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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 지은이: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패티 오버리, 낸시 미첼 지음 옮긴이: 김원영 출판사: 도서출판 이레 이 책이 특별한 이유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의 서문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을 영광으로 생 각한다. 먼저 나온 <마음을 열어주는 101 가지 이야기>를 읽고 깊은 감명과 영감을 받았다. 따라 서 이 서문이 책 자체보다 길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단 한 단어로 이 서문 을 대신 할 수도 있다. 바로 `사랑`이다. 이 단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위대한 영적 지도자 들의 말씀을 잔뜩 열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들은 벌써 내가 하려는 말의 뜻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우리는 감정적인 충격을 받았을 때 될 수 있으면 그 감정을 꾹 눌러서 가슴 깊이 숨기고 싶어 한다. 내가 아직 의사 초년병이었을 때 난 그것을 아주 잘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 자신을 보호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나 자신을 파괴하고 있었다. 결국 상처가 너무 깊어져서야 나는 회복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는 우리를 회복의 길 로 인도해 준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솔직하게 대면하고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육체와 삶을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을 마음껏 읽고, 마음껏 느끼고, 회복의 길을 찾길 바란다. 여러분보다 한 발자국 앞서 걸으며 회복의 길을 찾은 선배들로부터 배우길 바란다. 형태는 다 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모두 암에 걸려 있고 그것은 감정적인 암일 수도 있고 육체적인 암일 수 도 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 90 퍼센트에 달하는 사람들이 `삶은 너무 불공평해요.`라고 불평 을 한다. 그 말은 `삶은 너무 힘들어요.`라는 말과 같다. 하지만 삶은 우리 모두에게 힘들다. 그러 므로 삶은 공평하다. 이 책은 절망적인 삶과 어떻게 싸워야 하나를 가르쳐 준다. 삶의 모든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어떻게 삶을 좀 더 의미있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의사로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 좀 더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건강한 삶으로의 전환을 하고자 하는 자극이 필요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그 전환에 필요한 자극을 받는 것보 다는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를 읽고서 자극을 받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의사로 일하면서 모든 감정을 내 가슴 깊숙이 숨겼고,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결국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빈번히 일어나는 포스트 트러매틱 스트레스 신드 롬(전쟁 따위, 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후에 일어나는 정신질환)을 앓고 난 후에야 전환을 맞게 되었다. 내 환자들이 갑자기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환자들에게 다음 번 병원에 찾아올 때까지 어 떻게 살아야 하나를 가르쳐 주며 나 역시 사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여러분도 영원히 살지 못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행복과 사랑을 찾길 바란다. 그럼 누가 가장 좋은 선생님일까? 내 생각엔 죽을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다가 예정된 시간에 죽 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삶에 대해서 가르쳐 줄 것이다. 그 사람들은 통계 따윈 믿지 않는다. 절대 자기의 삶을 사는데 통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의대생이 암에 걸렸다. 그 학생은 그가 걸린 암에 대해서 교과서를 들춰보고 화를 냈다. `예외 없이 재발한 다.`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칠년 후 그는 의대를 졸업했는데 `고칠 수 없다.`고 하던 암이 그 때까지 깨끗이 회복되었을 뿐더러 한번도 재발하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아름답 게 만드는 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죽는 것을 잊는다. 어느날 갑자기 그 사람들은 회사에 사표 를 내고, 넥타이를 벗어 던지고, 산 속이나 바닷가로 이사를 가서, 사랑을 표현하고, 자신의 의견 을 솔직히 밝히고, 영적인 삶을 탐험하고, 전에는 시간이 없어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한다. `지금 삶을 즐겨라. 지금도 벌써 늦었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런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런 사람 들은 이기적인 생활 방식을 즐기지 않는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을 이기적으로 되 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내가 앞에서 말한 사람들은 자기 고유의 방법으 로 세상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한 여자가 말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다했는데도 죽지 않았어요.”


한춤 후 그 여자가 편지를 썼다. “지금은 너무 바빠서 죽고 싶을 정도예요. 도와 주세요! 이젠 어떻게 하지요?” 나는 그 여자에게 낮잠을 자라고 충고했다. 삶이 그 여자를 들볶는 게 아니었다. 그 여자를 들 볶는 것은 바로 그 여자 자신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회복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당신의 문제가 당신의 선생님이 되도록 해야 한다. 무엇이 힘든지를 설명할 때는 항상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해야 한다. 그런 후 자신이 설명한 것을 다시 한번 숙고해 보고 문제를 풀도록 한다. 그러면 당신의 삶의 질은 향상될 것이고 건강도 나아질 것이다. 삶은 아이를 낳는 진통과 같다. 하지만 그 진통은 다른 사람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새로운 당신을 낳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할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또한 당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진통을 겪으면 고통도 훨씬 덜 하고 합병증도 덜 일어난다. 그러니 손을 뻗어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의 손을 잡아야 한다. 가족, 친구, 간병인들과 함께 상호 투자 관계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잘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또한 담긴 이야기들은, 삶은 `왜 나지요?`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 게 가르쳐 줄것이다. 삶은 `자, 나를 시험해 봐요!`이다. 병이나 어려움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회 복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적과 함께 살며, 그 사는 방법으로 주위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삶을 사는 방법 때문에 당신은 승리자가 된다. 당신의 새삶엔 건강치 못한 죄의식, 수치, 비난 등을 위한 자리는 없다. 당신이 자동차 열쇠를 잃은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을 벌하셔서 당신을 집까지 걸어가도록 하기 때문이 아니다. 마찬가지 로, 당신이 건강을 잃었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당신을 벌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런 비난 도 하지 않고 우리는(여기엔 하나님도 포함되어 있음.) 당신이 열쇠를 찾도록 도와 줄 것이고, 또 그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건강을 찾도록 도와 줄 것이다. 매일을 삶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다보면 당신은 당신의 삶이 얼마나 변하는지 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고, 당신 마음속에 얼마나 깊은 지혜가 담겨 있나를 발견하고 또 다시 놀 라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배우게 되겠지만, 이 모든 것의 열쇠는 전환에


있다. 그 전환을 어떡하면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는지 여러분에게만 살짝 가르쳐 주겠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 몸 안에서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고 무 엇을 기대하느냐에 따라 우리 자신을 바꿀 수도 있다. 잠시 동안 웃고, 사랑하고, 즐겁게 놀며 고 민하고, 절망하고, 두려워했던 때보다 몸이 훨씬 다르게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이제 어 떻게 해야 할까? 그냥 우리가 되고 싶었던 사람처럼 행동하면 된다. 배우들은 그들이 맡은 역할 을 연기할 뿐인데도 맡은 역의 감정적 변화에 따르는 화학적 변화를 몸 안에 일으킨다. 이것은 벌써 의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 가지 이야기>를 읽고 나서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결정하고 새로운 당신의 모습을 행동으로 옮기길 바란다. 당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당신 외엔 아무도 없다. 하지만 훌륭한 코치는 당신이 더나은 사람 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다. 이 책은 훌륭한 코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코치를 또 찾 는 것도 잊지 말도록! 중요한 인용문을 마지막으로 서문을 끝낼까 한다. 윌리암 사로이얀이 말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다 배우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정말 비참한 배우다.” 사로이얀은 이렇게 말을 잇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처럼 연기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일생 동안 연습한다. 그 러므로 지금 당신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선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잘 안되면 아기였을 때의 사진을 꺼내서 한참 들여다 보고 당신을 용서하도록 한다. 그리고 나서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충고 한마디.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를 읽고 가르침을 받기 바란다. 암에 걸리지는 않았 지만 암환자의 가족, 친구, 간병인이거나, 아니면 그저 한 인간이라면, 치명적인 병에 걸릴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깨어나서 이 책이 주는 삶의 교훈을 배우길 바란다. 버니 S. 시겔 의학박사 이 책에 대한 소개 사람들이 해주는 이야기는 사람들을 돌보아주는 힘이 있다. 어떤 살아남으려면 음식 보다 이런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땐 우리가


베리 로페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함으로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를 당신에게 바친 다. 우리가 이 책에 담아놓은 이야기들은 당신의 용기를 북돋워주고, 당신이 당신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줄 것이다. 당신에게 좀 더 많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줄 것이며,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장애물과 끈기 있게 싸우도록 자극을 줄 것이다. 또 한 당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과 나누도록 충고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다른 사람 의 도움을 받도록 설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좀 더 확고한 신념으로 당신의 꿈을 실천하 고자 할 때 하루하루를 즐거운 마음으로 최대한으로 살도록 권할 것이다. 이 책은 절망과 도전의 시기에 당신을 지켜줄 것이고, 고통과 괴로움의 시기에 당신을 위로해 줄 것이다. 당신이 허락만 한다면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는 평생의 진실한 동반자로서 당신의 삶과 회복 을 위해 통찰력과 지혜와 충고를 줄 것이다. 내 삶을 걸고 암과 투쟁하는 매우 힘든 시기에, <마음을 열어주는 이야기>를 읽으며 힘과 평화를 얻을 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101 가지

이 책을 엮은이들이 전하는 말 1995 년 1 월, 낸시와 패티의 엄마 린다 미첼 여사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우리는 지난 오년 동 안 <마음을 열어주는 101 가지 이야기>를 내기 위해 글을 쓰고 책을 엮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미 첼 여사가 암에 걸렸다 회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엮어 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셨다. 처음엔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아서 우리는 과연 책을 낼 수 있을까 의문을 갖기도 했다. 암 생존자들과 가족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보내 주기 시작하고, 암에 대한 우리의 연구도 속도가 빨 라지며 우리는 이 책을 끝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멋진 책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외에 또 한가지를 깨달았다. 처음 이 책을 내기로 했을 때 우리는 이것이 암을 극복하는 것에 대한 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 했다. 하지만 책의 모양이 잡혀가면서 우리는 이것이 삶에 대한 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실 로 팔백만이 넘는 암 생존자들은 우리가 아직 배우지도 못한 삶의 비밀을 발견했다. 이 책에 담 긴 각 이야기들을 읽으며 우리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삶 의 가장 단순하고 조그만 것들, 예를 들면, 아침에 해가 뜰 때 보이는 구름의 색깔과 모양이라든 지, 바닷가를 거니는 것이라든지, 음악을 듣는 것, 방금 짠 과일 주스를 마시는 것, 아이들과 놀고 사랑하는 사람을 포옹하는 것조차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가족과 함께 나누는 사랑이 점 점 더 중요하게 되었다. 적어도 하루에 한번쯤 우리는 느긋하게 앉아 말한다. `우린 정말 운이 좋아.` 이 책 때문에 우 린 변했다. 이젠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열고 서로의 감정을 나눈다. 비타민과 약초도 더 열심히 먹는다.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명상을 하고, 요가도 자주 한다. 신념을 갖고 기도 드리고, 열린 마음으로 사랑한다. 하루 일과를 더욱 열심히 하고, 마음을 건강히 하고, 내부의 목소리에 더욱 열심히 귀를 기울인다. 더 자주 웃고, 더 많이 놀고, 다른 사람들 마음에 들려는 노력은 덜 한다. 하루하루가 선물이며, 하루하루를 최대한으로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 때보다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암의 도전을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를 보낸다. 그들 때문에 우리들은 삶과 사랑과 영 적인 힘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 책을 엮으며 얻은 경험을 독자 여러분도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다. 이 책의 미완성판이 마련되었을 때 우리는 암환자들과 그들의 가족과 간병인 들에게 읽어 보도록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이 암의 도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 로해 주고, 도와 주고, 영감을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이 책이 암을 앓고 있 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명종과 같은 역할을 하길 바란다. 그래서 그들이 직접 고통을 받지 않고도 삶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되길 바란다. 지금 암과 투쟁하고 있는 당신을 위해, 이 책이 당신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감동과 믿음을 주 고, 싸울 희망과 용기를 주고, 당신에 앞서 투쟁한 많은 사람들처럼 당신이 이기도록 도와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에 실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당신의 앞길에 등불을 밝혀 주길


바란다. 당신에 게 이 책을 만드는 데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축복을 보낸다. 우리는 당신을 걱정하고 있 으며 당신이 앞으로 겪어나가야 할 일, 그리고 당신에게 남은 가능성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려 주십시오. 우리 마음의 불이 꺼질 때가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다시 불이 붙을 때가 있다. 이 불을 붙여준 사람에게 우리는 깊은 감사를 보내야 한다. 알버트 슈바이처 이 책에 담긴 이야기 중 어떤 것은 당신에게 깊은 감동을 줄 것이고, 당신은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어할 것이다. 다른 환자, 생존자, 가족, 친구, 간병인 누구라도 좋다. 그럴 때 시간을 내서 전화를 하거나 찾아가서 이야기를 들려주길 바란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더 큰 선 물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약속한다. 이 책을 읽는 법 먼저 출판된 <마음을 열어주는 101 가지 이야기>의 독자 한 분이 한 권을 네 시간 만에 다 읽 었으며, 그러는 동안에 독감이 떨어졌노라는 편지를 보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읽는 것 이 면역 시스템과도 관련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 신기하다! 하지만 한자리에 앉아서 이 책을 한꺼번에 다 읽는 것을 우리는 권하지 않는다. 시간을 갖고 천천히 읽으며 즐기고 음미하기 바란다. 각각의 이야기를 당신의 존재와 연결시켜 보기 바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갖가지 후식을 골고루 맛보기 위한 거나 마찬가지이다. 너무 맛이 진해서 한 꺼번에 소화시키기엔 힘이 들지도 모른다. 각 이야기의 감동을 충분히 경험하길 바란다. 당신 정 신의 소리뿐 아니라 마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길 바란다. 각 이야기가 당신의 가슴에 와닿도 록 하길 바란다. 당신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길 바란다. `이 이야기가 내 마음에 일깨워 준 것은 무엇이지? 이 이야기는 내 삶에 무슨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지? 이 이야기는 내 마음에 어 떤 감정과 행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각 이야기들과 친근한 관계를 맺도록 당


신께 권하고 싶다. 어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보다 당신 마음에 더 크게 울려 올 것이다. 이야기는 더 큰 의미로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당신을 웃게 만들 것이고, 이야기는 당신을 울게 만들 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당신의 온 몸을 따스하게 덥혀 줄 것이고, 이야기는 아! 하는 탄성을 지르게 할 것이다. 그것에 대한 해답은 없다. 당신의 반응이 뿐이다. 당신의 반 응이 저절로 생기도록 놔두고 지켜보길 바란다.

어떤 어떤 어떤 있을

편지를 보내주세요. 이 책을 읽고 난 후 당신의 느낌이 어땠는지 알고 싶다. 이 이야기들이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 을 미쳤는지 우리에게 편지나 전화로 알려주기 바란다. 당신의 편지를 기다리겠다. 책 뒤에 있는 주소를 참고하길 바라고, 그럼 그 때까지... 우리가 이 책을 쓰고, 엮고, 편집하는 동안 감동하고 가르침을 받은 만큼, 당신도 이 책을 읽으며 감동하고 가르침을 받길 바라겠다.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패티 오버리, 낸시 미첼 1. 희망에 대하여 희망한다는 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열심히 일한다는 뜻이다. -버니 S. 시겔 의학 박사 암이 할 수 없는 것 암은 너무 힘이 약해서 사랑을 없앨 수 없고 희망을 깨뜨릴 수 없고 믿음을 부식시킬 수 없고 평화를 파괴할 수 없고 우정을 죽일 수 없고 추억을 억누를 수 없고 용기를 침묵시킬 수 없고 영혼을 침략할 수 없고 영원한 삶을 훔쳐갈 수 없고 기백을 정복할 수 없다. 작자 미상

얻기 위해


플로라 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 처음 몇달 동안 나는 육체적 치료법 외에 다른 치료법은 인정하지 않 았다. 병과 잘 싸울 수 있도록 도와 준다든지, 생명을 몇달 정도 연장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떤 테크닉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병의 완화라든지, `삶의 질` 같은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가 선택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완전 회복이었다. 완전 회복을 위해서라면 난 어디라도 가고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러 차례의 수술과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나에게 남은 것은, 하루 중 밝음이 끝나고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할 때와 같은 끔찍한 정적의 상태였다. 의사들은 최선을 다했고, 이제 나는 혼자 남아서 내가 내년쯤 살아 있을 것인지 죽어 있을 것 인지에 대해 머리를 굴렸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 난 내 자신에게 그리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 는 모든 사람에게 거듭 이렇게 말했다. `모든게 잘 되어가고 있으며 암에 걸렸다고 해서 다 죽는 것은 아니다.`라고. 당시 내 삶의 좌우명은 `암에 걸렸다고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다.`였다. 나는 모질었고 지칠 줄을 몰랐다.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그리고 이주일이 지났다. 마음이 혼란했고 내일이 무서웠다. 한밤중, 침 대에 홀로 누워, 하얀 벽을 바라보며 서른아홉 먹은 암환자를 누가 좋다고 할 것인지 생각해 보 았다. 아파트 안에서의 삶은 침울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런데 플로라가 내 삶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한 사주일 정도 된 고양이. 사납고 바싹 말랐고 온 몸에 쇠버짐이 피었고 벼룩과 진드기가 득실 득실 했다. 주차장에 세워둔 내 자동차 바퀴 뒤에 플로라는 바들바들 떨며 앉아 있었다. 어딘가 심하게 아파보였다. 나는 털이 다 빠진 꼬리를 움켜잡고 끌었다. 불과 몇초 동안에 플로 라는 내 손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할켜 놓았다. 그래도 난 고양이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쉭쉭대 며 불평하는 놈을 아파트로 데리고 왔다. 그 때 내 삶은 너무도 외로웠으므로 조그맣고 성난 고 양이의 소동조차 즐거웠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고양이는 내가 삶에 대한 우울한 생각을 하지 않 도록 도와 주었다.


고양이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나 장래에 대해서 초조하게 추측해 보는 습관을 버렸다. 그리고 고양이를 회복시키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쇠버짐과 벼룩뿐만 아니라 고양 이는 바이러스균에 감염되어서 혀와 양볼 안쪽과 목구멍에 궤양이 생겨 있었다. 나는 입 안에 생 기는 궤양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을 정도였으므로 그 가여운 동물을 진심으로 동정했다. 몇 주일이 지나자 플로라는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 동안 고양이와 나는 매우 친해 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플로라는 까맣고 하얀 털 복숭이가 되었고, 나를 사랑하고 믿게 되었으며 내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문 앞에서 나를 맞아 주었다. 아파트 안에 고여 있던 외 로움이 어느새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고양이와 내가 함께 힘써서 얻은 고양이의 건강을 소중히 여겼다. 비록 내 장래는 불확실했지만 플로라의 건강은 내가 노력해서 성취한 것이었다. 열심히 간호한 결과로 플로라가 건강한 모습을 겨우 되찾아가고 있을 때, 수의사는 플로라에게 고양이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암이었다. 수의사는 나를 담당하는 종양 전문의가 나에게 했 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 앞으로 일이 년밖에는 살지 못할 것이라고. 내 반응은 즉각적이고 무의식적이었다. 수의사가 암 진단을 내리자마자 나는 플로라를 이미 죽 어버린 고양이로 여겼다. 망설임없이 플로라에 대한 내 감정을 걷어들였다. 플로라가 진짜 죽었을 때 겪을 고통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플로라는 죽을 것이고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수의사는 플로라가 죽을 것이라고 말했고 나는 단순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 나는 플로라에게 말을 하는 것마저 그만두었다. 플로라에게 말을 하거나 같니 놀 때마다 결국 난 그칠 수 없을 정도로 흐느껴 울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플로라를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 게 되었다. 하지만 플로라는 내가 멀어져가도록 가만두지 않았다. 내가 옆으로 지나가면 나를 쫓 아왔고, 밤에는 침대로 기어들어와서 내 옆에 웅크리며 부드러운 발로 얼굴을 건드렸다. 목에서는 가르릉거리는 소리가 힘차게 울렸다. 내가 매정하게 굴어도 모른다는 듯이 플로라는 고양이들이 제일 잘하는 짓을 하고 있었다. 플로라는 참고 기다렸다. 플로라의 참을성이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어느날 저녁 나는 `그렇구나!`라고 부르짖었다. 플로 라에 대한 나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플로라에게 아무 희망도 걸지


않으면서 어떻 게 내 자신의 암이 사형 선고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른 생명을 거부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 희망이니 완전 회복이니 떠들고 다니면서도 결국 나는 나 자신을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을 후 나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그런 깨달음은 천천히, 그러나 거세게 내 위 로 우박 폭풍처럼 쏟아졌다. 이제껏 삶을 살아오며 나는 얼마나 자주 고통과 상실을 외면했으며 진실한 나의 감정을 피했던가! `반쪽` 삶을 살며 상실의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등을 돌렸다. 그러 는 동안 나 자신을 잃을 뻔 했던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 저녁 나는 플로라와 나를 위해 촛불을 밝혔다, 그리고 같이 앉아서 불꽃을 바라보며 플로라에게 맹세했다. 네가 내 곁에 있는 한 난 뜨거운 열정으로 너를 사랑할 것이다.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도 기분 좋은 일이니까. 너를 사랑하면서 나 자신 뿐 아니라 암 진단과 그 밖에 모든 것을 사랑하는 법도 배울 것이다. 우리 둘을 위해서 나는 매일을 축복의 날로 정할 것이다. 나는 플로라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위해 시도했던 여러 가지 비 전문적 치료법을 플로라에게도 사용해 보았다. 지압을 받았고, 해독에 도움이 되는 목욕을 했고, 그리고 끝없는 포옹과 사랑과 애정을 받았다. 플로라의 물 그릇에는 여러 가지 색깔로 빛나는 조 그만 크리스털 구슬들을 넣어 주었다. 플로라의 목걸이는 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초록색이었다. 이러는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어중이 떠중이 치료법`(어리둥절한 내 친구들이 그렇게 불렀다.)에 대한 내 태도의 변화였다. 치료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재미있고 우습기까지 했 다. 유머 감각이 정말로 발달되지 않았으면 무당을 데려다 집안의 `나쁜 귀신`을 쫓아 버려야겠다 는 말을 친구들에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몇달 동안 나는 병으로부터의 회복은 어떤 영웅적 행위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배웠 다. 회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암 진단과 치료를 받는 동안 ,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고생하 는 동안 나는 플로라의 도움을 받아 내 마음속에서 죽어버린 삶의 환희를 되찾았다. 차분하게 끝 까지 나를 믿음으로써 플로라는 내 마음에 평화를 심어 주었다. 사랑과 귀여움을 한껏 독차지하


며 드디어 플로라는 회복했고 그런 플로라를 바라보며 나는 나 자신에게도 희망을 갖기 시작했 다. 지금 플로라는 일곱 살이며 한껏 멋을 부리는 행복한 고양이이다. 그리고 지난 세 번의 백혈병 검사를 모두 무사 패스했다. 플로라를 바라보며 `그렇구나!`라고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플로라가 천사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거부하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내게 가르쳐 주려고 찾아 온 천사. 수잔 체나크 맥켈로이 항암 화학요업에서 카메라까지 믿음, 희망, 사랑. 우리는 이 세 가지 모두가 필요하지. 살고 싶으면 긍정적으로 되어야 해. 내가 종양에 걸렸다는 소문이 있네. 전에는 댄서였지만 지금은 암에 걸렸어. 전에는 머리가 등뒤로 늘어졌었어. 지금은 코작(텔레비전 시리즈의 대머리 형사)보다 짧아. 그래도 괜찮아. 이번 싸움에선 내가 이길거니까. 이건 내가 작곡한 `암 랩뮤직` 가사의 일부분이다. 1989 년, 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뼈암에 걸 렸다는 진단을 받고 쓴 것이다. 그 후 나는 이년 간의 항암 화학요법을 받았고, 왼쪽 다리를 무릎 위에서 절단하는 등 여덟 번의 대수술을 받았고, 종양이 여섯번 재발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지 금은 깨끗하다. 다른 사람이 암에 걸렸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없다. 그러나 암에 걸린 후 겪어온 일들을 나는 잊 지 않을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삶을 열렬히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고통은 인내 와 개성과 희망을 낳는다. 화학요법을 받으러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도 무척 재미있었다. 나와 다른 몇몇 환자들은(그 럴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화학요법과 수액요법을 받는 동안 매일 작은 파티를 열었다. 머 리가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빠졌을 때 나는 젓가락을 콧구멍과 귓구멍에 꽂고 병원 복도를 걸어다 녔다. 무심히 앉아 있는 다른 환자들을 웃겨 주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들을 웃겨서 잠시나마 고


통을 잊도록 해주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도록 하나님께서 나에 게 이런 시련을 주셨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열망은 결국 알맞는 직업을 찾도록 나를 이끌었다. 암에 걸리 기 전 나는 `쏘울 트레인`(젊은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전문 댄서를 비롯한 관중들이 함께 춤을 추는 텔레비전 프로)에 출연하는 댄서였다. 암에 걸리고나서 의사들은 내가 다시는 춤을 출 수 없 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의사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아직도 춤을 추고 있으니까. 2 년 전부터 연기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남부 캘리포니아는 영화 회사들이 많은 곳 이다. 처음으로 오디션을 받으러 가는 날이 왔지만 망칠까봐 걱정이 되어서 결국은 못가고 말았 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첫 오디션에 갔을 때는 그저 한 역할을 맡은 게 아니라 한창 인기를 끌 고 있는 미니 시리즈에서 주인공 역할을 따냈다. `노던 익스포져`(알래스카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 로 한 히트 텔레비전 미니 시리즈)였다! 그 시리즈를 찍는데 걸린 이주일은 내 생애에서 가장 멋 진 시간이었다. 나는 킴그리어의 역할을 맡았는데, 그녀는 알래스카 주 시슬리에서 열리는 휠체어 경주에 참가하기 위해 연습을 하다가 팔꿈치 뼈를 다치고 만다. 매기(제니 터너)는 나를 에드(대 렌 버로우즈)에게 데리고 가서 알래스카 인디언의 민속 요법으로 고쳐 주도록 부탁한다. 촬영장에서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잠시 말해 주겠다. 촬영 전날 저녁에 대사를 외운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난다(새벽 세시에 일어날 때도 있다.). 네시 반에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만나 같이 시애틀에서 촬영장까지 간다. 실내 촬영은 워싱턴주에 있는 레드몬드 시에서 하고 야 외 촬영은 로슬린이라는 작은 마을(인구 850 명)에서 한다. 화장을 반쯤 마치고 `블럭` 장면들을 찍으러 간다. 그리고 나서 화장을 끝내고 진짜 촬영에 들어간다. 진짜 촬영은 한 장면을 여러 각 도에서 되풀이 찍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 다음 `현상`을 하고 `고르기`를 한다. 그 프로 의 감독님은 정말 재미있는 분으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 나를 `연기도 하지 않으면서 연기 하는 소녀`라고 부르셨다. 오후가 되어서 내 촬영이 끝나도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장면 들 찍는 것을 구경했다. 바로 그런 것이 산교육이기 때문이다.


그 프로의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나에겐 정말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분장 트럭을 운전하시는 할 아버지가 나를 손녀 딸로 `입양`했을 정도였다. 그 프로그램의 촬영이 끝나고 돌아온지 이주일 만에 감독님은 나를 다시 부르셨다. `비벌리 힐 즈 90210`(비벌리 힐즈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비벌리 힐즈에서 자라나는 고등학생들의 생활을 담 은 텔레비전 시리즈)의 조그만 역할을 위해 오디션을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오디션이 끝나고 감독 님은 나에게 더 큰 역할을 주기로 결정하셨다. 남자 주인공인 브랜던 윌쉬의 상대역인데 학생 운 동가의 역할이다. 아직 `비벌리 힐즈 90210`의 배우들을 만나보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배우들은 실 생활에서는 자신이 연기하는 역할과 성격이 매우 다르다. 암 때문에 다리 하나를 잃었지만 나는 암에 걸리기 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한 다리로 스키 타는 법도 배웠다. 이젠 경주에도 참가하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양쪽 스키가 서 로 부딪치는 일 따위는 우리에겐 일어나지 않는다! 내 인생의 목표는 연기와 글 쓰기이다. 하지만 암에 걸린 후 나는 삶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 지 않는 법을 배웠다. 인생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죽기 전에 즐겁게 살아야 한다! 크리스틴 컬스틴 왜 암이 나았느냐구? 약뿐만 아니라 정신도 몸 안의 면역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죠나스 썰크 내가 졸업한 의과 대학은 미국에서 제일 좋기로 열 손가락 안에 든다. 그리고 나는 의대생들 가르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뉴욕의 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나는 의사로서 최 고의 훈련을 받은 셈이다. 나는 친절했고 동정심이 많았고 환자들을 좋아했고 또 대부분의 환자들도 나를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교육받은 것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즉, 의학 서적에 써 있지 않거나 엄 격한 실험을 거치지 않았으면 모두 돌팔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십년을 살았다. 내가 쉰아홉이 되기 삼개월 전 어느날 캘리포니아에 사는 딸이 책 한 권을 보내 주었다. 디팩 쵸프라 박사가 쓴 `콴톰 회복`이라는 책인데, 정신과 육체를 연결시켜 치료법을 찾는 것에 대해


씌여 있었다. 사실 건강은 무척 좋은 편이었지만 쉰아홉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종합 건강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전립선 종양 말기라는 선고를 받았다. 의과 대학의 교수를 찾아가 보았으나 진단은 마찬 가지였다. 이제 회복의 희망은 없으며, 호르몬 치료제를 쓰면 병의 악화를 조금은 지연시킬 수 있 으므로 18 개월에서 24 개월은 살 수 있다고 한다. 암 진단을 받고 나는 쇼크 때문에 우울증에 빠졌다. 아내와 아이들이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서 최선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두 딸이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망설일 틈도 없이 나는 회복에 대한 책을 읽고 테이프를 듣고, 식이요법을 시작했고, 명상에 대한 강좌를 신청했다. `암 심리학자`와 면담을 했고, 내 몸 속의 암 세포가 파괴되는 장면을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리는 심상요법을 시작했다. 이 중에서 정통 의학 치료법인 것은 하나도 없다. 마음속엔 회의가 가득했지만 아이들과 아내 가 거의 강제적으로 설득하는 것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나는 말 잘 듣는 환자가 되기로 결심했 기 때문에 마음을 활짝 열고 모든 치료법을 잘 따라했다. 그리고 벌써 51 개월이 지났다. 지금 내 건강은 아주 좋다. 하지만 난 더 이상 옛날의 내가 아니 다. 의학 치료에 대한 내 태도가 180 도 바뀌었다. 옛날에는 편협하고 앞만 바라볼 줄 아는 의사였 는데 지금은 모든 가능성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요즈음 나는 암 환자 후원회를 운영하며, 배우자와 함께하는 다이어트, 명상, 심상요법, 심리적 인 상담 등에 도움을 주고 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매주 서너 명의 새로운 암 환자가 전화를 통 해 회복을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일년 전부터 치료법에 기도를 넣었다. 기도의 힘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들어왔고, 우리 식구 들이 날마다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지만 그래도 계속 회의적이었다. 그러다 래리 도지 박사의 연설을 듣고 `회복의 말들`이라는 그 분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기도에 대한 기사나 텔레비전 프로들을 찾아가며 읽고 들을 뿐 아니라 날마다 내 나름대로의 비형식적인 방법으로 하 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나의 하루는 명상과 기도와 심상요법을 삼십분 정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쇼핑을 가고 요리 를 하는 것 또한 즐거운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육류나 지방은 전혀 먹지 않고


곡식류와 신선한 야채와 식이요법에 따르는 다른 음식의 양을 많이 늘렸다. 그리고 아직도 일년에 두 번 식이요법 전문가와 만나 상담을 한다. 버니 시겔 박사, 디팩 쵸프라 박사와 루이스 헤이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테이프를 들으며 육체 와 정신을 연결시켜 치료법을 찾는 공부를 하는 것도 내 하루 중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이런 공부를 하다보면 `비정통 치료법`을 통해 많은 `의학적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 옛날의 내 동료들은 아직도 나를 `약간 정신이 나간 경우`로 취급하며 어쩌다 운이 좋아서 암 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왜 암이 나았느냐고? 그들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깔려죽을 만큼 많은 사랑과 정신적 도움을 받았고 내 자신이 변하기로 결심을 했다. 바로 그게 내 생명을 구했다! 하워드 J. 푸르스트 의학박사 포기하지 않는 믿음 이젠 전혀 방법이 없다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헨리 포드 크레이그 설골드는 유머 감각이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유쾌한 성격의 크레이그는 남들을 즐 겁게 해주려는 기질을 타고났으며 사람들 웃기기를 무엇보다 좋아했다. 크레이그가 제일 좋아하 는 일은 런던 근교 칼셜톤에 있는 그의 집에서 가발과 우스꽝스런 모자를 쓰고 집안 식구들을 불 러모은 후 코메디극을 벌이는 것이었다. 크레이그의 쾌활한 성격은 축구를 할 때도 잘 드러났다. 그러나 1988 년 가을 축구부 코치는 당 시 아홉 살 먹은 크레이그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크레이그는 매우 적극적인 성격이 었다. “그런데 좀 느려진 것 같아요.” 코치가 크레이그의 아빠인 어니에게 말했다. 크레이그는 귀가 아프다고 호소했고, 크레이그의 엄마 마리온은 크레이그가 텔레비전을 볼 때 눈을 너무 자주 깜빡거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크레이그는 점점 더 멍해져갔다. 의사는 크레이그 가 진심으로 사랑하던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슬픔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크레이그는 점점 더 기운이 없고 침울한 아이가 되어갔다. 크리스마스가 되었을 때는 새로 사준 자전거를 타려고도 하지 않았다. 의사가 이번에는 중이염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항생제를 먹어도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주일 후 크레이그는 토하기 시작했고 마리온은 당장 종합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전문의는 여 러 가지 검사를 실시하며 뇌사진을 찍도록 지시했다. 얼마 후 의사는 크레이그의 엄마 아빠에게 상담실로 들어오도록 했다. “좋지 않은 소식이 있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크레이그는 뇌종양에 걸렸습니다.” 마리온은 할 말을 잃었고 어니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의사는 종양이 매우 위험한 위치에 있다고 했다. 그곳은 뇌간의 맨 꼭대기인데 호흡과 맥박수 와 혈압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구급차가 와서 크레이그를 런던 중심부에 있는 그레이트 올몬드 스트리트 병원으로 데려갔고 곧 뇌수술 날짜가 잡혔다. 마리온은 아이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불굴의 정 신이 깨질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아이에게 정직했었으므로 이제 와 서 그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크레이그의 침대맡에 앉아서 아이의 손을 잡았다. “크레이그,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니?” “알 것 같아, 엄마.” 그리고 크레이그는 즐겨보던 텔레비전 프로의 주인공 얘기를 했는데 그녀도 뇌종양에 걸려 있 었다. “그 아줌마가 걸린 것에 나도 걸렸지?” 크레이그가 물었다. 마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삭였다. “용감해야 해.” “용감할거야, 엄마.” 1 월 17 일, 크레이그는 휠체어를 타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행운을 빌기 위해서 그가 좋아하는 코 끼리 인형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마리온과 어니가 아이 옆에 서 있었다. 마리온은 부드러운 목소 리로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한거야.” 병원에 마련된 예배실에 무릎 꿇고 앉아서 마리온은 십년 동안의 노력 끝에 크레이그를 임신했 던 때를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는 레스토랑에서 자축 파티를 크게 벌 였다. 그리고 축하객 모두가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이끌었다. 1979 년 6 월 24 일 크레이그가 태어날 때까지 기쁨은 계속되었다. 이제 그녀는 아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 크레이그는 아직 하늘 나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절대 크레이그를 못 데 려가도록 하겠어요. 아직은 크레이그의 차례가 아니예요.” 기도도 소용이 없었다. 몇 시간의 수술 후 외과의는 종양이 너무 위험한 장소에 있어서 모두 제거하지 못했노라고 말했다. 이 주일 후 병리 보고서엔 `악성 테라토마`라는 끔찍한 말로 적혀있 었다. 테라토마는 매우 공격적인 뇌암이었다. 수술이 끝나고 크레이그는 더 많은 치료를 받았지만 이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마리온은 크레이그와 하루 종일 같이 있기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트럭 운전수인 어니는 저녁 때 일이 끝나면 곧장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래서 하루 24 시간 크레이그의 침대 옆엔 엄마나 아빠가 꼭 붙어 있었다. 크레이그는 가족들, 친구들, 축구부 부원들로부터 수도 없이 많은 카드를 받았다. 그래서 의사 가 “기네스 북에 올라가도록 해보지 그래.” 하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항암 화학요법과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크레이그는 로얄마즈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리 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크레이그가 가장 좋아하는 텔레비전 배우 한 명이 빠른 회복을 바란다는 내 용을 테이프에 녹음해서 보냈다. 그 소문이 퍼지자 한 커다란 신문사가 이 용감한 소년의 기사를 실었다. 그러자 다른 신문사, 라디오 방송국,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앞을 다투어 크레이그의 기사 를 다뤘다. 영국 언론계에서 크레이그는 `우리의 용감한 소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레이그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이제는 양 다리와 왼팔에 힘을 잃었 고, 말하는 것을 힘들어 했으며, 시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크레이그는 유 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화학요법으로 머리가 다 빠지자 그것에 대해서도 농담을 했다. “똑 똑.” “누구세요?‘ 그럼 문 뒤의 방문객이 대답한다. “아, 거기입니다.” “아, 거기 누구라고요?” 그리고 재미있는 부분이 나온다. “아, 거기 한 때 머리, 지금은 대머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레이그를 걱정해 주자 크레이그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날 저녁 화학요 법을 받은 후 기운이 완전히 다 빠졌을 때 크레이그는 슬퍼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말했다. “엄마, 카드를 생각하면 돼. 카드 생각만 하면 기분이 나아져.” 그 말을 듣고 셜골드 부부는 크레이그의 기운을 북돋워주려고 신문사에 연락했다. 그래서 병 문안 카드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 도전하려 한다고 말했다. 며칠 후 작은 트럭 하나가 셜골드 씨 집 문앞에 정차했다. 그리고 병 문안 카드가 가득 들은 커다란 자루 몇개를 내려 놓았다. 카드가 쏟아져 들어오자 소문은 더욱 퍼졌고 그래서 몇천 장의 카드가 또 쏟아져 들어왔다. 마가렛 대처 수상이 카드를 보냈다. 찰스 황태자, 죠지 부시, 로널드 레이건, 미카엘 고르바쵸프가 카드를 보냈고, 또 크레이그의 영웅인 마이클 죠던과 실베스터 스텔 론도 카드를 보냈다. 크레이그는 진짜로 기네스의 기록을 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당시의 기 록은 1,000,265 장의 카드를 받은 영국 소년이 보유하고 있었다. 이제 크레이그에게는 목표가 생겼다. 잔혹한 자신의 운명의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카드 가 너무도 많이 쏟아져 들어왔으므로 런던의 중앙 우체국에서는 크레이그에게 `선택 상자`를 마 련해 주었다. 그래서 크레이그는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이 한 도시처럼 우편물을 수령할 수 있게 되었다. 1989 년 11 월 17 일, 드디어 그 날이 왔다. 힘이 없어 떨면서도 크레이그는 그 날 저녁에 열릴 기 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근처의 축구 협회로 갔다. 300 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우체국장 은 크레이그에게 1,000,266 번째 카드를 주었다. 기록을 깬것이었다! 크레이그가 감격에 찬 목소리 로 감사의 말을 하자 모두들 `그 녀석은 너무도 유쾌하니까`라는 노래를 불러 주었다. 크레이그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부터 약 오천 킬로미터 떨어진 미국 버지니아 주 샬로츠빌에 사는 죤 클루지는 어느날 친구로부터 크레이그에 대한 편지를 받았다.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77 세의 클루지는 통신 관계의 사업으로 억만 장자가 된 사람이었다. 클루지의 친구들은 클루지에 게 크레이그와 병 문안 카드에 대한 얘기를 해주며 카드를 한 장 보내라고 말했다. 카드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클루지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모두들 카드 캠페인에 커다란 관심을 쏟고 있었지만, 클루지는 이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의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치료를 받아본 것일까? 다른 어떤 치료를 받도록 내가 도와 줄 수는 없을까? 지금까지 클루지는 자선 사업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해 왔다. 하지만 한 개인에게 돈을 준 적은 없었고 또 지금 와서 그런 전례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셜골드 가족에게 잘못된 희망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클루지는 크레이그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클루지는 버지니아 주 건강 의학 센터에서 신경외과 교수직을 맡고 있는 친한 친구 닐 캐셀 박 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닐 셜골드 가족에게 연락해 주겠나? 중요한 사항이 방관되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 네. 일체 비용은 내가 대지.” 셜골드 가족에게 전화 통화가 되지 않자 8 월 7 일 캐셀 박사는 속달을 부쳤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셜골드 가족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물론 그의 편지는 수백만 장에 이르는 병 문안 카드들 속에 묻혀버린 것이었다. 기네스 기록을 깬 후 크레이그가 받은 카드의 수는 2 천 6 백만 장에 이 르고 있었다. 9 월 20 일 크레이그의 담당의인 디아나 테이트 박사가 마리온과 어니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좋 지 않은 소식이었다. “크레이그 종양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테이트 박사가 말했다. 셜골드 부부는 앞이 캄캄했다. 그들은 이 소식을 크레이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마리온은 기분 전환을 하려고 크레이그의 병 문안 카드를 읽기 시작했다. 잔뜩 쌓인 봉투들 가운데서 마리온은 캐셀 박사의 편지가 담긴 속달 봉투를 끄집어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마리온의 손이 덜덜 떨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마리온은 소리쳤다. 마리온은 당장 캐셀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테이트 박사의 진단을 알려주었다. 캐셀 박사는 “아무것도 보장할 수는 없지만”이라고 전제한 후, 자신이 속해 있는 병원이 최근 `감마 나이프` 를 구입했다고 말했다. 감마 나이프는 뇌 종양에 직접 고압의 방사선을 쬐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계였다.


“이것으로 새로운 치료를 해볼 수도 있겠어요. 크레이그의 뇌 사진을 이리 보내 주십시오.” 박사가 말했다. 어니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마리온은 편지를 건네주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적을 허락하시나봐요.” 그녀가 말했다. 뇌사진을 받은 후 캐셀 박사는 자세히 검토해 보았다. 뇌 한 가운데에서 달걀 크기만한 회색의 종양이 뇌 중심부를 누르며 뇌간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순간 캐셀 박사는 희망을 잃었다. 감마 나이프를 사용해서 제거하기엔 종양이 너무 컸다. 더군다나 암은 벌써 가지를 뻗어서 근처의 세포에까지 퍼져있었다. 종양이 악성이라는 병원 보 고는 틀림이 없는 것 같았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크레이그의 회복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캐셀 박사 는 생각했다. 또한 수술을 한다 해도 수술 결과로 사망할 확률이 5 대 1 이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 해 도 도대체 크레이그에게 좋을게 뭐란 말인가? 캐셀 박사는 생각했다. 몇 개월 연장된 생명? 케셀 박사는 클루지 씨에게 전화해서 이 나쁜 소식을 전했다. “더 이상 의학이 손을 쓸 수 있는 단계가 아니야.” 그가 말했다. “정말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고 완전히 확신하나?” 클루지가 주장했다. “제발 좀 더 생각을 해보게나.” 캐셀 박사는 자신의 마음을 타진해보기 시작했다. 세 딸의 아버지인 자신이 만약 이것과 비슷 한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자신의 아이에 게 끝까지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줬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11 월이 다 끝나가는 어느날, 캐셀 박사는 셜골드 부부에게 연락했다. “제가 당신 아들을 도와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가 말했다. 위험한 수술이었으며, 수술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캐셀 박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종양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제거해내고 나머지를 감마 나이프로 공격해 보는 것 이었다. 그러면 생명을 좀 더 연장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캐셀 박사는 셜골드 부부에게 크리스 마스 동안 이 문제를 심사 숙고해 보고 정초에 결정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마리온은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크레이그가 더 이상 고통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결 국 마리온과 어니는 크레이그에게 결정할 기회를 주었다. “엄마.”


크레이그가 말했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어요.” 그래서 수술은 3 월 1 일 버지니아 주 건강 의학 센터에서 하도록 정해졌다. 그날 아침 크레이그 는 그의 침대 맡에 서 있는 엄마 아빠에게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난 이제 괜찮아질 거예요. 두고 보세요.” 얼마 후 병원 직원이 와서 크레이그를 수술실로 밀고 갔다. 크레이그는 코끼리 인형을 끌어안 고 소리쳤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그리고 크레이그는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전화한거야.” 캐셀 박사는 크레이그의 머리 제일 윗부분에서 약 육센티미터 크기의 타원형으로 두개골을 잘 라냈다. 조심스럽게 대뇌반구를 떼어놓고, 두 반구를 연결하는 한 줄기의 섬유질을 갈랐다. 회색 을 띤 하얀색의 종양은 거의 정확하게 뇌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종양은 얇은 막에 싸여 있었는데 뇌 사진에는 이것이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었다. 잘됐어, 캐셀 박사는 생각했다. 종양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덜 퍼져 있군. 캐셀 박사는 막을 잘라 연 다음 종양을 잘라내고 펌프해냈다. 집도하면서 캐셀 박사는 점점 더 흥분하기 시작했다. 종양이 악성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년 전 영국 병원에서 검사를 한 이후 종양의 성격이 바뀌었단 말인가? 종양을 잘라내며 캐셀 박사는 크레이그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수술을 시작한지 세 시간이 되었을 때, 캐셀 박사가 너무 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고 동료 의사가 걱정을 했다. “그 쪽으로 가지 마.” 동료 의사가 주의를 주었다. 캐셀 박사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처음부터 수술은 커다란 도박이었다. 이제 수술용 확대경을 통해 크레이그의 뇌에 박혀 있는 종양의 잔재를 바라보며 캐셀 박사는 다시 한번 도박을 해야 한 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셀 박사는 종양의 조그만 부분을 제거하지 못하고 남겨두어야 했다. 너무 위험한 장소에 있었을 뿐더러 대부분이 흉터였으므로, 완전히 죽어서 다시는 자랄 수 있을 것 같 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술은 다섯 시간 이상이 걸렸으나 감마 나이프는 필요하지도 않았다. 캐셀 박사는 지치고 흥 분한 상태로 수술실을 나와 크레이그 부모님께 좋은 소식을 전하러 갔다. 마리온은


펄쩍 뛰며 박 사에게 키스를 해주었다. 중환자실에서 마리온은 고개를 숙여 크레이그에게 속삭였다. “크레이그야, 종양이 모두 없어졌단다. 모두 다.” 크레이그는 눈을 조금 뜨고 미소지었다. 그 후 크레이그는 놀랍도록 빨리 회복했다. 즉시 말이 빨라지고 분명해졌고 수술 전에는 발음 할 수 없었던 단어들을 분명히 발음했다. 이틀 후 캐셀 박사가 찾아왔을 때 크레이그가 말했다. “의사 선생님, 선생님은 슈퍼캘리프레질레스틱엑스피알라도셔스(디즈니 영화 `메리 포핀스`에 나오는 말. 굉장하다는 뜻으로 지어낸 것이다.) 하십니다.” 그리고 크레이그는 깔깔 웃었다. 수술 후 검사를 해본 결과 이제 크레이그의 뇌에는 악성의 종양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어 떻게 해서 악성의 종양이 없어졌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중요한 사실은 크레이그의 종양이 양성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몇주 후, 클루지 씨가 셜골드 가족을 만나러 병원에 들렸다. 클루지 씨가 병원 문을 들어서자마자 마리온은 그의 손을 잡고 감사의 말을 했다. “당신은 우리를 도와 주러 온 천사예요.” 클루지는 양면에 얼굴 그림이 새겨진 동전 한 개를 크레이그에게 주었다(미국 동전은 한쪽에 얼굴 그림이 있고 다른 한쪽은 없어서 사람들이 내기를 할 때 동전을 던지기도 한다. 한 사람은 얼굴이라고 하고 상대편은 꼬리라고 해서 동전이 어느쪽으로 떨어지나를 본다.). 클루지 씨가 말 했다. “이렇게 하면 너는 절대 지지 않을 거야.” 크레이그도 클루지 씨께 선물을 드렸다. 몇달 전에 엄마가 찍어준 사진을 액자에 넣은 것이었 다. 사진 속에 크레이그는 권투 선수가 입는 팬티를 입고 권투 장갑을 끼고, `록키` 포즈를 하고 미국 국기 앞에 서 있었다. 사진 위에는 이런 글이 써 있었다. “제일 힘든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죤 펙카멘 희망 어느날 아침 식사를 의사가 불평을 했다.

하다가, 두 종양 전문의가 하는 얘기를

엿듣게 되었다. 한


“저 말이지, 밥,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구. 너랑 나랑은 같은 약을, 같은 양만큼, 같은 스케 줄에, 같은 용도에 처방하잖아. 그런데 내 성공률은 22%고 너는 74%잖아. 전이성 암을 치료하는 데서 이런 일이 생기는건 도대체 들어본적도 없다구. 어떻게 된거야?” 그의 동료가 대답했다. “우리 둘 다 에토포시드(Etoposide), 플래티늄(Platinum), 온코빈(Oncovin), 하이드로시유리아 (Hydroxyurea)를 쓰잖아, 너는 환자에게 약을 주며 EPOH 라고 하지? 나는 거꾸로 HOPE 라고 한 단 말이야. 통계상으론 암울한 경우지만 그래도 가망이 있다고 강조하는 거지.” 윌리암 M. 뷰치홀쯔 의학박사 에이미 그래함 삶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말코스 튤리어스 시세로 몇해 전 나는 워싱턴 D.C.를 출발헤서 밤새도록 날아 덴버 시에 있는 마일 하이 교회에 도착했 다. 그 곳에서 세 번의 예배를 주도하고 번영을 위한 마음 가짐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되어 있 었다. 교회를 들어서는데 프레드 보트 박사가 내게 물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재단>을 아세요?” “그런데요.” 내가 대답했다. “에이미 그래함은 백혈병 진단을 받았는데 이젠 가망이 없대요.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예 요. 그런데 그녀의 마지막 소원이 당신의 강연을 듣는 거예요.” 나는 깜짝 놀랐다. 우쭐해지는 기분도 들었고, 감동도 되었고,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죽을 날이 얼마남지 않은 아이들이라면 디즈니랜드를 가거나, 실베스터 스탤론이나 미스터 T 나 아놀드 슈왈츠네거를 만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일 것 같았다. 마지막 남은 날을 마크 빅터 한센의 강연을 들으며 보내고 싶다!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은 아이가 왜 의욕과 자신감에 대 한 강연이 듣고 싶을까? 그 때 보트 박사가 말했다. “이 아이가 에이미입니다.” 보트 박사는 창백한 에이미의 손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열일곱 살난 소녀였다. 머리엔 빨간색 과 주황색이 섞인 터번을 쓰고 있었다. 화학 치료로 인해 머리가 다 빠졌기 때문이었다. 곧 쓰러 질 것같이 허약한 몸을 약간 굽히고 그녀가 말했다.


“두 가지 소원이 있는데, 하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이고 하나는 선생님의 강연을 듣는 것이예요. 의사 선생님은 둘 다 할수 없을 거라고 하셨어요... 이 분들이 내 엄마 아빠예요.” 내 눈에 눈물이 넘쳤다. 목이 잠겼다. 마음의 평정이 흔들렸다. 너무도 큰 감동을 받았다. 목을 가다듬고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와 네 부모님을 오늘 내 손님으로 모시겠다. 여기 와 주어서 고맙구나.” 우리는 포옹을 하고 눈물을 닦고 헤어졌다. 나는 미국, 캐나다, 말레이지아,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를 돌아다니며 회복에 관한 강연을 듣 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귀를 기울이고, 심사숙고하고, 어떤 방법이 어떻게 왜 좋은지 스스로 질 문을 해보기도 한다. 그 일요일 아침엔 내가 강연을 했고 에이미와 그녀의 부모님이 참석을 했다. 배우고, 자라고, 더 성숙한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삼람들이 천 명도 넘게 모여서 강당이 넘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평생 동안 영향을 미칠 회복의 방법을 배우고 싶으냐고 겸손히 물어보았다. 강연대에서 내려다보자니까 한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손을 번쩍 들었다. 만장일치로 그들은 배 우기를 원했다. 사람들에게 두 손을 세게 문지른 후 약 5 센티미터 가량만 벌리고 두 손에서 스며나오는 에너지 를 느껴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씩 짝짓도록 한 후 짝의 손에서 스며나오는 에너지를 서로 느껴보도록 했다. 내가 말했다. “만약 당신을 회복시켜 줄 에너지가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여기서 받아들이세요.” 사람들은 모두 한 마음이었고, 넘치는 기쁨을 함께 느꼈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회복에 필요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나는 설명했다. 한 5 퍼센트 정도의 사 람들은 손에서 솟아나는 그 힘이 매우 강하므로 그것을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오늘 아침 전 에이미 그래함을 만났습니다. 에이미는 열일곱 살인데 마지막 소원이 이 강연 에 참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이미를 이 앞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자신의 손에서 솟 아나는 회복의 에너지를 에이미에게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그녀를 도와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이미가 부탁한 일은 아닙니다. 이 순간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제가 부 탁을 드립니다.” 사람들이 소리쳤다.


“네! 네! 네! 네!” 에이미의 아버지가 그녀를 데리고 강연대로 올라왔다. 그녀는 확학요법을 많이 받은 데다 항상 침대에 누워만 있었으므로 운동이 부족해서 더욱 허약해 보였다(이 강연에 오기 이주일 전부터 의사들은 에이미가 걷지 못하도록 했다.). 사람들은 손을 따뜻하게 덥힌 후 에이미에게 회복의 에너지를 보냈다. 그리고 모두들 일어서서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쳤다. 이주일 후 에이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암이 깨끗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병원에서 퇴원을 했다! 이년후 에이미는 다시 전화를 해서 결혼을 했다고 알려주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회복의 에너지를 무시하지 말라고 나는 배웠다. 정말 좋은 일을 위해서 사 용할 수 있도록 그 힘은 항상 우리 안에 있다. 다만 기억을 하고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마크 빅터 한센 야생의 빌 난 항상 내가 여든세 살까지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여든세 살인지는 나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쉰여덟 살까지라고 살수 있으면 감사해야 할 것이다. 내가 쉰여덟이 될 때 레이첼은 열두 살이 된다. 대강 세상 물정을 이해할 만한 나이다. 엄마를 잃는 것은 어떤 나이에도 힘든 일이지 만, 비록 엄마가 사실은 이모일지라도. 나는 하루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낸다. 매일 아침 자명종이 울리면 몇분 동안 침대에 가 만히 누워 있는다. 바깥 날씨가 어떻든지에 상관없이 나는 다리를 쭉 뻗을 수 있어서 행복하고 강아지를 쓰다듬어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리고 다시 하루를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기 도를 드린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은 햇살이 방에 쳐진 레이스 커튼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날이다. 하지 만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을 소리도 좋아하고 나뭇가지를 집 벽에 쓸어대며 부는 바람소리도 좋아 한다. 하루 중 가장 기분이 좋은 시간은 아침이다. 아침은 내게 희망을 준다. 이년 반쯤 전 한밤중, 왼쪽 부신이 있던 종양이 갑자기 터지는 바람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수술대에 누워서 이젠 다 자란 세 아이들과 아직 끝내지 못한 사업


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레이첼이었다. 응급차가 와서 나를 실어갈 때 레이첼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미친 듯이 울었다. 감사하게도 나는 수술을 잘 견뎌냈고 놀랄 만큼 빨리 회복을 해서 육주 후에는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레이첼과의 생활도 다 시 정상으로 돌아갔다. 종양은 정말 이상한 것이다. 악성으로 되어 버리기 전에는 누구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아내 지를 못했다. 다섯 군데의 종합병원을 다녔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야생의 빌` 이라고 불렀다. 이년 가량은 그런 대로 괜찮았다. 가끔 대장이 막히기는 했지만 수술을 받지 않고도 치료를 할 수가 있었다. 삼개월마다 시카고로 가서 종양 전문의의 검사를 받았는데 매번 무사 통과였다. 그 래서 얼마 후엔 `야생의 빌`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올해 정초부터 심한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등이 더 아팠고 항상 미열이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서 검사를 받아 보았다. 결핵부터(같은 직장에 결핵에 걸린 사람이 있었다.) 관절염까지 모든 검사를 다 받았다. 정밀 검사의 한 순서로 복부 자기공명 영상촬영이 있었다. 45 분에서 한 시간 가량 걸린다던 검사가 두 시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가슴이 뛰고 정신이 없었다.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 귀로 들어갔다. 병이 들었다고 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눈물을 닦을 수도 없었고, 누가 내 손을 잡아 줄 수도 없었다. 자기공명 영상촬영에 뭔가 비정상적인 것이 나 타난 것이 분명했다. 그 다음 날 길다란 바늘을 종양까지 넣어 조직검사를 했다. 결과는 `야생의 빌`이 재발했다는 것이었다. 앞이 까마득했다. 레이첼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좀 잘난 척하기는 하지만 자격은 충분해 보이는 의사가 나를 보러왔다. “실험적인 수술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그 놈이 어떤 놈인지 한번 보고 제거할 것은 제 거 합시다. 하지만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의식을 회복했을 때, 난 희망을 앗아가버리는 실망스런 그 말을 들어야 했다. “다 제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무엇을 제거했으며 무엇을 제거할 수 없었는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모두들 다 른 말을 했다. 다섯 명에게 물어 보면 다섯 가지 대답이 나왔다. 분통이 터졌다. 수술을 받고 나서 회복기를 지나는 동안 나는 억누르는 슬픔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옆으로 돌아누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저녁 때면 나무 토막처럼 가만히 누워 있었다. 식구들과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이 날마다 위문을 왔지만 아무 희망도 가질 수가 없었다. 차라리 처음 종양이 터졌을때 죽어버렸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울증을 털어내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미끄럼을 타듯 나는 우울증을 이겨냈다. 항 암 화학요법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결국은 그것 때문에 희망을 갖게 되었다. 책을 읽 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전혀 가망이 없는 암에 걸렸다가 회복하고, 의사가 예언했던 시간보 다 훨씬 오래 행복하게 산 사람들에 대한 책을 수도 없이 읽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 했다. 한 친한 친구와 목사님의 도움으로 기도하는 법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 레이첼과 나 는 밤마다 기도를 드린다. 1992 년 12 월의 끔찍한 저녁에 차라리 죽어버렸더라면 하는 생각은 다 신 하지 않는다. 지난 2 년 동안 좋은 일이 너무도 많이 생겼는데 그 때 죽었더라면 하나도 몰랐을 것이 아닌가! 첫째 아들이 첫번째 책을 출간했고, 연기를 하는 막내 아들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고, 딸 아이 와 남자 친구가 멋진 집을 지었다. 레이첼은 자전거 타는 법과 글 읽는 법을 배웠고 나는 소중한 옛 친구와 다시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전에는 당연한 것으로 보이던 일들이 이제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만약 그날 밤 죽었더라면 작년 가을에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할 뻔했다. 그리고 레이첼은 갑자기 엄마를 잃은 쇼크로부터 회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일을 겪는 동안 나는 우린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이 제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삶을 다시 연장해 주신 것에 감사 기도를 드리고, 새와 들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꽃을 꺾고 또 심고, 동생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고, 레이첼의 숙제를 도와 주며 날 마다 내가 더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희망`때문인 것 같다. `희망`은 이제 나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다. 희망이 있는 한 나는 회복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다. 메리 L. 랩 암에 걸린 아이들


아이들이 어른들의 세계를 대할 때는 어느 만큼의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고 어른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릿광대 같은 짓을 하며 권위 의식을 가진 어른들을 초조하게 만든다. 어른들은 걱정해야 할일이 태산처럼 많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더 아이 같아진다면 걱정거리가 태산처럼 쌓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른들은 잊었다. 콘래드 하이어즈 아직도 그 장면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남편 크레이그와 나는 메이오 병원의 햇빛이 잘 드는 상담실에 앉아 있다. 우리 맞은편에 앉은 어린이 암 전문의는 가능한 동정심을 총 동원해서 여섯 살 먹은 우리 아들이 암 말기이며, 그것 도 특별히 치사율이 높은 암이라는 비참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크레이그와 나는 겁에 질린 얼굴 로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내가 묻는다. “제이슨은 죽을 건가요?” 의사가 슬픈 대답을 하다. 몇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 의사의 목소리를 기억할 수 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심란한 목소리로 의사가 입의 연다.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렇게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그럴 겁니다.” 생각하기도 힘든 일은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 아마 부모들에게는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다. 자 기네 집에 침략자가 들어올 것이며, 그래서 그 사악한 침략자가 아이를 유괴해 갈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린이 암은 <숙녀의 가정 일 기>란 잡지에 게재되는 성녀같은 엄마들, 굳건하고 강인한 그런 여자들에게나 생기는 일인 줄 알 았다. 제이슨이 암 선고를 받았을 때 나는 어른, 어린이를 합쳐서 암에 걸린 사람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나는 가정 주부였고, 아이가 넷이었고, 그 중 하나는 아직 젖먹이였다. 크레이그는 열심히 일하는 남편이고 아빠였다. 우리는 미네소타 주 월딩톤의 목가적 동네에 사는 특별할 것이 없는 가족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병은 아늑한 우리집의 지붕을 뚫고 불타오르는 유성처럼 우리의 삶에 쳐들어 왔다. 우리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서 우왕좌왕했다는


것은 한치의 과장도 없는 말이었다. 아들은 죽지 않았다. 2 년 동안의 잔혹한 화학요법과 방사선 치료와 수술이, 또 하나님의 나라에 홍수가 날 정도로 우리가 해댄 기도가 아들의 목숨을 살렸다. 지금 제이슨은 건강하고 활동적인 십대 소년이다. 댄 마리노와 래리 버드(미국의 프로 운동 선 수들)의 충실한 팬이고 온 집안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록 음악을 틀어놓는다. 또한 <암에 걸린 아이들을 위한 나의 책>(당시 제이슨은 상당히 노력했지만 철자법이 틀리고 말았다.)을 쓰기도 했다. 제이슨은 치료가 다 끝나갈 무렵에, 회복이 잘 진행되고 있을 때 그 책을 썼다. 어느날 오후 제이슨과 나는 소파에 파묻혀 앉아서 암에 대한 어린이용 책을 읽고 있었다. 어떤 어린 환자가 쓴 책이었다. 나와 제이슨이 함께 읽은 다른 책들처럼 결말에서 아이는 죽고 만다. “정말 지독한 책이잖아!” 제이슨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왜 항상 죽는 아이에 대해서만 책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그러냔 말야? 나 같은 아이들에 대 한 얘기는 들어보지도 못했나? 암에 걸렸다가 살아나서 자라고 그러는 애들 말이댜. 왜 그런 책 은 쓰지 않지?” 대답할 말이 없어서 내가 제안했다. “네가 그런 책을 쓰면 어떻겠니?” 하지만 아이가 진짜 쓸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글쎄.” 아이는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야 할 것 같은데.” 몇달이 지난 어느날 설거지를 하고 있는 제이슨이 부엌으로 달려 들어왔다. “여기 있어, 엄마.” 아이는 말하며 노란색의 노트에 꼬불꼬불 쓴 `책`을 건네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별로 심각하 지 않은 것, 우습고도 귀여운 조그만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트를 넘기며 난 울음을 터 트리고 말았다. “암에 걸리면, 무서워하지 마세요.” 라고 아이는 충고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암에 걸렸다가 낫고 죽지 않고 살기 때문이에요.” 어른도 잘 이해하지 못해 고생하는 병에 대해 조금만 아이가 그토록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 것 에 나는 감동했다. 그날 저녁 회사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책을 읽으라고 주었다. 책을 다 읽고 덮으며 크레이그가 말했다.


“우리는 이제 이 일을 끝내가고 있지만, 어떤 엄마 아빠들은 이 일을 지금 막 시작하려 하고 있어. 그런 엄마 아빠들에게 이 책을 전해 주면 멋지지 않겠어?” 아들의 암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은 이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이다. 당신 아이의 행, 불행이 문제가 되었을 때 당신이 얼마나 끈질겨질 수 있는지는 아마 당신 자 신도 깜짝 놀란 정도일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이렇게 말해 줄 때가 나는 너무 좋다. “제랄린, 너는 정말 강한 여자야. 만약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견뎌내지 못했을 거야.” 물론 견뎌냈을 것이다. 병든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부모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선택 의 여지가 없다! 우리 가족이 겪어낸 일은 어떤 면에서도 영웅적인 일이 아니다. 단지 인간이 얼 마나 훌륭히 적응하고 생존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남편과 내가 저지른 실수는 딱 한 가지가 있다. 어린이 암은 환자나 부모뿐 아니라 가족 전체 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그 영향에 적응해갈 능력은 누구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는 것이 다. 어린 아이가 겪는 치명적인 병은 친척, 친구, 선생님, 직장동료 등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 을 미치게 된다. 암에 대한 연구의 진전은 최근 들어서 더욱 빨라졌다. 특히 어린이 암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만약 제이슨이 20 년 전에 암에 걸렸다면 아마 수주일 내로 죽었을 것이다. 1960 년 중반에는 암에 걸린 어린이 다섯 명 중 단지 한 명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1980 년 중반에 회복률이 세 명 중 한 명으로 늘어났다. 20 년 전이었다면, 아마 남편과 나는 아들의 즉각적인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을 것이다. 요즘의 회복률은 세 명당 두 명으로 상당히 높으며, 의학적 연 구가 발전함에 따라 어린이 암을 치료할 수 있는 희망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이런 경험을 아무 상처도 받지 않는 채 이겨내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사랑과 믿음이 필요하다. 솔직히 말해서 제이슨이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우 리의 생활은 제이슨의 병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다시는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더욱 발전했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 린이 암을 경험한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 우리가 바로 그 증거이다.


제랄린 개즈 암은 축복이었다 얼굴이 공포로 이그러질 정도로 힘든 경험을 겪어 낼 때마다 우리는 강한 힘과 용기와 지신감 을 얻는다. `이 끔찍한 일을 겪어냈으니까 이젠 무슨 일이 닥쳐도 무섭지 않아.`라고말할 수 있게 된다. 엘리노아 루즈벨트 “의사 선생님께서 이건 확실히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제 유방을 잘라내지 않기 위해서 제 생 명을 위험하게 하는 일은 안하셨으면 합니다. 유방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유방암의 진단을 받았을 때 내가 종양 전문의에게 한 말이다. 유방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서른여덟 살이었고, 내가 절린 유방암은 유방암 중에서도 희귀하고 회복이 힘든 종류였다. 모든 유방암 중 이 유방암에 걸릴 확률은 1 퍼센트에서 6 퍼센트 밖에 안되며 재발의 확률이 아주 높았다. 화학요법을 받으면 회복이 될 것이지만 삼년이나 오년 사이에 재발할 것이라고 의사들은 말했다. 일단 회복이 된 후 재발을 하면 어떻게 해야 이 암을 없앨 수 있는지는 모른다고도 말했다. 나는 의사에게 의학계에서 가능한 최고의 치료를 받고 싶 으며 그러기 위해선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의사는 보스턴에 있는 대나 화버 연 구소에서 받을 수 있는 실험적 치료법에 대해 말해 주었다. 특별히 힘든 치료이지만 내가 걸린 종류의 유방암엔 권장할 만하다고 덧붙였다. 그 실험적 치료는, 강한 화학요법을 격주마다 일주일에 세 번씩 네주기 동안 받고난 후에야 가 능하다고 했다. 그런 후에야 대나 화버 연구소에 입원할 수가 있으며, 거기서 매우 강한 화학요법 과 골수 이식 수술과 유방 절제술을 받고나서 방사선 치료를 6 주 동안 받을 것이라고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쇼크를 받았다. 힘들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심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골수 이식 수술이 필요하다고 의사가 말했을 때 나는 내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과의사에게서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종양 전문의에게 상담을 하러 가기 전, 나는 5 개월 된 손녀를 유모차에 태우고 끝없이 걸어다녔다. 걸으면서 손녀에게 말을 했다. 손녀를


데리고 돌아다 니는 동안엔 침착하게 생각할 수가 있었고 많은 결정을 내릴 수가 있었다. 더 이상 울고만 있을 수도 없고, 매일 하나님께 `왜 나여야 하나요? 왜 지금이죠?`라고 묻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 었다. 나 스스로를 동정하는 일은 매우 쉽지만 그것은 생산적이지가 못했다. 이 문제와 직접 부딪 쳐서 해결해야 하며, 앞으로 손녀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얻기 위해서라도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손녀에게 이 `할미`가 그냥 사라져버리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 있어 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암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손 녀였다. 그래서 의사가 매우 어려운 실험적 치료를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대나 화버 연구소에 가서 상담을 하고 실험적 치료를 받아도 괜찮겠다는 허락을 얻은 후 1993 년 6 월 화학요법을 끝내고 골수 이식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골수 이식 수술로 인한 심한 부작용 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추수 감사절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휴일을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내겠다고 결심을 단단히 했던 것이다. 1994 년 1 월까진 웬만큼 건강을 되찾았으므로 유방 절제술을 받았다. 그 후 검사에서 암 세포가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보다 더 행복한 소식은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육주 간의 방사선 치료를 받음으로써 4 월에 실험적 치료를 다 마쳤고, 6 월엔 일년 간의 휴가를 끝내고 직장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암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제 세상을 보는 눈이 더욱 밝아졌다. 전에 는 건강과 삶을 당연히 내 것으로 여겼는데 그것을 잃을 뻔하면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이제는 하루하루가 커다란 선물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오늘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 린다. 암에 걸리면 미래가 너무도 불분명하게 된다. 나는 내가 제대로 늙기도 전에 죽을 수 있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한다. 암에 걸리기 전보다 지금 나는 삶을 더욱 고맙게 생각한다. 전에는 내가 강한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내가


매우 강한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겪은 일을 알고나서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무척 강하고 용기 있는 여자라고 말해 준다. 지금 회상해 보건대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아남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을 했을 뿐이다. 내가 한 일들을 용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저 생존일 뿐이 다. 하지만 지금 살아남아서 되돌아보면, 내가 했던 것처럼 암을 직면하는 데는 상당한 힘과 용기 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 안에 있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던 힘과 용기 말이다. 내가 유방암과 싸워 이기는데 가장 힘이 된 것 중 하나가 가족들의 사랑과 협조였다. 가족들의 사랑과 협조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나는 확신 할 수 없다. 아직 해야 할 일 이 너무 많았고, 가족들의 사랑과 협조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가족을 떠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또 가족들이 내가 없는 삶을 살도록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앞으로 훨씬 더 오랫동안 그들의 삶의 한 부분이 되 고 싶었다. 가족이 나를 지켜주고 응원해 준다는 사실이 어려운 치료를 견뎌내고, 포기하고 싶었 던 순간들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가족들은 나를 도와 주었고 나에게 힘을 주었으며 내가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도록 해주었다. 만약 내 가족 중 한 사람이 어느날 나와 같은 진단을 받게 된다면 나도 그에게 똑같이 해줄 것 이다. 내가 그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으면 좋겠고, 살고 싶다는 용기를 북돋워줄 수 있었으면 좋 겠다. 또한 내가 겪은 경험으로부터 그들이 힘과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 요즘 나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암에 걸린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유방암에 걸린 여자들에 게 정보를 제공해 주고 치료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내가 겪은 경험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얻는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고 엄마가 항상 말씀하셨다. 지금은 그것이 나의 임무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암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이렇게 생각하 도록 이끌어 준다. `이 사람이 유방암에 걸렸다 살아났다면 나도 할 수 있어.` 암이라는 끔직한 질병은 우리에게서 귀중한 사람들을 수도 없이 앗아갔다. 나는 할아버지와 두 분의 이모와 사촌 언니 한 명을 암으로 잃었다. 그분들을 잃는 것은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분들이 암에 걸려 고생하는 것을 보며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그분들처럼 고생하다 죽지는 않 을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강한 화학요법과 골수 이식 수술을 받으러 대나 화버 연구소에 입원하기 하루 전, 사촌언니를 뵈러 공동묘지에 갔다. 나보다 네 살 위인 언니는 바로 몇 주일 전에 암으로 목숨을 잃었다. 무릎 을 꿇고 앉아서 나는 언니에게 맹세했다. 언니를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 대나 화버에 입원할 것 이며 골수 이식 수술을 받을 것이라고. 사촌 언니도 내가 받을 치료를 받아서 살아남을 수만 있 었다면 기쁜 마음으로 받았을 것이다. 언니가 죽자 모두들 나를 걱정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언니의 죽음으로부터 힘을 얻을 것이라고. 내가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언니가 어떻게 나를 격려해 주었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다신 암 진단 같은 것은 받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렇게 끔찍했던 것 같지는 않다. 암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으니까. 암은 무서운 것이지만 또한 나에겐 축복이었다. 암을 겪은 후 더 강하고 튼튼한 사람이 되었으 니까. 나는 이제 자신감에 충만하고 나 자신을 굳건히 믿는다. 이제는 나에게 던져진 일은 무엇이 든 해낼 수 있다. 문제를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서 한번에 하나씩만 해결해 나가면 된다. 마지막 방사선 치료를 받은 것이 벌써 18 개월 전이다. 지금 내 기분은 최고이다. 너무 행복해서 흡사 무엇에 도취된 기분이다.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다시 건강을 찾았다는 사실이 너무도 즐 겁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암은 죽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유방암은 극복할 수 있다. 킴벌리 A. 스톨리커 암과 직업 선택 인생의 목적은 우리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길과, 우리가 가도록 운명지워진 길을 찾 는 것이다. 병에 시달리고 있을 때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에는 그 만큼 더 빨리 길을 찾으면 된다. 버니 S. 시겔 박사


스물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나는 벌써 6 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했고, 음식 사업에서 크게 성공했으며,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하려는 참이었고, 아름답고 훌륭한 남매의 아빠였다. 마흔세 살이 되었을 때는 이혼한 지 2 년이 되었고, 한참 번창하는 사업체를 가졌으며, 더 큰 집 을 장만하려던 참이었고, 다시 한번 사랑에 빠져서 재혼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두 명의 사랑스런 아이들을 더 가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로부터 15 년이 지났을 때 아이들은 다 자랐고 여전히 훌륭했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은 모두 사라졌다. 결혼 생활도, 집도, 사업체도. 지금은 나는 잘 나가는 부동산 판매업자고 앞으로 시간만 있다면 재기할 확신을 갖고 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은 이렇다. 계속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나에게 어울리는 여성을 찾고, 새 집을 사서 다시 한번 가정을 꾸민다. 그러면 완벽할 것이다. 그럴까? 아니다! 그 동안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셨다. `충분하지 않아? 도대체 내가 뭘 더 해야 하지? 내 자식을 번개로 쳐야 하나? 아니야. 좋은 수가 있다. 생명이 위 독한 병을 주는 거야. 그럼 올바른 길을 찾지 않을까? 그렇거나 아니면 죽어 버리겠지. 어떻게 할 까! 어떻게 할까! 암. 그렇다! 암이야! 어떤 암? 그냥 생명만 위독해서만은 안되지. 남성의 능력을 빼앗아 버리는 거야. 그러면 정신을 차리겠지. 그래. 전립선 암을 주는 거야. 난 전지전능하거든.` 내가 그때 왜 갑자기 종합 검진을 받으려고 마음 먹었는지를 이렇게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 이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다 꾸미신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남성으로서의 능력이 건전하다 는 것을 확인하려고 특히 신경을 썼었다. 검사 결과는 내 성기관에 병이 있다는 것이었다. 좀 더 검사를 받은 후, 아직은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단계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당장 치료를 시작 하지 않으면 암세포가 번질 것이고, 그러면 남은 수명이 수개월로 단축될 것이며, 그 수개월이나 마 병원에서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으며 보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의사들은 의학적으로 가능한 여러 가지 치료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암세포가 생긴 기관을 완전히 제거해 내는 것 같았다. 전립선에서 정액을 만들고 정액이 정자를 운반하는 것이니 이제 나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건 그런 대로 참을 만하다. 의사가 나열한 어느 치료 방법을 택하더라도 결국 나는 소변을 가릴 수 없게 될 것이고 심지어는 발기 불능이 될 각오를 해야 한 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그것도 그런 대로 참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사람들은 모두 몇가지씩의 특별한 재능을 타고 태어나 는데, 특히 그 중 한 가지에는 남들보다 특별히 뛰어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사 업면에서 또 사교적인 면과 가정을 꾸미는 데에 특별한 재주가 있다. 하지만 나는 여지껏 나의 가장 뛰어난 재능을 무시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글쓰기와 영상을 통해서 나의 풍부한 상상력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참을성을 잃으신 것이다. 그래서 바퀴가 달린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밀려 들어가며 나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다. 이번만 살려주시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재능을 완전히 활용하겠다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자꾸만 다시 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 을 것이며, 내 예술적 재능을 더 이상 무시하지 않겠다고. 결국 나는 그 일을 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암세포는 더 이상 퍼지지 않고 수술로 완전히 제거가 되었다. 가장 최근에 받은 검사에서도 내가 더 이상 암 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치명적인 병에 걸림으로써, 그렇지 않았다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일을 나는 하게 되었다. 내 능력을 다해 창조하는 일. 첫번째 소설을 끝내고, 그 소설을 영화화하는 일이 바로 그 것이다. 물론 나는 돈 버는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을 `낮 직업`이라고 부른다. 그 돈으로 상 위에 음식을 올려놓을 수 있고, 아늑한 지붕 밑에서 잘 수 있다. 또한 몇 가지 사치스런 일도 할 수 있다. 즉, 창작에 도움이 될 가장 좋은 장비를 구입했고, 창작을 위한 시간을 마련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최 고로 행복하다. 나의 재능을 존중하고 있으며, 내 운명을 충족시킬 수 있는 두번째 기회를 얻었다 는 데서 스릴과 환희를 느끼고 있다. 거침없는 열정을 종이 위에 성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 실, 지금 이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일도 바로 그것이다. 로버트 H. 도스


용기와 결심에 대하여 만약 인류에게 가장 유용한 충고를 하나만 해주도록 부탁을 받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삶을 살다가 문젯거리와 부딪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문젯거리가 생겼을 때는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면 된다. “난 너보다 더 커. 네가 나를 이길 순 없어.” - 앤 랜더스 내리막 길을 올라가며 벼랑 끝으로 오세요. 싫어요. 떨어질 거예요. 벼랑 끝으로 오세요. 싫어요. 떨어질 거예요. 그들은 벼랑 끝까지 갔다. 그가 밀었고, 그들은 날았다. 길람 아폴리네어 나는 볼더 시에 위치한 콜로라도 주립 대학을 아무 문제 없이 다니고 있는 자신만만한 열여덟 살짜리 소녀다. 하지만 5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무척 수줍어하는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때만 해도 십대 소녀로서 그 이상 부끄러워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핑핑 도는 안 경을 쓴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부모님이 얼마 전에 이혼을 했기 때문이었을 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육상부에 가입하려고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가 내 차례가 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내 꼴을 보고 누가 웃기라도 하 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학교가 끝나면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텔레비 젼 앞에 앉았다. 그래서 <길리건의 섬> 시리즈 재방송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외우고 있었다. 중학교 2 학년 봄이 되었을 때 왼쪽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엔 좀 삐었나보다고 생각하고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통증은 점점 심해갔다. 친구네 집에 자러갔을 땐 다리가 하도 아파 서 뒤로 젖혀지는 의자에 밤새 앉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아빠는 나를 소아과로 데려갔고 거기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그리고 의사가 아빠를 상담실로 불렀다. 나는 옆방에 있었지만 벽을 통해서 의사의 말이 들려왔다. “아직 확실히는 모르지만...” 의사가 말했다. “운동을 하다 다쳤을 수도 있고... 아니면 종양일 수도 있습니다.” 로젤 이모가 종양에 걸렸었다. 하지만 수술을 받고 나았다. 그래서 나도 간단한 수술을 받으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엑스레이를 더 찍으러 엄마와 함께 종합 병원에 갔을 때 엄마친구인 페기 핸슨 아줌마가 따라 왔다. 나는 페기 아줌마를 어린아기였을 때부터 알았기 때문에 나에겐 이모나 다름없었다. 간호사 가 엑스레이 사진을 가져왔다. “여기 보여요?” 사진 속에 하얀 부분을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이것 때문에 다리가 아픈 거예요.” 얼마 후 남자 의사가 들어와서 챙 박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의사는 내 다리를 꾹꾹 눌러보고 챠트를 잠시 들여다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아드리엔” 그가 말했다. “종양에 걸렸기 때문에 다리가 아팠던 거란다. 종양이 네 몸으로 퍼지면 상당히 위험할 수가 있어. 죽을 수도 있지. 다행히 조기 발견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퍼지지 않게 할 수가 있단다. 하 지만 화학요법을 받아야 할거고, 아마 다리를 절단해야 할지도 몰라. 좀 더 검사를 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야.” 엄마가 숨을 들이마시더니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페기 아줌마는 침착한 자세로 평온을 유지한 채 앉아 있었고, 나도 그렇게 했다. `아마`라는 단어가 내 귓가를 맴돌았다. 따라서 아닐 수도 있 다는 말로 내겐 들렸다. 그 때는 절단이라는 말이 실제로 무얼 의미하는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 다. 잠시 후 챙 박사가 방을 나갔다. 페기 아줌마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는 아직 울고 있었다. “아드리엔, 절단을 해도 괜찮겠어?” 아줌마가 물었다. “그럴 것 같아요.” 내가 대답했다. “안될 게 뭐 있어요?” “가족뿐만 아니라 많은 친구들이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아줌마가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에겐 하나님이 계셔. 네가 잘 이겨내도록 우리 모두가 도와 주겠다.” 페기 아줌마는 강했다. 나는 아줌마를 존경했고 아줌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다음 날 뼈사진을 찍으러 갔다. 그 다음 날은 아티리오그램(동맥에 물감을 넣어서 종양의 위치를 확인하는 검사)이었다. 24 시간 동안 똑바로 누워 있어야 했고, 일어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 은 다음엔 바로 수술실로 가서 조직 검사를 받았다. 결코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절단하는 수밖에 없다고 의사들이 말했다. 그 전에 우선 한 달동안 화학요법을 받아야 했다. 병 원에 다니며 조금씩 종양에 대해서 배웠다. 내가 걸린 종양은 화학요법과 절단으로 치료가 가능 하기 때문에 죽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회복한 후 5 년이 지나도 재발하지 않으면 암세포가 완전 히 없어졌다고 생각해도 괜찮았다. 그리고 내가 걸린 종양에 걸릴 확률은 백만 명 중 세 명이었 다. 치료를 받는 동안은 결석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저녁 친구 제니스가 전화를 했다. “모두들 네 얘기만 하고 있어.” 그녀가 말했다. “어떤 애는 네가 대머리가 됐고 두 다리를 모두 잘랐다고 하는거야. 어떤 애는 이제 네가 몇 주일밖에 살지 못할 거라고 했어.” 전화를 받고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제니스는 몰랐다. 그때만 해도 난 수줍음을 잘 타는 성 격이어서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거나 내 얘기를 하는 게 싫었다. 페기 아줌마는 친구들과 하나님 이 나를 도와 주실 거이니 운이 좋은 아이라고 했다. 글쎄, 뒤에서 내 뒷공론이나 하는 것이 나를 도와 주는 것일까. 하나님에 대해서도 나는 완전히 혼동에 빠졌다. 화학요법을 시작하고 나서는 항상 피곤하고 아팠고 이제 한달 안에 다리를 절단 해야 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벌을 주시는 것일까? 그런데 어느날 저녁 나는 완전히 생각을 바꾸게 되었고 결국은 삶에 대한 견해마저 달리하게 되었다. 새벽 2 시였고, 나는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소파에 누워 있으면 자리가 좁아서 잘 움 직일 수 없었으므로 다리가 덜 아팠다. 방안은 어두웠고 조용했으며 나는 혼자였다. 나는 또 다시 백만 명 중 단 세명이 이런 종양에 걸린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백만 명 중 세 명이다. 그 말은 덴버 시에 살고 있는 사람 중 단지 다섯 명만이 이런 병에 걸린다는


뜻이다. 그 생각을 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그 다섯 명 중 한 명이라는 사실에 갑자기 기 분이 좋아졌다. 뭐랄까, 좀 특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혹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시는 게 아닐지도 몰라.` 혼자 중얼거렸다. `나를 특별히 선택하신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뛰었다. 왜 나를 선택하셨는지 그래서 그게 좋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내 다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종양을 다른 각도로 보게 되었다. 이젠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일 어났을 때 난 용기에 가득 차 있었다. 이젠 무슨 일이든 똑바로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난 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게 되었다. 육상부 테스트가 겁나서 도망나 왔던 나였다. 그런데 수술이 있기 며칠 전 난 학교의 카운셀러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랄슨 선생님,” 내가 말했다. “내일 제 육교시 수업 때 친구들과 얘기를 할 수 있을까요?” 그 다음날 난 교실에 앉아서 40 명도 넘는 학생들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오늘 너희들과 만나고 싶어한 이유는 내 병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고 싶어서야.” 내가 말했다. “이제 이틀 후에 난 왼쪽 무릎 위 십이센티미터 정도에서 다리를 잘라내야 해. 그런 다음엔 화학요법을 받아야 할거야. 머리가 빠질거고 한동안은 꽤 아플거야. 하지만 가을엔 학교로 돌아올 수 있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 난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까.” 처음엔 조용했다. 내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마침내 한 여자 아이가 손을 들었다. “인조 다리를 사용할거니?” “그래.” 내가 대답했다. “자른 다리는 네가 갖게 돼?” 다른 아이가 물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씩 둘씩 나중엔 우리 모두가 다 웃었다. 정말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글쎄,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대답했다. “내 인조 다리는 그냥 막대기같이 생겼을 것 같애. 아마 너희들은 보고 싶어하지도 않을 거야. ” “그런 소리 하지도 마, 아드리엔.” 다른 여자애가 말했다. “우린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상관하지 안하. 다만 네가 빨리 학교로


돌아오기를 바 랄 뿐이야.” 그 소리를 듣고 난 무척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도 이제는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나도 아이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그 다음엔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새 목요일이 되었다. 수술은 아침 7 시였다. 내 침대 옆에 사람들이 잔뜩 모였다. 리틀톤 연학 감리교에서 중등반을 맡고 계신 쥰 목 사님, T 라는 별명을 가진 병원 사회 사업가, 그리고 물론 엄마와 페기 아줌마, 복잡할 때를 피해 서 아빠는 나중에 오셨다. T 아줌마가 조그만 꾸러미를 꺼내서 내게 주셨다. “쟤넬 엄마가 주시는 선물이야.” 쟤넬은 내 친구인데 역시 뼈암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포장지를 풀자 조그만 갈색 곰이 나왔고 곰의 가슴에 이런 글이 붙어 있었다. `곰 인형은 사랑과 우정의 상징이야. 이 곰을 볼 때마다 많 은 사람들이 너를 걱정하고 있고 모든 일이 잘 되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줘.` 처음에 페 기 아줌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친구들이 나를 도와 줄 것이라고 . 페기 아줌마 말이 맞았다. 하나님과 내 가족에 대한 말도 맞았다. 수술실로 들어갈 때는 너무 긴장해서 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에서 깨 어났을 때는 신기하게도 마음이 평온했다. 솔직히 안심이 되었다. 이제 제일 힘든 부분을 치러냈 으므로 일상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 만큼 기운을 되찾은 후 나는 병원에 있는 다른 아이들과 사귀기 시작 했다. 옛날에는 재미있던 텔레비전이 그렇게 재미 없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는데 신기하게도 그런 일이 무척 쉬웠다. 사람들은 모두 내 상태가 어떤지 알고 싶어 했으므로 그들이 하는 질문에 대답만 하고 있으면 되었다. 작아져서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된 헌 옷처럼 부끄러움이 내 마음 안에서 사라졌다. 어린이 병원에서 전화로 상담받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도 난 기꺼이 승낙했다. 건강이 웬만큼 회복되자 교회의 중등부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요일 저녁마다 모여 서 배구도 하고 게임도 하며 놀았다. 첫날엔 아이들이 좀 어색해 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내가


따돌림을 받는 것같이 느낄까봐 걱정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고 한 구석에 서서 열심 히 응원을 하였다.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다음엔 나도 운동에 참여했다. 인조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기 때문에 한 다리로 균형잡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어느날 저녁 나는 다시 생각할 틈도 없이 인조 다리를 벗어버리고 소리쳤다. “나도 할거야!” 아이들은 배구를 멈추고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인조 다리를 벗어 던지고 한 다리로 뛰어 들어 오자 모두들 웃으며 응원해 주었다. 그 해 늦여름 난 <스카이 하이 호프>라는 암 환자를 위한 캠프에 참여해서 암벽 타기부터 말 타기까지 모든 스포츠를 다 해보았다. 나에게 스포츠는 이제 새로운 도전이었으며 특히 스키가 그랬다. 어린이 병원에서 일하는 릭 레이크스트러 씨가 스키 한짝과 아우트리거(끝에 조그만 스키가 달 린 스키 스톡)를 가지고 스키 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연습 코스를 처음으로 내려가며 나는 이 거야말로 나를 위한 스포츠라고 생각했다.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난 학교 플랙스쿼드팀에 참가했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고, 수영부에도 가입했다. 중학교 이학년 때 육상부 테스트에 갔다가 그냥 돌아온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공평하게 테스트도 받아보지 않고 포기해 버리다니, 그래서 이번에는 너무 느리고 달리기가 힘들 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덕분에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엔 우승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는 역시 스키다. 어느날 나는 재수 좋게 미국 대표 장애인 스키팀 선수인 폴 드빌로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장애인 선수들을 위한 윈터파크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트레이닝을 받게 되었다. 폴이 나의 코치가 되겠다고 자청했다. 나로선 최대의 도전이었 다. 매 순간이 스릴 만점이었다. 내년엔 국가 대표 선수가 될 것이다. 이제 보십시오! 내가 나갑니다! 스티 리프트를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눈 덮인 산을 올라갈 때면 생각해 본다. 내가 암에 걸 리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스키는 타지 않았을 것이다. 수영도, 자전거 타기도, 아 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병에 걸린 것이 즐겁지는 않았다. 지금 다시 해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무엇이든 이겨내고 가장 좋은 결과를 얻도록 가족과 친구들과 하나님이 도와 주셨다. 나에겐 눈곱만큼도 없던 용기를 암 때문에 갖게 되었다. 두 다리를 가지고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한 다리로 해낼 수 있는 용기를. 아드리엔 리베라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윈스턴 처칠 경은 영어 과목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어서 중학교 2 학년을 마치는데 3 년이 걸렸 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옥스퍼드 대학이 처칠 경에게 졸업 연설을 부탁한 것을 생각해 보면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처칠 경은 평소에 아끼는 소품들을 가지고 도착했다. 그는 어디를 가든 시가와 지팡이와 실크 모자를 가지고 다녔다. 처칠 경이 연설대에 올라서자 관중들은 일어서서 감사의 박수를 보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위엄을 갖고 처칠 경은 그를 선망하는 관중들에게 조용히 하도록 신호를 보낸 후 자신만만하게 섰다. 시가를 입에서 빼어 실크 모자와 함께 연설대 위에 놓고, 처칠은 기 다리는 관중들을 둘러보았다.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가 소리쳤다. 목소리에 권위가 넘쳤다. 몇초가 지났다. 그는 뒤꿈치를 들며 앞으로 몸을 숙였 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의 말은 천둥이 되어 관중들의 귀를 쳤다. 처칠이 손을 뻗어 실크 모자와 시가를 집는 동안 관중 석은 귀가 멍멍할 정도로 조용했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며 처칠은 연설대를 떠났다. 졸업 연설이 끝났던 것이다. <연설가의 원전 2> 싸움도 해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삶이란 다른 일들을 하느라 분주히 계획을 세울 때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존 레논 1992 년 7 월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일곱 아이들의 엄마이고, 학교 선생님이며, 또 노인 전용 시설 에서 재활 프로그램을 돕는 자원 봉사자로 일하며 꽉찬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항상 아일랜드 사람 특유의 행운이 나를 따라 다닌다고 믿었다. 그래서 모든면에서 긍정적이었으며 쉽사리 포기 하지 않았다. 어느 이른 봄날, 몇년 동안 유방암 검사를 받아 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 서 병원에 전화로 예약을 했다. 몇주 후엔, 큰딸이 시카고 로욜라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석사 과정을 밟기 위해 떠나게 되어 있었다. 아파트를 구하러 시카고로 가는데 같이 가자고 딸이 부탁 을 했다. 워낙 대가족이라서 둘이 오붓이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승낙했다. 그런데 달력을 보니까 시카고로 떠나기로 한 날이 유방암 검사를 받는 날이었다. 검사 날짜를 다시 잡을까 하다가, 잠깐 가서 검사받고 시카고로 바로 가면 되지 뭐 하 고 생각을 바꿨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검사원이 내가 기다리고 있는 방에 들어와서 “미안하지만 왼쪽을 다시 찍어 보아야겠습니다.” 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힘든 검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났지만 할 수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계속 바라보았다. 딸이랑 중요한 약속을 해놨는데 어쩌라는 말이지? 딸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옷을 입고 그냥 나가버릴까 생각해 보 았다. 검사원이 사진을 잘못 찍었다면 내 잘못도 아니니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생각은 나지 않았 지만 난 계속 기다리기로 했고, 검사원이 다시 들어와서 말했다. “의사가 사진을 다시 찍으랍니다.” 이번엔 더 깊숙이 찍는다고 했다. “세상에 맙소사!” 내가 소리쳤다. “이게 스웨덴에서 최근에 도입된 최신식 기계라구요? 거기 여자들은 다 가슴이 작은가 보죠? 너무 아프단 말예요!” 그런데 검사원은 그 과정을 다섯 번이나 되풀이했다. 너무 아파서 내가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한시까지는 꼭 가야 할 곳이 있어요!” 그 때까지는 매우 상냥하던 검사원이 갑자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방사선과 의사를 불러오겠어요.” 방 안이 말할 수 없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순간 시간이 멈춘것 같았다. 방사선과 의사가 문을 조금 열고 말했다. “왼쪽 가슴에 조그만 혹 같은 게 만져진다고 했던 것 생각나세요? 그런데 그 크기와 밀도가 달라졌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의사 선생님?”


“암일 수도 있다는 말이죠. 조직 검사를 해야겠어요. 월요일에 전화를 드려서 날짜를 잡겠습니 다.” 정신이 멍해서 나는 천천히 옷을 입었다. 내가? 그럴 리 없어! 겨우 마흔여덟인데. 이제 겨우 인생을 시작하려는 참인데. 정말 재미있고 좋은 일들이 이제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집으로 돌 아가며 나는 이 일 때문에 딸과 시카고로 함께 하는 여행을 망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아 무리 잊으려고 노력을 해도, 이제 새로운 손님이 나를 찾아왔으며 결코 달가운 손님은 아니라는 기분이 없어지지를 않았다. 세인트 루이스로 돌아온 후 일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조직 검사 결과는 암이었다. 남편과 나는 24 년 간이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가정에 매우 충실했지만 스트레스가 쌓이는 시기에는 감정적인 도움을 바랄 수는 없는 남자였다. 아이들도 자기 일들을 계속해 나갔 다. 결국 이 곤경을 잘 헤쳐나가려면 내 안에 존재하는 아일랜드 여자 특유의 힘에 의존해야 한 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1992 년 7 월 8 일, 나는 수술실로 밀려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우리의 25 주년 결혼 기념일 이었다. 그날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던 생각이 난다. “어떤 사람들은 25 주년 결혼 기념으로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데 나는 수술 여행을 떠나네 요.” 수술이 끝난 다음 날 의사는 유방 안에서 두 가지 종류의 암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에 스트로겐 세포로 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특히 파괴력이 강한 세포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난 드 디어 적수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싸움 한번 해보지 않고서는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 짐했다. 회복기는 매우 고통스러웠다. 통증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팔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그러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는 주도권을 되찾았다. 물리 치료사를 고용해서 팔의 근육을 움직일 수 있도록 치료를 받았고, 더 나은 식이요법을 위해서 영양학자와 상담을 했 다. 그리고 금방 다가올 방사선 치료를 받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미친 사람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부터 나는 뒷 정원에서 정 원 가장자리에 새로운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매일 한 손으로 물통에 콘크리트를 잔뜩 담아 나르


며 나를 시험해 보았다. 나 자신을 위해서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성취하려 노력했다. 몇 주일 후 면 학교에 돌아가 가르치기 시작해야 하는데 암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가르치고 오후엔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갔다. 치료를 받는 동안 결석을 하 지 않으려고 무단한 노력을 했다. 암에 결렸으니 더 이상 충분한 자격을 갖춘 교사가 아니라는 말을 듣기는 싫었다. 그리고 1992 년 10 월에 나는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12 월 초, 정기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갔다가 의사와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의사가 손을 뻗어 내 목을 만졌다. “언제 여기 혹이 생겼죠?” 그가 물었다. “한 일년 되었는데요. 주치의가 관절염 때문에 생긴 마디라고 했어요.” 그걸 떼어 버려야겠다고 하며 의사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가족들은 학 교를 쉬고 의사의 지시를 따르라고 했다. 또 조직 검사를 해야 하다니! 시간을 그렇게 낭비할 수 가 있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그 준비를 하느라 무척 바빴다. 다시 한번 수술실로 밀려 들어갔다. 이번엔 갑상선 암이었다. 또 꿰매고, 또 물리 치료를 받고, 또 통증으로 고생했다. 기운이 다 빠졌다.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거실에 혼자 앉아서 생각했다. 첫번째 수술을 하고는 겉치레만 했지. 이번엔 집을 다 다시 정리 해야지. 그러다 마음을 바꿨다. 고통을 호소하고 슬퍼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자기 연민에 푹 빠져 버리면 남은 삶이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목표를 정했다. 남은 인생 동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항상 대학교에 서 가르치면 멋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일 저녁 나는 처음으로 대학에서 가르치게 된다. 그것 을 해낸 내가 무척 대견스럽다. 작은 일들을 즐기는 긍정적 사고 방식을 길렀다. 이젠 집안일을 하다가 잠시 쉬며 꼬마들 축구 시합 구경을 간다. 아들이 공차는 것을 바라보며 가을 바람을 느낀다. 봄이 되어 나무가 초록색으 로 변하는 것을 바라볼 때도 즐겁다. 단순한 즐거움이 커다란 행복을 가져온다. 이번 여름, 야구 경기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다가 시냇가로 갔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물 속을 걸어다녔다.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살갗에 느끼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정말 간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한없이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동정심도 배웠다.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인간들은 결국 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평화가 내 안에 존재한다. 가슴속에서 물결치는 작은 진실들 외엔 아무것도 문제삼을 것이 없다. 그 진실들을 찾기 위해선 가슴속을 깊 숙이 들여다 보아야 한다. 슬퍼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려운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오래 가지는 않는다. 곧 사라지고 다시 좋은 일이 생긴다.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런 교훈들을 배울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이제 죽지 않고 살아남은 내 앞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사는 것, 배우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 메리 헬렌 브린들 닌텐도 도사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생각했어. 닌텐도 도사라고. 너에겐 그런 집요함이 있었어. 찌를 듯 이 쏘아보는 파란 눈과 조종판 위를 재빠르게 날아다니는 손을 보고 네가 이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았지. 겉으로 보기에 너는 비디오 게임에 미쳐 버린 다른 열살박이 아이들과 달라 보이지 않았어. 하 지만 단연코 달랐지. 여름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둘 모두 종양과 병동에 처박혀 있다는 사실 때문일까? 네 노력에도 불구하고 너는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어. 잔인한 일이야. 우리 둘 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너무 일찍 빼앗겨 버렸기 때문일까? 나랑 비슷한 아이가 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 기분이 편안해진 것일까? 추측을 해보는 수밖에. 정확히 알 수는 없을 테니까. 아무튼, 삶을 향해 솟아나는 너의 에너지와 열정에 나는 푹 빨려들고 말았어. 암 치료가 끝나고 첫번째 수술을 한 여름이었어. 의사들은 내 엉덩이뼈를 도로 맞추느라 낑낑 댔지. 강한 도수의 화학요법을 받는 동안 부서져 버리고 말았거든. 그리고 부서진 것은 엉덩이뼈 뿐만이 아니야. 삶에 대한 낙관적 태도도 어디에선가 잃어버렸어. 그리고 내가 그렇게 못된 아이 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지. 그래선 친구를 사귈 수가 없거든. 의사들은 수술 경과가 `좋다`고 말했어. 내 온 몸은 고통으로 찢기고 있는데 말이야(의사와 환 자가 한 가지 일을 얼마나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지 신기하지 않아?). 물리 치료실에서 너를 다시 보았어. 암이란 게 너를 얼마나 깊이 파먹고 있는지 거기서 깨달았


지. 나는 소리치고 싶었어. `이 바보 멍청이들아, 그 아이를 놔둬! 자기 침실로 돌아가서 비디오 게임을 하도록 놔두란 말이야!` 대신에 난 얼어붙은 듯 앉아 있었지. 네가 평행봉을 붙들고 걷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말이야. 네가 이 방에 들어오기 전 난 내 자신이 너무도 불쌍해서 꼼 짝할 수가 없었어. `암으론 부족했어? 이젠 엉덩이뼈야? 나더러 일어서란 말야? 할 수 없어. 일어 서기만 하면 난 죽고 말거야.` 넌 절대 나를 알지 못할거야. 하지만 넌 내 영웅이야, 닌텐도 도사. 용기 있게, 침착하게, 넌 하 나 남은 다리로 일어섰지. 어떤 사람들은 너를 불구니 장애인이니 하고 부를지도 몰라. 하지만 너 는 누구보다도 완벽해. 지정된 시간만큼 있는 힘을 다해 걷고 너는 다시 침대에 누웠지.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비디오 게임을 시작했어. 이제는 내 차례라고 나는 생각했어. 알겠어, 닌텐도 도 사? 보통 사람들이 평생 걸려서 겨우 알아내는 진실을 너는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삶 은 게임이라는 진실 말이야. 다 이길 수는 없어. 하지만 게임은 계속 된다.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게임을 하도록 강요받고 있어. 닌텐도 도사, 너는 누구보다도 게임을 잘하고 있어! 케이티 길 뇌종양과 벌린 한판 승부 로프의 끝까지 갔으면(서양 격언으로 갈 때까지 갔다는 뜻) 매듭을 지어서 걸어. 그리고 그네를 타는 거야! 리오 버스카글리아 그는 왼손에 드릴을 들고, 다리를 조금 움직여서 자리를 잡은 다음, 스위치를 켜고, 일을 시작 했다. 첫번째 구멍. 두번째 구멍. 그리고 세번째... 선반을 달거나 지하실을 뜯어고치는 게 아니다. 평범한 막일꾼이 아니니까. 뇌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외과의사이고 지금 내 머리에다 구멍을 뚫는 중이다. 나는 정신이 말똥말똥한 채 수술대 위에 누워 있다. 수술을 위한 장비가 완전히 갖추어졌고 내 앞에는 천이 드리워져 있다. 나는 드릴이 두개골을 뚫고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기다리는 중이 다. 고통은 전혀 없고 약간 불편할 뿐이다. 드릴이 듀라(뇌를 싸고 있는 두꺼운


막)를 뚫을 때마 다 `팍` 소리가 들린다. 의사가 드릴을 끝냈다. 그리고 각 구멍마다 다섯 개의 방사선 씨앗이 들은 카테타를 넣었다. 강 력한 씨앗을 심은 다음엔 엑스레이를 찍어서 씨앗의 위치가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의사는 머리의 상처를 꿰맨다. 이제 `프로젝트`가 끝났다. 악성의 뇌종양이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악몽은 내가 막 마흔이 되기 사개월 전에 시작되었다. 나는 일리노이 주 페오리아 시에 있 는 감리교 의료 센터에서 수술 담당 목사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수술이 시작 되기 전과 수술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또 수술이 끝나고 난 후 환자 및 환자의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수술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는 수술실과 대기실을 오가며 환자의 상태 를 가족들에게 알리는 일도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밖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의 긴장과 고통을 훨 씬 덜어 줄 수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매우 보람은 있었지만 무척 힘들었다. 나와 내 동료들은 일주일 내내 하루 24 시간 대기 상태였고, 심장 수술과 같은 대수술이 있는 날엔 20 시간이나 어떤 땐 그보다 더 긴 시 간동안 수술실과 대기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두통이 좀 지나치게 심하다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대부분 아스피린 두 알을 삼키는 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1987 년 봄부터는 아스피린도 듣지 않았다. 앞이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고 가끔 철자법도 틀렸고 여기저기 쾅쾅 부딪치기도 했다. 그래서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너무 쌓여서 그렇다고 생 각하고 주치의를 만나 정기 검진을 받아 보기로 했다. 4 월 21 일, 정기 검진과 함께 몇 차례의 피검사를 받았지만 별 다른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5 월 7 일엔 자기공명 영상촬영 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두통과 다른 증상들의 원인이 드러났다. 골 프공 크기만한 검은 반점이 뇌의 왼쪽에 있었다. 주치의는 이 소식을 최대한 직접적으로 그리고 자상하게 전했다. 그는 뇌의 그림을 재빨리 그 린 후 종양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었다. “다음 주엔 조직 검사를 해야겠어요.” 의사가 설명했다.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겠으니까요. 우선은 경련을 방지하기 위한 처방을 써 드릴 테니


까 당장 약을 드시기 시작하세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아무 질문도 못하고 병원을 나와 사무실로 돌아갔다. 비서에게 대강 얘기 를 해주고 차를 몰아 집으로 갔다. 쇼크 때문에 온 몸이 마비된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 다. 아니 팻트는 그날 아침 아이들과 함께 친정을 방문하러 가고 없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있고 싶었지만 소용돌이치는 감정 때문에 운전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구를 담당하는 목사회의 회장과 그의 아내가 나를 데려다 주겠다고 자청해서 그날 밤 늦게 우리는 아내의 친정집에 도착 했다. 아내는 현관문 앞에서 내 얼굴을 보고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다음부터는 일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거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월요일이 되었다. 외과 의 사와 상담이 있는 날이었다. 의사는 매우 솔직한 사람이었다. “종양은 이미 악성의 암으로 발전한 것 같습니다.” 의사가 질문을 하라고 했지만 그 순간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당황해서 아무 생각 도 나지 않았다. 다음 날 조직 검사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 날 오후에 입원을 했다. 내가 그 병원에서 일한지 벌써 칠년이 되었고, 따라서 이제는 친구가 된 대부분의 직원들이 더욱 친절하고 자상하게 돌봐 주었다. 조직 검사가 있기 전날, 한 병원 직원이 가슴 엑스레이를 찍어야 한다며 나를 데리러 왔다. 엑 스레이실까지 함께 걸으며 우리는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병실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직원 은 나와 함께 기도를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작은 사랑의 행동에 감동되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밤새 뒤척이다 일찍 일어나서 기도를 드렸다. `사랑하는 하나님이시여,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겨낼 수 있도록 제게 용기와 힘을 주시옵 소서.` 정말 힘든 날이었다. 의사는 뇌에 있는 종양이 추측했던 대로 애스트로시토마 삼단계라고 설명 했다. 즉, 암은 이미 커질 대로 커졌고 따라서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내 마음속의 고 통이 더욱 심해졌다. 의사는 가만히 앉아서 나의 반응을 기다렸다. 어디선가, 알지 못할 곳에서 목소리가 나와 침묵을 깼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얼마나 남았죠?”


“육개월에서 구개월입니다.” 의사가 대답했다. “잘하면 일년이죠.”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어떻게? “어느날 그냥 잠이 들 거예요.” 의사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의사의 말이 가슴속에 가라앉을 때까지 눈을 감고 기다렸다. 죽음이 어느새 수평선 이쪽으로 다가왔고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의사가 나갔다. 아내와 부모님과 여자 동생과 매제가 나와 함께 있었다. 모두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해하려 애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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