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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새삼 권정생 선생님이 그립다. 그의 새로운 작품도 그립고, 그의 묵은 작품도 다시 읽고 싶다. 그리고 혁명가로 산 선생의 기일과 맞닿아 있는 5월 광주의 혁명도 그립다. 그나마 그리움은 완성태가 아닌 결여태이기에 그래도 그리움 속에는 희망의 씨앗이 깃들어 있다. 그리움이 소진한다면, 희망도 소진할 것이기에. – 「여는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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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호·모두모아 94권 | 차례

여는 글

다시 권정생을, 평화를 생각한다 | 김상욱•4

동시 노랑이네 집 / 깜장 염소 | 이안•7

밤벌레 / 되새김질하는 말 | 오지연•10

쇠똥구리의 생활 계획표 / 사이좋게 | 주미경•12

한 번쯤 큰소리 치고 싶을 때! / 보고서 | 박억규 •14

응모 동시 길 위의 할머니들 | 남은우•16 응모 동시를 읽고

시인의 것으로 시를 쓰자 | 김미혜•17

연재 동화

놀기 대장 곡두 2 (10) | 김기정 •24

동화

빈 교실 | 방미진•34

닭발 인생 | 조태봉 •45

행복한 송아지 | 오주영•54

마지막 문자 | 박향희•64

나는 오빠다 | 이금옥•84

응모 동화를 읽고

고통의 쾌감을 권하며 | 이현•98

평론 들려주는 옛이야기로 아이와 교감하기 | 박현숙•109 서평

절제의 힘으로 일궈낸 시적 성취

『목욕탕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 장세정•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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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일상화를 꿈꾼 한 교사의 치열한 기록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도란도란 책모임』 | 최도연•134

당신의 숲은 어디입니까?

『숲으로 간 코끼리』 | 김민영•140 작업 일지

버림받은 사람들을 만나러 지리산에 | 김하늘•146

그림책 속 한 장면

뿌리 있는 그림책을 고민하다 | 조은숙•154

캐릭터 탐구

아이들이란 바로 이런 것! | 안성훈•158

다매체 읽기 팟캐스트를 믿다 | 이대연•164 영화는 불귀의 객이 된 그들 넋을 위로하네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 | 김민정•171 교실 이야기

코딱지 한성이 | 배훈•176

안내

제11회 그림책 원고 응모 안내•44

권정생 6주기 기념 행사 •83

정기 구독 안내•97

원고를 기다립니다•157

〈어린이와 문학〉 운영위원·후원회원 •182

표지 그림 : 강경아 두 아이와 놀다가 마흔 넘어 바다를 발견했다. 쓰고 그린 책으로 『거북이 를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고, 환경 문제를 생각하며 쓴 책 『똑똑한 빗물 저금통』, 함께 쓰고 그린 책 『까불이 1학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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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 김상욱(본지 운영위원장)

다시 권정생을, 평화를 생각한다

권정생 선생님 돌아가신 지 6주기가 다가온다. 몸에 새겨진 고통을 그만 편히 부릴 수 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감, 이러저러한 꼴 안 보고 돌아가시길 잘했다는 탄식, 언제나 빛나던 별 하나가 가뭇없이 지워져 버린 아쉬움, 내 가 또 우리가 그 빈자리를 채워 갈 수 있을까, 라는 머뭇거림, 그 모든 출렁 거림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데 벌써 6년이 지났다. 세월은 참 속절없다. 분명 그 세월 속에서도 시지포스가 바위를 밀어 올 리듯 힘겹게 밀어올린 노력이 마땅히 존재할 것임에도, 어찌 이 6년 동안 은 미꾸라지 한 마리, 아니 두 마리, 아니 한 줌도 안 되는 수천 마리 미꾸 라지가 분탕질한 것만 또렷하게 수면 위로 떠오른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또 그럴 터이고. 아마 선생님은 10주기가 되실 때까지 편안히 눈 못 감으실 거다. 그러니 우린들 편한 잠자기는 다 틀린 일이다. 뻑뻑한 눈을 비비고서 라도 뜬눈으로 세상과 어린이를 지켜볼밖에. 선생님 문학을 한마디로 규정할 수야 있으랴만 그래도 그래야 한다면

4•어린이와 문학 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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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연코 그 한마디는 ‘평화’다. 『슬픈 나막신』이, 『전쟁 3부작』이,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들이 그러하다. 다른 모든 작품 역시 평화의 변주이 거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되살린다는 것은 평 화를 지금, 여기의 모든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과 사람들의 마음속에 빼곡 하게 채워 넣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여기는 선생님의 바람과 너무 멀리, 갈수록 멀리 동떨어져 가고 있다. 북한은 유례없는 궁핍 속에서 미숙한 권력을 이어 가기 위해 전쟁을 볼 모로 트집을 일삼고, 남한은 한 치 양보 없이 누가 이기나 보자는 듯이 치 킨 게임에 열을 올린다. 휴전 협정이 평화 협정으로 고양되어야 마땅한데 도, 현실의 근본적인 모순을 덮어 버리고자 분단 모순을 극대화하는 전략 적인 외고집을 반복한다. 그 피해는 결국 고스란히 이 땅의 민중들에게, 어 린이들에게 전가될 것이다. 선생님이 그렇게 꿈꾸던 평화는 이렇게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이럴 때, 현실 속에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무릇 문학사는 어린이 를 되돌아보고는 했다. 방정환이, 이원수가, 이오덕이 그러했다. 어린이야 말로 10년 후, 20년 후의 분명한 구체적 미래이기 때문이다. 어린이 문학 둘레에서 숨 쉬고 울고 웃는 우리네 작가나 평론가, 독자들 역시 어쩔 수 없이 어린이의 삶과 마음을 앞서 추스를 도리밖에 없다. 모든 문학이 희망 의 문학이기에 평화라는 희망을 어린이들의 의식 도처에 깊이 아로새기는 수밖에 없다. 인권이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 것으로 말미암아 불이익을 받을 때 망실된다.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장애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피부색 이 다르기 때문에,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늙었기 때 문에, 어리기 때문에, 가난하기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면 그 모든 것이 반인

여는 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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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의 문제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평화란 내 일상을 내 뜻이 아닌 다른 그 무엇 때문에 억압받을 때 일그러진다. 내가 책을 읽고 싶을 때, 사과나무 를 심고 싶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꽃 피는 강변을 걷고 싶을 때, 흙을 일구 고 씨앗을 심고 새싹이 움트는 것에 환호작약하고 싶을 때, 그 일들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 또한 평화를 짓밟는 일일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바람을 이어 갈 수 있도록 문학은 북을 돋고 손을 내밀 일이다. 그것이 곧 어린이 문학이 뻗어 나가야 할 희망의 모습이다. 시절이 수상하고 엄혹할수록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문학의 품으로 건사할 도리밖 에 없다. 새삼 권정생 선생님이 그립다. 그의 새로운 작품도 그립고, 그의 묵은 작 품도 다시 읽고 싶다. 그리고 혁명가로 산 선생의 기일과 맞닿아 있는 5월 광주의 혁명도 그립다. 그나마 그리움은 완성태가 아닌 결여태이기에 그 래도 그리움 속에는 희망의 씨앗이 깃들어 있다. 그리움이 소진한다면, 희 망도 소진할 것이기에. 뜬금없는 이야기이지만 이 반동의 시대에 잡지 일을 맡은 2년의 세월도 흘러갔다. 잘해낼 수 있을까, 라는 저어함으로 시작했는데, 큰 흠결 없이 끝나 다행이다. 그래도 편집장과 운영위원들, 독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일 꾼들이었던 편집간사들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헛방이 있었을까 아찔 하다. 아무쪼록 마무리가 순조롭게 끝나고 고된 2년의 경험이 오롯이 체화 되어 이들 모두의 마음속에 좋은 글, 좋은 삶으로 새롭게 개화하시기를 바 란다. 더불어 새롭게 운영을 맡은 이들 또한 고단한 활동이 성장의 디딤돌 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모두 평화 속에서 건강하시기를…….

6•어린이와 문학 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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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 | 이안

노랑이네 집 뒷집 담벼락에 능청능청 개나리꽃 휘늘어졌네 샛노란 저 집에는 노랑이와 노랑이와 노랑이가 오글오글 반짝반짝 살 것만 같아 햇빛 눈부신 날 노랑이는 저마다 자기 집 노랑을 나눠주려 집을 나서지 노랑이 하나 노랑나비 옷 입고 노랑이 하나 누렁이 탈박 쓰고 노랑이 하나 노랭이 노인 지팡이 짚고 노랑 빛은 모두 저 집에서 나와 팔랑팔랑 절뚝절뚝 다니다 다니다 노랑 물 빠져나간 몸으로 돌아와 노랑을 생각하며 잠이 들지

이 안

1999년 〈실천문학〉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 『치워라, 꽃!』을, 동시집 『고양이와 통한 날』, 『고양이의 탄생』을 냈다.

동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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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유난히 길고 추워 꿈이 더 노래진 노랑이네 집 지금쯤 노랑이와 노랑이와 노랑이가 오글오글 반짝반짝 깨어날 것만 같아 쉬잇, 이제 곧 노랑이들의 행진이 시작될 시간 다녀오겠습니다아아아 노랑이들의 인사도 담 너머 들려오겠지

8•어린이와 문학 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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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장 염소 깜장 염소는 털이 까매. 하양 염소는 털이 희고. 똥은 땡글땡글 똑같이 까만색. 그런데 누군가 깜장 염소 울음소리는 까만 밤처럼 까맣고 하양 염소 울음소리는 하얀 눈처럼 하얗다 말한다면? 나는 곧장 그와 친구가 될 테야. 그 곁에 눈 감고 앉아 깜장 염소에게서 메에에에에 울려오는, 숯검정같이 까만 울음소리 들어 볼 테야.

동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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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 | 오지연

밤벌레 밤 속에 사는 벌레야. 컴컴한 그 안이 그래 좋나? 온종일 알맹이를 파먹으며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우리 막내 삼촌처럼 방안에서만 뒹굴뒹굴 온몸이 희멀겋겠다. 거기 웅크려 계속 잠만 잘끼가? 얼른 밖으로 나온나 눈부신 햇살 아래. 게으름뱅이야, 어서 나온나 사람들 입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퍼뜩!

오지연 제주도에서 동시를 쓰고 있다. 동시집 『기억할까요?』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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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새김질하는 말 “너, 목소리 참 좋다.” 새침떼기 하늘이가 음악 시간에 툭, 던진 한마디 그 말이 송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더니 자꾸만 내 귓가에서 되새김질한다. ‘너. 목. 소. 리. 참. 좋. 다.’ 맴돌던 말에서 향기로운 풀냄새가 난다.

동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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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 | 주미경

쇠똥구리의 생활 계획표 나는 시간을 조각조각 잘라 놓고 그 틈에 끼여 학원 가고 밥 먹고 학원 갑니다

쇠똥구리는 시간을 둥글둥글 뭉쳐 놓고 해 지는 줄 모르고 제멋대로 맘껏 주무릅니다.

주미경 2010년 본지를 통해 동시로 4회 추천을 완료했고,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 었다.

12•어린이와 문학 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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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좋게 한 나뭇가지에 쪼르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심장 소리는 못 듣게 방귀 소리는 들어도 될 만큼 사이를 두고 바람이 건너가는 햇살이 뛰어내리는 사이를 두고 참새들이 참 사이좋게 앉아 있다.

동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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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 | 박억규

한 번쯤 큰소리치고 싶을 때! 빨간 불 소리 지르며 숨 가쁘게 달려가는 119 소방차에게

아저씨, 어디예요? 시끄럽다고 붉은 얼굴로 올라온 아래층 아저씨에게

그것도 못 참아요? 다 큰 어른이! 공부 시간에 떠들지 말라는 소리 높은 선생님에게

그게 내 맘대로 안 돼요! 날 좋아한다는 소문만 무성한 도영이에게 정말, 진짜!

박억규 2011년 월간 〈어린이와 문학〉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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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아파트사우루스는 산과 들을 갉아 먹고 태어납니다 그들은 대체로 무리 생활을 하는데 강 위에 흙을 메우고 그 위에 서식하는 사우루스가 있는가 하면 뿌리 내렸던 논밭을 헤집고 땅 속에서 천천히 자라나는 사우루스도 있습니다 수명이 다한 아파 트사우루스는 덩치가 더 커지고 키도 더 웃자라 그 자리에 다시 태어나기도 합니다 더 잡아먹을 산과 들과 강이 부족하면 멸종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동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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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 동시 | 남은우

길 위의 할머니들 - 〈휴식〉* 공공근로 나온 할머니들 수양버들 그늘에 앉아 땀 식힐 때 화가 박수근 아저씨 내미는 박하사탕 “지금처럼 편하게 말씀 나누시면 돼요.” “우리 같은 늙은이들 그려서 뭐 할라 카노?” 수줍게 말하며 수건도 고쳐 쓰고 노랑 작업 조끼에 운동화 차림 모델들 박하사탕 볼마다 물고 두런두런 이야기꽃 피운다 쓱— 쓱— 하드보드지로 할머니들 모셔 가는 아저씨 먼저 가 있는 수양버들 아래 할머니들 도란도란 앉는다 * 휴식: 박수근 그림. 1960년, 하드보드에 유채, 33×21cm.

남은우 200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교문을 대문이라 부르고, 학교 뒷산을 마당처럼 뛰어다니 는 꼬마 시인들의 대장직을 수행하며, 동시 발굴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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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 동시를 읽고 | 김미혜

시인의 것으로 시를 쓰자

내가 읽고 있는 이 시는 특별한 눈과 귀가 발견한 것일까? 깊고 빛나는 통찰에서 나온 것일까? 새로운 발견과 해석이 들어 있는 것일까? 다른 시 각에서 바라본 것일까? 특별히 참신한 무엇이 있을까? 누구의 가슴을 울 릴 수 있을까? 13분이 투고한 39편의 동시를, 심사자가 아니라 독자로 읽 어 보았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박수근의 그림으로 새롭게 그려 낸 「길 위의 할머 니들 - 휴식」을 추천합니다. 함께 보낸 작품에도 탄탄한 동시를 쓸 수 있 는 시심이 보여 믿음이 갑니다. 「새봄」 외 「새봄」은 5행 모두 ‘봄’으로 맺는 전개가 새롭고 간결합니다. 그

런데 말놀이의 재미가 느껴지지 않고 건조합니다. ‘새봄’을 노래하고 있지

김미혜 동시집 『아기 까치의 우산』, 『아빠를 딱 하루만』, 『꽃 마중』과 『저승사자에게 잡혀간 호랑이』, 『그 림 그리는 새』, 『경복궁에 간 불도깨비』, 『나비를 따라갔어요』, 『신 나는 동시 따먹기』 등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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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시인에게 온 봄에서 봄이 느껴지지 않는 까닭이겠지요. 시인만의 구체 적인 봄을 보여 주세요. 「웨딩드레스 할머니」는 우리 의식에 불을 지펴 주 고자 쓴 시입니다. 시에는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강한 힘이 있으니까요. 그 런데 울림이 약합니다. 메시지가 강한 시로 밀고 나가면 좋았겠습니다. 하 나 둘 떨어진 꽃송이들의 고단한 굴곡을 보여 주려면 짧고 단호한 문장으 로 긴장의 효과를 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매미」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 엇일까 궁금합니다. 이미 많이 쓴 흔한 소재로 동시를 쓸 땐 새로운 감각이 필요합니다. 남과 다르게 보고 생각한 것이 없다면 씨앗을 버리는 게 낫습 니다. 「왜 떨리지」 외 「왜 떨리지」는 전개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평범합니다.

시는 단순한 서술이 아닙니다. 두려움의 감정이든 기쁨의 감정이든 시상을 정해 놓고 밀고 나가면 좋겠습니다. 「파자마 파티」는 밋밋합니다. ‘뚜쉬뚜 쉬’ ‘뚜뚜 쉬쉬’는 무엇을 위한 표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흉내말은 상황이 나 사물을 세밀하게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표현했어도 뚜렷하게 잡히는 상이 없습니다. 「키 컸구나」는 억지스럽습니다. 1연을 보 면 잠시 할머니 댁에 놀러 온 듯 보입니다. 그런데 할머니 댁 근처에서 고작 며칠이나 놀았다고 어느 날 아침 키가 한 뼘이나 자란 것을 보게 될까요? 「까치와 왕벚나무 보모」 외 「오늘 밤」은 평화로운 일상이 펼쳐지는 날 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폭격을 담담하게 그려 냅니다. 달, 불빛, 플라타너 스 열매, 연통의 뿌연 입김, 배달 오토바이 소리로 안온한 밤의 풍경을 5연 까지 묘사하다 폭격이 벌어졌단 뉴스를 알립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어둠을 어둠 그대로 보여 준 점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리다 말았 습니다. 폭격이 벌어진 곳의 폭력적인 풍경을 강렬하게 한두 줄이라도 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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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 보이면 좋았겠습니다. 「쓰레기봉투」는 쓰레기봉투가 가진 의미를 재발 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쓰레기봉투가 가진 본분에 대한 설정이 잘못 되었습니다. 알맹이를 담는 역할을 하는 게 봉지의 본디 본분은 아니니까 요. 그리고 부처님 예수님보다 맘 좋은 게 쓰레기봉투의 마음이라 할 수도 없지요. 뜬금없이 부처님 예수님을 마음 좋은 분으로 모셔 오는 것도 무리 입니다. 「까치와 왕벚나무 보모」. 시를 쓸 땐 문장 하나 허투루 써서는 안

됩니다. 단어가 틀려서는 더욱 안 됩니다. 왕벛나무가 아니고 왕벚나무입 니다. 「경운기 뿔났다」 외 이분의 시는 탄탄합니다. 「강아지 기차」는 꼭 쓸 말만

간결하게 쓰는데 모자라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경운기 뿔났다」는 익살스 럽습니다. 그런데 경운기가 왜 시뻘겋게 뿔났을까요? 적절한 묘사가 필요 합니다. 빠른 속도를 내지 못하고 툴툴거리며 논길로 가는 모습에서 고된 노동자를 그려 내고, 경운기뿐 아니라 흰머리 농부 할아버지도 경운기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그려 내면 어떨까 싶습니다. 「길 위의 할머니들 - 휴 식」은 박수근 화가를 등장시켜 수양버들 그늘에서 쉬고 있는 할머니의 모 습을 그려 내는 방식으로 전개해 낸 점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공공근로 할 머니들의 모습을 잘 잡아내어 마치 투박하고 서민적인 박수근의 그림을 보는 듯 선명합니다. 「빵점 맛」 외 일상에서 얻은 소재를 꾸미지 않고 써냈습니다. 「빵점 맛」은

연을 나누어 쓰면 낫겠습니다. 선생님- 반 아이들- 나- 선생님으로 연을 주어 선명하게 정리해 보세요. 「두 손 번쩍」은 정리가 잘되었습니다. 그런 데 파리채, 뿔자, 도끼 빗과 같은 것들이 엄마가 들기만 하면 전투기와 탱 크가 된다니 지나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엄마 목소리가 두 손을 번쩍 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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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항복일까요? 그런데 놀라움, 미안함으로 가슴이 내려앉은 엄마의 마음 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잘했지?」는 독자에게 환기해 주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주고 싶은 것인지 초점을 잡아 그것에 집중해 주어야 합니다. 「병아리가 피었어요」 외 「병아리가 피었어요」는 제목이 좋습니다. 해바라

기를 암탉으로, 채송화를 병아리로 본 마지막 연도 좋습니다. 그런데 시적 감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줄만 바꾸어 써 놓은 산문 같습니다. 시는 일상 의 경험을 단순하게 서술하는 게 아닙니다. 「강가의 돌멩이」는 다른 관점 에서 돌멩이를 보았으면 합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쓴 이미지입니다. 「빨 랫줄」은 가족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좋지만 초고 상태에 머물고 있습 니다. 종결 어미에서 높임말과 예사말을 섞어 쓰기까지 하는군요. 「신기한 줄넘기」 외 「신기한 줄넘기」는 안정되어 있습니다. 줄넘기 줄이

만들어 내는 반원 안에 들어오는 것들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런데 만들 어 썼기 때문에 신기한 줄넘기로 비치지 않습니다. 「아기와 신부님」은 간 결하게 정리하면 좋겠습니다. ‘무승부로 끝났지만/ 먼 훗날에는 아기가 이 기길 기원한다.’는 마무리는 안이하고 시에 쓰는 문장으로 적절하지 않습 니다. 일상의 경험을 동시로 형상화할 때도 감각이 필요합니다. 「기러기 가족」은 평범한 전개에 머물고 있습니다. 어느 기러기 가족의 구체적 이야 기를 잡아 보세요. 어떤 씨앗이 시를 쓰게 했나요? 그 씨앗을 발화시켜야 합니다. 「학교 가는 길」 외 「학교 가는 길」은 벚꽃 한 송이의 지각과 화자의 지각이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나무 허리/ 피려고 힘쓰다 쉬는’은 어떤 상 황을 보여 주는 것인지 모호합니다. 정황을 묘사해 주었으면 합니다. 말하 고 싶은 것이 뚜렷해야 합니다. 「함께 나가 봐」는 시인의 마음이 따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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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지만 중심이 약합니다. 전철 안에서 나뒹굴고 있는 민들레 씨앗이 싹 을 틔웠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는데 시선이 아가한테만 머물러 있지 않나 싶습니다. 민들레 씨앗에게 초점을 모아 주세요. 「매미 분실물」에도 시인 만의 발견이 있어야 좋겠습니다. 「힘센 이마」 외 「힘센 이마」는 군더더기 없이 탄탄합니다. 공부 벌레에게

약한 어른들의 부끄러운 현실을 잘 짚어 주는 점도 좋습니다. 그런데 연의 배열이 부자연스럽습니다. 1연과 2연은 한 연으로 묶고, 마지막 연은 두 연 으로 나누면 매끄러워지겠습니다. 「동백나무 할머니」는 바닷가 동백나무 와 동박새를 선명한 풍경으로 차분하게 펼쳐 가는 점이 좋은데 표현이 거 슬립니다. 춤추는 파도, 한바탕 자지러지는 웃음과 같은 표현은 상투적이 어서 아쉽습니다. 「청동기 그림책」은 암각화를 그림책으로 본 점이 신선 하지만 그림을 설명하는 부분이 밋밋합니다. 암각화를 넘어서는 시적 상 상력을 펼치거나 세밀하게 묘사하여 생명을 불어넣으면 좋겠습니다. 「눈사람」 외 눈사람을 화자로 내세워 쓴 「눈사람」은 ‘눈물만 남기고 가 버

릴 거야’란 표현이 좋지만 시심이 없습니다. 현실을 뛰어넘는 시적 상상력 으로 아이들과 놀고 싶어 하는 눈사람의 심리를 끌고 나가면 좋겠습니다. 「얼굴이 노래졌다」를 통해 무엇을 보여 주고 싶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먼 저 주제를 잡고, 시상 전개에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과감하게 잘라 냈으 면 합니다. 「그림책 넘기듯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먼나무」 외 「먼나무」는 멀리 있어도 먼나무, 가까이 있어도 먼나무죠?

‘먼나무’가 가진 말맛을 살려 깔끔하게 정리하면 좋겠습니다. ‘빠알간 열매 예쁘지’와 같은 표현은 진부합니다. 생생한 이미지를 보여 주세요. 「막내 의 크리스마스카드」는 아이의 입말로 아이의 심리를 차분하게 담아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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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런데 2연에서 익살스러움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어른의 목소리로 정리한 듯 느껴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시점이 혼재되지 않도록 1~3연까 지 아이가 쓴 카드 내용을 4연과 구분하는 장치도 필요하다 싶습니다. 「몰 라요」는 무난하지만 환기해 주는 부분이 약합니다. 「내 이름은」 외 「벽시계」는 대상에 대한 해석이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누

구나 만들 수 있는 비유는 시를 망칠 수 있습니다. 「내 이름은」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재미를 주지도 않고 가슴을 움직이게 하지도 않습니다. 코 고는 모습을 중심으로 고단한 삶을 사는 아빠의 모습을 애잔하게 그려 낸 「못 질」은 시로 형상화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여서 좋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못 박는’이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들어 감동 에 이르지 못합니다. 「빈둥빈둥 빈둥씨」 외 「빈둥빈둥 빈둥씨」, 「흰 토끼가 쭉」 두 편 모두 아이

의 현실을 새로운 형식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흰 토끼가 쭉」은 동화적 상상력이 충만합니다. 환상의 세계를 통해 학교 갈 시간에 욕실에서 꾸물 거리는 아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점이 좋습니다. 그런데 상상의 장 면에서 감성, 재치가 약하게 느껴집니다. 접속어 사용도 지나칩니다. 「빈 둥빈둥 빈둥씨」는 공상의 나열이 지루하게 읽힙니다. 재미나게 풀어 보십 시오. 책상 앞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책상에서 세상을 누비는 이야기로 맺 어지는 게 좋겠지요. 「화들짝」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습 니다. 어린 내가 본 노루이거나 어른이 되어 본 노루이거나 화들짝 놀란 그 순간을 예민하게 감각적으로 살려 냈으면 합니다. 내 동시에 엄정하게 잣대를 들이대 봅시다. 시인의 촉수가 작용하지 않 은 동시, 못난 내 자식을 어떻게 할까요? 버릴까요? 네, 버립시다. 나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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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보통 사람의 사유에 머물러 있다면 버립시다.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 는 나의 해석이 보통 사람의 해석을 넘어서 있지 않다면, 내가 구사한 언어 가 보통 사람들도 일상적으로 빚는 평범한 언어를 넘어서 있지 않다면 과 감하게 버립시다. 시인의 것이 아닌 것들로 시를 쓰긴 어렵습니다. 자신이 쓴 작품의 독자가 되고 심사자가 되어 무엇이 미흡한지 살펴보고 또 살펴 보십시오. 시인의 통찰, 시인의 해석, 시인의 언어를 만나기 위해 시를 읽 는다는 것! 이를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시가 될 재료인 지 절대 시가 될 수 없는 재료인지 스스로 판단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으음, 그러니까 헛수고할 필요 없는 것들을 붙잡고 괜한 씨름을 하지 말자 는 것이지요. 이 모든 말이 나한테 하는 말이라던 어느 달 심사평이 생각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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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동화 (10) | 김기정

놀기 대장 곡두 2 (10)

10. 천 가지 일등들

곡두가 학교에 다니고 한 달이 지났다. 누구에겐 ‘한 달밖에’였으나 어떤 이에겐 ‘한 달이나’였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글자도 제대로 못 읽고 수업 빼먹기 일쑤인 이 아이가 정말 학교에 잘 다녔느냐 하는 것이다. 적어도 곡두 말로는 그랬다. “그럼요. 얼마나 재미난대요. 아침에 엄마가 싸 주는 도시락도 까먹고 점심도 공짜로 먹잖아요. 아참, 이젠 엄마 도시락은 없답니다. 학교에서 점 심까지 준다는 걸 들켰지 뭐예요. 호호. 그리고 학교에는 여기저기 놀 거리 도 엄청 많답니다. 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잘 다닌답니다.” 김기정 2001년 첫날, 나는 동화를 쓰기로 마음을 굳혔고, 어느덧 열두 해째가 되었다. 그 순간이 어제인 듯 아침마다 새롭다. 황소처럼 한길만 보고 달려왔는데, 돌아볼 겨를은 없고 앞으로 나아갈 길만 참으로 멀다. 그간 쓴 책으로 『금두껍의 첫 수업』, 『이선달 표류기』, 『탐정 두덕 시리즈』 들이 있 는데, 꼽아 보니 열두어 작품쯤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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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말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곡두는 이사 오고 덩굴아파트 안에서만 맴맴 돌았다. 그러다 학교에 다니고부터 점점 노는 곳이 넓어졌다. 작은 골 목부터 큰 거리까지 말이다. “안녕하세요! 보였다, 안 보였다 곡두랍니다.” 가게 주인들과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까지도 곡두를 알아보았다. 웬 아 이가 시끌시끌하면서 온갖 참견하고 다녔으니까. 여기서 그 얘기를 안 하 고 다음으로 미루는 까닭은 몇 날 밤을 세도 모자라기 때문이다. 어쨌든 곡두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에도 학교에 갔다. 토요일 아 침부터 운동장에 죽치고는 혼자 뱅글뱅글 돌면서 노는 것이었다. 혼자 노 는 데도 아주 이골이 나서 하늘에다 대고 소리를 치곤 했다. “어쩜, 얘들은 이 널따란 마당을 두고 어디서 콕 쑤셔 박혀 있는 거야!” 그러면 한두 아이가 꼭 걸려들기 마련이다. 곡두는 점심때가 다 지나도 록 운동장에서 나갈 줄 몰랐다. ‘곡두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학교에서 놀 고 있더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도 이런 까닭이었다. 심심한 아이들이 몰려 드는 건 당연했다. 이 아이의 머릿속에는 일요일과 월요일을 나누는 법이 없었다. 비 오는 날, 맑은 날이 아니라 놀기 딱 좋은 날과 집 안에서 노는 날이거나 밖에서 노는 날뿐이었다. 곡두가 이런 줄 까마득히 몰랐던, 운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덩굴아파트 에 사는 단짝 동무 마똥과 자야와 도톨이었다. 이 아이들 눈에 주말 아침이 면 덩굴아파트 놀이터에 나오던 곡두가 보이지 않았다. “곡두는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세 아이가 소문을 듣고 주말에 학교로 향한 건, 곡두가 학교에 다니고 한 달이 다 되어 가던 토요일 오후부터였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그런 어느 월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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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도왔을까? 마똥과 자야와 곡두가 학교 안에서 딱 마주쳤다. 점심 시간이 거의 끝나 갈 때, 마침 곡두가 운동장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자야가 반갑게 말했다. “게서 뭐 하냐?” 곡두는 팔다리를 쫙 펴고 땅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한쪽 눈을 뜨면서 말 했다. “요렇게 햇볕이 좋은 날엔 빨래를 널지 않니. 지금은 나를 널고 있는 거 란다. 얘들은 말이야, 이렇게 햇볕에 널어 줘야 쑥쑥 크는 거란다.” 자야는 기가 막혔다. “수업도 안 듣고?” “아하! 그랬지. 어쩌면 좋으니, 지금은 햇볕 수업이 더 중요한데. 살살 간 질이고 살갗이 옴지락거리다가 보면 머리통에서 놀이 싹이 움튼단다. 얼 렁 너도 해 봐.” 마똥은 볼멘소리를 해댔다. “곡두야, 그러면 아침에 선생님보다 먼저 와서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한다 고. 하루 5교시 수업도 하나도 빠지면 안 되고. 4교시 끝나도록 교실에 안 들어오면 어쩌냐?” 곡두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글쎄다. 어쩜 좋으니, 오늘 아침에도 집에서 일찍 나오는데, 고물 장수 할머니 수레 끌어 드렸더니, 1교시가 지났고, 달려오다가 붕어빵 장수 아 줌마랑 2교시 수다 떨고, 문방구 할머니네 뽑기 구경하다 보니, 3교시가 지 나고 간신히 점심시간에 급식도 꼴찌로 먹고 요러고 있잖니. 아휴, 난 너무 바빠서 탈이란다.” 도무지 말려서 될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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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두가 학교에 다니고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아이들에겐 좀 실망스러웠 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 혼자 노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니까. 그렇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곡두를 한 번이라도 마주한, 학교의 아이들에게 조금씩 믿는 구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건 전염병처럼 아주 조심스럽고 도 은밀하게 퍼졌다. 교실에선 종종 벌어지곤 하던 이상한 일들만 봐도 그랬다. 한 선생님이 수학 시간에 반 아이들에게 곱하기를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구구단도 못 외는 녀석은 수학 빵점이야.” 그러자 한 아이가 눈을 빤히 뜨고 물었다. “왜요?” 선생님은 어이없어 했다. “구구단을 외는 게 수학이니까.” 아이들은 왠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왜 구구단을 외어야 해요?” “수학을 잘하려면 그래야 해.” “왜요?” “무조건 외면 돼!” “조잘조잘 외기만 하는 건 싫답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지 말고 자꾸 묻고 고개도 흔들고 해야 제대로 안답니다. 안 그러고 외기만 하면 입에 바보병 이 생겨 꼴까닥 죽을지도 모른답니다. 자꾸 ‘왜요.’라고 물어야 한답니다.” 잘 들어 보면, 꼭 곡두가 말하는 흉내였다. 선생님이 버럭 화를 낼 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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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런 말을 하느냐?” “곡두가요!” 선생님은 기가 막혔지만 참을성 있게 말했다. “안 돼. 수업 땐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그 아이는 휘둘러보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정말 그러니?” 그 순간 선생님은 처음 보는 광경을 눈앞에 보았다. 반 아이들 모두 한꺼 번에 고개를 저으며 도리질을 하고 있었다. “아뉘!” “그것 보세요.” 때문에 그날 선생님은 서른 명 아이들이 내는 서른 가지 ‘왜요.’에 하나 하나 답하느라, 1시간을 다 보내야 했다. 나중에는 진짜 곡두가 나타났다 사라진 건지, 아니면 아이들이 곡두처 럼 되어 가는 건지 헛갈렸다. 곡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아이들 입에서 ‘오늘 곡두는 어디 있을 까?’란 말이 심심찮게 나오곤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날 학교 교장실에서는 두 선생님이 머릴 맞대고 앉아 끙끙대고 있었 다. 교장 선생님과 콧대 선생님이었다. 전날 밤에도 교장 선생님은 아내인 국자 여사에게 바가지를 긁혔다. “여보, 아직도 곡둔지 꼭둔지 하는 놈이 말짱하게 우리 마을에 돌아댕기 고 있구려? 당신 학교에서 대체 어떻게 갤쳤길래 그렇수? 당신도 그놈이 랑 놀고 있는 거 아뉴?” 하며 남편에게 핀잔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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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선생님은 발끈해서 큰소리를 쳤다. “내가 얼마나 바쁜지 몰라서 그래! 내일 당장 내 솜씨를 보여 주지. 두고 봐!” 이날 콧대 선생님을 따로 불러서 얘기하려던 것도 바로 곡두 문제 때문 이었다. 하지만 ‘곡두’의 얘기는 좀체 쉬 풀릴 기미가 없었다. 두 선생님 사이에 오간 말을 들어 보면, 대강 짐작이 갈 만했다. “이봐! 콧대 선생, 자네가 곡두를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나?” “언제요?” “지금 와서 무슨 말이야. 그래서 자네 반에 곡두를 집어넣은 거라네.” “말씀드렸다시피, 곡두 말고도 저희 반에는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습 니다. 그 아이들만 잘 돌보는 것도 너무 바쁜데, 곡두까지 어떻게 신경을 쓰겠 습니까? 더구나 그 아이는 얼굴 보기도 힘들고 집에는 연락도 안 되는 걸요.” “어떻게든 좀 말 잘 듣는 아이로 만들 수 없을까?” “글쎄요? 워낙 놀기만 좋아해서요.” 콧대 선생님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을 거라고 믿었다. 얼마 전 시험 날 벌어졌던, 곡두의 시위를 떠올리곤 진저리를 쳤다. 그날 학교 안에 서 서른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시험을 안 치고 운동장에서 놀았으니 까 말이다. 교장 선생님은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고 궁리하는 눈치였다. “잘 생각해 보게나. 우리는 선생님이라고. 녀석은 지각도 밥 먹듯 하고 수업도 잘 빠지며, 또 만날 놀, 희한한 궁리만 한다지 않는가. 착한 다른 아 이들이 물들면 더 큰 일이라네.” 두 선생님은 끙끙거리기만 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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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러다가 몇 번인가 곡두와 놀았던 일을 떠올리곤 빙그레 웃음을 지었 다. 하나 어디까지나 그런 낌새를 들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아 주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때였다. 교장실 문이 빠끔 열렸다. 누군가 얼굴을 들이밀더니, 활짝 웃으며 말 했다. “어머나, 내가 젤로 좋아하는 두 선생님이 여기 다 모여 계셨네요. 어쩜, 한꺼번에 두 분이랑 놀게 생겼군요. 아이, 좋아라.” 곡두였다. 두 선생님은 몰래 뭘 훔치다 들킨 도둑마냥 깜짝 놀랐다. 콧대 선생님은 곡두 어깨를 꽉 잡고 반갑게 말했다. “드디어 잡았다. 요 녀석!” 하지만 곡두는 미꾸라지처럼 선생님 손을 빠져나와서는 교장실 안을 맴 맴 돌았다. 잠깐 사이 곡두는 달리고 선생님은 쫓는 술래놀이가 벌어졌는 데, 그러면서도 곡두는 잘도 조잘대었다. “제가 학교에 다닌 지 꼭 한 달이 되는데요. 아휴, 선생님 빨리 좀 잡아 보세 요. …… 그런데요. 여태껏 여기 구경을 하지 않았지 뭐예요. 여긴 뭐하는 곳 일까 궁금해서 들어왔답니다. 여기서 오늘 내내 놀아도 좋겠습니다. 하하.” 이 말을 듣는 순간, 콧대 선생님은 장승처럼 그 자리에 얼어 버리고 말았 다. 곡두가 교장 선생님 앞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자꾸 끔찍한 상상만 떠오 르는 것이었다. 교장실을 난장판으로 만들면 결국 자신은 교장 선생님에 게 혼꾸멍날 게 빤한 일이었다. 한편 교장 선생님은 ‘요놈, 잘 만났다!’ 하고 있었다. 한데 아이를 앞에 두고도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해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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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서 뛰어다니고 힐끔 쳐다보는 얼굴을 보는 순간, 그 희한하고도 기막 힌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좀 전의 계획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곡두는 교장실을 빙글빙글 돌면서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이어 두 선생 님은 곡두가 지껄이는 말을 듣고는 귀가 뻥 뚫렸다. “자, 어서 오세요. 지금부터 훌륭하신 두 선생님을 모시고 1등 대회를 열 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1등이라는 말에 눈이 두 배나 커졌다. 오랜 세월 ‘1등’을 입에 달고 산 교장 선생님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말했다. “1등이라고 혔냐?” “그럼요, 여기엔 1등들만 모인답니다.” “누군데?” 곡두는 대답은 않고 더 빨리 뱅글뱅글 돌더니 소리쳤다. 눈알도 뺑뺑 돌 았고 세상도 그랬다. 곡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맛난 빵 만들기 1등! 옥탑방 살던 이만두 씨!” 그러자 어디선가 불쑥 누군가 나타났다. 요리사가 쓰는 하얀 모자에, 하 얀 옷을 입고 손에는 쟁반을 들었는데, 거기엔 방금 만든 맛난 빵이 가득하 였다. 제빵사는 성큼성큼 교장 선생님 앞으로 다가가서는 바닥에 넙죽 엎 드려 큰절을 하는 것이었다. 곡두가 연이어 또 누군가를 소개했다. “왕호박 키우기 1등! 고래실 살던 김순자 씨!” 아줌마 하나가 수레 위에 엄청 큰 호박을 싣고 나타났다. 호박이 얼마나 큰지, 거기 들어가 살 만했다. 이 아줌마 농부는 사분사분 걸어와서는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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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 살짝 인사하고 그 옆에 팔짱을 끼고 서는 것이었다. 얼굴이 발그 레해졌다. 교장 선생님이 흥분해서 말했다. “곡두야, 이 사람들이 누구냐?” “잘 아실 텐데요?” “글쎄다. 허허, 학부모님이싱가요?” 하고 교장 선생님은 머쓱해했지만, 곡두는 더 빨리 달리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아주 훌륭한 선생님이시랍니다. 만날 1등이 되라고 말 씀을 하셔서 이렇게 1등도 참 많답니다.” 안타깝게도 교장 선생님은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대체 누구지? 그러고 보면, 이 아이는 꿈꾸는 것들을 눈앞에 부릴 줄 아는 아이지 않 은가. 곡두는 연신 뺑뺑 돌면서 소리쳤다. 그때마다 이런저런 이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하나같이 1등들이었다. 그 몇몇만 봐도 정말 대단했다. 고기잡이 1등, 농사짓기 1등, 흔들기 춤 1등, 아이 낳기 1등, 글씨 잘 쓰기 1등, 노래 부르기 1등, 사진 찍기 1등, 꽃꽂이 1등……. 단 공부 1등만 빼고 다 모인 듯했다. 세다 보면 천도 넘었으니, 세기도 참 힘들다는 게 맞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교장실, 아니 이젠 교장실이 아니었다. 너른 들판 한가운데 곡두와 두 선 생님이 서 있고, 그 옆으로 1등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가만 보면, 교장 선 생님 편에 선 이들이 서너 배는 더 되었고 그만큼 나이도 든 이들이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무릎을 치며 외쳤다. “알았다! 아이코, 요놈들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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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옆에 있던 이런저런 1등들과 얼싸안는 것이었다. 이어 콧대 선생님 도 비슷했다. “아하!” 하면서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려선 서로 눈빛을 마주했을 때, 모든 것이 머 릿속에 떠올랐다. 그랬다. 이 자리에 모인 1등들은 두 선생님이 지금까지 가르쳤던 제자 들이었다. 40년 전부터 10년 전까지…… 그리고 지금 곡두가 말한 것처럼, 제자들은 이런저런 1등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곡두가 딱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다. “자, 오늘 마지막 1등이랍니다. 히히, 놀기 1등 박곡두!” 곡두가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깔깔깔 웃자, 하늘에서 꽃보라가 내렸다. 징소리, 북소리, 피리 소리가 들렸고, 온통 잔치판이 되었다. 얼마 뒤, 두 선생님이 정신을 차렸을 때, 둘레에는 아무도 없었다. 둘은 아까처럼 교장실 소파에 머릴 맞대고 앉아 있었다. 곡두도 보이지 않았고, 1등들도 안 보였다. 꿈을 꾼 것일까? 이상한 건, 두 선생님 모두 한꺼번에 똑같이 아주 행복한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옷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그날 두 선생님은 같이 학교를 헤집고 다니며 곡두를 찾았다. 왜 그랬을 까? 그러나 곡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두 선생님은 투덜댔다. “요 녀석! 어디로 사라진 거야?” “낼 학교에 오기만 해 봐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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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 방미진

빈 교실

—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제자리에 서. —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움직였다. 내가 그대로 멈추라고 했잖아.

유민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교실로 들어선다. 그 양옆엔 친구 둘이 시녀 처럼 붙어 있다. 유민은 아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는 걸 느끼며 더욱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이 마치 춤추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춤이든 언젠가는 멈추게 되기 마련이다. 유민의 발걸음이 멈 칫한다. 방미진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지은 책으로는 『금이 간 거울』, 『손톱이 자라날 때』, 『괴담, 비 닐봉지풀』, 『형제가 간다』, 『왜 아껴 써야 해?』, 『착한 옷을 입어요』, 『신통방통 경복궁』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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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유민은 갑자기 아이들의 시선이 자신을 비껴가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 다. 그리고 한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유민은 멍하니 그 여자애를 보았 다. 하얀 얼굴에 허리까지 오는 초콜릿색 머리카락. 얘가 이렇게 예뻤나? 같은 반 아이다. 하지만 언뜻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머, 지연아 왔어?” 여자애 둘이 아첨을 떨며 지연에게 쪼르르 뛰어간다. 맞아, 지연이었지. 이름처럼 특색 없이 밋밋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던 아이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라 보인다. 유민이 경계하듯 눈을 가늘게 뜬다. 유민은 자리에 앉자마자, 거울부터 꺼내 들었다. 유민이 얼굴을 찌푸린 다. 제법 예쁘장하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오늘따라 밋밋하게만 느껴진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여자애들이 지연의 자리에 우르르 몰려 있다. 지연이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다. 화장이라도 한 걸까? “칫. 지가 그래 봤자지.” 지금은 반짝 아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지만,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지연 은 너무 평범한 아이니까. 하지만 지연은 유민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면에서 점 점 더 눈에 띄는 아이가 되어 갔다. 언제나처럼 침착한 얼굴로 조용히 있을 뿐인데도, 저절로 눈에 띄었고 빛이 났다. 상대적으로 유민은 점점 더 빛을 잃어 갔다. 유민에게 몰려들던 아이들이 지연을 둘러싸게 되었으니까. 거 울 속 얼굴은 점점 더 밋밋하게만 느껴졌고, 꽤 잘한다고 생각했던 공부도, 이젠 그 정도로 해서는 부족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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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은 시기심으로 늘 속이 끓는 것 같았다. 지연이 너무나 미웠다. 하지 만 아무리 저주를 퍼붓고 미워해도 지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예뻐졌고, 더 반짝이는 아이가 되어갔다.

“아, 귀찮아.” 유민은 공책 더미를 한 아름 안고 교무실로 향했다. 선생님들은 툭하면 업무를 떠넘긴다. 예뻐해 주는 걸 빌미로 말이다. 하지만 거절하고 싶은 마 음은 없다. 유민이 복도를 빠르게 걸어가는데, 빈 교실에서 춤을 추고 있는 아이가 언뜻 보였다. 다시 걸음을 뒤로 돌린다. 멈춰 서서 보니 춤을 추는 게 아니 라, 원을 그리듯 돌고 있다. 지연이다. 뭐 하는 거지? 마침, 지연이 돌기를 멈춘다. 그리고 유민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란다. “뭘 그렇게 놀라? 나쁜 짓이라도 했어?” 안 그래도 거슬리던 터라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나와 버렸다. 지연이 부 자연스러울 정도로 당황해한다. 유민은 뭔가 더 캐내고 싶었지만, 지연을 내버려두고 교무실로 향했다. 손에 든 공책이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그리 고 지연의 일은 잊어버렸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지연과 마주치자 다시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유민이 지연을 지나치며 비아냥거렸다. “너 요즘 좀 변한 것 같다.” 말을 뱉어 놓고 보니, 정말 그런 느낌이 확 든다. 지연은 확실히 변했다. 유민은 지연을 찬찬히 뜯어봤다. 겉모습은 어제와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지금의 지연은 어딘가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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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연이 유민을 향해 눈을 치켜뜨면서 도전적으로 말했다. “왜, 부러워?” 다르다. 유민을 보는 표정도 말투도, 이제까지와는 확실히 다르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다. 그것도 하룻밤 만에. 의심스럽게 지연을 살피는 유민에게 지연이 속삭였다. “내가 어제 빈 교실에서 뭘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유민이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지연의 입을 바라본다. 지연의 입초리 가 올라간다.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비밀?” “응. 그러니까 너만 알고 있어야 돼.” 지연은 유민의 귓가에 속삭이며, 짓궂게 웃었다.

“거짓말.” 유민은 빈 교실 앞에 서서 중얼거렸다. 이 학교에는 이런 식으로 방치된 빈 교실이 몇 개나 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 사이에선 빈 교실과 관련된 흉 흉한 소문들이 돌고 있다. 주로 빈 교실에서 벌어진 나쁜 일들에 대한 소문 이다. 진짜인 경우도 간혹 있지만, 대개는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다. 유민은 지연이 한 얘기 역시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연이 춤을 추던 빈 교실 앞을 쉽사리 지나치지 못한다. — 빈 교실에서 춤을 추면 네가 원하는 게 이루어져. 넌 단지 즐겁게 춤 을 추면 돼. “그런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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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느새 유민은 교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한 발짝 들여놓고는 주위를 휙휙 돌아본다. “괜히 망신만 당하는 거 아냐?” 지연과 그 일당들이 어딘가에 숨어서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유민이 춤을 추면 뛰어나와 마구 비웃으려고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 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숨어 있을 만한 곳도 없다. 책걸상 하나 없이 텅 빈 교실. 정말 춤을 추기 위한 무대 같다. 유민은 침을 꿀꺽 삼킨 뒤, 교실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그래. 눈 딱 감고 하는 거야. 춤이랄 것도 없잖아. 빙글빙글 돌기만 하면 되는걸. — 조그맣게 원을 그리면서 아홉 바퀴를 도는 거야. 유민은 지연이 가르쳐 준 대로, 바닥에 원이 있다고 상상하며 그 원을 따 라 돌기 시작했다. 속으로 바퀴 수를 헤아린다. 한 바퀴, 두 바퀴…… 순간, 오싹 겁이 난다. 언제가 흘려들었던, 시시한 괴담이 떠오른다. — 그 교실에는 오래전에 죽은 여자애가 살고 있대. 아주아주 예쁜 애였 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자애였지. 너무 완벽해서 죽기가 억울했던 거야. 그래서 계속 그 교실에 살고 있으면서……. 걸음이 점점 더 빨라진다. 무서움이 속도를 높이고 있다. 여섯 바퀴, 일 곱 바퀴…… 팔이 날개처럼 벌어지고 어느새 속도에 이끌려 몸이 저절로 돌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 인다. 여덟 바퀴, 아홉……마지막 한 바퀴야! 라 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 유민의 손을 잡았다. “꺅!”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아무도 없다. 불길한 기운 을 털어 버리듯, 손을 쓸어 내며 교실을 뛰쳐나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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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은 생각했다. 아홉 바퀴 다 돌았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며 학교 건물을 돌아보았다. 방금 뛰쳐나온 빈 교 실의 창문을 찾는다. 창문 너머엔 어둠만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유민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교실 안에 누군가 있을 것만 같다. 춤을 추면서 원을 그리고 있을 것만 같다. 아주 당연한 질문이 그제야 떠올랐다. 처음에 이 얘길 들었을 때 했어야 하는 질문이 말이다. — 빈 교실에서 춤을 추면 네가 원하는 게 이루어져. 넌 단지 즐겁게 춤 을 추면 돼. 그럼 소원을 들어줄 거야. 누가? 누가 들어주는 건데?

다음 날 아침, 거울을 보던 유민은 비명을 질렀다.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 의 비명을. 하룻밤 사이 유민은 놀라울 정도로 예뻐져 있었다. 지연이 들려 준 얘기는 사실이었다. 유민은 교실을 들어서며 지연부터 찾았다. 그리고 지연과 눈이 마주치 자 심술궂게 웃었다. — 지연보다 더 예뻐지고 싶어. 그게 바로 유민의 소원이었던 것이다. 배가 좀 아프겠지. 괜히 가르쳐 줬 다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이 유민의 자리로 우르르 몰려든다. 유민은 거울을 꺼내 들었다. “아, 너무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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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은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 행복감은 이내 시들해졌다. 완 벽한 건 얼굴뿐이었던 것이다. 유민은 또다시 빈 교실을 찾았다. 유민은 긴장한 채 교실 한가운데 섰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어둑해 지고 있다. 빨리 돌고 나가야지. 두 번째지만 겁나긴 매한가지다. 아니, 오 히려 처음보다 더 겁을 먹고 있었다. 마지막 아홉 바퀴째 느껴졌던 누군 가의 손. 유민은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춤을 추기 시 작했다. 하지만 춤을 시작하자마자, 누군가 유민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괜찮아. 눈을 질끈 감고 빙글 빙글 돌았다. 일곱, 여덟, 아홉…… 유민은 눈을 떴다. “꺅!” 유민이 소스라치며 멈춰 섰다. 주위를 휘휘 둘러본다. 아무것도 없다. 유 민은 가만히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발. 눈을 뜬 순간, 맞은편에 누군가의 발이 보였던 것이다.

그 뒤로도 빈 교실에서 춤을 출 때면, 언뜻 언뜻 누군가의 몸이 드러나 보였다. 어느 날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의 팔이 보였고, 다리가 보 였으며, 스쳐 가는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그 아이는 유민의 한쪽 손을 잡은 채, 같은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바람개비처럼 돌았다. 하지만 유민은 빈 교실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무서움은 순간이었 다. 잠깐 눈을 질끈 감고 나면 지나가는 것이었다. 반면 갖고 싶고, 이루고 싶은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유민을 괴롭혔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이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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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갖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깐만 참아 내면 가질 수 있는데, 이룰 수 있는데, 라는 생각이 터질듯이 들어찼다. 무서움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유민은 계속해서 빈 교실을 찾았다. 얼굴이 더 희었으면 좋겠어. 말을 더 잘했으면 좋겠어. 친구들이 더 몰려들었으면 좋겠어. 완벽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길지 않았다. 익숙해지면 완벽하다고 느꼈던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고, 늘 부족한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유민은 또다시 빈 교실에 서 있다. 오늘은 유민을 둘러싼 여자애들 중 하나가 기분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그 여자애는 최면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흠칫, 놀라더니 한 걸음 물러서 며 말했다. “너 이상해.” 그 말은 파동처럼 번져 나가며. 모두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너무 말라서 기형 같아.” 다른 여자애가 말했다. “쟤는 꼭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처럼 말해.” “얼굴도 너무 창백해. 꼭 죽은 사람 같아.” “귀신같아.” 유민은 교실 뒤로 뛰어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이상한 얼굴이 거 울 속에 있었다. 아무리 완벽한 얼굴이라도 질리기 마련이었다. 그때마다 유민은 소원했다. 눈이 더 컸으면 좋겠어. 피부가 더 희었으면 좋겠어. 입 술이 더 붉었으면 좋겠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사람 같지 않아. 이건 마치, 마치……. “인형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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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애 중 한 명이 말했다. 인상에 남지 않는 아주 평범한 아이였다. 쟤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지연. 지연이었지. 쟤가 저렇게 평범했었나? 하지 만 유민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자애들이 몰려들며 유민을 칭찬하 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맞아. 진짜 인형 같아.” “예뻐. 정말 예뻐.” “얘는 말도 정말 예쁘게 해. 정말 인형 같아.” 유민은 다시 우쭐해졌다. 거울을 보니, 인형 같은 아이가 미소 짓고 있었 다. 완벽해. 정말 인형처럼 예뻐. 아니, 인형 그 자체야. “볼이 붉으면 더 인형 같을 텐데.” 지연이 뒤에 와서 속삭였다. 정말 그랬다. 복숭아 같은 분홍빛이 돈다면, 너무 창백해 귀신같다는 말도 듣지 않을 것이다. 더 예쁠 것이다. 인형처럼 완벽할 것이다. 그게, 오늘 내 소원이야. 유민은 원을 그리듯 돌기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속도가 빨라지 고, 어느새 정말 춤을 추는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누군 가 유민의 손을 잡고 같이 돌고 있는 느낌에 소름이 끼친다. 몇 바퀴만 더 돌면 돼. 그럼 끝이야. 유민은 무서움을 참아내기 위해, 더욱 속도를 높였다. 착한 귀신인지도 모르잖아. 외로워서 죽은 아이일 거야. 그래서 늘 친 구를 기다리는. 그래, 내가 너와 춤을 춰줄게. 대신 넌 내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네 바퀴, 다섯 바퀴, 여섯 바퀴……. 유민은 점점 더 빠르게 돈다. 속도에 이끌려 몸이 저절로 돌고 있는 것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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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 마지막 한 바퀴야! 그 순간, 누군가가 유민의 손을 아플 정도로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보여. 유민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상대의 몸이 조각조각 드러난다. 유민의 시 선이 팔을 따라 서서히 올라간다. 손가락이, 그 위에 팔이, 가느다란 몸통이, 어깨가, 목이, 보여. 드디어 둥그런 얼굴이 나타난다. 유민의 시선이 홀린 듯 얼굴로 향한다. 네 눈이 보여. 히죽 웃는다. 입이 보인다. 그 입이 말한다. “다 돌았다. 열 바퀴.” 탁. 손을 놓고 떨어져 나간다. 하지만 정작 유민은 멈출 수가 없다.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원을 따라 계속해 돌고 있다. 춤을 춘다. 뱅글 뱅글 뱅글. 교실 안 풍경이 정신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 애가 보인다. 유유히 교실을 나가던 아이가 뒤를 돌아본다. 미 소 짓는 얼굴이 눈에 익다. 유민 자신의 얼굴이다. 내가 멈추라고 했잖아. 지연의 비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 아홉 바퀴를 도는 거야. 춤을 추면서. 소원을 빌 땐 꼭 기억해야 해. 열 번째가 되기 전에 멈춰야 한다는 걸. 꼭 아홉 바퀴만 돌아야 한다는 걸.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계속해 춤을 추며 돌고 있다. 오르골에 달린 인 형처럼,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그제야 깨닫는다. 누군가 와서 내 손을 잡기 전까진 이 교실에서 나갈 수 없다는 걸.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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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니? 넌 이 교실에 들어와 소원을 비는 거야. 그리고 신 나게 춤을 추 는 거야. 누구와? 너, 혼자.

제11회 그림책 원고 응모 안내 ■ 응모 형식 및 방법 ·접수 : 2013년 6월 20일까지 보내 주세요. ·원고를 보내실 때는 반드시 주소와 연락처를 적어 주세요. ·추천작 발표 : 월간 〈어린이와 문학〉 2013년 9월호 ■원고 보낼 곳 ·메일 : kkomia@hanmail.net ·주소 :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9-35번지 202호 ·문의 : 김윤희 (010-6340-3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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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 조태봉

닭발 인생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수학 학원이 휴강하는 바람에 다른 날보다 일찍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 런데 나는 우리 집, 아니 우리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뚝 멈추고 말았다. 유 리문 너머로 우리 가게하고는 정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예쁘게 차려입 은 아줌마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 아줌마는 눈물 콧물을 다 뽑아내며 매운 닭발을 뜯고 있었다. 엄마도 맞은편에 앉아 무슨 말인가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뭐야, 세진이 엄마 아냐?’ 세진이는 우리 반 회장이고, 세진이 엄마는 우리 학교 어머니회 회장이 다. 학기 초에 우리 반 회장 선거가 끝났을 때 세진이 엄마는 반 아이들에

조태봉 서울여대 겸임교수.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비둘기 아줌마」가 당선되었고, 동화집 『첨성대와 아기 별똥』, 그림책 『당나귀 임금님』, 『상아의 누에고치』 등을 냈다. 평론으로 「차별과 혼돈의 벽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시공간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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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피자를 돌렸다. 학교에서 가끔 마주치던 어머니회 회장이 세진이 엄마 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세진이 엄마는 척 보기에도 보통 아줌마들하고는 달랐다. 잘사는 집 아 줌마답게 고급스러운 옷에 몸매도 날씬하고 말 한마디를 해도 자상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엄마하고는 영 딴판이었다. 그런 세진이 엄마와 닭발이 라니! 나는 선뜻 가게 안으로 들어설 수 없었다. 망설이며 가게 안을 들여다보 고 있는데, 문득 세진이 얼굴이 떠올랐다. 세진이는 못 말릴 정도로 자존심이 센 아이였다. 공부든 뭐든 남한테 지 고는 못 견디는 성격이다. 이번 회장 선거만 해도 그랬다. 자기 인기가 떨 어지는 것 같으니까 남몰래 선물 공세를 퍼부었다는 소문이 있다. 어쩐 일 인지 선생님도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그런 데다 어찌나 도도한지 짓궂은 남자아이들도 세진이한테는 함부로 하지 못했다. ‘5학년 1반 공주병’으로 통할 정도로 온갖 고상한 척은 다 하 는 아이였다. ‘야비한 것. 완전 비호감이더니!’ 왠지 나도 모르게 쿡쿡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참 동안 나는 가게 밖에서 서성거려야 했다. 드디어 세진이 엄마가 돌 아갈 때가 된 모양이다. 퉁퉁 부은 눈으로 가게 문을 밀고 나왔다. 나는 잽 싸게 벽 쪽으로 등을 돌렸다. 엄마가 가게 밖까지 나와 세진이 엄마를 배웅 했다. “아들! 거기서 뭐 해?” 엄마가 나를 알아보고는 큰 소리로 물었다. “학원 휴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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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굴을 돌린 채 큰 소리로 대꾸하면서 후다닥 가게 안으로 뛰어들 었다.

가게 안은 손님 하나 없이 썰렁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더 그럴 것이다. 나는 세진이 엄마가 앉았던 자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둥그런 철 판에 시뻘건 닭발 양념이 엉겨 붙어 있고, 뼈 통에 닭 뼈가 수북이 쌓여 있 었다. 그 주위에 눈물 콧물을 닦아 낸 휴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엄마가 그것들을 주섬주섬 치우기 시작했다. “저 아줌마 알아?” 나는 엄마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엄마 단골이야. 포장마차 할 때부터니까 정말 오래됐지.” 엄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잖게 말했다. 하지만 세진이 엄마가 우 리 집 단골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엄마 목소리도 왠지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손님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시큰둥하게 다시 물었다. “근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엄마는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눈꺼풀을 내리깐 채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닭발 먹으러 온 거야. 우리 집 닭발만큼 매운 닭발이 없다고 아주 좋아하거든. 참, 그 집 딸아이도 너희 학교 다닌다던데, 이름이 뭐였더라?” “엄마가 걔도 알아?” 나는 더욱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는 건 아니고, 걔도 매운 닭발을 잘 먹는대. 포장도 자주 해 가거든. 어린애가 이 매운 걸 다 좋아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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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세진이가 닭 발을 먹는다고? 나는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만 같았다. “우리 가게 이름도 그 아줌마가 지어 준 거잖아.” “정말?” 순간 나는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지는 기분이었다. 처음 간판을 달고 나 서 아주 흡족해하던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가 세진이 엄마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 줄은 몰랐다. 그리고 세진이 엄마가 매운 닭발을 정말 좋아 하는구나 싶었다. 거기다가 세진이까지도 그럴 줄이야. ‘징그럽다고 어쩌고저쩌고 난리더니.’ 나는 왠지 세진이한테 사기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닭발 인생.’ 이게 세진이 엄마가 지어 준 우리 가게 이름이다. 처음부터 나는 이 간 판이 맘에 들지 않았다. 흰 바탕 위에 검은색으로 그려진 ‘닭발 인생’이란 글씨에서 젊은 청춘을 닭발만 다듬으며 살아온 엄마의 억척스러움이 느 껴졌다. 왜 우리 가게에는 ‘꼬꼬네 꼬꼬닭’처럼 귀엽고 재밌거나 ‘달콤살콤 닭강 정’처럼 살살 녹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는 걸까? 덕분에 나는 집에 드나들 때마다 닭발과 인생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다. 언젠가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인생이 뭐야?” 주방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생닭발을 물에 헹구고 있던 엄마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잠시 돌아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닭발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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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긴 뭐야. 사람 사는 게 인생이지.” “근데 왜 닭발 인생이야. 닭발도 인생이 있어?” 내가 되묻자, 엄마는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흘겨보았다. “인생이 좀 맵냐? 그러니까 매운 닭발로 퍽퍽한 인생살이 살살 달래 주 자는 거지!” “그게 뭐야? 순 엉터리!”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엄마 때문에 머릿속 만 더 복잡해졌다. 그렇게 알쏭달쏭한 우리 가게 이름이 세진이 엄마 작품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게다가 세진이도 앙큼하기만 했다. 며칠 전, 운동회 연습을 하는 날이었다. 세진이 엄마가 오븐에 구운 닭다 리를 싸들고 갑자기 나타났다. “운동회 연습 열심히 하라고 간식거리 좀 준비했어요.” 닭다리는 급식 시간에 반 아이들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졌다. 몇몇 아 이들은 좀 더 먹겠다고 급식 당번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나 역시 노 릇하게 구워진 닭다리를 보는 순간 군침이 돌았다. ‘우리 집도 이런 거나 하지. 하필이면 매운 닭발이 뭐야.’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닭다리를 포크로 찍어 한입 베어 물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닭발’이라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너 혹시 닭발 먹어 봤니?” 나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세진이와 친하게 지내는 아이들이 모여 앉자 닭다리를 뜯고 있었다. “아, 아니 징그럽게, 그런 걸 어떻게 먹어. 너는 먹어 봤어?” 세진이가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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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거 보니까 생각이 나서. 우리 엄마 아빠는 엄청 좋아하거든. 다 른 집도 그런가 해서 물어본 거야.” “우리 집은 다들 그런 거 싫어해.” 세진이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으으~’ 하고 자지러지는 표정 을 지었다. 그러자 다들 왁자지껄하게 웃어 대며 호들갑을 떨었다. ‘저것들을 그냥…….’ 나는 화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꾹 참아야 했다. 괜히 나섰다가 닭발집 아들이라는 게 드러나기라도 하면 아이들의 놀림감이 될 것만 같 았다. 우리 엄마는 원래 포장마차를 끌고 다니며 닭발을 팔았다. 아빠가 갑자 기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혼자 닭발을 팔아 나를 키웠다. 몇 해 전부터는 우리 학교 근처에 있는 큰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쪽으로는 발걸음도 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엄마는 거기 가 길목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장사가 잘되는 모양이었다. 방이 딸 린 가게를 얻은 것도 그 덕분이다. 하지만 요즘 엄마는 걱정이 많다. 가게를 얻은 후로는 포장마차를 할 때 보다 장사가 잘 안 되기 때문이었다. “가게 자리가 안 좋은 거야, 뭐야? 왜 장사가 이 모양이야?” 엄마가 썰렁한 가게 한구석에 앉아 턱을 괴고 있는 날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 엄마를 보고 있으면 나도 기분이 우울해진다. 그런 내가 그날은 아이들 때문에 마치 닭발이라도 된 거 같은 기분이었 다. 같은 닭인데도 닭다리와 닭발은 그렇게 차이가 큰 거다. 그런 게 인생 인 건가? 그래서 엄마는 가게 이름으로 그게 좋다고 한 건지도 모른다. 엄 마하고 딱 맞는 이름이라서? 그렇다면 세진이 엄마는 왜 그런 이름을 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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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까? 그날 나는 입맛이 떨어져서 밥 생각이 다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손도 안 댄 밥을 잔반통에 그냥 쏟아부었다. 닭다리 하나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 져 내렸다.

늦은 저녁에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니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근데 뭔 일 있었나 보네?” 가게에서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에 내 귀가 솔깃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 어 가게로 통하는 중간 문 쪽으로 다가갔다. 살며시 문을 여미고는 문틈으 로 가게 안을 살펴보았다. 세진이네 엄마였다. 벌써 낮에 왔다 갔는데 또 어쩐 일인지 궁금했다. 세진이 엄마는 아까하고는 아주 딴판이었다. 집에서 걸치고 있던 그대 로 나왔는지 평범한 차림새에 화장도 안 한 파리한 얼굴이었다. 머리도 좀 헝클어진 게 몹시 지친 기색이다. “그냥 갈 데가 없어서…….” 세진이 엄마는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는 자리를 잡고 앉아 닭발을 주문했다. “정말 참을 수가 없어서 한판 했어요. 대판 싸우고 나니까 속이 시원하 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미치겠더라고요.” 세진이 엄마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져 갔다. 세진이 아빠하고 크게 싸우 고 집을 나왔나 보다. “까짓거 잘했어요. 할 말은 해야 한다니까.” 우리 엄마가 한술 더 뜨고 있다. 싸움을 말리지는 않고 더 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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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만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래 도 숙제를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따금씩 세진이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가게에서 들려오는 얘기를 다 듣고 말았다. 세진이 엄마와 아빠가 오래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나 보다. 어쩌면 이혼을 할지도 모른 다고 했다. 세진이 아빠가 밖으로만 나도는 바람에 세진이 엄마가 속이 많이 상한 모양이다. 그런데 다 이따금 손찌검까지 하는가 보다. 그럴 때마다 매운 닭 발을 먹는다고 했다. 눈물 콧물 다 빼고 나면 답답한 가슴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아서다. ‘그럼 세진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문득 세진이가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빠가 없어서 다른 아 이들이 부러웠는데, 아빠가 있다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닌가 보다. 우리 아빠 가 돌아가신 게 아니고, 엄마와 매일 싸우다가 이혼을 한 거라면 지금 내 마 음은 어떨까? 모든 걸 가졌다고 해서 모두 행복한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세진이는 인생을 좀 알지도 모른다. 그래서 매운 닭발을 좋아하 는지도. 나는 한 번도 닭발을 먹어 본 적이 없다. 보기만 해도 혓바닥이 다 얼얼해질 정도로 너무 매울 것 같아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세진이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저도 모르게 스르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자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 보면 아직도 이야기 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언제 끝나려나 싶어 살며시 중간 문으로 나가 가게 안을 살펴보았다. 엄 마와 세진이 엄마는 술도 좀 마셨나 보다. 지치기는 했는지 가물가물 졸다 가도 다시 이야기를 간신히 이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밤을 새울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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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나 먼저 자야 할 것 같아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까무룩 잠이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닭발이 없었으면 어찌 살았을지 몰라. 닭발 팔아 아이 키우고 상한 마음도 이렇게 달래고.” “맞아요, 맞아. 그러니까 닭발 인생이지.”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 맞장구를 치면서 큰 소리로 웃어 댔다. 왠지 엄마 말이 내 귓가에 남아 오랫동안 맴돌았다. 엄마와 세진이 엄마의 웃음소리 도 내 잠결까지 따라와 붙었다. 아무래도 내일은 꼭 매운 닭발을 먹어 봐야겠다. 그래야 인생을 알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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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 오주영

행복한 송아지

어느 여름밤 담장 높은 으리으리한 집 창고에 송아지 한 마리가 배달됐 어요. 송아지는 꼬리로 휙휙 모기를 쫓으며 생각했어요. ‘난 엄마처럼 되지 않을 거야.’ 목장의 축사에 갇혀 살던 송아지의 엄마는 한 달 전에 갈비탕이 되고 말 았어요. 송아지의 삼촌도 같은 운명이 되었어요. 송아지는 목장의 소들이 누구나 엄마나 삼촌처럼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송아지는 자라고 싶지 않았어요. 건초를 일부러 조금씩만 먹었지요. 그 러다 보니 또래 중에 제일 작은 꼬맹이가 되었답니다. “어떤 남자애가 송아지를 애완동물로 사겠대. 작고 비리비리한 녀석을 팔아 치워야지.” 목장 주인은 이렇게 말하며 송아지를 트럭에 실었어요. 송아지는 태어 오주영 창비 좋은어린이책 저학년 부문 대상, 푸른문학상 아동청소년 평론 부문 새로운 작가상을 받았 다. 펴낸 책으로 『이상한 열쇠고리』, 『한입 꿀떡 요술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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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 처음으로 목장을 나왔어요. 송아지는 바깥을 보며 중얼거렸어요. “길을 걷는 동물이 별로 없네.” 사람들과 함께 걷고 있는 개 몇 마리가 보일 뿐, 길거리는 사람들과 차들 로 넘쳐났어요. ‘나도 마음대로 길에 다녀 보고 싶어. 애완동물이 되면 그럴 수 있을까?’ 송아지는 설레는 상상을 하며 이 집에 도착했답니다. 송아지는 창고 안에 마련된 여물통의 건초를 실컷 먹었어요. 똥도 시원 하게 누었어요. 어디선가 킁킁대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으흠, 구수한 냄새. 딱 한입만 먹으면 힘이 솟을 텐데.” 송아지가 펄쩍 뛰며 뒤를 돌아봤어요. “누구야?” 뒤쪽에는 빈 우리가 쌓여 있었어요. 개집, 철장, 아크릴 우리, 플라스틱 우리, 어항, 새장……. 세상의 우리란 우리는 다 모여 있는 듯했어요. 또 소리가 들렸어요. “네 앞의 나무 개집과 네모난 철장 사이에 쳐진 거미줄을 볼래?” 송아지는 우리 쪽을 찬찬히 살펴보았어요. 거미줄에 커다란 똥파리가 걸려 고무락대고 있었어요. 몸뚱이는 청록색으로 반들반들했고, 얼굴은 금빛으로 반짝였어요. 게다가 처음 보는 무지개색 날개를 갖고 있었어요. “목장에서 백구 할아버지한테 무지개 요정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 만나 기 무척 힘들댔는데.” 송아지는 목장의 터줏대감인 백구 할아버지에게 날마다 이야기를 해 달 라고 졸랐어요. 할아버지는 신기한 얘기를 많이 알았어요. 사람에게 먹힐 뻔한 돼지가 무지개 요정을 구해 주고 투명 망토를 얻어 도망친 이야기,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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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한 수탉이 무지개 요정을 도와주고 세상에서 제일 강한 발톱을 얻은 이 야기, 겁쟁이 똥개가 무지개 요정에게 먹을 걸 나눠 주고 요술 밥그릇을 얻 은 이야기……. 그런데 정말로 무지개 요정이 눈앞에 나타난 거예요! 무지개 요정이 으스대며 말했어요. “똥파라고 불러. 날 만나 감격스럽지?” “똥파야. 근데 너 거미줄에서 놀고 있는 거니?” “장난해?” “혹시나 했지. 털어 줄 테니 기다려.” 송아지는 꼬리로 살살 거미줄을 털어 똥파를 풀어 주었어요. 자유를 찾 은 똥파가 송아지의 똥으로 배를 채웠어요. 삼 일 만에 처음 먹는 밥이라고 했어요. “똥파야. 어쩌다 거미줄에 걸렸어?” “하도 들락날락하다 보니 아차 실수했지 뭐. 이 창고에는 별의별 동물이 다 살았거든. 고슴도치, 기니피그, 너구리, 이구아나, 카멜레온, 구렁이, 전 갈, 지네, 열대어, 아르마딜로, 프레리도그, 박쥐, 앵무새. 키우는 동물이 후 딱후딱 바뀌는 덕에 나도 갖가지 똥을 안 질리고 맛볼 수 있었어.” “진짜야? 그 동물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똥파가 딱한 눈으로 송���지를 보았어요. “빈 우리만 남은 거 보면 모르겠니? 이 집에 온 동물들은 길어도 한 달을 못 가. 이 집 아들인 견우 녀석이 동물들한테 심술을 부리거든. 얘는 약한 동물을 괴롭히는 게 세상에서 제일가는 놀이인 줄 알아. 못되게 굴기 대회 에 나가면 무조건 우승할 녀석이야. 너도 좀만 있으면 여물통 하나 달랑 남 기고 이 집에서 사라져 버릴걸.” 송아지가 불안한 눈으로 우리를 되록 굴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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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모르는 일이잖아.” 똥파가 입맛을 다셨어요. “잘해 보셔. 나도 이젠 다른 동물이 창고로 들어오거나 말거나 상관없거 든. 너한테 들켰으니 여길 떠나야 해.” “왜 떠나?” “그게 무지개 요정들의 첫 번째 법칙이야. 어서 소원이나 말해 봐.” “소원?” “옛이야기에 나오잖아. 도움을 받으면 소원으로 보답하는 게 무지개 요 정들의 두 번째 법칙이야.” “세 번째도 있니?” “마지막 법칙이야. 소원은 꼭 이루어 주고 떠날 것.” 송아지는 어두운 창고 안을 둘러보았어요. 혼자서 밤을 보내고 싶지 않 았어요. “똥파야. 내일까지 생각해 볼게. 그래도 될까?” “하암. 네 귓속에서 쉬어도 된다면 좋아. 사흘이나 못 잤더니 너무 졸리 다.” “그렇게 해.” 똥파는 소원이 떠오르면 부르라는 말을 남기고 송아지의 귓속으로 들어 갔어요. 똥파는 뒤척뒤척 자리를 잡더니 금세 곯아떨어졌어요. 송아지는 똥파의 도롱도롱 숨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어요. 다음 날 아침이 되었어요. 송아지는 새들이 지절대는 소리에 잠에서 깨 었어요. 창밖을 보니 창고 앞의 사과나무 위에 동박새 두 마리가 노래를 부 르고 있었어요. 송아지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요. ‘창고를 나가면 저 나무 아래서 단잠을 자야지. 저 담장 밖을 거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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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는 혀로 열심히 몸의 털을 골랐어요. 벽에 얼굴을 비벼 눈곱도 떼 어 냈어요. 견우라는 아이에게 잘 보이고 싶었어요. 조금 있자 관리인 아저씨가 창고로 들어왔어요. 송아지가 반갑게 인사 했지만 아저씨는 여물통을 채우고 똥을 치우며 투덜댈 뿐이었어요. “하다 하다 이젠 집에서 송아지까지 키운다고? 기가 막혀서 원.” 관리인 아저씨가 송아지의 목에 목걸이를 채웠어요. 긴 목줄을 창고 안 의 기둥에 묶고 나갔어요. 마침내 견우와 견우의 엄마 아빠가 들어왔어요. 견우가 송아지를 보자마자 빽 고함을 질렀어요. “우아, 송아지다. 내 거야!” 엄마가 샐긋 웃었어요. “우리 견우는 멋진 생각도 잘하지. 송아지를 애완동물로 삼다니.” 아빠가 흐뭇하게 말했어요. “실컷 가지고 놀아라.” 견우가 씩 웃으며 송아지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송아지는 두툴두툴한 혀로 견우의 손바닥을 핥았어요. 자기를 예뻐해 주길 바라면서요. 그러나 견우는 다른 쪽 손으로 송아지의 축축한 코에 주먹을 콱 내뻗었어요. 다다 다! 송아지 얼굴에 견우의 주먹이 쏟아졌어요. 놀란 송아지가 뒷걸음질하 다 발라당 넘어졌어요. 견우가 한쪽 발을 송아지 궁둥이에 올리며 인디언 처럼 외쳤어요. “아바바바바바!” 엄마 아빠가 배를 잡고 꼴딱꼴딱 숨이 넘어갈 듯 웃어 댔어요. 고꾸라진 송아지가 슬프게 울었어요. 견우가 낄낄대며 송아지의 꼬리를 잡아당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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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이 멍청아!” 송아지는 너무 슬퍼 꼼짝도 할 수 없었어요. “엄마, 아빠. 송아지가 고장 났어! 이거 치워. 난 고물 송아지 필요 없어!” 아빠가 말했어요. “그래, 우리 아들. 송아지를 도로 팔아 버릴까?” 견우가 말했어요. “팔지 마. 내 생일에 먹으면 되잖아.” 엄마가 호들갑을 떨었어요. “그래, 맛있는 송아지 요리 좀 먹어 보자. 송아지 간 구이가 그렇게 쫄깃 하다는데.” 아빠가 신이 나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어요. “아예 전문 요리사를 불러야겠어.” 송아지가 애처롭게 울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견우가 까들 막까들막 송아지를 놀렸어요. “재밌는 걸 알려 줄까? 내 생일은 바로바로 내일이야.” 견우 가족은 창고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어요. 송아지는 꼼작꼼작 구석으로 가 쪼그려 앉았어요. ‘차라리 목장이 좋았을까? 거기에 있었으면…….’ 그랬대도 언젠가는 음식이 되었을 거예요. 송아지는 마음이 답답했어요. 그때였어요. 송아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똥파를 떠올렸어요. “맞아. 소원!” 송아지는 벌떡 일어나 고개를 탈탈 흔들었어요. “똥파야, 자니?” 송아지가 몸을 뒹굴뒹굴 굴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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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야, 자니?” 송아지가 로데오 시합을 하는 소처럼 펄쩍펄쩍 뛰며 똥파를 불렀어요. 그제야 잠에서 깬 똥파가 송아지의 귀에서 기어 나왔어요. “하암,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네. 무슨 소원을 빌 거니?” “나는…… 행…….” 송아지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어요. 말간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 졌어요. 곧 후드득 눈물이 쏟아져 나왔어요. 커다란 콧구멍이 벌름이며 콧 물이 줄줄 흘러나왔어요. 똥파가 당황했어요. “어이, 왜 그러셔? 소원을 빌게 돼서 그렇게 기뻐?” 송아지는 겨우겨우 말했어요. “행, 으헝, 행복, 으허엉, 해지고, 으흑흑, 싶어.” 똥파는 앞발을 비벼 대며 고민에 빠졌어요. “행복, 행복이라.” 그건 투명 망토를 달라는 소원이나 세상에서 제일 강한 발톱을 갖게 해 달라는 소원보다 훨씬 어렵고 까다로운 소원이었어요. 똥파는 송아지에게 물었어요. “너한테 행복은 뭐니?” 송아지가 훌쩍이며 대답했어요. “갈비탕이 될까 봐 걱정하지 않고 사는 거, 창고를 나가서 자유롭게 풀 을 뜯으며 사는 거야.” 똥파가 송아지의 머리 위를 빙빙 돌았어요. 똥파의 무지개 날개에서 일 곱 빛깔 가루가 반짝반짝 떨어졌어요. “네가 소원을 이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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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가 가물가물 잠들었어요.

다음날 송아지는 뽀송뽀송한 이불을 덮고 깨어났어요. 하늘색 벽지로 발라진 천장이 보였어요. ‘어어? 여긴 창고가 아니잖아.’ 방문을 열고 견우의 엄마와 아빠가 들어왔어요. “견우야, 깼니?” “난 송아지인데요.” “그래그래, 어여쁜 우리 금송아지. 생일을 축하한다.” 송아지는 당황해 두리번거렸어요. 벽거울이 눈에 들어왔어요. 거울에는 송아지 대신 견우가 비치고 있었어요. “내가 견우라고요? 그럼 송아지는요? 송아지한테 가요. 빨리요!” 견우가 헐떡였어요. 엄마 아빠는 서둘러 견우를 창고로 데려가 주었어 요. 견우는 창고 문을 활짝 열었어요. 목줄에 묶인 송아지가 사냥개처럼 사납게 으르렁댔어요. 송아지는 목줄 을 질겅질겅 씹어 대며 몸부림을 쳤어요. “이 녀석으로 저녁에 맛있는 생일상 차려 줄게. 안심은 살짝 구워 스테 이크를 만들고, 등심은 얇게 썰어 튀김으로 만들고, 정강이는 통째 구워 바 비큐를 만들고, 갈비는 잘 쪄서 찜을 만들고, 다리는 푹 삶아 족발을 만들 거야.” 아빠의 말에 송아지가 울부짖었어요. 엄마가 깔깔 웃었어요. “쫄깃한 송아지 간 요리도 기대돼.” 송아지는 불쌍할 만큼 파들파들 떨어 댔어요. 견우는 송아지의 마음이 빤히 느껴졌어요. 가슴이 콕콕 쑤셔 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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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송아지를 그냥 놔둬요. 제발요. 부탁이에요!” 견우의 부모님은 어안이 벙벙했어요. 하지만 견우가 어찌나 절절하게 말했던지 입맛을 다시며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부모님은 고개를 갸우 뚱대며 창고를 나갔어요. 송아지는 둘만 남자 견우를 노려보며 쿵쾅쾅 발을 굴려 댔어요. 견우가 한숨을 쉬었어요. “너, 좀 전엘 생각해 봐. 내가 없었으면 넌 뭐가 됐겠니?” 견우의 말에 송아지가 부르르 진저리를 쳤어요. “어제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겠지?” 송아지가 불만스럽게 푸르릉 소리를 냈어요. 견우는 송아지의 목줄을 끌러 주었어요. 송아지는 쌩하니 창고를 떠났 어요. 천장에 붙어 있던 똥파가 견우를 불렀어요. “어이구, 늬들 친해질 수는 있겠니?” 견우가 깜짝 놀랐어요. “똥파야. 너 떠난 게 아니었어?” “기억 안 나? 어제 세 번째 법칙을 알려 줬잖아.” “그럼 내 소원은…….” “진행 중이야. 네가 소원을 제대로 이루려면 쟤를 변화시켜야 해. 쟤가 널 아껴 줄 수 있는 애가 되어야 소원이 완성되고, 넌 진짜 네 몸을 되찾을 수 있어.” 견우가 고개를 갸우뚱거렸어요. “똥파야, 쟤가 달라질까?” 똥파가 투덜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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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니깐 말이야. 이러다 창고지기로 눌러살게 될까 봐 걱정이다.” 어쨌거나 견우는 코앞의 기쁨부터 누리기로 했어요. 견우는 집을 나섰어요. 길은 어디로든 뻗어 있었고, 견우는 어디든 갈 수 있었어요. 견우는 바람에 담긴 흙냄새, 풀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걷기도 하 고 힘껏 달리기도 했어요.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기도 했어요. 풀줄기를 덥 석 물고 우물거리기도 했어요. 사과나무 밑에서 단잠도 잤어요. 견우는 행 복했답니다. 잠을 방해하는 모기를 꼬리로 휘휘 쫓을 수 없어 아쉬울 뿐이 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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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 박향희

마지막 문자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지각할까 봐 학교로 뛰었다. 그 러나 학교에선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진운, 대단하던데?” 우산을 접어 신발장 옆 우산꽂이에 꽂는데 민기가 한쪽 팔로 나를 툭 치 며 말했다. 뭔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다. 곧 대단한 경기라도 벌어질 것 같다. ‘또 무슨 일이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옆 반 담임이 교실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도 얼른 교실로 들어갔다. 뒤따라오는 민기 녀석의 얼굴이 실망으로 일 그러졌다. “진운아, 조심해. 너 그러다가…….” 박향희 한겨레 아동작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2011년 〈대구매일신문〉에 「나를 칭찬합니다」 당선, 2012년 제7회 소천아동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우리 가족을 도운 도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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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앉는데 짝인 지희가 뭔가 말을 꺼내다 상수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야, 너 오늘 아주 맞짱 뜨자.” 상수가 나를 보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 왜?” “어쭈, 이 자식이…….” 상수가 금방이라도 한 대 팰 듯이 팔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다. 상수는 멈 칫하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얼른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먹이를 놓친 맹수 같다. “여러분, 미안! 비가 와서 조금 늦었다.” 담임 선생님은 허둥지둥 수업을 시작했지만 난 집중할 수가 없었다. 뒤 통수에 꽂히는 상수의 눈길도 따가웠지만 머릿속에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했다. ‘또 무슨 일? 왜 자꾸 나한테 문제가 생기는 거지?’ 이런 의문은 1교시 끝나자마자 풀렸다. “네가 상수한테 도전장 보냈다며?”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뒤에 앉은 민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상 수 눈치를 보면서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뭐라고?” “네가 상수 한 방 먹였다면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자세히 말해 봐.” 민기 설명은 이랬다. 내가 어젯밤 상수에게 문자를 보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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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네 입에서 똥폰이라는 소리가 안 나오게 해 주마!’ 상수는 아침 일찍 씩씩대며 내가 오기를 기다렸고 그 녀석의 부하들까 지 분개해서 상수 폰에 찍힌 문자를 아이들에게 보여 줬단다. 거기엔 내 폰 번호도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고 했다. 이런! 내 휴대폰이 또 사고를 치다니. 이번엔 대형 사고다.

요즘 이 휴대폰이 수상하기는 했다. 시도 때도 없이 꺼지는 것은 예사고 어떤 때는 분명히 전원을 껐는데도 저절로 켜져 있기도 했다. 차라리 없으면 없는 대로 참겠는데, 이게 눈앞에 서 꺼졌다, 켜졌다 약을 올리니 미치겠다. 약정 기간만 끝나면 공짜로 휴대 폰을 바꿀 수 있는데……. 그러나 이 휴대폰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약정 기간이 아직 두어 달 남아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휴대폰은 나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처음 갖게 된 건 이사 오기 전이다. 마트에 다니던 엄마가 새 휴대폰을 장만하면서 내게 물려준 거다. “급하거나 위험할 때 전화해. 단축 번호 알지?” 그러면서 엄마도 퇴근길에 불량배를 만난 적이 있는데 긴급 전화 덕에 무사했다고 말했다. “수호천사, 이제부턴 진운이를 부탁해.” 엄마는 진짜 수호천사를 대하듯 휴대폰에 속삭이고는 입 맞추었다. “쳇! 이깟 똥폰이 무슨 수호천사? 남들은 스마트폰이다 LTE폰이다 최신 형을 쓰는데…….” 엄마에게 휴대폰을 받으면서도 못마땅했다. 그러나 우리 집 형편상 이 게 최선이란 걸 알기에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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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 첫 휴대폰인데…….’ 마음을 달래며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너무 오래전 모델이라 다른 애들은 거저 줘도 안 갖는다고 할 슬라이드 폰. 1년도 안 돼 최신 폰으로 갈아치우는 애들이 보면 ‘스마트폰의 조상’이 라 할 정도다. 그러나 차가운 은빛 몸체와 달리 엄마의 체온이 담겨 따뜻한 휴대폰은 내 손에 묘한 느낌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늦은 오후, 학원 끝나고 피시방에서 놀다가 엄마의 퇴근 시간에 맞추려고 공원을 가로질러 가고 있을 때 덩치 큰 중학생 형들을 만났다. 그중 한 명이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웃는 얼굴이 그렇게 무서울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뒷걸음치며 재빨리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어 집에 있는 아빠에 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미리 저장해 놓은 단축 번호 0번만 누르면 되니까. 하지만 나보다 형들의 행동이 더 빨랐���. 그 형은 재빨리 나를 밀쳤다. 난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그 형은 발로 내 가슴을 밟고 눌렀다. “보내 주세요.” “공짜로?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공원 통행세는 내야지.” 그 사이 다른 형이 내 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냈다. 그러나 얼마 없던 용 돈마저 피시방에서 써 버린 터라 지갑은 텅 비어 있었다. 가방 곳곳을 뒤진 형들은 내게 달려들어 주머니까지 다 뒤지고 나서 씩씩거렸다. “뭐야? 재수 없게. 돈 좀 갖고 다녀, 새꺄.” 가슴을 밟고 있던 형이 내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곧 주먹이 날아올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아빠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니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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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고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아빠가 달려오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등 장한 아빠의 기세에 놀라 그 형들은 달아났고 난 무사할 수 있었다. “아빠 어떻게 알고 왔어?” 아빠가 온 것이 신기했다. 그런데 아빠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네가 전화했잖아.” “엥? 무슨 소리야?” 휴대폰을 꺼내 확인해 보았다. 정말 단축 번호로 집에 전화한 기록이 있 었다. “네가 넘어질 때 슬라이드가 밀려서 단축 번호가 저절로 눌렸나 보다.” 아빠는 내 목소리랑 공원이라는 말이 들려서 달려왔다고 했다. “슬라이더 폰이 좋을 때도 있네.” 그때부터 난 비록 남들이 거들떠도 안 보는 ‘똥폰’이지만 내 휴대폰이 제 일 좋은 폰이라 여기게 되었다. 엄마 말대로 내겐 정말 ‘수호천사’였으니 까. 그날 일은 우연치곤 매우 특별한 우연이라 애지중지 쓰다듬는 버릇까지 생겼다.

그러나 기분 좋은 우연만 있었던 건 아니다. 상수와 엮이게 되면서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연달아 벌어졌다. 상수를 처음 만난 건 6학년을 앞둔 봄방학, 우리 가족이 평화 아파트로 이사 오던 날이었다. 대형 평수부터 소형 임대까지 골고루 배치된 아파트 였는데 마침 빈 임대 아파트가 있어 이사하게 되었다. 엄마는 근처 마트로 일자릴 옮겼고 일 년 동안 쉬던 아빠에게 새 직장이 생겨 가족 모두 들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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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녀석은 막대 사탕을 빨며 우리 식구 이삿짐 트럭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후유, 찾았다!” 주머니에서 빠진 휴대폰을 트럭 옆에서 찾았을 때 녀석의 눈과 딱 마주 쳤다. 녀석은 휴대폰에 묻은 모래를 털고 있는 나를 보며 입가에 묘한 웃음 을 흘렸다. “야, 저쪽으로 비켜.” 이삿짐센터 아저씨가 녀석을 쫓았다. 이삿짐을 통해 우리 가족의 단출 한 생활상을 엿보고 있던 녀석은 기분이 상한 듯 사탕을 던지고 가 버렸다. 그런데 6학년 개학 첫날, 하필 그 녀석이 우리 반이다. 부잣집 아들에 나 보다 덩치도 크고 항상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녀석은 우리 학교 짱이 었다. 녀석과 붙은 아이는 열이면 열, 무릎을 꿇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날 알아본 녀석은 그날부터 진운이라는 내 이름을 놔두고 ‘똥폰’이라고 불렀 다. 내가 구닥다리 휴대폰을 애지중지하는 게 우스워 보였나 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애들이 비웃든 말든 난 내 ‘수호천사’를 쓰다듬었다. 하루는 폰을 쓰다듬다가 기습적으로 달려온 상수에게 뺏겨 버렸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 똥폰, 냄새 지독해!” 상수가 내 폰을 제 부하들 쪽으로 던졌다. “이리 줘.” 내가 급히 달려갔지만 녀석들은 배드민턴 하듯 내 폰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약을 올렸다. “이런 똥폰 차라리 없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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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상수가 내 폰을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당장 덤벼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꾹 참고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휴대폰의 상태가 더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화단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휴대폰은 살짝 긁혔을 뿐,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기절이라도 한 듯 전원이 꺼져 있던 휴대폰은 내가 버 튼을 누르자 다시 정상 작동되었다. “휴 다행이야. 무사해서…….” 휴대폰의 상처를 쓰다듬다가 누가 볼세라 급히 주머니에 넣었다. 그 뒤 부터 학교에서는 절대로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았다. ‘휴대폰이 죄 있냐? 휴대폰에 계급이 있냐고?’ 상수를 볼 때마다 이 말이 입안에 침 고이듯 맴돌았다. 그러나 그 말은 한 번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돌덩이처럼 뭉쳐 단단히 자리 잡고 앉았다. 그래서인지 상수만 보면 속이 메스꺼웠다. “갖고 있는 물건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건 어리석은 거야. 어떤 물건을 갖고 있느냐보다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이냐가 더 중요하지.” 엄만 이렇게 말했지만 별 도움이 되진 못했다. 그러는 사이 상수와 관련된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났다. ‘똥폰’이라며 또 시비를 거는 상수를 피해 집으로 도망친 날이었다. 나는 학원도 빼먹고 엄마 아빠가 퇴근하는 저녁까지 죽 게임만 했다. 게임 속 적 을 상수라 생각하고 실컷 패 주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제가 잘나서 최신 스마트폰을 쓰는 게 아니듯 내가 낡은 폰을 쓰는 것은 내 탓이 아니다. 그런데 어쩌라고? 난 휴대폰을 꺼냈다. ‘어떤 물건을 갖고 있느냐보다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이냐가…….’ 휴대폰 문자판을 꾹꾹 눌렀다. 상수 가슴에 한 글자 한 글자 콕콕 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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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 쓰기도 전에 종료 버튼을 길게 눌러 전원을 꺼 버렸다. “이깟, 휴대폰으로 뭘 하겠다고.” 휴대폰에 비친 내 얼굴도 보기 싫어 소파 위로 던져 버렸다. 상수 앞에서 는 입도 뻥긋 못하다가 겨우 문자나 쓰다니. 마치 휴대폰 탓인 듯 나는 팔짱을 끼고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엉뚱한 데 화풀이한 것이 미안해서 다시 휴대폰을 들고 쓰다듬었다. “그래도 내 수호천사인데…….” 그때, ‘반짝’ 푸른 신호가 윙크하듯 깜빡이며 지잉 몸을 부르르 떨더니 저절로 전원이 들어왔다. ‘뭐야, 내 말을 알아듣나?’ 엉뚱한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웃겨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다음날, 점심시간에 상수가 나를 불러냈다. “너 따라와.” 상수는 다짜고짜 나를 화장실로 끌고 갔다. 상수 부하들이 복도에서 망 을 봤다. 화장실에서 오줌 누던 아이들이 슬금슬금 밖으로 빠져나갔다. “누가 이따위 문자질 하래? 이게 누굴 가르치려 들어?” 상수가 분을 못 참고 주먹을 들었다 놨다 했다. “왜 그러는데?” 난 억울했다. “이게 어디서 오리발이야?” 상수가 내 눈앞에 최신형 스마트폰을 들이댔다. “어떤 물건을 갖고 있느냐보다 그 주인이…….” 그리고 그 위에 정확히 찍혀 있던 내 폰 번호. 상수가 내 번호에 ‘똥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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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써넣은 것까지 보였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런 말을 해 주고 싶 었던 건 사실이지만 문자를 쓰다가 말았는데, 이상하다. 어쨌든 나는 아니니 빠져나가야 했다. 덩치로 보나 뭐로 보나 상수와는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다. “난 아냐. 다른 애가 내 번호로 보낼 수도 있잖아.” “쥐새끼 같은 놈. 또 빠져나가려고? 나한테 덤빌 수 있는 놈은 이 학교에 없다고!” 상수가 내 멱살을 잡고 씩씩대며 말했다. “나, 나도 덤빌 생각 없어.” 상수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내 예상대로 상수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 갔다. 그러나 그 힘이 목소리로 옮겨갔는지 낮지만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상수가 위협했다. “처음이니까 봐준다. 전학 왔다고 모른 척 깝치면 죽을 줄 알아.” 상수가 날 내려다보며 비웃던 눈빛이 내 가슴속에 들어 있던 돌덩이를 짓눌러 아프게 했다. 그래도 내가 참았던 덕분에 첫 번째 사고는 큰 문제 없이 대충 넘어갈 수 있었다. 곧 우리 반에 ‘고진운=찌질이’라는 소문이 퍼졌지만 나에겐 그 것보다 휴대폰 문제가 더 심각했다. ‘처음이라 다행히 넘어갔지만…… 누구지? 누가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리송했다. ‘누가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나 한 듯 똑같이 문자를 보냈을까?’ 상수 가방 들어주는 주현이? 상수 같은 애가 제일 싫다고 말하던 반장? 아님 부하 중 배신자? 5교시 내내 나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혹시나 해서 내 휴대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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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발신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온몸이 굳어 버렸다. 있었다! ‘어떤 물건을 갖고 있느냐보다…….’ 오전 12시라는 기록과 함께 문자가 남아 있었다. 10시 땡 치면 곯아떨어 지는 내겐 꿈나라 갈 시각인데……. ‘혹 꿈속에서 내가 그런 문자를 보냈던가?’ 6교시가 시작되고 아이들은 과학책을 꺼내 놓고 있었지만 내 책상엔 아 직도 5교시에 보던 사회책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내가 실수로 전송 버튼을 눌렀나?’ 전날 저녁 내가 한 행동들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난 아니었다. 지희가 눈치를 주며 내 사회책 위에 자신의 과학책을 올려놓았다. 난 힐 끗 담임 눈치를 보고 과학책에 눈을 두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문자 보낸 사람을 추적하고 있었다. ‘누가 내 폰을 훔쳐 갔었나?’ 선생님 몰래 아이들 하나하나를 살펴보며, 내가 혹 잠시라도 휴대폰을 잃어버린 적은 없나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그런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내 폰을 훔쳐 갔다가 되돌려 놓았나?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내 폰은 항상 주머니에 있었고 내 손을 떠난 적이 없다. 나는 휴대폰이 생긴 뒤부터 주머니 없는 옷은 입지도 않았으니까. 감쪽같이 나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후 내내 생각했는데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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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폰을 훔쳐 썼든, 내 번호로 위조했든, 속은 시원하다! 누군지 모 르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둘이 확 붙으면 좋겠다.’ 그날 밤 꿈속에서 누군가가 상수를 실컷 두들겨 주는 꿈을 꾸고 나서 속 이 시원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대형 사고가 터진 것이다. “니들도 봤지? 오늘은 정당방위야. 진운이가 먼저 시비 건 거라고.” 상수는 아이들에게 전쟁이라도 선포하듯 말하고 나를 기다렸다고 한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단 지 마음뿐이었는걸.’ 민기에게 전해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책상 밑으로 슬며시 내 휴대폰을 확인해 보곤 할 말을 잃었다. 또 있었다! ‘다시는 네 입에서 똥폰이라는 소리가 안 나오게 해 주마!’ 상수에게 보낸 문자가 민기가 말한 그대로 찍혀 있었다. 오전 12시라는 기록과 함께.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난 화장실로 가서 빈칸 아무 데나 들어가 문을 잠그고 앉았다. 다시 휴대 폰을 꺼내 확인해 보았다.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또 누구야? 이번에는 집안사람을 하나하나 의심해 보았다. 혹시 아빠?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아빠는 요즘 바빠서 나한테 신경 쓸 틈이 없다. 그럼, 엄마? 아냐. 엄마는 내 폰 비번도 모르는데……그럼,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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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휴대폰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혹시 네가?’ 골똘히 생각하느라 내 손이 흔들렸을까? 손바닥 위에서 휴대폰이 가늘 게 푸른빛을 내며 한 번 깜빡였다. 마치 할 말이 있다는 듯. 그러나 곧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반응이 없다. 난 고개를 저었다. ‘이런! 또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니.’ 며칠 전, 첫 번째 사건 뒤로 난 휴대폰 관리를 더 철저히 했다. 잘 때도 베개 밑에 두고 잤으니까. 그 누구도 나 몰래 휴대폰을 만질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수업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들렸다. 나는 서둘러 폰을 주머니에 넣고 화 장실에서 나왔다. 교실에서는 다음 수업이 이어졌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여러 생각이 꼬리 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제 막다른 골목이야.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어. 담임 선생님에게 구원을 청할까? 아냐, 그건 비겁해. 일단 도망쳐? 그건 더 비겁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차근차근 생각해 보니 상수는 물론 주변 아이들까지 내가 도전장을 보 낸 걸로 알고 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 봤자 문자가, 증거가 있다. 두 번씩 이나 봐줄 만큼 너그러운 놈이 아니다, 상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한참 고민했지만 결론은 두 가지다. 상수에게 무릎 을 꿇든지, 아니면 민기 말대로 한번 대단한 놈이 되어 보든지. 녀석이 비웃던 눈빛이 떠올랐다. 큰 덩치에 싸움으로 다져진 단단한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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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도. 한눈에 보아도 내가 여태 상대했던 애들과는 급이 다르다. 그러나 난 마음을 다잡았다. ‘피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야. 잘못도 없이 계속 무릎을 꿇는 건 옳지 않아. 그래……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라.’ 주먹을 꽉 쥐었다.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속 깊이 박혀 있던 돌덩이가 다이너마이트에 팍! 산산조각이 나면서 시원스레 가슴이 뻥 뚫렸다.

아침부터 오는 비는 그쳤다 내렸다 반복하며 이슬비로 변해 있었다. 상 수와 부하들, 그리고 나와 민기, 주현이. 우리는 가방을 멘 채로 학교 옆 공 터로 모였다. 공터에 둘러선 목련 봉오리들이 터지기 직전의 팝콘처럼 팽 팽했다. 가는 빗줄기가 옷 위에 이슬을 만들며 내려앉아 공기가 서늘했다. “덤벼!”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난 더 크게 소리쳤다. 두 주먹을 부서지도록 움켜쥐고 상수를 노려보았다. “어쭈? 똥폰 주제에…….” 상수가 우습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속눈썹에 자꾸 내려앉는 이슬비 때문에 앞이 흐려졌다. 상수가 내 쪽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오고 있었다. 갑자기 차가운 빗줄기 도, 주변의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음 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주변도 고요해졌다. 그러나 내 눈앞에 서 있는 상수의 모습만은 또렷했다. ‘다시는 네 입에서 똥폰이라는 소리가 안 나오게 해 주마!’ 상수를 향해 돌진해 갔다. ‘퍽’ 내 머리가 상수 가슴에 박혔다. 그러나 다 음 순간 상수가 잽싸게 몸을 빼내더니 주먹으로 내 배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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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갑자기 숨이 안 쉬어졌다. 이렇게 센 주먹은 처음이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난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최대한 위쪽 으로 휘둘렀다. 키 큰 상수의 턱이라도 맞혀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상수 는 몸을 빼내 내 등에 팔꿈치를 꽂았다. 전기에 감전된 듯 몸 구석구석으로 통증이 퍼졌다.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지금 쓰러지면 영원히 패배자가 될 거 같다. 온 힘을 다해 상수에게 달려들었다. 내 머리가 또 상수 가슴팍에 꽂혔다. 이번에는 상수도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상수의 주먹이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내 얼굴만큼 큰 주먹을 눈앞에서 맞닥뜨리는 순간 ‘피해야 해.’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 다. 내 코에서는 주르륵 코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 주변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 코피!” “한 방에 보내라!” 누가 누구한테 하는지 모를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난 다시 일어나 돌진했다. 상대가 상수였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어지 러웠다. 있는 힘을 다해 상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상수가 움찔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이어 더 센 주먹에 내 턱이 돌아갔다. 혀를 깨물었는지 입안에 비릿한 침이 고였다. ‘먼저 쓰러질 순 없어!’ 난 비틀거리면서 다시 일어나 돌진했다. 상수 가슴팍에 내 피가 튀었 다. 움찔하며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던 상수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가떨 어졌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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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짓이야?” 담임 선생님의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구슬이 튕겨 나가듯 아 이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세상에…… 진운아, 괜찮니?” 담임 선생님이 내 옷에 묻은 흙을 털어 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겨우 고개를 들어 보니 상수와 그 부하들은 벌써 도망치고 그림자도 보이 지 않았다. 나는 담임 선생님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비도 그쳤다. 찝찔한 피가 입속으로 계속 들어갔지만 아픔보다는 ‘내가 녀석을 쓰러 뜨렸다!’ 하는 뿌듯함에 어깨가 펴졌다. ‘담임 선생님이 어떻게 알고 왔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네가 와 달라고 문자했다며. 할 거면 더 일찍 하지.” 민기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오는 길에 들은 말이다. 민기는 담임 선생 님이 시켰다며 약국에 들르려고 했지만 내가 그냥 집으로 가자고 했다. ‘이깟 코피쯤이야. 그런데 문자라니? 또?’ 오는 내내 민기의 말을 얼른 확인하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아파 트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민기와 헤어져 엘리베이터를 탔다. 윙, 하는 기계음을 들으니 처음 휴대폰을 갖게 된 때부터 오늘 있었던 일 까지 차례로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처음 중학생 형들에게서 구해 주었을 때부터 ‘어떤 물건을 갖느냐…….’ 란 첫 번째 문자 사건, 그리고 어제 보낸 도전장과 오늘 담임 선생님에게 보낸 구조 요청까지……. ‘우연’이 이렇게 겹칠 수도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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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문을 급히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털썩 주 저앉았다. 서 있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우선 확인을 해야 했다. 휴대폰을 밀어 올려 보니 전원이 꺼져 있었다. 버튼을 눌러 켰다. 휴대폰은 모래에 여기저기 긁히고 빗물이 조금 묻어 있었지만 정상적으로 켜졌다. 그리고 역시! 담임 선생님에게 보낸 문자가 저장되어 있었다. ‘오늘 네 시에 학교 옆 공터로 와 주세요. 제발요!’ 담임의 휴대폰 번호가 저장되어 있긴 하지만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데……. 더군다나 오늘은 아침부터 상수 문제로 고민하느라 내 손에서 휴 대폰을 놓아 본 적이 없다. “너니?” 손바닥 위에 놓인 휴대폰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 보았다. “진짜…… 진짜, 네가 그랬니?” 그러자 휴대폰이 기다렸다는 듯 미세하게 진동했다. 흐리지만 푸른빛도 한 번 깜빡였다. 휴대폰이 내 말에 대답을 하고 있었다! 이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랬구나. 우연이 아니었어.’ 난 휴대폰을 두 손에 쥐고 얼굴 가까이 대 보았다. 코 주위가 퉁퉁 붓고 콧속에는 허연 휴지가 틀어박혀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비쳤다. 웃음이 났다. 코 주위가 아픈 것도 잊고 코에 밀어 넣은 휴지가 빠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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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 댔다. 다음날, 코 주위가 멍든 채 학교에 갔더니 담임 선생님은 벌써 와 있고, 상수와 부하들은 조용히 반성문을 쓰고 있었다. 어제 그 자리에 있었던 민 기와 주현이까지도 반성문을 쓰느라 조용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책을 읽 는 척하면서도 궁금해서 상수 패거리와 내 쪽으로 온통 시선을 향하고 있 었다. 담임 선생님이 나를 보고 조용히 손짓을 했다. 앞으로 나갔더니 하얀 종 이를 내밀었다. “좀 괜찮아?”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예외는 아니야. 어쨌든 폭력은 나쁜 거니까. 그래도 문자 보내 줘 서 고맙다.” 담임 선생님이 준 종이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너 어제 대단했다며? 상수를 쓰러뜨렸다며?” 지희가 기다렸다는 듯 속삭였다. 상수 쪽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나를 훔 쳐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움찔하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뒤에 앉은 민기도 상수 쪽을 힐끗 보고 나서 말했다. 마치 자신이 이기기 라도 한 것처럼 신이 난 목소리다. “너처럼 질긴 놈은 처음이래. 다시는 너랑 안 싸운단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때, ‘지잉’ 하고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문자가 온 모양이다. 주머니 속 휴대폰을 몰래 꺼내 책상 속에 손을 넣고 버튼을 눌러 문자를 확인해 보았다. ‘해낼 줄 알았어. 너를 지킬 수 있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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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 버튼을 눌러 나머지 문자를 확인하려는 순간 휴대폰이 꺼져 버 렸다. 담임 선생님의 눈을 피해 책상 속에서 휴대폰을 톡톡 두드려 보았다. 그러나 휴대폰은 작동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복도로 나가 휴대폰을 꺼내 아까보다 더 세게 쳐 보았다. 상 수 부하들이 보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잠시 뒤 복도로 나온 상수가 나를 보고 움찔하더니 패거리들과 조용히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상수의 반응에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켜지지 않는 휴대폰 때문에 내 마음은 어두 웠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와 충전을 시켜 보았다. 그러나 휴대폰 은 끝내 반응하지 않았다. “대답해! 눈 뜨란 말이야. 수호천사면 끝까지 지켜 줘야지.” 소리치며 두드려도 묵묵부답이었다. ‘나머지 말도 해 주고 가야지…….’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마지막이란 걸 직감했다. 꺼진 휴대 폰을 말없이 쓰다듬으며 한참 들여다보았다. “고진운, 그만 해라. 약정이고 뭐고 까짓 휴대폰 새로 바꾸자.” 엄마는 휴대폰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짐작도 못 할 것이다. 아니 내가 말한다 해도 믿어 주기나 할까? 가슴이 먹먹했다. 조용히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학 교 옆 공터로 향했다. 상수와 붙었던 그 자리에 다시 섰다. 어제의 싸움 장면이 슬로비디오처 럼 눈앞에 재생되었다. 수호천사는 나를 구해주기도 했지만 곤경에 빠뜨 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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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지킬 수 있는 건…….’ 문득 마지막 문자가 떠올랐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다시 들여다 보았지만 꺼진 휴대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으 니 나머지 문자가 무엇이었을지 짐작되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휴대폰으로 툭 떨어졌다. 난 마 지막으로 천천히 휴대폰을 쓰다듬어 보았다. 고개를 들자 어제 내린 비 덕분인지 여기저기 팝콘처럼 터지기 시작한 하얀 목련들이 흐린 눈에 가득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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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6주기 기념 행사 안내 더욱 그리운 얼굴, 권정생 해마다 5월이면 그리운 얼굴이 있습니다. 봄은 왔건만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듯 몸과 마음 시린 요즈음 그 분의 주름진 얼 굴이 더욱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권정생 선생님 6주기를 맞이하여 월간 〈어린이와 문학〉에서 추모의 자리를 마련 했습니다. 아동문학 평론가 이재복 선생님이 권정생 문학을 되돌아보는 강연을 해 주시고, 우리 시대의 가객 백창우 선생님과 동림 자유학교 어린이들의 노래 공연이 펼쳐집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순서 •1부 기념 강연 - 아동문학 평론가 이재복 •2부 권정생 동화 낭독 •3부 노래 공연 - 백창우, 동림 자유학교 어린이들 ■안내 •시간 : 5월 10일(금요일), 오후 7시 •장소 : 가톨릭 청년회관 바실리오홀 •문의 : 정혜원(010-2814-3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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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 이금옥

나는 오빠다

나는 오빠다! 보현이의 단 하나뿐인 오빠. “태현아, 보현이 입학하면 잘 보살펴 줘. 부탁해.” 엄마 말꼬리가 애교스럽게 올라갔다. 엄마는 얼마 전부터 틈만 나면 내 게 신신당부한다. 다른 애들보다 체격 작고 생일도 늦은 보현이가 걱정이 된다나. 아무리 그래도 왜 하필 나야?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내가 왜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오빠잖아.” 헉. 나긋나긋한 엄마 말 한마디에 이제껏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오. 빠.’ 란 단어가 가슴에 콕 박혔다. 그 뒤 엄마 걱정을 내가 그대로 옮아 버렸다.

이금옥 2012년 〈어린이와 문학〉을 통해 등단. 거미똥구멍과 늴리리에서 동화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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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현, 그 머리띠 하고 학교 가려고?” 나는 보현이가 머리에 쓴 분홍색과 흰색 왕방울이 달린 머리띠를 가리 켰다. 보현이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돼.” 보현이는 작은 눈을 끔뻑거리며 머뭇거렸다. 가만히 보니 평소에 좋아 하는 옷으로 챙겨 입었다. 분홍 티셔츠에 빙 돌면 쫙 퍼지는 분홍치마와 분 홍 타이츠. 분홍 나라에서 온 공주도 아니고. 내가 1학년 때 공주 드레스 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온 여자애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무척 예뻐 보였는데 여자애들은 예쁜 척한다고 수군거리고 같이 놀아 주지 않았다. 보현이가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 “학교에 파티 하러 가냐? 왕자님 만나러 가?” 보현이는 “흥.” 하고 주방에 있는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분명히 오 빠가 어쩌고저쩌고하며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칠 것이다.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애기 같은 보현이가 어떻게 학교에 다닐지 내가 다 걱정이다. 주방에서 나오는 보현이 손에 왕방울 머리띠가 들려 있었다. 시무룩해 진 표정으로 봐서 엄마가 내 편을 들었나 보다. ‘앗싸!’ 그럼 그렇지. 내가 오빤데. 나는 혀를 쭉 내밀어 보현이를 약 올렸다. 우리 반 여자애들 같으면 당장 소리 지르고 난리를 치겠지만 보현이는 그저 입만 쭉 내밀고 끝이었다. 자 랑 같지만 내 동생은 정말 착하다. 그래서 내가 더 걱정된다. 오빠인 나는 일찍 학교에 갔다. 3학년 1반. 새로운 교실. 예쁘고 젊은 담임 선생님. 잘 모르는 친구들. 모 두 낯설었다. 그렇다고 움츠러들 내가 아니다.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 구들과 분필을 던지고 놀았다. 선생님께 딱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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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부터 10분간 생각 의자에 앉아 있는 벌을 받았다. 생각 의자는 쓰레 기통 바로 옆에 있다. 스멀스멀 몰려드는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래 도 그동안 받은 벌에 비하면 이건 누워서 떡 먹기다. 이런 벌쯤은 아주 가 뿐하게 받아 줄 수 있다. 11시 입학식이 가까워져 오자 부모님과 손잡은 꼬마들이 교문으로 들어 오는 게 보였다. 보현이도 오겠지. 계속 교문을 힐끔거렸다. 선생님은 수업 에 집중하라고 했지만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렸다. 입학식이 진행되고 있는 강당으로 뛰어갔다. 복 도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요리조리 피하며 쥐새끼처럼 끼어들어 겨우 문 앞에까지 갔다. 키도 쪼그맣고 유치하게 옷을 입은 꼬마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나름 귀여웠다. 보현이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순간! 내 두 눈이 확 튀어나왔다. 얼른 몸을 낮추고 허둥지둥 교실로 돌아왔다. ‘강! 호! 랭!’ 2학년 때 담임. 생각만으로도 솜털이 쭈뼛 서고 어금니가 달달 떨리는 무서운 선생님.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2학년 마지막 날 선생님은 “내가 너를 못 잡은 게 최대 실수다.”라며 고 개를 내두르셨지만 나는 충분히 1년을 잡혀 살았다. 다시 내 담임 선생님 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다. 그 뒤 입학식장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고 교문을 나서는데 엄마가 나를 불렀다. 보현이는 작은 꽃 다발을 안고 연신 웃었다. 학교 다니는 게 뭐가 좋다고.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보현이와 나는 서로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우기다 결국 내 뜻대로 뚝배기 불고기를 먹기로 했다. “1학년 몇 반이야?” 식당에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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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반.” 보현이 대신 엄마가 대답했다. 그러면서 내게 궁금한 이것저것을 물었 다. 엄마가 물어보는 건 뻔했다. 담임 선생님, 남자야 여자야? 좋아? 누구 누구 같은 반 됐어? 등등. 나는 설렁설렁 대답했다. 지글지글 끓는 뚝배기가 내 앞에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며 달콤 하고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보현이 선생님은 누구야?” 나는 숟가락을 들다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강호선 선생님.” “쨍그랑!” 내가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너 2학년 때 담임이었잖아.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다행이야.” 나는 ‘좋은’이라는 단어에 사레 걸려 캑캑거렸다. 그 뒤 밥을 한 숟갈도 더 먹지 못했다. 엄마는 겨우 한두 ���갈 먹으려고 보현이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게 했다며 나를 나무랐다. 물론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보현이가 “오빠, 우리 선생님 좋아?” 하고 물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보 현이를 바라보았다. ‘윤보현, 너 이제 죽었다!’ 엄마는 우리를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회사에 갔다. 아빠는 벌써 일주일 째 외국 출장 중이다. 다른 때 같으면 보현이를 못살게 굴었겠지만 오늘은 한숨만 계속 나왔다. 보현이와 눈이 마주치면 불쌍하기까지 했다. 다음날, 마침 토요일이다. 보현이를 흔들어 깨웠다. “너, 지금 잠잘 때가 아니야.” 보현이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다짜고짜 손을 잡아끌어 의자에 앉혔다. “오빠,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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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글씨 하나도 안 틀리고 책 읽을 수 있어?” 보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가슴에서 걱정이 산봉우리처럼 솟았다. “오빠 말 잘 들어. 있잖아. 너희 선생님…….” 보현이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나를 봤다. “엄~~~~~~~청 무서워. 책 잘 못 읽으면 혼나. 받아쓰기 틀리면 틀린 것을 10번씩 써 오라고 해. 또, 떠들면 그 자리에서 얼음 땡 놀이할 때처럼 그 자세로 멈춰서 10분을 그대로 있어야 하고 복도에서 뛰다 걸리면…….”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물 론 그렇게 해서 내 책 읽는 습관과 받아쓰기 성적이 쑥 올라간 것은 사실 이지만 말로 다하지 못하는 고통이 있었다. 보현이는 벌써 겁에 질려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침을 꼴깍 삼켰으 니까. “오빠도 그런 벌 받아 봤어?” 깜찍한 보현이가 이런 질문을 하다니. 내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났다. “나? 나는 한 번도 안 받았지. 하지만 내 친구들은 엄청 받았어.” 보현이가 안 믿는 눈치다. “정말이야. 벌 받는 내 친구들이 얼마나 불쌍했다고. 우는 애도 있었어.” 나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말꼬리를 끝도 없이 올렸다. 보현이는 그 제야 믿었다. 다른 날 같으면 바보라고 놀렸겠지만 오늘은 오히려 바보 같 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일단 내가 제일 많이 혼났던 것부터 시켰다. 책 읽기. 나는 책을 빠르게 잘 읽는다. 문제는 단어를 휙휙 건너뛰어 읽 고 ‘을’, ‘를’, ‘이’, ‘가’ 같은 글자를 마구 빼먹는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그 버 릇을 잡겠다며 국어 시간만 되면 내게 큰 소리로 책을 읽게 했다. 틀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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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그때를 생각하니 오줌이 마려운 것처럼 몸이 배배 꼬였다. 보현이는 내가 시키는 대로 동화책을 소리 내서 읽었다. 책장이 한 장, 두 장 넘어가는데 보현이는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나는 하품이 나오고 슬 슬 졸음이 왔다. 가만히 보현이 방을 나왔다. ‘어유, 착한 내 동생.’ 나는 침 대로 가서 다시 잠을 잤다. 점심때가 지나서는 보현이에게 받아쓰기를 시켰다. 틀린 것을 10번씩 쓰는 것은 로봇 팔이 아닌 이상 정말 힘들다. 나는 10문제 중에서 10문제 를 다 틀린 적도 있다. 그럼 모두 합해 100번을 써야 했다. 윽! 글씨도 크고 또박또박 쓰지 않으면 다시 써 오라고 했다. 나같이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10분 이상 앉아 있지 못하는 사람에겐 그보다 더한 고통이 없었다. 보현이는 눈빛을 빛내며 내가 불러 주는 단어들을 받아 썼다. 어찌나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쓰는지. 내 양심이 찔렸다. 나는 내가 써 놓 고도 잘 읽지 못할 때가 많았다. 쓸 때는 분명히 글자를 썼는데 왜 나중에 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암호가 되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으이그, 이 덜렁아.” 갑자기 강호랭 선생님 목소리가 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받아쓰 기를 틀리면 선생님은 꼭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선생님 발음이 이상하다고 하소연했지만 “다른 애들은 모두 맞게 썼는데 왜 너만 그래?” 하면서 혼냈 다. 쳇! 나만 정상이고 다른 아이들 모두가 비정상일 수 있지. 보현이는 틀린 글자는 몇 번이고 다시 써 보고 연습했다. 내가 다시 불러 주었을 땐 절대 틀리지 않았다. 보현이 머리는 꽤 좋았다. 하지만 학교에서 진짜 받아쓰기를 하면 틀릴 거다. 내 경험상 그렇다. 저녁 무렵 엄마는 아빠와 통화를 했다. “태현이가 3학년 되더니 의젓해졌어. 호호. 이젠 듬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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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않은 엄마 말에 나는 우쭐해졌다. “걱정했는데, 보현이도 잘 챙기고, 오늘은 공부도 봐줬다니까.”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가 말한 ‘걱정했는데.’가 덜컥 걸렸지 만 어쨌든 기분 좋았다. 보현이는 옆에서 “아빠, 언제 와? 선물 사 와. 인형.” 하고 수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저렇게 애기 같은 애가 무슨 학교에 다닌다고. 오빠로서 내 어깨 가 더 무거워졌다. 일요일은 할머니 댁에 갔다가 늦게 돌아왔다. 오자마자 보현이 준비물 을 챙기는 것을 도와줬다. 견출지에 이름을 써서 붙여 주고 가방 챙기는 방 법도 알려 줬다. 특히 ‘강호랭 선생님에게서 살아남기’ 부분은 특별 과외로 진행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첫 번째. 지각했을 때 걸리지 않고 들어가는 요령. 몸을 최대한 바닥에 붙이고 기어가듯 해야 하는데 보현이는 발레까지 한 애가 몸이 낮춰지지 않았다. 하긴, 이런 것은 선생님께 두세 번 따끔하 게 혼나면 더 쉽게 잘할 수 있다. 두 번째. 후다닥 자리에 찾아가는 요령. 장난치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오시면 몸을 날려 의자에 앉아야 한다. 하 지만 보현이는 다칠까 봐 무섭다고 했다. 나는 다치는 것보다 혼나는 게 더 무섭다고 일러 줬다. 세 번째. 복도에서 뛰다 걸리면 안 뛴 척. 그대로 멈추기. 보현이는 운동 신경이 둔했다. 뛰다 멈추는 연습을 100번도 더 해야 했 다. 그게 제일 쉬운데 말이다. 네 번째. 얼굴 빨개지지 않고 거짓말하는 법. 보현이는 왜 선생님한테 거짓말을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착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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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해서 설명했다. “선생님은 네가 숙제 안 해도 아무 피해를 안 입지만 너는 괴롭고 힘든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야.” 이것은 분명히 알아 두라고 했다. 그랬더니 보현이는 숙제는 꼭꼭 하겠 다고 했다. 선생님이 내 준 숙제를 왜 안 해 가냐는 거다. 그 말에 나는 뿅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머릿속에서 “뿅!” 소리가 났다.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오빠, 고마워.” 내 방으로 가려는데 보현이가 말했다. 내가 태어나서 보현이에게 처음 듣는 말이다.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가슴속에서 뭔가 뭉클하는 느낌. 에이,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보현이가 저렇게 말하는 것을 봐서 나는 썩 괜찮은 오빠임이 틀림없다. 내 방에 왔다. 알림장을 봤다. 이것저것 나도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피곤하고 귀찮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해야겠다. 보현이가 해 준 “오빠, 고마워.”를 생각하며 흐뭇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이크!’ 또 늦잠을 잤다. 허겁지겁 준비물을 챙겨 학교로 향했다. 옆에 보현이가 졸랑졸랑 따라왔다. “오빠 말 기억하지? 걸리지 말고 잘해.”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학교에 가는 내내 잔소리했다. “수업 끝나면 교실에 가만히 있어. 오빠가 너희 교실로 데리러 갈게. 문 밖에서 신호하면 나와.” 나는 신호로 신발로 벽을 때리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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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 교실에 왔지만 보현이가 걱정되었다. ‘화장실은 잘 찾아가나?’ ‘설마 참고 있다가 옷에 싸는 것은 아니겠지?’ ‘선생님 무서워서 말 못할 수도 있는데.’ 혼내는 강호랭 선생님과 울먹이는 보현이가 번갈아 보였다. 나는 안절 부절 견딜 수가 없었다. “윤태현, 교과서 꺼내.”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가방을 뒤적여 봤지만 ‘이런.’ 교과서가 없다. “안 갖고 왔니?” “갖고 왔어요.” “그럼, 빨리 꺼내.” 나는 책상 서랍과 사물함을 뒤졌다. 없다. 급기야 가방을 책상 위에 쏟아 붓고 확인했다. “가방이 책을 먹었나 봐요. 없어졌어요.” 애들이 웃었다. 선생님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진짠데…….” 덕분에 나는 또다시 생각 의자에 앉았다. 아무래도 3학년 내내 이 의자 는 내 전용 의자가 될 것 같다. ‘그나저나 보현이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목소리가 워낙 작아 이름을 불러도 대답을 못 할 것 같았다. 다른 애들이 낄낄거리며 놀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내가 1학년 때 얌전하고 예쁜 여자아 이를 괴롭혔던 일이 떠올랐다. 심심해서 장난쳤는데 그 아이는 울어 버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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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었는데…….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보현이네 교실로 뛰어갔다. 누구든 보현 이를 괴롭히면 가만히 놔두지 않을 작정이다. 보현이네 교실은 조용했다. 뒷문에서 보현이를 찾았다. 옆자리 친구와 이야기하며 웃고 있었다. 보현이에게 듬직한 오빠가 있음을 보여 줘야겠 다. 둘레둘레 강호랭 선생님을 찾았다. 없다. 교실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순간 내 뒷목덜미가 들렸다. “말뚝, 여기 웬일이야?” 강호랭 선생님이다. “아이 참, 선생님, 저 말뚝이 아니에요!” 나는 억울해서 소리 질렀다. “아니긴 뭐가 아냐. 천하에 말썽꾸러기로 말뚝 박은 말뚝이 맞는데.” 강호랭 선생님이 놀리듯 피식 웃었다. 1학년 꼬맹이들이 모여들었다. 창 피했다. 개미 똥만큼 있던 내 자존심도 상했다. 씩씩거리며 교실로 돌아가 려는데, “오빠.” 곱고 예쁜 목소리가 들렸다. 보현이다. “친오빠?” 선생님이 보현이에게 물었다. 아아! 모두 이때 선생님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선생님은 ‘오! 세상에 이런 일이!’, ‘맙소사.’, ‘이건 분명 뭔가 잘못됐어.’ 이런 표정이었다. 얌전하고 천사 같은 보현이 오빠가 나일 리 없다는 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것도 일 학년 꼬맹이들 앞에서. “친오빠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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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리를 빽 지르고 우리 반 교실로 왔다. 약이 올라 씩씩거림이 멈춰 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화장실에 갔다 오는 것을 깜빡했다. 수업이 시작 되었는데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너무! 슬쩍 손을 들었는데 선생님은 본체만체했다. 나는 선생님 눈길이 내 쪽 으로 올 때마다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아무 소용없었다. 내가 또 장난치는 줄 아나 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오줌보 터져요!” 소리를 지르고 반사적으로 교실을 뛰쳐나왔다. ‘휴-!’ 교실로 돌아온 나는 또다시 생각 의자에 앉았다. 에이 참, 되는 일 하나 도 없다. 급식을 먹는데 또 보현이 생각이 났다. 편식 심한 보현이와 음식을 남기는 것을 딱 질색인 강호랭 선생님 얼굴 이 교대로 떠올랐다. 마지막 장면은 선생님 호통에 울면서 꾸역꾸역 먹는 보현이 모습이었다. 에이! 허둥지둥 밥을 먹고 보현이에게 갔다. 보현이는 밥을 다 먹고 식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뭘 잘했는지 선생님 이 보현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쳇. 혼자서도 잘하네.’ 돌아서 는데 뒷머리가 머쓱했다. 남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한 판 뛰었다. 배도 부르고 신 나게 뛰고 난 뒤라 지치기도 해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 다가 또다시 생각 의자에 앉아야 했다. 학교가 끝나고 벌로 청소를 했다. 동생이 기다린다고 선생님께 말했지 만 빨리하고 가라는 대답을 들었다. 혼자 남아서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보현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다. 틀림없이 내가 늦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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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울먹이고 있을 거다. 대충대충 슬렁슬렁 청소를 끝냈다. 보현이네 교실 문은 열려 있었다. 강호랭 선생님과 마주치기 싫어서 스 파이처럼 벽에 딱 붙어 섰다. 신발을 한쪽 벗어 들고 벽을 탁탁 쳤다. 보현 이가 나오지 않았다. 또다시 탁! 탁! 그래도 안 나온다. 또다시 탁! “다 큰 녀석이 뭐 하는 짓이야?” 지나가던 선생님이 벽을 더럽힌다고 혼냈다. 이젠 어쩔 수 없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보현이네 교실을 엿봤다. 보현이가 선생님에게 뭔가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또랑또랑 분명했 다. 언제나 엄벙덤벙하는 나와 달랐다. ‘어쭈, 제법인데.’ 기특했다. 항상 좀 덜떨어지고 모자란다고 생각했는데. 키득키득 웃음 이 나왔다. 그러다 강호랭 선생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태현이 왔니?”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고 싶지만 보현이 앞이라 그럴 수 없었다. 보현이 는 가방을 챙겨 들고 나왔다. 강호랭 선생님과 함께. “보현이는 좋겠네. 태현이같이 멋진 오빠가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선생님이 나를 칭찬하다니. 그것도 동생 앞 에서! 내 귀가 의심스러웠다. “재치 있고 똑똑한데 동생도 잘 보살피니 듬직하기까지 하네.” 선생님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내 등까지 토닥여 주면서. 평소 먹잇감 을 노리는 호랑이 같던 선생님이 천사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이런 게 바로 ‘감격’인가 보다. 내 어깨가 쑤욱 올라갔다. 집에 오면서 보현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말했다. 애들 이 야기며 선생님 이야기. 선생님이 착하고 좋다고 하는 부분에서 나는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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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 말해 주려다 참았다. 어쩌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르 니까. “오빠, 그런데 왜 쓰레기통 옆에 혼자 앉아 있었어?” 뜬금없이 보현이가 물었다. 가슴이 뜨끔했다. 보현이는 수업이 끝나고 우리 반 교실에 왔었단다. 문틈으로 나를 보았다나? 착한 보현이가 그런 몹쓸 짓을 하다니. “거기 특별한 자리야. 모범 어린이로 뽑힌 사람만 앉는 자리.” 바로 이것이 착한 거짓말이다. 어쩔 수 없었다. 내 동생 보현이에게 실망 스러운 오빠가 되기는 싫다. 정말로! “책상도 없이?” 보현이는 갸우뚱했다. 물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 다. 대신, 학교에서 오빠 교실에 오면 절대 안 된다고 일러 줬다. 우리 담 임 선생님이 학교에서 제일 무섭기로 소문난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겁을 주면서. 그 순간! 머리가 쭈뼛 서고 눈이 확 튀어나올 만큼 아니 숨이 턱 막히는 게 걱정이 퐝 터졌다. 바로 보현이처럼 학교 다니면 엄청 지루하고 따분하고 재미없다는 거 다. 이건 내 경험상 분명하고 틀림없는 사실이다. 마치 드라큘라가 사람 피 를 좋아하는 것이나 슈퍼맨 팬티는 빨강색이라는 것보다 더 정확하다. 그럼 안 된다. 절대! 나는 보현이 손을 잡아끌고 서둘러 집으로 갔다. 보현이가 끌려오며 “오 빠 아퍼.” 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빨리 가서 특별 과외 2탄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맛있는 급 식 많이 받는 법, 수학 시간을 양호실에서 편히 쉬는 법, 안 들키고 잘 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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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수업 시간 10분 일찍 끝나게 하는 법, 선생님이 간식 쏘게 하는 법 등등. 이런 것들을 잘 알면 학교생활이 깨소금같이 고소하다. 대견한 동생 보현이는 내 동생이다. 지금부터 즐겁고 신 나게 학교생활 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만의 비법을 알려 주는 일에 좀 더 앞장서야 겠다. 나는 오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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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 동화를 읽고 | 이현

고통의 쾌감을 권하며

우선 이야기 하나

옛날 옛적, 그 유명한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하늘과 바다가 잇닿은 곳에 있는 작은 왕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날 왕이 신하들에게 왕국에 서 가장 솜씨 좋은 화가를 불러오라고 명했다. 신하들이 곧 이름난 화가를 대령했는데, 뜻밖에도 화가는 갓 스물도 되지 않은 아름다운 소녀였다. 왕이 소녀에게 명했다. “나의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그려 오도록 하여라.” 소녀는 의아해하는 기색도 없이 명을 따르겠노라 대답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다시 왕궁을 찾아와 왕 앞에 그림을 펼쳐 보였다. 이현

『동화 짜장면 불어요!』, 『장수 만세』, 『오늘의 날씨는』, 『마음대로 로봇』, 그리고 청소년 소설 『우리 들의 스캔들』, 『영두의 우연한 현실』, 『오! 나의 남자들!』, 『1945년 철원』, 『나는 비단길로 간다』를 썼다. 제13회 전태일 문학상과 제 10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 그리고 제 2회 창원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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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왕과 신하들은 몹시 놀라며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것은 인 물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아름답기는커녕 흉측하기 그지없는 노인의 얼굴 이었던 것이다. 소녀는 그런 반응에도 동요하지 않고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림 속의 노인은 소녀의 아비이옵니다. 그런데 제가 어릴 적, 아비는 불구덩이에서 저를 구하다가 그만 온몸에 화상을 입어 저렇게 뒤틀린 몰 골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추하다고 손가락질할 테지만, 제게는 아비의 저 모습이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답습니다. 아비의 그 사랑이야말 로 눈에 보이는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소녀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은 숙연해졌다. 왕도, 신하들도, 자못 감격에 겨운 듯 말없이 그림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왕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마음은 잘 알겠다. 하지만 그건…… 네 사정이고.” 왕은 소녀를 돌려보낸 뒤, 신하들에게 다른 화가를 찾아오라고 다시 명 했다.

작가의 글쓰기란

그렇다. 그건 ‘네’ 사정이다. 소녀가 그저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면 모르겠지만, 타인을 위해 그린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소녀 자신이 아 니라 왕, 그러니까 타인이 즐길 수 있는 그림이라야 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일기를 쓰는 거라면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그저 취미 생활로 쓰는 글이라도 내키는 대로 쓰면 그만이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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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돈을 받고 팔겠다는 작정으로 쓰는 글은, 전혀 다른 얘기다. 작가를 직업으로 삼은 혹은 삼으려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을 위한 글을 써 야 한다. 그 한 권의 책을 사기 위해 낸 돈은, 누군가가 땀 흘려 노동하여 벌어들인 것이다. 값진 대가에 걸맞게 값진 글을 쓸 의무가 있다. 그런데 작가는 즐겁게 쓰고 독자는 고통스럽게 읽는 글은 곤란하지 않은가. 고통 스럽게 쓰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 내가 우는 게 아니라 독 자를 울리는 글이어야 한다. 독자의 비위를 맞추는 글을 쓰라는 게 아니다. 독자의 눈으로 자신의 글 을 냉정하게 다시 돌아보라는 뜻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글이라고 생각하고 냉정하게 평가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다른 사람의 글이라면, 과 연 나는 돈을 주고 사서 읽을 것인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글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더 읽으시 라. 자신의 글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길 때까지 읽고 또 읽으시라. 그리고 글에서 무언가 허술한 점이 발견된다면, 서슴없이 다시 쓰시라. 다시 써서 해결될 글이 아니라면 서슴없이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어차피 완벽한 원고는 없는 거 아니냐고? 옳은 말씀이다. 하지만 그 핑 계 뒤에 숨어서 게으름을 피우는 건 곤란하다. 완벽하지 않을지는 모르지 만, 적어도 나의 최선이어야 한다. 나로서는 더 이상 잘 쓸 수 없다고 단언 할 수 있을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쳐야 한다. 글쓰기라는 노동은 그다지 경 제적이지 못하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고 싶다면, 글쓰기 말고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게 낫다. 글쓰기란, 더구나 문학이란, 최대의 노 력을 다해도 최소한의 성과를 거두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고슴도치가 제 새끼 예뻐하듯 자신의 글을 그저 좋게만 보고 끌어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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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안 된다. 버르장머리 없이 키운 자식, 앞날이 뻔하지 않은가. 그런 태 도로 글을 써서는 함량 미달의 작품을 써 놓고 세상 탓만 하게 될 공산이 크다. 아, 세상은 어찌하여 나의 재능을 몰라주는가! 장담하겠다. 그런 일은 절대 없다. 당신이 좋은 글을 쓴다면, 반드시 책 으로 출판될 것이다. 아직 그렇지 못했다면, 당신에게 재능이 없거나 혹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세상은 생각보다 눈이 밝아서 재능을 몰라보 고 지나치지 않는다. 또한 세상은 꽤 눈이 높아서 어쭙잖은 아이디어를 재 능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이달에 투고된 원고들은 모두 그 둘 중 하나의 경우였다. 재 능이 없거나 혹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거나. 박정애 선생님과 논의한 결과, 그나마 눈에 들어온 작품으로 꼽을 만한 것은 「토끼 머리핀」과 「나는 짐 승」 정도였다. 그러나 두 원고 역시 아이디어가 나쁘지 않다는 정도 이상 을 보여 주지 못했다. 글쓴이들은 스스로의 원고에 감탄했는지 모르지만, 글쎄, 심사하는 입장에서는 한탄이 나왔다. 까놓고 말해서, 나라면 절대 돈 주고 사서 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꽃노래도 아닌 것을 백만 번이나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면 질린다는데, 뻔하고도 뻔한 교훈을 백 만 번째로 되풀이하는 글이라면 진력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보편적인 것과 뻔한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부모에게 효도하자는 얘 기는 보편적인 주제일 수 있겠으나, 단순한 의무감의 차원에서 그 문제에 접근한다면 그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잔소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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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만도 못한」의 경우가 그러하다. 짜임새 있는 구성은커녕, 육하 원칙에 따라 정리해 볼 만한 사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이 없다 면, 그건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서사 문학이란 과연 무엇인지 본질적 으로 다시 고민해 보시기 바란다. 「엄마의 황금잉어빵」 역시 마찬가지다. 「천하무적 발가락」, 「나의 행복한 주노 헤어」, 「박지성 1호 대 박지성 2호」, 「군만두와 찰찐빵」 역시 마찬가지다. 그나마 이 네 편의 경우 사건은 존재 하지만, 뻔하고 뻔한 이야기를 백만 번째로 또 읽고 있다는 기분이다. 전개 과정 또한 식상하기 그지없다. 갈등 상황이 있다- 알고 보니 오해였다. (혹은 트라우마였다) - 서로 이 해하고 화해한다. 어쩌면 이것은 서사 문학의 가장 전형적인 유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군다나 독창성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든 문 체든 인물이든 갈등의 유형이든, 어떤 측면에서건 그 작품만의 독창성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그저 전형적으로 식상한 글일 뿐이다. 「엄마의 황금 잉어빵」의 경우에는 그 식상한 의미나마 잘 느껴지지 않 았다. 굳이 요약하자면 어느 가족의 따뜻한 하루라는 느낌인데, 그렇게 그 저 서정적인 감성만으로 승부하고 싶다면 시적인 문장 정도는 구사해 줘 야 하는 게 아닌가. 딱히 문체랄 것도 없는 평이한 문장으로 몇 시간 동안 의 일을 시간 순서대로 기술하는 글이 대체 어떤 문학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까. 어린이 문학은 쉬워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쉽다’는 의미는 가독 성의 측면이지, 내용 자체가 허술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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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라면 더구나

그나마 이른바 생활 동화는 어쨌거나 현실이라는 토대 위에 지어졌다. 그러니 작가가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작품의 토대가 되는 세계는 이미 치 밀한 법칙에 따라 완결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며, 동 물은 사람의 언어를 할 수 없고, 물에 빠지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죽는다는 것과 같은 현실 세계의 법칙. 작가는 그 법칙에 따라 독창적인 사 건을 전개하기만 하면 된다. 그와는 달리 판타지는, 작가가 기초 공사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동물 이 사람의 말을 한다는 설정을 하고 싶다면, 그런 법칙이 작동하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게 먼저다. 평행우주처럼, 지금 우리 눈앞의 우주와는 동 떨어진 다른 차원의 우주를 구상해야 한다. 그냥 우리 집 강아지가 어느 날 말을 하더라며 안이하게 접근해서는 그저 황당한 이야기일 뿐이다. 3D를 넘어서 4D 영화까지 보는 세상이다. 텔레비전 리모컨만 누르면 한류 열풍까지 불러일으킨다는 화질 좋은 드라마를 언제든 볼 수 있다. 그 런데 2D로, 그것도 흑백으로 표현하는 ‘글’로 판타지 세계를 그려야 한다. 영화나 만화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입체적인 구상이 없고서야 어떻게 독 자를 설득할 것인가. 어린이 독자들이 어려워하지 않겠느냐고? 걱정 붙들 어 매시라. 쓰는 사람이 어려워하는 게 문제지, 재밌기만 하다면 어린이 독 자들은 그 두껍고 복잡한 해리 포터도 너끈히 읽어 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습작생들은 단편 동화를 쓰면서 흔히들 판타지에 덥 석 손을 대곤 한다. 패기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판타 지를 쉽게, 나아가서는 어린이 독자를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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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간에서 만난 도깨비」의 경우, 오래된 물건이 도깨비로 변한다는 사 실을 모티프로 쓴 글인 것 같다. 그런데 그 단순하고, 또 이제는 알 만한 사 람들은 다 아는 그 설정 하나로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민속촌에 갔다 가 재래식 화장실에서 도깨비를 만나 낯선 세계로 갔다는 것인데…… 과 연 그 낯선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 수가 없다. 과거로 갔다는 것인가? 그게 아니면 과거의 풍속이 계속 남아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우주로 갔다는 것인 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써야 하는 거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는데, 꼭 써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작가는 알아야 한다. 현실의 세계와 그 낯선 세계 는 어떻게 다른지, 두 세계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 일이 왜 하필 그 날 그 자리 그 아이에게 일어난 것인지. 알고 생략하는 것과, 몰라서 건너 뛴 것은 다르다. 전자라면 압축의 미일 것이고, 후자라면 허술한 이야기일 뿐이다. 「연못 자리 초등학교의 비밀」 역시 마찬가지다. 친구가 다가와 주인공 에게 괜찮으냐고 묻는 것으로 마지막 단락을 시작했는데, 그렇다면 연못 에서의 일은 꿈이란 말일까? 아니면 혼절을 했다는 뜻? 그렇다면 연못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는 시간의 흐름이 다른 걸까? 도대체 어떤 법칙이 작동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만약 연못 속에서의 모험이 꿈이었다는 설정이라면, 그것에 대해서도 심각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장화 신은 영환이」의 경우에도 신 비한 능력을 가진 고양이와의 여정이 꿈이었다는 듯이 암시하고 있는데, 이런 식의 결말은 반전이 아니라 사기다. 좋게 말해서 비겁한 결말이다. 지금까지의 신비한 체험이 꿈이었다고 주장하려면, 그런 결말 자체로 울림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구운몽」의 경우가 그러하다. 「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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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에서의 꿈이었다는 설정은 단순한 반전이 아니라 작품의 철학을 반영 하는 것이다. 「칸이 먹은 바나나」는 이야기 구조가 허술할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영화 〈라이온 킹〉과 너무도 흡사했다. 이야기 구조도 그렇거니와 부계를 따라 권력을 승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고루한 인식 또한 〈라이온 킹〉에 서 그대로 가져온 듯했다. 그래도 「라이언 킹」은 최소한 재미있었다. 현실 의 아프리카보다 더 아프리카적인, 달리 말하자면 현실의 아프리카와는 또 다른 세계처럼 보이는 낭만적 아프리카를 실감나게 그려 냈다. 하지만 「칸이 먹은 바나나」의 경우에는 시공간 자체가 모호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칸이 먹은 바나나」의 주인공이 동물이라는 측면에서도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동물의 가면을 씌워 놓았을 뿐, 그 동물 캐릭터는 인간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렇���면 왜 굳이 동물을 주인공으 로 삼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소견 탐정 따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소견 탐정 따루」는 해 당 동물들의 생태에 대한 사실 관계의 측면에서도 모호한 구석이 있다. 대 체 어떤 개가 제 눈앞의 그릇에 담긴 먹이를, 그것도 고깃덩이를 누가 가져 가도 모를 정도로 곯아떨어질까? 그것도 사흘 내리? 더구나 그 고깃덩이 를 훔쳐 간 범인이 비둘기라는데, 개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훔쳐 갔을까? 의인 동화는 동물을 인격화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 이지, 그냥 인간의 영혼에 동물 가면을 씌워 놓는 게 아니다. 「나의 행복한 주노헤어」의 경우에는 고양이가 화자인데, 이 글에서는 심지어 고양이에게 별다른 역할도 없다. 결말에 이르러 고양이가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지만, 그것은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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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적 설정으로 보일 뿐이다. 대체 고양이 화자를 등장시킨 이유가 뭐란 말인가? 고양이 화자라는 것 자체가 독창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독창적이지 않다. 그냥 드문 경우일 뿐이다. 드물다고 모두 가치 있는 것 은 아니지 않은가. 고양이 화자가 인간을 관찰하는 것이라면, 고양이의 눈 을 빌어 우리의 현실을 또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여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먹고 살기도 힘든 길고양이가 우리 동화에서까지 굳이 번거로운 화자 노릇을 감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동물을 화자로 혹은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려면, 우선 그 동물의 세계관 혹은 생태가 인간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고찰해 보기 바란다. 그래도 두 심사위원이 좀 낫다고 합의한 작품은, 「나는 짐승」과 「토끼 머리핀」이었다. 두 작품은 나름대로 단편 동화의 얼개를 갖추고 있다. 글 쓴이가 사건의 고삐를 틀어쥐고 끝까지 레이스를 마쳤다. 마침내 결승점 에 이르러 아, 이런 이야기였구나, 싶은 의미가 꽤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했 다. 그럼에도 추천작으로 뽑기에는 아쉬움이 컸다. 「토끼 머리핀」의 경우에는, 문장이 거칠었다. 개성을 느낄 수 없는 문장 에다, 문장을 연결하는 호흡도 불안정했다. 문학은 이야기를 문장으로 직 조하는 일이다. 옷감에 비유하자면, 문장은 실과 같다. 질 낮은 실로 좋은 옷감을 짤 수는 없다. 좋은 문장으로 쓰인 작품들을 탐독하며 자신의 문장 을 되돌아보기를 권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문장이란 사실 개인기가 아니다. 문체란 문 장을 쓰는 기술이 아니라, 글쓴이의 시각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다. 화자 의 시각에 따라 똑같은 말도 전혀 다른 뉘앙스로 들리지 않는가. 글도 마찬 가지다. 문장에 개성이 없다는 것은, 작품 속의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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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자체가 평이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토끼 머리핀」의 거친 문장은, 소 심한 아이의 친구 만들기라는 평이한 주제에 대한 글쓴이의 안이한 문제 의식이 근본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짐승」은, 듬성듬성하게 쓴 장편 동화 혹은 장편 동화의 요약본 같 다. 단편이라는 형식에 비해 사건을 너무 크게 벌였다. 거대 토끼로 변한 주인공이 무려 경찰과 추격전을 벌이고, 하마터면 총격전까지 벌어질 뻔 했다. 그런 내용을 고작 20~30매 분량에 담으려니 듬성듬성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분량의 문제를 떠나서, 글쓴이가 그 추격전의 양상을 얼마나 구 체적으로 구상했을까에 대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학교와 아파 트, 언덕, 동네 공원, 공원 안쪽의 굴다리, 그 너머 좀 떨어진 곳에 자리 잡 은 산……. 이 모든 공간을 지도로 정확하게 그려 낼 수 있는가? 만약 그렇 다면 그 공간을 배경으로 한 움직임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 법을 좀 더 고심해 보기 바란다. 만약 지도로 그려 낼 자신이 없다면, 처음 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나도 잘 모르고 쓴 동선을, 읽는 이가 무슨 수로 따라가겠는가.

끝으로 잔소리 하나 더

좋은 작품, 좋은 문장……. 막연한 말이다. 어렴풋이 감이 오긴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은 문장으로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일단, 기본을 지키는 일부터 시작하기 바란다. 캔버스에 물감 을 흩뿌린 것처럼 보이는 초현실주의 작품을 그리는 화가도 데생에서 아 니, 선 긋기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았겠는가. 기타 줄을 이빨로 물어뜯는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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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스트도 C 코드 잡는 것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좋은 문장. 일단 주어와 서술어가 호응을 이루는 정확한 문장 쓰기부터 시작하자. 시적 허용이라는 말은, 그 내용이 시적일 때 파격을 허용한다는 뜻이다. 비문이라고 모두 시적 허용이 아니다. 내용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과 관계에 합당한지, 상식의 수준에 서 개연성이 있는지를 우선 따져 보자. 이를테면 「천하무적 발가락」의 경 우, 뇌성마비 엄마는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주인공은 엄마가 글씨는 못 쓸 거라고 단정 지어 생각한다. 그렇다면 엄마랑 따로 산다는 건 가? 엄마는 글씨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여태 굳이 숨긴 건가? 그렇지 않다 면 어째서 아이는 엄마가 글씨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천하무적 발가락」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에서도 이렇게 기본적인 측 면에서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기본부터 충실하자. 적확한 문장과 합리적인 전개가 기본이다. 튼실한 토대 위에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이야기를 구축해 보자.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냐고? 물론이다. 어렵다 못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았는가. 문학이란, 고통스럽게 쓰고 즐겁게 읽도록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작가란 그 고통을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쾌감으로 느 껴야 하는 사람이다. 혹평에 마음 상하셨는가? 그 고통마저 쾌감으로 느끼며 새로운 도전에 나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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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 박현숙

들려주는 옛이야기로 아이와 교감하기

1. 옛이야기, 왜 들려주어야 하나

옛이야기는 오랜 세월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온 말의 문학이 다. 시대의 변화에 맞물려 이야기 향유 방식도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옛 이야기의 표현 방식의 근원이 되는 말의 전승은 불가피하게 사라져 가고 있고, 그 자리는 글과 영상으로 대체되고 있다. 말로 전하는 이야기 문화가 사라진 지금, 옛이야기책은 옛이야기 전승물로서 매우 중요한 시대적 역 할을 수행해 내고 있다. ‘어린이 문학’ 전체를 통틀어, 옛이야기만큼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충

박현숙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설화구연 전통에 기반한 옛이야기 들려주기 방법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건국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암행어사 박문수』, 『프로이트, 심청 을 만나다』(공저), 『호랑이 배에서 덩 딱기 덩 딱!』, 『한국의 이야기판 문화』(공저)가 있다. 전통적 인 이야기 문화를 되살리는 실천적 방법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옛이야기 들려주기’ 현장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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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감을 주는 것은 없다. 옛이야기가 현대사회의 구체적인 삶의 상황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바가 거의 없는 것은 사실이다. 현대사회가 생 기기 훨씬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이야기는 어른 들이 읽는 어떤 유형의 이야기보다도 인간 내면의 문제들에 대해 많은 가 르침을 주고도 어린이가 처한 난관에 알맞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어린이 는 항상 자신이 속한 사회의 여러 상황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내면적인 자질들을 발휘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그러한 삶의 상황들에 대처하는 방법 을 알게 될 것이라는 심리학자 브루노 베텔하임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는 옛이야기 효용성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옛이야기의 효용성이 극대화되기 위해서는 옛이야기 본연의 표현 방식 인 들려주기 문학으로 향유되어야 한다.

여섯 살 00에게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읽어 줬는데, 미리 읽어 볼 걸 하 는 후회를… 한 고개 넘어가며 저고리 달라는 것까진 괜찮았는데, 한 고개 넘 어가며 팔 한쪽 달라 하고 다음 고개에선 다리 한쪽… 마지막엔 떼굴떼굴 굴 러가다 입 벌린 호랑이가 꿀꺽 삼켜 버린… 엄마…(ㅜㅜ), 00이의 질문, “엄 마, 팔을 어떻게 떼?”……. 이럴 땐 뭐라 하죠? 어젯밤, 참으로 곤란했던 00였 습니다.

여섯 살 된 딸에게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그림책을 읽어 주면서 잔혹한 장면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는 엄마의 사연이다. 그림책에서는 독자의 상 상에 맡겨야 할 부분까지 구체적인 그림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그림 책에서는 삭제하거나 완화시켜야 할 그림 장면을 오히려 더 과장하여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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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시키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호랑이가 어머니의 팔, 다리를 떼어 가고, 잡아먹는 장면을 구체적인 그림 으로 형상화한다거나 〈여우누이〉에서 변신한 여우의 형상을 출판사별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무섭게 형상화하기도 한다. 어떤 아이에게는 그 이미 지가 공포 이미지로 각인되어 공포스러운 상황에 놓일 때마다 그 이미지 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림책에서의 글과 그림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글의 여백을 그림이 메우는 장르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 기 때문에 보여 주는 옛이야기에서는 수용자에게 주어지는 자율성이 그만 큼 제한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포스러운 장면도 옛이야기 문법을 따라 아이들에게 들 려주면 다른 반응을 보인다. 여기에서 들려준다는 말은, 글을 그대로 낭송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연자의 상상을 가미하여 자유롭게 들 려주는 구연을 의미한다. 옛이야기는 기본적인 스토리가 선명하게 드러나지만 작중 상황이 구체 적이고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스토리 위주의 구연이므로 건너뛰는 부분이 많다. 서사의 빈 부분을 청중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 내에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미를 찾아낸다. 웃긴 장면, 슬픈 장면, 무서운 장면 하나하나의 상상은 어디까지나 청중의 몫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이 야기를 들려줄 때는 청중의 다양한 상황적 요인까지 고려해야 한다. 들려주는 옛이야기는 누구나 청중과 소통하면서 이야기를 창조해 낼 수 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치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어른들 에게 옛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면 어른들은 당황해하며 거절하기 일쑤 다. 가장 많이 하는 거절 이유는 아는 옛날이야기가 없다는 것과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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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줄 모른다 것이다. 그런데 옛이야기 구연은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즐기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누구든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늘게 되어 있다. 지금부터 아이들과 옛이야기를 통해 교감하길 원하는 어른들을 위하여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

2-1. 경험담 들려주기

필자를 비롯한 젊은 부모들은 윗세대에게 옛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란 세대가 아니다. 70대, 80대의 노인 세대조차도 옛이야기를 기억하여 들려 줄 수 있는 이가 매우 제한적이다. 특히나 젊은 부모 세대는 대부분 책을 통해 이야기를 접한 세대이기 때문에 읽은 이야기를 쉽게 내면화해 내지 만 내면화된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구연해 내는 데엔 큰 부담을 느낀다. 옛 이야기 들려주기가 자신이 없을 때나 들려줄 구연 종목이 떠오르지 않을 때, 가장 쉽게 아이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경험담이다. 자신이 경험 한 이야기는 서사를 별도로 기억할 필요 없이 자신이 겪은 내용을 말로 형 상화하면 되기 때문에 구연에 대한 부담감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부모와 자 녀 관계, 친구 관계, 선생님과 제자 관계에서 경험담을 들려주게 되면 친분 이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구연자와 청중 간의 교감을 크게 높일 수 있다.

[A] 엄마가 어렸을 때 일인데, 엄마가 외삼촌이랑 할머니 몰래 방에다가 이렇게 양초를 문지르면 방바닥이 미끌미끌하니까 그걸 타고, 스케이트를 타 려고 그랬대. 그런데 그때 막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외할머니가 들어와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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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어, 놀지도 못하고 매만 맞았대.

[B] 그리고 또 한 번은 뭐냐면 엄마 어렸을 때, 이 학년 때, 초등학교, 그때 옛날이니까 피아노가 엄마 반에서 엄마밖에 없어서 엄마만 피아노 학원 다녔 는데, 엄마 반 담임선생님이 엄마 집으로 와서 엄마한테 그 피아노를 치러 온 거야. 그래서 언제는 외할머니가 어디 간다 그래 가지고, 엄마가 혼자, 엄마가 혼자 있었는데, 선생님이니까 우유를 데워 드리려고 했는데, 우유를 데우니 까 너무 맛이 밍밍한 거야. 그래서 소금을 넣었더니 너무 짠 거야. 그래서 설 탕을 넣었대. 그랬더니 너무 달아져 가지고 토할 거 같아서 조미료를 넣었더 니 진짜 맛이 [청중: 이상할 것 같아.] 토할 거 같았어. 선생님이 그때 막 피아 노 다 치고 집에 간다고 그래서 엄마가 그 우유를 버렸대 [청중: 마침 선생님 이 가서 아주 다행이다.]

위 인용문 [A]와 [B]는 한 아이가 엄마에게 들은 엄마 어릴 적 경험담을 기억하여 친구들에게 들려준 내용이다. [A]는 구연자의 엄마가 어렸을 때 외삼촌과 함께 방바닥에 초를 문질러 스케이트를 타려고 했다가 모친에게 혼났던 아주 짤막한 이야기를 사건 중심으로 들려주었다. [B]는 엄마가 외 할머니가 안 계실 때 방문한 선생님께 맛있는 우유를 접대하려고 소금, 설 탕, 조미료를 넣었다가 결국 못 먹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아이 는 엄마에게 들은 실수담의 기본 골격에 적절히 살을 붙여 가면서 재밌게 구연하였다. 아이의 친구들은 친구 엄마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다양한 조 미료가 첨가된 우유��� 맛을 상상하며 ‘토할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 고, 선생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그 우유를 마시지 않은 것에 대해 ‘다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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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엄마의 경험담을 전하는 아이와 친구 엄마의 경험담을 듣는 친구들 사이에는 이야기 구연의 특성 중 하나인 쌍 방향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아이의 엄마가 1차적 경험담을 아이에게 직접 들려줄 때 둘 사이에서 이루어졌을 충분한 교감을 예상할 수 있다. 부모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과거의 사실적 경험을 상기시켜 형상화할 때, 상상을 통해 재구성하여 들려준다. 아이 역시 부모의 경험담을 다른 사 람에게 들려줄 때는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내면화시킨 이야기를 또 한 번 재구성하여 들려주게 된다. 이러한 경험담의 재구성 과정은 옛이야 기의 전승 원리와 유사한 과정을 거친다. 경험담 들려주기는 누구나 쉽게 이야기 구연을 실천해 나갈 수 있는 방 법이다. 경험담 들려주기는 구연 서사를 사전에 준비할 필요 없이 즉흥적 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사실에 입각한 문학적 창조의 행위이며 청중과 직 접적 교감이 이루어지는 소통의 행위이다. 바로 지금, 과거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부터 오늘 일상에서의 소소한 경 험을 떠올려 보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찾아 아이에게 경험담 들려주기 부터 실천해 보자.

2-2. 책 내용을 기억하여 들려주기

어린이가 있는 가정의 잠자리에서는 부모들이 자녀에게 책 읽어 주는 정겨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렇게 잠자리에서뿐만 아니라, 아이가 원할 때, 아이가 지루해 할 때, 부모가 읽히고 싶은 책이 있을 때 등 다양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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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있다. 읽어 주면서 재미있던 책 내용은 낭독하는 부모와 보고 듣는 아이의 기억 속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또 아이들은 한 번 재밌게 본 책은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읽어 달라고 요구 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책 내용을 암기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야기를 구연할 때, 아이와 함께 책을 읽는 과정에서 인상 깊었던 이야 기, 반복적으로 읽어 자연스럽게 내용을 알게 된 이야기를 구연 종목으로 활용하면 좋다. 이때 구연 종목은 구비 전승되는 옛이야기가 구연자마다 의 개성으로 다양한 각편을 만들어 내듯이, 각 출판사마다 조금씩 다르게 재화된 옛이야기책들을 비교하여 서사의 원형을 잘 살린 마음에 드는 각 편을 선택하여 구연 종목으로 삼으면 된다. 또한 자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다양한 책에서 적극적으로 찾아 내용을 기억하여 들려주는 방법 도 좋다. 이야기를 처음 들려줄 때는 많이 어색하고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만으로 도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아이는 이야기가 재미없다는 반응 을 보이기도 한다. 이때, 실망하고 바로 포기하면 안 된다. 들려주는 이야 기가 내면화되고 진정한 내 것이 될 때, 들려주는 이야기에 신명이 붙고, 이야기의 맛이 살아나게 된다. 구연자가 신명으로 이야기를 구연하면, 청 중은 그 신명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이때 청중의 신명이 더해지면 이야기 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을 얻게 된다. 필자가 설화 채록 현장에서 만난 박순자 할머니를 잠시 만나 보자. 할머 니는 남편이 구연하는 지명 유래 전설을 옆에 앉아 듣고 있다가 필자가 설 화 구연을 청하자 처음에는 들은 이야기도, 알고 있는 이야기도 없다면서 구연을 거절하였다. 그러다가 할머니는 주일학교 부탁으로 학생들에게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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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책을 읽고 들려준 적이 있다면서 ‘내 나이 많다고 해 달라고 하는데, 난 책을 봐야 알지, 입으로는 못해. 책을 먼저 보고’라면서 책이 없으면 구연 을 못한다고 필자에게 재차 확인시킨 뒤 옛이야기 한 자락을 구연하였다.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은혜 갚은 호랑이〉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도 거 어머이하고 아들하구 못 사니까 저 산꼭대기 올라가 두 분이 사는데, 뭐 해 먹고살 기 없으니까 낭그를 해서, 낭그를 시내에다 내다 팔아 가지고 쌀을 사다 먹구사는데, 한번은 나무를 하러 가다니까 뭐이 저 낭그 저 그 그 아래쪽에서 뭐이 캑캑 하더라는구만, 목에 걸려 가지고. 그래 가 보니까 호랭이가 사람을 잡아가지고, 나물 뜯으러 온 아주머이를 잡어먹고는 비녀가 걸려 가지구서는 캑캑 하드래. 그래 왜 그러느냐 하구 보니까, 아구, 나 이거 죽겠으니까 나 좀 살려 달라는구먼. 총각 아저씨 보고. 그러니까 그래 이래 보 니까, 비녀가 이렇게 걸렸드래, 비녀가. 그래 손을 넣어 가지고 그걸 끄냈대. 끄내서 살았다는구만. 살아가지고선 고맙다구, 나무꾼 아저씨 고맙다구 인 사를 하구 가드니만. (……) 그래 지 욕심에 각시 할라구, 애기를 둘을 낳구는 색시터를 물어 가지구서는 찾아갔대. 그 대감님네 집엘 찾아가니까느르 아주 (딸이) 죽었다고, 어떻게 반구워허구 그러는지, 그래 사우도 그렇게 그만 산 골로 가지 말구, 뭔 대감을 시켜 가지구서는 그 서울에 있구, 그래 어머니도 모셔 오고 잘 살았단 말이야. 그랬는데, 그라고 잘 사는데, 아이, 그 호랭이가 또 나타났대, 시내에. 시내에 나타나고 막 그러니까, 총으로 막 쏴 죽일라고 그거 죽이는 사람에게는 상금을 준다고, 막 광고를 내고 그랬거든. (……) 그 래니깐 (호랑이가) “빈 총을 가지구 내가 시내서 훅 돌걸랑 쏘면 상금을 준다 니까 날 쏘는 척하고 탕 쏘라고. 그러면 내가 죽을 테니까. 내가 명이 다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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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가 됐으니까, 아저씨.” 그래 가지구서는 씨기드래는구먼. 그래서 그 호랭이가 씨기는 대로 빈 총을 가지고서 고만, 나타나니까 “저, 잡아라” 고만 나라에서 소리를 지르니까, 고만 이 나무꾼 아저씨가 나가서 탁 쏘았단 말이 야. 쏘니까, 그 불발이 나가지 않았는데, 고만 죽었어, 고만. 그래 그 호랭일 죽 였으니까, 아, 계급도 올라가고 뭐 고만 잘 살게 됐대, 그렇게. 그래 동화책에 서 보구선 내가 얘길했어. 그런 동화책에 보구선 내가 얘길 하는 거야.

박순자 할머니는 처음에는 이야기 내용이 정확히 기억이 안 나고, 구연 에 대한 부담감으로 이야기 구연을 거부했지만, 호랑이와 관련된 경험담 구연을 한 뒤, 서사가 기억났는지 〈은혜 갚은 호랑이〉 이야기를 자연스럽 게 구연하였다. 할머니는 구연 과정에서 호랑이가 나무꾼에게 은혜를 갚 는 장면을 특히 부각시켜 확장해 나갔다. 나무꾼에게 나무를 해다 주는가 하면, 색싯감을 데려와 총각이 결혼하여 자식 낳고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 게 해 줄 뿐 아니라, 〈김현감호〉의 호랑이처녀와 같이 자신의 희생으로 나 무꾼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화소를 첨가하는 등 박순자 할머 니 버전의 〈은혜 갚은 호랑이〉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이는 할머니가 책을 읽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읽은 내용을 내면화시켜 학생들에게 들려준 경 험이 큰 바탕이 된 것이다. 동일한 이야기를 한 번, 두 번 반복적으로 들려주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 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아이와 눈을 맞추며 쌍방향 소통을 통해 교감 하면서 이야기 구연을 자주 하다 보면 이야기를 즐길 줄 아는 이야기꾼이 되는 건 시간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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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야기 변용하여 들려주기

옛이야기는 구연자마다의 각기 다른 말투, 표정, 손짓, 몸짓 등 다양한 요소에서 그 개성이 드러난다. 특히 이야기 내용의 변용은 옛이야기의 다 양한 각편을 생성해 낸다. 구연자가 이야기 구연 과정에서 서사의 변용을 시도하고 각편을 생성해 내는 과정은 구연자의 이야기 창조 과정이다. 그 렇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를 그대로 외워서 구연하면 온전한 자기의 이야 기가 될 수 없다. 구연자는 구연 종목을 선택할 때 자신이 감당하고 소화해 낼 수 있는 서사를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전승되는 이야기의 편수가 많지 않고, 서사의 완결성은 떨어지지만 재미있는 화소를 지니고 있는 이야기 가 있다면 서사의 논리에 맞는 재구성을 통해 변이형을 만들어 내는 작업 은 불가피하다. 이때 서사의 변용은 원형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 루어져야 한다. 필자는 원형에 충실한 옛이야기 변용을 통해 청중에게 들려줄 옛이야기 를 구연 종목화 하는 방법을 네 가지 모델로 제시한 바 있다. 이 가운데, 이 글에서는 두 가지 서사를 조합한 변용을 통해 들려줄 이야기를 재구성하 는 과정을 제시해 보겠다. 필자가 이야기 구연 과정에서 아이들과 신명나게 소통할 수 있는 이야 기를 찾는 과정에서 선별한 이야기가 ‘김수한무~ 돌돌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아이의 이야기다. 필자가 어릴 때 재밌게 봤던 한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를 떠올려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 그랬더니, “아, 글쎄 김부자 어른. [다같이]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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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삼천갑자동박석치치포카사리사리센타워리월세프리캉바람막는담벼락담 벼락에서생원서생원에고양이고양이에바둑이바둑이는돌-돌이가 물에 빠졌 어요.” 그런 거야. “아니 뭐야? 우리 김수한무[하하하하하]거북이와두루미삼천갑자동박석 치치포카사리사리센타워리월세프리캉바람막는담벼락담벼락에서생원서생 원에고양이고양이에바둑이바둑이는돌-돌이가 물에 빠졌단 말이야? 뭣들 하 는 거냐? 얼른 가자.” [여기저기서 웃음] 그러구는 막 달려가고 있었어.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아구, 어르신 무슨 일이십니까?” 붙드는 거야. “아니, 글쎄, 우리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삼천갑자동박석치치포카사리 사리센타워리월세프리캉바람막는담벼락담벼락에서생원서생원에고양이고 양이에바둑이바둑이는돌-돌이가 물에 빠졌다는 거야. 빨리 오게, 자네도.” 그러고 달려갔더니 어떻게 됐게? [잠시 침묵] 이 얘가 이름이 너무 길어서 물에 빠져서……. 얘 이름이 [청중 아이들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우리 ‘00’, ‘00’, ‘00’, ‘이 렇게 얘기하면 빨리 와서 구했을 텐데, 이름이 너무 길어 가지구, 아이가 일찍 죽은 거야. (……) 그래서 그 아이 묘에다가 이렇게 써 놨는데, 이름을 뭐라고 써 놨는 지 알겠어? [아이들에게] 해 봐. 시-작. [아이들 다 같이]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삼천갑자동박석치치포카사리 사리센타워리월세프리캉바람막는담벼락담벼락에서생원서생원에고양이고 양이에바둑이바둑이는돌-돌이 묘비’ 이렇게 써 있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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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긴 아이〉 이야기는 구연이 거듭될수록 반복되는 이름 뒤에 새로 운 이름이 하나씩 더 추가되면서 재미를 배가시킨다. 구연 과정에서 이름 을 반복적으로 호명할 때면 아이들은 무척 즐거워한다. 이 이야기는 유쾌 한 웃음 뒤에 자식을 장수하게 하고 싶은 부모의 과욕으로 인하여 오히려 아이를 단명시키고 말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주제를 너무나 선명 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웃음 뒤에 씁쓸함이 묻어난다. 이 이야기는 듣는 아이들도 즐거워하고 주제도 선명한데, 이야기 구연 을 거듭할수록 아이의 죽음은 아이들과 호흡을 맞춰 신명나는 이야기판을 이끌어 가는데 불편한 마음이 들게 하였다. 그래서 긴 이름으로 성공한 아 이의 이야기를 찾아 희극적 결말로 변용해 보았다. 〈이름 긴 아이〉의 변용 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⑴ 한 부부가 늙도록 자식이 없어서 기자정성을 들여 어렵게 아들을 얻 었다. ⑵ 부모는 단명의 운명을 타고난 아들의 장수를 기원하며 ‘김수한무~ 돌돌이’라는 긴 이름을 지었다. ⑶ 하루는 이름 긴 아이가 왕이 이름을 열다섯 번 부를 동안 샛단 머리 한 바퀴를 돌면 사위로 삼겠다는 내용의 광고를 보았다. ⑷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비를 내고 시합에 참가했으나 한 바퀴를 채 돌 기도 전에 왕이 참가자 이름을 모두 불러 돈만 잃었다. ⑸ 이름 긴 아이는 시합에 참가하여 왕이 이름을 한 번 채 부르기도 전 에 한 바퀴를 도는 데 성공했다. ⑹ 왕은 이름 긴 아이를 사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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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름을 활용하여 청중과 소통하면서 흥겨운 판을 이끌어 나가기에는 변용한 희극형 〈이름 긴 아이〉의 서사가 더 적합하여, 요즘은 아이들에게 비극형 서사보다는 희극적 변이형 서사를 자주 들려주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옛이야기 〈우렁각시〉나 〈선녀와 나무꾼〉의 서사는 희극형, 비극형이 모두 존재하며, 비등한 전승 양상을 띠고 있다. 이는 이 야기 생성 시기와는 무관하게 두 서사 유형 모두 향유자들의 공감을 얻어 낸 결과라 할 수 있다. 구연자가 이야기를 들려줄 때, 구연자에게 불편함을 주는 화소가 있으 면, 그 불편함이 청중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청중은 그 불편한 지점에 대 해 유독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청중이 이야기를 받아들일 때, 불필요하게 구연자의 심리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구연자가 감당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서사를 선택하여 이야기를 즐기면서 들려주어야 한다.

2-4. 아이와 함께 구연하기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보다는 새로운 이야기를 듣기를 희망한 다. 그래서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면 이미 아는 이야기라고 시 큰둥한 반응을 보일 때가 많다. 아이들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이야기를 많 이 찾아서 들려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찾기란 쉽지 않다. 또한 찾아낸 새로운 이야기를 모두 내면화시킬 수도 없 다. 단순히 이야기를 찾는 노력만으로 이야기가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것이 되는 이야기들 이 있다. 이 이야기들이 나의 주요 구연 종목(레퍼토리)이 된다. 이는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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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구연 과정을 통해 형성될 수 있다. 아이들이 재미있는 책은 반복적으로 다시 읽듯이, 이야기 듣는 것도 마 찬가지다. 아이들도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그 이야기의 주인이 되어 간다. 내가 아이에게 반복적으로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면, 또는 내가 아이와 동일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그 이야기를 아이와 함께 구연해 보 기를 권하는 바이다.

열두 시가 되더니 여동생 방이 싸악 열리더니 갑자기 훽훽훽훽훽 아홉 바 퀴를 돌더니 부엌으로 들어가.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부엌에 들어가 무엇을 발랐을까요? 아이1: 아, 기름을 바르고. 맞았어. 참기름을 쏴사삭 바르고 얼른 아까 포수가 총을 쏘면 총알이 어떻 게 지나갔지? 아이1: 똥구멍 맞았어. 동물의 똥구멍을 지나서 입으로 쏙 나온 거처럼 어느새 손가락이 쒸익 들어가더니 갑자기 간을 쑥 뽑아 가지고 아그작 아그작 먹으면서 ‘음, 맛있다.’ 그러곤 들어가는 거야. [아이1은 필자가 들려주는 장면에 대해 행동으로 보이고 있다] 아버지한테 가서 “아버지, 아버지가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여동생이 여우로 변해서 먹어 버렸어요.” 그랬더니 “네 이놈!” 아이2: “꼴도 보기 싫다. 당장 나가라.” 어, 그래서 쫓겨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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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내가) “아버지가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여동생이 여우로 변해서 먹었어요.” 그랬더니, 아이2: “네 이놈, 꼴도 보기 싫다. 당장 나가라.” 어, 그래 갖고 또 쫓겨났어.

위 인용문은 이야기를 구연할 때, 아이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여우누 이〉 이야기를 아이들과 함께 구연해 나가는 장면의 일부이다. 아이들은 필 자에게 〈여우누이〉 이야기를 자주 듣다 보니, 이야기가 이미 아이들에게 내면화되어 있다. 그래서 필자가 이야기 구연을 시작하면 다음 대사를 먼 저 말해 버리거나, 여우누이의 행동을 직접 재연해 보이기도 한다. 아예 특 정 대사를 자신이 도맡아 구연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은 뒤에 막내아들 이 여우누이를 퇴치하는 장면에서도 보인다. 막내아들이 아내가 위험할 때 쓰라면서 건네준 조력물을 병 대신 ‘바람 風’, ‘물 水’, ‘불 火’ 자가 쓰인 부적으로 바꾸어 구연하였다. 이때 ‘바람 風’ 자가 적힌 부적을 날리면, 아 이들은 멀리 날아가는 시늉을 하면서 돌아올 때는 ‘오라비 한 끼, 말 한 끼’ 를 외치며 내게 다가온다. 이어서 ‘물 水’ 자가 적힌 부적과 ‘불 火’ 자가 적 힌 부적을 차례대로 던져 여우누이가 퇴치될 때까지 아이들의 행동과 대 사는 반복된다. 아이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익숙한 이야기는, 이야기 구 연을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부터 지루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익숙한 이야 기라도 어떻게 이끌어 가는가에 따라서 이야기를 대하는 청중의 반응은 크게 다르게 나타난다. 아이와 함께 이야기를 구연해 나갈 때, 이야기 구연 주도권을 아이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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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넘겨 아이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구연해 보도록 하거나, 부모와 아이가 이야기 구연 부분을 정해서 주거니 받거니 나눠서 구연하는 방법을 활용 해 볼 수 있다. 또는 아이가 맡고 싶은 일정한 부분만을 반복적으로 구연하 도록 하여 함께 구연해 나가는 방법도 있다. 이로써 부모와 아이가 서로 알 고 있는 이야기를 함께 재구성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창조의 경험 을 공유하게 된다.

3. 이야기 한 자락으로 이야기꽃 피우기

우리 옛이야기에는 〈이야기 말뚝〉이라는 짧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넷날에 어드런 사람이 길을 가다가 말뚜기에 채서 너머데서 증이 나서 말 뚜기를 뽑아 내느꺼니 말뚜기에 넷말이 달레서 자꾸 자꾸 따라 나오드래.’

이야기의 내용은 옛날에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말뚝에 걸려 넘어졌는 데, 그 사람이 화가 나서 말뚝을 뽑았더니 그 말뚝에 옛말(옛이야기)이 줄 줄이 따라 나오더라는 거다. 이 짧은 이야기에 이야기의 속성이 그대로 담 겨 있다. 이야기는 가만히 놔둔 상태에서 시간만 흘려보낸다고 저절로 피 어나지 않는다. 말뚝을 뽑아 당겨 틈이 열려야 말뚝에 딸려서 자꾸자꾸 나 오는 것처럼 이야기 말문이 트여야 이야기가 입에서 줄줄 이어서 나올 수 있다. 처음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많이 어색하고 쑥스러운 건 당연하다. 하 지만 이야기 한 자락이 시작되어야 온 집안 곳곳에 이야기꽃을 피워낼 수 있다. 시작이 없으면 결과 또한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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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구연에 자신이 없어서 망설여진다면, 경험담 들려주기부터 시작 하여 책 내용 기억하여 들려주기, 이야기 내용 재구성·변용하여 들려주 기, 아이와 함께 구연하기를 단계적으로 시도해 봐도 좋을 것 같다. 필자가 설화 채록 현장에서 만났던 박순자 할머니. 당시 84세, 고령의 나 이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읽었던 책 내용을 상기하면서 한마디, 한마디 이야 기를 엮어 나가던 모습은 몇 년이 흐른 지금 다시 떠올려 봐도 그때의 감동 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진 아이들과 교감이 먼 훗날 아이들의 기억 속에 잔잔한 감동으로 자리하기를 희망해 본다.

참고문헌 박현숙, 「〈선녀와 나무꾼〉 전래동화의 설화 수용 양상과 문제점」, 『겨레어문학』 제 41 집, 겨레어문학회, 2008. ______, 「설화구연 전통에 기반한 옛이야기 들려주기 방법 연구」, 건국대 박사학위 논문 2012. ______, 「사라져 가는 이야기판의 새로운 길 찾기」, 『비교민속학』 제47집, 비교민속 학회, 2012. 브루노 베텔하임 지음, 김옥순·주옥 옮김, 『옛이야기의 매력1』, 시공주니어, 2001. 서정오, 『옛이야기 들려주기』, 보리, 1995. 신동흔, 「경험담의 문학적 성격에 대한 고찰」, 『구비문학연구』 제4집, 한국구비문학 회, 1997. 임석재, 『임석재 전집 3: 한국구전설화』, 평민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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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장세정

절제의 힘으로 일궈 낸 시적 성취 『목욕탕에서 선생님을 만났다』(강정규, 문학동네, 2013)

동화작가로 알려져 있는 강정규 선생님이 동시집 『목욕탕에서 선생님을 만났다』를 펴 냈다. 빙긋 웃음이 나는 제목, 궁금하다. 표지 를 열자 여는 글 자리에 시 한 편이 앉아 있다. 두세 달 동안 구십 편의 시를 써냈다는 작가의 열정을 증명이라도 하듯 첫 동시집을 엮은 소 회를 시로 풀어내고 있다.

참,

눈이 내리던 날

장세정 2006년 월간 〈어린이와 문학〉에서 동시로 4회 추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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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손녀를 보았다. 그와 함께 시도 왔다. 하느님은 참, 많은 걸 주신다.

처음에 소설을 쓰다 동화를 쓰고, 나이 일흔에 시집이라니, 빚만 늘고 참 미안하다.

여는 글 「참,」 전문

참, 좋다. 시집을 다 읽은 것처럼 마음이 꽉 찬다. 세상을 오래 산 작가의 겸손과 여유가 느껴진다. 가져도 늘 더 가지려 드는 요즘을 살면서 작가는 무엇이 그리 넘치고 또 미안한 걸까? 본문을 열자 금방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첫 시에서 느껴지는 옹골진 절제의 미! 넘.친.다! 「갓난아기」를 함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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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기

어제까지 없었는데 오늘 있다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손톱도 작다

‘시를 쓸 때 어려운 것은 말과 뜻이 어울려 아름다움을 얻는 것이다. 그 때 시의 생명이 되는 것은 긴장과 절제(「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천양희)’ 라고 했던가.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시인은 ‘없었는데’ ‘있다’고 보았다. ‘없 었는데’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탄생, 놀라움, 기적, 떨림 혹은 두려움, 이런 것들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발견만으로도 독자에게 환기하 는 바가 큰데 시인은 찾아온 이 ‘있음’을 극도의 절제된 언어로 1연에 배치 하여 독자에게 궁금증을 일게 한다. 그 ‘있음’의 실체는? 제목을 통해 이미 작고 귀엽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스런 아기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그러나 ‘시는 감정의 해방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천양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인은 감 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절제된 언어로 구체적 실체를 따라간다. 작가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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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눈과 코를 지나 마지막 ‘작은 손톱’에 가 닿았을 때 독자인 나도 꼼지 락거리는 어린 생명에 그만 빠져들고 만다. 대상에 대한 적절한 거리 두기 로 시작된 감정의 절제가 긴장된 13음절의 시어로 표현되었을 때 시의 효 과는 극대화된다. 세상살이를 대하는 시인의 삶의 태도를 짐작케 하는 빼 어난 시편이다. 「연우」, 「길」에서도 이와 같은 탄탄한 시적 성취를 느낄 수 있다. 시선은 세계관과 맞물려 있다. 억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그쪽 으로 몸과 마음이 쏠리게 되어 있으니까. 이 시집에서 시인은 ‘남은 밥 갖 다 주고’ 싶은 도둑고양이, ‘아가미 이미 찢어진’ 붕어, ‘등에 바늘 꽂’힌 잠 자리, ‘모래 잔뜩 묻혀 가지고 뒹’구는 지렁이, ‘내 발에 밟혀 죽’을 것 같은 개미, ‘쥐 파먹은’ 참외, ‘눈꼽 끼고/ 털 빠지고/ 앞이 안 보여 침을 흘리’는 늙은 개, ‘돌아보지도 않고/ 어디로 가는지/ 관심도 없’는 똥, ‘요양병원에 누워 계’시는 할머니 들을 바라보고 있다. 살아 내는 것이 녹록치 않은 생 명들에게 시인의 마음이 닿아 있는 것이다. 또한 단순히 편들고 감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미물이라는 이유로 약하다는 이유로 한쪽으로 내쳐진 건 인간의 이기심과 문명임을 「까치집」, 「전기」, 「어떻게 되는 거 지?」에서 밝혀 말하고 있다.

까치집

빈집 있으면 고쳐 살고 알도 낳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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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집 없으면 나뭇가지로 새집 짓고

오순도순 새끼랑 살다 그냥 이사 가고

팔고 사지 않아 비싼 집도 없고 셋집도 없고

- 「까치집」 전문

전기

그 섬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대요,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고길 잡으면 이웃과 나눠 먹었대요, 전기가 들어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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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을 잡아도 혼자 먹는대요, 냉장고에 넣어 두고

- 「전기」 전문

비슷한 맥락의 시 「종교에 대하여」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친구들이 종 교에 대해 이야기하며 절, 교회, 성당, 원불교 다닌다고 말할 때 동생은 ‘난 영어 학원!’이라고 말한다. 어이없는 동생의 발언은 말이 안 되는 소리지 만, 어린 나이에 영어 학원을 신념처럼 믿고 다니는 현실을 돌아보았을 때 정말 말이 되는 역설을 낳는다. 모두가 웃고는 있지만 마음 한구석은 더 짠 해지는 울림이 있다. 어쩌면 작가는 이 모든 것에게 빚진 맘이었을까? 그 래서 미안하고 또 미안해하는 것은 아닐까?

자전거 연작으로 대표되는 단시도 매력적이다.

자전거 1

뒷바퀴가 끈질기게 쫒아온다 - 「자전거 1」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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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2

달리지 않으면 쓰러진다

- 「자전거 2」 전문

자전거 3

쓰러지는 쪽으로 쓰러지면 일어선다

- 「자전거 3」 전문

무엇이 나를 쫒아오는지도 모른 채 넘어지지 않기 위해 속도에 맞춰 달 려가는 아이들과 우리의 일상을 이토록 단순 명쾌하게 표현하다니! 어디 에도 비유나 수식어가 없다. 대상을 삶의 본질에 대입한 작가의 통찰만 있 을 뿐. 하이쿠보다 짧은 이 시편들은 시의 울림이 결코 수많은 수식과 긴 호흡에만 있는 것은 아님을 다시 한 번 보여 준다. 속도 속에 살다 보니, 속도의 주체이면서도 정작 우리는 자주 어긋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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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어긋남의 심리를 제 때 포착해 표현한 동시들도 읽어 볼 만하다. 바른 말과 옳은 말씀이 ‘말대 답’과 ‘잔소리’로 변하는 「말」, 첫 마음이 외부의 영향에 의해 맥없이 무너 지는 「처음처럼」, 똑같이 밥해 먹고 출근하고 유치원 가고 맥심 커피 마시 는 ‘우리 아파트 사람들’을 노래한 「똑같구나, 똑같애 2」, 여유가 없어 나그 네를 그냥 보낸 「달밤」 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빼어난 시편들에 비해 「목욕탕에서」, 「사춘기 2 」,「개미」 등은 마 지막 행 처리가 다소 안이하고 공감이 안 돼서 아쉬움이 남는다. 전체적으로 이 동시집에서는 아이 화자를 선택했을 때보다 담담히 어른 화자로서 시인의 목소리를 들려줄 때 훨씬 시의 깊이가 생기는 것 같다. 아 이들도 충분히 생각해 보고 공감할 시편들이라면 누구의 목소리든 상관없 지만 말이다. 오늘처럼 좋은 시집을 보면 가슴이 뛰었다. 한 편 한 편을 아껴 읽었다. 그러다 내게도 시가 찾아오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끌어안고 뒹굴곤 했다. 기뻐 환호하면서, 때론 고통으로. 이제는 끌어안되 덜 사랑해야겠다, 내 식 으로는. 사물과 대상 그것이 가진 사랑법을 내 몸에 붙여야 진짜 사랑임을 알겠다, 내 감정을 절제하고 언어를 벼리며, 그것이 깊어지도록 나를 놓아 줘야겠다. 그것을 생각하게 했다, 이 동시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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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최도연

독서의 일상화를 꿈꾼 한 교사의 치열한 기록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도란도란 책모임』(학교도서관저널, 2013)

몇 해 전 ‘바람직한 독서 문화를 위한 시민연 대’에서 마련한 세미나에 갔었다. 그곳에서 들 은 시민연대 대표 김상욱 교수의 발언이 떠오 른다. “누구에게나 책을 읽을 권리 그리고 읽 지 않을 권리가 있다. 또 책을 읽은 뒤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강제된 독서 교 육이나 독후 활동을 경계하는 말일 터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되도록 ‘읽지 않을 권리’ 를 누리려 한다. 이와 달리 스스로 나서서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한테서는 어떤 마음이 작동하는 것일까. 책 만드는 일을 하는 나로서도 궁금한 점이다. 재미를 찾는 마음? 지적 호기심을 채우려는

최도연 출판사에서 어린이 책을 만드는 편집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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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단순한 의무감? 물론 간단하게 표현할 수 없는 여러 마음이 뒤섞여 책을 읽게 한다. 내가 정말 궁금한 건 ‘자발적으로’ 책을 읽는 마음의 원천 이다. 멍하니 있거나, 누워서 빈둥거리거나, 널브러져서 텔레비전을 보거 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음악을 듣거나, 게임을 집중해 하거나, 웹 툰에 빠지거나, 운동을 신 나게 하거나, 친구랑 수다를 떨거나, 술을 마시 거나, 바람 쐬며 돌아다니거나, 돈 되는 일에 나서거나 하는, 수없이 많은 이러한 매혹적인 행위들을 마다하고 책을 집어 읽게 하는 원동력, 그게 무 얼까. 그 답을 알면 사람들한테 책을 읽도록 이끄는 데 잘 활용할 수 있을 것 이다. 그걸 줄곧 자극하고 강화하면 될 테니까. 그래서 그게 무언지 알려 주는 책이 있다면, 나뿐 아니라 부모나 교사, 사서 정도는 그 책을 시간을 내서 스스로 읽지 않을까?

아이들이 책 좀 읽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독서 권장 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좋은 책이라면 강제로라도 읽혀야 한다 는 쪽과, 책을 읽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마음에서 나온 이 상반된 방향 중 후자에 서서 활동해 온 중학교 국 어 교사가 있다. 독서 교육과 학교 도서관 살리기 운동을 오래 해 온 백화 현 선생님이다. 이분의 새 책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도란도란 책모임』은 학교에서 10년 넘게 꾸려 온 책 읽기 모임에 대한 기록이다. 몇 해 전에 나 온 같은 저자의 책 『책으로 크는 아이들』(우리교육, 2010)은 부제로 밝혔 듯 ‘가정 독서모임 이야기’이고, 이번 책은 그와 짝을 이루는 ‘학교 독서모 임 이야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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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내 궁금함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 도대 체 어떤 마음을 자극하고 어떤 방법을 썼기에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책 모임’, 그러니까 자율적인 독서 동아리를 꾸려 활동해 올 수 있었는지 궁금 하고도 궁금했다. 책모임의 필요성을 아무리 강조하고 잘 설득한들 독서 를 숙제나 일로 여기고 책 앞에선 졸리기만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니 말이 다. 그런데도 바쁘고도 바쁜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여러 해 동안 3~7명 의 소규모 책모임을 다양하게 만들고 참여해 왔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 었다. 지적 호기심과 성장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고, 또 독서는 결국 성적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로 이끈 것이 다일까? 더구나 이 책은 ‘어떻게 했는지’를 들려주기에 앞서 책모임이 성공했으며, 성공에 대해 여러 언론 이 호응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앞부분에서 강조해 들려준다. 이러한 구성 에 대해 살짝 거북스러워할 독자도 있을 법해서 아쉽게 여겨졌는데, 내 궁 금증은 그래서 더 커지기만 했다. 한데 책을 다 읽고서 알게 된 점은, 답이 멀리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 궁금증을 온전히 해소할 만한 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울림으로 다가 온 답은 바로 책 제목에 있는 ‘도란도란’과 ‘모임’ 그 자체였다. 책을 경쟁적 으로 많이 읽어서 토론하고 글 쓰고 교양을 쌓아 성적을 올려서 너도나도 유명 대학에 가자고 달려드는 엄숙한 혹은 속이 빤한 모임이 아니라, 그야 말로 책 읽고 수다나 떠는 모임을 연 것에 답이 있었다. 열쇠 말은 바로 친 구와 정서, 그리고 간식! 가뜩이나 외로운 오늘날의 아이들한테 고독한 일인 독서를 하라고 하면 흔쾌히 즐겁게 하기 어렵다. 그러니 편하게 친한 친구 몇몇이서 하자 하고, 지식과 정보가 아닌 정서를 얻고 누리는 데 집중토록 하며, 그러한 만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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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도록 간식(!)을 준다. 물론 간식이 필수 형식으로 강조된 건 아니지 만 나는 저자가 간식의 효용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손쉬운 당근책이라도 그것이 아이들 마음을 풀어 주고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는 느낌을 줄 수 있다면 되도록 놓치지 않을 형식 정도는 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바로 어른의 참여! 저자는 부모로서 자기 아이들과 함 께, 교사로서 학생들과 함께, 또 학부모들과 함께, 그리고 동료로서 다른 교사들과 함께 다양한 책모임을 꾸려 자신도 그 안에서 책을 읽고 이야기 를 나눴다. 학부모와 동료 교사들한테도 직접 참여할 것을 설득하고 또 설 득했다. 이는 독서라는 미끼를 아이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그물 안으로 던 져 넣은 것으로, 학부모와 동료 교사들도 저마다의 관계망 안에서 독서를 함으로써 개별적이되 다양한 책모임들이 거대한 일상적 관계망으로 직조 되도록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여기서 한 발 나아가 책과 학교 밖으로 눈 을 돌리게도 해서 개인적 활동인 독서가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의미를 띠 도록 했다. ‘도란도란’에 안주해 시야가 갇히지 않도록 하고, 독서가 연대 의 한 실천임을 경험하게 한 것이다. 백화현 선생님의 이러한 노력은 마치 뻥튀기 만들기와 비슷해 보였다. 뻥튀기는 옥수수나 쌀 알갱이에 불을 딱 들이댄다고 해서 만들어지지 않 는다. 그걸 뻥튀기 기계에 넣고 불을 은근하게 들이대고선 기계를 한참 돌 리고 돌려야 만들어진다. 기다리면서도 손놀림을 그만두지 말아야 급기야 ‘뻥!’ 하고 시원한 소리를 내며 구수한 냄새와 함께 뻥튀기가 와르르 쏟아 져 나온다. 이처럼 저자는 아이들로 하여금 쉽고 편한 독서와 수다를 쌓고 또 쌓아 단단한 독서와 유희적 토론으로 스스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배움 과 성찰을 해 가는 과정 자체가 은근하면서도 폭발적인 힘으로 이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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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산하게 하였다. 이러한 과정의 밑바탕으로 ‘정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이 나로서는 꽤 신선했다. 부모와 교사, 학교와 지역 사회가 아이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 해 애쓰고 아이들끼리 마음을 나누도록 배려하는 작업이 책모임의 밑바탕 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지당한 주장일 테지만 이 주장이 학생, 학부 모, 교사의 다층적 관계망 안에서 독서가 흔쾌한 행위가 되도록 하는 핵심 원리로 작동하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학생, 학부모, 교 사 모두 이기적인 공부와 성적, 성과와 형식에 쉽게 목매달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삶의 지혜와 따뜻한 마음을 아이와 함께 키우고 또 나누고 싶은 부모와 교사라면 이 책을 읽어 보면 좋겠다. 책모임의 필요성, 책모임의 다 양한 예, 아이들의 반응, 세밀한 실천 지침과 관련 자료 등이 빼곡하게 들 어 있고 술술 읽혀서 어렵지 않다. 다만 시행착오나 난제, 실천의 현실적 어려움이나 예상 못한 부작용, 이런 것들에 대한 고민과 지혜로운 대처 등 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적다는 건 이 책을 참조할 독자들에게 꽤 아쉬운 점이겠다.

이 책에 대한 글을 쓰면서 마지막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책을 알게 된 것과 거의 동시에 알게 된 ‘KBS 어린이 독서왕 대회’에 대 해서다. 이는 도란도란 책모임하고는 상극에 있는 것으로, 공영방송 KBS 가 주최하고 7개 교육청이 후원해서 초등학교 3~4학년과 5~6학년 아이 들한테 각각 20권의 선정 도서를 읽히고 그 내용에서 뽑은 문제를 누가 더 많이 맞히느냐로 경쟁을 시키는, 그래서 더 많은 문제를 맞힌 아이한테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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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 타이틀을 주는 퀴즈 대회다. 50회에 걸쳐 진행하고 올 9월부터 방송 할 것이며 선정 도서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사라고 KBS 홈페이지에 안 내된 이 대회의 내용을 보고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정 도서들은 예상 문제가 따라붙고 세트로 만들어져 서점들의 엄청난 홍보 속에서 팔려 나 가고 있다. 아무리 단순하고 무식하기로서니, 21세기에 어떻게 이렇게 저 급하고 천박한 대회를 기획할 수 있을까. 거대한 영향력으로 무장한 이런 반교육적 기획 앞에선 백화현 선생님이 10여 년 동안 꾸려 온 책모임 같은 활동의 희망적인 성과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출판사들의 상 업적 의도와 연결되지 않았을 리 없는 이 대회가 시민 사회의 강한 비판에 밀려,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즈음엔 꼭 무산돼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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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김민영

당신의 숲은 어디입니까? 『숲으로 간 코끼리』(하재경 글·그림, 보림, 2007)

지난겨울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갔 을 때였다. 처음엔 하루 종일 느긋하게 올레길을 걸으며 제주의 속살을 실컷 보리라 다짐했는데, 워낙 바람이 세게 불어서 그런지 다들 체력이 금방 바닥 났다. 그래서 편히 앉아 무언가를 관람 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현지 가이드의 소개로 서커스 공연을 보게 되었다. 외국에서 온 듯 피부가 까무잡잡한 남녀 아이들이 차례로 무대 위로 올 라오더니 아슬아슬 위험천만한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인간 탑을 층층 이 쌓고 맨 위에 올라서 있는 아이를 360도로 돌리는 건 약과고, 오토바이 김민영 여러 해 동안 출판사에서 어린이 책을 만들며 지내 왔다. 지금은 하던 일을 잠시 뒤로하고, 어떻 게 살지 즐거운 마음으로 탐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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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탄 아이들이 커다란 철제 구형 속에 우르르 들어가 동시에 전속력으로 회전하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보기가 힘들었다. 오토바이 바퀴와 철제의 마찰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금세 고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어느 한 명이 삐끗하면 바로 대형 사고로 이어질 터였다. 기껏해야 열두 살, 혹은 열세 살쯤 돼 보이는 앳된 아이들이었다. 아직 어린데 어떻게 저런 묘기를 할까 입이 쩍 벌어지긴 했지만 도무지 즐길 수가 없었다. 지켜보는 내내 돌덩이 하나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공연이 끝나자 무대에 섰던 아이들이 모두 관객석 앞으로 바짝 다가와 손을 흔들며 관객들을 배웅했다. 관객 중 누군가는 아이들에게 팁을 쥐어 주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허리 높이쯤 오는 난간 너머에 진열되듯 서 있는 아이들은 진한 화장을 한 채 인형처럼 웃고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 아이들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밖으로 걸어 나가는데, 아이들 외모에 관한 짓궂은 농담에 뒤섞여 아이들이 받은 팁이 고스란히 서커스 단장에게로 간다는 말이 얼핏 내 귀에 들렸다. 내딛는 발 걸음이 더 무거워졌다.

그로부터 몇 달 뒤쯤 영등포의 한 서점에서 『숲으로 간 코끼리』라는 그 림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제목이나 표지는 아주 평범한 인상이라 별로 흥미가 일지 않았지만, 표지 위쪽 모퉁이에 쓰인 ‘보림 창작 공모전 수상 작’ 타이틀이 갑자기 눈에 띄어 책장을 넘겼다. 책을 다 읽자마자 온몸에 찌릿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제주에서 보았 던 서커스단 아이들의 모습과 당시 다니던 회사와 일에서 느꼈던 갑갑함 이 번뜩 머리를 스쳤다. 존 버닝햄의 그림책 『알도』 이후에 그림책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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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받는 느낌을 받은 적이 거의 없던 터라 더욱 반가웠다. 아이들이 과연 좋아할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내가 감동받았으면 됐지 하고는 책을 사서 여섯 살 딸아이에게 선물해 주었다.

서커스 코끼리, 치유의 숲으로 들어가다

어렸을 때 원치 않게 서커스단에 들어와 날마다 고된 훈련을 받고 사람 들 앞에서 재롱을 부리며 청춘을 다 보낸 이름 없는 코끼리가 있었다. 더 이상 공연할 수 없을 만큼 늙어 버린 코끼리는 동물원에 팔려 갈 신세가 된다. 작가는 코끼리가 얼마나 불행한지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기보다는 덤 덤한 어조로 과거를 회상하듯 서커스단 코끼리의 고단한 삶을 쓱 훑고 지 나간다. 동물원에 가기 전날 밤. 다시 철창에 갇히게 될 생각에 잠 못 들고 눈물 짓던 늙은 코끼리는 서커스단에 오기 전 엄마와 함께 살던 숲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한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철창을 벗어나 마음껏 숲 속을 뛰어다니고 싶어. 단 한 번만이라도.” 코끼리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조그맣고 새하얀 요정이 거짓말처럼 나타 나 우리의 문을 열어 주며 말한다. “나를 따라와. 내가 널 숲에 데려다 줄게.” 코끼리는 요정을 따라 밤새도록 걷는다. 딱딱한 시멘트 바닥이 아닌 포 슬포슬한 흙바닥을 걷고, 자유로이 흐르는 강물을 건너고, 은은한 달빛이 비추는 마을을 지나 드디어 숲에 도착한 코끼리와 요정. 이때부터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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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단꿈과도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긴 코로 뿌뿌 물을 내뿜고 진흙탕 을 뒹굴며 목욕을 하고, 온갖 야생화가 만발한 향기로운 들판에서 숨이 찰 때까지 숨바꼭질을 하며 뛰어놀고,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몸의 열기를 식히고,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달콤한 열매들을 배불리 먹는다. 서커스단에 들어가면서 잃어버렸던 자유를 되찾은 코끼리 는 다시 아이가 된 것처럼 행복해한다. 작가는 코끼리가 우리에서 나와 숲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원경으로 묘 사해 숲에 대한 호기심을 점점 더 고조시키는 반면, 마침내 숲에 들어간 코 끼리가 마음껏 뛰어놀면서 자연에서 치유 받는 모습은 근경으로 묘사함으 로써 코끼리가 느끼는 자유로움과 행복에 흠뻑 젖어들게 한다. 숲을 배경 으로 한 매 장면들은 아늑하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작은 연못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말끔히 씻은 뒤 나무 그늘에 누워 까무룩 잠이 든 코끼 리의 모습은 마치 엄마 배 속의 태아처럼 한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편안하게 잠든 코끼리의 모습에 마음을 푹 놓고 있을 때, 뜻밖에 다음 장 에서는 서커스단이 발칵 뒤집히는 긴박한 장면이 펼쳐진다. 한 장을 더 넘 기면, 우리 밖에 홀로 핀 꽃을 향해 긴 코를 비죽 내민 채 눈을 감은 코끼리 가 보이고, 그 앞에서 서커스 단원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마치 자신들의 잘못을 사죄하듯이. 코끼리는 죽어서야 자신의 간절히 원했던 숲으로 가서 숲의 일부가 된 다. 급작스럽게 찾아온 코끼리의 죽음에 놀라고 당혹스럽긴 했지만, 코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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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의 마지막 가는 길이 마냥 슬프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죽음도 생명이 깃 든 존재라면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오랫동안 고단하게 살았 던 코끼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숲에서 편히 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코끼리가 죽기 전날 밤, 숲 속에서 펼쳐졌던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저 하룻밤 꿈이었을까? 언젠가 이런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이 수 명이 다해 죽을 때가 되면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생에서 가장 행 복했던 순간을 잠시 돌아본 뒤에 비로소 죽음을 맞는다고. 아마도 코끼리 도 목숨이 다하기 전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만나고 온 것은 아니었을까. 요정은 코끼리의 엄마가 아니었을까.

다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제주에서 서커스를 보는 내내 불편했던 이유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돈 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 아이들이 과 연 스스로 원해서 저 무대에 서 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 다. 물론 서커스를 정말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을 수 있지만 너무 어린 나이 에 혹독한 훈련을 감내하면서, 아이로서 누려야 할 행복과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스스로 택한 삶이 아닌, 누군가 선택해 준 삶을 사는 것은 그리 멋지지도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다. 코끼리가 (설령 하룻밤 꿈일지라도) 서커스 우 리에서 벗어나 숲에 들어가서야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렸듯이, 세상의 모든 아이도 언젠가 때가 되면 자신을 옭아매는 울타리를 벗어나 스스로 선택한 자기만의 길을 찾아 씩씩하게 걸어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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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행복이 소중한 만큼 다른 생명의 자유와 행복도 소중하다는 걸 이 책을 통해 느끼고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다. 이 책은 나에게 지금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물어봐 주었다. 그 래서 그래서 타성에 젖어사는 나를 되돌아보고, 내가 꿈꾸는 숲은 어디인 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딸아이는 이 그림책 을 처음 보고 코끼리가 너무 불쌍하다면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요즘도 가 끔씩 책장에서 꺼내 혼자 책을 펼쳐 본다. 이 책이 부쩍 커 나가는 딸아이 에게 훗날 어떤 질문을 던질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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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일지 | 김하늘

버림받은 사람들을 만나러 지리산에

드디어 벼르고 벼르던 지리산에 다녀왔다. 작년에 『지리산 소년병』이 나오고 가야지 가 야지 했다가 춥기도 하고 게으르기도 해서 못 갔던 지리산엘. 재작년에 『똥벼락』을 쓴 김회경 작가가 결 혼을 한다고 전화가 왔다. 내 고향 하동 총각 이랑 하는데 결혼식을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한다고. 그 전화를 받고 갑자기 벽송사에 가고 싶어 졌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딘가에 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날 때는 분명히 무슨 까닭이 있다는 것을 살아오면서 여러 번 겪은지라 두려 김하늘 『야!쪽밥』,『물싸움』같은 동화들과 『한강』을 비롯한 여러가지 역사책들을 썼고, 저작권관리회사인 모난돌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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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 반 기대 반으로 설레었다. 벽송사는 한국 전쟁 때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인민유격대 야전 병원이 있던 곳이다. 군경토벌대가 들이닥쳐서 환자들을 죽이고 불 질러 버린 절 이라고 들었다. 가끔 들리는 소문에 대낮에도 혼령들이 보인다고도 하고 그 둘레를 등산하던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고도 했다. 한국 전 쟁 때 죽은 사람들이 구천을 떠도는 것이라는 말에 오싹해지기도 했다. 하 지만 작가에게는 그런 일들이 호기심 반 창작 의욕 반으로 자연스럽게 다 가오기 마련이다. 화개에서 쌍계사까지 이어진 십 리에 벚꽃이 만개하여 ‘화개’라는 이름 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봄날만큼이나 아름다운 결혼식이 끝나고 평사리문 학관에서 하루를 묵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회포도 풀고 다음날 벽송사도 가려고 겸사겸사로. 소주 한 병을 챙겨서 벽송사로 갔다. 평사리에서 내비게이션에 벽송사 를 찍으니 80킬로미터가 넘었다. 지리산 바로 너머인데도 구례로 남원으 로 돌아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역시 지리산은 넓고 큰 산이라는 것을 실감 했다. 벽송사 올라가는 길에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 어릴 때처럼 꽃을 따서 입 에 넣어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진달래꽃은 향기롭다. 나는 배고픈 시절이 끝나 가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보릿고개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배부르 게 먹은 세대 또한 아니다. 진달래 찔레순 같은 것들을 따 먹으며 자란 세 대다. 도시 사람들은 내가 아무 풀이나 뜯어서 입에 넣는다고 위험하지 않 느냐는 듯이 보지만 나는 그 풀들이 아무거나가 아니다. 벽송사 삼층석탑은 절 뒤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절 밖에 서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원래는 탑이 있는 언덕 위에 절이 있었는데 새로 지으면서 아 래쪽에 크게 자리 잡은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탑 둘레에 소주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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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에 따라서 흩뿌렸다. “자꾸 오라고 불러 쌌지 말고 편히들 쉬세요. 가끔 술 한 병 들고 찾아올 게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주차장으로 다시 내려오는데 가슴에 맺혔던 무언가가 뻥 뚫리는 것 같 은 기분, 숙제를 해치운 것 같은 후련함이 들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그저 한국 전쟁 때 희생당한 분들한테 술 한잔 대접한 것이 내 기분을 좋게 만 든 것이라고만 느꼈다. 그 희생자들 가운데는 인민유격대도, 군경토벌대 도 있을 것이다. 죽어서는 정치도 이념도 분단도 없을 테니 모두 한 나라 한 동포로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천안쯤에 왔는데 갑자기 지리산 얘기를 써야겠다 는 충동이 확 일어났다. 그때야 왜 벽송사 혼령들이 나를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옆에 앉은 별숲출판사 사장인 방일권 선생님을 보고는 이제 알았 다고, “큰애기 복순이가 지리산 바깥에서 일어난 한국 전쟁 이야기를 쓴 것이 니 지리산 안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써 달란다.” 방일권 사장도 좋단다. 쓰면 원고 좀 보여 달라고도 했다. 나는 아주 게으른 작가라서 장편을 쓰려면 몇 년이 걸린다. 그런데 이 책 은 석 달이 채 안 결렸다. 뒤통수에서 이야기가 들어와 내 머리를 지나서 그냥 써지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제목을 ‘산꽃’이라고 정했다. 산에서만 핀 꽃, 지리산 안에서만 피었다가 스러져 버린 꽃들이라고 인민유격대를 규정했다. 그러다가 그들 이 시대를 마중 나온 사람들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져서 또 ‘마중꽃’이라고 도 정했다. 봄에 필 꽃들이 안심하고 피라고 추위 견디며 먼저 피는 매화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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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표지에 그림을 그린 김종도 선생님이 ‘지리산 빨치산’으로 하라 셨다. 그건 너무 세다. 그리고 주인공인 기주가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만 지낸 것은 아니니까 좀 어색했다. 그래서 ‘지리산 소년병’이 되었다. 역사 관련된 책을 쓰면 나랑 같이 역사 공부하는 사람들이랑 현장에 가 보는 기행을 했다. 동화 작가이신 이가을, 임정진, 이창숙, 이성숙, 김소연, 조지영 선생님 그리고 황철호, 윤해연, 박효진, 이은지 선생님 이렇게 열한 명이 즐거운 나들이 길을 나섰다. 음식은 전라도가 맛있다는 진리를 쫓아 장수군 어딘가로 들어갔다. 비 빔밥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었다. 나는 맛없고 맛있는 음식이라는 게 없 는 사람이라 음식을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모르지만 대체로 좋다고들 하셨다. 다행이다. 오랫동안 답사를 다닌 경험으로 여행을 가면 인솔자로 서 늘 부담이 되는 것이 낯선 지방에서 먹는 음식인데.

함양나들목으로 나와서 지리산 칠선계곡을 향해 들어갔다. 벽송사로 오 르는 길에 진달래를 따 먹어 보았다. 진달래 꽃잎이 품은 봄 향기는 역시 진하다. 처음 왔던 재작년 봄처럼. 지리산 소년병에 등장했던 겨우살이들도 여전히 참나무 가지에 달라붙 어서 겨우내 기를 쓰고 살아낸 나무를 빨아먹고 있다.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다른 나무에 빌붙어서 자기 배를 불리는 겨우살이들이 악질 자본 가와 지주 같다는 푸념이 또 나왔다. 벽송사 삼층석탑은 옥개받침이 1층과 2층은 네 개고 3층은 세 개인 것 과 기단에 탱주가 하나인 것이 통일 신라 후기나 고려 초 양식이다. 그런데 표지판에는 벽송사가 세워진 조선 시대에 만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어설 픈 지식으로 시대를 엉터리로 읽는 오류를 범하기 딱 좋다. 그래도 얄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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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고집은 꺾지 못하고 ‘그 시대에 만들어져서 다른 데 있던 탑인데 절을 지을 때 옮겨 세웠던 것일 수도 있다.’고 우겨 본다. 탑 둘레에 술을 따르면서 잘 지냈냐고 영혼들에게 인사를 했다. 내가 쓴 책이 지리산에서 스러져 간 사람들을 욕되게 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라고 도 했다. 혹시 그런 면이 있다면 앞으로 또 지리산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에 게 잘 일러 주라고 부탁도 했다. 다음에는 노고단으로 갔다. 성삼재 휴게소에 차를 세워 두고 화엄사 계 곡이 보이는 곳으로 올라갔다. 화창하고 눈부신 날씨가 계곡 아래 화엄사 와 구례 들판과 그 들판을 가로지르며 남해 바다를 향해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을 잘 보여 주었다. ‘큰애기 복순이’에 그림을 그린 장호 선생님이랑 몇 해 전에 왔던 때보다 훨씬 더 잘 보였다. 원래 계획은 노고단까지 올라가지 않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좋은 날 노 고단 일몰을 안 보고 가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고 일행들을 꼬드겼다. 해 질 때까지 시간도 남았고 해서 노고단까지 올라갔다. 다행히 등산로 폐쇄는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만이라서 노고단 능선까지는 올라갈 수 있었다. 해를 등지기도 했고, 워낙 청명한 날이라 지리산 동쪽 끝에 있는 천왕봉도 선명하게 보였다. “이렇게 큰 산이니 변란이 생기면 지리산으로 피해 들어오고 싶을 것 같 다.” 그 말에 모두가 공감했다. 그리고 지리산은 설악이나 월악처럼 이름에 ‘악’ 자가 붙지 않았다. ‘악’ 자 붙은 산들보다 덜 험하다. 그래서 산신도 여 자인 노고(老姑)라고 했나 보다. 산이 사람을 포근하게 품어 줄 것 같다. 역시 헛된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나도 처음 보는 지리산 일몰이다. 하늘은 물론이고 산 아래 들판과 마을들을 벌겋게 물들이며 서산으로 기우는 해는 장관이라는 말만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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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로 모자라는 표 현이다. 카메라를 연 신 눌러 댔다. 눈에도 담고 가슴에도 담고, 사진으로도 담았다. 화개장터로 내려오 니 깜깜해졌다. 하동 까지 와서 재첩국과 은어튀김을 안 먹어 볼 수가 없다. 어릴 때 첫차에서 내린 아주머니가 양동이를 이고 동네를 돌 아다니며, “재칫국 사이소!” 하던 추억이 새록새록 이었다. 숙소인 평사리문학관은 악양 들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쪽 끝에서 가을에 거지가 들어가서 다음 해 봄에 맞은편 끝으 로 나올 만큼 풍요로웠다는 악양 들판이다. 한국 전쟁 때 ‘악양보투’는 유 명한 사건이다. 악양에서 7일 동안이나 쌀을 지리산 도장골로 져 올렸는데 토벌대가 불태워 버렸던 사건이다. 지금은 박경리 소설인 토지를 드라마로 만들 때 세트장을 세워서 마치 실제로 평사리에 최참판댁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쌍계사 앞에서 아침을 먹고 칠불사로 올라갔다. 화개에서 쌍계사까지가 십 리인 4킬로미터, 쌍계사에서 칠불사까지는 10킬로미터나 된다. 쌍계사 도 화개에서 제법 들어갔는데 칠불사는 두 배도 더 넘게 지리산 골짜기를 굽이굽이 들어가야 하고 산도 하나 넘어야 한다. 토벌대에 쫓겨서 그 깊은 곳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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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사로 들어가는 길에 빗점골이 있다.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 사령 부가 있었고, 계곡물을 이용해서 수력 발전도 했다는 곳이다. 남부군 사령 관인 이현상도 이 빗점골에서 사살당하고 말았다. 칠불사는 가야 임금인 김수로왕 아들 일곱 명이 이 절에서 부처가 되었 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내가 어릴 때는 칠불암이었는데 절이 커졌는지 칠불사가 되었다. 아(亞) 자 모양으로 된 방이 대웅전 앞에 자리 잡고 있 다. 힘차게 울리는 독경 소리가 온 절을 채우고 있었다. 소리만으로도 절로 경건해졌다. 일행들이 대웅전 안으로 절을 하러 들어갔다. 나보고 안 들어 가냐고 물었다. “내가 하늘인데 어디다 절을 해요.” 무신론자임을 우스갯소리로. 이창숙 선생님은 나왔다가 108배를 하러 다시 들어갔다. 부럽다. 마음을 다해 몸을 다해 신에게 기원할 수 있다는 것이. 나같이 무질서한 사람은 엄 두조차 못 내는 일이다. 마지막 일정으로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으로 갔다. 천왕봉이 올려다 보이는 산청군 중산리에 있다. 이름부터 무시무시하다. 평화기념관 정도 로 이름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아직도 그 이름 그대로다. 전시 방향도 이름에 걸맞게 아직도 전쟁 중이다. 구경을 하 고 나오면서 같이 간 선생님 한 분이 ‘빨치산비극전시관’으로 이름을 바꿔 야겠다고 하셨다. 휴전 협정을 할 때 지리산에 있던 사람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에 대 한 얘기는 전혀 없었다. 포로들은 서로 교환하기로 했고, 남쪽에서는 북으 로 가지 않겠다는 포로들을 반공 포로라면서 풀어 주었다. 그러나 지리산 인민유격대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북한이나 유엔군이나 말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남쪽이나 미국 정부에서 보면 엄연히 빨갱이들이고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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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이니 죄를 묻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였다. 북쪽에서는 자본주 의에 물든 사람들이고 전쟁에서 세운 공도 별로 없는데 북쪽으로 데려가 면 상을 주어야 하니까 거북했던 것이다. 결국 지리산에서 죽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직도 토벌이라는 이름과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지리산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옆집 사람이었고 우리 동네 사람이었고 우리나라 사람이었지만 전쟁 과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에서 쫓겨난 사람들이다. 다시 고속도로로 나와서 함양을 지나 서울로 향했다. 어제는 함양으로 나와서 서쪽으로 빙, 오늘은 하동에서 출발해서 동쪽으로 빙, 이렇게 지리 산을 한 바퀴 돌았다. 넓고도 큰 산,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품어 줄 것 같은 지리산. 전쟁과 분단으로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지리산 안에서라도 따뜻하게 품어 주기를. 남들은 아름답다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아프기만 한 지리산을 향해 갈 때마다 되뇌어 보는 기원을 또 한 번 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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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속 한 장면 | 조은숙

뿌리 있는 그림책을 고민하다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는 2학년 국어 교과서에 ‘불개 이야기’라는 제 목으로 실리는 등, 그림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웬만하면 알고 있는 조은숙 프리랜서 그림책 편집자. 또한 그림책 연구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그림책을 공부했다. 한 국 그림책의 역사에 관한 탐구를 주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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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다. 그럼에도 굳이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이 책이 우리나라 그림책 역 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위치 때문이다. 이 책은 전래 동화인 ‘불개’를 우리나라 토종견인 삽사리에 대한 탄생 설 화로 재창작한 것이다. 주인공 삽사리의 모습은 〈문배도〉와 〈영모도〉 등 민화에서 나오는 삽살개의 모습에서 착안하였으며, 고구려 벽화 사신도에 그려져 있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모습이 그림책 화면에 성공적으로 도입되어 시선을 압도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기획부터 글, 그림 모두 우리 것에 대한 작가의 탐구와 애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밀듯이 들어오는 외국 그림책을 바라만 볼 수 없어서 이 일을 시작했습 니다. 우리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의 ‘찌든’ 상업 문화를 일방적으로 쥐어 줄 것 이 아니라 우리네 정서에 바탕을 둔, 우리 ‘냄새’가 솔솔 나는 뿌리 있는 그림 책으로 건네주어야 합니다.” (정승각 인터뷰 글-한겨레신문, 1993. 11. 2)

그는 이러한 탐색에 대한 결과물의 하나로, 1993년 어린이 책 전문 서점 ‘초방’에서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라는 주제로 그림책 원화전을 개최 한다. 또한 전시 기간에는 〈어린이 미술과 그림책-뿌리 있는 그림책, 왜 필 요한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열기도 했는데, 당시 일천했던 일러스트레이 션에 대한 인식 수준을 생각하면 이 같은 일들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일러 스트레이터로서의 주체적 인식과 이에 대한 공개적 선언, 그리고 그림책 그림에 대한 자긍심 등 그는 이후 다른 많은 작가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그림책 속 한 장면•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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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의 출간은 류재수 선생과 더불어 우리 그림책 에서도 자기 색깔과 연출력으로 책을 만드는 그림책 작가가 있다는 화두를 던져 주었다.” (박혜준 인터뷰, 우리나라 그림책 100년 ⑧-월간 〈도서관 이야기〉, 국립어 린이청소년도서관. 2011. 11)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비단 정승각뿐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까지의 우리 창작 그림책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작가 중에는 당 시 활발했던 사회적 참여 활동에 대한 실천적 혹은 심리적 대안으로서 일 러스트레이션을 선택했던 작가들이 여럿 있었다. 『백두산 이야기』(류재수 글, 그림/통나무출판사, 1988, 이후 보림, 2009), 『솔이의 추석 이야기』(이억배 글, 그림/길벗어린이, 1995), 『만희네 집』(권윤덕 글, 그림/ 길벗어린이, 1995) 등 이 시기를 대표하는 많은 그림 책이 이러한 사회의식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는 그림책 역시 사회적 산물이라고 할 때, 당 시 작가들의 정서, 나아가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최선의 반영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한국 그림책의 성격을 ‘우리 것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그것을 담을 것인가?’ 같은 정체성에 대한 탐구로 규정한다고 했을 때, 『까 막나라에서 온 삽사리』는 이를 대표하는 그림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정승각의 이러한 의식은 『강아지똥』(길벗어린이, 1996), 『오소리네 집 꽃밭』(길벗어린이, 1997) 등 이후 작품에서도 관철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뒷이야기를 소개하자면 이 책은 1990년대 당시 출간할 출판사를 찾지 못해 고심해야 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불과 20여 년 전에 는 너무 낯선 것이었다는 격세지감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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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기다립니다 월간 〈어린이와 문학〉은 어린이 문학을 사랑하는 여러 동시인, 작가, 평론가, 독 자가 뜻을 모으고, 힘을 모아 만들어 가는 잡지입니다. 신인에게는 발표의 장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자유로운 담론의 장을, 그리고 어린이를 창작과 비평의 중 심으로 되불러옴으로써 어린이 문학의 지평을 넓혀 가고자 합니다. 월간 〈어린 이와 문학〉은 어린이 문학을 사랑하는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 가는 잡지가 되고 싶습니다.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응모 분야 •동화 : 원고지 40장 내외 •동시 : 3편 (1인 3편) •청소년 소설 : 원고지 70장 내외 - ‌동화, 동시 3회 추천. 청소년 소설 2회 추천 완료시 〈어린이와 문학〉의 추천 작가, 추천 동시인으로 모십니다. •어린이 글 : 시, 일기, 생활문 - ‌어린이와 문학에 글이 실린 어린이에게는 작가 사인이 담긴 동화책을 보내드립니다. ■마감일 매달 10일 (청소년 소설은 1년에 두 번, 1월과 7월에 원고를 받습니다.) ■심사 보내 주시는 작품은 심사위원들이 가려 뽑아 심사평과 함께 싣습니다. 심사위원은 달마다 바뀌며, 동화는 두 분이 함께 심사합니다. 실리지 않은 글에 대해서도 평을 실어 드립니다. ■보내 주실 곳 보내실 때 이름과 연락처를 꼭 적어 주세요. •동화 : 이퐁 leepong@hanmail.net (010-8946-2507) •동시 : 서미애 go-mu-jul@hanmail.net (010-7275-2230) •청소년 소설 : 강윤정 justine02@hanmail.net (010-6412-8773) •어린이 글: 주미경 mediusju@hanmail.net (010-8893-1516) ※ 본지에 실린 모든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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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탐구_ 나를 매료한

| 안성훈

아이들이란 바로 이런 것! 『김 배불뚝이의 모험』(송언, 웅진주니어, 2012)

매일 변신하는 아이

세상에 이런 아이가 또 있을까? 『김 배불뚝이의 모험』을 읽다 보면 절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국가 대표 장난꾸러기 김 배불뚝이는 담임 선 생님의 음료수를 천연덕스럽게 뺏어 마시고, 툭 하면 배 아프다고 보건실 가고, 꼬박꼬박 말대꾸하며 교실 밖으로 나가 버린다. 그런데 이상하다. 선 생님을 휠체어에 태워 팔아 버리려고 하는 이 황당한 아이가 마냥 밉상인 건 아니다. 한 권 한 권 모험을 따라가다 보면 김 배불뚝이가 어린 시절 우 리 모습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김세찬이 본명이지만 아기 돼지처럼 통통한 몸매 때문에 배불뚝이라 불 리는 이 친구는 매일매일 변신한다. 하루는 『심청전』에 나오는 심 봉사가 안성훈 2012년에 6회 웅진주니어 문학상을 받으며 동화 작가로 등단하였다. 쓴 책으로 『거꾸로 세계』(가 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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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눈을 감고 더듬거리다가 또 어떤 날에는 물개가 되어 바닥을 쓸고 다 닌다. 미술 시간에는 화가 난 수탉이 되었다가 또 다른 날에는 도깨비가 되 기도 한다. 친구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강아지도 되고 오뚝이도 되며 장난 을 치려고 고장 난 물건이 되었다가 느닷없이 신종 플루로 변신한다. 전우치나 홍길동 같은 전래 동화 속 주인공들은 도술을 부리지만 김 배 불뚝이에게는 도술이 필요 없다. 목청껏 “나는 이제 물개다!” 하고 외치기 만 하면 된다. 배불뚝이의 외침에 교실은 순식간에 수많은 아기 물개가 뛰 노는 바닷가로 변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업을 방해하는 탓에 배불뚝이 를 싫어하는 친구들도 배불뚝이를 보고 까르르 웃고 따라 하며 즐긴다. 배 불뚝이는 말 한마디로 친구들 머릿속 풍경을, 반 분위기를 휙휙 바꿀 수 있 는 엄청난 마법을 가진 아이이다. 배불뚝이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가 되고 싶다면 그 어떤 사람의 말보다 자기 자신의 선언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말이다. 어쩐지 배 불뚝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OO이다!”라고 외치며 수백 수천 번 변 신할 것 같다. 그러면서 점점 멋진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선생님 말을 죽도록 안 듣는 사고뭉치 김 배불뚝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다.

놀이를 만드는 아이

배불뚝이에게 학교는 답답하고 지루하고 숨 막히는 곳이다. 그래서 툭 하면 교실 밖으로 나가 버린다. 그런데 배불뚝이는 공부가 싫은 게 아니라 지루한 게 싫다. 노는 것도 늘 하던 대로 놀면 지루해서 못 견디는 아이가 바로 배불뚝이다. 고스톱 규칙 한두 가지만 바뀌어도 성질부리는 어른들 과는 비교할 수 없다. 단지 배불뚝이는 재미를 느끼는 지점이 다른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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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약간 다를 뿐이다. 교문 앞에서 등교하는 아이들 얼굴을 관찰한다든지, 수업 시간에 새끼 선생님이 되어 담임선생님의 수업을 보조한다든지, 배불뚝이가 재밌어 하 는 일은 뭔가 유별나다. 배불뚝이의 놀이는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한 놀이 라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결국 모두가 함께하는 놀이로 발전한다. ‘선생님 팔기 대작전’은 배불뚝이가 만든 놀이 중에 가장 기발하고 흥미진진하다. 배불뚝이는 빗자루 선생님이 홧김에 내뱉은 말을 놓치지 않고 선생님을 휠체어에 태워 학교 밖으로 나간다. 선생님을 팔아 맛있는 간식을 사 먹으 려고 시장을 종횡무진 하는 배불뚝이와 친구들. 이 부분에서 가장 멋진 캐 릭터는 다름 아닌 담임 빗자루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화를 내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황당한 장난에 말없이 따라 주면서 아이들 몸속 에너지를 모 두 뿜게 해 준다. 선생님과 배불뚝이가 환상의 콤비를 이뤄 친구들과 함께 한바탕 재밌는 모험을 즐기는 이 장면에서 빗자루 선생님의 애정이 담뿍 느껴진다. 선생님 팔기 대작전처럼 흥미진진한 모험은 아니지만 배불뚝이의 놀이 마법이 빛나는 장면이 있다. 바로 배불뚝이가 싸움 짱 동주와 학교 운동장 에서 노는 장면이다. 배불뚝이는 동주에게 운동장에서 주운 돌을 그냥 가 지고 노는 것보다 공룡이 살았던 시대의 화석이라 생각하면서 노는 게 훨 씬 더 재미있다고 말해 준다. 자신에게 이름 붙이기를 넘어 사물들에게도 새로운 이름과 뜻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집에서는 무서운 아빠 때문에 떨 고 학교에서는 못된 아이로 찍혀 외로운 동주에게 시간 여행을 선물할 수 있는 아이는 배불뚝이밖에 없을 듯하다. 어른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아이만의 특권이 상상력이라면, 배불뚝이 는 특권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아이이다. 아니, 그 특권이 무한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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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배불뚝이의 상상력은 우주까지 닿아 있다. 개 미와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신호등 안에 사람이 들어 있으니 생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운동장에 금을 긋는 것만으로 지루한 세계와 즐거운 세 계를 나눌 수 있는 힘을 동심이라 부르는 게 아닐까.

그리고 요즘 우리 아이들

김 배불뚝이와 친구들, 그리고 빗자루 선생님은 시대를 초월한 동심의 세계를 아주 잘 보여 준다. 떠들고 장난치고 싸우고 그러다가 혼나고, 벌 받고…… 또다시 웃고 떠들고. 아이들 노는 모습이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배불뚝이의 모험』은 주인공들이 뛰어다니고 키득거리는 사이사이에 요즘 아이들이 직면한 문 제를 아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천하의 장난꾸러기 김 배불뚝이도 어찌하지 못하는 싸움 짱 이동주가 바로 요즘 우리 사회의 단면을 아주 잘 보여 주는 캐릭터이다. 동화에 가정 환경 때문에 말썽쟁이가 된 아이들이 등장하는 것이 그렇게 드물지는 않 다. 하지만 이 작품 속 동주는 다르다. 동주에게는 선생님과 친구들, 그 누 구의 동정도 필요하지 않다. 동주는 자기 입으로 자기가 가진 슬픔을 모두 털어 버린다.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인 다른 사람의 위로와 보살핌으로 극 복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폭발시키는 것이다. 빗자루 선생님은 다시 한 번 침묵과 경청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빽빽 소 리 지르고 떼쓰는 아이는 자기 자식이라도 참기 힘든 게 분명한데, 빗자루 선생님은 묵묵히 동주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작품에 서도 언제나 뒤로 밀려나 있던 소위 말하는 ‘나쁜 아이’의 생생한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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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나면 나쁜 사람이 과연 누군지 되묻게 된다. 전혀 나쁠 것 없는 이 ‘나 쁜 캐릭터’들은 작품에서조차 착한 아이, 착한 어른의 눈에 비추어져 그려 졌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동주는 나쁜 캐릭터 연합의 노조위원장과 같은 보물 캐릭터이다. 주인공 김 배불뚝이의 집안 사정도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이 항상 늦게 퇴근하기에, 비라도 내리면 우산을 가지고 오는 사람 은 배불뚝이 할머니다. 그런 배불뚝이가 싸움 짱 동주의 처지를 이해한 걸 까, 아니면 그저 날씨가 좋아 교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걸까. 화를 내고 운동장으로 나간 동주를 따라가 놀다가, 친구와 함께 늘어지게 낮잠 한숨 자는 배불뚝이는 어린 나이에 친구 위로하는 법을 다 깨우친 모양이다.

선생님 품 안에서

김 배불뚝이와 친구들은 어떻게 학교에서 그토록 신 나게 놀 수 있었던 걸까? 마지막 권을 덮고 나니까 알겠다. 사실 이 아이들은 빗자루 선생님 품 안에서 신 나게 뛰어놀았던 것이다. 세상에 어느 선생님이 공부하기 싫 다고 뛰쳐나가는 아이를 좋아하겠는가. 온갖 장난으로 수업 방해하는 걸 로 모자라 선생님과 맞먹고 농담 따먹기 하려는 당돌한 아이. 이런 아이의 부모는 쉼 없이 학교에 불려 다닐 게 뻔하다. 하지만 빗자루 선생님은 꾸짖을 땐 꾸짖고 이끌어 줄 땐 이끌어 주면서 도, 좀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아이들을 풀어 준다. 그리하여 배불뚝이는 마 음만 먹으면 공부도 잘할 수 있고 그림도 잘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 로 깨달았고 동주 역시 화가 나도 친구를 때리지 않는 법을 배웠다. 교실이 무너지도록 아이들이 마음껏 놀면서도 아이다움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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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빗자루 선생님 덕분이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엄하 게 혼내고 통제했다면, 배불뚝이와 아이들의 머릿속 풍경은 무척 삭막해 졌을 것이다. 뛰고 뒹굴고 엎드렸다가 누웠다가 흉내 내고 깔깔 웃고…… 정말이지 ‘온몸’으로 아이다움을 보여 준 김 배불뚝이에게 정말 고맙다. 작품 밖 현 실에서도 김 배불뚝이와 같은 아이들이 낙오하지 않고 즐겁게 살아갔으면 하는 소망을 품으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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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매체 읽기 | 이대연

팟캐스트를 믿다

팟캐스트의 낭만적 한 시기가 끝났다. 2011년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 수〉)를 필두로 우리의 일상 영역 안으로 들어온 팟캐스트는 여러 정치 이 벤트의 열기를 타고, 빅뱅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급속한 양적 팽창을 하였 다. 한국의 다운로드 순위가 그대로 세계 순위가 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 다. 그것은 콜럼버스를 태우고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산타마리아(Santa Maria)호처럼 신세계로 인도할 기적의 매체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총선과 대선의 결과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대선의 종료와 더불어 팟 캐스트라는 뉴미디어에 대해 반성과 고찰의 시간도 갖지 못한 채 급속히 국민 TV 논의가 이루어졌다. 종편이라 약칭되는 종합편성채널을 염두에 둔 움직임이었다. 국민 TV 논의는 빠른 속도로 구체화하여 미디어협동조 합의 형태로 조직이 구성되고, 마침내 2013년 4월 방송을 시작했다. 신자

이대연 2010년 〈예술시대〉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을 쓰고 있고, 경기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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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의 때문에 심화하는 양 극화에 대한 대안으로 주목 받는 협동조합의 형태를 취 했다는 것은 매우 신선한 일 이며, 또한 정권과 광고주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균형 잡힌 보도를 할 수 있는 방송이 탄 생했다는 점에서 한국 미디 어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러나 뉴미디어의 가능성과 역량을 외면한 채 올드미디어로 회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물론 스마트 TV가 등장한 시 점에서 TV를 더 이상 올드미디어로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콘텐 츠를 생산하는 프로그램 제작자보다는 케이블과 위성을 소유한 몇몇 대기 업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는 한국의 협소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 수많은 프로그램 제작자 중 하나일 뿐인 국민 TV의 위상은 여전히 불안하다. 사정 이 그렇다 보니 순발력과 자발성을 지닌 1인 미디어로서의 팟캐스트는 여 전히 유효해 보인다. 팟캐스트는 아이팟(iPod)과 브로드캐스팅(broadcasting)의 합성어이 며, 인터넷을 통해 오디오 파일이나 비디오 파일을 제공하는 서비스로 사 용자는 RSS 피드를 통해 컴퓨터, MP3 플레이어, 스마트폰 등 디지털 단말 기에서 구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정의가 미디어2.0이라는, 마치 정글처럼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요령부득의 미디어 환경 속에서 팟캐스 트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팟캐스트의 등장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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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살펴보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다. 호모 나랜스(Homo Narrans)란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라틴 어로, 존 닐(John D. Niles)이 저술한 동명의 저서에서 유래하였다. 인간은 누구 나 이야기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으며,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호모 나랜스가 주요한 개념으로 인식되는 까닭은 ‘스토리텔링’의 개념과 그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을 특징짓는 지점 중 하나 는 주관성에 대한 강조이다. 즉, 정보에 대한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전달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주관적 소통을 통해 전달하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접속’이 ‘접촉’을 대신하기 시작하던 1990년대 중반, 통신이라는 서비스 를 통해 사람들은 ‘동호회’를 결성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공간적 한계를 넘어 동일한 취향을 지닌 사람들과 만나고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다. 취미 에 대해, 제품에 대해, 사회 현상에 대해, 학문에 대해, 그들은 생각을 공유 하며 스스로 콘텐츠를 생산해 냈다. 동호회가 갖는 의미는 단순히 취향 공 동체로 한정되지 않는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지형에서 소외되었던 개개인이 말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호회’는 인터넷 이 활성화되면서 자연스럽게 포털 사이트가 제공하는 ‘카페’로 이어졌다. 그리고 데이터가 독점되지 않고 더욱 손쉽게 공유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이동한 웹2.0으로 전환되면서 블로그나 위키피디아와 같은 새로운 매체가 등장했다. 이러한 변화 과정은 커뮤니케이션의 역사에서 중세에 독점되어 있던 정 보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면서 근대 사회로의 전 환을 촉발하였던 것처럼, 현대 사회를 전혀 새로운 형태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인류 문명 초기에 말이 먼저 발생하고 이후에 문자가 등장한 것과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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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달 속에서는 문자가 선행하고 저장에 많은 데이터가 요구되는 음성 메시지가 뒤에 온다. 그런 관점에서 팟캐스트의 등장은 디지털 혁명 이라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사건이었을 것이다. 신문과 라디오의 경우처 럼, 문자 중심의 하이퍼텍스트로 이루어진 웹을 통해 활동하던 동호회, 카 페, 블로그가 보다 자연스러운 소통 방법인 음성을 통해 정보와 의견을 나 눌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자가 사실적 정보 전달에 효과적이라면 음성 메시 지는 더욱 감성적이고 주관적이다. 굳이 롤프 옌센(Rolf Jensen)의 ‘감성 사회’를 들먹이지 않아도 팟캐스트가 지닌 스토리텔링적 성격은 분명해 보인다. 대선 국면이 한창이던 지난해 말 개최된 ‘한국 팟캐스트 1인 미디어 연 합’ 발족식이 열렸다. 팟캐스트가 주요 일간지와 지상파 3사를 제치고 이 슈 메이커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 때였다. 그야말로 ‘소 문’일 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마트폰 가입자가 3,000만을 넘고 정치 팟캐스트만도 300개를 상회할 때였으니, 믿거나 말거나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 팟캐스트 1인 미디어 연합’이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팟캐스트 를 1인 미디어로 규정했다는 사실이다. 개방·참여·공유로 요약되는 웹2.0의 등장과 함께, 관리자가 아닌 이 용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 정보를 축적해 가는 소셜미디어가 확장되어 왔다. 블로그나 위키피디아, UCC 등 소셜미디어는 전통 미디어 가 지닌 ‘one to many’의 획일성을 벗어나 ‘many to many’를 지향하면서 1인 미디어의 길을 열어 주었다. 누구나, 혼자서도, 손쉽게, 미디어의 기능 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중동 자스민 혁명이 소셜네트워크로 촉발되 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은 비주류 휴먼 저널리스트로 유명한 ‘미디어 몽구’가 대표적 1인 미디어이다. 그의 블로그에는 2,500만 이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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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했으며 게시물 조회 수는 5,000만 건에 달한다. 여기에 스마트폰의 휴대 성과 집적성이 결합되면 비로소 미디 어 2.0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일찍 이 맥루한(Marshall McLuhan)이 이야기했듯이, 사회는 인간의 커뮤니케 이션 내용에 따라 형성된다기보다는, 매체 자체의 성질에 따라 역사적으 로 형성되어 왔다. 매체가 인간의 사고방식과 생활 양식을 변화시키는 것 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혹자들은 지난 대선을 전통 미디어와 뉴미디어의 대 결로 독단하기도 한다. 기성 매체들과 탈제도권, 탈객관성, 양방향성, 탈 엘리트주의, 탈자본을 표방하는 뉴미디어의 대리전이었다는 주장이다. 바 꿔 말하면 ‘잘난 놈들의 객관적 논평’인 전통 미디어의 대리인 보수 진영 과 ‘찌질이들의 편파적 잡담’인, 팟캐스트로 대표되는 뉴미디어의 대리인 진보 진영이 대체를 대신한 격돌에서 뉴미디어가 졌더라는 얘긴데 - 미디 어 2.0 시대에 그건 납득하기 어렵고, 대한민국이 인구의 노령화로 미디어 접근성이 낮은 노인층을 공략하지 못한 게 패인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 이다. 그러나 뉴미디어와 올드미디어의 격돌이라는 논리가 비약이건 아니 건, 그들이 지적한 팟캐스트의 탈제도적, 탈객관적, 탈엘리트적, 탈자본적, 양방향적 성격은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편파적이다. 하지만 그 과 정은 공정했다.’는 〈나꼼수〉의 진행자 김어준 총수의 말은 음미해 볼 필요 가 있을 것이다. 팟캐스트의 ‘탈-’ 성격은 비정치 팟캐스트- 인문·사회·예술·문화· 스포츠 등의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대선 정국의 그늘에서도 지속해서 외 연을 확장시켜 온 비정치 콘텐츠들은, 선거 이후 독특한 매력으로 더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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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를 끌고 있다. 방송심의위원회의 심의를 받지 않으니 가벼운 욕설 이나 음담패설, 노골적 어휘 사용이 용인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흔한 상담 전문가나 심리학자 하나 안 나오는 야매 상담소, 자기편만 응원하는 스포 츠 중계,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관한 오타쿠스러운 수다 등 그야말로 다종 다양한 콘텐츠들이 청취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정치 콘텐츠들이 대선 의 급류 속에서 〈나꼼수〉가 구축해 놓은 기본 포맷을 거의 벗어나지 못한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청취자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던 비정치 콘텐츠들 은 더욱 여유롭게 자신들의 색깔을 찾은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이 진행하는 〈이동진의 빨간 책방〉, ‘게임한다고 무 시하냐, XX’이라는 이름부터 파격적인 게임 관련 종사자들의 수다 〈게무 시〉, 라디오 PD들의 영화 이야기 〈씨네타운19〉, 축구 해설 경력 13년 차 서 형욱 해설위원이 진행하는 〈주간 서형욱〉, 의사들이 출연해 각종 보건 의 료 상식을 전달하는 〈나는 의사다〉 등이 대표적인 비정치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음악 방송들은 저작권 문제로 10초 이상 음원을 내보낼 수 없다는 제약으로 지상파 3사의 라디오 콘텐츠들이 팟캐스트로 제공됨에 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팟캐스트의 외연 확장 과정에서 팟캐스트 전문 사이트 ‘팟빵’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동안에는 애플 iOS와 구글 안드로이드 OS’ 중심 모바일 OS가 양립함에 따라 팟캐스트를 듣기 위해서는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해 사용하는 번거로움을 참아 내야 했다. 그런데 팟빵은 콘텐츠를 통합적으 로 제시, 관리해 줌으로써 청취자와 사용자의 동시다발적 편리함을 제공 했다. 이것은 아마도 모바일 OS가 앱 중심에서 웹 중심으로 이동하는 하 나의 징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꼼수〉의 등장 이후 폭발적인 양적 팽창을 이룩한 한국의 팟캐스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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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거치며 수적 증가뿐 아니라, 다양성과 개성을 일정 부분 확보하였 다. 그러나 다양성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얼마나 진전되었는지는 아직 의 문이다. 또한 노령 계층의 접근성 문제와 저작권으로 음악 방송의 비활성 화는 난제임이 분명하다. 팟캐스트의 경쟁력이 언제까지 디지털 문화 부 족(cultural tribe)의 자존심을 지켜 줄 수 있을지는 물음표를 찍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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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매체 읽기 | 김민정

영화는 불귀의 객이 된 그들 넋을 위로하네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오멸, 2013)

1948년 겨울의 제주, 주민과 군인, 한쪽은 죽어야 했고 한쪽은 미쳐야 했다.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이하 〈지슬〉)는 그들 죽어야 했던 자들, 미쳐야 했던 자들을 흑백의 화면에 불러다 놓았다. 〈지슬〉은 60년 세 월이 훌쩍 흘렀건만 아직도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역사, 제주 4・3사건 그 때 그 사람들 이야기이다. 3월 1일 제주도에서 20일쯤 먼저 개봉, 한 달이 안 돼 1만 관객이 〈지슬〉 을 보았다. 섬에서의 바람이 뭍으로 불어와, 4월 12일 현재 10만 관객이 〈지슬〉을 보았다. 4월 3일 당일에 누적 관객 7만 돌파, 사흘 뒤에 8만을 돌 파했다니 이 바람이 어디까지 갈까 궁금하다. 5만 관객이 봐도 흥행이라고 하는 독립영화. 상영관이 얼마 안 되는데 교차 상영까지 해야 하는, 독립영 화에서 10만이면 1,000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영화 〈지슬〉의 열풍 김민정 읽고 보고 들으며 또 걸으며,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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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어떻게 보면 좋을까?

제의로서 영���

〈지슬〉은 학습 영화도 선동 영화도 아니다. 또 상업 영화도 아니다. 제주 사람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은 제의로서의 영화라 해야 할 것이다. 〈지 슬〉이 제주 4・3사건을 처음 다룬 영화도 아니고, 감독이 제주 4・3사건을 처음 영화로 다룬 것도 아니다. 오멸 감독은 그의 세 번째 영화 〈이어도〉에 서 처음으로 제주 4・3사건을 다루었다. 감독의 어느 인터뷰를 보면 〈이어 도〉는 그 혼자 보고자 만들었던 영화란다. 그 당시 감독이 있어 4・3을 영 화로 찍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고민으로. 제주 4・3사건을 은유적으로 다 루었던 〈이어도〉의 실험 이후, 감독은 그의 네 번째 영화 〈지슬〉을 찍을 수 있었다. 비로소 제주 사람으로서 제주의 아픔을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어도〉에서 감자의 싹이 튼 것이다. ‘지슬’은 제주말로 감자다. 제의로서의 영화 〈지슬〉은 4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고, 장마다 신위, 신 묘, 음복, 소지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영혼을 모셔 앉히다’라는 의미의 신 위(神位). 영화는 1948년 11월 ‘빨갱이의 섬’ 제주에서 죽어야 했고 죽여야 했던 자들을 불러다 놓는다.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의 신묘(神廟). ‘귀신이 남긴 음식을 나눠 먹다’라는 의미의 음복(飮福). 감자를 품고 죽은 어머니. 지금은 살아 있고, 또 살았으면 좋겠는 이웃들에게 어머니 품에 있 던 감자를 나눠 주고, 어머니 잃은 아들은 그들 몰래 운다. ‘신위를 태우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다’라는 의미의 소지(燒紙). 붙여 놓은 제목들이 내용과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장과 장 사이에 서 어느 쪽에도 있을 수 없는 숏들도 있다. 갈팡질팡하다 길을 잃은 숏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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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그렇다고 철저히 계산 된 숏도 아니다). 떼어다 전시회 를 해도 좋을 이미지 숏들은, 정 서적 힘으로 관객의 마음을 흔 들어 놓는다. 감독이 또 불러다 놓은 불귀 의 객이 있으니, 김경률 감독이 다. 김경률 감독은 제주 4・3사 건을 다룬 영화 〈끝나지 않은 세월〉을 찍다 죽었다. 오멸 감독 은 김경률 감독을 불러다 놓고 함께 〈지슬〉을 찍었다. 그래 영 화에 총괄 지휘로 김경률 감독 이 올라 있다. 죽은 자로서 무엇을 찍었을까, 우리는 〈지슬〉에서 그것을 볼 수 있었을까? 영화 시작하고 30분쯤 이제 그만 보았으면 할지도 모르겠다. 감당할 수 없을 슬픔이 밀려올 것에 지레 겁을 먹고. 그랬으면 아마 어찌하지 못할 슬 픔으로 몇 날 며칠 밤마다 뒤척여야 할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지방을 태운다. 영문도 모르고 죽어야 했던 그들 넋을 위로하 고, 잔뜩 슬픔의 겁을 집어먹은 우리를 위로한다. 겪지 않았다고 상처 없을 까. 산 자든 죽은 자든 그 상처를 보듬고, 이제 영화는 제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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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미와 해학

제주 4・3사건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영화 〈지슬〉로는 알 수 없다. 설명 해 주고 해설해 주지 않으니 불친절하고 의식 없다 할 수 있다. 감독이 불 러다 놓은 것은 그때 그 ‘사건’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들이다. 그때 그 사 건이 그 사람들에게 뭔 짓을 했나를, 우리는 그저 볼 수 있을 뿐이다. 〈지 슬〉은 역사를 재현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불귀의 객이 된 그들 을 불러다 놓고, 감독은 영화를 찍었다. 그래서 〈지슬〉에서는 웃음과 슬픔 이, 그것이 마치 하나라도 되는 것처럼 함께하는 것이다. 비극적인데 어처 구니없어(천진난만하다 할까) 웃음이 나고, 웃고 있는데 슬픔으로 가슴이 먹먹하다. 웃음이 슬픔이 멀찍이 떨어져 있지 않고 한데 있다. 산 자와 죽 은 자가 한데 있는 것처럼. 구름으로 덮여 알 수 없는 섬, 연기로 형체를 잃은 초가, 마루에 널브러져 있는 제기들. 초가의 방 옷궤에는 알몸의 여자 시신이 아무렇게나 구부러 져 있고, 군인 둘이 아무렇지도 않게 배를 깎아 먹는다. 사람의 피 냄새 배 어 있는 칼로. 괴이하고도 괴기스러운(?) 장면에,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 다. (〈지슬〉은 공포 영화였던가?) 이제 카메라는 산속으로 좁은 구덩이로 이동한다. 산속 좁은 구덩이에는 주민이, 그야말로 옹기종기 앉아 있다. 구덩이에서든 동굴에서든 주민은 관객을 마주하고 앉아 마치 연극이라 도 하듯, 돼지 이야기며 총각 이야기며 어찌 보면 순 쓸데없는 이야기들만 늘어놓는다. 웃지 않으려야 웃지 않을 수 없다. 영문도 모르고 죽어야 하는 데, 뭔 저런 소리를 하고 있나. 또 쓸데없이 왜 티격태격하나. 그러니까 〈지 슬〉의 해학은 비극에서 발생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해학으로 비극은 더욱 비극이 될 것이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 한데 있을 것 같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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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들을 감독은 자연스럽게, 마치 그러한 것처럼 버무려 놓는다. 삶이 그러 한 것처럼.

낯섦

우리에게 〈지슬〉은 왜 낯선 영화일까? 무엇이 영화를 낯설도록 하는 것 일까? 이야기가 낯선 것도 아니고, 이야기하고 있는 삶이 낯선 것도 아니 다. 아무래도 영화에 대해, 또 역사를 다룬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것 들을 〈지슬〉에서 볼 수 없으니 낯설다 하지 않을까? 제주 4・3사건을 다룬 것만으로도 평가해 줄 수 있지, 라고 별 기대 없이 보았는데 재미있으니(영화적으로) 놀라울 것이고, 듣도 못한 말, 보도 못 한 얼굴들인데(스타는커녕), 재미있을 수 있다니 놀라울 것이다. 스펙터클 로서의 역사, 신파로서의 역사가 아니어도 영화를 보고 웃고 울고 감동할 수 있다니, 그 역시 낯설 것이다. 지역의 예술이 뭐, 소박하고 투박하지, 그렇지만 그쯤이야 하고 인심(혹 은 인상) 좀 쓰고 보려는데, 절제되고도 세련되니 겸연쩍을 것이다. 중심 과 변방의 사고, 어찌 부끄럽지 않을까. 〈지슬〉의 그들(자파리연구소)은 변방에서 영화로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할 수 있는 것들로 하고 있을 뿐이다. 살고 있는 그곳에서, 그곳의 사람들(산 자든 죽은 자든)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서울이 아니라 제주 에서 먼저, 영화를 개봉하는 것도 당연하다. 제주의 결과 몸짓이 살아 있어 회화적이고도 연극적인 영화, 제주의 말이 살아 있어 서울말 자막이 붙어 줘야 볼 수 있는 제주의 영화는,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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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이야기 | 배훈

코딱지 한성이

올해 겨울은 추워도 추워도 너무너무 추운 겨울이었다. 날씨가 너무 추 워 차 시동이 안 걸린 게 서너 번, 아파트 베란다의 세탁기가 얼까 봐 매일 밤 전기 히터를 틀어 놓고, 물건 포장할 때 쓰는 뽁뽁이로 온 창문을 감싸 놓고서도 불안에 떨 정도였다. 날씨만큼이나 마음 또한 춥게 느껴졌던 겨 울이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들었던 학교를 떠나 새로운 둥지를 찾아 가야 하는 선택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갈 학교를 선택한다는 것 은 새로운 5년을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지내는가, 아니 남은 평생의 운명 을 뒤바뀔 수 있는 중요한 결정이 달려 있는 문제였다. 많은 고민 끝에 15년간 근무한 여주를 뒤로하고, 인근 지역 이천으로 학 교를 옮기기로 하였다. 연고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곳으로 옮긴 결정적

배훈

초등학교 교사. 교실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아이들 얼굴이 더 자세히 보이고 아이들 하는 말도 더 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아이들 속에서 겪은 이야기를 담아 『멋진 1학년이 될 거 야!』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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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이유는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다. 이 부분은 두고두고 인생에서 곱씹 어 보아야 할 부분인 것 같다. 새로운 학교 교감 선생님께서 1학년이 어떠냐고 물으셨다. 어린이와 문 학에 연재했던 교단 일기가 『멋진 1학년이 될 거야!』라는 책으로 나온 걸 아 시고, 엄청난 1학년 전문가로 생각하셨나 보다. 사실 1학년 아이들과 생활하 면서 특별하게 가지고 있는 기술이나 노하우는 없다. 단지 조금 더 기다려 주고, 더 귀 기울여 들어주려고 하는 노력이 있을 뿐이지. 어쨌든 1학년 관련 책도 낸 사람이니 이제 빼도 박도 못하고 1학년만 내리 하게 생겼다. 3월 4일.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아이들을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드넓 은 체육관은 벌써 많은 의자로 채워져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오는 아이들 하나둘 자신의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달고 의자에 앉았다. 새로운 고객을 맞이하는 입장에서 하나둘 모여드는 아이들을 보며 또 다른 설렘이 밀려 왔다. 1학년 1반 의자에 앉아 있는 아이 중 유독 눈에 띄는 아이들이 두 명 있 었다. 한 명은 멋진 바바리코트를 입고, 의자 손잡이에 팔꿈치를 대고, 한 쪽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남자아이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엉덩이를 의자 끝에 두고, 의자 등받이에 목을 괴고, 한쪽 손으로 계속 코를 파먹고 있는 아이였다. 두 녀석 다 공통점은 목소리가 엄청 크다는 것이었다. 처음 만난 아이들이 금세 저렇게 떠들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신기했다. 옆자리에 앉 아 계시던 병설 유치원 원감 선생님께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 말씀 하 셨다. “부장님네 반 아이들 올해 끝내주겠는데요. 쟤들 우리 유치원 출신 아니 에요?” 걱정하시는 말씀 속에는 당신이 가르친 아이들이 아니라는 당당함과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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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감이 묻어 있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원감 선생님의 걱정(?)대로 아이들과 치열한 하루하루 가 시작되었다. 특히 코를 맛있게 파먹는 우리 반 ‘코딱지’ 한성이는 기대 이상이었다. 일단 생김새부터 남달랐다. 반에서 제일 작은 키의 소유자인 한성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동글동글하게 생겼다. 눈도 황소만큼이 나 크고 동글동글했고, 손가락도 마디 하나하나가 전부 동글동글했다. 특 히 배는 더욱 볼록해서 가만히 서 있으면 발끝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생김새만큼이나 성격도 꽤나 밝고 명랑해 보였다. ‘우리 반에서 가장 ( ) 한 사람은 ( )다.’라는 문장에서 빈칸을 친구의 이름을 넣어서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예를 하나 들어주었다. 우리 반에서 제일 (잘생긴) 사람은 (배 훈)이다. 공감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시 예를 들어 주었다. 우리 반에서 가장 (머리 긴) 사람은 (소진이)다. 이해가 금방 되나 보다. 여기저기서 어울리는 말을 지어내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한성 이가 큰 소리로 웃으며 떠들어 댄다. “우리 반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은 오한성이다. 하하하!” 놀림의 대상이 될 만한 몸매의 소유자임에도 저렇게 호탕하게 자신의 단점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니. 다른 아이들도 한성이의 당당함에 놀리 기보다는 그런 모습에 아주 즐거운 표정을 보내고 있었다. “선생님, 한성이 코 파먹어요.”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부터 예쁜 짝꿍의 입에서 더러운 코 파먹는 얘기 를 만들게 하다니. 한성이에게 대놓고 얘기하면 마음이 상할까 봐 돌려서 얘기했다. “선생님이 학교 마치고 집에 가서 코를 풀면 휴지가 새까맣단다. 공기 중에 먼지나 안 좋은 게 콧물에 걸려서 못 들어가게 된 거야. 콧물이나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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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지는 더러운 게 묻어 있게 되지.” 그러나 이 녀석은 큰 두 눈을 말똥말똥거리며, 연신 손가락을 양쪽 콧구 멍과 입으로 들락거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야기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성이를 쳐다보았다. 코 파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래도 눈치는 있 는지 손가락을 살짝 내려놓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 갔다. 잘했다는 신호였다. 1교시 수업이 시작한 지 몇 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칠판에 공부할 문제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명의 소리가 아니 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모두의 시선이 한성이에게 쏠려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냐?” “선생님, 한성이 또 코 파먹어요.” 새삼스런 일도 아닌데 웬 호들갑을 떠느냐고 하려다 한성이의 손가락 끝을 보고 그만두었다. 고 조그만 콧구멍에서 나왔을 거라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덩어리가 달려 있었다. 절로 고개가 옆으 로 절레절레 흔들어졌다. 더 빨리 흔들었다. 한성이는 두 눈을 멀뚱거리며 거침없이 손가락을 쑤욱 어딘가로 집어넣고 있었다. “안 돼!” 내가 소리쳤다. “까악!” 아이들이 소리쳤다. “쩝쩝.” 한성이가 입맛을 다셨다. 1학년 입학 초, 적응 활동 시간이었다. 아이들의 안전한 등하교를 위해 횡단보도 건너기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약간 자극적이긴 하지만,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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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에 대한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위기 탈출 넘버원’을 보여 주었다. 횡단 보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 상황을 보는 아이들 인상이 심상치 않다. 특 히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아이 모습에는 자신의 일처럼 슬퍼하고 안타까 워하는 인상이 역력하였다. “저런 일이 생기면 죽은 사람은 몰라. 남아 있는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 이 엄청 슬퍼하게 돼요. 그러니 여러분도 횡단보도 건널 때 더 조심하세 요.” 이 정도면 횡단보도에서 신호 잘 지키기는 충분히 학습되었으리라. 그 때 조용해진 교실을 뒤흔드는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죽으면 너희는 다 좋아할 거야!” 조용히 듣고 있던 한성이가 흥분한 표정으로 교실 전체에 쏘아붙이는 말이었다. 깜짝 놀라 그런 말이 어디 있냐고, 친구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 겠냐고 달랬다. “애들이 나 코딱지 파먹어서 다들 싫어한단 말이에요!” “그럼 안 먹으면 되지.” 더욱 날카로운 소리로 되받아쳤다. “먹고 싶어 못 참겠단 말이에요!” 푸하하핫. 친구들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 없는 그 맛의 정체가 무엇일까? 조용히 한성이를 불러 물었다. “코딱지가 무슨 맛이 나냐?”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고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고기 맛이요.” 흐흐흐. 설마 그런 맛이 나려고. 아무리 옛 기억을 되살려도 쫄깃쫄깃한 감촉에 씹는 맛이 일품이며,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우러나는 그 고기 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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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던 거 같은데. 점심시간, 오늘따라 한성이의 발걸음이 바삐 움직였다. 세어 보니 네 번 을 왔다 갔다 했다. 뭘 그리 받아먹는지. 김치는 아닐 것이다. 예상대로 수 육이었다. ‘그래, 오늘 너 좋아하는 고기 실컷 먹어라.’

그땐 누가 알았으랴. 한성이의 코딱지 파먹기는 그 무엇인가로부터의 결핍을 표현하는 사소한 신호탄에 불과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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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문학〉 운영위원·후원회원 강벼리 고재은 공진하 권오삼 권혁준 김기정 김남중 김리라 김리리 김미혜 김바다 김상욱 김성호 김소연 김송순 김양희 김영순 김 옥 김유진 김윤정 김은아 김은영 김이삭 김일옥 김정숙 김제곤 김중철 김지은 김진경 김찬정 김하늘 김해등 김환희 김회경 김희정 남지현 문현식 박경희 박금숙 박상률 박수진 박억규 박영기 박정아 박종순 박채란 박철수 박향희 방일권 배봉기 백승남 서정오 송아주 송 언 송미경 송수연 양이랑 엄영숙 엄혜숙 염희경 오인태 원종찬 유영종 유영진 유은실 윤금숙 이경화 이상교 이성숙 이승국 이숙현 이영애 이지호 이진옥 이재복 이중현 이창숙 임어진 임연아 임정자 임정진 임해경 장슬기 장영복 장주식 전기남 정승희 정유경 정진희 정혜윤 조성은 조성자 조은숙 조태봉 지수연 진현정 채수아 최원오 최은경 최은영 최은희 최종득 하은경 한윤섭 하 제 홍경희 천안곰곰이서점 한일아동문학회

※ 특별 후원금 : 진주 〈콩세알〉

(가나다 순임) 〈어린이와 문학〉은 이 땅의 아동 청소년 문학인 모두의 힘으로 만들어 가는 잡지입니다. 독자와 운영위원이 되어 주세요. 후원회원도 좋습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운영위원 연회비 : 구독료 포함 12만 원 •후원회원 연회비 : 구독료 포함 10만 원 •계좌 : 국민은행 037402-04-166621 (예금주: 김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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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모두모아 94권

발행일 | 2013년 5월 1일 발행인 | 김진경 발행처 | 월간 어린이와 문학 운영위원장 | 김상욱 상임운영위원 | 공지희, 김지은, 엄혜숙, 염희경, 오인태, 지수연 감사 | 김하늘, 이상교

편집주간 | 임어진 편집기획위원 | 김미혜, 김영욱, 김중석, 송수연, 오진원, 유영진, 최원오 편집 | 강경아, 김민정, 김일옥, 박영란, 송아주, 윤혜숙, 이성숙, 이혜원, 장세정, 정혜원, 최유정 디자인 | 디자인 시(02–336–3095) 인쇄 | 천일인쇄 등록일 | 2008년 4월 30일 등록번호 | 서울 라11902

주소 |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369–35 202호 전화 | 02–6497–0011, 010–7297–6497 인터넷 카페 | cafe.daum.net/childmagazine

정가 | 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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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년 어린이들을 위한

화제의 신작

문영숙 글 | 이상윤 그림 | 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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