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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역사 저자:김학은

차례 머리말 0.돈 말과 돈 돈의 어제와 오늘 돈이란 무엇인가 돈의 모습 돈의 관리 돈과 자유 1.화폐의 선사시대 자연과의 투쟁 신의 제물 부의 축적 물물교환의 문제 물물교환의 불편함 교환수단의 발달 청동과 경제혁명 화폐와 마술 2.초기 화폐의 운명 번쩍인다고 모두 금이 아니다 대변혁 그리스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 최초의 국제통화 로마:세계 최강국 너무 많은 화폐 귀금속의 유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다 은행이 문을 닫다 3.금 물물교환으로의 후퇴 여러가지 경화 모형의 변화 악마의 재앙


금화 금의 대홍수 지나치게 많은 금 4.현금과 신용 은행의 성장 상인 보호 국제결제 신용과 화폐 은행의 설립 새로운 은행업무 정부의 신용 대출의 위험 왕위를 잡힌 왕 살아난 은행 5.지폐의 등장 긴급지폐 왕의 도적질 성공적인 연금술사 영국은행의 등장 지폐의 인쇄 초기 지폐 남발의 역사 어음본위제도 금본위제도 관리통화제도 6.예금화폐 최초의 상업은행 당좌계정 현금없는 사회 인출되지 않는 예금 개인의 대출 은행의 대출 예금을 낳는 대출 호황 불황 예금통화의 창조 중앙은행의 지폐공급 원리 금융기관의 수 지불준비율의 변화 현금 선호 신용창조


금융시장 점유율 비통화성 금융기관의 수 7.화폐량의 관리 적정화폐량 엄청난 화폐량 관리 중앙은행 중앙은행의 독립 화폐공급량의 팽창 화폐공급량의 감소 화폐공급량의 조절 인플레이션 최근의 경험 영국의 내핍 미국의 긴축과 세금 경기부양 대논쟁 화폐를 넘어서 새로운 화폐 8.영국의 화폐와 은행 가치절하된 화폐 잡동사니 은행이 중요하게 되다 정부 후원 은행 영국은행의 성장 이중경화제도 정부 은행 불환지폐 하의 영국 금본위제도 하의 영국 영국은행이 강력해지다 초기의 발권규제 은행권의 발행 영국은행의 변화 은행의 전문화 흔히 이용되는 은행 스털링 지역 9.미국의 화폐와 은행 초기화폐 독립전쟁의 전비 조달 국립화폐 후기


초기 은행 제 2 미국은행 자유은행법 국립은행제도 새 시대 전쟁 하의 연방은행제도 10.한국의 화폐와 은행 초기 화폐 일본 침략 일본 제일은행 한국은행 조선은행 미군정 화폐교환 인플레이션 1 차 화폐개혁 2 차 화폐개혁 금리인상조치 금융조치 금리규제와 금융 금융실명제 금리자유화 11.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국제통화 금의 역할이 도전받다 새로운 국제신용의 창조 국제통화 사이의 그레샴 법칙 브레튼 우즈 체제로의 출범 새로운 국제통화인 SDR 의 창출 킹스턴 체제로의 이행을 도운 스미소니안 체제 머리말 생각해 보면 인류가 이 땅에서 경제생활을 영위한 이래 돈에 얽힌 에피소드만큼 많은 에피소드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일반 독자를 위해 쓴 돈에 대한 책은 생각 밖으로 많지 않다. 돈은 일견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그 정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면을 지니고 있는 야누스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돈의 정체를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돈의 정체는 끝끝내 그 모습을 전부 드러내지 않을 지도 모른다. 보통사람들은 돈이 곧 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는 소수의 사람들도 돈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는 보통사람들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다는 이상한 역설도 성립한다. 옛부터 제왕과 경륜가들의 꿈은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었지만, 돈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보면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어쩌면 돈의 실체는 항상 존재하지만 신기루처럼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돈에 관한 얘기는 그러므로 역설의 얘기이다. 그같은 역설을 이 책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필자가 1984 년에 번역하여 세상에 내어 놓은 니체(R.Nitsche)의 "화폐의 역사"를 골격으로 다시 쓴 것이다. 번역서를 읽고 재미있다는 독자가 많았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번역서가 오래 되어 요즈음의 사정을 반영하는 데에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필자는 언젠가 이 번역서를 골격으로 삼아 더 재미있는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언제나 시간에 쫓기어 미루어 왔다. 작년 10 월 금융실명제와 금리자유화가 전격 실시되면서 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다고 판단한 학민사 김학민 사장이 필자를 독려하여 모처럼의 기회를 얻었고, 방학을 이용하여 끝낼 수 있었다. 이 책은 니체의 책을 골격으로 필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많이 보태어 재미있는 책으로 만들려고 애썼다. 화폐금융론은 딱딱하고 재미없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을 위한 좋은 안내서가 없는 실정임을 감안할 때 이 책이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따라서 이 책을 대학에서 화폐금융론의 부교재로 사용하여도 좋고, 금융기관의 신입사원들의 연수교재로도 적당하리라 생각한다. 또한 일반 독자들의 교양서로도 무난하리라 믿는다. 엄격히 말하면 이 책은 필자의 저서가 아니다. 위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의 골격은 니체의 책이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내용을 필자가 추가하였으므로 이러한 점에서 필자의 저술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이 책과 필자와의 정직한 관계가 무엇인지 필자도 정확히 판단할 수 없으므로 이 부분은 독자에게 맡기기로 한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필자가 시간에 쫓겨 더욱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없게 된 점이다. 다시 기회가 주어지면 이 책에 더욱 많은 내용을 더하리라 약속한다. 1994 년 3 월 김학은 0. 돈 말과 돈 구약 창세기에 바벨탑의 이야기가 나온다. 원래 모든 사람들의 말은 하나였는데,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아 하늘의 권위에 도전하는 교만함을 보이자 하늘은 사람들이 말을 여러 개로 나누어 그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나라 말로 둘러싸인 채 불편하게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 말은 이해하지만 다른 나라의 문자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다. 세계가 하나가 되어 가면서 국제어가 된 영어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이 커져 가며 그 어느 때보다도 여러 나라에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세계는 다시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 발견되지 않은 어느 책에 의하면, 원래 돈은 하나였는데 사람들이 그 편리함 때문에 빠르게 부를 축적하여 하늘의 권위에 도전하는 교만을 저지르자 하늘은 여러 개의 돈으로 나누고, 돈과 돈 사이의 소통을 어렵게 만들어 세계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돈과 돈 사이의 소통을 위해 애를 쓰고, 그 다음에는 하나의 돈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그 다음에는 하나의 돈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현재 유럽에서의 화폐통합의 움직임이 바로 이것이다. 돈은 언어와 같은 것이다. 내가 당신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나에게 뿐만 아니고 당신에게도 도움이 된다. 내 집의 푸른 잔디가 당신에게 좋은 기분을 가져다 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돈도 이와 같다. 내가 당신 돈을 받아 주기 때문에 거래가 단순화되어 당신에게도 도움이 된다. 하나님이 하나이듯이, 말이 하나이고 돈도 하나다.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듯이, 돈 앞에 다른 것은 빛을 잃는다. 이런 면에서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은 사실은 '황금 보기를 돈같이 하라'는 말이 아니면 '돌 보기를 황금 보듯이 하라'는 말로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질투가 심하시다고 했는데 돈도 질투가 심하다. 그래서 돈은 귀신도 부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저승을 다스리시고, 돈은 이승을 다스린다. 그런데 홍콩 사람들은 저승에도 돈이 필요하다고 죽은 사람의 관에 저승의 돈을 넣어 준다. 이름하여 명부화폐, 명통은행이 발행한다. 그러나 한편 말이 하나가 되어 가는 때에 돈이 하나가 되어간다는 것은 다시 하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구의 자원이 빨리 고갈되어 가고 있는 것을 심상치 않게 보는 사람들의 걱정이다. 우리는 현대판 바벨탑을 쌓아 가는지도 모른다. 그 수단으로서 우리는 각종의 금융제도를 발달시켜가고 있으며, 대형 금융사고는 국가경제를 무너뜨릴 만큼 위력이 있다. 복잡한 언어가 바벨탑을 무너뜨리듯이. 돈의 어제와 오늘 금융이 발달된 현대의 입장에서 보면 옛날 사람들의 돈의 개념은 단순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원리는 똑같다. 말이 발달되었다고 해도 그 이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말의 이치나 돈의 원리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였으므로 새삼스럽게 하늘의 노여움을 다시 사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원시적인 돈의 원리를 살펴 보면 이 생각은 확실히 옳다. 마이크로네시아에 잇는 캐롤라인 군도에는 돌화폐의 섬이라는 것이 있다. 이 섬에는 금속이 없기 때문에 돌을 깎아서 돈으로 사용하였다. 과연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이 맞는 나라이다. 그런데 이 돌돈은 무겁기 때문에 유통되지 않는다는데 그 이상한 특징이 있다. 거래가 일어나서 물건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건너가도 그 돌돈은 원래 있는 자리에 그대로 있고, 새 주인은


자신이 것이라고 아무 표시도 해 놓지 않는다. 단지 사람들이 그 돌돈의 소유가 새 주인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만이다. 여러분은 이같은 돈의 개념에 익숙치 않으므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원리가 현대에도 통용되고 있다고 들으면 더욱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의 지하실에는 여러 나라의 소유 금이 보관되어 있는데, 국제수지의 차이에 따라 프랑스가 미국에 대금을 지불할 필요가 있을 때 프랑스 의 소유 금이 프랑스 서랍에서 미국 서랍으로 이동할 뿐 그 지하실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단지 모든 나라가 인정하기만 하면 족하다. 개인간의 거래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내가 당신에게서 물건은 받고 대금을 지불할 때 대금이 은행의 나의 계정에서 당신의 계정으로 옮겨지면 그만이다. 돈은 그대로 은행에 있을 뿐이다. 원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원리가 똑같기로는 옛날 메소포타미아의 은행의 원리와 현대의 은행원리가 동일하다. 또한 중세에 발견된 신용창조의 원리는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돈의 원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돈이란 무엇인가 원리 뿐만 아니고 돈의 개념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현대의 우리는 무엇을 돈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현금통화만을 돈으로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어음이나 수표로서 지불이 되는 당좌예금도 돈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현금통화에 당좌예금을 합친 것을 돈이라 생각하고, 이 돈을 통화 라고 부르며 M1 으로 표기한다. 일반적으로 돈은 다음의 세가지 기능을 가지면 돈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거래하는데 매개가 되는 지불수단의 기능을 가지면 된다. 가령 점심을 먹고 만원 짜리로 그 대금을 지불할 수 있다. 둘째, 돈이라고 불리우는 그 속에 항상 가치가 저장되어 있는 가치저장수단의 기능을 갖고 있으면 된다. 만원 짜리는 항상 만원의 가치가 그 속에 들어 있다. 셋째, 가치척도의 기능을 갖고 있다. 우리는 돈의 가격을 1 로 정하고, 나머지 다른 모든 물건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평가한다. 이같은 기준으로 볼 때 현금통화만이 돈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는 현금통화와 당좌예금을 합친 것을 돈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얼핏 보아 현금은 세 가지 기능을 모두 수행하니 돈임에는 틀림없고, 당좌예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으나 사실은 무엇이 돈인가 하는 질문은 간단하면 서 어려운 질문이다. 가령 현금이라도 5 억원 짜리 집을 사는데 있어서 1,000 원 짜리 현찰 50 만 장으로 지불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가능하다 하여도 그러면 이번에는 10 원 짜리 동전 5 천만개로 지불할 수 있겠는가. 누구든지 1,000 원권 지폐나 10 원권 주화는 돈이라고 믿고 있으나 상대방이 받지 않으면 지불수단으로서 기능이 정지되고, 돈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므로 돈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이상한 논리가 된다. 이 이상한 논리가 현실로서 나타난 적이 있다. 미국에서 연전에 어느 사람의 집에 전기회사로부터 전기요금이 생각보다 과다하게 청구되었다. 가령 30 불이라고 생각했는데 300 불이 나왔다고 하자. 이 사람은 여러 번 항의했는데도


뜻이 관철되지 않고 우여곡적 끝에 300 불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지불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사람은 화가 나서 전기회사를 골탕먹일 심사로 이 300 불을 1 센트 짜리 주화 30,000 개로 지불하려고 하자 전기회사는 이같은 소액 주화로 지불받는 것을 거절하였다. 결국 소송까지 번졌으나 이 사람이 패소하였다. 그 이유는 너무 낮은 소액 주화로 고액을 지불하지 못한다는 이상한 법규 때문이었다. 하여튼 법에 의해 법정주화가 된 1 센트 짜리가 또다른 법에 의해 지불수단의 기능이 정지 당해 돈이 되지 못한 예이다. 이번엔 반대로 고액권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미국의 최고의 고액권은 10,000 불 짜리이다. 5 불어치 점심을 먹고 만불 짜리로 지불하려고 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거스름 돈이 없다거나 하여 거절당할 수 있다. 지불수단으로서 기능이 정지되는 순간이다. 분명히 중앙은행이 발행한 법정지폐임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돈이 아니다. 이 만불 짜리로 점심을 먹으려면 가까운 시중은행에 가서 적당한 소액으로 바꾸면 된다. 마찬가지 논리가 저축성 예금통장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누구나 저축성 예금통장은 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속에 가치가 들어 있지만 점심 먹고 대금을 지불할 수 있는 지불수단이 못되므로 이것은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만불 짜리 저축성 예금통장이나 만불 짜리 법정지폐나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저축성 예금통장으로 점심을 먹으려면 가까운 시중은행에 가서 적당한 소액권으로 바꾸면 된다는 점에서 만불 짜리와 같다. 만불 짜리가 돈이라면 만불 짜리 저축성 예금통장도 돈이다. 저축성 예금은 당좌예금과 마찬가지로 예금통화이다. 이같은 논리하에서 현금통화와 당좌예금뿐만 아니고 저축성 예금까지 포함한 돈의 개념이 있다. 이 돈을 총통화라 부르고, 통화 M1 과 구별하여 M2 라 표기한다. 많은 나라들이 M2 를 돈으로 정하고 있다. 이같은 돈들은 모두 옛날의 돈과 그 기능에 있어서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돈이 돌고 돌아서 돈인 것처럼, 돈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원리나 개념이 돌고 돌아서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돈의 모습 돈은 귀신도 부린다고 하고, 죽은 사람도 살린다고 한다. 번쩍이는 금은 창녀를 귀부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노파를 젊은 여자로 바뀌게 할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은 세익스피어이다. 돈주고 살 수 없는 것도 있다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돈만큼 많은 것을 살 수 있는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돈의 사용의 여러가지 모습을 보여 주는 나라로서 미국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은 자유와 독립이 일찍부터 존중되어 온 국가이다. 이 나라의 화폐 역사는 이 두 가지 개념 하에 철저한 자유시장경쟁으로 이루어져 왔다. 화폐가 지배하는 사회의 대명사가 된 이 나라는 화폐의 역사 자체도 흥미롭지만, 화폐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위 또한 흥미롭다. 19 세기에 등장한 부자들의 행위는 그야말로 화폐의 과시 사용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름하여 '현시 소비'이다. 19 세기는 황금의 시대라고 불리울 정도로 당시의 과시소비는 악명 높았고, 유례를 찾을 길 없다. 승마에 초대된 손님이 마상에 앉은 채 250 불(요즘가치로


10,000 불) 짜리 점심을 대접받을 때 식사 메뉴판이 순은판인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파티에 초대된 모든 손님들이 주인으로부터 백불짜리 현찰로 말은 담배를 받아 피운 것은 과시소비의 시작에 불과하다. 모나코나 리비에라의 도박장은 순전히 이들의 돈을 과시하는 좋은 무대를 제공하였는데, 도박 테이블은 돈을 따는 현장이 아니라 돈을 잃을 만큼 부자의 몸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장소였다. 잃고 와야만 부자의 대열에 속한다. 어느 부자는 멀쩡한 이를 모두 뚫어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었고, 어떤 부자는 개에게 15,000 불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시카고의 호텔왕 팔머는 부인에게 너무 많은 보석을 걸치게 해서 그 부인은 보석 무게 때문에 비틀거릴 지경이었다. 팔머는 "마누라가 백만불을 지고 다닌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하였다. 조지 굴드 부인은 다섯 줄의 진주 목걸이를 갖고 있었는데, 하나가 백만불이 넘었다. 이 부인은 외출할 때 한꺼번에 세개를 착용한다. 헌팅톤 부인은 쇼핑에서 350 만불 어치의 목걸이가 든 손가방을 잃어 버렸다. 그녀는 그 날 8 백만불 어치의 가구를 사려던 참이었다. 짐 브래디는 2 백만불 이상의 보석을 지녔는데, 2 천 637 개의 다이아몬드와 21 개의 루비로 된 저녁 파티용 보석도 있었다. 한 때 그는 금으로 도금된 자전거 를 친구에게 주었는데, 그중 럿셀에게 준 자전거의 손잡이는 진주로, 바퀴살은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가 한번은 파티를 열었는데 초대된 남자 손님은 모두 다이아몬드 시계를, 여자는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선물로 받았다. 브래디는 한 번에 12 벌의 옷을 주문하는데, 이것은 베리 월에게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월은 500 벌의 정장을 갖고 있었으며, 하루에 최소 여섯 번은 갈아 입는다. 어느 날인가 사라토가 스프링에서 하루에 40 번 옷을 갈아 입어 '멋쟁이 왕'의 칭호를 얻었다. 왕년에 뉴 포트에서 부자 가족은 20 대 내지 30 대의 마차를 갖고 있었다. 윌리암 위트니의 2 백만불짜리 마굿간에는 68 필의 말이 있었다. 자동차가 보편화되면서 풍속도는 달라진다. 윌리암 반더빌트는 100 대의 차고를 짓고 20 명의 운전사와 정비사를 두었다. 해밀튼 톰불리 부인은 그녀의 롤스로이스에 금과 에메랄드 장식으로 10,000 불을 지불하였다. 텍사스 석유왕 웨스트는 40 대의 캐디락을 소유하였고, 출판왕 란돌프 허스트는 35 대의 자동차를 소유하였다. 증권왕 해티 그린은 자녀들에게 유산을 빨리 쓰도록 성화를 부렸다. 그 중 아들 네드 그린은 재빨리 세계에서 제일 큰 요트를 주문하였는데, 배의 길이가 90 미터이고 욕실이 딸린 방이 9 개가 있으며, 선실에는 벽난로가 있으며, 승무원은 선장까지 포함하여 71 명이나 되었다. 1930 년에서 1936 년까지 네드는 천만불 이상의 돈을 보석 구입에 썼다. 그의 차에는 유리 지붕과 변소까지 딸렸다. 그는 연 평균 3 백만 불씩 썼다. 해티의 딸 실비아는 이자도 없는 요구불 예금에 3 천만 불 이상을 예치하고 있었는데, 체이스 은행은 그녀가 언제 하루 아침에 나타나서 그 돈을 모두 현금으로 인출할까 봐 전전긍긍하였다. 스테토스 부인은 회비 500,000 불의 아프리카 사파리 클럽을 조직하였는데, 그 목적은 그녀의 모든 가구를 악어 가죽으로 장식하기 위함이었다. 이보다는 인도적이겠으나 코리칸 매킨리 철강회사 설립자의 딸 로라는 클리브랜드 동물원에 기증한다는 목적만으로 아프리카 동물들을 잡는 원정대를 조직하였다.


사진사, 신문기자, 두 하녀, 두 비서, 주치의, 간호원, 두 요리사, 세 웨이타, 미용사, 손톱청소인, 의상인을 대동하는 그녀의 원정대를 수송하기 위해 비행기 세 대가 동원되었다. 로드 아일랜드주의 반에 해당하는 크기의 땅에 들어 앉은 허스트의 대저택에는 비행장, 동물원, 식물원, 말목장이 딸려 있었고, 만 마리의 소가 있었다. 허스트가 그의 정부를 위해 지은 집에는 110 개의 방, 55 개의 욕실, 32 명의 하인이 있었다. 그는 예술품에만 매년 백만불을 썼는데, 개인 용돈으로 매년 1 천 5 백만 불을 썼다. 이밖에도 현시 소비의 전형은 얼마든지 있다. 제이 굴드로부터 도날드 트럼프까지, 뉴 포트에서 팜 스프링스까지, 자가용 기차에서 자가용 비행기까지, 롤스로이스에서 포쉐까지, 악덕 자본가에서 산업가까지, 산업가에서 다국적 기업의 회장에 이르기까지 전형은 바뀌었지만 동일한 내용이 되풀이된다. 비판가가 욕하든지 말든지 현시소비는 돈이 있는 곳에서는 결코 그치지 않는다. 미국에 있어서 돈의 역사는 현시의 역사이다. 동일한 내용이 되풀이된다는 사실은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이다. 형태만 달리할 뿐이지 부유층이 돈을 가지고 뽐내는 것과 야만사회에서 전사가 약탈품을 가지고 뽐내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인간에게는 언제 어디에서나 형식만 달리했을 뿐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그에 따른 찬사와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는데, 이 점에서 반더빌트나 휘트니는 파푸아족 추장이나 안나마스족 우장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반더빌트가나 휘트니가의 매우 복잡한 의식이나 그 부인들이 온몸을 고통스럽게 졸라 매는 콜셋은 야만인들이 성잔치에 엄청난 낭비를 하거나 몸치장을 위해 자상행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부유층의 젊은이가 지팡이를 손에 들고 다니는 것과 야만족의 추장이 손에 지팡이를 든 것은 모두 그들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과시하는 점에서 같다고 말한 사람은 베블렌이다. 그러나 돈의 에피소드는 이것이 모두가 아니다. 이같은 에피소드는 차라리 파한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돈의 속성은 생산적인 것이 아니고 파괴적인 것이다. 야만인에게서 볼 수 있는 포트라취(potlach) 의식과도 같다. 외국원수가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 21 발의 예포를 쏘는 행위나 야만인의 나라에서 초대된 이웃 추장을 즐겁게 하느라고 야만사회에서 값이 비싼 도자기를 쌓아 놓고 깨뜨리는 파괴행위는 똑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포트라취 행위는 현대국가에서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정도는 줄어 가고 있으며, 경제가 발전한 정도에 따라서 그 정도는 더 줄어 가는 것을 본다. 돈의 관리 이같은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서 현대국가는 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지혜를 모은다. 생산적인 곳에 돈을 적절히 배분하는 방법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관리통화제도 하에서 이와 같은 지식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옛날에는 이같은 방면에 지식이 전혀 없어서 국가가 망하기도 하였다. 저 위대한 로마제국도 화폐를 관리할 줄 아는 현자가 없어서 망한 것이다. 구약시대에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없어서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 것과 무엇이


다르랴. 현대국가는 의인 열 명이 필요하고, 또 화폐를 관리할 줄 아는 현인 열 명이 필요하다. 화폐의 역사를 볼 때 화폐는 가치척도와 교환수단으로서는 그 역할을 비교적 잘 수행해 왔다. 그러나 가치저장수단으로서는 때에 따라 그 역할이 실패하였다. 물가가 불안정할 때 화폐의 구매력은 동요한다. 근년에 가격은 오르기만 하고 화폐의 구매력은 사간과 함께 떨어진다. 돈의 가치는 늘어 나지 않고 줄어 들기만 한다. 가치의 저장수단으로서 화폐의 자격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정도는 다르지만 세계 도처에서 성행하고 있다. 사람들은 물가 상승에 익숙해 졌기 때문에 화폐를 더 이상 가치의 저장수단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주식, 보험, 증권 등에 투자한다. 이 행위는 교환수단으로서 화폐의 역할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 화폐가 가치저장수단으로서 실패하면 적게는 한 소비자의 저축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크게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역사는 그같은 운명을 가르친다. 멀리는 로마, 가까이는 1 차 대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과 2 차 대전 후 중국 국민당이 패망한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화폐가 가치저장수단으로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붕괴된 것도 화폐가치가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다. 화폐가 가치저장수단으로서 그 기능이 정지되면 교환수단으로서도 그 소임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을 역사에서 본다. 로마가 망한 후의 중세 유럽과 바이마르 공화국 후의 독일이 다시 물물교환경제부터 시작하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화폐의 역사는 화폐량이 너무 적으면 경제가 침체하고, 너무 많으면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극단적으로는 위기까지 초래한다는 것을 수없이 되풀이 강조하고 있다. 이같은 경험을 통하여 사람들은 16 세기부터 화폐와 물가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관계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거의 모두가 20 세기에 알려진 것이다. 긴 화폐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을 자주 괴롭혔던 문제와 이 문제에 대한 지적 도전은 하나의 체계 있는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화폐금융이론이다. 화폐금융론의 초기 내용은 화폐와 물가 사이의 관계였다. 이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서 화폐와 이자율, 화폐와 소득의 관계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화폐금융이론은 본질적으로 화폐와 물가의 관계를 주제로 하는 가격론에 속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이들 관계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견해 차이는 근본적으로 경제현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어떤 경제학자는 경제의 기본 속성은 불안정한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우리는 화폐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19 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인의 화폐관은 확실한 것이었다. 화폐제도가 안정적이면 경제도 안정적이다. 자유방임주의 철학은 그 바탕을 화폐제도의 안정성에 두고 있다. 이 화폐제도는 신뢰에 기초를 둔다. 돈과 자유 그런데 경제의 기본속성이 불안정하다고 보는 사람들은 신뢰를 당연한 것으로


보지 않으며, 신뢰가 얼마나 연약한 식물인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연약한 식물이 계속 생명을 유지하도록 인위적인 간섭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신뢰의 연약성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화폐는 노동의 전문화에서 생겼고, 거꾸로 노동의 전문화를 심화시켰다. 화폐가 없는 상태에서 노동의 전문화는 한 개인의 경제생활을 다른 개인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고대에 각 개인이 특별한 기술에 숙달되면서 자신이 필요한 물건보다는 자신의 전문화된 물건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시간을 하나의 기술에 바치면서 개인은 독립성을 잃었다. 도공이 도기를 자신이 필요한 수량 이상으로 만들면 그는 자신과 가족들에게 필요한 다른 물건을 만들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필요한 다른 물건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여야 한다. 이 의존은 많은 경우에 평등하지 못하여 자유를 잃게 되었다. 가발을 만드는 사람은 쌀을 생산하는 사람과 대등하지 못할 것이다. 흉년에 그가 굶어죽지 않으려면 평소에 농민에게 허리를 굽혀야 한다. 농민이 물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평등함을 주장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화폐의 유통이 없었던 장원경제에서도 영주와 기사는 방어의 일을 맡았고, 무기소지를 금지 당한 평민은 일상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더 이상 독립적이 아니고 그만큼 자유를 잃었다. 화폐의 사용은 노동의 전문화를 심화시키면서 개인의 자유를 회복시켜 주었다. 개인은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전보다 더 의존하여야 하지만 그 의존은 화폐로 인하여 평등한 것이 되어 자유를 잃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많은 경우에 화폐는 개인의 자유를 신장시킨다. 섬머세트 모옴은, 노벨상은 타지 못하였으나 돈은 많이 벌어 자유롭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돈이 자유를 신장시킬 수 있는 것은 화폐가 모든 상품과 대등한 보편상품(universal commodity)이기 때문이다. 화폐의 올바른 관리가 중요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화폐가 개인의 자유를 신장하는 최대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제도는 장점과 단점을 아울러 갖고 있다. 화폐제도라고 예외는 아니다. 화폐제도는 개인의 자유를 회복시키고 보장하지만 때에 따라 위협도 하였다. 지금은 화폐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현대국가는 화폐량을 조절하고 규제하고 다스리는 정돈된 제도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각종의 화폐 객체인 화폐, 주식, 채권 등에 대하여 익숙하다. 그러나 화폐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화폐 객체와 새로운 경제제도는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최초의 금화와 은화의 출현, 최초의 지폐의 등장, 최초의 환어음의 소개는 그것이 정착할 때까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서 의혹의 눈총을 받았다. 새로운 화폐제도의 출현은 새로운 파탄과 퇴보의 씨를 잉태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나아가 화폐제도의 성쇠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의혹, 염려, 불안은 불신이다. 이 불신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화폐질서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에서 나온다. 역사의 여러 시점에서 수많은 사회는 화폐경제가 지닌 단점을 인식하는데 실패하였다. 기원전 5 세기, 아테네의 항구 피라우스가 지중해 세계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주로 화폐제도의 혜택을 입었기 때문이다. 아테네인들은 그들의 긴 역사를 통하여 화폐단위와 무게를 변경시키지 않았다. 이같은 화폐제도는 역사상 보편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예외에 속한다. 현대인들은 삼백년 전 그들의 조상들과는 달리 지폐나 환어음의 사용에 대하여 의혹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인들도 화폐적 현상에 대하여는 역시 불안해 한다. 그 현상으로 해를 입을까, 손실을 볼까 염려스럽다. 나아가 그 현상으로 자신의 경제적 자유가 제한될까 걱정스럽다. 화폐는 신뢰의 상징이다. 신뢰는 더 이상의 정확한 정보가 결핍되었을 때 뛰어 넘어야 할 차원이다. 신뢰냐, 불신이냐는 개인, 단체, 정부의 특성에 대한 개인 의 평가에 따른다. 이 평가는 그가 얼마나 자유스러우냐에 달려 있다. 신뢰의 연약함은 개인의 자유의 연약함에서 비롯한다. 20 세기 초 유럽이 화폐가 와해되었던 경험은 케인즈(J.M.Keynes)와 동시대의 빅토리아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케인즈는 화폐정책의 제일 목표가 화폐적 불신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케인즈에 의하면, 화폐가치의 변화는 사회의 모든 단체와 계층에 불평등한 영향을 남긴다. 케인즈는 화폐가치의 하락이 가져오는 정신적 긴장과 증오를 우려하였다. 화폐가치의 하락의 결과 기업가가 혜택을 받는다면 그것은 치욕이다. 이것은 소비자에게는 결과로 보이지 않고 원인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기업가에 대한 신뢰는 손상된다. 또한 한 계층의 혜택은 다른 계층의 희생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의 정신적 긴장을 촉발시킬 수 있다. 케인즈는 이와 같은 일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그는 정부의 간섭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누구인가. 그리고 간섭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부는 화폐현상의 처방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는가. 사이먼스(H.C.Simons)를 비롯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이같은 물음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그들은 정부의 화폐정책에 그 능력 이상으로 역할이 부여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실 사이먼스가 케인즈의 위대한 저서 "일반이론"을 읽고 맹렬히 비판한 내용을 보면 화폐질서에 대한 정부 간섭이 개인의 자유를 얼마나 위협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자유화폐질서를 옹호한다. 자유화폐질서는 정부나 정치적 이해단체에 의한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간섭이 배제된 법질서이다. 이들의 정부관에 의하면, 정부는 "좋은 의도로 시작하여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서(the road to the hell is paved with a good will)" 개인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고, 나쁜 의도라면 말할 것도 없이 개인의 자유를 구속한다. 화폐로 인하여 신장된 자유가 정부의 간섭으로 억압될 때 이같은 화폐제도는 신뢰 이전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아무도 법에 호소하는 사람은 없다. 여러분은 길에서 자동차 접촉사고를 경험했을 것이다. 경미한 사고를 놓고 소액의 금전적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길에서 다투고 법에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투는 그 순간에도 정부의 화폐량 증가 조치로 여러분의 은행예금의 실질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금 규모가 클수록 떨어지는 금액도 크다. 접촉사고의 손해배상액과 비교도 안되는 금액이다. 그러나 아무도 정부를 상대로 법에 호소한 사람은 없다. 이 어찌 아이러니가 아닌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화폐경제의 기본속성이 안정적이라고 믿는다. 경제란 인위적인 간섭이 없을 때 가장 안정적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담 스미스 이래 자유방임주의의 기본 철학이다. 지난 2 세기 동안 경제학자들을 감탄하게 하였던


단일주제는 상품거래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개별적인 결정들이 전체적으로 놀랍게 통일된다는 것이었다. 이 감탄은 경제란 스스로 안정을 추구하는 힘이 있다는 믿음으로 바뀌었고, 이에 근거하여 인위적인 간섭을 배제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에 의하면 과거의 화폐제도의 부침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불안정해서라기보다는 정부의 관리 실패 때문이라고 보고한다. 신뢰는 연약한 식물이지만, 그 자신 안정적인 생명력을 갖고 있다. 이 식물에 대한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보호는 오히려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 연약한 자유는 정부의 권력남용 하에서 가장 위협받는다. 자유가 유약하기 때문에 정부의 권력을 분산하듯이, 신뢰가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정부의 간섭을 배제한다. 모든 경험, 이론,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견해 차이는 아직 좁혀지지 않고 있고, 화폐현상에 대한 처방도 통일되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상태에서 어떤 사람은 좌절을 느낄지 모르지만 이것이야말로 경제현실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아직도 우리는 열 명의 현자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질문을 안고, 우리는 돈의 에피소드에 대하여 여기서 막을 올린다.

1. 화폐의 선사시대 돈의 중요성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돈없이 문명이 발달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그래서 당신은 오래 전 선사시대에 어떤 천재가 돈을 발명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틀렸다. 어떤 한 사람이 국가라는 조직체를 발명하지 않은 것처럼, 화폐가 아주 유용한 경제적 도구가 되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수천년 전 우리의 조상들은 사람이 사는 사회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미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였다면 그것은 고작 다음 날에 대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류 최초의 돈의 목적과 형태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할 때, 현재 우리의 사고방식을 적용해서는 안된다. 대신 우리는 원시인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고대에 사람들의 활동은 사냥과 식량채취에 제한되었을 것이다. 가족들은 완전 자급자족이었다. 심지어 소단위 기구들로 다른 가구들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생을 영위하였다. 그들은 아무 것도 살 필요가 없었으므로 가치의 기준이나 교환의 수단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같은 초기 문명사회에는 동전은 커녕 금속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교환의 기본조건과 화폐제도의 필요성은 잉태되고 있었다. 자연과의 투쟁 아주 초기에 인류의 생활은 가족과 원시종족 중심이었다. 가족은 자녀를 돌보아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조직되었다. 또한 사람들은 야생동물과 호전적인 이웃의 종족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부족을 형성하였다. 초기부터 여기에는 노동의 전문화가 있었다. 남자는 사냥을 하고 부족을 방위하였다. 여자는 어린이를


돌보고 대부분의 나머지 일을 하였다. 이런 식으로 집단의 필요성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협력했고 완전히 자급자족이었다. 돈의 필요성은 없었다. 원시인은 돌로 무기나 조잡한 도구를 발명했고, 이것들은 생존과 작업의 용이함 때문에 만들어졌으므로 가치가 부여되었다고 역사는 가르친다. 그러나 이들에게 생존의 문제는 신의 손에 달려 있었고, 이들의 신은 수없이 많았다. 어떤 신은 물을 다스리고, 다른 신은 불을 다스리며, 또 다른 신은 사냥, 날씨, 전쟁 등을 지배한다고 그들은 믿었다. 일이 잘 안되면 신이 노했다고 생각했고, 만사형통하면 그 반대로 생각하였다. 신의 제물 역사의 초기에 사람들은 제물을 바치고 예배를 드림으로써 신에게 은혜를 간구하는 관습을 만들었다. 바칠 것이 별로 없었으므로 원시인들은 가장 가치있는 것을 신에게 바쳤다. 신의 은혜와 사람의 공물의 교환은 사업상의 거래라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신은 돌도끼를 받고 물을 보내 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신에게 바쳐진 연장은 전혀 돈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단순히 유용한 물건일 뿐이었다. 이같은 원시의식은 원시인들이 자신의 소유물에 서로 다른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끈다. 땅에 굴러 다니는 돌은 제사의 희생물로 가치가 없다. 그러나 이 돌이 도끼로 바뀌면 가치가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거래가 시작되었을 때 그 거래는 돈없이 이루어졌다. 이같은 거래는 물물교환이다. 하나의 유용한 물건이 다른 가치있는 물건과 교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물물교환이 시작되었을 때 교환되는 물건들은 창이나 도끼같이 유용한 것이었다. 이들은 한 때 신에게만 제공되었던 물건들이다. 물론 원시인들이 어떻게 거래를 수행하였는지 우리는 아는바가 없다. 그러나 거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풍족한 물건보다 희소한 물건에 더 가치가 부여되는 적당한 척도가 틀림없이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마찬가지로 한 물건의 가치는 그의 희소성과 유용성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어떠한 화폐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물건의 가치는 가격으로 전환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물건은 다른 물건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거래는 이루어질 수 있었다. 부의 축적 수천년 전, 아마도 사람들이 물건에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을 무렵에, 사람들은 하루 하루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 이상으로 축적하도록 충동을 받았다. 사실, 축적은 화폐의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 사이에 자연적인 본능이었던 것 같다. 초기의 축적은 무기와 연장의 형태였고, 나중에는 소나 기타 물건들이 추가되었다. 이들 축적물은 사용상에 가치있는 물건들로 구성되었다. 어떤 면에서 이것들은 오늘날 '만일을 대비한 저축'과 같았다. 그 당시에는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는 것이 아직 보편적인 만큼, 희생물을 바치는 자는 신으로부터 축복을 의심치 않았다. 좌우간 축적은 아주 옛날에도 오늘날처럼 우월과 지위의 징표가 되었다.


우리는 고대의 관습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어떻게 영향을 남겼는지, 그것을 몇 개의 단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자본(capital)'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머리' 또는 '소의 머리'를 의미하는 'caput'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현재 인도의 동전의 이름인 '루피(rupee)'는 인도어의 '소떼'를 의미하는 'rupa'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세계 도처에 흩어진 문명은 거의 같은 방식과 같은 목적 하에 물건을 축적하였다. 그러나 축적한 물건의 종류는 같지 않았다. 그리스에서는 청동의 세발솥과 대야가 축적되었고, 크레타와 이태리에서는 청동의 도끼가 축적되었다. 중국에서는 청동의 칼과 반지가 선택되었다. 그밖의 세계에서는 진주와 조개껍질 등이 모아졌다. 이같은 축적물을 소유자가 몸에 치장함으로써 모두에게 과시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들 축적물은 경제적으로 거의 의미가 없었다. 이것들은 거래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들은 화폐의 기능으로 발전하는 기미를 보여 준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서 창보다 말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가치의 개념을 느끼게 되었다. 가치에 대한 느낌은 거래가 확대되면서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물건을 축적하기 시작하였다. 가치의 저장수단으로써 화폐의 기능을 다양한 물건이 해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장된 물건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매일의 생을 영위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된다는 점이다. 축적된 물건들은 사용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들은 또한 교환가치도 생겼다. 즉 저장된 물건의 가치는 그들의 용도뿐만 아니라 그들과 교환되는 다른 물건의 용도로 인식될 수 있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심지어 초기사회도 오늘날의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성을 많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고대의 생활은 불안하였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야만 하였고,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서 재능을 발휘해야만 하였다. 경험은 그들에게 만일에 대비하여 자신들과 신을 위하여 필요한 물건들을 축적하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사회적 지위와 인정을 위하여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인간의 다른 면모가 있다. 인간은 현재에 대하여 결코 만족하지 않는 아주 묘한 피조물로 알려져 있다. 인간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원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원하고, 따라서 교환하고 싶은 강한 성향을 갖고 있다. 아래에서 우리는 이같은 인간의 면모가 어떻게 화폐의 필요성을 일으켜 궁극적으로 다분히 우발적이지만 화폐를 창조하였는가를 볼 것이다. 문명이 발달되면서 인간은 서서히 자급자족 씨족단위의 단순한 생존수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약 2 만년 전 신석기 시대에 인간은 더 세분화된 노동의 전문화의 길로 들어섰다. 각 개인은 사냥, 목축, 연장 제작, 또는 그릇 제작과 같은 특별한 길에 전문적으로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시간을 하나의 기술에 바치면서 개인은 독립성을 잃었다. 도공이 도기를 자신이 필요한 수량 이상으로 만들면, 그는 자신과 가족들에게 필요한 다른 물건들을 만들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필요한 다른 물건들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여야 한다.


종족 또한 전문화되기 시작하였다. 장소에 따라 다른 조건 때문이었다. 한 종족은 좋은 돌을 갖고 있지만 소금이 없을 수 있다. 반면, 다른 종족은 소금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무기와 연장을 만드는 좋은 돌이 없을 수 있다. 또 다른 종족은 도기에 필요한 훌륭한 찰흙이 있는 반면에, 이와 다른 종족은 찰흙은 없지만 보석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모든 종족은 그들의 조상이 수세기 동안 그것 없이도 생존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족이 갖고 있는 것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부족한 물건과 재료를 남는 물건과 바꾸려는 성향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거래는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전에는 신에게 바치려고, 혹은 사회적 지위를 표하기 위하여 쌓았던 물건들도 이제 가치를 얻었다. 왜냐하면 바라는 물건과 교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에서 어떻게 교환을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물물교환의 문제 물물교환은 수행되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서로 의심하였다. 친구보다는 적이 되기 쉬웠다. 가장 쉬운 교환은 아마도 호혜의 형태였을 것이다. 오늘날 어린이들은 이 방식을 따른다. "내가 너에게 공을 주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그들의 첫번째 거래를 경험한다. 물건의 실제가치는 별로 관계없다. 많은 어린이들은 새장난감을 지렁이와 바꾸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원시인들은 아마도 이처럼 행동하였을 것이다. 새 물건의 가치에 대한 그의 판단기준은 그가 그것을 얼마나 원하는지와, 그것을 위하여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가였다. 원시인들은 그의 마을에서는 이같은 거래를 훌륭히 해낼 수 있었다. 그의 종족이 돌로 전문화되었다면 그는 화살촉을 만드는 시간보다 돌도끼를 만드는 시간이 두 배로 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돌도끼 하나를 화살촉 두 개와 교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종족은 질그릇을 만들지 않으므로 질그릇 하나를 얻기 위하여 몇 개의 화살촉이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질그릇의 제작자도 물론 마찬가지 입장이다. 각 거래자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쌍방은 상대의 물건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필요한 기준을 결핍하고 있었다. 쌍방은 합의가 이루어지는 시장의 유용성에 대한 지식도 결핍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식과 시장이 없는 거래는 단지 어린이의 교환 정도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기원전 490 년에서 기원전 424 년까지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는 원시형태의 교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상선을 타지에 정박시키고 상인은 상륙한다. 그들은 물건을 진열한 다음 우호의 뜻을 표시하는 것으로 그 자리를 물러난다. 후에 원주민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의 물건을 늘어 놓고 상대방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하여 사라진다. 그러면 사인은 다시 돌아와서 상대방의 물건을 조사한다. 만족하지 않으면 자신의 물건의 일부를 갖고 사라진다. 새로운 흥정을 의미한다. 이같은 흥정은 쌍방의 제안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모두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면 거래는


끝난다. 이것은 아마 성가신 과정이겠지만, 여기에는 최소한 교환의 개념이 있다. 물물교환의 불편함 종족 사이의 물물교환은 상품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였지만 온갖 불편함이 따랐다. 자신이 갖고 있는 네 마리의 염소를 소 한 마리와 바꾸기를 원하는 사람은 소 한 마리를 네 마리의 염소와 교환하기를 바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오래 돌아다녀야 한다. 염소를 돼지, 벽돌, 포도주, 혹은 도끼와 바꾸는 것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한 마리의 소가 필요하다. 소의 임자가 염소를 받아만 준다면 일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소 임자는 양가죽을 원한다. 물물교환에는 다른 어려움도 있었다. 사람들이 바꾸기를 원하는 대부분의 상품들은 내구재도 아니고 운송하기 쉬운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염소의 가치를 손상하지 않고 오랫동안 염소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그리고 부피가 큰 상품은 소액의 교환을 위하여 분할할 수도 없었다. 조그마한 질그릇 하나를 얻기 위하여 소를 죽이지 않고 여러 조각으로 나눌 수 없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여도 나머지 조각이 과연 다른 상품과 교환될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었다. 교환수단의 발달 거래가 좀더 쉬워지려면 그것은 두 단계로 나누어져야 했다. 네 마리의 염소를 한 마리의 소와 바꾸려는 사람은 정확하게 반대의 거래를 원하는 상대방을 만날 때까지 돌아 다니지 않아도 된다. 대신 그는 염소를 누구든지 받아 주는 표준가치의 상품과 바꾸면 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 표준상품으로 소를 살 수 있다. 연장, 장신구, 금속막대, 반지가 서서히 표준상품으로 받아 들이게 되었다. 약 5 천년 전 청동시대의 유적에서 이같은 물건들이 무수히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수단으로 교환이 보편화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각 문명은 서로 상이한 교환수단을 발달시켰지만 그 목적은 모두 동일하다. 스코틀랜드 북서쪽의 헤브리디즈 열도에서는 멍석이 화폐의 형태가 되었다. 태평양의 캐롤라인 군도에서는 구멍 뚫린 돌바퀴가 화폐가 되었다. 알라스카의 생선, 멕시코의 코코아씨, 인도의 쌀, 이집트의 벽돌, 몽골의 차가 돈이었다. 이같은 물건들은 모두 거래를 편리하게 하였으므로 교환의 매개체로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화폐와는 달리 이들은 공통적으로 모두 유용한 것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예로써 쌀은 옛날에도 지금도 인도에서는 중요한 식량이다. 벽돌은 건축에 사용되었다. 이같이 다양한 교환의 매개체는 거래에 사용하기에 알맞는 특성이 있었다. 이것들은 대부분이 내구재였으므로 저장될 수 있었다. 예로써 차는 냄새나 촉감으로 말린 포도잎과 구별될 수 있었다. 이들 매개체의 어떤 것들은 다양한 수량으로 거래될 수 있었다. 한 주먹의 찻잎과 질그릇 하나가 교환될 수 있었고, 한 푸대의 찻잎은 도끼 하나 또는 한 마리의 작은 짐승과 거래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차나 벽돌 혹은 매개체는 무엇이든지 그것의 품질을 조사할 수 있는 사실 이외에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만드는데 얼마만큼 노력이 요구되었는가를 알기 때문에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차 한 푸대는 자연석 한 조각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대에 어느 곳에서든지 통용되었던 화폐는 자패껍질(cowrieshell)이었다. 이것은 낚시바늘, 바늘, 칼날 제작에 적당하였다. 이 조개껍질로 꿴 줄 또한 장신구로 수요가 대단하였다. 이 조개껍질은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의 전역에서 발견된다. 이 조개껍질은 오늘날 달러에 해당하였다. 가장 널리 유통되고, 쉽게 교환되고, 가장 안정한 가치를 지녔다. 고대사회에서 거래를 용이하게 해 준 물건들은 그렇게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현대 화폐의 대부분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것들은 거래에 사용되었다. 교환의 매개수단이었다. 저장될 수 있었다. 가치의 저장수단이었다. 대금지불로 받아졌다. 가치의 척도였다. 그리고 일부 어떤 것들은, 예를 들면 쌀 같은 것은 가치를 손상함이 없이 소량으로 분할될 수 있었다. 소위 교환의 매개수단의 분할성이었다. 이렇게 하여 네 마리의 염소를 한 마리의 소와 바꾸려고 사방으로 돌아 다니던 때 이래로 인류는 오랜 세월을 보내왔다. 청동과 경제혁명 방금 고찰한 신석기 시대에 모든 원시종족의 생활수준은 비슷하였다. 이 시대는 기원전 약 1 만년에서 기원전 3 천년에 걸친다. 이 시기에 인간의 생활은 크게 개선되었다. 인간은 연장을 만들 줄 알고, 씨를 뿌릴 줄 알고, 가축을 기를 줄 알고, 질그릇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서로 교역도 시작하게 되었고, 이것이 최초의 화폐사용을 불러 일으켰다. 물론 원시인은 바로 이웃 종족밖에 알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고대 중국인은 다른 곳에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조차 못하였다. 다른 종족과 한번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원시 중국인은 그들이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던 지식을 가령 아프리카인과 나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세계의 도처에서 화폐의 출현은 자급자족의 노동의 거쳐 물물교환으로부터 교환의 매개수단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동과 주석을 합금함으로써 단단한 청동을 만들어 냈다. 이 발견은 청동기시대 의 문을 열었다. 이 시대는 기원전 3 천년에서 기원전 1 천년에 이른다. 청동은 교역의 발달을 상상할 수 없이 촉진하였다. 그리고 청동은 많은 변화를 불러 일으키고 기술혁신을 뜻하였으므로, 청동의 보유는 사회 존속에 절대로 필요한 것이 되었다. 석기시대에 인간은 단지 자신의 잉여물은 교환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청동의 발견으로 부족들은 필요불가결한 청동과 바꾸기 위하여 자신들이 잉여물을 더욱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청동으로 무기를 만들 수 있었으므로 종족간에 청동에 대한 경쟁은 어떤 면에서 오늘날의 핵무기 경쟁과 비슷하였다. 청동은 이 시대에 지불수단으로 보편화되었다. 청동은 막대형태로 저장될 수 있었다. 그것은 분할될 수 있었고, 연장, 무기, 장신구에 대한 원료로써 누구나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간이 경화를 주조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들은 청동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금과 은이 사용된 것이다. 화폐와 마술 이에 대한 설명은 고대종교로 거슬러 간다. 특히 중동지역에서 성행하였던 점성술까지 거슬러 간다. 예수 탄생 3 천년 이상 전에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비옥한 땅에서 한 도시문명이 일어났다. 지중해와 페르시아만까지 확장된 이 제국은 약 3 천년간 계속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 영향이 이집트와 그리스까지 미쳤다. 이 문명은 천문학과 점성술이 자랑이다. 별을 더 가까이 관측하기 위하여 엄청난 탑을 쌓고, 그것을 관측소로 이용하였다. 바벨탑도 아마 그같은 관측소의 하나였을 것이다. 바빌로니아의 승려들은 금과 해, 은과 달 사이의 신비로운 관계를 가르쳤다. 금은 성스러운 태양과 관계가 있고, 은은 달과 관계가 있다고 그들은 말했다. 금과 은에는 신성이 있다고 가르쳤다. 승려에 의해서 신성이 부여되었고, 그들의 바빌로니아 제국이 고대의 강력한 국가였으므로 금과 은이 볼편적 지불수단이 되었다고 어떤 학자들은 결론짓는다. 바빌로니아 제국의 강력함 때문이라는 후자의 이유가 더 신빙성이 있다. 바빌로니아의 승려들은 대단한 수학자였다. 그들은 항성의 운행을 관찰하고 예측하였다. 그리고 금과 은의 교환비를 1 대 13.5 의 비율로 고정시켰는데, 이것은 양력의 1 년에 대한 음력 월수의 비율이다. 그러나 금과 은으로 주화를 만든 것은 바빌로니아인이 아니었다. 당시 바빌로니아인들은 소액의 지불이 필요할 때에는 금이나 은 막대에서 해당 양을 잘라 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기본적인 중량 단위로써 밀 한 알의 무게(0.0648g)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아직도 금 세공인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다. 금은 오늘날도 잘 통용되지 않는다. 바빌로니아에서도 금은 거의 유통되지 않았다. 그들은 금을 사원에 쌓아 놓고 이방인과 거래할 때에만 사용하였다. 마치 오늘날 금이 중앙은행의 금고 속에 잘 보관되어 국제결제에만 사용하는 것과 같다. 지금도 볼 수 있는 이집트의 한 사원의 벽화에 새겨진 글은 큰 '공물'이 바쳐진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집트의 수출품이 금으로 결제되고 있는 장면이라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 그 증거로써 고대 중동의 국가였던 미타니의 투쉬라타 왕이 기원전 13 세기에 파라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미타니에게 대금이 금으로 지불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금은 사원에 안전하게 보관되었고, 이와 함께 금과 은이 가치를 재던 표준저울추도 보관되었다. 바빌로니아의 저울추는 오리 모양이었다. 이집트의 추는 소머리 모양이었는데, 이것은 이전의 가치기준이 소였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바빌로니아가 채택하였던 관행 가운데 아직도 어떤 화폐에 적용되는 것이 있다. 승려는 금과 은의 가치를 정하면서 계산의 12 진법을 채택하였다. 사람의 손가락이 10 개이므로 10 진법의 사용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12 진법을 선택하였다. 그 까닭은 12 라는 수가 성스러운 수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태양이 매년 통과하는 12 궁도의 수였다. 이 계산법은 최근까지 영국 통화에 적용되었다. 영국도 지금은 10 진법으로 바꾸고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는 대내, 대외무역이 번창하였고, 확립된 법제도가 있었고, 사회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안전하게 지키는 승려계급이 있었던 융성한 제국이었다. 이 조건들은 화폐제도가 발달하는 선행조건이었다. 당시 제국의 사원은 경제의 중심지였다. 승려가 사업상의 계약을 마련해 주고 증인 노릇을 하였고, 모든 거래를 진흙서판에 기록하였다. 수천의 진흙서판은 후에 발견되어 상업이 얼마나 발달되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승려는 저축성 예금을 취급하였고, 이것 역시 기록되었다. 은행제도가 발달하기 시작했으므로 사람들은 노예를 사거나 빚을 같을 때 더 이상 돈을 갖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사람들의 저축이 소 한 마리가 끌만한 무게의 금속으로 구성된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대단한 구원이었다. 돈은 대단히 무거웠다. 기원전 약 2 천년에 미네케의 1 탈렌트는 그 무게가 최소한 50 파운드였다. 바빌로니아인들이 그들의 돈을 사원은행에 예치했을 때 승려는 그에게 신용장을 주었는데, 이 신용장은 어느 사원은행의 지점에서도 현금화될 수 있었고, 사원은행에 빚이 있는 제 3 자에게서 현금화될 수 있었다. 유럽은 중세기에 비로소 이같은 환어음과 수표제도를 발상하였다. 현금없는 최초의 발명은 바빌로니아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바빌로니아의 승려들은 은행업무의 경쟁을 보게 된다. 교역이 발달되면서 사설은행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2 대 은행이 있었다. 시파(Sippar)와 이기비 (Igibi)은행과 니푸(Nippur)의 무라추(Muraschu)은행이다. 이 두 은행은 종래에는 농민에게까지 적당한 이자율로 신용을 공여하게끔 발달되었다.

2. 초기화폐의 운명 물물교환의 마지막 시대에 수많은 물건들이 거래의 지불수단으로서 채택되었다. 예외도 있었지만 이들 물건은 돈으로도 사용되었고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될 수 있었다. 차가 대금지불로 여러 곳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이 차는 마실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교환의 매개체로 사용되는 물건에 익숙하게 되자 이들의 가치를 보증할 필요가 없어졌다. 사실 차, 쌀, 멍석 등이 돈으로 사용되는 곳에서는 그것들은 마치 돈이 나무에서 자라서 수확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번쩍인다고 모두 금이 아니다 그러나 경화가 등장하여 이전의 두 단계의 물물교환제도를 대체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금과 은은 아름다운 금속이며, 동시에 구리나 청동에 비하여 희소하다. 그러나 멍석, 차, 쌀과 달리 경화는 생활에 유용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무슨 금속으로 만들어졌던 경화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이들 경화가 제아무리 번쩍거려도 그 가치를 판단할 주먹구구의 방식도 없었다. 경화는 화폐의 모든 주요 기능을 만족하였지만 사람들의 신뢰를 담을 만한 것이 없었다. 경화 등장의 문턱에서부터 경화의 가치에 대한 신뢰와 보편적


유통은 그 경화를 발생하고 그 가치를 보장하는 개인의 명성에 심히 좌우되었다. 서서히 사람들은 경화 사용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경화의 가치를 보장한다는 것이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최초의 경화는 기원전 7 세기 중동의 고대국가의 하나인 리디아에서 등장하였다. 이 경화는 강의 모래 밑에서 발견되는 금과 은의 자연합금인 호박금으로 만들어 졌다. 리다아의 왕 크로서스는 기원전 550 년 경에 최초의 금화와 은화를 만들었다. 페르시아에서는 기원전 558 년에서 기원전 486 년까지 살았던 다리우스 1 세 왕이 자신의 모습을 담은 경화를 만들었다. 그것은 무릎꿇고 있는 궁수의 모습이다. 그 모습은 왕으로서 다리우스가 아니라 대지신으로서 다리우스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물론 왕뿐만 아니라 신이 경화의 가치를 보증한다는 것이다. 초기의 경화는 모두 신의 보증을 나타내는 기장이 있었다. 크니도스의 경화에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두상이 새겨져있다. 시라큐즈에서는 승리의 여신인 니케를, 아르고스에서는 포세이돈의 거북이를, 에피세스에서는 아르테미스의 성스러운 별을, 메타폰트에서는 디메터의 성스러운 보리이삭을 새겼다. 아테네의 드라크마는 여신 팔라스 아테나의 성스러운 부엉이를 보여준다. 1 드라크마는 6 오볼스의 가치가 있었다. 오볼스는 오베로스에서 유래되는데, 오베로스는 사회에 봉사한 아테네 시민에게 한때 수여되었던 쇠꼬챙이를 의미한다. 드라크마는 원래 한 주먹의 쇠꼬챙이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경화가 그 이전의 유용한 연장이면서 화폐였던 연장화폐와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는가를 나타낸다. 아테네인들은 드라크마 이상의 단위를 갖고 있었다. 100 드라크마는 1 미네이고, 60 미네는 1 탈렌트가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이처럼 10 진법의 길로 이미 들어섰는데 이것은 바빌로니아인들의 제도보다 더 실제적이었다. 이 무렵 사람들은 도시에 살기 시작하였다. 아테네는 아마 그리스 도시국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도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관리가 선거로 선출되기 때문이다. 그리스에는 다른 도시국가도 있었지만 왕이나 군주에 의해서 지배되는 소규모 왕국에 가까왔다. 도시의 발달로 도로와 상수도 같은 공공시설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자금도 많은 국가와 도시가 짊어지고 있는 공공재정의 문제의 길에 들어 섰다. 그래서 정부는 경비를 조달하는 수단으로 경화 주조에 의지하였다. 경화는 차, 쌀, 물건보다 더 훌륭한 교환의 매개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부에 의해서 조작되기 쉬웠다. 화폐주조의 특권은 어떤 정부든지 그 정부가 영속할 수 있도록 이용될 수 있었다. 경화 주조의 권리는 정부통치권의 불가결한 부분이 되었다. 이 권한은 점차 법률로 성문화되었다. 이 사실은 말로 추적할 수 있다. 오늘날 수를 나타내는 '남버(number)'는 라틴어의 '누무스(nummus)'에서 유래한다. '누무스'란 화폐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다시 그리스어의 '노미스마(nomisma)'에서 유래되는데, 이것은 관습과 법을 의미하는 '노모스(nomos)'에서 유래되었다.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화폐 주조의 중심지이었다. 라우리움(Laurium)의 은광이 원료를 제공하였고, 아테네의 항구인 피라우스(Piraeus)는 환전상의 본고장이 되었다.


아테네인은 금방 돈 다루는 법을 터득하였다. 기원전 600 년 그리스의 대정치가 솔론은 드라크마의 은 함유량을 줄임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화폐가치를 하락시켰다. 그는 드라크마를 페르시아의 통화에 맞추어 값싼 통화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목적은 두 나라의 경화를 교환할 수 있게 만들어서 아테네와 페르시아 사이의 무역을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의도는 성공하였다. 아테네 경제를 일으키려는 그의 시도는 아테네 해군이 다른 지중해 연안을 침략하는 데에서 도움을 받았다. 전리품이 아테네에 쌓이고, 당시에 알려졌던 세계(이오니아, 흑해, 시실리, 아프리카)의 모든 무역 중심지로부터 경화가 아테네로 몰려 들었다. 여신 아테네의 부엉이는 가장 널리 유통되는 화폐가 되었다. 대변혁 그러나 새 통화가 고대 그리스를 휩쓸자 이것은 매우 불안정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켰고, 새로운 법의 개념을 불러 일으켰다. 마침내 유혈과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문제의 근원을 이해하려면 물물교환시대로 돌아가 본다. 가령 쌀이 지불수단으로 이용되었다고 가정하자. 쌀이 풍작인 해에 농민들이 생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려면 싸게 값을 불러야 할 것이다. 시장에는 보통 때보다 더 많은 쌀이 흘러 들어 곧 쌀의 가치는 하락할 것이다 예를 들면 일년 전에 쌀 한 가마와 거래되었던 질그릇을 사려면 지금은 쌀 한 가마 반을 내 놓아야만 할 것이다. 누구나 이것은 이해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 해에 생산된 쌀의 대부분은 결국 식량으로 소비되는데, 필요 이상으로 쌀이 생산되면 이 중 일부는 팔리지 않게 된다는 것은 뻔하다. 그러므로 풍작일 때에는 쌀 가격이 떨어지고, 흉작일 때에는 쌀 가격이 오르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사람들은 똑같은 원리를 돈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금과 은은 내구재이고 먹어 없어지거나 닳아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들은 돈이란 그저 생활에 전혀 중립적 역할을 하는 냉정하고 메마른 금속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리스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수요에 비하여 공급량이 희소하면 가격은 오르고, 공급량이 수요에 비하여 풍부하면 가격이 하락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러면 가격과 가치는 수요와 공급의 힘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리고 이 법칙은 똑같이 금이나 돈에도 적용된다. 화폐의 유통량(화폐의 공급량)이 상품의 판매량(화폐의 수요량)에 비하여 많으면 화폐의 가치(구매력)는 하락한다. 말을 바꾸면 상품의 가격이 상승한다. 그리고 화폐공급량이 상품의 공급량보다 적으면 화폐가치는 오르고 상품가격은 하락한다. 처음에는 아테네의 경화가 귀했다. 그의 구매력은 대단히 높았고, 한 개의 경화로 구입할 수 없는 상품이 거의 없었다. 화폐의 유통량이 거래량에 비하여


많지 않았다(화폐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였다). 그래서 화폐의 가치는 높았다. 설사 아테네 사람들이 수요-공급의 원리를 이해하였다 하여도 그들은 이에 대해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화폐의 공급량은 전적으로 전리품과 귀금속의 양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수세기 동안 그들 사회는 금화와 은화 공급량의 변덕스러운 변화에 농락 당하였다. 지배자, 환전상, 상인들은 농민과 상품생산자보다 잘 살았다. 곡식 한 푸대로 항아리 하나를 할 수 있었던 농민들은 다섯 푸대로 경화 하나를 구해서 항아리 하나를 살 수 있었다. 한 때 부자였던 농민들은 곡식가격 하락으로 농락 당하였다. 그들은 빚을 갚을 길이 없게 되자 땅을 잃었다. 심지어 자유까지 잃는 경우도 많다. 농민들은 그들의 재산, 포도원, 소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경화 한 푸대로 살 수 없는 것은 거의 없었다. 새 화폐제도는 농민의 경쟁력을 꺾어 버렸다. 약 2,000 년 후에 미국에서 곡물가결의 하락으로 인민운동(populist movement)이 일어나 반란 직전에까지 사태를 몰고 간 것과 흡사한 상황이었다. 인류는 화폐의 역사를 통하여 별로 새로운 것을 배우지 못하는 우매한 짓을 되풀이해 왔다. 메가라(Megara)의 시인 테오그니스(Theognis)는 "귀족은 지참금만 많다면 평민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라고 적고 있다. 사회는 곧 귀족의 반란, 상인의 탐욕, 노동자의 분노로 분열되었다. 유혈폭동이 일어났다. 사모스(Samos)에서는 과격분자들이 200 명의 귀족을 살해했고, 밀레트(Milet)에서는 폭도가 풀어 놓은 야생소로 부유층의 어린이들이 밟혀 죽었다. 난동은 양측에서 일어났다. 커키라(Kerkyra)에서는 인민당의 지도자 600 명이 살해되었고, 인민당이 권력을 잡자 본때로서 60 여명의 귀족을 목매달았다. 폭동과 투쟁과 긴장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정부가 통화량을 증가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화폐경제에서는 어린이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최초의 국제통화 그리스의 영향이 고대세계에 점점 퍼져 나갈 때 최초의 국제통화도 이와 함께 나란히 발달되었다. 마케도니아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의 드라크마를 흑해에서 이집트까지, 그리스에서 인도 경계선까지 유통되는 통화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군대는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거기서 얻은 귀금속으로 대왕의 모습을 새긴 수천의 드라크마를 만들었다. 이것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에도 오랫동안 유통되었다. 역사상 이와 운명이 비슷한 경화가 있었다.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의 타러(Thaler)는 여제 마리아 테레사의 이름에서 비롯되는데, 1780 년 그녀가 죽은 이후에도 동아프리카의 교역상 사이에서는 가장 가치있는 은화로 유통되었다. 오늘날 미국 돈의 단위인 달러(dollar)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된다. 그러나 달러는 역사적으로 미국 달러보다는 스페인 달러가 더 유명하다. 테레사 타러는 지금도 여러 곳에서 사용된다. 아랍 세계에는 타러가 법화가 아닌데도 법화보다 더 애호를 받고 있다.


알렉산더는 최초의 국제통화를 만들었고, 이때부터 화폐의 역사는 경제사뿐만 아니라 정치사와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이때부터 화폐의 법칙(화폐의 공급량과 상품의 공급량 사이에 균형을 유지해야만 하는 법칙)이 적용된다. 이 균형을 깨는 요인은 어떤 것이든 화폐를 값싸게 만들어 인플레이션으로 인도하든지, 화폐를 비싸게 만들어 디플레이션으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 법칙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몰랐다. 그가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거기서 얻은 귀금속으로 만든 대향의 경화가 마케도니아 제국의 교역의 팽창으로 필요하게 된 화폐의 수요와 멋지게 들어 맞았다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화폐의 공급과 상품의 공급이 일치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새 시장이 그의 제국으로 흡수되었을 때 이에 맞추어서 수많은 경화를 유통시켰다는 것은 야심있는 이 정복자에게는 행운이었던 것이다. 로마-세계 최강국 그리스가 알렉산더 제위 동안 번성하고 있을 때 로마는 아직 이탈리아 반도를 제압하기 위하여 싸우고 있었다. 동지중해의 그리스가 교역과 상업의 제국으로 번성하는 것에 비하여 로마는 저개발 지역이었다. 로마의 돈은 그 당시 세계에서 하찮은 것이었고 조잡한 것이었다. 최초의 로마 돈은 아에스 루드(aes rude)라고 불리우는 조잡한 구리막대였다. 기원전 4 세기 말 경에 이것은 아에스 그레이브(aes grave)라고 불리우는 무거운 주형 구리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다루기가 거북하였다. 경화에 담은 초상은 미래와 과거를 동시에 바라본다는 두 얼굴의 야누스(Janus)였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여 지중해로 뻗어 나갔을 때 그 군대는 풍부한 은행이 있는 타렌튬(Tarentum)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때 이래로(기원전 269) 로마는 귀금속으로 경화를 만들었다. 은화 테라니우스(deranius)는 그리스의 드라크마를 본땄고, 한 면에 허큐리스의 초상이 새겨졌다. 다른 면은 전설에 의하면 로마시를 창건했다는 쌍둥이 형제 로물로스와 레무스를 젖먹이는 늑대의 모습을 보여 준다. 데라니우스는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던 모든 나라에서 주조되었다. 이 돈의 영향은 아직도 남아 있다. 영국 돈의 단위인 파운드를 표시하는 'L'는 한 파운드의 무게를 나타내는 라틴어 '리브라(libra)'의 두 문자를 따온 것이다. 역시 리브라에서 이탈리아와 터키의 화폐단위인 '리라(lira)'가 나왔다. 영국 돈의 소액단위인 페니는 'd'로 표시되는데, 이것은 데라니우스의 두 문자에서 나온 것이다. 아라비아와 유고슬라비아의 화폐단위인 '디나르(dinar)' 역시 로마의 돈 데나리우스에서 유래한다. 너무 많은 화폐 대향의 경화를 만들어 화폐량과 상품량 사이의 균형을 이루게함으로써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를 심한 사회적 격변에서 구하였다. 그의 사후 그의 제국은 분열되었고, 시장은 나뉘어졌으며, 교역도 줄어 들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발행했던 경화는 그대로 남아서 유통되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물가는 뛰고 드라크마의 구매력은


곤두박질하였다. 로마인은 그리스인의 경험에서 아무 것도 교훈을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모네타(moneta)'라는 칭호를 붙여 여신 주노(Juno)의 신전에다 조폐소를 차렸다. 이 이름에서 오늘날 'money'가 유래한다. 모네타가 로마의 화폐를 방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네타는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이 일을 수행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한니발을 격파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는 칼타고에서 60 톤의 은을 갖고 돌아왔다고 한다. 로마 군대가 스페인을 정복한 후 귀금속이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고, 화폐량은 상품량보다 많아졌다. 가격은 즉시 뛰기 시작하였다. 줄리어스 시저(기원 전 100-44)의 시대에 로마는 시저의 모습을 담은 금화를 주조하기 시작하였다. 아우그스투스(기원 전 27-기원 후 14)재위 때에 '아우레우스(aureus)'라 불리우는 금화가 완전히 유통되었다. 로마의 은화인 데나리우스와 비교할 때 이것은 16 데나리우스에 해당하였다. 위험한 인플레이션의 초기 단계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모든 것이 잘 되어갔다. 갓 형성된 부는 공공건물에 물쓰듯 낭비되었고, 사치품이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그러나 이 번영의 표면 아래 문제가 야기되고 있었다. 귀금속의 유출 새 정복지가 로마제국으로 흡수될 때마다 이 먼 지역을 지키기 위한 군대의 유지비는 크게 증가되었다. 로마 군대는 어디 가든지 먹여야 되고, 재워야 되고, 입혀야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로마로부터 귀금속을 실어옴으로써 조달되었다. 또한 이방군대는 끊임없이 제국의 경계선을 위협했고, 그들의 지도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 대신 귀금속의 형태로 공물을 요구하여 받아갔다. 사치품에 대한 로마인의 기호는 계속 커져만 가서 이를 위하여 지불되는 귀금속이 흘러 나갔다. 로마의 금화와 은화는 그 당시 세계의 어느 시장에서든지 기꺼이 환영받았다. 로마의 돈은 세계에서 가장 잘 유통되는 돈이 되었다. 많은 역사가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유 중의 하나는 로마를 유지하는 막대한 경비였다고 믿고 있다. 제국이 절정에 달하자 약탈해 올 귀금속이 더 이상 없었고, 전리품도 줄기 시작하였다. 이때 제국을 유지하는 경비는 최고의 수준에 달하였다. 그래서 로마 당국은 줄어 드는 귀금속을 늘리는 방편으로 데나리우스 은화의 은 함유량을 줄여 버렸다. 그들은 구리를 섞음으로써 이 일을 해냈다. 구리는 풍부하고 값이 쌌으므로 많은 데나리우스를 주조할 수 있었다. 데나리우스의 이같은 평가절하는 네로 제위 때(54-68) 시작되었다. 잠시 동안은 구리의 함량이 매우 적어서 이에 대해 언급할 만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순금화 아우레우스는 계속 구조되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다 로마의 곤경은 다음 백년 동안 악화되어 갔고, 은화의 구리 함량은 점점 늘어만 갔다. 마침내 은화는 그 가치의 3 분의 2 를 잃어 버렸다. 자신이 발행한


은화에 '화폐가치의 회복자'라고 스스로 칭호를 붙인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재위(222-235) 하에서 데나리우스의 25 퍼센트는 은이고 나머지 75 퍼센트는 구리였다. 갈리에누스의 재위(260-268)때에는 은 함량이 5 퍼센트로 줄어들었다. 그 동안 물가는 계속 오르고 사회적 조건은 계속 악화되어 갔다. 로마에 파는 상품대금으로 이방인들은 데나리우스를 받지 않았다. 로마군대가 이국에 주둔할 때 먹이고 재우고 입히는 경비도 데나리우스로 받지 않았다. 이방인들은 예전의 순은화 데나리우스를 요구했는데, 이것들은 녹여서 구리와 섞었으므로 남은 순은화는 점점 희귀하게 되었다. 순은화 데나리우스가 없을 때에는 이방인들은 금화 아우레우스를 요구하였다. 로마에서는 사람들은 평가절하된 데나리우스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든지 재수 좋게 예전의 순금화와 순은화를 갖게 되면 내놓지 않았다. 로마에서 유통되었던 돈은 평가절하된 데나리우스뿐이었다. 양화는 내놓지 않든가, 외국에 지불되므로 서서히 사라졌다. 이 현상은 왕립 런던 외환거래소를 창설한 토마스 그레샴 경이 그의 유명한 표현인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를 공식화하기 천 수 백년 전에 일어났다. 은행이 문을 닫다 로마가 시도한 첫번 조치는 사치품 수입의 제한이었고, 귀금속 소장의 금지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실패하였다. 서기 260 년 갈리에누스 재위시 환전상은 가치가 절하된 로마의 은화를 받는 것을 거절하였다. 사실상 은행이 문을 닫은 것이다. 데나리우스는 가치가 너무 떨어져서 심지어 정부마저 세금을 순금과 순은으로 요구할 지경이었다. 정부가 이렇게 거둔 순은은 다시 가치없는 데나리우스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디오크레티안은 그의 재위 동안(284-305) 가치가 없는 데나리우스가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이 외면을 해서 생긴 심한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하여 가격통제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실패하였다. 5 년 후 콘스탄틴 대왕(재위 306-337)은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새 금화 솔리두스(solidus)를 주조하여 사실상 유통에서 사라진 아우레우스를 대체하였다. 그러나 솔리두스는 아우레우스보다 더 빠르게 로마로부터 빠져 나갔다. 이와 함께 로마제국의 불행한 운명은 시작되었다. 이국 땅에 주둔한 로마군대를 지원할 수 없게 되자 로마는 별 수 없이 그들을 로마로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방대한 로마제국은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바바리안들이 로마인들이 뒤에 남긴 위대한 건축기념물들을 짓밟았다. 귀국한 군인들은 나라가 멸망의 문턱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금과 은의 소지자들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데나리우스는 가치가 없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화폐공급은 거의 영으로 줄어 들었고, 로마의 경제는 서서히 물물교환제도로 표류하고 있었다. 거래가 중단되면서 한때 사치품으로 가득 찼고 부유한 로마인들을 살찌게 하던 시장은 사라졌다. 농민의 파탄은 더 악화되었다. 봉급생활자는 식량을 재배할 땅도 없고 거래에 필요한 상품을 만들 원료도 없으므로 굶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옥수수를 나누어 주던 것을 재정의 결핍과 신용의 손상으로 이미


분해되고 있던 정부의 지출만 증가시킬 뿐이었다. 제국의 남아 있는 부분을 지키던 군대에게 봉급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제국은 멸망하였다. 마지막에는 바바리안들이 로마시 자체를 침략하여 약탈하였다. 과거의 다른 제국처럼 로마의 멸망도 전적으로 돈의 영향 때문이었다. 비극적인 것은 로마에서 가장 현명했던 사람들조차도 일단 형세가 불리하게 되자 그것을 바꾸는 방법을 몰랐다는 것이다. 화폐는 초기 인간사회의 협력자인 동시에 적이었던 것이다.

3. 금 로마제국이 멸망할 당시 유럽은 경제의 가장 원시적 형태로 돌아 갔다. 도시는 활기를 잃었고 교역과 화폐의 유통은 정지되었다. 물물교환으로의 후퇴 장원, 마을, 수도원은 대체로 자급자족 경제단위가 되었다. 여기에서 생산할 수 없었던 소수의 상품은 물물교환으로 충족되었다. 거래에 관한 한 유럽인들은 거의 석기시대 상태로 후퇴하였다. 그것은 사실상 돈이 없는 경제였다. 돈은 수요가 가장 적은 상품이 되었던 것이다. 주교와 귀족들이 아직 남아 있던 금화의 대부분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것들을 돈이라기보다는 장식품과 수집품으로 취급하였다. 죽을 때나 결혼 때에야 금화의 주인이 바뀌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부분은 녹여서 보석으로 되었다. 한때 고대 세계에서 널리 유통되었던 금화는 그 역할이 선사시대의 축적품으로 돌아갔다. 샤를 마뉴 대제(재위 768-814)가 서로마제국을 세웠을 때 화폐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가 주조한 금화 역시 퇴장되거나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들을 강제로 받도록 평민에게 의무화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이것도 효과가 없었다. 유럽인들은 은화를 받는 것보다는 상품과 상품을 교환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계속 느꼈다. 이 기간에 화폐의 진화가 정지되었던 것은 당연하다. 화폐가 유통되는데 필요한 조건들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수많은 조그만 지역으로 나뉘어졌고, 각 지역에는 지배자가 있었다. 그들은 독립적으로 운영하였고, 거기에는 돈을 발행하고 그 가치를 보증하고 통용시킬 만한 강력한 지배자가 없었다. 금은 부자의 소장으로 퇴장되었고, 평민은 가끔 보는 은화의 가치를 판단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받는 것을 아주 꺼려 하였다. 그들이 그 돈을 받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돈을 쓰는데 대단히 애를 먹었을 것이다. 중세기의 사회제도 또한 화폐사용을 저해하였다. 지역의 지배자나 지도자가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백성들을 완전히 지배하였다. 지배자는 지역을 방어하는데 무기를 지니는 것을 금지 당한 평민은 장사를 열심히 하거나 들에서 일하였다. 어떤 면에서 평민은 자유를 안보와 바꾼 것이다.


이 시대를 연구해 보면 지배층을 비난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들은 지역방어를 하였고, 지역의 일들을 관리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어떤 보상을 받을 만하였다. 여러 가지 경화 새로운 도시 중심의 경제가 나타나고 돈이 다시 보편적 가치기준과 교환의 매개수단으로 역할을 재개하기에는 수세기가 흘렀다. 첫째 화폐에 대한 혼란기가 있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유럽의 군주나 왕들은 혼란을 막아 보려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이든지 하려고 노심초사 하였던 것 같았다. 서로마의 샤를 마뉴의 후계자들이 권력이 약해져 가면서 지방 군주나 주교들이 점점 경화주조권을 확득하였고, 돈의 무게 및 은 함량을 결정하는 권리도 얻었다. 극소수만이 그들의 경화의 가치를 오랫동안 유지하였으나 그들도 서서히 경화를 절하시켜 갔다. 경화의 절하는 아주 수지맞는 일이었다. 가령 어떤 군주에게 순은화 10 개와 혼합하여 100 개의 경화를 만들 수 있는 구리가 있다면 그는 겉으로는 순은화처럼 보이는 110 개의 경화를 만들 수 있다. 지배자는 돈이 몹시 필요했는데 이와 같은 방법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한 방법이 되었다. 가치가 안정되었던 소수의 경화 가운데는 쾰른의 페니히(pfenning)와 비엔나의 페니히가 있었다. 도시의 경제력과 정직한 주조의 뒷받침을 받은 이 두 화폐는 유럽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모형의 변화 그러나 유럽의 군주들이 경화를 매년 바꾸는 터무니없는 시대가 도래되었다. 이 행위는 어떤 면에서 오늘날 제조업자들이 매년 상품의 모형을 바꾸는 것과도 같다. 이 때쯤 화폐주조권은 법에 의해서 오로지 지배자에게 주어졌고, 12 세기에는 전년에 주조된 돈의 가치를 절하시키는 것이 그들의 관습으로 되어버렸다. 평민들은 전년의 돈을 바치고 이의 75 펴센트에 해당하는 새 돈을 받았다. 이같은 괴상한 화폐개혁으로 생긴 이윤은 지배자의 것이었다. 지배자의 이같은 행위는 평민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이전에 수입의 원천으로써 경화가치를 절하시키는 행위보다는 나았다. 어떤 군주는 너무 탐욕스러워서 화폐주조권을 빌려주기까지 하였다. 그리되면 그는 그의 이름으로 된 돈의 가치와 무게를 단속할 도리가 없었다. 12 세기에는 많은 은화들이 너무 얇아져서 한쪽 면밖에 그림을 새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때쯤에는 처음에는 순은화로 전 유럽에서 통용되던 비엔나 페니히도 구리돈(동전)으로 되었다. 군주들이 이같은 행위를 단념한 14 세기 후에야 비로소 좀더 영구적인 화폐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전의 가치 또한 자주 오르락 내리락하였다. 이 화폐의 무게와 은 함량의 변화에 따라 감소하였다. 은의 가치는 은광에서 생산되는 은의 수량과 품질에 달렸었다. 그래서 새로 주조된 은화조차 그 가치가 불안정하였고, 교환의 매개수단으로서 효과적이 아니었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도 돈은 같은 운명이었다. 그로투노(투어의 대경화)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266 년 십자군의 지도자들에게 좋은 은화가 필요할 때였다. 그러나 독일의 페니히처럼 그로투노의 가치는 수세기 동안 떨어져서 마침내 조그만 구리돈으로 되어 버렸다. 돈의 역사는 화폐가치의 계속적인 하락에 관한 이야기이다. 프랑스의 지배자들은 경화절하에서 얻은 이윤을 시뇨리지(Seigniorage)(경화의 액면가치와 금속으로서 실제가치의 차이를 보유하는 권한)로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돈이 양화로 혹은 악화로 주조되는 것은 전적으로 왕의 재정상태에 달려 있었다. 프랑스의 샤를르 7 세가 영국과의 전쟁경비를 조달해야만 했을 때 그는 조폐국 장관 쟈크 콜을 불러서 그에게 표준 이하의 돈을 발행하도록 허락하였다. 갑작스런 유통량의 증가는 프랑스를 인플레이션으로 휩쓸어 버렸고, 언제나 그렇듯이 사회적으로 불만으로 내몰았다. 사태가 너무 심각하여서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게 되자 샤를르는 개혁자를 불렀고, 그들은 조폐국장을 재판에 부쳤다. 왕의 사면만이 그를 교수형에서 구할 수 있었다. 악마의 재앙 영국에서도 돈의 가치는 조직적으로 절하되었다. 특히 헨리 8 세와 에드워드 6 세가 재위에 있었던 16 세기의 전반부에 그러하였다. 그들의 동기도 똑같았다. 그들도 돈이 더 필요하였고, 경화의 절하는 그것을 충족시키는 훌륭한 방법인 것 같았다. 그때까지는 영국왕은 단지 돈의 무게만을 줄였다. 그러나 헨리와 에드워드는 1542 년부터 은화에 다른 금속을 섞음으로써 은 함량을 줄여 나갔다. 마침내 은 ㅎ량은 단지 원래의 4 분의 1 에 불과하게 되었다. 결과는 인플레이션과 사회적 파탄이었다. 이것은 16 세기와 17 세기 동안 영국을 휩쓸었다. 똑같은 과정이 똑같은 시간에 독일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표준중량과 고은함량을 지닌 양화를 환전상이 유통에서 회수하여 가치가 절하된 돈으로 만들기 위하여 은을 녹이자 양화는 사라졌다. 이같은 환전상을 'tippler(기울어지게 하는 자)'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이들은 돈을 저울에 달아 보아서 저울을 기울게 하는 것만 녹였기 때문이다. 저울이 기울어진다는 것은 높은 은 함량을 의미한다. 1618 년에는 은화 1 마르크로부터 단지 110 그로쉔 만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2 년 후에는 은화 1 마르크로부터 350 그로쉔이 만들어졌다. 생활비는 점점 앙등하였지만 정부는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을 막는 조치를 아무 것도 취하지 않았다. 나라의 지배자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들은 경화를 절하시키고 화폐주조권을 임대함으로써 수입을 얻었다. 돈이 절하하는 것을 막지 않은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독일의 국토가 동쪽으로 확대되어 교역이 그 쪽으로 커져 나갈 때 더 많은 돈이 유통되는 것은 교역을 도우므로 잠시 동안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독일의 예에는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첫째, 이 당시 유통되던 화폐의 양은 교역의 성장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필요한 양보다 훨씬 더 컸다. 따라서 화폐공급량은 상품공급량보다 훨씬 많았다. 둘째, 새 화폐가 순은이나


순금으로 만들어졌다면 그 결과는 앞서와 같았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이해될 것이다. 금 화 중세기 유럽에서 금은 평민의 돈이 아니었다. 14 세기부터 은화의 구조가 점점 줄어가자 금이 유럽의 안정, 견실, 부유의 기준이 되었다. 금은 또한 당시 하나의 강박관념이 되었다. 금은 돈으로 사용하기에는 아주 좋았다. 다른 금속과 비교할 때 금은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귀했다. 그러므로 가치가 있었다. 작고 편리하면서 높은 가치를 지닐 수 있었다. 금은 녹이 슬지 않는다. 주조하기 쉽다. 그의 연성과 무게 때문에 감정이 쉽다. 흔히 하는 식으로 깨물어서 감정할 수 있다. 유럽의 정상적인 원천으로부터 금의 생산은 금의 공급량을 서서히 증가시켜 돈의 홍수를 막았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주조 수수료를 징수하기 위하여 조폐국은 무슨 금이든지 가지고 오면 기꺼이 금화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재정적 안정은 변덕스러운 금 공급량의 변화에 좌우되었다. 그러나 최소한 처음에는 금의 자연적 희소성이 금화의 홍수를 막아 주었다. 무슨 금이든 국내의 거래보다 국가간의 거래에 점점 사용되어 갔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금이 많지 않았다. 어떤 역사학자의 추정에 의하면 중세기에 북유럽과 중유럽에서 유통되던 금은 단지 300 내지 500 톤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매년 생산되는 금의 양보다도 훨씬 작은 양이다. 더 많은 금이 인도와 아라비아로부터 중동을 거쳐서 유럽으로 스며들어 왔고, 이것은 이탈리아의 부자 도시국가인 플러렌스와 베니스에서 금화로 주조되었다. 13 세기에 플로렌스의 프로린(florin)금화와 베니스의 세퀸(sequin) 금화는 북유럽에서 가장 잘 유통되는 금화였다. 유럽의 군주와 왕들은 금에 굶주렸다. 유럽 대륙의 모든 왕궁에서는 최소한 한 명의 연금술사가 고용되었다. 연금술사의 일은 다른 금속으로부터 금을 만드는 비법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이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오랜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심지어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람들을 돌로 금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중세 유럽에서 금을 만드는 비법을 알려 주는 '철학자의 돌'을 찾는 일은 하나의 강박관념이 되었다. 금은 모든 종류의 기적을 이룬다고 생각하였다. 발견될 수만 있다면 마실 수 있는 금은 영원한 청춘의 원천이고, 모든 질병의 치료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아무도 인조금을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 금의 대홍수 바로 이 때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다. 중남미에서 쏟아져 나오는 금은 유럽인들이 꿈도 꾸어 보지 못한 양이었다. 신대륙의 원주민들은 스페인 정 복자로부터 약탈당하고 속고 고문당하였다. 모두 은과 금 때문이었다. 정복자는 금을 가득 실은 함대를 스페인으로 보냈다. 영국과 네덜란드 해적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프란시스 드레익 경은 스페인 함대를 습격하여 그들의 보물을 노략질하였다. 유럽의 정치가들은 이 발견을 기적의 선물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한 국가의


부가 얼마만큼 금과 은을 소유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모든 국가가 금의 보유량을 증가시켜 국부를 늘리려고 열을 올렸다. "금과 은은 이 세상의 폭군이다. 그러나 그들의 지배는 부당하지만, 우리가 그 들을 통치하는 것은 사리에 맞는다"라고 리슐레 추기경은 적고 있다. 철학자 존 로크는 "금과 은에는 생활을 쾌적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많이 갖는다는 것은 부를 의미한다"고 갈파했다. 이 당시 유럽의 금광의 생산량은 1 년에 약 7.5 톤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유럽의 모든 나라의 목적은 스페인의 금을 가능한한 많이 가져 오는 것이었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한 방법이었고, 그래서 몇 나라는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다른 방법을 취했다. 스페인으로부터 수입하는 것보다 스페인으로 수출하는 상품의 양이 많으면 되었다. 이 당시 국가간의 결제는 금으로 해결하였기 때문에 스페인에 대하여 국제수지가 유리한 나라는 반드시 많은 금을 갖게 될 것이다. 이 발상은 개인사업의 원리에서 본딴 것이다. 만일 개인사업가가 그가 지불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번다면 그는 더 부자가 된다. 마찬가지로 똑같은 원리가 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발상과 이 발상의 실천이 틀렸다는 것이 곧 증명되었다. 지나치게 많은 금 더 많은 금이 스페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전쟁과 무역을 통하여 이 금은 다른 유럽국가로 흘러 들어갔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은 무한정의 부가 아니라 엄청난 물가상승이었다. 당시 세계의 금 보유량의 4 분의 3 을 가지고 있던 스페인은 어째서 빵값이 매일 오르고 금값이 떨어지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어째서 금의 발견에 따라 파산의 선풍이 전유럽을 휩쓸고 있는지 놀란 뿐이었다. 그들은 금과 은의 증가가 물건값을 비싸게 하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유럽은 금 자체가 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알기 시작하였다. 금은 경제를 부추기고 국가의 생산량을 증가시킬 때, 그리고 금의 유통량이 재화와 용역의 공급량과 균형을 이룰 때 부를 창조할 수 있다. 십 수세기 동안 인간은 화폐의 유통량과 상품의 공급량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는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금은 무엇이든지 금화로 만들어 즉시 유통시켜 왔다. 그들은 왜 즉시 유통시켜야만 했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새로운 금이 출현하였을 때 이것은 대개 무역상, 상인, 때로는 해적의 수중에 들어갔지 정부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다. 정부는 수수료를 받고 금화를 주조해 주지만 주조된 새 금화가 유통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사실 정부는 주조는 조정하였지만 금의 공급량을 통제하지는 못하였다. 설사 정부가 화폐량이 상품량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해도 그들은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정부는 금을 소유하지 않았다. 정부는 얼마만큼의 돈이 유통되는지 알 방법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또한 정부는 일정 기간의 모든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알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같은 필요불가결한 정보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같은 정보를 갖고 있는 오늘날에도 마구 뛰는 인플레이션을 멈추게 하는 국가의 능력은 제한적이다.


스페인에서 생겼던 똑같은 일이 1 차대전 이후 미국에서 일어났다. 미국은 전쟁시에 영국과 프랑스에 많은 전쟁물자를 팔고 그 대금으로 대량의 금을 받았다. 그러므로 금이 뒷받침하던 달러를 더 많이 발행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전쟁물자의 생산으로 활기를 띠던 경기가 주저앉게 되었다. 생산이 감소할 때 새 달러가 쏟아져 나왔으므로 증가된 화폐량이 감소된 상품의 양을 쫓기 시작하였다. 1912 년과 1927 년 사이에 미국의 물가는 두 배로 뛰었다. 반복하면, 금이 부를 보증할 수 있다는 믿음은 단순한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4. 현금과 신용 중세 말(1000-1400)에 팽배하였던 금융의 불확실성, 불안정한 화폐, 파산, 금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급속히 발전하였고, 국가간의 무역도 이에 발맞추어 발전하고 있었다. 이것은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다. 먼 지역의 대금은 어떻게 지불하느냐, 서로 다른 화폐는 이미 가까운 거리의 결제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독일의 옷감 수입상은 플로렌스의 옷감공장에 어떻게 대금을 지불하였겠는가. 그리고 플로렌스의 옷감공장은 영국의 양모 상인에게 어떻게 지불하였겠는가. 은행의 성장 수많은 종류의 돈은 국제무역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환전상은 문을 닫지 않으려면 노련한 전문가가 되어야만 하였다. 그들은 당시 유통되는 수많은 종류의 금화와 은화의 실제가치를 평가할 줄 아는 전문가가 되어야만 하였고, 수많은 환율을 산출해 내는데 많은 경험이 필요하였다. 오늘날에는 어떤 은행원이라도 일간 신문에 발표되는 외환율의 표를 보고 환전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세기의 환전상은 거리 한 구석의 노점에서 일했고, 저울, 주판, 시금석으로 금화의 가치를 평가하였다. 그는 수백 종류의 금화의 가치가 그 금화를 만든 도시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였다. 보통 그는 금장인이었는데, 금장인으로서 그의 역할이 절대 필요하게 되자 그의 영업은 환전은행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국가간의 무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는 그의 영업방법을 과감하게 바꿀 필요가 있었다. 상인 보호 중세의 여행자는 거의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 유럽은 도적, 약탈군인, 실업자, 패망한 귀족의 놀이터였다. 노상강도는 길에서 배회하였다. 상인의 여행은 아주 위험한 것이었다. 상인들은 호송을 받고 여행하거나 스스로 단단히 무장하였지만 여전히 위험하였다. 북유럽에서 남유럽으로, 플란다스에서 폴란드로 가는데 수주가 걸렸고, 진흙탕으로 가는 힘든 여행이었다. 산사태, 부서진 교량, 범람하는 강은 위험을


더해 주었다. 마차로 여행하는 상인은 갑옷을 입었다. 그러나 갑옷과 돈 푸대는 더 좋은 목표가 되었다. 상인은 그의 돈이 자신과 함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런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여도 그곳의 돈으로 바꾸는데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유럽은 약 5 천년 전에 바빌로니아의 승려들이 국제결제를 쉽게 하는 제도를 발명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중세의 상인들은 과거의 도움없이 이 제도를 다시 고안해 내야만 하였다. 수천년 동안 각 사회는 각자의 화폐제도를 만들고, 모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 바빌론, 그리스, 로마가 망하였을 때 그들이 축적한 많은 지식과 그들이 이루어 놓은 발전은 모두 없어져 버리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이전의 생활로 돌아갔다. 고대와 심지어 중세기에도 지역간의 대화는 제한되어 있었다. 나라마다 다른 언어와 풍습이 교역과 정보교환에 장애가 되었다. 아마도 화폐로 인하여 문제가 계속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무도 화폐공급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원인을 몰랐기 때문이리라. 이 지식은 알려져 있지 않았고, 그러므로 전해 내려 오지도 않았다. 돈에 불평하는 대신 사람들은 지배자에 불평하였고, 정부를 바꾸면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중세기에 은행의 필요성이 생겼을 때 새 제도는 처음부터 무에서 시작했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금장인은 환전은행가로 되었고, 더 나아가서 예금은행이 되었다. 상인은 은행에 예금을 하고 은행으로부터 예금액을 증명하는 증서를 받는다. 이제 노상강도가 여행하는 상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타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은행증서뿐이다. 이 은행증서로는 명시된 이름의 주인공만이 돈을 받을 수 있으므로 도적에게는 단지 종이쪽지에 불과한 무용지물이다. 예금제도가 다시 처음부터 발명되었다. '신용(credit)'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다. 그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용'이라는 말을 가장 단순하게 사용하는 것은 오늘날 요구불예금 또는 당좌예금이라고 불리우는 것과 관계가 있다. 어떤 사람이 은행에 돈을 예치시키면 은행은 그의 돈을 대변에 기록한다. 은행의 계정의 대변(credit)에 기록되는 까닭은 이 돈이 은행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돈은 임자가 요구할 때에는 언제라도 내주어야만 한다. 따라서 은행이 신용장을 발행할 때, 이 증서는 은행이 예금주의 돈을 보관하고, 예금주의 지시에 의하여 돈을 내주겠다는 단순한 내용을 적은 것이다. 어느 한 은행에 돈을 예치시키고 신용장을 받은 르네상스 시기의 한 상인은 그 신용장을 다른 도시의 다른 은행에 건네줌으로써 거기에 적혀 있는 금액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그 신용장을 외국의 상인에게 보낼 수도 있었다. 이처럼 간단한 예금제도로부터 유럽의 은행가들이 '지로'라고 부르는 은행제도가 나왔다. 이 제도는 예금을 한 구좌에서 다른 구좌로 이전시킬 수 있었다. 예금주의 '지불지시'에서 현대의 수표가 나왔다. 이것은 자기 계정에 명시된 금액과 돈을 수표소지자에게 지불하라고 예금주가 은행에게 지시하는 지시에 불과하다. 국제결제


이때부터 유럽의 화폐경제는 바빌로니아가 사용하였던 것과 같은 기초 위에 세워져서 훨씬 복잡한 모양으로 급격히 성장하고, 상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새 결제제도의 도움으로 유럽의 여러 곳에서는 다시 한번 생산의 전문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플로렌스의 옷감 제조인들은 중유럽에서 옷감 무역의 독점을 차지했었다. 그들은 이탈리아로 들여오거나, 육지로는 프랑스를 거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중서부 타스카니로 들여왔다. 양쪽 길 모두 위험하였다. 그 대금을 같은 길을 통해 영국으로 보낸다는 것은 바로 같은 짓이었다. 그래서 플로렌스의 사업가들은 수천년 전에 바빌로니아인들이 했던 것처럼 종교당국과 협정을 맺었다. 이 무렵 교황청은 유럽에서 최대의 재력이었다. 교황청의 수입인 십일조 헌금, 유산, 수수료는 로마로 보내져야만 하였다. 그리고 이 때에는 영국도 아직 이 관행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플로렌스가 양모 대금을 결제하기 위하여 금과 은을 보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플로렌스의 방직업자들은 교황청에 그들이 영국의 교황청 수입을 받아서 그 돈으로 영국 양모를 사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리고 옷감을 판 돈으로 영국의 교황청 수입을 교황청에 지불하면 되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영국에서 교황청의 수입 10,000 다카트를 받아서 양모대금으로 8,000 다카트를 지불하였다고 하자. 나머지 2,000 다카트는 바다나 육지를 통해 로마로 가져 왔을까. 아니다. 그들은 나머지 2,000 다카트를 영국의 믿을만한 사업상 친구에게 맡겼다. 이 친구는 이 돈을 플로렌스의 방직업자가 사업상 관계하는 사람으로서 이탈리아나 어떤 외국에 은행계정을 갖고 있으면서 영국 상인에게 2,000 다카트 빚을 지고 있는 사람에게 주면 되었다. 이렇게 하여 국제결제방법이 발달되었다. 한 나라의 채권과 채무는 다른 나라의 채권과 채무로 상쇄되고, 다만 그 차액만이 실제로 지불되었다. 신용과 화폐 이와 같은 새 제도의 핵심은 신용이다. 채무자가 대금지불 약속을 이행하는 한, 그리고 그가 그 금액을 널리 유통되는 화폐로 지불하는 한 거래는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형식의 결제제도가 운영되면 지불수단의 형태는 무엇이든지 상관없다. 그것은 쇠막대기, 조개껍질, 금화, 증서 어느 것도 될 수 있다. 원리는 화폐가 신용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국제무역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유럽의 은행들은 화폐가치의 절하로부터 손해를 입는 위험을 제거함으로써 신용을 강화하기로 결심하였다. 은행은 금고에 보관된 귀금속이 보증하는 은행인수증을 창조하였다. 가령 함부르크의 지로은행에 1,000 길더를 예치한 사업가는 길더의 현행 환율을 걱정하지 않고도 이 증서로 홀란드나 이탈리아에서 대금결제를 할 수 있었다. 은행인수증은 종이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귀금속으로 보장받는다. 귀금속은 사업가에게 안전을 보장하였다. 17 세기 함부르크에서 고안된 이와 같은 화폐는 오늘날 중앙은행에 의해 국제결제에 사용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돈이, 유럽 결제동맹(European Payment Union)의 회원국에 의해 1950 년에 고안되었다. 이 돈은 개인 사이에서 유통되지 않고 단지 국제결제에만


사용된다. 이 돈의 단위는 '금달러(gold dollar)'이다. 동유럽에서의 상호경제원조협회(Council for Mutual Economic Aid)의 회원국들도 비슷한 돈을 고안하여 공산주의 국가들도 공동결제수단을 갖고 있다. 은행의 설립 은행업무는 두 종류의 사업으로부터 생겨 나왔다. 어떤 은행은 유럽의 대무역회사에서 파생되었다. 독일의 벨서(Welser), 후거(Fugger), 고센브로트(Gossenbrot)와 혹스테터(Hochstetter) 회사와 이탈리아의 스트로찌(Strozzi), 보로메이(Borromei), 단티니(Dantini) 회사가 그들이다. 이들 대무역회사들의 주관심사는 무역이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거래를 재정적으로 조달하여야만 했으므로 은행업무의 기술을 빠르게 발달시켜 국제결제업무를 취급하는 첫 회사들이 되었다. 다른 은행들은 현대의 예금은행의 선조인데, 처음에는 소극적인 업무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단순히 예금주로부터 돈을 받아 증서를 주고 이에 대하여 수수료를 받았다. 그들은 예금주에게 이자를 지불하는 것은 생각도 못하였다. 이때쯤 은행들은 예금주를 위해 구좌를 개설하였다. 신용장과 은행인수증을 발행함으로써 은행들은 채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돈을 갖고 돌아 다니는 위험하고 짐스러운 일을 편리하고 안전한 것으로 대체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사실상 새로운 교환수단을 창조한 셈이 된다. 이것이 초기 형태의 지폐이다. 은행들은 또한 송금하지 않고도 어음이 결제되는 어음교환소로서의 기능도 회복하였다. 지폐형태의 새 교환수단은 귀금속으로 만든 경화를 대체시켰다. 이들 경화는 사실상 은행의 금고 속에 퇴장되었다. 그러므로 지폐의 출현은 화폐공급량을 증가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이전의 금속화폐의 단순한 대용물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들 초기 은행신용장과 은행인수증은 국제무역에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일정한 시기에 결제하였다. 모든 거래를 소거하고 차액을 더하면 한 국가의 은행은 다른 국가의 은행에게 그 차액만큼 빚을 지게 된다. 그러면 이 차액은 금이나 은을 보냄으로써 모든 결제는 끝난다. 그러나 금이나 기타 화폐가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흘러나가면 지불한 국가의 화폐공급량은 줄고 대금을 받은 국가의 화폐량은 늘어났다. 새로운 은행업무 은행가들은 그 다음으로 환어음이라는 것을 고안해 냈다. 이것은 일정한 시간 내에 일정한 금액을 일방이 상대방에게 지불하겠다고 약속한 증서였다. 환어음은 신용장과 달랐다. 환어음은 예금주가 일정액의 돈을 자신의 채권자 앞으로 작성한 것이고, 신용장은 예금주 앞으로 작성되었다. 또한 예금주는 보통 신용장을 지니고 있지만 환어음은 오늘날 지폐가 유통되듯이 거래에 유통되었다. 거래 당사자의 신용상태에 따라 이 증서들은 현금처럼 생각되었고, 그렇게 취급되었다. 은행의 국제업무가 점점 커가자 그들은 외국에 지점망을 설치하였고, 이 지점망을 통해 유통되는 환어음의 양은 증가되었다. 이 제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자. 가령 제노아의 산 지오르지오 은행에 예금을 갖고 있고, 영국에 지불해야 할


빚이 있는 뉴럼버그의 상인을 생각해 보자. 그는 제노아의 은행으로부터 런던에 소재하는 제노아 은행의 거래은행을 지불인으로 한 환어음을 받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상인은 런던은행에 예금이 생기게 된다. 제노아 은행은 환어음을 상인의 계정에서 제하면 된다. 이 과정에는 세 나라가 개입되지만 어떠한 현금도 거래되지 않았다. 환어음은 번창하였고, 유럽의 대 시장도시인 브루게스, 안트워프, 리용, 베니스의 리알토, 플로렌스와 머가토 누오보와 상인의 중요한 교류장소인 대박람회에서 현금처럼 유통되었다. 환어음은 일단 발명되자 북유럽에서 급속히 사용되었다. 벨기에의 역사가가 이프레스에서 발견한 문서에 의하면 1249 년에서 1291 년 사이에 8 천장 이사의 환어음이 사용되었다. 환어음은 원래 먼 거리의 결제를 해결하려고 고안된 것이지만 결국에는 모든 상인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지불수단이 되었다. 환어음이 보편화되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어음에 서명하는 채무자가 미래 시점에 갚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시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신용 그리스와 로마제국의 시대에 비하여 중세기의 나라들은 작았고 그 정부는 약하고 가난하였다. 교역이 재개되면서 국가의 부는 왕과 군주의 손이 아니라 상인과 은행가의 손에 놓였다. 그래서 정부가 돈이 필요할 때 그들은 은행가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같은 정부의 부채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것 가운데 하나는 1199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영국의 존왕은 피아센자의 상인들에게 은화 2,215 마르크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상인들은 존왕 이전 사자왕 리차드의 십자국 원정에 돈을 댄 적이 있다. 존왕은 1202 년 다시 한번 이 상인들에게 손을 벌렸다. 그는 약속어음에 서명을 하자 마자 은화 500 마르크를 갚겠다고 약속하였다. 이것은 세금 수입으로 갚았다. 유럽의 대금융가들은 지배자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인물들이었다. 정부가 재정적으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배자들은 금융가들을 불렀다. 왕족 고객에 돈을 대기 위하여 은행가들은 아마도 세계 최초의 정부채권에 해당하는 것을 팔았다. 도시들은 곧 자신들도 이런 식으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부채권은 세금 수입으로 갚았다. 이런 종류로 가장 오래된 거래는 1164 년 제노아에서 생겼다. 대출의 위험 도시들은 국가의 지배로부터 수지맞는 시장, 화폐주조권, 조세권을 사기 위하여 돈을 빌렸다. 이같은 시도는 도시가 독립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지배자 들은 대부분 재정문제로 시달렸다. 그들은 도시에 각종 특권을 팔아서 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목적으로 돈을 빌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시정부는 자주 지나치게 돈을 빌려서 극심한 시 조세로 충당해야만 하였다. 만일 시가 빚을 갚을 수 없게 되면 시의 거주자들은 이중으로 곤란을 받았다. 시의 공채의


소유자로써 돈을 잃을 뿐만 아니라, 시의 시민으로서 정부의 빚을 갚아야 할 책임을 졌다. 당시에는 공공기관으로서 시와 개인으로서 시민의 구분이 없었다. 국가의 지배자가 빌린 돈은 유럽을 근대경제로 탈바꿈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모든 국가가 기능을 수행하는데 아주 중요한 정부부채의 기원이다. 군주들이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돈을 빌리는 것에서부터 현대정부의 공채까지는 먼 길이었지만, 그 길은 아주 분명하였다. 초기에는 정부에게 돈을 빌려 주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이었다. 유럽의 군주들은 궁전을 유지하는 비용이 오르는 것을 감당하기 위하여 간단하게 돈을 빌리고, 갚는 것은 수년을 두고 미루었다. 그 이자는 매년 쌓여 갔다. 때때로 하나의 빚을 갚기 위하여 보다 높은 이자율로 새 빚을 빌렸다. 결과는 빚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현대의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는 결코 경상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돈을 빌리지 않는다. 경상비는 조세로 충당한다. 현대국가는 공무원에게 봉급을 주기 위하여 공채를 발행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민들이 공채를 사는 것은 거의 위험이 없다. 왕위를 잡힌 왕 그러나 중세의 군주들은 건전한 정부재정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번번히 빚에 뛰어 들었다. 그들은 전리품으로 재정적 혜택을 보는 결혼으로, 거대한 유산으로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여러 기관이 돈을 빌려 주었다. 교회 정책상 이자를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수도원이 가장 성공적인 돈놀이꾼이었다. 성당기사단(the Order of the Templars)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은행업체였다. 본부를 파리와 런던에 두고 유럽 전역과 중동에 지점을 갖고 있었다. 성당기사단의 조직이 쇠퇴할 무렵 금융과 신용업을 주름잡은 것은 여러 재정단체들이었다. 14 세기에 이탈리아의 롬바르드 집안이 이 사업에 활동적이었다. 오늘날 런던의 금융가의 이름 가운데 하나가 롬바르드 거리인 것은 바로 이에 연유한다. 돈을 빌려 주는 측은 지배자로부터 조세권, 화폐주조권, 무역특혜, 식민지의 토지 등 정말로 값진 것을 받는 한 돈의 상환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빌려 주는 측은 은행가라기보다는 전당포 같았다. 프레데릭 2 세는 1251 년 제노아의 은행가에게 왕위까지 전당잡혔다. 영국의 왕 역시 돈 때문에 왕위를 전당잡히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배자에게 돈을 빌려주고 보상을 받을 수 없는 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영국의 찰스 1 세는 순전히 힘으로 돈을 빌렸다. 그리고 찰스 2 세는 그의 아버지의 빚을 갚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자조차 거부하였다. 찰스 2 세의 그같은 결정으로 많은 은행이 파산하였다. 찰스 1 세에게 빌려준 돈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은행은 예금자에게 써준 어음을 더 이상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살아난 은행 그러나 이 북새통에도 어떤 은행가들은 번창하여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이루었다. 가령 후거 집안과 벨서 집안, 알비지의 플로렌스 은행을 경영하였던


동업자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메디치 집안이었다. 메디치 집안은 노점 환전상으로부터 출발하여 마침내 군주가 나왔고, 심지어 교황까지 나왔다. 그같은 성공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은행이 많을수록 파산하는 은행도 많았다. 그 때문에 수많은 상인이 망했다. 야바위가 항상 은행파산의 이유는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은행은 자주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은행가의 판단이 자주 틀리면 오늘의 은행도 아주 곤란하게 될 수 있다. 초기 은행들이 자꾸 파산하고, 이 때문에 상인들도 피해를 입게 되자 정부가 은행을 단속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져갔다. 이같은 조치의 첫번째가 제노아의 산 지오르지오 은행이었다. 이 은행은 1407 년 제노아 정부에게 돈을 빌려 준 사람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들은 제노아 정부 수입의 운영과, 심지어 제노아의 식민지의 운영까지 감독하는 권한을 획득하였다. 그들은 해군함대를 만들고 전리품을 가질 권한도 얻었다. 은행의 총재가 시를 통치하였다. 제노아에서는 은행의 이해가 국가의 이해보다 앞섰다고 말한다. 서서히 은행과 정부는 하나가 되어 가고 동일체가 되어 갔다. 이 아이디어는 다른 도시로 퍼졌다. 베니스에서는 1587 년에 리알토 은행이 설립되었고, 밀란에서는 1593 년에 산 암브로지오 은행이 설립되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1609 년에 바이셀 은행이 문을 열었고, 여기에서부터 아이디어는 프랑스, 스페인, 독일로 퍼졌다. 이들 공립은행은 또한 공채사업에도 참여하였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참여하였다. 오늘날 정부공채는 가장 안전한 투자로 생각되지만 그 당시 유럽의 지배자들의 상환 약속은 아주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정부공채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재정운영의 분명한 개념을 가진 근대적 정부의 발달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경제가 더욱 발전하기 위하여 지폐의 사용이 필요하였다.

5. 지폐의 등장 세계 최초의 지폐는 중국에서 발명된 것 같다. 이것은 유럽인들이 돈을 종이로 만들 수 있다는 발상을 하기 수천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아주 오래 전에 중국에서 일어난 일은 유럽에서 너무 멀었으므로 중국의 발명은 유럽의 지폐 발달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유럽인에게 지폐로 가는 첫번째 조치는 정말 긴급상황에서 비롯하였다. 어떠한 종류의 경화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군대의 봉급은 지불되어야 하고, 무역은 이루어져야만 하였다. 1483 년 무어인들이 스페인의 알함브라 요새를 포위, 공략하였을 때 요새의 모든 경화는 지하 저장소로 사라졌다. 그러나 군대는 어떻게든 지불되어야 하였으므로 요새의 사령관은 지폐를 발행하여 지불하였다. 이보다 더 광범위한 지폐의 사용은 스페인 통치 하에서 네덜란드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생겨났다. 캐나다에서도 프랑스 통치 말기에 종이가 긴급통화로 사용되었다. 캐나다의 사연은 지폐발행 역사 가운데 희귀한 경우에 속한다.


긴급지폐 1685 년 캐나다의 프랑스 총독은 본국에서 돈을 실은 배가 오는 것을 수년 동안 기다려 왔다. 그러나 프랑스 왕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재정문제로 곤란을 받고 있었다. 오랫동안 유럽의 소동으로 그는 캐나다보다 더 염려해야 할 일이 많았다. 캐나다에 있는 그의 군대는 계속 봉급이 지불되지 않았다. 캐나다에서 쓰는 돈의 상당량이 군인들 호주머니에서 나왔으므로 캐나다의 교역은 감퇴되었고, 캐나다의 경제는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 총독은 놀라운 생각을 해내었다. 그는 프랑스 군대가 가지고 있던 모든 놀이용 카드를 징발하였다. 그것은 상당한 양이었다. 그는 카드를 4 등분하여 각 조각마다 그의 서명을 하고 법정화폐로 선언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그것을 경화로 상환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카드 조각은 그후 65 년 동안 돈으로 유통되었다. 파리 정부는 총독의 행동을 결코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돈은 총독의 약속과 그의 서명 이외에는 어떠한 것으로도 보증되지 않았다. 후임 총독들은 카드 화폐의 사용이 대서양을 넘어 돈을 싣고 오는 위험을 없앴다고 왕에게 긴 편지로 설명하였다. 그들은 또한 이 카드 화폐가 남쪽의 영국 식민지에서는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틀림없이 캐나다에서만 머물 것이라는 점을 지지하였다. 그것은 순수한 국내화폐이었다. 그리고 그 가치는 오로지 결국에는 그것이 경화로 태환될 수 있다는 사람들의 신뢰에 달려 있었다. 그들이 카드 화폐를 신뢰하면 할수록 캐나다는 더 강하게 프랑스에 매일 것이라고 총독들은 지적하였다. 정부의 보증으로 발행되어 유통된 첫 지폐는 30 년 전쟁 후의 스웨덴에서였다. 이 전쟁은 스웨덴의 재정을 고갈시켰다. 정부금고에 금과 은이 남질 않았다. 스웨덴의 첫 조치는 동본위제도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고액의 돈이 필요하면 그는 엄청난 무게를 짊어지고 돌아다녀야 했다. 고액 동전은 그 무게가 53 파운드나 나갔다. 선사시대 이래 가장 무거운 경화였다. 이것은 거래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그러므로 1656 년 스웨덴 정부는 지폐를 발행하여 법정통화로 선포하였다. 이것 또한 긴급상황이었고, 스웨덴은 서서히 이 지폐를 폐지하였다. 이것으로써 지폐사용의 초기 경험은 오늘날의 지폐 발행의 무대를 마련하였지만, 이것이 직접적으로 지폐출현으로 안내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지갑에 넣어 갖고 다니는 돈은 사실은 정부 가 아니라 은행의 발행에서 시작되었다. 왕의 도적질 은행권이 어떻게 발행되었는가. 이 이야기에는 흥미있는 우여곡절이 있는데 런던탑에서부터 시작된다. 16 세기에 런던의 상인들은 런던탑이 그들의 돈을 보관하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런던탑에는 이미 금, 은과 함께 조폐국이 있었다. 런던탑은 감옥으로도 쓰였는데 정치범 이외에 위조화폐범도 있었다. 조폐국은 이외에 위조화폐범을 고문하는 일도 하였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유명한 물리학자 아이삭 뉴톤 경의 마지막


공직이 조폐국장이었다. 이 요새는 수로, 담, 포탑으로 둘러싸였고, 유명한 근위병 비푸이터가 지키고 있었다. 런던 상인에게 금과 은의 보관처가 되었다. 왕이 아니면 아무도 훔칠 수 없었다. 그러나 찰스 1 세가 이 짓을 하였다. 1640 년, 의회가 찰스 1 세에게 전비를 위한 재정을 허락하지 않자 그는 런던탑의 모든 금과 은을 몰수해 버렸다. 영국 상인들은 그들의 재산을 졸지에 잃어 버렸다. 상인들은 즉시 돈을 보관하는데 더 안전한 장소를 찾기 시작하였다. 이 상적인 곳이 금장인(goldmith)의 금고인 것 같았다. 금장인은 중세에 출현한 이래 이미 은행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금과 은을 접수하여 보관하고 인 수증을 발행하였다. 이 인수증을 금장인의 지폐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돈처럼 런던의 상인 사이에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만일 한 상인이 다른 상인에게 지불하려면 그는 단지 금장인에게서 받은 인수증에 배서해서 주기만 하면 되었다. 이 인수증에는 소지자가 인수증에 적힌 금과 은의 양을 금장인의 금고에서 인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이 금장인의 지폐는 법적 보증없이 발달되었다. 사실 법은 이에 관한 한 혼란상태였다. 금장인의 지폐가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이것을 불법화하면 파탄에 빠지기 쉽게 되자 마침내 최고 법원의 법관들은 금장인의 지폐가 돈이라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금장인의 지폐는 오늘날의 지폐는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수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수표와도 다르다. 수표는 이자가 없고 예금주가 발행한다. 그러나 금장인의 지폐는 은행가가 발행한 것이고, 은행가는 예치금에 이자를 지불할 것을 약정하였다. 또 하나 중요한 차이는 현대의 수표는 수표발행자의 예치금인 당좌예금으로 보증된다. 그러나 금장인의 지폐는 금장인의 금고에 있는 전량의 금과 은으로 보증되었다. 금장인의 지폐가 법정화폐의 지위로 되기까지는 약 100 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 지위 없이도 그들은 발행되자마자 대량으로 유통되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금장인의 지폐가 전에 그처럼 광범위하게 유통되던 가치절하된 경화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연금술사 얼마 안 있어서 영국의 금장인들은 금과 은을 맡긴 예금주들이 그들의 금과 은을 찾으려고 한꺼번에 동시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금고에 있는 금과 은의 양으로 보증하는 액수 이상으로 금장인의 지폐를 발행할 수 있었다. 즉, 지폐=몇배*금의 양인데, 이때 금고에 있는 금은 그의 몇 배에 해당하는 지폐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지불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므로 준비금 또는 지불준비금이라 부른다. 결과적으로 금장인의 지폐는 100 퍼센트 귀금속으로 보증된다고 생각하였지만, 유통되는 지폐의 실제량은 금고의 금, 은의 양을 훨씬 초과하였다. 1666 년에 어떤 사설 은행가는 최소 120 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지폐를 발행 하였는데, 이 액수의 극히 적은 양만이 금과 은으로 보증되었다. 이같은 행위가 가능한 것은 금과 은을 맡긴 사람들이 동시에 인출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연금술사가 찾으려고 애썼으나 실패한 것을 초기 은행가들은 발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은행가들은 돌을 금으로 바꾸는 비법을 알아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이와 잉크를 돈으로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은행가들은 금과 은을 예치한 상인과 기타 사람들에게 이자를 지불하였다. 처음에는 각 예금주들은 그가 예치한 금은의 양이 기록된 금장인의 지폐만 받았다. 화폐량은 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금과 은은 금고에 들어가고, 대신 같은 양의 금장인의 지폐가 교환수단으로 활약하기 때문이다. 이 지폐가 100 퍼센트 금은으로 보증되고, 금은의 새 원천이 발견되지 않는 한 화폐공급량은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은행가들이 금은의 보증량보다 더 많은 지폐를 안전하게 발행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 그들은 금은이 보증하는 지폐와 똑같은 지폐를 금은의 보증없이 발행하였다. 사람들이 돈을 빌리러 은행에 오면 이 보증없는 돈을 주어서 유통시켰다. 돈을 빌리는 사람들은 물론 은행에 금은을 예치시킨 것이 없다. 금장인이 이 돈을 빌려 주면 금장인들은 마치 신대륙으로부터 금은을 실어온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돈을 창조한 셈이다. 차용자는 약속어음에 서명하고, 원금과 이자를 갚을 것에 동의한다. 이 약속어음은 차용인이 은행에 빚진 돈을 나타내므로 이것은 은행의 자산이 된다. 그리고 은행은 차용자에게 차용액을 주는데 예치한 것처럼 그 액수에 해당하는 예금을 얻는다. 이 발견의 원리는 현대의 은행제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현대의 은행은 현금 100 원을 이용하여 예금 1,000 원을 만들어 낸다. 예금주의 10 퍼센트만이 일정 시간대에 예금을 현금으로 찾아 가기 때문에 항상 예금의 10 퍼센트만을 준비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은행이 준비하고 있는 이 현금을 지불준비금이라 부르고, 이 경우 은행은 지불준비금의 10 배에 해당하는 예금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예금=10 배*지불준비금 그러면 은행은 예금 1,000 원 가운데 현금으로 100 원을 준비하고 나머지 900 원은 대출하는데 사용하여 돈 장사를 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900 원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사람들이 은행을 믿고 예금을 하고, 언제라도 현금을 요구하면 인출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즉 신용 때문이다. 이래서 신용은 창조되는 것이다. 이 원리를 발견한 초기 은행가들은 화폐량을 능력껏 증가시켰다. 화폐공급량이 아주 급속히 증가하므로 생기는 대파탄으로부터 영국이 무사했던 것은 운이었다. 영국은 해외에 제국을 막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늘어난 화폐는 제국의 팽창을 재정적으로 충당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어떤 곤란과 파탄이 앞에 놓여 있었다. 마카레이는 그의 저서 '영국의 역사'에서 많은 사설 은행가들이 새 사업에서 이윤을 얻는데 너무 몰두하여 부유한 고객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데, 이들의 신용을 판단할 수 없고 정직하지 못했으므로 파산하였다고 적고 있다.


경험 많은 금장인들이 은행업을 시작하였지만 은행 이윤의 마력은 소규모 점포주나 재봉사까지도 은행업으로 끌어 들었다. 오랫동안 파산 수가 증가함에 따라 사람들은 정직하고 노련한 은행을 정부가 설립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영국은행의 등장 여기에 자신들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었다. 이들은 모여서 120 만 파운드를 모으고 이 돈을 정부에 빌려 주었다. 대신 이들은 '영국은행'을 설립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영국은행에는 많은 특권이 부여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정부가 보증하는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근대의 은행권은 1674 년 7 월 영국은행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영국은행이 문을 열자 그때까지 은행 노릇하던 금장인들은 위협을 느꼈다. 정부의 보증 하에 영국은행은 저율의 이자율로 돈을 빌려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금장인들은 망하였다. 그들은 이것이 부당하다고 불평하고 영국은행의 존재는 상거래에 파멸적이고 파괴적이라고 주장하여 정부를 영국은행으로부터 돌려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철석같았다. 정부는 영국은행에 강력하고 믿을 수 있는 신용의 원천을 설립할 수 있다고 보고 점점 더 큰 권한을 주었다. 곧 영국은행은 영국에서 가장 큰 은행이 되었다. 당시 영국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을 유통하는 것이 법률화되지 않았는데도 최소한 런던에서는 금장인이 발행한 지폐가 사라졌다. 마침내 영국정부는 정부의 모든 금융거래를 영국은행을 통하여 하기 시작하였고, 영국은행은 또한 다른 은행의 지불준비금을 받기 시작하였다. 19 세기 초까지 영국은행은 정부의 금 보유고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영국의 중앙은행이 되는 길을 잘 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행이 화폐와 신용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일을 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세월이 필요하였다. 1790 년 영국에는 약 350 개의 개인은행이 영업을 하고 있었고, 각자 자신들의 은행권을 발행하고 있었다. 1792 년까지 이들 가운데 100 개 이상의 은행이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문을 닫아야만 하였다. 이 전쟁 후에도 277 개의 개인은행이 아직 남아서 각자 자신의 은행권을 발행하고 있었다. 1844 년 당시 수상이던 로버트 경 필 경이 후원하는 은행면허법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이 법은 영국은행의 은행권이 법정화폐이므로 누구든지 대금결제에 이것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선포하였고, 발행할 수 있는 은행권의 수량에 대하여 엄격한 규칙을 정해 놓았다. 영국은행은 조폐국과 은행국으로 나뉘어졌다. 양국은 매주 그 주의 거래계정을 발표하도록 되었다. 모든 통화량을 관리하는 정부관리은행의 발상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세계의 도처에서 실시되던 자유방임의 노선에 의하여 은행권의 발행은 모든 개인은행의 논의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권리라고 생각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어떠한 은행제도도 은행권 발행을 예금과 신용업무에서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 후 1874 년에도 여전히 은행권을 발행하는 은행이 이탈리아에는 7 개나 있었고, 독일에는 33 개가 있었고, 미국에는 수없이 많았다. 지폐의 인쇄 이제 지폐는 세계금융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지폐를 사용하는 데에는 두려운 일면이 있다. 지폐는 인쇄기가 돌아가는 속도로 빠르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금화와 은화의 유통량은 더 많은 금과 은이 발견되지 않는 한 증가할 수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금화나 은화의 가치를 절하시키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금이 완전히 보증하는 지폐 한 조각은 전혀 보증이 없는 지폐 조각과 모양이 똑같다. 그러므로 지폐가 일단 유통되면 인쇄기를 돌리는 것이 가장 쉬운 돈 만드는 방법이 되었다. 지폐가 등장한 이래로 은행가, 사업가, 정부관리, 경제학자들은 화폐량과 상품량의 균형을 맞추고, 이 균형을 유지시키는 방식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사실 심지어 지폐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화폐량과 그 가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음에 틀림없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위대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화폐론'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경화의 가치가 떨어지는 가장 흔한 이유는 경화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살았던 마틴 루터(1483-1546)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스페인의 금화 인플레이션이 유럽을 휩쓸 때 쓴 그의 소책자에서, 루터는 가격상승이 상인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을 생산자나 상인의 탓으로 돌린다. 가격상승의 이유는 이와는 아주 어뚱한 데 있는 데도 산업체가 곧잘 뒤집어 쓴다. 영국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르도(1772-1823)는 화폐량과 그 가치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인식하였다. 1817 년에 쓴 '조세 및 정치경제의 원리'에서 그는 "지폐 발행에 있어서 발행량을 제한하는 원리의 효과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지폐의 가치를 유지하려고 정금으로 태환해야 하는 것은 꼭 필요하지 않다. 단지 그의 수량을 관리하는 것만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어떠한 나라나 은행이든 지폐 발행의 무제한의 권한을 갖게 되면 반드시 그 권한을 남용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의 지폐 발행은 반드시 견제와 조정을 받아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지폐 발행자의 의무로 지폐를 금화나 금지금으로 태환되도록 의무화를 하는 것처럼 좋은 방법이 없는 듯하다"고 말하였다. 리카르도는 금의 수량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금에 묶어 놓은 지폐발행량 역시 제한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금에 묶여 놓을 때 금의 무엇에 묶어 놓는다는 말인가. 이 질문은 아래에서 보듯이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초기 지폐 남발의 역사


지폐 발행을 금에 묶어 놓을 때 금의 가치에 묶어 놓는 것이 아니고 금의 물리적인 단위에 묶어 놓아야 한다는 원리의 발견은 근대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1723-90)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여기에는 쓰라린 경험의 이야기가 있다. 아담 스미스보다 반 세기 전에 존 로우(1671-1729)라는 인물이 있었다. 아담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사람이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유대인 못지 않게 경제에 대하여 밝은 사람들이다. 근대경제학이 스코틀랜드 사람인 아담 스미스와 유대인인 데이비드 리카르도에 의해 수립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존 로우 역시 스코틀랜드 사람이다. 정말 우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존 로우는 은행권의 발행액을 토지에 묶어 발행하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 금은 귀했다. 자연 산물인 금의 생산은 빠르게 증가하지 않았다. 아무리 금의 몇 배에 해당하는 지폐를 발행할 수 있는 신용창조의 원리를 발견하였다고 하여도 지폐의 양은 역시 궁극적으로 금의 양에 의해 제한 받았다. 왕과 귀족들은 언제나 돈이 필요하였고, 자연금은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로우는 토지를 금 대신 생각하였다. 그는 또한 은행권의 발행액을 토지의 시장가치에 일정 비율로 정할 때 화폐의 가치가 안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화폐의 토지본위제도의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로우는 화폐의 공급량은 그의 담보물의 가치를 결코 넘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존 로우는 화폐가 실물경제를 활성화한다고 믿은 최초의 사람이다. 이것은 케인즈(1883-1946)가 생각했던 것보다 250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당시에 지폐는 금에 의해서만 발행되었다. 존 로우는 생각하기를, 금의 더딘 생산에 묶인 지폐 발행 때문에 지폐의 양이 쉽게 증가될 수 없으므로 이것이 실물의 증가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그는 중요한 착상을 하였다. 왜 하필이면 금이어야 하는가. 토지는 왜 안되는가. 토지는 금처럼 변하지 않고 가치가 보존될 수 있다. 그 당시 토지는 신대륙의 발견으로 거의 무한하다. 금본위제도 하에서 지폐의 발행이 묶여 있던 문제를 토지본위제도 하에서라면 일거에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지폐는 토지와 태환이 되므로 그 가치는 보장된다. 뿐만 아니라 지폐의 발행량이 토지와 연계되어 자동적으로 조절되고, 동시에 가격이 안정될 수 있는 기준을 토지가치가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토지를 담보로 지폐를 발행하는 지폐량은 실물가치에 의해 제한받으므로 결코 남발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간과한 것은 토지(실물)의 시장가치는 토지의 수량과 가격의 곱인데, 이중 토지가격은 지폐량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이었다. 지폐는 가격에 영향을 주고, 가격은 토지의 가치에 영향을 주고, 이것은 다시 일정 배수만큼 지폐를 발행케 하므로 결과는 지폐와 토지가치의 끝없는 상승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을 도식해 보면, 토지가치 -> 지폐량 -> 가격 -> 토지가격으로 영향은 끝없이 순환한다. 이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로우의


토지본위제도 하에서 지폐 발행의 원리는, 지폐량=몇배*토지가치인데, 지폐량은 다시 토지가치에 영향을 주므로, 토지가치=몇배*지폐량도 성립되어 영향이 순환함을 볼 수 있다. 로우가 설립한 프랑스은행은 지폐의 남발과 물가의 앙등으로 파산하였고, 사람들은 토지의 가치가 화폐량과 물가의 안정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이 경험은 이후 프랑스에서 은행의 발달에 막대한 지장이 되었다. 로우가 실패한 이유는 지폐의 발행근거를 토지의 물리적 단위에 두지 않고 토지의 화폐가치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폐 발행 근거는 그로 인해 발행되는 지폐에 의해서 거꾸로 영향받아서는 안된다는 지폐공급의 제 1 원리에 위배되는 좋은 예가 되었다. 이 원리를 처음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아담 스미스이다. 로우가 지폐의 발행을 실물(토지)의 담보로 묶어 두려고 한 최초의 시도라면, 아담 스미스는 지폐의 발행을 단기어음의 담보로 묶어 두려고 한 최초의 시도이다. 아담 스미스는 로우의 토지를 어음으로 대체하였다. 일종의 어음본위제도라 이름할 수 있다. 어음본위제도 스미스는 상품(실물)을 담보로 발행한 실물어음을 은행이 할인해 주는 것은 지폐량과 실물량 사이의 일정한 관계를 유지시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실물어음은 재화와 용역의 실물거래에서 발행되는 상업어음이다. 진성어음이라고도 한다. 실물거래가 없이 자금만의 거래에서 발행되는 융통어음과는 다르다. 스미스는 현대 실물어음주의의 시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스미스는 로우의 허점을 보완하였다. 그는 실물어음만으로는 지폐의 남발을 막는데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즉 실물어음의 가치에 근거를 둔 지폐의 발행은 거꾸로 실물어음의 가치에 영향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금태환으로 지폐발행을 제한하였다. 실물어음과 교환되는 지폐의 발행량을 금태환으로 제한함으로써 로우가 인식하는데 실패하였던 부분, 즉 지폐량이 어음가치에 미치는 통로를 차단하여 버렸다. 금본위제도 금본위제도는 지폐의 발행의 근거를 금의 가치가 아니라 금의 물리적인 단위에 두고 있다. 만일 금본위제도를 도입할 때 지폐의 발행을 금의 물리적인 단위가 아니라 금의 화폐가치에 근거를 둔다면 로우의 토지본위제도나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지폐량=몇배*화폐가치 금의 화폐가치=몇배*지폐량으로 순환하여 금의 화폐가치와 지폐의 양은 무한히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금본위제도 하에서 지폐의 발행은 금의 물리적인 단위인 중량에 근거한다. 이 경우 이들 사이의 순환은, 지폐량=몇배*금의 중량이


성립하여 역영향의 고리가 끊긴다. 금의 중량은 금의 가격과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1971 년 달러의 금태환 정지 때 금 1 온스에 대하여 달러 지폐 35 달러였던 것이 바로 이 내용이다. 이것은 지폐 발행의 제 1 원리를 따르는 대표적인 예이다. 관리통화제도 현대의 모든 국가는 관리통화제도를 채택한다. 금본위제도가 아니다. 관리통화제도 하에서는 통화 발행 근거를 본원통화에 둔다. 통화란 현금통화와 당좌예금의 합을 말하는데, 여기서 다시 현금통화란 중앙은행이 발행한 현금 가운데 사람들이 유통시키는 현금만을 말한다. 같은 현금이라도 시중은행이 보유하는 현금은 지불준비금이라고 부른다. 지불준비금과 현금통화의 합이 본원통화이다. 그러니까 본원통화란 대체로 중앙은행이 발행한 현금의 합을 말한다. 관리통화제도 하에서 통화는 본원통화의 몇 배로 창조된다. 즉, 통화=몇배*본원통화이다. 본원통화는 금본위제도 하에서 지폐발행의 근거인 금의 중량에 해당하고, 통화는 금본위제도 하에서 지폐량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때에도 통화발행의 제 1 원리는 지켜야 한다. 즉 인위적 관리의 대상인 본원통화에 외부적인 영향이 미쳐서는 안된다. 금본위제도에서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것은 금의 가치가 아니라 금의 중량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이 원리가 깨지는 것을 본다. 가령 한때 시중의 자금은 풍부한데 자금이 부동산에 몰려 기업측에서는 자금이 부족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이 말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어떤 사람은 자금이 부동산으로 가기도 하지만, 일부 기업측으로 가는 돈도 있으므로 이런 때일수록 돈을 더욱 풀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통화발행의 근거를 부동산 가격에 두라는 논리나 마찬가지로서 로우의 실수를 모르고 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때 중소기업의 자금조달이 어렵다고 하니까 대통령이 중소기업의 어음을 모두 할인해 주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그렇게 하면 그 결과는 위에서 본 바대로 로우의 실수를 재현할 수 있다. 관리통화제도 하에서는 통화발행의 근거가 되는 본원통화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

6. 예금화폐 화폐는 생활하는 데에나 사업하는 데에 편리한 것이다. 인구가 많고 재화와 용역의 양이 많을 수록 돈도 더 많이 필요하다. 이것은 식품가게나 백화점 이외의 곳에서도 많은 상거래가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알 수 있게 된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고 고용자는 노동력을 산다. 그 가격은 임금이다. 세금으로 낸 돈은 고속도로를 내로 교량을 건설하는데 쓰인다.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건설업자에게 고속도로와 교량을 사는 셈이다. 여하간 모든 것은 지불되어야만 한다. 공짜는 없다. 수천년 동안 세계의 인구는 증가하였고, 이들이 사용하는 재화와 용역의 종류도 크게 증가하였다. 사람들은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수세기를 두고 올바른 상태에서는 화폐 공급량의 점진적 증가가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국가의 발전이 돈이 부족해서 지체되거나 너무 많아서 해를 입었던 수많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회상해 보면, 두 경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해로운 경우였던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화폐량은 그의 수요에 부응하여 증가해 왔다. 우리는 화폐량이 지나치게 많이 유통되지 않게 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인플레이션의 문제와 싸우고 있다. 최초의 상업은행 화폐의 역사 가운데 상당 기간은 인간의 문명이 화폐공급량의 제멋대로의 변화에 좌우되었다. 귀금속의 경화가 유일한 화폐인 시절에는 화폐공급량은 금과 은의 새 광맥의 발견에 달려 있었고, 전쟁의 승리에 달려 있었고, 지배자의 분별없는 정책에 달려 있었다. 지폐가 처음 사용되었을 때 이것은 그 소유자가 금과 은으로 태환할 수 있다는 단순한 믿음에서 가능하였다. 즉 지폐는 귀금속으로 완전히 보증되었다. 지폐는 금과 은이 보증하는 양 이상으로 유통되지 않았다. 그같은 지폐의 사용은 화폐공급량을 증가시키지 않았다. 화폐공급량의 증가는 귀금속의 공급량의 증가에 달려 있었다. 중세기의 금장인은 사람들의 금과 은을 자신의 금고에 보관하였고, 금인수증을 발행하여 주었다. 금인수증은 오늘날의 지폐처럼 유통되었다. 금의 소유자(예금주)는 이같은 초기 지폐로 그들의 사업을 해 나갔다. 고객의 사업활동에 따라 금장인은 때때로 그의 금고의 금을 다른 금장인에게 이전시켜야 했다. 이 현상은 그가 예금주에게 발행한 금인수증이 상품대금의 지불로 사용되고, 이것을 인수한 다른 상인이 다른 금장인에게 예치할 때 일어났다. 반대 현상이 일어나면 물론 이 금장인은 다른 금장인으로부터 금을 이전받았다. 이같은 금과 은의 전출입에도 불구하고 금장인은 그의 금고 속에 얼마간의 금과 은이 유휴상태로 항상 남아있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모든 예금자들이 같은 시간에 한꺼번에 금을 인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같은 경험으로 그들의 예치금 모두가 결코 동시에 인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금장인들은 사람들이 금을 많이 예치하도록 이자를 지불하기 시작하였다. 또 그들은 대출을 시작하였다. 대출이라 함은 예나 지금이나 돈을 빌려 주는 것을 말하는데, 이 당시 돈은 금장인이 발행한 금인수증이었으므로 금장인은 차용자에게 자신의 금고에 남아 있는 금을 근거로 금인수증을 발행해 주었다. 그러나 이 금에 대해서는 이미 인수증을 발행하였으므로 중복으로


인수증을 발행한 셈이다. 이렇게 하여 대출을 통하여 그의 금고에 금을 예치시키지 않은 차용자에게도 금인수증을 발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자를 청구하였다. 이런 식으로 발행된 대출은 금과 은의 공급량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복하여 몇 배로 금인수증의 공급량을 증가시켰다. 만일 모든 예금주들이 일시에 금을 인출하지 않고 일정 기간에 20 퍼센트만 인출한다면 금장인은 금의 보유량에 대하여 5 배의 금인수증인 금태환 지폐를 발행해도 사람들이 금을 인출하는데 대비하여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태환지폐의 양=5 배*금의 양 이렇게 되면 금의 양은 흡사 금의 5 배에 해당하는 지폐량을 금태환하는데 대하여 대비하는 준비금이라 할 수 있다. 지불준비금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금장인의 업무는 오늘날의 상업은행의 업무와 아주 흡사하다. 지폐를 발행함으로써 그들은 상거래를 용이하게 했고, 이 서비스에 대하여 수수료를 받았다. 그들은 금과 은의 예치를 책임지고 이에 대해 이자를 지불하였다. 대출을 하고 이자를 청구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상업은행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야 했다. 당좌계정 현대 은행제도의 편리한 당좌계정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진흙 서판이나 중세기의 금장인의 금인수증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당좌계정은 1850 년까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19 세기 말까지 보편화되지 않았다. 은행가의 용어로는 이 계정을 요구불예금이라 불리운다. 예금주는 언제든지 그의 요구로 현금을 이 계정에서 찾을 수 있다. 당좌계정에 예금할 때에는 예금주는 수표책과 예금액이 기입된 구좌를 받는다. 예금주가 무언가 지불할 일이 생기면 그는 현금을 사용하는 대신 그의 수표에 금액과 상대방 이름을 쓰고 서명하여 주면 된다. 이 수표는 은행에게 자신의 돈을 지불하라는 지시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수표로 지불한다고 하자. 또 두 사람 모두 같은 은행에 구좌를 갖고 있다고 하자. 수표를 받은 사람은 수표에 배서를 하고 그것을 자기 계정에 넣는다. 수표의 서명자의 지시에 따라 은행은 수표액을 그의 계정에서 수표의 수취인의 계정으로 이전시킨다. 청구서는 지불되었으나 실제 현금이 왕래한 것은 아니다. 수표는 현금처럼 사용되었다. 이 모든 것은 당좌예금 때문에 가능한데, 그러므로 당좌예금을 예금통화라 부른다. 예금주의 입장에서 보면 당좌예금은 아주 편리하다. 그는 거액의 현금을 갖고 다닐 필요가 없다. 도난당할 염려도 없다. 청구액을 우편으로 지불할 수 있다. 현금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상업은행은 당좌계정 업무를 제공하는 대가로 적은 수수료를 받는다. 위의 예에서 수표의 청산은 간단하였다. 쌍방이 같은 은행의 고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도시에 수많은 은행이 있다. 수백만 장의 수표가


거래된다. 런던의 사업가는 버밍험 소재의 은행 앞으로 발행한 수표를 받을 수 있다. 뉴욕 시만은 샌프란시스코 소재의 호텔 숙박비를 뉴욕 은행 앞으로 발행한 수표로 지불할 수 있다. 모든 수표는 거래은행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다. 오늘날 셀 수 없이 많은 수표를 정리하여 거래은행으로 보내는 수표청산작업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 작업은 수표를 수취한 사람이 거기에 배서를 하고 자신의 거래은행의 자기 계정에 예치함으로써 시작된다. 그 거래은행은 수표액만큼 그의 계정을 증가시킨다. 그리고 나면 이 수표는 수표결제소로 보낸다. 여기에서는 수표가 도시별로 분류된다. 해당 은행이 이 수표를 받으면 수표 서명자의 수표액만큼 제하여 이 수표를 청산시킨다. 마지막으로 청산된 수표는 수표 서명자에게 보내어진다. 이 방법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숙박비로 지불된 뉴욕 시민의 수표는 뉴욕 은행으로 보내어진다. 오늘날 수표의 분류는 기계가 하고 있다. 예금과 인출은 계속되는 현상이다. 당좌예금에 관한 한 장기적으로 보면 예금과 인출은 같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예금주는 은행이 당좌대월을 허락하지 않는 한 당좌예금액 이상을 수표로 쓸 수 없다. 어떤 시점에서 수표결제의 결과로 하나의 은행은 다른 은행에 빚질 수 있다. 그리되면 은행 사이의 잔금 결제로 채권채무가 청산된다. 이것 역시 흔히 은행수표로 이루어진다. 현금없는 사회 오래 전부터 모든 지불이 현금으로 이루어졌다. 귀금속의 제한된 공급량으로 돈이 부족하면 상거래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상거래는 현금을 사용하지 않고 이루어진다. 현대국가는 지폐와 경화가 필요없는 시대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만일 수표결제소의 기능이 완벽하다면 돈이 전혀 필요없게 된다. 이 제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모든 노동자가 고용자로부터 현금 대신 수표로 봉급을 받는다. 노동자는 이 수표를 자신의 당좌계정에 입금시킨다. 그리고는 노동자는 신용카드로, 혹은 수표로 청구서들을 지불할 수 있다. 한편 고용자는 어떻게 돈을 얻는가. 그 역시 그의 상품의 판매대금을 수표로 받아서 자신의 당좌계정에 입금한다. 인출되지 않는 예금 상업은행은 민간에게 당좌계정을 제공한다. 미국에서는 어떤 은행들은 수표 1 장당 10 센트 정도의 수수료를 부과한다. 그리고 많은 은행들이 구좌당 매월 50 센트나 1 달러의 수수료를 부과한다. 그러나 이 수입은 상업은행의 주요 수입원이 아니다. 상업은행은 대출에서 이윤을 만든다. 중세기 금장인의 금고에 예치된 금이 모두 같은 시간에 인출되지 않는


것처럼 상업은행의 당좌계정도 한꺼번에 같은 시간에 인출되지 않는다. 이것은 당좌예금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은행 금고에서 떠나지 않고 인출되지 않는 자금의 양도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업은행은 이 유휴자금을 이용하여 기업이나 개인에게 대출하는 것이다. 개인의 대출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만원을 빌려 주면 돈은 그를 떠나서 그의 친구에게로 이전된다. 따라서 구매력이 이전된다. 그가 만일 현금 대신 수표를 주어도 마찬가지이다. 그 친구가 만원을 상환할 때까지 그는 이 돈으로 살 수 있는 재화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같은 개인간의 대출은 화폐공급량을 증가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은행의 대출이 지폐 한 장 경화 한 개 등을 추가로 발행하지 않고 화폐공급량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지만 사실이다. 은행의 대출 개인간의 대출과 달리 은행의 대출은 화폐공급량을 증가시킨다. 영국은행이 설립되었을 때 일단의 기업가들이 돈을 모아서 시작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상업은행도 동업자가 동을 모아서 시작하거나 일반에게 은행 주식을 팔아서 돈을 모아 시작한다. 그후 은행의 수수료 수입과 이자 수입이 설립자본에 추가된다. 만일 상업은행이 자신의 돈만으로 대출을 한다면 이것은 위에서 인용한 개인간의 대출과 같다. 그러나 은행의 자본금의 대부분은 대출에 사용할 수 없다. 그 돈은 은행건물, 계산기 등에 투자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상업은행의 대출금은 은행의 자본금이 아니라 은행 금고로부터 인출되지 않는 유휴자금으로 이루어진다. 예금주들이 예금을 모두 같은 시간에 인출하지 않기 때문에 이 자금을 사용할 수 있다. 예금을 낳는 대출 상업은행의 이같은 대출업무는 오래된 전통이다. 누구나 이 사실을 안다. 이것은 합법적이다. 그리고 상업은행은 예금주가 자신의 돈을 전액 요구하면 언제라도 내줄 의무가 있다. 대출이 되면 차용자는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겠다는 계약서에 서명을 한다. 보통의 경우 차용자는 부동산, 어음 등 가치있는 것을 담보로 제시하여야 한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 은행은 차용자에게 대출금을 주거나 해당금액을 차용자 이름으로 당좌계정을 만들어 준다. 화폐공급량은 대출금만큼 증가한다. 현대의 은행이 대출업무를 하기 전에 화폐공급량은 지폐의 양에 제한되어 있었다. 은행의 대출 업무의 등장과 함께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총화폐량은 지폐와 당좌예금의 합으로 정의된다.


대출금은 궁극적으로 은행에 예금되어 당좌예금이 되므로 상업은행의 대출은 화폐공급량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상업은행은 당좌예금된 돈으로부터 대부분의 대출금을 마련한다. 따라서 당좌예금이 증가하면 대출금은 증가한다. 그러나 대출금의 증가량은 당좌예금의 증가량보다 약간 작다. 당좌예금의 일부는 예금주가 인출하는데 대비하여 준비금으로 항상 대기시켜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상업은행의 대출금은 다시 당좌예금으로 된다. 한 은행에서 돈을 빌린 차용자는 그 돈을 다른 은행에 예금시키기 때문이다. 또는 그 돈을 사업상 쓰면 이번에는 이 돈을 받은 사람이 다른 은행에 예금시킬 것이다. 어떠한 경우이든 이 돈을 받아 은행은 이것을 다시 대출금으로 사용할 수 있다. 호황 반대로 대출금을 갚으면 그 액수만큼 화폐공급량이 줄어든다. 그러므로 상업은행의 대출업무가 화폐공급량을 좌우한다. 이것은 화폐량이 전적으로 금의 공급량에 달려 있던 시절에는 가능하지 않았다. 상업은행은 대출금을 공급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 화폐공급량을 증가시킬 수는 없다. 기업과 가게가 돈을 빌려가지 않는 한 화폐공급량은 증가하지 않는다. 경기가 좋을 때 사람들은 낙관적이 되고 지불을 늘린다. 가령 모든 것이 좋아 보일 때 돈을 빌려 집도 짓고 차도 산다. 사업 역시 경기를 탄다. 매상이 올라가면 생산을 증가시키려 하고 그래서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 어떤 규제가 없으면 은행은 원하는 만큼 대출하려 할 것이다. 대출의 증가는 이자 수입의 증가이기 때문이다. 은행도 다른 사업과 마찬가지로 호경기에 부응하려 한다. 대출의 증가는 당좌예금을 증가시키고, 이것은 다시 여유자금을 증가시킨다. 각 개별 은행은 더욱 대출금을 증가시킬 것이고, 총화폐공급량은 상품의 공급량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게 된다. 마침내 인플레이션이 들이닥친다. 불황 은행은 예금주의 요구에는 언제라도 예금을 돌려 주어야 한다. 상업은행은 한 푼의 지폐를 만들지 않고도 대출금을 만들어 내므로 은행이 맡고 있는 지폐의 양은 그들이 만든 대출금의 양보다 훨씬 적다. 만일 차용자와 모든 예금주가 같은 시간에 그들의 돈을 모두 인출하려 하면 은행에는 이들 모두를 지불할 돈이 없다. 상업은행은 이같은 일이 켤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대출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는 일로 사람들의 낙관이 불안과 공포로 바뀔 수 있다. 조그마한 도시에 아주 중요한 회사의 파산이 이같은 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어느 지역의 전쟁의 돌발이나 중요한 선거 결과의 소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과거 위기상황을 보면 공포가 나타나서 지역을 무서운 속도로 휩쓸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돈이 이제는 은행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금으로 집의 어딘가에 깊숙이 감추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 이같은 때에 사람들은 은행이 예상하지 못하던 행동을 할 수 있다. 모두 같은 시간에 은행으로 달려가서 그들의 예금을 현금으로 요구한다. 은행은 모두 예금주에게 현금을 내줄 수 없다. 예금의 일부만 지불준비금으로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예금주들이 돈을 잃게 되고 공황은 시작된다. 예금통화의 창조 모든 예금주들이 일시에 예금을 현금으로 찾아가지 않는 관습의 발견은 위대한 발견이다. 현대의 은행제도는 기본적으로 이 관습에 기초한다. 현대의 은행은 현금 100 원을 이용하여 예금 1,000 원을 만들어 낸다. 예금주의 10 퍼센트만을 준비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행이 준비하고 있는 이 현금을 지불준비금이라고 부르는데, 이 경우 은행은 지불준비금의 10 배에 해당하는 예금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은행은 예금 1,000 원 가운데 현금으로 100 원을 준비하고, 나머지 900 원은 대출하는데 사용하여 돈장사를 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900 원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사람들이 은행을 믿고 예금을 하고, 언제라도 현금을 요구하면 찾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믿음 때문에 모든 예금주는 일시에 자신들의 예금을 현금으로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즉 신용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지폐공급 원리 이 원리를 이용하여 현대국가의 중앙은행은 돈을 공급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국가에 있어서 현금은 중앙은행만이 발행한다. 가령 중앙은행이 100 원의 현금을 발행하였다고 하자. 그리고 이 현금 가운데 사람들이 60 원을 유통시킨다고 하자. 그러면 나머지 40 원은 시중은행이 금고에 갖고 있게 된다. 같은 현금이라도 사람들이 유통시키는 현금을 특별히 현금통화라고 부르는데 대하여, 시중은행이 갖고 있는 현금 40 원은 현금통화라고 부르지 않고 사람들이 예금을 현금으로 인출하는데 대하여 시중은행에 대비하는 지불준비금이라고 부른다. 이 40 원의 지불준비금은 시중은행측에서 보면 자산이지만 중앙은행이 발행했으므로 중앙은행측에는 부채가 된다. 그러므로 시중은행은 중앙은행에 지불준비금에 대하여 10 배에 해당하는 400 원의 당좌예금을 발행할 수 있다. 당좌예금 총액 가운데 10 퍼센트만이 단위 시간대에 현금으로 인출해 가기 때문이다. 이 400 원의 당좌예금은 당좌수표로 쓸 수 있고, 이 수표는 누구든지 받으므로 이것도 돈이 된다. 이 돈을 예금통화라 부른다. 그러면 360 원의 대출이 가능하게 된다.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돈의 크기는 현금통화 60 원 뿐만 아니라 당좌수표로 쓸 수 있는 예금통화 400 원까지 더하여 460 원이나 된다.


현금통화에 당좌예금을 합한 것을 통화라 부르는데, 결과적으로 중앙은행은 100 원의 현금만 발행하여 460 원의 통화와 360 의 대출자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100 원의 발행액으로 4.6 배의 돈을 만들어 낸 셈이다. 이때 중앙은행이 발행한 100 원의 발행액을 본원통화라고 부른다. 이 관계를 수식으로 적어 보면, 460 원의 돈=4.6 배*100 원의 본원통화가 된다. 여기에서 숫자 4.6 은 4.6 배를 나타내므로 배수 또는 승수라고 부른다. 더 정확한 말로 표현하면 통화승수라고 부른다. 우리가 통화를 영어의 'money'의 머리글자 M 에 숫자 1 을 붙여서 M1 으로 표기하고, 통화승수를 역시 영어의 곱하기에 해당하는 'multiplier'의 머리글자 m 에 숫자 1 을 붙여 m1 으로 표기하고, 본원통화를 영어의 'base money'의 머리글자 B 로 표기하면 위의 원리를, M1=m1*B 로 나타낼 수 있다. 이 원리의 발견이야말로 인류가 발견한 위대한 발견 가운데 하나이다. 은행이 지불준비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하고 이 지불준비금에 몇 배에 해당하는 예금을 창조함으로써 이 원리는 돈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금융기관의 수 위에서 통화승수는 여러 은행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설명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현금 100 원을 갑은행에 예치하면 은행은 10 원을 지불준비금으로 남겨 놓고 나머지 90 원은 대출한다. 90 원을 대출받은 사람은 사업자금으로 지출하지만, 이 돈을 받은 사람 또는 몇 사람의 손을 거쳐서 을은행에 예치하고 나머지 81 원은 대출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면 모든 은행의 지불준비금의 합은 100 원이 되고, 이 지불준비금에 의해 창조된 모든 은행의 예금의 합은 1,000 원이 된다. 그런데 이 신용창조는 서로 다른 은행의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아니고, 동일은행의 서로 다른 지점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다. 또는 단일은행의 단일 접포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은 신용창조가 금융기관의 수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화승수는 금융기관의 수와 무관하다. 지불준비율의 변화 그런데 예금주들의 10 퍼센트만이 돈을 찾아갈 것이라는 법은 없다. 이 비율을 지불준비율이라고 부르는데 이 비율은 수시로 변한다. 가령 지불준비율이 20 퍼센트로 상승하였다고 하자. 그리고 중앙은행이 발행한 현금은 100 원으로 변함이 없다고 하자.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여전히 60 원을 유통시키고 나머지 40 원은 시중은행이 시중은행이 지불준비금으로 중앙은행에 예치하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지불준비율이 20 퍼센트일 때 시중은행은 이 40 원으로 200 원의 당좌예금을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이 유통시키는 현금통화 60 원에 200 원의 당좌예금을 더하면 통화는 260 원이 된다. 이 통화는 100 원의 본원통화에 2.6 배에 해당하므로 통화승수는 2.6 이다. 따라서 이 경우 관계식은,


260 원의 통화=2.6 배*100 원의 본원통화가 된다. 이상의 두 예에서 보듯이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같은 본원통화에 대하여 지불준비율이 높아지면 통화승수가 낮아진다. 결과적으로 통화량이 감소하게 된다. 따라서 지불준비율은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조절하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나라에서 지불준비율은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금융통화운영위원회에서 정한다. 이 위원회는 경제사정을 감안하여 지불준비율을 바꾸어 통화량을 조절한다. 현금 선호 근래에 실명제로 현금 선호가 높아졌다. 현금 선호가 높아지면 중앙은행의 통화공급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위의 예로 돌아가 보자. 중앙은행이 발행한 현금 100 원 가운데 사람들이 60 원을 갖고 나머지 40 원은 시중은행이 갖고 있었다. 지불준비율은 10 퍼센트이다. 중앙은행은 현금을 더 이상 발행하지 않는데, 어떤 사정으로 사람들의 현금 선호가 높아져 60 원에서 70 원으로 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결과적으로 시중은행은 30 원만 지불준비금으로 보유하게 된다. 그러면 지불준비율이 10 퍼센트일 때 은행은 당좌예금을 300 원어치 발행하고 통화는 370 원이 된다. 100 원의 본원통화로 370 원의 통화를 만들게 되니 통화승수는 3.7 이다. 따라서, 370 원의 통화=3.7*100 원의 본원통화 통화가 460 원에서 370 원으로 감소하였는데, 이것은 현금선호의 증가로 통화승수가 낮아졌기 때문이다. 현금 선호는 중앙은행이 조절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현금 선호가 중앙은행의 의도와 다르게 변하면 통화승수의 크기에 불규칙하게 영향을 미치므로 중앙은행이 통화를 관리하는데 그만큼 어려움을 준다. 현금 선호의 정도를 통화에 대한 현금통화의 비율인 현금통화비율로 측정하는데, 이 현금통화비율이 의외로 변하면 통화관리의 정확성을 잃게 된다. 사실상 요즘에 와서 신용카드의 빈번한 사용으로 현금통화비율이 불규칙하게 낮아지고 있는데 이것이 통화관리에 영향을 주고 있다. 실명제로 현금통화비율이 높아지면 통화승수가 낮아져 같은 본원통화에 대하여 통화량이 감소한다. 따라서 전과 같은 수준의 통화량을 유지하려면 본원통화를 같은 비율만큼 증가시켜야 한다. 말하자면 현금 선호의 증가율만큼 현금을 더 찍어내도 통화량에는 변동이 없다. 위의 예에서는 지불준비율이 10 퍼센트, 지불준비금이 40 원, 현금통화는 60 원, 본원통화는 100 원이었다. 그리고 예금통화가 모두 당좌예금뿐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400 원이 모두 당좌예금이었다. 이제 예금통화는 당좌예금뿐만 아니라 저축성예금까지 포함한다고 하자. 그리고 이 400 원 가운데 당좌예금이 100 원이고 300 원이 저축성예금이라고 하면 현금통화와 당좌예금의 합인 통화 M1 은 160 이므로, 160 원의 통화 M1=1.6 배 통화승수*100 원의 본원통화 의 관계가 설립되고, 현금통화와 당좌예금과 저축성예금의 합인 총통화


M2 는 460 원이므로, 460 원의 총통화 M2=4.6 배 총통화승수*100 원의 본원통화의 관계가 성립한다. 총통화가 통화보다 크므로 총통화승수가 통화승수보다 큰 것은 당연하다. 신용창조 시중은행은 소위 제 1 금융권이라 부르는데 금융기관에는 이같은 제 1 금융권의 시중은행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투자신탁회사와 같은 제 2 금융권의 금융기관도 있다. 시중은행을 통화성 금융기관이라 부르는 것은 시중은행은 예금통화인 당좌예금을 발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하여 제 2 금융권의 금융기관은 비통화성 금융기관이라 부른다. 예금통화인 당좌예금을 취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 2 금융권의 역할을 무엇인가. 제 2 금융권은 추가적인 신용을 창조하는 역할을 한다. 시중은행이 예금통화를 지불준비금의 몇 배로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예금을 인출하지 않는 관습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중은행이 지불준비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원리를 이용하여 비통화성 금융기관은 시중은행에 지불준비금을 예치하고 그 몇 배의 예수금을 창조한다. 말하자면 통화성 금융기관은 비통화성 금융기관의 중앙은행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비통화성 금융기관의 예수금은 그 지불준비금의 몇 배가 된다. 아래 그림에서 안의 잘은 원은 본원통화의 크기를 나타낸다. 이 본원통화에 근거하여 통화가 두번 째 동심원만큼 증가할 수 있다. 그 증가 비율은 통화승수로 측정된다. 이처럼 통화성 금융기관의 존재는 본원통화의 크기를 변경함이 없이 경제 내의 자금사정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림생략" 이에 대하여 비통화성 금융기관은 통화성 금융기관과 달리 예금통화를 창조할 수 없다. 그러나 비통화성 금융기관은 시중은행에 예금통화의 형태로 예치된 지불준비금에 근거하여 신용을 창조함으로써 경제의 자금규모를 더 크게 확대시킬 수 있다. 총통화에 비통화성 금융기관의 예수금을 합친 것을 총유동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세번째 동심원으로 표현된다. 두번째 동심원과 세번째 동심원의 비율이 비통화성 금융기관에 의해 증가된 자금증가율이다. 첫번째 동심원인 본원통화와 세번째 동심원인 총유동성의 비율은, 총유동성=몇배*본원통화의 관계로 표현된다. 이 배율을 총유동성의 승수라 부른다. 금융시장 점유율 통화성 금융기관과 비통화성 금융기관의 시장점유 비율은 총유동성


승수의 크기에 영향을 준다. 비통화성 금융기관의 자산 크기가 통화성 금융기관의 자산크기에 비하여 커지면 커질수록 총유동성 승수의 크기는 커진다. 비통화성 금융기관의 수 총유동성 승수는 비통화성 금융기관의 수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모든 비통화성 금융기관을 통화성 금융기관으로 전환하면 총유동성 승수는 총통화승수와 동일해진다. 즉 총유동성의 크기는 총통화와 일치하게 된다. 이같은 일은 비통화성 금융기관을 그대로 둔 채 그의 지불준비금을 통화성 금융기관 대신 직접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7. 화폐량의 관리 화폐의 역사는 화폐량이 너무 적으면 경제의 발전이 지체되었고, 너무 많으면 물가가 상승하여 마침내는 금융위기까지 초래한다는 것을 수없이 되풀이 설명하고 있다. 현대의 은행제도의 발달은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화폐량은 상업은행의 업무를 이용하여 어렵지 않게 늘릴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 가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화폐량을 언제, 얼마만큼, 어떻게 변경해야 하는가이다. 적정화폐량 매일 평균적인 거래를 수행하고 긴급상황에 예비하기 위하여 보통은행은 총예금의 일부만 현금으로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서 은행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화폐량의 규모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이건 미국이건, 어느 나라건 중요한 문제는 개별 은행이 얼마만큼 화폐량을 창조하느냐가 아니라 은행제도 전체가 얼마만큼 화폐량을 창조하느냐이다. 다행히 오늘날에는 고대로부터 수수께끼였던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세 가지 정보가 주어져 있다. 고대에는 이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설사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였다 하여도 이 정보가 없어서 문제 해결에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한 국가의 화폐공급량은 알려져 있다. 지폐의 발행과 경화의 주조는 정부가 관리하므로 현금의 유통량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은행은 보고서를 제출하게 되어 있으므로 요구불예금의 총액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재화와 용역의 공급량도 알려져 있다. 이것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이면 충분하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정보를 갖춘 셈이다. 한편으로는 화폐공급량과, 다른 한편으로 상품의 공급량이 그것이다. 세번째 정보는 불과 50 년 전만 해도 알 수 없었던 것으로서 가격과


가격동향에 관한 것이다. 이 정보는 이제 기계적으로 수집된다. 가격이 급히 오르기 시작하면 이것은 화폐량이 너무 빠르게 증가한다는 신호이므로 그것을 둔화시키거나 마침내는 정지시키는 수단을 발동시켜야 할 것이다. 엄청난 화폐량 관리 오늘날 잉글랜드에는 8 개의 대은행 그룹이 대부분의 상업은행 업무를 장악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에는 4 개의 그룹이 있다. 북아일랜드에도 몇 개의 그룹이 있는데 이들은 단편적이다. 각 그룹은 지점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영국 은행제도는 매우 중앙집중화되어 있다. 다른 유럽 국가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미국에는 13,000 개 이상의 상업은행이 있다. 이들 가운데 지점을 갖고 있는 은행도 있지만 영국과 대조적으로 미국 은행들은 하나하나 독립된 은행이고 업무지역이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연방준비제도를 제외하고는 단일의 은행정책을 실시하기가 어렵다. 미국 은행의 약 3 분의 1 은 국립은행이고, 이들은 자동적으로 연방준비제도의 회원 은행이다. 나머지는 주 은행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규모가 큰 주 은행들도 연방준비제도의 회원 은행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상업은행의 예금 가운데 80 퍼센트 이상이 연방준비제도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폐량을 관리하는 일은 엄청난 작업이다. 중앙은행 오늘날 모든 국가는 중앙은행을 갖고 있다. 영국의 영국은행, 독일의 독일연방은행, 미국의 연방준비제도, 한국의 한국은행 등이다. 이들 은행의 유래와 역사는 나라마다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국가의 화폐공급량을 관리하고 정부의 금융활동을 돕기 위하여 정부가 설립한 것이다. 중앙은행의 특징은 고객이 일반은행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특징은 중앙은행과 상대하는 은행들은 중앙은행이 정한 규칙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 점은 일반은행과 고객과의 관계와 다른 점이다. 일반은행의 고객들은 자신의 돈을 관리하는데 은행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 중앙은행이 고객인 일반은행에 부과하는 규칙 가운데 하나는 매우 중요하다. 일반은행은 예금액의 약 6 분의 1 을 중앙은행에 예치시켜야 한다. 이 예금은 준비금으로서 일반은행이 대출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중앙은행에 예치된 준비금은 고정된 금액이 아니고 고정된 비율이다. 이것은 상업은행의 예금이 증가하면 그 준비금도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앙은행이 정부와 연결이 되어 있으면 예금주들이 은행의 파산으로 예금을 잃는 것에 대하여 최대의 보험이 된다. 정부는 모든 예금주들이 불시에 동시에 예금을 인출한다 해도 모두에게 현금으로 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은행의 장부는 정기적으로 검사 받는다. 은행의 규제는 은행의 운영과 신용을 크게 신장시켰다. 중앙은행이 정부와 연결되어 있는 형태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중앙은행이 정부의 직접 통솔 하에 있어 독립을 잃는 형태가 될 수 있고, 중앙은행이 정부와 연결되어 있으면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형태가 될 수 있다. 중앙은행이 예금주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정부의 직접 통솔을 받을 필요는 없다. 예금자보험제도를 이용하면 된다. 그러나 예금자보험제도는 최근에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켰다. 보험을 믿고 금융기관이 방만하게 운영하다가 손해를 보고 파산 지경에 이른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렇다고 이 사건이 예금자보험제도 자체를 무용하게 만들고, 중앙은행을 정부의 직접 통솔하에 두어야 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 중앙은행의 독립 중앙은행은 왜 독립되어야 하는가. 흔히 중앙은행의 목적은 통화가치의 안정에 있다. 이 목적의 원활한 달성을 위해서 중앙은행의 독립이 보장되어야 한다. 관리통화제도 하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본위화폐제도 하에서 통화는 어느 정도 자동조절기능에 맡겨지므로 관리통화제도에 비하여 통화가치의 안정은 어느 정도 보장된다. 그러나 관리통화제도 하에서는 중앙은행의 독립은 중앙은행의 외적 조직의 이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것은 국민의 기본권이 보호되기 위하여 삼권이 분리, 독립되어야 하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이같은 이치로 중앙은행의 독립을 제 4 부의 독립이라고도 부른다. 중앙은행의 독립을 국민의 기본권과 결부시켜 이해한 최초의 국가는 미국이다. 건국 초기에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은 국가의 화폐신용을 관리하기 위하여 중앙은행의 설립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무장관인 토마스 제퍼슨은 헌법이 그같은 권한을 의회에 부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이에 대하여 해밀턴은 의회가 여러가지 책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필요하고도 적절한'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는 문구를 들어 반박하였다. 그후 해밀턴의 주장대로 1791 년 미국 제일은행의 설립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중앙은행의 설립이 헌법에 근거하고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미국인들은 전통적으로 무엇이든지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 독립 초기에 설립되었던 제 1 은행과 제 2 은행이 중앙은행으로서 그 설립인가를 연장할 수 없었던 것은 순전히 금권이 은행가에게 집중되는 것을 두려워 하였던 미국인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보면 중앙은행의 설립의 반대는 미국 독립 이후 줄기차게 이어져 온 보수와 진보의 싸움의 한 예에 불과하다. 헌법이란 본질적으로 사유재산권이 정부에 선행한다는 개념을 선언한 경제적 문서일 뿐이고, 국가의 목적이 사유재산권의 보호에 있다고 믿는 보수주의자들은 중앙은행의 설립을 적극 옹호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주의회의 권한을 제한하여 부유층의 이익을 침해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도록 하여야 한다. 가장 중요한 예가 인플레이션을 조장하는 지폐


발행의 금지였는데, 그 효과적인 방법이 중앙은행의 설립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은 국가의 목적은 전체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헌법은 그 목적을 위한 계약으로 파악하였다. 제퍼슨과 잭슨의 정치적 강령은 소수의 기득권자보다는 전체 국민을 보호하는 금융제도를 창설하기 위해 중앙은행을 해체하였다. 이 사건은 상반되는 두 개의 정치철학, 즉 재산이 국가를 통치한다는 철학과 국가적 특권과 이익에 종속한다는 철학간의 대립이 절정을 이룬 예이다. 잭슨 대통령에 의해 제 2 은행이 문을 닫은 채 수십년 동안 미국인은 중앙은행을 갖지 못했다. 1913 년 월슨 행정부 때 중앙은행의 설립에 대하여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진보와 보수는 소위 대타협을 하여, 중앙은행을 설립하되 하나가 아니라 열 두개로 구성하였다. 이것이 현재의 중앙은행제도인 연방준비제도이다. 이것은 미국인의 기질을 잘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금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싫어하고, 더우기 금권이 분산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연방제도를 정부와 의회로부터 독립시켰다. 이 독립은 중앙은행을 운영하는 연방준비제도의 이사들의 구성과 임기뿐만 아니라 연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도 지켜질 수 있었다. 1913-35 년에는 재무장관이 당연직 이사였으나 1935 년 이후 재무장관은 이사가 아니다. 연방준비제도가 그 설립과정에서부터 지금까지 초지일관해 온 것은 통화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정부나 금융가까지 포함하여 모든 이익단체로부터 압력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연방준비제도는 일반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 국민은 삼권의 분리, 독립만으로 그 자유가 보장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도처에서 금권이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본다. 만약 경제력이 정치력과 결합된다면 더할 나위없는 권력집중이 될 것이나 경제력이 정치력과 독립적으로 유지된다면 경제력은 정치력의 집중을 견제하고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정치적 자유를 성취하는데 있어서 경제제도의 기본이다. 그런데 경제력 분권화의 핵심은 역사적으로 볼 때 화폐제도에서 연유한다. 화폐는 노동의 전문화에서 생겼고, 거꾸로 노동의 전문화를 심화시켰다. 화폐가 없는 상태에서 노동의 전문화는 한 개인의 경제생활을 다른 개인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고대에 각 개인이 특별한 기술에 숙달되면서 자신이 필요한 물건보다는 자신의 전문화된 물건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시간을 하나의 기술에 바치면서 개인은 독립성과 자유를 잃었다. 화폐의 사용은 노동의 전문화를 심화시키면서 개인의 독립성과 자유를 복구시켜 주었다. 개인은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전보다 더 의존해야 하지만 그 의존은 화폐로 인하여 평등한 것이 되어 자유를 잃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많은 경우에 화폐는 개인의 자유를 신장시켰다.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제도는 장점이 있으면서 단점도 있다. 화폐제도라고 예외가 아니다. 지금은 화폐경제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화폐의 역사를 보면 화폐제도는 경쟁의 원리로 운영되지


못했다. 최초의 금화와 은화의 출현, 최초의 지폐의 등장 등은 그것이 정착될 때까지 오랫 동안 사람들에게서 의혹의 눈총을 받았다. 새로운 금융제도의 실시는 새로운 파탄과 퇴보의 씨가 들어 있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이 모든 의혹, 염려, 불안은 불신이다. 이 불신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화폐제도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다. 이 불신은 화폐제도가 경쟁의 원리 하에서 독립적으로 운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세기에 영주가 화폐주조권을 특정인에게 양도한 역사적 경험은 오늘에도 살아 있다. 금융의 특혜는 독립적으로 운용되는 중앙은행의 결정이라기보다 정부의 허가의 원리로 운용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늘날 경제학자가 우려하는 것은 소득이나 부의 분배가 한계생산원리에 의한다기보다는 허가에 의한 금융특혜에 의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형 귀족주의는 주식, 공채, 통화와 같은 금융제도의 조작으로 형성된 것이기에 금융과두정치에 의한 착취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계급의 특권을 정치적 과정을 통해 파괴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이같은 이유로 제퍼슨은 중앙은행의 설립조차 반대하였다. 그는 중앙은행의 독립을 바랬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이상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독립이 보장된다면 제퍼슨의 이상은 현실에서 가능할 것이다. 화폐는 신뢰의 상징이고, 분권적 경쟁원리의 기본이다. 화폐제도가 경쟁원리가 아닌 허가의 원리로 운용되는 한 화폐제도에 대한 신뢰는 기대될 수 없다. 신뢰는 더 이상의 정보가 결핍되었을 때 뛰어 넘어야 할 차원이다. 신뢰냐 불신이냐 하는 것은 개인, 단체, 정부의 특성에 대한 개인의 평가에 따른다. 이 평가는 개인이 얼마나 자유스러우냐에 달려 있다. 신뢰의 연약함은 바로 개인의 자유의 연약함에서 유래된다. 20 세기 초 유럽에서 화폐제도가 와해되었던 경험은 케인즈와 동시대의 영국인들에게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케인즈는 화폐제도의 제일 목표가 불신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불신은 화폐제도가 분권적 경쟁원리로 운용될 대 제거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화폐제도의 핵심인 중앙은행이 은행가의 수중에 있다면, 만일 중앙은행이 대기업가의 수중에 있다면, 또 만일 중앙은행이 어느 특정의 이익단체의 수중에 있다면 일반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서류상으로만 보장받고 실제로는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왜 중앙은행을 특정 이익단체가 탐내는가. 그것은 그 단체가 자원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원에 대한 청구권을 표시하는 화폐를 펜이나 인쇄기로 쉽게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공짜 점심이 없기 때문에, 어느 단체가 공짜로 얻는 자원의 청구권에 대해서는 다른 단체가 지불해야 하므로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된다. 이것이 국민의 기본권인 재산권 침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여기에 간단하지 않은 문제가 있다. 정부는 행정부에 대한 책임을 의회에 지고 있다. 이 이유를 들어서 정부는 전통적으로 중앙은행의 행정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해 왔다. 현재 한국의 통화정책은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운영위원회가 수행하고


있는데, 그 위원회의 의장은 재무부장관이며, 그 외 8 인의 위원 가운데 금융기관이 추천하는 2 인의 위원을 제외한 6 인의 위원은 기획원장관, 농림수산부장관, 상공부장관이 추천하도록 되어 있다. 정부의 영향력은 직접적이다. 뿐만 아니라 재무부장관은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의결사항에 대하여 재의를 구할 수 있으며, 그 요구가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재적위원 3 분의 2 이사의 의결로서 부결되었을 때 대통령이 이를 최종 결정하는 것을 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한국의 통화정책은 사실상 금융통화운영위원회라는 형식을 빈 행정부의 소관이다. 따라서 행정부가 통화정책의 책임을 전적으로 지고 있는 셈이다. 사실상 한국은행이 1950 년에 처음 출발했을 때 중앙은행법은 당시로서는 너무 파격적이어서 위헌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법이 대륙법을 따른 것인데, 중앙은행법은 미국 중앙은행법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논란이 되었던 대목도 통화정책의 최종책임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였다. 이 법을 기초하였던 미국 중앙은행의 브룸필드 박사는 중앙은행을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통화정책의 최종책임이 정부에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대부분의 전문가의 견해와 상충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부 의원들은 금융통화위원회(당시)에 그같은 권한을 독점적으로 부여하는 것이 금융독재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강력히 반대하기도 하였다. 초대 총재 구용서씨는 "한국은행은 경제적 민주주의와 국민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지향하는 우리 헌법의 기본정신을 창달하기 위해 창설한 민주기구"라고 전제하고, "국가기관이면서도 어떠한 정치적 압력으로부터도 초연할 수 있는 참된 국민의 기관으로써 공개적, 민주적, 여론적 궤도 위에서 운영한다"고 말하였다. 또한 통화신용정책의 최종의결기관인 금융통화위원회는 금융, 산업, 경제의 각계 대표로 구성되어 중의제 하에 자치권을 부여받아 금융통제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안정에 공헌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애초의 중앙은행법의 독립정신은 쇠퇴되고, 법 개정을 통하여 정부의 간섭이 강화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헌법에 한국은행의 독립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은 경제발전을 주도해 온 정부의 고의적인 의지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한국은행법 제 3 조를 보면 한국은행의 주요 목적에 경제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이 안된다. 2 차대전 후 독일이 경제발전의 기적을 이루는데 정부의 간섭없는 중앙은행의 독립으로도 총분히 해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마도 독일만큼 중앙은행의 독립을 헌법에 강력하게 보장하는 국가도 없을 것이다. 독일연방법에는 국가의 모든 행정활동이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정부 밑에 두어야 한다는 의회책임제의 원칙이 모든 경우에 예외없이 타당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연방 이사회는 연방최고기관의 지위를 가지며, 중앙은행이사회는 수상의 기본정책상의 지시, 각 장관의 업무상, 인사상의 감독에는 복종하지 않는다.


풀이하면 독일은 연방중앙은행을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와 동일한 위치에 두어 완전한 4 권을 분리, 독립시키고 있다. 이것은 독일이 겪은 심한 인플레이션 경험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유럽국가에 있어서 중앙은행이 정부의 지시를 받는 국가는 공교롭게도 입헌군주국가이다. 영국, 벨기에, 덴마크, 스웨덴이 그렇다.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정부활동이 최종적으로 국왕에 대해 책임을 져온 역사적 소산에서 유래된지도 모른다. 과거 왕정시대에 발권력이 국왕에 있었던 전통이 형태를 달리하여 계승되어 온 유습이라 볼 수 있을까. 이렇게 볼 때 경제발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중앙은행을 정부 의 밑에 두어야 한다는 견해는 설득력이 없고, 여건이 비슷한 일본이 그러니까 우리도 그렇게 참고한다는 맹목적 추종도 설득력이 없다. 또한 미국도 처음 20 년은 연방준비제도 이사에 재무장관을 당연직으로 포함시켰으나 그 이후 재무장관을 제외시켰음을 상기해 보면 한국은행 설립 50 년이 되는 오늘날 재무부장관이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의장의 직책을 여전히 수행하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중앙은행이 정부로부터 독립한다고 해서 정부와 상충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와의 관계는 협력관계를 유지하면 된다. 이것은 행정부와 입법부의 협력관계를 상기하면 된다. 물론 협력은 중앙은행이 국민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각계각층과 협력한다는 의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이사를 지낸 마이젤 교수는 연방준비제도가 정책결정을 내릴 때 참고하는 각계의 의견 비율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행정부 35 퍼센트, 의회 25 퍼센트, 여론 20 퍼센트, 금융계 10 퍼센트, 외국 5 퍼센트, 기타 5 퍼센트이다. 이것을 보면 중앙은행이 정부와 협력하는 것 못지 않게 여론과도 협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중앙은행과 정부의 관계의 바람직한 모습이다. 결과론이지만,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비교적 잘 보장된 국가일수록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나라들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 까닭은 중앙은행의 독립은 정부의 때때로 중립적이지 못한 통화정책의 요청에서 벗어나 국민의 이해를 위해 일할 때 요청되는 직업적 정책가의 독립된 행동에 있을지 모른다. 아이젤 교수는 회고하기를, 한 달에 평균 20 일 이상 매일 보통 2-3 시간의 공식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또 한 달에 평균 3 번 정도 여러 회합에서 공식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 연방준비제도의 이사로서 직무수행에 바친 시간은 꼽을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중앙은행이 독립되면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기구의 위원은 겸직하기에는 너무도 벅찰 정도로 통화정책 수립에 온 정력과 시간을 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앙은행 독립이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하여 통화정책에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중앙은행이 정부 밑에 있는 경우에도 통화정책에 온 정력과 시간을 바치는 무리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경우 중앙은행이 독립된 경우에 비하여 중립적인 통화정책을 실시할 수 없고, 정부의 이해를 반영할


위험이 크다. 현재 한국의 경우 금융통화운영위원들은 겸직하고 있으며, 위원회의 모임도 한 주에 한번이다. 이것이 정부의 지시를 받는 중앙은행의 운영 보습이다. 결국 재무부의 관리들이 입안한 정책을 추인하는 수동적인 기능에 머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이젤 교수처럼 교수직을 떠나 이사직에 완전히 시간과 정력을 바친다고 할 때 통화정책 수립에 미치는 연방준비제도 내부기구의 영향도의 비율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의장(재무장관이 아니다) 45 퍼센트, 공개시장위원 25 퍼센트, 이사 20 퍼센트, 연방준비은행 10 퍼센트이다. 이들이 자신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이들을 돕는 산하기구도 방대한 규모이다. 결국 이렇게 볼 때 중앙은행의 독립을 반대하는 주장들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물론 중앙은행의 독립은 정부에게는 불편한 점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불편은 중앙은행이 정부와 의견대립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나타내고, 이 경우 중앙은행이 국민의 이해를 따라 행동한다면 이것만으로도 벌써 중앙은행의 독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국가의 통화정책을 몇 사람으로 구성된 독립된 기구에 맡기기에는 너무 중대하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는 국가의 사법정책을 몇 사람으로 구성된 독립된 대법원에게 맡기기에 너무 중대한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문제는 이같은 저차원의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통화정책 실체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일이다. 오히려 화폐는 너무 중요하므로 정부에 맡길 수 없다. 이같이 이해하면 중앙은행의 독립은 갈브레이드 교수의 말대로 신화만은 아니다. 화폐공급량의 팽창 일정 시점에서 개별은행은 그의 예금액을 초과하여 대출할 수 없다. 또 개별은행은 중앙은행에 예치한 준비금을 인출할 수 없다. 개별은행이 대출을 할 때 그 돈이 곧 현금으로 인출되어 다른 은행으로 이전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돈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 개별은행은 더 이상의 대출자원을 마련할 수 없다. 그러나 돈은 경제 내에서 돌고 돈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움직일 때에는 새로운 예금이 대출로 나간 자리를 메워 주어 또 대출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중앙은행의 입장에서 보면 전체 은행제도로는 예금이 증가하게 된다. 이같은 과정은 수학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한다. 은행이 예금의 6 분의 1 을 준비금으로 남기고, 나머지 6 분의 5 를 대출하면 전체 은행제도의 총예금은 준비금의 6 배로 증가한다. 화폐공급량의 감소 사람들이 돈을 빌리고 싶어하는 한 은행은 허락되는 한도 내에서 대출을 최대로 늘린다. 대출이자 수입이 은행의 주요 수입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화폐량은 커진다. 사람들이 계속 돈을 빌리고 싶어하는 사실은 돈이 필요하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출금을 갚기 시작하고 새로운 대출을 원하지 않으면 화폐량은 감소한다. 대출금은 요구불예금에서 현금을 인출하여 상환한다. 요구불예금은 감소한다. 이것이 반복되고 새 대출이 계속되지 않으면 화폐공급량은 줄어들어 은행에는 유휴자금이 쌓이게 된다. 화폐공급량의 조절 은행의 신용은 늘리고 줄여서 화폐공급량을 조절하는 방법은 확실히 전에 경화가치를 절하시키는 방법이나 기타 고대에서 사용하였던 방법보다 훨씬 실제적이다. 그러나 한 국가의 화폐공급량의 증가가 상품의 거래량과 항상 일치된다는 보장은 없다. 가령 전시에 생산되는 대부분의 상품은 전쟁물자이다. 이 경우 상품의 거래량은 화폐량보다 훨씬 적을 수 있다. 중앙은행은 이 문제를 다룰 줄 안다. 전쟁과 같은 긴급상황이 돌발하면 중앙은행은 상업은행이 예치하는 준비금을 증가시킨다. 이 조치는 자동적으로 화폐공급량을 줄인다. 자금은 감소되고, 자금이 귀하기 때문에 더 비싸진다. 즉 대출이자율이 오른다. 기업가와 개인들은 웬만하면 돈을 빌리려 하지 않는다. 이래서 화폐공곱량은 증가하지 않는다. 준비금의 증감만이 화폐량을 조절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방법이다. 전쟁에 사용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정부가 지불해야만 한다. 전비를 세금으로 충당한다면 소비자가 써야 할 화폐량이 자동적으로 줄어 든다. 이것은 전쟁물자의 감소된 소비재의 거래량과 대략 일치하게 된다. 소비자는 원하는 물건을 살 수는 없지만 물가는 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가 은행에서 돈을 빌리거나 지폐를 발행하여 전비를 조달하면 화폐량은 증가하고 위험한 인플레이션이 뒤따르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인플레이션 물가의 상승은 대개의 경우 화폐량의 증가 때문이다. 만일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정지시키기 위하여 화폐량을 감소하기로 결정하면 그들은 물가동향을 세심히 관찰해야 한다. 물가동향이 중앙은행의 처방이 효과적인가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나라가 작고 조직도 잘 안되었던 오래 전에는 정부의 경비는 전체 경제에 비하면 매우 적었다. 그러나 현대의 정부는 재화와 용역의 수요자 가운데 단일 수요자로써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부의 엄청나고 끝없는 재정문제를 돕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중앙은행은 정부의 은행으로 행동하고, 정부의 은행으로써 그의 주 임무는 화폐공급량과 상품의 공급량 사이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정부를 재정적으로 도와 주는 것이다.


어떤 나라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물자가 그 나라에서 생산된다고 하자. 원료를 공급하는 모든 기업체와 고용된 모든 노동자들은 지불되어야 한다. 노동자들은 평화시의 일에서 전시의 일로 이동되었을 뿐, 그들의 소득으로 지불되는 화폐량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자는 모두 전쟁터로 나가기 때문에 생활필수품과 기타 상품은 자연히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화폐량은 상품의 거래량보다 커졌다. 다른 조치가 위해지지 않는 한 물가는 급격하게 오를 것이다. 사실 이같은 현상은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수없이 되풀이 되었다. 최근의 경험 60 년대 후반에 영국과 미국은 인플레이션으로 고통을 겪었다. 양국의 인플레이션은 매우 복잡한 것이므로 단순히 화폐량과 상품량의 불균형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특히 미국은 엄청난 국방비를 유지해야만 하였다. 결과적으로 상품의 거래량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노동자는 임금의 상승을 요구하였고, 관철되었다. 임금의 상승과 다른 생산비의 증가는 가격을 상승시켰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조치를 취하기 전에 미국의 해외에서의 수입상품량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같은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화폐공급량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영국의 내핍 영국 정부는 수입상품량을 줄이는 조치를 취하였다. 또 일시적으로 임금상승을 억제하였고 법인세를 올렸다. 이에 부응하여 중앙은행은 대출량을 긴축하고 이자율을 상승시켰다. 이같은 일련의 조치는 화폐공급량이 증가하는 것을 막았다. 국내 소비지출도 감소되었다. 인플레이션은 진정되었다. 수입은 줄고, 수출이 증가되었다. 1970 년에 가서야 이들 조치가 완화되었다. 미국의 긴축과 세금 미국에서는 물가가 1968 년에 급격히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추세는 1969 년에도 계속되었다. 이 인플레이션은 미국의 월남전쟁비 조달방법에 그 원인이 있었다. 미국은 모든 법인과 개인의 소득에 10 퍼센트 추가세를 부과하였다. 또 감세계획을 연기하였다. 여러가지 누세를 막았다. 연방준비제도는 화폐량을 줄이지는 앉았지만 그 증가는 멈추게 하였다. 이자율은 몇 년 동안 계속 올라 있었다. 이들 조치는 미국경제의 성장을 둔화시켰다. 생산량은 1968 년 7 월에 감소하기 시작하였고, 그 해 말에 경제성장은 사실상 정지하였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억제 노력이 성공적이었는지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가격안정의 밑바닥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경기부양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는 영국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수입을 줄였고, 수출을 증가시켰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과 미국이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화폐공급량의 규제를 사용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과거에도 많은 사람들이 실업상태에 있었고, 산업이 활발하지 못한 때가 많이 있었다. 그 당시의 치료법은 지출을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그러한 시절에 중앙은행은 화폐공급량을 늘리고 대출이 완화되도록 조치를 취함으로써 경기를 부양시킬 수 있었다. 불황시에나 인플레이션시에나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도구로서 화폐공급의 관리에 대한 신념은 정당화될 수 있다. 대논쟁 그러면 화폐공급의 관리가 경제적 목표인 인플레이션 없는 성장을 달성하는데 유일한 방법인가. 긴 화폐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를 자주 괴롭혔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화폐량을 조절하는 방법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어떤 경제학자들은 그렇다고 믿는다. 인간은 마침내 기본적인 경제원리를 이해했다고 주장한다. 경제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으므로 화폐공급량을 조절하는 일이야말로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고 경제성장을 촉진하는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경제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미심쩍어 해한다. 오늘날 정부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그의 경비를 조달하는 방법이 화폐공급을 조절하려는 시도와 상충될 수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정부의 균형재정이 국가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고 말한다. 또 다른 경제학자들은 정부재정을 보전하는 조세와 화폐량 조절의 혼합방식이 국가의 경제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조세와 중앙은행이 함께 그 기능을 수행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아주 좋은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왜 두 가지 방법에 함께 의존하지 않는가. 모든 경험, 실수,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견해 차이는 아직 좁혀지지 않고 있고,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화폐를 넘어서 영국이 10 진법의 화폐제도로 바꾸는 시도는 혼란을 빚고 있다. 이같은 혼란은 곧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시간문제이다. 미국은 얼마 전에 25 전 은화를 만드는 것을 중단하였다. 지금의 25 전은 구리를 섞었다. 미국은 이같은 경화의 가치절하를 고대 로마가 겪었던 혼란에 빠짐이 없이


잘 수행하였다. 세계의 현대국가에서 화폐는 여전히 그 기능의 대부분을 잘 수행하고 있다. 형태는 달라도 파운드, 프랑, 마르크, 리라, 달러 등은 편리한 교환의 매개체이다. 교환의 매개 역할은 의심할 나위없이 화폐의 주기능이다. 또 이들도 모두 훌륭한 가치의 척도이다. 그러나 가치의 저장수단으로써 화폐의 자격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정도는 다르지만 세계 도처에서 성행하고 있다. 사람들은 물가상승에 익숙해 졌기 때문에 화폐를 더 이상 가치의 저장수단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주식, 보험, 증권 등에 투자한다. 새로운 화폐 기술의 발달로 교환제도에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화폐는 교환에 아주 유용하지만 도난의 염려가 있는데, 신용카드는 이점을 훌륭히 해결해 주었다. 온라인 제도 역시 화폐의 단점을 해결해 주었다. 온라인과 신용카드제도의 합성품인 전자이체제도(EFTS:dldctronic fund transfer system)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이 제도 하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신용카드와 지폐는 사라진다. 이 제도의 모든 거래 주체는 은행과 연결된 컴퓨터를 갖고 있다. 거래가 이루어지면 자신의 계좌에서 상대방의 계좌로 이채된다. 이 거래에 돈이나 신용카드가 필요없다. 전자이체제도 하에서 화폐는 형태가 없고 사람들은 계좌번호만 있으면 된다. 전자이체제도 하에서 금융거래가 실명제로 될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현금도 실명제가 된다. 이것이 화폐의 최후의 모습이 될 것이다. 전자이체제도가 보편화되기 전에 화폐의 모습은 당분간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최근에 새로운 형태의 화폐를 구상하고 있다. 우선 화폐의 재질은 종이가 아니고 플라스틱이다. 화폐의 수명을 늘리게 되는 효과뿐만 아니라 위조화폐의 위험을 덜게 된다. 화폐에 인쇄되는 초상화는 할로겐 사진을 이용하여 위조를 막는다. 무엇보다도 새 형태의 화폐의 하이라이트는 플라스틱에 넣는 미세한 마이크로칩이다. 만불 이상의 고액권에 넣는 이 마이크로칩은 공공건물 등에 설치한 간단한 장치에 의하여 점검되도록 도어 있다. 불법거래를 막 을 뿐만 아니라 탈세를 포착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

8. 영국의 화폐와 은행 귀금속을 돈으로 사용할 때, 돈을 만드는 기회는 그 금속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있었다. 대개의 경우 군사나 정치지도자들이었다. 줄리어스 시저와 기타 로마의 장군들은 정부의 허락으로 전쟁터에서 금화를 만들었다. 금은 전리품의 일부였고, 그것은 군인들에게 지불되는 데 사용되었다. 하여간 새 금화는 지출될 때마다 유통되었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귀금속이 실제로 유통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랬다. 금덩어리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금화와 바꿀 수 있었고, 금광업자는 사금푸대를 금화와 바꿀 수 있었다. 다분히 기회가 국가의 화폐량을 조절했다고 본다. 그리스의 드라크마와 로마의 데나리우스 및 아우레우스는 모두 불행한 운명을 당했다. 로마의 멸망 후에 금화가 유통에서 사라졌다. 경제는 정지상태가 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물물교환으로 돌아갔다.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부 유럽의 문명이 번영으로 돌아가는 것은 길고 느렸다. 도시 내의 교역과 국가 사이의 교역이 다시 한번 증가되었다. 너무 많은 돈이 유통될 때 인플레이션과 번영이 있었고, 돈이 적어서 디플레이션인 때도 있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실수는 거듭거듭 되풀이 되었다. 가난한 나라가 부자가 되었다가 다시 가난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화폐량을 관리하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하였지만, 발전은 계속되고 화폐의 사용은 서부 유럽에서 확고히 실시되었다. 가치절하된 화폐 중세기 마지막에 가치절하된 경화의 사용이 다시 보편화되었다. 이것이 당시로서는 급속히 증가하는 거래에 필요한 화폐량을 증가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새로운 귀금속의 공급이 주어지면 새 금화가 발행되었다. 새 돈은 곧바로 유통되었지만 오래된 절하된 돈도 함께 쓰였다. 처음에는 은화로 시작한 돈도 점차 가치절하 때문에 동화가 되었고, 동화가 되자 작은 가치가 부여되었다. 이것들은 오늘날 동전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소액거래에 토큰으로 사용되었다. 이 무렵 대부분의 발달된 국가의 정부는 화폐주조권을 되찾았다. 그들은 수수료 수입 때문에 시민들이 가져 오는 어떠한 귀금속이라도 기꺼이 경화로 주조해 주었다. 이 과정은 아주 간단하다. 사금이건, 금덩어리이건, 보석이건 금의 소유자가 조폐국에 가져온다. 순도를 검사한 다음 수수료를 제한 액수의 새 금화를 소유자에게 지불한다. 그때마다 화폐량은 증가하였다. 이 제도는 실로 제멋대로이었다. 잡동사니 전문화된 은행이 등장할 무렵에 유통되던 경화는 잡동사니였다. 대부분의 경화는 오랜 사용으로 완전히 닳아 버렸으므로 대강의 크기, 무 게, 색깔만으로 구별할 수 있었다. 또 경화를 함부로 다루었다. 오늘날 이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가령 경화에 구멍을 뚫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은 경화의 가장자리를 깎고 표면을 줄로 쓸었다. 심지어 이 시절에도 위조는 흔했다. 오래되고 손상된 경화는 금속의 함량 미달로 새 경화만큼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이 경화들(악화)이 새 경화(양화)를 유통에서 몰아


내었다. 또 외국인들도 악화를 거절했으므로 악화가 양화를 나라 밖으로도 몰아낸 셈이다. 영국 정부는 이같은 상황을 고쳐 보려고 자주 경화를 재주조하고 가치를 절하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화폐손상을 억제시키려 하였다. 화폐손상은 특히 헨리 8 세의 재위 후반과 1660 년부터 세기 말까지 아주 심했다. 그러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폐손상은 계속되어 1694 년 영국은행이 설립한 후 100 년이 지날 때까지도 문제가 되었다. 은행이 중요하게 되다 영국은행은 대혼란에서 질서를 찾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처음 은행이 시작되었을 때 은행가는 단지 중개인의 역할만 하였다. 실제로 돈을 보내지 않고도 은행 사이의 계정으로 결제되었다. 은행은 수수료를 받고 이 업무를 하였다. 상인이 귀금속을 예치한 것은 은행금고 속에 있어서 손상되지 않았다. 은행이 예금주의 금과 은으로 보증하는 은행 인수증을 발행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들은 화폐주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은행은 자신의 은행권을 인쇄하여 이자와 함께 원금을 상환하겠다는 사업가나 다른 사람에게 빌려줌으로써 화폐량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폐주조는 정부만의 책임으로 되었다. 은행이 새로 발견한 능력, 즉 대출을 통하여 화폐량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능력은 엄청난 것이지만, 그들은 거의 이해하지 못하였다. 은행이 금고에 보관된 귀금속의 양을 초과하여 대출함으로써 화폐공급량을 증가시키기 시작하였을 때 은행의 이 행위는 귀금속의 양이 전적으로 화폐량을 결정하던 시대를 영구히 종지부지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기본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은행이 너무 많은 돈을 발행하는 것을 막는 장치가 아무 것도 없었다. 정부 후원 은행 은행권의 발행을 모든 은행이 양도할 수 없는 권한이라고 생각하고 이었다. 이 특권은 자주 남용되었지만, 은행권은 곧 거래량이 귀금속의 공급량보다 일반적으로 빠르게 증가한다는 현상을 보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정부가 돈이 필요할 때 은행의 다른 고객처럼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정부는 은행으로부터 직접 돈을 빌렸으나 나중에는 정부가 민간에게 정부공채를 매각하여 자금을 얻도록 은행이 도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비, 도로와 항만건설 등을 충당하기 위한 정부재정의 필요는 급속히 커갔기 때문에 정부는 곧 은행의 가장 크고 중요한 고객이 되었다. 사실 정부지출과 재정은 아주 중요해져서 누구나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영국은행의 성장


근대적 은행업무가 발전하기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고, 그 사이에 수많은 금융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결국에는 사람들은 과거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어떻게 화폐량을 관리하는지는 몰랐지만 그것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들은 또한 후세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화폐의 역사가 물물교환에서 금을 거쳐 지폐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도처에서 거듭 되풀이된 것처럼, 영국은행의 발전도 다른 시기에 다른 곳에서 반복되는 중앙은행 발전의 본보기가 되었다. 영국은행은 1694 년에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중앙은행이다. 영국은행의 설립자는 나중에 할리팍스 경이 된 찰스 몬테규와 은행의 첫번째 부총재가 된 마이클 고후리이다. 금융사회에서 이 두 사람의 영향력은 영국은행의 성공의 초석이 되었다. 1700 년대에 영국은행은 예금을 취급하고, 환어음을 다루고, 부동산이나 귀금속을 담보로 대출도 하였다. 이중경화제도 이 무렵에는 금화와 은화가 함께 유통되어 로마처럼 영국은 잠시 이중경화 화폐제도 하에 있었다. 조폐국은 정부가 관리하였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삭 뉴톤 경이 조폐국장이었다. 은에 비하여 금에 상대적으로 높은 가치를 부여했으므로 금이 화폐제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오래 유통되는 그 금화일수록 칼로 깎이고 줄로 쓸고 구멍이 뚫어져 그 가치가 아주 절하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새 금화는 퇴장시켜 쓰지 않으려 하였다. 화폐 주조의 수수료를 물리지 않는 데도 양화를 충분히 유통시키는 일은 항상 문제거리였다. 그레샴의 법칙은 어디에서나 문제였다. 이에 대하여 아이삭 뉴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초기의 금화는 둥그런 가장자리에 아무 장식이 없었으므로 미세하게 칼로 깎아내고 줄로 쓸어낸 자국을 사람들이 알 수 없었다. 금은 부드럽기 때문에 이렇게 깎아낸 부스러기는 모았다가 또 하나의 금화를 만들 수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눈치 안 채게 이런 짓을 하였다. 뉴톤은 금화의 둥그런 가장자리에 톱니모양의 장식을 하였다. 금화를 받았을 때 이 톱니모양의 장식이 없으면 사람들은 받지 않는다. 말하자면 흠이 있는 돈이 되어 유통시키는데 애를 먹이므로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동전에도 이같은 톱니모양의 장식은 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남아 있다. 정부은행 18 세기 중엽에 영국은행은 국고증권을 유통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또한 국채를 매각하기도 하였다. 1751 년 영국은행은 정부 부채의 관리를 떠맡았다.


유통되는 지폐는 여러 종류의 은행권이었다. 영국은행의 은행권은 런던에서 사용되었고, 기타 은행의 은행권은 각 지역에서 유통되었다. 이들 은행권은 태환지폐였지만 법정통화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금과 은을 고집할 수 있었다. 불환지폐 하의 영국 영국은 1793 년 2 월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의 동맹국들이 프랑스와 제각기 조약을 체결하자 영국은 혼자 남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전비조달을 전적으로 영국은행에 의존하였다. 금이 영국에서 대륙으로 유출되고, 겁먹은 사람들은 은행에서 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행에서 유출되는 금의 양이 너무 많아지자 1797 년 2 월 영국은행의 총재는 금태환을 정지해 버렸다. 영국은 불환지폐본위제도로 되고, 이것은 1821 년까지 계속되었다. 금본위제도 하의 영국 1816 년 법이 제정되어 5 년 후에 영국은 금본위제도를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즉 금화가 다시 주요 통화가 되었다. 금화가 법화였고 모든 은행권을 보증하였다. 은화는 은 가치 이하로 평가되어 토큰 화폐가 되었다. 은화는 소액지불에 대하여만 법화였다. 1821 년 은행들은 은행권의 태환을 재기하였다. 영국 정부는 모든 경화를 주조하는 책임을 지고 경화의 내용물 함량을 관리하였다. 그러므로 낡고 손상된 경화가 유통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고 새 경화로 대체되었다. 경화의 질은 정부가 보증하였다. 경화에는 신의 모습 대신 영국에서는 왕이나 여왕의 모습이 자리잡았고, 미국과 그밖의 나라에서는 정치가나 국가의 상징이 자리잡았다. 금화는 백년 이상 유통되었는데, 그 크기가 금의 가치에 비례하여 다소 차이가 있었다. 오늘날의 소액 동전인 토큰 화폐는 오랫동안 가치절하로 가치가 하락된 경화가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소액지불에 편리하라고 일부러 가치를 부여한 화폐이다. 금이 유통에서 사라져야 하고, 지폐 도안이 좀 바뀌어야 하겠지만, 이 당시 돈은 오늘날의 돈과 아주 흡사하기 시작하였다. 경화가 제멋대로 주조되는 것이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서서히 폐기되었다. 하나씩 둘씩 정부들이 이 책임을 맡게 되었다. 곧 경화와 어음 형태의 화폐는 소멸하기 시작하였다. 상거래는 더욱 더 지불약속으로 이루어져 갔다. 영국은행이 강력해지다 영국 정부는 아주 초기부터 주조를 관리하였지만, 은행이 창조하는 여신의 양과 규모는 관리하지 않았다. 정부는 너무 많은 여신이 일찌기


스페인과 기타 지역에서 너무 많은 금이 일으킨 파탄과 똑같은 파탄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영국은행은 1844 년 은행면허법에 의하여 규제되고 강력하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은행권 발행 업무가 다른 은행업무로부터 분리되었다. 이 법은 앞으로 영국에서 설립되는 어떠한 새로운 은행도 은행권을 발행할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이 법은 이미 존재하는 은행이 은행권을 발행하는 것도 똑같이 금지하였으므로 마침내 영국은행은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 은행권을 발행하는 유일한 은행이 되었다. 초기의 발권규제 17 세기의 은행의 초창기에 은행가의 수입은 신용장과 환어음을 취급하는 수수료 수입이었다. 후에 은행은 예금에 이자를 지불해 주고 대출금으로부터 이자를 받았다. 그러므로 대출을 많이 할수록 대출이자가 커지고 수입이 늘어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품고 많은 은행들이 지나치게 많은 대출을 했는데, 차용인 가운데 대금을 상환할 수 없는 사람이 생기자 문제가 생겼다. 근대에 수표제도가 아직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은행가들은 차용인에게 은행권을 발행하여 주었다. 이와 같이 은행들이 은행권 발행의 특권을 남용하자 이를 억제하기 위하여 영국은행에게 은행권 발행의 독점권을 부여하고, 은행권 발행량에 관한 규칙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은행권의 발행 1914 년 이전에는 법정화폐의 발행 업무는 왕립조폐소와 영국은행이 분담하였다. 왕립조폐소는 모든 경화를 주조하였다. 영국은행은 금태환이 가능하고 금으로 보증하는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1931 년 영국이 금본위제도를 폐기하였을 때, 영국은행권을 고정된 가격 하에 금으로 태환하는 권리도 회수되었다. 1030 년부터 모든 지폐는 사실상 신용화폐로서 그 가치는 단지 정부의 보증만으로 보장받았다. 영국은행은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 은행권을 발행하는 독점권을 갖고 있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에서는 다른 은행들이 은행권을 발행하는 제한된 권리를 갖고 있다. 1967 년 10 월 영국은행권의 총액은 30 억 파운드였다. 1967 년 이래 유통량은 변했지만 발행방법은 변하지 않았다. 흥미있는 점은 현대국가들이 화폐의 유통량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가치있는 정보가 옛날에는 주어지지 않았다. 영국은행의 변화 1844 년 은행면허법이 통과되었을 때, 영국은행은 은행권을 발행하는 중앙은행의 업무뿐만 아니라 예금도 받고 대출도 하는 보통의 은행업무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후 백년의 경험으로 미루어서 이같은 조직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래서 영국은행은 중앙은행의 업무를 확대시키면서 보통의 은행업무를 철폐하였다. 처음 설립되었을 당시 영국은행은 소수의 개인들이 소유하였는데, 이들은 각자 설립자금을 댔다. 은행이 커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영국은행의 주식을 샀다. 1946 년의 영국은행법은 영국은행을 공공기관으로 규정하고, 주주들에게는 은행 주식 대신 영국정부 공채를 주었다. 그래서 200 년 이상의 역사를 거쳐서, 영국은행은 영국의 중앙은행으로서 오늘의 위치가 되었다. 영국은행은 공공기관이지만 자치기관이다. 영국 정부와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협력하지만 자치기관이다. 영국은행은 산업, 상업, 선박 등과 같은 여러 경제부문을 대표하는 일단의 전문가에 의해 운영된다. 이들은 선거에 의하여 뽑히지 않고 그들의 능력에 의해서 임명된다. 영국은행은 공공기관이므로 이윤추구에 의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영국은행은 화폐공급량과 상품광급량의 균형을 유지시키는데 그 모든 정력을 바친다. 영국은행과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이 어떻게 이같은 일을 수행하는가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은행의 전문화 은행의 업무는 굉장하게 복잡하다. 그래서 여러 종류의 은행이 발달하게 되었다. 각 은행은 특별한 은행업무에 전문화되었다. 은행가가 하는 일은 세계적으로 거의 똑같다. 그러나 은행업무의 조직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의 영국은행은 사실상 모든 시중은행의 업무를 하지 않기 때문에 거의 모든 시중은행은 정부 규제 하에 사적 업무에 머물고 있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이다. 영국의 은행업무는 다섯 개의 전문분야로 나뉘어져 있다. 런던할인시장은 12 개의 대금융회사와 기타 금융회사로 구성되어 정부와 사기업에 대하여 5 년 내에 상환되는 대출에 전문화되어 있다. 상인은행이 있다. 전통적으로 이들 은행은 국제무역에 자금을 조달하고, 영국 내에서 사업을 하고자 하는 회사에 대출하는데 그들의 업무를 집중시켜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국내금융으로 확장하였다. 이 은행은 국내사업과 국제사업에 종사하는 미국의 대규모 상업은행과 흡사하다. 우체국 지로는 영국의 은행업무 가운데 최근에 생긴 것이다. 이 업무는 1968 년에 은행구좌가 없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돈을 값싸고 빠르게 대체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지로는 예금을 한 계정에서 다른 계정으로 이동시킨다. 우체국에서 예금도 받고 지불대행도 해 준다. 이렇게 해서 우체국에 지로 계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우체국을 통하여 안전하게 돈도 송금할 수 있고, 기록도 남길 수 있다. 영국의 우체국 지로 업무는 미국의 우체국 업무보다 더 광범위하다. 지로 계정을 통하여 지불하는 방법은 미국의 우체국의 우편함 방법과 아주 흡사하다. 흔히 이용되는 은행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은행은 저축은행과 상업은행이다. 개인이 볼 때 저축은행은 그의 예금을 받고 이자를 지불하는 은행이다. 저축은행에 예치된 예금은 이자와 함께 증가한다고 한다. 저축은행은 이 돈을 투자하여 예금주에게 이자를 지불할 수 있다. 상업은행은 이름만 상업은행이지 그 기능은 이름과 상관없다. 상업은행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당좌예금 업무이다. 상업은행의 주수입은 대출업무에서 생긴다. 우리가 상업은행에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상업은행이 대출을 하기 때문이다. 우체국 지로도 당좌업무와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지만 대출업무는 하지 않는다. 상업은행은 현대의 연금술사이다. 대출업무를 수행함으로써 돈을 만들어 내고, 마치 오래 전 신세계에서 실려온 잉카의 금이 스페인과 서부 유럽의 화폐공급량을 증가시킨 것과 같이 상업은행도 화폐공급량을 증가시키는데 한 몫을 담당한다. 상업은행이 규제를 받지 않고 돈을 마음대로 빌려 주던 시기에 은행은 국가가 생산해 내는 상품의 공급량보다 화폐량을 더 빠르게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물가의 상승과 때로는 금융파탄이 흔히 뒤따른다. 스털링 지역 영국제국이 커짐에 따라 정부와 경제인들은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그들의 금융에 관한 전문지식을 이행하였다. 제국의 무역량은 급속히 증가하였다. 은행조직의 발달이 세계를 뒤덮었고, 이들 은행은 영국은행을 본받았고, 런던의 대은행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물론 거래에 사용된 돈은 영국돈이었고, 파운드 스털링이 국제통화가 되었다. 이들 나라들을 스털링 지역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들의 국부를 파운드의 형태로 축적하고, 영국 내의 은행에 예치시켰다. 현재 캐나다를 제외한 영국 연방제의 회원국들이 스털링 지역이다. 2 차대전 동안 스털링 지역의 많은 나라들은 런던에 있는 은행에 예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50 년대 종반에 이에 관한 규칙을 해제하자 그들은 돈을 빠르게 인출해 갔다. 이 때문에 영국 재정이 크게 타격을 받았다. 영국 돈이 줄어 들었기 때문이다. 국제통화로서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의 위치가 잠시 흔들렸다.

9. 미국의 화폐와 은행 미국의 화폐의 역사는 유럽으로부터 첫 이주자가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영국과 서부 유럽에서 얻은 화폐에 대한 지식이 곧 아메리카 땅으로 이식되었다. 그러므로 처음의 문제는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 그 자체가 없어서였다. 미국 역사책을 보면 거의 모두 만하탄 섬의 매입을 이야기하고 있다. 만하탄 섬은 오늘날 뉴욕시의 한복판이다. 이 섬을 인디안으로부터 25 불에


해당하는 가치에 샀다. 그 대금은 조개껍질과 염주로 지불되었다. 화폐가 없었기 때문에 물물교환이 성행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주자들은 돈이 주어지기만 하면 돈을 사용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금화가 1600 년대 초기에 북미에서 제한적으로 유통되었다. 이것은 여러 종류의 경화와 함께 사용되었다. 스페인과 다른 나라의 경화와 초기 아메리카의 동화 및 은화가 그것이다. 약 100 년 동안 금광 개발은 거의 없었고, 따라서 금화도 주조되지 않았다. 금화는 서부 유럽으로부터 이주민이 가져 오거나 무역, 특히 서인도와의 무역을 통해 들어왔다. 당시 유럽의 금화처럼 아메리카의 금화도 깎이고 구멍이 뚫리는 등으로 하여 무게가 덜 나갔다. 그래서 이 금화는 수량이 아니라 무게에 의해서 가치를 결정하였다. 잡동사니가 유통되고, 질이 좋지 않아서 거래를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이 문제는 중세기의 환전상의 문제와 비슷하였다.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무언가 이루어져야만 하였다. 초기 화폐 지폐는 유럽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아메리카의 초기 이주민들은 틀림없이 지폐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은 유럽과 달랐다. 귀금속 경화는 아주 귀했고, 지폐를 보증할 정도로 충분하지 못했다. 또한 아메리카에는 중앙은행도 없었고, 세금을 걷고 지폐발행을 관리하는 중앙정부도 없었다. 아메리카 최초의 지폐는 은행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식민지 지방정부에서 나왔다. 정부가 군대와 기타 정부지출을 위하여 돈을 빌릴 수 있는 은행제도의 조직이 없었으므로 정부는 지폐 인쇄에 의지하였다. 최초의 지폐 발행은 1690 년 매사추세츠 정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다른 식민지 정부도 곧 뒤를 따랐다. 이 지폐들은 정부의 상환약속 이외에는 아무 보증이 없었다. 잠시 후에 정부들은 지폐가 부족하다는 불평을 들었다. 그래서 토지를 담보로 대출함으로써 지폐를 발행하였다. 곧 개인들도 똑같은 일을 시작하였고, 지폐 발행 특권은 엄청나게 남용되었다. 지폐는 경화를 유통에서 내몰았다. 지폐의 만발로 물가가 치솟았다. 이 상태는 1751 년 영국이 더 이상의 지폐 발행을 금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식민지 정부들은 정부지출을 충당하기 위하여 세금에 의존해야만 하였다. 영국은 지폐 발행을 금하고 새로운 조세규정을 정하였다. 화폐의 유통량은 급속히 감소되고, 식민지는 경기후퇴로 시달렸다. 이 경기후퇴가 미국독립전쟁의 한 요인이 되었다. 독립전쟁의 전비 조달 과거를 돌아 보면, 전비를 조달하고 전쟁을 지휘하는 강력한 중앙정부도 없이 어떻게 독립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의아할 것이다.


전쟁불자는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로부터 얻은 차관으로 유럽에서 구입하였다. 미국 내에서는 식민지 정부가 발행한 지폐로 충당하였다. 이 지폐는 미래에 갚겠다는 정부의 상환약속이었다. 지폐는 남발되어 거의 가치가 없었다. 1781 년에 전쟁은 끝났다. 그해 의회로부터 인가를 받은 북미은행이 조직되었다. 이 은행이 신생국가의 최초의 은행이다. 이 은행은 1783 년 평화협정이 서명될 때까지 정부에 대하여 단기융자를 줄 수 있었다. 국립 화폐 화폐에 관한 한 다른 나라의 실패가 미국에서는 반복되어서는 안되었다. 독립 이후 헌법에 의하여 화폐 주조와 그 가치를 관리하는 권한이 연방정부에 주어졌다. 주정부는 화폐 주조와 지폐발행이 금지되었다. 화폐가치를 관리하는 권한은 의회에 위임되었다. 독립 전부터 재정은 영국 화폐단위인 파운드 스털링, 쉴링, 펜스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영국 돈은 거의 유통되지 않았다. 여러 나라의 경화가 식민지에서 사용되었었고, 그 가운데 스페인의 은화가 가장 흔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국이 최초의 조폐제도를 설립하였을 때 그 기초는 스페인의 은달러였다. 이 스페인의 은달러는 나중에 금달러와 경쟁을 하게 되고 패하게 된다. 1792 년 조폐법은 달러를 통화의 표준단위로 정하고 계산은 10 진법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새 경화의 한 면에는 자유의 상이, 다른 면에는 미국 독수리의 상이 새겨졌다. 10 달러, 5 달러, 2.5 달러는 금화로 제조되었다. 1 달러, 50 센트, 25 센트, 10 센트, 5 센트는 은화로 제조되었다. 조폐법은 또한 1 센트와 1/2 센트 동전을 규정하였다. 모든 경화는 해당되는 금속으로 그 무게가 거의 완전하였다. 이것은 경화 마손의 좋은 목표가 되었다. 경화의 마손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규정되었다. 화폐에 관한 한 최초의 미국법은 이중금속제도였다. 금화와 은화가 모두 법화였다. 그러나 다음 38 년 동안 은화가 금화보다 더 많이 유통되었다. 5 달러 은화가 주요 통화였다. 그러나 금과 은은 계속 모자라서 작은 양이 주조되었다. 경화는 깎이고 쓸리고 상태가 불량하였다. 어떤 때는 사람들은 잔돈을 만들기 위해 지폐를 둘로 쪼갰다. 외국 경화도 계속 사용되었다. 경화가 계속 모자랐기 때문에 이것은 지폐 발행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처음부터 연방정부는 화폐주조를 관리하였고, 1792 년에 설립된 화폐제도의 기본 골격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살아 있다. 후기 미국의 화폐의 역사는 다채롭다. 다른 나라들이 겪은 문제들은 미국 특유의 요인들로 더 한층 어렵게 되었다. 독립과 자유는 미국 발전의 기본 개념이었다. 사람들은 화폐독점을


두려워 하였고, 이에 관한 연방정부의 권한은 제한되었다. 동시에 자유의 이상은 은행가와 금융가가 마음대로 지폐를 발행하고 대출을 할 수 있는 완벽한 자유를 허락하였다. 최초의 13 주는 방대한 북미대륙으로 팽창하였다. 나라가 팽창하자 돈의 필요성도 커졌다. 이것은 계속되는 임시조치로 메꾸어졌는데, 이 임시조치들은 많은 경우에 신중히 생각해서 취해진 것이 아니라 금융투기의 바람으로 취한 것들이다. 고대사회처럼 어떤 때에는 지나치게 많은 돈이 유통되었다. 인플레이션이 창궐하고 금융위기가 들이닥쳤다. 마침내 미국 내에서 대량의 금과 은이 발견되었다. 금광이 소재하는 주들은 금화를 주요 통화로 주장하고, 은광이 소재하는 주들은 은화를 주요 통화로 주장하였다. 잠시 화폐문제는 화폐와는 아무 상관없는 정치적인 문제로 되었다. 이 문제는 1873 년에 첨예화되었고, 은광이 풍부한 지역은 은화를 법정화폐가 되기를 바랐으나 금화에게 패하였다. 오늘날 돌이켜 보면 미국이 금화와 은화를 모두 사용하는 복본위제도를 채택하였더라면 공황을 피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그런 의미에서 금화를 법정화폐로 정한 의회의 의결을 '1873 년의 범죄'라고 말한다. 복본위제도를 확대하면 다수의 화폐가 존재하는 제도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자유은행제도이다. 어느 은행이든지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으므로, 초기 은행 제 1 미국은행의 인가는 1701 년 연방법에 의해 공인되었다. 그 인가기간은 20 년이었다. 이 인가에 의해 은행은 은행권을 제한된 수량으로 발행할 수 있었고, 지점을 설립할 수 있었다. 이 은행은 잘 운영되었다. 정부재정을 훌륭히 도왔고, 그 은행권은 전국에서 잘 유통되었다. 제 1 미국은행의 인가는 1811 년에 만료되었지만, 미국의 은행제도는 이로써 시작되었다. 주정부는 더 이상 화폐를 주조할 수 없었고, 지폐를 발행할 수도 없었지만, 그들은 주은행의 면허를 인가할 수는 있었다. 주은행은 귀금속으로 보증하는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 1811 년에 이같은 주은행이 88 개나 되었다. 이들은 은행권을 남발하여 1812-14 년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 1816 년에는 246 개의 주은행이 문을 열고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이 은행권들은 모두 금과 은으로 보증되도록 하였지만, 이들 은행은 사실상 개인은행으로 주정부의 인가를 받긴 했으나 규제는 받지 않았다. 제 2 미국은행 제 2 미국은행은 1816 년에 인가되어 다음 20 년 동안 문을 열었다. 연방정부는 설립자금의 5 분의 1 을 담당하였다. 음행의 운영은 훌륭하였지만 처음부터 환영받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제 2 미국은행은 주은행의 은행권 발행업무를 규제하고, 그들의 은행권을 모두 금과 은으로 태환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폐독점의 공포는 사람들 사이에


여전하여 1836 년 인가가 만료되었을 때 제 2 미국은행의 업무는 끝났다. 제 2 미국은행의 운영은 화폐독점을 싫어하는 미국인들의 기질을 잘 드러낸다. 당시 제 2 미국은행의 주인 비들(Nicholas Biddle)은 잭슨 대통령의 권한에 도전하는 정도로 독점적이었다. 그는 국회의원들을 매수하여 의회에서 제 2 미국은행의 인가의 연장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잭슨 대통령의 거부권에 의해 이 인가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잭슨 대통령의 자유주의 정신의 발로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잭슨 대통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은행법을 지지하였다. 자유은행법 제 2 미국은행의 말기에 주가 자유은행법을 채택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법에 의하면 일단의 개인들이 은행을 설립할 수 있었다. 즉 인가가 필요없었다. 은행의 수가 1836 년의 713 개에서 1860 년에는 1,562 개로 늘어났고, 문제가 생겼다. 이 은행들은 모두 지폐를 발행하여, 이 돈을 토지나 건물을 담보로 잡고 개인들에게 빌려 주었다. 중앙은행은 없었다. 차용자는 이 돈을 유통시켰다. 이 돈을 소지한 사람은 누구든지 발행 은행을 찾아와서 금과 은으로 태환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온 나라가 은행권으로 넘쳤다. 무책임하고 신용할 수 없는 '들고양이 같은 은행'(wildcat bank)의 시대에 은행들은 그들이 발행한 지폐를 태환할 수 있는 충분한 금과 은이 없었다. 그들의 자산은 토지와 건물에 묶였고, 이것들은 금과 은을 확보하기 위해서 쉽게 팔려 지지 않았다. 미국이 금융파탄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미국이 급속히 팽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종내에는 지폐발행을 관리하는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19 년, 1837 년, 1857 년에 금융공황이 있었고, 많은 은행과 회사가 문을 닫았다. 국립은행제도 1864 년의 국립은행법의 취지는 은행권 발행의 규제에 있었다. 이 법은 정부공채만이 은행권을 보증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은행이 공채의 시장가치의 90 퍼센트까지 은행권을 발행하도록 허락하였다. 이 법에 의하여 발행된 국립은행권은 안전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자유롭게 유통되었다. 이 법은 모든 은행이 주 인가를 포기하고 국립은행으로 되기를 희망하였다. 1865 년에 국립은행의 수는 1,500 개였다. 1900 년 미국이 금본위제도가 되었을 때 그 수는 3,500 개로 증가하였고, 1914 년에는 7,500 개 이상이 되었다. 새 시대


모든 국립은행은 상업은행이었다. 그들은 예금을 받고 당좌계정을 공급하고, 은행권을 발행하고, 대출업무를 하였다. 그러나 주은행은 더 이상 지폐를 발행할 수 없는 데도 어떤 이권 때문에 많은 은행이 주은행으로 복귀하였다. 주은행에는 세 종류가 있었다. 상업은행, 신탁회사, 저축은행이다. 주은행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여 1915 년에 그 수는 14,600 개를 넘었다. 그래서 연방관리 하에 단일은행제도를 설립하려는 희망이 좌절되었다. 위원회가 조직되어 연방은행제도를 연구하였다. 이 위원회의 추천에 의하여 1913 년 연방준비법이 채택되었다. 월슨 대통령이 최종 서명한 이 제도가 오늘날의 제도이다. 1913 년 12 월에 통과된 이 법은 전보다 더 심화된 정부관리하에, 더 강화된 중앙집중은행제도와, 은행권 발행에 있어서 더 신축성있는 제도의 설립을 추구하였다. 전국을 12 지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을 한 개의 연방준비은행이 관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5 명의 위원과 재무장관과 감사원장 등 총 7 명으로 구성된 연방준비은행이사회가 전체 제도를 총괄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사회는 연방은행권의 발행을 관리하였다. 모든 국립은행은 반드시 연방준비제도의 일원이 되어야 하였으며, 주은행은 자유였다. 12 개의 연방은행의 고객은 각 지역의 회원은행이다. 그러므로 각 연방은행은 은행으로서 준비금을 받고 은행권을 발행하고 수표를 청산해 준다. 12 개의 연방은행의 설립은 중앙관리로 향하는 첫 조치였다. 영국은행처럼 단일의 강력한 중앙은행을 채택한 유럽국가의 정책은 미국인의 보편적 신념과 대조적이다. 무엇이든지 집중되는 것을 두려워 한 미국인은 은행의 권한 역시 한 곳에 집중되어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다. 미국인은 또한 미국의 은행제도는 크고 복잡해서 단일은행이 다룰 수가 없다고 믿고 있다. 전쟁 하의 연방은행제도 연방은행제도는 세계 제 1 차대전에 참전한 미국 정부의 전비를 조달하는 데 훌륭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20 년과 1921 년 종전 후의 갑작스럽고 격심한 경기후퇴를 막는 데는 실패하였다. 경기후퇴를 최소화하는데 도움은 되었다. 사람들의 공포를 없애고 재정적 손실을 덜어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새 제도가 1929 년 미국에서 시작한 대공황과 주식시장의 붕괴로 끝난 엄청난 투기의 물결을 막지 못했다는 것은 큰 불행이었다. 당시 7,000 개 이상의 은행이 파산하고, 은행의 예금주들이 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29 년 뉴욕의 증권시장의 붕괴로 시작된 대공황은 아이러니하게 은행제도의 장점 때문에 연속적인 은행 도산으로 연결되었다. 부실한 은행이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자 건실한 은행의 예금주들이 덩달아 자신의 은행의 신용에 대해 심한 의심을 갖게 되고, 모든 예금주들이 동시에 예금을 인출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사정은 다른 모든 은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은행 신용은 땅에 떨어지고, 신용창조는 더 이상 작용하지 않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사태를 막기 위하여 일주일 계속되는 유명한 '은행 휴일'을 선포하였다. 이 기간 동안 모든 은행들은 지폐를 확보하여 모든 고객들의 인출을 충족시켜야 했고, 연방은행은 지폐를 찍어 내어 은행들의 지폐 수요에 응해 주었다. 연방준비제도는 다른 면에서 예상이 빗나갔다.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주은행이 국립은행과 연방준비제도의 회원은행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주은행들은 주은행으로 머물면서 회원은행이 되었다. 대공황의 경험으로 미국은 은행제도의 약점을 심각하게 받아 들였다. 새 은행법이 제정되어 국립은행들의 업무를 규제하고, 이들이 상업은행의 역할 이외에는 다른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재무장관과 감사원장이 연방준비이사회에서 제외되었다. 새 이사회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승인하는 7 명의 이사로 규정되었다. 재무장관과 감사원장이 제외되었다는 것은 연방정부와 직접적 관계가 단절됨을 의미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개혁은 은행예금에 대해 보험을 들어 한 은행의 파산이 건전한 다른 은행에 파급되지 않도록 하였다. 이것이 예금자보험제도로서 오늘날에도 존속한다. 그러나 예금자보험제도도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최근에 드러났다. 미국의 금융기관인 저축대부조합이 예금자보험제도를 믿고 영업을 방만하게 한 결과 대량으로 파산하게 되었을 때 보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사태가 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결국 납세자에게 이 문제를 떠맡기기에 이르렀다. 현재의 미국 중앙은행제도는 영국 중앙은행의 많은 특성을 지닌다. 우선 그것은 공공기관이지만 연방정부나 주정부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재정적으로 독립을 추구하지만 이윤을 추구하지 않고 국가의 금융 수요에 부응하여 활동한다. 이 제도를 이끌고 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 본위로 임명된다. 선거로 선출되지 않는다. 이 제도는 정부기관이 아니지만 규칙을 제정하고 준행시키는 법적 권한을 갖고 있다. 지폐를 발행하고 경화를 주조하는 것은 미국의 재무성이지만, 이것들을 유통시키는 것은 연방준비제도이다. 미국은 1900 년에 금본위제도를 채택하였고, 이 때 모든 화폐는 금으로 태환되었다. 1 차대전이 발발한 1914 년에 많은 다른 나라와 함께 미국은 금본위제도를 철폐하였다. 1919 년에 미국은 다시 금본위제도로 복귀하였고, 이후 8 년 동안 많은 나라들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들은 1929 년 1936 년 사이에 금본위제도를 다시 철폐하였다. 독일과 영국은 1931 년에, 미국은 1933 년에 폐지하였다. 그 이유중 하나는 화폐사용을 위한 금의 공급이 세계가 거래에 필요로 하는 화폐량을 충분히 채워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지폐와 신용이 금융세계를 지배하였다.

10. 한국의 화폐와 은행


초기 화폐 "문헌비고"에 의하면 고려 성종 15 년(서기 996)에 철전이 사용되었다 한다. 주조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 철전이 고려에서 주조되었다는 사실은 그 다음 해의 목종 때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목종 때의 기록에는 선대에 경화가 주조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경화가 한국 역사 최초의 경화의 주조이다. 더 이상 이에 대하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 이 돈은 발견된 것이 없다. 1101 년, 고려 숙종 6 년에 은병으로 불리우는 은화가 주조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해동통보가 주조되었다. 해동통보는 현재 보존된 가장 오래된 돈이다. 해동통보는 구리로 주조되었는데, 원형의 모습에 가운데 사각형의 구멍이 뚫어져 있고, '해동통보'의 네 글자가 적혀져 있다. 해동통보에 이어서 동국통보, 동국중보, 삼한통보, 삼한중보가 만들어졌다. 당국은 이 경화의 유통을 적극 장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경화는 광범위하게 유통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쌀과 옷감이 주요 교환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경화의 유통이 잘 안된 이유는 한국에서 꽤 오래 전부터 발달한 어음제도 때문인 것 같다. 어음은 신용수단으로 상인이 사용하였다. 이것은 액수, 만기, 날짜, 수취인의 성명, 수령인의 성명이 적혀 있는 종이이다. 이 종이는 둘로 찢어서 쌍방이 한 조각씩 보관하였다. 채무자는 다른 한 조각이 제시되면 명시된 금액을 지불하였다. 어음의 사용은 한국에서는 화폐제도보다 신용제도가 먼저 발달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경화의 유통이 실패한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 고유의 시장제도 때문이다. 장날이면 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들이 장에 가지고 오는 모든 물건들은 쌀과 옷감으로 그 가치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돈이 유통되는 장소가 한 군데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시장이 아니라 주막집이었다. 이 사실 때문에 정부당국이 새 돈을 유통시키기 위해 주막집을 설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쌀이 돈 노릇을 했다는 사실은 지금도 그 증거가 남아 있다. 지금도 지방에 따라서는 쌀을 사러 가면서 쌀 팔러 간다고 말한다. 물건을 돈 주고 산다는 것은 돈을 팔아서 물건을 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쌀을 판다는 뜻은 쌀을 팔아 물건을 산다는 뜻인데, 이것은 쌀을 돈으로 사용했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쌀을 사러 가면서 쌀을 팔러 간다는 표현에 아직 남아 있다. 고려 충렬왕 13 년(1287)에 중국의 원나라는 사절을 보내어 지원보초와 중통보초를 사용하도록 강권하였다. 지원보초 1 관은 중통보초 5 관에 해당하였다. 이것은 원의 지폐였는데, 한국 최초의 지폐가 되었다. 1358 년에 지원보초 1 관과 한국의 옷감 5 필이 교환되었다. 이 돈이 한국에서 행세한 최초의 외국돈이다. 후에 일본은 이 경험을 뒤따랐다. 1464 년, 세조 9 년에 아주 독특한 화폐가 주조되었다. 이 화폐는 전폐라 불리웠는데 이름 그대로 화살촉의 모양이었다. 이 돈의 의도는 평화시에는 돈으로 사용하고, 전시에는 화살촉으로 사용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이 돈은 실패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후 이 돈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생김새가 뾰족해서 갖고 다니기에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1625 년, 인조 3 년 조선통보가 주조되었다. 1633 년 상평창은 상평통보를 주조하였다. 이 돈은 유통에서는 실패하였지만 화폐의 명칭에서는 성공이었다. 이후의 주화는 모두 상평통보로 불리었다. 조선조 말기에 상평통보는 특히 엽전이라고 불리었다. 1678 년, 숙종 4 년 경화의 주조가 상평창뿐만 아니라 호조, 진휼청, 사복시, 어영청, 훈련도감, 평안도와 전라도의 군사 주둔지 등 여러 정부기관에 위임되었다. 이것은 한국 화폐 역사 가운데 전환점이 되었다. 쌀과 옷감이 화폐의 기능을 빼앗기고 최소한도 화폐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여러 주화가 이 뒤를 따랐다. 조선조 말기까지 등장한 대부분의 경화는 구리로 만들어졌고, 돈의 가치와 재료의 가치가 일치하였다. 고종 초기에 최초의 가치절하가 발생하였다. 당백전은 실제가치가 구화폐인 당이전의 5-6 배에 불과하였지만, 액면가치를 100 배로 불려 통용시키려 하였다. 사람들은 이의 유통을 거부하였고, 정부는 주조를 정지하였다 그레샴의 법칙이 적용된 예이다. 당오전은 보통의 엽전과 거의 같은 크기이지만 그 액면가치는 다섯 배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유통에서 당오전과 보통의 엽전은 거의 1 대 1 로 사용되었다. 백동화는 조선조의 마지막 주화이다. 상당량의 백동화가 주조되었다. 개인들도 백동화를 주조하였는데, 정부의 백동화와 차이가 없었다. 지나친 백동화의 주조는 곧 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켰다. 신용은 떨어지고 물가는 치솟았다. 정부는 이 사실을 수수방관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계속 백동화를 주조해 내었다. 개인의 주조는 뇌물로 묵인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정부의 화폐주조기까지 빌린 적도 있다. 결과적으로 백동화의 가치는 액면가치의 반으로 줄어 들었다. 한국의 화폐의 경우에도 수요를 초과한 공급은 화폐의 실질가치를 하락시킨다는 법칙은 예외없이 맞는다. 일본 침략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무렵 조선에는 두 종류의 경화가 유통되고 있었다. 엽전과 백동화였다. 백동화는 주로 북서부에서 사용되었고, 엽전은 남부와 북동부에서 유통되었다. 일본의 침략은 한국에 외국화폐를 갖고 왔다. 두 외화가 유통되었다. 처음에는 멕시코 은화가 유통되었으나 점차 일본의 은화로 대체되었다. 일본의 은화가 유통되자 일본의 지폐가 뒤따라 들어왔다. 일본의 지폐는 은화로 태환되었다. 청일전쟁은 일본 돈을 대량으로 몰고 왔다.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 년 6 월에 한국의 통화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일본제일은행권이 한국에서의 화폐이다. 둘째, 백동화의 유통을 금지시키고 새로운 주화로 대체한다.


셋째, 엽전의 유통도 금지시킨다. 백동화는 형편없는 가격으로 사들여 회수되었으며, 엽전은 그 재료가 구리이므로 마침 세계적으로 구리값이 뛰는 기회에 외국에 팔아서 회수되었다. 일본 제일은행 일본의 제일은행은 1878 년에 그 지점을 부산에 설치하였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은행이다. 그후 이 은행은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평양, 대구, 성진, 개성 등 여러 곳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서울에 지점을 둔 것은 1888 년이다. 이밖의 산국에 상륙한 일본은행은 제 18 은행(1890), 제 58 은행(1892) 등이 있고, 그밖에 외국은행으로는 홍콩은행, 상해은행이 있었다. 한국인이 설립한 은행으로 한성은행, 천일은행이 있었다. 일본은행은 일본의 개인은행이지만 한국땅에서 사실상 중앙은행의 노릇을 하였다. 처음에는 외환과 관세업무를 주로 하였으나 청일전쟁과 노일전쟁 동안 일본정부의 허락 하에 한국에서 일본정부의 국고 역할을 대행하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업무는 한국에서 은행권을 발행하는 것이었다. 일본은행의 은행권은 관세가 무슨 화폐로 지불되느냐에 따라 일본의 은화, 멕시코 은화 등에 대해 발행되었다. 1902 년 금이 보증하는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이것이 한국에서 최초로 발행된 태환지폐이다. 1905 년부터 시작한 금융개혁에 따라 일본제일은행은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이 되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중앙은행은 외국은행이 되었다. 일본제일은행은 중앙은행으로서, 첫째 대한제국의 정부은행이고, 둘째 법정화폐를 발행하고, 셋째 화폐시장을 관리하고, 넷째 공공사업의 재정을 조달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법화는 일본 제일은행의 은행권으로 금태환 지폐였다. 한국은행 1909 년, 그때까지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던 일본 제일은행의 업무는 한국은행의 설립으로 이전되었다. 한국은행은 조선은행의 전신이다. 설립 당시 한국은행의 지점은 13 개였다. 이 가운데 하나는 만주의 안동에 있었다. 한국은행의 업무는 어음할인, 대출, 수신 등 일반업무와 금화와 은화의 보관, 금괴의 매매 등 중앙은행의 업무로 구성되었다. 일본 제일은행이 이미 발행한 은행권은 한국은행이 발행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한국은행 설립시에 일본 제일은행권의 유통량은 11,833,000 엔이었다. 이 가운데 3 분의 1 에 해당하는 3,944,000 엔은 정금으로 준비되어 있었고, 나머지 7,889,000 엔은 한국은행에 대한 일본 제일은행의 빚으로 규정하고 이자없이 그 후 20 년간 상환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국은행의 은행권 발행에 관해서는 다음 세가지 원칙이 정해 졌다.


첫째, 한국은행은 금화, 금괴, 일본은행권으로 100 퍼센트 지불보증되는 은행권을 발행한다. 그러나 은괴는 총준비금의 4 분의 1 을 초과하지 않는다. 둘째, 한국은행은 이밖에 국채와 믿을 만한 기업어음의 보증하에 2 천만엔까지 발행할 수 있다. 셋째, 이 이상 발행할 때에는 공채와 기업어음의 보증 이외에 통감부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데, 이 경우 한국은행은 5 퍼센트의 세금을 대한제국 정부에 지불하여야 한다. 조선은행 한국은행은 정부의 감독을 받았다. 1910 년 한일합병으로 한국은행은 조선은행으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대한제국의 말년인 1909 년 한국은행이 설립되었을 때 그 은행권은 금이나 일본은행권으로 태환할 수 있었다. 한국은행은 금화, 금괴, 은괴, 일본은행권으로 100 퍼센트 지불보증되는 은행권을 발행하도록 되었다. 또한 일본의 국채와 믿을 수 있는 기업어음의 보증 하에 2 천만엔까지 발행할 수 있었다. 이 이상의 은행권 발행은 공채와 기업어음으로 보증하는 이외에 통감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였는데, 이 경우 조세의 대상이 되었다. 이 내규는 그 후 많이 수정되었다. 가령 비과세 대상인 2 천만엔의 은행권의 발행 규모는 증가하여 1941 년 4 월에는 6 억 3 천만엔이 되었다. 이 증가에도 불구하고 이 한도액은 항상 넘었다. 초과발행에 대한 과세율은 연 3-6 퍼센트이었다. 더우기 1931 년 12 원 조선은행권의 금태환은 폐지되었고, 1937 년과 1941 년 사이에 조선은행이 소유하고 있었던 모든 금과 은은 일본으로 실어갔다. 그 결과 조선은행의 소위 준비금으로는 완전히 일본은행권만 남게 되었다. 1941 년 4 원 1 일 조선은행이 그나마 소유하고 있던 일본은행권이 일본은행의 예금으로 바뀌었을 때 조선은행의 준비금은 공채준비금뿐이었다. 이때부터 해방까지 조선은행의 준비금은 완전히 일본정부의 공채뿐이었다. 이 기간 동안 비과세로 발행할 수 있는 은행권의 증가도 허락되었다. 해방시에 조선은행은 그 은행권이 법정준비금으로 보증된다는 허구가 폭로되지 않기 위해서 애썼지만, 사실상 그 은행권은 법정준비금이 전혀 보증되지 않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비과세 발행한도액제도도 폐지되었다. 1949 년 7 월 이승만 대통령은 은행권 발행한도액을 500 억원으로 고정시키는 대통령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해 10 월 초에 이 한도도 무너졌다. 미군정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여러 번의 금융조치와 2 차의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가장 최근의 화폐개혁은 1962 년 6 월 10 일에 있었다. 1945 년 9 월, 미군이 남한에 진주했을 때 유통되던 화폐는 조선은행권,


만주은행권, 일본군표, 일본은행권, 대만은행권, 그리고 일본 정부가 발행한 주화였다. 이 가운데 조선은행권이 대종을 이루었다. 일본 정부의 주화는 말이 주화였지 그 재료는 초기의 조잡한 플라스틱이었다. 2 차대전으로 금속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강점 시기에 조선은행권과 일본은행권은 1 대 1 로 교환되었다. 이렇게 여러 은행권이 통용되었고, 1 대 1 로 교환되었건만, 그레샴의 현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흥미있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각 은행권의 수량에 따라 액면가치와 실제가치의 차이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행권은 일본제국의 전역에서 자유로이 유통되었다. 해방되던 날 조선은행권의 총액 가운데 약 40 퍼센트인 37 억원이 북한과 태평양 지역에서 유통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해방 이후 대부분의 조선은행권이 귀향민에 의해서 남한으로 들어왔다고 믿어진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공산당의 사보타지도 역할을 하였다. 1947 년 12 월 6 일 북한 정부는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조선은행권은 무효가 되었으며, 새 돈으로 교환되었다. 이 화폐개혁의 주요 명분은 교환된 조선은행권으로 대남 전복활동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이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미군사정부는 미리 1947 년 5 월에 북한에서 넘어 오는 피난민들은 일인당 조선은행권 1,000 원만을 지참할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이 이상의 금액은 당국에 예치시켰다가 일인당 한 달에 5,000 원까지 인출하도록 하였다. 미진주군 당국이 취한 첫번째 조치 가운데 하나는 조선은행권만이 법정화폐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동시에 소위 'A 형 연합국 보조군표'도 법화로 선포되었다. 이 군표는 한국에서 사용될 것을 예상하고 미리 만들어 놓았고, 미군 진주와 함께 가져 왔다. 그러나 조선은행권이 충분하였기 때문에 1946 년 7 월에 군표를 회수하면서 조선은행권과 교환시켰다. 이후 군표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모든 일본 군표와 기타 은행권은 무효가 되고, 그 사용은 금지되었다. 1946 년 2 월 21 일에 남한의 모든 개인과 법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일본은행권 1 엔권 이상과 대만은행권을 1946 년 3 월 2 일부터 3 월 6 일 사이에 정해진 은행에 예치하도록 명령받았다. 이렇게 예치된 은행권은 별도로 보관되고 예금자들은 예금증서를 받았다. 이 명령으로 약 4 억엔의 일본은행권이 예치되었는데, 이 돈은 그후 1947 년 11 월에 불태워져 버렸다. 이 '화장된 일본은행권'은 그후 한국정부의 대일본 청구의 일부분이 되었다. 이 예치된 금액의 상환요구가 있었지만 미군정은 듣지 않았다. 미리 투기꾼들이 40-50 퍼센트의 할인가로 대량 사들였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대한민국 정부도 같은 이유로 상환을 거부하였다. 화폐교환 1948 년 4 월 7 일 미군정은 "일본의 휘장이 새겨진 조선은행권은 더


이상 법화가 아니다"고 선언하고, 1948 년 4 월 12 일부터 4 월 24 일까지 무궁화가 새겨진 조선은행권으로 교환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화폐개혁이라기보다 교환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 교환의 목적은 은행권에서 일본의 잔재를 없애기도 하는 것이었지만, 제헌의회 선거를 교란시키고 전복하는데 사용하기 위하여 북한으로부터 자금이 흘러 들어오는 것을 막는데 있었다. 이 점은 이에 앞서 1947 년 5 월에 선포한, 귀향민의 지참금에 대한 법령에 어긋나는 돈을 가져오는 사람은 새 은행권으로 교환하여 주지 않았다는 점으로 알 수 있다. 1950 년 6 월, 한국전쟁 직전 남한에서 유통되던 화폐는 무궁화가 그려진 조선은행권으로 100 원권, 10 원권, 1 원권과 50 전, 20 전, 10 전, 5 전이 있었다. 그리고 1 원권 이하의 일본은행권과 일본정부 주화가 약간 있었다. 인풀레이션 때문에 1 원 이하 전 단위의 지폐는 가치가 떨어져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10 원, 5 원, 1 원권도 곧 유통에서 사라졌다. 심지어 100 원도 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물가와 거래량에 비하여 그 가치가 아주 적게 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는 10 억 원을 제외한 모든 돈이 남한에서 유통되고 있었고, 10 억 원은 북한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었다. 인플레이션 그 당시 인플레이션은 심각하였다. 2 차대전시 전시 인플레이션의 압력은 일제의 가격통제와 배급제도로 심하게 노출되지 않았다. 1939 년부터 1945 년까지 조선은행의 은행권 발행은 4 억 4 천만엔에서 44 억엔으로 10 배 증가하였고, 전 은행기관의 총예금고는 12 억엔에서 5 배인 60 억엔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도매물가지수는 단지 176 에서 276 으로 1.6 배의 상승에 그쳤다. 일제 패망 후 이와 같이 노출되지 않았던 인플레이션의 고삐가 풀렸다. 게다가 일제의 항복은 사회적 동요를 몰고 왔다. 생산과 교역은 완전히 와해되고, 사람들이 은행에 몰려가서 예금을 인출하는 통에 은행권은 배로 증가하였다. 해방 후 처음 두달 동안 도매물가가 20-25 배로 뛰었다. 이 파탄은 패망 일본이 조선은행으로부터 돈을 인출하여 총독부의 봉급과 일본회사의 봉급을 한꺼번에 지불한 것과 겹쳤다. 사람들은 살 수 있는 물건은 모조리 사려고 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물가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해방 후 처음 두 달 동안 도매물가는 20 배 내지 25 배로 뛰었다 고 보고한다. 미군의 진주 이후 약간 진정은 되었으나 물가의 앙등과 화폐량의 증가는 이후 고질적으로 되었다. 1945 년 12 월부터 1950 년 3 월까지 화폐공급량은 11 배로 증가하였고, 물가는 26 배로 앙등하였다. 이같은 인플레이션 하에서는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배급정책을 성과없이 만들어 버렸고, 정부, 기업, 개인의 경제활동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생산활동보다는 투기행위에 끌렸고, 사회계층간의


자원배분이 심히 왜곡되었다. 저축의 욕은 사라졌고, 외국투자의 자극도 사라졌다. 왜 이 시기에 인플레이션이 심했는가. 정부의 적자 때문이었다. 정부의 조세수입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결국 화폐발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 차 화폐개혁 1953 년 2 월 15 일 화폐개혁이 단행되었다. 이것이 제 1 차 화폐개혁이다. 조선은행권이 한국은행권으로 교체되었고, '원'은 '환'으로 바뀌었으며, 그 교환비율은 100 대 1 이었다. 개혁의 조짐은 몇 년 동안 보여 왔지만 정확한 시기는 비밀이었다. 이 비밀은 잘 지켜져서 물가에 미치는 소동은 없었다. 개혁의 목적은 해방 이후 고질화된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함이었다. 부수적으로는 체납된 세금과 대출을 걷기 위함도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한국은행은 발족과 더불어 한국은행권을 새로 발행하고, 그때까지 유통되던 조선은행권을 폐기해야 했으나 한국은행 설립 2 주일도 되지 않아 발발한 전쟁으로 조선은행권은 미처 폐기되지 못한 채 대구에서 새 한국은행권과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북한이 침략지역에서 미발행 한국은행권을 불법 남발하여 전시경제를 교란시키자 대통령 긴급명령 제 10 호로 제 1 차 통화조치를 실시하여 1950 년 8 월 28 이부터 1953 년 1 월 16 일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게 되었다. 이 통화조치는 화폐개혁으로 불리우지 않고 우리가 제 1 차 화폐개혁으로 부르는 것은 1953 년에 단행된 제 2 차 통화조치를 말한다. 이때 새 은행권은 미국에서 인쇄되었다하여 'US 프린트'라고 불렸다. 이 돈은 원래 1948 년 정부 수립 직후 미국에서 인쇄되어 당시 조선은행 창고에 보관되었는데 서울이 함락되면서 견본만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나머지는 그대로 남아있던 것을 서울 수복 후 부산으로 이송해 간 곡절이 있는 돈이다. 2 월 15 일은 구정이었다. 그 다음날은 토요일, 일요일이어서 연이어 은행이 휴무였다. 전국적으로 화폐조치 사무가 시작된 것은 일요일부터였다. 화폐개혁 결과 신구 화폐의 교환율은 97 퍼센트에 달하였다. 화폐개혁의 결과 화폐의 팽창속도는 현저하게 둔화되어 인플레이션은 진정되었고, 해방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화폐개혁의 내용 가운데 금융기관 예금에 대해서는 세대별로 한 사람당 500 환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별도 조치가 있을 때까지 동결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를 산업자금으로 전환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결자금에 대한 압력으로 그후 약 1 년이 지나면서 단계적으로 해체되고, 이 목적은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화폐개혁 이후 1961 년까지 물가는 4-5 배 상승하였다. 1953 년 이전의 물가상승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물가상승이다. 같은 기간에 통화량은 8-9 배로 증가하였다. 통화량 증가보다 물가 상승이


낮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전후의 경제회복의 빠른 속도에 기인한다. 여기에서 화폐량과 상품량 사이의 또 하나의 관계를 볼 수 있다. 2 차 화폐개혁 5.16 군사정부는 1962 년 6 월 10 일 일요일, 제 2 차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목적은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고 누대의 정권의 부패로 축적된 음성자금을 산업자금화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화폐개혁은 비밀리에 서울상대 박희범 교수가 입안하였다. '환'이 다시 '원'으로 바뀌었는데, 교환비율은 10 대 1 이었다. 개혁의 내용을 보면 구권예금과 재래예금은 6 개월 내에 설립될 산업개발공사의 주식으로 대체한다. 산업개발공사는 이 자본금으로 울산공업단지를 비롯하여 경제개발 5 개년 계획의 각종 사업체에 주식투자를 하기로 예정되었다. 새 원화의 인쇄는 이번엔 영국회사가 담당하였다. 영국회사로 결정된 것은 이 화폐개혁의 배경과 전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화폐개혁의 주목적이 음성자금을 산업자금화하는 것이었으나, 정작 그같은 희망은 기대에 못하여서 제 2 차 화폐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이같은 배경을 안고 화폐개혁을 추진하는데 미국이 반대할 것을 우려하자, 미국에 새 화폐의 주조를 부탁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가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는 처지이므로 이같은 중요 경제문제에 대해서 USOM 이나 유엔국 등과 협의를 해야 할 입장이었다. 협의해 보았자 화폐개혁의 명분이 약해 반대에 부딪칠 것이 뻔하였다. 일본은 너무 가까워 기밀의 보장이 어려웠다. 영국의 토마스 데라류 회사와 연락이 닿는 것은 주한 영국대사를 통해서였고, 1961 년 11 월 박대통령의 케네디 대통령 방문시 수행하였던 천병규 재무부장관이 영국으로 날아가서 6 월 농번기 이전에 은행권을 준비하리만치 다급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극비라고 하여도 한국은행 총재까지 모르게 한 것은 지나친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담화문이나 공문이 한국은행 총재 명의로 발표되는 터에. 게다가 새 원화에 그려진 독립문이 '득립문'으로 잘못 인쇄되었고, 다른 소액권들도 인쇄가 조잡하였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알 수 있다. 봉쇄계정은 그후 1 개월도 못가서 해제되었다. 봉쇄계정의 목적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봉쇄계정에 대한 드센 압력 탓도 있었지만, 자금 경색으로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 2 차 화폐개혁은 이렇게 하여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금리인상조치 화폐개혁에도 불구하고 투자를 위한 국내저축 동원에 실패한 군사정부는 1965 년 다른 방법을 생각하였다. 은행 금리의 인상을 통하여 예금을 늘리고 투자자금의 애로를 극복하는 시도를 하였다. 금리인상의 주요 내용을 보면 정기예금 이자율을 연 15 퍼센트에서 30 퍼센트로 대폭 인상하는


것이었다. 이 조치를 둘러싼 의견대립도 만만치 않았다. 후진국의 경우 가장 큰 애로는 금융의 낙후로 인한 투자자금 공급의 어려움인데, 금리인상으로 일거에 국내저축을 동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는 의견이 이 조치를 강력하게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있었다. 후진국의 경우 공식적인 금융은 낙후되었지만, 그 대체로써 사채금융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으므로 은행금리의 인상의 효과는 단순히 사채자금이 은행예금으로 이동하는데 불과하여 투자자금의 공급이 증가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성공하였다. 이 조치에 힘입어 1971 년 8.3 조치가 있기 전까지 높은 경제성장율과 낮은 물가상승율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성공을 보고 멕시코, 필리핀 등 다른 나라들이 뒤따랐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성공이 반드시 이 조치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금융조치 부실기업에 대한 최초의 대책은 1969 년 부실기업정리반의 설치였다. 당시는 경제개발 시작 6 년에 불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지불보증 차관 기업체 및 은행관리 기업체 83 개 가운데 40 퍼센트에 해당하는 기업체가 부실 또는 문제기업으로 판명되었다. 이들의 부실원인은 생산시설이 비효율적이고, 경영면에서도 가족 중심으로 불건전 지출이 많았다는데 있다. 한마디로 경험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부의 대책은 육성해야 할 기업과 정리, 처분해야 할 기업으로 나누어서, 육성해야 할 기업은 합병이나 금융기관을 통한 처분을 유도하였다. 이 당시 전 제조업의 부채비율은 약 270 퍼센트였는데, 해당 부실기업만의 부채비율은 이보다 훨씬 높았으리라 생각된다. 이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전 제조업의 부채비율은 하락하지 않고 계속 상승하여 1972 년 8.3 조치가 나오기 전 1971 년 말의 부채비율은 약 400 퍼센트에 육박하게 되었다. 부실기업 정리 조치 이후 1.5 배 증가한 셈이다. 8.3 조치는 순전히 기업 재무구조의 취약 때문에 취해졌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당시 기업 재무구조의 취약은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판단되었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가 8.3 조치였던 것이다. 8.3 조치는 우리나라 금융사상 획기적인 조치라고 불릴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이 조치의 주요 골자는 기업의 이자부담을 덜어주자는 것이다. 이에 힘입어 기업의 재무구조도 일시적이나마 개선을 보았다. 즉 부채비율이 8.3 조치 전의 400 퍼센트에서 조치 후의 300 퍼센트로 급락하였고, 1 년 후인 73 년에는 270 퍼센트로 더욱 하락하였다. 그러나 이같이 하락했음에도 불구하고 1969 년의 부실기업 정리 당시의 200 퍼센트보다는 높은 부채비율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두번에 걸친 조치가 부채비율을 일시적으로 하락 시키지만 장기적으로는


상승시키는 일시 쇼크 요법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이후의 5.29 조치와 9.27 조치를 통해 더욱 확인된다. 5.29 조치와 9.27 조치도 모두 기업의 재무구조 악화가 가져온 긴급조치라고 말할 수 있다. 1974 년 5.29 당시 기업의 부채비율은 8.3 조치 후의 비율인 270 퍼센트를 다시 넘어 310 퍼센트에 달하였고, 이에 대처한 5.29 조차 역시 이전의 조치처럼 그 목적은 여전히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 당시의 기업의 양상은 재벌그룹화하면서 높은 부채비율에서도 불구하고 계열기업을 거느리는 방만함을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5.29 조치는 이 계열기업군의 재무구조 개선을 겨냥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5.29 조치 후에도 기업의 부채비율은 계속 상승하여 1980 년 9.27 조치를 맞이할 때까지 약 500 퍼센트로 불어났다. 이 사이 내부자금의 축적이 취약한 상태에서 중화학공업 등 자본집약적 산업에 자금이 집중 투자됨에 따라 그 대부분의 자금을 차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도 있었다. 그러나 여하튼 1980 년에 와서 기업의 부채비율은 약 500 퍼센트로 최고에 달하였고, 이에 따라 9.27 조치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1969 년부터 1980 년에 이르기까지 취해진 중요한 조치는 모두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이 그 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보면 기업의 재무구조를 나타내는 부채비율은 계속 증가해 왔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0 년 이후의 6.28 조치와 7.3 조치 역시 마찬가지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1963 년에 90 퍼센트였던 기업의 부채비율이 1983 년에는 450 퍼센트가 되었다는 것은 연평균 18 퍼센트 포인트씩 상승했음을 의미한다. 금리규제와 금융 1970 년대 한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실물부문의 양적팽창이 괄목할 만하였다. 이에 대하여 금융부문은 1965 년 고이자율 정책에서 저이자율 정책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의 이자부담이 증대되어 부실기업이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같은 금융부문의 답보가 장차 경제성장을 제약하리라 우려를 표명하였다. 부실기업의 등장이 금융에 많은 장애가 되었음은 사실이다. 한국은 경제발전을 위하여 자금을 의도된 분야로 흐르도록 이자율을 인위적으로 조절하였다. 금융시장에서 자금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정책을 오랫동안 써 왔다. 이른바 저이자율 정책에 의한 금리규제이다. 금리는 자유화되어 있지 않았다. 금융부문의 답보상태는 한국의 고질적인 인플레이션 때문이었다. 인플레이션 하에서 저이자율은 자금의 흐름을 제도금융시장에서 사채시장으로 왜곡 유도하였고, 금융시장은 뚜렷이 이중구조로 고착화되었다. 1960 년대 한국의 금융시장에서는 통화성 금융기관인 은행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당시 한국의 금융시장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생명보험회사 정도가 유일한 비은행 금융기관이었다. 이 당시 제도금융시장의 자금 가운데 약 85 퍼센트를 통화성 금융기관이 차지하고 있었다. 1970 년대에 들어 오면서 사채를 양성화하고 실물부문에 대한 금융부문의 제약을 완화하기 위하여 비통화성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가 제거되었다. 단자회사, 상호신용금고, 신용협동조합 등이 설립되었다. 단자회사는 단기자본의 조달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고, 상호신용금고와 신용협동조합은 서민의 저변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74 년 투자신탁회사가 설립되어 일반인들에게 투자신탁업무를 함으로써 자본시장에 도움을 주기 시작하였다. 1976 년에는 종합금융회사가 설립되어 외국자본의 알선 및 선진국의 금융기법을 도입하는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이같은 비통화성 금융기관의 설립 및 영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통화성 금융기관과 경쟁할 수 있는 조건을 부여해야만 했다. 이같은 점을 감안하여 비통화성 금융기관에게는 덜 엄격한 이자율 규제가 허락되었다. 그래서 신종기업어음 등의 이자율은 언제나 시중은행의 이자율보다 높았다. 이같은 조치는 금융시장에 있어서 통화성 금융기관과 비통화성 금융기관 사이의 자금의 배분에 영향을 주었다. 우선 GNP 에 대한 금융자산의 비율은 1972 년까지 별로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은행 금융기관이 소개되면서 이 비율은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1976 년의 1.23 에서 1983 년의 2.16 으로 상승하여 같은 기간에 실물부문보다 더 빨리 상승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같은 금융자산의 비율이 빠르게 증가한 주요 이유는 이자율의 상승이었다. 금융자산의 비율이 상승하지만, 이 가운데 통화성 금융기관의 금융자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1970 년 이후로 감소해 가고 있다. 통화성 금융기관의 시장점유율은 1970 년대 초반의 60.7 퍼센트에서 1983 년의 36.7 퍼센트로 하락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비통화성 금융기관의 시장점유율은 같은 기간 동안 21 퍼센트에서 35.6 퍼센트로 증가하였다. 금융시장의 발달로 통화성 금융기관의 시장점유율이 낮아지고 비통화성 금융기관의 시장점유율이 높아지는 현상은 일견 금융시장의 발달이 통화성 금융기관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록 통화성 금융기관의 발달 및 비통화성 금융기관의 발달은 통화성 금융기관에 불리한 작용을 하지 않는다. 금융실명제 한국은 금리규제와 함께 금융의 가명제를 오랫동안 허용하여 왔다. 금융실명제 실시에 대한 요구는 끈질기게 계속되어 왔다. 드디어 1993 년 8 월에 금융실명제를 단행하였다. 보안은 잘 지켜졌다. 금융실명제의 목적은 경제의 모습을 이해하고 정책에 이용하는데 있어서 실물의 흐름과 함께 자금의 흐름을 정확히 포착한다는데 있다. 그 하나의 예로 조세의 공정한 실시에 금융실명제가 이용된다.


그런데 금융실명제의 실시는 사람들 사이에 혼란을 증폭시켰다. 조세의 공정실시가 금융실명제의 주목적인 것처럼 오도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금융실명제와 함께 조세를 지나치게 강조한 당국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더우기 소급실시와 자금출처의 증빙은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였다. 이것은 당국이 그 동안 비실명제가 크게는 정경유착에 이용되고, 작게는 금융부조리와 관계되므로 이들을 제거한다는 취지를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이다. 한국은 지난 30 년간 성장을 위하여 금융억압을 이용하여 왔다. 금리규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제도 하에서 사채시장은 제도금융시장을 만나게 되는 데에 꺾기, 커미션 등도 있었다. 이 역시 비실명제도 하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금리규제는 비실명제도와 동행한다. 금리규제는 그대로 두고 비실명제도만 실명제도로 전환한다 해도 또다른 형태의 파행이 발생할 소지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리규제를 푸는 것이 실명제의 선행작업이었어야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반대논리도 있다. 비실명 하에서 금리자유화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차명이나 가명으로 거래하는데 금리만 자유롭게 되었다 하여 개인의 신용평가가 가능한 것이 아니며, 이를 바탕으로 신용대출이나 기타 금융거래가 자유롭게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장의 기능을 과소평가하는데 기인하는 견해라는 반박도 있다. 시장의 기능이 자유로워지면 하지 말라고 하여도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스스로 실명제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후생경제학의 제 1 원리와 제 2 원리를 보면 경쟁이 최적상태를 가져다 주고, 최적상태는 경쟁상태라는 내용인데, 이것은 시장기능의 활성만이 최적상태를 가져다 준다는 증거이다. 이 원리에 의하면 시장기능의 자유로움만이 재산의 정의까지 확실하게 해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재산의 정의가 시장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재산을 정의한다는 말이다. 나의 것과 남의 것을 분명히 해 줄 수 있는 것은 시장이 재대로 자신의 기능을 수행할 때뿐이므로 시장기능의 자유가 실명제의 선행이라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실명제 실시 전에 금융도 자유화되었어야 했다. 실명제 당시 유일한 정책수단은 계속적인 어음할인을 통한 현금통화의 공급뿐이다. 전통적으로 금융시장에서 불확실성이 가중될 때에는 어음할인수단을 써 왔다. 그러나 이 수단은 금융이 자율적으로 움직여 어음을 선별할 수 있을 때에만 사용할 수 있는데, 문제는 금융이 자율화되지 않은 지금 자금이 여하히 중소기업에게 전달되느냐이다. 실명제 이후 사채시장이 잠적해 버렸으므로 중소기업은 제도금융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정부나 제도금융은 이들에 대한 신용평가가 없으므로 공급의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고 담보능력도 없다. 이것은 금율자율화가 실명제를 선행했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실명제 즉시 현금 선호가 커졌다. 현금 선호가 커지면 신용창조에 문제가 생긴다. 현금통화비율의 급격한 팽창으로 통화승수와 지불준비금을


감소시키므로 통화량이 감소한다. 이때 동일한 통화량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본원통화를 증가시키는 수밖에 없는데, 션금 선호에 부응하여 현금의 공급이 증가하게 된 것이다. 이 원리를 믿고 현금 선호가 급격히 팽창할 때 현금의 공급은 통화량에 별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물가상승을 별로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같은 신용창조의 원리에 대하여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금이 풀리면 곧장 물가로 연결된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이같은 심리만으로도 사실상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 금융실명제는 시대적 요청이고 늦은 감이 있다. 그러나 순서가 중요하다. 바둑에 '선행마 후치중' 격언이 있듯이 경제에도 '선치중 후행마'가 있다. 실명제를 행마로 보면, 이에 앞서 치중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금리자유화, 금융자율화, 지불제도의 혁신 등이다. 금융시장이 시장기능에 맡겨진 후라야 자금이 경제논리에 맞게 흐르고, 이를 이용하여 실명제를 했어야 했다는 견해가 있다. 금리자유화 금융실명제에 이어서 1993 년 10 월 정부는 금리자유화를 단행했다. 이전까지 한국의 금융시장에서 이자율은 시장수급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았다. 금리자유화 조치는 바로 이때까지 인위적으로 결정되었던 이자율을 지상에 의해 결정되는 균형이자율로 복귀시킨다는 것이다. 규제금리 하에서 국민경제가 부담하는 비효율성은 일반적으로 높다. 이 비효율성은 금리자유화로 제거될 수 있다. 아마도 이 비효율성의 제거가 금리자유화의 직접적인 이득이 될 것이다. 금리자유화와 함께 당연히 이자율은 규제금리보다 오른다. 문제는 오르는 이자율의 수준을 통화량의 조절로 물가에 심각한 영향을 주지 않고 현행이자율 수준으로 묶어 두어 균형이자율을 안정시킬 수 있느냐였다. 이것은 중앙은행의 판단에 속한다. 이 판단에 금리자유화의 성패가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자율이 오르더라도 앞에서 언급한대로 균형이자율하에서 제거되는 비효율성을 감안하면 제거되는 비효율성이 이자율의 오르는 부분보다 크므로 순효과는 긍정적이 된다. 이론적으로 볼 때 금리는 모든 가격변수를 다른 시간대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는 자원배분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금리자유화를 통해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가격인 이자율을 시장에 맡긴다는 취지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금리를 시장에 맡길 경우, 다른 가격과 달리 수량조정보다는 가격조정이 심하다는 것이 흠이다. 다시 말하면 금리는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금리자유화의 핵심은 정책에 있다. 당국은 이 점을 인지하여 금리자유화와 함께 종래의 목표통화량 정책을 버리고 목표이자율 정책을 택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관리통화제도 하에서 목표이자율 정책은 금본위제도의 폐기 하에서 실물어음주의와 같다. 이 점의 약점은 앞에서 보았듯이 다른 정책에 비하여 인플레이션을 쉽게 불러 일으킨다는데 있다. 당국이 어떻게


이를 기술적으로 운용하느냐가 과제가 되었다. 그런데 안정적 이자율과 안정적 물가를 모두 가질 수 없다. 어느 한 가지를 택하여야 한다. 그런데 금리자유화 조치와 더불어 목표이자율을 끼워 넣었다는 것는 이자율 안정을 최소한 단기적으로나마 겨냥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자율 불안정을 걱정하기에 앞서 금융실명제로 인해 풀린 돈으로 오를 물가를 걱정하였다. 말하자면 두 가지 일을 저지른 셈인데, 어느 것도 모른 체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금융실명제와 금리자유화는 금융시장의 정상화를 위한 동전의 앞뒤이다. 따라서 금리자유화는 금융실명제를 완성시키는 조치라고 할 수 있는데, 순서가 바뀌어서 두가지 일을 저질렀다는 견해가 있다.

11.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화폐의 역사는 이와 같이 진행되어 왔다. 오래 전에는 단지 순수 금화만이 유통되었다. 오늘날에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든지 상관없다. 제 2 차대전시 구리가 부족하게 되자 미국의 동전은 모두 아연으로 만들어 졌고, 그 밖의 곳에서는 플라스틱 경화가 유통되었다. 오늘날 화폐의 가치는 그 재료와 아무 상관이 없다. 화폐가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정부가 그의 가치를 보증하기 때문이다. 1920 년대에 금은 세계를 지배하였다. 금은 대부분의 현대국가의 지폐를 보증하는데 사용되었고, 금화는 이들 국가에서 유통되었다. 그러나 1929 년과 1936 년 사이에 59 개국이 금본위제도를 떠났고, 그 이후 금은 예전의 위치를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특히 한국의 금의 공급량은 더 이상 화폐공급량의 크기와 상관이 없다. 그러나 금은 국제금융에서는 여전히 중요하다. 국제통화 그리스와 로마제국의 순수 은화와 금화는 최초의 국제통화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와 로마는 지중해의 무역을 장악하였다. 국제상인들에게 교환의 매개수단이 몹시 필요하였고, 그리스와 로마의 금화가 이 필요를 훌륭히 만족시켜 주었다. 처음에 이들 경화는 순금과 순은으로 주조되었다. 고대에서는 금속화폐의 질만 조사하기 쉬우면 무슨 모양이 새겨졌던지 상관없었다. 트기가 다른 금화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수량보다는 무게로 평가되었다. 현대에도 국제통화는 무역의 결과로 생겨났다. 현재 미국의 달러와 영국의 파운드가 주요 국제통화이다. 국제거래의 상당량이 이 두 나라에 의해서 수행되고, 이 두 나라의 재정적 안정의 명성 때문에 이 두 통화는 국제통화가 되었다. 물론 영국의 사업가는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에서 파운드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아르헨티나 은행에서 파운드를 아르헨티나 통화로 바꾼다. 이때 두 통화의 교환비율인 환율이 그에게 중요하다. 그는 아르헨티나


통화로 쇠고기를 사서 영국으로 보낸다. 아르헨티나 은행은 파운드를 받아서 보관한다. 이 돈은 아르헨티나 사업가가 영국이나 스털링 지역의 국가, 또는 아르헨티나 통화보다는 영국의 파운드를 더 좋아하는 나라에서 상품을 사고자 할 때 사용된다. 아르헨티나에 상품을 팔고자 하는 나라들이 그 대금으로 아르헨티나 통화보다는 파운드로 받고자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아르헨티나는 오랫동안 인플레이션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통화의 구매력은 급격히 떨어졌고, 이미 여러 번 평가절하를 한 바 있다. 게다가 정치적 변혁이 있었고, 해외투자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태도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런 저런 것 때문에 아르헨티나 통화는 국제무역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결국 다른 상품처럼 어떤 나라의 통화도 그것을 많이 수요하면 할수록 값이 비싸지면, 반대로 수요가 적으면 적을수록 값은 떨어진다. 영국의 파운드가 아르헨티나의 통화보다 상대적으로 수요가 많으면 영국의 돈이 아르헨티나의 돈보다 상대적으로 더 비싼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이에 따라서 두 통화 사이의 환율은 영국의 파운드가 비싸게 결정된다. 영국과 미국의 정치적 안정과 건전한 경제운영이 그들의 통화를 국제무역에 적당한 통화로 만들었다. 많은 나라의 은행들은 그들의 외화의 대부분을 이 두 통화로 보유하고 있다. 파운드와 달러는 2 천년 전에 그리스의 드라크마와 로마의 데나리우스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국제무역에 유통되고 있다. 그러나 달러와 파운드는 금이 아니다. 어떤 나라는 아직도 국제거래를 영국돈이나 미국돈보다도 금으로 결제하고, 그 금을 자국의 은행에 보관하기를 원한다. 이렇게 하여 금은 아직도 화폐의 세계에서 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한 때 프랑스는 자신의 금 보유고를 증가시켜 왔다. 그러나 프랑스의 대량의 금보유고도 1969 년에 일어난 심각한 자국의 금융문제를 막지 못하였다. 금이 역할이 도전받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모여서 유엔에 국제통화기금(IMF)을 설립하였다. 여러가지 면에서 이 기구는 세계의 중앙은행이라 할 수 있다. 이 기구는 회원국이 예치한 자국통화와 금을 준비금으로 보유한다. 회원국에 대출도 한다. 그리고 이 기구는 1968 년에 국제신용제도를 발족시켰다. 이 제도가 완전히 궤도에 오르면 사실상 금의 필요성은 없어진다. 오랜 역사 후에 금은 마침내 산업과 예술에만 쓰이는 유용하고 아름다운 물체로 국한되고 말았다. 새로운 국제신용의 창조 금이 화폐로서의 역할을 마침내 내놓은 자리를 달러가 메우고 있다. 이밖에 여러 나라들의 돈도 국제통화로 널리 쓰이고 있다. 미국의 달러는 국제통화로 쓰이지만 국제무역의 크기에 맞추어 조절하지 않는다. 미국


국내경제에 우선하여 조절한다. 그러면 국제무역의 규모가 커져 갈 때 미국 국내의 달러의 양은 변동함이 없이 세계의 달러의 양은 이에 대해 어떻게 부응하는가. 이에 대한 해결은 참으로 우연히 발견되었다. 1950 년대에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소련은 미국내에 예치된 자국의 달러 예금을 미국이 적국의 자산으로 동결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이 예금을 미국내의 미국은행으로부터 인출하여 유럽내의 유럽은행에 달러화로 예치하게 된다. 이것이 유러은행과 유러 달라의 시작이다. 이같은 은행을 통칭하여 유러은행이라고 부르고, 유러은행에 예치된 달러를 '유러달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유러은행의 출현의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사람들은 소련이 미국내의 달러를 유출하므로 미국내의 달러의 양이 감소하고,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같은 일로 볼 때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이 독자적으로 미국내의 달러의 양을 조절할 수 없음을 뜻한다고 우려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이와 반대였다. 미국내의 달러의 양은 변동함이 없이 새로운 국제신용이 창조되었다. 이같은 현상은 앞장에서 설명한 국내의 제 1 금융권과 제 2 금융권의 관계와 똑같은 원리로 설명된다. 국내의 제 1 금융권과 제 2 금융권의 관계는 주어진 통화량 하에 더 많은 유동성을 창조시킨다. 이와 동일한 이치이다. 미국내의 은행을 제 1 금융권이라고 생각하고, 유러은행을 제 2 금융권이라고 생각하면 미국내의 달러의 통화량에는 변화없이 유럽에 달러의 유동성, 즉 유러 달러가 창조된 것이다. 같은 원리로 유러은행에 이어서 아시안은행이 등장하였고, 아시안 달러가 창조되어 국가간의 결제에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신용창조의 원리의 발견이야말로 인류의 위대한 발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제통화 사이의 그레샴 법칙 40 년의 국제통화기금(IMF)의 역사는 한마디로 그레샴의 법칙이 잘 적용된 보기 드문 화폐적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레샴의 법칙은 하나의 경제사회에 여러 종류의 통화가 존재하고, 이들 통화 사이의 교환비율이 명목적으로 일정하게 묶여 있을 때 통화 사이의 실제가치가 변하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된다는 현상을 말한다. 세계를 하나의 경제로 볼 때 많은 통화가 존재한다. 또한 하나의 국가는 하나의 경제단위로 다른 국가와 자발적인 교역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때 각국의 명목통화가치가 상대적인 희소성을 제대로 반영한다면 모든 통화는 지불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때 각국 통화는 보완재가 된다. 그러나 하나의 통화가 다른 통화에 비하여 그 상대적인 희소성(실제가치)이 명목가치보다 낮으면 사람들 사이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다. 이때 통화와 통화 사이는 경쟁(대체)관계가 된다. '브레튼 우즈 체제'로의 출범


1947 년 IMF 가 브레튼 우즈 체제로 처음 출범하였을 때 그 기본원칙은, 첫째 금을 각국의 통화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금본위제도, 둘째 각국 통화의 교환성을 인정하는 금환본위제도, 셋째 각국 통화의 교환비(환율)를 고정시킨 고정환율제도, 넷째 국제수지 적자국이 IMF 기금에서 차입할 수 있는 국제수지 조정제도였다. 둘째 원칙은 모든 가맹국의 통화를 국가간의 교역에 지불수단으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하나의 경제에 여러 종류의 통화가 존재하게 되었다. 게다가 첫째 원칙에 의해 금이라는 통화가 추가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셋째 원칙에 의해서 그레샴의 법칙이 적용될 소지가 있으나 이것은 넷째 원칙이 봉쇄해 주도록 되어 있다. 즉 넷째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면 셋째 원칙에 의하여 통화가치 사이의 고정 교환비는 항상 실제 교환비와 일치할 수 있으므로 하나의 통화가 다른 통화를 구축하는 현상이 발생함이 없이 금을 포함한 모든 통화가 자유롭게 결제수단으로 사용되어 첫째 원칙과 둘째 원칙도 지켜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브레튼 우즈 체제가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이상의 네 원칙 가운데 마지막 원칙이 제대로 운용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원칙은 소위 국제유동성의 모든 문제와 연결되어 처음부터 제대로 지켜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후의 IMF 역사는 1950 년대 말부터 이 문제가 노정되고, 그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그레샴의 현상을 막아 보려는 여러 미봉책으로 점철되어 있다. 마침내 이같은 미봉책으로는 더 이상 초기 IMF 체제가 지켜질 수 없게 되자, 그레샴 현상의 원천적인 셋째 원칙(고정화율제도)을 폐기하고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하는 킹스턴 체제를 성립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새로운 국제통화인 SDR 의 창출 브레튼 우즈 체제의 최초의 미봉책은 1964-65 년에 걸쳐 미국정부가 실시한 이자평형세제이다. 원래 IMF 의 이상은 모든 통화 사이의 교환성이었으나, 실질적으로 미국의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달러본위체제로 달러의 통용범위를 국제적으로 확대시킨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미국의 계속적인 국제수지 적자로 달러가 유출되고, 더우기 유러 달러를 중심으로 한 장단기 국제금융시장의 발달로 달러의 유출이 더욱 심해지자 금과 달러의 실제 교환비가 명목 교환비와 괴리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러샴의 법칙으로 달러보다는 금을 선호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면, 따라서 미국정부는 이것을 막기 위하여 이자평형세제와 민간기업 및 금융기관의 대외투융 규제를 실시하여 달러 불안을 해소하려 하였다. 이 정책으로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긴 하였으나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미국의 계속적인 국제수지 적자의 누적 때문이다.


1960 년대 중반에는 이미 금과 달러의 실제 교환비는 명목교환비와 크게 괴리되어, 이 괴리를 없애기 위해 1961 년에 실시하였던 금풀(pool)협정은 1968 년 금의 이중가격제로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금의 이중가격제는 IMF 체제를 지탱하고 있던 금환본위체제를 위협하는 중대한 조치로 평가된다. 사실상 이때부터 IMF 는 원래의 IMF 원칙을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68 년 또한 국제유동성논쟁의 중요한 해이기도 한다. 미국의 국제수지가 계속적으로 흑자인 경우 원래의 IMF 체제 하에서는 금-달러가 사실상의 국제통화이므로 다른 국가들에게는 국제통화의 부족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반대로 미국의 국제수지가 계속적으로 적자인 경우 다른 국가 사이에서는 국제통화가 팽창되어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이것은 달러의 실질가치를 떨어뜨려 금-달러의 실질가격과 명목가격 사이에 괴리를 일으키므로 흑자국들 사이에 달러를 금으로 태환하려는 요구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 경우 그레샴의 법칙으로 금이 달러보다 국제통화로 더 크게 선호되는데, 금은 그 공급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이 경우 역시 국제유동성의 부족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같은 국제통화의 모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달러 등 특정국가 통화에 의한 국제통화의 공급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이같은 모순은 사실상 1960 년대 초부터 학계와 금융계 등에서 활발히 검토되어 왔다. 결국 1968 년 스톡홀름 회의에서 금을 인조로 만들어내기로 합의하였다. 이것이 인조금, 또는 종이금(paper gold)이라고 불리우는 SDR 이다. 스톡홀름 회의는 새로운 국제통화인 SDR 의 관계규정을 마무리지었고, 1969 년에 발효되기에 이르렀다. SDR 은 IMF 기금과 달리 각국의 기금으로 창출된 것이 아니고, 기금없이 IMF 가 발행한 국제통화이다. '킹스턴 체제'로의 이행을 도운 스미소니안 체제 1968 년에 특정국가의 통화에 바탕을 두지 않는 국제통화를 창조하는데 간신히 성공하였지만, 새로운 국제유동성이 금-달러를 완전히 대체하기에는 아직 일렀고, 따라서 IMF 의 기본체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금본위제도와 고정환율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 60 년대를 통하여 각국이 경험한 것은 통화의 실제가치를 IMF 의 명목가치와 일치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내의 재정금융정책의 한계, 각국 사이의 이해대립, 미국의 계속적인 국제수지 적자, 그리고 특히 국제금융시장의 발달이 그 원인이었다. 최종적으로 금과 달러의 교환비를 고수하려던 미국도 1971 년에 와서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결국 고정환율제도가 그레샴의 법칙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할 수 있다. 1971 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금태환을 정지시켰고, 달러를 평가절하하였다. 달러의 교환성 정지 이후 국제통화질서는 한동안 혼미상태였다. 더이상


금본위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금을 대신할 본위제가 시급히 필요하게 되었다. 각국의 환율은 심한 기복을 보였다. 따라서 국제통화체제를 다시 안정시키기 위한 각국 사이의 협상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스미소니안 협정이다. 이 협정에서의 환율체제는 여전히 고정환율체제이지만 잠정적으로 환율변동폭을 전보다 넓게 하는 와이더 마진(wider margin)제를 채택하였다. 스미소니안 체제는 원래의 브레튼 우즈 체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금태환의 정지로 사실상 달러본위제가 된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뒤에 등장하는 킹스턴 체제로 이행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스미소니안 체제로 일단 국제통화의 혼란은 진정되었으나 이 체제는 오래 계속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혼란은 진정되었으나 이 체제는 오래 계속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스미소니안 체제는 미봉책으로서 국제통화제도의 원래의 문제인 통화의 명목가치와 실질가치의 괴리현상을 해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미소니안 협정이 체결된지 얼마 안되어 영국이 제일 먼저 스미소니안 체제를 이탈하여 변동환율체제로 이행하였다. 이어서 이탈리아가 이중외환시장제를 시도하였고, 스위스가 변동환율제로 바꾸었다. 유럽의 외환시장이 다시 혼란으로 들어갔고, 1973 년 미국은 다시 두번째로 달러를 평가절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러의 금교환 정지는 이에 앞선 금이중가격제 실시 등과 함께 금의 공정가격과 시장가격의 괴리를 한층 심화시켰다. 금에 대한 그레샴의 법칙의 적용으로 금은 양화로 그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었다. 금의 공정가격 폐지는 사실상 시간문제가 되었다. 1974 년 EEC 가 먼저 금의 공정가격을 폐지하였고, 1975 년 와싱턴에서 열린 IMF 잠정위원회는 금의 공정가격을 폐지하기로 하였다. 이후 금의 매매는 자유화되었다. 이것은 IMF 개혁작업에 있어서 큰 진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제 남은 문제는 변동환율제를 공식적으로 채택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킹스턴 회의에서 합의되었다. 킹스턴 체제는 변동환율제와 금공정가격의 폐지 이외에 표준 바스켓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로써 약 30 년간 브레튼 우즈 체제를 지탱해 온 금환본위제와 고정환율제는 붕괴되었고, 금 또한 가치척도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대신 인조금인 SDR 이 가치척도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수천년의 역사가 지난 후에 금은 마침내 산업과 예술에나 쓰이는 유용하고 아름다운 물체로 국한되고 말았다. 킹스턴 체제 이후 국제통화제도에 그레샴의 법칙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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