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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다 30 대 열다섯 전문가가 세상에 바치는 아름다운 삶과 꿈 이야기 지은이: 강태진. 김민석. 김석동. 김승환. 김은희. 김태영. 노재령. 손석희. 심규철. 오숙희. 은병수. 이경영. 이성헌. 조병희. 허진호 출판사: 일터사랑출판문화연구회 - 현암사

이 책을 엮으며 지금은 세기 말이 아니라 세기의 앞이다. 미래는 여기로, 우리에게로 오는 것 이 아니다. 창조적이고도전적인 젊음에게 미래는 서서 기다려야 할 시간이 아니 다. 미래는 젊음이 달려가 누려야 할 시간이다. 이 때 미래는 있다. 오늘의 창조 적인 30 대에게 미래는 이미 이들의 현재 안에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래와 연결된 한 가닥 밧줄을 튼튼하게 거머쥐고 있을지 모른다. 여기, 미래를 열어 가는, 미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빛나는 젊은이들이 있다. 오늘의 30 대는 출발과 끝의 낙차가 지나치게 큰 불행한 세대이며 문명사적 대 전환기에 성장한 `경계 위의 세대`이다. 이 땅의 30 대는 전쟁의 그늘에서 태어났 고 근대화 계획과 군사 독재가 닦아 놓은 길을 따라 달렸으며 이들의 성년식은 곧 `아버지`를 부정하는 일이었으니 심각한 단절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경계 위의 삶은 극도의 긴장을 요구한다. 위와 아래, 앞과 뒤를 끊임없이 주시하면서 살아온 이 세대 ... 여기, 오늘 새삼스레 주목받고 있는 이 단절의 세대들이 풀어 놓는 향기나는 삶들이 있다. 여기 이 사람들의 이야기는 결코 성공담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겨 우 시작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후 이들의 모험과 여정이 반드시 공 공하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출간하는 것은 모순 과 혼돈의 시대에 신파, 개혁과 보수, 20 세기와 21 세기 등 여러 전환점에 들어선 현실에서, 갈등과 오해가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서 어른 세대에게는 관용과 이해 를 신세대들에게는 새 날의 주역으로서 웅지를 펴나가는 데 조그마한 도움이 되 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애써 주신 필자 여러분의 건투를 소망하며 아 울러 어려운 사정에도 여력을 아끼지 않으신 형난옥 주간과 현암사 여러분께 진 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1996 년 3 월 엮은이 일터사랑 출판문화연구회 나는 컴퓨터 독립 운동가 강태진 1959 년 서울에서 태어나 토론토 대학에서 전산학과 인지심리학을 전공한 후 ` 한컴퓨터` 개발 담당 이사로서 `한글워드`, `한글 2000` 개발을 지휘하였고 `나라 소프트`사 대표를 역임한 후 현재 `한글과컴퓨터`사 이사로 있다. 한글 기계화 유공자로 국무총리상을 받았고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 컴퓨터 관련 칼럼을 다 수 연재하며 수필집 (내 사랑 내 사업 내 방식대로)를 펴내기도 했다. 깃발을 내리고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큰 변화를 겪었다. 직원 수가 20-30 명인 회사의 경영자 에서 200-300 명의 직원을 가진 회사의 경영진이 된 것이다. 한국에 돌아오자마 자 시작해 6 년간 운영하던 회사의 간판을 내리고 경쟁 회사에 직원과 함께 투항 을 했으니 그 이상 더 확실하게 패배를 시인할 수는 없으리라. 잠시도 쉬지 않 고 신제품 개발에 매달려야 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시장에서의 생존 경쟁은 그


어느 분야보다 치열하다. 그리고 그 경쟁 상대가 국내 기업보다는 마이크로소프 트 같은 외국의 거대 기업이므로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느끼는 위기 의식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1994 년 초에 그 동안 경영하던 `한컴 퓨터`를 중심으로 몇 개의 다른 소프트웨어 회사와 `나라소프트`라는 이름의 연 합 전선을 구축했다. 우리 나라의 소프트웨어 산업이 국제 경쟁력을 가지려면 중소 업체가 힘을 합해 덩치를 키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깃발을 내걸고 1 년 동안 세모으기에 힘을 다했다. 컴퓨터 전문 잡지뿐 아니라 일간지도 나라 소 프트의 출범을 크게 보도하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커다란 틈이 있었고 그 틈을 메우기에 능력은 턱없이 모자랐다. 사실 그 때까지 정말로 마음 먹고 하고자 하면 못 할 일이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1994 년 하반기에 들어서며 중학교 때부터 흔들리지 않던 그 자신감이 무참히 깨어졌다. 벌여 놓은 사업 때문에 경비는 늘어난 데 반해 투자 유치는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주변에서 여전히 믿어 주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회사는 굴러갔다. 그러나 그들의 도움은 투자 문제가 해결되어 사업이 본 궤도 에 오르지 않는 한 부채로 남게 될 게 뻔했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점점 늘어나 는 부채를 갚을 길이 보이지 않았다. 회사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고 사소한 일에도 신 경질을 내는 횟수가 늘어 갔다. 다른 출구가 보이지 않자 중소 기업을 경영하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자살이라는 이름의 출구가 자꾸 유혹했다. 죽으면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 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다. 한 일 주일 잠을 설치며 이 손쉬운 탈출의 유혹에 시달리다 마음을 굳게 먹었 다. 그 전에 흔히 들어 본 죽기로 마음 먹으면 뭘 못해 하는 말이 날 구해 줬다. 일 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시장 상황은 예측했던 것처럼 훨씬 더 나빠졌지만 최선을 다해서 좋은 제품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 한 번에 큰돈은 못 번다 해도 착실하게 회사를 운영해 조금씩이라도 빚을 갚아 가겠다고 다짐했 다. 그렇게 노력해 보고 안 되면 그 때 가서 죽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주변 의 상황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지만 일단 마음을 그렇게 먹고 나니 세상이 다 르게 보였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고 얼굴엔 웃음이 돌아왔다. 나라소프트는 훌륭한 명분을 갖고 태어나긴 했지만 그것을 재대로 키울 능력 이 없는 부모의 욕심이 빚어 낸 사생아였다. 무리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한동안 신경을 쓰지 못하던 제품 기획과 개발 지휘에 몰입했다. 이렇 게 비교적 평온을 찾은 생활을 한 지 몇 달이 지난 연말에 지금 몸 담은 `한글 과컴퓨터`에서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나라소프트를 설립할 때 내세운 명분을 그 대로 살리려면 `한글과컴퓨터`의 깃발 아래 합치는 게 맞지 않겠냐고. 오늘의 ` 한글과컴퓨터`와 `한글`의 성공이 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내가 오래전에 만들 었던 `한글 프로세서 3`이나 `한글 2000`이 초석이 된 것이고 이제 그 결실을 같 이 나누자는 승자의 아량도 보여 줬다. 이미 마음을 비운 상태였기에 결정을 내 리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한글과 컴퓨터`에 들어온 지 일 년이 지났다. 새로운 제품군의 개발을 지 휘하느라 몸은 바빠도 그전에 하던 일의 연장선상이어서 마음은 정말 편하다. 회사 살림에 대해 직접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너무 좋다. 사실 대학원 을 다니며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내 역할은 아이디어를 내 고 다른 사람을 그 아이디어에 같이 흥분하게 만들어 제품으로 만들어 내는 거 였다. 일을 벌이면 가장 친한 친구 정재열이 계약의 세부 내용을 챙기고 자금 흐름을 맞추었다. 재열과는 대학을 다닐 때 같이 한글 자동 모아 쓰기 원리를 발견했고 어느 한 쪽이 시작한 말을 다른 사람이 끝내 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잘 맞았다. 황금의 콤비였다고 할까. 그렇게 해서 미국의 텔리비디오사용 한글


워드도 만들었고 한글 2000 도 만들었다. 그런데 한글 2000 을 만들며 이제는 한국 도 소프트웨어 저작권법이 통과됐으니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고는 둘 중에 보다 무모한 성격을 가진 내가 한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1989 년부터 서울에서 회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때부 터 `한글과컴퓨터`에 합류하기까지 적성에 안 맞는, 재열이가 하던 일까지 맡아 하느라고 힘겨워 했다. 토론토에서 서울로 14 년을 살았던 캐나다를 뒤로 하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서울로 생활 터전 을 옮기겠다는 생각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사업이 아니라 삶이 좀더 의미 있게 되기를 바라서이다. 채워질 줄 모르는 호기심은 늘 새로운 형태의 자극을 찾아 헤매게 했다. 그 자극은 책으로부터, 영화로부터, 친구로부터, 이성으로부터, 일로 부터 왔다. 또 외부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자극으로는 부족해서 스스로 재미 있는 일거리를 만들려고 애쓰기도 했다. 중학교 3 학년 때, 한국에서의 마지막 겨 울 방학에는 친구들과 햄버거 가게를 차려 운영도 하고 대학을 다니면서는 연극 연출을, 석사 논문을 쓰면서 일도 했다. 대학도 옮겨 가며 두 곳을 다니고, 전공 도 두 가지를 동시에 했다. 그러나 점점 자극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함을 느꼈 다. 내 삶에 특별한 의미를 갖고 싶었다. 같은 시기에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친구들이 권력의 횡포에 대항해 처절히 투쟁하는 모습을 멀리서 보며 그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그들이 하는 행동 하나 말 한마디는 나라와 민족의 장래에 큰 의미를 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기 껏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자극을 증폭시키는 게임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 다. 격렬한 섹스 중에 느끼는 오르가슴은 살아 있음을 획인시켜 주긴 해도 그것 자체가 사는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사흘 밤을 새우며 디버깅을 완료한 프로그램이 며칠간 어깨 를 우쭐하게 해주지만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는 없었다.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할까? 그러다 우연히 한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게 되고 그것은 비 로소 내 삶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드디어 그 실마리 를 좇아 한국에 왔다. 한글 코드 전문가가 되어 지난해는 의미 찾기에 있어서 당당히 중요한 한 해이다. 지난 2, 3 년간 가슴 한구석에 풀지 못한 문제로 남아 있던 컴퓨터용 국제 문자 부호계에서 한글 처 리 문제를 말끔히 해결한 것이다. 우리가 한글이나 알파벳 같은 부호를 이용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나타내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같이 컴퓨터도 숫자로 이 루어진 코드 (부호)를 이용해 문자를 처리한다. 그런데 한동안 정부에서 표준으 로 정한 한글 부호계는 표현이 가능한 한글 음절 11,172 개 중에서 2,350 개만 나 타낼 수 있게 한 절름발이였다. 처음에 이 표준이 정해졌을 당시 많이 쓰이는 음절을 골랐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바뀌는 언어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세종 대왕의 한글 창제 원리를 컴퓨터 엔지니어들이 말살시킨 것과 다름이 없 다. 그래서 `또ㅁ방각하`의 `또ㅁ`자 같은 글자는 아예 컴퓨터에서 입력도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이 부호계의 문제점을 여러 차례 지적했고, 이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1992 년에는 국가 표준이 개정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제 표준이었다. 국제표준화기구 (ISO)는 세계 모든 나라의 문자를 지원하는 부호계인 ISO 10646 을 만드는 중이었고 미국의 컴퓨터 업체들 도 같은 목적으로 유니코드란 것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이 두 부호계의 통일을 앞두고 1992 년 6 월에 서울의 한 호텔에서 최종 회의가 열렸다. 그 동안 이 표준 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이 부족했던 정부의 무관심에 의해 유니코드에서도 한글


은 절름발이가 되어 있었다. 이 상태로라면 앞으로 영영 컴퓨터에서 한글을 제 대로 나타낼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기필코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각오로 회의 에 임했다. 영어권 나라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우리 나라 대표단의 대 변인 역할을 했다. 회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있었지만 한글에 관한 토의는 논란이 많을 것을 감지한 의장이 목요일로 미루어 놓았었다. 그러나 우 리는 매일 저녁 회의의 실세인 미국 대표들과 따로 모임을 가지며 이상적인 해 결책을 찾기에 바빴다. 회의 결과를 정리하고 새로운 문안을 준비하느라 하루에 서너 시간도 잠을 자기 힘들었다. 수요일 밤 12 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미국 대표 들과 합의를 보았다. 우리는 11,172 자 안이 아니면 한글은 아예 빼는 게 낫다고 강력히 요구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요청이 일본이나 중국의 반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우리가 금방 한 발짝 후퇴해서 수정안을 내는 것은 보기 좋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이 나서서 절충안을 낸다는 게 미국과 우리 대표단이 합의 한 시나리오였다. 이윽고 다음날 아침 한글 처리 문제를 토의할 차례가 왔다. 나는 마이크에 대 고 우리에게 왜 11,172 라는 숫자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설명했다. 중국과는 달 리 우리가 원하는 문자 수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을 것이니 우리가 우리의 문자 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20 분이 넘는 설명이 끝나고 의 장은 우리의 안에 대해 다른 나라 대표의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게 아닌가! 전날 저녁 우리가 사 줬던 갈비와 맥주의 효력이 있었는지 누구보다 먼저 반대할 줄 알았던 중국 대표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중국은 우리가 요구하는 공간에 한자를 더 집어 넣고 싶어서 반 대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있었다. 자신이 반대를 해서 주최국 의 인심을 잃지 않아도 누군가가 반대할 것이라는 중국 사람 특유의 배짱이었던 것 같다. 일본은 어떻게 되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한 5 분간 회의장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우리 대표단은 꿈만 같다는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했던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는가 보다. 흥분이 되어서 심장 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때 미국 대표가 손을 들었다. 한국이 요청하는 것 같은 큰 규모의 부호 영역 할당을 표준 비준 단계의 막바지에 와서 하는 것은 무리라 고 했다. 그리고 전날 합의했던 절충안을 내놓았다. 흥분한 우리 대표들은 누구 한테 무리냐, 절충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회의 분위기가 험 악해지자 의장은 정회를 선언했고 한글 문제는 다음날 아침에 다시 토의하기로 했다. 정회 동안 폴란드 대표가 우리 쪽으로 와서 미 제국주의자들은 나쁘다, 왜 당신들이 당신 나라 문자를 자유롭게 쓰게끔 내버려 두지 않는가, 당신들을 지 원하겠다며 격려해 줬다. 컴퓨터에서 우리 말 사용 주권 세우기 단장은 나에게 미국 대표단과의 회의를 소집하라고 했다. 그래서 미국 대표단 이 모여 있는 옆방에 갔을 때 그들도 심각한 표정으로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미국 단장은 나를 보자 잘 왔다며 얼른 회의를 하자고 했다. 나는 그 때 순간적 인 판단으로 시키지 않은 말을 했다. 우리 대표단은 지금 상당히 화가 나 있어 서 당신들과 더 이상 회의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자 미국 단장은 무슨 얘기냐, 어제 밤새 서로 합의한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한 게 누군데 화가 난 사람들은 우리다, 라고 흥분을 하는 것이었다. 합의한 것은 중국이나 일본이 우리의 안을 반대했을 때 당신들이 절충안을 낸다는 것이었지 남들은 가만히 있는데 당신들이 나서서 반대를 한다는 것은 아니지 않았느냐고 말을 받았다. 우리는 당신들이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착각임이 확실하다고 계속 항의하자 그들은 얼른 대답을 못 하다가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 꾸어서 이번에는 너무 늦어서 힘들겠지만 다음에 또 기회가 생긴다면 당신들을 꼭 돕겠다고 했다. 결국 다음날 회의는 일본과 중국의 반대에 대한 미국이 낸


절충안으로 끝나고 말았다. 회의가 끝나고 너무 허탈해서 며칠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 1 년만 더 준비를 하고 로비를 했으면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을 지 울 수 없었다. 우리의 실패로 인해 앞으로 컴퓨터를 사용하는 모든 한국 사람이 불이익을 입을 것이라는 생각이 회의가 끝난 후 2 년간 가슴을 짓눌렀다. 그러던 중 재작년 여름 한국마이크로소프트의 개발을 담당한 임원한테서 만나 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국제 표준에서 잘못된 한글 코드를 바로잡아 보자고 했 다. 외국 회사에 근무하는 한국 엔지니어도 우리말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컴 퓨터에서의 한글 처리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힘 을 합하기로 했다. ISO 가 재작년 말부터 10,646 의 개정 작업에 들어가며 기다리 던 기회를 다시 얻게 됐다. 1994 년 가을 캐나다에서, 지난해 3 월 미국의 실리콘 밸리에서 열린 유니코드 기술 위원회에 참석해서 왜 한글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처리되어야 하는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두 번의 회의에서 열띤 토론을 해도 의 견이 좁혀지지 않자 표결에 들어갔다. 중요한 사안은 회원사 3 분의 2 이상의 찬 성을 얻어야 하는데 우리의 안은 15 표 중 10 표를 얻어 통과하였다. 우리 회사는 그 표결권을 행사하기 위해 1 만 달러를 내고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 아슬아슬한 표결 결과를 보고 얼마나 기쁘던지. 우리 나라의 문자 코드 전문 위원회는 그 여세를 몰아 제네바에서 열린 ISO 회의에서도 우리 안을 상정시키는 데 성공했 다. 이 때도 중국과 일본의 치열한 반대로 몇 번을 엎치락뒤치락하여 간신히 합 의를 얻어 냈다. 마지막 결의안이 통과했을 때 내 손은 땀으로 축축했다. 이런 회의에 자주 참석했다가는 수명이 몇 년은 단축될 것 같았다. 결국 우리의 안은 지난해 8 월에 서면 투표로 확정되었다. 1992 년 서울 회의를 준비할 때부터 따지 면 4 년 만에 우리가 원하던 대로 일이 마무리된 셈이다. 보수를 받고 한 일도 아니고 회사의 이익과도 직접 관련이 없지만 작년의 유니코드 바로 잡기는 지난 몇 년 동안 한 일 중 가장 보람된 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컴퓨터 독립 운동 우리 나라의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자 중에는 사명감으로 일하는 사람이 많 다. 한글 코드처럼 앞으로 말고 생각을 기록하는 주된 수단이 될 컴퓨터에서의 언어 처리 문제를 우리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누가 해 줄 것인가? 우리말을 하고 알아듣는 컴퓨터, 손으로 쓴 우리 글씨를 읽어 내는 컴퓨터의 개발을 미국이나 일본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말 처리에 필 요한 이런 기본 기술을 우리 손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데 이견을 갖는 사람은 없 으나 워드프로세서 같은 응용소프트웨어도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데는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많다. 컴퓨터는 업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있는 도구 인 만큼 외국에서 수입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서 더 가볍고 멋진 운동화를 디자 인하고 보다 더 크고 안전한 선박을 설계해 수출하는 것이 국가 경쟁력 향상을 위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워드프로세서 같은 소프트웨어의 경우는 좀 다르 다.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부터인가 큰 숫자를 쓸 때 세 자리마다 콤마를 찍는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네 자리에 콤마를 찍었던 같은데 이제는 네 자 리 콤마는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세 자리에 콤마를 찍는 것은 `thousand, million, billion`하고 세 자리씩 단위가 바뀌는 영어권에서는 편리할지 모르지만 `일만, 억,조`같이 네 자리씩 단위가 바뀌는 우리말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 나라 사람은 큰 숫자를 읽을 때 콤마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하나하나 자릿 수를 세어야 알 수가 있다. 이 불편함은 우리말이 바뀌거나 네 자리 콤마를 사 용하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숫자 처리용 소프트웨어는 대 부분 자동으로 이 세 자리 콤마를 붙여 준다. 이런 소프트웨어를 우리 손으로 만들지 않는 한 우리는 이런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숫자 하나가 그러할 진대 우리의 말과 생각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워드 프로세서의 경우는 오죽하


랴. 요즘의 워드프로세서는 자동 철자 교정기를 기본으로 제공한다. 앞으로는 문 법 교정기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물론 외국에서 만들어진 워드프로세서도 철자 교정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것은 국산 제품과 경쟁을 위해 들어간 것이지 그 들이 앞장서서 집어넣은 기능은 아니다. 외국 회사는 자신들이 이미 세계 시장 을 위해 만들어 놓은 제품을 되도록 적게 개조하여 우리 시장에 팔려고 한다. 우리의 문화와 언어의 특성을 최대한으로 살린 기능을 지원하는 소프트웨어를 우리 손으로 만들지 않으면 그들이 알아서 해줄 리는 없다. 이런 사명감을 갖고 우리 나라의 젊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밤낮없이 일하 고 있으나 장래가 결코 밝지만은 않다. 껌 한 통 훔치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하면 서 몇십 만원짜리 소프트웨어를 불법으로 복제하며 눈 하나 깜짝 않는 사람이 아직도 많아 개발자를 맥빠지게 한다. 게다가 이제는 국내 시장에서도 마이크로 소프트 같이 막강한 외국 회사와 경쟁을 해야 한다. 기술력과 자금력에서 모두 앞선 그들과의 싸움에 문을 닫는 소프트웨어 회사가 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소 프트웨어 개발 업체는 모두 악전고투를 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대부 분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젊기에 다행이지만 나같이 가정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하기가 힘든 경우도 있다. 국민학교 상급생인 딸을 가진 친구가 해준 얘기가 씁쓸한 웃음을 짓게 한다. 친구의 딸이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 갔다고 퇴근한 그 집 아빠를 보고‚너희 아빠는 주 중에도 집에 오시니?‛ 하고 물었단다. 친구의 아내는 며칠에 한 번 집에 들러 잠만 자고 나가는 친구에게 딸의 얘기를 하며 불평을 했고, 친구는 아이에게 아빠는 독립 운동가라고 얘기해 주라고 했단다. 그는 우리가 하는 일 이 바로 컴퓨터 산업 독립 운동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했다. 그 친구보다 사명감 이 약한 나는 되도록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를 쓰나 주 중에는 거의 아 이들 얼굴을 보기 힘들다. 그 대신 주말은 반드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는 원 칙을 세워 여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지킨다. 영화냐 음반이냐 사실 외국 생활을 오래 한 내가 외세에 대항해 힘겨운 투쟁을 한다는 게 아이 러니일 수도 있다. 국내에 진출하려고 하는 수많은 외국 회사에 취직을 했더라 면 훨씬 더 편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제안 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에 안주하려 했다면 처음부터 한 국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국내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외국 회사와의 경쟁이 심 해지면서 나라소프트를 통해 시도했던 그리고 한글과컴퓨터가 나라소프트를 합 병하며 시도했던 국내 회사끼리 힘 모으기만 아니라 외국 회사와의 연합도 활발 히 진행되고 있다. 한글과컴퓨터는 지난해 IBM 의 지분 참여를 받아들여 마이크 로소프트에 대항하는 협력전선을 돈독히 했고 다른 외국 회사와도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지난해 여러 차례 미국의 기업을 방문하여 이런 협력 관계를 타진하 며 마이크로소프트와 경쟁 관계에 있는 대부분의 미국 회사도 우리와 같이 불안 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우리의 이러한 노력이 우리 나라의 소프트 웨어 시장에서 우리 개발자가 살아남고 나아가서는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발판 이 될 수 있을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할밖에.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영화나 음반에 비교하는 사람이 많다. 셋 다 창의력을 기반으로 해서 만드는 제품이고 한 번 히트를 하면 개발이나 제작에 들어간 투 자의 몇백 배를 건질 수 있는 고부가가치 상품이다. 물론 만든 것 중에는 성공 하는 것보다 실패하는 것이 더 많다는 것도 공통점 중 하나이다. 나는 소프트웨 어 산업이 음반 산업의 유형을 따랐으면 한다. 우리 나라의 영화 산업은 할리우 드에서 온 수입품에 눌려 기를 못 펴지만 음반 산업은 꿋꿋이 잘 버텨내기 때문 이다. 이것은 음반 하나를 만드는 데 드는 투자가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데 드는 것보다 훨씬 적어도 되므로 가능한 얘기이다. 소프트웨어는 아마 그 중간쯤일


듯한데 컴퓨터 사용 환경이 지금의 개인용 검퓨터 중심에서 네트워크 컴퓨터 중 심으로 바뀌면 음반 쪽에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네트워크 컴퓨터 올해는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 ENIAC 이 만들어진 지 50 주년이 된다. 그 당시 큰 방 하나를 다 차지한 이 컴퓨터는 우리의 책상 위에 올려진 개인용 컴퓨터 (PC)의 성능에 비교하면 보잘것없다. PC 라는 말은 IBM PC 가 등장한 1981 년에 야 나온 말이고 그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란 대형 메인프레임이나 중형 미니 컴 퓨터를 일컬었다. PC 의 출현은 기존의 컴퓨터보다 크기가 줄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대형 컴퓨터는 냉방이 잘 되고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컴 퓨터실에 설치되어 이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소수의 전산실 직원에 의해서만 제어 통제된다. 일반 사용자는 대형 컴퓨터에 연결된 단말기를 통해서만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하거나 이미 저장된 데이터를 검색할 수 있는 데 이것도 전산실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미국에서는 전산실을 10 여 년 전부 터 Data Processing Department 라는 이름에서 MIS(Management of Information System) Department 로 바꾸어 부른다. 단순한 자료 처리가 아니라 조직에 관한 모든 정보를 관리 통제하겠다는 의지를 이름에서부터 반영한다. 이러한 중앙 집 중적인 정보 관리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 PC 이다. PC 출현은 사용자가 관리자 에게 종속된 기존의 컴퓨터 사용 구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PC 는 대형 이나 중형 컴퓨터에 연결해 사용하는 단말기와는 달리 컴퓨터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CPU 와 입력된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하드 디스크 같은 보조 기억 장치 를 탑재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의 완벽한 컴퓨터인 PC 의 사용자도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의 완전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중앙 컴퓨터가 어떤 상태 에 있건 상관없이 필요할 때 컴퓨터를 작동시킬 수도 있고 원하는 자료를 검색 하거나 지워 버릴 수도 있다. PC 는 이처럼 사용자가 마음대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하여 컴퓨터를 보 다 창의적으로 해준다. 실제 PC 의 등장으로 컴퓨터를 일반적인 업무만 아니라 음악, 미술 등 분야에서 전산실의 사제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던 용도로 사용 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전산실의 본고장인 대기업에서조차 PC 사용자들을 수용한 지 오래되었다. 부서마다 업무의 특성에 맞추어 요구하는 소프트웨어를 전산실이 모두 제공할 수는 없고 필요한 소프트웨어가 PC 용 패키지의 형태로 이미 판매되고 있다면 그것을 사서 사용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부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 인터넷 사용자가 늘어나며 이 러한 추세가 변하고 있다. 사실 인터넷 이전에도 PC 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한번 사면 한 10 년은 문제없이 쓸 수 있고 구입한 지 3,4 년까지는 낡은 모델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텔레비전과는 달리 PC 는 값은 두 배쯤 비싸면서 산 지 1 년이 채 되지 않아 구형이 되어 버린다. 구입 후 3 년이 지나면 거기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아 사실상 쓸 수 없게 되어 버 린다. 이러한 사용자의 불만을 간파한 선이나 오러클 같은 미국의 컴퓨터 회사는 작 년 말부터 네트워크 컴퓨터(NC)라는 개념을 다투어 홍보하고 있다. NC 는 보조 기억장치 등이 빠진 간단한 구조를 하고 있다. NC 는 필요한 소프트웨어나 자료 를 그때그때 네트워크를 통해 가져와 쓴다. 소프트웨어를 일 년에 한 번씩 개정 판이 나올 때마다 돈을 주고 업그레이드할 필요도 없다. NC 에서 돌아가는 소프 트웨어를 만들기 위해 자바라는 새로운 프로그래밍 언어가 등장해 개발자의 관 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규모가 엄청나게 비대해져서 커다란 개발 팀 없이는 만 들 수 없는 PC 용 상업용 프로그램 과는 달리 자바는 어떤 특정한 일만 잘하는 작은 소프트웨어를 사용자가 자신의 필요에 맞게 연결해 사용할 수 있게 해준 다. 만일 NC 가 성공해서 현재의 PC 를 대처하게 된다면 소프트웨어 개발에 미래


를 는 만 을

걸려는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엔지니어가 아니라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PC 가 처음 나왔을 때처럼 번뜩이는 아이디어 있으면 창업을 하고 히트 상품을 내면 백만장자가 되는 꿈이 이루어질 수 있 것이다.

컴퓨터 과연 배워야 하나 컴퓨터는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아니더라도 잘만 사용하면 분명히 생활을 편하 게 해주는 훌륭한 도구이다. 그러나 요즘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컴퓨터를 모 르는 사람은 사회의 낙오자가 될 것이며 사회의 정보화가 가속화하면서 완전히 도태하고 말 것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과연 문맹 퇴치같이 컴맹 퇴치가 필요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당장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그러지 못하는 사람보다 어느 정도 이익을 보고 있긴 하다. 그러나 이러 한 이점은 3, 4 년, 길게 봐야 6, 7 년 안에 사라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컴퓨터 사용법이 아주 쉬워져서 특별히 배울 필요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지금 컴맹이 영원한 컴맹으로 남지는 않을 터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컴퓨터 배우기에 대한 집단 히스테리는 새로 운 기술이 도입될 때 볼 수 있는 과도기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그 새로운 것이 증기 기관이나 전동기 혹은 컴퓨터같이 생활 양식을 현저히 바꿔 버릴 수 있는 것일 때 호기심은 극에 달하 고 사회의 관심을 끈다. 컴퓨터가 생활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 불과 몇 년 사 이의 일이고 보면 누구나 컴퓨터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오 늘의 컴퓨터 기술 수준은 사용자한테 엄청난 수고와 인내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과도기 현상일 뿐 5, 6 년 내에 특별한 교육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나타날 것이다. 지금부터 백 년 전 유럽의 지식층 사이에는 전동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 으면 무식쟁이 취급을 당했다고 한다. 정장을 한 신사와 귀부인이 살롱에 모여 앉아 새로 개발된 전동기의 얼개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한 신사 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내가 가장 최근에 본 전동기는 탄소 브러시를 갖고 있고 1 분에 85 회 회전을 하더군 하고 이야기하면 앞에 앉은 귀부인이 부채로 입 을 가리며 감탄하는 모습, 상상하기가 힘들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20, 30 년 후의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이 컴퓨터에 보이는 관심의 정도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오늘날에도 전동기 전문 기술자는 엄연히 존재하며 보다 조용한, 보다 작은, 보 다 전력을 적게 소비하면서도 보다 강한 출력을 내는 전동기 개발을 위해 꾸준 히 노력한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사회 전체의 관심을 끌지는 못한다. 그래도 자동차 한 대에만 수십 개가 들어가는 전동기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해나간다. 어떤 이들은 컴퓨터를 배우는 것을 운전 면허를 취득하는 데 비교하기도 하나 컴퓨터 사용법은 당연히 자동차 운전하는 것보다 쉬워야 한다. 아무래도 컴퓨터 에 자동차보다 뛰어난 인공 두뇌가 있을 테니 사용자의 취향이나 습관을 파악해 서 일일이 이야기하지 않는 부분까지 알아서 작동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반드 시 10 년안에 우리는 이렇게 똑똑한 컴퓨터를 갖게 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컴퓨터 혹은 텔레비전(이 때가 되면 둘 사이의 구분은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화면 앞에 앉으면 그 날의 뉴스를 볼 수 있게 될 것이고(뉴스가 시작하는 시간 에 사람이 맞춰야 하는 게 아니라 통신망을 통해 계속 전달되는 뉴스 중 사용자 가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을 추려서 원하는 시간에 보여준다.) 그것을 통해 오늘 의 날씨나 전날 주식 시세를 파악할 수 있을 터이다. 똑똑한 컴퓨터는 지금의 텔레비전 같이 주식의 시세를 차례로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투자하고 있는 회사나 전에 관심을 보였던 회사의 주식 시세를 우선적으로 보여 줄 것이 다. 그 동안 들어온 전자 우편 목록도 보여 줄 것이고 그 날의 스케줄도 알려


줄 것이다. 이러한 일이 모두 음성 명령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특별히 컴퓨터 자 판 사용법이나 복잡한 운영 체제를 배울 필요가 없다. 물론 이런 컴퓨터가 나오기 전까지 컴퓨터를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남보 다 앞으로 몇 년 간은 필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찾아볼 수 있다든가, 보고서를 보다 쉽게 작성할 수 있다든가 하는 등의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목 적이 확실하면 조금 고생스럽더라도 컴퓨터를 배우는 게 좋을 것이나 단순히 컴 맹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초조해 할 필요가 없다. 사실 우리한테나 자라나는 후손들한테 더욱 필요한 것은 도구에 대한 교육보다는 논리적이고 체 계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워드프로세서를 잘 다루는 비서가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요 즘 미국의 관리자는 대부분 스스로 컴퓨터로 공문서나 보고서 등을 만들므로 이 런 비서의 일자리는 빠른 속도로 없어지고 있다. 이 비서들이 컴퓨터 교육 대신 관리자 교육을 받았더라면 지금 고용 시장에서 그들의 입지는 더 나았을지도 모 른다. 요즘 사람들의 입에 한창 오르내리는 인터넷에 접속을 해서 그 많은 자료를 뒤지고 다니려면 컴퓨터 전문가가 아니면 불가능하던 것이 불과 2, 3 년 전의 일 이다. 하지만 이제는 마우스로 원하는 내용을 화면에서 가리키기만 하면 필요한 정보를 모두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정보가 영문으로 되어 있어서 인터넷 을 잘 활용하려면 컴퓨터 공부보다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정보 시대에도 정말로 필요한 것은 기본적인 읽기 쓰기 교육과 체계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훈련이다. 우리는 컴퓨터 덕분에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손쉽 게 접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수십 수백 만 명의 다른 사람에게 어렵지 않게 전파할 수도 있다. 이런 정보 홍수 속에서 어떤 정보가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를 판단하고 자신의 생각을 보다 정확하게 다 른 사람에게 알리려면 앞서 말한 기본 교육이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며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아 온 우리에게는 더욱더 절실하다. 컴퓨터 교육에 온통 집중 된 우리의 관심을 교육 개혁으로 돌리는 것이 미래를 위한 훨씬 현명한 투자가 될 것이다. 마흔 이제 3 년 후면 나도 마흔이 되는데 그 때 과연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자신있 게 말할 수 없다. 그 동안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과연 내가 달리는 이 코스가 맞는 코스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그러다 지난 한 해 동안 오 랜만에 숨을 돌리며 삶의 우선 순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아이들 이 커 가며 가족이 일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헤 된 것도 큰 변화라면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마흔이 된다고 갑자기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만 그 때까지 이런 이런 것은 해놔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가끔 초조하다. 그 중에는 몇 년 전부터 구상하던 사이버스페이스를 배경 으로 한 부분적으로 무지 무지하게 야한 소설(이 야한 부분에 대한 나의 아이디 어를 Nicholson Baker 가 재작년에 낸 소설 Fermata 에서 도용한 것 같아 아직도 화가 난다.)을 끝내는 것도 있으나 내 이름으로 된 집을 소유하는 것은 들어 있 지 않으니 아직도 철들려면 멀었나 보다. 한눈 파는 버릇이 사업에 송공하지 못 한 주된 요인이라고 꾸짖는 친구도 있지만 요즘 나오는 컴퓨터도 동시에 여러 작업을 하는 멀티태스킹 기능을 지원하는데 명색이 사림인 내가 이 정도도 못할 까. 마흔이 넘어서도 일을 하고 공부하며 느끼는 크고 작은 재미와 가슴의 떨림 을 주위 사람들과 함계 나누며 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보여 줄 수 있는 마음으로


김민석 1964 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회학과, 하버드 대학 케네디 스쿨을 졸업하 고 정치계에 입문하여 92 년 총선에서 나웅배 부총리에게 200 여 표 차이로 패배 했다. 그 후 조순 시장 후보 대변인을 거쳐 새정치국민회의 영등포을 지구당 위 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순수의 시대를 지나 나는 요즘 20 세기의 평화주의자이며 시인인 칼릴 지브란이 자신의 연인 메리 헤스켈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을 자주 떠올린다. 보여 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 함에 견주어 보면. 이 짧은 구절에서 나는 깊은 사랑의 힘을 느낀다. 그리고 뒤돌아 본다. 부모님 과 아내와 친구와 세 살배기 비단이와 그리고 나를 믿는 많은 분에게, 작은 사 랑이라도 주었던가. 또 나는 곰곰이 헤아려 본다. 사랑을 장사꾼처럼 흥정하지는 않았는지, 그 사랑을 과시하며 보답을 바라지나 않았는지, 나는 수년의 징역살이 와 정치권으로 이끌었던 민주화의 열정이 행여나 명예와 지위를 좇았던 것은 아 닌지를... 그래서 저 칼릴 지브란의 글을 떠올렸던 간밤에는, `모자라긴 했지만 비겁하게 살아오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위대함을 찾아갈 때이다.`하고 다짐했다. 많은 분이 말한다. ‚어이, 요즘은 어떠신가? 결혼하더니 얼굴이 확 달라졌어.‛ ‚이번에는 자신 있나?‛ 어느새 나는 `운동권` 김민석에서 `젊은 정치인` 김민석이 되어 있다. 10 면이 지났다. 격랑의 80 년대가 내게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민주주의의 신념을 심어 주었다면, 90 년대는 현실 속에서 피워 내는 아름다운 정치의 가능성에 도 전하게 해주었다. 1985 년, 한 해 전에 총학생회가 부활하고부터 학생 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 어들었다. 학생 운동은 유신의 어둠을 야수적인 폭압으로 대체하며 들어선 쿠데 타 정권에 맞서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총학생회는 정치적 시련을 이겨 나갈 민주화의 선봉이었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는 중요한 전술 조직인 투쟁위원 회가 학내외 시위를 주도했지만, 총학생회는 학생 운동의 근간인 학생회를 축으 로 대중적인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나는 85 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당시의 선거 분위기는 최근의 학 생회장 선거와는 사뭇 달랐다. 모든 것을 헌신하겠다는 각오가 없으면 나설 수 없는 길이었고, 수배와 구속은 예정된 순서였다. 비장한 각오로 선거에 출마했 다. 85 년은 기존의 독재 청산과 민주화라는 기본 방향이 보다 구체적으로 집약되 면서 `광주학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최초로 제기된 해이다. 군부 정권의 잔혹상을 폭로하면서 민주화 투쟁의 공세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10 년 전 에 제기된 이 외침이 이제서야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으니 야속한 세월에게 외쳐 묻는다. 그 동안 흘린 광주 원혼의 눈물과 살아 남은 자의 상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제서야 비로소 시작된 광주 참극의 역사적 규명이, 새 시대를 여는 희 망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끝까지 지켜볼 참이다. 진정으로 역사를 바로잡 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하여 내 아이들에게 진실에는 항상 눈물과 피와 땀이 뒤따르는 것이라고 들려주고자 한다. 그 해 5 월에는 80 년대 최대의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미문화원 점거 농성이었 다. 이 사건은 대내외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새계에서 유일하게 `반미 운동`이 전개되지 않았던 한국에서 5 공화국의 최대 취약점인 광주학살 책임 문


제를 미국의 개입과 연결시키며 국민들의 대미관에 근본적 물음을 던짐으로써 국민들은 놀라고 세계 언론들은 미문화원을 주목했다. 과연 미국은 우리에게 우방인가? 수백 명이 대검에 찔리고 국방의 의무를 지 켜야 할 군인들이 탱크와 M16 을 들고 양민을 도륙하던 그 순간에, 군대 이동의 최종 결정권자였던 미국이 보인 행동은 저 광포한 쿠데타 세력에 찬성의 손을 들어 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80 년 5 월 광주 도청에서 산화해 간 민주 열사들 도 처음에는 미국이 이 사태를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것은 오산이었다. 학생들이 점거 농성을 하게 된 배경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평 화의 화신으로 각인되어 있는 대미 인식을 바로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의 민주화 는 미국의 입김에 의해 더국 요원해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에 대해 정부는 `용공`, `폭력`, `좌익`이라는 용 어를 동원하여 매도했지만 알다시피 공산당을 이롭게 할 목적도 아니고, 고의로 미문화원의 기물을 파손한 일도 없었다. 학생들은 72 시간의 농성을 폴고 자진 해산해서 미문화원을 나왔지만 전원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을 뿌리째 뒤흔들었고, 모든 것을 자국의 이 익만을 위한 잣대로 저울질하면서 쿠데타로 권력을 강탈한 독재 정권마저도 전 폭 지원하는 미국의 실체를 깨닫게 해 주었다. 순수의 시대였다. 우리는 스무 살 청춘의 활화산 같은 정열과 패기로 패륜의 역사에 정의의 깃발을 꽂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과연 그래야만 했습니까? 다른 길은 없었습니까?‛ 나는 대답한다. ‚그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혹시 돌아가 는 길은 없을까, 피 흘리지 않아도 되는 길은 없을까 찾아보았지만 그것마저도 막고 나선 세력들 앞에서 인간의 양심과 자존심을 세우는 길은 두 눈 부릅뜨고 싸우는 이뿐이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힌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나는 자존심 때문에 싸 웠다고 말한다. 내 알량한 체면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절대 복종을 요구하는 권력 앞에서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인간이다.’라고 선언하지 않고는 하루도 견딜 수 없다는 자존심 말이다. 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길은 부정의한 권력에 맞서 는 방법 이외에는 없었다. 시간은 앞으로만 간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함으러써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 그 래서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하다. 외치고 끌려가던 그 자리마다 서린 아 픔, 눈물, 이 모든 것이 나의 기억 속에서 미래의 원형이 된다. 어쩌면 내 남은 시간 앞에 드리울 고통과 시련조차 기억의 산물일지도 모를 일디다. 그래서 나 는 불행한 시대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순수의 땅에서 싹을 틔우며 자라 온 사랑을 나눠 가지자고 말한다. 새순이 돋아나는 ‘보이는 사랑’을 ‘보이지 않 는 위대한 힘’으로 키워 보자고 제안한다. 나는 아내를 좋아한다. 세상에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살 위인이 어디 있를까마 는, 내가 아내를 좋아하는 것은 말을 건제고 서로의 눈을 보면서 느끼는 충만함 때문이다. 맑은 산골에 지천으로 깔린 이름 모를 풀잎처럼 내세우지 않으면서 싱싱하게 살아가는 그런 모습이 참 좋다. ‚당신 정말 운동권이었어.?‛ ‚언제부터 춤을 그렇게 배웠어요?‛ 아내가 결혼한 후 미소를 머금고 물어 온 질문들이다. 상기된 얼굴로 최루 가 스 마시며 시위대를 이끌던 ‘운동권’이라고만 생각했다가 장난티기 좋아하고 어찌 보면 물컹해 보이기까지 하는 나를 보며 ‘속았다’는 생각도 했다던가. 대학 1 학년 때만 해도 어떻게 하면 데모하는 선배들을 피해볼까 몸을 사리고 는 했다. 그러나 진실은 피할 수 없는 법이다. 학교를 자기 집 안방처럼 드나드


는 사복 경찰과 개 끌려가듯 잡혀 가는 선배들, 비디오로 광주학살의 진상을 접 하면서 가슴 속에서 자꾸만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무엇이 있었다. 그냥 두면 홧병이 될 정도였다. 그 뒤로 놀기 좋아하고 평범하게 졸업하고자 했던 내 대학 생활은 ‘지랄탄’과 ‘수배’와 ‘구속’의 연속이었다. 그러고는 국회의원으 로 출마했으니, 나에 대한 아내의 첫인상이 어떠했을지는 능히 짐작이 간다. 그러다 사람 냄새 나는 보통 남자, 김민석을 매일같이 만나면서 아내는 자꾸 놀랐던 것이다. 선입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탐색과 도전을 가로막는 마음 의 벽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은 헉된 일이다. 우선 마음을 돌려 세워야 한다. 그러자면 넉넉하게 다가서야 한다. 내가 마음을 열고 다가가지 않으면 누구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벽을 넘어 서 만나기. 나는 아내를 만나서 마음의 벽을 허물고 대화하면 최선의 해답을 얻 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동갑내기 부부의 한집 살림은 주장하기 이전 에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했다. 그것은 나의 정치 활동에도 중요한 원칙이다. 같은 세상에 사는 수많은 사람 들이 공동의 이익을 지키면서도 개인의 발전을 지향하는 사회상을 만들기는 참 으로 어렵다. 화가는 캔버스에 자신의 느낌을 그려 내지만 정치는 세력 충돌을 올바르게 조율하고 국민의 장래를 역동적으로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느끼므 오는 안 된다. 실질을 추구하고 실력을 길러야 한다. 게다가 정치인은 조금만 딴마음을 먹으면 금세 타락하고 조금만 잘못 판단하 면 나라를 말아먹게 된다. 그래서 정치인은 순도 99.9%의 금화처럼 묵직하고 정 제된 행보가 필요하다. 나를 열고, 나를 알고, 실천해야 한다. 시대의 동력이 되 어야 할 정치인들은 지금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볼 때이다. 무엇도 완벽한 것은 없다. 혼자서는 더욱 그렇ㄷ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자 신의 부족ㄱㄱ한 점을 채워 나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한다. 나는 많은 사람을 마났고 한사람과 가정을 꾸렸다. 그 아름다운 만 남들이 있어 나는 세상의 지혜와 완전한 사랑을 배웠다. 그 사랑으로 대학 시절 의 날이 선 눈매는 편안한 미소로 마뀌었고, 가차없이 비판하던 청치 현실은 내 가 바꿔 나가야 할 생활의 현장이 되었다. 또 다른 시작에 선 내게 모든 것을 바쳐 나갈 순수의 시대를 꿈꾸면서 나는 하루를 시작한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녘에 긴 호흡으로 오늘을 설계하며 씩씩한 걸음으로 골 목길을 나서는 그런 날들이기를 기대합니다. 사회의 뿌리 깊은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그런 사람이기를 기대합니다. 무섭게 변해 가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런 마음 이기를 기대합니다. 밤낮의 구별 없이 서성거리는 타락과 모호함에 맞서 진실을 벗삼아가는 전진 의 투사이기를 기대합니다. 당신의 하루가 온갖 스러진 것들과 생채기 난 곳에 새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 는 희망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지난 연말 내게 인사를 보내온 학교 후배의 편지였다. 칼릴 지브란은 내게 보 이지 않는 위대함을 찾아가라고 일러 주었다. 이 후배는 나의 하루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85 년 5 월 미문화원 사건으로 나는 검찰의 검거 대상 1 호가 외었다.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수배를 받아 오던 나는 그 해 6 월 서울대의 아크로폴리스에서 열린 국민 대토론회를 마치고 나오다 경찰에 밭잡혔다. 서울 대 총학생회장과 전학련 의장이라는 직함 덕인지,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에 대한 국내외적 관심이 워낙컸기 때문인지, 연행 초기에 약간 구타를 당한 것과


잠을 안 재우며 조서를 쓰게 한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고문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엄청난 고통과 공포에 몸을 떨어야 했던 동료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 뿐이다. 후일 재판 과정에서 몇몇동료들이 고백하고 증거한 고문과 무차별 구타 에 나는 참을 수 없는 아픔과 분노를 느꼈다. 나는 징역 5 년 6 개월을 선고받았다. 구속에서 출옥 때까지는 약 3 년, 정확히 말하자면 1985 년 6 월 7 일부터 1988 년 2 월 27 일까지 2 년 8 개월하고 20 일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명 차례씩 감옥을 들락 거리며 고생한 분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 감옥살이를 경험이랍시고 이야기하는 게 송구스러울 뿐이다. 3 년간의 징역 생활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일 반수들과 한방에서 지내 보지 못한 점이다. 이들과는 주로 통방이나 면회를 오 가면서 잠깐씩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안양교도소에 있을 때 옆 방에는 절도죄로 들어온 아저씨가 있었는ㄷㄷ데 이 아저씨는 정치범들이 한바탕 구호를 외치고 나면 창가에 나와서 넌지시 내게 말 을 걸곤 했다. ‚민석이 학생, 난 다 알아요. 나는 남의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질을 했지만 학 생들은 이 나라를 훔치려는 큰 도둑질을 하려는 거지?‛ 그의 본의가 무었이었든 ‘큰 도둑질’이라는 단어는 모한 신선함을 던져 주 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요지경 같은 교도소에서는 온갖 유형의 사람을 다 만 날 수 있다. 교도소에서 다얗난 사람을 만나면서 나름대로 사람을 보고 판단하 는 눈도 생겼으니 인생에서의 배움이란 때와 장소가 따로 없다는 말이 실감난 다. 나름대로 정신적 성장도 이룰 수 있었지만 교도소는 어디까지나 교도소였다. 처음에는 5 년 6 개월의 형량이 그다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다가 정치적 상황 이 어려워지고 한 해 또 두해를 넘어가기 시작하자 이러다가 만기를 꼬박 채우 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걱정은 바깥 세상의 정치적 상황이 급 박하게 전개되면서 점점 심한 갑갑함으로 변했다. 특히 1987 년 6 월을 전후하여 6 월항쟁의 움직임을 전해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참담한 심경있다. 내가 이렇게 감옥에 앉아만 있어도 괜찮은 것인가? 탈옥이라 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현실에서 위쳐지고 소외되어 있는 것 같은 청년 특유 의 조바심, 역사의 변화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데서 오는 아타까움으로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해 마음이 어지럽곤 했다. 그야말로 나라 걱정 외에는 아무런 잡념이나 사념 없이 하루를 보내곤 했다. 우리 역사와 겨레가 너무 불쌍해서 혼자 눈물 지으며 밤을 하얗게 지새운 날도 많았다. 정수리에 새치가 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의 일이다. 생각을 많이 하고 잠을 설친 다음날은 어김없이 새치가 늘어나 있는 것이 신기했다. 징역 생활 말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87 년 대통령 선거이다. 6 월항쟁을 감옥에서 흥분과 기대 속에 지켜 본 우리는 위이어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게 되 었다. 선거 전술 문제를 둘러싼 격렬한 토론과 대립은 교도소 안에서도 마깥이 나 다를 바가 엄ㅅ었다. 미판적 지지론과 후보 단일화론, 민중 운동 독자 후보론 등 의견 대립이 격렬해졌을 때는 서로 주장이 엇갈린 정치법들끼리 사이가 서먹 서먹해지는 일까지도 있었다. 마침내 대통령 선거의 날, 우리 모두는 쇠창살에 매달려 설마, 혹시나 하는 일 말의 희망을 갖고 마지막 순간까지 숨을 죽이며 개표 결과를 기다렸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교도관들이 한 시간 간격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개표 상황을 알려 주었다. 세번째쯤 전해주었을 때던가. 교도관은 이제 더 볼 것도 없다며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가에는 분함인지 억울함인지 모를 눈물이 맺혀 있었 다. 그 날은 우리가 수감되었던 교도소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서 많은 이가 천금 같은 정권 교체의 기회가 무산된 데 대한 안타까움으로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 날의 상심과 분노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되려니 하며 남의 일로만 생각해 오던 현실 정치의 막강한 영향력에 대해 처음 으로 생각해 본 기회였다. 결국 이 날의 충격과 고민이 이후 제도권 정체에 발 을 들여놓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상이 변한 것인가. 사람이 변한 것인가. 많이들 힘들다고 말하고 격변의 80 년대를 함께 보낸 친구들에게서 느껴지는 허탈함 같은 것에서 나는 진실이란 무 엇인가를 생각한다.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희생을 무릅쓰고 들어선 길이었는데 왜 우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한탄하는 걸까. 그럼 왜 우리는 고개를 가로 저 으며 한탄하는 걸까. 그럼 왜 나섰던 것일까. 우리가 무슨 보상을 바라고 뛰어든 길은 아니지 않은가. 인간에 대한 사랑, 이 땅에 대한 사랑으로 흔쾌히 고난에 맞선 것이 아니던가. 세상을 말하기 전에 나는 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정리했다.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인간애를 확인하며 사랑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내리라고 결심하 였다. 나는 ‘정치는 현실’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그 말에서는 무언가 부정의하고 깨끗하지 못한 것을 인정하자는 뉘앙스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차피 현실에서 살고 있는데, 정치만을 유독 현실이라는 말고 강조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하지 만 사실은 인정하자. 지금까지 정치권이 그래 왔음을 솔직히 인정하자. 그렇다면 언제까지 지켜 보아야 하는가. 이제 바꾸어 볼 때도 돼지 않았는가. 술자리의 안 주감으로 정치를 논하기에는 지금 우리를 둘러싼 조건이 너무 절박하지 않은가. ‘더러운 곳에는 꼿이 피지 않는가.’ 내가 88 년 출감한 이후 앞으로의 진로 를 놓고 화두처럼 떠올린 물음이었다. 나는 시험해 보기로 했다. 세상의 한가운 데서 부딪혀 이겨 내지 않으면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고 마음 먹으면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 재야의 정치 세력 참여를 주장하는 입장에 같은 흐름이었던 나는 선배들과 하 께 야권 통합 운동을 벌이다가 야권 통합과 함께 민주당에 들어갔다. 얼마 후 나는 생애 두 번째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만 스물일곱 살의 최연소 후보. 이것은 총선 기간 내내 내 이름 앞에 붙어 다 니던 수식어다. 당 지도부에서는 하루아침에 장가도 안 간 새파란 학생 운동권 출신 젊은이를 내세워 선거를 치르라고 했으니 영등포 을구 지구당 당원들은 얼 마나 황당했을까? 더욱이 상대방 후보는 서울대 교수와 대학 총장 기업체 사장에 장관, 부총리까지 역임하고 현 집권당의 당 3 역 중 하나인 정책 위의장을 맞고 있는 인물이 아닌가?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선거가 끝나는 날까지 단 한 번도 내가 질거라고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마음 한 구석에 일말의 걱정도 있을 법했지만 정말이지 나 는 꿈에서도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필승의 의지를 굳히느라고 억지로 마음 먹은 것도 아니었은니 그것은 낙관적인 성격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선거 종료 1 주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말고는 승리를 확신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선거 초반부터 운영해 오 던 전화 여론 조사반의 조사에서 선거 공고 직후 상대방의 인지도는 90%에 육 박하는 데 비해 나의 인지도는 20%에도 못미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합동 유세 이후에 완연히 세가 바뀌는 것이 여론 조사에 나타났고 거리에 나가서 느끼는 체감 온도 역시 그랬다. 투표일을 사나흘 앞두고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는 약 2,000 표를 앞서서 이기는 것으로 나왔는데 실제 개표 결과 이 예상은 거의 맞아 떨어졌다. 하지만 최종 선거 결과는 군 부재가 투표를 제외한 지역 거주자 투표에서 738 표를 앞서는 대 신 군 부재자 투표에서는 1,023 표를 까먹어서 총 285 표 치아로 진 것이었다. 앞서의 여론 조사에서 우리는 젊은 군인들이 젊은 후보에 대해서 나쁜 반응을


보일 리 없다는 판단으로 부재자 투표를 일반 거주자의 성향과 비슷하거나 최소 한 5 대 5 로 보고 계산했던 것이다. 그런 가상 아래 부재자 투표 수를 일반 투표 수에 더해 보니 전체 집계 2000 표 승리로 예상치가 나온 것이다. 계속 대외 비 로 하던 이 낙관적인 여론 조사를 선거 운동 막판에 우리 편 운동원들에게 알렸 다. 모두 기뻐할 줄 알았더니 왠걸,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며 시큰둥한 반 을들이었다. 우리 내부에서도 이 예상치를 믿지 못했으니 밖에서 지켜 보는 보 통 사람들의 눈에는 이 싸움이 얼마나 무모하고 승산 없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 로 보였을지 짐작할 만했다. 두 차례의 합동 유세를 통한 연설이 나름대로 좋았는지 이를 계기로 분위기도 확 달아올랐고 우리 편 운동원들도 신이 나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선거 운동 을 하느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분과 악수를 하다 보니 손가락이 잘려 있 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영등포 을구는 대림동, 신길동, 여의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로공단에 다니는 노동자들이 많은 대림동 거주자 중에 산업 재해를 당 한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나는 합동 연설에서 이 이야기를 거론한 적이 있는데 선거가 끝나고 많은 대림동 거주자 중에 산업 재해를 당한 사람이 많았던 것이 다. 나는 합동 연설에서 이 이야기를 거론한 적이 있는데 선거가 끝나고 두 해 가 넘게 지났을 때 어떤분이 그 때 내가 한 연설을 기억하고 있다면서 참 인상 적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유권자들은 후보자의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 자세를 다시 한 번 가다듬었던 기억이 새롭다. 개표 종료 직전까지 우리는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미 역전극을 두 번이 나 멋지게 펼친 뒤였고 하나 남은 투표함에서 뒤집힐 확률은 거의 없었기 때문 이다. 개표 현장에서는 수시로 사무실에 연락을 보내 왔다. ‚지금 마지막 투표함을 열었는데요. 언뜻 육안으로 봐도 최소한 반타작은 되 겠어요. 얘기 끝났어요. 이겼어요.‛ 마지막으로 전화 연락을 받고 개표장인 여의도고등학교로 향했다. 사무실에서 승리 소감을 밝히고 가라는 사람들의 집요한 권유를 다 결정된 후 해도 늦지 않 는다고 사양한 터였다. 기자들은 14 대 총선의 최대 이변을 보도하기 위해 신문 지면까지 비워 놓고 내게 인터뷰를 요청하고 있었다. 개표장에 도착하여 그냥 들어갈까 하다가 혹시나 싶어 최종 결과를 확인할 사람을 먼저 들여보냈는데 잠 시후 이 사람이 멍청해진 얼굴로 나오는 것이었다. ‚이상해요, 이상해요, 정말 이상해요‛ 자꾸 이상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 아닌가. 더 볼 것도 없다며 미리 패배 를 인정한 상대방 개표 참관인들의 상당수가 자리를 뜬 가운데 개봉된 마지막 투표함에서 또 한 번 역전극이 벌어진 것이다. 들뜬 목소리로 시시각각 개표 상 황을 준비해 오던 우리 참관인들은 허탈한 듯 거의가 주저않아 있었다. 격전 끝에 남은 것은 허탈함뿐이었다. 지구당 사무실에 북적대던 사람들이 썰 물처럼 빠져 나가고 몇몇 사람만이 술로 허탈함을 달래고 있었다. 선거가 끝나 고 나서도 한동안 나를 붙잡고는 억울하다고 우시는 분이 많았다. 어떤 분은 사 실보다 진실이 소중하고 결국 진실이 승리하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는 위로 편지 도 보내 주셨다. 이제는 툭툭 털고 다시 시작할 시간이었다. 선거가 끝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생소한 지역에서 한 달도 못되는 기간 동안에 선거 운동을 한답시고 유권자들에게 한 표를 부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과연 그 때 내가 국정의 감시자가 될 만큼 철저히 준비되어 있었던가? 부족한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때는 지금보다 여러 모로 훨씬 부족했다는 생각에 스스로도 민망할 지경이다. 당시 내걸었던 주장과 각오는 오로지 양심 있는 사람이 국회에 들어가서 독재 정권을 어떻게 견제할 것이냐 하는 차원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나라의 정치가 이 모양인 마당에 지역 개발이 뭐 중요하냐는 생각에 공약은 일부러 내걸지도 않고 그 대신 포괄적인 정치 전반의 개혁을 주장하며 깨끗한 이미지로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지역에서 몇 해를 보내면서 생각이 많이 마뀌었다. 지역 사 회에서는 어떤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지, 내가 국회에서 정치를 하면 구체적으 로 어떤 국정 문제를 풀어야 할 지 가닥이 잡혀 가는 것이다. 그걸 보면 그 때 내가 얼마나 뜬구름 잡는 말을 많이 했는지도 알 것 같다. 준비가 그렇게 부족 했으니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도대체 유권자들이 나의 어 떤면을 보고 그 많은 표를 던져 주었을까 하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까지 든다. 그러기에 이번 선거는 훨씬 비장한 각오로 준비하고,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선거 에 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총선 덕분에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었으니 그것도 내게는 큰 행운인 셈이다. 어려운 일을 함께 겪으면서 마음이 통하게된 지구당의 많은 분과 이제 제법 낯이 익숙해진 지역 주민들, 지역구 활동을 하면서 가까워져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된 아내, 게다가 선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면 귀한 미국 유학의 기회도 없었을 테니 낙선 역시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명망도, 돈도, 힘도 없는 아였기에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 는 전부임을 깨달은 것 역시 정치를 시작하고 나서 얻은 가장 소중한 교훈이다. 진심으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결정적인 시기에 도와주고 어려 울 때 지켜 주는 것, 결국 그 힘으로 지금까지 버텨 온 것이다. 정치를 다다 보 면 불가피하게 이해 관계가 얽히는 경우도, 싫은 소리를 해야 할 경우도 많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마음 고생이 심한 일도 끊임없이 생기는 법이다. 이럴 때는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고 그것이 유일한 해답일 수 있 다. 그래서 그 동안 내가 터득한 것을 바탕으로 세워 놓은 두 가지 원칙, 그것은 솔직하고 길게 보자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지금까지 내가 사람을 얻어 온 방 법이고 나는 그 덕분에 힘든 상황을 잘 헤쳐 올 수 있었다. 또 다른 선택 93 년 3 월 말의 일요일 아침. 아내가 내게 말을 건네 왔다. 초롱한 눈을 뜨며 유학을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니고 생각지도 않았던 유 학이라니. 그런데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대합했다. ‚어디가 좋을까?‛ ‚당신은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나는 동북아 공부를 하고, 당신은 방송학을 공부하는 게 좋겠어.‛ ‚학비는 어떻게 하죠?‛ ‚아파트 전세금으로 하지뮈‛ 아내의 뚱딴지 같은 얘기에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치며 순식간에 유학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 쉬운 결정이 아무렇게나 나온 것은 아니었다. 국회의원 선 거와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내게는 낙선의 참담함과 대선 패배의 감정보다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재충전의 요구가 더 절실했다. 선거에 재출마하는 것도, 내 정치 인생의 한 부분이지만 내용 없는 구호와 이미지로 끌러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무엇보다 실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뿐 이었다. 실력을 키우며 진정한 정치인의 소양을 준비하자는 것이 유학 결정의 가장 큰 이유였다. 10 년간의 공백을 거친 후 늦깎이로 외국 유학을 결심한 내게 지구당 동지들은 처음에는 펄쩍 뛰며 만류했지만 지구당은 걱정 말고 중앙당의 양해만 구해 오라고 격려해주었다. 반대가 심할 줄 알았던 중앙당ㅇ에서도 긴 안목으로 배려해주어서 큰 문제 없이 유학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관심이 국제정치나 공공 정책 분야였기 때문에 미국에 있는 형과 의논하여 뉴 옥의 콜롬비아 대학, 하버드 대학의 케네디 스쿨 등 서너 군데 학교를 대상으로 골라서 지원했다.


모든 것을 단기간에 일정한 수준으로 올려놓아야 하는 상황이라 93 년 8 월에 토플을, 9 월에 GRE 시험을 통과할 계획으로 책을 붙들고 지냈다. 부족한 외국어 실력을 통감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여름을 보내고 시험을 쳤다. 두 개의 시험은 무사히 통과했다. 내가 추천서와 자기소개서를 영어로 작성하고 만삭이 된 아내 가 밤새 타이프를 쳐서 보냈다. 11 월 어느 날 콜롬비아 대학에서 편지가 날아왔 다. ‚여보, 두툼해요, 가벼워요?‛ 만약 떨어졌다면 유감이라는 내용만 달랑 들어 있을 테니 가켜울 테고 합격했 다면 관련 서류가 함께 들어 있을 테니 두툼할 거라는 말이다. 그런 말을 던지 는 아내는 나보다 더 속이 타 보였다. ‚아주 묵직한데.‛ 입학 허가서였다. 8 개월 전에 무작정 덤벼든 일이 감사하게도 너무나 빨리 첫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사회 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이라면, 정신 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자신만 정체 되어 이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학교를 졸업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면 자신을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과 계기가 더욱 절실해진다. 하지만 마음만 있을 뿐 현실이 함께 따라가 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내가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친구나 주위의 직장인들은 내가 부럽다고 말하곤 했다. 막상 실행에 옮기려고 할 때 생계와 자식 문제로 주저앉는 경우가 태만이다. 또 여야을 막론하고 정당의 지구당 위원장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지 역구를 비우고 공부를 하러 외국에 나간 전례가 없었다고 한다. 10 개월 만의 준 비와 입학 허가, 중앙당과 지구당의 배려, 이 모든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새로운 결정 앞에서 주저하게 되는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마찬가지일 것이 다. 가진 것을 다 포기하고 새로 시작하는 공부에 모든 것을 걸자고 마음먹었지 만 한때 불안하고 막막하기만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어려웠던 선택이 이제 내 삶에 새 지평을 여는 큰 기쁨을 주고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꼭 원하 는 것이 있게 마련인데 주위에 문제들이 얽히고 설켜 있어 접근이 어려운 경우 가 많다. 그럴때면 조심조심 실타래를 풀듯 문제를 풀어 목료에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눈 딱 감고 엉킨 문제들 사이로 돌진하는 것이 나을 경우가 있다. 나의 유학은 후자의 방법을 택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니, 그 역시 운이 좋은 선택이었다. 소중한 꿈-빅 파이브 지난 2 년간의 유학 생활에서 덛은 교훈은 ‘대화’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왔다 는 점이다. 거기서 국제 관계를 공부하던 중 아주 독특한 경험을 했다. 아랍과 이스라엘 출신의 두 학생이 아랍과 이스라엘의 영토 분쟁에 대해 자기들이 토론 한 결과를 책으로 엮어 놓은 것을 읽게 되었다. 두사람 다 자국 정부의 입장을 철저하게 중시하면서도 결국 실리적 접근을 통 해 공동의 타협안을 내놓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강경과 온건, 흑과 백의 논리에 익숙해 있던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것은 현실주의였다. 대화로 만들어 가 는 공동 이익의 증대, 실직적이며 근본적인 해결의 접근법은 선진적 정치를 꿈 꾸는 내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 얼마 전에 한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 자는 내게 젊은 사람으로서 우리 나라의 정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애기해 달라고 했다. 취재를 마무리하면서 그 기자는 21 세기의 한국 정치의 위상을 딱 한마디로 정리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때쯤 되면 우리 나라도 유엔 사무총장쯤은 배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 습니까?‛ 나는 평소에 생각하던 대로 대답했다. 물론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다는 것이


우리 나라의 정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잣대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 만 내 대답의 속뜻은 현 상태로 남북 양쪽이 모두 국제적으로 떳떳하지 못하니, 통일을 이루고 막강한 힘을 갖춘 뒤에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직국이 되어서 국제 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잡지에 실린 기사를 봤더니 내 이름 밑에는 ‚유엔 사무총장을 노 리는 운동권‛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아므리 바로 제목을 붙인다 하더라도 이런 식의 표현에는 실소를 금할 수 밖에 없었다. 20 대에 정치 일선에 뛰어들다 보니 장래 희망을 묻는 사람이 많다. 사람은 누 구나 꿈을 갖고 있다. 그것은 크든 작든 자신만의 소중한 꿈인 것이다. 학생 시 절, 나의 꿈은 민주화와 통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대학 시절 내가 꿈꿔 온 민주화와 통일은 엄밀하게 보아 그 자체가 최종 목표라기보다는 단계적인 과 제이다. 국민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목표는 무엇에 반대하고 무엇을 극복하 는 식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무엇을 성취하기 위한 긍정적인 목표여야 한다고 믿 는다. 나는 우리 민족의 역량이 정치, 경제 사회, 복지, 문화 모든 면에서 세계 5 위권 안에 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것은 턱없는 자신도, 무한책임한 변설 도 아니다. 나는 현대사의 거센 풍량을 이겨 낸 우리 민족의 저력과 국민적 열기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믿고 나아가는 사람만이 성취할 수 있으며, 오늘의 수준으로 내일을 구상한다면 발전이란 없다고 말이다. 한국의 역사는 향후 10 년 안에 새 로운 도약기에 접어들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미 눈앞의 통일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고 대내적 민주화의 과제를 정상적으로 추진하다면 우리는 능히 빅 파이ㅡ의 대열에 올라설 수 있다. 나는 꿈이 없는 20 대를 보냈다. 암흑같이 어두운 곳에서 한 점 불빛을 찾아서 질풍같이 달려나가던 시절이었다. 꿈을 꾸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날들이었다. 그 리고 감옥 생활. 아직 젊다는 것으로, 그리고 그 때의 고난이 오늘의 역사를 새 로 쓰는 조그만 힘이 되리라는 신념으로 정치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이제는 희망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살아온 날보다 실아갈 내일이 더 많은 내가 꿈꾸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중자애! 자를 귀중히 여기 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존귀함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지나온 날들이 그리 헛된 시간만은 아니었음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새근거리는 비단의 얼굴에 호 입김을 불어 넣는다. 이제 다시일어나 준비할 시간이다. 문밖 에 신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나저나 오늘 아침 반찬은 뭘까?‚ 딸에게 주는 편지 김석동 1961 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므라운 대학을 거 쳐 조지타운 대학에서 외교학 석사를 마치고 뉴록의 citicorp 에서 차장으로 일했 다. 1988 년 쌍용투자증권에 입사해 프랑스 INSEAD 에서 ,BA 를 취득한 후 국제 부 대리로 시작하여 지금은 사장으로서 한국 증권산업의 세계화에 주력하고 있 다. 취임식 때 떠오른 생각들 지원아, 오늘은 몹시 바쁜 하루였다. 넌 아마 ‚아빠는 언제나 바쁘잖아.‛ 하 겠지?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하루였단다. 아빠는 오늘 쌍용투자증 권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지. 아침 일찍 취임식을 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지만 잠이 오지 않는구나. 그래서 아빠는 지원이에게 이 편지를 쓰 기로 했단다. 아직은 우리 지원이가 너무 어려서 이해할 수 없겠지만 앞으로 10 년, 아니 20 년쯤 지나면 아빠가 무슨 생각을 했고 지원이하고 놀아 주지도 못하 고 항상 바쁘게 일만 했던 아빠를 용서하고 이해해 줄 수 있겠지. 취인 인사를


하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치고 자나가더구나. 아빠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생각이 난다. 그 때가 1971 년 11 월경이었지. 미국 에 대한 첫인상은 놀라움이었다. 얼마나 큰 나라였는지... 가도 가도 끝이 안 보 이던 끝없이 펼쳐진 들판, 너무도 높아 끝이 안 보이던 빌딩들... 얼굴이 하얗고 머리가 노란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고 떠들고 있었고, 아빠는 난 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아주 의기양양하게 서울을 떠났는데, 구름속을 가르며 날아가는 산상만으로도 행복했지. 창 밖으로 내려다 본 경치는 지금도 잊지 못 하겠다. 아주 조그마한 집들... 그위로는 붉은 노을이 걸려 있었어. 그 때 아빠는 갑자기 슬렀어.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이상한 감정이 어린 아빠의 가슴에 차 오르는 거야. 그것은 아마 미지의 것에 대한 동경, 두려움, 기대. 뭐 그런 감정이 뒤섞여 그랬을 거야. 그래도 그 땐 괜찮았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계셨으 니까. 지원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도 잘 모르지. 그래, 할아버지 얘기부터 해 줄게. 지원이는 정말 훌륭한 분을 할아버지로 모시고 있단다. 아빠가 이 세상에 서 제일 존경하는 분도 할아버지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할아버지를 떠올 리면 용기가 나고 새로눙 힘이 생긴다. 아빠도 지원이에게 그런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할마버지는 우리 나라 경제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기업 활동에 뛰어들어 한 강의 기적을 일으키는 데 한몫을 하신 분이지. 언제나 검소하게 생활하셨고 여 러 사람을 깊이 배려하는 대인의 풍모를 지닌 분이셨다. 옳지 않은 일은 아무리 많은 이익이 생겨도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셨고 당신과 가족보다 국가와 민족을 항상 먼저 생각하셨지. 사람들이 아빠가 일을 너무 많이 한다고 염려하는 말을 하지만 할라버지에 비햐면 대단치 않단ㄴ 생각이 든다. 아빠는 가장으로서 지언 이의 아빠로서, 나아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에 부딪힐 때 ㅁ다 할아버지의 처ㅍ하가 디시 ㅏㄴ번 처올려 보게 된닫다. 유학 시절 이야기 이제, 다시 아빠 얘기로 돌아갈까? 그래, 그 때가 열두 살 때였어.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아빠에게 그러시는 거야, ‚엄마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 간다. 너는 여기 남거라.‛ ‚나는 너무 놀라서 싫다는 말씀도 못 드리고 할머니 얼굴만 쳐다보았지. 할머니께서도 아무 말씀도 못 드리고 할머니 얼굴만 쳐다보 았지. 할머니께서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시기만 했단 다. 그렇게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지. 너무 외롭고 힘든 하루하루였다. 나보다 머 리 하나는 더 큰 아이들. 서툰 영어로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려 하면 쿡쿡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이 왜 그렇게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몰라. 지원아, 그 때 아빠는 슬픔을 이기는 법을 배웠단다. 아빠는 슬프면 나 자신에게 화를 낸단 다. 그러면 이켜야겠다는 의지가 생기거든. 지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지. 왜냐 하 면 난 훌륭한 부모님을 둔 한국의 아이였거든. 갖은 고생을 다해 가면서 모은 재산이 전쟁통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을 때에도 할아버지께서는 훌훌 털고 다시 시작하신 분이었다. 그 때 우리 나라 어른들은 다 그랬지. 몸 건강하고 하루 끼 니만 있으면 겁날 것이 없으셨단다. 그렇게 일궈 온라이고 경제란다. 지원아, 잊지 말아라. 너와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좋은 세상을 우리에게 물려주 기 위해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진지를. 힘 겨운 하루하루가 흘렀고 계절이 바뀌면서 차츰 적응이 되더구나. 세인트 폴에서 아빠는 많은 것을 배울수 있었어. 열린 마음으로 토론에 참여해 자기의 의사 를 조리 있게 발표하고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 민주적인 방식으로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기 일을 하는 것 등등. 그 당 시 형성된 습관이나 품성은 지금까지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단다. 마음이 갑갑 하거나 고향이 그리워질 때는 운동장을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 지 눙동을 자연스레 접하고 즐길수 있게 되었지.


아빠가 운동을 좋아한다는 거 지원이도 알지 탁 트인 운동장을 내달릴 때면 우리 나라 하늘이 보이는 것 같고 그리운 가족들 얼굴이 가득히 들어왔단다. 그 러면 공부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도 말끔히 풀리고 새로운 활력이 솟아나기도 했 다. 아빠는 지금도 어려운 일이 생기고 힘든 결정을 해야 할 경우에는 먼저 온 몸이 지칠 만큼 운동을 한다. 그러고 나면 머리가 말끔해지고 정돈되지. 우리 나 라에 돌아와서 가장 아쉬었던 점 중 하나가 사람들이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운동 시설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단다. 또 한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그 때 사귄 친구들이야. 처음에는 서먹서먹하게 대하던 아이들도 차츰 친해져서 형제 만큼이나 가깝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많아. 학교 생활도 공부도 즐겁게 해 나가던 어느 날이었어. 아빠가 미국에 간 지 3 년이 조금 지난 1975 년 2 월 25 이었지. 서울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는 전갈을 받 고 달려갔더니 엄청난 소식이 기다리고 있더구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 정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건강하고 늘 활력이 넘치시던 분 이... 유도 8 단으로 승단하신 지가 1 년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 갑자기 떠 나시다니... 방학 때 집에 가거나 출장길에 들르시면 낮고 엄하지만 자상하게 말 씀하시던 그 음성을 지금도 기억한단다. ‚석동아, 배우고 또 배우거라. 미국이 잘사는 나라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그것을 배우고 익혀 조국의 발전 을 위해 써야 한다. 알겠지?‛ 그럴 리가 없어, 뭔가 잘못된 거야. 처음에는 실 감이 나질 않았지. 아빠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때가 바로 그 때란다. 나를 떠받들어 주던 기둥이 쓰러져 버린 것 같았어.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재미가 없었지. 만약 그 때 아빠의 형님, 지원이 큰아버지들이 안 계셨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 야. 중간에 학업을 포기하고 쌍용그룹을 이끌어 가는 중책을 맡아야 했던 큰 형 님은 그렇게 경황 없는 가운데에도 언제나 아빠를 염려하셨고 위로해 주셨다. ‚이젠 내가 아버지 대신 널 돌봐 줄 테니 아무 걱정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라. 네가 내 몫까지 다 해야 한다.‛ 왜, 그런 말 있지, ‘형제는 용감했다’는 말. 우리 형제들은 참 용감했다. 믿음직한 큰형, 침착하면서도 추진력 있는 작은 형, 아빠는 정말 복이 많지? 지원아, 본래 아빠의 꿈은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단다. 회사 경영은 두 분 형님 도 계시고 또 훌륭한 분이 많이 계시니 아빠는 세계에서 우리 나라의 위상을 높 이는 외교 분야에 도전해 보고 싶었거든. 그 때만 해도 한국을 아는 사람이 적 었단다. 학창 시절에 ‚어느 나라에서 왔느나?‛는 질문에 ‚코리아‛ 하면 모 르는 사람이 많았고 혹시 안다고 해도 6.25 전쟁으로 페허가 된 고아와 거지의 나라쯤으로 생각해 측은한 눈길로 보기 일쓰였으니까.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 지. 훌륭한 외교관이 되어 세계 각국을 휘적소 다니면서 한국이 얼마나 근사한 라라인지 알려야겠다고 결심했지. 게다가 전쟁이나 폭력리 아닌 대화와 협상으 로 서로가 가장 만족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외교학이라는 분야도 적정에 잘 맞았고. 세계적인 일류 금융 회사를 꿈꾸며 아빠가 진로를 바꾸게 된 것은 85 년 쯤이었던 것 같구나. 세상이 변하고 있었 어. 냉전 체제가 해빙의 조짐을 보이면서 세계는 바야흐로 경제 전쟁을 예고하 고 있었지. 사실 소련과 동구 공산주의의 몰락을 가져온 것도 바로 경제였으니 가. 미국과 선진 유럽의 기업이 빠른 속도로 발전해 가면서 공산권에 진출하는 동안 공산주의 국가들은 군비 경쟁에만 열을 올렸으미 경제력 격차는 날로 심해 졌고 기업이 진출하면서 함께 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단다. 이론이나 사상의 우위를 실제로 증명해 낸 것이지. 세계사의 거대한 조류가 변하고 있던 시기를 관찰하면서 진정한 외교관은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국제적인 경영인이라는 결


론을 내리게 되었지. 더욱이 세계인이 한국을 인정하게 만들려면 먼저 경제력을 갖추어야하는 것은 필연이었으니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불과 30 년 만에 눈부신 경제 발전 을 이룩했고 그 결과 우리 나라 기업은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 지. 한 예로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 500 대 기업을 살펴보면 우리 기업의 이 름이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으며 섬유, 전자, 철강, 조선등 각 부문에서 상당한 국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단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기업 가운 데 우리의 금융 회사는 단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아. 아빠는 미국의 시티뱅크 (Citibank)에서 몇 년 동안 근무한 경험이 있는데 그 때 한국 금융계의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단다. 또 세계 금융업을 이끌어 가는 선진 기업과 비교하여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발전시켜 가야 하는지를 많이 생각해 보았단다. 낙후되어 있다 는 것은 발전의 여지가 많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할 일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 지. 더욱이 국가간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는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는 금융업이 갖는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이고 경쟁력을 갖고 있지 못한 우리 기업은 개방의 파고를 견뎌 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래서 아빠는 쌍용증권에서 일하기로 결심했고 우리 회사를 셰계적인 일류 금융 전문회사, 서구적 개념의 인베스트먼트 뱅그(Investment Bank), 즉 투자 은행으 로 발전시키는 데 나를 바치기로 했단다. 위기는 기회와 같은 말이라고 믿으니 까. 그래서 아빠는 쌍용증권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을 기회이며 행운이라고 받 아들이고 있고, 우리 나라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건너야 할 시험대를 통과하는 데 아빠도 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열 심히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란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성공하려면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이고 어떤 문 제가 있는지를 냉정히 생각해 보아야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갈지에 대해 계획을 세울 수 있고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겠지? 그럼 한국의 금융업이 이처럼 낙후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우리 나라는 이제 세계에서 무시하지 못할 경제력을 가진 나라이고 선진국이 라고 인정정되는 나라들의 모임인 OECD 가입을 종용 받고 있는, 선진국에 막 진입하려는 신흥 공업 선진국이란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 지. 경제 개발을 막 시작하던 당시에는 일제 식민지하에서 일본의 가혹한 수탈 정책으로 자원은 거의 고갈되어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6.25 전쟁을 거치면서 그나 마 남아 있던 공장과 기업은 거의 파괴된 상태였어. 말 그대로 폐허 위에서 처 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 거지. 다시 말해서 1950 년대 중반에 우리 나라의 지 도자와 국민들은 전쟁이 남긴 잿더미위에서 분단이라는 비극을 딛고 단시일에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내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과제를 안고 있었단다. 그 래서 선택한 전략은 아주 필요하고 빠른 시간에 성장이 가능한 산업을 선별하여 거기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이었단다. 국민들이 당장 생활에 필요한 경공업 부문과 산업 발전의 토대가 되는 사회 간접 자본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시작된 것은 이러한 전략을 배경으로 한 것 이었다고 생각한다. 공장을 짓고 회사를 세우고 고속도로, 철도, 항만 등을 건설 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지. 알고 있겠지만 금융업이란 쉽게 말해서 돈 을 관리하고 필요한 곳에 배분해 주는 것이란다. 당시 우리 나라의 실정에서는 돈이 많지 않아서 돈을 모아 배분할 때 꼭 필요한 곳에 우선적으로 나누어 주어 야 했을뿐더러 국재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해외에서 많은 돈을 빌려야 했지. 상당 부분을 해외의 차관에 의존하던 당시 상황에서는 국가가 금융업을 사실상 통제하면서 필요한 부문에 우선적인 재원 공급이 가능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통 제, 관리할 필요가 있었지. 예를 들어 수출 관련 사업에는 세제 혜택이나 관세 감면, 금융 특혜, 정책 금융 등의 폭넓은 지원을 해주었고 이를 위해서 은행을 비롯한 금융 회사의 경영은 정부의 방침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던 거야.


그러다 보니 금융 기관은 자체적인 경영 방침이나 노하우를 축적할 수 없었지. 그러니까 출발부터 자유 경쟁 분위기에서 자생력을 키워 왔던 서구의 금융 회사 와는 달랐어. 자연히 우리 나라의 금융 회사는 자립적으로 발전할 기반이 점점 더 취약해졌고 커다란 금융 기관은 국가가 직접 경영하고 있었으므로 경쟁력을 키울 필요도 없었단다. 더욱이 나라 전체가 가난하기 때문에 경제 개발을 위해 투자할 돈도 없고 국민들도 빈곤해서 저축할 돈이 없었으므로 문제는 더욱 심각 했어. 하지만 지도자와 온 국민이 합심하여 노력한 결과 이제는 상당한 정도의 경제 발전을 이루었단다. 어떤 사람은 한국 경제가 물건이 모자라던 시대에서 물건이 남는 시대로, 또 돈이 모자라던 시대에서 돈이 남는 시대로 이행했다고 우리의 경제 성장을 평가하기도 한다. 70 년대까지만 해도 물건이 없어서 필요해도 충분 히 쓸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과소비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으니까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 우리 나라는 70 년대 말을 고비로 해서 물건이 모자라던 시대에서 물건이 남는 시대로의 성공적인 이행을 완수할 수 있었단다. 수출이 활발해지고 산어이 발전함에 따라 돈도 풍부해졌지. 즉 이제는 돈이 남는 시대가 된 거지. 특히 3 저 호황이라고 불리는 국제적 호조건 속에서 80 년 말부터 국민들의 저축 액도 많아지게 되어 바야흐로 돈이 모자라던 시대에서 돈이 남는 시대로 넘어왔 다고 할 수 있어. 금융업이라란 본질적으로 남는 사람의 돈을 모아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 주는 일이고 돈을 빌려 준 사람은 그 대가로 이자를 받고 마찬가 지로 증권은 기업의 미래 가치를 보고 돈이 있는 사람이 현재 가치로 그 회사의 주식을 사서 미래에 그 회사가 발전하게 되었을 때 혜택을 나누어 갖는 것이란 다. 그러므로 돈이 남는 시대가 되면 금융업은 활기를 띠게 되지. 이런 맥락에서 80 년 초부터 정부는 과거의 정책을 바꾸어 금융업을 육성하고 자율적인 경영을 하도록 독려하기 시작한 거야. 이렇게 된 것은 우리 나라가 국제적으로 돈을 빌리는 입장에서 조금씩 빌려 주는 채권 국가로 전환하게 된 것도 한 이유가 되지. 또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은 이제 한국이 잘 사는 나라가 되었으니 한국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여러 상황으로 인해 우리 나라 금융 기관도 세계 시장 에 적극적으로 진출해 활발하게 활동할 필요가 절실해지게 되었던 거지. 그렇지 만 오랬동안 정부의 관리에 익숙해진 금융 기관들은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변하 기가 쉽지 않지. 마치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이 갑자기 세상에 나온 것처럼 당황스러울 거야. 눈부신 햇살, 각양 각색의 사람들, 분주한 거리.... 아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게 될지도 몰라. 더욱이 이제는 전세계가 하 나의 경영체제 안에서 될지도 몰라. 더욱이 이제는 전세계가 하나의 경영체제 안에서 통합되는 시대가 열렸으니 우리는 세계적인 금융 회사와 똑같은 조건에 서 경쟁해 나가야 하니까 기업 입장에서는 더욱 어려운 거지. 물론 정부가 금융 시장 개방의 속도를 단계적으로 조정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기업 스스 로 홀로 서기를 해야 하고 국제화 시ㅓ데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생존 전략을 세워 개방의 파고를 헤쳐 나가야 해. 그러니까ㅏ 금융 회사들이 할 일이 어 많 아지고 있는 셈이지. 이제는 금융업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 한사람이 더욱 열심 히 일해야 할 때가 된 거야. 그래서 아빠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의욕이 솟아 난단다. 최선을 다해 신나게 뛰는 사람들과 더불어 시로운 땅을 일구어 나가는 개척자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하지. 물론 더러는 생각한 것과 다른 실망스러운 결과에 맞닥뜨리게 되기도 하지만 실패에서 교훈을 얻을 수만 있다면 절망할 필 요는 없다고 믿는다. 아빠도, 우리 회사도, 우리 나라 금융업도 아직 젊기 때문 이지. 더 많이 배우고 뻗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아빠가 가진 신념이란다. 사랑이야기 지원아, 이제 골치 아픈

얘기를 잠시 접어 두고 지원이가 아주 궁금해 할 얘


기를 하나 해줄까? 어떻게 김지원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 기 말이지. 아빠와 엄마는 아빠가 대학 3 학년, 엄마가 1 학년 때 만났단다. 엄마 의 첫인상은 맑고 깨끗한 도라지꽃 같았어. 장미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고요 하고 청아한 매력이 있었지. 처음에는 그냥 선후배 사이로 친하게 지내는 정도 였는데 차츰 엄마에게 끌리게 됐어. 모두 저 잘잤다고 뽐내는 사람 가운데 조용 하고 기품 있는 엄마의 모습에서 고향을 느낀 것이었을까? 아빠는 엄마를 만나 고 있을 때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주위를 따스한 빛이 감싸는 것 같은 평화를 느 꼈지. 엄마는 아빠가 싫지 않았으면서도 그걸 표현하지 않아 아빠 애를 많이 태 웠지. 참 많은 편지를 썼어. 그 편지들은 엄마가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절대 보여 달라고 하진 말아라. 그건 엄마, 아빠만의 추억이니까. 지원아, 요사이 는 삐삐가 필수품인 시대가 되었지만 연애만은 고전적으로 하가고 주장하고 싶 구나. 밤을 새워 편지를 쓰고 답장을 목마르게 기다리면서 엄마와 아빠는 서로 를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 갔단다. 지금도 아빠는 지원이 엄마처럼 아름다운 여 자를 알지 못해. 화려한 것이 많을수록 향기롭고 기품 있는 진실한 아름다움이 귀해지는 법이란다. 아빠가 너무 바빠 엄마와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해도 불평 한 번 없이 알뜰하게 살림하고 너희를 예쁘게 낳아 기르느라 살찔 여유도 없이 분주한 엄마를 보면 안쓰럽고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아빠는 정말 복이 많지? 하지만 아빠가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란다. 괴롭고 힘들 때가 많이 있어. 아빠 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더욱 발전하기 위해 노력도 많이 하는데 사람들이 색안경을 쓰고 볼 때 화가 나지. 나는 동등한 전문인으로 신나게 일하고 싶은데 그 마음이 항상 전달되는 것은 아니니까. 사람들은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아 빠를 대할 때가 많아. 처음에는 참 거북하고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많이 적응 이 된 것 같구나.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법이라고 생각한 다. 아빠의 십자가는 바로 무거운 책임감과 언제라도 냉혹해질 수 있는 부러움 의 시선, 그리고 외로움일거다. 하지만 무거운 책임 뒤에는 커다란 기쁨이 함께 있다는 것도 얘기해 주고 싶다. 어려움이 클수록 성취감도 크고 책임이 많은 사 람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 향을 미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값어치 있는 삶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다. 동트는 새벽녘에 그러면 다시 아빠의 전문 분야로 돌아가 볼까? 이제 기업이 전략을 세우는 데 반드시 감안해야 할 점은 우리의 고객이 한국 인만이 아닌 세계인이며 우리의 영업 무대가 한국뿐아니라 세계 시장이라는 점 이야. 그러면 우리 나라 금융업이 세계시장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살펴보 기로 하자. 스위스 국제 경영개발연구원(imd)이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 아 시아, 아프리카의 신흥 공업국 등 41 개 국가를 대상으로 하여 8 개 부문에서 국 가 경쟁력을 가늠해 본 결과 우리 나라의 경쟁력을 가늠해 본 결과 우리 나라의 경쟁력은 24 위라는 만족스럽지 않은 평가를 받았고 그 중에서도 금융 부문의 경 쟁력은 꼴찌에서 3 등인 39 위라는 기막힌 성적을 받았지. 우리 나라가 세계 고역 량 13 위의 국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결과는 실망스럽다 못해 놀라울 정도야. 그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생각해 보자. 만약 세계 금융의 중 시지인 뉴욕에 진출해 있는 우리나라 금융 기관들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져 버 렸다고 가정해 볼까?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로 인해 뉴욕의 금융계와 국제 사회에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무슨 불편을 겪게 될까? 안타깝지만 그렇 게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게 아빠의 생각이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생각을 바꾸는 거야. 다시 말해 발상의 전환을 도모하는 거야. 의식과 사 고 방식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실 안주에서 벗어나 개혁가의 안목으로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지. 외국 기업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정보 능력도 강화하고 현지 채용을 늘려 정보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받아들여 가공하는 사람이 열린 마음으로 유용한 것으로 만들어야 해. 모든 것은 사람에게서 시작되고 사람에서 끝나므로 변화의 시작을 이끌어 가는 것도 조직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한다. 국제화라는 말 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마치 우리가 얼마나 국제적인 감각이 떨어지는가를 반 증해 주는 현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지. 어쩌면 회사 내에 국제 부서가 사라지 게 되는 날이 바로 우리 기업이 진정으로 국제화한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요사이 금융기관의 업무는 기능, 상품, 지역등이 유기적으로 연결, 결 합되고 ㅍ포트폴리오 구성도 국제적일 뿐 아니라 자산 규모도 세계를 포괄하는 규몰로 진행되고 있잖니? 따라서 국제 업무 전담 부서가 아닌 기업 전체가 새로 운 기능과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조직 전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수익성, 생산성, 강화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해. 그 동안 정부 보호에 안주하며 스스로의 경쟁력을 키우는 노력을 게을리 해 온 결과이니 만큼 희생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증권업 은 국재 정치, 세계 정치를 파악하고 판단하는 능력, 실물 경제 분석, 경기 동향 예측 능력, 상황 변화에 따른 인간의 심리 변화 등 미시적인 정말 매력적인 분 야이지만 그만큼 어려운 업무가 많지. 게다가 M & A, 리스크 관리, 금융 공학 등 고도의 전문성을 겸비해야 하는 분야란다. 그러므로 업계에 종사하는 개인은 자신이 과연 그런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 아니면 적오도 그러한 업무 능력을 갖 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을 거야. 직원 한 사람람, 한 사람이 모두 자기 분야에서 유능하게 일하고 이를 묶어 주는 조직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짜이고 여기에 첨단 컴퓨터 시스템을 구축해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 게 관리하는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면 경쟁력은 당연히 강해질 수 있으리라 확 신한다. 지원아, 벌써 새벽 동이 트는구나. 아빠는 이 시간을 제일 좋아하지 모든 것이 휴식의 신비로운 장막을 벗고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시간. 아빠도 이젠 잠깐 는을 붙여야 할까 보다. 오늘도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겠지. 지원이가 다 자란 의젓한 숙녀가 되어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우리 나라의 금융업이 세계적인 수 준으로 발전해 있으리라 믿으며 거기에는 아빠의 노력도 한몫을 했다는 것에 기 쁨과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열심히,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

카오스이론을 알리고자 뛰어온 세월 김승환 1959 년 경남 구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후 미국 펜실 베이니아 대학 유학 중 카오스 이론에 빠져들어 코넬 대학 연구원, 프린스턴 고 등연구소 연구원을 거치면서 카오스 이론에 대한 새로운 연구에 몰두하였다. 지 금은 아내와 함께 포항 공대 교수로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출판사에서 보내온 집필진 명세 ‚김승환, 과학계의 혁명적 패러다임으로 평 가되는 `카오스 이론`의 전문가‛를 바라보았다. 지난 37 년간 살아온 짧지도 길 지도 않은 편린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시골에서 태어나 미국 유학을 통해 학문의 길로 들어섰고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묵묵히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미 국에서 카오스(chaos;혼돈)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포항공대로 부 임한 후, 새로운 과학으로서의 `카오스 이론`을 널리 알리고자 바쁘게 뛰어나딘 세월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며 열심히 살고 있을 30 대 중 한 명으로서 나 자신의 학문에 대한 희망과 도전의 경험을 기록하고자 한다. 성장의 터전 구포


함경남도 함주가 고향인 아버지께서는 8.15 해방 전 수년간 낙동강 하구의 갈 대밭을 옥토로 만들기 위한 공사에 토목 기술자로 근무하셨던 인연을 찾아 1.4 후퇴 때 경상남도 김해로 이사해 오셨다가 다시 강 건너편 부산의 한 변두리인 구포에 정착하셨다. 위로 누님 네 분과 밑으로 여동생 하나인 딸부잣집의 독자 로서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자라났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적선지가 필유여 경, 불선지가 필유여앙(남에게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집안은 반드시 자손에게 경 사가 있고 그렇지 못한 집안은 반드시 자손에게 재앙이 있다.)‚라는 할아버지 이래의 가훈에 따라 동네 이웃과 친척처럼 서로 도우며 화목하게 살았다. 나는 1959 년 구포에서 태어나 자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낙동강을 바라보 며 금정산 기슭에 자리잡은 구포국민하교를 다녔다. 그곳은 한 학년이 네 학급 뿐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당시 60 여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학교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셈하기를 좋아했으며 누나들이 다니는 학교에 빨리 들어가고 싶어 했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몸이 조금 여위고 내성적이었으며, 학교 공부는 어 렵지 않게 했고 별로 말썽을 부리지 않은 편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친구들 과 산이나 강, 들로 나가 실컷 쏘다니다가 해질녘이 돼서야 돌아오곤 했다. 집에 서 가까운 낙동가에서 미역을 감기도 했고, 조개와 게를 잡는다며 온 펄을 헤집 고 다니기도 했다. `꼼밥`을 지어 먹으며 학교 뒷산에서 자수정을 캐러 다니기도 했으며, 시내 학교에 다니는 누님들의 해부 실습용 개구리와 도시락 반찬용 메 뚜기를 잡으려 근처 논을 휘젓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구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낙동강의 홍수이다. 큰 비가 오면 낙동강 물이 불어서 마을로 역류하는 것을 막느라 구포둑의 수문을 닫아 버리면 도랑 바로 위에 있던 우리 집으로 물이 밀려오는데 그것을 퍼내야 했다. 그러다 비가 그치면 상류에서 황톳빛 붉은 물살에 떠내려오는 짚더미, 수박, 가축 등을 구경하러 구포다리로 뛰어가곤 했다. `낙동강의 소설가` 김정한 씨의 ‚모래톱 이야기‛에도 나오지만, 사람들은 그 와중에도 구포다리 위에서 긴 망태기를 등 고 떠내려가는 수박, 돼지 등을 주워담으며 생계를 걱정했었다. 부산이 비대해지면서 구포를 삼켜 버려 이제는 내 고향이 부산의 한 변두리 베드타운으로 전략해 버렸고, 주위의 아파트 촌에 밀려 구포국민학교의 전통도 빛이 바랬지만 구포는 아직도 내게는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 가슴 설레는 나의 고향이다. 돌이켜 보면 그때 자연과 더불어 누린 행복한 어린 시절의 폭넓은 경 험은, 내가 큰 세상으로 나아가 원만하게 성장하는 데 보이지 않는 힘을 주었던 것 같다. 리틀 아인슈타인 - 물리학과 진학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자연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국민학교 때부터 어설프 나마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굳어졌다. 중.고등학교 평준화 세대여서 추첨으로 부산 서면의 중앙중학교에 입 학하였고 서울로 전학해서는 양정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중.고등학교 시절 아인슈 타인의 전기나 과학에 대한 책을 읽으며 물리학을 공부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지금도 삼풍 사고를 보면 주위에 부실 공사가 얼마나 만연한지 알 수 있지만, 아버지께서는 매우 강직하고 꼼꼼하여 이러한 일을 용납하지 못하셨다. 당시로 는 귀한 토목 기술자인데도 내가 국민학교 3 학년 때쯤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서 직장을 그만두신 후로는 다시 직장을 구하지 못하셨다. 그 후 가정 형편이 무척 어려워져 어머님께서는 대가족인 우리의 생계와 학비를 대느라 무척 고생하셨 다. 우리 집에 학생이 워낙 많아 학비를 제때에 못 낼 때가 많았는데 담임 선생 님께서 대신 내 주시기도 했다. 아버지께서 자식들 교육을 위해 나와 셋째 누님 만 부산에 남겨 두고 가족을 데리고 모두 서울로 가 있던 기간은 제때 생활비가 도착하지 않으면 끼니도 굶을 만큼 어려운 시절이었다. 모두 서울로 이사가서도 집안 형편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으나, 누님들께서 졸업 후 차례로 취직하고 나서는 집안 살림에 큰 힘이 되었다.


집안 형편과 누님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대학 진학을 앞두고 전자공학과 와 물리학과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께서 평소 전해 주시던 할 머님 말씀이 기억났다. ‚사람은 항상 대로를 가야 한다.‛ 한 번 대로에서 중로 로 빠지면 중로에서 소로로, 소로에서 다시 세로로 빠지기 쉬우며 끝내는 미궁 에 빠져 다시는 헤어나지 못한다는 이 말은, 내가 학문의 큰 흐름을 흔들림 없 이 따라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결국 원하는 길을 가고자 서울대 자연계열에 진학하기로 했다. 아버지께서도 관북에 은둔한 대학자였던 학산 김표 고조부의 뒤를 이어 과학자로서의 길을 가도록 격려해 주셨다. 이 때 인생에 있어 처음으 로 매우 중요한 선택을 해야 했고 물리학자로서의 미래가 결정된 셈이다. 돌이켜 보면 고등학교 시절은 대학 입시에 대한 강박 관념에 눌려 지낸 답답 한 시절이기보다는 과학자가 되겠다는 포부로 여유를 가지고 꾸준히 준비한 과 정이었다. 고등학교 3 학년 때 당시 4 당 5 락(네 시간 자면 대학 입시에 붙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을 명심하라는 담임 선생님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 루 8 시간 이상씩 꼬박꼬박 잤다. 입시가 가까웠지만 방과 후 학교에 남아 친구 들과 여유롭게 농구를 즐기기도 했다. 방학이 되어서도 친구들과 학교에서 거의 매일 서너 시간씩 농구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체력은 빠른 속도로 나아졌고 내 성적이던 성격도 점차 활달해졌다. 고 3 을 여유롭게 보내고 과외도 전혀 받지 않 은 내가 대학에 무난히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1, 2 학년 때 다른 학생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두어 복습의 필요성이 적었기 때문인 것 같다. 고등학교 이후 학교와 아버지 고향의 장학회에서 장학금을 받거나 가까운 친척의 공부를 도와 주어 학비에 보탤 수 있었다. 막상 대학에 들어가서는 반 학기를 그냥 보내 버렸다. 대학 생활의 자유와 데 모로 인한 어수선한 캠퍼스 분위기 때문에 나아갈 목표를 순간적으로 상실하고 표류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계열별 모집이어서 2 학년 진학시 원하는 학과를 가 려면 성적이 좋아야 했다. 평소 자부심을 가졌던 수학 과목이 중간 고사에서 반 타작을 하고 나 후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대학 시절 나는 식욕과 체력이 남보다 뛰어나 친구들 사이에서 앉은 자리에서 만두 100 개를 먹는 사람, 자장면 곱배기를 30 초 안에 마시는 사람, 그래서 회식 자리에서 피해 앉아야 할 사람으로 금방 유명해졌다. 엄청난 식욕에도 살이 안 쪄 친구들은 불량 돼지라고 놀리곤 했다. 먹은 음식의 에너지가 모두 소화되어 힘을 발위하는지는 모르지만 체력은 친구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그래서 얻은 별 명이 `물개`. 지금까지도 대학 친구들한테는 이 애칭으로 통한다. 체력은 지금까 지 내가 공부를 꾸준히 하는 데 큰 힘이 되고 있다. 물리학과 학생들은 정치에 관심이 적은 편이고 시대의 변화에도 가장 늦게 반 응했다. 밖에선 데모가 한창인데 수업을 계속하다가 교실 창문으로 돌이 날아오 는 바람에 당혹스러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80 년 봄, 데모의 규모가 커지자 우 리도 데모에 열심히 동참했다. 그 해 5 월 초순부터는 학교에 남아 도서관에서 기숙하며 아침부터 스크럼을 짜고 교문으로 달려가 전경과 대치하고 구호를 외 치다 돌아가곤 했다. 5 월 중순에는 가두 진출을 시도해 서울역에서 집회한 후 귀교하기도 했다. 비상계엄 확대 직전 계엄군이 교내로 들어올 예정이라는 정보 가 들어오자 학교를 사수한다던 총학생회를 비롯한 모든 학생이 썰물처럼 학교 를 빠져 나갔다. 그 후 광주의 어두운 소식이 들려왔고, 몇 번이나 학교에 가 보 았으나 학교 문 앞을 지키는 군인들의 서슬 퍼런 모습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허무와 좌절을 느끼며 아무것 도 하지 못하고 크게 방황하던 시기였다. 몇 달뒤 다시 개학했지만 혼란의 와중 에서 많은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유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여자구나 1978 년 5 월, 대학은 어수선했지만 여러 학교에서 축제가 시작되었다. 별 관심 을 두지 않았는데 주한이라는 친구가 잘 아는 이대 여학생의 축제 파트너로 지 목하여 마지못해 승낙을 했다. 그러고나니 약간은 설레는 마음이 생겨 전날 밤 누님에게 춤을 배우는 치밀한 준비도 하였다. 약속 장소인 이대 앞 파리다방에 서 흰색 블라우스을 입고 다소곳이 안자 있는 지금의 처를 처음 보고는 참 착하 고 순수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함께 축제 행사를 기웃거리다 그 날 대운동장에 서 벌어진 댄스에서 난생 처음으로 같이 춤을 추었다. 당시 처는 이화여대 2 학 년생으로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두워진 이대 교정에 앉아 각자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 근처 경 양식집에 굳이 데리고 가 평소 먹어 보지 못한 비프스테이크로 식사도 하였다. 그러나 관례적인 애프터 신청도 하지 않고 돌아섰는데 처는 나중에 이 일을 이 야기할 때마다 두고두고 분해 했다. 그 날 나는 가진 돈을 몽땅 털어 저녁을 샀 기 때문에 버스비가 없어 집까지 걸어서 돌아갔고 그 날의 기억은 기억에서 점 점 사라져 갔다. 1981 년 서울대 대학원 물리학과에 들어갔고 유학 준비에 한창 바빴다. 화사했 던 그 해 5 월, 이대 축제 때 파트너를 소개해 주었던 친구의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했다가 2 년 만에 처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처는 필연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그 때 신랑인 내 친구가 내게로 와서 피로연장 건너편에 자리잡은 처를 가리키 며 합석하라며 떠밀었다. 미적미적 처의 테이블로 옮겨서 처와 이야기를 나누며 옛날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교, 이 때 나의 반쪽이 `바로 이 여자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학과 친구들과 합창단 동아리 친구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보는 가운데 용기를 내 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함께 피로 연장을 떠났다. 그 후 처는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고 CC(캠퍼스 커플의 준말)로서 친 구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받으며 순탄한 연애를 하였다. 둘이 동반 유학을 준비 했지만 당시 집안 사정이 몹시 어려워 결혼은 고사하고 유학을 가기도 힘든 형 편이었다. 게다가 누님 두분이 그 때까지 결혼을 안 하신데다가 내 나이는 스물 세 살로 사실 너무 어렸다. 그러나 유학 이후를 걱정하신 장모님의 강력한 주장 으로 혼사가 급진전되어 우여곡절 끝에 1982 년 6 월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필라델피아에서의 유학 생활 서울대 대학원에 있을 때 물리학과에 갓 부임해 오신 김두철 지도 교수님의 영향으로 원자들의 아주 작은 세계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아주 큰 세계를 연결해 주는 통계물리라는 물리학의 한 분야에 매력을 느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다. 그러나 이 분야가 오랜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성숙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새로운 분야를 공부해 보고 싶기도 하였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그곳 에서는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기도 하여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 다. 떠나기 직전 지도 교수님께 인사차 들렀는데 한 논문에서 기묘하게 생긴 복 잡한 모양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 때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그 냥 지나쳤는데 나중에서야 카오스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모양인 야릇한 끌 개였음을 깨달았다. 결혼 한 달 후, 미래에 대해 큰 희망을 품고 큰 매형과 처가에서 마련해 준 비행기표 두 장을 들고 유학길에 올랐다. L.A.에 사는 내종사촌누님 댁에 들러 L.A. 갈비도 맛보고 꿈의 공원인 디즈니랜드도 구경하였다. 내종사촌누님 내외분 은 큰 집에 사셨지만 매형은 밤에도 일을 나갔다. 이민 생활이 얼마나 바쁘고 고달픈지 알 수 있었다. 두 분께 폐가 되지 않게 빨리 목적지인 미국 북동부 펜 실베이니아 주의 필라델피아로 떠났다. 안타깝게도 그 후 두 분 다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펜실베이니아 대학은 250 년 이상의 전통


과 역사를 가진 대학교로 미국의 8 대 명문에 속하는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하나이 다(전통이 오래된 학교는 담쟁이덩굴이 건물을 뒤덮을 정도로 많아 그렇게 불렀 다). 미국 동부와 서부의 시차도 모르고 새벽 3 시에 전화를 거는 바람에 선배의 새벽잠을 깨워 혼나기도 했지만 대학 선배가 공항까지 마중도 나와주고 집도 미 리 구해 놓는 등 큰 도움을 주었다. 처음으로 두 사람이 집에서 나와 독집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 지만 틈틈이 살림을 장만하고, 어학 연수를 받으며 학기 시작을 대비했다. 거금 을 투자한 침대와 저전거 외에는 대부분 벼룩시장에서 가구를 장만했으며, 아파 트 바로 옆의 길거리에 버려진 몇 가지 쓸 만한 가구들을 건지기도 하였다. 책 장은 벽돌과 널빤지로 만들어서 하얗게 페인트칠을 했고, 책상은 문짝을 하나 구해다가 썼는데 널찍한 게 아주 쓰기 편했다.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집들이하는 날, 혼자 자전거를 타고 중고차를 보러 나갔다고 모르고 필라데피아의 유일한 자전거 금지구역에 들어갔다. 딱지를 떼 고 있던 경찰을 향해 멋모르로 웃으면 지나가다 걸렸다. 여권을 보여 주며 더듬 거리는 영어로 사정사정 했지만 결국 벌금으로 자전거 반을 날렸다. 그 때 사서 몰고 다닌던 5 년 된 중고 차가 선버드인데, 그 차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지만 유학 초기의 추억이 어려 있어 현재 가장 아끼는 컴퓨터도 같은 이름으로 지었 다. 유학 생활 초기에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언어였다. 당시 우리 나라 영어 교육의 문제점이 나에게서 여실히 드러났다. 외국 학생을 가르치면서 조교 장학금을 받 으려면 토플 성적이 일정한 점수를 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토플 시험의 `등기 및 이해` 영역에서 밑바닥 점수를 받았다. 다른 영역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조교 를 하는데 요구되는 최저 점수는 겨우 넘겼지만 미국에서의 생활의 순탄치 못하 리라는 것은 자명하였다. 처음 맥도날드 패스트푸드 식당에 갔을 때 점원이 ‚ Here or to go?(여기서 들실래요. 아니면 가지고 가실래요?)‛라고물어보는 것을 알아들지 못해 눈만 껌벅껌벅 했다. 첫 학기에 한 대학원 과목의 수업에 들어갔더니 갑자기 시험을 보기 시작하였 다. 나는 깜짝 놀라서 시험 직후에 담당 교수를 찾아가 왜 예고도 없이 시험을 보느냐고 따졌더니 담당 교수는 시험 1 주일 전부터 계속 얘기했다고 했다. 학기 말 시험을 잘 보면 된다는 교수의 위로를 들으며 돌아섰지만 그 때의 충격은 상 당히 컸다. 그후 미국 친구들과도 적극적으로 자주 어울리려고 노력하였다. 미국 의 파티는 비스킷과 치즈, 마실 것이 거의 전부로 별로 먹을 것도 없이 말로 하 는 파티여서 한국 사람들에게는 별 재미가 없었지만 꼭 참석하여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 후 3 개월이 지나자 먼저 귀가 뚫렸고 곧 이어 대화도 어는 정도 가능하게 되어 영어의 핸디캡을 빠른 시간 안에 극복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어 구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배짱인 것 같 다. 이 점에서 처의 영어 실력은 나를 앞섰다. 나는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려고 오물오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던 반면에 처는 틀린 영어에 좋지 않은 발음이라 도 큰 소리로 자신 있게 말하여 상대편이 알아듣기가 더 쉬었던 것이다. 필라델피아는 미국에서 네번째로 큰 도시이며, 인구의 거의 반이 흑인이다. 미 국과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흑인들은 백인보다 여러 면에서 실제적인 차별 을 받으며 경제적으로도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산다. 대개 매달 지불하는 집의 월세에 따라 주거 지역이 크게 나뉘는데 주로 흑인들은 시내에, 백인들은 시 외 곽이나 교외의 보다 나은 환경에서 산다. 유학생들의 경우 대체로 최저 임금보 다 못 한 급여로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시내의 흑인 거주 지역 가까운 곳에 많 이 살고 있어 안전상 문제가 있다. 부활절은 미국에서는 가장 큰 명절 중 하나 로, 이 때가 되면 미국 학생은 거의 집으로 돌아간다. 대학원 아파트는 대학 캠 퍼스 안에 있어 비교적 안전한데도 내 입학 동기 여학생 한 명이 부활절 휴가


기간 중 자기방에서 살해되어 물리학과를 포함해 학교 전체가 충격에 휩싸인적 도 있다. 처가 다니는 템플 대학교도 흑인 밀집 지역 안에 마치 섬처럼 위치하 고 있어 항상 조심해야 했다. 나는 학부생들의 실험을 도와 주거나 숙제를 채점하여 조교 장학금을 받거나 또는 연구 조교로서 연구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원 박사 과정을 다녔다. 장학금 중에 반 이상이 집세로 나가고 나머지는 처의 급여와 합쳐 최저 생활을 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살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 벌어서 학교를 다닐 수 있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은 보람을 느꼈다. 박사 과정 생활은 거의 학교와 집을 시계추처럼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런 가운데 점심 시간에 건물 앞에 있는 조그만 점심 트럭에서 핫소시지와 커 피를 사거나 필라델피아의 명물인 프레첼 과자, 치즈 스테이크를 사 들고 건물 옆 테니스 코트의 스탠드에 앉아 신문을 보거나 테니스를 함께 즐기는 것이 일 상 생활의 낙 중 하나였다. 필라데리아도 뉴욕, L.A. 등과 마찬가지로 한국 교민이 매우 많아 한국 식료품 가게에서 김치를 비롯한 생활 용품을 살 수 있고, 비싸지만 가끔 한국 식당에서 식사도 하는 등 한국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또한 템플 대학교, 드렉셀 대학교 등 한국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또한 템플 대학교, 드렉셀 대학교 등 이 지역의 다른 대학에도 한국 유학생이 많은 편이어서 한국 유학생 사회가 꽤 크게 형성 되어 있었다. 유학생들은 한국 소식을 늘 궁금해 하여 날짜가 조금 오래된 미주 판 한국 신문을 한국 식료품점에서 구하면 근처의 모든 학생이 나누어 보곤 했 다. 외국 생활에 지치거나 학업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한국 유학생들은 서 로 어려움을 나누며 도음을 아끼지 않았다. 주말이면 서로 집에 초청하여 식사 도 함께 하고, 가끔 생맥주를 한잔 하거나 근처의 공원에 놀러가서 고기를 구워 멱으며 운동을 즐기기도 했다. 뉴저지 주의 바닷가는 조그만 보트를 타고 하는 게 낚시가 유명하여 한 번 가 본 적이 있는데, 게가 생닭다리를 그렇게 좋아하 는지는 그 때 처음 알았다. 닭다리를 실에 매달고 바다에 던져 넣으면 게들은 줄을 당기는 것도 모르고 그것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도 유학 초기의 기 억을 떠올리면 즐겁다. 가족, 친구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쉬웠지만 부부 단둘 만 떨어져 있다 보니 서로에게 한없이 기대고 가까워질 수 있었으며, 다른 일에 신경쓰지 않고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카오스에 눈을 뜸 펜실베이니아 대학원 1 학년 시절, `사이언티픽 아메리칸`등 과학분야의 잡지를 읽거나 물리학과의 정기 콜로퀴움 강연에 꼭 참석하는 등 나름대로 앞으로 해야 할 분야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당시 과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과학 뉴스에서 자주 접하던 카오스에 관한 기사는 내 눈을 사로잡았다. 묘한 뉘앙스를 가진 단 어인 카오스. 일상 생활 용어로 무심코 쓰이던 이 말이 왜 폭발적 관심의 대상 이 되는지. 카오스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그 내용이 너무나 새롭고 반직관적이 어서 처음에는 개념이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카오스를 처음 이해하면서 내가 알던 과학의 정리된 체계가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카오스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일종의 예측할 수 없는 불규칙한 운동이 다. 바람이 잔뜩 들어간 풍선의 운동, 담배꽁초에서 흘러나온 연기, 깊은 산 속 계곡 물의 급류, 커피잔 속에서 크림이 뜨거운 커피와 격렬하게 섞이는 현상, 기 상이 안 좋은 날의 공기의 흐름 등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카오스는 완전한 무 질서, 비예측 상태를 나타내는 혼란과는 본질적으로 다른다. 완전한 비예측성 현상의 간단한 예로는 동전 던지기를 들 수 있다. 동전을 던 졌을 때 이전에 위나 아래가 나왔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 다음에 무엇이 나올까 를 예측하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자연계에서는 완전한 비예측 성을 보이는 운동은 거의 없으며 그 불규칙성 속에 어떤 형태로든 규칙성이 있


다. 이 규칙성의 질서 구조인 야릇한 끌개는 1963 년 MIT 의 기상학자 로렌츠가 처음 발견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잡지에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그 중요성을 제때 인식하지 못하여 한참 뒤에야 빛을 본다. 카오스의 가장 큰 특징은 나비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즉 북경에서 나비 한 마 리가 날개짓을 하여 그 팔랑거림이 계속 증폭되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지구 반 대쪽인 뉴욕에서 폭풍우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의 전래 민요는 이를 잘 비유하고 있으며, 이 나비 효과로 인해 자연계의 거시적 비예측성이 생겨나 게 된다. 못이 없어 편자를 잃었다네. 편자가 없어 말을 잃었다네. 말리 없어 기수를 잃었다네. 기수가 없어 전투에 졌다네. 70 년대 말 미국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에 있는 미첼 파이겐 바움이라는 한 연구원이 규칙적 운동에서 카오스로 가는 하나의 길의 보편성을 이론적으로 나 타났다. 80 년대 초 이 이론적 예측이 막 실험으로 증명된 후 카오스 분야는 엄 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마침 카오스를 전공하는 한 젊은 교수가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딴 후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산타바바라에 있는 이론물리 연구소를 거쳐 막 물리학과에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오스트룬트 교수는 시계추와 비슷한 전동자가 여러 개 모여 함께 움직이는문제에서 어떤 보편적 매 커니즘을 통해 카오스가 생겨나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형의 새로운 문제에다 전에 배웠던 통계물리학적 방법을 확장 적용하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이 부임하기 전에 전화로 재빨리 연락을 취했지만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다고 이미 나보다 먼저 연락을 취한 멕시코계 학생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교수의 지도 학생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자리가 날 때까지 해리스 교수 밑에서 통계물리학의 무질서 회로망에 대한 연구를 하며 안타까운 기다림 의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마침 그 학생이 지도 교수와 잘 안 맞아 9 개월이 못 되어 나가는 바람에 예상보다 빨리 오스트룬트 교수의 지도 학생이 될 수 있었 다. 막상 이 때쯤 해서는 해리스 교수와의 연구도 본 궤도에 올라 논문이 막 나 오고 있었으나 과감하게 오스트룬트 교수에게게 옮겼다. 그 후 지도 교수와의 연구를 통하여 카오스에 대한 아주 많은 것을 새로이 배 우게 되었으며 자연의 여러 문제를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지도 교수는 나보다 다섯 살이 많았는데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친구처럼 지냈다. 내가 졸업한 후 그는 곧 스웨덴에 있는 샬머스 공대라는 대학으로 옮기게 되어, 나는 지도 교수의 미국에서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박사 학생이 되었다. 카오스 연구에 재미를 붙인 나는 문제를 한 번 잡으면 풀릴 때까지 달라붙어 놓지 않았다. 그리고 연구의 속성상 종종 밤늦게까지 남아 있게 되거나 밤을 새 고 터미널 앞에 앉아 있은 적도 적지 않았다. 지도 교수도 새로 부임하여 조교 수로서 열심히 연구했으며, 새벽 1 시나 2 시에 컴퓨터를 쓰고 있으면 지도 교수 로부터 컴퓨터를 통해 이야기하자는 메시지가 오곤 했다. 할 일이 아주 많아 산 만해지기 쉬운 지금의 교수 생활에 비추어 보면, 학생이었던 그 때가 하고 싶은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1987 년 여름, 박사 과정에 들어간 지 5 년 만에 `여러 개의 주기를 가진 계에서 의 준주기에 의한 카오스로의 전이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박사 학위를 받 았다. 박사 학위 논문 심사를 준비하느라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한국에서의 격동적 변화의 물결을 신문을 통해서만 알고 지냈다. 코넬 대학에서의 연구원 생활


코넬 대학은 미국 북동부 뉴욕 주 북쪽에 위치한 인구 5 만의 조그만 도시 이 타카에 있으며, 손가락 모양의 5 개 호수 중 하나인 카유가 호수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캠퍼스를 가진 대학 중 하나 로 알려져 있다. 1985 년 여름 코넬 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지도 교수를 따라 한 달간 이 대학에서 보내개 되었다. 그 때 빌려 살던 집에서 몇 달 동안 굶었 던 고양이, 벼룩한테 무차별 공세를 받아 온몸을 물리 기억이 난다. 벼룩에게 처 가 주식이고 나는 디저트 역할를 하게 된 것이 처에게는 불행이었지만, 그러나 아침에 집에서 나와 꽤 급한 경사의 캠퍼스 언덕을 걸어올라가는 것은 적당한 규칙적 운동이 되었고, 저녁에는 노을진 호수를 내려다보며 둘이서 집으로 향하 는 낭만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에 살던 서울이나 필라델피아와 같은 대도시와는 달리 작은 도시의 조용한 분위기와 대학의 활발한 분위 속에서 연구 에 집중할 수 있는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박사 학위를 딴 후 코넬 대학의 동역학계의 권위자인 구켄하이머 교수가 수리 과학연구소의 연구원 직을 제의하자 주저 없이 이타카로 떠났다. 이타카의 토박 이 미국 친구 탐 요크의 도움으로 농장이 흩어져 있는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산 장처럼 아름다운 집을 얻었다. 여름에 차를 몰고 등하교를 하며 길가에서 다람 쥐와 사슴이 뛰어 노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주말이면 작은 폭포가 흩어져 있는 근처의 주립 공원에서 산책을 즐기기도 했다. 그리고 카유가 호수에서 친구와 요트를 타거나 친구 가족 소유의 호수에서 조용하게 보트 낚시를 즐긴 것도 퍽 기억에 남는다. 이타카는 미국에서 눈이 가장 많이 내리는 스노 벨트 지역의 바 로 경계에 있어 겨울이면 눈이 아주 많이 내렸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눈을 치우 는 것이 겨울의 일상사 중 하나였다. 겨울에 집 바로 옆의 나지막한 산과 언덕 에서 오솔길을 따라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탄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코넬에 머무르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처가 1 년 먼저 박사 학위를 받고 오하이 오 주립대학으로 직장을 얻어 가는 바람에 서로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점이었 다. 오하이오 주립대학은 필라델피아와 이타카와는 차로 열 시간 거리에 있었다. 1 년이나 필라델피아에서 후배 한 명과 인도 학생이 함께 집을 빌려 자취 생활을 해왔으므로 서로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처가 차를 가지고 있어 떨어져 있는 동 안 너무 힘들면 밤새도록 차를 몰고 나를 보러 왔다가 곧 돌아가곤 했다. 그러 나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연구원이 되면서 수입이 다소 넉넉해졌고, 두 삶의 월 급에서 조금씩 떼어 가끔 양쪽 부모님께 보내 들리 수도 있어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코넬에서는 카오스를 연구하는 사람이 많았고 세계의 여러 곳에서 방문하는 사람도 많아 경험의 폭을 넓힐 수 있었으며, 지도 교수의 품을 떠나 독립적인 과학자로서의 첫발을 순탄하게 내딛을 수 있었다. 카오스는 불규칙한 자연 현상의 이면에 있는 보편성의 이해를 추구하므로 물 리학과 같은 과학의 속성을 가진다. 그러나 카오스의 모델은 미분 방정식 형이 나 사상과 같은 수학적 모델로 주어지므로 카오스는 수학의 역학계 분야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 학제간 성격을 강하게 띤다. 코넬 대학에서 수리과학연구소에 있었고 수학의 역학계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구켄하이머 교수 및 다른 교수와 함께 카오스가 일어나는 새로운 메커니즘에 대해 연구했다. 당시 나는 간단한 비선형 소자가 여러 개 결합된 계가 만들어 내는 복잡한 동역학을 연구하던 중 이었다. 비선형계는 선형계의 문제와 달리 입력의 변화에 따른 출력의 예측이 힘들게 되며 운동의 복잡성 때문에 해석적 연구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새로운 방법론의 개발이 중요한 관건이었는데 나는 당시 급격하게 발전하던 컴퓨터의 역할에 주목하였다. 컴퓨터는 전통적으로 데이터를 처리하는 간단한 도구로 출발했지만 고해상도 화면 표시 장치의 출현으로 시간 또는 3 차원 이상을 시각화한다든지, 스크린을 통해 대화한다든지 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지금은 학계에서 아주 많이 사용되고 있는 선이라는 워크스테이션형 컴퓨터가 바로 이 때 처음 나왔다. 나는 컴퓨터


를 많이 이용하는 편이고 다른 이용자의 요청도 있어 연구를 하는 틈틈이 시스 템 운영자의 역할도 수행하느라 컴퓨터 기술의 변화를 빨리 감지하고 이용할 수 있었다. 컴퓨터를 통해 그림으로 사고할 수 있는 새로운 속성을 최대한 연구에 이용하려고 노력했고 조금씩 보태다 보니 카오스를 일반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패키지를 개발하게 되었다. 1 년 후에 그 길이가 4 만 줄에 이르는 방대한 동역학 연구 프로그램을 완성하여, 많은 사람이 카오스 운동의 복잡성을 직접 눈으로 보고 스크린과 대화하며 전산 실험도 쉽게 수행할 수 있게 했다. 코넬에서의 이 러한 경험은 나중에 컴퓨터를 이용해 과학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의 연구원 생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는 1930 년 백화점 재벌이 었던 뱀버거가의 거액의 기금 출연과 저명한 교육자이자 첫 소장이었던 플렉스 너의 영감에 의하여 뉴저지 주의 조그만 도시 프린스턴의 한적한 곳에 세워졌 다. 고등연구소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사람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일 것이다. 아 인슈타인은 1933 년 미국으로 처음 건너가 이 연구소에 자리잡은 후 통일장 이론 연구로 여생을 보냈으며, 상당수의 노벨상 및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 수상 자도 여기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수많은 저명한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이 이곳에 서 학문 경력을 쌓아 갔다. 넓은 잔디밭과 울창한 숲 사이에 자리잡은 진입로로 들어서면서 바라보는 연구소는 마치 조그만 대학 캠퍼스 같지만 여기엔 학생들 이 없다. 고등연구소는 설립 취지대로 젊은 학자들에게 이상적인 연구 환경을 제공하고 이들을 교육하는 일종의 `연구원 대학`을 지향하며, 이론 연구나 지적 인 탐구에 있어 세계 최고의 중심지이다. 고등연구소에서는 한 분야의 최고의 연구자가 모여 집중적 연구로 연구 효과 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매년 특별한 토픽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1988 년 여름 부터 수학 스쿨에서 역학계에 대한 특별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되어 구켄하이머 교수와 함께 1 년간 고등연구소를 방문하도록 초청받았다. 고등연구소의 상징인 풀드홀이라고 불리는 조지아 양식의 빨간 벽돌로 된 3 층 건물의 2 층에 사무실을 배정받았다. 아인슈타인도 이 건물의 1 층 한쪽에 반원형의 사무실을 가지고 있 었다고 하는데, 도서관 중앙에 있는 그의 흉상이나 바로 근처의 아인슈타인이 거주했던 집 등 곳곳에서 그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연구소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은 풀드홀에서 걸어서 3 분 이내의 거리에 있는 회원 주거 단지에서 생활 하게 된다. 한쪽으로는 골프장을 끼고 다른 쪽으로는 연구소의 넓은 잔디밭과 숲을 끼고 있는 단지의 나지막하고 아담한 2 층 아파트에서 살았다. 이곳의 거의 모든 거주자가 아인슈타인 길과 폰 노이만 길이라는 매력적인 주소를 가진다는 점과 세계적인 학자를 이웃에 두고 생활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슴이 너무 많이 번식하여 한때 사슴 사냥을 해야 할 정도로 나무가 울창하 게 자란 연구소 뒷숲의 오솔길을 따라 산책을 하고, 풀드홀 뒤의 작은 연못과 넓은 잔디밭을 지나 연구소로 출근할 수 있어 항상 하루를 상쾌한 마음으로 시 작할 수 있었다. 특별한 행사도 별반 없이 이와 같이 조용하고 아름다운 환경에 서 오로지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것이 고등연구소의 강점이었다. 점심 식사 시간에 식사 쟁반을 들고 아무 식탁이나 가서 전세계에서 모여든 저명한 학자와 어울릴 수 있었으며, 쾌적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며 종종 제기되는 문제에 대 한 치열한 토론에 참석하는 것은 학식을 넓히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특히 풀드홀의 한가운데에는 안락한 소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널찍한 휴게실이 있는데, 주 중에 매일 오후 3, 4 시 사이면 이곳에서 쿠키와 티 타임이 있다. 이 시간에는 거의 모두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내려와 차를 마시며 다른 사람과 담소를 나누거나 학문적인 토론을 하는데 연구소 생활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였다.


새로운 명문 - 포항공대 내가 프린스턴에 가 있는 동안 처는 그곳에서 차로 네 시간 거리의 워싱턴 시 에 소재한 메릴랜드 대학에 방문교수로 가게 되어 1 년간 더 떨어져 있게 되었 다. 워낙 큰 나라인 미국에 몇 년 살다 보니 거리 감각도 둔해지고 두 도시의 거리가 그 이전보다는 훨씬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연구로 바쁜 삶 에 격주말 부부를 면하기가 힘들었다. 서로가 경력을 쌓아 후일에 대비하기 위 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3 년씩이나 계속 떨어져 있기란 매우 힘들었다. 누군가 부부가 실제 결혼한 기간은 함께 산 기간에서 떨어져 있는 기간을 뺀 기 간이라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떨어져 있으면 그만큼 서로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다는 말인데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우리가 필라델피아에 있을 때에도 워낙 이사를 많이 다녀서 선배들이 이삿짐 나르기에 지쳐 투덜거리곤 했는데, 이 때 쯤 해서는 미국에서 이사를 거의 20 번 정도 다닌 셈이 되어 이사에는 완전히 이 력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진로에 대해 큰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학 문적으로 더 크기 위해서는 고등연구소와 코넬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경력을 쌓 으며 미국에 좀더 남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 나날이 발전 하는 한국의 소식을 접할 때면 한시라도 빨리 귀국하여 할 수 있는 분야에서 무 엇인가 공헌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졸업하기 1 년 전인 1986 년에 한국 사정도 알아볼 겸 유학 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포항공대도 다녀왔다. 고 교 동창인 오종훈 교수의 안내로 당시 물리학과 주임 교수였던 성우경 교수와 김호길 총장님을 처음 뵈었다. 만나자마자 총장님의 ‚당신 미국에 뭐 하러 있 소. 빨리 한국에 돌아오지.‛ 하는 말과 함께 거침없이 쏟아지는 미래의 연구 주 심 대학에 대한 포부를 들었다. 당시 포항공대는 단층의 건설 현장 사무소 같은 곳에서 몇 안 되는 교직원만이 부임해 있었고 학교도 부지만 정리된 황량한 모 습이었다. 그러나 총장님의 원대한 포부와 자신감에 감동받은 우리는 학교에 대 한 호감을 가지고 미국으로 다시 떠났다. 3 년 뒤인 1989 년, 우리 부부도 경력이 어느 정도 쌓여 각자 국내외에서 영구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미국에서도 같은 지역에 있으면서 두 사람이 다 만족할 수 있는 대학 교수 직을 알아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각자 여러 미국 대 학으로부터 조교수 직을 제의받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주저하던 중, 한 국에서도 포항공대와 과기대라는 좋은 직장이 제시되고 있어 그 해 여름 최종 결정을 하기 전에 한국에 돌아와 포항과 대전을 방문하였다. 포항에서 김 총장 님을 다시 만나 뵙고 이정림 교수님을 포함한 여러 분들의 환대를 받았다. 포항공대는 1986 년 12 월 개교 이후 계속 우수한 신입생을 선발하고 있었다. 아직 전통이 짧은 대학이었지만 연구 중심, 소수 정예, 전원 장학생, 대학원 중 심이라는 매우 색다른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후 여론의 주목을 받아 오며 빠른 속도로 새로운 명문 대학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김 총장님의 포부대로 연구 중심 대학으로 뿌리 내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포항공대의 깨끗한 캠퍼스 와 조용한 주거 환경이 연구원으로 있었던 코넬 대학이나 프리스턴의 고등연구 소와 비슷한 분위기여서 대도시의 대학보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처와 숙의 끝에 귀국하기로 결정을 했다. 부부가 함께 한 학교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좋았고, 포항공대의 연구 여건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서 이곳에서도 계속 성장하며 각자의 분야에서 공헌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아름다운 캠퍼스에서의 카오스연구 포항은 1973 년 포항제철이 세워지기 전에는 인구 4 만의 조그만 어촌이었으나, 지금은 서울시보다 더 넓은 면적을 가진 인구 50 만을 거느린 경북 제일의 도시 로 탈바꿈하였다. 나는 귀국 직전 여권을 짐과 함께 부쳐 버려 한바탕 소동을


벌인 끝에 1990 년 2 월 처와 함께 포항공대에 부임했다. 귀국 직후 나는 물리학 과와 수학의 겸직 교수로서 양쪽 학과를 모두 강의해야 했다. 새로 강의 노트를 만들어 강의하고 여러 명의 학생을 받아서 연구 지도하는 등 내 생활은 아주 바 빠졌다. 컴퓨터 경험을 살려 물리학과와 수학과에 컴퓨터 시스템을 설치 운영하 고 운영 요원도 교육했다. 학교와 학과의 여러 위원회에 소속이 되어 배분되는 행정 업무도 맡아야 했고, 동아리 지도, 학생 지도위원 들의 업무에도 시간을 쪼 개야 했다. 물론 이런 와중에도 세미나, 워크숍, 학회 활동 등과 함께 연구를 계 속할 시간을 확보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며 시행착오 끝에 수많은 해야 할 일의 목록에서 일의 중요도와 완급을 판단하여 위에서부터 지워 나가는 지혜도 얻었 다. 귀국 직후 국내에서는 카오스라는 말이 생소하였다. 충남대를 중심으로 한 카 오스 스터디 그룹이 애를 쓰고 있었지만 전공자가 적어 본격적인 궤도에는 오르 지 못했다. 카오스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확산시키기 위해 강연을 다니기도 하고 과학 잡지와 신문에 카오스에 대한 소개의 글도 많이 썼다. 특히 대학의 초청을 받아 학생들에게 강연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마다하지 않고 카오스와 복잡성의 과학에서의 새로운 접근을 소개하였다. 대개 학생들은 호기심에 참석 하여 진지하게 듣고 난 후 쉽게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나 패러독스에 대하여 많 은 질문을 하곤 했다. 질문과 대답 시간이 강연 시간보다 더 길었던 경우도 있 을 정도로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은 학생과 젊은 연구자 등 새로운 세대를 중심으 로 크게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카오스에 대한 베스트셀러가 번연 출 간되기 시작하고 우연하게 카오스 관련 전자 제품이 나오면서 일반인들의 카오 스 분야에 대한 관심도 급속히 커지기 시작했다. 포항공대의 물리학과에 비선형 및 콤플렉스 시스템 연구실(Nonliner & Complex Systems Lab)을 차리고 카오스와 그 응용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며, 이 분야에서 국내 연구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고자 노력했다. 여러 연구자의 힘을 모아 국내의 카오스 스터디 그룹의 활동을 조직화하여 세미나, 소규모 워크숍, 산학연 강연, 카오스 응용연구회 모임 등 다양한 활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카오 스 그룹의 역량은 빠르게 증대되어 그 동안 두 번에 걸쳐 카오스와 비선형 동역 학에 관한 국제 워크숍을 포항에서 개최할 수 있었다. 이들 행사에는 200 명이 넘는 여러 분야의 산학연의 연구자와 학생이 모여 활발하게 논문 발표를 하는 등 매우 성공적으로 치렀으며 단시간에 국내의 카오스 그룹의 성장을 촉진하고 연구의 수준을 국제적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포항공대 교수와 그 가족은 모두 학교에서 걸어서 15 분 거리의 교수아파트라 고 부르는 단지에 함께 모여 산다. 주거 단지내에 쇼핑 몰 등 서구적 형태의 상 가도 있고 공부하는 사람들끼리만 이웃하며 사는 것은 마치 유학 생활이 연장되 는 것 같은 느낌이다. 비슷한 사람끼리 재미있게 사는 것도 좋지만 옆집의 숟가 락 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정보 재배분이 빠른 것이나 인적 교류의 폭이 좁은 것은 단점이라고 하겠다. 이곳 생활의 가장 큰 특징은 교수들의 사택이 가까워 저녁에도 쉽게 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포항공대의 학생은 다수가 올빼미 생활을 하고 있으며, 많은 연구실이 밤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나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밤에도 연구실에 나가게 되고 일이 밀리면 가끔 밤을 새우기도 한 다. 출퇴근 러시 아워에 시달리지 않고 학교에 쉽게 출퇴근 할 수 있어 좋기도 하지만, 사생활이 거의 없어지는 것은 가족의 불만이기도 하다. 귀국한 후 무엇 인가 제대로 한번 해보고자 하는 개인적 욕심이 있는데다가 해가 지나며 점점 더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많아져 며칠만이라도 시간을 내 가족과 휴가를 즐긴 기억이 없어 아쉽다. 서울에 가면 왜 서울에 살지 않고 포항에 사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어릴 적무 터 시골에 살았고 미국에서도 조그만 마을에 살아서 북적거리는 서울과 같은 대 도시보다는 작지만 조용한 곳이 좋다. 또 우리가 사는 주거 단지에는 포항제철


의 오랜 노력으로 서울에 못지않은 훌륭한 학교도 있어 교육 여건도 괜찮은 편 이다. 문화적 욕구를 채우기에는 약간 아쉽지만 학교를 중심으로 문화 행사가 자주 있고 일과 가정에 바쁠 때면 이러한 행사에도 다 못 가 본다. 포항은 무엇 보다도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 조건이 있다. 바닷가가 가까워 여름 이면 동해의 여러 깨끗한 해변 중에서 하나를 골라 반나절이면 다녀올 수 있고, 바다를 끼고 호미 등을 거쳐 구룡포, 감포를 경유하여 경주로 돌아오는 길은 최 고의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이다. 내연산, 주왕산도 가까이 있다. 가까운 경주는 하도 손님을 모시고 많이 가서 이제는 웬만한 여행 안내원 뺨치게 경주의 유적 에 대해서 줄줄 이야기할 수 있다. 포항의 별미인 오징어와 한치회는 포항에 온 뒤에야 그 맛을 알게 되었다. 고래육회, 과메기의 맛까지 안다면 진짜 포항 사람 이 되었다고 생각해도 된다. 이곳의 생활 가운데 교수 몇 명이 집에서 무공해 채소를 가꾸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포항은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철도의 축에서 벗어나 있어 서울 사람은 포항을 오지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포항에 눌러 앉아도 특별히 고립감을 느끼거나 활발하게 학문적 활동을 하는 데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서울에서 세미나나 강 연이나 학회 활동이 있어도 포항엔 비행기가 자주 있어 걱정이 없다. 지난 5 년 간 무려 200 번 이상 비행기를 탔다. 아직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활동할 수 있 는데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여행 중의 짜투리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 지혜도 쌓아 잦은 출장이 크게 힘들지 않다. 정보화 사회의 첨병으로서 직접 움직이지 않고도 팩스와 인터넷을 통한 전자 우편으로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의 학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활발한 교류를 유지하는 데도 아무 제약이 없다. 특히 포 항공대는 정보화된 캠퍼스를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교내에 LAN 네트워크가 외 부망과 고속으로 잘 연결되어 있어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만 알면 인터넷에 연결 된 전세계 어디라도 가 볼수가 있다. 부부 교수 포항공대에는 다섯 쌍의 부부 교수가 있어 국내의 타 대학보다 많은데 우리는 그 가운데 가장 젊다. 나는 물리학과에 있으며 수학과 겸직을 하고 있고 처는 수학과에 있다. 같은 건물에서 나는 3 층에 처는 5 층에 사무실이 있어 커피를 들 고 서로 찾아불 수가 있고 함께 캠퍼스를 산책할 수도 있어 좋다. 하지만 처가 학교에서 가끔 나오는 보너스 등 직장의 일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어 너무 비밀이 없다는 단점도 있다. 우리 부부는 생김새가 비슷해 모르는 삶이 오누이 냐고 물어본 적이 여러 번 있을 정도지만 성격은 꽤 대조적이다. 얼마 전 컴퓨 터를 이용하여 대표적인 성격 검사를 한번 해보았더니 아주 달랐다. 나는 보다 신중하고 분석적으로 나온 반면, 처는 보다 직관적이고 직선적으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인적 성품이나 학문적 분위기, 일에 대한 강한 욕구 등에 있어서는 서로 공통점이 많다. 특히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난 같은 세대로서 서로 동질성을 느끼며 도와 가며 사랑하며 어려운 일을 극복해 나간다. 한 학교에서 교수로서 함께 근무하는 우리 부부를 보고 시샘 섞인 눈으로 부 러워하는 사람이 많다. 부부가 함께 일한다는 즐거움 외에 돈도 두 배로 벌고 학교에서 개교 기념 선물이 나와도 두 개씩 챙길 수가 있으니. 그러나 두 사람 이 같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직장의 스트레스도 함께 나눠야 하고 가사, 육아 등의 일도 분담하고 도와 주는 수고와 이해가 따라야 한다. 특히 직장에 나가 있는 동안 아기를 돌보는 사람을 구하는 일이나 아이들 교육에 신경을 쓰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결혼은 일찍 했지만 아이는 늦게 가져 여섯 살과 세 살 난 두 아들이 있다. 가장 난감해지는 때는 저녁에 학생을 만나거나 회식이 있는 등 일이 겹치거나 두 사람이 모두 출장을 가야 하는 경우이다. 귀국 직후엔 어머니 께서 많이 도와 주셨지만 지금은 편찮으셔서 하실 수 없고, 급할 때 서울에 계


신 장모님께 구원을 요청하여 도움도 종종 받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어려움 과 함께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해 낼 마음가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처는 가정과 교수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잘 조화해 나가는 슈퍼우먼의 역할을 잘 해내며, 나도 처가 필요로 할 때 외조를 해야 한다. 김호길 총장님을 떠나보내며 1994 년 5 월 4 일 교직원 체육대회가 있던 날이었다. 울산에 계시던 외할머니께 서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울산으로 내려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참에 김호길 총장님께서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처의 전화를 받았다. 교직원 체육대회 에서 발야구를 하다가 홀플레이트 근처의 옹벽과 부딪치는 어이없는 사고를 당 했다는 것이다. 성모병원으로 급히 뛰어가 흰 시트에 싸인 김 총장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제철학원 이사회에서 포항공대에 대한 변함없는 지원을 약속받 으셨다고 매우 기쁜 마음으로 그 날을 시작하셨는데. 김 총장님은 버밍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와 메 릴랜드 대학에 계시며 핵 및 플라즈마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셨다. 특히 재미 과학자협회를 발기하셨고, 교포 2 세들의 교육에는 정열을 쏟아 한글 학교 를 운영한 바 있다. 학교측에서 시민권 취득을 종용했으나 거절하고 언젠가는 귀국하여 조극을 위해 일하리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83 년 럭키금성사의 요 청으로 귀국하여 연암공전에 계시다가 포항제철의 박태준 회장과 뜻을 모아 세 계 수준의 연구 중심 공과대학을 만들고자 포항공대를 세우셨다. 울산에 다녀와 고 김 총장님의 발인을 하던 날 운구를 맏게 되었다. 관의 무거 운 느낌만큼이나 마음도 무거웠다. 영구차가 학교로 향하는 도중 이른 아침인데 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검은 옷을 입고 나와 학교 후문부터 강당 앞의 영결식 장까지 도열해 있었다. 영결식장에서 김 총장님께서 제 1 회 입학식에서 신입생에 게 연설한 녹음 테이프를 틀었을 때 장내에서는 오열이 터지기 시작했다. ‚육 대주 기슬과 잇닿은 영일만 푸른 물을 내다보는 이곳, 나라와 인류의 복지를 위 하여 배달의 정예가 모였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포항공대의 교직원과 학생 거 의 모두가 김 총장님과의 강한 인간적인 끈에 직간접적으로 끄려서 포항으로 왔 을 것이다. 김 총장님의 고향인 안동군 임동면 지례로 떠나는 버스에 올랐다. 차는 안동 호 때문에 길이 수몰되어 새로 닦은 비포장 도로의 굽이굽이 고개를 아슬아슬하 게 돌아 한참을 달려 장지에 닿았다. 총장님의 묘소는 잔잔한 호숫가의 수몰된 고향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자리잡았다. 그 해 4 월 중순 승진자들과의 회식 모임 에서 ‚자네가 똑똑하다는데 제대로 하지 못할 바에는 우향후하시오.‛ 하신 말 씀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우향우`란 말은 박태준 전 이사장께서 포항제철을 처 음 건설할 때 일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면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로 뛰 어들라고 한 데서 유래된 말이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그 설립자는 하늘에서 쉽게 대학을 알아보게하기 위해서 지붕을 빨갛게 칠했다 한다. 김 총장님께서 하늘에서 포항공대 기숙사의 빨간 지붕과 교사의 푸른 지붕을 쉽게 찾아보시고, 연구 중심 대학의 이상이 실현되어 미래의 한국 과학자상의 빈 좌대가 채워지는 것을 지켜봐 주시기를 기원해 본다. 새로운 과학의 패러다임 요즈음 신세대 혹은 X 세대란 말이 많이 쓰인다. 흔히 신세대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개성의 존중에 의한 다양성, 뚜렷한 자기 의사표현, 개발성 등이라고 이 야기한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 과학에서도 전통적 과학의 패러다임을 떠나 새롭 고 다양한 방향 모색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여기서도 이러한 신세대적 특 성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과학사가인 토마스 쿤에 의하면 과학의 경우 패러다임 의 변혁기에 수많은 가설이 생겨나서 경쟁하는 갈등 시기를 맞게 되는데. 지금


현대의 과학이 카오스와 프랙탈, 생물 물리 등 새로운 과학 이론의 등장으로 이 런 시기를 받고 있다고 한다. 자연의 질서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로 양파 껍 질을 하나씩 벗겨 나가듯 자연의 질서 구조를 이해하는 과학은 계속 진보해 왔 다. 특히 과학은 환원론적 분석 방법을 통하여 거시적 세계의 규칙적 현상이나 미시적 양자 세계의 확률적 현상의 이해에서 큰 진보를 이루었다. 춤추는 불꽃, 부서지는 파도, 하늘에 떠다니는 무수한 구름 등은 불규칙해 보이는 득하면서도 어떤 규칙성이 있다. 이러한 불규칙 운동과 그 운동이 만드는 복잡한 패턴은 주 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도 오랫동안 거의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이해에 방해가 되는 예외적이며 비정상적인 성질로 소외되어 왔다. 그러 나 최근 들어 이와 같은 자연의 불규칙한 현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한 축이 형성되고 있다. 카오스의 과학은 최근 컴퓨터의 혁명적 발전과 맞물려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학제적 연구로 물리학 및 수학뿐만 아니라 생물학, 화학, 지질학, 공학, 생태학, 생리학, 사회학, 경제학, 과학철학 등 과학 및 사회 전반에 걸쳐 근본적 인 사고의 변화와 함께 매우 폭넓은 영향력을 끼친 혁명으로까지 여겨지고 있 다. 여기에서는 분석적 방법론보다는 합성을 중요시하며 생물학적 계처럼 전체 를 단순한 부분의 합이 아니라 유기적 전체로 보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과학의 전일적인 시각은 넓게 보면 최근 많은 철학자나 과학자가 생태학적 세계관이 20 세기 말 전환기를 헤쳐 나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예상과도 부 합한다. 올해 신정 때는 포항공대 입시에 출제 위원으로 차출되어 1 주일 동안 모처에 갇혀 문제와 씨름하며 보냈다. 바빴던 일상 생활을 떠나 좋은 입시 문제를 내는 한 가지 일에 매달린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았다. 우리 나 라의 입시 제도처럼 열두 번의 제도 변경과 함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으면서 도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한 경우는 유례가 없을 것 같다. 지금과 같은 비뚤어진 입시 교육으로 새로운 사고를 가진 과학계의 다음 세대가 제대로 자라날 수 있 을까? 21 세기를 눈앞에 두고 최근 과학 기술의 국가적 중요성과 2000 년대의 과 학 기술인의 역할 증대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국가적으로도 핵융합 기 술 사업, 우주 기술, 생명공학 기술, 정보 통신 기술 등과 함께 감성 공학, 의료 공학, 환경 공학 등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연구에 막대한 투자가 시작되고 있 다. 과학과 기술은 전환기에 빠르게 변하며 이에 맞추어 과학 기술의 요람인 공 과대학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다음 세기에는 새로운 과학과 기술이 다음 세대 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10 년, 15 년 후를 내다보는 자세로 건강한 삶 속에 중심을 잃지 않고 큰 길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다음 세기를 바라보며 청운의 꿈을 안고 귀국한 지 벌써 6 년이 되었다. 그 동안 과학계에서는 비전 통적 분야를 연구하는 개발적 성향의 신세대로 통하며 정말 바쁘게 뛰었다. 해 가 지나며 점차 여러 일에 매여 더욱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위치에 올라서 게 되었고 학생 및 젊은 연구자와 선배 교수 사이에서 허리의 역할을 해야 한 다. 벌써 40 대를 저만큼 내다보기 시작한 이 시점에서, 처음의 의욕과는 달리 지 금까지의 삶에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한 것 같고 타고난 체력도 저하되는 것을 느 낀다. 가끔 친구나 동료가 돌연히 세상을 떠나거나 병으로 고생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얼마 전 스탠퍼드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받이테크 사업을 시작하 여 성공한 친구가 포항을 방문하여 사업의 네 단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 다. 대부분의 기업이 실패한다는 창업 초기의 불확실성의 단계를 지나, 살아 남 은 기업의 반 정도가 흑자 도산하다는 고속 성장기를 거치면, 비로소 나가는 돈


보다 들어오는 돈이 많아지는 성숙기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면 유명해지기 시작 하고 성공담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저기에 하고 다니기 시작한다. 하지만 곧 자 기 살을 깎아 먹기 시작하는 쇠퇴기를 맞게 되고 다시 새로운 도전에 성공하지 못하면 스러지게 된다고 했다. 연구나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 동안 소진된 에너지를 재출전하도록 6 년의 대학 근무를 하면 돌아오는 안 식년을 준비하고 잇다. 여러 서류를 갖추며 유학을 준비하던 14 년 전으로 다시 돌아간 듯했다. 미국이 아닌 곳에 가고 싶었는데 마침 처와 함계 영국의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의 초청을 받아 1 년간 있다 올 예정이다. 복잡성의 과학의 미 래는 카오스의 리듬처럼 정확히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미래 사회에서의 그 중요 성은 여러 사람이 예언한 바 있다. 카오스 분야는 학제간, 미래 지향적 분야로 21 세기에도 계속 발전해 나갈 것으로 예상되며, 카오스의 남겨진 과제를 해결하 는 데 다음 세대들의 역할이 크게 기대된다. 나도 안식년을 마치고 이들과 함 께 다음 세기를 헤쳐 나갈 힘을 길러 다시 돌아오고자 다짐해 본다.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김은희 1958 년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나 서울대 의대 간호학과를 마치고 서울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구로의원 상담실에서 일했으며, 지금은 서울대 보건대학원 석사 과정을 밟으며 노동과건강연구회 회장으로서 노동자의 건강과 보건에 힘쓰고 있다. 누구나 삶은 달걀을 먹을 때는 목이 메겠지만 86 년 겨울, 그 날도 밤샘을 해야 했다. 산업 재해 슬라이드를 만드는 우리는 모두 초심자였지만 노동자 교육에 필요한 자료를 만든다는 자부심과 정열은 대 단했다. 공장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되어 나와 산업 재해를 당한 노동자와, 그림 을 그리는 민중 화가, 함께 일하는 후배가 이 작품의 기획팀이자 제작팀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일과가 끝난 저녁부터 산재 노동자들의 사무실이나 내가 일하는 구로의원 상담실에서 작업을 하였다. 그 날도 우리는 이 ‘산재 없는 그 날까지’에 관해 늦게까지 토론과 구상을 했다. 물론 소주와 라면은 항상 우리와 함께 했다. 논의를 끝내고 각자 작업을 나누어 하는 중 출출함을 느꼈다. 자정이 훨씬 넘었으니 무얼 사 먹을 수도 없 고 해서, 마침 있던 달걀 여섯개를 모두 삶았다. 뜨거워진 달걀을 찬물에 넣었 다가 꺼내느라 손에 물을 묻힌 터에 껍질까지 벗겨서 일하는 친구들에게 줄 작 정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일손을 놓고 쳐다보는 눈길이 있었다. 먼저 그 사람에 게 껍질 벗긴 달걀을 건넸다. 순간 그 표정은....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 다. ‚손이 이렇게 되고 나서 이 맛있는 달걀도 제대로 먹지 못했어요. 우리 마누라에게조차 달걀을 벗겨 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전에는 겨울만 되면 김 장은 내 몫이었죠. 일 년에 한 번, 한꺼번에 마누라에게 살림 빚을 갚을 수 있 는 기회였어요. 담는 김에 몇 포기 더 담아서 자취하는 총각 친구들에게도 나 누어 주곤 했는데....‚ 갑자기 목이 메어 왔다. 산재를 당해 오른쪽 손가락을 모두 잃은 그이의 어려움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기에 고마워함에 더욱 몸둘 바를 몰랐다.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대학을 졸업한 때가 81 년도였으니까 정확히 15 년간 사회인으로 살아왔디. 그 15 년 중 대부분을 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으로 보냈다. 지금 은 ‘노동과건강연구회’에서 일한다. 혹시 ‘문송면’을 기억하는지?

그 소년은 충남 서산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


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동학교 진학이 어려워지자 야간 산업체 학교에 가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영등포의 온도계 제조 공장에서 일하였다. 그 소년은 한 달 만에 ‘수은 중독’에 걸려 결국 꽃다운 꿈을 피워 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 로 떠났다. 그 때가 겨우 열다섯 살. 송면이가 원인 모를 병으로 고통스러워하 며 입원해 있을 때 그 소년의 형이 ‘노동과건강연구회’의 문을 두드렸다. 원 인 모를 병이 공장에서 하던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일 하면서 사용하던 화학 물질은 무엇이었을까? 작업 환경은 어떠했는가? 이러한 것을 알아 내기 위해 일하던 공장에 대해서 확인하고, 함께 일하던 동료들한테 공장 안의 환경과 작업 조건 등을 파악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 회원인 의료인 들과 함께 상의하며 필요한 자료와 논문을 찾아 연구도 했다. 온도계 제조 과 정에는 반드시 수은이 쓰이는데 수은 중독인지 확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의학적 검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과정은 송면이를 고용한 사용주가 해야 할일이다. 공장 을 운영하는 사업주가 현장에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화학 물질이며 그것을 이용 해서 작업하는 공정과 작업 환경 등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어느 공장이나 사업주 스스로 크게 써 붙인 ‚근로자를 가족처럼‛이라는 표어가 사실이라면, 송면이와 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 즉시 수은 중독 가능성을 확인해 보고 더 악화 되기 전에 적극 치료를 해주어야 한다. 아니 그보다 먼저 송면이와 같은 직업 병이 생겨나지 않게 안전한 작업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는 이와 같이 지극히 합리적이고 당연한 이치가 전혀 통하지 않고 있다. 문제의 원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문제의 원인 제공자이자 책임자인 사 업주는 오히려 그럴 리가 없다며, 오히려 원인은 노동자의 개별적 잘못이나 체 질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대개 이러한 과정은 일단 병에 걸린 노동자가 피해자 이며 송면이의 경우처럼 노동자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므로, 공공 기관인 정부는 법을 만들어 노동자를 보호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법의 공평한 집행을 감독 해야 할 정부조차 사업주 편에 서서 노동자 보호에는 인색한 게 현실이다. 송면이는 견디기 어려운 두통에 시달렸다. 뿐만 아니라 온몸이 가려워 잠을 못 자며 긁어서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맑던 정신이 몽롱해지고 현실감이 없어 져 갔다. 그러면서 이가 하나 둘씩 빠져 버렸다. 병원에 입원한 채 직업병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동부와 회사측과 승강이를 한 지 5 개월이 지난 88 년 6 월 말, 드디어 노동부로부터 수은 중독으로 인한 직업병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동안 송면이의 형은 구로공단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것도 그만두고 우리와 함께 동생 이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을 밝히려고 애썼다. 그간의 치료비는 그 가족의 어려 운 살림살이에 너무나 벅찼다. 직업병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사업주가 그 책임 을 지고 치료와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중요한 것은 성장 일변도로 내달려온 우리 사회의 그늘인 직업병 문제를 인식하고, 사회 전체가 그것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각성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에 시달리던 송면이는 그 ‘산재요양승인서’라는 것을 받아 든 지 3 일 만에 열다섯 짧은 생애를 마치고 말았다. 산재 직업병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듯이. 생산의 주역이며 사회 발전의 원동력인 노동자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그리고 인간답게 살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건강한 사회, 민주적인 사회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송면이 병의 원인을 밝히고 아울러 직업병 발생의 사회적 원인을 찾아 그 대책을 세움으로써 또 다른 송면이의 죽음을 막기 위한 일련의 활동을 한다. 88 년 3 월에 노동과건강연구회가 만들어질 때부터 지금까지 이 일 을 하고 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 이런 일을 하는 나를, 주위에서는 좀 특별한 여자로 보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지극히 평범하다. 단 지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피하지 않고 할 뿐이다.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그저 한 걸음씩 딛고 왔을 뿐’이라는 어느 노래처럼. 이 길은 어쩌면 어렸을 적 내가 기억하는 어느 순간부터 계속되어 온 것 같다. 아직 찬 겨울 바람이 느껴지는 3 월 초였다. 국민학교 2 학년 당시 이태원에 있는 군인 아파트에 살았다. 아버지가 군인이셨기에 태어나서부터 셀 수 없이 많이 이사를 다니다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뒤부터는 그곳 군인 아파트에 정착하 였다. 수업이 끝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넓고 누런 잔디밭은 찬바람 때문에 더욱 황량하였다. 그런 잔디를 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쓸쓸한 느낌이 들어 천천 히 걷는데 누런 잔디 속에 파란 기미가 보였다. 땅에 붙어 있는 잔디 가까이에 얼굴을 대고 속을 들여다보았다. 누런 잔디 속에 파란 새싹이 작은 몸짓을 하 고 있었다. 그 옆에도 또 그 옆에도. 아, 어느새 파란 새싹의 무리와 앉아 있 었다.! 그 뒤부터 새싹과 봄의 이미지는 내 삶의 기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리고 나는 많은 인간 관계 속에서 마치 그 때 새싹을 발견했던 것처럼 하나하나 소중한 사람을 찾아내면서 살아 간다. 그렇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노동과건강연구회 설립 전부터 만난 사람들, 특히 노동자와 동료 선후배들, 그들한테서 얻은 감동과 연 대감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산업 재해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 그간 지구 온난화 현상이니 뭐니 하여 겨울이 계속 따뜻했는데, 올 겨울이라 고 새삼 공해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건만 꽤 춥다. 지구 저편 어디에선가는 수은주가 영하 30 도 아래로 급강하하고 2 미터가 넘게 눈이 와 난리라고 한다. 그런데도 백화점, 극장, 찻집 그리고 아파트는 너무나 따뜻하다. 한겨울에 건물 안은 반팔 여름 옷차림으로도 더울 정도이다. 그 많은 건물과 난방 기구, 너무 많은 우리 주위의 생활 필수픔들.... 우리는 단지 돈을 주면 이러한 것들을 구입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편리함 속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불과 10 여 년 전 우리의 어머니들이 겪으신 생활의 고단함을 생각하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그 렇다면 이렇게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유지해 주는 그 많은 물건을 만드는 과 정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지난 1960 년대부터 30 여 년 동안 우리 나라는 산업화 정책으로 엄청난 속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 왔다. ‘60 년대 초 우리의 동생 뻘 되는 어린 여성 노동자 들의 힘겨운 노동으로 방직, 섬유 업종에서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90 년 대 이후로는 살인적 무더위 속에서 작열하는 태양에 달궈진 철판 위에서, 그리 고 섭씨 2,000 도를 넘는 용광로 옆에서 철의 노동자들 손으로 이루어지는 조선, 자동차 산업이 그 성장을 이어 가고 있다. ‘산업화’, ‘경제 성장’이라는 추상 명사 속에 가려진 구체적 노동의 과정 에 대해 우리는 거의 무관하고 무관심하게 지낸다. 아니 생산과 소유 그리고 소비를 담당하는 계층이 구조적으로 단절되어 일반 국민은 생산 영역에서 일어 나는 노동 과정에 대해 모르며, 노동자들의 처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도록 분 리된다. 그러나 우리의 고도 경제 성장은 저임금 정책과 장시간 노동을 근간으 로 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 기간 중에 노동자들이 감수해야 하는 건강 침해 와 노동력 상실은 엄청나다. 지난 산업화 과정 30 여 년 동안 산업 재해로 다치 거나 병든 노동자는 270 만여 명에 이르고, 사망자는 3 만 5,000 여 명, 그리고 평 생 불구로 남게 된 신체 장애자는 36 만 명이나 된다. 세계적 관심사가 될 만한 고도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노동 인권 탄압이라는 불명예와 함께 산업 재해 왕국이라는 또 다른 불명예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산업화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이제는 ‘삶의 질’을 추구해야 한다고 누구나 외치는 요즈음도 이러한 문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으니. 내가 잊지 못하는 사람


지금 노트북 컴퓨터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책상 위에 너무도 앙증맞게 올라 앉아 손가락으로부터의 신호를 기록해 가는 이 컴퓨터를 본다. 그리고 이 하나 의 컴퓨터가 제품으로 만들어져 나에게 오기까지 수천, 수만의 미세한 공정별로 노동을 행한 손길과 그 손길의 주인공인 수천, 수만의 노동자를 생각한다. 익명 의 노동자들, 산업 역군 또는 산업 전사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천만 명에 달하는 그 익명의 노동자군에서 또렷이 떠오르는 몇몇 얼굴이 있다. 구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삶과 노동의 과정이. 91 년 이른 봄 어느 날, 바람 부는 태화강변에서 현대중공업 노동자와 마주보 고 있었다. 거대한 공업 도시 울산, 초입에 들어서면 옛 시골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밭과 소나무숲이 있는데, 곧바로 시내에 들어서면 뿌연 공기에 차량 행렬 이 가득하다. 검게 죽은 태화강은 울산에서 가장 큰 병을 앓고 있는 듯하다. 강을 건너 태화강을 오른쪽으로 하고 계속 가면 효문로터리가 있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현대 왕국이 시작된다. 현대자동차, 현대정공으로 시작하여 현대중공 업, 현대미포조선 등등. 군데군데 고층 아파트들 역시 현대아파트이다. 그리고 현대스포츠센터, 현대백화점까지. 89 년 처음 그곳 현대 계열사 노동조합 간부들 과 산업 재해 문제로 교육과 토론을 했었다. 그리고 산업 재해를 해결하기 위 해서는 당사자인 노동자 스스로 나서야겠다는 결의도 하고, 나도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생각을 키웠다. 그러고 나서 90 년 2 월부터 5 월까지 울산에 살면서 현 대자동차 공장 구석구석을 다니며 작업 공정별 유해 인자에 대해 조사하고 그 대책을 세우느라 노력했다. 노조 사상 처음으로 민주적인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노동조합은 현장의 여러 문제점을 찾아 대책을 마련하려고 내가 일하는 노동과 건강연구회에 그 사업을 의뢰하였던 것이다. 이 사업이 성사되기까지는 1 년 이상 노동조합과 지속적인 관련이 맺고 상담과 자문, 교육 등의 활동을 하였다. 우리 노동과건강연구회는 나를 비롯하여 산업 보건에 관련된 일을 하는 회원과 보건대학원의 산업 위생 전문가 그리고 부산 지역 의료인으로 조사팀을 꾸려 이 크고 중요한 사업에 들어갔다. 팀장이었던 나와 다른 후배 한 명이 거의 울산에 상주하고 다른 팀원은 일정에 맞춰 1 주일 씩 돌아가면서 합류했다. 우리 일행은 현대자동차 독신자 아파트 한 채를 작업 실로 썼다. 낮에는 공장을 돌아다니다가 밤에는 아파트에 들어와 현장 점검을 통해 얻은 자료를 정리하고 수시로 세미나와 토론을 하며 지냈다. 이 사업의 성과로 우리는 ‘노동자가 앞장서는 산업 안전 보건 - 현대자동차 공정별 유해 인자’라는 작지 않은 책자를 만들었고, 이 보고서는 이후 노동조합의 산재 예 방 활동에 작으나마 기초가 되었다. 이 사업의 성과가 현대계열사의 다른 노조에도 인정되어 다음 해인 1991 년 골 리앗 투쟁을 막 끝내고 노조 내부 사업을 활성화시키려는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에서 같은 취지의 사업을 우리에게 의뢰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나는 울산에 있었다. 이 조사 사업의 자문을 위해 울산공대 교수를 만나려고 현대중공업 노조 간부와 태화강변의 호텔 커피숍으로 갔다. 부쩍 많아진 현대자동차들로 출퇴근 시간 울산의 교통 사정은 매우 나빴다. 우 리는 서둘렀던 터라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하였다. 아직 겨울을 느끼게 하는 차가운 바람이 불고, 저녁도 일찍 찾아와 시내에 하나 둘씩 켜진 네온 사 인 불빛이 태화강에 어리고 있었다. 당시 노동조합 산업안전부장이던 조 00 씨는 나보다 한 살이 많은 내 또래이며, 나보다 약간 클 정도의 작은 키에 작은 체구 이다. 항상 풍부한 유모와 기지로 주위 사람에게 인기가 좋았고 노조에서 큰 행사를 할 때마다 유력한 사회자로 등장하곤 했다. 특히 산업 재해에 관한 사 업에는 남다른 열정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가 울산에 갈 때마다 ‘아가 씨들이 여관에서 자는 것이 마음 놓이지 않는다’고 꼭 자신의 집에서 재우곤


했다. 그이처럼 역시 자그마한 부인과 작은 아들 둘이 그이의 가족이었는데, 부 인은 다정스레 이것저것 만들어 식사를 대접하고, 방 두칸짜리 윗방을 치워 우 리를 쉬게 했다. 결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면 바로 이들이 서울에 출장올 때 맞이해 줄 내 집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때이다. ‚나는 인생을 두 번 새로 태어났어요. 10 대를 깡패, 건달로 지내다가 군에 갔다 와 결혼하면서 다시 태어났고, 입사한 지 8 년 만에 신정 연휴 때 특근하다 가 사고를 당해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나는 58 년 개띠, 그이는 57 년 닭띠이다. 전쟁을 겪은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 은 궁핍한 시기에 그이와 나는 태어나 각각 30 년 이상을 살아왔다. 내가 비교 적 안정된 집안에서 정해진 교육을 받으며 자라고 있을 무렵, 그이는 나와는 전 혀 다른 삶을 살았다. 충청도의 어려운 농가에서 큰아들로 태어난 그는 국민학 교를 졸업한 뒤 남들이 다 가는 중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줄줄이 어린 동생들 에 아버님 혼자의 노동력으로 소작을 부치기에는 너무 힘이 달렸으므로 열네 살 짜리일망정 큰아들의 노동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친구들이 가방 들고 학교에 가려 할 때 자신은 소 몰고 밭으로 나가야 했다. 그이는 이 때 가방 든 친구를 만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러기를 일 년이 지나 또 다시 힘든 봄이 왔을 때, 그이는 그 지긋지긋한 농사일로부터 영원히 떠나고 싶 었다. 서울 가서 몇 년간 돈 벌면 늦더라도 학교에 진학할 수 있겠지 하는 생 각으로 어느 저녁 그이는 집으로부터 도망나왔다. 그리고 도착한 낯선 서울, 그 가운데에서도 한창 조성되기 시작한 구로공단에서 집에 연락도 끊은 채 자립하 려고 발버둥을 쳤다. ‚안 해본 것이 없어요. 봉제 공장 시다부터 금속 마찌꼬바 잔심부름 등등. 그나마 공장에서 일할 때는 낫지요. 일이 없거나 사장에게 미움을 사 예고도 없이 쫓겨나면, 어떤 때는 며칠간 밥을 굶으며 공단을 전전하지요. 그렇게 지내 다가 결국은 다른 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 때 의 배고픔은 정말 평생 잊을 수가 없어요. 차라리 힘든 농사일은 참을 만했지 요. 그래도 장남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가 있는데 그런 상태로 집에 돌아가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구로동 주위에 모여 있는 깡패 집단에 들어가 매와 역설 속에 구걸을 하거나 넝마를 주으며 살아 가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에, 고동학교 시절 을 친구들과 천진스레 까불고 놀던 그 때에. 그렇게 10 대 후반의 대부분을 보내 후 그이는 대한민국의 보통 남자들처럼 군 대에 갔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대개는 똑같이 머리를 깎고 옷을 입는 군대 생활이 차라리 천국이었다고 한다. 군에 가면서에야 비로소 집안에 연락 이 닿았고, 부모님들은 군에 가면 사람 된다는 생각으로 기대가 컸다. 그렇게 무사히 군대를 마치고 그야말로 ‘사람이 된’ 그이는 돈을 벌 생각으로 이국 땅인 중동으로 날아갔다. 그곳 무더위와 또 다른 인권 유린 속에서 죽을 고생 다해 가며 일하던 중 지금의 부인을 소개받고 귀국 즉시 결혼하였다. 그리고 현대중공업에 입사하였다. 가정 생활이라고는 어릴 때 일과 피곤함에 쫓긴 농 사일이 대부분이었던 그이에게, 단칸방일방정 젊은 아가씨와 함께 가정을 꾸려 생활하는 것은 이전에는 맛보지 못한 꿈결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그이는 비로소 인간으로 새로 태어났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런 행복도 잠시. 87 년 신정 연휴였다. 당시에는 5 공 때부터 이중 과세를 이유 삼아 우리 민족 고유의 설날을 없애고, 대신 신정 연휴를 4-5 일간 길게 하던 시절이었다. 대부 분의 사람은 연휴를 맞이하여 고향을 찾는다, 친지와 함께 지낸다 야단인데 일 부지만 꽤 많은 노동자가 특근 수당에 특별 대우를 해준다는 회사측의 강요 아 닌 강요에 가장으로서의 모든 계획을 제치고 특근을 한다. 당시만 해도 대기업 임에도 지금보다 훨씬 월급이 낮아서, 그나마 잔업이나 특근이 없다면 생계비를 제대로 보충하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아직도 중소규모 사업장의 노동자나 여


성 노동자는 같은 사정이지만. 그이는 넷이서 작업하는 업무를 혼자서 맡아 주 야간으로 일했다. 마지막 닷새째에는 아예 퇴근을 하지 않고 철야를 한 뒤에 남들이 연휴가 끝나 새해 첫 출근한 것처럼 6 일째를 맞아 작업에 들어갔다. 계속된 철야에 30 시간 지속해서 작업을 하던 그이는 몹시 지쳐있었다. 순간 오래된 장갑 끄트머리가 철판칩에 걸리면서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장갑 낀 왼 손과 팔까지 기계에 빨려 들어갔다. ‚으악!‛ 그이는 철판이 아니다, 그이는 사람이었다! 비명은 삼십여년 간 살아온 그 어떠한 역경의 순간보다도 가장 극 명하게 자신이 철판과도 같이 취급되어 왔다는 것, 단지 기계의 작업 대상에 지 나지 않았음을 느낀 순간 인간성이 무너져 내리는 데 대항한 절규였으며, 동시 에 자신은 철판이나 기계나 제품과는 전혀 다른, 구체적인 역사와 인간 관계를 갖고 살아온 인간임을 온몸으로 자각하는 그러한 깨달음의 포효였다! 88 년 1 월 6 일 오후 4 시경이었다. 왼쪽 팔 전체가 철판을 뚫는 드릴링머신에 해체되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2 년 20 일 동안 이 해체된 팔을 인간의 팔로 복원하기 위해 끝도 없는 수술과 싸 워 냈다. 결국 장애 등급 9 급의 판정을 받고 뼛속에는 몇 개의 철심을 박은 채 팔로서의 기능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산업 재해를 당한 뒤부터 2 년 여 간 회사측과 노동부로부터 받은 부당함을 통해 그이는 비로서 노동자로서 새 로운 자각을 하게 되었다. 그이가 두번째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그 뒤 회사에 복귀한 그이는 마침 민주 노조 운동이 고양되던 노동조합의 산 업안전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노동과건강연구회에 연락하고 만 나며 함께 일해 왔다. 그이는 하루에도 여러 명씩 일하다가 다치거나 아픈 노 동자의 산재 보상과 치료를 위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우리와 함께 이러한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조직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이와 그이가 겪은 일은 나에게 깊이 남아, 나를 일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튼튼히 묶고 있다. 나의 성장 나는 77 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다. 서울대 간호학과. 관악 캠퍼스로 옮긴 지 1 년밖에 되지 않아 삭막한 잔디에 꽂아 놓은 듯한 작은 나무, 그리고 대학의 역 사라고는 전혀 없이 생경해 보이는 건물들, 그 사이로 차가운 바람만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한마디로 춥고 쓸쓸한 입학 초기라고 기억된다. 그 넓은 교정에 카드 놀이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러 명이 모여 있지 못하던 시절. 이해 할 수 있는가? 교내에 소위 짭새라고 불리는 사복 경찰이 상주하고 있다가 수 상쩍은 기미만 보이면 즉시 달려오던 시절, 유신말기. 특별히 사회 의식이 있지 는 않았는데, 고교 선배 언니가 추천하는 학회에 가입하였다. ‘대학문화연구회 ’라는 곳이었다. 당시 각 단과 대학별로 있던 학회는 얼어붙어 있던 유신 시 절 학생 운동의 중요한 구심점이었다. 그런데 내가 가입한 학회는 연합 서클로 일반적인 단대 학회보다는 훨씬 온건하였다. 학회 멈버가 소수 정예화되는 것 에 대해 학생 대중의 참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배들이 창립한 학회로 개량적 이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나는 5 기 신입생이 되었다. 대학문화연 구회의 활동은 사실 1 년밖에 되지 않으나 나에게 끼친 영향은 아주 컸다. 당시 읽은, 아니 읽었다기보다는 세미나 교재로 E.H.Carr 의 ‘역사란 무엇인가?’, 프 레리의 ‘Pedagogy of the Oppressed’, 이영희 교수의 ‘전환 시대의 논리’, 그 외 철학과 정치경제학 교재가 있었는데 제대로 읽지를 못했다. 그리고 여름, 겨울의 농촌 활동을 통해 1 년 동안 나는 너무나 많은 사회 문제를 한꺼번에 채 소화도 시키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당시 세미나 때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나의 사고 체계로 나의 언어로 소화하지 못한 발제문을 읽어 내 느라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고, 다른 친구가 발제할 때는 한숨 놓이지만 토론에 거의 참여하지 못하던 내모습. 재수한 친구들 외에 대개의 신입생들의 모습은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미나을 지도하는 선배들만 열심히 이야기


하여 더욱 나를 주눅들게 한 시간들. 그러한 모습은 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 는 국민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대개 자신만만하고 적극적이며 발표 력 왕성한 학생이었다. 오빠들의 영향으로 중학교 입학 때부터 기타도 배워 소 풍을 가거나 학예회를 할 때는 빠짐없이 기타 반주로 노래를 하여 교내에서 선 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던 내가 사회과학적 문제 인식, 정치경제학의 이해라는 부분에서는 그만 처음부터 기가 팍 죽어 버렸다. 당시 선배 중 한 명 이 최근 언젠가 내게 ‚김은희 많-이 컸다. 예전의 은희로는 상상이 되지 않는 데!‛할 정도이니. 그런데도 많은 친구들, 선배들과 인간적으로 친해지면서 아 쉬운 1 학년의 관악 캠퍼스 시절을 마쳤다. 우리 학과는 1 학년 교양학부를 끝내면 연건동의 의대 캠퍼스에서 전공학과를 보낸다. 78 년 이미 복개 공사가 끝난 대학 천 옆의 몇몇 다방에서 아직 남아 있는 문리대의 옛 분위기를 느끼며 3 년을 지냈다. 이 때부터는 의대의 특성을 살린 주말 진료 팀에 가입해 열심히 활동을 했다. ‘송촌의료봉사회’라는 곳 인데 매주 주말을 서울 변두리의 철거민촌으로 가서 가장 방문, 의료 예방 교육 활 동등을 하고 방학 때는 강원도 오지의 무의촌에 들어가 1 주일씩 농촌 의료 봉사 활동을 했다. 우리 송촌은 단순한 의료 봉사 차원을 넘어 주민 스스로 건 강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해 나가도록 함께 노력하는, ‘지역사회의학’의 이념 을 바탕으로 지역 주민이나 농민들과의 다양한 접촉과 교류를 가졌다. 낮에는 진료를 하고 밤에는 청년회, 장년회, 부녀회 등 분야별로 모여 토론과 놀이를 하 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돌이켜 생각하면 세상 물정도 모르고 고생이라고는 거의 안 하고 지낸 내가, 엄연한 현실을 살아 가고 있는 생활인인 그 어른들에 게 무슨 작용을 했겠는가 부끄러울 지경이지만, 아무튼 이후 의료인으로 살아갈 우리에게 그 경험은 소중했고, 따라서 그 때 만난 많은 분께 정말 감사한 마음 뿐이다. 의대 시절 의료 활동은 1 학년 때의 학습 토론과는 다르게 실천적인 프 로그램을 갖고 접근하였으므로 정말 자발적이고 기꺼이 참여할 수 있었다. 그 리고 이 경험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산재 추방 활동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79 년 박 대통령 사망과 80 년, 4 학년 때 광주항쟁을 겪었다. 80 년 ‘서울의 봄 ’ 은 정말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게 했다. 거의 매일 학교별로 지역별로 토론과 집회에 바빴다. 그리고 소위 ‘서울역 회군’이후 닥친 광주사태에 우리는 참담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어떤 순간들, 그 때 적확 한 판단과 행동 방침이 정해지지 않으면 다시는 돌이키지 못하는 방향으로 역사 는 반전한다.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81 년 졸업을 맞이하였다. 간호학과 졸업생의 일반적 경로대로 나는 서울대학병원에 입사하였다. 흉부외과 병동에서 신참 간호사 시절을 보내면서 나름대로 알차고 의미있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였다. 환자와도 동료와도 두루두 루 좋은 관계를 가지며 병원 생활을 성실히 하는 것 자체에 어떠한 회의로 생길 여지가 없었다. 설벌했던 5 공하에서 전사회에 중격을 준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것이 기폭제가 되어 대학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그 러나 사회인이 된 나는 시국과 무관하게 2 년여를 지냈다. 그러던 ‘82 년 가을, 대학 3 학년이던 동생이 학내 운동과 연관되어 구속되었다.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했던 10 월 말경, 새벽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형사 3 명 이 우리 집을 온통 벌집 들쑤시듯 뒤지고는 몇 가지 동생의 일본어판 책과 메모 를 탈취하고 동생까지 납치하듯 데리고 갔다. 그 뒤 나와 어머니는 경찰서 유 치장과 서울구치소(당시에는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었다.)로 다니며 동생의 뒷일 을 처리해 주었다. 상당히 고도의 비상 수단으로 동생과는 은밀히 교통하며 동


생이 미처 처리하지 못하거나 긴급히 취해야 할 동료들의 대책을 연결해 도와 주었다. 그러느라고 동생의 선후배들을 만나며 다시금 2 년여 간 안주해 살아 온 자신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 열정적이었던 학교 생활 은 결국 사회인이 되어 올바른 역할을 해 나가기 위한 준비 기간이 아니었던가! 그 때야말로 나의 사회적 역할을 인식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상황에 임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며 병원 낮근무가 끝나면 곧바로 서울 구치소로 달려가 바깥의 모든 소식에 목말라 할 동생을 만나 이것저것 전해 주었다. 5 분간의 면회 동안 신문조차 보지 못한 동생을 위해 신문의 주요 기사를 빠르게 요령껏 전해 주려 애썼다. 시사적인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면회 규정을 위반했다고 면회가 중지된 적도 많았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어머니들과 재 소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구치소측에 항의하고 요구하며 싸움도 하고, 다른 시국 사범들의 재판에도 함께 참여하며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면서 그렇게 자식 들과 사회 문제를 이해해 갔다. 동생은 추운 겨울을 지난 8 개월을 살고 출감하 였다. 동생의 구속을 계기로 진행된 내 고민은 다시 구체화하였다. 80 년 광주항쟁 을 겪은 후 사회 운동은 큰 변화를 맞았다. 기층 민중 중심의 변혁 운동에 대 한 많은 논의가 진행되었다. 소위 ‘팜’이라고 지칭된 많은 문건이 열악한 복 사본 상태로 돌아다녔다. 친구와 함께 시간 나는 대로 후배들의 자취집에 가서 밤을 새고 그 ‘팝’을 읽었다. 당시만 해도 보안상 복사조차 자유로이 할 수 없을 때였으므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직 어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로 지내고 있을 무렵, 중요한 변화의 계기가 다가왔다. 홀로서기 동생 출감을 축하하러 선후배가 모이는 자리에서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당 시 인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두 해 선배였는데, 당시 상황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너무나 원칙적이고 경직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삶의 원칙을 다시 세우고 자 하던 시기였으므로 그러한 그이의 모습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그이는 정 치경제학 원서와 다양한 문건을 잔뜩 싸들고 와서 나에게 ‘학습’을 하라고 하 며 도와 주겠다고 했다. 1 학년 때 주눅든 기억이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 만,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바로 그 무렵 하는 한 후배로 부터 함께 일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천과 영등포 지역에서 노동자 주말 진료 활동에 참여하자는 것이었다. 학교 시절 빈민 지역 의료 활동을 한 사람 들이 사회에 진출한 뒤에도 자신의 뜻을 실천해 나가기 위해 직업은 별도로 있 더라도 주말을 이용하여 빈민 지역이나 노동자 거주 지역에 나가 학생인 후배들 과 함께 활동을 하고 있었다. 특히 광주민주항쟁을 겪은 후 사회 변혁의 필요 성과 노동 계급의 역할에 대한 열망이 강한 때였으므로 노동자들이 주로 오는 교회나 야학 등에서 주말 진료 활동이 생겨나고 있었다. 전태일 열사가 죽으므 로 항거한 청계천 평화시장 근처의 노동상담소, 영등포 산업선교회, 인천 일꾼교 회 등이 대표적인 곳이었다. 서울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삼교대 근무를 하고 있던 나는 가볍지 않은 학습과 노동자 진료 활동을 병행하는 것이 시간상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람들을 만나고 구체적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우연찮게, 아 니 결정적으로 이러한 고민을 정리하는 계기가 온 것이다. 왜냐 하면 이 때의 결정은 이후 삶의 방향에 아주 중요했으며, 그 때 결정한 바대로 같은 길을 가 고 있고 이후로도 계속 이 일을 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선배와 만난 어느 날이었다.

그이는 자신과 일하는 팀 구성원들이 나와


교제하는 것을 허락해야만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운동가의 부인이 되 기에 적합한지 확인하기 위해 사상성이나 세계관 등을 테스트해 보겠다는 것이 었다. 그 때의 어이없다 못해 경악스러움이란! 그이는 나를 잘 지도해서 키우 고 자신의 한 조직원으로 일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순간 나를 억누르고 있던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나는 누구의 지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 능력에 맞는 일을 기꺼이 하고 싶은 것이다. 또 연애나 결혼을 원하 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학 시절 이후 고민하고 준비해 온 것을 사회에서 실현 해 보고 싶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준비하고 지도받고 키워지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문제를 자각하기 시작한 주체적 자아 로 이 세계와 부딪치며 면화시키며 살아 가기를 온몸으로 원하였던 것이다. 건강한 사회, 건강한 노동자를 위해 나는 그 선배와의 만남을 끝냄과 동시에 인천 지역의 노동자 진료팀에 참여하 기로 했다. 그 후 한참 동안 나는 우리 집이 있던 잠실과 병원이 있는 혜화동, 그리고 활동의 근거지인 동인천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들 중 대부분 은 지금도 나와 함께 산재 추방 활동을 하거나 병원 노동조합 운동, 보건 의료 운동의 중요한 역할을한다. 일하면서 생기는 고민이나 어려움, 기쁨도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는 소중한 동료로서 늘 가까이에 있다. 1 주일에 2, 3 일씩 투자해서 지역 의료 활동을 하던 중 우리는 새로운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병원을 만들어 노동자가 늘 찾아올 수 있게 하고, 그곳 에서 직업적으로 일을 하는 의료팀 체계를 갖추자는 것이었다. 영등포 산업선 교회의 진료팀과 인천에서 일하던 나와 후배가 참여하여 우리 나라의 산업 재해 실태와 원인 등에 관해 세미나도 하면서 사업 계획을 구체화해 나갔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86 년 3 월 구로공단이 있는 구도동에 구로의원이라는 노동 자 병원을 만들었다. 우리의 뜻을 지지하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얻어 모금하여 작은 의원을 세운 것이다. 노동자들이 퇴근하고 나서도 방문할 수 있도록 일요 일도 없이 밤 10 시까지 진료를 하였다. 그리고 노동자가 진료를 받기 전에 상 담실에서는 개인 상담 카드를 작성해서 직업, 작업 환경, 평상시 건강 문제 등을 기록했다. 잠자는 시간과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공 장에서 일하며 보내게 되므로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는 일차적으로 일하는 곳에 서 비롯한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치료는 단순하게 증상을 완화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작업 환경을 개선하고 노동 조건을 바꾸어야 근본적인 치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병원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실제 본업은 근무 시간 외에 하는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가, 드디어 서울대학병원을 그만두고 우리가 만든 구로의 원의 상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직업과 관심사를 일치시키는 것, 너무나 가 슴 벅차게 바라던 바였다. 그러니까 대학 졸업 이후 5 년간을 모색하다가 86 년 에야 비로소 나는 전업 산재 추방 활동가가 된 것이다. 구로의원에서 의사, 간호사, 사회 사업가 등과 팀을 이루어 직업병 상담, 조사 연구 사업 등을 하면서 대학에서도 배우지 못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시 행 착오도 많았지만. 이렇게 사업을 진행하다가 우리 팀은 활동의 범위를 확대 하고 더 많은 산업 보건 의료인과 노동자를 포괄 할 수 있는 활동 구조가 필요 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87 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겪으면서, 전문적 으로 노동자의 산재 문제를 전담하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논의와 준비를 거듭한 끝에 우리는 88 년 3 월 24 일 ‘노동과건강연구회 ’를 설립하였고, 나는 활동의 장을 자연스레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결혼을 원하기는 하는 겁니까? 나는 서른여덟 살 노처녀다. 어느새 어마어마하게 나이를 먹었다. 며칠 전 우 리 노동과건강연구는 노동조합에서 산재 예방 업무를 맡고 있는 간부를 모아 교 육했다. 2 박 3 일의 빡빡한 일정인지라, 저녁마다 사귐과 토론의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첫날 밤 대화의 시간, 내 소개가 끝났을 때 어느 간부가 물었다. ‚김 대표는 결혼을 원하기는 하는 겁니까?‛ 드디어 독신주의 선언을 강요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대답은 이렇게 나왔다. ‚누구나 진정으로 원하면 반 드시 이룬다는 말이 무명씨 어록에 있습니다. 저는 돌이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결혼하기를 원했다면 나는 이미 결혼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결혼하지 않은 것을 보면, 나는 결혼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오래 살아온 만큼 몇몇 아름다운 사람과 이별의 기억이 있다. 너무나 아팠던 이별도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러 한 기억은 나와 교통했던 인간 관계의 하나로 녹아들어, 다른 만남처럼 살아 가 는 방법과 태도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사실 내가 15 년간을 거의 일정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결혼하 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경제적으로 아직 독립하지 못하고 있 다. 10 여 년 간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활동비를 받으며 일하고 있으 니 어쩔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부담해야 할 최소한의 가사 노동 조차 면제받고 있다. 언제든지 일하거나 약속을 하거나 출장을 갈 수 있다. 아 직도 부모님의 슬하에서 전폭적인 도움과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생활인으로서는 거의 빵점에 가까운 나는, 나의 일까지도 이해해 주시는 부모님과 가족이 너무나 고맙다. 이런 전적인 지원을 받으면서도 그간 일해 온 것만큼이라도 못 했다면, 부모님 앞에, 그리고 오늘도 작업 현상에서 일하다가 다치는 많은 노동자 앞에 부끄러울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결혼과는 멀어지지만, 일이나 세상과는 더욱 가까워진다. 노동 자 건강 문제에 관해 전업적으로 일을 한 지 꼭 10 년이 되었다. 뒤늦게 보건대 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건강한 사회는 건강한 노동자가 만든다는 믿음 때 문에, 그리고 노동자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산업 보건 정책이 만들어져야 하고 그것을 나의 주요 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준비해야겠다. 마흔 살을 앞둔 개인으로서 그리고 창립 10 주년을 앞둔, 분신과도 같은 노동과건강연구회를 위하여. 독립 프로적션의 새 이정표를 꿈꾸며 김태영 1957 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전 방송연예과와 영화과를 졸업하고 MBC TV 제작 1 부 무대감독으로 출발하여 KBS 의 ‘안전운전 365 일’, ‘베 트남 전쟁 그후 17 년’. ‘카리브해의 고도 쿠바’, ‘불타는 제 3 영화’등 수많은 다큐멘터리를 연출 해 왔으며, 92 년 인디컴을 창업하여 TV 프로덕션 감독으로 많은 작품을 내놓고 있다. 부모 유감 나의 어머니.... 자라면서 줄곧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친척들의 술자리에서만 떠올려지는 이 였다. 1, 4 후퇴 때 본부인을 남겨 두고 피난 내려온 아버지는 공병대위 시절 어머니를 만났고 나를 낳았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호적에 전혀 올라 있질 않다. 그 대신 첫째 계모가 된 이가 나의 어머니로 이름이 올라 있다. 친어머


니의 부재는 유년에 대한 기억 부재와 일치한다. 간간이 나의 이미지에 남아 있는 유년의 영상은 고통스런 파편의 ‘씬’(Scene)들이었다. 일곱 살쯤 되었을까. 최초로 집을 떠난 기억이 있다. 당시 용산의 도원동 큰 집에는 친할머니가 기거하고 계셨고 나는 몇백 미터 떨어진 첫째 계모의 집에서 갓 태어난 여동생과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날의 상황이 별로 안 좋았던 것 같 다. 겨울 저녁 발을 씻던 나는 세숫대야를 엎어 버리고 냅다 뛰기 시작했고 나 의 첫째 계모는 빨랫방망이를 들고 쫓아 나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60 년대 초의 골목 풍경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 날 저녁, 나는 영업이 끝난 고구마 장수의 리어카 속에서 온기가 남은 고 구마 드럼통을 껴안고 일곱 살의 추운 겨울 밤을 보냈다. 어느 때인가 큰집 옆으로 흐르는 개천의 큰 하수구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깨끗한 하수구로 기억된다. 100 미터 이상 들어가서 총알 껍질도 줍고 동전이나 큰 쇠망치도 주워 갖고 나와서 고물 장수한테 넘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집에 계시던 친할머니의 쌈짓돈을 얻어 홀로 전차를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넜다. 영등포의 어느 방에서 중년의 여인이 나를 붙잡고 쉴새없 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때 그 장면이 내가 친어머니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장면이자 마지막 장면이다. 일곱 살짜리가 어떻게 혼자서 그 먼 곳까지 주소만 갖고 찾아갈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의 어머니는 그 후 다시 뵐 수 없었다. 날마다 계모에게서 ‘눈칫밥’을 먹고 있었지만 그 이후의 ‘눈칫밥’에는 더 많은 눈물이 섞이게 되었다. 큰집에서 작은집으로, 작은집에서 친척집이라 불리는 집으로, 다시 둘째 계모 와 함께, 훌쩍 보따리를 싼 둘째 계모에 의해 천덕꾸러기로 추락하여 다시 작은 집으로.... 폐병이 심한 작은 어머니께서 낳은 자식은 모두 네 명. 그 속에 섞여 살면서 계모들이 몇 번 바뀔 때마다 기거하는 집은 바뀌어야 했 고, 결국 작은어머니가 폐병으로 돌아가신 후엔 대체로 작은집에 눌러앉게 되었 다. 네 명의 사촌과 함께 커 가는 작은집에서 보내야 했던 청소년기의 우울함. 심하게 맞는 바람에 문지방으로 넘어져 외쪽 귀가 찢겨 흉터도 남았고, 어디 에서 내가 옮겨 온 피부병이 사촌들에게 전염되자 화가 난 작은어버지가 던진 놋그릇을 피하는 죽을 고비도 넘겼다(그 순간 뒤돌아 도망치는데 안방 나무 문 이 놋그릇에 패어 구멍이 크게 뚤렸다.) 그 해 여름 내내 비가 많이 오고 태풍도 많이 불던 시절, 작은집 옥상 위에 최초로 나만의 집을 지었다. 군용 텐트 아래 3 단 스펀지 요를 깔고 만든 나의 오막살이집. 아무에게도 구 속받지 않고 혼자만 사유할 수 있는 공간. 그것은 기쁨이었다. 밤새 태풍에 오막살이가 형태를 잃어 가고 온몸이 비에 흠뻑 젖어도, 자유였다. 젖은 책, 젖은 가방, 젖은 교련복으로 그렇게 두 달을 보내면서 나는 나의 죄를 ‘깡그리’ 용서해 달라고 빌었고 또 빌었다. 옥상 위에서 태풍을 온몸으로 막는 동안 내 머리는 성숙(?)해졌기에 고등학교 를 자퇴하고 드디어 인생 전선에 뛰어들었다. 신분의 변화도 가졌다. 까까머리 학생에서 점원으로. 종로 5 가 한일극장 뒤의 ‘제일기료상회’란 조그만 점포에서 자고 먹고 일하 게 되었다. 섬유 기계 부속품을 공장에 배달하고, 헌기계들은 열심히 닦아 페인 트를 칠해 새로 진열하였다. 기계에서 원단이 짜여 나오듯 나의 삶도 인생 전 선에 철조망을 깔아 나가듯 다양하게 짜여 나갔다. 첫 월급은 4,000 원이었다. 제일기료상회에는 박 사장이란 분과 또 한 분의 사 장이 있었는데 1 만 5,000 원까지 월급을 계속 올려주며 공부를 계속하라고 권했


다. 퇴직금까지 쥐어 주며 꼭 검정고시에 합격하라는 간절한 당부를 뒤로 한 채 나는 세상을 더 넓게 보기 위해 무전여행을 떠났다. 설악산에서 동해안 줄기를 따라 내려오며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1977 년 당시는 유행의 막차였던 무전여행이었지만 그 때까지 살아온 작은 세계 를 떠나 내 나라 내 강토의 다양한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기에 15 개월간 모다 둔 돈이 다 날아갔어도 아깝지가 않았다. 40 일간의 여정이 끝나고 나는 ‘숙히 엄마’라는 마지막 계모가 운영하는 다 방에서 숙식을 시작했다. 낮에는 학원에 다니고 밤에는 그 다방에서 DJ 를 하며. 이 때의 계모는 데리고 들어온 딸과 함께 10 년 가까이 버텼고, 그 덕택에 종 로 2 가의 양지다방과 삼영다방, 종로 1 가의 영남다방까지 세 개를 운영하게 되 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방 명의를 내 앞으로 하나만 하자고 아버지께 가끔 말 씀드렸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고 우려했던 일은 터지고 말았다. 챙길 것 다 챙긴 계모는 아버지에게서 더 이상 빼낼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돌아섰다. 아버지는 상당히 돈을 많이 벌었지만 돈 관리를 직접 하지 않았다. 한국의 알 만한 토목 공사를 도맡아 하면서 철저한 품질 관리와 정직한 공사로 당시의 건설 업계에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존경받던 유명한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와 나는 알거지로 남게 되었다. 나는 그 동안 쌓였던 설움과 울분이 한꺼번에 터 져 대낮에 칼을 들고 계모를 쫓아갔다. 하지만 끝내 칼을 휘두르지는 못했고, 그 순간 계모는 잽싸게 도망치고 나는 경찰에 붙잡혀 동네 파출소에 끌려 갔다. ‚학교도 짤리고 작업도 없는, 몹쓸 깡패 같은 놈이에요‛ ‚얘 아버지가 돈 갖다 준게 뭐 있다고? 몇 년 동안 한 푼도 안갖다 줬고 남 남이에요‛ 어버지는 첫째 계모(내 어머니로 등록된) 이후 거쳐 간 여러 계모들을 절대로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토목 공사를 하니 명절 때만 서울에 올라왔기 때문에 사실혼도 인정되지 않았다. 내연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6 개월 이상 관계가 없다 면 ‘남남’이라는 법에 의해 아버지와 계모는 남이 되었고 나는 ‘칼 든 깡패 ’로 인정되어 꼼짝없이 유치장에서 며칠을 보냈다. 10 년 이상 우리 집을 털어 먹은 도둑에 의해 거꾸로 유치장에 갇혔으니,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고, 아버 지 왜 나를 버리셨나요?’ 처음으로 느낀 ‘부모 유감’이었다.

무전 유감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궁핍과 빈곤의 시기를 살아온 이들에겐 역설적인 얘기다. 빈대떡이란 비싼 녹두에 돼지고기도 넣어야 하니 말이다. 더욱이 주식이 아닐진대 한 끼를 때우 기 힘든 가정에서는 이런 노래가 나올 리도 없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신문의 사회면에 기사도 돈, 돈, 돈, 돈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대부분이다. 돈 때문에 살인하고 심지어는 낳아 준 부모도 버리거나 죽이는, 그런 시대를 상징하는 ‘ 무전 유죄, 유전 무죄’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돈 없음에 한탄하며 목숨을 끊는 이들도 많다. 나도 ‘돈’에 유감이 많은 축에 속한다. 돈 잘 벌던 아버지가 남겨 준 유산도 전혀 없었다. 1978 년 졸지에 알거지가 된 아버지는 얼마 후 유원건설 이사로 있다가 2 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현장 에서 일했다. 내 젊은 날의 가장 큰 고통은 잠잘 데가 없다는 것과 배가 고픈 것이었다. 검정 고시에 합격해 놓은 나는 홀로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해야 했다. 우선 먹 고 자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숙식이 해결되는 다방의 DJ 보조 자리를 얻었다. 살던 집이 유명한 양지음악다방이었기에 어깨 너머로 들은 팝송을 밑천으로 을


지로 6 가에 있던 ‘대광’음악 다방에 비집고 들었다. 1 층은 클래식, 2 층은 팝송을 틀었는데 동네의 새깨 깡패와 양아치 등 온갖 밑 바닥 인생들이 오글오글거리는 곳이었다. 몇 개월간의 보조 생활을 청산하고 숙대 앞의 ‘Life' 음악다방에 정식 DJ 자 리를 얻었다. 좋은 곳이었지만 잠잘 곳이 없었다. 저녁에 일을 끝나고 밤거리 에서 시간을 죽이고는 11 시쯤 되면 그 때부터 대광다방의 길 건너편에서 철제 셔터가 내려지기만 기다렸다. 주인이 퇴근하고 나서 셔터를 내리면 나는 한 10 분쯤 더 있다가 거리를 가로질 러 차가운 셔터를 두드렸다. ‚문좀 열어 줘.‛ 마음씨 착한 욕쟁이 주방 아줌마의 묵인하에 아가씨들 틈에 끼여 몸을 누이고 아침이면 주인이 나오기 전에 다시 몸을 일으켜야 했다. 비가 오는 날이나 바 람 부는 날이면 왜 그리 춥던지. 밤마다 셔터 내려지기를 기다리던 거리의 밤. 아가씨들 생일 파티라도 있는 날이면 꼼짝없이 거리에 홀로 서서 12 시를 넘겨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일찍 나온 주인에게 들켜 그나마 야간 기숙이 금 지되었고 나는 다시 밤마다 친구 집을 전전해야 했다. 또다시 아침이면 그 날 잘 집을 물색하기 위해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하룻밤만 재워 주라.‛ 어느 부모가 나 같은 친구를 좋아하겠는가? 대학에도 안 가고 부모 밑에 있 지도 않으며 음악실에 나간다는 친구를. 그 때 내 친구들은 삼수생 한 명을 빼 곤 다 대학생이었고 대체로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나로 인해 나쁜 물(?)이 들까 봐 나를 멀리하라고 했다. 라이프 다방은 방학 동안에는 문을 닫기 때문에 생계 유지를 위해 방학 때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대학의 방학은 너무 길었던 것 같다. 여자 스타 킹과 화장품, 옷가지 등을 싸 들고 아가씨나 마담들에게 팔기 위해 이 다방 저 다방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대체로 수금은 월급날 해야 했는데 하얀 색 투피스 정장 값을 떼어 먹고 도망간 마담 때문에 그것도 얼마 못 가서 그만 두어야 했 다. 개학해서 다시 라이프에 나가게 되었고, 방을 얻기 위해 저녁에는 포장마차를 끌기로 했다. 새벽마다 중앙시장에 가서 참새나 메추리, 곰장어 등을 사는 새로 운 순례가 시작되었다. 포장마차를 개업한 것이다. 먹고 자는 인간의 기본 조 건을 해결하기 위해 새벽마다 왕십리 순례요, 아침부터 낮까지는 다방에서 빈대 떡(?) 장사요, 밤에는 육, 해, 공의 요리사가 되었다. 숙대 앞 골목에 개업해서 숙대생들의 애정 어린(?) 도움을 받던 포장마차였지 만 단속이 심했고 자주 돈을 요구해 왔다. 하루는 단속 날에 맞춰서 일부러 술 을 잔뜩 먹고는 단속 방범들에 의해 청파동 파출소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닭똥집부터 버무려진 온갖 안주를 파출소 소장 앞에 토해 내자 갖은 욕설과 함께 쫓겨났고 그 길로 포장마차도 끝이었다. 밤에는 계속 DJ 로 일을 하며 레코드 가게 점원, 대학생, MBC-TV 의 스튜디오 FD(무대 감독), 독립 영화 감독 등 삶의 세계가 파노라마처럼 점멸되길 10 년, 서 울의 골목을 걷던 20 대 청춘은 그렇게 돈 없이 흘러간 인생이었다. 1989 년 가을, 나는 다시 잠잘 곳이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내 전 인생을 걸고 1988 년 한 해 동안 제작한 ‘황무지’란 16mm 장편 영화(90 분)가 공동 제작사 로부터의 필름 탈취, 정부의 압수와 최종적인 상영 금지 조치로 막을 올리지도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영화 제작비와 개봉을 위한 홍보물 인쇄비 등 5,000 만 원 이상의 빚을 졌기에 그 때까지 동료와 함께 하던 ‘스태프’란 사무실도 문을 닫아야 했고 월세방에 서도 보증금을 다 까먹은 채 쫓겨나야 했다. 그리곤 대학 친구이자 후배인 조 진 감독 집에서 서른둘에서 서른세 살까지의 내 인생을 꽉 채워야 했다. 영등


포 대림시장 골목 안에 있던 그의 집에서 대학 다니는 여동생 눈치도 보며 부모 님이나 친척이 시골에서 올라올 때마다 또다시 잠잘 곳을 물색하면서 1 년 4 개월 을 ‘무전 취식’했다. 밤마다 친구 집의 꽃무늬 천장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 야 하나? 왜 나는 꼭 일이 쉽게 풀리지 않고 꼬이는 것일까? 돈이 웬수다.’등 등, 가장 좋을 시절에 친구 집에서 존재의 이유와 머피의 법칙을 조금 일찍 깨 달으며 인생 유전을 되뇌야 했다. 바짝바짝 타들어 가던 무전의 고통, 그리고 불면의 나날들. 그 때 이후 ‘무전 유감’이 끝날 줄 알았는데 인생은 나의 의지대로 풀리지 않았다. 인디컴이란 회사를 정식으로 설립한 1993 년부터 다시 ‘무전 유감’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아침마다 전화 다이얼을 수없이 돌려 댔고 친구와 후배, 여자 친구와 아는 분의 전화번호를 찾아 하루에도 몇번씩 수첩을 뒤적거려야 했 다. 회사 책임자가 된 지 3 년 만에 흰머리가 잔뜩 돋았고, 머릿속은 돈, 돈, 돈으 로 뒤덮였다. ‚친구간에 돈 거래하면 의리 상한다.‛ 돈 얘기로 관계가 소원해진 몇몇 친구도 있고, 아예 돈 얘기는 입 밖에 내지 말라는 이들도 있다. ‚이 개새끼, 친척이고 뭐고 다 필요없어!‛라는 친척도 있고, ‚야, 이 새끼 야. 왜 돈 안 주는 거야. 맛 좀 볼래?‛하며 150 킬로 넘는 거구를 데리고 해결사 역할로 온 듯한 자의 공포 분위기도 겪어야 했다. ‚아니, 보증 보험이란 곳은 보증을 세울 수 없고, 돈이 없는 이들을 위해 만 든 거지, 여기서도 보증인이 필요하면 이게 무슨 보증 보험이요?‛ 이런 싸움도 했다. 회사 책임자가 된 지 3 년 만에 흰 머리가 잔뜩 돋았고, 머릿속엔 돈, 돈, 돈으 로 뒤덮였다. ‚여기는 한국 통신. 000 의 0000 번, 위의 전화는 0 월 0 일자로...‛ 전화가 생명인 방송 프로덕션에 며칠씩 전화가 끊겼고, 방송사로 법원 통지서 가 몇 번씩 날아들었으며, ‘돈이 없으면 문을 닫고 하지를 말아야지 왜 남까지 피해 주느냐’는 비난과 함께 경영자로서 책임지라는 힐책을 들어야 했다. 인디컴을 맡고부턴 예전에 전혀 보이지 않던 신문의 중소기업부도 소식 그리 고 ‚목매 자살‛등의 기사도 자주 보였다. 20 년간 새겨 온 ‘무전 유감’이었 다. 학력유감 ‚시험 볼 자격도 없어요.‛ 닭똥 같은 눈물에 돼지 껍데기를 뒤집으며 연기 속에 뱉어 내는 얘기다. 이맘 때쯤이면 더욱 빈도가 잦은 시험 볼 자격이 없다는 한탄. 경제계의 얘기를 빌리 면 불공정 행위요, 사회계 얘기로는 불평 등 사회의 대표적 사례이다. 전문대 졸업생들의 시험 볼 기회를 박탈하고 대학 졸업자 이상으로 자격을 제 한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아버지는 평안북도 성천의 지주 집안 자제로, 해방 전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김일성 대학을 거쳐 경성제대(서울대의 전신) 토목과를 마친 뒤 와세다 대학까 지 유학했다. 6, 25 전쟁 중 끌려간 작은아버지와 막내 작은아버지도 서울대 출 신이다. 이른바 명문대 집안이었는데 공주 김씨 집안의 장손(발에 채는 것이 ‘ 김’씨지만 한국에서 공주 김씨는 1 만여 명이 채 안 된다.) 이 잘 다니던 학교도 자퇴하고 가출하여 떠돌아다녔으니 아버지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언젠가 아버지 친구와 만나는 자리에 끼게 되었는데 아버님은 나를 대학에 다닌다고 인사시켰 다. 거짓말이라고는 전혀 모르던 분이 그렇게 말하고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서 울대 출신의 당신께 고등학교 중퇴의 외아들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몇 년이 흐르고 서울예술전문대학 방송연예과를 다닐 때는 ‘딴따라놈’으로, 술을 좀 드시면 ‘딴따라 새끼’로 부르는 것이 아버지의 나에 대한 호칭이었 다. 집안의 명문 학벌을 이어 주지 못한 장손에 대한 ‘화풀이’였다. 고등학교 를 몰래 자퇴하기 전까지 반에서 3 등 이하로 떨어져 본 적이 없고 IQ 145 의 공 부 잘 하는 모범생이었으니 그도 그럴 만했다. 아들 자랑은 학벌 자랑이라고 했 는데, 친구분들과 만나면 꼭 아들 학력에서 입을 다물어야 했으니... ‘김무영(김무영: 영화로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이라는 예명으로 숙대 앞과 명동, 종로 2 가에서 밤낮으로 DJ 생활을 하다가 서울예전의 방송연예과에 입학 하게 된 것은 PD 가 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학과라고 막연히 생각했기 때문이 다. 요즘만이 아니라 당시도 방송사 시험 볼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것을 전혀 모르는 채 입학했던 것이다. ‘DJ 의 경험도 많고, 인생 경험도 많고, 더욱이 방 송연예과를 다녔으니 PD 라는 것도?’라는 순진한 생각에서였다. 졸업 작품을 연출하기 위해선 명동의 도심다방과 종로 2 가의 뉴욕다방 두 곳 을 동시에 그만두어야 했다. 그런데 즉각 생계에 막대한 타격이 왔지만 연출 작 품이 있으면 방송사 취직도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견디기로 했다. 두 달 간 직장을 쉰 덕택에 졸업 작품 연출을 끝냈다. 당시 학교에는 ‘예술의 빛’이라는 상이 있고 몇 개 부문의 상 중에서 연출 상은 학과에서 한 명에게만 줬다. 그것을 받고자 밤 직장을 두 달간이나 쉬면서 제작하여 연출상까지 받았는데, 취직은 커녕 방송국 문 앞에도 못 가 보는 것이 아닌가? ‚PD 모집-4 년제 대졸 이상‛이라는 문구에 억울하고 울화가 치밀었지만 공 부를 더 하기로 결심했다. 직장은 쉬었고 졸업 작품 제작하느라 빚도 져서 막바 로 재입학 할 수는 없었다. 일하던 다방에 다시 나가면서 조금씩 빚도 갚으며 이듬해 영화과에 등록할 수 있었다. 영화과를 다니던 어느 날, MBC-TV 의 FD 자리를 소개받게 되었다. 제작 1 부 의 부장님은 이력서를 받곤 두어 마디 물어 보고도 언제부터 출근하라는 얘기가 전혀 없었다. 묵시적인 퇴짜였다. 1 시간 뒤 장면은 바뀌어 나는 목멱산의 정기를 이어받았다는 우리 학교로 걸 어올라가고 있었고 퇴계로에서 꺾어지는 골목의 남산 분식, 진흥공사 앞의 몇 개 안 되는 돌계단(졸업 작품 연출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 번이 흘렀 었지.)를 지나고 신호등도 없던 차도를 횡단하여 학교를 다니는 동안 전혀 주목 하지 않았던 학교 간판, ‘서울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를 몇 초간 틸 업(TILT UP: 올려보기)하던 나는 곧장 교무실로 직행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교수님은 까 마득한(?) 방송 후배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한번 채용이나 해보라고 설득을 하게 됐다. 정직원도 아닌 일용직 자리에. 일용직이란 일용할 양식을 항상 스스 로 구해야 하는 육체와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자리였다. 출근 카드가 찍힐 때마 다 하루씩 계산하여 월임금을 받는 것이다. 몸이 아프거나 다치면 이 자리는 이 걸로 끝이다. 매주 녹화를 뜨기 시작했다. ‘사랑과 야망’, ‘조선 왕조 오백년-설중매’, ‘전원일기’등. 나의 일은 AD 보조 역할로 프로그램의 스튜디오 녹화시 조연 출을 돕거나 연기자들에게 ‘큐’를 주는 일이었다. 처음 몇 개월간의 야외 촬영이 있는 프로그램의 야외 진행도 나갔다. 야외 촬 영을 나가면 출장비가 약간 지급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이익이었지만 곧 야 외 촬영은 절대 안 나가기로 결심했다. 스튜디오 녹화 때보다 더 AD 의 보조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영상 감각은 나보다 더 없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지 만 AD 는 나에게 지시할 수 있었다. 갓 들어온 AD 도 직책상 위였다. 우리 학교 출신으로 들어온 FD 들은 모두 다 현장의 ‘시다바리’로 전락했다. 그래서 연출 전공으로 FD 를 하던 이들은 PD 가 될 기회나 가능성이 전혀 없 다는 것을 깨닫고는 몇 개월 후 촬영이나 조명 등으로 전공을 바꾸어 입사 시험


을 다시 치렀다. FD 출신들은 대부분 기술직에 합격하여 정직원이 되었다. 그러 나 나는 6 개월쯤 지나서 스튜디오 녹화를 가능한 내가 맡았다. AD 들을 설득했 던(?) 것이다. 한편으론 힘드니까 녹화 때는 좀 쉬라고도 하고 FD 니까 스튜디오 녹화는 내가 책임져야 할 당위성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4 년제 출신 AD 들 사이 에서 조용히 나의 자리 찾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 때 나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 도 연출자로 더욱 뛰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당시 서울예전 출신의 방송 연출자는 없었다. 우리 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4 년제를 졸업하여 KBS 에 정직원 PD 로 근무하는 이가 딱 한 명 있었다. 그래서 어떤 연기자는 우리 동문 모임에는 전혀 안 나오고 나중에 졸업한 4 년제 졸업 동문 모임에만 나가는 이도 있었다. 전문대 출신을 감추는 때였으니 밀어 줄 빽 도, 이끌어 줄 선배도,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전혀 없었다. MBC 근무가 없는 날을 이용해서 16 밀리 독립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일용직인 나의 월급은 20 여 만 원에 불과하여(야외도 안 나갔기에 더욱 적다.) 저녁에는 밤 9 시 이후 DJ 를 다시 맡았다. 녹화가 정시에 끝나면 총알같이 명동 까지 날아와서 일했고, 녹화로 밤을 새면 조수가 메워 주었다. 필름 작업은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밤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6 년까지 ‘벽’, ‘밥’, ‘관찰 노트’, ‘부드러운 산책’등 16 밀리 네 편을 만들었다. 길이도 13 분부터 35 분까지 점차 늘어갔고 제작비도 가중되었다. 경제적으로 고통스러웠지만 MBC 에 다니면서 16 밀리 독립영화를 만드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의 자기 확인이요, 방송이나 예술은 성적순이 아니란 것의 증명 작업이었고 학력에 대한 반항이었다. 제 3 회 대한민국 단편 영화제 우수동백상(우수상), 제 12 회 한국 청소년 우수 작 품상과 조명상, 제 4 회 대한민국 단편 영화제 동백대상(최우수상)을 수상해 당시 국내에 있던 두 영화제에서 3 년간 최다 수상을 기록하였다. 그러고는 다음 작품 을 위해 미련 없이 MBC 를 떠났다. ‘학력 유감’의 87 년 4 월이었다. 시대유감 검게 물든 입술,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숱한 가식 속에서, 오늘은 아 우성을 들을 수 있어 얼마 전 공연윤리위원회에서 금지 공방으로 말썽난 서태지의 ‘시대유감’가 사 중 일부이다. 도대체 가사의 어떤 부분이 청소년이나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는 것일까? 삼천억짜리 무궁화 위성을 쌩쌩 띄우고 2002 년 월 드컵을 유치하기 위해 전세계를 돌며 거국적 노력을 하는 이 마당에 귀신이 곡 할 노릇이다. 지난해엔 30 년 만에 지방자치 투표가 있었다. 줄줄이 2 번만 찍었다. 민주당과 김대중 씨계의 인물들이 대거 당선되어 야당의 압도적 승리였다. 그런데 선거 직후 은퇴한 김대중 선생께서 정계에 재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8 년 전 87 년 대선 땐 혹시나 했지만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서울내기라 서 ‘군정종식, 민주수호’등의 구호를 외쳐 부르며 여의도에서 시청까지 김영 삼 씨 지지 대열에 적극 참여했다. 당연히 내가 갖고 있던 유일한 한 표도 ‘공 삼이’한테 갔고. 다 알다시피 3 등의 결과로 고배를 들었고, 그 얼마 후 김영삼 씨는 구국의 결단이라며 3 당 합당을 전격적으로 감행했다. 그렇게 믿었던 영삼 씨의 배신을 4 천만이 목격한 것이 엊그제였는데도 말이다. 최근에도 어제까지 깨끗한 정치인이라고 주장하며 인기 표를 몰아가던이가 대통령과 단독 회동 후 면 차를 갈아탔다. 동포들이 가장 정확한 뉴스를 얻는다는 9 시 뉴스에서도 요즘 정치 패션은 복고조풍으로 ‘차 갈아타기 패션’이라고 나오는 것을 보면 역사 는 돌고 있나보다. 이 강토에 역사 바로 세우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미국으 탓이 크다. 미


군정 시기에 단지 행정 처리 경험이 있다(?)는 것으로 해방 후 잠시 숨죽였던 친일파들을 다시 등용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아메리칸 드림과 자본주의 상징인 미국은 모든 세계 질서가 자국의 경제적 이익에 기초해야 한다는 논리를 갖고 있다. 이런 고로 타국 침략을 위해 종종 자국 배의 ‘자살 폭발’도 불사한다. 강화 앞바다에서 제너럴 셔먼호가 그러했고, 같은 시기 똑같은 일이 쿠바에서 도 일어났다. 미국은 아바나 항구 앞에 정박해 있던 자국의 해군 전함 메인호를 스스로 폭발시키면서 백년 동안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눈앞에 둔 쿠 바인들의 희망을 짓밟고 섬나라 쿠바를 침략했던 것이다. 폭발 당시 전함 메인 호에는 미군 병사 260 명이 있었는데 전원이 사망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기 위 해 자국 병사들의 목숨을 한꺼번에 빼앗은 것이다. 이국의 바다에서 영문도 모 르는 채 수장된 그들의 젊은 병사들은 아메리카의 신천지 개척을 위해 남의 나 라 차가운 대리석에 이름만 새겨야 했다. 1960 년대에 프랑스가 식민지 베트남에서 베트남인들에게 패배해 물러나게 되 었다. 이 때도 미국은 베트남의 통킹만에서 작은 나라 베트남이 먼저 공격했다 고 생떼를 쓰며 베트남으로 달려들었다. 베트남에는 1945 년 2 차 대전이 끝난 때부터 세계의 두 강대국인 프랑스와 미 국을 상대로 하여 30 년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설적인 인물이 있었다. 베트남 의 전쟁 영웅 ‘보겐 잡’장군. 몇 년 전 그를 취재하러 가서 그렇게 끝없이 묻 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왜 초강대국인 미국과 피 흘리는 전쟁을 30 년이나 했 냐.‛라고. 보겐 잡은 조용히 대답했다. ‚사실 우리 베트남은 누구보다도 평화 를 애호하고 세계인과의 우호를 귀중히 여기는 민족이다. 외부의 침략 세력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직 우리의 독립과 자주를 수호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우리의 전쟁은 강요당한 것이었다. 우리는 과 거에 강대국에게 양보를 많이 하였다. 그러나 양보하면 할수록 더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어나야 했다.‛라고. ‘베트남 전쟁 그 후 17 년’과 ‘카리브해의 고도, 쿠바’를 취재하고 라틴아 메리카의 몇 나라를 취재하였다. KBS 의 ‘세계 영화 기행-라틴 아메리카편’을 맡았기 때문이었는데 취재 중 만난 칠레의 영화 감독 미겔 리틴은 이렇게 말했 다. ‚미국은 라틴아메리카를 자기네 뒤뜰로 유지시키고 싶어한다. 미국은 그들 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라틴아메리카의 칠레에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최초의 민선 대통령인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을 학살했다. 10 년 이상의 계엄령하에서 칠레 전체가 감옥과 같았다. 역사는 우리에게 제국주의는 항상 같은 식으로 작 고 힘 없는 민족을 억압하려 한다.‛ 처음엔 자기들이 스스로 죽인 병사들의 목숨 값을 물어 내라고 하더니 어느새 총과 칼을 팔기 시작했고 뒤이어 코카콜라와 담배도 꺼내 놓더니 이젠 과잉 생 산한 쌀과 소고기까지 사라고 윽박지른다. ‘슈퍼 301 조는 슈퍼맨들이 만든 법 인가?’ ‘아니, 우리의 젊은 농민들이 정부 말만 믿고 키우던 소값이 떨어져 농약 먹 고 자살까지 하는데도? 몇만 명의 농민들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자식처럼 키 운 농산물을 몽땅 불태우는데도?’ 8, 15 해방 후 미국과 가장 친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앉혀 놓고 독재를 시켰 고, 10 년간이나 참다 못한 이 땅의 백성들이 일어서자 박정희 군사 혁명을 묵인 하였고, 다시 20 년간이나 숨죽였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하자고 하니 군사 쿠테타를 일으킨 편의 ‘손’을 들어 주었다. 무고한 국민의 피로 물든 그 손을 말이다. ‘이게 니들이 얘기한 민주주의의 수호이고 평등한 사회 건설이 여?’ 하긴 희망찬 80 년대 쿠테타의 주역은 ‚선진 조국을 창조하고 정의 사회를 구 현하자.‛고 했던 것 같다. 요즘 환경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져서 약간이나마 환경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쓰레기 소각할 때 생기는 다이옥신이란 유해 물질의 이름을 들었을 것 이다. 이 다이옥신이 인체 내에 오래 남아서 암을 유발하거나 몸이 꼬챙이처럼 말라 비틀어 죽어 가는 이들이 있었다. 그 후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던 미국 병 사와 연합국의 일원인 한국 병사, 그리고 베트남 병사들이었다. 미국은 전쟁 중에 베트남의 무성한 정글을 제거하기 위해 제초제인 고엽제를 비행기로 공중에서 하얗게 뿌려 댔다. 고엽제에는 다이옥신이란 성분이 있는데 살포 당시 미국의 의학자들이 인체에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그 독약을 미국 병사들에게도 숨기고,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우방의 병사 들에게도 숨기고, 목숨 걸고 싸우는 병사들의 머리 위로 10 년간이나 뿌려댔다. 그 후 베트남 종전 10 년이 지나 전쟁에 참가했던 미국 병사들이 40 대의 한창 살 만한 나이에 시름시름 앓다가 자꾸만 죽어갔다. 원인을 규명하기 시작했고 결국 전쟁 때 뿌려진 이 고엽제로 인한 것임을 밝혀 냈다. 제조 회사와 미국 정부, 병 사들의 논란 후 80 년대 말부터 미국의 고엽제 후유증 병사들은 치료와 보상을 함께 받기 시작했다. 3 부작으로 구성된 ‘베트남 전쟁, 그 후 17 년’의 제 2 부 ‘아메리칸 호프는 자란다’에서 나는 살포 당시 미국 해군 사령관인 ‘엘모줌 왈트’장군과 많은 미국의 관계 기관과 병사들을 취재했다. 그러나 고엽제 재판을 담당한 미국 판 사는 인터뷰를 피했고 자기 변론의 기회를 주겠다고 해도 미국 화학 회사의 관 계자는 기회를 포기했다. 한편 32 만 명의 병사가 참전했고 5 천명 이상의 병사가 꽃다운 나이에 죽어 간 한국에선 당시 2 년 넘게 조용했다. ‘왜 그랬을까? 미국 정부가 베트남 참전 병 사들의 치료와 보상을 하고 있다고 한국 정부에 알리지 않았던 것일까?’ 이 때 는 92 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때였다. 미국 정부가 이 사실을 한국 정부에 통보하지 않았다면 한국에 알릴 필요가 없었다(?)고 판단한 것이고, 알렸다면 한국 정부는 한국의 베트남 참전 병사에 대해 한때 유행했던 ‘미필적 고의 살인죄’에 해당된다. 그래서 고엽제에 대해 한국의 관계 기관에 인터뷰를 요청하자 한국의 관계 기관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고위층의 지시를 받았나? 아니면 강대국의 압력이 있었나?’ 베트남 전쟁시 고엽제를 살포하는 화학병으로 근무했던 한국 병사가 포항 근 처의 구룡포에 살고 있었다. 찾아가 보니 완전히 뼈만 남아 피골이 상접해 있었 고 병사의 부인은 ‚이 대한민국에서, 이 만큼 못사는 서민들이 얼마만큼 울고 얼마만큼 정부를 원망하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디 가서 무얼 어떻 게 보상받겠습니까? 어떻게 치료를 하겠습니까?‛ 취재가 끝난 6 개월 뒤 이 병사는 마흔일곱의 나이로 사망했고 취재에 응했던 병사들 중 다섯 명이 억울한 생을 마감했다. 누가 그랬다. ‚언제 정부가 백성 편에 스스로 먼저 선 적이 있냐고?‛ 일제 시대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2 차세계대전의 마지막 난민이 되어야 했던 사할린의 한인들, 사할린의 카레이스키(‘조선놈’이란 러시아말)들은 50 년의 한 국 현대사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버려진 한국인인 이들을 위해 정부의 한마디라 도 들어 보자고 했지만 역시 묵묵부답. 일본의 교수나 변호사, 중의원 의장까지 양심에 따라 인터뷰를 하는데도 말이다. 우리 나라의 관계 기관은 항상 그랬다. 88 올림픽 때는 상계동 철거를 촬영했고 이후 몇 군데 재개발 철거를 취재했 다. 똑같은 모습이었다. 시민들은 쫓겼고, 맞으면서도 감방에 갔고, 재벌들에 의 해 동원된 철거반들이 못 나가겠다는 아줌마들을 짓이기고 있었다. 망치와 해머 불도저가 지붕 위를 덮치고 있었고 그 뒤에는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합법 적인 것이라 우리는 어쩔 수 없습니다. 기업의 이익도 보호해야지요.‛ 이 땅의 풀뿌리 시민들이 땀을 흘리는 동안 위정자들은 독재의 총칼을 갈았고 미국은 국가 이익에 맞춰 한국 대통령의 차를 갈아 탔다. 배신을 가르친 것이다. 그렇게 위정자들은 배워 왔고 위정자들이 막아선 등뒤에서 한국의 기업들은 5 천


억이나 7 천억(미확인이라고 함)으로 위정자들의 몸을 도배하여 재벌이란 문어로 자라왔던 것이다. 2000 년을 눈앞에 둔 지금 변해도 변해도 역시 그 모습이었다. 관계 기관은 마 이크를 붙잡고는 항상 같은 내용을 발표했고 우리 힘없는 국민들은 속을 태웠 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시대. 이 ‘상실’의 시대에 우리 이 땅의 주인들은 무 얼 믿고 사나?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시대 유감이다. 겨울 공화국 ...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쉬는 것을 보았는가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갈아 앉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부르면서 불끈 불끈 주먹을 쥐고 으드득 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낄낄 웃어대거나 웃다가 새하얗게 까무라쳐서 누군가의 발밑에 까무라쳐서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 - 양성우 시집 ‘겨울 공화국’중 ‘겨울공화국’ 첫 연 1979 년 가을 학기부턴 DJ 로 몇 년째 일하던 숙대 앞의 라이프 다방에서 조금 더 벌어 보려고 다방 종업원도 겸했었다. 여대생만 오는 다방이라 남자가 커피 를 나르는 것이 창피하기도 했지만 몇 만 원 더 받았고 재미도 있었다. 해가 바뀐 80 년의 봄, 나는 일자리가 불안했다. 숙대생들의 데모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원래 방학 때는 항상 문을 닫으니 7 월부턴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했 는데 학생들의 데모로 이른 5 월인데도 수업이 일찍 종료할지 모른다는 얘기가 돌았기 때문이다. 5 월의 어느 날, 손님이 전혀 없어서 다방 입구에서 숙대생들의 데모를 구경하 고 있었다. 여대생들이 줄줄이 팔짱을 낀 채 구호를 외치고 있었고, 학교 쪽으로 올라오는 청파동 입구엔 경찰들이 대열을 이뤄 올라오고 있었다. 한순간 비명 소리와 함께 학생들의 대열이 순식간에 깨지더니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앞 뒤로 최루탄이 터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욱한 연기 속에 경찰 전위대가 달려 왔고 학생들은 골목과 학교로 흩어졌다. 엉겁결에 학교 담과 연결된 막힌 골목으로 도망가는 여학생들이 눈에 띄어 얼 른 같이 따라갔다. 담이 좀 높아 여학생이 쉽게 담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학생들한테 빨리 내 등을 밟고 넘어가라고 했다. 학생들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담장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골목을 다시 돌아 나오니 몇몇의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어떤 여학생은 양팔과 머리채가 잡힌 채 질질 끌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나도 얼른 다방으로 도망쳤다. 그 때까지 나는 한국 정치나 사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관심도 없었다. 신문에 큼직큼직하게 학생들의 데모가 기사로 실 려도 단지 학생과 경찰 사이의 ‘긴장 관계’라고 생각했다. 데모 횟수가 늘어나고 조금씩 더 치열해짐에 따라 다방도 거의 영업을 할 수 가 없었다. 노는 김에 하루는 데모 구경을 하러 서울역 까지 갔다. 서울역 앞에 서 남대문 쪽으로 가는 횡단보도, 퇴계로 방향 고가도로 밑, 길가엔 사람들의 물 결로 가득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처음 보았다. 데모였다. 80 년 5 월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왜 이 많은 사람들이 여기 나왔지?’ ‘여학생들이 맞고 끌려가면서 도 왜 데모를 계속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대학에 가기로 했다. 이듬해 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학교는 조용했다(남산 안기부와 붙어 있어서 그런지...). 혼자서 이 책 저 책 주워 보기 시작했다. 딱딱한 역사서나 이론 서적은 읽기가 힘들어 따분했고 시는 읽고 이해하기가 쉬웠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조태일의 ‘국토 ’, 신동엽의 ‘금강’등을 읽으면서 슬금슬금 논장서점도 알게 됐고, 남정현의 ‘분지’(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똥을 통해 풍자), 그리고 김지하의 ‘오적’을 알게 되었다. 내가 20 년이 넘도록 먹고 살기에 바쁘게 살아왔던 우리 나라는 ‘겨울 공화국 ’이었던 것이다. 군사 정권의 군화에 짓밟힌 나라였고 내가 잠시 목격한 80 년 5 월의 나라였던 것이다. 4 년 후, 처음 16 밀리 필름 작업에서 내가 맡은 것은 음악과 섭외였다. 연출은 조진 감독이었고, 난지도의 쓰레기 속에서 살아가는 난지도 사람들의 이야기로 제목은 ‘매립’이었다. 84 년의 난지도는 촬영 금지 구역이었다. 난지도의 자치 위원회를 설득한 후에 촬영 허가를 받으려고 경찰서 정보과를 1 주일째 들락거리 며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대학생들도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려고 합니 다.‛라고 담당 형사를 설득했다. 제출한 시나리오의 대본은 우리가 촬영할 내용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 얘 기를 믿었는지 아니면 설마 1 주일씩이나 경찰서 정보과에 와서 정식 촬영 허가 를 요청한 작품이 정부 비판을 하는 작품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촬영 허 가를 내주고 정보과 형사는 촬영 현장에 동행했다. 발이 폭폭 빠지는 온갖 똥, 오줌, 쓰레기 더미 속, 여름이 오기 시작한 때의 썩어 가는 악취와 쫓아도 쫓아도 달려는 똥파리들. 며칠 뒤부터 형사는 아예 현 장에 나오지 않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3 주일을 더 살았다. 곧바로 다음 작품부터 스스로 연출을 하기 시작했다. 현대인들이 부딪히는 벽이 각기 다른 형태로 개인을 압박하는 것을 그린 ‘벽 ’ (84 년, 13 분), 밥을 구하기 위해 전단을 붙이며 살아가는 한 청년에게 가해지 는 경찰의 합법적 폭력과 인간성 상실의 이야기 ‘밥’ (85 년, 17 분), 시대의 역 사적 상처(광주)로 표류하는 젊은이를 기록한 ‘관찰노트’(85 년, 25 분) 무료한 일상 생활에서 작은 일탈을 시도한 여대생의 ‘부드러운 산책’(86 년, 22 분), 광 주항쟁의 피해자인 한 인물의 의문사를 추적한 ‘칸트씨의 발표회’ (87 년, 35 분). 당시 독립 영화의 제작은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작을 해도 제작 비를 전혀 회수할 수 없어서 대개 학생 시절 졸업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대부분 이다. 그런데도 미친 듯이 제작을 했다. 돈이 좀 있으면 필름을 사고 또 좀 모아 서 현상하고, 그렇게 4 년을 보냈다. 이 때 독립영화의 상영은 프랑스 문화원에 근무하는 박건섭 씨의 도움으로 문 화원 내에서 토요일에 상영하는 것이 유일한 일반 상영이었는데 이마저도 입장 료를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반 상영을 개척해 보기로 하고 87 년 11 월 이대 앞의 연극을 공연하 는 청파소극장을 1 주일간 임대하였다. 대학 내에서는 어떤 작품이라도 상영 가 능하고 위험 부담도 없지만 나는 일반 공개로 위험을 정면 돌파키로 하였다. 대 체로 한국 사회에 비판적 작품들이고 ‘칸트씨의 발표회’는 잡혀갈 여지가 많 은 위험한 작품이었지만 87 년 대통령 선거 시기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공연장 상영 허가를 얻어 냈고 극장에 들른 형사도 따돌렸다. ‘16 밀리 단편 영화 발표회.’ 한국에서 처음으로 연 개인 발표회였다. 그 동 안 밤낮으로 직장을 다니면서 조금씩 돈을 모아 계속 제작해 왔는데 ‘칸트씨의


발표회’를 제작할 때는 700 만 원이나 들어 빚도 많은 터였다. 상영을 해도 임 대료와 포스터, 팜플렛, 제작비를 충당하면 이익이 생길 리 만무했지만 그러나 대단히 기뻤다. 내가 느낀 겨울 공화국, 내가 관찰한 우리 시대의 기록을 일반인들에게 처음 으로 공개하고 평가를 받는다는 설렘으로... 상영이 끝날 때마다 설문지를 돌렸다. ‚삼천리는 비단 같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울고 싶을 정도로 가 슴이 탄다.‛ 라는 내 영화 속의 한 대사를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옮겨 놓은 설 문지를 발견했을 때 눈시울이 붉어졌다. 왠지 몰랐다. 그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 는 것인지. 그 동안 보아 온 그 모습들, 막연히 ‘적’이 누구인 지도 모르는 채 살아왔던 시절들, 책 속에서만 들려왔던 그 목소리와 호흡들, 군사 정권의 군화 소리들, 그리고 난지도의 똥더미 속에서 여의도의 국군의 날 훈련까지... 나의 영화 ‘칸트씨의 발표회’는 이렇게 시작된다.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온몸으로 부르짖다 간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바치고자 합니다. 겨울 공화국에 대한 화답이었다. ‘황무지’에서 일어섯! 87 년 11 월 단편 영화 발표회 때 공개된 ‘칸트씨의 발표회’는 우연히 극장에 들른 베를린 영화제 영 포럼 부분의 한국인 통역자인 임혜경 씨의 눈에 띄어 제 38 회 베를린 영화제(88 년 2 월)에 공식 초청 되었다. 임혜경 씨의 적극적인 노력 과 집행부의 배려로 마감이 훨씬 지났지만 이미 선정된 이장호의 ‘나그네는 길 에서도 쉬지 않는다’와 다른 한국의 단편 영화 여섯 편과 함께 참가하였다. 영 화제 측에서의 공식 초청은 세 명이었는데 이장호 감독과 ‘칸트씨의 발표회’ 사진가로 출연했던 김윤태가 한국 단편 영화의 대리인 자격으로, 나는 ‘칸트씨 의 발표회’의 감독으로 초청되었다. 극적으로 초청된 베를린 영화제를 통해 나 는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었다. 세계적인 감독들의 작품과 국제 영화제 행사를 지켜볼 수 있었고, 우리 작품 이 상영된 후에 관객들과의 작은 토론을 통해 그들의 관심과 생각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토니 레인즈라는 영국의 영화비평가이자 감독을 만나 지속적인 교류를 갖는 기회를 얻었고 몇 명의 외국인을 친구로 삼을 수 있었다. ‘칸트씨의 발표회’는 이태리 토리노 영화제, 하와이 국제 영화제, 싱가포르 국제 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일본에서는 PIA 잡지의 후원을 통해 그 해 여름에 나까지 초청하였다. 이때 일본의 유명한 기록 영화 감독인 오가와 신스케 감독을 만나게 되었다. 오가와 감독은 60 년대 말, 나리타 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농부들의 다쿠멘터리 를 제작하여 해외 출국이 금지된 감독이었다. 몇 년 동안 나리타 공항 투쟁을 계속 필름에 담았고 만난 당시에는 농민들의 얘기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찍고 있 었다. 그의 삶은 잘사는 일본에서 돈 벌기를 포기한 삶이었다. 완성된 영화를 가지 고 일본의 여러 농촌 지방을 돌면서 농민 회관이나 학교를 빌려 직접 상영하였 다. 상영시에 후원 기금을 모으고 모은 기금으로 다시 새 영화를 찍는 일을 20 년 동안 반복하고 있었다. 소탈한 오가와 감독과의 만남은 작은 감명을 주었다. ‘칸트씨의 발표회’덕분에 유럽의 여러 나라와 일본까지 들러 영화 관계자들 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작은 행운이었다. 이전의 3 년간의 MBC 생활 동안에는 배운 것이 많았지만 가슴 한 구석엔 항상 학력으로 인한 좌절감이 응어리져 있 었다. 독립 영화로 국내의 상을 최다 수상하고 난 뒤 조금 더 큰 세계로 도전해


보고자 미련 없이 MBC 를 그만둘 때 속으로는 ‘꼭 존경할 만큼 뛰어난 감독이 되어 앞으로 10 년 안에 MBC 가 먼저 작품을 맡아 달라고 요청할 기회를 만들겠 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KBS 의 정직원 카메라맨이었던 동료 장상일을 사표 던지게 만들고 영 화 쪽에서 일하던 조진 감독, CF 쪽의 이정애 감독과 DJ 후배 한 명이 모여 충 무로의 극동 빌딩 뒤에 작은 사무실을 얻었다. 회사 이름은 ‘STAFF.' 처음으로 돼지 머리에 대고 ‘꼭 성공해야 합니다. 이 억울함(?)을 풀어줘야합 니다.’라고 엎드려 빌었다. 사무실을 열고 난 뒤 만든 작품이 이 ‘칸트씨의 발표회’였다. 그런데 내가 만든 독립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다니 믿을 수가 없었지만 사실이 었다. 베를린에 다녀와서 새로운 장편 영화 제작에 착수하였다. ‘황무지’란 작품이었다. ‘칸트씨...’는 광주항쟁의 피해자인 한 청년의 의문사를 다룬 것이었는데 이 번에는 정반대의 입장을 다뤄 보기로 하였다. 광주에 투입되었던 진압군 병사의 양심 선언! 과연 그 때 진압군은 광주에서 무엇을 생각하며 작전에 참가했을까? 조국의 동포를 죽이면서 양심의 고통은 없었을까? 길이는 90 분으로 설정하고 돈 없는 사무실에서 스태프를 끌어 모았다. 촬영은 유영길 촬영감독의 촬영부인 김성복 씨, 조수는 장상일, 조명은 같이 일하던 김 영수로 확정하고 배우들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학교 선배인 전무송 선생과 후배 인 영화배우 조선묵, 방은희(요즘 ‘부자유친’에 나오는), MBC 탤런트인 서갑 숙, 이경아, 김영석 등과 중견 탤런트들, KBS 의 양재만(‘대추 나무 사랑 걸렸 네’에 출연하는) 이 주요 배우로 무료 출연에 흔쾌히 응했다. 진심으로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제작비는 정진우 감독 (우진 필름 대표) 에게 직접 쓴 시나리오와 제작 계획 서를 담보로 판권을 반반으로 나누기로 하고 2,750 만 원짜리 어음을 받아 냈다. 그 때까지 16 밀리 독립 영화로 이런 거액을 투자한 경우도 없었지만 당시 영화 협회장이며 영화계에서 가장 독불장군이고 괴물이라 불리던 정 감독한테 받아 냈다는 것은 아직도 독립 영화계의 전설(?)로 나아 있다. 정 감독을 전혀 몰랐는 데 후배 배우인 조선묵이 정 감독과 친해 소개를 했다. 당시 나는 오직 ‚담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젊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제작 경험은 있고 좋은 작품을 만들 자신도 있습니다. 절대로 돈을 떼먹지는 않겠습 니다.‛라고만 했는데 밀어 준 것이다. 아마도 젊은 용기를 좋게 봐 준 것 같다. 그러나 6 개월간의 영화 제작이 완료됐을 때 우리는 한 순간에 우리의 모든 꿈 과 노력이 일시에 사라지는 절망을 맛보아야 했다. 제작이 완료되자마자 당시 문화공보부의 압력을 받은 공동 제작사에서 현상소에 보관되어 있던 영화 원판 과 상영용 필름을 강제로 탈취해 간 것이다. 영화 제작을 시작할 때와 달리 국 내의 정치 상황이 급격히 반전되었던 것이다. 87 년 6 월 항쟁과 대통령 선거로 이어졌던 잠시 동안의 자유가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 후 다시 꽁꽁 얼어붙으며 강성의 공안 정국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언론에는 우리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 ‚광주의 5 월이었습니다. 거리에선 시위 가 한창이었고 그 때 전 진압군으로 투입됐습니다... 저의 총이 불을 뿜고 흰 옷 에 붉은 피가... 전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더 이상 살 수가 없었어요. 전 도망쳤어요.‛라는 주인공의 양심 선언을 옮겨 실으며, ‚광주 진압 공수대원 양 심 가책 느껴 분신 자살‛,‚광주항쟁 이후 관심이 증폭된 한미 관계 본질 접근 시도‛등으로 영화의 내용과 함께 크게 보도되었다. 그러나 문화공보부는 16 밀 리 영화도 상영하려면 검열을 받아야 한다며 검열을 요구해 왔고 우리는 16 밀리 독립 영화는 검열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거부했다. 끈질기게 압력을 행사해도 되지 않자 방향을 돌려 공동 제작사인 우진필름에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우진 측은 즉시 우리에게 개봉 중지를 요구했지만 우리는 개봉이나 그 외의 모든 제작 책임은 우리가 지는 걸로 계약했으니까 개 봉 중지를 요구할 근거가 없다며 일축했다. 그런데 필름을 탈취당했다니? 예상 치도 못한 빠른 습격이었다. 원판을 현상소에서 갖다가 다른 곳에 감추어야 했 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이대로 무너질 수도 없었다. 2 년간의 분노의 시간을 삭인 우리의 희망과 사무실의 운명이 모두 그 영화의 상영에 달려 있었다. 더욱이 촬영 직전 아버님이 쓰러져 생명이 위독하다는 연 락을 받고 뛰어간 경희대 중환자실에서 작은아버님의 얘기만 잠시 듣고 ‚꼭 촬 영을 예정대로 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며 뒤돌아서서 나왔던 터였고, 속으로는 아버님께 ‘가야 합니다. 이 길은 내 길이고 아버님이 여기서 돌아가신다면 그것 또한 아버님의 운명이고 아버님의 임종을 못 보는 것 도 저의 운명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이 작품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용서 하세요.’라고 사죄하고 뒤돌아선 뒤 불효의 촬영은 멈춤 없이 끝까지 강행되었 다. 우리는 다행히 상영용 필름 한 벌과 방송용 1 인치 테이프를 하나 갖고 있었 다. 5 월 초 광주에서 상영한 후 5 월 9 일부터는 1 주일간 서울 혜화동의 예술마당 ‘금강’에서 상영키로 결정하고 광주의 드라마 스튜디오의 개봉에 맞춰 광주로 내려갔다. 드라마 소극장에는 광주 시청이 상영 중지를 요구해 왔고 형사들도 왔었지만 극장 측이나 우리는 무시할 수 있었다. 광주항쟁은 나라의 비극이었지만 광주라 는 도시의 비극이었고 이 영화는 그 비극을 담고 있어 혹시 건드려서 광주에서 화근이 될 우려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정부 측도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첫 회가 끝난 후 토론하고 있을 때 갑자기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들이닥치더 니 그 중 한 명이 영사실로 가서 작은 병 속에 든 약을 필름에 뿌려 댔다. 우리 도 몸으로 필사적으로 필름을 감싸고 극장 바닥에 나뒹굴렀다. 아세톤이었다. 아세톤은 필름에 닿으면 순식간에 필름이 녹아버린다. 마지막 남은 프린트가 한 순간에 재로 변할 뻔할 상황이었다. 우진필름의 직원들이었다. 옥신각신 욕이 오가는 중에 관객들이 목격을 하고 극장의 분위기가 안 좋아지자 그들은 다시 나갔다. 동료들과 상의하여 광주 상영이 끝날 때까지 조진 감독이 남아 필름을 지키기로 하고 나는 서울의 상영 준비를 위해 올라왔다. 그 날 밤 광주에서 ‘어깨’들이 20 명 이상이 한꺼번에 쳐들어와서 결국 필름 을 탈취해 갔다는 전화가 왔다. 불가항력이었다는 풀 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서울 상영 대책이 없었다. 갖고 있던 비디오 테이프를 틀어 입 장료는 안 받고 시나리오 책만 팔기로 했다. 금강극장에서 상영하는 날, 경찰 여섯 명이 오더니 뒤이어 문공부 직원 세명 이 영화 테이프를 압수해 갔다. ‚16 밀리 필름으로 상영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비디오로 대중 사영을 했기 때 문에 불법 음반에 관한 법률 위반‛이라는 것이 압수 사유였다. 비디오로 하더 라도 돈을 안 받고 내가 내 작품을 보여주는데 어떻게 불법 음반에 관한 법률 위반이냐고 항의했지만 권력의 법은 막무가내였다. 법이란 항상 힘 있는 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 우리 나라의 현실이었으니까. 표면적으로는 실정법 위반이 구실이었지만 상영 저지가 목적이었다.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작품 내용이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공 수대원이 광주의 망월동 묘지에서, ‚동포여! 용서하소서. 죽음으로 당신들의 영 전 앞에서 사죄합니다. 깨어나자 병사여! 깨어나자 민주주의여!‛라는 대사로 끝 난다. 한국에서 광주 작전이 완료된 지 8 년이 지나 모두들 무공 훈장까지 받은 터였 는데, 그 작전에 참가했던 공수대원이 양심 선언을 하고 분신 자살을 해? 더욱


이 망월동의 자신들이 죽인 자들의 묘지 앞에서? 압수, 압수였다. 당시 한국에서 광주와 반미 문제는 아직까지 뜨거운 감자였다. 우리는 극장 대관료도 제대로 못 낼 정도로 처참하게 망했다. 이후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키고 빚을 갚고자 남아 있던 방송용 1 인치 테이 프를 몰래 일본으로 들고 나가 필름으로 방식 전환을 했다. 이 필름을 김포공항 으로 몰래 갖고 들어오는데 세관에서 발각돼 이것마저 압수됐다. 마지막 희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임대료가 계속 밀렸던 사무실도 폐쇄되었고 월세방 에서도 쫓겨 나왔다. 서른두 살의 집 없는 천사(?)가 되었다. 조진 감독 집에서 내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됐다. 그러던 중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묻어 드릴 땅도, 비석도, 관마저 살 수가 없 었다. 당시의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중환자실에 계실 때도, 다시 1 년 6 개월을 누워만 계시고 말을 못 하실 때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는데, 돌아가시 는 길 끝에서 한 벌의 수의마저도 해드릴 수가 없는 처참한 신세였다. 절망적인 시간이었다. 작은아버님께서 모든 것을 치렀다. 망자의 길을 다지며 황토를 밟는 동안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버님 에 대한 불효의 눈물이었는지 아니면 부초같이 떠돌며 살아온 나의 삶에 대한 눈물이었는지, 참아도 참아도 쉴새없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님의 삶이 흙으로 돌아가던 그 시간, 나는 다시 나를 일으키려 하고 있었 다. ‘절망하지 마라. 절망이 없다면 어떻게 희망이 있겠는가? 인간의 삶이란 세 월처럼 물처럼 흐르는 것, 어두운 날도 있고, 돌아가는 일도 있지만 날은 다시 밝고 물은 흐른다.’ 황무지 같은 나라였고 이제 아버님도 한 줌의 황토로 돌아가며, 내 삶도 이 황무지로 돌아갈 것이지만 나는 이 땅에서 살아야 했다. ‚황무지에서 일어섯!‛ 차가운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쿠바까지 92 년 7 월, 나는 베트남의 옛 수도 호치민 시 (사이공)에 있었다. 그 때까지 3 개월간의 한국과 미국 취재를 끝낸 뒤 베트남 전쟁의 역사와 본질 을 바로 보고자 전쟁의 현장으로 들어갔다. 물론 이미 전쟁이 끝난 지 한참 흐 른 뒤였지만 나는 전쟁 당사자들의 얘기를 직접 듣고 싶었다. 무엇을 위해 10 년 이상이나 민족끼리 싸웠으며, 전쟁이 끝나고 17 년이 지난 지금은 그 전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이영희 선생의 베 트남 전쟁에 대한 글이 한국에서 10 년 가까이(?) 금지되었어야 했는지 그 이유 를 알고 싶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90 분 3 부작으로 제 1 부는 베트남 전쟁의 역사를, 제 2 부는 ‘ 아메리칸 호프는 자란다’로 전쟁의 후유증을, 그리고 제 3 부는 ‘반도의 황색인 ’이란 제목으로 전쟁 뒤에 남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으로 구성했다. 7 월 30 일. 호치민 시 콩긴(CONG QUICH)가 284 번지 두유(TU DU) 산부인과에서 우리 는 그 동안 베트남 외무부, 한국의 문공부, 미국의 장군 등 취재 허가와 촬영의 어려움을 한순간에 까맣게 잊어야 하는 생애 최대의 충격과 마주치게 되었다. 죽어갈 날만 기다리는 암병동의 부인들, 살아 남아서 고통의 삶을 보내는 기 형아들, 우리를 쳐다보는 그 기형아들의 눈과 전시실의 비극의 표본들... 이 모두가 전쟁 때 10 년 이상 베트남에 뿌려진 미국의 고엽제 때문이라니. 그 짧은 사이, 그들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되살아나서 우리의 눈을 붉게 충혈시키고 나의 숨통을 조르고 있었다. 취재 안내를 맡았던 베트남인들과 비밀 경찰들도 충격의 실상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외다리로 경쾌하게 뛰어다니는 열한 살의 두크는 이곳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 고, 그 애와 장난을 치는 일곱 살짜리 남자 아이의 얼굴은 너무나 밝았다. 두크 란 아이는 양다리의 무릎 아래 부분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도 날쌔게 뛰어다니는 그 아이. 또 세 살 남짓한 아이는 어느새 촬영을 하는 우리들에게 기어와서 신기한 듯이 올려다본다. 서지 도 못한 채... 이곳의 모든 아이들은 팔다리가 없거나 있어도 기형이다. 남은 발만으로 헬리 콥터 장난감을 집어 드는 아이. 색연필을 발가락에 끼워 들고는 그림을 그리려 는 아이. 그 옆의 팔이 굽은 아이도 간신히 색연필을 손가락에 끼워 들었다. 무 엇을 그리고 싶을까? 굽은 손과 발가락. 베트남의 누런 종이 위에는 단지 비뚤 비뚤한 선만이 그려지고 있었다. 3 층으로 가는 계단을 외다리로 뛰어오르다 쓰러진 두크는 아파서 얼굴이 일그 러지면서도 비명 소리를 내지 않았다. 훨체어를 이용하여 오르간 앞에 앉은 두크는 오르간을 치기 시작했다. 두 팔 이 없고 오른쪽 어깨에 한 손가락만 달랑 달려 있는 아이도 손가락을 입에 문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가요 ‘사의 찬미’로도 알려진 ‘다뉴브 강의 잔물 결’이 흐르기 시작하자 나는 그 방에서 잠시 벗어났다. 눈물이 흘러 아이들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크와 베트는 베트남어로 ‘라이티커’(괴물처럼 이상한 애), 즉 몸이 붙은 기형아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머리는 위아래로 두 개, 팔은 네 개, 다리는 두 개로 태어나 세계 매스컴에서 베트남 전쟁의 고엽제 피해로 인한 2 세들의 산 증 거로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86 년까지 몸이 붙은 채로 자라다가 87 년부터 수면, 식사 등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자 분리 수술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고는 88 년 일본 적십자사의 원조로 분리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독한 포르말린 냄새가 가득 찬 제 1 전시실의 표본들. 충격이었다. 운 좋게(?) 살아 남은 아이들과 달리 태어난 지 몇 시간 후 혹은 며칠 뒤에 죽은 기형아들이 1965 년 이래 1 년에 몇백 명씩 이 병원에서 죽어 나갔다고 했 다. ‘이 병원에서만 수백 명이라니? 베트남에서 제일 좋은 병원에서만 수백 명씩 이라면 산악이나 정글 지역에서는? 남베트남 전역에서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약 200 개 가량의 표본이 하도 끔찍해 베트남 스태프들고 밖에 서 있고 우리 조감독도 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표본 연도를 확인하며 전쟁과 인간의 관계를 묻고 있었다. 며칠 후 우리는 베트남의 1 번 국도를 따라 봉고차를 끌고 35 일의 장정을 시작 했다. 군데군데 파괴된 도로들. 평균 시속 10~20 킬로미터였고 타이어는 펑크로 다섯 번이나 때워야 했다. 그러면서 만난 베트남 전쟁의 인간들. 지뢰와 불발탄 이 남아 있는 그들의 삶 터. 우리는 소련제 지프로 갈아타서 베트남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베트남 최대의 정선 산맥을 동에서 서로 가로질렀다. 라오스 국경 근처. 전쟁 당시 혁명의 근거지였던 알 루이 마을. 북베트남의 최 대의 보급 기지로 이곳에서 호치민 루트를 따라 베트남 전역으로 전쟁 물자들이 보급되었다. 네이팜 탄으로 불바다를 만들고 다시 정글이 자라면 고엽제로 백색 지대를 만들었던 곳. 이곳의 휴유증도 여느 곳과 같았다. 전쟁 중의 병사들 몸에 뿌려진 화학 물질. 그 화학 물질은 55 갤런들이 드럼통 가운데 오렌지 색의 띠가 그려져 있어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 라고 부른다. 이 화학제는 베트남의 정글을 제거하기 위해 뿌려진 제초제로 62 년부터 71 년 ‘작전 중지’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전쟁은 그 후 4 년이 계속된 다. 그런데 왜 사용이 중지 됐을까?) 베트남 국토의 18 퍼센트인 500 만 에이커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낳았던 자식들, 실명한 아이들, 목발을 짚고 서 한쪽 다리가 말라 버린 청년, 신경이 마비된 채 인형처럼 아버지가 움직여주는 대로만 사지를 움직일 수 있는 아이들. 정선 산맥의 가장 깊숙한 곳 어디에도 나무가 없었다. 그렇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비가 오고, 해가 뜨고, 무수히 많은 날들이 지나갔지만 베트남 전체의 산맥 은 파괴된 채로 죽어 있었다. 모두 죽은 산이 된 것이다. 나무도 전혀 없고 감자 나 고구마 같은 화전도 안 되고,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풀만 자라나기 시작 했다. 그곳의 주민들은 이 풀을 ‘아메리칸 호프 (AMERICAN HOF)’라고 이 중의 의미로 불렀다. ‘희망(HOPE)이 사라진 곳, 그 속에서 자라나던 아메리칸 호프.’ 2 차대전 이후 최대의 비극으로 간주되는 베트남 전쟁, 이 무서운 비극은 누구 의 죄이고 누가 책임질 것인가? 무엇을 위해 싸웠을까?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 군 그리고 미군들, 부산항에 돌아온 우리의 한국 병사들. 그들에게 베트남 전쟁 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병사들의 몸 속에서 ‘느린 탄환’(SLOW BULLETS: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고엽제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 되어 박 혀 있었던 것이다. 촬영을 끝내고 TV 방영을 타진하고자 가편집된 VHS 와 구성안을 MBC 에 제 출했다. 혹시 MBC 노조의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 파업이 끝난 뒤를 택했다. 결 과는 퇴짜였는데 그 이유가 모호했다. 고위층 몇 분은 작품이 좋다고 했지만 최 고위층이 혹시 대통령 선거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어 방송하기 곤란하다 는 것이었다. 그 때가 92 년 10 월 말이었다. KBS 에 다시 제출하였다. 그리고 KBS 에 양국간 피흘리는 전쟁을 치른 베트남 과의 수교가 임박했다는 정확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러나 KBS 도 작품의 비 판적 시각을 약간 우려했는지 방영 의향만 보이고 최종 확답은 피했다. 시간은 점점 흘러 12 월 13 일 오후, 4 시였다(시간도 잊을 수 없다. 판매를 못할 까봐 계속 애타던 때라). KBS 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5 일 후 베트남과의 수교 소식을 이제야 알게 됐는데 수교 전날인 17 일까지 1 편을 급히 제작할 수 없겠냐 고. ‚아니, 4 일밖에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도저히 만들 수 없습니다. 가편집에서 본편집해야지요. 그게 3 일이지요. 자막 넣고 하면 2 일, 그리고 90 분짜리니까 원 고는 최소한 3 일. 다시 녹음해야지요. 열흘은 있어야겠는데요. 이건 불가능합니 다.‛ ‚이게 불가능하면 방영도 불가야. 방영 제의는 없었던 일로 해야 돼.‛ ‚너무합니다. 저희들이 그렇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연내에 틀림없이 수 교를 한다고 했고, 바로 1 주일 전에도 수교가 암박했으니 편성 예정이라도 먼저 알려 달라고 했을 때 연내에 방영은 전혀 없다고 말씀하시더니 이제 와서 그렇 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우리도 오늘 아침에야 알아서 어쩔 수 없네‛ ‚그럼 하루만이라도 늦춰서 수교하는 날 방송하면 어떻겠습니까? 5 일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안 돼. MBC 가 수교하는 날 보도국의 보도 특집으로 이미 편성을 했으니 우 리는 하루 전날 꼭 방송을 내보내야 하네.‛ 미칠 노릇이었다. 그로부터 4 일 뒤 방송 한 시간 전에야 한, 베트남 수교 특집 제 1 부 ‘베트남 전쟁 그 후 17 년’을 방송 주조실에 넘겨 줄 수 있었다. 그로부터 1 년 10 개월이 지난 93 년 10 월 1 일, 항공사 타임 레이블에 전혀 올라 있지 않은 미국의 마이애미에서 쿠바의 아바나로 향하는 마이애미 에어에 촬영 팀과 함께 탑승해 있었다. 쿠바. 당시까지 국내에 외신으로만 알려져 온 나라, 북한과 더불어 가장 폐쇄


적인 나라며 사회주의 국가의 전위대 역할을 해온 작은 섬나라.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혁명이 성공한 뒤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으면서도 초강대국 미국의 코 앞 에서 35 년간을 대치해 온 불온(?)의 나라였다. 나는 그들의 역사를 정확히 알고 싶었다. 우리가 배웠던 것이 올바로 기록된 역사였는지 진실을 대조해 보고 싶었다. ‚짝짝짝!‛ 요란한 박수소리가 쿠바의 호세 마르티 공항에 비행기의 착륙을 알려 주었다. 비행기가 미국의 봉쇄를 뚫고 쿠바에 무사히(?) 착륙했음을 축하하는 것 같았다. 동경의 쿠바 대사관을 몇 번이나 찾아갔고 본국의 쿠바 외무부에 취재의 취지 를 명확히 설명하면서 취재 요청을 시작한 지 8 개월 만에 마침내 쿠바 정부의 취재 승인을 팩스로 받아 낼 수 있었다. 그 후에도 한국의 외무부와 안기부, 문 공부를 수없이 들락거리며 50 일 만에야 취재 허가를 손에 쥘 수 있었던 과정을 겪은 터라 설렘과 약간의 불안도 있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입국 심사를 쉽게 통과하고 공항을 빠져 나오는데 당연히 나와 있어야 할 CPI (CENTER PRESS INTERNATIONAL: 국제기자센터)의 관계자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한 후 오후 늦게야 세 명의 관계자들 이 나타나 말했다. ‚미안합니다. 진실로 우리는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저희에게 내부적 문제가 발생했으니 취재를 보류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이게 웬일인가? 청천벽력이었다. ‚저희도 죄송합니다만 무슨 이유입니까? 내부적 문제가 발생했다니 어떤 문 제입니까?‛ 마음의 충격을 최대한 감추고 예의를 갖춰 반문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으니 다음을 기다려 보 십시오.‛ ‚다음이란 언제입니까? 이 프로는 95 년 1 월에 KBS 에 방영되기로 되어 있는 데 이제 시간은 3 개월 정도밖에 없습니다.‛ ‚정확히는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10 월 말까지 우리의 입장을 다시 팩스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쿠바 정부의 공식 취재 허가와 취재 협조에 대한 구체적인 비용 협의까지 마 친 상태에서 돌아가라니? 이것이 쿠바의 본 모습인가? ‘이걸 어째? 베트남에서 처럼 단식 투쟁을 해야 하나?’ 베트남 취재가 종료될 때쯤 전쟁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인 보겐잡 장군, 반첸 둔 장군, 외무장관과 전쟁시 외무장관들의 취재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때 나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단식하며 호텔 방에 드러누웠다. 그 때처 럼 한번 더 해봐? 아니면 쿠바 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하고 국제 여론에 호소를 할까? 온갖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취재팀은 꼼짝없이 호텔 방에만 10 일간 머무 르다가 CPI 의 서류 한 장만 들고 일단 철수했다. 서류의 내용은 한 달 이내에 취재 집행에 대해 통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와 목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CPI 의 회신은 오지 않았다. 울화통이 터졌지만 약속한 팩스의 회신 을 정중하게 요구하였다. 이틀에 한 번꼴로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쿠바 외무장관과 카스트로 대통령 에게 정중하게 상황을 알리면서 협조를 요청하는 팩스를 띄웠다. 그래도 답장이 없자 단신으로 다시 쿠바에 쳐들어갔다. 불쑥 나타나 회담을 요청하니 CPI 측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현재 KBS 에 손해 배상을 해야 할 입장에 있다는 것과 방영 예정일인 94 년 1 월이 불과 50 일 남았으니 지금 촬영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 를 높였다. 취재가 번복된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도 이 때쯤이었다. 개 방을 지향하는 쿠바 외무부는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꾀했으나 동맹국인 북한을 지지하는 내무부의 강경론자들이 반발하고 나섰고 동시에 북한이 이의를 제기했


던 것이다. CPI 의 엑토로 소장은 그 자리에서 한국의 다른 방송사에서 취재 허가 요청이 들어온 것을 알려 주었고 우리는 인디컴의 취재가 끝날 때까지 타방송의 취재를 불허하겠다는 약속만을 받아 내고 다시 물러섰다. KBS 와 방영 시기를 3 월까지 늦추고 팩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12 월 31 일, 결국 팩스는 오지 않았다. 애가 탔다. 쿠바 때문에 회사가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KBS 는 쿠바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며 쿠바 입국 후 지불한 계 약금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취재가 다시 성사될 경우 재계약하자고 했다. 사면초 가의 심정이었다. 우리는 2 월 말까지 회신이 없을 경우 계약금을 반환하겠다는 서류를 제출하고 속으로는 쿠바의 CPI 가 죽도록 미웠지만 예의를 잃지 않고 정중함과 간곡함, 최 소한의 협박을 곁들여 쉴새없이 전화와 팩스로 연락했다. 설상가상으로 CPI 의 소장이 2 월 말로 임기를 끝내고 외국 대사로 승진 발령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되 었을 때에는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그렇다면 누가 약속한 취재에 대해 책임질 것인가? 해답이 없었다. 촬영팀을 이끌고 94 년 2 월 23 일 무작정 쿠바로 떠났다. 2 월 25 일자로 외무 장 관 면담을 요청한 팩스를 띄우고 입국 사실을 숨긴채 25 일의 면담 요청 사본만 을 CPI 로 넣어 주었다. 결국 엑토르 소장은 우리의 돌발적인 입국을 못마당히 여겨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였고, CPI 는 공식적인 협조를 못 하니 국영 관광공 사의 협조로 3 월 13 일까지 20 일간만 취재하라고 했다. 장관과의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외무 장관의 결단이 내려졌던 것 같았다. 이튿날부터 스케줄이 죽 잡혀 있었던 것이다. 고위층 인터뷰와 북한 관계, 군사 정치 관계에 대한 부분이 취재에서 제외되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지옥에서 천국으 로 건너온 느낌이었다. 아바나에서 시작된 촬영이 산티아고 데 쿠바를 지나 쿠바의 최남단인 관타나 모의 미 해군 기지를 촬영할 때 쯤 우리는 쿠바 정부를 자극하지 않는 차원에서 허가받지 않은 부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공습에 대비해 건설하는 100 미터 가량의 땅굴 내부와 사탕수수를 씹으며 행군하는 쿠바군들. 요령껏 꼭 필 요한 영상들을 모아 나갔다. 촬영 17 일째인 3 월 13 일, 고위층 인터뷰를 하지 못해 안절부절하던 차에 국가 공식 행사를 급습하여 인터뷰를 시도하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 날 독재 자 바티스타의 습격을 기념하는 집회에 고위 관료들이 다수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아바나 대학에서 기다렸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다른 쿠바 촬영팀과 섞여 촬영을 시작, 마치 등록된 기 자처럼 위장했다. 한 시간쯤 뒤 우리가 인터뷰를 요청했던 7 인의 인물 중 한 사 람으로 서열 4 위인 리카르도 알라르콩 인민정권 회의 의장을 잡았고, 쿠바 공산 천년동맹 위원장인 후안공띠노를 인터뷰하는 데 성공했다. 예술협회장인 아벨 프리토와 혁명 당시 여성 혁명가였던 밀바에르난데스를 잡 으려 했으나 이미 우리의 정체가 발각된 터라 더이상의 인터뷰는 할 수가 없었 다. 인터뷰를 요청한 인물이 눈앞에 있는데도 못 하는 안타까움이란... 다음날, CPI 에서는 난리가 났다. 취재팀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였다. 촬영팀과 유진규 PD 에게 꼭 촬영해야 하는 내용과 이동하면서도 찍을 수 있는 그림, 밤에 쿠바팀이 없을 때 몰래 촬영이 가능한 것들 등으로 분류, 지시한 후 전략상 혼 자 귀국길에 올랐다. 서울에서 팩스로 매일 취재 상황과 촬영 콘티를 주고 받으면서 5 일 후 네번째 로 다시 쿠바행 비행기를 탔다. 그 동안 촬영 팀은 예정되었던 내용의 65 퍼센 트 정도를 찍었다. 내가 아바나에 들어가는 날 촬영팀은 한국으로 철수하고 유 진규 PD 만 남아 나와 합류, 마지막 모험을 감행했다. 쿠바의 촬영팀을 고용하여 쿠바 내반체제 인사들과 인터뷰를 감행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쿠바를 떠났다.


3 월 28 일이었다. 전투나 다름없었던 6 개월간의 쿠바 취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마지막 전선 이 되어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던 쿠바인들. 최악의 경제 위기를 ‘특별 시기’로 이겨 내려고 하는 쿠바. 어느 쿠바인들은 쿠바가 ‘특별 시기’를 만 남으로써 진정한 독립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90 년대 역사의 변환기여서 쿠바 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쿠바인들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쿠바는 3 부작으로 정리되었다. 100 년간의 독립전쟁과 완성되지 못한 쿠바 혁 명이 제 1 부는 ‘미완의 혁명’으로, 제 2 부는 쿠바 혁명을 지지한 최초의 지성인 이었던 헤밍웨이, 제 3 세계의 순수한 자유인으로 혁명에 참가한 체게바라와 그곳 의 한인들을 ‘이방인들의 조국’으로 묶었고, 혁명의 신화를 잠시 이루었지만 세계사의 변혁의 물결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쿠바의 오늘을 제 3 부 ‘마체테로 (사탕수수를 베는 영웅)의 희망’으로 설정했다. 혁명이 성공한 사회주의 국가 쿠바, 그 쿠바의 역사가 한국 방송계에 최초로 방영된 후 정작 언론보다도 KBS 내부에서는 다음날 난리가 났다. 사외주의 혁 명을 미화시킨 것이 아니냐고. ‚도대체 어떻게 이런 프로그램이 KBS 에서 방송될 수 있는가? 내용 확인하고 문제가 되는 부분은 모두 삭제해!‛ 고위층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다. 2 부와 3 부의 해설 대본 중간중간에 빨간 줄이 그어졌다. 오후에 녹음을 완료 했으나 방송되기 네 시간 전 또다시 방송 주조실에서 중간중간 중요한 인터뷰들 을 삭제하고 있었다. ‚아니,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자르려면 상대방 인터뷰도 같이 잘라야지요. 한쪽만 자르면 내용이 왜곡됩니다. 절름발이입니다. 정말 이럴 수는 없어요.‛ 크게 화를 내며 정신없이 뛰쳐나왔다. 1 년 6 개월간의 작업이 한 순간에 갈기 갈기 조각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한쪽 면만 보게 된다는 분노 때문이었 다. 그런 상태로 방영된 지 1 주일이 흐르고, 간부들은 얘기했다. 요즘 잠시 신공안 정국으로 흐르는 상태니까, 이해하라고 있다. 나는 전쟁을 모른다. 직접 겪지 않았기에.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의 인간들의 모습과 그 현장을 보았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나? 나는 제국주의를 모른다. 제 국주의의 실체는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나 내가 만났던 그들은 똑같이 얘기한다. ‚얼마나 더 많은 죽음이 있어야 이 전쟁을 끝낼 것입니까? 베트남과 쿠바. 그들은 모두 약소국이었다. 우리 나라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강대국으로부터 침략당했고 식민 시대의 쓰라린 역사를 갖고 있다. 내가 그들의 역사를 내 작업 에 담은 것은 단지 역사를 바로 보기 위함이었다. 보여지는 한 면보다 역사의 두 면을 통해 객관적인 시각을 모두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사회주의를 미화할 생각도, 자본주의를 깎아내릴 생각도 없다. 더욱이 내가 사 는 이 땅은 자본주의를 택했고 나는 그 속에서 30 년 이상 살고 있는데? 또한 내 나라를 사랑한다.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구수한 된장같은 한국인의 정서와 5,000 년의 문화를 사랑한다. 다만 잘못된 것은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한 다. 취재 중 만난 칠레의 미겔 리틴 감독은 말했다. ‚독재는 항상 자유로운 정신을 탄압한다. 우익 독재이건 좌익 독재이건 모든 독재는 작가, 예술가,지식인들을, 민중에게 강하게 다가설 능력과 반항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탄압한다. 이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이 의식을 저지하고 지우기 위해 고문을 하고 감옥에 보내 죽인다.‛


때론 나는 두렵다. 표현에 대한 두려움은 예술가의 적이라고 했는데도 두렵다. 이데올로기의 가 면들이 두렵다. 이데올로기란 인간의 무엇일까? 이데올로기 속에 감춰져 평화로 이 살려는 인간들을 짓밟는 권력의 폭력이 두렵다. 수없이 만난 그 눈들. 또 다른 장소, 또 다른 시간에 만났던 수많은 얼굴들. 그리고 함께 살아왔던 그 시간들. 두려우면서도 내 가슴 한 구석에선 ‘고개를 들고 당당히 말하라. 자유롭게, 자신의 힘으로!’ 역사의 이면의 진실을 말하라 고 반역한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왜 그렇게 살아?‛ ‚자신만 괴롭히지 왜 남들까지 끌어들이나?‛ 가끔 어떤 이들은 묻는다. 왜 사느냐고. 또 나무란다. 똑바로 살라고. 자존심 보리고(?) 올바르게 살라고 한다. ‚잘 나가던데요. 돈도 꽤 벌었지요?‛ 그러나 그 흔한 자가용도 없고 후배 PD 와 단칸방에 살고 있다. 불혹의 나이인데도 결혼도 못했다. 삐삐도, 핸드폰도, 비자금도 없다. 통장에 따로 넣고 있는 돈도 없다. 95 년 매출이 20 억원인 회사의 대표(?)가. 자본주의가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일까? 돈의 논리가 인가의 삶의 척도로 될 수 있을까? 아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3 년 동안 앞만 보고 오로지 한 길만 조용히 걸어왔다. 특집 ‘베트남 전쟁, 그 후 17 년’(KBS '93), ‘사할린의 카레이스키’(KBS ’93), ‘좁아지는 바다’(KBS ‘93),‘카리브해의 고도, 쿠바’(KBS, '94), ‘ 신주꾸 양산박’(KBS '94), ‘상관촌에서 온 편지’(SBS ‘94), ‘1995.카스트 로의 선택’(KBS, ’95), 현재 KBS 의 ‘그곳에 가고싶다’(매주 금요일), SBS 의 ‘환경탐사, 그린맨을 찾아라’(매주 토요일)를 2 년 가까이 계속 방영하고 있 다. 그리고 3 년 동안 제작해온 영화 탄생 100 주년 기년 ‘세계 영화 기행’(20 부 작)이 방영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어렵게 어렵게 꾸려 나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촬영 일수를 줄이고, 프로그램 팀을 세 팀에서 투 팀으로, 헌팅 대신 전화로 대충 알아보고 현장 박치기를 하고, 독립 프로덕션이니 AD 없이 조금 싸게 찍 고...이런 식으로 한다면 우리 회사도 금방 경제적 여유가 생길 것이다. 돈을 벌 어 모두가 여유 있게 살아가기 위해 프로그램을 적당히 제작할까? 안, 아니다. 우리만은 그럴 수 없다. 방송 프로그램을 최소한 양심적으로 제작하지니 현실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 다. 방송은 최소한의 공익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독립 프로 덕션도 최소한의 공익성을 추구해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의 방송 프로 제작은 독립 프로덕션이건 혹은 대기업이건 모두가 극대한의 이윤만을 추구하고 있다. 방송을 상품을 만들듯이 찍어 내고 있다. 아니, 아니, 이럴 수는 없다! 3 년 동안 제작한 ‘세계 영화 기생’ 때문에 회사는 여러 번 망할 위기도 겪 었고 그 와중에서 좋은 동료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났다. ‚김 감독님이 저의 인생을 망쳤어요.‛라는 이도 있고 ‚도저히 힘들어서 더 이상 못 나오겠다.‛명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회사로 옮겨간 이도 있다. 얼마 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돈 때문에도 울었고 사람 때문에도 울었다. 포기하고 싶다. 그리고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로 회사를 경영하고 싶다. 합작 제의가 들어온 대기업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버리고 그들이 요구하는 51 퍼센트 의 주식을 주고 나도 이 경제적 고통에서 (이 고통이 내 인생 전부를 말려 죽이 려 한다.)에서 한 순간 해방되고 싶다. 인디컴은 Independent Communicator's Union 이란 취지로 후배들과 설립하게


됐다.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또한 자유롭고 진실되게 방 송 프로를 제작하여 한국 방송계에서 독립 프로덕션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치열한 자본주의 논리 때문에 독립 투쟁을 해야만 했 고 지금도 투쟁 중이다. 독립군은 슬프다. 2 년 전 크리스마스 전날 저녁, 동두천과 의정부의 혼혈아 가족 몇 집을 돌았 다. 쌀 다섯 포대를 차에 싣고. 그들과 한잔의 커피를 마시며 살아온 슬픔을 듣 고 나서 쌀 한 포대를 내려 놓고 나왔다. 그렇게 가슴 아픈 이들만 담고 싶고, 우리의 정신을 그러한 프로그램에 싣고 싶다. 내 사회를 제대로 보고, 제대로 전달하고 싶다. 우리의 꿈은 단지 그것뿐 이다. 꿈을 실현하자니 빚만 늘어나고 또 자본주의 논리로 경영하자니 공익적인 방 송에서 멀어질 위험이 많다. 환전한 모순이다. 현실의 방송 환경이 우리 작은 인간의 정신과 사회적 조건 을 파괴하고 있다. 회사가 어렵다 보니 우리와 일했던 많은 이들에게 노동의 대 가를 제때에 지급 못 한 경우도 많고 현재도 그렇다. 그 모든 분들에게 백배 사 죄한다. 최선을 다해 빨리 갚아 나갈 것이다. 다만 근본적으로 나쁜 정신을 갖고 있는 인디컴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용서를 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모두가 돈의 역사로만 달려가고 있는 지금, 모든 사 회가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도 우리는 마지막까지 한길을 가고 싶다. 지난해 연말 SBS 에서 상도 많이 받고 잘 나가던 장상일 촬영 감독이 우리 회 사에 합류했다. 아마도 연봉 1,500 만 원 이상 손해를 봤을 터이고 기타 작업 조 건도 더욱 열악하리라고 본다. 10 년 만에 다시 같이 작업을 하게 됐다. 쥐꼬리 월급에도 다시 인디컴에 불을 밝히는 이러한 이들이 있기에 내 가슴 속의 수많은 나날의 울음과 그 긴긴 고통을 감출 수 있다. 그리고 또다시 나에 게 묻는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미술, 내 생명의 아드레날린 노재령 1963 년 서울에서 태어나 뉴욕 대학에서 미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록펠러재단 펠로우로 활동한 적이 있고 현재는 프리랜서 큐레이터이다. 논문 ‘해외 미술 전람회의 국가적 정체성’ 을 발표하였다. 큐레이터 시대의 개막 1995 년은 그 어느 때보다 가시적인 미술 행사가 많이 개최되었다. 일반인에게 는 볼거리가 풍성하게 제공되었고, 미술인에게는 국내 미술계의 역량과 한국 현 대미술의 세계화의 가능성을 실감케 해준 한 해였다. 미술계의 가장 큰 행사는 뭐니뭐니 해도 ‘한국 미술의 잠재력을 확인한 행사 ’라고 일컬어진 제 1 회 광주 비엔날레였다. 61 일간 개최된 광주 비엔날레에는 약 163 만 명의 관람객이 찾아와 관람객 동원에 성공한 미술 전람회라고 평가받 았다. 하루 평균 2~3 만 명이 설치 중심인 난해한 현대미술을 보기 위해 전람회 에 다녀갔다는 사실은 가히 놀랄 만하다.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미술 전람 회인 베니스 비엔날레의 최고 관람 인원수가 100 만 명이고, 독일의 카셀 시에서 5 년에 한 번씩 열리는 도큐멘타전이 대략 30 만명을 헤아린다는 사실과 비교해 볼 때, 광주 비엔날레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미술에 대한 국민적 열의를 보여 준 계기라고 할수도 있다.


그러나 9 개월의 준비 기간으로 무리한 일정에 맞추어 졸속 행정으로 치러진 이벤트였을 뿐 아니라, 182 억 원이라는 과다한 예산을 지출했다는 미술계안팎의 비판과 반성의 목소리 또한 높았다. 인파에 떠밀려 미술 작품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북새통이 된 전시장은 미술의 실종을 느끼게 했다. 뿐만 아니라 작품이 파손되어 외국작가가 철수해 가는 소 동까지 일어나 전시실 관리의 문제로 지적되었다. 제 1 회 광주 비엔날레는 국내 일반인을 위한 구경거리로 일단락되었는데, 이러한 대규모 전람회와 복합문화 축제를 개최하면서 우리 나라 미술계의 전문 인재 부재와 미술 행정력의 전문성 결여가 미술계의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였다. 이는 미술 전문인 양성을 통해 앞으로 한국미술계가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창작하는 작가와 이를 수용하는 일반인을 연계해 주고 미술 문화의 매개자 역 할을 할 수 있는 전문가는 앞으로 서울과 지방에 미술관이 신축되고 그 규모와 기능이 확장되면서 수요가 더욱 많아질 것이다.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신축 미술 관 프로젝트는 삼성문화재단이 1999 년 서울 운니동의 운현궁터에 개관할, 미숙 의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현대미술관이다. 경주의 선재미술관 이 1997 년 서울 사간동 정독도서관 근방에 미술관, 영화관, 카페가 함께하는 종 합문화센터를 개관하여 색다른 미술 문화 공간을 도심지에 마련할 계획이며, 쌍 용그룹이 1995 년 11 월에 이미 송곡 미술관을 개관한 바 있다. 인사동에서 성장 한 금호미술관이 사간동에 공간을 확장하여 1996 년 6 월 개관을 앞두고 현재 공 사가 한창이다. 그외에도 한솔제지 미술문화재단과 대우 미술문화재단에서도 신 축 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전문 인력을 필요로 한다. 한국에도 미술관 문화가 본격적으로 도래하였다. 우리 미술은 근대화 과정에 서 일제의 문화 식민정책으로 인하여 왜곡된 역사로 출발하였고, 해방 후에는 좌우 대립과 친일 미술인들에 대한 박대, 한국전쟁이 흔적과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성장 일변도의 산업화에 따라 서구 미술 문화를 일방적으로 답습해 왔다. 그 결과 미술은 우리의 삶 속에서 소외되어 설 자리를 잃고 무기력해졌으며 일 부 계층의 향수 대상으로 전략하였다. 그 동안 어려웠던 성장기를 거쳐 전환점 을 맞고 있는 지금, 우리가 미술을 가까이하기 위해서는 미술관의 역할과 기능 이 필수적이다. 모방과 주입식, 암기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초, 중, 고등학교의 미 술 교육은 반미술적일뿐 아나라, 입시 중심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이게 미술이란 부담스럽고 귀찮은 과목일 뿐이다. 따라서 작품을 직접 대하면서 미술에 대하여 체험하고 사고케 하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미술관은 학교에서의 미술 교육 의 부재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더욱 큰 몫을 가지게 될 것이다. 큐레이터를 필요로 하는 공간이 증설되고 있는 우리 미술계의 실정에서 이제 큐레이터의 역할을 제대로 정립하고 잡아 나가야 한다. 그 동한 세분화, 전문화 되지 못했던 미술계에서 이름있는 작가들이 창작 활동 외에도 미술 교육을 전담 하고, 미술계의 요직에서 미술 행정 전반을 주재하여 헤게모니 세력을 구축하던 시절과는 달리, 2 년 전부터는 ‘큐레이터 시대의 개막’이라는 문구를 자수 접 하게 되었다. 한국 미술계의 신진 세력으로서 한국 미술의 세계적 위상을 결정 지을 전문가, 그들 큐레이터의 가능성을 기대해 본다. 큐레이터가 뭘 하는 겁니까? ‚큐레이터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공부하면 되나요?‛ ‚미술관에선 언제 또 큐레이터 뽑습니까?‛‚큐레이터 시험은 뭐뭐 봐요?‛ ‚미술대학 졸업하고 그 동안 애기 낳고 살림해 온 주부인데 다시 공부 시작해서 큐레이터 하고 싶은데 요. 어떻게 하면 되지요?‛그 동안 많은 젊은 여성들이 내게 전화로 이런 문의 를 해 왔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근무하는 중에 갑작스레 이런 문의 전화를 받으 면 늘 당혹스럽다. 대학에서 미술 공부를 했거나 미술에 남다른 관심이 있는 사 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호기심을 가지면서 언제부터인가 인기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아직 우리 나라에는 큐레이터를 양성하는 학과 과정도 없고, 미술관에서 실무 를 연수받을 수 있는 전문인 양성 과정도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큐레이터가 하 는 일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부족하고 취직의 길이 재방되어 있지도 않은 실정 이다. 오죽하면 국립현대 미술관 학예연구실의 어느 큐레이터에게 무턱대고 전 화를 걸어 문의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섣불리 내가 모르는 사람의 진로에 대 해 이래라 저래라 대답하기가 어렵고, 전화 한 통화로 자문에 답한다는 것이 조 심스럽다. 나 역시 미술관에서 일하겠다고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미술관을 찾 은 경험이 일찍이 있었다. 그때 문전박대를 당한 경험 때문에 나는 미술관에서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미술관의 문턱이 높다고 실망시키고 싶지가 . 다만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우리 나라 대부분의 미술관이나 화랑 에서의 큐레이터의 역할과 위상, 대우 등의 문제에 대해서, 그러니까 큐레이터의 실체에 대해서 알려 주고 싶다. 대체로 큐레이터들은 학력과 경력에 비해 열악 한 보수와 구조적인 모순을 무릅쓰고 미술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사 명감을 갖고 이 일을 한다. 그리고 미술계가 건강한 한 큐레이터들은 미술계의 선두에 서서 앞으로의 전망과 비전에 대한 바람을 안고 오늘날의 역경을 참고 견디고 있다. ‚큐레이터가 뭐예요? 큐레이터는 뭘 하는 겁니까?‛ 내가 명함을 내밀 때 자 주 듣는 질문이다. 글쎄... 작가에게는 자신이 전시회를 도와주과 귀찮은 업무를 대행해 주는 사람일 수도 있고, 미술관이 관장이나 화랑의 대표에게는 잡무를 처리해 주는 심부름꾼일 수도 있고... 굳이 정의 비숫한 것을 내리자면 큐레이터 란 미술관의 작품을 수집, 연구, 보존하고 전시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전문 인력 으로서 일반인이 미술 작품과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미술계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정석에 가장 가까운 정의가 아닐까 싶다. 비술관 의 기능 과 역할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근거로 하여 큐레이터의 업무를 이해해야 하고, 큐레이터로서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미술관에서 전문가다운 위상을 찾을 필 요가 있다. 그래서 큐레이터 수업의 첫 단계가 미술관학/박물관학(museology 또 는 Museum studies) 공부일 것이다. 미술관/박물관(museum)이란 용어의 어원이 이야기해 주듯, 인류 최초의 미술 관은 기원전 300 년경 알렉산드리아 시에 위치한 학예의 여신 뮤즈를 모신 신전 인 뮤세이온(museion)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신전의 기능과 더불어 식물원, 도서 관, 집회장이 함께있는 복합적인 공공 기관이었다고 전해진다. 주로 과거의 자료 와 유물 수집, 보존 연구 중심의 museum 에서 점차 서구의 근현대 미술관은 관 람객들과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사회적 공익 기관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오늘날의 미술관은 일반인을 위한 레저와 휴식, 문화 향수와 지적 욕구를 충족 시키는 활력 있고 유익하고 재미있는 공간으로서 사람들의 삶에 근접해 가고 있 다. 이렇듯 미술관의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큐레이터의 역할 또한 확대되었다. 오늘날 큐레이터란 과거의 큐레이터의 업무인 작품의 수집, 보존, 연구뿐만 아니 라 미술 문화의 매개자로서 전시 기획과 미술 행정, 미술관 교육 등의 업무가 추가되어 비술관 전반에 대한 노하우와 행정력을 갖추고 미술관의 연구원으로서 특수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겸비하여야 한다.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적 위상과 평가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좋은 작업을 하 는 작가가 필요하며, 그 작가를 대외적으로 알려 주는 매개체인 미술관이 제 몫 을 하여야 한다. 미국 뉴욕의 근대미술관은 ‘The New American Painting'이라 는 전시회를 기획하여 1958 년에서 1959 년에 걸쳐 유럽 대순회 전람회를 기획하 였다. 일찍이 유럽에서는 미국이 미술은 지엽적이고 보수적이며 유럽 미술을 모 방하는 아류 정도라고 치부하였으나 ’The New American Painting'전람회는 유럽의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면서 미국 미술의 독창성과 특수성, 미 국적인 미술에 대한 담론이 유럽으로 회자하게 되었다. 1960 년대 들어서 미국은 세계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60 년대와 70 년대에 이어


새로운 미술운동이나 양식은 미국을 중심으로 생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미국 미술의 세계화를 주도한 주체는 뉴욕의 근대미술관이라는 평가를 미국의 여러 미술사가들이 내린 바 있다. 현대미술의 많은 사조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게 느껴지고 또한 쉽게 접할 수 있는 야식은 팝아트일 것이다. 팝아트는 1952 년경 영국에서 등장하였는데 미국에서는 몇 해 뒤인 50 년대 중반에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팝아트 계열의 작가들은 서로 동일한 양식도 없었고 어떤 조직 이나 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된 미술운동이나 움직임도 아니었다. 다만 감정이 배 제되고 적나라하고 키치스럽고 저급한 이미지들이 여러 작가의 작업세서 비슷하 게 등장한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접하는 환경에서부터 가공된 이미지들을 차용하여 상품의 대량 생산과 소비, 대중 매체의 범람으로 특징지어지는 자본주의 산업 사회를 반영하 는 미술이었다. 대량 복제, 획일적인 사고 모방과 기호만이 만연하는 문화에 대 한 인식을 새로운 조형언어로써 구현하는 미술 사조였다. 그런데 이같은 미국의 팝아트가 국력에 힘입어 유럽 지역, 라틴아메리카와 일본 등지로 확산되면서 세 계적인 미술 양식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팝아트의 동시대성은 이러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 우선되었다. 이는 일련의 중요한 전시회와 이를 기획한 작가와 큐레이터들의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런던의 건축가, 미술 평론가, 미술 작가들이 모여서 결성한 인디펜던트 그룹이 라는 작은 모임이 있었는데 이들 중 평론가 로렌스 알로웨이는 다음과 같이 말 했다. ‚우리는 서로 대중 문화를 공유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이는 미술, 건축, 디자인 또는 미술 평론에서 각자 서로 다른 관심사 또는 재능의 별개성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공통 부문, 접목되는 부문이라는 것은 대량 생산되고 복제되는 무화였던 것이다. 영화, 광고, SF(science fiction)등 대부분의 인텔리와는 달리 우리는 소비 문화에 대한 혐오감 같은 것은 없다. 그 모든 것을 주어진 시대적 조건으로 받아들일 뿐이며 우리는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였고 이를 적극 적으로 포용하였다.‛ 알로웨이는 팝아트 전시의 기획과 이론을 구축하는 작업뿐 아니라 차후 뉴욕 에 있는 휘트니미술관의 큐레이터로 활약하면서 난해하고 복잡 다양했던 60 년대 미술을 정의해 주는 일련이 전람회를 기획하였다. 미술관의 전시회란 또한 동시대의 작가들에 의해 창출되는 다양한 작업과 다 채로운 양상, 어떻게 보면 정리가 안 된 카오스적인 현상 속에서 동시대성을 읽 어 낼 수 있는 미술의 성향을 포착하여 그 내용을 전시로 기획하고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시회 역사, 사회와 문화를 비추어 주는 거울의 역 할, 즉 미술사의 선두에서 미술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 는 미술사를 처음 기술하는 미술사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 시대의 미술 동향 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는 뚜렷한 주관과 철학이 요구된다. 30 세가 되기까지 나는 아버지가 외교관이어서 일찍부터 해외 생활을 해야 했고 한국과 외국을 몇 차례 오고 가면서 성장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유치원 등록비가 비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어머니는 해외 근무를 시작하면 큰딸을 유치원에 못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는데, 그 덕(?)에 나는 서울에서 남보다 일찍 유치원 에 다녔다. 언니 오빠들 뒤를 쫓아다니면서 유치원생들로부터 아기라고 귀여움 도 받았으며 남들 하는 대로 따라서 대충 시늉을 내며 사회화 과정을 시작하였 다. 그리고 곧바로 캐나다로 이주하면서 그곳 유치원으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영어를 못하는 나는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동네의 한국 남자 아이를 졸졸 쫓아 다녔는데 아이들이 ‚재령 is xx's girlfriend‛라고 놀려 대니까 그애가 나를 떨 쳐 버리지도 못하고 아주 귀찮아했다고 한다. 6 개월 만에 유치원 수준 영어를


마스터하고, 한국에 돌아올 때쯤에는 본토 발음으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다. 길게 딴 갈색머리를 하고 오빠가 다섯이나 있던 제인이라는 단짝 친구와 헤어지 고 한국에 돌아와 국민하교에 들어갔을 때, 나는 국어 교과서를 읽지도 못해서 방과 후 날마다 교실에 남아 담임 선생님과 함께 국민학교 1 학년 교과서부터 읽 고 쓰기 공부를 하였다. 그러니 다른 수업시간에는 선생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 했을 터이고 재미도 없고 해서 나는 수업 시간에는 꾸벅꾸벅 졸다가 쉬는 시간 에는 누구보다도 공기놀이를 열심히 하고, 점심 시간이 되면 제일 먼저 도시락 을 후닥닥 꺼내서 먹었다. 낯선 환경과 언어와 관습을 거의 스무 해 동안 답습해 오면서 주어진 환경에 나 자신을 맞추며 새로움에 대한 충격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현실의 조건들을 수 용하면서 컸는데 대체로 순조로웠던 것 같다. 나라마다 다른 문화와 생활환경과 학교 생활을 비교하면서 내게 주어진 현실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사회적인 것이든 관습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간에, 절대적이라고 판단 되지 않는 현실의 모순을 받아들이는 게 내키지 않았다. 싫은 것에 대해 거부하 는 작은 반항의 정서가 내게 있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고등하교 때 청소를 빼 먹고 도망을 가기도 하고, 명상 시간에 친구들과 먹을 것을 가지고 학교 옥상에 올라가 숨어 있다가 수업 시작하는 시간에 몰래 교실에 돌아오기도 했다. 한국 의 고등학교란 참기 어려운 규제와 획일화의 관정이었고 금기 사항이 난발한다 고 느꼈다. 게다가 머리, 소지품, 속옷 검사 등 학생들의 몸에 대한 선생님의 검 열에 무척이나 화가 났으나 학교의 제도 안에 머물면서 그 제도의 통제에 반항 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미술대학 1 학년을 마치고 나는 겨울 방학에 가족을 따라 미국 워싱 턴으로 갔다. 이 곳은 라파이엣이라는 프랑스인이 설계한 도시인데 백악관과 국 회의사당을 연결하는 펜실베이니아 대로가 중심축을 이루고 도심지가 바둑판 무 늬같이 질서정연했다. 그러나 도시의 공간은 논리적이고 인공적이라 매력이 없 었다. 정치 외교의 중심가로 미국에서 변호사가 갖아 많이 모여 산다는 도시. 미 술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특별히 재미가 없는 곳이어서 나는 뉴욕으로 가기를 갈망하였다. 하지만 뉴욕은 무서운 도시이고 결혼하지도 않은 여자가 혼자 살 만한 곳이 못 된다는 부모님의 강경한 반대로 나는 워싱턴을 벗어날 수가 없었 다. 워싱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왠지 다시 돌아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학교를 마치고 귀국한 뒤 나는 이력서 한 통을 들고 무작정 국립 현대미술관 을 찾았다. 인사 채용 문제는 관리과에서 총괄하겠거니 하는 생각에 미술관 사 무실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다가 관리과로 들어가 이력서를 내밀었다. 나는 이러 이러한 사람이라 미술관에서 일하고 싶다. 사람 필요하면 꼭 좀 생각해 봐 달라 고 하면서 전문 인력을 채용할 계획이 없느냐고 물었다. 물론 어림도 없다는 답 변을 듣고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던가. 아마도 내가 나간 뒤에 관리과에서는 한바탕 웃으면서 저런 숙맥도 다 있군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국립현대미술관하고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인 1989 년 봄,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큐레이터를 공채한다고 공고하였다. 미술관 큐레이터가 전문인이기보다는 국가 공무원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국민윤리, 국어, 세계문화사, 영어를 비롯하여 전공 분야 과목을 시험 본 뒤 1 차 합격하였고 공 무원의 의무 등에 대해 물어 보는 면접을 통과하여 나는 큐레이터에 입문하였 다. 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의 미술 행정을 주도하고 해외와의 미술 교류의 창구라는 인식 아래 미술관 일을 시작하면서 포부도 컸던 것 같다. 국내 몇 안 되는 큐레이터 중에서도 가장 큰일들을 해내는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의 일원 이라는 풋내기다운 자부심도 있었다. 출근길 과천 서울랜드를 끼고 미술관 진입


로를 따라 올라가는 청계산의 기운 넘치는 경치는 화창한 날 아침이든, 비 오고 흐린 날 안개가 드리운 촉촉한 아침이든 언제나 작은 감동과 설렘을 안겨다 주 었다.미술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오라면 가고 가라면 나오고 하면서 전시과에 자리 배정을 받아 말만 큐레이터지 과장, 계장, 6 급 주 사의 지시를 받으며 내가 할 일과 설 자리를 파악하지 못하던 때였다. 미술관 일을 시작한 지 이틀 뒤인가 옛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시의 미술관장 이 한국에 초청되어 우리 나라와 동구권과의 미술교류전에 관함 협의를 위해 미 술관을 찾았다. 나는 갑자기 관장실로 불려가 유고의 관장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통역을 했고 미술관 전시실을 돌아보면서 미술관 소장품과 전시에 대한 안내를 맡았다. 이것이 미술관에서의 나의 첫 기억이다. 이를 시작으로 나는 그 후 수없 이 많은 외국 인사를 안내하면서 미술관이 역할과 위상, 한국 미술을 홍보하는 대외 PR 담당 대행 비슷한 업무를 떠맡게 되었다. 다른 행정붕서 초청한 외국의 주요 인사들이 관광 차원에서 미술관을 많이 찾았다.내가 미술관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 본 외국 손님이 아마 이스라엘의 고 이삭 라빈 총리의 부인이 었던 것 같다. 강인한 유태인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본인도 개인적으로 미술 애호가라며 그 때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던 외국 작가들을 관심 있게 보면서 이스라엘의 두 작가의 작품을 보더니 무척 좋아하며 그 작가의 작품을 자신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외국의 미술관장이나 큐레이터, 그리고 작가들과 미술관을 함께 돌아보며 한 국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안타깝게 생각되는 점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한국 미술이 생소하여 한국 작가의 이름도 모르고 작업도 모르기 때문에 조용히 설명을 듣고 이해하려는 성의를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끔은 한 국 미술을 선진국 미술의 아류 정도로 치부하고 싸잡아서 낮게 평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전시실 입구에서 눈대중 하고는 관심없다는 식으로 휙 둘러 본다 든지, ‘저 작가는 외국의 누구 누구와 흡사하다.’는 식으로 코멘트하기도 한 다. 모르는 작품을 접하였을 때 그것을 인지하고 해석하고 정의하기 위한 방법 으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중 흡사한 유형의 것을 떠올려 비교하 게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은 문화적으로 뒤떨어진다는 선입관과 독창성이 없다 는 단정하에 서구의 미술을 모방하고 유사한 아류만 생산해 낸다는 그들의 인식 에 의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 미술이 나라 밖에서 제 이상을 찾기 위해서는 이러한 외국 미술인의 인 식을 전환시킬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것은 한국 현대미술의 해외 전시회를 통해, 탄탄한 기획을 통해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한 나는 미술관에 근무한 지 3 년 만에 휴직하고 다시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 뉴욕 대학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학위 과정 중 나는 제 3 세계 미술운동, 식 민지 문화, 후기 식민지 이론(post-colonialism), 문화인류학에 관심을 갖고 해외 미술 전람회의 사례를 연구하는 논문을 쓰기에 이르렀다. 뉴욕에서의 생활은 미국 생활이 처음이 아니었고 영어에 불편함이 없는 나에 게도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야심 많은 사람들, 부귀영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 두 모여 사는 메가폴리스라고 느껴졌다. 세계 미술의 중심지라는 곳에서 몸으로 부딪치면서 도전해 보겠다고 각국에서 모여든 작가들, 핵으로만 접하던 저명한 미술사가들과 평론가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부터 소호의 갤러리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시 공간들... 뉴욕 미술계의 방대함과 정열에 나는 압도되었다. 책 보고 자료 찾아야 하는데 가 보고 싶은 전시는 너무나도 많았다. 결국 공부하고 미술하는 시간 외게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볼거리는 너무 많고 할 일도 많은데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였다. 그래서 뉴욕에서 몇 년 지내는 동안 부엌에서 음식 해 본 경우는 손꼽을 정도였으며 간단하게 하는 식 사 시간도 아까울 정도였다. 뉴욕 사람들처럼 길거리에서 한 손에 피자를 들고 먹으며 다니기가 일쑤였다. 미술이 마치 생의 전부처럼 여겨졌으며 미술을 먹고


마시며 지냈다. 나의 잠재력을 마음껏 방출한 시기로서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나는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특별 연구원 연구비를 받아 학위 논문을 휘한 자료 수집에 들어가는 한편, 논문의 연구 결과에 대하여 소속된 다른 특별 연구원들 과 세미나를 여러 차례 개최하였다. 대부분이 미국의 대학 교수인 이들과 교제 하면서 미국의 아카데미아에 있는 사람들이 학문하는 자세를 가까이에서 보고 본받을 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정열과 에너지에 우선 탄복하였고, 대 학에서 학문 하는 사람이면서 자기 분야에서 사회 활동을 많이 할 뿐 아니라 지 역 사회에 직접 참여하여 서민이나 이민 인구나 AIDS 환자와 동성연애계 등 어 려운 계층을 위해 헌신하는 학문의 태도를 배웠다. 졸업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되돌아왔다.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몇 년의 공백 기간 뒤에 찾은 미술관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개 선된 부분도 많지 않았다. 나는 다시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되어 실무를 담당하 게 되었다. 가장 힘겹지만 즐거운 일은 해외 전시 준비인 것 같다. 전시의 기획 과정에서 가장 우선되는 일이 전시의 기본 방향과 성격을 잡아 주는 것이며 여 기에 따라 작가를 선정하고 어느 작가의 어느 작품을 선정할 것인지 세부적으로 출품 작품까지도 완전하게 선정해야 한다. 작가수와 작품 수 등에 대략 전시 예 산이 측정되며 미술관의 1 년 예산에서 할당된 전시 예산액을 초과할 경우에는 예산에 맞추기 위해 기업이 스폰서십을 찾아 나선다. 전시 보험과 운송의 행정 적인 업무 처리가 뒤따른다. 일찍 서두르는 일이 전시 도록 작업이다. 전시에 대 한 설명 원고를 써야 학, 작가 약력이나 작품 목록 등 방대한 양의 텍스트를 정 리해야 하고 2 차, 3 차 교정을 봐야 한다. 도록 외에도 디자이너와 협의하여 전시 포스터와 기타 인쇄물의 레이아웃을 결정하는 준디자이너의 안목도 있어야 한 다. 가장 신나는 일은 전시 개막에 임박하여 작품이 운송되어 오면 이를 크레이트 에서 해포하는 것이다. 선물 포장을 뜯어 보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설레는 마음 으로 작품 하나하나를 면장갑 끼고 집안의 가보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크레이트 에서 빼내어 전시실 바닥에 늘어 놓고 디스플레이를 한다. 외국의 규모가 큰 미 술관의 경우 전시 디자인 팀이 따로 있다. 그래픽, 도색, 설치대와 특수 진열대 디자인, 조명 디자인 등 큐레이터와 협의하여 디스플레이를 책임진다. 디스플레 이가 끝나고 전시실 조명을 모두 조절하고 바닥 청소까지 끝나면 일반인에게 전 시를 공개하게 된다. 우선 개막식이 끝나면 한숨 돌릴 수가 있다. 그러나 담당 큐 레이 터에게는 전시 기간 중에도 그 전시를 계속 돌봐야 하는 책임이 있다. 하루에 몇 번씩 전시실을 돌아보며 작품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전시를 관람하 기 위해 찾아온 단체 관람객에게는 전시에 대해 설명한다. 가끔 방송국이나 신 문사에서 취재를 오면 작품 설명과 전시 홍보를 곁들여 카메라 앞에 서야 하는 데 마이크를 들이대는 순간 바짝 긴장하니까 평소에는 그다지 말을 잘 하지 않 은 사람인데 그 동안 여러 차례 다듬은 전시 관련 원고의 내용들이 빠른 속도로 정리되어 입밖으로 잘도 나온다. 미술관에서 전문 인력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큐레이터 본연의 업무를 고집할 수 없는 여건에 대해 고심한 끝에 나는 미술관을 사직하고 당분간 프리랜서로 내 재량껏 일하고 싶다. 예전의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뉴욕의 미술대학들 을 알아보고 수선을 피울 때 아버지는, ‚너는 왜 그렇게 실속 없는 공부를 하 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하셨다. 주변에 딸자식 가진 친구분들 보면 많 이 공부시키지 않고도 대학에서 경영학 공부하고 MBA 하거나 회계학이나 법률 공부해서는 한국에서 취직해 돈도 잘 벌고 안정된 생활하면서 시집도 잘 가던데 하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하나 있는 딸이 미술을 한다고 결혼은 생각지도 않고 작가들과 어울리며 지내는 바람에 부모님 걱정도 많이 시켜 드렸다. 속도 많이 상하셨을 게다. 그래도 언제나 딸자식에 대하여 크나큰 기대를 가지고 전적으로 믿어 주시고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셨고 나의 조그마한 성


취에도 크게 기뻐하셨다. 30 이 넘어서 오늘도 어린 님이 누구보다도 감사하다.

딸인 양 걱정해 주시는 부모

아내로서, 엄마로서, 일하는 여성으로서 30 이 넘어 가정 생활을 시작하였고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또 다른 사회화 과정을 밟고 있다. 남들과 비슷한 모양새의 생활을 하게 되면서 나는 예전의 나 의 모습과 현재의 나이 모습에서 얼마나 큰 외형상의 변화가 있는지, 그 변화에 대한 충격이 점차적으로 둔화되어 가면서 관습에 또다시 적응하는 과정이다. 30 이 넘은 오늘 나는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일하는 여성으로 살고 있다. 결혼 전 나는 부부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미술과는 무관한 일을 하는 남편을 만나 나는 그가 하는 일에 대 해서 어렴풋이 짐작은 하지만 잘 모른다. 그 역시 미술에는 곤심이 없어 내가 하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고 서로 아침에 집을 나와 저녁에 다 시 얼굴 볼 때까지 각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해를 못하는 만큼 서로에 대한 간섭도 없다.같은 일에 종사하는 부부들이 경우와는 달리 배우자에 대한 질투도 없다. 일하는 아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은가 보 다. 나에게나 아이들에게 무척 세심하고 다정한데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잘 한다’ ‘잘 되었구나’ ‘축하한다’는 말에는 인색하다. 모임이 있어서 저녁 때 집에 없거나, 주말에 점심 약속이 있어서 식구들과 함께하지 못한다거나, 출 장을 떠나서 아이들 아침 밥 챙겨 주고 도시락 싸 주는 일을 대신하거나 하면서 썩 내키지는 않겠지만 한마디 싫다고 말한 적이 없으니 그만도 감사하다. 아내 가 일을 함으로 해서 파생되는 크고 작은 번거로움들에 대해서 싫은 부분이 없 지는 않겠지만 이해를 하려고 노력해 주면서 그냥그냥 참아 주는 것 같다. 지난 1 년 동안 미술관을 사직한 이후 나에게는 프리랜서 큐레이터라는 지칭이 붙었다. 그래서 나는 주로 집에서 사무를 본다. 이제는 정보통신 테크놀로지가 보편화돼 점차 직장에서 해방되어 자율적으로 근무하는 전문인이 늘어날 추세라 고 한다. 얼마 전 미국 동부에서는 눈사태 때문에 교통이 마비되고 사무실이 폐 쇄되었을 때도 집에 발이 묶여 있던 사람들이 팩시, 전자우편과 인터넷으로 사 무를 보는 등 업무 처리하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틈틈이 신문도 읽고 부엌을 들락거리며 커피를 마시고, 그리운 친구들에 게 전호를 해보기도 하고 간간이 여유를 즐긴다. 그러는 중에 나의 일이란 사실 정해진 근무 시간이 없는지라 아침 일찍이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전화받고 팩 시 보내고 원고 쓰고 강의 준비하고 책 읽고 자료 찾고 사람 만나고 하는 일의 연속이다. PC 앞에서 글 쓰는 것을 늘 보는 아이들은 엄마를 공부하는 학생 정도로 생 각하는가 보다. 작년 나의 생일날에는 아이들이 화장품이나 꽃이나 먹을 것을 사다 주는 게 아니라 연필통을 선물했다. 직장 다니는 것은 아닌데 되게 바쁘다 고 생각하겠지. 집에 있는 시간에도 같이 놀아 주지도 않고 혼자 책상 앞에 앉 아 있거나 서류를 들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왔다갔다 한다고. 딸아이는 가끔 어두운 방에서 쉬고 있는 나더러 ‘밤의 여자’‘어두컴컴 여자’라고 부른다. 내가 외출했을 때 외국 사람의 전화를 자주 받아 주는 아들은 전에는 당황하더 니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Ms. Roe is not home."이라고 대꾸하고 저절로 영 어가 나온다고 뿌듯해 하며 상대방이 하는 영어도 알아듣고 내게 전해 준다. 전 업 주부인 엄마들처럼 아이들과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투정 부리지 않고 잘 자라 주는 것 역시 고맙다. 지금의 부족함은 아이들이 크면 이해해 주 리라 믿는다. 결혼을 하고 아내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생활하면서 나는 30 대의 여성들과 저 절로 공감대를 갖는다. 30 대 여성이라면 공통적으로 겪는 생활 패턴이 있고 나 이 들어 가면서 여기에 따른 의식의 전환에도 공통점이 많을 것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20 대에는 그래도 결혼과 직장이 본궤도에 오르기 전이라고 할 수 있 고 때로는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 졸업 후에도 학교를 다닌다든가 아니면 아이 를 낳고 가정을 돌보기 위해 한동안 살림에 전념하면서 직장일은 수년 뒤로 보 류하는 경우가 많다. 하고 싶었던 공부도 끝나고 아이도 웬만큼 커서 30 대에 접 어들면 한창 일에 전념하고 싶어지고 그럴 만한 여건도 조금 생기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가장 큰 장애 요소는 자식 교육 문제인 것 같다. 30 대 여성이 라면 누구든 우리 나라 교육이 가장 직접적으로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 에 다른 어떤 제도의 개선보다도 교육의 점진적이고도 대폭적인 개혁이야말로 가장 큰 바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 교육비에 매월 지출되는 돈이 월급 받고 생활하는 가정에서는 생활비의 30~50%를 차지하기 때문에 살림하는 주부들은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적자에서 헤어나기가 힘들다. 직장 다니는 여성들의 경우 특별히 수입이 높은 여성의 경우가 아니라면 근무 시간 중에 집에서 대신 아이 를 돌봐 줄 가정부 월급이 자신의 월급에서 50% 이상을 차지한다. 내 주변에서 도 보면 아이들이 저학년일 경우에는 여성들이 그런대로 자기 일을 계속하며 아 이들을 키운다. 집에 없으니까 주로 밖에서 전화 통화를 하면서 아이들의 일과 크고 작은 일처리에 대해 원격 조정을 한다. 과외하는 데에 데려다 주고 데리러 가고, 학교에 가서 급식당번 하고, 운동회, 소풍, 스승의 날, 학기 초와 학기 말에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서 인사하는 엄마들도 많은데 마음은 있으되 거기에 편승 해서 좇아 하기는 시간적으로 힘겹다. 그래서 일하는 여성을 풀타임 엄마로서 학부모로서 뛰어다니지 못한다는 점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 그러다가 아이가 고등학교 올라가서 새벽같이 등교하고 과외나 학원 갔다가 밤 늦게 오는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일하는 여성의 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주변 에서 많이 보았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 아침 먹이고 도시락 싸고 밤 늦 게 집에 돌아오면 밤참 차려 주어야 하고, 밤잠을 설치며 뒷바라지 하면 직장에 서는 피곤해서 일을 할 수가 없다는 얘기들을 한다. 그래서 일을 가장 많이 할 수 있고 경력이 10 년 이상 쌓이게 되는 30 대 말고 40 대 초반에 그만 포기하거나 아이가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 휴직하고 수험생 돌보는 여성이 많다. 그런데 문 제는 첫째를 치르고 나면 둘째가 있고 거기에 또 매이다 보면 어언 5 년, 6 년을 입시와 씨름하면서 살게 되고, 이러한 공백 기간 끝에 다시 일을 시작하기란 여 간 어려운 것이 아닐 일이다. 앞으로 나도 고등학교 수험생 학부모가 된다는 것은 피할 수가 없는 숙제이 다. 국민학생도 입시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갖는 만큼 나 역시 여기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에 대해 막연히 두려워진다. 그래서 나는 우리 나라 교육의 현실 에 대해 가슴에 쌓인 분노를 안고 사는가 싶다. 모순에 대해 항의하고 박차고 거부할 수는 없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들 하는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산다. 문제는 나이 분노가 그 대상물이 없다는 것이다. 가장 답답한 것은 무기력 하게 슬로건만을 남발하고 교육 개혁 선언을 공표하는 교육 당국이지만, 학교 제도와 교사들의 자질도 나를 화나게 만든다. 과외 과열로 큰 돈 버는 학원과 한 과목 가르치는 데 한 달에 200 만 원까지 요구한다는 과외 선생들의 과욕도 홧김에는 사회에 대한 악이라는 생각이 들고, 아이들을 부추기면 서로서로 경쟁 하고 경계하는 극성스러운 엄마들 역시 나의 분노의 대상이다. 내 자식의 일이 기 대문에 아이의 교육 문제에 대해서만은 나는 완전하게 무기력함을 느낀다. 맹목적으로 모순된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미술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늘 즐겁고 미술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나에게 아드레날린 촉진제와도 같이 원기를 회복시켜 준다. 미술이 우리 들의 생활 속에 위축되어 무력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관습과 타성에 젖어 들기 쉬운 나에게 늘상 충격과 자극을 주면서 나 개인과 일가족을 떠나 과거와 역사를, 오늘의 사회와 문화를 생각게 해주는 매개체이다. 미술계에서는 아마 여타 전문 분야보다도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비율을 차


지하고 있고 파워를 가진 여성이 많은 분야라고 생각된다. 미술대학만 보더라도 미술, 음악 등 예술 분야는 여성의 교양 함양 정도로 생각하는 의식에서 연유하 여 여성의 비율이 크다. 실기학과 학생들을 보아도 여학생의 비율이 높지만 특 히 국내에 몇 안 되는 미술사 학과를 보면 남학생은 여학생 속에 여성적이고 여 성화된 남학생이 한 명이나 두 명 꼴 정도 있을 뿐이다. 대학 교수직에도 미술 실기학과나 이론학과에는 다른 분야보다 상대적으로 여성의 비율이 높다.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이 가장 큰 소비자층이니만큼 미술 시장에서도 딜러나 콜렉터가 여성인 경우가 많아. 미술 전람회 관람 인원 역시 여성의 비중이 높고, 큐레이터 라는 분야 물론 젊은 여성의 비율이 높아 드물게 우먼파워를 과시할 수 있는 분 야이다. 창작을 하는 작가층 또한 예전보다 여성 작가가 많다. 페미니즘 미술과 여성 작가들의 미술계에서의 위상 등에 관한 논란이 80 년대 민중미술의 틀에서 일기 시작하여 90 년대 들어서는 미술의 중요한 이슈로 담론화되었고, 외면해 온 여성미술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제는 미술의 주류를 형성하는 중요한 부문이 되 었다. 여성이 슈퍼 우먼일 수는 없다. 나는 슈퍼 우먼이기를 거부한다. 사랑과 가정 과 일에서 완전하다는 것은, 그렇게 매일매일을 산다는 것은 고달픈 삶이려니 생각한다 나의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스스로 잘 안다. 남 보기에 완벽할 수는 없어도 남편과 가정과 일에 대한 애정과 열의가 있다면 조심스럽게 나의 생활에 균형을 이 @p 188 루면서 헤쳐 나갈 수는 있다고 본다. 현재 나의 모습이 지금까지 30 년 넘게 살아온 나의 과거의 결과요 결실이면서, 또한 앞으로 나이 미래의 토대가 될 것 이다. 오늘날의 내 삶이 만족스럽다. 내 마음의 언덕길 손석희 1956 년 서울에서 태어나 휘문고와 국민대를 거쳐 첫 직장에서 잠시 머무르다 가 1983 년 문화방송에 입사했다. 주로 뉴스를 진행해 왔고 교양 프로그램도 여 럿 진행했으며 지금은 아침 6 시에 방송되는 ‘뉴스 투데이’를 맡고 있다. 연희동 언덕길을 오르며 집안 식구들이 잘 모르는 나의 행태 중에는 내가 예전에 살던 동네나 집들을 배회하건 기웃거리는 게 있다. 일도 없이 우정 찾아가서 그러는 경우는 거의 없 지만 가령 그런 동네들을 지나칠 일이 있으면 대개의 경우 예정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출발해서 한 바퀴 둘러본 다음 목적지로 간다. 내각 그런 식으로 들르 는 굿은 꽤 많은 편이다. 이제껏 서른 번 안팎으로 이사를 다녔으니 웬만한 약 속장소는 내 살던 곳과 걸치게 마련이다. 지금은 재개발 공사에 들어간 필동의 골목길이라든가. 왕년의 불도저 시장이 우리 나라에선 처음으로 직주 근접의 개념(직장과 주거 공간이 함께 있는)을 도 입해 지었다는, 그러나 지금은 종로 한 복판에 흉한 몰골이 되어 버린 세운상가 아파트 그리고 아직도 이모님이 살고 계시는 보문동의 오래된 한옥 주택가의 골 목 등등. 누군가는 자신이 떠나온 집을 지나치면 그 집이 한없이 외로워보여 가끔씩 찾 는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나는 왜 내가 떠나온 공간들을 잊지 못하는가. 의식적 으로 앞만 보고 나아가려 해도 내 사념의 중심이 과거에 있어서인가. 과거로부 터의 연결 고리를 놓쳐 버리면 나의 현실조차도 안도할 수 없는 나의 회귀성 편 집증이 나를 그 골목길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밤 바람 부는 골목길을 심부름


으로 뛰어가다 제 어머니가 쥐어 주었을 천 원짜리 지폐를 잃어버리고 허둥대고 있는 소년의 불안에 싸인 눈빛에서 30 년 전 그 골목길의 나를 떠올리고서야 온 전히 현실로 돌아오는 나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느 산동네 문방구 앞길을 서성이다가, 드르륵 열리는 문 사이로 내딛는 슬리퍼 바람의 추운 발, 볼 펜 두 자루 움켜 쥔 청년의 손등에서 20 년 전쯤의 내 추웠던 젊은 날을 떠올리 고서야 온전히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며칠 전 밤에도 나는 신촌에서 성산대교 길로 돌아오다가 곁길로 빠져 올라온 곳, 연희동 산꼭대기 시범 아파트의 축대 위 난간에 서 있었다. 떠나온 지 13 년, 변한 것은 없었다. 산밑에 펼쳐진 도시의 불빛도 그대로이고 저쩍 길 끝 세탁소 의 김 서린 창문도 그대로인 곳, 나는 다른 곳보다도 이곳에서 가장 자주 나의 회귀성 편집증을 만족시키는 편이었다. 정류장에서 내려 이 꼭대기까지 20 여 분, 꼬박 8 년 동안 대궐 같은 연희동 집 들을 지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를 때면 그 길은 내게 뛰어넘을 수 없는 절벽이 되어 다가오곤 했다. 지금 저 언덕길을 올라오는 사람들의 가쁜 숨길에도 혹 20 여 년 전 내가 저 실을 처음 올라오며 가졌던 절망이 배어 있는 건 아닌지, 또 한 저 언덕길과 그 아래 잠겨 있는 저 대궐들이 지금 올라오는 저 소년을 적당 히 비뚤어지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5 동 1 층 2 호, 열다섯 평 나의 집은 이젠 사람이 살지 않는지 몇 번 찾아왔을 때마다 불이 꺼져 있다. 그러나 그 캄캄한 창문에는 그 좁은 공간에 숨차 하던 내 다섯 식구들의 실루엣이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빗방울이 후두둑거리던 5 동 앞 공터에는 그 창문을 바라보며 그토록 저 언덕길을 벗어나길 열망하던 젊은 날의 내가 있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또다시 받아들여야 했던 저 언덕길의 무기력 과 절망. 변명 삼아 말하자면 절벽 같은 언덕길에 막혀 나는 삶에 대해 개안하지 못하 였고 그 길을 오르내리며 기계처럼 외워 댄 수백 개쯤의 단어들이 가져다 준 모 처럼의 안식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런 식으로, 아무런 전망도 없이 그저 허겁지겁 저 언덕길을 벗어나 내려가는 데에만 집착해야 하는가. 언덕 밑의 삶이 내겐 그렇게도 대단 한 것인가. 마흔이 된 나는 그 언덕길을 차를 타고 내려오며 다음 번에 이곳에 온다면 그 때는 저 길을 걸어서 올라 봐야지 하고 생각한다. 나의 30 대, 무기력했던 20 대에 대한 빚갚기 83 년 10 월 9 일, 이 날을 한글날로만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 날 은 아웅산 테러 사건이 발생한 날이기도 하다. 목표물이었던 전두환 씨는 운 좋 게 살아 남아 지금은 감옥에 있지만 아무튼 그 날은 텔레비전 화면이 온통 폭파 된 아웅산의 참배소 잔해로 뒤덮였다. 그러나 내가 지금 얘기하려는 것은 아웅 산 테러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먼지로 뒤덮인 화면과 화면 사이의 어디쯤인가 에서, 내가 몇 달 동안 기다린 공고 내용이 하마터면 놓칠 뻔했을 정도로 짧게 방송되었던 것이다. 문화방송 사원 모집 공고였다. 사회는 뒤숭숭하고 5 공의 강권 통치는 점점 더 강퍅해져 아스라이나마 그 종 착점의 대폭발이 예견되던 엄혹한 시절에 나는 문화방송에 들어오려고 입사 원 서를 내고 필기, 실기, 면접 등으로 한달 가까이 이어지는 입사 시험을 기를 쓰 고 매달려서 치렀다. 당시 내가 다니던 직장의 동기 두 사람과 나는 방송사엘 들어가겠다고 직장 근처 여관에 거처를 잡아 놓고 합숙까지 하며 입사 시험을 준비해 오던 터였다.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려고 했던가. 그 엄혹했던 시절 에 방송이 어째서 우리의 꿈이었는가. 나는 아직도 그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찾 고 있는 중이다. 나는 나의 20 대를 암흑기로 기억한다. 10 대라고 해서 더 나을 것도 없었지만 특별히 20 대는 온갖 갈등을 더 명료하게 자각할 수 있는 시기여서 그렇게 느끼


는지도 모르겠다. 집안은 부침을 거듭하고 있었고 나의 진로는 불명확했다. 내가 왜 그렇게 무기력했는지 지금도 가끔씩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지만 나 는 장래에 대한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렇다고 현실에 탐닉하는 형도 아 니었다. 나는 그렇게 주어진 상황에 불만을 가져선 안 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 렸을 뿐이다. 그것은 70 년대 중반에서 80 년대 초라는 시대적 상황과는 무관하다. 70, 80 년대를 치열하게 살아 온 세대들의 사회적 역할이라든가 특성 따위들이 유행처럼 운위되고 있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그런 논의들에서 운동 엘리 트주의적인 자만심 같은 것을 느낀다. 그 시대를 관통했던 어떤 커다란 정서적 흐름과 그 실천적 흐름에 편입되지 못하고 자의로건 타의로건 소외됐기 때문인 가. 그래서 나는 더욱 허무주의적이었고 그만큼 그 시기를 무기력하게 지냈던 것이다. 나는 철저한 소시민이었고 간혹 내가 지극한 관심을 갖는 부분이 있었 다 해도 역시 소시민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학업, 연 애, 군대, 이런 것들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문제였던 경제적 문제, 즉 먹고 사는 문제가 내 젊은 날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그렇다. 나는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 사회로 진출했을 뿐 흔히 얘기하는 자아 의 실천이라든가 미래의 개척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므로 먹고 살 만큼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었던 첫 직장으로부터 탈출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허우적거리고 사는 것에서부터 해방돼 어디든 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시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20 대를 거의 다 보내고 난 후에 내 삶의 방식을 바꿔 보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것이 내게 한편으로는 매우 위험천만하고도 한편으로는 무척 호사스런 일일지도 모른다고 수없이 고민하면서 결국 직업을 바꿔 보기로 하였다. 그것만 이 내가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아마도 유일한 검증 방법이었을 것 이다. 직종이 무엇인가는 두번째였다. 지금보다 더 열중할 수만 있다면 상관 없 었다. 나는 무조건 바꿔야 한다고, 그것이 내가 빠져 있던 무력감에서 탈출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얼마 주어지지 않은, 몇 안 되는 기회 중의 하나가 방 송사였다. 캄캄했던 나의 20 대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방송 아닌 다른 직업이라도 택 했을 것이다. 어째서 방송이었는가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래서 늘 완벽하지 못 하고 궁한 구석이 있다. 또한 내가 혈기방장해야 했을 그 시기에 왜 무기력과 허무주의에 빠졌어야 했 는지 또 어떻게 해서 그 질곡으로부터 해방될 생각을 했는지 나는 지금도 그럴 듯하게 대답할 수 없다. 어려웠던 집안 문제라든가 실패를 거듭했던 학업 등등 의 상식적인 환경을 그 이유로 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나와 동시대를 살아 온 대다수의 사람이 공유했던 문제에 지나 지 않으며 더구나 나의 감수성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별난 것도 아니기 때문 에 그렇다. 20 대에 대한 나의 이런 의문은 끝까지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갑 갑함으로 나의 20 대에 대한 기억은 그 암흑의 도가 더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 다. 그나마 이 정도가 그 동안 발설을 꺼렸던 나의 20 대에 대한 불충분한 고백 이며 방송 입문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그리고 시작된 30 대를 거의 다 보내고 난 지금, 나의 30 대는 무기력했던 20 대 에 대한 빚갚기였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 빚을 다 갚지도 못한 것 같고 또 새로이 쌓아 놓은 빚이 40 대로 이월됐지만, 그래서 우리의 삶이란 것이 늘 빚갚 기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소박한 사념에 빠지기도 하지만. 가장자리가 해어지도록 넣고 다녔던 사표 봉투 엊그제엔 서울구치소엘 다녀왔다. 언노련(전국 언론노동조합연맹)위원장을 지 내고 지금은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으로 구속 중인 권영길 선배를 수감 두 달이 다 돼서야 면회를 한 것이다. 1 월 중순의 찬바람이 쌩한데 쉰을 훨씬 넘긴 그의 얼굴은 아직도 여름같다.


‚기소된 죄목이 3 자개입이다 뭐다 해서 다섯 가지나 되니 한 2 년은 사시겠구 려‛했더니 ‚괜찮아, 여기서도 하루가 굉장히 빨라. 책 읽을 시간이 모자랄 때 도 있어. 당신도 잠깐 있어 봐서 알잖아 왜‛하며 허허 웃는다. 하긴 이 양반 농 반 진반으로 늘‘감옥에 가고 싶다'고 하더니 이제 원 풀었다고, 면회 갔던 동료 끼리 구치소문을 나서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또 나 혼자만의 쓴웃음을 한 번 더 짓는다. 돌이켜 보 면 10 여 년 전 여관방에 틀어박혀 영어 책을 들여다 보고 상식 책을 들여다볼 때만 해도 내가 방송사에 입사해서 구치소를 들락거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권 선배도 신문사에 있을 땐 파리 특파원까지 지냈으니까, 그가 좀 덜 고민했든가 후배들을 짐짓 외면할 만큼만 마음이 좀 독한 사람이었더라면 지금쯤 구치소 독 거방이 아니라 편집국장석쯤에 앉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입사한 뒤 두어 달쯤이 지나면서부터는 주머니에 늘 사표를 써 넣고 다 녔다. 언제든 마음이 동하면 사표를 내던지고 휭하니 나오고야 말겠다는 심보였 는데 그 이유는 내가 무슨 민주 투사나 돼서 '나팔수'라고 손가락질받던 방송을 못하겠대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도무지 일이 주어질 것 같지가 않아서였다. 그 때까지 내가 파악한 바로는 아나운서실은 다른 부서와는 달라서 수습이 끝났 다고 해서 바로 일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상당 기간 동안을 절치부심하다가 그것도 기회가 맞아야 작은 일이라도 맡게 된다는 것이었다. 하기 좋은 말로는 향이 날 때까지 묵히는 포도주와 같다고도 했고, 또 얼굴만 좀 알려지면 소양이 있건 말건 이것 저것 방송을 맡는 연예인과는 다르다는 식의 위안이 있었으나 그것은 말 그대로 위안이었을 뿐이다. 삶의 방식을 바꿔 보겠다고 마음 먹은 내 게 기약도 없이 시간을 보내라는 것은 또다시 저 몰가치의 시대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다시 영어 책이며 상식 책들을 챙겨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사직을 꿈꾸며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사표 봉투의 가장자리가 닳아 해어지기 시작했던 그 해 늦봄에 예상치도 않게 일이 주어졌 다. 지금도 꼭두 새벽부터 뉴스를 진행하고 있지만 그 때 처음 주어진 일도 5 분짜 리 새벽 뉴스였다. 그 이후 다른 프로그램도 꽤 많이한 축이지만 나는 이리 저 리 시간대를 옮겨 다니면서 뉴스만은 쉼없이 했고 때로는 내 주제에도 맞지 않 는 주요 뉴스를 맡기도 해서 그제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나를 뉴스를 진행하는 사람 정도로 부른다. 그렇게 일의 양이 많아지면서 동시에 갈등의 시간도 늘어 갔다. 기억해 보라. 5 공 시절의 방송을. 나는 한꺼번에 세 가지의 뉴스 프로그램에 투 입될 정도로 '잘 나가는' 존재였으며 그 '잘 나간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 도 일 자체에만 매달리고 파묻히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바뀐 삶에 대한 도전 이란 것은 현실 도피의 위장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 위장에도 지치고 내게 쏟아지던 세속적인 관심에도 지쳤을 즈음, 그러나 찢어 버렸던 사표를 다시 쓸 용기도 없이 무기력감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려던 그 즈음에, 이번엔 내가 아 닌 세상이 바뀌려 하고 있었다. 앞의 글에서 얘기한 '종착점의 대폭발'이 일어나 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밤, 87 년 7 월 중순 어느 밤에 방송사의 동료들은 방송 민주화 선언을 발표 하고 밤새도록 토론을 벌였다. 노도와 같던 6 월 항쟁 내내 시민들의 돌팔매에 시달렸던 우리는 이제 방송이 바뀌어야 한다는 데에는 철저하게 동의했지만 어 떤 방법으로 변해야 하는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다. 그리고 다섯 달 동안의 산고 끝에 노동조합이 탄생했다. 나는 몰가치와 무기 력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노조원이 되었고 후에는 집행부에도 들게 되었 다. 말은 쉽게 했지만 내 입장에서 진정한 노조원이 되고 또 진정한 집행부원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때로 기회주의적이었


고 한없이 나약하기도 했다. 2 년여 전에 내놓은 졸서에 당시의 얘기는 신물나도 록 적었으니 여기에선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내가 이만큼이나마 내 자리를 지 키려 하는 것은 함께했던 동료들의 끝없는 담금질 때문이요, 수차 얘기했던 바 20 대에 대한 죄의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3 년 동안 노조 간부를 지내고 평조합원으로 돌아온 지 또 3 년이 지났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아나운서나 뉴스 진행자 이전에 노조원으로 기억하며 호의를 갖 기도 하고 이유 없이 미워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충 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좋은 방송을 하고 싶다는 노조의 열망은 일정 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왜곡 인식돼 있고 따지고 보 면 그런 풍토 역시 언론이 만들어 온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내게 호의를 가진 사 람들이야말로 언론의 피해자들이다. 나는 한 가지 일화로 모든 것을 증명해 보 일 수 있다. 88 년 지하철 파업 때 그것이 초유의 일이라 여론이 술렁거렸다. 그 때 내게 주어진 일은 시민들에 대한 인터뷰를 중심으로 해서 지하철의 파업이 시민들의 발을 볼모로 한 극단적인 방법이며 몇몇 지하철 노조원들의 이익을 위해 시민들 만 불편을 감수해야 하니 이런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 한다는 요지의 리포트였 다. 지하철 노조의 요구 사항을 정확히 전달하지도 않은 채 이런 리포트를 내는 것은 문제가 있었으나 모조리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만들어 방송했다. 미리 가르쳐 줄 필요도 없이 시민들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지하철 노조의 집회장을 취재하러 간 나는 차 에서 내려 보지도 못하고 조합원들의 발길질에 차체만 찌그러뜨린 채 황망히 집 회장을 빠져 나와야 했다. "이 자식 어제 뉴스에 나왔던 그놈 아냐!" 해가 바뀌고 지하철은 또 조짐이 심상치 않더니 그예 여름에 다시 파업이 시 작됐다. 나는 이번에도 단단히 각오를 하고 집회장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조합원들은 다른 신문, 방송사 사람들은 모두 바깥 공중 전화를 쓰게 하더니 나만은 위원장실 전화까지 빌려 주며 전화 리포트를 하게 할 정도로 친 절한 것이었다. "손형도 노조원이지요?" 문화방송 노조가 그 전에 파업을 할 때 머리띠 두른 내 모습이 화면에 한 번 비쳤던 모양이다. 얼마 전 프랑스 공무원들의 대규모 파업이 20 여 일 동안 계속돼 교통망이 거 의 마비되다시피했을 때 그들은 누구도 노조원들을 비난하지 않았고 언론도 그 런 여론을 부추기지 않았다. 성숙된 사회란 그런 것이다. 하물며 좋은 방송을 시 청자에게 돌려 주자는데...그러나 앞서도 얘기했듯이 호의와 비난이 공존하는 것 을 이해하기로 하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책임의 절반 이상이 언론에 있 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나는 노조에 대해서도 되도록 객관적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이러는 것이 혹 나이가 들어 가면서 오는 비겁함 때문이 아닌가 가끔씩 소스라 쳐 놀라기도 하지만, 결국 보다 넓은 시각에서 노조를 사랑하는 방법이란 생각 에 안도하곤 한다. 노조가 내 생활을 대부분 지배했던 시기에서 어느 정도 벗어 나서인지 이제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는 느낌도 각별하다는 얘기다. 짖궂은 사람들은 내게 이런 농담도 한다. "나이도 먹고 진급도 할 테고 노조 사정도 잘 알 테니 이번엔 구사대로 나서 보지?" 그래, 사람 세상에 훼절의 개연성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고 맞장구를 치며 그나 나나 싱거운 웃음을 짓는다. 그러고는 농담한 사람 무안하게 가끔씩은 짐 짓 심각한 듯 얘기를 덧붙여 보기도 한다. 고척동 사방 밖으로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김 없이 감상적이 되는데 그 때 나 역시 공연히


비감해져 가지고는, 적어도 앞으로 비굴하게는 살지 않겠노라그만 결심해 버리 고 말았다고. 듣기에 따라서는 이것도 요즘 유행하는 말로 '썰렁한' 얘기나 아닌지 모르겠 다. 텔레비전을 재미없게 하자! 이른바 600 억 전쟁이란 게 있었다. 방송과 신문이 한바탕 치른, 아니 정확하게 는 방송이 신문을 모처럼 실컷 두들겨 준 전쟁이었다. 마치 첨단 무기로 미국이 이라크에 분풀이를 한 걸프전처럼(후세인이 그렇듯이 신문들도 다시 멀쩡해진 것까지 닮았다.). 여기서 600 억 원은 이를테면 쿠웨이트와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 까. 전말은 대략 이렇다. 94 년 가을에 KBS 의 시청료가 전국적으로 통합공과금에 들어가면서 KBS 는 그 때까지 3 분의 1 정도는 포기해야 했던 시청료를 앉은 자리에서 고스란히 받 아 내게 되었다. KBS 는 이 때 공영성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1 텔레비전의 광고를 폐지하기로 했는데 그 규모가 600 억 원 정도가 되었고 다시 말해 광고 시장에서 갈 곳을 몰라 떠도는 돈이 600 억 원이 생겼다는 얘기다. 신문들이 꿈에 부푼 건 당연한 얘기다. 방송 광고는 그 시간과 광고료가 일정 하게 정해져 있고 이미 광고는 포화 상태로 받고 있었으므로 600 억 원의 대부분 은 신문으로 돌아갈 것이 뻔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예기치 못하던 일 이 벌어졌다. 방송이 그 당시 프로그램당 100 분의 8 로 정해져 있던 광고 시간을 100 분의 10 으로 늘림과 함께 광고료 인상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최근 들어 가 뜩이나 경영 상태가 전만 같지 않은데 이웃 방송이 포기한 그많은 돈이 신문으 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맥 놓고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신문 쪽에 비상이 걸렸 다. 몇몇 주요 신문의 사설에 방송이 광고 시간을 늘리는 것이 시청자들에게 피 해를 준다는 등의 비판이 올랐다. 이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당장 다음날부터 1 주일 가까이 문화방송은 뉴스 데스크를 통해 신문 위에 융 단 폭격을 감행했다. '방송의 광고 시간과 광고료는 묶인 지 십 년도 지난 것이 다. 신문을 봐라, 눈만 뜨면 증면 경쟁이요, 툭하면 전면 광고로 기사는 뒷전 아 니냐. 그것도 일부의 경우 광고를 내지 않으면 기업체를 협박한다는 설이 파다 하고 게다가 엉터리 부수 공개로 독자와 광고주를 속이는 게 신문 아니냐. 그게 떳떳하다면 왜 ABC 제도(신문부수 공사제도)엔 반대하느냐. 그 때문에 보지도 않는 신문 찍어 대서 거리엔 폐지가 쌓이고 비싼 신문 용지 수입만 늘어난다 등 등...' 어느 신문이 이런 엄청난 폭격을 당해 낼 수 있겠는가. 그들은 바로 잠잠 해져 버렸고 정부는 별 부담 없이 방송 쪽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런 가운데도 재미있는 일은 같은 처지에 있던 서울방송이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는 것이다. 들리는 말로는 서울방송의 대주주가 건설업체이기 때문에 구린 데가 많아서 신 문과 싸울 수가 없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재벌이 언론을 지배했을 때 의 폐해가 여기서도 드러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서울방송도 600 억의 전리 품 가운데 3 분의 1 은 가져가게 됐으니 손 안 대고 코푼 셈이다. 이 600 억 전쟁은 선언적 사건이다. 매체끼리의 생존 경쟁이 본격적으로, 무한 대로 시작된 것이라는. 지난해 우리 나라 광고 시장의 전체 규모는 4 조 7317 억 원 정도이다. 이 가운 데 방송 광로로 지불된 돈은 1 조 4715 억 원으로 매년 20% 정도 신장률을 보이 고 있는데 특별히 폭발적 신장 요인이 잠재하고 있는 건 아니다. 매체 신장률은 어떤가. 비율을 따지기가 무의미할 정도로 2,3 년 사이에 엄청나게 늘어났다. 각 종 신문, 잡지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30 개의 케이블 채널, 4 개의 지역 민방 등 영상 매체의 증가는 굉장한 변화다. 이들이 광고 시장 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아직 미미하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법은 없다. 케이블 TV 를 예로 들어 보자. 우리 나라 케이블 TV 는 민간 주도가 아닌 관


주도로 태어났다. 공보처는 여러 비난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억지다 싶게 케이블 TV 설립을 추진했고 결국 선로 미비로 가입자 수는 예상보다 반에도 못 미쳤 다. 광고가 안 따르니 프로그램 제작사의 월 적자액이 회사별로 3 억에서 20 억에 이른다. 그러나 케이블 TV 가 그 모양으로 끝나 버릴 것이라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동안의 조정기를 거쳐 가입자 수가 늘고 광고 시장 규모도 늘어나면 장 기적으로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이 과정에서 광고 수주를 둘러싼 치열한 전쟁은 불문가지다.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광고 시장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매체간의 치명적 싸움이 전개되는 것이다. 광고 시장이 매체를 웬만큼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로 팽창할 때까지의(현실적으로는 그런 상태가 존재하지 않겠지만) 구조 조정기는 말할 것 도 없고 설사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각 매체는 조금이라도 더 광고 물량을 차지 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그리고 매체는 매체대로 팽창해 간다. 금년부터 위성방송이 시작되고 그 채널 은 순차적으로 12 개까지 늘어날 것이다. 케이블에 참여한 재벌들은 위성방송과 의 연계를 기도하고 있으며 그들은 그 전략이 성공할 경우 신문, 케이블, 위성방 송으로 연결되는 매체 왕국을 완성해 기존의 공중파 방송을 제압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작년 말 정부가 국회에서 통과시키려 했던 방송법안의 골자는 위성 방송에 신문 재벌과 기존의 재벌들을 참여시킨다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의 반대로 일단 유보했지만 금년 중에 똑같은 시도가 있을 것이다. 그 것이 실현됐을 경우, 무궁화 위성만이 위성방송을 맡게 될까? 아니다. 재벌들은 장사만 된다면 민간 차원에서라도 또 다른 상업 위성을 쏘아 올릴 것이다. 그리 하여 매체는 또 늘어난다. 광고 시장에 비집고 들어갈 틈만 있다면 케이블 채널 도 또 늘어날 테고 지역 민방도 더 꿈틀댈 것이다(지금도 도청 소재지에 민방 설립이 이미 추진 중이다). 이것이 정부가 말하는 첨단 미디어, 다매체의 시대다. 그리하여 600 억 전쟁은 전설로 남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렇게 몇 번의 공방전 으로 수백 억씩 챙기던 시대는 태평성대라고 얘기할 것이다. 지금이 그 미래에 비해 그래도 태평성대인 이유가 또 있다. 이 글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런 것이다. 지금까지 방송을 좌지우지해 온 것이 권력의 논리였다면 이제 시작되고 있는 다매체의 시대는 자본의 논리가 권력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민방 하나 더 생긴 것만 가지고도 시청률 전쟁이 얼마 나 심화됐으며 그에 따른 방송 행태가 얼마나 자극적으로 퇴화했는가. 오락만이 TV 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기능이고 논쟁을 하려면 TV 를 끄라는 비현실적 사 고 방식(하루 평균 세 시간 이상 TV 를 보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고 '현상 '이다.)을 가진 사람들이 방송사 내에도 생겨날 만큼 우리의 TV 문화는 황폐화해 가고 있지 않은가. 매체가 늘어날수록 그런 현상이 도를 더해 가고, 그로 인해 그 동안 권력의 논리에 의해 실종 상태였던 방송의 제 모습을 제대로 찾아 보지 도 못한 채 이제는 자본의 논리에 빼앗겨 버릴 것이라 걱정하는 게 기우인가. 나는 방송 구조 개편 논의에서 만큼은 수구 세력이다. 우리에겐 공영 방송 체 제가 적합하다. 5 공이 정치적 이유로 도입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실천은 못해 본 공영방송 체제를 뜻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방송을 이익을 남기 기 위한 산업 매체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합의와 감시 아래 그 눈과 귀 가 되는 매체로 만들어야 한다. 감정적으로 말하자면 도대체 이 좁은 땅에 무슨 채널이 그렇게 많이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텔리비전 앞에 앉아 저녁 내내 쏟아 져 나오는 이념 선전의 노예가 되듯이 자본주의 국가의 시청자는 또 다른 방법 으로 자본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다. 양쪽 모두 피해자이다. 그 합리적 중간점이 제대로 된 공영 방송 체제이다. 매 체 수는 가능한 한 억제되어야 하고 오락성 역시 되도록이면 억제되어야 한다. 시청자들이 하루에 몇 시간씩 텔레비전에 묶여 있음으로 해서 낭비되는 사회적


에너지가 도대체 얼마인가. 광고 시장은 어떻게 소화하느냐고? 미안하지만 늘어 나는 매체가 광고 시장을 억지로 팽창시키는 면이 더 강하다. 그렇게 해서 필요 이상으로 부풀려진 광고 시장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비용은 결국 소비자가 부담 한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은 시대에 뒤떨어진 공염불이 되었고 다매체 상업 방송 의 시대는 이미 도래하고 있다. 이 흐름을 막을 자는 없다. 그래서 제안되는 것 이 시청자 운동이다. 방송을 감시하고 지키자는 것인데 운동이랄 것도 없을 정 도로 그 힘은 미약하다. 우리의 시청자 단체들이 경실련만큼의 조직력과 전문성, 그에 따른 영향력을 가질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을 갖곤 한다. 물론 방송을 만 드는 사람들이 더 각성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지만... 그리고 필연적으로 시청자들의 힘은 점점 더 커지리라고 믿지만... 그래도 나는 늘 주장하고 싶다. 설사 공염불이라도. "매체 수를 대폭 줄이자! 텔레비전을 훨씬 더 재미없게 하자!" 내가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두 가지 질문 강의라고 하기엔 좀 남사스러운 데가 있지만 아무튼 나는 몇 달에 한 번씩 두 군데에'강의'를 나간다. 한 군데는 민주언론운동협의회에서 여는 언론학교로 수 강생은 대부분 언론에 관심 있는 대학생이고 몇몇 일반인도 참가한다. 또 한 군 데는 문화방송의 자회사인 MBC 아카데미로 내가 나가는 과정은 아나운서 과정 인데 방송인을 지망하는 졸업반 학생이나 이미 졸업한 사람들이 꽤 비싼 수강비 를 내고 실기와 이론을 배운다. 시민 단체나 학교에서 부정기적으로 요청해 오는 강연을 거의 사양하면서 이 두 군데는 그래도 일 년에 몇 번 씩 나가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무슨 대단한 것 을 줄 수 있어서가 아니라 거꾸로 내가 그들에게서 얻는 것이 많아서다. 확연히 구분지어서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두 곳의 분위기는 사뭇 다른 데가 있다. 민언협의 언론학교는 성격상 기존의 방송에 비판적이고 수강생들도 대개 우리의 방송 행태에 문제 의식을 갖고 있다. 나 역시 그런 축에 속하는 편 이므로 강의랄 것도 없는 내 시간은 수강생들과 강사가 죽이 맞아 일종의 카타 르시스를 느끼는 시간이기도 하다. 때로는 그들이 바깥에서 미처 이 안쪽의 상 황을 파악하지 못해 필요 이상으로 키운 문제 의식을 무마하느라 진땀 나는 자 기 변명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시간이 소중하다. 그들은 혹 마 모돼 가는지도 모르는 나의 의식을 깎아 세워 주므로. 그리고 MBC 아카데미, 그들이 보여 주는 것은 문제 의식 이전에 갈망이다. 나는 그들이 우리의 방송, 아니 그들이 그토록 뛰어들려 하는 방송에 대해 아무 런 비판적 문제 의식도 갖고 있지 않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나타내 보이는 것은 어떤 문제 의식보다는 방송인이 되고 말겠다는 현실 의식이 다. 그러므로 내가 MBC 아카데미의 수강생들에게 민언협 언론학교에서 하는 식 으로 강의를 했다간 금세 분위기가 어색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그들과 의 시간 역시 소중하다. 그들은 내게 문제 의식에 가려진, 방송 자체에 대한 열 정을 잊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 주는 것 같다. 사실 돌이켜보면 내가 그들만큼의 나이였을 때 나는 민언협의 학생들처럼 문 제 의식도 갖고 있지 않았고 MBC 아카데미의 젊은이들처럼 어떤 갈망을 지니 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이 내게 방송을 희망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말이 무어냐고 물 어 올때, 그리고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방송을 택하게 됐느냐고 물어 올 때, 나는 연희동 언덕길에서 그저 기계적으로 외워 대던 단어들을 떠올리면서 난감해 하지만 꼭 대답을 해야 한다면 이렇게 얘기하겠다. 무조건적인 열정만 갖지 말고 날카로운 문제 의식을 가질 것이며 또한 그 문제 의식에 상처받지 않 을 만큼 방송 자체에 대한 애정을 가져야 한다고. 그리고 그것은 어느 날 갑자 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청년 시절을 통해 많은 연습이 필요한 것 같더라고.


나는 이 말이 미덥지 않은 후배들을 위해 반면 교사와 같은 나의 대학 시절에 대한 얘기로 마무리지을까 한다. 내게는 대학 시절과 관련해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그 첫째는"학생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는 것인데 이 질문은 주로 내 아내가 한다. 대학생들의 낭만적인 모습을 담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볼 때라든가 (알다시피 대학생이 나오는 드라마는 대개가 그 모양이다.) 가끔씩 지나치는 모 교 앞의 발랄한 여학생들의 모습을 볼 때 아내는 거의 빠짐없이 "저 시절로 되 돌아가고 싶다"며 내게 동의를 구하는 차원에서 그 질문을 해 온다. 그 때마다 나의 대답은 결단코 "아니오."다. 나는 그런 낭만적인 학생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미래에 대한 애정과 확신이 있어야 낙관적일 수 있는데 나는 늘 현실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으므로... 그래 서 내게 학교로 되돌아 가라는 것은 이를테면 군대로 다시 입대하라는 것과 같 다. 그 암흑의 시대로... 두번째로는 "학교때 운동한 적이 있느냐?"는 것인데 여기서 운동이란 테니스 나 수영, 하다못해 볼링 등속의 것말고 우리가 아는 그 '운동'을 말한다. 이 질 문은 주로 후배 학생들이 해 오는 것으로 나의 노조 활동과 연관지으려는 의도 가 있는 것 같다. 나의 대답은 물론 "아니오."다. 내가 사회적으로 의식이 전혀 없는 '무뇌아'였다는 것은 아니지만, 알량하게 가진 그 의식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굳이 변명하자면 그 당시엔 운 동 자체가 나와 같은 주변인들까지 포용할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이지 않았다. 아 니 설사 학생 운동이 지금처럼 대중적이었다 해도(과거와의 단순 상대 비교, 따 라서 '대중적'이란 표현에 논란은 필요치 않으리라.) 나는 아무것도 실천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갈팡질팡''허위허위'하는 나약한 젊은이에 지나지 않 았으니까. 이상의 두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동일한 부정형의 대답은 지금도 끈질기게 계속된다. 그러면서 나를 괴롭힌다. 당신들은 이 다음에 무어라고 대답할 것인 가? 무죄로소이다 심규철 1958 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제 28 회 사법 시험에 합 격, 제 18 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간사를 지 냈으며 지금은 헌법재판소 국선대리인. KNCC 인권위원. 21 세기 전략아카데미 회장으로 활동하며 영동신용협동조합에서 무료 법률상담도 하고 있다. 각자의 몫 나는 변호사다. 나는 성우처럼 입으로 먹고 산다. 의뢰인을 위해 말해야 하니 까. 나는 소설가처럼 끊임없이 휘갈겨야 먹고 살 수 있다. 그 많은 사건들의 준 비 서면을 작성해야 하니까. 그러고 보면 나는 사건이 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이다. 누군가의 싸움은 나의 밥줄이고 사람들이 너무 착해져서 아무 탈없이 지 내면 나는 그 날부터 굶어야 한다. 하지만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인간사의 대립과 이해 관계를 직시하면서도 나는 이 지루한 공방전이 어서 종결되기를 고 대한다.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공소사실 피고인은 일정한 직업이 없는 바, 1987. 11.말 일자불상경 서울 강남구 논현동 소재 관세청 앞길에서 공소 외 전○○ 소유 승용차를 운전하던 중 피해자 김○ ○(43 세,여)가 운전하던 승용차와 충돌하여 승용차 수리비 보상 문제로 피해자를 한두 차례 만난 뒤 같은 해 12. 말경 서울 송파구 잠실동 소재 상호 불상 여관


에서 피해자와 정을 통한 것을 기화로, 피해자가 유부녀인 약점을 이용하여 피 해자로부터 금전을 갈취할 것을 마음 먹고 상습으로... 변론요지서 89 고단 42○○호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피고인 ○○○ 위 사건에 관하여 피고인의 변호인은 다음과 같이 변론합니다. 다음 1. 이 사건의 경위 가. 피고인이 김○○를 만난 계기 피고인은 1987.11.하순 일자불상 01:00 경 공소외 전○○과 함께 전○○ 소유의 르망 승용차를 운전하여 영동전화국 부근 4 거리에 이르러 영동전화국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가고 있던 중 김○○가 운전하던 로얄 프린스 승용차에 부딪히는 접 촉 사고를 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피고인이 먼저 내려서 항의를 하고 있는데 피고인 옆에서 잠이 들어 있던 위 전○○이 차에서 내려 "싸울 필요 없지 않느냐, 경찰에 신고하면 모든 것이 밝혀진다"고 하면서 피고인에게 경찰에 전화하여 신고하라고 종용하였습니 다. 그러자... 법과 정의를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개업한 바로 그 해 여름의 한 사건은 나를 대법원 상고까지 몰고 갔다. 유부녀와 간통을 하면서 그를 이용하여 그 유부녀를 협박하여 금품을 뜯어내 었다는 공소 사실대로라면 전형적인 공갈범에 해당되는 사건이었다. 이는 김○ ○의 남편이 고소를 제기하여 문제가 된 사건인데 이미 그 전에 김○○의 남편 이 간통 사실을 눈치채고는 두 남녀를 간통죄로 고소하여 구속되게 한 적이 있 었다. 그런데 예전의 간통 사건을 조사하면서 당시 고소인의 요청에 따라 검찰 수사 의 초점은 남자가 여자에게서 갈취한 사실이 있느냐에 모아져서 그 부분에 대하 여 상당한 정도의 수사가 이루어져 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간통 사건 수사 당시 그 여자 김○○는 상대 남자의 금품갈취 사실을 극구 부 인하면서 자기와 그 남자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만났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 여 자의 남편은 간통 고소를 취소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간통죄가 아니 라 공갈죄로 고소를 한 것이었다. 물론 유부녀와 간통하여 남의 가정을 파괴한 것이야 백 번 벌을 받아도 마땅 하다. 하지만 피고인 남자의 말을 들어보면 절대로 그 여자와의 육체 관계를 빌 미로 남편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여 금품을 뜯어내는 관계는 아니었다는 것이고 또 그러한 정황이 여러 군데에서 드러나므로 나는 100% 무죄의 확신을 가지고 변론에 임하였다. 그런데 이번 공갈죄 소송에서 그 김○○는 간통죄 고소 때와는 태도를 180 도 바꿔 철저하게 갈취를 당했노라고 진술하고 법정에 나와 증언까지 했다. 피고인 에게는 당시 10 세 된 딸이 있었다. 김○○가 피고인과 함께 용인자연농원 등에 놀러가면서 피고인의 딸도 동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김○○는 피고인의 딸 에게 용돈도 주면서 자기를 이모라고 부르라고까지 할 정도로 귀여워했다는 것 이었다. 김○○가 법정에 증인으로 나왔을 때 피고인의 딸과 함께 용인 자연농원에 놀 러가서 용돈도 준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피고인 및 피고인의 딸과 함께 용인자 연농원에 놀러간 사실자체를 부인했다. 할 수 없이 피고인의 딸을 증인으로 신 청하여 법정에 세웠다. 당시 법정에는 그 여자 이외에도 여러 명의 여자가 있어 서 재판장인 정○○부장 판사는 방청석에 있는 사람 중에서 누구랑 같이 용인자


연농원에 갔는지 지적해 보라고 했다. 그 아이는 정확히 김○○를 지목했는데 결국 그 사건은 대법원까지 가서도 유죄로 인정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당시 일간지에 속칭 '제비족'사건으로 불리면서 세간의 관심이 집 중되기도 했는데 지금까지도 나는 그 판결 결과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이 사건을 통해 나는 변호인이 100% 무죄의 심증 내지 확신을 가지고 변론에 임해도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로마의 법학자 마르쿠스 키케로(Marcus T.Cicero)는 이런 말을 했다던가. "정 의는 각인이 각자의 몫(suum cuique)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소송에서의 정의 란 억울한 사람이 덜 억울하도록 해 준다는 뜻이다. 나는 1 년을 넘게 끈 속칭 ' 제비족'사건을 보며 과연 그 판결이 공정한 '각자의 몫'이었는지 다시 물어 본 다. 그는 정말 유죄였는가? '긴급조치' 당한 대학 시절 1979 년 10 월 27 일은 내 인생을 바꿔 놓은 날이다. 나는 그 날 석간 신문의 1 면 을 거의 다 덮을 정도로 굵게 밝힌 여덟 글자를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박정희 대통령 유죄 궁정동의 연회는 한발의 총성으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렇게 높아 보이던 유 신의 장벽도 마침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는 허탈했다. 적어도 그 때까지는 박정희만 없어지면 모든 문제가 순조롭게 풀릴 것이라고 믿어 왔다. 거시적으로 는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적 염원이 유신 독재 체제의 내부 균열을 가속화한 것 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이것은 4.19 처럼 시민의 힘이 직접 작용했다기보 다는 일종의 궁정 반란이었다.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 게 전개되었고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선택과 결단을 요구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려는 세력들은 용의주도한 쿠데타 준비에 바빴고 민 주화를 외쳐 온 정치 세력은 지리멸렬한 가운데 광주학살의 서막이었던 '서울의 봄'을 향해 달려갔다. 한편에서는 모의하고 또 한편은 대권을 위해 이전투구하던 그 때 스물네 살의 법대생이었던 나는 사법 시험 공부를 결정했다. 긴급조치 9 호 시대의 사법 시험에 근본적인 회의를 가졌던 나로서는 중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국민들을 독재의 사슬로 옭아매는 유 신헌법의 틀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당시 학생 운동과 일정한 연계 를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더더욱 힘든 결정이었다. 게다가 변호사가 목적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판검사를 하기 위해 고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일 이었다. 나의 대학 생활은 고시 공부와는 애당초 인연이 없었다. 나는 1976 년 서울대 학교 사회 계열에 입학했다. 관악 캠퍼스가 생긴 지 1 년 뒤의 일이었다. 아무것 도 모르고 평범하게 공부만 하면서 지내 왔던 내개 우리 사회의 어둠과 빛을 보 여 준 대학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1 학년 1 학기는 너무 평온했다. 그 때를 두고 친구들은 '요순시절'이라고 불렀 다. 나는 농촌법학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지금은 고인이 된 이범영 선배를 위시 한 많은 분들을 만났다. 진지한 대화 속에서 올바른 삶의 자세를 찾기 위해 노 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대학 생활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을 마련해 나갔던 시 기였다. 그해 여름 방학부터 시작된 농촌 활동은 나의 진정한 배움터가 되었고 대학 강의와 공부는 성적을 얻기 위한 단순한 방편에 불과했다. 대학 4 년 생활 의 중심은 농촌 활동과 사회과학 공부였다. 그런 생활이니 대학 2 학년 때 법과 대학에 진입한 후에도 법학 강의를 듣는 것이 대단히 소홀했고 특히 아침 9 시부터 있는 수업에는 전날의 늦은 술자리로 매번 지각을 도맡아 했다. 이 상황에서 학점이 제대로 나올 리 없었고 고시 공 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학교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살벌해지고 있었다. 1 학년 여름 방학의 농활 준비


모임은 법대 당국의 협조하에 관악캠퍼스 9 동에 있던 법과대학의 빈 회의실을 이용했다. 또 당시만 해도 캠퍼스 내의 잔디밭에서 학년별 스터디를 하던 경우 도 더러 있었는데 1 학년 겨울 방학 때부터 겨울 농촌 활동은 사실상 금지되어 버렸다. 우리들이 비밀리에 갔다가 현지 경찰의 연락으로 뒤늦게 학교 당국이 알게 되어 지도 교수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고 여름 농촌 활동만 겨우 학교 당국의 공인을 받아 다녀올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4 학년 여름 방학 때에 는 그것마저도 어려워 비공식적으로 가기에 이르렀다. 앞서 대학 1 년 동안을 '요 순시절'이라 불렀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상황이 1 학년 때와는 판이하게 돌아갔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1976 년 4 월 의 대규모 학원 사태로 잠재적 데모 주동 예상자까지 일괄하여 제적되는 사건이 발생한 이래 1976 년 11 월까지 관악 캠퍼스는 표면상 아무런 소요 사태 없이 조 용히 지나갔다. 그리고 그 때까지의 학생 운동은 3 학년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3 학년까지를 '무사히' 보내고 4 학년이 되면 그냥 졸업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불문율처럼 내려오던 이 전통을 여지없이 깨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1976 년 12 월 5 일로 기억하는데, 그 날 12 시경 우리 1 학년들은 기말 고사의 마지 막 시험을 치르고 나오고 있었다. 법대 4 학년생이었던 이범영(후일 민주화운동청 년협의회장을 역임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다가 1994 년 여름 췌장암으로 별세), 박석운(현 노동문제연구소장), 백계문 선배 등이 졸업 고사까지 다 치르고 졸업식만 남겨 둔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을 위해 미국을 상대로 로비를 벌였던 박동선에 대한 의혹을 터뜨리며 유신 반대 데모를 전개 했던 것이다.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 보는 데모였고 졸업을 코앞에 둔 선배가 대학 졸 업의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하고 나서는 장면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몰려온 전투경찰대에 의해 몇 마디 구호만을 외친 채 끌려 가는 모습은 나뿐 아니라 대학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 이후로 유신 정권을 반대하는 시위는 대학 4 학년에 의해 주도되었다. 캠퍼 스는 학생 수와 비슷한 규모의 정사복 경찰이 상주하는 처참한 공존이 계속되었 다. 그 무렵의 대학 생활은 두 마디로 집약된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파와 독재파를 대변하는 외침이었고 4 년 내내 반복된 구호였다. ‚학우여!‛- 대부분 그 뒷말을 잇지 못한 채 끌려가는 학생. ‚저 새끼 잡아!‛- 세계에서 제일 용감한 한국의 사복 경찰. 학회의 선배는 후배에게 존경받았지만 한편으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후배들은 대학 졸업이라는 기득권을 앞에 둔 선배들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자연히 그에 따른 고민과 부담은 가중되었다. 80 년 봄에 와서야 복학이라는 조치가 취 해졌지 그 때만 해도 한번 제적이면 영원히 대학 졸업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 하던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그의 자연 수명이 다할 때까지 존속될지도 모 른다는 우려가 짙게 깔려 있었다. 2 학년 2 학기에 들어와 농촌법학회 회장을 맡게 되자 경찰 당국의 나에 대한 관심은 필요 이상으로 집요해졌다. 심지어 등하교까지 담당 경찰관하고 같이 하 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대학 2 학년 가을 서울대학교 축제 기간에 관악 캠퍼스의 28 동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이 빌미가 되어 학생 수십 명이 제적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일로 학회 활동을 해오던 동료인 최상일(현 MBC PD)과 1 년 후배인 윤석인.진재학(현재 한겨례신문 기자), 오세중 등 후배 학회원 7~8 명 이 동시에 제적되어 캠퍼스를 떠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사건 이전에 벌써 2 년 선배인 양춘승(현재 우성해운 부장으로 근무), 권형 택(현 우리자원 대표), 양기운(현재 남원에서 농업에 종사)과 1 년 선배인 연성만 의 장거가 있었다. 하지만 선배들인지라 이제 가야 할 길을 택한 모양이라고 담 담하게 받아들이며 긴장된 마음을 삭이면서 지내던 참이었는데 이 사건은 의외 로 후배들이 많이 다치게 된 것이어서 그 때문에 학회 내부의 분위기가 더욱 비


장해졌다. 그들의 선배된 입장인 나로서도 일종의 미안함과 부담감이 더하지 않 을 수 없었다. (필자는 위 28 동 사건 당시 축제 행사의 일환으로 농협 문제 심포 지엄을 준비하느라 외부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28 동 현장에 없었던 이유로 '화' 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1979 년, 4 학년을 맞이했다. 이상할 정도로 한 학기가 아무 런 움직임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그 해 여름 YH 여공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이 있었고, 곧 이어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사 건이 일어났다. 4 학년들 사이에서는 누군가가 현 시국에 대하여 역할을 해주어 야 할 것이 아니냐 하는 반성과 촉구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은 10 월 초, 대학 4 년 동안 학회 활동을 같이 하면서 거의 붙 어지내다시피 했던 친구 김준희(현 웅진출판사 이사)가 김낙년(현 동국대 경제학 과 교수), 김진태(전 '말'지 기자), 신상덕(현 대우건설 근무), 김종채(현재 독일 유학 중) 등과 함께 용감하게 시국 선언을 하고 긴급조치 9 호 위반으로 체포 투 옥되었다. 나는 구속된 친구들의 가족을 위로하며 지내고 있던 중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10.26 이었다. 유신의 심장부에 꽂힌 총탄은 '긴급조치'당 했던 대학 생활을 제자리로 돌려 놓았지만 이미 나는 마지막 4 학년을 보내고 있 었다. 한순간에 찾아온 유신 체제의 붕괴와 대학 생활의 마감. 나의 사법 시험 공부가 어렵사리 결정된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더 내려가라! 운명의 10.26 이후 나는 이제 어두웠던 한 시대가 끝났다고 보고 본격적인 사법 시험 공부에 돌입했다. 사회에 나가서 뭔가를 하기 위해서라도 사법 시험에 합 격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사실 그 동안 법학 공부를 너무 소홀히 했다. 학점을 따고 졸업을 한 것이 용 할 정도였다. 학점 관리는 고시 공부를 하는 친구들이나 하지 않았던 나나 다 같이 등한시하게 마련인 소위 '비고시 과목(담당 교수님께는 대단히 죄송스런 표현이나 학생들은 그러한 과목을 '변두리 과목'이라 불렀음)'에서 그런 대로 유 지를 해온 셈이었다. 당시의 내 법학 실력을 알려 주는 일화가 있다. 4 학년 1 학기의 수강 과목 중 '민법 연습'이 있었다. 이시윤 당시 서울고등법원 부장 판사(현 감사원장)가 담당하셨는데 기말 고사 시험 문제 중 '중간 생략 등 기'에 관한 사례가 출제되었다. 중간 생략 등기라면 그 개념이나 내용에 대하여 민법의 물권법편을 조금만 공부한 사람이어도 알 수 있는 그야말로 물권법의 초 보 개념이다. 그것은 '갑'이 '을'에게 자신 소유의 부동산을 팔고 '을'이 다시 그 부동산을 '병'에게 팔았을 때 원칙적으로는 '갑'에서 '을'로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하고 다시 '을'에게서 '병'으로 소유권이전 등기를 해야 하지만 대법원 판례에 의하면 갑,을,병 3 자가 합의하면 '을'로의 중간 등기를 생략하고 곧바로 '갑'에게 서 '병'으로의 소유권 이전 등기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얼마나 공부를 안 했으면 그러한 기본도 모르고, 현행 민법이 정하는 부동산 등기의 원칙상 그러 한 중간 생략 등기는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답을 써놓아 D-를 받았다. 그게 4 학 년 과목이어서 재수강할 기회도 없이 그대로 졸업을 하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본인을 지금도 이런 수준이라고 오해하지는 마시라.) 이제 시간을 갖고 고시 공부를 하려면 군입대 문제 때문에 대학원 진학이 필 수였다. 시험 준비는 못해도 최소 2 년은 해야 할 상황인데 가정 형편으로는 대 학원 학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울대 대학원에 우선 진학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시험을 쳤지만 며칠 공부한 실력으로 대학원에 들어갈 수는 없 었다. 바로 군대에 갔다 와서 시간적 여유를 갖고 사법 시험을 준비할까 아니면 다


른 대학원이라도 가서 2 년을 목표로 사법 시험을 준비할까를 놓고 고민하던 끝 에 지방의 모 국립 대학교 대학원에 적을 두고 고시 공부를 했다. 그 대학원 측 에는 지금도 대단히 미안한 마음이다. 처음부터 석사 학위를 목표로 대학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서 강의에 출석하지 않았다. 다만 1 년차 1 학기에는 5.18 로 인 한 휴강 때문에 강의 대신 리포트로 학점을 이수하고 그 다음 학기부터는 등록 만 하고 학점 이수는 전혀 하지 못했다. 일생을 두고 그 불성실함을 후회하는 몇 가지 경우 중의 하나인데 어쨌든 그 러한 편법을 동원하여 2 년을 공부했고 마지막으로 시험 기회가 주어진 제 24 회 사법 시험의 제 2 차 시험은 예년의 4 월에서 7 월로 늦추어져 공부의 기회가 더 많 이 주어졌음에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국민윤리에서 과락을 맞는 불운을 맛보 았다. 그것은 입대를 앞둔 마지막 시험기회였다. 2 차 시험을 앞두고 입대 영장이 나와 1 차 시험 합격증을 첨부하여 겨우 입대 연기까지 받아가면서 천신만고 끝 에 본 시험인데 그런 결과가 나왔으니 실로 한탄스러웠다. 그러고 나서 두 달 후 입대 영장이 떨어졌고 나는 1982 년 11 월에 논산훈련소로 향했다. 무엇 하나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군대로 가는 내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군입대는 내 교만과 부족함을 교정하는 기간이었다. 육군병으로 복무 하는 데 서울 법대를 나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행정 업무마저 군대 에서 필요한 것은 타자를 잘 치고 차트 글씨를 잘 쓰고 하는 사람이 필요하지 법학 지식을 가진 사람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더 내려가라! 나는 아무것도 아 니다! 군대 생활을 통하여 나는 철저히 겸손해질 수 있었다. 신앙의 기복은 있었지 만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자인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나는 군대 생활을 하면서 거의 매일 묵상을 올렸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 이다.(시편 119:71)","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 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지킴이 허사로다.(시편 127:1)" 1984 년 11 월 29 일,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했다. 이듬해부터 다시 사법 시험 준 비를 시작하여 1986 년에 제 28 회 사법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때 같이 붙은 최연 소 학년이 83 학번이었으니 그들에 비해 7 년이 늦은 셈이었고 대학 동기 중 제일 빨리 합격한 그룹들에는 7 년이 못 미쳤다. 사법연수원(제 18 기) 생활은 1987 년 3 월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숙명적으로 80 년 대의 학번들과 같이 생활하게 되었고 이제 그들은 평생 동안 법조계 생활의 동 반자가 될 터였다. 사법연수원의 80 년대 학번 중에는 학생 운동에 꽤나 깊숙이 관여했다가 고시 공부를 시작하여 어렵지 않게 시험을 통과한 수재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들과 나는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고 그 당시 대학가에서 널리 읽히던 사회 과학 서 적을 가지고 토론도 벌이곤 했다. 확실히 70 년대 학번과 80 년대 학번은 같은 학생 운동을 경험했으면서도 달라 보였다. 70 년대 학번들은 다분히 지사적인 각오로 반독재 중심의 학생 운동을 벌였던 데 비해 80 년대 학생 운동은 '서울의 봄'이 좌절되고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전두환의 파쇼적 극우 정권에 대항하다 보니 반사적으로 강한 이념성 을 풍겼다. 하지만 나는 80 년대 학번 사법연수생들과 함께 정치와 역사 등을 함 께 토론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은 아직 학생티를 벗지 못했지만 패기에 찬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들에 비해 이런 저런 실패도 겪고 군대 생활 등을 통해 세상 물정을 어느 정도 경험한 셈이어서 서로 부족한 점을 긍정 적인 방향으로 보완하고자 노력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사법연수원 제 18 기의 '노동법학회'였다. 이 학회는


이후의 모든 사법연수원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었고 연수생들에게 노동법과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고 노동법에 소양이 있는 변호사를 배출해 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법연수원 제 18 기 노동법학회는 지금도 서울 서초동에 있는 내 사무실에서 매월 1 회 노동법 관계 세미나를 갖고 있고 제 19 기 이하의 사법연 수생들로 노동법학회를 만들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사법연수원은 내가 지금의 변호사로 들어서는 중요한 배움의 과정이었다. 좋 은 동기들과 열심히 학회 활동도 했고 우리 법조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으니 내게는 둘도 없이 소중한 기회였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핵심적인 사항을 몇 가지 짚어 보고자 한다. 첫째는 사법연수원의 교수분들 모두가 변호사 경험이 없는 현직 판검사들이기 때문에 은연 중에 현직 선호 의식을 내비치거나 변호사 개업에 대한 공포감을 주면서 또다시 점수 경쟁의 대열로 몰아넣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 그렇 지는 않겠지만 개업에 대한 두려움에다 현직에 있다가 변호사로 개업하면 전관 예우니 하면서 큰 돈을 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무시할 수 없는 형편 이다. 둘째는 법조 윤리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물론 사법연수원 의 교과 과정에 법조 윤리 과목이 있지만 참다운 법조인을 양성할 것을 강력하 게 요구하는 법조계의 현실에 부응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지금은 어떤 내용으로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기억에는 사법연수원 시절의 법조 윤리 과목 시간에 법조인이 나아갈 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토론해 본 적이 없다. 변호사와 판사, 변호사와 검사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며 또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경우는 어떤 때인가, 변호사가 브로커의 유혹을 뿌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변호사의 수임료는 어떻게 정해야 할 것인가 하는 등의 실천적인 윤리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 보지 못했다. 이런 실천적인 문제를, 사법연수원을 떠난 후 개인의 판단에 맡겨 버리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법조인이 바로 서지 않으면 진실은 가려지고 만다. 법조인이 돈의 노예가 되 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법의 권위는 법조인의 정직함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이런 내 생각이 한갓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 줄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 다. 드디어 사무실을 열다 2 년간의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때 가장 좋았던 것은 이제 몇 시간안에 어떤 답안 을 내어서 평가받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해방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변호사는 법조의 직역 중에서 가장 적성에 맞는 것이었다. 고시 공부를 했던 기본 목적이 현직보다는 변호사였기 때문에 흔쾌히 개업을 결심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광막한 황야에 홀로 선 기분이었다. 지금까 지의 삶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부모 형제가 보살펴 주었고 의지할 수가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내 생활은 내가 책임져야 하고 게다가 내가 맡을 사건은 오직 나 자신의 힘으로 풀어 나가야 했다. 1989 년 2 월에 서초구 서초동 1597 의 6 대하빌딩 403 호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 렸다. 사무실을 낸다고 하니 별의별 브로커성 사무장들이 명함을 내밀며 찾아왔 다. "사건 부담 하나 갖지 않아도 제가 책임지고 변호사님이 월 1,000 만 원 내지 2,000 만 원은 가져가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이 '아니오'였다. 변호사의 시작을 그런 잘못된 관행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개업을 하고 차차 형편이 나아지는 대로 사무실도 넓 히고 승용차도 구입하기로 했다. 대한변호사협회의 등록 비용 400 만 원도 2 회에 걸쳐 분납하기로 하여 부담을 줄였다. 빌딩 건물주가 보증금은 적게 받고 월세 를 많이 받아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지만 목돈으로 내는 전세 보증금은 부담이 크게 줄어 들어서 당장 필요한 도서 구입에 들인 돈 200 만 원을 포함하여 개업


비용을 1,000 만 원 정도로 줄였다. 아마도 1989 년 이후 대한민국에서 개업한 변호사 중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개업 한 변호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상업은행에서 변호사에게 개업 비 용으로 2,000 만 원까지 대출을 해준다고 하여 친지를 보증인으로 내세우고 대출 신청까지 했다가 그것마저 취소하였다. 주위에 주는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였다. 이제부터는 누구에게도 경제적으로 의지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던 터였다. 때늦은 '독립 운동'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확신한다. 내 밥벌이는 내가 하고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주변의 희생과 불편 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개업 초반의 경제적 부담을 이겨 나가려고 했다. 변호사의 길에서 1989 년에 개업을 했으니까 이제 변호사를 시작한 지 8 년째가 된다. 그 시간은 사건의 승패에 따르는 희비의 쌍곡선이 교차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때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첫 아이 태윤은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서 20 여 일 가까이 사건이 하나도 없던 중에 태어났다. 당장 출산비를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는데 대학 선배 이병돈 변 호사의 선임료 100 만원짜리 곗돈 소송을 소개받고 처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여자들끼리의 곗돈 분쟁이었는데 규모로 보아서는 법정에까지 가서 그 고생을 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제는 감정 싸움으로 비화되어 2 년이 넘도록 결말 을 보지 못하고 다투어 온 사건이었다. 자가용이 없었던 나는 고속버스를 이용 하여 공주를 오갔는데 3 회 정도만 가면 될 것이라던 소송이 5 회를 가도 끝날 기 미를 보이지 않았다. 증인으로 나온 사람들이 철저하게 증인 신청자 쪽에 유리하게 증언을 하니 민 사 소송이 처음인 나로서는, 분명히 한쪽의 주장과 증언은 거짓말인데 이럴 수 가 있나 하는 답답한 마음이었다. 가부간에 결심을 할 요량으로 6 회째 공주법원 을 가니 상대방 당사자가 지엽적인 문제를 입증하기 위하여 또다시 증인을 신청 하려고 했다. 재판장에게 10 분의 시간 여유만 주면 밖에 나가서 당사자 간에 화 해를 시도해 보겠다고 했더니 흔쾌히 승낙을 해주셨다. 재판 때마다 나와서 방청을 하던 우리측 당사자가 그 날따라 법정에 나오지 않아서 화해 시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공주를 다음에 또 오자니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그 날 나는 공주 재판을 마치고 바람이나 쐴 요량으로 차를 대 절하여 아내와 태어난 지 100 일도 채 안 된 태윤이를 데리고 공주로 갔다. 재판장에게 우리측 당사자가 없어서 화해 통보를 할 수 없는 사정을 이야기 했다. 재판장은 상대방의 증인 신청 채택을 보류하고 다음 재판 기일을 지정해 놓을 터이니 그 때까지 화해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법정을 나와 상대방 당사자 를 차에 태우고 우리측 당사자가 살고 있는 공주시 계룡면의 집으로 찾아갔다. 우리측 당사자를 만나 화해를 권유하니 펄쩍 뛰었다. ‚내가 재판에 이겨 달라 고 비싼 돈을 줘 가며 변호사를 샀지 화해해 달라고 산 줄로 아느냐.‛며 눈물 까지 쏟아 놓았지만 이웃에 사는 원피고의 양쪽 집을 오가며 4 시간 가량 설득하 여 화해안을 만들게 되었다. 재판장에게 전화하여 그 사건이 화해가 될 듯하니 퇴근을 늦추어 달라고 하자 몇 시간이라도 좋으니 화해를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 날 오후 늦 게 화해안을 만들어 법원에 가서 담당 재판장 앞에서 재판장 화해를 하는데 우 리측 당사자가 이의를 제기했다. ‚아니 이런 식으로 화해하면 저쪽이 동네방네 다니면서 자기가 이겼다고 자 랑하고 다닐 텐데, 그럼 내 꼴이 뭐가 되는 겁니까?‛ 이에 재판장은 즉석에서 통상의 화해 조서에는 있을 수 없는 내용인 ‚원피고 쌍방은 이 사건에 대하여 동네에 다니면서 서로 자기가 이겼다면서 상대방을 비


방하지 않기로 한다.‛는 이례적인 조항을 삽입해 넣었다. 그 사람들은 물론 동 네방네 다니며 떠들지 않았다. 비록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이 소송을 처리하면 서 변호사 일의 보람과 업무 처리의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내 생활을 끌어 가는 기본은 사건 의뢰에 따른 소송 처리지만 변호사로서의 기본적 자세를 재확인하고 지속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서 5 개의 활동을 중심적으 로 벌여 나가고 있다. 그 하나는 앞서 말한 제 18 기 ‘노동법학회’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판례나 사 례 공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두번째는 ‘우리법연구회’모임이다. 대학 시절 가 까이 지냈던 선후배 동료들이 중심이 되어 노동법과 헌법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위의 두 모임은 관련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외에 서로의 만남 자체로 부끄럽지 않은 법조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새롭 게 다지는 기회가 된다. 세번째는 정기적인 법률 상담이다. 나는 변호사라면 법률 상담을 적극적으로 벌여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호사들이 각처에서 활발한 상담 활동을 하면 법률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직접 변호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브로 커의 폐해가 없어지게 된다. 이로 인해 수임료가 낮아질 수 있으니까 일반 국민 들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혜택이 돌아가는 셈이다. 그런 취지에서 나는 현재 출석하고 있는 광림교회(기독교 대한 감리회 소속) 에서 매주 실시하고 있는 법률 상담 활동에 한 주를 맡고 있고, 또 내 고향인 충북 영동의 신용협동조합에서 개설하고 있는 무료 법률 상담소의 전담 변호사 로서 매월 2 회씩 무료 상담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영동은 변호사가 없는 곳이어서 종래 영동 주민이 변호사와 상담이라도 하려면 100 여 리 떨어진 대전이나 김천까지 가야 겨우 상담이 가능했다. 그나마 영동 촌사람이 대전이나 김천의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가서 변호사라도 만나려면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고작 사무장이나 만나고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 했다. 하지만 고향 출신의 변호사가 정기적으로 상담을 실시하면서 한 사람당 10~20 분씩 시간을 할애해서 상담을 해주니 상담을 받는 분들도 좋아하시고 상담 하는 나 역시 몸은 피곤해도 대단한 보람을 느낀다. 역시 조건 없이 만나면 담 백한 즐거움이 생기는가 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활동이 다. 민변 활동을 하는 변호사들 대부분이 많은 돈은 벌지 못하면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인권과 관련된 일이라면 사양하지 않고 헌신하고 있다. 군사 독재 시적 은 말할 것도 없고 문민 정부에 들어서서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등 각종 시국 사건의 변론은 이제 민변의 평범한 일상 업무가 되어 버린 정도이다. 하지만 인권의 지평이 넓어지고 삶의 질의 문제가 점면에 대두 한 지금, 민변은 단순한 변론 위주의 인권 활동에서 환경이나 노동 문제 등의 현장 조사 활동, 각종 국내외 유관 단체와의 연대 활동 등을 통하여 활동의 영 역을 지속적으로 넓혀 나가고 있다. 여기에 나는 1995 년에 농촌법학회 활동을 하던 동료 선후배와 연대, 고대, 성 대, 한대 등 서울 소재 대학의 87 학번까지 두루 결합한 ‘21 세기전략아카데미’ 에 참여하여 그 모임의 초대 회장을 맡고 있다. ‘21 세기전략아카데미’는 ‘미래를 보는 눈과 내일을 준비하는 손’이 되자 는 문제 의식으로 월례 초청 토론회, 기관지 「아카데미 저널」의 발간, 역사 기 행 등의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지방 자치 선거 때는 일 본의 ‘청년 시장회’회장단을 초청하여 한일 양국의 지방 자치 현안에 대한 토 론 행사 등의 연대 활동을 통하여 단순히 안티테제만 가진 집단이 아니라 적극 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준비하는 단체로서의 위치를 굳혀왔다. 이 모임은 세기의 대전환을 맞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청년 세대들의 건강한 의지와 열정을 모아서 사회의 개혁을 위해 고민하는 토론 무대가 되기를 자청한


다. 정신없이 바쁜 날들 속에 지난 8 년의 세월이 녹아 있다. 겸손하라. 더 내려가라. 같이 노력하라. 제 이익만 챙기려고 하지 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생활의 지표들이다. 죄와 벌이 정의와 양 심을 억누르는 상황에서 우리들은 영원한 무죄를 원한다. 그러나 진심을 밝히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 속내까지 들어가 물어 볼 수는 없다. 삶의 진실함이 법의 권위보다 우선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래서 나는 법률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도덕으로 나 자신과 이웃들에 게 아름다운 무죄의 삶이 되기를 기원한다. 그리하여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건네는 이 한마디가 어색하지 않은 날들을 기다린다. ‚진정 무죄로소이다.‛ 나는 주체적 현실주의자로 살아왔다 오숙희 1959 년 인천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여성학 을 전공한 후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다가 우연한 방송 출연을 계기로 토크쇼 진행자가 되었다. 여성으로서 자기 체험적인 글을 출간했으며, 현재 여성민우회 가족과 성상담소 부소장과 MBC 라디오의 ‘오숙희 초대석’진행을 맡고 있다. 방송, 인생의 전환점 내가 방송 일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 고 있던 어느 날 KBS 의 집중 토론 여성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출연 섭외를 받게 되었다. 나는 TV 에 나간다는 것이 너무 두렵고 어색해서 망설였다. 주제가 맞벌 이에 대한 찬반 토론이었는데 여성 입장에서 찬성 의견을 펴 나가면 되는 것이 었다. 섭외를 해 온 사람이 마침 대학 선배였고 주위에서도 해보라고 하여 용기 를 내게 되었다. 녹화였는데 막상 토론이 시작되자 나는 흥분해서 방송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반대 입장에서는 연세 지긋한 분들이 나오셨는데 아이를 키 워야 하기 때문에 여자는 집에 있어야 하고 정 일이 하고 싶으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때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 스스로 일을 하는 엄마로서 일하는 젊은 여성들의 현실을 열심히 말했던 것 같다. 그 날 밤 나는 집에 와서 잠을 못 잤다. 아까 반대편에서 그 말을 했을 때 내 가 이 말로 반박해야 했는데. 참 이런 말로 해야 했는데 빼먹었네. 마치 수험생 이 시험을 마치고 돌아와 틀린 문제만 생각나는 것같이 내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서 괴로웠다. 며칠이 지나 일요일 오전에 방송이 나왔다. 마침 시아버지 생신이어서 시집 식구가 다 모여 있었다. 나는 너무 쑥스러워서 부엌을 들락거 리며 차마 보지 못했다. 방송이 끝나자 시아버지께서 아주 칭찬을 해주셨다. ‚답답한 얘기를 하는 늙은이들이 아주 꼼짝을 못 하던데, 하하.‛ 사실 시아버지께서 여성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지 조심스러웠는데 교직에 계시면서 여교사들의 현실을 많이 보셔서인지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계 셨다. 우연히 보았다는 사람도 잘했다고 격려해 주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출연 섭외가 와서 같은 방송에 세 번쯤 더 출연했다. 토론 자로 나가는 일은 별로 부담이 없고, 찬반 논쟁은 재미도 있었다. 여성학과 선재 들이 방송을 보고는 ‚절대 먼저 흥분하지 말아라.‛‚상대가 보수적이고 공격 적으로 나오더라도 웃어라.‛하는 말로 기술적인 변에서 코치를 해주기도 했다. 방송 제작진들과도 얼굴이 익었고 그 프로그램의 제작 취지가 다분히 현대 사회 의 변하는 여성을 위한 것이어서 약간의 동지 의식까지 가지게 되었다. 90 년 10 월 어느 날, 급히 전화 바란다는 그쪽 PD 중 한 명의 메모를 받았다. 단순한 출연 섭외려니 했는데, 가을 개편을 계기로 나에게 ‘생방송 여성’이라


는 신설 프로그램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신나서 흥분도 되었지만 부담스럽기 도 했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자신이 없었다. 주위의 의견도 두 가지 였다. 잘됐는데 뭘 망설이냐는 입장과 학교 사회가 보수저이라 방송 일을 하다 보면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신중론이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 을까. 나는 또다시 내 인생의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 내 인생의 첫번째 전환점은 열일곱 살 때였다. 인천에서는 내가 고등학교 추 첨의 첫 케이스였다. 문제 많은 사립 학교에 배정되어 두어 달 다니다가 나는 회의에 빠졌다. 학교도 재미없고 공부도 하기 싫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생겨나 질 않았다. 불합리한 권위주의에 가득찬 학교 운영, 담임 선생님에게 항의하다 찍혀 버린 다음의 학교 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 어느 날 저녁밥을 먹다가 나 는 아버지께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심각하게 생각해서 어렵게 꺼 낸 얘기가 아니었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학교를 다녀야 할 이유를 나 스 스로도 모르는데 그냥 습관적으로 학교에 오가야 한다는 게 불쑥 억울하다는 생 각이 들어서였다. 그 이후 나는 학교에 가기 싫어서 꾀병을 부렸다. 꾀병도 통증 은 있었다. 무릎이 아프고 귀에서 열이 나고 피부병이 생겼다(우리의 질병 중 마 음에서 오는 게 많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 다음에는 그게 순전히 꾀병은 아니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때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는 여러 생각 끝에 내게 세 가지 길을 제시하셨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로 고졸 학력을 인정받은 후 대입 준비를 하는 길, 서울에 있는 여상에 적을 두고 학원에서 대입 준비를 하는 것, 서울에서 연 합고사를 다시 보아 새 학교를 배정받는 방법,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부모 님은 내 뜻을 존중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방의 불도 끄고 곰곰이 생각했다. 어렴 풋이 이게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거구나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 기억은 안 나지 만 나는 하여튼 세 번째 길을 선택했도 부모님도 만족해 하셨다. 어떤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지재여(지방 재수 여학생의 약자로 교육청에서 내 수험표에 찍 어준 표시)’로 열 달 가까이 지냈다. 새로운 고등학교 생활은 즐거웠다. 좋은 친구도 많이 사귀었고 서울이라는 문화적 토양의 혜택도 많이 받았다. 다음 전환점은 대학을 결정할 때였다. 그 전보다 더 힘들었다. 내가 선택할 몇 가지 길을 요약해서 제시해 줄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다. 오빠는 대입에 연속 실패한 후 군에 갔고 언니들이 여상에 진학했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대입에 관 해 내게 조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따. 선택은 오직 내 손에 달려 있었다. 명 예로 보나 경제 형편으로 보나 서울대학교에 가면 좋으련만 내 실력은 그에 못 미쳤다. 학교에서는 연,고대를 권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정 학과를 선택하기보 다 대학의 이름값으로 지원하던 터라 나는 결정을 못 내리고 시간만 보내고 있 었다. 원서를 쓰던 날 나는 우발적으로 이대를 선택했다. 집에서도 몰랐고 학교에서 도 놀랐다. 사실은 나도 놀랐다. 이화여대 근처에 살면서 한 번도 이대에 가겠다 고 생각한 적이 없던 나였다. 남녀 공학 대학에 대한 낭만적인 기대가 없지 않 은데다 여대는 왠지 시시해 보이고 학교 앞에 양장점만 즐비한 것도 경멸스러웠 다. 나는 선택의 이유를 두 가지로 들어 어른들을 설득했다. 첫째는 어차피 서울 대가 아니라면 굳이 남녀 공학에 가서 남자들한테 치이고 싶지 않다, 둘째는 입 학금부터 내가 벌어서 다녀야 하는데 그렇다면 내가 대학 생활에 보다 쉽게 적 응할 수 있는 여자 대학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의 아쉬움 속에 내 의지는 관철되어 79 년에 나는 이대 인문 사회 계열 에 입학했다. 1 학년이 끝날 때까지 영문과를 가리라는 것에 어떤 의심도 없었다. 이대 영문과의 네임 밸류는 높았다. 2 학년에 들어서면서 나는 이대 안에 영문과 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어령 선생이 계신 국문과도 기웃거렸 고 이에치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는 사학과에 마음을 두었다. 신문방 송학과도 매력 있었고 철학과도 가 보고 싶었다. 단과 대학의 틀이 없었다면 법


정대의 정외과도 탐냈을 것이다. 구멍 가게만 보다가 백화점에 들어간 아이처럼 나의 시선은 정신없이 분산되었다. 3 학년부터는 계열별 공부를 끝내고 확정된 과에 소속하게 되었다. 2 학년 2 학기가 끝나 가도록 갈피를 못 잡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도서관에서 낯 익은 동급생을 만났다. 사회학과라는 데서 신입생을 위한 학과 설명회를 한다기 에 간다고 했다. 사회학과? 그런데도 있었나 하는 호기심으로 별로 친하지도 않 은 그 친구를 따라갔다. 선배와 교수들이 이십여 명 나와 있었고 나 같은 입장 의 학생이 이십여 명 되어 아주 오붓한 분위기였다. 대학에 들어와서 항상 개별 적으로 대형 강의실에 밀려들어갔다가 밀려나오는 일만 하다가 오랜만에 맛보는 그 오붓한 분위기가 너무 반가웠다. 사회학이라는 말도 그가 내가 가지고 있던 다양한 관심 학과를 다 포괄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사회학과로 진입 했다.

내 인생의 원칙 두 가지 가끔 나는 내 인생이 우연의 점철처럼 여겨진다. 사회과학을 공부한 젊은 사 람답지 안게 사주 팔자를 싹 무시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등학교에서 문과냐 이과냐를 정할 때, 수학과 과학에 흥미가 없으면서도 무작정 이과를 택 한 것이나 졸지에 직장을 때려치우고 난데없이 여성학이라는 것을 하겠다고 덤 빈 것도 지금 생각하면 필연보다 우연에 가깝다. 선택의 기로는 항상 우연히 주어졌는데 그 때마다 내가 한 선택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항상 플러스가 되어 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간단하게 운이 좋았 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사고 방식 안 에 들어 있는 두 가지 원칙이 선택의 순간마다 작동했던 것 같다. 첫째 원칙은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 남의 눈이나 평가보다 내게 필요한 것 이 무엇이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고, 둘째 원칙은 ‚현재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이는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내 인생의 첫번째 좌절은 내가 막내딸로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자라면서 나는 내가 맏이로 태어났더라면 우리 집안이 훨씬 좋아졌을 거라는 확신과 함께 오빠 와 언니들의 서열 권위주의에 반항하기 시작했다. ‚이런 건 동생이 하는 거야. ‛하면 나는 ‚왜?‛라고 묻고 납득되지 않으면 하지 않았다. 내가 정말 듣기 싫어한 말은 ‚넌 아직 어려서 말해 줘도 몰라.‛‚넌 가만 있어, 조그만 게 뭘 안다구.‛였다. 알건 다 아는데도 막내라고 무시하고 존중해 주지 않는 데는 억 울하지만 별수가 없었다. 내 뜻을 관철시키는 방법은 부모님께 의지하는 것 뿐 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고양이’가 되었다(고양이가 주인의 무릎에서 야옹거리 듯이 항상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콧소리를 내며 어리광을 부렸다). 부모님의 확실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역시 대단한 힘이었다. 언니나 오 빠들이 노골적으로 공격성을 드러내는 일은 아예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 는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 달라고 내게 부탁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확실히 내 편 이었다. 누가 제일 좋으냐는 질문에 퀴즈의 답처럼 나오는 ‚너‛라는 답은 나 를 만족시켜 주었고, 나중에 커서도 부모님의 집 아랫방에 세들어 살기로 다 얘 기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 발생했다. 하루는 아버 지께서 만년필을 사 오셨는데 세 자루뿐이었다. 언니 오빠가 만년필에 잉크를 넣는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는 국민학생인 내게 만년필이 무 슨 소용이냐고 달래셨지만, 그 순간 아버지의 머릿속에 내가 존재했다면 연필 한 자루라도 내 몫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서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 귀여운 고양이는 소용없다. 부모님 마음에 믿음직한 기둥으로 자리 잡


아야 한다.’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한 불우한 아버지와 고생 모르고 사시다가 객지에서 맨 주먹으로 힘겹게 살아오신 어머니, 이 실향민 부부에게 유일한 희망은 자식이었 다. 자식을 통한 ‘영광이여 다시 한번’은 은연중에 맏아들인 오빠에게 가 있 었다. 술이 얼큰히 취해서 들어오시는 날이면 아버지는 항상 오빠에게 ‚법관이 되어 애비가 못다한 할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달라.‛고 말씀하셨다. 그 날 이후 나의 장래 희망은 ‘법관’이 되었고 나는 공부에 승부를 걸었다. 숙제도 제대 로 안 해 가서 신체 부위 중에 안 맞아 본 곳이 없던 내가 성적표를 받는 날이 면 부모님의 기쁨이 되었다. 오빠가 대입에 연속 실패하고 언니들이 상업 학교 로 진학한 다음에 나는 부모님의 유일한 희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막내딸이라는 지위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나는 타인의 마 음에 들려고 애쓰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그 때 깨달았다. 나의 사춘기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찾아왔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사실은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명절에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정든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너무 서러웠다. 시험과 숙제로 아등바 등 살아도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허무했다. 학교 가 파하면 친구들 중에 아무나 한 명을 집에 데리고 와서 내가 아끼는 물건을 주면서 집에 못 가게 붙잡아 두곤 했다. 그 틴구와 노는 동안은 괜찮은데 친구 만 가고 나면 가슴이 허전하고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TV 에 나오는 인기인 을 보고 환호를 하다가도 ‘언젠가 저 사람도 죽겠지.’하는 생각에 곧 시들해 졌다. 밤에 오줌이 마려워 깼다가는 단칸방에 나란히 잠들어 있는 가족의 숨소 리를 확인해 보곤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흐느껴 울리도 있다. 일 년 가까이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 후 나는 나름대로 인간이라는 운명과 합의를 보았다. ‘오지 않는 미래를 불안해 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자.’ 방송국의 쓴맛과 단맛 방송 제의가 들어온 그 무렵, 사실 나는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결혼 생활가 지방 대학 강사 생활을 2 년째 하면서 타성에 젖어 살가간다는 반성이 들었다. 내 삶은 대학 강사를 멋으로 달고 사는 기혼 여성일 뿐이었다. 집안 살림에 전 념하지 않더라도 정신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공부에 쏟을 에너지가 부족하고 연구 회 활동이나 세미나에 참여하지 못하다 보니 전공 분야에서도 낙후되고 있었다. 우려먹는다는 느낌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달리 대안이 없었다. 결혼 생활에도 별 불만이 없었고 한참 재롱을 부리는 아이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내 가슴 밑바닥에는, 펼쳐지지 못하는 낙하산처럼 분출되어댜 할 것이 억눌려 있는 답답함이 깔려 있었다. 나는 그 정체가 뭔지를 몰랐다. 유학을 갈까 생각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성학과에 박사 과정이 생기면 응시하리 라 벼르면서 스스로를 달래고 있을 때 내게 방송이 찾아왔다. 나는 방송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대학교 일학년 때, 구성작가 친 구를 둔 탓에 추적 60 분이라는 프로그램에 짧은 인터뷰를 한 후 PD 가 ‚리포터 를 하면 잘 하겠다.‛고 했지만 별로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나의 정체성은 학자에 가 있었다. 그러나 앞의 두 가지 원칙이 암암리에 작동하여 나는 학교로 돌아오지 못한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생방송 여성의 진행을 맡기로 결정했다. 별 기대 없이 당장의 슬럼프를 벗어날 욕심이 우선이었는데 뜻밖에도 방송 일은 즐 겁고 만족스러웠다. 내 전공인 여성학을 현실 생활에 접목시키는 것도 의미 있 었고 그것을 보는 여성들의 긍정적이 반응이 보람을 안겨 주었다. 함께 만드는 PD 랑 작가와도 일을 넘어서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유대가 다져졌다. 우리는 한팀이었다. 방송국 내에서 보기 드물게 실무진이 여자로만 짜인 팀이었다. 대학 시절에 맛보지 못했던 동아리 생활이 이런 것이려니 싶기까지 했다. 대학 강사


급료보다 훨씬 많은 소득도 뿌듯했다.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에 찼다. 일 주일에 한 번, 70 분짜리 생방송이었지만 일 주일에 서너 번은 방송국에 나 갔다. 월요일은 지난 토요일 방송에 대한 평가와 다음 아이템 회의를 하러, 화요 일은 섭외 문제로, 목요일이나 금요일에는 구성 대본을 놓고 토론하러 모였다. 섭외는 보통 사람 중에서 해당 주제를 실감나게 말해 줄 수 있는 게스트와 그 사례를 일반화하여 해석하고 필요한 경우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 전문가를 선정하는 것이었다. 자칭 인신 매매범이라고 할 만큼 우리는 자신의 주소록을 밑천으로 섭외에 나섰다. 무가 섭외되느냐에 따라 방송의 질이 결정되므로 섭외 에서는 PD, 작가, 진행자라는 역할 구분이 있을 수 없었다. 대본 회의를 하는 날 은 해당 주제를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까를 놓고 고민도 많았고 왕왕 의견 대립 이 일어나 분위기가 긴장되기도 했다. 생방송 여성은 그렇게 치열한 과정을 거 쳐 만들어졌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열띠게 토론했던 순간을 가장 아름답게 기 억한다. 그것은 직업적인 테크닉 차원을 넘어서 세상의 절만인 여성의 발언대를 지키는 인간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방송의 위력은 대단했다. 사람들이 나를 많이 알아보는 것도 신기하지만 출연 을 원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얻는 정보도 많았고 교제 범위도 넓어졌다. 요금을 안 받는 택시 기사나 반갑다고 우리 아이에게 덥석 5 천 원을 쥐어 주는 아주머 니도 있었고, 대중에게 알려졌다는 이유만으로 VIP 대접을 받는 일도 생겼다. TV 에 나온 사람이 오면 얼굴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아 성황을 이룬다며 강연 청 탁도 늘어났고 책을 내자, CF 를 하자는 제의도 심심치 않게 들어 왔다. 내가 어 느새 유명 인사라는 소리를 듣고 성공한 여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방송 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먼저 꼽는 방송의 단맛은 사람을, 그것도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는 데 있다.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고, 내가 미 처 경험하지 못한 것을 알게 되고, 상대의 말 속에서 뜻하지 않게 내가 처해 있 는 문제의 해답을 얻은 적도 있다. 혼자 살 수 없는 게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을 많이 사귀는 것은 귀중한 자원이 된다.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 람이 있고, 내게 도움을 청해 온 사람에게 실제로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연결 시켜 줄 수 있는 것도 방송 덕분이다. 구체적인 칠요에 의해서 뿐 아니라 마음 이 통해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출연자나 방송국 사람도 많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나는 방송의 단맛보다 쓴맛을 더 많이 느낀다. 첫방송 경험 에서 워낙 단맛을 많이 보아서 상대적인 쓴맛일지도 모르지만 방송국의 분위기 차체가 쓴맛을 만들어 낸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서울방송이 생겨나면서 시청률 결쟁이 치열해지고 노조에 대한 압력의 일환으로 경영자측에서 시청룰을 유일한 잣대로 들이대다 보니 모두 시청률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심각한 주제보 다는 가벼운 얘기를 , 진지한 분위기보다는 말초적으로 웃음줄을 자극하는 쪽으 로 흘러가고 있다. 물론 재미없는 것은 나도 싫다. 문제는 경쾌하게 다루는 방법 을 연구하지 않고 자극적인 소재로 쉽게 시청률을 올리려 한다거나 젊은 연예인 을 양념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경박한 언행으로 눈을 끌려 한다는 것이다. 방송 경력 5 년에 접어드는데 여러 방송국에서 일을 하면서 교육방송과 기독교 방송이 가장 마음 편했던 것도 시청률을 의식해서 시청자에게 아부해야 한다는 비굴함 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분야라고 할 여성 프로그램을 봐도 그렇다. 여성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보 다 먹고 살 만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여가용 프로그램이 훨씬 많다. 거리에서 나는 만난 사람은 여전히 나를 생방송 여성으로 기억하고 왜 이제는 그런 프로 그램이 없느냐고 힐책하듯 묻지만 그런 프로그램은 쉽게 만들어질 전망이 없다. KBS 의 아침마당이라는 프로그램이 그 역할을 어느 정도 하고 있는데 가끔 내가 여성학 전공자인 전문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추세에서 내가 여성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행여 내


가 그간 비판해 오던 현실과 타협하게 될까봐 그런 제의가 없는 것이 오히려 낫 다고 여기는 마음도 있다. 방송 일을 하면서 보게 되는 쓴맛은 또 있다. 개편 시즌이면 등장하는 ‚살았 니? 죽었니?‛. 어린 시절 여우 놀이를 하면 막판에 묻는 것 같은 이 말은 맡고 있는 프로그램이 계속되는지 없어지는지 안부를 묻는 것이다. 프로그램은 계속 되는데 진행자가 교체되는 경우는 ‘짤렸다’는 표현을 쓴다. PD 는 다른 프로그 램을 맡으며 방송국에 남지만 잘린 진행자는 더 이상 방송국에 별 볼일이 없어 진다. 진행자가 훨씬 나아 보이지만 결국 PD 는 정규직이고 프리랜서라는 이름의 진행자는 임시직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아무 용무 없이 방송국에 오는 것 처럼 초라해지는 일도 드물 것이다. 그러니 방송을 계속 못 맡을까봐 불안해 하 는 심리가 생겨나고 그 결과 시청자 대중에게 복무해야 한다는 방송인의 사명보 다 눈앞의 임용권자를 더 신경써야 하는 전도 현상이 생겨난다. 엄청난 대중적 파급력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방송에 매력을 느끼는 젊은이가 많다. 나는 그들에게 언제든지 기꺼이 잘릴 자신이 있으면 도전해 보라고 권한 다. 그러나 한 번 발을 디딘 곳에서 기꺼이 잘릴 수 있게 되리란 쉬운 것이 아 니다. 젊은 나이에 인기의 단맛을 빨리 보고, 달리 하던 일 없이 바로 방송가에 뛰어들었을 때는 퇴로가 차단된 것이기 때문에 죽기살기로 매달릴 수밖에 없다. 연예인 가운데 한참 인기 상승 중인데도 불안해서 대마초나 마약에 손을 대는 사람이 인기를 잃었다고 자살까지 하는 것을 보면 방송 자체가 마약일지도 모른 다. 프리랜서로 장수하는 법 나는 직장 생활보다 지금처럼 혼자 하는 자유업이 좋다. 조직이라면 어디에나 조금이라도 있는 권위주의와 형식주의 때문이다. 자기 소신이 확실하고 젊고 여 자인 내가 들어갈 곳이나 그런 나를 원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직장인을 대상으 로 한 설문 조사에서 가장 힘든 일이 조직 내의 인간 관계로 나타난 것을 보고 자유업에 대한 내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마땅한 이유 없이 남의 눈치를 살필 필요 없고, 권위없이 권위주의만 내세우는 윗사람에게 복종할 일없고 나를 둘러 싼 여러 가지 말로 상처받을 염려 없이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선에서 내 의지대 로 하고 살 수 있는, 말 그대로 자유업은 내게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가진 자유업은 단점도 있다. 그건 아무도 나를 보증해 줄 수 없 다는 것이다. 내가 이혼한 직후 미국에 유학가 있던 몇몇 친구가 소식을 듣고는 미국에 와서 넓은 세상을 보고 가면 기분 전환이 될 거라며 다녀가라고 성화를 한 적이 있었다. 이혼의 와중에서 생방송 여성을 그만둔 후 아쉬움도 있고 오프 라 윈프리쇼 같은 것을 보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미국 여행을 추진했다. 그런데 비자가 나오질 않았다. 미국이 비자 발급에 워낙 도도한 터지 만 나는 객관적으로 불법 취업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번듯한 직장도 없고, 그렇다고 제 이름의 집 한 칸이 있는 것도 아니며, 볼모로 남을 남편이 있는 것 도 아니었다. 현재 아무 직업도 없는 이혼한 여자가 아이 둘을 남겨 놓고 미국 에 간다면? 내가 생각해도 답은 뻔했다. 우리 땅에서 방송 진행자로 알려져 있 어 미국보다는 여기가 밥벌이가 낫다는 것을 내 주변의 사람은 다 알건만 객관 적으로 입증할 길이 엇었다. 프리랜서에게는 자신을 보증해 줄 ‘가족’으로서 조직이 필요하다. 일은 개 별적으로 하면서 연대하는 동일 직업 조직, 예를 들어 사진 작가끼리, 조각가끼 리, 자유 기고가끼리 또는 장르를 초월해서 에술인끼리 어떤 조직체를 울타리로 만들어 두는 것이 유용하리라 본다. 조직과 관련해서 또 하나의 필요성은 동료가 없는 데서 오는 외로움을 해결해 준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조직체가 아니더라도 감정을 교류하고 직업의 애환을


나눌 수 있는 사람끼리 작은 모임을 만들면 좋다. 내 경우에는 여성민우회의 회원으로 그 부설 기관인 가족과 성 상담소의 부소 장 직이 울타리 구실을 해줄 뿐 아니라 여성 운동의 동료 역할을 해준다. 장송 국에서 알게 된 사람 다섯이 모여 계를 하기도 하고 이혼한 여성끼리 모임도 갖 고 있다. 프리랜서의 좋은 점은 시간 조절이 가능하고 시간을 내면 낸 만큼 수입을 많 이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시간에 매이지 않고 융통성 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물론 하루하루 조절은 불가능하지만 생일, 소풍, 입학, 졸업, 등 일찍이 정해지는 행사에는 대개 참석할 수 있다. 경상 지출 외로 돈이 좀 필요한 달에는 강연 청탁이나 원고 청탁에 좀더 많이 응하면 되는 것도 보통 장점은 아니다. 그런데 이 장점은 곧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형편에 따라 일하는 시간을 자주 조절하게 되면 생활이 아주 불규칙해지고 청탁해 오는 시간에 따라 주다 보면 자기 시간이 선점당하게 될 뿐 아니라 자신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빠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을 맡는 원칙이 정해져야 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일하 지 않는다.‛‚저녁 6 시까지는 들어온다.‛‚강의는 한 주일에 두 개를 넘지 않 고 원고는 한 달에 50 매를 넘지 않는다.‛는 게 나의 원칙이다. 원칙이 항상 정 확히 지켜지지는 않지만 그래야 나름의 생활 규칙이 유지된다. 직업이 다 그러 기는 하지만 프리랜서는 시간과 돈을 맞바꿔 사는 일이다. 자칫하면 돈 버는 기 계같이 살 수도 있다. 나는 일하는 시간을 돈벌이로 하는 일 7, 의미로 하는 일 2, 자신의 관리를 위한 일 1 로 분할해 놓고 있다. 의미로 하는 일은 지역의 크고 작은 여성 모임에 나가 강연하는 일과 사회 단체의 행사에서 사회를 봐 주는 일 같이 돈보다는 사회 참여의 뜻이 강한 것이다. 프리랜서는 건강과 자기 충전도 직접 관리해야 한다. 건강 진단, 휴가 일정, 직업적 연수 등에 무심해지기 쉬운데 이를 무시하면 오래 버티기 힘들다. 특히 나처럼 대중을 상대로 말해야 하는 일은 기를 뺏기는 일이다. 엄청난 에너지 충 전을 요구한다. 항상 체력 관리를 잘하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나 도 재작년부터는 육 개월에 한 번씩 건강을 진단하고 방학을 이용해서 여름 한 달, 겨울 한 달은 아무 일 안 하고 가족과 함께 집을 떠나 푹 쉰다. 사실 한 달 씩 공백을 갖는다는 것은 직업적으로 약점이다. 우선 방송의 고정 프로를 맡기 가 어렵다. 휴가 예정 기간에 걸린 고소득의 드문 기회를 놓친 적도 있다. 그러나 휴가 후 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고 누적된 피로에서 벗어나고 보면 아까울 게 없다. 마흔 살이 가까워지면서 체력 관리를 위해 주말마다 등산할 계획도 세우고 정 신을 가다듬기 위해서 기 수련이나 그림 그리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직업적 연 수를 주로 책으로 한다. 알맞은 연수 프로그램을 찾기도 힘들지만 내가 일하는 시간과 겹쳐서 참여하기도 어렵다. 책은 우선 여성과 방송에 관련된 것을 보고 최근 관심 분야를 훑어본다. 학회, 동인 모임, 연구회, 교제성 모임에서 열리는 발표회에 주제를 보아 참석하는데 빈도는 두 달에 한 번 꼴이다. 이런 일들은 어느 정도 경제력이 확보되어야 가능한 것임디 틀림엇다. 그러나 프리랜서는 가난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한달에 일정한 돈을 벌어 놓지 않 으면 불안한 사람은 프리랜서가 될 수 없다. 필요한 만큼 벌 수도 있지만 번 만 큼만 가지고 살아 낼 수 있어야 한다.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 관리 차원에서 필 요하다면 자기 시간을 자기에게 팔아야 한다. 프리랜서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이미 지 관리에 있다. 프리랜서에게 자신만의 고유한 컬러는 상표 자체이다. 집안의 경제력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인데다 퇴직금이 없는 직업이다 보니 젊어서 일거 리 있을 때 부지런히 돈 모으라는 충고를 자주 받는다. 가족이나 미래를 생각하 지 않더라도 돈 없으면 초라한 게 프리랜서다. 은행에서 대출이 되나, 회사에서


가불을 받을 수가 있나, 서글픈게 사실이다. 그래서 나도 연금 보험과 적금, 아 이들 보험을 들어 두긴 했다. 그러나 나는 여성 운동가로서, 대중을 위한 방송인 으로서 내 자리매김에서 벗어나는 일은 맡지 않으려 한다. 우선 여성에 대한 고 정 관념에서 출발하는 프로그램, 여성 잡지적인 성격의 프로그램의 진행과 광고 출연은 사절이다. 우리나라 방송국에도 가부장제는 엄존하기 때문에 강성 여성 운동가의 이미지는 방송 일을 맡는 데 불리하게 작용할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여성 운동가로 사는 것이 만족스럽고 방송 일도 거기서 크게 벗어 나지 않게 해 왔다. 나의 방송출발을 생각할 때 내 컬러를 바꾸면서 방송을 한 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프리랜서에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개척하는 일은 필수이다. 나는 앞으로 방송보다는 글쓰기를 통해 대중 과 교통하고자 한다. 방송과 달리 책은 선택한 사람이 읽는 것이므로 내 컬러를 선명히 할 수있고 한 번에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지만 일회적으로 사라지는 방송 과 다른 힘이 있다. 방송은 늘 신선한 것만 요구한다. 키우기보다는 키워진 것을 소모하는 곳이다. 나는 학교와 여성 단체에 늘 한 발을 담그고 있었다. 방송 일을 하면서 거기에 만 갇혀 있지는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을 좀 떨어져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말자 는 배짱도 가질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으므로, 프리랜서를 나무라 한다면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되어야 한다. 일 에 찌들어 있을 때 자신의 삶과 일이 갖는 근본적 의미를 환기시켜 주고 전문가 라는 이름 아래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을 막아 주는 큰 물을 항상 곁에 두어 야 프리랜서는 장수할 수 있다. 특별히 방송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지금부터 여러 경험과 바른 언어 습관을 평소에 익혀 놓으라고 권하는 바이다. 학교 다니는 동안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과외 공부는 물론 학교 직업 보도실에서 주선하는 아르바이트는 거의 다 했다. 과외도 일곱 살짜리 한글 깨우치기부터 재수생 과외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고루 경험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교정 보는 일이나 설문 조사를 짬짬이 했다. 이 런 경험은, 강의에서는 실감나는 예 들기로, 방송에서는 만나는 사람에 대한 이 해의 폭을 넓혀 주는 것으로, 글쓰기에서는 소재로 밑천이 되고 있다. 나는 이것 을 가난이 가져다 준 선물이라고 믿는다. 언어는 평소 습관이 중요하다. 방송을 진행하려면 신경써야 할 것이 많기 때 문에 평소의 말투가 무의식중에 튀어나오게 된다. 말투나 어휘 선택에 신경을 쓰다 보면 진행의 맥을 놓치거나 말을 더듬게 된다. 따라서 평소에 바른 말을 써야 하고 잘못 발음한 말은 몇 번이고 고쳐서 익혀 놓아야 한다. 라디오 일을 하면서 내가 겪는 어려움도 여기서 비롯된다. TV 와 표정이나 몸짓을 보조적인 전달 수단으로 갖는 것과 달리 라디오는 말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근본적인 것으로는 인간에 대한 존경심과 방송국에서 띄우는 대로 둥둥 떠다 니지 않는 줏대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전화위복의 시대 나의 출판 기념회에 온 중학교 동창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숙희보다 공부도 잘했고 반장이었는데 나만 못했던 숙희가 더 출세했 네.‛ 친구들끼리 웃었지만 이것은 시대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럽 여행에서 나는 내 안에 있는 예술적인 감각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만약 한국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만족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갑자기 박탈감마저 들었다. 공부만이 살 길이라고 아직도 외치 고 있는 우리 나라의 현실이 잘못되었음을 확연히 느꼈다. 요즘 학교 어머니회에 강연을 가서 내가 강조하는 것은 자녀의 인생을 공부에 걸지 말라는 것이다. 그건 부모들이 자라던 6,70 년대의 가치관이다. 공무원이 안


정된 직장으로 인정받고 과거 제도의 연장으로 고시 제도가 출세의 발판이던 시 대는 이제 지났다. 많은 어머니들이 자신의 남편을 떠올리면서 그 말이 맞는다 고 고개를 끄덕인다. 남편이 공부를 잘했지만 지금은 공무원이나 샐러리맨으로 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직장 생활에 만족을 느끼는 것도 아니라고 한 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공부를 강요한다. 우리 사회가 현재 학맥 사회, 학벌 위주의 사회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지금 초등학교 에 다니는 아이들이 사회에 나올 10 년, 20 년 후에는 달라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 한다. 해외 여행의 자유화 물결로 외국에 며칠 놀러 나가 본 사람도 생각이 달 라져서 오느너데 해외 배낭 여행을 경험하는 젊은이가 늘어나고, 민족과 국가의 이념이 퇴색하고, 인류 공존과 지구촌을 강조하는 요즘의 시대적 조류가 우리 사회를 바꿔 놓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요즘 아이 중에는 연예인이나 프로 스포츠 선수를 꿈꾸는 사람이 많다고 한 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때 잘할 수 있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 만인 시대가 온다. 며칠 전 서울법대 졸업생 다섯 명이 이색 편입학을 했다고 화제가 되었다. 수의학과, 작곡과, 동양화과, 수학과, 심리학과로 진로를 바꿔 다 시 입학한 것인데 한결같이 내 길을 찾아 기쁘다고 했다. 몇 년 전부터는 대학 보다 전문대학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사는 데 가장 중요한 잣대는 자기 만족이라고 생각한다. 이젠 직업을 고를 때도 재미와 돈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돈은 많이 벌지만 재미가 없으면 사는 기쁨이 없기 때문에 돈을 버는 것 도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하에 나는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조카를 설득해서 여상으로 가 게 했다. 반에서 20 등 안에 드는 성적인데도 처음에는 타성에 젖어 인문계 고등 학교를 고집했다. 나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들러리식의 학교 생활을 하는 것 이 얼마나 인생을 낭비하는 것인지 말해 주었다. 여지껏 했던 일 중에 가장 즐 거웠던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빵 만들기라고 했다. 어른이 되어서 제과점을 하고 싶으냐고 했을 때 얼굴이 활짝 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진로는 결정 되었다. 언니와 형부도 쉽게 동의했다. 아마 아이가 10 등 안에만 들었어도 동의 하기가 쉽진 않았을 것이다. 미래를 준비하는 데는 공부를 못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는 전화위복의 시대인 셈이다. 올해 초등학교 2 학년인 딸아이의 희망은 만화가이다. 나는 아주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은근히 공부를 못하길 바란다. 내 생각에는 만화가가 훨씬 즐거운 인 생이고 직업으로서 비전도 있는데 공부가 끼여들면 혼선이 빚어질까봐서이다. 나는 중학생만 되어도 충분히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고 책임질 능력이 있다고 믿 는다. 안타까운 것은 입시 지옥에서 살다 보니 공부에만 매진하느라 사춘기를 대학 시절로 유보하거나, 대학 가기는 틀렸으니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나쁜 극단 의 사춘기만 많아졌다는 것이다. 진짜 의미 있는 사춘기는 중고생 시절이라고 나는 믿는다. 무엇을 하든 자기 인생을 생각한 다음에는 자발성을 띠게 된다. 부 모와 어른이 할 일은 그들의 등을 떠다미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가능한 한 다양 한 메뉴를 제공하고 선택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일 게다. 지역 공동체 건설이 목표 나는 저마다 개성을 지키면서도 사람들끼리 정을 나누고 그러는 가운데 함게 살면서 생겨나는 문제를 해결해 가는 세상을 염원한다. 과거에는 개성이 질식당 했지만 지금은 개성에만 치중하여 더불어 사는 지혜가 부족하다. 현대 사외의 익명성은 자유로움을 갖오는 한편 극도의 이기주의가 나올 수 있는 소지를 제공 한다. 아파트로 상징되듯이 겉보기에는 하나지만 그 안에서는 작게 쪼개져 철저 하게 단절되어 있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남에게 무심하면서 속으로 외로워 하고 잇다. 남자들은 직장 생활에 바쁘고 여자들은 사생활이 침해될세라 문화 센터 같은 곳에 돈을 내고 가서 친구를 사귀고 사람다운 숨을 쉰다. 아이들끼리


같은 반이어도 부모끼리는 모르고(때로는 주차 시비로 싸우기까지 하고), 친한 몇몇 집끼리만 이웃 사촌이고, 나머지는 그냥 있나 보다 하는 정도이다. 쓰레기 소각장 문제로 주민 모임을 한 번 가진 다음 상가에서, 놀이터에서, 주 차장에서 반갑게 인사하며 소각장을 걱정하는 이웃이 생겨나면서 나는 공동체 정서의 회복이 가져다 주는 기쁨을 가슴 벅차게 경험했다. 학교 동아리나 살벌 했던 시절의 운동권 선후배 사이에나 오갔던 그 마음의 교류는 온통 시멘트인 아파트촌에서 사람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우리 30 대의 시대적 임무는, 개성은 달라도 협동하지 않으면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치고 사회에 공동체 정서가 충만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 고 본다.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던 부모를 보면서 자란 세대로서, 나보다 전체 를 생각하는 것의 의미를 미처 생각해 보기도 전에 개인주의적이고 튀고만 싶어 하는 신세대와 우리 자신의 세대 그리고 우리 부모 세대를 아우르는 공동체를 실험해 보면 좋겠다. 30 대에게는 거창한 것, 대의 명분을 내세우는 것에서 벗어나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의 환경을 하나라도 개선하려는 것이 곧 사회 운동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명분보다는 실리, 관념보다는 현실을 택할 가능성은 비교적 30 대에게서 가장 높 다고 여겨진다. 나의 최근 관심사는 지역 주민의 자발적인 모임을 만드는 것이다. 우선 여성 들끼리 아이 키우기, 쓰레기 줄이기, 취미 활동, 정보 교환, 지적, 물적 자워 나누 기를 해볼 생각이다. 며칠 전 대보름날을 맞아 원하는 엄마끼리 입선전을 해서 스무 가족 정도가 모여 민속 놀이를 했다. 자기 집에서 새 물건을 기꺼이 상품 으로 내놓은 사람도 있고 먹을 것을 해 온 사람도 있었다. 평가 결과 애나 어른 이 모두 즐거워했고 이런 모임을 자주 갖자고들 했다. 지역 모임을 꾸려 가는 데에 능력 있고 적극적인 주민이 의외로 많았다. 오는 어린이날에도 굳이 차 끌 고 멀리 가서 고생하지 말고 마을 잔치를 열 계획도 세워 놓았다. 지방 자치 시대를 맞아 이런 흐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체가 될 수도 잇도 사회와 유리되어 있는 주부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또 전통적 인 가족의 틀이 급속히 깨져 가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노인 문제, 이혼 가족, 사 별 가족, 독신 가족, 장애아를 둔 가족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도 유익할 것이 다. 특히 앞으로 당분간 이혼과 독신은 상당히 늘어날 것 같다. 기존의 결혼은 여전히 가부장적인 틀을 고수하는 가운데 경제적으로 자립 가능한 여성이 그 틀 에서 뛰쳐나오거나 아예 거부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이혼의 경험 이 공동체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연애를 할 때는 서로 다른 점에 매혹된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그 다른 점이 갈등의 원인디 된다. 철 저한 현실주의자였던 나는 이상주의적인 것에 매력을 느꼈고 결혼 후에는 그로 인해 나도 모르게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음을 이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오래 사뤼고 여성학까지 공부한 서른의 나이에 한 결혼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게 도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엇지 않았다. 남자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기쁜 일이 긴 하지만 여성의 인생에 화룡점정은 아님은 분명하다. 일하는 여성이 슈퍼우먼 신드롬으로 골병드는 것도 공동체적 정서가 있다면 줄일 수 있다. ‚내 자식은 내 손으로, 나는 내 자식만‛하는 생각에서 벗어나면 우리 아이는 지역 안에서 잘 자랄 수 있고, 그 외에도 개별 가정이 각자 해결하 던 일을 한데 묶어서 여러 손이 돌아가며 하면 가정 내의 일은 줄어들 것이다. 이 글을 다 쓴 지금, 그렇다면 여지껏 내 삶을 이끌어 온 주인공은 무엇인가 를 자문하게 된다. 자답하자면 주체적 현실주의였다고나 할까. 내 소신대로, 스 스로를 책임지면서 살아왔고 현재에 충실하여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해 왔다는 판단에서 생각해 낸 답이다. 앞으로도 나는 이 주인공에 의지하여 살아갈 것이 다.


산업과 예술의 만남으로 신선한 충격을 오병수 1959 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으용미술과 공업디자인, Pratt Institute 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으며 금성사 디자인종합연구소에서 일하다가 89 년 국내 최 초의 제품디자인 전문 회사 ‘212 코리아’를 설립했다. 현재 ‘212 디자인’으 로 상호를 변경하여 대표로 있고 국내외 60 여 개사의 170 여 프로젝트를 완료하 였다. 국내에서 최초로 디자인 수출을 했으며 제조업 경쟁력 강화 상공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생활 속에 자리잡은 디자인 요즈음 대중들은 디자인이라는 말을 수없이 접하며 지낸다. 신문이나 잡지를 보게 되면 옷, 가전 제품, 자동차 할 것 없이 신제품 광고라면 으레 디자인을 앞 세운 문구가 보인다. 어느 하루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신세대 감각 디자인 이라느니 합리주의 디자인, 차세대 첨단 디자인, 복고풍 디자인 등 아주 다양한 수식어를 동반한 메시지가 쏟아진다. 패션, 인테리어, 건축, 자동차, 생활 소품 등 에 관련된 해외 유명 디자인을 앞세워 제품을 판매하는 곳이 늘고 있으며 성인, 학생 할 것 없이 디자인은 물건을 사는 주요 가치 기준의 하나가 되었다. 디자 인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 역시 스스로 놀랄 만큼 디자인은 이미 우리 생활 깊 숙이 자리하고 잇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0 여 년 전만 해도 디자인은 주로 패션을 중심으로만 이 야기되었으며, 더 거슬러 20 년 전쯤에는 그 말 자체가 낯선 이국어로 느껴질 만 큼 우리 사회에서는 생소한 분야이자 대상이었다. 그러했던 것이 점차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소득이 증가하며 해외 시장과의 교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좋은 환경 과 물건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늘게 되고, 그러한 욕구를 경쟁적으로 충족시켜 주기 위한 기업의 활동이 왕성해지면서 급속도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더욱이 과학 기술의 발달로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주요 상품들의 성능이 비슷해짐 에 따라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을 내세우는 디자인으로 경쟁하고 있는 상황이다. 점점 복잡 다양해지는 사회 구조에 따라 디자인도 많은 분야로 전문화되고 있 다. 패션 디자인, 인테리어 디자인, 날렵한 유선형의 자동차나 안락한 가구, 멋진 가전 제품 등을 계획하는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등으로 체계화되고 있다. 또한 포스터, 카탈로그 등의 비주얼 디자인과 컴퓨터 시대의 도래에 따라 우리를 놀 랍게 하는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도 있다. 이외에도 10 여 가지 이상의 분야로 나 눌 수 있으나 결국 무엇인가 대상을 계획하고 가시화하고 만들어 내는 것에 대 해서는 다 같은 의미의 디자인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곧 디자이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많은 분야에서 내가 주로 하는 것은 인더스트리얼(산업)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더 좁은 의미로 제품 디자이너라고 호칭되기도 하는데 이것 은 나와 나의 스태프의 주된 작업이 생활 용품, 가전 제품 등 기업이 생산을 전 제로 한 제품이 많아서 그러할 것이다. 22 디자인 식구들인 나와 나의 스태프는 그 동안 ‘바늘에서 우주선’까지 라는 모토로 작은 립스틱 케이스에서부터 전 기 자동차, 대형 지게차에 이르기까지 100 여 가지 이상의 물건들을 디자인해 왔 다. 자동차, 에어컨, 전화기, 컴퓨터, 화장품 용기, 무선 호출기, 트로피, 첨단 사 무용 가구 등 다양한 작업이 이루어졌고, 지금도 우리의 디자인에 맞춰 기업들 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고 있는 개발품들이 소비자에게 건네질 채비를 하고 있 다. 우리에게는 클라이언트가 있다. 즉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디자인을 해 달라고 의뢰하는 고객(주로 기업이나 연구소)을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의뢰를 받고 디 자인을 전해 주고 회사를 운영하는 이들은 거의 다른 분야의 용역 회사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내가 하는 일은 보통 사무직이나 생산직과는 달리 평범한 것은 아닌 듯싶다.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내고 스케치를 하고 모형을 만들어 보고 하는 것은 화가나 조각가가 창작하는 것 같고, 주로 만드는 대상이 생산과 판매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엔지니어나 영업 담당 들과 수시로 회의하고 의견을 절충할 때면 비즈니스 매니저와 같은 역할을 한 다. 미술 대학을 나와 아무래도 미적인 관점을 최 우선으로 하는 일을 하다 보 니 대부분의 고객은 나나 스태프를 창작하는 사람의 범주로 보아 첫 대면이 항 상 약간 어색하기도 하다. 더욱이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나 격식을 갖추지 않 은 인포멀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우리 디자인 오피스에서의 대면은 더욱 그렇 다. 그러나 나의 작업은 항상 창조적인 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주식회사 212 디자인이라는 소규모 회사를 운영하기 위하여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역할을 수 행하기도 한다. 어제의 나의 하루만 보아도 새벽 운동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출근하여 곧바로 새로 나올 공기 정화기 디자인 결정 회의에 갔으며, 점심 때쯤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오는 길에 산 햄버거로 점심을 대신하고 몇몇 디자이너와 현재 진행 중인 한두 가지 디자인의 문제점에 관해 토론하고 해결책을 찾고 4 시 경에는 새로운 소형 전기 자동차 디자인 문제 때문에 방문한 손님과 상담하고 제안서에 관한 기본 안을 작성하고 났더니 날이 이미 저물어 있었다. 게다가 지 난번 해외 출장 다녀온 슬라이드라도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한밤이다. 물론 아 침부터 캐주얼하게 하고 하루 종일 잡지나 책을 보거나 스케치 몇 컷 하고 동료 들을 추스려서 생맥주를 하는 날도 있지만 최근에는 나 스스로가 이런 규칙 속 의 불규칙에 적응하고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디자이너로서의 역할 과 경영자로서의 역할이 수시로 비교되었고, 그 사이에서 중용을 지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긴장했던 나는 더 이상 고민하거나 한쪽 일을 하면서 부담을 느끼거나 허전함 없이 나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해 나가기로 했고, 특별히 잘 못되는 일 이 없다면 향후 평생을 두고 이러한 고민을 다시는 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나의 일을 시작한 약 7 년 전에는 경험도 일천하고 경제 사정도 여의치 못하여 일을 가리지 않고 했다. 엄밀히 말하면 일을 구분할 여유와 지적 사고가 없었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디자이너의 역할이냐 경영자로서의 일이냐는 차치 하고 디자인 일 자체로 아주 사소한 작은 일 (예를 들면 내부 기술적 문제 때문 에 디자인은 일본 것과 거의 동일하게 하는 휴대용 미니라디오와 같은 일)을 하 곤 하였다. 단지 피한 것이라고는 내가 할 수도 있으나 다른 사람이 하면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래픽 디자인이나 인테리어 디자인과 같은 일이다. 요 즈음은 좀더 디자인을 잘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정말 내가 해야 되겠다, 하고 싶다는 일을 주로 하려 한다. 어떤 일은 아주 작은 장식품이고 완성되었을 때 몇백 원밖에 되지 않아도 마음이 끌리는 대상이 있고, 대규모 프로젝트여서 전 체 예산이 수억대에 이르는 일도 있으나 디자인 외적인 모든 주변 상황, 즉 고 객의 자세, 향후 효과, 우리의 역할 등을 가늠해 볼 때 썩 내키지 않는 일도 있 다. 이것은 요즈음의 경제 사정이 넉넉해져서가 아니라 조금씩 나의 주관이 정 립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 나는 신 개념이라는 말을 좋아하고 자주 쓰는 편이다.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보수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조와 형상을 찾는 일에는 흥분하기까지 한 다. 새로운 방식의 휴대 폰, 관광지에서 쓰일 차 같지 않는 소형 차, 명예로운 상의 의미를 추상화시킨 조각과 같은 트로피들, 누가 보아도 산들바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은 공기 정화기, 이러한 것들이 요즘 나와 함께 씨름하는 일 들이다. 그러나 가끔은 매출 증대가 최대의 목적인 고객들에게 너무 혁신적이라 고 하여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다보면 기존품과 유사해 져 버리는 허무감도 있지만,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우리 기업이나 대중에게 새 로운 경험을 안겨 주는 정말 필요한 작업이다. 최근에는 고객이 원하기 전에 우


리가 스스로 기획하여 새로운 흥미를 유발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비교적 안전한 어린이 자전거와 아름다운 조명 기구들을 디자인하고 있다. 항상 좀 부자연하게 느껴지는 아파트 내의 입식 부엌 가구를 어떻게 하면 우리 식생활 문화에 맞게 재미있게 풀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도 나의 메모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프로젝 트이다. 고정 관념을 깨고 창조성을 키우기 위한 모색의 날들 오늘날 디자이너로서의 나의 위치나 한 사회인으로서 겪어 온 여기까지의 과 정은 앞으로도 그만큼 가야 하겠지만, 돌이켜 보면 운명론적인 신의 섭리에 따 라 진행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렸을 때의 꿈을 훗 날 그대로 이루어 만족과 성취를 얻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경우 어렸을 적의 꿈 은 결코 지금과 같은 디자인 회사의 사장은 아니었다. 원래 전라북도 한 시골에 서 태어난 나는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는 형, 누나들이 보내 주는 위인전 등을 읽고 대부분의 그 나이 또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장군이나 대통령을 꿈 꾸었다. 그러다가 어머니를 따라서 서울을 한 번 구경한 뒤로는 택시 운전사가 되겠다고 둥그런 물건만 있으면 핸들로 인정하고 운전을 연습했으며, 거리 한가 운데에서 지휘 하는 교통 순경의 수 신호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수많은 차들 을 보고 교통 순경이 되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기도 했다. 이렇게 특별히 꼭 무엇이 되어야겠다고 1 년 이상 마음을 먹어 본 적이 없는 내가 이 분야의 길을 택한 후 여태까지 비교적 만족하며 한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서울, 자동차, 미대입시, 해병대, 전혀 연관이 없는 말들이지 만 굳이 돌이켜 보면 내가 디자인을 하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된 시간까지 나에 게 그 때마다 동기가 되었던 것 같다. 국민학교 4 학년 때 부모님의 말씀에 따라 서울로 전학 오게 된 나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되었다. 원래 서울에 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과는 달리 많은 호기심이 생겼으며 구경하는 일 자체만도 즐거움 이었다. 1960 년대 말경의 서울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나에게 비춰진 당시의 시골과 서울의 차이는 지금 이상의 것이었다. 수많은 상 품이 널려 있는 백화점에 친구들과 자주 놀러 가 구경하고 거리를 쏘다닌 체험 들이 나에게는 하나의 기본적 문화 감각으로 자리 잡게 된 것 같다. 또한 대부 분의 남자 아이가 가지고 있을 법한 자동차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심이 나에게는 유달리 지나쳤던 것 같다. 헌 책방을 다니며 미국 자동차 잡지를 구해 보고, 당 시 외제 차를 가끔 구경할 수 있던 이태원에 자주 나갔던 일, 고등학교 때 거리 에 서 있는 뷰익 승용차를 사진 찍다가 혼난 적도 있다. 자동차에 대한 이러한 취미는 서서히 차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으나 고등학교 2 학년이 던 나의 지식과 당시 여러 환경으로 볼 때 나에게는 그저 막연한 꿈으로만 존재 할 뿐 남들과 같이 최대의 목표인 대학 입시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지금도 가끔 만나고 있는 같은 반 친구가 자동차를 그리고 만드는 것을 공부하는 학과가 있고 자기 누이가 그 과에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방과 후에 우리는 그 누이를 만났고, 미술 대학에 공업디자인 학과가 있으며, 그 곳에서 자 동차뿐만 아니라 생활에 쓰이는 여러 가지 물건이나 장식품 등을 전반적으로 디 자인한다는 말을 듣고 난 후 설레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단순한 결정이었던 것 같지만 하여튼 그 과에 진학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막상 마음을 정하려 하니 미술 대학 입시 준비가 걸렸다. 물론 미술 대학을 나오면 가난한 화가가 되는 모습 외는 생각할 수 없으셨던 부 모님의 반대도 있었지만, 나의 기억으로는 모진 말씀 한 번 없이 매사에 나에게 일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네가 알아서 하라는 말씀으로 동의하셨다. 하지만 내 심 섭섭해 하셨고 훗날 7, 8 년이 지난 후 내가 일하는 디자인 분야가 활성화되 어 세상에 알려진 다음에야 친구 분들께도 조금씩 자랑하시는 것을 보았다. 하 여튼 단지 예비 고사와 본 고사만 염두에 둔 나는 미술 대학 입시를 위하여 데


생이니 구성이니 렌더링(정밀묘사) 등을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로 느 껴졌다. 일곱 형제를 포함하여 부모, 흔히 말하는 사돈에 칠촌, 팔촌까지 훑어보 아도 미술은커녕 음악에도 관련이 없는 예능과는 무관한 가족인데 과연 내게 재 주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고, 그렇게 흔하던 미술 대회에서 변변한 상이라 곤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내가 수년씩 그림을 그린 다른 지원자들과 경쟁한다 는 것은 얘기가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외국 잡지에서 본 멋있는 디자이너 들의 일하는 모습이 떠오르곤 하여 쉽게 포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한 번 해 보자, 그리고 별 발전이 없으면 그만두자고 마음을 먹고 화실 문을 두드렸고 그 때부터 흑색 연필을 쥐고 그림을 시작한 것이 20 여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불 의의 사고로 고인이 된 고향 친구가 오랫동안 미술반 활동을 하여 수시로 가르 쳐 주고 어렵고 힘들 때마다 격려해 준 일은 내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추억으 로 남았다. 입시 때까지 공부와 그림 그리는 일 두 가지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의외로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정도로 그려 놓은 그림을 보고 자신감을 갖기도 하 였다. 나는 그 해 다행히도 입시를 통과하여 미술대 학생으로서의 생활을 시작 하였다. 그러나 남들도 같았겠지만 고 3 때 고생을 하도 해서 그런지 대학은 그저 자유로운 세상이다 못해 허전하기까지 했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빡빡 밀었던 머리가 쉽게 자라지도 않아 같은 대학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으며, 주로 고교 선후배들과 술 마시고 여행하고 하는 불규칙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당시 어지러웠던 정치 사회 상황으로 인한 빈번한 휴강과 휴교는 나의 이런 생활을 더욱 부채질 했다. 자연히 학교 생활에 대한 흥미를 잃었고, 더군다나 디자인에 관한 말도 더 이상 흥미거리가 아니었다. 자동차에 대한 동경도 만들어 보는 것 에서 돈 벌어 사면되지 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성적은 말이 아니어서 넌 다음 학기엔 저절로 조기 졸업하겠구나 하는 친구들의 농담을 듣고 난 후에 대 한민국 남자라면 한 번쯤 은 생각해 보는 최상의 도피처이자 안식처인 군 입대 를 생각했다. 기왕이면 가장 짧고 확실하게 하겠다는 무모한 생각으로 해병대 자원서를 제출하고는 그 날부터 연속되는 송별회를 시작하였다. 평소에 궁했던 용돈도 주위로부터 심심찮게 접수되었으며 원 없이 한 번 놀아 본 짧은 시절로 기억된다. 입대하기 위하여 신체 검사를 받던 날 분위기는 정말 험악했고 고작 50~60 명 밖에 안 되는 지원자의 면면은 심상치 않았으며, 이미 군대 간 거나 다름없는 기합의 연속이었다. 30 개월에 대한 미래가 황당했으며,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로 군대 오려고 친구와 같이 시력 검사표를 외우지나 말걸 하는 막심한 후회가 계 속되었다. 그러나 시력 검사실에 들어가 한쪽 눈을 가리고 가리키는 막대 끝을 보는 순간 이건 내가 외웠던 가나다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겨우 큰 abc 는 보 이나 밑 부분은 거의 읽을 수가 없었다. 멈칫거리고 있는 사이 등짝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불합격 복창, 이것이 모든 창피함을 무릅쓰고 다시 캠퍼스로 돌아 오게 한 웃지 못할 사건이었다. 한 차례의 혼돈은 나를 차분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80 년대 들어 사회는 더욱 어수선했지만 나에게는 남의 일처럼 느껴졌으며, 당 시의 정치 상황에 대한 나의 인식은 심심할 때 읽는 신문 소설 같은 역할 정도 로 관심 밖의 일이었다. 서서히 전공 과목을 배우며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 이 생긴 것도 이 때부터였고, 선생님들로부터 들은 디자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내가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또 당시에 활성화 되지 못한 우리 나라의 디자인 분야에 대하여 디자인 이론 시간에 선생님으로부 터 들은 ‚50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우리 디자인을 팔기 위하여 기업가들을 쫓아 다녀야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들을 만나기에 너무 바쁘다.‛고 회고한 한 북유럽 디자이너의 말을 막연히 믿으며 지냈다. 나는 요즈음에도 일이 많아져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올 때면 항상 이 문 구를 생각하며 기꺼이 즐거운 마음을 갖도록 노력한다. 졸업할 즈음 마음은 이


미 디자이너가 되어 있었으며, 누구를 만나도 디자인의 중요성을 역설할 만큼 정신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디자이너는 멋있는 옷을 입고 음악을 들으며 창가 에서 아이디어를 스케치하는 일이 다가 아니라,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페 인트 냄새를 맡아 가며 밤새도록 모형을 만들기도 하며, 0.01 밀리미터까지 다투 는 설계도를 그리고, 때로는 클라이언트와 의견을 조정하기 위하여 대여섯 시간 씩 싸우다시피 회의하기도 하는 것이 실상이지만, 당시 디자인 직업에 대해 나 는 멋있게만 생각했고 신선하다 못해 천직으로 여기고 있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나는 최초로 지극히 현실적 판단 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자동차를 좋아 했으나 당시의 국내 자동차 디자인은 무척 낙후된 분야인데다 지방의 자동차 공장에서 근무하는 것은 상상 도 하기 싫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동차만 하겠다는 마음은 아니었고 향후에 독립적인 디자인 회사를 하려면 여러 제품 디자인에 관한 경험이 훨씬 중요하리 라 판단되어 가전 회사 디자인 실을 택해 입사했다. 물론 직장 한두 번 옮기는 것이 전혀 흠이 안 되는 요즈음이지만 당시 나는 그러한 융통성을 생각할 수 없 었다. 나의 첫 직장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좋은 느낌으로 남아 있다. 주위 동료 나 상사들도 매우 친절했으며 다양한 제품이 머리에서부터 종이 위의 그림을 거 쳐 생산되는 것까지를 내 눈으로 보고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그리 오래 못하고 채 2 년이 안 되어 미국 유학 길에 오른 것은 순전히 내 개인 적인 답답함 때문이었다. 지금은 대기업에 있는 디자인실 시스템이 점점 바람직 하게 개선되고 있지만, 너무나 판에 박은 듯한 업무의 반복과 몇 년 이상씩 똑 같은 텔레비전이면 텔레비전, 라디오면 라디오만 그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디 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창의력을 봉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선진국 문화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기대감을 갖고 당시로서는 비교적 해외 에 나가기에 그나마 덜 어려운 대학원 진학을 이유로 미국 뉴욕에 건너갔다. 뉴 욕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디자이너로서 많은 것을 보겠다는 욕심이었고, 덕택에 지내는 동안 비싼 학비와 생활비 때문에 2 년 반 내내 별로 풍성했던 기 억이 없을 정도로 고생했다. 때문에 지금도 가끔 후배들이 유학을 가겠다고 추 천해 달라고 찾아오면 경제 사정이 허락하는 한 대도시에 있는 학교를 권유하곤 한다. 귀국 후에 디자인 회사를 하겠다고 처음부터 확신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의 경험은 현재까지도 여러 모로 보이지 않는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넉넉 하지 못한 경제 생활 때문에 겪은 다양한 종류의 아르바이트는 돈을 벌어 준다 는 것을 떠나서 영어를 배우는 기회와 인내심, 제품과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지 식을 얻게 해주었다. 프리마켓이라고 하는 주말 야외 장터에서 장난감 기타를 목에 걸고 장난감을 팔던 일, 나는 그로 인하여 아이들 장난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대학 원 졸업 논문도 장난감에 대해서 쓸정도였다. 새벽 바람의 지독한 추위와 혹시 물건을 잃어버릴까 봐 하루 종일 화장실도 안 가고 지켜 서 있던 일은 막내인 나에게 인내를 느끼게 하였고, 덕택에 난 지금도 맥주를 어지간히 먹어도 다른 친구들처럼 화장실을 들락거리지 않는다. 신발 가게에서의 세일즈 경험은 각국 민족들의 관심사를 단편적이지만 파악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훗날 한국에서 운동 화를 디자인하는 데 산 지식이 되었다. 학교 공부에서는 몇몇 클래스에서 겪은 그들의 창의적 사고 방식이 지금도 나의 디자인 방법 중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 며, 파리에서 개인 전시 기간인데도 단 두 시간짜리 강의를 하기 위해 뉴욕에 다녀가는 한 일본인 시간 강사의 성실성도 보았다. 졸업할 즈음에는 우리 나라 에도 하루아침에 이들과 같이 디자인이 활발해지리라 생각할 수는 없지만 더 이 상 내 일을 미룰 것이 없다는 신념이 들었다. 속히 돌아가서 나의 디자인을 하 리라고 마음먹으니 모든 일이 가능할 것 같았다. 대부분의 학생이 공부를 끝낼 때쯤 되면 한 번쯤 고려해 보는 그 곳에 남을까 하는 고민도 이내 떨쳐 버리고 선배한테 빌린 돈으로 귀국 여행 삼아 중부, 서부와 하와이를 거쳐 귀국하였다.


창업, 실패와 도전 그리고 재기 무엇인가 새로 시작하는 일 중에서 창업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흔히들 이야기 하며 젊은이들은 성공과 실패에 관한 책을 많이 읽는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 로 새롭게 독립해 일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십수 년간 꾸준히 한 분야에 종 사하다 기회를 만들어 시작하는 이도 보았으며, 적지 않은 자본을 가지고 처음 부터 크게 벌이는 사람도 있다. 사회 경험도 일천한 내가 비교적 일찍 나의 일 을 시작한 까닭에 직장에 다니고 있는 친구들로부터 용기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곤 하였고, 어떤 클라이언트는 방법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하면서 어떤 계획과 순서로 준비해야 하는지 체계적인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당 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순전히 그냥 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미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분야가 자리잡고 활성화되어 있는 상황도 아니고 나에게 많은 경험과 실적이 있어 이름이 알려진 것도 아니며 더구나 자본이라고 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 외에는 귀국 때 빌렸던 비행기 값에서 남은 25 달러 뿐이었다. 거기에다 더욱 실망스럽게도 같이 일해 보자던 선후배들이 막상 뛰쳐 나오지 못하고 포기 의사를 전달해 왔을 때의 고독감까지 겹친 상황에서는 어떠 한 이성적 계산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자금은 해외에 계신 매형의 도움을 받아 함께 쓸 사무실을 가계약금 10 만 원을 지불하고 얻어서 일단 책상 을 하나 들여 놓고 하루 낮 하루 밤을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답은 역시 그냥 하자였고 내친 김에 회사 이름도 212KOREA 라고 지었다. 아무래도 디자인 회사 를 하려면 토속적인 한국적 이름보다는 무언가 있는 듯한 영어 이름이 좋을 것 같아 잠시 고민하였으나 서구 문화권에 대한 단순 사대주의다 싶어 이내 포기하 고, 당시에 같이 활동하였고 지금까지도 내 생활의 한 축이 되고 있는 고교 선 후배간의 클럽 이름을 따 212 로 할까 하였더니 공교롭게도 그 날이 89 년 2 월 12 일 이었다. 거기에다 일단의 애국심과 앞으로는 국제적으로 네트워크를 갖춰야 하겠다는 약간의 과장된 꿈을 가지고 코리아를 붙였던 것이다. 지금은 코리아 대신 디자인이라는 말로 바꾸었는데 애국심이 없어졌다거나 꿈이 작아진 것은 아니고 3, 4 년 전부터 해외 기업과 하는 일이 생겨나고 교류가 빈번해졌는데 그 들이 한국에 대한 인식은 한결같이 별로 유쾌하지 못함을 느꼈다. CNN 인가 하 는 방송에서 광주사태 데모 장면이나 구속 장면 등만 본 것을 기억하고, 조금 나이 든 사람은 6.25 때 이야기를 서두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물론 올림픽 도 있고 우리의 국가 경제가 점점 국제 사회에서 인정 받고 있지만, 첨단을 다 루는 산업 디자인 회사로서의 이미지에는 영 맞지 않는 경우가 계속되었다. 그 래서 당시에 진행하고 있는 미국 모토롤라사의 최종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돌 아와 개명하였다. 약간 낮 설기는 하였지만 특이한 숫자 이름을 가지고 어렵사 리 의기투합 한 대학 후배 몇 명과 시작했다. 일단 우리를 알리는 일부터 시작 하기로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에 촛점을 두어 브로셔를 만들어 디엠을 하였다. 우리가 디자인을 개선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를 찾아가 소개를 하고 필요성과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과거 실적도 전무하 고 눈에 보이지 않는 용역에 대하여 계약을 하자고 하는 것은 설득 자체가 되질 않았으며, 간혹 당신들의 의견에는 동의하니 일단 디자인을 해보고 맘에 들면 돈을 내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림 한 장을 파는 것도 아니고 의뢰 회 사와 디자이너간의 긴밀한 협의와 노력을 거쳐야 하나의 디자인이 완성되는 것 이 산업 디자인의 특성일진대 어떻게 날림으로 디자인 할 수 있겠는가. 당시에 도입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계약 후 신뢰를 바탕으로 한 개발 관계는 지속적인 우리의 설득과 인내로 얻어 낸 오늘까지의 바람직한 풍토 중 하나이다. 더욱이 89 년도 즈음만 해도 대부분의 우리 기업이 독자 모델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외국 회사의 OEM 이나 제품 모방에 급급하였으며, 일부 앞서 나가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하는 일은 있었으나 부분 변경에만 한정되었기에 우리에게는 디자인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회사 소개서를 들고 어느 은행 지점장을 찾아가 융통했던 경비 마저 바닥이 날 즈음 기업연구소에 근무한다는 한 후배의 친구 남편으로부터 디자인에 관해 논의 좀 하자는 연락이 왔고 그것이 내가 일을 시작한 지 약 6 개월 만의 첫 프 로젝트였다. 산업용으로 쓰이는 소형 전자 계산기만한 컴퓨터 단말기를 디자인 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연구소와 공장이 있는 안양과 오산을 수없이 오 가며 협의하였고 거의 두 달 여를 매달려 열과 성을 다했다. 노력한 덕분에 그 들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냈고, 지금 생각하면 지금의 10 분의 1 정도 되는 금액 을 그것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약속어음이라는 걸 받아 들었을 땐 괜 시리 눈시 울이 붉어졌다. 적은 돈보다는 디자인 일을 기업으로부터 의뢰 받아 처음 해보 았고, 그 일이 또한 서로 만족스럽게 마쳤다는 뿌듯한 기쁨 때문이었다. 그 후 그들의 소개가 이어졌으며, 우리는 사소한 일에도 열과 성을 다하였다. 첫해에는 약 20 여 가지 일에 계약 금액 1 억 원이 조금 넘는 액수였다. 일반 회 사에서야 아주 적은 금액이지만 당시 나를 포함한 212 팀은 인더스트리얼 디자 인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에 충분하였다. 두 해 세 해가 지나면서 일이 조금씩 늘어 우리는 바쁘다는 소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구태여 어려운 점이라고 할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고비라는 말을 써 본 적이 없을 만큼 힘든 것에 대해서는 사실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컴 퓨터도 한 대 두 대 늘기 시작하였고 장소도 넓혀 갈 수 있었다. 회사를 키우는 데에는 대략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다. 일을 하다 보면 일이 넘쳐 도저히 현재 인원이나 시설, 장소로 감당하지 못할 때 조금씩 늘려 가는 방법이 하나요, 또 하나는 좀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미리 준비하고 태세를 갖 추고 비즈니스를 하여 목표에 이르는 경우인데 나의 경우는 다분히 후자의 경우 이다. 그러다 보니 조금 안정되게 지내려고 하면 들썩이게 되고 사람을 더 뽑고 시설을 늘리고 하여 새로운 일에 대해 도전하게 되고 자연히 그 때마다 금전적 인 무리가 따라 여러 지인들에게 신세를 졌다. 그러다 보니 안정을 바라는 동료 가 떠나가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으며, 간혹 주위에서 그 정도 하면 됐지 뭘 또 더 하느냐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경우도 많았으나 나도 모르게 생기는 일에 대 한 욕심을 당시에는 주체할 수 없었다. 약 4 년 전 우리 나라의 큰 행사 중 하나였던 대전 엑스포의 전기 자동차를 디 자인하여 만든 적이 있다. 우리의 첨단 과학 기술력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 해 계획된 프로젝트로서 국가 연구 기관 재부 기술을 개발하여 진행하였다. 그 러나 과거 대부분의 개발 사례가 그러하듯 기술의 중요성만 강조한 나머지 외관 과 실내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기존의 승합 차를 개조하여 완성하겠 다는 것이었는데 그래 가지고 어떻게 첨단 기술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이미지 를 줄 수 있겠는가. 다행히 우연한 기회에 그 곳에 몸담고 있는 후배의 추천으 로 조직의 관련인들에게 늦게나마 디자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시킬 수 있 는 기회를 갖게 되어 디자인 과정과 완성 후의 예상 효과 등을 역설하였다. 모 든 관련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비록 적은 예산으로나마 프로젝트를 시작하였고 자동차 디자인에 대한 평소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와 국가를 대표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실제 주행할 수 있는 시작 차를 디자인뿐만 아니라 그것도 여섯 대씩 제작까지 한 일은 지금 돌이켜 보면 어떻게 해낼 수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힘 겨운 일이었다. 디자인이야 잘 해낼 수 있다지만 무엇보다도 큰 일은 일단 작업 을 할 수 있는 대형 작업장과 숙련된 제작 기술자들이 필요한데 당시에는 자동 차 회사 외에는 국내 어디에도 그러한 일을 살 수 있는 공간과 설비, 기술자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 없었다. 얼마든지 제작해 낼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사 실 저지르고 방법을 찾자는 나의 ‘끼’로부터 초래된 일이었다. 디자인 사무실 만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가능성 있는 작업장을 찾아 다니며 문의하고 상담하였 으나 선뜻 나서는 제작 업체는 없이 시간만 흘렀다. 설계가 완성되자마자 곧 제


작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작업장을 차리고 인원을 모으는 방법밖에 없었다. 몇몇 지인들을 설득하여 교외에 널찍한 작업 공장을 얻고 자동차 회사로부터 경험 있는 기술직들을 모아 제작을 시작했다. 지금은 212 테크노 팀이라는 그럴 듯한 기술 팀이지만 당시로서는 변변한 기계 하나 없이 맨손과 수공구로 작업하는 외인 부대와 같았다. 각고의 1 년여가 지나 고 엑스포 광장에 완성차 여섯 대가 도열했을 때 시민들의 박수 소리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너무도 고생한 나머지 그 후로 한동안은 저지르고 보자 는 나의 사고 방식은 표출되는 일이 없었다. 생활 문화 창조자로 살기 위해 일을 시작한 후 만 7 년이 지났다. 그 동안 나는 약 60 여 개 기업들에게 150 여 가지가 넘는 제품을 디자인해 주었다. 그 중에는 유달리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 도 있고, 그럴 듯한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프로젝트도 있다. 한국 최초의 디자인 수출 모토롤라 무선 호출기 디자인, 발매 이후 시장 점유율 연속 1 위인 정수기,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지게차, 아름다운 선이 지금도 야릇한 화장품 용기, 맹인 을 위한 특수 컴퓨터 등 나름대로 좋은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어 뿌듯하다. 이러한 다양한 작업 영역은 사물을 대하는 나의 관점을 새롭고 자유롭게 했으 며, 제각기 다른 클라이언트를 통하여 경영을 배우고 인생을 느낄 수 있었고, 하 지 말아야 될 일과 배워서 해야 될 일들을 구분하게 해주었다. 프로젝트의 진행 에 따라 국내 최대의 대기업에서부터 중소 기업까지 그리고 최고 경영자에서부 터 최 일선의 담당자까지 상대함으로써 어떻게 하면 회사가 발전하고 나아가 각 개인과 나라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도 어렴풋하게 나마 인식하고 있다. 최근 전 분야에 걸쳐 확산되고 있는 세계화 바람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 자는 근본적인 인식 아래 매우 긍정적으로 우리 사회에 확산되고 있다. 이렇게 사회 전반적으로 약간은 들떠 있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2 년 전부터 하는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리의 질을 높이자는 취지의 목표를 내걸고 많은 양의 일을 하기보다는 한두 개의 디자인을 해도 정말 자타가 내세 울 수 있는 디자인이 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간혹 있는 단순 대행 의 모형 제작 등의 일을 없애고, 프로젝트의 성격과 우리의 역량을 얼마나 발휘 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한다. 나는 그 동안 해온 작업을 정리하여 새로운 포 트폴리오를 만들기도 하고 리뷰하기 시작했는데, 그 동안 해온 일의 상당 부분 이 나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양적인 팽창만을 이룬 것 같은 공허함이 들었 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의 규모가 작으냐 크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내가 나의 팀과 얼마나 많은 창의성과 감성과 열정을 갖고 불어넣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일 을 조절한 후 이내 물질적 여파가 밀려왔으나, 우리는 자동차를 국민차로 줄이 고 장소를 축소하는 등 잘 대처했다. 약 1 년 여의 훈련 기간이었다고나 할까, 이 후 우리는 우리 결과물에 대한 만족도를 서서히 높여 갔고 국내외로부터 좋은 평가도 받기 시작하였다. 한동안의 철저한 자아 개선이 끝나 갈 즈음 우리는 새 로운 공간에서 일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했으며, 우리의 자아 개혁을 다시 한 번 한 차원 높게 시작하기로 하였다. 나의 일에 대한 인식은 항시 변해 가는 선상에 있고, 나는 그러한 것에 대하 여 항상 약간의 설렘을 느낀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막 시작했을 때는 모든 것을 디자인과 관련지어 생각했다. 백화점에 들러도 그 해 옷들의 디자인이나 색상을 보고, 새로운 제품의 모양을 디자인적 사고 방식으로 분석하였으며, 커피 를 마셔도 잔의 밑바닥을 보고 제조 회사를 보았으며 두드려 보곤 하였다. 요즈 음도 가끔 우리 디자이너들은 함께 어디라도 가서 식사를 하게 되면 들어가는 입구부터 문 손잡이, 테이블에서 그릇까지 모든 것이 탐구의 대상이요 화제거리 가 되곤 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항상 디자인 이야기부터 시작되었으며, 어


떤 클라이언트는 나를 만다면 디자인을 하지 않고는 지낼 수 없는 절박감마저 든다고 했다. 그러나 한때는 디자인할 때마다 수많은 기술적 어려움에 부딪혀서 세모가 네모 가 되고, 우선 잘 팔려야 된다 하여 위험 부담이 적은 쪽을 선택하다 네모가 동 그라미가 될 때에는 일에 대한 흥미를 잃은 채 수납원이 도장 찍듯 무감각한 개 념을 가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점차 여러 다양한 프로젝트를 겪고 난 요즈음은 내가 하는 일은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것 자체만은 아니며 하나의 생활 문화를 창조하는 일이고, 나는 그러한 여러 사람 중 일부라고 생각한다. 디자인은 우리 생활과 경제에 활력을 주는 중요한 매체이며, 단순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제품 이상의 즐거움을 사용자에게 전달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생산자에게는 새로운 생활 문화 창조자로서 또는 전달자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할 수 있다. 산뜻하고 화려하나 가볍고 값싼 스워치 디자인은 우리의 손목 시계 에 대한 고정 관념을 바꾸고 하나의 새로운 패션 문화를 창조하였고, 기술과 디 자인의 새로운 접목이 낳은 소니의 워크맨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라이프 스타일 을 바꾸어 놓았는가. 모든 제품이 항상 혁신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천편일률적 인 물건의 양산은 우리 생활에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하며 찾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사고는 자연 전문적이지 않고 오히려 포괄적이며 일반화 되기를 바라야 할 필요가 있다. 건축가라고 하여 건축 책만 본다든가, 자동차 디 자이너라고 하여 자동차 잡지만 본다든가 하는 일은 더 이상 우리에게 새로운 사고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폭넓은 분야의 화면을 접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단순히 시각적인 형상이나 색의 인지를 떠나 내면을 이해할 필요도 있다. 나는 비교적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이다. 요즘 젊은 대학 후배들에게는 영화 제 목 알아맞히기 게임에서 번번이 패하지만 흔히 입에 오르내리는 영화는 특이한 세트나 기법을 동원하거나 못 가본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영상물을 즐겨 찾는 다. 주로 전체적인 내용보다는 그 곳에 놓여 있는 각종 소품에 관심을 갖고 보 느라 줄거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내가 제품 디자인 에만 유념한 나머지 너무 편협된 사고를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 했을 때부터 나의 시야는 문 손잡이, 주전자, 텔레비전, 자전거 등에서부터 인테 리어, 건물, 거리, 산, 들로 확산되었다. 초현대식 도시에서 느끼는 정취와 중세 유럽을 무대로 하는 영화에서 받는 서정은 각기 다른 나의 상상의 갈래가 되었 다. 건물이나 소품과 같은 단순한 물체에서 전달받는 이미지는 시각적 한계가 있어 보이는 자체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광활한 들판에서의 새벽과 석양의 느낌은 전혀 다른 감성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집을 색칠하려 할 때, 자동차 색상을 새로 칠하려 할 때 또는 새로운 냉장고의 색을 결정하려 할 때에 흔히들 녹색, 푸른색, 아리보리색 등으로 대답하고 결정한다. 그러나 포괄 적이며 한계를 짓지 않는 감성적 사고는 동해 바다의 일출에서 느끼는 그 어떤 분위기, 물 안개가 피어 오르는 새벽 강가의 차가운 숲 같은 싱싱함으로 연출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매우 좋을 듯하다. 사고의 전환은 이러한 이미지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아주 근본적인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라이터를 디자인한다고 하면 여러 가지 라이터를 참고로 해서 좀더 예쁘고 고급스럽게 그리고 좋은 재료를 지정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외형만을 세련되게 하는 스타일링이라는 것일 뿐 새로운 감동 을 줄 말한 무엇이 없다. 가장 원초적인 것이 무엇인가부터 생각하고, 가장 기본 은 무엇인가를 고려한다면 부싯돌까지도 유추할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쓰고 버리는 일회용 라이터까지 나올 수 있다. 때로는 이러한 근본적 사고가 왜 그래 야 되는가 하는 존재에 대한 의문적 사고와 결합될 때 혁신적인 디자인이 나올 수 있다. 의자라면 다리가 꼭 네 개 있어야 하는가, 냉장고는 꼭 사각형이어야 하는가, 오디오는 꼭 데스크 위에 올려놓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요즘 시대의


기술 발달에 힘입어 벽걸이 텔레비전 등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미국의 어느 어린이 공원에 들른 적이 있는데 어른보다 아이들의 입장료가 비 쌌다. 안내원한테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공돈을 번 기분으로 입장하며 의아해 했 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모든 놀이시설이 어린이 만을 위해 디자인되어 있으며, 수영장도 가장 깊은 곳이 어른의 허리 정도였고, 군데군데 벤치나 가판대도 모두 어린이 체형 중심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그 곳 에서 어른은 단지 동행자이고 보호자일 뿐이었다. 철저히 어린이만을 위한 공간 이며, 적어도 그 곳은 어린이가 주인공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새 로운 개념을 현실화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남들이 하지 않는 비즈니스를 먼 저 해야 돈을 번다는 이야기를 흔히 하지만 그 얼마나 위험하며 노력이 따르는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판단의 공유와 용기로 독특하며 신선한 충격 을 주는 해프닝은 연속되고 있다. 내가 보고 겪는 그러한 충격이 항시 내가 만 드는 충격이 되기를 바란다. 세계인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산업 디자인을 꿈꾸며 최근 우리 나라는 산업이 급성장하고 수출이 1,000 억 달러를 넘어서는 시대를 지났다. 과거 수십 년 간 모든 것이 기술 중심주의, 생산 중심주의의 분위기에서 목표를 달성하고 새로운 목표를 향하여 내달려 왔다. 그러나 언젠가 느꼈던 나 의 공허함과 마찬가지로 우리 것에 관한 그 어떠한 것 하나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음을 정부와 국민들은 느끼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우리 것이라는 것은 우리 의 고전에서 출발하는 전통 문화가 아니라 우리 고유의 문화 등을 포함하는 오 리지널리티로 말할 수 있다. 여러 곳에서 새로운 문화를 정립하자, 이제는 더 이 상 선진국의 기술을 도입하여 피상적으로 각색하는 일은 그만 하자는 각성이 일 고, 더불어 문화에 대한 인식과 욕구가 증가하고 있다. 잘 나가는 미국 영화 한 편이 우리 자동차 수십만 대를 판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는 말도 나왔다. 전세계 에 지적 재산권 문제가 이슈화되고 과거에는 전혀 재화의 개념에 들 수 없던 각 종 문화의 산물이 교류를 통하여 경제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즈음에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 인가는 너무도 포괄적이고 광범위하여 나의 일과 분야만을 우선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21 세기는 몇 년 후로 다가왔으며 우리의 디자인을 논하고 세계 시장에 우리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일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미국 사람들이 메르세 데스 벤츠를 사게 되면, 그들은 독일 문화를 하게 되고 이내 독일 문화의 체험 자이자 전수자가 된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할리우드 영화와 디즈니가 미국 문화의 세계적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막강한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세울 만한 것은 무엇일까? 거창한 분야를 들먹이지 않아도 작은 단품 하나 세계적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수조 규모의 매출과 수백 종의 제품을 생산하는 우 리 기업들의 성적표는 과연 스위스 시계나 스와롭스키 크리스털 장식품 회사의 점수와 견줄 수 있을까. 이러한 문화와 기술의 정통성을 꾸준한 노력으로 개척 하고 싶다. 어느 한 분야라도 세계에 내 놓을 수 있다면 바로 우리라고 자신할 수 있는 날을 목표로 하자. 나는 평소에 이름을 드높인 우리의 몇몇 음악가를 존경하고 있다. 우리의 예술 분야에서 천재성으로만 인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칭송이 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부터 연유하였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올 연초에 나는 회사 입구에 Design, Techno, Culture 라는 세 단어를 써 붙였 다. 기술과 문화를 디자인을 통하여 접목하자는 생각이다. 우리의 전통 상품을 현대화하는 것도 가슴이 설레는 일이며, 기업에서 의뢰하는 디자인에 고유성을 부여하는 일도 꾸준히 시도할 것이다. 디자인의 개념을 부단히 넓힐 필요가 있 다. 이제는 점점 피부로 느껴지는 지구촌 생활에서 한때는 열등하게 느꼈던 문 화적 차이를 우리 스스로가 답을 찾는 일부터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4, 5 년 전에 이탈리아의 가구 전시회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전시관에 들어선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가구가 아니라 황홀할 정도의 아름다움과 도저히 해결을 찾을 수 없는 섬세한 기술이 조화되어 있었다. 더욱 이 그들의 기발한 발상으로부터 나옴직한 혁신적인 가구들은 나로 하여금 침묵 하게 하였다. 그 후 나는 한동안 심각한 열등 의식에 빠진 적이 있다. 그래, 어 려서부터 수많은 문화 유산 속에 살며 자라온 너희와 나의 감각을 어떻게 비교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가끔 동료 디자이너들에게 파리의 어린 학생은 비 오면 갈 데가 없어 루브르 박물관에가서 노는데 우리는 어땠느냐고 반문한 적도 있고,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꾸는 후배에게 태어날 때부터 자가용 탄 미국 애들하고 고무신 신고 다닌 너하고 어떻게 자동차에 대한 이해가 같겠느냐, 면 허부터 따라고 혹평한 적도 있다. 이러한 생각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으며, 일본 디자인의 괄목한 만한 발전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디자인 을 하면 할수록 우리 것에 대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고 세계 여러 나라가 저 마다 제각기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은 우리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당 연한 논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만 과거에는 우리의 개인적 노력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회 현실과 분야의 집단적 노력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문화를 가지고 우리 일을 완성하면 된다. 열린 세계 속에 흔히 말하는 국가간의 경쟁도 필요 없으며, 나 개인에게는 우선 이러한 나의 일 을 신명나게 할 수 있는 맥주 한 잔이 필요할 뿐이다. 무림고수를 꿈꾸며 이경영 1989 년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1987 년 ‚연산일기‛로 영화계에 입문하여 ‚구로아리랑‛,‚비오는 날의 수채화‛, ‚하얀 전쟁‛, ‚개 같은 날 의 오후‛, ‚런어웨이‛ 등 무수히 많은 영화에 출연하는 등 인기 정상을 달리 고 있다. 지금은 ‚귀천도‛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배우이며, 아브라삭스영화사 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하나의 불꽃 ‚... 지금 엄만 니 친엄마가 아녀 ... 겡녕이 넌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업동인 겨...‛ 그리고 그 때, 말없이 사랑방을 빠져 나온 아인 외할머니의 해소 섞인 기침소 리와 동네 아낙네들의 간간한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130 밀리 검정고무신을 품에 넣은 채, 낮고 눅눅한 다락방으로 숨어 들었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바람이 불고, 마당의 흰 빨래가 펄럭대더니 급기야는 후두둑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락방의 작은 창을 통해 내다본 소나기 오는 바깥 풍경은 소년의 마음을 더 욱 아리게 만들었다. 장독 뚜껑을 닫는 길러 준 엄마의 모습이 시야에서 흐려지 고 황급하게 뛰어가는 아낙네들의 발소리도 아득해지기만 했다. 덧문 닫히는 소리, 빨래 걷으라는 소리, 황소의 울음소리도 멀어져만 갔다.... 네모난 딱지와 유리구슬이 가득 찬 보물상자를 보듬어 안은 아이의 맑고 투명 한 눈에 이슬이 반짝였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큰 산도 넘고, 넓은 바다도 건너 길을 떠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어미와 누인 다락방 의 아이를 찾아 한나절을 동네 어귀마다를, 아이들의 간을 빼먹는다는 풍문 속 의 문둥이가 숨어 있다는 누런 보리밭도 찾아 보았다고 한다. 그 날 밤, 다락방을 내려온 아인 어미의 따스한 품속에서 유년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어미의 마른 젓을 만진 채, 키가 크는 꿈을 꾸며 그렇게...


이별의 시작 아무런 장식도, 이름 없는 들꽃도 없는 나무 십자가. 바둑이 메리의 작은 봉 분. 160 미리 검정고무신의 슬픔이 비가 되었다. 한 달 전, 옥이가 서울로 이사 가던 오후보다 더 오랫동안 언덕에 남아 있던 소년의 품으로 밤이 쓰러졌다. 쓰 러진 밤을 넘어온 바둑이 메리와 동네 한 바퀴를 돌던 소년은 발이 자꾸 커지는 걸 느꼈다. ‚아가, 일어나서 학교 가야지?‛ 등교길의 소년은 200 미리 검정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귀천검객 적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무림맹과 마교의 연합 공격인 것이다. 그는 부패한 당금 무림의 공적이었다. 단지, 무림 사상 초절정 고수라는 이유로.... 그는 혼자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피를 원하지 않았다. 단지, 자유를 꿈꾸 었을 뿐이다. 그는 바람이고, 꽃잎이고, 별이고, 하늘이고 싶었다. 적들은 자유를 원하지 않았다. 단지, 붉은 피만을 원했다. 귀천검객, 이경영. 무심한 하늘을 올려다본 그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눈물이 바닥에 구르는 것과 무림 초유의 구천 12 검을 펼친 것은 동시였다. 귀천 12 검! 그것은 죽는 순간까지도 오직 검도일도만을 추구했던 불멸의 대검성! 검도의 극치인 이기어검술을 십성의 경지까지 연성했던 유일한 대검호, 하후백의 최후, 최강의 무학인 것이다. 하늘의 기연으로 귀천검객 이경영은 하후백으로부터 귀 천 12 검을 그대로 전수받은 것이다. 허나, 하늘을 가르고 대지를 뒤흔들 검풍의 결과는 먼지 바람조차도 일으키지 못하는 실로 미미한 것이었다. 시시각각 조여 드는 무림맹과 마교의 정예 고수들,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운명, 귀천검객은 이른바 경공술의 최고봉이라는 세류표영으로 그 자리를 벗어 나려 했으나, 대지는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살기만을 품은 적들,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귀천검객을 구하는 귀인이 있었으니. ‚아가, 공부는 언제 할려구 잠만 자니?‛ 어머니로부터 목숨을 얻은 대가로 군소리 없이 심부름 길에 오른 소년의 230 밀리 검정 운동화가 힘차게 땅을 밟는다. 달빛 가르기 나는 할리우드 키드가 아니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재수 시절까지 내가 본 영화의 8 할을 짜장면 영화 (짠짠바라) 였다. 그 시절 나의 우상은 왕우, 깡따위, 이소룡... 이 아니었다. 내가 꿈꾸고 사랑했던 이는 검술 영화 속의 검객이었다. 비장미 가득한 검객의 최후는 내 꿈의 원료였다. 그 꿈의 원료는 귀천도란 시나 리오의 마지막 장면에 반영된다. * 검객의 최후 .... 시나리오 귀천도 중에서 119 실외. 초옥 - 낮 초옥 앞에 우뚝 선 다께조오 파천도 집을 감고 있는 검은 끈을 풀어 어깨를 휘감으며, 전투 형태의 복장을 갖추는 다께조오. 어깨선에 이르러 매듭의 마무리를 하는 다께조오 129 실내. 초옥 - 낮


이하, 고속촬영. - 발걸음을 옮기는 우운검. - 자리에서 일어나 우운검을 바라보는 도연. - 도연의 옆을 스쳐 가는 우운검. - 우운검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는 도연. - 도연에게서 멀어지는 CAMERA. 도연을 뒤로한 채 초옥을 빠져나가는 CAMERA - WHITE OUT 121 실외. 초옥 - 낮 A. 다케조오의 FLASH-BACK: - 스승, 다다가쓰의 최후. - 정인, 고노히메의 죽음. - 므네모리 등 사무라이들의 최후. - 고지로오의 최후 등이 섬광처럼 스친다. DISSOLVE: 초옥 앞에서 우운검을 바라보는 다께조오.(B.S) 초옥 앞에서 다께조오를 바라보는 우운검.(B.S) B. 우운검의 FLASH-BACK: - 지정의옥에서 정조의 마지막 모습. - 시간의 문을 넘을 때, 청연의 마지막 모습. - 희정단에서 도연을 처음 만났을 때. - 좌운검, 빈의 죽음. - 지훈의 죽음. - 초옥 안에서 도연을 스쳐 지나가는 우운검. - WHITE OUT. 눈 내리는 초옥 앞에서 마주 선 우운검과 다께조오의 모습이 원경으로 보인다. 두 무사의 피할 수 없는 마지막 대결. 두 사람의 얼굴에는 아무런 근심이나 욕망이 나타나지 않는 평온함이 어린다. 오직 무사로서의 도만이 나타날 뿐이다. 눈밭 속의 우운검과 다께조오. 천천히 파천도를 출수해 칼집을 버리고, 칼 끝이 허공을 향하게 두손으로 잡는 다께조오. 검집을 땅에 꽂는 우운검. 귀천검을 서서히 출수해 칼 끝이 땅을 항하게 한 손으로 잡는 우운검. 긴장된 대치 상황이 보여진다. 서로를 향해 달려가 필살 1 도를 주고받는 우운검과 다께조오. 서로 스치며, 일검씩 주고받는 두 사람. 자리가 바뀌자마자, 다시 방향을 틀어 일검, 일도를 주고받는다. 우운검의 귀천검이 아께조오의 심장을 파고든다. 다께조오의 파천도가 우운검의 심장을 가른다. 서로의 위치가 바뀐 상태에서 정지된 두 사람. 다께조오의 심장에 박힌 귀천검. 우운검의 심장에서 피어 오르는 붉은 피.


초옥 밖으로 뛰쳐나와 멈칫 서는 도연. 서로 마주 보게 된 우운검과 다께조오. 우운검의 배면에서 카메라가 약간 이동하면 나타나는 다께조오. 다께조오의 배면에서 카메라가 약간 이동하면 나타나는 우운검. 다케조오(방백)(일어) 무사 최고의 영광은 고수의 손에 죽는 것이다. 우운검, 도연을 바라본다.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도연의 얼굴에 우운검의 방백이 흐른다. 우운검(방백)(목소리) 마마를 다시 만나고, 지키기 위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우운검의 깊고 슬픈 눈. 우운검(방백) 다시 태어나겠사옵니다. 우운검을 향해 달려오는 도연의 모습이 하얗게 탈색된다. 휘몰아치는 눈발 속의 우운검과 다케조오의 모습이 360 도 PANNING 되면서 점 WHITE OUT 된다. - THE END -

기억하는 한 내 어린 시절의 놀이의 9 할은 검객놀이였다. 난, 늘 외롭고, 고독 한 무사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내 뒤편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녀린 낭 자가 있었다. 물론 내 역할을 그녀를 보호하며 적들을 무찌르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적 들(동네 꼬마 녀석들)의 칼이 내 것보다 길거나 강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 었다. 그리고 내겐, 적들은 절대 소유할 수 없는 명마(진바리 자전거)가 있었다. 대평원을 질주하듯 나의 명마는 적들을 뒤로한 채, 충주시 교현동 동네 한 바퀴 를 돌곤 했다. 물론 가녀린 낭자를 등뒤에 태운 채. 국민학교 5 학년부터 5 년 동안 안, 충청북도 충주시 교현동을 철권 통치 하였 다. 평화 시대가 5 년이나 지속되었다. 허나, 난 진정한 고수가 아니었다. 1975 년 어느 겨울, 난, 장기 집권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달빛 가르기에 실패했 다. 이제 교현동은 뒷집에 사는 기철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처연한 겨울 달을 바라보는 소년의 시야에 1978 년 12 월 31 일 달력장이 위태롭게 펄럭댄다. 상처받은 영혼 ‚...요한인 신부가 됐으면 좋겠는데....‛ ‚...산으로 오거라....‛ 허나 그 때 난, 불가능의 이상인 자유에 대한 불타는 열망을 지닌 시인 김수 영을 그리워했고, 스스로에 대한 존재의 깊은 가뭄을 느끼게 했던 곱사등 키에 르케고르를 만나고 말았다. 허나 그 때 난 또, 끝끝내 논리적 해명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남기를 원하는 존재 양식으로서의 시와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의 체험 에서 아주 훌륭하게 마음 조이는 불안한 상태를 실존이라 여긴 키에르케고르의 영혼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렇듯 내 열아홉의 겨울은 아주 스산했다. 세계는 거대한 의문 덩어리 그 자 체였고, 나는 대학 입학의 현실보다도 인생의 궁극적인 점에 대한 회의의 병을 깊이 앓고 있었다. 감당하지도 못할 감성적인 고뇌를 부둥켜안고 쩔쩔매고 있었 던 것이다. 김수영과 키에르케고르처럼 나도 상처받은 영혼이었다. 그 겨울의 끄트머리에서 난, 250 밀리 검정구두의 끈을 조였다. 봄이 시작되려나 보다.... 빼앗긴 동화 1980 년, 서울의 봄만큼이나 나의 80 년 봄은, 핏빛이었다. 의사가 되어 낙도의 어린이를 돌보고, 그 섬마을의 여선생에게 품은 한 사랑을 하얗게 부서지는 어 느 대보름 밤에 고백을 하고, 그래서 결혼을 해서 아이들도 낳고, 그 후로도 오 랫동안이나 섬사람으로 남아 같은 날, 내 사랑과 함께 그 섬에 묻히겠다던 스무 살의 동화는 의대 진학 44 일 만에 세상으로부터 빼앗겼다. 그 해 5 월, 자유에 대한 타는 목마름 속의 광주에 나는 없었다. 부천시 원미동 소재의 솔악다방엔 조그만 뮤직 박스가 하나 있었는데 그 자리의 주인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보수에 식사만 해결되는 조건을 쾌히 허락한 건 바 로 나 자신이었으니까. 그 해 5 월, 나는 한마디 멘트도 할 수 없었던 뮤직 박스 안에 수인처럼 갗혀 있었다. 날로 창백해지고 야위어만 갔다. 그 때 얼마나 말하 고 싶었던지.... 명색이 D.J 인데.... ‚밤이 오는 길목에서, 안녕하세요, 밤이 오는 길목에서 이경영입니다아. 3 시 를 출발해서 6 시까아지. 여러분의 Request Music....‛ 그 후 난 내 수무 살의 동화를 빼앗아 간 세상과, 내 어미를 오랜 어둠 속에 들게 했던 현실에 대한 복수심을 안으로 안으로 삭이며, 젊음을 덧없이 살라 먹 는 떠돌이 낭인 무사로서 무림을 떠돌다가 강원도 화천, 양구 지구 병력을 태운 입영 열차에 지치고 멍든 젊음을 싣고 말았다. 아버지의 눈물을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 두고 보자, 세상아! 내가 널 다시 만나 피멍들도록 패 줄테니까....’ 엄마, 아버지의 이름으로 서울 성북구 종암동 산동네. 주인집은 청계천에 의류를 납품하는 가내 수공업 자였고, 4 평도 채 안 되는 사랑방엔 온종일 중국집 나무젓가락 포장을 하시던 내 아버지와 이집 저집의 하루하루를 밝히시느라 절뚝거리며 비탈길을 오르내리 시던 여전히 아름다우신 내 어머니와 아직도 무림고수를 꿈꾸는 검객의 고단한 영혼이 숨쉬고 있었다. 탈출하고 싶었다. 숨막히는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날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먹고 사는 생존의 위협을 감당해 내고 싶었다. 그리고 어떤 날은 죽음 을 생각했다. 1984 년, 종암동엔 육교가 있었다. 비가 오는 밤이면 어김없이 비닐 우산을 쓰고 육교 위를 찾던 나는, 육교 밑을 빠져 나가는 자동차 불빛에 부서 지는 빗방울속에서 찬란한 저승의 세계를 보곤 했다.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때면 불빛에 부서지는 빗방울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허나 그 때도 대지는 내 발을 놓아 주지 않았다. 막연하지만 영원히 사는 법을 알고 싶었다.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죽어도 사는 법을 알고 싶었다. 그래야만 복수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대입 공 부를 시작했다. 아들의 겨울에도 여전히 아버진 나무젓가락 포장을 하고 계셨고, 어머닌 절뚝거리며 지탈길을 오르내리셨다. 그로부터 10 년 후에 아들은 당신들을 산 좋고 물 좋은 우이동 집에 모셨다. 팥죽을 드시며 당신들은 아들이 대견스러워 우셨지만 아들은, 오래전 청풍이란 마을의 냇가 빨래터에서 김춘희란 처녀와 그 처녀에게 연정을 품은 청년 이순호 의 인연으로 아들의 엄마, 아버지가 되어 보내신 세월, 당신들의 한 많은 늙으심


이 서러워 울었다. 새로운 고수들 1985 년, 스물여섯 살의 봄. 행당동 산 언덕, 한양대학교 연극영화맹에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잉그마르 베르히만, 구로자와 아키라, 오손 웰즈, 이만희 등의 전설적인 고수를 만나고, 새 로운 고수를 꿈꾸는 젊은 인재를 만난다. 짜장면 영화 속의 그들은 내게 넘볼 수 없는 고수들이었다. 44 일의 의대 생활을 청산하고, 떠돌이 낭인 무사로 세상의 어둠속을 바둥거리 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에 새로운 청춘을 던졌건만 새로운 고수들의 예술에 대한 청춘은 모태 신앙만큼이나 견실하였다. 그들의 아름다운 입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수많은 영화와 연극 이야기는 떠돌이 낭인 무사를 주눅들게 하였다. 또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 들려던 나를 밝은 빛 속으로 끌어낸 건, 친구들이었 다. 그들은 길들여지지 않은 내 영혼에 영화적인 감성과 지성을 쏟아 붓기 시작 했다. * 정희헌 - 영화 문주 박제된 천재의 표상. 끝없는 모성으로의 회귀. 늙은 어린왕자. 스스로 테리우스라고 칭하고 나니는 놈. 그에게 연인은 늘 캔디다. 칸트 그랑프리 수상 소감과 묘비명의 비문을 만들어 놓고 사는 놈. 세상은 그가 눈을 뜨는 날, 영상 문화 혁명의 시작과 끝을 볼 것이다. * 정초신 - 제작 문주 늘 같은 자리에 같은 키로 서 있는 놈. 절대 지성으로의 회귀. NEW YORK UNIV. - 영화 매체학 전공. USC - 영화 프로듀싱 전공. (단군 이래 프로듀싱 전공은 그가 최초이다.) 그는 모든 해외 유학파와 구별된다. 그놈이 귀천도의 프로듀싱을 위해 태평양을 단 한 걸음에 건너왔다. 1990 년.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놈과 함께했던 포장마차를 기억한다. * 김영빈 감독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82 학번 가난한 연극영화학도들은 영화에 엑스트라라도 출연을 해서 학비에 조금이라 도 보탬이 되고자 했다. 그런 학우들은 대표로 충무로에서 연출부로 활동하던 영빈 형을 찾아간 건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영빈 형과는 단편 영화를 통해 인연을 맺었다. 난 영빈 형의 책임감 있는 성 품을 신뢰했고, 그는 나의 순수성이 언제까지라도 변하지 않길 바랐다. 1987 년 어느 봄날, 충무로의 어느 여관방에서 영빈 형과 함께 시나리오 수정 작업을 하고 계시던 임권택 감독님을 운명처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영빈 형 의 도움으로 ‚연산일기‛라는 작품에서 중종 역할을 맡게 되었다. ‚어마마마, 미령하옵시다 듣자왔사옵니다. 기력은 어떠하신지요?‛ 이것은 영화를 시작하면서 한 첫 대사였다. 그 후 난,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석가 세존께서 득도하신 만 33 세보다도 세 살 위의 생명을 부여안고, 먼지 같은 영화배우로 흩날리듯 서 있다. 위태롭게.... 아, 길들여지지 않은 내 젊은 날의 초상이여!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한평생 밖으로 들어내지 않았을 자신의 감정들, 바로 내면에 도사린 그 감정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배우가 된 것.’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로버트 드니로에게 한 말이다. 난, 배우를 꿈꾸지 않았다. 진실로 내가 꿈꾸었던 건 사상 초유, 미증유, 파천 황의 전설적인 무림고수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스스로를 배우라 고 인정한 적이 없었다. 난, 행운아였다. 아직도 나는 무대 위에 배우이면서 배우 아닌 모습으로 서 있 다. 참을성 있게 내게 박수라도 보내 주는 이에게 난 줄 것이 남아 있질, 아니 처음부터 없었다. 나는 소년 시절, 달빛 가르기의 실패보다 더 심한 좌절과 절망 과 갈증을 배우로 살며 겪고 있다. 허나 이젠 더 이상 피할 수 ㅇ벗는 노릇이다. 보여 주고, 줄 것이 처음부터 없 었다면 지금부터 만들면 되는 것이다. 최소한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도록 말이 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귀천도로의 회귀 ‘새는 알을 깨고 태어난다. 알을 깨고 태어난 새는 한 세계를 파괴한다. 그 새의 이름이 아브라삭스다.’ 같은 뜻을 모은 사람들과 아브라삭스란 영화사를 설립하고 창립 작품으론 ‘ 귀천도’를 결정했다. 배우가 시나리오를 썼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인식되는 세상이지만, 영화에 대 한 관심과 애정이 자연스럽게 확대된 것이고 그 작업을 통해 진실로 배우답게 설 수 있기 위한 새로운 몸부림일 뿐 그 이상은 없다. 인지가 발달하면서부터 인간은 시간의 저편에 있는 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했 다. 수많은 문필가와 수많은 영화인이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이 땅에 영화가 만들어진 지 75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에게는 기억할 만한 시 간 여행의 영화가 없었다. 보다 더 강한 자극에 굶주린 관객들은 홍콩과 미국에서 대량으로 살포된 무협 과 액션에 그로기 상태였고, 한쪽 눈을 가린 채, 검을 휘두르시던 고 박노식 선 생님을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의 무협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우리는 결핍된 두 현상을 하나로 합쳐 새로운 장을 열고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숨가쁘게 진행되는 사무라이들의 추격과 조선의 검객들이 보여주는 본국 검 법, 지켜야 하는 조선 검객의 충과 죽여야 하는 일본 사무라이의 무도, 1996 년 대한민국 수도 한가운데에서 벌어지는 1800 년대 무사들의 생명을 건 전쟁, 그리 고 195 년의 시간 여행을 통해 낙양의 필름가를 올릴 만한 우리 영화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수백 억의 자본을 쏟아붓는 미국 영화나 수십 억을 투자하는 홍콩 영 화를 따라잡기엔 버겁다. 하지만 이러한 불평등 속에서도 몇몇 사람들이 공상 과학 영화를 만들기 위해 낮과 밤을 달려 왔다. 비록 그들의 발걸음이 더디게 보였을지 모르나 그들의 노력은 파격적인 실험 정신이었고, 그들 덕분에 우리의 기술은 자신을 얻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비난의 화살을 막아 내기 위해서 라도 우리는 고통에 시달리는 두뇌와 땀에 젖은 컴퓨터를 두드려서 제대로 보여 주는 시간 여행을 평쳐 갈 것이다. 왜 같은 이야기를 베르히만이 만들면 세계의 명작이 되고 우리가 만들면 전설 의 고향이 되는가? 우리의 고전 속에 갇힌 채, 녹아든 전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서양의 전설에 허리를 조아리는 낡은 정서에 도전하여, 잃어버린 우리의 전설을 다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조선의 22 대 임금 정조는 세종 이래 최고의 통치자였다. 정조의 죽음과 함께 우리 나라의 정통 왕조는 사라지고 세도 정치 시대라는 황 폐한 19 세기를 맞이하고 만다. 정통 왕조가 허물어지는 순간, 자신의 죽음을 예 견한 정조는 시간을 뛰어넘어 정통 왕가를 이을 수 있는 왕가 전래의 비전을 사 용하기로 작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귀천도’란 시나리오를 쓰는 상상


의 출발이며, 상상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잃어버린 전설을 찾았다. 산다는 일이 힘든 것은 신화가 없는 탓이다. 돌아가야 할 전설이 없는 탓이다. 잊혀져 버린 전설의 한 조각에서 광개토대왕을 만나거나 장보고를 만날 때, 우 리의 마음에는 평화가 깃든다. 신화가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는 한 우리는 꿈꿀 수 있는 것이다. 꿈을 꿀 수 있는 자유와 꿈을 만들 수 있는 자유를 찾기 위해 우리는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다. 이제는 꿈을 나누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꿈을 꿀 수 있는 한 세상은 아름답다. 꿈꾸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 꿈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더 아름답고 많은 꿈을 꾸어야만 할 우리의 아이 들을 위해 꿈을 만든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 그분께서 허락을 하신다면, 나는 문사 이문열 님의 젊은 날의 초상을 떠올리 며 말줄임표를 쓰고 싶다. ‚...갈매기가 날기를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갈매기가 아니고, 존재가 그 지 속을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진실로 예술적인 영혼 은 아름다움에 대한 철저한 절망 위에 기초한다고. 그가 위대한 것은 그가 아름 다움을 창조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불가능인 줄 알면서도 도전하고 피흘 린 정신 때문이라고....‛ 나는 빛나고 싶다. 나는 난의 불켜진 모습을 모두에게보여 주고 싶다. 아, 그 러나 지금 나는 어둡다.... 에필로그처럼 쓰는 프롤로그 1996 년, 1 월 20 일, 오후 2 시 45 분. 사랑의 이야기를 담을 수 없는 뜻은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까닭이 라, 단 한 번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심장을 가졌다는 사랑의 맹서를 지킬 수 없 었던 까닭이라, 그리운 그대의 행복을 빌어야지.... 구석으로 어둠속으로 숨어드는 습관적 폐쇄 성향이 짙은 내가 나를 기록한다 는 사실은 어색하기 그지없다. 허나, 바람이 있다면 유년 시절, 소년 시절, 청년 시절을 통해 내가 부둥켜 안았던 꿈자락이 이 땅의 아름다운 젊은이들에게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재료가 될 수 있다면 이 부끄럽고 서투른 고백을 토해 냄 이 어색하지 않을 듯 싶다. 꿈은 꿈을 꾼 삶만이 이룰 수 있다고.... 정영 형, 현택이 형, 성근이 형, 민종이, 선묵이, 준영이, 최형인 교수님.... 그리 고 사랑하는 많은 분들께 늘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며.... 우이동 하늘에서 느티나무가 되었으면 이성헌 1958 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를 졸업하고 행정대학원 에서 행정학 석사를 취득했다.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내고 대통령 비서실 정무 비서관을 지냈으며 현재 신한국당 서대문갑 지구당 위원장이다. 16 년 전에 정치가가 되려면 옛날에 정치를 하려면 군인이어야 했다. 약간 천박하게 세 글자로 하면 ‘군 발이’이고 다시 존경의 뜻을 담아 세 글자로 부르면 ‘장군님’이다. 여기에 언론이 가세하여 ‘영명한 지도력, 드넓은 포용력, 보스 기질’ 따위를 덧붙여 주면 금상첨화다. 그러면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되고, 못해도 시장 한 자리는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제도 정치권이엇다. 이런 걸 보고 자란 우리들은 그저 ‘ 정치’하면 그놈이 그놈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체념에 젖게 되 었다. 그리고 옛날에 정치를 하려면 혼자서 노는 데 익숙해야 했다. 툭 하면 연금이


다, 수배다, 구속이다 해서 어둠을 벗삼아 미래를 구상하고 내일의 운명을 걱정 해야 하는 팔자, 그래서 자나 깨나 앉으나서나 일신의 안위와 생계는 뒷전으로 제껴 놓는 팔자, 따라서 혼자 갇혀 있어도 폼을 잡을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정치에 적격이었다. 또 그 옛날에 정치를 하려면, 약속을 ‘잘 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 친구 믿을 만해?‛이런 말에 괜한 죄의식을 느끼거나 행여 뒤탈 걱정을 하면, ‘통이 작은 인간’이 되고 ‘보스가 되기는 글렀다’고, 그래 가지고는 ‘사람이 주위 에 모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면 일단 ‘약속을 잘 하는 사람’이어야 하 는데, 무엇보다 스케일이 커야 한다. 100 억 원 정도는 우습게 넘길 줄 아는 배 포, 탄탄한 토대보다는 당장의 ‘한 수’를 우선하는 자세, 소위 가신 그룹과 식 객을 다룰 줄 아는 ‘인간 경영의 도사’여야 한다. 그래야 정치를 할 수 잇었 다. 아니 그런 사람이 정치가였다. 그래서 그렇게 멋진 살맏르을 국민들은 ‘군 발이’와 마찬가지로 세 글자인 ‘정치꾼’으로 불렀다. 그런데 나는 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사기치는 사람한테나 붙여 마땅한 접미 어인 ‘꾼’을 달고 다녀야 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그 랬더니, 꾼(미) (1. 어떤 일을 전문적,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의 뜻)이라고 해놓고 ‘씨 름꾼, 장사꾼, 나무꾼’을 예로 들어 놓았다. 그 밑줄에는 (2. 그 일에 모이는 사 람의 뜻)이라는 풀이를 한 다음 ‘장꾼, 구경꾼’을 용례로 제시해 놓았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꾼’이라는 말이 틀렸다거나 나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 다. 그렇다면 정치를 업으로, 필생의 과제로 생각하여 국회에 나가거나 시청에 있거나 청와대에 매일 ‘습관적으로’ 출근하여 일하는 살마을 왜 ‘정치꾼’으 로 부르는 것일까? 오히려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문제는? 꾼이라는 접미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꾼이 되 지 못해서 그렇다. 꾼의 몸말인 정치가 잘못되어서 그렇다. 우리의 눈높이로는, 지나온 우리의 뼈아픈 역사 속에서는 도무지 정치가 놀음 이상이 아니었다는 말 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을 상대로 논쟁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고 떠돌아다니는 장님 논리학자 가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렇게 말했다. ‚ 내 앞에 빛을 가지고 와 보라. 그러면 나는 그것을 만질 수도 있고 북처럼 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빛의 소리도 듣고 싶고 맛도 보고 싶다. 그러지 않으 면 적어도 냄새라도 맡고 싶다. 자, 누가 내게 빛의 실체를 증명해 보라.‛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장님에게 빛의 실체를 증명할 수가 없었다. 빛은 사람의 손바닥 위에 올려 놓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세가 등등해진 장 님은 사람들을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이 말하는 빛은 상상일 뿐이다. 당신들 역시 그 빛을 가져올 수 없으 니 나 같은 맹인과 무엇이 다른가?‛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빛은 어디에나 있는데 그것을 증명하라니, 장님의 주장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아 버렸다. 눈이 아니고는 빛을 증명해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 끝에 현인을 찾아갔다. ‚우리들은 도저히 그에게 빛을 증명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선생님께 서 그에게 빛을 증명해 주십시오.‛ 그러자 현인은 사람들에게 타이르듯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증명이 아니라 의사이다. 그가 빛을 볼 수 있게 눈을 고쳐 주도록 하라.‛ 6 개월 후, 의사의 치료로 눈을 뜨게 된 장님은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구경하 면서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빛에 대한 논쟁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장님에게 빛은 무엇인가. 우리 국민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그 동안 우리 사회 에는 빛을 가져 오라는 장님의 논리만 있었고 의사에게 보내 눈을 고치라는 현 인의 조언을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다. 그러나 무시당했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 적 열망, 비전 있는 사회건설에 대한 드놓은 요구가 있었지만 무력에 의지하는 정치세력에 의해 원천봉쇄 당했다. 그래서 우리는 광명한 세계에 살면서도 눈뜬 장님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가 보아 온 정치는 정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사여구로 포장된 놀음일 뿐이었다. 거기에서 눈높이가 나올 수 없고 선진적 정치문화가 싹틀 수는 없었 다. 이제 그 낡고 낡은 편견과 관습을 깨버리는 일이 남았다. 누가 할 것인가, 반 드시 해야만 하는 일인가, 과연 이룰 수 있을까. 나의 정치인생은 바로 이 물음 을 풀어 나가는 데서 시작되었다. 형, 이제 시작이야 1984 년 여름 나는 쫓기고 있었다. 넓은 대로 위에서 우산을 푹 위집어 쓰고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내일의 일정을 떠올리며 시청앞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연세대 여름 청송캠프’사건으로 수배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유치한 일이었다. 이 사회에 대한 건전한 비판 과 발전의 논의조차 원천봉쇄되고 있었으니, 생기발랄한 대학생의 가슴에 울분 만 쌓이게 해놓고 그것을 풀어 나갈 그 어떠한 통로도 차단된 채 숨죽이는 여름 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 땅의 청년학생들이 전두환 정권의 폭압 속에서 스러져 가는 민주주의의 불 씨를 본격적으로 지펴 올리기 시작한 때가 1983 년이었다. 그 해 봄부터 학내 민 주화 운동을 시발로 하여 학생들의 민주화 열기를 하나로 모아 나갈 학생회 조 직 정비가 시작되었다. 그 때만 해도 유신 체제의 산물인 학도 호국단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학생 의 민주화 열기를 담아 내기 위한 학생 자치조직인 총학생회는 학생대중의 간절 한 염원을 모아 독자적으로 출범하였다. 1983 년 가을 학기부터 시작된 새로운 총학생회는 재학생들의 직접 선거로 회장단을 구성하였다. 나는 총학생회가 부 활하는 첫해에 학생회장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서 나는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성취하고자 노력했다. 우선, 동료 학생들이 우리 정치와 사회의 모순된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대 한 청년으로서 젊은 용기와 열정을 모아 민주화를 위한 내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각종 학내 소모임의 자율적 결성을 지원하였으며,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 간의 다양한 토론의 기회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를 제도화하여 확산시키고자 한 것이 1984 년 여름부터 시작한 ‘여 름 청송캠프’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청송캠프’는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각 단과대학 학생회 조직은 물론 다양한 동아리 모임의 회원들, 그리고 일반 학생 들을 대상으로 행한 민주화 대토론회였다. 푸른 숲이 있는 연세대학교 청송대에서 밤을 지새우며 우리 정치와 사회의 현 실에 대해 격론을 벌였으며, 어떻게 힘을 보으고 독재 정권에 맞서 투쟁해야 하 는지를 고민했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고귀한 희생을 치른 분들을 생각하며 함께 울기도 하고, 서로를 위안하고 격려하며 노래를 불렀다. 아름다운 청송대의 여름밤, 참으로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태양보다 더 뜨거운 열기를 뿜어 내었던 그 캠프에서 민주화를 향한 열정과 정치의식이 성숙되어 갔 다. 그리고 나는 이 사건으로 경찰의 수배를 받는 몸이 되었고, 학교에서는 무기 정학 처분을 받앗따. 언제나 그렇듯 거짓이 먼저 오고 진실은 뒤따르게 마련이다. 백양로의 은행나 무와 울창한 청송대에서 시작된 민주화의 대토론이 군사독재를 허물어뜨리는 소 중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그 때 고난이 승리의 신호라


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련을 예감했던 ‘청송캠프’를 준비하던 6 월 초순 1 년 후배인 k 가 던진 말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잇다. 비쩍 마른 몸매에 유난히 말이 없었던 그 친구는 ‘청송캠프’의 대자보를 붙이는 나를 보며 이렇 게 말했다. ‚형, 이제 시작이야.‛ 나는 말없이 그 친구의 손을 쥐었다. 84 년 여름은 연세 청송대의 그늘에서 수 배자의 어둠으로 시작되었지만 한국 현대 정치사의 가장 격동적인 80 년대는 그 렇게 열성적인 민주화 투쟁과 학생들의 숨막히는 교정에서 조금씩 깊어 가고 있 었던 것이다. 학생운동에서 정계 입문까지 만남은 운명지어진 것일까. 한 나라의 시민으로 일국의 대통령을 만난다는 것 은 민주 사회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긴 해도 모든 사람이 대통령과 상면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인간적으로 대등한 위치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토론도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대통령은 한 사람이고 국민은 4 천만을 헤 아리니 함께 일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잇다. 그런데 내게는 전 혀 예감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광주항쟁 3 주년을 기념하여 총학생회 주최로 시국 강연회를 준비하던 참이었 다. 이 때 우리는 초청 연사로 YS 를 초빙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학생회 장을 맡고 있던 나로서는 YS 를 찾아가 설득할 수 밖에 없었다. 학생운동을 활성 화하고 민주화를 위한 대동단결의 장에 참석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으나 YS 는 완강히 거절하였다. ‚내가 학교에 가 연설을 한다면 저들(집권자)은 내가 학생들을 선동한다고 몰아붙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야 각오가 되어 있으니 괜찮지만 학생 여러분 이 희생되니 참석을 안 하는 것이 나을 듯 싶다.‛는 것이 불참의 이유였다. 그러나 두 시간 가까이 호소를 한 덕에 YS 는 결국 승낙을 하였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 소식을 동료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YS 는 5 월 18 일 행사장에는 참석 하지 못했다. 아침 일찍 행사 참석이 어렵다는 전갈을 받고 나는 급히 상도동으 로 달려갔다. 당시 민주화 운동을 이야기할 때 YS 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었던터라 어떻게 든 모셔가야 된다는 의무감으로 전심을 다해 설득했지만, ‘나 때문에 대학생 여러분이 투옥되는 불상사는 없어야 되겠다’는 결심을 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날 1 만여 명이 YS 의 강연을 고대했으나 강연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 후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김덕룡 의원을 통하여 불참한 것에 대한 사과를 받게 되었고 시간이 지난 후 그 때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대통령 비서실에서 일을 하 게 되었다. 총학생회장 자격으로 상도동을 찾았을 때만 하더라도 YS 가 대통령이 되리라 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또 내가 대통령의 비서로서 일을 하게 될 줄도 몰 랐다. 그 만남으로 풋내기 대학생이 현실 정치판에 뛰어들게 되었으니, 사람의 일이 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들은 운명적 만남을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착역 없는 행로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에게 제일 큰 욕망을 말하라면 충분한 수면을 꼽을 것이다. 나는 상도동에서부터 청와대로 오는 동안 상상하지 못할 어려움을 겪었 고 동행자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그저 퍼 질러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첫 출근은 새 양복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기만 했다.평상시에는 청와대란 곳이 앞이 탁 트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뒤고는 인왕산이 있는 근 무 환경이 좋을 것이라고 기대가 컸었다. 늘 조그만 집에서 집무를 보던 처지라 정원을 가로질러 차를 타고 간다는 것은 참 희한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청와대 입성은 시작에 불과했다. 상도동에서 옮기기가 무섭게 새로운 일이 시작되었다. 긴장의 강도가 엄청나서 힘들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쉴새 없이 쏟아지는 사건과 정책 속에서 옥석을 가려내고 분석하다 보면 어느새 깜깜해져 있었다. 일을 하다가 창 밖으로 하늘을 바라보면 수인의 몸으로 먼 섬 에 표류되어 온 감정이 들곤 했다. 원망스러운 시간은 결코 나를 위해 멈추어 주는 법이 없었다. 말로는 출퇴근이었지만 비서생활이라는 것이 보통 업무와는 전혀 딴판이다. 설령 퇴근을 했다 해도 귀는 열어놓고 눈은 집무실 현장을 꿰뚫어 보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조여드는 생활 때문에 청와대 출근을 시작한 며칠 동안 대변을 보 지 못할 정도였다. 거울을 보면 이 얼굴이 내 얼굴인가 할 정도로 까칠해 있었 고 입술은 바싹 마르고 갈라 터졌다. 수년이 흐른 지금에댜 옛날 얘기하듯 흘릴 수가 있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하 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위안이 되주는 벗이 있다면 인왕산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산이지만 다정한 이웃같이 마음을 포근 히 감싸 주었다. 모두 윗사람들뿐인데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말을 걸 수 있는 것은 산이요 바람이었다. 그 때 산이 없었다면 나는 갑갑증과 긴장감에 마음의 병을 얻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꽉 짜인 일과 속에서 지내다 보니 실수의 연발이었다. 전화를 잘못 받 아서 엉뚱하게 전개된 일, 문서를 잘못 작성해 난감하던 일, 심부름을 잘못해 역 정을 듣던 일 등등.... 비서 초년생이면 으레 겪는 과정이라지만 정확을 요하는 내 성격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의 30 대 초반은 왜 그리 서툴던지. 애 꿎은 서른의 잔치는 패기 넘치던 나의 정신까지 때로 멍들게 했다. 그러면서 3 년 만에 일을 익혔다. 3 년, 여론의 흐름과 정책의 평가 분석 속에서 철부지 대학생은 현실 정치에 조금씩 들어서게 되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일 과를 시작하는 무렵에는 조용히 눈을 감고 첫 출근하던 날을 떠올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 날의 감정과 당황하던 모습, 그렇지만 열정에 넘치던 기운을 생각하 면서 말이다. 너는 잠도 없냐! 결혼생활 10 여 년 만에 처음으로 친구들과 바다에 가게 되었다. 부담감 없이 하루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가족을 동반한 여행 이라 가장으로서 으쓱해지기도 했고 그동안 쏟지 못한 부정도 표시하는 자리가 될 것 같아 흥분에 사로잡혔다. 남들이 들으면 같잖은 일에 불과하다. 그까짓 바다 구경 가는게 뭐 대단하냐 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가족을 데리고 개인시간을 누릴 수 잇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정해진 틀에서 일에 묻혀 헤매는 처지에 평일에 자유 시간을 가진다는 건 감 히 상상도 할 수 엇었던 터라 지레 흥분에 젖었다. 오랜만의 휴식을 취한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집사람과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는 기 쁨이 더 컸다. 어떻게 하면 알찬 휴가를 보낼까를 궁리하다가, 에이 못 잔 잠이나 실컷 자고 보지 뭐, 하고 간단히 정리하고 말았다. 일단 늦잠에서 깨어나 일행들과 바다 구 경을 하고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이 오전 스케줄이었다. 도착한 날 저녁에 술도 거나하게 한잔 하고 어울려 놀다 느지막이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실컷 잤다는 생각에 눈을 뜨니 6 시였다. 평소에 근무할 때의 기 상 시간이라면 늦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꿀맛 같은 단잠을 맛볼 때였다. 잠을 깨니 더 버티고 잇어 봐야 달아난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부둣가로 나갔 다. 부두에는 벌써 밤에 출항했던 배들이 돌아와 생성을 내리고 있었고 새벽장 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도회지의 시장보다 더 흥성거렸다. 사람들 틈에 끼여 바


다 내음이 진하게 배인 횟감과 찌개거리를 장만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아직도 일행들은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어이, 내가 바다를 사 왔어. 어서들 기상!‛ 큰 소리로 일행을 깨웠다. ‚야, 너는 야채장수냐! 왜 새벽부터 설쳐 대니?‛ ‚왜 그러니, 너 정말 여기 쉬러 온 거냐, 응?‛ ‚이 친구야, 너는 잠도 없냐! 제발 잠 좀 자자. 부탁이다.‛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해댔다. 휴식차 온 것이 아니라 평상시와 같은 기상 시 간이 불만이었나 보다. 새벽의 야채장수! 이 말은 나의 일상을 돌이켜보는 말이다. 나의 기상 시간은 어느 누구보다 빨라야 했다. 출근을 5 시에 하는데 업무 준 비를 위해서는 못해도 4 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하절기에는 5 시 반, 동절기에는 6 시 반에 행하는 조깅이 몇 년째 되고 보니 이제는 시계가 없어도 자동으로 기상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내 업무는 매일 쏟아져 나오는 신문을 분석하고 정리해 머리에 입력시켜야 하 는 일이었다. 신문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이 일은 신문에 발해오디는 시간부터 밤늦도록 해야 한다. 저녁에 다른 볼일이 있어 신문 보는 시간을 빼앗긴 날은 새벽까지 낱낱이 훑어봐야 한다. 신문을 보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다. 관련 기사 를 정리 요약해 머릿속에 입력해야만 한다. 나의 업무 보고 방법은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 대통령의 조깅시간은 평 균 30 분인데 그 중 나에게 보고할 시간으로 할애된 건 15 분에서 20 분이다. 사안 의 중요성을 미리 생각해 그 순서대로 머리에 입력시켜 조깅을 하는 상태로 보 고를 하고 사안의 예측도 해야 한다. 뛰면서 보고하는 일은 습관이 되어 어렵지 않았지만 뛰다가 보고 순서를 바꿀 수도 있고 잊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비가 오는 날이나 혹한이 몰아칠 때는 그 애로가 더 심해진다. 한겨울에는 방한복을 입고 머리를 다 덮는 모자까지 덮어 쓰고 뛰게 되는데 이 때는 대통령의 질문이 잘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방한복 의 모자를 벗어 버리면 매서운 새벽 바람이 귓바퀴를 도려내는 듯 아려 오니 남 감하기만 하다. 대통령의 질문에, 잘못 들었으니 다시 말씀해 달라고 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 무슨 질문을 했을 것이라고 감으로 말을 하지만 간혹 동 문서답을 하는 경우가 생긴다. 대통령을 바쁜 일과를 보내게 되므로 뛰는 시간도 아껴 쓰는 입장이다. 또 뛰 면서도 생각을 하는 대통령이니 내 업무는 당연히 조깅 시간이 적격인 셈이다. 재미난 일은 평상시보다 속도가 빨라지면 중대한 결심을 하는 날이라는 것을 경 험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상도동 시절과 청와대 시절의 조깅의 묘미가 다르다. 상도동에서는 상도동 산 중턱의 일정거리를 왔다갔다 하는 반복 코스가 조깅 코스의 전부였다. 산 중턱 이란 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가를 가로지른 동네를 관통하는 도로인지라 새 벽 일을 나가는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거리서 격의 없는 인사와 대화를 나 누게 되고 민의를 수렴하게 되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청와대의 조깅 장소는, 환 경은 상도동에 비하여 훨씬 좋은 편이지만 민의를 수렴할 기회는 거의 없는 셈 이다. 그래서 나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직접 토의를 자주 하는 편이다. 각 분야 에 진출한 동기나 선후배, 그리고 사회여성쪽 업무를 하게 되면서 여성 분야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려고 한다. 짧은 20 분의 조깅 시간에 진행되는 압축된 분석 정리를 위해서는 국내외 신문 을 완전히 꿰뚫고 있어야 한다. 어떤 내용의 질문이 나올지 알아야 하고 기사를 분석해서 머릿속에다 일목요연하게 정리 보관해야 하니까 피가 마르는 작업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년을 지내온 나였으니 말술이 들어가도 기상 시간이 달라질 리가 없었다.


바다를 다녀온 이후 친구들이 놀러갈 때 나도 끼워 달라는 말을 할라치면 ‘ 야채장수 이성헌’이 때문에 잠을 설치게 된다고 1 차 제외 대상이라는 농담을 듣게 되었다. 그럴 때면 ‚야! 나도 야채장수처럼 살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하겠 다‛는 말로 응수한다. 머릿속에 1 일 도서관을 만들어야 하는 것보다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야채장사 하시는 분들에게 실례가 될 줄 알면서도 감히 그런 말 을 지껄이곤 했다. 두 아이와 아내 첫째 아이 나라, 애교가 넘치는 장녀다. 1 주일 만의 귀가에 늦도록 나를 기다 렸다면서 무섭게 눈을 치뜨고 묻는다. ‚아빠는 왜 매일 늦게 들어와?‛ ‚응, 아빠는 말이다,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그래.‛ ‚그럼, 아빠도 숙제 하는 거야?‛ ‚숙제.... 그런 셈이지. 우리 나라가 잘 살려면 니가 공부하는 것보담 훨씬 숙 제를 많이 해야 돼.‛ ‚내 이름이 나라니까 날 위해 숙제 하는 거네요?‛ ‚그렇지. 나라야.‛ ‚숙제 빼먹고 혼날 때두 있죠, 그쵸?‛ ‚....‛ 할 말이 없다. 아내는 내가 늦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오늘 아빠는 사무실에서 숙제 하느라고 늦는다고 했다나. 이거 나이 먹고도 계속 숙제 한다고 한 달에 절반은 외박이니 아내와 꼬마 녀석들에게 점수가 영 엉망이다. 뉴스에서 국회의원들이 멱살잡이로 난리를 치던 지난 여름, 식구들이 모여 저 녁을 먹는 밥상머리에서 이제 다섯 살짜리 녀석이 내게 다짜고짜 묻는다. 둘째 재상이 놈이다. ‚아빠, 저 사람들 왜 그러는 거야?‛ ‚응, 그건 말이다....‛ 또 할 말이 없다. 부끄러워서다. 이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 막힘없이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정치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내 아이들 앞에서 체면 세우고 ‚아주 멋있잖아.‛ 이런 말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이다. 아니는 학교 후배다. 연대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80 년대의 젊은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소박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알게 되었다. 소리 없이 다가와 넉넉하게 이해하는 마음씨에 반하고 말았다. 우리는 1985 년 일제 치하 민족 독립의 투혼을 계승한 11 월 3 일 학생의 날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것 은 언제나 청신한 마음으로 살아가자는 무언의 약속이었던 셈이다. 아내는 쪽집 게다. 나의 판단이나 행동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차분히 전달하고 내가 방향을 벗어나지 않게 바로잡아 준다. 고마운 사람인데 아이들한테와 마찬가지로 늘 부 족한 마음뿐이니 지면을 빌려 이렇게 한마디 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아, 이럴 때 시인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이해해 주오. 여보.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은 내게 늘 소중한 사람입니다. 정치 지망생들을 위해 한 시대가 종막을 고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징표는 젊은이들의 패기와 도전 의 식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 지난 지자제 선거에서 20 대 후반과 30 대 초반의 청 년이 대거 당선되었다. 약동하는 기운이 절로 느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 은 정파를 떠나 우리 사회의 건강함을 보여 주는 신호였다. 젊은 정치 세력의 등장. 역사의 탁류를 정화시킬 위대한 가능성의 시대. 나는 오늘 우리 사회를 이렇게 본다. 정치는 인류를 병들게도 하고 예술가로 만들기


도 한다. 정치에 세균이 다량으로 함량이 되면 개인의 식중독이 아니라 사회의 몰락으로 마감하고, 훌륭한 정치는 개인의 창의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완전함을 넘어서는 예술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법이다. 이 땅에 태를 묻고 살아갈 우리들은 지금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실의 선두 주자가 되어야 할 정치와 정치인상을 새로이 정립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우선 16 년 전의 정치와 달라진 것부터 말해 보자. 첫째, 이제는 군인이 아니어도 정치를 할 수 있다. 시쳇말로 바위였거나 사유 가 있어 군대를 가지 않은 사람도 정치를 할 수 있으니, 출신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둘째, 더 이상 혼자 놀기 좋아하는 사람은 안 된다. 음침한 밀실에서 귓속말을 나누는 데 익숙한 사람은 이제 안 된다. 그래서는 거대한 국민적 소망을 담아 낼 수가 없으니 궁상맞게 살면 가장 곤란한 직업이 정치가다. 셌째, 통이 크지 않아도 된다. 나는 오히려 통이 좀 작아졌으면 한다. 한 달 월급을 쪼개 쓰는 주부의 심정이 되었으면 한다. 겁많은 정치인을 한 명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 제발 국민을 두려워하는 게 분명히 보이는 정치인을 만났으면 좋겠다. 덧붙여 분명히 밝혀 두고 싶은 항목이 있다. 빽 좋은 군인 아저씨가 아니어도 좋고 국민 속에서 활동하는 보통 사람의 대변자도 좋은데, 눈을 똑바로 뜨고 내 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올바로 판단하는 지혜가 있어 야 한다는 점이다. 시대의 변화와 발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시 골의 촌부와 다를 바 없다. 이것은 정치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정치으 주체 인 죽민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다. 지금 세상이 변화하고 잇다. 이만저만한 변화가 아니다. 당신은 지금 그 변화 의 한가운데에 있는가? 21 세기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물어 보는 첫마디는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지금 변화의 기운을 느끼는가?‛ 긍정 의 표시로 고래를 아래위로 흔든다면 당신은 일단 정치인의 자질이 있다. 아리 송하거나 아무것도 못 느낀다면 당신은 이 나라의 공민으로서 조용히 가슴에 손 을 얹고 반성해야 한다. 내가 말하는 변화는 그 무슨 엄청난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 야흐로 닥쳐오는 새로운 도약의 물결을 말한ㄷ. 90 년대를 기점으로 우리 사회는 급격한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그 핵심적 부분을 간단하게 살펴 보면 다음과 같 다. 우선 정치적 민주화의 물꼬가 트이고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외세의 침탈과 독재정치의 억압 속에서 국민적 원한이 쌓인 역사였다.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기 도 전에 닥친 동족 상잔의 한국전쟁과 군사쿠데타, 이제야 역사의 심판대에 오 른 80 년 5 월 광주학살까지, 민주주의에 목마르고 통일에 체념한 우리 민족의 한 이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게다가 이미 현실로 다 가온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까지 도출해야 한다. 사회적으로는 전후 세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세대의 출현과 독특한 문화 현상이다.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 굴절된 기성세대의 가치관이 억압과 복종에 익 숙한 것이었다면 70 년대 세대가 사회의 새로운 중심으로 등장하고 있는 현시점 은 개성과 창의를 덕목으로 하는, 전통과 첨단의 결합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 새로운 규범, 새로운 단결의 과제를 던져 주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전근대적이며 고질적인 정경 유착의 고리를 끊고 경쟁력있는 기 업 구조르 ㄹ확립하며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한 근본적 조정 작업이 시작되고 있 다. 지난 몇 년 사이 모든 대기업들은 ‘최선의 생존 전략은 일류가 되는 것’ 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제품, 조직, 고객의 세 축을 결정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바야흐로 자율과 서비스, 무한 결쟁 시대의 승자가 되기 위 한 본격적 교체기에 진입한 것이다.


더욱이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 버릴 정도가 되었다. 컴퓨터를 중심으로 ‘멀티’한 세상이 도래하고 무한대의 광역 체계인 ‘정보고속도로’가 인류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바꿔 놓으면서 개인의 창의가 중심이 된 조직과 인간 관계가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네트워 트화’는 사회 진보와 개혁을 향한 또 하나의 구동축이다. 모두 다 아는 이야기를 이처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위의 사항들이 정치인 의 새로운 규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변화는 근대 여 명기에 미완으로 끝난 한국사회 개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며 이는 곧 일국의 사회발전을 책임지는 정치인들을 가름하는 척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 대의 변화를 읽어내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 그는 난세에 홀로 일어선 영웅도 아니며, IQ 200 이 넘는 천재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전문 정치인이다. 지금까지 ‘고도의 정치 역량’은 교묘한 대중 선동과 여론 조작의 다른 말이 었다 즉 내용적으로 붕괴하고 있는 사당 정치와 그 아류들에 의해 국민 복지와 비전있는 신세기로의 전환은 끝간 데 모를 악순환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80 년 대 초반으로 기억하는데 ‘수렁에서 건진 내딸’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사춘기 의 방황속에 타락의 길로 빠져든 소녀를 사랑으로 다시 찾는다는 이야기다. 그 런데 이제는 ‘수렁에서 건진 정치’라는 영화가 만들어져야 할 때다. 통계 자 료 하나 분석할 줄 모르고 그저 ‘악수잡이’가 되어 여전히 연줄과 돈줄로 정 치생명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전면 퇴장해야 한다. 활력이 넘치고 전문성을 갖 춘 겸손한 사람이 거센 도전의 세기를 맞받아치며 나가야 한다. ‚국회의원이 되고 싶어요‛ 이제 이말을 없어져야 한다. ‚저는 엔지니어로 만족합니다‛ 이 말도 없어져야 한다. ‚저는 엔지니어 국회의원이 되겠습니다 ‛ 이래야 한다. 학벌 좋고 배경좋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분야에서 갈고 닦은 재능과 비전으로 섬세한 정치를 펼치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 전문 정치인이다. 서당개 3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아ㅜ리 손재주 없는 사람도 목수 밑에 서 어깨 너머로 3 년을 배우면 못질에 미장이 기술이 생기고 제아무리 헤엄을 못 치는 사람도 수영 강사와 동고동락 3 년이면 국가 대표는 못 될지언정 수영장 한 바퀴 정도는 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모양인지 국회의원 4 년 하면 재산이 수십 배로 불어나고, 선거철만 되면 ‘표밭갈이’한답시고 악선동 쟁기 질이니 국민은 곧 손바닥만한 종이 ‘표’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도대체 우리가 그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화려한 이력 뒤에 숨은 노회한 술수 이외에 무엇을 볼 수 있는가. 거리의 정치에서 삶의 현장으로 전환된 이 시대에 정치는 무엇이며 누구를 정치인으로 부를 것인가. 가슴을 찍어내리는 질문들이 다. 느티나무 한 그루 이제 내가 던진 질문들에 대답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동네 어귀나 놈배미가 멀찌감치 보이는 자리에는 느티나 무가 있다. 그 나무는 마을의 역사이며, 동네 사람들의 쉼터이고 방문객들에게는 정다운 이정표가 되어 준다. 키가 10 미터가 넘는 나무들은 대개 수령이 100 년이 넘는 것이니 족히 3 대를 품는 나이다. 3 대라면 만석꾼 부잣집이 망해서 그 손자가 인생 유전을 논할 세 원이고, 시련과 좌절로만 기록된 아버지의 일기장의 승리와 영광의 월계관을 올 려놓을 만한 시간이다. 느티나무는 그 모든 것을 품고 자란다. 긴 여정 끝에 귀 환을 준비하는 여행자에게 느티나무는 군소리 없이 자리를 만들어 주는 서비스 요원이다. 거친 흙바닥이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시원한 그늘과 혹한 바람 막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느티나무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디 그런 사람 없나. 너무 부끄럽고 묻는 것이 어색하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에게 되물어야 할 질문이었


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가? 너는 준비하고 있는가. 끝까지 해낼 자신이 있는가. 이 물음에 왜 나는, ‚해야만 합니다. 제가 합니다. 책임지겠습니다.‛큰 소리 로 외치지 못하는 것일까. 언제쯤이면 될까. 나의 답은 또 물음표로 끝나고 만 다. 힘든 줄 알면서도 가야 하는 길이다. 그것이 최선이다. 가슴속에서는 들썩거 리며 한번 외쳐보라고 부추긴다. 호흡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 보자. ‚자, 느티나무 한 그루 키우세요. 깨끗하고 싱싱한 느티나무가 왔어요. 비좁 은 마당 한켠에 느티나무 한 그루 키웁시다. 여러분!‛ 좌절은 늘 성공을 꿈꾸게 한다. 조병희 1960 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계에 입문하여 진명출판사 마케팅 과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일본어 뱅크를 창업하여 일본어 교재를 일본으로 역수출하는 등 어학 출판의 새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유년 시절의 향수와 환경 적응 훈련 고향은 누구에게나 아련한 향수를 안겨 줄 것이다. 나 역시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을 사랑한다. 하루하루 바쁜 삶에 쫓기다 보니, 부모님도 생존해 계시는 그 고향을 자주 찾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 2 리 75 번지. 그곳 사람들에게는 ‘느티마을’이란 이름 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영춘면은 남한강 상류의 명당 자리에 터를 잡은 곳으 로, 조선 시대에는 영춘현으로서 향교가 있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마을 사 람듸 구수한 마음도 일품이지만 주변의 경치 또한 기막히다. 고구려의 바보 온 달 장군이 쌓았다는 온달성과 그 절벽 밑의 온달동굴, 그리고 천태종의 본산인 구인사가 영춘면의 역사와 함께 있다. 마을은 면 소재지에서 나룻배로 건너 20 분 정도 걸어가야 나온다. 강 줄기를 따라 절묘하게 뻗어 있는 ‘북벽’이라는 절벽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어 매 우 아름답다. 마을 앞에는 모래사장과 자갈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하지만 강으 로 둘러싸여 있어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관계로 그리 알려진 편은 아니었다. 90 년 초가 되어서야 다리가 놓였을 정도이다. 물론 차배와 나룻배가 사라져 전처 럼 그윽한 정취는 자취를 감추었다. 느티마을은 ‘ ‚동족 부락으로 40 여 가구 가 거의 친인척이다.6 대묘가 문종산에 있고, 내가 23 대이고 보면 약 500 년이 넘 은 곳이다. 아버님은 단양군 내의 면사무소를 두루 거치며 약 40 년을 근무하셨고, 강원도 봉평에서 시집을 오신 어머님은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막내삼촌부터 우리 6 남 매까지 모두 7 멍을 대학 졸업까지 뒷바라지 해 주셨다. 부모님은 현재 두분 모 두가 71 세이시다. 나는 재집(동네에서 부르는 우리 집 이름:약 400-500 백 년 된 기와집)의 셋째아 들로 태어나 흙을 벗삼으며 자랐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형제자매를 다 소유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는 4 남 2 녀 중 넷째이지만 서열이 어중간해 불리한 점 도 무척 많았다. 우리의 어린 시절 역시 배고픈 시절이었다. 매일 보리밥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일. 요즘은 보리밥을 별식이라 하여 보리밥 전문 식당도 생겼지만, 그 시절에는 따뜻한 보리밥보다 식은 쌀밥이 더 좋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 당시 면 사무소 공무원이셨던 아버님은 매일 쌀밥이 섞인 도시락을 싸서 출퇴근하셨고, 나는 퇴 근 시간에 맞춰 두 동생을 데리고 배터로 달려가 배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아버님이 배에서 낼면 인사는 건성으로 하고, 그저 도시락(가방)을 받는 것으로


그 날의 운명은 결정된다. 무게가 묵직하면 그날은 횡재한 것이지만 달가닥 소 리가 나면 세 남매는 실망의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곤 했다. 다만 아버님은 빈 도시락일 땜녀 꼭 과자나 사과를 사와 실망하는 우리를 위로해 주곤 하셨다. 나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 국민학교를 다녔다. 학교 출석부에는 이름 앞에 ‚ 물 수‛자가 적혀 있었다. 장마 때는 강물이 불어나서 20 일 정도, 겨울에는 결빙 으로 10 일 정도 학교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천재로 인한 결석이었으므로 다행히 6 년 개근상을 받았다. 국민학교 1 학년은 분교에서 다니 고 2 학년 때 본교로 편입했다. 본교로 옮기자 겁도 났지만 이방인이라는 느낌 때문에 본교생과의 괴리감을 해소하는 데 1 년은 걸린 듯하다. 중학교 1 학년 때 드디어 우리 영춘면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밤이면 호롱불을 켜고 앉아 숙제도 하고 옆에서는 어머님이 양말도 깁곤 하셨다. 또 서로 내복을 벗어 호롱불에 들이대고 서캐와 수퉁니를 잡느라 꽤나 따다닥거렸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호롱불 그을음으로 코 밑이 새카맣게 되 곤 했다. 국민하교 때는 큰 형이, 중학교 때는 작은 형이 방학이면 고향에 내려와 나 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방학이 되어 형이 오는 날은 언제나 학수고대하던 날이 어서 기뻤지만, 다음 날부터는 지겨움의 연속이었다. 공부 못 한다고 혼나는데다 자질구레한 심부름이 많았던 탓이다. 하다못해 어서 빨리 방학이 끝나 형이 서 울로 다시 올라갔으면 하고 기도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왜 그리 기다렸을까? 형은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장난감이나 신발, 가방, 학용품 등을 꼭 사다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친구들한테 자랑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신주단지 모시 듯 잘 보관해 두기도 했다. 이러한 형들의 따뜻한 사랑과 채찍질은 오랜 기가 ㄴ집을 떠나 지냈던 학창 시절,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출판을 천직으로 삼게 되기까지 큰 힘이 되었다. 중학교 3 학년 때의 일이다. 그 당시는 고교 평준화 이전이어서 입시를 준비 중이었는데 한 학기 동안 영어 선생님이 없었다. 발령이 나도 너무 시골이라고 오지 않았고, 어쩌다 부임해 온 남자 선생님은 며칠 안 되어 군대에 가 버렸다. 그럭저럭 여름방학 때가 되어서야 여자 선생님이 오셨다. 결국 그 때부터 어설 프게 배운 영어에 흥미를 잃어 영어 실력은 타과목에 비해 하위였고, 그래선지 지금도 영어에는 자신이 없다. 제천고를 입학하면서 나의 객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때 고등 학교에서 교 편을 잡고 있던 막내삼촌 집에 엊혀살며 비로소 타향살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 학년을 마치고 삼촌의 권유로 청주에 있는 충북고로 전학을 갔다. 그 당시 사 전 보고 없이 결석(편입 시험 보던 날)했다는 이유로 2 학년 담임 선생님한테 군 복무 때러ㅡㄹ 제외하고는 제일 많이 맞았는데, 몽둥이로 허벅지를 50 대인지 100 대인지 셀 수 없을 만큼 맞고 며칠 후 청주로 전학했다. 환경 적응 훈련 세번째! 첫번째는 국민학교 분교에서 본교로 옮겼을 때이고, 두번째는 객지 생활의시작인 고교 1 학년 입학이었으며, 이번이 세번째였다. 전 학을 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편입생, 더군다나 키도 앞에서 서너번째인데다 깡촌 출신이라는 ‘촌놈’이란 별명이 붙었다. 제일 듣기 싫은 단어가 별명이 될 줄이야. 물론 대학생이 되고 부터ㅡㄴ 촌놈이 도시놈보다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하숙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 후 결혼할 때까지 통산 15 년의 객지 생활을 했다(삼촌집 1 년, 하숙 4 년, 독서실 1 년 6 개월, 큰형님 댁 6 년, 군대 생활 2 년 3 개월). 2 학년 때에는 내성적인 친구가 하숙방 동료였고, 3 학년 때는 교내에서 알 아주는 불량 학생과 하숙방 동지가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 친구를 상당히 무 서워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하숙 생활을 함께한 인연으로 나름대로의 친분 관계가 형성되었으므로 든든한 빽이 되었던 셈이다. 녀석은 이른바 촌놈들의 바 람막이였다. 성적이 떨어졌을 때 준비해 둔 매로 서로를 얼마나 때렸던지 지금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대학 입학 시험도 만만찮았다. 좌절의 쓴맛을 처음으로 느낀 시절이었다. 국립 대 중에서도 사범대를 가야한다는 아버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1978 년 서울의 사 립대인 K 대에 응시했다가 낙방했다. 제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 어설픈 대학보다 는 대성학원 문과반이 좋아 보였다. 광화문 대성학원에 입학함과 동시에 근처독 서실로 짐을 롬겼다. 숙식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독서실이었다. 하지만 쉽게 적응하지 못해 이만저만 힘든 생활이 아니었다. 독서실 책상에 엎 드려 자는 습성 때문에 걸린 축농증은 지금도 몸이 피로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 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되어 버렸다. 그 다음 해 전기 대학 입시에서 또 낙방의 고배를 마셔따. 후기대학에는 합격 을 했지만 전공도 맞지 않았고 대학도 마음에 들지않아 아버님을 속였다. 나중 에 들켜 마음 고생을 했지만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삼수의 길을 택 했다. 그 당시 공부에 대한 의지의 공통적 인식이던 백호머리(빡빡머리)를 하고 무들인 야전잠바를 입고 대성학원 편입 시험 준비를 한 결과 S 대 문과 진학반인 엘리트 반에 합격했다. 그야말로 마지막 도전이기에 4 개월간 열심히 공부했다. 재수 시절 엄습한 축농증의 재발이 문제였다. 또한 독서실의 탁한 공기 때문에 폐, 눈, 간이 전반적으로 나빠져 독서실 생활을 마감하고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하다못해 수업시간 외에는 공부를 못 할 정도였다. 축농증 약을 먹으면 하루 종 일 잠이 왔기 때문이다. 가을 바람이 불자 마음은 조급해지는데 진전은 없는 매우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 때는 예비고사가 30% 정도만 반영될 뿐 본고사(국,영,수)가 합격의 열쇠였다. 결국 예비고사 점수가 예상대로 나오지 않아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한다고 속였다가 대학에 가야겠다고 아버님한테 연락을 드렸더니 국립대에 한해서만 진학하라고 하셨다. 여동생이 고등하교 3 학년이라 대학 입시 를 같이 치를 운명이 되어 비교적 학비가 싼 국립대를 택하라는 것이었다. 그러 나 신문방송학을 꿈꾸던 나는 부산에서 시험조차 치르지 못할 형편이었다. 국립 부산대에는 신문방속학과가 없었다. 하지만 아버님의 뜻을 받아들여 일단 어문 계열에 원서를 내 합격했다. 꿈과 좌절의 연속-대학 시절 부산에서 또다시 객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본래 내성적인 나는 좀더 외향적이 고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성격 개조에 나섰다. 그 첫 작업은 나 자신에 대한 연구였다. 그래서 에리히프롬의 작품이나 스님들이 쓴‘소외’ 관련 책자를 수없이 읽었다. 그러고 나니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겨 소외감도 사 라지고, 나에게도 외향적인 끼가 있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나보 다 몸집도 크고 적극적인 친구들을 사귀게 된 것도 좋은 기회였다. 입학고 동시 에 ‘전통예술연구회’라는 클에 가입해 탈춤을 비롯한 전통예술에 빠져들었다. 그 모임은 당시 민주화 운동의 선봉장이 었던 서클 중의 하나였다. 다음 날 등 교하면 몇 학번 누가 구속되었다는 것이 뉴스거리일 정도였다. 수업은 거의 이 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5 월에 휴교령이 내려 학교에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으며, 시험은 리포트로 대체했다. 한편은 친목서클연합회에도 가입하여 타학교와의 교류도 폭넓게 가진 1 학년 생활이었다. 전공을 선택할 시기가 되었으나 마땅히 지원할 학과도 없던 터에 국립대로는 최초로 개설된 일어일문학과를 1 차 지망 학과로 정했다(그 당시 공 대를 졸업한 형님들의 권유가 있기도 했다). 결국 그 때의 선택이 현재의 직업과 연결된 셈이다. 고작 24 명의 학생이 전부였고, 선배도 없는 학과여서 많은 어려 움과 서러움을 겪어야 했다. 1 년이 지난 후 군대나 휴학으로 인해 남은 사람은 11 명뿐이었다. 정말 썰렁했다. 대여섯 명이 수업을 안들어가면 수업이 진행되지 못했고, 수업 시간에 따로 출석을 부를 필요가 없었다. 교내에서 ‘쪽빠리과’라


고 홀대하는가 하면, 사회에서도 별반 환영받지 못하는 학과였다. 따라서 여러 가지 고민으로 전공 공부에 깊이 빠져들 수가 없었다. 3 학년이 되고보니 앞날도 걱정되고 해놓은 거소ㄷ 없다는 자각이 들어 새로운 인생 설계를 세웠다. 대학 교수가 되기로 한 것이다. 외국어인만큼 국어학의 기틀 위에서라야 능률이 오를 수 있다는 판단 아래 국 문과 수업을 신청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1,2 학년 때의 학 점은 학점이랄 거소ㄷ 없을 정도로 평점이 낮아 3,4 학때 복구하지 않으면 졸업 후의 장래가 불투명하리라는 판단이 들어 열심히 공부에 매달렸다. 그 당시에는 여자 친구가 한 명 정도 있어야 공부도 잘 된다고 하던 구시대였다. 그래서 친 구 동생한테 소개를 받아 D 대학 가정확과 1 학년인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 는 나의 모든 생활에 윤활유가 되어준 첫번째 여자였다. 음치인 나는 그녀 덕분 에 자신감을 얻어 유행가도 꽤 여러 곡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 탓인 지 요즘도 그 당시의 노래를 자주 부른다. 그녀와는 그 해 가을에 헤어졌다. 서 클 룸에는 가끔 얼굴만 비추어 선후배의 격만 차릴 정도였다. 대학원과 유학을 가려던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는 듯했지만 3 학년 겨울 방할 때 또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내 자신도 확실히 모르고서 미래의 직업을 미리 정해 놓은 것이 잘못이라고 생가가하게 되었다. 그것은 두 번째의 좌절이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하여 프로듀서가 되려던 첫번째의 꿈이 일문학과 입학으로 무 너지고, 마음을 추스려 일어학을 제대로 연구하는 일어학 교수가 되겠다는 꿈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나의 적성이 아니라고 결정한 것이다. 그럼 무엇을 할 것 인가? 대학원에 진학하여 6 개월 석사 장교로 군복무를 마칠 계획이었지만 포기 한 셈이다. 재수, 삼수로 나이가 들어 일반병으로 가기도 어려운 탓에 학사 장교 준비를 학기로 작정했다. 4 학년이 되어서는 취업 겸 병역 의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해군 교육장교(일본어 교관 장교)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동기 중 서너 명이 함께 응시했는데 합격한 사람은 나 혼자였다. 졸업식 때 참석하신 부모님께 당 신 아들의 대학 시절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드릴 수 있어 더욱 기뻤다. 4 월 입대 예정이고, 10 년의 객지 생활로 부모님을 도와 드리지 못한 것이 아 쉬워 입대 전까지는 시골에 묵으며 두 분을 도와 드릴 작정으로 고향으로 올라 왔다. 마지막 남은 것은 신원 조회뿐이었다. 1,2 학년 때 데모 선봉장이었던 전통 예술연구회의 회원 전원이 학교 앞 파출소에 소위 블랙리스트로 기재되어 있긴 했지만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큰형은 공군 본부에, 작은형은 ROTC 장교로 전방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었으므로 신원 조회는 문ㅈ 없으리라 생각했다. 최종 합격자 발표를 며칠 앞두ㅗ고 동네 친인척들께 큰절을 올리고 나룻배를 건너 부 산으로 향했다. 시골 친지들이 주신 돈 몇 만원(1,000, 5,000 원권)과 어머님이 눈 물을 흘리며 주신 몇 만원을 지참하고 중앙선 하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아무리 찾아봐도 내 이름이 없었다. 대학 낙방 세 번을 했어도 이렇게 눈앞이 캄캄한 적은 없었다 친구들은 자기 갈 곳으로 다 가 버렸고, 시골에는 군대 다녀오겠다고 큰절까지 하고 온 상황이어서 너무나 원통 하고 비참했다. 처음으로 자살하고 싶다는 ㅜㅇ동도 느껴 보았다. 파출소 블랙리 스트 탓일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믿어지지가 않 았다. 군대 뽁으로는 친지도 아는 사람도 전혀 없어서 왜 낙방했는지 알아볼 수 도 없이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갈 곳 없는 사람이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는 것을 1 학년 당시 소외론에 심취해 있을 때 충분히 배워 두었으므로 나는 침착하게 내 갈 곳을 찾았다. 주머니에 몇 만 원이 있던 터여서 당장 며칠간은 생활할 수가 있었다. 합천 해인사. 그곳 의 여관에 들어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햇 다. 아무리 고심해도 좋은 묘안이 떠오리지 않았다. 부산 형님 댁과 시골 부모님 한테 연락도 못한 채, 해인사 겨내를 돌며 몇 년 전 읽은 법정 스님의 ‘서 있 는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읽었다.


4 일째 되던 날, 우연히 밤 9 시 뉴스를 보았다. D 대 건축공학과 4 학년 14 명이 졸업여행 길에 배가 난파되어 전원 실종되었다는 큰사건 뉴스였다. 그것은 나의 시골행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뉴스인터뷰에 나온 실종된 학생의 어머니가 ‚자 식이 어디서 살아만 있으면 효자지, 죽으면 불효다.‛라는 말이 나의 부모님 말 씀 같았고, 며칠째 연락을 취하지 못한 나 자신이 바로 불효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시골행이지 강을 꼭 건너야 했으므로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조 면 장 셋째아들이 장교가 되었다고 부모님이 동네 사람들의 인사를 받던 때가 바로 엊그젠데 무슨 낯으로 귀향한단 말인가! 밤에 도착하기 위해 시간을 맞춰 해인 사를 뒤로 하고 대구로 가는 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대구에서 안동 단양 영 춘행! 버스를 네 번이나 갈아타고 8 시가 조금 넘어 배터에 다다랐다. 9 시가 넘으 면 배를 띄우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다. ‚해군 장교는 3 년이나 해야 되는데 너무 길어서 일반병으로 가려고 그냥 왔 어요.‛ 거짓말이었지만 태연학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간이 길어도 장교가 좋을 텐데....‛ 형님 뻘 되는 뱃사공이 설득조로 얘기했다. 어두워서 얼굴빛이 바뀌어도 안 보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배에서 내려 20 분 정도 걷는 동안 부모님께 뭘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앞이 캄캄해 왔다. 대문을 들어서는데 마침 어제 그 뉴스가 막 나오고 있었다. 부모님은 연락이 없어 꽤 걱정하시 ㄴ모양이었다. 어머님은 ‚사내 대장부가 시험 떨어졌다고 기죽을 게 뭐 있어. 저렇게 다 키워 놓은 애들이 실종되기도 하는데....‚ 하시며 나의 손을 잡고 위 로해 주셨다. 눈물이 핑 돌며 ‛아버님, 어머님 죄송합니다.‚하고 울어 버렸다. 육군 소집 명령이 나올때까지 시골에서 부모님을 도와 드리기로 하고 농사일 을 시작했다. 그 해 농사를 거의 다 해놓고 추수를 못 본 채 육군 이등병으로 입대했다. 훈련을 마치고 부대 배치를 받은 곳이 수도방위사령부 30 경비단이었 다. 출판계에 첫발을 내딛다. 세상이 온통 시끄러웠던 1980 년. 그 시골에도 폭력 군사 정권은 어김없이 쳐 들어왔다. 대학 1 학년이던 그 때 아버님은 정년을 5 년이나 남기고 갑자기 면장 직을 그만두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해고였다. 공무원법이 무시된 채 그 당시 무 더기로 올라간 해직 공무원 명단에 끼인 것이다. 40 면 가까이 생활한 명사무소 를 떠나야 하는 그 마음을 내가 어떻게 다 알까. 아버님은 한숨만 쉬셨다. 내가 아직 대학 1 학년이고 두 동생이 앞으로 대학을 다녀야 하는데 농사만 지어서는 가르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몇년 전에 보상금을 받으셨다는 말씀을 들었지 만... 부득불 나는 하숙집에서 큰형님 댁으로 짐을 롬겼고, 여동생도 재수하다가 취 직을 하였다. 그 때부터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림 세일즈, 보리차 장사, 연말 카드 장사, 새마을 공사장 막노동 등 학생 신분으로서선 좀 힘든 것들이었다. 아무튼 그 시절의 땀과 경험이 지금의 밑거름이 된 셈이다. 행정병인 서무계를 끝으로 군대를 제대했다. 대졸 사원 공채가 다 끝난 11 월 말에 사회에 나와 보니 막연했다. 두어 달 정도는 꽤나 자세히 구인 광고 면을 정독하곤 했다. 형님들은 모두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훗날 독립할 꿈을 꾸고 있는 내게 중소기업을 택하라고 권했다. 이미 대기업 공채가 끝난 상 황이라 그 조언이 최상의 방안이었던 셈이다. 고심 끝에 무역과 출판 분야로 좁 혀졌다. ‘조선일보’의 1 단 3 센티미터 구인 광고(일본어 전공, 남, 키 170 센티미 터 이상)가 나의 인생 진로를 결정해 주었다. 지명출판사였다. 오라는 시간에 맞


춰 면접을 보러 갔다. 그 날 안광용 사장님은 나를 택했고, 나도 마음의 결정을 내려 다음 날부터 출근을 했다. 본고사 시절 ‘해법 수학’을 출판했다가 본고사가 없어진 80 년대 초에 부도가 난 뒤 일본어 출판으로 재기를 시작하여 불과, 4,5 년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사장과 직원 세명이 전부였다. 내가 입사함으로써 직원은 모두 네 명이 되었다. 말이 출판사지 평소 생각했던 출판사와 너무 창이가 있어 처음에는 실 망이 컸다. 사무실과 창고를 합쳐 고작 20 여 평에 지나니 않았다. 편집자도 없고 경리 한 명, 창고장 한 명, 영업 담당 두 명이 었다. 일본어를 전공한 나는 편집 과 영업을 동시에 배워 나갔다. 그 당시 1 년 정도는 거래처 외에는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아버님도 대학 졸 업해서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출판사에서 책 장사를 한다며 대기업에 취업하라 고 종용했다. 대학 동기들은 거의 유명한 언론사, 대기업, 증권 회사 등의 명함 을 소지하고 있어아예 만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출판사에서 일할 때는 몰랐지만 학원이나 서점으로 책 배댜ㅏㄹ을 하다가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조마조마했던 마음은 1 년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그야말로 큰 짐을 벗어 버린 것이다. 사실 편 집만 하려고도 생각했고 대기업으로 옮겨 볼까도 고려해 보았었다. 그런 고민이 증폭되었을 때 대기업인 S 그룹에서 일본어 전광자가 필요하다고 특채 권유가 들어와 응시를 하여 합격했다. 그것도 인연이 안되어 근무하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현재의 아내를 만나는 기회가 되었다. 최종 면접 때 S 그룹 버 스에 동승, 면접을 마치고 올 때도 같은 버스를 타 그때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S 대 일어 일문학과를 졸업한 그녀(김정은)도 중소기업에 근무하고 있으면서 추천 을 받아 이력서를 제출한 케이스였다. 어쩌면 옆자리에서 같이 근무할 수도 있 었는데ㅡ, 지금은 같은 집에서 여섯 살 난 남자 아이와 네 살 난 여자 아이를 키우며 나와 함께 살고 잇다. 3 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아내는 주부이면서 일본어뱅크의 교재 비평 가이다. 주위 사람들은 나 듣기 좋으라고 책 잘 만들었다는 얘기를 자주 하지만 아내는 절대 칭찬만 하지 않는다. 일본어를 전공한 탓에 표지부터 제목, 내용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앞으로도 계속 교재 비평뿐 아니라 출판사 운영에도 내조를 잘 해주리라 믿고 있다. 사업가의 장녀로 태어나서인지 사업 감각을 타고난 점도 자주 발견된다. 1987 년 9 월에 드디어 일본을 방문할 기회가 왔다. 그것도 대한 출판문화협회 의 대표 자격으로 일행 열한 명 중 최연소자로 참석했다. UCC(국제저작권협회) 가입 문제를 일본출판문화협회와 논의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 해 10 월 1 일ㅂ 2 ㅜ 터 국내에도 국제저작권법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처음 가 본 일본은 지금의‘일 본은 있다, 없다’는 논쟁과 달리 볼 것도 많았고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모티 브를 얻었다. 나는 그 때 일본이 한국보다 20 년 이상 앞서 간다는 것을 감지했다. 타분야보 다는 일본을 가장 먼저 아는 입문 수단인 언어의 역할을 심도 있게 재조명할 필 요성을 느낀 것이다. 기존의 일본어 학습서로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진명출판사의 사장님한테 건의를 하여 몇 가지 기획안을 내놓았다. 결국 그 기 획안들이 잘 실행되어 계획했던 만큼 판매도 햇고, 3 년 만에 일본어 전문 출판 사로서의 자리매김도 했다. 3 년 동안 저녁은 거의 회사에서 먹었고 집(부천 큰형 님댁)은 잠만 자는 곳이었다. 4 년째 되던 해 몇 가지의 기획안이 결재가 나지 않아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직접 출판하면 할 수 있겠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자본금도 없이 기획안만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결정을 내려야만 햇다. 사직서를 제 출하고 창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마케팅 과장이었던 나는 그 동안 맡고 있던 업무도 민ㅎ았고 제대로 인계해 줄 목적으로 사직서를 내고 3 개월을 더 근 무했다. 첫 직장이었고, 5 년간 젊음을 쏟아부었던 진명출판사를 떠나 홀로서기에


이르렀다. 패기 하나로 세운 일본어뱅크 한국인을 위한 일본어 교육이 뭔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압박이 계 속되었다. 집을 장만하려고 아내와 맞벌이를 해서 모은 2,000 만 원이 전부였고 전셋집은 단독 주택 2 층 10 평짜리 다락방이었다. 동산이라고는할부로 구입한 엑 셀 승용차 한 대가 전부였다. 아내한테는 몇 년 뒤 큰 집을 사 주기로 하고 함 께 모은 돈을 모두 출판사 창업에 사용했다. 20 평짜리 사무실을 임대하고 1991 년 10 월 1 일 일본어뱅크는 문을 열었다. 이 전에 근무하던 출판사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와 두 명의 직원은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다. 창업 자금ㅇ로 사무실 임대 보증금, 사무기기, 책 한 권을 만들고 나니 직원들 월급이 없었다. 부득이 아버님한테 500 만 원을 빌려 급여를 주고, 두 달 정도 운영비로 사용했다. 그 이후에는 아버님에게 신세를 지 지 않았다. 나의 홀로서기에 큰 용기를 주신 김영진 선생님이 인세(원고료)를 판 매 후 지불 방식으로 네 종의 원고를 계약해 주었다. 책 다섯 권과카세트 테이 프 여덟 종의 ‘재미있는 독학 일본어 시리즈’를 1 년 만에 완간했다. 거의 모 두가 히트했고 지금도 꾸준히 판매되는 스테디셀러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려웠다. 광고비도 부족했고, 교재도 독학용이다 보니 일 본어 학습자가 많은 기업체와 학원용의 교재 개발이 급선무라는 생각에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아직도 완간 되지 않은 ‘일본어뱅크 일본어 시리즈’와 ‘현장 일본어 시리즈’를 한종 한종 만들어 나갔다. 5 년간의 출판 경험을 최대한 살려 열심히 하다보니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어서 희망과 꿈을 더욱 굳게 다지고 계획대로 토털 마케팅 전략을 실행해 나갔다. 직원을 보강하고 책종류도 점차적 으로 늘려 3 년째 되던 해에는 연 매출 10 억 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모 신문사 에서 인터뷰도 하고 업계에서도 잘 된 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대학 다닐 때 한 번도 못 가 본 일본을 연 3,4 회 다니며 일본어와 일본 연구를 한층 더 깊 게 해야겠다는 다짐과 후배 대학생들한테 무료 탐방의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겠 다는 의지가 함께 작용하여 94 년에 세 명, 95 년에 마흔아홉 명, 96 년에 여덟 명 의 대학생들에게 4 일간의 일본 탐방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앞으로도 무료 탐방 은 정기적으로 계속하여 인원을 늘려 갈 계획이다. 일본어 학습자는 대학 시절 에 일본을 꼭 한 번 가 봐야 한다는 나의 지론에다 돈이 없어 기회를 못 갖는 후배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어학의 기본이 그 나라의 문화이고 그 문화를 알려면 언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언어학의 기본이다. ‘일본어뱅크 일본어 교재’가 짧은 기간에 히트(일본어뱅크 일본어:'95 스포 츠조선 고객만족도 1 위, 현장 일본어 회화:'95 일간 스포츠 빅히트 상품선정)한 동기도 일본어 교재에 일본 문화 사정에 대한 해당 면을 배정하는 등 철저한 기 획 출판의 덕이라 생각한다. 출판을 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문제점이 많이 발견 되었지만 옛날부터 내려오는 관행을 깨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 많은 문제점 중 몇 가지라도 조금씩 개선할 계획으로 출판 실명제를 선얹 한 적이 잇었다. 그 하나는, 거의 다단계 하청에 의해 제작되므로 상시 관리가 되지 않아 좋은 책을 만들 수가 없다. 또 하느는 종사자들의 이직률이 높다는 점이다. 또 저자와의 부수 문제로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점 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던 중 금융 실명제에서 힌트를 얻어 출판 실 명제를 국내 최초로 시도하게 되었다. 이름 그대로 제작 부수 공개, 하청업체 공 개, 사원 이력을 포함한 업무 공개를 통해 저자와의 신뢰도 구축, 책의 품질 격 상, 사원들의 책임감 부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타 출판사 에도 이 제도가 빨라 도입되어 출판계의 관행으로 자리잡혔으면 하는 마음이다. 95 년에는 어학 교재 사상 처음으로 일본으로 역수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한 국 유학생과 재일 교포가 많은 일본이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믿고


노력한 결과여싸. 역수출 기념으로 출판 기념회를 출판사 입장에서는 꽤 성대하 게 치렀다. 현재 영어 관련 출판사에서는 수입된 원서에 밀려 회화 교재는 원서라야만 된 다는 인식이 뿌리 내려 있다. 하루 빨리 한국인 전용 영어 교재를 개발해 주기 를 기대한 ㄴ바이다. 일본어 교재에도 일본판 라이센스가 몇 종 있기는 하지만 한국인에게는 접합하지 안항(일본에서 출간하는 일본어 교재는 영어권 학습자를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한국인의 학습 능률을 높여 주는 교재 개발에 박차를 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올해의 첫 작품인 일본어뱅크 일본어 회화(입문), (박순애 교수저)에 거는 기 대는 상당히 크다. 출판사를 창업한 지도 4 년이 지났고 사원도 열일곱 명이나 되는 상황이니 매출도 올려야 한다. 이교재에 거는 기대는 허황된 것이 아니라 고 믿는다. 국내 최초로 전면 컬러 편집에다 책 전체와 과정에 시간 개념을 도 입한 과학적인 교재이기 때문이다.또한 정보 통신 시대인 만큼 전화 사서함 교 육도 개설되어 있고, 앞으로 비디오나 CD 롬 타이틀 제작 계획도 세워 놓았기 때 문이다. 일본에 가서 출판인을 만나 보면 거의 고학력이며 명문대 출신이다. 한국의 출판계도 90 년대에 들어와 고학력 명문대 출신들이 대거 영입되고 있다. 인간은 책을 통해 성장하고 인생 설계를 한다고 해도 관언이 아닌 만큼 출판인들의 책 임은 너무나 크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소재 선정, 좋은 저자 섭외, 좋은 책을 폭 넓게 보급해야 하는 의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어설픈 책을 풀판했을 때에는 사 회적 책음을 져야 마땅하다. 국미느이 의식 개혁, 개인적인 개성 만들기의 기본 요소가 책이기 때문이다. 알맹이 없는 책은 국가에 막대한 손실을 안겨주는 악 재이다. 출판인은 머리를 움직이는 정신적인 총감독인 셈이다. 정부나 언론사에서는 구민들이 양서와 실용서를 애독하도록 계몽해야 한다. 요즘 TV,신문, 잡지 등을 보면 코믹한 이야기, 몇몇 탤런트들의 빈번한 출연으 로 시간과 면을 메워 나간다. TV 에도 책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많이 배정하고, 신문에도 책에 관련된 칼럼을 늘려 주어야 한다. 만화나 비디오에 시간을 허비 하는 어린이들의 창조적인 능력은 어디에서 나올 수 있을까? 가까운 일본을 보 면, 현재 일본 젊은이들의 가벼운 사고 방식은 10~20 년 전의 과거 문화(만화, 비 디오 등) 가 만들어 놓은 산물이다. 그래서 일본의 기성 세대는 앞날을 걱정하는 것이다. 변화의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90 년대에 들어와 한국도 소비 사회에 접어들었다. 80 년대까지만 해도 야근 수 당, 일요 특근 수당이 그런대로 돈을 번기 위한 수단으로 괜찮았다. 일도 하지만 부수입을 올릴 수 있는 기회였던 탓이다. 그러나 요즘 젊은 직장인들은 주 5 일 이니 주 40 시간 근무를 운운한다. 수당보다는 일직 끝내고 자기 시간을 갖는 것 이 좋다는 뜻이다. 나는 한국 사회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남자 한명이 벌어 서너 식구가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맞벌이를 하면 생활도 윤택해지고 여유 자금이 생기게 마련이다. 맞벌이 부부가 늘어남에 따라 소비도 함께 증가하는 것이다. 아직 미개척 분야인 전통을 이용 한 한국현 놀이 문화의 개발, 맞벌이 부부의 증가에 따른 자녀 교육 대책, 컴퓨 터 보급에 따른 이기주의 팽배에 대한 보완 방안 마련, 형제자매가 적어 우애라 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독불장군형 방지 등 우리 세대가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지 금부터 기틀을 닦지 않으면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국제화,세계화 추세에 따라 한 발 앞서지 않으면 경제형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참하고 불투명한 미래가 예견되낟. 특히 외국어 전문가 양성이 시급하다. 전문 가 자격은 능통한 외국어 구사가 가능한 자, 그러기 위해선 절대 불명의 기초


학습니 뒤따라야 한다. 기초 학습을 터득하지도 않고 선진국을 비방이나 하고 자기 우월주의에 빠진다면 경제형 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문법, 독해 중 심의 외국어 학습이 지금까지의 별폐로 지적되었듯이 어학 교육도 말 중심, 화 법 중심으로 전면 개편되어야 한다. 일본어 전문 출판-일본을 알아야 성공한다. 출판 분야 중 어학, 그 중에서도 근래 독도 문제로 반일 감정이 점점 악화되 고 있는데 일본어 출판, 일본어 교육을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도 간혹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감정적으로 해서는 이길 수가 없다. 우리는 현재 일본에 대한 연구가 너무나 미약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ㅈ백전백승이라 했 다. 적도 모르고 이기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목표 달성을 위한 ‘STEP BY STEP’의 중간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처음에는 일본어 전문 출판으로 시작했 지만 요즈음은 일본어 교육으로 범위를 넓혀 가고 있다(일본어 교재 개발, 일본 문화 연구, 일본어 교육 방법 연구, 일본 어학, 기술 연수 연구 등). 정보 통신의 발달로 인한 물질적,정신적 공유 시대에 대비한 교육의 전문 지 식을 계속 익히고 쌓지 않으면 안 된다. 내 고교 시절의 꿈인 프로듀서는 언젠 가 여건이 되면 언론사나 방송국을 설립할 꿈으로 변화되었고, 대학 시절의 꿈 인 대학 교수는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꿈으로 변화되어 나 자신을 계속 채찍질하 며 30 대를 메우고 있다. 그 꿈을 실현하려면 지금까지의 노력보다 몇 배나 더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쉬어 갈 시간이 없다. 이제 출판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약 10 년이 되었다. 내게 천직으로 되어 버 린 출판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앞으로 10 년, 20 년 뒤에는 뭔가 확연해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청년들이여, 원대한 꿈을 가져라 첫째,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에 빠를수록 좋은 것이 자기 알기이다. 자신의 능력 과 성격에 맞는 직업을 택해야 사는 보람을 최대로 만끽하기 때문이다. 인생관, 가치관, 직업관, 결혼관의 정립은 독서가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연습을 많이 하려 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하고 나면 이미 세월이 흘러 돌이킬 수가 없다. 인생은 연습이 아닌 본무대인 것이다. 독서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독서만 하고 실행하 지 않으면 이론가이지 현실적일 수가 없다. 해보고 싶은 일이 있으면 즉시 체험 해 보아야 한다. 두세 번 연습하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주변 경험자들의 조언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님, 선생님, 형님, 선배님들이 하는 이야기는 전부 잘 되라는 말씀이지 잘 되지 않길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둘째, 사랑을 하라. 남녀간의 사랑만큼 고귀한 것은 없다. 사랑은 인생의 윤활유요 삶을 즐겁게 해준다. 사랑하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는 뜻이며, 사랑의 힘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도 없다. 사랑하다 헤어져 본 사람이 자기 자신을 빨리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셋째, 정보화, 세계화 시대에 대비하라. 정보화, 세계화의 무기라 할 수 있는 컴류터와 외국어 학습을 장기적이고 꾸 준한 계획을 세워 실행하는 것이 21 세기 대비책이다. 조금 해보고 다했다고 자 만하지 말라. 외국어는 습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에 비례하며, 컴퓨터는 변화 하기 때문에 계속 배워야 하는 것이다. 넷째, 시간을 장악하라. 매일 바쁘게 시간에 쫓기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시간 관리 요령을 배워 야지 마음에 그리기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서는 안된다. 반드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 보는 과정에서 시간 관리 요령이 터득되는 것이다. 시간에 관계


된 책이 많이 나와 있다 책을 보며 시간이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한 뒤 자기에게 맞는 시간표를 짜 보라. 내 시간을 내가 만들어야지 시계에 끌려다니는 사람은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와 다를 바 없다. 일생, 10 년, 1 년, 1 개월, 1 주, 1 일, 1 시간 ,1 분의 철저한 계획 수립과 실행만큼 좋은 시간 관리는 없다. 삼대가 즐기는 인터넷 사회를 위하여 허진호 1961 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에서 계산통계학을 전공하고 한국과학기술 원에서 분산시스템에서 오브젝트의 프로그래밍과 배치를 위한 언어의 설계 논문 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휴먼컴류터, 삼보컴퓨터에서 네트워크 중심 기획, 개발 및 마케팅을 하고 지금은 아니네트기술 대표이사로 있다. 늦깎이 Enterpreneur 영어에 Enterpreneur 라는 표현이 있다. 사업가라는 의미인데 우리말로 정확히 표현하기 힘든 단어이다. Enterpreneur 라는 표현에는 나름대로의 꿈을 가지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매진하 는 사업가라는 도전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포장 하여 표현한다면, 늦깎이 Enterpreneur 라는 말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이제까지의 나의 인생은 여러 면에서 늦깎이였다. 학교 시절의 여러 역할이나 사회성도 동년배보다는 늦은 편이었고, 컴류터도 대학에 들어가서야 처음 시작 했는데 지금의 젊은이들에 비하면 아주 늦은 셈이다. 어쩌면 지금 경영하고 있 는 회사도 박사 학위를 받고 5 년이나 지난 서른다섯에 이르러서야 처음 시작하 였으니 다른 젊은 경영인에 비하면 꽤 늦었다고 볼 수 있다. 10 년짜리 프로젝트 나는 지금 나름대로 잡은 10 년짜리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과학원에서 전문 분야에 관한 훈련을 받으며 이‘인생은 10 년짜리 프로젝트 세 내지 넷’을 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기준을 갖게 되었다. 20 대는 전문인으로서 일을 하기 위한 준비 관정으로 앞으로 해 나갈 많은 일에 대하여 여러 준비를 해야 하고 그 과 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도 괜찮은 특권을 가진 세대라면, 30 대는 자신의 분야를 만들어 가는 첫번째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시기이다. 나는 이 프로젝트로 하이테크 모험 기업의 성공 사례를 만들겠다고 생가가하였다. 이러한 결정을 하는 데에는 10 년 넘게 오랜 친구인 정철 박사가 계기를 주었 다. 1989 년 12 월 박사 논문을 마치고 나는 다음해 4 월 Post Doc 과정을 위해 2 년 간 영국을 갈 계획이었다. 이를 위하여 그쪽 학교와 교섭도 끝내 놓았고 과학재 단의 연구비도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1 년 먼저 졸업하여 휴먼컴류터라는 회사를 창업하여 운영하고 있던 정철 박사가 회사의 경영에 참여해 달라고 제안 하였다. 당시만 해도 앞으로 할 일은 교육과 연구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는 아주 엉뚱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약 1 주일을 고민한 끝에 나름대로는 쉽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배경에는 ‘휴먼컴류터와 같은 첨단 모험 기업을 대표적 인 성공 사례로 만들어 후배들이 비슷한 기업을 여럿 만들어 컴류터 산업을 발 전시킬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만드는 것도 10 년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안 실리콘 밸리의 많은 기업 의 사례를 들으며, 또 학교에서 이론으로 배운것을 막상 실제에 적용하려다가 부딪힌 경험과, 이러한 첨단 기업이 우리의 정보산업을 발전시킬 기반이 될 것 이라는 확신을 자기면서 교육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학교 시절부터 같이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의 영향 또한 크다. 내가 대학교 다니던 70 년대 말에서 80 넌대 초는, 막 PC 가 등장하며 컴류터를 한다는 사람은


모두 애플의 신화를 동경하던 시절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글을 쓰는 지금 옆에는 애플의 몰락과 대표이사의 교체등에 관한 기사들이 있지만, 당시의 애플 과 스티브 잡지의 이야기는 컴퓨터를 갓 접한 젊은이들의 굼이 되기에 충분하였 다. 당시 대학교 전산 센터에서 사용한 컴류터는 각각 128Kbyte 와 512Kbyte 의 메모리를 가진 IBM S/360 과 S/370 으로 지금의 280 PC 의 약 3 분의 1 의 성능을 가진 기계였다. 수십 명의 학생이 그컴퓨터 두 대를 공유하며 공부하던 우리에 게 여섯 가지 원색의 애플로고, 실리콘 밸리의 신화적인 기업의 이야기들은 우 리 인생의 목표가 되ㄱ에 충분하였다. 같이 어울려 다닌 다섯 명의 친구는 학교 를 마치고 사회에서 경험을 쌓아 전문가가 된 후 다시 모여 애플과 같은 성공 적인 회사를 만들자고 다짐하기도 하였다. 그 중 두 명은 대학원에 진학하여 지 금은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고, 정철 박사와 나를 포함하여 과학원에 진 학한 세 명은 모두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물론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늦게 시 작한 늦깎이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과학원에서 훈련을 받으며 첨단 모험 기업의 필요성을 절 감했고 이러한 기업이 기술개발을 이끌어 온 미국에서의 사례, 첨단 모험 기업 이 자리잡지 못하는 척박한 국내 환경등을 보아 오며 국내 토양에서 성공 사례 를 하나 만들어야 겠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 가장 직접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러한 행동이 과연 내가 할 일인지를 잘 모르고 있을 때 쩡철 박사의 제안이 이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준 것이다. 그 후 휴먼컴류터에서의 경험,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갖장 성공적인 모험 기 업의 하나인 삼보컴류터에 근무하면서, 처음에 가졌던 ‘10 년 프로젝트’에 관 한 목표를 계속 키웠다. 아이네트 기술을 설립한 것도 그 목표의 연장선상이다. 물론 한때 이상적인 기업관이 현실과 부딪히며 좌절도 하고, 처음의 목푤르 포 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조금은 운이 좋기도 하고 조금은 밀어붙여서 지금 의 모습까지 온 것 같다. 30 대가 지난 후 40 대와 50 대의 프로젝트가 무엇인지를 지금 밝히기는 어렵다. 아직은 30 대의 프로젝트가 끝나지 않았고, 이 프로젝트가 30 대에 끝날지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야 내가 과학원에서 받는 훈련은 (교육이라기보다는 훈련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 할 것이다)나의 전문가로서의 성장에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과학 원 과정은 단순히 대학원 과정에서의 연구라기보다는 전문가로서의 가치관, 전 문 분야에 대한 개안 그리고 전문가로서 일하는 방식에 대해 훈련받는 기간이었 다. 과학원 기간 동안 지도 교수였던 전길남 박사께서 나를 포함한 또래들에게 일 관해 요구한 것은 ‘최고’와 ‘자존심’이다. 이는 특혜를 받으며 교육을 받는 과학원 학생들에게는 반드시 요구되는 기중이다. 상대적으로 보면 과학원에 진 학한 사람들은 일정 기준을 만족한 사람들이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비 교하는 기준은 국내 최고가 아니라 항상 세계 최고여야 했다. 연구 내용이나 수 준, 일하는 수준, 앞으로 해야 할 역할의 비교 기준, 이 모든 것이 세계 최고를 기준으로 비교해야 하였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특혜에 상응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당위론 때문이었고, 항상 큰 압박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반면에이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최ㄱ고가 되어야 한다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고, 나 잔 신을 계속 독려하는 기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판단 기준은 자존심이었고, 스스로에게 물어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면 프 로로서 일을 했다고 믿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방식을 지금 회사의 모든 사람에 게도 적용하여 ‘프로로서의 자존심’을 스스로의 기준으로 판단할 것을 기대하 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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