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ION WEEKLY V761

Page 48

WORLD NEWS

광고 문의 | 0422 258 092, 0432 008 985 | visionweekly01@gmail.com

도주해서 잡히면 고무 튜브로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맞고 고문을 당했다.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1945년) 원폭 투하 후 8월 18일쯤에 청소를 하러 나가사키 시내에 갔을 때 ‘인간 지옥이 여기구나’라고 생각했다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한국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출간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 책자. 양측은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으로서 이 책자를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로 각각 만들었다.

44 면에서 이어집니다.

드북은 “군함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함도로 불린다”며 “하시마 전체가 탄광으로, 바다 곳곳으로 갱도가 펼쳐져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1939년부터 하시마와 바로 옆 섬에 있는 다카시마탄광에는 4천명 정도의 조선 인이 강제동원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에게 하시마는 쇠창살 없는 감옥이자 공포의 노동 현장이 었다”며 “탈출은 어려웠고 끌려간 이들에 게 그곳은 지옥섬이었다”고 가혹했던 실태 를 전했다. 네트워크의 조사에 따르면 군함 도에는 1939년부터 1945년에 걸쳐 1천명 이 넘는 조선인들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 고 있다. 화장(火葬) 관련 문서로 확인된 사망자는 50명 가량이다. 사망자 가운데 절반 이상은 사고로 변을 당했다. 탄광 매몰에 의한 질식 사, 압사, 외상에 따른 사망, 여기에 탈출 과 정에서 숨진 것으로 보이는 익사도 있었다. 책자에는 “너무 힘들어 섬을 나가려고 신체 절단까지 생각했다”는 생존자의 증언도 수 록됐다. 실제 1943년 전북 김제군에서 군함도로 끌 려온 윤춘기 할아버지는 “임금의 3분의 1은 강제 저금되었고, 3분의 1은 고향에 송금한 다고 했지만, 귀국해 보니 송금이 전혀 안됐 다”고 일본측을 고발했다.

실제 군함도 전경 48

그는 “식사는 외국 쌀로 지은 밥과 국뿐이 었다”며 “밥에 주먹 정도 크기의 감자가 들 어있었기 때문에 밥은 겨우 세 숟가락 분량 밖에 되지 않았다”고 당시 열악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최장섭 할아버지의 경우 14세이던 1943년 전북 익산에서 군함도로 강제동원됐다. 책자에는 “도주해서 잡히면 고무 튜브로 피 부가 벗겨질 정도로 맞고 고문을 당했다. 감 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1945년) 원폭 투하 후 8월 18일쯤에 청소를 하러 나 가사키 시내에 갔을 때 ‘인간 지옥이 여기구 나’라고 생각했다”는 그의 증언도 소개됐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관계자는 12일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설명 속에, 불편하지만 외면해서는 안되는 강제노동 등 어두운 역사도 담겨야 한다”며 “이는 2차대 전이 끝난 지 70여년이 지났어도 아직 강제 동원·강제노동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