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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풍운(風雲)의 서막(序幕) ━━━━━━━━━━━━━━━━━━━━━━━━━ 두 소년(少年)이 있었다. 난세(亂世)의 풍진(風 塵)을 안고 동시대에 태어난 인중용봉(人中龍 鳳)의 두 절세기재. 그들은 만났다. 한 그루 천년고목(千年古木) 아 래서. 어느 눈 내리던 날, 그들은 운명처럼 만났다. 천지가 온통 은백색으로 물들던 날 운명의 신이 점지한 양 그들은 만났다. 이것이 바로 무림(武 林)의 하늘과 땅 사이에서 시작된 대풍운(大風 雲)의 서막(序幕)이었다.

하란산(賀蘭山)의 한 아름다운 언덕 위. 그곳에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거대한 천년고목이 서 있었다. 하늘과 땅이 시작될 때부터 있었을 지도 모를 고목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의연하게 거대한 그늘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천년고목에 무병장수(無病長壽)와 행운(幸運)을 빌었다. 그 고목나무의 높이는 근 십 장(十丈) 여나 되었으며 그 둘레만 해도 장 정 열 명이 팔을 두를 만큼 장대(長大)했으므로 보는 이로 하여금 무언가 숭엄한 느낌을 주었 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고목나무의 한 귀퉁이에 언 제 새겼는지 몰라도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이는 희미한 글씨가 보였다.

<하후성(夏侯星). 독고황(獨孤皇).


다시 만날 그날까지 변치 않을 우정(友情)을 위 하여.>

천년고목에 새겨진 글씨는 비록 짧은 글귀였지 만 웅혼한 기상이 담긴 필체(筆體)로, 보는 이 로 하여금 가슴을 찌르는 듯한 감동을 느끼게 했다. 그리하여 하란산을 지나던 사람들은 자신 도 모르게 그 글씨 앞으로 다가가 한동안 생각 하다가 그 뜻을 새기며 다시 떠나곤 했다. 아마도 풍운만변(風雲萬變)하는 세상사에 빛나 는 순수하고 뜨거운 진실을 느꼈음이리라. 세월 의 흐름에 빛바래고 희미해져 버린 그 글씨는 하란산을 지나던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처럼 인 생의 여정을 비춰주는 듯한 느낌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휘... 이... 이...... 잉! 일몰(日沒) 이후 잔잔하던 천기(天氣)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더니 서서히 바람이 거세어지 면서 급기야 일진광풍(一陣狂風)을 일으켰다. 뒤이어 먹장구름이 무섭게 몰려들더니 하란산 일대를 온통 칠흑의 장막으로 가려버렸다. 번쩍! 꽈르르... 릉......! 낙뢰일성(落雷一聲). 암천(暗天)을 가르는 일섬전광(一閃電光)과 함 께 무시무시한 벽력(霹靂)이 천지를 뒤흔들었 다.


꽈르르릉...... 콰...... 앙! 암천을 가르는 뇌전(雷電)이 불칼이 되어 느닷 없이 하란산에 떨어졌다. 벼락은 하란산 언덕에 우뚝 서서 천년 세월을 굽어보던 고목을 사정없 이 베어 버렸다. 고목은 정확히 두 쪽으로 쪼개어졌다. 그 바람 에 고목에 새겨진 두 이름이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뒤이어 고목나무는 무서운 불길에 휩싸이더니 하란산을 온통 횃불처럼 밝히며 만 하룻밤 하루 낮을 화염덩이가 되어 타들어갔다. 결국 하란산 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벗이요, 그늘이 되었던 천년고목은 검은 숯덩이만 남긴 채 사라지고 말 았다. 하란산에서는 이제 다시 천년고목을 볼 수가 없 게 되었다. 천년고목이 불타버린 그날 밤. 어딘가에서 비통 한 장소성(長嘯聲)이 하란산을 뒤흔들었다. "우...... 우...... 우...... 우!"

하란산 아래 살던 사람들은 그 장소성이 밤새 울린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소를 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장소성은 천년고목이 스스로 울부짖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월여류(歲月如流). 물처럼 흘러가는 풍진 세월 속에 차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천년고목과 그 고목에 새겨져 있던 글씨는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 대소림사 제 1 권 제 1 장 운명(運命)의 만남 -1 ━━━━━━━━━━━━━━━━━━━━━━━━━━━━━━━━━━━


하북(河北)의 겨울은 일찍 온다. 중원(中原)의 북쪽은 대체로 산은 험하고 들판의 지세(地勢)도 힘 찬 흐름을 가지고 있다. 북방대륙의 거친 융기는 영웅의 기세를 닮았다고 한다. 겨울(冬), 겨울이었다.

하란산(賀蘭山)은 북쪽 변방 일만리(一萬里)에 걸쳐 장대하게 뻗 어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과 장성 너머 등격리사막(騰格里沙漠) 의 동쪽, 그리고 대황하(大黃河)의 장장한 물길이 시작되는 상류 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산(大山)이다. 눈이 내린다. 천지를 은백색으로 뒤덮으며 눈이 내린다. 하란산 전체도 흰 눈에 덮여 찬란한 절승절경을 이루었다. 하란산의 절경을 이루는 산세(山勢)가 막 시작되는 언덕 위에 도 온통 눈이 덮여 있었다.

커다란 바위(岩). 그리고 그 옆에 좀처럼 보기 힘든 천년고목이 의연히 서 있다. 고목의 높이는 십 장(十丈), 그 둘레만 해도 장 정 십여 명이 팔을 벌려야 간신히 감쌀 만큼 장대했다. 그러나 고목은 겨울이라서 가지만 앙상했고 하늘을 가릴 듯이 뻗 은 가지에는 설화(雪花)가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소년(少年). 이제 겨우 십 세(十歲) 남짓해 보이는 소년은 고목 아래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여우털로 짠 조끼와 그 아래에 백의(白衣)를 입 고 있었고 머리에는 북방의 사정없이 몰아치는 추위를 막기 위해 털모자를 단단히 눌러쓰고 있었다.

아! 이토록 아름다운 소년이 또 있을까? 추위로 인해 발갛게 상기된 양 뺨, 그리고 꿈꾸듯 신비로운 흑진


주같은 두 눈....... 오관이 정명(正明)한 소년의 용모는 마치 선동(仙童)인 양 매혹적 이기까지 했다. 소년은 언덕 위 고목나무에 기대앉아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었 다. 그의 까만 눈은 언제부터인지 언덕 아래의 끝없이 펼쳐진 설 야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일면 외로와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자세에서는 나이보다 훨씬 조

숙해 보이는 분위기가 풍겼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총명하고 신비 로운 눈동자 속에 깃들어 있는 우수(憂愁)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희고 밝은 얼굴에서는 명랑하고 쾌활한 소년다운 면 도 깃들어 있었다. 눈 내리는 설야를 바라보며 가만히 눈을 감자, 무척이나 긴 속눈썹이 그의 눈꺼풀에 잠겨 심미적인 느낌을 주었 다. 문득 소년의 입술이 살짝 움직이더니 한숨이 새어나왔다. "휴우! 아버지께서는 올해가 가도 안 오시려나?" 소년은 티없이 맑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그의 눈망울 속에 잠깐 반짝이는 이슬이 비친 듯도 했다.

그는 고개를 들더니 자신의 머리 목을 바라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위 하늘을 가리고 있는 천 년고

"이 고목(古木)의 잎이 두 번 지기 전에 오신다고 성아(星兒)와 약속해 놓고... 아버지는 거짓말장이!" 소년의 눈가에 기어코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곧 소년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자책해마지 않았다. "쳇! 왜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는 거지? 절대로 울지 않겠다고 아 버지께 약속했는데…" 역시 소년은 아직 치기를 벗지 못한 연약한 동자에 불과했다. 그 는 눈물을 그친 다음 몸을 일으켰다. 우중충한 잿빛

하늘에 이따금씩 히끗히끗 눈발이 비치고 있었고


소년은 눈발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어서 집에 가봐야지. 할아범이 기다리겠어." 소년이 막 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후다닥! 가벼운 음향과 함께 어디서 나타났는지 하얀 토끼 한 마리가 고목 나무 뒷전에서 튀어나왔다.

"아!" 소년의 눈이 반짝 빛나며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토끼는 그의 앞 다섯 걸음의 거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소년은 입가 에 미소를 머금더니 잔뜩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살금살금 발을 떼 었다. 그러자 귀가 쫑긋 하는가 싶더니 토끼는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소년은 코웃음쳤다. "흥! 내가 너를 놓칠 줄 알고?" 소년은 재빨리 토끼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발이 눈에 푹푹 빠져 가면서도 그는 맹렬하게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토끼의 속도는 아무래도 그보다 더 빨랐다. 토끼는 잽싸게 저만큼 달아나다가 힐끔 돌아보곤 했다. 마치 소년이 눈속에 빠지 며 허둥대는 모습이 무척 재미있기라도 하다는 듯 얕보는 눈치였 다. 소년은 마침내 약이 바짝 올랐다. "에잇! 너를 기어이 잡고야 말겠다!" 흥분한 나머지 너무 급하게 걸음을 떼었던 것일까? "앗!"

갑자기 돌뿌리에라도 걸렸는지 소년은 휘청하더니 냅다 눈속에 처 박히고 말았다.


"아야야!" 넘어진 순간 소년은 비명을 질렀다. 오른쪽 발목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낀 것이다. 눈속에 엎어진 그는 인상을 잔뜩 쓰며 하늘 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시야에 함박눈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잿빛 하늘에선 어느 결엔가 주먹만한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야!"

소년은 발목의 고통도 잊은 듯 누운 채 펄펄 내리는 함박눈을 바 라보며 경탄성을 질렀다. 천진무구하고 맑은 동심(童心)이 그의 얼굴에 역력히 나타났다. 성아(星兒). 그는 어려서부터 무척이나 눈을 좋아했다. 눈만 보면 마냥 즐거워했다. 소년은 눈위에 누워 춤추듯 휘날리는 눈송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버지와 같이 이 눈을 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성아의 두 눈이 다시금 우울해졌다. 그러나 그는 곧 맑은 미소를 되찾으며 중얼거렸다. "할아범에게 가서 눈싸움 하자고 해야지!"

소년은 벌떡 일어나더니 앞을 향해 달리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 뿐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얏!" 발목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 소년은 그만 다시 앞으로 푹 고꾸라지 고 만 것이었다. 소년의 얼굴이 낙담으로 일그러질 때였다. 누군가가 그의 한쪽 팔을 덥석 잡아 일으켰다. "꼬마야, 조심해!" 낭랑한 음성이 그 뒤를 이었고 성아는 흠칫하며 소리가 들린 쪽으 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건장하게 생긴 소년(少年)이 자신의 팔


을 잡은 채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이는 대략 십사오 세 가량 되었을까? 날렵한 흑의경장(黑衣輕裝)에 머리에도 역시 검은 띠를 단정히 두 른 소년으로 눈보라 속에서 흑의를 입은 모습은 무척이나 선명한 인상을 주었다. 특히 길게 귀쪽까지 쭉 뻗은 검고 짙은 눈썹과 한 쌍의 봉목(鳳 目)같은 눈, 오똑한 콧날, 흰 피부는 더더욱 찬탄을 금치 못할 정 도로 준수한 모습이었다.

흑의소년. 그는 나이는 어리나 많은 사람을 고개 숙이게 할 정도의 위엄을 풍기고 있었으며 체격 또한 조숙하여 건장했다. 그는 등 뒤에 검은 탄궁(彈弓)을 메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토끼, 꿩, 야조(野鳥)등의 사냥한 짐승이 걸려 있었다. 실로 기상(氣象) 이 출중하고 매력이 넘치는 소년이었다.

흑의소년은 씩 웃으며 물어왔다. "꼬마야, 발을 다친 모양인데 괜찮으냐?" 성아는 갑자기 눈썹을 찡그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말 조심해! 나는 꼬마가 아니야, 성아야 성아!" 뜻밖의 태도에 흑의소년은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그러나 곧 다시 씨익 웃었으되, 그 웃음은 먼저 번 것보다 훨씬 짙었고 사나이다운 매력까지 물씬 풍겼다. "하하하... 그래, 내가 잘못했다. 너를 이제 성아라고 부르지."

그제서야 성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는 동안 흑의소년에게서 말


할 수 없는 친밀감을 느끼고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어디에 사니? 이곳 하란산 일대에서는 본 적이 없는데?" 그 말에흑의소년은 빙긋 웃었다. 웬일인지 자기보다 훨씬 어려보 이는 꼬마가 반말을 해도 밉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어깨에 쌓이는 눈을 툭툭 털어내며 호쾌하게 말했다. "보름 전에 이곳으로 왔지. 이 하란산 기슭의 봉산진(鳳山鎭)에 나의 집이 있다."

성아는 힐끗 흑의소년의 허리춤에 매달린 사냥감과 등 뒤의 탄궁 을 보더니 눈을 반짝 빛냈다. "너 무예(武藝)를 하는구나?" 흑의소년은 씨익 웃었다. "조금 하지." 함박눈은 더욱 많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대지(大地)는 건곤일색 (乾坤一色), 오로지 은색으로 화했다. 흑의소년은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눈이 너무 많이 내리는 걸?" 이어 그는 성아의 팔꿈치를 잡았다. "성아야, 너희 집은 어디냐? 내가 바래다 주겠다." 성아는 코웃음쳤다. "흥! 나 혼자서도 내려갈 수 있다." 그는 자못 당당하게 걸음을 떼었다. 그 순간 다시 극심한 통증이 발목을 휘감자 그의 신형이 중심을 잃고 비틀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비명 한 마디 내지르지 않았다. 어린 마 음에도 건장하고 씩씩해 보이는 흑의소년에게 결코 비웃음을 당하


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내가 도와주지!" 흑의소년이 커다랗게 웃더니 성아를 얹었다. 그의 힘은 놀랄 정도였다.

번쩍 안아 다짜고짜 등 뒤에

"놔! 내려놔라! 나 혼자서도 걸어갈 수 있단 말야!" 성아가 등 뒤에서 몸부림 치자 흑의소년은 점잖게 말했다. "바보야, 이 눈속을 잘못 걸으면 더 크게 다친단 말이다."

성아가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난 바보가 아니다! 왜 너는......." "하하... 바보가 아니면 가만히 입다물고 있어라." 마침내 성아는 입을 다물었다. 아닌게 아니라 눈발이 점점 폭설 (暴雪)로 화해 사위가 안보일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눈(雪), 눈, 눈. 폭설은 하늘과 땅을 온통 메울 듯 쉬지 않고 쏟아져 내렸다. 휙! 휙!

성아를 업은 흑의소년은 이 폭설 속을 마치 나는 듯이 달렸다. 그 런데 기이하게도 그가 지나온 자리에는 발자국의 흔적이 단 한 치 정도 밖에 없었다. 한 자가 넘게 쌓인 눈위를 달리며 그 정도의 발자국만을 남기다니 그것은 정녕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성아는 그의 목에 손을 두르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넌 마치 산짐승 같구나?"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흑의소년은 흠칫했다. "산짐승?"


"눈속을 이렇게 빨리 달리다니 말야." "후후." 흑의소년의 나직한 웃음이 들렸다. 그러는 중에도 그는 쉬지 않고 계속 언덕을 돌아 내려갔다. 성아는 자못 염려스러운 듯 물었다. "힘들지 않니?" "후후... 너같은 꼬마가 뭐가 무겁다고?"

그 말에성아는 주먹으로 흑의소년의 머리통을 가볍게 때렸다. "꼬마가 아니고 성아라니까!" "아얏! 그래 알았다, 알았어. 하하하하......." 흑의소년은 짐짓 엄살을 부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걸 음을 늦추고 생각난 듯 물었다. "성아, 너의 성명은 무엇이냐?" 성아는 점잔을 빼며 말했다. "하후성(夏候星)."

"하후성! 좋은 이름이구나." 성아, 즉 하후성은 흑의소년의 귀를 잡고 반대로 물었다. "네 이름은?" "음, 난 독고황(獨孤皇)이다." 하후성은 픽 웃더니 빈정거렸다. "무슨 이름이 그래? 괴상한 성(姓)에다 네가 무슨 제왕(帝王)이라 고 황자를 쓰지?"


독고황은 대답 대신 빙긋이 웃었다. 하후성이란 어린 소년이 여전 히 조금도 밉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한동안 묵묵히 걷다 다시 물 었다. "성아야, 너는 몇살이냐?" "너는?" 독고황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먼저 물었다." 하후성은 코웃음쳤다.

"그럼 그만 둬, 나는 말하지 않을테니." 독고황의 얼굴에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가 어렸다. "좋다. 내가 먼저 말하겠다. 나는 올해 열다섯이다. 자, 이제 너 도 말해라." "음... 성아는... 열 살이야." 독고황은 흥미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꼭 다섯 살 차이로구나. 어때? 나를 형(兄)이라 부르지 않겠느 냐?"

"형?" "그래." 하후성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고 독고황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말이 없지?" 하후성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빙그레 웃으며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나이같은 건 따지지 말고 서로 친구하자!"


"뭐? 친구?"

독고황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나는 네 나이의 거의 두배나 되는데 친구라니?" 하후성은 입술을 삐죽였다. "지금이야 두배지만 앞으로 백 년만 지나봐. 나는 백 다섯 살, 너 는 백 열 살, 그 쯤이면 친구가 될 수 있잖아." 독고황은 그만 픽 웃고 말았다. "그건 억지다."

"억지라고?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누가 더 학문(學文)이 높은가로 형을 가리기로." 독고황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학문이라고?" "그래." "하하... 성아야. 나는 이미 사서삼경을 다 뗐는데 너는 그 중 하 나라도 읽었느냐?" 하후성은 짐짓 엄숙하게 헛기침하며 말했다.

"에헴! 예로부터 지자(智者)는 겸손해야 한다고 했지만 오늘만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말을 해주지." 독고황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너는 지금 사서삼경을 뗐다지만 나는 이미 그것을 세 살때 뗐고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모두 통달했단 말야. 지금은 황청경해(皇淸 經解), 경의술문(經醫術聞), 일주서(逸周書), 개방명산측환요의 (開方命散測환要義) 따위를 보고 있는 중이란 말이다." 독고황은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는 하후성이 말한 책이름들을 한


번도 들은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정말이냐?" "흠! 군자(君子)는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 법(法)." "음." 독고황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설사 그렇다해도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내게 큰 손해인데." 하후성은 두 손으로 독고황의 목을 안으며 조르듯 말했다. "우리 친구하자. 응?"

독고황은 마침내 웃고 말았다. "좋다. 내가 손해보는 셈 치지." 하후성은 활짝 웃었다. "고마워, 너는 정말 내 마음에 꼭 드는 친구야." 그러나 독고황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래도 난 집에 가서 이 일을 좀 곰곰히 생각해봐야겠다. 오늘 은 손해를 많이 본 것 같단 말이야." 그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눈(雪). 굉장한 폭설이 계속 쏟아지고 있었고 두 소년의 모습은 눈발 속에 희미하게만 보였다. 그 속에서 독고황의 음성이 들렸다. "성아, 눈이 무척 많이 내리지?" 대답이 없었다. 대신 독고황의 등 뒤에서는 고른 숨결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독고황은 피식 웃었다. "이 녀석, 자는구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다. 이제부터 너와 나는 친구다." 독고황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곧 사라졌다. 그리고 두 소년의 모습 은 눈발 속으로 점차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사월(四月). 하북(河北)에서 항상 뒤늦게 찾아오는 봄(春)이다. 만리장성(萬里 長城) 전역(全域)을 흐르는 황진(黃塵)속에도 어느덧 훈훈한 춘풍 이 섞여 있었다. 하란산(賀蘭山).

일만 리(一萬里)의 대장성(大長城)이 한다.

이곳 하란산의 중심으로 통

그러나 워낙 장엄하고 거대(巨大)한 산이므로 만리장성의 맥(脈) 조차 단애와 계곡에서 끊어지고는 한다. 도화전현성(桃花田縣城). 이곳은 하란산 기슭에 자리잡은 수백호의 작은 현으로 대체로 풍 족한 가호들이 모여 사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현이다. 이 도화전현성의 서북 구릉 위. 그곳에는 제법 커다란 한 채의 장원(莊園)이 있었다.

장원은 이름이 없었다. 더우기 오랫동안 손질을 하지 않은 탓에 허름하게 낡아 있었다. 지붕에는 황사(黃沙)가 앉아 있었고 이따 금 잡초까지 자라 있는가 하면 담장도 몇 군데나 허물어져 있었


다. 그러나 장원 안에서는 도화향(桃花香)이 물씬 풍겨나오고 있었다. 장원 안의 화원에 도화가 만발해 있었기 때문이다. 도화전현성 전 체가 도화에 둘러싸인 것처럼 이 장원도 도화 속에 묻혀 있었다. 장원은 전원(前院)과 후원(後院), 그리고 내원(內院)으로 이루어 져 있었다. 그 중 후원(後院).

후원의 뜰에는 정자가 한 를 담그고 있었는데 연못 를 이루고 있었다.

채 있었다. 정자는 조그만 연못에 각주 주위에는 도화가 만발해 아름다운 풍치

이따금씩 황진 섞인 춘풍에 도화꽃이 날리며 연못 위로 떨어졌다. 연못의 수면(水面)이 가볍게 출렁이고 그때마다 연못 속에 사는 이름모를 고기(魚)들이 먹이인 줄 알고 꽃잎을 삼키곤 했다. 실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청심정(淸心亭). 이것이 정자의 이름이었다.

청심정 안에는 백의소년(白衣少年) 한 명이 난간에 기대앉아 책 (冊)을 읽고 있었다. 그는 대략 십사 세(十四歲)쯤 되어보였는데 전신에서는 신비로운 기운이 물씬 풍기며 얼굴은 마치 선동(仙童)처럼 탈속한 기품과 미(美)를 풍기고 있었다. 특히 눈(眼). 그의 두 눈은 대학자(大學子)조차 따르지 못할 비범 함과 혜지(慧志)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후성(夏候星). 바로 수년 전 천년고목 아래에서 부친을 기다리던 미동자(美童 子), 하후성은 내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한 번도 책에 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책을 모두 읽은 듯 책장을 덮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 줄


기 미풍이 그의 영준한 얼굴을 스치며 향기로운 도화향을 풍겼다. "아! 향기롭군." 하후성은 낭랑하게 중얼거리고 나서 연못 주위에 만개한 도화를 바라보며 시(詩)를 읊었다.

桃花美女兩相 長得君王 笑看 流春風萬里長城 도화꽃도 절세미녀도 다 좋다고 군왕은 항상 웃음을 띄고 바라 보더라 춘풍은 만리장성을 끝없이 흐르는데.......

낭랑한 시음(詩吟)은 후원의 절경을 더욱 빛나게 했다. 하후성이 읊은 시는 본래 이백(李白)의 청평조사삼수(淸平調詞三 首)의 마지막 수(首)인데 적절히 자구(字句)를 바꾸어 자신의 흥 취대로 부른 것이었다.

그의 뛰어난 시재(詩才)가 발휘되는 광경이었다. 하후성은 시를 읊고 나서 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기지개를 켜듯

창전(蒼天). 드물게도 황사가 흐르지 않는 푸른 하늘은 사뭇 눈이 시릴 정도였 다. 창천의 군데군데에 구름이 흐르고 있거니, 변방의 풍경치고는 매우 경이롭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皇)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는 서성거리다 문득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음, 호대인(胡大人) 댁의 호연향(胡燕香) 소저가 요즘 그에게 반 해서 접근하는 눈치던데......." 하후성은 이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황, 그는 모든 게 다 좋은데 단지 무뚝뚝하고 냉정한 게 흠이란 말야. 호소저 정도면 이 일대에서는 제일의 미녀(美女)이자 재녀 (才女)인데 조금도 흥미가 없는 것 같으니......." 하후성은 책을 정자의 목탁(木卓) 위에 놓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이제는 더이상

읽을 책도 없고... 어디 봉산진(鳳山鎭)에 가서

황이나 만나볼까." 하후성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정자를 걸어 나왔다. 이때 전원(前 院)쪽에서 심한 기침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그것은 매우 창노하고 기운이 쇠잔한 기침성이었다. 일순 하후성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며 걱정스런 어투로 중얼거 렸다. "요즘 할아범의 병은 점점 심해가고... 또 아버님은 벌써 육 년이 지나도록 소식조차 없으니......." 하후성의 신색은 금세 우울하게 변했다. 그는 장원 밖으로 걸어나 가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잘못하면 할아범도 올해를 넘기기가 어렵겠군." 하후성은 묵묵히 장원의 허름한 문을 열고 나섰다. 불과 십사세의 소년, 그러나 하후성에게서는 완전한 성인과 같은 진중한 분위기 가 풍기고 있었다.

도화전현성(桃花田縣城)의 양춘가절. 들뜬 분위기를 틈타 현성의 처녀들도 곱게 단장하고는 도화를 감 상하기 위해 나들이를 나섰다. 그녀들의 밝고 아름다운 웃음소리 가 곳곳에서 들리는가 하면 뭇청년들 또한 처녀들의 뒤를 따르며 각기 관심을 끌기 위해 거들먹거리기도 했다.


하후성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계속 걸었다. "와아아!" "이얍!" 한 쪽에서 떠들썩한 함성과 기합 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와 그의 주 의를 끌었다. 동자(童子)의 티를 벗지 못한 현성의 장난꾸러기 소년들이 패로 모여 무술시합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되지도 않는 동작으로 무술놀이를 하고 있었다.

하후성은 한동안 그 광경을 거리고 있었다.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내심 중얼

'황. 그는 항상 날 놀려댔지, 몸이 약골이라고. 그러나 오늘은 내 반드시 문(文)이 무(武)보다 높음을 인식시켜 주리라.' 하후성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창천에 한 사람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육척(六尺)의 키에 단단한 체격, 준수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 그 리고 먹같이 진하며 귀까지 길게 뻗은 눈썹의 기상이 출중한 사나 이.

독고황(獨孤皇). 바로 그의 모습이었다. 하후성의 얼굴에 점차 부드러운 빛이 떠올랐다. '황.... 그는 참 신비한 인물이지. 산중의 대호(大虎)도 하늘의 비응(飛膺)도 그보다 힘세고 날렵하지는 못해.' 어느덧 하후성은 도화전현성을 벗어나고 있었다. 하란산의 웅지가 그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하란산도 전체가 이 미 봄기운으로 푸르름이 짙어져 있었다. 그러나 산 정상의 봉우리 는 신비스럽게도 새하얀 백설을 그대로 이고 있었다.


봉우리는 만년빙설(萬年氷雪), 산등성이는 초지를 이룬 그 모습은 실로 영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후성은 하란산의 거대한 모습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표정이 장중해지며 눈에서는 기 이한 광채가 흘러 나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하란산! 수천만 년 전부터 저 산은 저렇게 이곳을 굽어보고 있었 다. 수많은 풍상(風霜)과 인간계(人間界)의 영고성쇠까지도 지켜 보면서......." 하후성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그러나 저 산은 늘 담담하기만 하다. 산... 산은 장중하고 또 위 대하다. 더더구나 저 하란산은 더욱 뛰어나다. 멀리 대황야(大荒 野)와 등격리대막(騰格里大漠)까지 한 눈에 굽어보면서도 마치 모 든 일에 초연하고 전능한 신(神)과도 같다!" 하후성의 독백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총기 번쩍이는 눈을 깜박이 지도 않고 하란산을 지켜 보았다. "나의 학문 수업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끝났다고 생각 될 때 저 하란산을 배우리라. 초탈한 저 하란산처럼 나의 마음도 거대하고 광활하게 키우리라." 하후성.

그의 만면에는 정기(正氣)가 환하게 피어 올랐다. 그는 한 동안 하란산을 올려보며 명상에 잠기더니 곧 다시 걸음을 옮겼다. 봉산진은 하란산 서쪽 등성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독고황 은 바로 그곳의 한 장원에서 무척이나 늙어 보이는 두 노인들과 살고 있었다. 하후성도 몇 번 그 두 노인을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괴이하기 짝이 없는 위인이었다. 백발이 성성했 으며 또한 몸은 허약한 듯 깡말랐지만 이따금씩 번뜩이는 안광은 무쇠라도 녹일 듯이 무서웠다.


특히 그들의 몸 전체에서 풍기는 기운은 냉막하고 음산하기까지 하여 하후성은 진작부터 그들이 결코 보통 인물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마치 흐르는 한성(寒星)처럼 차갑다. 그런 사람은 대체로 두가지 형(形) 중 하나다. 하나는 세상사를 초월한 달인 (達人). 또 하나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죽여버린 냉혹무비한 인간 이다. 과연 그들은 이 둘 중 어떤 형에 속할까?' 하후성은 벌써 몇 번씩이나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봉산진으로 향하며 씨익 웃었다.

'어쨌든 황은 좋은 친구이다.' 하후성은 하란산으로 올랐다. 험한 산길을 오르는 그의 히기 시작했다.

이마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

일년 내내 장원에 틀어박혀 책(冊)만 읽는 그에게 봉산진으로 가 는 산길은 너무도 험하고 힘들었다. 하후성은 호흡이 급박해지는 것을 얼거렸다.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내심 중

'이런 때는 황이 부럽다. 그는 이 하란산을 하루에도 몇십 번 씩 이나 훨훨 날듯이 넘을 수가 있으니.' 하후성은 이마에 축축히 배인 음을 멈추었다.

땀을 소맷자락으로 닦으며 잠시 걸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이때였다. "으... 으... 음......!"


하후성은 흠칫했다. '이 산중에 웬 신음성이?' "으... 으......." 낮은 신음소리는 계속 그의 귀로 흘러 들어왔다.

'어디 한 번 가 보자!' 하후성은 마음을 정하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언덕을 넘자 숲이 울창했다. 그는 숲을 헤치며 조금 더 나아갔다. 이어 한 거대한 바위 아래에서 하후성은 걸음을 멈추었다. 집채보다는 조금 작은 바위 밑에 한 명의 도인(道人)이 기대앉아 있었다. 그는 허름한 도포(道袍)에 때가 잔뜩 찌들어 거의 회색빛 에 가까와 보이는 낡은 도복을 입은 늙은 도사(道士)였다. 역시 때에 절은 회색빛의 머리에는 다 구겨진 도관(道冠)까지 쓰고 있 었다. 용모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으되 얼굴이 누렇게 떠 있는 노도인(老 道人). 그가 바위에 기댄 채 눈을 감고 낮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 던 것이다. 하후성은 잠시 멈칫했으나 곧 도인에게 다가갔다. 도인 또한 인기 척을 느꼈는지 급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도인의 눈빛 역시 지 극히 평범했으나 하후성을 보자 경계의 빛을 띄기 시작했다. 하후 성은 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미소는 조금도 악심(惡心)이 없고 세속에 물들지 않은 탈속한 미소로써 모든 사 람을 일시에 다 포용할 수 있을 듯 했다. 도인은 그 미소를 접하자 자신도 모르게 경계심을 풀었고 하후성 이 다가가 공손히 읍하며 물었다. "도장(道長)어른.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 도......." 도인은 그 말에대답 없이 의 눈에는 놀라움의 빛이

하후성을 찬찬히 훑어 보았다. 차츰 그 떠올랐다. 그러나 곧 그 기색은 사라졌


고 부드럽게 웃으며 되물었다. "소시주는 이 근방에 살고 있는가?" 하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시주의 이름은?"

"하후성이라고 합니다." 하후성은 대답한 후 도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노도인의 얼굴은 비록 평범했지만 그 이면에는 현기(玄氣)가 깃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만면에 인자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도인은 하후성에게 나직이 말했다. "소시주께서 빈도를 좀 도와 주시겠나?" 하후성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입니다."

도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리 좀 가까이 와 보게." 하후성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도인은 더욱 자세히 관찰하려 는 듯 하후성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의 시선에 이채가 번뜩인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그는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내심 중얼거렸다. '어허! 틀림없구나. 놀랍도다! 정말 놀랍군, 변방의 산중에서 이 런 천고(千古)의 기재(奇才)를 만나다니! 이 아이의 신체골격과 기질은 정말 너무나도 특이하구나.......'

그러나 일순 도인의 두 눈에는 안타까움이 어렸다. '정말 안타깝도다. 빈도가 백오십 년(百五十年) 간을 살아오는 동


안 처음으로 만난 기재이건만... 천축(天竺)의 마라혈교(魔羅血 敎)에서의 약속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하후성이 그의 상념을 깨듯 물었다. "도장 어른, 제가 도울 일은 무엇입니까?" 도인은 정신을 차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음, 빈도는 이곳 하란산에서 한 마리의 영사(靈蛇)를 만났네. 그 런데 그만 그 영사에 욕심을 부려 잡다가 실수를 하고 말았네. 그 놈에게 물려 독(毒)을 입었지." 도인은 말을 마친 뒤 바지를 조금 걷어 보였다. "아!" 하후성은 탄성을 터뜨렸다. 도인의 왼쪽 다리 무릎 부분이 완전히 흑빛으로 변한 채 퉁퉁 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후성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반면 도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빈도는 영사에 물린 즉시 기(氣)를 막아 독이 더이상 퍼지지 않 도록 상처로 몰았네. 그러나 이대로 두면 빈도의 다리는 곧 썩은 흑수(黑水)로 화해 버리고 말걸세."

하후성은 놀라 급히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독혈(毒血)을 모두 입으로 빨아내야 하네. 빈도는 기를 막고 있 어 할 수가 없네. 누군가 생명을 내걸고 입으로 빨아내야만 하 네." 듣고 있던 하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만일 입에 상처가 있거나 독혈을 빠는 도중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여 삼킨다면 즉시 죽고 네."

마네. 소시주는 필히 생명을 걸어야 하


도인은 말을 하며 의식적으로 하후성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하 후성은 곧 안색이 펴지며 낭랑하게 말했다. "소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도인은 그의 말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 아이는 정말 너무나 순수하구나!' 그는 짧은 순간 깊은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겉으로는 조금도 내 색하지 않고 품속에서 한 자루의 조그만 비수(匕首)를 꺼냈다. 비 수는 전체가 빛나는 금빛이었다. "빈도는 이제 이 금혈비(金血匕)로 다리의 상처를 찌를 것이네. 그럼 즉시 독혈이 솟아나네. 그때 소시주는 지체하지 말고 독혈을 빨아야 하네." 하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도인은 망설이지 않고 즉시 비수로 무릎을 푹 찔렀다. 하후성은 급히 독혈이 막 솟으려는 상처에 입을 대고 빨기 시작했다.

그는 있는 힘껏 독혈을 빨았다. 독혈이 입안에 들어가자 입안이 불에 타는 듯 뜨거워졌다. 그러나 하후성은 입 가득 독혈을 머금 자 일단 뱉어낸 후 다시 빨았다. 그의 태도에는 조금의 꺼리낌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눈살을 찌푸리는 기색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도인은 그 광경을 내려다 보며 더욱 진한 감동을 느낀 듯 두 눈에 모종의 결심의 빛을 담았다. '으음. 안타깝게도 이 아이는 나와 인연이 없다. 그러나 이 아이 를 이대로 보내기가 싫구나. 비록 나의 제자로 삼을 수는 없을 망 정 무엇이든 반드시 해주고 싶다.' 도인은 잠시 눈을 감고 운공(運功)해 보고는 다리에서 독기가 모 두 빠진 것을 느꼈다.


"됐네, 됐어!" 하후성은 즉시 입을 떼더니 입가에 묻은 검은 독혈을 옷소매로 쓱 문지른 다음 빙그레 웃었다. 도인은 그 광경을 찬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소시주는 더럽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그 말에하후성은 미소를 띈 채 말했다. "불가(佛家)에서는 구층 석탑을 쌓는 일보다도 사람을 구하는 것 이 최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그 고귀한 일을 더럽다고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정기(正氣)와 신심이 굳은 분명한 어조에 노도인은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그는 곧 몸을 일으키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네, 소시주." "별 말씀을......." 도인은 하후성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자네에게 답례를 하겠네."

하후성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도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이 늙은이의 선물이라고만 여기고 받아주게." 도인은 곧 품속에서 하나의 푸른 옥갑(玉匣)과 적색을 띈 깃털을 꺼냈다. 적색의 깃털은 기이하게도 일면 부드럽게 보이는가 하면 빳빳하게도 보였으며, 또한 은은한 적광(赤光)을 발산했다. "이 옥갑은 빈도의 선물이고 이 적봉우(赤鳳羽)는 빈도의 신표(信


票)네." 하후성은 얼떨결에 옥갑과 적봉우라는 붉은 깃털을 받았다. "옥갑 안에는 빈도의 몇 가지 무학과 이곳 하란산에서 잡은 금왕 신사(金王神蛇)가 들어있네. 소시주가 금왕신사를 제대로 사용하 고 옥갑의 무학을 익힌다면 장차 큰 도움이 될 걸세." 하후성은 기이한 느낌을 받으며 옥갑과 적봉우를 내려보았다. 도 인이 그를 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언제고 만약 자네가 중원(中原)에 오게 된다면 공동산( 山)의 공동파에 들러주게."

하후성은 옥갑과 적봉우를 도로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도인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허허허... 소시주, 그대의 미간(眉間)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네. 일년 내로 좋지않은 일이 일어날 조짐이네. 그러나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니네." 하후성은 의아한 시선으로 도인을 바라보았다. "만약 이곳을 떠날 일이 생기면 하남성(河南省)으로 가 보게. 그 곳에서 어쩌면 크나큰 기연(奇緣)을 만나게 될테니. 허허 허......." 도인은 너털웃음을 치더니 곧 고소를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빈도는 복이 없으니 그 늙은 중에게 양보해야지. 허허......."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아!" 하후성은 깜짝 놀랐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노도인의 웃음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더니 그의 모습이 차츰 안개처 럼 흐려지며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이어 아주 먼 곳에서 도인의 음성이 바람을 타고 그의 귓전에 모 기소리처럼 가늘게 들려왔다. "빈도의 명호는 적봉우사(赤鳳羽士)라네. 자네가 대성한 후에는 결코 공동을 잊지 말게, 부탁하네. 허허허... 그리고 오늘 빈도를 만난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허허... 허허허......." 이윽고 가늘게 전해지던 웃음소리가 끊어지고 적막만이 감돌게 되 었다. 하후성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그, 그 분은 노신선(老神仙)이었구나!'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멍청히 굳어져 버렸다. 마치 꿈이라도 꾼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푸른 옥 갑(玉匣)과 적봉우(赤鳳羽)가 그곳에 있는 바, 그 두 가지 기물 (奇物)은 방금 전의 일이 생생한 현실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후성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꿈은 아니었구나......."

■ 대소림사 제 1 권 제 2 장 문(文)과 무(武)의 우정(友情) -1 ━━━━━━━━━━━━━━━━━━━━━━━━━━━━━━━━━━━

봉산진(鳳山鎭). 바람이 다소 거세게 부는 데다 지세(地世)가 험한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황량한 곳이었다. 약 백여 호나 될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척박한 산허리를 일구며 사는지라 생활이 빈궁한 편으로 가옥도 대개 모옥이거나 토옥(土屋)이었다. 다만 한 곳의 예외가 있을 뿐이었다. 한 채의 작은 장원(莊園).


그 장원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약 사년(四年) 전에 이곳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따로 이름도 없었다. 그런데 이 장원에 사는 인물들은 매우 괴이한 인물들이었다. 두 명의 깡마르고 냉혹해 보이는 백발노인과 한 명의 준수한 소년으 로, 그 소년의 이름은 독고황이었다. 장원의 후원에는 연무장(練武場)인 듯한 작지 않은 공지가 있었고 그곳에 한 채의 소정(小亭)이 있었다.

지금 정자 안에는 한 명의 흑의청년이 탁자와 마주 하고 앉아 있 었다. 그 탁자 위에는 문방사보(文房四寶)를 비롯하여 세 권의 낡 은 책자가 놓여 있었다. 흑의청년은 바로 독고황이었다. 어느덧 십구 세(十九歲)로 성장한 그는 이제 그 누구라도 한번 보 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신비하고도 특이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 다. 먹같이 검고 진한 눈썹은 세 치나 되게 뻗어있고 흑의와는 대조적 으로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얼굴, 그리고 날카로우면서도 비범한 야망과 지혜가 담긴 깊은 눈(眼). 그리고 반듯한 콧날과 한일 자 로 다문 입술.......

실로 상선기재요 절세미남이었다. 독고황은 무릎에 한 자루의 긴 장검을 놓고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지극히 고요한 그의 자세와 얼굴에서는 무심(無心)이 흘 렀다. 후원의 월동문(月洞門)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하후성이 나타난 것 이다. 하후성은 가쁜 숨을 내쉬며 이마를 땀으로 흠뻑 적신 채, 독고황을 발견하자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대뜸 정자로 뛰듯이 올라왔으나 곧 웃음을 거두고 신색을 가 라앉혔다. 그는 독고황이 명상에 잠긴 것을 알고는 방해하지 않고 탁자 옆에 조용히 앉았다.

탁자에 양팔을 올린 채 독고황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 한 가닥


의문이 피어 올랐다. '황의 이런 모습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대체 무엇을 하는 것 일까?' 하후성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돌려 탁자 위를 바라보 았다. 그의 눈에 세 권의 책자가 보였고 그는 일순 큰 흥미를 느 꼈다. 어려서부터 책이라면 무엇이든지 좋아했던 하후성이 아닌가? 그는 맨 위에 놓여 있는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그러나 책을 바 라보는 그의 시선이 기이한 빛을 발했다. 괴이하게도 표지에 섬뜩한 서체(書體)의 핏빛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이 눈에 뜨인 것이었다.

<수라혈경(修羅血經)>

하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책 이름이 이토록 섬ㅉ하단 말인가?'

그는 뭔가 꺼림직함을 느끼며 책장을 넘겨 보았다. 첫장에는 역시 핏빛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지옥아수라천(地獄阿修羅天)의 피로써 천하(天下)를 씻는다. 수라혈마(修羅血魔) 역천균(逆天均)>

'아!'

하후성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십사 세가 되기까지 이토록 끔찍한


저주가 가득 찬 글을 읽은 적이 없었다. 하후성은 가슴이 마구 떨리는 것을 느꼈으나 자신도 모르게 다음 장을 넘기고 있었다.

<아수라비천마공(阿修羅飛天魔功)>

다시 섬뜩한 글이 쓰여 있었고 다음 장을 넘기니 전신에 핏빛 장 삼(長衫)을 입은 백발노인이 앉아 있는 그림과 빽빽한 주해가 쓰 여 있었다.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집중하여 도해와 구결주해를 읽어 내려갔다. 그는 천하제일의 총명한 두뇌와 오성(五性)을 가진 소 년이었다. 단지 한 번 읽었을 뿐인데도 모든 구결은 그의 머리 속 에 암기되고 말았다. 그러나 구결을 읽은 하후성은 탄식해 마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무공이라는 것이구나! 그런데 무공은 모두가 다 이 렇게 끔찍한 것이란 말인가? 도무지 이 무공 내용에서는 인성(人 性)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으니.......' 그는 계속 책자를 넘겨 보았다.

수라혈경 속에는 각종 검법(劍法), 장법(掌法), 신법(身法)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하후성은 비록 마음이 떨렸으나 이상한 호기심 때문에 모두 읽었다. 한참 후 그는 여전히 목상(木像)처럼 허공만 노려보고 있는 독고 황을 바라보며 내심 또다른 의문을 느꼈다. '황은 이것을 모두 익혔을까?' 하후성은 또 다음 책을 집어 들었다.


<만독진결(萬毒眞訣)> 거기에는 천하의 만(萬)가지 이상의 극독(極毒)을 다루는 법과 독 물을 이용하여 수련하는 독공(毒功) 따위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역 시 모두 한결같이 극악한 내용 뿐이었다. 하후성은 가느다란 전율이 이는 서 마지막 책을 살펴 보았다.

것을 느끼며 만독진결을 덮고 나

<마검통천진해(魔劍通天眞解)>

그 책은 한 권의 검경(劍經)이었다. 살기가 물씬 풍기고 지극히 패도적(覇道的)이며 상상을 초월한 마검식(魔劍式)이 수록되어 있 었다. 하후성은 대강 훑어본 후 책을 덮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 두 권 역시 좋지 않은 느낌이 든다.' 하후성은 힐끗 독고황을 응시했다. 독고황은 그때까지도 눈을 감 고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있는 듯 했다. 그런데 문득 괴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하후성은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다. 독고황의 입에서 붉은 혈홍 (血紅)색 기류덩어리가 숨을 내쉬면 나오고, 들이마시면 빨려들어 가고 하는 괴현상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하후성은 놀라는 한편 신비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잠시 넋을 잃 고 그 광경을 바라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 지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적봉우사(赤鳳羽士)란 도인이 주신 옥갑(玉匣)속의 무공을 황 이 익히는 무공과 비교하면 어떨까?' 하후성은 이 일에 지대한 호기심을 느꼈다.


마침내 독고황은 두 눈을 떴다. 혈홍색 기류는 모두 빨려 들어가 고 없었고 그 대신 그의 눈에서는 차가운 한광이 비수처럼 날카롭 게 뻗어 나왔다. 그 한광은 만물(萬物)을 얼음덩이로 만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가 눈을 몇번 깜빡이자 한광 또한 없어지고 담담한 기운이 감돌았 다. 그리고 잠시 후, 독고황은 눈앞의 하후성을 발견하고는 흠칫놀라 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곧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 왔지? 소성(小星)?"

하후성도 따라 웃어 보였다. "조금 전에." 독고황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소성, 조금만 더 기다려라. 하던 것을 마저 끝내고 얘기하자." 하후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독고황은 정자 밖으로 걸어 나갔다. "소성, 자리에 앉아서 이 형님의 실력을 자세히 보아둬라. 아마 너의 눈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 말에하후성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황, 그대는 무(武)가 영원히 문(文)을 능가하지 못함을 모르는구 나. 설사 그대가 그 검(劍)으로 하늘을 찌른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핫하하하......." 독고황은 앙천광소했다. "소성, 나는 너의 그 호쾌함과 대범하고 밝은 기질을 좋아한다. 비록 네가 문(文)을 알고 무(武)를 모르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욱


너를 좋아하는지도 모르지."

독고황은 말을 마치자마자 장검을 뽑았다. 번쩍! 검집이 떨어져 나가며 눈부신 백광(白光)이 폭사되었다. 검집과 검자루는 흑색인데 반해 검신은 눈부신 백색이었던 것이다. 독고황은 장검을 허공으로 쭉 뻗으며 검식(劍式)을 전개했다. 츠츠츠츠! 대기(大氣)를 가르는 괴이한 음향과 함께 백사(白蛇)가 혀를 내밀 듯 살벌한 검기가 검 끝에서 다섯 자나 치뻗었다.

쉬쉬쉬... 쉭... 파파파파... 팟! 독고황의 몸은 처음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검을 전개할 때마다 검기의 형세는 방원 십장(十丈)까지 뻗었다. 십장 범위는 완전히 검광과 검기의 영향권에 갇혔다. 실로 검초(劍招) 한식 한식 마다가 한결같이 악랄무비하고 괴이했 다. 비록 무공을 모르는 하후성일지라도 그 흉험한 기세와 뼈를 찌르는 살기는 절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하후성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찬연한 백색 검기에 가려진 독고황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저 검법은 바로 수라혈경에 수록돼 있는 수라구마검(修羅九魔劍) 이구나!' 놀라운 일이었다. 어찌 무공을 전혀 모르는 그가 단 한번 본 검법 을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하후성은 한동안 독고황의 검법을 지켜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문방사보에 손을 댔다. 그는 한 장의 화선지를 펼치고 붓에 먹을 찍어들었다. 그리고 다 시 시선을 돌려 한동안 독고황의 검법을 자세히 보았다.


우우웅!

엄청난 마기(魔氣)를 느끼게 하는 파공성과 함께 독고황의 검법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위이이... 웅! 가공할 검광과 검기가 허공 십 장 높이까지 치솟는 것을 보며 하 후성은 내심 부르짖었다. '제 팔 초(八招) 진천수라겁(震天修羅劫)이구나!' 검법은 돌연 홱 변했다. 우우우우... 웅--! 우우웅--!

천지가 온통 아수라(阿修羅)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하후성의 안색이 급변했다. '마지막 초식 영멸수라혼(永滅修羅魂)이구나!' 그의 수중에 들려져 있던 붓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화선지 위를 날았다. 화선지 위에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고 그것은 한 흑의청년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연무장에는 검법시전을 끝낸 독고황이 검을 검집에 집어 넣은 채 처음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자세나 호흡이 전혀 흐 트러지지 않은 태연한 모습이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는 검법을 전개한 것 같지도 않았다.

독고황은 돌아섰다. "하하하핫... 소성! 어떠냐? 나의 검법......?" 그는 갑자기 말을 끊고 의아한 표정을 골몰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지었다. 하후성이 그림에

휙! 독고황은 신형을 번뜩이더니 단숨에 정자 위로 올라섰다.


"소성, 뭐하는 것이냐?"

탁자 위에 시선을 던진 그는 화선지에 그려진 그림에 탄성을 발하 며 경악하고 말았다. 그림 속의 흑의청년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 던 것이다. 놀라움은 그 뿐이 아니었다. 하후성의 그림은 정확히 수라구마검 의 마지막 초식인 영멸수라혼의 검식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보다 더더욱 놀랄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까 독고황 자신이 전개할 때는 괴이하고 사악하기만 했던 검법이 그림에서는 광명정대(光明正大)하기 이를데 없이 변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일대의 군자(君子)가 탕마멸사를 하기 위에 검무(劍舞)를 추 는 듯한 그런 그림이었다. 독고황은 넋을 잃은 듯 굳어진 채 하후 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소성. 너는 이 그림으로 나에게 뭔가를 권유하고 있구나. 그것은 바로.......'

독고황은 더이상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안색은 삽시에 침중해지 고 말았다. 하후성이 밝게 웃으며 물었다. "황, 두 분 노인이 보이지 않는데 어디 가신 모양이지?" 하후성은 의식적으로 화제를 돌리고 있었고 독고황도 그것을 짐작 하고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분은 좀 멀리 가셨다. 아마 열흘은 있어야 돌아오실 것이 다." 독고황은 말하고 나서 몸을 돌렸다.


"소성, 잠깐 앉아 있어라. 내 방에 다녀오겠다." 그러나 독고황은 멈칫했다. 탁자 위에 쌓아둔 세 권의 책자가 흩 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빛이 기이한 변화를 일으켰다.

'혹시... 소성이?' 독고황은 의문을 품은 채 그대로 정자를 걸어 나갔다. 그리고 잠 시 후 그는 소반에 찻주전자와 찻잔 두 개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독고황은 탁자에 앉으며 담담히 말했다. "이것은 사천산(四川産)의 용정연화향문차(龍井蓮花香文茶)라는 것으로 무척이나 고귀한 것이다. 소성에게 맛을 보여 주기 위해 조금 남겨 놓았었지." 독고황은 신중한 동작으로 찻잔에 용정연화향문차를 따랐다. 차는 짙은 청황색을 띄고 있었으며 향기가 금세 정자 안에 감돌았다.

하후성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갑고 시원한 느낌이 목구멍을 적시자 입안이 향긋해지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야! 정말 좋은 차군!" 하후성은 탄성을 발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독고황의 준수한 얼 굴에 만족의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독고황은 표정과는 달리 가라 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성, 너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하후성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독고황은 찻잔을 내려 놓으며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에 말이다. 이것은... 만약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후성은 독고황의 기색에서 일말의 불 안을 느꼈으나 내색치 않고 묵묵히 듣고 있었다.


"내가 만일 훗날 세상의 커다란 죄인이 된다면 너는 나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의미심장한 말에 하후성은 난색을 띄며 반문했다. "황,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독고황은 다소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후성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다만 그의 미소는 일면 천진한 듯 하면서도 무한한 현기(玄機)를 품고 있었다. 하후성은 담담하게 말했다. "황, 이 하란산은 언제쯤 평지(平地)로 변할까?" 독고황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갑자기 그것이 무슨 말이냐? 이 거대한 하란산이 어찌 평 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냐?"

하후성은 그 말에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황, 나는 산을 좋아한다. 특히 이 하란산을 더욱더 좋아한다!" 하후성은 말을 그치고 그윽한 눈빛으로 독고황을 응시했다. 독고 황의 표정이 가볍게 동요하고 있었다. 뭔가 의미를 되새기려는 듯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하후성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황, 나의 마음은 곧 하란산이다." 독고황의 눈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소성.......' 독고황은 이 순간의 감정을 스스로도 정의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


다. 단지 분명한 것은 하후성에게서 진하디 진한 우의(友義)를 느 낄 수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는 마음의 파문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하란산의 웅지를 우러러 보며 입을 열었다. "소성, 너의 꿈은 무엇이냐?" 하후성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훌륭한 대학자(大學子)가 되는 것이 꿈이다." 독고황은 기이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명예(名譽)를 얻고 싶지 않느냐?" 하후성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명예? 글쎄... 나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 했다." 문득 독고황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하후성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힘찬 음성으로 말했다.

"소성, 저 하란산의 정상에 올라 밑을 보면 광활한 대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으음." "그러나 그것은 장대한 중원 땅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중원... 그 곳에는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나타나고 또 소멸되었다." 독고황의 눈에서는 강렬한 야망과 집념이 넘쳐 흘렀다. "나는 언젠가 저 중원에 뛰어들 것이다. 저 광활한 중원을 무대로 나의 힘을 시험해 보겠다." 독고황은 말을 마친 후 하후성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확 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성! 너는 문(文)의 제 일인자(一人者)가 되어라. 나는 무(武)


의 일인자가 되겠다. 나는 천하의 모든 인간들을 내 발아래에 놓 고 굽어 보겠다!" "크ㅋ......." "핫핫핫... 소성, 만약 그 때가 되면 나는 천하에서 가장 화려하 고 멋진 마차(馬車)로 너를 나의 집으로 데려가겠다! 어때? 재미 있지 않느냐?" 하후성은 짓궂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재미있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이 하란산도 배꼽을 잡고 웃으려 한다. 하하하하......." 독고황은 눈썹을 치켜 세웠다. "이 녀석! 나를 비웃고 있구나!" 그는 짐짓 하후성을 치려는 시늉을 했다. "하하하하......." 하후성은 크게 웃으며 혀를 쑥 내밀어 보였다. 그는 이어 시선을 돌려 백설을 잔뜩 이고 있는 하란산의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 고 눈을 반짝이며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황! 하란산의 정상에 한번 올라보자!" 그 말에독고황의 눈빛도 번쩍 빛났다. "좋다! 지금 가자!" 그들은 정자를 뛰어 내려갔다. 장원의 문을 나서자마자 그들은 나란히 하란산의 주봉(主峯)을 향 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않아서 하후성은 지치고 있었다. "헉... 헉헉!"

그는 숨이 턱에

찰 지경인 반면 독고황은 마치 산보하듯 유유히


걷고 있었다. 사실 걷는다고 하지만 그 속도는 뛰어가는 하후성보 다 훨씬 빨랐다. 독고황은 하후성이 헐떡이며 쳐지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하후 성을 향해 몸을 돌이키며 말했다. "소성, 너는 너무나 약하구나. 몸이 그렇게 유약하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어떠냐? 내가 무공을 좀 가르쳐 줄까?" 헐레벌떡 그에게 다가간 하후성은 저었다.

이마의 땀을 훔치며 고개를 내

"필요없다. 너에게... 배우지 않아도 곧... 몸이 튼튼해질 거 야......." 하후성이 이렇게 말한 것은 얼마 전 적봉우사(赤鳳羽士)가 준 옥 갑이 생각나서였다. 그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 옥갑의 무공을 익혀 주리라.'.

황의 높은 코를 반드시 납작하게 만들어

이런 하후성의 심중을 알리 없는 독고황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녀석, 고집은......." 그는 하후성을 갑자기 번쩍 안았다.

"아, 아니... 왜?" "가만 있거라. 네 체력으로 하란산 정상까지 오르려면 해가 다 질 거다!" 휙! 독고황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신형을 날렸다. 실로 엄청난 속도 로 내닫고 있었다. 윙--! 윙--! 하후성은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고 그 속도감에 진저리를

쳤다. 그가 만일 땅을 본다면 놀라 기절초풍을 했으리라.


독고황은 한번 신형을 솟구칠 때마다 무려 삼십 장(三十丈)을 날 아갔으며 허공 십장(十丈)까지 솟구치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통 천경악할 일이었다. 전설상의 팔보간섬(八步 蟾)도, 능공허도(凌空虎渡)도, 그리고 등천공(登天空)의 경공술도 따르지 못할 가공할 경공술이었다. 순 식간에 구름과 작은 산봉우리를 넘어 독고황은 하란산의 주봉에 당도했다. 그곳은 작은 분지를 이루고 있었다. 온통 만년빙설로 뒤덮여 은색 을 이루었으며 뼈를 얼릴 듯이 춥고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봉우 리 밑으로는 운해(雲海)로 구름과 안개가 각 봉우리를 누르듯 흐 르고 있었으니....... 일대 장관이었다. "아아!" 바닥에 내려진 하후성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바로 발 밑은 운 해와 산봉우리들이 늘어져 있었고, 멀리로는 광활한 대지가 끝없 이 펼쳐져 있었다. 서쪽으로는 등격리사막(騰格里沙漠)이, 동쪽으로는 거치른 황야 (荒野)가, 그리고 남쪽으로는 끝없는 대지가 안개 속에 희미하게 묻혀 있었다. 북쪽은 계속 산이었으며 남쪽은 바로 신비한 중원인 것이다.

하후성은 광활한 대지를 둘러보며 연신 탄복을 금치 못했다. "황! 정말 이 대륙은 너무도 드넓구나!" 독고황은 호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하지만 나는 네가 볼 수 있는 저 끝까지 만 하루면 갔 다 올 수 있다." 독고황의 모습에서는 불타는 투지와 호기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중천에 뜬 태양을 바라보며 팔을 벌렸다. "나의 야망(野望)은 저 태양보다도 높고 꿈은 대륙보다도 넓다.


하하하하하......." 하후성은 멍하니 대륙과 태양, 그리고 독고황의 모습을 바라보았 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가슴속에서도 치열한 불꽃 이 피어 올랐다. 그것은.......

바람이 분다. 따뜻한 훈풍이었다. 천년고목(千年古木).

하란산 기슭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천년고목 앞, 그 언덕에 두 인영이 나타났다. 바로 하후성과 독고황이었다. 황혼.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고 부드러운 일사의 황혼빛을 받으며 그 들은 다정하게 고목나무 아래로 다가왔다. 독고황은 황혼에 물든 불그스레한 얼굴로 고목을 올려보며 미소를 지었다. "소성(少星), 너는 이 고목나무를 기억 하느냐?" 하후성도 따라 미소지었다.

"이곳은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지." 독고황은 기이한 웃음을 흘리더니 고목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품 속에서 조그만 비수(匕首)를 꺼내 고목의 껍질을 벗겨내고는 그곳 에 글씨를 새겼다.

<독고황(獨孤皇)>

그 광경을 지켜보는 하후성의 눈에 부드러운 읏음이 어렸다. 이어


독고황은 비수를 그에게 건네 다가갔다.

주었고 하후성은 고개를 끄덕인 뒤

<하후성(夏候星)>

그의 이름이 바로 옆에 새겨졌다. 독고황은 나란히 새겨진 두 이름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하후성의 어깨를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소성! 이 천년고목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우정은 영원이 변치 않을 것이다! 하하하......." 하후성은 미소를 지었다. 독고황은 한동안 고목에 새겨진 두 이름 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더니 이윽고 몸을 돌렸다. "자 소성, 날이 어두워졌다. 이만 돌아가자. 내 너를 바래다 주겠 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고목나무를 떠나갔다. 일락(日落). 황혼은 지고 대지는 어둠에 가라앉고 있었다. 하란산의 거대한 웅 자도 어둠에 스며들 듯 컴컴해졌다. 휘 --이-- 잉--! 천년고목에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우-- 우-- 웅-! 가지가 떨며 괴이한 울음소리를 토(吐)해 냈다. 천년고목은 말이 없었다, 천년(千年) 동안을. 그리고 앞으로도 말이 없을 것이다, 고목으로써의 생명이 다할 그


날까지.......

겨울(冬). 엄동설한(嚴冬雪寒)의 동지(冬至), 북방의 기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혹한이었다. 폭설(暴雪). 모진 광풍과 함께 쏟아지기 시작한 폭설은 연 사흘째 계속되고 있 었다. 온 천지는 백색으로 물들었고 하란산 일대 역시 그야말로 설중(雪中)에 갇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위-- 잉! 휘이-- 잉! 광풍을 동반한 폭설은 천지를 온통 눈으로 뒤덮고 말았다. 그리고 어둠, 폭설이 계속 내리는 가운데 밤이 도래했다. 장원(莊園). 도화전현성에 위치한 허름한 장원은 어둠과 눈보라에 묻혀 적막하 게만 보였다. 바로 하후성이 거처하는 장원이었다. 후원의 한 침방.

방안 하고 색은 수가

구석에는 낡은 나무침상이 있었고 침상 위에는 백발이 무성 주름살 투성이인 노인이 기진한 듯 누워 있었다. 노인의 안 희다 못해 푸른빛이 감도는 것이 도저히 산 사람이라고는 볼 없었다.

노인의 옆에는 하후성이 잔뜩 근심어린 기색으로 지켜보고 있었 다. 하후성은 계속 물을 적신 천으로 식은 땀이 배이는 노인의 이 마를 닦아주고 있었다. 노인이 어느 순간 힘겹게 두 눈을 뜨자 하후성은 황급히 물었다. "할아범, 몸이 아직 괴로운가요?"


매우 염려스럽고 관심어린 어조였다. 그러나 잠시 희뿌연 눈길을 바로잡지 못하던 노인은 겨우 촛점을 맞추는가 싶더니 기침부터 연방 해댔다. "콜록! 콜록... 도, 도련님... 콜록! 노복은 괘... 괜찮습니다. 밤이 깊었으니 그만... 돌아가 주무십시... 오. 콜록! 콜...록!" 하후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할아범, 내 지......."

걱정은 말아요, 얼른

할아범이나

병이

나아야

그 말에노인의 두 눈이 흐릿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는 깡마른 손을 힘겹게 들더니 하후성의 손을 잡았다. 온통 주 름살투성이의 뼈만 남은 손이었다. "그... 그럼요....... 이렇게... 착하신 도련님을 두고... 어찌 이 늙은 몸이 죽을 수가....... 콜록... 콜록! 콜록......." 노인의 기침은 점차 더 심해졌다. "할아범!" 하후성이 다급히 불렀으나 노인의 안색은 이미 잿빛이 되고 있었 다. "욱! 콜록......!"

다시 한바탕 심한 기침을 하자 이번에는 시커먼 피가 한덩이 토해 져 나왔다. 그는 안간힘을 쓰듯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주... 주인님도 무심(無心)하시지....... 벌써... 칠 년이나 되 었는데도....... 욱! 콜록!" 시커먼 핏덩이가 연이어 노인의 목구멍에서 넘어왔다. 하후성은 어쩔 줄 모르는 듯 당황하며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할아범! 할아범......." 노인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꺼져드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도련님... 도련님... 부... 야... 합니다......."

부디....... 훌륭한 사람이... 되어

"하, 할아범!" "끄... 끝까지... 돌보지 못하는... 용... 서......."

노복을... 용서... 용서...

마침내 하후성의 손을 쥔 노인의 깡마른 손에서 힘이 빠져 버렸 다. 노인은 결국 숨이 다하고 만 것이었다. "할아범! 할아범......." 하후성은 크게 울부짖으며 노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열을 터

뜨렸다. 어려서부터 줄곧 자신을 보살펴주던 노인(老人). 그가 죽은 것이었다. 비록 주종관계라고는 하지만 하후성으로서는 친조부나 다름 없이 의지해왔던 노인이었다. 더구나 부친이 안계신 동안 넓은 장원에서 단둘이 외로움을 나누 며 칠 년이라는 긴 세월을 동고동락 해오지 않았던가? 그저 평생 동안 충심만을 가지고 착하게 헌신적으로 살아온 노인이었다. "할아범! 할아범......." 하후성의 오열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렇게 혼자서 훌쩍 가버리시다니! 할아범......." 방안은 온통 하후성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눈은 계속 내렸다. 새하얀 백설은 어둠 아랑곳없이 계속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폭설(暴雪), 그야말로 어둠을 다.

속에서 하후성의 마음도

짓뭉개 버릴 듯이 내리는 폭설이었


하루가 소리없이 지났다.

여전히 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실로 몇십 년 만의 대폭설이었다. 소년(少年) 하후성. 그는 추운 줄도 모르는 듯 창문을 열어젖힌 채 쏟아지는 눈을 바 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불과 하루 사이에 눈에 띌 정도 로 수척해져 있었다. 하후성은 멍하니 눈발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커다란 장원에 지금은 단지 나혼자 뿐이다.'

갑자기 고독감이 엄습해 왔다. 그 고독감은 그에게 뼈가 저릴만큼 지독했다. 비로소 하후성은 자신의 생활 중에서 죽은 할아범의 비 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깨닫고 있었다. 위-- 이-- 잉-- 휘--잉-! 밖은 오로지 폭설과 광풍 뿐이었다. 다만 이따금씩 방안으로 눈보 라가 휘몰아쳐 들어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하후성은 몸을 부들부 들 떨어야 했다. 고독(孤獨). 애초부터 그는 고독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더욱 완벽하게 고독 해져 버렸다.

혼자라는 사실에 하후성은 미칠 것만 같았다. 평소에는 그리도 좋 아하던 눈이건만 웬지 이젠 눈조차 싫었다. 저주스러운 느낌으로 그의 가슴에 퍼붓는 눈....... 눈이 오는 날에 할아범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범......."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웅얼거려 보았다. 외로움은 뼈를 깎다 못해 폐부를 저미고 있었다. 불현듯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하나의 얼굴


이 있었다. 준수하고 믿음직한 청년, 바로 독고황이었다.

일단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하후성은 미치도록 그가 그리워졌다. '황(皇)! 보고 싶다!' 그동안 할아범의 병세가 악화되어 근 한달 간이나 그를 만나지 못 했다. 독고황의 모습이 황량한 그의 가슴에 물밀 듯이 밀려 들고 있었다. "황......." 하후성은 부르짖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에게 가보자!'

그는 지체없이 방을 나섰다. 장원의 밖은 눈이 몇자나 쌓여 있었고 허리까지 눈이 덮혀 걸음을 옮기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후성에게 아무 런 문제도 되지 못했다. 그로서는 어떻게 하든 빨리 이 장원을 벗 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하후성은 눈을 마구 헤치며 곧장 화원을 지나고 또 전원(前院)을 지났다. 힘겹게 대문을 열어 젖히는 그의 눈에는 형언키 어려운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앗!"

그러나 그는 대문 앞 일 장(一丈) 쯤 거리에서 무엇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눈속에 손을 짚은 순간 전해져오는 뭉클한 감촉! 그것은 놀랍게도 분명 사람의 가슴 부분의 감촉이었다. "이, 이것은!" 하후성은 대경하여 급히 일어났다. 그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사이,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눈더미가 문득 꿈틀거렸다. 나직한 신음성이 그 안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으... 으으... 음....... 서... 성(星)아야......." 하후성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이 몸을 떨었다. 그는 곧 앞 뒤 가 릴 것 없이 급히 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눈속에서는 차츰 한 중년서생(中年書生)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 다. "아니!" 하후성은 경악성을 발했다. 중년서생은 워낙 남루한 옷을 입고 있는 데다 깡마르고 피골(皮 骨)이 상접하여 도무지 산 사람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온 몸이 시퍼렇게 얼어 있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후성의 눈길이

중년인의 쾡한 얼굴을

살피다 흡사 자석에라도

이끌리듯 그의 왼쪽 귀에 가서 멈추었다. 중년인의 왼쪽 귀, 그곳 에는 손톱만한 붉은 점이 하나 박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하후성의 전신은 경련으로 떨렸다. "아... 아... 아버님!" 그 중년서생은 바로 하후성의 부친이었다. 하후연(夏候淵). 이것이 중년서생의 이름이었다.

하후성이 일곱 살 때 집을 떠났던 부친 하후연. 그가 마침내 돌아 온 것이다. "아버님......." 하후성은 절규하듯 외치며 급히 하후연을 안았다. 그는 힘겨운 줄도 모르고 하후연을 안고 장원 안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방 침상 위에 눕혔다. 하후연은 완전히 뻣뻣하게 얼어 있었다. 그가 이런 몸으로 장원 앞까지 온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아버님!" 하후성은 얼음장같이 굳어진 부친의 몸을 주무르며 처절하게 외쳤 다. 하후연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힘겹게 두 눈을 떴으나 아쉽게 도 그의 눈에는 촛점이 없었다. "아버님! 정신 차리세요, 성아예요! 성아......." 하후성이 귀에 대고 이렇게 외치자 하후연의 몸이 한 차례 격하게 떨렸다. 그의 입술이 기적적으로 움직였다. "서... 성아라고....... 그... 그럼 내가... 집에... 까지 왔단 말이냐......." 거의 알아 듣기 힘든 말이었으나 하후성은 부친의 입 가까이 귀를 대고 있었으므로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하후성은 격동하여 외쳤다. "그래요, 아버님! 아버님은 지금 집에 계세요." 하후연의 움푹 꺼져 들어간 촛점 없는 눈자위로 눈물이 고였다.

"하... 하늘에 감사한다......." "아버님... 흑흑!" "서... 성아야, 손을......." 하후성은 급히 자신의 손을 차디찬 부친의 손에 대주었다. 하후연 은 미약하게나마 손에 힘을 주며 더듬거렸다. "칠 년(七年)... 만이구나. 칠 년......." "흑흑... 아버님......." 하후성은 오열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후연은 한동안 그의 손을


쥐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성아야....... 슬퍼하지 말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라....... 이 말을... 해야 한다는... 오직 한 가지 집념... 으 로... 이곳에... 왔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약해서 거의 들릴락말락 했다. 하후성은 그 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성아... 너의 어머님은... 살아... 계신다......." 뜻밖의 말에 하후성의 몸은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 그것은 과거 그에게는 하나의 금기(禁忌)였다.

부친인 하후연은 언제나 모친에 대해 물으면 침통한 표정을 짓곤 했다. 고사리같은 하후성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는가 하면 며칠 동안이나 방안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고 보냈던 적도 있 었다. 때문에 어린 하후성은 부친이 슬퍼할까봐 의식적으로 모친의 얘기 를 꺼내지 않았고, 그것은 아예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칠 년(七年)만에 돌아온 부친이 지금 그의 손을 잡고 어머니의 얘기 를 꺼낸 것이 아닌가? 아아, 모친(母親), 얼마나 사무치도록 그리운 사람인가! 하후연의 꺼져드는 음성이 계속되었다.

"너의... 어머니의 이름은... 주(朱)... 설(雪)... 란(蘭)..... .." 하후연의 흐려지던 눈에서 갑자기 신비한 빛이 발산되었다. 사랑 하는 아내의 이름이 그에게 어떤 생기(生氣)를 부여한 것일까? "십(十)... 오년(五年) 전의... 일이었다......." 그는 아련한 추억을 더듬듯 천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십오년 전.

하후연(夏候淵)은 일개 낙척서생(落拓書生)이었다. 비록 가슴에는 무한한 학문과 청운의 높은 뜻을 지니고 있었으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빈궁한 가운데 천하를 떠돌아 다녀 불운한 낭인문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천하를 주유하며 계속 학문 을 정진시켜 그의 학문과 덕망은 점점 높아만 갔다. 그러던 중 하남성(河南省)의 명사(名寺)에서 그는 운명의 전기를 맞았다. 백마사에서 책을 읽던 그는 그곳에 불공을 드리러 온 절 색의 미소녀를 만난 것이었다.

주설란(朱雪蘭). 이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청춘의 두 남녀는 이내 서로 인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말았고 급기야 하후연이 주설란의 조부에게 찾아가 청혼을 하기에 이르렀 다. 주설란의 부친은 당시 일찍 타계하고 없었다. 그러나 주설란의 조부는 일언지하에 하후연의 청혼을 거절해버렸 다. 주설란의 조부로 말하면 강호(江湖)에서 위명이 쟁쟁한 일대 고수로, 가문 역시 무림대세가(武林大世家)였다. 그러므로 일개 떠돌이 문사(文士) 따위에게 금지옥엽인 주설란을 절대로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후연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더우기 주설란은 당시 하후연과는 이미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반면에 그 사실은 주설란의 조부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노발대발한 나머지 하후연을 잡아 지하뇌옥에 가두 고 말았다. 일점혈육인 손녀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떠돌이 사내와 정(情)을 통했다 하여 실로 가혹한 처사를 감행한 것이었다. 손녀에 대한 사랑이 큰만큼 미움도 컸던 것일까? 이후로 주설란이 아무리 눈물로 애원해도 조부의 마음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무심한 세월만이 흘렀다.


그러나 세월은 조부의 분노를 점차 용해시키는 듯도 했다. 주설란 이 귀여운 옥동자(玉童子)를 낳게 되었는데 그 아기가 바로 하후 성이었다. 하후성이 태어나자 주설란의 조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후연을 뇌옥에서 끌어냈다. "너는 진정 설란(雪蘭)을 사랑하느냐?" 그의 느닷없는 질문에 하후연은 비장하게 말했다. "저의 목숨보다도 더 사랑합니다." "좋다! 너희들의 관계가 이렇게 된 이상 노부도 더이상 막고 싶지 는 않다."

"아!" 하후연과 주설란은 모두 감격의 탄성을 발했다. 그러나 조부는 역 시 호락호락한 위인이 아니었다.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는 하후연에게 문초(問招)라도 하듯 냉엄하게 덧붙였다. "그렇다. 그 조건을 이루지 않는 한 너와 너의 자식을 결코 노부 의 집 안으로 들여놓을 수 없다. 네가 노부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너와 너의 자식을 노부의 혈족으로 인정하겠다." 하후연은 아연 긴장하여 물었다.

"그 문제가 무엇입니까?" "노부는 닭잡을 힘도 없는 너같은 떠돌이 문사를 가장 싫어했다. 네가 만약 무인(武人) 못지 않게 참다운 용기와 인내를 보여줄 수 있다면 너를 받아 들이겠다." "하명(下命) 하십시오." "천축(天竺)에 가면 뇌음사(雷音寺)라는 신비의 절이 있다. 그곳 의 진산이보인 뇌음진경(雷音鎭經)을 가져 오너라. 그럼 허락하겠


다." 하후연의 얼굴은 그만 창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무공을 조금도 모르는 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찌 일만 리(一萬里)가 넘는 천산(天山)을 넘어 천축까지 다녀올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 설혹 간다하여도 뇌음진경을 가져오는 일은 도저히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뇌음사는 천축비문(天竺秘門)으로 무공(武功)이 엄청나게 높은 신 비의 라마승의 집단이었다. 더구나 뇌음진경은 그들의 밀종무학이 수록된 지보로써 타인에게 넘겨줄 물건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하후연은 기어코 외치고 말았다. "하겠습니다, 어르신!"

이후로 그는 갓 낳은 핏덩이인 하후성을 안고 중원의 북쪽 하란산 까지 왔다. 그리고 도화전현성에 장원을 짓고 하후성이 일곱살 될 때까지 함께 있었다. 그러다가 하후성이 일곱살 나던 해에 결국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천축으로 떠났던 것이다.

하후연. 여기까지 말한 그의 안색은 회색에 가까워졌다. "서... 성아야....... 이 애비는... 칠 년(七年)동안... 뇌음사에 서 온갖 수모를 겪으며... 마침내... 뇌음진경을... 가져왔 다......." "아... 아버님......." 하후성은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친의 일생이 너무 나도 처절한 한(恨)으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후연은 더욱 꺼져드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처... 천축은 너무... 멀어... 이 애비의 약한 체질... 로서... 견딜 수가... 없었다....... 춥고 허기진 것을... 참고... 수많은 난관을 ... 뚫고... 일만 리를 지나... 이곳까지... 왔... 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하나의 황색보자기를 꺼냈 다. "이것이... 뇌음... 진경... 한(恨) 맺힌 물건....... 애비는... 틀렸지만... 너는... 이것을 가지고... 외증조부에게 가... 어머 님을... 만나라....... 그리고... 그... 리고......." "아... 아버님!" "그리...고... 나... 나는... 최선을... 다 했고... 사랑... 했었 노라고... 전(傳)... 전해......." 차츰 하후연의 손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그의 동공이 서서히 위

로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아, 아버님!" 최후의 힘(力)을 다한 듯 하후연의 입술이 달싹였다. "성아....... 내 몫까지... 행... 행복...해...라....... 그리 고... 외증조부의... 집...은... 중(中)... 중... 중......." 별이 떨어졌다. 유성(流星)이 떨어졌다. 하후연이라는 이름의, 일생을 불운하게

지냈던 낙척서생(落拓書

生)은 마침내 이렇게 허망하게 지고 말았다. 사랑하는 아내를 다 시 보지도 못한 채 어린 아들의 비통한 눈물 속에서 그는 죽은 것 이었다. "아버님---!" 절규(絶叫)! 하후성의 피맺힌

절규가 하늘을 찔렀으나 죽은 자(死者)는 말이


없었다. 단지 싸늘히 식어갈 뿐이었다. 하후성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니, 흘릴 눈물조차 없었다. 너 무도 커다란 충격에 눈물조차 말라 버린 것일까?

"아버님! 칠 년 만의 상봉이 이토록 허망하다니요....... 더구나 아버님은 그 칠 년간을......." 그는 넋이 나간듯 눈을 부릅뜬 채 읊조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사셨을 수가....... 아버님--!" 피눈물. 피눈물이 흘렀다. 하후성의 눈가가 찢어지고 마침내 눈물 대신 피 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눈, 눈은 더욱 거세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폭설에 잠긴 설야는 말이 없다. ■ 대소림사 제 1 권 제 3 장 대소림사(大少林寺) -1 ━━━━━━━━━━━━━━━━━━━━━━━━━━━━━━━━━━━

후원(後園). 폭설이 분분이 흩날리는 후원 한 가운데서 하후성은 잿빛 하늘을 우러러 보며 서 있었다. 너무나 큰 타격이 그의 정신을 산산조각 으로 만들었는지 그의 얼굴은 무표정해 보였다. 문득 하후성은 허리를 굽히더니 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손가락 이 시퍼렇게 되었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하얗게 얼어버렸다.

잠시 후 맨땅이 나왔다. 돌처럼 단단히 얼어붙은 땅이었다. 그러 나 하후성은 그 언 땅을 맨 손으로 파헤쳤다. 피(血). 새빨간 피가 손톱 사이로 흐르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에는 양 손이 온통 벌겋게 피로 젖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아픔


을 느끼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땅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고 그제서야 하후성은 손을 멈추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된 부친 하후연을 곱게 헝겊으로 싼 뒤 정성스레 안아들고 후원으 로 다시 내려왔다.

시신을 구덩이에 넣은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시 손으로 구덩이를 묻어 조그만 봉분을 만들 었다. 그 위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고 눈 위에는 또한 점점이 선홍 빛 핏방울이 묻어나고 있었다. 바로 하후성의 손에서 떨어지는 피였다. 하후성은 넋이 나간듯 봉 분을 내려다 보았다. "아버님......." 그는 나직히 뇌이며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크흑!" 다시금 진한 통곡(痛哭)이 그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뜨겁게 솟아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참으며 아홉 번 절을 한 다음 비틀비틀 일어났다. "어머님을 찾겠어요. 그러나 아버님....... 외증조부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결코......." 하후성은 입술을 짓씹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은 용서하실지 몰라도... 저는 절대로 외증조부를 용서하 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天). 잿빛의 하늘은 어느덧 기울어가고 있었다. 아침인가? 동녘의 하늘이 밝아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실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텅 빈 하후성은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조차 분별할 능력을 잃고 말았다. 벌써 오일(五日)째 계속되는 눈발은 었다.

조금도 그칠 줄을 모르고 있

하후성은 계속 잿빛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이 더욱 미치도록 그리워졌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모 든 것을 이야기하고 통곡하고 싶었다. '황(皇).......' 눈물이, 메말라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비로소 흘렀다. 그러나 하 후성은 소맷자락으로 즉시 눈물을 닦았다. '울지 말자! 울지 말자....... 나는... 대장부(大丈夫)다. 오늘 이후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울지 않을 것이다!' 하후성은 내심 이렇게 외치며 다시 하늘을 보았다. 그의 눈(眼)속에 눈(雪)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녹아 물이 되 어 흘렀다.

봉산진(鳳山鎭). 독고황이 사는 장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곳은 풍설(風雪)만 사 납게 몰아치고 있을 뿐 인기척 하나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독고황도 괴이한 두 백발괴노인도 그 누구도 없었다. 장원은 온통 눈에 덮인 채 죽음같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텅 빈 독고황의 방(房). "......!"

그곳에 하후성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독고황이 사용하던 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탁자 위에


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로 미루어 오래 전에 사람이 떠났음을 알 수가 있었다. 휘-- 이-- 잉! 열린 창문으로 을씬년스런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밀려들어 왔다. 하후성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황....... 너는 또 어디로 갔는가?'

뼈저린 외로움은 두려움으로 변하여 그를 엄습했다. 탁자 위에 벼 루로 눌려진 한 장의 종이가 눈에 띈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것은 한 통의 서찰로 하후성은 웬지 그 서찰을 펼쳐 보기가 두 려운 느낌이 들어 한참 동안 집어들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창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휘-- 이-- 잉--! 바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눈(雪). 눈은 끝도 없이 내리고 있었다.

하후성은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며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춥... 다.......' 내심 이렇게 중얼거린 그는 드디어 서찰을 집어 들었다. 서찰을 든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서찰의 봉서가 그의 눈 앞에 펼쳐졌다.

들려지자 곧 웅혼무비한 서체(書體)가

<소성(小星), 말없이 떠나는 나를 용서해다오. 지난 오년간 너와 같이 지낸 세월은 진정 즐거웠다. 창문 밖에서는 눈발이 약간 내 리고 있다. 하늘이 잿빛인 것을 보니 폭설(暴雪)이 내릴 것 같다. 소성, 너도 지금 이 눈을 보고 있겠지? 지금 나의 마음은 지극히 슬프다. 소성, 너도 이해하겠지? 너를 만나보고 떠나고 싶었지만


웬지 서로의 마음만 더 아플 것 같아 그대로 떠난다.......>

"황......." 하후성은 여기까지 읽고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결국... 너도... 떠났구나......." 하후성은 불어오는 한풍에 다시 몸을 으스스 떨었다. 그는 잠시 망연히 있다가 서찰을 마저 읽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고 싶으냐? 묻지마라, 나도 모른다. 목 적지는 없다. 단 한가지 일을 완수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해야만 한다. 그 일이 무엇이냐고 또 묻고 싶겠지? 소성(小星), 그것은 말할 수 없다. 봉산진(鳳山鎭)에서 오년 동안 산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하후성은 또다시 멍해졌다.

'그 일 때문에 이곳에 살았었다고? 그 일이 대체 무엇이길래? 황, 너는 온통 비밀 투성이구나.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모 두.......' 서찰은 다시 이어졌다.

<......소성(小星), 날씨가 춥다. 너는 몸이 약해서 병이라도 걸 릴까 근심이 되는구나. 소성, 진정 보고 싶다. 앞으로 더욱 그렇 겠지. 그러나 볼 수가 없구나. 언제 너와 내가 만나게 될지는 나 역시 기약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험난한 나의 운명(運命) 때문이 다. 그러나 소성,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강하다. 어떤 일에도 굴 복하지 않을 것이다. 소성, 눈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옆에서 두 노인이 갈 길을 재촉한다. 소성, 이제 필(筆)을 놓아야겠다. 눈시울이 젖는다. 소성, 그럼.......


성(星)을 가장 좋아한 벗 황(皇).>

하후성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툭! 서찰이 힘빠진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황.......'

갑자기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하후성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치밀 고 올라왔다. 그리고 정신이 빙글빙글 돌며 아득해졌다. 쿵! 하후성은 머리를 탁자에 박았다. 폭설이 퍼붓는 이 사흘 동안 벌 어진 일은 어린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타격을 주고 말았다. . 첫째 날은 할아범의 사(死). 둘째 날은 부친 하후연의 사(死). 그리고 마지막 날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벗 독고황과의 이별!

하후성은 머리를 탁자에 박고 내심 피맺히게 중얼거렸다. '단 사흘동안... 모든 것이 단절되고 말았구나.' 하후성의 가슴이 터질 듯이 압박되었다. '모든 것이 나의 곁을 떠났다, 모두! 이제 나의 주위에는 아무도, 아무도 없다!' 휘-- 이-- 잉! 풍설이 방안을 다시금 을씬년스러운 한기로 가득 채웠다.

하후성은 문득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그


의 안색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렇다. 모든 것이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 은.......' 하후성의 시선이 창을 통해 했다.

설풍에 가려진 웅대한 하란산으로 향

'하란산(賀蘭山)! 하란산만은 여전히 변치 않는다. 그리고, 그리 고 그 천년(千年)의 고목(古木)도!' 갑자기 하후성은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 났다. 그는 방을 뛰쳐 나가더니 눈속에 푹푹 빠지며 뛰기 시작했 다.

천년고목(千年古木). 위-- 이-- 잉--! 위-- 이-- 잉--! 거센 풍설(風雪)이 언덕을 할퀴듯 후려치고 폭설이 천지를 뒤집었 다. 그러나 하란산 기슭에 우뚝 서 있는 천년고목은 설화(雪花)를 가득 피워낸 채 의연히 서 있었다.

눈에 반쯤 묻히다시피하며 나타난 한 소년, 하후성이었다. 그는 고목나무 아래까지 비틀거리며 다가와 멍하니 고목을 응시했 다. 풍설에 옷자락이 찢어질 듯 휘날렸으나 하후성은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우두커니 선 채 고목만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어려서부터 나는 이곳에서 아버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려 왔다.' 하후성의 얼굴에 감회가 어렸다.


'그리고 오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황(皇)을 만났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다시금 솟구쳤으나 하후성은 소맷자락을 끌 어 당겼다. '또... 눈물이 흐르려 하는구나. 울지 않겠다고 맹세해 놓고.' 하후성은 입술을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던지 입술이 터져 핏 기가 비치고 있었다. 그는 고목 곁으로 다가가더니 고목에 두텁게 붙어있는 눈을 손으 로 털어내기 시작했다. 얼어붙어 단단했지만 그는 참을성 있게 눈 을 모두 떼어냈다.

나무결이 보이는가 싶더니 나란히 드러났다.

곧 그곳에 칼로 새긴

두 개의 이름이

<독고황(獨孤皇)> <하후성(夏候星)>

하후성은 떨리는 손으로 글씨를 어루만졌다.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시

선은 글씨 밑으로 내려가다 흠칫했다. 그곳에 새롭게 새겨진 글씨 가 얼핏 보였던 것이다. 하후성은 다급히 다시 눈을 씨가 드러났다.

털어냈고 비로소 선명하게 새겨진 글

<다시 만날 그 날까지 변치 않는 우정(友情)을 위하여.......> 하후성의 가슴이 격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황(皇)!"


그는 가슴이 터져라 허공을 향해 외쳐댔다. 그의 만면에는 기쁨의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황(皇)!" 그의 외침은 눈보라를 뚫고 멀리멀리 대륙 끝으로 퍼져나가는 듯 했다. 반면 외침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육신은 기진하여 허물어지 고 있었다. 스르르....... 하후성은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자 고목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러나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고 눈은 도무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 다. 하후성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무척이나 많이 내리는군.' 졸음이 밀려 들었다. '졸린다. 조금만... 잘까?' 하후성의 눈이 서서히 내리감기고 있었다. 어디선가 꿈결처럼 아 득히 독고황의 음성이 들렸다.

- 소성(小星)! 잠들지 마라. 잠들면 죽는다!

하후성은 씨익 웃었다. '황, 조금만 잘께. 무척이나 몸이 피곤해. 그러고 보니 난 사흘 동안 밥 한 끼, 물 한 모금 안먹었단 말야. 부탁이야, 조금 만.......'


- 안돼! 소성(小星), 일어나라!

하후성은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너의 말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자고 나면... 자고 나야만 모든 것이... 새로와질 것 같거든.......' 하후성의 두 눈은 완전히 감기고 말았다. 휘-- 이-- 이-- 잉--! 풍설(風雪)이 몰아쳐 그의 몸을 눈으로 덮었다.

차츰 그는 설인(雪人)이 되어가고 있었다. 평화롭게 잠든 그의 얼 굴에는 천진하고 행복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무슨 좋은 꿈이라 도 꾸고 있는 것일까? 꿈속에서 누구라도 만난 것일까? 독고황? 아니면 부친을....... 그것도 아니면 얼굴은 모르지만 사무치게 그리운 어머니라도 만나 는 것일지....... 혹은 할아범, 다정한 충복 할아범을 만나 바둑 이라도 두는 것일까? 하후성의 얼굴에 떠도는 미소는 점점 짙어졌다. 그러나 몰아치는 눈발이 곧 그의 머리와 얼굴마저 덮어씌워 잠시 후에는 그 미소조 차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하후성은 완전히 눈덩이로 화하고 있었다. 이대로 그는 외로운 세상을 떠나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러 가려는 것인가. 그렇게도 빨리....... 휘-- 휘-- 이-- 잉! 풍설은 더욱 천지간에 혼돈을 일으킬 듯 휘몰아쳤다. 눈(雪).


눈이 대지(大地)를 삼키고 있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듯 거센 움직임이 그곳에서 일었다. 눈보 라를 뚫고 언덕 위 고목나무를 향해 치솟아 오르는 한 인영(人影) 이 있었던 것이다. 과연 초자연의 증명이련가? 인영은 이십 장(二十丈)을 단숨에 날 아와 고목 아래에 당도했다. 그는 전신에 회색승포를 입은 노승(老僧)으로 일견하기에도 백 세 (百歲)가 넘어보이는 창노한 모습이었다. 홍안의 노승. 그의 양미간에는 기이하게도 붉은 홍점(紅點)이 나 있었다. 그리 고 흰 눈썹에 눈송이가 얹혀 그의 눈썹은 더욱 길어 보였다.

회의노승은 고목 아래에 내려서자마자 고목에 기대앉은 채 설인이 되어 있는 하후성을 발견했다. "아미타불......." 그는 침음성으로 불호를 외우더니 급히 눈을 헤쳤다. 잠시 후 앉은 채 굳어있는 하후성을 발견한 노승은 경악성을 터뜨 렸다. "오! 진정 큰일날 뻔 했구나! 조금만 늦었다면 천고의 기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뻔 했다. 아미타불... 관세음......."

노승은 곧 조심스럽게 하후성의 맥(脈)과 호흡을 살핀 다음 그를 안아 들었다. 그는 동정의 눈빛으로 하후성을 내려다 보며 인자하 게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소사제(少師弟)....... 슬픔이란 순간적인 것, 어찌 한 순간의 비애로 인해 인생을 버릴 수가 있겠는가? 더우기 자네 에게는 앞으로 해야할 일이 태산(泰山)같이 많고... 운명(運命)의 책임이 있거늘......." 휘-- 익!


노승은 하후성을 안고 신형을 솟구쳤다. 눈보라 속에서 그의 중얼 거림이 들렸다.

"백 년(百年) 동안 기다려온 염원일세, 소사제. 기나긴 백 년 동 안 세 분의 선사(禪師)들이 자네를 기다렸네. 이 운명의 만남 을... 아미타불... 과연 대사부(大師父)님의 혜지는 천기(天機)를 맞추셨네. 이곳에 자네가 있는 것까지 맞추실 줄이야......." 휘-- 이-- 이-- 이--잉! 광풍폭설(狂風暴雪). 북방의 대지는 온통 눈보라에 휘감겨 천지색(天地色)을 잃고 말았 다. 오로지 건곤일색(乾坤一色), 눈(雪)... 뿐이었다.

소림사(少林寺). 당(唐) 초엽, 혹은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세워졌다고 하는 소림 사.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천축(天竺)에서 선종(禪宗)의 불경을 가지 고 소림에 들어옴으로써 소림사는 수천 년 무림사(武林史)의 태산 북두(泰山北斗) 격인 존재가 되었다.

면벽구년(面壁九年). 달마대사는 토굴에서 구 년의 면벽을 통해 마침내 무학의 시작이 되는 두 권의 기서(奇書)를 남겼다. 이른바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洗髓經). 이 두 권의 기서로 인해 대소림사의 역사(歷史)는 시작되었다. 그 이후 천 년(千年).


도합 사십이 대(四十二代)를 내려오는 동안 수많은 고승(高僧)이 명멸했다. 그리고 그동안 소림의 무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특히 소림칠십이비전절예(少林七十二秘傳絶藝)는 달마대사 이래로 소림 최고의 무공(武功)이었다. 그 밖에도 세인들은 수많은 절공 비기들이 소림사에 비장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실제로 작게 나누면 근 천팔백육십 종(千八百六十種)의 비학(秘 學)이 소림에 있었으니 그야말로 중원무학의 보고(寶庫)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림의 역사는 곧 무림의 역사이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칠백 년 전(七百年前). 희대의 대마두였던 혈세천존(血世天尊)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전 무림을 피바다로 만들며 혈세교(血世敎)를 일으켰다. 무림은 그의 장하(掌下)에 신음했다. 그러나 결국 혈세천존도 마지막 소림의 관문(關門)에서 야망이 꺾 이고 무너졌다. 오백 년 전(五百年前)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강남북무림(江南北武林)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며 무림사상 최고의 고수라고 자부하던 천극수라대제(天極修羅大帝), 그도 역시 최후 에 가서는 소림의 한 무명고승(無名高僧)에 의해 영원히 진토 속 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는 이백 년 전(二百年前).

섭혼마안공(攝魂魔眼功)과 차녀미심대법(叉女迷心大法)으로 전 중 원의 기라성같은 고수들을 치마폭 아래 굴복시키고 마음껏 희롱했 던 절세의 대마녀 천마교주(天魔敎主) 벽안마희(碧眼魔姬), 그녀 조차도 끝내는 소림 고승의 불심(佛心) 아래 눈물을 뿌리며 이 세 상에서 사라졌다. 소림사는 정도무림의 영원한 기둥이었다. 또한 꺼지지 않는 협골(俠骨)이었으며 그 어떤 폭풍 속에서도 의 연히 줄기를 뻗어가는 정의의 가람이었다.


숭산(嵩山) 소실봉(少室峯).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대소림사는 숭산 소실봉 자체를 불문(佛門) 과 무학(武學)의 성지(聖地)로 만들고 있었다. 수많은 법당(法堂)과 불전(佛殿), 석탑(石塔), 그리고 줄지어 건 립되어 있는 법사....... 소림사의 규모는 방대하기 이를 데 없었 다. 그 중 소림오각(少林五閣)을 이르자면 불심각(佛心閣), 장경각(藏 經閣), 세심각(洗心閣), 법화각(法華閣), 천수각(千手閣)이었고 소림오원(少林五院)으로 불리우는 곳은 달마원(達磨院), 수계원 (授戒院), 계도원(戒導院), 선좌원(禪坐院), 지객원(知客院)이었 다.

소림사의 가장 중요한 요지는 바로 이 오각오원(五閣五院)으로 소 림오각은 전선대(前先代)의 장로 이상의 고승들이 관리하며 소림 오원은 현 장문인(掌門人)과 동배의 대사들이 관장했다. 그 밖에도 삼전(三殿)과 팔당(八堂) 삼십육방(三十六房)이 있었는 데 모두가 뛰어난 소림의 고수들이 관장하고 있었다. 특히 삼전 중에서 나한전(羅漢殿)은 소림사의 중들이 무학을 익히 는 곳으로, 저 유명한 소림백팔나한대진(少林百八羅漢大陳)이 이 곳의 주력이었다. 장엄무비한 소림사. 과연 그 누가 대소림을 넘볼 수 있겠는가?

소림의 역사는 끝없이 되풀이 소리로 시작되고 있었다.

되는 불경(佛經) 읽는 소리와 법괘

불심각(佛心閣). 이곳은 소림 깊숙한 위치에 자리잡은 고색 창연한 건물로 당금 소 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소림삼성승(少林三聖僧)의 첫째인 천심 선사가 관장하고 있었다.


나이가 모두 백오십 세를 넘겼으며 천심(天心), 천뢰(天雷), 천기 (天機)로 이어지는 소림파 최고 배분의 세 고승은 이미 소림의 일 에 관여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단지 천심선사는 불심각을, 셋째인 천기선사는 장경각을 담당하고 있는 한편, 둘째인 천뢰선사는 괴이하게 소림 내에서조차 아무 것 도 맡지 않고 소림의 금역(禁域)이라 일컬어지는 자죽림(紫竹林) 속에 은거하고 있었다. 이들 천(天)자 항렬의 삼성승은 현 장문인 현공대사(玄空大師)의 사승(師僧)들이었다. 천심선사는 바로 전대(前代) 장문인이었던 것이다.

불심각의 한 정실(淨室).

삼인의 고승들이 침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침상 위에는 한 명의 백의소년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하후성(夏候星), 바로 그였다. 그의 안색은 백랍같이 창백해져 있어 핏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마 치 죽음(死)의 문턱을 이미 넘어서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세 명의 고승들이 줄곧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중 중앙에 앉아 있는 노승, 그는 이미 불(佛) 그 자체로 보일 만큼 인자하고 장엄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희고 둥그런 얼굴에는 혜광이 감돌고

있었으며 은염이 가슴까지

자라 있었고 백미(白眉)는 귀 밑까지 뻗어 있었다. 더우기 두 눈 은 물처럼 고요했다. 우측의 노승은 주사(朱砂)빛 얼굴에 각이 진 네모 꼴의 위맹한 모 습이었다. 두 눈은 화등잔처럼 활활 타고 있었고 괴팍해 보이는 인상으로 특히 두 팔이 길고 머리가 컸다. 그리고 좌측의 노승은 약간 마른 듯 하나 매우 청수한 용모를 지 니고 있었다. 안색이 다소 창백한 게 흠이라면 흠일까? 그의 두


눈은 끝없는 지혜를 포괄하고 있는 듯 현기가 넘치고 있었다. 이 세 노승은 어찌 보면 오륙십 세로, 또 어떻게 보면 백 세가 훨 씬 넘어 보이기도 하는 신비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야말 로 일컫기를 소림삼성승(少林三聖僧)이었으니.......

가운데가 천심선사(天心禪師)요, 우측과 좌측의 천뢰선사(天雷禪師)와 천기선사(天機禪師)였다.

두 노승은 각기

놀라운 일이었다. 강호는 물론 소림의 일까지도 전혀 상관을 하지 않는 삼성승이 한 자리에, 그것도 무명의 소년을 놓고 머리를 맞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는 실로 믿지 못할 기변(奇變)이 아닐 수 없었다. 왜? 어떻게 하여 하후성이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방안은 침묵에 싸여 있었다. 단지 방안 탁자 위에 피워 둔 조그만 청옥향로에서 푸르른 향연이 피어 올라 청아한 향(香)을 품고 있 을 뿐이었다. 삼성승의 둘째인 천뢰신사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대사형, 이 아이의 몸은 지금 한 구의 시체나 다름 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손을 쓰길 망설이는 것입니 까?" 그 말에 가운데 앉은 천심선사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천뢰사제, 아직은 때가 아니네. 좀 더 기다려야 되네." 그러나 천뢰선사는 성격이 몹시 화급한 듯 주사빛 안색을 변화시 키며 말했다. "대사형! 이미 사흘이나 기다렸소이다. 현오(玄悟)가 이 아이를 데려온 때와 전혀 차도가 없는데 만약 그러다가 이 아이가 숨이라 도 끊어진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게 아닙니까?" 천심선사는 대답 대신 빙그레 불존(佛尊)의 미소를 지으며 좌측에 앉은 천기선사를 바라보았다.


천기선사는 곧 담담하고 의미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뢰사형, 지금 이 아이는 마음 속에서 수많은 심마(心魔)와 싸 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손을 써봤자 그대로 살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천뢰선사는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의아한 듯 물었다. "천기사제(天機師弟), 그럼 이 아이를 살리는 것 외에 또다른 목 적이 있단 말인가?"

천심선사는 합장을 한 후 자비롭게 말했다. "천뢰사제, 조금 후면 이 아이는 곧 가사(假死)상태에 들게 되네. 그것은 곧 무심(無心), 무아(無我), 무념(無念), 무상(無常)의 상 태네. 즉 이 상태는 천(天), 지(地), 인(人)이 일치되는 것이나 다름없네." 천뢰선사는 마침내 침묵을 지켰다. 천심선사가 기이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달마선사께서 열반에 드신 지 천 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기재 들이 나왔지만 아직 그 누구도 최고무학인 달마역근세수경(達摩易 筋洗髓經) 내의 반야밀다대승신공(般若密多大乘神功)을 십이성(十 二成) 성취한 사람은 없었네." 천뢰선사의 안색이 약간 변하는 다.

것을 보며 천심선사는 합장을 했

"그것은 자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연이 없기 때문이었네." "아미타불......."

천뢰선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호를 외웠다. 천심선사는 침상 위 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하후성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저 아이의 몸은 지금 가사상태에 이르러 있으므로 무념무아무상 무심의 경지와 천지인에 도달해 있는 상태네. 거기에 소림의 무상 영약인 대환단(大還丹)을 복용하고 또다시 본문의 개정대법(開頂 大法)을 쓴다면 커다란 영효를 얻을 수 있네." "흐음." "그렇게 되면 전신의 삼백육십오혈맥 내의 온갖 더러움이 씻기고 십이경맥의 유통이 조금도 막힘 없이 흐르게 되어 천하에서 가장 깨끗한 순수지체가 이루어지게 되네."

"아!" 천뢰선사는 탄성을 발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있더니 이윽고 탄 식하며 말했다. "정말 대사형의 뜻은 이 우둔한 사제, 영원히 쫓지 못할 것 같습 니다." 천심선사는 빙그레 웃었다. "천뢰사제,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야. 자네는 무공 방면에서 나보 다 훨씬 높지 않은가? 소림사상 본문 칠십이종절예(七十二種絶藝) 를 모두 통달하고 반야밀다대승신공까지 십성(十成) 익힌 자가 자 네 말고 또 누가 있었던가?"

천심선사는 부드럽게 말하며 천뢰선사의 어깨를 잡았다. "앞으로 이 아이의 무공성취와 운명은 모두 자네에게 달렸네, 사 제." 천뢰선사는 두 눈을 감았다. "아미타불......." 그의 주사빛 얼굴에 불현듯 고뇌가 어리자 천심대사는 진중하게 물었다. "사제, 자네는 아직도 그 때 일을 원망하는가?"


천뢰선사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미 백 년이 지났습니다. 사형, 그 당시 나의 성격이 너무나 거 칠고 살심이 깊었으니... 당시 장문인이시던 대사형께서 녹옥불령 (綠玉佛令)으로 소제를 금제(禁制)하신 것을 어찌 원망할 수 있겠 습니까?" "아미타불......." "어쨌든 간에 백 년 동안 불망헌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잊어버렸 습니다." 천뢰선사의 눈이 더욱 깊숙하게 감겨지자 천심선사는 낮게 불호를 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조용히 있던 천기선사가 갑자기 입 을 열었다. "아! 사형, 보십시오!" 천심과 천뢰, 두 고승의 시선은 일제히 그가 가리키는 하후성에게 로 향해졌다. 창백했던 하후성의 안색이 평정되었는가 하면 가슴 의 기복이 눈에 띄게 줄고 호흡이 미약해져 있었다. 아니, 거의 숨을 쉬지않는 것처럼 보 이기도 했다. "무(無)의 상태다!" 천심선사는 이렇게 외치고 나서 급히 말했다.

"천기! 대환단을!"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천기선사는 즉시 품속에서 조그마한 붉은 옥갑(玉匣)을 꺼냈다. 그는 재빨리 옥갑을 열고 그 속에서 밀랍된 단약을 하나 꺼냈다. 단약. 그것은 크기가 용안(龍眼)만 했다. 천기선사는 조심스럽게 밀랍을 벗겨냈다. 그러자 붉은 단약이 나 타나며 방안은 금세 그윽한 향기로 가득차게 되었다. 천기선사는 멍하니 대환단을 내려다 보며 탄식했다.


"열 알 밖에 없던 대환단(大還丹)! 천 년이 흐르는 동안 모두 사 용하고 마지막 남은 하나인데......." 그 말에 천심선사는 다시 자비롭게 웃었다. "허허허허... 천의(天意)를 이룸일세, 사제." 천기, 천뢰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천기선사는 가사상태에 빠져있는 하후성에게 대환단을 복 용시켰다. 대환단은 하후성의 입에 들어가는 즉시 용해되어 그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천심선사는 담담히 말했다.

"천뢰, 이제는 자네 차례일세, 자네의 반야밀다대승신공으로 이 아이의 몸에 개정대법을 시행하여 대환단의 약력(藥力)을 도움과 동시에 임독양맥, 천지인맥을 타통하고 벌모세수(伐毛洗髓), 탈태 환골(脫胎換骨) 시켜 주게." 천뢰선사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침상 곁 으로 다가가 정좌했다. 그의 전신 승포자락이 갑자기 팽팽하게 부풀어 오름과 동시에 사빛 얼굴에는 장엄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소림최고의 비학인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시전한 것이 었다. 그의 몸 일장(一丈) 둘레에 은은한 현광이 장엄하게 둘러졌 다. 천심선사와 천기선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천뢰선사는 다음으로 두 손바닥을 움직이더니 하후성의 양쪽 가슴 에 장심(掌心)을 밀착시켰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천뢰선사는 계속 개정대법을 시


행하고 있었다. 그와 하후성의 주위에는 담담한 현광이 계속 감돌 고 있었다.

차츰 천뢰선사의 안색이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아울러 그의 이마 에는 땀이 배기 시작했다. 천심선사는 그 사이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별빛이 초롱초롱한 야천(夜天)을 응시했다. 한동안 그 상태 로 침묵을 지키더니 문득 담담한 음성을 흘려내었다. "천기사제, 자네 몇 살인가?" 천기선사는 흠칫하더니 곧 대답했다. "올해로 백육십이 세 입니다."

"백육십이 세라... 허허허... 그러고 보니 자네가 소림에 입문한 지도 벌써 백오십년이나 되었군." 천기선사는 의문을 품으며 몸을 일으켜 천심선사 곁으로 가 섰다. 그는 감회 깊은 음성으로 말했다. "소림은 이 사제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곳입니다. 음 양절맥(陰陽絶脈)으로 인해 이십 세를 못넘길 저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준 곳입니다." "그렇군. 아미타불......." "비록 아직까지도 음양절맥 때문에 무공을 조금도 익히지 못했으 나......." 그가 말을 흐리자 천심선사는 낮은 웃음을 발했다. "허허허... 천기사제, 나는 사제가 소림의 그 누구보다도 유능함 을 알고 있네. 비록 자네가 무공을 시전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장 경각(藏經閣)에 있는 천팔백육십 종의 소림 무학을 모두 암기(暗 記)하고 있으며 또한 각종 기관, 역리(易理), 천문(天文), 진법 (陳法) 등 천하무불통지(天下無佛通知)이니 어찌 타인(他人)이 따 를 수 있겠는가? 실상 오늘날의 소림이 이토록 강건해진 것도 자 네의 지혜 덕분이 아닌가?"


그들의 등 뒤에서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만약 사제가 무공을 익혔다면 지금쯤 저를 훨씬 능가했을 것입니 다." 천심, 천기선사는 동시에 몸을 돌렸다. 천뢰선사가 땀을 닦고 있 는 것이 보이자 천심선사는 급히 물었다. "사제, 그 아이는?" 천뢰선사는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공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이 아이 스스로에게 달렸습니다. 이 아이의 능력이 대사형의 짐작과 같다면 장차 소림 제일의 고수 가 될 것입니다."

"소림제일!" "소림사상 최고 고수로 말입니다." 세 성승의 눈길은 일제히 하후성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는 기 대와 갈망, 그리고 염원 등이 짙게 어려 있었다. 천심선사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천뢰, 천기사제, 저 하늘을 보게." "무슨 기운이라도?" "별이 아름답지 않은가? 그런데 저 암천(暗天)의 한 곳에서 천혈 성(天血星)을 중심으로 오대마성이 떨어졌네." "오오!" "엄청난 위난이 무림에 닥칠 것이네.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이제 그 모든 것은 저 아이에게 달렸네. 저 아이에게......." 천뢰, 천기선사의 안색이 일제히 굳어졌다. 그들의 눈은 아득한 천공(天空) 중에 명멸하는 수많은 성좌로 향해졌다.


하후성. 그는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의 전신에 서는 은은한 신광이 감돌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대소림사 제 1 권 제 4 장 소림(少林)에 입문(入門)하다 -1 ━━━━━━━━━━━━━━━━━━━━━━━━━━━━━━━━━━━

빙폭(氷瀑). 차라리 하나의 거대한 얼음기둥이라 해도 좋았다. 폭이 오 장(五丈), 높이가 근 사오십 장에 달하는 거대한 폭포가 혹한으로 인해 얼어붙어 있었다. 우르르릉-- 쏴-- 아!

빙폭 사이로 채 얼지 않은 물이 굉음을 내며 쏟아져 내려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비폭(飛瀑)으로 인해 주위에 자욱한 물안개와 얼 음가루가 휘날렸다. 이월(二月) 말이었다. 장소는 숭산 서북 쪽의 한 심곡(深谷). 세차게 쏟아지는 빙수 아래 한 소년이 가부좌를 튼 채 전신으로 폭포수를 맞고 있었다. 십오 세 소년, 그는 준수하고 영민하게 생겼으며 벗은 몸매는 약 간 수척해 보였다.

쏴-- 아!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에 긴 머리칼이 그의 상반신을 덮었으며 온 몸은 퍼렇게 얼어 있었다. 혹한이 최대로 기승을 부리는 이월에 그것도 빙폭에 앉아 폭포수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보통사람은 엄두도 못낼 일을 해내면서도 소년의 얼굴에는 전혀 고통의 빛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다름 아닌 하후 성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이 보이지 않는 대신 온갖 번뇌(煩惱)가 얽혀 어지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리 속에는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일곱 살 때의 부친과의 이별과 천년고목에서 부친 하후연을 기다 리다 영원한 벗 독고황을 만난 일, 그리고 어느 폭설이 내리던 날 그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할아범이 죽은 일....... 어디 그뿐인가? 긴 세월만에 돌아온 부친 하후연의 죽음과 독고황 과의 기약없는 이별 등 수많은 상념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런 기억들을 껴안고 마침내 어 버렸던 것까지도.......

폭설 속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

그러나 어느 날 하후성은 깨어났고 그 때 그의 곁에는 한 명의 인 자해 보이는 노승(老僧)이 앉아 있었다.

구순(九旬)이 넘어보이는 노승, 그는 바로 현 소림사의 사십이 대 장문인(掌門人)인 현공대사(玄空大師)였다. 현공대사는 망연자실하여 의식의 미궁(迷宮) 상태에 놓여있는 하 후성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일대의 대선승 천심선사(天心禪師)의 예언으로 소림의 현오대사가 그를 데려온 일, 그리고 삼성승이 그를 소림제일 고수로 키우기 위해 마지막 남은 대환단을 복용시키고 개정대법을 시행하여 탈태 환골 시킨 일 등. 결국 하후성은 그 모든 얘기를 듣고 오히려 더욱 더 멍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너무나도 큰 운명의 시련과 갑작스런 변화가 그로 하여금 허탈 상태로 접어들게 했던 것이다. 현공대사는 그 시기에 그에게 잠언(箴言)을 전해 주었다.


- 소시주, 인생을 살다보면 수많은 과정을 겪게 되는 법이오. 그 과정 중에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칠정(七情)을 두루 거치면서 드디어 참된 하나의 인간으로 성숙되는 것이오. 슬픔과 비탄에 빠져 그것을 벗어나지 못함은 의지가 부족한 탓이오. 참된 인도(人道)에 이르려면 반드시 그 어떤 타격이라도 딛고 일어서야 만 하는 것이오. 불가(佛家)에서는 모든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버 려야만 참된 나(眞我)를 얻을 수 있으며 해탈할 수 있다고 했소. 칠정오욕(七情五欲)과 백팔번뇌(百八煩惱)를 물리쳐야만 득도할 수 있는 것이오.

하후성은 빙폭에 앉아 마음 속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아버님! 할아범! 황(皇)!' 그러나 그 누구도 그에게 대답을 주는 자는 없었다. 그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세차게 경련했다. 마음 속의 고통과 싸 우는 그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폭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한 암석 위에서는 두 명의 고승이 우뚝 서서 하후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현 소림의 장문인인 현공과 처음 하후성을 소림에 데 려온 현오대사였다. 미간에 홍점이 나 있는 현오대사는 불호를 외우며 말했다. "아미타불... 저 아이의 마음속에 저토록 많은 번뇌가 있으 니....... 과연 대사부(大師父)님의 염원이 성취될까 걱정이오." 그 말에 현공대사는 만면에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합장했다. "사형, 며칠 내로 저 아이는 모든 것을 벗어날 것입니다."

기이하게도 소림의 현 라고 부르고 있었다.

장문인인 현공대사는 현오대사에게 사형이

현오대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장문인의 말씀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소?" 잿빛의 하늘을 응시하는 그의 눈길에 알 수 없는 감회가 어렸다. "장문인, 어쩐지 소승은 저 아이에게 남다른 정(情)을 느끼고 있 소. 아마도 저 아이의 현재 사정이 과거의 소승과 너무나 흡사하 기 때문인 듯 합니다." 현공대사의 얼굴에 착잡한 빛이 어렸다.

'아! 사형께서는 아직도 그 여인을 잊지 못하시는군.' 현오대사는 자기를 쳐다보는 현공대사의 시선에 언뜻 홍조를 띄우 며 어색한 듯 웃었다. "허허허... 장문인께 그만 소승의 마음을 내보인 것 같아 부끄럽 소이다." 현공대사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말했다. "사형, 마지막 눈이 올 것 같군요." 현오는 다시금 짙은 잿빛을 띈 하늘을 응시했다.

현공이 나직히 그에게 부탁했다. "사형, 계속 저 아이를 살펴 주십시오.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현오는 정중히 합장하며 대답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현공대사도 마주 합장하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불과 두 걸음을 옮겼는가 싶은 순간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것은 놀랍게도 실전(失傳)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소림의 유일한 경 공비예(輕功秘藝)인 무흔불화영(無痕佛化影) 신법이었다. 현오대사는 멍하니 그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더니 탄식하며 중얼거


렸다. "아미타불... 진정 멀었도다. 장문사제(掌門師弟)의 불심(佛心)은 나보다 백배로 높으니......." 현오대사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중얼거렸다. "아아! 대사부의 혜안이 얼마나 높으신가? 사제를 장문인으로 내 세우신 혜안 덕분에 소림은 영원할 것이다." 눈발이 희끗희끗 떨어지기 시작했다. 현오대사는 흩날리기 시작하 는 눈발을 맞으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과거의 추억들이 머리 속에 삼삼히 피어 올랐으나 곧 그는 고개를 흔들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이미 육십 데......."

년이나 지난 아득한

과거의 일인

자탄하는 그의 두 눈에는 흐릿한 안개가 어렸다. "빈승에게 불심이 얕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진정 그 일만은 죽 는 순간까지도 잊지 못할 것이다." 눈(雪). 눈이 점점 쏟아지지 시작했다.

현오대사는 쏟아지는 눈발을 바라보며 문득 외쳤다. "눈이여, 펑펑 쏟아져라. 그때처럼......." 현오(玄悟). 과연 그에게 무슨 깊은 사연이 있길래 백 세가 넘도록 번뇌를 떨 치지 못하고 이토록 상심하는 것일까? 결국 그 번뇌로 인해 그는 삼성승의 대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소림의 대통을 받지 못하고 사제 에게 장문인 자리를 넘기지 않았던가. 현오대사의 암울한 시선은 빙폭 속에 정좌하고 있는 하후성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곧 그의 눈에 감탄의 기색이 어렸다.

"아!"


현오대사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지극히 평정하게 가라앉은 하후성의 안색에는 무념무아무심무상 (無念無我無心無常)의 일체감(一切感)이 나타나고 있었다. "아! 저럴 수가......." 현오대사는 노안에 격동을 실으며 부르짖었다. "성공했구나!"

수계원(授戒院). 이곳은 소림의 승려로 입문하는 자에게 삭발을 하고 계(戒)를 내 리는 곳이다. 수계원은 지금 엄숙한 분위기였다. 수계원의 상? 餠〈?소림의 현 장문인인 현공대사가 엄숙하게 앉아 있었고 그의 뒤에는 소림의 막강한 고수인 사대금강(四大金剛)이 신상처럼 버티고 있었다. 또한 그의 앞에는 소림오원(少林五院)의 현자(玄字) 항렬 원주(院 主)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달마원주(達摩院主) 현오대사(玄悟大師), 수계원주(授戒院主) 현 암(玄岩), 계도원주(戒導院主) 현각(玄覺), 선좌원주(禪坐院主) 현광(玄光), 지객원주(知客院主) 현정(玄正). 그들은 당금 소림의 주축이랄 수 있었다. 그 밖에 수계원에는 십팔나한(十八羅漢)을 비롯하여 소림의 고수 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다.

수계원의 원당 중앙에는 하후성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은 완전히 담백무심(淡白無心)했다.


둥! 어디선가 북소리가 울렸고 현공대사가 장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시주, 그대는 이제 모든 번뇌를 씻었는가?" 하후성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현공대사는 자애스런 미소를 지어보인 뒤 수계원주를 불렀다. "현암사제." "네!" 수계원주 현암대사는 합장을 하며 일어섰다. "원주는 수계원의 하시오."

율법에 따라 저 시주에게 계를 내리고 삭발을

현공대사의 말에 수계원주 현암대사는 서서히 걸어 하후성의 앞으 로 갔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을 펴 하후성의 머리에 얹었다.

"시주, 소림의 입문을 후회하지 않는가?" "네." "불문(佛門)은 곧 사바세계를 벗어나는 일이다. 세속의 연(緣)을 끊겠는가?" "네." "불문오계(佛門五戒)와 소림십계(少林十戒)를 지키겠는가?" "네." 하후성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울러 그의 표정은 물처럼 담담했 고 음성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럼 계(戒)를 받아라." 현암대사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것은 전음입밀(傳音入密)로, 본시 부터 소림의 계는 본인에게만 전달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조용히 이를 듣는 하후성의 얼굴이 엄숙하게 굳어졌다. 이윽고 현암대사가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정혜(丁慧)." "네, 원주님!"

낭랑하고 힘찬 음성과 함께 십팔나한 중에서 젊은 승려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는 이십여 세쯤 되어 보였는데 청수한 용모에 두 눈에는 혜지(慧知)가 감도는 비범한 중이었다. 그는 양손에 쟁반과 서슬이 푸른 비수(匕首)를 받쳐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름을 받자 비수를 들고 하후성의 곁에 섰다. 그는 먼저 상단의 현공대사와 오원주를 향해 절을 하고는 하후성 의 머리를 비수로 삭발하기 시작했다. 스슥, 스스슥....... 맑은 음향과 함께 하후성의 긴 머리칼이 속속 바닥으로 잘려져 떨 어졌다.

하후성은 두 눈을 스르르 감았으나 표정에 일점의 변화도 없었다. 그의 무릎에 떨어지는 머리칼은 잠시 전만 해도 그의 속세를 상징 하던 번뇌의 상징이었다. 이른바 그의 과거와 현재를 잇던 인연의 머리칼이 속속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광경에 상단에 앉아있던 현공대사는 물끄러미 하 후성을 바라보다 내심 탄식했다. '과연 대사부님의 말씀대로다. 저 아이는 불문과 인연이 없다. 그 러나, 그러나.......' 현공대사는 합장을 했다. 그의 얼굴에 언뜻 아쉬움의 빛이 스치는 사이 하후성의 머리는 모두 삭발되었다.


파르란 머리가 드러나고 하후성은 마침내 승인(僧人)이 되었다. 그의 마음이 어떤 색채로 변해 있을지 그것은 오직 그 자신만이 알 일이었다. 현공대사는 장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사제(少師弟), 너의 법호는 오늘부터 현수(玄修)다." '현수(玄修).' 하후성은 나직히 다.

되뇌었다. 그의 준미한 눈썹

끝이 부르르 떨렸

현공대사가 다시 장중하게 말했다. "소사제의 소림입문을 진정으로 축하한다." 하후성. 과연 그는 완전히 불제자가 된 것인지....... 하후성의 무심한 얼굴은 차츰 더 무감동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불심각(佛心閣). 소림제일각(少林第閣)이라고도 부른다. 불심각의 선방(禪房)에 소림제일의 선승인 천심선사가 포단을 깔 고 단정히 앉아 있었고 그의 맞은 편에는 하후성, 이제는 머리를 깎고 소림에 입문한 현수(玄修)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계속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현수의 얼굴은 고요하고 평정하게 가 라앉아 있었다. 게다가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더욱 더 정적인 느 낌을 주었다. 천심선사는 인자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현수, 지금의 심정은 어떠한가?" 현수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그저 담담할 뿐입니다." 천심선사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물었다.


"현수, 그대는 왜 노납이 그대를 불문에 입적시켰으면서도 머리에 계인을 새기지 않았는지 아는가?" 현수가 대답을 대신하듯 의아한 표정을 짓자 천심대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안타까운 일이나 그대는 불문과 인연이 없구나." "무슨 말씀이온지......." "허허허... 세월이 흐르다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현수는 가슴에 의문을 품으며 물었다. "왜 그대를 소림에 입문시켰느냐 말이지? 허허허... 그것은 불존 (佛尊)의 뜻이다. 천혈성(天血星)과 오대마성(五大魔星)을 막기위 한......." 현수는 더욱 의혹을 금치 못했다. '내가 소림에 입문하는 것이 천기의 영향 때문이란 말인가?' 그의 의문이 더이상 계속되기 성이 들렸다.

전 천심대사의 담담하고 인자한 음

"현수, 앞으로 사흘간 너의 선방에서 푹 쉬어라.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그대는 무림 입문에 들어간다." 현수의 안색이 굳어졌다. "소림무공은 천하무공(天下武功)의 근본(根本)이다. 중원에서 가 장 광범위한 무공이다. 속세인들이 소림무공을 운운하나 그들은 진정한 소림무공의 백 분지 일도 모르고 있다." '아!' 현수는 비록 표정은 변치 않았으나 내심 탄성을 금치 못했다.


천심대사는 담담하면서도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현수, 소림에서 가장 무공이 강한 사람은 바로 천뢰(天雷)다. 그 는 소림사상 최강이다. 또한 한 사람이 완전히 터득하기가 불가능 한 소림 정종의 칠십이종절예조차도 유일무이하게 모두 터득했다. 그것은 바로 천뢰 그만이 가능한 일이다." "아!" "너는 천뢰대사에게 무공을 전수받을 것이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한은 삼 년이다. 그 삼 년 사이에 너는 그에게 칠십이종절예를 모두 익혀야 한다." 현수의 두 눈에서 점차 신비한 광채가 솟아나왔다. 소림무공입문, 기실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일인가? 현수의 가라앉 았던 가슴은 다시 새롭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불망헌(佛忘軒). 그곳은 소림사의 금지로 알려진 자죽림(紫竹林) 내에 있는 것으 로, 역시 대나무로 만들어진 한 채의 죽헌(竹軒)이었다. 본래 자죽림은 소림 창건 이래로 시작하여 근 천여 년에 걸쳐 현 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말하자면 과거 달마선사가 천축에서 가져 온 자부경죽(紫府經竹)을 심은 것이 오늘에야 비로소 울창한 죽림 으로 발전된 것이다. 자죽림 속에는 굵기가 한 아름이 넘는 엄청난 대나무도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대나무 전체가 자색(紫色)을 띄고 있으며 단단하기가 강철같아 웬만한 도검(刀劍)에는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소림의 승려들은 이곳의 자부경죽으로 죽장(竹杖)을 만들어 쓰기 도 했다. 그런데 소림에서는 왜 이 자죽림을 금지로 정했을까?


그 이유는 자죽림 안에 불망헌이 있기 때문이었다. 불망헌이란 바로

소림에 큰 죄를

지었으나 신분이 지고(至高)한

중을 역대 장문의 령(令)인 녹옥불령으로 가두어 참회토록 하는 곳이었다. 울울한 자죽림의 중심부에 대나무로 엮어진 불망헌은 허름하고 을 씬년스럽게만 보였다. 불망헌이 지어진 지 수 백 년이 지나도록 손질 한번 하지 않았으니 이는 당연한 노릇이기도 했다. 휘-- 이- 이-- 잉! 삭풍이 불면 자죽림에서는 괴이한 음향이 마치 지옥아수라천 악귀 의 호곡인 양 음산하게 울렸다. 자죽으로 엮어진 불망헌의 한 방.

바닥과 벽 천장까지 모두 대나무였고 간단한 탁자나 의자 침상 등 기물도 자죽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죽탁(竹卓) 위에는 고색(古色) 완연한 향로가 있었는데 향로에서 파란 향연이 피어 오르며 방안을 진동시켰다. 방 안의 죽침상 위. 그곳에는 소림삼성승 중 가장 괴팍하고 괴이한 천뢰선사가 낡은 마의승포를 입고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주사빛 얼굴에 화등잔같은 고리눈, 깔깔하게 뻗친 눈썹과 턱수염 은 그의 괴팍한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후성, 즉 현수는 침상 아래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천뢰선사는 디룩디룩 눈알을 굴려 현수의 몸 이곳 저곳을 살펴보 았고 그 때마다 그의 눈에서는 전광(電光)같은 빛이 번쩍이고 있 었다. 그는 다소 거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현수, 너는 대사형으로부터 노납의 성격을 모두 들었겠지?"


"들었습니다." 현수의 대답에 천뢰선사는 까칠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노납은 대사형처럼 불심이 않다."

깊지도 않고 세째처럼 생각이 넓지도

그의 말에는 정감이라곤 없었다. "노납은 백칠십 세가 되도록 불경의 참뜻도 모른다. 또한 평생에 단 한 권의 책도 끝까지 읽어본 적도 없다. 물론 읽으려고도 해보 지 않았다." 현수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어느 정도 천뢰선사에 대 한 말은 들었지만 예상을 넘는 그의 괴이함에 다소 놀라울 뿐이었 다. "노납은 단지 불존(佛尊)만 알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

말과 동시에 천뢰선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방안을 서서히 걸으 며 다시 말을 이었다. "노납이 십 세 때 입문하여 백칠십 세가 되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배운 것은 단지 불존과 소림의 무학 밖에 없다." 천뢰선사는 말을 마치자 전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현수를 노려보며 엄숙하게 물었다. "노납이 무공을 가르치는 방법은 가혹하고 잔인할 것이다. 너는 그것을 모두 참아낼 자신이 있느냐?" 현수는 고개를 들어 담담히 반문했다.

"사숙께서는 산을 아십니까?" 갑작스런 물음에 친뢰선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반면, 현수 는 신비롭고 고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산을 좋아했습니다. 대자연(大自然)의 어떤 변 화 속에서도, 수많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산은 언제나 산입


니다." 현수의 두 눈은 물처럼 고요했으며 표정 역시 단아하기만 했다. 오히려 그를 쳐다보는 천뢰선사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화를 일으켰 다.

'이 녀석은 진골(眞骨)이다. 이런 놈은 가히 백년지재(百年之才) 로 능히 성불할 자질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대사형은 이 녀석이 불문과 인연이 없다는 것인가?'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는 천뢰선사의 마음 속에는 차츰 현수의 존 재가 자리잡아 가기 시작했다. 그는 현수의 앞으로 가 침상에 걸 터앉으며 물었다. "현수, 너는 노납이 어떤 사람인 줄 아느냐?" "모르옵니다." 천뢰선사는 서서히 감개 어린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과거 백수십 년 전 강호에 마애천불(魔涯天佛)이란 중이 나타났 는데 그는 악(惡)을 도저히 참아내지 못하는 과격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정(正)과 사(邪)를 막론하고 눈에 뜨이는 악인들이라면 가차없이 죽였고 세인들은 그 보기를 마치 귀신 보 듯 했다." 그는 입술 꼬리를 말아 기이하게 웃었다. "후후. 마애천불의 무공은 감히 따를 자가 없었고 그의 과격하고 잔혹한 성품 때문에 사도(邪道)는 물론 위선을 자행하던 정도(正 道)조차도 그를 보면 꽁무니를 감추기 바빴다." '혹시?'

현수는 의문을 느꼈으나 입을 되었다.

열지 않았고 천뢰선사의 말은 계속

"마애천불의 손에는 단 하루도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의 손에 떨어져 나간 정사무인의 수가 근 천 명에 가깝게 되자 사람들은 그를 혈불(血佛)이라고 불렀다."


현수는 내심 짚히는 바가 있었다. '혈불, 마애천불... 그것은 혹 사숙님 자신의 옛 명호가 아니었습 니까?' "후후후... 결국 보다 못한 그의 대사형(大師兄)이 문파의 최고 권위인 녹옥불령(綠玉佛令)으로 그를 금제(禁制)하여 이곳 불망헌 에 백 년 동안 가두었지." 현수는 탄식하며 물었다. "아... 그 분은 그렇다면 백 년 동안 한 번도 불망헌 밖으로 나가 지 못했습니까?" 천뢰선사의 두 눈에 회한이 어렸다. "그렇다. 백 년 동안 그는 이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 다. 불과 일 년전에야 비로소 백 년 금제가 풀렸다." "아!"

"하하하... 그 백 년이 흐르는 동안 마애천불은 성격도 야심도 모 두 꺾이고 말았다. 모두......."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천뢰선사의 표정은 차츰 평정으로 되돌 아왔고 그는 말을 돌려 이렇게 묻고 있었다. "현수, 너는 본문의 칠십이종절예가 어떤 것인지 아느냐?" 현수는 공손히 대답했다. "대강 들었습니다."

천뢰선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자, 밖으로 나와 봐라!" "네."


자죽림 가운데 공지(空地). 그곳은 연무장(練武場)으로 손색이 없는 곳으로 현수는 바닥에 무 릎을 꿇고 있었고 천뢰선사는 그의 앞 일 장(一丈)거리에 우뚝 서 있었다.

천뢰선사는 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본문 칠십이종절예는 달마성승(達摩聖僧)께서 역근세수경(易筋洗 髓經)을 창안하신 이후 천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소림의 고승들 이 참오 끝에 만들어내신 것이다." 현수는 그의 말을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새겨 들었다. "그러나 천년이 흐르는 동안 상이 밖으로 흘러 나갔다."

지금 칠십이종절예 중 삼십여 종 이

천뢰선사는 약간 열기 띈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진본(眞本)이 아니므로 진정한 소림무예가 아니다."

천뢰선사는 칼칼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백보신권(百步神拳), 이는 소림 십 대 장문인이신 각비대사(覺非 大師)께서 창안하신 것으로 그 분은 황산 천도봉(天都峯)에서 백 보(百步) 밖의 청석비(靑石碑)를 가루로 만들어 전무림을 경동시 켰다." "아......." "그러나 지금은 백보신권이라면 무림의 삼류 고수도 할 줄 아는 평범한 무예가 되었다." 천뢰선사의 음성은 점점 더 짙은 열기를 띄어갔다.

"그들은 말한다. 칠십이종소림비예가 이럴진대 나머지는 알만하다 고, 그리고 그들은 가증스럽게도 백보신권을 흉내 내면서 소림을 함부로 비웃고 있다."


천뢰선사는 문득 힘차게 말했다. "자! 현수, 보아라. 이것이 바로 진정한 소림비예 백보신권이다!" 그는 즉시 오른손 주먹을 쥐었다가 앞으로 가볍게 뻗었고 놀라운 위력이 눈 앞에 펼쳐졌다. 꽈르르르릉!

천지를 뒤흔드는 뇌음과 함께 자죽림은 밖까지 완전히 평지가 되고 말았다.

일시에 오십 장(五十丈)

그 뿐이 아니었다. 오십 장 밖에 있던 거석(巨石)이 어이없게도 가루로 화하고 만 것이었다. "아!" 현수는 그 놀라운 광경에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백보신권의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한 반석 위. 일노일소(一老一少)의 중이 가부좌를 튼 채 다.

마주보고 앉아 있었

네모진 얼굴에 주사빛 피부, 화등잔같은 고리눈, 고슴도치 같이 빳빳한 수염의 괴승. 그는 바로 천뢰선사였고 맞은 편의 소년승은 바로 현수였다.

천뢰선사는 번뜩이는 눈으로 현수를 쏘아보며 엄숙하게 말하고 있 었다. "소림의 최고무공은 달마역근세수경에 적힌 반야밀다대승신공(般 若密多大乘神功)인데 이 신공은 가히 탈인간의 개세신학(蓋世神


學)이라 할 수가 있다." 현수의 준미한 얼굴이 엄숙하게 굳어졌고 천뢰선사는 두 눈에 섬 전같은 광망을 발하며 계속 입을 열었다.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익히기는 실로 성불하는 것 만큼이나 힘들 다. 더구나 대성하기 위해서는......."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 즉, 갓 태어난 아기를 근 이백 년의 공력을 가진 내가고수(內家高手)가 개정대법으로 탈태 환골(脫胎換骨)시킨 다음 천여 가지의 약초를 배합한 물에 천 일 을 담궈 그 후로 백 년간을 고련해야만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 고는 영원히 십이성(十二成)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으음. 그렇다면 나는 이미 불가능하지 않은가?' 현수의 표정은 실망으로 조금 변하였다. 천뢰선사는 그의 내심을 읽은 듯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노납은 백오십 년 있음을 알아냈다."

동안 연구한 끝에 마침내 또다른 길이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은 바로 삼십육 개의 단계를 거친 천 일의 수련방법이다. 다 만 이 방법은 정도에는 없었던 것으로, 지극히 위험하여 자칫하면 주화입마(走火入魔)는 물론 생명까지도 잃게 된다. 그러나 이 방 법이 아니고서는 영원히 반야밀다대승신공의 완전한 경지에 도달 할 수가 없다." "으음." "현수, 너는 앞으로 이

방법대로 신공을 수련해야 한다. 이미 제

일 단계는 깨쳤다. 노납이 너의 몸에 개정대법을 시행하여 탈태환 골시켰으며 소림 희대의 성약인 대환단으로 너의 내공은 이미 백 년 수위(百年水位)에 이르러 있다." 그 말에 현수는 흠칫 놀랐다.


'내가 백 년 공력을?' 천뢰선사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엄숙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너는 이 단계부터 시작한다. 천 일(千日), 앞으로 천 일간의 고련(苦練)에 들어간다!"

실로 피눈물 나는 수련이었다. 정신이 산산조각으로 갈라지는 고 통과 고통의 연속이랄까? 그의 살갗은 펄펄 끓는 약물 속에서 수십 번이나 처참하게 벗겨 졌고 벗겨진 살이 채 아물기도 전에 천뢰선사의 무자비한 철편(鐵 鞭)이 허공을 가르며 그의 살을 찢었다. 구절항마철편(九節降魔鐵鞭)이라면 사실 강호의 평범한 일반 병기 였다. 그러나 그것이 일단 천뢰선사의 수중에서 휘둘러졌을 때는 단지 그 경풍에 닿기만 해도 거목이 쓰러지고 암반이 가루가 되었 다. 그 무시무시한 구절항마철편으로 현수는 매일

일천 번씩 맞아야

했다. 게다가 때로는 지하 삼백 장 깊이의 빙굴 속에서 꽁꽁 얼어 사흘 을 보낸 뒤 얼음이 채 녹기도 전에 화로 속에서 지글지글 타는 고 통도 감수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수천 개의 금침이 다시 그의 온 몸을 고슴도치로 만들었다. 실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고통들이 온통 그를 에워 싸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천뢰선사의 장엄한 말이 그의 정신을 일깨우곤 했다. "참아라. 참아야 한다. 이 수련이 시작된 이상 노납조차 중단시킬 수가 없다. 중단하면 너는 영원히 폐인이 되고 만다."

현수는 참고 또 참았다. 고통이 극에 이를 때는 일생의 벗 독고황 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거듭되는 고련을 견디어 가고 있었 다.


어느덧 이백 일(二百日)이 지났다. 그동안 현수는 쌀 한 톨, 물 한 모금 먹지 않았다. 단지 십 일마 다 주는 한 알씩의 환약(丸藥) 밖에 먹은 것이 없었다. "청신정혈보환(淸身精血補丸) 만을 먹으며 온 몸의 온갖 더러움을 모두 제거해야만 한다. 곡기를 끊고 물 한 방울 먹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공(功)이 수포로 돌아간다!"

천뢰선사의 말은 더욱 지독한 허기와 갈등을 불러 일으킬 뿐으로, 그는 정신이 어지럽고 온 몸의 맥이 다 풀리곤 했다. 그러는 가운데 다시 이백 일(二百日)이 흘렀다. 그는 잠도 자지 못했다. 매일 밤을 수마(睡魔)와 싸워야 했으며 어쩌다 깜빡 졸기라도 하면 천뢰선사의 철편이 여지없이 그의 전 신을 강타했다. 끔찍하도록 무자비한 훈련이었다. 극한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까무라치고 만 적도 있었다. 그러나 쓰러진 몸뚱이 위로 찬물이 쏟아지는가 하면 다시 구절항마철편이 날아와 그를 깨웠다. 이백 일(二百日)이 그렇게 하여

또 지나자, 이전 것까지 도합 육

백 일(六百日)이었다. 실로 겁난의 세월....... 이제는 그도 더이상은 고통을 느끼지 않 게 되었다. 펄펄 끓는 약물도 그리 뜨겁게 여겨지지 않았으며 데인 살도 하루 면 멀쩡하게 아물어 버렸다. 그런가 하면 그 무서운 구절항마철편의 세례에도 그의 몸에는 단 한 줄기 혈흔(血痕)만이 남을 뿐이었고, 금침이 날아와 박혀도 채 일 각이 안되어 저절로 빠져 버렸다. 이는 정녕 기이한 변화였으나 막상 현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보다 더 혹독한 고통들이 시시각각 닥쳐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수의 인내는 실로 초인간적이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


는 한계를 벗어난 고통을 그는 고 있었다.

신음소리 한 번 없이 잘도 참아내

그것은 어쩌면 끝없는 자신과의 투쟁일런지도 몰랐다. 자아(自我) 와의 처절한 싸움....... 이를 느낀 천뢰선사는 지극히 감동했고 마침내 현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평생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괴승, 그가 바로 천뢰였다. '노납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대사형 천심(天心)이다. 가장 감탄 한 사람은 세째 천기(天機). 그러나 이 아이는.......' 현수를 향하는 그의 손길에는 어느 때부터인지 보이지 않는 따뜻 함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평생을 외곬으로 괴벽하게만 살던 천뢰 선사의 살벌한 가슴 속에 알게 모르게 싹튼 정이었다. 다만 당사 자인 그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그러나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천뢰선사를 바라보는 현수의 두 눈에는 언 뜻언뜻 미소가 어렸다. '사숙님, 제자는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반드시....... 사숙님 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성공할 것입니다!'

현수의 웃음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다시 이백 일이 흘러 팔백 일이 지났다. 그는 삼십육 중에서 드디어 삼십사 관(三十四關)을 넘겼다. 이제는 단지 이 (二關)의 단계만을 남겨 놓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남은 이 이야말로 지금껏 거쳐온 삼십사 관을 모두 합친 것 만큼 힘든 이었다. 현수도 변했다. 그의 골격은 튼한 강골로 변해 있었다.

관 관 관 것

이제 연약한 소년의 그것이 아닌 튼

비록 살이 거의 없이 깡마른 몸집이었으나 뼈대와 근육은 오히려 조화의 미(美)를 물씬 풍길 정도로 완벽하게 성숙되어 있었다.

얼굴 또한 지극히 평정담백해져서 득도한 선승(禪僧)의 얼굴도 그


와 같지는 못할 듯 했다. 누구도 그 내심을 읽을 수가 없겠거니와, 더우기 옥으로 깎은 듯 이 고운 그의 용모에서 감히 짐작이나 하겠는가. 그가 이토록 험 난한 고통 속을 헤쳐 나왔으리라는 것을.......

천뢰선사(天雷禪師). 야색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유난히 수심이 어려 있었다. 그는 천공에 걸린 달을 바라보며 부르짖었다. '만약 저 아이가 나머지 이 관을 통과치 못하고 실패한다면... 아 니,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노납은 스스로 익힌 반야 밀다대승신공을 전부 그에게 주입하더라도 반드시 성취시키고 말 테다.' 그것은 천뢰의 진심이었다.

■ 대소림사 제 1 권 제 5 장 색(色)의 관문(關門) -1 ━━━━━━━━━━━━━━━━━━━━━━━━━━━━━━━━━━━

태실봉(太室峯). 소실봉(少室峯)과 함께 숭산이대봉(崇山二大峯)으로 알려진 수려 웅장한 봉우리였다. 초여름이다. 울창한 수목이 태실봉 전체를 푸르게 뒤덮고 있었다. 하남(河南)의 여름이 힘차게 다가온 것이다.

태실봉 정상에 한 현수였다.

영준한 청년중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는 바로

완전한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임풍옥수(臨風玉樹), 곧 바람 앞에 선 옥나무와 같이 비범하고 준미했다. 현수는 물같이 고요하고 신비한 눈으로 봉우리 아래의 선경과 수 해(水海)를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이틀 후면 삼십육 관 중 가장 험난한 이 관을 향한 이백 일 수련에 들어간다. 이 관은 험난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그동안 통과한 삼십사 관 모두를 합친 것보다 힘들다고 그랬지.' 현수의 표정은 굳은 의지로 엄숙해졌다.

'그러나 두려움은 없다, 오직 이제 기다릴 뿐. 남은 이 관을 기필 코 통과하여 세 분 성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할 즈음 등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현수는 흠칫했으나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한가닥 여인(女人)의 음성이 바로 가까이에서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여봐요. 스님, 말 좀 묻겠어요." 목소리....... 그것은 한번 들으면 영원히 다. 아니, 거의 환상에 었다.

잊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매혹적이었

가까울 정도로 아름답고 고혹적인 음성이

현수의 승포자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아울러 그는 이렇게 생각했 다. '이런 목소리의 여인이라면 모습도 아름다울 것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고 그의 눈은 곧 한 곳에서 못박힌 듯 정지 되었다. 백의소녀(白衣少女). 그녀는 약 십팔구

세 가량 되어 보였는데 그야말로 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소녀였다. 특히 머리를 궁장으로 가볍게 틀어올려 학 같이 곱게 뻗은 목선이 유난히 아름답게 돋보이고 있었다. 현수는 그녀를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내심 부르짖었다. '아름답다.......'


백의소녀는 묘한 양면성(兩面性)을 지닌 미녀중의 미녀였다. 요염절륜함과 순진무구함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고나 할까? 그러 한 미녀란 사실 보기 드문 형이었다. 무릇 요염함이란 욕정(慾情) 을 불러일으키는 사요(邪妖)함을 말하는 것이요, 순진무구함은 세 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결성을 말하는 것으로써, 이를 테면 이 두 가지의 성질은 전혀 상반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미녀를 두고 양면성을 느낄 수 있다니 이는 매우 불가 사의한 일이었다. "아......." 한순간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탄성을 발한 것은 현수가 아니라 백의소녀였다. 그녀의 꽃 잎같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가 싶더니 한동안 다물려지지 않았 다. 그녀 역시 현수의 얼굴을 본 순간 크게 놀란 듯 했다.

옥(玉)으로 깎아 만든 듯 섬세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비록 승 포를 입고 있다고는 하나 사실 하후성의 얼굴은 천하미남자(天下 美男子)의 풍모가 아닌가? 두 사람의 눈길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에 못박힌 채 떠날 줄을 모 르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현수의 눈길은 금방 평정을 되찾고 무심(無心)해졌다. 황홀한듯 백의소녀를 보던 그의 눈은 이내 나무나 돌을 보듯 담백해지고 만 것이었다. 백의소녀의 눈꼬리가 상큼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

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것이 반영되기라도 했는지 그녀의 고혹적 인 신비한 눈에서는 한 가닥 쓰린 곤혹이 스쳤다. 그러나 이 신비한 젊은 중에게 급격히 마음이 끌린 소녀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곧 순결무비하고 천진한 미소가 그녀의 아름다 운 얼굴에 떠올랐다.


그녀의 이러한 변화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기이한 것이었다. 그녀는 옥음으로 말했다. "스님께서는 소림사의 제자이신가 보군요?" 현수는 합장했다.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백의소녀는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쓸어본 뒤 다시 말했다. "숭산(崇山)이 아름답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과 연 명불허전이군요." 현수가 다만 담담한 웃음을 짓자 백의소녀의 아름다운 눈에 이번 에는 요염한 기운이 떠올랐다. 현수는 땅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백의소녀는 교태롭게 말했다.

"스님,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들어 주시겠어요?" "아미타불... 말씀하시지요." "저는 숭산이 초행이라 지리에 어두워요. 그러니 안내를 좀 해주 시겠어요." 현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현재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익 히기 위해 천 일 수련을 하는 중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한가롭게 미녀의 길 안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는 거절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백의소녀의 눈을 본 순간 가슴이 크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백의소녀의 눈에서 신비로운 기운이 무형중에 흘러나와 그로 하여 금 거절을 할 수 없는 느낌을 준 것이었다. 마침내 현수는 응답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주." "호호호... 고마와요, 스님." 백의소녀의 교태로운 웃음소리가 다시 그의 심금을 뒤흔들어 놓았 다. "스님, 소녀의 이름은 백화미(白花美)예요. 스님의 법호는 어찌 되시나요?" 현수는 담담히 대답했다. "소승은 현수(玄修)라고 합니다." 백의소녀, 즉 백화미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기이한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현정대사(玄正大師). 그는 현자(玄字) 항렬을 가지고 있는 소림의 고승으로 지객원주였 다. 그는 현 자 배분의 마지막 서열로써 대외적인 손님을 맞는 지 객원을 관장하고 있었다. 나이는 구순(九旬)으로 무공 또한 지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소림외가신공(少林外家神功)의 최고인 나한금불신공(羅漢金 佛神功)을 십이 성까지 터득하고 있어 그의 몸은 이미 창검(槍劍) 이 침입하지 못하는 금강지체였다. 현정대사는 지객원의 원방의 포단에 앉아 좌선하고 있었다. "사숙님, 제자 정원(丁元)입니다." 들려오는 소리에 현정대사는 눈을 떴고 원방 밖에서 전언은 다시 이어졌다. "한 분의 여시주께서 사숙님을 뵙자고 찾아 오셨습니다."


"여시주?" 현정대사의 하얗게 센 눈썹이 위로 솟는가 싶더니 깊은 눈에는 의 혹이 서렸다. 그는 곧 침중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노납을 만나자고 하더냐?" "그것이... 꼭 사숙님을 뵈어야만 된다고......."

정원이 곤란한 듯 말을 흐리자 현정대사는 더 묻지 않고 몸을 일 으켰다. "알았다. 물러가 있거라." "네." 현정대사는 포단에서 일어서며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그가 들고 있던 염주 의 끈이 갑자기 툭 끊어지더니 백팔(百八)개의 염주알이 좌르르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것이!' 현정대사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는 웬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가슴 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선방(禪房). 그곳은 지객원에서 손님을 맞는 곳으로 넓은 탁자와 의자 등이 단 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곳에 한 명의 중년부인이 탁자와 마주한 채 단정히 앉아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녀는 전신에 흑의(黑衣)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흑 의와는 대조적으로 희다못해 창백할 정도의 흰 얼굴에 용모는 찬


탄할 정도의 절색이었다. 실로 양귀비를 능가할 정도의 미부였던 것이다. 다만 그녀의 두 눈은 마치 얼음장같이 차가운 한기가 감돌고 있어 섬ㅉ한 느낌을 주었다. 흑의미부는 마치 그린 듯이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찻잔이 놓여 있었으나 손도 대지 않은 듯 찻잔 속에는 향차가 그 대로 담겨 있었다. 선방 안에 현정대사가 들어왔고 흑의미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 라보았다. 정통으로 그들의 눈길이 마주쳤으나 그녀의 눈은 얼음 같이 무심했다.

'고수(高手)다!' 현정대사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으며 가슴 한 구석이 진탕하는 느 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역시 불문의 고승답게 조금도 그것을 내색치 않고 합장하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여시주께서는 어인 일로 빈승을 찾아오셨습니까?" 흑의미부는 그를 쳐다보며 차갑고 오만하게 물었다. "당신이 지객원주인 현정인가요?" 극히 오만무례한 말투였으나 현정대사는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답 했다.

"그렇습니다." "호호호호... 나는 소림의 고승들이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크게 실망을 금치 못하겠군요!" 느닷없는 안하무인격의 말, 그것은 실상 소림 전체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역시 현정대사의 정력(定力)은 대단했다. 그는 여전히 미 소지으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빈승이 워낙

자질이 부족하여 여시주께서 실망하셨


나 보군요. 그러나 빈승 하나만으로 소림 전체를 평가함은 크나 큰 잘못이오." 그 말에 흑의미부의 두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내가 소림을 찾은 것은 한 사람을 만나보기 위해서요." 흑의미부는 싸늘하게 말했다. "곡무현(曲武玄), 법호는 현오(玄悟)에요." 현정대사의 안색이 비로소 가볍게 변했다. 그는 낮게 불호를 외우 더니 물었다. "여시주께 실례를 무릅쓰고 묻겠습니다. 현오사형과 무슨 관계이 신지?" 흑의미부는 또한 싸늘하게 반문했다. "사사로운 일까지 대사께서 알아야 되나요?" 현정대사의 흰 눈썹이 일순 꿈틀했다. "아미타불... 그것은 지객원주인 소승의 임무입니다." 흑의미부는 냉랭하게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대사, 이것을 좀 보시겠어요?"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에 투명할 정도로 흰 섬섬옥수를 대더 니 살짝 눌렀다. 그러자 푸른 연기가 솟더니 찻잔은 탁자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깨끗하고 완벽하게 찻잔은 탁자와 평면을 이 루며 박혀 있었다. 현정대사의 흰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정녕 대단한 내공이다. 천산오목(天山烏木)으로 된 이 탁자는 굳 기가 쇠보다 더한 것인데 이토록 쉽게 찻잔을 박아 버리다니!'


현정대사는 합장했다.

"놀라운 솜씨입니다, 시주. 아미타불......." 흑의미부의 싸늘하나 요염한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대사께서도 이렇게 할 수 있나요?" 현정대사는 초탈한 미소를 지었다. "빈승의 빈약한 재주로 어찌 그런 신기를 보일 수 있겠습니까?" 흑의미부는 냉소 짓더니 일시지간 오른손 식지를 세워 현정대사의 가슴 현기혈을 찔러 왔다. 현정대사는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살기(殺氣)가 너무 짙소이다." 현정대사는 곧장 우수(右手)를 뻗어 막았다. 팍! 흑의미부의 손가락과 현정대사의 손가락이 부딪쳤다. 그 순간 현 정대사는 손 전체가 얼어붙는 느낌에 안색이 급변했다. '음.......' 싸늘한 기운이 온 몸을 응축시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시 자신의 최대 무공인 나한금불신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피부가 금빛으로 변했으며 한기는 곧 사라지고 팽팽한 형세가 이 루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다시 차츰 흑의미부의 손가락을 통해 싸늘 한 기류가 그의 장심(掌心)을 뚫고 밀려 들어왔다. 현정대사의 이마에 서서히 식은 땀이 맺혀가고 있었다. 그는 흡사 얼음구덩이에 빠진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본신의 혈맥마저 차갑게 수축되기 시작하자 현정대사는 내


심 절망하여 부르짖었다. '무, 무리다. 나의 힘으로는!'

흑의미부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마침내 손을 거두었고 현정대사는 멍해진 채 탄식하며 물었다. "아미타불... 여시주께서 조금전 쓴 무공은 혹시 빙백마유공(氷魄 魔幽功)이 아니신지요?" "호호호호... 안목만은 대단하군요!" "아미타불......." 현정대사는 불호를 외우며 고개를 숙였으나 그의 안색은 어둡게 변해 있었다.

"정원(丁元)!"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밖을 향해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사숙님." 밖에서 응답이 들렸다. "이분 여시주를 현오사형에게 안내해 드려라." "네, 알겠습니다." 현정대사는 말을 마치자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흑의미부는 그를 힐끗 응시한 후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고 밖에 서는 중년승려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에게 합장했다. "아미타불... 소승을 따라 오십시오, 시주." 정원은 곧 흑의미부를 안내하여 지객원을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 선방에 있던 현정대사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정초(丁草)!"


"네!" 오 순 가량의 중이 선방으로 들어왔고 현정대사는 그를 향해 침중 히 당부했다. "천리신구(千里信鳩)를 날려 달마원의 현오사형께 조금 전의 일을 전해라." 정초는 즉시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게 된 현정대사는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었다. "아미타불... 도대체 가슴이 이렇게 무거워짐은 무슨 이유인가?" 현정대사는 계속 불경을 외웠다.

현수(玄修). 그는 백의소녀 백화미와 녹음이 무성한 태실봉(太室峯)아래를 걷 고 있었다. 백화미의 몸에서 풍기는 야릇한 체향이 가까이 느껴지 자 현수는 마음이 울렁거렸다. "호호호... 스님!" 백화미는 교태롭게 부르며 아름다운 눈으로 현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만일 스님이 중이 아니라면 중원에 큰 혼란이 올 거예요."

현수의 의아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머물렀다. "호호호... 어떤 여인이든 당신을 보기만 하면 그 즉시 사랑에 빠 져 헤어나오지 못할 테니까요." 그 말에 현수는 말했다.

잠시 얼굴을 붉혔으나 곧 고소를 지으며 담담히

"여시주, 얼굴이란 하나의 껍질에 불과한 것이오. 죽으면 썩어 한


줌의 흙이 되고 맙니다." 백화미는 허리를 움켜쥐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호호호호... 그렇게 말하니 당신은 정말 득도한 고승같군요?"

현수는 고개를 숙이고 걸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여인은 대체 누구일까? 이 태실봉은 상당히 험해 일반 여인은 결코 오를 수가 없는데.......' 그의 마음 속에는 점차 기이한 미녀 백화미에 대한 의구심이 차오 르고 있었다. "아! 물소리....... 이곳에 폭포가 있군요." 쏴... 우르르릉! 아닌 게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지축을 울리듯 폭포수 떨어지는 음 향이 시원스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폭포가 나옵니다. 상당히 아름다운 곳으로 그곳의 이름은 승불폭(昇佛瀑)이라 하며 소림의 불도들이 가끔 참선하기도 하는 곳입니다." 승불폭(昇佛瀑). 그곳은 바로 수년 전 현수가 입문하기 전에 잡념을 떨치기 위해 하루 밤낮을 참선한 곳이었다. 백화미는 활짝 웃었다.

"저에게 구경시켜 주시지 않겠어요?" 현수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우르르릉... 쏴-- 아! 승불폭.


부처가 득도하여 승천한다는 뜻을 지닌 거대한 폭포수. 자욱한 물안개가 주위 반 마장을 뒤덮고 있었고 거대한 물줄기가 굉음과 함께 쏟아져 내려 지축을 흔들었다.

그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에 백화미는 환성을 질렀다. "아! 정말 멋지군요." 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 라보았다. 백화미는 폭포 앞으로 나서며 명랑하게 말했다. "스님,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줘요. 한참 걸었더니 몸에 땀이 났 어요. 이 시원한 물에서 목욕 좀 해야겠어요." 백화미는 말을 마치자마자 정말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 아니!"

현수가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백화미는 옷을 모두 벗 고 완전나체가 되고 말았다. 쏟아지는 폭포수의 포말 속에 휘감긴 여인의 백옥(白玉)같은 전라 (全裸)....... 빙기옥골(氷肌玉骨)의 새하얀 피부가 금세 습기에 젖어 반들거렸다. 날개죽지같이 날렵하고 가냘픈 두 어깨, 가녀린 팔과 앞가슴에 마 치 복숭아처럼 깨끗하고 탐스럽게 열려 있는 젖가슴... 그리고 젖 가슴 정상에 달린 열매....... 잘록한 허리와 동그란 배, 배 한가운데 귀엽게 숨어있는 앙징스런 배꼽, 그 아래로 급격히 미끄러지며 펼쳐지는 신비한 여인의 비림 (秘林).......

대리석같은 두 다리는 살짝 벌려져 폭포의 비말에 젖고 있었고 칠 흑같은 흑발이 젖어 젖가슴과 등을 살풋이 가렸다. 진정 인간의 육신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일까? 요정(妖精).


백화미의 모습은 그대로 폭포수 속에 내려온 천상(天上)의 요정이 었다. 실로 폭발적인 아름다움을 전신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아!" 현수는 충격을 받았다. 가슴을 거대한 쇠뭉치로 두들기는 듯한 소 리가 연신 들려왔다. 난생 처음 그는 여인의 나신을 본 것이었다. 그것도 천하절색 미인의 전라(全裸)를....... 현수의 눈은 힘껏 크게 떠져 백화미의 나신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 다. 그녀의 학같이 가는 목으로부터 흑발 사이에 숨은 젖가슴과 열매 를, 그리고 동그란 배와 한가운데 숨은 배꼽을, 또한 두 다리가 갈라지는 사이의 불타는 비림(秘林)을....... 이제껏 물처럼 잠잠하던 현수의 눈은 몹시 흔들렸고 그에 따라 그 의 승포자락도 눈에 띄게 떨렸다. 백화미(白花美).

그녀는 현수가 이제껏 쌓은 모든 정심(定心)을 송두리째 무너뜨리 고 있었다.

한편 소림사의 달마원(達摩院). 현오대사는 천리신구를 통해 전달된 쪽지를 읽으며 얼굴에 짙은 의혹을 담고 있었다. '대체 누가 나를 찾아왔단 말인가? 더구나 흑의미부라니.' 문득 현오대사의 안색이 변했다.

'혹시?' 그의 미간 사이의 홍점에 어두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선방 문을 열었다. 그러나 방을 나서려


다 말고 현오대사는 흠칫 굳어지고 말았다. 문 앞에서 그의 사제이자 선좌원주(禪坐院主)인 현광대사가 기다 리고 서 있었던 것이었다. 현광대사는 현 자 항렬 중에서 가장 성격이 온유하고 침착한 인물 로 불심(佛心)이 매우 깊어 일찌기 선좌원을 맡고 있으며 현오와 는 가장 친분이 두터운 사이기도 했다.

더우기 나이가 올해로 백 였다.

세(百歲), 세사에 또한 이미 달관한 그

현오대사는 침중하게 물었다. "현광사제, 웬일인가?" "아미타불... 대사형, 정(情)이란 고해(苦海)요. 부디 그 여시주 를 만나지 마십시오." 현오는 그만 흠칫했다. "그럼... 그녀가 맞는가?"

현광은 합장하며 말했다. "육십 년이 흘렀지만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더군요." 현오대사의 고요하던 눈에 파랑이 크게 일었다. "사제, 용서하게!" 그는 현광을 피해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현광은 더욱 바짝 다가서며 가로막았다. "대사형, 이 사제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도저히 비켜드릴 수 없 습니다."

평소 그렇게도 온유하던 현광이었으나 이 순간만은 굳세고 완강하 기가 마치 강철신과도 같았다. 현오는 탄식했다.


"사제, 곡무현은 이미 육십 년 전에 죽었네.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은 단지 현오(玄悟)일 뿐이네." 현광은 그 말에 움찔하며 굳어졌고 현오대사는 묵묵히 불호를 외 우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대사형.......'

현광은 멍한 눈길로 사라져 가는 현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르르르릉... 쏴아아! 승불폭(昇佛瀑). 현수는 도저히 눈 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폭포수의 굉음 조차 지금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마치 자석에라도 이끌린 듯이 승불폭 아래의 넓은 연 못으로 향해져 있었다. 백화미, 그녀가 전라로 연못에서 인어처럼 유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수는 이제껏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이었 다. 생전 처음 보는 여체(女體), 그것도 미녀의 전라가 유영하는 모습은 그에게 너무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전신의 혈맥이 팽창하면서 목 이 갈라지도록 갈증을 느끼게 하였다. 과거 그는 팔백 일의 수련 중 물 한모금 마시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에도 이렇게까지 목이 타지는 않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갈증과

함께 이상한 열기가 그의 전신을 휘

몰아치고 있었다. 백화미가 드디어 폭포수에서 밖으로 나왔다.


물에 젖은 흑발이 길게 앞으로 드리워져 백옥같은 나신을 부분적 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노출되어 있는 나머지 부분의 유혹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옥같은 피부에는 물방울이 선연하게 돋아 있는가 하면 젖어 붙은 머리칼 사이로 육봉과 유두가 이상한 빛을 발하며 돌출되어 있었 던 것이다. 다만 어찌 된 셈인지 백화미의 나신에서는 조금도 음탕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너무도 깨끗하고 순진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 때문이 었을까? 그러나 이러한 매력이야말로 무서운 흡입력으로 현수를 빨아들이 고 있었다. 차라리 단순한 음심(淫心)이라면 굳은 정심(定心)으로 가볍게 떨쳐 버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현수는 점점 더 심해지는 갈증으로 정신마저 혼미해질 지경이었 다. 그러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화미는 어깨를 움츠리며 오 들오들 떨었다. "아! 산중(山中)이라 그런지 매우 춥군요!" 벗어놓았던 그녀의 백의는 이미 폭포의 비말에 몽땅 젖어 있었다. 현수는 문득 그녀가 애처롭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다가 갔다. "아미타불... 소승의 옷이라도 걸치십시오." 그가 승포를 벗어 주자 백화미는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와요, 스님. 당신은 무척 친절하시군요." 그녀는 스스럼없이 승포를 받아 걸치더니 크고 아름다운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이 근처에 혹 불을 피워 요?"

현수는 마음이 떨렸다.

몸을 녹이고 옷을 말릴 만한 곳은 없나


'이 여인의 뜻은 대체.......' 그는 곧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백화미의 눈동자는 티없이 순수하고 맑기만 할 뿐 도저히 욕념(欲念) 따위를 지닌 탕녀의 눈빛이 아니었다. 현수는 눈을 감으며 자책했다. '부끄럽다, 사심(邪心)을 가졌던 것만도 수치스럽거늘!' 이어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이곳에서 얼마만 가면 조그만 동굴이 있습니다." "그래요? 좀 안내해 주시겠어요?" 현수는 이번에도 또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소녀 백화미에게 빨려 들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불존의 자비(慈悲)일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단지 알몸에 넓은 승포만 걸친 백화미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물에 젖은 그녀의 머리칼에서는 강하고 야릇한 육향이 풍겼고 승포 아래로 미끈한 두 다리가 사뿐사뿐 움직이는 것이 보 였다. 그의 눈길은 어느덧 어쩔 수 없이 백화미의 늘씬한 두 다리 에서 멎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다시금 그의 가슴에서 뜨거운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현오대사(玄悟大師). 그의 고요한 두 눈은 이미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흑 의중년 미부가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현오는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의 깊이 가라앉았던 마음 속에 격정이 일고 있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곡무현, 육십 년 만이군요." 흑의미부의 음성은 차디찼으나 가늘게 떨고 있었다. 현오는 다시 눈을 떴고 그의 눈에는 아련한 비애가 떠올랐다. 현오는 침중하게 합장하며 말했다. "여시주, 곡무현은 이미 죽었소. 소승은 현오(玄悟)라 하오." 그 말에 흑의미부는 격앙된 음성으로 말했다. "무현(武玄), 당신은 육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 군요. 당신의 마음속에는 이 단혜령(段慧令)이 들어갈 공간이 조 금도 없단 말인가요?" 현오의 얼굴에 고통의 빛이 스쳐갔다. "여시주, 과거는 이미 지났소. 모두 사라진 일이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 흑의미부 단혜령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빛에 사악한 빛이 스쳤다. 그녀는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무현! 당신은 이것을 기억하시죠?"

그것은 끝이 절반 가량 부러져 나간 은색의 소도(小刀)로, 손잡이 부분에 주사빛 글씨로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단심도(丹心刀)> 그것을 본 현오의 몸이 떨렸다. "단... 심... 도......." "그래요! 단심도예요. 저는 팔십 년 전 애정의 표시로 이 단심도 를 당신에게 주었고, 당신은 그 확인으로 단심도를 반으로 잘라 서로 한 쪽씩 보관하기로 했었지요." 현오의 수양 깊은 얼굴이 마구 경련을 일으켰다.


"그 후 이십 년이 흐르는 동안에 우리는 맺어지기는 커녕, 급기야 정사의 대립을 이유로 나의 아버님마저 당신 손에 죽어야 했지 요." 단혜령의 창백한 얼굴에는 점차 무서운 증오와 살기가 짙어졌다. "아미타불......." 현오의 흰 눈썹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고 단혜령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그것을 문제 삼고자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니까요."

"으음." "마지막으로 묻겠어요. 당신은 아직도 단심도의 한 조각을 갖고 계시나요?" 현오대사는 격동을 금치 못하였다. 그의 눈에는 온통 회한, 슬픔, 후회, 번민 등이 어지럽게 교차되었다. 그럼에도 현오대사는 합장을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미타불... 육십 년 전에 이미 버렸소." "버렸... 다고 했나요? 지금?"

단혜령의 안색은 아예 백짓장처럼 질리고 있었다. 동굴(洞窟).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모닥불을 마주보며 두 남녀가 벽에 등을 나란히 기대고 앉아 었다. 현수와 백화미, 바로 그들이었다.

백화미는 현수의 승포를 걸친 채 불을 쬐고 있었다. 불빛에 어른 거리는 그녀의 얼굴은 그야말로 요염절륜의 극치였으며 혼백을 빨 아들일 듯 뇌쇄적이었다.


그러나 살풋이 미소 짓고 있는 두 눈빛은 순진무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따금씩 몸을 숙여 불을 지필 때마다 그녀가 입은 넓은 승포자락 사이로 완전히 드러나곤 하는 젖가슴이 도리어 무색할 지경이었 다. 현수는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이 여시주의 정체는 무엇인가.' 현수는 어찌된 영문인지 평소의 지혜로움도 모두 사라지고 멍한 상태였다. 도대체가 오늘의 일이 꿈만 같을 뿐 스스로조차 이런 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화미가 살며시 그의 어깨에 교구를 처녀의 체향이 물씬 풍겼다.

기대오자 싱그럽고 강렬한

"스님, 당신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백화미는 동그란 턱을 들어 현수의 코 밑에 바짝 들이대며 묻고 있었다. "어째서 스님은 중이 되었어요?" 현수의 얼굴에 그늘이 덮혔다. "그것은... 소승도 모릅니다."

백화미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그런 말이 어디 유를 모르다니."

있어요? 자신이 중이면서 중이 된 이

"그것을 알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백화미는 그윽한 눈으로 그의 을 발했다.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낮게 탄식

"아아... 당신이 만약 중이 아니라면......."


현수는 백화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불현듯 환속(還俗)하고 싶 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 그녀의 두 눈은 신비로운 광채를 발산하며 현수의 모든 것을 빨아 들일 듯한 마력(魔力)을 사출했다. 현수는 어느 순간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나마 남 아 있는 사고력마저 일시에 상실하고 말았다. 그의 두 눈에 점차 뜨거운 열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백화미의 섬섬옥수를 잡았다. 백화미는 의식적으로 그의 가슴으로 무너지듯 안겨 들어왔다. 그 러자 부드러운 여체(女體)의 감각이 곧 그의 품에 밀착되었고 그 녀와 그의 얼굴은 맞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백화미의 두 눈이 사르르 감겼다. 그녀의 속눈썹은 무척이나 길었다. 까만 속눈썹이 옥(玉)같은 얼굴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더 매혹적이 었다. "스님......." 백화미는 낮게 그를 부르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붉고 탄력있는 입술 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빛났고 그녀의 입에서 는 뜨거운 입김이 토해져 현수의 마음을 불태웠다.

현수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으음......." 두 사람의 입술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었다. 입술과 입술을 통해 꿀물같은 타액이 오고 가는 사이 백화미의 백 옥같은 손은 그의 목을 휘어감고 있었다. 현수는 황홀감에 정신이 빙글빙글 도는 듯 했다. 어느새 그의 손 길은 자신도 모르게 백화미의 몸에서 승포를 벗겨내리고 있었다.


스르르.......

백옥 덩어리같은 백화미의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정녕 뇌쇄적 인 육체였다. 백화미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젖가슴에 대었다. "음!" 현수는 뜨겁고 뭉클한 여인의 촉감에 전신을 떨며 그 젖가슴을 꽉 움켜 쥐고야 말았다. "아... 아......." "으음!"

동굴 속은 이내 열풍(熱風)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흑의미부 단혜령(段慧令). 그녀는 안면이 경직된 채 전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반면 현오대사는 두 눈을 감은 채 내심 계속 불호를 외우고 있었 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부처님이시여....... 이 깊은 정해(情 海)로부터 제자를 구원하소서.......' 단혜령의 두

눈이 갑자기 악독하게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앙칼지게 외쳤다. "맞아요! 곡무현은 육십 년 전에... 이미 죽었어요." 그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수중의 부러진 단심도를 치켜세웠다. 단심도의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현오대사의 심장을 향해 단심도를 찔렀다. 쉭!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었다.

그러나 현오는 여전히 눈을 감고 지 않았다.

불호만 외울 뿐 피할 생각도 하

푹! 단심도는 정통으로 그의 심장에 깊숙히 박혔다. 피(血)! 피가 치솟았으나 현오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않았다. 그는 마치 부 처라도 된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아!"

단혜령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찰나, 현오는 드디어 눈을 떴다. 그 러나 그의 눈에는 짙은 고뇌가 서려 있을 뿐 추호도 죽음의 공포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를 보던 단혜령의 눈이 기이할 정도로 사악해졌다. 그녀는 창백 한 안면에 계속 경련을 일으키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곡무현! 육십 년 준 것이에요!"

지한(六十年之恨)을... 이 단심도를 통해 돌려

현오는 다만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털썩!

마침내 그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대사형....!" 외침과 함께 그 자리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선좌원주 인 현광이었다. 현광대사는 급히 땅에 쓰러진 현오를 부축했다. "대사형! 대사형......."


그러나 이미 현오는 말이 없었고 어느새 그의 얼굴은 고요하게 가 라앉아 있었다.

"아! 대사형......." 현광대사는 절망적인 탄식을 발하며 현오를 천천히 땅에 뉘었다. 그의 불심 깊은 얼굴에 무서운 분노심이 솟구쳐 오른 것은 그 순 간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여시주! 빈승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소!" 단혜령은 현오의 시체를 힐끗 바라보더니 곧 미친 듯이 웃었다. "호호호호호....... 이미 육십 년 전에 죽었어야 할 자다!" 현광은 더욱 분노했다. "아미타불... 불존이시여! 살계(殺戒)를 범하는 제자를 용서하소 서!" 현광은 망설이지 않고 즉시 혜령을 공격했다.

양쪽 승포자락을 위맹하게 흔들며 단

위이잉--! 승포자락이 빳빳하게 펼쳐지며 괴이한 금속성을 냈다. 단혜령은 냉소 지으며 급히 일 장의 옥수(玉手)를 날려 보냈다. 파팟! 손이 승포에 부딪친 순간, 그녀는 마치 강철을 친 듯 손이 찌르르 울림을 느끼고 안색이 변했다.


"단포철공(鍛袍鐵攻)!" 그녀가 경악하여 외치자 현광은 앞으로 두 걸음 미끄러지며 단호 하게 외쳤다. "살계를 범해 자결하는 한이 있어도 여시주를 용서하지 않겠소!" 위-- 잉! 위- 잉! 무서운 공격이 퍼부어졌다. 현광대사의 소맷자락은 소림절예의 절공인 단포철공으로 마치 강 철판처럼 단단해졌다. 소맷자락이 어지럽게 춤추며 태산을 무너뜨 릴 듯한 경풍이 주위 사오 장을 휩쓸었다. 단혜령은 이리저리 신묘한 보법으로 공격을 피하느라 도저히 반격 할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과연 소림의 중들은 무섭구나!' 그러나 그녀의 눈에 일순 빛을 발했다.

살기가 서렸고 양손은 이내 벽옥(碧玉)

"호호호... 그 따위 시시한 소림의 무학 따위로는 나를 이기지 못 할 것이다!" 그녀는 조소를 날리며 양손을 떨쳤다. 벽옥빛의 투명한

강기( 氣)가 무섭게 둥근 원을 그리며 일어났

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웅혼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미타불... 현광, 손을 거두어라!" 휙! 동시에 누군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콰르르릉! 엄청난 폭음이 울린 순간, 현광은 가슴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뒤 로 연달아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단혜령 역시 뒤로 다.

두 걸음 물러났으며 그녀의 안색은 크게 변했

'누가 이토록 무서운 내공을?' 자욱한 흙먼지가 가라앉자 그 가운데 한 명의 고승이 홀연히 서 있는 것이 드러났다. 그는 바로 소림최고 기승인 천심선사(天心禪 師)였다. 뒤이어 몇 명의 고승들이 다시 장내에 출현했다. 천뢰선사와 천기 선사, 그리고 현공대사 등 십여 명이었다. 현광대사는 황급히 천심선사에게 허리를 굽혔다.

"대사부님......." 단혜령은 그 광경에 안색이 변했다. '저 노승이 바로 천심이란 말인가?' 천심선사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현오의 시체를 보고도 안색이 조 금도 변치 않았다. 그저 담담히 물을 뿐이었다. "여시주께서 조금 전에 쓴 무공은 혹시 이백 년 전 천마교주(天魔 敎主)였던 벽안마희(碧岸魔姬) 냉소군(冷素君)의 벽옥사라공(碧玉 邪羅功)이 아니오? 여시주께서는... 벽안마희와는 어떤 관계이시 오?"

그 말에 소림의 고승들은 모두 대경했다. "벽옥사라공! 아미타불......." 단혜령의 안색이 놀라움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곧 그녀는 교소를 날렸다. "호호호... 과연 선사의 안력은 대단하시군요!"


그녀는 안색이 곧 싸늘하게 변하며 오만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앞으로 오 년 이내에 천하는 마종지문(魔宗之門)이 다스리게 될 것이다! 소림사가 비록 강하다지만 마종지령(魔宗之令)을 따르지 않는다면 처참하게 멸문을 당하고 말 것이다!" "뭣이? 아미타불......" 소림의 고승들은 일제히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멈추 지 않고 외쳤다. "호호호... 그뿐만이 아니다. 너희 소림사가 애지중지하며 키우고 있는 그 애송이 어린 놈도 지금쯤 나의 제자에 의해 철저히 망가 지고 있을 것이다! 호호호......." 단혜령은 요란하게 웃으며 신형을 허공으로 날렸다.

현광은 대노하여 버럭 외쳤다. "여마! 도망가지 마라!" 그는 곧 뒤따라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천심선사가 그 를 만류했다. "그만 둬라. 현광!" 그 말에 현광은 멈칫했으나 수긍이 가지 않는 듯 불만스러운 시선 으로 천심선사를 바라 보았다. "하지만 대사부님, 현오사형이 이렇게......."

죽은 현오와 그의 친분을 익히 아는 천심선사는 합장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현오는 스스로 그 길을 택한 것이다." 천심선사는 이어 현오의 시체 곁으로 다가가 그를 안아 들었다. "또한 현오는 아직 죽지 않았다."


이는 또 무슨 말인가? 천심대사의 나직한 읊조림에 현광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현오대사는 심장이 관통되어 이미 숨 이 멎었는데 어찌 죽지 않았다는 것인지....... 그러나 그는 천하에서 가장 존경하는 천심선사를 믿었다. 천심대 사의 읊조리는 음성도 실은 그만이 들었을 뿐이었다.

한편, 천심선사는 현오대사의 시신을 옮기려다 문득 그의 왼손을 보고는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현오대사는 전신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반면에 왼손을 꽉 움켜쥐 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부러진 단심도의 끝이 삐져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육십 년 전 단혜령과 나누어 가졌던 정표로써 그의 심장에 박힌 단심도의 나머지 부분이 아닌가? 천심선사는 탄식했다. '단심도....... 현오여! 너는 그동안 얼마나 괴로와 했는가?'

천심선사는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로 인하여 네가 모든 것을 잊고 속세의 연을 끊을 수 있 게 된다면... 노납도 더이상 바랄 것이 없건만.......' 천심선사는 현오를 안아들고 걸었다. 천뢰선사가 그의 옆에 다가와 불안한 듯 물었다. "사형, 현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 아까 그 여마가 말한대 로......." 천뢰선사는 차마 뒷말을 잇지도 못했다. 그러나 천심선사는 염려 말라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를 찾지 말게. 그가 진정한 소림과 무림의 운명을 걸머질 기재 (奇才)라면 결코 색(色)에 무너지지는 않을 걸세." "그렇다면!"


"아미타불... 어쩌면 오히려 그로 인해 자네가 설정한 반야밀다대 승신공의 삼십육 단계 수련 중 마지막 이 관(二關)의 하나인 심관 (心關)을 넘어설지도 모를 일이네." "아!" 천뢰선사의 얼굴이 복잡하게 변해 갔다.

그 사이 천심선사의 얼굴에는 어리고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새삼 불안의 기운이

그는 거의 남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그 여마가 소림에서 현수를 키운다는 사실을 알았단 말인가? 그럼 이 소림에 첩자가? 설마 그럴 수는......." 천심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말은 오직 천뢰만이 들었다. (사형!)

천뢰의 안색은 삽시에 무섭게 굳어졌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사제, 아무 말 말게. 내게 생각이 있으니.......) 그들은 전음으로 이같이 주고 받았다. 천뢰선사는 이것도 저것도 불안을 금할 길이 없었다. 비록 그는 천심선사를 하늘같이 믿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걱정을 아예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로서는 사실 소림의 첩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격정적인 성격을 가진 천뢰선사는 무엇보다도 당장 현수의 안위가 궁금해 가슴이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그가 세상에서 오직 유일하게 정(情)을 느끼던 현수가 아닌가? 그 는 팔백 일의 수련을 통해 현수와 너무도 깊은 정이 들어 있었다. 천뢰선사는 거세지는 호흡을 억지로 자제하며 되뇌였다.


'현수.......'

동굴 안은 뜨거운 열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요녀(妖女)와 선녀(仙女)의 양면성을 한 몸에 가지고 있는 백화미 (白花美). 그녀의 나신은 온통 도화빛이 되어 있었다. "아아......." 그녀는 연신 가쁜 숨을 몰아 쉬었고 현수의 양 손이 그녀의 불같 이 달아오른 나신을 더듬고 있었다. 여인의 은밀한 부분을 스치는 현수의 끓어 올랐다.

손길에 그녀는 용광로처럼

"으음......."

두 사람의 격정적인 신음 소리가 동굴을 더욱 뜨거운 열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백화미는 자신의 몸을 동굴 바닥에 뉘였다. 그녀는 두 다리를 약 간 벌린 채 짙은 열망의 호소가 담긴 눈으로 현수를 불태울 듯이 응시했다. 현수는 거친 숨을 토했다. 그의 영준한 얼굴은 온통 붉게 달아 오 른 채 극심한 갈등들을 어지럽게 교차시키고 있었다. 욕정(欲情). 이 세상에서 가장 참기 힘든 것이 바로 욕정이리라.

현수의 가슴은 발산하고 싶은 욕정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참으면 참을 수록 욕망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더구나 백화미의 마력적인 눈은 그의 혼백을 빨아들이고 있지 않 은가? 두 다리를 비스듬히 벌리고 그의 전신을, 젊은 육체를 받아


들일 자세를 취한 채....... 마침내 현수는 무너지듯 백화미의 나신 위에 자신을 실었다. 그러자 백화미의 얼굴에 일말의 득의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 은 마치 정복자의 자만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일면 그 니.......

속에는 어떤 가벼운 실망의 표정도 실려 있었으

백화미, 그녀는 대체 어떠한 여자인가? 그녀는 두 눈을 스르르 감았고 현수의 미칠 듯한 욕정의 행위가 그녀의 전신을 마구 탐하고 있었다. "헉헉......." 그의 폭풍같은 호흡을 귓전에 느끼며 백화미는 사지를 늘어뜨렸 다. 이제 그의 폭발할 듯한 남성이 자신을 삼킬 때를 기다리만 하 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문득 짤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현수의 동작 이 갑자기 중지되자 백화미는 놀라서 눈을 떴다.

현수는 그녀의 나신 위에서 두 눈을 한껏 부릅뜬 채 마구 안면근 육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안돼!" 현수는 뒤이어 버럭 외치더니 마치 불에 데인 사람처럼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니?" 백화미는 대경하여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현수의 허리 를 와락 끌어 안고는 물었다.

"당신, 왜 그러시죠?" 현수는 마치 목석이라도 된 듯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뿐 말이 없 었다. 백화미의 뇌쇄적인 얼굴에 짧게 당황의 빛이 스쳤다.


"당신......." 그녀는 달콤하게 말하며 현수의 손을 이끌어 다시 자신의 젖가슴 에 대었다. 현수의 손이 부르르 떨리더니 급히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멍청하던 얼굴에 곧이어 장엄한 표정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 의 혜지를 잃고 있던 두 눈에 강렬한 광채가 빛나며 전신은 마치 거대한 산을 연상케 하듯 은은한 위엄을 되찾았다. 현수는 곧 백화미에게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여시주, 소승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현수의 음성은 이미 물처럼 처럼 엄숙했다.

가라앉아 있었고 입정한 고승의 설법

백화미는 아연하여 알몸을 가리지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알몸을 보는 현수의 눈빛은 더이상의 흔들림이 없 었다. 마치 생명이 없는 나무를 대하는 것처럼 지극히 담백했다. 그는 그저 그렇게 담담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백화미의 얼굴이 문득 애처롭게 변했다. 그녀는 커다란 두 눈에 담뿍 눈물을 고이게 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제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 실로 그 어떤 철혈인(鐵血人)이라도 녹일만큼 가련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현수는 이제 전혀 미혹되지 않았다. "여시주, 그대의 두 눈과 마음은 소승에게 진실(眞實)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대는 분명 어떤 목적을 품고 있습니다. 시주의 행동과 생각에는 수많은 모순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백화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이었 고 그녀는 곧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흑... 당신은 순결한 저의 몸을 마음대로 유린하고는... 이제


와서 고고한 척 발뺌을 할 셈인가요?" 현수는 묵묵히 합장한 채 고요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제 그의 마 음은 굳기가 강철같아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릴 수가 없었다. 백 화미는 돌연 이를 갈더니 싸늘하게 외쳤다. "당신을 죽여 버리겠어요!" 그녀는 만면에 독한 살기를 띄우더니 일 장을 뻗어 현수의 앞가슴 현기혈(玄機血)을 쳤다. 그녀의 장심은 은은한 벽옥빛을 띄고 있 었다.

현수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설사 피하고 싶어도 그는 무공 초식 을 조금도 모르는 몸이기에 피할 수가 없었다. 퍽! 백화미의 장심이 그의 가슴에 적중했다. 그러나 당혹에 빠진 것은 오히려 백화미 쪽이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손으로 철벽을 때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그녀는 뒤로 두 걸음 밀려났고 현수도 두 걸음 물러섰다. 그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으나 아무런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이럴... 수가!" 백화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뇌까렸다. "아미타불......." 현수는 불호를 외며 잠시 서 있더니 서서히 몸을 돌며 동굴 밖으 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고 백화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사라지는 현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악독했던 모습은 언제부터인지 희한하게도 슬프게 변해가


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눈 속에는 안타까움과 번민이 가득 어렸 다. '현수.......' 백화미는 낮게 부르짖었다. 그녀는 나체인 채로 언제까지고 동굴 안에 서 있을 듯 했다. '현수, 산(山)같은 사내....... 현수! 아아, 내 마음이 왜 이렇 게.......'

백화미는 갑자기 추운 듯이 나신을 움추렸다. 모닥불은 어느덧 꺼져 있었고 조금 전의 일은 오직 환상(幻想)인 것만 같았다. 백화미(白花美). 그녀는 그 순간부터 현수의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될지도 모 른다고 생각했다. ■ 대소림사 제 1 권 제 6 장 적미천존(赤眉天尊), 그리고 십팔나한관(十八羅漢 關) -1 ━━━━━━━━━━━━━━━━━━━━━━━━━━━━━━━━━━━

쏴-- 우르릉! 쏴아---! 승불폭의 웅장한 폭포수가 쏟아져 내렸다. 현수는 폭포 앞에서 멍한 표정으로 선 채 심한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부끄럽다. 자칭 불문의 제자라는 내가 한낱 여인의 미색(美色)에 그토록 흔들리다니?' 폭포수의 비말에 젖고 있는 현수의 얼굴은 여느 때와는 판이할 정 도로 어둡게 변해 있었다.


'세 분 사부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현수는 스스로를 꾸짖으며 후회가 담긴 시선으로 쏟아지는 폭포수 를 응시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카랑카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와 그의 상념을 깨웠 다.

"하하하하... 소화상(少和尙)! 무슨 근심이 그렇게도 많은가?" 현수는 흠칫 놀라 급히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 았다. "헛허헛헛! 노부를 찾느냐? 그러나 너의 눈으로 나의 모습을 발견 하긴 좀 힘들 것이다!" 실로 괴이한 일이었다. 폭포소리가 요란함에도 불구하고 카랑카랑 한 음성은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현수는 합장했다. "아미타불... 어떤 고인이신지요?"

"소화상, 자네는 소림의 제자인가?" "그렇습니다." 현수는 허공에 대고 대답하자 을 다셨다.

음성의 주인공은 아쉽다는 듯 입맛

"허어, 아깝군. 그대와 같은 자질을 지닌 아이가 소림같이 고리타 분한 곳에서 썩고 있다니......." 현수는 계속 주위를 살폈으나 여전히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어디서 음성이 들리는지는

커다란 웃음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핫핫핫핫핫......." 마치 천 개의 철종을 치는 듯 쩌렁쩌렁하게 울려 고막이라도 터뜨


릴 것같은 엄청난 광소였다. "자! 소화상, 잘 보아라. 너에게 노부의 모습을 보여 주겠다." 자신감에 찬 외침이 들림과 동시에 굉음과 함께 놀라운 현상이 벌 어졌다. 쿠르르릉!

거대한 승불폭의 폭포수가 돌연 흐름을 멈추는 것이 아닌가? "아!" 현수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기현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쿠르르릉....... 흐름을 정지했던 폭포수가 이번에는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너 무도 기가 막히도록 놀라운 일이었다. 현수는 일시지간 넋을 잃은 채 멍해졌다.

"으핫핫핫핫핫!" 일진의 광소가 다시 그의 고막을 때렸다. 이어 거대한 흡인력이 현수의 몸을 휘감더니 그대로 승불폭으로 끌어들였다. "아앗!" 피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그의 몸은 삽시간에 폭포수 뒤쪽 의 공간을 뚫고 들어가 바닥에 떨어졌다. "으음." 현수는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비록 동굴 속은 어두웠으나 그의 안력은 그대로 환히 살펴볼 수 있었다. 곧 그의 눈길은 한 곳에 못박혔다.


괴노인(怪老人). 동굴 안쪽 벽의 암석 위에 있었다.

한 명의 괴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노인은 백발이 성성하여 나이가 이미 백 세(百歲)를 훨씬 넘은 것 처럼 보였다. 특이한 것은 괴노인의 눈썹 길이가 무려 한 자에 이 르렀는데 붉은 적미(赤眉)라는 것이었다. 입고 있는 낡아빠진 의 복 또한 홍의(紅衣)였다.

현수는 캄캄한 동굴 속에 그렇게 앉아 있는 괴노인을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실로 괴이한 노인이구나.' "소화상, 너는 소림사 어느 중의 제자냐?" 현수는 비록 공손하지만 꼿꼿하게 반문했다. "그것은 어찌하여 물으십니까?" "만약 그대가 노부가 생각한 사람의 제자가 아니라면 노부에게 한 가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현수는 침묵했고 괴이한 적미노인은 불그스레한 섬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다시 물었다. "너는 천심(天心)의 제자냐?" 현수는 비로소 움찔 했다. 적미괴인은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부가 한 발 늦었군. 확실히 그 늙은 중은 혜안(慧眼)이 있어." 적미괴인은 탄식하며 아쉬운 듯 현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기 이하게도 차츰 따뜻하게 변하고 있었다.

"소화상, 너는 노부가 누군지 아느냐?" "모릅니다."


"후후... 노부는 과거 백이십 년 전만 해도 사도무림을 관장하고 천하를 흔들었다. 노부의 별호는 적미천존(赤眉天尊) 여적성(呂赤 星)이라고 했다." 적미천존(赤眉天尊) 여적성(呂赤星). 만일 일반 무림인이 이 별호를 들었다면 필시 안색이 잿빛으로 변 하고 말았으리라. 그는 근 백이십 년 전 사도 제일의 방파인 현천교(玄天敎)의 교주 이자 사도무림의 대종사(大宗師)이기도 했다. 일신상에 실로 가공할 무공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적수가 무림에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백 년 전 그는 갑자기 실종되었다. 그 이후 그의 실종과 함께 현천교도 자연히 해체되었다.

현수는 강호무림의 정세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를 알아보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적미천존 여적성은 눈에서 붉은 광망을 다.

번뜩이며 칼칼하게 말했

"노부는 이제까지 삼 갑자(三甲子)를 살아오는 동안 평생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단지 인생에 있어서 두 번 좌절을 당한 적 이 있을 뿐이다." 여적성은 안색을 이었다.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감개 어린 음성으로 말을

"그 두 번의 좌절 중 첫번 째 좌절로 인해 현천교가 해체되었고 두번 째 좌절로 인해서는 이 승불폭에 갇혀 백 년 간이나 나오지 못했다." 여적성의 두 눈에는 괴이한 빛이 일어났다.

"그러나 결코 무공으로 좌절을 당한 것은 아니다. 천하에서 그 누 가 나 적미천존을 꺾을 수 있단 말이냐?"


여적성의 얼굴에서는 그야말로 꺾을 수 없는 오만함과 자부심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현수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아미타불... 노시주께서는 틀림없이 그 오만한 성격 때문에 좌절 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 말에 여적성의 안색이 듭 변화를 일으켰다.

보기싫게 일그러졌으며 그의 표정은 거

도중에는 분노한 듯 잠시 살기가 스쳐 지나가기도 했으나 결국 그 는 탄식을 했다. "으음.......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아미타불.... 소승의 법명은 현수라고 합니다." 여적성은 안색을 씰룩이며 말했다. "바보같은! 너는 평생 불문과는 인연이 없다. 노부의 예상이 맞는 다면 너는 필시 얼마 안 있어 환속하게 될 것이다." 현수가 흠칫하는 사이 여적성이 다그치듯 말했다.

"네 실제 이름을 대란 말이다!" 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후... 성......." 실로 오랫만에 뇌이는 이름이었다. 그의 음성은 어쩔 수 없이 떨 려 나오고 있었다. "하후성, 좋은 이름이다. 노부의 마지막 이름 자와 같군!" 여적성은 쓰디 쓴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천심, 그 늙은 중은 아주 그럴 듯한 제자를 구했군. 너로 인하여 소림의 성세는 무궁할 것이다."


그는 마치 내뱉듯 말하고 있었으나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눈에 서 이채가 번쩍였다. '좋다. 천심, 그대는 노부를 이곳 승불폭에서 백 년씩이나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첫번 째 대결에서는 내가 진 셈이다. 그러나 승 부는 지금부터다. 두번 째 대결에서는 결코 패하지 않을 것이다!' 여적성은 이어 현수를 노려보며 괴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형제, 노부의 눈을 보아라." 현수는 순순히 여적성의 눈을 응시했다. 그러나 곧 그는 흠칫했 다. 적미천존 것이 아닌가?

여적성의 두 눈이 갑자기 붉게 타오르며 확산되는

현수는 순식간에 그의 눈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의 사 고력과 혜지(慧志)는 모두 사라져 버리고 두 눈은 멍청해졌다. 적 미천존 여적성은 침중하고 웅혼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소형제! 지금부터 노부가 말하는 것은 영원히 너의 머리 속에 남 아있게 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현수의 머리 다.

속으로 그의 말은 깊숙이 파고 들었

"노부의 무공은 현후천겁마공(玄侯天劫魔功)으로부터 비롯된다. 현후천겁마공은 다시 세 가지로 분리되어 과......."

한 가지의 장법(掌法)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갔다. 괴이한 마력이 깃든 여적성의 말은 속속 현수의 뇌리를 파고 들었 다. 한 시진, 두 시진... 다섯 시진....... 어느덧 두 사람은 마주 앉은 채 꼬박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동안 여적성의 입술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현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혼(魂)이 빠진 듯 그의 마안(魔眼)에 붙들려


있었다. 현수는 차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정신이 들자마자 깜짝 놀라며 급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런데 아무도 없었다. 동굴 속은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적미천존 여적성은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가 앉아 있던 암석에는 그의

"아!" 현수는 머리 속이 꽉 찬 듯한 느낌과 함께 심한 혼란을 느꼈다. 마치 눈으로 보듯이 머리 속으로 수많은 무공(武功)의 도해(圖解) 가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아아, 이럴 수가!' 현수는 머리를 움켜쥐며 당혹에 빠지고 말았다. 무공의 도해는 한결같이 모두가 패도적이고 사이(邪異)한 것들 뿐 이었다. 그러나 또한 지극히 심오하고 정묘한 것이기도 했다. 그의 눈에 불현듯 무엇인가가 보였다. 바로 여적성이 앉아 있던 암석의 바닥에 한 자루의 검은색 화살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현수는 의문을 느끼고 화살을 뽑아 살펴 보았다.

<현천령(玄天令).>

한 뼘이 조금 넘는 검은 화살의 날개 부분에는 그렇게 씌여져 있 었다. "현천령......." 또한 암석에 지력(指力)으로 새겨진 글귀가 보였다.


<소형제, 노부는 백년금제에서 풀려 밖으로 나간다. 강호에서 다 시 만나게 될지는 피차의 인연에 달렸다. 현천령은 너와 내가 만 난 기념으로 준다. 오늘의 일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소형제와 나만의 일이기 때문이다. 훗날 환속하여 강호에 나온다면 중양절(重陽節) 악양성(岳陽城)의 악양루(岳陽樓) 현판 에 현천령을 꽂고 십일(十日)을 기다려라.......>

현수는 여기까지 읽고는 고개를 저었다. '노시주, 소승이 어찌 환속할 수 있단 말이오. 뜻은 고마우나 소 승은 결코 환속하지 않을 것이오.'

그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며 암석 위에 새겨진 글을 다시 읽어내 려 갔다.

<......마지막으로 소형제에게 충고(忠告)를 남기겠다. 강(强)하 면 부러진다, 겸손해라. 이것은 노부가 백팔십 년을 살아오며 절 실히 느낀 것이다. 강호는 훙험하기 그지없으며 음모와 질시가 심 한 곳이다.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마라. 목숨에 위험이 없는 한 (恨) 항상 마음과 능력의 삼 푼은 숨겨두어라. 그것이 진정한 강 자의 처세법이다. 그럼 훗날 강호에서 다시 만나길 바라며 소형제 의 무운(武運)을 빌겠다.

적미천존(赤眉天尊)>

현수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기이하게도 사도지존인 적미천존의 인상이 지워지 지 않은 채 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가 설사 사도(邪道)의 거마(巨魔)일지라도 웬지 이상한 정(情) 에 이끌리는 듯한 심정이 들고 있었다. '노선배.......'


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내심 그렇게 그를 부르고 있었다.

달마원(達磨院). 그곳은 자질이 특출하여 소림에서 선택받은 기재(奇才)들만이 고 승들로부터 무공수련(武功修練)을 받는 곳이다. 달마원에서 무공수련하는 승려들을 일컬어 범천승(梵天僧)이라고 부른다.

범천승, 그들을 선택하는 조건은 무척이나 까다롭고 철저했다. 그 러나 일단 범천승이 되면 소림최고의 절학(絶學)을 전수 받게 되 며 또한 그들은 장차 소림의 요직을 받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자는 다음 대(代)의 소림장 문인으로 내정(內定)되는 것이었다. 일 대(一代)에 범천승은 단지 십 명(十名) 안팎이었다. 현재에도 소림의 천 명(千名)에 달하는 일반 중들 가운데 범천승 은 이십여 명 정도일 뿐이었다. 현수(玄修).

그가 태실봉의 승불폭에서 소림사로 돌아왔을 때 달마원의 분위기 는 침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달마원 소속의 승려들은 모두 법당(法堂)에 모여 염불합장을 하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윽한 향연이 법당을 메우는 가운데 모두 비 통하고 침중한 안색이었다. 현수는 의아심을 금치 못하는 한편, 만면에 의혹을 지으며 법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명의 중이 밖으로 걸어나왔는데 그는 바로 정혜(丁慧)였다.


그는 삽팔나한(十八羅漢)중 가장 젊은 승려이며 또한 정자(丁字) 행렬 중에서도 가장 젊었다. 그러나 그는 현오대사의 수제자로써 자질이 비범하고 능력이 출중해 범천승(梵天僧)에 포함되어 있기 도 했다. 그는 이제 이십사오 세 정도로 다음 장문인으로 내정되어 있었으 며 영준한 용모와 지혜로운 안광 등은 누구나 그가 기재임을 느끼 게 했다. 정혜는 현수를 발견하자 공손히 합장했다. "아미타불... 소사숙님." 현수는 그에게 물었다.

"정혜, 어찌된 일이오? 무슨 일이 생겼소?" 정혜는 떨리는 음성으로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소사숙, 사부님께서... 원적하셨습니다." 현수는 충격을 받았다. "혀, 현오사형께서!" 그의 가슴이 격탕을 일으켰다.

불심각(佛心閣). 한 선방(禪房)에서 천심선사가 선정에 든 듯 눈을 위에 단정히 정좌하고 있었다.

감은 채 포단

그의 앞에는 현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대사부님! 제자가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현수의 격동된 음성에 천심선사는 두 눈을 떴다. 그의 눈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맑고 고요했다.


그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현수,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노납이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너는 천일수련(千日修練)중이니 더이상 신경 쓰지 말아라." "대사부님!" "현수......." 천심선사는 고요하게 현수를 응시했다. "지금 너는 노납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이 있을 것이다." 현수는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현수, 노납은 네게 한 가지만 말하겠다. 태실봉에서 일어 났던 그 일은 훗날의 네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반드시 굳은 신념으로 헤쳐 나가야만 한다." 그뿐이었다. 천심선사는 두 눈을 스르르 감고 다시 선정에 들고 말았다. 현수는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요녀(妖女)백화미(白花美)에 관한 일을 고백하고 싶었고 또 승불폭 뒤꼍 암동 속의 적미천존 여적성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말 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만 했다. 그는 공손히 천심선사를 향해 삼배를 올린 후

선방을 물러 나왔

다.

어두운 석실(石室). 사방은 완전히 밀폐되어 창문조차 없었다. 석실은 사방 오륙 장이 넘는 넒은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현수는 석실 중앙에 상의를 벗고 정좌하고 있었고 그의 주위에는 수십 개의 촛불이 켜져 그를 비추고 있었다.


현수는 참선에 든 듯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크... 르... 릉! 암석이 마찰하는 음향과 함께 석실의 한 쪽 벽면이 갈라졌다. 문 이 열리자 그곳으로부터 한 노승이 들어왔다. 그는 천뢰선사였다. 그의 표정은 엄숙하기 그지 없었으나 현수를 보는 눈빛만은 매우 따뜻했다. 그는 서서히 현수에게 걸어와 입을 열었다. "현수, 열흘이 지났다. 이제 냐?"

마음 속의 모든 잡념을 떨쳐 버렸느

"네, 사숙님!"

"이제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위한 마지막 관문을 뚫어라. 노납은 이 것을 십팔나한관이라 명명(名命)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엄숙했으며 천뢰선사는 횃불같은 눈으로 여전히 미동도 않고 앉아 있는 현수를 응시했다. "잠시 후면 소림의 절정고수인 십팔나한이 들어온다. 그들은 철봉 (鐵棒)으로 너의 전신 삼백육십오 개 혈도(穴道)를 사정없이 격타 할 것이다." 현수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너는 절대 그것을 막아서는

안되며 또한 피해서도 안된다. 단지

맨몸으로 철봉과 부딪쳐야 한다." 천뢰선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만약 너의 정신이 조금이라도 흩어지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너는 주화입마(走火入魔)되어 이제껏 쌓은 공(功)을 모두 잃을 뿐만 아 니라 심하면 생명까지 버리게 된다." 현수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는 반면 오히려 천뢰선사의 얼 굴에 갈등이 어렸다.


천뢰선사는 염려스러운 눈으로 현수를 응시하며 말했다. "현수, 자신이 없다면 그만 둬도 좋다."

그 말에 현수의 굳게 다물렸던 입이 비로소 열렸다. "사숙님, 제자는 이미 모든 것을 각오했습니다." 천뢰선사의 노안에 경련이 스쳤다. "현수......." 그는 무엇인가 말하려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만 두자." 그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침중하게 말했다.

"현수, 반드시 기억하라. 반야밀다대승신공의 이환결(移環訣)과 탄공결(彈空訣), 그리고 유화결(柔化訣)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 다." "네, 사숙님." 현수는 입술을 지그시 물며 대답했다. "현수, 반드시 성공하길 빌겠다." 천뢰선사는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들어와라."

그 순간 열린 문으로부터 십팔 명의 중이 들어왔는데 그들이 바로 십팔나한승이었다. 그들은 모두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손에는 길이 일 장(一 丈) 가량에 무게가 백여 근이나 나가는 긴 철봉을 들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정혜(丁慧)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陳)을 펼쳐라!"


천뢰선사의 외? ㎱?떨어지자 십팔나한은 소리도 없이 신형을 이동 했다. 현수를 화점(花點)에 놓고 그들은 구궁(九宮)의 형태로 에 워쌌다.

현수는 그들을 둘러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정신 을 모으며 합장했다. 천뢰선사의 물음이 들렸다. "현수, 준비가 됐느냐?" "아미타불......." 불호가 현수의 대답이었다. "그럼 시작해라." 천뢰선사의 말이 다시 떨어지자

십팔나한은 철봉을 쥔 채 현수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들이 회전하자 주위에 있던 촛불이 일제히 꺼질듯 흔들렸다. 그 러나 한 개도 실제로 꺼지지는 않았다. 정인대사(丁仁大師). 그는 십팔나한의 수좌로 육 현수에게 합장했다.

순(六旬)이 넘은 노인으로 제일 먼저

"아미타불... 소사숙, 용서하십시오!" 그의 손에서 무지막지하게 철봉이 날았다.

휘... 잉! 철봉의 끝은 정확히 현수의 벌거벗은 앞가슴 현기혈(玄機血)을 강 타했다. 퍽!


'으윽!' 현수는 분명 비명을 질렀다. 엄청난 철봉의 위력에 그는 그대로 거꾸러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비명은 결코 입 밖 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移)... 탄(彈)... 유(柔).......'

대신 현수는 마음속으로 계속 구결을 외웠다. 윙--퍽! 또 하나의 철봉이 이번에는 그의 명문혈(命門血)을 강타했다. "욱!" 그의 입에서 한 줄기 피화살이 뻗쳤다. 그러나 쉴 틈이 없었다. "아미타불......."

이번에는 정운(丁雲)의 철봉이 불호와 함께 바람을 일으키며 무섭 게 현수의 장대혈(章臺血)을 쳤다. "우... 욱!" 현수의 입에서 다시 피가 튀었다.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 십팔나한은 모두 소림 절정고수였고 그들 이 전력(全力)을 기울인 철봉의 강타는 설사 일류 고수일지라도 단번에 즉사할 정도였다. 물론 현수는 달랐다. 그는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익히기 위해 삼십 오 관을 넘었으며 팔백 일의 껍질을 벗기고 뼈를 깎는 수련을 통 해 이미 전신이 무쇠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그러나 십팔나한의 철봉은 가히 바위에 구멍을 뚫고 철판을 부술 만큼 위력적이었다. 퍽!


"읍......." 십팔나한의 철봉이 현수의 혈도에 정확히 떨어질 때마다 현수는 참혹한 신음을 토했다. 정혜(丁慧)의 철봉이 다시 다.

그의 복부 수분혈(水分血)을 강타해왔

'이(移).......' 그는 즉시 정신을 모아 구결대로 전신의 진기(眞氣)를 수분혈로 옮겼다. 그러나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배가 터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비록 수분혈에 진력을 모았지만 정혜의 정순한 내공과 철봉의 위 력에 그는 다시 피를 토해야 했다.

십팔나한의 무예는 한결같이 초범했다. 그들이 삼백육십오 혈을 치는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으 며 현수는 바로 그들 십팔나한진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었 다. 그의 전신은 이미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 있었고 칠공(七孔)으로

선혈이 낭자했다. 실로 눈 뜨고는 못볼 참혹한 모습이었다. 휙! 현수의 목으로 날아들던 정인(丁仁)의 철봉이 일순 멈칫했다. 그 는 고통에 일그러진 현수의 얼굴을 보고는 차마 철봉을 뻗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천뢰선사의 우렁찬 노성이 떨어졌다. "정인! 모든 것을 망치고 싶으냐?" "아미타불......."

결국 정인은 불호를 외우며 철봉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퍽! "크윽!" 현수는 마침내 피를 뿜으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는 한 차례 부르르 전신을 떨더니 이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 의 주위에는 온통 그가 토한 피투성이였다. 그가 혼절하자 십팔나한들은 모두 동작을 멈추었다. 그들의 눈길 은 한결같이 동정을 담은 채 현수를 내려다 보았다.

혈인(血人), 완전히 혈인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천뢰선사의 매몰찬 외침이 들렸다. "정혜! 그에게 청신정혈보환(淸身精血補丸)을 세 알 먹이고 물을 뿌려라!" 정혜는 소스라치듯 움찔했으나 곧 쓰러져 있는 현수에게 다가갔 다. 너무나도 처참한 현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새삼 진 저리를 쳤다. '소사숙.......' 그러나 천뢰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품에서 청신정

혈보환을 세 알 꺼내 현수에게 복용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정현(丁玄)이 현수에게 한 동이의 찬물을 뿌리자 현수는 꿈틀거리며 깨어났다. 정혜가 부축하려 하자 현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혼자... 일어 나겠소."


현수는 비틀거리며 몇 번씩이나 쓰러졌으나 기어이 혼자 힘으로 일어섰다. 그 광경은 실로 처절하고 숙연하기까지 했다. 천뢰선사는 백미를 파르르 떨었으나 눈을 지그시 감으며 외쳤다. "다시 시작해라!"

십팔나한은 그의 명령에도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잠시 멈칫거렸 다. 현수의 몰골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현수가 도리어 핏발이 선 눈을 부릅뜨며 괴상하게 쉰 음성 으로 외쳤다. "어서... 시작 하시오. 망설이지... 말고......." 그 말에 십팔나한은 모두 섬ㅉ한 느낌을 받았다. 현수의 초인적인 의지에 차라리 그들은 공포심마저 느낄 정도였다. 천뢰선사가 뒤이어 외쳤다.

"망설이지 마라. 그것은 현수를 일이다."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치는

십팔나한은 비로소 다시 움직였다. 휙! 윙--- 퍽! 퍽! '크윽! 이(移)... 크... 윽!' 하루, 이틀....... 고통의 나날은 끝없이 되풀이 되었다. 십팔나한은 매일같이 현수의 전신 삼백육십오 혈을 철봉으로 강타 했으며 그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차츰 날짜가 지날수록 그의 고통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 했다. 철봉이 그의 혈도를 치는 순간 저절로 전신의 경기가 한 곳 으로 집중되어 혈도(穴道)를 차단하며 그 부위는 쇠처럼 단단해지 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반야밀다대승신공의 이환결(移環訣)을 완성한 것으로 써, 이환결이란 전신의 진력을 뜻(意)에 따라 하나의 환(環)을 이 루어 이동시켜 적의 공격을 막는 비기(秘技)였다. 어느덧 백(百)여 일이 지났다. 무수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탄(彈)... 탄공결(彈空訣)!'

현수는 내심 부르짖었다. 팍! 단중혈(檀中穴)에 격중되었던 정인(丁仁)의 철봉이 막강한 반탄력 에 튕겨나갔다. 팍! 팍! 팍! "헉!" 연달아 현수의 혈도를 치던 철봉들도 모두 튕겨나갔다.

현수는 마침내 이환결에 이어 탄공결(彈空訣)마저 완성한 것이었 다. 탄공결은 내가의 진력을 신체 한 부위에 모아 강력히 쏘아내는 것 으로 절정에 이르면 단지 뜻(意)만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 고 암경(暗勁)을 쏘아 적을 살상할 수 있었다. 실로 반야밀다대승신공은 오묘불가사의한 기학(奇學)이었다. 다시 백 일(百日)이 흘렀다.

현수는 석실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십팔나한은 그의 주위에 여전히 구궁(九宮)의 형태로 서 있었으며 그것은 이백 일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광경이었다. 천뢰선사가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촛불을 모두 꺼라!" 수십 개의 촛불이 일제히 꺼지고 석실 안은 손가락을 코에 대어도 안보일 정도로 암흑을 이루었다. "현수, 오관(五官)을 모두 차단하라. 눈을 감고 청각도 끊고 후각 도 차단, 모든 감각을 죽여라! 일체 무념무아무상무심(無念無我無 常無心)의 상태로 들어가라."

현수는 천뢰선사의 지시대로 했다. 곧 암흑 속에서 그는 무(無)가 되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인 상태, 즉 그는 허공에 부유하는 공기나 다름 없는 몸이 되고 있었다. 실제로 이런 상태를 즉각 이루기란 하늘로 오르기만큼 어려운 일 이었으나 현수, 천하제일의 기재인 그에게만은 가능한 일이었다. "십팔나한, 동시에 그를 공격해라!" 천뢰선사의 말이 떨어졌으나 이미 온몸의 감각을 죽여버린 현수의 귀에는 그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십팔나한은 일제히 철봉을 뻗었다. 아무런 소리도 공기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그들의 봉 술이 초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설사 음향과 공기의 진동이 있 다한들 현수는 이미 그것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정인(丁仁)의 철봉이 현수의 영대혈(靈坮穴)을, 정호(丁虎)의 철 봉은 현수의 머리 한 가운데 백회혈(百會穴)을, 정혜(丁慧)는 명 문혈(命門穴), 정운(丁雲)은 목 밑 천돌혈(天突穴)을....... 십팔나한의 철봉은 동시에 현수의 전신 십팔 개 사혈(十八個死穴) 을 격타했다.

현수는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열여덟 개의 철봉이 혈도에 닿기도 전에 이미 현수의 심신은 일체(一體)가 되어 있었 다.


'이환(移環)... 탄공(彈空)... 유화결(柔化訣)!' 마침내 천지합일(天地合一)의 상태를 이룬 것으로써, 그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으윽!" 십팔나한은 철봉이 현수의 혈도를 강타하는 순간 손에 극심한 통 증을 느껴 일제히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현수의 각 혈도에서 무서운 경기가 흘러 철봉의 경력을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경력이 배가 되어 도로 튕겨나온 것이었다. "크으으......." 십팔나한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르르 밀려났고, 그 순간 석실 안의 촛불이 일제히 밝혀졌다. 천뢰대사가 벌떡 일어서며 격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쿠르르릉! 석실의 문이 열리며 천심(天心), 천기(天機) 두 고승이 나란히 들 어오는 것도 보였다. 그들 또한 격동 어린 시선으로 석실 안을 둘 러보고 있었다. 반면에 십팔나한은 경악해마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들의 손에 든 철봉들은 한결같이 엉망으로 휘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성공이다!" 천뢰선사가 감격에 찬 음성으로 외쳤고 합장하며 불호를 외웠다.

천심선사는 현수를 향해

"아미타불... 현수, 그대의 반야밀다대승신공의 완성을 축하한 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

현수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었으나 전신에 밀려드는 진한 감동을 어쩔 수가 없었다.


'드... 드디어... 성공... 했구나.......' 그는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 대소림사 제 1 권 제 7 장 소림(少林) 파문(破門) -1 ━━━━━━━━━━━━━━━━━━━━━━━━━━━━━━━━━━━

세월은 유수(流水)같이 흘러 일 년이 지났다. 그동안 현수와 천뢰선사는 자죽림 내의 불망헌에서 한 걸음도 밖 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불망헌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소림의 승려들은 자죽림을 지나치면서 모두 깊은 호기심을 느꼈지 만 아무도 감히 금지로 설정된 자죽림 속으로 들어갈 마음을 품지 못했다. 불망헌의 한 방안. 현수는 정좌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어느새 상당히 길게 자라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고 입고 있는 승포도 낡을대로 낡아 먼지마 저 두껍게 앉아 있었다. 천뢰선사는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 만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현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마치 물처럼 고요하기 만 했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천뢰선사의 백미가 꿈틀함과 동시에 횃불같은 눈에서는 이채가 번쩍 빛났다. "현수, 깨달음이 있느냐?" 현수의 입술이 담담히 열렸다. "있습니다."


"무엇이냐?" "무(無)에서 유(有)를 발견한 듯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천뢰선사의 얼굴에 기쁨이 어렸다.

"오! 장하다. 노납은 기쁘기 한량 없구나." 그러나 곧 천뢰선사의 얼굴은 엄숙하게 굳어지더니 현수를 날카롭 게 쏘아보며 말했다. "현수, 이제 너는 소림 칠십이종절예를 모두 터득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아미타불... 말씀하십시오. 사숙님." "앞으로 소림의 칠십이종절예를 모두 익힌 사람은 너로서 끝나야 한다. 이 비법(秘法)은 영원히 그 누구에게도 전수할 수가 없다." 현수는 놀라며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천뢰선사는 대답하지 않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대 나무 탁자로 걸어가 찻주전자를 들더니 찻잔에 물을 따랐다. 그가 계속 따르자 잔이 넘치고 찻물은 바깥으로 흘렀다. "아!" 현수는 그의 그런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내 깨달을 수 있었 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

"사숙님, 제자 비로소 사숙님의 뜻을 알겠습니다." 천뢰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무엇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 많으면 넘치고 강하면 부러 진다."


"으음." "이것은 노납이 백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느낀 진리다." 할 말을 모두 마친 듯 천뢰선사의 눈빛은 따뜻하게 변했다. "현수, 너는 노납의 말을 이해했느냐?"

"네, 사숙님." 천뢰선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이제 노납의 모든 것을 배웠다. 이제 내일부터는 장경각(藏 經閣)으로 가서 천기사제(天機師弟)에게 배워라." "사숙님?" "천기사제는 소림사상 최고의 인재다. 그의 머리는 천하에서 가장 총명하여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한다. 그래서 그의 머리에는 소림 칠십이종절예는 물론 그 밖의 천팔백육십 종 의 무학이 모두 들어있다."

천뢰선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가 만약 무공을 익힐 체질이었다면 노납을 훨씬 능가했을 것이 다." 천뢰선사는 여전히 현수가 입을 다.

다물고 있자 문득 너털웃음을 졌

"허허허... 현수, 이제 너와 나는 헤어질 때다. 왜, 서운한가?" "사숙님......." "허허허... 이 녀석! 우리 차를 마실까?"

"사숙님......" "껄껄... 자, 현수. 이 차는 노납이 끓인 것이니 맛 좀 보아라. 아마 네 솜씨보다 나을 것이다."


현수는 일어나서 죽탁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공손히 차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차맛을 도통 느낄 수가 없었다. 차맛을 느끼기에는 그의 서운한 감정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그가 차를 다 마시는 동안 천뢰선사는 그의 모습을 정이 넘치는 눈길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현수가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 이미 그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사숙님!' 현수의 가슴에는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정(情)이 일어나고 있었다.

장경각(藏經閣). 이곳은 역대 소림의 모든 불경(佛經)을 보관하는 곳으로 소림사에 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었다. 장경각 내에는 막상 천축(天 竺)에서 온 불경의 진본보다도 더 많은 소림 무학의 비급(秘級)이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장경각의 내부는 온통 서가(書架)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수십만 권에 달하는 불경들이 고풍을 풍겼으나, 특히 그것들 중 소림 천 년 동안 창조된 무공과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수많은 무공비급은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 더우기 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장경각 내에 정 종(正宗)이 아닌 사도(邪道)의 비급도 백여 권 이상 소장되어 있 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동안 소림에 의해 제거된 마두(魔頭)들의 비예 (秘藝)들이었다.

장경각 내의 한 선방(禪房). 그곳에 장경각주인 천기선사와 현수가 마주 앉아 있었다.


현수의 윤기 나는 머리칼은 길게 자라 단정히 묶여져 있었다. 그는 왜 머리를 다시 깎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천심선사의 지시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흰 띠로 묶자 현수의 영준한 용모는 마치 선인(仙人)을 방 불케 할 정도로 뛰어났다. 천기선사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수척하고 쇠잔한 모습이었다.

그는 근래 들어 급격히 체력이 쇠퇴하여 완연히 병색(病色)이 돌 았으며 기실 기동조차 불편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바퀴 네 개가 달린 사륜거에 몸을 의지하 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기선사는 주름살이 깊게 패인 얼굴에 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현수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현수, 너의 몸에 현기가 서리는구나." 현수는 다만 고개를 숙이고 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있을 뿐이었고 천기선사는 반대로 고

"현수, 밖으로 나가보자." "네, 사숙님." 현수는 비로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사륜거의 뒤로 돌아 가 조심스럽게 밀었다. 사륜거는 소리 없이 그가 미는대로 선방을 빠져 나갔다.

눈(雪). 눈이 오고 있었다. 어느덧 겨울이었고 잿빛 하늘을 가득 메우며 탐스러운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허어! 첫눈이 내리는구나." 천기선사는 하늘을 보며 감회 깊게 중얼거렸다.

현수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본시 눈(雪)을 좋아 하던 그였으나 그 눈은 그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 갔지 않 은가? 문득 천심선사가 물었다. "현수, 올해 너의 나이가 몇이냐?" "십팔 세이옵니다." "흠, 올해만 넘기면 십구 세가 되겠군." 천심선사는 눈발을 맞으며 다시 물었다.

"현수, 너는 대사형이 왜 너를 노납에게 보냈는지 아느냐?" 현수는 공손히 대답했다. "사부님께 가르침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심선사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허허허... 현수, 너는 이미 천뢰선사에게서 모든 것을 배웠다. 그런데 더이상 무엇이 필요하느냐?" 천심선사는 손을 내밀어 눈송이를 받으며 말했다.

"현재 너는 너무나 강하다. 너는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너의 모 습에서 풍기는 기운은 상대가 섬ㅉ해 할 정도로 강하다." 현수는 그 말에 흠칫했으나 이를 내색치는 않았다. "현수, 사륜거를 밀어라." 천심선사의 말에 현수는 묵묵히 사륜거를 밀 뿐이었다. 쏟아지는 눈발 속으로 사륜거는

굴러가고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


로 합(合)해지고 있었다. 천기선사는 담담히 말했다.

"현수, 너는 이제 좀 약해질 필요가 있다." 현수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실상 그는 여태까지 강해지기 위하여 천 일의 가혹한 무공수련을 쌓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약해지라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인지....... "천뢰사형이 강(剛)이라면 노납은 유(柔)다. 강유(剛柔)가 조화되 어야만 진정한 고수랄 수 있다." 천기선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장경각에는 소림 칠십이종절예 외에도 수많은 무공이 있다. 그러 나 정작 너에게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천기선사는 허리를 숙여 땅에 쌓인 눈을 한 웅큼 집어들더니 눈송 이를 뭉쳐 앞으로 휙 던졌다. 눈덩이는 겨우 일 장쯤 날아가다 힘없이 떨어졌다. "쯧! 노납의 힘은 점점 쇠약해 가는군." 천기선사는 혀를 차더니 다시 말했다. "장경각에 비장된 천팔백육십 종의 무학이 칠십이종절예보다 강하 다면 어찌 그것이 정종무학(正宗武學)이 되지 못했겠느냐?" 그의 말은 백번 지당한 말이었고 현수는 내심 수긍하며 귀를 기울 였다. "노납이 너에게 가르칠 것은 천팔백육십 종의 무공 중 단 한 가지 뿐이다." "음." "그리고 그 밖에는 네가 앞으로 해야할 일을 이루기 위한 준비일 뿐이다."


천기선사는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장경각의 뒤 뜰은 화원과 가산으로 꾸며져 있었다. 천기선사는 손 을 들어 가산의 한 모퉁이에 있는 바위를 가리켰는데 그것은 오 장(五丈)밖에 있었다. "현수, 눈을 뭉쳐 던져 저 바위를 부숴 봐라." 현수는 의아했으나 곧 지시대로 머리를 숙여 눈을 한웅큼 집어 뭉 쳤다. 그리고 그는 가볍게 앞으로 던졌다. 눈은 소리없이 날아가 바위 속에 매끈하게 박혔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눈이 단단하기 그지없는 바위 속에 소리도 없이 깊이 박히다니....... 천기선사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다. 너의 무예는 지금 현 자(玄字) 항렬 중에서 제일 고강 하다." 그러나 천기선사는 이내 탄식하며 말했다. "노납은 일 장 밖까지도 눈을 던지지 못했다. 너무도 늙고 쇠약해 졌다." 천기선사는 다시 어투를 환원하여 말했다. "그러나 또한 저 바위를 부수려면 부술 수도 있다." 천기선사는 현수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미소를 머금었다.

것을 보고는 의미심장한

이어 그가 왼손으로 사륜거의 팔걸이 한 부분을 누르자 놀라운 일 이 벌어졌다. 파파파팟! 콰... 쾅...! 푸른 불꽃이 바위를 덮는가 싶은 순간, 폭발음과 함께 바위가 완 전히 가루가 되고 만 것이었다.


"아!" 현수는 크게 놀란 반면 천기선사는 담담히 말했다. "노납이 너에게 가르칠 첫번 째는 바로 이같은 기관학(機關學)과 노부가 평생을 연구한 다섯 가지 암기술(暗器術)이다." 천기선사의 눈이 기이한 빛을 띄어 갔다. "무(武)란 힘(力)만 가지고 다루는 것이 아니다. 노납과 같이 힘 없는 자들도 단지 머리를 조금만 쓰면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사람 을 해칠 수가 있다. 암기술(暗器術)은 비록 정종(正宗)이라 할 수 는 없지만 때에 따라서는 커다란 위력을 볼 수가 있으니 역시 익 혀두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네, 사숙님." 현수의 물처럼 고요하던 눈이 반짝 빛났다. 그의 감추어진 혜지가 노출된 것이었다.

그것을 느낀 천기선사는 만족한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 앞은 노납이 직접 가꾼 화원이다. 화원 앞으로 세 걸음 나 가 봐라." 현수는 의아했으나 곧 지시대로 세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앗!" 갑자기 주위환경이 돌변한 것이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놀랍게도 망망대해 한 가운데의 암초 위였다.

현수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한편 곧 느끼는 것이 있었다. '기문진법(奇門陳法)에 걸렸구나!' 그는 우선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계산하여

자신이 조금 전 들어왔던 방향으로


나갔다. 그러나 주위 환경이 다시 변화를 일으켰다. 대해는 사라지고 처처 에 기암절봉(奇岩絶峯)이 솟아있는 심산유곡(深山幽谷)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이럴 수가?'

현수가 아연실색하는 사이, 주위의 환영들이 모두 사라지며 천기 선사의 부드러운 말이 들렸다. "너에게 두번 다."

째로 가르칠

것은 바로

이 기문진학(奇門陳學)이

현수는 돌아서며 감탄과 존경의 눈으로 천기선사를 바라보았다. 천기선사는 점점 더 탐스럽게 떨어져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담담 히 말했다. "현수, 눈이 아름답구나. 조금만 더 나가보자." 현수는 다시 사륜거를 밀었고 퍼부어 내리는 눈발 속으로 두 사람 은 나아갔다. "오백 년 전 소림의 이십일 대 장문인이신 광무사존(廣武師尊)께 서는 속가(俗家) 시절 당시 강호제일의 검객이셨다." 천기선사의 말이 계속 되었다. "그 분은 이후 삭발하고 소림에 입문한 이후에도 계속 검을 통해 진리를 터득코자 하셨다." 현수는 두 눈에서 현기를 품어내며 천기선사의 말에 귀를 모았다. 눈발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그 후 장문인이 되시고 육십 년이 지난 후 광무사존께서는 열반 에 드시기 직전 후대에게 한 권의 검보(劍譜)를 남겨 놓으셨다." 천기선사는 손을 내밀어 눈송이를 받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검(劍)은 원래 소림의 정종무학이 아니다. 그래서 그 검


보는 장경각에 묻힌 채로 오백 다."

년간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지냈

천기선사는 손바닥 위에서 녹아 을 계속했다.

물이 되는 눈송이를 내려보며 말

"소림에서는 훨씬 이후에 달마삼검(達磨三劍)이 창안되어 유일한 정종검법으로써 칠십이종절예의 하나로 삼았을 뿐, 광무사존이 남 기신 검보는 완전히 잊혀져서 아무도 익히지 않았다. 만일 노납이 장경각 안의 수십만권에 달하는 불경과 무공비급을 모두 읽지 않 았다면 역시 영원히 찾지 못했을 것이다." 현수는 호기심이 크게 일어났다. "그 검법은 어떤 것입니까?" 천기선사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불영구검(佛影九劍)! 그것이 검법의 이름이다, 또한 그것은 실로 신비한 검법으로 만약 누군가 노납더러 불영검법을 칠십이종절예 에 포함시키라면 서슴없이 칠십이종절예중 두번 째 위치에 놓겠 다."

현수가 크게 놀라는 것을 보며 천기선사는 다시 덧붙였다. "바로 반야밀다대승신공의 다음에 말이다." 거기까지 이른 천기선사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소림의 폐쇄성 때문에 천고(千古)의 기학(奇學)이 오 백 년 동안 먼지 속에 버려진 것이야." 눈(雪), 눈이 더욱 심하게 쏟아졌다. 현수와 천기선사의 몸에는 눈이 상당히 기침을 해댔다.

"쿨록! 쿨... 록!" 현수는 몹시 염려스러워진 듯 물었다.

쌓였고 천기선사는 심한


"사숙님,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천기선사는 가슴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는 사륜거의 방향을 반대로 하여 밀고 갔다. 천기선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불영구검(佛影九劍)은 바로 네가 유일하게 배울 천팔백육십 종 무예 중 한 가지다." 천기선사의 기침은 끊이지 않았다. "쿨... 럭! 그러나 그 분의 불영구검에도 일곱 쿨... 럭... 이 있다."

군데의 헛점...

"사숙님 기침이......." "그 헛점을 보완하면 불영구검은... 천하무적의 검법이 된다." 그 사이 사륜거는 장경각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눈은 이미 폭설(瀑雪)로 변해 소림사 전체를 은빛으로 덮고 있었 다.

마지막 겨울 (冬)의 추위는 기승을 부렸다. 대단한 추위가 눈보라와 함께 세차게 숭산(崇山)을 휩쓸었다. 소실봉 기슭의 한 바위 위에 다. 구 순이 넘어 보이는

한 명의 노승(老僧)이 우뚝 서 있었

노승은 승포를 눈보라에 휘날리며 아까부터

계속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한 마리의 비둘기가 들어있는 조그만 철책이었는데 노승은


곧바로 철책을 열었다. 푸르르르륵! 비둘기는 철책이 열리자마자 잽싸게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목에 작은 죽통(竹筒)을 매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바로 밀 서(密書)를 전하는 전서구였다. 비둘기가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

순간 노승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

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주위를 잠깐 살피고는 번뜩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그런데 노승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한 명이 바위 위에 나타났다. 그는 거의 백여 세에 가까운 또다른 노승이었다. 특징이 있다면 그는 오른 소맷자락이 바람에 멋대로 펄럭이는 외 팔이었고 얼굴에 왼쪽 이마에서 오른쪽 뺨으로 긴 검상(劍傷)이 나 있어 섬뜩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런 인상 때문에 그에게서는 도저히 불승다운 면모를 느낄 수가 없었다. 소림 계도원주(戒導院主) 현각대사(玄覺大師).

그는 바로 소림의 계율을 어기는 자에게 벌을 내리는 계도원을 담 당하는 현각대사로 소림에서 가장 냉정한 인물이었다. 원래 그는 과거 육십여 년 전 희대의 마두(魔頭)였으나 당시의 소 림 장문이었던 천심선사에게 감동을 받아 소림에 입문하게 된 인 물이었다. 현각대사는 노승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현우(玄羽)! 과연 대사부님의 추측이 맞았군." 현각대사는 하나 뿐인 왼팔을 들어 올렸는데, 놀랍게도 그의 손에 는 조금 전 눈보라를 뚫고 날아갔던 비둘기가 잡혀 있었다.

현각대사는 비둘기 목에 매달린 죽통을 떼어내며 냉막하게 중얼거 렸다.


"현우여, 그대는 아는가? 이 년(二年) 동안 단지 주인을 찾아내지 못했을 뿐, 그대가 띄워 보냈던 모든 전서구가 빈승의 손에 잡혔 음을......." 휙! 현각대사는 몸을 날려 소림사를 향해 사라졌다.

밤(夜). 칠흑같은 밤이었다. 장경각(藏經閣)도 어둠에 묻혀 있었다. 휘익! 어둠을 뚫고 장경각으로 한 줄기 인영이 날아들었는데 그는 머리 서부터 발끝까지 흑의(黑衣)와 복면으로 감싼 자였다. 흑의복면인 은 장경각 앞에 내려서자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유령같은 신법 으로 장경각 안으로 스며 들었다. 그는 장경각의 구조를 매우 잘 아는 듯 했다. 도합 십팔 개의 서고로 된

장경각은 총 오 층이었으며 층마다 서

고가 있고 서고 안에는 종으로 서가(書架)가 설치되어 있었다. 휙! 휙! 흑의 복면인은 조금도 멈칫하는 기색없이 일 층부터 오 층까지 침 투해 올랐다. 오 층을 제외한 아래는 불경이 장서되어 있었으나 오 층의 중앙서 고에는 소림비전무공비서(少林秘傳武功秘書)가 배치되어 있었다. 흑의복면인은 마침내 무경고(武經庫)에 들어왔다. 무경고에는 고색 창연한 소림의 칠십이종절예를 수록한 비급과 그 밖에도 천팔백육십 종의 무학기서(武學奇書), 그리고 수천 권에 달하는 무서가 질서정연하게 꽂혀 있었다.


그러나 흑의복면인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무경고의 서가를 그대로 지나쳐 계속 안 쪽으로 들어갔다. 하나의 혈오목(血烏木) 탁자 위. 그곳에 고색창연한 푸른색 옥갑(玉匣)이 놓여 있었다. 흑의복면인 은 옥갑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조심스럽게 탁자로 다가갔다. 그의 손끝이 약간씩 떨리고 있었다. 그는 마음의 동요를 느끼는 듯 옥갑에 손을 대고 잠시 멈춰 있다 가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낡을대로 낡은 양피로 된 책자가 두 권 포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바로... 천 년 소림의 맥을 이어 온 역근경(易筋經)과 세 수경(洗髓經)이다!' 흑의복면인의 손 끝이 아까보다 더욱 눈에 띄게 떨렸으며 그의 복 면 사이로 노출된 두 눈에는 심한 갈등이 어렸다. 그러나 결국 결심한 듯 그는 옥갑 속에 든 두 권의 책자를 집었 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윽!' 그는 손 끝에 무형의 기운을 맞고는 떨어져 나갈 듯한 통증을 느 꼈다. 그는 불에 데인 듯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한 줄기 불호성이 그의 고막을 때렸다. "아미타불......." 동시에 그의 앞에 마치 허공에서 나타난 듯 한 명의 청년이 내려 섰다. 놀랍게도 청년은 현수였다. 현수는 회색 승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미 허리까지 자란 검고 윤기 나는 긴 머리칼을 단정히 묶고 있었다. 실로 비범한 신태가 흐르 는 신비한 모습이었다. 흑의복면인은 그를 보자 부르르 떨었다.

'현수!'


현수는 합장하며 낭랑하고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누구신데 감히 금역(禁域)인 장경각에 침입한 것이오?" 흑의복면인의 눈빛에 초조함이 가득 어렸다. 그는 당황하여 내심 중얼거렸다. '큰일이다! 이 녀석을 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곧 장경각을 지키는 오대수장승(五大守藏僧)이 들어온다!' 현수는 다시 추궁했다.

"시주는 어찌 답이 없으시오?" "닥쳐라!" 흑의복면인은 낮게 외치고 나서 다짜고짜로 일 권(一拳)을 날렸 다. 현수는 흠칫 놀랐다. "금강복호신권(金剛伏虎神拳)! 그대는 어찌 소림의 있소?"

무공을 알고

위---잉! 권풍이 현수의 어깨를 스쳤다.

"말이 많다!" 흑의복면인은 계속 권력을 날렸다.

금강복호신권. 이는 소림 칠십이종절예 중 하나로 소림의 제 십이 대 장문인이 창안했다. 그런데 그 위력은 너무도 패도적(覇道的)이어서 대성 (大成)하면 백 장(百丈) 밖의 바위를 박살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경지는 단지 사오 장 밖의 나무를 부러


뜨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 이유는 대성하기가 극히 힘들기 때문 이었다.

윙---! 윙---! 흑의복면인이 주먹을 뻗을 때마다 무서운 권풍이 뻗었다. 또한 흑의복면인은 내공(內功)이 정심하여 현수가 물흐르는 듯한 신법으로 피할라치면 빗나간 권력을 즉각적으로 쉽게 회수하기도 했다. 그것은 소란을 피워 장경각을 지키는

오대수장이 몰려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로 미루어 흑의복면인의 금강복호신권 은 완숙의 경지에 이른 것이 분명했다. 윙! 윙----! 권풍 사이를 누비며 현수는 말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소승도 무례를 범하 겠소." 현수는 마침내 왼손을 칼날처럼 세워 흑의복면인을 찔러갔다. "으윽! 천불인수(千佛刃手)!"

흑의복면인은 권세가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이번에는 급격히 초식 을 나한십팔장(羅漢十八掌)으로 바꾸었다. 휙! 팍! 팍! 팍! 복면인의 장력은 마치 도끼로 장작을 패듯 위력적이고 날카롭게 현수를 밀어부쳤다. 현수는 그만 깊은 의혹에 잠기고 말았다. '이 자가 쓰는 무공은 길래?'

모두 소림 칠십이종절예다. 도대체 누구이

어느덧 두 사람의 공방전은 삼십여 초가 흘러갔다. 좁은 공간 속 에서 그들은 막상막하의 전세를 유지했는데 그야말로 갖가지 소림 의 절예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다만 흑의복면인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초조함을 금치 못했고 현수는 약간 뒤로 신형을 물리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시주, 할 수 없이 소승은 실례를 범하겠소이다." 그는 양손을 합장하더니 그대로 앞으로 쭉 뻗었다. 슈---- 웅! 웅휘한 경기가 뻗었다. "앗! 범자대비공(梵慈大悲功)! 네... 네가 그것까지?"

흑의복면인은 크게 놀란 듯 했다. 두 사람의 경력이 마주치며 폭 음을 냈다. 꽝---! "우욱!" 흑의복면인은 엄청난 압력이 가슴을 치는 것을 느끼며 뒤로 주르 르 오 보(五步)나 물러났다. 그의 복면 입가가 금세 피로 젖었으 나 그는 눈에 살기를 띄더니 대뜸 양손을 치켜 세웠다. 그러자 괴이하게도 그의 손은 청색 기운을 띄었다. 현수는 흠칫했 다.

'저것은 대체 무슨 무공이길래?'

흑의복면인은 쌍장을 뻗으며 음침하게 외쳤다. "이 놈! 청강마라공(靑剛魔羅功)을 받아랏!" 현수는 결코 상대의 공격을 경시하지 않았다. 쏴아!


푸른색 장영(掌影)이 몰려오자 그는 전신에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육 성(六成)까지 일으켜 장심(掌心)에 모으더니 즉시 일 장을 내 쳤다. "으악!" 흑의복면인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튕겨 나갔다. 아무런 소리도, 형체도 없었다. 그럼에도 흑의복면인은 마치 환상 처럼 입에서 피를 뿜으며 그대로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세차게 몸을 벽에 부딪치며 바닥에 떨어진 그는 이내 몸을 축 늘 어뜨리고 말았다.

"아! 이... 이럴 수가!" 현수는 이 뜻밖의 광경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반야밀다대승신공의 위력이 이렇게 강하다니! 단지 육 성 밖에는 펼치지 않았는데.......' 그는 자책을 느끼며 흑의복면인에게 다가가 상처를 살펴 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이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주, 죽었다!" 흑의복면인은 가슴이 박살나고 내장이 가루가 되어 즉사한 상태였 다. 현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내, 내가... 살생(殺生)을 하다니......." 현수는 어쩔 줄 보았다.

몰라 하며 떨리는 손으로 흑의인의 복면을 벗겨

"앗! 현... 현우사형(玄羽師兄)!" 믿을 수 없게도 복면인은 현우였다. "이, 이게 대체......."


현수는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아미타불......." 그의 등 뒤에서 창노한 불호소리가 들린 흠칫하여 뒤로 돌아섰다.

것은 그때였다. 현수는

언제 당도했는지 사륜거에 단정히 앉은 천기선사와 계도원주인 현 각(玄閣), 그리고 장경각을 지키는 정 자(丁字) 돌림의 오대수장 승이 우뚝 서 있었다. "사... 사숙님!" 현수는 천기선사의 발 아래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미타불......."

천기선사의 온통 주름진 얼굴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러나 현우의 시체를 보는 순간 그의 두 눈에는 고통이 배어나고 있었다. "사숙님......." 현수는 거의 울부짖듯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비로소 천기선사가 입을 열었다. "현수여,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그는 고개를 돌리며 다시 말했다. "현각, 현우의 시신을 치워라."

"네, 사숙님!" 계도원주 현각은 공손히 답했고 오대수장승들이 즉시 앞으로 나가 현우의 시신을 들었다. 현각을 위시한 그들 오 인은 굳은 표정으 로 시신을 메고 밖으로 사라졌다. 천기선사는 현수에게 침중하게 말했다. "현수, 지금 곧 불심각(佛心閣)으로 가서 대사형을 뵈어라."


"사숙님......." 천기선사는 괴로운 듯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아미타불... 대소림에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다니......." 천시선사는 사륜거를 돌려 밖으로 사라져 갔다. '사숙님.......' 현수는 고개를 떨구었다.

불심각(佛心閣). 천심(天心), 천뢰(天雷), 천기(天機) 등 삼성승(三聖僧).

그들은 눈을 내려감은 채 나란히 불심각의 한 있었다.

넓은 선전에 앉아

분위기는 침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벌써 시간이 한참 흘렀는데도 선전 안은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마침내 가운데 앉은 천심선사 가 먼저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현수, 네가 소림에 입문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현수는 공손히 대답했다. "사 년 반이 되었습니다."

"아미타불......." 천심선사는 담담히 현수를 내려 보았다. "현수, 한 가지 묻겠다. 불문오계(佛門五戒)와 소림십계(少林十 戒) 중 첫번 째가 무엇이냐?" 현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 살계(殺戒)이옵니다."


천심의 고요한 눈빛이 갑자기 흔들렸다. "그렇다, 바로 살계다."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팔백 년 전 각원사존(覺遠師尊)께서 소림십계를 만들었 으나 그 중 몇 가지 계율은 강호무림과 깊은 관계가 있는 본문의 특성 때문에 종종 지켜지지 못했다." 현수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특히 마도(魔徒)가 창궐할 때에는 제마멸사(制魔滅邪), 항마참요 의 뜻으로 살계를 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림십 계는 그 후 다소의 융통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소림입 문(少林入文) 오 년 이내에만 살생을 금지시킨 것이다!"

현수의 몸이 중심을 잃을 듯 흔들렸다. 천심선사는 탄식하며 말했 다. "그러나 현수, 그대는 그 오 년 안에 살계를 범했다." '사부님.......' "그러므로 노납으로선 한 가지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 다." 그 말에 천뢰, 천기선사는 모두 안색이 굳어지며 감았던 눈을 떴 다. 그들의 눈은 안타까운 빛을 띄며 현수에게 향해졌다. 천심선사의 마지막 말이 떨어졌다.

"현수여! 너에게 오늘부로 소림파문(少林破門)을 명(命)한다." 현수는 또 한번 몸을 부르르 떨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천심은 강경하게 그를 거부했다. "현수! 말하지 마라, 이것은 불존의 뜻이다. 비록 배신자 현우를 죽인 너의 살생이 정당한 것이라고는 하나 살생은 살생이다."


천심선사의 말에는 태산같은 위엄이 있었다. 현수는 감히 항거할 수 없음을 느끼고 그만 고개를 다시 꺾고 말 았다.

"사부님......." 천심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현수, 네가 비록 파계(破戒)하여 영원히 소림제자가 될 수는 없 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뜻이 있느니라." 현수는 그 말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천심선사는 물같이 고 요한 눈으로 현수를 자애스럽게 내려다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현수, 이젠 노납이 모두 이야기해 주겠다." 현수는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였다.

"왜 너를 소림에 삭발 입문 시키면서도 머리에 계인을 박지 않았 으며 또 그 이후 머리가 길러졌을 때도 깎지 않게 했는지 아느 냐?" 천심선사는 나직히 탄식했다. "너는 애초부터 불문과 인연이 없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것을 말해주지 않은 이유는 너의 무공수련에 지장을 초래할까 봐서였고, 계인을 박지 않은 것은 바로 너를 무사히 환속시키기 위해서이다." 현수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나... 나를 환속시킬 예정이었다고? 그럼... 대사부님이 이 모든 일을 사전에 예측하고 안배하셨단 말인가?' 현수는 머릿 속이 온통 의문과 어지러운 회의로 가득 차고 말았고 천심선사는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한동안 자애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를 소림에 입문시킨 이유는 노납이 머지않은 장래에 있을 무림 의 혈겁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노랍은 천혈성(天血星)과 오대마성


(五大魔星)의 창궐을 미리 대비해야만 했다." "으음......." "바로 너를 천혈성과 오대마성을 막을 인재로 키우려 했다면 알아 듣겠는냐?"

천심선사는 문득 몸을 일으켰다. "현수, 일어나 노납을 따라 와라." 현수는 곧장 천심의 뒤를 따랐고 천심선사는 창가로 가 창문을 활 짝 열었다. 밤(夜). 밖은 캄캄한 심야였다. "하늘을 보아라, 현수." 천심선사는 야공에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었다.

"저 어두운 천공에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점점 가고 있다."

진한 핏빛을 띄워

그의 음성이 점차 침중해지고 있었다. "실로 두려운 일이다. 수천 년 무림사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엄 청난 대혈겁이 미구에 몰려들 것이다." 천심의 말에 현수는 가슴이 격탕했다. 캄캄한 밤하늘에 뜬 무수한 성좌(星座)들....... 현수는 그 중 어느 것이 천혈성과 오대마성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 나 강한 의기(義氣)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현수." "네, 사부님." 천심은 현수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 이유로 노납은 너를 소림에 입문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제는 너에게 소림십계와 같은 구속을 주지않기 위해서 너를 파문 (破門), 환속시키려는 것이다." 천심선사는 합장했다. "아미타불... 무서운 살겁이... 끔찍한 혈하(血河)가 중원을 적실 것이다. 아미타불... 아아! 불존의 자비만 바랄 뿐......." 현수는 점점 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현수, 너의 한 몸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천혈성과 오대마성, 그 마의 저주를 막을 자는 오직 너 뿐이다. 아미타불......." 천심선사는 불호를 외우며 돌아섰다. 그러나 현수는 계속 창가에 서서 천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잔잔한 물결처럼 고요하던 그의 눈속에서는 무섭도록 강렬한 빛이 솟아나 오기 시작했다.

■ 대소림사 제 1 권 제 8 장 강호제일보(江湖第一步) -1 ━━━━━━━━━━━━━━━━━━━━━━━━━━━━━━━━━━━

장경각(藏經閣). 장격각의 한 선방 안에서 현수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앞에 는 사륜거에 몸을 의지한 천기선사가 침중한 안색으로 그를 내려 보고 있었다. 문득 천기선사가 신음을 흘렸다. "으음....... 현수."

"네." "너를 이렇게 부르는 것도 오늘로서 마지막이 되겠구나." "사숙님......."


현수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정(情)이 든 천기선사인가? 천뢰선사는 냉혹무비할 만큼 혹독한 수련을 시키며 두터운 정을 느끼게 했지만 천기선사는 정반대로, 현수는 지난 일 년간 자애 롭기 그지없는 천기선사에게 친조부 이상의 따뜻한 정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헤어져야 하다니....... 천기선사는 무릎에 놓여있던 가죽주머니를 건네 주었다. "자, 현수, 이것을 받아라." 현수는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것은 네가 소림에 들어왔을 때 갖고 있던 물건들이다." 그의 준미한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내 물건.......'

"그 물건들은 모두 긴히 쓰일 용도가 있는 것들이다. 잘 간수해 라." 천기선사는 가죽주머니를 주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현수, 사륜거를 밀어라. 밖에 나가고 싶구나." 현수는 공손히 일어나 사륜거를 밀고 나갔다. "콜록! 콜록......." 천기선사는 갑자기 심한 기침을 했다. 그의 기침은 요즘 들어 특히 심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얼굴 의 주름살도 더욱 늘어 났으며 안색도 극히 초췌했다. 현수는 내심 탄식을 했다. '아! 사숙님께서는 요즘 와서 더욱 건강이 말이 아니시니, 걱정스


럽기만 하구나.' 천기선사는 간신히 기침을 진정시키고 나서 말했다. "흠, 이렇게 지내는 것도 오늘이 끝이 되겠군." 사륜거는 장경각을 벗어나 화원에 들어섰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천기선사는 탄성을 발했다.

"허어! 기이한 일이로다. 네가 처음 이 장경각에 올 때도 눈이 오 더니 오늘도 눈이 오는구나. 그러고 보니 꼭 일 년이 지난 셈이 군." 현수는 멍하니 잿빛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았고 천기선사는 눈을 맞으며 담담히 말했다. "현수, 너는 이미 노납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터득했다." '사숙님.......' "노납이 장담하건대 현 무림에서 너를 당할 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현수는 묵묵히 사륜거를 밀고 있었다. 칠흑같이 검고 윤기나는 그의 긴 머리는 여전히 허리 뒤로 넘겨져 단정히 묶여 있었고, 회의승포와 묘한 조화를 이루어 탈속한 기품 을 자아냈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그의 준미한 얼굴을 스치는 순간 천기선사는 여전히 담담하되 약간 침중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강호란 원래 험난하기 그지 없는 곳이다. 결코 무공만으 로 통하는 곳이 아니다. 더구나 수많은 기인이사(奇人異士)와 괴 인들의 드러나지 않은 무학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그는 눈가에 수심을 담으며 현수를 돌아다 보았다. "현수."


"네, 사부님" 그의 음성은 진지하기 그지 없었다. "너는 소림을 내려가는 즉시 두 사람을 찾아가라.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온갖 지혜를 동원하여 그 두 사람의 모든 것 을 배워라." 현수의 고요하던 눈빛이 현기를 발하고 있었다.

"첫번 째 인물은 호북성 대홍산(大洪山) 천화곡(天火谷)에 살고 있는 광검절심(狂劍絶心) 유무심(有無心)이다. 그로부터는 불영구 검(佛影九劍)의 일곱 군데 헛점을 메울 검도(劍道)를 배워야 한 다." "광검절심......." 현수가 나직히 되뇌이자 천기선사는 부언했다. "광검절심, 무림에서 그를 아는 자는 거의 없다. 실상 그로 말하 면 천하무림에서 검법으로 가장 뛰어난 삼 인 중에 으뜸이나 그의 존재는 거의 안개에 가려 있다. 그러나 광검절심 유무심, 너는 그 에게서 불영검법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현수의 가슴 속에는 이미 와 박히고 있었다.

광검절심 유무심이란 존재가 깊이 들어

"두 번째 인물은... 콜록! 콜... 록......." 천기선사는 다시 기침을 했다. "사숙님... 바람이 차니 안으로......."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의 만경루(萬京褸)를 찾아 만사귀재 (萬事鬼才) 호불귀(胡佛鬼)를 만나라. 너는 그에게서 무공을 전혀 모르고도 무림을 헤쳐나갈 수 있는 수많은 수법을 터득할 것이 다." 이어 천기선사는 품 속에서

두 개의 고전(古錢)을 꺼냈는데 그것


은 녹이 슬고 매우 오래된 동전이었다. "그들을 만났을 때 이것을 보여 줘라." 현수는 묵묵히 두 개의 고전을 받았다. 사륜거는 눈 위를 스르르 굴러갔고 천기선사는 아쉬운 듯 쏟아지 는 눈발을 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현수, 오늘 밤 너는 이곳을 떠나라."

현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사형은 찾아볼 들어갔다."

필요가 없다. 이미 대사형과 이사형은 폐관에

"아!" "소림의 산문 오백 리 밖을 벗어나기 이전에는 절대 너의 본 모습 을 타인에게 보이지 마라." 천기선사의 얼굴은 다소 어둡게 변했다. "천려일실이라고 했다. 무엇이든 조심하는 게 좋지."

눈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사륜거는 함박눈 속을 지나 장경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밤은 폭설이 쏟아졌다. 폭설에 묻힌 소림사를 뚫고 한 줄기 섬전(閃電)과도 같은 인영이 날아갔다. 그 인영은 소리도 없이 소림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하후성. 그것은 바로 천하제일의 기재인 그가 무림에 나간 순간이었다. 눈 보라를 뚫고 그가 첫 출도를 한 것이다.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 호북 제일의 성도(省都)이자 장강(長江)의 수로(水路)가 활발히 발달된 대성(大城)으로 번화하기 그지 없는 곳이었다. 한 명의 백의기청년(白衣奇靑年). 눈이 그친 무창성에 표표히 입성한 그는 이십여 세 정도의 나이로 실로 비범하고 기이한 신태의 미청년이었다. 눈같이 흰 백삼에 머리에도 역시 백건(白巾)을 둘렀으며 얼굴은 관옥같이 희고 깨끗하여 그 준수함이 선인을 방불케 했다. 온화하 고 부드러운 기품이 은연중 그의 전신에서 풍겨 나와 탈속함을 느 끼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물같이 고요한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평화로움을 느끼게 하 고 있었다. 또한 그는 매우 특이한 머리모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칠흑같이 검고 윤기나는 긴 머리칼을 뒤로 모아 흰 띠로 묶고 허 리까지 늘어뜨렸다. 이같은 모양은 그야말로 옥골선인(玉骨仙人)의 풍모로써 보는 이 마다 찬탄을 금치 못했다.

이 절세의 기청년, 그는 바로 사 년반 동안 소림사에서 현수란 법 명으로 무공을 익혀온 하후성(夏侯星)이었다. 마침내 무창성에 입성함으로써 하후성의 강호 출도는 그 일보(一 步)를 내딛게 된 것이었다. 무창성은 대단히 번잡하고 커다란 성도(城都)였다. 하후성은 이렇게 큰 도성은 처음 대해본 것으로, 그는 그때까지의 세월을 오직 저 북방의 한적한 하란산과 숭산의 소림사에서만 보 내왔으므로 무창성의 번화함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음, 굉장히 크고 복잡하구나.'

하후성은 내심 놀라며 어깨를 부딪는 인파를 헤치고 무창성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곁을 지나던 행인들은 한결같이 하후


성을 보자 크게 경탄하며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오! 세상에 저토록 멋진 청년이 있었나?' 행인들은 모두 공통된 생각에 탄성을 발했다.

회웅루(會雄樓). 무창성에서 꽤 알려진 커다란 객점이었다.

하후성은 붉은 현판에 금빛 글씨로 씌어진 회웅루를 발견하자 문 득 시장기를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결심하고 회웅루의 계단 으로 올라섰다. 회웅루는 이 층의 객점으로 안에서 술마시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 나왔다. 그가 계단에 올라서자 안에서 점소이로 보이는 젊은 장한 이 황급히 나와 맞았다. "헤헤헤... 어서 오십시요. 공(公)......." 점소이는 말을 끊고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멍청히 하후성의 얼굴을 바라보며 넋을 잃어버렸다. 하후성 의 투명할 정도로 흰 얼굴과 너무나도 준수한 용모에 정신을 빼앗 기고 만 것이었다. 점소이는 내심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세, 세상에... 이렇게 잘 생긴 사람이 있었다니... 내 예전에 호 북제일의 기녀(妓女)인 염교월(艶嬌月)을 보고 반한 적이 있었지 만, 염교월도 이 공자 옆에 서면 당장 빛을 잃고 말 것이다.) 하후성은 점소이가 멍청히 자신을 으며 온화한 음성으로 물었다.

바라보며 서 있자 담담하게 웃

"안에 자리가 있소?"

점소이는 그제서야 정신을 번쩍 차리며 어색하게 낯을 붉혔다.


"아, 네네! 있고 말고요. 공자님,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점소이는 하후성을 이 층으로 안내하기 위해 앞장서며 속으로 자 신을 나무랐다. '이런... 정초(正初)부터 정신도 없지, 여자도 아닌 남자에게 넋 을 뺏기다니.......' 한편 하후성은 객점이라면 난생 처음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일 층이 왁자지껄 빽빽한 것을 신기한 눈으로 보며 점소이를 따라 이 층으로 오르고 있었다.

"헤헤... 공자님, 일 층은 온통 잡인들이 우글거려 공자님같은 점 잖은 분이 음식을 드실 곳이 못됩니다. 이 층은 비교적 조용 합 죠. 헤헤......." "고맙소." 하후성은 부드럽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 층에 오르니 사람도 드문드문 앉았을 뿐 아니라 분위기도 한결 품위가 있게 꾸며져 있었다. 이 층은 비교적 부자나 신분이 높은 자들이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하후성이 점소이를 따라 이층에

오르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

제히 그에게 집중됐다. 손님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경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들은 모 두 신비로울 정도로 풍모가 비범한 하후성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 을 느끼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후성은 천천히 걸어 창가 쪽에 있는 빈 자리로 가 앉았다. 그 가 자리에 앉자 중인들은 모두 조그만 소리로 저마다 수군거렸고 그 소리들은 모두 하후성의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허어! 정말 잘 생긴 청년이군. 장노이(張老二), 자네 저렇게 잘 생긴 공자를 본 적이 있나?" 걸찍한 음성에 이어 다소 탁한 장한의 응답이 들려왔다.


"없네. 과거 천풍보(天風堡)에서 당금무림의 중원사룡(中原四龍) 중 한 명인 옥면가람(玉面伽藍) 남궁수(南宮秀)를 본 적이 있네만 그도 저 청년과는 비교도 되지 않네." 그 자의 입맛 다시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쩝! 정말 내가 저 청년의 반 만큼이라도 생겼으면 천하의 미녀란 미녀는 모두 후릴 수 있겠는데......." "클클클... 왕팔(王八), 동경에 낯짝이나 비쳐보고 그런 소리하 게. 자네는 그저 지금 있는 호박같은 여편네의 엉덩이나 두들기고 사는 게 분수에 맞으니까."

처음 음성의 비웃음에 왕팔이라는 장한은 투덜댔다. "빌어먹을! 그렇게 말하는 너는 얼마나 잘 났느냐? 여편네가 그러 는데 너보다는 내가 훨씬 낫다더라!" 하후성은 가만히 그들의 말을 듣다 입가에 고소를 지었고 점소이 는 잔뜩 기대를 품고 정중히 물었다. "공자님, 무엇을 드실까요?" 하후성은 그 말에 일시지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객점에 무 슨 음식이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점소이가 묻지도 않 았는데 곧 떠벌이기 시작했다.

"헤헤... 저희 회웅루에는 여러가지 산해진미가 있습죠. 먼저 연 자삼정탕(蓮子三精蕩)에다 상어의 지느러미를 볶은 일급요리, 죽 순 삶아 데친 것, 오리 혓바닥 볶음, 진귀한 설삼(雪參)에 잉어를 고은 삼리탕(蔘鯉蕩), 어수육(魚水肉), 백빙전(白氷全)에 또 그 밖에도......." 점소이의 수다는 다. '모두가 처음 니.......'

끝없이 이어졌고 하후성은 그만 멍해지고 말았

듣는 이름인데...

더구나 나는 육식을 하지 않으

"나에게 소채 한 접시와 국수 한 그릇만 갖다 주시오."


점소이의 안색이 확 변했다. "소, 소채하고 국수요?"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시 물었다.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실망하지 않고 다

"그럼 술은 뭘로 하실까요? 산동명주(山東名酒) 죽엽청(竹葉靑)에 천일향잔(千日香棧), 녹각비류주(綠角秘柳酒), 여아홍(女兒紅), 금병산(金甁散)......." 하후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나는 술을 못하니......."

그 순간 주위에서 왁자하게 폭소가 터져 나왔다. "핫핫핫... 생긴 것은 멀쩡한데 술도 못먹다니 정말 웃기는군!" "프흐흐... 왕팔! 혹시 저 친구 여자 아닌가? 남자 치곤 너무 반 반하단 말야. 더군다나 술도 못하니!" 크게 떠드는 자들은 바로 장삼과 왕팔이라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후성은 그들의 야유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점소이는 기 어코 실망한 듯 투덜대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후성은 담담한 신색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의 고요 하던 눈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이채를 발했다. 그와 반대쪽에 있는 구석진 자리에서 한 명의 흑삼(黑衫)을 입은 중년문사가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 다. 그는 대략 삼십오륙 세 쯤 되어 보였는데 새카만 흑의에 머리에는 문사건을 쓰고 있었으며 두 눈은 담담하고 용모도 청수하기 그지 없었다. 한 눈에도 보통 인물이 아님을 느낄 수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치자 중년 흑의문사의 담담하던 눈에서도 역시 기이한 빛이 일어났다.


그는 곧 하후성에게 호감어린 소로 답했다.

미소를 보냈고 하후성도 온화한 미

이윽고 하후성이 주문한 소채 한 접시와 국수가 나왔다. 그것은 주위에서 식사하는 손님들과 크게 대조를 이룰 정도로 조촐하고 보잘 것 없는 음식이었으나 하후성은 사 년반 동안 소림사에서 이 런 식사마저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맛있게 음식을 들고 있었 다. 우당탕! 우지-- 끈! 아래층에서 갑자기 요란하게 탁자 따위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 다.

"어이쿠!" 누군가의 비명에 이어 앙칼진 소녀의 뾰족한 힐책이 들려왔다. "이 바보같은 놈아! 저리 썩 비키지 못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찰싹! "아이쿠우!" 뺨을 치는 소리와 더불어 듣기에도 무참한 비명이 터졌다.

그리고 잠시 후 계단을 쿵쿵 밟으며 올라오는 음향이 중인들의 관 심을 온통 집중시켰다.

이 층에서 식사하던 중인들은 큰 호기심을 보이며 이 층 입구를 향해 시선을 집중시켰고 두 명의 여인들이 올라왔다. 그 두 명은 각기 새빨간 홍의와 눈같이 흰 백의를 입은 절세의 미 소녀들이었는데 그 중 홍의소녀는 전신에 찰싹 들러붙은 홍의를


입고 있어 육체의 굴곡이 완연히 드러나 몹시 도발적인 느낌이 들 었다.

특히 백설같은 피부에 살구같이 또렷한 매혹적인 미색을 풍겼다.

눈은 매우 앙칼지면서도

반면 백의소녀는 고귀하고 내성적이며 기품있는 용모였다. 큰 눈 은 깊은 지혜를 담은 듯 했으며 눈같이 흰 피부와 고운 아미(峨 眉) 등은 말할 수 없이 그윽함을 느끼게 했다. 두 소녀는 모두 십칠팔 세 정도의 절세 미녀들로서 홍의소녀가 조 금 어려보였다. 그러나 홍의소녀는 왼손에 채찍을 감아쥐고 있었 으며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살구씨같이 야멸찬 두 눈 을 부릅뜨며 매서운 살기를 드러냈다. 그 바람에 중인들은 그만 찔끔하여 모두 고개를 돌리거나 숙이고 말았다. 실로 기(氣)가 당당하고 오만한 소녀였다.

하후성도 그녀들을 보게 되었다. 그는 두 소녀의 아름다움에 매우 감탄했다. '정말 아름다운 소녀들이구나.'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감정일 뿐이었다. 그는 그저 두 송이의 아름다운 꽃(花)을 보는 기분이 들었을 뿐 담담한 그의 마 음은 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그런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는 눈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흑의를 입은 중년문사로써 그는 기이한 미소를 지으 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홍의소녀는 오만한 눈초리로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다 하후성을 발견하게

'아!' 그녀는 탄성을 발하는 표정을 지으며 눈빛이 야릇해졌다. 마침 하후성이 그녀와 눈길이 마주치자 담담하게 미소를 지어 보 였다. 그러자 홍의소녀의 얼굴에 은은한 홍조가 떠오르며 자신도


모르게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살짝 웃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백의소녀가 주위를 살피다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영매(鈴妹), 저곳이 자리가 좋은 것 같으니 앉아서 식사하자." 그제서야 홍의소녀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대답했다. "아! 네, 언니......." 그녀는 백의소녀가 걸어 가는 대로 따라가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는 하후성과 중년문사의 꼭 중간지점으로 홍의소녀는 자리 에 앉은 이후에도 힐끔힐끔 하후성을 응시하곤 했다. 백의소녀는 그녀의 태도에 이상한 느낌을 받고 내심 중얼거렸다.

'영매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그녀는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 또한 하후성이 천천히 식사하는 모습을 발 견하고는 내심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아! 정말 대단한 미공자(美公子)구나!' 그녀는 내심 짚히는 것이 있었다. '훗! 그러고 보니 영매가 바로 저 사람 때문에.......' 백의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저 사람은 무공을 모르는 것 같으니, 좀 아쉬운 느낌이 드는구나.' 홍의소녀는 백의소녀가 자신의 내심을 눈치 챈 것을 느꼈다. 그 녀는 그만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여 버렸다. 조금 전까지의 오 만무례하고 방자했던 모습과는 퍽이나 대조적이었다. 하후성은 식사를 끝내고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창성의 번화가는 아직도 그의 눈에 신기하게만 보였다. 층층누 각의 커다란 저택의 지붕들이 첩첩이 보이고 그 지붕 위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정말 이곳은 매우 큰 곳이구나.' 하후성이 내심 이렇게 중얼거릴 때 문득 그의 귓전에 담담하고 냉 랭한 음성이 들렸다. "공자, 합석을 해도 되겠소?" 하후성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 앞에는 흑의중년문사가 미소를 띈 채 서 있었다. 하후성은 아까부터 그에게 호감을 느끼 던 터였기에 빙그레 웃어 보이며 정중히 말했다. "앉으십시오." 중년문사는 사의를 표하며 앉았다. 이어 그는 청수한 얼굴에 미소 를 지으며 다소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소협의 기우가 워낙 헌앙하여 소생이 감히 합석을 청한 것이니 너무 허물치 말아주시오." 하후성은 빙긋 웃었다. "너무 과찬이십이다. 오히려 제가 송구스럽습니다." 흑의문사는 담담한 눈에 기이한 광채를 발하며 자기 소개를 했다. "소생은 위전풍(韋全風)이라 하오."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합장을 했다.

"아! 위형이셨군요. 소제는 하후성이라 합니다." "하후성!" 갑자기 흑의문사, 즉 위전풍은 크게 놀란 듯 부르짖었다. 그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하며 안색이

굳어지더니 곧 경외지심을


나타내며 포권하는 것이었다. "아! 실례 했습니다. 설마하니 소협께서 대명이 쟁쟁한 환영신룡 (幻影神龍) 하후성 소협이신 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실로 뜻밖의 일이 벌어지자 하후성은 그야말로 어리둥절해지고 말 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환영신룡이라니?' 하후성은 의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반면 위전풍은 정중히 말하 고 있었다. "보통 분이 아닌 줄은 알았으나 설마 꼬리를 보이지 않는다는 신 룡, 환영신룡이신 줄은 몰랐소이다." 하후성은 어이가 없었다. "아뭏든 하후소협같은 기인을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소이다."

위전풍은 하후성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 몇 번씩이나 입을 열려다 말을 을 짓고 말았다.

하지 못한 하후성은 그만 쓴 웃음

'아무래도 나와 동명이인인 고수가 있는 모양인데, 그만 나도 모 르게 그의 이름을 빌린 꼴이 되고 말았군.' 하후성은 뒤늦게 자신의 존재를 부인해 보았자 상대가 믿을 것 같 지도 않아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객점 안은 아주 조용해져 있었다. 그것은 주루 안에 있던 무림인들이 모두 위전풍이 말한 것을 들었 기 때문이었다. "아아, 환영신룡!" 중인들은 대경하여 안색이 변하고 있었고 특히 얼마전 하후성을 비웃던 장삼과 왕팔 두 장한은 안색이 잿빛이 되어 슬금슬금 눈치 를 보며 벌써부터 줄행랑을 치려는 중이었다.


조금 떨어진 탁자에 있던 였다.

홍의소녀와 백의소녀도 크게 놀란 눈치

'음. 저들의 태도를 보니 황영신룡이란 자는 정말 보통 인물이 아 닌 모양이구나. 대체 누구이길래?'

하후성은 의혹에 싸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 층 계단 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들 려왔다. "핫핫핫......." 다시 새로운 인물들이 계단 위로 올라섰는데 그들은 한 명의 칠순 (七旬) 가량 되어보이는 백발노인과 두 명의 청년이었다. 백발노인은 칠십이 넘은 나이였으나 정정한데다 눈빛이 섬뜩할 정 도로 예리했으며 두 팔이 유난히 긴 데다 입고 있는 마의를 간편 히 걷고 있어 무척 활달한 인상을 주었다.

두 명의 청년은 모두 비범한 모습으로, 우측의 청년은 황의를 입 고 있었으며 약간 각이 진 얼굴에 피부빛은 건강한 화색(和色)을 띄고 있었다. 인중지룡(人中之龍)을 방불케 할 준수하고도 비범한 모습이었다. 좌측의 청년은 갈의를 입고 있었으며 얼굴이 다소 검은 빛을 띄었 으나 오관이 단정하고 두 눈이 뚜렷하여 역시 비범하고 준수해 보 였다. 세 사람 중 마의노인(麻衣老人)을 발견하자 위전풍의 안색이 갑자 기 가볍게 변했다. 그는 슬쩍 얼굴을 그의 반대쪽으로 돌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하후형, 소생은 볼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소. 우리는 천풍보(天

風堡)에서 어쩌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하후성은 그의 갑작스런 태도에 어리둥절해졌으나 위전풍은 그의 답도 듣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바삐 밑으로 내려가 버렸다. '위형(韋兄)이 갑자기 왜 저럴까?'


하후성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었다.

저었으나 곧 느끼는 것이 있

'음. 아마 저 노인과 무슨 관계가 있나 보군.' 하후성이 이렇게 생각할 때 자리에 앉아있던 홍의소녀와 백의소녀 가 백발노인을 보더니 모두 반색을 지으며 벌떡 일어났다.

홍의소녀가 먼저 명랑하게 외쳤다. "숙부님! 이쪽이에요." 백발노인은 곧 그녀를 발견하고는 껄껄 웃으며 그녀들에게 다가갔 다. "허허허... 이 계집애야!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 가 있었길래 이 숙부로 하여금 찾지도 못하고 애먹게 만들었느냐?" 홍의소녀는 생긋 웃으며 교소를 날렸다. "호호호... 미안해요, 숙부님. 오는

길에 그만 황보 언니를 만나

게 되어 약속을 못지켰지 뭐예요." 그러나 그 말에 얼굴이 거무스레한 갈의청년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랐다. "소령(素鈴)아! 너는 냐?"

우리가 걱정하는 것도 상관치 않았단 말이

백의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청아한 음성으로 말했다. "팽소협, 영매만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이 일은 제게 책임이 있 어요." 그러자 팽이라 불리운 갈의청년은 그만 머쓱해져 입을 다물고 말 았다. 그는 백의소녀를 전부터 알며 또한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 았다. 황의청년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핫핫핫... 팽형, 이제 됐으니 그만 하고 자리에 앉읍시다." 황의청년의 말에 일행은 모두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홍 의소녀는 하후성을 힐끗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일행에게 뭐라고 소근거렸다. 그들 일행은 모두 깜짝 놀란 듯 일제히 안색이 변했고, 이어 백발 노인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성큼성큼 하후성에게 다가갔 다. 하후성은 이미 홍의소녀가 그들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듣고 있었으나 모르는 척 창 밖만 바라보았다. 마의노인은 그의 옆까지 다가와 헛기침 했다. "험! 소협, 좀 실례해도 되겠소?" 하후성은 고개를 돌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 앉으십시요, 노인장." ■ 대소림사 제 1 권 제 9 장 천풍보(天風堡)의 회웅(會雄) -1 ━━━━━━━━━━━━━━━━━━━━━━━━━━━━━━━━━━━

마의노인은 하후성의 맞은 편에 앉았다. 하후성은 그 순간 마의노인의 허리춤에 한 자루의 자색빛이 도는 도(刀)가 숨겨져 있는 것을 보았고 마의노인은 이러한 하후성을 유심히 살폈다. '흐음.'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후성은 도저히 무공을 연마한 사람같 지 않았으며 그의 두 눈은 물처럼 고요하여 깊이를 느낄 수가 없 을 정도였다. 마의노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으음, 과연 대단하다. 무공을 익힌 흔적을 조금도 노출시키지 않 으니 이는 전설상의 무학경지인 반박귀진(返璞歸眞)에 이른 것이 아닌가? 과연 환영신룡답다.'


마의노인은 다시 헛기침을 했다. "허험! 실례지만 좀 묻겠소이다. 소협께서 환영신룡 하후성 소협 이 맞소이까?

하후성은 그만 난처해졌다. "환영신룡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소생의 이름이 하후성인 것은 맞 습니다." 그의 대답에 마의노인은 반색을 하며 너털웃음을 졌다. "헛헛헛! 정말 반갑소이다. 노부는 예전부터 소협의 쟁쟁한 소문 을 들어 왔소이다. 진작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기 쁘기 한량 없소이다." 그는 포권하며 자기 소개를 했다.

"노부는 하북 팽가장(彭家莊)에서 온 자전신도(紫電神刀) 팽수위 (彭袖位)라고 하오." 하후성은 두 눈에 이채를 띄며 슬쩍 자전신도 팽수위의 왼쪽 허리 춤에 있는 자색도를 바라보았다. '음. 이 노인이 바로 당금 째 고수 자전신도였구나.'

무림의 사대세가 중 하북 팽가의 두번

하후성은 비록 무림에 처음 나왔지만 그동안 소림사에서 천기선사 로부터 현무림의 전통적인 문파(門派)와 각 무가(武家), 그리고 전대고수에 대해 자세히 들은 적이 있었다. 최소한 삼백 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사대세가는 다음과 같았다.

하북(河北) 팽가장(彭家莊). 강서(江西) 남궁세가(南宮世家). 사천(四川) 당가장(唐家莊).


산동(山東) 악가장(岳家莊). 그들 사대세가는 각기 특이한 무공으로 수백 년 간 일맥을 유지해 온 무림세가로써, 사대세가의 세력과 영향력은 각기 성(省)을 지 배할 정도로 컸으며 당금의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성세와도 비교 할 정도였다. 하북 팽가도법(彭家刀法). 이것은 너무도 유명하여 자전십팔풍(紫電十八風)이라면 무림의 일 절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도법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자 전신도 팽수위는 현 팽가장의 제 이 가주(第二家主)였다.

하후성의 생각이 여기까지 이어졌을 때였다. "호호호! 숙부님, 저희들도 좀 소개시켜 주세요."

그의 뒤에서 마치 은방울을 왔다.

울리는 듯한 짜랑짜랑한 교소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홍의소녀가 그에게 방긋 웃고 있었다. 또한 그 뒤로 백의소녀와 두 명의 청년도 서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호 감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하후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홍의소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하후소협, 저희들도 같이 합석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아, 그렇게 하십시요." 하후성이 담담하고 부드럽게 승낙하자 홍의소녀는 대뜸 활짝 웃으 며 그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일부러인지 살이 맞닿을 정도로 찰싹 붙어 앉았으므로, 하 후성의 코에 처녀 특유의 체취를 물씬 풍겼다. 반면 백의소녀와 두 명의 청년은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모두 자리에 앉자 자전신도 팽수위는 몹시 기분이 좋은 듯 너털웃


음치며 말했다. "허허! 하후소협, 노부가 이 젊은이들을 소개 하겠네." 그는 먼저 홍의소녀를 가리켰다. "소협의 옆에

앉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그 계집애는 바로 노부의

조카일세. 별호는 홍의은편날수(紅衣銀鞭 手) 팽소령(彭素鈴)이 네. 허허... 지독한 말괄량이니 앞으로 조심해야 할 걸세." 팽수위의 말에 홍의소녀 팽소령은 뜸 반발했다.

그만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대

"어머! 숙부님, 그 무슨 말씀을... 제가 어디 말괄량이에요?" 그러나 팽수위는 짐짓 위엄스럽게 말했다. "이 녀석아! 더이상 심한 소리 듣기 전에 입이나 닫아라." 팽소령은 과연 찔리는 데가 있는지 입을 다물었으나 귀여운 입술 이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팽수위는 이번에는 갈의를 입고 다. "이 아이 역시 노부의 하지."

얼굴이 약간 검은 청년을 가리켰

조카일세. 그리고 저 계집애의 오빠이기도

갈의청년은 즉시 일어나 하후성에게 포권했다. "소제 흑금강(黑金剛) 팽의천(彭義天)이라고 합니다" "아, 팽형이셨군요." 하후성이 답례하고 나자 팽수위는 얼굴에 화색이 감도는 황의청년 을 가리켰다. "이 젊은이는 바로 태양장(太陽莊)의 소장주(少莊主)인 적인금붕 (赤印金鵬) 황보무룡(皇甫武龍)일세. 당금무림의 후기지수 중 손 꼽는 고수이니 잘 사귀어 보게."


적인금붕 황보금룡은 일어나 포권했다. "처음 뵙겠소이다. 하후형." 팽수위는 마지막으로 백의소녀를 가리켰다. "이 낭자는 황보문연(皇甫文娟)이라고 하네. 황보소협의 여동생이 지. 설금옥향(雪琴玉香)하면 음률(音律)과 미모로 모르는 사람이 없지." 황보문연은 얼굴을 사르르 붉혔다. "아이, 노선배님도......." 그녀는 웬지 가슴이 두근두근함을 느끼고는 감히 하후성을 바라보 지도 못했다. 그녀는 얼굴을 숙인 채 사뿐히 인사했다. 하후성이 답례하자 팽수위는 호탕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후소협, 여기있는 이 네 젊은이들은 모두 사귀어볼만 하네."

적인금붕 황보무룡이 빙긋이 웃으며 나섰다. "솔직이 말해 소제는 하후형의 위명을 듣고 소문이 지나치게 과장 되었으리라 생각해 왔었소. 그러나 막상 보게 되자 오히려 소문이 실제보다 못한 것 같소이다." 하후성은 그만 고소를 짓고 말았다.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군. 강호초출(江湖初出)인 내가 어떻게 이 렇게 유명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후성은 생각할수록 괴이한 느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대체 그 환영신룡이란 자는 누굴까?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대단한 인물인 것같은데.......' ■ 대소림사 제 1 권 제 9 장 천풍보(天風堡)의 회웅(會雄) -2 ━━━━━━━━━━━━━━━━━━━━━━━━━━━━━━━━━━━


다시 계단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두 명의 인 물이 올라섰다. 그들은 극히 대조적인 흑의노인과 자의소녀(紫衣少女)였다. 흑의노인은 약 육순(六旬) 정도의 나이에 음침한 인상으로 전신이 깡마른데다 넓은 흑삼을 입었고 두 눈은 움푹 패였으며 안색마저 창백하여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는 기이하게도 일문종주(一門宗主)다운 위엄 이 풍기고 있었다. 자의소녀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대단한 미녀였다. 그녀는 자색의 피풍을 어깨에 둘렀으며 입고 있는 자의는 경장차 림이었는데, 눈이 유난히 맑고 피부가 백옥같이 깨끗하여 매혹적 이고 산뜻한 용모였다. 흑의노인은 주루 안을 둘러보다 자전신도 팽수위를 발견하고는 흠 칫하는 표정을 짓다가 곧 반색했다. 그는 곧 팽수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고 팽수위도 그를 발견하자 벌떡 일어났다. "허허허...! 이거 사천당가(四川唐家)의 가주(家主)이신 천수겁천 (天手劫天) 당환성(唐幻星)대협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 이곳까지 왕림하셨소이까?" 흑의노인, 즉 천수갑천 당환성은 냉막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담 담히 말했다. "팽형이 오는데 어찌 노부라고 빠질 수 있겠소." "하하하! 이리 앉으시오. 아뭏든 더 새로와진 것 같소이다."

당환성은 고소를 지으며 답했다.

몇 년 못본 새 당가주의 경지는


"노부의 암기(暗器) 따위야 팽형의 자전십팔풍에 부딪치면 흔적도 없이 가루가 될텐데 그 무슨 농담이오?" 팽수위는 두 손을 들어보였다. "원, 당가주야말로 무슨 농담을......." 이어 그는 당환성의 옆에 있는 자의소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 낭자는?" 당환성의 음성이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진아(眞兒)야, 인사 드려라. 이 분은 팽가의 제 이 가주(第二家 主)님이시다." 그러자 자의소녀가 곱게 절을 했고 팽수위는 펄쩍 뛰었다. "아니! 이제 보니 낭자는 바로 당옥진(唐玉眞) 낭자가 아닌가?" "네, 노선배님." 자의소녀의 음성은 꾀꼬리처럼 고왔다. "허어! 세월 참 빠르군. 그때 왔을 때는 귀엽고 깜찍한 어린 소녀 였는데 벌써 이렇게 어엿한 아가씨가 되었다니."

자의소녀 당옥진은 얼굴을 붉혔다. 이윽고 먼저 자리에 앉았던 일행들, 특히 젊은이들이 다투어가며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젊은이들은 활기차고 명랑했으며 당환성은 냉막한 얼굴에 모처럼 밝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허... 아까부터 주루 안이 환하다 했더니, 이제 보니 절세의 기남기녀(奇男奇女)들이 모두 모여 있었군." 하후성은 이제껏 당환성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점차 당가의 가주인 천수겁천 당환성에 대해 감탄을 느꼈다. '음. 이 노인의 인상은 매우 특이하구나. 겉으로 보면 음산하고 냉혹하게 보이는데 실제의 내면은 매우 강직하고 정 많은 협사(俠 士)의 기질을 가지고 있구나.' 당환성은 뒤늦게야 하후성을 발견하고는 그의 뛰어난 풍모에 놀란 기색을 지었다. "팽형, 이 분 소협은 뉘시오?" 그가 묻자 팽수위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당가주, 내 천하의 기재 한 분을 소개하겠소."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당가주, 혹시 환영신룡 하후성 소협을 아시오?" "환영신룡!" 당환성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어찌 그를 모르겠소? 출도한 지 반 년도 못되어 대막삼흉(大 漠三兇), 관외오마(關外五魔), 음산이절(陰山二絶), 동백십살(桐 栢十殺) 등의 마두들을 모두 제거하여 이미 전 무림을 경동시켰거 늘,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팽수위는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당가주, 왜 그렇게 눈치가 없으시오? 이 분 소협이 바로 환영신룡 하후성 소협이시오." "아!" 당환성은 탄성을 발함과 동시에 곧 경외심을 나타내며 황급히 포 권지례 했다. "이거 대단히 실례했소이다, 하후소협. 이 늙은이가 미처 고인을 몰라 보았소."


"무슨 말씀을. 당대협." 하후성은 얼떨결에 답례는 했지만 입가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나는 이제 완전히 환영신룡이 된 셈이군.' 자의소녀 당옥진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해 있었다. 그것은 실로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의 변화로, 그녀는 당 가장의 금지옥엽으로 자라면서 세상을 고고하게 내려보았고 특히 남자에 대해서는 이유없이 깔보고 경시해 왔었다. 그런데 눈같이 흰 백의를 입고 긴 검은 머리를 뒤로 묶은 신비한 청년 환영신룡, 그를 보자 그녀의 방심(旁心)은 온통 뒤흔들리고 만 것이었다. 하후성이 풍기는 기운은 그야말로 꾸밈이 없는 천성이었으나 또한 그 기운은 세상의 모든 여인들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고도 남음이 있을만큼 마력적인 것이었다. 그 특이한 기질은 소림의 천기선사가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한 것 으로써 정작 본인인 하후성만이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당환성은 호감어린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소협도 천풍보(天風堡)에 가시려고 이곳에 온 모양이구료?" 하후성은 흠칫했다. 얼마 전 흑의문사 위전풍의 말이 떠올랐기 때 문이었다. '그는 어쩌면 천풍보에서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그랬지.'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도 실상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강호에서 이들같이 신분이 높은 자들이 모두 천풍보로 가는 걸로 보아 필히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위전풍, 그 사람을 만날겸 한 번 가보자.'


"허허허! 정말 반갑소이다. 실로 이번 길은 소협같은 기인을 만나 게 되었으니 헛되지 않았소이다." 당환성의 말을 시작으로 일행은 곧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했다. 그 들은 모두 기분이 좋았으며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다만 하후성은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오해된 것이니 만큼 씁쓸한 기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인들은 하후성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감탄과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후성이 만사무불통지(萬事無佛通知), 즉 모르는 것이 없 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가 문(文)이고 무(武)고 하후성의 바다같이 넓은 지식은 그 들에게 경외지심까지 느끼게 했던 것이다. '역시 환영신룡은 일대기재다!' 중인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후성이 전혀 모르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당옥진, 황보문연, 팽소령 등 절세 미모를 갖춘 명가의 세 소녀들의 하후성을 향하는 눈빛이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는 것 으로,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향한 세찬 불꽃이었다.

하후성. 그는 다.

출도하자마자 꽃(花) 밭에 둘러 싸이고 만 것이었

지금으로부터 약 사십오 년 전(四十五年前). 무림에 일대 선풍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한 명의 소년영웅(少年英 雄)의 출현 때문이었다.


종리자허(鍾里子虛). 이것이 소년영웅의 이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십오 세에 불과했으나 놀라운 무공을 소유 한 그는 강호에 출도하자마자 삽시간에 강북무림을 휩쓸었다. 강호의 무수한 고수들이 소년영웅 종리자허의 쌍수(雙手) 아래 추 풍낙엽같이 거꾸러졌다. 실로 무림에 돌풍을 일으킨 것이었다. 더 우기 그에게는 타인이 따를 수 없는 신기에 가까운 의술(醫術)이 있어 그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죽은 사람조차 살수가 있다고 전해 졌다. 그는 출도 후 십 년간 적수를 찾지 빛나는 무명을 날렸다.

못하고 대남강북을 종횡하며

그리고 그는 강남제일미(江南第一美)로 미와 재를 떨친 남궁세가 의 금지옥엽 남궁영미(南宮永美)와 혼인을 했으며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에 거대한 보(堡)를 건립하여 정착했다.

이름하여 천풍보(天風堡). 이것은 또한 현 무림에서 가장 큰 세력인 일장이보(一莊二堡) 중 의 하나이기도 했다. 종리자허는 그 후 천풍보에 수많은 고수들을 받아들여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무당파와 함께 호북무림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태을성수(太乙聖手) 종리자허(鐘里子虛). 그는 무림의 거성(巨星) 중 한 명이랄 수 있었다.

천풍보(天風堡). 무창성 동쪽 십 리(十里) 밖에 광활한 대지를 접하고 세워진 거대 한 보(堡)였다. 근 오만 평에 달하는 방대한 대지 위에 천풍보의 층층거각과 지붕 이 즐비하게 늘어섰으며, 높이 삼 장(三丈)의 성보와 주위에 깊고 넓게 파여진 호보하는 실로 장관이었다.


게다가 천풍보 주위에 빽빽이 자라있는 송림(松林)은 그야말로 볼 만한 절경으로 웬만한 무림고수는 천풍보의 위세만 보아도 기가 질리고 말 것 같았다.

천풍보의 영빈청(迎賓廳)은 하나의 광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웅대 하고 넓었다. 좌석만 해도 수백 석인 데다가 그곳에서는 지금 근 오백 여 명에 달하는 군웅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시고 음식을 들고 있었 다. 영빈청의 중앙에는 아름다운 무희 이십 여 명이 멋드러진 춤을 추 고 있었다. 흥겨운 가무음곡이 들리고 화기애애한 웃음소리와 술잔 부딪치는 소리, 큰 소리로 축하하는 소리, 함성소리 등이 영빈청을 한껏 쾌 활하고 호탕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왜? 오늘이 무슨 것일까?

날이기에 천풍보는 이토록 군웅들로 흥청거리는

천풍보주인 태을성수 종리자허, 오늘이 바로 그의 육십 회갑(回 甲)일로 사해에 위명을 떨친 종리자허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전 중원의 군웅들이 축하객으로 달려온 것이다. 이것은 태을성수 종리자허의 위명을 생각할 때 어쩌면 당연한 일 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종리자허의 회갑일은 축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한편 하후성은 영빈청의 한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적인금붕 황보무룡과 대작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지기처럼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황보무룡은 하후성과 안 지 불과 반 나절 밖에 안된 처지였으나 하후성에게 급격히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설사 자 신의 한 쪽 팔을 떼주어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친밀한 기분이 드 는 것이었다. 도대체 자신의 이런 기분이 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황보무룡은


술을 호기있게 마시고 나서 입을 열었다. "하후형, 소제는 진정 궁금하오. 실례가 아니라면 사문이 어디신 지 알려줄 수 있겠소?" 하후성은 멋적게 웃으며 말했다.

"황보형, 실제 소제의 무공은 대단한 것이 못되오. 소제는 단지 한 무명노인에게 몇 수 무공을 배웠을 뿐이오." 황보무룡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하후형이 정히 숨기려 한다면 할 수 없지요." 이어 그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하후형의 실력이 별 것이 아니라면 대체 소제의 무공은 어디 가서 써먹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하후성은 다시 멋적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때 그의 눈에 네 명의 노소가 영빈청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 였다. 두 명의 노인과 한 청년, 그리고 백의미소녀였다. 앞장 선 두 노인 중 오른쪽은 전신에 백삼을 입고 있으며 나이는 약 오십 정도였는데 용모가 지극히 청수했으나 기이할 정도로 안 색이 창백했다. 그러나 반면 두 눈은 마치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섬뜩하게 빛 나고 있었으며 왼쪽 허리에 기형(奇刑)의 검을 차고 있었다. 그와 나란히 선 노인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위맹하게 생긴 칠순 노 인이었다.

그는 적포장삼을 입었으며 등 뒤에는 적(赤)과 청(靑)색의 두자루 쌍창(雙槍)을 메고 있었는데 얼굴은 자색빛이었고 긴 수염을 마치 교룡처럼 꼬아 기르고 있었다. 두 노인은 매우 상반되는 인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종 주(宗主)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 뒤에 따르는 남녀는 모두 미남미녀였고 똑같이 백의를 입고 있었다. 청년은 이십이, 삼 세 정도의 준수무비한 용모와 날카롭고 명확한 눈매를 지니고 있었고, 소녀는 눈이 번쩍 뜨이는 절세가인이었다. 나이는 약 십구 세 정도 되어 보였다.

그녀는 눈, 코, 입술 등 어느 곳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얼굴이 지나치게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게 흠이었다. 동중매화, 아니 설중매화(雪中梅花)같이 고결한 미를 발산하고 있 다고나 할까? 하후성은 그들을 관심있게 관찰했다. '음, 저들 두 노인은 보통 인물들이 아니다. 특히 저 오른쪽의 백 의노인의 두 눈빛을 보건대 무서운 고수임이 틀림없다. 이곳 천풍 보에도 지금 수많은 고수가 있지만 그 누구도 저 노인에게는 비할 바가 못된다.'

하후성의 관찰은 극히 예리했다. 이때 황보무룡이 웃으며 물었다. "하후형, 저 분들이 누군지 아시오?" "모릅니다." "하하.... 저 분들은 위명이 실로 천하를 울리는 분들이시오. 백 의를 입은 분은 바로 현 남궁세가의 가주이신 검제(劍帝) 남궁진 강(南宮進江)이신데, 저 분은 당금무림에서 검법의 일인자요." "아!" 하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남궁노선배는 이곳 천풍보의 보주이신 태을성수 종리노선배 님과 처남매부지간이시오. 종리노선배님의 부인이 바로 남궁노선 배의 여동생이기 때문이지요." 하후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보무룡은 다시 설명을 이었다.


"그 옆에 적포장삼의 쌍창을 멘 분은 일장이보 중 절강성(浙江省) 신창보(神槍堡)의 보주이신 자면신창(紫面神槍) 소중산(蘇中山) 노선배시오." "음." "그 분은 무림사상 최고의 창술을 지닌 창의 진인이시오."

황보무룡은 침을 삼키며 계속 설명했다. "그 두 분 노선배님 뒤를 따르는 백의청년은 바로 남궁노선배님의 아들인 옥면가람(玉面伽藍) 남궁수(南宮秀)요. 그는 당금무림의 후기지수(後期之秀) 중 으뜸이라는 중원사룡의 일 인이기도 하지 요." '중원사룡?' 하후성은 중원사룡이란 말에 황보무룡이 말을 이었다.

호기심을 느꼈으나 질문하기도 전에

"또 그 옆의 절세미모를 지닌 백의소녀는 빙심한매(氷心寒梅) 남 궁설지(南宮雪芝)라는 방명을 가지고 있으며 남궁수 소협의 동생 인데 그녀는 성격이 차갑기로 소문 나 있소." "음." "들리는 말로 그녀는 신비의 기녀인 북해 빙심곡(氷心谷) 빙심파 파의 수제자라는 것이오. 그녀는 오히려 오빠를 능가한다는 소문 이 있소이다." 황보무룡은 문득 히쭉 웃으며 말했다. "남궁소저는 너무나 마음이 차가와 수많은 청년들의 애를 태우고 있소이다. 그러나 그녀도 하후형을 보면 아마... 핫핫핫핫..... .!"

하후성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호호호! 황보대가, 뭐가 그렇게 우습죠? 저도 좀 같이 웃을 수는 없을까요?"


교소와 함께 자리에 끼어드는 것은 바로 홍의은편날수 팽소령이었 으며 그녀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 팽낭자, 앉으시오." 황보무룡이 명쾌하게 말하자 팽소령은 연신 웃으며 말했다. "앉는 건 앉는 건데, 황보대가를 좀 보자는 분이 계신데요."

"누가......?" "호호호! 황보 노선배님이 조금 전에 도착하셨어요." "아!" 황보무룡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하후성에게 포권했다. "하후형, 잠시 나갔다 오겠소이다. 아마도 아버님께서 오신 모양 이오." "그러시오, 황보형." 황보무룡은 곧 서둘러 영빈청 앞으로 나갔고 그가 자리를 비우자 팽소령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하후소협, 옆에 앉아도 될까요?" 하후성은 흠칫했다. 그러자 팽소령은 생긋 웃으며 교태스럽게 말 했다. "그럼 허락한 것으로 알고 앉겠어요." 그녀는 서슴없이 옆자리에 앉더니 엉덩이를 바짝 붙이고 앉아 사 나이의 간이라도 녹일 듯 생글생글 웃었다. "하후대가. 소매의 술 한잔 받으세요."

그녀는 섬섬옥수로 술병을 받쳐 들었다. 하후성은 일생에 한 번도 여 고개를 저었다.

술을 마셔본 경험이 없었으므로 당황하


"소생은 술을 못하오." 그러나 팽소령은 억지를 썼다. "아이! 제 손이 부끄럽잖아요. 어서 받으세요." 그녀는 더욱더 하후성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아 뭉클한 육체의 감촉 마저 느끼게 했고 하후성은 그만 당황하다 못해 어쩔 수 없이 술 잔을 들었다.

"고, 고맙소이다. 소저......." 그는 곧 가득 채워진 술잔을 드는 듯 마는 듯 입술에 적신 다음 내려 놓았다. 그 모습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던 팽소령은 재빨리 남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소매에게도 한 잔 주세요." 하후성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소녀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웬지 밉지는 않은 심정으로 그는 담담히 술을 따라 주 었다. 팽소령은 잔을 들더니 두 눈을 꼭 감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녀 의 양 뺨에는 곧 홍조가 피어 올랐고, 얼굴이 상기되자 그녀의 미 모는 더욱 눈부시게 피어났다. 팽소령은 웬지 자신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하후성이란 사내에 게 끌려들어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 대체 내 마음이 왜 이럴까? 단 한 번 만난 사이인데도 이토 록 끌려 들어가다니.......' 팽소령은 멍하니 절세미남 하후성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고 말았 다. '얼굴이 잘 생겨서만은 아니야. 이분의 전신에서는 남들에게서 도 저히 볼 수 없는 특이한 기질이 강렬하게 발산되기 때문이야!'

팽소령은 마침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좋아, 나 팽소령이 한 번 마음먹은 이상 도중에 중단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끝까지 이 분을 내가.......' 팽소령은 몸을 움직여 더욱 하후성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술기운에 얼굴이 상기되고 육향이 풍기는 그녀는 거의 하후성과 붙어 앉은 꼴이었다. 그러나 하후성이 어떤 인물인가? 불문의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익혀 남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초인

적인 정력(定力)의 소유자로써 그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단지 약간 거북하고 어색할 뿐이었다. "아이.... 하후대가, 저만 술을 마시면 되나요? 대가께서도 한 잔 드시라니까요." 팽소령이 교태스럽게 다시 술을 권했다. "아, 소생은 술을 하지 못하오." "호호호... 불문의 스님도 아니면서 술을 마시지 못하다니 말이나 되나요? 영웅이라면 마땅히 주색......." 팽소령은 말을 하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말이 잘못됐음을 느꼈는지 그녀는 제 풀에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어찌 처녀의 입으로 주색을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하후성도 그만 돌려야 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불편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하하하... 하후형! 과연 이곳에서 또 만나게 되었구려!" 낭랑한 웃음소리가 그의 귓전에 들려왔다. 그는 바로 흑의문사 위전풍이었다. "아! 위형."

하후성은 반색을 지었고 위전풍은 슬쩍 팽소령의 눈치를 살피더니


은근히 물었다. "하후형, 여기에 앉아도 되겠소?" 순간 팽소령의 살구씨같은 눈에 쌍심지가 돋더니 그녀는 마치 어 서 꺼지라는 듯이 야멸차게 위전풍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하후성의 심정은 정반대로 마치 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

"물론입니다, 위형. 어서 앉으십시오."

위전풍은 팽소령을 향해 씩 웃었다. "소저, 죄송하오이다. 그럼......." "흥!" 팽소령은 그에게 들릴 정도로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꼬았다. 한편 영빈청의 상좌에는 몇 나누고 있었다.

명의 인물들이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그들은 바로 사천당가의 가주인 천수겁천 당환성과 그의 애녀 당 옥진, 그리고 남궁세가의 가주인 검제 남궁진강과 그의 아들딸인 남궁수와 남궁설지, 그리고 하북의 자전신도 팽수위와 그의 조카 흑금강 팽의천 등이었다. 또 절강성에 있는 신창보의 보주인 자면신창 소중산도 한참 술을 연거푸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모두 웃음을 띄고 즐겁게 담소하고 있었으나 단 한 명, 빙 심한매 남궁설지만은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에 조금도 변화를 보이 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이따금씩 음식을 집어먹을 뿐 이야기에 끼어들지도 않았다. 당옥진(唐玉眞), 그녀는 힐끔힐끔 다른 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하후성이 있는 곳으로 그녀는 팽소령이 하후성의 곁 에 바짝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두 눈에 초초함과 질투심까지 드 러내고 있었다.


좌중의 인물들은 아무도 그녀의 태도를 눈치채지 못했다. 단지 팽 수위 만이 그녀의 심정을 눈치채고는 늙은 얼굴에 히죽 웃음을 지 으며 말했다. "당소저, 몸이 좀 불편한가 보군!" 당옥진은 깜짝 놀랐다. "네?" "허허허... 몸이 아프면 들어가 쉬는 것이 좋을 걸세."

"괘, 괜찮아요......." 당옥진은 그만 얼굴이 새빨개졌고 그녀의 귓전에 익숙한 차가운 전음이 들려왔다. (이 계집애야, 눈치채게 하지 말고 잠자코 있거라. 너는 그저 이 애비 만 꼭 믿어라. 다른 건 몰라도 사위 고르는 솜씨 만큼은 노 부의 암기 솜씨 못지 않으니까!) 당옥진은 자신의 내심을 들킨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했으나 반면 야릇한 느낌과 함께 기쁜 심정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환성은 문득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헛헛헛... 팽형! 참 부럽소!" 느닷없는 말에 팽수위는 움찔했다. "허허허! 요즘은 딸을 한 번 시집 보내려면 무척이나 힘드는데 하 북 팽가는 대체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토록 부모 힘을 빌리지 않고 도 남자를 잘 고르오?" 당환성의 야유 짙은 말에 팽수위는 비로소 그가 팽소령을 가리켜 하는 말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자전신도 팽수위가 또 어떤 사람 인가? 짐짓 그는 신이 난다는 듯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핫핫핫... 그것은 바로 하북 팽가의 전통이외다! 솔직히 하후소 협 정도면 노부가 여인이라도 당장 발벗고 뛸 것이오. 하하 하......." 당환성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한방 얻 어맞고 만 셈으로, 이렇게 되면 선수를 빼앗긴 것이나 다름이 없 지 않은가? 팽수위가 득의의 미소를 날리고 있는 것을 보자 당환성은 은근히 약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고인인지라 사감(私感)을 떨쳐버리고 맞은 편에 앉은 남궁세가의 가주인 검제 남궁진강과 신창보의 보주인 자면신창 소중산에게 말했다. "남궁형, 소형, 노부가 한 청년기협을 소개하겠소."

그 말에 남궁진강과 소중산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은 환영신룡 하후성이란 이름을 들어보셨소?" 두 사람은 모두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으며 소중산이 성급히 반문 했다. "그가 이곳에 있단 말이오? 어디 있소?" "허허! 역시 만나고 싶은 모양이구려. 바로 이곳에 있소이다." 당환성이 하후성을 가리키자 두 사람 모두 안광이 번쩍 빛났다. 특히 남궁진강의 투명한 눈빛은 하후성을 자세히 살펴본 후 한 차 례 진동을 보였다. '놀라운 기재다, 당금 무림에 저런 기재가 있다니!' 소중산은 탄성을 발했다. "허어! 말로만 듣던 환영신룡이 바로 저 젊은이요?" "그렇소이다." 소중산은 몹시 성질이 급한 듯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자, 일어섭시다. 오늘 청년기재와 얘기를 나누고 싶소."


■ 대소림사 제 1 권 제 10 장 마종지문(魔宗之門) -1 ━━━━━━━━━━━━━━━━━━━━━━━━━━━━━━━━━━━

하후성은 위전풍과 담소하고 있었으며 팽소령은 한 쪽에서 연신 술을 마셔대고 있었다. 그녀의 볼은 완전히 부어 있었다. 생각같아서는 위전풍이란 사내 의 멱살을 잡아 땅 속에 처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흥! 남의 좋은 일을 방해하다니.......'

그녀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데다 또한 술기운도 오르고 있어 심정 을 억누르기가 고역이었다. 평소에 하던대로라면 그녀가 이렇게 참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희한하게 발전해 가고 있었다. "허허허... 하후소협, 노부들도 좀 동석하세." 너털웃음과 함께 팽수위를 위시한 그 일행이 다가왔다. 이윽고 그들은 분주히 서로 인사를 교환한 다음 차례로 자리에 앉 았으나 모두의 관심은 하후성에게 있었다. 하후성은 쟁쟁한

명성을 지닌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어야만

했고, 어느 정도 인사가 끝나자 그들은 자리를 잡고 술잔을 돌렸 다. 팽소령은 그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빙심한매 남궁설지에게 아는 체 를 했다. "남궁언니, 오랫만이군요." 그러나 남궁설지는 여전히 냉담한 얼굴로 고개만 약간 까닥할 뿐 이었고 팽소령은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흥! 고고한 척 하긴.'


검제 남궁진강은 그 사이 하후성의 모습을 계속 살피며 차츰 감탄 해마지 않았다. '으음. 실로 눈으로 보기 전에는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이다. 이 청 년의 내공(內功)은 이미 최극성의 경지에 올랐다. 어쩌면 오히려 노부보다 높을 지도 모른다. 도대체 천하에서 어떤 기인이 이같은 고수(高手)를 키워냈단 말인가?' 짧은 순간 남궁진강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기인고수들을 떠올 려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한 역량을 지닌 기인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좌중은 시끌벅쩍 대화가 무르익었다. 대화의 중심은 역시 하후성이었으며 모든 질문이 그에게로 향해졌 기 때문에 하후성은 좋든 싫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후성은 어려서부터 학문의 조예가 깊었다. 이미 십여 세 때 하란산 기슭에서 독고황을 경악시킨 학문의 경지 가 아닌가? 그리고 그 후로는 소림에서 천기선사로부터 더욱 정심 박대한 학문을 익힌 몸이었다. 대화가 익어갈수록 중인들은 하후성의 폭 넓고 심오한 학문조예에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는 좀체로 표정의 변화를 보이 지 않는 남궁설지마저 그에게 경이의 눈빛을 보냈다. 하후성은 강호에 첫 출도하자마자 기라성같은 고수들의 이목을 집 중시킨 셈이었으며 실로 그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하후성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께 소생이 여쭈어볼 게 있습니다." 중인들은 모두 그에게 이목을 집중시켰다. "혹시 적미천존(赤眉天尊)이란 분을 아십니까?" 순간 중인들, 특히 노인들은 모두 안색이 굳어져 버렸다. "적미천존!"


좌중은 금세 찬물을 뿌린 듯이 조용해졌고 소중산이 제일 먼저 입 을 열었다.

"하후소협, 어떻게 적미천존을 아시오?" 그의 음성은 약간 떨리기조차 했으나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언젠가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팽소령이 의아한 듯 물었다. "적미천존이 누구죠? 저는 어째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죠?" 그 말에 그녀의 오빠인 팽의천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소령, 그는 절세의 거마(巨魔)이자 효웅으로 이미 백 년 전에 사 라졌으니 네가 알 리가 없다." 옥면가람 남궁수도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그 이름은 한두 번 들은 적이 있소이다만 그가 그토록 무서운 인 물이오?" 그의 질문에 이번에는 소중산이 침중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무서운 인물이고 말고......." 이어 그는 좌중을 훑어보며 설명했다. "자네들같은 후배들은 잘

모르겠지만 적미천존은 천 년 무림사상

가장 무서운 육대천마(六大天魔) 중 한 명이다." "육대천마?" 팽의천과 남궁수가 똑같이 반문했다. "육대천마는 천 년 동안 가장 뛰어났던 대마두 육 명을 말하는 것 이지. 바로 그 첫 번째는 천 년 전의 천중극마(天中極魔), 두 번 째는 칠백 년 전의 혈세천존(血世天尊), 세 번째는 오백 년 전의 천극수라대제(天極修羅大帝), 네 번째는 이백 년 전의 불사지존 (不死之尊), 다섯 번째가 불사지존의 아내였던 천마교의 교주인


벽안마희(碧眼魔姬),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가 백 년 전 현천교(玄 天敎)의 교주였던 적미천존(赤眉天尊)을 말하는 것이네."

"아......." 소중산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생각해 보게. 천 년 이래 가장 강한 육 명의 대마두 중 일인이라 면 엄청난 실력을 갖고 있지 않겠는가?" 중인들, 특히 육대천마라는 말을 처음 들은 젊은이들은 아연하여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후성도 적지 않게 놀랐다. '으음, 이제 보니 그 노선배가.......'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위전풍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멍한 표정 을 짓고 있다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쩌면 육대천마보다 더욱 무서운 고수가 사도(邪道)에서 생겨날 지 모르오."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흑의문사 차림의 위전풍에게로 쏠렸다. 그들은 비로소 위전풍에 대해 그동안 너무도 주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자면신창 소중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실례지만 대협의 존함은?"

그제서야 위전풍은 퍼뜩 자신의 실수를 느낀 듯 급히 어색한 표정 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소생은 그저 일개 평범한 무인이오이다." 그러나 천수겁천 당환성의 얼굴에는 작은 의혹이 나타났다. '음, 저 자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당환성은 이렇게 생각되자 즉시 약간 냉막한 어조로 물었다.


"노부는 그대의 얼굴이 무척 낯익은 것 같소만?" 위전풍은 흠칫했고 당환성은 갑자기

오른손을 쭉 뻗더니 그의 앞

가슴 현기혈(玄機穴)을 찔렀다. "당가주! 왜 그러십니까?" 위전풍은 급히 반문하여 슬쩍 좌수(左手)를 들어 공격을 봉쇄했 다. 만일 당환성이 그대로 수도(手刀)를 찌르면 필히 그의 좌수가 당환성의 손목을 끊게 될 그런 교묘한 자세였다. 당환성의 안색은 홱 변했다. "노부는 그대가 누군지 이제 알았다!" 그는 두 눈에 무서운 살기(殺氣)와 한광을 쏟으며 싸늘하게 물었 다.

"그대가 이 천풍보에 온 의도는 무엇인가?" 중인들은 모두 안색이 굳어졌고 졌다.

위전풍은 안색을 音)을 전했다.

장내에는 대뜸 험악한 살기가 퍼

딱딱하게 굳히며 다급히 당환성에게로 전음(傳

(당가주, 이 위모(韋某)의 인격을 믿는다면 한 수만 양보해 주시 오. 위모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결코 나쁜 뜻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오.) 당환성의 안색은 또다시 가볍게 변했다.

'음, 이 자가?' 그는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으나 마음 한 구석으로 꺼려지는 면 도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의 정체를 밝히면 연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 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이 자는 한 번도 신의(信義)를 어긴 적 이 없었으니 한번.......' 쉭! 당환성은 뻗었던 수도를 갑자기 금나수로 바꾸며 위전풍의 좌수 완맥을 거머 쥐어갔다.

"당가주......." 위전풍은 안색이 홱 변해 좌수를 움켜 쥐었다가 일제히 다섯 손가 락을 뻗었다. 핑! 핑....... 그의 오 지(五指)에서 예리한 지력이 뻗어 당환성의 손을 튕겼고 당환성은 급격히 손을 회수하며 껄껄 웃었다. "헛헛헛... 내가 실수했군, 모습은 비슷한데 그 자가 아니었소. 실례했소, 귀하(貴下)."

위전풍도 급히 손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별 말씀을, 강호에는 비슷한 사람도 있는 법이니 오."

개의치 마시

중인들은 이 짧은 순간에 일어난 광경에 모두 경악과 의혹을 못했다. 먼저 당환성과 신비한 흑의문사가 나눈 이, 삼 초에 함에도 절묘무비한 공방에 경악했으며, 또한 그들이 곧 서로 하는 것에는 더욱 큰 의혹을 느꼈다. 그러나 일단 당환성이 마친 이상 아무도 캐물으려 하지는 않았다.

금치 불과 양보 말을

바로 이때 영빈청 안의 군웅들이 술렁거리며 일제히 입구(入口)쪽 을 바라보았으며 중인들의 눈길도 모두 그곳으로 향했다.

두 명의 위엄이 충만한 노인이 앞장 서 들어오고 있었고 그 옆에 황보룡과 황보문연이 그들 중 황색장포를 입은 거구의 노인을 따 르듯 들어오고 있었다.


그 노인은 팔 척(八尺)에 가까운 장신에 수염과 머리칼이 온통 붉 은 색을 이루고 있었으며 안광(眼光)에도 역시 붉은 빛이 감도는 위맹한 모습이었다. 하후성은 대뜸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음. 저 노인이 바로 태양장(太陽莊)의 장주인 태양신군(太陽神 君) 황보숭양(皇甫崇陽)이겠구나.' 그는 노인과 나란히 들어서는 금삼(錦衫)을 입은 노인을 주시했 다. 대략 육순(六旬) 정도의 나이에 지극히 인자하고 현기(玄機)어린 청수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전신에서 극히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흐르고 광명정대함과 강직한 느낌도 풍겼다. 노인의 가슴에 새겨진 천(天) 자를 보며 하후성은 내심 단정했다. '저 노인이 바로 이곳 천풍보의 보주인 태을성수(太乙聖手) 종리 자허(鐘里子虛)이겠구나.' 과연 그의 추측은 정확했는지 영빈청 안의 수백 명 군웅들이 일제 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와--아! 태을성주 종리대협!" "청풍보주의 만수(萬壽)를 축원하오이다!" 축복의 함성이 삽시간에 영빈청을 메웠다. 금삼을 입은 태을성수 종리자허는 연신 답례하며 영빈청의 상단에 마련된 자리로 올랐다. 그는 사방에 일일이 읍하며 담담하면서도 웅후한 음성으로 말했다. "감사하오, 감사하오! 이 보잘 것 없는 노부의 회갑에 이렇게 많 은 군웅들께서 와주시다니, 정말 감격을 금치 못하겠소이다." "종리대협이 무림에 끼친 공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이오."

"종리대협의 만세건수를 기원합니다."


군웅들은 모두 저마다 한 마디씩 외쳤다. 그야말로 호탕하고 유쾌 무비한 분위기로써 종리자허는 거듭 포권했다. "정말 노부는 여러분들께 감사하오. 여러분, 술과 음식은 얼마든 지 있으니 마음껏 즐겨 주십시오." "와--- 아----!" 군웅들은 환성을 울렸다. 그러나 군웅들의 함성을 뚫고 어디선가 음침하고 냉혹무비한 괴소 가 들려왔다. "흐흐흐흐!. 사람은 많이 모였으되 쓸만한 놈은 한 놈도 없구나!" 마치 까마귀가 울부짖듯 거칠고 역겨운 음성이었으며 또한 군웅들 의 술기운과 흥을 일시지간에 산산조각 내버리는 안하무인 격의 말이었다. 군웅들은 삽시에 모두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고 태을성수 종리자허 가 상석에서 흰 눈썹을 무섭게 꿈틀거리며 외쳤다. "누구요? 어떤 친구가 본보에 와서 그런 무례한 말을 하는 것이 오?"

그러자 즉시 예의 듣기 거북한 음성이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하! 종리자허! 명년 오늘이 바로 너의 제삿날이 될 것 이다!" 쉭! 공간을 뚫고 흰 섬광이 번개같이 종리자허의 이마로 날아들었다. 번쩍하는 섬전과도같은 일순이었다. "흥!" 종리자허는 코웃음치며 손을 들어 슬쩍 막았다.

그러나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흰 섬광은 돌연 방향을 바꾸더니 그 의 옆의 청강석(靑剛石)으로 된 돌기둥에 깊숙히 박히는 것이 아


닌가? 실로 절묘한 변화였다. 종리자허와 군웅들은 급히 돌기둥에 박힌 물체를 바라보았다. "앗!" 중인들은 흰 물체를 확인한 순간 모두 대경하여 경악성을 내질렀 다. 단단하기가 강철같은 청강석의 기둥에 박힌 물체. 그것은 믿어지지 않게도 하나의 종이칼(紙刀)이었던 것이다. 얇고 부드럽기 그지없는 종이칼이 단단한 청강석주에 깊이 박히다니!

"우----!" 군웅들은 모두 가슴에 찬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며 은연중 으스스 몸을 떨었다. 과연 천하무림에서 몇 명이나 종이칼을 날려 청강석 주에 박을 수 있단 말인가? 비화적엽(飛花摘葉). 적엽상인(摘葉傷人). 이들 무공은 나뭇잎을 날려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내가기공(內家 奇功)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종이칼(紙刀)을 청강석주에 깊이 꽂을 수 있는 실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군웅들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덮혔으나 천풍보의 주인인 태을성수 종리자허만은 태연했다. 과연 그는 사십오 년 전 십오 세의 나이 로 진중원(震中原)을 했던 관록과 실력을 가진 대가다웠다. 그는 조금도 표정의 변화를 성으로 물었다.

보이지 않았으며 단지 가라앉은 침음

"친구는 누구요?" "크흐흐흐흐흐......." 소름끼치는 괴소가 영빈청을 울렸다. 그것은 도무지 방향(方向)을 알 수 없는 괴소성이었으며 곧이어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영빈 청의 중앙에 세 명의 괴인(怪人)이 나타났다.


휙! 휙! 휙! 그들은 모두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괴들이었다. 먼저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괴인은 마치 한 구의 백골(白骨)을 연 상케 할 정도로 비쩍 말랐으며 회의를 입고 얼굴마저 회색이었다. 두 눈은 움푹 패인 채 검은 동자가 없는 흰자위만으로 공포스러운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좌측에는 흑의(黑衣)에 콧날이 칼날같고 턱이 뾰족하며 역시 장대같이 마른 음산한 노인이었다 우측은 보는 이의 가슴이 섬뜩할 만큼 시뻘건 혈의(血衣)를 걸치 고 있는 괴인이었다. 더구나 그의 혈의 가슴팍에는 역시 핏빛의 고루가 새겨져 있어 마치 지옥의 혈신(血神)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군웅들은 모두 숨막히는 살기와 공포감 에 온몸이 얼어붙은 듯 굳어졌다. 그들 세 괴인이 풍겨내는 살기와 피비린내가 수백 명 군웅들의 기 (氣)를 완전히 억누르고 만 것이었다.

태을성수 종리자허의 얼굴은 세 명의 노괴(老怪)가 모습을 나타내 자 경악으로 크게 일그러졌으며 백미가 부르르 떨렸다. '저 세 노마(老魔)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니.......' 세 노괴 중 가운데 있는 백골괴인이 음산한 괴소를 흘리며 그에게 물었다.

"흐흐흐흐! 종리자허, 너는 노부가 누군지 알겠지?" 종리자허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정중히 포권했다. "어찌 무림인으로써 백골사마(白骨邪魔) 금(金)노선배를 모르겠소 이까?" 종리자허는 이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세 분께서는 무슨 일로 본보에 왕림하셨소이까?"


그 말에 이번에는 음산한 흑의 괴노인이 괴소를 흘려냈다. "흐흐흐... 종리자허, 우리 세 명이 청풍보에 온 것이 불만스럽단 말인가?" 종리자허는 담담히 말했다. "어찌 제가 감히 불만을 품겠소이까?" 한편 하후성과 함께 자리잡고 푸리며 욕설을 지껄였다.

있던 자면신창 소중산이 눈썹을 찌

"빌어먹을. 저 세 노마가 대체 무슨 흉심(兇心)을 품고 이곳에 나 타났을까?" 그의 말에 옥면가람 남궁수가 의아한 듯 물었다.

"소백부님, 저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소중산은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저들 세 명은 모두가 최소한 사십 년 전에 사라졌던 거마들이네. 특히 가운데 인물은 백골사마(白骨邪魔) 금마륜(金摩輪)이라는 자 로 이미 나이가 백 살이 넘었네." "음, 백골사마 금마륜......." "흑의를 입은 노마는 지도마살(紙刀魔殺) 마운천(馬雲川)으로 저 자는 종이칼로 강철까지 자르는 실력을 가지고 있네. 과거 사십 년 전 천산파(天山派)의 장문인이셨던 천산비검옹(天山飛劍翁) 노 선배에게 패한 후 실종되었는데 다시 나타나다니......."

그의 말에 천수겁천 당환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그러나 괴이한 것은 고루혈마(蠱 血魔) 곡우양(谷雨陽), 저 늙 은 귀신이오. 노부가 알기로 저 노괴는 음산(陰山)에서 이미 삼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는데." 하후성은 여전히 물처럼 담백한 눈빛으로 세 노마를 응시했다. 종 리자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 분께 재차 묻겠소이다. 이 천풍보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오?" 그러자 지도마살 마운천이 시비 걸듯 괴소로 응수했다.

"흐흐흐... 종리자허, 목적이 있으면 어떠할 것이고 없으면 어쩌 겠느냐?" 종리자허는 엄숙히 말했다. "옛 말에 선자불래(善者不來)요,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했소. 목적이 있으면 말하고 없으면 죄송하지만 조용히 돌아가 주길 원 하는 바이오." 백골사마의 흰 자위뿐인 눈이 가느다랗게 변하는가 싶더니 그의 찢어진 눈 사이로 섬뜩한 한광(寒光)이 뻗었다. "종리자허! 다시 한번 말해 봐라."

그의 음성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풍겨냈고 종리자허의 곁에 있던 태양신군 황보숭양이 벌떡 일어나며 우렁차게 외쳤다. "다시 듣고 싶다면 노부가 말하겠다. 금노괴, 이곳에서 더이상 망 신 당하고 싶지 않다면 당장 물러가라!" 황보숭양의 음성은 영빈청을 들썩이게 할 정도로 쩌렁쩌렁했고 백 골사마 금마륜의 흰 자위가 희번뜩이며 더욱 무서운 살기를 사출 했다. "대단히 거만한 놈이구나. 너는 누구냐?" 황보숭양은 거구를 앞으로 밀며 자신의 가슴을 쳤다.

"태양신군 황보숭양이 바로 나다!" 백골사마의 입가가 기이하게 삐뚤어졌다. "흐흐흐! 이제 보니 태양장(太陽莊)인지 뭔지 하는 곳의 애송이였 군. 건방진 놈!" 백골사마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옆에 서 있던 지도마살 마운천 이 으스스하게 외쳤다.


"황보숭양! 금형을 대신해 노부가 너에게 버릇을 가르쳐 주겠다!" 휙!

지도마살은 그대로 몸을 솟구치더니 공중에서 매가 병아리를 채 듯이 양 손을 쫙 벌려 덮쳤고, 황보숭양의 아들인 황보무룡이 느 닷없이 냉소하며 뛰쳐 나갔다. "너같은 노괴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위-- 잉! 황보무룡은 쌍장을 뻗었으며 허공에 뜬 지도마살의 공격과 그의 쌍장이 격돌했다. 그 순간 황보숭양의 안색이 크게 변해 부르짖었 다. "용아! 위험하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전권에 뛰어들어 쌍장을 날렸고 붉은 화광 (火光)이 그의 장심에서 번쩍였다. 꽝... 꽈르릉! 무시무시한 폭음이 울렸으나 사태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으윽!" 황보무룡은 비명을 지르며 연달아 뒤로 오 보(五步)나 밀려 나갔 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두 자루의 종이칼(紙刀)이 깊숙히 박힌 채 피로 물들고 있었다. 황보숭양은 가운데 서서 왼손 손가락 사이에 세 개의 지도(紙刀) 를 잡고 있었는데 그의 입가에도 한 줄기 선혈이 맺혀 있었다. 그 나마 천만 다행으로 만일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는 하마터 면 하나 뿐인 독자(獨子)를 잃을 뻔 했던 것이다. 그의 얼굴은 온통 분노로 물들었으며 붉은 수염과 머리칼이 온통 곤두서고 있었다. 황보숭양은 으스러져라 손을 움켜 쥐었다.


화르륵! 그대로 불길이 솟으며 세 자루의 지도가 금세 재가 되었다. 그것을 본 지도마살 마운천은

냉소 짓고 있었으나 황보숭양은 더

이상 참지 못한 듯 그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황보숭양의 전신에 곧 붉은 기운이 솟더니 양 손에서 불길이 일어 났다. "태양신공(太陽神功)이다!" 백골사마가 경악하여 외치자 지도마살 마운천의 강팍한 얼굴에도 아까와는 달리 놀람이 떠올랐다. 꽈--- 꽝! 이미 시뻘건 화기(火氣)가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으흑!" 지도마살은 연달아 뒤로 세 걸음 밀려났으며 그의 가슴 옷자락이 시커멓게 그을은 것이 보였다. 그러나 황보숭양 역시 어깨 옷자락이 헤어져 나갔다.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도(紙刀)가 스친 것이다. 두 사람의 실력은 실로 막상막하였다. 이번에는 이제껏 두 눈에서 혈광(血光)을 흉흉하게 뻗치고 있던 고루혈마 곡우양이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황보숭양! 네 놈을 가루로 만들어 주겠다!" 쉬쉬쉬...... 쉭!

그의 양 소매 속에서 수십 개의 핏빛 광선이 사출됐다. 그것은 그의 독문암기인 혈망사주(血芒死珠)로써, 혈망사주는 무 림에 알려진 공포의 암기였다. 또한 그것은 극독이 발라져 있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핏물로 녹고 마는 무서운 마물이었다. 슈슈슈슉!


혈망사주는 황보숭양의 몸 가까이 이르자 처음 사출되었을 때보다 수십 배나 더 빨라졌는데 그것은 바로 암기술의 절정을 말하는 것 이었다. "아!"

중인들은 모두 가슴이 철렁했다. 여지없이 황보숭양은 당할 판국 이었다. 그가 어떻게 몸을 피해도 십여 개의 암기는 몸에 맞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누군가 나서는 인물이 있었다. "곡우양! 암기라면 노부가 상대해 주겠다." 어디선가 싸늘한 음성과 함께 흰 빛이 섬전같이 뻗쳤다. 팍! 파파파팟! 놀라운 일이었다. 황보숭양의 몸에 막 적중되려면 수십 개의 혈망 사주가 모조리 추락한 것이었다.

휘익! 한 줄기 흑영이 빛살처럼 날아들며 수백 개의 암기를 고루혈마 곡 우양에게 날렸다. 슈슈슈슉! "으헉! 이... 이건!" 고루혈마는 전신을 덮어 씌우는 암기 세례에 안색이 잿빛이 되어 굴러가듯 급히 뒤로 후퇴했다. 파파파팍!

수백 개의 암기는 모두 바닥을 쳤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튕겨나듯 떠오른 암기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처음의 흑영에게 회수되는 것 이 아닌가? 실로 불가사의한 수법에 고루혈마는 당황성을 발했다. "어, 어떤 놈이냐?"


흑영은 신형을 빙글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 "흐흐흐... 사천당가(四天唐家)의 천수겁천 당환성이오." "사천당가!" 고루혈마의 안색이 변함과

동시에 백골사마와 지도마살의 안색도

심한 동요를 일으켰다. '뜻밖이다. 이제 보니 이 보잘것 없는 천풍보에 정파무림의 최고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구나!' 세 노괴는 똑같이 이렇게 생각하며 안색이 굳어졌다. 이번에는 남궁세가의 가주 검제 남궁진강이 앞으로 나서더니 담담 히 말했다. "세 분 선배, 이곳 천풍보는 지금 매우 즐거운 분위기요. 그러니 이곳의 화기(和氣)를 깨지 말고 이제 그만 사라지는 것이 어떻겠 소?"

그의 말은 비록 공손한 듯 했으나 매우 오만한 기색이 내포되어 있었고 백골사마는 흠칫하며 괴이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는 또 누군가?" "소생은 남궁진강이라는 무명소졸이외다." 백골사마의 안색이 다시 가볍게 변했다. "그대가 검제(劍帝) 남궁진강이란 말이냐?" "그렇소이다." 백골사마는 흰자위 뿐인 눈빛을

좌로 우로 돌리더니 내심 중얼거

렸다. '음, 과연 궁주(宮主)의 예측이 맞았군.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더 니....... 좋다, 어차피 싸우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니까.'


백골사마는 음침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이제 노부가 이곳에 온 이유를 밝히겠다." 그는 품속에 손을 넣더니 한 를 향해 던졌다.

장의 검은 색 첩지를 꺼내 종리자허

흑첩(黑帖)은 처음에는 천천히 날아가는가 싶었으나 갑자기 빨라 지며 전광석화같이 종리자허의 미간으로 파고 들었다.

그러나 종리자허 역시 절대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탁! 그는 어느새 두 손가락 사이로 흑첩을 받아냈으며 신중한 표정으 로 그것을 뜯어 읽어 보았다. 그의 얼굴에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그의 안색이 창백해지는가 싶더니 두 눈썹까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쳐들며 격앙된 음성으로 물었다. "금노선배! 이 뜻은?"

백골사마는 돌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모두 잘 들어라! 앞으로 일 년(一年), 일 년안에 정 사무림(正邪武林)의 여하 단체는 물론 모든 인물들이 마종지문(魔 宗之門)에 굴복해야 한다. 만일 거부하면 가공할 혈겁(血劫)이 일 어날 것이다." "뭣이?" 군웅들은 모두 안색이 대변하여 경악성을 발했다. ■ 대소림사 제 1 권 제 11 장 천하제일지녀(天下第一智女) -1 ━━━━━━━━━━━━━━━━━━━━━━━━━━━━━━━━━━━

하후성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종지문(魔宗之門)이라고? 마종지문......' 그의 뇌리에 즉시 소림사를 방문했던 신비의 흑의여인이 떠올랐 다.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그는 그 여인으로 인해 현오대사 (玄悟大師)가 죽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 여마(女魔)도 마종지문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후성은 가슴이 은은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마종지문이 모습을.......' 자전신도 팽수위가 냉소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금마륜!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백골사마 금마륜은 안색이 무섭게 변했다. "네 놈은 또 누구냐?"

"하북팽가(河北彭家)의 자전신도 팽수위다!" 백골사마는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이제 보니 이곳에 다 모였구나. 너희 팽가에도 이미 서찰이 당도했을 것이다. 팽가는 필히 굴복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팽수위는 대로했다. "미친 수작!" 쐐--- 액!

그는 허리에서 자전섬도(紫電閃刀)를 뽑자마자 그대로 백골사마를 덮쳤다. 츠츠츠츠... 츳! 가공할 도기(刀氣)가 자색

광망을 뿜으며 회오리쳤으나 백골사마


도 결코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건방진 놈! 백골강시공(白骨 屍功)의 위력을 보여 주겠다!" 그의 쌍장에서 음산한 검은 기운이 뻗었다. 파파팟... 펑!

파공성과 폭음이 울림과 동시에 팽수위는 낮은 신음을 발하며 뒤 로 사 보(四步) 후퇴했으며 그의 안색은 즉시 창백해졌다. 그러나 곧 이를 부드득 갈며 팽수위는 자전섬도를 치켜들었다. "노마! 자전십팔풍(紫電十八風)이 어떤 도법인지 똑똑히 보아라!" 자전섬도에서 자색의 기운이 뻗어 나오자 백골사마는 흠칫하여 내 심 중얼거렸다. '듣기로 자전십팔풍은 팽가의 었다고 하는데.......'

비전도법으로 오백 년간 적수가 없

그가 멈칫하는 순간이었다.

"노마! 받아라!" 무서운 도풍(刀風)을 일으키며 자전섬도가 춤추듯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자색 기운으로부터 엄청난 회오리가 발생하여 휘몰아쳤다. 윙--- 윙--- 윙! 회오리 기류에는 무서운 흡인력이 일고 있었다. 백골사마는 감히 경시하는 마음을 먹지 못하고 자신의 백골강시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우우우--- 웅!

그의 회의가 바람을 품은 듯 부풀어 오르며 전신에서 가공할 악취 와 함께 흑무가 서렸다. "죽어라, 애송이!"


우---- 웅! 그의 쌍장에서 흑색 기류가 뻗어나갔고 마침내 두 줄기 공력이 격 돌할 찰나였다. "잠깐!" 군웅들의 귀청을 두드리는 낭랑한 외침과 함께 전광석화같이 두 명 사이로 끼어드는 백영(白影)이 있었다.

"앗! 저... 저런!" 군웅들은 경악성을 내질렀다. 엄청난 위력의 자전십팔풍과 백골강 시공 사이에 뛰어든 자는 대체 누구인가? 누가 감히 그들 두 개세 고수의 틈바구니에 끼어들고 있단 말인가? 꽝... 꽈르르릉! 엄청난 폭음과 함께 군웅들의 기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무서운 반 탄지기의 압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윽! 으으......."

두 마디의 다급한 비명이 터졌고 군웅들은 눈을 크게 떴다. 자전신도 팽수위가 뒤로 다섯 걸음이나 후퇴하고 있는가 하면 백 골사마 또한 가슴을 움켜쥔 채 삼사 보 밀려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경악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 천하에 이토록 무서운 내공을 지닌 자가 있다니.......' 그들은 자신들을 격퇴시킨 의문의 그림자에 대해 똑같이 회의한 나머지 눈을 들어 곧장 중앙으로 향했다. "앗!"

놀랍게도 그곳에 우뚝 서 있는 인영은 불과 이십 세 정도의 젊고 준미한 청년으로 눈같이 흰 백의(白衣)에 검고 윤기나는 긴 머리 를 흰 띠로 묶어 허리춤까지 늘어뜨린 선풍(仙風)의 미청년이었 다.


"하후소협!" 팽수위가 놀라 부르짖었으나 백골사마의 놀라움은 그것에 비할 바 가 아니었다. 그는 아예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이 어린 놈이?' 하후성, 그는 팽수위를 향해 공손히 포권지례 했다.

"팽 노선배님, 잠시만 후배에게 양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음......." 팽수위는 입맛을 다셨으나 아무 말없이 옆으로 물러나 주었고 하 후성은 곧바로 백골사마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노선배께 한 가지 묻겠소이다." 백골사마는 대답 대신 흰자위 눈을 희번뜩였다. "네 놈은 누구냐?" "후배는 하후성이라 하오."

군웅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네가... 환영신룡이라는 놈이란 말이냐?" 백골사마가 놀란 듯 묻자 하후성은 다시금 쓴 웃음을 지었으나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골사마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멈칫거렸다. '과, 과연 강하다 했더니... 역시 환영신룡이었구나!' 하후성은 다시 물었다.

"노선배께 묻겠소이다. 아까 마종지문이라 하던데, 혹시 단혜령 (段慧令)이란 여인을 아시오?"


백골사마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급변했다. "네, 네가 어찌 그녀를......." 그러나 그는 곧 실수했다는 것을 느낀 듯 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 고 하후성은 그의 표정 만으로 무언가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단혜령은 마종지문의 일원이었구나.' 그는 안색을 굳히더니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담담하나 무거운 음 성으로 물었다.

"노선배, 마종지문의 정체를 말해줄 수 없겠소?" 백골사마는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그것이 궁금하느냐?" "그렇소." "흐흐!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일 년 만 지나면 저절로 알게될 것이다." 백골사마는 주위를 둘러보며 득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전 무림의 구파일방(九派一幇)은 물론 일성(一成), 사가(四 家), 일장이보(一莊二堡)를 비롯하여 사파(邪派)의 남맹북단(南盟 北檀), 이곡(二谷), 일교(一敎), 일회(一會), 그리고 그 밖에 전 무림의 단체와 개인에게 마존첩(魔尊帖)이 전달됐다. 으하하 핫......." "으음!" 군웅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으나 백골사마는 더욱 득의한 괴소를 흘리며 하후성에게 말했다. "환영신룡, 너의 소문은 익히 마존첩을 받게 될 것이다."

하후성은 낭랑하게 웃었다.

들었다. 그러나 너 역시 머지 않아


"하하하! 소생은 일정한 거처가 없는데 어찌 첩지를 전달하겠소?" "마종지문의 이목(耳目)은 천하를 손바닥 보듯 한다. 네 놈이 어 디에 있건 찾아갈 것이다." 하후성의 입가에 문득 신비한 미소가 어렸다. "그렇소? 그러나 소생 만은 좀 힘들 것이오." 백골사마는 갑자기 음산한 눈빛을 흘렸다. "애송이 놈! 그렇다면 아주 이곳에서 너를 제거하겠다!"

쉬...... 쉭! 쉭!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지도마살이 돌연 양손을 뻗었고 그의 손가 락 사이에서 십 여 자루의 지도(紙刀)가 눈 깜빡할 사이에 섬광처 럼 날아갔다. 그러나 하후성은 빙그레 웃을 운 광경이 벌어졌다.

뿐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으며 놀라

파파파팍! 여덟 개의 지도는 그의 몸에 적중되자마자 그대로 튕겨나가더니 가루로 화해 흩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자루의 지도는 어느새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마(馬)선배께 두 개는 돌려 드리겠소이다." 하후성의 담담한 음성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으악!" 지도마살 마운천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으며 그의 양어깨에서 피가 치솟았다. 두 자루의 지도가 어깨를 관통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까 황보형이 당한 빚이오." 하후성의 재치있는 말이었다.


"으으... 이, 이놈이!" 지도마살은 만면에 살기를 띄며 마가 그를 저지했다.

다시 몸을 날리려 했으나 백골사

"마노제, 참게. 이곳에서의 싸움은 의미가 없는 것이니 훗날을 기 약하는 것이 좋네. 자, 가세!" 휙! 휘익! 휙! 그들의 말과 행동은 일치했다. 어깨를 한 번

흔든 순간 그들은 삽시간에 장내를 벗어나 사라져

버렸고 바닥에는 지도마살이 흘린 피 만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군웅들은 모두 꿈을 꾼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도 큰 변화였으며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마 종지문(魔宗之門)이라는 단체와 마존첩(魔尊帖)에 대해 불안의 먹 구름을 느꼈다. 또한 군웅들은 하후성이란 신비한 청년의 놀라운 무공에 대해서도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검제 남궁진강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종리형님, 도대체 그 마존첩의 내용은 무엇이오?"

종리자허는 탄식하며 마존첩을 내밀었다. "보게." 남궁진강을 비롯한 고인들은 모두 마존첩으로 눈길을 집중시켰고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천풍보(天風堡)를 마종문(魔宗門)의 호북분타(湖北分陀)로 봉한 다. 백 일 안으로 수라궁(修羅宮)으로 와 마종지령(魔宗之令)에 복명하라. 이에 거역하면 천풍보는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수라혈신(修羅血神>

마존첩의 내용은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요, 있을 수 없는 망상으로 가득 찬 내용이었다. 중인들은 모두 안색이 대변했다. 성질이 급한 자전신도 팽수위는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이 따위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우리 하북 팽가에도 이런 서찰이 날아왔단 말인가?" 중인들의 안색은 모두 침통해졌다.

의사청(議事廳). 이곳은 천풍보에서 중요한 공사(公事)를 토의하거나 결정짓는 장 소로 지금 의사청에는 여러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당금무림의 사가(四家)와 일장(一莊), 이보(二堡)의 인물들로서 먼저 천풍보의 주인인 태을성수 종리자허를 비롯하여 검제 남궁진강, 천수겁천 당환성, 자전신도 팽수위가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산동(山東) 악가(岳家)의 가주 선마검 악진 원(岳震元), 태양장의 장주인 태양신군 황보숭양, 신창보의 보주 인 자면신창 소중산 등의 고수들도 나란히 앉아 있었다. 좌중은 한동안 조용했다. 이윽고 침묵을 깨듯이 먼저 태양신군 황보숭양이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어이가 없소이다. 마존첩인지 뭔지를 보자마자 그토록 많이 몰려왔던 무림인들이 급급히 자신의 문파와 집으로 돌아가 버리다 니......."

그 말에 팽수위도 못마땅하다는 듯이 코웃음쳤다.


"그들이 이토록 이기적일 줄은 정말 몰랐소!" 태을성수 종리자허는 탄식하며 말했다.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팽형은 하 북팽가가 걱정되지 않소?" 자전신도 팽수위는 탁자를 쾅 치며 거칠게 말했다. "내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소이까? 그러나 걱정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오? 앞으로의 일에 공동대응을 해야지 무작정 허겁지겁 자신 들 문파로 돌아간다면 무슨 대처를 할 수 있겠소?"

중인들은 모두 할 말을 잃은 듯 침중하게 침묵을 지켰고 검제 남 궁진강이 탄식하며 침묵을 깨뜨렸다. "근 백 년 동안 무림은 너무도 평온했었소. 그러나 그 반면 정파 무림은 오히려 단결심이 약해지고 각기 자파(自派)의 안위에만 신 경을 쓰는 좋지 않은 풍토가 생겨났소." 자면신창 소중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옳은 말이오. 그동안 무림인들은 구파일방, 특히 소림을 너무도 의지해 왔었소." 소중산은 침을 꿀꺽 삼킨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실상 정파무림의 지주인 소림은 백 년전 탕마멸사(蕩魔滅 邪)에 앞장 섰던 희대의 고수 마애천불(魔涯天佛)을 불러들인 이 후 줄곧 강호 일에 관계하지 않았소." 하후성은 흠칫했다. '마애천불이란 천뢰 사숙님을 말하는구나.' 소중산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

팔파일방의 세력도 이제는 예전

같지가 않소이


종리자허도 탄식했다. "아! 아무튼 이미 발등에 불은 떨어졌소이다. 마종문이 어떤 것인 지는 모르나 백골사마같은 노마들이 수하 노릇을 하는 것을 보면 실로 무서운 집단임에 틀림없소." 남궁진강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표했다. "으음, 형님의 말씀이 맞소이다. 소제의 추측대로라면 아마 백일 후에 있을 수라궁 마종지문의 개파대전 이후 강호무림에는 엄청난 변혁이 일어날 것같소이다." 중인들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치자 종리자허가 다시 탄식하 며 입을 열었다.

"으음, 실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소이다. 더구나 정파무림의 본 산이라 할 수 있는 소림사(少林寺)마저 백 년 이래 무림의 일에 관여치 않고 있으며 구파일방 중 가장 강한 무당(武當), 천산파 (天山派)도 이십 년 이래 두문불출이요, 해남파(海南派)는 이미 팔십 년 전에 문을 닫아 걸었고......." 종리자허는 침중하게 말을 이어갔다. "더구나 공동파마저 천하제일도(天下第一道)이신 적봉우사(赤鳳羽 士)께서 실종된 이후 무림과 인연을 끊었으니 결국 구파일방은 당 금에 이르러서는 이름만 있을 뿐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존재일 뿐 이오."

그의 말이 끝난 순간 하후성은 움찔했다. '적봉우사라고?' 종리자허는 다시 침중하게 말했다. "특히 가장 애석한 것은 정파무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중 원무성(中原武城)의 노성주(老城主)인 주청산(朱靑山) 노선배께서 이십 년 이래 두문불출 하시는 것이오." 하후성은 그 순간 웬일인지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주청산!'


하후성은 급히 물었다. "그 분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의 질문에 당환성이 대답했다. "으음, 주청산 노선배는 대단한 고수(高手)로써 정파무림의 명숙 으로 추대받고 있으며, 중원무성(中原武城)은 성역(聖域)으로 되 어 있소." "으음." "주청산 노대협은 여태까지 한 번도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언제나 육장(肉掌)만을 썼으나 그 분의 권(拳), 장(掌), 지(指)는 무림의 독보적 절기로 알려져 있소. 원래 그 분은 오십 년 전 무당파(武 當派)의 속가제자(俗家弟子)로써 현 무당장문인 을목자(乙木子)의 사숙뻘이 되오." 당환성이 말하는 동안 중인들은 모두 공경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 로 미루어 중원무성의 성주인 주청산이 얼마나 존경받는 인물인지 능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당환성은 재차 말을 이었다. "그 분은 무당파의 내가권장법(內家拳掌法)에 자신이 깨달은 독문 의 무학을 가미하여 장삼봉(張三峯) 진인으로부터 시작된 무당내 가권을 완성시킨 절세고수이오."

하후성은 가슴이 다.

더욱 진동하여 안색이

변하며 조심스럽게 물었

"혹시... 그 분에게 손녀가 있습니까?" 그 질문에 당환성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후소협이 그걸 어떻게? 그 분의 손녀는 거의 무림에 나온 적이 없는데......." 하후성의 심장은 더욱 심하게 뛰었다. "그, 그 분 손녀의 이... 름은?"


당환성은 의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글쎄... 너무 오랜 일이라서......." 그러자 옆에 있던 남궁진강이 말했다. "노부가 알기로 그 분 노대협의 손녀 이름은 주설란(朱雪蘭)이라 고 들었소이다." 하후성은 마침내 심장이 탁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드디어... 아버님이 마지막 나.......'

멎는 것같은 충격을 받으며 일시간에

남긴 중

자(中字)의 뜻을 알았구

중인들은 모두 그의 반응에 의아심을 금치 못했다. 하후성은 그들 을 의식하여 곧 표정을 회복시켰으나 내심 끓어오르는 격동을 누 를 길이 없었다. '아버님! 드디어 외증조부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 버님, 소자는 어찌해야만 하옵니까?' 하후성의 마음은 심한 격탕을 거듭했다. 혈연(血緣), 그것은 인간 본연의 끊을 수 없는 감정이 아닌가? 그러나 혈연을 느끼기에 하후성의 외증조부는 너무도 많은 한(限) 을 하후성의 가슴에 못박히게 한 존재로 비록 겉으로는 태연한 표 정을 짓고 있었지만 내심 무수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좌중의 화제가 다행하게도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있었고 자면신창 소중산이 침중하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소이까?" 종리자허가 담담하나 기개있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물이 넘치면 흙으로 막고, 적이 오면 군사(軍士)로 막으라 했소. 정파무림의 의기를 잃지 않으면 그 어떤 사(邪)의 세력도 능히 물 리칠 수가 있는 법이오. 우선 각자의 문파로 돌아가 대책을 상의


한 뒤 백 일후에 있을 마종문의 개파대전 이전에 다시 상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팽수위가 다시 탁자를 두들겼다. "좋소! 대체 수라궁 마종지문이 어떤 곳인지 그때 가서 똑똑히 보 겠소." 황보숭양도 두 눈에 홍광을 뿜어내며 말했다. "그때 우리 태양장도 뜨거운 맛을 보여 그들의 생각이 망상이었음 을 일깨워 주겠소!" 중인들은 팽수위나 황보숭양의 말에 모두 투지가 끓어오르고 있었 으나 반면에 웬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부지불식간 거대한 먹구름이 밀려들고 있었 고, 그것은 바로 장차 무림에 엄청난 혈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막 연한 불안감이었다.

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밤하늘에 무수히 떨어지는 은백의 눈송이는 소리없이 지계(地界)를 덮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 눈같이 희다면 더이상 무림의 혈풍(血風)은 일지 않으리라. 한 객방의 창가에서 하후성은

창문을 열어젖힌 채 소리없이 내리

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천풍보를 떠나려 했으나 보주인 태을성수 종리자허가 극력 붙드는 바람에 하룻밤 유하게 된 것이었다. 그가 든 객방은 고귀한 빈객을 모시는 곳으로 매우 단아하게 꾸며 져 있었고, 또한 천풍보의 깊은 후전(後殿)에 위치하고 있어 조용 하기 그지 없었다. 하후성은 멍하니 창 밖을 응시했다.


눈만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독고황(獨孤皇).......

하후성은 창 밖의 어둠 속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내심 부르짖었 다. '황(皇). 지금쯤 너도 이 눈을 보고 있겠지. 황, 너는 대체 이 하 늘 아래 어느 곳에 있느냐? 오늘따라 웬일인지 그대가 더욱 그립 구나.' 하후성은 창 밖으로 팔을 감촉을 느꼈다.

내밀어 손바닥에 떨어지는 차가운 눈의

'너는 나에게 말했지, 언젠가 이 중원제일의 고수(高手)가 되겠다 고! 그런데 어찌하여 무림에서 너의 소식을 조금도 들을 수가 없 단 말인가? 너와 헤어진 후 벌써 다섯 번째 오는 눈이건만 세월이 갈수록 나의 마음은 자꾸 외로워지기만 하는구나.' 하후성은 마음이 울적해짐을 금치 못했다. 부모형제의 정(情)을 누려보지 못한 그는 오직 독고황에게만 유일하게 뜨거운 정을 주 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니.......

헤어진 지 오 년이 지나도록 만날 수

없었으

하후성의 마음은 고독(孤獨)으로 쓸쓸하기만 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무엇을 생각했는지 품 속에 손을 집어 넣었고 그의 손에는 한 권의 비단 책자가 들려 나왔다.

<뇌음진경(雷音眞經)>

그것은 바로 오 년전 하란산에서 그의 부친 하후연(夏候淵)의 목 숨과 바꾸어 온 천축(天竺) 대뢰음사(大雷音寺)의 보전(寶典)이었 다.


하후성은 뇌음진경을 두 손에 들자 일단 먼저 마음의 격동을 억눌 러야 했다. '황. 오늘 드디어

외증조부님의 행방을 알아냈다. 어머님의 소식

도....... 미칠 듯이 보고 싶다, 그들을....... 그러면서도 달려 가지 못하는 내 마음을 아느냐? 황.......' 하후성은 뇌음진경을 움켜쥐었다. '이 한 권의 책자 때문에... 사랑을 위하여 눈보라 속에서 숨지신 아버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황.......' 뇌음진경을 쥔 손이 격하게 떨렸으나 그가 고통을 내색하지 않는 것은 불문의 반야밀다대승신공으로 다져진 초인적인 정력(定力) 때문이었다. 이윽고 하후성은 간신히 마음을 가라 앉히고 뇌음진경을 품 속에 도로 집어 넣었다.

'주청산(朱靑山), 나의 외증조부....... 코.......'

그러나

결코... 결

하후성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런데 문득 방 밖에서 한 줄기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후소협, 좀 들어가도 되겠소?" 그는 태을성수 종리자허였고 하후성은 흠칫하여 돌아서며 담담히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선배님."

문이 열리고 종리자허의 인자하고 현기어린 모습이 들어섰다. 그 는 만면에 부드러운 웃음을 짓더니 활짝 열린 창문을 보며 말했 다. "허허! 소협은 무척이나 낭만적인 성품을 지녔구려. 밤에 자지 않 고 눈을 감상하다니......." "무슨 말씀을....... 그런데 무슨 일로 이 밤중에?"


종리자허는 방 안의 탁자에 앉으며 신중히 말했다. "소협에게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하후성이 의문을 느끼며 맞은 편에 가 앉자 종리자허는 그를 진지 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협, 솔직히 대답해 주시겠소?" "무엇을......?" "소협은 소림(少林) 출신이 아니시오?" 하후성은 흠칫했다. "아까 영빈청에서 소협이 백골사마와 황보숭양대협을 갈라서게 한 무공은 노부가 알기로는 소림의 범자대비공(梵慈大悲攻)이었소." 하후성은 안색이 약간 변했다.

"또 한 가지, 현 천하무림에서 소협 정도의 무공을 익힐 수 있게 키울 기인(奇人)은 오직 소림의 삼성승(三聖僧)밖에 없기 때문이 오." 종리자허의 추측은 실로 칼날같았고 마침내 하후성은 탄식하고 말 았다. "노선배의 혜안은 도저히 속일 수가 없군요. 그렇습니다, 모두 선 배님의 예측대로 입니다." 종리자허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하게 펴지는가 싶더니 그는 덥썩 하후성의 손을 잡으며 탄성을 발했다.

"오, 오! 역시... 역시!" 그는 잠시 흥분한 듯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렇게 부르짖었다. "진정 기쁜 일이오! 실로 중원무림의 커다란 복이오!" 반면 하후성은 그저 담담히 미소지을 뿐이었다.


하후성과 종리자허, 그들 두 사람은 탁자에 마주 앉아 향차(香茶) 를 나누며 조용히 담소를 나누었다. 종리자허는 흰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실상 노부가 회갑을 기해 정파무림인들을 초청한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소." 종리자허는 차를 한 모금 마신 연후 말을 이었다. "그것은 무림동도들과 한 가지 일을 상의하려는 의도에서였소." 하후성은 지혜로운 눈을 이따금 깜박일 뿐 조용히 경청했다. "원래 노부는 약간의 성복지학(星卜之學)을 익히고 있었소. 그리 하여 거의 매일같이 천공(天空)을 살피는 게 버릇이 되어 있소이 다." 하후성은 그 말에 소림의 천심선사를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노부는 전설로 알려진 천혈성(天血星)이 차 츰 붉게 타오르는 것을 발견했소. 뿐만 아니라 사기(邪氣)를 띈 오대마성(五大魔星)이 천혈성을 둘러싼 채 점차 홍살(紅殺)의 기 운을 퍼뜨리는 것까지 확인하게 되었소." 하후성은 눈썹을 움직였다. '천혈성과 오대마성. 이 노선배도 그것을 발견하다니.......' 그것은 이미 천심선사와 천기선사로부터 수차에 걸쳐 익히 들은 바가 아닌가? "전설에 의하면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빛을 내면 세상에 가공할 피 바람이 분다고 했소. 강호무림에 유사 이래 엄청난 혈겁(血劫)이 일어난다는 것이오." 종리자허의 안색은 지극히 어두워졌다. "그래서 노부는 이번에 회갑을 명분으로 무림고수를 모아 이 일에 대해 상의를 하고자 했던 것이오. 틀림없이 거대한 마(魔)의 세력 이 암중에 자라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오."


종리자허는 탄식했다. "그러나 그 누가 알았겠소? 그 마(魔)의 세력이 예상보다 훨씬 빨 리 나타난 것이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노부의 성복지학은 그 경지가 얕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왔소. 그러나 소협을 보니......." 종리자허는 기광이 어린 눈으로 하후성을 부신 듯이 바라보았다. "소림 삼성승의 혜안(慧眼)에 대해 실로 감탄과 존경을 금할 길이 없소. 그 분들은 이미 모든 것을 예측하고 하후소협같은 무림의 신성(新星)을 키워냈으니 말이오." 하후성은 담담한 표정을 지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깊숙한 두 눈에 담긴 혜지는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종리자허도 역시 사십오 년 전 십오 세의 나이로 무림에 출도할 때에는 천하무림의 일대기재(一代奇才)로 지칭 받은 인물이었다. 태을성수 종리자허라는 그의 이름은 전 중원을 진동했고 모든 무 림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흐르고 그는 인생의 고개에 올라섰다. 젊은 기인(奇人) 하후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부러움과 감탄이 어려 있었다. 기재(奇才)는 기재(奇才)를 알아 보는가? 종리자허는 이미 하후성에게 남다른 애착을 느끼고 입가에 부드러 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협, 노부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잠깐만 노부를 따라서 한 사람을 만나보지 않겠소?"


하후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종리자허의 입가에는 갑자기 자랑 스런 기색이 서렸다. "허허! 다름이 아니고 노부의 딸 아이를 만났으면 하오." 하후성은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오. 그 이유는......." 종리자허는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딸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오. 그 아이는 천성적으 로 특이한 체질(體質)을 타고난 천고(天古)의 지녀(智女)라오." 그는 미간에 약간 어두운 기색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단지 흠이라면... 몸이 너무나도 허약하여 바람만 조금 불어도 쓰러질 정도로 약체일 뿐, 그러나 그 아이의 지혜는 실로 바다와 같이 깊소." 하후성은 웬지 강한 호기심을

느꼈고 종리자허는 그의 반응에 만

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부가 조금 전에 딸아이에게 소협의 얘기를 했소. 그랬더니 그 아이가 꼭 소협을 한 번 뵙고 싶다는구료. 어떻소, 소협?" 하후성은 마음이 강하게 이끌렸다. "좋습니다. 선배님." 종리자허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고맙소, 소협."

한 채의 별원(別院).


거대한 천풍보 내에서 가장 깊숙한 후원에 정교한 솜씨로 축조된 것으로 섬세하기 그지없는 여인(女人)의 기질이 풍기는 구조를 지 니고 있었다. 인공(人工) 연못이 후원의 한가운데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는가 하 면, 바로 그 연못 한가운데 별원이 지어져 있었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목교(木橋)가 다.

별원으로 이르는 유일한 통로였

밤. 눈이 내리는 조용한 밤길을 하후성과 종리자허는 걸었으며 그들은 곧 별원이 있는 연못가에 당도했다. 연못들은 투명하게 얼어 있었으나 그 위에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 어 몹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바로 이곳이 딸아이의 거처요."

종리자허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한 후 목교 위로 올라섰다. 하후성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고 잠시 후 목교를 완전히 건너자 종리자허는 별원의 문 앞에서 멈추었다. 끼익! 문을 열자 은은하게 꾸며진 대청이 나왔다. 종리자허는 대청으로 들어섰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청 안 쪽의 월동문 앞에 두 명의 청의시비가 서 있었다. "보주님을 뵈옵니다."

두 시비는 종리자허를 보자 꾀꼬리같은 음성으로 말하며 깊숙히 허리를 숙였다. "음. 향아(香兒)는 안에 있느냐?" 종리자허가 묻자

오른쪽의 얼굴이 갸름한 시녀가 공손히 대답했


다. "예, 보주님. 아가씨께서는 벌써부터 보주님을 기다리셨어요." "음." 종리자허는 월동문 앞에서 부드럽게 물었다.

"향아야, 들어가도 되겠느냐?" 안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버님이신가요?" 하후성은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웬지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안에서 들려온 여인의 음성은 매우 부드러운 한편 특이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써, 그 음성에는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사 람의 마음을 강하게 끄는 신비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하후성은 짧은 순간 자신도 고 그 음성은 다시 들렸다.

모르게 아름답고 은은한 음성에 취했

"아버님, 들어 오세요." 종리자허는 월동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여인의 규방(閨房)으로 은은한 여인 특유의 향기가 감돌고 실내의 장식은 지극히 섬세하면서도 고아했다. 사방 벽에는 고서화 몇 점과 수를 놓은 걸려 있었다.

부드럽고 단아한 장식이

하후성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방 한가운데에 놓인 침상이 었는데 연자색 휘장이 반쯤 걷혀 있고 거기에는 한 미녀가 비스듬 히 기대앉아 있었다.

막 보던 책(冊)을 덮는 그녀는 백의의 미소녀(美少女)로 한 번도 햇볕을 보지 못한 듯 안색이 창백했으며 몸이 극히 유약해 보였 다. 나이는 대략 십칠팔 세 정도로 보였으나 기이한 매력이 그녀 의 전신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백의소녀는 칠흑같은 머리칼을 폭포수처럼 등 뒤로 완전히 빗어 내렸는데 그 모습은 막 하계에 내려온 선녀(仙女)를 방불케 했다. 그렇다고 백의소녀의 용모가 절륜한 것은 아니었고 단지 그녀가 풍기는 인상이 지극히 고혹적이라는 것이었다. 종리자허는 침상으로 다가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향아야, 몸은 좀 어떠냐?"

소녀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좀 괜찮아요." "허허... 다행이구나." 종리자허는 고개를 돌리며 하후성을 가리켰다. "참, 향아야. 이 분이 바로 애비가 말한 하후소협이시다." "아!" 소녀는 가벼운 탄성을 발했고 하후성은

그녀에게 정중히 포권했

다. "소생 하후성, 처음 뵙겠소이다." 백의소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달콤하게 말했다. "소녀는 종리유향(鍾里有香)이라고 하옵니다. 몸이 불편하여 예를 못취함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녀, 종리유향이 그윽한 눈으로 응시하며 살풋이 미소짓자 하후 성은 전신이 찌르르 울림을 느꼈다. 종리유향의 미소는 단번에 사람을 흡수할 듯이 신비로운 마력(魔 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법(邪法)의 미공(迷功)과는 본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써 천성적(天性的)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는 매혹을 지닌 미소였다. 하후성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이끌리는 것을 느꼈으나


담담할 뿐 겉으로는 이를 내색하지 않았다. "별 말씀을....... 개의치 않아도 좋소이다." 종리유향은 그윽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소협의 풍모를 뵈오니 소녀의 눈이 크게 떠진 듯하여 감탄을 금 치 못하겠습니다." 하후성은 그녀의 말에 절로 가슴이 잔잔하게 흩어지는 것같았으며 종리자허가 그런 그에게 말했다. "소협, 노부는 잠시 후에 올테니 향아와 이야기를 나누시오." 이어 그는 하후성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밖으로 사라졌다. 종리유향은 부드러운 눈길로 아직도 침상 앞에 서 있는 하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협, 자리에 앉으세요." "고맙소이다." 하후성은 침상 곁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그는 난생 처음 여인의 규방에 들어왔기 때문에 자연히 마 음이 거북하고 행동도 굳어졌다. 종리유향은 그의 심정을 헤아린 며 물었다.

듯 자연스럽게 침상에 기대 누우

"실례이지만 소협의 태생은 어디인가요?" 하후성은 담담히 대답했다. "북방의 하란산(賀蘭山) 부근이오." 종리유향은 미소지었다.

"하란산은 비록 가보진 않았으나 그곳의 아름다움은 서책을 통해 수없이 보았어요. 정말 하란산이 그토록 아름다운가요?"


하후성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렇소이다. 하란산은 무척 아름다운 곳이오." "그래요. 언젠가는 저도 그곳에 가봤으면 좋겠군요." 종리유향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으나 잠시 후에는 다시 맑 게 웃었다. 하후성은 그녀가 표정을 변화시킴에

따라 비로소 그녀의 얼굴 윤

곽을 자세히 파악하게 되었으며 내심 흠칫 놀라고 말았다. '으음, 이제 보니 종리소저는 매우 특이한 상이구나. 그녀는 선천 적으로 심미안상(審美顔相)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은 자신은 의 식치 못하지만 천하의 모든 남자의 마음을 은연 중에 휘감게 된 다. 어떤 남자라도 소저가 웃는 모습을 보면 평생을 잊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까 내가 느낀 감정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심미안상(審美顔相). 이것은 천성적으로 타고 나는 희귀한 상이었다.

상(相) 중에서도 여인이 갖는 가장

이 심미안상은 상천역서(相天易書)라는 고서(古書)에 기록 되어 있는 것으로 이 상을 타고 난 여인은 마음 먹기에 따라서 천하를 어지럽히는 일대마녀(一代魔女)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심미안상의 여인은 단명(短命)하는 것이 상례였고 하후성은 지난 날 소림에서 천기선사로부터 관상지술을 배운 적이 있어 이 점을 발견한 것이었다. 종리유향은 그가 자신의 얼굴을 조를 띄우며 수줍은 듯 물었다.

계속 주시하자 창백한 얼굴에 홍

"하후소협, 어찌하여 저의 얼굴을 그렇게 뚫어지게 보시나요?" 하후성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실례를 했소이다."


종리유향은 다시 그를 그윽히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듣기로 소협은 소림 삼성승(少林三聖僧)의 전인이실지 모른 다고....... 그런데 그게 사실인가요?" "그렇소이다." "소림 삼성승의 존명은 수없이 들었어요. 게다가 아버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미 소협의 무공은 천하무적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하셨지 요."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종리 노선배의 지나친 과찬이시오. 소생은 이제 무림에 첫 발을 내민 말학 후배에 불과할 뿐이오." 그러나 종리유향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니예요. 소협의 전신에서는 일대종사의 풍모가 풍기고 있어요. 또한 소협은 이미 자신도 모르게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는 기풍을 드러내고 있어요." "으음." "그것으로 보아 이미 소협의 무공 경지는 더 오를 수 없는 극(極) 의 경지에 있는 것이 분명해요." 하후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종리유향은 그의 그러한 모습에 서 도리어 일종의 형언할 길 없는 매력이 풍긴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내심 몰래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하후소협, 소녀가 왜 소협을 뵙자고 한 지 아시나요?" 하후성이 묵묵히 고개를 젓자 을 사르르 굴리며 말했다.

종리유향은 지혜가 가득 담겨진 눈

"얼마 전에 아버님으로부터 마종문에서 보내온 마존첩(魔尊帖)을 보았어요."


"마존첩......." "저는 어려서부터 몸이 무척 허약했기 때문에 자라면서 낙(樂)이 라고는 책(冊)을 읽는 것밖에 없었어요. 그 덕분에 웬만큼 지식을 쌓게 되었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성복지술(星卜之術)에는 큰 흥미 를 느껴 몰두했지요." "음." 하후성은 신음을 발하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거의 매일 창문을 열고 천공을 살피던 중 저는 놀랍게도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준동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종리노선배께서도 같은 말씀이 계셨소이다." "그래요. 벌써 몇 년 전부터 천혈성과 오대마성을 관찰해온 저는 그것이 결코 평범한 마(魔)의 기운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 래서 장차 무림은 천혈성과 오대마성의 기운을 타고난 가공할 거 마(巨魔)로 인해 혈풍에 휩쓸릴 것이 틀림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어요." 종리유향은 약간 피곤한 듯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며 다시 입을 열었다. "천년무림(天年武林)을 통해서 수많은 마두들이 나타나 무림을 혈 겁에 빠뜨렸으나 그들은 모두 한 가지씩은 부족한 면(面)을 가지 고 있었어요. 즉 가장 무섭다던 육대천마(六大天魔)를 예로 들어 볼까요?" 하후성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천 년 전의 천중극마(天中極魔) 구양평(歐陽平)은 무림사상 최대 의 무공을 지녀 당시에 달마대사와 쌍벽을 이룬다 할 정도였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살심(殺心)은 있으되 웅심(雄心)이 없었어요. 또 한 무공은 있으되 지혜가 부족했죠. 그래서 결국 그는 말년에 제 자들의 배신으로 비참하게 죽고 말았어요." 그녀의 말은 잔잔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 이후 칠백 년 전에 혈세천존(血世天尊)은 비록 무공과 지혜


를 함께 지닌 대효웅(大梟雄)이었지만 남을 너무 믿지 않는 게 탈 이었죠. 그 불신(不信) 때문에 그의 혈세교(血世敎)는 금이 가고 결국은 멸망했지요." 하후성은 갈수록 감탄의 빛을 띄며 그녀의 얘기를 들었다. "오백 년 전의 천극수라대제(天極修羅大帝) 역시 무공은 있었으나 지혜가 모자랐죠. 또한 그는 너무도 오만했기 때문에 결국 자멸하 고 말았어요." "흐음." "이백 년 전의 천마교주(天魔敎主)나 불사지존(不死之尊), 백년 전 적미천존(赤眉天尊) 역시 무공은 불세출의 고수이나 모두 자만 심 때문에 사라진 인물들이죠, 그런데......." 종리유향은 어두운 안색을 지었다. "이번에 나타날 마두는 저의 상상으로도 추측하기 힘든 엄청난 능 력을 지니고 있어요. 그의 무공이나 지혜는 과거 육대천마를 합친 것보다 훨씬 뛰어나며, 더더구나 천혈성의 마기를 타고나 그 능력 이 하늘을 가를 정도예요." 하후성은 안색이 굳어졌다. "특히 그에게는 과거 육대천마와 맞먹는 오대마성(五大魔星)이 도 움을 주고 있으니... 실로 무서운 일이에요."

종리유향은 섬섬옥수로 이마를 짚었다.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누군지는 아무도 몰라요. 단지 천기(天機) 에 그들의 출현이 예시되었을 뿐이죠......." 하후성, 그는 아까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종리유향의 말을 듣 기만 했다. 그러나 그의 신비감 넘치는 깊은 두 눈에서는 이따금 씩 혜지가 번뜩이곤 했다. 종리유향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소협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후성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담담히 말했다.


"소저, 예로부터 수많은 개세마두들이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혀 왔 소. 그러나 이제껏 그 누구도 무림을 지배한 자는 없었소." 종리유향은 아름다운 눈을 빛내며 하후성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나타날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과 는 마찬가지가 될 것이오." 하후성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정도인의 기(氣)가 꺼지지 않고 살아있는 한, 평화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오."

그는 말을 마치자 신음처럼 덧붙였다. "단지... 그 과정에 있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릴지 의문이지만 말 이오......." 하후성이 몸을 돌려 창문 쪽을 향하자 종리유향은 문득 하후성의 등이 한 없이 넓고 커다랗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하후성의 등을 보는 것 자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산(山) 을 보는 것 같다고 느꼈다. 즉 그 어떤 일이 닥쳐도 여전히 원래 그 자리에 산(山)처럼 변화없이 서 있을 것만 같은 굳은 신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이 분은 대체.......'

종리유향은 완전히 자신이 압도당하는 느낌과 함께 마음 한 구석 에서 가슴을 울리며 다가드는 뜨겁고 오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모든 생각들이 짧은 찰나에 새롭게 바뀌고 있었다. '아!' 그녀는 등을 돌린 하후성의 뒷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끓는 듯한 격정이 있었다.

밀려들어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공히 천하제일지녀(天下第一智女)인 종리유향.

그러나 총명한 그녀의 두뇌조차도 지금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도저히 규명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이런 감정을 생전 처음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랑(愛),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 아닐지....... 종리유향의 창백하던 양 볼에 은은히 홍조가 떠올랐다. 가슴이 두 근거리기 시작하자 얼굴에 화기(和氣)가 밀려든 것으로 그러한 그 녀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왔다. 때마침 몸을 돌린 하후성은 종리유향의 그런 모습을 보는 순간 가 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마음이 또다시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빨려들었다.

그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운명적인 느낌으로써, 두 남녀의 뜨 겁에 타는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 짧은 순간 우주(宇宙)는 멎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갑자기 종리유향은 심한 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콜록......." "종리소저!" 하후성은 깜짝 놀라 그녀에게 다가갔으나 감히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종리유향은 잠시 후 간신히 기침을 멈추긴 했다. 그러나 그녀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창백해 있었으며 이마에는 땀방울마저 처연하 게 맺혀 있었다. 두 눈을 꼭 감은 종리유향은 애처롭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며 긴 속눈썹에서 보이는 가느다란 떨림이 더 할 수 없이 사람의 마음을 시큰하게 했다. 하후성의 돌처럼 굳었던 의지가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종리유향의 등을 부축했다. "소저, 몸이 무척 불편한 듯 싶소이다."


종리유향은 두 눈을 살며시

뜨며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이어 그

녀는 그윽한 눈빛으로 잠시 체를 기댔다.

하후성을 바라보더니 그의 가슴에 상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침상에 앉으며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러나 그녀를 안은 순간 그는 종리유향의 어깨가 너무나도 가냘 프다고 생각했다. "하후소협......." 그의 가슴에 안긴 종리유향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소저." 종리유향은 눈을 사르르 감으며 물었다.

"제 모습이 무척... 추하죠?" 하후성은 그녀의 몸을 약간 힘주어 안으며 부인했다. "아니오. 소저는 아름답소, 그 누구보다도......." 종리유향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하후소협, 당신은 만개(滿開)하고 싶은 꽃의 열망을 아시나요?" 하후성의 안색이 미미한 흔들림을 보였다.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 꽃은 십 일(十一)을 붉지 못하다 했죠. 그러나 저는 십 일이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좋으니, 단 한 번만이 라도 활짝 피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하후성은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고 종리유향은 그의 품에 기댄 채 넋두리하듯 말했다. "소협, 어려서부터 몸이 아주 약한 소녀가 있었죠......." "으음." "그녀는 너무나 연약하여 언제나

침상 신세만 지고 살면서 이 세


상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언제나 부러워했죠....... 그러나 하늘은 그녀에게만은 그런 행복을 주지않는 거예요......."

문득 하후성은 가슴이 축축해짐을 느끼고 흠칫했다. 종리유향이 그의 가슴에 얼굴은 묻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후성은 가슴에서 일어나는 격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굳게 껴안았다. "아!" 종리유향은 가는 신음을 발했으나 뿌리칠 생각이 없는 듯 오히려 그의 품에 더욱 파고 들었다. 마치 한 마리 외로운 새처럼....... 하후성의 물같이 고요하고 잔잔하던 마음에 뜨거운 파도가 일어났 다. "소저......." 그가 부르자 종리유향은 두 눈을 떴고 신비하도록 아름다운 그녀 의 눈 속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러나 그 눈 속에는 의 혹과 기대, 그리고 막연하기는 하나 미지(未知)의 희망과 애정의 빛깔이 섞여 있었다. "유향(有香)." 마침내 하후성의 마음이 그녀를 향해 활짝 열렸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떨어지며 종리유향의 젖은 입술을 덮었다.

"아!" 종리유향은 전신을 바르르 떨며 그의 목에 가는 두 팔을 감았다. 과거 백화미(白花美)의 선정적이며 적나라한 육체 공세에도 굴하 지 않았으며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익혀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던 하후성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인간의 순수한 본연의 정(情)에는 약했다.


"서... 성랑(星郞)......." 종리유향이 전신을 파르르 떨며 그의 넓은 가슴에 몸과 마음을 파 묻어 왔다. 어려서부터 정(情)에 굶주려온 하후성, 그는 이 순간 처음으로 이성(異性)을 받아들인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실(淨室). 하나의 오목(烏木) 탁자를 마주하고 하후성과 태을성수 종리자허 가 앉아 있었다. 종리자허가 앉은 자리는 창문이 보이는 곳이었 다. 밝은 아침. 종리자허는 계속 창문 쪽을 바라보며 담담히 웃었다.

"소협, 아마 어젯밤이 향아 그 아이의 일생 중 가장 행복한 날이 었을 것이오." 하후성도 시선을 창문에 둔 채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종 리자허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 하오." 아침 햇살 아래 종리자허의 안면에 있던 주름살이 더욱 깊게 보였 고, 그는 우울하게 말을 이었다. "하늘이 내린 천형(天刑)인지 향아는 천성적으로 절음폐혈증(絶陰 閉血症)을 앓고 있는데... 그 절증에 걸린 자는 이십 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게 되오......." 하후성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 그럴 수가......." 그는 더 할 수 없이 충격을 받았다. "그럼 그 절증을 치료할 방법이 전혀 없단 말입니까?"


종리자허는 고개를 흔들었다. "노부는 수십 년 간 의술(醫術)에 정열을 바쳐왔소. 천하에서 의 술 만은 누구보다 높다고 자부해 왔소, 그러나 유독 딸아이만 은......." 하후성은 문득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세상에는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이치가 있는 법이거늘 방법이 어 찌 전혀 없겠습니까?" 종리자허는 탄식하며 대답했다. "물론... 전혀 없지는 않소. 그러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왜......." "두 가지 영약(靈藥) 중 하나가 있으면 되기는 하오."

하후성이 눈을 빛내며 바라보자 종리자허는 거의 자조에 가까운 투로 입을 열었다. "그 하나는 소림의 대환단(大還丹)이오." 그 말에 하후성은 그만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대환단, 그것은 이미 자신이 마지막으로 복용함으로써 영원히 소 림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만년신학(萬年神鶴)의 年鶴精血)이오."

정혈(精血), 즉 만년학정혈(萬

"아!" 만년학정혈, 그것은 실로 전설상에나 있는 영물이었으며 또 설사 있다 해도 그것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려는 것과 다르지 않았 다. 하후성은 침음했고 종리자허는 탄식하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있소. 그것은 마교(魔敎)에서 전해오는 천마환혼영체대법(天魔還魂靈體大法)이오." "그, 그것은......." 하후성이 놀라자 종리자허는 괴로운 듯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대법을 시행하자면 필히 죄없는 동남동녀(童男童女)들 을 희생시켜야 하고 또 성공한다고 해도 향아는 그 후 무서운 천 하의 희대마녀(希代魔女)가 될 것이오." "그... 방법을 종리소저도... 알고 있습니까?" 종리자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그러나 그 아이는 마녀가 되면서까지 살고 싶다는 생 각은 없다고 했소." 하후성은 잠시 침묵했다. 정녕 이 순간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 인가? 그러나 그는 곧 진심이 담긴 어조로 종리자허를 향해 말했 다. "소생이 만일 인연이 겠습니다."

있어 만년학정혈을 얻는다면 반드시 가져오

종리자허는 쓰디 쓰게 고소를 지었다. 천하제일의 의술을 지닌 그 가 말없이 탄식하는 것이었다.

눈(雪)이 내렸다. 눈보라 속에 천풍보의 문(門)이 열렸다. 보문 안에서 한 명의 영 준한 백의청년이 걸어나왔으나 청년을 배웅하는 사람은 단 한 사 람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천하무림이 존경하는 태을성수 종리자허였다. 그토록 흥청거리고 떠들썩하던 천풍보(天風堡)나 지금은 너무도 조용했고 종리자허는 지금 홀로 백의청년, 즉 하후성을 떠나 보내 고 있는 것이었다.


하후성은 감회 깊은 듯 천풍보를 둘러본 뒤 종리자허에게 깊이 포 권했다. "그럼... 노선배님, 소생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잘 가시오, 하후소협."

종리자허는 아쉬운 듯 말했다. 여전히 눈이 쏟아지고 있었고 그 눈 속으로 하후성은 묻혀져 갔 다. 종리자허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빛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문득 잿

"이 놈의 겨울은 길기도 하군......."

< 대소림사 제 1 권 끝 >

b10-1  

그런데 자세히 보면 고목나무의 한 귀퉁이에 언 제 새겼는지 몰라도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이는 희미한 글씨가 보였다. 어느 눈 내리던 날, 그들은 운명처럼 만났다. 천지가 온통 은백색으로 물들던 날 운명의 신이 점지한 양 그들은 만났다. 이것이 바로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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