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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가볍게 살고 싶다. 지은이: 이주향 출판사: 청년사

나는 왜 가벼움을 사랑하는가 파격적 몸짓으로 창의력을 인정받고 있는 현대무용가 안은미 씨는 빡빡머리다. 그가 추는 춤은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즉흥적으로 보여 준다. 한마디로 중성적인 주제다. 그런데 긴 머리를 나풀거 리며 추는 춤은 사람들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여성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게 싫어서 머 리를 잘랐다고 한다. 이제 안씨는 머리가 가벼워서 빡빡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머리가 가볍다는 게 말 그대로 머리카락의 무게가 없어졌다는 뜻은 아닐 터였다. 가벼워진 머리를 하고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안은미 씨의 춤판은 확실히 고정관념을 깨고 있었 다. 무용수들은 가슴을 드러내놓고 춤을 춘다. 차라리 안타까움에 휘몰려 광적으로 몸을 흔들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벗은 몸으로 마찰을 받는 대로 튀는 공을 쫓아다니기도 한다. 도덕적 위선의 무거움을 벗어버리기 위한 걸까? 놀이에의 몰두, 거기에 자유가 있었고 활활 타오르는 생 명의 불꽃이 있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불꽃이 일었다. 길모퉁이 깨진 보도블럭 틈새에 민들레가 억세게 박혀 있다. 봄냄새를 나르는 바람이 기분 좋 게 뺨을 스칠 때 바로 그 민들레에서 후욱, 꽃씨가 날더니 하늘하늘 날아간다. 문득 마음에 펄럭 펄럭 바람이 일었다. 가볍게 날아가는 꽃씨는 가벼워서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거기에는 태산 같은 생명이 있 었다. 생명의 씨를 안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바람을 타는 거였다. 저게 어디로 갈까? 내가 모르는 곳으로 가서 어디든 힘 있게 박힐 거였다. 꽃씨는 내 마음에서 후욱 날아다니 며 가벼움의 무늬로 어른거린다. 그건 자유의 무늬고 생명의 흔적이다. 우리는 서울을 고집하고 일류대학을 선망하고 대기업에 인생을 걸지만 민들레 꽃씨는 생명을 꽃피우기 위해 화단을 고집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매여서 행여 그 기준에서 멀어질까 안절부절 못하는 걸까? 왜 우리는 남과 다른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걸까? 이 책에서 나는 이제까지 자본의 이름으로, 성장의 이름으로, 경쟁의 이름으로


우리를 한 방향 으로 몰아 온 세상의 기준에 조용히 저항해 온 탄탄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 거 대한 이름들이 부채질한 욕망에 들뜨지도 않고 기 죽지도 않고 진정 마음 놓을 수 있는 길의 흔 적을 찾아 보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사는 데는 한 가지 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이 책을 쓰다 보니 세상이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에 주눅들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실제로 혹은 상상 속에서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자본 축적이 목적인 직장에 온종일 매여서 노예처럼 사는 게 싫어서 대학을 졸업하고도 신문배달을 하며 재미있게 살아가는 사람, 집안일이 좋아 당당하게 파출부의 길을 택한 총각, 서울대 교수직을 버리고 땅의 기운을 감지하러 나선 최창조 씨, 인간이 경제적 동물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면서 지리산 자락을 택한 부부, 도무지 매이는 일에 자신이 없 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직업도 없이 역마살이 동하는 대로 떠도는 내 친구, 술집작부, 거지, 첩, 제비족, 춤선생, 사기꾼을 사랑할 줄 아는 방송작가. 이들을 통해 나는 보았다. 견고한 틀의 무거 움을 벗어버리고 가벼워져야 자기 삶의 질감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을. 갑작스런 경제 위기로 인해 모두가 우왕좌왕, 갈팡질팡이다. 어쩌면 지금이 이제까지 우리가 살 아왔던 편협한 삶의 방식을 반성해 볼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는 게 악몽이어 서 이건 사는 게 아니야,를 소리 지르고 싶었다면 어떻든 길을 바꿔 줘야 한다. 길을 바꾸면 해를 만난다. 마음이 가는 길은 작아도 정겨우며, 고단하더라도 가뿐하다. 1994. 4 이주향 감사 드립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이 되는데는 수많은 희생과 손길이 미쳐 있는 법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엔 어머니를 빼고 지금 그 사람의 인생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그리고 언제나 고마운 두 사람이 있다. 내 스승 정대현 선생님과 친구 같은 후배 정인경이다. 내가 스승에게 늘 빚진 마음이 되는 것은 늘 기다려 주시고 믿어 주시는 그 마음 때문이다. 아침 7 시면 연구실에 도착해 밤 10 시가 되어서야 불빛이 꺼지는 연구실이 내 스승의


연구실이었다. 그 런 스승에게 나는 늘 모자라는 제자였을 텐데도 모자란다는 말보다는 더하면 된다는 말로 기다려 주시고 믿어 주시는 분이 내 스승이었다. 지금은 미국에 교환교수로 나가 계시는데, 내 세 번째 책이 형식이 어떻든 인간과 생활 세계에 관한 책이었으면 좋겠다고 편지를 보내 오셨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자기 주장이 없는 듯 희미하게 보이긴 해도 바다처럼 넉넉하게 모든 얘기 를 포용해 줄 수 있는 내 후배 인경이가 있다. 나는 그와 못하는 얘기가 없음으로써 세상 사는 일이 낯설지 않을 때가 많다. 공인이라는 이유로 이 책에 이름이 오르내리게 된 분들, 살아가는 속내를 훤히 내보여 주신 분 들,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들 외에는 가명을 사용했음을 밝혀 둔 다. 프롤로그 적게 보고 깊이 보고... 팔만대장경에는 이런 애기가 숨어 있다. 젊은 부부가 있었다. 남자는 잘생겼고 여자는 예뻤다. 둘은 쳐다만봐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세 월이 쌓이면 쌓일수록 권태와 싫증이 생기는 게 아니라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열정과 정이 새록 새록 해졌다. 그런데 부처님의 조화일까? 부부가 모두 실명하게 되는 사건이 생겼다. 이제 부부는 더 이상 서로의 아름다운 얼굴과 예쁜 몸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이 부부의 사랑을 끊지 못했다. 오히려 의 좋은 이 부부는 더욱 가까워졌다. 부부는 늘 손을 잡고 다녔다. 보지 못 해 애가 끓어서, 사랑하는 아내를, 남편을 잃어버릴까 봐서,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당신 `을 볼 수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까웠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의 좋은 장님 부부의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갔다. 그 소문 을 들은 한 의원이 찾아와서 이 부부의 눈을 치료해 주었다. 치료를 받는 순간에도 부부는 손을 놓지 않았다. 얼마나 기대가 될까? 다시 예쁜 아내를 볼 수 있는데, 다시 잘생긴 남편을 볼 수 있 는데. 남자가 먼저 눈을 떴다. 세상을 보게 된 남자는 제일 먼저 아내를 찾았다. 그런데


어디에도 아 내는 없었다. 옆에 뿐이었다. 세월이 예뻤던 새댁을 늙은 “누가 내 아내를 남자의 절규였다. “내 남편은 어디

있는 여자는

남자가 사랑했던 아내가 아니라 늙은 할머니일

할머니로 바꿔놓은 것이다. 바꿔치기 했는가?” 여자도 눈을 떴다. 눈을 뜬 여자는 놀라 외쳤다. 갔는가?”

행복은 반드시 눈 뜨고 있는 것과 관계가 있는 건 아니다. 많이 보면 더욱 섬세하게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때로는 사실을 많이 보는 일이 상상력을 차단하기도 하고, 진실에 다가가 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많이 배우면 지혜로울 거라고 생각하나? 때로는 배우면 배울수록 교묘해져서 넉넉하게 사는 법 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많이 벌면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대부분의 부자는 돈 지키느라 여념이 없다. 나는 돈 많고 건강하고 시간 많은 사람이 건강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사람은 그 삼박자를 추구하지만 그 삼박자가 맞으면 이상하게도 타락한다. 사람 냄새 풍기면서 살기 위해서 는 셋 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없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높아지는 것도 그렇다. 더 높아지면 많은 사람을 거느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마음으로 악수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워져서 평등한 관계에서 마음을 틀 수 있는 마음이 없어진 다. 이때 마음은 외로워지고 황폐해진다. 이제 우리는 지금껏 익숙했던 것을 바꿔야 한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벌고 더욱 많은 지식을 쌓고 더 높아지고... 그러느라 잊고 있었던 그 잃어버린 시간 속의 감성과 자유의 반란을 정직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적게 보고 깊이 보는 삶의 풍경을 그려보고 싶었다. 1. 작은 것이 아름답다. 칭기즈칸의 진짜 매력 칭기즈칸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적을 추격해 쓰러뜨리는 거지. 적의 소유물을 독차지하고 적의 여 자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때 나는 가장 큰 희열을 느낀다고. 적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다니고 적의 여자들의 몸을 침대와 베개 삼아 논다고 생각해봐, 인생에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고!” 적의 여자를 침대 삼아 노는 남자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때는 언제였나? 마음이 순해지는 사람과 사랑을 할 때였다. 한번도 섬세한 적이 없었는데 괜히 섬세해져서 전 화선을 타고 흐르는 목소리만으로도 마음이 아픈지, 몸이 아픈지를 느낄 수 있었던 사람, 자꾸 이 름을 불러 보게 되는 사람, 없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핑그르 도는 사람과 어줍잖은 미래를 설계할 때였다. 미래는 오지 않았고 더 이상 목소리를 쓸어 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때 나는 인생에서 원 초적인 진실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배웠다. 정겨운 정이 마음 한켠에 도닥도닥 쌓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그 시간, 그 시간을 추억하 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어느새 순해지고, 내 표정엔 반짝 반짝 윤이 나는 것 같다. 그런데 나처럼 작은 인생과 칭기즈칸처럼 큰 인생의 차이는 뭐였을까? 칭기즈칸의 몽고는 겨울이 길다. 영하 40 도까지 떨어지면서 눈보라 치는 날이 비일비재하다. 칼 바람이 불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눈발이 몰아치는 땅. 그 땅에서 살아내야 한다면 삶의 동 작이 크고 거칠 수밖에.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니 전투 같은 사냥을 해야 했고 따뜻해서 먹거리 가 나는 땅을 얻기 위해 쉬임없이 싸워야 했다. 유럽정신이 전쟁에도 도가 있고 윤리가 있다고 믿었다면 척박한 조건에서 칭기즈칸은 `전쟁은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선포해야 했다. 포로 를 화살받이로 이용하기도 하고 서양인들이 비겁하다고 하는 위장과 매복을 자주 사용하기도 했 지만 그 거친 정신의 뿌리에는 윤리와 도의 포로가 되어서는 살아 남을 수 없는 거친 땅이 있었 다. 명분이 행동을 제약하지 못하는 땅에서는 약육강식이라는 동물의 생존법칙이 풀풀이 묻어난 다. 그 땅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최고의 진리는 살아 남는다는 것. 살아 남는 것이 유일한 명분이고 도덕인 그 땅에서 살아 남는 일이란 다른 부족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일이다. 이겨야 먹을 게 나 오고, 이겨야 전사들에게 나눠 줄 약탈물이 나온다. 강자만이 살아 남고 살아 남는 것이 아름다운 거라면 강자만이 아름답다. 피에 민감하고 눈물과 절규에 섬세해지면 살아 남을 수도, 아름다울 수도 없다. 그래서 칭기즈칸은 섬세해질 틈이 없다. 섬세해진다는 것은 약해진다는


것이고 그것은 몰락이기 때문이다. 그 때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노래는 절절한 진리다. 그런데 언제나 크고 강한 것이 아름다운가? 지금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야.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돈으로 산 여 자들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기쁨, 돈이면 다 되지!” 이렇게 돈이 가져다 주는 즐거움을 역설한다면? 설혹 그의 인생관이 천한 자본주의가 품어대는 독성에 쓰러지지 않고 꼿꼿이 버텨내기 위한 지렛대였다 해도 나는 그와 연이 없기를 기도할 것 이다. 그리고 그를 설득할 필요도 느끼지 않고 그에게서 멀리멀리 도망갈 것이다. 사랑하니까 결혼하겠다는데 그런데 돈이 없어서 피로가 묻어나지만 결코 타락할 수 없는 사람과의 인연이라면 어떨까? 가 끔씩 나는 내 막내동생과의 인연을 생각하게 된다. 막내는 늘 자신만만하게 살고 있다. 그래도 막 내를 생각할 때면 나는 언제나 마음이 쓰인다. 전생이 있다면 우리는 분명 어머니와 아들이었거 나 아버지와 딸이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기는 동생이다. 막내동생은 고졸이다. `일찍 끝난다`고 시험 보는 날을 제일 좋아했던 막내는 대학에 가지도,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남들이 다 하니까 대학에 원서라도 한 번 내 볼 만한테 막내는 원서 내 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공부하는 동네는 무조건 싫다는 거였다. 우리는 한 번 원서라도 내 보자고 얼마나 설득했는지 모른다. 그에 대해 막내의 항의는 거칠지 도 않았다. 그저 나른한 신경질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싫어`하고 잘라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 싫어`는 단호했다. “그럼 뭐하고 살 건데?” 그랬더니 막내는 눈빛을 초롱하게 밝히면서 `신발가게`라고 당당하게 대답 했었다. 그런 막내가 군대에 갔다 와서 취직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신발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화점을 지키기 위 해서였다. 백화점 경비가 된 것이다. 깨끗한 양복을 줄 세워 입고 무비 카메라를 들고 혹시 누가 돈을 내지 않고 물건을 가져가지 않는지 지키게 된 날 막내는 내게 그가 하는 일을 신나서 설명 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누나, 나 멋있지 않어?” 나는 한 대 얻어맞은 듯 황당했지만 그 순간 막내는 분명 멋있어 보였다. 백화점에 출퇴근을 하면서 막내는 연애를 시작했다. 1 년 연상의 그 여자는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고, 게다가 연하이기까지 한 내 동생을 좋아했다. 착한 여자였다. 옷가게에서 일을 하는 여 자는 무던하기도 했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결혼을 한다고 알려 왔다. 여자네 집에서 기를 쓰고 반대했다. 누가 봐도 여 자쪽 집안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명목상은 연하라는 이유였지만 어찌 그게 문제되었을까? 내 동생 이 스스로 감탄해하는 그 직업이 문제였다. 직업이 똑똑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세상살이의 미신에 오염되지 않은 이들의 저항도 만만하지 않았다. 저항의 논리는 단순했고 그 래서 강했다. 사랑하니까 결혼하겠다는 거였다. 사실 나는 동생과 동생의 연인이 말할 수 없이 예 뻤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깊이 끌어안을 수 있고 늘 해주지 못한 말이 맴맴거려 결코 떠날 수 없는 사람들, 그렇게 그리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게 내 지론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이 모여 사는 그 단순한 일, 그 이상 의미 있는 일이 세상에 있을까?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나는 먹먹해진다. 쟤들은 다치면 안되는데... 여자가 연상이라는 이유로, 가방끈이 짧다는 이유로 동생과 동생의 연인이 헤어진다면... 남들이 좋다고 하는 직업, 학력,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었던 내 동생이 학력과 직업에 의해 밀려나게 될까봐 나는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모른다. 대학에 가지 않으려고 버텼을때의 그 뚝심으로 동생과 동생의 착한 연인은 결혼을 추진했고 지 금 10 평도 안되는 아파트에서 아주 잘살고 있다. 나는 자문해 본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아껴 주고 싶은 마음을 짓밟은 적은 없었는지. 자본주의 의 원리라는 큰 이름으로 돈 되는 일의 순서에 따라 사람의 귀천을 가리고 돈 쓸 수 있는 양에 따라 사람의 등급을 결정하지는 않았는지. 사회조직이라는 큰 이름으로 조직사회에 길들 수 없는 자유인을 무능한 실업자라고 돌팔매질 하지는 않았는지. 합리성이라는 큰 이름으로 생산성이 높 은 일에 맘 붙일 수 없는 사람을 뿌리 뽑힌 자 취급하지는 않았는지. 아내가 적의 아이를 품고 만삭이 되었다면? 사람이 때로는 도란도란, 때로는 지지고 볶으면서 모여 사는 일이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로 분 석되고 합리적으로 계산될때 삶은 썰렁해지고 허무해진다. 처자식을 먹여 살린다는


절대절명의 사명감을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조직사회에 충성하느라 처자식과 도란도란 얘기해 본 기억이 없다 면? 손해 보지 않은 혼인을 위해 피가 뜨거워지고 눈물이 핑그르 도는 사람을 뒤로 하고 학력, 직업, 집안, 재산을 꼼꼼히 따진다면? 그러다가 드디어 맞는 조건을 찾아 우아하게 결혼해 놓고 뭉클 억울해지는 느낌을 지우기 위해 더 많은 재산을 향해 더 높은 지위를 향해 아둥바둥한다면? 큰 것의 속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 있다. 이집트의 권력자 람세스의 아버지가 최고의 권 력자가 된 아들 람세스에게 해 주었다고 전하는 말이다. “그 누구도 믿지 말아라. 네게는 형제 자매도 없을 것이다. 네가 많이 베풀었던 사람들이 너를 배반할 것이며, 네가 부유하게 만들어 주었던 사람들이 등뒤에서 너를 칠 것이며, 네가 손을 뻗어 도와 주었던 사람이 너에게 반기를 들도록 선동할 것이다. 너의 신하들과 측근들을 믿지 말아라. 너 자신만을 믿어야 한다. 불행의 날이 오면 아무도 널 돕지 않을 것이다.” 큰 것의 속성이다. 큰 것을 지향하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몽고정신의 `큼 `은 그 `큼`이 아니다. 늘 죽음을 앞에 두고 싸워야 했던 전장에서 하급병사들까지 칭기즈칸에게 `너`라고 반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해 줄까? 분명히 칭기즈칸의 거칠고 큰 삶에는 살아 남아야 한다는 동물적 본능이 바닥에서 파닥파닥 숨 쉬고 있다. 그것은 칼바람을 맞으며 거친 땅에서 살아가야 했던 인간의 슬픈 운명과 관계가 있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은 큰 동작 때문이 아니라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굴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내 기 위한 야성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야성이 거칠고 투박하기는 해도 비겁하거나 야비하지 않다는 데 칭기즈칸의 칸정신이 있다. 끝없이 빼앗고 죽이고 부수어대는 싸움터에서 평생을 보내야 했던 칭기즈칸이 늘 이기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싸움에서 진 어느 해 칭기즈칸은 아내를 약탈당했다. 적에게 자기 여자를 침 대와 베개로 내주게 된 것이다. 그 후 칭기즈칸은 그 부족과 다시 붙었다. 이번에는 칭기즈칸이 이겼다. 그때 칭기즈칸은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내는 이미 만삭의 몸이었다. 적 의 아이를 품어서 태산처럼 배 부른 아내를 본 것이다. 그때 칭기즈칸은 얼마나 허물어지고 싶었을까? 칭기즈칸을 다시 보아야 하는 아내의 가슴은 얼


마나 후들거리고 눈빛은 얼마나 공허하고 불안했을까? 칭기즈칸에게 `너`라고 부를 수 있었던 부 하들은 한결같이 아내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누가 칭기즈칸을 닮았는가 칭기즈칸은 적의 아이를 낳아야 했던 여자를 다시 아내로 받아들이고 부하들을 설득했다. 지켜 줘야 할 것을 지켜 주지 못해 생겨난 일이기 때문에 아내가 적의 아이를 품은 것은 아내의 책임 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지켜 주지 못한 자기의 책임이라는 논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칭기즈칸은 아내를 거둬들이는 것은 물론 아내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였다. 자기의 여 자가 낳았으니 자기의 아이란 거였다. 단지 심정적으로만 아이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 아 이를 자신의 태자로 지명함으로써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의 자리를 단단히 했다. 자신감이 없으면 행하지 못할 행동이었지만 어찌 자신감뿐이었겠나? 적의 여자들의 몸을 침대와 베개 삼아 논다고 생각해 봐, 인생에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고, 라고 말했던 그 거친 남자는 세계의 논리와 책임 의 힘, 그리고 사랑의 힘을 아는 당당한 남자였다. 사실 커다란 폭력으로 세계지배의 꿈을 꾼 인물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한무제가 그랬고 알 렉산더가 그랬고 나폴레옹이 그랬다. 부분적으로 히틀러도 그랬다. 그런데 다른 정복자보다 칭기 즈칸에 시선이 머무는 이유는? 강자와의 싸움에서 처절했던 그 남자는 약한 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작은 자를 껴안을 수 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책임질 줄 아는 사내였고 그래 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뭔지를 아는 사내였다. 작은 것 속에 태산 같이 소중한 것이 있음을 모 르지 않았던 남자, 나는 그것이 칭기즈칸의 진정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시사주간지가 세계의 정복자 칭기즈칸과 그 칭기즈칸을 닮았다고 평한 우리 재벌들 사이 에서 나는 현기증 같은 심연을 보였다. 그 차이의 심연에는 무엇이 있을까? IMF 한파로 하루아침 에 굴지의 기업들도 팍팍 쓰러지는 때다. 언제나 오만하리만치 자신만만했던 재벌 회장님의 얼굴 에도 짙은 피로가 보인다. 피로로 어두어진 그 표정 뒤켠에는 몇 달치 월급을 더 받고 명예퇴직 을 할 것인가, 언젠가 다시 고용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감원을 선택할 것 인가를 초조하게 고민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초라한 뒷모습도 있다. 도대체 누가 이 사태를 책임질 것인가? 말이 주식회사지 여지껏 재벌들은 기업에 대해 전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을 개인의 몫으로 축적할 수 있었다. 누구나 어려운 이 시기에 기업 때문에 축적 할 수 있었던 돈을 기업을 위해 모두 쓸어 넣고 그래도 부도 가 나는 기업과 기업인이 있다면 나는 기업에 대한 사랑을 알고 책임감을 아는 그를 칭기즈칸이 라고 당당하게 불러 줄 수 있겠다. 그런데 축적은 개인이 하고 경영 잘못으로 생긴 부채에 대한 책임은 사회가 지는 이 땅에서 기 업이 망했어도 줄어들 줄 모르는 엄청난 개인 재산 때문에 재벌이 칭기즈칸이라고 지칭된다면 몇 백 년 전 북방을 달렸던, 나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칭기즈칸을 위해 나는 목놓아 울어 주고 싶 다. 빈 손으로 갈 줄 아는 사내가 아름답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땅의 칭기즈칸을 보았다. 아파트 외에 개인 재산을 가진 게 있으면 내 무 덤에 똥을 뿌리라고 했던 파스퇴르 유업의 최명재 회장. 그는 회사가 어렵게 되자 그가 살던 아 파트마저 팔아서 회사에 내놓고 그 자신은 분당의 20 평짜리 전세아파트로 옮겨 앉았다. 어려운 회사의 운명과 함께 빈손으로 갈 줄 아는 그는 정말 큰 사내였다. 다 주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가슴이 시리다. 기업경영의 목적이 큰 돈이 아니라 인생인 이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없는 삶들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칭기즈칸을 보라고 소리쳤을 때 난감할 수밖에. 재벌들이 세계의 정복자 칭기즈칸을 보고 문어발식 기업 확장을 정당화하고 있다면 자본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 앞에서는 얼마나 샐샐 웃으며 작아져야 할 까? 그 작은 것은 태산 같은 소중함이 들어 있는 작은 것이 아니라 비굴한 것이고 비굴해서 초라 한 것이다. 큰 것을 지향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에는 숨쉬는 것, 손잡아 주고 싶은 것들로 채워져야 할 인생들의 작은 꿈을 짓밟고 끊임없이 이윤확대를 위해 나아가야 하는 독하고 추악한 운명의 질곡이 번들대고 있다.


유혹과 사랑 사이 인생을 쓸어 주는 부드러운 손길, 그것은 작은 것 속에 있다. 비운의 장수 계백의 매력은 그가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의 신라군대를 몇 번 이겼다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자식을 죽이고 나온 전장에서 적의 자식을 살려 주었다는 데 있다. 나는 쟁취한 권력을 누리기 위해 자식도 믿지 못했던 태종 이방원보다는 태종이 정해 주려 했 던 정략결혼을 물리치고 정혼녀와의 결혼을 추진한 양녕대군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양녕은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하지 않음으로써 더 가깝게 느껴진다. 양녕은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하지 않음으로써 순간순간의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여러 번 배반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위하여 힘의 근원은 머리카락에 있다고 털어놓다가 끝내 데릴라에게 배반 당한 삼손의 매력은 그가 힘이 세다는 데 있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작은 사랑을 믿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고 믿어서 왕을 유혹하기만 했을 뿐 사랑해 보지 못한 장희빈이나 왕의 권위 운운하면서 한때 사랑했던 여자를 처참하게 죽인 숙종보다는 눈빛을 맞추며 사랑을 위하여 를 부를 줄 아는 내 막내동생 부부가 훨씬 아름답게 다가온다. 나는 계백과 삼손과 막내동생 부부가 남겨 준 그 작은 이미지들을 사랑한다. 녹녹하지 않은 세 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순한 시선 때문에 그 이미지들이 상처나고 다칠지라도 녹녹하지 않은 세 상 닮아 더 표독해진 사람들보다 상처로 표정이 생긴 그 삶들이 행복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큰 것들에 가려서 때로는 짓밟히고 때로는 잃어버린 작은 것들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뭉클하다. 물론 작다고 밟고 작다고 주눅들게 만드는 일이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그러 나 큰 것이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는 억센 사회에서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 는 사람이야말로 인간의 향기가 있는 사람이다. 칭기즈칸이 아름다운 이유, 그것은 그가 정복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작은 것을 책임질 줄 알고 사랑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작은 것을 놓치고 그저 큰 것을 향해 달려가는 삶은 쓸어 주고 싶지 않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적게 벌어 재미있게 사는 방법


만일 당신의 남자가 너무나 바쁜 사람이어서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면? 때로는 호 텔의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고급 요리를 사 주기도 하고 가끔은 남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코트 를 선물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은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모인 호화 로운 파티에 데려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혼자 지내게 한다면? 당신은 그로 인해 행복하다고 느 낄까, 불행하다고 느낄까? 어떤 남자가 좋을까요? 반대로 당신의 남자가 너무나 없는 사람이어서 가난을 각오하지 않고는 그 사람과 살 수 없다 면? 대부분의 시간을 붙어 있을 수 있고 요리도 잘하고 당신과 매주 등산도 갈 수 있지만 그로 인해 당신이 늘 경제적인 짐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면? 당신은 기꺼이 가난을 받아들일까, 아니 면 갈등하다가 그 남자를 버릴까? 당신에게 그는 연인일까, 짐일까? 대부분의 선택지가 그렇게 대립적이지는 않겠지만, 또한 그것이 언제나 선택의 문제는 아니겠 지만 분명한 건 어떤 상황을 선택하건 돌을 맞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선택은 집요한 것이어서 그 다음 삶에 자신의 행적을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나라면 어떨까? 만일 내 남자가 돈 때문에 바쁘고 사회생활 때문에 정신이 없다면 나는 나른한 권태를 잊기 위해 나대로 바쁠 것 같다. 내 남자가 내 속의 남자가 되지 못하는 그 불행하면서도 급수가 낮은 밋밋한 불행에 눌려 체념을 배울지도 모르겠다. 반면 내 남자가 돈이 없어 돈 쓸 일에 미적미적거린다면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주눅도 들겠 지만 그로 인해서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가난에 길들여지는 법을 배우려 할 것이다. 삶 에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은 없다고 믿으면서 힘을 낼 것 같다. 삶에서 소화해낼 수 없는 고통은 없다고 믿는 것, 때로 그것은 자만이고 때로는 사실도 아니다. 때로는 견뎌내는 일 외에 별 방법도 없고 때로는 무너지는 일 외에 별 비전도 없어 보이는 그런 운명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믿는 사람, 남에게 그 믿음을 힘 주어 강조하지는 않지만 무심히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좋다. 그런 사람은 사는 데는 그렇게 큰 돈이 필요하 지 않다는 것을 안다.


어떤 심리학자는 사람은 깨어 있는 시간의 80 퍼센트를 돈 생각하는데 쓴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95 퍼센트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글쎄, 그럴까? 그렇다면 그것은 물가는 폭등하고 감원 폭풍 이 몰아치는 이 상황을, 이 상황에 대한 불안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 이때 뚜렷한 직업 없이 적은 돈으로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돈을 벌기는 하지만 돈 을 버는 이유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는 걸 잊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구나 그 사람이 자 신의 생활을 사랑해서 자신의 삶을 그 누구의 삶과도 바꾸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본성과 친해져야 진짜 친해진다 김창후 씨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직장을 다녀 본 적이 없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는 상사 눈치 보며 희망과 불안을 되풀이해야 하는 조직에 얽매이기 싫었다. 남들 사는 대로 사는 일이 말이 많지 않은 일임을 알았지만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정장을 입고 해가 떠 있는 시간 모두를 조직에 바친다는 것은 끔찍했다. 그는 조바심치는 일을 제일 싫어했다. 김창후 씨는 직위나 수입이 인간을 보증하는 그런 사회가 생리에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생활 할 수는 있어야 했다. 자유를 담보로 잡히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시작한 일이 신문배달이었다. 배달원의 수입은 한 부에 천 원, 그는 꼭 삼백 부를 돌렸다. 오백 부를 돌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지만 새벽 4 시부터 6 시간까지 두 시간 재미를 잃지 않고 돌리기에는 삼백 부가 딱 맞다는 것 이 김씨의 설명이다. 그러니까 30 만 원이 김씨의 수입인 셈이다. 30 만원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까? 신용카드가 없으니 충동구매할 일 없고 매달 내야하는 월세가 없으면 30 만원은 서울에서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돈이라고 김씨는 말한다. 사는 데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들까? 기본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 돈이 많이 드는 사람이 있 다면 그는 우아한 사람이라기보다 자유를 누리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가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경 비를 만들기 위해 그만큼 자유를 담보로 잡혀야 하기 때문이다. 돈 대신에 머리를 쓰면 돈 안 들이고 멋있는 데이트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아무튼 별로 돈을 벌지 않아도 기죽지 않는 김씨의 설명이었다. 돈이 있어야 데이트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게 하는 힘이 되지는 못한다. 그처럼 돈 없으면 느낌이 있는 데이트를 할 수 없


다는 생각도 자본주의적 편견이다. 김창욱 씨는 데이트를 할 때 작은 공원 벤치를 약속 장소로 정한다. 담배 연기 자욱한 답답한 카페에 갇혀 있기보다 야산을 가볍게 산보하면서 할 수 있는 데이트. 형식이 늘 내용을 담보하는 건 아니지만 형식만으로도 훨씬 인간적이다. 데이트는 돈 쓰기다, 이 등식은 편견이다. 서울 시내에서도 돈 냄새를 거둬내고 문화와 낭만이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김창후 씨는 최고의 데이트 장소로 어디에나 넓게 자리잡은 대학 캠퍼 스를 권한다. 그 다음 한남동의 이슬람 사원이 있다. 이국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슬람 사원은 그에게 추 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 그는 한 여인과 여기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 그곳에는 성도들이 제단으로 올라갈 수 있는 큰 계단 뒤로 후미진 곳이 있었다. 거기에는 늘 깨끗한 짚이 깔려 있었다. 그 짚위에 편하게 털썩 앉으면 계단의 경사면이 눈앞에 와 닿았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는 4B 연필을 꺼내 번갈아 가며 경사면에 연시를 썼다. 창문을 열면, 이라고 그가 운을 떼면 이마에 와 닿는 산빛 푸르리라, 는 게 여자의 반응이었다. 그러다가 성전지기에게 들키면 쫓겨나 기도 했다. 프랑스 영화를 좋아한다면 프랑스 문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데이트 코 스가 될 수 있다. 흔히 볼 수 없는 좋은 영화를 별 비용 들이지 않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남산의 단군굴도 데이트 장소로는 좋다. 단군영정이 모셔져 있는 단군굴 근처엔 약수터도 있고 골짜기를 걷는 맛이 있어 신선하다. 어떤 사람의 인생과 만나고 싶다면 등산을 가라, 이것이 김창후 씨의 지론이기도 하다. 산에 올 라가다 보면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나온다. 바로 그 자리가 인간과 인간이 밑바탕에서부터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자연을 느낄 때 살아 있는 존재는 싱싱해지죠. 자본주의적 편견과 싸울 힘도 나고요. 등산하 다 보면 처음엔 손도 잡아 주고 하지만 자기가 힘들어지면 본성이 나오기 마련이죠. 바로 그 본 성과 친해져야 정말 친해지는 거죠.” 데이트를 하다 보면 배가 고파진다. 그러면 식사를 해야지. 식비는 생각만큼 많이 들지 않는 품 목이다. 김씨는 여자와 밥을 먹기 위해 식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시장엘 간다. 시장


구경, 그것도 빼놓을 수 없는 데이트 코스다. 여름엔 오이, 상추, 고추와 같은 야채를, 겨울엔 생선매운탕을 끓 일 수 있는 재료들을 산다. 얼마든지 적은 돈으로도 풍성하고 기분 좋은 식탁 앞에 마주 앉을 수 있다. 식단을 짤 때 유의해야 할 점 하나, 신선도도 떨어지고 건강에도 않 좋으면서 비싸기만 한 인스턴트 식품을 사지 않는 일이다. 함께 밥상을 차리고 함께 밥상 앞에 마주 앉는 일, 그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겠지. 비교하면 무너진다. 가난한 삶을 편견이 해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비교하지 않는 것. 비교 하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자본주의적 가치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온다. 그 다음 가난한 마음은 청 명해지는 게 아니라 음산해져 아무런 울림이 없이 완전히 폐허가 된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불쑥불쑥 마음이 쏠리면 자유는 절망이 된다. 그 대신 누릴 수 있는 것을 느낄 줄 알면 가난한 마음은 평정한 자유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명상적이고 더 삶의 깊이가 있습니다. 가난은 나를 삶과 밀착시켜요. 사 고 싶었던 책을 사기 위해서도 기다려야 하거든요. 책 한 권도 얼마나 소중한대요.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를 권태롭게 궁리하는 게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야 돼요. 그러면 잡념과 망상이 자리할 여지가 없어요. 그게 삶과 밀착된 거 아닐까요. 소위 오렌지족들은 삶과 간격이 있습니다. 돈이라는 완충지대가 너무 두텁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겸허하게 삶과 맞닥뜨릴 수 없는 거죠. 당장 지갑에 얼마가 있는지도 모르고 또 어떤 규모로 돈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계획이 없으니까 흥청망청하게 되죠. 설계의 기쁨이 없잖아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데 그렇게 살다 보면 적당히 사회에 길들여진 친구들과 멀어지지 않 을까? 그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쾌했다. “뭐 부딪히는 사람들을 모두 아는 척 하면서 살 필요가 있습니까? 휘귀종끼리 알아보고 사귀 면 깊이 사귀게 되고요. 군중 속의 고독 같은 거, 그런 개념없이 살 거든요.” 두세 시간이면 끝나는 새벽일을 마치고 나면 돈 버는 일은 하지 않는 김창후 씨의 하루 해는 짧기만 하다. 자신이 존경하는 교수나 강사의 강의를 들으러 갈 때도 있고 그냥 하루종일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상상을 즐기거나 음악을 듣기도 한다. 우이동에 가서 기공과 명상을 하기도 한다. 늘 자기만의 시간으로 세상을 사는 김씨가 권하는 문화생활은 이런 것이다. -

나무나 꽃 가꾸기 언더밴드들 무료공연 보러 가기 문화학교 서울, 씨네마떼끄에 가기 친구집에 가서 요리해 먹기 새벽시장 둘러보기 자전거 타고 동네 돌기 도서관 가기 개나 고양이, 새 기르기 애청 프로그램 한두 개 정한 다음 라디오 방송국에 엽서 보내기 외국인 친구 사귀기 붐비지도 않고 친절하기도 한 신설 은행 가서 커피 마시며 잡지 읽기 명상모임에 나가기 무료전시회 찾아가기 자동차 정비 배우기 운동 종목 하나 선택해서 실력 쌓기 환경운동연합 같은 사회단체에 정기적으로 나가서 자원봉사 하기 버려진 헌 가구 손질하기 문화 강좌 들으러 다니기 동네 노인분들 사귀기

이처럼 다양한 일도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없다면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자유인 이 되기 전에는 자유도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대기업에 취직 못 하면 죽는 줄 압니다. 그건 전근대적 사고죠.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내 인생은 사라지는 겁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넥타이 맨 노예가 되는 걸 거부하기 위해 그의 경력은 화려하기만 하다. 그는 세차 일도 한 적이 있다. 주유소마다 세차장이 없던 시절 그는 매일 아파트 단지 앞 세차장에서 두 시간 반동안 열심히 차를 닦았다. 새벽 일을 선호하는 건 생활이 규칙적일 수 있고 나머지 시 간을 몽땅 하고 싶은 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시간 반 일하고 한 달 수입은 50 만 원. 1990 년 초 그것은 괜찮은 벌이였다. “세차장 옆에는 스포츠센터가 있었어요. 일부러 돈 내고 운동하러 갈 필요있나요? 저는 새벽 마다 스포츠센타에 간다고 생각하고 출근했습니다. 옷도 운동복으로 갖춰 입었겠다, 양동이 하고 먼지떨이, 물걸레가 바로 운동기구였죠. 정말 신나게 일했어요.”


새벽에 일한 대가로 하루를 멋지게 보내는 그는 새벽에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 봤다. 그런 그가 권하고 싶지 않은 일 하나는 우유배달. 수입은 좋지만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 우유배달을 하기 위해선 권리금이 필요하다. 당연히 시작할 때 몫돈이 필요하다. 그는 세차해서 저축한 돈을 그 권리금으로 넣었다. 우유배달의 맹점은 수금이 안된다는 거였다. 28 일간 받아 먹다가 수금일을 이틀 앞두고 이사를 가 버리는 깍쟁이가 있고, 분명히 배달했는데 며칠 며칠 안 들어왔다고 달력에 가위표를 쳐서 내 미는 황당한 사람들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건강을 담당한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했어도 스트레스가 많은 게 이 일이다. 아르바이트처럼 일하고 일하듯 인생을 즐긴다는 자부심이 없다면 김창후 씨처럼 사는 일은 불 가능하다. `인생을 어떻게 즐기기만 하냐, 멀쩡한 대학 잘 다녀 놓고 왜 안정된 직장을 갖지 않느 냐`는 주변의 시선을 무심하게 받아넘길 만큼 강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낙천적이어야 한 다. 너무도 잘 놀아 이름도 `노자` 김창후 씨가 사는 동네에 얼마 전 50 대 군인이 전역했다. 그리고 그는 한 달만에 세상을 떴다. 그 아저씨뿐일까? 실제로 퇴직한 후 부쩍 늙었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지 않은가. 미국의 한 연 구에 따르면 은퇴 후 10 명 가운데 7 명이 2 년 안에 사망한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왜 그럴까? 스 스로 노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들은 도대체 지칠 줄 모르고 잘도 논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게 살아 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는 생성이며 놀이이며...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신성한 긍정이다. ” 살아 있으므로 아이들은 주위의 모든 것을 살려낸다. 돌멩이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된다. 친구는 남편도 되고 아내도 된다. 우산은 집이 되고, 강아지도 친구가 된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아이들은 모든 것을 누릴 줄 안다. 모든 것과 놀기 때문에 언제가 쓰임새가 있고 언제가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성공이라는 고지를 향해 달려온 사람들은 그 성공이 자신을 버렸을 때 더


이상 자신의 쓰임새는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들은 `일` 외에 할 줄 알고 생각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들의 인생을 쥐고 있던 바로 그 일이 그들의 손을 놓았을 때 이제 끝났다고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노는 일을 배워야 한다.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길지 않은 삶으로 몸소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 온 김씨는 놀 줄 아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 라고 잘라 말한다. “제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인류역사상 최고로 잘 놀았던 사람인데, 이름도 `노자`예요. 얼마 나 잘 놀았으면 이름도 노자였겠어요? 노자는 모든 사람이 앞서가려고 할 때 뒤쳐져 가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깨달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노자 사고의 혁명성이죠. 뭔가를 가득 채워야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답답한 사람, 불행한 사람, 무거운 사람이기 때 문이죠. 노자는 그걸 과감하게 비우라고 하고 있죠.” 캐나다 사람들은 걸음걸이가 느린 반면 표정은 대체로 평온하다. 거기에서 운동복을 입지 않은 누군가가 뛰어가면 곧바로 경찰이 출동한다. 캐나다에서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뛰는 사람 은 좀체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경찰의 출동이 빈번해졌다. 관광중에도 느긋하지 못하고 뛰어다니기 때문이다. 빨리빨리 보고 빨리 가야지, 그런 심리 때문이다. 도대체 왜 관광을 하는 걸까? 노자는 어디로 갔나? IMF 시대, 이제 거리에는 앞서가야 한다는 아니, 적어도 뒤쳐지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더욱 조바심치는 풍경이 널리게 될지도 모른다. 집념에 불타는 눈빛을 볼 때면 나는 마음문을 닫는다. 집념 때문에 인간을 냉대하는 쌀쌀한 기운에 놀라서다. 반면 무욕해서 청명해진 눈을 보면 따뜻 해진다. 적은 돈을 들이고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서 배우자. 무욕한 사람과 마음이 만 나는 일 외에 따뜻해질 방법이 있을까? 최창조가 `서울대 교수`를 버린 이유 꿈이 많았던 아파트가 있었다. 아니, 꿈이 많았다기보다 꿈에 시달렸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너저분했던 그 꿈들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기분만은 아직도 남아 있다. 질척이고


끈적거리고 끌어내리고 마치 악귀처럼 따라붙고. 나는 10 평짜리 그 아파트에서 자주 감기몸살을 앓았고 때로 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결국 1 년도 견디지 못하고 이사를 했다. 사람을 믿듯이 집을 믿는다. 내가 이사 가던 날 새로 이사를 든 사람이 아파트 바닥 공사를 했다. 세상에, 나는 기절할 뻔했 다. 바닥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벌겋게 녹이 슨 호수 사이에 진흙탕 같은 물이 흥 건했다. 그 썩은 물 위에서 1 년 가까운 세월을 산 것이다. 그때 나는 충충했던 꿈의 근원을 알 수 있었다. 모른다고 해서 무시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렇지만 알고 싶지 않은 것은 모르면서도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다. 그런데 내게는 모르면서도 존중하게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풍수다. 나는 사람을 믿듯이 집을 믿는다. 나와 맞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나와 맞는 집, 맞지 않는 집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나의 20 대는 우울했고 그 집은 우울한 청춘이 살아야 했던 집이었다. 어떤 근거에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물으면 할말이 없다. 때로는 기분 외에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이 있다. 지금 남향의 내 집은 20 대의 우울함, 목까지 차오르는 슬픔과 같은 정서에서 도망가게 한다. 여전히 작은 집이지만 20 대와 결별하고 싶은 내가 좋아하는 집이다. 나는 꿈을 매일 꾼다. 대체적으로 내 꿈은 내 현실의 적나라한 반영이다. 나는 현실을 현실 아 닌 방식으로 얘기해 주는 꿈의 세계를 사랑하는 편이다. 문만 걸어 잠그면 그 어떤 것과도 소통 할 일 없는 아파트에서 살고 문명의 최첨단이라는 컴퓨터를 쓰고 있어도 꿈은 내가 자연에서 온 자연적 존재라는 걸 잊지 않게 해 준다. 꿈은 때로는 자연적 교감이고 때로는 자연과의 교감이라 고도 할 수 있는 영감으로 살았던 시대에 대한 흔적 아닌가! 서울, 밥을 위해 사는 영혼들을 외롭게 하는 땅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신비한 것들에 관심이 많다. 마치 `신비는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불안한 인생을 담보로 잡고 `신비`라는 말을 싸구려로 팔아 연명하는 사람들에는 관심이 없다. 그 러나 남달리 직관이 발달되어 있고 감성이 예민해서 `신비`의 냄새가 묻어나는


사람에겐 살짝살 짝 곁눈질을 보내게 된다. 그 신비는 언제나 자연을 보는 눈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 버린 자연이 무욕하고 안타깝게 찾아가는 사람을 만나면 괜히 미안해지기도 한다. 풍수를 모르면서도 풍수적 시각을 무 시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의 무덤은 망우리 공동묘지 한켠에 서북 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소위 술법으로서의 풍수라면 결코 택하지 않을 좌향이다. 물론 내 설명이 아니라 풍수를 위해 서 울대 지리학과 교수 자리를 박찬 최창조 씨의 설명이다. 묘석도 없이 조그만 시비가 덩그렇게 무덤을 지키고 있는 쓸쓸한 묘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세월이 가면> 가운데 이 부분만 거기에 새겨져 있다. 박인환이 세상을 떠나던 1956 년 추석, 친구들이 세웠다고 전한다. 그런데 그 묘지는 그의 시풍에 가장 적합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최창조 씨의 주장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서른한 살 젊은 나이에 심장 마비로 죽은 시인 박인환의 시에는 깨끗한 허무가 밴다. 허무가 깔린 무덤덤함이 그의 시의 표정 인데 묘지가 그 표정에 맞게 자리하고 있다면 그 땅은 그 영혼을 완전하게 받아낼 수 있으리라. 마치 궁합이 맞는 부부처럼. 최창조 풍수의 정신은 그것이었다. 그것은 땅에도 표정이 있어서 느낌이 있고, 맞고 맞지 않음 이 있다는 거였다. 쓸쓸한 사람을 환희에 찬 음악이 위로할 수 없는 것처럼 허무를 본 사람에게 양명하기만 한 땅이 맞을 리 없다. 땅이 입을 다물었을 때 제일 두려운 사람, 바람이 머무는 곳과 흐르는 곳을 아는 사람은 분명 땅의 기운을 감지하는 사람이었다. 최창조 씨는 그가 최대의 잡답이라고 평한 서울의 삶에 이런 회의를 보낸다. “서울에서 내가 찾은 것은 무엇이고,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끝내는 서울대 교수를 자진해서 그만두어야 했던 최창조 씨의 고백이었다. 무엇이 그를 `교수` 라는, 그것도 `서울대 교수`라는 긍지를 배반하게 했을까? 어떤 강인한 힘이


불렀기에 그는 서울 대 입성을 `전도된 명예욕과 지적 허영심`이라고 단언함으로써 나 같은 사람들의 열등감을 건드 리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훔쳐보고 싶었다. 그러면 바로 신비하다는 이유로 때로는 우 리가 멀리했고 때로는 맹신했던 잃어버린 삶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팔트에 익숙하고 육중하게 서 있는 빌딩들에 별 거부반응 없이 살다가도 쑥쑥 고개를 내밀 며 이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었다고 배시시 웃게 되는 풍경이 없었나? 언젠가 명지산에 오를 때 였다. 뽀송뽀송한 황톳길, 한적한 산길에 들어섰을 때 나는 갑자기 신을 벗고 맨발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신을 신고 양말을 신고 첩첩으로 땅과 격리되어 온 내 발인데도 부드러운 흙의 매 력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건 본능이었다. 마치 연인의 몸을 만지듯 나는 어린애가 되어 흙을 만 지며 놀았다. 30 분이나 놀았을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건 긴 추억이었다. 정말 세월이 가면 운명처럼 느껴져서 떠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돌변해 있을지라도 운명처럼 느 껴져서 떠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최창조 씨에게 땅이 그랬다면 서울 사람들에게 서울이 그렇다. 서울에서 사람들은 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과중한 업무도 견디고, 무시하는 시선도 견뎌내고 곤한 스트레스도 견뎌내면서 무엇엔가 매여 있지 않다는 것, 그걸 견디기는 힘 들어 한다. 거기서 밥이 나오기 때문이라면 우선은 위로가 된다. 그런데 밥이 점점 기름져 가고, 그 기름져 사는 밥을 위해 때로 우리가 더 중요한 것을 놓치면서도 `밥을 위해서`라고 변명하는 건 아닌지? 변명 같은 진실 속에 들어 있는 비굴함에 울고 싶은 만큼 최창조 씨가 서울을 최대의 잡답이라고 평한 이유에 공감하게 된다. `밥을 위해서`의 대가는 명백하다. 밥의 논리에 매인 영혼들의 외롭고도 누추한 삶. 그것이 풍 수에서 서울은 밥을 위해 사는 영혼들을 외롭게 하는 땅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아닐까. 밥을 위장 한 논리는 공격적이어서 늘 날이 서 있다. 상처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처나고 무릎을 푹푹 꺽 으며 실낱 같은 목숨을 이어가야 한다. 그것은 서울 생활 몇 년만에 최씨가 직접 경험한 것이기 도 하다. “서울은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물어 오고 무언가를 발표해야 하고 무


언가를 방어해야 하는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내가 원하는 공부는 내가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또한 최씨가 대학강단을 떠난 이유이기도 하다. 일반상식은 자신을 대학 강단에 매어 두어야 학문이 된다고 말하지만 가슴으로 스며드는 공부, 논리보다는 무욕한 마음이 바탕인 공부 는 `대학`도 지적 허영심이 되고 권위있는 이론가들도 공부를 방해하는 장벽이 될 수 있다. 이미 학문에도 권력이 있고 계급이 있어서 그 무게를 지우지 않고 땅의 논리, 바람의 이치를 만나기는 힘들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신비가 복이 되는 요즘 그를 이렇게 소개하는 사람들도 있다. “뜻이 있어서 지금은 교 직을 그만두시고... 일찌감치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고. 글쎄, 그는 풍수를 과학적 근거가 없는 미신으로 치부하는 서양지리학에 대한 울분 못지않게 서울대 교수 출신이 교수직을 그만두었으니 까 깨달음이었을거라는 식의 논리가 부담스럽다. 그에게 땅과 산은 크고 부드러운 힘으로 잡아 끄는 연인이어서 그저 본능적으로 빠져들었을 뿐이다. 연인의 부름에 따라간 것일 뿐이지 높은 깨달음이 있어서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소리 지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자유로운 삶이지,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자기 존재의 위대성을 증명하기 위 해 자유를 믿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사랑하고 싶은 것, 만져 주고 싶은 것, 그래야 마음자락이 편해지는 것이 있어 그것을 몸이 따라갈 때 `자유`는 구호가 아니라 현실의 원리가 된다. 밤새 애만 태울 것인가 최창조 씨는 1992 년 3 월, `서울대 교수`라는 갑옷을 벗는다. 그가 상아탑에 들어감으로서 함께 숨막혀 하는, 그의 속에 있는 풍수지리학에게 단단했던 철장문을 열어 주기 위함이었다. 교수로 살았던 십여 년, 그는 풍수학을 사랑했지만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교수라는 이름의 무거운 갑옷을 입고서는 바람을 느낄 수도, 물길 따라 마음을 흘려보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서 로의 감정적인 대립도 학문적 논쟁이란 기막힌 말로 표현을 하고 치열한 순위경쟁도 새로운 면학 분위기 조성이라는 말로 둘러대는 곳, 결코 패배해서는 안되는 그곳에서 투사로 살아가기 싫었다. 투사를 길러내는 투쟁장에서 어찌 산의 표정을 읽고 땅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을까?


안온함이 없 는 곳에서 사랑은 서툴게 마련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산은 그냥 거기에 있고 나는 산에 안겨 있었으나 대화가 통하지를 않았어요. 그러니까 밤산 도 두려움으로 다가왔죠.” 결국 그는 결단했다. 산이 부르는 대로, 물길이 인도하는 대로 살겠다고. 역마살이 동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상아탑은 일종의 사치라고, 안정 대신 자유를 선택한 이유였다. 그런데 당신도 나처럼 이렇게 묻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어찌되었거나 최대의 밥줄이 끊겼는데 상아탑이라고 말하는 그 좋은 직장에서 당당하게 자기 발로 걸어나온 그 행위가 사치이지 않겠는 가고. 실직한 가장의 가장 큰 형벌은 역시 생활방편을 마련해야 한다는 부담이었다. 두 마리 토기를 잡는 일은 역시 위험부담이 큰 모험이었다. 그는 이렇게 쓴다. “...우선은 서글픔이었고 다음은 후회였다... 도저히 내가 장사를 해낼 것 같지가 않았다. 절망 적인 생각이 들었다... 하다 하다 생각해낸 것이 망할 생각이라더니, 결국 집을 팔고 줄여서 그 나 머지 돈으로 은행에서 이자를 받아 생활을 하면 어떻게 버틸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 그는 강의도 하고 원고료도 받고 연구비도 받아서 생활을 꾸렸다. 안정적이지는 않지만 생계는 결코 막막하지 않았다. 안정성을 담보로 잡히고 선택한 자유는 고단한 것이었어도 의미 있는 선 택이었다. 사실 고달프지 않은 선택이 어디 있으랴. 삶은 그 자체 고달픈 것이다. 내가 원하는 공부는 내가 할 수밖에 없다고 끊임없이 그를 불러 대는 당의 소리를 따라왔다고 해서 고들픈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세월이 흘러가면 한점 흙으로 돌아가는 그 몸이지만 한순간은 찬란히 빛나는 그 몸이, 그 몸이 깊이 만나고 싶어 안달 이 나는 상대를 제대로 만났다면! 그러면 고달픔도 무섭지 않고 따뜻한 거겠지. 그래서인지 그의 풍수에는 인간사가 정겹게 묻어난다.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사 뒤의 자지골과 보지골은 폐촌이 되어가는데, 그 이유가 바위와 계 곡이 깊숙이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밤새 애만 태우고 `가친가친`거리다 마는 안타까운 꼴이 기에 그곳 사람들이 시름시름 그 골짜기를 빠져나간다는 얘기다. 안정 대신 자유를 선택한 그는 풍수를 깊게 만날 수 있었다. 발길 닿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이 땅, 이 강산을 떠돌다 보면 때로는 개발에 상처나고 때로는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은 다 듬어 주고 싶은 마음, 나는 그 마음을 배우고 싶었다. 땅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마음 둘 수 있는 느낌일 테니까. 그 자리에서 나는 물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밥그릇에 쩔쩔매다가 내가 무엇을 원하 는지 그 사실조차 놓치지는 않았는가? 나는, 고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고단하더라도 얼굴에는 생기가 도는 그런 일을 위해 안정 대신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가? 최창조 씨를 생각하면서 나는 내 생각을 했다. 당신은 어떠한가? 콘크리트 시대에 자급자족으로 사는 맛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우리 모두, 여기까지 달려왔자. 국민소득 1 백 달러도 안되는 그 시점에서 1 만 달러 시대까지 목표를 향해 이 자리까지 달려왔다. 달린다는 것, 그것이 집단적 인 구호가 되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달려가야 했는지 한번도 진지하게 되물은 적 없이, 인생 의 나직한 쉼표를 찍을 여유도 남기지 않고 그저 달려온 날들이었다. 달리는 무리에서 뒤떨어지 지 않기 위해 때로는 허둥지둥 허겁지겁, 때로는 으쓱거리면서 무지개가 있다고 한 1 만 달러 시 대까지 이렇게 왔는데. 이제는 쉼표를 찍을 때 지금은 그저 달려온 일, `달려라, 고지를 향해`라는 구호가 얼마나 난감하고 얼마나 허무한 것 이었는지 절절하게 다가온다. 달리는 것의 끝이 무지개를 타는 일이 아니라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었다는 걸 가슴 저려하는 우리는 무지개가 있다고 소리 친 구호의 기수들에게 사기 당했다는 불행한 느낌도 있다. 막연하고 낙낙하기만 한 느낌은 비통하게도 현실이어서 구호를 내지르기만 한 자들을 `책임지라`고 고발하고 싶다. 누가 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누가 내 삶을 이렇게 막막하게 했을까? 원망도 지친 날 스며들고 있는 물음 하나. 도대체 구호에 얹혀지고 구령에 맞취진 장님 같은 내 삶은 정당한 것이었나? 왜 나는 분주하기만 한 그 삶에서 쉼표 한번 제대로 찍지


않고 살아왔 을까? 정말로 쉼표를 찍고 인생을 되돌아볼 시간을 갖는 것이 낙오이기만 했을까? 사실 달릴 때 는 생각이 멈춘다. 어쩌면 우리에게 비감하고 썰렁한 이 시기가 쉼표를 얻어 가질 수 있는 드문 시기인지도 모른다. 책임 지지 않으려 해도 삶은 `나`의 어께를 쉬게 하는 일이 없다. 책임을 떠날 방도가 없는 삶 이 추락의 시기에 묻는 것은 여지껏 비웃음으로 무시했던 본질적인 것이었다. 산다는 게 뭔지? 자꾸만 물음표를 찍게 되는 이때 돌아보게 되는 삶이 있다. 언제나 깨달음이란 늦은 거라지만 쓸 모없는 것이 아니라면 회의 속에서 한 삶을 돌아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겠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과 살아야 하는 허망함 지리산 자락에서 살고 있는 박정수(59)씨 부부. 이들 부부는 원래 서울에서 나서 서울에서 학교 를 다닌 서울 토박이였다. 또한 명문대학을 나온 엘리트 부부이기도 하다. 1978 년 박정수 씨가 시골 생활을 결심했을 때 그는 대기업 수출 파트에서 5 년을 근무한 경력사 원이었다. 유신 말기, 박정희 대통령과 대기업은 잘살아 보자는 구호 아래서 하나가 되어 오로지 하나의 길만을 열어 두었다. 그것은 너무도 유명한 `경제`였다. 국민소득 1 백 달러가 달성되었으 나 1 천 달러, 1 만 달러 시대를 열어가자며 정부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장미빛 희망을 선전했다. 1980 년대만 되면 집집마다 자가용 한 대씩 굴리는 선진국 국민이 될 거라는 거였다. 그때 `자가용 한 대`는 얼마나 풍요로운 것이었는지! 그 달콤한 당근이 인권과 삶의 다양성을 담보로 잡은 것 은 물론이었다. 이때 최선의 삶은 정치적으로 정책적으로 입 다물고 그저 수출기업의 노동자가 되는 일이었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한창 고속성장을 구가하던 때 잘 나가던 박씨는 아침 5 시에 일어나 통 행금지 시간이 막 시작되는 밤 12 시까지 오로지 수출을 위해 몸 바쳐야 했다. 그런 박씨에게 어 느 날부턴가 스멀스멀 회의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바이어 신경 쓰고 숫자 계산만 해대는 이일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세상에 태어났나? 남들이 부 러워하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을지라도 제대로 자기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 때문에


박씨는 순간순간 불행해야 했다. 사실 박씨는 남들이 부러워한다는 점을 빼면 대기업에 묶인 자기 인생이 맘에 들지 않았다. 산 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단지 회사를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종일 회사를 위해 살다가 저 녁에는 회사와 관련된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집에 와서는 출근을 위해 잠을 자야 했다. 몇 마디 문장으로 요약해도 행간의 느낌이 없는 그런 생활을 위해 18 년이나 공부했나? 죽을 때까지 이렇 게 살아야 하나? 최선이었으나 행복하지는 않은 직장생활은 허망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과 살 아내야 하는 허망함이 이런 것일까? 고속성장의 주문을 외고 사기 위해서는 단지 경제적인 것만 생각해야 했다.그러나 그건 악을 쓰는 거였다. `이건 사는 게 아니야.` 모든 영광은 박정희 대통령과 대기업의 것이었고 고단한 삶 은 모든 노동자의 몫이었던 그 자리에서 박씨는 문득문득 분노했고 문득문득 절규했다. 살맛이 나지 않는다는 건 무엇보다도 심각했다. 박씨의 회의는 성공할 수 없는 사람의 자포자기도, 성공한 사람의 오만도 아니었다. 이런 방식 으로밖에 살 수 없을까? 그 물음은 `성공`의 울타리에서도 포기되지 않는 인간적인 물음이었다. 박씨가 원했던 것은 경제적으로 잘사는 게 아니라 사람의 향기를 가지고 사는 거였다. 박씨는 살 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줄 부드러운 손길이 필요했다. 위로가 되는 것, 그것은 점차적으로 사 라져 가는 자연이었다. 내가 먹을 것은 내 손으로 때로는 심사숙고할 필요 없이 결단해야 하는 일이 있다. 박씨는 돌발적으로 결단했고 용의주도 하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새 삶을 준비했다. 그것은 남들이 어리석다고 말리는 자급자족의 삶이 었다. 당시는 전통적인 농업구조가 하루가 다르게 해체되어 가는 시기였다. 때 되면 산비탈 밭까지 누렇게 출렁이던 키 큰 밀대궁의 모습도 사라져 가고 대량생산을 위해 종자개량이 진행되어 토종 종자들도 씨가 말라가는 때였다. 그런 때 박씨는 수출지향 정책과 함께 사라져 가는 우리의 것을 찾아 내가 먹을 것을 내 손으로 키워야겠다는, 미련할 만큼 소박한 결단을 감행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도시생활에 익숙할 뿐 시골생활을 전혀 해 보지 않은 아내가 반대하면 안되는 일이 었다.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시골에서 사느냐는 아내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 렇지만 박씨는 한 번뿐인 삶인데 노예처럼 살기 싫다고 아내에게 호소했다. 경쟁에서 이기고 있 다는 허망한 욕망과 당장 나오는 월급 때문에 하루 24 시간을 스트레스성 긴장 속에서 살아야 삶 이 가능하다면 그게 사는 거냐고. 2 살, 1 살 아기 남매의 어머니이기도 한 아내는 남편을 이해했다. 처음엔 겨우 농사꾼의 팔자냐 는 회의가 찾아들었지만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게 좋은 팔자라는 깨달음도 생겼다. 의기투합한 부 부는 지리산 자락으로 눈을 돌렸다. 자리산 산비탈에 논 열 마지기가 붙은 땅 5 천 평을 샀다. 화려한 학력과 경력에도 불구하고 농사꾼의 삶을 고집한 박씨 부부를 친지들은 이해할 수가 없 었다.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친지들은 박씨 일가의 귀향을 현실도피라고 비난함으로써 쌓이는 것은 스트레스뿐이어도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그들의 삶을 달랬다. 물론 박씨 부부는 친지 들이 쉽게 내뱉는 말로부터도 멀리멀리 도망갔다. 박씨가 지리산 자락에 내려와 처음으로 한 일은 집을 짓는 일이었다. 박씨는 박씨의 땅에서 나 는 흙과 돌, 소나무를 이용해 손수 아담한 집을 지었다. 집만 지은 것이 아니었다. 소 외양간도 짓고 돼지를 기를 수 있는 축사도 지었다. 물론 박씨 부부 둘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집 지은 경험이 있는 동네장정 몇 사람의 도움을 얻었다. 품삵은 가을 추수 때 품앗이를 해 주는 것 이었다. 집을 지을 때부터 사람의 관계가 얽혀 가고 정이 쌓이는 생활이었다. 교육도 자급자족 박씨는 토박이 농사꾼조차 비웃을만큼 철저하게 구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한창 화학비료가 주 가를 올릴 때였지만 박씨는 열 마지기 농사를 철저한 유기농법으로 지었다. 화학비료의 폐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축에게는 사료도 먹이지 않았다. 그때 이미 아무도 심지 않 게 된 밀도 심었다. 그만큼 힘은 두 배로 들었다. 여름철이면 온 산을 헤매며 퇴비 만들 풀을 베 어 날라야 했고 농약을 치지 않는 논은 많은 손길을 요구했다. 사료를 먹이지 않는 가축들도 마찬가지였다. 돼지에게는 사람이 먹고 남은


음식찌꺼기를 먹였 고 소에게는 풀을 베어다 먹였다. 겨울에는 비탈 밭에서 거둔 노란 호박과 고구마 그리고 건초를 커다란 가마솥에 넣어 쇠죽을 쑤기도 했다. 그 모두가 박씨 가족의 먹거리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까 고단했다. 그렇지만 지긋지긋하지 않았다. 지긋지긋하지도, 괜히 불안하지도 않 은 일을 하고 나서 고단하다는 것은 단잠을 잘 수 있다는 거였다. 사실 서울생활에서 벗어나 새 로운 생활에 적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생활이 힘겨울수록 얻는 것도 만만하지 않았다. 박씨는 편안한 마음을, 아내는 아침부터 밤까지 편안한 남편과 함께 하는 삶을 누릴 수 잇었다. 그들의 20 년은 자연을 닮는 과정이었고 서로 닮아 가는 과정이었다. 가족의 먹거리는 가족이 생산해 먹는다, 그것이 박씨의 생활신조였다. 그러다 보니까 많이 생산 하는 게 목적일 수 없었다. 농약 없고 공해 없는 먹거리가 중요했다. 가족이 먹고 남은 것만 장에 내다 팔았다. 조금씩 모은 돈으로는 옷을 사고 책을 사고 필기구를 샀다. 사야 할 것이 그렇게 많 지 않았다. 그런데 큰아이의 취학 통지서가 나오자 박씨 부부는 서울을 떠나기 전에 했던 고민을 다시 시 작했다. 바로 교육문제였다. 명문대학을 나온 이들은 제도권 교육의 맹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교 육을 받지 않았을 때 당해야 하는 부담함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고민 끝에 박씨 부부는 교육도 자급자족하기로 결단했다. 배울만큼 배운 부부는 자기 아이들을 스스로 가르칠 수 있었다. 낮이면 농사를 짓고 밤이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읽 기와 쓰기, 셈하기와 같이 기본적인 것만 가르치고 나서는 책을 많이 읽도록 유도했다. 부모의 사는 모습 자체가 교육일 거라고 믿는 이들은 농사일을 마치고 아무리 피곤해도 한두 시간 동안은 아이들과 같이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었다. TV 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 아이들은 책을 매우 좋아했다. 아이들은 박씨가 장날이면 구해 오는 책들을 다음 장날이 되기 전에 이미 다 읽어 버렸다. 그럴때면 아이들에게 역사 이야기나 상상 속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했다. 학교생활을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역시 사회생활이었다. 혹시 남을 이해할 수도, 배려할 수도 없는 사람이 된다면 끔찍했다. 그래서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도록 신경 을 썼다. 큰아이가 열다섯 살이 되던 때에는 읍내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만든 독서회에 가입 하도록 했다. 2 년 후에는 둘째도 그 독서회에 가입했다. 다행히 학교를 다니지 않았어도 아이들은 열등감없이 자기 생각을 발표할 줄 알았고 다른 이의 생각을 들을 줄 알았다. 아이들은 이미 학교를 다니지 않는 아이들로 유명해져 있었다. 유명세를 타고 아이들은 호기심 많은 또래의 아이들을 산골 집으로 자주 데려왔다. 마음맞는 친구끼리 서로 사는 집을 편안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중요했다. 아이들은 그렇게 친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필요한 만큼만 생산한다. 그렇게 20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세상의 변화는 엄청났다. 모두들 잘 살게 되었다고 하면 서 컴퓨토피아, 테크노피아에 들뜨기까지 한다. 그런데 테크노피아가 유토피아인가? 컴퓨토피아의 공간에서 미래에 대해 낙관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찬란한 기술`에 황홀해하는 우리가 기술 을 끌고갈 것인지, 기술에 끌려갈 것인지는 점칠 수 없다. 맹목적인 거대화로 치달은 공룡의 진화 방향이 자기 파멸을 가져왔듯이 비대해지기만 하는 자본주의적 기술문명이 공룡이 운명과 다르다 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사실 우리는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다. 여지껏 축적된 경험이 미래의 설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이다. 정보사회라는 오늘날, 어제의 경험은 오늘에 축적되지 않고 오히려 쓰레기가 된다. 그것은 오늘의 경험도 내일의 쓰레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경험을 대접 하는 것이 인간을 대접하는 것일 텐데. 기로틴(단두대)을 만든 기로틴이 기로틴에 처형된 것처럼 오늘 우리의 경험이 내일 파괴될 운명에 있다는 것을 알 때 불안은 스며든다. 거대한 소비사회에서 창조되는 것은 소비문화를 통한 자본의 확대재생산이고 파괴되는 것은 ` 나`의 호흡이 묻어난 경험이다. 이 파괴의 폐허 위에 떠도는 유령은 현실에 대한 신허무주의이고 불안한 마음이다. 테크노피아를 향한 세상의 변화는 하루가 다르게 허무해져 가는 인간의 자리에서 더 이상 작아 질 수 없이 초라해진 인간의 비명을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억압하고 있다. 나는 그 사실을 `변화 `는 없지만 표정은 있는 박씨 부부의 자급자족의 삶을 통해 분명히 보았다.


사실 20 년 전이나 지금이나 박씨 부부의 생활은 큰 차이가 없다, 여전히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른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언제부터인지 그들이 길러낸 유기농산물에 사람들이 관 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박씨 일가가 생산한 것을 여기저기서 비싼 값으로 사겠다고 나서 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박씨는 장사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저 가족이 먹고 이웃이 먹고 남은 것 이 있다면 장날 팔아 사고 싶은 것들을 살 수 있으면 족하다. 욕심이 생기면 평안은 깨진다는 게 박씨의 생활철학이다. 학교에 보내지 않고 부부가 가르치고 자연이 가르치고 이웃과 함께 배운 아이들도 이제는 장성 했다. 학교에 보내지 않았더니 오히려 더 가고 싶었는지 아이들은 차례로 검정고시를 거쳐 모두 대학에 들어갔다. “이제 아이들은 아이들 삶을 살아야죠. 도시에서 살겠다고 결정하면 존중해 줄 겁니다. 뮈든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의미 없어요. 좋은 거라고 아무리 가르쳐 줘도 자기가 경험할 때까지는 좋은 게 아니거든요.” 지리산 자락에 오롯하게 남은 부부의 얘기다. 그렇지만 이들 부부는 결코 지리산 자락을 떠날 수 없다. 아이들 때문에 서울 나들이를 가끔 하지만 서울 생활은 어지럽고 머리가 아프다. 서울에 서 살았던 시절은 전생처럼 아득하고 비현실적이다. 밤이면 마당으로 쏟아질 것 같은 별이 없고 언제나 세수를 할 수 있는 개울이 없고 나무에 스치는 정겨운 바람소리를 느낄 수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박씨 부부는 그들이 언제 서울살이를 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햇볕에 그을리고 바람에 그을 렸다. 나이에 맞게 주름진 얼굴은 자연스러운 표정을 갖고 있었다. 살아있는 표정은 아름다웠다. 박씨 부부의 삶을 보면서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가? 쿼바디스,쿼바디스. 어디로 가시나이까? 감성과 자유를 위한 반란 요즘 잘 나가는 총각 파출부 어머니는 밖에서 밥 먹는

걸 싫어했다. 아니 싫어했다기보다 안절부절 못했다고


하는 게 옳겠 다. “고기 사다가 집에서 구워 먹으면 3 만 원이면 식구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는데...” 어머니와 함께하는 외식은 외식이 아니라 원가와 판매가의 대차대조표를 대조해 보는 산수시간 이었다. 당연히 그런 어머니의 가장 큰 재능은 알뜰살뜰 살림하는 거였다. 적은 돈으로 최대의 효 과를 거두는 일은 천부적인 것이 아니라 헤펐던 아버지와 살기 위해 익혀야 했던 재능이었겠지만 그 외의 다른 재능이 다 묻힐 만큼 어머니의 그 재능은 두드러졌다. 친지들은 그런 어머니를 천상 여자,라고 했다. 물론 천상 여자라는 건 어머니가 여자라는 사실 에 스스로 뿌듯해하거나 남자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좀더 싸고 좀더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 시장을 몇 바퀴씩 돌면서 일일이 물건값을 물어 보고 다니는 그 성격 때문이었다. 아껴야 잘살죠, 어머니가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그런 행태를 벗어날 줄 모르는 그 성격 때문 에 어머니는 천상 여자라고 찍혔다. 때로 나는 그런 소리를 듣는 어머니가 싫었다. 분명 그 소리를 듣기까지 어머니는 자기 삶을 양보하고 양보했을 것이다. 그래서 끝내는 스스로도 싫어하는 궁티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게 여자의 속성이었을까? 나도 여자였지만 나는 분명 그렇지 않았고 바로 밑의 내 여동생은 더 그럴 줄 몰랐다. 우리는 싼 물건을 사기 위해 시장을 돌아 본 일도, 음식점에 가서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본 적도 없었다. 어쩌면 그건 천상 여자라고 찍히는 것에 대한 반항심이었 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콩나물값 아끼는 심정으로 사는 사람들은 음식점에 가서 그보다 수십 배, 수백 배 가 되는 외식비를 내지 못한다. 그 외식비는 콩나물값 아끼는 심정으로 사는 여자의 남편들이 보 란 듯이 낸다. 사실 음식점에서 계산하는 것이 남자의 일이라는 게 싫어서 나나 내 동생은 어디 가서 돈 내는 데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돈을 낭비해 본 경험도 없지만 돈 내야 하는 자리에서 여자라는 이유 로 뒤로 빠져 본 적도 없다. 나나 내 여동생이 여자답지 않은 것인가, 나아가서 우리가 남자다운 것인가? 나는 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 나는 한 신문에서 우연히 우리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한 남자를 만났다.


프로 백수로 이름을 날리던 남자 주덕한 씨에 대한 기사였다. 주씨는 우리나라도 고실업 시대로 접어들면서 어쩔 수 없이 백수들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누군가는 백수로 남아 주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백수의 자리를 당당하게 만들어 주자는 것 이 스스로를 `프로 백수`로 선언한 주씨의 변이었다. 백수로 즐겁게 살아가는 지혜를 모아 책을 내기도 했던 주씨가 드디어 자신에게 딱 맞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해서 나는 관심 있게 기사를 읽 었다. 그는 이제 총각 파출부가 되어 있었다. “2 천 원이면 동태가 네 마리예요, 네 마리. 5 백 원짜리 동태 한 마리면 4 인 가족이 한 끼를 먹 을 수 있고요.” 커피 한 잔에 2 천 원인 커피숍에서, 커피값 2 천 원이 싸다는 기자의 말에 주씨는 이렇게 반응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이런저런 이유로 어머니에게 많이 듣던 얘기를 젊은 남자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아하, 알겠다. 알뜰함은 여자의 속성이나 남자의 속성이 아니라 살림하는 사람들의 속성이었다. 살림하는 사 람들은 생활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적은 돈에도 민감하다. 사실 살림하는 이가 적은 돈에 집착 하는 것은 그것이 적은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태 네 마리면 10 여 명이 먹을 수 있는 푸짐한 찌개를 끓여낼 수 있다. 그렇다면 동태 네 마리의 값이 어찌 적은 돈이겠나! 그러고 보니까 7,8 년 전 어머니가 학교 앞 카페에서 차를 마실 때가 기억났다. 커피 한 잔 1 천 2 백 원. 어머니는 그걸 커피값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그것은 쌀 한 되 값이었고 오징 어 두 마리 값이었다. 먹는 걸 유난히 좋아했던 내 조카는 그때 두 돌을 넘겨 색깔을 배우고 있 었다. 조카는 커피를 보더니 초콜릿색, 주스를 보더니 오렌지색이라고 더듬더듬 그러나 똘똘하게 발음했었다. 두 돌배기 조카는 노란색은 바나나색, 빨간색은 사과색, 주황색은 오렌지색, 초록색은 수박색, 검정색은 콜라 색이라고 익힌 애였다. 조카의 재롱으로 어머니의 쌀값타령은 끝이 났었 다. 그때 나는 분명히 알았다. 세계에 대한 전망은 자기 지평을 넘어서기 힘든 법임을. 그 남자 주덕한은 우리 어머니처럼 살림꾼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살림하는 여자라는 이유로 주 목을 끌지 못했다면 주덕한은 파출부로 나선 총각 살림꾼이라는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주목을 끌


기에 충분했다. “노량진 수산시장은 오후 세네 시에 싸고요, 물건이 많기로는 용산 농협이에요.” 사실 그렇게 아는 척 하는 건 만천하에 초보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살림은 여자만 하 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남자는 명랑하고 건강해 보였다. 주씨는 강조한다. 집안일은 남 자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장바구니 무게만 생각해도 그렇다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쯤 장을 보는 나도 장바구니 무게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주씨는 어렸을 적부터 요리하기를 좋아했다. 세 살 위인 누나의 요리 조수를 하면서 익힌 요리 감각은 대학 입학후 10 여 년 자취생활에 일취월장했다. 요리뿐이 아니었다. 그는 빨래 삶는 냄새 가 좋아서 평소에도 즐겨 빨래를 삶는다고 한다. 빨래 삶을 때의 그 구수한 냄새를 나도 좋아한다. 삶은 빨래는 조금만 치대도 때가 쏙쏙 빠진 다. 그리고 나서 빨래감을 미지근한 물로 헹궈낼 때면 복잡한 생각들은 사라지고 마음은 가뿐해 진다. 무념무상이 이런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빨래 헹구는 물이 맑아질 때마다 마음도 휑 궈지는 순간의 그 체험 때문에 가끔 나는 면으로 된 옷을 빤다. 깨끗이 헹궈 물기를 탁탁 털어낸 빨래가 쨍쨍한 볕에 펄럭펄럭 말라 갈 때면 괜히 기분이 좋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마당 한켠 빨 랫줄에서 햇볕에 잘 마른 옷가지에 자주 얼굴을 묻고 큼큼거렸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말갛게 되 는 기분 좋은 그 느낌 때문이었다. 물론 내게 손빨래의 과정이 기분 좋은 이유는 내가 빨래를 즐길 수 있는 처지이기 때문일 것이 다. 의무가 아니라 취미이고 취미이니 만큼 아주 가끔씩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리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을 우리는 살림이라고 한다. 살기 위해 살림을 해야 한다면 살 림을 모르는 삶이 제대로 사는 일일 수 있을까? 살림만을 하면서 어머니가 우리에게 깊은 숨을 쉬면서 들려 준 말이 있다. 너희는 이렇게 살지 마라. 살림만을 하도록 강요받은 자의 살림은 억압이고 한숨이다. 그렇지만 살림을 모르고 번드르 살고 있는 자의 삶은 공허하다. 밥을 하고 국을 끓여 함께 밥상머리에 앉아 자잘한 일상을 참새 처럼 얘기해 줄 사람 없이 어떻게 삶이 순해질 수 있을까? 살림을 사랑할 줄 알고 아낄 줄 아는 자는 건강하다. 모르는 것이 특권인 양 된장찌개를 끓여 낼 줄 모르고 빨래는 물론 청소조차 해 본 일 없는 삶은 남자든 여자든 불안하다. 무엇을 위해


저 이는 사는 일을 놓쳤을까? 저 이는 살림을 몰라도 될 만큼 큰일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할 까? 저 이가 하고 있는 그 `큰일` 때문에 나물을 무치고 찌개를 끓이는 일이, 깨끗하게 빨래를 헹 궈내는 일이, 바로 사는 일이 허드렛일이 되지는 낳을까? 그런 점에서 살림하는 일로 돈도 벌고 사는 재미도 찾는 주씨의 삶은 순수해 보였고 탄탄해 보 였다. “청소, 빨래, 요리는 기본이고요, 집들이나 돌잔치를 할 때는 장보기에서 상차리기까지 해 줍 니다. 물론 예산을 맞춰야지요. 보수는 하루에 5 만 원쯤입니다.” 파출부로는 일당이 비싼 편이다. 일반적으로 파출부가 청소와 빨래만 한다면 주씨는 장보기에 제대로된 요리까지 해 주는 프로 파출부이므로 결코 비싼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게다 가 컴퓨터 배우기를 원하는 주부에게는 컴퓨터 강습까지 해 주기도 한다. 집에서 하는 일은 못하 는 일이 없는 프로중의 프로다. 일반적으로 프로의 특징이 있다. 프로로서의 가치가 계산되지 않는 곳에서는 완전히 손을 놓는 다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궁금했다. 프로 파출부가 가정을 꾸리게 될 때 자기 살림에 대해서는 손을 놓을까, 적극적일까? “살림 잘하는 남편을 원하는 여자와 결혼할 거예요. 물론 결혼해서는 파출부 일을 계속해야죠. ” 아마도 주씨가 사랑하는 여자가 살림 잘하는 남편감에 뿌듯해하는 모양이다. 주씨의 삶에 시선 이 머물렀던 건 그가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깼기 때문이라기보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그 일 에 행복해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살림이 사는 일의 기본임을 놓치지 않는 삶, 적게 보고 깊이 느 낄 줄 아는 삶은 건강해 보였다. 게으르고 매혹적인 나날들 내게는 결코 평범하게 산다고 볼 수 없는 평범한 친구 경주가 있다. 경주는 죽을 때까지 보통 사람의 일상적인 삶을 절대 누리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게 하는 친구다. “ 왜 이렇게 새로운 게 없지? 뭐 재미있는 일 없을까?” 그렇게 말하는 경주는 스스로가 얼마나 예외적인 사람이고 재미있는 여자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나와 경주와의 인연은 대학원에서였다. 우리는 동갑내기였지만 내가 박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경주는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철학을, 그것도 불교철학을 해야 한다고 경주는 그 동안의 사회생활 을 접고 삼수를 해 가면서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했다. 어렴풋이 느끼는 `허무`를 철학적으로 명증 하게 밝혀 보고 싶다는 것이 경주의 꿈이었지만 나는 알았다. 경주는 언어의 그물로는 허무를 건 져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판단보다도 행위가 빠른 경주의 삶에는 논리정연한 언어가 때로는 감옥이었으므로. 경주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무엇보다도 경주와는 `약속`을 할 수 없다는 거였다. 언 제 어디서 만나자고 하면 경주는 십 중 오륙은 나오지 않거나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게 했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처음엔 화가 치밀었지만 얼마만큼 경주에 익숙해지다 보면 경주와 시간 장소를 약속한 내가 경 주를 모르는 거였다. 오지랍이 넓은 경주는 언제나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실연 당한 친구, 부모와 갈등하는 친 구,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은 친구, 친구와 다툰 친구, 상사의 미움을 받는 친구... 세상의 온갖 불행 들이 경주에게 흘러 들어갔다. 세상의 온갖 불행들이 흘러 들어와야 했으므로 경주의 24 시간은 언제나 분주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부처님처럼 사는 친구에게 시간을 정하고 만나 는 일은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었다. 경주를 만나고 싶으면 도서관에 가면 되었다. 도서관 정독실 한켠이 경주의 자리였다. 물론 그 자리에서 책을 읽는 경주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거기에서 만날 수 있는 건 채권 아저씨 가방 같 은 경주의 가방뿐이었다. 대부분 경주는 지하 1 층 휴게실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경 주에게 얘기를 하는 애들은 나직나직 목소리나 표정의 변화가 별로 없었지만 남의 얘기를 들어 주는 경주의 표정은 바다의 표정처럼 다양했다. 때로는 가만가만, 때로는 부르르, 때로는 불끈불 끈. 경주는 그렇게 남의 얘기에 빠질 줄 알았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마음을 만져 주는 그 능력 때문에 경주는 머리로 살아야 하는 일에서는 속 도감이 없었다. 경주는 평균 5 학기면 끝나는 석사과정을 8 학기가 되어서야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경주가 졸업을 하고 어느 날 동경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공부하려고?”


그렇게 물으면서도 나는 내가 경주에게 맞지 않는 표현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본격적 공부` 라는 목적지향적 사고는 경주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경주에게 `불교`는 우연이 아니 었다. 그렇지만 경주가 언어의 명증화를 기다리는 불교철학을 계속한다는 것은 어쩐지 맞지 않아 보였다. “집에서는 살 수가 없어. 니가 결혼할 생각을 하니, 그렇다고 취직할 생각을 하니, 더는 빈둥 빈둥거리는 꼴 못 보겠다, 우리 어머니 말씀이야... 난 되고 싶은 게 없는데.” 난 되고 싶은 게 없는데, 경주의 그 표현은 경주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이었다. 만일 이 시 대에도 방랑자가 유효하다면 경주는 방랑자였다. 뭔가가 돼서 그 된 것에 맞게 일을 해야만 하는 곳을 경주는 견디기 힘들어 했다. 인간관계도 그랬다. 경주는 아픈 사람을 쓸어 주는 따뜻한 재주가 있었지만 쓸어 주고 나서는 스스로도 그 일에 대해 오래 기억하지 않았다. 물론 경주 자신도 누군가의 기억에 오래 남는 그 런 매력을 갖지는 않았다. 환자 아닌 사람이 의사를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당연하기도 했다. 그런 경주가 어느 날 불현듯 비행기를 타고 습기 많고 지진 많은 나라로 날아가겠다는 거였다. 가는 방식도 경주다웠다. 나 내일 떠나, 하면서 떠난 경주는 어느 날 나 왔어, 하면서 돌아올 것 이다. 그것이 경주를 두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경주다운 것이었다. 그런데 나 왔어, 하면서 돌아 왔어야 할 경주가 오기도 전에 어느 날 뜬금없이 전화를 했다. “어머, 어쩐 일이야?” “그냥.” “그냥? 너 무슨 일 있구나!” “무슨 일은? 거기도 보름달 떴니? 보름달 때문에 가슴이 텅 빈 거 같아.” “...” “사는 게 왜 이래?” “...” “어떤 남자, 사랑했는데 결혼하재.” “하면 되잖아.” “근데 너 나 알잖아. 자신 없어. 한 남자에 매여서 매일매일 밥하고 국 끓이고... 그러다 떠나 고 싶으면 어떡하니?” “그때 떠나면 되지.” “그러면 될 텐데 그게 자신이 없다... 거기 보름달 떴니?” 그때 떠나지 않기 위해서 경주는 내게 전화를 건 시점에 일본을 떠났다. 한 달 뒤


경주는 버마 에서 전화를 했다. 무슨 명상센터라고. 정오에 죽 같은 식사를 하고 하루종일 참선과 명상을 하는 그런 생활을 한다고 했다. 무심을 이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경주는 이제 정착할 곳을 찾 았다며 행복하다고 했지만 나는 알았다. 경주는 정착할 수 없음을.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 해 돌을 던지는 세상과 부딪치면서 경주가 마음을 많이 다쳤겠구나, 하는 생각도 스쳤다. 남의 아 픈 마음을 쓸어 주던 경주는 경주에게서 위로를 받고 떠났던 그의 친구들처럼 버마에서 위로를 받고 버마를 떠나 또 어디론가 떠돌거였다. 허무를 본 것인지 허무를 견디지 못한 것인지 어렸을 적 깍두기가 있는 게임을 해 본 적이 있나? 깍두기는 어느 팀에도 소속되어 있지는 않 지만 이 팀 저 팀에 모두 관여한다. 그렇지만 완전히 빠져도 게임이 깨지는 일이 없는 그 깍두기. 경주의 인생은 그 깍두기 같다. 버마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우리나라에 와서도 오래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곳이 없었다. 전라도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강원도로 절을 찾아 다녔다. 공부를 하는 건지 노는 건지, 도를 구하는 것인지 생활에 시달리는 것인지, 허무를 본 것인지 허무를 견디지 못한 것인지 구분 도 안되지만 구분할 필요도 없는 경주의 삶에 나는 묘한 매력을 느껴서 문득문득 경주를 궁금해 한다. 그렇지만 내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경주는 그 흔한 호출기마저 갖고 다니지 않으 므로. 깍두기 같은 경주는 앞으로 뭐가 될까? 나는 그걸 점칠 수가 없지만 분명한 건 언제나 씩씩하 게 잘살고 있을 거라는 것이다. 분명히 경주는 잘살겠지만 경주처럼 역마살을 원죄처럼 안고 사 는 인생을 우리 사회는 뭐라고 평가할까? 빈둥빈둥 논다,고 하지 않을까? 경주를 `팔자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팔자 좋은 경주의 팔자를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 대신 `빈둥빈둥 논다`는 사회적 평가가 집요하게 경주를 따라다녔다. 사실 경주가 빈 둥빈둥거린다는 건 돈을 벌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경주는 돈을 벌었다. 물론 소박한 식사와 검 소한 옷을 입을 수 있는 그만큼이었다. 경주가 돈을 번 원천은 과외었다. 이 땅에서 경주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중.고등학생들에게 영 어를 가르쳤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일본에 가서는 재미교포 아이들에게 수학과 우리말을 가르쳤 다. 그러니까 경주가 빈둥빈둥거린다고 평가되는 건 확실히 돈을 벌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나이 에 요구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주를 향한 비아냥거림은 모든 사람을 통제해야 직성 이 풀리는 사회가 인간을 통제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사실 경주는 부지런했다. 단지 경주는 사회조직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자기 시간표에 의 해 움직일 뿐이었다. 그 때문에 경주는 그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게으르다고 평가된 것이다. 만 일 그것이 게으름이라면 그 `게으름`이 저주 받아야 하는 사회는 얼마나 끔찍한가. 일은 안하고 밥만 축내고 빈둥빈둥거리는 게 게으른 무위도식이라면 일하기 위해 잘 놀고 잘 먹는 걸 휴식이라고 하는 것 같다. 휴식은 아름다운 거지만 게으름은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 무위 도식이라는 이분법의 근거는 뭘까? 휴식은 그 자체 목적이 아니라 더 많은 생산을 위한 수단이다. 반면 생산이라는 목적이 없는 쉼 자체는 게으르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아하, 알겠다. 잘 놀아야 일도 잘한다 나는 어렸을 적 무척 잘 놀았다. 딱치지치, 구슬치기, 잣치기, 팽이치기, 망까기, 땅따먹기, 전쟁 놀이, 오자미... 내가 좋아하는 놀이였다. 그 놀이 속에 있을 때 나는 행복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행복하게 그 놀이에 푹 빠져 있었다. 그때 내가 제일 싫어했던 건 나를 불러들이는 어머니의 목 소리였다. “주향아, 그만 놀고 밥 먹어야지.” 놀이가 충분히 행복했던 그때 우리에겐 `휴식`의 개념이 없었다. 노는 건 노는 거였고 공부하는 건 공부하는 거였다. 그런데 4 학년 때였을까. 학교에 처음으로 오락시간이 생겼다. 오락시간을 앞 두고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오락시간은 노는 시간이 아니라 휴식시간이라고. 노는 건 게 으른 거지만 휴식은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이라고. 그러니까 공부를 잘하 기 위해서는 잘 놀아야 한다고. 오락시간에 잘 놀 줄 아는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는 거였다. 망까기, 구슬치기에서는 적수가 없었던 나는 오락시간엔 쩔쩔맸다. 혼자 흥얼거리는 건 얼마든


지 할 수 있었지만 모든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 자리에서 내 노래는 빨리 끝내고 싶은 숙제 같은 거였다. 나는 오락시간이 제일 싫었다. “공부 잘하고 일 잘하는 애가 놀기도 잘한다.” 그 명제는 옳을 수도 있고 옳지 않을 수도 잇다. 그런데 나는 그 명제를 힘주어 말하게 하는 전제가 싫다. 그 명제는 `노는 일`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시킴으 로써 생산지향적 가치관을 주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는 참호를 파고 사역을 하고 그래서 축 늘어지고 싶은 군인들을 휴식하게 한다고 한곳 에 모은다. 일요일이면 `휴식`을 시킨다. 줄 세워 앉혀 놓고 초청가수의 노래를 듣게 하거나 단체 로 영화관람을 시킨다. 스트레스를 푸는 `회식`을 한다고 모여 술 마시게 하면서 높은 계급의 술 주정을 듣는 시간이 바로 휴식시간이라나. 군대의 `휴식시간` 그 의도가 너무나 뻔뻔하게 노출되어 있지만 어디 군대뿐일까? 학교에서, 직 장에서 휴식은 생산을 위한 거라며 노는 형태를 개발해 간다. 생산의 논리가 `노는 일`이지 지배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냥 그대로 노는 걸 인정하지 않고 노는 일조차 `생산`에 붙들어 매야 적성이 풀리는 사회는 끔찍이도 부지런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1970 년대는 잘살아 보세가 구호였던 시대였다.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때 선생님은 부지런해야 한다고 했다. 그저 이불 속이 좋 은 겨울, 고구마나 구워 먹으면서 두런 두런 보내고 싶은 그 겨울에도 일을 해야 한다고. “겨울에 시골 가 보면 화투나 치고 마실이나 다니면서 놀아요. 그래서는 잘 살 수 없어요. 선 진국에서는 농촌이라고 겨울에 노는 법이 없어요. 비닐하우스라도 만들어서 부업을 해야죠.” 그때까지 나는 화투를 치는 풍경이나 마실 다니면서 노는 풍경을 본 적이 없었다. 서울에 살았 으므로, 그렇지만 교육의 영향 때문에 나는 그 풍경은 매우 나쁜 풍경이라고 인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교육을 해댄 탓인지 농촌은 겨울에도 부지런해졌다. 그래서 우리들도 한겨울에 나는 딸 기와 수박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기쁜가? 식물들은 비닐하우스라는 가상의 세상에서 쑥쑥 자라 고 있다. 봄이 아닌데도 봄을 느끼고 여름을 느끼는 식물은 마침내 열매를 낸다. 그렇게 열매를 얻는 일에서 자본의 논리를 거둬내면 뭐가 남을까? 자본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사기의


환경을 만 드느라 부지런한 우리는 정상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부지런히 과학과 기술을 개발하고 부지런히 자연을 파괴해 가는 이 부지런한 `문명`을 건설하는 인류의 그 다음은 뭘까? 지금도 하루에 1 백 종 이상의 자연종이 멸종된다고 한다. 한 달이면 3 천 종, 일 년이면 3 만 6 천 종, 3 년이면 10 만 종... 부지런한 인류문명의 결과다. 어쩌면 인류는 부지런히 망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회가 된다면 빈둥빈둥 놀아 보자. 어쩌면 평생 동안 일만 해 온 사람들에게 그것은 일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조직생활을 하느라고 잃어버린 자기 마음의 논리를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조직이 나를 버렸을 때 회복할 수 없는 실의에 빠져서 속수무책이 되는 것은 조 직을 떠나서는 마음이 놀 줄 모르기 때문이다. 러셀은 행복해지려면 게을러지라고 권한다. 어떻게 놀까, 묻지 말고 스스로 찾아 보자. 마음에는 법이 없다. 산에 오를 때 정해진 길로만 가나? 자기가 가는 게 길이다. 실존주의자들이 강조한다. 인생은 한 번뿐이라고, 반복되지 않는다 고. 자기만의 고유한 길을 가는 경주가 문득 보고 싶다. 꿈과 생존 사이 목성이 조금만 더 컸더라면, 목성, 알지? 부피는 지구의 1,400 배, 질량은 318 배. 태양을 도는 모든 위성을 합친 것의 두 배. 목성이 조금만 더 컸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중력을 더 받으니까 그 압력 때문에 목성 내부가 핵분열되고 그래서 에너지를 발사하는 발광체, 태양이 되었을 거야. 목성은 조금 더 크질 못해 침묵의 위성이 되었어. 주목도 받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어두운 영겁의 시간을 돌게 된 거지. 목성, 어때? 그 목성은 내가 좋아하는 별이다.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타다 남은 열정이 아직 남아 있는 별, 그래서 잿빛 열정을 삭히면서 침묵 속에서 영겁의 시간을 돌고 있는 별. 비극은 비극으로서 아름 답다고 생각하게 하는 별이 내게는 목성이다. 물론 나는 내가 목성 같다고 생각해 본 일은 없다. 목성 같은 사람은 레


마누(만화가 신일수 씨의 장편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등장 인물. 네 딸 가운데 맏이이다)고 계백이다. 가끔씩 나는 목성 같은 우리 역사가 아쉽다는 생각을 한다. 그 역사는 위화도 회군으로 무릎 꿇은 대륙 회복의 꿈이고 북방을 달리는 기상을 접어야 했던 남이 장군의 꿈이다. 내가 목성 얘기를 해 주니까 내 동생은 눈을 반짝거렸다. 그러면서 하는 말, “그거 나잖아.” 나는 쿡, 웃었다. 세상에, 그렇게 균형감각이 없을 수 있을까? 웃으면서 감각이 생겼다. 왜 쟤가 어울리지 않는 데서 동질감을 발견했는지. 천진한 내 동생이 눈을 반짝거리는 걸 보았을 때 어쩌면 현대인 모두가 스스로를 목성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 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목성 같은 사랑을 알고 있다고, 목성 같은 꿈을 알고 있다고. 차 오르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묵묵히 접은, 언젠가 한번쯤 앓아 봤을 그 사랑 때문에, 차마 이루지 못하 고 가슴 한켠에 잠재웠을 그 꿈 때문에. 화려하게 일할 기회를 상실한 사람보다 화려하게 일하기 위해 하고 싶은 일을 접은 사람들의 꿈이 화려하게 일하지도 못하는 현실에서 초라한 그리움으로 되살아날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사 랑 때문이건 일 때문이건 초라한 그리움에 목이 메이면 그 쓰라림을 견디는 일 외에는 방법이 없 을까. 영겁의 세월을 그렇게 돌아야 하는 목성처럼? 꿈보다는 책임을 택한 남자 화가가 되고 싶은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부드러운 곡선과 슬픈 색감으로 세계를 표현해 보고 싶었다. 어머니가 죽는 꿈을 꾼 새벽 공포감에 눈을 떴을 때 등을 쓸어 주는 어머니의 손길 을, 낯선 남자를 따라 조금은 웃고 조금은 울면서 자박자박 집을 떠난 누이의 표정을, 그 누이가 타고 간 기찻길 위에서 괜히 막막해진 노을빛 마음을 그려 보고 싶었다. 화가가 되기 위해 남자가 미술대학을 간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부드럽게 말렸다. “너는 맏이야, 맏이는 든든해야 돼 그림은 언제고 취미로도 할 수 있지만 그림만 그리면서 살 수가 없어. 맏이는 책임이 있는 거야!” 남자는 부드럽고 단호하게 말하는 어머니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소년을 그려 보고 싶었다. 남 자의 마음은 어떤 상황도 풍경으로 자아낼 줄 알았다. 그러나 남자는 영민하기도 해서 누구보다 도 어머니를 이해했다.


맏이는 그러면 안돼, 라는 말을 우리처럼 잘 이해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 때로는 이해력이 문 제였다. 이해력이 뛰어난 남자는 그림의 꿈을 접고 경영학도가 되었다. 부드러운 아침햇살을 그려 보고 싶었던 남자는 아침햇살과 함께 누구보다도 일찍 출근을 했다. `창아, 이거 맛있다.` 생선을 발라 주던 누이의 긴 손가락을 그려 보고 싶었던 남자는 그 대신 통계표를 그리고 기획안을 그려냈다. 야무질 뿐더러 성실한 남자는 남들보다 일 년 일찍 차장이 되었다. 남자는 어머니 말씀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림을 그렸다면, 아마도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 는 가난한 화가의 비루한 일상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차장이 되던 해 남자는 그림을 그리 는 세련된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 만일 남자가 그림을 그렸다면, 그러면 우아하게 그림을 그리는 세련된 이 여자와 결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잘생긴 아들과 섬세한 딸이 연년생으로 태어나 남 자의 어깨가 기분 좋게 무거워졌을 때 남자는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누구보다도 가정을 아꼈다. 가정을 아꼈으므로 그는 열심히 일했다. 출근시간은 9 시였지 만 늘 8 시에는 회사에 나가 회의를 준비했다. 물론 퇴근시간을 오후 6 시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 었다. 그는 9 시 전에는 퇴근하지 않았다. 내가 사장, 이라는 심정으로 남자는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다. 남들보다 일 년 일찍 차장이 되었던 남자는 3 년 일찍 부장이 되고 7 년 일찍 이사가 되었 다. 언제부터였을까? 남자는 그림을 그리는 아내와 코드가 맞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열정적인 남자는 늦게 귀가해서도 하루 일과를 참새처럼 떠들길 좋아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얘기에 무반응했다. 남자는 된장찌개를 좋아했지만 여자는 찌개 끓이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남자는 아 이들 교육에 열정적이었지만 여자는 그런 남자에 무덤덤했다. 남자는 가끔 시장에 나가 물건값을 깎기도 하면서 장을 보고 싶었지만 여자는 백화점 지하매장에서 정찰가로 장을 보는 일 외에는 장보기를 하지 않았다. 남자는 가끔씩 밖에서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남자가 그와 코드가 맞지 않는 여자와의 가정을 깨지 않기 위한 돌출구였을 뿐 다른 여자를 사랑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문득문득 못 견딜 때가 있는 법이다. 어느 일요일 아침 남자는 홀로 잠에서 깨었다. 아, 아이들과 집사람은 교회엘 갔구나. 해방감과 함께 슬픔이 찾아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너 무 좋아서 남자는 슬펐다. 문득 울고 싶다는 느낌을 지우고 싶어서 부스스 일어났다. 여자의 화장대에 비친 중년의 얼굴, 남자는 거울 앞에 앉았다. 반짝반짝하던 총기가 빠져나간 얼굴이었다. 흰머리도 보이기 시작했고 주름살도 잡히기 시작했다. 갑자기 잃어버린 꿈이 기억 났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자신만만했던 젊음을 적당한 주름과 흰머미로 바꾼 세월의 그 무심한 표정을 잡아 보고 싶었다. 남자는 여자가 그림을 그리는 방으로 달려갔다. 여자의 성격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방 화폭 위에는 손이 그려져 있었다. 남자는 손에도 표정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여자가 그린 손은 고왔지만 어쩐지 게을러 보였다. 우아한 손엔 생기가 없었다. 남자는 옛날 누이의 손을 생각했다. 가늘고 긴 손이었지만 우아하다는 느낌도, 게으르다 는 느낌도 주지 않았던, 지나치게 섬세해서 슬펐던 그 손을 현실처럼 기억했다. 남자는 자신을 손을 느릿느릿 쥐었다 폈다 하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손은 섬세하지도, 우아 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살이 붙고 적당히 기름지기도 한 너무나 평범한 손이 기름 낀 세월을 살 아왔음을 증거해 주는 것 같아 괜히 눈물이 났다. 아내의 그림을 치우고 이젤 위에 빈 도화지를 올려 놓았다. 남자는 표정 없는 자신의 손 대신 에 이제 겨우 허무를 배우기 시작해서 아침햇살이 슬픈 40 대 남자를 그려 보고 싶었다. 그런데 머리 속이 하얘져서 손끝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자가 보았다면 우두커니 뭐 하느냐고 야단할 거였다. 그렇지만 우두커니 않아 있는 남자는 실은 현기증에 쩔쩔매고 있는 거였다. 꿈을 버리고 경영학도가 되었을 때 이미 그림은 남자의 손을 떠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자 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손에 쥐어진 4B 연필을 슬그머니 내려놓으려다가 울컥 치밀어오르는 그 리움에 시달려 그림을 그리려던 도화지 위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목성이 조금만 더 컸더라면, 목성, 알지? 부피는 지구의 1,400 배, 질량은 318 배. 태양을 도는 모든 위성을 합친 것의 두 배.


목성이 조금만 더 컸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중력을 더 받으니까 그 압력 때문에 목성 내부가 핵분열되고 그래서 에너지를 발사하는 발광체, 태양이 되었을 거야. 목성은 조금 더 크질 못해 침묵의 위성이 되었어. 주목도 받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어두운 영겁의 시간을 돌게 된 거지. 나는 목성 같은 꿈을 알고 있다. 지금 나는 내 꿈이 목성 같았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렇게 쓰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꿈을 안정적인 가정 의 단단한 소리였다. 남자는 계속 썼다.

버림으로써 얻어진

그런데 목성이 조금 더 컸더라면, 태양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차 오르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묵묵히 영겁의 시간을 돌고 있는 목성이 바로 태양계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중요한 힘이겠지. 마지막으로 남자는 이렇게 썼다. 그런데 태양계의 질서라는 거, 그거 존중될 필요가 있는 거야? 한국의 이홍렬과 프랑스의 드골 인기는 일종의 사랑이다. 거기에는 좀체로 배반하기 힘든 중독성이 있다. 인기인이 된다는 것은 중독된다는 것이다. 허무한 거라고, 불안한 거라고, 슬픈거라고 설명하고 설명해도 차디차게 끝을 보기 전에 스스로 끊어내기는 너무 힘든 욕망이 거기서 팔닥팔닥 숨쉬고 있다. 인기 속에서 자기 운명을 보는 사람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안정적이지 않은, 불 안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이 언젠가 내지르게 될 말은 이것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 다.` 인기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높아 보이지만 나락이 보이는 것, 화려해 보이지만 예측 할 수 없는 야릇한 것, 그래서 극적인 인생을 가장 또렷하게 그려 보여 주는 것이다. 인기인은 언제 식상해지나 인기 주변에는 대부분 달콤한 돈이 있다. 드라마 시청률이 높으면 광고가 많이 붙는다. 인기인 을 만들어내는 일은 인기상품을 생산하는 일과 같다. 10 대들을 음반의 주 구매자로 끌어올린 서 태지. 1 집부터 4 집까지 판매된 음반량이 3 백만 장이 넘는다. 음반 판매 수익금과


각종 CF 광고, 공 연수입, 저작권료를 합하면 최소한 순수익 1 백억 원대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서태지를 둘러싸고 생산된 부가가치는 상상만으로도 엄청난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인기는 없다. 문화가 문화상품으로 강조되어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할 수록 인기의 목적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누구도 영원한 인기를 누릴 수 없다. 한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형태파괴적인 새로운 노래라는 찬사와 함께 석달 동안 그는 이 방송 국, 저 방송국을 종횡무진했다. 그는 마구 행복했고 마구 바빴다. 인기 상종가를 치면서 그의 음 반은 50 만 장 이상이 팔렸다. 더 이상 음반이 나가지 않을 즈음 그의 인기도 식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식상해한다는 이유 였다. 나는 왜 가수 이름을 암기할 틈이 없이 인기가수들과 가요들이 3 개월 돌이로 그렇게 자주 바뀌는지 그게 궁금했다. 그런데 거기에 `식상`이 있었다. 그리고 유행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식상 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식상`은 중요한 거였다. 만일 식상을 만들어낼 줄 모른다면 음반시장은 어떻게 될까? 그 가 수의 그 음반을 살 만한 사람들이 다 샀다면 가수는 무대 뒤로 물러나 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의 그 노래가 여전히 인기 상종가라서 사람들이 다른 노래를 즐겨 듣지 않는다면 음반시장은 확대되지 않는다. 음반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새로운 충격`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히트 음반들은 계속 나와 줘야 한다. 그리고 한때 새로운 충격이었던 그의 또 다른 충격으로 음반시장을 공략할 수 없다면 인기인의 대열에서 조용하고 초라하고 쓸쓸하게 물러나야 한다. 처음에 그가 안에서 나오는 소리를 참을 수 없어서 가수가 되었다면 이제 그는 가수로 남기 위 해 눈치껏 시장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 분명 인기는 `그`의 인기지만 `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 니다. 현대사회에서 인기는 자본주의 매커니즘의 소산이다. 인기는 철저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기 주변에 돈이 있기 때문에. 사실 영원한 권력이 없듯이 영원한 인기도 없다. 어제 잘생겼다는 이유로 인기를 모았던 탤런 트는 오늘 기생오라비 같다는 이유로 퇴물이 된다. 오늘 신선한 충격으로 열광적인 박수를 받던 가수는 내일 새로울 게 없다는 이유로 무대에서 밀려난다. 현재 순발력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 개그맨은 언젠가 진부하다는 이유로 도태 당할지 모를 일이다. `나`에게서 나오지 않는 `나`의 인기는 불안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정상의 인기는 야릇한 것이어 서 미래에 대해 장님이다. 쇠락의 기운을 감지하는 데 늦고 불안의 냄새를 맡는 데 더디다. 어쩌 면 정상의 자리는 그 모든 기운을 삼켜 버릴 만큼 빛나는 자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기가 5 월의 태양만큼이나 눈부신 그 정상에서 스스로 그만, 을 선언하면서 스스로 끝을 결단하 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개그맨 이홍렬. 잘 나가는 대중 스타인 그가 정상에서 그만, 을 선언했다. 기발한 유행어 없이, 과장된 몸짓 없이 기분 좋게 웃음을 줄 줄 알았던 이홍렬씨는 괜찮은 프로그램이었던 `이홍렬 쇼 `를 스스로 접었다. 그리고 미국 어학 연수를 결정했다. 그의 나이 마흔다섯. “미국에 갔다와서 제가 방송인으로 더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불안하지 않을 리 없지요. 그렇지만 도전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할 줄 아는 그는 프로였다. 프로는 그만둘 때를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 각한다. 떠날 때를 알아서 스스로 판을 접을 줄 아는 사람, 내가 아는 프로다. 역시 프로 중의 프 로는 복귀설이 끊일 날 없는 서태지다. 서태지는 언제나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왔다가 사라졌다. 그 사라짐이 그의 음악에는 관심이 없 고 그에게로 모아지는 열광만을 보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상종가를 준비하기 위한 반복적 행위라 고 읽혀질 즈음 그는 완전히 은퇴를 선언하고 신화를 만들었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고, 그 에게로 쏟아지는 온갖 찬사와 무거운 담론들을 가볍게 털어내고 밴 하나에 의탁한 채 미국 전역 을 유랑하고 있다는 서태지. 언제나 사무치는 인기를 누렸지만 인기가 그를 버리기 전, 인기정상 에서 스스로 인기를 버리고 신화 속으로 사라질 줄 아는 청년. 인간은 유한하고 영원히 빛나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매듭 짓는 일 역시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시작만큼 끝이 중요하다면 매듭을 지을 때를 알고 매듭 지을 줄 아는 자가 다시 시작할 줄 아는 자이고 성숙한 자 아닐까? “기발함보다도 더 중요한 건 타이밍이에요. 같은 말이라도 1, 2 초 사이에 웃음이 터질 수도 있 고요, 어색한 침묵이 흐를 수도 있지요. 개그를 시작한 지 20 년이나 됐지만 그


타이밍을 포착하는 일이 아직도 가장 어려운 일이지요.” 이홍렬 씨는 자신이 구사하는 개그를 타이밍의 문제라고 정의한다. 시간을 판단하는 일을 해 왔기 때문일까? 160 센티미터의 작은 키에 된장찌개처럼 편안한 인상의 이홍렬 씨는 시간이 되었 다고 판단될 때 판을 접었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언제나 다시 시작했다. 인기를 믿지 않는 인기인 1979 년 개그맨이 된 이씨는 개그맨 가운데 몇 안되는 고졸 출신 개그맨이었다. 어려웠던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 배경도, 학벌도, 인물도 없이 그야말로 맨발로 시작한 그는 누구보다도 꼼꼼하 게 자료를 챙기는 정보통이었다. 아무리 짧은 시간 방영된 것일지라도 그가 나온 방송이라면 녹 화해서 다시 보고 다시 생각했다. 물론 그를 소재로 한 신문, 잡지 기사도 모두 모았다. 그래서 그는 무명시절부터 지금까지 그가 출현했던 모든 방송 테이프와 기사를 거의 가지고 있다. 어느 정도 이름이 생기고 등록금을 낼 수 있는 돈이 생기자 이씨는 대학에 들어갔다. `괜한 고 생 하지 말라`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86 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물론 고생은 고생이었다. 그러나 괜한 고생은 아니었다. 20 대 한창의 젊은이들과 함께 강의실에서 강의 를 듣고 함께 카메라를 들고 작업하는 일은 뭔가가 쌓이는 즐거운 고생이었다. 그 즐거운 고생을 끝낸 이홍렬 씨는 잠시 전업방송인으로 돌아오는 듯 싶더니 이번에는 일본유학을 시도했다. 서른 일곱 살이었다. “아이디어가 떨어져 가는데 알량한 인기만 믿고 있다가 끝이 나겠다 싶었습니다.” 그것은 돌파구였지만 아내와 두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에게는 굉장한 부담이었다. 어쨌든 잘 나가고 있는 개그맨이, 내일모레면 사십인 나이에 방송활동을 중단하는 일은 간단하지도 쉽지 도 않았다. 그것은 `결단`이었다. 처자식을 위해 택시운전을 해 가며 그는 일본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웃는지 바닥에서부터 배울 수 있었다. 어렵던 시절이었지만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을 구경한 그 경험은 우물 속의 돌담 외에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것만으로도 소 중한 세월이었다. 그 세월이 그 동안 우리가 본 그의 편안함과 순발력 속에 녹아 있을 것이다. 그


리고 이제 마흔다섯. 지금 그는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다. 또 다른 세계를 보고 싶다는 열정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어 쩌면 감각이 젊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그 감각으로 그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돌아올 것 이다. 그가 다시 돌아올 때 그는 지금보다 각광을 받을 수도 있고 재기에 실패할 수도 있다. 미래 가 보장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상에서 떠날 줄 아는 그는 아름다웠다. 언젠가 돌아올 그 의 귀가의 꿈이 기회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상에서 그만둔다는 것은 자기 절제에 강하다는 것이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바닥을 보고 빈곤해진 모습으로 서글프게 떠나야 하는 것이 대부분의 방송인의 결말인데 아직 퍼낼 게 많은 자리에서 툭툭 털고 나와 그 에너지로 새로운 충전을 시도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 으로 보는 눈을 가진 프로다. 이렇게 프로 연예인은 하나 둘 인생을 말하는데 인생의 스승이 되는 정치인은 없을까? 왜 우리 에겐 달인의 경지에 들어선 프로 정치인은 없을까? `정치 9 단, 10 단`이라고 하면서도 그만둘 때를 모르고 밀려날 때까지 버티는 정치인들의 살아 남음이 `달인`으로 평가될 때 나는 슬펐다. 단지 살아 남는 일이 아름다움이라면 우리에게 아름다움이란 뭐란 말인가? 명분도, 의미도 없이 살아 남음에 대한 촉각만이 발달된 자의 그 촉각은 기회주의적이다. 그것은 달인의 것이라기보다 곡예 사의 것이 아닐까? 늙은 곡예사가 아니라 인생의 깊이를 아는 달인을 나는 프랑스의 드골에게서 보았다. 드골은 물러날 때를 알았던 프로 정치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독재자이긴 했지만 대중정치인인 드골의 뿌리는 시민이었다. 그는 시민들이 그에게 보내는 눈짓을 믿어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런데 그 가 그의 인기를 걸고 행한 국민투표에서 그는 `부`표를 얻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셈이지 만 드골은 그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뒤돌아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물러났다. 비감했을 터였 다. 헛헛하게 물러난 그 뒷모습이 무욕했기 때문일까? 프랑스 시민들은 다시 드골을 요구했지만 그 는 끝까지 정계복귀를 하지 않았다. 대중의 인기가 허망하다는 것을 간파한 드골은 몇 번의 기회


가 있었음에도 인기의 이름으로 일신상의 욕망을 부채질하는 그런 일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 드 골은 그 후 인기에 영합해서 그의 인생을 걸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정치로부터 인기로부터 멀리 멀리 도망가서 자유롭게 살았다. 그런데 정계복귀를 하지 않은 바로 그것으로 드골은 독재 자라는 파탄의 냄새를 씻어 버리고 위대한 정치인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었다. 프로는 떠나야 할 때 떠날 줄 안다 사실 남기려 하는 의지만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스탈린 시절 권력자 스탈린을 천년 만년 기억하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스탈린 동상이다. 그런데 그 동상은 권력의 종말과 함께 비참하게 끌어내려졌다. 그 역사가 어디 소련의 역사뿐일까. 영원한 인기가 있나, 영원한 권력이 있나?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은 허망한 것일까, 다행한 것일까? 어쩌면 영원 자체도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떠날 때를 알고 떠날 줄 아는 프로가 아름답다고 느낀다. 왜 떠날 때를 알고 떠날 줄 아 는 이가 아름답다고 느껴질까? 무엇보다도 쉽지 않은 그 일은 세계를 알고 시대를 알고 인간의 유한성을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유한하고 영원은 없다. 따뜻한 체온과 순정한 웃음, 그리고 때로는 처절하고 때로는 따스한 눈물, 그런 것들로 살아가는 생명체가 `영원`을 꿈꾼다면 그 영원은 죽음의 증거다. 그래서인지 어떤 종교건 문화건 영원을 말하는 자리는 죽음처럼 엄숙 하다. 몇 해 전 나는 물과 태양의 나라 이집트에서 영원한 불멸의 상징 피라미드를 보았다. 물론 나 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 그 규모와 수학적 정교함에 놀랐다. 그렇지만 오늘도 썩 지 않고 버티고 있는 람세스를 보았을 땐 놀라움에 앞서 쓰디쓴 전율이 먼저 왔다. 세상에, 불멸에 대한 사랑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었겠지만 권력의 상징이 불멸의 상징이 되 어 썩을 자유도 없이 수천 년을 방부제로 버텨 온 영혼은 왠지 안쓰러웠다. 죽어서도 이집트의 구심점으로 버텨내려고 하는 왕의 애국심이었을까, 죽음에서도 평등하지 못한 영원한 권력의 폭 력이었을까? 그 규모에 놀란 만큼 나는 그 규모가 무거웠다. 죽을 자유도 없는 그 땅이 어쩐지 갑갑해서 피식 웃기도 했다. 그 거대함 속에 우악스럽게 감춰져 있는, 죽음도 깨지


못한 불평등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풍경이었다. 도대체 권력이 뭐길래? 누워 있는자 가 내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영원을 믿고 싶어서 새끼손가락 걸고 영원을 맹세한 남녀는 아름답지 못해 귀엽다. 그 맹세가 설령 영원토록 이어지지 못한다 해도 그 순간만은 지고지순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거기엔 어떠한 억압도, 불평등도 없다. 그러나 영원을 믿어서 동상을 만들고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을 꾸역꾸역 감춰 놓는 손길은 무지 하고 뻔뻔하고 우악스럽다. 스탈린처럼 살고 싶은가, 드골처럼 살고 싶은가? 이 시대의 프로들이 닮아 가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그건 핑계야 우산 하나로 둘이 쓰는 게 무지무지 기분이 좋고, 마주치는 강렬한 눈빛에 빠져들고 싶어 안달 이 나고, 말 한마디 몸짓 하나 그런 걸 영원히 기억할 것 같고, 그 사람이 징검다리가 되어 사건 과 사건이 연결될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한다고,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라고 사이 좋고 포즈를 취하고 광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부 부는 돌이 막 지난 아이를 하늘 높이 치켜올려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사진 속 사람들의 화사함 이 내게 전이되지 않는 건 그 사랑이 내 사랑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사랑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어서 우리는 때로 남의 사랑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지만 그 때 `사랑`의 말에는 어떠한 울림도 없다. 진부하고 짜증나고 징징거리는 신파로 무감하게 들릴 때 도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 감정은 결코 전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랑 속에 있을 때 `사랑`은 몸이다. 그래서 그 외의 말을 자연스레 입는다. 때로는 단순하게 입기도 하고 때로는 화사하게 입기도 하고 때로는 교활하게 입기도 하고 때로는 쓸쓸하 게 입기도 한다. 수천 가지를 입혀도 늘 아쉬워서 더 입혀 주고 싶은 게 사랑 속에 있는 사람들 의 입이다. `사랑`의 말을 살아 있게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은 무서운 에너지다. 승려를 환속시키기도 하고 귀부인을 망가뜨리기도 하며 신데렐라를 무자비하게 출세시키기도


하고 바보를 장군으로 만드는 그 힘, 나는 사랑이 바꿔 놓는 변화에 놀란다. 그 힘은 때로는 지상 에서 영원으로 때로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인도하는 힘이다. 무서운 에너지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타오르는 거기에는 법이 없다. 법을 초월하고 윤리를 초월하고 그럼으로써 난 이런 사랑을 했다, 고 소리칠 수 있는 열정이 퍼득거릴 때 바로 거기에 사랑하는 그들만의 길 이 보인다. 각자의 길을 내게 만드는 그 힘은 파괴력일까, 생산력일까? 승려의 법복을 벗긴 사랑 한 사랑이 승려의 법복을 벗겼다. 한 사랑이 평생 도시처럼 살아온 첼리스트에게서 도시를 벗 겼다. “중이 결혼하는 것은 끝장이 아닌가, 내 인생이 마지막 카드다.” 돈연 스님은 스님으로서의 길을 한순간에 꺽고 사랑을 선택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삶터를 옮겼 다. 송광사에서 강원도 두타산 계곡으로. 2 만여 평의 땅을 구해 밭농사를 시작했다. 무, 배추, 감 자, 약초를 재배하는 농부가 된 것이다. 음악만 30 년 넘게 해 온 중견 첼리스트 도완녀 씨도 법복 을 벗은 남편과 함께 농부가 되었다. 1993 년이었다. 법복을 벗긴 사랑이니만큼 긴 절벽의 폭포 같은, 뭔가 특별한 사랑이 있을 법하다고 추측하는 건 확실히 잘못된 상식인가 보다. 도대체 법복을 벗겼다는 그 사실 외에는 별 다른 사건이 없이 그만그만한 사랑이다. 1970 년대 후반 독일 유학을 준비중이던 23 살의 도완녀 씨와 독일어를 배우려던 스님은 남산 기 슭에 있는 독일 문화원에서 만났다. 많은 얘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결코 이상한 감정은 생기지 않 았다. 그저 도씨가 독일로 유학을 떠남으로써 끝난 짧은 인연이었다. 도씨는 7 년 만에 돌아와서도 특별히 스님을 만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샘 터>를 읽게 되었는데 거기서 스님을 만났다. 인도 성지를 순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92 년 5 월, 두 사람은 “차 한잔 마실 수 있겠습니까?”로 다시 만났다. 틈 나는 대로 만나 세상 사는 얘기를 나누고 틈 없을 때는 팩스가 우체부가 되어 연애편지를 썼다는 그런 사랑.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섭섭한 그런 사랑. 그래, 사랑의 본질은 그저 끌렸다, 는 그 설명할 수 없는 단순한 사실이겠지. 어쩌면 호들갑스럽지 않게 가만가만 찾아와 둥지를 짓 고 그 둥지가 힘이 되는 그것이 인연의 힘이겠지.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인연이 있어 물 흐르듯이 세월이 가도 마음은 물 흐르듯 하지 못하고 때 로는 집착 같은 기쁨이, 때로는 사정 없는 난도질이 마음 자락을 누른다. 위로가 되기도 하고 상 처가 되기도 하는 수많은 인연 가운데 자연인 나종하로 돌아온 돈연 스님과 첼리스트 도완녀의 인연에 시선이 머무른 이유는 뭘까? 내게 그런 결혼을 발표하고 도반들과 벌인 난상토론에서 나 씨가 말했다고 전하는 몇 문장 때문이었다. “부처님이 왕궁을 등지고 떠났듯 뭔가 내 나름의 절박한 심경으로 떠난다. 중이 결혼하는 것 은 끝장이 아닌가. 내 인생의 마지막 카드를 쓰겠다. 쓰고 나서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신과 기대로 던지는 것이 마지막 카드의 사용법 아닌가. 내 삶의 방식을 추구하기 위해 결혼을 하기로 했다. 이왕 하게 된 결혼이니 박수를 쳐 주며 보내다오.” 내 인생의 마지막 카드를 쓰겠다 바로 내 인생의 마지막 카드를 쓰겠다,는 그 문장이었다. 아무런 전제 없이 `스님과 첼리스트의 사랑`은 극적이다. 정말로 마지막 카드를 쓰고 있다는 절박함이 있다. 그러나 도를 구했다는 스님 스스로가 파계하면서 부처님을 들먹이고 마지막 카드라는 말을 했다고 전했을 때 극적이라는 느 낌보다는 슬프다는 느낌이 먼저 왔다. 때로는 말이 얼마나 현실을 배반하는지. 돈연 스님의 말은 불교적이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거기엔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무심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선승의 마음이 없다. 그보다는 치열한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개체 의 욕망이 뜨겁게 녹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의 마지막 카드를 쓰겠다, 는 돈연 스님의 문장이 문득 걸렸던 건 그 카드가 바로 세파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우리들이 꼭꼭 감춰 두고 한 번도 쓰지 못한 카드였 기 때문이다. 한 달에도 몇 차례씩 루비콘 강을 건너 억눌려 있던 감성적 세계로 도망가고 싶지 않았나! 그러나 이편의 삶에 매여 강 건너기를 결단하지 못하는 사이 결단 당한 우리는 이편의 삶에서도 버림 당했다. 큰 풍파가 없으면 그저 승진하고 성실하기만 하면 점점 월급을 많이 받고 근면하기만 하면 안정적일 수 있었던 그런 삶에 길들여져서 우리는 감성을 지우고 분노를 지우고 상상력을 죽이면서 사람을, 사랑을, 삶을 시들어 말라 버린 늙은 젖꼭지 취급하지는


않았는지. 왜 우리는 마음 가는 대로 가 보지 못했을까? 강 건너를 문득문득 준비해 본 경험이 없을까? 중요한 것은 강 이편의 생활에 자신감이 붙지 않았던 것처럼 강 저편의 사람도 확신이 서지 않는 다는 점일 것이다. 가끔 우유부단함을 잊기 위해서 준비 안된 시작의 불안감보다는 가만 있으면 중간은 되는 삶을 위로하지는 않았는지. 하지만 그 삶마저 보장되지 않아 밀려난 사람들에게는 이미 삶 자체가 불안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카드를 쓰고 있다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아직도 연소되어야 할 삶의 열정 이 많아 활기 있어 보였다. 열정이 번뜩이는 그의 진부한 말 한마디가 새롭다. “승려 생활을 하며 소설을 쓰기 위해 많은 생각들을 했습니다... 더 이상 폼 잡는 승려보다는 이쯤이면 결혼도 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보자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습니다. 창작 욕구가 주 체하기 힘들 정도로 솟구쳤거든요. 내적으로 치열하게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게 가장 본연에 충실하겠다 싶었습니다. 웬수놈의 문학이 나를 이 길로 들어서게 한 셈입니다.” 월간지 <Feel>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뭔가를 쓰고 싶어 하는 그는 하고 싶은 말 이 마음으로부터 충동질해서 마음을 닦기보다는 마음을 토해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보면서 어쩌면 그에게는 오히려 스님이 외도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사실 삶에 외도가 어디 있고 정도가 어디 있을까? 마음이 가는 게 정도고, 도무지 마음이 따라 주지 않는 게 외도인 게지. 삶의 정도와 외도는 없다. 시름시름 아픈 자리, 안절부절 떠나고 싶은 자리, 마음이 후들거려 꼿꼿이 버텨내려면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자리, 그 자리는 떠나야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하고 싶은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로 우리는 얼마나 핑계를 만들어 왔나. 풍요에 길들여진 삶을 정당화하는 핑계를. 옛날 우리 외할머니가 그랬다. 사람이 죽는 법은 없다고. 떠나야 하는 자리를 박차지 못하는 것이 정말 죽음이라고. 잡아 주고 싶은 손의 온기가 있는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때로는 넘어져 상처가 나더라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자리, 때로는 무심해져서 마음자리를 느낄 수 없는 자리, 마음자락을 다잡을


필요 없이 그저 단순해지는 자리, 그 자리를 찾아서. 참을 수 없는 도덕의 무거움 〈옥이 이모〉의 복태를 기억하나? 선생님이 불량식품을 먹지 말자, 고 복창하게 하는 자리에 서 복태는 묻는다. “선생님, 그러면 불량식품을 외상으로 사 먹었으면 외상값 안 갚아도 되는 겁니까?” 모범생이 아닌 복태는 길들여지지 않는 인생의 본보기다. 장래희망이 뭐냐는 너무나 도식적인 선생님의 질문에 반 아이들은 도식적으로 대답한다. 선생님요, 장군요, 약사요, 경찰요. 꿈을 가진 인생은 건강하다는 집요한 편견이 만들어낸 도덕적인 질문에 대한 도덕적인 대답들 이다. 그런데 복태는 그 도식을 툭, 건드려 깨뜨린다. “되고 싶은 거 없심더!” 난 되고 싶은 게 없는데... 되고 싶은 게 없다는 건 불량한 거였다. 아니, 선생님의 질문을 무색하게 하는 그 대답이 불량 한 거였다. 권위를 회복하고 싶은 선생은 `복태, 너 교무실로 와`하며 교실을 긴장시킨다. 그러나 교무실에서 인간적인 선생님은 복태에게 쩔쩔맨다. `이놈아, 아무 거나 대고 빨리 가거래이.` 오히려 복태가 호소한다.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꺼.” 가짜 희망으로 희망을 대체할 수 없다는 복태는 정직하다. 그 복태는 짐짓 근엄한 모습으로 사 느라 우리가 놓쳤던 사람의 행간을 순간순간 만지게 해 준다. 그런 것이 김운경 드라마에 현기증 같은 웃음이 생기는 이유다. 김운경은 〈옥이 이모〉뿐 아니라 〈파랑새는 있다〉, 〈서울의 달〉의 극본을 쓴 드라마 작가 다. 그 작가 덕분에 겨우 주말의 1 시간 여행이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삶의 행간을 여 행한다. 그 시간 속에는 뭐가 들었을까? 그건 분명 밑바닥 인생에 대한 애정이다. 그러나 단순히 밑바닥에 대한 애정은 아니다. 오히려 인생에 대한 애정이라고 하는 게 옳다. 술집작부, 거지, 첩, 제비족, 춤선생, 사기꾼, 밤무대, 다방, 어떤 느낌이 드나? 중심부의 번듯한 삶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등 돌리고 싶은 사람들이다. 직업만으로도, 무대만으로도 평생 부도덕의 낙인을 지우지 못하고 살아가는 변두리 인생들과 그 인생들이 사는 동네. 경자도 그 변두리 동네


에서 살았다. “서비스 잘해 드릴 게 한잔 먹고 가이소.” 〈옥이 이모〉의 경자는 집에 들어가는 남의 남편 손목이나 잡아 끄는 인생이다. 그 인생은 경 자에게 손목을 맡긴 남편들의 아내들에게 돌을 맞아도 좋은 나쁜 인생이다. 그런데 어쩐지 경자 는 나빠 보이지 않는다. 시선이 객관성의 척도일 수는 있지만 진실의 척도라고 할 수는 없는 도 덕에 맞춰 있지 않고 경자라는, 목구멍이 포도청인 개인의 삶에 맞춰 있기 때문이다. 이외수는 이런 말을 했다. 소는 죽어서 사지가 찢긴 채로 정육점에 내걸리지만 아무리 정밀한 눈금의 저울이라도 그 영혼의 무게를 표시해 주지 않는다고. 영혼이 삶이고 진실이라면 진실은 정육점에 있는 저울과 같은 윤리, 도덕, 규범에 있지 않고 그 이면에 있다. 사실 도덕은, 그것의 힘을 강조하면 할수록 인간에 대한 예의를 벗어나는 그 무엇이 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삶이다. 도덕은 객관적인 척도일 수는 있지만 다 양한 삶의 진실을 규명하기에는 너무나 거친 척도다. 큰 잣대를 거둬내야 섬세한 삶의 표정들을 다양하게 잡아낼 수 있다. 자본주의적 일부일처제는 남의 남자를 유혹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한다. 그 큰 도덕의 잣대로 경자를 재단하면 경자의 삶의 색깔은 추접스러워서 시선을 둘 수가 없다. 거기에는 `나쁜 인생`이라는 어두운 단색만이 존재하 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파를 구르면서 술집작부가 되기까지 사람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했던 한 인간의 시선에 눈높이를 맞추면 남의 남자 손목이나 잡아 끄는 경자의 인생에서도 광대무변한 인 생의 색깔들을 만날 수 있다. 사실 경자는 그냥 그렇게 사는 인생이다.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울고 분노할 때 분노하는 팔팔 한 인생이다. 경자는 눈물로 인생을 한탄하고 있지도 않고 분노로 악을 쓰지도 않는다. 도덕의 관 점에서는 천한 인생이지만 인생의 관점에서는 천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것은 인생`이다. 그것은 때로는 폭풍처럼 격정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고양이처럼 교활하기도 하고 때로는 풀잎처럼 여리기 도 한 그런 삶들을 도덕이라는 거친 잣대로 뭉개지 않고 그 자체로 드러낼 줄 아는 김운경의 공 로다. 당연히 나는 경자와 복태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복미와 백 관장의 어머니이기도 한 김운경에게 관심이 갔다. 평소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나를 〈옥이 이모〉와 〈파랑새는 있다〉


〈서울의 달 〉 앞으로 잡아 끈 김운경이라는 사람에게서 나는 좀 다른 `냄새`를 맡았다. 돈이 지배하고 권력 이 지배하고 대체로 그런 기득권을 보호하고 있는 도덕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비명소리조차 억압 되어 있는 작은 삶들에 눈높이를 맞추는 그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했기 때문이다. 달동네에서 사는 일류 작가 그 세대 대부분이 그랬듯 어린 시절 김운경은 달동네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자랐다. 그러 나 성공한 그 세대 대부분과는 달리 김운경은 그 시절을 잊지 않았다. 눈물 젖은 빵이 기름진 음 식으로 바뀌게 되면 대부분 눈물 젖은 빵을 향해 돌팔매질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거지근성이 있 어서 늘 바라기만 한다고. 못 배운 사람들은 무지해서 억지만 쓴다고. 그런 이유 같지 않은 이유 로 가난을 폄하한다. 자신들의 어렸을 적 가난은 그들의 성공을 빛내 주는 보석같은 거지만 현재 가난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들이고 염치 없는 사람들이고 윤리, 도덕도 없는 무지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격리시켜야 할 그 무엇이라고. 물론 그것은 더 부유하고 더 배운 삶들을 향한 경박한 야망이거나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천박한 자기 증명 방법이다. 그 남자 김운경은 인생들을 편견 없이 느끼기 위해 달동네에 들어가 살기도 한다. 달동네 인생 들의 삶을 그린 〈서울의 달〉은 그가 6 개월 이상을 달동네 단칸방에 살면서 보고 느끼고 만진 인생들의 이야기였다. 물론 달동네에서는 아무도 김운경이 누군지를 몰랐다. 그는 단지 무능하고 마음 좋은 옆집 아저씨였을 뿐이었다. 그것은 취재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취재가 취재 당하는 자가 있어서 취재하는 자의 싸늘 한 시선과 평가를 배제할 수 없는 거라면 차라리 그것은 사람을 찾아 헤매는 여행이었다. 그는 동네 사람들의 싸움에 참견하기도 하고 동네일에 밤 놔라, 대추 놔라, 참견하기도 하면서 그들과 함께 살았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을 수 있어야 사는 얘기가 가감 없이 묻어나오는 법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프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가 프로인 확실한 이유는 바로 언론에 노출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드라마가 전국에서 동시에 방송되어 언제나 상종가를 치고 있었음에 도 불구하고 진작 그의 얼굴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인터뷰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얼굴 이 알려지면 삶을 찾아 헤매는 여행이 담담해질 수도, 무심해질 수도 없어서 삶이 과장된다는 것 이다. 그래서 언제나 허름한 작업복에 낡은 모자를 눌러 쓰고 다니는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의 순 덕이 오빠`같은 그 사람을 아는 이가 드물다. 사기꾼이 밉지 않은 이유 풍요로운 땅에 있어도 마음이 가난해서 삶이 가난의 자리에 남기고 간 무늬를 잊지 않는 남자, 배우지 못해 질펀해진 사람들의 억센 목소리에서 푸득거리는 생명력을 느낄 줄 아는 남자, 그 남 자가 거부하는 인생은 없다. 때로는 느글거리는 눈빛에서, 때로는 교활한 사기극에서, 때로는 사 랑 같지 않은 사랑에서 인생을 볼 줄 아는 김운경은 사기꾼같이 재고할 가치도 없는 삶에서도 질 펀한 사는 소리를 듣는다. 〈파랑새는 있다〉의 백 관장은 그렇게 탄생했다. 자기 꾀에 넘어가는 사람은 대체로 똑똑한 사람이다. 20 억 원을 사기치기 위해 사탕발림한 2 억 원을 미끼로 썼지만 2 억 원만 고스란히 뜯긴 남자, 〈파랑새는 있다〉의 백 관장이다. 사기꾼인 남자가 왜 밉지 않을까? 영악한 남자가 왜 연민을 갖게 할까? 한몫 잡아 보겠다며 약삭빠르게 굴었지만 아무 것도 손에 쥐지 못하는 남자. 그리하여 울고 싶 기도 하고 분노에 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허무가 밴 무표정 같기도 한 표정을 갖고 있던 남자. 그가 바로 〈파랑새는 있다〉의 백관장이다. 그는 선하지 않다. 돈 없고 빽 없지만 어떻게든 잘살 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 영악한 프로 사 기꾼 백관장은 아마추어 사기꾼에게 톡톡히 당한다. 상대를 이용하려고 했지만 상대에게 이용 당 했을 뿐이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이익을 향해 돌진했지만 남아 있는 것은 허무한 빈 손. 그는 아름다운 바보가 아니라 영리한 천치다. 표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화려하게, 한번만이라도 화사하게 살아 보고자 사기꾼이 되었지 만 화려한 꿈이 몸 안에서 썩어 갈 때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고 울고 있어도 우스꽝스러운 표정 들이 생긴다. 어쩌면 얄팍한 세상이 만든 가장 복잡한 표정인지도 모를 그 표정이 백 관장의 표 정이다. 이 대사기꾼 백 관장은 사기꾼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동동걸음치지만 그 동동걸음 속에


도 생존은 보장되지 않는 현대인의 초상이다. 눈 뜨면 별, 눈 감으면 꿈 김운경은 그 흔한 컴퓨터도 쓰지 않는다. 굳이 원고지에 만년필을 고집하는 작가다. 컴퓨터를 쓰지 않는 것은 컴퓨터 앞에 서면 생각이 멈추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에 대한 의리일 수 있겠다. 그는 필체를 잡아먹는 컴퓨터가 싫다. 또박또박 글을 쓰는 사람, 휘갈겨 쓰는 사람, 글 자를 눕히는 사람, 글자에 힘이 들어간 사람, 어쩐지 자신 없어 보이는 글자를 가진 사람, 볼펜으 로 쓰는 글자여도 필체에는 표정이 있다. 그가 그의 친구 박건삼에게 보낸 작은 엽서의 필체는 섬세하고 쓸쓸하다. 거기에는 별을 머리에 이고 살 그런 섬세한 사람이 들어 있었다. 필체에 맞게 이렇게 쓰여 있다. “어린 왕자에게 생텍쥐베리가 그랬습니다. 사막을 여행하다가 별을 보십시오. 양들이 풀을 먹 고 있는지 아닌지,... 낮에는 이름 모를 작은 마을들, 법 없이 사는 착한 사람들을 지나왔습니다... 사람이 나이따라 놀게 된다고 센티한 감정이 자꾸 사라지는 것 같아 서글프기도 합니다... 모래언 덕 위에서 낙타몰이꾼이 깔아 주는 매트 위에 슬리핑 백을 깔고 잤습니다. 어차피 눈 뜨면 별, 눈 감으면 꿈.” 눈 뜨면 별, 눈 감으면 꿈. 이보다 인생을, 그리고 그의 인생을 잘 요약할 수 있을까? 그는 여 행을 즐긴다. 아니, 즐긴다기보다 여행은 그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드라마 한 편이 끝나면 역 마살이 동하고 역마살이 동하면 그는 어디든 정처없이 떠난다. 자유로운 삶이다. 그와 한번 만나 얘기라도 나눠 보기 위해 연락했지만 연락할 때마다 지리산으로, 제주도로, 네팔로 떠났다는 얘기 밖에 듣지 못했다. 자유로운 그의 시간에 끼여들기 어려웠다. 만나는 일을 포기하고 그가 보냈다 는 엽서의 한 구절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사람이 나이따라 놀게 된다고 센티한 감정이 자꾸 사라지는 것 같아 서글프기도 합니다.” 나잇살 먹은 사람의 기분 좋은 쓸쓸함이 배어 있다. 센티한 감정이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볼 줄 아는 사내의 삶은 물 맑은 빛이 되어 우리에게 삶의 모습들을 투명하게 전달해 줄 수 있을 것 같 다. 삶은 굵은 쇠사슬로 엮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라 수천 겹 가는 실로 엮어진


사건, 사건들 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는 유행가의 설득력이기도 하다. 그 남자 김운경은 고행 같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그 겹겹의 실 같은 인생들의 다양한 표정을 잡아낼 것이다. 어떻게 잡아낼까, 기대해 본다. 눈 뜨면 별, 눈 감으면 꿈인 인생은 아름답다. 하 나의 강력한 칼로 재단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아름답지 않은 인생은 없다. 나는 그것을 김운경에 게서 다시 배운다. 3. 한 발짝만 물러서면 세상이 달라진다 평균 한국인 남자의 불안과 희망 나이 37 세, 키 167 센티미터, 몸무게 63 킬로그램, 학력은 고등학교 졸업, 27 세에 결혼해 처자식과 부모, 다섯 명 식구를 부양하고 있다. 집은 있지만 방은 두 개만 쓰고 나머지는 세를 주었다. 월 소득은 40 만원 가랑, 집에 TV 는 한 대 있지만, 세탁기, 오디오, 피아노는 없다. 자가용은 물론 없 다. 한 시사 주간지가 1984 년 평균 한국인 남자의 조건이었다고 소개한 것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집이 있다는 것만 빼면 아예 극빈층이다. 그렇다면 현재 마흔을 바라보는 평균 한국인 남자는 어떤 모습일까? 97 년 KBS 제 2 라디오가 조사한 바를 재구성해 보자. 학력은 전문대 졸업 정도, 20 대 후반에 결혼해 언제나 더운 물이 나 오는 30 평 아파트에서 부모님을 모시지 않고 평균 서너 명의 식구가 오붓하게 살고 있다. 월소득 은 150 에서 200 만원 정도. TV, 전화, 오디오는 물론 컴퓨터와 자가용도 있다. 두세 개 정도의 카 드를 갖고 있고 가끔 가족이 외식을 한다. 84 년도 평균 가장의 월소득 이상의 자녀교육비로 털어 넣으며 휴가철엔 가족여행이 필수다. 97 년 평균 한국인은 10 여 년 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많은 것을 누리면서 안락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가난했던 84 년 평균 한국인에게 `희망`이 있었다면 97 년 평균 한국인에게는 `불안`이 있 다. 언제 회사를 그만두게 될지 스스로도 예측할 수 없는 아득한 상황에서 한기에 젖는 사람들. 추적추적 젖어오는 그 한기에 어깨가 무거워지고 눈빛이 불안해졌다면 당신은 분명 이 시대의 평 균 한국인이다. 막연한 것인 줄 알았던 그 불안감 이면에 구체적인 부실이 있었음이


여기저기서 증명된다. 한라그룹이 50 퍼센트 감원을 결정한 데 이어 굴지의 삼성이 기구를 30 퍼센트 축소한다 고 한다. 초라한 가장들이 많아질 것은 불 보듯 훤하다. IMF 는 많은 사람을 어둡고 축축한 생활 속으로 밀어넣을 것이다. 명퇴다, 조퇴다, 지난해 가을부터 불어닥친 한파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 데 벌써 150 만 명 정도의 실업자가 생활의 막막함이 주는 공포 앞에서 후들거리고 있다. 그들이 책임지고 있는 식구들이 평균 세 명이라고 치면 전국민의 10 퍼센트가 훨씬 넘는 숫자가 먹고 사 는 일을 걱정해야 하는 판이다. 구체적인 국가적 위기, 기업의 위기를 맞아서 지금껏 살아왔던 방식으로 살수는 없다. 지금껏 우리는 성장의 시대를 살아왔다. 1 천 달러 시대에서 1 만 달러 시대까지였다. 그 시대는 어제보다 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요로운 시대였다. 내일은 풍요로움이라고 가르치는 성장의 논 리는 풍요라는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돌리는 전화기를 쓰다가 누르는 전화기로 바꾼 지 얼마 되 지 않아 응답이 되는 무선전화기를 썼다. 용량이 커지고 커져서 주방에서 번쩍거리며 자기의 존 재를 증명하는 냉장고는 어떤가? 빨래를 집어넣고 스위치를 누르기만 하면 저절로 빨래 끝, 하면 서 나오는 세탁기에 길들여져서 손빨래하던 시절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점점 더 커져서 40 인치가 다 되는 화면으로 비디오를 보고 영화를 보고 TV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었다. 여지껏은 그렇게 더 풍요로워지고 더 문명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되는 시대였다. 당연히 그런 잣대를 가지고 IMF 가 통치하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는 없다. 소비성향의 불가역 성이 있지 않나! 한 달에 용돈 10 만 원 쓰던 사람이 20 만 원을 쓰기는 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50 만 원 쓰던 사람이 30 만 원으로 줄이기는 여간 힘들지 않다. 소비행태는 한번 커지면 쉽사리 줄 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번도 안해 봤던 그것이 숙제인 시대가 지금의 시대다. 성장의 논리, 문명의 논리가 지배했던 지금껏의 잣대를 바꿔야 한다. 앞으로의 시대는 내일이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 만 달러 시대에서 5 천 달러 시대로 어떻게 작아질 수 있을까? 여지껏 성장의 논리에 가려서 잊고 있었던 일상의 삶을 회복해야 한다. 집안을 경제적으로 책임지던 사람이 실직을 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보다도 하늘이 무너진 듯 사건을 비극적으로 몰고가서는 안된다. 가난의 공포보다도 무서운 것은 절망의 공포다. 자존심만 상처 받지 않는다면 가난과 실직의 상처는 오히려 인생을 깊이 있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기가 꺾이면 다 꺾인다. 나는 단순한 행운에 취하는 사람보다 고통을 소화하는 능력이 있 는 사람에 취하는 편이다. 더구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눠가질 사람의 넉넉한 품이 있는 사람은 결코 무너질 수도, 불행해질 수도 없다는 것을 안다. 운명공동체라고 불러도 좋은 그 사람이 실직 을 했다면 무엇보다도 함께 기다려 주자. 그리고 가난에 길들여지자. 주말마다 고속도로를 메우는 행렬 속에서 너와 나를 빼내자. 백화점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품들을 외면해 보자. 자가용 대신 지하철을 이용해 보자. 학교 다닐 때 외에 별로 본 적이 없는 교양서적을 읽으면서 왜 책을 읽는 시간이 행복한 시간인지 피부로 알게 될 것이다. 왜 수학, 영 어 과외를 시킬 수 없는지 자녀들의 도움을 구해 보자. 분명히 현명한 당신의 자녀는 성실하게 혼자 공부하는 법을 터득할 것이다. 외식보다는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요리해서 나눠 먹어 보자. 정신 없이 바쁘게 사느라 삭막해졌던 관계들 사이에 여유 있는 미소가 생길 것이다. 골프 대신 등산을 해 보자. 한번도 사랑해 본 적 없는 자연 사랑에 눈 뜨게 될 것이다. 노자가 가르쳐 준 것 이도 하지만 때로 가난을 극복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가난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변한다. 봉급 많은 좋은 직장에서 남보다 빨리 승진하기 위해 애쓰면서 그런 기준만으로 세상을 재단했을 때 세상은 얼마나 단조로웠었나! 나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일, 그리고 잘난 사람을 시기하거나 동경하는 일. 그 단조로운 기준을 벗어 버릴 기회라고 생각하 자. 그러면 인생을 한발짝 뒤에서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서두름보다는 기다리면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때로 인생은 먼길을 원한다. 넘어진 김에 쉬었다 가자 무인년, 호랑이해다.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기가 세다고, 남자 앞길을 막는다고 하는 바로 그 백 호의 해다. 나는 호랑이띠는 아니지만 사주 네 기둥 가운데 호랑이가 두 기둥이나 앉아 있다. 그 걸 보고 어떤 이는 백호살이 있다고까지 했다. 백호살이 있어서 독수공방 팔자라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백호살을 독수공방으로 연결시킨 건 재미있는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호랑이는 일 년에 한 번, 번식기를 제외하고는 짝짓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 다. 물론 짝짓기가 끝나면 암수가 눈빛을 맞추고 서로에게 친근하게 구는 법이 없다. 아무 일 없 었다는 듯 수놈은 자기의 길을 간다. 암놈이 새끼를 돌보지만 그것도 기껏 1~2 년이다. 새끼가 커 서 먹이를 구할 수 있게 되면 암놈도 새끼를 떠나 보낸다. 백호살이 독수공방 팔자라는 건 호랑 이의 그 습성에서 연유했을 터이다. 언제나 맹수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초식동물들은 개체로 행동하지 않는다. 떼를 지어 모여 사는 일이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초식동물은 아니지만 늑대나 이리 같은 동물 들도 무리 지어 다닌다. 때로는 홀로 사냥하기 벅차고 때로는 자기보다 강한 호랑이나 사자와 싸 워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한 맹수는 무리 지어 다니지 않는다. 호랑이띠 여자의 팔자 임진왜란 때 일본 실력자였던 풍신수길에겐 아들이 없었다. 누군가가 길을 알려 주었다. 살아 있는 조선 호랑이를 고아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풍신수길의 부하들은 조선 호랑이 한 마리를 생포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큰 상자에 넣었다. 조선에서 일본까지 거리를 감안해서 먹이로 개 세 마리를 넣어 주었다. 배는 무사히 일본에 도착했다. 부하들은 의기양양해서 호랑이 상자를 풍신수길에게 바쳤다. 그 런데 상자 안에 호랑이는 없고 개만 세 마리 남아 있었다. 그 개가 진돗개였다고 전한다. 아무리 진돗개였어도 세 마리의 개가 조선 호랑이를 당할 수 있었던 건 공간이 협소했기 때문 일 것이다. 움직이는 데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한 호랑이는 상자 속에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협소한 공간에서는 강한 이빨수가 힘이 된다. 진돗개가 호랑이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많은 이빨 수 때문이 아니었을까? 맹수가 아닌 육식동물이 모여 사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물론 그 무리는 초식동물의 무리보다 크지 않다. 너무 무리가 크면 기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맹수는 모여 살지 않는다. 강 하기 때문에 숲에서 홀로 살아 남을 수 있는 맹수는 생존을 위해 다른 존재가 필요


없기 때문이 다. 그런 맹수가 외롭게 보이는 건 어쩌면 살기 위해서는 모여야 하는 약한 존재의 감정이입인지 도 모른다. 호랑이띠 남자는 기상이 있을 거라고 추측하지만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고 추측하는 것은 그런 속설까지 동원해서 여자를 연약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약한 여자가 아름답다는 구 호는 여자를 사회적 약자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다. 사회적 약자로 만들어야 그저 허드렛일이나 시키면서 부릴 수 있다. 대부분은 틀린 그 추측이 힘을 가질 수 있게 된 건 약한 여자를 선호했 던 가부장 사회의 전략이다. 만약 실업자가 된다면? 무인년 호랑이다. 여자든 남자든 강했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해다. 활동영역이 크고 거칠지만 치밀한 호랑이의 기상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런 데 모두들 움츠려들고 있다. 경제신탁통치, 감원, 물가인상, 부도, 실직과 같은 무서운 단어들이 무인년의 길목을 지키고 있는 이때에 여자든 남자든 그런 것들에 기 꺾이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나 직장을 잃을 수 있다. 능력보다도 더 무서운 건 그 능력을 발휘할 기반이고 기회였다는 것을 우리는 설마설마 하면서 지켜본 이 경제위기에서 정말 비싼 대가를 주고 배우고 있다. 아무리 물건을 잘 만들면 뭐 하나? 그 물건을 소비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면! 아무리 기 획을 잘하면 뭘 할까? 회사가 그 기획을 실행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면! 아무리 요리를 잘하는 능력이 있다면 뭘 할까? 그 음식을 먹어줄 식구들이 없다면! 능력이란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와 의 상관관계하에서 능력이다. 지금 구조조정기를 거쳐야 하는 우리 경제는 많은 사람들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해 줄 수 없는 그런 위기에 와 있다. 그러다 보니까 능력과 상관 없이 실업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임원은 `임시직원`의 준말이라는 서글프면서도 엄연한 현실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주변에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속속 늘어난다. 만약 실업자가 된다면? 속살 깊이 스미는 한기 때문에 피하고 싶은 물음이다. 그러나 IMF 통


치 시대에 막연한 그 의문은 가장 생생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우울한 그 현실에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를 든든히 해야 한다. 그 물음에 아찔해지지 않고 담담해질 수 있을 때까지, 그 물음을 둘러싼 현실을 준비해서 어느 날 벼락 맞은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 실직을 하면 대부분은 조급해진 마음으로 전환의 길을 모색하려 든다. 무언가에 버림 받았다는 상처와 아직은 누군가를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이대로 끝날 수 없다는 비장감이 결합 하면 현실감각은 형편없이 둔해진다. 그래서 집을 담보로 잡히고 퇴직금을 털어 놓어서 여지껏 지켜왔던 인격(?)을 유지시켜 주는 그런 사업을 모양 좋게 벌이는 경우가 많다. 물론 대부분은 겉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생에 깊은 구멍이 생긴다. 실제로 광고회사에 있다가 명예퇴직한 한 남자는 퇴직금으로 받은 6 억 원을 털고 집을 담보로 잡혀 또 다른 광고회사를 차렸다. 물론 1 년 만에 6 억 원을 다 날리고 집이 보증한 빚만 거머쥐었 다. 그리고는 건강까지 잃었다. 때로는 기다릴 줄 아는 일, 그것이 어려운 지혜다. 어떻게 기다리나? 오징어와 소주를 벗삼아 상처 낸 사회와 조직을 욕하면서 성난 얼굴로 취해 있을 수도 있다. TV 와 비디오를 앞에 두고 무념무상에 빠져들 수도 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방 황을 들키고 싶지 않은 남자는 집에 있기 싫어한다. 동네 다방에 출근하면서 시간 죽이기를 할 수도 있다. 놀고 있는 남편을 보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놀고 있는 남편을 보는 아내를 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부인은 매일 2 만 원씩 주면서 남편을 내보낸단다. 그러면 그 남편은 그걸로 점심 먹고 영화 보고 담배 하고 차비 하고 그러면서 시간을 죽이다가 저녁참에나 집에 들어온다고 한다. 어쩌면 그럴 수가, 만 연발하고 있을 수 없다. 우선은 낙천적일 필요가 있다. 극단적으로는 내가 가진 퇴직금, 그저 은행에 넣어놓더라도 노후 까지 쓰는 데 문제 없다, 고 생각하자. 그러면 적어도 찌든 표정으로 초조해하지는 않는다. 실제 로 먹고 사는 일이 해결이 안돼 표정이 궁벽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표정이 구겨지는 것은 대 부분 먹고 사는 일을 과장해서 걱정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미국으로 유학 간 아들에게 매달 보내던 2 만 달러를 계속 보낼 수 있어야 한다며 그것을 먹고 사는 일이라고 걱정했다. 왜 우리 부모들은 환갑이 되어서도 서른이 다 된 팔팔한 자식들을 의존적으로


만드는 재주를 포기할 줄 모르는 걸까? 때로는 믿음직스럽고 때로는 어리석기도 한 그 태도를 포기하기 전에는 자식들의 홀로서기는 불가능하다. 서른이 되어서도, 우리 아빠가, 우리 엄마가, 하면서 말로만 효 자 효녀처럼 구는 철나지 않은 아이들 뒤에는 언제나 품을 떠난 자식들까지도 결코 품 밖으로 내 보내지 않는 성숙하지 못한 부모가 있다. 그래도 호랑이해다. 호랑이에게 배우자. 낙천적이기 위해서는 줄어드는 퇴직금에 초조해하면 안된다. 당연히 퇴직금은 줄어들게 마련이 다. 그때 퇴직금의 규모를 나의 인생의 규모라고 생각하면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다. 퇴직금이 3 분의 1 로 줄어도 문제 없다고 생각해 보자. 아이들이 크면 나름대로 벌어 쓸 거고 교육비도 안 나갈 거리고. 그러다 보면 집을 줄여도 된다고 생각하자. 사실 50 이 넘어서 퇴직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의 퇴직금은 절약해서 쓰기만 한다면 웬만한 문화생활까지 해 가면서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규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점만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으면 물밀듯이 스며드는 불안감을 떨칠 방법이 없다. 막연한 불안감은 비전도 없고 인생 망치기 쉬운 구체적인 일을 저지르게 만드는 강한 힘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진다면 직장을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무덤 같은 세월이 아니다. 오히려 모 처럼 찾아든 자유다. 언제 우리가 아침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해서 또 출근을 위해 잠자리에 들어 야 하는 그런 다람쥐 챗바퀴 돌리는 생활에서 벗어나 볼 수 있단 말인가? 오소리에게서 배우자 시골산에서 흔하게 돌아다니던 오소리를 본 적이 있나? 오소리는 겨울이 되면 긴 동면에 들어 간다. 오소리가 추운 겨울에 먹이를 구하겠다고 눈꽃 핀 산을 헤맨다면? 동상에 걸려 죽을 것이 다. 지구는 돌아도 시간을 중지시키고 세상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는 그 지혜를 나는 배우고 싶다. 만일 여건이 된다면 시골로 내려가도 좋다. 아이들 교육문제가 걸려 있지 않고 직장문제가 걸 려 있지 않다면 집값 비싸고 공기 나쁘고 물가 비싼 도시생활을 할 이유가 없다. 이 시대에 자급 자족의 삶을 통해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표정은


분명 살아 있는 표정일 것이다. 지겨운 월급쟁이 생활 접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했던 이들은 변신의 기회로 생각해도 좋 겠다. 안정된 생활에 익숙해져서, 용기가 없어서 미적미적 오늘까지 살아왔다면, 위기를 기회로 새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위기는 기회와 함께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실직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적 건강이다. 윤기 있게 살다 보면 길이 열린다. 그러다 가 갑근세를 내야 하는 일이 생기면 봄을 맞는 오소리처럼 다시 세파로 나오면 된다. 충분히 동 면을 취할 수 있는 자는 겨울도, 봄도 건강하다. 머리 대신 몸으로 사는 즐거움 의외로 두려움은 상상에서 온다. 이러면 어쩌나, 저러면 어쩌나, 그러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상상에서, 미국의 한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다. “노인이 된 지금 내 인생을 돌이켜보니 그 많은 걱정 가운데 실제로 일어난 일은 별로 없었 다.” 상상 속의 두려움은 조바심이 된다. 그것이 현실의 바탕색이 되면 실제 현실은 소심해지고 사 람은 궁벽한 보수주의자가 된다. 이는 대체적으로 화이트칼라의 특성이다. 양귀자 소설 속에서 노 동을 하는 한 남자는 이런 말을 한다. “머리 속에 생각이 많으면 행동이 굼뜨고, 그러기 시작하면 인생을 망치는 겁니다... 머리 속에 먹물 담아 놓고 주위에 검정물 뿌려대는 인간하고는 안돼요. 그런 부류들은 저밖에 모르는 인간 이거나 필경 주위에 불행만 옮기거든요. 엘리트 은행원의 성공시대 아직도 머리 속에 먹물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렇게 생각해서 조바심쳐야 했던 한 남자 가 있었다. 이상효 씨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여의도 한복판에 자리잡은 모 은행 간부실로 출근했다. 그는 그 은행 상무이사였다. 이상효 씨는 1970 년대 초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당시 화이트칼라의 전형이었던 은행으로 들어갔 다. 비록 가난한 집의 장남이었지만 그는 출세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사실 60 년대 말 일류대학 의 상과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성공을 거의 보장받은 거였다. 그렇지만 그 성공이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어서 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하여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직장이었던 은행에 들어갔다. 그때 그는 내일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씨는 차곡차곡 올라갔다. 지점의 출납계원에서 시작해서 `초짜` 은행원이 거치게 마련인 어음 교환, 서무계, 예금계원을 거쳐 삼십 중반에 본부로 진출했다.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는 그런 말도 그에게는 필요가 없었다. 오늘의 태양이 내일을 보장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가 무난한 승진 코스를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성실했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성실했기 때문에 남자답지 않게 차분하고 치밀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것은 은행원으로서는 타고난 성 품이었다. 은행이라는 공간에서 일하도록 먼 옛날부터 운명이 정해진 사람처럼 그의 성격은 그의 직업에 딱 맞았다. 어쩌면 은행원이라는 직업이 그를 차분하고 치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 었다. 본부에서는 주로 조직관리를 맡아 왔다. 인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일이었다. 잘 나가는 은행 에서 그것은 잘 나가는 일이었다. 가끔은 스스로의 인생에 도취될 정도로 이씨는 자기 인생을 사 랑했다. 2 년 전 상무이사가 되었을 때 주변의 시선은 부러움으로 빛났다. 능력 있어, 성공했지, 잘 나가 잖아, 하고 말해 주는 친구들의 말에 이씨는 버릇처럼 그게 뭐 대단한 거야, 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의 말을 대단하지 않게 생각해 본 적은 추호도 없었다. 그에게도 자신은 능력이 있어서 성공한 인생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의심하지 않을수록 이씨는 성공을 모르는 인생을 폄하했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인간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어떻게 많은 사람이 고개 숙이고 악수하고자 하는 손과 아무도 거 들떠보지 않는 청소부의 거친 손이 손을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씨도 눈치가 빤해서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한 거지, 그도 말은 그렇게 할 줄 알았다. 그렇지만 그가 정말 그렇게 믿었으면 그렇게 아둥바둥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남들은 능력 있 는 사람의 무난한 승진이라고 했지만 은행 일 외에 그가 아는 일, 할 줄 아는 일이라곤 골프밖에 없었다. 그것도 적당히 성공해서 적당히 성공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위해 시작한


거였다. 그렇게 보면 그는 온 열정을 은행에 쏟아부은 것이다. 사실 인간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집안 분위기에서부터 배우면서 자랐다. 어렸을 적 그의 아버지는 막일꾼이었다. 막일꾼이라고 어찌 인생이 귀하지 않으랴만은 아버지는 정말 미 래가 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새벽에 봉천동 인력시장으로 출근했다. 대부분의 날들은 거기에서 건 축현장 잡역부로 뽑혀 갔다. 그러자 뽑혀 가지 못하고 공친 날도 많아서 그런 날 아버지는 스스 로 허름한 선술집을 골라서 소주를 마셔댔다. 그러기를 수십 년이었다. 그 수십년 중에 아버지가 권력을 쥐고 있을 때라곤 십장이 되어 일을 진두지휘했을 때뿐이었다. 잡역부였던 아버지에게는 계절도 일의 중요한 변수였다. 한겨울이나 여름 장마철엔 일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아예 집에서 놀았다. 놀고 싶어 노는 게 아니라 일이 없어 노는 아버지는 노는 시간을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을 잊고자 아버지는 또 술을 마셨다. 두려워서 술을 마시는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사소한 일에도 시비를 걸어 처자식을 괴롭혔다. 때로는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술취한 아버지의 폭력은 물리적으로 아프지도 않았고, 피할 수도 있는 거였지만 그 폭력적 분위기는 찐득찐득 남아 있어 그때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처 럼 살지 말아야지, 이씨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는 대접 받는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 했다. `나는 펜대를 굴리면서 대접 받고 살아야지.` 아버지의 직업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이었고 그는 그 흔적을 지우고자 애를 썼다. 그것은 이씨가 상과대학에서 은행 간부실까지 달려갈 수 있었던 중요한 힘이었다. 그는 정말 직업의 보 호를 받지 못해 술의 보호를 받아야 했던 남자의 자리를 지우고 직업이 든든하게 보호해 줘서 삶 이 든든한 그런 남자가 되고 싶었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을 보증해 주지 않는 세상 이씨는 평생 결재서류에 사인을 하거나 도장을 찍으면서 살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알았다. 기약도 없는 막일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봉천동으로 출근해야 하는 직업과 대출을 얻기 위해 고 개 숙이며 찾아드는 손님에게 당당하게 대꾸하는 직업의 차이를. 그 차이의 적나라함을. 아버지는


술을 마셨지만 그는 차곡차곡 저축했다. 번듯한 자기 집이라곤 가져 본 적이 없는 이가 평생 번 듯한 남의 집을 지어 온 아버지였다면 이씨는 대출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거들먹거리면 서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번듯한 아파트를 가질 수 있었다. 번듯한 아파트는 주거공간이라기보다 는 그의 출세를 보증해 주는 담보물이기도 했다. 그 아파트에 사는 한 그의 성공은 안정적인 듯 했다. 그러나 1997 년 하반기의 금융계를 강타한 위기는 치명적이었다. 사실 금융위기는 예비된 것이 었지만 어제의 안일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깨고 싶어도 깨어나지 않는 가위눌림이 었다. 이씨의 은행은 부실대출 때문에 대외 신인도가 급강하했고 애당초 자본보다는 빚이 많아 상환능력이 의심스러웠던 대출기업들이 줄줄이 넘어졌다. 외국계 은행들은 신용장 발급을 비롯해 대외 업무를 기피하기 시작했고, 지급보증을 해 주었던 은행들은 서둘러 발을 뺐다. 정부의 대책도 갈팡질팡이었다. 은행장을 임명함으로써 은행의 돈줄을 쥐고 있던 정부는 정부 가 나서서 경영을 정상화시킨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다가 세 살 먹은 아이도 무서워하는 IMF 의 비난을 받고 나서야 시장경제의 논리를 존중하겠다고 발을 뺐다. 그것은 외국은행의 인수합병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하에 은행측은 부랴부랴 조직감축에 나섰다. 해고 우선 순위에 오르는 것 은 영업직보다는 관리직이었고, 대리급 이하의 실무직원들보다는 연봉 부담이 큰 임원들이었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을 보증해 주지 않는 세상에서 어제의 성공은 오늘의 나락이었다. 이상효 씨 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은 이씨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은행 형편 때문에 생각보다 퇴직금은 보잘것없었다. 게다가 이씨는 한국의 장남이었다. 동생들 결혼비용을 보태느라 5 천만 원의 은행돈을 쓰고 있었다. 그 대출금을 갚고 나니 퇴직금은 더욱 작아졌다. 24 시간 편의 점이라고 해서 사장님 소리를 듣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액수였다. 잘 지어 놓은 집이 하루아침에 화재가 난 기분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필름이 끊기도록 술을 마 셨다.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술을 마시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 처음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 씨는 밝은 것이 두려워 술을 마셨고 깨어 있는 것이 무서워 술을 마셔댔다.


어느 날 그는 대학생인 딸이 자기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순간적으로 술이 깼다. 피 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모처럼 면도를 하다 말고 이씨는 또 한번 놀랐다. 짙은 피로가 묻어나는 얼굴, 예전에 그가 그 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아버지 얼굴이 거울 속에 들어 있었다. 실직 후 두 달 사이에 그는 삶이 고단하고 외로워서 쩔쩔매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관계가 재산 아니었나! 이씨는 그 동안 보험에 든 것처럼 든든해했던 다른 은행 간부들을 찾아다녔다. 다시 일하고 싶어서였다. 모두들 반색을 하면서도 내심은 난감해했다. 금융권이 태풍 속의 선박이었기 때문이다. 무게가 나가는 짐꾸러미를 바다에 던져 넣는 그 상황에서 이씨와 같 은 고급선원을 승선시키는 일은 불가능했다. 감수성이 무디지 않은 이씨는 출구가 없다는 것을 담박에 눈치챘다. 그의 절망감을 부축인 것은 평생 우아한 귀부인이었던 이씨의 아내가 간병인 프로그램에 등록 한 일이었다. 그 일은 아내의 발빠른 현실감각이었지만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 한 이씨에게 그 일은 모독이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살아온 아내 아닌가! 그 아내가 갑자기 남의 뒷바라지를 해 주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 일은 아내도 아내지만 자신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을 빼도 박도 할 수 없게 증거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씨는 그 사실을 못내 참지 못했다. 당장 그만두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그렇지만 두어 달 세월에서 이씨도 배운 것이 있었다. 귀한 인생과 천한 인생이 따로 있는 것 이 아니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운에 따라 귀하게도 되고 천하게도 된다면 귀한 것과 천한 것은 역할이지 사람이 아니었다. 인생은 어떠한 삶을 살고 있어도 귀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자신은 모 두 귀한 인생이었다. 다만 추락의 시기에 그가 숨어서 배우고 싶었던 진리를 거침없이 삶으로 드 러내는 아내에게 그는 주눅이 들어 있었고 상처 입은 자존심 때문에 괜한 부부싸움을 한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추운 겨울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바싹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삶에 대한 열 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다만 사방이 꽉 막혀 있는 현실에서 어떠한 통로로 그 열정을 소화해낼


지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배사가 되니 단잠을 자요”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집을 도배해 보자고 제안했다. 벽지를 싸게 사려고 을지로 방산시장에 찾아갔다. 거기에서 벽지 바르는 방법을 배우고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했다. 벽지를 바꿨을 뿐인 데 집안 분위기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작은 일이 기분을 상쾌하게 바꿔주고 있었다. 그때 이씨는 본격적으로 도배를 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전직 은행이사였다는 것은 도배사가 될 수 없는 까닭은 아니었지만 그건 의외로 심리적인 걸림 돌이 되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삶의 궤적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섬뜻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역사회 복지관 도배사 양성과정에 등록하고부터 이씨는 상상 속의 두려움은 현실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육체노동은 의외로 스트레스가 없었다. 정신노동이 기가 펴지는 일이 아니었듯이 육체노동은 기죽을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신노동으로 잘난 체 했던 일이 꼴불견이었다면 육체노동으로 기죽는 일도 꼴불견이었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 그는 먼 길을 돌아온 것이다. 물론 정신노동이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했다면 육체노동도 지식과 숙련을 필요로 했다. 도배사 생활 첫 달에는 목덜미까 뻐근하고 손목이 시큰거리는 일이 잦았다. 몇 시간 쉬지도 않 고 쭈그리고 앉아 수십 장의 벽지에 풀칠을 하다 보면 한쪽 어깨의 감각이 무뎌지기도 했다. 그 런데 볼썽 사납던 시멘트 벽이 화사하게 바뀌면 이씨는 자신이 요술상자를 가진 양 황홀해지기도 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일을 사랑하게 된 증거이기도 했다. 더구나 꼼꼼한 이씨의 성격은 도배 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일하다 보면 무념무상에 빠져서 스트레스가 생길 틈이 없다. 시간도 훌쩍 지나가 금세 점심시 간이 되고 퇴근시간이 된다. 도배사 보조로 일할 때 일당은 4 만 원이었지만 보조를 뗀 지난 달부 터 일당은 9 만 원에서 10 만 원. 물론 일이 매일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IMF 한파로 도배하는 집이 줄어든 지금은 더욱 그 렇다. 그러나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인 것은 아니어서 쉬는 날은 쉬는 날대로 좋았다. 봄이 되면서부터는 이씨에게 일을 맡겼던 사람들의 소개 소개로 그의 일감은 차츰


늘어나고 있 는 추세다. 간간이 쉬고 간간이 일하면서 무엇보다도 밥맛이 생겼고 잠맛이 생겼다. 그것은 돈으 로 환원될 수 없는 살맛이기도 했다. 요즘은 집주인과 만나 벽지 종류를 의논하면서 이미 일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 다. 일반 사람들에게 실크벽지는 종이벽지보다 도배하기 어렵지만 전문가에겐 실크벽지 도배가 더 쉽다. 실크벽지는 폭이 넓은 반면 종이벽지는 폭이 좁아 여러 차례 덧발라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종이벽지는 풀칠을 하는 붓의 방향에 따라 종이가 늘어나기 때문에 빨리 바르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도배지의 종류에 따라 풀의 되기도 달라져야 한다. 두꺼운 고급벽지에는 된 풀을, 얇은 벽지에는 묽은 풀을 써야 한다고. 얼마 전에는 동네 교회의 도움으로 소녀가장의 집을 알아내서 무료로 벽지를 발라 주기도 했 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중학생 소녀에게 그는 기분좋은 이웃이 된 것이다. 행복해하는 소녀 못지 않게 그의 가슴도 후련해졌다. 그는 처음으로 이웃과 함께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는 수십 년 동안 밑바닥 인생 두려움증이 있었다. 그런데 밑바닥 인생의 진정한 뜻이 입 에 착착 감기는 밥맛이고 어지러운 꿈이 없는 단잠임을 배우면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사랑한다. 사실 새로운 삶을 새로운 것으로 느끼지 못하고 낮은 것으로 비하하는 것은 편견과 걱정으로부 터 걸머진 빚이다. 물론 쉽게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니어서 결코 그 빚을 걸머진 자의 세계는 넓 어지지 않는다. 아니, 그만큼 좁아진다. 실제로 견디지 못할 현실은 별로 없다. 아슬아슬한 시대를 헤쳐가는 재미는 기름낀 시대에 편 승해 가는 재미보다 한수 위다. 상상속에서의 밑바닥 생활은 어깨에 바위 하나 얹고 살아가는 것 이지만 실제 바닥으로 내려가보면 그 생활은 창백했던 삶의 활력이 되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우 리 안에서 거인의 목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때로는 복잡하기만 한 생활의 잔가지를 쳐낼 수 있어야 삶이 편안해진다. 자, 머리로 살지 않고 가슴으로, 몸으로 사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자. 머리로 사는 일이 신부나 수녀처럼 사는 거라면 몸으로 사는 일은 금욕하지 않는 사람, 바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 바 로 그런 삶이니까.


농사를 지어 보겠다고? 철철 넘쳐흐르는 자신감을 가진 경영학도 정충근 씨가 대기업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설레이기 까지 했다. 여러사람이 분주하게 일하는 번잡한 사무실 한자리를 차지하는 평사원에서, 독방에서 은밀하고도 핵심적인 일을 처리하는 이사까지, 그는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그는 뚜럿한 인생의 목표가 주는 찬란한 희망을 결코 세파라고 폄하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세파가 아니라 열정의 근원이었다.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면서 정충근 씨는 미래의 자신을 생각했다. 적어도 1 천여 명의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들이 자신에게 예를 갖추 고 인사를 하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부르르 떨렸다. 그럴수록 그는 높은 사람들에게 깊이 고개 를 숙여 인사했다. 충근 씨는 1984 년 졸업하던 해 바로 대기업 공채시험에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자금운용부에서 근무하던 충근 씨는 비젼 있는 남자답게 명문대학을 나온 똘똘한 여자와 결혼 했다. 그 동안 연년생으로 딸과 아들을 낳았다.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 에서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당연히 직급도 오르고 호봉도 올랐다. 3 년 전에는 자동차도 중형으로 바꿨다. 주변에선 부러울 것이 없는 가정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렇지만 충근 씨는 뭔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파에 시달려 보지 않은 사람에게 세파는 무엇일까? 때로는 유혹일런지도 모른다. 한 번뿐인 인생을 극적으로 디자인해 보고자 하는 유혹은 세파에 시달려 본 경험이 없을수록 절절하고 충동 적이다. 부처님도 세속을 떠난 도는 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세파를 향한 열정이 탱탱 할 때는 부처님까지 들먹이면서 현실옹호론자가 된다. 그것은 세파가 우리를 찌들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가뿐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듯 달떴던 열정이 왜 시큰둥해지고 나아가서 피로해질까? 거기에는 화려한 것 같으 면서도 스산하고 웃는 얼굴을 하고도 뒤통수를 치는 괴물같은 세월이 있다. 피로는 안정을 위한 세금


자금운용이라는 게 늘 긴장하고 사람을 재촉하거나 안된다고 잘라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시간 싸움이기도 했다. 늘 스트레스를 안고 충근 씨는 파김치가 되어서야 집으로 기어 들어왔다. 분명 충근 씨는 헤어지기 싫어서 결혼했다. 그런데 그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가장 많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피곤해`였다. 부부관계라는 게 피곤하다는 말만 편하게 내뱉을 수 있고 그 말을 안쓰 럽게 들어 주기만 하는 관계라는 것을 충근 씨는 부부는 확인시키고 있었다. 충근 씨는 점차 20 대에 가졌던 청운의 욕망을 잊어버렸고 마침내는 자신이 그런 꿈을 가졌었다 는 사실조차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단지 세상 다 산 얼굴로 집에 들어오면 누워서 자고 싶다는 사실 외에는 인지하기 싫었다. 아침에 겨우 정신이 들어 회사로 나가면서는 그날 처리해야 할 일 과 풀어야 할 혹은 매듭지어야 할 인간관계 때문에 바짝 긴장했다. 때로는 눈이 따끔거려 운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퇴근 후 동료들과 술을 마시 면서 심각하게 퇴직과 전직을 고민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술자리에서의 고민일 뿐 진전 이 안되었다. 회사 다니는 사람치고 문득 문득 사표 쓰고 싶지 않은 사람 있나, 라는 데는 모두들 한마음이었다. 어느 정도의 피로감과 모멸감은 안정된 생활을 위한 세금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들은, 누구 인간답게 사는 놈 있으면 나와 봐, 하는 데 동의했을 뿐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모색하 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벌써 새로운 일을 모색하기 힘들다고 스스로 체념하게 되는 30 대 후반이 었다. 여지껏 자본주의 시스템에 길들여진 이들은 회사 다니는 일 외에는 살아가는 다른 괜찮은 방법이 있다는 데 대해서는 깜깜이었다. 그렇다면 퇴직은 지금껏 그들이 이뤄 놓은 아파트와 중 형차, 비싼 사교육의 포기일 뿐이었다. 그런 정씨에게 귀농의 계기가 찾아온 것은 1994 년 말이었다. 조직의 심장부에서 일하고 있는 정씨는 무분별하게 돈을 여기저기서 끌어다 쓰는 회사가 못내 불안했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항변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비틀거리기 시작한 회사는 그날그날을 버티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 미 래가 있다는 것을 생각 할 틈도, 미래를 설계할 틈도 없었다. 회사의 여의치 않은 사정을 누구보 다 앞서 체감한 충근 씨는 그저 불안하기만 했다. 회사는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은 부도설이 나돌았다. 그러자 관리직부터 자진 사퇴하라는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눈치와 눈치들이 적나라하게 싸우고 있었다. 계속 회사를 다닌다는 것은 스트레스 를 지나 수치이기까지 했다.정씨는 체념하듯 사표를 냈다. 화가 치솟아서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한없이 막막했다. 그렇지만 가부장제의 역사가 빛나는 한국의 가장이기도 했다. 식구들의 미래를 책임져야 했기에 우선 치솟아오르는 분노를 접고 접었다. 아파트를 전세 놓고 그 돈으로 고향 벌교에 가서 땅을 사고 터를 잡았다. 그러고 나니까 잠시 미뤄두었던 정서들이 마음 놓고 찾아들었다. 회사에서 밀려 났지다는 자괴감과 회사에 대한 분노 가 뒤범벅이 되어 정씨를 괴롭혔다. 그 와중에 부도를 내고 도망간 회사 간부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그 다음부터는 신문을 보는 일이 무서웠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은 무슨 계기만 있 으면 정씨의 마음에 터를 잡아 정씨를 흔들었다. 혹시 회사와 관련된 뉴스가 나올까 봐 TV 뉴스 도 외면하게 되었다. 벌교는 고향 땅이었지만 고향 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말을 나누지 못했다. 우연히 길가에서 부 딪치는 아이조차 `낙오자`라고 비웃는 듯했다. 세파에 흔들려 결국은 나락으로 떨어진 그 망가진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달픈 일이었다. 정씨는 자기가 고달퍼서 주변 사람들을 고달프게 했 다. 충근 씨의 이성은 말 없이 자신을 따라 고향으로 내려온 아내가 고마웠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고마움을 표시할 여유가 없었다. 식사가 조금만 늦게 준비돼도 버럭 신경질을 낼정도로 오히려 짜증만 늘었다. 아이들이 사소한 말대꾸라도 하는 날이면 걷잡을 수 없이 야단을 쳤다. 이래선 안 된다고 마음을 잡고 또 잡았다. 그러나 몸은 비록 고향 땅, 녹색의 품에 안겼어도 마음은 자신을 밀어낸 회사에서 한발치도 떠나지 못한 충근 씨는 핏발이 서 있거나 멍해있거나 할 수밖에 없었 다. 누가 나를 이렇게 넉넉하게 받아 주었던가 귀향한 지 두세 달 지난 어느 비 갠 날 오후였다. 그날따라 아내와 아이들은 모두 집을 비우고 충근 씨 혼자 대청마루에 앉아 처마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을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일흔 일곱, 일흔 여덜... 멍청하게 정신을 놓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무심하게 마음을


달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때 이웃집 할머니가 찾아왔다. 할머니는 삶은 고구마를 담은 소쿠리를 들고 있었 다.고구마를 권하는 할머니는 달다, 고만 했다. 충근 씨의 슬픈 눈빛을 마주하자 할머니는 환하게 웃었다. 깊게 파인 주름이 표정이 되어 할머니가 얼마나 선하게 살았는지 담박에 느낄 수 있었따. 찡, 했다. 휴식을 모르던 영혼이 넉넉한 안식처를 찾았다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찾아왔다. 서울에 서 누가 자신을 이렇게 넉넉하게 받아 준 적이 있었던가! 아니, 서울 생활중에 누군가가 할머니 같았다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은 시골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밀려날 즈음 회사 사람들의 미묘한 분위기가 생각났다. 그들은 분명히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러나 밀기 아니면 밀리기였기 때문에 동료들의 눈빛 에서는 내가 밀리지 않았다는 데 대한 야릇한 안도감이 풍겨 나왔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언제나 동료를 경계하게 했다. 갑자기 그때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황량하고 서 먹한 때였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이 깨달음처럼 담박에 온 것이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준비된 생각인지도 몰랐다. 다만 도 시적 편리함과 으쓱함에 가려 잊고 있었던 것일 뿐인지도 비로소 그는 자신이 회사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도시생활의 허울을 벗은 것이고 이제는 더 이상 삶에 그런 허울이 필요 없다는 해석 을 입힐 수 있었다. 도망갔던 마음이 몸을 찾아 돌아오니까 몸에 생기가 돌았다. 그에게는 그가 자유의 몸이라는 사실이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비로소 정신없이 부산하고 이유 없이 불안하기만 했던 서울생활을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찾아들었다.편안해지니까 저주스러웠던 퇴직이 고맙기까지 했다. 그것은 실 패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느림은 권태가 아니라 풍요 서울생활의 속도가 80 킬로미터라면 시골생활의 속도는 시속 50 킬로미터였다. 80 킬로미터의 속 도감으로 시골생활을 재단하면 시골생활은 이발소 그림 풍경 속의 풍경처럼 권태롭다. 그렇지만 느림의 미학에 익숙해지면 그 생활은 권태롭다기보다 풍만한 것이었다. 엑셀러레이터를 밟을수록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기는 한다. 그러나 나를 스쳐간


것이 무엇이었 는지, 무엇이 나를 붙들었고 무엇 때문에 내가 흔들렸는지 깜깜하다.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삶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무늬들을 지우고 오로지 하나, 밋밋하고 살기 어린 목표만을 남긴다. 목표를 위하여 모든 삶이 수단화되는 것이다. 도대체 목적지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반대로 시속 5 킬로미터의 속도감으로 도시를 관찰하면 도시의 표정들은 생산성이 높은 일을 하 는 풍부한 표정이라기보다 정신 없는 표정이다. 그 변화는 조련사의 훈련에 자기를 적응시키는 개의 적응능력 같다. 그렇다면 5 킬로미터, 몇 템포 느린 그 삶에는 무엇이 있을까? 충근 씨는 거 기에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보았다. 그는, 그 느린 삶이 체화되는 변화는 마음이 경이로움을 깨운 다고 입을 연다. “언제나 거기에 그렇게 있는 줄 알았던 앞산만 해도 얼마나 많은 무늬들이 있는지 아십니까? 아침에는 풋풋하게 생기를 머금은 녹색이 신선해요, 그런데 노을녘에는 산이 주홍빛이예요, 불 타 는 듯 황홀하죠. 밤에는요, 칠흙처럼 어두운데 이제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휴식의 시간임을 말해 주죠. 가끔씩 별이 살아 있다는 느낌은 왜 그렇게 설레던지, 제가 살아 있다는 걸 비로소 느 끼죠.” 산뿐만이 아니었다. 논, 밭, 소, 돼지, 닭 들에도 새록새록 애정이 생겼다. 그리고 보니까 그들이 모두 살아 있는 존재로 다가왔다. 농사는 여보적자라는 말이 실감났다. 농부의 손끝을 타야 하는 모든 생물들은 부모의 손길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았던 것이다. 차츰 마음이 열린 충근 씨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산에 올라가 어릴 적 보던 식물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을 찾아가 과실주를 나눠 마시기도 했다. 95 년 봄에는 본격적인 전업농부로 나섰다. 제일 먼저 퇴직금을 털어 길이 100 미터의 대형 비닐하우스를 설치했다. 방울토마토를 재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해 여름에는 농협의 지원을 받아 자연농업교육원에서 자연농법을 교육받았다. 농약을 쓰지 않고 화학비료도 치지 않고 방울토마토를 재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농약으로 찌든 땅이었다. 무엇보다도 치유가 시급했다. 그래서 땅에 숯을 뿌렸다. 토양을 살균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 녹즙 상태의 영양제를 공급해 토착 미생물들을 활성화했다.


비닐하우스 재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온도조절이다. 한겨울에도 낮에는 25 도를 유지해야 한 다. 밤에도 10 도 이하로 내려가게 해서는 안된다. 정말 애를 썼다. 그래서인지 수확은 좋았다. 그 러나 수확과 수입은 관계없다는 것을 그는 배워야 했다. 유통업자들의 농간 때문에 출하된 방울 토마토 값이 폭락한 것이다. 자연농법이 소득에 큰 프리미엄을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에 실망하기 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극복하지 못할 실패는 아니었다. 그는 그 실패를 귀농신고식에 드는 등록금이라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낙천적으로 마음을 먹으니까 새로운 희망이 보이기 시작 했다. 다음 해에는 오리와 염소도 키우기 시작했다. 감나무와 잡목들이 즐비하던 뒷마당에 도랑을 파 고 가축을 방목했다. 축사에서 가둬 놓고 키우는 것보다 질 좋은 가축을 얻기 위해서였다. 일단 소규모로 시작해서 경험을 쌓은 다음 대규모 동물농장을 갖는 것이 현재 그의 꿈이다. 그것은 살아 볼 만한 인생 비닐하우스 재배하랴, 가축 키우랴 일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학원가로 돌거나 비 디오와 오락기에 몰두하던 아이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반찬 투정도 하지 않았고 메이커도 따지 지 않았다. 텃밭을 일구는 어머니를 도울 줄 알았고 가축들의 먹이도 줄 줄 알았다. 누가 시킨 것 도 아닌데 아이들이 힘을 모으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있었다. 도랑에서 노는 오리를 한 참 들여다보기도 하고 계곡에서 가재를 잡아오기도 했다. 아이들이 자연친화적인 삶에 길들여지 고 있었다. 시골의 삶이 도피라고 생각했을 때는 친구들과 연락하지 않고 지냈다. 누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당당한 생활이 되니까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스스럼없이 연락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의사로 살고 있거나 샐러리맨으로 살고 있는 친구들이 가끔 방문하기도 했다. 그때 무공해 밥상을 대접하는 일은 대접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기쁨이었다. 친구들이 갈 때는 오리알이나 방울토마토, 오이나 산나물을 선물로 주었다. 모두 무공해였다. 도시생활에 지친 친구들은 진정으로 충근 씨의 삶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충근 씨는 단 호하다.


“마음만 가지고는 안돼, 계기가 있어야지. 함부로 시작했다간 낭패 보기 쉽다고.” 충근 씨는 농사나 지어 볼까라는 목가적인 생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상상인가를 강조했다. 상 상만으로 시작하면 그만큼 배반당해야 하는 것이 농업이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충근 씨는 분명히 강조한다. 살아 볼 만한 삶이라고. 시골이 삶의 도피처는 될 수 없 지만 도시적 삶에 찌든 사람들의 주눅 든 표정을 바꿔 주기는 할 수 있다고. 96 년부터 충근 씨는 농업은 흑자를 내고 있다.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전업농으로 선발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3 년 연속 농사를 지으면 전업농이 되는데 그러면 정부의 무상지원금과 연리 5 퍼센트의 낮은 이율로 융자금을 받을 수 있다. 가끔 벌교 큰길에도 오토바이나 승용차가 질주한다. 그때마다 충근 씨는 이제는 숨막히는 곡예 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긴 숨을 내쉰다. 충근 씨는 깊은 숨으로 호흡을 고른 사이 굉음 을 내고 달리던 차들은 사라지고 없다. 그들은 어디를 향해 저렇듯 빨리 질주해야만 하는 것일 까? 자가용을 버려 보자 77 년형 브리샤를 타고 다니는 남자를 뉴스에서 보았다. 남자는 의기양양했다. 갑자기 미덕이 된 `절약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그랬다. 우리는 너무나 낭비가 심하다고. 미국 같은 선진국 도 차를 사면 평균 11 년을 타는데 우리는 3.6 년밖에 타지 않는다고, 이 남자에게서 배우자고, 기 자의 덕담에 걸맞게 씩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남자에게 나는 기자가 묻지 않은 것을 물어 보 고 싶었다. 어쩌면 위로해 주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얼마나 불편하셨어요?” 물론 그것은 차를 산 지 5 년만 되면 차 바꿀 때 안되었냐고 인사를 하는 주위의 시선을 두고 묻는 말은 아니다. 단종된 자동차가 고장이 날 경우 그 부품을 어떻게 구했느냐고 묻고 싶은 거 였다. 며칠 전 내동생이 씩씩거리면서 차를 바꿔야겠다고 했다. “왜 그러니?” “글쎄, 누나, 아직도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차가 작년에 단종되었다고 부품이 없대, 부품이. 그 래서 고칠 수가 없다는 거야.” 동생은 그 차를 1994 년도에 구입했다. 물론 그때 그 차는 새 차였다. 그런데 그 차종이 작년에 단종되었다. 단종되고 나니까 부품까지 단종시킨 것이다. 그것은 차를 바꾸라는 기분


나쁜 명령이 었다. 선진국에서 그런 경우가 어디 있었나? 그런 서비스정신으로 세계시장을 공략할 희망을 가 지면 그 희망은 망상이다. 그 차는 아직도 길거리에 즐비하게 돌아다닌다. 아마 그 차종을 타고 있는 사람들은 조만간 모 두 차를 바꿀 것이다. 고장이 나면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차를 어떻게 타고 다니겠는가. 나는 우리 국민들이 특별히 낭비벽이 심하고 과시욕에 몸살을 앓아 채 4 년도 되지 못한 차를 바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 고장날지 모르는데 고장이 나도 서비스를 제대로 받을 수 없 는 차를 가지고 어떻게 10 년을 탈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과 내구성이 강해 10 년 이상을 타도 튼튼한 차를 타는 사람을 평면적으로 비교한다는 건 의미 없는 짓이다. 나는 차가 없다. 한때는 보는 사람마다 왜 차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서 먹하고 어색했다. 차가 없어도 나는 내 일들을 충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아파트 주차장을 꽉 메우고 있는 자동차들을 보면 순간적으 로 숨이 막혔다. 내 마당이고 우리 마당이어야 할 이 넓은 공간이 주차장으로 좁아져 있다니. 나 는 우리가 발전된 문명의 불행한 아이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다가 정말로 너무바빠졌다. 두 권의 책을 쓴 작가가 되고 나서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 사람 들이 많아졌다. 좀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나는 차가 필요해졌다. 그런데 운전을 못하니 기사를 두어야 했다. 나는 동생을 기사로 썼다. 동생 차를 쓰고 기름값을 따로 주지 않는 대신 월 얼마씩 을 지급했다. 나는 많이 줬다고 생각했는데 동생은 감가상각비 빼고 자기 일 못하는 거 빼고 기 름값 빼면 남는 게 없다고 우겼다. 물론 `사생활`이 없어진 나는 엄청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사적 공간에서 오는 넉넉한 여유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 가운데 중요한 일은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이다. 나는 그 일을 연인처럼 사랑한 다. 당연히 낮이 바쁘니까 그 일은 밤일이 되었다. 늘 수면부족에 시달리면서 짜증이 생기기 시작 했다. 일이 많은 것은 일을 왜 하는지 그 의미를 내게서 빼앗아가고 나를 노예로 만들었다. 잠자 는 시간을 놓칠수록 내 삶은 지쳐 갔다. 계절이 바뀌는 것에도 무심해질 만큼 내


삶은 건조해지 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길고도 격렬한 몸살을 앓았다. 무엇에 취해서 그렇게 질식할것 같은 시간을 보냈 을까.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강렬하게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인간답게 `너`를 느끼고 `나`를 느끼면서 살고 싶었다. 제일 먼저 나는 자가용 타는 일을 접었 다. 조금 불편했고 좀더 많은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왜 일을 하는지 똑똑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제서야 `일`은 적절히 나를 긴장시키고 적절히 나를 들뜨게 했다. 그런 `일`은 살맛 이기도 했다. 때로는 느림의 미학에 익숙해질수록 삶은 훨씬 편안하고 누릴 게 많다는 것을 나는 어렵게 배웠다. 길들여진 자가용을 버려보자. 물론 자가용을 버리는 일은 때로는 불편하다. 자가용의 안일을 배 반하기는 차마 못할 노릇 같기도 하다. 그러나 배반 후의 생활은 의외로 가뿐해진다.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비만해 있었던 삶의 물살이 기분 좋게 다이어트되니까. 무엇보다도 부지런해진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조금 일찍 서두르게 되고 좀더 일찍 귀가하게 된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면 기동성이 떨어질 것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은 정말 소수다. 그리고 그런 삶은 정상이 아닌 정신 없는 삶이지 결코 부러운 삶은 아니다. 대부분 의 사람에겐 삶의 규칙성이 생기면서 성실해진다. 게다가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다니는 일은 만만하지 않은 운동이다. 자가용이 있는 풍경이 스포츠센타 회원권을 따로 요구했다면 자가용 없는 삶은 그 자체가 운동이 된다. 열심히 걷고 때로는 뛰다 보면 사람이 사람으로 보인다. 그 사람 차 뭐야? 자기보다 후진 차 앞에서 거들먹거리던 습성은 자기보다 좋은 차 앞에서 기죽기 마련 아니었나! 그런 비인간적 인 사람 나누기는 저만치 가고 사람이 성격으로, 색깔로, 표정으로 다가온다. 또 하나, 휴일에 놀러가야 한다는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자가용은 휴일엔 잘 놀아야 한다 고 부추긴다. 그리하여 집을 떠나 거리에다 돈을 뿌리게 만든다. 잘 놀아야 한다는 것을 끊임었이 의식해야 하는 게 얼마나 휴식으로부터 먼가? 그럴듯하게 놀아야 한다는 부담을 벗어 보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 함께 놀고 싶은 사람이 또렷이 보인다. 그리고 몇 달을 지내 보자. 그러면 늘 마이너스에 시달리던 통장에 분명히 잔고가 남을 것이다.


자가용을 버릴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부유하게 살 없어도 규모 있는 삶을 꾸릴 수 있는 야무진 사람임은 분명하다.

수 있는 사람이라 점칠 수는

4. 연애와 결혼에 관한 쌉싸름한 이야기 못생긴 여자여 당당하라!? `못생긴 여자여, 당당하라.` 성추문으로 곤욕을 겪고 있는 클린턴의 편을 들어, 우리는 교황을 뽑은 것이 아니라 인간 대통 령을 뽑은 거, 라고 선언했던 그 여자 팝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자서전 제목이 그랬다. 그런 데 그 자서전 표지를 보았을 때 뭔가 어색하고 찜찜하다는 느낌이었다. 분명 메시지는 강했다. 그 렇지만 어쩐지 공허했다. 헛다리를 짚는 기분이기도 했다. 못생긴 여자여, 당당하라? 나는 화두를 풀지 못해 맴맴거리는 선승처럼 밥을 먹으면서도, 차 안 에서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렇게 주절거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항하듯 내지르는 그 명제가 허하다고 느껴질까? 어떻게 그 명제의 논리를 풀 수 있을까? 분명한 건 그 명제는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하는 식으로 풀어내선 안 된다는 거였다. 얼굴보다는 마음, 이라는 식의 논리는 얼굴이 가치라는 걸 눅눅하게 숨김으로써 생긴 것의 가치를 비굴하게 드러내고 있다. 못생긴 게 일이나 잘해야지 얼굴이 뭐 중요해? 마음이 중요하지, 그렇게 말했던 남자가 있었다. 스물아홉의 그 남자는 허리 사이즈 29 인치를 입는 마음 좋은 여자와 결혼했다. 그 여자는 배가 불러와도 7 시 반이면 출근하 는 남편의 아침식사를 거르게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착실한 여자였다. 어디 남편뿐인가? 그 여자 는 홀로 된 시아버지를 남편보다 극진히 섬기는 효부이기도 했고 짜증이 많은 시누이의 속옷까지 깨끗이 빨아서 시누이 서랍에 차곡차곡 넣어 주는 신데렐라이기도 했다. 확실히 그 여자는 요즘 여자답지 않았다. 전화도 없이 가끔씩은 자정을 넘기는 남편을 뜬눈으 로 기다렸다가 늦밤에도 된장국을 끓여냈다. 여자는 바로 얼굴이 뭐 중요하나, 마음이 중요하제,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소박해 보이는 남자의 말 속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여자는 남편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 좋은 게 아니라 기가 죽었다. 그 여자에게 그 말은 생기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처럼 들렸다. 그 말이 얼굴도 못생긴 게 마음이나 착해야지,


섹시하지 않은 게 일이나 잘해야지, 로 번역이 된 건 여자의 자격지심이겠지만 자격지심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그 말에 제동을 걸지도 못했다. 더구나 여자는 결혼 전 남편의 애인, 희재 씨를 알고 있었다. 남편과 희재 씨는 여자가 종업원 으로 있는 한식당에 자주 들렀다. 여자가 물컵을 갖다 놓으면 언제나 남자는 `희재 씨, 뭘로 드실 까요?`를 물었다. 그래서 여자는 희재씨를 알게 되었다. 결혼 전 남편은 희재 씨에게 밥을 사 주 고 액세서리를 사주면서 따라다녔다. 예쁘진 않아도 예쁘게 화장할 줄 알았던 희재 씨는 하늘 하 늘한 몸매를 하고 있었다. 그 몸매 때문인지 그 몸매를 유지하기 위함인지 무얼 먹든 희재 씨는 언제나 깔짝거렸고 그 남자는 그렇게 밥을 먹는 희재 씨를 안타까워하며 듬뿍듬뿍 밥을 먹었다. 희재 씨의 숟가락질은 느릿느릿했고 남자의 숟가락질은 게걸스러웠다. 여자는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남자에게서 묘한 연민을 느꼈다. 그 연민은 우아한 척, 예쁜 척 하는 그 희재 씨와 그 남자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확신에서 왔다. 식당생활 10 여 년, 여자는 숟가 락질로 사람을 점치는 버릇이 생겼다. 희재 씨는 밥을 먹으면서도 루즈가 지워질까, 땀이나서 화 장이 번들거릴까 신경이 곤두선 여자였다. 여자의 점에 의하면 희재 씨는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것 이 아니라 그 남자가 자기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따져 보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는 절대 얼굴 값을 세일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믿을수록 희재 씨와 어울리지 않는 남자에 대한 여자의 연민 은 깊어 갔다. 한동안 희재 씨와 남자가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여자는 예감했다. 드디어 희재 씨가 남자를 버렸다고, 루즈가 지워질까 밥을 배부르게 먹지 못했던 희재 씨는 희재 씨를 향해 빛나는 시선을 보냈던 남자의 따뜻한 눈빛에 빠져들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여자는 자신이 남자와 관계없는 여자라는 사실을 잊고 남자를 배신했을 거라고 단정한 희재 씨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남자에 대한 여자의 연민은 더 절절해져서 여자는 남자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여자가 뜬금없이 남자를 기다리게 된 건 바로 그 이유 아닌 이유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남자가 식당에 나타났다. 혼자였다. 이미 빛나는 시선을 잃어버린 남자는 추리했지만 남자를 절절이 기다려 온 여자에게 그 남자는 밝고도 찬란한 빛이었다. 실연을 한 남자는 처음으


로 여자가 자신에게 펀안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는 여자를 찾아 매일 식당에 왔다. 남자는 용산에서 컴퓨터를 조립해서 파는 조그만 가게 의 직원이었다. 여자의 예감대로 남자는 희재 씨가 버릴 만큼 별 볼일 없는 남자였다. 그렇지만 마음속에 별을 품은 여자에게 남자는 별이었다. 보름 뒤 남자와 여자는 식당 밖에서 만나 다른 식당에 갔다. 여자는 담뿍담뿍, 남자는 듬뿍듬뿍 밥을 먹었다. 한 달 뒤 남자는 여자에게 청혼했다. 그것은 남자가 살고 있는 방 세 칸짜리 지하 셋방에서 시아버지 모시고 시누이를 거두는 그런 생활이었지만 기꺼이 그 생활을 받아낼 준비를 한 여자는 스물아홉을 넘기지 않고 쓸쓸한 가을녘에 푸짐한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여자는 넉넉한 몸집만큼이나 편안한 여자였다. 날씬하고 예쁜 여자가 한 마리 새가 되어 푸드 득 품을 떠나자 남자는 비로소 알았다. 가진 것 없고 딸린 식구들이 있는 남자에게 예쁜 여자와 의 사랑은 꿈이라는 것을,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남자는 편안한 여자가 필요했다. 예쁜 여자는 얼굴값을 했다. 오죽하면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의 여주인공인 르윈스 키가 미모만 갖추면 높은 권력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했을까? 백악관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젊은 여성의 노하우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그 자리에 도 수요공급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당연하다. 자본주의 사회니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하지 않았나? 실연을 하고 결혼을 한 그 해 남자에게는 여성관이 생겼 다. 그것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였다. 그것은 그 남자에겐 얼굴 예쁜 걸 좋아하는 뭇 남자들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의 노래이기도 했다. 남자는 틈이 있을 때마다 그 노래를 불렀다. 남자의 노래는 비감했지만 그 노래를 듣는 여자는 짜증이 났다. 그 노래는 예쁘지도, 날씬하지 도 않지만 예민하지 않은 것은 아닌 그 여자에게 상처였기 때문이다. 여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라면 어떠한 역경도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가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품어 주고 싶었던 사랑은 의외로 작은 일에서 크게 다쳐 생기를 잃는다는 것을 여자는 배우고 있었다. 술만 먹으면 토해내는 남자의 말버릇, 얼굴 그거 다 소용 없다! 얼굴값 한대이, 여자는 착해야제! 여자는 자기의 열등감을 건드리고 있는 그 말버릇 속의 진실이 못내 싫었다. 사실 여자는 남자가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다는 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 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굴! 그게 뭐 중요하나? 마음이 중요하제, 를 애써 강조하는 그 남자의 독특한 억양을 참기란 어려웠다. 그것이, 그 남자가 떠난 사랑을 달래고 현재의 결혼에 만족하려 는 최면술이라고 해도 그것은 유치한 것이었다. 생겼다, 아니다의 기준을 떠나라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그 노래는 억양에 따라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때로는 예쁜 여자를 둘 수 없는 무능한 남자의 위로의 변이기도 하고 때로는 착한 여자가 되지 않으면 미인박명이 된다는 저주의 노래이기도 하 다. 그 노래는 마음이라는 순수한 이름으로 `예쁘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한 여자의 자존심을 건드 리고 있고 무엇보다도 `예쁘다`와 `착하다`로 여자를 평가하는 남성적 시선의 빈약함을 교묘하게 정당화하고 있었다. 확신하건대 `예쁘다`는 시선에 길들여지거나 `착하다`는 시선에 길들여지면 삶은 초라해진다. 언제 그 시선에 길들여지나? 예쁘다는 것이 힘이라는 걸 배울 때다. 사실 예쁘다는 찬사에 길들 여지는 건 위험하다. 그 찬사를 즐겨 온 여자가 다른 힘으로 사는 것을 배우지 않을 때 그 여자 는 `에쁘다`와 `아니다`를 평가하는 남성적 시선에 목메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생긴 것 하나로 어디서나 시선을 모을 줄 알고 그 시선을 의식해서 더 예쁘게 꾸밀 줄 아 는 여자의 적은 그런 여자가 된다. 예쁘다는 힘으로 사는 여자는 그 여자보다 예쁘게 꾸밀 줄 알 아서 자신에게 모아져야 할 시선을 빼앗아가는 여자를 가장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그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기분 나쁜 말은 진리가 되고 예뻐서 높아진 콧대는 더 예쁜 콧대 앞에서 하염없이 초라해진다. 그것은 마치 애완견처럼 예쁘다고 쓸어 주고, 예쁘지 않다고 외면하는 남성적 시선이 그 기준으로 여자들을 세울 때 생각 없이 줄을 섰던 당연하고도 엄연한 대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못생긴 여자여, 당당하라`는 저항과 절규가 담긴 메시지도 우울하다. 그 명제 속에는 이미 `생겼다`는 것이 휘두르는 폭력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를 쓰고 당당해야 한다는 것은 기를 쓰지 않으면 주눅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당당한 것,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쉬운 것은 아니다. 언제 우리는 당당한가? 자신감이 붙 었을 때 당당하다. 그렇다면 스스로 못생긴 것을 의식하고는 당당한 척 애를 쓸 수는 있어도, 당 당할 수는 없다. 진정으로 당당하기 위해서는 생겼다,아니다를 가르는 시선을 체화하지 말아야 한 다. 어떻게? 값비싼 장신구로 예쁘게 치장하고 오만하게 눈을 내리깔 수 있는 사람은 위압적이다. 그 위압 적인 시선을 무심하게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무심하게`가 중요하다. 예쁘게 치장한 그 사람을 못생겼다고 깎아내리는 그 마음으로는 담담해질 수도, 당당해질 수도 없다. 분명히 예쁘다는 것은 많은 가치 가운데 하나다. 그 가치를 가지려고 하는 사람, 예쁘게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가볍게 예쁘다고 칭찬해 주라.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하라. 예쁘다는 것에 집착해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심지어 제대로 살아낼 수도 없다. 함께 일해 야 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은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일하는 능력은 있는 사람인지에 있지 화장술에 있지 않다.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인 지, 마음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있지 다른 것에 있지 않다. 당당한 것이 문제라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는 법을 모르고 당당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 생을 책임지는 방법을 아는 사람의 넉넉함은 당당한 채 하지 않아도 당당함이 배어난다. 나쁜 여자의 플라토닉 러브 땡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 풀섶에서 나와 동생은 공기를 했다. 우리는 노는 것이 아니었다. 일을 하는 거였다. 바로 할아버지가 올 때까지 풀뜯는 암소를 지키는 일이었다. 나보다 공기를 잘하지 못하는 동생이 공기가 지겨워졌는지 얘기를 꺼냈다. “언니, 그거 알어?” “뭐?” “언니, 주워 온 아이라는 거.” 타고난 이야기꾼인 동생은 내가 주워 온 딸이라는 가설을 만들고 증거를 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아서 그 얘기에 푹 빠져들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황소 한 마리가 불현듯 나타 났다. 그 황소는 할아버지의 암소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5 학년이고 2 학년인 우리는 그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다. 언니가 주워 온 딸이라고 여유 있게 얘기하던 동생이 기막히도록 억세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나도 울고 싶었다. 우리 암소 가 다칠까 봐서, 아니, 암소를 다치게 해서 할아버지에게 야단 맞을까 봐서, 그렇지만 목놓아 우 는 동생을 따라 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두고 간 긴 막대기로 연거푸 황소를 때 려서 쫓았다. 그러나 소름이 끼치도록 긴박한 눈빛에 온몸이 긴장되어 있는 황소의 힘을 막을 수 는 없는 일이었다. 황당했고 무서웠고 황망했다. 그와중에서 우리는 황소와 암소가 짝짓기를 하는 풍경을 처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게 되었다. 속수무책이었다. 속수무책인 사태는 저절로 수습되었다. 짝짓기를 끝낸 황소는 미련 없이 암소를 떠나갔다. 이성 을 잃고 맹목적인 충동으로 달음질쳐 오던 황소가 유유히 사라져 간 것이다. 이 사태를 할어버지 에게 어떻게 고할 것인가? 영악한 두 초등학생은 앙큼하게도 아무 일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이틀 후에 시골을 떠나서 어머니 아버지가 있는 서울로 돌아갈 우리들이었다. 보 지 말았어야 할 풍경을 훔쳐봤다는 느낌, 그 찝찝하고도 무서웠던 느낌을 우리는 그렇게 지우기 로 했다. 시침을 뚝 떼고 서울로 돌아온 나는 그 후 그 풍경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런데 며칠 전이었다. 우연히 TV 에서 영화 한 토막을 스쳐보다가 정말 오랜만에 엉뚱하게도 그때 그 풍경을 기억해냈다. 영화는 잠깐 봤으므로 제목도, 끝도 몰랐지만 유부녀와 독신 목사와 의 사랑을 그린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금지된 사랑 속에 있는 두 남녀는 간절한 눈빛, 애타는 몸 짓으로 말하고 있었다. 평생을 쌓아올린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게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간절한 사랑이 충만해지지 못해 애타는 그 풍경에서 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그 옛날 황소와 암 소의 짝짓기 풍경이 살아났는지. 그때 나는 아이들에게 절대금기인 성의 폭발력을 본 것이다. 한순간 용암처럼 들끓어서 그 어 떤 장벽도 훨훨 뛰어넘는 그 힘을 훔쳐본 것이다. 그 힘은 끝내 동물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어하 는 사람에 의해 `사랑`이 된다. 사랑할 수 있으면 난 괜찮아, 무너질 수 없어, 그렇게 말할 줄 아 는 남자와 여자는 믿음직스러웠지만 위태로워 보였다. 그건 여지껏 쌓아올린 것을 다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거였다. 거기에 있는 것은 사랑의 폭발력이었다. 맹목적인 폭발력을


무엇으로 막을 까? 사랑은 왜 권태로 끝나는가 그런데 모든 것을 녹이는 그 용암 같은 열정은 결코 영원한 법이 없다. 극단적으로 그 열정은 어떤 연민도 남기지 않고 얼음처럼 차가워져 사랑의 연한 피부를 사정 없이 할퀴기도 한다. 그것 은 순리일까, 악을 써야만 하는 고통일까? 불행한 결혼들을 만나면 내가 묻게 되는 질문이다. 다정하게 손잡고 와서 상기된 표정으로 결혼을 알리는 커플을 만나면 순간 나도 화사해진다. 사랑의 신선함에 부드러워진 표정만큼 예쁜 것도 없다. 나는 상기된 표정을 믿어서 진심으로 축 하해 준다. 하늘이 맺어 준 좋은 인연이기를 기원하면서, 그러나 사랑할 때의 그 달콤한 아름다움 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믿지는 않는다. 사랑으로 탱탱해진 표정이 갈등 혹은 권태로 늘어지는 것을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섬광 같은 운명으로 시작한 사랑이 결혼의 울타리 안에서 지리멸렬 해지는 이유는 뭘까? “어찌하여 그 남자와 나는 이토록 다른 인간인가? 한때는 그 남자가 없으면 내 인생이 무의미 하다고 굳게 믿지 않았던가? 그 남자만 있으면 부모도 형제도 다 소용없다고 믿었던 때가 있지 않았던가? 그 좋던 관계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아년아, 그게 나 때문이냐, 너 때문이지. 술에 취한 그 남자는 이렇게 말할는지도 모르겠다. 야, 말은 바른 대로 해라. 너 때문이지, 나 때 문이냐? 아직 함께 살고 있어 싸움을 했다면 나는 이렇게 대꾸했을 것이다.” (<새로 쓰는 결혼이야기 2> `내 영혼의 씻김굿을 치르고` 중에서) 그 사람 없인 못살 것 같던 사람들이 그 사람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고, 넌 정말 이해심 많은 여자야, 라고 말했던 남자가 넌 정말 이해심이 없어,라고 돌아선다. 그 사람 정말 듬직해, 라고 말 했던 여자가 그 사람은 책임감이 없어,하면서 해방을 꿈꾸고 너 없이 나 어찌 살라고 매달렸던 남자가 너라면 지긋지긋하다며 떠나고 싶어한다. 부부 사이에 싸울 일이 뭐가 있나며 금실을 자 랑하던 부부가 마침내 원수가 되어 갈라선다. “너 아니었으면 난...” 역사에 가정이 무의미하듯이 개인사에 가정이


무의미하지만 그런 말이 일상화될 때마다 나는 도대체 사랑을 믿을 수 있는지 묻게 된다. 사랑이란 어쩌면 유유히 사라져 황소의 충동 같은 거 아닐까? 그런 걸 결혼으로 가둬 놓으려고 하다니, 오죽하면 어느 작가가 결혼이란 추억이 없이는 견디기 힘든 허술한 제도라고 했을까? 마 침내 낡은 추억주머니를 싸들고 거기서 태어난 연민 없이 남자와 여자가 한 집에서 모여 살 수 없다면 결혼은 본성을 억압하는 제도일까, 본성을 다스려 주는 제도일까? 그 옛날에 이혼이 없었던 것은 누구나 결혼을 해야 했을 때, 신부가 아니면서 중이 아니면서 혼자 사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절, 결혼은 약자의 성을 통제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성을 결혼제도 안에 가둬 둠으로써 성의 폭발 력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사회가 규정하는 틀을 따르지 않고 사랑을 하거나 성을 분출하는 일은 파멸되어야 할 악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사회질서를 만들어내는 원천이기도 했고 사회질서를 조작하는 원천이기도 했다. 봉건사회에서 가족제도를 이루는 원천인 결혼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의식이다. 어떤 `집안`의 여자를 들이느냐에 따라 집안이 흥하기도 했고 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체 높은 사람들의 혼 인일수록 혼인을 하는 남자와 여자의 감정은 변수로도 작용하지 않았다. 단지 집안과 집안의 현 실적 이해관계만이 품위라는 옷을 입고 뻔뻔하게 드러났다. 성종과 한명회의 딸이 혼례를 치루는 데 사랑이 있었을까? 숙종과 인현왕후가 결혼하는 데 애틋한 마음이 있었을까? 존재했던 것은 정 치적 계산뿐이었다. 그렇지만 사적인 감정으로 살지 않았던 시절에도 사회적 강자인 남자는 개인적으로 감정의 분 출구를 가질 수 있었다. 가진 것이 많은 남자들일수록 첩을 들이고 기방을 출입하는 일은 흉이 아니었다. 오히려 애첩은 남자의 기쁨으로 인정되었다. 심지어 많이 가진 자가 가난한 여자를 첩 으로 들이는 일은 사회적 재화의 배분 방식일 수도 있었다. 조강지처의 정부를 허락하지 않는 가 진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분출구를 찾지 못한 약자의 감정들은 눈물이 되고 한이 되고 인내 가 되고 편견이 되었다. 그것은 대체로 여자의 것이었다. 애틋한 떨림이나 충만한 마음에 기대어서 혼인관계가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사랑이


가 버렸다고 혼인이 깨지는 법도 없었다. 혼인은, 가문의 필요에 의해 맺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 필요가 채워 지지 않을 경우에는 산산이 깨졌다. 대체로 여자가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했다든지, 시어른께 공손하지 못했다든지, 투기를 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든지 하는 것으로 혼인이 깨졌다. 남성 중심사회에서 혼인은 남자집안에 여자가 들어가는 것이었으므로 혼인이 깨질 경우에도 크게 다치 는 쪽은 여자뿐이었다. 집안보다 개인의 감정이 중요한 시대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갔다. 남편보다는 시댁이 중요하고 아내보다는 아내가 낳아 줄 아들 이 의미 있었던 그 시대는 갔다. 사회는 더 이상 가문 단위로 움직이는 봉건사회도,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초기 자본주의사회도 아니다. 사회는 이제 개인의 능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지는 정보 사회의 문턱이다. 개인 단위로 움직이는 사회는 홀로 설 줄 아는 개인의 감정을 존중한다. 경제적으로 홀로 선 사람의 감정은 무시되지 않으며 자기 감정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의 감정은 존중된다. 지금 이 시대는 경제적으로 홀로 서고 자기 감정을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인간을 요구한다. 그런 사회에서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만남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다. 당연히 결혼에서 개인의 감정은 중요해진다. 얼마 전 유명인사들의 검소한 혼례가 일간 신문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유심히 봤던 것은 `유산 물려주지 않기 운동`을 했던 이시형 박사의 경우였다. 강북삼성병원 신경정신과 부장인 이 박사는 외부에 알리지 않고 아들을 결혼시켰다. 유명인사가 청첩장을 돌리는 것은 일 종의 협박이며 범죄라는 이유였다. 물론 결혼식도 간소하게 치뤘다. 한 예로 며느리의 예단을 말 렸다. 이제까지의 관행에 익숙해져 있는 예비 며느리는 한사코 예단을 하겠다고 우겼다. 그 며느 리에게 목록을 정해 줬다. 시숙들에겐 국산 넥타이 하나씩,시숙모에겐 국산 스카프 하나씩, 아들 과 며느리가 잘사는 것이 중요하지 결혼식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때까지만 의식주를 책임져 주고 졸업과 함께 500 만 원씩 사회생활 적응비를 준 후에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는 이시형 박사, 그는 이 사회를 건강하게 살아내는


데 중요한 건 집안에 기대 많은 유산이나 바라는 의존심리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간과한 지성이었다. 나는 그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나는 나쁜 여자였다” 분명 지금 이 시대에도 `사랑`이 결혼의 필요조건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해서 결혼하는 일 은 무엇보다도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때 이혼하는 일도 부자연스럽지 않 다. 주인이 있는 황소나 암소와는 달리 사람은 사람끼리 모여 살아야 하기 때문에 눈빛 맞추는 일 외에도 현실을 나눠갖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일이 중요하다. 눈빛만 봐 도 서로 통했던 싱싱한 관계가 눅눅해지고 마침내 곰팡이가 피는 일은 함께 살아도 동반자가 되 지 못하고 짐이 되기 때문이다. 부부가 삐끗하고 어긋나는 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지만 삐끗거 리면서도 맞춰 갈 수 있다면 그 관계는 스승이지 결코 짐이 아니다. 그러나 한때의 사랑조차 기 억할 수 없을 정도로 어긋나고 상처나기만 할 뿐이라면 어떡하나? 정체 모를 사랑으로 화려하게 시작했어도 정을 붙일 수 없는 관계라면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이때 이혼을 한다면 돌을 맞아야 할까? “그가 가지고 있는 여성의 개념은 섹스를 할 수 있는 엄마 더하기 남성의 자아를 살찌우기 위 한 먹이, 24 시간 활용할 수 있는 비서와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나는 `나쁜 여자`였다.” (<다시 쓰는 결혼이야기 2> `나에게로 돌아온 여행` 중에서) 그 고백의 주인공 최리 씨는 의사였다. 최씨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이혼하기 위해 자기 명의 의 부동산을 다 넘겨 주는 조건으로 이혼을 할 수 있었다. 결혼한 지 10 년 만이었다. 이렇게 고백 한다. “10 년 동안 잊고 묻어 두었던 나의 역사를 찾기 시작했다. 친정의 제사와 성묘를 다니며 아이 들이 외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음을 처음으로 알았는데 되돌아보니 10 년의


결혼생활 동안 친정 제사에 첫 1 년밖에 참석하지 않았고 고교 동창과도 만난 적이 없을 정도로 폐쇄적으로 살아왔음 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남편 위주로만 살았기 때문이었다. 같이 수다를 떨고 눈물을 짤 여자친구 한 명 없었다.” 이런 고백으로 결혼을 회상하는 사람에게 이혼은 다른 삶을 찾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어야 한 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걸림돌이 많은 출발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편견이 걸림돌이 다. 사회적 편견 속에서 아이들이 상처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이혼한 커플의 관심사다. 그런데 이 혼녀인 최씨의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들은 걸림돌을 넘어서서 남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 다. “우리 반 아이들은 자기들만 옳다고 해. 나도 전에는 그랬을 거야. 입장 바꿔 생각해 볼 수 있 는 건데.” 아이들이 다칠까 봐 학년이 바뀌어 생활조사부를 쓸 때 최씨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빠는 유학 갔다고 하면 어떠니?” 그러나 큰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있는 그대로 쓸 거야.” 그렇게 말할 줄 아는 아이들을 결손가정의 아이들이라고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혼 후에 많은 편견과 싸우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해 주지 못한다면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것이 이웃의 정 아닐까. 사랑 없는 마음도 정상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도닥도닥 정을 쌓아 가는 모습은 푸근하다. “두눈박이 물고기로 살기 위 해 평생을 붇어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로 살고 싶다”고 노래하는 마음은 애틋하다. 사랑하는 마음이 쌓이고 쌓여 함께 살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사람들의 결혼은 샘 나도록 아름답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만남` 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어 혼인관계를 깰수밖에 없는 사람 들이나 그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외로운 사람들을 무조건 매도하다면? 매도하는 사람들이 융통성 없는 도덕주의자가 될 때 매도 당하는 사람들은 불행의 주인공이 되고, 매도하는 사람들


이 경멸감을 드러내며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할 때 매도 당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외면함으 로써 자기만의 방으로 숨어든다. 때로 인간은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간섭 받지 않는 혼자만의 방을 필요로 할 때가 있는 것이 아닐까? 어느 때 외로움에 사무쳐 혼자라는 건 절름발이 인생이라며 누군가와 도란도란 살기를 원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어떤 때는 옆에 누가 있다는 것이 거추장스러워 혼자 있는 방을 꿈꾸기 도 하지 않나? 밤낮으로 고독에 절며 절며 시달릴 수 있을까? 밤낮으로 혼자만의 방을 사랑할 수 있을까? 어느 때 그 사람 사랑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었는데 어떤 때 그 사람 사랑은 시큰둥한 권태거나 고통이기도 하다. 당신은 곧 나 자신이라고 밤낮으로 애틋한 마음일 수 있을 까? 밤낮으로 고통으로 시퍼렇게 멍들 수 있을까? 사랑하는 마음이 정상적인 마음의 작용이라면 사랑하지 않는 마음도 정상적인 마음의 작용이 아닐까? 관계가 하시로 변하는 감정에 기대 있다는 것은 불안한 것이지만 정직한 것이고 그래서 맞춰 보는 재미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은 사건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마음. 그 마음과 마음 이 챙강챙강 부딪치며 소우주라고 하는 우리 마음의 깊이를 내는 것일 텐데 어떻게 어떤 순간에 마음이 일평생 이어지지 않는다고 무조건 단죄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이 한결같지 않음을 옹호하고 싶은 이유는 이혼의 멍에를 지고 쭈뼛쭈뼛 살아가는 사람들, 그럴듯한 직업도 돈도 없이 독신이라는 타이틀이 무거운 사람들, 그들이 그저 이혼을 했 고 혼자 산다는 이유로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들을 이방인 취급하는 그 속 좁은 마 음은 답답하다. 만일 우리가 이웃이라면 때로는 선택으로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엄마가 없고 아빠가 없는 가정, 독신인 가정을 그 자체로 편안하게 인정해 주자. 사는 데는 유일한 법이 있을 수 없다.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는 숨막히고 다양성을 인정할 줄 모르는 마음은 갑갑하다. 어쩌면 무심함이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인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사랑에 끼어든 자본주의


한 가난한 연인이 있었다.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는 가난한 남자의 가장 큰 재산은 그 여자였 다. 여자는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과외 선생이었다. 남자처럼 여자도 틈틈이 돈을 벌었다. 둘은 늘 버스를 타고 다녔다. 물론 그럴듯한 식당에 한번도 출입해 보지 않았다. 아니 엄두도 내지 않았 다. 늘 남자의 자취방에서 혹은 여자의 자취방에서 밥을 하고 국을 끊였다. 그래도 둘 사이엔 셀 수 없는 웃음이 피어났다. 함빡 웃는 여자의 웃음을 만나면 남자는 폭발할 것 같은 행복에 휩싸 여 자연스레 여자를 안았다. 내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결혼을 할 수 없는 이유, 그건 경제적인 이유뿐이었다. 남자는 지하 셋방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 고 싶지 않았다. 가난한 두 사람은 앞날이 막막하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삶으로 배우고 있었다. 그래도 앞날이 창창했으므로 그들은 희망으로 그 막막함을 견뎠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30 평 아파트에서 신혼 살림을 차린 동기의 신혼집에 초 대되었다. 여자는 깨끗한 살림에 주눅이 들었다. 자기 남자와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세계였다. 주눅 든 그 자리에 세상살이의 미신이 파고들었다. “얘,아무 것도 없으면서 어떻게 사랑을 하니? 가난해 봐라, 사랑도 쪽박 깨지듯 깨지는 거야! 어차피 사랑이란 게 영원할 수 없는 거잖아, 그렇다면 조건을 봐야지. 그건 사랑보다 오래 남는 거 아니니! 결혼을 하는 거 보면 그 애의 수준을 알 수 있어. 사랑타령 하는 애들 있지, 대부분 못생기고 가난해서 괜찮은 남자들이 데려갈 수 없는 애들이야!” 여자는 쿨렁쿨렁 마음의 멀미가 났다. 자꾸자꾸 부끄럽기까지 했다. 이런 친구들이 부끄러운 것 일까? 아니면 그런 조건을 맞추지 못하는 자기 사랑이 부끄러운 것일까? 여자도 몰랐다. 여자는 그저 비틀, 흔들거렸다. 집들이에 왔던 한 남자가 그 여자를 찍었다. 그는 보너스를 1,000 퍼센트나 주는 일간지 기자였 다. 웬만큼 있는 집안의 남자이기도 했다. 처음 남자가 여자에게 따로 만나고 싶다고 정중하게 제 의했을 때 여자는 움찔했다. 그런 만남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30 평 아파트의 신혼 살림집의 분위기는 묘했다. 여자는 단지 내가 이런 분위기를 선택 할 수 없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여자는 그


분위기를 제공할 수 있는 그 남자를 가끔 만났다. 여자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남자는 여자에게 고급 레스토 랑의 우아한 분위기를 선물했다. 그리고 때때로 옷과 가방과 액세서리로 여자를 놀래켰다. 처음에는 그저 허영심에서 시작한 관계였는데 이제 여자의 그 마음을 만족시켜 주는 남자는 여 자의 첫 남자와는 다른 도시적 매력이 있었다. 도시적 매력, 그것은 길들기 전엔 비웃을 수 있어 도 일단 길들여지고 나면 배반이 힘든 그런 매력이었다. 여자는 새로운 남자의 매력에 스멀스멀 빠져 갔다. 여자는 자기 남자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자기 남자 앞에서 더 이상 웃지 않 았다. 남자는 여자가 왜 웃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그러자 남자에게도 폭발할 것 같은 행복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남자는 불안이 깃든 다정함으로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배반을 꿈꾸 는 여자는 남자의 다정함을 감옥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여자에게 없던 짜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자는 느닷없는 여자의 짜증에 안절부절못했다. 남자는 짜증 섞인 여자의 표정을 거둬내고 사 랑으로 따뜻해진 편안한 미소를 찾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미 여자의 마음은 남자의 손길 저편 에 있었다. 돌연 변해 버린 여자는 어느 날 남자에게 쪽지를 남기고 떠나갔다. 나를 잊어 줘. 난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아. 사랑의 시작은 돌연한 것이었어도 사랑을 돌연 접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자의 빈 자리가 저 려 왔다. 남자는 그 마음저림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걸 그대로 부둥켜안으려는 것은 그래도 그것 이 여자의 흔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저리는 그 추운 자리에서 남자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때 여자의 결혼소식이 들려왔다. 남자는 믿을 수 없었다. 홀로 남은 처연함 때문이었을까? 칼 로 에이는 듯한 배신감 때문이었을까? 남자는 그저 부르르 떨었다. 그 추위를 타고 세상살이의 미신이 남자에게도 왔다. 사내대장부가 여자 때문에 인생을 망칠 수 있느냐, 세상에 믿을 만한 여자 없다. 돈 있고 명예 있으면 여자는 얼마든 있다. 떨리던 마음자락이 불신의 울림으로 시끄러울 때 남자는 여자를 용서하는 노래를 배우기 시작 했다. 너를 용서 않는 건 내가 괴로워 안되겠다, 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 남자는 여자를 잊는


것으로 여자를 용서하려 했다. 여자 용서하기, 그것은 더 이상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하는 법을 포 기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남자가 여지껏 세상을 살아온 방법을 바꾸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미신들을 진리처럼 붙들고 있으니까 세상살이는 한결 수월했다. 남자는 살아간다는 것 이 상의 진리는 없다고 다짐하면서 맘껏 비굴해질 수 있었다. 비굴해질 수 있는 법을 배운 남자는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잊을 수 있었다. 그러자 세상살이가 원하는 것이 선명하게 들어오 기 시작했다. 남자는 학계의 정치적인 실력자들을 옹호하는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쓰고 싶지 않은 논문이었지만 그렇게 쓰다 보니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던 때가 가물가물할 정도였 다. 진정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그 물음은 여자와 함께 날아갔고 여인의 향기를 믿지 않게 된 남자는 출세를 향해 달렸다. 물론 출세를 향해 달리는 것이 출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는 자기 여자를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그러기 위해선 현실에 발을 딛어야 한다, 그런 논리 가 남자의 삶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었다. 여자가 어루만져 주지 않는 허전한 자리에서 떠돌기 싫은 남자는 `현실`에 발 딛기에 집착했다. 가끔씩 술을 마시면 답답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그 여자 꿈을 꾸었다. 그 여자는 사과를 들고 남자에게 먹을 것을 권하기도 했고 깨끗한 옷이 들어 있는 상자를 내밀기도 했다. 어느 날 은 탄탄해 보이는 차 속에서 타라고 손짓하기도 했다. 꿈속에서도 남자는 저만치에서 다가오려는 여자를 믿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의 호감을 유혹으로 느끼고 꿈속에서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자가 초라한 몰골로 남자의 자취방에 찾아들었다. 너를 떠난 내 인생 은 권태였어. 나를 받아 줘! 남자에게는 그것조차 유혹의 몸짓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움찔해진 남 자는 애써 여자를 외면했다. 그래도 사랑했던 여자였다. 한순간 여자의 우울한 표정이 남자의 가슴에 사진처럼 선명하게 찍 혔다. 여자는 한참 살이 올라 있었다. 여자는 초췌했고 눈의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세상에, 남자 는 더 이상 그 여자가 자기를 우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는 애걸하는 여자에게 느낌을 받지 못했다. 최소한도의 연민도 생기지 않았다. 여자가 남자의 품에 안겨 왔지만 등을 쓸어 주고 싶은 순한 마음은 이미 저만치


가고 없었다. 예전 같으면 여자의 표정의 작은 변화만으로도 여자의 슬픔, 괴로움, 소망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더 이상 남자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남자의 마음이 아려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서인가? 더 이상 유혹할 수 없는 청춘의 사랑 때문일까? 그 사랑과 함께 허무하게 흘러간 자기 청춘 때문일까? 남자는 가슴 을 움켜쥐었다. 답답했다. 그리고는 눈을 떴다. 대상이 없이 상상 속에서 혼자 키우고 혼자 죽인 짝 없는 사랑의 비수가 무의식 속 여자를 사 정 없이 난도질한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남자의 마음이기도 했다. 여자 꿈을 꾼 새벽, 남자는 부스스 일어나 담배를 물었다. 꿈은 단순한 게 아니다, 현실의 또 다른 얼굴이다. 남자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남자는 자기를 떠난 여자의 불행을 믿어 의심치 않 았다. 언젠가 여자는 사랑 대신 허영을 선택한 대가를 혹독히 치를 것이었다. 여자가 자기를 찾아 온다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남자는 복잡해졌다. 담배를 깊이 빨았다. 꿈이 맞다면 여자는 곧 남자에게 찾아들 것이 뻔했다. 그때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다짐이라도 하듯 남자는 담 배를 비벼 껐다. 삶이 농담이 될 때 남자는 의뢰로 빨리 여자를 만났다. 물론 남자가 상상한 대로 여자가 의도적으로 남자를 찾아 온 것은 아니었다. 남자가 의도를 가지고 학회 회장님댁을 방문한 정월 둘째 날, 그 회장님 댁에 서 세배를 드리고 떡국을 먹고 있는데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자와 여자의 남편이 선물꾸러미 를 들고 웃으면서 들어섰다. 남자는 여자를 보았다. 자기와 함께 행복을 만들 줄 알았던 여자는 이제 손내밀 수 없는 데 있 었다. 여자는 남자가 좋아했던 그 함박웃음을 다른 사람을 향해 짓고 있었다. 그 회장님은 여자의 남 편의 은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든 남자의 상상은 모든 면에서 빗나갔다. 여자는 안정을 선택한 대신 따분하고 권태로워 예전의 사랑을 그리워해야 했다. 그러나 탱탱하게 웃고 있는 여자는 누가 봐도 현실이 행복한 여 자였다. 여자는 싱싱했다.


여자는 여전히 남자가 알고 있는 그 여자였지만 더 이상 남자의 여자는 아니었다. 남자의 그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남자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지만 여자는 남자를 보고서도 태도를 바 꾸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듯 미소를 머금고 목례를 했다. 교활한 것인가, 현명한 것인가? 남 자는 섬뜩했다. 내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여자를 진짜 잃어버린 남자는 오돌오돌 떨었다. 추워서 남자는 그 자리에 더 있을 수가 없었다. 남자가 일어서서 나왔다. 누가 뒤에서 남자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뒤돌아보면 불쾌함을 지나 수치스럽기까지 한 뭔가 모를 풍경이 펼쳐질 것 같았다. 남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대신 성큼성큼 앞만 보고 걸었다.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았 을 때, 더 이상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연히 확인했을 때 한시름 덜었다는 느낌으로 남 자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다짐하듯 생각했다. 이제 저 여자로 말미암아 내 인생이 망가지는 일은 없으리라. 그런 데 그건 안도감이 아니라 절망감이었다. 갑자기 삶이 농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인생에는 농담처럼 흘러보내야 할 일들이 있는 거지. 농담은 애써 기억했다가 재생하면 재미없지. 그 자리 그 순간에만 힘을 발휘하는 게 농담의 속성이니까. 한물 간 여자들에게 “서른을 눈앞에 두고 앓아 누웠던 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삼십대를 살아갈 일이 서른이 되면 편안 해진다고. 그런데 거짓말이더군요. 초라해지기만 해요. 아마 `성공`하지 못한 대부분의 하물

적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아무

까마득했습니다. 그대 한 선배가 그러더군요. 나이를

한살 한 살 먹어갈수록 제 자신이

간 여자들이 느끼는 슬픔일 겁니다.”

왜 `중후한` 여자는 없는가 한 독자의 편지를 앍으면서 나는 나이 먹어 갈수록 좋다는 선배를 생각했다. 그 선배는 사십이 되는 봄날 불혹의 나이를 축하하기 위해 모처럼 성대한 파티를 했다. 이제 사십이 되었다고, 이제 끊어오르는 열정을 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고. 그 선배의 말 속에 다소의 허세가 들어 있다고 해


도 나는 선배를 인정해 주고 싶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든 환갑이 되고 칠순이 돼도 선배는 당당하게 나이를 먹을 것이었다. 그것은 본능적인 예감 같은 거였다. `나이` 때문에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있다면 `나이` 때문에 놓여날 수 없는 것도 있다. 나 이가 훑어가는 것이 있고 나이와 함께 찾아드는 것이 있다. 반짝이는 피부, 뜨거운 혈기, 넘어져 도 일어설 줄 아는 용기, 이성에의 두근거림은 나이가 훑어간다. 여자가 남자보다 나이에 민감하 다면 그 이유는 여자가 나이에 훑어가는 것들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젊다는 것은 한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찔한 가치다. 그것은 분명 초원의 빛이여, 꽃 의 영광이여를 노래할 수 있게 하는 원천이다. 그러나 나이와 함께 초원의 빛은 스러지고 꽃의 영광은 시들어진다. 그때 그 가치에만 기대 있던 여자는 추리해진다. 물론 그건 많은 부분 `영계`를 선호하는 우리 사회에 책임이 있다. 우리는 퉁퉁한 40 대의 스튜어디스, 머리 하얀 여비서를 볼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화살에 상처 나는 건 사회가 아니라 여자다. 나이와 함께 중후해지 는 남자들은 많은데 나이와 함께 당당해지는 여자들이 드문 건 여자에게 나이를 방어할 수 있는 구조적 장치가 허술했기 때문이다. 가족을 돌보는 일이 여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라고 믿고 살아온 중년의 여자가 많다. 가정 울타리 밖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과 자식들이 더 이상 그 여자의 손길을 기다리지 않게 된다면? 그때 중년의 여자는 허무해진다. 더 이상 젊지 않 은 나이를 생각하면 새로운 인생이 두렵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게 불안하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서 `나이`의 무게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젊은 날 뜨 거운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절대적으로 부모를 요구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그 맹목적인 시간 은 분명 귀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젊은 시간이 가는데 마음이 지나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다면? 그때 찾아드는건 휑한 바람 소리뿐이다. 세월이 허무하게 한자리에서 한발짝 옮겨놓지 못 하고 그냥 그대로 서 있으면 울고 싶을 뿐이다. 울고 싶은 자리는 바꿔 줘야 한다. 4,50 대 주부들이 자식에 집착할수록 얻을 수 있는 건 허무감이다. 배려할 줄밖에 모르는 아내가 부담스러운 남편은 아내를 `바가지나 긁는 여자`로 폄하하고 어머니보다는 또래집단에게서 더 많


은 문화적 영향을 받을 만큼 훌쩍 커버린 자식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잔소리쯤으로 치부한다. 그 때가 되면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진자리 마다 않던 여자는 객석이 텅빈 무대에서 연기해야 하는 배우처럼 허탈해진다. 관절은 여기저기 쑤셔대고 가슴은 휑하고 얼굴에 잡히는 주름은 처량하다. 어디 가서 지금껏 살아온 허무한 세월들을 터놓고 퍼내고 싶지만 들어 줄 사람이 없다. 그때 마 음은 점점 과장되어 신파극의 주인공이 되기 쉽다. 이때 동물의 세계에서 배우자. 철저히 환경에 적응하는 야생동물들은 감정을 낭비하는 일이 없 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번식기에만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낳는다. 짝짓기는 맹목적이고 새끼 돌보 기는 본능적이지만 새끼가 어미의 손을 떠나 홀로 설 수 있을 때가 되면 본능적인 양육을 미련없 이 끝내고 어미의 품 밖으로 떠나 보낸다. 그리고 홀로 선다. 그래서 동물의 세계에서는 사랑은 어렵지 않고 양육은 길지 않다. 사랑과 양육이 힘들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힘이 나는 자라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야생의 세계에서는 감정이나 열정의 낭비 가 없다. 무엇으로 잘사는 것일까? 주부의 세세한 손길이 바가지가 되고 간섭이 될 때 부메랑처럼 돌아 오는 허탈감에 맥놓는 것일까? 더 이상 세세한 손길이 필요하지 않은 남편과 아이들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일까? 적당한 그 거리는 남편과 자식뿐 아니라 여자에게도 자유의 거리다. 가정은 안정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가정만이 강조될 때 그 안정은 답답하다. 안정적인 가정이 희망일 수 있으려면 스스로 설 줄 아는 거리가 필요하다.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식구가 눈물 같은 희생만을 바 랄 때 함께 사는 사람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쓸어 주고 싶은 순한 마음보다는 그 삶을 위 탁관리하고 있다는 억한 부담감에 죄인이 된다. 떠나는 마음을 붙들 수는 없다. 어거지를 써서 마음을 붙들어 보면 찾아오는 건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하염없는 외로움이다. 떠나는 마음은 떠나게 둬야 한다. 사실 마음이 다른 자리를 찾아 떠 날 때가 보내는 마음이 스스로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괜히 허탈해하지 말 고 방법을 찾아보자. 어디에 돈을 쓸 건가


중년의 허탈감을 극복하고 자기 인생을 설계하는 방법을 여행에서 찾은 한 주부가 있다. 주부 여행가 노소남 씨. 50 대 초반인 노씨는 목표여고를 졸업하고 결혼하기까지 직업을 가져 본 일이 없다. 주부여행가로 알려지기까지 노씨의 직업은 전업주부였다. 노씨는 은행감독원에 근무하는 여 덟 살 연상의 남편과의 사이에 1 남 2 녀를 두고 검소하게 살아온 이 땅의 알뜰한 주부. 노씨는 18 년된 식탁을, 10 년이 넘은 냉장고와 세탁기를 쓰고 있고 그 흔한 자가용도 없다. 그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면 으레 없으면 이상할 `무스탕`이라는 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래도 기죽어 본 적이 없 다. 형편이 안되는 것도 아니지만 필요 없는데 차를 굴릴 필요는 없다는 게 노씨의 생각이다. 그 대신 노씨는 책을 읽고 강의를 들었다. 말하자면 노씨는 돈 쓰는 방법이 다른 주부들과 달랐던 것이다. 그가 돈을 쓰는 데는 분명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남들 다 하는데, 그런식으로 소비하 는 일은 평생 없었다. 철저하게 자신의 필요에 따라 소비했다. 강의 듣고 여행 가는 일이 그에게 는 집 넓히는 일보다 더 중요했다. 노씨는 1988 년 이화여대 평생교육원의 카운슬러 과정에 입학했다. 그 이듬해 평생교육원에서 해외여행을 갔다. 단체여행이었다. 혼자 떠나는 노씨와 남아서 가정을 돌봐야 하는 남편이 갈등하 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믿을 만한 교육원에서 교수와 함께 가는 단체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노씨는 그렇게 아이들과 남편을 떠난 삶의 가능성을 경험했다. 차츰 노씨는 여행은 돈을 밟고 지 나가는 유한 취미가 아니라 자기를 찾아 떠나는 것이라는 데 눈을 뜬다. 학교에서 주관하는 몇 번의 해외 문화연수에서 자신감을 얻은 노씨는 뜻이 통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여행동호회를 발족, 인도대륙, 시베리아, 아프리카, 유럽, 남미, 실크로드로 떠났다. 그런 노소남 씨에게 여행은 호텔에서 묵고 가이드가 인도해 주는 곳에서 사진을 박는 그런 일이 아니 다. 그는 여행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한다. 각기 다른 자연환경에서 다른 문화양식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노씨는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고양되어 감을 체험한다. 그것이 그가 1 년에 두세 차례씩 여행을 떠나는 이유다. 주부여행가 노소남 씨를 대충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 한다.


“참, 팔자도 좋은 여자군!” 정말 그는 팔자 좋은 여자인지도 모른다. 어디를 가나 남편 걱정, 자식 걱정이 떠나지 않는 우 리 어머니들이 그랬듯 틈나는 대로 전화해서 식구들의 안부를 시시콜콜 묻는 법도 없다. “집에 일이 있다고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도와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노소남 씨의 매력은 그런 거였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어머니라는 사실, 아내라는 사실, 50 대 여 인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는다. “여행지에서는 내가 서 있는 곳, 내가 만나는 것들에 푹 젖어요. 그래서 내가 한국 사람이고 주부라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리죠.” 까마득히 잊어버려야 새로운 것을 느낄 수 있다. 노소남 씨는 잊고 떠날 줄 알고 다시 돌아올 줄 안다. 세 아이의 엄마, 직장에 다니는 남편을 둔 아내. 이 관계에 얽매이면 1 박 2 일로 친정에 다녀오 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달씩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까. 1988 년 여행자율화 이후 안 가 본 나라가 없는 노씨. 노씨는 주부는 남편과 자식을 돌보는 일 에 전념해야 한다는 우리의 미신을 확실히 깨고 있다. 둘째가 고 3 일 때도 여행을 떠났으니까. `가 출`이 아닌 여행을. 고 3 어머니의 여행, 그것은 이색적이다. 그러나 노씨와 아이들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그 행위는 돌출적이라기보다 자연스럽다. 노씨는 자녀들에 대해 안달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해보라고 권하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면 신중하게 들어준다. 하지만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주변에서 그렇게 들어 준다. 하지만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주변에서 그렇게 한다는 이유로 들들 볶으면서 시 켜 본 일이 없다. “인생은 자기 꺼야, 누가 책임져 주지 않는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 평범한 진리가 노씨가 아이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말이다. 책임져 주지 않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스스로 책임지는 법을 배웠다. 고 3 이라고 특별히 황제 대접을 요구하거나 쓸데없는 짜증을 부리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가 집에 없어도 쓸데없이 어머니 자리가 나지도 않는다. 노소남 씨의 남편은 술과 담배를 엄청 좋아하는데 여행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세계가 궁금한


아내가 지구를 도는 동안 박씨는 단 한 번도 여행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박씨는 흔 하디 흔한 무스탕 하나 사지 않고 친척이 준 냉장고를 10 년 이상 쓰면서 언제나 당당한 아내가 믿음직스럽다. 그래서 그는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를 이해하고 인정해 준다. 노소남 씨 또한 거의 날마다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하는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지 않는다. 그리 고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에게 여행을 함께 가자고 우기지도 않는다. 서로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인정해 주고 믿어 주는 자세가 이 부부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여행할 줄 아는 아내, 여행할 줄 아는 어머니, 그 덕에 남편과 아이들은 밥도 해 보고 빨래도 해 보면서 어머니 없이 살 줄 아는 최소한도의 살림을 배운다. 그렇지만 여행에서 보고 온 것을 들려 줄 줄 아는 어머니가 밥해 주고 빨래해 주는 어머니만큼 귀하다. 여행에서의 경험을 놓치지 않고 노씨는 지난 95 년 책을 펴내기도 했고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에게 강의 형식으로 자신의 체 험담을 들려 주기도 한다. 노씨는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본보기다. 마흔이 훨씬 넘어서도 여 행가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노씨는 나이의 무게에 지레 짓눌려 사는 이 땅의 많은 `한 물 간` 여자들에게 인생을 보여 준다. “아이들이 중학교를 들어갈 때까지는 어머니는 절대적이죠. 그렇지만 그 후에는 자기를 찾을 수 있는 다른 일을 가지는 게 좋아요. 다른 일이 있어야 아이들에게도 보기 좋고 남편에게도 당 당한 거 같아요.” 내게는 꿈이 여행이었다 가끔은 나도 현실을 완전히 잊고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느낌에 절절하다. 그런데 나는 여 행을 즐길 형편이 못 되었다. 해야 할 일이 언제나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물론 세상사를 훌훌 털 어 버릴 수 있는 성격이 되지 못했다는 게 더 근본적인 이유다. 안정적이지만 체한 듯 답답한 현 실에서 놓여나는 싶다는 생각이 미치도록 절절해도 나는 언제나 성실하게 궤도를 돌았다. 현실의 책임을 놓쳐 본 적이 없는 나는 맏딸 콤플렉스를 벗어 버리지 못했다. 때로는 그런 내가 지긋지 긋할 때도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꿈을 꾼다. 나는 매일매일 꿈을 꾼다. 꿈을 꾸기 때문에 나는


아프지 않고 성 실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 내게는 꿈이 모든 것을 잊게 하는 여행이다. 꿈을 꾸기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꿈을 꾸기 때문에 잠을 잔다. 꿈에서 나는 자유의 어렴풋한 모습을 본다. 꿈에 나는 모든 걸 놓는다. 나는 맏딸도 아니고 바쁘지도 않으며 교수도 아니다. 30 대 여자도 아니고 사회적 편견에 오염된 상식 인도 아니다. 꿈에서 나는 그저 `나`다. 그 `나`는 때로는 집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김삿갓이 되 기도 한다. 때로는 윤리적, 관습적 장치가 없는 야생상태에서 모든 사건을 온몸으로 겪는 행동하 는 자이기도 하고 때로는 일어나는 사건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는 관찰자이기도 하다. 꿈은 언 제나 새로운 세상이다. 그 세상에서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만나기도 하고 나무들을 만나기도 하며 동물들을 만나기도 한다. 내게 꿈은 여행이다. 꿈에서 나는 의식과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본다. 의식의 지배에 숨막혀 하는 또 다른 진실이, 의식의 관점에서는 무질서하겠지만 무의식의 관점에 서는 자유롭게, 깊은 숨을 쉬고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공간이다. 꿈을 꾸기 때문에 나는 현실을 견딘다. 내게 꿈이 일종의 여행이라면 노소남 씨에게 여행은 일종의 꿈인 셈이다. 내가 꿈을 구는 중에 현실을 잊는다면 그는 여행하는 동안에 현실을 잊는다. 어머니라는 사실, 아내라는 사실, 50 대 여 인이라는 사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는다. 먹는 일에서부터 그렇다. 노씨는 여행할 때 김치나 고추장을 챙기는 그런 촌스런 일을 하지 않는다. 물론 돈을 아낀다고 매번 빵만 먹지도 않는다. 여행 아닌가? 그 땅에서 나는 음식을 먹어 봐야지. 그건 여행의 중요한 재미다. 물론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관광객들의 입맛을 고려해 개성 없이 만들어진 음식을 비싼 돈 주고 먹는 일도 하지 않는다. 노씨가 즐겨 이용하는 곳은 본토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뒷 골목 식당. “먹는 일에도 여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험이 필요하죠. 쥐를 통째로 구워 주는 곳도 있으니 까요. 그런데,모두 사람이 먹는 거 아니예요? 그래서 먹어보죠. 시장의 풍경, 식생활의 풍경이 사 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풍경이잖아요.”


이렇게 이 세상의 많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노소남 씨. 그래서인지 그의 얼굴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 그가 20 대면 어떻고 60 대면 어떤가. 그런데 우리는 왜 사람을 보면 나이가 궁금 해질까. 왜“이 나이에...” 하는 나이값에 스스로 목매고 사는 걸까. 나이 때문에 인생이 끝나는 법은 없다. 분명히 젊음은 가치다. 그렇지만 나이와 함께 따라나오는 지혜도 그에 못지 않은 가치다. 로미 오와 줄리엣같이 맹목적인 열정에 스스로를 태울 줄 아는게 젊음의 가치라면 빛바랜 열정에 편안 해하면서 그 자리에서 열정 때문에 소화하지 못했던 세상사 지혜를 소화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나이의 가치다. 사오십이 되어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차 나르는 일을 하지 못한다고 낙담하는 자는 어리석은 것 이지 세계를 바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이 때문에 접어야 하는 것, 나이와 함께 변화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은 있어도 나이 때문에 인생이 끝나지는 않는다. 나이 들어 여행할 줄 아는 마음 을 찾았고 그 마음을 담아 책까지 펴낸 노씨는 나이가 장벽이 아님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미국 대학에 가 보면 중년의 대학생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가정형편 때문에, 별 취미가 없어서 대학에 다니지 않는 `아줌마들`이 큰 가방을 메고 강의실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는 모습은 참으로 신선하다. 환경단체나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씩씩한 아줌마들도 많다. 미국이 안고 있는 그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가 중심을 잃지 않는 건 그런 아줌 마들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내 가족,내 나이에서 조금만 놓여나면 사는 법이 달라진다. 이 땅의 한물 간 여자들이여, 물갈 이를 한번 해 보자. 기살리기 운동에 기죽는 이유 여자는 깔끔하고 알뜰했다. 속옷을 세탁기에 넣어 돌리는 법이 없었을 뿐더러 청소를 쉬는 날 도 없었다. 찬밥이라도 버리는 일이 없어서 양파를 톡톡톡, 당근을 어슷어슷 다져서 볶음밥 파티 를 열 줄 알았다. 여자의 냉장고는 언제나 정돈이 잘되어 있었다. 물론 계절이 지난 옷은 옷장에


걸려 있지 않았다. 속옷은 속옷대로, 양말은 양말대로, 서랍장은 늘 정갈했다. 대통령이 나라를 이 렇게 준비한다면 나라가 망할 일은 절대로 없었을 거였다. 여자의 남편과 여자의 딸은 그 여자 덕분에 깔끔하지도, 알뜰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언제나 여 자의 손길이 미쳤기 때문에 남자는 언제나 주름이 선 옷을 입고 출근할 수 있었다. 중학교를 다 니는 딸의 옷차림도 그랬다. 누가 봐도 정성이 고루 미친 아저씨였고 소녀였다. 남편과 딸을 정갈하게 재우고 깔끔하게 입히기 위해 여자는 아침부터 밤까지 쉴 새가 없었다. 여자는 살림하는 재미를 알고 있었다. 매달 꼬박꼬박 통장으로 들어오는 남편의 월급은 바로 여 자의 살림밑천이었다. 판공비를 따로 받는 남편은 월급에서는 용돈도 가져가지 않았으므로 여자 의 살림밑천은 든든했다. 싱싱한 재료를 사다가 요리를 만들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틀어 놓고 집을 쓸고 닦는 기쁨, 분명 그것은 대학을 나와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대학을 나오 고 나서는 더 더욱 할 만한 일이었다. 통계적으로 대학을 나온 여자의 남자가 벌어들이는 수입이 더 넉넉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능력을 믿었고 그럴수록 살림솜씨가 새록새록해졌다. 파출부를 쓰지 않아도 집 안은 반짝반짝 윤이 났고 식탁은 때로는 풍성했고 때로는 야무졌다. 그런데 남자는 여자가 만들어 놓은 깔끔함을 즐길 줄 몰랐다. 여자의 남자에게 그것은 삶의 출 발점이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일상이 된 사건들에 감동하기는 어려운 법이었 다. 남자가 그러한 대접을 당연시했을 뿐 감동을 느끼지 못했던 건 어쩌면 무의식중에 그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침부터 밤까지 남자는 직장에 매여 있었다. 그 사실이 남자를 문득문득 억울하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은 겉으로 보면 순탄하기만 한 남자의 직장생활을 남자가 순탄하게 느끼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자는 제법 규모 있는 출판사의 판매부장이었다. 당연히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었다. 그렇지만 책이 잘 팔리는 경우에도 남자는 행복하지 않았다. 오늘이 내일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 이었다. 내일을 생각하면 막연하면서 생생한 두려움이 남자의 가슴에 푹, 파고 들어와 오늘을 상 처냈다. 두려움을 갖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거였다. 그런데


생각하지 않으려 는 것은 이미 그 생각의 포로라는 것이기도 했다. 남자는 영업이 잘되건 안되건 늘 안달했다. 물 론 안달은 능력이기도 해서 대부분의 태평성대에 남자는 많은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실 적과 상관 없이 남자는 늘 회사를 관두는 꿈을 꾸었다. 알뜰한 당신은 족쇄가 되고 대책 없는 꿈은 강박관념 같은 거였다. 실적 없이 살아도 되는 날에 대한 남자의 꿈은 절절한 거였지만 실상 남자는 실적 없이 살아도 되는 날이 올까 봐 절절 맨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늘 실 적 올리기에 열을 올려 온 남자는 실적과 상관 없이 사는 삶이 어떤 건지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스트레스일 수도 있고 강박관념일 수도 있는 그것에 시달리느라 남자는 그 외의 삶을 즐기는 방법을 잊고 있었다. 그런 남자에게 깔끔하게 정돈된 집은 평안의 상징이 아니라 감옥의 상징이었다. 여우 같은 아 내와 토끼같은 자식이 만들어내는 닻줄이 남자를 꽉 부여 잡고 있는 이상 내일은 결코 달라질 수 없을 거였다. 그런 강박관념이 남자의 가슴 밑바닥에서 나직히 숨쉬고 있는 동안 남자는 문득문 득 절망해야 했다. 그 느낌이 고약한 까닭에 그 남자는 알뜰한 아내의 살림솜씨를 즐기지 못했다. 국가경제가 사실상 부도, 라는 신문의 헤드라인이 모든 사람들을 우울하게 한 몇 달 뒤 남자의 강박관념도 현실이 되었다. 출판사의 사정이 극도로 악화된 것이다. 사실 부도가 나기 전 출판사 의 경영상태는 절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출판사와 연결된 대형 도매상 두 곳이 부도가 나면서 그곳에서 받은 어음이 휴지가 되었다. 출판사는 다이어트를 해야 했다. 마흔이 된 정월달에 남자 는 그 많은 실직자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여자가 갖고 있는 남자의 통장 예입금액란에 더 이상 의 숫자가 찍히지 않게 되었다. 여자에게 그 사태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기막힌 사태였지만 여자는 이미 부도와 실직이라는 단 어에 익숙했다. 몇 달 전부터 TV 에서, 신문에서, 라디오에서, IMF 시대라는 추운 단어를 오만 번 도 더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어들이 익숙하다고 해서 사태에 익숙해지는 것도, 절망스러운 마음이 진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여자의 가슴은 매일 후들거렸다.


실직자가 된 남자는 여전히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왔다. 여자는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 았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 라는 모범답안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물어도 대답하지 않 고 짜증만 내는 남편의 반응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입고 나서는 옷은 여전히 여자의 손길이 미쳤지만 어쩐지 후줄근해 보였다. 청소하는 손에 기운이 빠지니까 청소를 해도 집안은 그다지 윤이 나지 않았고 밥하는 손에 신 이 나지 않으니까 밥상은 더 이상 야무지지도 않았다.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곳에서 살고 있어 도 삶이 이렇게 느닷없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여자는 처음으로 배웠다. 여자는 얼굴도, 등도 곧게 펴지 못하고 한쪽으로 누워 자는 남편이 낯설고 그 남편과 10 여 년을 살아온 아파트가 낯설 어서 밤잠을 설쳐댔다. 밤잠을 설쳐 얼굴이 푸석해진 여자는 세탁기에 빨래를 넣다가도, 청소를 하다가도 순간순간 맥 을 놓고 주저앉게 되었다. 할 일 없이 남자가 집밖을 방황하는 동안 여자는 집안에서 허해진 마 음자락을 여미지 못했다. 남편 기살리기 운동의 각본 이래서는 안되지, 이래서는 안되지, 마음을 다 잡아도 마음은 잡히지 않았다. 여자가 속옷을 빨 다 말고 넋 놓고 있던 어느 시간이었다. 라디오에서 남편 기살리기 운동을 하는 어느 사회교육원 강사의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직에서,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남편을 제왕으로 모시라 는 얘기였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하루에 한 가지씩 칭찬해 주는 거라고, 지푸라기도 잡고 애원하고 싶은 여자에게 그 소리는 복음처럼 들렸다. 오랜만에 힘이 나는 기분이었다. 라디오에서 가르쳐 준 대로 여자는 특별히 장을 봤다 남편이 들어올 즈음 화장도 했다. 남편은 여전히 어깨가 축 늘어져서 들어왔다. 그런데 교육이 효과 때문인지 그 날부터 남편이 달라 보였 다. 여자에게 남자는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는 어린애였고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빈 노트였다. 여자가 얼굴 가득 교태를 품고 과장된 목소리로 당신이 최고예요, 하고 말했을 때 스스로 최고 가 아니라는 걸 아는 남자는 담박에 여자의 웃음이 어쩐지 과장되었다고 느꼈다. 감정을 과장하 느라 부산을 떨면 정서불안보다 더 불안하다. 그 느낌은 집요했다. 과장된 것은


시선을 끌지만 그 속에 풍덩 빠져들게 하지는 못해서 마음이 마음으로 다가서는 것을 막는다. 남자는 여자를 한번 쳐다보았을 뿐 여자를 향해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았다. 자신의 애교가 사랑이 아닌 무반응으로 돌아오자 여자는 순간적으로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여 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라디오가 이미 가르쳐 주었다. 실직 후에 남자들이 느낀다는 박탈감 때문 이라고, 여자는 그저 하루 빨리 남자가 무력감을 극복하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능력있는 가장 으로 돌아와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306 호 김 부장 있잖아요. 글쎄, 매일 술 먹고 들어와서는 세간살이 다 집어던진대요. 여자를 무슨 북인지 알고 온몸에 멍이 들도록 때리기도 한대요. 아휴, 그런 사람도 있는데 난 얼마나 행 복한지 몰라! 당신을 절대 못 그러잖아요.” 어누 순간부터 여자는 식탁에서, 잠자리에서 하루에 한 가지씩 남편을 칭찬해 주고 있었다. 당 신은 가정적인 남자야,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당신은 책임감 있는 사람이지, 다시 태어나도 당신 만을 사랑할 거야. 당신은, 당신은...ㅍ그렇지만 남자는 그 말들을 그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래 도 그 분위기는 남게 되는 법이었다. 그 분위기는 찐득찐득한 거였다. 왜 그랬을까? 어느 날 여자 가 침대 속에 파고들면서 남자를 향해 여보, 당신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야, 사랑해요, 하 고 말했을 때 남자는 그 분위기가 찐득한 이유를 알아챘다. 남자는 유행가 가사를 잘 인용하는 여자가 사랑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숙제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기살리기 운동을 하느라 각본 을 외우는 배우처럼 하루에 하나씩 칭찬하기를 잊지 않으면서 인형같은 미소를 짓는 일보다는 차 라리 무표정이 편했다. 숙제, 그것은 숙제였다. 그 숙제는 남자가 현재 하고 있지 못한 숙제를 연상시켰다. 한 번도 돈 을 벌어 본 일이 없는 식구를 죽을 때까지 부양해야 한다는 그 막막한 숙제를. 남자는 사랑은 기분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노력이라고, 식탁에서 여자가 똑똑히 발음했던 걸 기억했다. 그 말은 진리였지만 노력만이 덩그랗게 강조되는 사랑은 잔인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치유한다고 과장되이 강조하는 그것은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거였다. 여보, 사랑해요, 사랑, 을 발음하는 여자의 액센트가 노력을 강조하면서 남자의 몸에 손을 대며 남자를 향해 돌아누웠을 때 남자는 숙제 같은 사랑이 징그럽고 막막했다. 남자는 그


숙제를 어쩔 줄 몰라 여자를 행해 반응하지도, 여자를 등지고 돌아눕지도 않았다. 남자가 불안한 자리를 스스 로 박차지 못해 쫓겨난 것처럼 여자도 절대로 스스로 숙제하기를 단념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갑자기 그 불안한 일이 생의 굴레인 모든 인생들이 불쌍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상한 느낌이 남자를 스쳤다. 남자는 처음으로 기살리기 운동을 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바로 보았다. 여자에 대한 연민이 일었다. 남자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그것은 바로 남자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했 다. 사는 데 다른 방법이 없어 자신을 향해 베시시 웃으면서 생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여자가 서 러워서, 가슴이 난도질 당하는 그 느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남자는 여자를 힘껏 끌어당겼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여자들은 기도 안 죽나? 이 여자 기가 죽으면 어떻게 살려 줘 야 되는 거지? 에필로그 이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국수를 훔친 임산부, 이만 칠천 원에 강도가 된 가장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그 소식은 이내 목 의 가시가 된다. 나는 지금 가시를 빼내지도 못하고, 넘기지도 못하고 캑캑거린다. 이 땅에 뿌리를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를 떨고 두려워하는 IMF 라는, 코 큰 일수 아 저씨들의 일수놀이 때문에, 사치가 뭔지 과소비가 뭔지 전혀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기반 이 제일 먼저 흔들릴 때 막막했다. 위기다. 문제의 본질은 위기 상황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법이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기혼여성들이, 그 다음 미혼여성들이 줄줄이 줄사탕처럼 잘려나갔다. 그건 이땅의 여성의 지위였고 자리였다. 그 다음은 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버텨 보려 했던 이 땅의 불쌍한 가장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성장`의 신화에 시달리면서 만만찮은 짐에 등이 휘도록 뛰어온 가장들이었다. 그 가장들이 아직 은 짐을 내려놓을 수 없다며 어떡하든 남아 보겠다는 절실함으로 인간적인 자존심을 접고 열렬하 고 성실하게 비굴해졌다. 그렇지만 부도라는 어쩔 수 없는 사태와 구조조정이라는 막강한 파워에 눌려 그들도 가차없이 잘려나갔다. 다 쓰지도 않았는데, 기계고장으로 더 이상 쓸 수


없는 공중전 화 카드 같은 느낌을 안고 실업자가 된 사람들, 그 숫자가 1,2 월에만도 100 만 명, 그 뉴스에 수긍 해야 할지 통곡해야 할지 먹먹해졌다. 위기다.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희망도 없는데 가위눌림 같은 몸짓을 하는 이도 안쓰럽다. `위기는 기회`라고 애써 믿으며 품위를 지켜 줄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는 사장들의 표정은 영화 <25 시> 마지막 장면 같다. 앤소니 퀸의 그 표정, 울고 있는 것일까, 웃고 있는 것일까, 마음자락이 젖어든 다. 가짜 희망이라도 부여잡으려는 절박한 상황은 희망의 강도만큼이나 기막히다. 한발짝 물러서 있는 우리에겐 그의 서두름이 어디로 갈지 나락이 보이는데 정작 가짜 희망을 부여잡고 있는 그 는 절박함에 가려 한치 앞을 보지 못한다. 허탈하다. 이렇게 나락을 보려고 그렇게 동동 뛰었던가? 전쟁이 아닌데도, 가뭄이 들어서 농작물이 말라 버린 것이 아닌데도 하루아침에 망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엄청난 수업료를 지불 한 셈이다. 하루아침에 망했기 때문일까? 쓸쓸하다 못해 허망했고 어깨들은 처져 있고 눈빛들은 휑해 보인다. 나의 세대, 내 아버지 세대는 성장의 세대였다. 성장은 가시적이고 지속적이었다. 모든 것이 풍 요로운 물질로 보상되는 성장의 시대에서 우리는 오늘보다 풍요로워질 내일을 꿈꿨다. 자연스럽 게 물질만능주의에 빠져들기도 했다. 모든 것이 물질로 보상되는 `성장`이 우리 시대, 아버지 세 대의 행운이라면 물질만능주의는 우리시대의 문화적 불운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물질은 살기 위해 필요한 도구를 넘어서서 성공을 증거해 주는 전리품이기도 했다. 누가 성공했나, 누가 센가를 증명해 주는 것이었기에 우리는 더 많은 돈, 더 높은 권력, 좀더 그 럴듯한 지위, 더 자극적인 쾌락을 향해 불나비처럼 달려갔다. 성공이 오면 행복이 온다고 믿었을까? 행복도 지수화될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구의 아파트가 넓 은지, 누구 차가 더 고급인지, 어떤 직장에서 어떤 직급으로 일하는지, 휴가철엔 얼마나 돈을 뿌 려대고 놀 수 있는지 그런 설문으로 사람값을 매기기도 했다. 물질에 대한 뻔뻔한 희망이 번쩍였던 그곳에선 이름 석 자밖에 가진 게 없어 명함을 만들 수 없는 사람들의 자리는 없었다. 우리가 이름 석자 앞에 붙은 직함과 돈에 기대


있을수록 이름 석 자는 얼마나 허기졌나. 이름 앞에 소복히 쌓여 있는 그 편견들 없이 수 있는 사 람에 대한 허기짐.

마음을 나눠가질

이 시대에 무너져야 하는 건 물질만능주의고 성장의 신화다. 실제로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에 성장의 신화는 힘이 없어 거기에 기대 있는 삶들을 무너지게 한다. 지금은 그 동안 우리 시대의 문화적 불운인 물질만능주의를 거둬낼 수 있는 때인지도 모른다. 사실 세상에는 폐허가 희망일 수 있고 찬란한 문명이 오히려 절망적일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종교의 자유가 억압된 곳에서 순교자들이 불꽃처럼 종교정신을 증명했지만 종교의 자유가 인정된 곳에서 종교는 마녀사냥의 전당이고 부정축재의 대명사였지 않나. 때로 폐허는 정신을 순 수하게 하는 희망의 그루터기일 수 있고 때로 찬란한 문명은 인간을 그 문명의 전사로밖에 취급 하지 않는 포악한 독재자일 수 있다. 돈만 있었을 땐, 돈 벌 궁리에 다른 생각이 없었을 땐, 돈으로 되는 사람, 돈 될 사람만 남고 좋은 사람은 다 떠난다. 성공을 향해 무작정 질주했을 땐 우월감과 아부 그리고 전략만이 남아 있을 뿐 마음 놓을 마음이 없다. 지금은 물질만능주의가 만들어낸 무거운 편견들을 거둬낼 수 있는 때다. 편견들을 거둬내면 삶 이 분해되는 것이 아니라 가뿐해진다. 행복은 결단코 성공과 함께, 돈과 함께 오지 않는다. 재벌그룹 부회장을 지낸 최고경영자가 최근 한국경영자협회 고급인력정보센터에 구직신청서를 냈다. 삼미그룹 전 부회장 서상록 씨가 낸 구직신청서의 희망직종란에는 `식당 웨이터`가 적혀 있 다. 웨이터가 되면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프로가 되겠다는 서씨는 이렇게 말했다. “식당 문을 들어서는 손님에게 `넥타이가 잘 어울리십니다` 라고 한마디 하면 손님들이 기분 좋게 식사를 즐기지 않겠습니까.” 그는 당당해 보였고 야무져 보였다. 행복을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같아 보이기도 했다. 만일 내 가 식당경영주라면 당장 그를 채용했을 것이다. 왜 전직 대통령은 농사를 지으면 안될까, 왜 60 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25 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보다 잘살고 있다고 생각할까, 왜 전직 대기업 이사는 운전을 하면 안될까, 왜 그 동안 열 심히 돈 벌었던 사람들은 잠시 쉬면 안될까, 왜 국회의원이 소형차를 타고 다니면


안될까, 왜 남 자는 파출부를 하면 안될까, 왜 직함없이 사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될까? 사는 일보다 보이는 일이 앞서면 삶은 그럴듯해지는 게 아니라 무거워지고 초췌해진다. 보이는 일을 접고 사는 데 충실하면 초췌해 보이는 게 아니라 침범할 수 없는 존중되어야 할 세계가 있 어 보인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역사에 길이 남을 권력자가 되기 위해 무겁게 구는 사람 들의 강박관념은 안쓰럽다. 역사가 기억하는 그 `이름`이 한줌의 흙으로 `곱게`썩어 가면 좋은 그 인생에게도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보다는 이름 위에 무겁게 올려져 있는 멍에를 내려놓고 가뿐 해진 마음으로 꽃 한송이 내밀고 싶은 가뿐한 이름을 조용히 불러 보자. “나는 구내식당에서 백반 대신 라면을 먹었어. 네가 엄마의 자궁을 조금씩 채워 갈 때 내 안 주머니엔 백반값 라면값의 차액이 조금씩 채워지고... 세상의 모든 햇빛 같은 장미꽃 바구니를 샀 다.” 박범신이 태어날 딸애에게 바친 가난한 꽃바구니는 세금을 적게 내고 아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 려주기 위해 온갖 방법을 궁리하는 어느 재벌의 증여재산보다 귀했다. 무거운 물질만능주의의 멍 에를 벗어 보면 물질만능주의가 작은 일이라고 폄하한 일들을 결코 작지 않음이 보인다. 거기에 삶의 이유가 들어 있는데 어찌 작을 수 있을까? `97 이주향의 독서일기 최인호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 <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집> 살아 있을 때는 얘기도 대충대충, 사랑도 대충대충, 슬픔도 대충대충 나누는데 죽음으로 이별하 게 되면 정말 가슴 아픈 추억을 만드는 이름. 그 이름 어머니. 박상우 <말무리반도>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한 수단으로 원치 않는 길을 잠시 선택해 본 적이 있나? 그러다가 영원히 원하는 길을 놓쳐 본 적은? 꿈을 이루기 위해 꿈을 잠재운 남자의 꿈. 박완서 <어른 노릇 사람 노릇>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작가 박완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우리 시대의 어른이다. “모든 사람한테 미움받는 악인에게서도 연민할 만한 인간성을 발


굴해 낼 수 있고, 만인이 추앙하여 마지 않는 성인한테서도 찾아내고야 마는 게 작가의 눈”이라고.

인간적인 약점을

김주영 <홍어> 자존심을 구겨가며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 있는 사람은 안다. 기다림이 우리를 얼마나 지치게 하고 황폐하게 하는지.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은 가슴을 앓게 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떠날 줄 아는 사람만이 머무를 곳을 알아 본다. 전경린 <사막의 달> “사랑, 사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목숨. 눈뜨면 언제나 속눈썹 끝에 매달려 나를 내려다보고 있 는 사람, 내 몸안에 집을 지은 사람. ...한날 한시 한순간도 잊어 본 적이 없는 내 생의 보석. 그가 부르면 나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달려가. 그리고 돌아가라 하면 갈 곳이 없어도 돌아가지.” 세상에. 왜 그런 사랑과 이별하는가. 이현세 <천국의 신화> 인류의 역사는 생사를 건 투쟁의 역사다.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싸우면 선한 자가 이기는 게 아 니라 강한 자가 이긴다. 선한 자라도 투쟁에서 쓰러지면 끝장이다. 강하다는 건 선악과 관계가 없 다. 김혜린 <불의 검> 바람 냄새로 봄을 아는 여자와 `이겼다`는 승리감에 취하기보다 승리의 북소리 뒤에서 피를 아 끼지 못한 것에 대해 처연해 하는 사내가 사랑할 때 노래를 불러 주고 싶었다. 예쁜 것들은 눈물 이 된다고. 또하나의 문화 동인 <새로 쓰는 결혼이야기 2> 사랑한다는 것과 함께 산다는 것, 그건 꿈과 현실처럼 다르다. 그 꿈과 현실 사이에서 우는 여 자들이 더이상 없기를. 같이 사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면 독신으로 사는 일도 쉽지 않다. 사랑할 때와 결혼할 때 또 는 독신일 때와 이혼할 때 그 모두는 살아 있는 삶의 풍경들이다. 마빈 해리스 <작은 인간> 문화인류학적 시각에서 보면

일부다처제는 땅이 넓은 곳에서 시행되었다. 여러


아내에게 많은 아이를 낳아야 넓은 땅을 경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다부일처제는 땅이 좁은 곳에서 시행 되었다. 두세 명의 형제들의 한 명의 아내를 공유함으로써 공동경작지를 상속할 후손의 수를 줄 여야 하기 때문에. 자연파괴적인 현대문명이 들어서기 전 인류가 어떻게 자연에 적응해 왔는지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재미있는 책. 이정우 외 <프랑스 철학과 우리> 크리스테바는 프랑스 지식인들을 `사무라이`에 비유한다. 그렇듯이 프랑스 지식인들은 특정 분 야의 전문가일 뿐 아니라 문화 예술에 대한 이해도 깊다. 또한 그들은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행동과 지식인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프랑스 철학은 무엇일까? 전여옥 <여성이여, 느껴라 탐험하라> 성은 금기의 대상일까, 향유의 대상일까? 사랑 없는 성은 허무하고 성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랑 은 절름발이다. 전여옥의 칼날 같은 문제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그런 생각에 이른다. 성은 관 계의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고 인격과 인격 간의 최고의 대화라고. 작가는 테러리스트다. 전여옥을 보면 드는 생각이다. 성의 질서에서 남성적 시선을 거둬내자. 그래야 남성도 여성도 성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김용택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도시 어린이는 전자오락에 맘을 빼앗길 줄 알지만 시골 어린이는 하늘의 별자리를 읽을 줄 안 다. 풀과 나무의 이름을 아는 아이들과 비싼 운동화와 청바지의 이름을 아는 아이들, 누가 행복할 까? 그런데 왜 우리는 산이 있고 물이 있고 별이 있는 풍경보다 자동차가 있고 빌딩이 있고 호텔 이 있는 풍경을 지향할까? 은희경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 호감은 차이에서 나온다. 그런데 남녀 사이에 긴장이 사라진 후엔 그 차이가 갈등을 만든다. 다 름이 만들어 내는 피로와 권태의 무늬. 박범신 <바이칼, 그 높고 깊은> 딸을 시집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쓸쓸하고 추리한 것인지도 몰라. 딸이 떠난다 는 것, 그것만으로도 아버지는 잔인한 난도질을 당한거야. 딸이 만든 상처를 삭여야


하는 아버지. 거기에 흘러가는 인생이 있었어. 니체 <도덕의 계보> 인류의 역사는 본능 억압의 역사다. 본능은 억압되면 억압된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애꿎은 자 기자신을 할퀴어 상처낸다. 본성에 충실한 것이 건강한 것이라면 본성의 억압 위에 세워진 문화 는 질병이다. 류시화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이 책에서 인용한 로마의 에픽테투스의 말이 스민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되어가기를 기대하지 말라.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받아들여라.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오게 하고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가게 하라. 그때 그때의 삶은 순조롭고 평화로울 것이다.” 마종기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목숨을 건 사랑을 만져보고 싶은 시인. 이렇게 살기는 싫다고. 낚시질하다 물고기가 서러웠던 건 물고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이겠지. 물고기는 왜 사는가... 평생을 헤엄만 치면서 왜 사는 가.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만은 없다고 중년의 흙바닥에 엎드려 물고기같이 울었다고. 포리스터 카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인디언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이해한다는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삶 이 끼어들지 않는 사랑은 없다는 말일 텐데. 이해한다고 꼭 사랑이 끼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 사랑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일 수는 없겠지. 롤랑 바르트 <신화론> 신화는 옛날 이야기라기보다 의사소통의 체계다. 신화를 분석한다는 것은 전도된 이미지 속에 들어 있는 진짜 현실을 찾아내는 것이다. 영화, 소설, 스포츠, 사진, 광고와 같은 것들에 현대의 신화가 숨어 있다. JF 비얼레인 <세계의 유사신화> 성서의 `창세기`에. 인도의 `리그베다`에, 북유럽의 창조신화도, 그리스의 창조신화도 태초에는 어둠과 혼돈뿐이었다고 전한다. 도대체 태초를 무나 혼돈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뭘까? 문화의 기 원을 혼돈으로 보는 이유는 현재의 질서를 선험적 질서로 옹호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남자와 여 자는 혼례를 치뤄야 잘 수 있다는 것이 질서가 되면 혼례 절차 없이 남자와 여자가 자는 것은 혼 돈이 되니까. 남경희 <말의 질서와 국가> 인간은 본질적으로 비정치적 존재다. 그래서 정치가 필요하다. 이런 명제는 인간에 대한 모독일 까. 인간본성에 대한 정확한 판단일까. 인류의 역사에는 무수히 많은 악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역사가 이렇듯 오래 버티며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악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 때문이었다고. 글쎄, 전하지 않아도, 극단적으로는 악해도 꽃 피울 줄 아는 게 역사이기 때문은 아니고? 데즈먼드 모리스 <아기의 비밀 60 가지> 내 아기가 보석이라는 걸 왜 남들은 알지 못할까? 엄마에게 아빠에게 아기는 빛이다. 아기가 새록새록 예쁜 이유?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아기는 살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 서 아기들은 힘껏 예쁜 것이다. 예쁜 것은 도움을 끌어내기 위한 본능적인 전략이라고. 신경숙 <그는 언제 오는가> 알을 낳고 나면 까맣게 타 죽는 연어는 죽기 위해 모천을 향해 수천 킬로미터를 맹목적으로 달 려온다. 죽기 위해서라기보다 죽을 자리를 찾는 거겠지. 거기가 생의 자리이기도 하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산 사람들은 죽음을 가지고도 서로 상처낸다. 삶은 상처다. 생이 내 앞 에서 더이상 곡예를 부리지 않는다면 내생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는 여자는 아는 거겠지. 삶이 상처라는 것을. 상처내며 받으며 즉음으로 간다는 것을. 삶을 조금은 가볍게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상처가 많아 진지해지는 걸까. 너무 진지해서 상처를 받는 걸까? 김영하 <나는 아름답다> <호출> 여기에 나오는 신화 한 토막이 시선을 끈다. 첫날밤 남편을 살해한 여자 다나이드. 죄를 지은 여자 다나이드는 지옥으로 끌려갔다. 여자가 받은 형벌은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거였다. 여자 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다. 채워도 채워도 끝나지 않을 형벌을 받고 있는 여자가 아름다운 이


유는 뭘까? 사랑은 위험한 거라고. 그래서 제도 속에 가둬야 만들었는데 거기 에 사랑이 갇힐까?

한다고 결혼제도를

조경란 <내 사랑 클레멘타인> <불란서 안경원> 아버지의 굽은 어깨를 내려다본 적이 있나? 연민을 넘어 외면하고 싶은 충동 때문에 울컥 울고 싶은 딸의 이야기. 여기서 아버지의 치매는 딸과 아버지의 관계를 비트는데 본질적인 것일까? 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 바다 때문에 시를 쓰는 이생진의 바다는 막막하고 쓸쓸한 바다다. 그리고 바다 성산포에서 잊 을 수 없는 시 `섬묘지`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하라고 산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주었다. 김용호 <아들아 세상을 품어라> 왜 그렇게 돈돈돈. 하느냐고 부모들에게 물어보면 그 대답은 한결같다. 이 다음에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부모가 성실하지 않은 돈이 많으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아이들이 부모사랑에 감동하는게 아니라 부모 돈 믿고 성실하게 사는 법을 놓친다. 아이들이 자연스레 물 려받는 것은 삶의 태도다. 아들아, 세상을 품어라.면서 아들과 산행을 하는 구두닦이 아버지, 그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아들이 아름답다. 정대현 <맞음의 철학> 장군으로서는 맞는데 대통령으로서는 맞지 않는 사람. 대통령으로서는

맞는데


예술가로서는 맞 지 않는 사람. 예술가로서는 맞는데 친구로서는 맞지 않는 사람. 친구로서는 맞는데 애인으로서는 맞지 않는 사람. 애인으로서는 맞는데 남편으로는 맞지 않는 사람. 남편으로서는 맞는데 아들로서 는 맞지 않은 사람. 맞는 관계를 만나면 평안이 스미고 맞지 않는 관계를 만나면 불행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맞다`와 `맞지않다`가 생활세계의 원초적 체험일 수 있다. 구스타프 융 <자서전>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과학적이고 분석적이라면 융의 심리학은 정서적이고 신비하다. 융의 심리 학이 신비한데도 낯설지 않은 것은 그것이 동양적 체험과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에 의해 금 지된 사색을 무의식의 힘으로 힘 있게 깨부수는 융의 심리학의 밑바닥엔 역시 삶이 있었다. 융은 어렸을 적부터 신비한 정서적 체험에 대해 절레 절레 고개를 흔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 다. 그리고 그 체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기울이든 데 익숙하다. 크리스티앙 자크 <람세스> 꼭 무협지같다. 내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이제트뿐이다. 권력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매력에 관심 이 있어서 람세스를 떠나지 못했던 관능적인 여자. 그 여자는 권력과 명예에 관심이 없었지만 권 력과 명예에 의해 밀려난 여자였다. 어쩌면 관심이 없어서 밀려났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권력이 소용돌이치는 그곳에 순수한 사랑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좀 덜 외로웠을지도 모르는 데. 외롭지 않기 위해서 그 여자는 람세스가 네페르타르를 선택했을 때 왕을 버리고 자기의 길을 갔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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