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을 연구하다보면 인간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는 여러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해지는데, 특히 두드러 지는 본성은 회복력과 임기응변 능력, 관대함, 동정심, 용기 같은 것들이다. 정신의학에서는 재난의 영향을 일관되게‘트 라우마’, 곧 정신적 외상이라고 일컫는다. 이는 참을 수 없이 연약한 인간, 행동하기보다는 행동의 영향을 받는 자아, 한 마디로 피해자가 되기 딱 좋은 인간을 암시한다. 재난 영화와 대중매체는 평범한 사람들이 재난에 직면하면 병적 흥분에 빠지고 광포해진다고 묘사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믿기보다, 우리를 가리켜 희생자나 야수라고 말하는 대중매 체를 믿는다. 공식 자료들, 주류에 속하는 자료들은 확인해주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는 다른 인간 본성이 있 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안다. 지금은 널리 이야기되고 있지 않지만, 이 주제는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가 어떤 존재 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주제다.
- 리베타 솔닛의〈이 폐허를 응시하라〉중에서 -
인연이라는 것은 예고된 것도 있지만 우연처럼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번 정뱅이마을 아카이빙북을 발간하면서, 많은 것을 새롭게 느끼게 됩
니다.‘더프라미스’는‘세상에는 고통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부
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해낼 수 있기를 바라
는 마음, 특히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에 대한 약속, 재난으 로 고통을 겪는 이들의 일상 회복에 대한 약속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
다. 더프라미스는 가까운 아시아의 지역사회 복원을 넘어 튀르키예-시
리아 지진, 모로코 지진 등 전 세계적인 지역사회의 위기의 현장에 달려 갔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지원 활동을 하면서 예정에 없던 소중 한 인연들을 만났습니다.
대전 서구 용촌동 정뱅이마을도 작년에 더프라미스가 재난 대응 교육을
진행한 인연이 있습니다. 더프라미스 책임자가 주민들이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일상의 훈련과 인식 전환의 기회라 생각해 열심히 진행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인연의 기억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을 때인 지난 여름
의 수해는 정뱅이마을에 혹독한 시련을 안겨줬습니다. 정뱅이마을에서 오랫동안 마을 활동을 하시던 권선필 교수님의 긴급한 전화가 그 사실 을 일깨워 줬습니다. 빗물은 산골짜기를 따라 강으로, 바다로 빠져나가
는 것이라는 도시민의 관념과는 다르게, 집중 호우로 제방이 무너져 온 마을이 어른 키만큼 차오른 수심에 잠겼고, 권 교수님은 취미로 갖고 계시던 카누를 띄워 주민들을 구조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더프라미스 이사장
록’이었습니다.
마을이 갖고 있는 가장 소중한 자산인 기억, 정, 사랑, 추억….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한 힘이‘기록’에는 있다는 사실을 새기며 기록 작업을 시
작했습니다. 이 아카이빙 북에 담긴 주민들의 이야기가 그런 것들일 겁
니다. 이웃들과의 사진 촬영으로 모처럼 웃음소리가 가득하던 중‘내가 이렇게 웃어도
이웃을 부탁하는 공동체 정신, 살가운 표현 없이 살아온 부부 간에 나 타난 깊은 신뢰, 도시로 떠났지만 항상 맘에 품고 있는 자식에 대한 사 랑, 그리고 다시 마을을 살려내려는 강인한 마음까지, 우리 안에 내재된 공동체적 힘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이 사업이 진행되기까지 너무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습니다. 현장에서 주 민들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노력해 준 더프라미스 직원들, 기록화 작
업에서 주민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인터뷰하고 읽기 쉽게 원고로
윤문 작업을 한 대전의 마을활동가들, 함께 재난의 과정과 공동체 회복 에 대한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같이 해주신 권선필 교수님, 그리고 무엇
보다 서로에 대한 마음과 정으로 그 기간을 너끈히 견뎌낸
목원대학교 경찰행정학부 교수
정뱅이마을 주민
재난은 우리에게 예기치 못한 도전과 시련을 안겨줍니다. 재난이 밀어닥
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감정적 대응이 표출되
고, 이는 주민들 간의 갈등으로 확대 심화될 수 있습니다. 재난 그 자체
로 힘든 상황에서 피해 주민 사이 갈등은 재난의 여파를 더욱 아프고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실제로 재난 구호물자의 배분 과정에서의 불투명이나 불공정함, 복구
대상의 우선순위에 대한 의견 차이 등이 곧 바로 주민 간 갈등을 유발
하곤 합니다. 이러한 갈등은 공동체의 결속력을 약화시키고, 재난 회복
과정을 더디게 만들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민들 간의 서로 공감
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소통을 활성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소 통을 통해 다양한 배경과 지위를 갖는 주민들 간에 서로의 입장을 이해 하고, 갈등을 해소하며, 공동체의 단합을 강화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지난 7월 10일 제방 붕괴로 수해를 입었던 정뱅이마을에서도 이러한 문 제를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주민들 간 소통이 활성화되기 위해 대피소에 서 저녁 8시가 되면 주민대책회의가 열려서 다양한 문제에 대해 생각을
나누기도 했고, 공무원이나 의원들도 같이 참여하여 질문하고 의견을
모으기도 하였습니다. 카톡방, 밴드, 유튜브 등 다양한 정보매체를 활용 하여 정보를 나누고 소통하고자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더 가기 전에 남아있는 기억이라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하여 재난을 겪으신 마을 분들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을활동가들이 일일이
주민으로서, 이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끼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재난의 다양한 양상과
그로 인한 영향을 보다 명확히 알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앞으로의 재난
관리 및 대응에 있어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재난 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웃들 사이에의 상호도움을 생각하 는 데 큰 자극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 책이 재난을 겪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고, 더 나아가 앞 으로의 재난 대비와 공동체의 회복력 강화를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될 것 입니다. 주민들의 소중한 경험과 지혜가 담긴 이 책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정뱅이마을 재난 후 진행경과
오전4시경 재난 발생
오전8시
현황파악 회의
불편사항 처리 공지사항 안내
· 대피소 내 공지판 · 둑방 처리 상황 공유 · 마을 도로 정비
· 배수관로 정비 및 지속 관리
방안 안내
· 기성동(용촌동) 주민센터 2층 TF팀 운영 7월
오후1시 대전시청 사회재난과장, 행안부 관계자 간담회
· 복지관 체류 기간 : 7월 15일 제안
· 서구청 재난 관리과
· 주민 의견 창구 단일화, 주민 대표 선출 요청
· 시, 구 책임자 방문 시
주민 의견 사항 논의
· 특별재난구역 지정
서구청 재난 과장 설명회
· 도로 청소 : 굴착기/살수차 진흙 처리
· 집안 청소 : 자원봉사 또는 인력 지원
·
·
전기 : 법률에 근거하여 범위를
넓게 해석해서 지원
대피소 상황 장기화 시
숙박시설 이용 가능
·
주민 대표 선출 및 협의
· 하천 준설의 필요성 건의
·
자원봉사자 투입 시 행정과 함께 집 확인
오후8시
주택과 하우스 자원봉사자 배치 문제
주택 복구 우선으로 하우스에는
자원봉사를 배치하지 않음 7월 14일 (일) 갈등 ①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 진입 창소 2/3 이상 완료
· 전기고압 설치 완료
· 자원봉사자 250-300명 활동
· 경노당 시설보수 대책위원회 구성
오후8시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사고 후 시간이 많이 지났으나 힘내시기 바랍니다’
· 7월 15일 한전 전기 안전점검
· 7월 15일 자원봉사 주택 마무리
· 농기구 피해 및 농작물 피해 접수 · 자원봉사자에게 예의 → 민원 발생 함 · 특별재난지역선정을 위한 홍보활동 · 대표단에 시장, 서구청장 면담 요구
하우스와 주택 피해 지원의 차이
국회의원 대책회의 참석
피해신고 빠짐없이, 철저하게 신고 요청 · 시설하우스 관련해서 농민들
지원 요청 · 부구청장 도배 300만원
우선 지원
· 주민, 폭우 대비 부족 비판 →
예산 우선 순위로 집행하면서 부족 · 자연재해인가? 인재인가? →
평촌 산단 조성 시 산업 재해
영향 평가 실시 후 진행
오후8시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협동단결 합시다(믿읍시다)’
· 기성동 주민센터 TF팀 현장방문 보고
· 특별재난지역에 예비로 등록됨
· 내일부터 자원봉사 지원 없음
· 점심식사 배달
오후8시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오후8시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수해 복구 관련 작업에 고생 많으십니다’ · 흙집
갈등 ③ 갈등 ④
행정 - 주민 소통 문제 : 동장 → 통장으로의 소통만 존재
오후8시
기성동 동장 대책회의
주민과 동장과의 대화 : 주1회 가능 (동의) · 피해에 대한 원인 규명 요청
주민 간 소통 문제 전체 주민의 대표자 역할
또는 대표 기구의 부재
침수 조사 완료, 피해신고 내일까지 접수, 지원 규모
동장 면담
참여주민 : 채홍종, 김용태, 김영주, 권선필, 송민용, 김환수
오후8시
갈등 ⑤
지원 물품 배분의 문제
유튜브 보겸 TV의
물품 지원이
주민 갈등의 씨앗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 7.26.~27. 정화조 청소
오후8시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 구세군 교회 마을로 기부체납 논의
· 대책위원들, 파트별 전문성을
가지고 업무 분담
· 서구청 건설과에‘하천 제방’관련
정보 공개 청구
· 시설하우스, 김환수님 대책위에 포함
오후8시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 비닐하우스 자원봉사자, 작업 내용 구체적으로 공지 필요, 작업도구, 기구 준비에 도움
7월 27일 (토)
오후8시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 최재욱님 거주지 퇴소 검토
7월 28일 (일)
7월 29일 (월)
오후8시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 7월 31일 20:00 동장 면담 :
의사전달시 공문 요청 · 건조작업 : 필요시
자원봉사센터에 직접 연락 · 공동세탁기, 냉장고 등
확보 필요
오후8시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 서구 관할 관저동 주민대책위 참석
폐기물 처리 문제 : 동장이 환경과에 이야기 전달
· 제습기 한달 렌탈
· 식사 준비 : 경로당 선수리 식사
준비 및 내부 마감
·
이장님 공지사항 : 7월 31일 재난
과장 참석 공지사항 전달 예정
·
운영본부 공지사항 : 세탁차, 식사 안내
오후8시 기성동 동장, 서구청 재난과장 및 직원 방문
· 피해 복구 제원 : 시 예산 없음, 예비비 선집행 예정 · 피해 신고 확정 · 시설하우스 지원 대책 요청 → 산재보험, 정부 지원 중복 · 정방마을 피해 원인
오후8시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 제습기 15대 한달 임대
· 폐기물 8월 1일 처리 예정
· 재난 피해 신고 확정 시기 궁금
· 공지사항 : 후원 물품 나눔, 특별재난지역 포함 여부 차이점
구의원
서구 의회에서 피해주민 적극 지원 및 긴급 보안 사업 추진을 위한 추경 예산안 처리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 이장님 공지사항 : 집에서 배출 쓰레기는 종량제 봉투, 공영 제습기 경로당 비치, 8월 3일 세탁서비스 종료, 8월 5일 도시락 현장배달 종료 7월
8월
오전10시
장종태 의원 간담회
·
·
농업 분야 실태 조사
시정/구정 질의 : 원인과 대책, 예산편성‘위로금’
· 대전시 건축사회/
건설협회 → 지원방안
오후8시 대전 서구청 복지과 간담회
· 점심식사, 현장 배달
유무에 관한 회의
· 빨래에 관한 대책
· 장기거주 예정자
오후8시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
특별재난지역선포 요구 현수막
설치 지출 보고
·
점심식사 : 현장 배달 요청
·
세탁 버스 수리, 세탁 서비스 자원
봉사로 통장의 역할 · 민원 처리 방안 문서로 정리하여
전달
오후8시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 다음주 월요일부터 방역 시작 · 폐기물 처리 : 종량제 봉투 사용 처리 · 8월 17일 청년들 자원봉사 참여 (붕어빵 100인분) · 8월 10일 후원 물품(냉장고 바지 40벌, 티셔츠 40벌) 도착 · 제방 복원 계획 : 주민설명회 요구 · 마을 복원 및 미래 계획 프로젝트 검토
8월
오후8시 55분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 통장선거 : 입후보 08.19.~09.04.
오전10시 장종태 의원, 최지연 의원 간담회 · 제방 관련한 재발 방지 대책 · 현재의 경로당 건물, 주민회관으로 통합돌봄센터 등의 역할 · 일반 주민 입주 시기 요청 : 필요 사항 파악 위해 · 장기 피해자 : 근거리 숙박시설 임대
오후8시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 피해 사실 확인서 : 서구청에서 발급
· 경로당 시설 완료 : 기존 시설물은 가져가도 됨
· 오전 9시 우리은행 대출 관련
최지연 의원 면담
· 노인정 입주 관련 대화 :
복지정책 과장 + 정방마을
대책위 대표
오후8시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 주택, 작물 보상에 대해 상세 내역 요청
· 간접 지원에 대한 보상 절차 확인 · 은행 대출 1.5%: 농협중앙회, 우리은행
피해 사실 확인서 : 동사무소 신청 가능 · 재난지원금 가구별로 지급. 미지급 세대 있음
8월 21일 (수)
오후8시
용촌동 마을 수재 관련 대책회의
· 8월 24일(토) 음악회 예정
· 재난지원금 미지급 세대는 서류 미검토로 9월 1일 일괄 지급
· 통장투표 : 9월 1일 오후 1시~3시, 노인정
8월 31일
대피소 생활 종료 마을로 복귀
· 공지사항 : 마을회관 건립추진 계획, 도로명 주소 내년 상반기에 교체 예정, 상수도 및 우체통 설치 지원, 마을 재난 기록 활동 회의록 작성 김양호님, 김영주님
재난이 지나간 흔적
“한 4시 반쯤 됐나, 어디서‘빵!’소리가 나더라구요.
흘러가더라구요. 둑이 터진 거예요.” - 채홍종님 -
“침수당하고 마음 아픈 것보다도 멍했어요.
계속 멍하니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우리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너무나 어이없다.
눈물도 처음에는 안
나 50년 넘게 살면서 여태까지
정뱅이마을 주민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강진순님
우리 부부는 둘 다 정뱅이 마을 옆 흑석리가 고향이예요 정뱅이
마을로 이사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어요. 작년 4월 첫째 주 일요
일에 이사했거든요. 제가 10년 가까이 바위솔을 키웠는데, 흑석리
집은 연립주택이라 집 안에서 키웠어요. 마당 있는 집에서 바위솔
을 마음껏 키우고 싶어 지금 집으로 이사 왔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종중(宗中) 집이에요. 가격도 저렴하고 평생
살라는 말씀에 고민 끝에 예전에 살던 집을 전세 주고 이사 왔
죠. 하지만 1년 만에 모든 게 다 무너졌어요. 마당 있는 집에서
사는 게 꿈이었는데, 이번 재해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사라졌
어요. 사실 하소연할 곳도 없어요. 세입자라 재난지원금도 못 받
았고, 10년 동안 가꾼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어요. 남
들에겐 별거 아닐지 몰라도, 저에겐 너무 소중했던 것들
이거든요. 10년 전부터 바위솔을 하나하나 사서 키
워왔어요. 정말 조그맣던 것이 이렇게 커진 건데요,
아끼던 단지들도 하나하나 모았어요. 그중에는
70~80만 원짜리도 있었어요. 물
인터뷰 민순옥
글 민순옥
이 빠져 들어가 보니 단지
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건질 수 없었어요.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게 그 단지들은 돈 이상의 의미예요. 지금 단지 챙기
면 마을 사람들한테 혼난다고 가족들이 말리더라구요. 그때 정
말 속상했습니다. 한 번도 이런 말은 안 했지만, 저에겐 모든 것
이 소중했거든요. 아르바이트로 단지들을 하나씩 모았어요. 오전
에는 요양보호사 일하고, 선거 알바도 하고, 이런저런 일을 하며
10년 동안 모아온 건데, 하루아침에 다 사라졌어요.
수해가 난 건 새벽 4시 반쯤 알았어요. 원래 잠을 깊게 못 자는
데 그날은 세상모르고 잤어요. 신랑이 아무래도 나가
할 것 같다고 깨웠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휴대전화와 손전등 하
나를 들고 나갔어요. 마을 입구까지 갔는데, 물이 넘쳐 마을로
막 쏟아져 들어왔어요. 안 되겠다 싶어 얼른 집으로 돌아가려는
데 물이 무릎 위까지 찼어요. 신랑이 앞집 할머니를 빨리 깨우라 고 해서 갔더니 물이 이미 허리까지 차 있었어요. 할머니를 깨우
는데 잘 못들으시는거예요. 저는 할머니를 깨우고, 신랑은 아이
들을 깨우는 동안 물이 점점 차올라 마당에 있던 차 3대가 모
두 잠겼어요. 다행히 우리는 권교수님 세미나실이 있는 언덕배기 로 대피했어요. 물이 차오르는 걸 보는데 어이가 없어 그냥 웃음
밖에 안 나오더라고요.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어요. 물
이 밀려오는 걸 계속 쳐다 볼 수밖에 없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어르신들이 안 보이는거 발견하고 아들들이 와서 구해 드
리고, 119도 와서 집 안에 계신 분들을 모시고 나갔어요. 우리 마 을 사람들은 다 언덕으로 대피했다가 보트를 타고 복지관으로 이동했어요. 우리는 가게가 있어서 그곳으로 갔죠. 수해 나고 하 루 이틀 지나니까 수건이 부족해 마당에 흩어진 수건들을 모아
빨아 다시 썼어요. 새벽부터 오후 3시까지 복구 작업하고, 가게
로 와 장사하며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그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저는 재난지원금 단돈 천 원도 받지 못했어요. 세입자라
는 이유로 모든 지원금이 종중에서 처리됐고,
도배와 장판 비용도 가져갔을 때 재난지
원금은 우리 몫이 아니구나 하고 포
기했어요. 반이라도 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전화 한 통 없더라구
요. 다행히 시댁과 친정 식구, 친
구들, 지인들의 도움으로 세간
살이를 마련했어요. 저희는 물
이 빠지자마자 주변 지인 20여명
이 와 짐을 꺼내줬어요. 사람들은
짐을 꺼내면 지원금을 못 받는다고
했지만, 저희는 그저 빨리 복구하고 싶
었기에 상관없었어요.
복구하는 동안 지금 하는 치킨집 건물주가 4층 빈방에서 지내
라고 해서 그곳에 머물렀어요. 신랑이 몸이 안 좋아 복지관에서
는 하룻밤도 지내기 어려웠어요. 복구하고 와서 장사하고, 저녁 엔 4층에서 지내다 보니 회의 참석도 못하고 도시락도 손가락으
로 셀 만큼 받았어요. 이 난리를 겪다 보니 사람 마음이 다 틀린 거예요. 예전 마음하고 이 난리를 겪으며 느낀 마음이 너무 달라 진 게 너무 싫더라구요.
왜 이사 왔을까 후회도 했죠. 종중 대응이 속상했고, 일이 생기
면 똘똘 뭉쳐도 힘든 판에 갈등도 생기고 그렇다고 나도 바빠서
가게에 와야해서 도와주지 못한 것도 미안해요. 맨날 수고하시
는 분들이 일을 많이 해서 되게 미안했어요. 이번 수해로 마을 분
위기가 더 심란해졌어요. 막상 이사 나가려니 전세도
1년밖에 안 남았고, 갈 곳도 마땅치 않아요. 그래도 살림 다 정
리하고 언제 그랬냐 듯 잘 지내고 있어요. 마당만 정리되면 돼요.
좀 선선해지면 하나씩 하나씩 다시 시작해보려 해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제가 미친 것처럼 맨날 웃고 다녀서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하겠어요. 치사하게 매달리고 싶지 않아요. 누구 잘못도 아닌 재해인데요, 뭘 어떡하겠어요. 우리 가족이 건 강하고 다친 사람 없이 무사히 넘긴 것만 해도 감사해요. 마을
사람들 모두 무사해서 너무 감사해요.
딸이 그러더군요.“엄마, 1년 동안 행복했잖아. 그걸로 된 거야.” 그 말이 큰 위안이 됐어요.
남모르게 울기도 했지만, 딸이 말하길,“엄
마가 심고 싶은 꽃도 다 심고, 마당에서 고
기 파티도 했잖아.”1년 동안 행복했더라
고요. 물난리 전까지는…. 그걸로 만족하고
이제는 다 복구됐으니 바랄 것도 없어요. 마
음의 복구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요.
이제 선선해지면 마당도 정리하고, 여기저기서
조금씩 모아 다시 바위솔을 키우고 싶어요. 마당에
서 숯불 피워 고기도 구워 먹고, 우리 집 도와준 사람들 초대할 생각이에요. 저는 바라는 것 없이, 그저 마을 사람들이 서 로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
#정뱅이마을 주민
87살 39년생이여. 내가 범띠여. 22살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살아 요. 그이하고 일곱 살 차이 나는데, 내가 마흔 살에 남편이 술이 과해서 병이 나더니 세상을 떳어. 난 아들만 셋이여. 큰 아들은 용정이, 둘째는 중훈이, 셋째는 정일이예요. 아들들은 대전 근처
에 살면서 다들 밥벌이 하며 지내고 집에도 자주 와요.
마흔에 혼자됐는데 그때는 정부미 같은 배급이 나왔어요. 애들
은 학교를 고등학교까지 밖에 못 가르쳤어. 남의 밭 매러 다니고
당면 공장에도 댕기고 성냥 공장에도 댕기고 벽돌공장에도 가구.
나중에는 정림동 아파트 청소하는 거 했어. 그러다 내가 수술하 게 됐어. 몸에 몽우리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괜찮다가 나중에 조 금 아프대. 아들한테 멜롱멜롱한게 아프다고 했더니 병원으로
데리고 가대. 수술을 하게 됐는데, 주변만 하면 나중에 위험할
수 있다고 해서 큰 수술을 하게 됐어. 그러자마자 몸 상태가 이
렇게 됐어. 한 50살은 넘었을 때 애들이 일을 못 나가게 해서 산
밭을 일궈서 밭에서 일하구 했지.
수해 날은 새벽 4시가 좀 넘어 방송을 들었어. 맨 날 일찍 먹고
5시만 되면 밭으로 나가거든. 일어나서 불
을 좀 켜놓고 잠깐 생각을 하고 있는 디 방
송 소리가 나데. 근데 내가 똑똑히 못 들었
어. 우리 뒷집 정이 엄마가 전화해서 불을 켜
고 계시래. 아주 비 많이 온다고. 불을 켜고
마당을 내다봤는데 물이 안 보여. 마당에 있
는 잔디를 이렇게 손으로 만지니까 물이 없
어. 비가 별로 안 왔나보다 하고 대문 밖을
보니까 무슨 그림자 같은 게 쭐룩쭐룩 앞으
로 오네. 물이 덜렁덜렁 여기 무릎까지 올라
와. 부쩍부쩍 금방 물이 차대. 조금 있다 펑
소리가 나더니 우리 아랫방 현관문이 안으로
막 밀리며 무너지고.“우리 집이 다 무너져
서
나는 어떻게 살어. 아이고 큰일났네 큰일
났네”하는디…, 사랑채 문이 반으로 꺾어지
며 아래로 탁 쪼개지네. 그것도 겁나지. 우리
집 처마, 안채까지 물이 넘실넘실해.“난 이
제 죽는구나 자식들도 못 보고”,“우리집은 다 무너지고 어떡하냐”하고 있는데… 우리
집 신발장이 또 넘어지다가 기둥에 걸려서 출
렁출렁하는데 내가 그걸 붙들었어. 그냥 그 것만 놓치면 물에 떠내려가는 거지. 매달려서
땅바닥에 발이 닿나 해보니까 안 닿아. 그것
만 꼭 붙들고 있는디.‘어떻게 해야 내가 이
속에서 살까?’이제 정신이 초랑초랑하지.
매달려 있는데, 저기 위에서 바가지도 같
덩어리 같은 게 보이다 물 속으로 사라
졌다가 또 보이네. 근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
우리 둘째 아들 목소리여. 어떻게든 그거 잡
은 거 놓치지 말고 정신 차려서 꼭 붙들라고
하는겨.
나는 죽어도 괜찮은디‘저거이 오다가 죽으
면 지 자식들하고 어떡하려고 그려.’내가 소
리는 안나오는디.‘여기 오지 마. 애미는 이
나이 먹어서 죽어도 괜찮으니까,’‘니 집 자
식들은 니가 없으면 어떻게 하냐.’하고 있는
데 아들이 와서“엄마”하면서 붙드는데“왜
왔어?” 하니까 “엄마, 정신 차려.” 하며 나
를 애기 무등 태우듯이 목에 올려서 화장실
지붕 위에다가 올려놓네. 우리 아랫집에서도
‘사람 살려’소리가 들려. 그 할머니도 지붕
위에 올려놨대. 그러고 있는데 저 아부지(권 선필)랑 다른 한 명이 주부(보트)를 타고 왔
어. 우리 아들이랑 연락이 됐나 봐. 그걸 타
야지 또 끌어갈 것 아녀. 나를 안아서 주부
(보트)에 앉히고 옆집 할머니를 태우고 갔
어. 권선필선생 집으로 갔어. 거기 있는데 왜
이렇게 떨려.‘할머니들 추워서 안 되겠다’ 고 해서 선생님네 윗 집 불 때는 방으로 가
서 있었어. 그러다가 복지관으로 가자고 해
서 간 겨. 잘 때 물이 들었으면 우리동네 죽
은 사람 많을겨.
복지관에 있는데 밥은 잘 해줘유. 반찬도 갖
춰서 노인네들을 참 대접 잘 하더라구. 누군
지 이름은 모르는데 여러 양반들이 왔지. 와
서 말로도 위로해 주고 도와주니께 우리가
살았지. 시골에서는 일하니까 시간이 금방
가는디 복지관에 있으니까, 시간이 지루혀
서 질루 힘들었어. 거기서 먹고 편안히 있으니
을매나 시간이 안가던지 힘들었어. 여러 양반
들이 잘 먹게 해주고 얼마나 고마운지 참말
로 잊덜 못하겠더라구.
우리집은 건진게 하나두 없대니께. 복지관에
나 입고 간 옷 빼고 다 떠내려갔대잖아. 찬
장, 식탁 다 없어졌어. 집에 간 건 한 열흘이
나 됐나. 아들들이 내가 놀랄까봐 안 데리
고 가.“우리집 마당이라두 가서 보고와야
겠다.”하니“뭐하러 봐유. 다 떠내려갔는디” 하고 속아프다고 안 데리고 가. 그래서 며느
리를 졸랐어. 태워 가지고 오더라고. 와보니
까 이거 참 아무것도 없고.‘저걸 어떻게 해
야 해. 저걸 어떻게 손을 대서 집을 만드나’
그 걱정이더라구. 지금은 삼 형제가 와서 일
꾼들 하고 집 정리하고 있지. .
비 오면 그런 일 또 있을까 봐 겁 나. 우리
동네 사람이 서로 합심해서 그저 한 마음 한
뜻으로 지내는 게 제일 좋을 거 같아.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김양호님
저는 64년생, 올해 환갑으로 정뱅이 마을에서 혼자 살고 있어요.
이 집은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제가 태어난 후 가족들이 서울로
이사 갔지만, 집은 그대로 있어서 고등학교 때까지 방학마다 사
촌들과 놀러 오곤 했어요. 정뱅이 마을에는 광산 김씨가 많아서,
마을에 30가구가 있다면 그중 열몇 가구는 일가예요. 아버님께 서 2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께 제가 이 집을 고쳐 힘들면 함 께 살자고 했어요.저한테는 실버타운이나 들어갈래 하셨는데 친
구분들께는“우리 큰아들이 시골집 고친다니 놀러 가자”하셨어 요. 그해 5월에 오셨다가 6월에 쓰러져서 8월에 돌아가셨어요.
이 집은 예전 그대로예요. 엄마랑 약속도 있고, 태어난 곳에서 제
생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에 혼자 고치고 있어요. 이 집은 약
100년, 110년 전에 지어졌습니다. 석가래에‘소화 몇 년’이라는
글씨가 남아있어요. 살기에는 불편하지만, 원래 모습 그대로 살
리고 싶어서 블록 하나하나 제 손으로 고치느라 시간이 걸려요.
정뱅이 마을은 살기 편하게 변했지만, 시골 마을만의 느낌이 많
인터뷰
글 민순옥
이 사라졌어요. 이번 수해로 가장 아쉬웠던 건 엄마와 가족의 추
억이 담긴 사진과 물건들을 잃어버린 것예요. 조부모님과 부모님
영정 사진도 손상됐고, 추억이 담긴 소중한
작품들을 잃어버려서 서글펐어요. 그런 물건
을 보며 제 딸이나 조카들과 추억을 이야기
하고 기억할 수 있었는데, 이번 수해로 많이
잃었습니다.
그날은 어찌 보면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요. 전날 밤 10시쯤 저녁을 못 먹어서 배가
고팠어요. 유성에 있는 24시간 해장국집에
갔다가 대전 집에서 잤죠. 새벽에 문자 받고
수해 소식을 듣고 6시에 마을로 들어왔습니
다. 현장에 도착해서 보는데 멍해요. 아무 생
각도 안 나고‘어떡하지, 놔두고 간 물건들
은 어떡하지, 엄마 거는 어떡하지’그 생각만
들더라고요. 다른 생각은 안 나고‘어떡하
지’하는 생각뿐이었어요.
물이 어느 정도 빠지기를 기다리다 10시쯤에 주민이라고 소방서에서 안내해 주어 집에 갔
어요. 뻘이 많고 집이랑 기물들이 넘어진 걸
보며‘어떡하지’라는 생각만 들었지, 뭘 어떻
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나더군요. 처
음 열흘 동안은 뭘 알아서 하기보다 시키는
대로 하는 상황이었어요. 대피소로 이동해
등록하고, 쉼터에서 잠자리를 마련해 주니까
그냥 거기서 지냈어요.
저는 혼자라 그나마 괜찮았지만, 마을 주민
들은 완전히 생활 터전을 잃었으니까‘주민
들을 돕고 공공의 것을 먼저 챙기자’는 마
음을 먹었죠. 저는 전날 트럭을 타고 나가
서 차도 살아 있었어요. 처음에는 복지관에
서 도시락을 날라 오고, 쓰레기를 차로 옮기
는 일을 했죠. 제가 건축 일을 해서 복구할
때 도움을 드렸죠. 집에 물 먹은 부분 철거
를 도울 때 무엇을 먼저 하고 어느 정도 해
야 하는지 알려드리고, 바닥 같은 부분도 제
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와드렸어요. 물청소할
때도 진흙과 뻘이 많으니 먼저 하수 관로를
청소해 막히지 않게 하고, 정화조도 구청에
요청해 안에 찬 것을 빼고 청소할 수 있도록
말씀드렸죠. 우리가 복구하려면 길게는 6개
월에서 1년도 가는데, 한 번 치웠다고 끝나
는 게 아니라고 말씀고, 폐기물도 일정 장소
에 모아두고 계속 나오는 쓰레기를 치워줄
수 있게 요청해야 한다고 했죠.
자원봉사 첫날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150
명 넘게 오셨는데, 다리에서 걸어 들어왔어
요. 그날 차량 통제가 되었고 방송국도 왔
는데,‘가시죠’하니 사진을 먼저 찍어야 한
다며 현수막을 들고 사진을 찍으시더라고
요. 끝나고 찍으시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 들었어요. 저희는 자원봉사자들이 오신다 고 해서 집마다 인원을 배치했는데, 봉사자 한 분이 그걸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하며 “모르면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하시
더군요. 당연히 수해는 처음 겪는 거라 어떻 게 해야 하는지 모를 수밖에 없죠. 우리 주 민들은 차분히 건질 것은 건지려고 하는데, 20~30명이 와서 이것저것 끄집어내 내놓더니
어느 날 보면 갑자기 훅 쓰레기로 가져가 버
리더라고요. 텔레비전에서 본 것처럼 도와주
는 분들이 와서 고맙긴 하지만,‘이런 게 자
원봉사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오신 분들은 필요한 것을 물어보고 도움을
주셔서 감사했죠. 그런데 봉사자들도 현업에
서 일하다가 시간 내서 오시는 것이니, 그분
들도 나름의 방식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자원봉사자 중 평택에서 굴착기를 가지고
오신 분이 기억에 남아요. 혼자 오셔서 마을
이장님과 이야기하고 봉사하셨죠. 처음 오
신 분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치우셨지만, 사
람의 마음을 움직이진 않았어요. 마을 주민
들은 마음에 더 큰 상처가 있었으니까요. 도
배장판을 해 주러 온 분들께도 일만이 아닌
마음을 함께 치유해야 하니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모두가 힘든 일
을 겪고 복구하느라 돌아볼 겨를이 없잖아
요. 첫 일주일에서 보름 동안 정신없이 일했
어요. 뻘 있는 데도 장화 안 신고 슬리퍼를
신고 막 일해요. 시간이 지나 발진이 나면 그
제야 아프다는 걸 느끼잖아요. 마음에 힘듦
이나 아픔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예요. 마음
에 상처가 물건들 챙기면서 불쑥불쑥 올라
와요.
마을 사람들과 형님, 아우님 하며 지냈는데
힘든 일을 겪으면서 서로 오해도 생기고, 연
배에 따라 생각의 차이도 있어요. 어떻게 치
유할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는 명상하며
조용히 지내려고 하는데 주민들과는 일주일
에 한 번씩 식사하며 복구에 대해 의논도 하
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야기도 나
눕니다. 이제 복구는 되었지만, 완전히 일상
으로 돌아간 건 아니니까요.
우리는 서로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죠.
우스갯소리로 수해가 난 7월 10일이 30가
구가 모두 합방한 날이라고 웃어요. 그러면 서 조금씩 치유가 되겠죠. 7월 10일을 기억
하고, 해마다 더 나아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서로 다짐합니다. 그렇게 좋은 방향으로 마
무리되어 서로 융화가 잘 되는 잊히지 않는 마을이 되면 좋겠어요.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김영주님
저는 2014년 11월 달에 이사와서 10년 됐어요. 처음에는 남편이
살던 곳이니까 썩 좋지 않은 데 들어와서 처음에야 딱히 아무 생
각이 없었죠. 이제 몇 년이 지나면서 그래도 우리 농촌 마을이니 까 도심과는 다른 모습들을 좀 가져야 되지 않겠냐 삶이 좀 달
라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몇몇 분들과 같이 공유하기 시작하
면서 우리 청년회 활동을 시작했거든요. 그때 그전에는 그냥 거
주의 개념이었다면 사람들이 같이 모이고 생각을 나누고 공유하
기 시작하면서 생활이 되고 마을에 애착이 가기 시작한 거죠. 그 래서 이제는 정말 내가
우리 마을에서 같이 더불어서 서로 케어하면서 살면 좋겠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거. 특히 권 교수님이나 우리 황경희님 같은 분
들이 계시니까 어떤 목적성이 좀 생기기 시작을 하는 거죠.
그래서 보조 사업도 작년에 100만원짜리 해서 당시에 정원 행복
한 정방마을 가꾸기로 도로에 꽃길 조성하는 사업을 했거든요.
그래서 지금 여기 보면 주차장 옆에 막 지금 뭔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바뀐 것처럼 우리 마을도 우리 모습도 우리 생각
인터뷰 김은진
글 김은진
들도 많이 바뀐 거죠.
그러면서 우리가 좀 더 많은 것들을 해야지
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진 거예요.
이번에 중요한 건 서구청이나 관에서는 비가
많이 왔다고 비 핑계를 대는데 실제로 우리
가 몇 년 동안 살면서 넘치지는 않았지만 진
짜 넘실넘실한 것도 봤고 비가 진짜 억수로
많이 온 경험도 있잖아요. 근데 정작 그날은
비가 그렇게 많이 오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저희가 안심했던 거예요. 그때가 새벽 4시쯤
됐나. 4시 전후로 잠이 안 와고 막 천둥번개
쳐서 거실에서 계속 있다 깼다가 잠들었다
가 했는데 그때 전기가 계속 오락가락 했거
든요. 그러고 이제 방송이 나와서 내가 우리
남편을 깨웠어요. 밖에 좀 나가봐야 되겠다
고 그랬더니 이제 나간 거죠. 나는 우리 애랑
같이 있으면서 상황이 좀 그래가지고 2층에
올라가서 구조가 됐는데 그때 당시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그게 터질 거라고 진짜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는데 일단 상황이 그렇게 됐을 때 우
리나라의 재난 대응 시스템이라는 게 있잖아
요. 골든타임이라는 게 있어요. 근데 그게 물
이 차오르는 속도가
애도 이제
119에 신고를 했어요.‘헬기가 뜨든지 보트 가 와야 된다’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몸만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세상에
처음에 왔을 때 그래서 보트 갔다 오는 시
간이 한 30~40분이 소요됐고 그 공백을 사
실 우리가 아까 말한 청년회에서 이제 권 교
수님과 다른 우리 회원께서 그 공백을 이용
해가지고 다 주민들을 구하신 거죠.
근데 그런 시스템 자체가 우리가 그동안에 계속 이런 네트워킹이 됐었기 때문에 쉽게 대 응할 수 있었지 만약에 그게 아니었으면 너
무 우왕좌왕해서 그나마도 다 그걸 못했을
것 같아. 근데 우리는 나름의 그게 훈련이라
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어떤 소통
체계를 갖췄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안면이
다 터 있잖아. 이미 우리가 지금 어떤 누구누
구가 어디 살고 있고 근데 이제 어르신들의 소재야 그렇다고 치지만 우리 청년회원들이 계속 만나가지고 소통하다 보니 쉽게 잘 대
응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걸
보면서 골든타임이라든지, 아직까지도 누군
가를 믿어서는 절대 불가구나.
이게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수많은 왜침이 있
었는데 그때마다 관군보다는 전부 의병들이
나와가지고 나라를 구했잖아요.
이거는 슬
인터뷰
프게도 그냥 역사 속의 것들이었는데 우리가
진짜 이 재난을 통해서 너무 뼈저리게 느꼈어
요.‘우리가 우리를 지키는 거다.’그래서 앞
으로는 우리가 이걸 어떻게 해야 될지 굉장
히 좀 고민을 많이 할 부분이라고 생각이 돼
요. 일단 골든타임을 다 놓쳤고 그들을 바
라보고 있었다가는 우리가 다 죽었겠구나
그리고 이제 또 하나는 매뉴얼대로 또는 규
정대로라고 얘기를 하는데 실제로 재난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런 사람들이 앉아
가지고 탁상 행정 뭔가를 했으니까 진짜 이
현실상황하고 이 매뉴얼이라는 거 하고 갭이
너무 크다는 거죠.
우리는 진짜 너무 억울하고 기가 막힌데 이
재민 생활을 무려 50일 넘게 했잖아요 저는
물이 빠져서 금방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 지. 특별재난구역선포가 되면 수도 요금이든
전기 요금이든 이런 게 전부 재난 발생한 때
로부터 30일이면 실제로 우리는 집에 있지도
않은 시간인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시스템
이 아직도 굉장히 후진적이다. 그리고 여기에
서 제일 마음이 아픈 건, 제일 황당한 부분
은 우리가 진짜 절대적인 피해자잖아요. 우
리가 잘못한 게 아니고 우리가 그 어떤 것도
안 했는데 우리는 진짜 한순간에 집이 저렇
게 되고 모든 가전제품이나 모든 추억이나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거예요. 정말 휴대
폰 하나 들고 나왔으니까. 근데 그런 과정에
서 서구청이든 시든 얼마나 고생하냐 건강은
어떠냐 위로의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정작 책임 있는 기관에서 위로하거나
뭔가를 사과를 한다는 게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해가지고 보상 책임을 옴팡 뒤집어 씌울 까 봐 그랬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따뜻한 말 한마디 한 번을 들어본 적이 없어
요.
저는 구청의 이 무능력하고 무책임하고 역량
이 없는 그런 행정에 대해서 그리고 정말 더
심한 말도 하고 싶지만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정말 너무 분노했어. 동장이라고 하는 사람
은 동민의 어려움을 헤아려가지고 구청하고
가교 역할을 해줘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동민하고는 전혀 소통하지 않고 문제가 있
는 통장하고만 소통하고 동사무소는 가장
일선에서 주민하고 소통하고 주민의 애로를
보듬고 해결해 주려 노력하고 이런 자세들
을 보여줘야 되는데 1도 볼 수가 없었어요.
우리 위에 굴림하는 기관은 아니잖아요. 되
게 화나고 지금도 지금도 진짜 서구청을 폭
파시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에요.
서구청장은 사퇴해야 된다고 탄핵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뚝방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
더니 와서 하는 말이 1월 1일부터는 금강유
역 환경청으로 넘어간다는 이런 얘기나하고
있고 말이죠. 자기네들은 뭘 어떻게 하겠다
는 거예요 서구청은 이런 무책임한 모습들이
어디 있어요?
우리가 분노하는 건 정말 작은 부분이고 왜
냐하면 우리는 큰 것들은 어느 정도는 이해
를 하고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기 때
문에 그런 부분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아주 섬세한 행정이어야 되는 부분들
이 그걸 간과하고 있으니까 주민들의 어려움
에 대해서 1도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우
리가 그랬죠. 만약에 둔산동이나 관저동이
이런 상황이면 그대들이 가만히 있겠냐고.
표랑 연결되는 것만 일을 하나요? 정치에 대
한 정치인들에 대한 회의예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여러 다른 사람을 위해
서 노력하고 사시는 분들이 되게 많더라고
요. 그전에는 간과했어요. 그냥 뭐 그럴 수
도 있지. 근데 제가 도움을 받다 보니까 그
분들이 좀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삶의 방식
이 이렇게 다르구나 그러니까 관하고 민하
고 하는 행태가 너무 다르니까 거기서도 또
이런 걸 느꼈던거예요
정뱅이마을은 굉장히 분열상이 많았던 곳이
에요. 통장 선거에서처럼 이제 우리는 재난
을 통해서 하나가 됐나 생각했더니 역시 또
그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참 이게 뿌리 깊다
고 하는 건 무시할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전 같으면 분노만 했을 텐데 우
리가 이제 더 탄탄한 기반이 됐다고 그럴까
우리가 좀 더 주축이 되는 역할을 해서 우
리 동네를 노노케어가 가능한 요양병원 가
지 않고 우리 동네에서 행복한 노후를 맞이
하고 즐길 수 있는 끝까지 이 동네에 남아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들을 케어할 수 있는 동
네가 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려면 이제 공
동체라고 같이 운동하고 같이 식사하면서
챙기고 같이 마을을 좀 가꾸고 우리 동네가
한 집 같은 이런 곳으로 만드는 게 우리의
꿈이라고 ●
#정뱅이마을 주민
전 통장
여기서 나고 자라서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지금은 집사람하고
둘만 사는데, 아이들은 여기서 자라 학교 졸업하고 다 독립 했어 요.
그날은 한 새벽 세 시쯤 저 밑에 모타 펌프가 잘 안 돌아간다고 해서 3명이 가봤죠. 하우스에 있는 애가 가보라고 해서 가봤더니
잘 돌아가더라고. 그래서 다시 올라와서
인터뷰 윤지영 글 김윤정
고 할머니들 그리 나갔나 알아보라 했죠. 사람들이 막 옥상으로 올라가
고, 나중에 보트 갖고 와서 하나씩 꺼냈지. 아무것도 못 챙겼어요. 서류, 옷 아무것도 없어. 다들 그랬지 다들. 조금 이따가 날 새고 119 오고 인
명피해 없이 그렇게 복지관으로 다들 갔죠.
복지관에서는 여럿이 있다 보니까 시끄럽고 힘들었지. 잠자리도 불편하
고, 나는 도저히 못 있겠더라고요. 한 3~4일 자고서 일찍 들어왔어요. 들
어와서 여기에(집 앞 데크) 텐트치고, 정화조 푸고, 청소하고, 흙 걷어내고
계속 매일 일 했어요. 그러니까. 뭐 텔레비전으로만 보다가 직접 당하고
나니까 이게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대민 지원, 자원봉사자들 오
고, 군인도 오고 경찰 오고, 장비들이 계속 오고 펄 긁어내고, 그 장비가
계속 와서 정리를 했지.
단체에서 많이 왔는데 젊은이 하나가 우리 집에서 자면서 돕다 갔어요. 단체는 아니라는데 텔레비전 보다가 개인적으로 그냥 왔다고. 고마운 사
람이지. 이름도 모르는데. 그리고 나라에서도 해주는 것도 있지만 단체는 물품이야. 물품이 많이 들어와요. 오늘도 농협에서 또 왔네. 그런데 물품
도 이렇게 (사람 수에) 딱 맞게 오면 괜찮은데 좀 적으면 적다고
고(한숨). 이런 일 겪고 나니까 사람들 속이 드러나. 아무래도 자원봉사 자들이 청소해 주는 게 한계가 있지. 그래도 입주 청소까지 바랄 수는 없 잖아요? 우리가 알아서 할 건 해야지.
여기는 하우스(농사)만 하는 사람이 많아요. 농막쳐놓고 하는 사람들이
몇 채 있어요. 그런데 거주 주소지가 여기가 아니면 해당이 안 된다는 거
에요. 또 구청에서는 그런 걸 몰라. 이런 집은 완파로 하고 저런 집은 반
파라고 하고, 공무원들도 잘 모르니까 자꾸 나한테 물어봐요. 전문가들
이 잘 알겠지. 완파, 반파, 침수 이런 단계로 하는데, 그 보상 차이가 있 으니까 내가 안 도와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특별재난구역이 되고 나
서도 개인에게 더 지원되는 건 없어요. 공공시설이나 도로 복구에 더 신속
하게 투입되는 거지. 그리고 완파, 반파 상태를 보고 그 수리 지원을 바 로 한다는 거지.
이제는 세월이 약이죠. 통장직도 이제 끝났고. 복지과장도 엊그제 다녀갔
는데, 동네에서 하도 뭐라고 하니까요. 어떻게 침대 사달라, 이불 사달라 까지..(한숨) 이제 서로서로 협조해야죠.
이번 수해가 인재라고도 하는데, 앞으로 제방도 높이고 하천 준설도 파
내고 해서 그런 거 막아야지. 앞으로 재발 없이. 나는 여기 벼농사짓는데, 저기 아래는 기름 때문에 빨간 하더니 지금은 또 새파래. 이제 다 바짝
말라서 큰 피해는 없을 것 같아요. 아직까지는. 이번 일로 이전에 이 마을
에 들어오려고 했던 사람들이 취소했어요. 망설이는 거지. 이거 아니면 여 기가 정말 살기 좋은 데에요. 농사에 물주기도 좋고. 옥토라고 하죠. 옛
날에도 쌀 많은 집이 부자잖아요. 여기는 거의 벼농사, 물 걱정은 안 했 거든. 그래서 외지에서 땅만 있는 사람이 많아요.
다른 주민들 얘기도 들어봐요. 나랑 다른 말 하는 사람도 있을거에요 ●
#정뱅이마을 주민
김환수님
도안동에서 농사를 짓다가 거기가 개발되는 바람에 8년 전 이
마을 땅을 임대해 시설 하우스를 짓고 들어와서 살게 됐어요. 시 설 하우스를 11동 하는데,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오니까 펌핑으로 물을 빼내야 하고, 겨울에는 농작물이 냉해를 입으면 안 되니까
하우스에 농막을 해놓고 살죠. 동네 사람들하고는 무난히 어울
려 잘 지내왔어요.
그날이 10일 날이죠. 아마 그날 한 새벽 1시 40~50분부터 비가 많이 왔어요. 이제 나 같은 경우는
펌핑을 했어요.
다 빼놔서 농작물 피해가 없었죠. 그런데 이제 마지
막으로 한 바퀴 돌고 동네 앞에 딱 오는데 우측에서 황톳물이 막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오더라고요.‘이거 정말 큰일났다.’싶어
서 승용차 타고 차를 산 위에 올려놓고, 뛰어가지고 농막에 있
는 우리 식구들한테 큰일났으니 나오라고 했어요. 물이 더 차니
까 신발은 물론 쓰레빠도 못 신고 나왔어요. 트럭에 시동을 거니
인터뷰 김계숙 글 김채원
까 벌써 트럭 가스통까지 물이 찼더라고. (트럭까지) 겨우 끌어내
인터뷰
서 차 두 대랑 마누라 구한 것 밖에 없죠.
그날은 그래도 농사짓는 사람들이 다들 하
천에 관심을 갖고 지켜봤죠. 그래서 마을 통
장한테 전화해서 하천이 위험하니까 방송을
하라고 말하고, 그래서 통장이 둑터지기 한
5분 전, 10분 전 됐나, 그전에 방송해서 사
람들 다 깨웠죠. 물이 막 지붕 끝까지 찼는
데 노인분들이 사람 살리라고 소리 질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아들이 위
험 무릅쓰고 가서 노인네 두 분을 지붕 위에
올리는 일도 있었고, 아무튼 동네 사람들끼
리 연락해서 어디로 가라고 해서 위기를 넘겼 죠.
여기는 그전부터 이런 위험성을 항상 안고
살았어요. 그래서 (지자체한테) 하상 정리해
달라고 수 차례 얘기들도 하고 펌핑장 같은 시설을 늘려달라고 수도 없이 얘기해 왔죠.
그런데 이제 하상 정리 같은 게 잘 안 됐죠.
그리고 저 위에 산업 공단을 조성하면서 사
전에 제방 상태라든가 이런 거를 잘 확인하
지 않았어요. 그런 걸 사전에 조치하지 않아
서 제방의 취약한 부분이 붕괴된 거예요. 우
리 주민들은 이게 비가 많이 와서 발생한 자
연재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없어요. 관리 부
실로 제방이 터졌으니 여기 사람들은 인재다,
사고다 이렇게 생각하죠.
그날 차 두 대랑 마누라 말고 나머지 는 다 잃어버렸어요. 마누라 인명 피해
안 입은 것만 해도 큰일 했다고 생각
해요. 내가 저쪽에 물 푸러 갔다가 저
쪽 하우스 밑에서 그런 일 당했으면
어떡했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 그 생 각만 하면 병이 생겨가지고 한동안…
사람이 자다가도 막 그 생각만 하고.
또 뭐랄까, 무기력함? 지금도 저 하우 스만 쳐다보면 무기력해져요.‘저걸 어
떡하지, 저거 나중에 어떻게 철거하지,’ 그 생각만 하는데, 지금도 그쪽에만 가면‘어떻게 처리하나’생각하죠. 한
두 사람 도움 받아가지고 처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날이 더워서 뭘 할 수도 없고. 하우스 걷어내고 할 상 황인데 좀 막막하죠.
하여튼 우리가 동네에서 피해가 제일 클 거예요. 하우스 피해 복구
하려면 7~8년 전에도 억대가 들어갔어. 지금도 저걸 복구하려면 포
킹도 해야 하고. 원래 하우스 안에 기계, 장비 보조 시설, 보일러 시 설, 농약 사용 시설 등등 시설이 엄청 들어가거든요. 그런데 다 파
괴되었으니까 적어도 2~3억은 들어가지. 게다가 8년 전에 시설할
때는 인건비가 한 7~8만 원밖에 안 했는데, 지금은 하루 25~30만
원씩 하고 자재값도 엄청나게 올라 있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요.
우리는 아직 복구를 시작도 안 했어. 날이 뜨거워가지고 시설 하우 스 안에 들어가서 뭘 할 수도 없고, 또 시설 뜯어서 다 빼내야 하
는데 양옆 논에 벼가 심어져 있어서 뺄 여건이 안 돼. 그래도 군인은 군인 나름대로, 경찰은 경찰 나름대로, 또 자원봉사자들도 열심히 와서 도와줬죠. 마을 주민들한테 엄청 도움됐을 거예요. 옷 한 벌 을 가지고 나온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런 분들이 와서 도와주지 않
았으면 쓰레기가 된 그 많은 살림살이들을 어떻게 처리했겠어요. 다
열심히 해줘서 동네가 어느 정도 정상 상태로 돌아왔다고 생각해 요.
이렇게 복구하는거랑 별개로, 이런 일이 또 없기 위해서는 원인이 반
드시 규명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단 쪽에서 내려오는 물이 문제
가 되는 거라면 앞으로도 그런 일은 또 생길 수 있어요. 토목공학
을 전공했던 사람 입장에서 보면, 공단 쪽에 큰 공사를 하면서 물
의 흐름이 교각 사이를 지나게 되니까 반대쪽 취약한 부분까지 힘
이 가해져서 제방이 붕괴되지 않았나 생각하거든요. 그런 부분까지 규명해서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제방을 보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하천 바닥이 동네 문보다 높은데, 하천도 보강하 고 준설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마을 사람들이 큰 어려움을 겪다보니까 지원 물품 배분이라든가 이런
#정뱅이마을 주민
문옥남 님
나는 문옥남이야. 정뱅이마을로 시집오면서 살게 됐지. 벌써 60 년 됐어.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는 살아본 적 없어. 아들 셋에 딸 하나 낳고 살았지. 이 마을은 풍경이 좋은데 하우스가 들어오는 바람에 풍광을 망치는 것 같아 안타까워. 여기 경치가 좋다고 들
어온 사람들도 하우스게 생겨 답답하다며 떠난 사람들이 많아. 7월 10일 수혜가 있었던 날 밤, 나는 집에 있었는데
인터뷰 최정화 글 최정화
뒷집 아기엄마네로 갔는데 그 집도 기척이 없어. 어찌어찌해서 옆
데리고 왔어. 뒷집 옥상으로 올라가려니까
물이 이미 들어 차 있잖아.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만큼 길고 가느다란 막대기가 있는 거야.“사람 살려”하면서 그걸 잡고 겨
우 버티고 있었어. 근데 그 막대기가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 그걸 놓치면 이제 우리는 죽는거야.“사람 살려”하고 소리를 지
르니까 어떤 사람이 밖에서 그 소리를 듣고 우리를 구하러 오는
데 물이 이미 턱밑까지 찬 거야. 억지로 들어오면 나 살리려다가
인터뷰
자기가 죽잖아. 그래서 다시 나가더라고. 옆
집 아기 아버지가 우리 큰아들한테 전화를
했어. 우리 아들이 가양동에 사는데 소식 듣
고 달려온거야. 우리 아들이 포크레인기사야.
빈 기름통을 타고 와서 나를 들춰 업고 화
장실 지붕 위에 올려뒀어. 그런 뒤 권교수님
보트를 타고 나가서 겨우 살았지. 그렇게 구
조대와 복지관에 간 거야. 죽은 사람 하나
없고 손가락 하나 다친 사람 없이 다 멀쩡해
서 얼마나 다행이야.
복지관도 얼마나 고마워. 그게 없었으면 우
리는 학교나 들어가 있었을 거야. TV 보면
불나서 대피한 이재민들 있잖아. 할머니들의
밖에 텐트쳐놓고 거기서 생활하잖아. 자원봉
사 아줌마들이 돌리는 밥 먹는 거 보면 우리
가 딱 그렇게 될 뻔했어.
얼마 전에 꿈을 꿨는데 소낙비가 마구 쏟아
지는 거야. 아침에 일어나서 벤치에 앉아있는
아저씨들한테“아저씨 어제 비가 많이 왔지
요?”했지. 아저씨들이“아주머니 무슨 소리
에요. 어제 비 한 방울도 안왔어요.”하는 거
야. 충격이 너무 커서 내가 꿈하고 현실하고
구분을 못한거지.
복지관도 얼마나 고마운 지 몰라. 매끼 고
기반찬 나오고 우리한테 참 잘해줬어. 집에
서도 이렇게 못해먹는다 했어. 우리 동네에
서 나고 자란 사람 중에 한의사가 한 명 있
어. 태평동에 살아. 근데 자기 고향이 수혜
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 거야. 일주일에
몇 번씩이나 와서 우리를 치료해 줬어. 그리
고 마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2주간 매
일 와서 프로그램도 하고 그랬지. 근데 프
로그램 진행하는 거는 에너지가 너무 없어서
함께 하기 힘들었어. 그래도 손, 발 마사지해
준 거는 너무 고마웠어. 얼른 복구돼서 옛날
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주민들끼리 서로 화
합하고 보듬어 주면서 잘 살았으면 좋겠어.
서로 다투지 말고 행복하게 잘 살자고 말하
고 싶어.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정뱅이 마을에 산 지 28년이 됐어요. 결혼하면서 여기로 왔거든
요. 남편은 정뱅이 마을 토박이였고요. 남편이 건강이 좋지 않았
는데, 하늘나라로 간 지 벌써 8년이 됐네요. 속상하지만 마음속
에 묻어두고 다시 앞을 보고 가야지요. 남은 가족은 97년생 아
들 하나인데, 지금 복학해서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아들이 잘 커
줘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요.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사는데, 부족함은 생각하기 나름이잖아요.
남들한테 손 벌리지 않고 살면 그걸로 충분하죠. 꼭 금밥을 먹
어야 만족인가요? 남들 소고기를 먹을 때 저는 돼지고기를 먹으
면 되고,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게 행복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어
요. 저는 호탕하지만, 까칠한 면도 있어요. 세상을 순리대로, 순
조롭게 한 발 한 발 즐기면서 살고 있어요. 성실하게 열심히 살
면 모든 것은 따라오더라고요.처음 이사 올 때 잊지 못할 감동
인터뷰 양금화
글 민순옥
박한 마을 분위기는 많이 사라졌어요. 농사
도 기계화되고, 외부에서 사람들이 많이 들
어오면서 마을 분위기가 젊어지며 많이 변했
어요. 그 나름의 매력은 있지만 조금 아쉬운
것은 정뱅이 마을에는 큰 행사나 잔치, 여행
같은 게 없다는 거예요. 회의 때마다 어르신
들이 바닷가에 가서 진짜 바다 공기도 마시
고 펄떡 뛰는 고기도 보고 회도 한 점 잡수
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제안했지만, 잘 안
됐어요.
7월 10일 수해 날은 정말 위기였어요. 밖에
서 자고 있었는데, 그날 집에서 잤다면 저도
위험했을지 몰라요. 새벽 3시쯤 마을로 넘어 가려고 준비하는데, 야실 사는 형님이 전화
해“빨리 와, 소가 다 죽어가”라고 하시길래
부지런히 달려왔어요. 그때가 새벽 4시쯤이
었을 거예요. 오니 119와 소방대원분들도 오
고, 마을 사람들도 산으로 대피하거나 옥상
으로 올라가 있었어요.
밖에 있다 돌아왔으니 집이 궁금하고 걱정
이었지만, 갈 수 없었어요. 집에 소도 있었고, 특히 갓 태어난 송아지와 묶어 놓은 어미 소
가 있었으니 더 걱정이 되었지요. 하지만“사
람이 먼저다”하는 생각에 더 이상 말도 못
하고 그냥 있었어요. 물이 조금씩 빠지고 구
조 작업이 모두 끝난 후에야 집을 바라보는
데,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어요.“소방관님,
우리 집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아요”라고
말씀드리니갔다가 오더라고. 소가 살아 있
났어요. 인터뷰
다든 거야. 그러면 가서 끈을 끊어줘라. 그
러면 소가 움직일 수 있잖아요. 그리고 나도
같이 가겠다고 했지. 처음엔 안 된다고 하 시다가 결국 같이 데리고 가더라고요. 소 두
마리와 송아지는 다행히 밥 먹는 곳에 있었 더라고요. 어미 소가 얼마나 발버둥 쳤을까
싶어. 송아지가 온몸이 다 까져더라구요. 옆
마을로 데리고 가서 닦아주고 말려주었죠.
그렇게 기적적으로 저도 살고, 소들도 살아
재산 피해는 상당해요. 제가 임대업도 하는
데, 텔레비전 8대, 냉장고 4대, 에어컨 2대 등
여러 가지 물품을 두고 있었어요. 서울에 계
신 삼촌이 물건을 싼 가격에 구해다 주면 필
요한 사람에게 임대하곤 했는데, 이번에 다
떠내려가서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피해가
커요. 집 안에 있던 옷이나 예초 기 같은 것도 하나도 건지지 못
해 지금은 완전히 빈털터리예요.
이렇게 말은 해도, 속상하지요.
돈이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니고,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마음
만 무너지는 거죠. 하지만 이런
마음을 누구한테 얘기한다고 해
결될 것도 없잖아요. 그냥 천천
히 여유 있을 때 하자는 마음이
에요. 우리 집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작은 건물 하나까지 3동
으로 되어 있었는데 모두 전파 판정을 받았어요. 음악하던 시절
에 170만 원 주고 산 앰프도 있
었는데… 건진 건 하나도 없네 요.
집이 전파 판정을 받았지만 보
상금은 2,100만 원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 돈으로는 리모델
링도 못 하죠.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요. 자연재해라면 둑을
넘어서 물이 왔다고 하겠지만, 이번에는 둑이
터졌으니 관리 문제도 확인이 필요하다고 생
각해요. 그래서 지금 권익위원회에 민원을 올
려두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해봐야죠.
복지관 쉼터에서 생활할 때는 매일 아침 산
책을 나갔어요. 새벽 5시 반쯤 어르신들과
함께 뚝길을 따라 정자나무 식당까지 한 40
분 걸려요. 너덧 명이 매일 산책 멤버였어요.
비 오는 날 하루 빼고는 매일 같이 다녔어 요.
모든 봉사자가 정말 애써 주셨어요. 군인, 경찰, 적십자, 많은 봉사자들 중에서도 축협
조합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조합에서 조합
장을 비롯해 전 직원이 와서 온갖 장비로 청
소를 해주셨어요. 너무 감사해서 방송국에
도 알리고 싶을 정도예요.
마을 사람들은 처음엔 모두 자기 일 챙기기
에 바빠서 다른 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어 요. 저는 일이 많아서 아침에 눈만 뜨면 나
가야 했고, 어르신들과 잠깐씩 인사하고 이
야기한 게 전부였어요. 바쁘다 보니 마을 행
사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친한 사람도 특별
히 없는 편이에요.
앞으로는 모두 건강하고 더 행
복했으면 좋겠어요. 다른 거 없
어요. 서로 이해하고 품어주며 살
아가길 바래요. 사람은 다 다르
잖아요. 내 생각으로만 보면 마
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죠. 말
도 처지를 바꿔 생각하고,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마
음을 활짝 열어 건강하고 화목 하게 지냈으면 합니다. ●
#정뱅이마을 주민
박 선미님
저는 여기 들어온 지가 한 4년 정도 됐고요. 우리 아저씨는 여기
서 태어나고 자라서 계속 여기서 생활했대요. 저는 타지에 있다가
들어온 지가 한 4년 됐어요. 남편은 건축 일을 하니까 지금 여기 마을 일하고 있어요.
저희는 하우스에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방송 소리는 잘 안 들려
요. 잘 안 들리는데 새벽에 비가 그날 엄청 왔잖아요. 2시에서 3
시 정도 사이에서 우리 아저씨가 이제 비가 너무 많이 오니까 괜 찮나 하고 나갔다 들어왔다 계속 나갔다 들어왔다 했거든요.
있었어요. 안에 있었는데 그때 한 3시 반 정도 됐는데 나간 지
됐는데도 안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제 한번 나가 봤어요. 나가봤더니 없어. 그래 가지고 또 한 하우스 쪽에 있나 하고 살펴봤는데 불빛이 안 보이더라고요. 플래시를 켜고 이제
있으니까 어둡잖아요. 그 시간에 그래서 아무리 찾아도 없어. 그
래서 어디 갔나 전화를 한번 해봐야겠다~ 하고 집으로 들어왔
인터뷰 김윤정
글 김윤정
는데 전화기도 안 가지고 나갔더라고요. 그리고 그래서 저기 있 으면 오겠지 하고 있는데 한 4시가 좀 됐나~ 4시 조금 넘었나?
아마 그때쯤 갑자기 뭐가 쿵쿵 거리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방문을 탁
열었더니 물이 확 들어오는 거야.
그래 가지고 이제 제가 강아지를 키우는
게 있거든요~ 그 개를 안고, 휴대폰, 아
저씨 거랑 내 거랑 들고 문을 열고 나오
는데 물이 이만큼 찬 거에요. 바로 어떻
게 나오다가 보니 앞에 막 쓰레기가 밀
려와서 문 입구가 막히고, 막 그걸 어
떻게 파헤치고 나왔는지 나도 모르겠
어. 마침 그때 여기 옆에 하우스 하는 언
니가 전화가 와 가지고,“어떻게 어디에
있냐, 언니는 정자에 있다”그러고 나왔
는데, 정자 쪽으로 가기에는 물살이 이
쪽에 이렇게 실려 오니까 그쪽은 못 가 겠더라고요. 언니한테 어디로 가야 되냐
고 하니까 그럼 산 쪽으로 가라~그래
서 산 쪽으로 돌아서 마을로 온 거예
요. 근데 마을에 조금 근처 오니까 물이
꼭꼭 덜 차더라고요. 그래서 교수님 댁
그쪽으로 가는 동안 물이 들어차더라
고요. 그때가 4시 좀 넘었을 거예요. 우
리 아저씨는 아침 버스 타고 밖에 나와
가지고 봤죠. 이제 아침 되니까 여기저기
서 막 남편 찾는 전화도 오는데 전화기
내가 갖고 있으니까 일일이 내가 다 설
명해 가면서, 그렇게 한 상황이 복잡했 죠.
복지관에서는 저는 한 열흘인가 밖에 안 있었어요. 왜냐하면 제 주소지가 도
마동으로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가야
된다고, 그래서 제가 제일 먼저 나왔을
거예요. 아마 마을에서 그랬겠지. 가족
이 여기 있는데도 거기에서 걸림돌이 되
어 그렇죠. 그래서 도마동에서 출퇴근
했어요. 그 당시에는 처음에, 나가는 사
람들한테는 식사도 제공 안 된다고 했
었어요. 그래서 어떤 때는 뭐 도시락을 인터뷰
싸가지고 올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그
냥 빵 같은 거 이런 거 사가지고 올 때
도 있었어요. 근데 사람들이 많이 들어
오고 나서부터 이제 도시락이 오고 그랬
잖아요. 그전에는 그런 게 없었어.
우리 같은 하우스 주민이 8가구에요.
시에서 이런 뭐가 나와서 배제를 많이
해버리니까 처음에 하우스 사람들은
“왜 우리는 수해 입은 주민도 아니냐”,
“다 똑같은 수해 주민이고 피해 보는
건 다 똑같은데 오히려 하우스가 더 많
을 수도 있는데, 왜 하우스 배제를 하
느냐”이런 얘기는 좀 많이 있었죠. 지
금 와서는 밥도 가져가고 같이 식사도
하고 얘기도 하고 회의도 참석하고 하
는데, 듣고 가봤자 맨날 주택 얘기인데
우리 하우스 얘기도 없는데 뭐 하러 그 걸 하냐, 했어요. 처음 복지관에 있을 때
는 회의 한다면 여기서 일하다가도 하
고 싶은데 제일 먼저 나오느라 못하고, 나온 사람들 하다가도 시간 맞춰서 들
어오려고 가고 그랬었거든. 근데 하다가 얘기하고 하다 보면 그런 위주로 수직
위주로 돌아가니까 또 그 얘기가 그 얘 기들이야. 같이 이렇게 잘 지냈으면 좋긴
저도 솔직히 여기 지금 계시는 그분들보
그쪽 분들이랑 친하게 지냈었는
데, 이 둑이 터지고 나니까 또 눈치도 가
지고 그런 면도 있더라고요. 어쨌든 화
합해서 잘 지내면 좋긴 하겠네. 마을 통 합 시간을 갖는다 해 가지고, 또 무슨
우리만의 또 잊지 말자는 식으로, 11월 (?) 날짜를 잡자 이런 얘기도 많이 하시
더라고요. 그날을 기념이라기보다는 좀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될 날이니까, 그 날을 이름을 정해서 명칭을 해서 하자
는 그런 얘기도 있고 마을 다 들어오고
자리가 잡고 나면 마을 잔치 겸 고마운
분한테 뭐 하자는 그런 의견도 있고 하 죠.
비가 그러고 나서, 이제 비가 오니까 밖
에 내다봐지더라고요. 가슴이 막 두근 두근거리는 것도 있고 바람만 불어서
무슨 소리가 나면 거기 내려왔나 하고 덜컹~ 또 그런 게 있더라고요. 한동안 그랬었어요. 요새는 지금 비가 안 와서
잘 모르겠어. 그때 사고 나고부터는 비 가 또 왔잖아요. 비만 오면 걱정이 막
되더라고요. 근데 그게 오래 갈 것 같아 요. 안 잊을 것 같아요.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새벽 4시였어. 물들어 온다고 연락이 왔어. 나가 보니까 논에 벼
가 새파랗고 물이 없어. 그래서 물도 안 들어 오는데 나오라고
숙자 님
인터뷰 문서영
글 최정화 박
하냐고 화를 냈지. 근데 갑자기 그 물이 나를 쳐다보대. 이 물
이 굴러 오는데 눈덩이처럼 오는 거야. 나는 물이 하얗게 되는 건
처음 봤네. 기절초풍을 하면서 마당으로 들어갔는데 물이 발뒤
꿈치를 따라와. 어떻게 방에 들어가서 더듬으면서 핸드폰을 찾
았어. 우리 다락이 이만큼 높아. 물이 방으로 들어오는거야. 얼
른 다락 쪽으로 한층 한층 올라갔지. 이만하면 됐겠지 하면 물 이 계속 그만큼 차고 더 올라가면 또 물이 그만큼 차는 거야. 기
를 쓰고 올라갔어. 한쪽 팔은 부러져서 악을 지르면서 다락에 겨
우 올라가 앉았어. 다락에 마루가 있어 문을 열면 마당이 보이
는데 물이 어디로 가는지 안 보여. 그래서 발을 살짝 내밀었는데
물이 거기까지 올라온거야. 기절초풍하고 뒤로 나자빠졌어. 부녀 회장한테 전화가 왔어. 형님 어쩌고 있어요? 해서 다락에 올라와
있다. 물은 안 찼다 알렸지. 구조대원들도 자꾸 전화를 해. 어머 니 살아계시냐고 저기 다리에서 보니까 우리 집 날맹이(제일 높은
곳, 지붕)는 어디냐고 물어봐서 알려줬지. 근데 물이 다 잠기니 논
인지 길인지 아무도 몰라. 바다 같대. 지금은 모시러 못 간다 돌
아가시지는 말고 계시라는거야.
조금 있으니까 문 사이로 물이 빠지는 소리 가 났어. 또 전화가 오는거야. 구조대원이야.
‘어머니 물이 이제 조금씩 빠지니 조금만 기
다리’래. 나 하나 남았다고 하더라고. 올라
올 때는 어떻게 올라왔는데 내려가지는 못 한다고 그랬더니 이제 물이 어느 정도 빠져 서 마루로 내려오면 된대. 보트를 마루에 갖
다 놓으면서 타라는 거야. 자기네가 나를 끌
어내려서 간신히 마루로 내려왔지. 내가 한쪽
팔이 부러져서 부축하지 못해. 그래도 어떻게
붙잡고 뒤에서 밀고 해서 권교수네로 올라
갔지. 뻘 묻은 몸을 이렇게 물로 끼얹어서 씻
었어. 그날 내가 제일 늦게 간거야. 흠뻑 젖
었더니 거기서 이불을 가져다 둘러줬어.
그때가 5~6시 됐을 거야. 복지관 가서 보니
까 7시가 넘었더라고. 두 시간을 다락에 있
었지. 천안에 있던 아들이 복지관에 먼저 와
있었어. 복지관에서 다 씻고 이렇게 떨고 있
으니까 츄리닝을 하나씩 줬어. 속옷도 사주
고 나중에 슬리퍼도 나눠줬어. 너무 고마웠
어. 츄리닝 입었다고 그랬더니 아들, 며느리
가 복지관으로 속옷이랑 윗도리, 일바지(몸
빼)를 사갖고 왔어.
정뱅이 마을에서는 60년 살았어. 24세 때 시
집왔어. 대전 유성에 살다가 여기로 시집왔
지. 지금 MBC있는 동네 도룡동에 살았어.
지금 자녀는 아들 셋에 딸 둘이야. 이 마을
을 떠난 적은 없고 지금 집 뒤에 살다가 앞
으로 왔어. 예전에 여기는 그냥 두메산골이
었어. 산속이고 길이 없었어. 차도 없었어. 막
내 낳을 때 전깃불 들어왔어. 불이 없어서 새
벽에 밥을 하려면 보이지도 않았어. 그때는
참 먹을 것이 없었지. 고구마를 다들 쪄먹었
는데 우리 시어머니는 밭이 그렇게 많은데
고구마를 안 심었어. 대신 조를 많이 심었어.
고구마가 먹고 싶어도 줘야 먹지. 없어서 못 인터뷰
먹었어. 시어머니가 9남매를 낳으셨어. 아들
이 여섯, 딸이 셋 내가 셋째 며느리였는데 고
생을 했어. 식구가 좀 많아 하루에 쌀 한말
을 먹었어. 쌀이 없어서 이야기 하면 왜 벌써
쌀이 없냐고 눈물 쏙 빠지게 혼났어. 시아버
지, 시할아버지 다 모시고 살았지. 돌아가시
면 고연을 모셨어. 아주 고생했지.
통장이 전화를 해서 둑방이 터진 줄 알았어.
전화가 왔을 때는 둑이 터지기 전이었는데
전화 끊자마자 물이 막 하얗게 공 굴리듯이
들어오는거야. 다락으로 피신 가면서 아무
정신이 없었어. 물이 마구 들어오니까 쾅쾅
다 넘어졌어. 방에서는 냉장고니 장농이니 다 넘어졌어. 마당에는 나무를 이렇게 쌓아났는
데 그게 다 넘어졌지. 고추 말리려고 고추건
조기를 샀는데 그 놈도 냅다 넘어진거야. 난
리도 아니었어. 그때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어도 몇 시인지 몰랐어. 그걸 볼 정신도 없
었던 거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
근해. 그래도 권교수님 집이 있어서 대피했고
또 깨워줘서 살았지. 물 들어올 때 대문 근
처에 있었으면 나는 떠내려 갔을거야. 그 경
황없는데도 핸드폰을 어떻게 들고 다락으로
올라갔나 몰라. 구조대들이 오는 걸 보는
데 거기에 가방 하나가 걸려있어. 거기에 비닐
이 있더라고, 그걸 꺼내서 핸드폰에 물이 안
들어가게 꽁꽁 쌌어. 그래서 전화 잘 받아서
이렇게 살았지. 그거 안 받았으면 내가 다락
으로 올라갔는지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알 아.
복지관 갔을 때가 7시가 넘었으니까 거기서
이제 씻고 츄리닝 줘서 갈아입었지. 밥도 주
더라고. 그때 날이 새고 이런 일이 있어서 다
행이지 밤에 그랬으면 하나도 못살아. 살 도
리가 없어. 하우스 하는 그 사람이 깨웠대.
그이가 보니까 둑방에 물이 넘실넘실 넘을
것 같더래. 하우스에 물들어 올까봐 여기저
기 돌아다니다가 둑 상태 보고 이장한테 전
화했지. 이장이 방송으로 다 깨워서 살았어.
그러고 전기가 싹 나갔어. 3일 동안 전기가 안 들어왔어.
집이 저렇게 된 거 보니 너무 속상해. 이게 사
는 거야? 우리 집은 흙집이라 아직 손도 못
대고 있어. 물이 말라야 돼. 집구석에 가보면
난리도 아니야. 다 떠내려가고 아무것도 없
어. 동네가 똑같이 당했으니까 너나 나나 똑
같지 누가 더하다고 더 주고 덜하다고 덜
주지도 않고 보상도 똑같아. 집터 평수에 따
라 더 주고 덜 주고 그거밖에 없어. 농협에서
는 천 만원 빌리면 1년은 무상이래. 그것도
조합원만 해준대. 내가 조합원이니까 전화
가 왔어. 그래서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라
했지. 그때 보니까 누구네는 150만원인가 그
냥 줬대.(보험을 말하는 것 같음)
도와주신 분들한테는 다들 너무 고마워. 이
불 하나 베개 하나 다 고맙지. 냉장고 받은 것도 너무 고마워. 통장 막내 사위가 유튜브
에 연락해서 냉장고를 타게 해줬지. 그런 거
생각하면 모든 게 다 고마워.
이런 수해도 함께 겪었는데 앞으로는 다 같
이 단합해서 잘 살면 좋겠어. 지금도 얼마나
좋아 이렇게 같이 먹고, 놀고, 자고 그 전에
는 누가 이렇게 모여서 했겠어. ●
#정뱅이마을 주민
박찬월님
정뱅이 마을에서 세컨하우스 구해서 살아. 한 3년 됐어. 그 전에 는 옷 장사 20년 했어. 매장을 꽤 크게 했어. 지금은 안하고 그 냥 세주고 있어. 지금 이 집은 세컨하우스라 왔다 갔다 하지. 원 래 집은 가장동이야. 수해로 집이 엉망이 돼서 수리중인데 직접 칠
하려고. 사람 불러서 칠하려면 30만원은 줘야 돼. 이 정도는 내가
오히려 꼼꼼히 잘해. 앞집사모님하고는 동갑이야. 친구처럼 지내
면서 친해졌어. 나이는 60이야.
침수되는 날이 7월 10일이었지. 수요일이었어. 나는‘금요일에 여 기서 깻잎 수확해서 김치 담궈야겠다’생각했지. 근데 그날 청년 회에서 톡이 온 거야.‘우리 마을 완전히 잠겼습니다’하고 톡이
온 거지. 이게 웬 난리냐. 집 벽 여기까지 물이 찼어. 물 빠지고 내 가 얼마나 퐁퐁으로 닦았나 몰라. 봉사단들이 있어서 도움을 많 이 받았어. 근데 뻘이 찐득거려서 다닐 수가 없어. 인절미 위를 걸
인터뷰 이현미
글 최정화
어 다니는 것 같아. 신발에 뻘이 딱 달라붙어. 이거 다 치우는데 한 일주일 걸렸어. 친구들도 와서 도와주고, 정리해주고, 버리는 것들이 많았지. 전자제품 싹 다 버렸어. 물에 잠기면 못쓰니까. 안방에 있는 것들도 싹 다 버렸어.
사람들은 다 자기 입장이 있잖아. 이 집이 지금 등기가 안 되어있어. 농막으로만
되어 있어. 나는 이번 난리에 특별선포가 됐으니까 농막도 어느 정도 지원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동사무소 가서 물어보니까 안 된다고 하는 거야. 지원에서
제외가 됐어. 안 되는 걸 억지로 어떻게 해. 법적절차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우
리 남편도 공무원으로 퇴직했고 거기 말이 맞다는 걸 아니까 그러려니 했어. 치울
때랑 라면 받은 거 말고는 지원이 없었어.
전자제품도 지원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어. 통장이 딸 앞으로 나올 냉장고를 나
한테 챙겨줬어. 이걸로 마을에 말이 많았어. 나는 솔직히 안 받고 싶었어. 내가 달
라고 했다고 소문난 거야. 젊은 애기 엄마가 저쪽에서 이러쿵저러쿵 하길래 불러
서 설명했어. 나는 냉장고 달라고 한 적도 없다. 너희 시어머니랑 친정어머니랑 지 금까지 서로 왕래하고 명절에 소고기 사다드리면서 잘 지내고 있는데 왜 그러냐 고 이야기 했지. 그랬더니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더라고. 내가 속상하고 복받쳐서
눈물이 다 났어. 내가 부자라고 오해를 하는 거야. 부자는 무슨 부자야 부자가
저기 일하러 다녀? 요즘 시대에 돈 들어갈 곳이 또 얼마나 많아. 여기저기 벌어야
또 쓰지. 애들 용돈도 줘야지. 생활도 해야지.
저 앞집은 세 들어 살아. 저 집도 집이 있는데 시골이 좋아서 온 거야. 엊그제 만 났는데 나한테 냉장고 사건 들었다는거야. 앞집은 여기 등기가 안됐다고 나눠 준
선풍기를 그냥 가져갔대. 나는 거짓말 안 해. 그래서 나는 등기 안냈는데 받았다 고 이야기 했어. 이런 일은 누가 하나가 잘 못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고, 재난이잖 아. 재난상황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똑같이 지원해줘야 맞는 것 같아.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백기순 님
내 이름은 백기순이야. 올해 95세지. 23세에 시집왔어. 정뱅이마을
에 산지가 75년 됐어. 우리 고모가 중매해서 할어버지를 만났지.
40년 전에도 마을에 물이 들어왔었는데 그때는 이렇게까지 심하
지 않았어. 시어버지 고연1이 방에 있었는데 그게 젖을까 봐 들었 다 놨다 했지. 그렇게 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는데 물이
자동적으로 빠지더라고 그런 일이 있었어.
올 해 수혜가 있었던 날 새벽 4시였어. 나는 자고 있었어. 누가
문을 두드리는거야. 혼자 자는데 누가 문을 두드리니까 무서웠 지.“누구요?”하니까 여자 목소리야. 고리를 풀고 문을 여니까
물이 똘판(마당)까지 찼어. 같이 온 남자가 나보고 얼른 나오라
는 거야. 자기 목에 내 팔을 두르고 다른 한 팔로는 나를 끌었 어. 저 높은 집에 올라가서 피난했지. 물이 조금씩 빠져서 복지관
인터뷰 최정화 글 최정화
마련됐으니 가자고 해. 그 남자가 나를 업어서 데려가는데 이 나 1 고연 : 궤연이라고도 함 이 말은 죽은 사람의 혼령을 위하여 차려놓은 영궤와 영궤에 딸린 모든 물품을 이르는 말
이 먹어서 남자한테 업혀도 봤어. 봤더니 물이 깊더라고 그래서 보 트를 타고 나오는데 가다보니 뻘이 이만큼 차서 배가 못가. 또
내려서 업혀갔지. 그렇게 복지관으로 갔어. 가슴이 방망이질 치고 말도 못해.
캐나다에 사는 누구 딸은 내가 배 타고 가는 걸 TV로 봤대.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더니 거기까지 소식이 갔나 봐. 이 동네에서
사람 하나 안 다치고, 안 죽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야. 그때 아무 도 몰랐으면 늙은이들은 다 죽었어. 나올 수가 있어? 길도 못
찾고 새벽 4시가 여전히 어둡지. 그래도 밤에 그랬으면 다 죽었
을 거야.
하우스 하는 남자가 비만 오면 하우스 안으로 물이 들어오니 걱정이 돼 서 잠을 못 잔대. 그 남자가 둑방을 왔다 갔다 했는데 물이 불어나는
게 까딱하면 넘칠 것 같더라는 거야. 이장한테 전화하고, 여기저기 전화
해서 정신을 차리고 있게 한 거야. 그 사람들 아니었으면 나는 벌써 죽었
을 거야.
복지관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고마웠어. 얘기하다 보면 그 순간만큼은 잊
어버리잖아. 그게 너무 고맙더라고. 방도 저이(문옥남)이하고 같이 한방
썼어. 사람이 많은데 내 편하자고 한방 쓰면 안되니까 같이 썼지. 묵은
살림이 많았었는데 그거 떠내려가니까 속이
시원하기도 하더라. 갖고 있었으면 아까워서 못 버렸을 거야.
뚝방 정비 좀 제대로 했으면 좋겠어. 좀 더
깊이 파고 빗길을 좀 더 내서 물이 잘 흘러
내려가게 했으면 좋겠어. 우리는 살날이 얼
마 안 남아서 상관이 없지만, 남은 사람들
은 또 살아야 하잖아. 그 사람들 위해서라
도 잘 재정비 했으면 좋겠어.
동네 주민들한테는 살아줘서 너무 고맙다 고 하고 싶어. 하나라도 죽었으면 송장 챙 기러 다니느라고 정신없을 거야. 그 분위기에 대화는 제대로 할 수 있겠어? 그게 제일 행
복해. 앞으로도 같이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백순자 님
여기에서 살고 싶었어요. 이 앞에 두 개천이 만나면서 환경적으로
너무 예쁜 곳이었거든요. 22년 전 구세군 사관으로 여기 있을 때, 들꽃으로 압화를 만들고 천연염색을 하고, 그래서 들꽃 축제도 했었죠. 7번 했어요. 그때 당시에 이 마을이 조금 활성화되면서
농촌 녹색 체험마을, 뭐 이런 걸 할 정도로 예쁜 마을이었어요. 그래서 은퇴하고 여기로 다시 와야겠다, 노후를 여기서 살아야겠
다 하고 2023년 7월에 다시 왔죠. 낡은 집이 하나 있어서 그거를
고쳐 가지고 들어왔거든요. 그런데 그 게 흙집인데다 이렇게 바로
수해를 입게 돼서 고치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해서 임시 거처
로 간 거죠.
수해 있던 그날은 새벽 2시부터 비가 굉장히 많이 왔어요. 그때부
터 계속 들락날락 들락날락하면서 불도 켜놓고 밖에 불도 켜놓 고, 우리 집은 담이 없으니까 그냥 밖에 나와서 이제 한참씩 보
다가 들어가고 했죠. 그러다가 한 4시경부터 이제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오더라고요. 웅성웅성하는 거죠. 너무 많이 오니까. 그
랬다가 어느 순간에 방송도 했다고 그런 전화를 받은 것 같아
인터뷰 김현정
글 김윤정
요. 그리고 지금 둑이 터졌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둑이 터
지고 나서 아는 지인이 그냥 강아지만 이렇 게 하나 데리고 오고, 신발도 못 신었더라 고. 그래서“어머, 신발을 못 신고 왔어?” “물이 너무 많아서 신발 못 신고 왔다”“그
래 신발 내 거 하나 줄게” 그리고 돌아서
서 대여섯 발자국 가는 사이에 물이 무릎에
서 이제 가슴까지 막 차 올라오니까 순식간
에. 그래서 그 시간은 한 5분? 이렇게 된 것
우물우물하다가는 빠져나가지 못할
같아서 일단 거기에 신발 신기고 우리 빨 리 빠져나와서 여기(높은 지대) 와서 서 있었 거든. 거기 서 있는데 뭐 순식간에 막 그냥
불어나기 시작하고, 그때 어쨌든 젊은 사람들은 그 시간대에 4시 이후에는 다 나
인터뷰
왔어요. 거의 나온 것 같고 2층에 있는 사람
은 2층으로 올라가고, 80대가 넘은 사람들
만 못 나왔어요. 그 어르신들은 이제 물살에
도 그랬고, 뭐 금방 집에까지 막 찼기 때문
에 못 나오셨지.
그래서 그때 다 보트로 구조해 냈는데 그때
당시에는 이제 권 교수님하고 이제 젊은 분
들이 보트 쪼그만 거, 마을에 있는 거 하고, 마을에 이렇게 넓은 널판지 같은 거 있었어
요. 그거로 옮겨주고 그렇게 구조하다가, 그
이후에 이제 다들 괜찮으신지 이제 묻기 시 작하고, 그 어른들은 다 전화해서 한 사람
씩 모시고 나온 거예요.
그리고 저는 이제 우리 교인도 있었고, 그분
이 88세였는데, 막 급하니까 싱크대 위로 올
라가 계셔라, 싱크대는 그래도 안전하니까
거기 그 위로 올라가시고 나중에 119 보트
가 와서 구하고, 요 앞에 집도 어르신들이
다 못 나와서 그때 지붕 위로 자녀들이 올
라가고 보트 태워서 구했죠. 구조되는 사람
들은 엄청 춥기도 하고 하니 다 이렇게 옷으
로 싸매주고 해서 거기에 있다가 나중에 전
체 다 보트 타고 저 밖으로 나가서 그다음
에 복지관으로 갔지. 그게 한두 시간 걸렸던
것 같아요. 그때가 4시부터 한 6시 사이까지
그러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살던 집으
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처지라, 관저동에 LH
아파트로 들어갔어요. 집 지을 동안만 빌려
준 거죠. 1년간 임시 거처로 마련해준 거라,
최소 살림살이만 마련해서 살고 있어요.
작년에 그 집으로 이사 들어올 때 5톤짜리 2
개가 왔어요. 그 많은 게 다 쓰레기로 버려
졌잖아요, 이번에. 아무것도 못 건지고. 그런
데 임시주택이 11평이래요. 처음엔 11평에 어
떻게 가서 사냐고 좁아서 그랬는데 아무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가능하더라고. 거기 있는
걸 갖고 오면 못 집어넣는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여기에 맞게 놓으니까 가능한 거
야. 그래서 이제 또 이렇게 적응하다가 나중
집으로 들어갈 때 뭘 어떻게 움직여야 하
는가가 상당히 고민이 되는 부분이에요. 그 리고 거기 마을 사람들하고 떨어져 있는 거
는 너무 안 좋아요. 여기서 거기 이렇게 들어가는 게 그래서 한 정거장 걸어가 고 버스 타고 내려서 또 한 정거장 걸어 서 들어가야 하는 게 쉽지만은 않더라 고. 그동안에는 한 달 동안 계속 했어 요.
이제 우선은 제가 그 트라우마에서 좀 벗어나야죠. 어른들도 아직은 그 치료
를 다 받으셔야 해요. 우리 치료다운 치
료 못 받았는데, 왜냐하면 비만 오면 우리 내내 빗소리로 들렸잖아요. 복지 관에서 에어컨 들어가는 소리도 밤새 비
왔다, 그랬거든요. 그리고 요번에 또 비
오니까 막 그 옛날 생각들이 올라오니
인터뷰
까 막 힘들어하고 그건 어른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죠.
지나고 나니까 무슨 일이 그동안에 벌어졌었
나 싶어요. 2개월 사이에. 이제 일지를 보니
까‘53-13’이라고 기록돼 있더라고요. 53일
만에 우리가 텐트 생활을 접고 나와서 13일
이 된 거예요. 다시 우리 마을로 들어갈 때까
지 일지를 쓸 건데, 거기를 안전하게 잘해서
예전과 같이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 되었으
면 좋겠어요.
그 마을 회관 위에 붙은 거 보셨죠? 우리
그전에 녹색 농촌체험마을 할 때 붙인‘100
년 후에도 행복한 마을’이거잖아요. 그러니
까 정말 100년을 살고 자녀들이 후대에까지
살아도 그 마을이 정말로 행복한 마을이 되
었으면 좋겠어요. ●
#정뱅이마을 주민
서명숙 님
8년 전에 도안동에서 농사 짓다가 여기에 땅을 샀어. 6천 대출
받고 2억 2천에 샀지. 올해 66세야. 정뱅이마을은 소개로 들어왔 어. 도안동 개발할 때 거기 단지가 컸잖아. 거기서 농사를 한 30 년 지었어. 개발하면서 사람들이랑 다 헤어졌어. 여기는 좀 비싸서
논산, 연산 그쪽으로 다 갔지. 우리는 마지막에 나왔어. 개발돼서 돈이 나오는데 여기 땅을 사려니까 돈 맞추기가 어려웠어. 여기저
기 땅을 좀 알아보느라 1년이 걸렸어. 그렇게 정뱅이마을로 들어 왔지.
동네에 논이 있는데 여기 논물 대는 곳이 비만 오면 넘쳐서 작물 이 죽어. 그래서 비만 오면 우리 아저씨는 잠을 못 자. 여기가 야 트막해. 농로를 높이던가 해야 되는데 구청에 민원을 넣어야지.
저 밑에 집은 개울이 더 가까워서 더 심해. 비만 오면 개울이 넘치
니까 물이 들어와. 그 집이랑 우리 집은 비만 왔다 하면 물을 퍼
내느라 밖에서 왔다 갔다 해. 그날도 11시부터 비
가 오니까 소금 7자루, 양파 등등 다 올
려놨어. 여기만 찰 줄 알고. 그때 우
인터뷰 이현미 글 최정화
리 아저씨랑 그 집 아저씨랑 왔다
인터뷰
갔다 물 푸고 있었어. 새벽 4시 안 됐는데 물이 막 쳐들어
왔어. 이장한테 전화했어. 동네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
지. 자고 있었어. 이장이 방송을 했어. 그래서 사람
들이 다 나온거야. 우리 아저씨 아니었으면 노인네
들 어떻게 됐는지 아무도 몰라.
물론 사람들이 살아난 게 중요해. 나도 알아.
근데 하루 지나니까 자기들은 벌써 여기저기 지
원 요청해서 복구 시작했어. 봉사단도 여기저기서
나왔어. 근데 3일이 지나도 우리한테 전화 한 통이
없었어. 여기는 개미 한 마리가 없어. 우리가 살려준 거
나 다름없는데 좀 서운하더라고. 우리 아저씨가 너무 착 해. 이런 걸 말 못해. 내가 나서서 말하면 창피해서 못 하게 해. 근데 진짜 아무도 몰라.
복지관에 마을 사람들이 다 갔잖아. 회의를 했어. 내가 돈이 없으면 나
도 보태겠다고 했지. 내가 제일 처음 했어. 후원이 어디 있어. 나는 협조
를 다 했는데 다들 고마운 줄 몰라. 그렇게 하고 3일 됐는데 파리 한
마리도 없고, 전화 한 통도 없어. 말 한마디 없었어. 하우스 하는 집이
한 6집 돼. 내가 왕따도 아니고 시골 인심 왜 그러냐고 목소리를 높였 어. 그랬더니 나보고 성질 급하다고 기다리라는 거야. 우리도 급해. 이
건 생계야 생계. 동네 사람들이 우선 자기들 다 하면 해주겠다는 거야.
그건 말이 안 되지. 여기까지 쓰레기가 쌓여서 얼마나 불편한 줄 알아?
쓰레기를 여기부터 저기까지 막 버렸잖아. 내가 복지관에서 딱 10일 자
고 나왔어. 그 이후로 이 집에서 잤어. 뻘이 엄청 쌓여서 밤에는 삽으로 긁었어. 낮에는 뜨거워서 못해. 얼른 작물을 심어야 또 팔잖아. 우리 아
저씨하고 내가 망가진 거 다 끌어내고 정리해서 다시 심었지.
이런 문제가 터지면 서로가 힘을 합쳐서 헤쳐 나가야 하는데, 너무 자 기들 위주라 안타까워. 그저께 밥을 타러 회관에 갔어. 할머니들이 계
셔. 할머니들이 왜 그 집은 회관에 오지도 않고 회의하면 안 오냐고 해. 내가 좀 복받쳐서“어르신 저희가 해당이 있어요? 저희 협조 많이 했잖
아요. 냉장고도 다른 사람들은 다 나왔잖아요. 저는 무슨 해당이 되 요? 우리 제외시켰잖아요.”라고 했어. 할머니들이 우리 남편이 살려준 거 알아. 다 이해해 이러더라고. 내가 진짜 공치사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저씨가 살려줬으면 다들 그러는 거 아니라고 했어.
마을 청년회에 내가 그랬어.“다른 거 안 바라고 구청장도 오지 않았 냐. 동네 끝 하우스들도 신경 써 달라 한마디만 해달라”고 했어. 나한 테 청년회 들어오라고 하면서 여태까지 모은 건 그냥 내버려 두고 12월 까지 6만원씩만 내래. 그래서 나는 좋은 마음으로 청년회에 들었어. 회
비도 현찰로 6만원 줬어. 그랬더니 카톡방에 초대를 해놓고, 자기들 이 야기만 하는 거야.
4일째 되는 날 젊은 경찰들이 왔어. 원래 봉사자들이 와서 도와주면 오전에만 하고 가. 우리집 냉장고가 4대였거든 농사를 지으면 여기서 먹고 자야 해. 여름에는 낮에는 뜨거우니까 새벽에 일해야 하거든. 냉장 고가 다 엎어졌으니 음식물 쓰레기가 많아. 얼린 다슬기, 얼린 장어 날 씨도 뜨거운 데 썩잖아. 구더기도 생기고. 오전에 온 경찰이 이거 심각 하다고 오후에 또 온거야. 어지간한 건 이틀 만에 치웠어. 그 다음 날 군인들이 왔어. 한 30명 왔나 봐. 어제는 논산에서 했 대. 거기는 사람도 죽고 상황이 더 심각하더래. 그 군인들이 무거운 거 번쩍번쩍 들어서 치웠어. 근 데 문제는 내가 포대자루에 필요한 물품을
담아서 다 꺼내놨어. 근데 이 사람들도 그걸
정리해 둔건지 몰라. 옷이며, 쌀이며, 음식이
며 다 그냥 차에 실어 버려. 그럼 짬뽕이 되
잖아.
나는 우리 아저씨한테 고맙다고 누가 말 한
마디 했으면 좋겠어.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
렇게 됐다고 미안하다 한마디라도 해줬으면
좋겠어. 우리 딸이 무선청소기 보내준 거 며
칠 안 됐어. 내가 고관절이 안 좋으니 걸레질
엎드려서 하지 말라고 청소기를 보냈어. 냉
장고도 사주고, 전기밥솥도 고장 나면 사줬
어. 근데 그걸 다 버렸지. 그날 우리 아저씨
가 불러서 일단 개만 데리고 나갔어. 여기 위
에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너무 아까
운거야. 우리 아저씨가 저쪽으로 가길래 또
들어왔지. 어두컴컴한데 물이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정신이 나가서 이것저것 침대에다 올
리고 식탁에다 올렸어. 전기밥솥, 전기장판
다 좋은 걸로 사줬는데 얼마나 아까워. 방
안에서는 우리 아저씨가 밖에서 부르면 안
들리거든. 정신없이 챙기는데 갑자기 뒤를 확
잡아채. 우리 아저씨가 이게 미쳤나 하면서
끌고 나간거야. 그때 이미 물이 막 차고 있
었어. 우리 딸이 나보고 아빠가 목숨 살려줬
으니까 잘하래.
이런 일이 생기니까 요즘 나도 쌈닭이 되고
인상도 나빠졌어. 이게 진짜 괴로워.
우리 딸이 어제 전화를 했대. 이
집이 무허가야. 그러니까 수
저 하나 지원이 없는 거야.
지금 나온 거 농지 보험
금 150만원하고 영세민
아파트 밖에 없어. 3개월
거기 임시 거주하래. 우리
딸이 이제 그래 앞으로 지
구 온난화 때문에 해마다
더 심해질 건데 너무 겁난
대.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
죽고 싶다가도 또 그렇
게 살고 싶어. 지금 전세
로 집을 알아보고 있어.
나는 다른 건 없고 하우스만
원상복구 해주면 좋겠어. 이거 4
중이야 겨울에 기름을 떼서 4중으로
했어. 커튼도 비싸. 저쪽 한군데는 완전히
망가졌어.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어.
보험도 밖이 무너져야 해줘. 안만 무너진 건
다 소용없대. 보험이 별개야. 그것도 100%는
안 나와. 어디서 나온 건지는 몰라도 150만
원 받았어. 우리 딸이 집을 해줘도 여기서 살
아야 해. 농사를 계속 지어야 하니까. 과수
원도 멀어서 문제야. 이제 어쩌다 비
오면 무서우니까 농사짓는 사
람들은 출퇴근 못해. 여기에
조그맣게 원막을 짓고 싶
은데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떡해. 걱정돼. 12월까지
원막을 허가해준다 해서
지금 기다리는 중이야. 농
막은 6평까지 가능해. 농
사를 지으면 컨테이너를 갖
다 놓으려고 해도 허가는
받아야되는데 집도 고처야
하고 이중으로 돈이 들어 가.
통장이 이번에 욕을 많이
얻어먹었어. 사람은 좋은데
처신을 잘 못해. 통장이잖아.
이런 상황에서는 누락되는 사람
없이 자기가 잘 챙겼어야 해. 근데“조
금만 기다려라,”“사람이 우선이야, 집이 우
선이야”이렇게 나오는데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어. 여기에 8년을 거주 했었어도 불법이라
니까 나는 할 말이 더 없는 거지.
통장 막내 사위가 유튜브에 연락했어. 그 보
겸티비 말이야. 이 사위가 보겸 티비를 불러
서 통장 집을 찍어갔나봐. 그 집 방이 쓰러
진 걸 찍어갔어. 내가 보니까 통장 마누라
랑, 딸이 울어 그걸 유튜브에 올렸는데 1억
이 들어왔대. 어떤 사업가가 후원했대. 1억이
들어와서 그걸로 냉장고, 세탁기 등을 보내
려는데 27가구라고 했대. 거기에 우리를 넣
었어봐 얼마나 감사할 일이야. 근데 못 받
았고 우리를 안 넣은거지. 원래는 쉬쉬했다
는 말이 있어. 근데 유튜브에서 1억을 받았
다고 나온거야. 나중에 회관에서 밥을 먹는
데 냉장고 필요한 사람 냉장고, 세탁기 필요
한 사람 세탁기, 에어컨 필요한 사람은 에어
컨, 이렇게 하나씩 나눠줬대.
8년을 살았는데 마을에 기대도 없고 나대로
그냥 살 거야. 그냥 어른 보면 인사는 하지
만 그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아. 나는 빨리 이
땅 팔리면 나가고 싶어. 근데 우리 아저씨랑
내가 공동명의로 되어 있어. 우리 아저씨는
절대 못 판다고 해서 엄청 싸웠지. 나는 새벽
에 나가서 이거 팔아야 하고 와서 농사일도
해야 하고 혼자 하려니 너무 힘들어. 이제 좀
쉬고 싶어. 임대를 했으면 때려치워도 되는데
땅을 사놔서 골치야. 이제 팔려야지 나가지.
지금 이 모든 게 드라마 같아. 드라마로 만
들어도 재밌을 것 같아.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성은경, 조영옥님 부부
전날부터 밤에 어찌나 비가 오던지, 밤에 불을(아궁이) 떼 놓으
니까, 뜨끈뜨끈하지. 물 차 가지고 구조해 놓은 사람들인데, 노
인네들이 달달달 떠는데, 뜨끈뜨끈한 먹을 거 다 먹이고 커피 한
잔씩 먹고, 뜨끈한 방에서 이불 덮고 하니까, 노인네들 안 그랬
으면 큰일 났어.
여기서 마을 사람들 나가고, 이 사람이 8시 넘어서 나갔고 보트
타고 나갔고, 물 완전히 빠진 거는 한 10시 정도, 내가 여기서 제
일 늦게 나갔어. 전기가 나가버리니까 있을 수가 없지. 체육관에
가자 해서 그래 갔더니, 딱 들어갔더니, 여기(집)는 물 안 찼는데
뭐 하러 왔냐고~ 그래서 다시 와버렸어. 그냥 집에 와서 촛불로
살았어.
여기서 촛불로 열흘을 살았어. 전기 나갔으니까 냉장고는 안 되
지, 음식 다 썩고 내버렸으니까. 우리 아들이 가수원 살아서 짐을
실어다가, 차로 실어다가 거기다 갖다 놨다가 전기해달라고 쌈
인터뷰 김윤정
글 김윤정
박질 해 가지고 전기 들어서는 다시 실어왔어. 내가 한 열흘은 쫓 아 댕겼어.
그런데 마을에 오니께 뭐 마을 여기 저기 봉사하는 사람들, 어디
있을 데가 없네. 천막도 칠 데가 없어가지고, 이 마당하고 여기하고
다 내주고서는 군인들 다 와서 그랬지. 여기서 모여가고 샤워하고
다 했지 뭐, 군인들이. 몇십 명, 몇백 명 자원봉사자들도 와서 쉴 데
도 없고 그늘도 없고, 그러니까 다 위로 와서 (쉬려고) 여기다 텐
트 같은 거 치라니까 어따 쳐. 저기 치고 여기 비 안 맞으니까 거기
다 내가 파레트 깔고 장판 의자, 손자가 갖다 놓은 거 깔아주고, 자그마치 300명이나 된다는데, 한 번 오면 몇백 명씩 오는데. (손
자 생각에) 나도 새끼가
있으니께. 구청에서도 와서 머리 감 고, 등목하고,“물 써도 돼요?”그러는데, 물 쓰지 마요, 그래? 하
하하~ 그냥 다 하고 닦고 가서. 그 이번에 경찰서에서 와 가지고 서 다 닦고서는,“닦아도 돼요?”그러면 닦아도 된다고 하지 뭐라
고 그래. 어쩔 수가 없어. 나도 자식들이 나가면 다 신세지지. 대신
쓰레기는 못 버리게 했어. 가지고 가라 그랬더니 쓰레기는 싹 쓸고
갔어. 저녁 때 가고 나면 내가 물 청소하고.
여기 원래 장마지면 물 바다지. 세번째여. 84년도, 94년도. 94년도
에는 저 뒤쪽 뚝 터졌고 올해는 여기 터지고. 10년마다 남아있다는 데 좋은 게 뭐가 있어? 이번에가 더 심했지. 옛날에는 여기 물 들어
차면 노인네들 손 끌고 올라오고 쌀 지고 올라오고 텔레비전 들
고 올라오고, 테레비만 머리에 이고 오는 사람도 있었어. 텔레비전, 그때 비싸잖아. 옛날에는 노인네들 그냥 다 이고 왔지. 팬티 바람
으로 올라오기도 하고.
그때 당시는 맨 물 다리가 없었어. 지금 여기 들어오는 다리 있지?
이거 놓은지 얼마 안 돼. 그때는 건너 당길 데가 없고 철로 밑으로
당겼어. 그러면 비 오면 못 나가요. 여기는 섬이여.
그 당시에는 비 오면 나갈 데가 없어. 그러면 버스 타려 해도 철로
넘어 다니고, 기차 타려 해도 철로 넘어서 원정리로 댕겼어. 그전에 기차가 댕겼으니까 원정 버스 들어온 데도 여기는 별로 들어온 때 가 없으니까. 버스가 몇 년 됐냐, 다리 놓고 다녔구나. 참 이 다리
놓고 다녔어, 버스가. 그때는 이게 다리 놓는 바람에 지금 많이 여 기 교통이(좋아져서) 원정리로 새평리로 지금 일이 다 돌아왔다 가 는 거지. 안 그러면 옛날에는 (건너갈) 길이 없었어. 장마지면 섬이
여, 못 나가.
만약에 애들 학교 가면 비 온다, 비 떨어진다, 그러면 가서 데리고
와요, 기성초등학교 가서. 물이 불으면 못 들어오니까, 물 불는다, 그러면 다 데리고 와요. 그렇게 하고서 그냥 동네 사는 애들 다
데리고 와. 우리 손주도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러니 그때는 갈등이 어딨어. 그때는 젊은 사람들이니까 다 빨아서 입고, 나갈 데도 없 으니까. 밥해 먹고. 전에 내가 당당했었어. 먹을 것 좀 있으면 갖다 주고.
옛날에 다리 없을 때는 아무도 (이사) 안 왔는데 다리 놓고 나니 까 들어와. 나이 들어 싹 돌아가시니까 (빈집이 생기니까). 땅 사고 집 짓고 살자 그러면서 그 후로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고, 벽화 체 험 마을하고. 그거 할 때는 마을 일에 관여를 안 해서 몰라요. 그
런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나 하는 거지 뭐.
옛날하고 많이 달라졌어요. 내가 많이 갖다줬는데 이젠 나도 안햐. 미리미 갖다주지. 수해 지나고 할머니들 식구 중 아무도 고맙단 사람도 없어. 말을 들으려고 하는 건 아녀도. 인심이 옛날 같지 않 아요. ●
#정뱅이마을 주민
송민용님
나는 2013년 10월 17일에 이사 왔어요. 그 전에 집수리하러 왔다
갔다 하다가 그날 이사 들어왔어요. 내 고향은 청원군이었는데, 지금 여기 동네 마냥 냇가가 흐르고, (고향은) 기차만 안 다녔지, 여기가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이 들어가지고 선택하게 됐죠. 그때
는 은퇴 전이라 출퇴근하기에 불편했어도 조용하고 좋았죠. 신 탄진까지 1시간 걸리니까...아이들은 다 출가하고 집사람하고 둘
밖에 없어요. 집사람이 (텃밭을) 잘하더라고. 뭐 고구마, 도라지, 콩, 깨… 좀 잘되면 이웃들하고 나눠 먹고 했죠. 그렇게 10년을 살고 이런 물난리는 처음이었죠. 내 평생 처음. 이 게 비가 많이 와 가지고 또랑에 많이 흐르고 하는 거는 있었죠. 한 3년 전에 거기 물이 너무 차서 많이 흐르니까 집사람이 다리 건널 때 무섭다고 그랬었죠. 근데 올해는 뭐 그렇게 찰랑거리지 도 않았는데도 터졌거든.
그날은 내가 4시경에 깬 것 같아요. 밤새 비가 많이 와서 잠을
인터뷰 윤지영 글 김윤정
설치다가 깨서 누워있었거든. 그때 밖에서 방송이 나왔어요. 비가 많이 와서 둑이 범람할 것 같다고 통장이 방송을 했어요. 근데
인터뷰
밖에서 물이 넘쳤다고 막 어수선 해 가지고 나와봤죠. 비도 많이 오고 그래서 나왔는데 이미 둑이 터져가지고 4시 반인가? 4시 반에 나왔는
데 벌써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둑이 터져서 물이 들어오기 시
작하는 거죠. 물이 막 들어와 가지고 이제 다른 건 하나도 못 챙기고
이제 집사람 노트북하고 제 노트북만 높은데다 올려놓고 그대로 나
왔어요. 노트북만 올려놓고 나머지는 신경 못 썼죠. 그거만 올려놓고
이제 나와서 뭐 좀 해놓을 거 없나 하고 보는데, 뭐 이미 물이 들어오 고 있었으니까요.
집은 이제 그래놓고 일단 나왔더니 누군가가 차를 빼라는 소리가 있
어 가지고 두리번 두리번 하다가 집사람 차
가 마당에 있었는데 얼른 빼서 저기 위에 가
져다 놨죠. 집사람 차가 마당에 있었고 제
차는 여기에(마을회관 앞) 주차장에 있었으
니까. 두 대가 여기에 더 있었는데 키가 없었
어요. 키가 없어서 그 차들은 못 올렸어. 키
가 없어서 저쪽에 딸내미 차, 전기차하고 있
었는데 문은 열어줬는데 키가 없으니까 운전
이 안 돼. 그래서 침수됐지.
그때 변압기 터지는 소리가 딱! 하면서 깜빡
깜빡 두 번 정전이 됐다가 켜졌다 하고서,
변압기가 넘어가면서 뻥 소리 나더니 그때서
부터 이제 정전이 다 돼버린 거죠. 처음에는
핸드폰 불빛으로 봤고, 좀 지나고서는 그것
도 필요가 없었어요. 눈으로 확인할 정도로
날이 밝아지니까후레시 같은 건 필요가 없었
고, 그때서부터는 차도 올리고, 또 물이 여
기 무릎 밑에로 있었으니까 다시 한 번 집에
들어갔다가 노트북을 챙기고, 뭐 또 챙길 게
없나 이것저것 하다가 물 들어오는 속도가
좀 빨라 가지고 다시 나왔지요.
그리고 우선은 이제 동네 사람들이 한 사람
씩 저기 저쪽에 권 교수님 올라가는 길 있잖
아요. 거기로 이제 다 모였죠. 모이면서 봤더
니, 동네 사람들은 이제 나오고 있고, 그런데
어르신들이 못 나왔죠. 그때는 이제 이미 물
이 차 가지고 저기 포크레인 하시는 분, 지금
도 저기서 일하고 있는데, 그 양반이 자기 어
머니하고 옆집 아주머니하고 두 분이 거기 있
다고, 자기 어머니가 여기 계시니까 막 저기
서 그냥 막 동동거리다가 그러다가 포크레
끌고 들어오려고 시도하다가 못 하고 이
헤엄을 쳐서 온 거죠. 헤엄쳐서 와 가지
분을
일단 대피시켜놓고,
여기서는 이제 저쪽에 안동현씨하고 권
우리가 거기 있었으니까 이제 구 하러 가야 되는데 우리한테 아무것도 없었
어요. 물은 세게 계속 들어오는 거예요. 마
침 다시 권교수님이 집에 올라가더니 어린이
용 보트, 놀이용 보트 있잖아요. 그거 하고
구명조끼 2개 가지고 와서 안동현씨하고 권
교수님이 입고 이제 시도를 한 거죠. 첫 번째
시도 때는 가다가 안돼서 돌아왔다가 다시
집 뒤쪽으로 이렇게 들어가서 보트로다가 한
분을 모시고 나왔어요. 보트로 한 분을 모
시고 나오고 다시 들어갔죠. 그때는 평상이
하나 떠내려 와가지고 거기다가 어르신 한
분을 모시고 나왔어요.
그때쯤 구조대도 왔어요. 구조대가 왔는데,
수해 현장에 오는데 작은 보트 하나 없이
왔어. 수해가 나면 무조건 보트가 필요하죠.
그게 좀 아쉬웠죠. 그러니까 이런 데는 큰 것도 필요가 없어요. 나중에 큰 동력
보트가 왔는데, 그거 필요도 없어요. 그거 동력도 끄고 사람들이 끌고 다녔어
요. 그래서 그렇게 구조를 하고 그 이후에는 보트가 큰 게 왔죠. 큰 게 와가지 고 이현구 씨가 저기 자기 집 옥상에서 이렇게 하고, 저기 다리 있는데 거기하고
저기 정자하고 우리 여기에 있는 사람들하고 서로 연락을 해서“누구네 집에 아
직 어르신 계시다, 전화해 봐라”그렇게 해가지고 그때부터 소방 구조대들이 들
어가서 구조를 하는거죠. 위치를 알려줘서 그 집에 어디 계시니까 모시고 나와 라, 이렇게 해서 다 모시고 나왔고, 여기 처음에 구조한 어르신 두 분도 이분들 (권선필, 안동현)이 헤엄쳐서 안 갔으면, 그 두 분 다 돌아가셨어. 10분? 10분 사이에 다 그랬으니까.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이동 차량 타고 복지관으로 갔 어요. 비가 그치니까 물이 빠지더라구요. 저는 119 대원들이 타는 버스를 타고 갔어요. 장비도 있고 그런 119구조대 버스였고, 또 몇 개 차량을 이용했죠.
언제 들어왔는지 가물가물한데, 자기 차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들어왔어요.
우리 집은 흙집이라 창 밑으로 흙이 다 무너졌어요. 아궁이 떼는 장작도 있고,
팰릿 보일러도 쓰는데 장작도 다 널브러져 있고, 팰릿 1.5 톤 정도 있던게 다 못 쓰게 되버린거죠. 일단 마당에 어질러진 것들을 한쪽으로 치워놔야 안에 있는
걸 확인을 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구요. 장비 같은 것들이 필요하지, 바로 자원봉사자도 들어올 수도 없더라고. 너무 어질러
져 있으니까 뭐부터 해야 될지 몰랐죠.
마을이 다 침수가 됐으니까 집에
서 쓰레기가 많이 나올 거 아니에
요. 구청에서는“이 쓰레기를 여기
다가만 버려라”하고 장소를 정해
주는 건 좋아요. 그런데 집집마다
정리하는 시간도 다르고 상황이
다 다르잖아요. 그런데 행정에서
는 우리가 더 해드리고 싶어도 예
산도 없고 하니 언제까지만 해줄
수 있다. 그러니 그 안에 다 갖다 놔라. 머 그런식이었죠. 아니 치우
는 과정에서 폐기물은 계속 나오
잖아요. 이런 것들을 좀 유연하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이번 일 겪어보니 행정에서도 매뉴
얼이 있는건지 모르겠고, 사람이
사는 거 내가 이렇게 되면 뭐가
불편하지? 아마 이런 생각을 하
고 업무를 보면 아마 조금이라도 좀 도움이 되는 일을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
지는 않은 것 같아요. 보면 저기 체육관 생활하고 텐트 생활을 하면서 거기 구
청에서 나와서 있거든요. 제 눈에는 웬 감시자가 나와 있나 이런 느낌이었죠. 공
무원들도 대부분이 친절하게 해요. 그부분에 대해서는 감사하죠.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그렇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는 거죠. 한참 예민해져 있는 상태에서 들
으면 더 서운한 거고. 그중에서 꼭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무슨 대단한 것처럼
뭐 하면 못하게 하고 그거 왜 필요하냐고 그러고 뭐 이제 그러니까 식사하는 것
도, 왜 더 가져가냐고 하고, 그거 더 가져갈 사람이 누가 있냐고! 사실 그거 두 개 먹을 사람 없거든요. 하나 먹기도 지금 힘들 상황인데 누가 몇 개를 먹는다
고 그래요, 참내.
그래도 몇몇 자원봉사 오셔서 위로해주신 분들이 고마웠어요. 마을 사람들도
이제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은 더 가까워진 거 같아요.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을
식구라 하잖아요. 진짜 식구가 됐죠. 이제는 누가 뭘 좋아하는지, 누가 뭘 싫어
하는지 그런 것도 다 알게 되고, 그래서 싫어하는 것을 그 사람 앞에서는 조심 하게 되고, 서로를 걱정하고 또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리고 제가 이번 재난을 겪으면서 느낀 게, 아 나도 이제 이런 재난상황이 생기 면 좀 진정성을 가지고 봉사활동을 해야겠다고 느꼈어요. 회사 다닐 때도 봉사
활동을 다니긴 하지만, 형식적으로 하는 것도 많아요. 그런데 내가 직접 겪어보 고 그 당사자가 돼보니 이게 진짜 그분들한테 도움이 되는 자원봉사를 해야겠 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렇게 누구한테라도 말하고 나니 좀 낫네요. 추석 앞두고 집수리에 마음만 급
해지고 답답했는데, 나중에 아궁이도 다 고치고 따뜻한 온돌방에서 또 인터뷰 할 수 있으면 더 좋겠네요. ●
#정뱅이마을 주민
안 동영님
저는 할아버지 때부터 살았어요. 밖에서 살다가 2019년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혼자 계셨는데 2022년에 수술하셔서 혼자 생활하시기 어렵고 하니 아내에게 정뱅이마을로 들어가자고 했더 니, 흔쾌히 허락해 줘서 다시 들어왔어요. 저는 원래 어릴 때부터
나중에 나이 먹으면 다시 들어온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들어오는 시기가 조금 빨라진거 뿐이었지요. 근데 물난리가 나가지고…
10일 날 새벽에 나는 몰라서 자고 있는데 깨우더라고요. 얼마
나 비가 왔는지 웅성웅성하는
요. 새벽 4시에 나와서 30분 사이에 물이 찬 거예요. 어머니를 마
을 높은 곳에 위치한 주민 집에 모셔서 차 빼주고 왔다갔다 하
며서 불과 한 20분도 안 걸릴 거예요. 그 사이에 쳐다보니까 벌 써 저희 집 길 쪽으로 물이 들어오길래 내 차를 빼고 최재현 선배 가 따님차도 옮겨달라고 하더라구요. 전기차 산지 한, 두 달 됐 나 원격 시동을 해가지고 차를 빼려고 했는데 안되더라구요. 우
인터뷰 박창숙 글 강영희
왕좌왕하다가 시간이 지나니까 안되겠다 하고 아내 차 빼러 갔 더니 그사이에 금방 물이 찬 거예요. 차가 모닝인데 앞쪽부터 물
에 잠겨 있었어요. 차에 얕게 물이 찼지만 중
간에 시동이 꺼질 꺼 같아서 포기했어요. 모
닝을 새 차로 구입한 지 2년밖에 안 됐는데
침수는 무조건 폐차해야 된다고 하더라고
요. 그러고는 우리 개를 먼저 풀어놨어요. 권
교수님이 어린이용 보트를 가지고 와서 둘이
서 구명조끼 입고 물속에 들어갔어요. 겁났어
요. 물이 이렇게 셀 줄 몰랐어요. 그때는 물
이 세돌아쳐서 물살이 엄청 세더라구요. 그래
서 보트 타고 갔는데 땅도 안 잡히지, 어디
지역인지 모르지, 나는 그래도 우리 동네니까
대충 알잖아요. 지붕 밑에 바로 어르신이 계
셔서 모시고 나와서, 그 보트로 가는데 물살
이 세서 겨우 잡아서, 수영해서 모시고 나오
니까 그 옆에 또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밭에
농업용 전기가 항상 연결되어 있잖아요. 그
게 얕아서 넘쳤으니까 전기가 끊겼다고 하더
라구요. 안 끊겼으면 거기 감전되잖아요. 권
교수님 보트인지 소방대원 보트인지 그거 타
고 5시인지 해 다 뜨고 7시가 뭐 8시 넘었을
걸요. 기억도 잘 안 나는데 그거 타고 나갔
죠. 사람들 구하는 거는 교수님(보트) 거 그
걸로 했고.
그러고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출입 통행
금지를 시켰어요. 그때는 현실에 와닿지 않 고 이게 물난리구나 그랬어요. 텔레비전 보
면 남 얘기인 줄 알았어요. 실제로 내가 당해
보니까 이거는 진짜 두 번 다시는 할 게 아
니더라구요. 다음 날인가 집에 왔어요.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왜냐면‘그냥 복구해야 된
다’그 생각은 했지만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으니까요. 와서 보니까 다 뒤집어진 거야.
창고 안에 있는 냉장고, 김치냉장고 다 뒤집
어지고, 방 안이고, 밖이고 간에 각종 농기
구 다 잠겨서 하나도 못 써요. 창문과 현관
문으로 물이 들어와서 얼마큼 찼는지는 모
르겠지만 거실이고 다 벌이고, 흙탕물이잖아
요. 악취가 말도 못할 정도로 나더라구요.
전기가 몇 일 나갔으니 음식 다 상하고 냄새
도 많이 났어요.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어머님 빼고 저 하고 아내, 둘인데 자원봉사자가 여러 사람
이 와서 도와주니 도움을 엄청 받았어요. 처
음에는 엄두도 안 났지. 안에 있는 거는 둘
째 치고 밖에 있는 거 남아 있는 게 없었으니
까, 다 떠내려가고 지금도 못 찾은 거 많아
요. 피해액으로 따지기는 그렇고 시간이 지나
니까 좀 덜하긴 한데 처음에는 뭐 정리를 하
는데 그때 당시에는 그게 아무 생각도 안 나
요. 집에 나무 절구가 있었어요. 작은아버지
가 물어보시더라고요 나무 절구통 있는지.
나는 무심결에 물어보니까 있다고 대답했어
요. 그걸 이제 좀 차분하게 정리해야 되는데
그때는 그게 아니야. 병원 가고 또 자원봉사
자분들 많이 오셔 가지고 일일이 물어보고
그러니… 보고 막 버리기도 해서 어디로 갔는
지도 몰라요. 어머니가 수술하셔서 6개월치
약을 받아왔는데 그게 어디 갔나 없는 거예
요. 어머니가 당장 먹을 약이 없어서 다시 받
으러 가니까 비보험으로 한 달치 약을 받고, 특별재난이 되니까 의료보험적
용이 되더라고요. 약이 떠내려
갔는지, 버렸는지… 정리하면
나올 줄 알았는데 안 나오더
라고. 저 같은 경우는 집 안을
시작하는데 다 걷어냈어요. 일
단 다 꺼내놓고, 물을 먹었으
니까 다 끄집어내는데 진짜 갑
갑하대요.
첫날 우리가 피해입은 날은 무
조건 철수했고, 그리고 두 번
째 날은 도로가 벌이여서 정비 하고 있었어요. 한 2~3일 정도
있다가 자원봉사자가 왔을거
예요. 그때는 여자 자원봉사자
하고, 가까운 지역사회, 농협, 부녀회에서 왔어요 같이 물건
들을 걷어냈어요. 처음에 복구
할 때 절실했죠. 물 청소 다 해
주고 더운데 피할 곳도 없고,
점심 먹을 데도 없고 한데 다 인터뷰
같이 해서 치운 것 같아요. 어떻게 치웠나 몰
라, 그냥 닥치는 대로 자원봉사자들이 물으
면 알아서 하세요, 다 버리세요, 주인도 사실
은 경황이 없고요. 가전제품이 물이 차면 못
쓴다 그래서 다 버렸지요. 정리할 당시에 냉
정하게 생각하고 정리했으면 되는데 경험이
없었어요. 가전제품 기본적인 것만 사도 천
만원 이상 들어가지, 가구, 옷 사야지, 하다
못해 밥그릇 사야 하잖아요.
복구를 하는데 3분의 1은 치우는데 집중하
고요, 벽돌이나 이런 데에 물이 스며들어서
말리는데 시간이 무지하게 오래 걸려요. 끝
마무리는 리모델링이라서 시간이 얼마 안 걸
리더라구요. 한 달 이상 집 건조 하는데 썼
는데 고체연료, 보일러 불 때고, 제습기 틀
면 물이 꽉 차서 중간에 제습기가 꺼져 있고,
단시간이 아니라 장시간을 가지고 서서히 말
려야 하더라구요. 서구청에서 집으로 빨리
들어가라고 하니까 공사업자도 마음이 급한
데 덜 말린 상태에서 하면 나중에 하자가 생
기면 내가 책임 못지니 충분히 말리고 들어
가라고 하더라구요. 처음에 우리 집이 리모
델링을 제일 먼저 시작했는데 완벽하게는 아
니지만 어느 정도 말리고 공사하느라 다른
집보다도 늦게 끝났어요.
복구하는 과정에서 서구청, 동사무소 나도
공무원이지만 참… 개인적으로 볼 때 이런
상황이면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있어주면 좋 잖아요. 처음에는 TF를 설치해서 해 준다
하더라고요. 잠깐 와서 피해 상황 보고, 어
느 정도 해주고 철수해 버리고, 서구청에 물
어볼 것이 많은데, 지원을 해달라고 해도 오
지도 않고, 물어보면 대답도 안하고 복지관
으로 담당부서에서 몇 명이 왔지만 시원하게
답변도 못하고. 책임자도 아닌데 위에다 보
고해서 해준다고 하지만 답변은 함흥차사
예요. 우리가 무슨 도둑집단도 아니고, 필요
하거나, 앞으로 계획을 물어보면 대답도 안
해주고 소통이 안되니까 조금 서운하더라구
요.
폐기물 치우는 데도 몇 번에 걸쳐서 치우고
말도 못해요. 이해가 안돼요 어떻게든 빨리
마무리만 지을 생각만 하지, 우리 주민들 생
각은 안중에도 없더라구요. 지원이나 경청하
는 과정에서 우리는 피해를 당했으니까 절실 하잖아요. 주민 의견을 듣고서 자기네가 해
주던지 아니면 지원을 하든지 해야 하는데
와 보지도 않고, 무슨 얘기를 해도 시원하게
답도 안 해주고 재난과장이나 와야 얘기를
하는데 소통되지 않더라구요. 복지관에 서구
청장 한번 왔다 갔어요. 저도 출근하고 그
래서 못 봤는데 최지연 구의원 그분은 열성
적으로 해주세요. 우리가 필요한 거, 궁금한
거 얘기를 하면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 다음
날이나 그 이후에라도 설명을 해 주더라구
요. 그리고 장종태 국회의원님이 주민들하고
수시로 몇 번 와서 얘기하고 일부 개선되었
어요.
나는 이번 계기로 최우선은 제방 무너지지
않게 보수하고요, 도시 속에 농촌은 여기밖
에 없어요. 마을에 변화를 조금 줘서 도시
사람들이 들어와서 즐겁고,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런 상황을 겪으니까 평상시에는
잘 지내는 것 같아도 어딘지 모르게 감정들
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복구가 어느 정도 되
면 동네 주민이 다 모여서 마을 잔치가 아니
고 뭐 화합의 장으로 모인다고 하더라구요.
좋은 생각이지요. 큰일도 당했지만 앞으로
더 잘 살아보자는 취지에서요. 지금 과
도기라고 보면 돼요. 연세가 많으신 어
머님, 부모님 세대들이 계세요. 그리고
젊은 사람, 외부 사람 들어오고 바뀌는 과정이잖아요. 모여서 대화하고, 소통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고요. 재미
있게 살아야지요
그리고 제일 고마운 분이 빨리 신고하
신 하우스 임유순 씨라고, 그분이 하우
스를 하는데 비가 오니까 걱정돼서 잠
을 못 주무신대요. 그래서 그분이 뚝방
에 물이 제방을 넘칠 것 같으니까 대피
할 준비하라고 통장님한테 얘기했다는 거예요. 방송 좀 해달라고 그래서 방송
을 했대요. 나는 못 들었지만 자느라 고. ●
#정뱅이마을 주민
오재월님
내 이름은 오재월이야. 25세에 여기로 시집왔어. 지금은 88세야.
내가 9남매 막내였거든. 오빠들이 결혼을 늦게 해서 결혼이 늦은 편이야. 그 당시에 역혼은 흉이었거든. 옛날에는 아무리 싫어도
부모들이 하라면 해야 됐지. 그래서 저기 공주 마곡사서 여기까
지 시집 온거야. 여기 산지도 63년 됐네.
옛날에는 어려웠어. 아까 음식 버려지는 게 아깝다고 했잖아. 그
때는 먹을 것이 없었어. 가난했지. 길도 척박해서 비가 오면 발이 빠져서 못 다녔어. 포장이 안됐지. 보리밥만 먹다가 통일벼
면서 쌀밥을 배부르게 먹게 됐지. 그런 시절이 있어서 그런지 음 식 버려지는 거 보면 아까워.
같이 살던 아저씨가 돌아가신지는 5년 됐어. 나도 아저씨 있던
그 병원에서 수술했어. 아들 며느리가 가수원에 살았는데, 나 혼
자 거동 못한다고 들어왔어. 이사를 아주 온 건 아니고 들어와서
밥 해주고 돌봐줘. 지식은 아들 하나에 딸 넷이여. 그 때는 아들
적고 딸 많이 낳아서 대우를 못 받았어. 그런데 지금은 좋아.
인터뷰 문서영 글 최정화
우리 집이 지은 지가 10년 됐어. 얼마 안됐지.
침수당한 날 우리 며느리가 마당에 차를 대
놨는데 대가리가 먼저 물에 잠겼어. 그랬더니
차 안에 있는 것이 물위로 다 올라오더라고.
우리며느리가 지금 출근도 못하고 계속 치
우고 있어.
침수당한 날 핸드폰이 하도 울려 대서 잠을
일찍 깼어. 안내 문자가 계속 들어왔어. 잠에
서 깼는데 방송을 두 번 하더라고. 세 번째
하는 방송에 용촌동 주민 대피하라고 한 거
야. 그 통에 정신을 차려서 아들, 며느리 깨
웠지. 바로 나왔어. 권교수 집 옆에서 피신해
있다가 복지관으로 가는데 보트에 탔거든.
근데 물 없는 곳으로 가니까 보트가 앞으로
안 나가. 내려서 업혀갔지. 도로 있는 데까
지 겨우 가서는 자빠졌어. 업은 사람도 나도
뒤로 자빠졌지. 기자들이 막 모여들었어. 그
렇게 복지관으로 갔어. 딸이 나중에 내 등에
상처 딱지가 있다는거야. 여름이라 옷도 얇
잖아 넘어지면서 긁혔던 모양이야. 복지관에
있는데 딸들이 오더니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해. 내가 싫다고 안 간다했더니 일요일에 와
서 자꾸 가자는 거야. 따라 가서 한달 넘게
있다가 여기 온지 얼마 안되. 복지관에서는
사흘 잤어.
몸은 복지관에 있어도 마음은 온통 마을에
와있었지. 집에 와보고 싶은데 차가 못 들어
가서 안된댜. 걸음도 못 걷고 하니 차가 들
어가야 하는데 못 간다는 거야. 내가 왔으면
뭔가를 건질 텐데 다 버린거야. 농사지어서
광에 쟁여놓은 농산물 물이 들어가 다 버렸
어. 된장, 간장, 고추장 전부 아까워서 어떡
해. 애들이 와봤자 속만 상한다고 안 데려다 줬어.
우리 집이 좀 높은데 있어. 집에 물이 반 정
도 찼어. 밑에 있는 건 싹 다 버렸어. 배내다
문갑도 다 뜯어내고 텔레비전 다이도 2개 다 내버렸어. 내 침대는 원목이야. 그것만 남겨
놓고 싹 다 버렸지. 우리 며느리는 출근도 안하고 빨래하고 말리고 지금 그게 일이야.
내가 환자잖아. 며느리가 손도 못 대게하고
출근도 안하고 계속 정리하고 있어. 또 딸들
이 토요일에 손자, 손녀 데리고 왔었어.
8월 17일인가 정뱅이 마을로 다시 들어왔
어. 우리 집이 아니고 남의 집 같아. 내가 하
던 살림 하나도 없고 전부 남의 집 살림이
야. 속상한 게 간장, 된장이야. 내가 메주 두
말을 끓여서 담아서 묵혀놨는데 못쓰게 됐
어. 복지관에 있는데 며느리가 “어머니 된장
못 먹어요”그래. 그래서 냅 둬! 내가가서 보
겠다했지. 며느리가 “구더기가 벌썩 벌썩 들
어가요”그래. 그 새 무슨 구더기가 있어 놔
둬 그랬지. 말을 들으니까‘똥물 들어갔다’
고 그러는 거야. 내가 들어와서 이렇게 눌러
보니까 물이 푹 솟아. 속도 안 퍼냈나 싶어
내가 퍼냈지. 소금을 꺼내고 물로 헹궈서 받
쳐놓고 된장을 반쯤 퍼냈어. 물 퍼내니까 노
란된장이 나오잖아. 그래서 조금은 놔뒀어.
애들은 안 먹는대. 노란 게 괜찮아 보여서
남겨놨는데 먹으면 먹고 말 라면 말어 나도
몰라. 농사지은 거 못 먹게 돼서 얼마나 속
상한지 몰라. 참깨를 놔뒀는데 그걸 못쓰게 됐어. 큰 딸한테 기름 좀 짜와라 했거든 유
성시장가서 볶았대. 주인이 우리 거 먹어보고
딴 사람 거 먹어보니 안 고소하고 쓰대. 그
참깨를 그냥 가져왔지.
권교수 그 양반 아니었으면 벌써 몇 죽었어.
권교수가 우리 아들하고 구명 조끼들고
여기저기 구조하러 가는데 이렇게 작게
보여. 어제 그 이야기를 아들한테 했더니
아들이“엄마 발이 땅에 안 닿았어”라고 하더라고. 그 사모님은 이불 가져다주면
서 얼마나 놀랬는지 눈물을 흘려. 그 딸
보고 엄마 놀랬으니까 청심환 좀 갔다 주라했어. 우리는 몇 번 겪어봤으니까(40
년 전 홍수)괜찮아.
옛날처럼 복원은 안 되겠지만 사람이 거
처할 수 있게는 해야지. 최대한 예전 모
습을 되찾으면 좋겠지만 그렇게는 못
할 것 같아. 마을 사람들하고 의좋게 지
냈으면 좋겠어. 앞으로 변함없이 똑같은
마음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어.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저는 여기서 태어나 27살까지 살다 서울로 올라갔어요. 아버지는
토박이는 아니시고 금산에서 사시다가 여기로 오셨어요. 우리 형
제들은 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토박이라고 할 수 있죠. 어 머니께서 정뱅이 마을에 혼자 계셔서 제가 내려와 6년 3개월 정도
살았어요. 어머니는 작년 2023년 10월에 요양원으로 가셨고, 저
는 다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셔서 수해 당시 집은 빈집이었어요. 제가 연
락을 받고 내려온 거지. 어르신들께서는 식탁 위에 올라가셨다고
하고, 저쪽 박순자 씨는 다락으로 올라가 계셨다고도 하는데, 어머니께서 집에 계셨다면 큰일 날 뻔했죠. 어머니는 잘 걷지 못하
셨거든요. 제가 우리 어머니를 대한민국에서 제일 많이 업어 드린 것 같아요. 휠체어 타실 때도 업고, 화장실 갈 때도 업고, 이동하 실 때마다 제가 업고 다녔어요. 어머니가 혼자 계셨다면 큰일날
인터뷰 신정은
글 민순옥
어릴 때 이곳에서 추억이 많죠. 27살 때까지 살다가 서울로 올라 가 직장을 잡았으니까요. 명절이나 마을의 경사, 친구들의 경사
일이 있으면 내려오며 자주 찾았고, 삼십 년 서울에서 살다 내려와 6년 3개월을
살고 다시 올라갔지만, 저에게는 여전히 정겨운 동네입니다.
수해 당시 상황은 직접 보지는 못하고 얘기만 들었고, 그 후에는 영상으로 봤
어요. 앞집에서 찍은 영상을 받아서 보기도 했죠. 내가 와보니까 물은 이미 다
빠지고 방 안에만 물이 남아 있더라고요. 어머니가 계셔서 집에 CCTV를 달아
놨었는데, 그날 비가 많이 와서 새벽까지 CCTV를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 기 화면이 안 보이더라고요. 정전이 된 줄 알았는데, 수해가 나서 전기가 나가고 와이파이가 끊어졌던 모양이에요. 새벽에 전화가 와서 수해 사실을 알았죠.
복구할 때는 제 아내도 오고 친구들도 와서, 제가 아마 두 번째로 복구를 시작
했을 거예요. 찬수네 집이 제일
먼저 시작했는데, 그쪽은 열 몇
명이 오더라고요. 물에 잠긴 옷
장이나 이불 같은 것은 모두 버
리고, 그릇은 그냥 빼놓았는데
뭐랄까… 찝찝해서 버린다고 하
던데 모르겠어요. 내일 아내가
와야 알겠지만요.
복구할 때 친구들도 와서 도와
줬고, 자원봉사자들이나 서구
환경과 분들도 일 잘하셨죠. 공
무원과 자원봉사자들 도움으로
붙박이장을 뜯어내고 방에 있는
무거운 것들도 다 꺼냈어요. 올
여름에 특히 더웠는데 많은 분이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더라구 요.
수해 발생 후 2~3일 지나 자원
봉사자들이 투입됐어요. 저희는
첫날부터 복구 작업을 시작했지만, 다른 분들은 자원봉사자 투
입 후 복구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오는데, 누구네 집에 들어가고 누구네 집에는 안 들어가는 일이
있어 서운함이 생기더군요. 봉사자들 중에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집에 먼저 들어가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음 날에는 자원 봉사자를 배정하는 사람을 지정해서 어느 집에 몇 명이 필요한지
접수하고 배정했어요. 그런데 단체에서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계획
이 무용지물이 됐어요. 통장님이나 주민대책위원장도 수해를 입
어 바빴기에, 봉사자 신청과 배정은 동이나 구청에서 맡아주면 주민 간 갈등이 줄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뱅이 마을 전체가 반파 아니면 완파 판정을 받았어요. 서구청
에서는 벽돌집과 콘크리트 집은 반파로, 흙집과 목조는 완파로 판정했죠. 이 집은 목조인데 반파로 판정된 것 같아요. 오래된 집 은 완파 판정을 받았고, 지원금은 2천에서 3,600만 원, 반파는 천에서 1,800만 원으로 면적에 따라 달라요. 창고는 인정되지 않 고 주택만 해당되었어요. 저희는 1,500만 원을 받았는데, 이 돈 으로는 어림도 없지. 실내장식도 새로 해야 하는데.
이번 수해에서 행정의 도움은 전혀 없었다고 마을 주민들은 생각
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선 도움을 주고 빠르게 대처해야 하는 데, 오히려 권 교수님 부부가 관에서 할 일을 다 했지. 권 교수님 부인을 주민들이‘엄마’라고 해요. 무슨 얘기인가 했더니 필요한 것들을 조달해 주고 주민들이 원하는 것을 챙겨줘요. 지금도 도 시락만으로는 부족하니 반찬이나 필요한 물품도 챙겨주시고, 제 습기가 필요하다고 하니 권 교수님께서 열몇 대를 갖다 주셨다 고 들었어요.
기록해 주시는 분들에게도 감사하고, 자원봉사자 분들께도 정 말 감사드려요. 올여름이 무척 더웠는데도 오셔서 도움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죠. 아마 수백 명이 왔을 겁니다. 연휴 때는 천 명 가까이 왔다고 들었어요. 어떤 날은 300명 넘게 투입되기도 했고
요. 몸으로 봉사해 주신 분들도 있고, 후원금을 보내주신 개인
목하게 잘 지내면 좋겠습니다. ● 인터뷰
과 단체도 있어요. 수해 물품을 보내주신 분들도 많아 정말 감
사한 마음뿐입니다. 제가 동네 사람들에게 수해 복구가 어느 정 도 마무리되면 도움을 주신 분들을 모시고 감사 잔치를 한 번
하자고 했어요. 크게 대접할 수는 없어도 정성껏 밥 한 끼 대접하
면서 주민들끼리 수해 과정에서 있었던 갈등이나 감정도 풀고 좋
게 지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데 그 갈등의 골이 깊어져서
저는 참 안타깝습니다.
우리 동네는 배산임수 지형이라 지인들도 아늑하다고 해요. 이렇
게 좋은 동네에서 주민들이 갈등 없이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화
#정뱅이마을 주민
윤여장 님
2000년도에 이 흙집을 해서 들어와 살았으니까 들어온 지가 25
년 된 거예요. 이 마을과 연고가 있진 않았지만 이 땅하고 건물
이 따로 경매가 나와서 집을 사서 들어오게 됐죠. 원래는 흙집에 서만 살다가 집이 좁아서 모듈주택 하나 갖다 놓고 살기 시작했
죠. 처음에 이사 왔을 때는 시골이 그렇듯 텃세가 좀 있었지. 또
시골이 하나로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성씨들이 달라서 최씨, 김씨 집성촌으로 나눠져 있었어요. 한 10년 지나고 나서야 융화가
인터뷰 박창숙 글 김채원
그날은 새벽 6시에 마을에 돌아왔어요. 조카 결혼식이 있어서 마
을 밖 형네 집에 갔다 왔거든요. 아침에 딱 오니까 물이 차서 넘
치는 걸 다리 앞에 서서 본 거죠. 마을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이제
밖에서 보고만 있었죠. 식구들 모두 전부 전의에 다녀오느라 차
는 하나도 안 잠겼어요. 집만 침수가 된 거예요. 물이 빠지고 수
습하러 집에 들어왔는데, 뭘 좀 챙길 마음도 안 들고 다 그냥 집
어내 버리는 느낌이었어요.
마을에 있는 집 중 두 집만 지대가 조금 높고 나머지는 다 아래
쪽이라 벽에 한 1m 정도씩 물이 다 찼어요. 그러니까 석고보드도
다 물먹고 벽지, 장판도 들떴죠. 다 뜯어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냉장고, 세탁기, 뭐 이런 거 수리하려고 내놓고 보니까 집이 쓰레
기만 한가득이더라구요. 어느 세월에 정리하고 수리하겠어요. 심
지어 삼성, LG 수리 기사가 바로 왔는데도 수리가 안 된대요. 바
짝 말라야 수리도 하고 그러는 거지, 2~3일 지난 거 가지고는 처
리가 안 돼요. 그래서 그냥 다 집어내버리고 새로 장만하고 해야
했는데 그때 마침 보겸TV(*유튜버 BJ보겸) 에서 각 가정에 세
탁기, 냉장고 등등 다섯 가지 가전 제품 중에 하나를 준다고 하
더라고요. 나 같은 경우에는 일을 해야 되니까 에어컨을 설치했
어요. 아침 7시에 집에 와도 32도일 정도로 뜨거우니까 에어컨을 인터뷰
달아달라고 한 거죠. 친구들 도움도 받아서 빠르게 석고보드 뜯
어내고 새로 다 했어요.
이런 복구과정에서 행정은 도움이 안 돼요. 공무원들은 와서 자
기네 일만 보고 가니까요. 주민들 만나서 편의시설이나 필요한
지원에 관한 질문은 없고 어느 집이 반파인지 완파인지만 따지
고 있더라구요. 구청장이나 국회의원이나 와도 전시 행정이지. 제 가 보기엔 일하는 사람들 독려하려 왔다가 사진이나 찍고 가는 거예요. 자원봉사 같은 경우에도 마음 상하게 하는 경우가 종 종 있었어요. 지원 나온 사람들이 세 부류인데, 자원봉사자 있 고, 군인 경찰들 있고, 소방관 있고 해요. 그런데 오기 싫은데 억 지로 와서‘시간 때우고 가지’마인드로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구요.‘설렁설렁 하러 왔나, 그럼 그냥 가지.’하는 생각이 들 정
도로 대충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래도 군인들이 일을 너무
잘해 줬어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도와주러 오니까 고마웠죠. 5~6명이 함께 하니까 혼자였으면 하루 종일 해야 할
걸 한 시간만에 다 하기도 했어요. 한 1시간 함께 하니까 손발이
맞아서 일이 잘 되더라구요. 아쉬운 면도 있지만 대부분 고맙고 그러죠.
복지관 생활하고 밥도 같이 먹으면서 주민들하고 친해진 거는
좋아요. 그런데 복지관에서 함께 지낸 구청 복지 담당자들은 수 해 본 사람들한테 마음을 많이 주거나 그러지는 않더라고요. 자
기 업무만 하는 공무원 같은 느낌이었어요. 두세 명씩 로테이션
으로 근무하니까 서로 마음 주고 하는 건 없더라구요. 지금 한
달 이상 복지관에서 지내는데 내가 밥 먹었나, 안 먹었나 체크하
면서 이름만 안 정도인 것 같아요. 그리고 아무래도 복지관이 같
이 생활하는 곳이다 보니까 어려움이 좀 있었어요. 에어컨 트는
거 관련해서 어떤 사람은 덥고, 또 어떤 사람은 춥고 하니까 어려
운 점이 생기더라구요.
수해 나고서
것도
지원을 못 받으면서 불만이 나오더라구 요. 처음에는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고 그랬는데, 계속 지원을 못
받는 상황이 반복되니까 어려움이 생겼어
요. 주택들만 치우고 쓸고 닦으니까 우
선 순위에서 밀렸다는 생각에 속상해하
시는 분들도 생겼어요.
저는 이번 일로 후유증이 생기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냥‘그러면 그런대로 하고
사는 거다’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냥 우
리 마을이 수해 전처럼 잘 지냈으면 좋겠
어요. 저는 1년 365일 마당에 상추가 있
었어요. 상추, 푸성귀, 이런 거 심고 살았
는데, 수해 나고 나선 마당에 푸른 잎이
하나도 없잖아요. 예전처럼 마을이 회복
되면 작은 텃밭 해놓고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그게 제일 나을 것 같아요.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이기정님
인터뷰 박창숙
글 강영희
2000년도에 결혼했는데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다 돌아가셔서 기
존에 살던 집을 수리하면서 신랑 고향이라 들어왔어요. 저도 외
가집이 원정리이고 남편을 소개받아서 만났어요. 신랑이 직장 다
니면서, 주말에 조금씩 농사짓고 있어요. 우리 식구들 먹을 정도
하고 형님들 하고 나눠 먹을 정도로요.
콩을 형님이 주셔서 마을에서 두부 만들어서 먹기로 했는데, 이번
에 수해가 와서 날아갔잖아요. 12일인가 토요일에 만들어 먹기로
정했는데, 10일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날은 수해가 난 줄
모르고 자고 있는데, 4시 45분쯤에 전화가 왔어요. 우리 차가 있
는 거 보고, 우리가 안 보이니까? 재현이 아저씨가 남편한테 전
화를 준 거예요.‘빨리 나오라고’. 침대방에서 일어나서 나왔는
데 불이 안 들어오는 거예요. 거실로 나가서 소파로 갔는데 질 퍽거려서 깜짝 놀랐어요. 밖을 보는데 소파 뒤쪽으로 방범창 가
운데 정도까지 물이 있는 거에요. 놀래서 남편이 막 소리 지르는 데, 뭐라고 했는지도 몰라요. 그러고 딸내미 방문이 안 열려서 겨
우 열고, 딸내미 깨워서 빨리 가방 챙기라고 그렇게 하니까 딸 물
건 중요한 거 챙겨놓고 현관문으로 나오려고 했는데 문이 안 열
리는 거야, 그래서 다시 침대방 침대 위로까
지도 물이 차고 김치냉장고가 둥둥 떠다니더
라고요. 그래서 침대방 모기장 해놓은 거 찢
고 얘 아빠가 먼저 밑으로 내려가고 우리 딸
내미 잡아서 내려가고 이제 나는 내려가려고
하는데 딸내미 가방 때문에 나가지지가 않
는거야. 이 가방이 필요 없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그냥 던져놓고 잡아주고 해서 나갔
죠. 나가니까 이제 물이 여기(가슴)까지 차는
데, 우리는 맨발로 밖으로 나와서 그냥 옷
입은 상태로 복지관 가니까 다리가 아프더
라고요. 네 번째 발가락의 발톱이 그렇게 아
프더라고. 피가 좀 나고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찰받고 선생님이 빠질 거라고 하더니 토요
일 날 빠졌어요.
집 밖에 나오니까 선미한테 전화가 온 거야.
전화하면서 어르신들 누구누구 계시냐고 물
어봤죠. 그러니까 이제 나이 많은 박숙자 할
머니랑 자기네 시어머니랑 있다고 하더라고 요. 전화하니까 다락에 올라가 계신다는 거
야. 일단 연락은 됐으니까. 그리고 이순이 아
버지 통화가 안되서 이순이한테 전화를 걸으
인터뷰
니까, 이순이는 야근한다고 해서, 빨리 아버
지한테 연락해 보라고 상황을 전달했어요.
나중에 노인회 총무에게 전화를 거니까, 지
금 형님은 다락에 계신다고 하고, 또 전화하
면서 누구 연락이 안 되는지 얘기를 하고 그
랬더니 나중에 효열 언니가 최재원 아저씨를
차에 태우고 나왔더라고요. 그래서 아저씬
여기 있고 추워서 덜덜 떨고 계시는데 정신
이 없었어요. 119가 왔는데도 보트를 안 갖
고 와서 보트를 구해야 되는데.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소리 지르고 그것도(보트) 안 갖고
왔다고요. 그렇게 하고 나중에는 형님(노인
회 총무) 잘 계신가 전화하려니까, 형님이 다
락까지 물들어 온다고‘나 살려달라고’전
화가 온 거야. 그래서 놀래 갖고 사람들한테
말해서, 빨리 구하고 했죠.
복지관 들어가고 다음 날, 집에 갔었지. 그
날 사관님이(백순자쌤) 먼저 마을로 가셨어.
그런데 그냥 나오시는 거예요. 교회 쪽에서
걸어오시더라고. 그리고 사관님이 장화 좀
한 번 닦는다고 하시더니, 장화만 닦고 그
냥 가야겠다고, 손볼 것도 하나도 없고 복
지관에 그만 가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는 몰랐어. 왜 그렇게 하셨는지 몰랐는데, 내
가 집으로 들어가 보니까 어떻게 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고, 사관님 가시고 우리 집에
이제 신랑하고 들어갔는데 불도 안 들어오 잖아요. 근데 열어보니까 냄새도 너무 나고, 그리고 그날은 그렇게 빠져나오면서‘그래
우리 세 식구가 살았으니까 다행이다’. 그런
마음만 들었는데, 그다음 날 가보니까 그게
아닌 거예요. 안 울 수가 없는 거죠. 눈물 좀
가라앉히고 나도 복지관에 왔어. 복지관에
왔는데 사관님이 복지관 바깥에서 계시더라
고요. 사관님이 내 기분이었겠다 싶은 거예
요. 엘리베이터에서 사관님과 둘이 눈이 마주
쳤는데 그냥 둘이 막 눈물이 나와 갖고 어
떻게 할 수가 없는 거지. 둘이 그냥 울었다
니까요. 이 감정을 좀 숨기려고 했는데도 안
되고, 올라가서 앉아있는데도…. 이거 표현
도 못 하고 그냥 울었더니 할머니들이 같이
우는 거야. 집에 갔다 온 걸 아니까.
그렇게 하고 나서 다음 날 가니까 조금 마
음이 안정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추스리고 치
운다고 하고, 봉사자들도 오시고 정신도 없
었잖아요. 첫날 치우는 날은 만두레 총회장
언니가 있어요. 언니가 첫날 봉사를 오면서
우리 집에 서더라고.‘기정아’그러면서“니
네 집인 줄 알았다” 하면서 꼭 껴안아주는
거야. 그 한마디가 또 위로가 되잖아요. 와
서 도와주기도 하는데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
고, 뭘 치워야 할지 모르고 엄두도 안 나고
했지만, 그런 상황들이 너무 기가 막히기도
하고. 그리고 내 정신이 아니었지요. 제가 뭐
라고 했는지도 모르겠고‘그냥 이제 알아서
하세요’라고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하고 나중에 장농 열어보니까 박스 같은 거
들어 있는데, 거기에 또 물이 꽉 차 있고, 최
근에 냉장고도 고장 나서 바꿨는데…
그런데 복구하고 있는데 기자들이 와서 찍어 도 돼요? 하는데 성가스럽더라고요. 우리가
바쁘고 할 일도 많은데. 그러다가 통장님이
다 모아놓고 봉사자가 오니까 필요한 인원
얘기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6명, 7명, 주
민들이 다 적은 거야. 나는 이제 맨 마지막 으로 하겠다, 내 이름 적고 그냥 물음표 해
달라고 했어요. 인원이 몇 명 오는지 모르겠
지만 이제 거기서 남으면 우리 집으로 오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죠. 근데 우리는 자
원봉사자들도 안 왔는데, 그 언니(복지만두
레)가 와서 도와주고, 또 나중에 부녀회에서
끝나고 와서 도와주고. 그렇게 한 상태에서
3시쯤 끝나고 가는데 내 지인 언니 둘이 와
서 마당 청소를 진짜 깨끗하게 해줬어요. 수
도가 나오니까, 우리는 살림살이가 거의 없
으니까 방도 해주고 그랬는데.“언니, 우리
힘들어서 간다”고 내가 그랬어. 지금 가야
되니까 그만하고 가자 그랬더니 언니들이 조
금 더 있다 갈 테니까 너는 가서 쉬라는 거
야. 같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지쳐서 가서 쉬 고 싶더라고요. 그 다음날 오니까 깨끗하게 해놓은 거야. 언니들이 해줘서 고맙긴 한데.
마당이 너무 깨끗해서 자원봉사자가 그다음
에 안 왔다니까. 언니들이 안에 들어가서 막
인터뷰
물 청소도 다 해주고, 고마운 언니들이죠.
그랬는데도 그런 두 가지 또 마음이 들더
라고. 경찰들이 일도 너무 잘하셨는데, 나이
가 너무 어려 보이더라고. 남편이 다치지 말
고 천천히 하라고, 다치면 안 된다고“천천
히, 천천히” 했더니“아닙니다”이러는 거예
요. 내가 속으로 얼마나 웃었나 몰라. 처음
에는 많이 힘들고 했는데 이렇게 하면서 웃
기도 하고 그랬어요.
쉼터에서 지내는 건 많이 불편했어요. 힘들기
도 하고. 우리 딸내미는 중학생이고 사춘기
라 그런지 조금 불편해하고, 씻는 것도 그
래서 집에 데리고 와서 씻고 가고 그랬어요.
텐트에서 셋이 생활하다가 이제 자리가 비
워져서 혼자 쓰게 하고. 딸내미가 그림 그리
는 거 좋아해서, 웹툰 혼자 하거든요. 자기
가 해놓은 그림을 집에 많이 저장해 놓고 했
는데 그게 싹 없으니까 너무 힘들어해서 나
중에는 이제 조그마한 거(패드) 하나 사주니
까, 그리고 싶은 거 그리니까 조금 안정됐어
요.
이제 집에 들어가야 하니까 서구청에서 청소
하는 봉사자를 보내줬는데 그분들 너무 실
망했어요. 오신 분이 걸레 없냐고 하고, 이
제 그릇 좀 닦아달라고 그러니까 수세미 없
냐, 고무장갑 없냐, 앉는 깔개 의자 없냐고
하고, 그냥 몸만 왔어요. 너무 성질났어요.
솔직히 가라고 하고 싶었어. 근데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오시면 또 사진 찍고 하잖아. 사
진 찍고. 이제 나중에 닦아주시고 해서 고마
웠는데…. 처음 그렇게 왔을 때 너무 힘들더
라고요. 나중에는 수세미랑 고무장갑이랑 해서 보냈더라고요. 그릇이나 냄비 같은 거
씻어주고 가셨는데도 아직 진흙이 남아서 제
가 몇 번 더 씻었거든요. 통 같은 것도 닦아
놓긴 했는데 그게 닦아놓으면 또 묻고, 지금
또 담가놨거든요. 근데 좀 담갔다가 이제
안 되면은 못 쓰죠. 샷시 같은 것도 한 두세
번 닦아서 껴놨는데도 이렇게 열면은 진흙이
떨어져 있는 거예요, 흙이 말라서. 인터넷 같
은 것도 하는데도 모뎀이니 기계를 사는 데
도 다 우리 돈으로 해야 하더라고. 우리가
재해를 입고 재난 선포되었는데도, 스카이라
이프 그거 하는 것도 10만 원인가 얼마 내고
설치했다고 하더라고. 이렇게 얘기 들어보니 까. 되는 게 별로 없어.
그리고‘저기 복지관에 그만큼 있었으면 됐
지 얼마나 더 있으려고 하나’막 그런 소리
도 하고, 정뱅이마을이 거지들이라는 얘기까
지 들려요. 거지들만 있다고, 많이 받고 했는
데 더 얼마나 더 받을 거냐? 뭐 그런 얘기를
하는 거겠지. 냉장고니 뭐니 다 받은 줄 알
고 다 그렇게 알고 있는거야. 이런 게 좀 안
타까워요.
우리가 복지관이 있을 때도 우리 얘기 들어
주는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우리 얘기를 통
장님이 들어주셔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었어
요. 노인 회장님하고 일찍 나가시고(복지관)
같이 힘을 합쳐서 해야 되는데 그게 너무 없
으셔서 많이 안타까운 거에요. 그래서 우리
가 대표할 사람을 새로 뽑고, 같이 도울 사
람도 뽑아서 이야기했어요. 이런 걸 통장님이
해주셨으면 더 쉬웠을 것 같아요.
집은 원상복구 하면서 구조를 조금 바꿨거
든요. 내가 보니까 곰팡이가 나요. 그래서
닦고 또 닦고 그러거든요. 아직 덜 마른 거
지 다른 집도 그럴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는 사람들은 좀 천천히 하라고 하
고, 너무 빠르지 않냐 하는데. 비가 쏟아지
하면 좀 불안하고 이제 우리 동네 분들
다 그럴 거예요. 이제 비가 많이 오면 잠도 못 주무실 거예요. 어느 정도 복구를 하고
여기다 재방을 해놓고 하면 이제 안심이 될
지 모르겠는데, 지금까지는 집을 다 고쳤는
데 또 혹시나 이거 이렇게 안 해놨을 때 저거
무너지면 우리 이제 어떡하냐고. 그렇다고 보
상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피해 본 데는
또 많이 봤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또 피해 보
고 다 고치고 또 가전제품 없는 데는 다 사
야 하고, 그런 게 좀 많이 힘들죠.
그리고 임유순씨라고 그분에게 고마워요. 하
우스 하시는 분인데 그분이 비가 많이 오면
항상 밖에 나와서 살펴보고 하신대요. 그분
이 그날 통장님한테 전화해서 사람들 빨리
대피시키라고 해서 전화 통화하고, 방송하고
해서 빨리 피한 거예요. 나중에 전기 끊기니
까 방송도 끊기고 그런 상황이었어요. 만약
에 그분이 그렇게 안 했으면 사람 피해 엄청
났을 거예요. 자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중
고차 타고 자원봉사자라고 하시면서 욕실이
막힌 것을 뚫어줬어요. 도와주고 싶어서 오
고 싶었는데 막아서 못들어왔다고요. 수해
후에 딸친구 엄마가 딸에게 필요한 물품들
챙겨줘서 너무 감사했어요.
제 발 좀 봐봐요(발가락에 물집이 그대로 굳어서 딱딱해져 있음). 물
집이 생겼는데 이렇게 됐어요. 이거
또 터뜨리고 그랬더니 이렇게 굳어
졌어. 여기도 그랬는데 이쪽도 그
래요. 이제 조금 많이 좋아졌고 이
쪽만 더 그렇고, 여기 침 맞고 있
는 거 봤어요?. 저기 흑석한의원이
라고 그분이 침 봉사활동 하러 오
셔서 동네 어르신들 침 놔드리고
저희도 이제 몸이 불편하고 그랬거
든요. 발에도 맞고, 고마우신 분
들이 많았어요. 마지막으로 회복이
빨리 됐으면 좋겠어요. ●
#정뱅이마을 주민
이순자
님
여기는 장마 때마다 수해를 봐도 우리 저 파이프가 이렇게 무너
지는 거는 생전 처음이야. 한 30년 이상 농사 들어서 처음이야.
옛날에 유성에서는 농사 때 눈사태도 있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쓰러지지 않았어.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 물로 인해서 이렇게 하우
스가 무너졌다는 거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그러니까 이제는 하고
싶은 마음이 안들 정도에요. 1년에 한 번씩 파이프만 안 쓰러졌
지, 물은 해마다 차. 해마다 차는데 보험을 지금까지 안 들었어.
이제는 작물 피해도 보험 들어야 하는데, 풍수 보험만 들 었더니 풍수 보험은 작물하고 상관없는 거라고 (보상)안 해주더
라고.
물찬 날 새벽에 매노동에 사는 시누가 전화 왔어요.“그 동네는
모르지만 여기 비 많이 와서 회관까지 물이 들어
왔어”그러는 겨. 매노동 마을 회관에 물
이 들어왔다는겨. 그래서 남편이 이
앞 집에 전화를 했지. 그랬더니
“아유 형님 여기 난
인터뷰 박창숙 글 김윤정
리, 난리도 아
니”라고,“하우스 다 무너졌다” 그러는 겨. 그래도 수해감을 못 느꼈어. 근데 와 보니까 물이 철렁철렁해. 여기 하우스에 물이 출렁 출렁. 다리 또 저 안으로 못 들어오는 게 차가, 경찰차니, 119 소 방차니 다 와가지고 보트 타고 막 들어가더라고. 그래서 사람들
나오는 거 보고 나도 따라서 복지회관으로 들어갔지. 그 이튿날부터 봉사자가 와서 해줬어도 저 하우스 안에는 아예 건들지도 못하고 여기만 펄이 이만큼씩 쌓여 있어 요. 요 위로 그러니까
고 그거 갖다 여기 이제 요 앞에다가 (하우스앞 도 로) 앞집이랑 우리랑 같이 산더미로 그냥 쌓아 놨잖 아 쓰레기를.
자원봉사자는 저 안(농작물 비닐하우스)에는 아예 일 을 못 시키는 거죠. 사람들이 와도 안에는 위험해서 들어 가지를 못해. 원래는 여기 치우는 것도, 작업장 치는 것도 치우 는 거잖아. 이 안에 있는 걸 치워야 우리는 일을 하잖아. 아예 못 치우니까 그 여지없이 두 달 이상 저 안에 손을 못 댄 거야. 다행히
도 이거 한 동만 살아남았어요. 이것도 잠겼는데 그래도 무너지지 않았잖아. 그래서 이거(열무)라도 한 거지. 만약에 여기도 무너졌으 면 이것도 못 심지.
여기가 해마다 물이 찼는데, 그래서 이제 옛날부터 이게 어떻게 됐 었나, 이제 그거를 지금 실체 파악을 하려고 하는 건데, 그게 쉽지 가 않아. 우리는 자연이 아니라 인재라고 하는데, 그렇게 인정을 하지를 않아. 인재라고 하면 보상도 많이 해야 하고 하니까. 그리 고 우리 하우스 한 사람들은 생업이라 이렇게 많이 무너졌기 때문
에 손해가 많이 보는 건데 그런데도 동네 사람들은 하우스가 문제
냐? 집이 문제지, 그런 식으로 해서 하우스 하는 사람들이 엄청 서
운했어. 진짜 너무 서운해. 그래서 어디 후원금이 들어와도 하우스 사람 거는 빼는 겨. 자기네들 동네 사람들끼리만 하는 겨.
나도 이번 수해에 있기 전에는 그냥 이물 없게 잘 지냈지. 내가 뭐
바쁘니까 동네를 가지는 못하고 지나가면은 커피 한잔이라도
라고 하고 서로 기분 좋게 생활했지. 그리고 그때는
나는
번에 이제 물난리 나고 복지회관에서 생활을 했잖아. 나도 거기 한
달 가까이 생활은 했지만 젊은 분들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어.
아마 40대 50대 젊은이들이 많고, 어르신 분은 한 열 분이나 되나 몰라. 그러고는 다 젊은 분들이야. 낮에는 다 출근하겠지. 근데 그
사람들이 다 마을 사람이라는데 뭐 그렇다면 그런 줄 알지. 누군지
내가 몰라서는 저 사람은 누구, 어느 집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어, 어른들한테. 그리고 물어보면은 어느 집 누구 자녀고 누구 자녀고, 뭐 이 집은 어른들은 안 계시는데 나가서 사는데 들어왔다, 이번 일 때문에 들어왔다, 그래서 알았지.
예전엔 요 앞집도 동네 통장하고 그렇게 잘 지냈
어. 의형제 맺어가면서도. 그런데도 하우스
를 빼니까는 그래 서운하더라고. 이젠
되는 대로 살아. 나도 그래. 너무 그
렇게(삭막하게) 안 하고 종전처럼
하고 싶은데, 시간이 지나면 좋아
지겠지. 뭐 서운한 거 다 잊어버리
고 살아야지.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옆 마을에 살다가 남편과 만나 결혼한 지 40년 넘었어요. 남편
은 내 2년 선배인데 이곳에서 나고 평생을 여기서만 살아온 토박
이에요. 통장직을 6년째 한 남편은 식구들이 보기에는 우리 남 편 어디 가서 잘한다고 하는데, 막상 옆에서 보기가 너무 힘들었
어요. 수해가 나고 무슨 일이든 통장부터 부르는데, 지금 집일은
손 하나 못 대고 있어요.
우리 집은 지난 4월 선거 끝나고 리모델링을 다 했었어요. 한창
농사도 지을 때라 못자리 다 심어놓고 시댁 식구들, 친정 식구들
부르고 친구들도 불러 집들이 겸 식사도 다 같이 했는데, 며칠
있다가 이 상황이 된 거에요. 침대며 가구, 싱크대도 다 새살림이
었는데, 물을 먹으니 다 버렸죠. 그러고 있는데 동네에서는 또 통
장님 때문에 막 이제 협박하고 민원 넣고 이런 상황이 생기니까
눈물 나요. 통장님은 집에 오면 속상하니까 통장님은 저한테 얘
기하면 저는 막 가슴이 아프고. 그래서 내가 병이 나가지고 딸네
그래서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내가 마음을 추스려야지 마음을 이연구님
내려놓고 이거는 세월이 가야된다. 이
걸 자꾸 속 썩으면 안 된다, 그래 갖
고서 우리 애들이 처음에 수해 난 상
황을 영상을 찍었나 봐요. 물 빠지는
날 와서 딸이 셋인데 물 빠진 뒤 다 넘
어진 거, 뒤집어진 거 다 영상으로 찍
고 그랬나 봐요. 근데 저도 몰랐어요.
못 봤었어요. 안 보여주더라고요. 근
데 영상으로 찍어놓고서는 그걸 보고
서 이제 보겸 tv가 왔었어요. 그때 내
가 “너무 힘들다고” 울면서 인터뷰를
했어요. 처음에는 헤엄쳐서 어머니 살
린 그 삼촌 찾았는데 그 삼촌이 (인터
뷰) 안 한다고 해서 나보고 해달라는
데 너무 힘들어서 뭐라고 했는지도 모
르겠어요. 그런데 나중에 전화가 와서
보겸 tv라고 전체가 몇 가구냐고 묻길
래 침수된 집은 27가구라고 했죠. 그
러고서 세탁기, 에어컨, 냉장고랑 보내
준다고 하는데 몇 명이냐, 몇 가구냐
하는데 그때는 내가 말을 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복지관에서 잠도 못 자고
내 몸이 아팠었거든요. 전화를 딸내미
바꿔주고“보이스피싱 아니냐”고 물어
보고 했죠. 그렇게 해서 가전제품이 막
오는데, 유튜브 본 사람들이 전화 오
고, 언제 이런 거 찍었냐고 하고, TV도
이만한 거, 에어컨도 이만한 거 다 준
다, 어쩐다, 한 개씩 줘? 5개씩 줘? 집
집마다? 다들 이러는데 내가 다 정신
이 없는 거야. 또 누구는 김보겸한테
전화해 봐라, 5개 한 세트씩 주라고
다시 해봐라, 막 난리 치는 거야. 그럼
우리는 막 미쳐 죽어. 그래서 우리 아
들은 스트레스 받아서 이번에 뽑은 사
람 저기를 불렀어요.“어떻게든 타협
을 봐서 골고루 가게 해야 되지 않겠
냐”고,“조용히 잘 넘어가자 했죠.”
어쨌든 집집마다 필요한 거 가져갔어
요. 불만이 있겠지만, 근데 그걸 어떡 해요.
감사하다고 하시는 분도 계셨어. 몇
몇이 난리를 치는 거지. 몇몇이가. 저기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찾 는다는 말이 맞아. 그렇다면 이렇게 되
고 또 이런 걸 인사를 받아서 맛이 아 니에요. 근데 이웃집 아주머니들은 이
렇게“형님 고마워”,“사위 덕분에, 형
님들 자식들 덕분에 이렇게 냉장고 받
아서 좋아, 에어컨 받아서 좋아”그러
는데 이 몇몇 사람들이 불만이 많아
요. 한마디도 안 하고 쳐다도 안 봐
요.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우리
통장님이 잘못하고 있는 것 같고, 그 래요.
우리 집이 피해가 많아도 어디 가서 말 도 못하고, 누구하나 통장님 아는 사
람이 도와주러 우리 집을 오면 동네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우리 집만 도
와주는 줄 알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냥 가시라고 또 하면, 그분들은 아
니라고 통장님 댁 도와드리러 온 거라
도 담아 가지고 왔더라고. 이거 우선 급한 데로 드시고, 가을에 김장할 때
도와주러 온다고 하고 고마운 사람 들도 많아요.
저 진짜 통장님한테는 얘기 안 했지만, 딸한테는 이사 가고 싶다고 했어요.
여기서 못 살 것 같아서 너무 힘들고 하니까. 그런데 남편은 안 된다고 하 죠. 여기가 터전이라고. ●
고 또 하고, 내가 어떻게 하지를 못하 겠더라고.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김치
#정뱅이마을 주민
이을주님
저는 77세입니다. 2010년에 퇴직하고 안식구가 농사짓는 것을
좋아하고, 나도 먹고, 우리 애들도 주면서 자급자족하려고요. 천
변도 있고 마을이 좋았어요. 마을이름 유래를 보면 역사적으로 백제와 신라 싸움이 있었고요. 당나라 소정방 군대가 주둔했다
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는 것 같아요. 열대성 기후로 비가 내릴 때는 안 오고, 내리면 계속 오고요. 또 한 가지는 평촌산업단지
쪽에서 비가 오면 완충작용을 했는데 비 오면 다쓸어내잖아. 비 가 한꺼번에 쏟아져서 뚝방이 터지고 인명피해가 없는 것만도 다
행이에요. 저도 그날 저녁에 여기서 자려고 했는데 예감이 좋지 않
아서 시내아파트에서 잤어요.
비가 많이 와서 4시에 일어나서 식사하고 오려
는데. 유등교다리가 끊겨서 교통혼잡으로
9시 넘어서 도착하니 못 들어가게 통제
하고 소방관이 우리를 인솔하더라구
요. 난리도 아니었어요. 진흙이 있어 서 걷지도 못하고, 달라붙고, 미끄러
지고 그랬어요. 컨테이너가 1m~2m
정도 옮겨지고 휘었어요. 우물에 물 이 빠져서 이번에 다시 팠어요. 채소하 고 닭을 키웠는데 닭장까지 물이 차서
전부 죽었어요. 봄에 논에 성토를 하고 하
우스를 지었는데..
자원봉사자는 주택을 우선으로 하고 이쪽은 늦게 오더라구요.
피해는 거의 같거든요. 그리고 서구청에 몇 번 얘기를 했어요. 보
상을 안했어도 피해 현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갔으면 좋겠다
고요. 그런데 동네 몇 집만 다니고 그냥 갔대요. 그러면 여기는
(하우스) 왜 안 오냐 했더니 안 보여서 안 왔다고 하더라구요. 이 게 무슨 소리여, 다 둘러봐야지요. 또 한 가지 보상 신고하는데
주택하고 농작물 피해 신고하래요. 농작물 피해 현장을 보지도
않고, 실질적으로 조사해야죠. 몇 가구(28개)도 안 되고, 동네가
몇 십리 되는 것도 아니고. 동사무소, 서구청이 피해 본 주민들하
고 마주하기도 하고, 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정확한 피해 조사해 서 보상을 해줘야지. 그러면서 피해 본 사람이 마음에 위로가 되
지요. 오지도 않고 얘기하면 신고해라. 동사무소 와라, 안 하면
보상 안해준다고 협박이나 하고 말 그대로 탁상행정이지요. 보
상을 떠나서 주택이 아니라고 오지도 않고 무시하는 것 같아 속
상해요. 구청장님 오셔서 냇가가 다른지역보다 조금 더 높고. 흙
이 쌓여서 파달라고 했어요. 그러면 환경단체들이 난리난다는 거
예요. 환경지킴이도 좋지만 물이 아래로 가서 흙이 쌓이면 점검해 야 해요. 산과 강을 잘 관리해야 국가 발전이 되지요. 있는 그대 로 하면 살기 힘들어요. 이렇게 두면 계속 물난리가 나거든요. 시 장님도 오셔서 해준다고 했는데 해줄지 모르겠어요.
여러 가지 생필품 지원은 잘하는데 사람들이 현장에 오지를 않
거지취급 받는거 같아 아쉽지 요. 주민들을 잘 보살펴줘야 돼요. 농촌사람들 무시하면 안 돼요.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는 마을이 되어 야지요. 좋은 말만 하면 마을이 좋
아져요. 여기 주민들 순수하고 좋
아요. 주민들 생활과 마음이 크게
변하지 않고 오래 살았으면 좋겠고
요. 마을 전체가 침수를 당한 것은 처음이고 힘든 기억이기도 하지만, 피 해 현장을 동네 사람들이 찍은 사진을
모아서 기록으로 남겨서 애들한테 알려줘야 해요. ●
#정뱅이마을 주민
이중섭님
제가 여기서 산 지는 한 8년 됐어요. 처음에 정뱅이마을에 농사지
으려고 땅 보러 왔을 때 산책로도 잘 돼 있고 공기도 좋고 아늑
하니 참 좋았어요.
하우스에서 떨어지는 물을 수로로 다 품어내야 해서 장마 기간에
는 잠을 못 자요. 물을 안 품어내면 하우스에 물이 들어오니까,
해마다 물이 들어왔거든요. 그날 새벽 4시에도 비가 오니까 펌프
기로 물을 품어냈어요. 그때까지는 하우스에 물이 안 들어왔고
비가 그치니까 안심하고 이제 들어와서 자려고 했죠. 그런데 기분
이 이상해. 뭐가 막 물 들어온 소리가 나는 것 같아. 그래서 문을
열고 나갔는데 벌써 물이 무릎까지 찬 거야. 그래서 앞에 받쳐
놓은 차를 저기 산 중턱에다 올려놓고 산꼭대기로 가서 봤는데
인터뷰 김계숙
글 김채원
1~2분 사이에 하우스를 덮어버린거야. 방송 듣고 할머니 할아
버지들은 우리가 다 구했지. 소방관들은 우리가 사람들 다 꺼낸
다음 늦게 왔어. 만약에 하우스 하는 사람들이 물 관리 안 했으
면 여기 어르신들 다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비가 많이 오
면 우리가 우산이나 비옷 입고 돌아다니거든요.
그날 이후로 비가 조금만 와도 막 걱정되고 겁이 나더라고요. 매년
수해를 겪었으니까 그러려니 하려고 해도 이번에는 피해가 너무 크지
요. 작물을 심어놓고도 물이 차면 작물을 못 따요. 그래도 이런 경
우는 자연재해니까 딴 사람들이 작물 피해라고 다 신고해도 나는 지
금까지 작물 피해 보상 신고를 한 번도 안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워낙 피해가 크다 보니까 나도 피해 보상을 받고 싶더라고. 우리 같
은 특수 작물 하는 사람들은 이 안에 (들어간) 시설비가 어마어마해
요. 이 시설들을 다 못쓰게 된 것은 물론 하우스도 보수해야 하니까
멀쩡하다 보니까
보수하려고 하는데, 보수하는 사람 들이 이거를 안 하려고 해서 업자 찾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새로 짓는 건 하려고 하는데 수리하는 건 안 하려고 하니까 두 배로 힘들죠.
재산 피해 산정하는 과정도 미흡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보상이 있으
려면 서구청에서 실사가 나와야 하는데, 이 실사도 없이 어떻게 보상
을 해주려고 하는 건지 우리는 아직도 몰라요. 실사라는 게 원래 농
장 주인 입회하에 해야 해요. 그런데 서구청에서는 자기네들이 (이미)
다 하고 갔다는 거야. 농장 주인도 없는데 이게 말이 안 되잖아. 그
런 부분에서 서구청에 서운한 부분이 있지. 지금 우리 하우스 하는
사람들은 재해 보험을 들어요. 나라에서 90%를 보조해줘서 들지만
그거 보험 들었다고 (지자체에서) 신경을 안 써주는거야. 보험회사하
고 해결하라 이거지. 그런데 보험회사도 연락이 없고 그래요. 하우스
폭삭 주저앉은 사람들 있죠? 한 동 부서져 봐야 (보험에서) 돈 2천
만원 밖에 안 나와요. 한 동 짓는데 돈이 1억 가까이 드는데 보험을 뭐 하러 들어요. 아무 소용 없어요. 그런데 서구청에 따지면 공무원
들은 억울하면 소송 걸으라는 소리나 하고 있고, 그런 부분은 서운 하다는 얘기지. 전 재산 털어서 하우스 농사 짓기 시작한 거라 저한 테는 (이게) 하나의 직장이에요. 수해로 직장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 예요.
나는 복구 과정에서 자원봉사자 지원도 못 받았어요. 하우스라는 것 이 내부가 40도가 넘으니까 자원봉사자들이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나는 두 달 동안 하우스를 혼자 치웠어요. 하우스가 완파된 사람 들은 농협 조합에 가입했다 보니까 나중에 날씨가 선선해지면 (시설) 철거해주는 자원봉사자들을 투입시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복지관에 한 달 있으면서 잠자리가 좀 불편했을 뿐이지, 씻는 거라든가 먹는 거라든가 잘 돼 있어서 살맛나는 세상이라고 느꼈어 요. 이전에는 주택들, 하우스들끼리 왕래도 없고 소통도 없었어요. 이 번에 물난리 나서 서로 얼굴도 알고 어디 사는지도 알게 됐어요. 이번 인터뷰
에 보니까 주민들끼리 단합도 잘되고 서로 의지하고 그런 건 보기 좋 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번에 청년회에 가입했어요. 옛날처럼 좋은 동
네 한번 만들어 보자고 하면서 단합이 잘 되더라고요.
사실 이번 일 겪고 마을을 떠날 생각도 해 봤어요. 그런데 돈이 없어 서 떠날 수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바라는 건 일단 이런 일이 다
시 안 일어나게 해주는 거예요. 다시 침수되지 않게 우리가 매년 건의 하는 하천 정리, 제방 높이기, 보 없애기를 (지자체에서) 좀 들어주면 좋겠어요. 이 동네가 처음에는 정말 아름답고 깨끗했어요. 지금은 물
난리 때문에 지저분해지고 다 파괴됐지만 빨리 복구돼서 내가 8년 전 에 왔던 그때처럼 좋은 마을에서 살고 싶어요.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이창희님
저는 정뱅이 마을이 산지 만 10년차 되고 애들은 다 출가했구
남편이랑 둘이 살아요. 여기는 동네가 딱 정방다리 건너서 오면
되게 아늑하고 평온하고 풍수지리적으로 동네가 참 좋아요. 눈
이 비도 많이 안 올뿐더러 눈이 오면 다음 날 남쪽 따뜻한 동네
이기 때문에 바로 녹고 행복하고 조용한 동네였죠. 저희는 10년
전에 옛날 흙집을 사서 리모델링을 했어요.
그날 재난방송을 듣고 새벽 4시 정도 나가 보니까 대피하라는
방송이었어요. 그때부터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남편이 밖에
서 빨리 차 빼라고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잠결에 막 키를 들고
나갔죠. 나가니까 벌써 물이 이렇게 들어오고 있었어요. 그래서
빨리 산 중턱에다가 얼른 세워놓고 들어오니까 또 물이 막 무릎
위로 차고 있어. 방에 들어가서 늘 들고 다니던 부직포 가방에
손에 잡히는대로 일단 넣는데 몇 가지 못 챙겼어요. 옷가지 몇 개
하고 핸드폰만 챙겨 마당에 가니 허벅지까지 차 가지고 그때 남
편하고 나간 거예요. 일부 주민들이 나와 있더라고. 이쪽으로 무
인터뷰 김은진
글 김은진
슨 일인가 하고 슬리퍼 신은 채로 다 나왔는데 차도 다 못 뺐어
요. 저희만 차를 위로 올렸지 다 잠긴 상태였어요. 순식간에 저쪽
에서부터 거의 처마까지 물이 찼어요. 그때부터 물이 막 순식간에 밀려 들어
오면서 동네가 한꺼번에 다 찬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어르신들이 집 안에 갇히신 거죠.. 우리 젊은 사람들은 방송
을 듣고서 나왔지만, 어르신들은 못 들을 수도 있잖아요, 연세가 연로하시 고 그러면서. 그때는 기가 막혀가지고 웃음밖에 안 나왔어요. 그냥 이런 일
을 처음 당했으니까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지켜만 본 거예요. 너무 기가 막
혀서 그냥 뭐 먼 산 바라보듯이 지켜만 본 거예요. 그때부터는
아이들 보트를 가지고 와서 동네 남자분하고
무슨 일인가 하고 건너쪽으로 가셨던 주민분들은 물이 차서 집에 못
들어오시는 분도 있었고. 그러니까 소방대원들 119 그분들이 늦게 도착을 한 거예요. 그리고 들어오면서 보트도 안 가지고 그냥 온 거예요. 그나마
우리 주민들이 일찍 일찍 서둘러서 인명 피해 하나 없이 다 구조했다는 거는 진짜 이런 분들 다 표창하셔야 되는데, 진짜 우리 청년회원들이 엄청 일조 를 많이 했어요.
아침에 한 8시 넘어서인가, 생각지도 못했던 진짜 이재민 생활의 일들이 이 제 눈앞에 딱 펼쳐지고 텐트 생활을 시작하면서 잠자리가 바뀌었기 때문에 한 열흘 이상 잠을 거의 못 잤어요. 잠도 안 오고 이런 생활이 창피해서 얘 기를 안 했어요. 너무 창피해 가지고. 근데 뉴스를 보고 다 연락이 온 거예 요.
수해로 저희 집은 거의 반 이상이 물에 차서 벽에 있는 흙이 다 바닥으로 내려 앉았어요 그래서 저희 집이 전체 가구 중에서 가장 늦게 입주를 하게 될 것 같애요. 저희는 황토 흙집이라서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기술자나 업 자가 들어오지도 않고 섭외도 어렵고 복구를 남편 혼자 지금 하고 있어요.
일단은 제방이 무너졌기 때문에 이거는 제방은 하늘에서 제방을 무너뜨리는 건 아니잖아요. 제방 관리를 관에서 구청이겠죠, 그런데서 관리 유지 보수 를 제때 하지 않은 탓에 이제 그 사람들이 인정하고 진작부터 관리를 해 줬
어야 되는데 관리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어요. 아직 진상 규명도 안 되 고 이런 것들을 하루 빨리… 우리 주민이 이런 피해를 당하며 심신까지 다 진짜 초토화시킨 그런 상황인데 이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너무 아파요. 비가
많이 온다는 그런 예보를 받으면 너무 힘들어요. 또 차면 어떡하지 이제 불 안한 거죠. 그날은 잠을 거의 다 못 자요. 기관에서 대피소도, 현장도 왔었고
목소리를 많이 냈거든요. 어떻게 해달라 하면 기관에서는 저희도 처음 당했다고 이야기해요. 아무리 관에서 도 처음 당했어도 빨리 숙지를 해가지고 우리한테 안내를 먼저 해줘야지,
저희가 목소리 내는 걸 다 듣고 만 가요. 시의원, 구청 ,동장 다
듣고만 가서 가면 그만이에요. 답변을 해줘야 되잖아요. 근데
제대로 된 조치가 없어요. 이 사 람들은 전화하면“우리도 처음
당해서 지금 공부하고 있다, 지
금 위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 식으로만 얘기를 하는 게 답답하고 너무 힘들게
하는 거예요 행정의 늑장대응이 가장 힘들어요
복구하면서는 봉사단체들이 처
음에 오셔서 아수라장인 가구, 집기류는 마대자루에 다 넣고
묶어서 젖은 것은 다 갖다 내 놨어요. 저도 처음 당했기 때문에 묶어서 나오는데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 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무조건 다 내놨어요. 이제 10일 지나니까 조금씩 집
안 어느 자리에 뭐가 있었는데 생각나는 것들이, 그건 쓸만한 건데, 완제품 이었는데, 거기 껍질만 버렸으면 됐는데… 하나하나 생각나면서 많이 힘들 었어요. 우리 애들하고 10년이라는 추억, 애들하고 같이 했던 앨범 그런 거
다 젖어가지고 하나도 못 건져
는 것이었고, 근데 이제 우리가 제일 중요한 거는 재난 지원금 관련해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어쨌든 그런 재난 지원금을 받았어요. 특별재난지역
선포가 되면은 나라에서 감면혜택 내지 지원해 줄 수 있는 그런 방법이 30 개 항목인데 하나하나 열거해서 따져보니까 저희들이 받을 수 있는 감면
혜택 같은 거는 10이면은 1도 안 되는 그런 것들이에요. 전기세, 수도세 얼
마나 나오겠어요? 이 동네에서요 그런 거 감면 혜택이라는데 너무 터무니없
고, 대출도 저리 대출, 무이자 대출이 있다고 해서 우리 주택 침수는 우리은
행에서 전담으로다가 저리로 3년 거치 17년 상환이 있대요. 그러면 그거를 행안부에서 구청으로 해서 이제 동으로 해서 우리한테 이제 연락을 해주는 데 우리은행 안내가 안 내려와서 우리은행에 전화를 해서 알아보래요. 구
청 직원이 알아봤더니 새로 짓는 신축에 한해서 건축 설계서가 있어야 되고 계획서, 건축비 지급 내역서 이런 것들이 있어야지만 저리대출 적용이 된다고 하는데, 아니 지금 여기 새로 짓는 집이 아무도 없어요. 이거는 완전히 기만 행위죠. 저희를 두 번 세 번 죽이는 거예요. 그리고 행정에서 이재민 생활도
최대가 60일,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식사 제공도 최대가 60일 그게 이제 9월 7일로 다 끝난데 요. 구청 직원들이
하는 말이 저희 동
네에 최대로 지원
을 해줬다는 식으
로 말을 하더라고
요. 눈치 밥을 먹 고 있었던 거죠. 텐
트 생활 한 달 지
나면서 계속 눈칫
밥을 먹고 있었던 거지. 집이 특히 하
우스 쪽 계신 분들은 집이 따로 있으실 거 아니에요 하우스에서 먹고 자고 하기는 힘드니까, 그런 분들은 거의 일찌감치 강제로 나가시게 된 거지요.
이번에 구의원 최지연의원 그분한테만 감사해요. 그분은 항상 회의 때마다 오셨어요. 오시려고 노력하시고 독거노인 어르신들한테는 가셔서 진짜 말
벗도 많이 해 주시고 그 고민 다 들어주시고 회의 때도 오셔 가지고 저희가 얘기했던 의견들을 다 적어 가지고 구에 가서 다 또 각 부서별로 다 올려주
시고 또 답변도 있으면 답변 갖다가
풀면서 화합의 장이 되었다는 거, 그리고 서로 다 힘드니까 같이 서로서로 챙겨줬다는 거, 마음도 토닥토닥 거려주고 일도 같이 해주고 같이 먹 을 것도 공유해서 좀 챙겨주고, 빨
래 세탁 같은 것도 마찬가지고 그
런 것들이 좀 좋았어요. 물론 사
람 마음이 다 달라서인지 여전히 어
울리지 못하는 몇몇 분들도 여전히 계시지만요.
어쨌든 여기 정상적으로 복구해서
입주하고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이
되면, 저희도 받았던 것들 이제 베
풀어야지요. 봉사를 하든가, 아니
면 베풀 수 있는 그런 장 한 번 나
름 만들려는 마음도 있어요. 받은
만큼 또 베풀어야 되니까요.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이호열님
여기 정뱅이에서 농막한 지 지가 8년 됐고 집은 가수원동에 있지
만 하우스 관리를 해야 해서 남편하고 농막에서 살아요. 우리는
하우스가 11동이에요. 그런데 11동이 다 침수가 됐어. 그리고 6
동이 완파야. 시설 보험 들었다는 이유로 아예 아직 보상은 하
나도 못 받았어요. 시설 보험이 이제 나라에서 좀 보조를 해줘서
우리가 10% 내고 90% 정도 보조를 받을거에요. 그렇게 해서 그
걸 들어놨어요. 그러니까 보험회사에서 먼저 타고 나머지는 어떻
게 한다고 아직 연락 안 해줬어요. 오늘 연락은 받았는데 그것도
뭐 추석 전에 줄지, 안 줄지 그것도 몰라요. 내가 농작물 보험은
안 들었잖아. 그래서 그거는 줘야 될 거 아니냐고 그랬더니 아직 한 푼도 안 줬어요.
그리고 여기서 피해를 봤는데 주민등록이 안 돼 있다는 이유 하
나도 아무것도 혜택을 못 받았어요. 우리 같은 경우는 지금 보겸
TV도 통장이라는 사람이 딱 하우스 하는 사람까지 해서 38가
구인데 어떻게 27가구라고만 해서 우리는 못 받았어요. 다 준 것
처럼 나오잖아. 우리는 아예 없어요. 여기 아예 하우스라는 이유
인터뷰 김은진
로 안 해준 거야. 그냥 주택만 얘기를 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뭐
힘든 거지. 그렇잖아요.
에 8년 이상 사는 사람한테 그게 말이 안 되는 거지. 엄청 힘들어 요. 가깝게 지내던 사람하고도 지금 등지고 있고 지금 현재 그런 편이죠. 막 눈물이 나죠. 어떤 때는 진짜 한심하고 눈물 나고 저
하우스만 쳐다보면 막막하고 진짜 살 길이 막막하죠. 지금즈음 이면 오이랑 상추 따고 있었어야 하는데
우리는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차는 걸 알기 때문에 양수기를 8대 설치를 했어요. 그래서 비가 오는 거 다 뿜어내. 그 날도 잠 안
자고 꼬박 새우고서 4시까지 물을 다 뿜어냈어. 근데 비가 그치 고 전기가 딱 나가면서 둑이 터지면서 이게 이렇게 된 거야. 잠 한
시간도 안 자고 양수기 세 군데를 막 돌아다녔는데 뿜어낼 물이 하나도 안 찼었어. 그런데 갑자기 둑이 터지면서
래 걸리는 것 같은 거예요. 근데 어르신 한 분이 나오시더라고.
그때가 새벽 4시에요. 그래서 그분이랑 정자로 올라갔는데 가서
쳐다보니까 두두두 퍽하는 거야. 우리 하우스 무너지는 소리야. 그러니까 그냥‘어떻게, 어떻게’밖에 할 말도 안 나와. 그렇게밖
에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막 눈물 밖에 안 쏟아지면서 나 또
울려 그래. 그랬지, 뭐. 그래서 비만 오면 가슴이 두근 두근 한
동안은 막 잠도 못 잤어요, 맨날 심란해서.
그후에 보험 회사에서 와
서 시설만 보고 갔지. 하
우스에 뭐가 있나, 농약 기 기가 어떤 거고, 이게 스프
링클러니 뭐 다 있잖아. 그
리고 작물이 뭐가 들어있
나 실태조사를 하나도 안
했어. 그래서 자꾸 재조사 해달라는데 그렇게 말을
해도 한 번도 안 하잖아
요. 똑같은 하우스를 해
도 보상이 다 틀려야 될
거 아니에요. 이 사람은 오
이를 안 따. 우리는 오이
를 따, 그러면 작물에서도 틀리잖아. 또 우리 같은
경우는 이제 완파가 됐어.
그러면 완파를 쳐주어야
지. 근데 저 앞집 같은 경
우는 1층이 쭉 찌그러졌어. 근데 속은 다 쑤셔 박혔어도 서 있어. 그럼 보험 대상이 안 된다는 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우리
삼촌 같은 경우가 하우스가 찌그러졌는데 그냥 서 있다는 이유 로 비닐 값만 준다 이거지. 그래도 주택 같은 경우는 그냥 치우 고 쓸고 닦고 해서 리 모델링만 하면 되잖아. 하우스는 다 그냥 우리 가 손 봐야 되는 거죠. 감사한 거는
마나 좋아 나 놀랐어. 그래서 나도 받았으니 까 나중에는 좀 해보고 싶어요. 막 진짜 간식도
많이 해주시고 저렇게 마사지도 해주시고 많은 도움받고 있죠.
받은 만큼 나도 돌려주고 싶어. 그 중 기억에 남는 건 여자 경
찰인데 세상에 다른 남자보다 더 막 그러는 거예요. 너무 고맙더
라고. 그런데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는데 어떤 봉사자는 내가
물 좀 달라니까 자기네 명 수 딱 세어 갖고 와서 물을 못 준대. 주민한테 그래서 나 또 울었어. 그런 봉사자도 있더라고요. 고맙 긴 한데 좀 그런 일도 있더라고요. 엄청 서운했어.
앞으로 우리 정뱅이마을이 그냥 분열은 없어지고 다 화합해서 함 께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진짜 다들 좋은 사람들이 많더라고 요. 살고 싶은 동네에요. ●
#정뱅이마을 주민 인터뷰
이홍제님
나는 이홍제야. 장인어른 살아계실 때 들어왔으니 20년 됐어. 처
갓집이야. 새벽 4시 자고 있는데 앞집 남자한테 전화가 왔어. 비
에 다리가 넘칠 것 같다고 해. 막 정신없이 쫓아다니는데 그때 전
기가 나갔어 그때 막 벼락같은 소리가 들리더라고 둑이 무너진거
지. 철길 밑으로 전봇대가 하나 있어. 그때 둑방이 터져서 전봇대 가 쓰러졌어. 그때 전기가 나가서 한 이틀 안 들어왔지.
전기가 끊겨서 그 동네에서 여기로 차 끌고 야실다리 건너오는데
무서웠어. 그 건너에 하우스가 있거든. 그래서 와봤는데 괜찮은
거야. 근데 마을 쪽이 이상해. 둑이 터져서 저 냇물이 흐르는 거나
동네로 흐르는 물이 똑같았어. 저쪽 앞에서 사람 살려달라고 그
래.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들어갔는데 그 집 아들이 수영해서 건
너갔어. 자기 어머니하고 옆집 할머니를 구했잖아. 여기는 지대가
좀 높은데 저 앞쪽은 처마까지 물이 찼어. 저 위 계량기 밑까지
찼어.
인터뷰 이현미
글 최정화
이게 그때 찍은 사진이야. 그날 새벽에 나왔을 때 이 다리 밑까 지 물이 찼지. 그때부터 찍은거야. 이건 물 빠진 후 찍은 논이야.
논 위에까지 물이 전부 찼지. 물은 그날 저
녁에 다행히 빠졌어. 여기 처갓집이 있는데 그
때 논도 다 물에 잠긴거야. 요 앞 빨간집에
처마까지 물이 찼었지. 방송 듣고 바로 나와
서 차로 운전해서 가려 했는데 물이 이미 내
려와서 몸만 도망갔지.
내가 여기에 논이 22마지기가 있어. 지대가
좀 높은 곳에 있는 논이 기름이 떠갖고 벼가
죽었었어. 근데 살아났어. 이렇게 노랗게 자
랐어. 벼는 장마 때 물 한번 찼다 빠져도 그
게 거름이 돼. 밭에는 별의 별개 다 들어왔어.
독단지니 뭐니 잔뜩 있어. 내가 여기 20년을
살아서 동네 노인네들이랑 농담을 곧잘 해.
노인네들이 돈을 꽉꽉 채운 단지가 우리 논
에 떠내려 와서 가을에 벼 벨 때 발견하면 얼
마나 좋겠냐고.
지금 이 논안에 냉장고도 있고 별게 다 들
어 있어. 벼를 누가 베 주려나 모르겠어. 날
이 밑에서 잘못 걸리면 나가. 그거 한번 갈려
면 7~80만원 짜리야. 벼를 천천히 베고 앞
에 다니면서 물건을 하나씩 빼야지. 논은 저
앞에 두고 여기는(논두렁) 전부 콩을 심었거
든. 지금 콩농사는 나쁘지 않아. 그래도 비
만 아니면 콩 농사가 기가 막히게 됐을거야.
이 품종이 청자 5호라는 거야. 신품종 서리
태야. 내가 해마다 서리태를 한 가마 이상
수확했는데 올해는 침수 때문에 작년만 못 해.
나는 원래 저 밑 동네에서 태어났는데 장가
들고 이 동네에 왔어. 20년을 살았지. 처갓
집에 와서 장모님 먼저 돌아가시고 장인어
른 모시고 살았지. 옛날 철도청을 다녔는데
2005년 철도공사로 바꿨어.
저 건너 산 밑은 비가 100ml만 와도 물이
차. 냇물이 불어나거든. 87년도에 방까지 물
이 한번 찼었어. 이 동네 밑에 유천동보라는 게 있어. 그걸 몇 년 전부터 라바댐을 해달라
고 민원을 넣었어. 그리고 하천정비도 같이 해달라고 했지. 몇 년째 안 했어. 그걸 안 해
서 이렇게 물난리가 난거야. 87년에 물난리
나고 나서부터 지속적으로 요구했지. 이번에 국회의원하고 대전시가 나와서 흑석리 복지 관에서 설명회를 했어. 나도 갔지. 서구청, 시
청 사람들이 자연재해로 이야기하더라고. 그
러니까 노인네 하나가 화가 났어. 이게 왜 자
연재해냐고 말이야. 하천정리 해달라고 그렇 게 말했는데 해주지도 않고 이게 무슨 자연
재해냐는 거지. 나도 한마디 했어. 나 봉국2
동 통장인데 여기 살면서 비가 100ml만 와
도 넘치니 라바댐을 해달라고 그렇게 요구했
다. 근데 들어주지 않았다, 라바댐만 해주면
장마 때 물이 쑥 빠지니 하천에 토사가 쌓
일 일이 없다 그렇게 말했더니 이번에 라바
댐 공사 할 것 같아. 이번 난리 겪고 나서 그
래도 다행히 라바댐 하게 됐어. 이번에 둑방
이 터져서 동네가 피해를 많이 봤는데 봉국
2동은 집들은 산 쪽에 있어서 괜찮아. 앞에
있는 논은 다 버렸지. 제방 공사 하러 왔는
데 여기 다시 높이고 넓힌다고 하네. 땅 가진
사람들 논이 포함되니까 동의서를 받아야
해. 건설사에서 통장인 나한테 협조 좀 해달
라고 해서 내가 동의서를 전부 받아줬지. 라
바댐 지어 준다는데 이제 원 없어.
이 동네는 이상하게 서구청에서 보상 받은
사람은 있었어. 동사무소 가서 물어봤지. 내
가 통장이니까 물어봤는데 자기들은 모른
대. 서구청에서 하는 일 이라는 거야. 서구청
가서 물어보려다 그만뒀어. 농지는 농협에서
보험 들었거든. 보험회사에서 현장 실사 나
왔어. 내가 이거 다 갈아엎었는
데 얼마 나오냐고 물었어.
자동네였어. ● 인터뷰
나는 보험료를 좀 더
냈거든. 다른 사람들은 40% 나오는데 나
는 45%가 나와. 아예 망가져도 150만원 나
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나와. 그래도 농
지에 들어간 것도 안 나오는 금액이지. 둑방
터진 곳 뒤에 있는 논은 100% 망가졌어. 세
군데를 보상받았는데 100만원 나왔어.
나는 처갓집 동네니까 처음에 논이 이렇게
됐어도 계속 와서 봉사활동 했어. 우리 마누
라는 하루도 안 빼놓고 계속 쫓아다니고 오
늘도 나갔어. 처음에는 봉사 활동하는 사람
들이 몇 백 명씩 왔어. 그때 와서 보니까 집
안팎 할 것 없이 쓰레기가 어마하게 쌓였어.
이걸 봉사 활동하는 사람들이 다 치워줬으
니 얼마나 고마워. 물이 집 안까지 다 찼으
니까 살림하나 쓸 거 없어서 다 내려야 되니 폐기물이 어마했지. 이거 치워도 리모델링하
면 또 쓰레기가 엄청 나오지. 이 동네일에는
솔직히 간섭 안하고 싶어. 옛날에는 이 동네
가 기성동에서 최고 부자동네였어. 땅이 비옥
해서 농사도 잘 됐고 완전 부
#정뱅이마을 주민
임유순 님
농사 지으려고 8년 전에 이곳에 들어왔어요. 전에는 도안동 도솔
터널 근처에서 30년 동안 농사를 지었는데, 도안동이 개발되면서
이곳으로 옮긴 겁니다. 여기가 좋다고 해서 들어왔는데… 이 동네
는 두 편, 세 편으로 갈라져 있어요. 사고가 나면서 더 심해졌고
요. 서로 알게 모르게 인사도 안 하고, 젊은 사람들끼리도 갈라
져 있고요. 이사 들어온 사람들도 서로 나뉘어 있어요.
이번에 수해가 나고 저는 초창기부터 말했어요. 보상보다도 이
런 일이 터지면 다 같이 합심해야 한다고요. 그런데 하우스는 아
예 얘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런 일에는 한 사람이라도 더 힘을 보태야 하는데도 소용이 없어요. 옛날부터 갈라져 있던
젊은 사람들끼리도 틀어지고, 통장하고도 틀어지고, 욕심이 너무 많아요. 엊그제 통장 선거를 했는데, 빨리 투표하라면서 한 시간
에 세 번씩 전화가 오더라고요. 나중에는 쫓아오기까지 했어요.
“이럴 때만 주민 취급하느냐”한마디 던지고 말았죠.
농작물이나 하우스 시설 보험도 있지만 너무 비싸
인터뷰 신정은 글 민순옥
서, 저는 하우스 비닐 겉면에만
들었어요. 그건 싸거든요. 작물 보상까지 받으려면 여기가 한 천
평인데, 70~80만 원이 들어가요. 1년에 이렇게 돈을 내야 한다
면 누가 가입하겠어요? 정부에서는 보험이 있다지만 농민들이 그
돈을 어떻게 내겠어요. 우리는 비닐이 4개인데 그중 하나만 보험
보상이 됩니다. 정부에서는 보험이 있다지만, 있으나 마나예요.
농사는 주로 오이를 하고, 여름에는 잠깐 야채를 재배하고요.
오이는 한 30년 넘게 했어요. 보조 사업도 대전권은 지원이 별로
없어요. 논산 쪽만 가도 간이 화장실까지 보조해 주거든요. 여
기는 하우스 농가가 몇 집 안 돼서 힘을 못 써요. 토마토도 이제
막 내일 모레 따야겠다고 했는데, 홀딱 쓸려가 버렸어요.
우리는 비만 오면 비상이에요. 솔직히 말해, 제가 통장을 깨워서 통장이 방송하면서 동네 사람들이 다 살았어요. 그렇지 않
았으면 다 죽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어요. 빈말이라도 할 수 있잖아요. 그런
데 누구한테서도 고맙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이 없네요. 지원도 3일 만에, 그것도 어거지
로 받았어요. 하우스는 지원 안 된다고 하 더라고요. 자원봉사자들도 집부터 해야 한다면서, 하우스는 바로 지원이 안 되었 어요. 사람이 많이 오니까 몇 명씩만 보내 줘도 좋았을 텐데, 동네에서 하우스는 안
된다고 막 반대해서 처음에는 지원을 못 받았 고, 뒤늦게야 조금 받았어요. 지금은 깨끗이 치워
졌지만, 여기저기서 떠내려온 짐이 다 쌓여 있어서 들어 올 수가 없었어요.
여기는 하천이 높아서 물이 잘 빠져나가지 않아요. 구청
에 민원을 무지하게 넣어도 소용없었어요. 결국 이번
봄에 공사한다고 하면서 집수정 두 개를 짜놓고 양수기 설치는 다 안 했어요. 왜 양수기를 다
설치하지 않느냐 물으니 예산이 없어서 못한
다고 그래. 그 자리에서“그럴 거면 왜 박스 를 두 개씩 짜 놓느냐, 하나만 짜고 나머지는 옛날식으로 해서 양수기를 더 설치하지”했어 요. 결국 여기를 파서 바닥부터
하
니, 되레 왜 배수 얘기를 하느냐고 하더라고요. 제가“당신들 건물 지을 때 하수구부터 안 빼느냐, 배수구부터 잘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했죠.
새벽 2시 반쯤 역류가 시작될 때 통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상이 있다고, 빨리 나가보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전화를 안 받더더라 고. 3시쯤 다시 전화를 해서 난리가 났다고, 빨리 나와 보라고 했고, 구청에도 전화했어요. 옷이 다 젖어서 갈아입으러 가는 길
에 전기가 탁 나가더군요. 두꺼비집이 나가면서 전기가 끊긴 거
죠. 그때 한 번 방송하고 전기가 나간 거예요. 하천물이 절름절
름하더니 순식간에 확 들어왔어요. 방송 안 했으면 몇 사람은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이 둑방에 있다가 물이 꽉 차서 저쪽 다 리 앞으로 피신했죠. 할머니들은 살려 달라고 난리였고요. 포크 레인 기사가 좀 젊고 자기 부모님이 있으니까 물 많은 데도 수 영해서 들어가 건져냈잖아요. 앞에서 보면 정말 환장할 노릇이에
요. 동네 사람들도 말렸어요. 이곳이 저수지처럼 물이 확 쏠리는 곳이 아니라 물이 잠잠하게 멈춰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같 이 휩쓸려갔을 겁니다.
지난 겨울 날씨도 워낙 안 좋았잖아요. 계속 구름 끼고 비 오고 난리였죠. 동사무소에서 일 조건이 안 좋아 조사한다고 했는데, 조사만 하고는 아무것도 없었지. 몇 푼이라도 줄 줄 알았더니, 그런 것 하나 없어요. 지난겨울엔 완전히 적자였어요. 아, 정말 토마토도 잘 길러서 내일 모레 따야겠다고 했 는데… 하우스에서 오이, 토마토 농사 짓는 사람
들은 90%가 하우스에서 먹고 살아요. 일 하다가 쉴 곳이 없으니 하우스 안에 방
을 마련해 두는 거죠. 부구청장이 왔을 때
제가 “집 있는 사람들은 봉급이라도 받 고 보상금이라도 받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
은 생계가 걸린 문제라 일자리를 잃은 거나 마
찬가지입니다. 밥줄을 끊어 놓은 겁니다.”라고 말
했어요. 하우스는 파이프만 남아 있고 비닐은 전부 갈아
야 해요. 보일러도 한쪽은 괜찮은데 이쪽은 싹 걷어내고 새로 해 야 하고요. 구청은 보험이 있으니 해결하라고 하겠죠. 하지만 그
보험으로는 겉 비닐만 해결되고 속 비닐은 보상되지 않으니 문제
예요. 어떻게 해 줄지도 모르겠으니 답답할 따름이에요. 담배도 겨우 끊었는데, 3개월 만에 다시 피고 앉자 있구만. 내가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이렇게 큰 사고가 났으니까 무조건 합심해야 해요.
이럴 때일수록 서로 의지하고 뭉쳐야죠. ●
#정뱅이마을 주민
장 용순님
제가 시골 출신이다 보니 이런 마을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정
년 퇴직하고 나서 이런 데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다가
이 동네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우리 아저씨는 7~8년 전에 하우 스 짓고 살러 들어왔고, 나는 갈마동에서 살다가 이번 일 있고
나서 살러 들어왔어요. 그날 새벽에 한 4시 조금 안 돼서 제가 들어왔어요. 새벽에 남편 한테 전화가 왔는데 물어보니까 물
인터뷰 박창숙 글 김채원
괜찮아?”했는데 그때 방송을 하는 거야.
문 열고 나와서 보니까 벌써 물이 차기 시작하더라고. 내 차는 회관에다 대 놓고 우리 아저씨는 농막에다 차를 대 놨는데, 아저씨 차를 타고 산으로 올라가면서 차를 뺐죠. 물이 한 무릎 까지 차오르니까 그냥 해 보자는 마음으로 빼서 차는 겨우 구했
어요. 내가 그때 안 갔으면 아저씨는 하우스에 물 다 찬 걸 뺐으
니까 마음 편하게 자다가 아마 물에 잠겨서 죽었을지도 몰라.
인터뷰
난리 나고 처음에 하우스 딱 들어갔는데, 큰
일 났네. 진짜 이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요. 나 50년 넘게 살면서 여태까지 그런 물
난리는 처음 봤어요. 제가 들어간 우리 하우
스는 그래도 아저씨가 조금은 치워놓은 상
태였는데 그걸 보고 주저 앉았어요. 진짜 얼
마나 펑펑 울었나 몰라. 저희 아저씨도 처음
에 보고 눈물이 나서 그 자리에 앉아 펑펑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주말에
저희 하우스 상황 보고 동네 언니네 갔는데
언니는 더 처참해. 언니가 너무
씩씩하게 버티고 있어서 그걸 보고 내가 울
수가 없겠더라고.)
저희 하우스가 겉(비닐)이 4중인데요, 겉만
멀쩡해요. 안은 다 무너진 상태예요. 다시 짓
자니 돈이 너무 많이 들고, 고치려고 해도 돈
이 너무 많이 들어요. 우리가 풍수 보험을
들었는데 거기서 얼마가 나오는지 보고 나머
지를 지자체에서 지원해주겠다고 하는데 그
게 보니까 얼마 되지도 않아요. 하우스 한
동 지을 돈도 안 돼. 원래 하우스 들어가서
오이 따고 이렇게 농사를 지었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있으니까 속상하죠. 주택은 도배,
장판비 나오고 재난 지원금 나왔다고 하는
데 하우스는 단돈 10원 받은 것도 없어요.
저희 하우스는 자원봉사를 받을 수가 없었
어요. 남편이 정리는 조금 해 놓은 상태에서
제가 들어왔어요. 주택에는 다 자원봉사자
가 있는데 하우스는 누구 하나 자원봉사를
보내주질 않아서 진짜 둘이 다 치웠어요. 왜
하우스는 안 해주고 주택만 하냐니까 통장
이든, 동장이든 “주택이 먼저다”이러는 거
예요. 먼저가 어딨어요? 하우스도 사람 거
아니에요? 그러니 우리가 다 치우고 형제들
와서 도와주고 한 거지, 누구 자원봉사 받
은 적이 없어요.
그리고 주택에 자원봉사자들 왔는데, 너무
기가 막힌 게 많더라. 내가 진짜 인터넷에 사
진 찍어서 올리려고 했어요. 한 집에 막 몇 십
명씩 모여 있으면서 할 일이 없어서 뒷짐지고
있고, 작은 나무 하나 옮기면서 서로 장난치
고 있더라고요. 그게 자원봉사하러 온 사람
들의 태도예요? 정말 일손이 필요한 데는 안
해주고 주택에서 그러고 있는 거야. 오죽하
면 제가 쫓아와서 통장님한테 하우스도 봐
달라고, 사람 좀 지원해달라고 했겠어요. 그
래서 보내겠다고 통장님이 그랬는데 (사람
들은) 그냥 오전에 하고 가버리는 거야. 그
래서 제가 차를 다 쫓아가려고 그랬어요. 멱
살을 잡고서라도 끌고 와서 보라고 하려고
했더니 우리 아저씨가 말리더라고요. 그래서
말았는데 오후 늦게 왔더라구요. 한여름에
30~40도니까 그냥 있어도 더워 죽는데 하
우스는 50~60도 돼요. (늦은 오후면) 자원
봉사자들은 애초에 들어가지도 못해. 물론
봉사자들 여기 와서 고생은 했죠. 했지만 그
게 정말 필요한 곳에 제대로 지원이 안 갔다
는 거지. 체계가 있어서 (인력을) 정확하게 분
배했다면 좋았겠죠. 그래서 우리는 도움받
았거나 지원받았다는 느낌이 아예 없어요.
내가 동장이라면, 내 지역 주민이잖아, 지역
주민들이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와 보고 했을텐데 여기 동장
님은 진짜 잘 못하는 것 같아. 물론 자기도
공무원이라 위에서 월급을 타겠지만 동장이
라면 주민들 편도 좀 들어주고 사람들 말에
귀기울여서 (위에) 전달하는 역할도 해야 하
지 않았을까 싶어.
이번 일의 원인에 관해서는 제방이 무너졌다
고 이야기들 하더라고요. 저도 항상 거기 다
니면서‘야, 여기 비 많이 오면 이거 넘치겠 다.’라고 생각했거든요. 자주 다니지는 않지
만 비 많이 오면 넘칠 수 있겠다고 생각만
했지, 진짜 넘쳐버리니까 너무 놀랐죠. 이런
물난리는 초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이에요.
제가 이번 일 겪으면서 생긴 트라우마가 있
는데요. 비가 오면요, 심장이 철렁해요. 비가
조금 많이 온다 싶으면 심장부터 철렁해요.
그러면 사무실에서 일하다가도 괜찮냐고 제
일 먼저 전화부터 해요. 물론 그런 일은 또
없겠지만 그래도 전화부터 하게 되더라고. 여
기저기에 괜찮냐고 전화하는 습관이 생겼어 요. 그래도 이번 물난리 나고 나서 주민들
알게 된 건 좋아요. 같이 음식 해서 나눠 먹
고 그런 걸 좋아하는데, 이렇게 할 수 있으
니까 그거는 오히려 좋은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제일 바라는 건 하천 공사 제대로
해서 다음에 또 이런 일 없게 되는 거예요.
다들 얼른 복구 잘 돼서 예전처럼 평화롭게
서로 웃으면서 얼굴 맞대고 얘기 할 수 있는
상황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무사히 이사
잘 하고, 다들 건강하고 재밌게 오래오래 잘
살 수 있길 바랍니다. ●
#정뱅이마을 주민
정병원님
인터뷰 신정은 글 민순옥
정뱅이 마을에서 오래 살았어요. 14살 때부터 살다가 결혼하고,
지금 85세인데 평생을 여기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동
네는 아주 좋은데, 하천이 높아서 가끔 물난리가 있었지만 이렇 게 크게 난 적은 없었어요. 예전에는 물이 조금씩 들어와서 아래
논도 조금 버리고 했었는데, 이번처럼 큰 난리는 평생 처음이에 요.수해 난 건 못 듣고 잤어. 자고 있는데 물이 막 들어오며 폭
탄 터지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일어나 보니 방에는 물이 안 들어 왔었는데 금세 차올랐어요. 어떻게 피해야 할지 걱정이 컸어요. 문 앞까지 나갔는데, 어떻게 나가야 하나 그게 큰 걱정이었지. 나
가야 살지. 물이 금방 꽉 찼지만, 다행히 물살은 없어. 사방이 물
로 가득 찼지만 고요했어요. 한 10~20분 지나니까 소방대원들 이 보트를 가지고 와서 타고 나갔지.
휴대전화가 방에 있었는데, 물이 차서 문이 안 열리더라고. 그래
서 연락도 못 했지. 구조된 뒤에야 딸이 연락했어. 복지관에 가 니 동네 사람들만 아니라, 다른 동네에서도 무슨 사태 났다고 온 사람들이 함께 있었어요. 혼자 있는 것보다 여럿이 있으니 낫 잖아요. 동네 사람들이라 서로 다 알고 잘해줘서 복지관에서 잘
지냈어. 생활에 불편함도 없었어. 도시락도 매일 나왔고, 어제까지 먹다
가 오늘은 딸이 밥을 해주고 가서 집에서 밥 먹었어요. 복지관은 잠자리
가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시간이 있어 좋지. 삼
시 세끼를 다 해결해 줘서 불편하지 않게 지냈어.옆집도 도배한 지 한 달
도 안 돼서 물이 들어왔어요. 우리 집도 도배한 지 한 3주밖에 안 되었
는데, 처음에는 하얗게 곰팡이가 피더니 나중에는 시커멓게 변하더라고
요. 습기를 제거하려고 계속 불을 때었어요. 낮에는 괜찮다가도 하룻
밤 지나면 습기가 가득 차서 축축해지곤 했죠. 기름도 미리 넣어두고 많
이 땠어요. 에어컨도
실외기에 물이 들어가서 고장 나 서 못 쓴대요. 그나마 에어컨 본체는 높이 있어서 물에 잠기지 않아 살린 줄 알았는데, 실외기가 물에 잠기면서 사용할 수 없다고 하더라구요. 가
전제품은 하나도 쓸 수가 없어요. 다 새로 사야 해요. 씨앗 같은 것도 하나도 없어요. 깨 넣어둔 것도 다 젖었고, 쌀도 창고에 넣어둔 건 하나 도 못 쓰게 되었죠. 작년에 거둬들여서 올해까지 먹고, 다시 추수해서 내 년까지 먹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껍데기만 있어요.
보겸TV에서 와서 가장 시급한 필요를 파악하고, 가전제품을 많이 지원 해줬어요. 원하는 걸 하나 고르라고 해서 우리 집은 냉장고를 골랐고, 다른 집은 에어컨이나 세탁기 같은 것을 골랐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필요한 것을 바로 지원해 주는 사람이 고마운 거지요. 언젠가 해줄 거면 빨리 해주든가 해야
지, 행정처리한다고 필요한 때
놓치고 해달라고 해달라고 해
야지 해주면 뭐가 고마워요. 해
주고도 욕먹기 십상이에요.
여기 청소를 하니 쓰레기가 어 마어마하게 나오거든요. 끌어 내는데 백 년 묵은 쓰레기까지
다 나오는 것 같았어요. 나중 에 뼈대라도 살려야 되니까, 그
런 걸 다 꺼내는 데 도움 주신 분들께 참 감사했어요. 지역 분
들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습니 다.
저(딸)는 이 집이 아닌 저 위
에 집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집은 여기가 조금 높아서 어릴 때 물이 들어 왔을 때 동네 분들이 많이 와서 마당에 가득 앉아 계셨던 기억도 나고 요. 예전에는 저 큰 다리가 없었거든요. 철길 따라 학교 가야 했는데 밑
이 훤히 보여서 무서웠어요. 우리 엄마가 중학교 갈 때도 저를 업고 다니 셨어요. 지금은 다리가 생긴 지 한 10년 정도 됐어요. 고등학교 때인가, 집을 새로 지으면서 지대가 낮아 기초를 높게 쳤어요. 옛날 그대로였으
면 큰일 날 뻔했죠.옛날에는 동네 사람들이 같이 놀러 가고, 여행도 가 고 그랬었지. 동네에서 형제처럼 지내는 사람들과 오형제계를 만들어 부
부 동반으로 놀러 다니고 그랬어요. 그전에는 동창계 같은 모임도 여러 개 있었는데, 나이를 먹다 보니 하나둘씩 없어지더라고. 이제 살 날이 얼 마 남지 않아 특별히 바라는 거 같은 건 가질 수가 없어.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정유경님
이 동네에 들어온 건 7년쯤 됐어요. 신랑이 3년 먼저 들어와 있었 으니 10년 됐겠네요. 대전에 살다가 정뱅이마을로 들어왔어요. 시 어머님이 조부월님이에요. 처음에 여기는 시댁이다 보니 어려웠고, 마을 사람들과 별로 소통은 하지 않았어요, 지내다 보니 청년회
도 만들고 마을 사람들과 맛있는 것도 해 먹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죠. 이런 시골살이도 괜찮겠다 생각했어요.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편이에요. 새벽 4시에 재난문자가 왔어요.
비는 계속 오고 있었죠. 침수붕괴 위험이 있다고 계속 문자가
어요, 조금 있으니까 마을방송이 나왔어요. 남편이 밖에 확인한
다며 나갔어요. 저는 설마 했어요. 그래도 어머님이 계시니까 모시
고 밖으로 나갔어요. 우리 집은 마을과 떨어져 있어요. 어머님 모
시고 산으로 갔죠. 나갈 때 물이 어느 정도 차 있었어요. 그래도 마을이 그 난리가 난 줄 몰랐어요. 우리는 산으로 올라갔으니까
마을이 어떤지 몰랐던거죠. 119에서 왔는데 동네 분들은 안 보였 나 봐요. 우리는 여기 높은데 있으니까 바로 보이죠. 그래서 1등
인터뷰 문서영 글 최정화
으로 타고 나왔어요. 정뱅이 마을에서 이렇게 물이 많이 찬 적이 없었대요. 어머님이 우리 집은 안 차니까 괜찮다고 하셨어요. 근
인터뷰
데 그렇게 찰 줄은 몰랐던 거죠. 밑에 할머니들 집처럼 물이 차지는 않아
도 집 안까지 물이 들어와서 살림살이는 다 못쓰게 됐죠. 우리 집은 높은
데 있으니 이만했지만, 밑에 할머니들은 죽을 고비를 넘기신거죠. 우리만
살겠다고 산으로 올라간 게 마음에 걸려요. 근데 또 산사태가 나면 반대
상황이 되는 거죠. 그때 상황이 그랬어요.
가재도구랑 싱크대 그릇들이 못쓰게 돼서 너무 아까워요. 사진 앨범도 다
젖어서 버렸어요. 애들 어릴 적 모습이 담겨있는데 그런 게 너무 아깝네요.
침대, 가구 전부 다 버렸죠. 이제 새로 하려니 전부 다 돈이에요. 도배도
집이 말라야 하는데 아직 못하고 있고요. 간이 침대 놓고 생활하고 있어
요. 돈이 없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에요. 당장 사야 할 것도 많은데 대출
도 잘 안 되구요. 대출이 가능한지 서구청에 민원을 넣었는데 아직 답변
을 못 받았어요. 줄이고 줄여도 돈이 많이 들어서 대출이라도 받아서 해 보려구요. 집 부서진 거는 일부 지원금은 받았어요. 근데 그거 갖고는 안
돼요. 100%는 안되니까 돈이 턱없이 부족하죠. 우리 물건이 새것은 아니
지만 이런 수혜가 없었으면 돈 들어갈 일은 없잖아요. 우리가 집을 새로
하려고 인테리어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근데 외부에서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아요. 안 해도 되는 걸 한다고 생각해요.
자원봉사를 나는 한 번도 요청한 적이 없었는데 청소를 도와달라고 조
심스럽게 이야기를 했어요. 근데 우리들이 스스로 해도 되는 거를 청소까 지 요청하냐고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우리끼리 해도 되는데 자원봉사자들
이 도와준다고 하니까 요청을 했던 거죠. 근데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들리 니까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요.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으면 그 기분은 몰라 요. 복지관에 있을 때 회원들이 언제까지 저렇게 할 거냐고 말이 나오기도 했어요. 실상은 별로 받은 것도 없는데 1억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요. 햇반, 라면은 많이 받았어요. 근데 그런 거 갖고 되겠냐구요. 집에 지금 필
요한 것이 한 두 개도
아닌데.
오죽하
면 복구되면 떡 사 들 고 한번 간다고 했어요.
복지관에서는 7월 10일에 가서 8월 31일에 나왔어요. 복지관에 있을 땐
괜히 위축됐어요. 고마운 점도 많지만 복지관 회원들한테 미안했어요. 괜 히 당당하지 못했고 눈치가 보였어요.
나는 솔직히 관에 관심도 없었고 민원도 한번 넣어 본 적이 없었어요. 근 데 행정이 어쩜 이렇게 소통이 안 되는지 몰랐어요. 의견 전달도 안 되고 답변도 시원하게 안 하구요. 세탁을 해야 하는데 거기서 봉사를 해줬어 요. 만약 그 사람들이 며칠 밖에 못하면 며칠밖에 못 합니다라고 칠판에 써놓고 끝인거에요. 해결할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는거 죠. 제가 너무 속상해서 민원을 넣었어요. 자원봉사자들도 우리만 봉사 하는 것이 아니니까 며칠까지 한다고 하면 서구청에서 미리 와서 안내를 해야죠. 몇 일까지 자원봉사를 하니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 야기를 해야 하는데 칠판에다 써놓고 끝 인거에요. 이 동네는 소통이 제일 안되는 게 가장 큰 문제에요. 특히 통장님하고 소
통이 제일 안돼 답답하더라고요. 구호물품이 들어오는데 각양각색이에요.
대책위로 들어오는 거 통장으로 들어가는 거 분리되서 어떻게 정리되는
지 잘 모르겠어요. 노인회로 들어오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거기는 잘 모
르겠지만 이게 어떻게 정리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마을 일
에 관심도 좀 가지고 같이 해서 좋은 동네를 만들어야지 생각했는데 지
금은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사람들도 나랑 비슷한
생각할 걸요. 그분들은 또 나름대로 우리가 소통이 안 된다고 생각하겠
죠. 이런 다른 지점을 풀어야되는데 누가 좀 나서서 중간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동장이 통장하고만 소통을 했다고 생각해요. 저번에 이야기를 좀 나눴어요. 근데 우리가 소통을 못하게 차단했다고 하더라구요. 생각
이 다른 거죠. 우리는 소통이 안 됐다고 하고, 이건 자연재해냐 인재냐 이
런 시시비비 가리는 것도 생각이 많이 다르고요. 제일 중요한 건 소통인데 그게 제일 안돼요. 관에서 와서 설명을 해주면 좋은데 그게 안 되나봐요.
물론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려운 점이 많겠지만, 이게 자기들이 해야 하
는 일이잖아요. 우리가 요구하는 게 과한 것 같다는 시선도 있어서 눈치
가 보이는 건 사실이에요. 우리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닌데 죄인이 된
것 같아요.
처음에는 이 일을 계기로 더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 했어요. 근데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요. 우리끼리 마음 맞고 좋아하
는 사람들 만나서 차나 마시는 그 정도에요. 동네 사업 있잖아요. 그런
것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마을은 힘들 것 같아요. 화합이 누
구 한 사람 희생한다고 될 일도 아니구요. 이게 세태가 바뀐 것 같아요.
근데 또 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죠. 이 모든 것이 과정이니까요. 통장님
이나 중간에서 조율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좀 바뀌어야 되는데 옛날에
했던 방식 그대로 하는 것 같아요.
냉장고를 받았어요, 통장님 사위를
통해서요. 굉장히 고마운 일이죠. 근
데 기증을 받았으면 동네 거잖아요.
근데 그 분은 나를 통해서 받았으
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
는 거에요. 그게 옛날 방식이죠. 이게
그렇다 보니 갈등이 있어요. 이건 순
전히 제 생각이에요.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죠. 본인들 생각은 제가 바
꿀 수 없겠지만, 계속 대화를 했으 면 좋겠어요. 자기 생각을 이야기 하
고 양보도 좀 하구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완전히 대립 관계
에요. 하나로 잘 풀어나갔으면 좋
겠어요. 그래야 나중에 큰일도 같이 하죠.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정이순님
여기는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에요. 시집갔다가 친정엄마가
아파서 들어온 후로 계속 살고 있어요. 어머니 계실 때는 친구들
이나 동생이나 언니, 오빠들 되게 많았어요. 옛날에는 흑석리 중
학교까지 걸어갔어요. 초등학교는 원정리까지 걸어가고, 저기 공
굴(굴다리) 있잖아요, 여기 냇가가 나무다리였어요. 비만 오면 떠
내려가고 없거든요. 학교는 가야 하고, 병원도 다녀야 하는데, 저
철길 공굴 위로 뛰어다니고 막 그랬어요.
저는 그 전날 야간 근무하느라 밤에 없었어요. 아침 9시 퇴근이
라 한창 일할 때였죠. 그래서 일하고 있는데, 5시 40분
쯤에 부녀회장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이순아
큰일 났어. 마을이 물에 잠겼어. 아버지 어
디 계시니?”“아버지 집에 혼자 계시는
데요” 그러니까 아버지한테 연락 좀
해보라고, 지금 물이 잠겨 가지고 사
람들은 다 빠져나가고 그랬는데 아
버지하고 연락이 안 된대요. 아버지
인터뷰 박창숙
글 김윤정
한테 전화하니까 진짜 연락이 안 되
는 거야. 전화를 안 받는 거야. 큰일 났어. 가지도 못하고 발로
동동거리고 회사에다 얘기하니까 교대해 줄 사람이 없는 거야. 그래 막 여기저기 연락해서 교대 좀 부탁한다고 그랬는데도 안 돼요. 그때 같이 일하는 선생님이 교대를 해줘서 자전거 타고 와
서 보니까 물이 완전 마을이 잠겨 가지고 보트만 둥둥 다니는 거 야. 119 아저씨들이. 그때만 해도 아버지랑 연락이 안 됐거든. 그
러고 한참 이따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아버지 저기 잘 계 시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냥 한 2시간 지났나, 119 보트 타고 나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요. 정확한 시간은 잘 모르겠는데, 10시쯤 아버지를 만난 거 같 아요.
복지관에서 지내다가 집에 와서 보니까 다 넘어져 있고, 쓰러져 있 고, 다 물에 흙탕물에 잠겨 있고 막 난리도 아녜요. 전쟁 폭탄
맞은 집 마냥. 봉사자들이 많이 오셔서 많이 치워줬어요. 또 회사
에서 원장님도 오시고 같이 일하는 선생님도 오셔서 도와주셨어
요. 근데 봉사자분들이 어떤 걸 버려야 되는지, 어떤 걸 둬야 하
는지 모르니까 그냥 무조건 다 버리시는 거야. 그래가지고 잘 빼
놓은 것도 버리고, 그래서 많이 없어진 것들도 있고 그래요. 그래
도 감사하죠. 나도 내 걸 내가 챙겼어야 하는데, 정신이 없으니 까, 버리지 말아야 되는 것들을 챙기지 못했어요. 돌아가신 엄마 사진이랑 우리 애들 어렸을 때 사진이랑 다 없어졌어요. 이거라도 찍어놨어요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는데, 다 젖은 채였 다). 우리 아기들 사진은 하나도 챙길 수가 없었어요. 아기 때 사 진은 다시 찍을 수도 없잖아요.
집 복구는 직장도 다녀야 하고 해서 연차 쓰면서 일 보고 있어
요. 동네 언니들이 집 고치는 사람들, 인테리어 사장님들을 불렀
나 봐요. 그래서 나도 같이 맡겼어요. 제가 정보도 알아야 하고
그래서 청년회 모임에 들어서 회의도 하고 하면서 지내요. 복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마을에 무슨 일이 돌아가는지를 알아야
겠더라고요. 회의 때 내가 뭐라고 말을 하는 건 없는데, 그래도
되도록 참석하려고 해요. 여기 교수님 언니가 많이 신경 써주셨어
요. 봉사자도 보내주시고, 신발장도 봉사자들 통해서 만들어 주
시고, 좀 많이 신경 써주셨어요. 뭐라 그럴까 특별히
하는 사람들, 손이 미처 가지 못하는 부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해주셔서 도움이 많
이 됐어요.
옛날부터 알던 동네 오빠들이 많이 살고 있고, 부녀회장님도 그런 오빠
랑 결혼해서 언니처럼 지내요. 그리
고 마을에 밴드랑 카톡방도 있어서
정보를 많이 받아요. 아버지도 보살펴
야 하고, 직장도 다녀야 해서 그런 거 많
이 보죠. 이번에 물난리 나고 보니까, 갈등도 있어 보이고, 조금 속상하기
도 해요. 저도 이제야 참여를 하는 거지만, 다른 분들도 많이 참여하면 좋겠어요. 옛날에는 진짜 좋은 동네
였거든요. 사람 좋고, 공기 맑고, 살기
좋은 그런 동네. ●
#정뱅이마을 주민
정회상 님
나는 정뱅이 마을에서 평생 살았다고 보면 돼. 여기서 어머니를 5
년 모시며 살았어요. 일부러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따서 어머니를 돌봤지요. 어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정뱅이 마을은 할아버 지, 할머니의 고향이에요. 과거에는 대전 대우당 약국 건너편 상
가들이 다 우리 할아버지 소유였어. 어릴 때 대흥동 중구청 근처 에서 살아서 선화동에서 놀았지. 할아버지를 따라 유성호텔에서
지낸 적도 많았고. 그때는 어려움이란 걸 몰랐지.
7월 10일에 복지관에 들어갔다가 28일에 나왔어요, 18일 만에 나 왔죠. 빨리 나온 이유는 행정기관에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결 국 침수냐 반파냐, 완파냐 이런 식으로 보상 관계 얘기가 흘러 가요. 이건 아니다. 내가 여기서 계속 있을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 했어요. 당시 제 차도 물에 잠겨서 차부터 새로 샀어요. 복지관에 있으려니 잠자리가 너무 불편해서 집에 와서 자고, 밥은 복지관
인터뷰 신정은 글 민순옥
내가 소농을 해요. 나 먹을 양식과 가족들이 먹을 과일, 고추, 상추, 대파 같은 걸 심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빨리 상황 판단
을 하고 삶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알아요. 자꾸 불평하고 남들 욕해 봤자 소용없더라고. 사람이 많으니 한마디 잘못하면 남을 헐뜯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요. 다 마을 사람들이고 어른들인데, 자기들끼 리 대책위원을 세워 일을 하다 보니 혼란이 생기는 거죠. 성금도 들
어오고 구호금도 들어오고 하니, 의식주 부분은 기본적으로 잘 해결 되더라고요.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이재민을 위한 시설이 면이나 동 단위에 하나쯤 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상 기후와 기후 위기로 세 상이 점점 더 어려워지니 위급 상황에 이용할 수 있는 긴급 시설이 필 요하다고 느꼈어요. 내년부터는 더 더워질 거라는 말도 있고요. 예전
에는 장마철에 며칠 동안 비가 쏟아지고 끝났지만, 이제는 짧은 시 간에 국지적으로 2~3시간 내리는 비를 예측하기 어렵워요. 이번 비로 대한민국 11개 지역이 재난지역으로 선포됐으니, 사태가 그만큼 심
각해진 거죠.행정은 아니니까 제가 정리를 좀 했어요. 하우스 피해를 본 사람들은 많지만, 법적으로는 이재민이 아니죠. 하우스는 주택이 아니니까요. 많은 분이 불법적으로 공간을 만들어 생활하고 계시죠.
똑같이 억울하게 피해를 봤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하우스 생활을 규 제할 수 있으나 자율에 맡긴 거예요. 하우스는 국가에서 농지 보험 과 하우스 보험을 몇 년 전부터 들어주고 있어요. 자부담이 10%이 고, 100만 원이면 10만 원을 내고 나머지 90만 원은 정부가 지원하 는 거예요. 재난이 나면 우선 보험회사 처리를 하라 하죠. 이중으로
지원 못한다는 거지. 구호 물품이 많이 와요. 한 마을이 침수되다 보
니 의식주 해결을 위한 후원도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욕심을 부리
는 경우도 생겨. 똑같이 나눠주고 싶은데 어려움이 있어. 교회에도 냉
장고 같은 가전제품들이 쌓여 있었는데, 통장 사위가 유명한 유튜버
에게 제보해서 지원을 받은 것을 동네에 나눠주고 남은 거예요. 얼마 나 고마워요. 그런데 그걸 나누면서 싸움이 된 거예요.
우리 동네 하천은 대둔산과 계
룡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에요. 하우스가 많아서 비 가 200~300mm만 와도 하우
스에 물이 차요. 그 펌프장 때
문에 민원이 끊이지 않고 싸움
이 되는 겨. 7월 10일 밤에 비가
많이 오니 통장이 3시에 펌프장
을 가본 거야. 둑이 넘칠 것 같
아서 저한테 전화했어요. “형,
둑이 넘칠 것 같아. 큰일 났네.”
그래서“위험하니 둑에 가지 말 고 집으로 들어가라”고 했어요.
하지만 불안했는지 통장이 한
번 더 나가보더니“형, 진짜 난
리 났어.”라더군요. 그래서 일단
방송을 해라 해서 4시에 방송을
시작 한거야.
4시 반쯤 동네 앞에 나가 보니
한 친구가 배수로를 뚫고 있어.“물이 안 빠져나간다”며 물이 차오
르는 걸 막으려 했어. 도로변 쪽이 자꾸 침식되면서 동네 젊은 친구 들 다섯이 나와 차를 빼서 끌어올리고 있었어. 교회 쪽 도로변까지 만 물이 들어오겠거니 했는데, 갑자기 물이 확 터져버린 거예요.
나는 옥상으로 올라가서 2시간 정도 있었어요. 산으로 살살 올라갈
수도 있었겠지만 무섭잖아. 비도 오고 산사태도 걱정됐지. 우리 집은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어. 다른 사람들은 다 막 소리 질러서 노인들 도 구출한 거예요. 나는 옥상에서 사람들 구출되는 걸 기다리고 있
었어. 노인들을 구출해서 권 교수님 집에 모여 있었지.
이번 재난으로 인해 차부터 사계절 내 옷, 이불, 농작물까지 합하
면 한 7~8천만 원 손해를 봤어요. 정부 보상은 반도 안 되는 1,500 만 원이었고요. 도배 장판하라고 190만 원인가를 줬어. 적십자에서
도 돈을 주고, 행정기관이나 공공기관에서 가구 수에 따라 지원금 도 지급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반으로 줄어들었어. 기성동 일대 재
난지역 선포하고 신고를 받아보니까 36가구가 아닌 400군데가 넘 는 신고가 있었어. 서구청 입장에서도 정뱅이 마을에만 해줄 수는 없 잖아.이런 재난은 원래 일어나선 안 되는게 맞아요. 정부나 개인 모
두 기후 변화에 따른 충분한 논의와 대책이 필요해요. 이 지역의 취 약한 부분을 더 신경 써 미리 예방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에 요. 모두 같은 피해를 본 주민들인데, 우리끼리 싸울 일이 아니에요.
이곳은 조상들이 물려준 땅이고, 나름대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고
있는 곳이예요. 앞으로도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하니, 조금씩 내려놓고
서로 이해하며 살자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조부월님
나는 23세에 정뱅이 마을에 들어왔어. 논산 성동에서 시집왔어.
67년 됐네. 논산 성동 전깃불 있는데서 전깃불 없는 산골짜기에
사니까 무서웠지. 밤에 한 발짝도 못나왔어. 내 나이가 지금 90 세야. 그때 우리 집 양반은 21살 먹고 나는 23살 먹었어. 연하였
어. 우리 집 양반은 대전역에서 36년간 근무했어. 플랫폼에서 금
태모자 쓰고 깃대 들고 흔들잖아. 개찰도 했지. 철도원이었어. 그
렇게 애들 다 가르쳤어. 그때는 대전역 옆 소제동 관사에 살았어.
시댁이 여기(정뱅이마을)이야. 정자나무 집 안쪽 큰집이야. 철도공
무원 관사에서는 조금 살다가 다시 정뱅이마을로 왔지. 신랑이
맏아들이라 할 수 없이 들어왔어. 관사에서는 1~2년 살다 왔어.
7월10일 새벽에 손자가 물들어온다고 빨리 피난을 가자고 하는
거야. 전날 저녁에 손자가 왔었어. 나는 침대에 올라가면 괜찮다 고 손자한테 얼른 나가라 했지. 손자가 극구 나를 업어서 마당
으로 나갔는데 물이 여기까지 들어왔어. 산 위로 나를 올려놨어.
손자 아니었으면 꼼짝 못했어. 침대에만 앉아있으면 괜찮을 줄
알았어. 근데 방까지 물이 막 들이쳤지. 자개농 6자짜리가 물어
인터뷰 문서영
글 최정화
다 젖어서 못쓰게 됐어. 방 맞춰서 해 온건데 100만원 들었어. 딸
들이 아빠가 마지막에 해주고 돌아가신 물건이라고 못 버린다 한거야. 일꾼 품삯 8만원씩 주고 다른 방에 옮겨놨어. 안 버리고 집 수리 끝나면 갖다 놓을 거야. 그거 한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 는데.
피해 입은 건 말도 못해. 집에 가보니까 아무것도 없어. 물에 젖
은 6자 자개농뿐만 아니라 서울 사는 막내딸이 보내준 식기세척 기, 전자레인지, 식탁도 안보여. 남은 거는 덩치가 커서 못나가고
문에 걸려있는 김치냉장고랑 냉장고만 있어. 찬장에 있던 술, 우 리 집 양반 철도공사 손님들 오면 대접한다고 진열해 놓은 놋그
릇 그런 것들이 다 어디로 떠내려갔는지 아무것도 없어. 스뎅 냄
비 큰 거 작은 거 포개 놓은 것도 없어. 숟가락 하나도 없어. 간 장담은 독도 떠내려가서 하우스 때문에 더 못가고 구석에 쑤셔
박혀 있대. 그냥 사람만 살았어.
한 달을 복지관에서 살다가 왔어. 이제 나가라고 해서 이리로 왔 지. 돌아오니 내 방은 덜 말라서 도배도 못하고 있어. 큰아들 방
에 잘 곳를 만들어 놓고 준비해 놨더라고. 거기서 안 자고 마을회관
에서 여럿이 하루 자고 태평동에 있는 내 아파트로 갔어. 큰 딸이 엄
마 집에 가고 싶대서 또 지금 온 거야. 또 계속 이렇게 있어야 하면 내 아파트로 가야지.
불편해도 복지관에서 한 달을 있었어. 내 아파트로 혼자 갈 수도 있
었는데 나만 가서 있기가 그랬어. 우리나라가 그래도 이렇게 죽게 생 긴 사람들 밥 먹여주고, 잠 재워주고 고마웠어. 이불도 주고 그러니 까 우리나라 같은 나라가 없지. 감사하지. 아는 동생이 국회의원 남
편을 뒀어. 건양대 앞 아
파트에 살아. 나 더러 이
렇게 고생하지 말고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어. 신
랑이 서울 가서 없으니 저
혼자 있다면서 같이 있자
고 한거지. 내가 물난리
났다고 너희 집에 어떻게
가 있냐. 자식들하고 의논 을 해야지 했어. 내 마음
이 편해야 거기 가지. 혼자
가서 몸 편하게 있는 다
고해서 편한 게 아니야. 내
속이 편해야 하는 거야.
이제 얼른 집들 고치고 옜
날처럼 조용하고 화목하
게 살았으면 좋겠어. ●
#정뱅이마을 주민
채주현님
2년 전 부모님과 함께 정뱅이 마을에 들어왔어요. 아버지와 어머
니가 계셔서 그냥 따라 들어온 거죠.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가 계
셔서 자주 오곤 했는데, 그땐 완전 시골이었어요. 화장실도 푸세
식이고 아궁이에 불을 때던 시절이라, 여기서 절대 못 살 거라 생 각했죠. 지금은 씻을 수 있고 화장실도 수세식에 편의시설도 많
이 갖춰져서 적응하고 살고 있어요. 아침에는 5시에 일어나야 해
요. 여기가 시골이라
인터뷰 민순옥
자고 있었는데 엄마가 깨웠어요. 밖에 나가 보니 물이 무
릎 이상 찼어요. 할머니는 안쪽 건물에 살고 계셔서, 할머니를 업 고 나오려고 동생을 데리러 가는데 물살이 차오르는 게 보였어 요. 할머니를 업고 나오니 물이 가슴까지 차올랐어요. 제가 사는 컨테이너가 높아서 그 위에 피신했는데, 거기까지 물이 차오르는
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으니 엄청나더라고요. 컨테이너 뒤가 바로
산이라 산으로 올라갔어요. 피신해 있는데 물이 슬슬 빠지는 것
같은 거예요. 아빠는 다리 너머에 계셨는데 계속 통화하면서 상 황을 알렸어요. 아빠가 구조대가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날은 정말 현실감이 없었어요. 큰일 났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멍했고,‘출근은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수해를 당한 10일 이후로 5일 동안 출근을 못 했어요. 대피소 쉼
터에서 생활했는데, 당장 출근할 옷이나 구두가 없어서 사러 가
야 했어요. 컨테이너가 높은 위치에 있어 제 방은 젖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사시는 건물 세탁실에 있던 평소 입는 옷들은 모두 없
어졌어요. 컴퓨터나 패드는 괜찮았는데, 다른 건물에 있던 동생
물건들은 모두 젖어 컴퓨터랑 패드도 다 버려야 했죠. 가전제품 은 보상이 안 된다고 하고 당장 필요한 것도 보상이 안 되니 답
답했어요.
수해 나고 바로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물이 다 빠지
고 나서 집을 보니까 그때야 정말 큰일이구나 싶었어요. 온통 뻘
밭에 똥 밭이고 걸을 수도 없고 곳곳에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었
어요. 강아지들도 상태가 너무 안 좋고, 직접 보니까 실감이 났어
요. 정말 큰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희가 큰 강아지 를 키우는데, 씻기려고 물을 뿌리니 기겁 하는 거예요.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아요.
처음엔 물이 잘 빠지지 않아 개인이 들어갈 수 없었어요. 3일째
부터 어른들이 들어가셨는데, 그때도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하셔서 저는 12일에 한번 걸어서 들어가 보고, 마지막 날인 13일
에 일하러 갔어요. 아빠 축협에서 아저씨들이 나오셔서 정말 많이
도와주셨는데, 고마운 분들이 많다는 걸 진짜 많이 느꼈어요. 쉼 터에 가보니 텐트와 물품이 모두 적십자에서 지원해 준 거였어요. 저희가 쉼터에 갔을 때 이미 물품들이 와 있어서 텐트도 바로 설
치해 주셨죠. 저도 적십자에 한 달에 만 원씩은 내야겠다고 생각 했어요.
우리 집 저쪽 논은 완전히 망가져서 들어가면 아직도 기름 냄새 가 나요. 내년에는 농사를 못 지을 것 같아요. 그러면 아빠의 업
인데, 부모님께서 굉장히 힘들어하시죠. 할 일은 너무 많은데, 어 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상황이죠. 수해 뉴스 를 볼 때는 그냥‘집이 잠겼구나’했는데, 그게 제 일이 되니 정
말 큰일이더라고요. 저희 집은 아직 장판도 못 깔고 도배도 안 된 상태예요. 9일에 다 들어온다니까 아
직 70%는 작업이 남았어요. 수돗물도 나
오지 않아 계속 들어오지 않다가 어제 처
음 집에 들어가 봤어요. 부모님이 장판도
안 깔린 곳에서 라쿠라쿠 침대 하나 놓고 주무시고 계시더라구요. 들어갈 만한 상
황이 아닌데 두 분이 그런 데서 계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앞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는 제 의견보다는
실질적으로 일하시는 분들 의견이 더 중
요하다고 생각해요.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채한영님
저는 밖에서 가게를 늦게까지 하고 와서 집에 오면 새벽에나 잠
을 자요. 그날도 종일 비가 왔고 저는 새벽 3시쯤 잠이 든 거 같
은데, 엄마가 밖에서 소리 지르고 엄청 어수선한 거에요. 바로 깨 서 나와 보니까 이제 물이 넘쳐져 있었던 거죠. 그때 아버지는 밖
에 둘러보느라 안 계셨고, 어머니랑 저랑 누나가 같이 있었고, 할
머니는 안채에 있었는데, 무릎 정도까지 올라와 있었어요. 저희
가 차가 3대라 빨리 차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에 시도를 했는데,
차 문도 못 열고 바로 떠오를 정도로 물이 차오르더라고요. 금
새 물이 차서 가족들이 피해야겠다고 하려는데, 할머니 고집이 안
나가신다고 하는 거에요. 할머니가 할머니 집은 안 넘쳤다고, 괜
찮다고 하시는데, 제가 보기에는 아닌거죠. 할머니가 쌀은 지켜
야 한다고 해서 쌀을 집 높은데 올려놓고, 할머니를 업고서 집으
로 갔는데, 저희 집도 물이 차 있었죠. 그래서 다 같이 뒷산으로 피신을 했는데, 그 와중에 강아지들이 묶여 있으니까 막 낑낑대
고 하는 게 보여서 강아지 다 목줄 풀어주고 그러고 산으로, 뒷
산으로 올라갔죠. 정말 짧은 시간 안에 다 일어난 일이라 정신이
없었어요. 자다 깬 지도 얼마 안 됐고, 뭔 일인지 싶고, 계속 물이
인터뷰 김현정
글 김윤정
차오르니까 공포심이 생기더라고요. 그게 4시 반쯤이었고, 높은
데서 기다리다 보니, 7~8시쯤 119 오고 나
올 수 있었어요. 아무것도 없이 핸드폰밖에
없었어요.
할머니는 집에 있겠다고 하시는 거에요. 그
런데 전기도 안 들어오고 다 침수가 됐으니
살 수가 없죠. 모두 복지관으로 가서 생활
했는데, 저는 따로 가게를 하고 있어서 복
지관에서 자고 거기서 출근하고 했어요. 차
가 모두 침수돼서 폐차를 했고, 집도, 할머
니 집, 우리 집, 가재도구며 재산적인 손실이
컸죠. 물이 빠지고 집에 가서 보니, 막막했어
요. 이걸 어디서 어떻게 뭐부터 손대야 할지
도 모르겠고, 저 같은 경우는 제 가게 일도
있어서 어떻게 도와드릴 수도 없으니 더 속 상했죠.
저야 생계에 차가 필수였는데 없으니 그런 게 제일 불편했는데, 할머니는 잠자리며, 빨
래 같은 거, 이런 게 불편하셨어요. 속옷이며, 갈아입을 거, 모두 새로 사 입었고, 식사도
그렇죠. 식사 지원, 빨래 지원, 이런 거, 다 해
준다고 했는데, 처음엔 잘해 줬어요. 의원들
도 많이 오고 매스컴도 타고 했죠. 한 3일쯤
되니까, 점점 부실해지는 게 느껴졌어요. 좀
지나니 끼니를 잘 안 드시는 경우도 있었죠.
빨래 지원도 어느 날 통보를 하더라고요. 며
칠까지만 해준다. 그렇게…
집수리도 다 안 됐는데, 복지관에서는 나가 야 한다고 하고, 누나도 출근해야 하니까,
집에는 못 들어오고, 여러 친구 집으로 옮겨
다니고 있을 거에요. 집에 바로 못 들어가시
는 할머니들은 경로당에서 지내신다고 해요. 그러면서 다 같이 식사 챙겨 드시고 하니까,
어머니 말로는 예전보다 더 끈끈해진 거 같
더라고요. 서로를 의지하니까. 마을 사람들
하고 더 많이 친해지신 것 같아요. 어머니도
많이 힘드셨는데, 마을 사람들하고 막 얘기
하시고, 밥도 같이 드시고 그러면서 많이 위
안 삼으신 것 같아요.
저는 어렸을 때 도시에 살았지만, 이곳에 할
머니도 계시니까 자주 왔던 기억에 참 평화
롭고 좋았어요. 그때부터 오래 사신 어르신
들도 이번 일이 충격일 것 같아요. 저도 솔직 히 너무 힘들었거든요. 저보다 더 많은 걸 잃
으셨을 텐데, 그런 게 너무 속상하죠. 곧 추
석인데, 어떻게 보내실지…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채홍종님
정뱅이 마을은 제가 태어난 고향이에요. 원정초등학교, 기성중학 교를 나와서 대학교를 다녔고, 이후에 서울에서 직장 생활했어 요. 아버지 병간호를 하다가 8년 전에 돌아가셔서 혼자 정뱅이 마을에 들어왔어요. 가족이 다 들어온 지는 3~4년쯤 된 것 같아
요.
그날 안전 문자가 계속 와서 일어나 보니 4시였어요. 둑방에 서
너 분이 서 계셔서 가봤는데, 수위가 계속 줄길래 괜찮겠거니 하 고 이런저런 얘기 하고 있었어요. 한 4시 반쯤 됐나, 어디서‘빵!’
소리가 나더라구요. 그러고 좀 이따‘샥’소리가 나면서 물살이 흘러가더라구요. 둑이 터진 거예요. 물이 금세 차올라서 그때부터
우리 청년회가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어요. 정신이 없
으니까 감당이 안돼서 내가 119 신고를 했어요. 신고한 지 20분 후에 119차 두 대가 오더라구요. 그때부터 어르신들을 챙기기 시
인터뷰 권인호ㅏ이 글 김채원
작했어요. 최종적으로 고립된 분이 일곱 분인가 됐어요. 친구 동 생인 김중훈이가 와서 포크레인을 타고 어르신들을 구하기 시작 했어요. 옆집 할머니 지붕에 올리구, 자기 엄마두 지붕에 올리구, 한 분은 권 교수님이 구해서 네 분의 어르신이 남았어요. 119차
만 열 몇 대 왔는데, 보트가 없으니께. 보트가 너무 안 오니까 보 트 오기 전에 제가 승질나서 119 대원들한테 빨리 가라구, 여기서 이럴 거면 뭐하러 왔냐고 그랬죠. 빨리 들어가서 어떻게 해야지
않겠냐, 어르신들 물 한 번만 먹으면 돌아가시니까 빨리 가서 안
정시키라고 했어요. 그러자 소방대원 2명이 킥판을 잡고 수중으 로 들어갔어요.
신고하고 1시간 후에 보트 하나가 왔더라구요. 보트 하나가 들
어갈 때 물이 조금 빠졌어요. 그래서 사람 구조하라고 했더니 송
아지 구조한다고 그러고 있더라니까요. 보트 한 대가 또 왔는
데, 기자들이 타고 들어가서 상황만 찍고 있네. 그러니 속이 얼마
나 타들어 가요. 내가 들어가지는 못하니까 답답해하기만 하다
가 결국은 어르신들 구해다가 한쪽으로 모셨어요. 그러고 나니 물이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좀 빠지더라구요. 그러다가 동장이 왔어. 제가 동장한테 지금 위험하니께 대피소 만들어서 담요 같
은 거 준비하라고 했어요. 이미 (한쪽으로) 옮겨 놓은 분들 보트
로 데리고 나오는데 (구조대 원이)“몇 명 구조해서 나오
고 있습니다” 라고 통신하
는 거예요. 그래서“무슨 구
조는 개뿔 구조냐고. 우리 어
머니 저쪽에서 대피하고 있었
던 거 동네 사람들이 어디로
올라가라고 얘기해서 구조 한 건데” 라고 하면서 따졌
죠. 그런데 들은 척 안 하고
또 “다섯 분 구조해서 나오
고 소방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더라고. 그래도 다 빨리 빨리 나오셨으니께 한 분씩
태워서 119차로 빨리 모시고 가라고 했죠.
그렇게 저는 마지막으로 대
피소에 갔는데 아무것도 안
되어 있더라구요. 거기가 스
포츠 이용 시설이었는데, 스
포츠 용품들을 치우고 있더
라구. 그라구 나서 인제 담요 하나씩 뒤집어 쓰고 텐트가 펴지니
까 들어가게 됐지. 종일 신경쓰다가 대피소에 오니까 머리가 깨질 것 같더라고. 거기에서 이틀 동안 잠이 안 오더라구요. 긴장을 놔 서 그런가 그냥 이틀 밤을 꼬박 샜어요. 처음에 보트도 없이 119
차만 열 몇 대 왔는데 저쪽에서는 살려달라고 소리지르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힘들었지. 자기들 부모였으면 그렇게 손 놓고 있 었겠냐고 따지면서도 사실 마
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지요. 119만 부르면 초동에 잘 될 줄
알았는데, 대전시에 그래 보트 가 없어가지고 되겠나 했지요.
이번 일로 농기계는 물론 자동
차 세 대까지 다 잠겼지, 물 빠
지고 다음 날 오후에 마을에
들어갔는데, 소 밥을 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장화가 푹
푹 들어가서 나무 (지팡이) 하 나 가지고 돌아다녔어요. 그래
도 (소가) 주인을 알아보고 산 에서 내려오더라고.
그래도 봉사자분들 오시고, 뭐 라도 갖다주시고 하면서‘우
리가 혼자는 아니구나…’깨달 았지. 우리 동네에 오신 봉사
자분들이 매일 같이 뻘 퍼내고,
흙탕물 된 거 다 꺼내고 해 주셨어요. 그리고 제가 축협에 가입해
서 축협 조합장에게“이렇게 상황이 벌어졌는데 좀 와서 도와달 라”라고 전화했어요. 그랬더니 다음 날 축협 직원들이 한 30명 오고, 포크레인 장비를 갖고 와서 치우고 도와주고 그랬어요. 제
가 대책위를 맡고 있어서 지금은 동네 일을 많이 하고 있어요. 구
청에 뭘 해 달라는 요구를 제가 하죠.
우리 마을에 수해가 나서 아픔이 있지만 반대로 이번 기회에 한
번 쫙 청소를 하게 되었어요. 이 마을을 인제 장기적으로 어떻게
꾸미고, 어떻게 살기 좋은 마을로 맨들을까, 그런 것들을 고민하 고 있죠. 지금 그림을 그리기로는 구세군 교회에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우리 청년회 사람들이랑 함께
이야기하다 보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이 함께 자고, 먹고, 어르신
들 케어하는 걸 공동으로 해보고 싶더라구요. 어차피 우리 다 같
이 나이 먹어서 노인도 될 거니까, 이렇게 해서 공동 생활을 만들
어 보고 싶어요.
지금 제가 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분이 있을까 자주 고민해요. 이 직책을 내려놓고 더 잘할 수 있
는 다른 걸 끌고 나가고 싶은 바람도 있고요. 사실 이번에 통장
선거가 있었는데 제가 이번에 떨어졌어요. 우리 동네 분들이 찍어
준다 했는데 뒤통수를 친 거죠. 여기서 똘똘 뭉쳤는데 당선이 안
돼서, 책임감도 남고 복합적인 생각이 드네요. 계속 이야기하다
보면 한이 없는데 오늘은 여기서 그만하고 마저 동네 일이나 하
러 가야겠어요. ●
#정뱅이마을 주민
최재건님
여기 원래 본 이름은 정방리요. 곧을 정, 방방, 리 자는 마을 리
자, 정방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마을 이름이 참 묘하게 돼 있
어요. 옛날에 소정방 장군이 여기서 머물다 갔대요. 이 정방마을 에서. 그래 그 장군 이름을 따서 정방이라고 한답니다. 마을 모
양은 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래요. 이 마을이 이렇게(손으로 그리듯이) 들어가 산에 들어 있잖아요. 그래서 용의 알을 품고
있는 그 마을이다, 뭐 그런 전설도 있어요. 이건 나도 다 전해 들 은 얘기요.
새벽에 마을 방송을 하더라고요. 범람하니까 빨리 피신을 하라 고. 그래 그 방송을 듣고서 몸만 빠져나왔지. 나와 보니까 결국 은 저쪽에서 둑이 터져가지고 이제 이렇게 물이 찬 거예요. 물이
여기까지 들어왔어요. 물이 여기 불과 한 5cm, 5cm만 더 왔다면 여기도 넘을 뻔했어요. 우리 집도 위험했지.
지금 저 강변, 하천 강변과 이 지대를 좀 보세요. 어느 쪽이 더
인터뷰 김은진 글 김윤정
낮고 어느 쪽이 더 높은가, 현재 육안으로 보더라도 저기가 높 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전에 우리가 구청으로 많은 탄원서를 냈
어요. 여기 이게(둑) 높고 우리 지대가 낮으니
가급적이면 하천 정비를 해달라고, (바닥을)
좀 낮추고 폭이 좀 더 이 지대보다 좀 낮게
해달라고, 그런데 뭐 무슨 재정 탓을 하면서
돈이 없다, 뭐 이런 핑계를 대더라고요. 그래
서 오늘날까지 내려온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된 건데 이거 좀 보십시오. 저기서 지금 이게
냇가라고 보입니까? 저 가운데 똘(또랑), 똘
같이만 해놨잖아요. 여기 보이죠? 똘 같이만
해놨어요. 그래서 보니까“저거 왜 저렇게 해
놓느냐”내가 물어봤지. 저것이 어로 통로랍
니다. 통로, 이 고기들이 왔다 갔다 하는 통
로만 만들어놨다 이겁니다.
그러고 저기를 산책로로 한다 이래요, 산책
로. 어떻게 냇바닥에다 그래 산책로를 합니
까? 저쪽은 시멘트로 길을 냈어요. 지금 저
건너에다가 내고, 거기다가 그거 해서 되겠습
니까? 그거 안 그렇잖아요. 보세요. 지금 보
다시피 어디가 더 높습니까? 지대를 높이고
저걸 몇 번 퍼내던지 좀 해달라고 해도 들
은 둥 말은 둥 하더라고요. 결국 이런 피해
를 난 거요. 보세요. 내년에 또 있어요. 이걸
만일 안 해준다면 또 그런 일이 반복될 건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네. 나는 이제 인생 다 살
았으니까 별거 아니지만, 우리 후 세대에게
이제 이런 일이 없도록 좀 해달라는 거지요.
저기 저 뻘건 지붕까지 물이 든 저분들이 다
지붕 위로 가서 생명을 구한 거예요. 올라갔
지, 그 사람이 수영해 가지고 이렇게 다 끌어
올리고 그랬어요. 그렇지. 그걸 처음에 그 위
까지 올라갔었어요. 그 정도면 뭐 남은 게
뭐 있었겠어요? 그걸 지금 생각해 보면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어. 물이 그냥 갑자기
확 들어와 가지고, 뭐 순식간에 들어오더니
이렇게 된 거야.
집은 전파라고 2천 5백만 원이 통장에 들어
왔는데, 그걸로 어떻게 집을 지어요? 농기계
값만 해도 6천만 원인데, 택도 없지요. 트랙
터를 작년에 샀는데, 빚을 더 져서라도 집은
고쳐야겠죠. 복지관에서 나와서 LH 아파트
에서 임시로 살고 있는데, 이런 건 고맙죠. 숙
식도 도와주고, 이재민들 챙겨주는 게, 옛날
에는 이런 것도 없었어요. 불교재단인가? 무
슨 재단에서 우리 옷 같은 거 세탁도 해주고,
참말로 고마웠어요. 어디서 음료수랑 간식도
보내줘서 고마웠고, 어떤 구청 직원한테 내가
편지도 써서 줬어요. 고맙다고, 최지연2이라고
알아요? 봉사자나 그 사람들이나 우리를
도와준 데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지.
이제는 서로 단합해서, 이럴수록 서로 뜻을
하나로 해서 잘 지내봅시다. 지금 여기 같은
처지인데, 그 말 하고 싶어요. ●
2 최지연 : 대전광역시 서구의회 의원
#정뱅이마을 주민
최재욱님
내가 지금 팔십팔 세여. 태어나서 줄곧 정뱅이 마을에서 살았어
요. 군대에 다녀오고 철도청에 근무하다가 그대로 여기서 살고
있지. 시골이다 보니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예전에는 이곳에 55 가구가 모여 살았고, 서로 고 나누며 살기 좋았어. 먹고 사는 건
어려웠지만, 동네에 일이 있으면 서로 도우려 하고 나누려는 마
음이 있었어. 그런데 우리 세대와 지금 세대는 많이 다르더라고.
요즘은 서로 다투고 한다는 얘기가 있어. 내가 많이 타이르지만,
아직도 그게 정착되지 않은 것 같아. 지도자를 세워놓고 임원을
세웠으면 따라야 하는데, 잘 안 되는 걸 보면 마음이 안 좋아.
사회가 바뀌고 제도가 바뀌니까 이런 변화가 온 것 같어.
권선필이라고 목원대 교수인데, 그 사람을 중심으로 우리 마을
이 단합해서 개발을 해봤으면 하는데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결국 중단됐어. 지금도 다시 시작 해보면 좋겠다는 마음이지. 권
선필 교수에게 자주 제안하지.“다시 한번 신청해 봐라”그러는
데 뜻을 이루지 못하니 아쉬워. 서로 대립하고“내가 잘하니 나
를 따라라”이런 식으로 하니까 협조가 안 돼요. 예전에는 사람
들끼리 서로 이해하고 나누며 살았는데, 그런 정이 없어.
인터뷰 신정은
글 민순옥
수해가 났을 때 나는 혼자 있었어요.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소리
가 들리는 것 같아 주방에 가 보니, 물이 가슴까지 찼어. 딸한테 연락이 와서“탁자에 올라가세요”라고 해서“물이 찬다”고 했 더니 싱크대로 올라가라고 했어. 냉장고가 자빠지고 물이 여기 어 깨까지 차올라서 주방 싱크대 위로 올라가 앉았는데, 그때 권선 필 그양반이 보트를 타고 와서 구조해 주었어. 권선필을 잊지 못 해. 내 목숨을 살린 사람이지. 나는 기독교인이라
려주시든 데려가시든 하시겠거니 믿고, 하나님이 살려주실 거라 기도하니 마음이 편했어.
이번에 물이 잠긴건 갑천하고 여러 물줄기가 합쳐지면서 밀려온
인터뷰
것 같아. 위쪽은 넓고 아래쪽은 좁아지면서, 또 산업단지 건설로
둑이 터져서 이렇게 된 것 같아.
정뱅이 마을에서 혼자 살아. 대부분 혼자 살아. 빨리 복구해서
옛날 모습을 찾아야 할 텐데, 어떻게 돼 가는지 모르겠네. 복지
관에 갔을 때 남자는 나하고 두 사람밖에 없어. 나머지는 다 여
자들이야. 할머니들. 서먹서먹햐. 어디서 나왔는지 몰라도 이불
같은 것도 챙겨 주고, 구호단체에서 식사도 제공해 줬어. 마을이
다 복구될 때까지 노인정에서 어르신들께 식사를 제공해 줬으면 좋겠더라고.
수해 나고 복구하는데 흙집은 손을 못 대요. 현재 방식으로는
어려워. 전문가도 거의 없다네. 옛날에 흙집 짓던 사람들이 이제
는 없어. 벽돌로 지은 집들은 손봐서 들어가고 있어. 수리비만 해
도 많이 들어가. 예전에는 사랑방에 모여 얘기도 하고 새끼 꼬고
짚신 삼고 그러며 살았는데,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가고 새 세대
가 와서 깨끗하게 마을을 만들어야지. 옛날 것을 그대로 이어받
을 필요는 없고, 시대에 맞게 해야지. 예전에는 누구네 집 지붕을
잇는다고 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도왔는데, 요즘은 보니까
다 따로 공사하는 사람을 불러서 하시더라고요. 이제는 옛날 모 습은 찾을 길이 없어.
추석 전에는 집에 들어가야지 지금은 딸네 집에 있는데 내가 얼
마나 살지 몰라도 내 살던 집에서 일생을 마쳤으면 하는 게 바램 이지. 자식들 걱정 끼치지 않고 남 도움받지 않고 그렇게 살면서, 하나님 품에 안기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내와 사별한 지 이제 6년 가까이 됐어요. 밥은 제가 직접 해 먹 고, 자식들이 반찬을 해서 갖다 주면 꺼내 먹고, 예전처럼 많이는 못 먹고, 그냥 끼니 때우는 거지. 혼자 사니 외롭지. 집에 들어가
인터뷰
오직 마을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 사심 없이 희생하고 마을
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돼야 해. 지도
자와는 만나서 뜻을 나누고 서로 돕는 관계가 되어야 해요. 그
래야 의견도 나오고 서로 도울 수 있지. 마을이 예전 모습을 찾
기 위해서 단합된 모습으로 지도자도 세우고, 의견을 나누며 마
을을 잘 가꿨으면 좋겠어. 외부 사람들도 와서 볼 수 있는 그런
마을이 되면 좋겠어. ●
#정뱅이마을 주민
최재현님
정뱅이 마을이 고향이죠. 결혼하고 한동안 살다가 아이들 교육 과 직장 때문에 마을을 떠났지만, 노후는 고향에서 보내고 싶어
10년 전에 돌아와 살게 됐죠. 우리 네 식구가 같이 왔는데, 처음 엔 아이들이 시골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했어요. 교통도 불편했
으니까요. 막내는 고등학교를 여기서 다녔는데, 3년 동안 제가 데려다주고 데리고 왔어요. 이제는 졸업해서 직장에 다니면서도 이곳에서 출퇴근하며 지내니 좋다고 합니다. 친구들도 데리고 와 서 마당에서 별자리도 보고 참 좋아하더라고요.
우리 마을은 정말 살기 좋았죠. 지금은 큰일을
어렵지만, 예전엔 정말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었어요. 인심도 좋고, 서로 돕고 협동하며 모든 일을 함께했으니까요. 젊은 층이 들어 오면서 권 교수님과 함께 청년회를 결성하고 구청에서 지원받아 조그마한 사업도 하면서 1년 동안 재미있게 지냈어요. 마을회관
2층에서 회의도 하고, 탁구대를 설치해 틈틈이 탁구도 치면서 행 복했죠. 그런데 갑자기 큰 사고가 터지면서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인터뷰 민순옥 글 민순옥
그날 새벽엔 집사람이 먼저 깬 것 같아요. 물이 많이 찼으니 나가 보라고
해서 대문을 열고 나가 봤어요. 새벽 4시쯤 됐나? 둑에 가보니 물이 이제
막 넘칠 듯 찰랑찰랑하고 있었어요. 걱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압기가 터
지는 것처럼‘빵’하는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뒤에서 물이 쏟아져 들어
오는 거예요. 순식간에 갑천 물이 마을로 들어와 저는 둑에 고립되고, 집
사람과 딸은 옥상에 올라갔어요. 딸이 전화로 위험하니까 가까이 오지 말
라고 하고 눈물 났었지.
우리는 콘크리트로 지은 집이라 좀 안전하다고 느꼈지. 집사람과 딸이 10
년을 살다 보니 지리를 잘 알아서 할아버지, 할머니 사시는 곳을 구조대
원들에게 알려줬고, 두 사람도 나중에 119 보트를 타고 구조되어 기성복
지관으로 갔어요.
비가 많이 와서 밖에 나갔는데 큰 소리가 나고 물이 차오르던 상황은 정
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어. 첫째로 생각난 것은“사람부터 구해 야 한다”였어요. 다른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인명 사고 없이 모두 무 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둑에 있으면서 아는 노인분들에게 일일이 전화했어. 다락에 계신 분, 식탁 위에 올라가신 분 등 모두에게 물살에 휩 쓸리지 않도록 가만히 계시라고 했지. 그땐 정말 막막했죠. 건너편에서 앞
에 사는 중훈이 엄마라고 창교 엄마하고 정민이 엄마 계시는데 막 살려달 라는 소리가 들렸었거든요. 그 아들이 그 소리 듣고 환장할 거 아니에요.
인터뷰
이번 수해 피해는 엄청나죠. 경제적 피해보다 정신적 피해가 더 크고, 지금 도 남아 있어요. 수해 때 터진 둑은 임시방편으로 막아 놓았는데, 9월과 10월에 태풍 올 수도 있어서 항상 불안해요. 제방을 제대로 복구해서 태
풍이 와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재산 피해 보상은 현실적으로 턱없이 부족해요. 관에서는 자연재해라고 최
소한의 보상만 하고 있어요. 실제 리모델링과 차 침수 피해를 생각하면 어 림 턱도 없죠. 너무 차이가 크죠. 그래도 재산 피해는 앞으로 살다 보면 극복할 수 있지만, 수해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주
민들 모두 불안해하고 있고, 미리 방지할 대책이 없다면 트라우마가 더 커 질 것 같아요. 지금은 주민들이 불안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
라고 생각해요. 이런 일을 처음 겪다 보니 다들 당황했지만, 이제는 다들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도 많이 했어요. 특히 권 교수님은 저녁 8시에 복
지관 회의에도 항상 참석하셔서 필요한 정보와 조언을 많이 해 주셨어요. 함께 협조하며 큰 도움이 됐어요.
청년회를 중심으로 제방이 터진 원인을 규명하고 있어요. 이곳은 두 개천 과 대둔산 물줄기가 합쳐지면서 야실에 있는 보에 토사가 계속 쌓이거든
요. 산업단지가 생기면서 배수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요. 비가 많이 오면서 토사가 쌓이고, 그게
터뜨린 게 아닌가 싶어요.
이번 재해 나고 외부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도움을 받으면서 아쉬
웠던 점은 관에서 소통이 부족했다는 거예요. 어떻게 해결되고 진행되는
지 알려주면 덜 답답하고 마음도 편할 텐데, 알 수 없으니 우리끼리 답답 하고 자책하며 실망했죠. 그래도 구의원들, 특히 최지연 의원과 장종태 의
원은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고 전달해 주셔서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 어요. 주위에서도 따뜻한 위로와 물질적 지원을 많이 받았어요. 저도 도움 을 받으니 저도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적십자 자원봉사 지원서를 냈어요.
우리 동네는 예전부터 끈끈한 정으로 살았어요. 청년회의 기본 목표 중 하나는, 나이가 들면 요양원에 가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자는 거였어요. 서 로 돕고 경로당과 마을회관을 이용해 함께 식사도 준비하고, 오붓하게 우애 있게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최지수님
저는 최지수예요. 25세구요. 여기서 태어난 것은 아니고 중학교
졸업할 때쯤 정뱅이 마을에 이사왔어요. 원래 둔산동에 살았는
데, 아빠 고향이 정뱅이 마을이에요.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해 서 들어오게 됐어요. 고등학생 때는 집에서 잠만 자서 크게 불편
한 점은 없었어요. 등하교도 부모님이 차로 같이 해서 교통이 불
편한 점도 못 느꼈구요. 이 동네는 둔산동보다 먼지가 덜 쌓이
는 게 좋았어요. 둔산동은 먼지가 까만데 여기는 먼지가 하안색
이에요. 공기도 좋구요. 조용해요. 원주민들이랑 마주칠 일은 별
로 없었고 오며가며 인사하는 정도였어요,
수해 있던 날 당일 새벽 4시에 갑자기 동네 방송이 나왔어요. 높
은 곳으로 대피하래요. 엄마랑 집에 있었는데 2층까지 물이 안
들어 찰 줄 알고 1층에 있던 선풍기를 2층으로 옮겼어요. 아빠
는 둑방에 물이 넘실거린다고 하니 나가서 보겠다고 하고 엄마
인터뷰 최정화
글 최정화
랑 저랑 둘밖에 없었어요. 집 정리를 하려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 갔어요. 아빠한테 전화가 와서 빨리 나와서 높은 데로 가라고 했어요. 전기가 나가기 전에 나가서 봤을 때는 괜찮았는데 아빠 한테 전화오고 나서 보니까 물이 이미 무릎까지 차있었어요. 집
으로 들어가려고 현관문을 열려고 했는데 전기로 되어 있는 문이
라 문이 안 열렸어요. 그래서 데크를 밟고 2층 베란다로 갔어요.
그렇게 2층 베란다에서 버티고 있으니 구조대원이 왔어요. 할머
니들 먼저 구조하고 엄마랑 저는 마지막에 나갔어요. 2층까지는
물이 차오르지 않은 상태였고 1층으로 내려오면서 보트를 타고 대피했어요.
마을 주민들이랑 복지관에 갔어요. 한 달반 정도 있었어요. 복지
관에 있는 동안 군인들이 와서 저희 집 짐을 빼주셨다고 하더라 구요. 정말 고마웠어요. 처음 수해가 있고 나서 어떤 분이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라디오로 소식을 들으셨대요. 그래서 마
을 주변에 숙소를 잡고 마을에 차있는 뻘을 트렉터로 다 치우셨
다고 하셨어요. 혼자서요. 외지 사람인데 복구 작업 시작하기도
전이에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혼자 오셔서 뻘을 치우고 있
었던 거죠. 그땐 저희가 다 복지관 들어간 직후니까 마을로 돌아
오지 않았었거든요.
같은 일을 겪어서 마을 주
민들이 힘을 합쳐서 다 같
이 함께 할 줄 알았는데 그
런 건 없는 것 같아요. 무너
진 둑방이 지금 임시조치 되
어있어요. 빨리 정비를 했으
면 좋겠어요. 한 달반이 지
났는데 아직도 임시상태라
고 해요. 이런 일이 생기지만
않는다면 정뱅이 마을에서는
계속 살고 싶어요. 그러니 더
욱 둑방 정비를 빨리 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일이 재발 되
지 않으려면 정뱅이 마을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
#정뱅이마을 주민
한 선미님
57세 한선미 입니다. 어머님, 신랑, 저 이렇게 살고 있어요. 어머님
은 토백이세요. 어머님이 아파서 수술하시고 우리 집에서 간호하
다가, 어머님집에 들어온 지 3년 됐어요
마을이 너무 좋아요. 집에서도 꽃 가꾸고, 마을 청년회하고 꽃 가꾸기도 하고, 마을회관 2층에서 함께 밥도 나눠먹고, 주민들이
너무 좋아요. 마을언니, 친구들 너무 좋아요. 꽃가꾸기 하고
실 담그고 하면서 친목이 다져졌어요.
7월 10일에 전기가 세 번 나갔어요. 깜빡깜빡 해서, 이상하다 싶 어 일어났는데‘펑’소리가 났는데 변압기 소리인지, 둑 터지는 소리인지 깜짝 놀라서 다 일어났거든요. 그러면서 전기가 나갔어 요. 동네가 암흑 같았아요. 별일 아니겠거니 하면서 집 안에 있었 어요. 그런데 겐스빌 치킨하는 옆집에서 전화가 온 거예요.‘지금
인터뷰 김은진 글 강영희
물들어 오니 빨리 나오라고’큰일 났다고 해서 아무것도 못 가 지고 나왔어요. 내 차는 마당에, 신랑 차는 경로당 앞에 있었어 요. 신랑 차는 권선필 교수님(이하 권교수) 집 지대가 높아서 거 기에 옮기고, 내 차를 옮기려고 하는 찰나에 물이 들어와서 내
차는 침수가 됐어요. 주민들이 대피해서 권교수님 펜션에 있었어
요. 권교수님이 구명보트 가지고 와서 우리 신랑하고 들어가서
주민을 구했어요. 옆에서 보니 물이 너무 차니까 못 들어가는데
물이 순식간에 차더라고요.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 진짜 일어난
건지, 현실이 맞는지, 상황이 와닿지 않으면서 생각지도 못한 일
이기도 하고 정신이 없었어요. 보트 타고 사람들 구해서 나오면
담요 덮어주고, 오한 오는 노인분들 3~4명은 권교수님 윗집에서
불을 때 놔서 그분들 도움을 받았어요. 일사천리로 해서 구했어
요. 지금 그때를 회상해 보면 정신없이 지나간 거 같아요. 소방구
조대가 와서 구조되어 나가서 복지관 생활을 52일 정도 하다가
들어온 거죠
우리 집은 지대가 조금 높으니까 어머님이 문을 잠그고 나왔으 면 안 들어갔을 거라구요. 거의 소파 있는데 까지 물이 들어왔
어요. 벽돌집으로 10년밖에 안 됐는데 습이 안 빠져서 15군데 정
도 코아로 뚫었어요. 제습기를 틀어놔도 산 쪽하고 가까워서 습
이 계속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장판, 도배지가 제일 늦었어요. 올
해는 고추를 많이 심어서 출하를 생각했는데 잠겨서 슬프더라구
요, 전부 버리려고 자원봉사자님이 고추 뽑아줬고, 그 자리에 배 추 심었어요.
침수당하고 마음 아픈 것보다도 멍했어요. 계속 멍하니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우리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너무나 어이 없다. 눈물도 처음에는 안 나오고 나중에 나더라고요. 집안에 진 흙이 엄청났어요. 치울 때 마다 눈물이 나서 펑펑 울었어요.
가도록 울었어요. 창고에 있는 것이 뒤집어지고, 진흙 들어가고, 닦는 과정도 엄청 했어요. 자원봉사들이 닦아줘도 흙이라 닦고
또 닦아야 되더라구요. 창고에 물하고 흙이 들어왔지 냉장고는 뒤집어지고 냄새도 나고 해서 5~6번은 닦은 거 같아요. 복지관
가서 서구청에서 오신분에게 집에 가서 아프면 먹게 구호 의약품 을 조금 달라고 얘기를 했어요. 정방리 노인회장님이 가져갔다고 해서 마을에 와서 구급약을 달라고 했는데 안 주는 거예요. 구 급약은 나눠 줘야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이 아프다는데 나중에 나눠 줄테니 놔두라고 하더라구요.
통장님, 노인회장님이 같이 있어줬으면 했는데, 복지관을 먼저 나 건 것이 속상했어요. 대책위원장을 세워서 해결하려면 통장님이 우선이잖아요. 그리고 식사 문제가 어려웠어요 언제 해준다 했다 가 안 해준다고 했다가. 복지관에서 있는 것도 서러운데 약간 눈 치 보였어요. 서구청, 구청장이 나서서 보상 처리나 주민과의 소 통이 잘되었으면 했는데 잘 안 되었어요. 주민들이무시당한 느낌 이 들었어요. 특별재난 지역이 된다고 했는데 도움은 별로 못 받
은것 같아요. 복지관에서 빨래 지원이 마감되서 못 해준다고 해
서 손 빨래해서 복지관 앞에 널어놓았어요. 주민들이 손목도 아
프고 힘들어하니까 권교수님이 민간 단체에 요청해서 세탁기 지
원을 받았어요. 개인 자원봉사자가 수해 동안 사용한 장화를
닦아 놨는데. 행정에서 장화를 가져간다고 하더라구요, 장화가
널브러져 있을 때는 신경도 안 쓰더니 깨끗이 해놓으니까 가져간
다고 하는 것 같아서 어이가 없었어요. 행정에 기대했었는데….
우리 집이 24평인데 반파로 나왔어요. 보상금보다 리모델링 비용
이 더 나갔어요. 손해 봤는데 어떡하겠어요? 시에서 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받아들이고, 돈 벌어서 갚아야지요. 그리고 제일 가
슴 아픈 것은 유튜브 보겸TV에서 전자제품 지원을 해준다고 해
서 너무 고마웠는데, 동사무소 주민명단에 올라가 있는 27가구 만 지원해 준다고 해서 분열이 생겼어요. 그러면서 상처 많이 받 았어요.
작은음악회를‘함께하는
교회’에서 준비해 줬구요.‘다시 마을
의 희망’이라는 글도 써오시고 감동받았어요. 마음에 안정을 시 켜준 거 같아요.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내일처럼 청소를 해주셨
어요. 다른 자원봉사자도 많이 도와주셨구요. 그리고 싱크대 혼 자 치우는데 남자분이 분해해서 버려주는 것까지 도와줬어요. 얼
마나 더웠는지 땀을 그냥… 너무 더웠어요. 여상희 작가가 설치
할
먼저 둑이 복구가 됐으면 좋겠어요. 집 인테리어가
둑이 또 터지면 나는 그게 제일 걱정이고요. 최우선으로 해 서 앞으로 안 터지게 안전하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잘 나가는 빵 집에서도 후원하신다고 너무 고마워요. 라이온스도 그렇고 진짜
다 고마우신 분들이세요 ●
인터뷰
#정뱅이마을 주민
인터뷰 강영희
글 강영희
그날 나는 몹시 피곤했어요. 비가 왔다는데 나는 비소리를 못 들
었다는 게 신기할 만큼 3시 50분까지 곤하게 잠들었지. 아마 딸
이 새벽까지 뭘 하고 있었나 봐.‘쿵’하면서 전기가‘탁’나가는
소리가 났데. 그냥 뭔가 쿵하는 정도가 아니라 댐이‘퍽’하는 정
도의 소리인거지. 전기가 나갔나보다 했는데 조금 있다 방송이 나온거지. 그리고 날 깨운거였어요.
하우스 하시는 분들이 가장 먼저 봤데요. 하우스 하시는 분들
은 비가 많이 오면 양수기를 꺼내기 시작하는 거야. 그분들이 가
장 먼저‘물이야’한 사람인거지. 비가 이렇게 24시간 온다던가
이렇게 되면 내가 넘친다던가, 불이 나간다던가, 하우스가 어떻 게 된다든가, 논이 어떻게 된다든가, 밭이 어떻게 된다는가 이런 거지.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다 깨어 있었기 때문에 다 개인적으로 전화해 주고 방송 두 번 하고, 방송 두 번 했다더
라고....근데 난 그 방송 소리도 못 들을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개
인적으로는 이 때가‘어두움’의 상징이야.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그렇게 비가 오는데 안 일어나고 자는 거는.... 우리딸이 깨워서
일어났어.‘엄마 전기 나갔어. 엄마 이 마을에 물이 찼어’
그리고 벌떡 일어나 나왔더니 우리 교수님이 보트에 바람을 넣고 있더라고 그래
서 내가 위험을 감지했어. 교수님은 이미 바깥에 나가서 다 보고 온 상태였고, ‘보트 찾아라’이 소리에 원래 우리 집에 큰 보트가 있어. 그게 바람이 빠졌거 든. 거기에 바람을 넣으려니 어림반 푼어치도 없는 거지. 엄청나게 큰 카약 같은 거거든. 그래서 딸이 작은 보트를 찾아서 바람을 넣고 있었어요.
나는 밖으로 무조건 뛰쳐나갔지. 그랬더니 이미 사람들이 다 나와서 우리 건물 앞에서 뭔가 기다리고 있는데, 내 집 앞에 지붕 아래까지 물이 찬걸 내 생애 처 음 본거에요. 건물 아래에서 물이 너무 찰랑찰랑 거리는거야. 그런 장면은 아찔 한 장면이야. 나는 마을이 지붕만
걸
본 거지. 지붕만 보였어. 전부 다 정신 좀 차려서 이제 나는 뭐를 해야지 하는데 벌써 교수님이 물로 건너가고 있 더라구. 그 순간 위험한 생각이 확 들더라구. 수영의 문제가 아니잖아 물 속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고 전기가 흐를수도 있고… 이건 굉장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남편이 건너가는 걸 말릴 수는 없겠더라구. 그래서 여기저기 전 화했지.
그렇게 하고서 보니까 이미 구조대가 사이렌을 켜고 거기서 구경하고 있는거야. 이런 경우 보트를 타고 들어와야 하는데 구조대원들도 구조대원이 위험한 데 그냥 들어가는 게 아니야. 그런데 보트를 보유한 게 없대. 보트를 가지러 간 40
어르신들을 하나둘씩 구하기 시작했어. 우리 동네 가장
지 않았으면 어쩌면 사람들이 그냥 40분을 바라봤을 거잖아. 교수님이 이런 상
황이 딱 되니까 그냥 들어간 거지.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 사람들이‘교수님 저
기 가주세요. 누구 있어요.’라고 말하는 거야. 근데 길이 안보이는 거야. 지붕만
떠 있고, 길은 없어진거야.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가야되는지도 잘 몰라, 밑에 뭐
가 깔려 있는지 이런 것도 몰라. 그런데 교수님은 길을 알고 있잖아. 구조대원
은 거기가 어딘지를 모르니까 어르신하고 통화를 해도 못 찾아갔다니까. 나는
그때 알았어. 골든타임이라고 하는 거는 나라가 살리는 게 아니야. 절대 공적인
힘이 살리는 게 아니야. 그때는 옆에 있는 사람이 살리는 건데, 옆에 있는 사람
이 포기하면 끝나는 거야. 나는 그거를 이번에 확실하게 알았어요.
어르신이 거의 백지장이 돼서 나왔어. 조금 더 있었으면 저체온증이 왔겠지. 다
른 어르신도 팔이 안 펴져서 사람들이 살짝 펴 가지고 들고서 옮겼지. 우리 끝
집에 불을 떼는 방으로 모두 모시고 갔어요. 그게 끝이 아니고 그 뒤 구조대원
들과 함께 구했지. 구조대원과 같이 구조한 어르신은 여기 와서 막 툴툴거리더
라고...배에서 엎어서 데려와서 코로 물이 들어가고 그러니까 죽을 것 같았다고. 긴장과 스트레스를 받으셔서 막 화를 내더라고, 나를 왜 이렇게 했냐고 그러니
까 사람들이 이게 뭐야 하지. 그런데 복지관 화장실에서 나한테‘교수님 덕분
에 살았지 큰일날 뻔했다’고 말하더라구. 어쨌든 22명이 우리 에멜무지로에 들
어와 있었어. 근데 구조대원은 와서 계속 22명이 있냐고 확인해. 꼼짝 말고 여기
계시라고 하는거야. 아니 우리가 어딜 간다고, 갈 데가 없다고 해도 아무데도
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해. 우리는 119가 오면 다 살거라고 생각하잖아. 그
렇지 않아 그러니까 그 상황에는 우리들끼리 협조하는 게 훨씬 더 살길이 빠른
빨리 가서 담요 가져오고
남편을 보면서 나도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하는데, 도울 게 있으
면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이걸 선택했어요. 뭐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걸 알아
서 어르신들 프로그램 (마을활동가포럼 연결) 만들어 주고, 필요한 봉사자들을 할 수 있는데 까지 불러다 주고, 먹을 거, 필요한 물품 지원한다고 하면 뭐가
필요하다고 얘기해주고 했지. 제일 고마운 데가 가치플러스 협동조합이야. 여기 는 너무 감사해요. 왜냐면은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이 줄 수 있는 걸 가져다줬 지만 여기는 내가 요구한 걸 줬거든요. 실질적으로 필요한 거 요청하면 거기서 찾아서 해준거에요.
되게 혼란스럽고 중복되는 상황에 서 지원을 받는거야. 구청이나 적십
자사에서 받는 거는 재난이 일어났
을 때 기본 키트가 있어. 슬리퍼, 휴 지, 이불 등 키트를 제공하는거야.
근데 가치 플러스에서는 필요한 걸
구해줬던 거지. 근데 집이 다 되기
전 상황에서 뭐가 필요한지는 아무
도 몰라요. 냉장고, 세탁기 등 기본
적인 거는 모두 필요해요. 그런데 그
외 자잘한 거는 집집마다 뭐가 필요
한지 모르잖아. 뭐가 필요하냐고 물
었을 때 도깨비 방망이를 말하는 사
람이 있었는데, 이건 생존에 필요한 건 아니잖아. 그래도 음식을 해먹으
려면 필요한 거지.
그리고 계속 지원을 받다 보니 역기
능이 생기기도 했어요. 처음에 지원받으면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시간
이 갈수록 당연하게 돼서 이거 안 되냐?, 저거 안 되냐? 요구하더라구요. 자기
들끼리 막 나눠 갖거나 그런 일이 생기는거에요. 물품 지원은 멈춰야 될 것 같 더라구. 물품을 나누다 보니까 오히려 맘이 피폐해져. 내가 필요한 거 이상으로
모든 걸 새로 지원받으려 하는거야. 외부 지원으로 사단 날 뻔한 적도 있어요.
보겸TV 지원받을 때 하우스를 빼고 계산해서 27대를 지원 받은거지. 그러니까
하우스는 못 받고 또 다른 한 분은 챙겨 준거야. 그거 받은 분이 여기에 못 와.
사람들 얼굴도 못 보고...
내가 개인적으로 친한 목사님하고 콘서트를 했는데 그때 너무 따뜻하고 좋았
어. 그런데 의원들하고 같이 온
자원봉사 단체에서 트로트 공
연을 해 줬는데 주민 한 분 중
에 100만원 지원을 받게 됐는
데,‘예쁜 옷 입고 오셔야 되요’
했다는 거야. 근데 지금 이 상황
에 예쁜 옷이 어디 있어. 그리고
그 분 평상시에 옷을 깔끔하게
입고 다니는 분이거든. 진짜 너
무 자존심 상해 했어요.
재난 유토피아라는 말이 있잖아
요. 재난에 모든 걸 다 잃었으니
까 공동체성이 확 생기는 것처
럼 느껴지는데, 한쪽에서는 막
싸움이 일어나는거야. 예를 들
면 구청이나 동에서는 재난 상
황을 빨리 마무리해서 혼란과
자기들이 하는 역할을 줄이고 싶을거 아냐. 그래서 대피소에 오래 있지 말라고
도배 장판, 재난 보상을 해준다고 하는거야. 그러니까 대피소에서 집으로 자기
들끼리 그냥 나가 버린거야. 근데 다른 사람은 아직 집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어. 이런 건 공동체가 같이 얘기했어야 한다고 봐.
그리고 처음에 봉사자들이 100명, 50명 단위로 막 들어왔어. 전체 쓰레기를 치
우는 데는 도움이 되는데 집 안을 정리하는 데는 별반 도움은 안 돼. 사람들이 별로 만족하지 않았어. 개인적으로 부른 봉사자들이 자기 집에 와서 뭐가 필요 한지를 도와줄 때 가장 사람들이 만족하더라구. 그래서 일단 자원봉사자들이
돕는 거는 약속이나 훈련이나 경험을
못해. 말하자면 이 집이 지금 너무 어 려워, 그럼 여기를 다 같이 돕고 해야 하는데 그런 거는 못하더라고. 근데 한 골 목에서는 그게 가능했어요. 공구도 공유하고 너는 이걸 잘하니까 와서 우리 이 걸 좀 도와줘 그랬더라구요. 집집마다 복구되는 과정이 다 달라요.
지금은 조금 안정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제 난 조금 지쳤어요. 이제 물품 지원 은 너무 힘들고 그렇게까지 받아야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이 상황 이 사단이 나기가 쉽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냥 모르는 척 하고 밥 열심히 한 거 야. 묵묵히 내가 한 달이면 한 달, 내가 밥을 해야되겠다 생각했지. 근데 이것도 이제 사람들이 넘 미안해 하는거야. 너무 미안해하는 걸 끌고 가면 안되거든 그 래서 지난주에 딱 접었어. 그런데 이제 습관이 되어서 벌써 60일을 밥을 같이 해 먹잖아.
나는 사람들의 의식이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공동체 의식이라고 굳이 얘기할 필 요도 없이, 이제 서로 도와야 한다는 거,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거 지. 어떻게 해야 그런 게 생길까? ●
주민분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뭔가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전문 상담사는 아니지만 재난 시기에는 수다가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생각지 못했는데, 인터뷰가 마을 주민들에게
필요한 시간이 되었던 것 같아 기뻤어요.
회복탄력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것을 현실에서 느낀 것 같아요.
‘이거(인터뷰) 해야 돼?’했던 분들이 예정했던 30분이 넘어서까지
계속 이야기해주시고,‘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나’했다가
나중에 전화해서 빼 달라고 하기도 했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남자 분들이 손을 떠는 것을 봤어요.
트라우마를 해소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후 기록이 어디까지,
어떻게 남아서 갈등의 원인이 되지는 안을지 걱정이 돼요.
마을의 젊은 분하고 인터뷰를 했는데, 이야기하고 나서 ‘후련하다, 답답했었다’고 해서 이런 인터뷰의 효과를 확인하고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