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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좋은 아버지가 되는 15 가지 방법 출판사:명진출판 지은이:좋은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신세대 아버지의 새 자리와 역할 김광웅(숙명여자대학교 유아교육과) 아버지 자리는 얻기보다 지키기가 어렵고 잘 지키기는 더 어렵다. 전통사회에 서 아버지의 자리는 어머니가 지켜 주었고, 유교적 문화의 틀이 아버지의 권위 를 보존시켜 주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들은 어느정도 멋도 부리면서 아버지의 역할을 잘해 낼 수 있었다. 반면 우리 어머니들은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서 정말로 훌륭한 중재자 노릇을 해왔다. 그 역할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곧 부덕으로 칭송되었고, 가 부장 중심의 가족문화를 더 굳건하게 만드는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했다. 어머 니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기를 실현하면서 우리의 삶을 통제하였다. 이제 이러한 어머니들의 모습은 옛 이야기가 되었고, 결국 아버지의 자리도 흔들리고 혼란을 겪게 되었다. 아버지의 자리만 얻으면 저절로 아버지의 권위와 힘이 호의적으로 작용했던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 오늘날의 아버지는 어느 길을 택하든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다. 사회가 고도 로 분업화되고 가족이라는 개념이 달라진 상황에서 육아와 가사를 아내에게만 맡기고 모른 척 뒷짐을 지려고 해도 이제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뭘 좀 해 보려고 덤벼들어 보아도 어색하고 잘 되지 않기 일쑤다. 어색하게 느껴지는 그런 일들을 전에는 아버지가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일을 거드 는 것이 문화적 금기 사항이기도 해 '팔불출' 이라는 말도 들어야 했다.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나 우리의 사고 속에는 아직도 과거의 생활양식이 잔존해 있어서 아버지들의 양육 행동을 어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본래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적응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변했는데도 쉽게 변화하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남자들의 생리다. 그래 서 아버지들은 요즘 말 그대로 문화적 과도기, 부적응 상태에 놓인 것이다. 그렇 다고 변화된 상황을 멀거니 바라만 보고 아버지 자신은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 다. 신세대 아버지는 이제 새롭게 자리 메김을 해야 한다. <<좋은 아버지가 되 려는 사람들의 모임>>은 바로 이러한 적응 과정에 나타나는 뜻 있는 아버지들 의 새로운 문화 구축 현상이다. [좋은 아버지가 되는 15 가지 방법]이라는 책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해 보기 도 전에 겁부터 먹고 있거나 어색한 시도를 몇 번 해 보다가 '내 할 짓 따로 있 다'고 치부해 버린 아버지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육아 는 아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아내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 이고 용기를 내어 멋있는 아버지 노릇을 한번 시도해봄직 하지 않을까. 자식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젖을 먹이는 양육의 1 차적 책임은 어머니에게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자녀 양육에 대한 면죄부를 갖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잉태하고 출산하고 젖을 먹이는 일 이외에 어느것도 아버지 몫으로 어울리지 않 는 것은 없다. 오히려 그 역할을 더 잘해 낼 수 있는 저력이 모든 아버지에게 잠재되어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아버지의 저력을 모아 놓은 책이다. 그것도 아버지의 얘기만


을 엮어 놓은 것이 아니라 자녀들의 진솔한 얘기도 같이 담았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해 핵가족 사회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올바르게 자리 매김하길 바라고, 나와 우리 가족밖에 모르는 '가족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우리가 어디서나 함께 어 울릴 수 있는 차세대 모습을 만들어가는 데 아버지들이 앞장서 주기를 기대한 다. 가정이라는 프로그램의 프로듀서 범효춘(KBS1 라디오 자녀교육상담실) 나는 <<자녀교육상담실>>에서 아버지들의 직장을 찾아가는 <자녀교육 순회 강좌>를 통해 우리나라 대기업의 간부로 계시는 꽤 많은 아버지들을 만나게 되 었다. 그 분들은 흔히 남성들이 이루고자 하는 사회적 성취를 이룬 분들로 남부 럽지 않은 위치에서 안정을 누리고 계셨는데 한결같이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ㅈ은 날 정신 없이 회사 일에 몰두하다 보니 애들 얼굴 볼 시간이 없었어요. 이제 안정된 자리에 올라와 여유가 생겨 아이들을 좀 보려고 해도 이제는 걔들 이 나보다 더 바빠 볼 시간이 없네요. 그런데 어쩌다 마주쳐도 할 말이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젊은 날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의 인생을 테이 프 레코더처럼 거꾸로 돌릴 수는 없겠지요." 열 중 아홉 분의 아버지는 대개 이런 얘기를 하시는데 얼마나 슬프게 들렸는 지 모른다. 지난 10 여 년간 <<자녀교육상담실>>을 방송해 오면서 수없이 만난 아버지들 을 통해 내린 결론이 '사랑으로 태어나서 좋은 아버지를 갖는 것 만한 행운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많은 아버지들을 직접 대면하기도 했지만 숱한 자녀 문제들 속에 개입된 보이 지 않은 아버지들을 만나면서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는 아버지의 큰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실제로 <<자녀교육상담실>>이 상담해 온 자녀 문제 가운데 심각하고 해결이 어려운 문제의 대부분은 아버지의 부정적인 힘이 작용하는 경우였다. 아버지의 공부 질책으로 온몸의 털이 다 빠져 버린 여고생, 늘 무섭게 다그치는 아버지 때문에 가출한 청소년, 아버지가 보기 싫어 눈길을 피하는 아이, 증오가 쌓여 복 수를 꿈꾸는 청소년 등등. 어디 이뿐이겠는가. 어느 청소년 상담가는 자신이 정신과 병동에서 상담한 청소년 문제의 99 퍼센 트가 문제 아버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또 오랫동안 법죄 청소년들을 당담한 한검사도 "청소년 범죄자 가운데 대부분이 아버지와 나쁜 관계 속에서 성장했다"고 말한다. 종종 언론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부친 살해사건도 그 원인 이 아버지에 대한 오랜 증오와 분노에 있었음을 볼 때 아버지의 부정적인 힘이 얼마나 강하게 악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다. 반면 아버지의 긍정적인 면은 자녀들에게 놀라운 힘으로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송을 하면서 만난 훌룡한 사회 명사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분들에게 어떤 때는 넓은 대지처럼 너그럽게 품어 주는 아버지의 격려가 지금의 자기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고백을 들었다. 그런데 자녀 인생의 모양새에 이토록 강력하게 작용하는 아버지의 힘을 정작 아버지 자신들은 잘 모르는 듯하다. 늘 '시간이 없어서'라는 핑계를 대지만 어쩌 다 시간이 생겨도 취미생활을 즐길지언정 아이들에게 시간을 내주지 않는 것은 아버지 노릇의 무지 탓인지 이기적인 마음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아버지들이 3, 400 명씩 모여 있는 직장순회 강좌에서 자녀 교육에 관한 독서 나 방송청취 경험을 물어 보면 어디서나 겨우 한두 분이 손을 들 뿐이다. 많은 아버지들이 자녀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할 중요한 시기를 놓치고 훗날 자신도 소외될 길로 들어서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의 등장은 한줄기 빛과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버지의 자리와 역할을 잘 지켜내기만 한다면 가정의 행복은 물론이고 이 나라의 미래도 밝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아버지가 바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길이 어렵다고 자꾸 나중으로 미루거나 지레 포기하는 아버지들을 위하여 [좋은 아버 지가 되는 15 가지 방법]을 권한다. 이 책은 좋은 아버지가 되는 실례들을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소개하고 있 다. 이를 통해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엿보길 바란다. 좋 은 아버지의 모습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신도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작은 실천부터 시작해 보는 것이다. 세대간의 고리 역할, 젊은 아버지가 해야 합니다 나원형('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운영위원장)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세대 차이'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쓰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런 단어가 있었지만 요즘처럼 그 말이 실감나는 때는 없었던 듯합니 다. 학창시절 젊음을 얘기하면서 우리 부모님, 그리고 선생님이나 교수님들을 세 대 차이 난다고 성토했던 사람들도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벌써 후배들 그리고 자녀들에게 세대 차이가 난다는 말을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불혹의 나이 전후임에도 불구하고 간혹 아직 신세대임을 자칭하시는 분들을 보 기도 합니다만, 글쎄요, 신세대라는 자평보다는 신세대를 이해하고 그들의 문화 를 소화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우리는 인생의 중간 지점에 와 있고 가정과 사회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심적인 '젊은 리더'의 위치에 있습니다. 분명 신세대, 신인류는 아니지만 우리 세대는 우 리 위 아래 세대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이 시대의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합니다. 저를 포함한 3,40 대의 아버지들은 비교적 신교육을 받았 고, 풍요롭지는 않았으나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하였으며, 현재 사회에 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서 활약하는 허리 세대입니다. 경제 성장기에 젊음을 보낸 부모 세대들 덕분에 지금 우리는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꾸리고 있으며, 우 리 2 세들은 보다 나은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나 경제적 풍요로움과 편리함의 이면에는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최근에 언론 매체들을 통해 보도된 패륜적인 범죄 들, 그리고 인간의 양심을 저버린 비도덕적, 반윤리적 사건들을 대책없이 무감각 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더러 혹자는 고도의 경제 사회로 가기 위해 필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만 그 대가가 너무나 엄청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 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 모든 문제를 제 탓이 아닌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잘못되었으며,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 지 철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만든 문제라면 당연히 우리 스스로가 풀어야 하는 숙제는 아닐는지요. 그런 흉악한 사회 문제 들은 하나같이 가정 안의 갈등이 잠재된 동기가 가정에서 싹텃다면 우리 가정 안에서 막아야 합니다. 부부간의 갈등, 자녀와의 갈등, 형제간의 갈등. 이런 갈등 들이 가정 내에서 원만하게 걸러지지 못한 채 사회에 노출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방치한다면 우리자신이, 우리 자녀들이 또 다른 사회 문제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회 현상은 지금까지 우리 아버지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는 비난을 몰고 왔고 우리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변명 같습니다만, 아마 '지구상에서 가장 짐을 많이진 아버지' 하면 한국의 아버지들일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역할은 과거 우리 아버지 때와는 또 많이 틀립니다. 해야 할 일은 더 많 아졌고 힘들어졌습니다만 결국에는 우리의 일입니다. 이제 우리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대가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을 흔쾌히 인정해야 합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부족했던 아버지의 역할을 좀더 적극 적으로 찾아 실천하여 우리 세대와 윗세대 사이에 생기는 갈 등의 폭을 좁히고, 아래세대와 윗세대 간의 단절도 이어 줄 수 있는 고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처한 위치를 탓하기보다는 자신의 자리에서 재미있고 신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행동으로 옮기면 되는겁니다. 어느 가정이나 사회, 더 나아가 한 국가에도 전통이 있습니다. 앞에서 세대 차 이라는 말을 했는데 효의, 예의 전통이 단절되었다는 말 또한 세대 차이만큼이 나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 세대가 제자리에서 맡은 역할과 책임을 성실히 해낸다면 좋은 전통과 문화는 계속 될 것이고 우리의 2 세들도 그런 고리 의 역할을 자랑스럽게 물려받을 것입니다. 이 책은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의 아버지들과 그 가족의 글을 모아 엮은 것입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생활하고 느끼고 배운바를 세련되고 체계적이지는 못하지만 진솔하게 쓴 실천적 인 이야기들입니다. 좋은 아버지 역할에 정답이 있겠습니까만 노력하는 모습으 로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끝으로 이 책의 출간에 많은 협조와 도움을 주 신 명진출판 스태프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며 아울러 회원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 드립니다. 추억을 만드는 마이다스가 되어라 이종린(소아과 의사) 우리집에는 아이들이 셋 있다. 위로 딸아이가 있고 연년생 쌍둥이 아들이 둘 있다. 딸은 소위 허니문 베이비로 지금도 병원에서 처음 들은 우리 아가의 심음 을 잊을 수 없다. 의사로서 그 동안 다른 아가들의 심음을 많이 들어 그냥 그렇 겠지 했건만, 처음 들은 우리 아가의 심장 뛰는 소리는 경이 바로 그 자체였다. 그럭저럭 큰아이는 별일없이 낳았다. 본래 쌍생아는 여러 가지 핸디캡이 많아 잘못 되는 수가 흔히 있다. 그래도 잘못 되는 아가보다는 정상으로 태어나는 아가들이 더 많은데도 어찌 그리 머리 속엔 온통 잘못 된 아가들 경우만 생각이 나는지 열 달 내내 기도 속에 지냈다. 더구나 아내가 조산을 하게 되어 분마실로 들어갈 때는 응급사태에 대비해 인 공호흡할 준비까지 했다. 그때의 비장함이란``````.이때까지 남의 아가들을 인공 호흡해 왔는데 내 아이들을 내가 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 다. 어쨌든 그런 우려를 뒤로 하고 녀석들은 건강하게 태어나 우리집은 다섯 식 구가 되었다. 딸 하나 키우기도 벅찬데 갑자기 연년생으로 두 녀석이나 더 생기니 힘든 일 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딸아이로서는 이제 막 엄마 아빠와 재미있으려 할 때 동생 둘이 생긴 격이니 우리부부는 큰아이가 섭섭해 하지 않게 신경을 써야 했


다. 또 쌍둥이 둘을 도저히 함께 키울 수 없어 외갓집에서 번갈아 가며 한 녀석 씩 맡아 주었다. 쌍둥이란 정말 묘한 것이 한 녀석은 외갓집에서, 한 녀석은 우 리집에서 키우는데도 처음엔 어찌 그리 우유 먹는 시간, 똥오줌 싸는 시간까지 같은지, 우리집 녀석이 기저귀 갈 때면 외갓집 녀석도 우유 먹고, 우리집 녀석이 기저귀 갈 때면 외갓집 녀석도 기저귀를 갈았다. 쌍둥이를 같이 키우기로 한 것은 돌잔치가 끝나고 나서부터였다.아이들은 나 란히 누인 그날 밤은 정말 가관 이었다. 그날 밤 우리 부부는 한숨도 못 잤다. 세 녀석이 돌아가며 자는 걸 서로 견제(?)하는데, 한 녀석이 자면 다른 녀석이 방해하고, 간신히 두 녀석을 재워 놓으면 남은 한 녀석이 고함을 질러 또 깨우 고``````. 쌍둥이를 키울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세운 원칙은 쌍둥이들에게 뚜렷한 자아 관을 갖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옷도 가급적 다른 색으로 입히고, 장난감도 다 른 것을 사주었는데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이들 에게 사줄 장난감을 고를 때는 무의식적으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게 마 련이데, 제일 좋은 것이 동시에 두 개 있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변신 방법이 몇가지인지, 모습은 그럴 듯한지를 늘 비교해서 사야 했다. 이렇게 해도 녀석들 은 한수 위라, 장난감을 사주면 우르르 와서 두 개를 비교해 보곤, 조금이라도 더 낫다 싶은 것을 서로 차지하려고 번번이 싸움을 벌였다. 그래서 장난감 하나 를 사면서도 또 서로의 것이 낫다고 싸우지는 않을까 고민하곤 했다. 세월이 흘 러 초등학생이 된 지금도 이런 고민은 여전한데, 고민의 대상이 이제는 장난감 이 아니라 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쌍둥이를 키우면서 겪는 힘든 일 가운데 제일 마음 쓰이는 것이 똑같이 잘하 게 하는 것이다.애들이 초등학교 추첨할 때도 그랬다. 한 놈만 좋은(?) 학교에 가면 어떻게 하나 하고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아내에게 두 녀석 다 떨어졌다 는 얘기를 들었을땐 오히려 만세를 불렀다. 공부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찌 나 상호 견제(?)가 심한지 숙제를 할 때도 자기보다 진도가 빠르면 상대방이 숙 제한 것을 찢거나 지우개로 지워 버려 한바탕 싸움이 붙는다. 하나가 산수를 잘 하면 다른 녀석은 산수에 취미를 잃어버린다. 우리가 보기엔 못 하는 편이 아닌 데도 그렇다. 그래서 한 놈이 공부를 잘해도 걱정이다. 다른 부모들은 아이가 상을 받아 오 면 마냥 기쁘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기쁘다가도 다른 녀석에게 생각이 미 치면 '아이구, 이 놈도 상을 타야 할 텐데```````' 하고 걱정이 앞선다.아빠하고 바 둑을 둘 때고 아빠가 이기면 진 녀석은 졌다고 서러워하고 다른 녀석은 아빠가 이겼다고 즐거워 한다. 만약 내가 지면 이긴 녀석은 즐거워하고 다른 녀석은 나 에게 이기지 왜 졌냐고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한다. 이런 일들은 철이 들어가는 지 학년이 올라가면서 빈도가 많이 줄었으나 아직도 상호 경쟁심은 대단하다. 딸이 태어났을 때도 그랬지만, 나는 참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생각해 보 라!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면, 자식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자라며, 또어른이 되어서도 어릴 때 추억이 아름답게 자리잡아 이들 역시 좋은 아빠, 좋은 엄마가 되어 줄것이 아닌가! 그래서 자녀들이 결혼할 때 그 동안 찍은 사진을 책으로 펴내 결혼 선물로 준 아버지 얘기라든가, 그림을 잘 그려 육아 일기를 만화로 펴낸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참 부러웠다. 나는 사진도 잘 못 찍고 그림 도 잘 못 그리는데```````. 하지만 나도 아이들을 위해 나름대로 하고 있는 일이 있다.아이들 일기를 쓰


는 일인데, 딸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쓰고 있다. 아이들이 자라 결 혼할 때쯤이면 며느리와 사위에게 선물할 생각이다.(이 사실은 아이들에겐 비밀 임). 나에겐 한 가지 소원이 있다. 아이들이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자라서,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이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직업이 뭐래도 좋 고, 어디서 살아도 좋다. 다만 주위 사람들에게 꿈과 빛을 줄 수 있다면 부모로 서 그보다 더 바랄 일은 없을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격이 거의 형성되는 시기를 보람되고 알차게 보내도록 해 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 한다. 나는 수시로 아이들에게 격언이나 속담을 들려 주고 따라하게 한다. 지금 당장 깊은 뜻을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말들이 나중에 살아갈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자주 들려 주는 말은 "항상 마음은 넉넉하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쉬지 않으면 마침내 이루어지리라",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등이다. 아이들은 앵무새처럼 잘 따라하다가도 가끔 "항상 마음은 안 넉넉하게" 하고 반발을 하기도 하는데 그 자체가 그 말들 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한다. 밤에는 가급적 살아갈 때 도움이 될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려 한다. 그런데 레퍼토리가 풍부하지 못해 동화책을 사서 낮에 읽어 외웠다가 잘 때 들려 주곤 한다. 어릴 때와 달리 이런 이야기들은 흥미도 덜하고 잘 외워지지 않는 것을 보니, 나도 마음이 많이 늙기 는 늙은 모양이다. 그리고 뭐든지 열심히 하라고 늘상 이야기한다. "놀 때도 열심히 놀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했더니, "그럼 아빠, 야단도 열심히 맞고 매도 열심히 맞아요?" 하 는 바람에 까르르 웃은적도 있다. 또 아이들에게 특기 한 가지를 만들어 주려 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를 시키지 않고 일단 한 가지만 시키고 있다 (현재 딸은 피아노, 쌍둥이는 바둑을 시키고 있다). 그 외에도 농구, 축구, 배구, 등산처럼 함께할 수 있는 운동을 시키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생활하는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서다. 딸을 생각하면 어떤 때는 마음이 조금 아프다. 연년생 쌍둥이 동생이 생겨, 아 무래도 부모가 소홀히 하는 것 같아서이다. 나는 딸이라고 큰 차별은 두지 않으 려고 노력한다. 딸 역시 남자처럼 강인하고 당당하게 키우려고 나름대로 애쓰는 데, 과연 뜻대로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자식이 잘못하면 그것은 부모가 잘못하기 때문이요, 특히 아버지의 잘못 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더 없이 소중한 이 시간을 부모의 잘못으로 헛되이 보내게 해서는 안 되겠기에 늘 반성하고 깨어 있는 부모가 되려고 한다. 어떤 친구는 나를 보고 극성 아빠라며 꼬집기도 한다. 글세 내가 극성인지는 모 르겠으나 부모된 입장으로 자기 삶만 중요시 여길 수야 없지 않겠는가.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은 보물이 가득 찬 곳간과 같은 것이라 뒷날 고달프고 외로울 때 끄집어내고 또 끄집어내어도 줄지 않고 마르지 않는 시원한 샘물이 되어 그들을 넉넉하게 만들어 줄 것이니, 어찌 부모로서 하찮은 일이라도 소홀 히 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나름대로 도움을 주려고 고민하고 노력해 왔는데, 과연 정말로 제대로 도움을 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까지 열거한 여러 일들도 사 실은 다 지키지 못하고 있고 못해 줄 때가 많은 못난 아버지임을 고백한다. 그 렇지만 내가 아이들에게 들려 주는 말처럼 쉬지 않으면 마침내 이뤄질 것이니, 아이들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질책하기 앞서 언제나 깨어 있고 노력하여 좋 은 아버지 좋은 부모가 되기를 다짐해 본다.


이종린(1955 년 생) 씨네 가족 어려서부터 꿈꿨던 의사가 되어 소아과 의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늘 생각해 왔 던 의사상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겸손한 의사 선생님이자 이 세상 모든 꼬마 (!)들을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게 키우고 싶다는 우리 모두의 아빠다. 1995 년 4 월부터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에 함께하게 된 것도 건강한 사회는 건강한 꼬마들이 만드는 것이고 건강한 꼬마는 부모들의 책임이라는 이 유에서 부모 교육에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1 년 정도 모임 활동을 하고 있는 그 이가 바라는 것은 가입 방법이나 의무-혜택 등을 잘 홍보해 누구나 쉽게 가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새롭게 가입한 회원 관리에 좀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것이다. 특히 딸 지은이에게는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아빠가 길 러 줄 테니 열심히 일하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커리어 우먼이 되기를 바라는 깨 어 있는 남자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도 아름다울 수 있는 여성,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여성이라는 생 각에 결혼한 부인 송경원(1959 년 생) 씨는 소아치과를 전공한 전문인력이지만 지금은 그 기술을 썩히고(?) 세 아이의 교육에만 힘쓰고 이에 아주 만족해 한다. 첫째 지은(1985 년 생)이는 만화 그리기와 동화 쓰기를 즐겨, 만화가와 동화작 가가 되고 싶어하는 이야기꾼. 부모 도움 없이도 모든 일을 척척 잘하지만 그만 큼 고집도 세다. 대단한 상상력과 호기심의 소유자 호원(1987 년 생)이는 물건이 나 사실을 그냥 넘어가는 일 없이 분해해 보고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래서 하나 를 열 가지로 응용하는데 가끔 터무니 없는 상상의 비약으로 주위를 놀래키며 특히 레고를 잘 만든다. 주원(1987 년 생)이는 마음이 넓어 여유가 있고 속이 깊 다. 말은 많지 않지만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며, 무슨 일이나 잘 참는다. 운동과 친구 사귀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전쟁도 사랑하라 강건형(회사원) 단란하게 한 가정을 꾸리고 오순도순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지극히 행 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씩씩하고 건강하게, 그리고 해맑게 자라나는 아이들은 역시 부모의 기쁨이고 미래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가끔씩 아이들 때문에 힘이 들어서 행복하다는 사실을 잊고 살 때 가 있다. 신혼 때는 우리 부부 단 둘이서 우하하게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누리 기도 했지만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이 바쁘기 때문에 낭만적으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임신부 강좌에도 함께 참석하고, 클래식도 같이 들 으면서 태교를 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 가정에 태어날 사랑스러운 존재에 대해 얼마나 아름다운 상상을 했던지. 딸을 낳으면 단발머리 곱게 빗어 주고, 아들을 낳으면 손목을 꼭 잡고 산책도 하고, 바이얼린도 켜고, 같이 운동도 하리라. 이런 상상을 할 때면 슬며시 웃음 이 비집고 나오곤 했다. 하지만 막상 아이가 태어나자 내 행복한 상상은 여지없 이 무너졌다. 아이는 부모의 아름다운 상상에 비례해서 아름답게 자라주는 천사 가 아니라 무법자라는 사실을 그땐 왜 몰랐을까! 배고프다 울고, 기저귀 갈아달 라 울고, 잠 온다고 울고, 잠 안 온다 울고, 또 울고. 하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찮은 악동에게도 고마울 때가 있다. "성재야, 고 맙다. 네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서 네 엄마랑 같이 식사도 하고 그래서 네 엄마


가 외롭지 않겠구나"라고 말하면 두 눈을 깜박이며 내 분신은 웃어 준다. 그 아이가 세 살 되던 해 여름 동생이 태어났다. 마땅히 큰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 고민하다가 지방에 있는 처가에 맡기기로 했다. 부모 곁을 떠나 있던 큰아 이가 거의 일주일 만에 삼촌 손을 잡고 몸조리하느라 누워 있는 아내의 병실에 들어섰다. 검게 그을린 큰아이가 신나게 뛰어와 아내를 보고 반갑게 소리지르며 와락 안겼다. 그러나 이내 큰아이의 시선은 아내 옆에서 쌔근쌔근 잠자는 갓난 아이에게 고정되었다. 그러더니 뭔가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어안이 벙벙해 서 잠시 뒷걸음 치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놀란 얼굴이 생각날 때마다 그때 큰아이가 동생의 존재에 대한 놀 라움과 엄마에 대한 불신 같은 것을 직관적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미안해진다. 미리 동생에 대해 얘기를 해주었지만 아직 어려서 이해를 못 했던 것 같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보람 되면서도 무척 힘든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인가 보다. 두 아이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대체로 질투와 갈등, 산만함, 무질서, 전쟁(?) 이런 것들이다. 언젠가는 퇴근해서 들어가니 아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 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으니 아내는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당황해 하며 이야기해 주었다. 아내가 갓난아기를 담요 위에 뉘어 놓고 잠시 다른 일을 하다 가 와 보니, 갓난아이는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고 큰아이가 아기 담 요 위에서 큰 대자로 누워 있더라는 것이다. 그동안 독차지하던 사랑을 동생에 게 빼앗긴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식으로 큰아이는 나름대로 투쟁하고 관심끌기 작전을 폈는데 꼭 우리 부 부가 원하는 반대 행동으로 표현하곤 했다. 이런 때일수록 큰아이에게 더욱더 사랑을 듬뿍 쏟아 주고 동생보다는 큰아이에게 더 관심을 보여 주는 게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맨 처음에는 부모로서 교양 있는 언행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 해 무척 노력했다. "얘야, 그렇게 하면 안 돼! 왜냐하면", "얘야, 엄마 아빠는 늘 너를 사랑한단다. 하지만 이렇게 구는 것은 싫다", "참 영특하구나!" 등등. 하지만 두 사내 애들을 기르면서 그렇게 점잖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력을 필요로 한다. "너 한번 맞아 볼래?",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어?", "내 말 안 들 려?" 이렇게 변하기 십상이다. 무심코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말들이 튀어나온 다음에는 후회막급이지만 어찌 뱉어 낸 말을 쓸어담을 수 있겠는가. 부모의 일관성 있는 자세와 행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색종이 접기를 하고 놀 때다. 큰 아이가 가위가 필요하다길래 종이만 자르고 옷 같은 것은 자르면 안 된다고 주위를 주고 시선을 돌렸는데 잠시 후 구석구석에서 발 견되는 머리카락뭉치를 보고 무척이나 놀랐다. 가위를 들고 아이들은 서로서로 이발을 해 주고 있었다. 결국 영구의 모습으로 변한 동생은 삭발을 해야 했고, 귀까지 안 잘린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야했다. 그런데 야단치고 나서 불과 5 분도 안 되 서로 '어퍼 컷' 이라니. 어떤 면에서는 저렇게 싸우고 웃고 떠들어야 정상이란 생각도 든다. 서로 부 대끼며 '오기' 라는 것도 느껴 보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하기도 할 테니 크게 다치지만 않으면 주의를 주고, 화해를 시키는 것으로 족하고 있다. 그러나 쓸데없이 고집을 피운다든지 거짓말을 한다든지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선 매우 단호하고 엄격하게 다스리는 편이다. 아이들끼리 싸우고 울 때는 꼭 파일을 시킨다. 우선 "미안하다"고 말하기, 그


다음에 서로 볼을 비비고 나서 "사랑해" 하면서 뜨거운 포옹을 하게 한다. 분명 형제는 라이벌 관계이기도하지만 또 영원한 친구이기도 하다. 지금 큰아이는 방 송국 차를, 둘째는 포크레인을 가지고 꼭 붙어서 붕붕거리며 놀고 있다. 참 보기 좋은 풍경이다. 문제아 뒤에는 꼭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이 있다. 아이를 탓하기 이전에 먼저 부모 스스로가 잘못된 점이 없는가를 반성하고 일관성 있게 교육하는 것이 중요 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아이만큼은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더불어 풍부하 고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키우는 것이 최고일 것이다. 강건형(1962 년 생) 씨네 가족 LG 산전 서울영업실 영업팀 과장으로 다소 무뚝뚝해 보이지만 무척 자상하고 가정적이어서 바쁜 일과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위한 주말여행을 계획하고 기타까 지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 주고, 또 아이들은 그에맞춰 노래하고 춤을 추는 단란 한 가정의 가장.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의 회원은 아니지만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하는, 주변에서 인정하는 좋은 아버지다. 남 먼저 생 각하는 마음 때문에 '속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물 같은 성격으 로 누구와도 잘 어울리며 언젠가 본인 사업을 하겠다는 꿈도 있다. 오아시스와 같은 가정을 만드는 것이 기쁨인 부인 주명숙(1966 년 생) 씨는 전 기공학을 전공한 남편과는 대조적으로 불문학을 전공했고 그만큼 여러 면에서 서로 대조를 보이지만 또 그만큼 서로를 사랑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순수함과 예쁜 꿈을 지켜 주고 아이들이 자신의 가치를 펼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한다. 첫아이라 임신 초기부터 태교에 많은 신경을 써서 그런지 성재(남, 1991 년 생) 는 다정다감하고 감성적이며, 어휘력이 풍부하여 화려채를 써가며 얘기를 하는 반면 성민(남, 1993 년 생)이는 생김새부터 굵직굵직하고 행동도 과격하며 힘도 세고 남성적이라 서로 싸울 때는 무조건 대드는 성민이 때문에 성재가 먼저 울 기도 한다. 벌써 전화기를 내 개나 부순 장난꾸러기들이지만 산타할아버지의 존 재를 진실로 믿고, 또래 여자 친구와 결혼해서 예쁜 여자 아기를 낳겠다는 야무 진(?) 꿈도 갖고 있다. '싸가지' 를 실천하라 김갑재(청소년 활동 지도자) 꽃씨를 심고 정성을 다해 가꾸어야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듯이 아이도 바르게 정성으로 키워야 올바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 방긋 웃는 어린이들 의 환한 얼굴에서, 쌔근쌔근 잠자는 모습에서, 아장아장 걷는 모습에서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돌 때쯤이면 어린아이와 의사소통이 되는 시기이므로 이때부터 바른 언어 습 관을 길러 주어야 한다. 초기의 언어 습관은 아이가 어떤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 성장하느냐 하는 기본 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대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외 동이인 민철이가 어릴 때부터 존대어를 썼다. "민철이 이리 오세요." "밥 먹어요." 민철이가 말을 알아들을 7 개월무렵부터는 언제나 동네 어른들께 인사하고, 어디


를 가더라도 고마움을 표시하게 했다. 아이가 정서적으로 감성적으로 성장할 시 기에 우리 부부는 서로를 아끼며 다정한 대화로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노력했 다. 혹시 아내와 다툼이라도 생기면 아이가 잠자리에 든 후 밖으로 나가 다툼을 가라앉히곤 했다. 이러다 보니 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마음이 풀리는 경우도 많아 싸우는 일이 줄어들었다. 부모의 언어 습관이나 생활 모습은 자녀에게 그대로 보여지고 전달된다. 초등 학교 3 학년인 민철이가 "아버지", "어머니"라 호칭하면서, 어른을 공경할 줄 아 는 마음을 갖고 동네 어른들께 인사 잘하는 아이가 된 것은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힌 예절 때문일 것이다. 민철이도 가끔 자신의 의견이 관찰되지 않을 때면 성질을 부리기도 한다. 그 럴 때면 아이의 입장에 서서 옳고 그름을 알려주고 내 어릴 때의 이야기를 들려 주며 아이가 공감할 수 있도록 한다. 가르치는 것보다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하 여 많이 대화하고 주변의 어린이들과 문화유적지나 미술관, 전시장, 인형극제에 도 함께 다니며 즐기도록 한다. 민철이만 데리고 가지 않고 동네 아이들까지 데 리고 가는 것은 더불어 사는 삶을 일깨워주고 싶어서이다. 특히 방학 때가 되면 민철이와 시골 친척집도 방문하고 조상의 얼이 깃든 고향도 찾아 보면서 부자간 에 격의 없는 정을 나누기도 한다. 요즈음 부모들은 아이들을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에 짜 맞추려고 해 아이들이 마치 공산품이 되는 느낌이다. 또한 아이가 귀엽다고 요구하는 것을 "오냐, 오 냐" 하며 받아 주고 아이한테 쩔쩔(?)매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투정부린다고 모 든 것을 생각없이 받아 주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버릇 없는 아이로 키우는 결과 를 낳고 말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어려서 잘못 길들여진 버릇은 평 생을 간다. 잘못된 행동이나 습관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려서부터 좋은 습관을 갖는 것은 더 중요하다. 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좋은 습관을 길러 주고 싶은 마음에서 '일상의 다섯 가지 마음'-'고맙습니다'라는 감사(感 )의 마 음, '미안합니다'라는 반성(反省)의 마음, '덕분입니다'라는 겸허(謙虛)한 마음, '제 가 하겠습니다'라는 봉사(奉仕)의 마음, '네 그렇습니다'라는 유순(柔順)한 마음을 담은 붓글씨를 인쇄하여 만나는 소년소녀들에게 전해 주고 있다. 기쁜 마음으로 생활하며 밝은 미소로 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부모의 모습 속 에서 작은 사랑이 자녀의 마음으로 이어진다면 착한 마음을 갖는다거나 예의를 지키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공부하라고 백 번 말하기보다 성실하고 알차게 살아가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혼자만 잘사는 법이 아닌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 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부모 먼저 모범을 보여 자녀가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이웃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한다면 이 사회는 보다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다. 어릴 때 습관을 올바르게 만들어 줘야 한다는 내 생각은 사실 톨스토이의 말 에서 연유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랑의 말 한마디, 친절한 행동 하나하나가 세상을 아름답게 바꿔 준다. 사랑 과 친절은 어려운 일을 쉽게 해결하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변하게 하는 아주 좋은 것이다." 김갑재(1952 년 생) 씨네 가족


장애를 탓하지 않고 도리어 장애인들이 불편하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어 려서의 꿈이었고 지금은 자녀 교육상담과 언론출판에 관한 일들을 하고 있다. 특히 청소년 지도를 통해 청소년들을 밝고 건강하게 키우는 일에 가장 큰 중점 을 두고 있으며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무료 배포하는[사랑의 종이연]을 만들 계 획도 있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과는 1993 년 6 월 <외부인 토론>으로 만나게 되었지만 아버지라는 공통 주제가 잘 맞아 활동하기 시작하 여 1995 년에는 '좋은 아버지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모임의 모든 회원들이 서로 가 하는 일을 중시할 뿐 그 직급을 따지지 않는 따뜻한 시선을 특별히 자랑한 다. 1995 년부터 모임 회보의 편집 책임을 맡고 있다. 통장인 남편의 직무대행 활동을 성실히 수행하는 부인 이순이(1952 년 생) 씨 는 걸어 다니는 119 구급대라고 불릴 정도로 동네의 해결사이자 적극적인 조력 자이다. 특히 아들 민철(1986 년 생)이의 친구들을 모두 인솔해 문화행사 등의 참 석해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있다. 서로가 바쁜 활동가들이라 서로의 건강을 가장 염려하여 일도 좋지만 스스로를 챙겼으면 하는 바람을 늘 가지고 있다. 민철이는 인사성이나 기본 예절이 매우 바르고 아버지의 불편한 다리가 낫기 를 기도하는 활발한 '날다람쥐'. 그러나 부모님의 일찍 들어오고 주의의 다른 사 람들보다 자기를 더 아껴 주기를 바라는 외동이기도 하다. 편식을 하고 글씨는 날아가지만 틈만 나면 책을 읽고 벌써 태권도의 '품띠'를 섭렵한 미래의 유능한 '형사님'이다. 안 아픈 손가락을 만들지 마라 김연옥(회사원) 큰딸, 승주가 태어나고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집안 어른들 과 주변 사람들은 둘째 아이를 바랬고, 이왕이면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재촉했 습니다. 더욱이 나는 장남이고 결혼한 남동생도 첫딸을 낳아 더 그랬는지도 모 릅니다. 하지만 당사자인 우리 부부는 주변 사람들만큼 조급하거나 염려하지 않 았습니다. 그것은 아이를 낳는 것이 우리의 계획에 따르기도 하겠지만 하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린 맞벌이 부부로 첫아이를 낳은 지 두 달 만에 여수에 있는 누님댁에 아이 를 맡겨야만 했습니다. 그곳에는 조카인 승주의 오빠와 언니가 있어서 아이들끼 리 노는 즐거움을 배울 수 있었고, 누님 가족이 승주를 매우 예뻐해 주어서 안 심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전화를 해 딸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또 수시로 찾아가 서 달아이를 어루만지는 그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 에서 우리 부부는 딸아이의 외로움을 알 수 없었고, 동생이 필요하다고 느낄 수 도 없었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살고 싶은 열망 때문에 시골에 사시는 부모님을 서울로 모셔 한 살림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승주도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 때서야 우리 부부는 둘째에 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되었고, 아내의 특수한 생리적 조건 때문에 의사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신 후반기에 나타난 천지 태반으로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겼음에도 결국 둘째 아 이를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우린 아이를 진정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도 하 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딸 승주를 꼭 껴안고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 하나만이라도 괜찮다. 꼭 훌룡한 아이로 키우겠다."


나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하며 딸을 꼭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 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가운데 시간은 흘러갔고 우린 행복한 삶으로 다시 돌 아갔습니다. 회사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딸 승주에게 예전에 갖지 못했던 관심과 사랑스러움이 새록새록 솟아났습니다. 피곤하고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 고 늦은 시간에 귀가해도 아이와 함께 한글 공부도 하고 색칠놀이와 인형놀이를 했습니다. 승주는 졸린 눈을 붙잡고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 동안 부모와 떨어져 지내느라 사랑을 받지 못했는데도 건강하고 착하게 자 라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보상이라도 할 것처럼 많은 시간을 승주와 같이 보냈 습니다. 승주에게 맞는 영화, 연극, 무용, 뮤지컬을 골라 보여 주고, 큰 서점을 찾 아가서 보고 싶은 책을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읽게 하기도 하고, 같이 여행도 가고. 그러던 중 하늘은 아내에게 다시 건강한 아이를 갖게 해주었습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승주가 다섯 살이 되던 해 가을에 힘찬 울음소리를 내며 태어났 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들 민우는 우리 가족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습 니다. 민우가 웃으면 모두가 따라 웃고, 울면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프면 모두가 가슴을 졸입니다. 그 아이는 어느새 우리 가족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승주가 자기 방에서 아무 말 없이 인형놀이에 열중하는 모습 을 보았습니다. 무언가 불만에 가득 차 있는 듯한 모습이었죠. 난 살며시 그 옆 에 앉아 "승주야,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나 보구나! 뭔지 말해 볼래? 아빠 가 도와 줄게" 하고 물었습니다. 한참 후 승주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습 니다. "난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엄마, 아빠 모두가 민우만 예뻐하는 게 싫 어! 나도 할머니 할아버지 손자고, 엄마 아빠 딸이에요!" 나는 이 말을 듣고 무 척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 그랬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화가 나 있었구나, 미안하다 승주야!' 그리고 한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과 아내 에게도 승주의 소외감을 전했습니다. 민우를 돌봐야 하는 부모님과 아내에는 어 렵더라도 나 혼자만이라도 이전에 승주에게 대했던 모습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다 짐하였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항상 작은아이 위주로 생활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작 은아이의 투정은 받아 주어도 큰아이의 투정은 허용하지 않고, 항상 큰아이에게 양보와 이해를 요구합니다. "동생은 어린아이잖니!", "누나니까 참아야지!", "형이 양보해야지!" 하지만 두 아이 모두 아직은 어린아이입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편파적인 관심과 사랑은 비뚤어진 성격의 아이로 키우기 쉽습니다. 요즘 퇴근을 하면 민우보다도 승주를 먼저 찾습니다. 그리고 하루의 안부를 묻습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예전처럼 색칠공부와 학습지를 같이 하기도 하고, 내 가 지도하고 승주가 따라하던 모습에서 때로는 역할을 바꾸어 승주가 지도하고 내가 따라하는 재미있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풍부한 상상력을 기르고 경 험을 쌓을 수 있도록 예전처럼 한 달에 한 번 이상 어린이 뮤지컬이나 연극, 만 화, 영화를 같이 보러 가기도 합니다. 그곳에 가면 모두 엄마와 손잡고 오는 아 이들 뿐이고 아빠와 같이 오는 아이는 승주 혼자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승 주는 아빠와 같이 있는 것을 매우 좋아하고 나 역시 즐겁습니다. 저녁이면 승주 방에 들어가 옆에 누워 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아버지라는 의무감에 책을 읽어 주고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의 마음이 되어 같이 놀고, 웃는 것입니다. 민우 때문에 속상해 하던 승주도 이제는 많이 자라서 여덟 살이 되었고 동생


을 매우 예뻐하고 귀여워해 줍니다. 두 아이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더욱더 잘 키워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김연옥(1962 년 생) 씨네 가족 대학 시절 유스 호스텔러로 원없이 떠돌았었고 지금도 수도권 정도는 고양이 가 다니는 길까지 아는 수준으로, 멋진 카폐나 음식점을 찾아 다니는 '돈 드는' 일을 골라 하고 있다. lg 전자 연구소에서 재직하다가 지금은 근무 여건이 좋다는 대우전자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부모님과 함께 꿈꾸던 이상적인 가정을 이 루고 있는 지금, 가족 모두가 예측 불허의 사고를 당하지 않고 건강하게 생활하 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다. 신문과 사보를 통해 알게 된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과 1993 년 부터 함께했으며, 다른 모임과 달리 아이들이 아버지들의 목적에 휘둘 리지 않고 아이 중심인 점이 특징이고 자랑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각계 각층의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현실의 실경험들을 공유할 수 있는 점도 자랑으로 꼽을 만하다고 규모가 커진 모임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만들고 있는 5 개 분과 가운데 <아동분과>의 위원장으로 활동할 계획이다. 아직 구체적인 사항까 지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가족신문 만들기 / 그 나이의 아동에게 맞는 어린이 추 전도서 선정하기 / 어머니와 동화 읽기와 같이 가족 구성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러 행사를 구상하고 있다. 아마도 오래 전에 따놓은 레크레이션자격증과 분위 기를 주도하는 그의 끼가 큰 몫을 할 것이다. 대학 때 선후배 사이로 만난 아내 조순덕(1966 년 생) 씨는 88 년 올림픽을 대 비한 특수 여경에 과식(!)과 치마에 돌을 넣는 트릭으로 합격, 지금은 어느 직업 과도 바꿀 수 없다는 자부심으로 최고의 여경이 되고자 노력하여 지난 승진시험 에도 우수한 성적으로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 시험 공부 그늘에서 아내 와 엄마의 관심에 목말라하는 남편과 아이들이 늘상 마음에 걸렸단다. 짱구라고 수시로 이마를 때리는 승주(여, 1989 년 생)는 의사가 되어 가족이 아 플 때 치료해 주는 것이 꿈이다. 엄마 일을 돕겠다고 나서기도 하고, 20 개월이 되도록 귀한 세간살이를 장난감인 양 두들겨 망가뜨리는 민우(남, 1994 년 생)를 낑낑대며 업고 다닌다. 비밀노트가 되어라 오두환(회사원) 내나이 사십, 남들이 쉽게 얘기하는 불혹의 나이, 중학교 1 학년인 큰딸, 초등 학교 4 학년인 둘째 딸, 유치원에서 2 년째 재수를 하고 있는 사내 녀석을 두고 있으니 자녀 교육에 대한 무슨 얘기가 있을 법한데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 습니다. 우리 세대야 거의 비슷비슷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 만 나는 엄격한 부모님의 방임(?)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 로 놓아 두는 듯하면서도 강력한 힘을 가진 아버지의 엄격한 관리하에서 어린시 절을 보냈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나는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일들을 참 많이도 하였습니다. 형과 동생들의 돼지저금통, 아버지의 양복 주머니는 그 시절 나의 중요한 자 금 출처였습니다. 그렇게 마련된 동전은 주로 만화책을 사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교과서 볼 시간도 없는데 만화 볼 시간이 어디 있느냐며 나무라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뒤로하고 나는 만화가게와 책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부 모님 속을 썩였는데도 아버지는 매를 드신 적이 없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크 게 화가 나셨을 때 벌로 내 살을 꼬집으시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언젠가 아버지 생전에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 저 어릴 적에 잘못한 일이 무척 많았던 기억이 나는데 아버지는 늘 칭찬만 하셨어요. 왜 그때 한번도 매를 드시지 않으셨는지요." 아버지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두환아, 이 아버지가 힘이 장사라서 너에게 매를 대면 상처가 심해질 것이고 그것이 마음에 상처로 남으면 매를 대지 못하지 않니. 그래서 매를 댈 수가 없 었단다." 아버지와 나는 너무 일찍 해어져야 했습니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분이 갑자기 닥쳐온 간암이라는 무서운 질병을 이기지 못하신 거죠. 그러나 아버지께 전에 받은 가르침은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사람을 사랑하거라' 라는 우리집 가훈 사람은 모두가 좋은 사람이라는 가르침과 가정의 화목은 집안식구 들의 상호 이해가 중요하니 항상 양보하며 이해하고 살라는것, 그리고 항상 웃 어른을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깊이 있 게 다가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우리 형제들을 교육하셨던 방식과 내용을 기억해 그대로 실 천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아이들에게 들려 주는 말들은 우리 아버지가 하신 말씀입니다. 어쩌면 아이들을 대하는 내 눈빛이나 몸가짐마저 아버지를 닮았는 지도 모릅니다. 물론 세상이 달라지다보니 아이들의 정서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요즘아이들은 잘못을 지적해도 반성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또 아이들의 세계에도 이기주 의가 팽배해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학교 친구들이나 동네 아이들과 함께 생 활하는 습관을 길러 주어 학교나 동네에서 함께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중 요하다는 생각을 심어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자주 만나기는 어렵지만 동네 어른들에게 예절을 지키는 교육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그래도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 지만 고학년이 되면 아버지라는 권위만으로 아이들을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요 즈음 어린이들은 정보도 빠르고 습득하는 자세가 훨씬 뛰어나 우리때는 비교도 하기 힘든것 같습니다. 그러니 항상 4-5 년은 앞서서 생각해야 하고 아이들의 생 각을 유심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안의 중요한 문제는 어른들끼리 협의하여 아이들에게 통보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비디오 카메 라처럼 중요한 물건을 아이들에게 맡기면 고장나기 쉽다는 선입관이 있어서 만 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믿고 맡기니 어른들보다 훨씬 잘 보관 하고 사용하더군요. 또 자녀들의 생일 파티는 돈도 많이 들고 번거롭다고 생각 할지 모르지만 어른들은 그저 계기만 만들어 주면 아이들이 다 알아서 합니다. 우리 부부는 생일을 맞은 아이의 친구 부모들에게 편지를 써서 언제 무슨 행사 를 하고자 하는데 시간을 허락해 주시면 시간 안에 귀가시키겠다는 약속만 합니 다. 그러고 나면 나머지 행사는 아이들끼리 더 재미있게 알아서 잘 하더군요. 다 만 방향만 잡아 주고 너희들도 잘할 수 있다는 확신과 그렇게 믿고 있다는 믿음 을 아이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첫째가 딸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아들보다는 딸아이 지도가 몇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찌 그리 토라지는 이유도 많은지, 장단 맞추기가 매우 어렵지만 아 이들을 친구로 만들면 그 다음부터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게다 가 첫째는 사춘기라 자신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무엇보다도 필요로 할 때입니 다. 첫째가 5 학년 때 여자 아이들이 갖추고 있어야 할 필수품을 한 세트 사서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머리빗, 손수건, 핀, 바늘, 실, 거울 해서 선물을 했더니 어찌나 좋아하던지 지금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늘 퇴근 때는 전화를 걸어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 줄 수 있는가를 묻곤 하지요. 아이들의 친구들 이름을 다는 알지 못하지만 가까이 지내는 10 여 명의 친구들 을 기억해 주는 아빠는 분명 자랑거리일 겁니다. 더구나 남자친구를 자랑할 때 아빠가 만나 보고 싶어하고, 한 친구 하고만 친하기보다는 어릴 때는 많은 친구 와 사귀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 주는 아빠는 아이들의 친구가 될 자 격이 있지 않을까요? 또 어떤 때는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지만 친구처럼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아빠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큰아이는 중학생이 되자마자 성년식을 해야 했습니다. 오래전에 처음 어른이 되는 날 아빠가 그럴싸한 파티를 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너무 일찍 찾아왔 지요 그날 동생들은 무슨 날인지도 모르면서 다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냈지요. 장미 13 송이와케이크 그리고 작은 손수건. 선물은 작지만 온 가족이 아이의성 장을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가정의 행복이 아니겠습니 까. 어떤 때는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친구를 다른 아이가 좋아해서 고민하는 큰 아 이 때문에 문을잠가 놓고 진지하게 대하를 나누기도 하지요. 엄마가 들으면 안된다나요. 하루종일 귀에 이어폰을 끼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공부가 될까 하는 불안감도 없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믿고 맡겨도 잘해 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제 할 도리는 스스로 한다는 학실한 믿음을 계속 심어 주기로 했습니다. 학교 성적이라는 것이 상대적이어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가 더 노력하면 내 성 적은 떨어지는 것이니 항상 할수 있는 만큼만 하라는 것이 제 교육방침이지요. 가장 어려웠던 것은 핵가족제도에서 사는 아이들을 어떻게 할머니와 묶어 주 느냐는 겄이었습니다. 자주 빕는 분이 아니다보니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 할머 니임을 아이들에게 인식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요. 그래서 생각한 것 이 막내의 장난감 등은 가능 한 할머니가 사주시도록 어머니께 장난감을 구입할 돈을 드리는 방법과 세 차례의 '가정 시험' 을 치르는 것입니다. 그 시험에는 우 리집의 가훈과 우리 집안의 어른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를 내 아이들 이 재미있게 쓸 수 있도록하였습니다. 학교 시험도 지겨운데 집에서까지 무슨 시험이냐고하시겠지만 시험도 시험 나름이지요. 세 번쯤 시험을 치르고 나니 할 머니가 가장 어른이라는 대답이 나오더라구요. 오두환(1957 년 생) 씨네 가족 1991 년 7 월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모임>>의 첫 소식지를 보고취지가 좋아 시작하여 지금은 운영위원으로 활동중이다. 소규모로시작된 모임이 지금은 거의 준사회단체가 될 정도로 인원이 늘어 말도 많아지고 있지만 이해관계나 정치적 인 면에서 순수한 이 모임이 계속 깨끗하게 유지되기를 무엇보다 희망하고 있 다. 인원이많아져 자주 만나지 못하고 회비가 완납되지 않아 운영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다양한 의견과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곳이라며 자랑이 대단하다. 개 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큰 모임 하나보다 여러개의 작은 모임이 자생적으로 활성 화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신세계백화점 기획실을 거처 지금은 (주)카인드웨어서울 상무이사로 재직중이 다. 하는 일이 힘들다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주변에는 늘 즐거 운 일, 좋은 사람들만 있다는 행복한 사람. 어린이나 청소년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과 누구나 살고싶은 성남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아빠의 생각을 담은 작은 책 을 아이들에게 남겨 주는 것이 소망이다. '잘 사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 이라 는 전제하에 학교공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적은 자신의 노력만 큼만 되면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과 함께 사는 지혜를 아는 사람 다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멋진 아빠. 그리고 부인이 더 나이 들기 전에 자신 의 생활을 즐길 여건을 마련해 주겠다고 생각하고, 아직도 부인을 '나의연인' 이 라 부르며 시와 편지를 낭만적인 남편이다. 고등학교 2 학년 때 참한 걸음걸이에 반해 손수건에 시를 적어준 것이 인연이 된 부인 이애영(1957 년 생) 씨는 좋은 이웃, 좋은엄마, 괜찮은 며느리로 통하고 있다. 첫째 보람(여, 1982 년생)이는 고집이 세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일에는 감상적이 라서 다소 걱정스럽지만 리더십을 발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못 말리는 개구장 이 둘째 보아(여, 1985 년 생)는 이해력이 빠르고 즉흥적인 상황 판단이 뛰어나 다. 철저한 준비와 사전 연습을 거쳐 떠난 두 번째 신혼여행에서 만든 걸작 셋 째 세빈(남, 1989 년 생)이는 성격이 다소 여성적이어서 태권도 도장에 보낼 예정 이다. 내것이 아닌 신의 선물로 여겨라 서재균(여행사 대표) 나는 한나와 나나 두 딸을 두고 있다. 아들이 없다고 서운하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은 한번도 없다. 주위 사람들이 이따금 섭섭하냐고 묻곤 하지만 '천만에-' 라고 일축해 버린다. 아내와 나는 이미 결혼 전부터 딸 아들 구별 없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으로 키 워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나 친지들이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새 생명 탄생을 진심으 로 축하하고 산모와 아기의 건강에 대해서만 안부를 묻는다. 남자 아이인지 여 자 아이인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묻지도 않는다. 그런데 아들을 낳은 이들 은 그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한다. 이쁜 공주를 둘 기르다 보니 주위에서 아들을 낳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걱정어 린 말씀을 많이 하신다. 그러나 딸이라는 이유로 섭섭해 하거나 더 낳아야 한다 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내생각을 그런 분들게 그대로 말씀드리면 좀의아해하 신다. 우리도 아들이니 딸이니 하는 전근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왔 다고 생각한다. 자녀 교육에 '바로 이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 다만 자녀 를 소유의 개념에서 벗어나 자연인으로, 한 인격체로 여겨야 한다는 것만은 분 명히 해야 할 것 같다. 자식을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할 때 잠시 우리에게 맡겨진 자식은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니 그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 보고 도 와 주는 것을 재일 큰 기쁨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결국 부모의 역할은 격의 없 는 대화를 통해 아이가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데 있지 않을까. 아이들은 권위적이고 위엄있는 아버지보다는 친구나 오빠 같은 아버지를 더 원하고 있다.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가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더 돈


독히 하고 가깝게 만든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뒹굴고 게임하고 노래부르고 춤 을 춘다. 이때 아이들을 가르친다거나 교육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건강 한 몸과 건전한 생각을 갖도록 도와 주고 지켜 봐 줄 뿐이다. 인생을 먼저 살고 있는 인생 선배로서 이웃을 사랑하고 세계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내 자신 의 경험을 이야기해 준다. 비록 우리의 교육 환경이 입시 중심이지만 아내에게 항상 지나친 학습이나 점 수 위주의 공부를 시키지 말라고 권유하고 있다. 공부나 그 외의 과외활동도 아 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면 되는 것이다. 굳이 하기 싫다 는 것을 시킬 때 그 효과가 얼마나 나타나겠는가. 아이에게 처음부터 강압적으 로 시킨다면 그 반발은 더 클 것이니, 아이가 흥미를 갖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 주면 되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성장시켜 멋지게 악수하며 '언제나 너를 지켜 보고 있단다' 하는 말과 함께 당당히 떠나 보내면 되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다른 가족들과 다르게 가족간의 정을 위한 장을 마련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이면 '가정의 밤'을 여는데 한나와 나나가 돌아가면서 사회를 본다. 먼저 내가 삶에 대한 여러 얘기들을 쉽게 사례를 통해 들려 주고, 한나와 나나 는 학교생활과 친구들 얘기, 걸스카우트나 그외 동아리 얘기를 들려 준다. 다음 으로 가족간의 불만과 서로에게 원하는 점도 얘기하고 자신의 고민과 잘못한일 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한다. 2 부 순서로 엄마가 준비한 다과를 먹으면서 게임을 하는데 어떤 때는 온 가족 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한 울타리에 산다는 공동체 의식과 연대감이 저절로 싹튼다. 가끔은 이웃을 초대해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가급적 형제나 친지들이 자주 모시려 한다. 핵가족 구조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 께 어울리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은 자녀의 정서에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에 빠지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우리 부부는 한나와 나나가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올바른 것을 볼 수 있도록, 올바른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간직할 수 있도록 도와 줄 뿐이다. 서재균(1955 년 생) 씨네가족 남 좋은 일이라면 마다 않고 나서서 수입의 절반 정도를 쏟아 붓는 열성파. 가족이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족 모임과 단체에서 사랑실천에 나서고 있으며 해외 한민족 후예들을 입양해서 양유할 계획이다. 특히 전세계에 좋은 아버지 모임을 만들어 잠실 올림픽 경기장에서 '좋은 아버지 세계대회' 를 여는 것이 꿈이다. 결혼 전에 이미 좋은 아버지가 될 계획을 세워 담배와 술을 끊고 (냄새 나는 입으로 아이에게 뽀뽀할 수 없기 때문에) 육아-교육-요리 책들을 마 스터했다. 또 이책들을 부인에게 선물해 부인을 감격시킨 진짜 가정적인 아버지. 그래서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의 아버지들의 모임을 핑계 로 귀가가 늦어지는 경향을 속상해 할 정도이다. 평소 이런 모임을 구상하던 중 이미 모임이 만들어 졌다는 소식을 듣고 1991 년 첫행사부터 참여해 지금은 제 3 대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아버지가 없는 결손가정에도 아 버지 노릇을 해 주고 싶은 바람이있다. 이상형의 남편을 만났다는 부인 이내규(1955 년 생) 씨는 남편이 사준 웨딩드 레스와 결혼식 후 열린 무도회에서 춘 왈츠의 기억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아주 큰 지하실을 만들어 청소년들에게 노래부르기와 디스코파티를 열어 주고 싶어한다. 말라깽이 한나(여, 1983 년 생)는 모든 동아리 모임에서 '한나가 없으면 재미없 다' 고 할 정도지만 처음 보는 친구와는 쉽게 친해지지 않는다. 빨리 커서 아빠 가 엄마에게 사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어한다. 언니와는 달리 처음 만난 친구 와도 쉽게 친해지는 나나(여, 1986 년 생)는 언니 옷을 물려 입는 것이 불만이지 만 엄마 일을 잘 돕는다. 짧지만 굵은 시간을 함께하라 한기천(문화예술진흥원 근무) 아이는 유아기를 지나 취학기에 이르면서 본격적으로 친구를 사귀게 된다. 사 회 교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한글교육까지 마쳤다면 이 제 모방과 흉내의 폭도 넓어지고(정보, 자료 입수 범위가 넓어짐) 질문도 대담해 진다. 친구 누구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데 나도 가져야하겠다고 당당하게 요구도 하고, "아빠, 이것 좀 알아맞혀봐?" 하며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하면서 아빠의 자질을 테스트하기도 한다. 최근 있었던 몇가지 실례를 들어 보자. 하나 친구가 갖고 있는 것은 무조건 사달라고 떼쓴다. 안 사줄 때는 설명을 잘 해 주어야 한다. 부부의 의견이 틀리면 자기 의견에 동조해 주는 사람에게는 너그 럽지만,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실망도 한다. 따라서 인기를 얻기 위해 일방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좋지 않다. 떼쓰는 게 귀찮아 우선 사주겠다고 임기웅변으로 약 속하면 그 자리는 모면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는 쉽게 이지어버리지 않는다. 애 들 요구에 무조건 대답하지 말고, 신중하게 관단하자. 약속은 지키는 것이 좋다. 누리가 7 살 때 있었던 일이다. "아빠, 왔어? 들어오라고 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7 살 난 아들 녀석이 목욕탕 안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 었다.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아져 "애한테 오냐 오냐 하니까 이 모양이잖아?" 하며 집안일 하나 제대로 처리해주지 못하는 아내에게 곱지 못한 눈길을 보냈다. 아들 생일이 며칠 전이었는데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 하였고, 직장에서 바쁜 일도 있어 그날 늦게서야 집에 들어갔다. 누리는 아빠 선물을 기다렸다 못 받은 것이 서운한지. 그날 이후 집에 들어가면 성화를 부려댔다. 그때마다 그래 다음에 다음에로 미루면서 그냥 넘어가길 바랐는데``````. 그날은 토요일이라 일찍 들어갔더니만 기다렸다는 듯 보채고 나왔다. "여보, 주말인데 오랜만에 아버지 노릇 좀 해 보세요" 아내와 아들 녀석의 등 쌀에 밀려 뭐든 사주어야 할 판이었다. "그래, 뭐 사줄까?" "게임기". "게임기는 안 돼." 최근에 게임기의 부작용에 대한 신문기사를 본 적도 있고, 전자오락을 조아 하지 않는 내 성격상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완강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누리가 거실 구석에서 훌쩍훌쩍 울며 사달라고 떼를 썼다. "여보, 요즘 게임기 없는 집이 어디 있어요? 매일 친구 집에 가서 눈치보며 조


금씩 만지니 얼마나 게임기가 갖고 싶겠어요. 지금은 너댓 살만 돼도 다 게임기 를 만진단 말이에요." 선뜻 마음은 안 내켰지만 이 대 일로 열세니, 집안 분위기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하루 30 분 이상은 가지고 놀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게임기를 사주고 말았다. 아이는 한동안 게임기에 정신이 팔려 부자지간의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안중에 도 없어 보였다. 그 일이 있은 후 주말에 젊은 아버지들이 가나안 농군학교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누리와 함께 참여하였다. 1 박 2 일의 재미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누리는 불쑥 이렇게 말 했다. "아빠, 큰 공 하나 사줘." "왜?" "준수 형, 연호 형은 공을 세게 잘 던지는데, 나는 처음 만져서 잘 못 던졌단 말야." "공 가지고 노는 것도 재미있었니?" "그럼, 다음에도 형들 노는 데 데려다 줘. 나도 이제부터 아빠 약속은 지킬게." 나는 다음날 누리에게 배구공 큰 것을 하나 사주었다. 누리는 놀이터에서 동네 친구들과 뛰어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파트 창가에서 누리가 뛰어노는 모습을 뭉끄러미 보고 있는데. 아내가 옆에 다가와서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웬일이죠? 혼자 밖에는 잘 나가지도 않던 아이인데! 주말에 부자간에 무슨 일이 있었길레 저렇게 변할 수가 있죠?" 그저 빙그레 웃고만 있자 아내가 꽤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당신, 마음을 주었군요. 결혼하기 전 나한테 하듯." 둘 어린이 주위에 나쁜 비디오와 만화가 널려 있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어른들만 보고 못 보게 하면 더 호기심을 갖는다. 엉뚱한 방향으로 호기심 이 발동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피치 못할 상황에 부딪치면 어린이 수준에 맞게 성실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누리가 8 살 때 있었던 일이다. "야, 야아아, 으, 히히```````." 토요일 저녁 영화를 보다 말고 갑자기 옆에 있는 아들 녀석에게 싸음을 걸었 더니 금새 몸싸움이 벌어졌다. 8 살 된 누리가 힘으로는 밀리는 것을 느꼈는지 터리개, 장난감 칼, 베개 해서 눈에 뜨이는 장비를 총동원하여 한바탕 격투를 벌 였다. 잠시 후 언제나처럼 대세는 아버지에게로 기울고 있지만, 그날은 질질 끌 어 2 단계로 말싸움에 들어갔다. 평소에는 데개 누리가 울거나 내가 적당히 항복 을 선언해야 싸움이 끝났다. 그러나 그날 싸움은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시작한 것이었고, 사정상 승부보다는 시간을 끌어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하지 않던 말 싸움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야, 너 할머니가 그러는데 요즘 어른들한테 인사도 안 하고, 밥 먹을 때도 혼 자 먹지 않고 할머니가 먹여 줘야 먹고, 할머니를 깔보고 막 대하고`````` 버릇이 없다고 그러는데 그러면 되겠어? 할머니가 누구야? 아빠의 엄마 아냐, 엄마! 그 런데 네가 그 럴 수 있어?"


아내가 사회생활을 하기 때문에 누리가 많은 시간을 할머니와 보내고 있어 며 칠 전 어머니께 들은 얘기를 핑계삼아 훈계조의 말로 기선을 제압했다. 한참 동 안 실랑이를 벌이고 이런저런 얘기로 지루하게 시간을 끌다 보니 어느덧 누리는 당초 의도대로 꿈나라로 갔다. 그날 싸움은 저녁식사 후 안전하게(?) 영화를 보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얼 마 전에도 액션 비디오를 보다 옷을 벗는 정사 장면니 나와 갑작스럽게 그 장면 만 넘기고 보느라 아내, 아들, 나 사이에 웃지 못할 일이 있었는데````. 아무튼 씁씁하다. 옆에서 영화를 보느라 정신이 없는 아내에게 그렇게 태연히 영화를 볼 수 있느냐는 야속한 눈짓과 함께 앞으로는 집에서 외국 영화를 볼 때는 조심 해야겠다는 언질을 주었다. 셋 습득한 지식을 테스트할 대상으로 가족을 고른다. 말상대가 필요한 것이다. 자 기 과시를 하거나 인정도 약간은 요구한다. 최소한의 맞장구나 분위기 동조가 필요하다. 이때 너무 완고하거나, 귀찮아하거나, 사회물정을 몰라 말상대가 안 되면 아빠 엄마는 말벗은 될 수 없겠구나 하는 실망감을 갖게 된다. 누리가 9 살 때의 일이다. "아빠, 황소와 젖소가 싸웠는데, 황소가 젖소를 이겼어. 그럼 싸움에서 진 젖소 가 황소에게 뭐라고 했을까요?" 물론 아빠는 알 턱이 없다. 멈칫멈칫하고 있는데, "그것도 몰라? 젖소는 젖소 [졌소]라고 했지?" 하면서 쾌감을 느끼는지, 자기 자랑을 하고 싶은지 빙그레 웃 는다. 요즘 돈만 생기면 책을 빌려보더니만 벌써 샛길도 보게 되는 모양이다. 작은 관심과 동참이 필요하다 아버지의 경우 직장 일에 바쁘다 보면 집안일에 신경쓰기가 쉽지 않다. 특히 애들이 어리다는 생각에 별탈없이 크겠지, 유치원에 보내니까 알아서 잘 가르쳐 주겠지 하며 무관심하게 지내기 쉽다. 어쩌다 아이가 같이 놀자고 하면 피곤하 고 귀찮기도 해서 비디오를 빌려 주거나, 뽑기 하라고 돈을 주어 혼자 놀게 할 때도 많고, 나쁜 습성이 보여도 그냥 방치하기가 쉽다. 가정에서 자녀들에 대한 대한 엄마와 아빠의 역할은 다르다. 아버지도 가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동화책도 읽어야 하고, 게임기도 약간은 다루어야 아이의 말동무가 될 수있고, 아이들 세계도 이해할 수 있다. 집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짧은 시간을 함께 있더라도 아이에게 아버 지의 이미지가 박힐 수 있도록 따뜻한 애정 표시와 관심이 뒤따라야 한다. 특히 친구 가족이나, 친척이나, 교회 모임을 이용하여 같은 또래들이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는 것은 최고의 아빠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이 다. 잘 안 해 보던 일에 대한 경험을 쌓도록 하거나, 엄마없이 아이와 단둘이 시 간을 갖는 것은 서로가 가까워 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한기천 [1956 년 생] 씨네 가족 경직된 분위기의 공무원이나 실리에 집착하는 기업체를 마다하고 개인 시간 도 있고 국민들의 문화적 삶을 지원한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어 1983 년부터 한 국문화예술진흥원에 근무해 왔다. 88 올림픽 문화예술축전이나 오페라 초청공연 등 공연예술업무와 국제교류업무에 주력하다 최근 사업 및 운영 개선에 힘쓰는 기획업무로 옮겨 심적으로 부담도 되고 만족도도 떨어지지만 좋아지도록 노력하


고 있다. <아버지가 쓰고 그림책> 강좌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컴퓨터 가 족의 불만] 이라는 책도 내고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발족 에 참여, 초대 준비위원장을 역임 하였다. 교육적 내용보다는 '가족춤자랑' 같이 가족들이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이 YMCA 등과 같은 여러 사회 단체에 새로운 프로그램도 제공해 주고 참여하는 계기를 주기도 했다. 모임이 지금까지 지속될수 있었던 것은 힘이나 돈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평범 한 사람들이 회장도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개방된 조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앞으로도 모임을 위한 모임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주부 어머니 아동과 같은 식으로 성별이나 계층을 나누지 않고 가족 모두가 함 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 들이 확산되기를 바라고 있다. 진흥원의 첫 부서인 연극무용부에서 당시 대한민국무용제 대상을 수상한 안 신희(1957 년 생) 씨와 업무차 만나다 결혼하게 되었다. 뛰어난 현대무용가로 평 가받고 있고 또 그만큼 그 일에 만족하고 몰두하지만 규칙적인 일이 아니라 가 족들과 자주 어울리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서로의 일을 아껴 서로가 좀 더 안목을 넓히고 소신껏 활동하기를 바라는 열린 부부다. 잠꾸러기에 물건 정리도 잘 못하지만 성격이 좋아 아무하고나 잘 어울리고 눈 이 예쁜 누리(남, 1987 년 생)는 요즘 한창 책 읽는 재미에 빠졌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동생! 양산군자만 아니라면 일터를 공개하라 한진구(경찰관) 사회가 다원화되고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우리 사회는 대가족제도에서 핵가 족제도로 사회 구조가 예전에 비해 많이 바뀌었다. 핵가족제도가 자리를 잡은 지금 가정에서 아버지 역할이 애매해지고 위상이 흐트러져 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어느덧 아버지의의미가 '아버지=돈 버는 사 람' 으로 전락되어 설자리를 잃고 가정 안에서조차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 아닌 가 생각된다. 참으로 당당하고 엄격하며, 나름대로 격을 갖추면서도 따뜻하고 훈 훈한 정을 느끼게 해 주시던 옛날의 아버지들에 비하면 요즈음의 아버지상은 서 글프다는 생각도 든다. 참으로 바쁜 현대의 아버지들. 그러나 단지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나중으로 미 루거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아버지 노릇 아닐까? 나는 아들 상민이가 태어날 때부터 막연하나마 '내아이는 최소한 이렇게 키 워야 되겠다' 는 육아론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경찰관이라는 나의 여유없는 직업이 그 생각을 실천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자녀와 함 께 아버지들이 쓰고 그린 그림 동화책을 자녀들에게 선물하였다' 는 신문기사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이후 좋은 아버지는 실천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어려 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과 자녀 교육은 사랑의 실천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상민이에게 세상의 많은 것들을 직접 보여 주고자 노력 하고 있다. 다 양한 것들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느낌을 가지는 아이로 자라 주었으면 하는 생 각에서였다. 시간이 많으면 동해바다 설악산 지리산, 시간이 적으면 서해바다 통 일전망대 관악산 북한산 박물관 운동경기장 등을 데리고 다녔다. 데리고 가서 보여 준 곳은 반드시 사진을 남겼다. 상민이가 갓 태어난 모습부터 11 살이 된 지금까지 상민이의 성장 과정을 약 만여장의 사진에 담아두었다.


처음에는 기념하고 기록하는 의미로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는 교육의 재반 복 효과를 생각해서 사진을 찍게 되었다. 여행지에 다녀온 후 사진을 보면서 "여 기가 어디고, 그때의 느낌이 어땠지?" 하고 이야기하면서 반복 교육도 되고, 상 민이와의 대화 소재도 풍부해지고 추억을 되새기는 계기도 되었다. 어떤 아버지는 자녀와 뭔가를 이야기하려 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아버지와 말 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대화를 꺼린다고 한다. 이런 경우 아버지의 입장 만 일방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자녀와의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녀와 대화할 적에는 언제나 마음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어려서는 같이 놀아 주기도 하고 이야기도 많이 하지만 자녀가 자랄수록 공부시간에 밀려 대화 의 내용을 이끌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다. 자녀와의 대화는 양보다 질이 라는 생각을 하고 자녀가 커갈수록 벌어져 가는 세대차를 아버지가 스스로 극복 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무엇보다 자녀와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아이들도 아 버지가 바쁜 줄은 알고 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약속을 어길 때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자녀와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그것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신뢰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부모를 신뢰할 수 없으면 부모의 권위가 상실됨은 물론이고 아이가 바로 설 수 없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 직업이 무엇인가는 알아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나의 직장 동료가 "아이들이 내가 경찰 관인 줄 모르고 그냥 회사 다니는 줄 안다"며 자랑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어떤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아들 상민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아빠, 다른 아이들 아빠들은 매일 매일 집에 들어오는데 왜 아빠는 집에 매일 안 들어오고 들어왔다 안 들어왔다 해요?" 하고 물었다. 나는 아들에게 "아빠는 하루 근무하고 하루 쉬는 격일제 근 무라서 그렇다"며 격일제 근무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했지만 상민이는 이해를 못하는 것이었다. 하긴 다섯 살짜리에게 격일제 근무를 설명한들 어떻게 알아듣 겠는가? 그래서 몸으로 부딪치고 눈으로 보면 알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다음날 아 침, 상민이와 함께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파출소로 출근하였다. 파출소에 가서 112 순찰차에 태워 순찰도 함께 돌고 경찰 장비도 보여 주고 밥도 같이 먹고 숙 직실에서 잠도 자고 사고 현장 도 보여 주며 나와 하루를 꼬박 보내고 다음날 함께 퇴근하였다. 그제서야 상민이는 아빠가 왜 집에 들어왔다 안 들어왔다 하 는지 이해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뒤로 상민이가 아빠를 더욱 신뢰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대개의 부모들은 어른들이 싸우는 모습이나 교통사고 현장은 교육상 좋지 못 하다 하여 아이들의 눈을 가리려고 한다. 그러나 무턱대고 아이들의 눈을 가리 거나 발을 묶는 것보다는 아이가 보고 느낌으로써 선과 악, 옳고 그른 것을 판 별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 서 폭력사건 취하 과정을 아이에게 직접 보여 주었더니 누가 옳고 그른가를 묻 지 않아도 스스로 판단하고 느낀 점을 이야기하였다. 초등학교 3 학년인 상민에 게 파출소 견학과 아빠의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일은 매년 2 회씩 여름과 겨 울방학을 이용하여 연례행사처럼 실시하고 있다. 하루 24 시간을 근무하고 다음날 하루 쉬는데, 24 시간 꼬박 근무하고 나면 피 곤하여 하루종일 잠만 자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평생 직업인데 쉬는 날 잠


만 잔다면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전혀 없겠다 싶어 가급적 아이에게 아 빠의 잠자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비번 날에는 상민이가 학교 에간 사이 잠깐 잠을 자고 가까운 공원이나 약수터에 가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 간을 가지려고 한다. 상민이가 아빠 얼굴을 보지 못하는 날에는 편지로 대화를 나눈다. 전에는 벽 에다 커다란 도화지를 붙여 놓고 편지를 ㅆ지만 지금은 메모지나 칠판을 이용한 다. "아빠가 엊저녁에 너무 늦게 들어와 새벽에 너의 잠자는 모습을 보며 출근하 지만 아빠는 언제나 너의 그림자처럼 네 곁에 있단다. 오늘도 건강한 하루가 되 렴" 하고 적어 놓고 다음날 퇴근하여 돌아오면 반드시 답장이 적혀 있다. 아이라고 해서 마냥 어린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체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부모의 생각 없는 행동이 아이의 의식에 그대로 각인된다고 생각하면 자녀가 보 는데 함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가끔 가족회의를 한다. 처음에는 다분히 권위적이고 아이에게 지 시하는 형태로 진행되던 가족회의가 지금은 아이와 상의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아이가 자신의 생각과 고민을 내게 스스럼없이 상의하기도 한다. 가족회의를 통하여 발표에 익숙해진 아이가 학교에 가서도 학급회의나 기 타 발표시간에 자기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발표할 수 있는 자신이 생겼다고 자랑 도 하였다. 좋은 아버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을까? 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자녀 사랑의 생각을 자년 사랑의 실천으로 옮 길 수만 있다면, 이미 좋은 아버지인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모두가 좋은 아 버지들이다. 단지 자신의 일에 너무 충실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 할 뿐이다. 바쁜 현대의 아버지들이여! 자녀들을 직장에 한 번쯤 데리고 가서 아버지의 일하는 모습도 보여 주고, 책 도 함께 읽고, 자녀의 고민에 관심을 가져 주고, 자녀에게 편지도 써 보고, 숙제 하는데 관심도 갖고, 자녀의 생일과 자녀의 친구 몇 명 정도는 이름을 기억하고, 약수터에도 같이 가고, 아버지의 실수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 주자. 자신의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았겨서 그렇지 다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 아 닌가. 이제 부터라도 실천을 하자! 모두가 이 땅의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한진구(1958 년 생)씨네 가족 육군대장을 꿈꿨지만 무산되고 꿈에 경찰시험을 보라는 백발노인의 계시(?)를 따라 지금은 동부경찰서의 경사로 또 외빈 경호요원으로 근무중이다. 태권도 4 단 유도 3 단에 존 웨인과 게리쿠퍼 다음가는 사격 솜씨(?)로 대통령과 TV 에서나 보 는 국빈들의 경호를 맡았다. 경찰관을 천직으로 생각해 소소한 대민관계 일이건 국빈경호건 모두 열심히 좋은 경찰 아저씨, 그리고 '제 1 회 좋은 아버지상'을 탈 정도로 언제나 일보다 가정이 먼저인 든든한 가장이다. <좋은 아버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에는 1991 년 겨울 <아버지기 쓰고 그 린 그림책>과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참여하게 되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해 모 임에서도 주로 사진을 찍어 주고 또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좋은 아버지는 많은 데 그 생각을 실천하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꼭 모임에 참여하


지 않더라도 가정 안에서 스스로 실천하려는 아버지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 다. 소개로 만나 7 년간이나 연애한 부인 유경자(1961 년 생) 씨는 재테크와는 거리 가 멀지만 가정주부에 만족하고 남편의 월급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알뜰주부. 요 즘은 남편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수채화 그리기와 사진찍기에 빠져 있다. 황소만한 호랑이 꿈을 꾸고 태어난 호랑이띠 상민(남, 1986 년생)이는 공부보다 는 운동을 좋아하고 스포츠에 관한 한 소식통이다. 어려서 영양실조에 걸릴 만 큼 말랐었는데 스포츠에 취미를 붙여 지금은 남자다워지고 도리어 다이어트를 할 정도로 체격이 좋아졌다. 잘 못할수록 애교도 잘 떨고, 백설공주나 선녀와 나 뭇꾼을 직접 본 듯이 실감나게 이야기도 잘한다. 겁은 많으면서 걱정는 없는 낙 천적인 상민이의 꿈은 운전사에서 운동선수로 그리고 요리사로 수시로 바뀌지만 무엇을 하든 착한 사람이 될 것이다.

방목한 고기가 더 맛있다 최인수(은행원) 우리집은 자녀 교육에 특별한 규칙을 두고 그대로 실행하고 있지도 않으며 현 대적 교육 이론에 의존하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아이들이 원하는 자연스러운 교육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현재 초등학교 5 학년인 딸아이와 여섯 살짜리 딸 그리고 네 살인 아들을 두고 있으며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대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인 딸아이에게도 철저히 본인이 싫어하는 것은 시키지 않고 있습니 다. 여섯 살 무렵 미술학원에 보냈는데 서너 달 쯤 다녔을까, 본인이 다니기 싫 어해 중단하고 피아노를 치고 싶어해서 피아노 학원으로 옮겼습니다. 지금은 글 쓰기 학원만 다니고 있는데 아이도 재미있어 하는 편입니다. 이제까지 큰딸에게 적용한 교육 방침이 얼마나 실효를 거둘지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름데로 보람을 느끼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제가 철저하게 지키는 교육법이 있다면 공휴일에는 절대로 인공적인 놀이터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고향이 강원도인 탓에 어릴 때 자연을 벗삼아 지냈고 지금 도 그때의 추억에 빠져들 때가 많다 보니 언제나 자연을 찾게 됩니다. 무엇보다 자연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제 나름의 철 학이 자연 속으로 저를 내몰곤 합니다. 아이들에게 드넓은 대지와 끝없이 펼쳐 진 하늘을 보여 주려고 밖으로 많이 나갔습니다. 태백의 탄광과 바다, 경주일대, 경기도의 유적지 등을 많이 다녔습니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이 글을 쓸 때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소재가 풍부하고 다양하게 표현해 글에 대한 소질이 있다고 담 임 선생님께서 귀띔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방임형, 자연주의적 자녀 교육이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가 하면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큰아이를 속샘학원 같은 곳에 보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이가 초등학교 에 들어가고 나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초등학교 1 학년 말이었던가.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가니 아내가 큰일났다며 울상이었습니 다. 아내는 아이가 10 에 대한 배수 개념응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속상해 했습니 다. '진작에 학원에 보냈으면 다른 아이들처럼 미리 알고 입학할 수 있었을 텐


데' 하며 아내는 학원 교육을 반대한 저를 원망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으레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대강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아이를 붙잡 고 8 시부터 10 시까지 산수를 가르쳤습니다. 아이는 굉장히 힘들어했습니다. 저 역시 선생님은 도대체 교육을 어떻게 시키고 있는 거야 하는 생각에 화가 났으 며, 매를 들어볼 생각까지 했습니다. 2 시간 동안 아이를 잡고 늘어졌는데도 이해 하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사무실에 있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어떻게 하면 될까?' 하는 생 각뿐이었습니다.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향하는 제 마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저 녁을 먹은 후에 다시 아이를 앉혀 놓고 산수 문제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30 분쯤 흘렀을까 이내 아이는 이해하는 눈치였습니다. 그후에도 산수 때문에 문제가 많 았지만 그때마다 아이와 함께 해결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무턱대고 꾸지람을 하거나 학교에서 100 점을 받아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도 학교 성적으로 꾸짖거나 혼낸 적은 없습니다. 시험지를 받아 오면 아내나 제가 함께 풀어 보고 이해시키는 것이 전부입니다. 솔직히 저는 아이기 3 학년 때까지 아이의 학교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아 내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습니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을 만나면서 제 생각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아이의 가정생활 만큼이나 학교 생활에도 관 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가정생활에는 관심이 많으면서 학교생활에 관심 이 없다면 그 불균형으로 인해 부모와 자식 간에 대화가 끊기게 되고 아이의 성 장에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어떤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가 를 아이에게 얘기해 준다면 아이는 더 신나게 자신에 얘기를 하지 않을까요. 저 는 등산이나 운동을 하면서 아이와 얘기를 많이 합니다. 언젠가 모임에서도 제 얘기를 한 적이 있지만 저는 큰아이에게 굉장히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큰아이는 한 번도 안아 보지 못하고 지낸 반면 둘째와 셋째에게는 입맞춤도 잘하고 안아 주기도 잘합니다. 첫째 때만 해도 아 버지의 자리와 역할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습니다. 아침마다 둘째와 셋째를 안고 뽀뽀하는 것은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는데 아직도 큰아이에게는 어딘지 모 르게 부담스럽습니다. 누구나 시행착오는 있다고 하지만 큰아이에게 진 빚은 아이와 함께하면서 천 천히 갚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이 세상에 사랑을 전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로 건강하게 키우고 싶습니다. 최인수(1959 년 생) 씨네 가족 강원도 주문진이 고향이고 언젠가 다시 고향에서 생활하기 위해 열심히 생활 하고 있다. 전형적인 한국의 촌스러운 가장이지만 사랑을 베풀고 사랑하는 법을 몰라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에 들었다는 사랑 많은 아버지. 말 뿐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주변사람들의 의심을 확실히 종식시키고 있다.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에 자신을 변화 시키기 위해 열심히 참석했다. 그러나 평범한 회사원 에게는 금전적 . 시간적으 로 부담이 되는 경우가 많아 최근 많이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운동이다. 특히 등산은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장 점이 있어 거의 매주 산에 오르고 있다. 그외에도 시간이 되는 대로 여러곳, 특


히 강원도의 산과 바다로 가족들을 이끌고 있다. 삼난매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 부인 김영자(1961 년 생)씨. 요샛 말로 '간 큰 남 자' 였던 남편의 썰렁한 사랑 표현에 행복해 하고 있다. 최근 바쁜 회사일로 피 곤해 하는 남편의 건강이 걱정이다. 깔끔한 성격이 지나쳐 차갑고 냉정하게 느껴질 때도 있는 정아(1985 년 생)는 쑥스러움이 많아 표현이 어색하기도 하지만 자기 주장은 정확하다. 맏이답게 동 생들을 무척 잘 돌보며 특히 네 살배기 막내 진규(1993 년 생)는 정아를 엄마처 럼 따른다. 모두의 감탄을 자아내는 대단한 아이 영지(1991 년 생). 나이 차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언니가 하는 공부는 뭐든지 다 샘을 내 따라하면서도 그것도 성에 안 차 다른 것을 또 하겠다고 엄마를 졸라댄다. 그러면서도 동생에게는 한 없이 너그러운 누나. 무엇보다 사랑 표현이 적극적이어서 어색해 하는 아빠를 완전히 다정하게 개조시킨 장본인이다. 엄마와 여자들 치마폭에 둘러싸여 아직 도 바지를 입지 않으려고 벗어던지는 '야한 총각' 진규는 임신 6 개월이 되도록 모르고 있다 태어났기 때문에 건강이 가장 걱정된다. 그러나 아빠와 다니는 것 과 공차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대단한 운동량의 소유자다. 아마조네스는 아마존으로나 보내라 유관철(자영업) "오빠가 욕을 안 하면 좋겠다. 그렇지만 오빠가 때릴까봐 걱정이 된다. 수빈" "수빈아! 글씨 쓸 때는 정신 차리고 써라. 욕하는 것, 때리는 것, 욕 안 하기로 노력해 보고 안 때리려고 노력 해 볼게. 그리고 엄마한테 소리 좀 지르지 마. 그러면 화나. 수빈이가 오빠 화 안 나게 노 력해 보렴. 종범" "아빠 요즈음에 오빠가 다행히 욕을 안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빠 사랑해요. 보내는 사람 : 유수빈 받는 사람 : 유관철" '우리가족 편지 모음(00 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하세요)' 에 적힌 수빈이와 종 범이의 짧은 편지들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하지만 오 늘도 어김없이 큰소리가 오갑니다. '네가 잘못했다' 느니 '내가 잘했다' 느니 '그 래 참지 마라' 느니 하면서 일과처럼 치르는 작은 전쟁들은 우리 가정이 건강하 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증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1988 년 3 월 14 일 11 시 25 분 출생한 종범은 분당 내정초등학교 2 학년이고, 1989 년 3 월 14 일 11 시 29 분에 태어난 수빈은 이제 초등학교 입학생이 되었습니 다. 우리 부부는 1987 년 2 월 14 일(발렌타인데이)에 혼배성사를 받은후 연년으로 꼭 365 일 하고 4 분 차이로 화이트데이(3 월 14 일)에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한 살 터울인 남매의 하루는 하교생활을 제외하고는 놀이와 다툼과 화해의 연 속입니다. 애들의 짧은 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외견상으로는 경계와 견제의 내 용인 듯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감정이 진하게 배어 있음을 느낄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커다란 정서가 작은 정서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남 매의 사소한 다툼에 끼여들지 않고 스스로들 부딪치고 느끼며 해결하게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가족간의 신뢰와 사랑이 저절로 두터워지고 나아가서 타인들


에 대한 관심과 배려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리라 생각됩니다. 연년생을 키우다 보니 오빠인 종범이는 돌상도 못 받은 채 수빈이 돌상에 덤으 로 두 살 생일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그후 매년 생일 날이면 케이크 하나에 종범이와 수빈이의 나이만큼 초를 꼿고 합동 생일잔치를 벌이다가 지난해 처음으로 4 천 원짜리 소형 케이크에다 각자의 나이만큼 초를 꽂았습니다. 아이들 생일날에는 벽의 그림을 떼어내고 우리 부부가 2 장의 전지를 붙여 놓 고 커다랗게 벽장식을 합니다. 주위에 여러 모양의 장식용 풍선들을 붙이고 가 운데는 '맑고, 밝게, 드높게' 라는 우리집 가훈을 색색으로 그려 넣고, 왼쪽 오른 쪽에는 두 아이의 이름과 나이, 생일축하 글을 쓰고, 아래에 빈 여백을 남겨서 생일축하에 오는 개구쟁이 꼬마친구들이 마음대로 축하 사연을 적게 합니다.이 렇게 몇 년 하다보니 내 생일에는 남매가 공동으로 며칠씩 그리고 붙이고 해서 커다란 벽화를 만들어 선물하기도 합니다. 아직도 어린아이들이지만 나는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남자니까 어찌해야만 된 다" 든지, "여자애는 그러는 게 아니다"라든지, "오빠니까 이래야 되고, 동생이니 까 저래야 된다"는 식의 고지식한 틀--남자와 여자의 성 역할이나 성격을 규정 하거나, 각자의 지위나 나이, 특별한 관계 등에 대하여 특정의 대응방식을 규정 해 놓는 등-을 씌워서 그들의 느낌과 반응을 옭아매지 않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얼마 전,아마존 강 유역에 살고 있는 여인들만의 세계를 묘사한 영화 '아마조네 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여인국은 종족 번식에만 외부의 남자들이 필요할 뿐 여인국 내부의 모든 일을 여성들만의 힘과 의지로 해결함으 로써 여자의 여성상과 남자의 남성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편협하게 유지, 발전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성 역할이란 천성적으로 타고난 특성이 아니고 문화적 소산 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인간의 성이 인간의 행동이나 성격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남자든 여자든 사회에 잘 적응하 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양성적 툼성을 갖춘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남자에게도 적절한 여성성이 필요하며 반대로 여자에게도 적절 한 남성성이 필료한 것입니다. 성 차별이란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성을 상위와 하위 로 구분지어 남과 여를 수직선상에 놓으려는 관점으로 바로 남아선호 등이 이에 해당하며 오늘날의 보편적 개념의 성차별입니다. 또 다른 관점은 남자와 여자의 성 역할이나 특성을 규정짓고 갈라 놓는 수평적 개념의 성차별입니다. 성차별의 일차적 목표가 수직적 의미의 성차별을 일소하는 데 있지만 수평적 의미의 성차 별은 보다 더 근원적인 성차별이므로 교육과 사회운동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영혼은 성별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과 같은 조건 이전 에 고유하고 절대적인 존엄성을 지닌 존재라는 믿음이 확산돼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부부는 남매간의 관계는 물론이고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까지도 소유나 수직적 관계가 아닌 독립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로 설정하고 특별한 인간 관계의 틀 이전에 보편적 인간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느끼고 반응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로서 수빈이와 종범이가 건강한 자존심과 진정으로 자유로운 영혼 을 지닌 자연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적절한 조력자의 역할을 다하고자 합니 다.


유관철(1958 년 생) 씨네 가족 좋은 선생님이나 사제가 되려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여러 시민 단체활동 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금은 아프리카와 인도를 중심으로 수출입일을 하고 그와 관련해서 아프리카 조각품 전시회 등도 개최하고 있지만 교육에 대단한 관 심과 열의를 가지고 있는 큰 사랑의 소유자. 그래서 1987 년 성 발렌타인스데이 에 혼배성사를 이룬 부인 최혜경(1961 년 생) 씨와 '20 세기 최고의 사랑' 을 약속 하였다. 그 사랑이란 '당신께 베푸는 직접적인 사랑이 아닌 이웃과 세상에 나누 는 사랑이 온 세상에 가득하고 넘쳐서 드디어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득하게 되는 그러한 것.' 아이들도 사랑받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유일한 바람이다. 이 사랑의 동반자 최혜경 씨는 심 적으로나 외적으로 좀더 성장하여 가정의 안정과 발전에 일조하기를 바라며, 직 업상 출장이 많아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이 유일한 불만이다. 어른의 것과 어린이의 것을 이해해 부모님을 편하게 해 주는 종범(남, 1988 년 생)이는 박학다식하고 의젓해 유 박가, 유 영감으로 불리고 있으며, 본인 역시 발명가나 과학자가 되고 싶어한다. 싫고 힘든 일을 먼저 하는 순둥이 수빈(여, 1989 년 생)이는 패션 감각이 뛰어나 인형극이나 장식하는 일을 좋아한다. 아직 어리고 용돈도 많지 않은데 각자 30 만 원, 25 만 원이 넘는 돈을 저축하고 있는 알뜰이들이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 창단총회를 갖기 이전인 1992 년 봄 예술의 전당에서 아이들의 장난감을 교환하는 행사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창단부터 지금까지 계속 모임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무엇보다도 다른 의식 을 가진 사람들도 자각하고 모델링할 수 있도록 모임을 알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모임의 장점이라면 다른 모임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되는 구속력과 결집력 이 약하다는 것. 아버지 역할이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담을 주거나 강제력이 느껴져서는 안 되고 없는 듯 있는 모임 이 되어 편하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처음에는 자녀들을 위해 뭔가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모임에 참여했지만, 이것 이 궁극적으로는 아버지들 인생의 완성을 위한 좋은 통로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 다. 원초적으로 표현하라 나원형(자영업) 아내의 출산 진통이 시작되고 산부인과에서 우리의 2 세가 태어나기를 기다리 던 7 년 전 내모습이 바로 어제 일같다. 아내가 분만실에 들어간 후 아래층에 내 려와 있을 때 갑자기 들리던 우렁찬 울음 소리. 나는 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달 이 지날수록 점점 불러오는 아내의 배를 보면서 뱃 속의 아이를 상상하고 또 출 산 준비를 하면서도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크게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런데 정말 우리의 아기가 태어난 것이다. 혜영이의 탄생은 우리 가정에 많은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아내와 함께 일을 하는 터라 혜영이가 태어나자 시내에 있던 사무실을 철수하고 집 근처의 아파트 를 구입해 사무실로 개조하고 방 세 개 가운데 하나를 혜영이 놀이방으로 만들 었다. 출생 후 3 주부터 혜영이는 우리 부부와 같이 사무실에 출근했기 때문에 나도


자연히 직접 육아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기꺼이 즐겁게 했다 고 자신할 수 있다. 비교적 쉬운 아이라 특별히 힘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아내는 혜영이에게 모유를 먹었기 때문에 밤에 우유를 먹이기 위해 깨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의 영아들이 그렇듯이 칭얼댈 때 그저 물리면 잤으니까. 아내와 함께 무역업을 하는 덕분에 출장이나 외근이 없으면 사무실에서 시간 나는 대로 혜영이와 같이 놀고 기저귀를 갈아 주고 목욕을 시키고 잠을 재웠다. 목욕시킬 때 앙앙대던 모습, 자장가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 리며 재우던 때, 아가의 똥은 향긋하기(?) 까지 하다는 생각으로 기줘기를 갈아 줄 때 모두가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혹 아내가 외출하면 내가 전적으로 혜영이 를 돌봐야 했다. 혼자서 일하랴, 전화 받으랴, 혜영이 보랴 정신이 없었다. 게다 가 전화를 받는 도중에 얌전하게 가만히 있던 혜영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면 그땐 정말 대책이 없었다. 이렇듯 어랄 때 엄마 아빠와 시간을 많이 보낸 탓인지 혜영이는 누가 보아도 밝은 아이라고 말해서 우리를 기쁘게 한다. 혜영이는 비교적 아빠인 나와도 피 부 접촉이 많았다. 좀 커서는 목욕탕도 데리고 갔고 많이 안아 주고 뽀뽀도 자 주 해 주었다. 나의 경우는 누구에게서 배우거나 책을 통해 교과서적으로 육아를 한 것이 아 니라 동물이 새끼를 보살피는 것과 같은 원초적 이고 본능적인 부분에 충실했다 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부족하다고 느꼈던 점, 그리고 성장하면서여러 경로를 통해 언어진 간접 경험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고 또 이를 실제 활용 했 다. 그 가운데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어떤 형태로든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이 중 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혜영이는 우리 가족 모두가 간절히 원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주변의 많 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줄 줄 안 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할 때 아주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혜영이를 키우면서 우리 부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있다면 혜영이가 우리 부부에게 똑같은 비중을 두는 것이었다. 아빠와 같이 시장도 갈 수 있고 유치원에도 가고 여행도 떠날 수 있는, 그러한 일들이 젼혀 어색하지 않은 아이 로 키우고자 했다. 엄마나 아빠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보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자라난다면 장차 커서 경험하게 될 여러 가지 인간관계애서 보다 유연해 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가능한 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혜영이를 여러 곳에 데리고 다녔다. 돌이 지난 후부터는 거래처에 데리고 가서 아빠의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물론이고 이곳저곳 다니기도 했고 LF 년 에 한두 차례는 해외출장 길에도 데리고 갔다. 우리와 다른 세계.인종.문화를 보 여 주고 체험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있다고 믿는다, 핵가족 세데의 중심에 있는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교육에 관심이 많은 세대라 고 한다.아내와 다소 논쟁이 있긴 하지만 나는 유아기에 공부라는 명칭의 교육 에는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솔직히 지금까지 내가 혜영이에게 공부라고 무엇 을 가르쳐 본 기억이 없다. 혜영이를 유아원에 보낸 것은 놀이 개념으로, 그리고 네 살 때 발레를 1 년 정도 시킨 것은 혜영이가 하고 싶어 해서 시켰고 하기 싫 다고 해서 그만두라고 했다. 다행이 지금 다니는 유치원에서 발레를 기본 과목 으로 하고 있는데 다른 아이들 앞에 나가 시범을 보일 정도로 어릴 때의 경험이 득이 되고 있다. 그리고 피아노는 지금 2 년째 배우고 있는데 때로는 가기 싫어 해도 보내려고 한다. 혜영이가 살아가면서 악기를 한 가지라도 연주할 수 있다


면 좀더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렇지만 정말 혜 영이가 싫어한다면 그만두게 할 생각이다. 내가 그래도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것은 혜영이가 태 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시기별로 해두었다는 점이다(이 일은 정말 아버지의 부지런함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이것은 단순히 혜영이와 우 리 부부 간의 정을 이어줄 훌륭한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시간이 날때마 다 비디오를 보여 주면 혜영이가 어릴 적 일들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해서 막 태어난 그순간, 그리고 지금까지 혜영 이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이 테이프들은 나중에 혜영이에게 내가 줄 수 있 는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 만 일곱 살이 된 요즈음 혜영이는 연령적으로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가장 많 을 때라 많은 것들에 대해 물어 본다. 인공위성과 우주선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무엇을 하는 것인지, 기체- 고체- 액체는 어떻게 다른지, 여객기는 누가 조종하 며 왜 그렇게 생겼는지, 거미는 거미줄을 어떻게 치는지 등등 보이는 모든 것들 이 신기하고 질문의 대상이 된다. 적당한 백과사전을 하나 사줄까도 생각해 이 것저것 찾아 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내가 그림을 그려가면서 설명을 해 주고 있 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알고 있는 데까지 설명을 해 주고 '이걸 이해할까' 하는 심정으로 되물어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 줄 정도로 이해를 잘하 고 있다면 아버지의 지나친 자랑일까. 아버지마다 자녀 교육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겠지만 나는 비교적 아내 못지않게, 아내에게 육아의 책임을 전적으로 떠맡기지 않고 아버지의 역할을 해 왔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적으로 내가 시간을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직업이었기 에 가능했음을 감안하면 다른 아버지들에게는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다소 미안 하기도 하다. 나 역시 우리 아버지들의 생활이 어떤가는 익히 잘 알고 있기 때 문이다. 그렇다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아버지들이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사고 전환이다. 지금의 아버 지들 대부분은 그런 생각을 갖지 못하고 자라났기 때문에 어색하고 몸에 익숙 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자녀 교육에 대한 아버지의 참여 가 많이 요구됨에 따라 아버지들의 모습이 점점 적극적으로 바뀌지 않을까 기대 해 본다. 나는 종종 혜영이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 기도를 한다. "내가 아버지로서 혜영 이가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게 도와 주십 시오." 나원형(1960 년 생) 씨네 가족 어려서 부터 여행을 좋아했고 지금도 위즈마인 코리아라는 바잉 오피스를 운 영하면서 업무상 세계를 다니고 있어 아주 만족스럽고 여행과 관련된 또 다른 일을 구상중이다. 지금까지 원했던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져서 앞으로도 모두 잘 될 것이라고 믿는 낙관주의자. 그리고 45 세 정도가 되면 비행기 조종면허를 따서 가족, 친구들과 함께 본인이 직접 조종하는 비행기로 여행을 하겠다는 콧 수염이 멋진 아버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부족한 아버지 수업을 위해 1991 년 말부터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가하여 지금은 제 3 대 운영위원장을 맡아 모임을 이끌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이끄는 모임을 개인의이


익을 위해 이용하려고 접근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다. 함께 일을 하고 있는 부인 송미란(1963 년 생) 씨는 그의 가장 훌륭한 조언자 이자 비즈니스 파트너 그리고 능력 있는 비서로 모든 일을 적극적이고 즐겁게한 다. 서로가 바라는 것은 나이가 들어도 아름답고 여유 있는 생각과 향기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는 딸 혜영(여, 1989 년 생)이에게는 사회인이 되었을 때 도움이 될 수 있 는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해 주려 노력하고 있다. 특히 공부라는 말은 하지도 가르쳐 보지도 않았다. 그저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기회를 줄 뿐이 다. 요즈음은 여행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생각만 하는 철학자보다 행동하는 실천가가 되어라 김동열(자영업) 나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이웃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고 싶다. 그런데 행복한 가정, 함께하는 이웃은 생각 만큼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관심과 바람만 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보다. 우선은 효과적인 방법을 잘 모르고, 또 알고 있다고 해도 실컨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처음에는 내 마음이 가족과 이웃에 전달되지 않는 데 대해 좌절을 하기도 했 다. 점차 다른 사람들의 좋은 모습을 보고 배우고자 했으며, 책이나 각종 강좌, 행사 등에 열심히 참여했다. 덕택에 많은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알고 있고 배운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내 가 겪는 어려움이다. 이를 극복하기위해 생활속에 작은 목표를 정하여 실천하려 하고 주변에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고 실천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동기를 부여받곤한다. 내 주변에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많이 있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이런 활동들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행동이 다 혜에게 비춰지게 되고 또한 가르침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다혜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과 썩 잘 어울렸다. 많은 행사에 참여함으로 써 친구들을 만나게 했고, 공동체 생활의 중요성을 알게 했으며, 양보할 줄 아는 마음을 배우게 하였다. 그후 소극적이고 차분하기만 하던 성격이 적극적이고 긍 정적이며 명랑한 성격으로 변하였고, 이젠 제법 남을 배려할 줄도 아는 것 같다. 다혜가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본인도 그렇고 우리 부부도 그 전과 다를 게 없다. 왜냐하면 공부하는 생각이나 태도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몸에 익은 손놀림처럼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다혜가 공부를 스스로 재미있게 할 수 있도록 공부할수 있는 분위 기를 만들어 왔다고 생각한다. 다혜는 초등학교 5 학년 때부터 1 일 학습량을 소화할 수 있을 만큼만 싫증나지 않게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하루에 한자(漢字)한 자, 영어 단어 한 개, 한 문제 정 도씩. 중학생이 되어서는 하루에 두 자씩으로 늘렸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양 을 늘려 계속하고 있다. 동시에 다혜가 공부에 흥미를 잃지 잃지 않도록 계속적 인 관심을 가져 주었다. 주위에 계신 선생님을 찾아 뵙고 교육에 관한 자문도 여러 번 받았고, 잘 아는 선생님과 다혜의 성격, 적성, 장래 희망에 대해서도 얘 기를 나누었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과 자녀의 학습 방법에 대 하여 고민하던 중 "학습 방법을 모르면 그게 바로 요즈음 문맹자이고 기초 학력 은 바로 자기 혼자 공부할 수 있는 힘이다" 라는 유성종 교수의 말씀을 듣고 공


감하는 바가 컸다. 그래서 아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고 애를 썼다. 1 일 계획을 세운 후 일주일 계획 나아가서 일 년 계획을 함께 세우 기도 하면서 학습 방법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다혜 스스로 시간을 활용하여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지난 해 담임 선생님께서 진학 상담을 하러 오라는 전갈을 보내셨다. 설레는 마 음으로 그 동안 다혜와 상의한 내용과 주위에 있는 선생님들과 상담한 내용을 정리한 메모를 가지고 선생님을 만났다. 나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괜히 떨 리고 불안했다. 마치 큰 죄라도 진 사람처럼. 선생님은 다혜의 생활태도와 학습방법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칭찬을 하셨다. 으레 하시는 말씀이려니 하면서도 내심 기분은 좋았다. 다혜는 수업시간에 자세 한 번 흩트리지 않으며 조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 덕분에 스승의 날에는 일일선생님까지 해 보기도 했다. 진학 상담은 선생님 말씀과 다혜의 생 각 그리고 부모의 생각을 반영함으로써 서로 승자가 된 기분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우리집은 일주일에 한번씩은 어김없이 가족회의를 연다. 벌써 7 년이 넘어 서 고 있는데 해를 거듭하면서 회의 내용도 제법 세련돼 가고 있다. 처음에는 집안 얘기와 잡다한 신변잡기가 오갔지만 지금은 시사 문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 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회의는 이렇게 시작한다. 첫째, 지난 주에 정한 실천 목표의 실행 여부를 점검하고, 지난 주에 일어났던 국내외 크고 작은 뉴스를 중심으로 토론을 벌인다. 물론 어떤 주제는 결론이 나 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 시험이 곧 있을때는 가급적 회의 시간을 단축한다. 둘째, 사람이 정치와 경제를 떠나서는 하루도 살 수 없으므로 그 주의 가장 중요한 이슈를 알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 준다.효과적인 설명을 위해 사전에 준비를 하느라 한바탕 혼쭐이 나곤 한다. 셋째, 지난 주의 실천 계획을 얼마나 잘 지켰는가 확인한다. 각자의 생활쓰레 기는 얼마나 줄였는지, 웃어른께 불손한 태도로 대한 적은 없는지, 고운말은 잘 쓰고 있는지, 공중도덕은 잘 지켰는지 등등. 혹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키지 않 았다면 다음 주부터는 어떻게 하겠다는 부연 설명도 빼놓지 않는다. 이것으로 가족회의가 끝나는 게 아니다. 아이들이 제일 기다리는 순서가 남아 있다. 물론 회의 때마다 가지는 못하지만 가급적 가지려 노력하고 있는데, 바로 아이들과 함께 노래방을 찾는 것이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뽕짝부터 아이들이 즐 겨 부르는 랩까지 목청껏 부르다 보면 한 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이렇게 아이들 과 어울리는 기회를 갖다 보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같다. 요즘 아이들이 좋 아하는 노래나 옷차림, 율동을 무조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반발할 게 아니라 실제로 같이 참여하고 즐기다 보면 소위 세대 차이는 좁아질 것이다. 뿐만 아니 라 한바탕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나면 지난 주에 쌓인 피로도 봄 눈 녹듯 사 르르 없어진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충일감에 콧노래도 절로 나온다. 김동열(1952 년 생)시네 가족 평소 가족운동의 필요성과 자녀 교육의 어려움을 느끼던 터에 신문을 보고 알 게 된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에 적극 참여하여 <아버지와 함께 떠나는 기차여행>을 처음 시작 정착시켰으며, 이런 행사에 참여하고자 하


는 어머니들을 위해 독립기념관 방문 등도 추진하였다. 초대 운영위원장을 거쳐 현대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몇몇의 의견으로만 일을 진행하지 말고 모임의 초 창기 때처럼 여러 의견을 잘 반영하여 계속 순수하게 모임이 추진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라 모임에서만 할 수 있고 금전적-시간적으로 부담없는 행사들이 많아지고 또 이러한 가족운동 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를 바라고 있다. 아버지와 가족에 관한 글도 쓰고 있어 [한 울타리 가족 이야기]를 펴내기도 했다. 부인 유인화(1956 년 생) 씨와는 첫선에서 만났다. 한마디로 법과 규칙이 필요 없고 만나는 어느 누구와 편안하게 해 주며 보이지 않는 그늘진 곳에서 봉사하 는 성격이며, 두 자녀의 확실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엄부자모'의 전형. 아버지의 영향으로 다혜 다미 모두 편지나 글을 거부감 없이 잘 쓴다. 다혜는 글씨도 예쁘게 쓰고 글도 멋지게 쓰는, 작가지망생이다. 이름뿐인 작가가 아니라 그 가난을 받아들이고 타인과 공감하는 눈을 갖는 부유함까지 사랑하는 문학소 녀. 다미라는 예명을 가진 미진이는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여전히 순수한 꼬마 의 마음을 간직한 귀염둥이(본인의 주장)로 영어를 좋아한다. 그래서 리포터였던 꿈이 훌룡한 영어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몸으로 가르쳐라 임 정(내과의사) 가정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행복의 근원지요, 작은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튼튼 하고 행복한 가정은 국가 발전의 밑거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부모와 자식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느냐는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 어느 가정을 막론하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작은 전쟁과도 같다. 부모 는 부모대로 요구하는 것이 많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이 러니 끈임없이 크고 작은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수없이 부딪치는 문제들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 가느냐에 따라 부모와 자식 관계가 엮어지는 것이다. 나는 남자 아이 셋을 둔 아버지로서 자식들에게 어떤 아버지로 자리잡을 것인 가 많이 고민한다. 아이의 정서와 인격을 존중하는 인성교육은 도외시되고 지능 교육과 학력만을 추구하는 학교 교육, 베풀고 나누어 가질 줄 모르는 극도의 개 인주의, 황금 만능주의에 찌든 요즘 자녀를 사회가 필요로하는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부모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겠기 때문이다. 외관상 아름답게 치장되고 튼튼해 보이는 건물도 기초 다짐이 잘못 되고 부실 하면 대형 참사를 일으킬 수 있듯이 한 인격체가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당당하 게 한몫 하기까지는 어린시절의 환경과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은 두말할 나 위도 없다. 한 살 터울격인 사내아이 셋은 서로 너무도 다르고 제각각이다. 한 부모에게 서 태어나고 같은 환경과 가정 교육, 균등한 사랑을 받고 자라지만 어쩜 그렇게 성격도 특기도 개성도 다른지 아버지인 나도 의아할 때가 있다. 나이 차이가 거의 없어 친구처럼 지내는 삼형제에게 전통적인 형, 아우 관계 를 잊지 않게 하려고 자주 일러 준다. 다행히도 어설프지만 형은 형대로 아우는 아우대로 위치를 잡아가는 것 같아 녀석들에게 고맙다. 부모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으레껏 나오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아이에게 체벌 을 하는 게 좋으냐, 아니면 체벌은 무조건 안되고 대화로 푸는 게 좋으냐'이다. 이 논란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지만 나는 우리 삼형제에게 이렇게 한다. 어


떤 잘못이나 실수를 두 번 이상 반복하면 체벌로 다스린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 을 내세워 체벌하지는 않고 왜 같은 실수를 여러 번 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했 으면 좋겠는지, 어떤 벌을 받아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해 얘기한 다음 체벌을 가 한다. 아이 자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할 기회를 갖게 됨으로써 자신들의 행 동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어떤 행동을 할 때도 그만큼 신중해 지리 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시기, 질투, 과시욕 등을 가질 수가 있는데 어른들의 이 러한 병든 의식은 자연히 아이들에게도 전염된다. 값비싼 학용품, 장난감, 의복 등을 가지고 친구와 비교함으로써 자신과 친구를 평가하고 친구를 가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옷이나 신발은 깨끗해서 좋은 인상을 주면 그것 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치고, 형이나 이웃집 형들이 커서 못 입는 옷과 신발이 있 다면 당연히 물려받게 하고 또 물려주게 한는데 아이들도 큰 불만 없이 즐겁게 따라 주고 있다. 사내아이만 셌인 이유로 해서 부득이(?) 아내를 뺀 우리 집안 남자들이 정기적으로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대중 목욕탕 이다. 아버지와 아이 들이 벌거벗고 모처럼 부자지간에 등도 서로 밀어 주고 이런저런 얘기도 할 수 있어 좋지만 다른 속뜻도 있다. 대중 목욕탕은 낭비의 현장 학습지로 제격이다.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채 물이 철철 넘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때를 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회용 면도기나 삼푸 봉지를 일정한 곳에 버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목욕탕 바닥에 버리기도 한다. 여탕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남탕의 경우에는 삼 푸와 치약 등을 준비해 높은 곳이 많은데 자기 것이 아니라 그런지 턱없이 많이 써 물로 흘려버리는 이들도 눈에 띈다.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공 장소는 깨끗하게 아낄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목욕탕에서는 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필요 이상으로 공공의 물건을 함부로 쓰 거나 낭비하는 잘못 된 행동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물론 보는 것만으로 잘 못된 점을 깨우치고 개선할 수는 없다. "한준아,삼푸며 치약이 자기 거라면 저렇게 함부로 쓸수 있겠니?" "내 거면 마구 쓰지는 못하죠. 저도 요전날에 삼푸를 많이 풀어썼는데 앞으로 는 내 것처럼 아껴 써야겠어요." 그러면 나머지 두 녀석도 "저두요" "저두요"를 연발한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게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한다. 어떤 지시나 언어상의 가르침보다는 내가 먼저 솔선수범을 보이고 함께 얘기해야 아이들은 진실로 받아들이고 행동한다. 아버지는 실천하지 못하면서 백날 아이한테만 "너 이렇게 해야 한다", "누구 좀 봐라, 너는 왜 그렇게 못하냐" 하고 강요한다면 아 이는 속으로 '우리 부모는 맨날 -하라, -하지마라는 것 투성이야!' 하고 불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 불만이 알게 모르게 쌓여 언젠가 폭팔한다 해도 그때는 엎질러진 물과 같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우리집은 한곳에서 십 년째 살고 있다. 사실 집과 내가 근무하는 병원이 꽤 멀어 이사의 필요성을 항상 느끼고 있지만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아파트는 삭막하기 그지없고 그곳에서 이웃간의 정 운운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사는 아파트에서는 이웃끼리 어 울려 얘기도 하고 놀러도 가기 때문에 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삭막함이나 단절감 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이웃간의 정이 더욱 깊어져 이사할 엄두를 못 내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 여름에는 수년 전에 대덕연구단지로 이사간 구ㅗ순호 씨 내외가 대덕까


지 우리 가족을 초대했다. 마침 아이들도 여름 방학인지라 여름 휴가를 겸해 경 주의 유적답사를 병행해서 내려갔다. 권순호 씨네 가족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한가족처럼 살았기에 그들이 대덕으로 내려갈 때는 송병연까지 준비해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권 씨네는 각별한(?) 서울 생활의 그 정을 잊지 못하고 있다면서 빈데떡과 콩국수로 정성어린 대저ㅂ 해 주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3 년 만에 만났는데도 즐겁게 노는 모습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기성세대인 우리들보다 더 메마르고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살아갈 우리 아 이들에게 더불어 사는 삶의 풍요로움이 무엇인지, 만남의 연이 사회 생활의 행 복 가운데 하나임을 일깨워 주고 싶은 게 아버지의 소망이다. 임 정(1943 년)씨네 가족 영어를 좋아해 외교관이 될 계획이었으나 사회적 불안 등의 이유로 과감히 의 대로 진로를 바꿨다. 배금주의나 가족이기주의 등을 타파하는 데 의사들이 앞장 서야 한다고 생각해 '부모님께 효도 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이웃간에 내 가족 과 같은 사랑과 관심을 나누며 사는 것이 참된 삶의 지름길' 이라는 글을 성북 구의 모든 병원과 보건소, 동사무소 등에 부착하도록 힘썼다. 그리고 가까이 있 는 걸식아동들을 힘닿는 대로 돕는 '인간적인' 의사 선생님이다. 공부벌레가 아 닌 지. 덕. 체를 겸비한 사회인으로 키우기 위해 자녀들에게 태권도, 피아노, 붓 글씨 등 다양한 분야를 접하게 하고 있다. 1992 년 가을 신문에 난 기차여행 광고를 보고<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 의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회원 모두가 건강한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고 또 몸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특히 마음을 끌었다. 가장 큰 바람은 요즘 신세대문제, 사회. 입시 구조가 학력 위주로 흐르는 모순, 자기과시욕이나 남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놀부정신들을 아버지 모임이 중심이 되어 타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소한 개인 차원의 자녀 교육이 아니라 사회운동이 되 어 의식 개혁으로 확산되었으면 한다. 부인 오순이 씨와는 17 살의 나이 차이가 걱정되었으나, 동일한 의식구조와 많 은 대화로 주위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단란하게 산다. 가전제품 등을 손수 고치 고 이웃간에 아이들 헌옷을 서로 물려받고 물려주고 이발기구를 사서 세 아들의 머리를 손수 다듬어 주는 우등생 주부. 그러면서 외국어, 꽃꽂이, 볼링 등의 취 미생활 에도 열심이다. 왕성한 식욕으로 건강한 삼형제는 각자 성격에 맞는 멋진 별명이 있다. 첫째 한준이는 유순 과묵하고 눈물이 많아 유비, 둘째 태준이는 샤프하고 야무지며 고집이 세서 관우, 그리고 힘이 세고 두루뭉실한 씨름선수 스타일의 막내 도준 이는 장비라고 불린다.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편지로 전하라 임진번(인형극단 단장) 늦은 밤, 단체로 휴가를 떠난 단원들이 해금강이라며 전화를 했다. "그래 별일 없나? 날씨는? 식사는." 못 말리는 내성격 탓에 해금강은 어디로 사면 뭐가 있 고 뭐가 좋고 하면서 시외전화를 붙들고 가이드에 열을 올렸다. 옆에 있던 아내 와 딸들이 질세라 한마디씩 한다. "아버지, 우린 언제 휴가 가요? 다른 아이들은 어디 어디 다녀왔다고 검게 탄 살갗을 보이며 자랑을 하는데."


"그래요, 여보. 우리도 한 이틀 정도 어디 다녀와요." 모처럼 시간이 난 2 주간. 하지만 내 시간이 온전히 내 시간만은 아님을 다시 한 번 절감하는 순간이다. 강의 신청이 줄을 잇고 아내와 아이들은 내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어리고 예쁘고 귀엽기만 하던 아이들이 이젠 방이 좁아 보일 정도로 몸집이 커졌을 뿐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펼칠 정도로 정신적으로도 많이 성장한 것 같 다. 좀처럼 답답한 마음을 해결할 묘안이 떠오르질 않는다. 아마 다른 아버지들 도 나와 같은 현실에 처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전장을 옮겨 보자. 옥상으로 올라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참 있자니 한바탕 해 보자는지 아이들이 올라왔다. 큰아이 효주가 퉁퉁부은 투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도 이젠 아주 어린아이가 아니예요. 아버지는 우리가 아기였을 때부터 그 러니까 약 10 년 전쯤부터 지금까지 1 년에 반은 지방으로 가끔은 외국으로 나가 시잖아요. 물론 전국의 많은 어린이들이 연극을 볼 수 있도록 하시느라 바쁘게 사시는 것은 좋은일이고 이해가 가지만 저희들에게도 추억이 필요하지 않겠어 요? 우리들도 어른들이 느끼지 못하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어요. 다른 아이들이 자기가 경험한 다양한 여행과 견학을 얘기할 때면 자신감이 있어 보이고 밝아 보이는데 저는 마치 우물안 개구리처럼 느껴질 때가 참 많아요. 아마 희정이도 그럴 거예요. 휴가를 다녀온 지 벌써 4 년이 되었으니까요." 효주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 중학생 딸아이가 다양한 교육 환경에서 자란 여러 친구들과 사귀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비교하며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그리고 사춘기에 접어든 여학생이 세상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호기심과 발랄 함을 아버지가 키워 주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살기가 바빴든지 관심을 못 가졌든지간에 아이들의 정서를 파악하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한 탓에 톡톡히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 되었건간에 효주는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문득 효주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이 생각났다. 궁리 끝에 효주에게 예쁜 내의를 선물했다. 물론 선물을 받은 효주는 아주 좋아하면서 금세 방으로 들어 갔다. 방에 들어간 효주의 모습을 살짝 들여다 보다 얼굴이 마주치자 효주의 얼 굴이 금방 붉어지고 말았다. 엊그제 기저귀를 갈아준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컸 을까. 이렇듯 효주는 언제나 아이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나를 일 깨워 준다. 우리집은 음식을 통하여 많은 것을 극복한다.바쁜 일정 때문에 정해 놓고 외 식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일 년에 몇 차례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식사 하고, 그 횟수만큼 김치와 된장찌개를 곁들인 한식으로 외식을 한다. 피자나 햄 버거를 먹을 때는 주로 아이들의 얘기에 귀기울여 주고 요즘 유행하는 것들과 변화에 대한 얘기를 한다. 반면 된장찌개를 먹으면서는 어른들의 과거 생활문화, 집에서 다하지 못한 얘기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아 얘기한다. 지방 공연이 많은 관계로 지방에 내려가 있을 때는 전화보다는 편지를 이용한 다. 전화로는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낼 수도 없고 정련되지 못한 말이 불쑥 튀 어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편지를 더 선호한다. 편지에는 지금 있는 지방의 정서 와 분위기 무엇을 하러 이곳을 찾게 되었는지, 그리고 평소 딸아이들에게 하지 못했던 얘기까지 친구에게 얘기하듯이 쓴다. 물론 딸아이의 편지를 받는 즐거움 도 빠뜨릴 수 없다. 어느덧 훤칠하게 커버린 예쁜 딸들의 모습과 함께 10 여 년이 지난 후 독립할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삶에도 문화 가 있다는데 그들의 문화에 나는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아직도 어설프고 모자라는 아버지지만 포용과 관용 그리고 적절한 인색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 된다. 얘들아! 맑고 밝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임진번(1956 년 생)씨네 가족 1987 년부터 극단 안데르센을 운영하고 있는, 그 자체가 동화인 아버지, 하지만 계속되는 공연으로 너무 바빠 가족끼리의 여행은 물론 가족 사진까지 귀할 정도 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어린이와 함께하는 일을 하고 싶어했고 작품에빠져 연구 하고 노력하는 지금의 일을 정말 좋아한다. 앞으로도 더욱 많은 어린이가 공연 예술 분야에 참여하여 밝은 마음을 갖고 모든 가정이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의 창단 멤버로 하는 일의 성격상 주 로 모임 홍보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1 년의 반 이상을 지방이나 해외에서 지 내기 때문에 자주 참석 못하는 것이 늘 아쉽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은 다 좋 은 아버지들이지만 생각을 옮기는 데 인색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좋 은 생각들을 실천하라고 늘 말한다. 셋방집 주인 딸이었던 부인 이인숙(1961 년 생) 씨는 극단에서 연기활동을 했 고 지금은 조명을 공부하고 있다. 연년생인 효주(여, 1983 년 생)와 희정(여, 1984 년 생)이는 바쁜 아빠의 일을 격 려해 주는 다정한 연인. 책읽기와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효주는 학자가, 무엇이든 만들기를 좋아하는 희정이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보일 듯 안 보일 듯, 가끔은 사랑을 숨겨라 오부환(회사원) 우리집은 부모님과 우리 부부 그리고 사내아이 둘, 이렇게 여섯 식구가 사는 대가족입니다. 결혼해서 줄곧 13 년째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불편한 때와 힘들 때도 많았지만 편한안 점과 좋은 점도 많습니다. 특히 자녀 교육 측면에서는 자 연스럽게 인사 예절을 익힌다던가 어른을 공경하는 태도를 아이 스스로 터득하 게 되어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아이들은 먹을 것이 있으면 항상 할아버지 할머 니께 먼저 드릴 줄 알고, 아침이면 "안녕히 주무셨어요"라는 인사로 하루를 시작 합니다. 또 손님이 찾아 오시거나 친척집을 방문하면 으레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린다든지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인 사를 먼저 할 줄 압니다.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좋은 습관을 갖게 되어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가 늘 얘기하는 것은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행동으로 보여 주 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행동으로 보여 준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 이 손을 잡고 무단횡단을 하려는 순간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오늘 딱 한번 만' 하고 무심히 건넌다든지 자녀에게는 "꼭 횡단보도로 건너야 된다"고 가 르치면서도 자신은 지키지 못한다면 아이눈에 어른의 모습이 어떻게 비치겠습니 까. 모르긴 몰라도 '아버지도 거너는데 나라고 못 건너라는 법 있나' 하고 생각 할 것입니다. 다들 그렇겠지만 내 아이들을 보나 다른 아이들을 보나 걱정거리 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먹고 싶은 거 다 먹어야 하고, 사고 싶은 거 다 사야 하고, 갖고 싶은 것은 당장 가져야만 적성이 풀리는 참을성 없는 아이들을 볼 때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막연해지고 맙니다. 입에서 말만 뚝 떨어지면 모든 게


다 된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자식에 대한 적당한 사랑과 적절한 통제는 주체 적 힘을 갖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식구들의 구두를 닦 든 심부름을 하든 자신의 노력이 들어간후 어렵게 물건을 장만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이는 그 물건에 대한 애착도 남다를 것이며 자신의 노력이 들어갔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다루지 않겠습니까? 요즘은 자식이 하나 아니면 둘 특별해야 셋을 키우므로 자식에 대한 사랑이 각별할 수밖에 없겠지만, 어른들 말씀에 자식은 겉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 니다. 그래서 드러내놓고 사랑을 표현하면 할아버지 상투까지 뽑는다는 말처럼 꼬박꼬박 말대꾸에 위아래도 모르고 함부로 행동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습 니다. 게다가 잘못된 교육 방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부만 잘하면 뭐든 지 잘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것 도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을 공부하는 기계나 공부 벌레로 키우려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바깥에 나가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 겨를도 없이 이 학원 저 학원 으로 뺑뺑이를 돌아야 하는 아이들이 그저 안쓰러울 뿐입니다. 너댓 살 만 되면 유아원으로 유치원으로 학원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의 마음 한구석에 아 무도 지울 수 없는 푸른 멍이 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입 니다. 우리집은 3 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인 만큼 아이들과 함께 정해 놓은 가훈 이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 "항상 최선을 다하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 각하고 행동하자." 이 가훈에는 '사람됨됨이'가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우리 부부의 생각 이 들어 있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가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아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 하고 일요일이면 등산, 수영을 온 가족이 함께 즐깁니다. 또 내 욕심만 채우다 보면 타인에게 '이 정도쯤 이야', '나 하나쯤이야' 하는 마음을 곧질 갖게 되는데 '나 하나라도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아이들에게 얘기 합니다. 나 혼자만 잘 되겠다는 좁은 마 음보다는 타인과 더불어 잘 되기를 바라는 넓은 마음을 갖게 되길 바라기 때문 입니다. 긴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바로 자식 키우는 일이라는 것을 부모가 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첫째와 둘째에게 똑같은 교육방식을 적용한다고 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요, 똑같은 반응이 오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로서 나름대로 주관을 가지고 아이들과 생활하다가 도 '아차! 이게 아니구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내 아이가 학교에서건 밖에서건 싸워서 맞을 수도, 다칠 수도, 때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 잘잘못을 가려 주기 전에 제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적 여 유를 줌으로써 스스로 판단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 런데 부모들은 제 자식의 말만 듣고 상대방 부모에게 당장 전화를 건다든가 쫓 아가 따지고 맙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문제가 발생하면 자신의 입장만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 움으로 번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것이 먼저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무모의 희망대로 아이의 인생이 결정되기를 바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이들 도 나름대로의 꿈이 있고 희망이 있고 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줘야 합니다. 어른은 어른답게 아이는 아이답게 맑고 밝은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서로를 그대로 비추어


주는투명한 거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부환(1957 년 생) 씨네 가족 본인 스스로 늦게 철이 들었다는 대기만성형. 그래서 어려서부터 가졌던 야망 같은 것은 없다. 1983 년 대우조선(주)에 입사해 지금은 대우증권(주)에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 인심 안 잃고 주변에 좋 은 사람들이 많기를 바란다. 부인 이정숙씨(1959 년 생) 씨는 장녀라 그런지 막내인 남편을 잘 이해하고 감 싸 준다.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도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얹혀사는 것'이 라 생각해 14 년 동안 고부간의 갈등 없이 잘 지내 아이들에게도 효를 보여 주고 있다. 외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요리도 잘해 조리사자격증까지 취득해 남편에게 는 든든한 '빽'이다. 본인이 말썽쟁이 막내로 노부에게 늘 공부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 놀지도 못하고 공부도 잘하지 못해 어영부영 지냈기 때문에두 아들 세현(1984 년 생)이 에게는 '남자는 뭐든지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한 경험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화투와 카드까지도 다룬다고. 연년생 형제 면서도 성격이 많이 다르다. 세현이는 가만히 앉아 바둑을 두거나 무엇이든지 조립하는 것을 좋아해서 과학자가, 세민이는운동은 뭐든지 좋아해 야구선수나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 장래 희망이다. 1990 년 한창 바쁜 사회생활과 개인적인 일들로 매일 늦고 가족에 소홀해지던 중 시사지에 난 모임 소식을 접하고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의 창된멤버가 되었다. 행사부장으로 여러 야외모임과 국악교육 등을 주최하였 다. 보통 자신이 하는 일에만 최선을 다해 그 일에 메몰되기 쉽지만 모임을 통 해 신선한 자극을 받고 또 여러분들의 이야기만 들어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어 좋다고 한다. 그러나 주로 저학년 위주의 프로그램들이라 고학년이 된 아이들은 흥미를 잃기도 하고 아이들의 휴일은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지낼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 고학년 아이들이 관심 있어 하는 행사를 준비했으면 한다. 최근에는 부친의 병간호로 모임에 소홀했으나, 이제는 부친도 자신을 좋은 곳 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2 장 이 정도는 해야 '좋은 아버지' 진짜 유비같은 아들이 될 거예요 임한준(초등학교 3 학년) 우리 가족은 다섯 명이다. 나이 차이가 한 살씩밖에 나지 않는 동생들이 두 명이고 내가 첫째다. 첫째지만 세 번째 대장인 나는 개구쟁이인 두 남동생 때문 에 속상할 때가 많다. 아빠는 평소 우리에게 좋은 말씀도 해 주시고 정말 잘해 주시지만 같은 잘못 을 두 번 이상 저지르면 우리 삼총사를 한꺼번에 혼내신다. 회초리를 들기도 하 신다. 야단을 맞을 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는다. 그런데도 왜 똑같은 실수를 저지 르게 되는지 모르겠다. 나이 차이가 없는 우리 형제들은 마치 친구같이 재미잇게 놀때도 많고 숙제도 함께 모여서 할 때가 많다. 나는 몸도 크고 힘도 세지만 동생들과 다툴 때 동생 들이 다칠까봐 절대로 때리지 않고 말로 하려고 노력한다. 어쨌든 제일 큰형인


내가 먼저 양보하고 이해해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상할 때도 있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 사람들과 아주 친하게 지내신다. 엽집이나 앞집 가족들과 식사도 하고 일요일에는 온 가족이 이웃과 함께 야외로 놀러도 간다. 많은 사람 이 함께 움직이고 행동하는 게 조금은 불편하기도 하지만 함께 웃고 얘기하고 노는 것에 비하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삼총사끼리 노는 것도 좋지만 옆집 아이들과 한가족처럼 친하게 지낼 때 는 마치 두 동생 외에도 더 많은 동생과 누나가 생긴 것 같다. 언젠가 아빠께 이웃과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것이 무척 좋다고 말씀 드리자 그래서 먼 친척보 다 이웃이 더 낫다는 뜻으로 '이웃 사촌'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말씀을 해 주셨 다. 우리는 동네 친구들과 책과 장난감들을 서로 교환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동 네 형들에게 작아서 못 입는 옷이나 신발을 물려 받기도 한다. 그럴 때는 동네 형과 더욱 친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우리 형제도 내가 입은 옷은 태준이 가 입은 옷은 도준이가 물려 입는다. 물론 옷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신발, 책도 그 렇다. 우리 아버지 직업은 내과 의사이다. 병원에서도 진료 때문에 바쁘시지만 모임 도 무지 많아 자주 늦게 들어오신다. 그럴 때는 우리 삼형제도 늦게까지 기다렸 다가 꼭 아빠 얼굴을 보고 자고 싶지만 어느새 잠든 경우가 있다. 친구분들을 마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집에서 엄마와 우리들이 기다린다는 생 각을 하셔서 다음부터는 조금만 일찍 돌아오셨으면 한다. '절약과 성실'이 우리집 가훈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집에는 오래 쓴 물건이 많 고 물건을 잘 버리지도 않는다. 아버지께서도 병원에 들어오는 깨끗한 광고지를 모와 오실 때가 있다. 우리 형제도 작은 종이 조각에서부터 신문지, 다 쓴 공책 들을 모아 두었다가 폐지를 수집하는 할아버지께 전해드린다. 우리 삼형제는 삼국지와 만화를 제일 즐겨 읽는다. 그런 우리들을 보고 할아 버지와 아빠는 성격이 온순하고 눈물이 많은 나를 유비, 고집이 세고 성격이 급 한 태준이는 관우, 힘이 세고 두루뭉실한 도준이는 장비라고 비유하면서 가끔씩 '유비야' '장비야' '관우야' 하고 부르신다. 제일 큰 나를 보고 눈물이 많다고 하는 데는 찬성할 수 없지만 똑똑하고 지혜 로운 유비로 불리는 것만은 너무도 기분이 좋다. 나는 유비처럼 동생들과 사이 좋게 지내고 동생들을 잘 도와 주고 싶다. 엄마 아빠께 '우리 아들 진짜 유비'라 는 말을 꼭 듣고 싶다. 2 차는 우리가 사겠어요! 오세현(초등학교 6 학년) 지난 6 월 6 일. 우리 하교에서는 현충일 기념 만보걷기대회가 열였다. 장소는 미 사리 조정 경기장으로 둘레가 약 5 키로 정도라고 한다. 5 키로 정도면 만보쯤 걷 는다는 것일까? 나는 지남 여름에 국토순례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 5 키로 정도는 '식은죽 먹기' 라고 생각했다. 전교생이 참여하는 대회라 굉장히 복잡하고 시끌벅적했지만 아 무탈 없이 잘 끝났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점심 시간이 돌아왔다. 이웃에 사는 내 동생의 친 구 중언이네 부모님도 오셨길래 인사를 했다. 우리 부모님과 중언이네 부모님은 이웃에 살면서도 아직 인사할 기회가 없어서 인사를 못하고 지내셨는데 그날 처 음 인사를 하셨다. 처음엔 좀 어색한 것 같았지만 곧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람처럼 식사도 하고 즐겁게 지낸 후 함께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른들끼리 좀더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동생하고 궁리하다가 "아 좋은 방법이 있어" 하고 동생 세민이에게 내 생각을 애기했다. "부모님들을 2 차로 포장마차에 보내 드리자."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생 세민이도 "그래 그것 참 좋은 생각이야" 하 면서 맞장구를 쳤다. "우리도 두 명이고, 중언이도 동생과 두 명이니까 모아 두었던 용돈을 합쳐서 어른들을 포장마차로 모시면 되는 거야." 드디어 중언이네 형제도 우리 생각에 찬성했다. 지난 번에 아파트 앞 상가에 있는 실내 포장마차에 아버지를 따라가 본 적이 있는데 그곳은 가격도 싸서 우리들이 내기에도 별로 부담스럽지 않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어른들게 우리가 2 차로 포장마차에 가서 한턱을 내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어 른들은 생각지도 않으신 2 차 포장마차와 돈까지 내겠다고 나서는 우리들을 보고 어리둥절해 히시며 웃으셨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포장마차엘 가게 되었다. 어른들은 꼼장어 안주에 소주를 한잔씩 하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셨고, 우리 넷은 우동을 한 그릇씩 먹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어른들끼리는 처음 서먹서먹해 하던 분위기와는 달리 아주 친한 이웃사촌이 되었다. 물론 우리들도 더 친해졌다. 항상 이웃 어른께 먼저 인 사하라는 아버지 말씀이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아파트로 이사온 지가 2 년쯤 되었다. 처음 이사 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데 단독 주택에 살던 우리 식구들은 참으로 어색했다. 전에 살 던 동네에서는 이웃들과 서로 인사도 하고 함께 놀러도 다니곤 했는데 아파트에 오니 서로 인사도 하지 않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냥 지나쳐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아버지께서 아파트 전체 사람들은 알지 못해도 같은 엘리베이터 통로에 사 는 30 가구는 알고 지내야 한다며 엘리베이터를 타면 먼저 "안녕하세요. 405 호에 사는 오세현입니다" 하고 소개하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인사를 하려니까 굉장히 어색하고 ㅆ스러웠는데 자꾸만 하다보니 괜 찮아졌다. 그렇게 해서 이제는 이웃과 친해져서 서로 인사도 하고 방문도 하게 되었다. *오부환(103 페이지) 씨의 큰아들

부모님은 볼록한 배를 좋아한다 오세민(초등하교 5 학년) 작년 여름 방학에 형 과 함께 광복 50 주년 기념 주문진에서 임진각까지 보름 동안 걷는 '어깨동무 국토순례'에 참가했다. 그 전 해에는 형만 갔다왔는데 힘들 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잔뜩 기대를 가지고 참가하였다. 그런데 직접 가보니 쉬 울 거라는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둘째 날부터 걸어야 하기 때문에 첫날은 뜨거운 땡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고된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저녁에 자려고 누웠는데 집 생각도 나고 괜히 왔나 하는 생각에 보름을 견딜 일이 꿈만 같았다. 다음날부터 도보에 들어갔는데 지도 선생님들의 "다 왔다, 다왔어" 하는 거짓


말에 속아가면서 열심히 걸었다. 새벽부터 걷다가 아침은 김에 말은 주넉밥에 우유나 두유, 빵, 음료수로 간단한 식사를 했다. 특히 간식에 나오는 막대기 아 이스크림 하나가 더위를 싹 당아나게 해 줄 만큼 꿀맛이었다. 집에서는 하루에 몇 개씩 먹어도 그 맛을 몰랐는데`````. 점심으로 먹은 짜장밥이나 카레라이스, 또 저녁에 나오는 푸짐한 불고기 백반의 맛이란 엄마가 해 주시는 것과는 비교 가 안 되게 맛있었다. 넷째날 처음으로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편지를 받았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집에만 보내 준다면 당장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도 선생님은 "조금만 가면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점점 더 힘들어졌다. 진고개보다 더 힘들다 는 태기산을 넘을 때는 시원한 소나기에 바람까지 불어 별로 낙오하는 사람 없 이 무사히 넘을 수 있었다. 걷다가 힘들고 지칠 때는 마음속으로 '나는 할 수 있다', '꼭 해내고야 말겠다' 는 말을 새기면서 걸었다. 다행히 발에 물집이 안 생겨 잘 걸을 수 있었다. 국토 순례에 참가하면서 처음에는 걷는 것이 무척 힘들어 후회도 됐지만 차차 인내심 과 공동체 의식을 배울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가족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여태까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속상하게 한일, 형과 싸운 일이 너 무나 후회스러웠다. 팀이 다르다 보니 형을 잘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녁이면 몰래 형이 있 는 텐트에 가서 형이 잘 있나 살피기도 하였다. 집에서는 많이 싸우고 미워하기 도 했던 형이건만, 이렇게 함께 고생을 해 보니 500 명 중에 걱정되는 사람은 딱 하나 형뿐 이었다. 더구나 형은 작년에도 참가했고 이렇게 힘이 드는데도 올해 에 또 참가한 것이다. 이제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형과 절대로 안 싸우고, 형 말도 잘 들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원레 작고 마른 편인데 어머니 편지 내용에 '네가 살이 더 빠져서 오면 엄마는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하셔서 밥을 많이 먹었다. 그랬더니 윗배가 불록 튀어나와서 '어머니께서 좋아하시겠지' 하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8 월 9 일, 서울에 입성하여 부모님을 뵐 수 있었다. 양남초등학교에서 어머니 얼굴을 보는 순간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어머니 품에 안겨서 한참을 어머니와 함께 울었다. 어머니도 형과 내가 많이 보고 싶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퇴근하 고 이곳까지 형과 나를 보러 오셔서 정말 기뻤다. 국토 순례를 시작해서 11 일 만에 처음으로 편안하게 잠을 많이 잤다. 드디어 8 월 13 일, 국토 순례 마직막 날. 통일 공원에서 무모님을 만나 아침을 먹고 부모님과 함께 임진각까지 걸었다. 집에 돌아와 할아버자 할머니를 뵈니 역시 우리집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들과 보름 동안이나 떨어져 있으니 가족이 얼마나 소 중한가를 깨닫게 되었고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라는 아버지 말씀대로 어떠한 일이든지 포기하지 말고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처음 2-3 일은 너무 힘들어 나를 보내신 부모님이 밉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시 간이 지날수록 '꼭 해내고야 말겠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한 번도 낙오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해서 나의 늠름한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굳어 졌다. 다녀와서 생각하니 이런 소중한 경험을 하게 해 주신 부모님께 고마움을 느끼 고 친구들에게도 권하고 싶어졌다. 나의 4 학년 여름방학은 앞으로 영원히 잊지 못할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 오부환(103 페이지) 씨의 작은아들 우리 아들 고추가 많이 컸나? 정영빈(중학교 2 학년) 직접 경험으로 얻어진 것은 물론이고 텔레비젼이나 책을 통한 간접 경험으로 도 이 세상에는 참 소중한 것들이 많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내 가족만큼 소중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가끔 텔레비전으로 고아원의 아이들을 볼 때면 부모님 의 소중함을 더욱 크게 느낀다. 더욱이 어머니나 아버지가 안 계시 는 친구들을 생각하면 느끼는 바가 더욱 크다. 우리 아버지는 가정에서도 소중 한 분이지만 우리 사회에 없어 서는 안 될 귀증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방송국이 나 신문사, 잡 지사 같은 데서 자주 집으로 취재하러 오는데 우리집을 이끌어 가는 이야기를 아버지와 주고받을 때면 맞아, 우리집은 다른 집하고는 달라' 하 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아버지는 외박이 잦다. 어떤 때는 한달에 3, 4 일은 집에 서 못 주무시고 밖에서 주무신다. 왜냐하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에 게 자녀 교육에 대한 강연을 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집에 계실 때는 전국 에서 많은 분들이 자녀 문제로 전화 상담을 해온다. 아마 우리 아버지가 아는 사람은 천만 명 쯤 될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좋은 일을 하는 분이라 는 생각이 든다. 그 덕분에 우리 가족도 신문이나 TV 에 서른 번쯤 나왔다. 아버 지는 어머니를 많이 이해하신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엄하고 조금 더 무섭 다. 화난 어머니 얼굴을 보고 아버지가 ..뭘 그래' 하시면 어머니는 웃고 마신다. 어떤 때는 엄마의 궁둥이 를 만지면서 '힘든 일 없는가?' 하면서 거들어 주는 척하시면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신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모든 면이 좋으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우리 아버지는 용돈을 많이 안 주신다. 꼭 필요한 것만 사라 고 적게 주신다. 또한 일을 많이 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잘 하시는 말씀이 '일하 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이다. 그래서 나와 내 동 생은 부억일도 자주 한다. 그 런데 아버지는 일을 시켜도 기분 나쁘게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농담으로 웃으면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즐겁게 하게 된다. 지금은 내가 아침 일찍 학교에 가니까 그렇지만 전에는 아버지와 아침 운동을 많이 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아 침마다 이 불 속 대화를 한다. 어렸을 때부되 아침이면 아버지께저 이불 속으로 들어오신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고추 많이 컸냐?' 했는데. 요즘에는 세상 사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내가 필요한 것을 이때 이야기하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을 이야기해 주신다. 그래서 나는 고민 없 이 사야겠다 안 사아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불 속 대화가 아니라도 우리 아버지는 아는 것이 많아 이야 기 가 통한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말할 때 안 된다고 무조건 거부하시는 것이 아 니라 왜 안 되는지 설명하신다. 그러면 '내 욕심만 차렸구나' 하고 반성하게 되 고 또 옛날 아버지가 크면서 겪으셨던 비슷한 애기를 해주시면 내 주장만 내세 울 수 없게 되 고 여러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참으로 기분 좋은 것은 학교 일 에 아버지가 적극 참여하셔서 내 고민을 많이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 남의 집 아버 지와 비교해 보며 우리 아버지의 좋은 점을 발견한다. 웃음이 많 으시기 때문에 우리집은 언제나 화기애애하고,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여러 종류 의 많은 사람을 만나셔서 그런지 몰라도 이해 심이 많아 우리들을 쉽게 이헤하 시는 것 같다. 또 술을 안 드시 는 것도 좋다. 그러나 담배를 많이 피우시는 것 은 싫다. 그리고 섭섭하시겠지만 한 가지 모르고 계신 일이 있는 것 같아 말씀 드린다. 텔레비전을 볼 때 우리가 보고 싶은 프로가 있는데도 아버지가 보실 프


로가 있으면 우리 형제는 꼼짝 못한다. 가끔은 우리들이 즐겨보는 프로를 보실 때도 있지만 대체로 우리 집은 아버지가 왕이다. 가끔은 어머니가 여왕일때도 있기는 하지만, 아버지가 우리집의 기둥인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커가는 것을 보면 "대견스럽다고"고 늘 말씀하신다. 아마도 든든하신가 보다. 나는 커서 4 층집을 지어서 내 동생하고 식구들이 같이 사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겠다. 정송(170 페이지)씨의 큰아들 몇점일까~요? 김미승(초등학교 6 학년) 여러 아이들에게 자기 아버지 점수를 물으면 아이들은 띵점 99 점 아니면 100 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점수는 아버지를 과 대평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아버지의 단점과 장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점수가 나올 수 있을까? 난 우리 아버지를 과대평가하지 않겠다. 솔직히 우리 아버지에게 점수를 주자면 한 70 점쯤 될 것 같다. 장점을 생각하면 100 점을 주고 싶지만 단점을 생각하니 70 점이 알맞은 점수인 것 같 다. 꽈점이나 깎을 정도의 단점과 100 점을 주고 싶 을 정도의 아 버지의 장점을 공개한다. 장점:우리 아버지는 성적 가지고 때린다든지 나무라시지 않는다. 다른 아이들 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아버지가 갑자기 출장 가셔서 시험지를 못 보셨으면 좋 겠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하는데 난 그런 것을 생각하고 느킨 적도 없으니 우리 아버지는 참 좋은 아버지인 것 같다. 단점:말로만 약속을 해 놓고 잘 안 지키신다는 것이다. 특히 난 둘 째라서 그 런지 언니보다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많은 편 이다. 그럴 때는 아버지께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예쁜 웃음을 띠 고는 '아빠, xx 좀 사주세요'라고 말하곤 한다. 아버지째선 애교에 못 당하셔서 '알았다. 알았어'라고 하시며 새끼 손가락 끼고 약속을 하신다. 근데 그건 그때뿐 그 이야기만 나오면 슬 슬 피하신다. 내 가 아버지면 팍팍 사줄 텐데... 우리 아버진 신세대이시다. 지금 나이로 보면 영 락없는 체크 세대 (체크세대란? 병원에 가서 이것 저것 체크를 쌔 보는 세대 로 38 세~45 세) 지만 우리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과는 달리 신 세대시다, 저번 출장 휴가로 오셨을 때 아버지는 어린아이 떼쓰듯 어머니를 졸라 베네통의 우산, 가 방, 넥타이 등을 사셨다. 다른 아버지 같았으면 '뭐? 빈깡통? "베네통이 뭐야?아 이스박스 상자 이름인가?' 라고 하시며 누리꾸리한 것들을 사셨을 텐데 말이다. 그런 걸 보면 우리 아버지는 신세대인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남행열차 같은 흘러간 노래들도 좋아하시지만 신세대 노래도 좋아하신다. 특히 노이즈의 ' 상상 속의 너'를 가장 좋아하신다. 이 점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닮으셨다. 어머 니 도 요즘 김정은의 흐로포츠 가사를 열심히 외우고 계신다. 난 신세대 부모님 을 가졌으니 누구보다 행운아다. 우리 어머니 이야기로는 아버지를 보고 한눈에 '뽕~' 하고 반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매력적일까? 하긴 우리 아버 지께 선 천재적이시다. 중국어에 영어. 한문까지 잘하신다. 중국 어는 거의 마스터하 셨고 다른 것들은 완전히 마스터하셨다. 한 문은 열 번 쓰면 딱 외워진다고 하 신다. 하옇튼 우리 아버진 떠 리부터가 좋으신 것 같다. 그 머리를 이어받은 나 도 음~ 머리 가 남들보다 좋은 것(?) 같은데...... 이 글은 보잘 것 없지만 아버지들께서 읽어 주셨으면 한다. 그리공 우리 아버지 를 포함한 아버지들이 자신의 단점과 장점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한 다. 그리고 모든 아버지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녀들과 한 약속은 꼭 반


드시 지키셔 야 해요!' 이 한마디이다. * 전 운영위원장 김병건 씨의 작은딸 아주 가끔은 헐크가 되는 아빠 오보람(중학교 2 학년) 안녕하세요? 제목이 그럴싸하죠. 전 아버지라는 말보다 아빠라는 말이 더 친 근감 있게 느껴져 늘 이떻게 부른답니다. 홴지 아버지라고 부르면 어색해서요. 괜찮나요? 전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우리 아빠를 꼽 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 아빠는 이 세상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 가운 데 한 사람입니다. 아빠가 왜 한없이 좋고 존경스럽냐고 그 이유를 누군가 물으 신다면 전 이렇게 말하겠어_e, 이유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저회 아빠는 제가 5 학년 때부터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어 주셨습니다. 생일 파티도 해당되겠지 만 그래도 굳이 이름을 붙 이자면 '우정을 잊지 말라는 파티'라고 할까요, 이 파 티는 1 년 에 한 번씩 열리는데 게임과 먹올 것이 풍부해요. 이 파티에 온 아이 들은 한결같히 우리 아빠를 좀 색다르게 보지요, 모두들 입 을 모아 우리 아빠 를 멋있고 아이들을 생각해 줄 줄 아는 신사 (?) 라고 말하죠. 이런 아빠가 세상 에 어디 있을까요. 다른 아빠들과 달리 꼭 내 친구 같습니다. 아빠는 한두 번 본 제 친구들을 잊지 않고 기억 해서 되묻곤 합니다. 그게 전 좋아요. 어디 이런 아 빠 계세요? 1 ~2 년 전만 해도 아빠와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 나에 대해서 모르 시는 게 없는 우리 아빠였는데... 요즘은 도리어 내가 나 자신 에 대해서 아빠에 게 말하는 것을 숨기려 하는 것 같아요. 언젠가는 '4 학년 때까지만 해도 이 아빠 가 목욕시켜 주었는데..' 하시며 서운해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죄송하기도 했지만 이젠 아빠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왔다고 생각합 니다. 아빠는 하 루에 두세 번 전화를 안 하시면 손에 무좀이 생긴다 나요? 전화하시는 걸 책 읽 는 것만큼이나 좋아하시는 아빠. 그 래서 전화가 안 오면 몇 번이고 전화통을 무심히 바라보게 됩니 다. 가끔은 수화기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사랑해'라는 말이 날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특별한 날은 잊지 않으시는 나의 아빠. 저희 집은 원래 생일 파티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4 학년 땐가 5 학년 때였을 겁니 다. 저도 제 생 일을 잊어먹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 아빠께서 갑자기 외식을 하자며 우리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웬 외식이냐?' 고 신나서 물어 보는 우리들에게 ' 너희들 생일이 잖아' 하며 씨익 웃으셨습니다. 그때 눈물 때문에 아빠의 모습이 점점 흐려졌습니다. 우리집의 둘째와 저는 생일이 하륵 차이 인지라 생일을 한 커번에 셉니다. 이런 식으로 아 u 마는 우리들의 특별한 날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고 꼭 작은 선물이라도 챙겨 주십니다. 숙제를 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으레 엄마보다는 아빠 에게 먼저 물어 봅 니다. 아빠는 언제나 함째 풀어 보려고 애를 쓰시고 잘 가르쳐 주십니다. 하지만 잘 안 풀리면 '보람이가 배우 는 것인데 왜 이렇게 어렵게 나왔나? 하시며 진땀 을 흘리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너무 어려우니 그런 문제는 다시는 물어 보지 말 라는 농담도 하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네 스스로 할 수 있으 니 먼저 고민하고 풀어 보도록 노력한 후 안 될 때 물어 보라' 고 하십니다. 더 이상 아빠째 기댈 수도 없고 해서 오기로라도 나 혼자 하려고 하지만 썩 잘 되고 있지는 않습니 다. 그러나 계 속 해 볼 참입니다. 친구 같고 친절한 아빠가 정말 좋습니다. 그 렇다고 해서 다른 아빠들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가 바라는 아빠의


모 습은 다르겠지요. 위엄 있는 아 u 마를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을 테고 많이 아 는 아빠를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을 겁니다. 전 친구 처럼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그런 아빠를 좋아합니다. 아빠는 몸 이 피곤해도 다 큰 저의 어리광도 받아 주 시고 함께 놀러도 잘 갑니다. 괜지 모르게 엄마보다는 아빠가 더 좋아요. 엄마의 잔 소리 때문인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항상 좋은 건 아니에_9_ 저희 아빠는 부 처님이나 하 나님처럼 신이 아니니까요. 동생들 편을 들어줄 때, 날 무시할 때가 제일. 아니 죽기보다 더 싫어요. 동생 보아에게는 1 시간만 공부하라 하시면서 내 게는 더 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는 아빠도 보아도 얼마나 싫은지... 하지 만 아 빠도 보아도 진짜로 미워한 적은 없습니다. 어느 때는 우 울해 있는 제 기분을 맞추려고 진땀 빼시기도 하고 남들보다 아니 나보다 유행을 더 따라가는 특별하 고 별난 아빠. 머리에 횐 머리가 생겨도 항상 젊으셔서 내 남자친구 같은 아빠. 할머니를 언제나 모시고 싶어하는 아빠. 이런 아빠의 모습을 많이 닮은 내가 아 빠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빠,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아빠를 사랑 해요.' 오두환(44 페이지) 씨의 큰딸 예민한 너무도 예민한 김다혜(고등학교 1 학년) '아빠...' 계속 불러 보아도 싫지 않은 말이다. 고사리 작고 귀여운 손으로 재롱 을 떨던 어린시절부터 인생의 첫째 고비라고 흔히들 말하는 고등학교 진학을 마 친 지 금까지 언제나 내 마음을 포근하게 해 주시는 소중한 이름이다. 엄마께서 는 항상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시지만 어디 사람의 습 관이란 것이 한날에 바 꿀 수 있는 것이어야지. 좀처럼 어색하고 힘들다. 그래서 아직도 '아빠' 라는 말 을 쓴다. 팬지 정겹게 들 려서 좋기 때문이다. 매일 보기는 하지만 펜을 들자니 쑥스럽기 도 하고 손끝도 저려온다. 유난히 다정한 아빠는 아직도 친구처럼 편 안하다. 가족이라는 한 배를 탄 운명이라는 고리가 아빠와 나를, 엄마와 나를. 동생 들과 나를 그리고 우리 모두를 서로 이어 주는 모양이다. 내가 본 아빠의 꼬습이 매양 같지는 않지만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꽤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분이시다. 일을 핑계로 가족에게 무관 심하지 않으신 것을 보면 상당히 가정적 이면서 내적인 세계를 즐기시는 것 같다. 누구나 그렇듯이 사람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다. 마찬가지로 아빠의 이면에도 장단점이 고루 존재한다고 할 수 있 다. 단순히 나만의 견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아님이 확 실하다. 아빠께선 우리의 사고방식과 태도를 잘 이해해 주시고 수용해 주신다. 바로 이 점이 아빠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더욱 크게 한 다. 가족간의 갈등은 물 론이고 사회 갈등까지 야기시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세대 차이'라면 일단 우 리집은 그런 걱정은 없 는 셈이다. 또한 아빠께서는 종종 아름다운 글귀를 적어 주신 다. 내가 힘들어 할 때는 편지로 아빠의 마음과 사랑을 전해 주 신다. 이렇 게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걱정해 주시 는 아빠의 따스한 눈물과 손길이 있기에 우리들이 이떻게 자랄 수 있었다고 믿는다. 한없이 자상하신 것 같은 아빠지만 한편으로는 바라고픈 점도 있다. 아빠께서 좀더 절도 있게 김정 을 조절하셨으면 한다. 작 은 일에도 예민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면 사물에 대한 넓은 아량으로 격하지 않게 차분히 해결하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감 정의 기복만 잘 조절하신다면 우리에게는 더없이 좋은 아빠가 될 테니까. 이제 고등 학생이 된 나도 '인생이란 항해와 같아 많은 시련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만 수많은 시련을 겪어 온 아빠는 힘든 생활 속에서도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살


아오실 수 있었다며 이런 말씀을 학신다. '우리들의 삶이란 한 그루의 포플러 나 무와 같은 거란다. 힘 든 나날의 삶이지만 참고 이겨 내면 언젠가 무성한 잎으 로 풍성 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결코 주저앉지 않는 거란다. 인생에 있어 가장 증요한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나름 대로의 확고한 목표를 설 정하는 것이요, 나머지는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란다." 늘 들어온 말이 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새롭다. 오랜만에 아빠의 얼굴을 화폭에 담아 보았다. 날 보며 손짓하 는 듯 웃음을 머금고 계신다. 저 멀리 반짝이는 별빛이 아빠의 눈 일 거란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쳐갔다. 하늘처럼 맑고 바다처 럼 넓은 아빠의 마음처럼 온 세상에 사랑이 가득하길 바라며 끝 으로 파이팅을 외치고 싶다. '아 빠. 힘내세요.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할게요. 아빠, 파이팅 김동열(87 페이지) 씨의 큰딸 엄마와 아빠 가운데 누가 더 좋니? 김미진(중학교 1 학년) 아빠와 함께 지내온 지도 벌써 13 년이 되어간다. 13 년이란 시간. 그리 길지는 않지만 서로를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 세월 동안 한결같이 우리에게 디정한 친구처럼 대해 주시는 아빠. 우리가 짜증나는 일이 있을 때는 옆에서 웃 음을 보이시며 달 래 주시고 슬픈 일이 있을 때는 슬픔을 같이 하시며 위로해 주 시고 기쁜 일은 함께 기뻐해 주시는 모습을 보면 나는 아빠가 친구처럼 편안 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때로는 호랑이처럼 무섭게 변하시는 아빠. 내가 옳지 못 한 행동을 했을 때 아빠는 서슴지 않고 매를 드신다. 언제나 예의를 지키며 올 바르게 행동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시 는데 내가 아빠의 기대를 저버리는 때가 많 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내가 신체적인 아픔을 느낄 때 아빠는 정신적인 아 픔을 느꼈으리라는 것을. 모두가 잠든 밤에 퉁퉁 부어오른 내 다리를 어루만지 며 눈시울을 붉히던 아빠의 마음을 이제 나는 느낄 수 있다. 아빠는 호랑이처럼 성격이 거칠어질 때도 더러 있지만 하니님 처럼 너그럽고 인자하시다. 우리의 짜증과 응석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 주시고 스트레스 가 많은 우리에게 따뜻한 사랑이 가득 담긴 미소를 보내 주시는 아빠에게서 나는 이 시대가 필요 로 하는 참다운 아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친구들은 그런다. 엄마 아빠 두 분 가운데 누가 더 좋으냐고 물어 본다면 엄마라고 말할 거라고 말이다. 물론 나도 그랬다. 철부지이던 옛날에는 그저 옷 입혀 주고 밥 먹여 주시는 엄마가 최고라 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선뜻 엄마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아빠가 내게 못해 주시는 것을 엄마가 해 주시는 것이라면 엄마가 내게 못해 주시는 것을 아빠가 해 주신다는 것을 크면서 느꼈기 때문이다. 아빠와 함께 등산도 다니고 오목도 두고 조겅도 하고 운동을 하면서 아빠와 더 가까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만 좋다고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들은 아빠와 함께 있기가 어색하고 쑥 스럽다고 하지만 나는 아빠가 오히려 더 편하다. 먼 훗날 내가 사회인이 되었을 때 누가 내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대답할 것이 다, 우리 아빠'라고 말이다. 김동열(87 페이지) 씨의 작은딸 왜냐하면? 편지가 있으니까 임효주(중학교 2 학년) 우리 아빠는 '극단 안데르센'이라는 아동극 극단의 단장이시다. 공연, 작품 제 작. 홍보. 행사 계획, 공연할 장소 찾는 일 등을 단원 여러분들이 각자 분담해서


하시지만 전체적으로는 우리 아빠가 책임지셔야 한다. 그런 일과 더불어 극단 단원들 하나하나까지 다 신경 쓰셔야 한다. 더구나 지방 곳곳을 다니시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1 년에 180 일 정도, 쉽게 말하면 l 년의 반은 거의 지방에서 보내신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모든 일들 때문에 우리 아빠는 피곤해 보이 고 너 무 힘드신 것 같다. 이런 아빠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안마 해 드리기, 심부름 잘하기 정도. 하지만 나와 동생 희정이는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다고 생각히 고 아빠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다른 일을 찾기 시작했 다. 얼마되지 않아 우린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편지'였다. 엄마 아빠가 지방에 다녀오신 어느 날, 우리는 편지를 써서 안방 화장데에 올려놓았다. 그때 만 해도 우리가 너무 형식적인 편지를 썼는지 부모님께서는 좋아하시기는 했지 만 약간 낮설어 하시고 부담스러워하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도 그 편지를 쓸 때 '뭘 쓰지? 하면서 너무 힘들 고 어덥게 썼다. 그레서 우리는 형식 같은 것 은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쓰고 싶은 대로, 편한 대로 편지를 쓰기로 했다. 보통 종이에 그림도 그리고 예쁘게 오리기도 하고 해서 그냥 편하게 쓰는 것이다. 얼 마 후 엄마 아빠가 지방에 다녀오신 날, 우린 그렇게 편지를 써서 드렸다. 엄마 와 아빠는 예쁘고 귀엽다 며, 그리고 너무 정성스럽게 만들었다며 정말 좋아하 셨다. 네용 은 그리 길지도 않았다. 그때 내가 쓴 편지 내용은 이렇다. '아 빠. 지방에서 힘드셨죠? 아빠가 힘들게 일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s, 아빠가 일하시 는 건 우리나라 전국에 있는 아이들을 위 한 거니까요. 그래도 너무 힘들게 일 하시면 안 돼_인 왜냐면 아 빠 건강이 나빠지실 테니까요. 언제나 건강한 모습 으로 생활하 세요. 사랑해요~. 정말 길지 않은 글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쓰 고 싶은 대 로 쓰니까 형식적이고 딱딱한 편지보다 휠씬 더 감정이나 의사 전달 이 잘 되었던 것 같다. 만약 아빠가 늦게 들어오시는 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이렇게 메모 형식으로 쓴다. '아빠, 저 오늘 영어 선생님한레 칭찬 받았어 요. 잘했죠? 아참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이렇게 여러 방법으로 편지를 쓸 수 가 있는데 나는 어떤 방법 으로 편지를 쓰든 편지 쓰기를 정말 좋아하고 편지를 쓸 땐 너 무나도 즐겁다, 나한테는 또 한번 즐거울 때가 있다. 아빠나 엄마가 주 신 편 지를 읽는 시간이다. 물론 언제나 작은 층고 한마디쯤은 들어 있다. 아빠 의 편지는 대부분 편지 형식이 아니다. 우리 아빠의 취미 이자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서예. 바로 붓글씨로 하시고 싶은 말 씀이나 좋은 말들을 정성스럽게 써 주신다. '항상 밝고 맑고 명랑한 얼굴, 생각, 행동, 협동, 사랑, 책임 완수 등을 통하여 우리는 더욱더 항상 밝고 맑고 명랑한 가족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이런 글을 쓰셔서 거실이나 방에 붙썩 놓으신다. 이렇게 대부 분을 붓글씨로 써 주시지만 때로는 편지나 메모로도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전해 주신다. 지 방에 가셨을 때는 편지를 보내 주시고 평상시에는 짧은 메모도 남겨 주신다. 내가 어렸을 때 무슨 일을 잘하지 못하고 실수해저 엄마께 굉 장히 많이 혼나고 꾸중을 들은 일이 있었다. 너무나도 큰 층격 을 받았던 타라 저녁 때까지 혼자 슬퍼하면서 방에 있었는데 아 빠가 들어오셔서 편지를 주고 가셨다. 난 그 편지 를 읽었다. '효주야.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는 말이 있다. 오늘 실 수로 혼 나긴 했지만 이번 일로 더욱 큰 깨달음을 얻어서 다음부 터는 실수하지 않도록 하면 되잖니? 그리고 누구나 다 실수는 할 수 있는 거란다. 그러니깐 슬퍼하지 말고... 알았지? 효주를 사랑하는 아빠' 난 그때 그 편지로 기분도 풀렸고 아빠의 따뜻한 사랑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아빠께도 단점이 여러 가지 있다. 첫째는 너무 독선적이라는 것. 어떤 일이든지 아빠의 뜻과 생 각만이 옳다


고 주장하고 행동하신다. 그리고 너무 아빠의 뜻에 만 따르도록 하시고 모든 일 을 아빠의 상황에만 맞추려고 하시 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나와 희정이가 급히 아빠한테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면 아빠는 '시간 없다' 거나 '피곤하다'고 하시 면서 나증에 얘기하자'고 그러신다. 반대로 우리가 할 일이 있다거나 피곤해 하 는데 아빠는 우리를 불러서 아빠 하실 말씀만 하시고... 이런 식으로 우리 입장 이나 상황을 생각해 주지 않으실 때가 많다. 또 다른 단점은 아빠께서 우리한테 는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어라' 하시면서 아빠는 음식에 대해 너무 까다로우 신 것 같다 는 점이다. 이렇게 아빠께도 단점은 있지만 머지 않아 고치실 거라 고 믿는다. 물론 고치시면 좋겠지만 고치지 않으셔도 난 지금 이대로의 아빠의 모습도 좋다. 또 내가 좋아하는 아빠와 더 가깝게 의사 전달을 할 수 있고 쓸 때와 읽을 때 즐거움을 주는 변지'가 너 무너무 좋다. 난 앞으로도 아빠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빠 와 나 사이의 세대 차이를 좁힐 것이다. 그리고 자식들 이 커가 면서 부모님과 데화하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예를 많이 듣고 보 았는데 우리는 문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편지가 있으니까... 임진번(99 페이지) 씨의 큰딸 또 갈래요! 송 슬바센나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주말에 치악산으로 1 박 2 일 동안 여 행간다는 소식을 아빠에게 들었 다. 나는 벌써부터 기차를 타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잠을 잘 때도 생각했고 꿈도 꾸었다. 드디어 토요일 학교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오려고 했는데 아빠 께서 정문에 차를 세워 놓고 기다리고 계셔서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청량리역에서 함께 떠날 다른 가족들과 원주로 가는 기 차 통일호를 탔다. 기차 창 밖으로 퐁경을 보니 한강에서 신나 게 수상스키를 타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빠께서는 팔당댐을 지 날 때 서울과 주변 수도권 지역에 생 할용수와 공업용수를 이곳 에서 공급한다고 설명해 주시며 그래서 이곳에서 낚 시를 하거나 더럽히면 안 된다고도 말씀하셨다. 원주에 도착한 우리 가족과 다 른 가족들은 버스로 바꿔 타고 치악산으로 향했다. 조금 올라가다가 너무 험해 서 버스로 올라 가지 못하고 할 수 없이 걸어서 올라가게 되었다. 나는 내 짐 가운데 가장 무거운 배낭을 메고 료분 정도 올라갔는데 땀에 홈 뻑 젖었다, 텐 트를 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햄, 김치, 고 기, 고추장, 소시지들을 넣은 부대찌개는 너무나 맛있었다. 밤 에는 캠프 파이어를 했다. 나도 어른들이 주는 나무를 불 속에 집어넣었다. 기차 여행에 참가한 가족들은 청팀과 백팀으 로 편 을 갈라 시합을 하기로 했다. 맨 먼저 닭싸움과 씨름을 했는데 나는 부대 장이어서 두번째로 경기에 나갔다. 나는 닭싸움에서도 이기고 씨름에서도 안다 리걸기로 이겼다. 결국 4 대 0 으로 이긴 우리 편은 상대 편에게 절을 받았다. 다 음날 아침, 아침 식사로 잡탕(?) 을 먹고 운동을 하기 위해 체력 단련장으로 가 서 줄타기, 철봉 뛰어넘기 등을 했다. 나는 줄을 타고 올라갔는데 거기에 '오디' 가 있었다. 오디는 뽕나무 의 열매로 빨간 것보다 잘 익은 검은 색이 더 맛있다. 오전 10 시에는 다시 어제 나눈 팀으로 시합을 했다. 경기 종 목은 씨름. 닭싸움, 공굴려 달리기 등이었다. 씨름에서 5 학년 형과 맞붙어 힘에 밀려 넘어지고 말았 다. 그러나 닭싸움에서 다 시 맞붙게 된 그 형은 뚱뚱해서 균형을 잘 잡지 못했 다. 그것을 알고 형이 공격해 올 때 슬쩍 피하자 형은 균형을 잃고 넘어지 고 말았다. 결국 닭싸움에서는 내가 이겼다. 마지막으로 공굴려 달리기에서는 달리


기가 빠른 내가 맨 끝으로 가서 공을 위로 전달해 주면서 달리다가 막판에 공을 잡고 힘껏 달렸다. 상대편또 막 달렸지만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열 심히 달려 서 이겼다. 감자탕을 점심으로 먹었는데 시합을 하고 나서인지 밥맛이 좋 아 세 그룻이나 먹었다. 점심 설거지는 내가 당댄이었다. 시냇 가에 가서 그릇을 깨끗 이 닦고 텐트로 가려고 할 때 무언가 지 나가는 것을 보았다. 들쥐였다. 언젠가 '들쥐는 생쥐보다 힘이 세다'는 아빠의 말씀이 생각나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막 뛰 어 돌아왔다. 사람들은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고 아빠와 나도 텐 트와 짐 을 싸서 산을 내려왔다. 여행을 끝내고 청량리역에 도착한 우리들은 서로 인사 를 하고 헤어졌다. 너무나 즐겁게 이틀을 보내서인지 아꺼움이 남았다. 집으로 가기 위해 전철을 타고 명학역에 내리니 엄마께서 아 빠와 나를 기다리고 계셨 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제 오늘 있었던 일을 열심히 엄마께 얘기해 드렸다. 엄마도 너무 신나고 좋은 경험을 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가족끼리만 가는 여 행도 좋지만 여러 가족과 함께 가는 여행도 재미있고 어떤 프로그램 을 정해 그 대로 하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과 생 활할 때는 협동심이 필요하 다는 것도 알았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기차여행>에 참여한 자녀 이 아들, 믿어주세요! 김민철(초등학교 4 학년) 아버지가 싫다는 아이들은 별로 없겠지만 내게 아버지라는 존 재는 좀 남다르 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제일 좋아한 다. 아버지의 웃는 모습은 정말 멋 지다. 아버지가 안 계셨다면 나는 제대로 하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 다. 아버지 는 나에게 한자도 가르쳐 주시고 칭찬도 해 주시지만 무엇보다도 나와 데화를 많이 하신다. 그날 속상했던 일, 기뻤 던 일. 친구와 다투었던 일까지도 아버지 께 애기하다 보면 다투 었던 친구에게 먼저 사과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학 교 생활 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집만의 특별한 대화 놀이 (? 가 있다. 3 분 대화 시간이다. 아버지, 어머니. 내가 각각 돌아가면서 5 분씩 이 야기하 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 가 아버 지가 되어 다른 입장에서 얘기를 하는 역할 놀이이다. 처음에는 재미있기만 했 는데 지금은 내 입장만 고집하지 않고 아버지 어머니 입장을 생각할 수 있게 되 었다.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 가운 데 한 사람뿐 인 장애인이지만 모든 일에 열심이시다. 아버지께 서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 관 절염을 밟으셔서 두 다리가 불편하기 때문에 목발 두 개를 짚고 다니신다. 하지 만 우리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보다 더 많은 기회를 래게 주신다. 아버지는 나와 내 친구들의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한다. 작년에는 환경 보존을 위한 남산걷기대 회에 우리 가족과 동네 친구들이 함께 참가해서 7. 5km 를 끝까지 걸었다. 나중 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아버지는 이 걷기대회가 끝난 뒤 일주일 동안이나 다리와 겨드랑이에 약을 바르고 출근하셨다고 한다. 또 한민족 체전 때도 비가 주룩주 룩 오는데 새벽 여섯시까지 올림픽 공원 출발점에 도착하여 동네 친구들과 달리 기 대회에 참여하신 열성 파시다. 아버지는 유네스코 청소년 지도자 회원이기 때문에 5 년 전부터 우리 가족도 가족 캠프에 참억하고 있다. 캠프에서는 두부 만들기, 인절미 만돌기, 아스팔트에 그림 그리기 같은 놀이를 하고 또 밤에는 참 가한 모든 가족이 산행을 하는데 아버지도 일 반 사람들과 똑같이 산행에 참여 하신다. 힘드셔서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 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아버지는 장애인이지만 한번도 장애를 탓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 모든 행사를 먼저 알아 오셔서 준비하고 함께 참옇하신 다. 지난 여 름방학에는 우면사회복지관에서 사씩복지냅인 은초록 이 주최한 개구쟁이 음악 제에 참가하였다. 아버지는 이 행사에 참썩하기 위해 여름휴가를 내시어 폐품을 이용한 =1 세기 새롬 이'라는 이름의 눈사람을 같이 만드셨다. 이 눈사람 만들기 행 사에서 우리 가족이 만든 '21 세기 새롬이'가 대상을 받아 상패 와 상품도 받 았는데 모두 아버지 덕분인 것 같다. 개구쟁이 음악제에는 100 여 명의 어린이들 이 예선에 참가하였 다. 나는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에 맞춰 내가 개발한 춤을 추 었는데 예선을 통과해서 결선에 올라갔다. 결선에서 상은 못 탓 지만 동네 어른들과 부모님께 칭찬을 들었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무지무지 자랑스럽다. 1993 년에는 서울특 별시에서 주는 시민상을 받으셨고 l994 년에는 올해의 좋은 아버지상을 수상했을 정도이다. 그 덕분에 우리 가족은 텔레비전 과 신문, 라디 오에 나가기도 했다. 아버지는 한국자녀교육상담소에 다니시고 다른 활동도 거 의가 청소년과 관련된 일을 하신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서울가 정법원 소 년자원보호자협의회에서 상담을 맡아 하셨고 흥사단 에서도 청소년 유해환경 감 시단장으로 활동하신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밖에서도 바쁘시고 집에 계실 때도 밤낮 으로 계속 사람들이 찾아와 늘 바쁘시다. 150 세대가 살고 있는 우리 아파 트의 통장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물으러 오시는 분, 부탁하러 오시는 분, 누가 아 프다고 상의하러 오시는 분, 사고가 생겨 인터폰으로 신고를 부탁하는 분까지 아버지를 찾으신다. 아버지께서는 전화 상담하시고 어머니는 인터폰 받으시고 나 는 벨소리에 뛰어나간다. 아버지가 통장인지, 어머니가 통장인 지 구별을 못 하겠다. 재활용품을 분리 수거하는 일요일에는 주민들과 함께 동네도 깨끗하게 하고 버리는 습관보다는 절약하는 것이 환경 오염을 예방하는 길'이라고 말씀하 신다. 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셔서 서초구 우면동에서 중랑구 면목 동까지 버스 를 세 번이나 바꾸어 타시면서 출근하시니 얼마나 힘드실까? 그런데 퇴근하고 오시면 동네 어른들과 동네 일로 이 야기하시고 동네 형들과 누나들도 만나신 다. 우리 마을은 처음에 마을 버스가 없어서 불편했다. 아버지께 서는 동네 사람 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아파트 단지까지 버 스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드셨는 데 지금은 버스 열 대가 다니고 있다. 또 가까운 복지관에 동네 아이들의 숙제 를 가르쳐 주는 자원봉사자 대학생도 올 수 있게 힘써 주셨다. 아버지께서는 1952 년 12 월 12 일이 생일이시고, 어머니는 1952 년 5 월 5 일이신데 두 분은 1985 년 5 월 12 일 대학로 흥사단 강당 에서 결흔식을 올리셨다. 그리고 서른다섯이라 는 늦은 나이에 나를 낳으셨기 때문쎄 처음 보는 분들은 막내가 이쁘게 생겼다 고 하신다. 늦게 본 아들이니 얼마나 귀하냐고 하시지만 우리 부모님들은 귀하 게 여기지 않을 때가 많은 것 같아 솔직히 불만이 많다. 특히 동네 아이들과 함 께 어울릴 때 다른 아이들부터 챙기시면 정말 속상하다. 그리고 아버지도 단점 이 한 가지 있다. 어머니 말씀은 잘 믿 어 주시면서 내 말은 잘 믿어 주지 않아 외롭고 쓸쓸하고 썰렁 하다. 아무리 내가 덜렁대고 개구쟁이지만 내가 한 약속 은 언제 나 지키려고 노력하는데 가끔 나를 믿지 못하시겠다는 아버지의 눈빛을 보면 정말 슬퍼진다. 아버지, 이제부터라도 저를 전적으 로 믿어 주세_인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시는 아버지께 아주 크게 짝짝짝 박 수를 보내 드린다. 적극적 으로 아버지의 뜻을 도와 주시는 어머 니께도 짝짝짝 박수를 보내 드린다. 불편 하신 몸이지만 열심히 사시는 우리 아버지 파이팅! 우리 아버지 멋쟁이! 김갑재(33 페이지) 씨의 아들


세 여자와 좋은 아버지 서한나(초등학교 6 학년) 아버지와 어릴 때부터 함게 놀고 춤추며 자랐기 때문인지 우리 아버지는 우리 에게 친구 같은 분입니다. 아버지는 아심 에 출근하실 때와 밤에 잠자리에 들 때. 하루에 두 번 이상 꼭 안아 주시며 뽀뽀를 해 주십니다. 물론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엄마에게도 뽀뽀를 해 주시는데 엄마는 눈을 감고 행복해 하는 눈치입니 다. 동네 아이들과 줄넘기를 하고 있을 때면 우리와 함께 줄넘기 도 하시고 줄 도 돌려 주시면서 꼬마야 꼬마야 뒤로 돌아라. 꼬 마야 꼬마야 땅을 짚어라, 꼬 마야 꼬마야 만세를 불러라, 꼬마 야 꼬마야 자~알 가거라' 하시는데 얼마나 재 미있는지 모릅니 다. 토요일이나 국경일에는 일찍 집에 들어오셔서 불고기나 떡 볶기를 직접 만들어 주시는데 엄마가 만들어 주시는 것보다 더 맛있어_9. 엄마 가 들으시면 서운해 하실지도 모르지만 사실인걸 어떡해요. 집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우리 가족 전부가 춤을 출 때는 너무나 행복하답니다. 어느 때는 동네 친 구들이 집에 와 있다가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기도 하는데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친구들이 더 쑥스러워하는 것 같아요. 지난 5 월에는 학교에 아버지께서 일일교사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 씀해 주셨 고 또 포크댄스도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날은 얼마나 아버지가 자랑 스럽고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아이들도 부러워하는 눈치였 습니다. 아버지는 가 끔 족보를 펼쳐 놓고 조상들의 이야기도 들려 주 십니다. 처음에는 순전히 한자 로만 된 책을 보고 딱딱한 이야긴 줄 알았는데 아버지께서 선조들의 일화와 전 해 내려오는 이야기 를 쉽게 풀어 주셔서 재미있게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 금은 조상에 대한 공경심도 갖게 되었고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어머 니의 어머 니들이 얼마나 소중한 분들인가 알게 되었습니다. 월요일은 우리 가족에게 특별 한 날입니다. 다른 집처럼 회의가 열리는 날인데 회의도 하지만 게임도 하고 노 래도 부르며 노 는 시간입니다. 회의 때는 자신의 주변 얘기부터 고민까지 이야 기합니다. 또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그때 말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집은 한 달 예산을 공개하기 때문에 그 예산에서 살 수 있 는 것과 없는 것을 정한니다. 살 수 없을 때는 당장은 못 사도 우선 순위를 정해서 처리합니다. 무언가를 사 달 라고 할 때 무조건 안 된다고 하시면 정말 섭 섭할 텐데 우리집은 예산을 공개 하기 때문에 무작정 사 달라고 떼를 쓸 수가 없습니다. 또 너무 비싼 것은 우선 순위에 따라 살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이때 자신의 용돈을 절약해서 모았 다 가 살 때 합하기도 합니다.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콤니다. 아 마 아버지는 돈의 중요함과 물건의 소중함을 함께 깨닫게 하기 위해 예산을 공 개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여러 사람들과 많이 어울려야 한다고 말씀하시 면서 학교의 단체 캠프나 걸스카우트 캠프에도 적극 참여하라고 나보 다 더 보 채시는 편입니다. 초둥학교 Z 학년 때는 아버지와 외국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엄 마와 떨어져 독럽심도 가져 보고 우리 와 많이 다른 여러 환경이나 풍경들을 보 고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비행기와 호텔에서 지켜야 할 예 절과 주의점을 일러 주셨습니다. 특히 호텔 방에서는 엄마가 안 계셔서 아버지께서 옷 입을 때와 목욕할 때 도와 주셨는데 지금 도 잊을 수 없는 일입 니다. 서재균 씨의 큰딸 3 장 신세대 아버지를 위한 아버지 철학강의 평등한 부부는 평등한 성에서 시작한다


나원형(자영업) 살다 보면 가끔 드라마 같은 일들을 접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그런 일도 있 구니 하는 느낌파 함께 감돕엽 반게 되고 나도 그런 주인공이 되어 봤으면 하기 도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배우자를 어떻게 만났는가 물어 보면 어쩌다 만나서 결흔까지 하게 되었다는 싱거운 대답을 한다. 하지만 곰 곰이 생각해 보면 배우 자를 만난 그 과정 자체가 드라마이고 사 건이다. 정말 수십 억의 사람들 가운 데 어떻게 만난 사람들인가 1 그러나 불행히도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 같은 사랑은 식 어가고 무미건조함을 당연하게 느끼며 그냥 그런 대로 살아가게 된 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유난히 자녀 교육에 집착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결 과가 아닌가 한다. 누가 뭐래도 기정생활은 부 부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부부 만의 생환과 대화가 점점 줄어 들다 보니 아내들은 자연히 그 출구를 자녀 쪽으 로 돌리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도 별다른 생각 없이 남들과 비슷하게 살아가다 가 아 주 최근에서야 좋은 아버지 이전에 부부간의 관계가 원만해야 한다는 사 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농담으로 하는 말 가운데 '육 십대에도 아내 있는 남자 가 좋아 보인다'라든가 악처라도 마누 라가 있는 게 좋다'라는 말이 결코 헛소 리가 아님을 깨달았다고 나 할까. 우리 사회가 남성 위주라는 지적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지만 사실 선진국에서도 여성에 대한 불이익과 불평등은 아씩도 남아 있다. 인류가 경작을 시작하면서 남자와 여자의 평등 관계는 금 이 가기 시작했 다. 남자는 밖의 일, 여자는 집안 일 하는 식으 로 일을 분담하고 지시하면서 형 성된 불평등 관계는 아직도 사 회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아내를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앞으 로의 남녀 관계에 큰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녀들에게 가 장 좋은 교육은 실천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사회에서 받는 각종 불평등과 불이익을 가정에서 만큼은 없애 보는 것이다. 딸이든 아들 이든 평등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난다면 여성의 뿌리 깊은 열등의식과 남성의 권 위의식은 점점 사라지리라 생각한다. 배우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선택 한 이상, 그의 인생 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역시 바로 자신의 몫이다. 여 성들 의 사회 진출 기회가 많아지고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급속히 변 함에 따라 최근 들어 아네의 취미 생환을 배려해 주고 능력 계발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남 편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남편들 스스로의 제안 이라기보다는 아내의 요구에 따라 베풀어 주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일명 선진국들이 20~30 년 전에 경험했던 일들을 이제 우리도 겪고 있 는 것이다. 막 을 수 없는 변화의 물결이라면 우리 남편들이 좀 더 기꺼이 그런 분위기에 편승 한 때 아내는 물론이고 자신의 삶 도 더 풍요로워지지 않겠는가. 사실 결흔이란 적어도 20 년 이상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던 독럽된 개체가 결합하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결혼 생환 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느 부부든 끊임없는 갈등과 싸움을 무수하게 경험하게 된다. 미완의 반반이 만나 완전한 하나를 만 드는 게 결혼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결흔생활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 을 텐데. 우리는 불행히도 아주 늦게 흑은 어떤 계기가 주어져야 그 진리를 깨 닫는다. 그나마 어떤 부부는 서로 를 이해하지 못하고 지칠 만큼 싸운 후에야 서로를 포기하고 이 해할 부분을 찾아 무언의 합의를 보는 경우도 있다. 그떻지 못 한 부부는 결국 이혼이라는 비극적인 해결책을 찾지만 이흔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요즘 이혼에 대 해 다시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흔하지 않았다고 다들 행복하거나 나름대로 만족 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유김쓰럽게도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어


떤 통계에서는 '라시 결혼할 수 있다면 하겠느냐' 는 질문에 70 퍼센트에 육박하 는 여성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것도 결혼 10 년 미만의 ㅈ은 부부들 의 갈등이 더욱 심각하다고 한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그런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 감히 자신할 수는 없다. 부부갈 등의 원인 제공자는 남편인 경우가 많다. 갈 등의 요소를 생각해 보자. 경제적인 문제, 사고방식의 차이, 성격의 차이, 일가친척은 물론 자녀 문제도 이 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 요소들 가운데 어느 것보다 중 요한, 어쩌면 다른 문제들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부부간의 성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요즘은 '성'에 관한 인식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일간 신문에서도 성생활에 관한 비디오 테이프가 아무렇지도 않게 광고되고 그 테이프가 불티나 게 팔리는 현실만 봐도 그 관심의 정도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워낙 오랫동안 금 기시돼 온 터라 아직은 드러내 놓고 얘기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나는 사회학 자는 아니지만 성 차별의 원인을 제공하는 가장 중대한 요소가 남녀간의 '성 불 균형'이 아닌가 생각한다. 부부간의 성생활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고대의 화려 한 문화는 성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과 개방적인 분위기가 그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훌륭한 미술품이나 교향곡, 불후의 문학작품이 성을 탐구하고 있는 것만 봐도 성은 풍요로 운 문화와 정신의 토대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은 언제나 개인적인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특 정한 시대를 제외하면 인류사를 통틀어 성은 토 론의 장으로 이끌려 나오거나 역사의 전면을 장식하지 못하고 가려지고 왜곡되기 일쑤였다. 그러한 경향은 21 세기 우주시대에 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한 가지,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달 라진 것이 있다면 성을 상품화한 산업이 나날이 번창하고 있다 는 점이다. 업무 차 세계 각국을 여행하다 보면 역시 가장 큰 상 품은 성과 관련된 것이라는 느 낌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성이 인간 생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부 정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원초적이고 생활의 중요한 활력소인 사 랑과 성을 더 이상 가려 두지는 말아야겠다. 어줍잖 은 논리인지는 몰라도 부부 간의 성 문제를 툭 터놓고 얘기하는 분위기를 남편이 만들어 본다면, 아니면 아 내가 만들더라도 거 부하지 말고 따라가 본다면 어렵게 생각했던 부분들이 정말 마 술처럼 풀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느 사회든 남자가 성의 욕구를 층족하 기는 비교적 자유롭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어 디서든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고 사회가 그것을 용인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똑같은 욕구 를 가진 여성들에게는 거의 그런 문이 닫혀 있다. 이것이 모든 갈등의 시작일 지 모른다. 또한 성문화가 삐뚤어지게 개방되다 보니 단순히 쾌락의 정도 만을 가지고 평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또한 문제가 되고 있 다. 개개인의 신체적 특성과 성향에 따라 성에 관한 만족의 정 도는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가 성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고 숨겨 두기에 진실을 알지 못한 채 현실성 없는 환상을 쫓 게 된다고 하겠다. 서로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를 이 해한다면 타협점을 찾지 않겠는가? 성의 즐거움이야말로 결흔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선물 가운데 한 가지임을 인정한다면 더 좋은 방법을 추구하지 않 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많은 수의 남성이 성에 있어 독재를 행사하는 데 있다. 부부간 에 성 문제를 솔직히 애기해 보자. 완벽한 일심동체는 바로 그 런 관계 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흔률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 다. 그것도 여성들의 이흔 요구가 월등히 높다. 그리고 이혼의 속사 정에는 성 문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한다. 여성들이 성 평등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문제를 우리 남편들이 제대로 이해만 한다면 그게 바로 '좋 은 아버지, 좋은 남편'이 되는 지름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자녀들에게는 그 렇게 좋 은 아버지인데 부인과는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 다. 짧은 시간의 갈둥은 일상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일 이지만 그런 관계가 오 래 지속된다면 좋은 아버지. 어머니 역할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녀들의 물 질적 욕구만을 층족시켜 준다고 좋은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 이다. 가정은 가장 흘륭한 자녀 교육의 장이다. 원만한 기정에서 자 란 자녀가 원만한 성격을 가진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 미 래 사회는 더욱더 개인간의 갈등이 심화될 것이다. 우리 자녀들 이 그런 사회에서도 굳건히 설 수 있게 하 려면 어느 환경에도 어울리는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것 이상은 없다. 그런 의미 에서 부부야말로 성공적인 결혼생활, 성공적인 가정 생활의 연출자이자 주인공 이다. 부모와 자녀 그리고 우리 주변 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두 사람의 선택을 완벽한 성공으로 만들 어 주는 조연의 역할이다. 우리 또한 타인의 행복을 위한 조연 의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 지 않는다 면 타인의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기도 힘들다.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만큼 중요한 존재인지만 알아도 결흔생활은 성공 적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아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내의 입장에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노력이 부단히 필요함을 느 낀다.

좋은 아버지에 모범답안은 없다 한기천(문화예술진흥원 근무) 모일간지에서 전국 각계각층 시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우리들의 사회, 개인 의식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향후 이루고 싶은 희망 사항은 무엇입니까?'라는 질 문에 <행복한 가정 61%), <자신의 능력개발 60%), <건강> 순으로 응답한 기사 를 읽은 적 이 있습니다. 한국인의 행복의 원천은 '개인'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특히 많은 사람들이 뱅복한 가정'을 최고로 염원하고 있고 관심을 보이고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결과는 '가정' 은 은밀한 부분이고 집안일을 작은 일로 여겨 깊이 관여할 필 요가 없다(보통 남자의 경우 여기에 너무 신경 싱면 큰 인물이 못 된다고 하였다)는 전통적 사고가 많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마디로 딱 이떻다고 답이 정 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너, 아이스크림 좋아하는구나?', '너, 짝꿍 좋지?'. '너는 왜 고양이를 그렇게 싫 어하니?' 이렇듯 사람에게 있어 '좋다' 저 쁘다' 빕다 "사랑스럽다'와 같은 감정 은 각자의 마음에서 느끼는 것으로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마 '행복한 가정'은 큰바위 얼굴과도 같이 각자가 마음에서 지향하는 것을 그 려 가고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여러 가지 활동에 참억하고부터 주워에서 '어떤 아버지가 좋 은 아버지냐?' 하는 질문을 자주 받고 있습니다. 또 '어, 좋은 아버지가 이떻게 늦게 집에 들어가면 되나'하며 빈정대는 이들 도 있습니다. 사실 '좋은 아버지 " 좋은 기정'을 도덕적 차원에 서만 생각하면, 무조건 좋은 것이란 생각에서 어떤 규격화된 모 습만을 연상하게 되고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능력이 탁월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은 도무지 해낼 수 없다는 자괴감과 부담감 을 안게 됩니다. 사람 의 손금조차 천 명이면 천 명 다 제각각이 듯이 좋은 아버지, 좋은 기정의 모습


은 어떤 정해진 형태가 있 는 것이 아니며. 여러 가지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원에 사는 한 회사원은 아침운동으로 테니스를 치러 다니는 데, 어린 아들과 함께 다니곤 하였습니다. 아씸마다 어린 아들 은 테니스 공도 줍고 테니스장을 왔다갔다 뛰어다니는 것이 좋 은지 매일 빠지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테니스장에 나오게 되었 고, 초등학생이 되면서는 아버지를 졸라 테니스를 정식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몇 년을 배우다 보니 국내에서 각종 상을 휩 쓸게 되었습니다. 그리 고 타고난 소질이 발견되어, 코치의 제의 에 의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로 스타를 양성하는 미국의 세 계적인 테니스 학교에 입학을 허가 받아 어린 나이 에 유학을 떠 나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인 김 씨는 산을 좋아하는 산악인 인데, 두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산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작은 산부터 오르기 시 작하척 마침내 둘째 아들이 닥날 되던 해에는 4 천 478 미터나 되 는 알프스 마테 호른 봉 등정에 성공하여 세계 최연소 등반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이제는 세계적인 산악 가족이 되었습니 다. 또한 시골에 거주하는 한 평범한 농부는 주 말마다 가족 네 명 이 사물놀이를 배웠는데, 몇 년이 지나자 동네 잔치에 빠짐 없이 초청을 받아 사물을 연주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이제는 어엿 한 사물연 주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삼성반도체에 근무하는 모 연구원은 경쟁국 인 일 본에 뒤질 수 없다는 신념으로 몇 년 동안을 연구에 전념하느라 매일같이 세벽이면 출근해서 지정이 가까워서야 퇴근하는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디생 히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그가 해온 메모리칩 연구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 정받게 되었습니다. 그 는 이 모든 공을 그간 아무 불평 없이 바쁜 남편을 지켜 봐 준 아내에게 돌렸다고 합니다. 좋은 기정은 자기가 처한 생할 여건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역할에 차이는 있더라도 한 가족이란 공동의식과 관심 속에서 나름대로의 가정문화를 가꾸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시간 동안 일해 야 하는 직업도 있고 성직자나 운동선수처럼 자 기 절제를 해야 하는 직업도 있]= 예술가처럼 끼가 있어야 하 는 직업도 있고, 관굉여행업이나 항공사 파일럿 과 같이 가족들 과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하는 직업도 있고 많은 수입을 보장받 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니까 우리도 해야 하고, 다른 집 애들 이 무엇을 가졌으니까 우리 애도 가져야 하고 친구는 이번 휴 가를 어 디서 보냈으니까 우리도 그 수준으로는 가야 하고 누구 네 아빠는 몇 시면 꼭 집에 들어오니까 당신도 그래야 하고... 이렇게 주위를 의식해서 무엇을 해야 한 다고 요구한다 면 건강한 기정문화를 일굴 수 없다고 생리껍니다. 나의 고향은 시골이지만 지금은 부모님, 누나, 남동생 가족이 서울의 한 동네에 모여 살고 있 습니다. 같은 아파트 같은 층에 부모님과 우리집, 누나네가 살고 있고 남동생은 옆동 3 층에 살고 있숩니다. 일요일이면 믿음이 있건 없건 모든 식구가 교회에 같이 나가고. 점심식사는 가급적 부모님 집에서 같이 먹고, 오후에는 인 근 산으 로 약수를 뜨러 가거나 합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아들 누리가 전에는 가끔 아빠. 왜 나는 혼자야?' 하고 외로워 했는데, 이제 누나 집과 동생 집을 왔다갔 다 하며 잘 노는 것입 니다. 그리고 가끔 식사 전에 감사 기도에도 참여하곤 합 니다. 자기보다 위인 조카에게 깍듯이 형이라고 부르고 무척 따르며. 형이 입던 옷을 물려 입다 보니 때로는 헐렁해 웃음이 날 때가 있는데도 그렇게 좋아할 수 가 엉 습니다. 가급적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우리집 문화입니다. 내가 하나를 주었으니까 반드시 하나 이상은 받아야 한다면 서로간 에 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핵가족으로 살다 보 니 가족관계에도 '공정 거래'를 도입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하니까 나도 이 정도만 해


주겠다', 너 이 자식 아빠 말 안 들으니까 뭐 해 주나 봐라' 이처럼 타산적인 사 고로 는 따뜻한 가족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어릴 때 나의 부모님은 돈을 주시면서 매번 이유를 물어 보고 는 필요한 만큼만 주곤 해서 나는 크면 아이들 에게 돈만큼은 넉넉하게 주어야지'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 면 참 철없는 시절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부모님에 대해 서운한 마음 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학교를 졸업하고. 취 직을 하고, 월급을 받아 가정을 꾸리고 나서야, 돈에 대한 개념 이나 가치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나의 부 모님이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오셨는지, 자식들을 위해 헌신해 오셨는 지, 온갖 불평을 듣고도 묵묵히 감내해 오셨는지 생각하니 부모 님께 죄송한 마 음이 들었습니다. 자그만치 부모님의 이런 한 부 분을 이해하는 데도 30 여 년이 걸린 것입니다. 즉각적인 결과와 무엇이 돌아오나 하는 근시안적인 기대는 크 게 증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 지금이 되든 나 중이 되든, 사후 에라도 작은 부분이지만 이런 미안한 마음이 들 도록 하는 것, 이것이 좋은 가 정을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밑지거나 어럽더라도 감수하고 참고 기다릴 때, 언젠가 우리 마음 한편에는 미안한 마음이 싹트고 그리움과 진 정한 애정이 자리잡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어떤 계기가 있거나 굳은 결심을 했더라도 하루 아침에 갑작스럽게 생활습성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 다. 좋은 생 각과 바람직한 생활을 학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은 소중한 것 이 며 작은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만남 을 통해 가족을 바라보는 눈도 변하고 세상을 향한 마음도 변할 것입니다. 벌로 가지를 치고 칭찬으로 북돋워라 정송(카운슬러) 직업이 자녀문제를 상담하는 카운슬러이다 보니 내 인생을 무척이나 풍요롭게 산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고, 자녀문제도 지혜롭게 풀 수 있어 축복 받은 직 업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부모들은 한결같이 자녀를 훌륭히 키우고 싶어하며, 자 녀가 존경받는 사회인으로 커주길 바랄 것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며 적어도 정도를 지키면서 무엇이 올바른 자녀 교육 인지 늘 생각하는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억러 사람들의 자녀 문제를 상담하면서 간접 경험을 얻게 되고 그 경험 속 에서 학 문적으로 공부한 것보다 더 소중한 진리를 깨닫기 때문이다. 상담을 통 해 다양한 사례를 접하면서 그 문제가 '내 문제라면' 하고 반문해 보곤 한다. 그 때마다 자녀 교육만큼 어려운 일 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자라는 아이 들의 섬세한 감수 성을 생각하면 꾸증 하나 칭찬 하나도 소흘히 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나는 자녀 교육에 있어 '매'를 드는 것에 찬성한다. 다만 내 욕심이나 내 감정에 휘둘려 매를 드는 것에는 반대한다. 어디까 지나 자녀의 나이에 따른 발달심리에 근거하여 그 나이에 행동 할 수 있는 것과 해서는 아니 될 행동에 대한 이해와 꾸중을 분 명히 구분하여 자녀의 올바른 성장에 도움을 주려는 교 육적 대 응이어야 한다. 자녀를 때리면서 키우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전혀 때리 지 않 고 키우는 이가 있다. 부모가 매를 절제하지 못하고 휘두르면 난폭하고 폭행을 일삼는 자녀로 자라기 쉽다. 반면 그저 어리다 는 이유로 과잉보호를 하 게 되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을 기르지 못해 무분별한 사 람이 될 수도 있다. 매는 어디까지나 교육의 한 방편이다. 자녀를 바르고 건전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한 한 방법으로 쓰여야 한다. 그런데 부모가 화나서 때리고 감정으로 처리하고 어른의 기준에 따라오지 못 한다고 회초리를 든다면 그것은


자녀의 건전한 성장을 돕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악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매 맞을 짓을 하지 않고 성장하는 아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자 녀의 사고능력이나 판단능력이 미흡한 단계에서 그들의 행동이 단순하고 사려 깊지 못할 때 부모가 옳고 그름. 잘함과 잘못함 을 지적하면서 올바르게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자녀 교육이다. 잘잘못을 바르게 일러 주지 못한 부모는 자녀의 미래에 희망을 주지 못하고 또한 자녀 교육을 방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매는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 단이지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 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 서 매를 들 때 너무 심하게 아이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 맞을 짓을 많이 하는 어린이라면 그렇 게 키워 온 부모의 책임도 크 다. 또한 성장발달과 심리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아이를 김정적 으로 대하는 부모는 분명 문제 부모이다. 흑시 부모인 내가 무지 한 탓에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안 되는 불합리한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염 려하면서 영빈과 경빈에 게 l 년에 한두 번 정도 매를 드는데 성장하면서는 그것 마저도 기 회가 없어지고 있다. 꾸중도 1 달에 2.5 번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 다고 해서 다른 기정의 아이들과 크게 다를 정도로 모범생이냐 하면 그떻지 않다. 지 극히 평범한 보통 아이들일 뿐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내가 자녀를 보는 눈이다. 내일 시험인데도 놀이켯에서 늦게까지 농구하다 들어와서 맛있게 밥 먹는 모습 을 보면 그저 든든할 뿐 꾸중의 대상은 아니다. '영빈이 시험 잘 보겠지?' 하면 '네' 하는 씩씩한 대답에는 느긋한 마음이다. 그 러다 성적에 문제가 생기면 평 소에 노력하도록 반복 학습을 일 러 주고 학교에서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노력 부족으로 성적에 문제가 생기면 달밤에 놀이터 나무 밑 에 앉아서 아이가 알아듣게 이런저런 얘기를 곁들이면서 대화를 한 다. 이것이 오히려 다음 시험을 잘 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적이 많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학교 시험에서 20 등 정도 하던 아이가 사고력 측정에서 수학올림피아드 학 교 대표로 출전한 적도 있다. 이렇듯 아이를 키우면서 회초리를 들거나 꾸중할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던 기억은 난다. 영빈이가 7 살 때였 던가 돼지 저금통에서 핀셋으로 동전 몇 닐을 빼냈는데 그 돈을 쓰지 않고 있다 가 엉겁결에 '돈 있어, 이모!' 하는 통에 들통이 났다. 나는 그 돈의 출처를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 냈다. 영빈이와 경빈이를 앉혀 놓고 '너희의 행동도 나쁘지만 너희를 잘못 지도한 아빠의 책임도 크다'라고 말하면서 세 부자 가 다갚이 벌을 받기로 했다. 눈이 쌓인 추운 겨울날 밤에 우리 부자는 웃옷을 벗고 밖에서 반 성할 시간을 가졌다. 그 일이 있 은 후로 지금껏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백원짜 리 동전 한 개도 손대지 않고 필요하면 달라고 해 벌이 교육임을 항상 느끼게 한 다. 이것이 벌의 효과이다. 그런데 폭행에 가까운 체벌과 김정적인 폭언으로 이성적이지 못할 때 문제가 심각해진다. 자녀의 잘못된 행동을 그냥 봐주는 것 도 자녀 교육에 자신 없는 부모의 태도이다. TV 프로를 선택 하는 문제만 해도 아이의 고집대로 무조건 따르는 부모는 무능 한 부모이다. 나무가 자랄 때 아까 워서 가지치기를 해 주지 않으면 잊은 무 성할지 몰라도 쓸 만한 목재로서의 가 치는 없고 반대로 내가 요구하는 데도 커 주지 않는다고 잎을 너무 많이 자르면 결국 필요한 잎도 가지도 없이 몸뚱이만 남게 되어 좋은 목재가 되지못한다. 벌 을 잘못 사용하면 자녀 교육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듯 칭 찬도 마찬가지다. 방 법은 있다. 자녀를 키우면서 칭찬이나 격려 는 인생을 사는 데 보약과도 같지만 보약의 과용은 오히려 비만 이나 부작용을 가져오듯, 칭찬도 아이에게 교육적이 어야 한다. 벅찬 일을 했을 때는 칭찬을 보내고 할 일을 했으면 격려를 보내야 한다. 시험점수는 아이가 할 일이니 잘해도 격려를 하 고 불우한 이웃을 도왔을


때는 아낌없이 칭찬을 해야 한다. 과 일을 아파트 관리 아저씨께 갖다 드리면 칭찬을 해 주어야 한 다. 설거지, 청소, 빨래, 밥짓는 일. 식사 준비 등은 남자도 해 야 할 일이므로 칭찬의 대상은 아니다. 새벽 5 시에 일어나 공부 할 때면 격 려 반 칭찬 반이다. 열심히 하는 모습은 칭찬하고 일찍 일어나는 것에는 격려를 하면 되는 것이다. 벌도 지나치면 해가 되듯이 칭찬의 남발은 오히려 아이를 작 은 일에도 보상 받으려는 이기주의자로 만들 수 있다. 아침에 아빠의 구두를 닦 아 주면 그것은 자녀가 아빠를 위해 한 최소한 의 노력봉사지 대가를 받기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단지 '고맙 구나'라고 하면 된다. 하찮은 것에도 지나치게 칭 찬을 받는 습 관은 학교에서 정답 한 개 맞춰도 꼭 칭찬 받으려는 마음이 생 기 게 만들어 그렇지 못했을 때 오히려 좌절하기 쉽다. 따라서 칭찬도 격려도 자녀 를 위한 하나의 교육임을 기억하고 적절히 행해야 한다 바로 내 가정이 결손가정이다 성민섭(변호사) 사람들은 나에게 참 좋은 직업을 가졌다고 한다. 내 앞에서 몇 가지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설명하지만 그 속마음은 무엇보다도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또 벌 고 있으리라는 일반적인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속성상 사회의 어두운 면만 을 주로 보아야 하는 변호사라는 직업은 결코 좋기만 한 직업이 아니다. 특히 교양 있고 점잖은 사람들이라면 정말 할 일이 못 된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그럼에도 나는 진심으로 이 직업에 감사하고 있다. 변호사라 는 직업 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가정의 소중함을 절실하 게 느낄 수 있었을지, 특히 우리 기정에서 아버지로서의 내 역 할에 대하여 지금처럼 진지할 수 있었 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 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현재 아버지 역할을 훌륭히 잘 수행하 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응 좋은 아버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아버지로서의 내 역할'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있고 좀더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 임에는 틀림없다. 변호사로서 많은 가정과 가족 관계의 해체 과정, 그 결과와 후유증을 보아 왔고 또 보고 있다. 가족이 해 체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이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자녀들이다. 또 그들이 평생 겪어야 할 영혼의 상처를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참 마음 아폰 일이다. 그것은 정말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비극적이다. 그래서 많은 변 호사들은 법정. 특히 이흔법정을 서슴없이 '지 옥'이라고 부른다. 그 지옥에서 사람들이 보여 주는 행태는 그 사람의 나이나 학력, 지식, 직업, 사회적 지위, 교 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결국 그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 는 사람은 맑은 영흔을 가지고 있던 그들의 자녀들뿐이다. 법정 에서 싸움이 끝나 고 나면 자녀들의 영혼 또한 이미 회복 불가능 한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 보통 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남편의 경제적 무능과 불성실을 자식들 효 에서 공공연 하게 비난한 교사 어머니가 있었다. 그에 격분하여 부인의 과거(?) 를 역시 아이 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비난한 아버 지. 그 때문에 부부의 육탄전이 벌어지고` 칼 을 들고 날뛰는 아 버지, 이를 말리던 사춘기 딸의 가슴에 아버지는 상처를 내 고 그후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게 된 딸. 곧 형사고소를 하고 아버 지는 구속된 다. 딸은 수사기관에 아버지의 처벌을 강력히 탄원(?) 하고 어머니는 그 딸을 부 추긴다. 이에 격분한 시어머니의 분노와 절교 아들의 가출로 집안은 엉망이 되 고 결국 이흔 소 송까지 내게 된다. 이혼 괴정에서 증언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진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딸의 공개적 비난, 법원 의 이흔 판결을


끝으로 명실상부한 기정 파탄을 맞게 된다. 이 정도 되면 당사자인 부부는 물론 아이들의 영혼도 돌이킬 수 없는 싱써를 입게 된다. 이것은 가상 소설이 아니다. 엄연한 우리 이웃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 사례는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 다. 얼마 전 우리는 끔찍한 살부 사건을 두 건이나 접한 바 있다. 하나는 타락한 유 학생이라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더 충격적인 일은, 인격도 나무랄 데 없고 실력도 쟁쟁하먹 제 자들도 평소 존경해 마지 않았다는 일류대학 출신의 현직 대학 교수가. 교육시섭가로 평소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오던 자기 친아 버지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제판이 계 속되고 있으니 그 대학교 수가 정말 반인륜적 범행을 저지른 패 륜아인지는 단언할 수 없겠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재판 과정에서 공개되었다는 그들의 기정사를 들어 보면 우연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들의 아버지 가 가정 내에서 어떠한 존재였나 하는 점이닥. 일부 언론 보도에 따르면. 두 사람의 아버 지는 모두 그 기정 에서 완벽한(?) 독재자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말은 누구도 거 역 할 수 없는 지상명령이었고 그의 행콩은 언제나 옳았으며, 가족들 가운데 그 누구도(심지어 부인까지도) 아버지의 일방적인 결 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그 아버지는 절대적인 권력자 였다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다른 가족 들의 실수는 아무리 사소한 것도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고, 실수를 반복하는 자 식은 무능하다 하여 배척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의 눈에 비친 그 아버지의 모습은, 걸핏하면 사소한 일로 매질만 하는 폭력적인 사람, 일반인으로서는 납득 하기 어려운 독선적인 사람, 집 안과 집 밖에서의 모습이 전혀 다른 이증인격자 였다 한다. 그 대학교 수는 범인이라는 사실이 밝척진 후 눈물을 홀리며 '참을 만큼 참았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며 '차라리 돈 때문이었다고 해 달라'고 경찰에게 부탁했다던가... 위의 내용은 그간 신문지상을 통해 보도된 것을 간추 린 것에 불과하다. 보_도가 얼마나 실체적 진실에 입각한 것인지 확인해 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굳이 위와 같은 극단적 사례가 아니더 라도 교양 있는 부모 밑에서 자란. 유복한 가정에 공부도 잘하 는 자녀들이 비행을 저지르고 구속되 는 일은 근래 흔히 볼 수 있다. 대개의 경우 그런 가정은 겉으로만 평안하고 화 려하게 치 장되었을 뿐 사실상 속으로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인 때가 많다. 곧 그 아이들은 부모들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결 손가정' 에서 자란 아이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한편 비록 부부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 가 되었지만 그 자녀들만은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각고 의 노력을 하고 아이들 또한 지극히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라도 그들 대부분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소위 '결손가정'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 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 다. 그럴 때는 실로 세상 사람들의 경박함에 한 숨을 쉬지 않을 수 없다. 몇 해 전, 어느 지방에서 초둥학생들이 음료수 때문에 다투다 가 두 아이가 한 아이를 목졸라 죽이고 시체를 화장실에 유기하 였다고 어척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몇몇 언론들 은 그 아이들의 가정이 결손기정이라는 보도를 하였고 모 지방 신문은 그 사건기사와 함께 비행청소년 에 대한 논설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사건은 '결손가정의 아이들이라면 능 히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그릇된 확신을 가진 경찰들에 의하여 강압 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아이들은 지극히 순박하고 모범 적인 학생들이었지만, ' 부모가 이흔한 결손기정의 자녀'라는 이 유만으로 자기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 건의 범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그 사건의 번론을 담당하여 진행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 을 느꼈다. 결손가정이란 어떤 것일까. 단지 부부가 이혼하지 않


고 함께 살고만 있으면 정상적인 가정인가. 그렇지 않다. 오 히려 겉으로만 멀쩡 하고 실제로는 저로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한 모습을 자식들에게 그대로 보옇 주는 그런 가정이 더 심각 한 결손가정일 것이다. 또 부부들 사이에 온전한 사 랑을 주고 받지 못하는 기정,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을 필요한 만큼 받지 못하는 가정, 가족돌 서로간에 가면을 쓰고 있어야 하는 가정, 가족 가운데 어느 한 사 람이 다른 사람들을 힘이나 권위로 지 배하는 가정, 이 모든 가정이 실제로 결 손가정이라는 것이 나 의 생각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약 4 년 전 이다. 그후 얼마 지 나지 않아 나의 처는 실직(?) 을 하였다. 당시 처는 지방대 학의 교수였고 나는 서울에 사무실을 두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주말부부로 지내 고 있었는데, 큰아이는 초등 학생이므로 나와 합께 있었고 작은 아이는 처가에 맡겨졌다. 당시 나의 펑균 귀가 시간이 보통 밤 10 시가 넘다 보니 큰아이 는 사 실상 주증에 거의 부모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지냈다. 저학년이라 부모의 손 길이 많이 필요한 때였지만 부모의 이기심(?) 때문에 사실상 전척 보살핌을 받 지 못하였고 그 결과 아이 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어느 날 바로 내 가정이 결손기정이고 내 아이가 결손기썽의 아이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당황한 나는 숭좋은 아 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변을 기웃거리게 되 었고 처에게도 은근히 겁을 주는 이중 작전을 폈다. 결국 그런 상태를 못 견뎌 한 처의 결단으로 우리 가족들은 함께 모여 살게 되었다. 그후 나는 진정한 기 정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실감하며 살고 있다. 주위에서는 지금도 내 처에게 그 아까운 자리를 어떻게 포기 할 수 있었느냐는 말을 많이 하고 특히 전업주부들 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잃어 본 사람만이 잃어버 린 것의 소증함을 안다. 우리 가족은 정말 소증한 것을 거의 다 잃어버릴 뻔한 시 점에 그 소중한 것을 되찾은 것이다. 어찌 가 정생활이 연습이겠으며, 그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인생을 어 떻게 실험해 볼 수 있겠는가. 나는 속으로는 처의 결단에 깊이 감사하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너무나도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말한 다. 내 처 또한 진정으로 자 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맡항다. 그리고 자신을 동정 하는(?) 사람 들에게 이떻게 말한다. '저는 현재의 생활에 너무나 만족하고 있어 요. 그리고 먹러 제자 기르는 것도 좋지만 정말 훌륭한 두 제자를 기르는 것이 더 보람 있는 일 아니겠어요.' 내 아들이 나를 그대로 닮아도 좋은가 강우현(그림동화작가) 지금도 가정의 자녀 교육은 어머니 몫이라고 생라하는 사람들 I 이 많다. 가정 주부인 어머니가 자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 고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도 소상하게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나 지금이나 자녀 교육쎄 있어서 어머니의 역 할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맞벌이 부부가 증가 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오히 려 남성보다도 우월(?) 해지는 오늘날에는 어 머니의 역할이 줄어 들었을까? 그리고 흔히들 말하듯이 아버지의 역할이 증대되 고 있을까?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만하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던 시대였다고 해서 어머니들이 하루종일 자녀 교육만을 위해 헌신할 수는 없 었다. 낮에는 논밭에 나가 일을 해야 했고 밤에 는 바느질이며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느라고 요즘보다 자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더 없었다. 게다가 책이나 오락물도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그 당시의 자녀 교육 이란 그저 일상생활 속에서 자녀의 안전과 '사람됨' 을 '사랑' 으로 보살피는 일 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는 지 적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상


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여성의 사회 참여와 외출이 늘어난 지금, 아버지의 자 녀 교육 참여가 더욱 절실 해지고 있다. 옛날처럼 권위나 내세우면서 멀찌감치 떨어져 은 유적인 모범을 보이는 일만으로 아버지 역할을 다했다고 말하기 는 어렵게 되었다. 부모의 역할은 조기 교육에 참석하는 것 문 화생활을 가꾸는 것 에 이르기까지 그 역할이 골고루 필요해졌 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의 아버지 들은 얼마나 자녀 교육쎄 관 심을 갖고 있으며 또 생활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자녀교육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30~40 대의 젊은 아버지들은 대체로 바쁜 일과에 쫓기고 있 다. 소수의 프리랜 서들을 제외하면 대다수는 직장 내에서 자신 의 능력을 활발하게 발휘해야 할 때이고 또 궂은 일도 서슴지 않고 해야 하는 위치이다. 그러나 아직은 권한도 없고 남을 시 킬 만큼의 지위도 아니며 봉급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나이도 아 니 다. 그저 일만 많이 해야 인정을 받고 또 그것으로 어느 정도 의 장래를 보장받 을 수 있을 뿐이다. 더러는 자신의 일에서 강 력한 성취감을 맛보지 못하는 경 우도 많다. 새벽 출근에 밤늦은 귀가. 자녀와 얼굴을 맞대는 시간은 일요일이나 공휴일 정도인 젊은 아버지들. 그렇다고 해서 가정에 경제적 풍요를 선사할 수 도 없는 처지이다. 이러한 몇 가지 요 인들은 바로 부부싸움으로 면결되고 결국 자녀 교육에 대한 아 버지로서의 발언권마저 박탈(?)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 다. 그 래서 대부분의 젊은 아버지들이 적어도 자녀 교육에 관한 한 많은 결정 권을 아내에게 위임할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인 것이다. 아직도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들이 있다는 언론의 보 도가 끊이질 않고 있으나 반대로 여성들의 '언어 폭력'에 시달 리는 남성들이 의외로 많다. 자녀 교육에 아버지가 함께 참여해 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자녀를 훌륭한 사회인 으 로 키우고 싶어하지 않는 아버지는 없다. 그러나 항상 바쁘고 위축된 채 살아가 는 젊은 아버지들이 자신의 의사를 주장하기에 는 현실적인 약점이 너무나 많 다. 약점 아닌 약점으로 인해 아 버지는 자녀 앞에서 언제나 '못난이'가 되어야 하는 경우가 허 다하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은 '잘난이(?) ' 로 남고 싶어하는 무리들일 뿐이다. 늦게 들어온다고 자녀 요에서 망신당하고 봉급이 적다고 가 장의 자존심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드리는 아내의 언어 폭력에 시달리는 남성들 이 적지 않은 실정이다. 자녀와 많은 시간을 함 께할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의 자녀 교육 방법에 다소 문제가 있어도 간섭하지 못하는 아버지들도 있다. 과외 공부 같은 것은 일일이 시키고 싶지 않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아버지가 되 기 싫어 묵묵히 있거나 아내의 언어 폭력이 두려워 말하지 못하 는 남편들도 많 다. 상당변의 남성들이 스스로 못난이를 자처하 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 교 육의 언저리에서만 맴도는 못난 아버지들이 늘어가고 있다. 못난이에게 자녀 교 육의 어느 부분 을 맡길 수 있을까? 아버지가 참가하는 자녀교육 행사는 어머니들이 신청해 준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은 문자 그대로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이 모여 자녀 교육을 보다 적극적이고 올바르게 실천하는 모임이다. 바쁜 가운데서도 잠시 틈을 내 자 녀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고 대화하고 놀면서 아 버지의 역할을 해 보자는 뜻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열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이 모임에 가입한다든가 행사에 참가하 는 데 있어서 그 신청자의 95 퍼센


트는 아버지 당사자가 아닌 '어머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의 기차 여행>은 지난 lS92 년부터 실시돼 온 가장 인기 있는 가족여행 프로그램으로 평 균 테가족 정도가 참가하는데 이 여행에 아버지가 직접 참가 신청을 하는 경우 는 열 가족도 안 된다. 그 외의 아버지들은 여 행 신청해 놨으니 아이와 함께 다녀오세보'라는 아내의 지시 (?) 를 받고 나왔다고 한다. 물론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참가하길 잘했다' 고들 말하지만 등을 떼밀려 나온 사실에 대해서는 스스 로들 시인하고 있다. 여 행을 다녀온 아이들도 결과에 대해서는 늘 만족해 하지 만 그들도 알고 있다. 그리고 불쌍한 아버지라고 여길 것이다. 아버지 가 회사에 출근한 후 어머니가 전화하는 모습을 보았을 테니까. 아버지에게도 설자리를 마 련해 주어야 한다 하루 종일 어머니와 함께 지낼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여성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무서움을 잘 타고, 자주 화 를 내고, 금방 토 라지는 것이나 도전적인 용기가 줄어드는 일. 스스로 판단하기보다는 '엄마에게 물어 보고'라는 의타심이 늘 어가는 것도 한 예이다. 여자아이가 여성다워야 한 다는 데야 이의가 있을 수 없지만 사내아이의 여성화 문제는 심각하다. 그들은 앞으로 20 년 만 지 나면 사회를 이끌어가는 증추적인 역할을 해 내야 할 텐데 내심 펴정이 된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미래 사회의 리더로 성장해야 할 아이들 에게는 남성다운 매력도 함께 길러 주어야 한다. 아버 지의 역할은 그 점에서 어머니의 역할과 상호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가정의 경제를 위해 돈이나 벌어다 주는 '하 숙생'이나 자녀 교육의 위임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 정의 경영'에도 참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정에 아버지가 설자리 가 있어 야 한다. 아직도 봉건적 권위주의 사상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기정에 서 '아버 지의 설자리'를 말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면도 없지 않지만 앞서의 예를 보면 다음 몇 가지에 대해서는 부부간에 서 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이것은 부 부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이지만 특히 어머니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첫째. 남편의 약점을 자셔 앞에서 큰소리로 말하거나 이에 대 한 자녀의 동의를 구하지 말아 야 한다. 둘째, 시부모의 약점을 자주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부부간에 대화의 단절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셋째, 남편만의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대개의 경우 집 안은 안방과 아이방 그리고 거실로 구성돼 있다. 이런 구조는 남성들이 화장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이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찍 퇴 근하척 아이들과 텔레비전이나 보며 시간을 보내 는 경우 자칫하면 사회에서 도 태될 수 있다. 그떻기 때문에 안 방의 일부라도 책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남편 의 공간으로 만들 어야 한다 넷째, 남편이 아버지로서 자녀에게 훈계할 때는 절 대로 나서 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자녀가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갖도록 해 줘야 한 다. 물론 존경할 만한 일이 있어야 하겠지만 자녀가 아버지에게 갖고 있는 환상을 자주 깨지만 않는다면 가능한 일이다. 자녀 교육은 부부가 합심해야 한다 지금까지 다소 편파적일 정도로 주로 아버지의 입장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으나 결국 가정에 있어서 부부는 공동체이다 아버지에게 설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함 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위상도 함께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앞서 말한 대부분의 예들은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가하는 이들을 기준 으로 한 것이므로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을수도 있다. 하지만 자 녀를 미래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자녀들에게 모범을 부여주 고 그것을 계승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따라서 어느 편에서 이야기하는가는


문제 될 것이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듯이 아 이들은 어른들의 흉내를 내면서 성장해 간다. '나를 그대로 닮아도 좋다'는 생각 으로 자녀 앞에서 보여 줄 만한 좋은 모습이 많을수록 좋다. 원론적인 말이긴 하지만 부부간에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며서 자녀가 흉내낼 수 있는 일이 많아질 때 자녀는 바르게 성장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하는 자녀 교육은 결국 '좋은 심성'을 가꾸어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을 갖게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으로 만들어 정성으로 낳는 아기 이종린(소아과 의사) '선생님 태교는 여자만 하는 겁니까?' 임산부들을 만나면 종종 듣는 질문이다. 그러면 나는 대체로 이렇게 말문을 연다. '태교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 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한다고 할 수 있지요. 그 가운데서도 남편의 역할이 제일 중요합니다. '태교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 이 한다고할 수 있지요. 그 가운데서도 남편의 역할이 제일 중요합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태교를 중요시 여겨 다른 어느나라보다 태교에 관한 책과 가르침이 많다. 그 덕분에 젊은 사람들도 아기를 가지게 되면 으레 태교를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실제로도 태교에 익숙한 편이다. 사실 태교는 서양보다 동야적인 개념으로 나이를 출생시부터 계산하는 서양과 달리 우리 조상들은 수태 기간도 나이에 포함 시켜 태어나면 바로 한 살로 보았다. 근래에 의학이 발달되어 초음파 등으로 태아에 관한 여구가 가능해지자 비로소 서양에서도 태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과학적 인 연구를 하게 됨으로써 막연하게 우리 조상들이 알고 실행했던 태교의 지혜에 과학적 접목을 시도하여 좀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태교가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태교에 관한 관심이 지대하여 누가 시키지 않아도 태아의 건강을 위해 먹을것과 안 먹을 것, 볼 것과 안 볼 것을 가리고 임신 기간 내내 근신을 했다. 또한 옛 어머니들은 태교 교과서까지 남겨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태교 교과서인 사주당 이씨의 '태교신기'에 보면 태교할 줄 모르면 어미될 자격이 없다 하며 임산부가 가려 먹야할 음식, 가려야 할 행동, 보고 들어서는 안 될 일들, 평상시 마음가짐, 눕고 잘 때 조심할 것 등 임산부의 생활 태도를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건강하고 훌륭한 자식 갖기를 기원하며 태교를 실천했다. 그런데 이런 태교가 여자 쪽에만 강요된 것은 아니었으니, 지혜롭게도 우리 옛 어른들은 태교가 모친 못지 않게 부친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가르쳤다. 사주당 이씨는 출산을 남녀 공동으 책임으로 보아, '어미가 열 달 뱃속에서 가르침이 아비가 하룻밤 교합할 때 바른 마음 갖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고. 또 태아의 양생엔 임산부뿐 아니라 온 집안 사람들이 항상 조심하고 삼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의보감에 보면 부부가 관계를 가질 때도 여러가지를 주의하라 하였으니, 피해야 할 일기나 일진이 있으며. 잉대 장소도 가펴야 하 고 부친의 심신 상태도 중요하여 지극히 편안하고 정상일 때 관계를 가질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부친이 허약한 상태, 잔병중일 때, 과음했을 때, 과식이나 허 기졌을 때, 정신이 혼미한 때 등에는 수태를 피해야 한다. 하척 주태 이전의 부 친의 섭생과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이르 고 있다, 옛 어른들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태교는 어 머 니들만의 일이 아닌 것은 너무나 지평하다. 태교에서 제일 증요한 일이 임산부의


마음기가짐 데 그것은 어머니의 기쁨과 애정이. 어머니의 불 안과 괴로움이 그대로 태아에게 전달되어 영 향 을 미치기 때문이 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들이 어머니 한 쪽만의 힘으로 될 수 있겠는가. 어머 니도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기정의 구성원이요, 가정이란 부부 어느 한 쪽의 힘으로만 지탱되 는 것이 아닐진대, 태아의 교육에 있어 다른 한 축, 즉 아버지의 역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 하다 하겠다. 기평 임신중 금해야 할 것으로 담배, 커피, 술이 있다. 이런 것들이 나쁘다는 것은 상식으려. 웬만한 여성들은 다 알고 있어 적어도 아기를 낳기 원하는 여성들 중에는 담배를 피 우거나 술 을 지속적으로 먹는 이들은 별로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홉연에 있어 간접 흡연 도 직접 홉연 못지 않게 태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부인은 집에서는 물론이고 밖에 서 도 담배 연기를 애써 멀리하는데, 남편이 이런 일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집에서 담배 를 피우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부인의 노 력은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커 피 같은 것도, 부인은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석 참고 있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요에서 분위 기 잡아가며 마시고 있으면 견딜 수 있는 이들이 그 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임신중에 복부가 요 동 치게 하는 것은 금물이다. 점점 배가 불 러오는 부인에게 자동차 여행을 하자 하여 이리저리 다 니게 되 면 부인과 태아에 엄청난 부담을 주게 되고 심하면 유산을 하는 일까지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임신중에 자동차 타기는 가능한 '한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임신 중 부부 관계는 임신 중기 외에는 가 능한 한 피해야 한다. 이 역시 부인 흔자서 될 일이 아 니


다. 그 외에도 우리가 별 것 아니라고 무심코 넘어가는 일 가운데 남편 의 도움을 필요로 하 는 예는 무수히 많다. 가령 무서운 영화나 비디오를 보고 부인이 느끼는 불안감이 태아에게 전 달 될 수 있 고 또한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마음의 상처가 되어 태아를 우 울하게 만들 수 있 다. 끊임없는 칭찬과 감사, 기쁨, 태아에 대 한 희망과 감격, 이런 것들을 어머니의 가 슴에 샘물처럼 솟아나 오게 해야 태아도 같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그러면 우리 남편들이 어떻게 부인을 도울 수 있을까? 구체적 으로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할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내를 샤녕하는 마음 그리고 아기를 열 달 동안이나 몸 안에 담고 어떻게든 건강하게 키우려는 부인 의 지극한 정성에 대한 경이와 감사하는 마음을 늘 잊지 않고 부 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일이다. 태교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 어머니의 마음인데, 부 부간의 애정이 태아에게 이어져 이 마음이 늘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층만해 있을 때 태아 도 행 복하고 안락해진다. 어머니가 스트레스를 느끼면 태아도 같이 느끼고 어 머니가 불안해 하면 태아도 같이 불안해지니. 절대로 부인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게끔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마음가짐 아래 같이 할 수 있는 일로 집안 청소 시장 보 기 등 신체적으로 힘든 일이 있다. 또한 산보하기, 좋은 음악 들려 주고 음악회나 전람회 같이 가기 등 정신적인 행복감을 느 끼게 해주는 일, 그 리고 임신중에는 여러 가지 신체적인 어려움 이 산모에게 많이 찾아오므로 병원 에 같이 가서 산모의 건강 상 태를 직접 듣고 상담하는 일 등이 있다(의사들은 산모에게 직접 말하기보다 남편과 상담하기를 훨씬 선호한다. 참고로 출산시 산 모의 감정 상태도 중요한데 마음이 안정되어 있으면 진통도 길지 않고 분만도 비교적 쉽게 끝나나, 산모가 안정이 안 되고 불안해 하면 진통도 길어지고 난산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라에도 여러 가지 같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겠으나 어찌 보면 이런 일들은 사실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무엇 보다 중요한 것 은 아기를 가져 고생하고 있고 어떻게든 건강하 고 튼튼한 아이를 낳으려는 사 랑하는 아내의 고달픔을 조금이라 도 남편이 나눠 갖는 마음가짐이라 하겠다. 이런 마음가짐 없이 하는 일들은 만금을 줘도 다 겉치레로 감동을 주지 못하나 이런 마음가짐 으로 하는 일들은 어떤 하찮은 일도 감동을 주어 부인 의 마음에 행복감이 물 흐르듯 솟아 오를 것이다. 이처럼 복되 고 안정된 상태에서 건강한 아기가 태어난다. '나라'가 외면하는 '나라의 보배' 변경환(회사원 0 복잡한 여행도 작년 7 월 증순으로 끝났다. 우리 가족(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 부부에게 가장 소중한 하나밖에 없는 딸이 며 보통때는 '솔'이라 부르는 푸른솔) 은 마음먹고 어디를 가려 면 다른 가족보다 절차가 복잡했다. 다른 가족 같으면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돌아을 때나 남편이나 아내가 퇴근할 때를 기다 려 목적지로 떠나면 된다. 그런데 우리 가족은 나와 아내가 서울에서 전주로 푸 른솔을 데리러 내려가야 했다. 그런 다음 목 적지가 동해안이건 내륙의 어디건 떠나는 것이다. 푸른솔이가 전주 처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s 년간 이런 과정을 되풀이했 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들어간 것은 1993 년 1 월의 일이다. 5 월에 숭실대학에서 l 박 2 일로 부부강좌가 있 었는데 그날 우리 부 부는 부인들에게 지탄의 대상이었다. '어떻게 아이를 떼어놓고 키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 만 해도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의 첫 인사가 '솔이 데려왔냐?였다. 그럴 때마다 대답은 간단했다. "공기 좋은 전주에서 건강 하게 잘 크고 있어.' 차츰 솔이랑 더 이상 떨어져 지 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반면 솔이를 전주에 맡긴 것에 대해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많 았다. 그들은 주로 일을 하고자 하는 주부들 이었다. 아이를 낳은 후에도 일하기를 원할 때는 같은 동네에 사는 아주머니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 비용이 40 만 원 가량이니까 부담스럽기 도 하거니와 여러 가지 신경 쓰이는 일이 많다고 한다. 우리 아 이를 내 아이처럼 돌봐 주는지도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들리 는 얘기에 따르면 그저 기저귀나 갈아 주고 우유나 줄 뿐 동화책도 읽어 주지 않고 버릇된다고 잘 안아 주지도 않는다고 하니 탁아 모를 선택할 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공무원인 한 친구는 월급 70 만 원 가운데 40 만 원을 탁아 모에 게 준다. 그 친구 하는 말이 돈 때문이라면 집에 있는 게 낫지 만 일이 하 고 싶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가장 부러워했다. 이런 사람이 어디 그 친구뿐이랴. 일을 하고 싶어 도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서 집에 눌러앉 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나라도 서구 선진국처럼 원하는 시간에 언 제라도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시간제 탁아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부부 는 연애는 열렬하게 했고, 결혼은 엉겁결에 해버렸고 아이는 확실한 육아 대책을 마련한 후에 계획적으로 가졌다. 우리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던 80 년대 초. 중반을 몸부림치다시피 하며 대학을 겨우 겨우 마쳤다. 둘 다 운동권에 몸 담고 있어 수배령이 떨어져 쫓겨다닐 때도 있었고 감옥에 가 있 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양쪽 집안에 자연스럽게 두 사람 관계가 알려졌다. 어떤 부모가 귀한 딸자식을 장래가 불투명하 고생길이 훤한 사람에게 주고 싶겠는가? 그런데 두 분은 의 외로 쉽게 결흔을 승낙하셨다. 아마 포기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먹고 사는 문제도 제대로 해결할 능 력이 없는 상태에서 덥석 결흔부터 해버렸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혼수며 예물 대신 돈으로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꼭 필요한 것들만 평화시장 이나 세운상가 같은 곳에서 사고 나니 방 한란 얻을 돈만 남았 다. 이렇게 신흔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니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나는 우선 직업을 구하는 게 급선무였으므로 취업 준비를 해 야만 했다. 대학 다니는 동안 담을 쌓았던 취업과 관련된 공부도 해야 했다. 결혼한 지 6 개월 가량 지났을 때 아이를 가졌다. 물론 둘 다 직업이 없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육아 대책은 확실히(?) 세워 놓았다. 장모님의 말씀 한마디로 '여자가 너무 나이 들어 애 낳으면 고생한다. 그러니 더 늦기 전 에 낳아라. 키우는 건 내가 맡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리고는 장모님 말씀대로 아이를 낳았고 낳은 지 7 일 만에 솔이는 전주 처가로 내려갔다. 당시 아이를 떼어


보내는 우리 부부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고 빨리 자리를 잡고 솔이를 데려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 부부는 늘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한 달에 두 번 가량 솔이를 보 는데 그 만남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주을 향하는 전 날 밤에는 잠을 설칠 지경이 었다. 아이러니컬하게 이런 기대감과 만남이 우리 기정을 활력 있게 만들기도 했다. 열렬히 사랑하는 애인과 떨어져 있다가 만날 때 아마 그런 기분일 것이다. 솔이 를 만나려면 우리가 내려가거나 장모님이 올라오셨다. 그렇게 가끔씩 딸아이를 볼 때마다 낼써 이렇게 컸구나!' 싶게 부쩍부쩍 크는 느낌이었다. 부득이한 시썽이 있어서 한달 만 에 볼 때는 더욱 그랬다. 떨어져 있음으로써 좋은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가족간에 편지를 자주 쓴다는 점이다. 내가 먼저 보 내면 솔이가 답장을'보내는 식이다. 의욕만 효섰지 맞춤법도 틀 리고 쓰는 단어도 한정돼 있는 편지지만 그걸 받는 나의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 을 정도였다. '솔이는 아빠, 엄마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야'라고 썼더니 멋 물이 뭐냐'고 묻는 다. 다시 그 뜻을 설명해 주는 답장을 쓰는 것으로 편지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 이 아이와 함께 생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 할 때마다 우 리 부부 역시 공감하지만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는 말이기도 했 다. 물론 올봄에 솔이를 데려와 한집에 살면서는 다 옛날 이야 기가 됐지만... 핵가족이 일반화되고 맞벌이 부부가 늘어가는 상황에서 자녀 양육은 가장 커다 란 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육아 문제를 기정에서만 해결하도록 맡 겨놓은 채 무관심하다. 물론 여성운동 단체를 증심으로 비영리 보육시설이 하나 둘 생기고는 있지만 턱없이 모자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국가 차원에서 다 큰 춘성을 갖고 '우리 아이를 함께 키운다'는 공동 육아의 개념이 절실히 필요 한 때이다. 보육시설의 경우 1994 년 l2 월 현재 6 천 900 여 개 소에 약 22 여명 의 유. 아동이 이용하고 있지만 이 수자는 정부가 추산하 는 우리나라 보육대 상 아동수 103 만 명 가운데 22 퍼센트에 불과 하다. 게다가 보육시설의 70 퍼센트 가 민간 보육시설이고 변나마 재정 지원에 치중되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요즘 들어서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 '공동육아조합'을 만드는 움직임이 전국적으 로 번져가는 것을 볼 때 너무나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들이 출자금을 내 보육시설 건물부터 교육 프로그램, 운영 전반에 참여한다고 하니 바람직한 탁아 모델로 자리잡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우는 일은 우리 의 미래를 밝게 하는 일이 다. 육아문제를 단순히 가족문제가 아닌 복지문제로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남편은 스트레스 해결사 결혼을 하고 한 이불을 덮는 순간부터 부부는 일명 '자리 굳히기'로 사소한 일에도 신경전을 벌이기 일쑤다. 그도 그럴 것이 스물 몇 해를 흑은 서른 몇 해 동안 같이 생활해 본 적이 없는 타인들이 만났으니 티격태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 다. 그런 신경전이 잠잠해 질


때쯤. 아니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 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쯤 부부를 꼭 빼 닮 은 아기가 태어난다. 그런데 아이가 가족의 일원으로 자리잡을수록 부부는 아이 때 문에 하지 않아도 될 싸움이나 말다틈을 꽤 자주 하게 된다. 그 이유가 아이든 가사일 때문이든 아내들은 늘 스트레스가 쌓여 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아이가 있는 경우 다투게 되는 경위는 대략 이렇다. 대부분 남편들이 하루종일 이런 저런 갈등으 로 스트레스가 머리 끝까지 차오른 아내에게 생각없이 속 긁는 얘기를 하다가 아닌 밤증에 릉 두깨 식으로 다른 화풀이까지 함께 듣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 다. 그 내면에 아이 때문에 생 기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클까? 남편들 입장에서는 '아니, 남들 다 키우는 아이를 뭐가 그리 힘들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겠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밥하 랴. 빨래하랴, 아이 보랴 몸이 열 개라도 오자란다'고 전혀 다 른 얘기가 나온다. 그 렇다고 남편이 '그것도 남들 다 하는 일 아닌가?'라고 할 수 없는 게 요즘 실정 이다. 나는 혼자서 며칠 동안 아이를 본 경험이 여러 번 있는데, 솔 직히 며칠이 었기에 기꺼이 자청하고 '순하디 순한 혜영이 돌보 는 것쯤이야' 하고 생각했지 만약 계속 아이를 돌보아야 했다면 결국 두손들고 말았을 것이다. 대부분 아이 차의 갈등은 어른이 스스로를 참지 못해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모든 것 이 신기하고 호기심의 대상인 아이 들은 쉴새없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어지르고 쏟고 엎지르고 깨=닥 찢고, 뜯어 내는가 하면 스스로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 기도 하니 잠시라도 한눈을 팔 수 없다. 아이의 성장 발달 괴쩡 으로 볼 때 지 극히 당연한 행동이라고 이해하면저도 끝까지 인 내를 가지고 참아 낼 아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의 구조상 아직까지 는 어머니가 절대적으로 육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당연히 육 아 스 트레스도 대부분 아내의 몫이고 그 기본적인 역할은 앞으 로도 크게 변하지 않 을 것 같다. 지금의 일반적인 가정에서 남편들이 겪는 육아 스트레스는 고작 휴일에 잠깐이고 때 때로 아 내에게 스트레스 해소용의 바가지를 듣는 게 전부이다. 스트레스는 완벽하게 해소하 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지만 반복 되는 일상에서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 내들이 스트레스를 느끼는 강도는 아네의 김정이나 기분에 크게 좌우되 므로 남 편의 관심과 이해의 정도에 따라 스트레스의 양을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따뜻한 한마디 위로도 도움이 될 것이고 육아에 같이 참여하지 못하는 아쉬움(?) 을 표현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나 역시 아내가 혜영이를 키우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직. 간접 으로 받을 만큼 받았다. 그러나 비교적 다른 남편들보다는 덜 받았다고 생각된다. 재택 근무를 하면서 혜영이를 유아 때부터 봐주었기 셍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나름대로 아내의 스트레 스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같이 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 다. 혜영이를 두고 아내와 같이 외출하는 경우, 아내의 모습을 보면 그떻게 흘가


분싸 보일 수가 없다. 혜영이를 데리고 외출하면 혜영이를 화장실에 데리고 가 는 것, 밥을 먹이는 것 등은 될 수 있는 한 내가 맡아서 했다. 그리고 아내가 혼 자 아 이를 돌보는 시간을 가능한 한 줄여 주었고 아주 곤란한 경우가 아니면 같이 외출하려고 노력했다. 무역일을 하는 관계로 낮에 외출할 때뿐만 아니라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 있는 해외출장 때도 혜영이를 데리고 나간다. 이것 이 혜영이와 나만의 특별한 관계 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아내에게는 잠시 가사와 육아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시 간 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아내가 외출할 때는 기꺼이 혜영이를 두고 나가라고 하는 것도 아내가 고마워하는 부분이다. 요으로 여성들의 다양한 사회 참여로 인하척 점점 육아의 일 부를 우리 아버지들이 맡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올 것이다. 이때 아버지들이 아내의 육아 스트레스를 줄여 준다는 소극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육 아에 좀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동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아버지 가 의도적으로 아이와 접 촉하지 않으면 아이는 출산 후 거의 6 개월까지는 아버 지의 존재 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아씨의 생사를 좌우하 는 어머니와의 관계는 그만큼 절대적이 되어 당연히 아이와 어 머니 .사이에 보이 지 않는 갈등이 생긴다. 아이는 늘 같이 있는 어머니에게 집착을 하면서도 배가 고프거나 추울 때 당장 욕구 가 채워지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미움을 갖는 것이 다_ 아버지는 유아기에 생길 수 있는 이와 같은 모자 갈등을 조정 하는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이에게는 아버지를 통해 자신을 이해해 주는 또 하나의 편안한 안식처를 찾게 하 고, 아울러 어머니에게도 한걸음 물러서서 모 자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애기이다. 그러한 아 버지의 역할 부재로 기인한 모자관계의 악화는 평생 을 가고 우리가 일상생활에 서 접하는 갖가지 가정문제를 일으키 는 요인이 된다. 물론 우리가 무의식적으 로 그러한 조정자로서 아버지 역할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다시 한땐 생각해 볼 가치는 층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결혼생활에서 가족간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무 한한 기 쁨을 주기도 하지만 또한 엄청난 갈둥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내가 육아의 1 차 전담자라면 남편은 그 갈둥을 해소해 주고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기꺼이 해야 한다. 아내와 단둘이 영화도 보고 카페에서 향기 로운 커피 한잔을 마시거나 아이들을 재운 후 동네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이라도 기 울이는 시간을 가져 본다면 아내의 육아 스트레스는 많이 줄어 들 것이고 아 내 역시 그러한 남편의 관심에 감사를 표할 것이 다. 또한 아이들에게도 아버지 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 야 한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얘기다. 위기에 처했을 때 '그때를 생각 해 봐' 하면서 아이 들과 데화할 수 있으려면 실제로 아이들과 같이 한 그때'가 있어야 한다는 애기 다. 추억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일 터이다. 그리고 아이와 보다 적극져으로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여 아 이가 어버지와 노 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아내의 육 아 스트레스를 직접적으로 줄썩 주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부부간의 관계도 훨씬 원만해질 것이 다. 2 년 전 결혼기념일의 일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흥대 앞의 근사한 카페에


들어가 우리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우리 둘 다 뭔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노천 카페에서 커피잔을 들고 우리는 그 웠인이 친척에 게 맡기고 온 혜영이 때문임을 확인하고는 "우리도 어쩔 수 없군"하면서 한참을 웃었다. 혜영이는 잠시라도 우리들 마음에서 떠나 있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혜영이는 오히려 우리를 찾 지 않고 잘만 놀았다고 하는데, 글세 그것도 육아 스트레스라고 해야 할지..." 스트레스는 확 버리고 사랑만 담자 이병재(지역신문 발행인) 해바라기와 음악과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흥미로운 보고서가 있다. 음악을 듣고 자란 해바라기 는 꽃이 크고 씨도 튼실한 데 비해서 음악을 듣지 못하고 자란 해바라기는 꽃도 작고 씨도 부실하 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연구결과에 의하면 스트레스를 받 고 자란 장미꽃의 경우 꽃잎 모양이 이 상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색깔도 제 및을 내지 못하고 검게 물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인 간이 아닌 동식물까지도 평소에 스트레스를 받고 자 라면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 어 기형이 발생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것이다. 육아는 일반적으로 (페 이하의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것을 의 미한다. 이 시기에 아이는 가족 특히 부모 에게 전적으로 의지하 기 때문에 객관적인 태도를 가지지 못하게 되므로 '저 혼 자만의 존재' 시기이다. 이때는 아이의 건강과 위생에 특별히 유의해야 하고 주변 환경을 깨끗 이 정리하여 질서 있는 생활 습관의 기초 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유아 교육학자들에 의하면 유아 기 에는 아이에게 최대한의 자 유를 부여함으로써 아이가 신체적 .심리적으로 깊은 모지.견계를 맺 을 수 있게 하고 아울러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유아 기를 보내야 한다고 한다. 정도 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떤 부모나 나름대로 육아에 헌신 적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육아에 따르는 보이지 않는 즈트레즈를 많이 받을 것이며, 이러한 스트레스를 해소하 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가정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 역시 아이를 둔 가 장으로 첫아이를 키우면서 육아 스트레 ' 스에 단단히 곤흑을 치루었다. 그러면 서 터득한 육아 스트레스 해결 방법들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 육아로 인한 스 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스트레스를 미연에 방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부모도 스트 레스를 반기 때문에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사전에 예 방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 은 화기애애한 가정 분위기 조성이다. 부 부간에 항상 의견이 일치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아이와 함께 있을 때는 충돌 국면을 뒤로 미루고 아이와 더날어 호 흡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부부 싸움 잦은 환경에서 아이의 성격이 올바 르게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주 어야 한다. 걸음마를 하는 아이들이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도록 넓은 공간을 제공해 주고 실내 분위기를 수시로 바꿔 짜증나지 않도록 한다. 아이들은 한 가지 일에 오래 집착하지 못한다. 때문에 그림책 이나 장 난감 등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교체해 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새로운 것 에 대한 호기심이 많게 마련이다. 부모들이 이러한 특성을 잘 파악하여 지 속적인 관심 을 보여 주면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 성격이 밝아질 것 이 다. 그떻다고 무조건 아이 중심으로 생활한다면 이기적인 성격이 되기 십상이므 로 잘못에 대해서는 크게 나무라거나 윽박지르지 말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유도 하면서 자션스럽게 해결해야 한 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다음으 로 부모와 아이가 함께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하는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아빠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육아로 인하척 아내는 아내대로 아이는 아 이대로 극도로 지쳐 있을 때 아이가 좋아할 장남감과 엄마가 좋아하는 치킨 한 쪽을 선물한다면 치켜져 있던 엄마의 눈꼬리는 금방 내려갈 것이고 아이는 새로 운 관심거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아내와 아 이를 번갈아 껴안으면서 '여 보, 사랑해 "아가 사랑해' 한다면 방안은 엔돌핀으로 가득할 것이다. 한편 부부 가 약간의 술을 할 수 있다면 아이와 함께 '건배' 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고 생각된다. 이때 술은 엄마 아빠가 화를 푸는 '악 이라고 아이한테 설명하고 아이 잔에는 음 료 를 채워 함께 건배한다. 가족과 함께 하는 '건배!' 소리에 쌓였던 스트레스는 허공으로 말끔히 날아갈 것이다. 아이들은 누구나 동물을 좋아하게 마련이다. 엄마도 좁은 방 안에 있 는 것보다 탁트인 야외에 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휴일을 이용하척 동물원이 있 는 공원을 찾아 나선다. 푸른 잔디 위에서 함께 윙굴고 뛰놀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것이다. 또한 동물 원을 둘러보면서 동물 이름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면 교육적 효 과도 클 것이다. 이때 도시락을 지참하는 것은 나들이를 두 배 로 즐 겁게 하는 비결이다. 마지막으로 스트레스를 부부가 함께 푸는 방법이 있다. 아 이가 쌔근쌔근 잠들어 있을 때 남편이 평소에 익힌 요리 솜 씨를 발휘하척 저녁 상을 마련하는 것이다. '요리가 이렇게 힘들 줄 몰랐습니다. 그 동안 두 아이(한 아이는 아빠) 뒷바라지 하느 라 수고가 많았습니다'라고 존대말을 쓰면서 직접 마련한 요리 를 함께 먹으면 아내의 스트레스는 얼마쯤 풀리지 않겠는가. 이 런 방법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아이를 가까운 친척에게 하루 이틀 맡기고 가까운 근교로 여 행을 떠나는 방법도 있다. 주말에는 교통체 증으로 오히려 역효 과를 낼 수 있으니 주증에 휴가를 얻어 둘만의 오붓한 시간 을 보내는 것이 좋다. 팔쌍을 끼고 오솔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연 애 시절의 짜 릿한 김정이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아 이를 남겨두고 그렇게 갈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몰라도 스트레스를 계속 안고 아씨와 지내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더 나은 기분으로 아이와 새롭게 만나는 것이 좋지 않 겠는가. 하루나 이틀씩 시간 을 낼 수 없다면 영화관에서 손을 꼬옥 잡 고 에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다. 사랑받고 사랑하 는 일 만큼 유쾌한 일은 없다. 유쾌한 기분을 유지하고 유 쾌한 일을 찾아서 한다면 스트레스는 저절로 해소될 것이다. 스트레 스를 확 버 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사랑만을 가득 담아 오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손영락(동양화가) 며칠 전에 동형이와 함께 전에 살았던 녹양동엘 갔습니다. 동형이가 세 살 때부터 일곱 살 이 될 때까지 그곳 지하방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처음 녹양동으로 이사 오던 날, 나는 친지의 등에 엎힌 채 와 서 몇 년간을 누워서 지내야 했습니다. 아내는 이틀에 한 번씩 화장실로 엎고 가 서 머리를 감기고 세수를 시켜 주고 면도도 깨끗하게 해 주곤 했습니다. 때로는 나를 일으키다 가 힘에 겨워 넘어져 울기도 하고 통증 으로 고함을 질러 동형이가 자다 말고 놀라 울기도 했습니 다. 언젠가 사촌 누님이 사는 한강맨션을 다녀오고 난 후에 동형이 는 집 앞에 있는 주공아파트를 보면서 우리도 저기에서 살았으 면 좋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 다. 누님이 살고 있던 그 아파트의 내부가 무척이나 좋아 보였던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모 두 가 그렇게 행복하게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동형아. 너 여기서 살았을 배 기억 나니?' 얼마쯤 변해 버린 동네를 두리번거리 던 동형이는 놀이터의 돌 계단이 없어진 것과 우리가 살았던 방과 친구들의 집 들을 하나 씩 하나씩 기억해 냈습니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미래에 대한 정확한 비전도 설정 하지 못한 채 아버지로서 동형이를 생각하며 만든 것이 [아 버지가 쓰고 그린 그림책]이었습니다. 자정이 지난 늦은 귀가길에 통증으로 길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삼키기도 하면서 무리하게 만들었던 그 책이 나오던 날 나는 약간의 흥분을 검틴존풍 책장 을 넘기면서 동형이에게 이야기해 주었지만 동형이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얼마 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첫 수업이 시작 되는 날, 동형이 는 우리도 모르게 그 책을 가방에 넣고 간 모양입니다. 반 아이 들과 선생님께 우리 아버지께서 만든 책이라고 자랑을 했다는 것을 나중에 담임 선생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동형이의 손을 잡고 녹양동 건너 들녘에 앉 아 보았습니다. 여 러 해 전부터 이떻게 넓은 들녘에 동형이와 단둘이서 나와 보고 쉰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금빛 물결이 출렁거렸을 들 판에는 늦


가을에 베어둔 볏짚들이 군데군데 절모 있었고 그 속 에서 동형이는 깡통 뚜껑 을 높이 던지면서 뛰어놀았습니다. 멀 리 산자락 마을에서는 저녁 연기가 두어 군데 피어오르고 산새도 집을 찾아 서둘러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몇십년 전쯤이었을까. 광주에 서 생 활하던 어느 날 이심. 아내는 저에게 큰절을 했습니다. 어리둥 절해하면서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어서 절을 올리고 싶 다고 했고 그 일이 있은 후 매일 아침 우리는 서로에게 큰절을 하기로 했습니 다. 미운 점이야 한 두 가지가 아닐 텐데 그 속에서 좋은 점을 찾으려는 마음 씀씀 이가 어찌나 예쁘던지 나이나 남녀 구분을 떠나서 아내가 존경 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선물이나 겉치레보다는 내면 깊이 스며드는 마음씨 가 말 한마디에도 담겨져 있고 또 그 러한 행동을 보여 주기에 내게는 소중하기 그지없는 사람입니 다. 진실로 사람을 알고 나면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간에 순 간 의 행동에 동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 아내가 가슴밞이를 할 때면 그 마음이 평온을 찾을 때까지 아내가 나를 위해 숱하게 애쓴 흔적들을 되새깁니 다.. 한쪽이 괴로워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이 화를 낸다면 그 가 정은 아무리 좋 은 환경을 갖추고 있더라고 불행하지 않겠습니 까. 저는 참는 것보다는 이해하 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신석정 님의 시구가 생각납니다. '뼈에 저미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믄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어느덧 이 들녘에도 첫눈이 내리고 고렇게 또 겨울은 우리 곁 에 다가왔다가 또 그렇게 가겠지요. '겨울이 지나면 봄은 온 다.' 아주 아주 고통이 심하던 날 아 내가 내게 들려준 말인지 아내 자신에게 한 말인지 모르게 되뇌이던 말입니다. 나는 살면서 세 번 죽으려고 했습니다. 한 번은 어머니께서 내 앞에 무릎을 끓 고 앉아 우시는 모습을 보고 돌아서야만 했 고, 다음 두 번은 아내와 동형이가 나를 구했습니다. 그러니 세 분이 모두 내 생명의 은인인 셈입니다. 이 세상에서 목숨을 구 해 준 것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생명의 은인들 에게 어떻게 큰소리를 지를 수가 있겠습니까. 아내의 아픈 마음 도 위로해야 하고 정 리를 잘 못하는 아드님 책상도 정리해 주면 서 따뜻한 봄을 기다려야지요. 가족 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남편 이나 아버지라는 혈연 관계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네들은 신뢰 와 사랑으로 내 생명에 각인된 지 오래입니다. 유리창에 묻어 있는 노을을 털어내기라도 하듯이 차는 덜커덩 거리면서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장암 동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행복이라 하는 것은 결코 남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 생명 안에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인생에는 폭풍의 날도 있고 눈이 오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흉중의 창공은 항상 희망의 태양이 빛나고 푸른 하늘이 아릅답게 펼쳐져 있으 면 되는 것이다'라는 스승의 말씀이 귓전을 땡돌았습니다. 이 땅에서 생활한 지 40 여 년. 그 동안에 나는 숱한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살아왔습니다. 내가 건강하고 잘 되는 것이 그들 자신의 기쁨인 양 기다리고 있을 많은 분들을 위해 나는 어떤 그림으로 그들을 환희롭게 해 줄 수가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아내와 동형이에 게 어찧게 감사하며 남은 생을 함께 보내야 할지 많은 생각들이 겹쳐집니다. 승강기를 오르면서 초인종보다는 아내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가장 디정스런 목소리로 불러 봅니다. "유선아..." 당신은 불행하고 싶습니까?


상담 선생님께, 오늘 같은 날은 차라리 폭우라도 쏟아져 이 세상의 오염된 모든 것을 모조 리 씻어 버리고 인간의 오염 된 정신 상태까지 씻어 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은 왜 이리도 달은 밝습니까? 지금은 한바탕 전투가 벌어지고 난 다음의 휴전 상태입니다. 아마 아 내 는 아파트 주변을 맴돌지 않으면 친구네 집에서 동지들에게 하소연이나 푸념을 늘어놓고 있겠지요. 이혼은 절대 안 되는데 그러면 어찌하여야 합니까? 요즘에 와서 여성 의 권위신장이니 동등한 입장이니 하는 여성 운동이 마른 장작 타듯 하여. 우리 기정도 이렇게 부부싸움이 많아진 것인가요? 더욱이 아침 TV 드라마는 아내의 방황, 삼각 관계, 이혼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는데 그 여파가 얼마나 큰 지 알 고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억성운동이 남편들을 구속하 고 들볶는 것인지 사뭇 궁금합니다. 직장 동료들도 회식이 있을 때면 집안에 계시는 아내에게 일일이 보고하척 승낙 을 받는 것은 이제 예삿일이고 아내가 낮에 계모임, 동창회에 나갈 때 는 통보형이 되는 것을 선 생 님도 알고 계시죠. 간이 큰 남자가 아닌 이상 이렇게 하는 것은 상례입니다. 어 떤 때 는 전화통을 붙잡고 쩔쩔매며, '그래 조금만 마실게, 그래 그래 알았어, 딱 한번 이야, 그 시간에 갈게' 를 연발하면서 통 사정을 한 끝에 결국 결재를 어렵게 받 지만 그 모습이란 가관이 죠. 솔직히 말해서 전화를 하지 않으면 뒤탈이 두려워 (아내의 무표정) 그렇게 하는데 저도 전화를 해서 통사쩡을 할 때가 많 습니다. 뭐 이뿐이겠습니까. 다들 집에 가면 부인들의 눈초리나 잔소리에 시달리는 것도 거의 비슷한 것 같아요. 이것을 저는 '아내의 언어 폭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 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방위로 군대를 다녀온 덕택에 24 세에 소위 말하는 대 그룹 신입사원 공채에 당당히 합격해, 내 인생을 걸 비상한 각오로 근무를 시작 했습니다. 29 세에 결혼하억 10 년 이 지난 지금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2 학년, 작은 아이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으며, 자그마한 아파트 에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너무나 행복한 기정이라는 것이 주변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위로는 비좁은 승진, 아래에서 무섭게 올 라오는 젊은 엘리트 사원들. 원 만한 인간관계 없이는 통솔력 부 족으로 낙인찍히기 쉽고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다른 동료들도 무섭게 일하고 있으니, 줄도 없고 백도 없는 저로서는 직장을 잃 으면 이 나이에 어찌될까 생각만 해도 두렵습니다. 죽을 둥 살둥 일한 탓에 일요일이면 삶아 놓 은 시금치처럼 피로에 지쳐서 만사가 귀찮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젊은 날 내가 바랐던 진 정한 꿈의 실현인지 처량하기조차 합니다. 그런데 지쳐서 돌아온 나에게 아내가 생활비니 물


가 니 하면서 이야기할 때 왜 그렇게 야속합니까? 우리보다 못한 사람은 이 세상에 많으니 소박하 고 분수껏 살자는 나의 제안에 '못한 사람 과 비교하니, 당신은 수위 아저씨와 비교하여 승진도 안 된다' 고 푸념만 주렁주렁 늘어놓습니다. 내가 술 한잔 마시 고 들어간 날이면 그 눈동자는 무언의 폭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물론 7 시에 퇴근하여 아내를 도와 주고 아이들과 놀아 주는 것 이 좋은 아버지이자 좋은 남편인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 나 우리 사회의 풍토나 문화적 배경이 그렇지 못하고 남 의 집 밥먹으면서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가정과 직장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직장과 가정의 틈 바구니에서 짓눌리는 정신적 샌드위치 신세로 정말이 지 미칠 것 같습니다. 청소년이 라면 가출이나 탈선이라도 생각 하겠지만 눈 까맣게 뜨고 있는 처자식 생각하면 그만두고 집에 서 놀 팔자도 못 되니 생각하면 가슴이 콱 막힐 때도 있습니다. 오늘만 해도 그떻습니다. 아내가 월간지 부록에 있는 시험지 로 아이를 테스트 해 보았는데, 테점밖에 안 나와 아이에게 꾸중 을 하는 순간, 내가 모처럼 정시 에 퇴근하척 기분 좋게 현관문 을 들어섰습니다. 아내의 얼굴 표정이 그다지 곱 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무슨 일이냐' 는 내 말에 대뜸 '영철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아까 시험 본 것 좀 봐요' 하면서 시험지를 내 앞에 내 밀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제 2 학년인데 뭘 그러느냐' 했더니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사니까 요모 양 요꼴이지' 하면서 화를 벌 컥 내지 않겠어요. 내가 짐승(?) 이 아닌 이상 가 만히 있을 수 있 겠습니까? 그래서 서로의 언성이 높아져서 결국 부학싸움이 되 었고 너무나 기가 막혀 이 사연을 띄우게 되었습니다. l0 년 동 안 살면서 아마 이런 식의 부부싸움은 밥 먹는 횟수와 엇비슷하 게 있었을 겁니다. 연애시절 그 곱던 말씨와 행 동은 다 어디 가고, 언어 폭력에 퇴근길이 가시밭길을 걷는 지경이 되었을까요? 비슷한 처지 에 있는 친구는 부부의 성생활에서 문제가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정말 제 가 무능한 남자입니까? 모든 부부에게 당신은 불행하고 싶습니까?라고 질문하면 '아 니다'라 고 대답할 것이다. 아니, 모두가 행복하고 싶다고 큰소 리로 이야기할 것이다. 모든 부부가 행복하게 살기를 염원하는 데, 그 바람이 실현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아 니다. 부부는 가정을 위하척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면 된다. 한 배 속에서 태어난 형제도 성격이 다르고 의 견이 다르다. 하물며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삶의 방법이 다른 조건에서 그것도 20 년이 넘게 살다가 만났는 데 어찌 성격 이나 의견이 맞겠는가? 맞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부부가 되는 날 그 기쁨과 행복, 그리고 희망에 찬 설계는 다 어디로 가고 어찌하여 세월이 흐르면서 괴 로움만 커진단 말인가? 새로운 가정을 꾸릴 때의 기쁨과 희망을 회복하는 길은 간단하다. 서로 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 거기에 불행을 막는 길이있다. 좋은 아버지 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김갑재(청소년 활동 지도자) 흔히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다'라는 말 들을 한다. 그떻다면 그들 뒤에는 훌륭한 어머 니만 있었고 훌륭한 아버지는 없 었는가? 원시공동체를 지나면서 인류는 집 안팎의 일을 철저히 구분하 기 시작 했다. 그때 이후로 참으로 오랜 세월을 남자는 밖에서, 여자는 안에서 일하다 보 니 자연 육아와 가사는 여자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세상이 변했다. 여자들도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를 갖게 되었고 집 안에서 집 밖으로 나가 지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 를 갖게 되었다. 반면 집안일로만 단정지워졌던 육아와 가사를 남자들도 함께하는 기쁨(?) 을 갖게 되었다. 좋은 부모가 되려는 노력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어 야 한다. 아이는 어머니 배 속에서 열 뎔 동안 듣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보낸다. 엄마가 웃고 애기 하면 아이는 기쁨과 편안함을 느끼지 만 엄마가 화를 내고 거친 행동을 하면 아이는 알 수 없 는 불안 감에 싸이게 된다. 아내가 심정적으로 안정 속에서 임신 기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무 엇 보다도 남편의 역할이 크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말을 배우고 예의범절을 배우 고 사랑을 배우게 된다. 화목한 가정은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는 마음과, 마음을 터놓고 애기하는 생활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아버지는 기정 의 행복을 가꿔 가는 주역'이 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 쳐야 할까? 어릴 때 내 아버지의 모습은 무척 권위적이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5 남 2 녀의 막내인 나는 떠려서 관절염을 닳아 왼쪽 다리 를 쓰지 못 하여 12 살까지 집에서 독학하면서 국어와 산수를 비 롯해 초등학교 교과 과정을 공부했다. 교육감까지 지내신 아버 지께서는 자신이 교육계에 있기 때문에 다리 가 불편한 자신의 아들을 학교에 보내면 학교에서 과잉 보호가 있을 것이라는 생 각으로 초등학교 입학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가족과 친척들의 성화와 노력으로 나는 아버지도 모르 게 6 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집에서 국어와 산 수 과목은 완벽 하리만큼 공부했지만 외우는 과목은 책을 읽어 보는 데 그쳐 학 교에 다니면서는 매일 시험공부 속에서 헤매었다. 나는 그 당시 아버지 모르게 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조금은 부 담되었지만, 학생


이 되었다는 기쁨 속에서 2~5 시간 정도만 자 면서 밤새워 공부했다. 당시 6 학년 담임이셨던 김낙기 선생님께서 아버지의 입장에 대해 시칸이 날 때마다 이야기 해 주셨다. 어린 나에게 학교생활 의 어려움을 즐거운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도 록 격려하고 큰 용 기를 주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덕분에 열심히 노력하여 중 학교 입학의 영광을 안았다. 중학교 입학과 함께 학교에 공식적(?) 으로 다니게 된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늦게 시작한 공부니 너무 무리하지 말고 꾸준히 하랴' 며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는 몸이 불편하니 집에서 공부하길 왼하셨다. 생 각컨대 아버지 나름대로 자식을 사랑하고 걱정하시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러 나 내 생각은 달랐다. 날씨가 흐리면 아버지께서 출근하 시기도 전에 집에서 나 와 오른쪽 겨드랑이에 책가방을 끼고 목 발을 짚은 채 꽈분 가량을 걸어서 학교 에 갔다. 그렇게 중학교 3 년을 개근했다. 아버지는 항상 엄격하고 완고하셨지만 자신보다는 가족을, 집 안 식구보다는 이웃을 생각하셨다. '방상 성실하게 배우 는 자세 로 이웃 사랑의 마음을 행하자'라는 아버지의 지론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청소년운동의 기본정신이 되지 않았나 싶다. 부모가 자녀를 어려서부터 어 떻게 가르치고 습관을 길러 주느 냐에 따라 생활 태도가 바꾄다고 본다. 또 어 떤 환경에서 자라는가 하는 것도 자녀의 장래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대화 시간 을 많이 갖고 자녀의 의견을 존증하는 것은 대단히 중 요하다. 아버지는 참견자가 아 닌 조력자나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한다. 때로는 자녀에게 지나친 보호가 되지 않 도록 지도하고 조 정하면서 자율성을 키워 주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 버 지의 직장생활 모습을 보여 준다든지 해서 일터의 중요함과 근 로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면 아버지와 자녀 간의 관계는 더욱 밀접 해질 것이다. 이제 11 살이 된 아들 민철이는 어려서부터 나의 장애택시웃를 자 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친구들에게도 '우리 아버지는 몸이 불편 하시니까 도와 드 려야 한다'며 아무 거리낌없이 아버지를 소개 하는 배려의 마음을 갖고 있다. 나 역시 집에 놀러오는 민철이 친구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 주고 좋은 책을 읽도록 일 러 주며 모두 내 자녀라는 마음으로 대해 주고 있다. f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t 은 4 년 전 친지들과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회원이 되 었다.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30~40 대의 아버지들이 자녀 키우는 어려움 을 비롯해서 아버지의 어려움을 서로 나누고 자녀와 함께하는 행사를 준비하 고 마련하면서 좋은 아버지의 자리를 조금씩 찾고 있다. 이런 과정과 만남을 통해 아버지로서 반성할 기회도 갖고 다른 아버 지의 모습 속에서 많을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민철이에게 관심을 드러내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아 곧잘 잊어버리기도 했지만 꾸준하게 실행에 옮겼다. 밖에서 시간 날 때마 다 집으로 전화해서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물어 본다든지 귀가가 늦어지면 민철이의 학교생활 알 림 장을 확인해 아침에 몇 마디라도 주고받는다. '오늘 학교에서 뭐 재미있는 일 없었니 t' '빈 철 아. 오후에는 뭐 할거니?' '놀 때는 신나게 놀더라도 엄마도 좀 도와 드려라." 아이를 키우면서 '


칭찬은 보약이다'라는 말처럼 실감하는 말 은 없다. 아이에게 큰 이유 없이 꾸지람을 하거나 버럭 소리를 지른다면 아이는 자신이 하는 일에 자신이 없어지고 눈치를 살 피게 된다. 그래저 민철이의 작은 선행에도 꼭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민철이가 가끔 자기 고집을 피우거나 성질을 부릴 때는 동네 주변을 산책하며 차근차근 대화로 풀어간다. 털분이고 한 시간 이고 민철이와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조금씩조 금씩 서로의 마음이 별리는 게 느껴지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은 시작과 달리 무척 기썹고 웃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 때로는 민철이와 함께 목욕을 가서 푼다. 서로 욕탕에 몸을 담그로 눈 을 마주치며 조 용조용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언제 그랬느냐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고 아이 스스로 잘못된 점을 고쳐 갈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된다는 점에서 좋다. 나는 민 철이에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진솔한 모습을 거짓없이 보여 준다. 청소 미화원이 나 기술자가 땀을 흘리는 현장이나 술 에 취해 헤매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기 도 하는데 이는 삶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다같이 보여 줌으로써 스스로 느끼고 판 단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난 봄에 있었던 아현동 가스폭발 때 민철이와 함께 이재민 을 찾아 그 동안 모아 두었던 교과서와 학용품을 전달하고 적십 자 봉사단을 도와 봉사활동을 했 던 것도 더불어 사는 사람의 책 임과 의무를 알려 주고 싶어서였다. 좋은 아버 지, 좋은 부모는 어떤 모습일까? 이제 성큼성큼 걸어다니기 시작한 자녀와 미술 관에 그림을 보 러 갔다고 생각해 보자. 부부는 걷는 모습이 제법 폼을 갖춘 아 이 손을 잡고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의 눈에 비친 그림 은 어떤 모 습일까? 그림의 아랫 부분만 커다랗고 윗부분은 도무 지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는 기형적인 그림일 것이다. 반면 아 이를 안아서 그림의 정면을 보여 준다면 그림은 어떻게 보일까? 이와 같이 좋은 아버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자 녀가 어떤 상태이고 어떤 마음일까를 먼저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자 신의 말과 행동이 아이에게 거울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행동, 말 한마디에 서 이웃과 함께하는 자세를 보넉 준 다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배우고 따라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자녀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구들도 모두가 내 자녀라는 마 음으로 작은 관심과 사랑을 보인다면 우리 사회는 보다 밝아질 것이고 건강한 이웃이 함께하는 시꾀가 될 것이라 믿는다. 이런 정답이 있는데도 당신은 좋은 아버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썰렁한 아버지는 가라! 유관철(자영업) 가정이란 부부를 증심으로 하는 가족들의 생활 공동체이다. 부부 중심이란 남 자와 여자가 한울타리를 꾸밈으로써 인간이 지닌 가능성의 가치를 극대화한다는 넓은 의미가 있 다. 또 한 부부와 부모 자녀를 포함한 사람 중심의 생활 공동체라는 의미를 갖는 특별한 조 직 이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행함으로써 건강하고 행복한 가 정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나올 수 있다. 먼저 누구의 노력이 필요할 것인가 하는 물 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누구의 역할이 가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가족 구성원 모두의 노력 이 필요하고 그 가운데에서도 부부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사실이나, 변화하는 현 실 속에서도 여전히 가장인 아버지 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그럼 무엇을 위해서 노력할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 가정에 갈망하고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면 된다. 기쩡이라 는 울타리 속에서 우리는 지 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고 쓸어 줄 수 있는 가족간의 따 뜻함을 원하고 있으며 가족간의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 관계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가장인 아버지는 이런 기정을 이루기 위해 과연 어 떠한 사고와 생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일치썩으로 경제적 안 정을 위해서 성실과 근면, 창의성과 융통성 등의 기본적인 자세 가 필요하다. 그런 연 후에 가족간에 따뜻한 인간관계를 형성하 기 위해서 바람직한 아버지의 자세와 역할은 어떤 것이며, 효과 적인 수행 방법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째. 가장의 위치는 수직적 가직판계의 상부(상랑)가 아니고 수평적 가족관계의 중앙이어야 한다. 즉 부모와 자식 간 의 관계가 수평적이고 독립적인 관계 라는 인식을 확고히 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가정이란 부부가 상부상조하여 부 부 중심으로 운영해야만 정상적인 기능을 다한다. 부모들은 자녀와 가족관계에 끝 없는 열정 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열정을 보다 합리적이고 객관 적인 방법을 찾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을 때라야 비로 소 부모의 역할을 올바로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때는 부부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같이 고민하고 실행하고 반성해 야 한다. 셋째, 자상하고 융통성 있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자녀의 입장을 능 동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녀와 함께하는 대화 시 간을 많이 가짐으로써 자녀의 생각과 입장을 폭 넓게 이해해야 하고 자녀와 아 버지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아버지의 장점을 자연스럽게 자녀에 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자상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해야 한다. 넷째, 자신의 모습이 곧 자녀의 삶의 모델이 되고 있음을 명 심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생활 속에서 모범을 보이며 실천적 노력을 행하고 있는가?를 되물어야 하고, 바로 자 신이 자녀의 거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때 유의해야 할 점은 수시로 인생의 동반자인 아 내 에게 신 뢰 지수를 확인하고 보완해 나가는 것이다. 또한 아직 미성숙한 자녀와 시간적, 공간적 으로 함께하면서 가사는 물론 교육까지 전담하다시피 하는 아내의 정신적 .육체적 고층을 이해하고, 아내와 자녀 사이에 생기는 갈등을 조정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요즘 세상이 법이 없어서 이렇게 흔란한 것인가? 우리 모두는 법의 존재 유무가 문제가 아니라 법의 준수나 집행에 많은 문제 가 있음을 익히 잘 알고 있다. 우리 기정의 문제도 바로 여기 에 있지 않을까. 부부관계가 원만해야 하고 자녀에게는 모범이 되어야 하고 가족관계는 신뢰와 사 랑


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몰랐단 말인가. 오늘의 문제는 실천에 있다. 이제 썰렁한 남편, 썰렁한 아버지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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