 콜록! 알겠습니다요." 혜진은 백천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천천히 구경하시오. 시주." "고맙습니다. 대사." 혜진은 백천강을 향해 아부의 미소를 흘렀다. 이어 그는 다시 죽림을 통해 밖으로 걸어갔다. 마침내 혜진의 뒷모습이 죽림 속으로 사라졌다. 백천강은 백로를 향해 포권하며 공손히 말했다. "노인장. 소생을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비로소 백로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백천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불현듯 백로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백천강은 그것을 즉시 눈치챘다. "왜 그러시오. 노인장?" 그는 놀라며 물었다. "아... 아니오... 콜록! 저... 젊은이가 누군가와 흡사해서......." 백천강은 흠칫했다. "내가 대체 누구와 닮았다는 말씀이시오?" "아... 아니오. 이 늙은이가 눈이 흐려져 잠깐 착각을 했나 보오" 백로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백천강의 눈이 번쩍 빛났다. '저 발걸음은?' 백천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분명히 보았다. 백로는 짚신을 신고 있었다. 바닥은 이슬로 인해 축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로의 짚신은 젖은 흔적이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록 순간적이긴 했다. 하지만 백천강은 그의 발걸음이 현묘하게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 것이다. 백천강의 가슴 한구석에서 한가닥 의혹이 솟았다. 그때였다. "콜록! 따라오시오. 공자." 백로가 앞장을 서며 말했다. 백천강은 곧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는 백로의 뒤를 따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노인의 정체는 심상치 않다. 필시 정체를 감춘 이인(異人)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슉! 백천강은 기척도 없이 백로의 등 뒤 명문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자기가 흘렀다. 그것은 바로 대마인수(大魔人手)였다. 대혈륜서에 적혀있는 가공할 무공이었다. "대마인수!" 문득 백로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그는 섬전처럼 몸을 움직였다. 경악한 것은 도리어 백천강이었다. "대마환광보(大魔幻光步)!" 백천강은 대경실색했다. 백로가 펼친 것은 바로 대마인절기편에 기재되어 있는 대마환광보였던 것이다. "......!"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응시했다. 그들의 눈에서는 똑같이 불꽃을 튕겼다. 찰나지간 백천강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대마절기(大魔絶技)를......?"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백로도 그와 똑같은 질문을 동시에 던졌기 때문이었다. 백천강은 가슴이 서늘해 왔다. '대혈륜서의 무공을 알다니.... 그렇다면?' 문득 그의 뇌리에 갈천기가 떠올랐다. 백로는 필히 갈천기와 관계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대혈륜서상의 무공을 익히고 있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때였다. 우드드둑! 하는 소리와 함께 돌연 백로가 허리를 폈다. 그러자 굽어졌던 그의 허리가 꼿꼿이 펴졌다. 동시에 그의 주름살 투성이 얼굴이 변했다. 뒤이어 나타난 얼굴은 청수하면서 날카로운 인상이 감도는 위엄있는 얼굴이었다. 백로의 흐리멍텅하던 두 눈에서는 무서운 빛이 폭사되어 나왔다. "너는 누구냐?" 백로가 싸늘하게 물었다. 백천강은 내공을 끌어올리며 반문했다. "노인장이야말로 누구요?" 백로의 눈빛에 살기가 흘렀다. "노부의 대마인절기를 알다니......."


백천강은 아연실색했다. "노... 노인장의 절기라고?" 그 말에 백로는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 대마인수와 대마환광보는 노부 백무웅(白武雄)의 독문무학이다." "배... 백무웅!" 백천강은 마치 철퇴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백무웅. 그는 바로 대마성의 성주인 만마지존 백무웅이었다. 백천강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무림사상 최대의 대살성이었던 만마지존 백무웅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넌 누구길래 노부의 절기를 아느냐?" 백무웅은 눈을 무섭게 번쩍이며 물었다. 백천강은 내심 부르짖고 있었다. '아아! 갈천기 하나만으로도 사해가 혈풍에 감싸이거늘. 이제 또다시 만마지존이 나타나다니!' 그는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소생은 백천강이라 하오. 대혈륜서에서 익혔소." "백천강? 네가 백씨란 말이냐? 그렇다면 대혈륜서는 어떻게 얻었느냐?" 백무웅은 급히 물었다. 백천강은 점차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마침내 그는 말했다. "당신은 갈천기를 알 것이오. 대혈륜서는 바로 그에게 얻은 것이오." "처... 천기와는 어떤 사이냐?" "그 자는 나의 원수요!" 백무웅은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문득 무엇을 생각했는지 안색이 변했다. "너는... 호... 혹시... 백수련을 아느냐?" 그 말에 백천강은 전신을 가볍게 떨었다. "그 분은... 소생의 모친이오." "뭐... 뭣? 그게 정말이냐?" "사실이오." "아! 어쩐지 처음 너를 볼 때 낯이 익는다 싶었다." 백무웅의 만면에 격동이 어렸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깃들었던 살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백무웅의 얼굴에는 인자한 빛이 가득 어렸다. "얘야. 그런데 네 성이 백씨라니 어떻게 된거냐? 네 부친은 대체 누구냐?" 갑자기 변한 백무웅의 태도에 백천강은 의문을 금치 못했다. 그는 대답대신 백무웅을 주시했다. "혹시, 천기거나... 궁우가 아니냐?" 그러나 그는 즉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그렇다면 네 성이 백씨일 리가 없지. 대체 네 부친이 누구냐?" 문득 백천강은 만마지존 백무웅에게 알 수 없는 기이한 정이 솟아남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생의 부친은... 천무선사이시오." "천무가 네 부친이라구? 그... 그럴 수가!" 백무웅은 대경실색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얘야! 어찌된 일인지 빨리 말해 보아라." 이번에는 백천강이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의혹을 지우지 못하고 되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오?"


백무웅은 노안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이야, 수련이 노부가 어떤 관계인지 아느냐?" "당신의 제자가 아니오?" "허허.... 제자라고? 그렇기도 하지. 그러나 그보다 더 가까운 사이다." "......?" 백무웅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허헛! 그 아이는 한 번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지만 그 아이는 노부의 딸아이다." "아!" 백천강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만마지존 백무웅이 바로 어머님의 부친이라니... 그렇다면!' 백무웅의 말이 이어졌다. "허허! 그럼 너와 나는 조손간이 되는구나." 백천강은 일시에 전신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만마지존이 내 외조부라니. 그렇다면 난 결국 살살성(煞殺星)의 핏줄을 이었단 말인가?' 백천강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무웅은 그것을 보고 장탄식했다. "아이야. 외조부가 살인마라서 실망한 모양이구나. 그렇다. 외조부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다." 백무웅의 얼굴에는 무한한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노부는 과거 대마성이 붕괴된 이후 복수를 다짐했다. 그래서 다시 정도무림을 무너뜨릴 궁리를 했지. 하지만 그 결과는......." 백무웅의 입에서 마침내 과거의 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③ 만마지존 백무웅, 그는 천하마도일통(天下魔道一統)을 이루었다. 그러나 천하정사일통의 야망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는 그 와중에서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마공으로는 백도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백도의 무공으로 백도를 궤멸시키리라!' 이렇게 생각한 그는 한 가지 계책을 세웠다. 그것은 바로 소림으로 잠입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중상을 입고 있었다. 따라서 백도의 추격을 피하기에는 소림으로 숨는 방법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병든 백로(白老)로 변장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소림사의 불목하니가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뜻을 이루었던 것이다. 백로는 소림사에 들어간 지 사 년만에 조사동을 청소하는 일을 맡게 되는데 성공했다. 백무웅이 굳이 그 일을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소림의 조사동에 필시 숨겨진 소림비학(少林秘學)이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소림 조사동의 청소하는 늙은이로 안전을 유지했다. 천하를 이잡듯이 뒤지던 백도고수들도 설마 그가 소림에 숨어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다. 그러나 조사동에 기거하던 백무웅은 차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소림비학을 찾기 위해 조사동 안을 이잡듯이 뒤졌다. 그 결과 그는 소림 전대신승들이 남긴 많은 경전들을 읽게 되었다. 그 속에는 과연 전해지지 않은 소림비학이 있었다. 그런데 그 비학을 익히는 동안 백무웅의 마성이 차츰 소멸되어간 것이다. 소림비학은 정종불문심법(正宗佛門心法)에 기초를 둔 것이다. 따라서 불문심법을 익히던 백무웅은 자연스럽게 마심이 소멸된 것이다. 그로부터 십 년 후, 백무웅은 완전히 마심을 씻었다. 그리고 잃었던 인성(人性)을 되찾게 되었다. 그후 그는 천하혈세를 포기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씻을 수 없는 업보를 보상하는 길은 조사동을 지키며 평생을 불도에 드는 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가짐���로 백무웅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그야말로 그 누구도 예측치 못했던 결과였다. "......!" 백천강은 백무웅의 얘기를 모두 들었다. 어느덧 백무웅의 얼굴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과거 고금제일의 대마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평범한 선인(善人)에 불과했다. 백천강은 몇 차례나 안색이 변했다. "이것이 노부의 과거다. 아이야. 내가 널 부를 면목은 없지만 이미 노부는 옛날의 백무웅이 아니란다. 알겠느냐?" 백천강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백무웅은 손을 내밀었다.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날 할아버지라고 불러줄 수 없겠느냐?" 마침내 백천강의 마음의 벽이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하... 할아버님!" 그는 쌓이고 쌓인 한을 토하듯이 부르짖으며 털썩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이야!" 백무웅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다가와 백천강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핏줄! 그 순간 끊을 수 없는 핏줄이 연결되었다. 비슷한 길을 걸었던 조손의 해후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으흐흑!" "아, 아이야!" 할아버지와 손자는 서로를 굳게 끌어 안았다. 50 장 나타난 금궁지부(禁宮之府) ① 석실은 아담했다. 두 사람이 석실 안에서 마주 서 있었다. 그들은 백천강과 백무웅이었다. 석실은 조사동의 일부분으로 그곳에서 만마지존 백무웅은 이십여 년 간을 기거하며 정도인들의 눈을 피해온 것이다. 석실의 한쪽에는 서가(書架)가 있었다. 서가는 몹시 낡았는데 고서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물론 대부분이 불경이었다. 백무웅은 서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노부가 지난 이십 년 동안 조사동에서 찾아낸 불공비급들이다." "......." 백천강은 눈을 빛냈다. 백무웅은 대견한 듯 백천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부는 저 불공들의 절반도 익히지 못했다. 혹시 저 안에 네가 찾는 금궁비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백천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금궁무학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갈천기를 꺾을 수 없습니다. 할아버님." 백무웅은 탄식했다. "천기는 본래부터 야망이 컸다. 하지만 그 아이가 천하를 장악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아! 그것이 이 할애비의 불찰이었다." 백무웅은 낮게 탄식했다. 백천강은 서가쪽으로 걸어갔다. 이어 그는 결단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소손은 불공들을 익히겠습니다." 백무웅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일은 모두 잊어 버려라. 노부가 모두 해결하겠다." 백천강은 돌아서며 물었다. "혜진이 돌아오면......?"


"걱정마라. 할애비가 알아서 대처하마." 백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불공에 전념하겠습니다. 하루라도 기일을 앞당기는 것만이 천하창생을 구하고 소손의 죄를 보상받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녀석. 대견하구나." 백무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백천강은 서가에서 낡은 불경 한 권을 꺼냈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는 불경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그 날 이후로 백천강은 말과 침식을 잊었다. 오직 손만이 이따금씩 책장을 넘기기 위해 움직일 뿐이었다. 많은 날들이 흘러갔다. 그러나 백천강은 일체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백천강의 얼굴은 수염으로 텁수룩해졌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그는 불공을 읽고 깨우치는 일에만 전념할 뿐이었다. 불공비급은 대부분 소림고승들이 남긴 것이었다. 거개가 소림칠십이종의 달마절예를 해설한 것이었다. 그 속에는 간간이 천축(天竺)의 불공도 있었다. 백천강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텁수룩하게 자라난 수염과 손보지 못한 머리카락으로 괴인처럼 변해갔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딴판이었다. 그의 눈빛은 시간이 흐를수록 맑아져만 갔다. 항마대법력(降魔大法力), 대불화인수(大佛化印手), 범천화엄공(梵天華嚴功), 범자대비신공(梵字大悲神功), 달마천화불영심(達磨天花佛影心), 불영금강존허신강(佛靈金剛尊虛身 )....... 백천강의 체내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불공이 축적되기 시작했다. 백무웅과 마찬가지로 그는 불력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미 그의 체내에는 천무선사가 전한 대불령법신이 있었다. 불이 마른 나무를 만나 크게 일어나듯이 그의 불력은 점차로 완성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모두... 익혔다." 백천강은 서가의 마지막 불경을 읽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그의 눈빛은 부처의 그것처럼 유현(幽玄)하기만 했다. 그러나 백천강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내가 찾는 금궁지공은 없구나." 불현듯 전신에 허탈감이 몰려왔다. 백천강은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때였다. 등뒤에서 백무웅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야, 아직도 못 얻었느냐?" 백천강은 한숨을 내쉬었다. "없습니다. 할아버님." 백무웅은 그에게 다가오며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망하지 말아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다." "......." 백천강은 초연한 표정을 지었다. 백무웅은 그런 백천강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기이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백천강은 그것을 느끼고 물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백무웅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네게 조사동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아직 한 곳만은 보여주지 않았다." 백천강은 흠칫하며 물었다. "어떤 곳입니까?" 백무웅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부가 그곳을 보여주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 "과거 노부는 우연히 그곳을 발견하여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 하마터면 주화입마할 뻔 했다." 백무웅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곳에 엄청난 마기가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쌓은 불력이 산산이 파괴되는 듯한 충격을 느껴 급히 빠져나오지 않았다면 필시 주화입마하거나 대마성(大魔性)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백천강은 그 말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벌떡 일어났다. "어디입니까?" 백무웅은 백천강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조심해야 한다. 일단 마기에 눌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 백천강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따라 오너라. 노부도 그곳이 금궁지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무웅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가 백천강을 데리고 간 곳은 다름아닌 납골전(納骨殿)이었다. 그곳은 역대 소림고승들의 유골을 안치한 곳이었다. "......." 백천강은 백무웅과 함께 납골전 안으로 들어갔다. 납솔전 안에는 거대한 향로에서 향이 끊이질 않고 타오르고 있었다. 제단 위에는 줄지어 세워진 위패(位覇)와 유골을 봉한 항아리가 늘어져 있었다. 실로 숙연한 분위기였다. "여기다." 백무웅은 납골의 끝으로 걸어갔다. 그곳의 벽에는 달마대사(達磨大師)의 화상이 걸려 있었다. "......." 백무웅은 화상 앞에 이르러 공손히 합장했다. 이어 화상을 걷어내는 것이었다. 화상이 들춰지자 가려져 있던 벽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돌출된 기관장치가 나타났다. "그곳으로 통하는 기관이다." 백무웅은 말과 함께 돌출된 부분을 눌렀다. 위잉... 그그 긍....... 하는 음향과 함께 벽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어 하나의 통로가 나타났다. 어두운 통로를 바라보며 백무웅은 염려스러운 듯 당부했다. "들어 가거라. 노부는 네 무운을 빌겠다. 성패는 오직 부처님의 뜻에 달렸다." 백무웅은 합장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는 만감이 어려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 된다면 유일한 혈육인 손자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백천강은 그를 향해 대례를 올렸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잠시 후 백천강은 통로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들어가자마자 석벽은 원래대로 닫혀 버렸다. "아미타불......." 백무웅은 불호를 외우며 바닥에 가부좌를 틀었다. 백무웅은 기다릴 심사였다. 백천강이 다시 나올 때까지 일체의 미동도 없이.


② 백천강은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통로는 비좁아 겨우 한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였으나 생각보다 길어 한참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그는 마침내 넓은 석전에 당도했다. 그곳은 방원 삼십여 장쯤 되는 넓은 대전이었다. 백천강은 망설이지 않고 석전으로 들어갔다. "으으!"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기(魔氣)였다. 이루 형언할 수 없이 강한 마기가 그를 엄습해온 것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한곳에 시선을 멈춘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내심 부르짖고 말았다. '이럴 수가!' 백천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방의 벽에 가득한 것은 벽화(壁畵)였다. 그런데 벽화의 내용은 실로 공포스럽기 짝이 없었다. 군마도(群魔圖)였다. 석벽에 새겨진 그림은 흉신악살(兇神惡殺)과 요마나찰귀(妖魔羅刹鬼)들이 대부분이었다. 군마도에는 그들이 저지르는 살인과 방화, 강간, 약탈 등등이 온통 그려져 있었다. 한 마디로 세상에 뿌려져 있는 온갖 악행이란 악행이 모두 표현되어 있었다. 그 악행의 종류만도 무려 팔만사천 가지에 달했다. "으으......." 백천강은 신음을 토해냈다. 벽화를 보는 순간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신음을 흘렸다. 악행도는 한쪽 벽에만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면의 벽을 비롯하여 천장, 심지어는 바닥까지도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 백천강의 눈은 무섭게 충혈되었다. 이제 그의 눈에는 흡살귀가 사람의 머리통을 밟고, 생간을 꺼내 씹는 그림이 들어왔다. 그 벽화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는 자신이 그 흡살귀인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그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온 것일까? 그것은 생각하면 할수록 끔찍스런 일이었다. 그의 입에서 졀규와도 같은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벽화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백천강의 죄업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옳았다. 어느새 그는 마구 귀두도를 휘둘러 양민을 학살하는 귀왕(鬼王)이 되어 있었다. 그런가하면 여인들을 강간하는 색귀(色鬼)로 화했다. 이제 그의 귓전에는 자신의 웃음소리가 무섭게 들려왔다. "크크크크...! 죽여라! 모두 도륙을 내라!" 이번에는 처절한 비명과 애원이 들려왔다. "아아악! 살려줘요! 제발... 제발!"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아아악!" "살려줘... 이 악마!" 백천강의 입과 코로 어느새 시뻘건 피가 흘러 내렸다. "으으윽... 그만... 그만!" 백천강은 데굴데굴 구르며 부르짖었다. 어느새 그의 체내에는 무서운 마공지기가 다시 끓어 오르고 있었다. 백천강은 손톱이 빠지는 것도 모르고 바닥을 긁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들아... 내 아들아......."


백천강의 뇌리를 때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백수련의 음성이었다. 백천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머니!" 그는 크게 부르짖었다. 그 순간 시뻘건 선혈을 또다시 울컥 토해냈다. '이... 이겨야 한다!' 백천강은 비장하게 부르짖었다. 그는 힘겹게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크크크! 일어나라... 일어나라... 피가 그립지 않느냐?" "으아악... 악마... 너는 악마다!" 백천강의 뇌리에 또다시 환청이 들려왔다. 순간 그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졌다. 다시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백천강은 이를 악물며 진기를 끌어올렸다. '청명부동심공(淸明不動心功)을 일으켜야 한다!' 그는 무자서에 기재되어 있는 청명부동심공의 구결을 떠올렸다. 마침내 그는 청명부동심공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환청과 환상이 거짓말처럼 소멸되어갔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천강은 마침내 완전한 평화로움을 되찾았다. 그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 고요하면서도 심원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바로 깨달은 자의 눈빛이었다. "아! 참으로 무서운 환상이었다." 백천강은 탄식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사방의 벽화를 둘러보았다. 이제 벽화는 그저 벽화일 뿐이었다. 백천강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한쪽 석벽에 가 멎었다. 그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 그곳에 새겨진 것은 부처의 상이었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머금은 부처가 연화대(蓮花臺)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백천강은 불화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부처의 자비로움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벽화를 향해 절을 올렸다. 바로 그때였다. 기이이... 잉....... 희미한 기관음과 함께 돌연 불화가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백천강은 눈을 크게 떴다. 갈라진 불화 속에 또 하나의 석벽이 나타났다. <금궁지부(禁宮之府)> 석벽의 상판에 그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드디어 찾았구나!" 백천강은 희열을 금치 못했다. 마침내 그는 전설의 금궁지부를 찾아내고야 만 것이었다. 그는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석벽을 향해 다가갔다. 그르르릉....... 석벽은 그가 다가가자 저절로 굉음을 내며 열렸다. 때를 같이하여 석벽 안으로부터 눈부신 광휘(光輝)가 쏟아져 나왔다. "......!" 백천강의 몸은 황홀한 광휘에 감싸였다. 그는 넋을 잃고 자신도 모르게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만마지존 백무웅은 초조감으로 인해 피골이 상접했다. 어느덧 백천강이 금궁지부를 찾아 떠난 지 열흘이 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백천강은 종무소식이었다. 백무웅의 입술은 바짝 말라 부르튼 지 오래였다. 그는 갈라진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결국... 주화입마했단 말인가?"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깃들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노부... 다시 마성에 빠지는 한이 있어도 그 아이만큼은 필히 구하리라!" 그는 석벽의 돌출된 부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르르릉! 그의 손이 닿기도 전이었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석벽이 좌우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 백무웅은 그 자리에서 멍청히 굳어버렸다. 그의 눈에 한 인영이 어리고 있었다. 그 인영은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부처의 미소였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백천강의 몸은 은은한 불광(佛光)에 감싸여 있었다. "오오! 성공했느냐?" 백무웅은 벅찬 희열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할아버지, 금궁지학(禁宮之學)을 얻었습니다." "오! 부처님이시여!" 백무웅은 벅차오르는 희열을 이기지 못해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때였다. 백무웅은 부드러운 기운이 자신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이어 그는 그 기운에 의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바로 그 순간 백천강이 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모두가 할아버님의 정성 덕분이옵니다." "처.. 천강아!" 백무웅은 와락 백천강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그의 노안에서 넘치듯이 흘러내렸다. "됐다! 이제 되었다. 우리의 업보를 풀 수 있으리라!" 백무웅은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③ 무림에 일대풍운이 일었다. 천하무림을 암흑시대로 일통(一統)한 혈의교의 만행은 극을 치달았다. 정녕 혈의교의 만행은 하늘조차 분노할 지경이었다. 한때 혈의교가 주춤하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불과 반 년 전의 일이었다. 극락서생이 혈의교 지부 이십여 곳을 사풍으로 궤멸시켰을 때 무림인들은 한 가닥 서광을 보는 듯했다. 더구나 그 때는 대동맹의 존재가 나날이 의혼(義魂)을 부르짖으며 커가던 때이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극락서생이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대동맹에 대한 소원도 연기처럼 흐려지고 말았다. 대동맹에 관한 이야기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되자 잠시 주춤했던 혈의교의 만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은 잠시 주춤거렸던 것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려는 듯 무섭게 무림을 유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또다시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그것은 황제가 기거하는 자금성(紫金城)으로부터 전해진 소식이었다. 무림왕(武林王) 책봉!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황제가 혈의교 교주에게 무림왕을 책봉한다는 소문이 흘러나온 것이다. 그것은 바로 팔십일만금군통령이자 대원수인 사광천의 상소로 인한 것이었다. 그의 상소로 인해 혈의교주를 무림왕으로 책봉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결과는 자명했다. 이제부터는 명실공히 혈의교가 무림을 다스리는 것을 황명(皇命)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의 천하가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파 무림인들은 그 소문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들은 그 소문이 한낱 풍문이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뜬 소문이 아니었다. 어느날 아침 강호 전역에 아래와 같은 포고문이 나붙었기 때문이다. - 혈의교를 무림성(武林城)으로 개명하노라. 오는 중양절(重陽節) 본성에서 무림왕 책봉식을 성대히 거행하노라. 천하무림동도들은 필히 본성의 무림왕 책봉식에 참가하기 바란다. 결국 무림왕 책봉은 사실이었다. 뜻있는 정도 무림인들은 모두 자금성을 향해 부르짖었다. ...... 황제시여! 어찌하여 엄청난 잘못을 범하려 하시오? 대마왕(大魔王)을 무림왕으로 책봉하시다니! 천륜이 두렵지도 않단 말이오? 의분을 참지 못한 무림인들 가운데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구중궁궐인 자금성에 그들의 분노에 찬 울부짖음이 들릴 리는 만무했다. 대동맹이 정도의 칼날을 갈며 의혼을 불태우던 불회곡은 실로 오랜만에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에 뒤덮였다. "와아! 맹주께서 돌아 오셨다!" "대동의혼(大同義魂)이여!" 거대한 함성이 연이어 터져오르는 곳은 의혼전(義魂殿) 앞이었다. 거대한 대전 앞에는 군웅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대동맹의 절정고수들을 비롯하여 그동안 새로이 가입한 지사들이었다. 의혼전 중앙의 태사의에는 한 인영이 앉아 있었다. 인영은 극락서생의 차림을 한 백천강이었다. 그의 뒤에는 극락십령이 나란히 서 있었다. "......." 군웅들은 모두 극락서생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그는 군웅들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여러분, 드디어 때는 왔소이다." 그의 음성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수만 군웅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군웅들은 극락서생이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극락서생은 심현한 눈빛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중양절 무림왕 책봉식에 그들은 천하무림동도들에게 성문을 활짝 연다고 선포했소이다." "......!" "그것은 그 날을 기하여 혈의교 천하를 선포하고 무림을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뜻이기도 하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중양절은 무림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날이 될 것이오. 본인은 그날 혈의교와 일전을 결행하려 하오." 군웅들의 안색은 일시에 변했다. 그들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그때였다. 앞자리에 서 있던 신주제일룡 사유성이 입을 열었다. "옳으신 말씀이오! 무림왕 책봉은 기필코 막아야 될 것이오!" "옳소!" "피로써 막아야 하오!" 군웅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극락서생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무림의 안녕을 위해, 정도지혼을 되찾기 위해 본맹은 그날 의혈을 뿌려야 할 것이오. 마지막 한 사람의 의인이 남을 때까지 우리는 싸워야 하오." 극락서생의 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대동맹의 의혈인들은 일제히 함성을 발했다. "대동의혼!" "최후까지 의혼을 바치겠소!"


군웅들은 모두 일제히 함성을 부르짖었다. 백천강은 군웅둘을 바라보며 감동을 금치 못했다. '아아! 이들의 대협혼(大俠魂)이 있는 한... 마도는 영원히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때였다. 백천강은 문득 가슴 한구석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과거 나의 길은 그 얼마나 추악했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 고통을 감추어야 할 때였다. 군웅들의 흥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극락서생은 또다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절대로 타초경사해서는 아니되오. 중양절까지 본맹은 그들에게 경각심을 주어서는 안될 것이오." 군웅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은밀히 강호로 나가야 하오. 모두 각자 도검(刀劍)을 감추고 무림성으로 들어가야 하오." 극락서생의 차분한 음성은 계속되었다. "여러분들은 무림성에 하객으로 참가하는 것이오. 이후 일제히 봉기하여 단번에 그들의 기를 꺾어야만 하오. 그래야 승산이 있소." 군웅들의 얼굴에는 탄복의 빛이 어렸다. "이미 여러분을 각 대(隊)로 나누었소이다. 각자 대에 따라 중양절까지 무림성에 당도해주시기 바라오." 극락서생은 계속해서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군웅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대동맹주가 그토록 완벽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놓았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총공격의 시기는 바로 황궁의 특사가 황제의 칙서를 읽는 순간이 될 것이오." "......!" 군웅들의 두 눈에서는 신광이 활활 타올랐다. 꺼지지 않는 열혈의 투혼이 그들의 가슴 속을 들끓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일부터 각 대는 출발하시오!" 극락서생의 호기에 찬 음성이 장내를 메아리쳤다. "와아!" 불회곡을 뒤흔드는 뜨거운 함성은 끊이질 않았다. 의혈인들은 이튿날 아침부터 불회곡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비장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몰랐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그동안 무공을 고련(苦練)하며 피땀을 쏟았던 불회곡을 아쉬운 듯이 돌아보며 발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중인들은 불회곡을 하나 둘 떠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회곡은 차츰 비어 갔다. ④ "......." 극락서생은 의혼전의 태사의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잔뜩 어려 있었다. 그는 갈등에 빠져 있었다. '천강아! 너는 끝까지 가면을 쓰고 있을 것이냐? 대동맹의 지사들 앞에서 끝까지 위선의 탈을 쓰고 있을 테냐?' 다음 순간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다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언뜻 그의 눈 속에 하늘이 들어왔다. 만추(晩秋)의 하늘은 높고도 푸르렀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중양절이 가까워 오는군.'


휙휙....... 문득 의혼전에 수십 명의 인영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최후까지 남아있던 대동맹의 정예고수들이었다. 신주제일룡 사유성을 위시하여 무림구공자, 그리고 구파일방의 지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제마천문의 문주인 설화영과 석대세가의 석몽화, 낙양세가의 여화연, 무림일비 사운봉 등 네 여인들과 무림삼옹 중 만겁옹과 장천화웅들이었다. 그들은 극락서생 앞에 앞에 내려섰다. 그들은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극락서생은 어두운 안색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 중인들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 극락서생은 단 한 번도 어두운 안색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현듯 사유성이 물었다. "맹주, 이제 떠나는 것이오?" 극락서생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께서 하실 일이 있소이다." "......?" 극락서생은 그들을 둘러보며 무섭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사풍객(死風客)을 기억하실 것이오." "......!" 중인들의 안색은 크게 변했다. 그들은 극락서생이 무엇 때문에 사풍객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극락서생의 말은 이어졌다. "사풍객은 혈륜왕(血輪王)과 동일인물이기도 하오." 극락서생을 주시하고 있던 사유성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것은 이미 알려진 바가 아니오? 맹주?" 극락서생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소이까?" "......!" 중인들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제일 먼저 반응을 나타낸 것은 무림구공자였다. "그... 그 자가 살아 있다면 우리들이 제일 먼저 그 자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겠소!" "옳소! 그 자는 우리 구대세가의 철천지원수이오!" "하지만 놈은 죽지 않았소?" 극락서생은 한숨을 쉬었다. 이어 그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한 불행한 자의 얘기를 들어 보시겠소이까?" "......?" 중인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웬지 그들의 가슴은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지고 있었다. 극락서생은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한 소년이 있었소이다. 그의 이름은 백천강(白天 )이라고 했소." 군웅들은 모두 흠칫했다. 백천강. 군웅들은 그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풍객의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극락서생은 말을 이었다. "그는 낙양의 한 병기점에서 철이 들 때부터 검을 만들며 살아왔소이다. 그러던 어느날이었소." 극락서생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한 소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파검소년 백천강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극락서생 자신이 걸어온 이야기이기도 했다. ....... 마침내 극락서생의 긴 이야기가 끝을 맺었다.


"그게 정말이오? 대마왕인 그에게 그토록 비참한 과거가 있었단 말이오?" "그... 그럴 수가!" 중인들은 모두 경악성을 토해냈다. 극락서생은 중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것이 소생이 아는 대혈마 백천강의 과거라오." "......!" 중인들은 모두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극락서생의 의중을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극락서생이 침중하게 말했다. "그는 지금 살아 있소이다. 여러분들은 그를 어찌 하시겠소이까?" 중인들은 곧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엄밀히 말을 하자면 그는 무림을 대혈풍 속에 몰아넣은 저주스러운 자였다. 그러나 그의 과거가 그토록 불행하다는 것에 이르러서는 동정심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사유성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맹주, 그렇다면 그는 지금 완전히 정도로 돌아왔단 말이오?" 극락서생은 탄식했다. "그렇소이다.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 나날을 고통 속에 지내고 있소이다." 그 순간 무림구공자가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었다. "흥! 그럴 리가 없소이다. 그 놈이 죽지 않았다면 필시 다시 무림을 피바다로 만들려 광분할 것이오!" "그렇소! 설사 그가 정도로 돌아왔다해도 우리는 그 자를 용서할 수 없소!" "그 자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오!" 극락서생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용서받지 못할 죄인.... 그렇소. 그는 너무나 큰 죄를 지었소." 문득 그는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중인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여러분, 그 자가 바로 본인이오. 극락서생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오! 날... 처단해 주시오!" "그럴 수가!" "미... 믿을 수 없소!" 중인들은 아연실색했다. 그들이 받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백천강은 바닥에 무릎 꿇은 채 말했다. "본인이 바로 대혈마인 사풍객이오. 또한 혈륜왕이기도 하오. 여러분이 어떻게 하든 죄값을 달게 받겠소이다." "으으!" "그럴 수가!" 중인들은 넋을 잃었다. 그들은 모두 아연실색한 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바로 사유성과 무림구공자, 그리고 사운봉, 여화연, 설화영 등이었다. "오오! 이럴 수가!" 구공자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얼굴 가득 분노를 띄우며 백천강을 에워쌌다. "이... 이제껏 우리들을 우롱했더란 말이냐?" "크으! 그동안 마음껏 우리들을 비웃었겠지?" 구공자들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들은 바로 백천강으로 인해 가문이 완전히 몰락한 상태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씹어죽여도 마땅치 않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백천강을 포위했다. 그리고는 일제히 쌍장을 치켜 들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비... 비록 정도로 돌아섰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네 놈을 쳐 죽이리라!" 구공자는 끓어오르는 원한을 이기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은 백천강을 향해서 서서히 쌍장을 뻗었다.


그 순간 사유성의 안색은 수십 차례나 변했다. 그는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 했다. 사운봉과 설화영, 여화연은 눈물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각오해라!" "네 죄값이다!" "저승에 가서도 널 저주하겠다!" 콰르르르릉! 마침내 원한을 담은 열 줄기의 장력이 우뢰소리와 함께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잠깐!" 돌연 사유성이 부르짖으며 뛰어 들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세 여인들도 울부짖으며 장내로 뛰어들었다. "흐으윽! 안 되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검옹과 장천화옹도 뛰어 들었다. 삽시에 백천강의 주위에는 인영이 어지럽게 엉켜들었다. 콰콰쾅! 무시무시한 소용돌이와 함께 폭음이 터졌다. 그 와중에 여러 마디의 신음이 들렸다. 장영이 가라앉으면서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백천강은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그의 입과 코로는 검은 피가 줄지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림구공자는 손을 늘어뜨린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흐흑!" 사운봉과 설화영, 여화연 등은 울음을 터뜨리며 백천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들은 백천강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여인들이었다. 사유성은 탄식하며 구공자를 향해 말했다. "어쨌든 그는 참회하고 있소이다. 그는 과거를 후회하며 무림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지 않소? 그대들은 사감(私感)을 위해 대의(大義)를 저버리려 하오. 그가 없다면 대동맹은 종이호랑이나 다름이 없소. 뿐만 아니라 무림의 앞날은 어찌 되겠소?" "......!" 무림구공자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만검옹도 입을 열었다. "여보게들, 이 일은 천하무림의 안녕이 걸린 일이네. 어쨌든 지금의 그는 대동맹주임을 잊었는가?" 장천화옹은 구공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혀를 찼다. "쯧쯧! 부처께서도 고개를 들면 피안이오. 도도(屠刀)를 버리면 즉시 해탈한다 했거늘... 그가 심판을 받아들이려는 이상 이제 그는 악인이 아니라고 보네." "......!" 무림구공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였다. 구파일방의 지존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렇소이다. 우리들은 구원을 잊겠소이다." "옳소! 동감이오." 장내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그 순간 남궁신효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 "아아! 이 모든 것은 악마의 장난이오! 난 뭐가 뭔지 모르겠소!" 이어 그는 신형을 날렸다. "난 먼저 무림성으로 떠나겠소!" 남궁신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남은 팔공자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탄식을 남기며 몸을 날리고 말았다. 유일하게 한맺힌 음성을 남긴 것은 악진원이었다.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소. 그가 행한 것들을!" 구공자가 모두 떠나가자 중인들은 무거운 침묵에 빠졌다. 그때였다. "으음!" 무거운 신음을 발하며 백천강이 깨어났다.


51 장 대혈륜(大血輪) ① 중양절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그에 따라서 태실봉의 무림성은 나날이 그 면모를 더해 가고 있었다. 거대한 공사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때를 같이 하여 혈의교의 마인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그런 가운데 천하무림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그것은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과도 같았다. 그 정적 속에서 천하무림은 준동하기 시작했다. 중양절이 가까워지는 동안 정사를 망라한 무수한 무림인들이 태실봉의 무림성으로 향했다. 낙양의 빈민가 후미진 곳의 낡은 토집. 그곳은 과거에 무림인들의 주목을 받던 곳이었다. 바로 그곳은 궁가병기점(宮家兵器店)이었기 때문이었다. 궁가병기점은 거의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텅 비어있던 병기점에서 망치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땅... 땅... 땅....... 쇠를 단련하는 자는 웃통을 벗어던진 한 청년이었다. 그는 열흘이 넘도록 쇠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탄탄한 등에서는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릴 때마다 땀방울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청년은 단 한 번도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식음을 전폐했다. 심지어는 잠도 자지 않았다. 청년이 민들고 있는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그의 입에서는 신념에 찬 음성이 간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검을 만들어야 한다. 천하의 마(魔)를 베어버릴 신검을!" 땅... 땅... 땅....... 쉬지 않고 들리는 망치질 소리 속에는 혼이 담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신검을 만들어내야 한다. 기어코... 그것은 할아버지의 뜻이기도 하고 하늘의 뜻이기도 하다." 망치질 소리는 점점 더 세차게 들렸다. 시뻘겋게 단 쇳덩어리는 차츰 검의 형태를 닮아갔다. 그에 따라 청년의 충혈된 눈은 점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채 완성되지 않은 검이었다. 그 미완의 검혼(劍魂)이 처음으로 울음을 토해냈다. 그때였다. 청년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어렸다. 그것은 부처의 미소처럼이나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세상의 모든 악을 베어버릴 너에게 나의 혼을 불어 넣으리라." 땅... 땅... 땅....... 그는 지칠줄 모르고 망치를 휘둘렀다. 땀에 젖은 그의 몸이 은은한 불광(佛光)에 뒤덮이고 있었다. 황군(皇軍). 황군은 천군(天軍)이라고도 불리웠다. 그것은 황제가 직접 파견한 자금성의 금군(禁軍)이었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는 지축을 울렸다. 대지는 온통 자욱한 황진에 뒤덮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기지창검을 번뜩이며 십만금군이 황하를 건너 달려오고 있었다. 천자(天字)가 수놓인 금빛 깃발이 바람에 용맹스럽게 휘날렸다. 무림인들은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다. 황제가 기거하는 자금성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던 금군이 황하를 내려온 때문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적토마 위에 위풍당당하게 타고 있는 반백의 대장군. 그는 놀랍게도 팔십일만금군통령이자 대원수인


사광천이었다. 그가 직접 십만의 금군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온 것이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곧 그들의 향방이 드러났다. 바로 숭산 태실봉의 무림성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무림인들은 가슴이 진동함을 금치 못했다. ...... 무림왕 책봉을 위해 천자께서 대원수와 십만 천병을 파견했다! 이런 소문은 삽시간에 강호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조금도 틀림이 없는 사실이었다. 십만의 천병은 숭산으로 접어 들었다. 마침내 중양절 하루 전날. 금군은 태실봉을 엄중히 포위했다. 이어 대원수 사광천과 함께 오천의 금군위대가 무림성으로 입성했다. 천하가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중양절(重陽節). 마침내 운명의 날이 도래했다. 태실봉 봉우리를 빙 두른 채 세워진 무림성의 웅장한 성문이 활짝 열렸다. 무림인들은 성문을 통해 속속 무림성으로 입성했다. 그로 인해 무림성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무림성으로 들어오는 자들의 눈빛은 각양각색이었다. 정도인물도 사도인물도 있었다. 정사중간의 인물도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한결같이 흥분으로 빛났다. 중양절에 거행될 무림왕 책봉식은 향후 무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대동맹의 의혈지사들은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품 속에 벼리고 벼린 칼을 품고 입성했다. 그들은 이미 삶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림성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한 후였다. 그들은 두 눈에 비장한 빛을 띄우고 입성했다. 두웅! 둔중한 북소리가 들렸다. 무림성의 광대한 대광장. 그곳에 하나의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대 위에는 찬란한 깃발들이 수없이 꽂혀 추풍에 나부꼈다. 깃발에는 수없이 많은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그 글귀들은 한결같이 무림성을 찬양하는 내용들이었다. - 천하통일무림성(天下統一武林城). - 무림왕책봉경축(武林王冊封慶祝). - 영세무궁무림대성(永世無窮武林大城). 실로 천하인을 우롱하는 안하무인격인 글귀들이 아닐 수 없었다. "......." 대광장에는 십만을 헤아리는 무림인들이 만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차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흥분과 열정이 가득했다. 대의 좌우에는 무림성의 고수들이 도열했다. 또한 금군이 화려한 무복을 입고 무장한 채 대열을 짓고 있었다. 그 기세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대 위에는 이미 무림왕 책봉을 위한 의전이 갖추어진 상태였다. 거대한 향로가 향연을 품고 있었다. 황제의 봉책서를 읽을 상대(上台)와 무림왕으로 봉책될 무림성주 혈제 갈천기가 봉책받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윽고 정오가 되었다. 둥... 둥... 둥....... 둔중한 북소리가 서른 여덟 번을 연속해서 울렸다. 그때였다. "와아!" "와! 무림성 천천세(千千歲)!" 무림성에서 우렁찬 함성이 일제히 울려 퍼졌다. 그것은 무림성의 인물들과 무림성에 굴복한 자들이


내지르는 열띤 함성이었다. 마침내 분위기는 터질 듯 고조되었다. 둥둥둥! 북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그에 따라서 상대 위로 일단의 인물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로 혈천마국의 인물들이었다. 절세마인들은 두 눈에서 가공할 마광(魔光)을 흘리며 혈제 갈천기를 호위하고 대 위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혈제 갈천기는 지상에서 오직 황제만이 입는 곤룡포를 걸치고 있었다. 마침내 갈천기는 대 위로 올라갔다. 그때였다. "와아!" "무림왕 천세(千歲)!" 무림성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일어났다. 때맞춰 혈제 갈천기는 군웅군마들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했다. "헛허! 노부의 무림왕 책봉식에 참가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오." 그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수만 무림인들의 귓전에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무림인들은 모두 가슴이 진탕되었다. '과연... 거마로구나!' '무서운 마공이다!' 그 순간 대동맹의 의인들의 가슴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누가 저 자를 꺾을 것인가?' 한편, 신주제일룡 사유성은 군웅들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의 초조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연신 눈을 두리번거리며 백천강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백천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백천강, 아니 대동맹주는 왜 아직 오지 않는가?' 사유성은 백천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초조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무림구공자도 마찬가지였다. 대동맹의 의인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들이 유일하게 믿는 존재는 바로 대동맹주 극락서생뿐이었다.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사유성은 두 눈을 감았다. '결과는 비참할 것이다!' 그때였다. "핫핫핫핫!" 혈제 갈천기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군웅들의 귓전을 때렸다. 이어 갈천기는 군웅들을 쓸어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영광스럽게도 천자께서는 본인을 무림왕으로 책봉하셨소이다." "와아!" 일제히 군마들의 함성이 일어났다. "핫핫핫! 금후 본왕은 무림평화를 위해 천자와 함께 심력을 다할 것이오!" 갈천기는 감히 천자를 칭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상대 위에 오른 대원수 사광천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어렸다. 둥! 둥! 둥! 다시 한 번 북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천마부주 위지경이 음성을 높여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갈천기를 대신해 혈의교의 교주직을 맡아온 자였다. "이제 팔십일만대군 통령이자 대원수이신 사광천대장군께서 천자의 친서를 내려 무림왕을 봉하실


것이오!" "와아아!" 군마들은 다시 함성을 질렀다. 대원수 사광천은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품 속에서 금사(金絲)로 묶은 두루마리를 꺼냈다. 이어 그는 두루마리를 북쪽에 놓았다. 그리고는 자금성이 있는 곳을 향해 세 번 절했다. 수만의 군마군웅들은 숨을 죽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르륵....... 사광천은 두루마리를 끌렀다. 그는 대아래를 내려보며 엄숙히 말했다. "대명의 신하 갈천기는 황명을 받으시오!" 갈천기는 만면에 오만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대 아래 무릎을 꿇었다. '후후! 단 한 번 무릎을 꿇는다. 이후 다시는 무릎 꿇는 일이 없으리라.' 그는 그렇게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사광천은 두루마리를 펴들었다. 대동맹의 의인들은 입술을 피가 나게 깨물며 감추어진 칼을 꼬나잡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내심 애타게 부르짖고 있었다. '맹주시여! 어찌하여 나타나지 않는 것이오?' ② 궁가병기점이었다. 땅! 문득 망치질 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얼마 후였다. 불현듯 병기점 안에서 격동에 찬 부르짖음이 흘러 나왔다. "드디어 완성이다. 오오! 천하만악을 벨 신검(神劍)이 탄생했다!" 병기점 안에서 눈부신 보광이 흐르고 있었다. 청년은 두 손으로 막 완성된 한 자루의 보검을 받쳐들고 있었다. 우우우웅! 티끌 한 점 없는 순백의 보검이 검명(劍鳴)을 토해내며 울었다. 뒤따라 순백의 보검은 눈부신 광채를 발산했다. 청년은 격동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가자! 첫 번째 악의 피를 묻혀 너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리라!" 위잉! 찰나지간 기이한 진동음과 함께 청년의 몸은 검광에 흡수되고 말았다. 놀라운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우우웅! 신검은 곧장 토방의 천장을 뚫고 솟아 오르는 것이었다. 뒤이어 순백의 광휘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림사에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는 구만리장천어검비행술(九萬里長天馭劍飛行術)이었다. 한 줄기 광휘는 태양을 가르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그날은 바로 중양절이었다. 드디어 대원수 사광천은 황제의 천서를 읽기 시작했다. 군웅군마들은 숨을 죽였다. 특히 대동맹의 의인들은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발검할 태세를 갖추었다. 사광천은 마침내 음성을 높여 천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용이 전혀 뜻밖이었다. "역적(逆賊) 갈천기는 강호계를 피로 어지럽혔을 뿐 아니라 황궁마저 전복할 가증스런 음모를 꾸몄다. 이에 짐은 천병(天兵) 십만(十萬)을 대원수에게 내린다. 대원수는 천하를 어지럽히고 반역을 꾀한 대역도 갈천기를 흉수하고 무림성을 폐하라! 명을 받지 않을 시에 강호인들은 다함께 봉기하여 대역도 갈천기와 그 일당주구들을 토벌할 것이다." "으으... 이럴 수가!" 갈천기는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일시지간 넋을 잃고 말았다. 이때였다.


대원수 사광천은 돌연 황검을 뽑아들었다. 그것은 황제가 손수 사광천에게 내린 것이었다. 이어 그는 격동에 찬 음성으로 외쳤다. "들었느냐? 황제의 어명이 내리셨다! 흉신역도 갈천기와 무림성의 역도들은 무릎을 꿇으라!" 그때였다. 갈천기는 벌떡 일어서며 분성을 터뜨렸다. "너... 너는 천면환요(千面幻妖)가 아니구나!" 사광천은 즉시 황검을 치켜들었다. "쳐라! 황상의 명이시다! 반역도들을 추살하라!" "와아!" "대역도를 처단하라!" 차차창창! 무림성을 포위하고 있던 금군시위대는 일제히 병기를 뽑아들었다. 이어 그들은 혈천마국과 무림성의 마도들을 공격했다. "이럴 수가... 크아악!" "케에에엑!" 마도들은 그야말로 창졸지간에 당하는 공격이었다. 그들은 미처 정신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금군시위대는 자금성에서 고르고 고른 절정고수들이었다. 그들은 무림고수들에 비해 추호도 손색없는 절정고수들이었다. "크아아악!" 장내는 삽시에 비명과 혈무로 가득찼다. 신주제일룡 사유성도 그 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장소를 터뜨렸다. "대동맹의 의인들이여! 의검을 뽑아라!" "대동의혼大同義魂)!" 차차차창! 마침내 대동맹의 의혈인들도 싸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갈천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역시 대마웅다웠다. 그는 금세 침착을 되찾았다. "크핫핫! 겁낼 것 없다. 무림성은 영원무적이다! 허수아비들을 거꾸러 뜨려라!" 갈천기의 음성에는 강력한 마기가 실려 있었다. 그것은 마인들에게 사라져가던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크크크!" 혈천마국의 마인들은 일제히 광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일제히 신형을 뽑아 올렸다. 바로 그때였다. "핫핫핫! 혈천마국의 반역자들아. 너희들은 우리가 상대하마!" "업보를 받아라!" 삼백여 명의 인영이 군웅들의 머리를 뛰어넘으며 그들에게 덮쳐 갔다. 그들은 바로 혈천마국의 뇌옥에서 탈출한 마국의 충신들이었다. 꽈르르릉! 마침내 대격전이 벌어졌다. 이때였다. "으악! 이럴 수가!" "크아악!" 무림성의 마도인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들은 모두 절정고수들이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그들은 자기편 끼리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무림성 외삼당(外三堂)의 천향당(天香堂) 여인들이 무림성 마도인들의 허리를 느닷없이 베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뇌인물들 속에서도 피보라가 일어났다. "크아악... 네가?" 사월비마문(死月飛魔門)의 문주인 사월비마 염천교는 동도들을 사월도(死月刀)로 도륙하고 있었다.


과거 대마성의 사대군사의 하나였던 마면제갈 역호군은 느닷없이 동도들에게 암수를 쓰는 것이었다. 무림성의 마도고수들은 순식간에 머리가 으깨어졌다. 그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동도의 손에 의해 쓰러졌다. 요화문주 요화낭랑은 느닷없이 교소를 터뜨리며 옆에 있던 사해문(四海門)의 문주인 사해마룡의 목을 찌르는 것이었다. 개방의 변절자 철수무정개 호자운도 느닷없이 일월신복문(日月神卜門)의 문주인 소면마자(笑面魔子)의 복부를 타구봉으로 찔렀다. "케에에에엑!" 소면마자는 영문도 모르고 복부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졌다. 그야말로 혼란의 극치를 이루는 광경이었다. 무림성의 마인들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우왕좌왕하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한편 대동맹의 고수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마도인들을 공격했다. "차아앗!" "심판을 받을 때다!" 마인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그러나 마도들의 숫자는 워낙 많았다. 마침내 싸움은 승패를 점칠 수 없는 대혼전으로 접어 들었다. 그때였다. "와아!" 사방에서 엄청난 함성이 일어났다. 태실봉을 포위하고 있던 십만 황군이 마침내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그 기세는 실로 엄청났다. 슈슈슈슉! 황군은 무림성 마인들을 향해 강전을 우박처럼 쏘아대기 시작했다. "크아악!" 수없는 마인들이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무림성은 금방 혈무로 가득찼다. 만추의 따사로운 태양이 혈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장내는 비릿한 피비린내로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무림성의 대광장은 마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혈제 갈천기의 몸이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는 안면에 온통 무시무시한 살광을 흘리며 전세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크핫핫! 모두 황천으로 보내주마!" 갈천기는 광소를 터뜨리며 대동맹의 군웅들을 향해 쌍장을 뻗었다. 콰우우웅! 엄청난 강기가 소용돌이치며 군웅들을 향해 뻗어왔다. "크아아악!" 순식간에 혈육(血肉)이 난비했다. 이어 자욱한 피보라가 선풍을 일으켰다. 갈천기는 단 일장을 뻗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공할 일장이었다. 수백 명의 군웅들은 혈육을 구별할 수 없게 피모래로 으스러져간 것이었다. "크크크!" 갈천기는 괴소와 함께 다시 쌍장을 뻗었다. 이때였다. "이 놈! 천기! 멈추지 못하겠느냐?" 돌연 허공에서 침성이 터졌다. 이어 한 인영이 날아왔다. "앗! 다... 당신은?" 갈천기는 인영을 보는 순간 대경실색했다. 날아든 인영은 놀랍게도 죽은 줄 알았던 만마지존 백무웅이었다. "사... 살아 있었다니!"


꽈우우웅! 두 줄기 장력이 부딪혔다. 콰르르르!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 위로 백무웅의 노구가 날아올랐다. 어느새 백무웅의 안색은 잿빛이 되고 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갈천기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핫핫핫! 늙은이! 아직 죽지 않았다니 뜻밖이다. 그러나 나 갈천기는 옛날의 갈천기가 아니다. 길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황천으로 보내주마!" 콰르르릉! 그는 다시 쌍장을 모아쳤다. 백무웅은 노성을 질렀다. "사부를 죽이려 드는 패륜아! 용서할 수 없다!" 백무웅은 혼신의 힘으로 쌍장을 뻗었다. 그러나 이미 그는 패색이 짙었다. 백무웅은 노쇠한데다 내상이 아직 치유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였다. "헤헤헤헤! 볼만한 구경거리로군!" 괴소와 함께 백발의 한 늙은 거지가 훌훌 날아왔다. 그는 바로 천하제일개(天下第一 )인 개선( 仙)이었다. 그는 즉시 곤두박질치며 갈천기를 향해 쌍장을 뻗었다. 콰콰콰콰! 천번지복의 음향이 들려왔다. 뒤이어 흙더미가 십 장 높이로 치솟았다. "음!" 백무웅과 개선은 묵직한 신음을 토하며 비틀거렸다. 그러나 갈천기는 뒤로 몸을 약간 휘청거렸을 뿐이었다. 그는 두 눈에 가공할 살광을 흘리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핫핫핫! 노괴물들아! 너희들 늙은 뼉다귀들을 아주 부숴주마!" 우우웅! 갈천기의 몸이 짙은 흑무(黑舞)에 휩싸였다. 그는 흑무에 싸인 채 허공으로 십 장 높이나 솟구쳐 올랐다. ③ 한편 사유성은 천마부주 위지경과 경세일전을 벌이고 있었다. 파아아앗! 사유성은 외팔이였다. 그러나 그의 우검(右劍)은 이미 이기검술(以氣劍術)의 극상승단계를 펼치고 있었다. 위지경은 처음에는 사유성을 얕잡아 보았다. 바로 그것이 실수였다. 그는 차츰 몰리기 시작했다. 또한 무림구공자는 각기 무림성의 마두들을 상대로 그동안 쌓이고 쌓인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케에엑!" 구공자의 분검(忿劍)에 마두들은 피를 뿌리며 거꾸러졌다. 참고 또 참았던 구공자의 한은 무서운 피보라로 풀어져 갔다. 그들은 종횡무진 닥치는 대로 무림성의 마인들을 쳐죽었다. 구파일방의 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무림성에게 자신들의 문파를 빼앗긴 후 그들은 불회곡에 숨어 이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칼을 갈고 또 갈았다. 마침내 그들은 울분을 터뜨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자!" "의혼은 불멸이다!" 무림성의 마인들은 삶도 죽음도 버린 그들의 공격에 피를 뿌릴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꽈꽈꽈꽝! 엄청난 폭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폭풍이 소용돌이쳤다. 마침내 갈천기가 백무웅과 개선을 향해 개세마공을 펼친 것이다.


"크으윽!" 백무웅과 개선은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갈천기를 당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피를 뿌리며 뒤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갈천기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본좌를 막는 자는 모두 지옥으로 보내주마!" 콰르르릉! 그는 무섭게 사방으로 쌍장을 뻗었다. 순식간에 방원 십여 장의 모든 물체가 으스러졌다. 비명을 지를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흙과 돌이 무너지는 소리만이 사방을 울릴 뿐이었다. 꽈아아앙! 갈천기의 마공의 힘은 가공지경이었다. 군웅들은 피모래로 으스러졌다. 백무웅과 개선은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다시 덤벼들었다. 이미 승산은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비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삶을 포기하고 갈천기에게 덤벼들었다. "으아아악!" 쇄애액! 피의 푹풍이 휘몰아쳤다. 무림사 이래 이런 대참사는 없었다. 무림성은 아수라지옥으로 화했다. 시체는 산처럼 쌓였고 피는 내를 이루며 흘렀다. 싸움은 끝이 없었다. 무림은 완전히 종말을 고하려는 듯이 서로가 서로의 심장에 검을 꽂으며 쓰러졌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잘린 수급이 허공을 날아갔다. 바로 그때였다. 무림성의 서편 하늘로부터 눈부신 신광이 일직선을 그으며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다. 뒤이어 웅후한 장소성이 들려왔다. "우우우우우우......!" 그 장소성은 태실봉은 물론 무림천하를 송두리째 뒤흔들 것만 같았다. 이어 장내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케에에에엑!" 그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웅후한 장소성이 울린 순간이었다. 마인들은 느닷없이 고막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처절한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었다. 무기를 놓친 그들은 귀를 틀어막으며 일제히 비틀거렸다. 때를 놓칠세라 군웅들의 도검이 그들을 베어가기 시작했다. "크아악!"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순간에 무림성의 마인들이 황천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와아!" 군웅들은 믿을 수 없는 일에 아연해하다가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그 순간 눈부신 신광이 무림성으로 내려꽂혔다. 쌔애애애애...... 액! 그것은 천하의 암흑을 밝혀줄 한자루의 신검(神劍)에서 흐르는 광휘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신검을 보는 순간 중인들은 넋을 잃었다. 백무웅과 개선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던 갈천기도 그 신검을 보았다. 순간 그는 안색이 흑빛이 되어 부르짖었다. "구... 구만리장천어검비행술(九萬里長天馭劍飛行術)!" 그는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바로 그때 허공에서 한 가닥 웅혼한 음성이 들려왔다. "혈제 갈천기. 너의 생이 종말을 고할 때가 왔다." 우웅! 그 음성은 천지를 진동시켰다.


"부... 불혼대사자후(佛魂大獅子吼)! 너... 너는 대체 누구냐?" 갈천기는 안색이 백지장이 된 채 물었다. 스스스....... 허공을 한 자루의 신검이 배회했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미 검신일체가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허공에서 예의 웅후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갈천기. 과거에 그대와 같은 혈로를 걸었던 무림의 중죄인이다." "누...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허공에서 음성이 다시 들렸다. "기억하겠지? 네가 대별산에서 죽였다고 믿었던 혈륜왕이다." "무... 무엇이?" 갈천기의 눈이 온통 회의와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군웅들도 대경실색했다. "혀... 혈륜왕!" "그... 그가 살아있었단 말인가?" 군웅들은 넋을 잃고 웅성거렸다. 허공에서 다시 음성이 들렸다. "갈천기. 아직도 늦지는 않았다. 돌아보면 피안(彼岸)이요, 도도(屠刀)를 버리면 성불할 수 있다." 갈천기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크크ㅋ! 웃기지 마라. 네 놈이 어떻게 살아났는지는 모르지만 나 갈천기는 영세무적이다. 널 쳐죽이고 다시 무림성을 세우겠다! 다시 일어서는 데에는 크크크! 일 년이면 족할 것이다." 그 순간 허공에서 탄식이 들렸다. "아아! 불법의 무한함을 모르다니.... 마의 힘은 한계가 있는 법이다." 스스스....... 신검은 점점 선회하며 아래로 내려왔다. 군웅들은 그 눈부신 광휘에 눈조차 바로 뜨지 못했다. 그러나 갈천기는 예외였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신검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의 충혈된 눈에서는 가공할 마기가 폭사되고 있었다. "크하하핫! 어리석은 소리마라. 마의 힘이야말로 무궁하다. 나 갈천기는 천하를 통일하여 만대에 걸쳐 마도천하를 이룰 것이다." 신검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어리석은 자여! 그대를 구할 수 있는 자는 그대의 마음뿐인 것을 모르느냐?" "크하하핫! 시끄럽다. 남은 것은 너와 나의 싸움뿐이다." "아아! 그대는 너무도 어리석다!" 우우웅! 돌연 갈천기의 몸이 가공할 흑무(黑霧)로 뒤덮였다. "크크크크......! 영세제일의 마공을 보여주마!" 흑무 속에서 아수라귀의 괴소가 흘러나왔다. 신검은 더욱 낮게 내려왔다. 군웅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드디어 무림사 이래 최강의 결전이 벌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일순 무서운 적막이 피비린내나는 무림성을 짓눌렀다. 우우우웅... 스스스스.......! 흑무는 더욱 짙어졌다. 신검은 더욱 낮게 내려오며 허공을 선회했다. 군웅들은 숨을 죽이며 가슴을 조였다. 그들의 마음 속에 이미 공포심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혈제 갈천기와 혈륜왕. 그들은 모두 희대의 혈마왕이었다. 그러나 혈륜왕의 새로운 출현은 군웅들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있었다. 이제 혈륜왕은 혈마왕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무림의 구성(救星)으로 무림성에 등장한 것이다.


"......!" 군웅들은 긴장한 채 신검과 흑무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흑무가 움직였다. "크크크! 아수마라지옥겁(阿修魔羅地獄劫)!" 우우우웅! 흑무가 무서운 속도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 순간 군웅들은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순식간에 천지는 암흑으로 화하고 말았다. 고오오오오오......! 지옥성의 저주가 지상을 휘감았다. "크하하하... 하하하!" 천지가 암흑에 뒤덮인 가운데 저주에 찬 광소가 울렸다. 바로 그때 군웅들은 보았다. 허공을 선회하던 신검이 일순 광휘를 잃고 흑무에 뒤덮이는 것을. '끄... 끝났다!' 군웅들은 일순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났음을 직감했다. 바로 그때였다. 번쩍! 암흑을 가르며 눈부신 광휘가 한 차례 뻗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너무나도 눈부신 광휘였다. 군웅들은 순식간에 눈이 멀어버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크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군웅들을 몸서리치게 했다. 뒤이어 천지를 온통 뒤덮었던 암흑이 거짓말처럼 씻은 듯이 사라졌다. 군웅들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일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다음 순간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환희를 맛보았다. 혈제 갈천기! 그는 지면을 밟고 선 채 비틀거리며 두 팔로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가슴을 한 자루의 신검이 꿰뚫고 있었다. "크... 크으으... 윽... 졌... 다......!" 갈천기는 신검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서서히 주저앉았다. 갈천기 앞에는 온몸이 불광(佛光)에 감싸인 청년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는 바로 백천강이었다. "......." 백천강은 연민의 눈으로 쓰러지는 갈천기를 바라보았다. 갈천기는 두 손으로 가슴에 박힌 신검을 뽑았다. 그러자 핏줄기가 분수처럼 허공으로 뿜어졌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팟팟팟팟! 갈천기의 몸이 산산이 분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핏방울로 화해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희대의 대혈성 갈천���는 자신의 최후를 대살성답게 스스로 장식하고 만 것이다. ④ 혈제 갈천기는 죽었다. 결국 마의 저주 속에 굴러가던 대혈륜(大血輪)은 스스로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 백천강은 불광에 감싸인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군웅들은 차츰 움직였다. 그들은 서서히 이동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백천강을 포위했다. 그러나 백천강은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그는 최후의 심판을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군웅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와아!" "무림왕(武林王)이시여!"


백천강을 에워싼 군웅들의 함성은 그칠 줄을 몰랐다. 멍하니 서 있던 백천강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무림왕이라고?" 그의 눈에서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천강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군웅들은 함성을 지르며 그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백천강은 군웅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는 한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무림 구공자들의 앞이었다. "......!" 무림구공자들은 모두 넋빠진 표정을 지었다. 백천강은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대들이 한을 풀 때요." 그 말에 갑자기 악진원이 울음을 터뜨렸다. "크흐흐흑!" 이어 악진원은 눈물을 뿌리며 어디론가로 몸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아아!" 흐느끼는 듯한 신음소리와 함께 나머지 팔공자들도 악진원의 뒤를 쫓아갔다. 그들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가문의 원수! 그러나 지금은 무림의 구성이요, 대협객으로 변해버린 상대였다. 어찌 복수의 검을 휘두를 수 있겠는가! 결국 무림구공자는 통한의 눈물을 뿌리며 사라져버린 것이다. 백천강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다시 군웅들 사이를 걸어갔다. 그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한편 군웅들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기가 막힌 사연을 군웅들은 마음 깊이 이해했던 것이다. 백천강은 서서히 무림성을 빠져 나갔다. 문득 몇 개의 섬세한 인영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다. 공야운리를 비롯하여 설화영, 사운봉, 여화연 등이었다. 그녀들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그녀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아! 저 분은 천하에서 가장 불행하신 분이야." "저 이를 보살펴 드려야 해." "그가 어디를 가든 따르겠어요." 한편, 사라져 가는 여인들을 지켜보는 젖은 눈망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유성의 눈이었다. '그래. 가거라. 운봉, 그것이 네가 결정한 일이라면... 세상 끝이라도 그를 따라가거라.' "무림왕 천천세(千千歲)!" "와아!" 무림성은 군웅들의 함성으로 뒤흔들렸다. 그날 이후 백천강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렀다. 하지만 천하인들에 의해 명예스러운 이름을 간직하게 된 무림왕 백천강은 두 번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그를 따라 무림에서 사라져버린 네 명의 가인(佳人)들도 마찬가지였다. ⑤ 다시 또 오랜 시간이 흘렀다. 처음 그것을 발견한 것은 신주제일룡 사유성을 비롯한 구공자들이었다. 그들은 일세의 고승이자 천하제일인이었던 천무선사를 기리기 위해 불혼애에 갔다가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과거 천무선사가 새기다 만 불혼애의 마애불이 누군가에 의해 완성되어 있는 것을. 마애불의 입가에는 자비스럽기 그지없는 염화시중의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휘이잉....... 세찬 삭풍이 휘몰아쳐도 마애불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불혼애의 석벽에 새겨진 마애불상은 그렇게 천하를 굽어보고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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