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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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별책부록 시안

동시 | 양재홍·이중현·김상욱·김현욱·서미애 동화 | 최은영·김혜란


동시


양재홍 1994년 〈문화일보〉 하계문예공모에 동시 「하늘 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제2회 눈높이아동문학상 을 수상하였고, 동시집 『즐거운 모험』, 『너도나도 숟갈 들고 어서 오너라』를 냈다.


잘생긴 나무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하늘 가운데로 가지를 쭉쭉 뻗어 둥그렇고 그윽한 세상을 만들지 산에서 들판에서 바닷가에서 낭떠러지에서도 온갖 새들 볼통스런 지저귐 다 받아 주지.


사랑은 심심한 고양이 울음소리에 메아리치듯 샛바람 건듯 건너와 말캉한 살구가 투두둑 떨어지면 할아버진 나무 아래 풀을 싹 낫질하고 아껴둔 새 짚을 폭신폭신 깔아 두셨다.


이중현 이중현 90년 초 〈교육문예창작회〉에서 ‘삶의 동화 운동’을 시작했고, 〈어린이와 문학〉 상임위원장을 지냈다. 동화집 『여울각시』, 『나의 비밀 친구』, 『마지막 은어낚시』, 『삼진아웃』 등을 냈다.


바이러스 우리 반에는 별별 바이러스가 다 있다. 수다 바이러스, 웃음 바이러스 공주병, 왕자병 바이러스 졸음 바이러스, 장난 바이러스 게임 바이러스, 군것질 바이러스……. 그래선지 바이러스 감염으로 캄캄한 모니터처럼 우리 선생님은 할 말을 잃을 때가 많다.


각도기를 들고 각도를 재다가 문득 잴 수 없는 각도를 생각했다. 좋아하는 가수 자랑하다가 다툰 나하고 내 짝꿍 사이엔 몇 도나 벌어졌을까? 용돈 많이 쓴다고 혼내는 아빠와 내 생각은 한 90도는 벌어지고 점점 말대꾸한다고 화내는 엄마하곤 100도 정도 벌어졌을까? 마주 보고 있어도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는 선생님하고 나하고는 180도일까? 360도일까?


김상욱 2010년 〈동시마중〉으로 등단했다. 『시의 길을 여 는 새벽별 하나』, 『문학 교육의 길 찾기』, 『숲에 서 어린이에게 길을 묻다』 등을 냈다.


때죽나무 껍질에 때가 묻은 것 같다는 때죽나무는 5월이면 방울방울 꽃을 피운다 겨울눈처럼 하얀 종 모양의 꽃을 이파리 밑에 조롱조롱 매달고 있다 바람이 불면 때죽나무 꽃들은 한꺼번에 달랑달랑 종소리를 낸다


수십, 수백의 희디흰 꽃들이 울려 대는 종소리에 때죽나무는 그예 울음이 터질 것만 같다


깨꽃 손톱만 한 아니, 눈곱만 한 꽃 올망졸망 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청평댁 할머니 몰래 한 줄기 꺾어 와 얼마나 많은 꽃 달렸나 헤아려 본다 하나 둘 서른일곱 서른여덟 서른여덟 송이의 꽃 서른여덟 송이의 별 서른여덟 송이의 우주


작고 하얗고 고소한 꽃 별 우주


김현욱 2007년 〈진주신문〉 가을문예에 시가, 2010년 〈매 일신문〉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현재 포항 달전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고 있다.


별 깨지고 부서지고 금가고 갈라지고 타지고 무너지고 결딴난 곳, 그곳에 사금파리처럼 별이 뜬다.


19일 오늘 며칠이지? 19일이요. 19번! 19번 없는데요? 그럼, 20번! 어, 너는 많이 읽었는데 앉을까요? 아니다, 그래도 읽어! …….


서미애 한겨레아동문학작가학교 10기를 수료했고, 2012년 〈어린이와 문학〉으로 등단하였다.


형이랑 나는 “거, 애들 좀 조용히 시켜요!” 아래층 할머니 또 올라오셨다 할머니 가신 뒤 떨어진 불호령에 쿵쿵 뛰어도 안 되고 와와 소리 질러도 안 되고 형이랑 나는 잔뜩 움츠린 새처럼 까치발로 종종종 어항 속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벙긋


그러다 파다닥 푸드덕 파닥파닥 하늘 나는 익룡이 되었다가 펄떡쿵 펄떡쿵 풀떡풀떡 바닷속 고래도 되었다가


숨바꼭질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 해님과 도토리들 숨바꼭질한다 도토리들이 숨을 차례 콩닥콩닥 도토리 마음 알고 나뭇잎을 덮어 주었다 바람이 콩닥콩닥 도토리 마음 알고 그늘을 만들었다 꽃나무가


콩닥콩닥 도토리 마음 알고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흙이 술래가 된 해님 꼭꼭 숨은 도토리들 찾고 찾았다 그러다 ‘못 찾겠다 꾀꼬리!’ 외쳐 대자 나뭇잎 속에서 쏙 꽃나무 뒤에서 쏘옥 흙 속에서 쑥 한 다리로 선 도토리들 고개 내밀고 웃는다


동화


최은영 2006년 푸른문학상과 황금펜아동문학상을 받으며 동 화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2008년 『살아난다면 살아 난다』로 우리교육어린이책작가상을 받았다. 작품집 으로 『게임파티』, 『수요일의 눈물』, 『이유는 백 만 가지』, 『우토로의 희망노래』 등이 있다.


잃어버린 열쇠


열쇠가 없다. 혹시나 싶어 가방을 뒤졌다. 그래도 없 다. 아무래도 형석이랑 한 판 붙었을 때, 떨어뜨린 모양 이었다. 동주는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왔다. 빌라 현관 앞에 털썩 쭈그려 앉았다. 길게 한숨이 나왔다. 엄마가 오려면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그런데 엄 마가 와도 문제였다. “너희 엄마, 당장 잘라 버리라고 할 거야!” 동주에게 깔려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형석이가 소리 를 질렀다. 하늘을향해 추켜올렸던 주먹에서 스르르 힘 이 빠졌다. 그 틈을 타고, 형석이가 동주를 밀어냈다. 형 석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탁탁 털었 다. “뭣도 없는 주제에 까불기는!” 가소롭다는 듯 형석이는 입술을 실룩였다. 동주와 형 석이를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이 구경거리를 잃은 듯 뿔뿔이 흩어졌다. 형석이도 제 친구들 이랑 어깨동무를 하고는 낄낄거리며 몸을 돌렸다. “일어나.” 재혁이가 동주의 팔을 잡았다. “재수 없는 자식.”


재혁이가 멀어지는 형석이를 흘겨보았다. 동주도 힐 끗 형석이를 보았다. 형석이는 뒷모습조차 기세등등했 다. 전부터 항상 그랬다. 형석이네는 아주 커다란 가게를 서울과 경기도 지역 에만 여덟 개를 갖고 있다. 학기 초에 자기소개를 할 때 마다 형석이는 그 사실을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형석이 는 돈 씀씀이가 컸다. 툭하면 반 아이들 전체에게 피자 를 사 주기도 하고, 체육시간이면 비싼 스포츠 음료를 공짜로 나눠 줬다. 형석이를 따르는 아이들도 많았다. 물론 부잣집 아들이라고 거들먹거리는 형석이를 싫어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동주는 그 편에 속했다. 그런데 하필 동주의 엄마가 형석이네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오른팔과 가슴을 다친 아빠가 생 각보다 오래 병원에 있는 탓이었다. “꼴사납게 돈 좀 있다고 으스대기는!” 재혁이가 입을 비쭉이며 동주와 걸음을 맞췄다. 동주 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슴께가 뻐근했다. 보기보 다 형석이의 주먹은 매웠다. “또 너한테 심부름 시킨 거야?” 재혁이가 물었다. 동주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걸음만 옮겼다. “요새 부쩍 너한테 그러더라. 왜 그러냐?”


재혁이가 얼굴을 디밀었다. 동주는 대답할 기분이 아 니었다. “다음에 얘기하자.” 동주는 맥없이 대꾸하고는 집으로 왔다. 얼른 들어가 서 잠이나 자고 싶었다. 그런데 열쇠가 없었다. 동주는 고개를 번쩍 들어 하늘을 보았다. 파란 하늘 은 높고 맑았다. 동주의 마음도 하늘처럼 맑았으면 싶 었다. 동주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오늘따라 휴대전화도 집에 놓고 왔다. 가방에 읽을 책도 없었고, 지금 와서 재혁이에게 가고 싶지도 않았다. 동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집 앞에 앉아서 두 시간을 버틸 수는 없었다. 동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 다. 어느새 버스 정류장이었다. ‘아빠한테 가 볼까?’ 아빠는 버스를 타고 삼십 분 거리에 있는 병원에 있 었다. 동주가 가면 아빠는 분명 반가워할 것이었다. 하 지만 동주는 자신이 없었다. ‘이런 상태로 아빠한테 가면, 아빠가 걱정을 하겠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친구 가 자기 할 일을 자꾸만 동주에게 시킨다고, 그런데 그 친구가 엄마가 일하는 가겟집 아들이라 함부로 대할 수 가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참는 김에 조금만 더 참을걸.’ 안개처럼 후회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형석이의 숙제 까지 대신해 줄 수는 없었다. 동주는 입술을 앙다물었 다.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는 잘못 없어.’ 동주는 버스가 오는 쪽을 빤히 보았다. 마침 아빠가 있는 병원으로 가는 버스가 스르르 다가와 섰다. 집으로 돌아올 때도 내린 자리에서 같은 버스를 탔으니까, 이 버스에 계속 앉아 있으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 다. 동주는 버스에 올랐다. 손님은 몇 사람 없었다. 동주는 버스 뒷자리 끝에 앉았다. 엄마랑 병원에 갈 때도 동주는 늘 이 자리에 앉았다. “여기 앉아 있으면 버스 안이 훤히 다 보여서 좋아!” 엄마랑 나란히 앉아 동주는 노래하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빠가 반년이 되도록 병원에 있을 줄 상상도 못했었다. 동주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에는 사람이 많았다. 동네 시장 입구를 지날 때는 아주머니들이 많았다. 다들 반찬거리를 사러 나온 모양이었다. ‘울 엄마도 저런 적이 있었는데…….’


아빠가 입원하고 석 달 무렵이 지나서 엄마는 형석이 네 가게에 일자리를 얻었다. 형석이 엄마가 동주네의 사 정을 듣고, 마련해 준 자리라고 했다. 엄마는 형석이 엄 마 덕분에 편한 일자리를 얻었다며 좋아했다. ‘치, 아줌마만 착하면 뭐해. 아들이 나쁜 놈인데…….’ 또 형석이 생각이 치받았다. 동주는 주먹을 불끈 쥐 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조금만 더 가면 아빠가 있는 병원이었다. 동주는 내릴까, 말까 고민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기분으로는 아빠를 만나지 않는 게나을 것 같았다. 가슴에 물기가 고였다. 동주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눈에 힘을 줬다. 병원이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여러 명이 내렸다. 버 스에 남은 사람은 동주랑 젊은 아주머니 한 명 뿐이었 다. 다음 정류장에서 아주머니가 내렸다. “뒷자리 학생은 어디까지 가니?” 기사 아저씨가 마이크를 켜고 물었다. “더 가야 하는데요…….” 동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 아저씨 는 앞거울로 힐끔 동주를 쳐다보고는 버스를 출발시켰 다. 버스는 회차 지점에서 여러 명의 손님을 태웠다. 기 사 아저씨가 더는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놓 였다. 동주는 다소 느긋해진 마음으로 창밖을 보았다.


몇 개 정류장을 지나자, 거리에 커다란 천막이 보였 다. 천막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오른손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며 무엇이라 소리를 지르 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북을 두드리는 사람도 있고, 마 이크를 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동주는 유심히 그들을 살폈다. 천막에는 빨간 글씨의 걸림막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 었다. 걸림막에는 〈해고 노동자 전원 복직〉, 〈무단 해고 고용주 사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아무 잘못 없이 십수 년 동안 일한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마이크를 쥔 아저씨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차창 사이 로 흘러들었다. 곧이어 둥둥 북이 울렸다. 천막 주위에 는 경찰관들이 몇 겹으로 둘러서 있었고, 버스 정류장에 는 경찰차가 줄지어 있었다. “허구한 날, 저 모양이니 원.” 앞자리의 아저씨가 큰 소리로 불평을 했다. “아무 이유 없이 평생 일하던 직장에서 쫓겨났으면 저럴 만도 하지.” 아저씨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천막 속 사람들을 두둔 하고 나섰다. 두 사람은 부부로 보였다. “설마 아무 이유도 없이 쫓겨났을라고.”


아저씨가 퉁명스레 말했다. “요새 저러는 데가 한둘이 아닌 모양입디다. 우리 아 랫집 사람도 잘 다니던 직장에서 갑자기 그만 나오라고 통보를 받았다잖아요.” 아주머니가 퉁을 놓았다. 아저씨는 끙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버스는 복작거리던 정류장을 지나 한적한 도로 위를 쌩쌩 달렸다. 동주는 얼굴을 구긴 채 창밖을 보았다. 천 막 속 사람들을 보고 난 뒤부터 가슴이 요란하게 쿵덕거 렸다. “너희 엄마, 당장 잘라 버리라고 할 거야!” 형석이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아무 잘못 없이 십수 년 동안 일한 직장에서 쫓겨났 습니다.” 마이크를 쥐고 울부짖던 아저씨의 목소리도 들렸다. ‘어떡하지?’ 동주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로 엄마가 잘렸으면 어떡하지? 엄마 잘못도 아니 고, 나 때문에 그렇게 됐으면…….’ 가슴에 고이던 물기가 눈으로 차올랐다. 기어이 톡 눈물이 떨어졌다.


“집에서도 가깝고, 일하는 시간도 길지 않고, 일도 어 렵지 않고. 아주 좋아.” 형석이네 가게에서 일을 하기로 한 뒤, 엄마는 신이 나서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도 엄마를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맘에 들어 하던 일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학원 숙제를 대신 해 주는 것도 나쁠 것 이 없었다. 그만큼 동주에게 공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냥 해 주고 말걸…….’ 다시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또 다른 생각도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그 녀석 숙제까지 해 줄 필요는 없는 거잖아.’ 동주는 당당해지고 싶었다. 형석이랑 몸싸움까지 벌 인 건 잘못이지만, 하는 수 없었다. 형석이가 엄마 얘기 를 꺼내며 신경을 건드렸다. ‘어떡하지?’ 버스는 어느새 동네로 들어가고 있었다. ‘형석이는 나빠도, 형석이 엄마는 착하니까, 별일 없 을 거야.’ 동주는 형석이 엄마를 믿고 싶었다. 동주는 아랫입술 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버스가 집 앞 정류장에 멈춰 섰 다.


집을 향해 동주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버스를 타고, 끝까지 다녀왔으니 적어도 한 시간은 더 걸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아직 집에 없을 테고, 동주에 게는 여전히 열쇠가 없었다. ‘열쇠를 찾으러 가 볼까?’ 동주는 걸음을 학교로 옮겼다. 하지만 학교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진작 찾으러 올걸.’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동주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다른 때 같으면 오 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가 오늘따라 무척 긴 듯했다. “서동주!” 골목에 막 들어서는 순간, 엄마의 목소리가 동주를 잡았다. 동주는 얼른 몸을 돌렸다. 엄마가 뒤쪽에서 허 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엄마…….” “너, 어디 갔다 온 거야? 전화도 안 받고!” 엄마가 숨을 헉헉 몰아쉬며 물었다. “저기 그게…….” 동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엄마는 형석이네 가 게 계산대에 있을 시간이었다. 절대로 동주의 눈앞에 있 으면 안 되는 거였다.


“엄마가 왜…….” 묻기가 겁났다. 동주는 가만히 마른침을 삼켰다. “형석이랑 싸웠다며?” 엄마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로 잘린 거야?” 동주가 물었다. 눈물이 툭 떨어졌다. 형석이 엄마도 결국은 형석이 편이었다. 믿은 게 잘못이었다. “숙제를 하라고 하잖아. 자기가 해야 하는 건데, 그걸 왜 나한테 하라고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동주는 잘못한 것 같지 않았다. 그 래서 빽빽대고 고함 치듯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참았 어야 했나 싶었다. 동주는 엄마랑 아빠한테 미안했다. “잘했어, 아들. 맞아. 자기 숙제는 자기가 해야지.” 엄마가 동주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도 엄마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동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가 뭐 어떻게 됐는데?” “잘렸잖아. 내가 형석이 말 안 들어서.” 동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깔깔대며 웃었다. 동주가 고개를 들었다. “엄마 안 잘렸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잘려?”


“잘못한 것 없어도 잘리는 사람 많다고…….” 동주가 말을 흐렸다. “우리 아들, 그런 것도 알고, 다 컸네!” 엄마가 새우처럼 눈을 접으며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했다. “요즘 그런 사람들도 많기는 하지. 그런데 다행히 형 석이 엄마 악덕 업 주가 아니거든. 그래서 이유 없이 직원을 자르는 일 은 안 해.” “그런데 왜 여기 있어? 지금 가게에 있어야 하잖아.” 동주가 입을 불뚝 내밀고 물었다. 엄마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동주가 잃어버린 열쇠였다. “너희 반 여자아이가 갖고 왔더라. 너랑 형석이랑 싸 우고 난 뒤에 주웠 다고.” “진짜?” 동주는 얼른 열쇠를 받아들었다. “지금쯤 형석이는 등짝을 맞아가면서 숙제하고 있을 거야. 형석이 엄마 가 씩씩거리면서 들어갔거든.” “진짜아?” 동주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었다.


엄마가 살그머니 동주를 안았다. “엄마가 형석이네서 일한다고 눈치 보지 마. 엄마는 형석이네서 정당하게 일을 하고 돈을 받는 사람이야.” “그치? 나 형석이한테 당당해도 되는 거지?” “당연하지. 그런데 열쇠 잃어버릴 일은 다시 하지 말 기. 무슨 뜻인지 알지?” 엄마가 동주를 보며 실눈을 떴다. 동주는 엄마가 하 는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다시는 친구랑 안 싸울게요.” “좋아. 오늘은 처음이니까 봐주는 거야.” 엄마가 동주의 손을 잡았다. 엄마랑 맞잡은 손에 열 쇠가 잡혔다. 소용돌이치던 마음이 다시 찾은 열쇠와 함 께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김혜란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주최 동화 당선, 한국시나리오작 가협회 시나리오 공모 당선, 불교신문 신춘 문예 동화 부문에 당선되었어요. 지은 책으로는 『초콜 릿이 달콤한가요?』, 『난 괜찮아』, 『조금 달 라도 괜찮아』, 『날아라 고래』,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아니? 2』 등이 있어요.


친구 만나러 간다


동해 바다를 향해 시원하게 오줌 줄기를 내지르려던 순간, 단춧구멍만 한 종구의 두 눈이 놀란 황소개구리 눈알만 해졌다. 분명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귀신고 래 위에 보란 듯이 앉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V를 만들어 울산시 지도를 닮은 붉은 점이 있는 왼쪽 눈 옆에 붙 인 할아버지는 ‘내 말이 맞지!’라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했 다. 종구는 할아버지를 향해 위험하다고, 내려오시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만 간질거릴 뿐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태운 고래가 바닷속으로 잠 수해 버리자 종구는 화들짝 놀라 잠이 깼다. “어, 어헉!” 황소개구리 눈이 다시 단춧구멍으로 돌아오는 동안 종구는 집 안을 휘둘러보았다. 초겨울 짧은 햇살이 여전 히 발끝에서 알랑거렸다. 마루에 엎드려 일기를 쓰다 깜 빡한 모양이다. 일기장에 창민이 이름만 둥둥 떠다녔다. 오줌통이 터질 것 같은 압박감에 어기적거리며 일어 나 화장실로 간 종구는 소변을 보며 거울을 들여다보았 다. 꿈에 본 귀신고래는 왼쪽 눈에 얼룩점이 선명했다. 할아버지처럼. “아, 할아버지!”


종구는 서둘러 바지를 추스르고 마루로 뛰어나왔다. 방마다 설레발 떨며 뒤지고 다녀도 할아버지는 온데간 데없다. 섬돌 위에 할아버지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대 문이 열려 있다. 뒷머리가 섬뜩했다. “아이, 씨! 또 어디 가신 거야?” 대문을 박차고 나간 종구는 골목 아래 위를 휘둘러보 았다. 위로 올라가야 할지, 골목 아래로 내려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에이, 씨!” 종구는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찾았다. 초등학생이 라 안 된다며 고집부리던 아빠가 종구에게 휴대폰을 사 준 이유는 할아버지 때문이다. 주머니를 죄다 까뒤집어도 휴대폰은 나오지 않았다. 후다닥 집 안으로 뛰어든 종구는 마루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고 아빠에게 전화를 하려다 멈칫했다. 섬돌 위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수상했다. 맨발로 마당에 뛰어나 온 종구는 고개를 들어 지붕 위를 보았다. 헉! 할아버지는 지붕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검지 를 안테나처럼 머리 양쪽에 붙이고 온몸을 앞으로 내뻗 었다. 마치 무언가 감지하려는 듯 보였다. 무엇을 감지하려는 것일까?


종구의 호기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체중 을 버티기에는 처마 빗물받이가 힘겨워 보였기 때문이 다. “할아버지.” “쉿, 조용히 해. 얼룩이가 보내는 신호를 잡아야 해.” 할아버지는 곁눈질로 힐끗 종구를 보고 목소리를 낮 춰 쇳소리를 냈다. “와, 왔어. 드디어 왔다구. 얼룩이가 왔어. 헤헤, 나랑 놀자고 왔어.” 종구는 재빨리 휴대폰을 눌렀다. 곧이어 아빠 목소리 가 들렸다. “아빠 바쁜데 왜?” “아빠, 할아버지가 지붕 위에 올라가셨어요.” “뭐라고? 어떻게? 사다리, 사다리를 찾아봐.” 종구는 집 뒤에 세워 두었던 사다리를 찾았지만 보이 지 않았다. 사다리는 지붕 위에 올려져 밑둥치만 보였 다. “사다리가 지붕 위에 있어요, 아빠.” 아빠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119 부르고 아빠도 곧 갈 테니까, 넌 할아버지 관심 을 다른 데로 돌려.” 종구는 겁이 나 다리가 후들거렸다.


지붕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할아버지 연세라면 충분 히 위험한 높이였다. 앞마당으로 나온 종구는 여전히 안 테나처럼 뻗대고 서 있는 할아버지를 불렀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르릉거리 다 으릉으릉거리고, 똑 똑 똑 노크 소리도 내고, 둔탁하게 쿵! 하는 소리도 간헐적으로 냈다.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종구는 궁금했다. 동화 속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 신 것일까? 할아버지는 일 년 전에 처음으로 얼룩이 이야기를 입 에 올렸다. 점차 횟수가 많아지더니 한 달쯤 지나자 잠 잘 때 말고는 쉬지 않고 고래 이야기만 쏟아냈다. 열 살 때 아기 귀신고래를 살려 주었고, 친구가 되었고, 그 고 래 왼쪽 눈에도 할아버지처럼 얼룩점이 있어서 얼룩이 라고 이름 지었고, 해마다 겨울 초입이 되면 만나러 왔 었다는 이야기를 식구들은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저 건성으로 네, 네 할 뿐이다. 병원에서 할아버지에 게 노인성치매라는 진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할아버지는 동화 속에 살았다.


동화 속 아이는 귀신고래를 타고 동으로 서로 온바다 를 구경하고 다녔다. 동화 속에서만 살던 할아버지는 어느 날부터인가 친 구를 만나야 한다며 하릴없이 바다로 내달아 종종 식구 들을 놀라게 했다. 그 후 할아버지 곁에는 꼭 누군가 붙 어 있어야 했다. 배를 만드는 공장에 다니는 아빠는 야간조로 일하는 시간을 바꿨다. 고래박물관 매점에서 일하는 엄마가 출 근하는 아침이면 아빠는 퇴근해서 잠시 눈을 붙이고 할 아버지를 돌보았다. 아빠가 출근할 때쯤 엄마가 퇴근하 고 집안일과 함께 할아버지를 돌보아야 했다. 주말이 면 서울 삼촌이 내려와 할아버지를 돌보아 드렸다. 오늘처럼 아빠 회사에 일이 생겨서 출근을 당겨 하는 날이면 학교에서 돌아온 종구 혼자 할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혼자 할아버지를 돌보는 일은 짜증 나는 일이다. 창민이가 더 간절히 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창민이는 종구의 절친이다. 고래에 미친 얼룩이영감 손자라며 아이들이 종구를 왕따로 내몰았을 때 창민이만 종구를 왕따 시키지 않은 의리 있는 친구였다. 두 달 전 단짝 친구 창민이가 서울 로 이사 가고 난 후, 종구는 끈 떨어진 연처럼 늘 혼자였 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종구는 서울병에 걸리고 말았 다. 서울로 이사 가자고 졸라도 아빠 엄마는 모르쇠였 다. 엊그제, 신청만 하면 아빠가 서울 본사로 발령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종구는 마루를 데굴거리며 서울로 가자고 졸랐다. 하지만 아빠는 묵묵부답이고 엄 마는 오후 내내 이불 빨래만 했다. 장생포를 떠날 수 없는 이유가 할아버지 때문이라는 걸 종구도 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지만 가끔 종구는 할아버지가 너무 미웠다. 며칠째 할아버지와 놀 아 주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말을 붙여도 숙제해야 한다 며 퉁을 놓았다. “나 심심해, 놀자.” 할아버지가 종구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매달렸다. 짜증이 난 종구는 할아버지를 떼놓기 위해 컴퓨터로 귀신고래 소리를 들려주었다. 종구의 생각은 적중했다. 할아버지는 컴퓨터에서 나오는 귀신고래 소리에 빠져 들었다. 컴퓨터를 할아버지에게 내주었으니 게임은 할 수 없어도 혼자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종구는 자기가 할아버지를 위험에 빠뜨리게 한 것 같 아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다. 눈두덩을 꾹꾹 눌러 눈물 을 참으며 지붕 위에 있는 할아버지에 게 물었다. “할아버지. 지금 뭐 하세요?”


“얼룩이랑 얘기하고 있지.” “할아버지, 얼룩이 얘기 해 주세요.” 종구가 지붕을 쳐다보며 마당에 쪼그려 앉는 것을 보 고 할아버지도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먼 바 다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할아버지의 동화 속 세상이 있다는 듯. 왼쪽 눈 주변에 손바닥만 한 얼룩점이 있는 아이는 친구들에게 얼룩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어이, 얼룩 조센징!” “얼룩얼룩, 바보 얼룩이~.” “얼룩강아지야, 멍멍 짖어 봐.” “내 이름은 경선이야!” 얼룩이는 혼잣말처럼 소리치고 되돌아 달려갔다. 또 래보다 몸집이 훨씬 컸지만 게다를 신고 다니는 아이들 을 상대로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다. 그 아이들을 잘못 건 드렸다가는 할아버지가 치도곤을 당한다는 걸 얼룩이 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래 해체 일을 하는 얼룩이의 할아버지는 백정 취급 을 받았다. 같은 일을 하는 일본인들은 기술자 대접을 받았지만 할아버지는 아니었다. 기술자들 중 그 누구도 할아버지 솜씨를 따라올 수 없다는 걸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니 그걸 깨달을 때마다 할아버지를 더 무시하고 괴 롭혔다. 얼룩이에게는 할아버지와 바다가 전부였다. 할아버 지를 따라다니면서 자맥질을 배우고, 오래 잠수하는 법 도 배웠다. 얼룩이가 나무통처럼 단단한 팔뚝에 매달리면 할아 버지는 세상 구경시켜 준다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면 하늘이 돌고, 바다가 돌고, 세상이 돌았다. “경선아, 고래 소리가 어떤 줄 아느냐?” 할아버지는 목을 길게 빼고 고래 울음소리를 흉내 냈 다. 으릉으릉~ 그르릉, 그르릉~ 똑, 똑, 똑 ……쿵, ……쿵 “할아버지, 귀신고래는 왜 귀신고래예요?” “허허, 왜 무섭냐?” “아뇨, 무섭지는 않은데…….” “글쎄……. 귀신처럼 나타났다가 귀신처럼 사라져서 귀신고래라고 했나? 허허허!” 해안 가까이에서 머리를 세우고 주변을 살피고 있다 가 사람이 다가가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사라져 버리는


귀신고래를 잡기는 하늘에 별 따기라고 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할아버지는 바쁘게 옷을 챙겨 입 었다. 그 서슬에 어린 얼룩이도 잠이 깼다. 더럭 겁이 난 얼룩이도 덩달아 옷을 꿰찼다. “할아버지, 어디 가려구요?” “더 자라.” “싫어요.” 얼룩이도 허위허위 밖으로 나가는 할아버지를 따라 나갔다. 할아버지는 무언가에 홀린 듯 바닷가로 갔다. 짙은 안개 속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정확하게 바닷가로 갔다. 그곳에 커다란 귀신고래가 있었다. 어찌나 큰지 놀란 얼룩이의 목구멍이 콱 막혀 아무 소리도 새어 나오지 못 했다. 할아버지는 죽은 듯 누워 있는 귀신고래 곁으로 천천 히 다가갔다. 할아버지 옷자락을 움켜쥔 얼룩이도 덩달 아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쯧쯧, 어쩌다 예까지 떠밀려 왔느냐?” 할아버지는 귀신고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살펴보았다. “할아버지, 죽었어요?” 얼룩이가 개미 소리로 물었다.


“글쎄……. 그런 것도 같고……. 할애비가 하늘의 별 을 거저 딴 거 같구나.” 바위처럼 꼼짝 않는 고래의 배가 꿈틀거렸다. 얼룩이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할아버지…….” “가만있어라.” 옷자락을 거머쥔 얼룩이의 손을 떼어 내고 할아버지 가 고래 배에 귀를 가져갔다. 늘 지니고 다니는 가방에 서 할아버지는 예리한 칼을 꺼냈다. “할아버지, 죽이지 마세요.” 얼룩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할아버지를 말렸다. “새끼가 있는 거 같구나. 이대로 두면 새끼도 죽어. 저 리 가 있어.” 할아버지는 능숙한 칼놀림으로 고래의 배를 갈랐다. 칼끝에 온 마음을 담아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할아버지 는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갔다. 얼룩이도 온몸이 땀으로 번들거렸다. 추워서 딱딱 소리 나게 턱이 떨리는데 온몸에 땀이 흐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밀물이 들어오고 있다. 할아버지 손길이 더욱 바빠졌 다. 드디어 고래 배 속에서 새끼 고래 머리가 쑥 빠져나 왔다. 왼쪽 눈가에 얼룩점이 선명한 새끼 고래였다.


아! 얼룩이의 두 눈이 등잔만 해졌다. 딱딱 소리를 내던 턱이 멈추고 온몸에 솜털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등줄 기로 야릇한 소름이 오소소 흘러내려 갔다. “보고만 있지 말고 이리 와서 밀어라.” 할아버지는 새끼 고래를 밀물에 실어 바다 쪽으로 내 몰고 있었다. 바다로 끌어내자 4미터가 넘는 새끼 고래 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죽는다. 호흡을 하게 해야 해.” 할아버지는 바닷속으로 들어가 새끼 고래 배를 받쳐 물 위로 띄워 올렸다. 가라앉고 띄우기를 몇 수십 차례 나 했을까. 새끼 고래는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얼 룩이는 지칠 대로 지쳐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숨을 쉬어라, 이놈아! 숨을 쉬어!” 할아버지는 다시 깊은 숨을 삼키고 돌덩이처럼 물속 으로 가라앉는 새끼 고래를 향해 헤엄쳤다. 새끼 고래가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자 얼룩이가 소리쳤다. “숨을 쉬어, 얼룩아!” 간신히 수면으로 등을 보이던 새끼 고래가 다시 잠겨 들려다 숨구멍이 터지면서 물줄기가 터져 나왔다. 푸엉~!


그 순간 바다에서 떠오르는 햇덩이가 수면으로 붉은 물감을 풀어 놓았 고, 새끼 고래 머리 위로 무지개가 선명했다. 잠시 아 주 잠시였지만. 얼룩이 눈에 그 광경은 숨 막히는 신비로움이었다. 첫 호흡을 한 새끼 고래는 활기차게 꼬리지느러미를 움직여 수면을 쳤 고, 얼룩이는 새끼 고래의 머리를 얼싸안았다. “잘했어, 얼룩아! 잘했어!” 수면으로 반쯤 머리를 내민 새끼 고래는 빙글빙글 돌 며 얼룩이와 어울 려 춤을 추었다. 새끼 고래의 까만 눈동자 속에 얼룩 이가 보였다. 얼룩이의 작은 눈동자 속에도 새끼 고래가 들어 있을까? 얼룩이는 그때 들었다. 새끼 고래가 부르는 노랫소리 를. 온 마음 온몸으로. 세포 하나하나에 소름처럼 번져 오는 그 소리에 온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이상하게 눈물 이 났다. 할아버지가 종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119 대원들이 도착했다. 안 내려간다고 버티는 할아버지를 간신히 지붕에서 내려 주고 119 대원은 돌아갔다.


깊은 한숨을 내쉰 아빠는 회사로 돌아가고, 엄마는 마루 끝에 앉아 숨죽여 울었다. 잠결에 콧등을 찡그리며 웃는 할아버지를 보고 종구 는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할아버지는 동화 속에서 여전 히 행복한가 보다. 종구는 할아버지 곁에 누웠다. 긴장이 빠져나간 몸뚱 이는 한없이 가라앉았다. 몽롱해지는 의식 너머 무지개 가 아른거리고 어디선가 고래 노랫소리가 들렸다. 물 젖 은 나무토막처럼 무거운 몸이 수면을 떠다니는 해파리 처럼 가벼워졌다. 파도에 내맞긴 몸뚱이가 둥실둥실 수 면을 떠가고 히뜩히뜩 구름이 가물거렸다. 푸엉! 고래 숨구멍 터지는 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터져 나왔 다. 무지개가 선명 했다. 무지개 끝에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왼쪽 눈에 얼룩이 진 귀신고래가 할아버 지를 태우고 바다로 나가고 있었다. 할아버지……. 목구멍을 넘어오는 짠 바닷물을 삼키며 종구는 두 팔 을 허우적거렸다. 잠이 깨며 부스스 떠진 눈앞에 희끗한 것이 방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할아버지.’ 화들짝 놀란 종구가 할아버지 자리를 보았다.


화들짝 놀란 종구가 할아버지 자리를 보았다. 자리는 비어 있다. 서둘러 마루로 나선 종구는 막 대문을 빠져 나가는 할아버지의 옷자락을 보았다. 겨우 슬리퍼를 꿰찬 종구가 골목으로 뛰어 나갔다. 할아버지가 어찌나 잰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는지 엄마를 깨울 시간이 없었다. 새벽이 골목의 어둠을 밀어내는 만큼 할아버지는 멀 어졌다. 할아버지를 불러 보려고 했지만 목구멍에 소금 이 잔뜩 들러붙은 것처럼 따가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 다. 죽을 듯 내달려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두고 종구 는 할아버지를 쫓아 갔다. 고래박물관 마당에 있는 매점 앞에서 할아버지는 우 두커니 서 있다. 매점 위에 있는 커다란 귀신고래 모형 을 올려다보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숨 이 턱에 찬 종구가 할아버지 옆에 와 섰다. 할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로운 목소리 로 말했다. “종구야, 얼룩이 살려준 죗값으로 할아버지가 왜놈들 한테 몰매 맞아 죽어도 내가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눌러 산 건 얼룩이 때문이었다. 얼룩이가 겨울 초입이면 날 찾아왔거든. 거지처럼 떠돌며 죽어라 일해서 배를 사고, 물고기 잡아가면서 저 바다를 헤매며 산 것도 얼룩이를


만날 수 있 는 그날이 있기 때문이었어.” 거친 숨으로 오르내리던 종구의 어깨가 조용해지자 할아버지가 배 속을 울리며 고래 소리를 냈다. 서서히 아침 안개가 걷히면서 회색빛으로 내려 앉은 수평선에 햇덩이가 몰래몰래 물감을 풀어 놓았다. 할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 박물관 야외 데 크에 있는 전망대로 갔다. 전망대 망원경에 눈을 댄 할 아버지는 먼 바다 어딘가에 초점을 맞췄다. “봐라, 저기 얼룩이가 와 있지 않니.” 할아버지가 권하는 망원경에 종구는 눈을 갖다 댔다. “어떠냐? 아주 잘생긴 놈이지.” 동전을 넣지 않은 망원경이 보일 리가 없었다. 주머 니를 뒤져 보았다. 바지 주머니에서 오백 원짜리 동전이 하나 만져졌다. ‘넣어 볼까?’ 종구는 잠시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공중전화를 찾아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휴대폰을 놓고 왔기 때문 이다. 종구가 공중전화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동안 할아 버지는 사분사분 박물관을 빠져나갔다. 종구도 종종걸 음으로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할아버지, 어디 가시게요?” “친구 만나러 간다.”


종구는 할아버지 팔을 잡았다. “집에 가요. 친구는 이따 만나면 되잖아요.” 잡아끄는 종구의 팔 힘이 제법 거칠었나 보다. 할아 버지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아파! 난 친구한테 갈 거야. 너나 집에 가.” 종구가 팔을 놓아 주지 않자 할아버지는 바닥에 퍼질 러 앉아 발을 구르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얼룩이가 기다린단 말이야. 지금 안 보면 다신…… 다신…… 못…… 보는데…….” “할아버지…….” 종구야말로 바닥에 퍼질러 앉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 다. 갑자기 창민이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졌다. 혼자서 할아버지를 볼 때면 창민이가 늘 함께 해 주었다. 창민 이는 할아버지 마음을 잘 다스려 고분고분 말을 잘 듣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지루한 할아버지 이야기도 잘 들어 주고, 얼룩이 이야기에도 늘 신 나게 맞장구를 쳐 주었 었다. 창민이가 있을 때는 혼자 할아버지를 돌보아도 조 금도 힘들지 않았었다. 속상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닭똥 같은 눈물이 후드 득 떨어졌다. 종구는 휙 돌아서 걸어가며 소리쳤다. “할아버지 맘대로 해요. 난 집으로 갈 테니까!” 종구가 그대로 몇 걸음을 걸었다. 할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꽉 다문 할아버지 입술이 떠올 랐다. 내친 김에 성큼성큼 더 걸어갔다. 그래도 할아버 지는 아무런 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박물관 마당 저편을 지나 항구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눈물이 대놓고 쏟아 내렸다. 종구는 그대로 달렸다. 미치게 밉기도 하고, 가슴 멍하게 안쓰럽기도 하고, 눈 물 나게 가엾기도 한 할아버지를 향해 내달렸다. 가슴이 바쁘게 두방망이질 쳤다. 숨이 가쁜 것과는 다르게 무언 가 불안한 생각이 자꾸 가슴을 벌렁거리게 했다. 항구로 달려간 할아버지는 재빨리 닻줄을 풀고 얼룩 호라고 쓰인 배로 뛰어올랐다. “할아버지, 안 돼요!” 종구는 스르르 딸려가는 닻줄 끝을 잡았다. “할아버지, 내가 잘 놀아 줄게요. 가지 마세요.”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종구야, 할애비가 편지할게. 얼룩이랑 이 바다 저 바 다 돌아다니다 보고 싶으면 찾아가마.” 힘주어 잡은 닻줄에 쓸려 손바닥이 아렸다. 손아귀에 점점 힘이 빠졌다. 손을 빠져나간 닻줄이 첨벙 하고 바 다에 빠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종구는 그대로 주저앉았


다. 할아버지를 태운 배는 힘차게 고동 소리를 울렸다. 종구는 항구를 빠져나가는 얼룩호의 꽁지를 원망스럽 게 바라보다 벌떡 일어나 내달렸다. 새벽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종구 옆을 스쳐갔 다. 맨발로 미친 듯 달리는 종구를 보고 사람들은 혀를 찼을까? 아무래도 좋았다. 종구는 미친 듯 달려 박물관 야외 데크 전망대로 갔 다. 이마에 손을 올리고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수평선 저쪽에서 무언가 가물거렸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망원경 구멍에 밀어 넣었다. 망원경 너머 수평선이 불쑥 코앞으로 달려들었다. 머 리를 반쯤 내민 귀신고래가 주억주억 춤을 추었다. 눈 한 번 깜작하는 사이에 할아버지는 얼룩이 위에 올라탔 다. 푸엉! 고래의 공기구멍이 열리고 물줄기가 솟구쳤다. 그 위 로 무지개가 부챗살을 폈다. 할아버지가 종구를 향해 손 을 흔들었다. 종구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천천히 흔들었다. ‘할아버지…….’ 목구멍으로 뜨거운 게 치밀었다. 종구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할아버지는 좋겠다! 친구 따라 강남 가니까!” 겨울이 오고, 이상하리만큼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그 동안 할아버지는 얼룩이 귀신고래와 함께 종종 종구 를 찾아와 약을 올렸 다. 이 바다는 이렇고, 저 바다는 저렇더라는 둥 알알 이 새로운 수다도 떨었다. 꿈에서 할아버지를 만나고 잠 이 깬 날이면 종구는 유난히 긴 일기를 썼다. 할아버지 가 보낸 편지에 답장하는 일은 이제 이골이 나서 아무것 도 아니었다. 덕분에 방학 숙제 중 일기 숙제는 야무지 게 해낼 수 있었다. 삼월을 앞두고 종구네는 드디어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장생포 앞바다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종구는 득의만만한 미소 를 날렸다. ‘할아버지, 나도 친구 따라 강남 가요. 아니, 서울. 흐 흐~. 답장에 주소 적었으니까 편지 보내세요, 꼭!’ 푸엉! 숨구멍 열리는 소리가 나고 물줄기가 솟았다. 먼 바 다에 무지개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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