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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다 지은이:시드니 셀던 옮긴이:오호근 출판사: 영림카디널 시드니 셀던 <깊은 밤 깊은 곳에> <거울 속의 이방인> <혈통> <천사의 분노> <게임의 여왕> <내일이 오면> <신들의 풍차> <시간의 모래밭> <심야의 추억> <최후의 음모> <별빛은 쏟아지고> 등을 쓴 금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데뷔작 <벌거벗은 얼굴>은 [뉴욕 타임즈] '올해의 최우수 추리소설'에 선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붉은 머리>로 토니상을, 영화 <독신남고 사춘기 소녀>로 아카데미상을 수상, <천사의 분노> <게임의 여왕> <신들의 풍차> <심야의 추억>은 TV 미니 시리즈로 제작 방영되었다. 이밖에 시드니 셀던은 23 편의 시나리오를 쓰고, 네 편의 장기 TV 시리즈의 대본, 제작, 감독을 맡았다. 현재 부인과 함께 남 캘리포니아와 런던에 살고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 아나스타샤와 로드릭 만 부부에게 사랑을 전한다. 작가는 이 책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의료계 종사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것은 메스로, 메스로 치료할 수 없는 것은 인도로, 그리고도 치료할 수 없는 것은 불치병이다.(히포크라테스, BC 480) 인간에게는 세 종류가 있다. 남자, 여자, 그리고 여의사.(윌리엄 오슬러 경) 프롤로그 샌프란시스코 1995 년 봄 시 검사장 칼 앤드루즈는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같 은 병원에 일하는 의사 세 사람이 같은 집에서 살다가 하나는 병원 문을 닫아버릴 지경의 사고를 내고, 또 하나는 백만 달러를 차지하려고 환자를 살해하고, 세 번째는 살해당했다는 거 아냐!" 앤드루즈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 셋이 다 여자란 말야! 빌어먹을, 여자 의사라니! 언론에선 그들이 무슨 스타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하잖아. 텔레비전도 온통 그 여자들 얼굴뿐이고. '60 분'(CBS 의 유명한 추적 프로그램)도 그 여자들 얘기를 다루었고, 바바라 월터즈도 특집을 만들어 방송했어. 도대체 신문이건 잡지건 그들 사진이나 기사가 없는 것이 없잖아. 아마 틀림없이 할리우드에서는 지금 영화권 교섭을 시작했을 거야. 도대


체 그 망할 년들이 무슨 영웅이나 되는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으니! 이러다간 엘비스 프레슬 리처럼 우표에 얼굴을 내겠다고 덤빌지도 몰라. 이건 말도 안돼. 절대로 그냥 놔두지 않겠 어!" 그는 앞에 놓인 [타임]지 표지와 여자 사진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사진 설명은:닥터 페이지 테일러 - 자비의 천사인가, 아니면 악마의 화신인가? "닥터 페이지 테일러라고?" 검사장의 목소리에서 증오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는 수석검 사인 거스 베너블에게 얼굴을 돌렸다. "거스, 자네가 이 사건을 맡아줘야겠어. 확실하게 유 죄판결을 받아내야 돼. 1 급 살인죄로 말야. 당연히 사형선고를 받아내야 한다구." "걱정 마십시오." 거스 베너블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틀림없이그렇게 될 겁니다." 거스 베너블은 피고석에 앉아 있는 페이지 테일러를 쳐다보았다.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고는 믿기 어려운 얼굴이군.' 그러나다음 순간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누구도 겉모습만으로 배심원을 설득할 수는 없지.' 그녀는 큰 키에 늘씬한 몸매였다. 희가기보다는 창백한 얼굴이어서 짙은 갈색 눈이 더 크게 보였다. 얼핏 보기에 평범하면서도 매력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관찰하면 그녀의 얼굴에서 파란만장했던 인생 역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얼굴에는 순진한 어린애의 행복한 표정과 사춘기의 불안감, 그리고 성숙한 여자의 고민과 지혜가 모두 섞여 나타났다. 어딘지 모르게 순진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무난한 며느리감이라고 노인들이 좋아할 타입이야. 하긴 냉혈 살인범도 괜찮다면 말이지만,' 거스 베니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페이지 테일러의 눈은 완전히 딴 세상을 보고 있는 듯, 앉아 있는 법정 내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았다. 마치 다른 시대의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재판은 브라이언트 가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법원 건물에서 열리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주 고등법원과 샌프란시스코 시 구치소가 함께 사용하는 법원 건물은 7 층 회색 석조건물로 음산한 분위기였다. 방청객들은 법정에 들어오기 전에 전자검색기의 수색을 받아야만 했다. 고등법원은 건물 3 층에 있었다. 주로 살인사건을 재판하는 121 호 법정은 판사석 뒤쪽에 성조기가 걸려 있었다. 그 외쪽에는 배심원석이 있었고, 중앙에는 검사용 핵상과 변호인 책상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법정은 기자들과 대형 교통사고를 구경하려고 모여드는 구경꾼 같은 방청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살인사건 재판치고 이처럼 관심을 끄는 사건도 드물었다. 담당검사 거스 베너클도 구경거리가 될 만한 인물이었다. 우람한 체구에 품위 있는 희끗희끗한 머리와 콧수염이 남부지방의 부유한 농장주 같은 점잖은 분위기를 풍겼다. 사실 그는 남부에 가본 적도 없었지만... 항상 약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머리는 컴퓨터같이 빨리 돌아갔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언제나 흰색 양복에 구식 정장 셔츠를 입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페이지 테일러의 변호사 알란 펜은 베너블과는 정반대 분위기였다.


자그마한 몸집에, 어떤 허점도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유능한 변호사였으며, 형사소송에 무죄판결을 잘 받아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두 사람은 전에도 여러 번 법정에서 대결한 적이 있었다. 때문에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절대로 상대방을 믿지 않는 사이였다. 재판이 시작되기 1 주일 전 알란 펜이 찾아왔을 때,베너블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스, 당신을 좀 편하게 해줄까 해서 왔는데..." '변호인이 담당검사인 나를 편하게 해준다?' "알란,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우선 이건 아직 의뢰인하고 상의해 보지도 않은 나만의 생각인데. 만약에... 만약에 말야... 내 의뢰인을 설득해서 1 급 살인이 아닌 좀 낮은 죄목으로 유죄를 승복시킨다면 법원도 막대한 재판비용을 줄이고 우리도 서로 편해질 게 아닌가?" "그럼 죄목을 낮춰 유죄를 인정해서 형량도 줄이자는 말이지?" "맞아." 갑자기 거스 베너블은 책상을 뒤지며 뭔가 찾기 시작했다. "달력이 어디 갔지? 자네, 오늘이 몇 일인지 알고 있나?" "6 월 1 일 아냐? 그건 왜?" "글쎄, 난 혹시 크리스마스가 벌써 다가왔나 해서 그랬어. 그렇지 않고야 자네가 그런 선물을 나한테서 받아가려고 할 수 있겠나?" "거스..." 베너블은 앉은 채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봐, 알란. 보통 같으면 나도 자네 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사실 난 지금 알라스카에 가서 낚시나 하고 싶은 심정이거든.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자네 의뢰인은 저항도 할 수 없는 환자를 돈 때문에 냉혹하게 죽여버린 살인범이야. 나는 사형을 구형해야만 되겠어." "난 그녀가 무죄라고 생각해. 그리고..." 베너블은 소리내어 웃었다. "자네도 그녀가 유죄라는 걸 알고 있어. 그녀가 무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건 너무나 뻔한 사건이야. 자네 의뢰인이 유죄라는 것은 카인이 유죄라는 것과 마찬가지야." "거스, 배심원이 결정하기 전에는 유죄 운운할 수 없잖아." "배심원들도 유죄판결을 내릴 거야."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야." 알란 펜이 떠난 다음 거스 베너블은 잠시 그대로 앉아 조금 전의 대화를 되씹어 보았다. 펜이 찾아왔다는 것은 피고가 불리하다는 것이다. 재판에 승산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거스 베너블은 자신이 확보하고 있는 확고부동한 증거와 검찰측 증인들을 다시 마음 속으로 정리해 보면서 흡족한 생각이 들었다. 닥터 페이지 테일러가 유죄판결로 사형언도를 받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배심원 선정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벌써 여러 달 동안 사건이 언론에서 집중 보도되었고, 그렇잖아도 살인의 냉혹성 때문에 격분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아 편견을 갖지 않은 배심원들을 찾아내는 것이 몹시


어려웠다. 재판장은 바네싸 영이라는 여성 판사였다. 강인한 성격에 출중한 기량을 지닌 흑인 판사로서 연방정부 대법관 자리가 비면 틀림없이 추천될 것이라는 소문이 도는 인물이었다. 급한 성격에 잔재주 부리는 변호사들을 엄하게 다루기로 유명했다. 샌프란시스코 변호사들 사이에 '유죄가 확실한 의뢰인에 대한 판결에서 약간의 온정을 기대하려면 영 판사를 피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날, 영 판사는 검사와 변호인을 함께 사무실로 불렀다. "우선 재판의 진행 원칙을 두 분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사건은 아주 심각한 살인사건이므로 피의자가 공정하게 재판받을 수 있도록 각별히 배려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배려를 기화로 부당한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의 있습니까?" "없습니다, 판사님." "없습니다, 판사님." 거스 베너블은 검찰측 논고를 끝내고 있었다. "그래서, 배심원 여러분, 저희 검찰은 닥터 테일러가 자신의 환자였던 존 크로닌 씨를 살해했다는 것을 일말의 의혹도 없이 증명해 보일 것입니다. 그녀가 저지른 범죄는 단순한 살인이 아닙니다. 엄청난 액수의 돈 때문에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크로닌 씨를 살해하고 백만 달러를 차지한 것입니다." 잠시 멈추었다가 베너블은 논고를 매듭지었다. "앞으로 제시될 모든 증거를 확인하시면, 여러분들은 1 급 살인죄를 범한 피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배심원들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논고에 대한 반응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앞으로 제시될 증거나 증언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거스 베너블은 재판장에게 몸을 돌렸다. "재판장께서 허락하신다면 검찰측 증인으로 먼저 개리 윌리암스를 출두시키겠습니다." 증인이 증인선서를 하고 앉자 거스 베너블이 물었다. "당신은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에서 의료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습니까?" "맞습니다." "당신은 작년에 존 크로닌 씨가 입원했을 때 제 3 병동에서 일했었지요?" "그렇습니다." "그때 담당의사가 누구였나요?" "닥터 페이지 테일러였습니다." "존 크로닌 씨와 담당 의사가 어떤 사이였다고 생각합니까?" "이의 있습니다!" 알란 펜이 벌떡 일어났다. "검사는 지금 증인의 주관적 의견을 묻고 있습니다." "이의를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각도에서 얘기해 봅시다. 존 크로닌 씨와 담당 의사였던 페이지 테일러 사이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꼭 들으려고 해서 들은 건 아닙니다. 전 그 병동에서 늘 일했으니까요." "그럼 그 대화 내용이 어땠습니까?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가 이루어졌나요?"


"아닙니다." "그래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제 기억으로는, 크로닌 씨가 입원한 첫날 닥터 테일러가 진찰을 시작하자 그는..." 윌리암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저, 크로닌 씨의 말을 그대로 옮겨도 괜찮을까요?" "윌리암스 씨, 괜찮아요. 이 법정에 미성년자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있었던 대로 말해 보세요." "크로닌 씨는, '이 쌍년이 어디다 손을 대!' 하고 소리질렀어요." "아니, 정말로 그런 말을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외에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보고 들은 대로 얘기해 주십시오." "크로닌 씨는 닥터 테일러를 '그 쌍년'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예 옆에 오지도 못하게 했지요. 그녀가 병실에 들어서기만 하면 크로닌 씨는, '쌍년이 또 나타났군!' 아니면 '저 쌍년보고 나한테 손대지 말라고 해!' '왜 제대로 된 의사가 나타나지 않는 거야?' 라고 했었습니다." 거스 베너블은 잠시 말을 멈추고 피고석에 앉아 있는 페이지 테일러를 쳐다보았다. 배심원들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베너블은 서글프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젓고 나서 다시 증인을 향했다. "당신이 볼 때 크로닌 씨가 닫터 테일러에게 백만 달러를 줄 사람 같았습니까?" 알란 펜이 다시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이의 있습니다. 증인은 검사의 질문에 대답하십시오." 알란 펜은 페이지 테일러를 한번 쳐다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림도 없었어요. 크로닌 씨는 닥터 테일러를 무척 혐오하는 것 같았거든요." 다음 증인은 아서 케인 박사였다. 거스 베너블이 물었다. "케인 박사님, 당신은 존 크로닌 씨가 정맥주사에 인슐린이 투여돼 살해..." 그는 영 판사를 흘끔 쳐다보았다. "사망했을 때 병원 당직의사로서 그런 사실을 발견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인슐린 투여가 닥터 테일러의 행위혔다는 것을 확인했습니까?" "그랬습니다." "케인 박사님, 여기 닥터 테일러가 서명한 병원의 공식 사망진단서가 있습니다." 베너블은 서류 한 장을 집어서 케인에게 건네주었다. "그 서류를 좀 큰 소리로 읽어주시겠습니까?" 케인은 읽기 시작했다. "존 크로닌. 사망원인 - 대정맥 혈전(혈관 안에서 굳운 핏덩어리)에 의한 심근경색 때문에 발생한 질식사."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무슨 뜻인가요?" "이 사망진단서에는 환자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진단서는 닥터 테일러가 서명했지요?" "그렇습니다." "케인 박사님, 존 크로닌 씨의 사망원인이 정말로 심장마비였습니까?" "아닙니다. 인슐린 투여로 사망했습니다." "그렇다면 닥터 테일러는 치사량의 인슐린을 환자에게 투여하고 사실과 다른 사망진단서를 작성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병원장인 월러스 박사에게 보고했고, 월러스 박사는 사직당국에 보고하게 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건 내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케인은 공분을 느낀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의사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 인간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증언대에 올라온 것은 존 크로닌의 미망인이었다. 붉은 머리칼에 30 대 후반의 헤이절 크로닌은 수수한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지만, 관능적인 몸매는 감출 수 없었다. 거스 베너블이 물었다. "크로닌 부인, 지금 몹시 슬픈 상황에 있는 분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안됐지만, 배심원 여러분들께 사망하기 전 크로닌 씨와 부인의 관계를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커다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남편과 나는 아주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남편은 정말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언제나 내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했었지요." "크로닌 씨와 결혼한 지는 얼마난 됐습니까?" "2 년요. 하지만 존은 항상 그 2 년 동안 천구에서 산 것 같다고 했어요." "크로닌 부인, 혹시 당신 남편이 닥터 테일러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습니까? 아주 훌륭한 의사라든가, 아니면 자신에게 아주 친절하고 각별하게 신경을 써준다든가, 또는 그 의사가 아주 마음에 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없는데요." "한 번도 없습니까?" "네, 한 번도." "남편이 부인이나 부인의 형제들에게 유산을 전혀 남기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건 말도 안돼요. 존은 이 세사에서 제일 관대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갖게 해주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만약 자신이 죽으면..." 그녀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만약 자신이 죽으면, 나는 많은 재산을 상속받게 될 것이고,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영 판사가 말했다. "15 분간 휴정하겠습니다." 법정 뒤쪽에 앉아 있던 제이슨 커티스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페이지에 대한 여러 사람의 증언을 그냥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저 여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나와 결혼할 여자야.' 그는 생각에 잠겼다. 페이지가 체포되자 제이슨 커티스는 즉시 유치장으로 달려갔었다. "이건 말도 안돼. 반드시 무죄를 밝혀내야 돼." 그는 페이지를 위로하려 했다. "형사사건에 가장 유능한 변호사를 찾아봐야겠어." 알란 펜이라는 이름이 그의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다. 제이슨은 바로 알란 펜을 찾아갔다. "나도 이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보도를 읽었습니다." 펜이 말했다. "언론에서는 벌써 그녀가 돈 때문에 존 크로닌을 살해했다고 재판하고 선고까지 한 셈이에요. 게다가 그녀는 크로닌을 죽인 것을 인정하고 있더군요." "난 그녀를 너무 잘 알아요." 제이슨 커티스가 말했다. "페이지는 절대로,


절대로 돈 때문에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하여간, 죽인 것은 인정하고 있잖소?" 펜이 말했다. "그렇다면 결국 사건이 안락사 문제로 귀착되는데... 안락사는 캘리포니아에서는 불법이고, 미국 내 대부분 주에서도 법으로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락사 문제만큼은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내가 여의사를 자비의 천사로 미화시킬 수도 있고, 안락사시킨 것을 사랑과 온정의 행위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문제는 당신 애인이 자신에게 백만 달러의 유산을 남긴 환자를 죽게 했다는 데 있단 말입니다. 도대체 닭이 먼저요, 알이 먼저요? 그녀는 환자가 자신에게 백만 달러를 남겼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까?" "페이지는 유언이니 돈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이슨은 단호하게 말했다. 펜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 "좋아요. 그럼, 우연의 일치였다는 말이로군. 검찰측은 1 급 살인죄로 기소하고 사형을 구형할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이 사건을 맡아 변호해 주시겠습니까?" 펜은 주저했다. 제이슨 커티스가 페이지 테일러에게 푹 빠져서 그녀가 범죄를 저지를 수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 너무도 분명했다. '허기야 삼손도 델라일라를 철썩같이 믿었었지,' 그는 제이슨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 한심한 친구도 자기 머리칼이 이미 잘린 걸 모르고 있는 거 아냐?' 제이슨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좋아요. 맡아보지요. 하지만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재판에서는 악전고투하는 건 물론이고, 무죄판결을 얻어내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을 지금 분명히 밝혀둡니다." 알란 펜의 경고는 그래도 낙관적인 편이었다. 다음날 아침 재판이 재개되자 거스 베너블은 검찰측의 새로운 증인들을 계속 증언대에 세웠다. 먼저 간호사 한사람이 증언하기 시작했다. "존 크로닌 씨가, '난 틀림없이 수술대 위에서 죽게 될 거야, 너희들이 날 죽일 게 분명해. 그런 다음 너희들이 살인죄로 기소되기만 바랄 뿐이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다음은 로더릭 펠람이라는 변호사의 차례였다. 거스 베너블이 물었다. "당신이 닥터 테일러에게 크로닌 씨의 유산 백만 달러를 받게 되었다고 했을 때 그녀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글쎄, '그 사람은 내 환자였는데... 도의적으로 문제가 안될는지 모르겠네요.'라고 했습니다." "도의적인 문제가 있다고 그녀 스스로 인정했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래도 유산은 그냥 받기로 했지요?" "아, 네. 물론입니다." 알란 펜의 반대심문이 시작되었다. "펠람 씨, 닥터 테일러가 당신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 "먼저 전화해서 '존 크로닌 씨가 당신에게 백만 달러의 유산을


남겼습니다.'하고 알려주었나요?" "아닙니다. 저는..." "그렇다면 닥터 테일러를 찾아가서 직접 유산 얘기를 했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그 얘기에 대한 닥터 테일러의 반응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겠군요?" "그렇습니다." "막대한 유산을 받게 되었다고 알려주었을 때 닥터 테일러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글쎄... 상당히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펠람 씨, 감사합니다. 더 이상 질문은 없습니다." 재판이 시작된 지 벌써 2 주가 지났다. 거스 베너블은 검찰측 증거를 보강시켜 줄 증인들을 세워 논고를 매듭지으려 했다. "재판장님, 검찰은 알마 로저스 부인을 증인으로 신청하겠습니다." 증언선서를 마친 증인이 자리에 앉자 베너블이 물었다. "로저스 부인,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저는 로저스 부인이 아닙니다. 독신이에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코나쉬 여행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 여행사는 해외 관광여행 예약, 호텔 예약, 기타 해외여행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주선해 주지요?" "그렇습니다." "지금 저쪽에 앉아 있는 피고를 잘 보십시오. 혹시 본 적이 있는 사람입니까?" "아, 기억납니다. 2 - 3 년 전에 저희 여행사에 들러서 저하고 여행 상담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때 무슨 얘기를 했나요?" "제 기억으로는 런던과 파리 여행에 대해 상담했었습니다. 참, 그리고 베니스도 가보겠다고 했습니다." "패키지 투어를 하겠다고 했습니까?" "아뇨. 항공편은 일등석, 호텔은 특급으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요트를 대절하는 방법도 물었습니다." 법정은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요해졌다. 거스 베너블은 검찰측 책상에 다가가서 서류철을 집어들었다. "경찰이 이 안내책자들을 병원에 있는 닥터 테일러의 사물함에서 발견했습니다. 여기에는 런던, 파리, 그리고 베니스의 관광안내와 그곳에 있는 특급 호텔에 관한 정보가 있습니다. 항공편 안내도 있고, 고급 요트 대절하는 비용을 여러 가지 비교해 놓은 것도 들어 있습니다." 법정은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검사는 서류철을 열었다. "여기에 대절할 수 있는 고급 요트의 이름과 그 가격이 적혀 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크리스티나 호... 1 주일에 2 만 6 천 달러, 운항비용 별도... 리졸루트 타임 호... 1 주일에 2 만 4 천 5 백 달러... 럭키 드림 호... 1 주일에 2 만 7 천 3 백 달러..." 그는 고개를 들었다. "럭키 드림


호에 펜으로 표시해 놓았더군요. 페이지 테일러는 1 주일에 2 만 7 천 3 백 달러가 드는 초호화 요트를 이미 선택해 놓은 것입니다. 아직 범행대상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알란 펜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의뢰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책상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은 더 창백하게 보였다. "이 서류를 증거물 A 로 보존 신청하겠습니다." 베너블은 알란 펜에게 고개를 돌리고 미소지었다. "제 심문은 끝났습니다. 반대심문 하실 차례입니다." 펜은 일어서면서 상황을 분석하느라고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로저스 여사, 요즘 여행사가 잘됩니까?" "그게 무슨 말씀인지?" "지금 사업이 잘되는가를 물어본 것입니다. 코니쉬 여행사는 상당히 규모가 큰 여행사일 텐데요?" "그렇습니다. 우리 업계에서는 상당히 큰 규모이지요." "그렇다면 매일 여행상담 하러 찾아오는 고객의 수도 엄청나겠군요?" "물론이지요." "하루에 대여섯 명 정도 여행상담을 하십니까?" "말도 안돼요!" 그녀의 표정이 모욕당했다는 듯 변했다. "하루에 50 명 정도의 고객이 여행상담을 하러 옵니다." "하루에 50 명이라구요?" 펜은 놀랐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거참, 대단하군요. 그런데 지금 2 - 3 년 전에 피고와 상담한 얘기를 한단 말이지요? 50 명씩 9 백일 동안 상담하셨다면 대략 4 만 5 천 명 정도가 되는데요?" "그렇게 되겠지요." "그 4 만 5 천 명 중에서 닥터 테일러와 한 상담을 지금 그렇게 정확하게 기억하신다니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그건 그녀와 두 친구가 유럽 여행을 한다는 것에 너무나 흥분하고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서 저도 흐뭇했었거든요. 꼭 수학여행을 앞둔 소녀들 같았어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사실 고급 요트를 대절할 수 있는 사람들로 보이지는 않았었거든요." "그랬군요. 그럼 상담을 하고 여행 안내책자를 얻어가지고 간 사람들 모두가 그대로 여행합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지요. 그러나..." "닥터 테일러가 실제로 여행 예약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안 했습니다. 최소한 우리 여행사에는 안 했습니다. 그녀가..." "다른 여행사에도 예약한 적이 없어요. 그냥 안내책자를 얻고 상담해 본 것뿐이지요." "맞아요. 그녀는..." "그렇다면 런던이나 파리로 여행하는 것하고는 거리가 먼 얘기 아닙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감사합니다. 더 이상 질문 없습니다." 베너블은 재판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벤자민 월러스 박사를 증인으로 채택하겠습니다." "월러스 박사님, 당신은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의 병원장이시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닥터 테일러 개인과 그녀의 근무태도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닥터 테일러가 살인죄로 기소되었을 때 그 사실에 대해서 놀랐습니까?" 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의 있습니다. 재판장님! 그 질문에 대한 월러스 박사의 증언이 받아들여지면 안됩니다." "왜 이 질문을 했는지 설명을 들으시면..." 베너블이 대답했다. "제 설명을 들으시면 증언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좀더 들어보지요." 영 판사가 말했다. "하지만 베너블 씨, 법정의 원칙을 왜곡시키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럼 질문을 좀 바꾸어 보겠습니다." 베너블이 계속했다. "월러스 박사님, 모든 의사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해야 되지요,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선서에는 이런 문구가 포함되어 있지요?" 베너블은 종이 한 장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절대로 부도덕하거나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며..." "맞습니다." "닥터 테일러의 근무태도에서 그녀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까?" "이의 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그런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설명해 주십시오." "닥터 테일러가 반드시 수혈해야 된다고 판단한 환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문제는 환자의 가족이 수혈을 허락하지 않은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닥터 테일러는 가족의 허락 없이 수혈을 강행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합법적입니까?" "물론 아니지요. 법원의 허가 없이 강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닥터 테일러는 어떻게 강행했나요?" "먼저 수혈한 다음 법원의 허가를 나중에 얻어내고 날짜를 변조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병원기록까지 변조했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알란 펜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페이지를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또 얼마나 더 불리한 증언이 나올까? 왜 나한테 미리 다 털어놓지 않은 거지?' 페이지 테일러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동요를 기대했던 모든 사람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얼음장 같은 표정이군.' 수석 배심원은 생각했다. 거스 베너블은 재판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재판장님, 아시다시피 검찰측은 로렌스 바커 박사를 증인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커 박사는 최근 뇌출혈로 쓰러져 아직도 이 법정에 출두해서 증언할 만큼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검찰은 바커 박사와 같이 일했던


의사들과 병원 직원들을 증인으로 채택하겠습니다." 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의 있습니다! 그런 증인들의 증언이 어떻게 이 재판에서 진실을 밝혀내는 데 도움이 될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바커 박사는 법정에 출두할 수 없는 상황이고, 또 바커 박사가 재판을 받는 것도 아닌데..." 베너블이 끼어들었다. "재판장님, 저는 좀더 확실하게 진실을 밝히는 데는 지금까지 들어온 증언은 물론 방금 신청한 증인들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증언은 피고가 의사로서 얼마나 소양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영 판사는 설득당한 표정이 아니었다. "좋아요, 계속해 보세요. 그러나 여기는 법정이지 강이나 호수가 아닙니다. 검찰이 계속 그물을 던져서 뭔가 건져내려고 하는 것이 확실해지면 즉시 중단시키겠습니다. 다음 증인을 부르세요." "감사합니다. 재판장님." 거스 베너블은 법정 서기에게 몸을 돌렸다. "매튜 피터슨 박사를 증인으로 채택하겠습니다." 60 대의 품위 있는 신사가 증언대로 다가왔다. 증인선서를 마치고 증언대에 앉았다. 거스 베너블이 말문을 열었다. "피터슨 박사님,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에 근무하신 지 얼마나 됐습니까?" "8 년 됐습니다." "전공 분야가 무엇입니까?" "심장외과입니다." "그럼 오랫동안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로렌스 바커 박사와 함께 일한 적이 있었습니까?" "물론이지요. 여러 번 있었습니다." "바커 박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여러 사람이 저와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니까요. 드베키 박사와 쿨리 박사만 제외하면 바커 박사는 세계 제일의 심장외과의입니다." "당신은 닥터 테일러가..." 베너블은 서류철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랜스 켈리라는 환자의 심장수술을 할 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날 아침 수술실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피터슨 박사는 잠시 주저했다. "수술 도중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환자의 맥박이 끊기기 시작했지요." "맥박이 끊기기 시작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심장이 멎었다는 얘기입니다. 모두가 박동을 살려내려고 안간힘을 썼지요. 그리고..." "그때 바커 박사를 불렀습니까?" "그랬습니다." "바커 박사가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에 수술실에 들어왔습니까?" "그렇습니다. 수술이 끝나갈 무렵에 들어왔지요. 하지만 이미 더 손을 쓸 여지가 없었지요. 환자의 심장을 다시 박동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때 바커 박사가 닥터 테일러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그 사람은 속이 상하고 화가 나서 그랬겠지만..." "바커 박사가 닥터 테일러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커 박사의 말을 그대로 해주십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법정 밖에서 천둥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강풍이 불어오면서 법원 건물 지붕에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바커 박사는, '네가 이 사람을 주였어.'라고 했습니다." 방청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영 판사는 의사봉을 쾅쾅 내리쳤다. "조용히들 하세요. 여러분들 질서의식이 이 정도밖에 안됩니까? 한 번만 더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모두 비가 오든 말든 법원 건물 밖으로 퇴정시키겠습니다." 거스 베너블은 방청석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모두 잠잠해지자 질문을 계속했다. "바커 박사가 닥터 테일러에게, '네가 이 사람을 죽였어.'라고 한 것이 확실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바커 박사의 의학적 의견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박사님, 검찰의 심문은 끝났습니다." 그는 알란 펜에게 몸을 돌렸다. "반대심문 있으십니까?" 펜은 일어나서 증언대로 다가갔다. "피터슨 박사님, 제가 직접 수술실에 들어가 수술과정을 본 적은 없지만, 심장수술같이 심각한 수술이 진행될 때는 모두 상당히 긴장하겠지요?" "맞습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럴 때 수술실 안에는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서너 명 정도 되나요?" "아뇨, 더 많지요. 최소한 여섯 명은 넘습니다." "확실합니까?" "그렇습니다. 언제나 수술의가 두 사람 있지요. 한 사람은 수술을 주관하고 다른 사람은 보조 역할을 합니다. 대개 마취 전문의도 두 사람이 참여하게 되고, 수술보조 간호사도 있지요. 그리고 또 한 간호사가 수술실을 돌아다니면서 진행을 돕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수술 진행과정은 상당히 소란스럽고 복잡하다는 말씀이군요? 담당의사가 지시를 내리고 도움을 청하고 하느라고 소란스럽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듣기에는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음악을 트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하던데요?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랜스 켈리가 죽을 때 바커 박사가 수술실에 들어왔다고 했는데, 그 때문에 혼란이 더 심해진 건 아닙니까?" "글쎄요, 모두가 환자의 심장을 박동시켜 보려고 정신 없었지요." "많이 소란스러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주 소란스러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럽고 소란한 와중에서, 게다가 음악까지 틀어져 있는데 박사님은 바커 박사가 닥터 테일러에게, '네가 이 사람을 죽였어.'라고 한 말을 정확하게 들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게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혹시 잘못 들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요?" 피터슨 박사는 한숨을 쉬었다. "바커 박사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그 사람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두드려 봐도 신통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질문 없습니다." 페이지 테일러의 입장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알란 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제 사태는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데니스 베리가 증언대에 올랐다. "당신은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의 간호사이지요?" "맞습니다." "그 병원에서 언제부터 일했지요?" "5 년 전부터입니다." "그 동안 닥터 테일러와 바커 박사 사이의 대화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 번 있습니다." "그 내용을 좀 얘기해 주십시오." 간호사 베리는 닥터 테일러를 쳐다보고 잠시 머뭇거렸다. "글쎄요... 바커 박사님은 상당히 거칠게..." "베리 간호사, 바커 박사의 태도를 묻는 게 아닙니다. 그가 닥터 테일러에게 한 말을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한참 동안 말이 끊겼다. "글쎄요... 언젠가는 닥터 테일러가 형편없이 무능하다고 한 적도 있었고, 그리고..." 거스 베너블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커 박사가 닥터 테일러를 형편없이 무능하다고 했단 말입니까?"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바커 박사가 닥터 테일러에 대해서 다른 말을 한 것은 없습니까?" 증인은 잠시 주저했다. "별로 기억나는 게 없는데요..." "베리 양, 증인선서 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돼요." "한번은 그분이 이렇게 말한 적도 있..." 뭐라고 말하는지 나중 부분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데, 좀더 크게 얘기해 주십시오. 바커 박사가 뭐라고 했다구요?" "그분이... 그분 말이 닥터 테일러한테는 집에서 기르는 개의 수술도 맡길 수가 없다고 했어요." 방청객들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분의 말뜻은..." "우리는 바커 박사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페이지 테일러에게 집중되었다. 방청객들과 기자들은 검사와 변호인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거스 베너블은 흰색 정장, 알란 펜은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페이지 테일러라는 졸을 사이에 두고 흰색은 잡아먹으려 덤비고, 검은색은 안 먹히려고 안간힘 쓰는 체스판이 벌어진 것이다. 두 사람은 아슬아슬한수를 조심스럽게 두어 나가고 있었다. 페이지 테일러에 대한 검찰의 논고는 막강했다. 그러나 알란 펜도 형사법정에서 놀라운 실적을 가진 변호사였다. 이제 펜이 변호인측 증인을 채택하고 증거를 제시할 차례가 되었다. 과연 이 사건에서도 자신의 명성을 지켜낼 수 있을까? 알란 펜은 우선 페이지 테일러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모든 사람이 이 순간을 기다려 왔었다. "닥터 테일러, 존 크로닌 씨가 당신의 환자였습니까?" "그렇습니다." "크로닌 씨는 어떤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 그분을 좋아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병이 얼마나 중한지 알고 있었지만 의연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분은 심장암으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집도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수술과정에서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심장을 절개해 보니 악성 종양이 다른 기관으로 많이 전이되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 암은 이미 온몸에 퍼졌다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암세포가 임파선을 타고 전신에 전이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치료 가능성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어떤 방법으로든 그 환자는 나을 수 없었다는 말입니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 존 크로닌 씨는 인공적인 생명연장장치에 연결되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닥터 테일러, 당신은 존 크로닌 씨의 생명을 끊기 위해서 치사량의 인슐린을 주사했습니까?" "그랬습니다." 방청객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참 대단한 여자야,' 거스 베너블은 생각했다. '환자에게 차 한잔 준 것처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하니...' "왜 존 크로닌씨의 생명을 끊었는지 배심원들에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본인이 원했기 때문입니다. 저한테 계속 애원했었거든요. 어느 날 밤 늦은 시간에 저를 찾았습니다. 가보니까 엄청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투여한 진통제가 더 이상 효과가 없었지요." 그녀는 차분하게 말을 계속했다. "그분은 도저히 더 이상 고통을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며칠밖에 더 살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분은 제발 편안하게 가도록 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결국 그분의 청을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닥터 테일러, 그 사람의 생명을 끊는 데 주저하지는 않았습니까?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페이지 테일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때 크로닌 씨의 상황을 보았다면... 며칠 더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인슐린을 어떻게 주사했지요?" "환자의 정맥에 연결되어 있는 정맥 주사선에 투여했습니다." "그렇게 투여했을 때 환자가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까?" "아뇨, 고통 없이 그냥 잠들어 버리지요." 거스 베너블이 벌떡 일어났다. "이의 있습니다! 피의자가 잠들어 버린다고 한 것은 죽는다로 고쳐져야 합니다. 저는..." 영 판사가 다시 의사봉을 내리쳤다. "베너블 씨, 재판정에 처음 나왔습니까? 아직 재판절차도 몰라요? 당신이 충분히 반대심문 할 기회가 있잖아요. 아무 말 말고 자리에 앉으세요." 검사는 배심원 쪽을 쳐다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다음 자리에 앉았다. "닥터 테일ㄹ, 존 크로닌 씨에게 인슐린을 투여했을 때 그 사람의 유언 속에 당신에게 백만 달러를 상속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몰랐습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깜짝 놀랐다구? 연기가 보통이 아니구만.' 거스 베너블이 생각했다. "그렇다면 크로닌 씨와 돈이나 선물 같은 것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까? 혹시 무엇인든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페이지 테일러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크로닌 씨와 사이가 좋았다고 했잖습니까?" "그랬습니다. 환자의 상태가 그렇게 심각할 때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깊어지게 되지요. 그분은 사업문제나 가정문제를 저에게 털어놓았었습니다." "그 사람한테 뭔가를 기대할 상황은 아니었군요?"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크로닌 씨가 당신을 신뢰하고 존경했기 때문에 그런 유산을 남긴 것으로 해석되는군요. 닥터 테일러, 감사합니다." 펜은 거스 베너블에게 몸을 돌렸다. "반대심문 하실 차례입니다." 펜이 변호인 책상에 가서 앉을 때, 페이지 테일러는 법정 뒤쪽을 쳐다보았다. 제이슨이 뒷자리에 앉아서 힘을 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하니가 앉아 있었고, 하니 옆에는 웬 낯선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바로 케트가 앉아 있어야 될 자리였다. '케트가 살아 있다면... 그렇게 죽고 말았으니...' 페이지는 생각했다.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거스 베너블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증언대로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기자석은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고 모두가 취재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이제 쓸 거리가 점점 더 많아질거야.' 베너블은 생각했다. 그는 증언대의 페이지 테일러를 말없이 한참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아주 가볍게 물었다. "닥터 테일러... 존 크로닌씨가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에서 당신이 살해한 첫 환자입니까?" 알란 펜은 격분한 표정으로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재판장님, 이건..." 영 판사는 벌써 의사봉을 내리치고 있었다. "이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녀는 검사와 변호인에게 동시에 말했다. "15 분간 휴정하겠습니다. 두 사람 다 내 방으로 좀 들어오십시오." 두 사람이 방에 들어가자 영 판사는 먼저 거스 베너블에게 말했다.


"재판장님,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 눈엔 저쪽에 대형 천막이라도 보입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녀는 칼날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법정은 서커스장이 아니에요. 당신이 그런 곡예로 그런 감정적인 표현을 쓸 수 있습니까?" "재판장님,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질문도 표현을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안돼요!" 영 판사가 다시 못을 박았다. "질문의 표현뿐 아니라, 당신의 태도도 바꾸어야 돼요. 한번만 더 그런 재주를 부리면 즉시 재판무효를 선언해 버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재판장님." 다시 법정으로 돌아와 재판이 속개되었을 때, 영 판사는 먼저 배심원들에게 말했다. "배심원 여러분은 아까 검사가 했던 말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녀는 검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대심문 계속하십시오." 거스 베너블은 다시 증언대로 다가갔다. "닥터 테일러, 당신은 당신이 살해한 환자가 백만 달러의 유산을 남겼다고 들었을 때 상당히 놀랐었지요?" 알란 펜이 다시 벌떡 일어났다. "이의 있습니다!" "이의를 받아들입니다." 영 판사는 베너블에게 고개를 돌렸다. "검사는 재판장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재판장님,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는 다시 증언대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그 환자와 특별히 좋은 관계였던 모양이지요? 내 말은 입원하기 전에는 전혀 모르던 사람이 백만 달러의 유산을 남긴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페이지 테일러는 약간 얼굴을 붉혔다. "우리 사이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 이상이 아니었다는 말입니까? 사랑하던 아내와 가족에게는 전혀 유산을 남기지 않고, 백만 달러라는 막대한 유산을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사람에게 남겼는데도 말입니까? 당신은 크로닌 씨가 사업문제 등을 털어놓았다고 했는데..." 영 판사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경고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베너블 씨..." 검사는 항복한다는 듯 두 손을 들어올리고 다시 증언대를 향했다. "그럼 크로닌 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단 말이군요? 그는 자신의 사생활에 관한 얘기를 했고, 당신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두 사람의 관계를 요약하면 내 말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당신에게 백만 달러의 유산을 남겼단 말입니까?" 페이지는 법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베너블은 검찰측 책상으로 돌아가서 갑자기 몸을 돌리며 증언대를 향했다. "닥터 테일러, 당신은 존 크로닌 씨가 당신에게 유산을 남긴 사실과 자신의 가족에게는 한푼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증언했었지요?"


"그랬습니다." "도대체 엠바카데로 시립병원 레지던트의 연봉이 얼마나 됩니까?" 알란 펜이 벌떡 일어났다. "이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이의를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증인은 질문에 대답하십시오." "3 만 8 천 달러입니다." 베너블은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요즘 세상에 얼마 안되는 수입이로군요. 거기서 세금과 기타 공과금을 제하고 기초생활비를 계산하면 남는 게 없을 텐데? 그런 수입으로 런던이나 파리, 또는 베니스까지 호화로운 휴가를 즐기러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렇다면 도저히 그 정도의 여행 경비를 부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계획은 할 수도 없었던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알란 펜이 다시 일어났다. "재판장님..." 영 판사가 검사에게 물었다. "베너블 씨,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저는 단지 피고가 그런 호화스러운 여행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입니다." "그건 벌써 대답이 나왔잖아요." 알란 펜은 뭔가 분위기를 바꿔야 된다고 느꼈다. 속으로는 재판 결과에 대한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겉으로는 방금 복권에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밝은 표정으로 증언대에 다가갔다. "닥터 테일러, 검찰측이 제시한 여행 안내책자를 코니쉬 여행사에서 얻어온 것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그러면 유럽으로 여행한다든가 호화 요트를 대절한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습니까?" "물론 없습니다. 그건 우리들 사이의 장난에 불과했어요.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을 꿈 꾸어본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친구들과 그런 공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사기가 올라간다고 생각했었지요. 우린 그때 모두 너무 지쳐 있어서... 그런 공상을 안내책자까지 얻어가며 하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알란 펜은 배심원들의 표정을 슬쩍 훔쳐보았다. 페이지 테일러의 증언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거스 베너블은 다시 반대심문에 들어갔다. "닥터 테일러, 당신은 로렌스 바커 박사를 잘 알지요?" 갑자기 머릿속에서 갖가지 기억들이 떠올랐다. '로렌스 바커를 죽여 버리고 싶어! 아주 천천히 죽일 거야. 먼저 온갖 고통을 당하게 하고 나서... 그 다음에 죽여버릴 거야.' "잘 압니다." "어떻게 알지요?" "지난 2 년 동안 같이 일해 왔습니다." "당신 생각에 바커 박사가 유능한 의사라고 생각됩니까?" 알란 펜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이의 있습니다. 재판장님. 증인은..." 그러나 펜이 말을 마치거나 영 판사가 입을 열기도 전에 페이지가


대답했다. "그분은 유능한 정돠 아닙니다. 세계 정상의 심장외과 의사입니다." 펜은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충격에 입을 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바커 박사는 세계에서 가장 고명한 심장외과의 중 한 사람입니다. 그분은 개인적으로 환자가 엄청나게 많은데도 매주 3 일간은 반드시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렇다면 의학에 관한 그분의 판단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른 의사의 능력에 대한 판단도 정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펜은 페이지가, '잘 모르겠습니다.' 하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그녀는 잠시 주저했다. "그렇습니다." 거스 베너블은 배심원을 향했다. "지금 피고가 바커 박사의 의학적 판단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말을 모두 들으셨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바커 박사의 평가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녀의 능력에 대한 혹평을 말입니다." 알란 펜은 격분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이의 있습니다!" "이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검사의 말은 벌써 배심원들의 뇌리에 심어진 다음이었다. 재판이 잠시 휴정되었을 때, 알란 펜은 제이슨을 화장실로 끌어들였다. "도대체 날 골탕먹이려고 작정이라도 했소?" 펜은 볼멘소리로 말했다. "존 크로닌은 그녀를 혐오했고, 바커 박사도 그녀를 형편없는 의사라고 했다지 않소? 처음부터 나한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있는대로 자세히 얘기하라고 하지 않았소? 그래야만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니오? 이런 식으로는 내가 도울 방법이 없소. 도대체 당신 여자 친구는 나한테 밝히지 않은 게 얼마나 더 있는지.... 나는 지금 암중모색을 하는 기분이오. 게다가 증언대에서 입을 열기만 하면 불리한 소리를 해대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처음이야!" 그날 오후, 제이슨 커티스는 페이지를 면회했다. "닥터 테일러, 면횝니다." 제이슨이 페이지의 감방으로 들어갔다. "페이지..." 그녀는 제이슨에게 몸을 돌렸다. 눈물을 가까스로 참는 얼굴이었다. "재판이 아주 불리하게 진행되지요?" 제이슨은 억지로 미소를 띠었다. "변호사가 말했잖아... 재판이라는 것은 끝나 봐야 아는 거라구. 걱정할 것 없어." "제이슨, 당신은 내가 크로닌씨를 돈 때문에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죠? 난 정말 그 사람을 편하게 해주려고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한 것뿐이에요." "물론 당신 말을 믿지." 제이슨은 힘주어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 제이슨은 그녀를 포옹했다. '이 여자를 잃을 수는 없어.' 제이슨은 생각했다. '절대로 잃을 수는 없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그런 다음 우리는 영원히 같이 있게 될 거야." 페이지는 제이슨에게 안겨 생각했다. '영원한 것은 없어, 절대로 없어, 어떻게 모든 것이 이렇게 잘못될 수 있었을까? 이렇게까지...'


제1부 제1장 샌프란시스코 1990 년 7 월 "케이트 헌터." "네." "베티 루 태프트." "네." "페이지 테일러." "네."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의 넓지만 볼품없는 강당에는 백 명이 훨씬 넘는 레지던트 초년생들 이 모여 있었다. 이제 막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 병원에서 전문의 과정을 밟게 된 이들 중 여자는 단 세 명뿐이었다.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은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을 통 틀어 가장 오래 된 벼원 중 하나였다. 1989 년의 대지진 때 이 병원이 운 좋게도 피해를 입 지 않은 것은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에게 병주고 약주는 셈이 되었다. 세 블록이나 차지하고 있는 이 거대한 병원은 외벽의 화강암과 벽돌이 오랜 세월 동안 쌓인 먼지에 잿빛으로 변해 음산한 모습이었다. 본관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대기실이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이나 방문객을 위한 나무 벤치가 늘어서 있었다. 실내 벽은 오랜 세월 계속 덧칠해 온 페인트가 여러 군데 벗겨져 있었고, 바닥은 수많은 환자들의 휠체어와 목발 때문에 울퉁불퉁해졌다. 세월의 흐름을 실감할 수 있는 고색창연한 분위기가 병원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은 그 자체가 도시 안의 작은 도시였다. 종업원만도 9 천 명이 넘었다. 병원 소속 전문의가 4 백 명, 자원봉사자로 시간을 할애해 주는 전문의가 1 백 5 십 명, 레지던트가 8 백 명, 간호사가 3 천 명, 그리고 각 분야의 기술자, 보조원 등이었다. 병원 응급실과 별도의 에이즈 병동, 그리고 환자 2 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입원실이 있었다. 병원장인 벤자민 월러스 박사는 전문의 수련과정을 밟게 된 레지던트 초년생들을 모아놓고 환영인사 겸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월러스는 전형적인 출세지향적 인물이었다. 큰 키에 품위 있는 외모, 의사로서의 능력은 크게 떨어졌지만 매끄러운 대인관계를 무기로 곡예하듯 병원장 자리를 지켰다. "오늘부터 우리 병원에서 일하게 된 레지던트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의과대학 시절 주로 시체의 인체실험을 통한 의학지식을 습득했고, 지난 2 년 동안은 전문의들의 지도와 감독하에서 환자들을 돌보아왔을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가 환자를 책임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진정한 의미의 의사가 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정열을 쏟아야만 의사의 길을 낙오하지 않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열심히 주목하고 있는 레지던트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 중에는 각 분야의 외과의로서 수술을 담당할 사람도 있고, 내과 전문의를 지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 분야별로 선임 레지던트가 여러분의 임무를 정해 주고 각자 맡은 일에 정착될 때까지 돌보아줄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행동 하나하나가 환자의 생사에 직결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듣고 있었다.


"엠바카데로는 시립벼원입니다. 따라서 병원을 찾아오는 어떤 환자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환자의 대부분은 서민입니다. 비싼 개인병원에 갈 경제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 병원을 찾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곳의 응급실은 24 시간 정신없이 돌아갑니다. 여러분은 박봉에 고된 업무로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개인병원으로 갔다면 레지던트 첫해는 잔심부름이나 하게 될 것입니다. 2 년째는 수술 집도의 옆에서 도구나 건네주게 될 것이고, 3 년째에야 전문의 감독하에 간단한 수술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그렇게 편안한 병원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수술을 한번 보고 나면 즉시 혼잦 집도해야만 되고 그 다음에는 신참을 가르쳐야 되는 형편입니다." 월러스 박사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 병원은 의사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따라서 빠른 시일 내에 여러분 스스로의 책임하에 수술을 맡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의문점이 있으면 질문해도 좋습니다." 듣고 있던 레지던트 모두가 오만 가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한 사람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질문 없습니까? 좋습니다. 여러분의 업무는 내일부터 시작됩니다. 아침 5 시 30 분에 본관 안내소에 모이도록 하십시오. 그럼 행운을 빌겠습니다." 월러스 박사의 연설이 끝났다. 모두들 출구로 몰려가면서 흥분과 긴장에 들뜬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여자 레지던트 세 사람은 서로 가까이 서 있었다. "아니, 다른 여자 레지던트는 모두 어디 갔죠?" "아마 우리 셋뿐인가 봐요." "이건 의과대학의 재판이잖아? 완전히 남자판이야! 이 병원은 아직도 중세기를 벗어나지 못했어!" 마지막으로 말한 사람은 육 척에 가까운 키에 강인해 보이는 몸매의 흑인 여자였다. 체격은 컸지만 동작이 무척 우아했고 얼굴도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었다. 그녀의 자세, 침착하고 뚜렷한 눈길, 그리고 동작 하나하나가 이지적이고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나는 케이트 헌터예요. 모두 케트라고 부르죠." "난 페이지 테일러예요." 상냥하지만 이지적이고 자신만만해 보이는 젊은 여자가 말했다. 두 사람은 세 번째 여자를 쳐다보았다. "베티 태프트예요. 모두들 하니라고 불러요." 그녀는 부드러운 남부지방 사투리로 말했다. 부드러운 회색 눈에 순진해 보이는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고향이 어디예요?" 케트가 하니에게 물었다. "테니시 주, 멤피스 시예요." 두 사람은 페이지를 쳐다보았다. 페이지는 복잡한 설명을 피하고 알아듣기 쉽게 대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보스톤." "난 미네소타 주 미니아폴리스 출신이에요." 케트가 말했다. '대강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뭐.' 그녀는 생각했다. 페이지가 말했다. "우리 모두 고향에서 멀리 온 사람들이네요. 지금 숙소가 어디예요?" "형편없는 싸구려 호텔에 묵고 있어요." 케트가 대답했다. "어디 살 만한


데를 찾아볼 시간이 있어야지..." 하니가 말했다. "나도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갑자기 페이지의 얼굴이 밝아졌다. "내가 오늘 아침에 아파트를 좀 보러 다녔어요. 그 중에 맘에 쏙 드는 근사한 집이 있었는데 너무 크고 비싸서 나한테는 과분했어요. 그런데 침실이 세 개나 있었거든요..."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리 셋이 같이 살게 되면..." 케트가 말했다. 아파트는 마리나 구역 필버트 가에 있었다. 세 사람이 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침실 세 개에 욕실이 두 개, 새 카펫과 세탁기가 있었고, 전용 주차장에다 별도의 관리비도 없었다. 가구는 싸구려 백화점에서 들여놓은 구형이었지만 필요한 것은 다 있었고, 깨끗하게 사용한 것이었다. 아파트를 다 둘러본 다음, 하니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아주 훌륭해 보이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케트가 말했다. 두 사람은 페이지에게 얼굴을 돌렸다. "좋아요. 우리 같이 살아요." 그날 오후 세 사람은 그 아파트로 이사했다. 관리인이 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래, 병원에서 일하게 됐다구요?" 관리인이 물었다. "간호사들입니까?" "의사예요." 케트가 말했다. 관리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케트를 쳐다보았다. "의사라구? 아니, 진짜 의사란 말이오?" "네, 진짜 의사예요." 페이지가 대답했다. 관리인은 혀를 끌끌 찼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몸이 아프면 여의사를 찾아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몸이 자주 아프면 안되겠네요." "텔레비전은 없나요?" 케트가 물었다. "안 보이는데요?" "이 아파트는 텔레비전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요. 원한다면 하나 구입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럼 즐겁게들 지내기 바랍니다. 아가씨들... 아니, 의사 여러분." 관리인은 소리없이 웃으며 나갔다. 세 사람은 멀어져 가는 관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케트가 그의 목소리를 흉내냈다. "간호사들입니까?" 그녀는 코웃음쳤다. "저런 남성우월주의자 같으니... 자, 이제 침실을 배정해야겠어요." "난 아무래도 좋아요. 먼저 고르세요." 하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침실 세 개를 다 둘러보았다. 주인의 침실로 꾸며진 방이 다른 두 방보다 크고 좋았다. 케트가 말했다. "페이지, 당신이 이 방을 쓰는 게 어때요? 이 아파트는 당신이 찾았잖아요." 페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그들은 모두 자기 방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페이지는 여행 가방에서 작은 액자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30 대 초반의 남자 사진이었다. 잘생긴 얼굴에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어 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페이지는 액자를 편지 뭉치와 함께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았다. 케트와 하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녁때가 됐는데 식사하러 나가지


않을래요?" "그러죠." 페이지가 말했다. 케트가 침대 옆 탁자 위의 사진을 보고 물었다. "누구예요?" 페이지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결혼할 사람이에요. 알프레드 터너라고, 세계보건기구 의사예요.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일하고 있는데, 머지않아 샌프란시스코로 날 찾아올 거예요." "참 복도 많네요..." 하니가 부럽다는 듯 말했다. "정말 좋은 사람 같아 보여요." 페이지는 하니를 쳐다보았다. "애인 있어요?" "아뇨. 난 남자복이 별로 없나 봐요." 케트가 말했다. "이제 엠바카데로에서는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세 사람은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타란티노라는 이태리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의 배경과 살아온 얘기를 나누었지만 왠지 다 털어놓게 되지는 않았다. 깊은 사연은 접어두고 흔히 할 수 있는 얘기만 했다. 아직 서로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에 관한 얘기를 어디까지 해야 될지 조심스럽게 더듬어보는 것 같았다. 그 중에서도 하니는 별로 말이 없었다. '상당히 수줍어하는 성격인가봐.' 페이지는 생각했다. '저렇게 연약해 보일 수가... 멤피스에서 실연이라도 당했나 보지?' 페이지는 케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자신만만하고 품위 있어 보여. 대화하는 태도나 내용도 아주 세련되었고, 가정교육이 잘 된 훌륭한 집안 출신인 것 같아.' 한편, 케트도 페이지를 보며 나름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어려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부잣집 딸일 거야. 인물만 가지고도 편안하게 지내왔을 것 같아.' 하니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두 사람 다 자신감에 차 있고 유능해 보이는데. 저들에게는 레지던트 생활이 별로 어렵지 않을 거야.' 세 사람 모두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왔지만, 페이지는 너무 흥분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앞으로의 병원생활을 생각해 보았다. 창 밖에서 자동차 부딪히는 소리에 이어 사람들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페이지에게는 그 소리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싸울 때 지르는 소리, 그리고 콩볶듯 쏘아대던 총소리처럼 들렸다. 그녀의 생각은 원주민 부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던 동아프리카의 작은 마을로 돌아갔다. 페이지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 "우릴 모두 죽이려는 거예요!" 아버지는 페이지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우리를 해치지 않을 거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도우려고 여기에 왔잖니. 그들도 우리가 친구라는 걸 알고 있어." 그때 갑자기 한쪽 부족의 추장이 거실로 뛰어들어와... 하니는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엄청나게 멀리 떠나왔어. 다시는 그곳에 돌아갈 일이 없겠지. 다시는...' 그녀의 귀에는 아직도 보안관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립턴 목사 집안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이번 사건은 단순한 자살로 처리될거야. 하지만 너 같은 계집애는 당장 이곳에서 꺼져버려! 그리고 다시 돌아올 생각은 아예


하지 마!" 케트는 침대에 누워 창 밖을 내다보면서 도시의 소음을 듣고 있었다.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자신에게 속삭이는 소리 같았다. '잘했어... 정말 잘 해냈어... 모두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 거야. "네까짓 게 의사가 되겠다고? 깜둥이 의사가 된단 말야?" 그리고 의과대학의 냉랭한 입학거절. "우리 학교에 원서를 제출한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금년 우리 학교 신입생 선발은 이미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 자리가 없습니다." "당신의 배경으로 볼 때, 좀더 작은 의과대학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케트는 최고의 성적으로 25 개 의과대학에 입학원서를 제출했지만 입학을 허가한 학교는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 그때 의과대학의 학장은, "요즘 세상에 이렇게 정상적이고 훌륭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학생을 입학시키게 된 것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라고 말했었다. '만약 학장이 나의 어두운 과거를 알았더라면....' 제2장 다음날 아침 5 시 30 분, 신참 레지던트들은 본관 안내소에 모였다. 각 분야의 선임 레지던트와 전문의들이 그들 각자에게 임무를 배정하고 여러 부서로 배치시켰다. 그렇게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병원 전체가 소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병원에는 응급환자가 밤새도록 계속 들어왔다. 앰블런스나 경찰 순찰차에 실려서, 또는 스스로 걸어서 들어왔다. 병원 직원들은 응급실로 들어오는 환자들을 'F 와 J'라고 불렀다. 떠돌다 들어왔다는 말과 초고속으로 달려왔다는 말의 약자였다. 모두 뼈가 부러졌거나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총격을 당한 사람, 칼에 찔린 사람, 그리고 교통사고 부상자, 대부분 몸에 상처를 입었을 뿐 아니라 어려운 낙오자가 된 사람들. 그들은 대도시의 어두운 그늘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같이 계속 병원 응급실로 몰려들었다. 병원 안은 엄청난 혼란 속에서도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묘한 분위기였다. 분주한 의사와 간호사들의 움직임, 그리고 사방에서 들여오는 고함소리, 그 와중에서도 계속 돌발하는 응급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신참 레지던트들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소란스러운 새로운 주변 환경을 관찰하며 끼리끼리 모여 있었다. 페이지, 케트, 그리고 하니는 복도에 서 있었다. 선임 레지던트 한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누가 닥터 태프트요?" 하니가 대답했다. "전데요." 선임 레지던트는 미소를 띠고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갑소. 나는 당신의 업무배치를 담당하는 선임 레지던트요. 과장님이 당신의 의과대학 성적이 전례 없이 우수하다고 하더군요. 우리 과에서는 당신 같은 우수한 레지던트가 오게 된 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니는 칭찬에 좀 무안한 듯 얼굴을 붉히며 미소지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케트와 페이지는 놀란 표정으로 하니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렇게 우수한 사람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는데.' 페이지는 생각했다.


"닥터 테프트, 내과 전문의가 되려고 한다지요?" "그렇습니다." 선임 레지던트는 케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닥터 헌터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신경외과 전문의가 되려고 한다지요?" "맞습니다." 그는 들고 있던 서류철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허튼 박사 밑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페이지를 쳐다보았다. "닥터 테일러지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심장외과를 지망했군요?" "맞습니다." "좋습니다. 당신은 닥터 헌터와 함께 우선 외과로 배정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간호원장 사무실에 가서 신고하세요. 간호원장은 마가릿 스펜서입니다. 이 복도를 따라가면 사무실이 나옵니다." "감사합니다." 페이지는 케트와 하니를 쳐다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자, 이제 시작이군. 우리 모두 잘되었으면 좋겠어!" 간호원장인 마가릿 스펜서는 탱크처럼 생긴 여자였다. 우람한 몸집에 표정이 엄했고 단도직입적인 성격이었다. 페이지가 다가갔을 때, 스펜서는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간호원장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여기에 신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왔어요. 나는 닥터 테일러입니다." 간호원장은 잠시 서류철을 뒤져보았다. "잠시 기다리세요." 그녀는 문을 열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수술복과 흰색 가운을 들고 나왔다. "자, 이 수술복은 수술실과 중환자실에서 입는 것이고, 회진할 때는 흰 가운을 걸쳐야 됩니다." "고맙습니다." "아 참, 그리고," 그녀는 책상 서랍에서 금속판으로 된 명찰을 꺼내 페이지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의사 명찰입니다." 명찰에는 '페이지 테일러, M.D.'라고 새겨져 있었다. 페이지는 명찰을 손에 들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페이지 테일러, M.D.' 마치 최고 무공훈장을 받은 기분이었다. 오랜 세월 고생하고 열심히 공부했던 결과가 명찰 끝에 있는 M.D.라는 두 글자에 요약되어 있었다. 간호원장 스펜서는 페이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럼요." 페이지는 미소를 띠었다. "괜찮고말고요. 고맙습니다. 옷을 어디서..." "복도를 따라가면 왼쪽에 의사용 탈의실이 있어요. 곧 회진이 시작될 테니까 옷을 지금 갈아입어야 될 거예요." "고맙습니다." 페이지는 복도를 걸어가면서 주변의 혼란스러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복도는 의사와 간호사, 직원과 환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모두가 바쁜 걸음으로 오가고 있었으며 구내방송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닥터 키난...제 3 수술실...닥터 키난...제 3 수술실..." "닥터 탈봇...제 1 응급실...응급상황...닥터 탈봇...제 1 응급실...응급상황..." "닥터 엔젤...212 호 병실...닥터 엔젤...212 호 병실..." 페이지는 의사 전용 탈의실이라고 써 있는 문 앞에 다다랐다. 안에는 열 명이 넘는 의사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 중 두 사람은 아예 발거벗고 있었다. 페이지가 문을 열자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아!... 실례했습니다." 간신히 말하면서 페이지는 문을 닫았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간호사 전용 탈의실이라고 표시된 문이 보였다. 페이지는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 안에는 간호사 몇 명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어서 와요. 새로 들어온 간호사인 모양이죠?" "아니에요." 페이지가 자르듯 말했다. "간호사가 아니에요." 문을 닫고 다시 으이사 전용 탈의실로 돌아갔다. 문 앞에 잠시 멈추었다가 숨을 깊이 들이쉰 다음 문을 열었다. 안에 있던 의사들의 대화가 멈췄다. 의사 한 사람이 말했다. "아가씨, 미안하지만 여기는 의사 전용 탈의실이오." "나도 의사인데요." 페이지가 말했다.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한 사람이 겨우 입을 열었다. "아, 그래요? 저...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페이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비어 있는 옷장으로 다가갔다. 남자 의사들은 그녀가 옷장에다 수술복과 가운을 집어넣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 의사들을 잠시 둘러본 다음 천천히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남자 의사들은 엉거주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서 있었다. 결국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좀... 저 아가씨에게 자리를 피해줘야 될 것 같은데... 그게 좋지 않겠어?" '아가씨라고?' "고마워요." 페이지가 대답했다. 그녀는 선 채로 남자 의사들이 옷을 다 갈아입고 떠나기를 기다렸다. '앞으로 매일 이런 꼴을 봐야만 되나?' 페이지는 생각했다. 입원환자를 회진하는 그 전통적인 형태는 전혀 바뀌짖 않고 있었다. 책임 전문의가 앞장 서고 바로 뒤에 선임 레지던트가 따르고, 그 다음에 레지던트가 몇 명, 마지막으로 의과대학생 두어 명이 따르게 된다. 페이지가 속한 팀의 책임 전문의는 윌리엄 래드노 박사였다. 페이지와 레지던트 다섯 명이 복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지던트 중에는 젊은 중국인 의사가 있었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는 톰 창입니다." 그가 말했다. "다른 사람도 나처럼 긴장되고 불안한지..." 페이지는 즉시 톰 창이 마음에 들었다.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왔다. "안녕하시오?" 그가 말했다. "내가 래드노 박사요." 맑고 푸른 눈에 차분한 목소리였다. 레지던트들 모두가 박사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오늘이 여러분들 첫 회진이지요? 여러분이 듣고 보는 것 모두에 정신을


집중하고 배워야 됩니다. 그러나 환자들 앞에서 긴장하는 표시를 내면 안돼요. 이건 아주 중요합니다." 페이지는 속으로 다짐했다. '정신을 집중시켜야지.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행동해야 돼.' "만약 여러분이 긴장하는 것을 환자가 눈치채면 그도 같이 긴장하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자신이 중병에 걸려서 죽게 된 것을 알려주지 않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환자를 긴장시켜서는 안돼.' "이제부터 여러분은 환자의 건강과 생명에 대해 책임을 져야 됩니다." '정말? 남의 생명을 책임진다고?' 래드노 박사가 얘기를 계속할수록 페이지는 점점 더 긴장되고 불안해졌다. 그의 얘기가 끝나갈 때쯤엔 모든 자신감이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난 의사로서 전혀 준비가 안돼 있어!' 페이지는 생각했다.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종잡을 수가 없어. 어떻게 나보고 이제 의사가 됐다고 했지? 만약 누굴 죽이기라도 한다면...' 래드노 박사는 말을 맺고 있었다.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자세한 메모를 제출하도록 준비하세요. 병리실험, 혈액검사, 초음파검사 결과 등 하나도 빠뜨리면 안돼요. 알겠지요?" 모두 같이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우리는 최소한 30 - 40 명의 수술받은 환자를 돌보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환자들의 회복과정을 철저하게 살펴 나가야 합니다. 지금부터 아침 회진을 시작합시다. 오후에 또 한번 회진이 있습니다." 의과대학 시절에는 모든 게 너무나 쉽게 느껴졌었다. 페이지는 4 년간의 의과대학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학생은 모두 150 명이었고, 그 중 15 명이 여자였다. 해부학 과목 첫시간에 들어갔을 때를 잊을 수 없었다. 학생들은 큼직한 탁자 스무 개가 듬성듬성 놓인 흰 타일 바닥의 넓은 방에 들어가 탁자마다 다섯 명씩 둘러섰다. 탁자는 모두 노란색 천으로 덮여 있었다. 교수가 말했다. "자, 이제 천을 벗겨요." 페이지의 눈앞에는 처음 보는 시체가 놓여 있었다. 혹시 어지러워지거나 토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상하게도 별 탈 없이 지나갔다. 시체는 화학약품으로 오랫동안 보존시켜 놓았기 때문에 사람의 시체라는 느낌이 덜한 것 같았다. 처음에 학생들은 해부학 실험실에서 경건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1 주일도 지나지 않아 시체를 해부하면서 샌드위치도 먹고 저질 농담까지 하는 학생들이 생겼다. 페이지는 그런 변화를 믿기 힘들었다. 그들의 행동은 알고 보면 일종의 방위적 행동이었다. 자신의 상식적인 도덕기준을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시체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마치 잘 알던 사람처럼 대했다. 페이지는 다른 학생들처럼 태연하게 행동하려고 애썼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체를 해부할 때마다 시체가 된 사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 사람도 집과 가정이 있었던 사람이겠지.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1 년에 한번씩 휴가여행도 다녔겠고, 운동경기도 즐기고 영화나 연극 구경도 다녔을 거야. 남들처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아이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며 흐뭇해 하기도 했었겠지. 아이들의 즐거움과 슬픔에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기도 했을 거고. 장래에 대한 꿈도 컸을 테지. 그 꿈이 이루어졌는지...' 그는 이미 죽었고 자신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어쩐지 서글픔이 몰려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페이지도 시체해부를 별 생각 없이 하게 되었다. 시체의 가슴을 절개하고... 우선 갈비뼈를 검사하고... 폐가 나타나고... 그 다음은 심장을 덮고 있는 심낭이 나타나고... 대동맥과 정맥.... 모세혈관... 그리고 신경... 의과대학 생활 초기에는 학생들이 '신체 기관명 연주회'라고 부르던 인체의 기관 종류를 외우느라 고생했었다. 제일 먼저 뇌신경 종류를 완벽하게 외워야만 했다. 후각신경, 시신경, 동안신경, 활차신경, 삼차신경, 외선신경, 안면신경, 청각신경, 인후신경, 미주신경, 척수신경, 그리고 설하신경 등... 신경의 이름이 모두 라틴어나 희랍어에 근원을 두고 있었고 철자도 까도로웠기 때문에 학생들은 12 개 신경 이름을 외우기 위해 '올림퍼스 산 정상에서 프랑스 사람과 독일 사람이 호프를 팔고 있다.'는 문구를 만들었다. 문구의 단어 첫자를 나열하면 12 개 신경 이름의 첫자와 같았기 때문이다. 근래에 와서는 남학생들이 '아, 아, 아, 처녀의 그곳에 손을 집어넣으면 천당에 간 기분이야'로 바꾸었다. 역시 문구의 첫글자가 신경 이름들 첫글자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의과대학의 고학년이 되면서 교과과정이 점점 흥미로워졌다. 내과, 외과, 소아과, 그리고 산부인과 등 의학 각 분야의 과목을 수강하고, 학교 주변의 병원으로 실습도 다녔다. '그때 일이 생각나...' 페이지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닥터 테일러..." 선임 레지던트가 재촉하고 있었다. 페이지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모두들 복도 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 갑니다." 페이지는 급히 걷기 시작했다. 첫 회진은 양쪽 벽으로 침대가 늘어서 있는 다인용 입원실이었다. 각 침대 옆에는 작은 스탠드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입원실에는 최소한 침대 사이에 커튼이라도 쳐 있을 법 했지만, 엠바카데로의 다인용 입원실에는 그런 배려가 없었다. 첫번째 환자는 안색이 좋지 않은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었다. 그는 숨을 깊이 쉬면서 잠들어 있었다. 래드노 박사는 침대 옆에 다가서면서 환자의 진료기록을 찬찬히 검토했다. 잠시 후 환자에게 몸을 숙여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포터 씨..." 환자가 눈을 떴다. 아직 덜 깨어난 표정이었다. "누... 누구요?" "안녕하세요. 나는 래드노 박사입니다. 포터 씨 상태가 어떤지 보러 왔습니다. 지난밤에는 잘 주무셨습니까?" "괜찮았어요." "혹시 통증은 없었나요?" "좀 있었어요. 가슴이 아팠어요." "어디 좀 볼까요?" 래드노 박사는 청진기를 환자의 가슴과 등에 대고 진찰했다. 진찰이 끝나자 청진기를 떼면서 말했다. "아주 좋습니다. 잘 회복되고 있어요. 간호사에게 진통제를 좀 드리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후 회진 때 다시 뵙지요." 일행은 포터의 침대에서 물러났다. 래드노 박사는 뒤따르는 레지던트들에게 말했다. "환자에게 질문할 때는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환자는 대부분 자신의 상황을 오래 설명할 기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환자가 잘 회복되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신경써야 됩니다. 이 환자의 진료기록을 잘 읽어보고 검토하세요. 오후 회진 때 어떤 변화가 있는지 즉시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모든 환자의 두드러진 증세, 진단 내역, 유전적 특성, 그리고 직업환경 등을 정확하게 기록해 두어야 합니다. 술을 마시는지, 담배를 피우는지도 빼놓아서는 안돼요. 다음 회진 때 각 환자의 상황에 대한 보고를 듣겠습니다." 일행은 다음 침대로 다가갔다. 40 대의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롤링스 씨." "안녕하세요." "오늘 아침에는 기분이 좀 어떠십니까?" "좀 안 좋은데요. 지난밤 한숨도 못 자고 꼬박 세웠어요. 잠들만 하면 복통이 오고... 계속 그랬어요." 래드노 박사는 선임 레지던트에게 물었다. "직장 내시경 검사 결과는 어떻게 나왔나?" "아무 문제도 없다고 나왔습니다." "그럼, 바륨을 투입하고 상부 소화기관 검사를 하도록 해. 응급(STAT)으로!" 선임 레지던트는 즉시 검사 의뢰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레지던트가 페이지에게 속삭였다. "'응급'을 왜 STAT 로 쓰는지 알아요? '멍청한 아가씨야, 엉덩이 좀 흔들어'의 첫자를 딴거예요." 그 소리가 래드노 박사에게도 들렸다. 그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레지던트를 쳐다보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STAT 는 라틴어 statim 을 줄인 거요. '즉시' 또는 '당장'이라는 뜻이지." 그때부터 페이지의 병원생활은 'STAT'라는 말의 연속이었다. 다음 환자는 혈관순환 수술을 받은 나이 많은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터켈 부인." "대체 언제까지 나를 이곳에 가두어두려는 거예요?" "조금만 더 참으시면 됩니다. 수술은 아주 잘 되었어요. 얼마 안 있으면 퇴원하게 됩니다." 일행은 다음 환자에게 다가갔다. 회진이 계속되면서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아침 한나절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약 30 명의 입원환자를 회진했다. 환자 한 사람 한 사람 진찰이 끝날 때마다 레지던트들은 메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급히 메모하느라고 글씨를 너무 흘려써서 나중에 알아볼 수 있을지 걱정이었지만 회진을 늦출 수는 없었다. 페이지는 몸이 조금도 불편해 보이지 않는 한 여자 환자를 보고 의아해졌다. 일행이 그녀의 진찰을 끝내고 물러났을 때 페이지는 래드노 박사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요?" 래드노 박사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 문제도 없지. 그냥 '고머'일뿐이오."


그는 레지던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의과대학 시절에 배웠지요? '내 응급실에서 나가!'의 첫 글자를 모으면 '고머'가 된다는 것 기억납니까? '고머'는 심리적으로 자신이 병들었다는 착각에 만족을 얻는 사람이에요. 그러다가 일종의 취미가 되어버리는 것이지. 저 여자는 작년에도 여섯 번이나 입원했어요." 그들은 마지막 환자에게 다가갔다. 의식 없이 산소호흡기가 연결되어 있는 나이 많은 여자였다. "이 환자는 급성 심장마비로 입원했습니다." 래드노 박사는 레지던트들에게 설명했다. "벌써 6 주째 의식이 회복되지 않고 있어요. 모든 기관의 기능이 끝난 상황입니다. 오늘 오후 생명연장장치를 제거할 예정입니다." 페이지는 충격을 받았다. "생명연장장치를 제거하다니요?" 래드노 박사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오늘 아침 우리 병원의 윤리위원회에서 결정했습니다. 그녀는 벌써 식물인간이 되었고, 나이도 87 세입니다. 발병 직후 뇌사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녀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은 잔인하다고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가족에게 엄청난 의료비 부담을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자, 그럼 오후 회진 때 다시 만납시다." 모두 몸을 돌려 걸어가는 래드노 박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페이지는 다시 환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 살아 있는 게 분명했다. '몇 시간 안 있으면 생명이 끊어지겠구나. 오후에 생명연장장치를 제거할 예정이라니...' 페이지는 생각했다. '그건 살인이나 마찬가지야!' 제3장 그날 오후, 회진이 끝난 다음 신참 레지던트들은 볼품없는 전용 휴게실에 모였다. 실내에는 테이블 여덟 개와 낡아빠진 흑백 텔리비전 한 대가 있었다. 벽 한쪽에는 만든 지 오래 된 샌드위치와 졸아든 커피를 뽑을 수 있는 자동판매기 두 대가 있었다. 테이블마다 화제는 비슷했다. 레지던트 한 사람이 동료들에게 말했다. "내 목 안 좀 봐줘. 아무래도 편도선에 염증이 생긴 것 같아." "난 열이 나는 것 같아. 으슬으슬해지는데..." "속이 거북하고 배가 부어오르는 것 같아. 이건 확실히 맹장염 증세야..." "왜 이렇게 가슴이 조여오는 거지? 심장마비가 아니어야 하는데..." 케트가 하니와 페이지가 자리잡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래, 첫날 근무가 어땠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런 대로 괜찮았던 것 같아." 하니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페이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잔뜩 긴장했었지만 태연한 척하고,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침착한 척하느라고 혼났어." 페이지는 한숨을 쉬었다. "아주 힘든 하루였어. 빨리 퇴근해서 좀 쉬고 재미있는 일을 찾아야겠어." "동감이야." 케트가 말했다. "같이 저녁식사하고 영화라도 보러 갈까?" "좋은 생각이야." 그때 직원 한 사람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누가 닥터 테일러입니까?" "내가 테일러인데..." 페이지가 말했다.


"월러스 박사가 사무실로 좀 오시랍니다." 병원장이 찾는다는 소리에 페이지는 깜짝 놀랐다. '난 잘못한 것 없는데...' 직원은 페이지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닥터 테일러, 바로 오시라고 했는..." "알았어요." 페이지는 숨을 한번 깊이 들이마시고 일어섰다. "갔다와서 다시 얘기해." 페이지는 직원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갔다. 5 층에서 내려 병원장의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월러스 박사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페이지가 들어가자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안녕하시오, 닥터 테일러." "안녕하십니까." 월러스 박사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했다. "이거 참! 첫날부터 여러 의사에게 유명한 인물이 되었더구만요." 페이지는 월러스 박사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네? 그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오늘 아침에 의사 전용 탈의실에서 약간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소." "아, 그 말씀이군요." '그 일 때문에 나를 불렀군...' 월러스 박사는 페이지를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당신과 다른 아가씨들의 탈의실 문제를 어떻게든지 해결해 주겠소." "우린..." '아가씨라구요?' 하려다가 페이지는 급히 말을 돌렸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당분간, 간호사들과 같이 탈의실을 쓰기 싫다면..." "저는 간호사가 아닙니다." 페이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의사예요." "물론, 물론. 여의사 탈의실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소." "감사합니다." 그는 페이지에게 서류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게 당신의 업무 일정표요. 오후 6 시부터 24 시간 동안 당직임무를 맡게 되었소." 그는 시계를 보았다. "30 분 후부터 시작하는 거요." 페이지는 월러스 박사를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오늘 새벽 5 시 30 분부터 지금까지 일해 왔는데, 계속해서 당직임무까지 맡으라는 것이었다. "24 시간이라구요?" "실제는 36 시간도 더 될 거요. 모레 아침 회진 때까지 계속 자리를 비울 수 없을 테니까." '아니, 지금부터 36 시간 이상이라구?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얼마 있지 않아 스스로 얻게 되었다. 페이지는 다시 케트와 하니에게도 갔다. "저녁식사와 영화는 잊어버려야 될 것 같아." 페이지가 말했다. "지금부터 36 시간 동안 당직근무야." 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지금 막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들었어. 나는 내일 저녁부터 시작하고, 하니는 모레부터 당직근무라는 통지였어." "아무리 힘들어도 견뎌낼 수 있을 거야." 페이지는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직근무 하면서 시간이 나면 눈 좀 붙일 수 있는 방도


따로 있대. 좋은 경험이 될 거야." 너무나 터무니없는 기대였다. 페이지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월러스 박사가 36 시간 당직근무를 명령했는데," 페이지가 물었다. "모든 레지던트가 그렇게 해야 되나요?" "첫 3 년 동안만 그래요." 직원이 대답했다. '3 년?' "닥터 테일러, 하지만 근무중에 충분히 쉴 수 있어요." "어떻게요?" "여기서 쉬면 되요. 이 방이 바로 당직자 휴게실이거든요." 그는 방문을 열고 페이지를 안으로 안내했다. 방 안은 마치 가장 엄한 수도원의 수도사 침실 같았다. 울퉁불퉁한 매트리스가 놓인 간이침대 하나와 금이 간 세면대, 그리고 전화가 놓인 침대 옆 탁자가 전부였다 "근무중에 시간이 빌 때마다 여기서 잘 수 있어요." "고마워요." 페이지가 식당에서 막 저녁식사를 하려 할 때, 구내방송으로 호출이 시작되었다. "닥터 테일러... 제 3 응급실... 닥터 테일러... 제 3 응급실..." "지금 갈비뼈가 부러진 환자가 들어왔..." "헤너건 씨가 가슴에 통증이 온다고..." "제 2 병동의 환자가 두통을 호소해 왔어요. 아세타미노펜을 투여해도 괜찮겠어요?" 자정이 되자 페이지는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제 1 응급실로 급히 오세요." 환자는 칼에 찔려 출혈이 심했다. 페이지가 간신히 치료를 마쳤을 때는 벌써 새벽 1 시 30 분이었다.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전화벨이 또 울렸다. 2 시 15 분이었다. "닥터 테일러... 제 2 응급실로... 응급상황입니다..." 페이지는 잠이 덜 깼지만 억지로 말했다. "곧 갈게요." 'STAT 가 뭐가 준 말이라고 했었지? '멍청한 아가씨야, 엉덩이 좀 흔들어'라고 했던가?' 그녀는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응급실로 갔다. 다리가 부러진 환자가 통증 때문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빨리 X-선 촬영을 요청해요." 페이지가 지시했다. "그리고 디메롤 50 밀리그램을 주사해요." 그녀는 환자의 팔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그때 구내방송의 잡음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닥터 테일러... 제 3 병동으로... 닥터 테일러... 제 3 병동으로...응급상황..." 페이지는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고 있는 환자를 쳐다보았다. 그냥 떠나버리는 것은 너무 매정한 짓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다시 구내방송이 들려왔다. "닥터 테일러... 제 3 병동으로... 닥터 테일러... 제 3 병동으로... 응급상황..." "알았어... 알았다구..." 중얼거리며 다리 부러진 환자를 남겨두고 떠났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따라가 제 3 병동에 도착했다. 환자 한 사람이 심한 구토 끝에 위액까지 다 토하고는 숨이 막혀가고 있었다.


"구토의 경련 때문에 숨을 못 쉬어요." 간호사의 보고였다. "당장 인공호흡장치를 연결시키고 산소를 틀어요." 잠시 후 환자는 경련이 진정되면서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전에 다시 구내방송이 울렸다. "닥터 테일러... 제 4 병동으로... 닥터 테일러..." 페이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제 4 병동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복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환자였다. 페이지는 진찰을 서둘렀다. "장 폐쇄증일 가능성이 높아... 빨리 초음파 검사실로 데려가야 돼!" 간호사와 직원에게 지시했다. 페이지가 다리 부러진 환자가 있는 응급실로 돌아왔을 때는 진통제 효과로 통증이 거의 가라앉아 있었다. 수술실로 옮기고 부러진 뼈를 맞추기 시작했다. 치료가 거의 끝나갈 때 다시 구내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닥터 테일러... 제 2 응급실로... 응급상황..." 닥터 테일러를 찾으며 응급상황을 알리는 구내방송은 계속되었다. "제 4 병동의 위궤양 환자가 통증이 심해져서..." 새벽 3 시 30 분, "닥터 테일러, 310 호실 환자가 다시 출혈이 시작..." 한 병실의 환자는 심장마비 증세가 왔다. 달려간 페이지는 초조한 마음으로 진찰하고 있었다. 그때 다시 구내방송이 들려왔다. "닥터 테일러... 제 2 응급실로... 응급상황... 닥터 테일러... 제 2 응급실로... 응급상황..." '당황하면 안돼!' 페이지는 생각했다. '의사는 항상 침착하고 의연해야 돼.' 그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금 진찰하고 있는 환자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다음 환자가 더 중요한가?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잠깐만 기다려요." 할수없이 일어섰다. "곧 돌아올께요." 제 2 응급실로 달려가는 동안 구내방송이 다시 울렸다. "닥터 테일러... 제 1 응급실... 응급상황... 닥터 테일러... 제 1 응급실... 응급상황..." '이런 세상에!' 페이지는 생각했다. 마치 끝나지 않는 악몽에 시달리는 기분이었다. 그 후 날이 밝기까지 페이지는 식중독 환자, 팔이 부러진 환자, 장파열 환자, 그리고 갈비뼈가 부러진 환자 때문에 계속 휴게실에서 불려나왔다. 새벽녘에 간신히 휴게실로 돌아온 그녀는 너무 지쳐서 손발을 움직일 수도 없는 느낌이었다. 페이지는 바로 간이침대에 올라가 졸기 시작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려댔다. 페이지는 눈을 감은 채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닥터 테일러, 모두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뭐라고..." 드러누운 채로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 건지 생각해 보았다. "닥터 테일러, 지금 회진이 시작될 시간입니다." "회진이라구요?" '뭔가 잘못된 걸 거야.' 페이지는 생각했다. '이건 사람 취급이 아냐. 어떻게 밤새도록 뛰어다니며 일한 사람을 또 회진하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 10 분 후, 페이지는 아직도 잠이 덜 깬 채로 회진을 돌았다. 발을 헛디뎌 래드노 박사에게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밤새 한잠도 못..." 래드노 박사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 안 가서 곧 익숙해질 거요."


그날 오후 드디어 근무가 끝났을 때, 페이지는 집에 가서 바로 쓰러져 14 시간 동안 깨지 않고 잤다. 레지던트 생활의 상상할 수 없는 압박감과 육체적 피로 때문에 많은 레지던트들이 견뎌내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레지던트의 수가 한 사람 두 사람 줄어들기 시작했다. '난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페이지는 스스로 다짐했다. 압박감은 조금도 늦추어지지 않았다. 한번은 36 시간 동안 고된 당직근무를 마쳤을 때, 페이지는 너무 지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분간할 수 없었다. 간신히 엘리베이터까지 갔지만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르는 것도 잊고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톰 창이 다가왔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페이지가 중얼거렸다.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얼굴이 엉망인데요..." "칭찬해 줘서 고마워요. 대체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죠?" 페이지가 물었다. 창이 대답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레지던트들과 환자의 접촉을 최대화한다는 이론 때문이에요. 우리가 환자들을 병원에 남겨두고 퇴근하면 다시 출근할 때까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없다는 거죠." 페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듯하군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반은 자고 반은 걷는 상태에서 어떻게 환자들을 돌볼 수 있어요?" 창은 난들 어떻게 알겠느냐는 표정이었다. "글쎄, 내가 규칙을 만든 것도 아니고... 모든 병원이 이런 식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그는 페이지의 얼굴을 조심스레 들여다보았다. "집에까지 갈 수 있겠어요?" 페이지는 가슴을 펴고 당당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물론이죠. 걱정 마요." "그럼 조심해요." 창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페이지는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르고 기다렸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와 문이 열렸을 때, 그녀는 선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이틀 후, 페이지는 케트와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케트, 내 얘기 좀 들어볼래?" 페이지가 말했다. "고생고생하다가 새벽 4 시쯤 겨우 눈 좀 붙이려는데, 환자에게 아스피린 두 알을 주는 것 때문에 구내방송이 깨우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알아? 나는 복도를 반은 자고 반은 깨서 달려가는데 밤마다 환자들은 편안하게 잠들어 있잖아. 그러면 병실문을 모조리 다 두드리고, '모두들 일어나!' 하고 마구 소리치고 싶어져." 케트는 손을 내밀었다. "같은 클럽 회원이 된 걸 환영해." 병원의 환자들은 다양했다. 뚱뚱한 사람과 마른 사람, 키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 그리고 인종도 각양각색이었다. 겁에 질린 사람, 용기 있는 사람, 점잖은 사람, 오만한 사람, 까다로운 사람, 친절한 사람, 그러나 모두가 고통에 시달리는 인간이었다. 대부분의 의사는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어떤 분야나 그렇듯 훌륭한 의사가 있으면 질이 떨어지는 의사도 있었다. 젊은 의사와 나이 든 의사, 동작이 느린 의사와 순발력이 있는 의사, 상냥한 성격의


의사와 매정한 성격의 의사 등등, 그 중 몇 사람이 때로는 페이지에게 집적거렸다. 은근하게 접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거칠고 저속한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밤에 근무하면서 좀 외롭지 않아요? 나는 밤만 되면 상당히 외롭던데. 우리 같이..." "이렇게 혹사당하는 게 견디기 힘들지 않아요? 나는 어떻게 견디는지 알아요? 섹스가 힘을 준다구요. 우리 한번..." "우리 집사람이 며칠 여행 갔거든요. 카멜 해변에 조그만 별장이 하나 있는데... 이번 주말에 우리 같이..."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내 의사라구? 정말? 어떻게 하면 내 병이 나을지 내가 가르쳐 드릴까?" "이 침대에 바짝 다가와요, 아가씨. 몸에 붙은 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 좀 해봅시다." 그럴 때마다 페이지는 이를 악물고 모두 무시해 버렸다. '알프레드와 결혼하고 나면 이런 건 없어질 거야.' 알프레드 생각만 해도 마음이 한결 따뜻해졌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올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어느 날 아침, 회진이 시작되기 전에 페이지와 케트는 아침식사를 하면서 자신들이 당하는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해 얘기했다. "대부분 의사들은 점잖은 신사답게 행동하지. 하지만 몇몇 사람은 여의사가 자신들의 오락 대상으로 병원에 고용된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아. 여의사는 당연히 남자의사를 즐겁게 해주어야 된다는 듯 행동한단 말야." 케트가 말했다. "한 주도 거르는 법이 없어. 반드시 어떤 친구가 집적거리는 거야. '우리 집에 같이 가서 한잔 하는 게 어때? 아주 낭만적인 CD 가 많이 있다구.' 하면서. 심지어 수술실에 내가 보조로 들어갔을 때 수술의가 일부러 팔을 내 가슴에다 대고 비비는 거야. 한 미친 녀석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이봐, 나는 닭고기를 시켜 먹어도 짙은 색깔 쪽이 더 좋더라구.' 하는 거야!" 페이지는 한숨을 쉬었다. "그 중에는 오히려 우리가 성희롱 대상이 되는 것을 원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어. 왜 우리를 그냥 의사로 대하지 못하는 걸까?" "상당수는 우리가 회진이나 수술실에 들어가는 것조차 싫어해. 여의사란 그냥 재미나 보는 상대가 되면 됐지, 수술하거나 치료하는 데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지. 이건 정말 불공평해. 여자는 항상 자신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고, 남자는 얼마나 형편없는 멍청이인가가 드러나지 않으면 우월한 것으로 평가되잖아?" "여기도 역시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한 조직이야." 페이지가 말했다. "여의사가 좀더 많았더라면 우리도 당당하게 평등을 주장할 수 있을텐데..." 페이지는 심심찮게 아서 케인 박사의 소문을 들었다. 그는 병원 내의 가십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이었다. 별명이 007 박사였다. 즉, 살인면허를 가졌다는 뜻이다. 그는 웬만하면 수술로 문제를 해결하려했다. 병원 내의 어떤 의사보다도 수술률이 높았고, 환자의 사망률도 가장 높았다. 그는 매부리코에 대머리였다. 뚱뚱한 몸집에 키는 작았고, 이빨은 타르가


끼어 지저분하게 보였다. 그는 자신이 여성에게 인기가 있다는 착각 속에 사는 인물이었다. 간호사나 여의사가 새로 드러오면 '물 좋은 고기'가 생겼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에 페이지 테일러는 당연히 물 좋은 고기였다. 식당에서 혼자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케인이 다가와 앉았다. "난 당신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어." 페이지는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뭐라고 하셨지요?" "내가 아서 케인 박사요. 가까운 사람들은 그냥 아서라고 부르지." 벌써 치근거리는 목소리였다. '이런 사람도 가까운 친구가 있을까?' "병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나?" 그의 질문이 딴 생각을 하고 있던 페이지를 당황하게 했다. "아... 괜찮아요. 그런 대로 괜찮은 것 같아요." 그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여긴 대단히 큰 병원이야. 멍청하게 있다가는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모르게 되거든. 내 말뜻 알아듣겠어?" 페이지는 대답도 하기 싫었다. "잘 모르겠어요." "당신은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은데, 어느 구석에 묻혀버리면 좀 억울하잖아? 누군가가 뒤를 좀 봐줘야 빛을 볼 수 있어. 여기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밀어줘야 된단 말이야." 대화가 점점 묘하게 돌아갔다. "그래서 절 도와주겠다는 말이에요?" "바로 그거야." 타르가 짠뜩 끼어 지저분한 이빨을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조용히 저녁이나 같이 하면서 얘기 좀 할까?" "아무것도 얘기할 거 없어요." 페이지가 말했다. "전 전혀 흥미 없어요." 아서 케인은 벌떡 일어나 걸어가는 페이지의 뒷모습을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외과 계열을 지망하는 신참 레지던트들은 산부인과, 정형외과, 비뇨기과, 그리고 일반외과 등을 각각 2 개월씩 돌아가면서 수련의 생활을 했다. 페이지는 레지던트들이 근무하는 병원의 여름철 입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책임 전문의들 다수가 휴가로 자리를 비우기 때문에 환자들은 경험 없는 레지던트들 손에 생명을 맡기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 수술의들은 수술을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계속 음악을 틀어놓았다. 어떤 의사는 모차르트의 음악만 듣기 때문에 아예 모차르트로 불렸고, 악셀 로즈의 팝 음악을 고집하는 의사도 있었다. 집도의의 취향이 다양한 만큼 수술실은 하루에도 여러 번 분위기가 바뀌었다. 수술에 참여한 사람들은 왜 그런지 항상 식욕이 왕성해지는 것 같았다. 틈만 나면 음식 얘기가 나왔다. 꽉 막혀버린 담낭을 제거하던 수술의가 느닷없이 레지던트들에게, "어제 저녁, 바델리라는 식당에 갔었지. 정말 기가 막히더군. 샌프란시스코에 그 이상의 이태리 식당은 없을 거야." 하는 게 흔한 일이었다. "싸이프러스 클럽에서 게 요리를 먹어봤어?" "로스트 비프를 좋아하면 반네스 가에 있는 프라임 립 하우스로 가보라구. 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는..." 이런 얘기가 오가는 동안 수술보


조원이나 간호사가 환자의 피를 닦아내고 절제된 부위를 치우는 것이었다. 음식 얘기가 아니면 의사들은 야구나 미식축구 같은 운동경기 얘기를 좋아했다. "지난 일요일에 샌프란시스코 49ers 가 어처구니없이 깨지는 것 봤어? 지금쯤 조 몬타나를 이적시킨 게 후회막급일 거야. 그 친구라면 마지막 몇 분에라도 역전시킬 수 있잖아? 그런 선수를 이적시키다니..." 말이 끝나면서 곪은 맹장이 절 제되어 나왔다. 페이지는 생각했다. '이렇게 괴상한 상황은 카프카의 세계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 하루는 페이지가 당직자 휴게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 새벽 3 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닥터 테일러, 419 호 병실로 와주세요. 아무래도 심장마비가 오는 것 같아요. 서둘러 주세요." 목쉰 소리로 말하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끊어버렸다. 페이지는 정신을 차리려고 잠시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서둘러 달라고 했지?' 급히 일어나 휘청거리면서 복도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비상계단을 뛰어내려가 4 층 복도에서 419 호 병실을 찾았다. 가슴이 방망이질치고 있었다. 419 호를 찾아 문을 연 페이지는 그 자리에 몸이 굳어버렸다. 419 호는 간이창고였다. *** 케트 헌터는 리처드 허튼 박사를 따라 회진하고 있었다. 40 대의 허튼 박사는 단도직입적이고 일처리가 몹시 빨랐다. 그는 환자 한 사람당 2 - 3 분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벌써 진료기록을 다 훑어보고 레지던트들에게 취해야 될 조치를 다 지시하는 것이었다. 마치 기관총을 쏘아대듯 계속 지시와 명령이 떨어졌다. "백혈구 수치를 확인하고 별 문제 없으면 내일 수술 일정을 잡도록 해..." "체온변화를 잘 관찰해야 돼..." "수혈용 혈액을 충분히 확보해야..." "당장 실밥을 뽑아내도록..." "가슴 X-선 촬영을 당장 의뢰하도록..." 케트와 다른 레지던트들은 메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허튼 박사의 지시대로 하기는 커녕 지시 자체를 메모하기도 힘들었다. 일행은 환자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지난 1 주일 동안 고열에 시달린 사람으로, 검사란 검사는 다 해보았지만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환자로부터 물러나 복도로 나왔을 때, 케트가 선임 레지던트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뭐가 잘못된 거예요?" "저런 게 바로 GOK 야." 그가 대답했다. "하느님만 안다는 뜻이지. X-선 촬영, 컴퓨터 단층촬영, 자기공명촬영, 척수검사, 간조직검사, 필요한 검사는 안 해본 것이 없거든. 그런데도 왜 열이 나는지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 거야." 일행은 다른 병동으로 건너갔다. 첫 환자는 뇌수술을 받고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잠들어 있는 젊은이였다. 허튼 박사가 붕대를 풀기 시작하자 환자는 깜짝 놀라 깨어났다. "무... 무슨 일이에요?" "일어나 앉아." 허튼 박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젊은 환자는 몸을 떠는 것


같았다. '난 절대로 내 환자를 저렇게 다루지 않을 거야.' 케트는 다짐했다. 다음 환자는 아주 건강해 보이는 70 대의 남자였다. 허튼 박사가 침대로 다가오자 환자가 소리쳤다. "망할 자식! 개새끼들 같으니라구. 너희들을 고소하고 말 거야." "자, 스파롤리니 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입 닥치라구! 날 아예 씨발놈의 고자를 만들어버렸잖아!" '씨발놈의 고자도 있나? 그건 대단한 모순인데.' 케트는 생각했다. "스파롤리니 씨, 정관수술하는 것을 당신도 동의했잖습니까?" "내가 무슨 동의를 했어. 여편네하고 짜고 너희들이 한 짓 아냐? 집에 가기만 해봐라. 망할 놈의 여편네,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 그들은 아직도 투덜거리는 스파롤리니를 뒤로 하고 떠났다. "왜 저렇게 아우성이예요?" 레지던트 한 사람이 물었다. "문제는 저 친구가 나이답지 않게 너무 섹스를 밝히는 데 있는 거야. 젊은 아내와 사는데 벌써 아이가 여섯이나 된대. 그녀는 도저히 더 못 낳겠다는 거야." 다음 환자는 열 살쯤 되는 여자 아이였다. 허튼 박사는 진료기록을 들여다보고 나서 말했다. "주사 한 대만 맞자. 그러면 아픈 것이 금방 다 없어질 거야." 간호사 한 사람이 주사기를 들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싫어!" 아이는 소리쳤다. "아프게 하려는 거지!" "하나도 안 아파. 걱정하지 마." 간호사가 말했다. 그 말은 케트의 마음 속 가장 어두운 그늘에 숨겨놓은 상처를 건드렸다. 하나도 안 아파... 캄캄한 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이던 의붓아버지의 목소리로 들렸다. "걱정하지 마. 오히려 기분이 좋아질 거야. 다리를 벌려. 하라는 대로 해, 이년아!" 그는 억지로 다리를 벌리고 케트의 몸 깊숙이 뚫고 들어왔다. 신음소리를 지를 수 없게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케트는 열세 살이었다. 그날 밤 이후 의붓아버지는 매일 밤 찾아와 케트를 괴롭혔다. "넌 나 같은 사람에게 성교육을 받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다행스러운 일인지 알아야 돼." 그는 징그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케트라는 말 뜻이 뭔지 알아? 그건 작은 계집애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조금만 맛볼게." 그는 케트를 덮쳐 괴롭히기 시작했고, 아무리 울고 애원해도 자신의 욕심만 채웠다. 케트는 친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들이 사는 인디아나 주 개리 시의 작은 아파트 근처에 있는 빌딩 청소원이었다. 낮에는 집에 있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청소하는 직업이었다. 의붓아버지는 제철공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몸을 다치고 집에서 빈둥거리며 술이나 마시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출근하고 나서 밤만 되면 케트의 방으로 들어왔다. "만약 네 엄마나 동생에게 한 마디라도 얘기하면 널 그냥 죽여버릴 거야." 케트는 우람한 체격의 의붓아버지가 자신과 동생 마이클을 목졸라 죽이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마이클을 다치게 할 수는 없어!' 케트는 생각했다. 동생은 케트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고, 케트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케트는 항상 동생을 아끼고 보호하느라고 마음을 썼다. 케트의 생활에 유일한 낙은


마이클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 의붓아버지의 위협에 고민하던 케트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는 틀림없이 의붓아버지가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해주고 자신과 마이클을 보호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엄마, 새아버지가 엄마가 출근한 후에 내 방에 와서 날 억지로 폭행했어요." 어머니는 잠시 케트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뺨을 때렸다. "어디서 그렇게 거짓말하는 걸 배웠어? 못된 것 같으니라구...?" 케트는 다시는 어머니에게 상의하지 않았다. 집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은 마이클 때문이었다. '내가 없어지면 마이클은 어떻게 될까...' 그러나 어느 날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즉시 미네소타 주 미네아폴리스 시에 사는 이모에게로 도망쳤다. 집을 떠난 그날부터 케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 없어." 이모가 말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야. 넌 이제 도망다닐 필요가 없어. 세사미 스트리트에 나오는 노래 '초년생은 고달프다!'를 들어본적 있지? 사실 흑인으로 사는 게 더 고달픈 거야. 그러니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어. 계속 도망다니고 숨고, 그리고 모든 문제는 세상 탓이라고 남을 원망하면서 사는 방법과, 스스로 노력해서 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 둘 중 하나야!"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지요?"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가지면 되는 거야. 우선 마음 속으로 네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결정해야 돼. 그런 다음 열심히 한눈 팔지 말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야." '난 도저히 이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케트는 결정했다. '낙태수술을 받아야겠어.' 어느 주말, 이모 친구인 조산원이 낙태수술을 해주었다. 수술이 끝났을 때, 케트는 이를 악물고 혼자 다짐했다. '다시는 남자가 내 몸에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 절대로!' 인디아나 주의 개리 시같이 우중충한 도시에서 살던 케트에게는 미네아폴리스가 마치 동화 속의 도시처럼 느껴졌다. 시내 어디서나 몇 블록 가지 않아도 호수나 강, 또는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시내에는 거의 천만 평 가까운 녹색 공원이 있었다. 호수에서는 작은 요트를 탈 수 있었고, 때로는 미시시피 강에서 보트를 타기도 했다. 이모와 함께 동물원에도 가고, 주말이면 어린이 공원에도 갔다. 도시 근교 관광농장에 가서 말도 타고, 샤코피에서 벌어지는 르네상스 축제에서 중세 기사 차림의 선수들 결투 장면도 구경했다. 이모는 케트를 깊이 알게 되면서 측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아이는 따뜻한 가정이라고는 전혀 모르면서 여태까지 커왔어...' 케트는 점점 정상으로 돌아가 밝은 얼굴을 보일 때가 많아졌다. 그러나 이모는 조카의 마음 속 깊이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어두운 그늘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시 괴로움을 당하지 않으려고 마음 속에 높은 벽을 쌓아버린 것이다. 케트는 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없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데이트했지만 케트는 남자와는 만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왜 남자를 피하는지 입 밖에 내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이모를 존경하고 이모에게만 정을 주었다. 개리에서는 케트가 공부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모에게 온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모 집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모의 단면이 케트에게 점차 옮아갔다. "세상에는 좋고 아름다운 것이 너무도 많아." 이모는 말했다. "그걸 알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돼. 네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알 수 있어. 넌 언젠가는 유명한 사람이 될 거야. 그렇게 느껴지거든. 그렇게 되려면 우선 교육을 받아야 돼. 여기는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는 미국이잖니. 네가 유명해지고 싶으면 그렇게 될 수 있어. 지금 너는 돈 한푼 없는 흑인이지. 그러나 수많은 흑인 국회의원, 영화배우, 과학자, 또는 유명한 운동선수 대부분이 너와 마찬가지였어. 언젠가는 이 나라에 흑인 대통령도 나올 거야. 네 장래는 네가 하기에 달린 거야. 열심히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어." 그것이 시작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케트는 학년 전체 수석을 차지했고 독서량도 엄청나게 늘었다. 하루는 도서관에서 씽클레어 루이스의 <애로우스미스>라는 소설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소설 속의 사명감에 불타는 젊은 의사들이 케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런 다음 아그네스 쿠퍼의 <지켜야 될 약속>과 엘시 로 박사의 <여성외과의>도 읽었다. 의사들에 관한 소설은 케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려내고 고통을 없애주기 위하여 일생을 바치는 훌룡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케트는 이모에게 선언했다. "전 의사가 되겠어요. 아주 유능하고 훌륭한 의사가 되겠어요."

제4장 어느 월요일 아침, 페이지가 담당했던 환자 세 사람의 진료기록이 없어졌다. 페이지의 책 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책임 전문의로부터 호되게 야단맞았다. 수요일에는 당직실에서 자 고 있다가 새벽 4 시에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페이지는 수화기를 들고 졸음을 참으며 말 했다. "닥터 테일러입니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보세요...여보세요." 수화기에서는 가쁜 숨소리만 들려올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찰칵 전화 끊는 소리가 났다. 페이지는 다시 잠들 수 없었다. 그날 아침, 케트를 만났다. "내가 좀 신경과민이 되었거나, 아니면 누군가 날 골탕먹이고 있어." 페이지는 케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때로는 환자


들도 의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때가 있어." 케트가 말했다. "환자 중에 그럴 만한 사 람이 있어?" 페이지는 한숨을 쉬었다. "수도 없이 많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 없 어. 별일 아닐 거야." 페이지는 케트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싶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름이 다 지나갈 무렵, 고대하고 고대하던 전보가 왔다. 페이지가 밤늦게 아파트에 돌아와 보니 전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요일 정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예정. 다시 만날 생각에 들떠 있소. 알프레드." 드디어 알프레드가 찾아오는 것이다! 페이지는 전보를 몇 번이나 읽어보았지만, 그때마다 마음은 점점 더 설레었다. '알프레드!' 그 이름만 들어도 즐겁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페이지는 알프레드와 함께 자랐다. 두 사람의 아버지는 세계보건기구의 의사로서 같이 제 3 세계 나라 여러 곳에서 근무했다. 항상 생소하고 전염성이 강한 질병을 퇴치시키는 임무였 다. 페이지는 어머니와 함께 의료진의 단장으로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페이지와 알 프레드는 흔치 않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인도에서 페이지는 힌디어를 배웠고, 두 살 때는 대나무로 된 집을 그곳에서 바샤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고라샤이브, 즉 백인이라고 불렸고 자신은 나니, 즉 꼬마 자매라고 불렸다. 아버지를 부를 때는 보통 아바 단, 즉 지도자, 또는 바바, 즉 아버지라고 했다. 페이지의 부모님이 집을 비웠을 때는 방가라 는 대마 잎으로 담근 술을 마시고 차파티에 기를 곁들여 먹었다. 그 다음에는 아프리카로 전근되었다. 그곳에서는 또 다른 모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페이지와 알프레드는 악어와 하마가 들끓는 강에서 수영하는 데 익숙해졌다. 어린 얼룩말 과 치타, 그리고 뱀까지 애완동물로 키웠다. 그들은 모두 흙바닥 위에 나무와 풀잎으로 벽과 지붕을 댄, 창문도 없는 둥근 움막 같은 집에 살았다. '언젠가는 나도 집다운 집에서 살게 될 거야. 푸른 잔디 정원과 흰색 담장이 쳐진 예쁜 집에서 살게 될 거야.' 페이지는 혼자 다 짐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파견된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별로 보


람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페이지와 알프레드에게는 모험의 연속이었다. 사방이 사자와 기린, 그리고 코끼리까지 설쳐대는 곳이었다. 그들은 원시적인 건물의 학교에 다녔 고, 때로는 그마저 없어 개인교습을 받았다. 페이지는 명석한 아이였다. 두뇌가 마치 스펀 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했다. 알프레드는 페이지를 아끼고 좋아했다. "페이지, 언젠가는 너하 고 결혼할 거야." 알프레드가 열네 살 때였다. 페이지는 열두 살이었다. "나도 너하고 결혼 할 거야, 알프레드." 두 사람 다 조숙했고 서로 좋아했다. 어느새 장래를 굳게 약속하게 되 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파견된 의사들은 주어진 임무에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은 항상 최악의 조건에서 일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우게샤, 즉 동네 무당과 같이 토속적인 치 료를 시술하는 사람들과 경쟁해야만 했다. 문제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 우게샤를 믿어왔고, 토속치료법이 때로는 인명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었다. 마사이족의 경 우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소의 피와 생고기 덩어리, 그리고 정체불명의 풀뿌리 삶은 물을 섞은 올키로리테라는 약을 바르는 것이었다. 키쿠유족은 천연두에 걸린 어린 아이를 막대기로 때려 병을 쫓아내는 것이 전통적인 치료 방법이었다. "그런 짓은 그만두게 해야 돼요." 테일러 박사는 그들에게 말했다. "어린애를 막 대기로 때린다고 병이 나아지지 않아요." "그래도 엉덩이에 쇠 바늘을 꽂는 것보다는 낫지 않소?" 그들은 대답했다. 병원 시설이라고는 나무 그늘 아래 테이블을 붙여놓고 수술대로 쓰는 게 고작이었다. 하 루에도 수백 명의 환자를 진찰했다. 얹제나 진찰을 받겠다는 사람은 줄을 지었다. 문둥병 환 자, 폐결핵 환자, 기관지 천식 환자, 천연두 환자, 이질 환자 등 각양각색의 환자들이 모여들 었다. 페이지와 알프레드는 항상 붙어다녔다. 자라면서 두 사람은 멀리 떨어진 시장이나 다 른 부족 마을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면서 항상 두 사람의 장래 계획을 얘기했다. 의료 행위는 페이지의 소녀 시절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일찍부터 환자들을 돌보는 방법 을 배웠고, 주사를 놓고 약을 조제하는 것도 터득했다. 그러면서 항상 아버지를 돕기 위해


치료법도 열심히 관찰하고 배우려 했다. 페이지는 아버지를 무척 사항했다. 커트 테일러 박 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헌신적이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소중 하게 생각했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의 생활 태도가 페이지에게 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무리 일이 바쁘고 힘들어도 반드시 페 이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의 따뜻한 보살핌 때문에 원시적인 곳에서의 힘든 생활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다. 페이지의 어머니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고, 딸과의 관계도 아버지와는 달리 소원한 편이었다. 어머니는 부유한 상류사회 출신의 미인이었는데, 지나치게 이지적이고 냉정한 성 격이어서 페이지와 가까워질 수 없었다. 결혼 초기에는 이색적인 곳에서 일하게 된 의사와 결혼한다는 것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미개한 곳의 고통스러운 생활에 부딪히 자 모든 것이 못마땅해졌다. 그녀는 남을 돕거나 그런 일에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성 격이 아니었다. 페이지는 어머니가 항상 불평하던 것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커트, 우리가 왜 이런 오지에서 살아야만 돼요?" "여기 원주민들은 꼭 짐승같이 살잖아 요. 더 오래 있다가는 저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이름 모를 전염병에 걸리고 말 거예요." "왜 당신은 다른 의사들처럼 미국에 돌아가서 편하게 일하면서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 거 예요?" 어머니의 불평은 끝이 없었다. 어머니가 불평을 하면 할수록 페이지는 아버지가 더 자랑스러웠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 페이지가 열다섯 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브 라질의 코코아 농장주와 도망치고 말았다. "이제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을 거죠? 그렇죠?" 페이지가 물었다. "미안하다. 아마 안 돌 아오실 것 같구나." "차라리 잘됐어요." 페이지는 그렇게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머니가 자신과 아버지를 그렇게 쉽게 버리고 떠난 것에 대해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어머니가 떠난 다음, 페이지는 알프레드 터너와 더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같이 놀고 산과 들을 헤매고, 그리고 장래를 설계했다. "나도 크면 의사가 될 거야." 알프레드가 말했다. "너 도 의사가 되고, 그러면 우린 결혼하고 같이 일할 수 있을 거야." "아이도 여럿 낳아야 되겠


지?" "물론이지. 네가 좋다면..." 페이지가 열여섯 살 되던 해, 생일날 저녁 두 사람의 오랜 관계가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했다. 동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에 있을 때,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다른 마을의 전염병 때문에 모두 그곳으로 가고 캠프를 쳤던 곳에는 페이지와 알프레드, 그 리고 조리사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일찍 저녁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천막에 들 어가 잠을 청했다. 그러나 밤중에 먼곳에서 들려오는 짐승 떼 달리는 소리에 페이지는 잠에 서 깨어났다. 잠시 앉아 있는 동안 그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페이지는 겁이 나서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일행은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었다. 페이지는 일어났다. 알프레드의 천막은 바로 옆에 있었다. 겁에 질린 채 옷을 다시 입은 페이지는 텐트를 젖히고 알프레드에게 뛰어갔다. 그는 잠들어 있었다. "알프레드!" 그는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났다. "페이지? 무슨 일이야?" "무서워서 잠이 안 와. 네 천막 에 들어가 좀 같이 있으면 안되겠니?" "어서 들어와." 두 사람은 나란히 누운 채 들판을 질 주하는 짐승떼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제야 알프레드는 옆에 누워 있는 페이지의 따뜻한 몸을 의식하게 되었다. "페이지, 이제 네 천막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페이지는 알프레드의 몸에서 변화를 느 낄 수 있었다. 여태까지 말로만 표현하던 두 사람의 감정이 서서히 몸으로 전해지기 시작했 다. "알프레드." "왜 그래?" 들뜬 목소리였다. "우리는 결혼할 거지, 안 그래?" "물론이지." "그럼, 괜찮아." 이제 두 사람에게 주변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만의 신비한 새 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그 세계의 경이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원초적 연인 사이가 되었고, 그 기적과 같은 기쁨에 황홀해졌다. 날이 밝자, 페이지는 자신의 텐트로 돌아가면서 뿌듯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난 이제 여자가 된 거야.' 가끔 아버지는 페이지에게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시카고 시 근교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는 삼촌 집에서 학교를 다니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왜요?" 페이지는 반문했다. "너는 제대로 교육받은 숙녀가 되어야지..." "여기서도 문제 없어요." "야생 원숭이와 장난치고 어 린 얼룩말이나 타는 것은 숙녀가 할 일이 아냐. 좀더 세련되어야 해." 페이지는 항상 같은 대답이었다. "난 아빠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페이지가


열일곱 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세계보건기구 팀은 남아프리카의 밀림 속에 있는 한 부족 마을로 보내 졌다. 그곳에 장티푸스가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장티푸스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팀 이 도착한 직후 그 지방 부족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테일러 박사는 그곳을 떠나는 것이 좋 겠다는 지시를 받았다. "아니, 지금 이 환자들을 내버려두고 우리가 떠나면 어떻게 되겠어 요? 난 그럴 수 없소." 나흘 후, 그 마을은 다른 부족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페이지와 아 버지는 움막 같은 집에 쭈그리고 앉아 총소리와 고함소리를 들으며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페이지는 겁에 질렸다. "우릴 다 죽이려는 거예요!" 아버지는 페이지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우리를 해치지는 않을 거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이 사람들을 도우려고 여기에 왔잖니. 그들도 우리가 친구라는 걸 알고 있어." 아버 지의 말은 맞았다. 그 마을 부족의 추장이 무장한 부하 몇 사람을 데리고 집 안으로 뛰어들 어왔다.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가 당신들을 지킬 거요." 그는 약속을 지켰다. 전투는 새벽녘에야 끝났다. 그러나 밤새도록 생각에 잠겨 있던 테일러 박사는 아침에 결 단을 내렸다. 그는 즉시 시카고에 있는 동생에게 전보를 쳤다. "다음 비행기 편으로 페이지 를 보내겠음. 자세한 것은 추후 연락하겠음. 비행장 마중 바람." 그 말을 들었을 때, 페이지 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몸부림치고 울면서 먼지 나는 조그만 비행장으로 끌려갔다. 경비행기 한 대가 그녀를 태우고 요하네스버그로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왜 나를 쫓 아버리려는 거예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 거죠?" 페이지는 계속 울부짖었다. 아버지는 페이지를 끌어안고 차분하게 말했다. "나에겐 네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소중 하단다. 네가 떠나면 나도 쓸쓸해서 견디기 어려울 거야. 그러나 이번에는 나도 미국으로 돌 아갈 거다. 얼마 안 있으면 다시 같이 살 수 있을 거야." "정말이에요?" "정말이고말고." 알프레드도 페이지를 전송하러 나왔다. "걱정하지 마." 알프레드가 말했 다. "내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널 찾아갈 거야.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지?" 페이지에게는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물론이지." 사흘 후 페이지는 시카고의 오 헤어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장에는 리처드 삼촌이 기다리고 있었다. 페이지가 생전 처음 보


는 삼촌이었다. 아버지에게 들은 것은 사업에 성공해서 부유하다는 것, 그리고 몇 년 전에 숙모가 돌아가셨다는 것밖에 없었다. "우리 집안에 성공한 유일한 인물이지."하고 아버지가 말했었다. 삼촌의 첫마디에 페이지는 넋을 잃고 몸이 굳어졌다. "페이지, 정말 뭐라고 해야 될지 모 르겠다. 방금 소식이 왔는데, 부족전쟁 통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단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아픔이 너무 깊어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삼촌에게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않을 거야. 절대로.' 페이지는 다짐했다. '왜 그곳을 떠났지? 다시 돌아가야겠어!'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면서 페이지는 차창 밖으로 차량의 홍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 시카고가 싫어요." "페이지, 왜 그렇지?" "이건 정글이에요." 리처드 삼촌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려는 페이지를 못 가게 했다. 페이지는 감정이 복받쳐 어쩔 줄 몰랐다. 삼촌은 페이지를 달랬다. "페이지, 벌써 장례가 끝났고, 아버님은 편 히 묻히셨어. 지금 네가 돌아간다고 해도 아무 소용 없어." 삼촌의 말은 정확하지 않았다. ' 알프레드가 거기 있단 말예요.' 페이지가 도착한 후 며칠이 지나자, 삼촌은 장래문제를 심각 하게 상의해 보자고 했다. "상의해 볼 필요도 없어요." 페이지가 말했다. "전 의사가 되겠어요." 스물한 살에 대학을 졸업하자 페이지는 열 개의 의과대학에 입학원서를 냈고, 모두 입학이 허가되었다. 페이지는 보스톤에 있는 의과대학으로 결정했다. 그 소식을 전하려고 자이레에서 세계보건기구 팀과 일하고 있던 알프레드에게 전화를 하는 데 이틀이나 걸렸다. 페이지가 의과대학 진학 소식 을 전하자 알프레드는, "정말 잘됐어. 나도 이제 의과대학이 끝나가고 있어. 당분간은 세계 보건기구 일을 더 해야겠지만 몇 년 안되어서 우리가 같이 일할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했 다. '같이 일할 수 있을 거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이었다. "페이지, 네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내가 며칠간이라도 시간을 내면 네가 하와이로 와서 나하고 만 날 수 있을까?" 페이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이지." 두 사람은 어렵게 하와이에서 만났다. 알프레드는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하와이에서 며 칠을 같이 보내기 위해 얼마나 어려운 여행을 했었는지를 페이지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두 사람은 써니 코브라는 아담한 호텔에서 즐거운 사흘을 보냈다. 두 사람은 전혀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페이지는 알프레드에게 함께 보스톤으로 가자고 하고 싶은 맘이 굴뚝 같았지만,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에 그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알프레드는 남을 돕는 데 헌신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만 생각할 사람이 아니었다. 헤어질 때가 다가오자 페이지가 물었다. "알프레드, 다음에는 어디로 파견될 거야?" "감비아, 아니면 방글라데시가 될지도 몰라." '생명을 구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서 가야만 되겠지...' 그녀는 알프레드를 꼭 껴안고 눈을 감았다.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 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알프레드가 말했다. "나는 절대로 널 잃지 않을 거야." 페이지가 의과대학을 다니는 동안 그녀는 알프레드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알프레드 는 세계 어떤 구석에서 일하더라고 페이지의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는 반드시 전화를 걸었다. 의과대학 2 학년, 연말 직전에 알프레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페이지?" "알프레드! 지금 어디야?" "지금은 세네갈에 있지, 써니 코브 호텔에서 정확하게 1 만 4 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 는 거야." 잠시 그 뜻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아니, 정말 그럴 수..." "망년회 때 하 와이에서 만나는 게 어때?" "정말? 물론 만나야지." 알프레드는 지구를 거의 반 바퀴 돌아 그녀를 만나러 왔다. 두 사람 사이는 더욱 뜨겁고 깊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추고 두 사람만 의 세계가 펼쳐진 것 같았다. "내년에는 나도 세계보건기구의 팀장이 될 거야." 알프레드가 말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 면 우선 결혼부터 해야지..." 그 후 두 사람은 한번 더 만날 기회가 있었다. 서로 떨어져 있 는 동안은 계속 편지가 오갔다. 오랜 세월 알프레드는 그의 아버지나 페이지의 아버지처럼 제 3 세계의 빈곤한 나라에서 헌신적으로 일해 왔다. 드디어 그 알프레드가 찾아오는 것이다. 페이지는 알프레드의 전보를 또다시 읽어보았다. '알프레드가 드디어 샌프란시스코에 도 착하는 거야!' 그녀는 마음이 들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케트와 하니는 각자의 침실에서 자고 있었다. 페이지는 두 사람을 흔들어 깨웠다. "알프레 드가 온대! 온단 말이야! 이번 일요일에 도착한대!" "정말 반가운 소식이군." 케트가


중얼거 렸다. "난 오랜만에 침대에 누웠으니 일요일쯤 깨워줘." 하니는 좀더 관심을 보였다. 침대에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정말 잘됐어. 나도 그 사람 좀 만나보고 싶어. 못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했지?" "2 년." 페이지가 말했다. "하지만 우 리는 언제나 편지로 연락을 했었어." "넌 참 복이 많구나." 케트가 한숨을 쉬었다. "자, 이 제 잠이 다 깨버렸으니 내가 커피를 끓여올게." 세 사람은 식당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알프레드의 도착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면 어떨까?" 하니가 제안했다. "말하자면 신랑을 환영하는 파티 같은 것 말이야."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인데." 케트가 말했다. "우리가 솜씨를 내서 식사 준비를 하면 되겠지?" 하니가 말했다. 케트는 고개를 저었다. "네 음식 솜씨는 벌 써 알고 있어. 아무래도 음식은 밖에서 주문해 와야 될걸." 일요일까지는 나흘 남아 있었다. 세 사람은 틈날 때마다 알프레드의 도착을 축하하는 파 티 계획을 상의했다. 기적적으로 일요일에는 세 사람 다 당직근무가 없었다. 토요일에 페이 지는 간신히 시간을 내 미장원에도 갔다. 그리고 백화점에 가서 새 옷을 마련했다. "이 옷 괜찮게 보여? 그 사람 눈에도 괜찮을 것 같니?" "정말 예뻐!" 하니가 말했다. "그 사람이 너 같은 신부를 얻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페이지는 미소지었다. "내가 그 사람 신부가 될 자격이 있는지 걱정이야. 너도 그 사람이 마음에 들 거야. 정말 훌륭한 사람이거 든." 일요일이 다가왔다. 최고급 음식을 주문해서 식당 테이블에 늘어놓고 얼음에 채운 삼페 인도 준비했다. 세 사람은 알프레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집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오후 2 시에 벨소리가 울리자 페이지는 달려가 문을 열었다. 알프레드가 서 있었다. 약간 피곤해 보이고 살이 빠졌지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알프레드가 틀림없었다. 옆에는 30 대로 보 이는 갈색 머리의 여자가 서 있었다. "페이지!" 알프레드가 소리질렀다. 페이지는 말없이 알프레드를 포옹했다. 그리고 나서 몸을 돌려 하니와 케트를 보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알프레드 터너야. 알프레드, 나와 같이 사는 동료들이야. 이쪽은 하니 태프트고 저쪽은 케트 헌터." "만나서 반가워요." 알프레드가 말했다. 그는 옆에 있던 여자를 돌아보 았다. "내 아내 캐런 터너입니다." 순간 세 여자는 그대로 굳어버린 듯했다.


한참 후에야 페이지가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 아내라고?" "그래, 페이지." 알프레드가 얼 굴을 찌푸렸다. "내가 보낸 편지 못 받았어?" "편지?" "그래, 벌써 몇 주 전에 보냈는데." "그런 편지 못 받았는데..." "아, 이거 참... 뭐라고 말해야 될지. 난 편지에 모든 것을 설명 했기 때문에... 하지만 편지를 못 받았다니..."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정말 뭐라고 해야 될 지 모르겠어, 페이지. 우리가 너무 오래 헤어져 있는 바람에... 그러다가 캐런을 만나서... 무 슨 말인지 알잖아..." "무슨 뜻인지 알겠어." 페이지는 표정 없이 말하고 캐런에게 얼굴을 돌 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다...당신과 알프레드가 행복하기를 바라겠어요." "고마워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캐런이 말했다. "여보, 우리가 그냥 떠나는 게 좋 겠어요." "그래요, 그러는 게 좋겠어요." 케트가 말했다. 알프레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 다. "페이지, 정말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어. 난... 정말... 잘 있어." "잘 가요, 알프레드." 세 사람은 꼼짝 않고 서서 신혼부부가 떠나가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 다. "망할 자식 같으니라고!" 케트가 말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페이지의 눈엔 벌써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난... 그 사람은 그러려고 한 것이... 내 생 각에는... 아마 그 편지에 모든 것이 설명되어 있겠지." 하니가 페이지를 안으며 말했다. "저 런 남자는 거세해 버려야 된다는 법이라도 생겨야 돼." "동감이야." 케트가 말했다. "미안, 나 좀..." 페이지는 급히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그날 그녀는 다시 밖으 로 나오지 않았다. 제5장 그후 몇 달 동안 페이지는 케트나 하니와 같이 시간을 보낼 기회가 별로 없었다. 병원 구 내식당에서 아침식사 때 잠깐 만나거나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게 고작이었다. 아파트에 서로 메모를 남기는 것이 거의 유일한 통신방법이었다. "냉장고에 저녁식사를 남 겨두었음." "전자 레인지가 고장이야!" "청소하지 않고 나가서 미안!" "이러다가는 얼굴 잊어 버리겠어! 토요일에 셋이 저녁이나 하러 나가는 게 어때?" 병원 근무에 따르는 엄청난 압박감과 혹독한 근무시간이 계속되는 형벌같이 여겨지는 가 운데 대부분의 레지던트들은 정신적, 육체적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페이지는 오히


려 압박받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알프레드와 꿈꾸었던 달콤한 장래의 설계가 산산조각 난 상황에서는 오히려 일에 몰두하는 것이 절망감이나 배신감을 어느 정도 잊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알프레드의 존재를 마음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그와의 결별은 페이지의 가슴 속 깊이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의 아픔은 아직 도 줄어들지 않았다. "만약 내가 아프리카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만약 알프레드가 1 년 전에만 돌아왔더라면..." "만약 알프레드가 캐런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의과대학 졸업 후 즉시 아프리카로 돌아갔다면..." "만약..." 되씹어보아도 아무 소용 없는 생각들이 계속 상처를 건드렸다. 어느 날 페이지가 수술복 으로 갈아입으려고 탈의실에 들어갔을 때 '쌍년'이라는 글씨가 그녀의 옷장에 굵은 매직 펜 으로 쓰여 있었다. 다음날에는 진료에 관해 메모해 놓은 노트가 없어졌다. 아무리 찾아봐도 나타나지 않았다. 회진 때 기록한 메모가 송두리째 없어진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잘못 두었 겠지...' 페이지는 애써 좋게 해석하려 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 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페이지는 병원 밖의 세상에 전혀 신경쓰지 않으며 생활했다. 이라크 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뉴스는 들었지만, 그보다는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열다섯 살 소녀 를 돌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동서독이 통일되어 세계가 떠들썩했을 때도 심한 당뇨병 으로 의식을 잃은 환자를 되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쎄쳐 영국 수상의 사임으로 언론이 떠 들어대도 214 호실 환자가 다시 걷게 된 것이 페이지에게는 더 중요한 뉴스였다. 페이지가 그렇게 혹독한 병원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같이 고생하고 봉사하 는 동료 의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소수의 예외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의사들은 다른 사람 의 고통을 덜어주고 생명을 연장하는 데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헌신적인 치료로 죽어가던 환자가 기적같이 소생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들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뿌듯한 긍지를 갖게 되었다. 병원생활에서 가장 심하게 압박감을 받는 것은 응급실 근무였다. 그곳은 각양각색의 사고와 급환으로 끊임없이 환자가 들어왔다. 한순간도 한가할


때가 없었고, 시설과 인원은 태부족이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나 간호사의 사생활도 직 업의 압박감과 상식을 벗어난 근무시간 때문에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9 시에 출근하고 5 시 에 퇴근하는 직장인들과 같은 가정생활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의사들의 이혼율은 평균치보다 엄청나게 높았고 혼외정사도 흔한 일이었다. 톰 창은 병원생활 때문에 가정에 문제가 생긴 경우였다. 그는 식당에서 페이지의 테이블 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난 아무리 힘들어도 병원생활을 버텨낼 수 있어요." 창이 말했다. "문제는 아내가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데 있어요. 내 얼굴 마주치기 가 힘들고 어린 딸아이에게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불평하는 겁니다. 사실 그 렇잖아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부인이 병원에 와본 적 있어요?" "아뇨, 없어요." "톰, 한번 여기서 점심이라도 같이 하면 어떨까요? 당신이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보면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될 거예요." 창의 얼굴이 밝아졌다. "거참, 아주 좋은 생각이네요. 페이지,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해봐야겠어요. 당신을 만나보면 더 좋 겠는데... 점심식사 하러 오면 같이 할 수 있겠어요?" "물론이죠. 나도 부인을 만나보고 싶어 요." 톰 창의 아내 싸이는 누구든지 다시 한번 쳐다볼 고전적인 미인이었다. 창은 먼저 병원 을 구경시키고 점심시간에 페이지와 식당에서 만났다. 두 사람을 소개시킨 다음 아내가 홍 콩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랐다고 페이지에게 설명했다. "샌프란시스코가 맘에 드세요?" 페이지가 물었다. 싸이는 잠시 주저했다. "참 흥미있는 도 시예요." 굳이 험담을 피하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도 없고... 어쩐지 외톨이가 된 기분이에요. 이곳은 너무나 큰 도시고, 또 너무 시끄러워서..." "내가 듣기에는 홍콩도 아 주 크고 복잡한 도시라던데요?" "우리가 살던 곳은 홍콩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섬의 작은 마을이었어요. 그곳에는 자동차도 별로 없고, 도시의 소음 같은 것은 전혀 없었어요. 우리 마을에서는 이웃간에 서로 잘 알고 도우면서 살았어요." 그녀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우리 세 식구가 그곳에서 살 때는 정말 행복했어요. 그곳 라마 섬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거든요. 해변에는 백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고, 그 뒤로는 아담한 농장들이 있었죠. 멀지 않은


삭꾸 만의 작은 어촌에서는 막 잡아온 생선을 살 수 있었어요. 정말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곳이었 는데..." 향수에 젖어들어 그녀의 눈길은 먼곳으로 떠나 있었다. "그때는 남편과 함께 보내는 시간 이 많았어요. 정상적인 가정이었지요.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돌아오면 식사하고 함께 시 간을 가졌었어요. 이곳에 온 이후로는 얼굴 보기도 힘들어요." 페이지가 말했다. "이곳 생활 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은 나도 잘 알아요. 부인과 얼굴도 마주치기 힘든 것은 톰도 견디기 어려울 거예요. 하지만 몇 년만 참으면 톰은 전문의로서 독립하게 될 것이고, 그 때는 다시 정상적인 가정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모든 레지던트들이 똑같은 시련을 받는다는 것을 이해하세요." 톰 창은 아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들었지? 내 말이 틀린 것 아니잖아.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조금만 더 참으면 돼." "그렇게 해볼게요." 싸이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는 전혀 확신이 없었다. 그들이 테이블에서 얘기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식당에 들어와 음 식 진열대 앞에 섰다. 그 남자의 뒷모습만 보았는데도 페이지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색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음식을 받아든 남자가 돌아섰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페이지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본 창이 물었다. "왜 그래요? 안색이 아주 안 좋은데..."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페이지는 얼버무렸다. '그 사람은 이제 잊어야 돼. 다 끝났잖 아' 그러나 어린 시절 알프레드와 함께 즐거웠던 나날... 서로 아끼고 사랑했던 시절... 둘이 서 발견했던 사랑의 환희... 그 아련한 추억이 다시 몰려왔다. '그런 추억을 어떻게 지워버리 지? 기억 제거 수술이라도 받아서 지울 수 있다면...' 점심 후 복도에서 하니와 마주쳤다. 그녀는 숨이 턱에 닿도록 허둥거렸고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페이지가 물었다. 하니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별 일 아니야." 말하고는 부리나케 달아났다. 하니는 찰스 이슬러라는 내과 책임 전문의 밑에서 수련받고 있었다. 이슬러 박사는 모든 일을 원리원칙대로 하는 까다로운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하니가 첫 회진에 참여했을 때 이슬러 박사가 말했다. "닥터 태프트, 당신이 우 리 팀에 들어오는 것을 모두 고대하고 있었소. 월러스 박사가 당신의 의과대학 성적을 자랑 스럽게 말해 주었소. 내과 전문의를 지망했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좋아요. 우리 팀에서 3 년간 같이 일하게 됐구만." 회진이 시작되었다. 첫 환자는 나이 어 린 멕시코 소년이었다. 이슬러 박사는 다른 레지던트들은 제쳐놓고 하니에게 물었다. "닥터 태프트, 이 환자의 증세를 잘 관찰하면 배울 게 많아요. 병을 진단하는 데 필요한 교과서적 인 증세를 보이고 있소. 식욕부진, 체중감소, 입안의 쇳냄새, 지속되는 피로, 무기력증, 심한 신경질, 그리고 운동신경의 마비증세를 보이는데 이런 경우, 어떤 진단을 내릴 수 있소?" 미 소를 띠며 묻는 이슬러 박사는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하니는 잠시 이슬러 박사를 쳐다보았 다. "글쎄요, 몇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이슬러 박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하니를 쳐다보았 다. "이런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이..." 레지던트 한 사람이 참다 못해 끼어들었다. "납중독 아닙니까?" "맞았어." 이슬러 박사가 말했다. 하니가 그제야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납 중독이 틀림없어요." 이슬러 박사는 다시 하니에게 물었다. "그럼 납중독은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하니는 우물쭈물하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글쎄요, 치료방법은 환자의 상 태에 따라 몇 가지 있잖아요?" 한 레지던트가 말했다. "만약 환자가 오랜 기간에 걸쳐 중독되었다면 뇌기능장애가 올 수 있고, 따라서 뇌기능을 정상화시키는 치료를 해야겠지요." 이슬러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 지금 바로 그런 치료를 시작했어. 환자의 체내 탈수현상과 전해질의 불균형을 해소 할 조치를 취했지. 그리고 화학요법을 계속하면 결국 중독증세가 해소될 거야." 다시 하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 환자는 80 대의 노인이었다. 두 눈은 충혈되었고 눈꺼풀이 부어올라 눈을 뜨는 것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눈은 곧 치료될 겁니다." 이슬러 박사는 환자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 다. "기분이 좀 어떠세요?" "글쎄, 내 나이치고는 나쁜 편은 아니오." 이슬러 박사는 환자가 덮고 있던 담요를 걷어냈다. 환자의 무릎과 발목이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발바닥에는 상 처가 보였다. 이슬러 박사는 레지던트들을 향했다. "무릎과 발목이 부어오른 것은 관절염 때문이야." 그는 하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다 발바닥의 상처와 결막염이 겹쳤는데, 그렇다면 진단은 분명한 게 아닐까?" 하니는 간신히 입을 떼었다. "글쎄요. 이건... 아무래 도..." "이건 라이터 병이에요." 레지던트 한 사람이 대답했다. "아직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병입니다. 대개 미열을 동반하는 게 이 병의 증세지요." 이슬러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았어." 그는 또 하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치료방법은?" "치료방법요?" 그 레지던트가 다시 말했다. "치료방법은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항생제 투여로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맞았어.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군." 이슬러 박 사가 말했다. 일행은 환자 10 여 명을 회진하고 나서 아침 일정을 끝냈다. 하니는 이슬러 박 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이슬러 박사님, 잠시 만나뵙고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좋아요. 내 사무실로 와요." 두 사람이 이슬러의 사무실에 앉았을 때, 하니가 말문을 열었다. "저한 테 많이 실망하셨죠?" "글쎄,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라서 좀 놀랐..." 하니가 말을 막았다. "이슬러 박사님,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사실 어젯밤에 한잠도 자지 못했거든요. 박사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설레어 전혀 눈을 붙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아침에도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는 놀란 표정으로 하니를 쳐다보았다. "아, 그랬었군. 그러면 그렇지... 당신 의과대학 성적은 내가 처음 보는 높은 것이었거든. 왜 의과대학을 가게 되었지?" 하니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말이 없었다. 수줍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의사들은 살려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전 그애가 죽어가는 것을 보았어요. 오랫동안 고통받으면서 죽어가는데, 저 자신이 너무 무기력 하다는 것을 절감했어요. 그 이후 저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 제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어요." 하니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정말 착하 고 마음이 여린 여자로군.' 이슬러 박사는 생각했다. "닥터 태프트, 나한테 이렇게 얘기 하 기를 정말 잘했소." 하니는 그를 쳐다보았다. '내 말을 그대로 믿잖아.'


제6장 샌프란시스코 시의 다른 한편에서는 기자들과 TV 카메라맨들이 루디네토가 법원 건물에 서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디네토는 법원 건물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면서 얼굴에 웃 음을 띠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두 손을 흔들었다. 마치 봉건영주가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 들을 내려다보는 태도였다. 옆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붙어 있었다. '그림자'로 불리는 큰 키 에 깡마른 사람과 라이노라는 무거운 몸집의 인물이었다. 루 디네토는 항상 그랬듯이 비싼 옷과 장식품으로 한껏 멋을 내고 있었다. 회색 실크 양복, 흰 셔츠에 감색 타이를 메고 있었 다. 구두는 악어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작은 키에 뚱뚱한 몸집이었고, 안짱다리였기 때문에 양복을 만들 때 특별히 날씬해 보이도록 신경을 썼다.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기 자들을 대했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기자들도 디네토의 말을 그대로 기사 에 인용하곤 했다. 그는 방화 혐의, 범죄단체조직 혐의, 그리고 살인 혐의로 세 번이나 기소 되었었지만, 그때마다 무혐의로 풀려났었다. 이제 계단을 다 내려온 디네토에게 기자 한 사람이 소리쳐 물었다. "디네토 씨, 무혐의로 풀려나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까?" 디네토는 껄껄 웃었다. "물론 알고 있었지. 난 죄 를 지은 적이 없는 사업가일 뿐이잖소? 도대체 검찰은 왜 나 같은 사람을 기소하느라 시간 과 정력을 낭비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오. 그런 낭비 때문에 세금이 높은 것 아닙니까?" TV 카메라가 그의 얼굴을 향했다. 루 디네토는 걸음을 멈추고 활짝 웃는 얼굴로 포즈를 취했다. "디네토 씨, 당신에 대한 살인 혐의가 검찰측 증인 두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 에 성립되지 않았지요? 어째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것으로 기대했던 증인들이 나타 나지 않았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야 간단하지요." 디네토가 대답했다. "정직한 사람들이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할 수 없 으니까 안 나온 것 아닙니까?" "검찰은 당신을 서부지역의 마피아 두목으로 지목하고, 최근 의 살인사건은 당신이 배후에서 조종..." "내가 조종하는 것은 내 식당 손님들의 예약석을 배치하는 것밖에 없소. 내 손님들이 즐


겁고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내 임무잖소?" 그는 싱글거리며 모여 있는 기자들 을 둘러보았다. "그건 그렇고, 여러분, 모두 오늘 저녁 내 식당에 오시면 내가 한턱 내지요. 모두들 오세요." 그는 길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는 검은 리무진으로 다가갔다. "디네토 씨, 한 마디만 더..." "디네토 씨, 잠깐..." "디네토 씨..." "오늘 저녁 내 식당으로 오면 돼요. 여러분 중에 내 식당을 모르는 사람은 없잖소." 루 디네토는 웃음을 띤 채 손을 흔들며 차에 탔다. 라이노는 뒷문을 닫고 나서 조수석에 탔다. '그림자'는 운전대를 잡았다. "아주 훌륭했습니다, 두목!" 라이노가 말했다. "그 골치 아픈 기자들을 정말 멋지게 다루었어요." "어디로 갈까요?" '그림자'가 물었다. "집으로 가, 목욕 좀 하고 뭘 좀 먹어야겠어." 자동차가 출발했다. "그 증인 얘기가 좀 마 음에 걸리는데..." 디네토가 말했다. "자네들, 확실하게 조치했겠지?" "물 속에서 말할 수 있 는 인간이라면 몰라도, 전혀 걱정할 것 없습니다." 디네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자동차는 필모어 가를 빠른 속도로 지나고 있었다. 디네토가 말했다. "자네들, 판사가 검 찰의 기소를 기각했을 때 검사들 표정 봤어?" 그때, 갑자기 강아지 한 마리가 달리는 리무 진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림자'는 핸들을 꺾어 개를 피하면서 브레이크 페달을 힘껏 밟았 다. 자동차는 인도 위로 밀려 올라가 가로등을 들이받았다. 라이노의 이마가 앞유리창에 부 딪혔다. "야!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디네토가 소리쳤다. "너 지금 누굴 죽일 작정이 야?" '그림자'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되었다. "두목, 죄송합니다. 강아지가 차 앞으로 뛰어드 는 바람에..." "그래, 강아지 목숨이 나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야 뭐야? 이런 병신 같은 놈..." 라이노가 신음소리를 냈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대네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마가 찢 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디네토가 '그림자'에게 소리쳤다. "라이노가 많 이 다쳤잖아!" "괜찮아요." 라이노가 중얼거렸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디네토는 '그림자' 에게 소리쳤다. "빨리 병원으로 차를 돌려!" '그림자'는 차도로 리무진을 후진시켰다.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이 가까이 있어. 그곳 응급실로 가!" "알았습니다, 두목." 디네토는 등을 기대고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강아지 한 마리 때문에..."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디네토가 '그림자'와 라이노를 데리고 응급실에 들어갔을 때 케트가 당직근무를 하고 있 었다. 라이노의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디네토는 케트에게 소리쳤다. "어이, 이봐!" 케트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나한테 말한 거예요?" "어디 딴 사람이 있어? 지금 이 사람 출혈이 심해. 당장 치료해주라구!" "지금 응급환자가 대여섯 명이나 기다리고 있어요." 케트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했다. "그분 차례가 되면 치료해 드리지요." "우린 기다릴 수 없어!" 디네토는 다시 소리쳤다. "지금 당장 치료해야 돼!" 케트는 라이노에게 다가가서 상처를 살펴보았다. 솜을 상처 부위에 대고 손으로 눌렀다. " 이렇게 누르고 있어요. 하던 일을 끝내고 돌아올게요." "지금 당장 치료하지 않을 거야? 당 장 못해?" 또 한번 디네토가 소리쳤다. 케트는 디네토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기는 시립병원 응급실이고, 내가 당직의사예요. 잠자코 있든가, 아니면 여기서 나가요." 듣다 못해 '그림자' 가 끼어들었다. "이봐요, 지금 이분이 누구신지 모르는 모양인데... 이분 말대로 하는 게 좋 을 거요. 바로 루 디네토 씨랍니다." "자, 이제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 빨리 저 친구를 치료 하라구." 디네토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안 들리시는 모양이네요." 케트가 말했다. "한 번만 더 말하지요. 조용히 있지 않으려 면 여기서 나가요. 난 할 일이 많아요." 라이노가 입을 열었다. "디네토 씨에게 그렇게 말할 수..." 디네토는 라이노에게 소리쳤다. "입 닥쳐!" 디네토는 말투를 완전히 바꾸어 케트에게 말했다. "저 사람을 가능한 한 빨리 치료해 주면 고맙겠소." "최선을 다할께요." 케트는 라이노를 간이침대에 눕혔다. "상처를 누르고 누워 있어요. 하 던 일을 곧 끝내고 올게요." 그녀는 디네토를 향했다. "저쪽 모퉁이에 걸상이 몇 개 있어요. 거기 앉아 기다리세요." 디네토와 '그림자'는 케트가 응급실 다른 쪽에 있던 환자들에게 돌 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 '그림자'가 말했다. "두목 이름을 듣고도 누군지 깨닫지 못하다니..." "알았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보통 여자가 아닌데..." 15 분쯤 지나 케트는 라이노에게 돌아왔다. 상처를 살펴보고 눈동자도 검사했다. "뇌진탕 걱정은 없군요." 그녀가 말했다. "운


이 아주 좋은 편이에요. 상처는 심하지만 다른 문제는 없을 거예요." 디네토는 케트가 라이 노의 이마를 꿰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거침없이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처를 다 꿰매고 나자 케트가 말했다. "그대로 놔두면 잘 아물 거예요. 5 일 후에 다시 오 세요. 실밥을 빼야 되니까요." 디네토가 다가와 라이노 이마의 꿰맨 자리를 살펴보았다. " 거참, 대단한 솜씨인데..." "고마워요." 케트가 말했다. "자, 그럼 난 다른 환자들이 있어서..." "잠깐 기다려요." 디네토가 말했다. 그는 '그림자'를 돌아보았다. "한 장 꺼내드려." '그림 자'는 주머니에서 백 달러 지폐 한 장을 꺼내 케트에게 건넸다. "자, 받아요." "경리과는 본관 건물에 있어요." "이건 병원에 치료비를 내는 게 아니고, 당신에게 주는 거요." "그런 건 필요없어요." 디네토는 다른 환자들에게로 가 치료를 시작하는 케트의 뒷모 습을 바라보았다. "두목, 액수가 적었던 모양이지요?" '그림자'가 말했다. 디네토는 고개를 저었다. "저 여자 는 원칙이 분명한 사람이야.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야. 마음에 드는데" 그는 잠시 말을 멈 추고 생각에 잠겼다. "에반스 박사가 곧 은퇴한다고 했었지, 맞아?" "네." "좋아. 저 여의사 의 배경을 샅샅이 조사해 와. 가족관계, 애인관계, 다녔던 학교, 그리고 사생활에 관한 것까 지 모조리." "그건 뭘 하려구요?" "다 쓸 데가 있어서 그래. 언젠가는 저런 여의사가 아주 요긴할 때가 올 거야." 제7장 병원 운영의 실세는 간호사들에게 있었다. 간호원장 마가릿 스펜서는 엠바카데로 시립병 원에서 일한 짖 20 년이 넘었고, 병원 구석구석 모르는 데가 없었으며, 의사나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징이나 문제점도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간호원장의 영향력은 막강했 고,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한 의사들은 그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녀는 어떤 의사 가 마약 중독자인지 또는 술고래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의사가 무능하고, 어느 의사가 헌신적이고 능력이 뛰어난지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실습 간호사, 정규 간호 사, 수술 간호사 전체를 통괄하고 있었다. 어떤 간호사가 어떤 수술실에 들어가고,


어떤 병 동에 배치되는가 하는 것은 간호원장 단독 결정사항이었다. 수많은 간호사들 중에는 없어서 는 안될 탁월한 사람도 있었지만, 오히려 방해가 되는 무능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의사들이 간호원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좋은 간호사를 배속받는다 는 뜻이었다. 복잡한 장기수술에 주사도 제대로 못 놓는 무능한 간호사를 배치시킬 수도 있 었고, 마음에 드는 의사에게는 간단한 편도선 수술에 일급 간호사를 배치시킬 수도 있었다. 마가릿 스펜서는 편견이 심한 사람이었다. 특히 여의사와 흑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케트 헌터는 흑인 여의사였다. 케트의 레지던트 생활의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증명할 수도 없 었지만, 근무중 자신에 대한 편견을 느낄 수 있었다. 유능한 간호사의 지원을 요청하면 항상 다른 업무 때문에 올 수 없었고, 대신 보내진 간호사들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또 케트는 남자 성병 환자들만 계속 치료하게 되었다. 처음 몇 명은 별 생각 없이 치료했지만, 하루에 도 대여섯 명 이상 보내왔을 때,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에 페이지를 만나 물었다. "요새 남자 성병 환자들 많이 치료했어?" 페이지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대답 했다. "지난 주에 한 사람 치료했던 것 같아. 병원 직원이었어." '이건 아무래도 그냥 놔둘 수 없는데...' 케트는 생각했다. 간호원장 스펜서는 닥터 헌터를 계속 괴롭혀 스스로 그만두 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케트의 능력이나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제대로 판단하 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조금씩 케트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환자나 동료들에게 자신의 능력과 사명감을 인식시키는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 었다. 특히 병원에서 유명해진 '돼지피 사건'은 케트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결정 적인 계기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케트는 던다스라는 선임 레지던트와 회진을 돌고 있었 다. 두 사람은 의식을 잃고 있는 환자의 침대로 다가갔다. "레비 씨는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 은 환자요." 던다스가 케트에게 말했다. "출혈이 아주 심해요. 빨리 수혈을 받지 않으면 생 명이 위험합니다. 그런데 병원에는 지금 같은 혈액형 피가 부족하고, 환자 가족은 헌혈을 거 부하고 있어요.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난처한 상황이오." 케트가 말했다. "지금


가족이 병 원에 와 있어요?" "아래층 대기실에 있을 거요." "내가 그 사람들과 얘기 좀 해도 괜찮을까 요?" "소용없을 거요. 내가 벌써 얘기해 보았는데... 도무지 말이 안통하는 사람들이라니까." 회진이 끝나고 케트는 아래층 대기실로 갔다. 환자의 부인과 다 큰 아들, 딸들이 있었다. 아들들은 유태교 의식에 쓰는 모자와 옷을 입고 있었다. "레비 부인?" 케트가 물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편은 좀 어때요? 아직 수술을 받지 못했나요?" "아직 수술을 못했어요." 케트가 말했다. "우리에게 헌혈하라는 소리는 더 하지 마세요. 요 즘 세상에 에이즈도 있고, 너무 위험해서 그런 것은 할 수 없어요." "레비 부인," 케트가 말 했다. "헌혈하면서 에이즈에 감염되는 법은 없어요.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그런 말 말아요. 나도 신문에서 읽었어요. 뭐가 어떻게 되는지 다알고 있다구요." 케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잘 알았어요. 그렇다면 할수없죠. 레비 부인. 지금 병원에는 같은 혈액형의 피가 부족하지만 어쩌면 별 문제 없이 해결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럼 잘됐네요." "아무래도 댁의 남편에게 돼지피를 수혈해야 될 것 같아요." 부인과 아 들, 딸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케트를 쳐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돼지피를 수혈한다고 했어요." 케트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마 별로 해롭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레비 부인의 소리에 케트는 걸음을 멈추 었다. "왜 그러시죠?" "아니... 저, 상의할 시간 좀 주세요." "그러지요." 15 분 후 케트는 닥터 던다스에게 말했다. "레비 씨 가족은 기꺼이 헌혈을 할 거예요. 이제 걱정할 거 없어요." 그 사건은 삽시간에 병원 전체에 퍼졌고, 며칠 안 가서 전설적인 사건이 되었다. 케트를 무시하고 따돌리던 의사와 간호사들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이제는 친숙하게 말도 붙이 고 의견을 묻기도 했다. 며칠 후, 케트는 위궤양 환자인 톰 레너드의 특실에 들어갔다. 그는 외부의 식당에서 주문해 온 점심을 먹고 있었다. 보통 사람에게도 부담이 갈 만한 엄청난 양이었다. 케트는 그의 침대로 다가갔다. "지금 뭘 하는 거예요?" 레너드는 케트를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오랜만에 음식다움 음식을 먹고 있는 중이오. 좀 들어볼래요? 음식이 아주 많 은데..." 케트는 간호사를 호출했다. "불렀습니까?" "이 음식을 당장 치워요. 레너드 씨의 음식은 병원 처방에 의한 것 밖에는 드릴 수 없어


요. 진료기록을 읽지도 않았어요?" "읽었지요. 하지만 레너드 씨가..." "지금 당장 치워요!" "아니, 잠까!" 레너드가 격앙된 표정으로 말했다. "병원에서 주는 그 쓰레기 같은 음식은 먹을 수 없어!" "위궤양을 치료하려면 그럼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어요." 케트는 간호사에게 다시 지시했다. "당장 치워요." 30 분 후, 케트는 병원장에게 호출되었다. "월러스 박사님. 부르셨습니까?" "그래요. 좀 앉으시오. 톰 레너드 씨가 당신 환자 맞소?" "그렇습니다. 아까 병실에 들렀더 니 엄청난 양념쇠고기 샌드위치에다 오이 피클과 감자 샐러드를 먹고 있더군요. 자극성이 강한 음식만 잔뜩 차려놓고 정신없이 먹고 있길래..." "그래서 치우라고 지시했소?" "물론 그랬지요." 월러스 박사는 앞으로 몸을 내밀려 말했다. "닥터 헌터, 당신은 톰 레너 드가 이 병원의 재단이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소. 그 사람이 불만을 갖도록 해 서는 안돼요. 내 말뜻 알아듣겠소?" 케트는 월러스 박사의 얼굴을 쳐다보며 표정도 바꾸지 않고 말했다. "못 알아듣겠는데요." 월러스 박사는 눈을 깜박였다. "지금 뭐라고 했소?" "저는 톰 레너드 씨가 불만을 갖지 않게 하려면 위궤양을 제대로 치료해 줘야 한다고 생 각하는데요. 그런 음식을 마구 먹으면 위장이 찢어지면 찢어졌지, 궤양이 나을 리 없잖습니 까?" 월러스 박사는 억지로 미소지었다. "그 사람 스스로가 선택하도록 내버려두면 되지 않 소?" 케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 그 사람의 주치의거든요. 다른 말 씀은 더 없으신가요?" "난...그게...없소. 그뿐이요." 케트는 사무실을 떠났다. 벤자민 월러스 박사는 어처구니가 없는짖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도대체 여의사들이 란...말이 통해야지...' 하루는 케트가 야간 당직근무를 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닥터 헌터, 320 호실로 좀 와주셔야겠어요." "곧 갈게요." 320 호실 환자는 80 대의 몰로이 부인이었다. 암 환자로 암세포 가 너무 많이 퍼져서 회복될 가능성이 없었다. 케트가 병실 문에 다가가자 안에서 심하게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케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몰로이 부인은 강한 진통제가 투여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의식은 있었다. 그녀의 아들과 딸 둘이 옆에 있었다. 아들이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이 유산을 똑같


이 3 등분해서 나누어 갖는 것이 제일 공평한 방법이야." "안돼!" 딸 하나가 소리쳤다. "지금 까지 엄마를 돌본 것은 로리와 나야. 음식 만들고, 청소하고, 엄마를 씻기고, 옷 갈아입히고,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우리가 다 맡아서 했어. 유산에 대한 권리는 우리 두 사람밖에 주 장할 수 없어. 그리고..." "나도 너희들이나 마찬가지로 친자식이란 말야!" 아들이 소리질렀 다. 몰로이 부인은 침대 위에서 꼼짝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케트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실례합니다." 딸이 케트를 흘낏 쳐다보더니 말했다. "간호사, 나중에 다시 와요. 지금 우리끼리 얘기할 게 있어요." 케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몰로이 부인은 내 환자예요. 당신들 모두 10 초 내 에 이 방에서 나가요. 방문객 대기실에 가서 기다리든 싸우든 마음대로 하세요.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비원들을 불러 쫓아낼 거예요." 아들은 케트에게 뭐라고 말하려다 그녀의 이글거리는 눈길과 마주치자 입을 다물어버렸 다. 그는 누이들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밖에 나가서 얘기하지." 케트는 세 사람이 방 에서 나가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문이 닫히자 침대로 다가가 몰로이 부인의 머리를 쓰다 듬었다. "무슨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닐 거예요." 케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고는 침대 옆에 앉아 부인의 손을 잡고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우리 모두 결국엔 죽는 거 야.' 케트는 생각했다. '다일란 토마스가 뭐라고 했든 간에 중요한 것은 고통 없이 평화스럽 게 영원히 잠드는 거야.' 케트가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데 직원 한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들 어왔다. "닥터 헌터, 사무실로 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케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고마워요." 그녀는 온몸에 기브스를 하고 다리를 위로 매달아놓은 환자에게 말했다. "금방 돌아올게요." 케트는 사무실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누나, 잘 있었어?" "마이클!" 동생의 목소리를 듣는 반가움도 잠깐 뿐, 케트는 곧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동 생이 급한 전화를 했다는 것은 틀림없이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병원 에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 아파트 번호를 알고 있지? 정말 급할 때는..." "나도 알아, 누나. 미안해. 하지만 도저히 기다릴 수 없었어. 문제가 생겼거든." 케트는 벌써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사업에 투자하려고 어떤 친구에게 돈을 좀 꾸었는데..." 케트는 무슨 사업에 어떻게 투자했는지 물어볼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 사업이 잘 안됐다는 말이지." "그래. 지금 그 친구가 꾼 돈을 갚으라고 해서 말야." "마이클, 대체 얼마나 되는데?" "글쎄, 한 5 천 달러만 보내줄 수 있으면..." "뭐라고?" 사무실에 있던 간호사가 놀란 표정 으로 케트를 쳐다보았다. '아니, 5 천 달러라니...' 케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난 그렇 게 많은 돈이 없어. 당장은... 그래, 반 정도는 보내줄 수 있어. 나머지는 몇 주 더 걸려야 될 거야. 그러면 되겠어?" "할수없지 뭐, 그렇게라도 해줘. 누나를 계속 괴롭히긴 싫지만, 워낙 사정이 급해서..." 케트는 마이클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벌써 스물두 살이나 된 동생은 항상 말도 안되는 사업을 한답시고 돈을 없앴다. 범죄조직원들과 몰려다니면서, 지금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상적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케트는 마이 클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 '다 내 잘못이야.' 케트는 생각했다. '내가 마이클 혼자 남겨놓고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발 사고내지 않도록 조심해. 마이클, 사랑해." "누나, 나도 누나를 사랑해." '어떻게든지 돈을 만들어 줘야 돼.' 케트는 생각했다. '이 세 상에서 내게 소중한 사람은 마이클뿐이야.' 이슬러 박사는 닥터 태프트와 다시 일하는 것에 기대를 걸었다. 첫 회진에서 있었던 무기 력한 하니의 행동을 다 이해했고, 그녀가 자신을 존경한다는 사실도 기분나쁘지 않았다. 그 러나 다시 회진이 시작되자, 하니는 다른 레지던트들 뒤로 돌면서 한번도 질문에 대답하거 나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회진이 끝나고 나서 이슬러 박사는 병원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무슨 문제가 있소?" 월러스 박사가 물었다. "닥터 태프트가 문제요." 월러스 박사는 이해 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이슬러를 쳐다보았다. "닥터 태프트가 문제라구? 그녀는 최고의 성적 으로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우리 병원으로 올 때의 추천서 내용도 내가 본 중 가장 훌륭한 것이었는데." "그래서 나도 이해가 안 간다는 겁니다." 이슬러 박사가 말했다. "내 판단뿐 아니라 다른 레지던트들 보고에도 계속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요. 진단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고, 치료과정에서도 심각한 실수를 저지른다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나 도 좀 알고 싶어요." "글쎄, 이해할 수 없군. 그렇게 훌륭한 성적과 평가를 받았는데..." "닥터 태프트가 졸업한 의과대학 학장에게 한번 전화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이슬러가 제안했다. "아, 짐 피어슨? 아주 훌륭한 의사지. 나도 잘 아는 사이니 즉시 전화해 봅시다." 몇 분 후, 짐 피어슨 박사와 전화가 연결되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가볍게 몇 마디 한 후 월러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네, 혹시 베티 루 태프트라는 졸업생을 기억하고 있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알고 있어." "짐, 닥터 태프트 때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우리 병원 에 지원할 때 자네가 아주 뛰어난 학생이라고 추천했었지?" "맞아." "지금 내 앞에 자네 추천서가 있는데, 자네 말이 의과대학 교수 생활을 통틀어 처음 보는 우수한 학생이라고 돼 있구만." "그랬지." "이런 학생은 의학계에 큰 기여를 할 자질이 있다 고도 했지?" "그랬어." "혹시 미심쩍은 것은 없었나?" "전혀 없었어." 피어슨 박사는 단호하 게 말했다. "그녀가 뛰어난 학생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아마 신참 레지던트라 너무 긴장해서 그럴 거야. 좀 마음이 여린 편이거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잘 적응하고 훌륭한 의사가 될 거야." "물론 그녀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어야겠지. 어쨌든 고맙네. 다시 연락하 지." "천만에. 시간 나면 다시 연락하게." 전화가 끊겼다. 짐 피어슨 학장은 전화를 끊은 다 음에도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되씹으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내 가정이 더 중요해' 제8장 베티 루 태프트는 너무나 뛰어난 집안에 태어났다는 것이 불운이었다. 미남으로 유명했던 아버니는 테네시 주 멤피스 시에서 컴퓨터 회사를 창업하고 성공시켜 부와 명예를 함께 누 리는 사람이었다. 어머니 역시 미인으로 숱한 남성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고, 유전공학자로 서도 명성을 떨쳤다. 하니의 오빠와 쌍둥이 언니들 역시 모두 잘생기고 머리가 좋았으며 부 모 못지않게 야심만만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태프트 집안은 멤피스의 저명한 가문 중 하 나로 꼽혔다. 하니의 출생은 바로 위의 쌍둥이 언니들이 여섯 살이었을 때, 부모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니는 실수로 태어났어요." 어머니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냥 떼어버릴까 하다 가 남편이 반대해서 낳았지요. 지금은 좀 후회하고 있지만..." 하니의 언니들은 눈이 번쩍 뜨 일 미인이었지만 하니는 그저 평범했다. 언니들은 학업에도 뛰어났지만, 하니는 항상 그저 그랬다. 언니들은 9 개월 됐을 때 벌써 말하기 시작했지만, 하니는 거의 두살 될 때까지 한 마디도 못했다. "하니를 '우리 집 바보'라고 부르지." 아버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태프트 가문의 미운 오 리 새끼인 셈이지. 문제는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하니가 특별히 못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뛰어나게 예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 했다. 갸름하고 선이 가는 얼굴, 색깔이 선명하지 않은 금발머리, 그리고 특징 없는 몸매, 어 디 한 곳 눈에 띄는데가 없었다. 하니의 장점은 유난히 착한 마음씨였다. 남에게 얼굴을 찌 푸리는 법 없이 항상 남의 입장을 생각해 주는 착한 성격이었다. 문제는 집안 식구 모두가 경쟁적이고 남보다 앞서가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니의 좋은 점이 오히려 결점으로 취 급되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하니는 부모님과 언니들을 기쁘게 해주고 자신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라왔다. 그러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부모님은 자신들의 일에 전념하면 서 하니에게 신경쓰지 않았고, 언니들은 미인대회에 나가거나 장학금과 상을 타느라고 바빴 다. 하니는 몹시 내성적이었기 때문에 더욱 불행하게 느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결국 집안 식구들은 하니에게 심한 열등의식을 심어준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하니의 별명은 '벽지의 꽃'이었다. 학교에서 댄스 파티나 모임이 있을 때 항상 혼자 오고서도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지를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남들이 즐기는 데 방 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언니들이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 아이들과 같이 파티에 가 면 하니는 혼자 자기 방에 올라가 숙제와 씨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럴 때는 간신히 울음을 참았다. 주말과 어름방학 때는 동네 아이들을 돌봐주고 용돈을 벌었다. 하니는 아이들 돌보는 것 이 즐거웠고, 아이들도 하니를 따랐다. 한가한 시간에는, 혼자서 멤피스 시를


돌아다녔다. 엘 비스 프레슬리가 살았던 그레이스렌드도 구경했고, 블루스 음악이 시작되었다는 비얼 가도 헤매고 다녔다. 공룡의 뼈가 모아져 진열된 핑크 팔레스 박물관과 시립 식물원에도 가보고, 수족관도 구경했다. 언제나 혼자였다. 하니는 자신의 인생이 갑자기 바뀌리라고는 전혀 예 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니는 같은 반 친구들이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그들 의 화제는 거의 성에 관한 것이었다. "너, 리키하고 같이 자보지 않았어? 아직도? 그애가 최 고야." "조는 금방 흥분해..." "어젯밤에는 토니와 데이트했었지. 지금 피곤해 죽겠어. 그애는 지칠 줄도 모르는 것 같아. 오늘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니는 부러움과 서글픔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자신에겐 그들처럼 성의 즐거움을 알 기회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날 원하 겠어?' 하니는 혼자 생각했다. 어느 금요일 저녁, 학교에서 댄스 파티가 있었다. 1 년에 한 번 정장을 하고 모두 참석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하니는 가고 싶은 맘이 전혀 없었다. 그때 아버짖가 하니에게 말했다. "얘야, 난 네가 좀 걱정이야. 언니들 말이 네 별명이 '벽지의 꽃' 이라며? 데이트할 남학생이 없어 댄스 파티에 갈 엄두를 못낸다니..." 하니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저도 데이트할 사람 있어요. 같이 파티에 갈 거예요." '제발 내 데이트 상대가 누구인지 묻지는 마세요...' 속으로 빌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니는 할수없이 파티에 가서 혼자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춤추고 즐기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 다. 하니의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학생은 로저 머튼이었다. 잘생긴 얼굴에 건장한 체격 의 머튼은 미식축구 팀 주장이었다. 파티 도중에 여자친구와 춤을 추다가 심한 말다툼이 벌 어졌다. 그는 벌써 술에 취해 있었다. "나쁜 자식! 넌 너밖에 모르는 형편없는 놈이야!" 여자 친구가 소리질렀다. "이 멍청한 계집애가..." "가서 너나 혼잦 재미 봐!" "쌀리, 그런 걱정하 지 마. 나하고 재미 보려는 여자가 한둘인 줄 알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 학교


어떤 여 자애라도 문제 없어!" "맘대로 해!" 여자친구는 거친 걸음으로 파티장을 나갔다. 하니는 그 말다툼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머튼의 눈길이 그를 쳐다보던 하니와 마주쳤다. "뭘 쳐다보는 거야?" 그는 약간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냥..." 하니가 말했다. "그 멍청한 년, 어디 두고 봐!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그... 그래...?" "본때를 보여주 겠어. 자, 우리 같이 한잔 하자구." 하니는 잠시 주저했다. 머튼은 벌써 상당히 취한 것 같았 다. "글쎄, 저..." "좋아. 내 차에 가면 한 병 있어." "난 술 같은 건..." 머튼은 막무가내로 하니의 팔을 잡고 파티장 밖으로 끌고 갔다. 하니는 옥신각신 다투어 머튼을 무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냥 따라나섰다. 밖에 나가 하니는 머튼의 팔을 뿌리치면 서 말했다. "로저, 이러면 안되잖아. 난 술도 마실 줄 모르..." "넌 도대체 어떻게 된 아이 냐? 그렇게 겁나?" "그런 게 아니고..." "좋아. 그럼 빨리 가자구." 그는 하니를 자동차로 끌고 가 문을 열었다. 하니는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자, 타." "잠깐이라면..." 하니는 거절하지 못하고 그냥 차에 탔다. 머튼은 옆자리에 앉았 다. "우리 둘이서 그 멍청한 년에게 본때를 보여주자구. 좋아?" 그는 버번 위스키 병을 꺼 내 하니에게 내밀었다. "자, 우선 한잔 해." 하니는 딱 한 번밖에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는 데,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할 정도로 술이 싫었다. 그러나 머튼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를 쳐다보다가 할수없이 한 모금 마셨다. "넌 괜찮은 아이야." 머튼이 말했다. "최근에 전학왔어?" 하니는 머튼과 3 년 동안 여러 과목을 같이 들었다. "아니." 하니가 말했다. "난..." 갑자기 머튼이 몸을 당기고 하니의 가슴 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이 어느새 젖꼭지에 닿았다. 하니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 "이봐, 왜 이래! 날 좀 즐겁게 해줄 수 없어?" 머튼이 말했다. 바로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하니는 여태까지 자신은 남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다고 느껴왔다. 어떤 방법으로든 남을 즐 겁게 해줄 수 있다면... 머튼의 차, 그 불편한 뒷좌석에서 하니는 처음으로 성관계를 가졌다. 그것것은 여태까지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하니에게 열어주었다. 성관계 자체는 별 로 즐거운 줄 몰랐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머튼이 몹시 즐거워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황홀해 했다. 하니는 여태까지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하면 남자들이 좋아하는구나...' 하니는 생각했다. 그것은 놀라 운 발견이었다. 하니는 그날 파티에서 일어났던 기적 같은 일을 마음 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다. 혼자 침대에 누워 그 장면을 계속 다시 그려보았다. 머튼의 강한 남성이 자신의 몸 깊숙이 들어 오고... 그의 힘찬 동작들... 그리고 신음소리... '아, 그래, 그래... 정말 좋아. 쌀리, 넌 정말 기 막혀...' 하니는 술취한 머튼이 자신을 쌀리로 착각한 것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어찌 됐든 미식축구 팀 주장을 즐겁게 해준 것이다. 머튼은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학생이 아닌 가! '난 어떻게 하는 줄도 모르고 그냥 가만히 있기만 했어.' 하니는 생각했다. '정말 남자를 즐겁게 해주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면...' 바로 그 생각이 하니의 또 다른 발견이었다. 다음날 아침, 하니는 폴라 가에 있는 플레저 체스트라는 포르노 전문 서점에 갔다. 섹스에 관한 책을 여섯 권이나 사서 집에 몰래 가지고 들어갔다. 자신의 방 문을 닫아걸고 책을 읽 기 시작했다. 너무나 생소한 세계를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향기 있는 정원>과 <카마 수트라>를 탐독하고 <티베트식 사랑의 묘기>와 <절정의 황홀감>을 두세 번씩 읽었다. 다음날, 다시 플레저 체스트에 가서 여러 권의 책을 더 사왔다. 모두가 성의 신비를 도색적인 관점으로 써놓은 책들이었다. 하니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성교의 서른일곱 가지 자세와 방법을 사진으로 하나하나 공부 했다. 여성 성기에서 반달이 무엇이고 원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고, 꽃잎이란 말뜻도 알게 되었다. 동양적인 표현인 운우지락이 구체적으로 왜 그렇게 표현되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하니는 입으로 애무하는 여덟 가지 방법에 통달했고, 열여섯 가지의 즐거움도 빠짐없이 알게 되었다. 가는 쇠사슬과 구슬로 느낄 수 있는 황홀감도 터득했다. 성교 도중 남자에게 황홀감이 더 오래 가도록 해주는 방법도 배웠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모조리 터득한 것이 다. 하니는 이제 자신의 지식을 시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카마 수트라>에는 남자를 흥분시키는 강장제에 관해 여러 장에 걸쳐 나와 있었다.


하지 만 하니는 처음 들어보는 이국적인 풀뿌리나 나뭇잎, 또는 열매를 구할 방법도 없었고 엄두 도 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구할 수 있는 대체품을 생각해 냈다. 그 다음주, 하니는 교실에서 로저 머튼과 마주쳤다. 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지난번에는 정말 즐거웠어. 우리 다시 만날래?" 머튼은 하니를 알아보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아, 너구나. 그래, 좋지. 오늘 저녁 우리 식구들이 다 외출하고 조용할 텐데... 저녁 8 시쯤 우리 집으로 오면 어때?" 그날 저녁 하니가 머튼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손에는 시럽이 담긴 작은 병이 들려 있었다. "그건 뭐야?" 머튼이 물었다. "잠깐만 기다려, 무엇에 쓰는지 보여줄게." 하니는 무엇에 어떻게 쓰는지 보여주었다. 다음날, 머튼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하니 얘기 를 떠들어댔다. "정말 기막힌 애야." 머튼이 말했다. "따뜻한 시럽 조금 가지고 그런 재주를 부리다니 이건 믿어지지 않을 정도야." 그날 오후, 대여섯 명의 남학생들이 하니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그로부터 하니는 매일 저녁 데이트가 있었다. 그녀와 데이트한 남학생들은 대단히 만족했고, 그 때문에 하니도 만 족감을 느꼈다. 하니의 부모는 막내딸의 인기가 갑자기 높아진 것에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저애가 원래 좀 늦되는 아이였나 봐."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태프 트 가문의 딸답게 되었어." 하니는 항상 수학 성적이 형편없었다. 학기말 시험도 엉망이었기 때문에 낙제할 것이 분명했다. 수학 선생 잰슨은 총각으로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혼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하니는 그의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잰슨 선생은 하니를 발견 하고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하니! 어떻게 여길 찾아왔지?" "선생님 도움이 필요해서 왔어요." 하니가 말했다. "선생님 과목을 낙제하면 아버지가 절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문제집을 가지고 왔는데, 좀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는 잠시 주저했다. "글쎄, 이건 좀 문제가... 좋아. 들어와." 잰슨 선생은 하니를 좋아했 다. 하니는 같은 또래의 여자 아이들과 달랐다. 대개는 톡톡 쏘아대고 남의 일에 무관심했지 만, 하니는 항상 남의 입장을 생각하고 도우려는 성격이었다.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 려고 애쓰는 것이 역력했다. 수학에 자질만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었다.


잰슨 선생은 하니 옆 소파에 앉아 복잡한 로그 원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니는 로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잰슨 선생이 얘기하는 동안 그녀는 점점 가 까이 다가갔다. 하니의 숨결이 그의 목과 귀에 느껴지고 어느 틈엔가 잰슨 선생은 자신의 바지 지퍼가 열린 것을 깨달았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하니를 쳐다보았다. "아니, 뭘 하는 거야?" "전 선생님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선생님 생각만 했어요." 하니가 말했다. 그녀는 손가방에서 거품 크림이 담긴 작은 병을 꺼냈다. "그게 뭐지?" "뭐에 쓰는지 보여드릴게 요..." 하니는 수학에서 A 학점을 받았다. 하니가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아진 것은 평범한 물건을 성관계 때 사용함으로써 상상치 못했던 효과를 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니는 성애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책은 모조리 읽었고, 거기서 얻는 지식이 그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녀는 수천 년 전에 개발된 성애 의 기술로 남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런 기술은 현대사회에서 대부분 잊혀졌기 때문에 하니와 관계를 가진 남자들은 상상도 못한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녀에게서 맛볼 수 있는 '황홀감'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하니의 학교 성적은 갑자기 좋아졌다. 그리고 이제는 언니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보다 더 인기 있는 학생이 되었다. 하니는 저녁이면 멤피스 시의 최고급 클럽들에 초대받았고, 유명 연예인의 공연이나 이름난 쇼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남학생들은 겨울에 스키 여행을 갈 때나, 여름방학 때 스카이 다이빙 하러 갈 때도 하니를 반드시 초대 했다. 대학에 가서도 하니의 생활은 계속 화려하게 펼쳐졌다. 하루는 저녁식사 도중에 아버 지가 말했다. "이제 곧 졸업하게 될 텐데... 너도 장래 문제를 좀 생각해 봐야 될 때가 되었 잖니. 너는 앞으로 무얼 했으면 좋겠니?" 하니는 즉시 대답했다. "간호사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의 얼굴이 갑자기 상기되었다. "의사가 되겠다는 말이지?" "그게 아니구요... 아버지, 전..." "넌 태프트 가문의 딸이야. 의학 분야에서 일하려면 의사가 되어야만 해. 알아듣겠 어?" "알았어요." 아버지에게 간호사가 되겠다고 말한 것은 하니의 진심이었다.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따뜻


하게 돌보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하니로서는 가장 보람 있는 일로 느껴졌기 때문 이다. 사실 의사가 된다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환자들의 생명을 책임진다고 생각하면 가슴부터 떨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넌 태프트 가문의 딸 이야!' 하니의 학교 성적은 의과대학에 가기에는 좀 부족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아버지는 테네시 주 녹스빌 시에 있는 의과대학에 제일 많은 기부금을 낸 사람이 었다. 즉시 의과대학 학장 짐 피어슨 박사를 찾아가 하니의 입학을 부탁했다. "이건 보통 같으면 얘기를 시작할 필요도 없는 일인데..." 피어슨 박사는 주저했다. "좋아 요, 이렇게 하지요. 하니의 입학을 조건부로 허락하겠습니다. 입학하고 나서 6 개월이 지난 다음 그녀의 성적을 검토하고 계속 다닐 수 있는지를 결정하지요." "좋습니다. 그애는 아마 교수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겁니다." 아버지의 말은 정확했다. 아버지는 하니가 녹스빌에 살고 있는 사촌형뻘 되는 더글러스 립턴 목사 집에서 학교에 다니도록 했다. 더글러스 립턴은 침례교회 목사였다. 60 대의 립턴은 10 년이나 연상인 여자와 결혼했었다. 하니가 같이 살게 되자 립턴은 무척 기뻐했다. "저애가 우리 집에 온 후로 분위 기가 완전히 달라졌어."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하니처럼 남의 입장을 생각하고 남을 위해 행동하는 젊은이를 본적이 없었다. 하니는 의과대학에서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심으로 공부에 열중할 수 없었다. 의과대학에 온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고,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것뿐이었다. 교수들도 그녀를 인간적으로 좋아했다. 두드러지게 착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모두 그녀가 잘되길 바랐다. 그렇게 성애게 대해서 많은 책을 읽었지만, 하니는 해부학 시간이 딱 질색 이었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소용 없었다. 학기가 두 달쯤 지나자 해부학 교수가 하니를 불 렀다. 그는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해부학 학점이 안 나올 것 같은데..." '난 이 과목을 낙제하면 안돼!' 하니는 생각했다.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어. 이럴 때 어 떻게 해야 되지?' 하니는 해부학 교수에게 다가갔다. "전 사실, 이 학교로 오게 된 것이 교 수님 때문이었어요. 교수님 명성을 벌써부터 듣고 있었거든요." 좀더 가까이 접근했다. "저 도 교수님같이 되고 싶어요." 이제는 아주 가까워졌다. "의사가 되는 것만이 제


유일한 꿈이 에요." 몸이 밀착되다시피 했다. "제발, 좀 도와주세요..." 한 시간 후, 하니는 해부학 교수실을 나왔다. 그녀는 손에 학기말 시험 문제를 들고 있었 다. 하니가 의과대학에 다니는 동안 여러 명의 교수가 그녀와 성관계를 가졌다. 가련할 정도 로 순진하고 착해 보이는 하니가 접근해 오면 거절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모두가 하니에게 유혹당했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니를 유혹한 것으로 생각했다. 순진한 여자와 성관 계를 가졌다는 데 대한 죄의식을 느꼈다. 짐 피어슨 박사도 끝까지 버티다가 드디어 하니의 유혹에 넘어갔다. 그는 하니에 대해 떠 도는 소문에 호기심을 느꼈다. 소문은 그녀가 믿어지지 않는 성애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루는 하니가 성적 때문에 피어슨 학장실에 찾아왔다. 그녀는 곱게 간 설탕이 들 어 있는 작은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그날 오후 피어슨 박사는 다른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하니의 기술에 매료되고 말았다. 하니는 남자가 더 젊어지고 정력이 넘쳐흐른다고 느끼게 하는 기술을 발휘했다. 마치 제왕으로 군림해서 그녀를 노예처럼 절대복종하게 만드는 기분 이었다. 그렇게 즐기면서 피어슨 박사는 아내와 아이들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니는 아저씨뻘 되는 더글러스 립턴 목사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래서 냉정하고 인간미 없는 아내가 그를 비판하고 나무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하니는 립턴 목사가 너무 딱하다 고 생각했다. '저렇게 대접받아야 할 이유가 없어.' 하니는 생각했다. '더 따뜻한 위로가 필 요해.' 립턴 부인이 여동생 집으로 여행가고 없는 어느 날 밤, 늦은 시간에 하니는 립턴 목 사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더글러스..." 목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하니, 왜 그래? 괜찮아?" "문제가 좀 있어요." 하니가 말했다. "얘기 좀 해도 되겠어요?" "물론이지." 그는 스탠드를 켜려고 팔을 뻗었다. "불은 켜지 마세 요. 이대로가 좋아요." 그녀는 침대로 다가가서 목사 옆에 누웠다. "왜 그러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걱정이 돼서 그래요." "무슨 걱정인데?" "당신 걱정요. 당신은 사랑받을 권리가 있어요. 제가 사랑해 드릴게요." 그는 잠에서 완전 히 깨어났다. "이런 세상에!" 목사가 말했다. "넌 아직 어린애야. 나 같은 노인과 어떻게..."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부인은 당신에게 조금도 사랑을 보이지 않는데..." "하니, 안돼! 지금 당장 네 방으로 돌아가. 그리고..." 그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하니의 나 신이 점점 그의 몸을 조여왔다. "하니, 이러면 안돼! 나는..." 하니의 입술이 목사의 입을 덮어버렸고, 그녀의 뜨거운 몸이 위에서 눌러왔다. 더글러스 립턴 목사는 잠시 주저하다가 더 이상 거부할 기력을 잃었다. 하니는 다음날 아침까지 그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새벽 6 시에 침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립턴 부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침 대 위에서 두 사람을 발견하고 몸이 얼어붙은 듯 한참 그 자리에 서서 노려보다가 아무 말 없이 나가버렸다. 두 시간 후, 더글러스 립턴 목사는 차고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죄의식 때문에 자살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하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 비극이 었다. 잠시 후, 녹스빌 시의 보안관이 나타나서 립턴 부인과 한동안 얘기했다. 부인과의 얘기가 끝나자 보안관은 하니를 찾아왔다. "립턴 목사 집안의 명예를 생각해서 라도 이번 사건은 단순한 자살로 처리될 거야. 하지만 너 같은 계집애는 당장 이곳에서 꺼 져버려! 그리고 다시 돌아올 생각은 아예 하지 마!" 그래서 하니는 샌프란시스코의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에 레지던트로 지원했다. 짐 피어슨 박사가 쓴 최상의 추천서를 가지고 떠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제9장 페이지는 세월의 흐름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바쁘게 일했다. 낮과 밤이 뒤바뀌면서 언제 하루가 끝나고 다음날이 시작되었는지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수술실, 응급실, 병실, 그리고 잠깐 휴식의 연속이었다. 병원이 그녀의 세계 전부였다. 바깥 세상은 점점 멀어져 마치 딴 세상 같았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가 했을 때는 이미 지나간 다음이었고, 연말 연시도 어느 틈에 지 나가 버렸다. 밖에서는 미국이 이라크 군을 쿠웨이트에서 몰아냈다는 뉴스로 떠들썩했다. 그러나 알프레드는 소식이 없었다. '지금쯤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 거야.' 페이지는 생각 했다. '알프레드는 반드시 내게 돌아올 거야.' 새벽이면 페이지를 괴롭히던 장난전화도 이제 걸려오지 않았다. 페이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의 위협이 없어진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정말 악몽 같은 일이었어...' 문제는 그 장난이 꿈이 아니고 실제로 일어났다는 데 있었다. 병원에서의 일과는 계속 정신없이 돌아갔다. 환자들과 친숙해질 겨를이 없었다. 그저 담낭염이나 급성간염, 대퇴부 골절이나 척추장애라는 병명으로만 인식되었고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고민과 불평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병원은 마치 괴상하게 생긴 기계나 기구로 가득찬 정글 같았다. 인공호흡기, 심장박동 측정기, X-선 촬영기와 컴퓨터 단층촬영기, 자기공명 촬영기 등 엄청난 기계와 기구가 여기저기 보기 흉하게 널려 있었다. 기계마다 소음도 가지각색이었다. 윙윙거리는 소리, 바닥이 흔들리는 진동소리, 작동이 끝났다는 벨소리, 이런 모든 소리가 계속되는 구내방송과 섞여 소란스러운 불협화음으로 들려왔다. 레지던트 생활 첫해가 끝나도 정신없이 일해야 되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신참 레지던트들이 들어오자 고참들은 책임이 많아졌고, 책임 전문의 없이도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고참들은 새로 들어온 레지던트들을 보면서 딱하다는 생각과 함께 우월감을 갖게 되었다. "저 딱한 애들 좀 봐." 케트가 페이지에게 말했다. "앞으로 어떤 고생을 하게 될지 상상도 못할 거야!" "걱정 마. 얼마 안 있어 알게 돼." 하니와 페이지는 케트가 요즘 좀 달라진 것 같아 걱정되었다. 항상 우울한 표정이었고 체중도 눈에 띄게 줄었다. 함께 얘기하다가도 어느새 시선이 멀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덮여 있었다. 가끔 장거리 전화가 걸려왔는데, 통화가 끝나면 더 우울해졌다. 보다못해 하니와 페이지는 케트와 얘기해 보기로 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페이지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 두 사람이 너를 친형제처럼 생각하고 있는 걸 알잖아? 무슨 고민인지 말해봐. 우리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고마워. 너희들이 나를 걱정해 주는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너희들이 도울 일이 아니야. 돈 문제거든." 하니는 놀란 표정으로 케트를 쳐다보았다. "왜 돈 문제가 생겼는지 이해가 안돼. 우린 어디 가볼 시간도 없고 쇼핑할 시간도 없잖아. 병원에만..." "내가 돈이 필요한 게 아니야. 내 동생 때문이야." 그때까지 케트는 동생 얘기를 두 사람에게 하지 않았었다. "동생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 페이지가 말했다. "동생도 여기 샌프란시스코에 살아?" 하니가 물었다. 케트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니, 동부에 살아. 디트로이트 시에. 언젠가 여기에 오면 너희들에게 소개할게." "그럼 꼭 만나봐야지. 지금 뭘 하는데?" "혼자 조그만 사업을 한다고 바쁘게 뛰어다녀." 케트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지금은 사업이 신통치 않지만 얼마 안 있어 좋아질 거야. 그애는 끈질긴 성격이거든..." '정말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해리 보우만이라는 레지던트가 다른 병원에 근무하다가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으로 옮겨왔다. 그는 낙천적인 성격으로 유멈 감각도 뛰어났고, 누구에게든 친절하게 대했다. 하루는 보우만이 페이지에게 말했다. "내일 밤, 우리 집에서 파티가 있어요. 당신과 닥터 헌터, 그리고 닥터 태프트가 시간 있으면 한 번 화보지 않을래요? 아주 재미있는 파티가 될 거예요." "좋아요." 페이지가 말했다. "우리가 뭘 가지고 가면 되죠?" 보우만은 웃었다. "그럴 것 없어요." "그래도 그렇지, 처음 가는 집인데..." 페이지가 다시 물었다. "포도주 한두 병이라도..." "괜찮아요. 조그만 아파트에서 몇 사람 모이는데 뭘..." 보우만의 작은 아파트는 백 평도 훨씬 넘는 아파트 건물 맨 위층 전체였다. 내부는 값비싼 골동품 가구와 서화 등으로 품위 있게 꾸며져 있었다. 세 여자는 아파트에 들어서자 눈이 휘둥그래져서 잠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런 세상에!" 케트가 말했다. "레지던트가 어떻게 이런 아파트에 살아요?" "난 원래 똑똑했기 때문에 착하고 돈많은 아버지를 두었지요." 보우만이 웃으면서 말했다. "돌아가신 후 돈을 모두 다 나에게 남겼어요." "그런데도 레지던트로 그런 혹독한 일을 해요?" 케트는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이었다. 보우만은 미소를 띠었다. "의사생활을 좋아하거든요." 뷔페식으로 늘어놓은 음식도 세 여의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벨루가 캐비아, 거위 간 파테, 스코틀란드산 훈제 연어, 껍질 위에 놓여진 싱싱한 굴, 알라스카 산 게살 요리, 신선한 샐러드, 그리고 크리스탈 샴페인, 모두가 최고급이었다. 보우만의 말대로 세 사람은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정말 너무나 고마웠어요." 파티가 끝나고 나오면서 페이지가 보우만에게 말했다. "이번 토요일에 시간들 있으세요?" 보우만이 물었다. "마침 이번 토요일은 우리 무두가 비번이에요." "나한테 작은 모터보트가 있는데... 같이 바다에 나가보지 않겠어요?" "정말요? 좋구말구요." 새벽 4 시. 당직자 휴게실에서 잠들었던 케트는 구내방송 소리에 눈을 떴다. "닥터 헌터, 제 3 응급실로... 닥터 헌터, 제 3 응급실로..." 케트는 피로에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면서도 좀처럼 잠이 깨지 않았다. 응급실 입구에는 의료보조원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저 구석에 누워 있는 사람 말이에요. 조금 전에 들어왔는데 통증이 아주 심한 것 같아요." 케트는 환자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닥터 헌터예요." 아직도 잠이 덜 깼지만 하품을 참으며 말했다. 환자는 신음소리를 냈다. "아이구, 나 좀 살려주시오. 지금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아요." 케트는 다시 하품을 참으며 물었다. "통증이 언제부터 시작됐어요?"


"한 2 주일 됐어요." 케트는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2 주일? 그러면 왜 진작 병원에 오지 않았어요?" 환자는 몸을 뒤척이려다가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 난 병원에 오는 게 딱 질색이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왔어요?" 그는 표정이 밝아졌다. "며칠 있으면 아주 중요한 골프 시합이 있어요. 지금 허리를 고치지 않으면 시합에 못나갈 거 아녜요." 케트는 욕이 튀어나올까 봐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물었다. "골프 시합 때문이라구요?" "그래요." 케트는 화가 끓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렇게 하세요. 일단 집으로 가서 아스피린 두 알을 드시고 아침까지 누워서 쉬세요. 그래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으면 그때 다시 연락하세요."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급실을 나와버렸다. 환자는 멍하니 케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보우만의 작은 모터보트는 길이가 20 미터 가까운 최신형 요트였다. "어서들 와요!" 페이지가 케트, 하니와 함께 도착했을 때 보우만은 부두에서 세 사람을 맞았다. 하니는 요트를 부러운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참 멋있는 요트네요." 페이지가 말했다. 그들은 세 시간 동안 샌프란시스코 만이 물살을 가르고 다녔다. 맑게 갠 하늘에 따뜻한 날씨였다. 세 사람은 정말 오랜만에 한가하게 쉬면서 즐길 수 있었다. 엔젤 섬에 닻을 내리고 호화로운 점심식사가 시작되었다. 케트가 입을 열었다. "정말 천국에 온 기분이야. 사람이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지... 우리 여기서 그냥 사는 게 어때?" "좋은 생각이야." 하니가 말했다. 그렇게 하루가 꿈같이 지나갔다. 그들이 다시 부두로 돌아왔을 때, 페이지가 말했다. "해리, 정말 너무나 즐거웠어요. 고맙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천만에! 내가 더 즐거웠던 것 같아요." 보우만은 페이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시간나는 대로 또 오지요, 뭐. 언제라도 좋아요. 당신들 세 사람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정말 따뜻한 사람이야!' 페이지는 혼자 생각했다. 하니는 산부인과에서 일하는 것이 제일 좋았다. 산부인과 병동은 항상 새 생명과 새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인간이 태어난 이래 끊임없이 계속되어 온 탄생의 기쁨이 넘치는 곳이었다. 초산의 경우 산모들은 불안해 하면서도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여러 번 출산 경험이 있는 산모들은 빨리 끝나기만 기다리는 것 같았다. 출산 직전의 어떤 산모가 하니에게 말했다. "이제 드디어 내 발가락을 볼 수 있게 되겠네요." 만약 페이지가 일기를 썼다면 아마도 8 월 12 일을 무슨 경축일이나


공휴일처럼 특별히 표시했었을 것이다. 바로 그날 지미 포드를 만난 것이다. 지미는 병원의 의료보조원이었다. 항상 밝게 웃는 얼굴에 언제나 남을 먼저 생각하고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는 명랑한 성격이었다. 왜소한 체격에 아직도 10 대 같은 모습이었지만 실은 25 살이었다. 지미는 병원 복도에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다녔다. 아무리 어렵고 귀찮더라도 항상 밝은 표정으로 일했다. 그는 누구의 일이라도 마다 않고 싹싹하게 해주었다. 상대방의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의사든 간호사든, 심지어 잡역부들의 부탁이라도 똑같이 들어주었다. 지미는 익살과 재담을 좋아했다. "온몸에 기브스한 환자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두 눈만 내놓고 미아라처럼 기브스한 환자를 보고 옆의 환자가 직업이 뭐냐고 물었답니다." "그 친구 대답이, '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유리창 청소원이었어요.'" "다시 옆의 환자가 묻기를, '그럼 언제 그만 두었는데요?' 했지요." "'빌딩 중간쯤에서요.'" 그리고 지미는 활짝 웃으며 누군가의 심부름을 해주려 달려가는 것이었다. 지미는 페이지를 특히 좋아했다. "나도 언젠가는 의사가 될 거예요. 꼭 닥터 페이지 같은 의사가 될 겁니다." 지미는 수시로 페이지에게 작은 선물을 가지고 왔다. 초콜릿 한개, 아니면 작은 인형 등이었다. 그때마다 재담도 하나씩 곁들였다. "휴스턴 시에서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어요. '병원으로 빨리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텍사스 주가 쌍놈들이 사는 곳이라고 말만 하면 돼!'" 신통치 않은 재담이었지만 지미는 항상 재미있게 말했다. 이른 새벽에 페이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지미는 모터싸이클로 달려와 페이지 앞에 멈춰섰다. "환자가 이렇게 물었대요. '내 수술이 위험할 것 같아요?'" "수술의가 대답했어요, '아뇨. 2 백 달러짜리 위험한 수술은 없어요.'" 말하고는 번개처럼 사라졌다. 페이지는 케트, 그리고 하니와 함께 시간이 날 때마다 샌프란시스코 시를 구석구석 쏘다녔다. 화란식 풍차 방앗간과 '작은 동경'의 일본식 찻집에도 가보았다. 그들은 관광지로 유명한 휘셔맨즈 워프도 둘러보았고, 명물인 전차도 탔다. 큐란 극장에서 연극도 보고, 포스트 가에 있는 마하라니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종업원 모두가 인도 사람이었는데 페이지가 그들과 스스럼없이 힌디어로 대화하는 것을 보고 케트와 하니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험 힌두스타니 바트 바후트 오쵸 볼타 히." 페이지가 말한 다음부터 식당 종업원들은 반색하면서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아니, 어디서 인도말을 그렇게 배웠어? 아주 유창한데..." 하니가 물었다. "힌디어야." 페이지가 말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우린... 난 한동안 인도에서 살았거든." 추억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녀는 알프레드와 아그라에 가서 타지마할을 구경하고 있었다.


'자한 왕이 사랑하던 아내를 추모해서 지었다고 했지. 20 년이나 걸렸다며? 알프레드, 알고 있었어? 난 얼마가 걸리든 널 위해서 나의 타지마할을 지어줄 거야. 내 아내 캐런 터너입니다.' 페이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페이지" 케트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괜찮아? 얼굴이 안 좋은데..." "아니, 아무 일도 아냐. 괜찮아." 혹독한 근무시간은 조금도 늦추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연말연시가 다가왔다가 지나가 버렸다. 레지던트 2 년차가 끝나고 3 년차가 시작되었지만 계속되는 업무는 줄어들 줄 몰랐다. 병원 안의 세계는 바깥 세상과는 동떨어진 가치기준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나 기근 등은 24 시간 계속 죽어가는 환자를 살려내려고 허둥거려야 하는 의사들에게는 별로 뉴스거리가 되지 못했다. 페이지와 케트가 바쁜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다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케트는 웃는 얼굴로, "재미 좋아?" 하고 물었다. 그러면 페이지는, "언제 눈 좀 붙였니?" 하고 말을 받았다. 케트는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그걸 기억하는 사람도 있어?" 그들은 밤낮으로 계속되는 고된 업무에 때로는 졸면서 때로는 휘청거리며 버텨냈다. 운이 좋으면 샌드위치라도 한 조각 먹을 시간이 났고, 대부분의 경우 커피 한잔 식기 전에 다 마실 여유도 없었다. 케트에 대한 성희롱도 그칠 줄 몰랐다. 의사들만이 그녀를 집적거리는 게 아니고, 환자들까지 걸핏하면 잘생긴 흑인 여의사를 유혹하려 들었다. 물론 모두 단호하게 거절당하고 때로는 심한 창피도 당했다. '어떤 남자도 내 몸에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 케트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환자를 치료하느라고 정신없을 때 마이클에게서 장거리 전화가 걸려왔다. "누나, 잘 있었어?" 케트는 마이클이 왜 전화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여태까지도 돈을 있는 대로 보내주었다. 그러나 계속 보내주어도 마이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누나를 계속 괴롭히는 것 같아서 말이 잘 안 나오지만,,, 나도 정말 이런 전화 하는 게 괴로워. 그런데 내가 좀 난처한 입장이 되어서..." 마이클의 목소리는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마이클, 너 몸은 성하니?" "아, 괜찮아.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어떤 사람한테서 돈을 좀 꾸었는데, 그 친구가 급한 사정이 생겼다고 즉시 갚으래. 미안하지만 누나가 좀..." "글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게." "고마워. 누나만 믿어.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나밖에 더 있어? 사랑해. 연락 기다릴게." "마이클, 나도 사랑해." 하루는 오랜만에 페이지, 케트, 하니, 세 사람이 아파트에 모여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케트가 입을 열었다. "우리 세 사람이 지금 제일 필요한 게 뭔지 알아?"


"한 달쯤 계속 잠자는 것?" "휴가여행이야. 멀리, 멋진 여행을 하는 거야. 파리에 가서 샹젤리제를 산책하고 유명 디자이너들 본점에서 최고급 옷도 구경하고..." "까짓것, 뭐든지 최고급으로 하지 뭐." 페이지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낮엔 실컷 자고 밤새도록 신나게 노는 게 어때?" 하니도 깔깔거리며 끼어들었다. "거참 좋은 생각인데..." "몇 달 있으면 우리도 휴가를 얻을 수 있을 텐데..." 페이지가 말했다. "되든 안되든 우리 셋이서 같이 휴가여행 하는 것을 계획해 보는 게 어때?" "멋진 생각이야!" 케트가 열을 올렸다. "이번 토요일에 우리 셋 다 당직근무가 없잖아? 어디 여행사에라도 같이 들러볼까?" 토요일을 기다리며 세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휴가여행 얘기였다. "난 런던이 제일 가보고 싶어. 혹시 엘리자베스 여왕과 마주칠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파리가 더 좋을걸. 이 세상에서 제일 낭만적인 도시라고들 하잖아? 게다가 첨단 유행의 본산지..." "베니스에서 달 밝은 밤에 곤돌라를 타보고 싶어." '페이지, 우리 신혼여행은 베니스로 가는 게 어때?' 알프레드가 말했었다. '내 생각이 맘에 들어?' '그럼!' 문득 알프레드가 캐런과 신혼여행을 베니스로 갔을까 생각해 보았다. 토요일 아침이 되었다. 세 사람은 파웰 가에 있는 코니쉬 여행사를 찾아갔다. 카운터에 앉은 여직원이 친절하게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저희 여행사에는 다양한 여행 패키지가 있는데요..." "유럽 여행을 해볼까 해요. 런던, 파리, 그리고 베니스도 가보고 싶어요." "좋습니다. 별로 비싸지도 않고 골고루 구경할 수 있는 패키지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도..." "아니, 그런 거 말구요." 페이지는 하니를 쳐다보며 윙크했다. "모든 게 최고급이라야 되겠어요." "물론 항공편은 일등석이어야 되고..." 케트가 한 마디 거들었다. "호텔도 특급에만 묵을 거예요." 하니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시다면 런던에서는 리츠 호텔이 좋겠고, 파리에서는 크리옹 호텔을 추천하겠습니다. 베니스에는 치프리아니 호텔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페이지가 말했다. "그런 호텔들 안내책자가 있죠? 우리가 좀 가지고 가서 읽어보고 결정해 알려드리면 안되겠어요?" "그렇게 하시면 좋지요." 여행사 직원이 대답했다. 페이지가 직원이 건네준 안내책자를 훑어보면서 다시 물었다. "유럽에서 요트를 대절하는 것도 이 여행사에서 주선할 수 있나요?" "물론이지요." "잘됐네요. 아마 요트도 대절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러시다면 요트 대절에 관한 안내책자도 드리지요." 직원은 안내책자 여러 개를 골라 페이지에게 건넸다. "여행계획이 대강 확정되면 즉시 저에게 연락주세요. 바로 예약하고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하니가 대답했다.


밖으로 나오자 케트는 큰 소리로 웃고 나서 말했다. "이렇게 야무지게 꿈을 꾸어보는 것도 재미있잖아?" "걱정 마!" 페이지가 말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그런 여행을 할 수 있을 거야." 제 10 장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의 내과 시모어 월슨 박사는 부족한 인원에 넘치는 환자들을 돌보느라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환자가 너무 많고 의사와 간호사의 수가 너무 적은 것뿐만 아니라 하루 24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는 쉴새없이 병원을 돌아다니며 최선을 다했지만, 마치 여러 곳에 구멍이 나서 침몰하는 배를 혼자 뛰어다니며 손으로 막는 느낌이었다. 구멍 하나둘은 막을 수 있지만, 배가 점점 가라앉는 것은 혼자서 막을 수 없었다. 지금 윌슨 박사는 고민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닥터 태프트 문제였다. 어떤 의사들은 그녀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신임하는 레지던트들이나 간호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닥터 태프트는 의사로서의 자질과 기량이 전혀 없었다. 윌슨 박사는 견디다 못해 병원장 월러스 박사를 찾아갔다. "아무래도 레지던트 한 사람을 전출시켜야 될 것 같아." 윌슨 박사가 말했다. "같이 회진하고 일해 본 의사들이 그녀는 의사로서의 자질이 없다고들 하는데..." 월러스 박사는 하니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최고의 의과대학 성적과 학장 추천서 때문에 쉽게 잊어버릴 수 없었다. "거참, 이해가 안되는데." 월러스 박사가 말했다. "뭔가 좀 잘못된 것 같아."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모어, 이렇게 하면 어때? 내과 책임 전문의 중 가장 엄하고 까다로운 친구가 누구지?" "그야 테드 알리슨이지." "좋아. 내일 아침 닥터 태프트를 알리슨과 함께 회진시켜 보라구. 알리슨에게 태프트에 대한 평가보고르 내라고 하지. 그 친구도 그녀가 능력과 자질이 없다고 하면, 그때는 내보내야지." "좋은 생각인데." 윌슨 박사가 말했다. "벤, 고마워." 점심시간에 하니는 페이지를 만나 내일부터 테드 알리슨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도 그 사람을 알아." 페이지가 말했다. "보통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소문이 자자해. 게다가 여의사에게는 더 심하게 대한다고 하던데." "나도 그런 소문 들었어." 하니는 생각에 잠겼다. 바로 그 순간, 병원 다른 쪽에서 시모어 윌슨 박사는 테드 알리슨 박사와 얘기하고 있었다. 알리슨 박사는 25 년간 이 병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었다. 군복무를 해군 군의관으로 마쳤는데, 그 시절 군기를 잡았던 일화를 아직도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윌슨 박사가 말했다. "닥터 태프트를 데리고 다니면서 잘 관찰해보라구. 일을 제대로 해내면 괜찮지만,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내보내야 돼. 알았지?" "잘 알았어." 알리슨 박사는 이런 기회가 온 것이 오히려 기뻤다. 시모어 윌슨 박사와


마찬가지로 그는 무능한 의사를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여자가 의학계에 기여하는 것은 간호사 정도밖에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간호사 노릇이 나이팅게일의 천직이었다면, 요즘 여의사라고 설쳐대는 여자들에게는 간호사도 오히려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6 시. 레지던트들은 회진이 시작되기 전 복도에 모였다. 알리슨 박사 팀은 자신을 보좌하는 전문의 톰 벤슨과 하니를 포함한 다섯 명의 레지던트로 구성되었다. 일행을 둘러보다가 하니의 얼굴에 시선이 닿은 알리슨 박사는 생각했다. '자, 아가씨. 재주있는 대로 다 부려보지!' 그는 일행을 둘러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시작하지." 제 1 병동의 첫 환자는 10 대 소녀였다. 두터운 담요를 덮고 잠들어 있었다. 일행이 다가가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자," 알리슨 박사가 입을 열었다. "모두 이 환자의 진료기록을 읽어보게." 레지던트들은 환자의 진료기록을 뒤적였다. 알리슨 박사는 하니에게 물었다. "이 환자는 열이 오르고, 오한을 느끼고, 전신이 쑤시고, 식욕이 전혀 없어. 지금도 계속 열이 높고, 심한 기침에 폐렴 증세까지 겹쳤어. 닥터 태프트, 이런 경우 어떻게 진단하겠소?" 하니는 얼굴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르겠어?" "이건..." 하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시타코시스, 즉 앵무병 같아요." 알리슨 박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하니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진단을 내릴 수 있지?" "환자의 증세가 모두 시타코시스의 전형적인 증세와 일치하잖아요. 애완동물 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혹시 그곳의 앵무새한테서 감염되지 않았을까요?" 알리슨 박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아주 훌륭한데. 그러면 어떻게 치료해야 될지 알고 있소?" "테트라사이클린 항생제를 한 열흘쯤 계속 투여해야 되겠지요. 그리고 절대로 무리하지 않고 쉬면서 수분을 많이 섭취해야 돼요." 알리슨 박사는 다른 레지던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들 들었지? 닥터 태프트가 정확하게 진단하고, 최선의 치료방법도 제시한거야." 다음 환자 차례가 되었다. 알리슨 박사가 말했다. "이 환자의 차트에 의하면, 피부 속에 종양이 생기고 출혈이 멈추지 않고, 그리고 심한 피로감에 시달린다고 되어 있어. 이런 경우 어떤 진단을 내릴 수 있겠나?" 레지던트 한 사람이 확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종의 폐렴 아닐까요?" 다른 레지던트가 말했다. "암인지도 모르겠는데요." 알리슨 박사는 하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닥터, 당신은 어떻게 진단하겠소?" 하니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글쎄요, 차트 내용만 보고 말씀드리면 뉴모코니오시스가 아닌가 생각해요. 석면 먼지 같은 것에 중독될 때 생기는


진폐증 같은 것이지요. 차트에 이 사람은 카펫 공장에서 일한다고 되어 있잖아요." 테드 알리슨 박사는 하니에 대한 놀라움과 감탄의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잘했어! 정말 훌륭해! 그럼 치료방법도 알고 있소?" "불행하게도 이 병에는 아직도 알려진 치료방법이 없어요." 하니의 대답은 다시 한번 알리슨 박사를 감탄시켰다. 그로부터 두 시간 동안 하니는 라이터 증후군, 변형성 골염에 의한 적혈구 증가증, 그리고 말라리아 등 쉽게 진단할 수 없는 희귀병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치료방법도 제시했다. 회진이 끝나자 알리슨 박사는 하니에게 악수를 청했다. "닥터 태프트, 나는 레지던트들을 쉽게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오. 그러나 당신은 정말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오!" 하니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알리슨 박사님." "그리고 월러스 원장에게도 그렇게 말할 거요." 알리슨 박사는 일행을 떠나기 전에 다시 말했다. 알리슨 박사의 조수인 톰 벤슨은 하니를 쳐다보며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봐, 30 분 후에 조용히 만나자구." 페이지는 아서 케인 박사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그러나 케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수술에 페이지가 참여하도록 요청했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그의 태도는 더 노골적이 되었다. "나하고 데이트를 안하겠다고? 정말로 하는 말이야? 다른 남자들과 그렇게 재미가 좋아?" 페이지는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 갈수록 괴로워졌다. 그것은 케인이 치근거리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케인의 수술은 거의 대부분이 멀쩡한 내장을 잘라내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페이지가 수술실고 들어가다가 케인과 마주쳤다. "케인 박사님, 오늘은 어떤 수술이에요?" 페이지가 물었다. "저 친구 돈보따리를 수술해야겠어!" 케인은 페이지의 얼굴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이봐, 그냥 농담한 거야." "그런 사람은 도살장에나 가서 일해야 돼." 나중에 페이지는 흥분된 목소리로 케트에게 말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수술할 수 있는지 난 이해가 안돼." 어느 날, 케인 박사는 환자의 간을 수술했다. 도대체 수술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있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수술이 끝나면서 케인이 페이지를 쳐다보며 먈했다. "그 친구, 참 안됐군. 살아날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 같아." 페이지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아냈다. 톰 창을 만나자 속에 있던 말을 털어놓았다. "누군가가 닥터 케인을 고발해야 돼요." 페이지가 말했다. "환자를 계속 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좀 진정해요." "어떻게 진정할 수 있어요? 저런 사람이 수술한다는 것은 뭔가 잘 못 돼도 크게 잘못된 거예요. 이건 완전히 범죄란 말예요. 저런 사람은 의사자격 심의위원회에 회부되어야 해."


"그런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줄 알아요? 다른 의사들이 케인의 무능과 부도덕성을 증언해야 되는데, 누가 하겠어요. 페이지, 의사들 세계는 상당히 배타적이에요.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세계의 구성원이라구요. 훌륭한 의사도 때로는 공박을 받을 때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의사들은 가능한 한 다른 의사들 험담을 하지 않아요. 이제 그만 진정해요. 나가서 점심이나 같이 할까요? 내가 살게." 페이지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죠 뭐. 하지만 이건 말도 안돼!" 두 사람이 식당 테이블에 앉았을 때 페이지가 물었다. "참, 싸이는 잘 있어요?" 톰은 잠시 머뭇거렸다. "난... 우리는 문제가 좀 생겼어요. 직장 때문에 내 가정이 무너지고 있어요.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조금만 더 참으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예요." 페이지가 말했다. "그렇게 돼야 할 텐데." 창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페이지는 창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싸이가 떠나면 난 도저히 혼자 살 수 없어." 다음날 아침, 아서 케인 박사가 신장수술을 할 차례였다. 외과 과장이 페이지에게 지시했다. "제 4 수술실에서 있을 신장수술에 당신이 보조해야 되겠다고 케인 박사가 요청했소." 페이지는 갑자기 입 안이 말라오는 듯했다. 아서 케인 옆에서 수술을 돕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페이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누가 대신 좀 들어갈 사람이..." "닥터 테일러,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들 있소." 페이지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페이지가 몸을 소독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 수술은 벌써 진행중이었다. "이봐, 아가씨, 여기 와서 날 좀 도와줘." 케인이 페이지에게 말했다. 환자의 복부는 깨끗이 소독되었고, 복부 좌상귀 바로 왼쪽 갈비뼈 아래가 이미 열려 있었다. '아직은 괜찮은 것 같은데... 제발 무사히 끝났으면.' 페이지는 속으로 빌었다. "메스!" 수술 보조 간호사가 케인 박사에게 날카로운 메스를 건네주었다. 케인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음악 좀 틀어." 잠시 후 CD 의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케인은 계속 메스를 놀리고 있었다. "음악 좀더 경쾌한 걸로 틀어." 그는 페이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예쁜 아가씨, 이제 보비를 작동시키지." '예쁜 아가씨?' 페이지는 이를 악물고 보비를 집어들었다. 전기로 작동되는 보비는 미세한 혈관을 지혈시키는 데 쓰는 기구였다. 페이지는 피가 흘러나오는 혈관 끝 부위를 보비로 지져서 지혈하기 시작했다. 흐르는 피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수술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정말 다행이야.' 페이지는 생각했다. "스펀지!" 간호사가 케인에게 스펀지를 건네주었다. "좋아. 이제 흡입장치를 가동해." 신장 주변을 차례로 절단하자 신장이 드러났다. "고 녀석, 이제야 나타났군." 케인이 말했다. "흡입 장치를 더


강하게 가동시켜." 그는 신장을 핀셋으로 집어올렸다. "자, 이제 됐어. 다시 꿰매기만 하면 돼." 이번에는 오랜만에 차질 없이 수술이 진행되었지만, 페이지는 뭔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절단된 신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주 정상적인 신장이었다. 페이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혹시... 케인 박사가 절개부위를 봉합하고 있을 때 페이지는 X-선 사진이 붙어 있는 벽으로 가서 불을 켰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잠시 후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런 세상에!" 'X-선 사진을 뒤집어 보았잖아. 케인은 엉뚱한 신장을 잘라낸 거야.' 30 분 후, 페이지는 병원장 월러스 박사를 찾아갔다. "떼내야 할 신장은 그냥 두고 건강한 신장을 떼내버렸단 말이에요!" 페이지는 분노로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 사람은 벌을 받아야 돼요." 벤자민 월러스 박사는 페이지를 달랬다. "페이지, 나도 이 사건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절대로 고의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잖아. 그건 실수였을 뿐이야. 그리고..." "실수라고요? 그 환자는 이제 여생을 계속 인공신장에 의존해서 살아야만 돼요. 누군가 그 책임을 져야 되는 것 아니에요?" "알았어. 병원 내에서 동료평가위원회를 열고 이 문제를 검토해 보지." 페이지는 그게 무슨 말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의사 몇 명이 모여서 그 사건을 검토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진행되는 것이다. 그 내용은 환자나 외부인에게는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월러스 박사님..." "페이지, 당신도 우리 팀의 일원이잖소? 팀 전체를 좀 생각해 줘야 되는 거 아뇨?" "그런 사람은 이 병원에서 의사 노릇을 할 자격이 없어요. 어떤 병원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좀더 대국적으로 생각할 수 없소? 만약 케인을 해고하면 그건 큰 뉴스거리가 될 것이고, 우리 병원의 명예에도 먹칠하게 될 거요. 그렇게 되면 엄청난 의료분쟁 소송이 걸려올 거란 말이오." "그럼 환자들을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앞으로 케인 박사를 유심히 관찰하겠소." 그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선배로서 좀 충고하겠소. 언젠가는 당신도 전문의로서 독립하면 다른 의사들이 환자에게 당신을 호의적으로 추천해 주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돼요. 그러지 않고는 의사로서 성공할 수 없어요. 만약 당신이 기회주의자이고 다른 의사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면 당신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거요. 그건 내가 보증하지." 페이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는 말씀이군요." "벌써 말했잖소? 동료평가위원회에 회부하겠다고 말이오." "그게 다예요?" "그뿐이오." "이건 말도 안돼." 페이지가 말했다. 그녀는 케트, 그리고 하니와 함께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케트가 고개를 저었다. "원래 세상만사엔 말도 안되는 게 너무 많아." 페이지는 흰 타일투성이의 실내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정말 이곳은 복마전이야. 모두가 정상이 아니야." "정상인이 무엇 때문에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겠어?" 케트가 말했다. "우리, 기분전환도 할 겸 파티나 열면 어때?" 하니가 제안했다. "파티?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하니가 신이 나서 말했다. "고급음식도 시키고 마실 것도 여러 가지 준비해서 그냥 파티를 하는 거야! 우리 모두가 좀 사기가 떨어졌거든. 한바탕 놀고 나면 기분전환이 될 거야." 페이지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듣고 보니," 그녀가 말했다. "그거 아주 괜찮은 생각인데. 그렇게 해보자." "좋아, 내가 책임지지. 준비는 내가 다 할게." 하니가 신이 나서 말했다. "내일 저녁 근무가 끝난 다음 파티를 여는 거야." 페이지가 복도를 걸어갈 때, 아서 케인이 다가왔다. 그는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렇게 쓰잘 데 없는 짓을 하고 다니지? 쓸데 없는 소리 지껄이지 않고 입다물도록 버릇 좀 고쳐놔야겠군!" 내뱉고는 멀어져 갔다. 페이지는 케인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월러스가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다 한 모양인데... 병원장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기회주의자이고 다른 의사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면...?" 또 다시 저 사람을 고발할 수 있을까?' 페이지는 생각해 보았다. '몇 번이라도 할 거야!' 세 사람이 파티를 계획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병원 내에 퍼졌다. 모든 레지던트들이 참여하겠다고 해왔고, 모두들 조금씩 돈을 보탰다. 다양한 음식을 주문하고 술과 음료도 넉넉하게 주문했다. 파티는 5 시에 의사 휴게실에서 열기로 했다. 4 시 30 분에 벌써 음식과 마실 것들이 도착했다. 모두들 병원에서는 처음 보는 다양한 음식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바닷가재와 새우, 그리고 여러 가지 해물이 있었고, 여러 종류의 파테, 스웨덴식 미트볼, 여러 종류의 스파게티, 신선한 과일, 게다가 다양한 후식도 있었다. 페이지가 케트, 하니와 함께 의사 휴게실에 들어왔을 때는 벌써 5 시가 지나 이미 레지던트와 간호사들이 먹고 마시며 파티가 시작되어 있었다. 페이지는 하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파티 정말 좋은 생각이었어!" 하니는 미소지었다. "고마워." 그때 구내방송이 울리기 시작했다. "닥터 핀리와 닥터 케틀러 제 1 응급실로... 응급상황..." 새우를 막 입에 넣으려던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며 한숨을 쉬고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톰 창이 페이지에게 다가왔다. "매주 이런 파티가 열렸으면 좋겠는데..." 그가 말했다. "그럼 얼마나..." 구내방송 소리가 페이지의 말을 끊었다. "닥터 창... 7 호 병실로... 닥터 창... 7 호 병실로..." 1 분도 안돼서, "닥터 스미스... 제 2 응급실로... 닥터 스미스...


제 2 응급실로..." 구내방송은 그칠 줄 몰랐다. 30 분도 안돼서 거의 모든 인턴, 레지던트, 그리고 간호사들이 응급상황 때문에 불려나갔다. 드디어 하니의 이름이 방송되고, 그런 다음 페이지와 케트의 차례였다. "이건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아." 케트가 말했다. "사람들은 어려울 때 보살펴주는 수호신이 있다고들 하잖아? 그런데 우리 세 사람에겐 수호신이 아니라 우리만 골탕먹이려는 귀신이 붙어 있나 봐." 케트의 말은 예언과도 같았다. 다음날 새벽, 페이지가 근무를 끝내고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로 가보니 양쪽 타이어가 칼에 찔려 바람이 빠져 있었다. 페이지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케인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않고 입다물도록 버릇 좀 고쳐놔야겠군!' 아파트에 돌아온 페이지는 케트와 하니에게 말했다. "아서 케인과 마주치면 조심해야 돼. 그 사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제 11 장 어느 날 밤, 늦은 시간에 케트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24 시간 이상 계속 근무하다가 잠들었기 때문에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간신히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누나? 나 마이클이야!" 케트는 정신이 번쩍 들어 일어났다. 동생이 또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마이클, 무슨 일이 생겼니?" 그러나 수화기에서는 동생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일밖에는 아무 일도 없어. 누나 친구 덕에... 그러니까 누나 덕에 모든 게 잘 풀렸어." "내 친구라니?" "디네트 씨 말이야." "그 사람이 누군데?" 케트는 아직 잠이 덜 깨서 그 이름이 금새 기억나지 않았다. "디네트 씨를 몰라? 그분이 내 생명의 은인이야." 케트는 마이클의 말을 종잡을 수 없었다. "마이클, 대체..." "내가 어떤 친구한테 돈을 좀 꾸었다고 했잖았어? 그 친구들이 턱없이 이자를 붙여 몇 배를 갚으라고 하잖아. 말대로 안하면 죽여버린다고 협박까지 했었어. 그런데 디네토 씨가 한 마디 해주니까 깨끗이 해결되더라고. 그분은 정말 신사야. 누나 칭찬을 많이 하던데." 케트는 디네토와 마주쳤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마이클의 얘기를 듣자 번뜩 기억이 살아났다. '이봐요, 지금 이분이 누구신지 모르는 모양인데... 이분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요. 바로 루 디네트 씨랍니다.' 마이클은 말을 계속했다. "그 동안 누나한테 신세진 것의 일부라도 곧 송금할 거야. 누나 친구 소개로 취직하게 됐거든. 아주 좋은 조건이야..." '디네토가 내 친구라구?' 케트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마이클, 내 말 잘 들어.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건... 하여튼 조심해야 돼." "누나도 참, 걱정도 팔자야. 내가 뭐라고 했어? 모든 게 다 잘될거라고 했었지? 내 말대로 됐잖아? 이젠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어."


"하여튼 조심해! 마이클, 절대로..." 그러나 이미 전화가 끊어진 다음이었다. 케트는 다시 잠을 청했지만 불안과 의구심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루 디네토! 그 사람이 어떻게 마이클을 찾아냈고, 왜 그런 호의를 베푸는 거지?' 다음날 저녁, 케트의 근무가 끝나고 병원건물을 나설 때 큰길 모퉁이에 검은색 리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동차 옆에는 '그림자'와 라이노가 서 있었다. 캐트가 그들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려 할 때 라이노가 입을 열었다. "닥터, 차에 타시지요. 디네토 씨가 좀 뵙자고 하십니다." 케트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라이노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치료했던 이마의 상처는 희미한 흉터만 남아 있었다. 두 사람 중 얼굴은 라이노가 훨씬 험상궂었지만, 케트는 어쩐지 '그림자'가 더 위험한 인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깡마른 체구에 말없이 쳐다보는 '그림자'와 눈길이 마주칠 때면 온몸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때 같으면 케트는 절대로 그 차에 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 마이클과 통화한 다음부터 디네토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기 때문에 말없이 차에 탔다. 리무진은 교외로 한참 달리다가 작은 아파트 건물에 멈추었다. 케트가 차에서 내리자 디네토가 기다리고 있었다. "닥터 헌터, 이렇게 와주어서 감사합니다." 디네토가 말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오. 내 친구가 사고로 약간 다쳤는데 보시고 좀 치료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대체 마이클에게 어떻게 한 거예요?" 케트가 따지듯 물었다. "어떻게 하다니?" 디네토는 시치미를 뗐다. "나쁜 친구들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해결해 준 것뿐이요." "어떻게... 그런 걸 어떻게 알아냈지요? 그보다도 나한테 마이클이라는 동생이 있다는 것을..." 디네토는 미소지었다. "나는 사업상 아는 사람이 어느 구석에나 있어요. 아는 사람끼리 서로 도우며 사는 거 아니오? 마이클이 나쁜 친구들에게 걸려들어 고생한다기에 도와준 것뿐이오.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 되지 않겠소?" "물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케트가 말했다. "정말이에요." "좋소. 그러면 서로 돕는다는 뜻으로 내 친구를 치료해 주면 되겠군." "난 불법적인 일은 할 수 없어요." 케트가 말했다. "불법적인 일이라구?" 디네토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불법적인 일을 해달라고 부탁하겠소? 내 친구가 사고로 좀 다쳤는데 워낙 병원에 가기 싫어해서 여기서 치료를 부탁하는 거요. 우선 좀 봐야 되지 않겠소?" '이러다가 혹시 범죄조직에 연류되는 건 아닐까?' 불안했지만 거절할 방법도 없었다. "좋아요, 우선 환자를 보지요." "지금 침실에 있소." 디네토의 친구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심하게 구타당한 것 같았다. 그는 침대 위에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다. "어떻게 다친 거예요?"


디네토는 케트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말했다. "높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이렇게 됐소." "병원으로 가야 돼요." "아까 얘기했잖소. 이 친구는 병원이라면 딱 질색이라니까. 의료기구나 약품, 뭐든 필요한 것은 다 가져올 테니 여기서 치료해 달란 말이오. 전에 낸 친구들을 돌보던 의사는 사고가 나서 그만두었소." 그 말에 케트는 등골이 오싹했다. 당장 집으로 도망가서 디네토의 이름을 다시는 듣게 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행운은 대가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마이클의 문제를 해결해 준 대가를 치러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빚을 지면 갚아야지!' 케트는 재킷을 벗고 환자에게 다가갔다.

제 12 장 레지던트 4 년차가 시작될 때, 페이지는 벌써 수백 번 보조의로서 수술에 참여했다. 이제 수술실은 그녀의 일상생활의 일부분이었다. 담낭수술, 비장수술, 간수술, 맹장수술, 그리고 가장 까다로운 심장수술까지 눈을 감고도 순서를 빠뜨리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그러나 자신의 책임하에 수술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페이지는 점점 불만이 쌓였다. '처음에는 수술을 한번 보고, 그 다음에는 직접하고, 그리고는 가르쳐야 된다고 하더니 어떻게 된 거야?' 혼자 투덜거렸다. 그러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어느 날 외과 과장인 조지 엥글런드 박사가 페이지를 찾았다. "닥터 페이지, 내일 아침 7 시 30 분 제 3 수술실에서 탈장 환자를 수술하도록 예정되었소." 페이지는 메모했다. "알았습니다. 집도의가 누구지요?" "당신이지." "알았어요. 제가..." 갑자기 말뜻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제가 집도해요?"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소?" 페이지의 표정에 어둠침침하던 방이 갑자기 밝아지는 것 같았다. "천만에요! 아무 문제 없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제 집도할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소. 그 환자는 당신 같은 집도의를 만난 게 행운이오. 참, 환자 이름이 월터 허조그요. 지금 314 호 병실에 있소." "허조그... 314 호실... 잘 알았습니다." 페이지는 날 것 같은 기분으로 방을 나왔다. 페이지는 흥분으로 어쩔 줄 몰랐다. '이제 내 책임하에 첫 수술을 하게 된 거야. 내 손에 다른 사람의 생명이 달린 거야. 혹시 내가 아직 실력이 부족하면 어쩌지? 혹시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면 어쩌지? 내가 실수하지 않아도 일이 잘못될 수 있잖아? 머피의 법칙에 의하면 그럴 가능성은 항상 있다는데...' 생각해 보면 볼수록 페이지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페이지는 구내식당으로 가서 진한 커피 한 잔을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아마, 잘 될 거야.' 페이지는 스스로 위로했다. '탈장수술 정도는 벌써


수십 번이나 보조했잖아. 이건 아주 쉬운 수술이야. 엥글런드 박사 말대로 환자가 나를 만난 게 행운일 거야.' 커피를 다 마실 때쯤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 페이지는 환자를 만나볼 용기가 생겼다. 월터 허조그는 60 대 중반의 남자였다. 깡마른 몸에 대머리였고, 몹시 불안해 하는 환자였다. 페이지가 꽃다발 하나를 들고 314 호 병실에 들어갔을 때, 그는 사타구니에 손을 넣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허조그가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이봐, 간호사... 내 주치의 좀 만나야겠어." 페이지는 침대에 다가가서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내가 주치의예요. 내일 수술을 집도할 겁니다." 그는 꽃다발과 페이지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지금 뭐라고 했소?" "걱정하지 마세요." 페이지는 침착하게 말했다. "수술은 잘될 거예요. 아주 간단한 수술이거든요." 페이지는 침대 아래쪽에 있던 차트를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다. "차트에 뭐라고 써 있어요?"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여자가 왜 꽃다발을 들고 왔지?' "별 문제가 없다고 돼 있어요."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정말 내일 수술을 집도할 거요?" "그래요." "당신은 너무... 너무 젊어 뵈는데..." 페이지는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난 아직 실수한 적 없어요." 그리고 병실 안을 둘러보았다. "병실에 불편한 건 없으세요? 뭐 읽을 거리도 보내드릴까요? 책이나 잡지 같은 것 말이에요. 아니면 과자라도?" 듣고 있던 허조금는 점점 더 불안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대체 이 여자가 왜 이렇게 친절한 거지? 뭔가 나한테 말 안하는게 있는 것 아냐?' "자, 그러면 내일 아침에 만나요." 페이지는 명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빈 종이에 뭔가 적어서 허조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내 집 전화번호예요. 밤에라도 내가 필요하면 전화하세요. 나는 집에 있을 테니까, 언제든지 연락이 될 거예요." 페이지가 떠난 다음, 허조그는 더욱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병실을 나온 페이지가 휴게실에 앉아 쉬고 있는데 지미가 찾아왔다. 그는 활짝 웃으며 페이지에게 다가왔다. "축하합니다. 내일 첫 수술을 하게 되었다지요?" '아니, 벌서 소문이 돌았나? 정말 빠르기는...' 페이지는 고개를 저었다. "벌써 소식을 들었어요?" "그 환자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지미가 말했다. "내가 만약 수술을 받게 된다면 다른 의사에게는 받고 싶지 않아요. 닥터 테일러가 꼭 해줘야 돼요!" "지미, 그렇게 생각해 주니 정말 고마워요." 물론 지미가 재담 한 마디 없이 그냥 떠날 리가 없었다. "발목에 이상한 통증을 느낀 사람 얘기를 들어봤어요? 발목이 쑤셔대는데 돈이 아까워서 병원에 안 가고 버티던 사람이 마침 가까운 친구가 자기와


똑같은 통증을 느끼는 것을 알았어요. 그 친구보고 빨리 병원에 가라고 했지요. 의사가 하는 말을 그대로 얘기해 달라고도 했고요. 다음날, 아무리 기다려도 친구가 나타나지 않아서 집으로 연락해 보니 그 친구는 벌써 죽었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 검사하는 데만 5 천 달러를 썼대요. 그래서 죽은 친구의 부인에게 전화해서, '체스터가 죽기 전에 통증이 심했나요?' 하고 물었대요. '아뇨.' 미망인이 대답했어요. '달려오는 트럭을 볼 틈도 없었는데, 통증은 무슨 통증이에요.'" 지미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날 저녁 페이지는 너무 흥분해서 저녁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저녁 내내 식탁 다리에 실을 묶는 연습을 했다. '오늘밤은 푹 자둬야겠어. 그래야 내일 아침 수술에 맑은 정신으로 집도할 것 아냐?' 그러나 페이지는 밤새 한 잠도 잘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수술 순서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 보았다. 탈장은 세 단계로 구분된다. 가장 가벼운 초기 탈장증세는 장기의 일부만 절제하고 정상이 된 장기를 환원시키면 되는 병이다. 증세가 좀 심해지면 중기 탈장이 되고, 이 경우에는 장기의 유착이 생기기 때문에 수술범위가 훨씬 넓어진다. 가장 어려운 증세는 혈관의 소통이 완전히 막혀버렸을 때 생기는 말기 탈장으로 장기 전체가 썩기 때문에 수술이 아주 위험했다. 월터 허조그는 가장 가벼운 초기 탈장이었다. 새벽 6 시, 페이지는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렸을 때, 바로 옆에 빨강색 페라리 스포트카가 주차되어 있었다. 페이지는 이 병원에 어떤 사람이 저렇게 비싼 자동차를 가졌을까 궁금했다. 대단히 부유한 사람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차였다. 아침 7 시가 되자 페이지는 병실로 가서 월터 허조그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들이 의료보조원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간호사는 허조그에게 진정제를 주었다. "난 수술이 처음이오." 허조그가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페이지는 생각했다. 의료보조원이 이동침대를 가지고 도착했다. 그 위에 월터 허조그를 눕히고 제 3 수술실로 갔다. 이동침대 난간을 잡고 같이 걸어가던 페이지는 가슴이 너무 뛰어 혹시 그 소리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제 3 수술실은 여러 개 수술실 중 상당히 큰 편이었다. 실내에 심장박동 측정기, 인공심폐기, 그리고 수많은 기계와 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페이지가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 보조원들은 벌써 들어와 기계를 점검하고 수술 준비에 열중하고 있었다. 참관의 한 사람과 마취의, 레지던트 두 사람, 수술보조 간호사, 그리고 일반보조 간호사 두 사람 등, 일곱 명이 준비하고 있었다. 페이지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모두 그녀의 첫 수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페이지는 수술대로 다가갔다. 환자의 국부는 깨끗이 면도되고 소독되어 있었다. 소독약에 적신 수건이 절개할 부위를 덮고 있었다. 허조그는 진정제로 초점이 풀린 눈으로 페이지를 쳐다보았다. "닥터, 날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거지요?" 페이지는 미소지었다. "아니, 내 완벽한 기록에 먹칠을 할 것 같아요?" 페이지는 마취의 쪽을 쳐다보았다. 이번 수술에는 경막마취로 전신을 마취하게 되어 있었다. 페이지는 숨을 깊에 들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취약이 투여되자 허조그는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 이제 수술이 시작되었다. "메스." 페이지가 막 피부를 절개하려 할 때, 간호사 한 사람이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긴장 때문에 페이지도 수술의들 특유의 거친 말투가 나왔다. "닥터 테일러, 음악을 좀 틀까요?" 자신이 그런 질문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페이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지미 버펫의 음악을 틀지." 메스가 환자의 피부를 가르는 순간 페이지의 모든 불안감은 사라졌다. 조금도 어색한 느낌이 없었고 항상 하던 일을 다시 하는 것같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페이지는 비계층과 근육층을 정교하게 가르고 탈장 부위를 노출시켰다. 그러는 동안 주변에선 항상 들어온 소음이 어김없이 들려왔다. "스펀지..." "보비를 작동시켜!" "아, 환부가 나타났어..." "지금 수술하길 잘했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막아..." "흡입장치 작동시켜!" 페이지는 수술에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우선 탈장 부위를 찾아내서... 노출시키고... 정상적인 장기를 원위치로 환원시키고... 환부를 졸라매고... 일부는 절제하고... 절단 부위를 봉합하고... 환자의 피부에 메스를 댄 지 한 시간 20 분 만에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페이지는 수술이 끝나면 긴장이 풀려 허탈해질 것으로 생각했었지만, 막상 끝내고 보니 너무나 상쾌한 기분이었다. 환자의 피부 봉합까지 완전히 끝나자, 수술보조 간호사가 페이지에게 말했다. "닥터 테일러..." "왜 그래?" 페이지가 물었다. 간호사는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닥터, 오랜만에 훌륭한 수술을 보았어요." 그 후 여러 날이 지난 어느 일요일이 되어서야 페이지, 케트, 그리고 하니는 함께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오늘 뭘 할까?" 케트가 물었다. 페이지가 제안했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우리 모두 '삼림공원'에 가보는 게 어때? 점심은 싸가지고 가서 피크닉하는 기분으로 먹으면 되잖아." "좋은 생각이야." 하니가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자구." 케트가 말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세 사람은 모두 전화기를 쳐다보면서 아무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세상에!" 케트가 말했다. "노예는 벌써 링컨 시절에 해방했잖아. 그 전화 받지 마. 우린 오늘 비번이야." "언제부터 레지던트에게 당번, 비번이 따로 있었어?" 페이지가 말했다. 마지못해 케트가 전화를 받았다. "닥터 헌터입니다." 잠시 상대방의 말을 듣더니 수화기를 페이지에게 건넸다. "닥터 테일러를 찾는데." 페이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어. 그럴 줄 알았다구..."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닥터 테일러입니다. 여보세요... 아, 톰. 무슨 일... 뭐라구요?... 아니, 지금 막 나가려는... 그래, 그래서... 그 외에 또 다른 증세는... 알았어요... 아니, 괜찮아요... 15 분 내로 도착할 거예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피크닉 한 번 가나 보다 했더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환자의 상태가 심각하대?" 하니가 물었다. "그런 모양이야. 아무래도 오늘을 못 넘길 것 같대. 저녁식사 전에 돌아오도록 해볼게." 페이지가 병원 주차장에 도착해 빈자리에 주차했을 때 옆에 일전에 보았던 빨간 페라리 스포츠카가 있었다. 낮은 유선형 디자인의 차체가 번쩍이는 것이 신품이 분명했다. '대체 수술을 몇백 번이나 해야 저런 차를 살 수 있을까?' 20 분 후, 페이지는 방문객 대기실로 들어갔다. 짙은 색 정장차림의 한 남자가 창 밖을 내다보며 앉아 있었다. "뉴톤 씨?"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습니다." "제가 닥터 테일러입니다. 지금 막 응급실에서 아드님을 보고 나오는 길입니다. 심한 복통 때문에 병원에 왔다고 하더군요." "그랬지요. 하지만 이제는 집으로 데려가야겠습니다." "그럴 수 없어요. 지금 아드님은 비장이 파열되었어요. 당장 수혈하고 수술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해요." 뉴톤 씨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여호와 증인 신도입니다. 하느님은 저 아이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실 거예요. 그리고 난 다른 사람 피로 저 아이의 몸을 더럽힐 수 없어요. 아내가 다급해서 아이를 이곳에 데리고 온 모양인데,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뉴톤 씨, 지금 상황이 얼마나 절박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시는 것 같군요.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아드님은 죽게 돼요." 그는 미소를 띠며 페이지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믿음이 없는 사람 같이 보이는군요." 페이지는 화가 치밀어오르지 시작했다. "하느님이 어떻게 하실는지는 잘 모르지만, 비장이 파열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고 있어요." 그녀는 서류 한 장을 내보였다. "아드님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수술동의서에 보호자가 서명해야 됩니다." 서류를 뉴톤에게 내밀었다.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요?" "그러면... 수술할 수 없지요." 뉴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의술이 하느님의 뜻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페이지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금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세요?" "못하겠어요. 당신의 의술보다 훨씬 더 위력 있는 하느님의 뜻이 내 아들을 살려낼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페이지는 할수없이 다시 응급실로 돌아갔다. 이제 여섯 살 된 피터 뉴톤은 의식을 잃고 있었다. "아무래도 희망이 없어요." 창이 말했다. "출혈이 너무 심했거든요.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페이지는 결단을 내렸다. "제 1 수술실로 데려가요! 응급상황이에요." 창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이 아버지가 생각을 바꿨어요?" 페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사람이 생각을 바꿨어요. 자, 서둘러요." "정말 잘했어요! 난 한 시간 동안이나 설득해 보았지만 꿈쩍도 안하더라구요. 계속 하느님이 보살펴줄 거라고만 하면서." "틀림없이 하느님이 보살펴줄 거예요." 두 시간 후, 피를 1 리터 이상 수혈하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피터 뉴톤의 모든 기능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페이지는 아이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제 곧 회복될 거야." 직원 한 사람이 수술실로 뛰어왔다. "닥터 테일러, 병원장께서 즉시 좀 오시랍니다." 벤자민 월러스 박사는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닥터 테일러,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소? 보호자의 동의도 없이 수혈하고 수술까지 해버렸단 말이오? 이건 불법행위요!" "전 그 소년의 생명을 구했어요!" 월러스 박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렇다면 법원의 승인을 얻어서 해야 될 거 아니오?"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페이지가 말했다. "10 분만 더 지났어도 그 아이는 죽었을 거예요. 하느님이 좀 바쁘셔서 그애를 돌볼 틈이 없었던 것 같아요." 월러스 박사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데..." "법원 승인을 받아야지요." "그건 왜? 벌써 수술을 끝났잖소?" "법원 승인 날짜를 하루 소급하면 돼요. 형식을 갖추는 것뿐이잖아요." 월러스 박사는 그 말에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이런 세상에..."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자칫 잘못하면 내 신상 문제로까지 비화되는 거 아냐?' 페이지는 한참 동안 서성거리는 월러스 박사를 쳐다보다가 말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페이지..." "네?" "다시는 이런 짓 해서는 안돼요. 약속할 수 있겠소?" "그럴 필요가 없을 때는 절대 안할 거예요. 약속하지요." 페이지가


대답했다. 제 13 장 모든 종합병원에서는 약품이 없어지는 게 항상 문제였다. 특히 습관성 또는 향정신성 약품이 자주 없어졌다. 그런 약품을 병원 약국에서 공급할 때는 반드시 책임의사가 수령증에 서명하도록 법에 명시되어 있었지만, 아무리 엄하게 통제해도 마약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에서도 문제가 심각했다. 마가릿 스펜서가 병원장을 찾아갔다. "월러스 박사님,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단속해도 약국의 펜타닐이 계속 없어져요." 펜타닐은 강력한 습관성 마약으로, 마취에 쓰는 약품이었다. "얼마나 없어졌소?" "상당량이 계속 없어집니다. 그저 몇 병만 없어졌다면 별로 걱정할게 없죠. 그러나 1 주일에 열두 병 이상이 계속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 지 벌써 몇 달이 되었습니다." "혹시 의심가는 사람이라도 있소?" "전혀 모르겠어요. 보안책임자와 얘기해 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대요." "약품보관소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오?" "그게 문제예요. 마취의들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대부분 수술의나 간호사들도 드나들지요." 워러스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알려주어서 고맙소. 내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월러스 박사님." 간호원장 스펜서는 밖으로 나갔다. '왜 이렇게 골치아픈 일이 계속 터지는 거지?' 월러스 박사는 혼자 투덜거렸다. 병원 이사회가 다가오고 있었고, 합의 봐야 될 골치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월러스 박사는 마약에 관한 통계 수치를 잘 알고 있었다. 미국 전체 의사 중 10 퍼센트 이상이 최소한 한 번이라도 알콜이나 마약에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향정신성 약품을 항상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의사들에게는 그만큼 유혹이 더 컸다. 어떤 의사든 약품 캐비닛에서 약품을 꺼내 자신에게 주사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심한 중독의 경우 두 시간마다 마약을 투여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 자신이 책임자로 있는 병원에서도 그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사회 전에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그냥 놔두었다가는 내 실적에 문제가 생기겠는데...' 월러스 박사는 범인을 색출하는 데 누구를 믿고 상의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이런 일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만 했다. 그는 닥터 테일러와 닥터 헌터가 머리에 떠올랐다. 두 사람은 절대로 마약을 사용할 사람들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한동안 더 생각해 본 끝에 월러스 박사는 두 사람에게 부탁하기로 결정했다. 페이지와 케트가 방에 들어오자 월러스 박사는 말했다. "두 사람에게 좀 부탁할 일이 있소." 그는 펜타닐이 계속 도난당하는 얘기를 했다. "두 사람이 좀 주의 깊게 관찰해 주면 좋겠소. 만약 수술 도중에 잠시 밖으로


나갔다 오는 행동을 반복하는 의사가 있다던가, 어떤 형태로든 마약 중독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나에게 보고해 주시오. 의사들 중 성격이 갑자기 달라지는 사람이 있는가 살펴봐요. 예를 들면 갑자기 우울해진다거나, 우울하다가 갑자기 명랑해진다거나, 갑자기 자세가 흐트러진다거나, 또는 그러지 않던 사람이 약속시간을 자주 어기는 것 말이오. 그리고 이 얘기는 우리들끼리만 알고 절대로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않도록 해주면 고맙겠소." 두 사람이 월러스 박사의 사무실을 나왔을 때, 케트가 말했다. "이 큰 병원에서 어떻게 그런 사람을 찾아내지? 셜록 홈즈라도 데려와야 되겠군." "아냐, 그럴 필요 없어." 페이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난 그게 누군지 알 것 같아." 밋첼 캠벌 박사는 페이지가 가장 좋아하는 의사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호감을 주는 얼굴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50 대 중반의 전문의였다. 언제나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점잖게 행동했지만 수술실에서는 매서운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페이지는 최근 캠벌 박사가 걸핏하면 수술시간에 늦게 도착하고 수술 도중에 자주 손이 떨리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수술 보조의로서 항상 페이지를 찾았고, 수술 과정 대부분을 그녀에게 맡겨왔다. 수술 도중에도 손이 떨리기 시작하면 바로 메스를 페이지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지금 몸이 좀 불편해서..." 그는 중얼거리며 페이지에게 말했다. "나머지를 좀 해주겠어?" 페이지가 수술을 인계받으면 그는 바로 수술실을 나갔었다. 그럴 때마다 페이지는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캠벌 박사가 걱정되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대답은 뻔한 것이었다. 페이지는 어떻게 해야 될지 망설여졌다. 만약 이런 사실을 월러스 박사에게 보고하면 캠벌 박사는 해고당하거나, 심하면 그의 의사생활도 끝날 수 있다. 그 반면에 잠자코 있으면 캠벌 박사 때문에 환자들이 희생당할 수도 있다. '혹시 내가 직접 얘기해 보면 어떨까? 내가 관찰한 것을 다 털어놓고 즉시 치료를 받으라고 하면 어떨까?' 페이지는 케트에게 상의했다. "그건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케트가 말했다. "참 좋은 의사인데, 성품도 좋고... 월러스에게 말하면 그분의 의사생활은 끝나는 거야. 그렇다고 가만있자니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잖아. 만약 직접 대놓고 얘기하면 뭐라고 할까?" "케트, 아마 부정할 거야. 중독환자치고 처음부터 자신이 중독되었다는 것을 털어놓는 사람은 없어." "그래. 정말 곤란한데." 그 다음날에도 페이지는 캠벌 박사의 수술을 보좌하도록 일정이 짜여져 있었다. '내 걱정이 근거 없는 것이라면 좋겠는데...' 페이지는 생각했다. '제발 오늘은 늦게 오지 않았으면... 그리고 제발 수술 도중에 나가지 않았으면...' 캠벌 박사는 수술실에 15 분이나 늦게 도착했고, 수술이 한참 진행되는 도중에, "페이지, 수술 좀 인계받아 줘. 금방 돌아올게..." 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젠 털어놓고 말해 봐야겠어.' 페이지는 결단을 내렸다. '무조건 그의 의사생활을 끝내게 할 수는 없잖아.'


다음날 아침, 페이지가 하니와 같이 의사 전용 주차장에 차를 댔을 때, 해리 보우만이 빨간 페라리를 그들 옆에 주차시켰다. "정말 멋있는 차예요." 하니가 말했다. "그런 차는 대체 얼마나 해요?" 보우만이 웃으며 대답했다. "값을 물어봐야 할 정도라면 아예 살 생각을 안하는 게 좋아요." 그러나 페이지는 생각이 다른 데 가 있었다. 보우만의 페라리를 쳐다보면서 그의 화려한 아파트, 사치스러운 음식, 그리고 최고급 요트가 머리에 떠올랐다. '난 원래 똑똑했기 때문에 착하고 돈많은 아버지를 두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우만은 시립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왜? 10 분 후, 페이지는 인사과를 찾아갔다. 인사기록 담당인 린다 캐런에게 말했다. "린다, 날 좀 도와주겠어? 이건 좀 사적인 일인데... 해리 보우만이 자꾸 데이트하자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 사람 기혼자인 것 같아. 그 사람 인사기록을 잠깐 봐도 될까?" "남자란 그저... 괜찮은 여자만 보면 어떻게든 집적거려 보려고 그러지. 좋아, 내가 그 사람 화일을 보여줄게." 린다는 캐비닛으로 가서 서류철을 뒤적였다. 한참만에 그 중 하나를 뽑아들고 페이지에게 돌아왔다. 페이지는 인사기록을 빠른 속도로 훑어보았다. 닥터 해리 보우만의 지원서에는 중서부의 작은 의과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의과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했었다. 보우만은 마취 전문의가 되기 위해 수련중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발사였다. 엠바카데로 시립병원 대부분의 의사들에게 닥터 태프트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아침 회진을 돌 때, 그녀는 항상 불안해 했다. 그러나 오후 회진 때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었다. 갑자기 각 환자들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예리한 진단을 내리는 것이었다. 선임 레지던트 한 사람이 동료들과 닥터 태프트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난 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가 말했다. "아침에는 닥터 태프트에 대한 불평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거야. 계속 실수를 하거든. 왜 일만 시키면 실수하는 간호사 얘기 있잖아. 들어본 적 없어? 의사가 4 호실 환자에게 알약 세 알을 주라고 하면 3 호실 환자에게 알약 네 개를 주고, 환자의 곪은 환부를 바늘로 터트리라고 하면(prick his boil) 조금 있다가 물이 펄펄 끓는 냄비를 들고 벌거벗은 환자를 쫓아다니는 거야. 그 친구의 물건을 삶으라고(boil his prick) 알아들은 거지." 동료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닥터 태프트가 아침에는 꼭 그 꼴이야. 그런데 희한하게도 오후만 되면 막히는 게 없거든. 진단이 아주 예리하고, 환자에 대한 메모도 완벽하고, 모든 것을 능숙하게 처리한단 말이야. 오후에만 효과가 있는 기적적인 약이라도 있는지 원..." 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돼." 네이산 리터 박사는 원칙주의자였다. 모든 것을 원칙대로만 처리했고, 융통성이 별로 없었다. 그는 돋보이는 능력이나 기술은 없었지만 그래도 유능한 편이었고, 병원 일에 헌신적이었다. 따라서 함께 일하는 레지던트들에게도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능력과 헌신적인 태도를 요구했다.


불행하게도 하니는 리터 박사의 팀으로 전속되었다. 회진이 시작되고 10 여 명의 환자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도착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막 아침식사를 끝내고 있었다. 리터 박사는 침대 밑에 있던 차트를 꺼내 읽어내려갔다. "닥터 태프트, 이 사람이 당신 환자 맞지?" 하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오늘 아침 기관지 내시경을 보기로 되어 있구먼." 하니가 다시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런데 아침식사를 하도록 내버려두었단 말이야?" 리터 박사가 소리쳤다. "기관지 내시경을 보기 직전에?" 하니가 말했다. "이 환자는 딱하게도 벌써 이틀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 리터 박사는 선임 레지던트에게 말했다. "기관지 내시경 검사를 당장 연기해." 그는 하니에게 다시 뭐라고 하려다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자제하는 표정이었다. "다음 환자에게로 가자구." 다음 환자는 푸에르토리코 사람이었다. 그는 계속 기침하고 있었다. 리터 박사는 환자의 차트를 검토한 다음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의 환자이지?" "제 환자인데요." 하니가 말했다. 리터 박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 사람 염증은 벌써 가라앉았어야만 되는데." 그는 차트를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지금 엠피실린을 하루에 네 번 50 밀리그램씩 주고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짓이야. 이건 상식 밖의 일이야. 하루에 네번씩 500 밀리그램을 투여해야 되는 거야. 숫자에 0 하나를 빼먹었잖아." "죄송합니다. 제가..." "이러니 염증이 가라앉을 리 있나? 지금 당장 500 밀리그램씩 주도록 조치해." "알겠습니다." 또 다른 하니의 환자 차례가 되었을 때, 리터 박사는 심기가 더 불편해져 있었다. "이 사람은 결장 내시경 검사를 해야 되는데 방사선과 보고서는 어디 있지?" "방사선과 보고서요? 아 참, 그 보고서 요청하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습니다." 리터 박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하니를 쳐다보았다. 아침 내내 하니의 환자를 진찰할 때마다 문제가 생겼다. 다음 환자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픈 거지요? 내가 무슨 병에 걸린 거예요?" "아직 무슨 병인지 모릅니다." 하니가 말했다. 하니를 쳐다보는 리터 박사의 눈길이 험악해졌다. "닥터 태프트, 잠깐 나하고 밖에 나가서 얘기 좀 합시다." 복도로 나가자 그는 낮은 목소리였으나 힘주어 말했다. "절대로, 절대로 모른다는 말을 해서는 안돼. 그 사람들이 의지할 곳이라고는 의사들밖에 없잖아! 아직 진단이 제대로 안된 경우에도 그럴 듯한 대답을 해주어야 되는 거야. 알아듣겠어?" "하지만 정확하게 모를 때 그런 대답을 하는 건..."


"지금 당신의 의견을 묻는 게 아니야. 내 말대로 하라고 지시하는 거야." 일행은 탈장 환자, 간염 환자, 알자이머 병 환자 등 수십 명을 회진했다. 회진이 끝나자 리터 박사는 즉시 병원장 월러스 박사를 찾아갔다. "좀 심각한 문제가 있어." 리터 박사가 말문을 열었다. "네이산, 왜 그래?" "레지던트 한 사람이 문제야. 하니 태프트란 레지던트야." '또 하니 태프트 얘기야?' "어째서?" "그녀는 의사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전혀 없어." "거참, 이상하구만, 의과대학 성적이나 우리 병원에 지원했을 때 추천서는 최사이었는데... 전에도 자질 운운해서 책임 전문의에게 주의해서 관찰하고 보고하라고 했더니 열심히 잘 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벤, 그녀를 그냥 두면 무슨 사고가 생길지 몰라. 병원 전체의 문제가 될 수도 있어. 그러다가 실수로 환자가 죽게 되는 불상사라도 벌어지면 어쩔 텐가? 빨리 내보내는 게 좋겠어." 월러스 박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결단을 내렸다. "좋아. 정 그렇다면 내보내도록 하지." 페이지는 오전에 계속되는 수술 때문에 잠시도 한눈 팔 시간이 없었다. 마침내 수술이 다 끝나자 바로 월러스 박사를 찾아가 아무래도 해리 보우만이 약품을 빼돌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보우만이라구? 틀림없소?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은 전혀 마약 중독자로 보이지 않던데..." "자신의 중독 때문에 필요한 게 아니에요." 페이지가 말했다. "내다 파는 거예요. 레지던트 연봉으로 어떻게 백만장자처럼 살 수 있겠어요?" 월러스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조사해 보지. 페이지, 정말 수고했소." 월러스 박사는 즉시 병원의 보안책임자인 브루스 앤더슨을 불렀다. "누가 마약을 빼돌렸는지 알아낸 것 같아." 월러스 박사가 말했다. "지금부터 닥터 해리 보우만을 특별히 감시하도록." "보우만요?" 앤더슨은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닥터 보우만은 경비원들이나 직원들에게 항상 웃는 얼굴로 대했고, 비싼 씨가나 초콜릿 같은 것을 잘 주는 편이었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다. "만약 보우만이 약국이나 약품보관소에 들어가면 나올 때 반드시 몸수색을 하라구." "잘 알겠습니다." 해리 보우만은 약국으로 향했다. 그는 주문을 받고 있었다. 끝없이 계속되는 주문이었다. 그런 주문을 받게 된 것은 우연한 일로 시작되었다. 그는 아이오와 주 엠즈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시골 병원에서 레지던트의 쥐꼬리만한 연봉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항상 좋은 옷과 비싼 음식, 그리고 화려한 생활을 즐기고 싶었지만 주머니 사정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그의 환자 한 사람이 퇴원한 후 어느 날,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닥터, 지금 통증이 아주 심한데요. 진통제를 좀 처방해 줘야겠어요." "병원으로 다시 들어오지 그래요." "지금 집을 떠날 수가 없어요. 미안하지만 진통제를 좀 갖다주실 수


없을까요?" 보우만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알았어요. 오늘 저녁 퇴근할 때 갖다드리지요." 그날 저녁, 보우만은 펜타닐 한 병을 가지고 환자의 집으로 찾아갔다. 환자는 펜타닐을 보자 얼굴이 밝아지며 허겁지겁 그 약을 낚아챘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고액권 지폐를 여러 장 꺼내 보우만에게 내밀었다. "자, 받으세요." 보우만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돈을 낼 필요가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 약은 금은보석보다 더 귀한 거예요. 이 약을 더 갖다주시면 최고의 가격을 지불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시작은 그랬다. 두 달도 안 가서 해리 보우만은 상상도 못하던 돈을 벌었다. 그런 일이 계속되면서 병원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리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병원에서는 해리 보우만의 짓이라는 것을 눈치챘고, 병원장은 일이 시끄럽게 되는 것을 피하려고 보우만에게 조용히 다른 곳으로 전근할 것을 권했다. '아이오와를 떠나길 잘했어.' 보우만은 생각했다. '샌프란시스코가 훨씬 더 재미있는 도시고, 마약 수요도 엄청나게 많거든.' 그는 약국에 도착했다. 브루스 앤더슨이 약국 문 앞에 서 있었다. 보우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브루스, 잘 있었어?" "안녕하세요, 닥터 보우만?" 5 분 후 보우만이 약국에서 다시 나왔을 때, 앤더슨이 앞을 가로막았다. "실례합니다만, 몸수색을 해야 되겠습니다." 해리 보우만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앤더슨을 쳐다보았다. "몸수색이라구? 브루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닥터, 죄송합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약국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은 몸수색을 하라는 엄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앤더슨은 둘러댔다. 보우만은 점점 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무슨 소리야? 난 이런 대우를 받아들일 수 없어!"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병원장 사무실로 동행해 주셔야겠는데요." "좋아! 병원장이 아마 이 소리를 들으면 나보다 더 화를 낼걸?" 보우만은 월러스 박사의 사무실에 노크도 없이 들어갔다. "월러스 박사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이 사람이 날 몸수색하겠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몸수색을 받으면 될 거 아니오?" "내가 왜 몸수색을 받아요? 그럴 수 없어요." "좋아요." 월러스 박사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럼 경찰에 연락해서 당신 몸수색을 하라고 하지. 우리 보안책임자는 수색할 자격이 없다니까." 그는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보우만은 갑자기 다급해졌다. "잠깐 기다려요! 그럴 필요가 뭐 있어요." 그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아! 이제 왜 그랬는지 알겠어요." 그는 밝은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펜타닐 한 병을 꺼냈다. "내가 수술실로 이 약을 가져가려고..." 월러스 박사는 그의 말을 끊고 조용히 먈했다. "주머니를 다 비워봐."


보우만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이마에 땀방울이 돋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주머니를 다 비워." 두 시간 후, 연방 마약수사국 샌프란시스코 지국에서 보우만은 모든 범행을 자백하고 자신에게서 마약을 넘겨받은 사람들 명단도 밝혔다. 보우만 사건의 결말을 들은 페이지는 밋첼 캠벌 박사를 찾아갔다. 그는 사무실에 앉아 쉬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페이지가 들어서자 캠벌 박사는 재빨리 두 손을 책상 아래로 내렸다. "페이지, 웬일이야? 잘 있었어?" "캠벌 박사님, 얘기 좀 하러 왔어요." "거기 좀 앉지." 페이지는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대체 파킨슨 씨 병을 앓은 게 언제부터예요?" 캠벌 박사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뭐라고?" "파킨슨 씨 병이 틀림없지요? 그 동안 내색을 안하려고 애쓰셨지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난... 내가... 그래요. 하지만 난... 난 의사생활을 단념할 수 없었어. 지금도 난... 단념할 수 없어. 의사생활이 내 사는 보람이거든." 페이지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의사생활을 단념해야 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그런 상태로 수술을 해서는 안되잖아요." 캠벌 박사의 얼굴이 갑자기 더 늙어보였다. "나도 알아. 작년에 그만두려고 했었지." 그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이젠 정말 그만둬야겠어. 월러스 박사에게 보고할 거야?" "아뇨." 페이지는 차분하게 말했다. "박사님이 병원장께 말해야 되잖아요." 페이지가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을 때, 톰 창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얘기 들었어요." 그가 말했다. "해리 보우만! 정말 놀라워요. 탐정 실력이 보통이 아니네요." 페이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엉뚱한 사람에게 혐의를 둘 뻔했어요." 창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톰,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나한테서 대충 괜찮다는 말을 듣길 원해요. 아니면 정말 어떤지 알고 싶어요?" "우린 친구잖아요. 있는 그대로 말해 봐요." "아무래도 내 결혼생활이 깨질 것 같아요." 창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싸이는 떠났어요.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정말 안됐네요." "싸이의 잘못이 아니에요. 우리 가정에서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했어요. 싸이는 내가 자신과 결혼한 것이 아니고 병원과 결혼했다고 했어요. 별로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내 생활 거의 전부가 병원에서 낯선 사람 돌봐주는


것이 되어버리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잖아요." "다시 돌아올 거예요. 결국엔다 잘되지 않겠어요?" 페이지는 톰을 위로해 주었다. "아뇨. 이번에는 그렇게 안될 것 같아요." "가정문제상담소를 찾아가 보거나,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봤어요?" "싸이가 그런 데는 절대로 안 가겠대요." "톰, 정말 안됐어요. 만약 내가 뭐라도 도울..." 그때 구내방송에서 페이지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닥터 테일러... 410 호 병실로..." 페이지는 갑자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지금 곧 가봐야겠어요." 410 호는 새무얼 번스타인의 병실이었다. 그는 페이지가 인간적으로 끌리는 환자였다. 70 대의 노신사인 번스타인은 어떻게 손을 써 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위암 말기 환자였다. 일반적으로 입원환자들은 병원에 대해서나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불평이 많았지만, 번스타인은 예외였다. 페이지는 죽음을 눈앞에 둔 노신사의 용기와 의연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아내와 장성한 두 아들은 자주 문병왔고, 페이지는 그들도 좋아하게 되었다. 번스타인은 이미 의식이 없었고, 인공심폐기에 의존해서 생명이 연장되고 있었다. 인공심폐기에는 DNR - 인공호흡을 시키지 말 것 - 이라고 쓰여진 카드가 붙어 있었다. 만약 심장박동이 멎으면 다시 재생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페이지가 병실에 들어왔을 때, 간호사가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페이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닥터, 다 끝났어요. 심장박동이 멎었을 때, 응급조치를 하지 않았어요. 아시다시피..." 말을 제대로 맺지 못했다. "그렇게 해야만 됐어요." 페이지는 조용히 말했다. "하여간 수고했어요." "혹시 내가 할 일이 더..." "괜찮아요. 이제 내가 다 처리할게요." 페이지는 침대 옆에 서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한 인간의 주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가족과 친구도 있었고, 즐겁기도 했지만 슬플 때도 있었고, 일생 동안 열심히 일하고 가족들을 훌륭하게 부양했었다. 그러나 이제... 페이지는 침대 옆 조그만 서랍을 열었다. 번스타인의 소지품 전부가 그 안에 있었다. 값싼 시계, 열쇠뭉치, 현금 15 달러, 틀니, 그리고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 그가 이 세상에 남긴 것 모두였다. 페이지는 번스타인의 죽음으로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을 털어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는데...왜 그럼 사람이 먼저..." 케트가 말했다. "페이지, 의사는 환자에 대해 감상적이어서는 안돼. 그러다간 얼마 안 가서 자신에게 문제가 생길 거야." "알아. 케트,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너무나 허무해... 죽고 사는 게 종이 한 장 차이 같아... 아침에 나하고 얘기했었는데, 내일은 장례식이라니..." "설마 장례식에 가려는 건 아니지?" "아니." 장례식은 '구원의 언덕'이라는 공동묘지에서 있었다. 유태교의 관습은 사망 후 즉시 장례를 치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사망 다음날 장례식을 치렀다.


새무얼 번스타인의 유해는 유태교 전통의식에 따라 전통문양이 수놓인 옷이 입혀지고 흰 천으로 덮였다. 가족들 모두가 묘지 주변에 둘러섰다. 랍비가 히브리어로 의식을 시작했다. 페이지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페이지의 표정을 눈치챈 옆에 있던 남자가 랍비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부디 하느님께서 그대를 추모하는 시온과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대를 편하게 인도하소서..." 페이지는 가족들이 입고 있던 옷을 찢으며 히브리어로 기도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건 무슨..." "옷을 찢는 것은 망자에 대해 경의를 표시하는 겁니다." 옆의 남자가 속삭였다. "흙에서 오라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그 영혼을 주신 하느님께 돌아갑니다." 그리고 장례식은 끝났다. 다음날 아침, 케트는 복도에서 하니와 마주쳤다. 하니는 좀 불안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케트가 물었다. "월러스 박사가 호출했어. 오늘 오후 2 시에 병원장실로 오라고 했어." "왜 그러는지 알아?" "아마 며칠 전 회진 때 내가 실수를 많이 한 것 때문인가 봐. 리터 박사 팀에서 회진했는데 계속 나만 못살게 굴더라고." "그 사람 좀 융통성이 없어." 케트가 말했다. "하지만 뭐 별일 있겠어? 다 잘되겠지." "그래야 할 텐데... 예감이 좀 좋지 않거든." 2 시 정각에 하니는 벤자민 월러스 박사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손가방 안에는 꿀이 담긴 작은 병이 들어 있었다. 비서는 아직 점심식사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월러스 박사가 열려진 문 사이로 하니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닥터 태프트, 이리 들어와요." 하니는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 닫고 좀 앉으시오." 하니는 문을 닫았다. "자, 거기 앉아요." 하니는 월러스 박사와 마주 앉았다. 불안으로 온몸이 떨려오는 것 같았다. 벤자민 월러스 박사는 마주 앉은 하니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강아지를 발길질하는 게 낫지 원...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할 일은 해야 되니까...' "닥터 태프트, 좀 안 좋은 소식이 있는데..." 그가 말문을 열었다. 한 시간 후, 하니는 휴게실에서 다시 케트와 마주쳤다. 소파에 털썩 앉는 하니의 얼굴은 미소짓고 있었다. "월러스 박사 만났어?" 케트가 물었다. "그럼 한참 동안 얘기했지. 그 사람 부인이 작년 9 월에 떠나버린걸 알고 있었어? 15 년 동안이나 결혼생활을 했었다는데. 그 전 부인 한테는 장성한 아이들이 둘이나 있는데, 얼굴도 볼 수 없대. 참 외로운 사람이야."


제2부 제 14 장 다시 새해가 찾아왔다. 페이지, 케트, 그리고 하니는 엠바카데로 시립병원 당직실에서 1994 년을 맞았다. 밖은 온통 연말연시로 들뜬 분위기였지만 세 사람의 병원생활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환자들 이름만 계속 바뀔 뿐이었다. 페이지는 주차장을 지날 때마다 해리 보우만과 그의 빨간색 페라리 스포츠카가 떠올랐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보우만이 판 마약에 중독되어 인생을 망쳤을까?' 혼자 생각해 보았다. 마약의 유혹은 너무도 강렬하고, 유혹에 빠지면 너무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 지미 포트가 작은 꽃다발을 들고 페이지를 찾아왔다. "지미, 이게 뭐죠?" 그는 멋쩍은 듯 얼굴을 붉혔다. "그냥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사실은, 곧 결혼하거든요." "정말! 그것 참 반가운 소식이네요. 신부는 누구예요?" "베치라고, 드레스 전문점에서 일해요. 우린 애를 많이 낳을 거예요. 첫딸은 페이지라고 부르고 싶은데, 괜찮겠죠?" "괜찮고말고요.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해야죠." 지미는 여전히 멋쩍은 표정이었지만, 재담 한 마디는 빼놓지 않았다. "완자에게 앞으로 2 주일밖에 살 수 없다고 선고한 의사 얘기를 들어봤어요? 환자가 '지금 당장 치료비를 낼 돈이 없어요.' 하니까 그 의사 말이 '좋아요. 2 주일 여유를 드릴 테니 그 안에 지불하세요.' 했답니다." 지미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페이지는 톰 창이 몹시 걱정스러웠다. 톰은 무척 명랑했다가도 갑자기 깊은 우울증에 빠지곤 했는데, 그런 변화가 자주 되풀이되었다. 어느 날 아침 톰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 도움이 없으면 그냥 죽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봤어요? 우리 의사들만이 그들을 치료해 건강을 되찾도록 해줄 능력이 있는 거라구요." 하면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페이지에게 말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페이지, 이건 다 우스꽝스러운 짓이에요. 우리가 간섭하짖 않으면 환자들이 더 빨리 나을지도 모르잖아요. 우린 의사랍시고 모든 병을 다 고칠 것처럼 설쳐대는 위선자일 뿐이에요. 우리가 고칠 수 있는 병이 대체 얼마나 되겠어요?" 하고 의사에 대한 비관론을 늘어놓았다. 페이지는 잠시 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싸이한테서는 연락 있어요?" "어제 통화했는데, 이제 이곳에는 돌아오지 않겠대요. 그리고 이혼 수속을 밟겠다고 하더군요." 페이지는 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톰, 정말 안됐어요." 톰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별로 안될것도 없어요. 난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른 여자를 찾으면 되죠, 뭐."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아이도 다시 낳으면 되는 거구, 두고 보라구요." 톰은 마치 남 얘기하듯 말했다. 그날 밤, 페이지는 케트에게 말했다. "톰 창이 무척 불안해 보여. 요즘 그와 얘기해 본 적 있어?"


"응." "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어?" "난한데 남자란 다 이상한 존재야." 케트가 대답했다. 그러나 페이지는 걱정을 떨져버릴 수 없었다. "내일 우리 저녁식사에 초대하면 어떨까?" "그러지, 뭐." 다음날 아침, 페이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빌당 관리인이 지하 창고에서 톰 창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한 것이다. 페이지는 자책감에 빠졌다. "내가 그를 살릴 수도 있었는데..." 그녀는 소리쳤다. "톰은 누군가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했던 거야. 그런데 난 그의 절망적인 상황을 이해라혀고도 하지 않았어!" 케트가 단호하게 말했다. "페이지, 넌 그 사람을 돕거나 위로할 수 없었어. 그 사람 문제는 너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고, 또 네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어. 톰은 아내와 딸 없이는 살아갈 의욕이 없었던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도울 수 있었겠니?" 페이지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이 빌어먹을 병원!" 혼자 중얼거렸다. "그렇게 매일 병원에만 매달려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았더라면 톰은 아내도 떠나지 않았을 거야." "어쨌든 떠났잖아." 케트가 조용히 말했다. "이젠 끝난 거야. 자꾸 되씹어봐야 아무 소용 없어." 페이지는 중국식 장례식은 처음이었다. 서양의 장례식보다 훨씬 더 거창한 의식이었다. 장례식은 아침 일찍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 그린 가에 있는 장의사에서 시작되었다. 밖에는 벌써 많은 조문객이 모여 있었다. 톰 창의 대형 사진을 든 사람을 앞세우고 수십 명의 조곡대가 뒤따랐다. 그 다음에는 수백 명이나 되는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장례 행렬은 조곡대의 연주가 시가지에 울려퍼지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구차는 행렬 뒤에서 천천히 따라갔다. 대부분의 조문객들은 걸었지만 일부 노약자들은 정처 없이 헤매듯이 움직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조문객 한 사람에게 물었다. 그는 목례를 하고 말했다. "우리의 장례 전통은 고인이 생전에 즐겨 찾던 장소를 하나하나 지나가는 것입니다. 즐겨 찾던 식당이라든가, 단골 가게, 산책하던 공원..." "아, 그렇군요." 행렬은 엠바카데로 시립병원 앞에 멈추었다. 조문객은 페이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기가 바로 톰 창이 일하던 병원입니다. 긍지를 가지고 그가 의사로서의 꿈을 키우던 곳이지요." '말도 안돼!' 페이지는 생각했다. '이곳에서 톰은 모든 것을 잃었어!' 어느 날 아침, 마켓 가를 걸어가던 페이지는 알프레드 터너의 뒷모습을 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아직도 알프레드는 그녀의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횡단보도의 신호가 막 바뀌려 할 때 건너가고 있었다. 페이지가 서둘러 횡단보도에 다다랐을 때, 신호는 바뀌고 말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요란한 자동차 경적과 운전사들의 욕설을 무시하고 그대로 뛰어갔다.


길을 건너 페이지는 빠른 걸음으로 터너에게 다가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알프레드..." 그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시지요?"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4 년차 레지던트가 되자 페이지와 케트는 정기적으로 자신들 책임하에 수술을 집도했다. 케트는 신경외과에서 수술을 맡았다. 인간 두뇌 속의 복잡한 컴퓨터와 같은 수천 억 개의 뇌세표들의 기적과 같은 기능을 접할 때마다 새삼 생명의 신비를 느꼈고, 자신의 일에 뿌듯한 긍지를 갖게 되었다. 케트는 같이 일하는 대부분의 의사들에 대해서도 신뢰와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헌신적이고 실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몇몇 의사는 케트를 괴롭혔다. 대개가 데이트하자고 집적거리는 측들이었다. 케트가 데이트를 거절하면 할수록 더 집요하게 치근거렸다. 한번은 어떤 의사가 수술실에 들어오는 케트를 보고 중얼거렸다. "'정조대' 아가씨가 들어오는군..." 키블러 박사의 뇌수술에 보조의로 들어갔을 때도 진한 농담이 그치지 않았다. 키블러 박사는 뇌 표피를 약간 가르고 좌측 뇌 한복판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가는 고무 호스를 댔다. 그가 움직이는 동안 케트는 작은 핀셋으로 절개된 부위를 잡고 있었다. 케트는 눈앞에 보이는 흰부분에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키블러 박사는 계속 손을 놀리면서 그녀를 흘깃 쳐다보고 말했다. "바에 뛰어들어온 알코올 중독자 얘기 들어봤어? 그 친구가 숨이 턱에 닿아 바텐더에게 '빨리 한잔 주쇼!' 하니까 바텐더가 '당신 벌써 많이 취했는데 어떻게 또 술을 달라는 거요?' 하더래." 이제 매스는 더 깊이 들어갔다. "빨리 한잔 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어버릴 거야." 뇌 속의 척수액이 호스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 바텐더가 말했대. '내가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당신이 그걸 모두 해결해 주면 아예 병째로 주지.'" 말을 계속하면서 키블러 박사는 뇌 속으로 15cc 의 공기를 주입하고 뇌 양쪽과 측면에서 X-선 촬영을 했다. "'저 구석에 앉은 미식축구 선수 보이지? 아무래도 저 친구를 내보낼 수가 없어. 우선 저 친구를 좀 쫓아내야겠어. 그리고 내 사무실에 가면 애완용 악어가 있는데, 이빨 하나가 많이 상했어. 그런데 그놈이 어떻게 사나운지 손도 댈 수가 없거든. 그걸 빼야 돼. 마지막으로 저기 보이는 여자가 시 보건국 여의사야.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바 문을 닫게 하려고 노리고 있어. 저 여자를 데리고 자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야. 그땐 병째로 줄게.'" 간호사가 흡입기를 작동시켜 환부에 고인 피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 알코올 중독자는 단숨에 축구선수를 내쫓아버리고 악어가 있다는 사무실로 뛰어들어갔대. 15 분 후에 옷이 다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돼 밖으로 나와 한다는 말이 '이빨이 상했다는 여의사는 어디 있어?' 하더래." 키블러는 낄낄거리고 웃었다. "이해가 안돼? 그 친구는 여의사 대신 악어를 덮친 거야. 재미가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


케트는 키블러의 뺨이라도 때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없이 서 있었다. 수술이 끝나고 휴게실로 돌아온 케트는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절대로 저런 인간들 때문에 기가 죽으면 안돼!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견뎌낼 거야.' *** 때때로 페이지는 병원 의사들과 데이트를 했다. 그러나 누구와도 이성으로서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알프레드 터너가 남긴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하루의 거의 전부를 병원에서 보냈다. 고된 일과였지만, 외과 수술을 책임지면서 페이지는 일에 대한 만족감을 얻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외과 과장 조지 엥글런드 박사가 페이지를 불렀다. "닥터 테일러, 금년부터 전문 분야로 들어가게 됐지요? 심장수술 전공이고?" 페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소. 바커 박사의 명성을 들어본 적이 있소?" 페이지는 깜짝 놀랐다. "로렌스 바커 박사 말입니까?" "그래요." "물론이지요." 의학계에서 로렌스 바커 박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심장수술의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바커 박사가 지난 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돌아왔소. 그곳 왕의 심장수술을 집도하고 온 거지. 원래 나하고 친한 친구라서 우리 병원에서 일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바커 박사가 1 주일에 사흘을 우리 병원에서 무보수로 봉사해 주겠다고 약속했소." "정말 믿어지지 않네요!" 페이지가 소리쳤다. "난 당신을 바커 박사 팀으로 보낼 생각이요." 페이지는 잠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저... 전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마 당신에겐 더할 수 없는 기회가 될 거요. 바커 박사 같은 사람 밑에서는 배울 게 많을 거요." "물론이지요. 정말 고맙습니다. 전 지금 꿈을 꾸는 기분이에요." "내일 아침 6 시에 바커 박사의 첫 회진에 참여하도록 해요."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페이지는 기쁜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로렌스 바커 박사 같은 명의와 일하게 된 것은 불가능해 보였던 꿈이 실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로렌스 바커 박사 같은 명의라니... 멍청하긴... 그와 같은 명의는 한 명밖에 없잖아!' 페이지는 로렌스 바커 박사의 사진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품위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 호리호리한 체격, 희끗희끗한 머리칼, 예술가같이 섬세한 손을 가진 따뜻한 성격의 신사다운 풍모가 연상되었다. '이제 로렌스 바커 박사와 같이 일하게 된 거야.' 페이지는 생각했다. '수술실에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가 되어야지. 그 사람 결혼했을까?' 그날 밤, 페이지는 로렌스 바커 박사와 정사를 가지는 꿈을 꾸었다. 두


사람은 옷을 벗은 채 수술을 하고 있었다. 수술 도중 바커 박사가 말했다. "지금 당신을 안아주고 싶어." 간호사가 다가와서 환자를 수술대에서 들어냈다. 바커 박사는 페이지를 수술대에 안아올리고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뜨거운 정사에 빠져들었다. 페이지는 깨어나는 순간 침대에서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6 시, 페이지는 선임 레지던트 조엘 필립스 외에 여러 레지던트들과 함께 초조한 마음으로 바커 박사를 기다렸다. 잠시 후, 작은 키에 못마땅한 표정의 한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강한 맞바람이 불 때처럼 몸을 앞으로 숙이고 빠르게 걸어왔다. 그는 기다리고 있는 레지던트들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웅성거리고들 있는 거야? 빨리 따라와!" 페이지는 너무 뜻밖이라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종종걸음으로 일행을 쫓아갔다. 복도를 걸으며 바커 박사는 내뱉듯 말했다. "당신들은 매일 30 명 내지 35 명의 환자를 돌봐야 돼. 그러니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자세하게 메모해 두란 말이야. 알아들었어?" "알겠습니다." 모두들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행은 첫 병동에 다다랐다. 바커 박사는 40 대 남자 환자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지금까지 내뱉듯 말하며 잔뜩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바커 박사의 태도가 순간 일변했다. 그는 환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난 닥터 바커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아침에는 기분이 좀 어떻습니까?" "가슴에 통증이 있어요." 바커 박사는 침대 밑에 있던 차트를 훑어보고 선임 레지던트 필립스를 돌아보았다. "X-선 사진에 이상 있었나?" "아무 변화가 없는데요. 치료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럼 CBC(혈구검사)를 한번 더 하지." 필립스는 차트에 메모했다. 바커 박사는 환자의 팔을 잡아주며 다시 미소지었다. "상태가 아주 좋아요. 1 주일 정도만 있으면 퇴원해도 될 것 같아요." 그는 레지던트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서둘러! 아직 봐야 될 환자가 많다구!" '이런 세상에!' 페이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바로 지킬 박사와 하이드 아냐!' 다음 환자는 비만형 여자였다. 최근에 인공심장 박동기를 다는 수술을 받았다. 바커 박사는 그녀의 차트를 훑어보았다. "셀비 부인, 안녕하세요." 그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난 닥터 바커입니다." "도대체 날 여기에 얼마나 더 붙잡아둘 거예요?" "부인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계속 붙잡아두고 싶은 심정이군요. 하지만 난 기혼자니 어쩔 수 없겠는데요." 셀비 부인은 농담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님 부인이 부럽네요." 바커 박사는 그녀의 차트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내 생각으론 이제 퇴원해도 되겠어요." "정말이세요?"


"오늘 오후에 다시 와서 퇴원하시도록 조치하지요." 바커 박사는 다시 레지던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서둘러!" 레지던트들은 바커 박사를 따라 다음 병실로 들어갔다. 독실 같은 방에는 과테말라에서 온 소년이 누워 있었고, 불안한 표정의 부모가 옆에 서 있었다. "안녕." 바커 박사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환자의 차트를 훑어보면서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기분이 어떠니?" "아주 좋아요." 소년이 대답했다. 바커 박사가 필립스에게 물었다. "전해질에 이상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참 좋은 소식이군." 그는 소년의 팔을 다독거렸다. "후안, 조금만 더 참으면 돼." 소년의 어머니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애가 완전히 회복될까요." 바커 박사는 미소를 띠고 말했다. "우리는 후안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바커 박사가 복도로 나가자 레지던트들이 뒤를 따랐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지금 이 환자에겐 심근이상 증세가 보여. 가끔 심한 발열, 두통에다 몸 일부엔 부종까지 생겼어. 여기 계신 천재 중에 이런 증세의 원인을 아는 분은 없나?" 모두 잠잠했다. 한참만에 페이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는 선천성 원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전적이 아닐까요?" 바커 박사는 페이지를 쳐다보며 더 말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기를 얻은 페이지는 말을 계속했다. "그런 경우 한 세대... 잠깐..." 의과대학에서 배운 것을 기억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 세대를 건너 그 다음 세대로 유전되지요. 모계 유전인자를 통해서요." 말을 마친 페이지는 자랑스러운 기분에 얼굴이 상기되었다. 바커 박사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내뱉듯 말했다.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 저 아이는 소위 샤가스 병을 앓고 있는 거야. 남미에서는 흔한 병이라구." 그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페이지를 쳐다보았다. "원, 세상에! 누가 의사 면허증을 줬어?" 페이지는 얼굴이 새빨개져 입을 열 수 없었다. 페이지에게 나머지 회진은 몽롱하게 지나갔다. 24 명의 환자를 회진하는 동안 바커 박사가 계속 자신을 망신 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커 박사는 환자마다 그 병에 대한 것을 페이지에게 먼저 질문하면서 계속 그녀의 지식과 능력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페이지가 제대로 대답해도 칭찬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틀린 대답이 나오면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한번은 페이지가 잘못 대답했을 때, "그래서는 우리 집 개의 수술도 맡길 수가 없어." 하고 내뱉었다. 드디어 회진이 끝나자 선임 레지던트 필립스가 말했다. "오후 회진은 14 시에 시작됩니다. 노트를 준비하고 환자마다 상세하게 메모하세요. 절대로 빠뜨리는 게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페이지를 쳐다보고는 뭔가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 바커 박사 쪽으로 걸어갔다. 페이지는 생각했다. '저렇게 매몰스러운 인간은 처음 봐. 어떻게 같이 일하지?' 다음날 저녁은 페이지의 당직근무였다. 계속 쏟아져 들어오는 응급환자들... 환자 한 사람의 치료가 끝나기도 전에 더 급한 환자가 나타나고,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응급상황은 그칠 줄 몰랐다. 새벽 1 시가 되어서야 페이지는 간신히 당직실에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너무 지쳐 곯아떨어졌기 때문에 응급실에 도착하는 앰블런스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도 깨지 않았다. 앰블런스 문이 열리고 의식을 잃은 환자가 아동침대로 옮겨졌다. 의료보조원 두 사람이 침대를 제 1 응급실로 밀고 들어왔다. 이미 앰블런스로부터 무선 연락을 받은 간호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뛰어가 옮겨지는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고 다른 사람들은 응급실 안에서 환자를 맞을 준비에 부산했다. 응급실에 들어온 환자는 즉시 검사대로 옮겨졌다. 환자는 젊은 남자였다. 그러나 얼굴과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도저히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간호사는 즉시 가위로 환자의 옷을 잘라내고 대충 피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전신에 성한 곳이 없는 것 같아..." "출혈이 엄청난데 지혈부터..." "맥박이 없는데." "당직의사가 누구지?" "닥터 테일러." "빨리 연락해! 즉시 조치하면 살려낼 수도 있겠어." 페이지는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여보세..." "닥터 테일러, 제 1 응급실에 응급환자가 들어왔어요. 상황이 심각해요. 벌써 맥박이 끊어졌어요." 페이지는 벌떡 일어났다. "알았어. 곧 갈게." 시계는 1 시 30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페이지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어떻게 된 거지?" 페이지가 물었다. "모터싸이클 사고예요. 대형 트럭이 모터싸이클을 덮쳤어요. 환자는 헬멧도 안 쓰고 있었어요." 페이지는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다가갔다. 환자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음 순간 페이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맥 주사선을 세 군대 열어!" 황급히 지시했다. "즉시 산소호흡기를 연결하고 작동시켜! 수혈 준비를 하고 혈액은행에 연락해서 혈액 1 리터를 보내라구 해! 인사과에 전화하면 혈액형을 알 수 있어." 간호사들은 놀란 표정으로 페이지를 쳐다보았다. "아는 사람이에요?" "그래..." 페이지는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은 지미 포드야."


지미의 머리를 만져보았다. "머리의 상처가 아주 심해. 지금 당장 X-선과 단층촬영을 해봐야겠어. 이 환자는 특별 케이스야! 어떻게든 살려내야 해." "알았어요, 닥터 테일러." 그 후 두 시간 동안 페이지는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다. 지미는 중태에 빠져 있었다. 두개골에 금이 가고, 뇌에 타박상을 입고, 팔 위쪽 뼈가 부러지고, 전신이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맥박이 돌아오고 정상적으로 호흡할 수 있을 때까지는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새벽 3 시 30 분, 페이지는 지금으로서는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다 해본 것 같았다. 일단 고비는 넘긴 듯했다. 지미의 맥박이 점점 빨라지고, 호흡도 한결 나아졌다. 의식을 잃은 지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우린 애를 많이 낳을 거예요. 첫딸은 페이지라고 부르고 싶은데, 괜찮겠죠?' "변화가 있으면 곧 알려줘요." 페이지가 간호사에게 말했다. "닥터 테일러, 걱정 마세요." 한 간호사가 말했다. "우리가 돌볼게요." 페이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당직실로 돌아왔다. 몸은 천근같이 무거웠지만 지미 걱정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드는 것도 힘이 들었다. "...여보세요." "닥터 테일러, 3 층 병동으로 급히 와주셔야겠어요. 바커 박사님의 환자가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것 같아요." "알았어." 페이지가 말했다. '하필 로렌스 바커의 환자야...' 페이지는 한숨을 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세면대에서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3 층으로 달려갔다. 간호사 한 사람이 입원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환자는 헌즈 부인이에요. 또 심장마비가 온 것 같아요." 페이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로 들어갔다. 헌즈 부인은 50 대였다. 얼굴엔 아직도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었지만 몸은 비만증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고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구 죽겠다..." 페이지를 쳐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인가 봐... 숨도 못 쉬겠어..." "곧 괜찬아질 거예요." 페이지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간호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심전도검사 했어?" "손도 못 대게 해요. 죽을 것 같아서 꼼짝도 못하겠대요." "심전도검사를 해봐야 돼요." 페이지가 헌즈 부인에게 말했다. "안돼! 난 죽고 싶지 않아! 제발 날 건드리지 마..." 페이지는 할수없이 간호사에게 말했다. "바커 박사님께 즉시 연락해. 지금 좀 오셔야겠다고 말씀드려." 간호사는 서둘러 나갔다. 페이지는 청진기를 헌즈 부인의 가슴에 대어보았다. 심장박동은 정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곧 바커 박사님이 오실 거예요." 페이지가 말했다. "너무 불안해 하지 말고 진정하세요." "이렇게 괴로운 건 처음이에요. 가슴이 이렇게 답답할 수가... 제발 날 혼자 두고 가지 말아요." "걱정 마세요. 바커 박사님이 오실 때까지 옆에 있을게요." 페이지가


대답했다. 로렌스 바커 박사를 기다리면서 페이지는 중환자실에 전화했다. 지미 포드는 아직 의식이 회복되지 않았고 상태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30 분쯤 지나 바커 박사가 나타났다. 급히 옷을 입은 흔적이 역력했다. "어떻게 된 거야?" 페이지가 대답했다. "심장마비가 온 것 같아요." 바커 박사는 침대에 다가서면서 물었다. "심전도검사는?" "환자가 몸에 손도 못 대게 해서 할 수 없었습니다." "맥박은?" "정상입니다. 열도 없고요." 바커 박사는 헌즈 부인의 등에 청진기를 갖다대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세요." 허즈 부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한번 더..."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쉰 헌즈 부인은 큰 소리로 트림까지 했다. "이런... 죄송해요."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크림 한 번 하니까 가슴이 시원해지네요." 바커 박사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헌즈 부인, 저녁식사로 뭘 드셨습니까?" "햄버거를 먹었어요." "햄버거? 그뿐이에요? 햄버거 하나만?" "두 개 먹었어요." "그리고 뭘 더 드셨죠?" "같이 나오는 거 있잖아요. 볶은 양파에 감자 튀긴 것..." "음료수는요?" "초콜릿 밀크 세이크를 마셨어요." 바커 박사는 환자를 내려다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부인의 심장은 걱정할 게 없습니다. 부인의 식욕이 걱정이지요." 그는 페이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헌즈 부인은 과식 때문에 소화불량이 된 거야. 닥터 테일러, 밖에 나가서 얘기 좀 하자구." 두 사람이 복도에 나오자 바커 박사의 표정이 험악하게 바뀌었다. "대체 의과대학에서 뭘 배운 거야? 그래 심장마비와 소화불량도 가려내지 못한단 말이야?" "제 생각으로는..." "생각은 무슨 생각? 생각하는 사람이 소화불량을 심장마비로 판단해? 다시 한번 이런 일로 한밤중에 나를 깨우면 가만두지 않겠어. 알아들었어?" 페이지는 굳은 표정으로 그냥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의사 선생, 헌즈 부인에게 소화제나 좀 드리시지요?" 바커 박사가 비꼬았다. "아마 즉시 효과가 있을 겁니다. 자, 그럼 6 시 회진 때 보자구." 페이지는 멀어져 가는 바커 박사의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당직실로 돌아온 페이지는 간이침대에 누웠다. '로렌스 바커를 죽여버리고 싶어! 그것도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중병에 걸려 꼼짝 못하고 생명연장장치에 의존하는 꼴이 되겠지... 그땐 나보고 죽게 해달라고 애걸할걸... 그렇게 쉽게 죽게 해주지 않을 거야. 계속 고통받는


꼴을 봐야겠어. 그러다가 상태가 좀 좋아지면... 그때 죽여줄 거야!' 제 15 장 페이지는 '짐승'과 함께 아침 회진을 돌았다. 마음 속으로 로렌스 바커를 '짐승'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적인 면에서 바커 박사를 혐오함에도 불구하고, 의사로서의 그의 능력과 기술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세 번이나 바커 박사의 심장수술을 보조하면서, 정교하고 막힘 없는 손놀림으로 정확하게 심장부위를 절개하여 기증된 심장을 순식간에 이식하고, 재빨리 봉합하는 것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런 대수술을 5 시간 내에 끝내는 놀라운 솜씨였다. '얼마 안 있어 이 환자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될 거야. 이러니 바커 같은 의사들은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 오만해질 수밖에 없지. 죽어가는 사람을 멀쩡하게 살려낼 수 있으니...' 바커 박사 팀의 일원이 되고부터 페이지는 거의 매일 심장수술에 참여하게 되었다.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하는 심장은 병들면 아무 소용도 없는 근육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의학의 기적으로 폐물이 되었던 심장이 다시 박동하기 시작하면 죽어가던 몸에 다시 혈액을 공급해 살려내는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 심장 근처의 혈관이 막힌 것을 작은 풍선을 주입해서 뚫는 수술이 있었다. 페이지는 바커 박사의 보조의로 수술실에 들어갔다. 수술이 막 시작되려 할 때 바커가 페이지에게 말했다. "맡아서 해봐!" 페이지는 순간 바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 하셨지요?" "이건 아주 간단한 수술이야. 맡아서 하기에 좀 벅차다고 생각하나?" 바커는 예의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벅차지 않습니다." 페이지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럼, 빨리 해보란 말이야!" 바커는 말투를 바꾸지 않았다. 그는 페이지가 가는 호스를 헐관에 주입하고 심장까지 조심스럽게 밀어올리는 것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페이지의 손은 조금도 흔들이지 않고 침착하게 움직였다. 바커는 꼼짝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어떻게 생각하든 이젠 상관하지 않을 거야! 내가 잘하든 못하든 소리지를 게 뻔한데 뭐.' 곧이어 호스에 X-선 투시를 막는 액체를 흘려넣었다. TV 모니터에 액체가 혈관을 통해 심장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형광투사용 모니터에 막힌 부위의 위치와 형태가 나타났다. 비디오 카메라가 모니터의 영상을 자동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선임 레지던트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정말 훌륭한 솜씨요!" "고마워요." 페이지는 바커에게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꾸물거려?" 바커가 내뱉었다. 그는 다른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페이지는 바커 박사가 개인환자들 때문에 엠바카데로에 출근하지 않는 날이 기다려졌다. 케트와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다. "그 사람을 하루 안 보는 건 1 주일 동안 시골로 휴가 가는 것과 같아." "그런 사람 밑에서 어떻게 일하니?"


"의사로서는 두말할 필요 없이 탁월한 능력을 가졌어.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형편없어. 정말 이름 그대로 간다더니... 버커(Baker:'bark'는 '짖다, 고함치다'의 뜻) 박사는 그렇게 소리 질러대다가는 언젠가 뇌출혈로 쓰러지거나 심장마비를 일으킬 거야." "형편없는 인간들 때문에 고생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 주변에도 하나둘이 아니야." 케트가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자기들을 조물주가 여성에게 보내준 특별한 선물인 양 착각하고 있어. 정말 남자 없는 세상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페이지는 케트를 다시 쳐다보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미 포드의 병실로 찾아갔다. 지미의 병세는 변화가 없었다. 아직 의식도 돌아오지 않는 상태라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케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빌어먹을... 꼭 착한 사람만 이렇게 당한다니까... 너무 불공평하잖아?" "글쎄 말이야..." "살아날 수 있을까?" 페이지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다 했어. 이젠 하느님 손에 달린 거야." "정말 웃긴다. 우린 환자의 생명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잖아?" 다음날 오후, 페이지의 책임하에 오후 회진을 막 시작하려는데 선임 레지던트인 카플란이 다가왔다. "닥터 테일러, 오늘은 재수 좋은 날인 모양이오." 카플란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회진에 신참 의과대학생을 데리고 다니게 됐소." "그래요?" "그래요. IN 이오." "IN 이라뇨?" "'천치 조카'의 약자 아니오. 월러스 박사의 처가 쪽 조카 중에 의과대학생이 있는데 벌써 의과대학 두 군데서 낙제하고 쫓겨났답니다. 그 친구 돌봐주느라고 모두 고생깨나 했지... 오늘은 닥터 테일러 차례요." 페이지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나왔다. "아니, 안 그래도 바빠서 정신 못 차리는 판에... 할 일도 태산 같은데..."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에요. 그 친구 잘 돌봐주면 월러스 박사가 고마워할 거요." 말을 마치고 카플란은 돌아섰다. 페이지는 한숨을 쉬고 나서 회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레지던트들에게 다가갔다. '그 IN 은 어디 있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회진 시작 시간이 벌써 3 분이나 지났다. '1 분만 더 기다려줄 거야! 그래도 안 나타나면 할수없지.' 그때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복도를 뛰어오고 있었다. IN 이 틀림없었다. 그는 헐떡거리며 페이지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월러스 박사가 닥터 테일러를..." "어떻게 회진시간에 늦을 수 있어요?" 페이지가 쏘아붙였다. "정말 미안합니다. 사실은 오다가..." "변명은 필요 없어요. 이름이 뭐죠?" "제이슨, 제이슨 커티스입니다." 그는 양복 차림이었다. "왜 가운을 안 입었죠?"


"가운이라뇨?" "회진할 때 가운을 입어야 된다는 것을 아직도 몰라요?" 그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글쎄... 난 잘..." 페이지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빨리 간호원장실로 가서 가운을 달라고 해요. 그리고 노트도 없잖아요?" "없어요." '이건 천치 조카보다 더 심하잖아!' "빨리 준비하고 제 1 병동으로 와요!" "이봐요, 난..." "빨리 하라는 대로 해요!" 페이지는 다른 레지던트들을 데리고 제 1 병동으로 향했다. 제이슨 커티스는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일행이 벌써 세 번째 환자를 진찰하고 있을 때 제이슨 커티스가 가운을 입고 나타났다. 페이지가 레지던트들에게 한참 설명하는 중이었다. "...심장 종양은 드물기는 하지만 심장 내부에도 생깁니다. 대부분의 경우 종양은 심장 자체보다는 관련 부위에 생기지요." 페이지는 제이슨 커티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심장 종양의 세 가지 유형이 뭔지 알아요?" 제이슨은 당황한 표정으로 페이지를 쳐다보았다.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알리가 없지!' "심장외막 종양, 심근 종양, 그리고 심장내막 종야이에요." 페이지가 설명했다. 제이슨은 페이지를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그것 정말 흥미로운데요..." '이런 세상에!' 페이지는 속으로 말했다. '월러스 박사의 조카건, 누구의 아들이건 상관없어. 이런 친구는 데리고 다닐 수 없어.' 일행은 다음 환자에게 걸음을 옮겼다. 그 환자의 진찰이 끝나자 페이지는 일행을 복도로 데리고 나와 환자가 듣지 못할 장소에서 말했다. "이 환자는 갑상선 기능에 이상이 생기고 열이 오르면서 맥박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수술 후에 생긴 증상이지요." 그리고는 제이슨 커티스에게 물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치료해야 되는지 말해봐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따뜻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페이지는 소리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당신은 이 환자의 어머니가 아니잖아요. 담당의사란 말이에요! 우선 정맥 주사를 계속 놓아 탈수증상을 막아야 해요. 그리고 갑상선 기능을 정상화시키는 약과 요드를 투여해야 돼요. 혹시 경기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진정제도 빠뜨리면 안되고요."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그렇게 회진이 계속되었다. 드디어 회진이 끝나자 페이지는 제이슨을 따로 불렀다. "좀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겠어요?" "괜찮구말구요." 제이슨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솔직한 말을 듣고 싶군요."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제이슨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의사로서의 자질이 안 보인다는 말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전혀 없어요. 병원 일을 즐겁게 느끼는 것 같지도 않던데요?" "사실 그렇지 못해요." "그럼 왜 시작했죠?" "솔직히 말하면 내 뜻이 아니고 억지로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럼 월러스 박사에게 솔직히 털어놔요. 이건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다른 직업으로 바꾸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말해 주니 정말 고맙습니다." 제이슨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얘기를 좀더 해보고 싶은데요. 오늘 저녁, 약속이 없으시면 식사라도 하면서..." "더 이상 말할 게 없어요." 페이지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월러스 박사가 삼촌 된다면서요? 그분께..." 바로 그 순간 월러스 박사가 나타났다. "아, 제이슨!" 그가 말했다. "한참 찾았다." 그는 페이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새삼스럽게 내가 서로를 소개할 필요는 없겠지?" "벌써 인사했어요." 페이지는 얼굴을 찌푸린 채 말했다. "잘됐군. 제이슨은 우리 병원의 새로 짓는 병동 설계를 맡았소. 아주 유능한 건축 설계사지..." 페이지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 건축 설계시라구요?" "그렇소. 그런 얘기를 안했소?" 페이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회진할 때 가운을 입어야 된다는 것을 아직도 몰라요?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내 뜻이 아니고 억지로 이렇게 된 겁니다.' '억지 부린 건 나야!' 페이지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은 완벽하게 바보짓을 한 것이다. 제이슨에게 물었다. "왜 의사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페이지를 쳐다보았다. "글쎄...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잖아요?" "무슨 기회를 안 줬다는 거지?" 월러스 박사가 끼어들었다.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페이지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저녁식사는 어떻게 할 겁니까?" 제이슨이 물었다. "난 저녁식사하러 나갈 시간 없어요." 페이지는 그 자리를 떠났다. 제이슨은 페이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정말 대단한 여자야..." "맞아, 아주 유능한 의사지. 자, 그럼 내 사무실로 가서 새 병동 설계 얘기를 해볼까?" "그러죠." 제이슨이 대답했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 페이지의 생각을 떨져버릴 수 없었다. *** 어느덧 7 월이 되었다. 미국 내 어느 병원에서나 7 월이면 전문의가 되려는 레지던트를 맞아들였고, 엠바카데로 시립병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참 레지던트들이 들어올 때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여간호사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신참 레지던트 중에서 애인이나 남편감이


생기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그들의 얼굴만 보고 '우선권'을 선언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다투기도 했다. 금년 신참 레지던트들이 소개되었을 때는 모든 여간호사의 눈길이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닥터 케네스 말로리였다. 케네스 말로리가 워싱턴의 으리으리한 개인병원에서 샌프란시스코의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으로 옮긴 정확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벌써 5 년차 레지던트였으며, 일반외과 전문의를 지망하고 있었다. 그가 워싱턴에서 국회의원 부인과 스캔들을 일으켜 급히 샌프란시스코로 떠나왔다는 말도 있었고, 여간호사 한 사람이 그에게 실연당해서 자살했기 때문에 할수없이 그만두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어찌 됐뜬 케네스 말로리는 모든 간호사들이 처음 보는 미남이었다. 큰 키에 운동선수 같은 균형잡힌 체격, 곱슬거리는 금발머리, 그리고 유명 배우보다 더 매력적인 얼굴은 당장 은막에 데뷔시켜도 단연 돋보일 정도였다. 말로리는 새로운 환경에 빠른 속도로 적응했다. 불과 며칠 니나지 않아 엠바카데로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사람처럼 익숙해졌다. 성격도 아주 사교적이어서 처음부터 수많은 간호사들이 그의 관심을 끌려고 경쟁을 벌였다. 거의 매일 밤, 다른 레지던트들은 말로리가 새로운 여간호사와 비어 있는 휴게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정력과 여자를 매료시키는 힘은 병원 내에서 소문이 자자해졌다. 페이지는 케트, 하니와 함께 말로리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많은 간호사들이 말로리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거지? 좀 건드려 달라고 애걸들 하고 있으니?" 케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친구의 일회용 애인이라도 되려고 야단들이야..." "하지만 그 사람은 정말 매력적이잖아?" 하니가 말했다. 케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는 조금도 매력없어." 어느 날 아침, 레지던트 몇 사람이 의사 전용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말로리가 들어왔다. "지금 막 자네 얘기를 하던 중이야." 한 사람이 말했다. "모두 자네가 녹초가 됐을 거라고 하던데." 말로리는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힘들 것도 없던데 뭐." 지난밤 그는 간호사 둘과 차례로 정사를 갖고 당직근무까지도 별 차질 없이 해냈다. 그룬디라는 레지던트가 입을 열었다. "케네스, 자네가 나타난 뒤로 우리는 갑자기 내시가 된 기분이야. 이 병원에서 일하는 여자는 하나도 안 남기고 다 건드릴 거야?" 말로리는 웃으며 대답했다. "시간이 있으면 그렇게 되겠지." 그룬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자네가 건드려도 꼼짝하지 않을 여자가 있어. 내기해도 좋아." "정말? 그게 누군데?" "선임 레지던트인데, 이름은 케트 헌터야." 말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흑인 아가씨? 나도 본 적 있어. 아주 매력적이던데... 왜 그 여자가 꼼짝 않을 거라고 확신하지? 뭔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그녀가 이 병원에 온 지 벌써 몇 년 됐다더라? 그 동안 수많은 사람이 어떻게 해보려고 별 수단을 다 써봤지만 데이트 한번 한 사람이 없어.


남자에 대해서 아예 흥미가 없나 봐." "아직 임자를 못 만나서 그렇겠지." 말로리가 말을 받았다. 그룬디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리 자네라도 그녀는 넘어가지 않을걸. 자네도 남자잖아?" 그룬디의 말은 말로리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럴 리 없어. 그건 자네들일 경우지. 내기해도 좋아." 말로리가 단언했다. 다른 레지던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자네가 케트 헌터를 데리고 잘 수 있을지 내기하자는 말이야?" 말로리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내기할 사람이 있으면 받아주지." "좋아." 레지던트들이 말로리를 둘러쌌다. "난 자네가 그녀를 건드리지 못한다는 데 5 백 달러 걸겠어." "좋아, 받아들이지." 또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나도 걸자구. 난 6 백 달러 걸지." 결국 레지던트들은 말로리가 케트 헌터를 데리고 잘 수 없다는 데 모두 5 천 달러를 걸었다. "시간은 얼마나 줄 거야?" 말로리가 물었다. 그룬디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앞으로 30 일 이내로 하면 어떨까? 그만하면 넉넉하잖아?" "그 정도면 충분해. 뭐 그렇게 오래 걸릴 것도 없겠지만..." 그룬디가 다시 말했다. "자네가 그녀를 데리고 잤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돼. 그녀 스스로가 자네와 잤다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는 말이야." "좋아. 문제 없어." 말로리는 레지던트들을 둘러보고 싱글거리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리석기는... 다들 돈을 버리지 못해 안달이군..." 15 분 후, 그룬디는 구내식당에서 페이지, 하니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케트를 찾아갔다. 그는 세 사람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숙녀 여러분... 아니, 세 분 닥터와 잠시 합석해도 괜찮겠습니까?" 페이지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러세요." 자리에 앉은 그룬디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케트에게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나 파렴치한 짓이라서 닥터 헌터에게 미리 알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서..." 케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룬디의 말을 끊었다. "대체 무슨 소리예요? 뭘 알려준다는 거예요?" 그룬디는 한숨을 쉬었다. "새로 온 레지던트 중에 케네스 말로리라고 알지요? 워싱턴에서 온 사람 말이에요." "알아요. 그 사람이 어쨌다는 거예요?" 그룬디가 말을 이었다. "그 친구가... 이거 정말 낯뜨거워서... 그 친구가 당신을 30 일 이내에 데리고 잘 수 있다고 다른 레지던트들과 5 천 달러 내기를 걸었답니다." 케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네? 내기를 걸었다고요?" 그룬디는 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화내는 게 당연하죠. 나도 그 말을 듣고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미리 알려주는 겁니다. 그 친구가 데이트하자고 졸라댈 텐데 왜 그러는지 알고 있는게 좋을 것 같아서..." "고마워요." 케트가 말했다. "일부러 알려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야 당연히 해야 될 일이지요." 세 사람은 그룬디가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식당 밖 복도에는 다른 레지던트들이 그룬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입을 모아 물었다. 그룬디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완벽하게 됐어. 보통 화가 난 게 아니더라구. 그 자식 혼 좀 나게 될 거야." 하니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케트는 아직도 굳은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 인간은 아예 거세해 버려야 돼! 날 데리고 잔다구? 낸 옷깃에 손도 못 대게 할 거야. 내가 미치지 않고야 그런 놈과 데이트하겠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페이지가 말했다. "케트, 좀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과 데이트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아주 흥미진진할 거야." 케트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뭐라구?" 페이지의 눈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안될 것도 없잖아? 그 사람이 내기 때문에 접근해 오면 모른 체하고 내버려두라구. 하지만 우리도 미리 각본을 짜두었다가 골탕을 먹이는 거야." 케트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떻게?" "내기 기한이 30 일 맞지? 그 사람이 데이트를 신청하면 좋아서 어쩔 줄 무르는 것처럼 행동해. 같이 있을 때는 홀딱 빠진 듯이 행동하고, 함께 자는 것은 문제도 안된다고 느끼도록 하란 말이야. 그러면서 시간을 끌고 자지만 않으면 되잖아. 5 천 달러짜리 강습을 받도록 해주자구." 케트는 불현듯 의붓아버지가 생각났다. 말로리도 의붓아버지나 마찬가지로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가 틀림없었다. 그런 남자를 골탕먹이는 것은 자신이 어렸을 때 당했던 고통을 조금이라도 되돌려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 생각인데." 케트가 말했다. "정말 해보겠다는 말이야?" 하니가 물었다. "그래. 해보자구." 케트는 이 순간의 결단 때문에 자신이 살해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제 16 장 제이슨 커티스는 페이지 테일러를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월러스 박사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 제이슨 커티스입니다. 닥터 페이지 테일러의 집 전화번호가 필요한데... 좀 가르쳐 주겠어요?" "아, 커티스 씨... 물론이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 비서는 페이지의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아파트의 전화벨이 울리자 하니가 받았다. "닥터 태프트입니다." "전 제이슨 커티스인데요... 닥터 테일러 계십니까?" "지금 없는데요. 병원에서 당직근무를 하고 있어요."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이슨은 몹시 실망하는 말투였다. 하니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급한 일이라면 어떻게 연락을 해보..." "아니, 괜찮습니다."


"그럼, 커티스 씨가 전화했었다고 메모를 남기지요. 전화하라고 할까요?"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이슨은 자신의 전화번호를 말해 주었다. "틀림없이 전해 줄게요." "감사합니다." "제이슨 커티스라는 사람이 전화했었어." 페이지가 집에 돌아오자 하니가 말했다. "예의바르고, 아주 괜찮은 사람 같던데? 전화 좀 해달라고 했어. 이게 그 사람 전화번호야." 하니는 메모지를 내밀었다. "없애버려!" "전화 안 해줄 거야?" "안 해." "너 아직도 알프레드를 잊지 못하는 거지?" "천만에. 알프레드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페이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제이슨은 이틀을 기다리다가 다시 전화했다. 이번에는 페이지가 전화를 받았다. "닥터 테일러입니다." "안녕하세요?" 제이슨이 말했다. "전 닥터 커티스입니다." "닥터 누구시라구요?" "저를 기억 못하실지도 모르겠군요." 제이슨이 말했다. "왜 지난번 회진 때 가운 안 입었다고 야단맞은 사람 기억나십니까? 회진이 끝났을 때 함께 저녁식사 하자고 했었지요. 닥터 테일러는..." "난 시간이 없다고 했는데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커티스 씨,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무슨 일인데?" 하니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다음날 아침 6 시, 페이지가 레지던트 여러 명을 데리고 회진을 시작하려는데 제이슨 커티스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가운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 "아, 간신히 시간을 맞추었네요." 제이슨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가운을 얻어입느라 하마터면 늦을 뻔했어요. 그냥 나타났다가는 닥터 테일러에게 또 야단맞을 것 같아서..." 페이지는 어이가 없었다.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잠깐 저쪽으로 가죠." 제이슨을 비어 있는 의사 탈의실로 데리고 갔다. "대체 지금 뭘 하자는 거예요?" "사실은 지난번 회진 때 본 환자들이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서 왔어요." 제이슨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들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요. 잘 회복되고 있는지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제이슨의 넉살에 페이지는 얼른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건축가라면서 뭔가 창조하는 일을 해야 되는 거 아녜요?" 제이슨은 따뜻한 눈빛으로 페이지를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렇게 하는 중이에요." 그는 주머니에서 티켓을 여러 장 꺼냈다. "당신 취향을 모르기 때문에 오늘 저녁 자이언츠 팀의 야구 시합, 연극, 오페라, 그리고 음악회 표를 모조리 두 장씩 사왔어요. 환불받을 수 없는 표니까 한 가지라도 써야 되지 않겠어요? 골라보세요."


점점 더 기가 막혔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돈을 뿌리고 다니세요?" 페이지가 물었다. "사랑에 빠졌을 때만 그래요." 제이슨이 대답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 제이슨은 손짓으로 그녀의 말을 막고 다시 표를 내밀었다. "자, 골라보세요." 페이지는 그가 들고 있는 표를 모두 건네받았다. "정말 고마워요." 정중하게 인사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외래 환자들에게 주겠어요. 그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구경을 평생 한번도 못할 사람들이죠." 제이슨은 미소지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그 사람들이 즐겁게 구경하면 좋겠어요. 그럼 저녁식사나 같이 하는 게 어때요?" "생각 없어요." "어차피 저녁식사는 하실 것 아닙니까? 따로 시간을 뺐지 않을 테니 그렇게 하시죠." 페이지는 제이슨이 애써 마련한 여러 장의 표를 빼앗은 것에 조금 미안함을 느끼긴 했다. "함께 식사해도 즐거운 분위기가 되기 어려울 거예요. 난 어젯밤부터 계속 당직근무를 서느라..." "일찍 끝내도록 하죠. 약속할게요." 페이지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지요. 하지만..." "잘 생각했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럼 몇 시쯤 올까요?" "저녁 7 시에 끝나는데..." "그럼 7 시에 오겠습니다." 그는 크게 하품을 했다. "난 집에 가서 한숨 더 자야겠어요. 어떻게 매일 꼭두새벽부터 근무해야 되는 직업을 선책했지요? 이게 어디 아름다운 여자가 할 일이에요?" 돌아서는 제이슨의 뒷모습을 보면서 페이지의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날 저녁 7 시에 제이슨은 페이지를 데리러 병원으로 다시 갔다. 닥터 테일러를 찾으니 당직 간호사가 말했다. "아마 지금 당직자 휴게실에 있을 거예요." "고마워요." 제이슨은 휴게실을 찾아 복도를 따라갔다. 휴게실 문은 닫혀 있었다. 노크해 봤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번 노크하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페이지는 간이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제이슨은 다가가서 한참 동안 잠든 페이지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난 반드시 당신과 결혼할 거야!' 그는 말없이 한동안 그대로 서 있다가 발소리를 죽여 방을 나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 다음날 아침, 제이슨이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을 때 비서가 작은 꽃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꽃다발에 붙여진 카드를 꺼내보았다.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RIP. 제이슨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즉시 병원에 있는 페이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어젯밤에 데이트한 사람입니다." "어제는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페이지가 말했다. "그런 실수는 처음이에요. 뭐라고 사과해야 될지..." "천만에. 사과라니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요?" "RIP 라는 게 '영원히 잠들다(rest in peace)'의 약자는 아니겠지요?" 페이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좋을 대로 해석하세요." "좋을 대로 해석하면 오늘 저녁식사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걸로 생각해도 되겠어요?" 페이지는 잠시 망설였다. '또다시 남자와 깊은 관계가 되는 것은 싫어. 하니가 그랬었지... 너 아직도 알프레드를 잊지 못하는 거지?'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지금 오늘 일정을 챙겨보는 중이에요." '저녁식사 한번쯤은 괜찮을 거야.' 페이지는 마음을 정했다. "좋아요, 저녁때 만나죠." "고맙습니다." 저녁때 페이지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있는데 케트가 들어왔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오랜만에 그렇게 차려입으니 말이야. 데이트 상대가 누구야?" "의사 및 건축가야." 페이지가 대답했다. "뭐라구? 그런 직업도 있어?" 페이지는 제이슨을 만난 경위를 설명했다. "아주 괜찮은 사람 같은데? 앞으로 잘될 것 같아?" "그냥 저녁 한번 같이 하는 것뿐이야." 그날 저녁, 페이지는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제이슨과 함께 있는 것이 편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아직 서로를 잘 몰랐기 때문에 깊은 얘기은 할 수 없었지만 화제는 끝이 없었다. 즐겁게 얘기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자신에 대한 얘기 좀 해봐요." 제이슨이 말했다. "어디서 자랐어요?" "말해도 믿지 않을걸요." "믿을 테니까 말해 봐요." "좋아요. 콩고, 인도, 버마, 나이지리아, 그리고 케냐..." "저런, 그건 못 믿겠는데요." "그것 봐요. 안 믿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렇지만 사실이에요. 아버지가 WHO 에 근무하셨거든요." "WHO? 그건 또 뭡니까? 지금 무슨 수수께끼 게임을 하는 건 아니죠?" "WHO 는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라고 UN 산하 기구예요. 아버지는 의사로서 WHO 에서 일하셨지요. 전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제 3 세계의 빈곤한 나라들을 돌아다녔어요." "고생이 아주 심했겠군요." "좀 고생스러워도 흥미 있고 보람을 느낄 때도 많았어요. 가장 어려웠던 것은 친구를 사귈 만큼 한 군데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이었어요." '페이지, 난 아무도 없어도 외롭지 않아. 너만 있으면 돼... 내 아내 캐런 터너입니다.' 페이지는 애써 추억을 떨쳐버렸다. "난 그 덕분에 낯선 언어와 생소한 풍습을 여러 가지 알게 됐어요." "그것 참 재미있겠는데요. 그런 얘기 좀 해봐요." "글쎄... 어떤 게 재미있을까..." 페이지는 잠시 생각했다. "예를 들면 인도 사람들은 죽은 다음 다시 태어난다고 믿어요. 어떻게 다시 태어날지는 현세에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결정한다고 믿지요. 나쁜 짓을 많이 하면


내세에는 짐승으로 태어난다는 거예요. 그곳 어느 마을에 살 때 우리는 개 한 마리를 길렀는데, 난 전생에 어떤 사람이 무슨 짓을 하다가 저 개가 되었을까 궁금해 했었어요." "아마 엉뚱한 짓을 하다가 그렇게 됐겠지요." 제이슨이 말했다. 페이지는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게라오라는 게 있었어요." "게라오라니요?" "아주 별난 처벌이지요. 굉장히 무서워들 해요. 여러 사람이 죄지은 사람을 둘러싸는 거예요." "그래서?" "그뿐이에요." "그뿐이라니... 그게 무슨 처벌이 돼요?" "아무 말 없이 건드리지도 않고 그냥 둘러싸고만 있는 거예요.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은 꼼짝할 수 없지요. 물론 달아날 수도 없구요. 그런 상태로 몇 시간, 며칠이라도 죄를 자백하고 그 대가를 치르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계속되는 거예요. 둘러싼 사람들은 교대할 수 있지만 갇힌 사람은 꼼짝 못하기 때문에 대개는 쉽게 항복하게 돼요. 게라오에서 도망치려는 것을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몰매를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어요." 몸서리쳐지는 기억이었다. 보통 때는 온순하고 친절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미친 듯 소리지르며 달려들어 도망치는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이었다.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자!' 알프레드가 소리쳤었다. 그는 페이지의 손을 잡고 뒷골목으로 군중을 피해 달아났었다. "거참, 무시무시한데..." 제이슨이 말했다. "다음날 아버지가 우리를 그 마을에서 떠나게 했어요." "아버님을 만나뵐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훌륭한 의사셨어요. 뉴욕에 그냥 계셨다면 부와 명예를 함께 누리셨을 텐데, 그런 것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으셨어요. 불쌍한 사람들 돕는 일에만 열심이셨지요." '알프레드도 그랬었지...' 페이지는 생각했다. "지금 아버님은 어디 계세요?" "내가 의과대학에 가기 전 아프리카에서 부족전쟁 통에 돌아가셨어요." "그런 분이... 정말 안됐군요." "아버지는 불쌍한 사람들 돌보는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시고 항상 기쁜 마음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일하셨어요. 미개한 나라, 거기서도 문명과 가장 동떨어진 지방으로 가면 원주민들이 처음에는 잘 받아들이지 않아요. 대개가 미신적이기 때문에 자신들 전통과 다른 치료법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거죠. 인도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는 동네 무당이 마을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주팔자를 알려주면, 모두 그렇게 되는 것으로 믿고 살아요." 페이지는 그 추억에 미소지었다. "어릴 때 그 무당이 내 사주팔자를 말해 주는 게 아주 재미있었어요." "혹시 그 무당이 나중에 잘생긴 건축 설계사와 결혼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페이지는 제이슨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뇨." 갑자기 대화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이슨, 건축 설계사니까 이 얘기에 흥미를 느낄 거예요. 나는 어릴 때 주로 맨 땅바닥에


풀잎으로 벽과 지붕을 덮은 '투쿨'이라는 데서 살았어요. 초가지붕에는 쥐와 박쥐가 드나들었죠. 그때 나는 푸른 잔디와 흰 나무 담장에 둘러사인 예쁜 2 층집에 사는 게 꿈이었어요. 잔디밭 쪽으로 베란다가 있는 그런 집 말이에요." 페이지는 순간 말이 너무 많았다고 생각되었다. "미안해요. 너무 재미없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아서... 옛날 얘기를 하다 보니 그만..." "아니, 정말 재미있게 들었어요." 제이슨이 말했다. 페이지는 시계를 보았다.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이렇게 늦은 줄 몰랐어요." "나머지 얘기는 나중에 들려주세요." 제이슨이 말했다. '공연히 기대하도록 자꾸 만나서는 안돼...' 페이지는 생각했다. '너무 졸라서 한번 만나준 것뿐인데...' 순간 케트의 말이 떠올랐다. '넌 알프레드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어! 이젠 그만 잊어버려!' 그녀는 제이슨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좋아요." 다음날 아침 일찍 누군가가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소포 배달원이 큼직한 상자를 들고 있었다. "닥터 테일러에게 온 소포입니다." "내가 닥터 테일러예요." 배달원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정말 닥터 테일러 맞습니까?" "그래요." 페이지는 애써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닥터 테일러라구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여기 사인해 주시겠어요?" 소포는 상당히 무거웠다. 페이지는 무엇이 들었는지, 누가 보냈는지 궁금했다. 거실 테이블에 소포를 올려놓고 포장지를 풀었다. 베란다가 있는 흰색 2 층 주택의 모형이었다. 집 앞에는 잔디밭과 정원이 펼쳐져 있고, 그 주위에는 흰 나무담장이 둘러져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주택 모형이었다. '이걸 만들려면 밤을 꼬박 세웠을 텐데...' 모형에 카드가 한 장 끼어 있었다. 내 집() 우리 집() 괄호 안에 표시하세요. 페이지는 꼼짝 않고 모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꿈에 그리던 그런 집이었다. 그러나 그 꿈속의 남자가 보낸 게 아니었다. '내가 왜 자꾸 이러는 거지?' 페이지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제이슨은 잘생기고 능력있고 매력적이잖아... 그리고 아주 착한 사람이고...' 해답은 간단했다. 제이슨은 알프레드가 아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새 집 받았어요?" 제이슨이 물었다. "정말 아름다운 집이에요." 페이지가 말했다. "너무 고마워요." "그 모형과 똑같은 진짜 집을 지어주고 싶어요. 같이 보낸 카드에, 선택했어요?" "아뇨." "선택할 때까짖 기다리지요. 난 참을성이 많아요.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식사나 같이 합시다." "좋아요. 하지만 오늘은 하루 종일 수술이 있기 때문에 저녁때면 지쳐서


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좋다면..." "일찍 끝내면 되잖아요. 식사는 내 부모님 집에서 할 겁니다." 페이지는 잠시 주저했다. "부모님 댁이라구요?" "부모님께 닥터 테일러 얘기를 했더니 초대하라고 하시더군요." "좋아요." 대답을 하고 보니 갑자기 제이슨의 부모를 만난다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한 번밖에 데이트하지 않은 제이슨이 벌써 부모님을 소개하는 것은 너무 서두르는 느낌이었다. 전화를 끊고 페이지는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 제이슨의 부모님을 만나는 것은 무리야... 오늘 근무가 끝나면 너무 지쳐서 눈붙일 생각밖에 없을 텐데...' 다시 전화해서 저녁 약속을 취소할까 생각했다. '그건 너무 큰 실례잖아... 빨리 끝내고 오면 되겠지.' 그날 저녁, 페이지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있을 때 케트가 말했다. "곧 쓰러질 것같아 지쳐 보이는데..." "사실 그래." "그럼 뭣 때문에 나가는 거야? 그냥 잠이나 자지.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어?" "오늘은 좀 나가봐야 돼서..." "또 제이슨을 만나는 거야?" "그래. 오늘은 그의 부모님을 만나게 됐어." "아, 그래..." 케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뭐,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야." 페이지가 말했다. '정말이야...' 제이슨의 부모님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퍼시픽 하이츠 구역의 품위있는 19 세기풍 주택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귀족적인 풍모의 70 대 노인이었고, 어머니는 상냥하고 소탈한 성격이었다. 두 사람은 스스럼없이 그녀를 따뜻하게 맞았고, 페이지는 금세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제이슨한테서 닥터 테일러 얘기 많이 들었어요." 커티스 부인이 말했다. "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네." "감사합니다." 그들은 서재로 들어갔다. 방 안은 제이슨과 그의 아버지가 설계했던 건물 모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이슨과 나, 그리고 제이슨의 증조부님, 우리 커티스 집안의 세 사람이 오늘날 샌프란시스코 도시 경관의 상당 부분을 설계했지요." 아버지가 말했다. "그 중에서도 제이슨이 가장 뛰어난 설계사랍니다." "페이지는 제가 그런 사람이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도 잘 안 믿는 것 같아요." 제이슨이 말했다. 페이지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 믿어요. 정말..."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졸음을 참아내려고 속으로 안간힘을 썼다. 제이슨은 페이지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자, 이제 식사를 시작하는 게 어때요?" 그가 말했다. 그들은 널찍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의 벽은 고풍스러운 목재로 되어 있었고, 품위있는 골동품과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하녀가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벽에 걸린 초상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분이 바로 제이슨의


증조부님이오. 대단한 건축가였지. 불행하게도 저분이 설계한 수많은 건물이 1906 년 대지진에 모두 부서졌지요. 정말 훌륭한 건물들이었는데... 식사 후에 옛날 사진들을 보고 싶으면..." 페이지의 고개가 앞으로 떨어졌다. 식탁에 얼굴을 대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수프를 먼저 내지 않기를 잘햇어..." 어머니가 말했다. 케네스 말로리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케트를 두고 내기를 걸었다는 소문이 병원에 퍼지자 내기에 끼어드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 이제 내기의 총액이 1 만 달러로 늘어났다. 말로리는 자신만만했기 때문에 내기에 진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고 엄청난 액수를 걸어버렸다. '만에 하나 실패하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닌데... 실패라니? 어떻게 실패할 수 있어? 내가 집중공략하는데 안 넘어갈 리가...' 케트가 페이지, 그리고 하니와 함께 구내식앙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을 때 말로리가 다가왔다. "닥터 여러분과 좀 같이 앉아도 되겠어요?" '숙녀들, 아가씨들, 하고 말하지 않는 것 보니 많이 연구했군!' 케트는 속으로 코웃음쳤다. "괜찮구말구요. 어서 앉으세요." 케트가 대답했다. 페이지는 하니의 눈을 마주쳤다. "난 병실에 가봐야 돼." 페이지가 일어섰다. "나도 늦었어. 나중에 또 봐요." 하니도 말했다. 말로리는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늘 아침에도 정신없이 바빴어요?" 말로리가 입을 열었다. 상대방을 걱정해 주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다들 그렇잖아요. 나만 불평할 수도 없지요." 케트는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상대방에 대한 호감을 나타내는 미소였다. 말로리는 신중하게 작전을 세웠다. '우선 인간적으로 자기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인상을 줘야 돼. 그냥 예쁜 여자니까 접근한다는 느낌을 주면 안되지. 자존심 있는 여자는 섹스의 대상으로 취급받는 걸 싫어하니까... 직장에 대한 화제로 시작해야지. 급할 것 없어. 천천히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거야. 어차피 한 달 안에만 데리고 자면 되니까.' "엊그제 사망한 턴볼 부인의 해부결과 들었어요?" 말로리가 말했다. "위장에서 콜라 병이 나왔다고 하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그런..." 케트가 몸을 당기며 말로리의 말을 끊었다. "케네스, 이번 토요일 저녁에 무슨 계획이라도 있어요?" 말로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한참 뒤에나 하려던 말을 케트가 먼저 해온 것이다. "뭐라구요?" "다른 계획이 없으면 함께 저녁식사라도 하면 어떨까 해서..." 그는 하마터면 얼굴을 붉힐 뻔했다. '이런 세상에!' 말로리는 생각했다. '이건 우리에 갇힌 새를 사냥하는 식인걸. 이 여자가 어떻게 레즈비언일 수 있겠어. 그 친구들, 아무리 집적거려도 잘 안되니까 그런 험담을 했겠지. 내가 저희들과 같아? 가만히 있어도 내기는 이긴 거야. 건드려 달라고 아예 사정을 하고 있군 그래.' 그는 토요일 저녁 데이트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았다. '아! 수술실 산호사 쌀리였지. 뒤로 미뤄도 전혀 문제될 것 없어.' "별로 중요한 건 없어요." 말로리가 말했다. "저녁식사를 같이 하는 건


내가 제안하려던 참이었어요." 케트는 그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케트는 속삭였다. "토요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말로리는 싱글거리며 말했다. "나도 그래요." '이 아가씨야, 내가 토요일이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상상도 못할걸... 1 만 달러가 생기는 거라구!' 그날 오수, 케트는 페이지와 하니에게 말로리와 한 대화를 그대로 말해 주었다. "입이 벌어져서 다물지를 못하더라구!" 케트가 웃으며 말했다. "그때 그자의 표정은 정말 볼 만했어. 고양이가 생선을 통째로 삼키고 시치미떼는 표정인 거야." 페이지가 말했다. "네 이름대로 네가 고양이고, 그자가 생선이란 사실을 잊으면 안돼!" "토요일 저녁에 어떻게 할 거야?" 하니가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렇게 하면 어떨까?" 페이지가 말했다. "우선 식사 도중에 계속..." 토요일 저녁, 케트는 말로리와 샌프란시스코 만 해변에 있는 에밀리오라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케트는 몸매가 돋보이도록 옷에 신경을 썼다. 어깨가 완전히 드러나는 흰 면 드레스를 입었다. "오늘은 더욱 아름답군요." 말로리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말투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칭찬을 해줘야 돼. 하지만 지나친 표현은 안되지. 접근하고 싶다는 표시를 하더라도 너무 서두르면 안돼...' 말로리는 케트를 유혹하기 위해 온갖 신경을 다 쏟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케트가 자신을 요혹하려는 것이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칵테일을 마실 때 케트가 말했다. "케네스, 모두들 당신이 뛰어난 의사라고 칭찬이 자자하던데요..." "글쎄..." 말로리는 겸손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좋은 의과대학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어요. 그러나 나에게 더 중요한 건 환자들을 돕는 것이에요. 그들이 회복될 때가 나에겐 가장 기쁠 때지요." 그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케트는 말로리의 손을 잡았다. "정말 훌륭해요. 그런데 고향이 어디예요? 난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요. 닥터 케네스 말로리가 아니라 인간 케네스 말로리 말이에요." '이런 세상에!' 말로리는 생각했다. '이건 바로 내가 여자들 꼬실 때 쓰는 수법인데.' 그는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여자를 다루는 일만은 천재적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여자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할 때의 표정, 미소, 목소리의 높낮이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케트와의 대화에서는 자신의 그런 능력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케트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당신에 관함 모든 것을 알고 싶어요." 말로리는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계속 자신에 관해 이야기했다.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어 케트에 관해 들으려 할 때마다 그녀는 고집을


피웠다. "아니, 그게 아니고... 당신 얘기를 더 듣고 싶어요. 정말 재미있어요. 당신이 자라난 과정은 책을 써도 되겠어요." '벌써 홀딱 빠졌구만...' 말로리는 판단했다. 왜 내기를 더 걸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오늘 저녁이라도 해치울 수 있겠는데...' 식사 후 커피가 나오자 케트가 말했다. "내 아파트로 가서 한잔 더 하시겠어요?" 말로리는 오늘 저녁에 내기가 끝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말로리는 케트의 팔을 더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좋은 생각이오." '그 친구들 모두 돌았어... 안아 달라고 사정하는 여자를 두고 그런 내기를 걸다니...' 자칫하면 케트의 아파트에서 자신이 강간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0 분 후, 두 사람은 케트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집이 좋은데요." 말로리가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주 좋은 아파트예요. 여기서 혼자 살아요?" "아뇨. 닥터 테일러, 닥터 태프트와 같이 살아요." "아, 그렇군요." 말로리는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케트는 그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병원에서 아주 늦게 돌아올 거예요." 말로리는 활짝 웃는 얼굴이 되었다. "거참, 좋은 소식이네요." "한잔 하시겠어요?" "좋지요." 그는 한쪽에 있는 바로 가서 술을 따르는 케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몸매가 아주 훌륭해... 얼굴도 매력적이고... 이런 여자를 데리고 자는 데 오히려 1 만 달러가 생긴다니... 거참, 괜찮은데...' 말로리는 혼자 소리내어 웃었다. 케트가 고개를 돌렸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별것 아니오. 그냥 당신과 단둘이 이런 시간을 갖는 게 실감이 안나서 그런가 봐요." "나도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케트는 웃는 얼굴로 말하고 말로리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는 술잔을 쳐들고 말했다. "자, 우리 건배..." 케트가 재빨리 말을 끊었다.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말로리가 '음악을 좀 틀면 좋겠는데...' 하고 말하려는 순간 케트가 말했다. "음악 좀 들으실래요?" "어떻게 내 생각을 그렇게 잘 알지요?" 케트는 콜 포터의 감미로운 음악을 틀었다. 그녀는 시간에 신경이 쓰인다는 듯 시계를 들여다보고 말로리에게 말했다. "춤 한번 추실래요?" 말로리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는 아무하고나 춤추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당신과는 추고 싶어요." 두 사람은 감미로운 블루스 음악에 맞춰 천천히 춤추기 시작했다. 말로리는 케트가 몸을 밀착해 오는 것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흥분되었다. 그는 케트를 잡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제 결정적인 순간이 왔군...' "당신은 정말 매력적이야." 말로리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난 마음이 끌렸어." 케트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케네스, 나도 마찬가지예요."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뜨거운 키스가 길게 이어졌다. "우리 침실로 들어가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로리가 말했다. "좋아요!" 말로리가 케트의 팔을 잡은 채 침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파트 출입문이 열리면서 페이지와 하니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페이지는 케네스 말로리를 보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어, 닥터 말로리 아니에요? 우리 집에 어떻게..." "아니, 저... 사실은..."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잠깐 들른 거야." 케트가 말했다. 말로리는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다 무르익어 가던 판이 깨진 것이다. 그는 케트에게 말했다. "그럼 난 이만 실례해야겠어요. 시간도 너무 늦었고, 내일은 일요일이지만 근무해야 되니까요." "그냥 가게 돼서 섭섭해요." 케트가 말했다. 얼굴에는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말로리가 말했다. "내일 저녁에 만나면 어떻겠어요?" "꼭 만나고 싶어요..." "그럼 내일 봅시다." "... 하지만 내일은 피치 못할 일이 있어서..." "그럼 다음 금요일은 어때요?" 케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다음 금요일에도 피치 못할 일이 있는데요." 말로리는 조급해졌다. "그럼 토요일은 어때요?" 케트가 미소지었다. "좋아요. 토요일엔 아무 일 없어요." 말로리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토요일에 만납시다." 그는 페이지와 하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히 가세요." 케트는 문 밖까지 말로리를 배웅했다. "그럼 편히 쉬세요."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전 아마 당신 꿈을 꿀 거예요." 말로리는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 꿈은 반드시 실현될 거요. 다음 토요일에 오늘 아쉬웠던 것까지 즐기면 되잖소." "빨리 토요일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날 밤, 케트는 침대에 누워 말로리 생각을 해보았다. 근본적으로 그녀는 말로리 같은 남자를 증오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날 저녁 데이트를 즐겼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로리 역시 연극에 불과하지만 자신과의 데이트를 즐긴 것이 분명했다. '이게 피차 연극이 아니고 진실이었다면...' 케트는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 연극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제 17 장 '아마 날씨 때문일 거야...' 페이지는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잿빛 구름이 덮여


있는 하늘 에선 줄기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축축한 습기 때문에 한층 더 음산한 느낌이었다. 새벽 6 시 출근 후 문제는 끊이질 않았다. 환자들은 아픈 데도 없으면서 의사들을 괴롭히려고 찾아 온 사람같이 보였다. 모든 불평을 의사에게 한꺼번에 쏟아놓는 것이었다. 또 간호사들은 무 뚝뚝했고 일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엉뚱한 환자를 채혈하는가 하면, 급히 필요 한 X-선 사진을 잃어버리고, 환자들에게는 톡톡 쏘아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독감이 유 행해 결근한 직원이 많았다. 안 그래도 부족한 인원이 더 줄어든 것이다. 뭐 하나 제대로 되 는 게 없는 날이었다. 그나마 제이슨이 전화해 주어 약간 위안이 되었다. "여보세요." 제이슨의 밝은 목소리였 다. "우리 환자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어요." "그럭저럭 지내요." "혹시 점심 같이 할 시간 있어요?" 페이지는 웃으며 대답했다. "점심이라구요? 병원에서 근무중에 점심 먹을 시간이 어디 있어요. 오후 늦게 샌드위치라도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죠. 지금 여기는 정신없어요." "알았어요. 바쁜데 더 이상 붙잡지 않을게요. 저녁때 다시 전화해 도 괜찮겠죠?" "그러세요." '가끔 이런 전화가 오는 게 안 오는 것보다 낫지...' "그럼, 안 녕..." 페이지는 그날 자정까지 잠시 쉴 틈도 없이 계속 일했다. 자정이 넘어 드디어 교대했을 때는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지쳐 그냥 당직자 휴게실 간 이침대에 누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깨끗하고 편안한 집에서 푹 쉬고 싶은 생각에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갔다. 마침 닥터 피터슨이 지나가다가 그 녀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아니, 이런..." 피터슨이 말했다. "괜찮아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페이지는 억지로 웃어보였다. "내 꼴이 엉망이죠?" "엉망 정도가 아닌데요." 피터슨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집으로 가는 거요?" 페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도 먼저 맞는 사람이 낫다고 하지 않소. 난 이제부터 시작 이니..."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러나 페이지는 선 채로 졸고 있었다. 피터슨이 조 심스럽게 페이지를 흔들었다. "페이지..." 그녀는 간신히 눈을 떴다. "음-?" "이래서야


운전하 고 집에 갈 수 있겠소?" "괜찮아요." 페이지는 중얼거렸다. "집에 가면 침대로 직행할 거예 요. 앞으로 24 시간 동안 잘 거라구요." 주차장으로 내려온 페이지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차를 찾아갔다.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 자 열쇠를 돌려 시동 거는 것도 귀찮았다. '여기서 잠들면 안돼! 어떻게든 집에 가서 편히 쉬어야지...' 페이지는 주차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차를 몰았다. 반은 졸고 있었기 때문에 자 신이 얼마나 위험하게 운전하고 있는지 전혀 감각이 없었다. 비틀거리는 페이지의 차를 간 신히 피한 운전사가 소리쳤다. "야! 죽고 싶어 그 따위로 운전하는 거야? 주정뱅이 여편네 같으니라구..." 페이지는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잠들면 안돼. 절대 잠들면 안돼...' 라디오를 켜 고 볼륨을 높였다. 가까스로 집에 도착해서도 차를 멈추고 한참 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차에서 내려 아파트로 올라갈 수 있었 다. 케트와 하니는 모두 깊이 잠들어 있었고 침대 옆 탁자의 시계는 1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새벽 1 시야...' 페이지는 옷을 벗으려 했지만 도저히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옷 을 입은 채 침대로 쓰러져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득히 먼 딴 세상에서 울리는 듯한 그 소리에 문득 깨어났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계속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가 머릿속을 바늘로 찔러대는 것 같았다. 할 수없이 페이지는 더듬더듬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보세요?" "닥터 테일러세요?" "그래요."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바커 박사님이 급히 찾으세요. 응급수술에 보 조해 달라고요. 제 4 수술실로 오세요." 페이지는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뭔 가 잘못된 것 아니에요? 난 조금 전에 근무가 끝났는데..." "제 4 수술실이에요. 바커 박사님이 기다리십니다." 페이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직도 잠에 취해서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시계를 쳐다보았다. 4 시 15 분... 왜 이런 시간에 수술을 하는 건지, 왜 바커 박사가 자신에게 나오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환자 한 사람이 갑자기 상황이 나빠진 것말고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페이지는 휘청거리며 화장실로 가서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물기를 닦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세상에! 어머니 또래처럼 나이 들어 보이 잖아! 아니, 어머니도 이렇게 얼굴이 망가진 적은 없었어...' 10 분 후 페이지는 다시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차를 주차시키고 병동으로 들어가 엘리베 이터를 타고 제 4 수술실로 가는 동안 계속 졸고 있었다. 먼저 탈의실에 들어가 가운으로 갈 아입고 손을 씻은 다음 수술실에 들어섰다. 세 명의 간호사와 레지던트 한 사람이 바커 박 사를 보조하고 있었다. 바커 박사가 들어오는 페이지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이게 뭐하는 것이야? 흰가운을 입고 들어오면 어떡해! 수술실에 들어올 때는 전신을 소독하고 수술복으 로 갈아입어야 된다는 걸 아직도 몰라?" 바커 박사의 고함에 페이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그의 냉랭한 태도에 화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러세요?"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바커 박사를 쏘아보며 말했다. "난 지금 비번이에요. 특별히 박사님이 찾는다고 해 서 이틀 동안 한잠도 못 잤지만 달려왔어요. 그럴 의무가..." "나하고 말다툼하러 왔어?" 바커 박사가 페이지의 말을 끊었다. "잔소리 말고 이리 와서 이 핀셋이나 잡아!" 페이지는 수술대로 다가갔다. 자신의 환자가 아니고 처음 보는 사람이었 다. '구태여 나를 끌어낼 이유가 없었잖아! 날 계속 괴롭히면 병원을 그만둘 거라고 생각하 는 모양인데, 난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거야!' 페이지는 바커 박사를 흘겨보면서 핀셋을 잡 고 수술에 끼어들었다. 심장벽의 관상동맥이 막혀서 우회하는 새 혈관을 이식시키는 응급수술이었다. 벌써 가슴 한가운데부터 왼쪽 갈비뼈까지 전기톱으로 절개해 놓았고, 심장과 혈관 등이 드러나 보였다. 페이지는 핀셋을 절개 부위에 집어넣고 계속 열려 있도록 붙잡았다. 바커 박사는 즉시 매 끄러운 솜씨로 심장외벽을 절개했다. 그는 관상동맥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여기가 문제 야! 빨리 이식해야 돼!" 이미 환자의 다리에서 이식할 혈관을 떼어놓고 있었다. 그는 막힌 혈관의 심장 쪽을 잘라 새 혈관에 연결하고, 반대쪽은 막힌 부위를 훨씬 지나 연결하기 시작했다. 막혀 있는 부위를 우회해서 혈액순환이 정상적으로 되도록 새 혈관을 이식한 것이다.


페이지는 피로와 싸우면서도 바커 박사의 정확하고 예리한 수술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한 솜씨야, 인간성만 그렇게 고약하지 않았더라면...' 수술은 꼬박 세 시간이 걸렸다. 페이지는 눈을 뜨고 있기조차 힘들었다. 피부 봉합까지 다 끝나자 바커 박사는 수술실 안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모두 수고가 많았소." 그러나 페이지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페이지는 말없이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수술실을 나와 위층 에 있는 병원장 월러스 박사의 사무실로 갔다. 막 출근하던 월러스 박사와 문 앞에서 마주쳤다. "닥터 테일러, 몹시 지쳐 보이는데..." 월 러스 박사가 말했다. "집에 가서 좀 쉬지 그래요?" 페이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눌렀다. "저를 다른 수술 팀으로 보내주세요." 월러스 박사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지금 바커 박사 팀에 소속되어 있잖소, 그렇죠?" "그래요."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소?" "전 모르겠어요. 바커 박사한테 물어보세요. 항상 저를 못마땅해 하니까요. 아마 저를 다른 팀에 보낸다면 좋아할 거예요. 바커 박사 팀만 아 니면 어디라고 좋아요. 어느 분 밑이라도 상관 없어요." "바커 박사와 얘기해 보겠소." 월러 스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페이지는 월러스 박사의 사무실을 나왔다. '다시는 바커와 마주치지 않을 팀으로 옮겨야 지. 그 인간과 또 마주치면 죽여버릴 생각이 들 거야...' 집으로 돌아온 페이지는 그대로 쓰 러져 열두 시간 동안 한번도 깨지 않고 잤다. 깨어났을 때는 무언가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참! 이제부턴 그 악랄한 인간을 안 봐도 되는 거지!' 병원으로 차를 몰면서 자신도 모르게 휘파람이 나왔다. 페이지가 복도를 걸어가는데 직원 한 사람이 다가 왔다. "닥터 테일러..." "무슨 일이에요?" "월러스 박사가 사무실로 좀 오시랍니다." "고마워요." 대답하면서 페이지는 새 팀의 책임 전문의가 누굴까 생각해 보았다. '누구면 어때? 어쨌든 그 악랄한 인간ㅂ다는 낫겠지 뭐.' 페이지는 노크를 하고 월러스 박사의 사무 실로 들어갔다. "아, 닥터 테일러! 오늘은 얼굴이 좀 좋아 보이는군요." "고맙습니다. 기분도 훨씬 좋아졌어요." 정말 그랬다. 이제 바커의 손에서 벗어난다는 생 각에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바커 박사와 상의해 봤소." 페이지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고


맙습니다. 정말 뭐라고 말해야..." "당신을 다른 팀으로 보낼 수 없다고 하던데..." 페이지의 표정이 싹 굳어졌다. '뭐라구? 그게 무슨...' "바커 박사 말이, 자신의 팀에 들어 왔으면 싫든 좋든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거요." 페이지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못마땅해 하면서 그대로 남아 있으라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죠?" 페이지는 단 하나의 이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바커는 누군가를 학대하는 데서 변태적인 만족감을 얻는 인간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싫어하는 사람을 억지로 잡아두려고 할 이유가 없었다. "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월러스 박사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페이지의 말을 끊었다. "닥터 테일러, 이 병원 에서 근무하는 한 선택의 여지가 없소. 다른 병원으로 옮긴다면 모르지만... 혹시 병원을 옮 길 생각은 안 해봤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아뇨." 페이지는 바커 때문에 밀려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 다. 바로 그것이 바커가 원하는 바가 틀림없었다. "전 여기서 전문의 과정을 마칠 거예요." "좋아요. 그럼, 이 얘기는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그런다고 바커한테 당한 게 없어지나? 두고 보자구... 어떻게든 그 인간을 혼내 주고 말 거야!' 회진 전에 의사 전용 탈의실에서 케네스 말로리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닥터 그룬디와 세 명의 레지던트가 들어왔다. "엠바카데로의 카사노바가 여기 계셨구만!" 그룬디가 말했다. "케네스, 어때? 잘 되어가나?" "그럼 문제없어." 말로리가 대답했다. 그룬디는 같이 들어온 일행에게 말했다. "자네들 보기에는 어때? 난 아무래도 저 친구가 케트 헌터의 손도 못 잡아본 것 같은데..." 고개를 말로리에게 돌렸다. "돈 좀 마련해 놓아야 될걸. 난 그 돈을 새 차 사는 데 보태야겠어."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난 그 돈으로 최고급 양복이나 몇 벌 사야겠어." 말로리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친구들 참 멍청하기는... 그런 달콤한 생 각은 버리는 게 좋아. 내게 내놓을 돈이나 준비하라구!" 그룬디는 잠시 말로리의 얼굴을 쳐 다보다가 물었다.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야?" "케트 헌터가 남자를 싫어하는 레즈비언이라는 말은 내가 고자라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 녀는 여지껏 내가 만난 수많은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남자를 밝히는 여자라구. 며칠 전에는 내가 오히려 겁탈당할 뻔 했단 말이야." 그룬디 일행은 못 믿겠다는 듯 서로를 마주


보았 다. "하지만 아직 그녀와 잔 것은 아니잖아." "이 친구들아, 그날 끝장내지 못한 건 우리가 막 침실로 들어가려는데 훼방꾼이 나타났기 때문이야. 이번 토요일에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그땐 깨끗이 마무리지어 버릴 거라구." 말 로리는 옷을 다 갈아 입었다. "자, 그럼 난 바빠서 이만 실례. 내주에 다시 만나자구." 한 시간 후 그룬디는 복도를 걸어가는 케트를 불렀다. "할 얘기가 있는데요." 그는 약간 흥분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죠?" "그 말로리라는 자식 말입니다. 그 친구 점점 더 기고만장해져서 지금이라도 내기를 더 걸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받아주겠다고 하더라구요. 진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않는 것 같 았어요. 어떻게...?" "걱정 말아요." 케트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자는 절대로 내기에 이기지 못할 테니까." 어느새 토요일이 되었다. 케네스 말로리가 케트를 데리러 왔을 때, 그녀는 자신의 몸매를 한껏 드러내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정말 멋지군요!" 말로 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케트가 그의 팔을 잡았다. "당신 같은 미남과 데이트하는데 나 도 최대한 멋을 내야 되지 않겠어요?" 케트는 말로리에게 몸을 기댔다. '완전히 내게 사정 을 하고 있군!' 말로리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케트, 좋은 생각이 있어. 저녁식사하 러 가기 전에 잠시 침실에 가서..." 케트는 말로리의 얼굴을 만지며 대답했다. "아, 정말 그랬으면 좋겠는데... 페이지가 집에 있어요." 사실 페이지는 병원에서 당직근무중이었다. "아, 그래?" "하지만 저녁식사 후에는..." 케트는 수줍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식사 후 에?" "당신 집으로 가면 되잖아요." 말로리는 케트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아주 멋진 생각이 오." 두 사람은 아이언 호스 레스토랑에서 최고급 저녁식사를 주문했다. 케트는 연극을 하면 서도 말로리와 보내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유머 감각도 풍부했고, 예의바르고 친절 했으며, 남자로서의 매력도 넘쳐흘렀다. 케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말도 마치 진심 처럼 들렸다. 자신을 칭찬할 때마다 뻔히 그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게 연극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말로리는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경황이 없었다. 속으로는 침실로 갈 시간만 재고 있었다. '지금부터 두 시간이면 1 만 달러를 벌게 되는 거야. 이제 한 시간만 더 있으면 1 만 달러가 생긴다구... 앞으로 30 분만 더 있으면...' 두 사람이 식사 후 커피까지 다 마셨을 때 말로리가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나가 볼까?" 케트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내가 얼마나 이 시간을 기다렸는지 모를 거예요. 빨리 일어나요."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말로리의 아파트로 향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오..." 말로리 가 케트의 귀에 속삭였다. "이러다가 당신에게 홀딱 빠지고 말 거요." 그러나 케트는 그룬디의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친구 점점 더 기고만장해져 서 지금이라도 내기를 더 걸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받아주겠다고 하더라구요.' 택시가 아파트에 도착하자 말로리는 요금을 지불하고 케트를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조 급한 마음에 말로리는 엘리베이터가 왜 이렇게 느린가 하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드디어 현 관에 도착하자 서둘러 문을 열고 말했다. "자, 어서 들어가요." 케트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저 평범한 독신남자의 아파트였다. 여자의 손이 닿지 않아 물건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 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케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로리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무엇 보다도 당신 아파트니까..." 말로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럼 우리가 쓸 방을 보여주지. 우선 음악부터 좀 틀고..." 그가 음악을 틀려고 오디오 세트에 다가가자 케트는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바바라 스트라이잰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로리는 케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자, 이제 침실로 들어가지." "잠깐만요." 케트가 말했다. 말로리는 뜻밖이라는 듯 케트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아니, 왜 그래?" "잠시 이대로 이 순간을 음미하고 싶어서 그래요. 침실에 들어가서 더 가까워지기 전에..." "침실에 들어가서 음미하면 되잖소?" "우리 술 한 잔만 더 해요." "술?" 그는 조급한 마음을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한 잔쯤 더 하는 것도 괜찮지. 뭘로 할까?" "보드카 토닉이면 좋겠어요." 그는 미소지었다. "그 정도야 문제없지." 그는 주방으로 가서 서둘러 보드카 토닉 두 잔을 만들었다. 케트는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말로리는 술잔을 들고 돌아와 케트에게 건네주었다. "자, 건배." 그는 술잔을 쳐들었다. "우리 둘만의 시간을 위해..." "우리 둘만의 시간을 위해..." 케트는 한 모금 마시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이게 뭐지?" 말로리는 깜짝 놀라 물었다. "왜 그러지?" "이건 보드카 아니에요?" "그래요. 보드카 토닉을 달라고 했잖소?" "내가 그랬어요? 미안해요. 사실 난 보드카가 질색이거든요." 케트는 말로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스카치 소다로 바꾸어 주실래요?" "문제없어." 말로리는 점점 더 조급해지는 마음을 꾹 누르고 다시 주방으로 가서 스카치 소다를 만들었다. 케트는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자, 여기 있소." "정말 고마워요." 케트는 술을 두어 모금 마셨다. 말로리는 그녀의 잔을 받아 탁자 위에 놓고 팔을 벌려 케트를 감싸안았다. 케트는 그의 몸이 벌써 흥분하기 시작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 이제..." 말로리가 속삭였다. "우리 두 사람의 역사적인 순간이 왔어..." "아, 그래요!" 케트가 말했다.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녀는 말로리가 이끄는 대로 침실로 들어갔다. '결국 해냈어!' 말로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가 해낸 거야! 이제 성역은 무너진 거야!' 그는 케트에게 말했다. "빨리 옷을 벗지." "당신이 먼저 벗어요. 당신이 벗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래? 그래도 좋지." 케트가 지켜보는 앞에서 말로리는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우선 윗도리를 벗고 타이를 풀고 셔츠를 벗었다. 구두와 양말을 벗고 나서 바지도 벗었다. 드디어 운동 선수 같은 탄탄한 몸매가 드러났다. "이렇게 옷 벗는 것을 보는 게 좋아?" "그럼요. 이젠 팬티도 벗어요." 말로리의 팬티가 천천히 방바닥으로 내려갔다. 그의 남성이 벌써 우뚝 솟아 있었다. "말로리, 당신은 정말 멋져요." 케트가 말했다. "이젠 당신 차례야." "좋아요." 바로 그 순간 케트의 삐삐가 울리기 시작했다. 말로리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이게 무슨..." "급한 일인 모양이에요." 케트가 말했다. "전화 좀 해야겠어요." "지금 전화를 한다구?" "그럼요. 응급상황이 틀림없어요." "지금? 조금 있다 하면 안돼?" "규정을 잘 알잖아요. 나도 하고 싶지 않지만..." "하지만..." 케트는 벌거벗은 채로 서 있는 말로리를 지나 전화에 다가가 다이얼을


돌렸다. "닥터 헌터예요." 잠시 듣고 있던 케트가 다시 말했다. "그래요?... 알았어요... 물론이지요... 곧 가도록 할게요." 말로리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바로 병원으로 가야겠어요." "지금 당장?" "그래요. 내 환자 한 사람이 지금 위독하대요." "케트, 잠깐 내 말 좀..." "정말 미안해요. 우리야 다시 만나면 되잖아요." 옷을 벗은 채 말로리는 서둘러 나가는 케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자 그는 탁자 위의 술잔을 벽으로 집어 던졌다. '빌어먹을... 망할 년... 빌어먹을... 망할 년...' 속으로 수없이 되씹었다. 케트가 아파트에 돌아오자 페이지와 하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페이지가 물었다. "내가 시간을 제대로 맞췄어?" 케트는 웃으며 말했다. "아주 정확히 맞아떨어졌어." 그녀는 저녁에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얘기했다. 말로리가 벌거벗은 채 우뚝 솟은 남성을 드러내고 서 있는 장면을 설명하자 페이지와 하니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배를 잡고 웃었다. 케트는 케네스 말로리와 데이트한 시간이 사실 얼마나 즐거웠는지 두 사람에게 털어놓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너무 멍청한 소리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말로리는 순전히 내기에 이기려고 자신을 유혹한 것이잖은가? 그러나 페이지는 본능적으로 케트의 마음을 눈치챈 것 같았다. "케트, 그자를 조심해야 돼." 케트는 미소지었다. "걱정 마. 하기야 그자가 내기 때문에 나를 유혹한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그자는 구렁히야. 아주 보기 좋은 구렁이지만 말이야." "언제 다시 만나기로 했어?" 하니가 물었다. "한 1 주일쯤 지나야 열기가 식지 않겠어?" 페이지가 케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누구의 열기 말이야?" 루 디네토의 검은 리무진이 병원 입구에서 케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림자' 혼자였다. 케트는 라이노가 있을 때 마음이 더 편했다. 왠지 '그림자'는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얼굴 표정을 바꾸는 법도 없었고 별로 말도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상대방을 위축시켰다. "타세요." 케트가 다가오자 '그림자'가 말했다. "이봐요." 케트가 항의조로 말했다. "디네토 씨에게 나를 오라가라 할 권리가 없다고 전해 주세요. 난 디네토 씨의 고용인이 아니에요. 한번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계속 이렇게..." "타세요. 그분께 직접 말씀하세요." 케트는 잠시 주저했다. 그냥 가버리고 더 이상 디네토를 만나지 않아도 자신을 해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이클이 걱정이었다. 케트는 말없이 차에 올랐다. *** 기다리고 있는 환자는 심하게 구타당해 의식이 없었다. 그냥 얻어 맞은 게 아니고 쇠사슬 같은 흉기로 폭행당한 것이 분명했다. 옆에는 루


디네토가 기다리고 있었다. 케트는 환자를 살펴보고 말했다. "이 사람은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야 돼요." "케트." 디네토가 말했다. "여기서 치료해요." "왜요?" 케트가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벌써 알고 있는 것이었고, 그 대답을 듣는 게 두려웠다. 제 18 장 일요일 아침, 마음까지 밝게 해주는 화창한 날씨였다. 샌프란시스코 만을 뒤덮고 있던 비구름은 밤사이 바람에 씻겨나가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건조하고 시원한 날씨였다. 페이지는 집에서 제이슨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도착했을 때, 페이지는 자신이 그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깨닫고 새삼 놀랐다. "안녕?" 제이슨이 말했다. "오늘은 정말 멋있게 뵙니다!" "고마워요." "어디로 가볼까요?" 페이지가 대답했다. "당신이 샌프란시스코 토박이잖아요. 난 그냥 따라다닐게요." "좋아요." "한 가지 해야 될 일이 있는데..." 페이지가 말했다. "병원에 잠깐 들러야겠어요." "오늘은 비번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요. 하지만 걱정되는 환자가 한 사람 있어서요." "그럼 그렇게 해요." 제이슨은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금방 다녀올게요." 차에서 내리면서 페이지가 말했다. "난 여기서 기다릴게요." 페이지는 3 층 지미 포드의 입원실로 갔다. 그는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여러 가지 생명연장장치에 의존하고 있었다. 간호사가 페이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닥터 테일러,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페이지는 지미의 침대로 다가갔다. "뭔가 변화가 있어요?" "없는데요." 페이지는 지미의 맥박을 짚어보았다. "벌써 여러 주가 지났는데." 간호사가 말했다. "전혀 변화가 없으니... 아무래도 조짐이 좋지 않아요." "반드시 회복될 거예요." 페이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의식이 없는 지미 포드에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내 말 들려요? 당신은 반드시 회복될 거예요!" 지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페이지는 잠시 눈을 감고 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만약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으면 삐삐로 연락해 줘요." "알았습니다. 닥터 테일러." '지미는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 페이지는 생각했다.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페이지가 주차장으로 나오자 제이슨이 차에서 내렸다.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페이지는 제이슨이 알지도 못하는 지미 포드의 상태를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에요." 가볍게 대답했다. "자, 그럼 관광객이 되어볼가요?" 제이슨이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모든 관광 프로그램이 반드시 '휘셔맨즈 워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법이 있어요." 페이지는 웃으며 대답했다. "법대로 해야 되겠죠." '휘셔맨즈 워프'는 야외에서 열리는 축제 같았다. 여기저기에서 거리의 예술가들이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익살부리며 다니는 광대, 혼자 무언극을 벌이는 배우, 랩 음악에 맞춰 춤추는 3 인조, 그리고 거리의 악사들로 시끌벅적했다. 좌판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찐 털게, 조갯살 크림 수프,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인 싸와도우 빵을 팔고 있었다. "이런 곳은 세상에 둘도 없을 거예요." 제이슨이 말했다. 페이지는 제이슨의 천진난만한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동심으로 돌아가 단순한 일에도 열중하는 그의 성격이 드러났다. 사실 '휘셔맨즈 워프'에는 벌써 와보았고 샌프란시스코 관광지를 거의 다 돌아보았었지만, 제이슨이 무안해 할까 봐 잠자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녔다. "전차 타봤어요?" 제이슨이 물었다. "아뇨." '지난 1 주일 동안은 안 탔었지...' "아직 전차도 안 타봤어요? 말도 안돼! 자, 따라와요..." 두 사람은 파웰 가까지 걸어가서 전차를 탔다. 전차가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제이슨이 말했다. "이 전차를 '할리디의 웃음거리'라고 불렀답니다. 할리디가 1873 년에 설치했죠."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짓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죠?" 제이슨이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고등학교 때, 주말에는 관광안내원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 이런 것을 알게 됐어요." "꽤 잘했을 것 같은데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죠. 그때 솜씨를 한번 보여드릴까요?" "해보세요." 제이슨은 상투적인 관광안내원 투로 방송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먼저 샌프란시스코 시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오래 된 길은 그란트로이고, 가장 긴 도로는 총연장 길이가 12 킬로미터인 미션 가입니다. 가장 넓은 길은 폭이 40 미터인 반 네스 로이고, 가장 좁은 길은 드포레스트 가로서,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 그 폭이 1.5 미터입니다. 경사가 가장 가파른 길은 경사도가 31.5 도인 휠버트 가입니다." 그는 페이지를 쳐다보며 웃었다. "이렇게 줄줄 나올 줄은 나도 몰랐는데요." 전차에서 내리자 페이지는 제이슨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죠?" "이젠 마차를 탈 차례예요." 10 분 후 두 사람은 '휘셔맨즈 워프'에서 북쪽 해변의 거라델리 광장까지 마파를 타고 갔다. 제이슨은 마차 위에서도 주변 경치와 풍물에 대해 계속 설명해 주었다. 페이지는 제이슨과 같이 보내는 시간이 의외로 즐겁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러다가 너무 쉽게 가까워지는 건 아닐까...'


두 사람은 코이트 탑에 올라가 도시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시원한 바람을 쐬며 시내를 내려다보다가 제이슨이 물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야외에 나와 돌아다니다 보니 페이지도 꽤 시장기를 느꼈다. "네, 조금요." "좋아요. 이제 세상에서 제일 가는 중국 식당으로 갈 거예요. 토미토이라는 레스토랑이지요." 페이지도 병원 직원들이 그 레스토랑 얘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점심식사는 문자 그대로 성찬이었다. 우선 바닷가재를 매운 소스에 요리한 전채로 시작해서 해물이 들어간 수프가 나왔다. 이어서 완두콩과 호두를 넣어 요리한 닭고기가 나오고 사천식 송아지 요리, 그리고 양주식 볶음밥이 나왔다. 복숭아로 만든 후식과 중국차가 마지막 코스였다. 페이지가 여태 한번도 맛보지 못했던 진기한 음식이었다. "여기에 자주 오세요?" 페이지가 물었다. "가능한 한 자주 오지요." 페이지는 제이슨의 소년 같은 순수함이 마음에 들었다. "제이슨, 당신 얘기를 해주세요." 페이지가 말했다. "어릴 때부터 건축가가 되려고 했어요?" "그건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제이슨이 웃으며 대답했다. "부모님이 사주신 첫 장난감이 집짓기 세트였으니까요. 마음 속에 품었던 꿈이 벽돌과 콘크리트로 현실이 되고 내가 사는 도시의 일부분이 되어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아세요?" '얼마가 걸리든 널 위해서 나의 타지마할을 지어줄 거야!' "페이지, 난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으니까요. 누가 이런 말 했지요? '대부분의 인간은 절망 속에서 묵묵히 살아간다.'" '병원 환자들 얘기 같군.' "난 건축가 이외의 직업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샌프란시스코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 산다는 것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요. 정말 아름답고 매력있는 도시예요." 제이슨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에는 없는 게 없고, 세월이 가도 싫증나지 않는 도시예요." 페이지는 잠시 제이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결혼한 적 있어요?" 제이슨이 대답했다. "한번 한 적이 있지요. 우린 둘 다 너무 어렸어요. 얼마 안 가서 헤어지고 말았죠." "참 안됐어요." "오히려 잘된 것 같아요. 그녀는 돈많은 육류가공공장 주인과 재혼했고, 나는 지금까지 편안하게 독신생활을 누렸으니까요. 당신은 결혼한 적 있어요?" '나도 크면 의사가 될 거야. 그러면 우린 결혼하고 같이 일할 수 있을 거야!' "아뇨."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 만을 한바퀴 도는 유람선을 탔다. 금문교를 지나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란드 시를 연결하는 베이브리지로 향했다. 제이슨은 다시 관광안내원으로 돌아갔다. "신사 숙녀 여러분, 바로 저 섬이 그


유명한 알카트래즈입니다. '기관총 켈리', 알 카포네, 그리고 '인간 새'로 유명해진 로버트 스트라우스가 수감되었던 감옥이지요. 스페인어로 알카트래즈는 펠리칸 새를 뜻합니다. 처음 북부 캘리포니아를 개척한 스페인 사람들이 저 섬을 '알카트래즈의 섬'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섬에는 펠리칸 새들밖에 없었으니까요. 알카트래즈 감옥에서는 죄수들 모두가 하루 한 번씩 의무적으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게 합니다. 왜 그러는지 아세요?" "왜죠?" "죄수들이 더운 물에 익숙해지면 샌프란시스코 만의 찬 물 속에 들어가 견디기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헤엄쳐서 저곳을 탈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죠." "그게 정말이에요?"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요?" 유람선에서 내렸을 때는 벌써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노 계곡에 가봤어요?" 제이슨이 물었다. 페이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곳을 꼭 보여주고 싶어요. 옛날에는 자연 그대로 시냇물이 흐르고 농가만 드문드문 있었는데 19 세기에 와서 주택지로 개발되기 시작했어요. 빅토리아식 주택과 아름다운 영국식 정원으로 유명하죠. 1906 년 대지진 때도 피해를 입지 않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오래되고 품위 있는 주택가예요." "정말 아름다운 곳인가 봐요." 제이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곳에 내 집이 있어요. 한번 가보지 않겠어요?" 그는 페이지가 대답을 망설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페이지, 난 당신을 사랑해요." "우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아직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 어떻게 벌써 사랑이란 말을..." "난 당신이 병원에서 '회진할 때 가운을 입어야 된다는 것을 아직도 몰라요?' 하고 말하던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어요." "제이슨, 그런..." "나는 첫눈에 사랑이 시작되는 것을 믿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고 그 길로 쫓아가서 만나셨어요. 그 후 석 달 만에 결혼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50 년 동안 사이좋게 사셨어요. 아버지는 길을 건너는 어머니를 처음 보고 그 순간 결혼상대로 선택하셨답니다. 벌써 45 년 동안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계셔요. 우리 집안 내력이 바로 그래요. 난 당신과 결혼하기로 작정했어요." 어떻게든 대답을 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제이슨을 바라보며 페이지는 생각했다. '제이슨은 알프레드 이후 처음으로 호감가는 사람이잖아... 잘생기고... 똑똑하고... 게다가 정말 성실한 사람이야. 남편감으로 더 좋은 사람을 찾기 힘들 텐데... 내가 왜 망설이는 거지? 아직도 알프레드를 떨쳐버리지 못한 걸까?' 사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젠가 알프레드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이 끈질기게 자리잡고 있었다. 페이지는 제이슨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겠다고 마음먹었다.


"제이슨..." 바로 그 순간, 페이지의 삐삐가 울렸다. 뭔가 심각한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페이지..." "빨리 병원에 전화해야겠어요." 서둘러 공중전화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제이슨은 페이지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페이지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안돼! 절대로 안돼! 내가 곧 갈 거라고 해요." 수화기를 내치듯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에요?" 제이슨이 물었다. 그에게 시선을 돌리는 페이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내 환자에게서 생명연장장치를 제거하겠대요. 지미 포드라는 착한 젊은이예요.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겠다니..." 페이지가 지미 포드의 병실에 도착해 보니 조지 앵글런드 박사, 벤자민 월러스 박사, 그리고 변호사인 실베스터 대몬이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지미 옆에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페이지가 물었다. 벤자민 월러스 박사가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 병원 윤리위원회에서 지미 포드의 병세는 호전될 수 없다고 결론내렸소. 따라서 생명연장장치를 제거..." "안돼요!" 페이지는 월러스 박사의 말을 끊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지미의 주치의는 바로 나예요. 내 판단으로는 아직 소생할 가능성이 있어요. 이 상황에서 생명연장장치를 제거한다는 것은 말도 안돼요!" 실베스터 대몬이 입을 열었다. "닥터 테일러, 그 결정은 당신의 권한 밖의 일입니다." 페이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시지요?" "나는 지미 포드의 변호사입니다." 그는 손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페이지에게 건넸다. "이제 지미가 전에 작성해 놓았던 유서입니다. 자신이 중병에서 호전될 가망이 없을 때는 인공적으로 생명을 연장하지 말라구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지미의 상태를 처음부터 관찰해 왔어요." 페이지는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사정했다. "벌써 몇 주째 상태가 안정되었어요. 곧 의식을 회복할 수도 있어요." "그걸 보장할 수 있습니까?" 대몬이 물었다. "보장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유서의 내용대로 해야 됩니다. 닥터 테일러." 페이지는 다시 지미 포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안돼요! 조금 더 기다려 봐야 해요!" "닥터 테일러, 병원에서야 지미 같은 환자를 오래 남겨두는 것이 좋을지 모르지만, 가족들은 더 이상 치료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제 유언대로 생명연장장치를 제거햐세요." 실베스터 대몬은 극히 사무적인 말투였다. "하루 이틀만이라도 더 기다려 주세요." 페이지는 애원했다. "반드시 좋은 결과가..." "안됩니다." 대몬이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제거해야 돼요."


조지 엥글런드가 페이지에게 말했다. "페이지, 정말 안됐소. 하지만 어쩔 수 없잖소?" "엥글런드 박사님, 고맙습니다." 대몬이 말했다. "이제 여러분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믿고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생명연장장치가 오늘 제거되니 장례 준비를 하라고 전하겠습니다." 그는 월러스 박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병원장께서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 사람은 병실을 나가는 대몬의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우리 손으로 지미를 죽일 수는 없어요!" 페이지가 소리쳤다. 월러스 박사가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페이지..." "지미를 다른 병실에 숨겨두고 좀더 경과를 두고 보면 안될까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게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어떻게든..." 월러스 박사가 말했다. "닥터 테일러, 지미의 생명연장장치 제거는 단지 가족들의 희망만이 아니고 우리의 법적 의무요." 그는 조지 엥글런드 박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당신이 하는 게..." "안돼요!" 페이지가 소리쳤다. "내가... 내가 할게요." "그렇다면..." "잠시 지미와 단둘이 있게 해주세요." 조지 엥글런드 박사는 페이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페이지, 정말 안타까운 일이오..." "이젠 괜찮아요." 페이지는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문을 닫았다. 이제 의식이 없는 지미와 단둘뿐이었다. 페이지는 산소호흡기에 연결된 호스와 정맥 주사선을 둘러보았다. 산소호흡기의 작동 스위치만 끄면 지미의 생명은 그대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렇게도 밝고 꿈에 부풀어 있던 지미의 인생이 끝나는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의사가 될 거예요. 꼭 닥터 페이지 같은 의사가 될 겁니다... 사실은, 곧 결혼하거든요... 베치라고... 우린 애를 많이 낳을 거예요. 첫딸은 페이지라고 부르고 싶은데, 괜찮겠죠?' 그런 지미가 죽게 된 것이다. 지미를 내려다보는 페이지의 눈에서 눈물리 흐르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 거예요?" 페이지가 소리쳤다. "그만한 상처에 살기를 포기하는 거예요?" 그녀는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 화려하던 꿈은 다 어떻게 하고 죽는다는 거예요?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요! 대답 좀 해봐요! 내 말이 안 들려요? 눈 좀 떠봐요!" 그러나 창백한 지미의 얼굴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미안해요!" 페이지가 말했다. "정말 미안해요!" 그녀는 몸을 숙여 지미의 뺨에 키스했다. 천천히 몸을 다시 일으켰을 때 지미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니... 지미! 지미!!!" 지미는 눈을 한번 깜박이고 다시 감았다. 페이지는 지미의 손을 잡았다. 몸을 숙여 그의 귀에 입을 대고 흐느끼면서 속삭였다. "지미,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고 정맥주사로만 영양을 섭취하던 환자 얘기 들었어요? 주치의에게 주사약을 한 병 더 달라고 했대요. 점심에 손님이 오기로 해서 필요하다고 하더래요."


제 19 장 하니는 병원생활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다. 이제야,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찾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다른 의사들보다 훨씬 환자들과 인간관계가 좋았다. 진심으로 환자들을 돌보아주었기 때문이었다. 노인병 병동, 소아 병동, 산부인과 병동에서 근무했지만 월러스 박사의 배려로 말썽이 생길 만한 어려운 임무는 맡겨지지 않았다. 월러스는 하니를 병원에 남아 잇게 해서 자신이 필요할 때 그녀의 봉사(?)를 받겠다는 속셈이었다. 사실 하니는 간호사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심각한 의학적인 판단을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환자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면 되는 것이었다. '난 의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 하니는 생각했다. '그보다는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거야.' '넌 태프트 가문의 딸이야... 의사가 되어야만 해.' 오후에 일과가 끝나면 하니는 백화점이나 레코드 가게에 들러 소아과 병동에 입원해 있는 어린이들에게 줄 선물을 사러 다녔다. "난 아이들을 돌보는 게 정말 즐거워." 하니가 케트에게 말했다. "결혼하면 아이를 많이 낳을 거야?" "응. 언젠가는 아이를 많이 낳아 북적거리며 살고 싶어." 하니는 꿈꾸듯 말했다. "우선 결혼상대가 나타나야지..." 노인병 병동의 환자 중에 대니얼 맥과이어라는 노인을 하니는 좋아했다. 간경변증으로 입원한 그는 벌써 90 세가 넘었지만 항상 밝은 표정이었고 무엇에든 긍정적이었다. 젊은 시절에 도박사였던 맥과이어는 하니만 보면 내기를 걸자고 했다. "오늘 아침, 보조원이 틀림없이 식사를 늦게 가져올 거야. 50 센트 걸지!" "오후에 비가 올 게 분명해 1 달러 내기 하자구!" "오늘 야구시합에서 자이언츠 팀이 이기는 데 1 달러 걸까?" 하니는 언제나 그의 내기를 웃으며 받아들였다. "난 멀쩡하게 회복될 거야. 내기 걸자구. 10 대 1 로 걸어도 좋아!" "그 내기는 받아줄 수 없는데요..." 하니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저도 맥과이어 씨 편인걸요." "닥터 태프트 생각이 그런 줄 나도 알고 있지..." 맥과이어는 하니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몇 달만 더 젊었더라도..." 하니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걱정 마세요. 전 나이 지긋한 사람을 더 좋아해요." 어느 날 아침, 병원으로 맥과이어에게 편지가 왔다. 하니가 직접 그 편지를 가져갔다. "무슨 편지인지 좀 읽어주겠소?" 맥과이어는 이미 시력이 떨어져 글을 읽을 수 없었다. "물론이죠." 하니는 편지를 꺼내 잠시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아니... 복권에 당첨됐어요! 5 만 달러예요! 정말 축하해요." "거봐! 난 운이 좋은 사람이라구." 그도 소리쳤다. "언젠가는 한 번 복권에 당첨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어! 자, 축하 키스라도 해줘야지..." 하니는 몸을 숙여 그의 뺨에 키스했다. "하니, 난 정말 이 세상에서 제일 운이 좋은 사람이야!" 그날 오후, 하니가 다시 맥과이어를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하니가 의사 휴게실에서 쉬고 있을 때, 스티븐스 박사가 들어왔다. "누구 버고(virgo:별자리 중 처녀자리)인 사람 없소?" 의사 한 사람이 웃으며 대답했다. "숫처녀(virgin)를 찾는다면 아마 없을걸요." "버고 말이야." 스티븐스 박사가 다시 말했다. "지금 버고인 의사가 급히 필요해." "제가 버고인데요." 하니가 말했다. "무슨 일이세요?" 스티븐스 박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환자 중에 어처구니없는 여자가 한 사람 있어서 그래요. 버고가 아닌 사람은 옆에 오지도 못하게 아우성을 치는 거야." 하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가서 얘기해 보지요." "고맙소. 그 환자 이름은 프란시스 고든이오." 프란시스 고든은 최근 교통사고로 부서진 골반뼈를 인공뼈로 대체하는 수술을 받은 환자였다. 하니가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하니를 쳐다보고 말했다. "얼굴만 봐도 버고인 줄 알 수 있어요. 맞죠?" 하니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맞았어요." "아쿠아리안(물병자리)이나 리오(사자자리)는 의사가 될 자격이 없어요. 환자를 꼭 무슨 물건취급 하거든..." "우리 병원 의사는 다 우수한 사람들이에요." 하니가 말했다. "그들 모두가..." "무슨 소리! 그들 모두 돈벌이에 더 신경을 쓸걸?" 그녀는 하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당신은 달라요." 하니는 그녀의 진료기록을 훑어보다가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요?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요?" 하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여기... 직업이 심령술사라고 되어 있는데요..." 프란시스 고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안 믿어요?" 하니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이런... 잠시 앉아서 내 말 좀 들어봐요." 하니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손 좀 잡아봅시다." 하니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런 것을..." "글쎄, 손만 좀 줘봐요." 마지못해 하니는 손을 내밀었다. 프란시스 고든은 하니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뜨더니 그녀가 말했다. "여태까지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죠?" '어려운 일을 겪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하니는 생각했다. '이젠 내가 멀리 여행갈 거라고 말할 차례인가?' "당신은 많은 남자들을 이용해 왔죠?" 갑자기 하니는 몸이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최근에 와서 당신 마음에 상당한 변화가 온 것 같은데..., 안 그래요?" 하니는 당황했다. 빨리 병실에서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프란시스


고든의 말이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하니는 손을 빼면서 일어나려 했다. "이제 곧 사랑에 빠지게 될 거예요." "이제 그만 가봐야..." 하니가 일어나며 말했다. "상대는 예술가일 거예요." "난 예술가라고는 아는 사람이 없는데요." "곧 알게 될 게요." 프란시스 고든은 하니의 손을 놓아주었다. "시간 날 때 들러서 얘기나 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죠." 하니는 빠른 걸음으로 병실을 나왔다. 하니는 새로 입원한 환자인 오웬스 부인의 병실에 들렀다. 깡마른 체구에 40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그러나 진료기록에는 나이가 28 세로 되어 있었다. 그녀는 코뼈가 부러졌고 두 눈은 심하게 멍들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가 붓고 상처투성이였다. 하니는 그녀의 침대로 다가갔다. "난 닥터 태프트예요." 오웬스 부인은 표정 없이 멍한 눈으로 하니를 쳐다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어요." 말을 하느라 입을 열었을 때 앞니 두 개가 부러져 나간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니는 진료기록을 훑어보았다. "여기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지고 골반뼈도 금이 갔다고 되어 있는데요?" "그래요. 아주 심하게 다쳤어요." "그런데 눈은 왜 멍이 들었죠?" "굴러떨어지면서 이렇게 됐어요." "결혼하셨어요?" "네." "아이는요?" "둘이에요." "남편은 뭘 하시나요?" "내 남편과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공연히 남편을 개입시킬 것 없어요." "그렇게는 안됩니다." 하니가 말했다. "남편이 구타한 거죠?" "아니에요." "아무래도 경찰에 보고해야 될 것 같아요." 오웬스 부인은 갑자기 당황했다. "안돼요! 그러면 안돼요!" "왜 안되죠?" "날 죽일 거예요! 내 남편이 어떤 사람인 줄 몰라서 그렇지..." "전에도 이렇게 맞은 적 있어요?" "그래요. 하지만... 그 사람은 원래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가끔 술에 취하면 발끈하는 성질이아..." "왜 이혼하지 않고 이렇게 당하고 있는 거예요?" 오웬스 부인은 허탈한 표정이었다. 말하는 것조차도 고통스러운 듯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아이들하고 어디로 가겠어요?" 듣고 있던 하니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필요가


없어요. 당신과 아이들을 보호해 줄 사회사업기구가 여러 곳 있어요." 오웬스 부인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난 지금 한푼도 없어요. 그 사람이 이렇게 변한 후에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젠 괜찮아질 거예요. 내가 책임지고 당신을 돌볼게요." 5 분 후, 하니는 월러스 박사의 사무실로 갔다. 월러스는 반색을 하면서 이번에는 뭘 가지고 왔을까 궁금해 했다. 단둘이 그의 사무실에서 만날 때마다 하니는 더운 꿀, 초콜릿 시럽, 따뜻한 물, 그리고 그가 제일 좋아하는 메이플 시럽 등을 사용해서 그를 즐겁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우선 문을 잠그지." "벤, 그럴 시간 없어요. 곧 돌아가야 돼요." 하니는 오웬스 부인 얘기를 했다. "경찰에 보고해야 되겠는데." 월러스가 말했다. "법이 그렇게 돼 있잖아." "여태까지 법이 그녀를 보호해 주지 못했어요. 그녀가 남편과 이혼하고 새 출발을 하는 게 중요해요. 전에 비서로 일한 적이 있대요. 병원에 자료실 직원이 한 명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야 필요하지. 하지만... 아니, 무슨 얘기야!" "고마워요." 하니가 말했다. "우선 그녀의 상처를 치료하고 살 곳을 찾아주어야겠어요. 그런 다음 새 직장에 출근하는 거예요." 월러스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해보지." "벤, 당신은 참 착한 사람이에요." 하니가 말했다. 다음날 아침, 하니는 다시 오웬스 부인을 찾아갔다. "오늘은 좀 어때요?" 하니가 물었다. "훨씬 좋아졌어요. 고맙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되죠? 남편은 내가 너무 오래 집을 비우면 좋아하지..." "당신 남편은 다시는 당신을 괴롭히지 못할 거예요." 하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살 곳을 마련할 때까지 그냥 있으세요. 상처가 다 회복되면 병원에서 일할 수 있을 거예요." 오웬스 부인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이고말구요. 아이들과 함께 살 아파트도 구해 볼게요. 어태까지 당해 온 그런 폭력은 앞으론 없을 거예요. 당신은 떳떳하게 새 직장에서 새 출발 할 수 있어요." 오웬스 부인은 하니의 손을 잡았다. "뭐라고 감사해야 될지..."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옥 같았는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 "짐작이 가요." 하니가 말했다. "하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예요." 오웬스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하니가 다시 오웬스 부인을 찾아갔을 때, 그녀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오웬스 부인은 어디 갔어요?" "글쎄요..." 간호사가 대답했다. "오늘 아침 남편이 와서 퇴원시키는 것 같던데요." "닥터 태프트... 215 호 병실로... 닥터 태프트... 215 호 병실로..."


하니를 찾는 구내방송이 들려왔다. 서둘러 걸어가다가 복도에서 케트와 마주쳤다. "뭐가 그리 바빠?" 케트가 물었다. "말도 마. 계속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어." 하니가 말했다. 215 호 병실에서는 리터 박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에는 20 대 후반의 인도 남자가 누워 있었다. "이 사람이 닥터 태프트의 환자 맞죠?" 리터 박사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영어를 전혀 못한다고 적혀 있는데, 맞소?" "그렇습니다." 그는 진료기록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게 닥터 태프트의 필적 맞소? 구토, 복통, 갈증, 그리고 탈수현상?" "그렇습니다." 하니가 대답했다. "... 그리고 맥박도 낮아지고..." "그렇습니다." "어떻게 진단했소?" "단순한 위염으로 생각했는데요." "대변검사는 해봤소?" "아뇨. 그런 게 왜 필요하죠?" "지금 이 환자는 콜레라에 걸렸어! 그러니 대변검사를 해야 될 것 아냐!" 리터 박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돌면 이 병원문을 닫아야 된단 말이야!" 제 20 장 "뭐라구 콜레라? 아니, 우리 병원에 콜레라 환자가 입원해 있단 말이야?" 벤자민 월러스 박사가 고함치듯 말했다. "그런 것 같네." "확실해." "의심할 여지가 없어." 리터 박사가 말했다. "대변검사에서 콜레라 균이 검출됐어. 혈액의 산성이 높아지고, 저혈압에다 맥박도 정상 이하고, 게다가 산소부족으로 청색증까지 나타났어." 콜레라 같은 모든 전염병은 주 보건위원회와 조지아 주 아틀란타 시에 있는 연방정부기관인 전염병관리 센터에 보고하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었다. "벤, 아무래도 이건 정식 보고를 해야겠어." "그렇게 되면 병원을 닫게 될 것 아냐!" 월러스 박사는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럴 수는 없어. 어떻게 입원환자를 모두 격리시키고 새 환자도 받지 않을 수 있겠어?"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환자 자신도 알고 있나?" "모를 거야.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거든. 인도 사람이야." "환자와 접촉이 있었던 사람은 몇이나 되지?" "닥터 태프트와 간호사 두 사람이야." "닥터 태프트가 위염으로 진단했단 말이지." "그랬어. 딱하지만 닥터 태프트를 자네가 해고해야 되겠군." "글쎄,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는데." 월러스 박사가 말했다. "실수야


누구든 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진료기록에는 위염으로 되어 있는 거지?" "그래." 월러스 박사는 결심했다. "그냥 그대로 놔두자고. 이렇게 하면 어때? 우선 탈수증을 해소하려면 계속 정맥 주사로 수분공급을 해주어야 돼. 거기다 테트라 사이클린 항생제를 투여하면 되겠지. 빠른 시간 내에 환자의 혈액 양과 체내 수분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면 얼마 안 돼서 정상에 가깝게 회복될 거야." "그럼 보고를 하지 않겠다는 거야?" 리터 박사가 물었다. 월러스 박사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되물었다. "위염 환자가 있다는 보고도 해야 돼?" "그럼 닥터 태프트와 간호사들은 어떻게 할 거야?" "그들에게도 테트라 사이클린을 투여하라구. 그 환자 이름이 뭐지?" "판디트 자와." "48 시간 동안 격리시키라구. 그 동안 회복되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할 테니..." 하니는 어쩔 줄 몰랐다. 서둘러 페이지를 찾아갔다. "날 좀 도와줘." "무슨 일인데 그래?" 하니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환자와 얘기를 좀 해봐야겠는데 영어라곤 한 마디도 몰라. 넌 인도 말을 할 줄 알잖아." "힌디어는 좀 하지." "그게 뭐든... 하여간 통역 좀 해줘." "그래." 10 분 후 페이지는 판디트 자와와 얘기하고 있었다. "압 기 타비야트 카이시 하이?" "카라바하이." "압 잘드 아카 코 홈 카덴지." "바그완 압 기 소네이 가." "압 가 일라지 훔 잘브 슈루 카덴지." "슈크리아." "도스트 키스 라야 하인?" 페이지는 하니를 복도로 데리고 나갔다. "뭐래?" "고통이 아주 심하대. 곧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 줬어. 저 사람이 그건 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했어. 우리가 곧 치료를 시작할 거라고 했더니 고맙다고 했어." "정말 고마워." "우리 사이에 고맙긴 뭘..." 콜레라는 탈수현상이 생기면 24 시간 내에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무서운 전염병이지만, 치료효과가 있으면 불과 몇 시간 만에 호전될 수도 있는 병이었다. 치료를 시작한 지 다섯 시간이 지나자 판디트 자와는 거의 정상인 같이 보였다.


페이지는 지미 포드의 병실에 들렀다. 그녀를 보자 지미의 표정이 밝아졌다. "안녕." 아직도 약한 목소리였지만 지미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오늘은 기분이 좀 어때?" 페이지가 물었다. "좋아요. 어느 의사가 환자에게 이렇게 말했대요. '이제부터 당신의 건강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담배를 끊고, 술도 끊고, 그리고 성생활도 줄이는 것이오.' 그 환자 말이,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최선을 기대하겠소? 차선의 방법이나 알려줘요.' 하더래요." 페이지는 이제 지미가 완전히 회복되어 간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케네스 말로리는 근무를 끝내고 케트와 만나러 갈 참이었다. 그때 자신을 찾는 구내방송이 들려왔다. 그냥 못 들은 척하고 나가버릴까 잠시 망설였다. 다시 그를 찾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마지못해 그는 구내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닥터 말로리요." "닥터 말로리? 급히 제 2 응급실로 좀 와주시겠어요? 지금 응급환자가..." "미안하지만," 말로리가 말했다. "난 지금 막 교대가 끝났소. 다른 의사를 찾아봐요." "지금 이 환자를 볼 수 있는 의사가 아무도 없어요. 급성 출혈성 위궤양이에요. 생명이 위험해요. 시간을 끌면..." '빌어먹을!' "알았소. 바로 가겠소." '케트에게 늦는다고 전화해야겠군.' 응급실에 누워 있는 환자는 60 대 남자였다. 거의 의식이 없었고 얼굴은 백지장 같았으며, 이마에는 땀방울이 솟아 있었다. 심한 통증에 호흡은 거칠었다. 말로리는 환자의 상태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당장 수술실로 데려가! 응급상황이야!" 15 분 후 환자는 수술대 위에 올려졌다. 마취의가 환자의 혈압을 점검하고 있었다. "혈압이 급격히 떨어지는데..." "빨리 수혈을 하라구." 케네스 말로리는 서둘러 수술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피부와 지방질층을 절개하고 근육 부위도 열었다. 드디어 매끄럽고 거의 투명한 복막이 보이고 위장이 나타났다. 위장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지혈기!" 말로리가 말했다. "혈액은행에서 수혈용 혈액을 더 가져아야겠어." 그는 피가 흐르는 혈관을 지혈하기 시작했다. 수술은 네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수술이 끝나자 말로리는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환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제 고비는 넘겼어." 간호사 한 사람이 말로리에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정말 닥터 말로리가 없었더라면 큰일날 뻔했어요." 그는 간호사를 다시 쳐다보았다. 젊고 예쁜 그 간호사는 눈에 보이게 호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가씨, 조금만 기다려. 나중에...' 말로리는 혼자 생각했다. 그는 신참 레지던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잘 마무리짓고 회복실로 데려가. 내일 아침에 다시 보도록 하지." 말로리는 케트에게 지금이라도 전화해 볼까 생각했지만 벌써 자정이었다. 대신 장미 스물네 송이를 케트에게 보냈다. 말로리는 아침 6 시에 출근해 우선 회복실에 있는 환자를 찾아갔다. "지금 막 깨어났어요." 간호사가 말했다.


말로리는 침대에 다가갔다. "닥터 말로리입니다. 기분이 좀 어떠세요?" "살아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소." 환자는 간신히 말했다. "당신이 내 생명을 구했다고들 하더군요. 너무 어처구니없이 일이 벌어져서 종잡을 수가 없소. 만찬에 참석하려고 차를 타고 가던 중, 갑자기 통증이 오면서 기절해 버린 것 같소. 다행히도 이 병원에서 한 블록밖에 안되는 곳이었기에 바로 이곳 응급실로 데려온 모양이오." "정말 운이 좋았어요. 출혈이 상당히 심했거든요." "10 분만 더 지체했더라도 난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고들 하더군요. 닥터 말로리, 정말 고맙소." 말로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당연히 할 일인걸요." 환자는 그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난 알렉스 해리슨이오." 말로리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해리슨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는 해리슨의 맥을 짚어보았다. "아직도 통증이 있습니까?" "약간... 하지만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았잖소?" "마취는 곧 풀릴 겁니다." 말로리가 말했다. "그리고 통증도 가라앉을 겁니다. 수술이 아주 잘됐기 때문에 걱정할 것 없어요." "병원에 얼마나 더 있어야 될 것 같소?" "며칠만 더 안정하면 퇴원할 수 있습니다." 원무과 직원 한 사람이 입원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해리슨 씨, 사무적인 일로 귀찮게 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원무과에서는 선생님의 의료보험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아야 입원수속을 마칠 수 있어서요." "내가 치료비를 낼 수 있는지 알고 싶다는 말이오?" "글쎄,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샌프란시스코 신용은행에 연락해 보시오." 그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 은행이 내 소유요." 그날 오후, 말로리가 알렉스 해리슨에게 회진 갔을 때 아름다운 여자가 옆에 있었다. 30 대 초반의 그녀는 금발에 날씬한 몸매로 품위있는 외모였다. 입고 있는 옷은 유럽 일류 디자이너의 작품으로 말로리의 월급보다 훨씬 비쌀 것 같았다. "아! 날 살려준 사람이 나타났군." 알렉스 해리슨이 말했다. "닥터 말로리 맞소?" "네 케네스 말로리입니다." "닥터 말로리, 이애가 내 딸 로린이오." 그녀는 갸름하고 깨끗하게 다듬어진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께서 당신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셨어요." 그는 미소지었다. "의사가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거죠." 로린은 말로리를 쳐다보며 흡족한 표정이었다. "의사라고 모두 그렇지는 않잖아요." 말로리는 해리슨 부녀가 이런 시립병원에 드나들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알렉스 해리슨에게 말했다. "이제 수술 경과가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해리슨 씨의 주치의를 불러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알렉스 해리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소. 내 생명을 구한 의사는 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당신이잖소. 그건 그렇고, 이곳 병원생활이 어떻소?"


말로리는 좀 의아해 했다. "그런 대로 괜찬하요. 흥미 있는 일이 많은 편이지요. 왜 그러시지요?" 해리슨은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글쎄, 내 생각엔, 당신같이 능력있고 잘생긴 젊은 의사는 여건만 좋으면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거요. 그런데 이런 병원에서는 별로 전망이 없는 것 같아서..." "글쎄요, 전..." "내가 여기서 수술받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소." 로린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당신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말씀이세요." "로린 말이 맞소. 내가 퇴원한 다음에 나하고 진지하게 얘기해 봅시다. 우리 집에서 저녁이라도 하면서 얘기하면 어떻겠소?" 말로리는 로린을 쳐다보고 말했다. "초대해 주신다면 기꺼이 가지요." 그 순간부터 그의 운명은 바뀌었다. 케네스 말로리는 케트에 관한 내기를 빨리 매듭짓고 싶었으나, 그녀와 만나려고만 하면 공교롭게도 일이 생겨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케트, 월요일 저녁이 어때?" "좋아요." "그럼 내가 7 시쯤 데리러..." "잠깐. 내 정신 좀 봐! 월요일 저녁에는 뉴욕에서 사촌언니가 올거예요. 아무래도 그날은..." "그럼 화요일은?" "화요일에는 당직이에요." "수요일도 바빠?" "수요일에는 페이지, 하니와 함께 어디 좀 가기로 약속했어요." 말로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내기의 시한이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목요일은?" "그날은 괜찮아요." "좋아. 내가 데리러 갈까?"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셰즈 파니스 레스토랑에서 만나요." "그래도 좋지. 8 시쯤 어때?" "좋아요." 케네스 말로리는 셰즈 파니스에서 9 시가 넘도록 기다렸으나 케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집으로 전화해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할수없이 그대로 30 분을 더 기다렸다. '아마 날짜를 착각했을 거야.' 그는 생각했다. '일부러 날 바람맞힐 리가 없어.' 다음날 아침, 말로리는 병원 복도에서 케트와 마주쳤다. 그를 본 케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 케네스! 정말 너무 미안해요! 내가 어쩌면 그렇게 멍청했는지... 생각보다 근무가 일찍 끝나는 바람에 저녁약속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었어요. 그래서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깨어보니 벌써 자정이 넘었더라구요. 정말 미안해서 어쩌죠? 거기서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잠을 자다가 약속을 어기다니, 멍청하기는...' 그는 케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우린 서로 좋아하게 됐잖아? 난 당신 생각만 하면 미칠 지경이야."


"나도 마찬가지예요." 케트가 말했다.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요." "이번 주말에 만나서..." "이번 주말에는 당직근무에 선약까지 있는데... 어떻게 하죠?" 이렇게 두 사람의 데이트는 계속 연기되었다. 내기의 시한은 점점 다가왔다. 케트가 페이지에게 말로리와 마주쳤던 일을 얘기하고 있을 때 삐삐가 울렸다. "잠깐만." 케트는 전화를 걸었다. "닥터 헌터예요." 잠시 상대방의 말을 들었다. "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페이지에게 말했다. "급히 가봐야겠어. 응급상황이래." 페이지는 한숨을 쉬었다. "뭐 좀 색다른 소식은 없어?" 케트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의 스무 개도 넘는 이동침대에는 모두 응급환자들이 누워 있었다. 이곳에는 교통사고 환자, 총이나 칼을 맞은 사람, 팔다리가 부러진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그칠 새가 없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람들만 모아놓은 요지경 같았다. 케트는 응급실에 들어갈 때마다 지옥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료보조원 한 사람이 케트에게 다가왔다. "닥터 헌터시죠?" "어떤 환자 때문에 날 찾았어요?" 케트가 물었다. 보조원은 응급실 구석에 있는 이동침대로 케트를 안내했다. "환자가 의식을 잃고 있어요. 심하게 구타당한 것 같아요. 얼굴과 머리를 심하게 다쳤어요. 코뼈가 부러지고, 어깨 한쪽이 빠지고, 오른팔 뼈에 최소한 두 군데 금이 가고..." "그런데 왜 날 찾았죠?" "앰블런스의 치료원이 뇌를 다친 것 같다고 했어요. 머리를 심하게 다쳤기 때문에 뇌진탕이 아닐까..." 환자의 얼굴은 상처투성이로 심하게 부어오르고 피범벅이 되어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최고급 양복과 셔츠, 악어가죽 구두... 케트는 섬뜩했다. 몸을 숙이고 얼굴의 피를 닦아내면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바로 루 디네토였다. 케트는 익숙한 솜씨로 머리를 만져보고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뇌진탕이 분명했다. 급히 X-선과에 전화를 걸었다. "닥터 헌터예요. 즉시 뇌 단층촬영을 해야 되는 환자가 있어요. 환자 이름은 디네토, 루 디네토예요. 빨리 의료보조원을 보내요. 응급상황이에요." 전화를 끊고 돌아온 케트는 다시 디네토를 들여다보고 응급실 의료보조원에게 지시했다. "이 환자 옆을 떠나면 안돼요. X-선과에서 보조원이 오면 같이 3 층으로 데려와요. 내가 미리 가서 기다릴게요." 30 분 후, 3 층 X-선과에서 케트는 단층촬영한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뇌출혈이 있는데... 열이 나고... 충격이 아주 심했어... 우선 24 시간 동안은 안정이 필요해요. 일단 상태가 안정되어야 수술 일정을 잡을 수 있어요." 케트는 디네토가 당한 것이 마이클에게 어떤 영향이 있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마이클도 이렇게 되는 건 아닐까...' 페이지는 지미의 병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본 지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레인코트 속 알몸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좀 돈 친구 얘기 들어봤어요? 하루는 그 친구가 봉제공장 지역에서 한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레인코트를 활짝 열어 젖혔대요. 그 여자가 잠시 훑어보더니, '안감이 왜 그 모양이야?' 하더래요." 드디어 케트와 말로리는 바닷가 외딴 곳에 있는 낭만적 분위기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마주 앉은 말로리를 쳐다보면서 케트는 약간의 죄의식을 느꼈다. '공연히 이런 게임을 시작했나 봐...' 그녀는 생각했다. '이자의 속셈을 뻔히 알고 있지만,,, 다 알면서도 난 즐기고 있잖아! 미친 짓이지... 그래도 계획을 바꿀 수는 없어...' 두 사람은 식사 후 커피까지 다 마셨다. 케트가 몸을 앞으로 당기며 말했다. "케네스, 우리 자기 아파트로 가면 어때요?" "좋은 생각이야." '됐어!' 말로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순간, 뭔가 불편하다는 듯 케트는 앉은 채로 몸을 움직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이런..." "왜 그래? 뭐 잘못됐어?" 말로리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잠깐 실례하겠어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말로리를 남겨두고 케트는 화장실로 갔다. 몇 분 후, 화장실에서 돌아온 케트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때가 좋지 않아요. 공교롭게도... 정말 미안해요. 아무래도 그냥 집으로 가야겠어요." 말로리는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었다.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기만 하면 반드시 차질이 생기는데 어이가 없었다. "그러지." 말로리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내색하지 않는 게 쉽지 않았다. 얼마 남지도 않은 내기 시한이 또 4 - 5 일이나 없어진 것이었다. 케트가 아파트로 돌아간 지 5 분도 안됐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는 속으로 미소지었다. 말로리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찾아올 핑계를 생각해 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로리가 다시 찾아오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하고 새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케네스..." 라이노와 '그림자'가 서 있었다. 케트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다. 라이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디네토 씨의 수술을 맡았다지요?" 케트는 입 안이 바짝 말라드는 것 같아 말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요." "절대로 그분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안돼요." "그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케트가 말했다. "난 하루 종일 근무해서 너무 피곤해요. 좀 쉬어야겠으니..." "생명을 잃을 가능성이 있소?" '그림자'가 조용히 물었다.


케트는 잠시 주저했다. "어떤 뇌수술이든 생명을 잃을 가능성은 항상 있는 거..."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안돼요." "자신의 환자를 잃고 싶은 의사가 어디 있어요? 난 최선을..." "하여간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시오." '그림자'는 라이노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 이제 가자구." 케트는 방을 나가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문 밖에서 '그림자'가 돌아섰다. "마이클에게 안부나 전하시오." 케트의 몸이 갑자기 굳어졌다.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우리는 협박 같은 건 하지 않소. 닥터 헌터,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거요. 만약 디네토 씨가 살아나지 못하면 당신도 당신 가족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이오." '그림자'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21 장 의사 전용 탈의실에는 대여섯 명의 레지던트가 케네스 말로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로리가 들어오자 그룬디가 입을 열었다. "엠바카데로의 여성 정복왕이 개선하시는구먼! 그 재미 본 얘기 좀 자세히 해보라구." 그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정복당한 당사자가 얘기해야 된다는 거지." "일이 좀 공교롭게 돼서 며칠 더 걸리겠어." 말로리는 자신만만하게 미소지었다. "며칠 내로 내기 건 돈이나 준비하라구." 케트와 페이지는 수술복을 갈아입을 때 만났다. "의사를 수술해 본 적 있어?" 케트가 물었다. "없는데." "넌 운이 좋았던 거야. 의사들이 아프면 이 세상에서 제일 까다로운 환자가 된다구. 아는 게 너무 많거든." "누구를 수술하는데?" "머빈 프랭클린 박사야. 조금이라도 아픈 걸 못 참는 사람이야." "고생 좀 하겠군..." "조금이 아니야." 케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머빈 프랭클린 박사는 60 이 넘은 나이에 머리는 다 벗겨졌고 깡마른 체구에 신경질이 심한 의사였다. 병실에 들어오는 케트를 복 대뜸 소리쳤다. "주치의가 뭘 하다가 이제야 나타나는 거야? 수술 전 검사 결과는 어떻게 됐어?" "다 나왔어요." 케트가 대답했다. "모든 게 정사 이고 수술에 지장있는 문제는 전혀 없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 병리검사실 직원들을 믿을 수 있어? 걸핏하면 말도 안되는 실수를 저지르잖아. 수혈도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엉뚱한 혈액형으로 할 수 있다구." "걱정 마세요. 제가 직접 확인할게요." 케트가 다독거렸다. "수술의가 누구야?" "닥터 저건슨과 저예요. 프랭클린 박사님, 조금도 걱정할 것 없어요. 별로 어려운 수술도 아니고 우리 모두가 신중하게..."


"지금 수술받는 사람은 나야! 내 뇌를 수술하는 거잖아? 수술에는 위험이 따르게 되어 있어. 왜 그런 줄 알아? 수술의라는 자들 반수는 직업을 잘못 선택한 자들이야. 백정이 되었어야 할 인간들이 의사라니..." "닥터 저건슨은 아주 훌륭한 수술의잖아요?" "그건 나도 알아! 아무나 날 수술하게 할 것 같아? 그리고 마취의는 누구야?" "닥터 밀러일 거예요." "그 얼간이가 날 마취한다구? 안돼! 딴 사람으로 바꿔야겠어." "프랭클린 박사님..." "아냐! 바꿔야만 돼! 혹시 닥터 핼리버튼이 시간이 나는지 알아봐." "그러죠." "그리고 수술실 간호사들 명단을 가져와! 검토 좀 해봐야겠어." 케트는 잠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프랭클린 박사님, 이 수술을 직접 집도하시겠어요?" "뭐라구?" 그는 놀란 듯 케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무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수는 없겠지." 케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를 믿고 맡겨두세요." "알았어. 그러고 보니 당신 참 괜찮은 의사야. 맘에 들어." "저도 박사님을 좋아해요. 간호사가 진정제 드렸어요?" "그럼." "좋아요. 이제 곧 준비가 끝날 거예요. 뭐 필요한 게 더 있으세요?" "있지. 그 멍청한 간호사들에게 정맥 찾는 법 똑똑히 가르치라구." 머빈 프랭클린 박사는 제 4 수술실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는 병실에서부터 수술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잠시도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건 잊으면 안돼!" 프랭클린이 말했다. "마취약은 최소량만 쓰라구. 뇌 자체는 감각이 없으니까 절개할 때의 통증만 없애주면 돼. 덮어놓고 전신을 마비시키면 안돼!" "잘 알고 있어요." 케트는 짜증스러운 내색 없이 대답했다. "실내온도는 절대로 섭씨 4 도를 넘으면 안돼! 4 도가 절대상한선이야." "알았어요." "수술중에는 빠른 음악을 틀도록 해! 그래야 바짝 긴장하게 된다구." "그러죠." "수술보조 간호사를 항상 가까이 대기시켜야 돼."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취약이 투여되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잔소리는 계속되었다. 두개골이 전기톱으로 삽시간에 절개되고 뇌가 드러나자 케트가 말했다. "저기 혈전이 잘 보이는... 별로 심한 것 같지는 않아." 케트는 이제 환부에만 몰두했다. 세 시간 후, 수술은 차질 없이 끝나고 신참 레지던트가 절개된 부위를 봉합하고 있었다. 그때 외과 과장인 조지 엥글런드 박사가 수술실에 들어와 케트에게 다가왔다. "케트, 이제 수술이 다 끝났지?" "봉합이 거의 끝났어요." "그럼 닥터 저건슨에게 맡기고 빨리 좀 봐줘야 될 환자가 있어. 당신


환자 한 사람이 상황이 급해졌어." 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저건슨에게 말했다. "좀 마무리지어 주겠어요?" "걱정 말아요." 케트는 엥글런드 박사를 따라 수술실을 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당신이 하루 이틀 안정시킨 다음 수술하겠다던 환자가 갑자기 또 뇌출혈이 시작됐어. 지금 제 3 수술실로 데려오는 중이야. 아무래도 좀 힘들 것 같아. 하지만 당장 수술해 보는 수밖에 없잖아?" "환자가 누군데요?" "디네토 싸라더군." 케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디네토?" '만약 디네토 씨가 살아나지 못하면 당신도 당신 가족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이오.' 케트는 서둘러 제 3 수술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선가 라이노와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거요?" 라이노가 물었다. 케트는 입 안이 바짝 말라 말하기가 힘들었다. "디네토 씨가 다시 뇌출혈이 시작됐어요. 빨리 수술해야겠어요." '그림자'가 케트의 팔을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요. 내가 한 말을 잊지 않았겠지요? 디네토 씨를 꼭 살려내야 돼요." 케트는 아무 대꾸 없이 서둘러 수술실로 들어갔다. 케트와 응급수술을 함께 하게 된 의사는 닥터 밴스라는 유능한 의사였다. 케트는 의례적인 수술 전 소독을 시작했다. 우선 양팔을 30 초씩 깨끗이 씻고 나서 손도 씻었다. 또 한번 되풀이한 다음 손톱 사이도 소독했다. 닥터 밴스가 손을 씻으며 케트에게 말을 걸었다. "기분이 어때요? 계속 수술하느라 좀 피곤하지 않아요?" "아니, 괜찮아요." 케트는 초조한 심정을 내색하지 않았다. 환자를 실은 이동침대가 수술실로 들어왔다. 간호사와 보조원들이 의식을 반쯤 잃고 있는 루 디네토를 조심스럽게 수술대로 옮겼다. 머리칼을 깨끗이 면도로 밀어내고 씻은 다음 메르시오레이트 소독제를 발랐다. 메르시오레이트는 피부를 소독해 줄 뿐만 아니라 피부가 수술실 조명 아래서 밝은 오렌지색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디네토의 얼굴은 머리와는 대조적으로 시체같이 창백했다. 수술 팀은 모두 자리를 잡고 준비를 끝냈다. 닥터 밴스와 또 한 사람의 레지던트, 마취의, 수술보조 간호사 두 사람, 일반보조 간호사, 모두가 케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케트는 다시 한번 수술기구와 연결된 기계장치를 둘러보았다. 산소공급 양, 이산화탄소의 수준, 실내온도, 근육작동기의 작동 수준, 심장박동 수준, 뇌파의 움직임, 혈압 수준을 보여주는 모니터가 켜져 있었고, 기계장치가 끊어졌을 때의 경고등도 연결되어 있었다. 모두 정상으로 작동되는 것을 확인하고 케트는 마취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디네토의 오른팔에 혈압계를 연결하고 얼굴에 고무로 된 호흡기를 덮었다. "자, 이제 숨을 깊이 들이마셔요. 세 번만 깊이 마시면 돼요." 디네토는 숨을 두 번 들이마시자 의식을 완전히 잃었다. 수술이 시작되었다. 케트는 큰 소리로 수술 팀에 말했다. "뇌 한복판에 문제가 생겼어.


동맥이 좀 굵은데 혈전이 생겨서 혈액순환을 막고 있어. 뇌 오른쪽의 미세한 혈관으로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왼쪽 혈관도 약간 영향을 받았고..." 케트는 좀더 깊이 들어갔다. "혈전의 위치가 상당히 깊은데... 메스!" 의료용 전기 드릴로 뚫은 작은 동전 크기만한 구멍이 환자의 머리에 나 있었다. 케트는 우선 경뇌막을 절개하고 그 속의 뇌피질에 다다랐다. "핀셋!" 간호사가 전기 핀셋을 건넸다. 케트는 절개된 부위를 전기 핀셋으로 고정시켰다. "출혈이 아주 심한데요." 닥터 밴스가 말했다. 케트는 보비로 출혈하는 혈관을 지혈시키기 시작했다. "이제 곧 지혈될 거야." 닥터 밴스는 경뇌막에 댄 작은 솜뭉치가 피에 젖는 대로 흡입기를 작동시켜 피가 고이지 않도록 조치했다. 이제 출혈하던 혈관은 확인되었고, 피가 응고되면서 점차 지혈되었다. "잘 되어가는데요." 닥터 밴스가 말했다. "위험한 상황은 지난 것 같아요." 케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바로 그 순간, 루 디네토의 몸이 갑자기 굳어지면서 경련을 일으켰다. 마취의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혈압이 갑자기 떨어져요!" "빨리 수혈하도록 해!" 케트가 소리쳤다. 시선이 모두 벽의 모니터로 쏠렸다. 환자의 신체기능을 나타내는 모니터의 곡선이 점점 수평으로 변하고 있었다. 심장박동을 나타내는 곡선이 두어 번 오르내리다 수평에 가까운 선으로 이어졌다. "전기충격!" 케트가 소리쳤다. 재빨리 전류방출기를 환자의 가슴에 연결하고 전기충격장치를 가동했다. 디네토의 몸이 한번 들썩였지만 모니터에는 변화가 없었다. "빨리 강심제를 주사해! 서둘러!" "심장이 멎었어요!" 잠시 후 마취의가 소리쳤다. 케트는 전기충격장치의 다이얼을 높이고 다시 한번 시도했다. 대네토의 몸이 또 한번 들썩였다. "심장박동이 멎었어요." 마취의가 다시 소리쳤다. "전혀 반응이 없어요." 그래도 케트는 단념하지 않고 다시 한번 전기충격장치를 작동시켰다. 디네토의 몸은 더 심하게 들썩였지만 모니터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안되겠소." 닥터 밴스가 말했다. 제 22 장 '적색 경보'는 환자의 생명이 위독할 때, 그런 응급 상황에 대비하고 있는 특수 의료진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경보였다. 루 디네토의 심장이 수술 도중에 멈추자 수술실 담당 적색경보 팀이 달려왔다. 케트는 계속 반복되는 구내방송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적색경보, 제 3 수술실... 적색경보..." '적색(Red) 소리가 꼭 죽었다(Dead)는 것처럼 들려...' 케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전기충격장치를 작동해


보았다. 디네토의 생명을 구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마이클의 생명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디네토의 몸은 들썩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반응이 없었다. "한번 더 해봐요!" 닥터 밴스가 소리쳤다. '우리는 협박 같은 건 하지 않소. 닥터 헌터,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거요. 만약 디네토 씨가 살아나지 못하면 당신도, 당신 가족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이오.' 케트는 기계의 다이얼을 조정하고 또다시 작동시켰다. 디네토의 몸이 몇 센티미터 공중으로 들썩 떴다가 내려앉았다. "한번 더!"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케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마이클과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어.' 수술실은 이제 적색경보 팀까지 가세하여 의사와 간호사로 붐볐다. "뭘 기다리는 거요?" 의사 한 사람이 소리쳤다. 케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다시 전기충격을 가했다. 아무 반응도 없다가 잠시 후 모니터에 미미한 파장이 나타났다. 그 파장은 잠시 멈추었다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다시 멈추었다가 또다시 움직였다. 모두 숨을 죽이고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니터의 파장은 점점 강해지고 마침내 일정한 리듬을 되찾았다. 케트는 멍하니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움직일 줄 몰랐다. 수술실에 있던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이제 살아난 거야!" 누군가가 소리쳤다. "세상에, 정말 아슬아슬했어!" '정말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 상상도 못할 거야!' 케트는 생각했다. 두 시간 후, 루 디네토는 수술대에서 이동침대로 옮겨져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케트는 이동침대가 중환자실에 도착할 때까지 옆에서 따라갔다. 복도에서 라이노와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다. "수술은 잘되었어요." 케트가 말했다. "디네토 씨는 완전히 회복될 거예요." 케네스 말로리는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오늘이 내가 시한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 이를 때까지 그는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았었다. 케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그녀를 데리고 자는 것을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그녀만은 안될 거라구? 오히려 적극적으로 덤벼드는데?' 그러나 어느덧 시한이 다 지나가고 오늘 어떻게든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문제가 아주 심각해진다. 말로리는 공교롭게 틀어지던 일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침실로 막 들어가려던 참에 케트의 동료 의사들이 들어오던 일... 케트가 데이트 시간을 내려고 할 때마다 피치 못할 일이 생기고... 자신이 옷을 벗고 서 있는 상황에서 삐삐가 울려 그냥 나간 일... 그녀의 사촌이 갑자기 뉴욕에서 내려왔던 일... 깜빡 잠이 들어 데이트 시간을 놓쳤던 일... 절묘한 시간에 멘스가 시작된 일... 그는 문득 깨달았다. '아니, 이것 봐라!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야!' 케트가 고의적으로 시간을 끈 것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내기 건 사실을 미리 알고 골탕을 먹이려고 작정한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 때문에 1 만 달러를


내놓아야 되는 데 있었다. '망할 년!' 처음부터 이길 가능성이 없었던 내기였다. 케트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연극을 계속한 것이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실수를 했지?' 내기에 진다면 말로리는 그 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의사 탈의실로 들어가자 여러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 이제 지불해야 될 때가 됐어." 그룬디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말로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자정이 안됐잖아. 시한은 오늘밤 자정이 맞지? 이봐, 오늘 저녁에 틀림없이 해결할 거라구." 몇 사람이 코웃음쳤다. "좋아, 당사자 입에서 들으면 믿어주지. 하여간 내일 아침에는 현찰을 가지고 와야 될걸." 말로리는 웃었다. "현찰은 자네들이나 준비하라구."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 순간 말로리에게 묘안이 떠올랐다. 케네스 말로리는 휴게실에 앉아 있는 케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말을 꺼냈다. "오늘 환자 한 사람을 살려냈다는 얘기 들었어." "나도 살아났어요." "뭐라구?"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도 좀 살려줄 수 없어?" 케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 저녁식사나 하면서 얘기 좀 하지." "케네스, 난 너무 지쳤어요." 케트는 이제 말로리에게 연극하는 것에 지쳤다. '그만하면 할 만큼 했어.' 케트는 생각했다. '이젠 그만둘 때가 됐어. 그만두어야 돼. 덫을 놓았다가 내가 그 덫에 걸린 꼴이야.' 케트는 말로리가 정직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정말 사랑할 수도 있는 사람인데...' 말로리는 집요하게 졸라댔다. "저녁식사를 일찍 끝내면 되잖아. 어차피 저녁식사는 해야 되는 것 아냐?" 마지못해 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지막 데이트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저녁때 만나면 자신이 내기에 관해서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고 연극을 끝내버릴 작정이었다. "좋아요." 하니는 오후 4 시에 근무를 끝냈다. 저녁식사 전에 쇼핑할 시간이 있었다. 하니는 우선 아파트의 장식용으로 쓸 양초를 사고 유명 커피점에 가서 아침식사에 필요한 커피를 샀다. 마지막으로 침대 시트와 타월 등을 사러 크리스 켈리라는 유명 상점에도 들렀다. 물건을 한아름 안고 하니는 아파트에 들어섰다. '아무래도 저녁식사는 혼자 해야 되겠군. 뭘 만들가?' 케트는 말로리와 데이트하러 나갔을 것이고, 페이지는 당직근무중이었다. 하니는 두 손으로 물건을 안고 있어 발로 문을 닫았다. 물건을 탁자에 내려놓고 전등 스위치를 켰다. 순간 큰 체구의 흑인이 화장실에서 뛰쳐나왔다. 그는 카펫에 피를 흘리며 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었다. "끽소리도 내지 마! 소리치면 쏴버릴 거야!" 하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제 23 장 말로리는 프론트 가에 있는 슈로더 레스토랑에서 케트와 마주 앉았다. '이제 9 회말 투아웃이 되었군. 이러다가 퍼펙트 게임을 당하는 거 아냐?' 만약 내기에 건 1 만 달러를 내놓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았다. 병원 내에 삽시간에 소문이 퍼지고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입장이 될 것이 뻔했다. 케트는 환자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말로리에겐 무슨 얘기인지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이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밖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고 웨이터가 커피를 가져왔다. 케트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케네스,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돼요. 이제 일어나죠." 그는 꼼짝 않고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케트..." 말로리가 고개를 들었다. "당신에게 꼭 해야 될 얘기가 있어." "뭔데요?" "고백할 게 있어."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고백한다는 게 쉽지 않군." "무슨 얘긴데요?" 케트가 물었다. "이런 얘길 하자니 창피해서..." 말로리가 더듬거렸다. "내... 내가 멍청하게 다른 레지던트들과 내기를 했거든... 당신을 데리고 잘 수 있다고 말이야..." 케트는 말로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기라고요?" "내 말 좀 더 들어봐. 난 내가 한 짓이 창피해서... 처음에는 장난 비슷하게 시작했는데, 결국 내가 웃음거리가 되어버렸어. 내가 예측하지 못한 일이 생겼거든. 난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어." "케네스..." "케트, 난 지금껏 사랑에 빠진 적이 없었어. 여자는 수없이 사귀어 봤지만, 지금 같은 기분은 처음이야. 당신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난적이 없어." 그는 다시 깊은 숨을 내쉬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케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저... 내가 뭐라고..." "내가 청혼한 것은 당신이 처음이야. 내 청혼을 받아줘. 케트, 나 하고 결혼해 줘야 돼." 말로리가 속삭이던 말이 모두 진실이었다는 생각에 케트의 가슴이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마치 꿈속의 사랑이 현실이 된 것 같았다. 말로리가 그녀에게 정직하게 털어놓을 것을 얼마나 바랐던가. 이제 그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여태까지 자신이 정직하지 못했던 것에 죄책감을 느껴온 게 분명했다. 말로리는 흔한 남자들과 달리 진지하고 순수한 사람으로 보였다. 말로리를 쳐다보는 케트의 눈길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요! 케네스, 그러구말구요!" 말로리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케트..." 그는 앞으로 몸을 당겨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 멍청한 내기는 정말 미안해." 그는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1 만 달러... 우리 신혼여행에 쓸 수도 있었지만...


까짓것, 당신을 얻는 대가로 생각하지 뭐." '1 만 달러라고...?' 케트는 생각했다. "난 정말 바보였어." "내기의 시한이 언제예요?" "오늘밤 자정이야. 하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이제 결혼하게 된다는 거야. 우리는..." "케네스?" "왜 그러지?" "당신 아파트로 가요." 케트의 얼굴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아직 내기에 이길 시간은 있어요." 침대에서 케트는 완전히 딴 사람이었다. '이거 정말 기다린 보람이 있군!' 말로리는 생각했다. 오랫동안 남자를 혐오하고 멀리 하며 살아온 케트의 정열이 한꺼번에 폭팔하는 것 같았다. 말로리는 이렇게 정열적인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두 시간이나 계속된 사랑놀음이 끝나자 기진맥진한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말로리가 케트의 몸을 만지며 입을 열었다. "당신 참 대단해!" 케트는 몸을 일으켜 한 팔로 머리를 고이며 말했다. "자기도 대단한데 뭐... 난 지금 정말 행복해요." 말로리는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나도 행복해!" '최소한 1 만 달러어치는 행복하지. 게다가 재미도 톡톡히 봤잖아...' "케네스, 우리 사이가 언제나 이럴 거라고 약속해 줘요." "약속하지." 말로리는 진지하게 말했다. 케트가 시계를 들어다보고 말했다. "옷을 입어야겠어요." "오늘밤 그냥 여기 같이 있으면 안돼?" "아니에요. 아침 일찍 페이지와 같이 병원에 출근해야 돼요." 케트는 말로리에게 키스하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일생을 같이 있을 텐데 뭘 그래요?" 말로리는 옷을 입는 케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멍청한 친구들에게 1 만 달러를 받아낼 수가 없잖아. 그 돈이면 멋진 신혼여행을 갈 수 있을 텐데..." 말로리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말을 믿지 않을 거야. 당사자한테 들어야만 된다고..." 케트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입을 열었다. "걱정 말아요. 내가 그들에게 말하죠." 말로리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어서 침대로 다시 들어와!" 제 24 장 권총을 든 흑인이 하니에게 소리쳤다. "입 다물라고 했잖아!" "미...미안해요." 하니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대... 대체 왜... 왜 이러는 거예요?" 그는 왼손으로 계속 피가 흘러나오는 옆구리의 상처를 누르고 있었다. "누나는 어디 있소?" 하니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낯선 사람이 총을 들고 들어와 누나를 찾다니... "누나라뇨?" "케트..."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이런 세상에! 마이클 아냐!" "그래요." 마이클은 힘없이 권총을 떨어뜨리고 무너지듯 방바닥에 쓰러졌다. 하니는 급히 다가가 옆구리의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총상을 입은 듯 한 옆구리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움직이지 말아요." 하니는 서둘러 욕실에 가 소독약과 타월을 찾아 마이클에게 돌아왔다. "좀 아플 거예요." 마이클은 이제 움직일 힘도 없는 것 같았다. 상처를 소독하고 타월로 눌렀다. 마이클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잇었다. "곧 앰블런스를 불러 병원으로 가야겠어요." 하니가 말했다. 마이클이 하니의 팔을 잡고 소리쳤다. "안돼... 병원은 안돼! 경찰에 알려지면 안돼요." 그의 목소리는 점점 약해졌다. "누나는 어디 있어요?" "나도 몰라." 하니는 케트가 말로리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른 친구에게 연락해야겠어." "페이지 말예요?" 마이클이 물었다. "그래." 하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트가 우리 얘기를 했나 보군...' 병원에 연락해서 페이지와 통화가 되기까지는 10 여 분이 걸렸다. "페이지, 지금 곧 집에 와야겠어." 하니가 말했다. "하니, 난 지금 당직근무중이야. 지금 환자가 여러 명..." "케트의 동생이 여기 와 있어." "아, 그래? 그럼 나중에..." "마이클이 총에 맞았단 말이야." "뭐라구?" "총에 맞았다구!" "그럼 즉시 앰블런스를 보낼..." "안돼! 마이클은 병원에 가면 경찰이 알게 될 거라고 안 가겠대. 어떡하면 좋지?" "상처가 심해?" "상당히 심해." 잠시 말이 끊어졌다. "누군가 내 자리를 지켜줄 사람을 찾아볼게. 30 분 후면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하니는 전화를 끊고 마이클에게 고개를 돌렸다. "페이지가 곧 올거야." 두 시간 후, 케트는 아파트로 돌아가면서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행복한 기분이었다. 어릴 때의 무섭고도 어두웠던 경험 때문에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것을 두려워했었다. 꼭 그런 다음에는 자신을 혐오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로리와의 경험은 경이롭고 황홀하기만 했다. 그는 케트가 모르고 있던 정열의 세계를 일깨워준 것이다. 내기 걸었던 여러 의사들을 마지막 순간에 골탕먹인 것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즐거운 마음으로 아파트 문을 열었던 케트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멈춰섰다. 페이지와 하니가 쓰러져 있는 마이클 옆에 앉아 있었다. 마이클은 아파트 거실 바닥에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고, 옆구리의 상처는 타월로 눌러져 있었다. 타월은 이미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페이지와 하니가 케트를 쳐다보았다. "마이클! 이게 웬일이야!" 케트는 마이클 옆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동생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누나..." 그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총에 맞았어." 페이지가 말했다. "출혈이 심한 것 같아."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야지!" 케트가 말했다. 마이클이 고개를 저었다. "안돼!"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가 의사잖아. 좀 치료해 줘." 케트는 페이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혈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봤지만 아직 총알이 박혀 있어서... 여긴 기구가 하나도 없잖아? 어떻게 해볼 수가..." "출혈이 계속되고 있잖아." 케트가 말했다. 마이클의 얼굴을 감싸안으며 그의 귀에다 말했다. "마이클, 내 말 잘 들어. 빨리 병원에 가서 수술하지 않으면 살 수 없어." "내가... 병원으로... 가면... 경찰에 보고... 그럴 수는... 없어..." 케트가 조용히 물었다. "마이클, 대체 무슨 짓을 하다가 이렇게 됐어?" "별일 아냐... 그냥 내가... 사업관계로... 일이 좀... 잘 안돼서 그 친구가 화가 나서... 날 쐈어..." 오랫동안 마이클에게서 들어온 얘기의 제탕이었다. 마이클은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케트는 항상 마이클이 거짓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도 거짓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케트는 애써 마이클의 거짓말을 믿어주려 해왔다. 마이클은 케트의 팔을 잡고 말했다. "누나... 날... 좀... 도와줘..." "그래, 마이클. 내가 도와줄게." 케트는 그의 뺨에 키스하고 일어섰다. 전화로 다가가서 수화기를 들고 병원 응급실로 전화했다. "나는 닥터 헌터예요." 케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즉시 앰블런스를 보내줘요." 병원에 도착하자, 케트는 페이지에게 수술을 부탁했다. "출혈이 너무 심했어." 페이지가 말했다. 수술 보조의에게 고개를 돌리고 지시했다. "수혈을 해야겠어." 새벽이 되어서야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마이클이 회복실로 옮겨지자 페이지는 케트를 복도로 불러내 물었다.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어? 사고로 보고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안돼." 케트가 말했다. 아픈 마음을 꾹 참는 표정이었다. "벌써 오래 전에 이렇게 했어야만 했는데... 총상을 수술했다고 있는 그대로 보고해 줘." *** 말로리는 수술실 밖에서 케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트! 동생이 심하게 다쳤다고 들었는데..." 케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안됐어. 수술은 잘된 거지?" 케트는 말로리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요.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모든 게 이제 잘될 거예요." 말로리는 케트의 손을 잡았다. "난 정말 당신과 같이 보낸 지난밤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말해 주고 싶었어. 당신은 기적 같은 사람이야. 참, 내기 걸었던 의사들이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런 사고를 겪은 당신 보고 그 친구들을 만나라고 하기는 좀..." "그게 어때서요?" 케트는 말로리의 팔을 끼고 의사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곳에 있던 의사들이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룬디가 입을 열었다. "어이, 케트. 당신 입으로 좀 들어봐야겠소. 닥터 말로리가 어젯밤 당신과 아주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고 주장하는데, 그게 사실이오?" "그냥 황홀한 정도가 아니었어요." 케트가 말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어요." 케트는 말로리의 뺨에 키스했다. "자기, 나중에 봐요." 떠나가는 케트의 모습을 쳐다보는 의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탈의실에서 케트는 페이지와 하니에게 말했다. "마이클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너희들에게 중요한 얘기를 못했어." "무슨 얘긴데?" 페이지가 물었다. "케네스가 나에게 청혼했어." 두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농담이겠지!" 페이지가 말했다. "아냐, 어제 저녁에 청혼했어.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어." "아니, 결혼을 하다니!" 하니가 소리쳤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잘 알잖아. 내기 때문에 널 데리고 자려던 사람 아냐?" "내기에 이겼지." 케트는 웃으며 말했다. 페이지는 케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건지 잘 이해가 안돼." 케트가 말했다. "우리 모두가 그 사람을 잘못 보고 있었어. 사실은 정반대였어. 케네스가 내기 걸었다는 사실을 나에게 털어놓았어. 여태까지 계속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거야. 이제 이해가 돼? 난 그 사람이 내기를 걸었다는 것을 알고 골탕을 먹이려고 데이트에 응했고, 그 사람은 내기에 이기려고 나한테 데이트를 신청했던 거지. 그러나 결국 우리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된 거야. 난 지금 정말 행복해." 하니와 페이지는 서로 마주 보았다. "그럼 결혼은 언제 할 건데?" 하니가 물었다. "아직 구체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곧 하게 될 거야. 너희 둘은 내 결혼식에 들러리를 서줘야 돼." "그야 물론이지." 페이지가 말했다. "그건 말할 필요도 없잖아." 페이지는 마음 속에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었지만 그냥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밤새 수술했더니 피곤해. 집에 가서 좀 자야겠어." "난 마이클 옆에 있을게." 케트가 말했다. "마이클이 깨어나면 아마 경찰이 와서 심문하게 될 거야." 케트는 두 사람의 손을 잡고 다시 말했다. "너희 같은 친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페이지는 지난밤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케트가 마이클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케트가 경찰에 보고하도록 한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벌써 오래 전에 이렇게 했어야만 했는데...'


페이지가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제이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당신을 보고 싶다는 말을 하려고 전화했어요. 요즘 어떻게 지내요?" 페이지는 어젯밤 일을 얘기할까 생각했지만 그건 케트의 사생활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기로 했다. "별일 없어요." 페이지가 말했다. "모든 게 잘되고 있어요." "좋아요. 오늘 저녁식사를 같이 하는 게 어때요?" 페이지는 제이슨과 다시 만나는 것은 단순히 저녁식사를 하는 것 이상의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람과 자꾸 만나면 아무래도 관계가 깊어질 거야.' 페이지는 생각했다. 제이슨을 계속 만나는 것은 자신의 장래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선택이라고 생각되었다. 페이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제이슨..." 그때 현관벨이 울렸다. "제이슨, 잠깐만 기다려요." 페이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알프레드 터너가 서 있었다. 제 25 장 페이지는 그대로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알프레드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좀 들어가도 돼?" 페이지는 당황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무...물론이에요. 내... 내 정신 좀 봐..." 거실로 들어오는 알프레드를 쳐다보면서 만감이 교차되었다. 반갑고 기쁘면섣 화가 치밀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어차피 안부나 묻다가 가버릴 사람인걸...' 알프레드가 말했다. "난 캐런과 헤어졌어." 페이지는 그 말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알프레드는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페이지, 내가 큰 실수를 했어. 결코 널 떠나서는 안되는 거였는데." "알프레드..." 순간 제이슨의 전화가 생각났다. "잠깐만요." 서둘러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제이슨?" "아, 오늘 저녁에 우리..." "저녁에 만날 수 없어요." "오늘 시간이 안 나면 내일 저녁은 어때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제이슨은 페이지의 목소리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아니, 왜 그래요? 무슨 문제가 생겼어요?"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내일 전화할게요. 그때 얘기해요." "알았어요. 그러죠." 제이슨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페이지는 전화를 끊었다. "페이지, 네가 무척 보고 싶었어." 알프레드가 말했다. "넌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보고 싶었냐구? 바보같이 알프레드인 줄 알고 낯선 사람을 쫓아가기도 했었는데...' "나도 보고 싶었어요." 페이지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우리는 헤어질 수 없어. 우린 함께 있어야 해."


'정말 그래? 그런데 왜 캐런하고 결혼했지? 난 뭐야? 필요없을 때는 떠나갔다가 생각나면 다시 찾는 편리한 존재야?' 알프레드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렇게 생각 안해?" 페이지는 그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난 잘 모르겠어요." 너무나 갑작스럽게 알프레드가 나타났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알프레드는 페이지의 손을 잡았다. "틀림없이 네 마음도 그럴 거야." "캐런은 어떻게 됐어요?" "캐런과의 결혼은 실수였어. 난 계속 당신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어. 우리의 즐거웠던 추억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어...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자라났잖아?" 알프레드를 쳐다보는 페이지의 눈길은 옛날 같지 않았다. 어느 틈엔가 거리가 생겼고 경계심마저 나타났다. "알프레드..." "페이지, 난 이제 여기에 남을 거야. 샌프란시스코를 말하는 건 아니야. 우리 같이 뉴욕으로 가는 게 어때?" "뉴욕?" "그래. 자세히 얘기해 줄게. 커피라도 한잔 마실 수 있을까?" "물론이에요. 곧 끓일게요. 잠깐이면 돼요." 알프레드는 페이지를 따라 주방으로 갔다. 페이지는 커피 끓일 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정리해 보았다. 그렇게도 그리던 알프레드가 돌아왔는데도 착잡한 느낌만 들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난 많은 것을 깨달았어. 페이지, 그만큼 난 더 성장한 거야." 알프레드가 말했다. "그래요?" "그래. 나는 의사가 된 후에도 계속 WHO 에서 근무했잖아." "알아요." "그렇게 봉사해도 그 나라들은 우리가 어렸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게 없어. 어떤 곳은 더 나빠졌지. 온갖 질병과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하지만 당신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었잖아요." 페이지가 말했다. "그랬었지. 그러나 이제는 꿈에서 깨어났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오랫동안 내 인생을 허송세월했다는 것을 깨달았어.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제 앞도 못 추스르는 야만인들을 돌보느라고 하루 24 시간이 모자랐었지. 여기서 개업하면 편안하게 돈 잘 벌면서 살 수 있었는데 말이야." 페이지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뉴욕의 파크 애브뉴에서 개업한 의사 한 사람을 만났어. 그 사람이 연간 얼마나 벌어들이는지 알아? 50 만 달러도 더 된대! 알겠어? 연간 50 만 달러 이상 번단 말이야!" 페이지는 말없이 알프레드의 얼굴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난 생각했지.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가고 나는 여태까지 거지꼴로 살아왔나?' 그런데 그 의사가 나에게 동업하자고 제의해 왔어." 알프레드는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난 그 제의를 받아들였어. 그래서 같이 뉴욕으로


가자는 거야." 페이지는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알프레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제 뉴욕으로 가면 최고급 아파트를 살 거야. 너에게 최고급 옷과 보석을 사줄 거야. 어릴 때 내가 약속했던 것 기억나지? 다 해줄거야. 정말 놀랐지?" 페이지는 입 안이 말라들었다. "난... 글쎄... 알프레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알프레드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럴 거야. 연간 50 만 달러 수입이라는 말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돈 얘기가 아니고..." 페이지가 천천히 말했다. "그럼 무슨 생각을 했어?" 페이지는 알프레드의 얼굴을 낯선 사람 보듯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알프레드, WHO 에서 일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보람을 느끼지 않았어요?" 그는 가볍게 대답했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소용 없었어. 이젠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캐런은 날더러 방글라데시에 계속 남으라는 거야. 말도 안되지... 웃기지 말라고 했더니. 혼자 가더라구." 그는 페이지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된 거야... 왜 말이 없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한 거야?" 페이지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했다. '파크 애브뉴에서 개업하셨더라면 부와 명예를 누렸을 텐데... 돈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어.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데만 보람을 느끼셨지...' "캐런과의 이혼수속은 벌써 끝났어. 우린 당장 결혼할 수 있어." 알프레드는 페이지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뉴욕에서 사는 것 괜찮지?" 페이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알프레드..." 그는 싱글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래, 어떻게 생각해?" "이제 그만 가봐요." 알프레드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뭐라구?" 페이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라구요." "어디로 가란 말이야?" 그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당신이 너무 섭섭해 할 것 같아 그 얘긴 안하겠어요." 페이지가 대답했다. 알프레드가 떠나자 페이지는 생각에 잠겼다. 케트의 말이 옳았다. 자신이 여태껏 환상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제 앞도 못 추스르는 야만인들을 돌보느라고... 편안하게 돈 잘 벌면서 살 수 있었는데... 연간 50 만 달러 이상 번단 말이야!' '그런 인간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니...' 페이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음이 아파야 되는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자신을 붙들어매고 있었던 끈이 끊어지고 자유롭게 해방된 기분이었다. 이제는 마음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페이지는 전화로 다가가서 제이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제이슨? 페이지예요. 노 계곡에 있다는 당신 집 얘기 했던 기억나요?"


"그야 물론..." "그 집을 보고 싶어요.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제이슨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봐요. 페이지, 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은 바로 나였어요. 난 오래 전부터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믿어왔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아니었어요. 이젠 마음이 다 정리되었어요." "페이지, 그럼?" "노 계곡의 당신 집을 보여줘요." 노 계곡은 마치 시간을 뒤로 돌려놓은 것 같은 분위기였다. 현대적 국제도시인 샌프란시스코 한복판에 19 세기의 작은 도시가 자리잡고 있었다. 제이슨의 집은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편안하고 깨끗하면서 마음이 끌리는 그런 집이었다. 제이슨은 페이지를 집 안으로 안내하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거실이고... 저쪽이 주방... 손님용 화장실은 바로 여기 있고... 그리고 이쪽에 서재가..." 그는 페이지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침실은 2 층에 있는데... 올라가 보겠어요?" "보고 싶어요." 페이지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2 층으로 올라갔다. 페이지의 가슴이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이제 제이슨과 가장 은밀한 곳에서 단둘이 있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야 했어...' 누가 먼저 손을 뻗었는지 페이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포옹하고 있었고 제이슨의 입술이 페이지의 얼굴을 덮어왔다. 두 사람은 항상 그렇게 해온 듯 전혀 스스럼이 없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서둘러 서로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침대로 올라가자 두 몸이 섞이고 여태 참아왔던 열정을 거리낌 없이 터뜨렸다. "아, 정말..." 제이슨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속삭였다. "당신을 사랑해!" "알아요." 페이지가 장난기 어린 말투로 말했다. "내가 가운을 입으라고 소리쳤을 때부터 날 사랑하게 되었다면서요?" 폭풍이 한번 지나가고 두 사람은 포옹한 채 그대로 누워 있었다. 페이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밤엔 여기서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이슨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가 혹시 아침이면 내가 보기 싫어지는 것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요." 그날 밤 두 사람은 서로의 지난날 얘기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한참 얘기하다가 다시 애무가 시작되고 흥분이 가라앉으면 얘기가 계속되었다. 날이 밝아오자 페이지는 주방으로 가서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페이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바라보던 제이슨이 말했다. "난 정말 이 행운이 믿어지지 않아!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 이렇게 사랑을 나누다니..." "당신과 만난 건 내 행운이에요." 페이지가 말했다. "참, 얼마 전에 내가 집 모형과 카드를 보낸 것 기억나? 당신의 선택을 알려줘야 되잖아?" "오늘 오후에 대답을 보낼게요."


그날 오후, 제이슨에게 작은 봉투가 전달되었다. 속에는 제이슨이 페이지에게 집 모형과 함께 보냈던 카드가 들어 있었다. 내 집() 우리 집(O) 괄호 안에 표시하세요. 제 26 장 루 디네토는 이제 완전히 회복되어 퇴원준비를 하고 있었다. 케트는 작별인사를 하려고 그의 병실에 들렀다. 디네토 옆에는 라이노와 '그림자'가 서 있었다. 케트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디네토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잠시 꺼져." 라이노와 '그림자'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디네토는 케트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톡톡히 신세를 진 것 같소." "신세진 것 없어요. 할 일을 한 것뿐이에요." "아니, 이 디네토의 목숨이 그렇게 값어치가 없다는 말이오? 어찌 되었거나 당신이 결혼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사실이오?" "그래요." "상대가 의사라지요?" "맞아요." "그 사람에게 내가 당신을 아끼고 잘 돌보라고 하더라고 전하시오. 안 그러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도 하시오." "그러죠." 잠시 말이 끊어졌다. "마이클 일은 정말 미안하게 됐소." "이제 괜찮아요." 케트가 말했다. "나하고 얘기 많이 했어요. 앞으로 모든 게 다 잘될 거예요." "좋소." 디네토는 두툼한 큰 봉투를 내밀었다. "당신 결혼을 축하하는 내 작은 성의요." 케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하지만..." "몸조리나 잘 하세요." "고맙소. 당신도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겠소. 당신은 정말 드물게 보는 여자요. 내 말 잘 듣고 꼭 기억하시오. 어떤 난처한 일이라도 생기면 언제든지 나에게 연락하시오. 당신 일은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 주겠소. 알겠소?" "알았어요." 케트는 디네토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로 그에게는 부탁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노 계곡에 있는 제이슨의 집에 다녀온 다음부터 페이지는 하루에도 네댓 번씩 제이슨과 통화했고 야간 당직근무가 없을 때는 반드시 제이슨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병원생활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어느 날 페이지는 응급상황이 계속되었던 36 시간의 근무 끝에 겨우 당직자 휴게실에 갈 수


있었다. 불편한 간이침대에 누워 막 잠이 들려는데 전화벨이 울려댔다. 페이지는 눈을 감은 채 수화기를 더듬어 잡았다. "...여보세요?" "닥터 테일러, 422 호 병실로 급히 와주셔야겠어요. 응급상황이에요!" "알았어." 페이지는 머리를 흔들어 잠을 떨쳐버리려 했다. '422 호 병실이라구? 바커 박사의 환자 아냐? 랜스 켈리... 맞아...' 며칠 전 심장판막 이식수술을 받은 환자였다. '뭐가 잘못되었을까?' 페이지는 간이침대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경황이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 422 호 병실로 향했다. '신참 간호사가 별것 아닌데 호들갑 떤 건 아닐까? 정말 심각한 상황이라면 바커 박사에게 연락해야지...' 병실에 도착한 페이지는 열려 있는 문 안으로 실내를 볼 수 있었다. 환자는 호흡도 제대로 못하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페이지를 보자 간호사는 반색을 하면서 말했다. "닥터 테일러! 어쩌면 좋을지 몰라서..." 페이지는 서둘러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우선 환자를 안심시킨 다음 손가락으로 맥박을 짚어보았다. 맥박은 고르지 않고 기복이 심했다. 심장판막의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우선 진정제를 주사해야겠어!" 페이지가 지시했다. 잠시 후 간호사가 주사기를 건네주자 페이지는 환자의 정맥을 찾아 진정제를 주사했다. 페이지는 다시 간호사에게 지시했다. "간호원장에게 서둘러 수술 팀을 구성해 달라고 해! 응급상황이야! 그리고 바커 박사에게도 즉시 연락하구." 15 분 후 랜스 켈리는 수술대에 올려졌다. 피터슨 박사의 참관 아래 수술 팀은 페이지와 레지던트 두 사람, 수술보조 간호사 두 사람, 그리고 일반 간호사 한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수술실 벽 윗부분에는 맥박, 심전도, 그리고 혈압 상태를 눈으로 볼 수 있는 대형 TV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마취의가 수술실로 들어왔다. 닥터 허만 코치가 나타나는 것을 본 페이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엠바카데로 병원 대부분의 마취의들은 수준급이었지만, 허만 코치는 예외였다. 전에도 그와 함께 수술을 해본 페이지는 가능한 한 그를 피해 왔다. 그의 능력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페이지는 코치가 환자의 코와 입에 산소호흡기를 연결시키는 것을 확인하면서 수술 부위만 드러내고 환자의 몸을 덮는 소독된 종이 타월을 펼쳤다. 곧 환자의 왼쪽 가슴만 드러나고 온몸이 종이 타월로 덮였다. "우선 주사선을 경정맥에 연결해요." 페이지가 지시했다. "알았어요."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지던트 한 사람이 물었다. "뭣 때문에 재수술하게 된 거예요?" "어제 바커 박사가 심장판막 이식수술을 했어. 그런데 봉합부위가 터져버린 것 같아." 페이지는 코치에게 고개를 돌렸다. "환자가 마취됐어요?"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방에서 잠자는 것같이 편하게 잘 자고 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 잠자고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마취약은 어떤 걸 썼죠?" "프로포폴이에요."


"알았어요." 페이지는 환자에게 인공심폐기가 연결되는 것을 점검했다. 심폐순환 수술을 하려면 인공심폐기가 환자의 심폐기능을 지속시켜 주어야 되기 때문이다. 페이지는 벽의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맥박 140... 혈액산소 포화도 92 퍼센트... 혈압 80/60... "자, 시작해요!" 페이지가 말했다. 레지던트 한 사람이 음악을 틀었다. 페이지는 수술대로 다가가 1,100 와트의 조명 아래서 수술 부위를 점검했다. 곧이어 수술보조 간호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메스..." 수술이 시작되었다. 페이지는 우선 어제 수술한 봉합부위의 가는 철사를 모두 제거했다. 그리고 흉골 아래쪽까지 길게 절개했다. 레지던트 한 사람은 계속 흘러내리는 피를 거즈로 닦아냈다. 페이지가 조심스럽게 지방층과 근육을 절개하자 심장이 드러났다. 눈으로도 심장이 불규칙하게 박동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여기가 문제야." 페이지가 말했다. "심방에 구멍이 여러 개 났어. 심장 주변에 피가 고여 심장에 압박을 가하는 거야." 페이지는 다시 벽의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맥박과 혈압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인공심폐기를 더 강하게 작동시켜!" 페이지가 지시했다. 그때 수술실 문이 열리고 로렌스 바커 박사가 들어왔다. 그는 수술대에 거리를 두고 서서 수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페이지가 말했다. "바커 박사님, 직접 수술을..." "이건 당신 수술이야." 페이지는 마취의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코치를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 "조심해요! 마취가 너무 심한 것 아니에요? 좀 천천히 투여해요!" "그런 게 아니..." "심실 빈맥증이에요! 혈압이 계속 떨어져요!" "어떻게 하죠?" 코치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마취의 노릇을 해?' 페이지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빨리 리도케인과 강심제를 주사해! 서둘러!" 페이지는 고함치듯 말했다. "알았어요." 페이지는 코치가 주사기로 정맥 주사선에 리도케인과 강심제를 투여하는 것을 확인했다. 레지던트 한 사람이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소리쳤다. "혈압이 계속 떨어져요!" 페이지는 흘러내리는 피를 지혈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시 코치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마취약이 너무 많이 들어가고 있어! 벌써 얘기했잖아..." 모니터의 심장박동을 나타내는 곡선이 갑자기 춤을 추고 불협화음 같은 소리가 났다. "큰일났어! 무언가 잘못됐어!" "전기충격기 이리 내!" 페이지가 소리쳤다. 간호사가 전기충격장치를 수술대 가까이로 밀고 와 스위치를 켰다. 출력을 높이고 두 개의 접촉기를 페이지에게 건냈다.


페이지는 접촉기를 환자의 심장에 가장 가까운 부위에 갖다댔다. 켈리의 몸은 허공으로 들석 떴다가 내려앉았다. 페이지는 다시 한번 시도했다. 환자의 심장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다시 호흡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아무 반응도 없었다. 랜스 켈리의 심장은 다시 박동할 기미가 없었다. 페이지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자신의 수술은 잘되고 있었지만 코치가 마취를 너무 심하게 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페이지가 세 번째로 랜스 켈리의 몸에 접촉기를 갖다댔을 때, 바커 박사가 수술대로 다가왔다. 그는 페이지에게 말했다. "네가 이 사람을 죽였어." 제 27 장 제이슨이 설계사무실에서 회의하고 있을 때 비서가 들어와 말했다. "지금 닥터 테일러한테서 전화가 와 있어요. 나중에 전화드린다고 할까요?" "괜찮아. 지금 받을게."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페이지?" "제이슨... 지금 좀 만났으면 좋겠어요." 페이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지?" "지금 내 아파트로 올 수 있어요?" "그럼. 곧 갈게." 제이슨은 전화를 끊고 일어섰다. "그만하지.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하자구." 30 분 후 제이슨이 아파트에 도착했다. 페이지는 제이슨이 문을 열자마자 그에게 뛰어들었다. 충혈된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제이슨이 물었다. "정말 그럴 수가... 바커 박사가 나보고... 내가 환자를 죽였다고 하잖아요. 그건 절대로... 정말로 내 잘못이 아니었어요!" 페이지가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이젠 바커 박사에게 당하는 데 지쳤어요. 더 이상..." "페이지," 제이슨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가 얼마나 괴팍한 사람인지 나한테 얘기했었잖아. 원래 그런 사람인데. 그런 사람 말에 신경 쓸 것 없잖아?" 페이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없어요. 그 사람은 처음부터 내가 못 견디고 떠나게 하려고 마음먹은 거예요. 제이슨, 그 사람이 형편없는 의사면서 나를 수준 이하로 평가한다면 나도 그를 무시하면서 견뎌낼 수 있어요. 하지만 바커 박사는 명성 그대로 최고의 기량을 가진 의사예요. 그 사람의 판단이 엉터리일 수는 없잖아요? 아무래도 나는 심장 수술의로서 기량이 부족한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제이슨이 정색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훌륭한 의사야! 내가 만난 의사들 모두가 당신을 칭찬했어." "로렌스 바커 박사의 말은 못 들었잖아요." "그 사람은 잊어버려." "그래야 되겠어요." 페이지가 말했다. "엠바카데로를 떠나야겠어요." 제이슨은 페이지를 끌어안았다. "페이지, 난 당신이 의사로서 환자를 돕는 데 얼마나 큰 보람을 느끼는지 잘 알고 있어. 그런 것을 어떻게 단념하겠다는 거야?"


"단념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엠바카데로를 떠나 다시는 바커와 마주치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제이슨은 손수건으로 페이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 문제로 이렇게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페이지가 말했다. "이제 당신 남편이 되려면 이런 연습도 해둬야 되지 않겠어?" 그 말에 페이지는 웃을 수 있었다. "지금 그 말, 나쁘지 않게 들리네요. 이젠 괜찮아요." 페이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기분이 훨씬 좋아졌어요. 내 하소연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월러스 박사에게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어요. 지금 병원에 가서 그만두겠다고 통보할 거예요." "그럼 저녁식사 때 만나." 페이지는 월러스 박사의 사무실로 가는 복도를 걸었다. 이 복도를 걷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들어온 소음이 들려오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복도는 붐볐다.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얼마나 병원의 소음과 혼란에 익숙해졌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엠바카데로는 페이지에게 집이었고 고향이었다. 지미와 창이 생각났고 같이 일했던 수많은 훌륭한 의사들 생각도 났다. 제이슨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운을 입고 회진에 따라다니던 일... 케트, 하니와 함께 수백 번도 더 아침식사를 하던 구내식당을 지나서 의사 휴게실이 눈에 띄었다. 레지던트들과 파티를 열었다가 음료수 한 잔도 못 마시고 호출되던 일... 복도 구석마다, 방마다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떠나고 나면 이곳이 그리워질 거야... 하지만 그 악랄한 사람과 한 지붕 밑에서 일할 수는 없어!' 병원장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월러스 박사는 페이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닥터 테일러, 전화 받고 깜짝 놀랐소. 그렇게 갑자기 그만두겠다니... 정말 그렇게 결정한 거요?" "그렇습니다." 월러스 박사는 한숨을 쉬었다. "정 그렇다면 할수없지... 떠나기 전에 바커 박사가 좀 보자고 했소." "저도 그분에게 할 말이 있어요." 여태껏 참아왔던 바커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마 실험실에 있을 거요. 하여간... 앞으로 행운을 빌겠소." "고맙습니다." 페이지는 실험실로 향했다. 페이지가 들어섰을 때 바커 박사는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 병원을 떠나기로 했다구?" "그래요. 바라던 대로 됐죠?" "내가 바라던 게 뭔데?" 바커 박사가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를 쫓아낼 생각이었잖아요. 이제 생각대로 된 거예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요. 저보고 랜스 켈리를 죽였다고 했잖아요? 정말..." 페이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당신은 변태적이고... 냉혹한 사람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 밑에서 절대로 일하지 않을 거예요." "거기 좀 앉아!" 바커 박사가 말했다. "필요없어요. 더 이상 할 말 없어요." "그래? 내가 할 말이 있어! 대체 뭘 알기나 하고..."


갑자기 바커 박사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다음 순간 호흡이 가빠지면서 무너지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너무나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페이지는 몸이 굳은 채 고통스러워하는 바커 박사의 얼굴이 한쪽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곧 정신을 차린 페이지는 바커에게 달려갔다. "바커 박사님!" 급히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 "적색경보! 적색경보!" 피터슨 박사가 말했다. "뇌출혈이 아주 심했소. 의식을 회복할 수 있을지... 좀더 두고 봐야 되겠소." '나 때문이야... 그렇게 악담을 퍼부었으니...' 바커를 죽여버리고 싶었던 자신의 생각이 현실로 나타난 것 같았다. 페이지는 다시 월러스 박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바커 박사님 일은 참 안됐어요. 정말 훌륭한 의사였는데..." 페이지가 말했다. "그렇소. 정말 충격적인 일이요." 월러스 박사는 잠시 페이지를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페이지, 이제 바커 박사는 엠바케데로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는데... 병원에 그대로 남아 있을 생각 없소?" 페이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러죠. 여기 남겠어요." 제 28 장 환자의 진료기록에는 '성명:존 크로닌, 인종:백인, 성별:남, 연령:70 세, 진단소견:심장 종양'으로 써 있었다. 페이지는 아직 존 크로닌을 만난 적이 없었으나 이제 그의 수술을 집도하게 되었다. 수술 전에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려고 레지던트 한 사람과 간호사를 데리고 그의 병실로 갔다. 페이지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크로닌 씨?" 위장에 호스를 넣고 고정시켰던 반창고 자국이 입가에 얼룩져 있었다. 머리 위에는 링겔 병이 매달려 있었고, 왼팔에 주사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크로닌이 페이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또 뭐야?" "닥터 테일러예요. 우선 상태를 점검하고 나서 수술..." "이게 무슨 수작이야! 어디다 손을 대려고 해! 왜 제대로 된 의사가 나타나지 않는 거야?" 페이지의 표정이 달라졌다. "나는 심혈관전문 수술의예요. 당신은 빨리 종양제거 수술을 받아야 돼요. 우리들은 최선을 다할 거예요." "바로 당신이 내 심장을 수술한다구?" "그래요. 나는..." 존 크로닌은 페이지와 옆에 서 있던 레지던트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런 빌어먹을... 이 병원 수준이 이것밖에 안돼?" "걱정 마세요. 닥터 테일러는 경험도 많고 아주 유능한 수술의예요." 레지던트가 말했다. "웃기고 있네..." 페이지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다른 수술의를 초빙하시겠어요?" "어림없는 소리! 날강도 같은 유명의를 초빙할 돈이 어디 있어? 의사란 다 마찬가지야! 돈밖에 몰라. 환자야 죽든 살든 돈만 밝힌단 말야. 의사들 눈엔 환자가 그저 고깃덩어리로밖에 안 보일 거야, 안 그래?"


페이지는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 병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러시겠지만 잘 생각..." "신경이 날카로워졌다구? 그럼 내 심장을 칼로 짼다는데 신경이 무뎌지란 말야?" 크로닌이 소리쳤다. "난 틀림없이 수술대 위에서 죽게 될 거야! 너희들이 날 죽일 게 분명해! 그런 다음 너희들이 살인죄로 기소되기만 바랄 뿐이야!" "허튼소리 그만 해요!" 페이지가 소리쳤다. 크로닌은 페이지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의사 선생님, 제가 수술 받다가 죽으면 선생님 경력에 오점이 남겠지요? 그렇다면 그냥 수술하게 내버려둘까?" 페이지는 폭발 직전이었다. 그러나 의사인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고 애써 크로닌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고개를 돌리고 지시했다. "즉시 심전도와 화학반응 검사를 신청해." 크로닌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날 오후, 검사 결과를 확인하러 회진 갔을 때 크로닌은 페이지를 올려다보며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저 쌍년이 또 나타났군..." *** 다음날 아침 6 시, 존 크로닌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가슴을 절개하고 심장을 노출시킨 순간 페이지는 환자의 상태가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심장기능이 아니었다. 심장과 그 주변에 퍼진 흑색 종양은 암세포가 분명했다. 레지던트가 소리쳤다. "아니? 이런 세상에... 어떻게 하죠?" "이런 상태로 오래 끌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지." 페이지가 수술을 마치고 복도로 나갔을 때 한 여자가 두 남자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30 대 후반으로 보였다. 짙은 화장에 머리는 붉은색이었고, 몸에서는 싸구려 향수 냄새가 짙게 풍겼다. 관능적인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꼭 끼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40 대로 보이는 두 남자도 붉은 머리였다. 차림새나 분위기가 마치 삼류 서커스 단원 같았다. 여자가 페이지에게 물었다. "닥터 테일러, 맞아요?" "그래요." "난 크로닌 부인이에요. 이 사람들은 내 오빠구요. 남편은 좀 어때요? 수술은 잘 됐어요?" 잠시 주저하다가 페이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환자의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아이구, 하느님, 감사합니다!" 크로닌 부인은 신파조로 소리쳤다. 그런 다음 손수건으로 눈물 닦는 시늉도 잊지 않았다. "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도저히 혼자 살아갈 수 없을 거예요." 페이지는 삼류 극장에서 여배우의 형편없는 연기를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이제 내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크로닌 부인, 아직은 안됩니다. 지금 회복실에서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일 만나시지요." "그럼 내일 다시 오겠어요." 크로닌 부인은 오빠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그만 가요." 페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존 크로닌도 알고 보니


불행한 사람이구나...' 다음날 아침 크로닌의 검사 결과가 모두 나왔다. 암세포가 전신에 퍼져서 이제는 방사선 치료로도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암전문 내과의가 페이지에게 말했다. "고통을 덜어주는 것말고는 아무 방법도 없어요. 이제부터 고통이 아주 심해질 텐데..." "얼마나 더 살 수 있어요?" "1 주일... 길어야 2 주일을 못 넘길 거예요." 페이지는 중환자실로 존 크로닌을 찾아갔다. 그는 잠들어 있었다. 어제까지 악을 쓰고 펄펄 뛰던 그 존 크로닌이 아니었다. 생명의 등불이 희미하게 깜빡이는 또 한 명의 환자일 뿐이었다. 산소호흡기가 연결되어 있고, 주사선으로 영양분이 공급되고 있었다. 페이지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지치고 사색이 완연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독히 운도 없는 사람이야... 현대의학이 그렇게 발전했어도 이 사람을 살려낼 방법이 없으니...' 페이지는 살며시 그의 팔을 잡았다. 한참 동안 그대로 앉아 있다가 조용히 일어나 병실을 나왔다. 오후에 페이지는 다시 크로닌을 찾아갔다. 산소호흡기는 제거되어 있었다. 힘없이 눈을 뜬 크로닌은 페이지를 보고 입을 열었다. "수술은 다 끝난 거요?" 아직도 마취약 기운이 남아 있어 발음이 분명치 않았다. 페이지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잘 끝났어요. 경과가 어떤지 보려고 왔어요. 불편한 건 없어요?" "불편하냐구?" 크로닌은 코웃음쳤다. "언제부터 의사가 환자들 불편한 것까지 신경썼지?" "이봐요, 지금 말다툼할 필요가 없잖아요." 페이지가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크로닌은 말없이 페이지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말투는 완전히 달라졌다. "다른 의사 말이 당신 수술 솜씨가 대단했다고 하던데..." 페이지는 말없이 크로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암이 생긴 거지요?" "맞아요." "아주 심각한 거요?" 수술의들이 대답하기를 꺼리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환자에게 솔직하게 마라해 줄 수밖에 없었다. "아주 심각해요." 크로닌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방사선이나 항암제 치료는 어떻소?" "정말 미안해요. 그렇게 해봐야 고통만 더할 뿐 아무 효과도 없을거예요." "그렇군... 알겠소. 그 동안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았으니 별로 억울할 것도 없지..." "좋은 일이 많았던 모양이죠?" "지금 내 꼴을 보면 믿어지지 않겠지만, 젊었을 때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지..." "지금도 그렇겠는데요." "그래... 예쁜 여자들... 푸짐한 스테이크... 최고급 씨가... 참,


결혼했소?" "아뇨." "결혼해야지... 혼자 살면 반쪽 인생 아니오? 난 두 번 결혼했소. 첫 아내와 35 년 동안 사이좋게 살았지...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소." "많이 상심하셨겠네요." "그래요. 하지만 다 운명인데 어쩌겠소..." 그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그 후 난 몸매밖에 볼 게 없는 욕심 많은 여자와 재혼했지... 오빠들까지 빌붙어 내 돈에만 군침을 흘렸어... 내가 너무 몸매 좋은 여자만 밝히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누구를 원망하겠소? 처음에는 붉은 머리가 섹시하게 보이더라구. 잠자리는 끝내 줬지..." "부인은 진심으로..." "기분나쁘게 듣지 마시오. 내가 왜 이런 시립병원으로 왔는지 알고 있소? 내 여편네가 이리로 데려온 거요. 개인병원에 가면 치료비가 많이 드니까. 내가 죽으면 한푼이라도 더 건지겠다는 속셈이지..." 그는 페이지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나한테 시간이 얼마나 더 남았소?" "사실대로 듣고 싶어요?" "아니... 그래요, 솔직하게 말해 줘요." "1 주일 내지 2 주일 남았어요." "이런 제기랄! 그럼 통증이 계속 심해질 거 아뇨?" "크로닌 씨, 통증을 가능한 한 줄이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 씨자는 집어치우고 존이라고 불러요." "그러죠." "인생이 너무 허무하지 않소?" "아까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았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이제 곧 끝난다고 생각하니 좀 우습곤... 죽으면 어떻게 될 것 같소?" "그건 모르겠는데요." 크로닌은 억지로 웃어보였다. "내가 죽어본 다음 꼭 알려주겠소." "곧 진통제를 가져올게요. 뭐 더 필요한 것 없으세요?" "이따 밤에 와서 같이 얘기나 하면 좋겠소." 페이지는 24 시간 이상 계속된 근무 끝에 그날 밤에는 비번이었다. "그러죠." 그날 밤 늦은 시간에 페이지가 크로닌의 병실을 찾아갔을 때 그는 잠들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기분이 좀 어때요?"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말도 마요. 원래 아픈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심한 것 같소." "그럴 수도 있어요.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헤이절을 만났소?" "헤이절이 누구예요?" "내 아내 말이오. 오빠들과 같이 왔었소. 당신을 만나서 얘기했다고 하던데..." "그랬어요." "정말 웃기는 여자야! 안 그렇소? 그런 저질과 결혼하다니... 내가 미쳤지. 내가 죽기만 고대하고 있으니..."


"그럴 리가..." "아니, 그건 사실이오. 헤이절이 나하고 결혼한 건 순전히 돈 때문이었소. 난 다 알면서도 처음에는 별로 개의치 않았지... 잠자리에서 재미가 아주 좋았거든. 시간이 지나면서 오빠들까지 끼어들어 본색을 드러내더구만. 아무리 줘도 또 손을 내밀고... 욕심이 끝도 없는 인간들이야..." 잠시 말이 끊어지고 두 사람은 각자의 상념에 잠겼다. 크로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여행을 많이 했다고 얘기했소?" "아뇨." "젊었을 땐 어지간히도 돌아다녔지... 스웨덴... 덴마 크... 독일... 프랑스... 유럽에 가본 적 있소?" 페이지는 케트, 하니와 함께 여행사에 들렀던 일이 생각났다. '베니스가 어때? 아니야, 파리로 가자. 런던이 더 좋지 않아?' "아뇨, 아직 못 가봤어요." "꼭 한번 가봐요." "언젠가는 그럴 생각이에요." "이런 병원에서 일하면 수입이 별로 신통치 않을 텐데... 안 그렇소?" "괜찮아요. 그만하면 충분한 수입이에요." 크로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정말 유럽은 꼭 한번 가볼 만해요. 만약 유럽 여행을 하게 되면 내 부탁이 하나 있소. 파리에 들러서 크리옹 호텔에 들고 맥심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는 거요. 제일 큰 스테이크를 주문 하고 샴페인도 한 병 주문하시오. 스테이크를 먹고 샴페인을 마시면서 내 생각을 한번 해주 면 좋겠소. 그렇게 해주겠소?" 페이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꼭 그렇게 할게 요." 존 크로닌은 페이지의 얼굴을 한참 더 쳐다보다가 말했다. "고맙소. 자, 이젠 피곤하니 까 좀 쉬어야겠소. 내일도 들러서 나하고 얘기할 수 있겠소?" "물론이죠." 페이지가 대답했 다. 존 크로닌은 곧 잠이 들었다.

제 29 장 케네스 말로리는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 없었다. 해리슨 일가와 가까워진 이후 자신이 선택받은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당초 알렉스 해리슨 같은 유명인사가 엠바카데로 시립병원 같은 데서 치료받을 확률은 거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공교롭게 엠바카데로에 들어오고 내가 생명을 구해 주었어. 이제 나한테 은혜를 갚겠다고 하니...' 말로리는 공중에 붕 뜬 기분이었다. 그는 금융게에 있는 친구에게 해리슨 일가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냥 부자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 친구가 말했다. "그 사람 재산이면 백만장자가 몇십 명도 더 나올 거야. 그리고 외동딸이 있는데 대단한 미인이야. 서너 번 결혼했다가 이혼했다고 들었어. 최근에 유럽 귀족과


결혼생활을 청산했다던데..." "그 사람들 만나본 적 있어?" "아니, 우리 같은 백성들과 어울릴 사람들이 아내." 토요일 아침, 알렉스 해리슨은 퇴원준비를 하고 있었다. 병실로 들어온 말로리에게 물었다. "케네스, 앞으로 1 주일쯤 후에 집에서 파티를 열어야겠는데, 내가 견뎌낼 수 있겠나?" 말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무리하지 않으신다면 별지장 없을 겁니다." 알렉스 해리슨은 미소지었다. "좋아. 그날 주빈은 바로 자네야." 말로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영감, 정말 나한테 보답을 하려는 모양이지?' "아, 예... 감사합니다." "다음 토요일 7 시 30 분까지 우리 집에 오는 걸로 알고 있겠네." 그는 말로리에게 노브 힐 지역의 집주소를 알려주었다. "시간 맞춰 가겠습니다." 말로리가 대답했다. '가구말구!' 말로리는 그날 저녁 케트와 극장에 가기로 약속했었지만 별로 구애받지 않았다. 내기에 이겨서 1 만 달러를 벌었고, 케트와의 사랑놀음도 계속되었다. 1 주일에 몇 번씩 빈 당직자 휴게실이나 병실, 아니면 각자의 아파트로 가서 즐겼다. '정말 뜨거운 여자야.' 말로리는 케트와의 정사장면을 연상하며 미소지었다. '접근하기는 어려웠지만 한번 달아오르면 무섭게 폭발하는 여자야. 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손을 흔들어야 될 때가 오겠지...' 해리슨과 저녁 약속이 된 날 아침, 말로리는 케트에게 전화했다. "케트? 문제가 좀 생겼어." "무슨 일이에요?" "의사 한 사람이 아프다고 결근했어. 나밖에는 자리를 메울 사람이 없다니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극장엔 못 갈 것 같아." 케트는 그와 함께 극장에 못 가게 돼 무척 실망했지만, 그보다는 말로리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마음 아팠다. 그러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가볍게 말했다. "아, 그야 병원에서 일하다 보변 다 그런 것 아니에요?" "그래, 나중에 더 좋은 연극을 보자구." "그러지 않아도 돼요." 케트가 말했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케네스, 우리 장래에 관한 얘기를 좀 해야 되잖아요?" "무슨 얘기 말이야?" 그는 케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여자들이란 모두 남자를 묶어두려 하는 것이다. '옷 몇 번 벗으면 그것으로 남자를 평생 묶어버리려고 든단 말이야...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지금까지 수없이 그래왔듯이 때가 오면 말로리는 애석한 척하면서 케트에게 이별을 고할 작정이었다. 케트는 계속 말하고 있었다. "케네스, 날짜도 잡아야 되잖아요? 미리 계획을 세워야 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야 그래야겠지." "내 생각엔 6 월이 좋을 것 같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요?" '내 생각을 알면 기절할걸. 내 계획대로 되면 난 결혼하게 될 거야. 문제는 신부가 다른 사람이라는 거지.' "나중에 얘기하지. 지금 급히


가봐야 돼." 해리슨 가는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저택이었다. 잘 손질된 넓은 정원에 둘러싸인 저택은 한없이 이어진 듯 엄청난 규모였다. 20 여 명의 만찬 손님들은 벌써 다 모여 있었고, 넓은 거실 한쪽에서는 실내악단이 연주하고 있었다. 말로리가 들어서자 로린이 달려와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녀는 몸매가 다 드러나는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로린이 말로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주빈이 드디어 나타나셨군요.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반가워요." "나도 반가워요. 아버님은 좀 어떠세요?" "언제 수술 받았느냐는 듯 정정하세요. 다 당신 덕분이지요. 우리 집안에서는 당신이 영웅이 됐어요." 말로리는 겸손하게 말했다. "내 할 일을 한 것뿐이에요." "아마 그런 말은 하느님도 매일 하실 거예요." 로린은 말로리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며 손님들에게 소개시켰다. 손님 명단은 어마어마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비롯해 프랑스 대사, 연방 대법관, 10 여 명의 유명 정치인들, 예술가들, 그리고 재벌 총수들이 모여 있었다. 말로리는 거실에 모인 거물급 인사들의 권력과 영향력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바로 이런 곳에서 활동해야 되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고 살아야 사는 것 같지...' 저녁식사는 최고급 요리가 우아한 격식에 맞추어 나왔다. 식사가 끝나고 손님들이 떠나기 시작했을 때, 해리슨은 말로리에게 말했다. "서두르지 말게. 난 자네와 좀 얘기할 게 있어." "아, 그러지요." 드디어 손님들이 다 가고 말로리는 해리슨 부녀와 서재로 들어가 앉았다. 해리슨 부녀는 나란히 앉아 말로리와 마주 보았다. "병원에서 내가 자네보고 장래가 촉망된다고 말한 건 진심이었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자네, 개업할 계획은 서 있나?" 말로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지었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해리슨 씨. 개업을 하려면 레지던트 생활이 끝나고도 상당한 경험을 쌓아야 되고, 또 엄청난 자본이..." "보통은 그렇지. 맞는 말이야. 하지만 자네는 이제 보통 사람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씀이시지요?" "당신이 레지던트 생활을 끝내고 전문의가 되면 아버님이 개업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선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에요." 로린이 말했다. 잠시 말로리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너무나 일이 쉽게 풀리는 것이다. 그는 마치 달콤한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글쎄요... 제가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나는 부유한 친구들이 아주 많아. 벌써 자네 얘기를 많이 해뒀지. 자네가 간판만 걸면 상류사회 환자들이 몰려올 것을 내가 보장하네." "아빠, 병원이 무슨 상점이에요? 간판을 걸게..." 로린이 말했다. "어찌 됐든. 자네가 개업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내가 대지. 괜찮겠나?" 말로리는 어쩔 줄 몰랐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만... 하지만... 전... 언제 갚을 수 있을지..."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군. 자네가 갚을 게 아니고, 내가 자네에게 진 빚을 갚는 거야. 자네가 나한테 갚을 건 아무것도 없어." 로린은 따뜻한 눈길로 말로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의 제의를 받아들이세요." "이렇게 후한 제의를 거절하면 바보가 되겠죠?" "그래요." 로린이 말했다. "당신은 절대로 바보가 아니에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로리는 둥둥 뜨는 기분이었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을까?' 그러나 더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너무 사업 얘기만 했어요. 사적인 얘기 좀 해도 돼요?" 말로리의 입이 벌어졌다. "되구말구요. 무슨 얘긴데요?" "내주 토요일 저녁, 자선모두회가 있는데 같이 가지 않겠어요?" '가구말구. 안 그래도 그냥 놔두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좋아요. 그날 시간을 내지요." 사실 말로리는 그날 당직이었지만, 아프다고 핑계를 대면 누군가가 자리를 메워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로리는 지금까지 장래를 용의주도하게 계획하면서 처신해 왔다. 그러나 우연히 알렉스 해리슨을 수술해 준 다음부터의 행운은 감히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로린과 함께 자선무도회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말로리는 여태까지 접근할 수 없었던 상류사회를 알게 되었다. 해리슨 씨의 소개와 자신의 뛰어난 외모 때문에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게 되자 새로운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다. 밤이면 로린과 레스토랑으로 나이트클럽으로 늦은 시간까지 쏘다니느라 낮의 근무시간에는 반은 졸면서 대강 시간만 때웠다. 자신의 근무태도에 대한 비난이 들려왔지만 말로리는 신경쓰지 않았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개업하게 되고, 그때는...' 엠바카데로같이 음산하고 번잡스러운 병원을 떠나 깨끗한 새 빌딩에 개업해서 수준 높은 환자들만 상대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게다가 로린이라는 상류사회의 미인까지 호의를 갖고 접근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케트가 계속 문제였다. 말로리는 케트를 피하는 데 더 이상 핑계를 찾기가 어려웠다. 케트가 결혼 날짜를 잡자고 졸라대면 말로리의 대답은 녹음해 놓은 것 같았다. "케트, 난 당신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물론 결혼하고 싶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다음 별의별 핑계를 다 늘어놓았다. 어느 날 로린이 '빅 써' 지역에 있는 해리슨 가의 별장에서 주말을 함께 보내자고 했다. 말로리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게 제대로 풀려가는군... 이젠 완전히 팔자를 고치는 거야!' 별장은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소나무 숲이 우거진 넓은 대지 위에 펼쳐져 있었다. 화강암과 목재로 지어진 건물은 여느 저택보다 더 크게 보였다. 주인 침실 외에도 손님용 침실이 여덟 개나 되었고, 탁트인 거실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있었다. 놀랍게도 실내 수영장과 사우나도 따로 갖추어져 있었다. 돈이 넘쳐흐르는 분위기였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로린이 말했다. "하인들은 주말에 모두 휴가 보냈어요."


말로리는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잘 생각했어." 두 팔로 로린을 감싸안고 귀에다 속삭였다. "난 당신 생각만 하면 견디기 어려웠어..." "그러면 왜 우물쭈물해요?" 로린이 말했다.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침대를 떠나지 않았다. 로린도 케트에 못지 않은 열정을 발산했다. "이러다간 녹초가 되겠어!" 말로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야 돼요. 다른 여자를 건드릴 생각도 나지 않게 만들 거예요." 로린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정색하고 물었다. "딴 여자가 있는거 아녜요? 케네스, 솔직하게 말해 봐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말로리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에게는 당신밖에 없어. 로린, 당신을 사랑해!"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장래를 완벽하게 보장받을 기회가 온 것이다. 개업의로서 성공하면 많은 수입과 높은 명성을 누릴 수 있다. 거기에다 알렉스 해리슨의 외동딸과 결혼해서 사위가 된다면 모든 것이 완벽해지는 것이다. "나와 결혼해 줘!" 말로리는 속으로 긴장하면서 로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좋아요! 결혼하고말고요!" 로린이 말했다. 케트는 아파트에서 말로리가 연락하기만을 기다렸으나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우선 병원으로 전화해 보았다. "미안합니다, 닥터 헌터. 닥터 말로리는 오늘 당직이 아닙니다. 삐삐를 쳐봐도 연락이 안되는데요." "어디 연락처를 남지지 않았어요?" "아무 기록도 없어요." 케트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페이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사고가 분명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여태까지 연락을 안할 리가 없어." "케트, 연락을 못할 사정이 생겼겠지. 사고는 무슨... 별일 아닐거야. 갑자기 지방에 갈 일이 생겼든가... 뭐 그런 것 아니겠어?" "그래, 네 말이 맞아. 무슨 급한 사정이 생겼겠지." 그러나 케트는 전화 옆을 떠나지 못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벨이 울리기만 기다렸다. 별장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자 말로리는 병원에 전화해서 케트를 찾았다. "닥터 헌터는 오늘 비번이에요." 간호사가 말했다. "고맙소." 말로리는 케트의 아파트로 전화했다.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케트가 받았다. "케트! 잘 있었어?" "케네스! 어디 갔었어요? 통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어요. 갈 만한 곳은 다 전화해 봤는데..." "갑자기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겼어." 조금도 주저 없이 둘러댔다. "미리 전화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급히 지방에 좀 갔었거든. 지금 그리로 가도 돼?" "알면서 왜 물어요? 빨리 와요. 별일 없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30 분쯤 걸릴 거야." 전화를 끊으며 말로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 이젠 손수건을 흔들 때가 왔군... 사랑하던 케트 양, 그 동안 정말 즐거웠어. 하지만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니겠어?'


말로리가 도착하자 케트는 문을 열고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케트는 자신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말할 수 없었다. 남자들은 여자가 그런 걱정 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케트는 한 발 물러서서 말로리를 쳐다보고 말했다. "케네스! 몹시 피곤해 보여요." 말로리는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에 한잠도 못 잤거든."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케트는 말로리를 다시 한번 껴안았다. "불쌍하게도... 뭐 먹을 거라도 좀 만들까요?" "아니, 괜찮아. 오늘 푹 자면 돼. 케트, 좀 앉아. 얘기할 게 있어."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무슨 일 있어요?" 말로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케트, 난 요즘 우리들의 문제를 많이 생각해 봤어." 케트는 미소지었다. "나도 그랬어요. 당신이 깜짝 놀랄 소식이 있어요. 난..." "아니, 잠깐. 내 말을 먼저 들어봐. 케트, 아무래도 우리 둘 다 일을 너무 서두른다는 느낌이야. 저... 내가 너무 성급하게 청혼했던 것 같아." 케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예요?" "내 말은 아무래도 결혼을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는 거야." 케트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케네스, 그럴 수는 없어요. 난 지금 임신했단 말예요." 제 30 장 페이지는 자정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했기 때문에 완전히 지쳐 있었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었고, 저녁은 수술복을 입은 채 샌드위치 한 조각으로 때웠다. 옷도 안 벗고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잠들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다시 잠이 깨었다. 간신히 수화기를 집어들면서 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3 시였다. "...보세요?" "닥터 테일러? 이런 시간에 죄송합니다. 환자 한 사람이 당장 닥터 테일러를 봐야겠다고 야단이라서요." 페이지는 입 안이 말라들어 말을 하기도 힘들었다. "난 조금 전에 근무가 끝났어요. 누구 딴 사람이 가면 안되겠어요?" "환자가 닥터 테일러하고만 얘기하겠대요. 다른 사람은 필요없대요." "누군데요?" "존 크로닌이에요." 페이지는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잘 모르겠어요. 닥터 테일러만 찾아요." "알았어요." 페이지는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곧 갈게요." 30 분 후 병원에 도착했다. 페이지는 바로 존 크로닌의 병실로 향했다. 크로닌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에는 고무 호스가 끼워져 있었고, 팔에는 주사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와줘서 고맙소."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메말라 있었다.


페이지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미소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잠자는 것밖에 할일도 없었어요. 존, 왜 꼭 나를 찾았나요? 이 병원에 의사가 수백 명이나 있는데..." "당신하고 얘기하고 싶어서 그랬소." "아니, 이 시간에요? 난 무슨 응급상황이 벌어진 줄 알았잖아요." "응급상황이오. 난 지금 떠나는 게 좋겠소." 페이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도 안돼요. 이런 상태로 어떻게 집에 가겠다는 거예요? 집에서는 병원과 같이 치료를..." 크로닌이 페이지의 말을 끊었다. "집에 가겠다는 게 아니오. 그냥 떠나겠다는 거요." 페이지는 크로닌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다 알아들으면서 왜 그러시오? 이제 진통제도 안 듣잖소? 더 이상 고통을 참을 수 없소. 빨리 끝내고 싶소." 페이지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크로닌의 손을 잡았다. "존, 그럴 수 없어요. 진통제를 좀더..." "필요없소. 난 지쳤소. 페이지, 이제 내가 가야 될 곳으로 가는 게 좋겠소. 더 이상 구차하게 매달리고 싶지 않소." "존..." "내가 살아야 얼마나 살겠소? 며칠 더? 난 고통을 참지 못한다고 얘기했잖소? 꼭 짐승같이 묶여서 갇힌 느낌이오. 시간이 갈수록 몸속의 암세포는 커지고... 지금 난 사는 게 아니오. 죽어가고 있는 거요. 제발, 날 돕는 셈치고 빨리 끝내 줘요!" 그는 갑자기 통증으로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더 약해져 있었다. "제발... 빨리 끝내 줘..." 페이지는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존 크로닌의 요구를 먼저 병원장 월러스 박사에게 보고하면 그는 병원 윤리위원회를 개최하게 된다. 여러 의사들은 크로닌의 병세를 모두 검토하고 나서야 결정을 내릴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또... "페이지... 이건 내 생명이오. 제발 내 뜻대로 좀 해줘요." 페이지는 고통에 시달리는 절망적인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발... 이렇게 사정하지 않소..." 페이지는 오랫동안 크로닌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한참만에 페이지가 입을 열었다. "존, 알았어요. 그렇게 해드리죠." 크로닌은 고통 속에서도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내 말을 들어줄지 알았소." 페이지는 몸을 숙여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 "눈을 감고 자도록 하세요." "페이지, 안녕." "안녕,. 존." 존 크로닌은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얼굴에 평화로운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페이지는 앉은 채 크로닌을 내려다보며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래드노 박사와 첫 회진을 돌 때 충격을 받았던 것이 기억났다. '벌써 6 주째 의식이 회복되지 않고 있어요. 모든 기관의 기능이


끝난 상황입니다. 오늘 오후에 생명연장장치를 제거할 예정입니다.' 한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게 잘못일까? 천천히, 마치 물 속에서 움직이듯 일어나 옆방에 있는 캐비닛으로 다가갔다. 응급용으로 인슐린 한 병이 비치되어 있었다. 페이지는 인슐린 병을 들고 들여다보며 서 있었다. 한참 그대로 있다가 병마개를 따고 주사기에 넣은 다음, 존 크로닌의 침대로 돌아왔다. 지금이라도 그만둘 수 있다. '꼭 짐승같이 묶여서 갇힌 느낌이오. 시간이 갈수록 몸속의 암세포는 커지고... 지금 난 사는 게 아니오. 죽어가고 있는 거요. 제발, 날 돕는 셈치고 빨리 끝내 줘요!' 페이지는 앞으로 몸을 숙여 크로닌의 팔에 연결된 주사선에 인슐린을 주사하기 시작했다. "잘 자요." 페이지는 속삭였다. 자신이 흐느끼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밖으로 나와 페이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몹시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옳았던 것인가 계속 생각해 보았다. 새벽 6 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닥터 테일러, 좋지 않은 소식이 있어요. 당신 환자인 존 크로닌 씨가 오늘 새벽 심장마비로 사망했어요." 그날 아침, 당직 전문의는 아서 케인 박사였다. 제 31 장 케네스 말로리는 언젠가 한번 오페아 구경을 갔을 때 너무 지루해서 공연중에 잠들었었다. 그러나 오늘 저녁은 달랐다. 샌프란시스코 시립 오페라 극장에서 '리골레토'를 구경하면서 지루하기는커녕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았다. 그는 해리슨 부녀와 함께 전용 특별석에 앉아 있었다. 중간 휴식시간에는 극장 로비에서 수많은 상류사회 인사들을 소개받았다. "내 사위가 될 사람이오. 케네스 말로리라고 대단히 뛰어난 의사지..." 알렉스 해리슨의 사위감이라는 말만으로 충분했다. 그의 사위감이라면 당연히 뛰어난 의사일 수밖에 없으니까. 공연이 끝난 다음 말로리는 해리슨 부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페어몬트 호텔의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으로 갔다. 지배인이 달려나와 정중하게 그들 일행을 예약된 테이블로 안내했다. 해리슨 일가의 얼굴만 보여도 특별우대를 받는 게 분명했다. '이제부터는 나도 이런 대우를 받으며 살게 될 거야!' 말로리는 생각했다. '모두 이 케네스 말로리를 쳐다보게 되는 거야!' 주문이 끝나자 로린이 입을 열었다. "케네스, 우리 약혼을 알리는 파티를 여은 게 어때요?" "거, 참 좋은 생각이다!" 알렉스 해리슨이 말했다. "그게 좋겠어. 아주 성대한 파티를 열어야지... 케네스, 안 그래?" 말로리는 속으로 당황했다. 해리슨 가의 약혼 파티는 당연히 언론의 화제가 될 것이다. '우선 케트 문제를 해결해야 돼! 돈으로 해결하면 되겠지...' 말로리는 케트를 놓고 내기했던 것을 후회했다. 1 만 달러 때문에 이 엄청난 행운을 놓쳐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케트와의 관계가 알려지면 해리슨 부녀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참, 별일은 아니지만... 깜빡 잊고 있었는데, 병원에 같이 근무하는 여의사와 약혼했어요. 그녀는 흑인...' '좀 웃기는 일이 있었어요... 우리 병원에 근무하는 흑인 여의사가 있는데, 동료 레지던트들과 그 여자를 데리고 잘 수 있다고 내기를...' '벌써 결혼 날짜를 잡았어요...' '안돼! 절대로 그럴 수 없어!' 말로리는 생각했다. '어떻게든 케트 문제를 조용히 해결해야 돼!' 해리슨 부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로리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로린의 표정이 활짝 밝아졌다. "그럼 내일부터라도 서둘러 준비해야겠어요. 남자들은 파티하는 데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한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알렉스 해리슨이 말로리에게 말했다. "자, 그럼 약혼 파티는 결정됐고... 케네스, 자네 장래 문제는 벌써 상당한 진전이 있었어." "무슨 말씀입니까?" "개리 기틀린이라고, 노스 쇼어 종합병원장이 있지. 내 컨트리 클럽 회원으로 자주 골프를 같이 치는 친구야. 자네 얘기를 했더니 개업하면 그 병원과 연결해 주겠다고 약속했네. 자네도 알다시피 노스쇼어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병원 아닌가? 그런 병원과 연결되면 자네 개업에 큰 도움이 될 거야. 개업 문제는 내가 다 알아서 준비하고 있어." 말로리는 구름 위로 둥둥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정말, 그렇게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큰 수입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 몇 년 관록이 붙어야 수입다운 수입이 생길 거야. 첫 한두 해는 그저 20 - 30 만 달러 정도밖에 안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질 거야." '20 - 30 만 달러? 이런 세상에...' 말로리는 생각했다. '당신에겐 잔돈밖에 안될지 모르지만, 그게 적은 돈이야?' "그,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알렉스 해리슨은 미소지었다. "이봐, 케네스. 난 자네 장인이 될 사람이야. 정중한 것도 좋지만 계속 딱딱한 예의 차릴 것 없어. 이제부터는 날 알렉스로 부르고 편하게 대하라구." "그러죠, 알렉스."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난 남들처럼 '6 월 신부(6 월에 대학졸업 직후 결혼하는 신부)'가 된 적이 없어요." 로린이 말했다. "케네스, 결혼식 날짜를 6 월에 잡으면 어떻겠어요?" 말로리는 케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케네스, 날짜도 잡아야 되잖아요? 내 생각엔 6 월이 좋을 것 같아요.' 말로리는 로린의 손을 잡았다. "나도 6 월이 좋아." '6 월이라면 케트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 충분해.' 말로리는 마음이 느긋해졌ㄷ. '내기에서 딴 돈을 좀 나눠주면 될 거야...' "내 요트가 프랑스 남해안에 있는데," 알렉스 해리슨이 말했다. "신혼여행은 리비에라로 가는 게 어때? 니스까지는 은행 전용 제트기로 가도록 수배해 주지."


호화 요트... 리비에라에서의 신혼여행... 전용 제트기... 모두가 꿈도 꾸지 못하던 얘기였다. 말로리는 로린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로린하고만 있으면 신혼여행을 어디로 가든 상관없습니다." 알렉스 해리슨은 흡족한 표정이었다. "자, 그럼 다 결정된 거야." 웃는 얼굴로 로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가 결혼한다니 좀 섭섭한데..." "아빠! 내가 아빠를 떠나는 게 아니잖아요. 의사 사위가 생기는 거죠." 알렉스 해리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래... 아주 훌륭한 의사지... 케테스, 내 생명의 은인이 이젠 내 사위가 된다니..." 로린은 말로리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아빠를 살려낸 보답은 내가 두고두고 할게요." "케네스, 내주쯤 점심시간을 좀 내지." 알렉스 해리슨이 말했다. "개업할 사무실을 찾아봐야 되지 않겠나? 포스트 빌딩이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개리 기틀린과 만날 약속을 해야겠어. 내 친구들 모두가 자네를 만나보고 싶다고 야단이야." "아빠, 아빠 친구들은 괜찮겠지만, 케네스를 함부로 소개시키면 안돼요." 로린이 아버지와 말로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내 친구들도 케네스 얘기를 듣고 만나보자고 야단이에요. 하지만, 어림도 없어요. 결혼 전에는 내 친구들이 얼씬도 못하게 할 거예요." "로린, 나에게는 정말 당신뿐이야." 말로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그들은 운전사가 대기하고 있던 해리슨 가의 롤스로이스에 올라탔다. 로린이 말로리에게 물었다. "어디에 내려드릴까요?" "병원에서 내리지. 환자 몇 사람 좀 봐야 되거든." 사실 환자를 볼 생각은 전혀 없었고, 당직근무중인 케트를 만날 생각이었다. 로린은 그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아니, 이 시간에 또 환자를 봐야 돼요? 자기, 너무 혹사당하는 것 아녜요?" 말로리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내가 좀 피곤한 거야 별 문제가 아니지, 딱한 환자를 돕는 게 중요하잖아?" 말로리는 노인병 병동에서 케트를 찾을 수 있었다. "케트, 잘 있었어?" 케트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케네스, 어제 저녁에 만나기로 했었잖아요?" "그래, 미안하게 됐어. 사실은 급한 일..." "지난 주에만도 벌써 세 번째예요.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말로리는 계속되는 케트의 불평과 투정을 듣는 게 짜증스러웠다. "케트, 좀 조용히 얘기하고 싶은데... 여기 어디 빈 방이 없나?" 케트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315 호 환자가 오늘 퇴원했어요. 아직 비어 있을 테니 그리로 가요." 두 사람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간호사 한 사람이 급히 말로리에게 다가왔다. "아, 닥터 말로리! 여기 계셨군요. 피터슨 박사가 급히 찾으십니다. 그분이..." "난 지금 바쁘다고 해!" 말로리는 케트의 팔을 잡고 서둘러 엘리베이터로 갔다. 3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린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복도를 걸어 315 호


병실로 들어갔다. 말로리가 문을 닫았다. 그는 속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뜻밖에 생긴 엄청난 행운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지가 앞으로 몇 분 내에 판가름나기 때문이었다. 그는 케트의 손을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케트, 내가 얼마나 당신을 좋아하는지 알지? 난 여태껏 어떤 여자에게도 이런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어. 하지만, 케트, 지금 당장 아기를 갖는다는 건... 그건 말이야... 그건 정말 곤란해. 내 말뜻은 우린 둘 다 정신없이 일해야 되는 처지고... 우리 둘의 수입을 다 합쳐도 아직 넉넉하게..." "그게 무슨 문제예요?" 케트가 말했다. "케네스, 난 당신을 사랑해요. 아무리 어려워도..." "잠깐, 내 말을 마저 들어봐. 난 그저 우리 계획을 잠시 뒤로 미루자는 것뿐이야. 조금만 참으면 수련의 생활이 끝나고 개업할 수 있을거야. 함께 동부로 갈 수도 있겠지. 몇 년만 열심히 일하면 저축도 늘고 아이를 가질 여유가 생길 거야." "몇 년을 기다리라구요? 난 지금 임신했다고 했잖아요." "알고 있어. 케트, 임신한 지 이제 겨우 두어 달밖에 안됐잖아. 아직은 안전하게 중절수술 할 수 있어." 케트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안돼요! 절대로 안돼요! 난 그런 수술 절대로 받을 수 없어요. 우리가 당장 결혼하는 수밖에 없어요." '내 요트가 프랑스 남해안에 있는데... 신혼여행은 리비에라로 가는 게 어때? 니스까지는 은행 전용 제트기로 가도록 수배해 주지...' "난 벌써 페이지와 하니에게 우리가 결혼할 거라고 했어요. 두 사람 다 들러리를 서주겠다고 했는걸요. 내가 임신한 것도 알고 있어요." 말로리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았다. 만약 해리슨 부녀가 이런 소문을 듣게 되면 만사휴의였다. "그런 얘기를 뭣 때문에 했지?" "하면 어때요?" 말로리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의 사생활을 여러 사람이 아는 게 싫어서 그래." '개업 문제는 내가 다 알아서 준비하고 있어... 첫 한두 해는 그저 20 - 30 만 달러 정도밖에 안될 거야.' "케트, 한번만 더 말하지.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어. 중절수술 받는게 어때?"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속으로는 케트가 그러겠다고 대답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안돼요." "케트, 다시..." "케네스, 난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내가 어렸을 때 중절수술 받았던 얘기 했잖아요? 난 그런 짓은 다시는 안하겠다고 맹세했어요.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어요." 바로 그 말에 말로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겠다고 결론 지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케트를 죽이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제 32 장 하니는 306 호실 환자를 만나는 것이 즐거웠다. 시언 라일리라는 검은 머리에 항상 반짝이는 눈으로 하니를 쳐다보는 에이레 출신 남자였다.


하니는 진료기록에서 그가 마흔이 갓 넘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회진 갔을 때, 하니가 진료기록을 보며 말했다. "콜레시스텍 토미하러 입원했군요." "그래요? 난 담낭제거 수술 받으러 들어온 줄 알았는데..." 하니는 미소지었다. "같은 말이에요." 시언은 하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내 심장만 빼고 뭘 떼어내든지 상관없소. 내 마음은 벌써 당신에게 뺏겼으니까..." 그 말에 하니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런 말에 넘어갈 것 같아요?" "되든 안되든 해보는 거요." 하니는 몇 분이라도 한가한 시간이 나면 그의 병실에 들러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시언은 낙천적인 성격에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수술 같은 건 몇 번이라도 받을 수 있지..." "아니, 수술이 걱정되지도 않아요?" 하니가 물었다. "당신의 예쁜 손으로 하는데 뭐가 걱정이겠소?" "난 수술의가 아니에요. 내과 전문의가 되려고 수련중이에요." "그럼 내과 수련의는 환자와 저녁식사 데이트해도 되는 거지요?" "안돼요. 규정에 환자와 데이트는 못하게 되어 있어요." "내과 수련의는 규정을 어길 수 없는 거요?" "절대로 안돼요." 그러나 하니는 웃고 있었다. "당신은 웃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워요." 시언이 진지하게 말했다. 하니는 여태까지 아름답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시언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고마워요." "당신 모습은 킬라니 들판의 꽃에 맺힌 아침 이슬 같소." "킬라니 들판은 에이레에 있는 곳이지요? 그곳에서 살았어요?" 하니가 물었다. 시언이 웃었다. "아니, 아직 못 가봤소. 하지만 언젠가는 꼭 당신을 데리고 갈 거요. 두고 봐요." 에이레인 특유의 터무니없는 허풍이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 하니는 다시 시언의 병실을 찾았다. "기분이 좀 어때요?" "당신을 보니 금세 좋아지는데... 저녁식사 데이트 신청을 생각해 봤소?" "아뇨." 하니는 거짓말을 했다. "수술이 끝나고 퇴원하면 데이트 한번 합시다. 혹시 벌써 약혼이나 결혼 같은 멍청한 짓을 한 건 아니겠죠?" 하니는 미소지었다. "그런 멍청한 짓은 안했어요." "나도 마찬가지요. 누가 나 같은 사람에게 흥미를 갖겠소?" '그럴 리가 있나?' 하니는 생각했다. "식당보다 집에서 식사하는 것이 좋으면 집으로 초대하겠소. 요리하는 건 자신 있거든." "수술 끝난 다음에 얘기해요." 다음날 아침, 하니가 다시 시언의 병실에 찾아갔을 때 그가 먼저 입을 열였다. "당신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오." 시언은 도화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하니의 초상을 부드러운 선으로 스케치한 것이었다.


"아니, 이건? 정말 고마워요!" 하니가 말했다. "당신은 대단한 화가로군요." 순간 심령술사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이제 곧 사랑에 빠지게 될 거예요. 상대는 예술가일 겁니다.' 다시 한번 시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소?" "아뇨." 하니가 천천히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5 분 후, 하니는 프란시스 고든의 병실을 찾아갔다. "아, 버고가 나타나셨군." 하니가 물었다. "나보고 사랑에 빠지게 될 거라고 했던 말 기억하세요? 예술가를 만나게 될 거라고 했죠." "기억하고말구요." "저... 사실은... 글 사람을 만난 것 같아요." 프란시스 고든은 미소지었다. "그것 봐요. 별자리에 따라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거예요." "혹시... 그 사람 장래가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있겠어요? 우리가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있을까요?" "저기 서랍 속에 점치는 카드가 있어요. 이리 좀 가져와요." 하니는 카드를 꺼내 프란시스 고든에게 건넸다. '말도 안돼! 카드로 점을 치다니... 이런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어...' 프란시스 고든은 카드를 한 장씩 펼쳐나갔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미소를 짓기도 하면서 계속 카드를 펼쳤다. 갑자기 그녀의 손이 멎으며 안색이 달라졌다. "이럴 수가!" 고든은 하니를 쳐다보았다. "왜... 무엇 때문에 그래요?" 하니가 물었다. "그 예술가를 벌써 만났어요?" "네. 며칠 됐어요." 프란시스 고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 딱하게 됐어... 그 사람은 너무 운이 나빠..." 고든은 고개를 들고 하니를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별 도리가..." 시언 라일리가 수술을 받는 아침이 밝아왔다. 8 시 15 분:윌리엄 래드노 박사는 제 2 수술실에서 라일리의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다. 8 시 25 분:엠바카데로 시립병원이 필요로 하는 수혈용 혈액 1 주일분을 실은 트럭이 응급실 입구에 도착했다. 운전사는 운반해 온 혈액을 건물 지하에 있는 혈액은행으로 가져갔다. 당직근무중인 레지던트 에릭 포스터는 젊고 예쁘장한 간호사 안드레아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걸 어디다 내려놓을까요?" 운전사가 물었다. "저기 내려놓아요." 포스터는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알았어요." 운전사는 혈액 상자를 내려놓고 서류를 꺼냈다. "당직의사 서명이 필요한데요." "아, 네." 포스터는 서류에 서명한 다음 운전사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운전사는 떠났다. 포스터는 다시 안드레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얘기하다 말았지?" "내가 아주 매력적이라고 했잖아요." "맞아. 당신이 결혼만 안했다면 벌써 데이트를 신청했을 거야." 포스터가


말했다. "혹시 남편 몰래 딴 남자와 데이트한 적 없어?" "없어요. 내 남편은 권투선수거든요." "흠... 그럼 혹시 여동생은 없어?" "있어요." "당신만큼 예쁘게 생겼어?" "나보다 더 예뻐요." "이름이 뭔데?" "마릴린." "당신 부부와 마릴린, 그리고 내가 같이 식사라도 하면 어떨까?" 잡담이 계속되는 동암 팩스가 들어왔지만 포스터는 신경쓰지 않았다. 8 시 45 분:래드노 박사의 집도로 시언 라일리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수술이 순조로웠다. 수술 팀은 손발이 잘 맞아 한치의 착오도 없이 수술을 진행해 나갔다. 9 시 05 분:래드노 박사는 담도에 다다랐다. 그때까지는 교과서에 나오는 것 같은 수술이었다. 그러나 담낭을 막 제거하려 할 때 손에서 메스가 미끄러지면서 혈관을 건드렸다.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래드노 박사는 상처난 혈관을 지혈시켜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마취의가 소리쳤다. "혈압이 급격히 떨어졌어요.! 95 로 떨어졌어요!" 래드노 박사는 간호사에게 소리쳤다. "빨리 수혈용 혈액을 가져오라구 해!" "알겠습니다." 9 시 06 분:혈액은행의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받을게." 포스터는 책상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 "혈액은행입니다." "지금 제 2 수술실로 O 형 혈액을 급히 보내줘요. 응급상황이에요." "알았소." 포스터는 전화를 끊고 조금 전에 도착한 혈액 상자가 쌓여 있는 구석으로 갔다. 상자에서 혈액이 든 비닐 백 네 개를 꺼내 구내 운반용 핸드카에 실었다. 그는 혈액형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O 형이 틀림없지." 혼자 중얼거렸다. 즉시 의료보조원을 불렀다. 그때 팩스 수신이 완료되었다. "무슨 일이에요?" 안드레아가 물었다. 포스터는 수술일정표를 들여다보고 말했다. "제 2 수술실에서 래드노 박사가 수술에 고전하고 있는 모양이야." 9 시 10 분:의료보조원이 혈액은행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이걸 제 2 수술실로 가져가. 응급상화이래." 포스터는 의료보조원이 핸드카를 끌고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안드레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동생 얘기를 좀더 해봐." "그애도 결혼했어요." "아니..." 안드레아는 웃었다. "하지만 다른 남자들과도 자주 데이트해요." "정말?" "농담이에요. 이젠 내 자리로 가봐야겠어요. 에릭, 커피 고마웠어요." "언제든지 와." 포스터는 나가는 안드레아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거참, 몸매 하나는 죽여주는군!' 9 시 12 분:의료보조원은 2 층 수술실로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9 시 13 분:래드노 박사는 계속 흘러내리는 피를 막아보려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수혈용 혈액은 왜 이렇게 안오는 거야?" 9 시 15 분:의료보조원이 제 2 수술실 문을 열었다. 보조 간호사가 급히 비닐 백을 건네받았다. "고마워요." 그녀는 비닐 백을 들고 수술대로 다가갔다. "래드노 박사님, 지금 도착했어요." "서둘러! 빨리 수혈을 시작해." 지하층 혈액은행에서 에릭 포스터는 커피잔을 비웠다. 아직도 안드레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반반하게 생긴 간호사는 죄다 결혼했으니, 젠장...' 책상으로 돌아가다가 팩스가 눈에 띄었다. 수신된 내용을 읽어보았다. 경고. #687, 불량 혈액 회수, 6 월 25 일:적혈구 세포, 냉동 플라스마. 일련번호 CB83711, CB800007. 캘리포니아, 아리조나, 워싱톤, 오레건 주 지역 혈액 센터. 실험결과 HIV-1 항체의 양성반응이 나타났음. 이미 공급된 상기 플라스마는 즉시 회수시킬 것. 잠시 더 들여다보다가 포스터는 책상으로 다가가 조금 전에 도착한 혈액의 수령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일련번호가 팩스의 경고번화와 일치했다. "이럴 수가!" 황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제 2 수술실 부탁해요. 빨리!" 간호사가 전화를 받았다. "여기 혈액은행인데, 조금 전에 O 형 혈액 보낸 것 있죠? 그걸 수혈하면 안돼요! 즉시 새로 보낼게요." "벌써 수혈했는데요." 간호사가 말했다. 병원이 발칵 뒤집히고 공식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 잘못이 아니에요." 에릭 포스터가 말했다. "경고가 팩스로 들어왔을 때는 벌써 수술실로 혈액을 보낸 다음이었어요." 래드노 박사는 시언 라일리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청난 실수였소." 래드노가 말했다. "있을 수 없는 실수였소. 정말 돌이킬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해볼 텐데... 방법이 없으니..." 시언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맙소사! 난 이제 죽은 목숨이구나!" "앞으로 6 주 내지 8 주는 기다려 봐야 HIV 양성반응이 나타날지 알게 됩니다. 설사 양성반응이 나타난다 해도 당신이 반드시 에이즈에 걸린다고는 할 수 없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소." "더 이상 날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시언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 끝난 것 아니오?" 그 소식을 들은 하니도 큰 충격을 받았다. 프란시스 고든의 말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정말 딱하게 됐어... 그 사람은 너무 운이 나빠...' 하니가 그의 방을 찾았을 때, 시언 라일리는 잠들어 있었다. 하니는 침대 옆에 조용히 앉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참 후 눈을 뜬 시언은 하니를 보고 말했다. "꿈속에서 또 꿈을 꾸었는데, 내가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구." "시언..." "내 시체를 보러 온 거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소?"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시언, 이건 엄청난 실수였어요." "난 정말 에이즈로 죽고 싶지는 않아!" "HIV 가 주입됐다고 반드시 에이즈에 걸리는 건 아니에요. 에이레인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 아니에요?" "당신 말대로라면 얼마나 좋겠소?" 하니는 그의 손을 잡았다. "내 말을 믿고 마음을 굳게 가져요." "난 하느님께 기도한 적이 별로 없지만, 이제부터는 열심히 해야 되겠소." 시언이 말했다. "나도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하니가 말했다. 시언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저녁식사 데이트 얘기는 이제 없었던 걸로 해야겠죠?" "무슨 소리예요? 그렇게 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할걸요. 난 잔뜩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그는 하니를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정말 그랬소? 진심이오?" "물론이에요! 날 에이레에 데려가겠다고 한 것도 잊으면 안돼요!" 제 33 장 "케네스, 왜 그래요?" 로린이 물었다. "자기, 너무 긴장해 있는 것 같아요." 두 사람은 해리슨 저택의 넓은 서재에 앉아 얘기하고 있었다. 알렉스 해리슨과 함께 말로리의 개업과 장래 얘기를 꽃피우며 호화스러운 저녁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만 서재로 와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어요?" '임신한 깜둥이 년이 나와 결혼하겠다고 설쳐대서 그래... 우리가 약혼했다는 소문이 들리기만 하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렇게 되면 이 엄청난 행운이 다 물거품이 될까 봐 그래...' 말로리는 로린의 손을 잡았다. "아마 너무 피곤해서 그럴 거야. 로린, 난 환자들에게 무심할 수가 없어. 나만을 의지하는 불쌍한 사람들이거든. 항상 그들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로린은 말로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케네스, 당신의 그런 따뜻한 인간미 때문에 당신을 더 좋아하게 됐어요. 항상 딱한 사람들을 생각해 주니까..." "어릴 때 그렇게 자라서 그런 모양이야." "참, 깜빡 잊을 뻔했네. <크로니클> 신문사에서 월요일에 인터뷰하러 온대요. 사진기자도 같이 온대요." 말로리는 가슴이 철렁했다. "자기, 그날 시간 내서 여기로 와줄 수 없어요? 당신 사진도 찍고 싶다고 했어요." "글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날 병원 일이 너무 바빠서 힘들것 같아." 이렇게 말하면서 말로리는 속으로 자신의 계획과 일정을 맞추어보았다. "로린, 지금 그런 인터뷰를 하는 게 괜찮겠어? 내 말은 좀 기다렸다가..." 로린은 웃었다. "케네스, 신문기자들을 잘 몰라서 그래요. 뒤로 미룬다고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사냥개처럼 냄새 맡고 어떻게든 들춰낼 거예요. 차라리 일찍 밝히는 게 속편해요." '월요일! 그때까지는...' 다음날 아침, 말로리는 약품보관소에서 케트를 찾아냈다. 수척한 얼굴에 몹시 피곤한 표정이었다. 얼굴에는 화장기가 전혀 없었고 머리도 손질하지 않았다. '로린이라면 절대로 자신을 저렇게 무너뜨리지 않을 거야.' 말로리는 생각했다. "케트, 안녕."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로리는 두 팔로 케트를 끌어안았다. "케트, 어젯밤 한숨도 안 자고 우리 생각을 많이 해봤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에겐 당신밖에 없어. 당신 생각이 옳아.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아마 당신이 임신했다는 말에 좀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 이제 결심했어. 우리 아이를 낳자구." 그는 케트의 얼굴에 생기가 되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케네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물론이지." 케트는 두 팔을 그의 목에 감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정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당신 없이 어떻게 할지 막막하기만 했어요." "이제 그런 걱정 할 필요 없어.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내가 얼마나 잘될지 상상도 못할걸.' "케트, 난 일요일 밤 비번인데, 혹시 당직근무 아냐?" 케트는 그이 손을 잡았다. "어떻게든 시간을 낼게요." "좋아!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당신 아파트로 가면 어떨까? 페이지와 하니가 집을 비우도록 할 수 있을까? 우리 둘만 있으면 좋겠는데..." 케트는 미소지었다. "그건 문제 없어요. 오늘 당신이 날 얼마나 행복하게 해줬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나도 당신을 사랑해. 그럼 일요일 밤에 봐." 아무리 따져보아도 완벽한 계획이었다. 말로리는 세세한 부분까지 몇 번이나 다시 살폈다. 케트의 죽음이 자신과 연결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필요한 약품을 병원 약국에서 입수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보우만 사건 이후 보안조치가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 일찍 말로리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약국을 찾아나섰다. 대부분의 약국은 문을 닫았지만, 한참 헤맨 끝에 문을 연 약국을 발견했다. 카운터 뒤에 앉았던 약사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뭘 드릴까요?" "아, 이 근처에 사는 환자에게 약을 좀 갖다주려고 합니다. 처방전을 떼지요." 말로리는 의사 신분을 밝히고 처방전에 서명했다. 약사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요즘 세상에 왕진하는 의사는 찾아보기 힘들어요." "그래요. 왜 이렇게 각박해졌는지... 환자가 어떻게 되든 상관할 바 아니라는 식이니..." 말로리는 처방전을 약사에게 건네주었다. 약사는 읽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곧 가져올게요." "고마워요."


'계획 1 단계 완료!' 그날 오후, 말로리는 병원에 들렀다. 약 10 분간 건물 안에 머물렀다가 두툼한 봉투를 들고 나왔다. '2 단계 완료!' 말로리는 케트와 트레이더 빅스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먼저 가서 케트를 기다렸다. 케트가 들어오는 모습을 쳐다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이 멍청한 년아, 이게 바로 최후의 만찬이라는 거야!' 케트가 테이블로 다가오자 말로리는 활짝 웃는 얼굴로 일어나 맞았다. "케트, 오늘은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데." 사실 그랬다. 말로리는 누구든지 케트가 지나가면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류 모델보다 더 매력적인데! 잠자리는 말할 것도 없고... 문제는 제산이 몇천만 달러 부족한 데 있어...' 케트는 오랜만에 일류 레스토랑에서 말로리를 만났다. 주변의 여자들 시선이 말로리에게 갔다가 부러운 듯 케트에게 돌아오는 것도 기분나쁘지 않았다. 말로리는 눈앞에 케트밖에는 없다는 듯 친절하고 따뜻한 옛날 케네스 말로리로 돌아가 있었다. "오늘도 바쁘게 지냈어?" 말로리가 물었다. 케트는 한숨을 쉬었다. "정신없이 바빴어요. 아침에 수술이 세 건 있었고, 오후에 두 번 더 있었어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 그럴 리는 없지만 옷을 갈아입을 때 아기가 뱃속에서 움직인 것 같아요." 말로리는 미소지었다. "빨리 나오고 싶어 그러겠지." "아들인지 딸인지 초음파검사를 해봐야겠어요. 그러면 옷을 미리 사둘 수 있잖아요?" "좋은 생각이야." "케네스, 결혼 날짜를 잡는 게 어때요? 이대로 오래 끌 수는 없잖아요?" "걱정 마." 말로리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내주에 결혼허가 신청서를 제출하지. 바로 허가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빨리? 정말 기뻐요!" 케트는 결혼을 서두르다가 모든 것을 너무 간략하게 처리하는 게 아닌가 약간 불안해졌다. "아무리 바빠도 신혼여행은 며칠 다녀와야 되지 않겠어요? 멀리 갈 수는 없겠지만 오레건이나 워싱턴 주의 경치 좋은 곳을 다녀오는 게 어때요?" '틀렸어, 이 멍청아! 난 6 월에 리비에라로 신혼여행을 갈 거야. 내 요트에서 즐길 거라구.' "아주 좋은 생각이야. 월러스 박사에게 말해 볼게." 케트는 말로리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세상 어떤 여자보다 더 좋은 아내가 될게요." "당신은 틀림없이 그럴 거야." 말로리는 미소지었다. "자, 그 야채를 먹어. 아기를 생각해서 이제는 먹는 것에 신경써야 돼." 두 사람은 9 시에 레스토랑을 나왔다. 케트의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말로리가 다시 한번 물었다. "페이지와 하니가 집에 없는 게 틀림없지?" "걱정 말아요." 케트가 대답했다. "페이지는 병원에서 당직근무중이고, 하니에게는 우리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니 좀 나가 있으라고 했어요." '이런, 젠장...'


케트는 말로리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눈치챘다. "왜 그래요?" "아니, 별것 아니야. 하지만 우리 사생활을 딴 사람들이 알게 되는게 어쩐지..." '조심해야겠는데... 아주 조심해야 돼!' 말로리는 생각했다. "자, 빨리 들어가지." 케트는 말로리가 서두르는 것이 싫지 않았다. 아파트에 들어가자 말로리가 재촉했다. "침실로 갈까?" 케트는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침실에서 옷을 벗는 케트를 쳐다보면서 말로리는 생각했다. '몸매 하나는 기막히게 빠졌어. 애를 낳으면 엉망이 되겠지...' "케네스, 안 벗을 거예요?" "벗어야지." 그는 케트가 옷을 벗은 자신을 남겨두고 가버렸던 때가 생각났다. 이제 그녀가 당할 차례였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말로리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혹시 너무 긴장해서 표가 나면 어쩌지?' 긴장으로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속으로 자신의 계획을 정당화시켜 보았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저 여자 탓이야! 몇 번이나 그만두자고 했을 때 순순히 말을 들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 아냐? 고집만 부리고 말을 안 들었잖아!' 그는 침대 위 케트 옆에 누웠다. 곧 케트의 따뜻한 몸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말로리는 자신이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그는 케트의 몸 깊숙이 들어갔고 케트는 신음하기 시작했다. "아! 자기... 정말... 너무 좋아요..." 케트는 점점 더 빠르게 움직였다. "아! 그래요... 더... 더... 난 어떡해... 멈추면 안돼..." 절정에 도달한 케트는 몸을 뒤틀다가 부르르 떨었다. 잠시 후 맥없이 쓰러져 말로리의 팔을 베고 움직이지 않았다. 케트는 정신이 돌아오자 수줍게 물었다. "당신도 좋았어요?" "물론이지." 말로리는 태연히 대답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했기 때문에 사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잔 어때?" "술은 안돼요. 아기가..." "하지만 우린 지금 결혼 날짜를 잡고 축하 파티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한잔 안할 수 있어?" 케트는 잠시 주저했다. "좋아요. 조금만 마실게요." 말하고는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말로리가 먼저 일어났다. "아니, 아기 엄마는 그냥 누워 있어. 이젠 응석도 좀 부려봐." 케트는 행복한 표정으로 침실 밖으로 나가는 말로리를 쳐다보았다. '난 정말 운이 좋아! 저런 사람과 결혼하게 되다니...' 말로리는 거실의 바로 가서 위스키 두 잔을 따랐다. 케트가 침실에 그대로 있는지 확인한 다음 재킷을 걸쳐 놓았던 소파로 갔다.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병의 액체를 위스키 잔 하나에 부었다. 잘 저은 다음 냄새를 맡아보았으나 스카치 위스키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침실로 돌아간 말로리는 약을 탄 잔을 케트에게 건넸다. "우리 아기를 위해 건배해요."


"좋아. 우리 아기를 위하여!" 말로리는 케트가 한 모금 마시는 것을 쳐다보았다. "새 살림 차릴 아파트를 구해야겠어요." 케트는 즐거운 꿈을 꾸는 표정이었다. "아기 방도 꾸며야 되고... 아무래도 우리는 아기를 너무 좋아해서 버릇없이 키울 것 같아요." 케트는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말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겠는데." 그는 케트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기분이 좀 어때?" "너무 좋아요. 케네스, 난 사실은 우리 사이가 걱정돼서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하지만 이젠 걱정 안해요. 난 아주 행복해요." "그럼 그래야지." 말로리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케트의 눈꺼풀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맞아요." 케트가 말했다.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어요." 이제 혀가 굳기 시작해서 말끝이 흐려졌다. "케네스, 기분이 좀 이상해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졌다. "넌 임신해서는 안되는 거였어." 케트는 멍한 표정으로 말로리를 올려다보았다. "뭐라구 요?" "넌 내 장래를 망치려고 했어." "망치다니..." 케트는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네가 내 앞을 가로막는 거야." "무슨..." "내 앞을 막는데 가만둘 수 없지." "케네스, 어지러..." 말로리는 서서 케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케네... 좀 도와... 케..." 드 디어 케트의 눈이 감기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말로리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은 충분했다. 제 34 장 케트의 시체를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하니였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케트는 피바다가 된 욕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옆에는 피묻은 큐렛(긁어내는 데 쓰는 의료기기)이 떨어져 있었다. 심한 자궁출혈이 분명했다. 하니는 충격으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이, 이럴 수가!" 목소리도 크게 낼 수 없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케트에게 다가가서 떨리는 손으로 동맥을 짚어보았다. 맥박이 없었다. 하니는 거실로 뛰어가 수화기를 들고 911 을 돌렸다. "911 응급구조대입니다." 남자 목소리였다. 하니는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심한 충격에 온몸이 마비된 것 같았다. "911 응급구조대입니다. 여보세요...?" "여... 여기... 사람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주, 죽었어요... 좀... 도와주..." "누가 죽었습니까?" "케트요." "고양이가 죽었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녜요!" 하니가 소리쳤다. "내 친구 케트가 죽었단 말이에요. 빨리 좀 와줘요!" "이봐요..." 하니는 수화기를 내리치듯 전화를 끊었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수화기를


들고 병원으로 전화했다. "닥터 테...테일러 부...부탁해요." "잠깐 기다리세요." 하니는 수화기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페이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몇 분 지나서 페이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닥터 테일러입니다." "페이지! 빠, 빨리 와!" "하니? 대체 무슨 일이야?" "케트가... 케트가 죽었어." "뭐라구?" 페이지의 목소리가 갑자기 달라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집에 와 보니까... 혼자 임신중절 수술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 같아." "어떻게 그런 일이! 알았어. 곧 갈게." 페이지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정복 경찰관 두 명, 사복 형사 한 명, 그리고 경찰 검시관이 와 있었다. 하니는 진정제를 먹고 침실에 누워 있었다. 검시관은 케트의 시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욕실 쪽으로 다가오는 페이지를 보고 형사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페이지는 잠시 케트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피부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난 닥터 테일러예요. 이 집에 살아요." "닥터 테일러,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나는 번즈 경감입니다. 이 사건을 신고한 사람과는 얘기가 안돼요. 충격이 심한 모양입니다. 지금 진정제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습니다." 페이지는 처참한 욕실 광경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뭘... 뭘 알고 싶으세요?" "이름은 뭐죠?" "케이트 헌터, 닥터 케이트 헌터입니다. 우린 케트라고 불러요." "닥터 헌터도 여기서 살았습니까?" "네." '나 케네스의 아기를 가졌어! 축하해 줘.' "아무래도 혼자 임신중절 수술을 하다가 실수로 사고가 난 것 같은 데..." 번즈 경감이 말했다. 페이지는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건 말도 안돼요." 페이지가 말했다. 번즈 경감은 잠시 페이지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닥터 테일러,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케트는 몹시 아기를 낳고 싶어했어요." 점점 사건의 전말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애 아버지되는 사람은 원치 않았지만." "애 아버지요?" "닥터 케네스 말로리예요. 그 사람도 우리와 같이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에서 일해요. 그는 케트가 임신했는데도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이봐요, 케트는 우수한 의사입...였어요." 페이지는 케트를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게 가슴 아팠다. "만약 임신중절 수술을 하려 했다면 욕실에서 이런 서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페이지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어요."


검시관이 시신 검사를 마치고 일어나면서 페이지에게 말했다. "혹시 임신한 사실을 남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혼자 시도했을 수도 있잖소?" "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도 벌써 알고 있었잖아요?" 번즈 경감은 페이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늘 저녁 내내 닥터 헌터 혼자 있었습니까?" "아뇨. 닥터 말로리와 데이트 약속이 있었어요." 케네스 말로리는 침대에 누워 저녁에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자신의 행적에 만에 하나 허점이 없었나 세심하게 돌이켜보았다. '완벽해! 허점은 없어.' 그는 왜 경찰이 아직도 찾아오지 않을까 의아했다. 바로 그 순간 현관벨이 울렸다. 말로리는 벨이 두 번 더 울린 다음에야 일어났다.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갔다. 문으로 다가가서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세요?" "닥터 말로리입니까?" "그런데요." "샌프란시스코 시 경찰국 번즈 경감입니다." "경찰이라구요?" 말로리는 의외라는 말투였다. 말로리가 문을 열자 복도에 있던 번즈 경감은 신분증을 내밀었다. "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좋아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닥터 헌터를 잘 아시지요?" "알고말고요." 말로리는 갑자기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케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지난밤에 만났었죠?" "그랬어요. 아니, 왜 그러시죠? 케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좀 안 좋은 소식입니다. 닥터 헌터는 사망했습니다." "뭐라구요? 그럴 수가... 어쩌다 그렇게 됐죠?" "혼자 임신중절 수술을 시도하다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로리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 내 탓이야!" 경감은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왜 그게 당신 탓입니까?" "이건 내 탓이에요. 난... 닥터 헌터와 결혼하려고 했었어요. 단지 지금 아기를 갖는 게 너무 부담스럽다고 했었죠. 좀더 기다리자고 설득하니까 결국 케트도 동의했어요. 난 당연히 병원에서 할 줄 알았는데... 남의 시선 때문에 혼자 시도했던 것 같아요... 이건... 난 정말 믿어지지 않아요." "몇 시쯤 닥터 헌터와 헤어졌습니까?" "아마 밤 10 시쯤 됐을 겁니다. 아파트에 내려주고 난 바로 집으로 왔어요." "그녀의 아파트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아뇨." "닥터 헌터가 혼자 수술을 해보겠다고 한 적 있습니까?" "임신중절 수술을요? 아뇨, 아무 말도 없었어요." 번즈 경감은 명함을 꺼냈다. "닥터 말로리, 뭔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기억나면 내게 전화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이지요. 난... 정말 너무 엄청난 일이라..." 페이지와 하니는 밤을 꼬박 새웠다. 어떻게 케트가 그런 처참한 죽음을


당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름대로 사건의 경위를 밤새도록 추측해 보았다. 아침 9 시에 번즈 경감이 다시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어제 바로 닥터 말로리를 찾아가서 얘기해 봤습니다." "그래서요?" "닥터 말로리 말이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 닥터 헌터를 데려다 주고 자신은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건 거짓말이에요." 말하고 나서 페이지는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케트의 시신검사에서 정액이 추출되었나요?" "예, 있었소." "그렇다면," 페이지가 말했다. "닥터 말로리가 거짓말했다는 게 증명되잖아요. 성관계가 있었다는 게 분명한데..." "오늘 아침에 닥터 말로리를 다시 만났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했더니 저녁식사 하러 나가기 전에 관계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페이지는 믿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 케트를 죽이는 데 쓴 큐렛에 지문이 찍혔을 거예요. 지문 채취 결과가 나왔죠?" 페이지가 물었다. "나왔습니다, 닥터 테일러." 번즈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지문은 모두 닥터 헌터 것이었습니다." "그건 불가능... 잠깐! 말로리가 장갑을 끼고 범행한 것이 분명해요! 그런 다음 큐렛에 케트의 지문을 찍어놓은 게 틀림없어요." "제시카의 추리극장이나 형사 콜롬보를 너무 많이 보신 것 아닙니까?" "케트가 살해당했다고 생각지 않으시는군요."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부검은 했어요?" "예, 끝났습니다." "결과는요?" "검시관은 사고에 의한 사망으로 결론내렸습니다. 닥터 말로리는 임신중절 수술을 하기로 합의보았다고 했습니다. 닥터 헌터는 아마 혼자서..." "혼자 욕실에 들어가 그런 터무니없는 수술을 했단 말이에요?" 페이지는 번즈 경감의 말을 끊었다. "경감님, 그건 말도 안돼요! 케트는 의사였어요. 뛰어난 외과의였어요! 혼자 그런 어처구니없는 수술을 할 리 없어요." 번즈 경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닥터 말로리가 임신중절을 하도록 설득해서 함께 수술을 시작했다가 문제가 생기니까 달아났다는 말입니까?" 페이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케트는 절대로 중절수술에 동의하지 않았을 거예요. 말로리가 의도적으로 케트를 살해한 게 틀림없어요." 페이지는 점점 생각이 정리되어 갔다. "케트가 맨 정신에 그렇게 당할 리가 없어요. 의식을 잃지 않고는 그렇게 하도록 가만있지 않았을..." "검시결과 별다른 상처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의식을 잃을 정도면 머리에 충격을 줄 만한 상처가 있든가, 아니면 목을 조른 흔적이 나타나든가 할 텐데..."


"혹시, 수면제 같은 약물이 검출되지 않았어요?" "전혀 없었습니다." 페이지는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내가 보기에는 살인사건 같지가 않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닥터 헌터가 잘못 판단하고 실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정말 안됐습니다." 페이지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는 번즈를 쳐다보았다. "잠깐!" 페이지가 소리쳤다. "살해 동기가 충분하잖아요." 번즈는 고개를 돌렸다. "그게 확실치 않소. 닥터 말로리는 닥터 헌터가 임신중절에 동의했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근거가 없잖소?" "살해당한 사람이 있는데도 수사를 안하겠다는 말이에요?" 페이지는 계속 물고 늘어졌다. "닥터 테일러, 증거가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결국 닥터 말로리의 말과 피해자의 말밖에 증거가 될 수 없는데 피해자는 이미 사망했지 않습니까?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번즈는 몸을 돌려 떠났다. '케네스 말로리가 절대로 그냥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거야.' 페이지는 이를 악물었다. 제이슨의 아파트로 찾아왔다. "소식 들었어." 그가 말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케트가 어쩌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지?" "케트가 한 짓이 아니에요." 페이지가 대답했다. "케트는 살해당한 거예요." 페이지는 번즈 경감과 나눴던 얘기를 제이슨에게 해주었다. "경찰은 수사도 안 해볼 생각이에요. 그냥 사고사로 처리하겠다는 거예요. 제이슨, 케트가 살해당한 것은 다 내 탓이에요." "당신 탓이라니?" "내가 케트보고 말로리의 데이트에 응하라고 했었어요. 케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케트가... 케트가 사랑에 빠진 거예요. 어쩌면 좋아요?" "그렇다고 당신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어." 제이슨이 단호하게 말했다. 페이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저히 이 아파트에 더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어디로든 떠나야겠어요." 제이슨이 페이지의 손을 잡았다. "그럼 우리 당장 결혼할까?" "그렇게 서두를 수는 없어요. 아직 케트의 시신이..." "알았어. 한두 주일 기다린 다음 얘기하지." "그래요." "페이지,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케트와 나는 같은 시기에 사랑에 빠졌난데, 난 살아 있고 케트는 죽었으니... 자꾸 죄책감이 들어요." *** 그 사진은 화요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 1 면에 실렸다. 활짝 웃는 케네스 말로리가 로린 해리슨을 한 팔로 감싸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진 설명에는 '대재벌의 상속녀, 의사와 약혼'이라고 되어 있었다. 신문을 들여다보던 페이지는 믿어짖지가 않았다. 케트가 죽은 지 이틀밖에 안되었는데 케네스 말로리가 다른 여자와 약혼한 것이 신문에 실린 것이다. 케트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하고 가까이 지내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 엉뚱한 여자와 결혼계획을 진행시켜 온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케트를 살해한 거야! 그 여자와 결혼하는 데 케트가 방해가 되니까!' 페이지는 수화기를 들고 경찰서에 전화했다. "번즈 경감님 부탁합니다." 잠시 후, 경감이 전화를 받았다. "경감님, 닥터 테일러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아침 <크로니클>지의 기사와 사진 보셨어요?" "봤습니다." "바로 그게 살인동기가 되잖아요?" 페이지가 말했다. "케네스 말로리는 로린 해리슨이 알게 될까 봐 케트를 살해한 거예요. 말로리를 체포해서 기소해야 돼요." 페이지는 흥분으로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잠깐... 좀 진정하세요. 닥터 테일러. 그게 살인동기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아무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당신은 닥터 말로리가 닥터 헌터를 살해했다면 먼저 의식을 잃도록 했을거라고 했지요? 당신 말을 듣고 법의학 전문가들과 얘기해 봤습니다. 의식을 잃게 하려면 상당한 충격을 가해야 하기 때문에 상처를 남기지 않는 게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틀림없이 강한 수면제나 진정제를 썼을 거예요." 페이지가 말했다. "아마 클로랄 하이드레이트 같은 최면제를 썼을 거예요. 그 약은 상당히 빨리..." 번즈 경감은 차분하게 말했다. "닥터 테일러, 닥터 헌터의 시신에서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는 검출되지 않았소. 정말 안됐습니다. 진심입니다. 하지만 닥터 말로리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됐다고 체포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뭐 다른 얘기는 없습니까?" "없어요." 페이지는 수화기를 내리치듯 전화를 끊었다. 그 자리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할 얘기야 너무 많지... 말로리가 케트에게 약을 먹인 게 틀림없어... 병원 약국에서는 어떤 약이라도 쉽게 구할 수 있어.' 15 분 후, 페이지는 병원으로 출발했다. 병원 약국에는 책임자인 피트 새무얼즈가 카운터 뒤에 앉아 있었다. 그는 들어오는 페이지를 보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닥터 테일러, 무슨 일이시지요?" "며칠 전에 닥터 말로리가 약을 좀 가져갔을 거예요. 나에게 약명을 알려줬는데 아무래도 기억이 안 나요." 새무얼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닥터 말로리는 여기에 온 지가 한 달도 더 되는데요?" "그게 확실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기억 못할 리가 없어요.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미식축구 얘기로 항상 입씨름을 하거든요." 페이지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간 고마워요." '외부 약국에서 처방전을 떼고 약을 구한 게 틀림없어!' 페이지는 클로랄 하이드레이트 같은 습관성 약품을 처방할 때는 처방전이 세 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장은 환자용, 한 장은 주정부의 약품통제국으로 보내지고,


나머지 한 장은 약국에서 보관해야 되는 규정 때문이었다. '어디선가 말로리는 처방전을 떼고 약을 구했을 거야. 샌프란시스코에 약국이 2 백 - 3 백 개는 될 텐데...' 무조건 말로리의 처방전을 찾을 수는 없었다. 케트를 살해하기 직전에 약을 구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된다. '일요일에 구했다면 찾아낼 수도 있어... 일요일에 문을 여는 약국이 몇 안되니까 찾기 쉬울 거야.' 페이지는 생각했다. 페이지는 위층 원무과로 가서 지난 토요일 당직자 명단을 찾아 훑어보았다. 케네스 말로리는 토요일 하루 종일 당직근무를 했다. 그렇다면 일요일에 약을 구했을 게 틀림없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요일에 문을 여는 약국이 몇이나 될까? 페이지는 수화기를 들고 캘리포니아 주정부 약정국에 전화를 걸었다. "난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의 닥터 페이지 테일러입니다." 페이지가 말했다. "지난 일요일에 내 친구 의사가 약국에 처방전을 맡기고 여행을 떠났어요. 나보고 약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는데 약국 이름을 깜빡 잊었어요. 좀 도와주시겠어요?" "글쎄요... 닥터 테일러, 약국 이름을 모르신다면 어떻게..." "대부분 약국은 일요일에 닫죠?" "그렇습니다만..." "일요일에 여는 약국을 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잠시 반응이 없었다. "글쎄요...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아주 중요한 일이예요." 페이지가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36 개의 약국 이름과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골고루 퍼져 있는 주소를 알아냈다. 경찰이 수사한다면 별로 힘들지 않겠지만, 번즈 경감은 사건을 이미 사고사로 처리해 버렸다. '하니와 내가 직접 찾아다닐 수밖에 없어...' 이렇게 생각하고 페이지는 하니에게 털어놓았다. "글쎄... 너무 막연하지 않아?" 하니가 말했다. "말로리가 일요일에 처방전으로 약을 구했는지도 확실히 모르잖아?" "케트가 살해당한 건 확실하잖아? 이 방법밖에 없어. 내가 리치몬드, 마리나, 노스 비치, 마켓 가, 미션, 그리고 포트레로 지역을 맡을게. 넌 엑설시오, 잉글사이드, 레이크 머시드, 웨스턴 애디션, 그리고 썬셋 지역을 맡아." "알았어." 첫번째 약국에 들어가서 페이지는 의사신분을 밝히고 말했다. "내 동료인 닥터 케네스 말로리가 지난 일요일에 여기서 처방전을 뗐다고 들었어요. 여행을 떠나면서 나에게 약을 다시 구해 놓으라고 부탁했거든요. 그런데 약 이름을 잊었어요. 미안하지만 기록을 좀 찾아주시겠어요?" "닥터 케네스 말로리요? 잠시 기다려 보세요." 약사는 몇 분 후 돌아왔다. "미안하지만 지난 일요일 닥터 케네스 말로리의 처방전은 없는데요." "고맙습니다." 그 다음 약국 네 곳도 마찬가지였다. 하니도 계속 허탕만 치고 다녔다.


"처방전이 어디 한두 장이에요? 수천 장이에요."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지난 일요일에 쓴 거예요." "지난 일요일이라... 아무리 찾아봐도 닥터 케네스 말로리의 처방전은 없는데요? 미안합니다."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이 약국 저 약국을 뒤지고 다녔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점점 실망만 더해 가는데, 오후 늦게 포트레로 지역에서 막 문을 닫으려고 하는 작은 약국으로 들어간 페이지가 드디어 처방전을 찾아냈다. 약사가 말했다. "아, 닥터 케네스 말로리 말씀이지요? 기억나구말구요. 왕진 가는 길이라고 했어요. 정말 좋은 의사 같았어요. 요즘 세상에 왕진해 주는 의사가 어디 있어요? 처방전이 여기 있네요." '레지던트가 왕진을 가다니, 말도 안돼!' "어떤 약을 처방했어요?" 페이지는 숨을 죽이고 대답을 기다렸다. "클로랄 하이드레이트입니다." 페이지는 흥분으로 몸이 떨렸다. "확실해요?" "처방전에 그렇게 써 있어요." "환자가 누구예요?" 약사는 다시 처방전을 들여다보았다. "스파이로스 리바티스군요." "그 처방전을 복사해서 가져가도 되겠어요?" 페이지가 물었다. "그렇게 하세요." 한 시간 후, 페이지는 번즈 경감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복사한 처방전을 그의 책상에 내놓았다. "여기 증거가 있어요." 페이지가 말했다. "지난 일요일 닥터 말로리는 자기 집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약국을 찾아가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를 처방하고 약을 구했어요. 케트의 잔에 약을 타서 의식을 잃었을 때 살해하고 사고사로 가장한 것이 틀림없어요." "닥터 헌터의 잔에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를 넣어 의식을 잃게 하고 살해했다는 말이지요?" "맞아요." "닥터 테일러, 그 생각에는 문제가 하나 있소. 부검에서는 클로랄 하이드레이트가 전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병리검사실에서 실수를 한 게 틀림없어요. 한 번만 더 확인해 보라고 하세요." 번즈는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닥터 테일러..." "제발! 부탁이예요. 내 말이 틀림없을 거예요." "이건 아무래도 시간낭비 같은데..." 페이지는 번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번즈 경감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한번 더 해보라고 하지요. 혹시 실수했을지도 모르니까." 제이슨이 페이지를 데리러 왔다. "오늘 저녁식사는 내 집에서 해." 제이슨이 말했다. "보여줄 게 있거든." 제이슨의 집으로 가는 동안 페이지는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틀림없이 클로랄 하이드레이트가 검출될 거예요." 페이지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케네스 말로리는 죄값을 치러야 해요." "페이지, 정말 너무 안됐어."


"그래요." 페이지는 제이슨의 손을 뺨에 갖다댔다. "당신을 만난건 정말 행운이에요." 차가 제이슨의 집 앞에 멈추었다. 창 밖을 내다본 페이지는 깜짝 놀랐다. 정원 주변에 흰색 나무 담장이 예쁘게 둘러져 있었다. 페이지는 컴컴한 아파트에 혼자 있었다. 케네스 말로리가 케트에게서 얻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와 침실로 다가왔다. 페이지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말로리는 재빠르게 뛰어들어 페이지를 덮쳐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 망할 년! 네가 날 망치려고 들어? 얼마든지 해보라구! 이젠 더 뒤지고 다니지 못하게 숨통을 끊어줄 거야." 그의 손이 점점 세게 조여왔다. "내가 너 따위에게 잡힐 것 같아?" 손이 점점 더 세게 조여왔다. "내가 케트를 죽였다는 건 아무도 증명할 수 없어!" 페이지는 소리쳐 보려 했지만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몸부림치다가 간신히 그의 손을 벗어났을 때 잠에서 깨어났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혼자 침대에 일어나 앉아 몸을 떨고 있었다. 그날 밤, 페이지는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번즈 경감의 전화를 기다렸다. 아침 10 시가 되어서야 전화가 왔다. "닥터 테일러입니까?" "그렇습니다." 페이지는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 세 번째 검사보고서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나왔어요?" 가슴이 두근거렸다. "닥터 헌터의 시신에서는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나 다른 어떤 수면제, 또는 진정제도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돼! 약을 먹인 게 틀림없어. 의식을 잃도록 폭력을 쓴 흔적이 없댔잖아... 목에도 손자국이 없고... 그럴 수가 없어. 말로리가 살해할 때 케트는 의식이 없었던 게 분명해. 아무래도 부검과정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아...' 페이지는 부검 책임자를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돌란 박사는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또 이 사건을 설명해야 된단 말이오?" 그가 말했다. "벌써 세 번이나 검사했단 말입니다. 이미 번즈 경감에게 내장 어디에서도 클로랄 하이드레이트가 검출되지 않았다고 보고했소. 전혀 없었소." "하지만..." "닥터 테일러, 더 할 얘기가 있소?" 페이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것이다. 케네스 말로리는 케트를 살해하고도 멀쩡하게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저... 없어요. 시신에서 화학물질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면 나로서도..." "아무것도 검출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오." 페이지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럼 뭔가 검출됐다는 건가요?" "트리클로로틸린이 약간 검출되었소." 페이지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어떤 작용을 하나요?" "별 영향이 없소. 약간의 진통효과가 있을 뿐이지. 트리클로로틸린 때문에 잠이 오거나 의식을 잃을 가능성은 전혀 없소."


"네에..." "별 도움이 못돼서 미안하오." "고맙습니다." 실망한 페이지는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시체 안치실 복도를 걸으며 뭔가 빠뜨렸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로 케트의 의식을 잃게 했다고 확신했었는데. '트리클로로틸린이 약간 검출되었소. 트리클로로틸린 때문에 잠이 오거나 의식을 잃을 가능성은 전혀 없소. 그러면 어째서 트리클로로틸린이 케트의 몸에서 검출되었을까?' 케트가 어떤 약도 복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페이지는 걸음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병원으로 돌아간 페이지는 바로 5 층에 있는 도서관을 찾았다. 트리클로로틸린에 대한 문헌은 금새 찾을 수 있었다. 트리클로로틸린은 이렇게 정의되어 있었다. 무색, 투명한 액체로서 섭씨 15 도, 중력 1.47 하에서 할로겐화된 탄화수소로서 화학식은 CC1 CC1:CHC1. 그리고 마지막 줄에서 페이지가 찾던 내용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인체 내에서 클로랄 하이드레이트가 신진대사로 변화하면 트리클로로틸린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 35 장 "경감님, 닥터 페이지 테일러가 찾아오셨습니다." "또?" 번즈 경감은 면담을 거절해 버릴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닥터 헌터의 죽음을 살인으로 단정하고 형사반장이라도 된 듯 수사를 지휘하려 들었다.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도록 하려면 아무래도 다시 만나 얘기해야 할 것 같았다. "들여보내!" 페이지가 들어오자 번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봐요, 닥터 테일러. 이제 할 만큼 해봤잖소? 돌란 박사가 화가 나서 전화로..." "케네스 말로리가 어떻게 케트를 살해했는지 알아냈어요!" 페이지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케트의 몸에서 트리클로로틸린이 검출되었잖아요." 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란 박사한테 벌써 들었소. 하지만 트리클로로틸린은 수면이나 진정효과가 전혀 없는 약이잖습니까? 돌란 박사가..." "클로랄 하이드레이트가 트리클로로틸린으로 변한 거예요! 말로리가 케트의 아파트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케트의 잔에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를 섞은 게 틀림없어요. 술에 섞이면 전혀 냄새가 나지 않고, 마시고 나서 몇 분이면 정신을 잃게 돼요. 케트가 의식을 잃은 다음 말로리는 그녀를 살해하고 임신중절 수술을 하다가 실수한 것으로 가장한 거예요." 페이지는 격앙된 목소리로 설명했다. "닥터 테일러, 이렇게 말하면 좀 뭣하지만... 그 설명은 당신의 상상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는 것 아닙니까?" "아니예요. 이건 상상이 아닙니다. 말로리는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를 스파이로스 리바티스라는 환자에게 줄 것이라고 처방전을 뗐어요. 하지만 그 환자에게 준 적이 없어요."


"그걸 어떻게 알죠?" "그 환자에게 주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스파이로스 리바티스의 진료기록을 찾아봤어요. 그 사람은 포피리아증 환자예요." "그게 뭡니까?" "포피리아증은 유전적으로 신진대사 기능에 장애가 생기는 병입니다. 그 병은 고혈압, 빈박증 등 여러 가지 장애를 가져옵니다. 유전인자의 결함 때문에 생긴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래서요?" "만약 케네스 말로리가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를 포피리아증 환자인 스파이로스 리바티스에게 투여했다면 그는 벌써 사망했을 거예요! 포피리아증 환자에게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는 절대로 쓸 수 없는 약입니다. 투여하면 즉시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지요." 처음으로 번즈 경감의 표정이 달라졌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주 철저히 조사해 보셨군요..." 페이지가 계속했다. "왜 케네스 말로리는 멀리 떨어진 약국까지 가서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를 절대로 줄 수 없는 환자 앞으로 처방하고 직접 구입했을까요? 이제는 말로리를 체포해야 돼요." 번즈 경감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즉시 체포해야만..." 번즈 경감이 손을 들어 페이지의 말을 막았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지요. 내가 시 검찰청 검사들과 상의해 보겠소. 그들 의견으로 사건이 성립된다고 하면 경찰은 수사를 시작하겠습니다." 페이지는 더 이상 밀어붙이는 것은 효과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고맙습니다. 경감님." "곧 다시 연락드리지요." 페이지 테일러가 떠난 다음, 번즈 경감은 그대로 앉아 조금 전 대화를 되씹어보았다. 닥터 말로리가 살인범이라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데, 끈질긴 여의사의 심증만으로 수사에 착수할 수는 없었다. 그는 드러난 사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았다. 닥터 말로리는 케트 헌터와 약혼한 사이였다. 그녀가 죽은 지 이틀 만에 알렉스 해리슨의 딸과 약혼이 발표되었다. 뭔가 좀 이상했지만 살인의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 말로리는 케트 헌터를 아파트 앞에서 내려주고 같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녀의 몸에서 말로리의 정액이 검출되었지만 그에 대한 설명도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런데 클로랄 하이드레이트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말로리가 뗀 처방전은 그 약을 먹으면 죽게 되는 환자 앞으로 되어 있었고, 그 환자에게 주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다. 이 대목이 바로 결정적인 심증을 주었다. 과연 말로리가 의심을 풀어줄 만한 설명을 할 수 있을까? 번즈는 인터콤으로 비서를 불렀다. "바바라, 시 검찰청 검사장에게 오늘 오후에 좀 찾아뵙겠다고 연락해." 페이지가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네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시 검사장, 검사 한 사람, 번즈 경감, 그리고 워렌이라는 누군지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닥터 테일러,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검사장이 입을 열었다. "번즈 경감에게서 닥터 케이트 헌터의 죽음 때문에 여러 가지로 신경쓰셨다고 들었습니다. 닥터 테일러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생전의 닥터 헌터와 아주 가까운 친구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살해당했다면 당연히 범인을 체포해야 되겠지요." '이제 케네스 말로리는 체포될 거야. 그렇게 쉽게 빠져나갈 수는 없어!' "그렇습니다." 페이지가 말했다. "닥터 말로리가 케트를 살해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말로리를 체포하면 그..." "지금 그럴 수는 없습니다." 페이지의 안색이 달라졌다. "무슨 말씀이지요?" "닥터 말로리를 체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안되는데요." "살인사건이 성립되지 않아요." "왜 성립되지 않죠?" 페이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트리클로로틸린이 검출된 사실만으로도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를..." "닥터 테일러, 형사법정에서는 법을 몰랐다는 것은 핑계가 될 수 없지만, 의학지식을 잘못 알았다는 것은 충분한 핑계가 됩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간단하지요. 닥터 말로리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잡아떼면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클로랄 하이드레이트가 포피리아증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랐다고 하면 그걸 거짓말이라고 증명할 방법이 없어요. 그렇게 되면 닥터 말로리는 형편없는 의사로 평가되겠지만, 그 때문에 살인혐의를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페이지는 다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 말로리가 이대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거예요?" 검사장은 잠시 페이지를 쳐다보았다.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긴 합니다. 번즈 경감과는 벌써 상의했습니다. 당신 아파트에는 그날 밤 술을 마시던 잔이 증거물로 보존되어 있는데, 당신이 동의한다면 그 잔을 수거해서 다시 화학반응검사를 하겠습니다. 만약 그 중 하나에서 클로랄 하이드레이트가 검출된다면 그때는 살인사건으로 수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말로리가 잔을 씻어냈다면 소용없잖아요?" 번즈 경감이 대답했다. "아무리 용의주도하더라도 잔을 세제로 씻어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냥 물로 헹구기만 했다면 화학반응이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두 시간 후, 페이지는 번즈 경감의 전화를 받았다. "닥터 테일러, 술잔의 화학반응검사가 끝났습니다." 페이지는 또 한번 실망스러운 소식을 들을까 봐 불안했다. "클로랄 하이드레이트가 섞였던 것이 분명하게 밝혀졌습니다." 페이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지문도 검출되었소. 닥터 말로리의 지문과 대조해 볼 겁니다." 페이지는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번즈 경감은 말을 계속했다. "말로리가 닥터 헌터를 살해했을 때 - 만약 그가 살해했다면 - 아마 장갑을 끼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큐렛에서는 지문이 검출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술잔을 들었을 때도 장갑을 낄 수는


없었을 테고, 술잔을 바에 갖다놓았을 때도 장갑을 안 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맞아요." 페이지가 말했다. "장갑을 끼고 술을 마실 수는 없었겠죠." "솔직히 말해서 닥터 테일러가 이 사건을 살인사건이라고 주장했을 때, 나도 처음에는 감정적인 생각이라고 단정지었었습니다. 이제는 내 생각도 달라졌소. 닥터 말로리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계속했다. "검사장 말씀을 들었지요? 지금 이 상태로 말로리를 기소하면 유죄판결은 불가능합니다. 클로랄 하이드레이트의 부작용을 몰랐다고만 주장하면 그의 유죄를 증명할 방법이 없소. 의학지식의 부족을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지 않소? 바로 그 점이..." "잠깐!" 페이지가 소리쳤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케네스 말로리는 로린과 통화하고 있었다. "아빠와 함께 당신의 사무실 자리를 보고 다니다가 아주 좋은 곳을 발견했어요! 포스트 가 490 번지 빌딩에 있는데 주변환경이 안성맞춤이에요. 비서와 간호사는 내가 고용해야겠어요. 너무 예쁘면 곤란하니까..." 말로리는 웃었다. "로린,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야. 난 당신밖에 모른다구." "그곳을 빨리 보여주고 싶어요. 지금 빠져나올 수 없어요?" "두어 시간 있으면 근무가 끝날 거야." "좋아요. 그럼 집에 있을 테니 데리러 오겠어요?" "그러지. 그럼 이따 봐." 말로리는 전화를 끊었다. '이 이상 잘 풀릴 수는 없을 거야. 행운의 여신이 나를 계속 따라다니고 있어!' 구내방송에서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닥터 말로리... 430 호 병실로... 닥터 말로리... 430 호 병실..." 그러나 말로리는 그대로 앉아 달콤한 장래 생각에 잠겨 있었다. '포스트 가 490 번지, 으리으리한 사무실... 몰려드는 상류사회 환자들... 가만히 있어도 굴러들어오는 돈...' 다시 그를 찾는 구내방송이 들려왔다. "닥터 말로리... 430 호 병실로..." 그는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조금만 참으면 이 빈민촌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야!' 말로리는 430 호 병실로 향했다. 레지던트 한 사람이 병실 앞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가 좀 생겼어요." 그가 말했다. "이 병실 환자의 주치의는 피터슨 박사인데, 그분은 지금 병원에 안 계세요. 그런데 다른 의사 한 분과 의견충돌이 생겼어요." 두 사람은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와 의료보조원, 그리고 처음 보는 의사 한 사람이었다. 레지던트가 말했다. "이분은 닥터 에드워드입니다. 닥터 말로리의 의견을 들어봐야겠습니다." "문제가 뭡니까?" 레지던트가 대답했다. "이 사람은 포피리아증 환자예요. 그런데 닥터 에드워드가 진정제를 투여하겠다고 고집합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돼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닥터 에드워드가 말했다. "환자는 지난 48 시간 동안 잠을 못 잤어요. 그래서 나는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를 처방하고


좀 편히 쉬도록..." 말로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에드워드를 쳐다보았다. "당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오? 이 사람을 죽이려는 거요?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를 투여하면 당장 빈박증에 심장마비가 오고 죽게 돼요. 대체 어느 의과대학을 다녔소?" 에드워드는 말로리를 바로 쳐다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난 의과대학을 다닌 적이 없소." 주머니에서 경찰 뱃지를 꺼냈다. "나는 샌프란시스코 시 경찰국 강력반 형사입니다." 그는 침대의 환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녹음 잘됐어?" 누워 있던 환자가 베개 밑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그럼요." 말로리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지금 뭘 하는 겁니까? 무슨 녹음을 한다는 거요?" 형사는 말로리를 쳐다보았다. "닥터 말로리, 당신을 닥터 케이트 헌터 살인혐의로 체포합니다." 제 36 장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는 1 면 톱기사로 '약혼자 살해 혐의로 의사 체포'라는 제목 아래 케이트 헌터가 살해된 이유와 경위를 자세하게 보도했다. 말로리는 유치장 안에서 신문을 받아보고는 내던져 버렸다. 옆에 있던 죄수가 말했다. "이 친구, 아주 단단히 걸려들었군!" "웃기지 마!" 말로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난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아. 전화 한 통화만 하면 최고의 변호사들이 몰려올 거야. 난 24 시간 내로 풀려날 거라구. 두고 봐." 해리슨 부녀도 아침식사 테이블에서 신문을 읽었다. "아니, 이건..." 로린이 소리쳤다. "케네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건 말도 안돼!" 그때 집사가 다가왔다. "해리슨 여사, 실례합니다. 닥터 말로리한테서 전화가 와 있습니다. 아마 경찰서 유치장에서 전화하는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로린이 일어나려 했다. "그냥 앉아서 식사나 해!" 알렉스 해리슨이 말했다. 그는 집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닥터 말로리라구?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인데." 페이지도 출근하려고 옷을 입으면서 신문기사를 훑어보았다. 이제 말로리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러나 페이지의 심정은 기쁜 마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말로리가 처벌을 받든 빠져 나가든 케트를 다시 살려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현관벨이 울렸다. 페이지가 문을 열자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짙은 색 정장 차림에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닥터 테일러입니까?" "그런데요..." "전 로더릭 펠람입니다. 로스만과 로스만 법무법인의 변호사입니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페이지는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펠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무슨 일이시죠?"


펠람은 서류가방을 열고 서류 몇 장을 꺼냈다. "닥터 테일러, 당신이 존 크로닌의 유언에 그의 재산상속자로 된 것을 알고 계시지요?" 페이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펠람을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에요?" "착각이라뇨. 크로닌 씨는 당신에게 1 백만 달러 상당의 재산을 남겼습니다." 페이지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음을 앞둔 크로닌이 하던 말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정말 유럽은 꼭 한번 가볼 만해요. 만약 유럽 여행을 하게 되면 내 부탁이 하나 있소. 파리에 들러서 크리옹 호텔에 들고 맥심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는 거요. 제일 큰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샴페인도 한 병 주문하시오. 스테이크를 먹고 샴페인을 마시면서 내 생각을 한번 해주면 좋겠소. 그렇게 해주겠소?' "여기 서명을 해주시면 서류수속은 내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페이지는 고개를 들었다. "저... 난 정말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네요... 그분은 직계가족이 있었잖아요." "그분의 유언에 의하면 가족들은 1 백만 달러 이외에 남은 돈을 상속받게 되어 있습니다. 별로 많은 돈은 아니지만..." "이건 내가 받아서는 안될 돈 같아요." 페이지가 말했다. 펠람은 놀란 표정으로 페이지를 쳐다보았다. "왜 안됩니까?" 페이지는 할 말이 없었다. 존 크로닌은 그녀에게 1 백만 달러를 물려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은 내 환자였는데... 도의적으로 문제가 안될는지 모르겠네요." "하여간, 1 백만 달러짜리 수표를 놔두고 가겠습니다. 이 돈을 어떻게 하시든 그건 닥터 테일러의 뜻에 달린 겁니다. 받았다는 서명이나 해주십시오." 페이지는 얼떨결에 영수증에 서명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닥터 테일러." 펠람이 간 다음, 페이지는 소파에 그대로 앉아 이미 세상을 떠난 존 크로닌을 생각하고 있었다. 페이지가 1 백만 달러를 상속받았다는 소문이 병원에 널리 퍼졌다. 페이지는 아무 말 없이 그 소문이 가라앉기를 바랐다. 아직도 그 막대한 돈을 어떻게 써야 될지 몰랐다. '그건 내 돈이 아냐. 그 사람 가족은 어떻게 되지?' 페이지는 도무지 병원으로 돌아갈 기분이 아니었지만,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환자들을 생각하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날 아침에도 수술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페이지가 수술실로 가는데 복도에서 아서 케인 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X-선 사진을 뒤집어 본 사건 이후 한번도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페이지는 아무 증거가 없었지만 위협적인 전화나 자동차 타이어를 칼로 짼 것이 아서 케인의 짓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페이지, 잘 있었어? 이제 우리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자구. 어때?" 페이지는 표정 없이 대답했다. "좋아요."


"케트 헌터 건은 정말 안됐어. 말로리란 녀석 정말 나쁜 놈이었어, 안 그래?" 케인이 말했다. "그래요." 케인은 야릇한 표정으로 페이지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의사란 사람이 고의적으로 다른 인간을 살해할 수 있어? 그건 말도 안돼, 안 그래?" "그래요." "그건 그렇고," 케인이 계속했다. "축하해야겠구먼. 이제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무슨..." "페이지, 오늘 저녁 극정표 두 장이 있는데 같이 가지 않겠어?" "고맙지만, 난 지금 약혼자가 생겼어요." 페이지가 말했다. "그럼 파혼하면 되잖아." 페이지의 안색이 달라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케인은 몸을 가까이 디밀었다. "난 존 크로닌의 사체부검을 지시했어." 페이지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서요?" "그 사람은 심장마비로 죽은 게 아냐. 누군가가 인슐린을 다량 주사했지. 내가 사체부검을 지시할 것을 예측 못한 거지." 페이지는 갑자기 입 안이 말라버리는 것 같았다. "크로닌이 죽었을 때, 당신이 옆에 있었잖아?" "그랬지요." "그 사실은 나밖에 아무도 몰라. 부검보고서도 내가 가지고 있지." 그는 페이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난 그런 일을 떠벌릴 생각이 없어. 자, 그럼 오늘 저녁 극장에서 만나..." 페이지는 몸을 뒤로 빼면서 고함치듯 말했다. "필요 없어요!" "날 이런 식으로 대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이러는 거야?" 페이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잘 알아요. 더 할 말 없으면 난 수술에 들어가야겠어요." 케인은 페이지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돌려 병원장 벤자민 월러스 박사 사무실로 향했다. 아파트의 전화가 새벽 1 시에 울렸다. 페이지는 수화기를 더듬어 찾았다. "넌 또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어. 이번엔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낮은 목소리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의도가 분명했지만 누군지 금세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역시! 케인이었어!' 다음날 아침, 페이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두 낯선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닥터 페이지 테일러 맞습니까?" "그런데요?" "경찰서로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존 크로닌 살인혐의로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제 37 장 재판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변호인 알란 펜은 배심원들에게 최후 변론을 하고 있었다. "배심원 여러분, 그 동안 여러분들은 닥터 테일러가 유능한 의사인가


무능한 의사인가에 대한 논란을 들어왔습니다. 재판장께서도 여러번 지적하신 바 있지만 이 재판은 닥터 테일러의 기량을 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닥터 테일러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한 의사가 한 사람 있으면, 훌륭한 의사라고 생각하는 의사들은 열 명이 넘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이 재판의 목적이 아닙니다. 닥터 페이지 테일러는 존 크로닌 씨를 살해한 혐의로 이 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본인은 크로닌 씨가 편안하게 일생을 마치도록 도와 주었다고 인정했습니다. 크로닌 씨가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었고, 도와달라고 애원했기 때문에 그랬다고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살인이 아니고 안락사입니다. 안락사의 개념은 이제 세계 각국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작년에도 켈리포니아 주 대법원은 정신상태가 건전한 성인은 어떤 형태든 의료행위를 거부하거나 그런 행위를 중단시킬 권리가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주어진 치료방법을 계속하든가 중단하는 것은 그 개인의 선택이자 권리입니다." 그는 배심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안락사를 도운 것은 살인이 아닙니다. 이는 온정적인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병원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안락사가 수없이 행해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검찰은 피고를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1 급 살인죄로 기소했습니다. 이건 법 적용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안락사를 도운 사람에게 1 급 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 국민의 63%가 안락사는 법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실제로 18 개 주에서는 합법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환자에게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더 살라고 강권할 권리가 있습니까? 물론 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이런 판단은 더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런 경우 환자를 기계가 돌보게 된 것입니다. 기계는 인간과 달리 환자의 인간적인 면을 고려할 능력이 없습니다. 말의 다리가 부러지면 우리는 더 이상 ㅇ고통받지 않도록 그 말을 쏘아죽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경우에는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생명만 연장되도록 형벌을 주는 것입니다. 존 크로닌 씨의 죽음은 닥터 테일러가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크로닌 씨 자신의 결정이었습니다. 이걸 혼동하면 안됩니다. 닥터 테일러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한 것뿐입니다. 게다가 닥터 테일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솔직하게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크로닌 씨가 자신에게 유산을 남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행위는 환자에게 온정을 베푸는 것 이외의 동기가 있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존 크로닌 씨는 심장암으로 암세포가 전신에 퍼져 앞으로 살 날이 며칠밖에 남지 않은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런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더 고통을 받으며 살아남으려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알란 펜은 몸을 돌려 페이지 옆자리에 앉았다. 거스 베너블은 천천히 일어나 배심원에게 다가갔다. "온정을 베풀었다구요?" 그는 페이지 쪽을 쳐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시 배심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배심원 여러분, 저는 검사생활을 한 지 벌써 20 년이 지났지만 그 동안 한번도, 단 한번도 이처럼 냉혹하고 악랄한


살인사건을 본 적이 없습니다." 페이지에겐 거스 베너블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비수처럼 느껴졌다. "변호인은 이 사건을 살인이 아니고 안락사라고 했습니다. 과연 닥터 테일러가 환자에 대한 온정으로 그런 행위를 저질렀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닥터 테일러 자신과 여러 의사들이 크로닌 씨가 며칠밖에 살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스럽다 해도 며칠을 그대로 보낼 수 없었다는 말입니까? 혹시 크로닌 부인에게 유서 내용이 알려져 문제가 생길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요? 크로닌 씨가 유언 내용을 바꾸어 닥터 테일러에게 1 백만 달러를 남기자마자 그녀가 치사량의 인슐린을 투여해서 크로닌 씨를 살해한 것은 도저히 우연의 일치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재판과정에서 피고는 자신의 유죄를 증언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피고는 존 크로닌 씨와 인간적으로 가깝게 되었고 나중에는 자신을 좋아하고 존경했다고까지 증언했지만, 여러분들은 여러 증인들로부터 크로닌 씨가 피고를 '그 쌍년'이라고 불렀고,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는 증언을 들었습니다." 거스 베너블은 흘낏 피고석을 쳐다보았다. 페이지는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그는 다시 배심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크로닌 씨의 변호산는 피고가 1 백만 달러를 상속받게 되었다고 들었을 때, '그 사람은 내 환자였는데... 도의적으로 문제가 안될는지 모르겠네요.'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돈을 차지했습니다. 필요했기 때문이겠지요. 피고는 런던, 파리, 그리고 베니스까지 여행하려고 여행안내 책자를 여러 권 집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재산을 상속받은 다음에 여행사를 찾았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피고는 오래 전부터 그런 호화여행을 계획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는데, 바로 존 크로닌 씨가 그 돈을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피고는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했습니다. 피고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크로닌 씨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고, 그 때문에 피고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크로닌 씨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는 것으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닥터 테일러가 어떻게 존 크로닌 씨로 하여금 사랑하던 가족들을 제치고 자신에게 거의 대부분의 유산을 남기도록 설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크로닌 씨가 사망하기 직전 닥터 테일러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갔을까요? 혹시 자신의 고통을 덜어주는 대가로 1 백만 달러를 제시한 게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존 크로닌 씨의 죽음은 냉혹한 살인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이 재판이 오래 계속되는 동안 피고에게 가장 불리한 증언을 한 증인이 누군지 기억나십니까?" 거스 베너블은 연극배우의 동작처럼 페이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바로 피고 자신입니다! 우리는 피고가 불법으로 환자에게 수혈하고 사후에 문서를 조작했다는 증언을 들었고, 피고 자신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피고는 존 크로닌 씨 외의 다른 환자를 살해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지만, 우리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로렌스 바커 박사가 여러 사람 앞에서


피고가 환자를 죽였다고 한 것을 증언으로 들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로렌스 바커 박사는 최근 뇌출혈로 쓰러져 이 법정에서 피고에 대한 증언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바커 박사의 피고에 대한 의견을 기억하십시오. 여기 피고의 수술에 대한 피터슨 박사의 증언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는 기록을 읽어 내려갔다. "문:'바커 박사가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에 수술실에 들어왔습니까?'" "답:'그렇습니다.'" "문:'네가 이 사람을 죽였어. 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간호사 베리의 증언입니다." "문:'바커 박사가 닥터 테일러에게 한 말을 구체적으로 말해 주십시요.'" "답:'닥터 테일러가 형편없이 무능하다고 한 적도 있었고... 한 번은 닥터 테일러한테는 집에 기르는 개의 수술도 맡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거스 베너블은 배심원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많은 정평있는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닥터 테일러를 모함하려는 음모를 꾸몄거나, 아니라면 닥터 테일러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냥 한번 거짓말한 것이 아니고 상습적으로..." 그때 법정 출입문이 열리고 검찰청 직원이 들어왔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복도를 걸어들어와 거스 베너블에게 다가왔다. "검사님..." 거스 베너블은 발끈했다. "이런, 정신없는 친구 같으니 지금 어떻게..." 직원은 바짝 다가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거스 베너블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라고? 정말이야? 거참, 좋은 소식이군." 영 판사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대단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 두 사람 대화를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도대체 재판중에 이게 무슨 짓이에요?" 거스 베너블은 흥분된 표정으로 판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재판장님, 지금 저는 로렌스 바 커 박사가 재판정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왔지만, 증언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그분을 증인으로 신청하겠습니다." 갑자기 법정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알란 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의 있습니다!" 그는 소리쳤다. "검사는 지금 마지막 논고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증인을 신청한다는 것은 전례에도 없을 뿐 아니라..." 영 판사는 의사봉을 내리쳤다. "검사와 변호인은 이리로 오세요." 펜과 베너블은 판사 앞으로 갔다. 알란 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재판장님, 이건 재판의 일반관행과 상치됩니다. 이의를 제기..." 영 판사가 말했다. "펜 변호사, 지금 증인을 채택하는 것이 일반관행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 기억으로도 중요한 증인의 증언을 듣기 위해서 재판절차를 이례적으로 조정한 전례가 여러 번 있어요. 구체적으로 전례를 찾아보시려면 이


법정에서 5 년 전에 있었던 재판기록 하나를 찾아봐도 나올 겁니다. 내가 재판장이었거든요." 알란 펜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다면 바커 박사를 증인으로 채택하시겠다는 말씀입니 까?" 영 판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바커 박사는 이 재판의 중요한 증인이고... 전에는 몸 이 불편해서 증언할 수 없었지요. 이 재판에서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므로 나는 바커 박사를 증인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안됩니다! 바커 박사가 증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습니 다. 저는 정신과 의사 여러 명이 바커 박사의 정신상태를 감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펜 씨, 이 법정에서 당신은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요청할 권리 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거스 베너블에게 고개를 돌렸다. "증인을 데리고 들어와도 좋습니다." 알란 펜은 맥빠진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다 끝났어! 이 사건은 이제 다 끝난 거야!' 거스 베너블은 직원에게 말했다. "바커 박사를 모시고 와." 법정 출입문이 천천히 열리고 로렌스 바커 박사가 휠체어를 타고 들어왔다. 페이지 옆을 지나가면서 페이지와 눈이 마주 쳤다. 여전히 냉랭한 눈빛이었다. 페이지는 그가 쓰러지기 전 내뱉던 말이 기억났다. '도대 체 뭘 알기나 하고...' 로렌스 바커 박사가 증인석으로 다가가자 영 판사가 몸을 앞으로 당기며 부드럽게 물었 다. "바커 박사님, 증언하실 수 있겠습니까?" 바커 박사는 혀가 굳어 발음이 분명치 않았지 만 알아들을 수 있게 대답했다. "재판장님,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재판장님." 그는 페이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저 여자를 살인죄로 재 판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페이지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 여자라구?' 영 판사는 결단을 내렸다. 서기를 보고 먈했다. "증인선서를 시작하시오." 바커 박사가 증인선서를 마치자 영 판사가 다시 말했다. "바커 박사님, 휠체어에 그냥 앉 아서 말씀하세요. 검사는 증인심문을 시작하십시오. 그런 다음 변호인의 반대심문이 있겠습 니다." 거스 베너블은 미소지었다. "재판장님, 감사합니다." 그는 천천히 바커 박사의 휠체어로 다가갔다. "박사님, 오랫동안 말씀하시지 않도록 간단하게 질문하겠습니다. 저희는 불편하신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증언하러 나오신 것을 대단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이 재판에서 있었던 증언내용을 알고 계십니까?" 바커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텔레비젼과 신문을 통해서 다 알고 있소. 너무 충 격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혼자 분개했었소." 페이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거스 베너블은 승리가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박사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 꼈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진실을 밝히려고 이 법정에 나온 거요." 베너블은 미소지었다. "그러시겠지요. 우리 모두가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로렌스 바커는 숨을 한번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고함치듯 말했다. "그렇다 면 도대체 왜 닥터 테일러를 기소한 거요?" 베너블은 자기가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했다. " 뭐라고 하셨지요?" "이런 엉터리 재판이 어딨어!" 어리둥절해진 페이지와 알란 펜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순간 거스 베너블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바커 박사님..." "떠들지 말고 내 말 들어!" 바커 박사가 소리쳤다. "도대체 닥터 테일러에 대한 증언이라 는 게 하나같이 편견과 질시에 가득 찬 인간들 말만 모아서 탁월한 기량의 의사를 모함하는 것뿐이잖소! 닥터 테일러는..." "잠깐만!" 베너블은 당황했다. "당신이 닥터 테일러의 능력을 심하게 비판하는 바람에 그 녀가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을 그만두겠다고 한 것이 사실이지요?" "그렇소." 거스 베너블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사실이 그렇다면, 어떻게 페이지 테일러가 탁월한 기량의 의사라고 할 수 있습니까?" 베너블의 얼굴은 정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탁월한 의사를 탁월하다고 하지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잖소." 바커 박사는 페이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는 페이지와 단둘이 얘기하듯 법정의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 없었다. "드물기는 하지만, 탁 월한 의사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어. 너는 내가 가르친 사람 중에 유일하게 그런 자질을 보였지. 너를 처음 만나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어. 그 때문에 너에게는 심하게 대한 거야. 너무 심했는지도 몰라. 너한테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한 거야. 네가 그냥 탁월한 게 아니고 아주 완벽해지기를 바랐던 거야. 심장수술의는 항상 완벽을 추구해야 돼. 아주 작 은 실수도 환자의 생명을 좌우하기 때문이지." 페이지는 얼굴이 굳은 채 바커 박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지난날 바커 박사와 일하던 장


면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지나갔다. 법정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난 네가 그만두도 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야." 거스 베너블의 얼굴은 다시 핏기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로렌스 바커 박사의 증언에 걸었던 큰 기대가 악몽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바커 박사님, 박사님이 닥터 테일러보고 랜스 캘리라는 환자를 죽였다고 했다는 증언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 말은 닥터 테일러가 책임 수술의였기 때문에 한 소리요. 책임 수술의가 수술의 궁극 적인 책임을 진다는 말이었소. 사실은 마취의의 실수로 켈리 씨가 사망한 것이오." 법정은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페이지는 충격으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바커 박사는 힘들게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 고 존 크로닌 씨가 유산을 남긴 것을 닥터 테일러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일이오. 내가 크로 닌 씨와 얘기했었소. 크로닌 씨는 나에게 자신을 돌보지 않는 가족들에게 유산을 남기고 싶 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닥터 테일러에게 남기겠다고 했었소. 그리고 엄청난 고통으로 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닥터 테일러에게 부탁하겠다고도 말했소. 나도 그의 생각에 동의했 소." 방청객들이 환성을 질렀다. 거스 베너블은 넋이 빠진 듯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알란 펜이 벌떡 일어났다. "재판장님, 검찰의 기소를 기긱해 주십시오!" 영 판사는 의사봉 을 내리쳤다. "조용하십시오!" 소란해진 법정을 진정시킨 후 영 판사는 베너블과 펜을 번갈 아 쳐다보았다. "내 방으로 좀 들어오세요." 영 판사, 알란 펜, 그리고 거스 베너블은 판사실 에 자리잡고 앉았다. 거스 베너블은 어떻게 재판이 뒤집어졌는지 얼떨떨하기만 했다. "이 거... 이건 뭔가 잘못됐습니다. 재판장님, 바커 박사는 환자 아닙니까? 제정신일 수 없습니다. 정신과 의사 여러 명의 감정을..." "거스, 이봐요. 아까 뭐라고 했지요? 이랬다 저랬다 할 수는 없잖아요? 아무래도 검찰측 주장의 근거가 송두리째 없어진 것 같습니다. 더 이상 검찰이 망신당할 필요가 없잖아요? 검찰의 기소내용에 대하여 기각판정을 내리겠어요. 이의 있습니까?" 거스 베너블은 한참 말이 없다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할수없지요." 영 판사가 말했 다. "잘 생각했어요. 거스, 내가 충고 한 가지 할게요. 당신 증인이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를 때는 절대로, 절대로 증인으로 채택하면 안돼요."


재판이 속개되었다. 자리에 돌아온 영 판사는 배심원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배심원 여러 분, 긴 재판과정을 참을성 있게 지켜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본 재판장은 검찰의 기소 내용 전부에 대한 기각 판정을 내립니다. 피고는 이제 자유의 몸입니다." 페이지는 몸을 돌려 제이슨에게 손으로 키스를 보내고 빠른 걸음으로 바커 박사에게 다가 갔다. 휠체어 옆에 무릎을 꿇고 바커 박사를 감싸안았다. "정말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페이지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왜 똑똑지 못하게 이런 사건에 말려드는 거야?" 여전한 바커 박사의 말투였다. "멍청하 게 정신 못 차리니까 그렇지... 어디 조용한 데 없나? 얘기할 게 있어." 영 판사가 그 말을 듣고 일어서면서 말했ㄷ. "그러시면 내 사무실을 쓰시지요. 법원이 두 분께 그 정도 편의를 제공하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페이지, 제이슨, 그리고 바커 박사 세 사람은 판사실로 들어갔다. 바커 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진작 나타나서 도와줬어야 하는 건데... 꼼짝도 못하 게 하잖아. 의사들이란 그저..." 페이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정말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 "모르면 안해도 돼!" 바커 박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의 말투에 페이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휠체어에 앉아 있지만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그가 전보다 더 훌륭해 보였다. 그러자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존 크로닌 씨와 언 제 얘기했지요?" "뭐라구?" "시치미떼지 마세요. 언제 존 크로닌 씨를 만났냐니까요." "언제냐구?" 페이지가 천천히 말했다. "존 크로닌 씨를 만난 적이 없죠? 얼굴도 모르잖아 요." 바커 박사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모르지. 하지만 난 너를 잘 알잖아." 페이지는 말없이 그를 다시 감싸안았다. "너는 이게 탈이야." 바커 박사는 핀잔을 주었다. 고개를 제이슨에게 돌리고 말했다. "이 친구는 가끔 감정을 못 이기는 게 탈이야. 자네가 잘 돌봐줘야 되겠네. 남편 노릇 제대로 못 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염려 마십시오. 박사님.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페이지는 제이슨과 다음날 결혼했다. 바커 박사는 휠체어를 타고 들러리를 섰다. 에필로그 페이지 테일러 커티스는 명망 높은 노스 쇼어 종합병원과 연결되어 개업했다. 존 크로닌 이 남긴 1 백만 달러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남아프리카에 의료재단을 설립하는 데 출연했다. 로렌스 바커 박사는 페이지와 같은 사무실을 쓰면서 심장수술 자문역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아서 케인 박사는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의사면허를 박탈당했다. 지미 포드는 완쾌되 어 베치와 결혼했다. 첫딸을 페이지로 이름지었다. 하니 태프트는 시언 라일리와 함께 에이 레로 가서 더블린에서 간호사가 되었다. 시언 라일리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아직도 에이즈 증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이클 헌터는 특수강도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주립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알프레드 터너는 뉴욕 시 파크 에브뉴에서 개업하고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벤자민 월러스 박사는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로린 해리슨은 테니스 코치와 결혼했다. 루 디네토는 탈세로 유죄판결을 받고 징역 15 년을 선고받았다. 케네스 말 로리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루 디네토가 교도소에 들어간 지 1 주일 만에 케네스 말로리는 감방 안에서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엠바카데로 시립병원은 아직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다음번 지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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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다 지은이:시드니 셀던 옮긴이:오호근 출판사: 영림카디널 사실이었다. 그는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밖으로 나오자 케트는 큰 소리로 웃고 나서 말했다. "이렇게 야무지게 꿈을 꾸어보는 것도 재미있잖아?" "걱정 마!" 페이지가 말했다.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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