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 5회 졸업 45주년 기념 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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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맺음, 다정한 추억 자유인으로 산 45년


축하 휘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23편) 넓고 넓은 하늘에 흰구름 날아가고, 높은 산중엔 붉은 단풍이 가득 찼네. 밝은 달빛 소나무 사이로 비쳐날 때 맑은 샘 솟는 물 바위 위로 반짝 넘쳐흐르네.

唯眞 박청 (재미 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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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축하 휘호

‘한심정거’ 한가로운 마음으로 조용히 사노라

이종상(신일 5회) 1985 율곡 서화대전 우수상 2007 한반도 미술대전 입선 2008 단원 미술대전 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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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ㅣ표지 설명 ㅣ

신일 교가, 시암 장광순 쓰다 장광순(신일5회) 대한민국 열린미술대전 특선(2회) 율곡서화대전 한글부문 2위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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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맺음, 다정한 추억 자유인으로 산 45년 축하 휘호 ( 박청 ㅣ이종상) 표지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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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및 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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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동기회장) ㅣ 축사(총동문회장) ㅣ 축시(김용환) 은사님 글 (이원희 ㅣ 주명갑 ㅣ 정오영 ㅣ박태남 ㅣ김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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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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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법인 信一學園 설립 ㅣ 교육 이념 및 교훈 ㅣ 校名 제정 모표, 배지 제정 ㅣ 신일 교가 ㅣ 신일 졸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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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동기회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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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동기회 발자취 ㅣ 기념행사 ㅣ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賞』 수상 동기들 장성택 동기 제20대 신일고 총동문회장 취임(사무총장 전영식) 동기회 소모임 ㅣ 학창 시절 수양회 행사 ㅣ 자유정신의 투사들 신오동기회 경과 및 현황 ㅣ 역대 신오동기회 회장단 3년 간 담임선생님 명단(1971~1973) ㅣ 3학년 각 반 재적 명단(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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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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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篇 ㅣ 강구영, 이종상, 전일웅, 정익진, 조희철, 한창덕 일篇 ㅣ 김상호, 김성진, 김연태, 김용성, 김한철, 민한기, 박영대, 신호현, 안동준, 이상국, 이상권, 이영권, 이영식, 이충호, 임순기, 장광순, 지정수

자유인篇 ㅣ 갈종완, 강동식, 고광표, 고승경, 김구섭, 김병돈, 김상호, 김성일, 김수봉, 김영수, 정윤식, 김용환, 김윤갑, 김응원, 김종선, 김종진 김해만, 박명수, 서광석, 손종득, 여운철, 유재석, 유태한, 윤상욱, 윤성식 윤호영, 이도희, 故 이동준, 이병현, 이순규, 이종상, 이종혁, 故 이철주 장남선, 전영식, 정유택, 조성천, 주인성, 최세양, 한동표, 황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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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글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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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글(신일교지 3, 4호) ㅣ 신일문학회 3회(문예반) 신일회보 (영자신문 포함) ㅣ 커뮤니티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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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화보 - 추억의 조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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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으로 산 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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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및 축사

발간사(동기회장) ㅣ 축사(총동문회장) ㅣ 축시(김용환) 은사님 글 (이원희 ㅣ 주명갑 ㅣ 정오영 ㅣ박태남 ㅣ김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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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발간사

지금은 제목마저도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어느 단편소설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귀던 여자가 어느 날 결별을 통고 해왔다 이유를 물어도 즉답을 피하더니 편지 한 장을 보내 왔다 ‘당신의 이 사이에 낀 고춧가루를 보자 환멸을 느꼈다’ 이 글을 읽은 남자는 비로소 깨달았다 사람은 어떤 위대한 사상이나 가치관에 의해 변화 받거나 감동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함으로 인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윤호영 신일 5회 동기회장

우리는 얼마나 작은 존재일까요? ‘모래야 나는 얼마나 작 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나 작으냐 정말 얼마나 작으냐’(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며) ‘어머니 나는 별 하 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소학교 때 책상을 같 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가 돼버린 계집애 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윤 동주, 별 헤는 밤) 짧은 인생입니다. 아주 사소하기도 한 작은 인생입니다. ‘우리의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그 동 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황동규, 즐거운 편지) 먼저 간 신일 친구들의 이름을 오롯이 새겨 불러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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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보내고 ‘견고한 고독’(김현승)을 견디며 남몰래 눈물 훔치는 친구들, 질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 내는 친구들과 그 아내들을 생각해봅니다.’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김현승, 눈물), 하나 님께서 ‘눈동자와 같이 보호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신일,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민태원, 청춘예찬)입니다. 모교 신일을 사랑하는 친 구들이 글을 모았습니다.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서툴고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글을 던졌습니다. 문 집이라고 문학집이 아닙니다. 디지털로 기억하고 아날로그로 기록하자는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무모한 시도일는지도 모릅니다. 글은 못 냈지만 평소 중요한 때마다 동기회와 신일고총동문회에 협조해준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머나먼 이국에서 도움 준 친구들과 직접 글과 작품을 보내오신 은사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친구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먼저는 신일을 좋아해서 우정을 이어온 친구들입니다. 그냥 5회가 아니라 신일 5회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맺음, 다정한 추억’을 안고 살아갑니다. 신일이 우리에게 이어준 ‘위대한 소망’으로 서로 보듬고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솔잎은 청청 향기를 내고 종소리 얼 려 가슴 뛸’ 청춘, 제2의 ‘인생의 새벽’을 파랗게 열어갑시다. 감사합니다.

2019년 12월 5회 동기회장 윤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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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축사

5회 선배님들의 기념 문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리는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살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 장 허물없고 진실한 친구로 대부분 고등학교 친구들을 꼽을 겁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해관계를 떠나 순수한 관계였기 때문일 것 입 니다. 대부분의 5회 선배님들이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중학교부터

정명철 총동문회장

고등학교까지 6년간을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이라는 훌륭한 교 훈아래 원대한 꿈을 꾸고 온갖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며 성장하여 모 교에 대한 애정과 동기들간의 우정이 각별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금번 문집에는 이렇듯 소중한 신일동산에서의 추억과 관련된 글 들로 구성될 것으로 예상되어 신일동산에서 6년의 학창시절을 보낸 저에게도 소중한 추억의 문집이 될 것이란 기대로 가슴이 설레이며 출간이 기다려 집니다. 다시 한번 5회 선배님들의 문집 발간을 축하드리며, 금번 문집 발 간을 계기로 선배님들의 우정이 더욱더 깊어지어 인생 2막이 보다 윤택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2019년 12월 총동문회장 7회

정명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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祝詩

우리는 김용환 헐벗은 황토뿐인 미아리 산 13번지에 물빛 달빛 한 방울씩 맺힘 하나로 작은 샘터 옹골차게 비집던 그때만도 사위는 온통 칠흑이었으니 한낱 환상이었지

이슬 맑은 한 방울로 맺히고 눈물 간절한 한 방울로 모이고 낯설게 시작한 사랑의 맺음 다정했던 그 약속 때도 어둠은 때로 존재였고 때로 두려움이었지

물의 믿음을 물의 사랑을 물의 인내를 물의 헌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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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물의 겸손을 아아 물의 자유로움을 위해 辛酸의 아픔도 예감했지만 헐벗던 황토에도 초록은 내리고 언덕바지는 거대한 山으로 자라나고 깊어진 샘은 우리의 始原이 되었다

이슬은 물결이 되어 눈물은 함성이 되어 두려움 찢어내 始原을 떠나 거친 계곡을 맨발로 내달리던 초행길 우리는 작은 돌부리에도 부딪쳐 상처 받고 아파했고 독을 품은 탁류에 몸을 섞으며 울부짖기도 했으니

그럴 때마다 혹은 다시 혼자였고 그럴 때마다 혹은 다시 눈물로 돌아갔고 그럴 때마다 혹은 돌아서 우리의 始原만 바라보기 했었다

시원은 때때로 구름에 가리었고 시원은 때때로 다른 山들에도 가리었고 시원은 때때로 어둠에도 가리었고

어둠 속에서는 우리의 맑음도 투명함도 간절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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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잃었지 길을 잃었지 두려움 속에서는 우리의 믿음도 사랑도 많이 흔들렸지

결국은 우리는 더욱 단단하게 자유인이 되어 결국은 우리는 더욱 냉정하게 혁명가가 되어 검붉은 오염수와 몸을 섞어 스스로 탁류가 됐고 바위와 부딪쳐 핏물이 됐다

한 방울의 신산함에 한 방울의 간절함을 잃어버렸다 욕하지 말라 상처 많은 훈장을 욕되이 말라

우리가 부딪쳤던 그 폐허에 꽃이 피었고 울음을 잊었던 새들이 노래하고 있으니

우리는 탁류가 되었고 또 下流가 되었고 흘러 다시 만나 두려움 없이 평야를 가로지르는 江이 되었다

이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났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어디서 다시 만날 것인가,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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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님 글

나의 건강의 토대는 신일 생활이었다 이원희 선생님

나는 80 평생을 살면서 늘 건강하고 활동에 지장 없이 살 것 같 은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80을 넘기고 보니 점점 삶 속에서 건강 의 소중함을 느끼고 젊어서 더 건강을 챙겼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했다. 나는 신일고등학교에 부임하여 나의 평생 잊을 수 없는 건강의 토 대를 마련했다는 데 감사함을 느낀다. 신일고등학교에서 직장생활 은 행복했다. 근무환경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았고 업무 수행에서 도 근심, 걱정, 스트레스 없이 지냈으며 특별한 대우도 받아 밖에서 는 신일고등학교에 근무한다면 좋은 학교에 근무한다고 부러워하 는 친구들도 많았다. 동료 선생님들 간의 우정과 사랑, 상호협력의 분위기는 물론 학교 재단이나, 상사로부터 질타나 압력도 없었으며 매일, 매시간 학생들 과의 수업에서도 힘들기보다는 보람을 느끼면서 지냈다. 1970년 우리나라에 테니스 열풍이 일자 재단에서 학교 공지에 테 니스장을 개설해서 방과 후 선생님들이 마음껏 테니스를 즐기고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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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증진시켰다. 나의 퇴직하는 날까지 30년 간 테니스가 나의 삶의 동반 자가 되었다는 것은 나의 행운이었고 행복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건강의 초석이 되었다. 당시 문교부장관(민관식 박사)이 전국시도대항 교직원 테니스대회를 열 어 나는 서울시 선수로 선발되어 훈련도 했으나 하기 방학(8월 서울) 중에 시험이라고 故 이일천 교감께서 수업 결손을 염려해 출전을 불허해서 나는 출전하지 못한 선수가 됐고 서울 팀이 우승했다. 당시 서울 내 고교 교직 원 테니스 팀 하면 신일고 팀이 상위팀으로 주목받았고 여러 대회에서 우 승도 많이 했다. 국민대학에서 테니스장을 개설하고 우리 팀을 초청해서 게임을 하고 당 국자들과 간담회를 하던 당시, 학교 홍보를 위해서 교직원 테니스대회를 개 최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더니 다음 해부터 개최하기도 했다. 나는 2000년 초에 30여 년간 봉직했던 신일고를 퇴직하고 과격한 테니스 를 접고 혼자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산행(등산)을 시작했다. 주당 2-3회로 우 이동에서 짧게는 대동문까지, 길게는 백운대까지 오르고 하산 길에 약수터 에서 약수를 떠오기도 했다. 80대가 되니 산을 오르는 것도 신체적 부담이 되어 밖에서 활동이 아니고 실내로 장소를 옮겼다. 우리 주변 공공시설(복지관, 주민 센터 등)의 ‘건강 증진실’에서 하루에 1시간 정도 운동기구를 이용한 운동을 해서 현재의 건 강상태를 유지하는데 힘쓰고 있다. 건강은 돈 주고 살 수도 팔 수도 없으며 대신 해 줄 수도 없는 것이기에 자신이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 대도大道다. 하루 밥 세끼 먹는 것과 같이 운 동을 사식四食으로 생각하고 오늘도 열심히 먹어서 건강한 내일을 바라보 면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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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은사님 글

지구 촌 곳곳에서 활동 중인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여러분! 주명갑 선생님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인사드리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행복하게 여기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신일동산을 그려보고 있습니다. 믿음 으로 일하는 자유인 여러분, 여러분이 있는 곳 어디에서도 신일의 영광이 하늘과 땅에 날리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5회 졸업생 여러분, 졸업 45주년을 맞이하여 문집 발간을 축하 합니다. 5회 동문 여러분의 모교 사랑과 후배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제 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19일 제18회 신일 사랑 한마음 대축제에 다녀왔습니 다. 많은 동문들과 가족들이 모교에서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 니다. 학교 소식은, 내년에도 자율형 사립고 신입생을 선발합니다. 교장 선생님과 전 교직원들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학교와 학생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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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하는 신일의 정신은 여전합니다. 자율형 고등학교, 서울 사이버대학교는 최첨단 시설로서 최고를 자랑합니다. 신일 고등학교 퇴직 교사회 소식을 전합니다. 퇴직 교사회에는 37명의 회 원이 매년 3월, 6월, 9월, 12월에 모여서 옛날 이야기와 서로의 안부를 물 으며 즐거운 시간을 갖습니다. 또 一木會(매월 첫째 목요일)는 회원 19명이 고, 二木會(매월 둘째 목요일)는 회원 6명이 모여서 아 옛날이여 하며 맛있 는 음식을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갖습니다. 저는 99년 명예퇴직 후 재능 기부로 6년 간 고등학교에서 강의하였고, 여 러 나라를 여행하였습니다. 지금도 교회에 속한 노인 학교에서 주당 2시간 씩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여러분 어느 곳에서도 겨레와 나라를 위해, 사회와 가정을 위해, 신일의 영광 하 늘과 땅에 날리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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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은사님 글

45주년 기념문집 축하 정오영 선생님

세월이 참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50주년을 기념집을 만든다고 하기에 의아했지요. 영롱한 눈동자를 가진 청소년이 벌써 육십 이순六十而耳順을 맞이하고 있으니 세월이 너무 빠르게 가는 것을 느낍니다. 이순耳順이라 하니 세상의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듣고 받아들 이며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군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말을 잘 듣 고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의사 선생님들의 건강에 관한 말을 잘 듣고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건강검진 결과를 가지고 운동부족이나 금연 또는 금주하라는 말은 꼭 지켜야 할 중요한 말이 되겠지요. 요새 인생人生은 100세 시대라고 하니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몸 과 마음을 꾸준히 움직이는데 힘써야겠습니다. “人的前半生不要怕, 人的后半生不要悔”라는 말이 있지요. 인생의 전반기는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며 인생의 후반기는 후 회 없는 삶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전반기의 삶을 훌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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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성공적으로 마쳤기에 후반기의 삶을 후회 없이 보내기 위해서 준비 가 필요합니다. 노인을 가리켜서 노인(NO人)이라고도 하는데, ‘NO人’이 아니고 노인 (KNOW人)입니다. 다년간의 경험 지식 기술을 습득한 노인(Knowledge 人)입니다. 이런 노인(Knowledge 人)을 선배 시민이라고 합니다. 선배 시민은 후배 시민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어떻게 공헌과 봉사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공자님 같은 성인聖人들께서도 배우고 익히는 일은 즐거움이라 고 강조하셨고 그보다 인생人生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후진(자손들, 제자 들)을 지도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앉으나 서나 어디를 가나 늘 어떻게 제자 들을 지도할까를 생각하며 사셨다고 합니다. 자유인들! 생명이 있는 한 배우는 일을 그치지 말고 배우고 익힌 지식을 후진들에게 전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일에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나는 신일 학교라는 훌륭한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좋은 제자들과 만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자유인들은 사제지간의 끈끈한 유대와 모 교사랑과 동기들 간의 사랑이 돈독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제 자들의 사랑을 여러 곳에서 받고 있음을 이 기회를 통해서 감사함을 전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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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은사님 글

돈에서 자유로워야

박태남 선생님

가을이 깊어갑니다. 스산한 바람이 낙엽을 휩

는데도 돈은 뜻한 대로 모아지지 않습니다. 삶은

쓸어 날립니다. 가을의 낙엽을 보면서 인생의 황

그래서 힘듭니다. 생존의 조건들이 온통 돈으로

혼을 느낍니다. 석양의 아름다운 낙조나 단풍이

마련되는 것인데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삶

곱게 물든 산을 바라보면서 어찌하면 인생을 아

이 편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장

름답게 장식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상적인 삶이란 돈이 차고 넘쳐 더 이상 돈에

우리가 사는 동안 돈 때문에 겪었던 많은 일들 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삶에서 돈이란 그저 필요

시달리지 않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에서 놓 여나 살면 좋겠다는 꿈을 꾸게 됩니다.

한 것이 아닙니다. 돈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갖

그런데 돈에서 자유롭기를 바라는 것은 이러

춰야 하는 거의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돈이 없으

한 경우만이 아닙니다. 돈이 많아 돈에 아무런

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돈에

걱정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

서 자유롭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돈이란 대체로

람들도 때로 돈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왜냐

거저 내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하면 돈이란 근원적으로 매개 기능을 하는 것이

는 몸 고생은 당연하고 마음고생 또한 이루 말할

어서 인간관계를 얽어 놓습니다. 그 얽힘이 때

수 없을 만큼 겪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

로 삶을 무척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돈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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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계가 기울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고 엉

습니다. 그래서 쌓아놓은 돈 만큼 자신은 당당

킨 채 이어지기도 해서 돈이 없어 하는 고생보

하고 성공했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뜻

다 더한 어려움에 몸도 마음도 시달리게 되기

밖에 많습니다. 성실하게 살아온 분들이 더 그

때문입니다.

러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돈이 많지는

그러나 돈은 쓰기 위한 것이라는 기준에서 보

않지만 모자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는 데는

면 부(富)란 지님에 있지 않습니다. 돈의 가치는

별 걱정이 없는 데도 여전히 돈 걱정을 관성처럼

쓰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에서 놓여나려면

하며 살아갑니다. 이제 돈 걱정은 하지 않고 살

다른 길이 없습니다. 돈은 써야 합니다. 문제는

아가고 싶은데 그게 잘되지 않습니다. 그때도 사

어떻게 써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어려

람들은 ‘이제 돈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생

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쓰는 것이 가장 쉬우면서

각을 하게 됩니다. 돈에만 매어 곁눈질 한번 하

도 의미 있게 쓰는 것이기도 합니다. 공공의 복

지 않고 돈을 모으며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 스

지를 위한 시설이나 기관을 위해 돈을 쓰는 것도

스로 생각해도 그런 자신이 한심하고 딱하기 짝

한 방법입니다. 결국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자기

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늦었지만 이제부터

가 쓰고 싶은 데에 쓰면 되겠지요.

라도 돈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싶어집니다. 이

어찌하든 돈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가지고

런 경우 돈에 욕심내지 않는다면 생존을 위한 돈

있는 돈을 써야 된다는 사실만을 깊이 유념한다

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괜찮은 경우라 하겠습니

면 쓰는 목적이야 저절로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

다. 이것은 남은 삶을 잘 살고 싶은 간절함이 있

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돈을 어디에 어떻게

기 때문입니다.

얼마를 써야 하는 것에 마음이 쓰인다면 먼저 내

그런데 돈이란 쓰기 위해서 모으는 것입니다.

가 얼마나 성숙한 인간인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

그러니까 만약 돈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면 그것

다. 성숙한 사람이야말로 돈에서 자유로우며 현

은 내가 돈을 쓰지 않고 움켜쥐고 있기 때문입

명하게 삶을 살아갈 축복을 받은 것이라 여겨지

니다. 돈을 쌓아놓고 있으면 든든해서 그렇기도

기 때문입니다.

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돈이란 쓰는 것이기 보 다 모아 놓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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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은사님 글

세계 속의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들 - 미국 사회 속의 신일인들 -

김길동 선생님

세월이 참 빠르다. 60년대 말 어느 봄날, 노란 진달래꽃으로 물들 인 신일 동산에서 처음으로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신일 가족”이 되어 함께 생활한 지도 벌써 50년 가까이 지나가고 있다. 그때 10 대 까까머리 학생들이 이제는 60대 중반이 되어가고 있으니 말이 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당시 참으로 훌륭한 선배 선생님들과 귀 한 제자들과의 11년 생활은 내 생에 있어서 너무나도 귀한 재산이 되었다.

1979년 말 부모님이 계시는 L.A로 이주 생활한 지 벌써 40년이 가까이 지나가고 있다. 미국 생활은 주로 L.A의 한인 언론사(중앙일 보)에서 30여 년을 일하고 있었다. 올림픽가 한인 타운을 지나가다 보면 식당에서, 점포에서, 각종 모임에서 인사하는 제자들과의 반 가운 만남을 가졌고 ‘신일동문회’가 조직되어 자주 만나다 보니 이 제는 L.A 인근에 살고 있는 동문들이 200명이 넘었다. 매년 여름방 학 때 서울 총동문회의 협조를 받아 이 곳 동문회에서 본교 은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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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을 초대하여 미국 관광을 안내해 드리기도 했다. 또 서울과 미 전 지역 에 사는 5회 동문들이 미주 여러 곳에서 1년에 한번씩 2박 3일 갖는 모임에 참가한 지도 8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동안 초기 이민 생활 정착의 어려움 속에서 선후배 동문들이 서로 도와 주고, 격려해주고, 힘이 되어주는 모습 속에서 신일 가족의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는 큰 행복이었다. 이제 한인 커뮤니티도 크게 성장하였고, 그 가운데 우리 ‘신일인’들은 각 분야에서 열심히 두각을 나타 내고 있다. LA 한인들의 상업 활동 중심지인 미드 윌셔 지역 개발위원회 회 장을 역임한 건축가 1회 조삼열 동문을 비롯하여 4회 변호사 김성태 동문, LA 한국 문화원장 7회 김종율 동문, 대학교수, 목사, 선교사, 신경정신과 의 사, 치과의사, 한의사, 카운티 공무원, 언론사 편집국장, 연극인, 공인회계 사, 호텔 사장, 은행 부행장, 자동차 딜러 사장, 그리고 여러 업종에서 열심 히 활동하고 있는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들을 보게 된다.

많은 동문들이 이민 초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창조적인 마음을 가지 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꾸준히 도전하는 삶 속에서 이제는 미 주류사 회 속에서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현재 미주에 사시는 옛 신일의 은 사님들은 김삼열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17명, 신일 동문 출신 목사님은 1회 김기호 목사님 등 14명이 연락되고 있다.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우리는 너무나 귀한 ‘교훈’을 가지고 있다. 신일동산에서 3년 혹은 6년 동 안 이 귀한 ‘교훈’ 속에서 배움의 길을 가진 우리 신일인들이 이제 세계화 속에서 한국, 미국,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 속에서 열심히 승리의 삶을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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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나 아름답다. 생의 시계를 보니 오후 7시 30분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잠시 미국 생활을 돌이켜보니 하나에서 열까지 빌리기만 한 생활이었다. 자동차도 빌렸고, 집 도 빌렸고, 사무실도 빌렸고, 가게도 빌렸고...

이제 나이 70대 중반을 지나가는데 무얼 더 빌려볼까? 성공한 사람들의 명예를 빌려볼까? 젊음을 빌려볼까? 그런데 이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우리 주님은 나를 반겨주셨다. “나도 너같이 무일푼으로 집 없이 인생을 살았다.”고 하시며 하나님은 생 명까지 주어 버렸다고 말씀하시는데... 주님에 비하면 나는 부자지요. 아직도 줄 것이 너무 많은 부자이고, 주님 보다 긴 세월을 살았고, 주님보다 가진 것이 더 많으니.... 이 많은 것들을 어떻게 쓸까? 생각해 본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다행히 나는 만나면 언제 나 이야기할 제자들이 많아 행복하다. 함께 모여 자리를 할 때마다 밝은 주파수를 전해주는 사람, 행복 바이러스 처럼 늘 기쁨과 행복을 전염시켜주는 사람, 그런 제자들이 있어 나의 미국 생활은 오늘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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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의 뿌리 학교법인 信一學園 설립 교육 이념 및 교훈 校名 제정 ㅣ 모표, 배지 제정 신일 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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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의 뿌리는 「신일 30년 사」를 기초로 하여 편집하였습니다.(편집자 주)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自由人) 학교법인 信一學園 설립

1959년 李永守, 李仁守, 李奉守, 李廣守 제씨는 국가와 민족에 유익한 인재를 양성할 내용이 충실한 기독교 교 육기관을 설립하였다. 학교 부지를 매입하고 1965년 11월 8일 학교법인 신일학원 정관을 제정했으며, 이사회 를 조직한 후 설립자 이봉수 씨를 이사장으로 선출하고, 1966년 3월 10일 문교 당국의 법인 설립 인가를 받았다.

교육 이념 및 교훈

신일학원은 대한민국 교육법에 명시된 ‘국가에 유익한 중견 인물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교육’ 하는 것을 그 이념으로 하였다. 즉, 信一의 기독교 정신에 의한 교육 이념 구현이란 학생들에게 기독교적인 인격을 심어주고 함 양함을 의미한다. 한국의 기독교가 西勢東漸의 시대 이래 신문화 수입에 큰 공헌을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 문이다. 처음에는 믿음의 사람, 자유의 사람, 일하는 사람 등과 같이 일종의 덕목을 나열하는 정도에 그쳤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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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데 이렇게 덕목을 나열만 하다 보니 학생들이 기억하기도 쉽지 않아 실제적인 이념 구현의 실효는 어렵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이 3개의 덕목을 하나로 합쳐 쉽게 연상되도록 최종 결정을 내렸다. ‘믿음으로’라는 말의 숨 은 뜻은 기독교적인 교양인의 양성을 목표로 하되, 결코 종교 교육을 무조건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리 고 ‘일하는’이란 말은 勞作(노작)하는 생활인을 양성하겠다는 의미이고, ‘자유인’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방향의 민 주주의적 교육이 제시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과거의 전통적인 사회 구조만을 답습하다 보니 민주주의의 본질적 실현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정황에서,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민주주의적 사고와 생활을 체질화함으로써 새로운 역 사 발전에 이바지하자는 의도가 담겨 있다.

校名(교명) 제정

교명이 제정되기까지엔 설립자 네 분의 좀 더 깊은 철학과 의지가 관철되어야 했다. 처음엔 유명 한학자나 교 육자에게 의뢰해 볼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기엔 네 형제분이 평생을 바쳐 노력하고 결실을 보기까지 의 집적된 철학이 보다 확고했다. 네 형제분 사업의 가장 기본은 항상 ‘信用’이 먼저였다. 기본뿐이 아니라 목표 였고 철학이자 주 무기였다. 당연히 평생 사업의 결실이자 삶의 목표인 교육 기관 설립에 신의의 개념이 빠질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바탕에 둔 기독교 신앙과 불신의 사회가 아닌 믿음과 신뢰의 사회를 염원한 ‘信一’의 교명은 이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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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표, 배지 제정

본교는 개교를 앞두고 사전 준비 행사의 일환으로 본교의 상징이 될 모표와 배지를 현상 모집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서울대 미대를 중퇴하고 당시 一潮閣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그 분야의 깊은 조예로 당선 8회의 경력을 갖 고 있던 金公雄 씨(당시 27세, 男)가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1966년 12월 말의 일이었고, 제작은 1967년 1월 중 에 있었다. 도안의 구상 의도는 힘차게 돋아나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죽순을 형상화함에 있었다. 신일의 두음인 ‘ㅅ’과 ‘ㅇ’으로 기본 구성을 삼았고, 죽순이 양편에서 감싸 안아 잘 자라도록 안배했다. 단순히 글자 풀이의 도안 으로부터 탈피하여 간단하면서도 특색 있는 이미지를 나타내는데 주안점을 둔 도안이었다.

ㅣ신일의 모표 해설 ㅣ

<그림 1>

<그림 2>

<그림 3>

<그림 4>

<그림1> 대나무의 새싹, 즉 죽순이 막 피어났을 때의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두 형체가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모 양에서 협동과 단결의 상징을 엿볼 수 있다. <그림 2> 신일 ‘신’자의 ‘ㅅ’을 양쪽에 배치한 형이다. 또 다른 뜻으로는 사람 인(人)을 연상케 함으로서 두 사람 이 손을 맞잡은 화목의 표시이자 평화를 상징하고 있다. 본교의 교훈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림 3> 모표의 가운데 부분으로 배움과 학문의 표시인 펜(붓)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 4> 불의와 싸워 이길 투사의 방패를 연상케 한다. 우리 ‘신일인’들이 사회에 만연한 부정과 불의, 불신과 싸워 이겨 신뢰의 사회를 구축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상 각 부분의 조각들은 새싹, 빠른 성장, 협동, 단결, 화목, 학문, 정의를 상징하고 있어 종합하면 ‘신일인’들 의 기상을 세계로 벋어나게 할 학문의 전당이 바로 ‘신일 학원’ 임을 확신하고 있다. 당시 이정수 미술 교사의 평 : “부드럽고 날카로운 조화, 뚜렷한 시각적 효과의 형태감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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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 교가

교가에는 그 학교의 얼과 기상이 녹아있게 마련이다. 학생들과 교직원 모두가 일상적으로 늘 접하면서 느낄 공통 된 정서를 통해 자부심과 애교심을 함양시킬 수 있도록 세밀하게 창작됐다. 1966년 11월에 본교는 한국 근대 자 유시의 효시인 ‘불놀이’를 쓴 시인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정평이 있던 주요한 선생에게 작사를 의뢰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역시 당대 최고의 작곡가이자 사계의 권위자이신 김동진 선생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사계의 두 권위 자는 교가 창작 당시 함께 본교를 내방하고 둘러보며 미래 ‘신일 정신’의 웅장한 서사를 가슴에 담고 창작에 임했 다. 그렇게 해서 개교 이래 늘 애창돼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을 선사할 우리의 교가는 빛을 보게 됐다. 주요한 선생의 肉筆을 통해 그 수려한 감각과 뜻을 정제해 만들어진 우리 신일의 교가는 다음과 같다.

1. 동트는 하늘 찬란한 빛이 백운대 위에 퍼져 날 때 젊음의 노래 메아리치는 우리의 자랑 신일 동산. 굳세게 서자 배움의 벗들 새로운 때는 열렸나니

신일 졸업가 (박목월 작사, 나운영 작곡) 1. (졸업생) 스승님이 뿌려 주신 진리의 씨앗 마음의 터밭에 고이 가꾸어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으로 가지마다 꽃이 필 그날을 향해

자유의 깃발 펴드는 곳에 그 앞을 누가 막을쏘냐.

떠납니다 떠납니다 오늘은 날개를 펴고

믿음을 쌓고 슬기를 길러 겨레를 위해 몸바치면

신일의 영광을 길이 빛내리

신일의 영광 신일의 영광 하늘과 땅에 날리리라.

2. (재학생)

2.

길어 내도 끝이 없이 고이는 샘물 신앙과 신의와 신념의 동산 서로서로 깨우치고 정성을 다해 사람의 참된 길 바르게 배워

북한산 기슭 훤칠한 터에 너나의 포부 서려있고

따릅니다 따릅니다 우리도 그 뒤를 이어

저 원산가도 백두산까지 위대한 소망 이어 준다.

신일의 영광을 길이 빛내리

솔잎은 청청 향기를 내고 종소리 얼려 가슴 뛸 때 인생의 새벽 청춘의 꿈을 해마다 여기 겹쳤노라. 사랑의 맺음 다정한 추억 세월을 따라 깊으리니 신일의 영광 신일의 영광 억천만 해에 날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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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모두 함께) 볼수록 새로워라 정든 백운대 날마다 자라나는 기쁨의 동산 정의와 자유와 굳센 의지로 겨레의 앞날에 불을 밝히는 되렵니다 되렵니다 사회의 빛과 소금이 신일의 영광을 길이 빛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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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오(신일 5회)동기회 발자취

5회 동기회 발자취 ㅣ 기념행사 ㅣ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賞’ 수상한 동기들 장성택 동기 제20대 신일고 총동문회장 취임(사무총장 전영식) 동기회 소모임 ㅣ 학생 수양회 행사 ㅣ 자유정신의 투사들 신오동기회 경과 및 현황 ㅣ 역대 신오동기회 회장단 3년 간 담임선생님 명단(1971~1973) ㅣ해외 거주 동기 현황(2019.11) 3학년 각 반 재적 명단(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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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오(신일 5회) 동기회 우리 신오동기회의 첫 인연은 1971년도에 태동했다. 55년생 (양띠)이 주축인 동기들의 세대는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의 미가 큰 베이비부머의 시작 세대이며 민주화와 산업화, 정보화 시대를 아우르고 관통하며 그 주축을 이룬, 굵고 함축적인 세대 라 말할 수 있다. 당시 신설 명문교로 부상한 신일 고등학교에서 의 운명적 만남은 1974년도의 졸업과 1982년도의 초대 동기회 (회장: 염은호)의 결성을 시작으로 오늘에까지 이르면서 우리만 의 ‘끈끈한 인연’을 쌓아가고 있다. 현재는 20대 회장단(윤호영 회장, 김구섭 총무)이 조직되어 막중한 임무를 수행 중에 있다. 이쯤에서 신오동기회의 그간 발 자취를 돌아보고 그 대강을 간추려보기로 하자.

2. 기념행사 ■ 졸업 20주년 기념 『홈커밍데이』(회장 김병돈/ 1994. 10. 8) 장소: 모교 제2운동장과 체육관 행사: 개교 28주년 기념행사/『홈커밍데이』본 행사 ‘선후배와의 대화’/ ‘제자와 스승님 간의 발야구 시합’ 등 참석: 150여 동기 및 가족/ 이봉수 이사장님/ 김삼열 교장님을 비롯 한 은사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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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 30주년 기념 『다시 가는 수학여행』 (회장 이기영/ 2004. 10. 23-24) 장소 : 청호인력개발원(경기 의왕시) 행사 : 첫째날 - 개회식(오후 5시) 다시 듣고 싶은 수업 : 박원상(수학), 주명갑(화학) 선생님의 수업 진행(고교 시절 모 습 재현), 설교 : 한태근(음악) 둘쨋날 - 졸업 30주년 기념 예배/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명랑운동회

■ 졸업 40주년 기념 『아름다운 동기들의 만남』 (회장 장남선/ 2014. 9. 19-20) 장소: 포레스트펜션(경기 양평) 행사: 아름다운 동기회 영상 감상/ 함께 하는 노래 마당 장학금 전달 - 재단법인 ‘신일고 장학재단(이사장 조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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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賞』 수상 영예의 동기들 총동문회는 한 해 동안 신일의 교훈인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정신을 빛낸 동문을 선정, 매년 『믿음으로 일하는 자 유인 賞』을 시상하고 있다. 그동안 김만수(2008), 김동선(2011), 김윤갑(2018) 동기가 수상하였다.

김만수 (제6회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賞』 수상자(2008))

가톨릭 대학교 교수(안과 전문의)로서 후진을 양성하며 성모병원에서 인술로 빛을 가져다주는 그는 특히 많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세상을 선 물해왔다. 지난 20년간 그의 손을 거쳐 간 각막이식 수술만도 1,500건 으로 국내 각막이식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통한다. “MBC 느낌표- 눈 을 떠요” 특별방송 2년 기간 동안 각막이식 수술을 집도하며 훌륭한 의사일뿐 아니라 옆집 아저씨 같은 인자함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 을 받았다.

김동선 (제9회『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賞』 수상자(2011))

30여 년간 특허청, 산업자원부, 청와대 등에서 공직생활을 하면서 특 히 우리나라 중소기업 발전에 혁혁한 공헌으로 기여해왔다. 특히 2008 년 3월부터 2010년 3월까지 대통령 실 지식경제비서관으로 재직하던 기간 중, 차세대 수출 산업 선정과 수출 전략을 기획하여 UAE에 원전 수출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2010년 3월부터 2011년 11월까지의 중소기업청장 재직 기간 중에는 중소기업의 해외시장 진 출을 적극 지원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위한 정책 수립 등 국가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기에 수상자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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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갑 (제16회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賞』 ‘참 신일인상’ 수상자(2018)) 김윤갑 동기(늘푸른한의원 원장) :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고 국외로는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실천하는데 정열을 쏟고 있는 김 동기는 특히 나 원주 지역사회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신념을 갖춘 도전 적 창조인,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귀감이 되어 ‘참 신일인 상’의 수상자 로 선정됐다.

4. 장성택 동기 제20대 신일고 총동문회장 취임 (사무총장 전영식) 제20대(2009-2010) 총동문회의 회장으 로 장성택, 사무총장으로 전영식 동기가 선출됐다.

장성택 회장

전영식 사무총장

장성택 총동문회장 취임사 신일 가족 여러분. 2009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모두 새로운 희망을 안고 힘찬 걸음을 시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지 난해 세계적인 경제 위기의 여파로 인해 올 한해도 무척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우리 주변에 도 갑작스럽게 역경에 처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10년 전 외환위기를 슬기롭게 이 겨냈듯이 지금의 어려움도 충분히 극복해 낼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제가 총동문회장이라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제가 회장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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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회와 학교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할 지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심 성의껏 최선을 다한 다면 우리 신일 가족 모두가 제게 힘을 보태주시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주어진 책무 를 성실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수행할 용기와 자신을 갖습니다. 우리 신일은 올해로 개교 43년이 되었습니다. 조만간 50년의 역사를 갖게 됩니다. 신일 동산에서 미 래의 꿈을 키웠던 소년들의 수도 3만 여명에 이르렀습니다. 경제계, 학계, 교육, 문화예술, 의료, 군, 스포츠 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 신일의 자유인은 눈부신 성과를 이룩 하였습니다. 비교적 짧 은 역사임에도 놀라운 전통을 만들어낸 우리의 저력에 저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집니다. 바로 이런 변화와 도약의 시점에 저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는 무엇보다도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 신일인의 역량을 한 곳에 모으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위해 각 분야별 모든 동 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소통의 장들을 많이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동기회가 결성되지 않 은 기수를 빠른 시간 내에 결성하도록 주력하겠습니다. 특히 지금까지 소외된 지방과 해외의 동문 에게도 많은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결집된 에너지를 학교와 동문회의 발전을 위해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라 생각 합니다. 재학생들을 위한 지원, 졸업생들의 취업 주선, 지역과 국제 사회에 대한 봉사, 우리 동문간 의 유대 강화 등 우리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은 무척 많습니다. 이 두 가지 과업을 위해 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우리 선배님들의 열정을 이어받을 것입니다. 각 분야에 잠재해 있는 우리 신일의 역량을 최대한 발굴하고, 우리 모두의 자산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겠습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일수록 우리 선후배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자조적인 노력이 야 말로 위기 극복의 원동력이 되리라 믿습니다.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우리 한번 이 어려움을 딛고 힘차게 나아가 봅시다. 새로운 각오와 포부를 가 지고 시작한 올 한 해 뜻하신 모든 일이 원만히 성취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 합니다. 또한 우리 신 일 가족 모두의 가정에도 하나님의 가호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2009. 1. 16 신일고등학교 총동문회 회장 장 성 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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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5. 동기회 소모임 ■ 신세월(現 방장 손종득)

‘강북 모임’으로 출발(2004. 2. 24 / ‘신세월’로 변경 - 매월 셋째 주 월요일) ■ 신오산우회(現 대장 신동익/ 대총 이승태)

서광석 대장으로 시작(2005. 4. 25 / 매주 토요일 산행 600회 돌파) ■ 초월회(現 회장 남궁원)

장성택 회장/ 서광석총무로 시작(2006. 3. 6 / 매월 첫째 주 월요일) ■ 광화문 사랑방(現 회장 이무길)

정태식 중심으로 발족(2006. 10 / 매월 넷째 주 금요일) ■ 신오골프회(회장 김영진)

이환노회장 중심으로 시작(1992년 / 매월 두 번째 주 목요일) ■ 미주 5회 동기회(회장 김상호)

김희동 중심으로 시작(동기, 은사님과 골프, 캠핑 등 / 연 2회)

[총동문회 산하 단체 참여 활동 동기들] ■ 신일 OB합창단

2005년 12월에 창단되어 2019년 까지 13회의 정기연주회를 가졌다. 조현준(테너1, 2012-2013), 김해만(테너2, 2015-2016)동기가 단장 역임하며 합 창단 발전에 기여. ■ 신일산악회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을 목적으로 매달 한번 씩 장거리 위주의 정기산행을 하고 있 음. 안동준(2004~2008), 김용훈(2014~2015) 동기가 회장을 역임하며 산악회 발 전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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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학창 시절 수양회 행사(재학 3년 동안 학생 수양회를 실시) 교훈이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인 신일의 중요한 종교 행사로는 학생 수양회와 추수감사절 행사 를 꼽을 수 있다. 학생 수양회는 매년 봄철 부활절을 전후하여 시행하였다. 많은 기독교 학교들의 연례행사라지만 모교는 특히 이 행사에 큰 주안점을 두고 세심한 배려 속에 3일간에 걸쳐 모든 수 업을 전폐하고 영락교회에서 개최했다. 초교파적 입장의 각계각층을 망라한 강사를 초빙해 가진 세 차례의 수양회를 통해 깊은 신앙과 영적 양식을 심는 계기가 되었으며, 하나님을 향한 삶의 자 세를 고양하는데 큰 보탬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고1 학생 수양회

일자 : 1971. 4. 15 ~ 17 장소 : 영락교회 본당 주제 - 참된 삶의 추구 주강사 - 김장환목사 부강사 - 주영흠교수. 김명선박사. 민경배박사

고2 학생 수양회

일자: 1972. 4. 13 ~ 15 장소: 영락교회 본당 주제 - 자아의 발견 주강사 - 은준관목사 부강사 - 안병욱교수, 김용준교수, 채규철선생

고3 학생 수양회

일자: 1973. 4. 12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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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장소: 영락교회 본당 주제 - 믿음 안에서 자라자 주강사 - 전영창교장 부강사 - 최태섭장로, 김득황장로, 고범서교수

7. 자유정신의 투사들( - 4.19 탑의 민주 함성 - ) 1973년 12월 8일. 신일고 3학년 학생들이 교내와 교외에서 시국 선언과 함께 전격적인 시 위에 나섰다. 3년생 김철과 김갑수 등을 주축으로 한 학생들은 ‘유신 철폐’ 및 ‘자유민 주주의 수호’를 골자로 하는 유인물을 준비, 각 신문사와 방송사 등 언론 기 관에 미리 연락을 취하고 담대한 뜻을 모았다. 8일 오전 10시 정각의 예고 된 집회를 앞두고 이른 시각부터 10여 대의 신문사 및 방송국 차량들이 신 일고등학교 정문 앞으로 급거 집결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거대한 함성으로 일제히 교실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하였지만 이와 같은 상황을 감지한 교사들의 적극적인 만류에 의해서 1차 시도는 일 단 좌절되었다. 학교 당국의 입장이나 교사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린 학 생들의 뜻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서 벌어질 엄청난 결과를 미리 예방하 는 것이 중요했다. 그 엄청난 결과란 두말할 나위도 없이 학생들 자신에게 장차 가해질 법적인 제재였다. 따라서 교사들은 우선 주동 학생들을 설득시 키는 일에 노력했다. 주동 학생인 김철, 김갑수 등을 교내 양호실에 불러들 여서 시위에 참가하려는 학생들과 격리시킨 후 계속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순간의 틈을 이용한 이들 주동 학생들은 창틀을 뛰어넘어 총집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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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4.19 묘지 방문 (모교 홈페이지 역사자료실)

지인 수유리 4.19 묘지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미 그곳에 집결해 있 던 피 끓는 120여 명의 신일고 학생들과 합류하여 본격적인 민주 함성을 쏘아 올렸다. 그 함성은 바로 12년 전 정의의 깃발을 젊은 피로 적신 수많 은 젊은 지성들의 민주 함성이었고, 자유와 정의를 향한 부르짖음이었다. 신일고 대의원회 의장인 金甲洙는 ‘자유인의 민주 선언문’(핍박받는 자 는 복이 있나니)을 목 놓아 낭독하였고, 이어서 ‘사월 학생 혁명 기념탑’에 새겨진 글귀 또한 부르짖듯 낭독하였다. “……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 명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 이어 본격적으로 시위에 나선 학생들은 겹겹이 둘러싼 경찰과의 일촉 즉 발의 대치 속에서도 백운대가 울리도록 함성을 지르며 ‘민주 수호’의 구호 를 외쳤다. 이들 시위 학생들은 李京俊 교사를 비롯한 몇몇 교사들의 호위 를 받으며 4.19 탑에서 신일고 교정에 이르기까지 도로 한쪽 면을 따라 대 열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당당하게 시위를 이어갔다. 한편 이례적으로 12월 8일에 있었던 4.19 탑의 시위와 관련되어 처벌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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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학생들은 다행히 한 명도 없었다. 4.19 탑과 신일의 자유인들 사이에는 오 래전부터 무언의 대화가 있었고, 암시가 있었고, 교감이 있는 듯했다. 수유 리에 자리하고 있는 ‘4.19 학생 혁명 묘지’는 거리상 본교와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개교 이래로 해마다 4월 초가 되면 수백 명의 학생들 이 이곳에 가서 묘역을 가꾸고 손질한 후에 한 송이 꽃을 그들 영령 앞에 바 치는 일을 빼놓지 않고 해왔다. 또한 본교의 교훈인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 인’의 기상과도 4.19 정신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에 교육적인 면에서도 늘 귀감이 되어왔다. ‘4.19 학생 혁명 묘지’는 의분에 넘친 학생들에게는 늘 용기의 분화구요, 영원한 자유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따라서 본교 학생들의 민주주의를 위 한 함성은 의당 자유인들의 마땅한 몫이었다. (※ 본 글은 「신일 30년 사」를 기초하여 편집하였습니다)

8. 신오동기회 경과 및 현황 그간 신오 동기들에게도 변화가 적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이미 유명을 달 리한 동기들이 하늘나라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으며, 5대양 6대주 다양한 현장과 분야에서 개인 사업이나 기업 활동, 사회봉사를 통한 자유인으로서 의 길을 걷고 있다. 미주 동기회.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동기회는 정기 모임을 통해 이국에 서의 ‘신일 정신’을 통한 유대감을 돈독히 하고 있으며, 지역별로 펼치고 있 는 ‘은사님을 모시는 행사’는 타교 동문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제 이순의 나이, 백발의 모습으로 우리들의 자화상 까까머리 시절로 돌 아가 본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41


9) 역대 신오동기회 회장단 총무 및 회계

연도

회장

1

1982-1983

염은호

2

1984-1985

이정균

3

1986-1987

이상국

4

1988-1989

이창수

5

1990-1991

구창선

6

1992

이창수

7

1993-1994

김병돈

이환노

8

1995-1996

김철수

김해만

9

1997-1998

김병돈

김해만

10

1999-2000

이상국

정태식

11

2001-2002

민순기

김해만

12

2003-2004

유재석

김해만

13

2005-2006

이기영

윤호영

14

2007-2008

장남선

비고

정태식

졸업20주년 홈커밍데이 (모교 체육관)

졸업30주년 기념행사

김해만 남궁원 15

2009-2010

권영철

유동혁

16

2011-2012

남궁 원

주면길

17

2013-2014

김해만

전영식

18

2015-2016

장남선

전영식

19

2016-2017

전영식

주면길

20

2018-2019

윤호영

김구섭

42

ㅣ 신일 5회 동기회

졸업40주년 기념행사


10) 3년 간 담임선생님 명단(1971~1973)

1학년(1971) 담임선생님

2학년(1972) 담임선생님

3학년(1973) 담임선생님

1

최영근

이용남(작고)

이석보(작고)

2

최창렬

최두식

신대식

3

강병훈

신정식

이원희

4

명노걸

정태만(작고)

주명갑

5

정오영

주명갑

정오영

6

장동찬

주영진

김성한(작고)

7

이대석(작고)

김동화

박원상

8

이원희

성우경(작고)

박태남

11) 해외 거주 동기 현황(2019.11) 지역

남가주 지역(35)

미국

뉴욕지역(5) 워싱턴 지역(8) 아틀란타 지역(9) 씨애틀(3)

카나다 기타

이름 고승경 김상년 김상호 김영두 김영주 김용성 김용진 김인승 김준태 김철 김홍구 김희동 김희주 노춘근 마창진 박성업 박성은 박일우 박준량 박희광 백준호 손상헌 송수학 신현돈 안경국 오동석 이종혁 임수빈 윤상욱 윤태균 전영일 조희철 채경철 홍세훈 홍승훈 구창선 박찬일 윤여명 최병우 최종상 김영훈 김명수 배종언 염은호 오민환 장진명 한영희 김강식 김온직(플로리다) 김원이 신현태 왕홍렬 우종인 이훈 이명근 이봉하 박승렬 장태수 최유돈

토론토 지역(5)

노상진 유의식 조한규 최성철 한석현

벤쿠버 지역(3)

박주택 최사무엘 한우용(잠시 제주거주) 김호재(호주) 성연민(인도네시아) 이상란(대만) 하영철(뉴질랜드) 황윤홍(인도네시아)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43


12) 3학년 각 반 재적 명단(1971~1973) 반

담임선생님

반원 차승진 이승재 도정환 임승철 이광구(작고) 고세훈 김온직 성연민 김우겸 이성 재 이무길 김진규(작고) 박태영 박명수 신명우 이충렬 김동선 김희섭 허경신 김 기옥 이원우 갈종완 오수근 이용성 김세진 정유택 이수훈 김구섭 장광순 남구

1

이석보(작고)

현 김동기 한창덕 이해긍(작고) 오병주 김종언 허영섭 김상년 배용주(작고) 이 일구 남궁원 정창식 백영준 신호현 장기성 김득철 김종국 염은호 송영인 권희 영 황도연 허익배 조병관(작고) 이석희 박병진 여운철 강상욱 김수봉 최창경 조 승철 정명환 김광석 이종성 최세양 신현돈 전현철 박춘영 김지훈 최종상 최병우 나건 이순규 임기홍 임중수 김창순 이종상 김성호 김원이 김종진 성도경 김용호 이상훈 이정호 이성

2

신대식

모 김충열 이진원 이재용 신영천 김연태 구창선 유성환 배승익 서광석 정태한 한 봉수 박영대 엄용립(작고) 김용진 강세원(작고) 박동진 윤호영 박성업 오순방 박 성만(작고) 문경종 모지현 황호근 이상국 박승용 홍성우 장성택 이윤성(작고) 송 길섭 우종인 김성일 이희선 이충호 한준상 강성호(작고) 신창득 김옥두 박임우 이창희 강진근 김왕률 맹주식 김용환 박춘원 김홍구 박영배 장남선 김주병 윤 창영 조광훈 임광수 서철수 한승동 김종선 최성철 김정훈 고승경 지중훈 이상 권 이대영 김원택 임명빈 김수동(작고) 서시영 김강식 홍정표 조정열 이원휘 이

3

이원희

종혁 윤석노 김건식 최철규 유진영(작고) 백웅기 이광진 이교선 나경천 황윤선 정성손 배동근 이승종 이돈응 김성수 박진식 정경천 한명우 김인근 김철 한용수 백명철(작고) 이철수 김승영 김영환(작고) 서정범 이기호 한정성 김상천 김갑수 박주택 이도희 이훈 임순기 왕홍렬 김인승 이태준 이환노 이명근 지정수 손종득 안광신 유희근 주인성 안근철 장영수 유봉우 천일 수(작고) 박민선(작고) 박영구 양형국 서재경 문용택 김현준 고형기 김호재 이길 렬(작고) 배종언 하영철 여성훈 이희준 유동혁 송석진 김남진 이형수 조영식 김

4

주명갑

주환 이주호 김효진 장원배(작고) 김해만 이호성 지태하(작고) 유금배 안창욱 김 철수 홍세훈 이영권 김대원 계명석 황윤홍 강구영 왕형택 김용훈 김철수 김진 구 이상우 오계석 이명학(작고) 안홍식 김상범(작고) 김영선 차달수 강석창 임 광빈(작고) 오영훈

44

ㅣ 신일 5회 동기회


전영식 조한규 박희광 최호원 이영식 윤태균 이용휘 유종열 박찬일 강용민 노상 진 이철호 최용근 임태철 장일흥 성훈경 이정필 이기영 최형택 황창현(작고) 배 은룡 오태열(작고) 김성식 한석철 최명률 윤여명 정광식 김지홍 이용현 임준식 5

정오영

김응원 이동준(작고) 안경국 서상원 최명훈 박승열 박천규 김병돈 최삼열 이인 성 안동준 권혁원(작고) 최세영 임동기 조용원 박성은 김인제 김형웅 김명준 현 수천(작고) 한상훈(작고) 나창균 오민환 신동호(작고) 김용훈 봉유종 이승철 김 지한 민한기 오동석 조원성 박종선 홍문기 김재영 최유돈 김두호 정영훈 김영수 박준량 서유영 정태 식 홍영표 송성재 권상대 김한상 고광표 윤상욱 김영두 전신택(작고) 주용진 한

6

김성한(작고)

우용 김대원 김용호 이응훈 박재현 조성천 이규봉 김정무 전재영 이봉하 한영희 오종환 안관식 장재성(작고) 남연우 전일웅 이수영 김명수 엄동섭 최봉현 김영 진 신현태 신진희 김학식 김중득 백홍우(작고) 민순기 김성진 조영진 한상환 김 문성 윤성식 백준호 박형언 이종원 이경철 조현근 박승국 강동식 김위석 김철우 정형일 윤항진 성흥모 이성일 황종근 김영주 신동익 이원열 이정 근 정승호 최유성 마창근 정태성 변문환 노춘근 김형수 정익진 홍문식 원긍식

7

박원상

이승태 김상호 조현준 맹두영(작고) 노홍섭 송수학 장준 백영인 강정혁 이창수 이운행 김용성 박성진 우호영 한동표 이강윤 오진 장태수 이상란 유재훈 이성근 배근완 김정갑 김희동 이영화 권영철 김영두 남규현 조영률(작고) 엄호성 황희 철 한태영 신세윤 유의식 최병진 김영훈 손상헌 전영원 윤장호 박인호 임수빈 조혁증(작고) 이광세 황태영 장동영 강승일 김승남 전성 근 김철수 조희철 김한철 권오양 이서철 심선식 김희주 황순모 강태욱 강호양 김윤갑 이충보 김세권 서용무 박형섭 박태호 유태한 엄인상 김만수 한장섭 정한

8

박태남

문(작고) 유기철 신동훈 손창수 김용성 이덕열 노승훈 이정균 김홍기 홍승훈 이 철주(작고) 주면길 김옥배 김상원 전영철 한석모 양동민 마창진 유충목 이신재 유재석 박용두 박영원 김영대 정윤식 장진명 박태학 김준동 한동익 소영성 차승 균 권국환 허철 강진규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45


자유인으로 산 45년

04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믿음篇 강구영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이종상 『성경 신·구약을 세 번이나 썼다 한들』 전일웅 『그때는 몰랐었지만』 정익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조희철 『학창 시절에 처음 해 본 경험들』 한창덕 『지혜로 쓴 오랜 편지』

46

ㅣ 신일 5회 동기회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강구영

나는 신일 중·고등학교 출신 동문이라는 것이

하지 않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자랑스럽다. ‘신일인’이라는 나의 마음속 각인

입학식 날 신일중학교의 교훈 ‘믿음으로 일하

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소중한 나침판

는 자유인’을 복창하고, 교가 “동트는 하늘 찬란

이다. 왜냐하면, 빼고 붙일 것도 없이 말 그대로

한 빛이 백운대 위에 퍼져 날 때”를 합창했다. 그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교훈

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교가 암기를 위해 반복

의 의미가 나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은 아

해 부르던 생각이 난다. 그때 처음 ‘백운대’라는

주 뒤늦게야 절절히 깨달았다. 26세의 나이로

단어에 주목했다. 뭘까?

미국 유학을 떠나 갖은 고생을 겪으며 진정한

다음날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국어)께 ‘백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야 비로소 이 교

대’가 무엇이냐고 여쭤 보았다. 선생님은 창문

훈에 얼마나 심오한 뜻이 담겼던가를 깨우쳤으

너머 멀리 우뚝 솟아 있는 웅장한 바위산을 가

니까 말이다.

리키시며,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한자어를 칠판에 쓰시고 백운대의 심오한 뜻을 일러 주

1968년 신일 중학교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을

시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아버지는 한국중

당시에 운동장에서 백운대를 바라보다 보면

공업 노동자 신분으로 당시 한창 전쟁 중이었던

“저 웅장한 바위산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월남에 계셨기에 합격의 기쁨도 함께 나눌 수가

라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다. 특히 백운대와

없었다. 당시 대한민국 대부분의 민초는 가난했

인수봉을 합쳐서 옆으로 보면 꼭 하늘을 향하여

으니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마다

무엇인가 소리치는 옆모습을 보는 듯도 하여 더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47


욱 백운대 위가 궁금해지곤 했다. 입학 첫 주 일요일 날, 삼립 식빵의 크림빵 두 개를 사서 나일론 가방에 넣고 마침내 나는 백

치지 않았다. 덕분에 4반 동창과는 오랫동안 동 고동락을 제대로 했다. 그래서 4반 동기들은 여 전히 반갑고 친근하다.

운대를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백운대

당시 화학 교과의 담임선생님은 100% 예비고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놀랍게도 산 아래에

사 합격률을 위하여 마음고생이 무척 많으셨던

운해가 피어오르고 내가 그 위에 서 있었다. 바

것 같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조용히 나를

람에 구름 안개가 사라지면서 아주 멀리까지 보

부르셨다. 그리고 학교의 명성을 위해서라도 내

이는 신세계가 신비롭기만 했다.

가 예비고사 응시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지를

이 사건이 나를 산으로 이끌었던 계기가 됐다.

물었다. 나는 “산에 다니기 위해서라도 대학은

한 마디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산에만 다

반드시 가야 합니다.”라고 단호히 응답했다. 그

닌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산에만 올

리고는 예비고사 시험 4개월 전부터 거의 매일

랐고, 산악인이 되겠다고 다짐하게 된 계기가

학교 뒷산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면서 오로지

됐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 무턱대고 산에만

예비고사 합격만을 위해 준비를 한 끝에 당당히

다닌 것은 아니었다. 다니며 체력뿐만 아니라

합격했고, 인하대학교 화학공학과 합격마저 성

끈기와 도전 정신을 배웠으니 말이다.

공했다. 이 전공 선택도 사실 담임선생님에 대 한 반항이 한몫했겠지만, 어쨌든 전문 산악인의

이제 학창 시절 추억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대 학 입시를 치르기 위해서는 예비고사를 합격해

길이자 전문 암벽등반가로 나아가는 길목이 됐 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야 했고, 모교는 열정적인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야간 학습과 체육관 합숙(돌 반만 해당)을 강행

74학번 동창들은 참으로 우울한 대학생활을

했다. 이러한 선생님들의 눈물 나는 헌신이 있

한 세대인 것 같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구호 속

었기에 신일은 전국 고등학교의 입시 성적에서

에 데모의 연속으로 대학생활에서 학교 수업은

빛나는 일류가 되었다.

거의 못 들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나는 1975

산에서 살다시피 했던 나는 고등학교 전 학년

년 12월 군에 입대를 했고, GOP에서 군 생활

동안 4반(우리는 4반을 돌 반이라 부른다)을 놓

을 하던 중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벌어져 두

48

ㅣ 신일 5회 동기회


달 연장된 34개월을 꼬박 채우고서야 만기 제 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엘 케피탄 설치 등반을 위한 연습 등반 중 추락해 왼쪽 무릎이 골절되는 사고를 당하고

그런데 이런 불운의 군대 생활이 내겐 아이러

말았다. 귀국 후 연골 제거 수술을 받던 한 달간

니하게도 축복의 발판이 됐음을 나중에 깨달았

의 입원 중, 대한민국 산악회 히말라야 등반대

다. 당시 전방에는 북에서 판 땅굴 발견으로 탐

가 구성됐고 마침내 나는 무릎 부상으로 자격이

침봉 설치로 바빴는데, 나도 역시 꼬박 그 관

상실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리사병을 하느라 삼 년을 전방에서 바삐 보내 야만 했다. 그런 중에도 한편으론 고등학교 재

그때 내겐 불가능한 목표가 아닌 가능한 새 목

학 시절 산에 다니느라 눈코 뜰 새 없어 거의 등

표가 필요했다. 그때까지 안 해 본 것을 노트에

한시 했던 영어공부를 새삼 들여다보았으니 정

적어보기로 했다. ‘공부’라는 다소 생소한 단어

말 행운이 겹친 군 생활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

가 제대로 안 해 본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하여

행운은 후에 내가 유학을 갈 수 있는 자격시험

유학을 결심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유학을 가기

인 토플과 GRE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는 무

위한 경제적 형편도 내겐 없었지만 산에 다니며

기가 됐다.

몸으로 배운 도전과 끈기가 있었고 죽음에 대한 공포감마저 초월했다고 생각했던 나는 빈손 유

군 생활 동안은 거의 데모가 없었다. 그러나 제

학을 감행했다.

대 후 설악산 양폭산장에서 산장지기를 하다가 1979년에 복학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민주

돈 없는 유학생활은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등

화운동 데모가 시작되어 또다시 학교를 거의 등

록금을 벌기 위하여 밤에는 주유소에서 일하고

교하지 못하는 학생이 되었다. 대신에 산이 나

낮에는 학교 다니면서도 그때마다 산에서 배운

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말라야 고산을 목표로

끈기로 할 수 있음을 다짐했다. 밤에 미국 Long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1980년에는 미국 요

Beach의 주유소에서 일하면서 도합 다섯 번의

세미티 국립공원 Half Dorm 북서벽을 2박 3일

권총 강도 사건을 당해야만 했다. 산에 오르면서

에 걸쳐 수직 암벽에 매달려 자며 대한민국 최

죽음의 공포는 극복했다고 여겼었는데 그게 아

초로 등반에 성공하였다.

니었다. 엄습한 죽음의 공포 속에 “내가 강도 손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49


에 죽으러 미국에 공부하러 왔나?”하며 나도 모

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구절을 읽으며 벼락

르게 예수님을 부르고, 살려 달라고 엄청난 눈물

맞은 듯 나의 몸은 굳어졌는데, 이상하게도 머

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이 구원의 사건은

리는 맑아져 옮을 느꼈다. 아울러 신일중·고등

내가 신일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강제

학교의 교훈인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이 바

로 배운 성경 과목과 아무 믿음 없이 드렸던 예

로 이 말씀임을 깨달았다. 예수님께서 나를 신

배를 통해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의 절벽 위 나를

일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보내심을 다시 생각했

찾아오신 것임을 확신하는 계기가 됐다.

다. 산에 오르며 반항적인 삶과 내 멋대로의 삶 만 추구했던 나였지만 지금은 예수님께서 나의

그 사건 이후 나는 미국 ‘LA 동양 선교 교회’에

발걸음 속에 항상 함께 하여 주심을 믿고 있다.

다니면서 밤에 일할 때에는 학교 공부뿐만 아니 라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몇 차례에 걸쳐 성

우리 ‘신일인’은 항상 어느 곳에 있든 간에 예

경을 읽던 어느 날 밤 요한복음 8장의 “나는 세

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잊지 말자. 다시금 함께

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신일의 교훈인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을 소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요

리쳐 다짐하며, 대한민국 속에 영원한 신일이

한복음 8장 32절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

빛나기를 바란다.

50

ㅣ 신일 5회 동기회


성경 신·구약을 세 번이나 썼다 한들 - 그래도 감사합니다 -

이종상

이번이 나로서는 3회차 성경 필사다.

기 노트였다.

1차는 직장 말년에 쓰기 시작해서 완필하기까

나로서는 그때가 2차 필사를 마치고 1년 이

지 6년 10개월이나(2004. 7. 28 ~ 2011. 3. 5)

상을 쉬고 있던 시절이었다. 1, 2차 때와는 뭔

걸렸지만, 2차는 직장 그만두고 홍천에 내려와

가 다르게 쓰고 싶었지만 막상 적당한 아이디

그 이듬해부터 쓰기 시작해서 3년 6개월 만에

어가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어 왔던 것이다. 그

(2014. 1. 19 ~ 2017.7. 30) 모두 끝냈다. 이번

러던 차에 교구의 ‘성경 통독’ 프로그램을 만나

에는 만 1년도 안 된 최단기일 내에(2018. 10.

면서 나는 거기에 필사를 추가하기로 마음먹었

16 ~ 2019. 9. 12) 끝내게 돼서 나로서도 참 기

다. 사실 꽤나 무리한 작정이고 어찌 생각하면

특하게 생각한다.

무모하기까지 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결국 오늘

이번 필사를 이렇게 짧은 기간 내에 끝낼 수

로써 나는 그 무모하다고 생각되었던 계획을 한

있었던 건 순전히 춘천 교구의 ‘성경 통독’프로

달 이상이나 앞당겨서 끝내게 되었으니 나름 기

그램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작년 10월경에 본

특하다고 여길만하겠다.

당으로부터, 춘천 교구에서 배포한 ‘날마다 만

성경 쓰기 방식은 2차 때와 마찬가지로 한자

나는 성경 통독 일기’라는 아주 깜찍한 노트를

공부를 위해 한자로 쓸 수 있는 낱말은 모두 한

받았다. 펼쳐 보니 성경 신·구약 전체를 52주간

자로 쓰되(모르는 건 사전을 찾아서), 2차 때와

에 걸쳐 날짜별로 일일이 세심하게 쪼개어 놓아

달리 이번에는 필사 노트 앞뒤 두 쪽을 성경의

서 그 진도표에 따라서 읽기만 하면 1년 안에

한쪽에 맞추어 써서 페이지 수를 서로 맞추기로

신 · 구약 통독을 완료할 수 있도록 구성한 일

했다. 그래서 구약 1,634 페이지, 신약 442 페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51


이지의 성경과 필사 노트의 페이지가 똑같아질

이나마 다가갈 수 있어서 좋았다. 가장 마음에

수 있게 되었다.

남는 구절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

다 쓰고 나니 일단 나 스스로 뿌듯하고 대견

다.”는 요한복음 8장 32절의 말씀이다.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걸 크게 내세우고 싶 지 않은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나의 평소 언행

끝으로 매주일 미사 시작 전에 그날의 성경을

이 다른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성경 필사를 세

함께 봉독 하게 하며 신자들에게 성경 읽기를

번이나 한 사람’에 어울리지 않게 비칠 수도 있

독려하신 본당 신부님 덕에 나도 필사를 무사

기 때문이다.

히 마칠 수 있었음을 밝히고 싶다. 앞으로 혹시

사실 성경 읽기나 필사가 꼭 신심과 결부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 번의 성경 필사보다

또다시 성경 필사를 하게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세필 붓글씨로 정성스럽게 쓰고 싶다.

노숙자에게 밥 한 끼 대접하는 게 주님께 칭찬 받는 지름길일 것이다. 다만 내 경우에는 성경

주님께서 이토록 저를 사랑하시고

필사를 하는 동안만큼은 죄 지을 기회가 많이

은총을 베풀어 주시니

줄어드는 효과는 있는 것 같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멘.

그리고 11개월 동안 거의 매일매일 그날의 성 경을 쓰고 마음에 남았던 말씀이나 나의 간단한 묵상을 필사 일기에 옮겨 적으면서 주님께 조금

52

ㅣ 신일 5회 동기회

2019. 9. 12. 홍천 서석 성당, 세례명 베드로


그때는 몰랐었지만

전일웅

저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교에 갈 때는 집에 그대로 있을 수 있었습니다.

1993년 7월. 10여 년을 근무하던 소매 유통

하지만 아이가 하교 후 집에 올 때는 면목도 없

회사를 퇴사하고 국산 차류와 음료를 취급하는

고 체면 때문에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총판을 개업, 영업을 개시하였습니다. 1996년

서 집(서초동)을 나서서 되도록 멀리 돌아서 되

에는 대전에 공장을 임차하여 생산도 같이 겸

돌아오는 버스를 탔습니다(그때는 환승 제도가

하게 됐습니다. 인삼제품은 일본으로 수출하고

없었지요). 차비를 아끼기 위해 33-1(여의도를

음료는 유한양행 납품, 대리점에 판매하던 중,

한 바퀴 돌아오는) 버스 혹은 289-1(신림동 관

1997년 좋은 기회(일본 거래처의 소개로 일본

악산을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돌아와, 아이가

계 자금을 대출 받음)가 생겨서 충북 증평에서

집에 오는 시간 후에나 집에 들어가곤 하였습니

음료와 국산차 제조 공장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

다. 참으로 마음이 곤궁한 시기였습니다.

다. 계획대로 운영되어 가던 중 IMF사태가 발

그래도 참 무던하게 견디며 오히려 격려해준

발하고, 지방 대리점들의 도산(부도)과 대출금

마태(아들)와 아내, 기도로 응원해주시는 부모

리의 3~4배 폭등은 제조공장 운영하기를 더 이

님, 또 친지들이 함께 해준 것들이 지금도 너무

상 어렵게 만들어 계속 버티기만 하다가 이듬

고맙습니다. 아들과 저는 단둘이 2박 3일로 설

해인 1998년 4월에 도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악산을 종주하며 힘든 일을 함께 하면서 조금

이후 백수 생활과 고난이 시작됩니다. 제 아이가 그때 고1이었고요. 전에도 조금 늦 게 출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아이가 학

더 가까워졌던 것도 좋았던 일이었지요. 그땐 교회엔 나갔지만 예수님의 안중에 저는 열외인 줄(그건 아니었지만) 알았습니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53


그러던 중, 전에 근무하던 회사가 제 사정을

의 발자국’ 이야기가 그 당시 저에겐 바로 저의

알게 되었지요. 당시 신종 업태인 생활용품 할

착각이었음을 저는 고백합니다. 제가 어렵고 힘

인매장을 시작하려 하는데 도와달라는 제안이

들었을 당시 뒤를 돌아보니 두 줄의 발자국이

온 것입니다. 저는 그 회사의 영업담당 이사로,

아닌 한 줄의 발자국만 남아있어, 예수님은 어

또 Incentive제로 회사와 동업 형태의 매장을

딜 가시고 저 혼자만 그 길을 걷게 하시는 줄 알

운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업태가 지금은 경

았습니다. 이제 보니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힘

쟁이 심하지만 당시는 요즘 말로 대박(?)이 났

들어하는 저를 업고서 그 어렵고 힘든 시기를

습니다.

지나게 하셨지요.

이후에 집도 다시 마련하고, 따로 2006년에

이젠 주님을 오해하지 않습니다. 이젠 확실히

영업장(생활용품 판매업)도 다시 개업하여 현재

주님이 언제나 저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고 있

에 이르고 있습니다.

으니까요.

많이 알고 계시는,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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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졸필 마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정익진

<요일 4:7-12>

오늘 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너무 흔한 주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

제라 다들 잘 안다고 생각하고 더 배우거나 더

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

훈련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주제이

서 하나님을 알고

지만, 사실은 너무 모르기도 하고, 너무 잘못 알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기도 하기에 대부분은 끝내 제대로 못해보고 죽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기도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이 성경의 사랑은 셰익스피어와 같은 이야기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

꾼이 들려주는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께서 말씀해 주시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셰익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

스피어가 말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이

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

를테면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사랑은 어떤

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입니까? 물론 그 사랑은 목숨보다 더 강한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

사랑 같은 것을 보여 줍니다. 젊은 남녀 간에 있

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을 애절한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사랑은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결혼 생활을 통해 오랜 시간을 지내며 익어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

는 그런 사랑과는 다릅니다. 서로 간에 수도 없

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이 생기는 갈등과 충돌을 참아내고 해결하는 가 운데 성숙하여지고 온전해지는 그런 사랑이 아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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닙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 만나고 사랑하

어로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라고 되

고 결국 죽게 되는 그 기간은 일주일도 채 안 됩

어 있습니다. 참된 사랑의 출처, 진짜 사랑의 원

니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사랑을

산지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원

처음 느끼며 불타오른 그런 사랑입니다. 그들이

래 그런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서

죽지 않았으면 오래가기나 했을까 의문이 들기

로 짝이 맞고 계산이 맞고 격이 맞고 이해관계

도 합니다. 그런 사랑도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가 맞아야 하는 사랑뿐입니다. 끼리끼리의 사랑

도 없고, 또 이것을 계기로 원수진 두 가문이 화

입니다. 그것마저 오래가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해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사랑은 성경에서 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랑은 다릅니다. 그 사랑은

르치는 사랑과는 다릅니다.

이 세상에 없다고 합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으

성경은 잠시 피었다가 지는 들의 꽃의 한 순간

로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영원성을 지닌

이처럼 세상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이처럼 이

것을 가르칩니다. 참 사랑입니다. 보다 현실적

땅에 사랑이 없으니 당연히 우리는 그 사랑을

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 가능하고, 잘 생겼

알지도 못하고, 주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고,

거나 못 생겼거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우파

실제로 받아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TV

나 좌파도 가리지 않고, 원수도 사랑하고, 국경

드라마를 비롯해서 대중 소설이나 비중 있는 고

도 넘어가며 모든 이해관계를 넘어가는 그런 사

전들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초등학생의 입에

랑, 한 마디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그런 사랑

까지 사랑이라는 말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을 가르칩니다. 이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그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다니며 사랑을 찾아

런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다니게 됩니다. 여기는 없는데도 있을 것이라고

7절입니다.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은, 그런 사랑이 여기는 없고 하나님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

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다

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

고 믿는 사람들의 확신은 틀리지 않습니다. 분

서 하나님을 알고”

명히 그 사랑이 있습니다. 다만 어디 있는지 모

이 사랑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가르칩니다. 원

56

ㅣ 신일 5회 동기회

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딜레마입니다.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사랑을 그리워하는데 정

이런 이유로 많은 이들은 그 귀한 것을 받고

작 여기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랑은 그

서도 그것을 벗어던집니다. 딱 맞지는 않더라

들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는 하나님께 있기 때

도 그것을 입고 다니며 거기에 익숙해지려고 하

문입니다.

는 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다들 장식품처럼 자

그러나 이제 이 사랑이 우리에게 알려졌습니

신을 꾸미는 일에만 약간씩 사용을 합니다. 그

다. 그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도

사랑도 변질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영원한

알려졌습니다.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

사랑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세상

수를 통하여 그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배웠습니

의 사랑으로 전락합니다. 예수 믿는 이들도 그

다. 연습을 했습니다. 문익점은 중국 땅에서 목

저 그런 정도로만 사랑을 사용합니다. 그 외에

화씨를 숨겨왔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사람들은 그것마저 없이 살아갑니다. 그것의 가

로부터 나오는 그 사랑을 이 세상에 전하신 것

치를 모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

입니다.

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사랑이 원래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저 하늘에서 돌이

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니 우리에게 잘

하나 떨어져도 대단히 귀하게 여깁니다. 그것을

맞지 않는 것입니다. 형이 입던 옷이 나에게 맞

운석이라고 합니다. 우주에 날아다니는 유성 같

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쓰시던 것이 나에게

은 것이 지구와 부딪히기 전에 대기권에서 공기

잘 맞을 리가 없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와의 마찰로 화염을 일으키며 타다가 남은 조각

싸우러 나갈 때 사울 왕이 자기의 갑옷을 그에

이 운석입니다. 운석도 종류에 따라 가격이 다

게 입혔습니다. 사울 왕도 거구입니다. 보통 사

른데 가장 비싼 것은 무게 600 킬로그램에 1조

람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더 컸습니다. 그러니

원이라고 합니다. 이제 운석 주우려 다녀야 할

그 갑옷이 소년 다윗에게 맞지 않습니다. 오히

것 같습니다. 저 허공에서 떨어진 돌멩이도 이

려 거추장스럽습니다. 그래서 벗어던졌습니다.

렇게 비싼데,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얼마

사랑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던 것이니 우

나 비싸겠습니까. 하나님이 소지하시던 것이라

리에게는 잘 맞지 않고 도리어 불편합니다. 잘

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이것은 1조, 2조가 아

안 됩니다. 그러니 별로 좋은 지도 잘 모릅니다.

닐 것입니다. 가치로 따지면 그 백 배 천 배도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57


될 것입니다.

는 아담이 하와를 알았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또

아담에게 하와는 지식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경

그렇게 비싸고 귀하다면, 그것을 가진 자와 가

험과 관계의 대상입니다. 실제로 아담은 하와의

지지 못한 자는 서로 큰 차이가 있게 될 것입니

혈액형도 모르고, 시력이 얼마인지, MBTI 성격

다. 그것을 가진 이는 그만큼 비싸고 귀한 자

검사의 어느 타입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결혼

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자는 그만

후에 부부로 살면서 아담은 하와를 아내로 알게

큼 값싼 싸구려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

되었고 아담을 하와는 남편으로 알게 되었습니

로서 하나님의 본질의 모습을 닮지 못했기 때문

다. 누가 자기 배우자를 알아보겠다고 그를 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사랑이 있는 자와

식의 대상으로 삼아 분석하고 조사하고 가설을

사랑이 없는 자를 구분하십니다. 7-8절입니다.

세우고 추론하고 한다 해도 결코 알 수가 없습 니다.그 결과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어떤 생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 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 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 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물일 수는 있어도 그의 아내나 그의 남편은 아 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 님을 지식의 대상으로 여기면 빗나갈 수밖에 없 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지 않는

님을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으로 다가가야

자를 다르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합니다. 그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아담이 하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는

와를 알게 되어 그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듯이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안

사람이 하나님을 알면 얻는 결과도 그와 같은

다는 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것입니다. 즉 그와 사귀고, 그를 신뢰하고, 그를

은 아무리 해도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

사랑하고, 그와 친밀해지고, 그를 섬기고, 그에

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안다’고 하는 표현은

게 순종하고, 그를 기뻐하고, 그를 경배하고, 그

경험과 관계를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

에게 헌신하게 되는 결과입니다. 결과가 그렇다

어 아담과 하와가 결혼을 했다는 것을 성경에서

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된 것입니다.

58

ㅣ 신일 5회 동기회


오늘 읽은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을 안다고 할

가 희생하는 일이 있으면 핑계를 대고 빠지려고

때 그 중에 가장 본질적인 것이 사랑이라고 가

하고, 남을 잘 돕는 것 같은데 오래가지는 못하

르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기

고, 듣기 좋은 말은 하는데 책임지지는 않습니

때문입니다. 사랑이 그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다. 흔히 보는 무난하고 보통 사람입니다. 때로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게 될 때 무엇보

사랑이 있다고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다도 강하게 무엇보다도 분명히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졌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본질적인 것을 우

또 어떤 사람을 보니까 좀 험상궂게 생겼습니

리도 가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다. 말도 없고 무뚝뚝합니다. 그런데 아까 올 때

있는 것입니다.

사고가 날 뻔했는데 보니까, 한 아이가 가는데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

차가 못 보고 달려왔습니다. 다들 비명을 지르

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을 찾아보

고 쳐다보기만 합니다. 어디서 한 사람이 번개

라고 하면 이런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테

같이 뛰어오더니 그 아이를 밀어내고 자신이 죽

면, 야유회를 가서 게임을 할 때 리더하시는 목

기 직전이었는데, 10센티 앞에서 차가 간신히

자님이 종이쪽지를 나눠주고 거기에 적혀 있는

급제동을 하는 바람에 살아난 아저씨입니다. 그

사람 찾아오라고 합니다. 그 쪽지에는 목사님도

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툭툭 털고 간 사람

있고 안경 쓴 사람도 있고 빨간 옷 입은 사람도

이 바로 이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데려가

있습니다.여러 가지가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도 될 것 같습니다. 온전하진 않을지라도 하나

여러분들이 받은 쪽지를 펴보니 이렇게 적혀 있

님 사랑이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얼굴이 험악

습니다. “하나님을 아시는 분” 이렇게 적혀 있습

한 것과 사랑이 있고 없고는 꼭 일치하는 것은

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찾아야 합니까? 생

아닙니다. 맞습니다, 이 성경에 의하면 이 사람

각하다 못해, “혹시 하나님을 아시는 분?” 이렇

은 그래도 조금 하나님을 아는 사람 같습니다.

게 물어봅니다. 그러자 누가, “저요!” 하고 손을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겉모양의 사랑이 아니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손을 잡고 데려

라 남 대신 내가 아픈 사랑이고, 남 대신 내가

오려고 하다가 생각을 해 보니, 이 사람은 겉으

피 흘리는 사랑이고, 남 대신 내 뼈가 부러지는

로는 친절하고 사랑이 있는 것 같은데, 정작 내

사랑이고, 내가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59


사랑에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특성이 바로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 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라는 뜻입니다. 그의 핵심적인 특성인 이 사랑 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며, 모든 우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짜

상과 그를 구분하는 것이며, 천국을 천국 되게

릿한 사랑도 아니고 가슴이 뛰는 환상적인 그런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핵심적인 특성으로 가지

사랑도 아닙니다. 잘생기고 부자이고 귀족의 아

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 되는 것이며 그

들인 로미오가 역시 잘생기고 부자이고 귀족의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딸인 줄리엣에 대해서 가지는 그런 감정이 아닙

그러므로 사랑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본질

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 도대체 상대도

과 일치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

되지 않은 그의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사랑입니

다.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을 이 사람도 가졌

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

기 때문입니다.이처럼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중

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도 않고 순종하려

요한 것이 서로 일치하면 하나님을 닮고 그를

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에게 복종하기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은 모르면

는커녕 도리어 그에게 대들고, 삿대질하고, 사

서 지엽적인 것만 조금 안다면 하나님을 아는

람으로 오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런 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이 성경에 도통한 세계

악무도한 존재들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돌은

적인 신학 박사이고, 그의 저서들이 세계적으

귀한 줄 알면서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은 미워했

로 베스트셀러가 될지라도, 그에게 사랑이 없

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이들도 사랑하는

다면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사

사랑입니다. 그분을 경험하여 그에게 배우되 그

람은 하나님의 핵심적인 특성과 본질을 모르고

의 사랑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흠모하지도 않는데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랑을 예수님을 통해 보 여주셨습니다. 9절입니다.

60

ㅣ 신일 5회 동기회


학창 시절에 처음 해 본 경험들

조희철

내가 고등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면 2, 3학년 때

지금 이 나이에 아직도 축구를 즐기는 것은 아

는 입시 준비로 힘들었던 기억밖에 없고, 별로 생

마도 그때 실컷 해보지 못한 탓이 아닌가 생각

각나는 추억들도 없다. 가장 꿈이 많았던 고1 시

한다. 마음껏 뛰어보고 싶어했던 마음이 트라우

절이 제일 생각난다. 물론 그때도 공부하느라

마가 된 거 아닌지 모르겠다. 마치 어린 나이에

힘들긴 했어도 인생에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사춘기를 제대로 겪지 않으면 40대에도 사춘기

면, 가장 가고 싶은 시절이 바로 이때가 아닐

가 온다고 하는 심리학자의 말처럼 말이다. 그

까 한다.

때의 축구에 대한 목마름이 아직도 해갈이 필 요해서 인지 토요일 저녁 8시만 되면 운동장으

우선 즐거웠던 기억부터 나누고 싶다.

로 죽기 살기로 달려간다. 마치 밀렸던 한을 풀

그때나 지금이나 운동을 잘하지 못하면서도

려는 듯.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역시 체육 시간이었다.

그 다음으로 즐겁던 시간은 역시 음악 시간이

그 전 시간이 되면 휴식 시간에 미리 바지는 속

었다. 그때는 같은 동네의 은근히 짝사랑 대상

에 갈아입고 있다가 종만 치면, 겉에 껴입었던

이던 어느 중학교 여학생(뒷날 대학생이 되어

옷들을 벗어던지고 뛰쳐나간 생각이 난다. 아

만났을 때 그 환상은 깨지고 말았지만)을 생각

마도 평상시에는 늘 공부에 대한 압박감 때문

하며, 나름의 상상의 날개를 곁들여 배운 가곡

에 늘어져 있다가, 아무 생각 없이 달리던 이

들이 정말 나의 불타는 속마음을 달래 주었기

시간이 가장 스트레스를 풀기 쉬운 시간이었던

에, 내게는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다. 연민의 마

것 같다.

음을 담아 상상의 노래를 펼치며 부르던 노래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61


들은 가사 가사마다에 푹 빠져 들게 하였다. 그

러웠고, 말 그대로 개울에서 첨벙거리며 놀았던

런데 성인이 되어 연애할 때, 그때 배운 가곡들

추억을 가진 친구들은 내게 늘 선망의 대상이었

이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게 할 줄은 전혀 예기

던 것 같다. 내 아내도 사실 거의 같은 수준이라

치 못했었다.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

자연인과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우리는 대리 만

없는 고독의 위를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족을 얻고 있다.

또다시 죽는…… ”의 마침 이 수선화 노래가 그

또한 그때 처음 경험한 것 중의 다른 하나는 포

상대 여인이 가장 좋아했던 곡이라 쉽게 마음을

도주 한 병을 다 마시고 좀 취했던 기억이다. 나

얻을 수 있었다. 음악 선생님께서는 미리 앞을

름대로 그때까지 반듯하게 지내왔던 나에게 정

보시고 좋은 노래를 가르쳐 주셨고, 나도 앞을

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여름 방학 때의 일이다.

내다보기라도 하듯 열심히 연습하여 점수도 잘

그 당시 나는 네 살 손위 친누나의 친구를 만나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를 두고 도랑 치고 가재

한눈에 반해 몸살을 앓던 중이었다. 얼마 후 누

잡는다고 하는 것인지……

나 친구를 그 집 앞에서 기다리면서, 어리지만 남자답게 보이려고 포도주 한 병을 사서 다 마

고1 때 처음으로 해본 것들 몇 가지도 생각난다.

셔버렸다. 그리고 누나 친구가 좋게 타이르는

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것을 안 듣고 계속 객기 부리며 만나려다가 친

없었다. 서울에서만 살았고 지방에는 아무 친척

누나에게까지 알려져, 집안에서 온통 난리를 겪

도 없어 한번도 시골 경험을 하지 못했었다. 그

은 적이 있다. 다행히 방학 동안이었고, 잠깐의

때 우리 반 반장으로 있던 친구의 어머님이 돌

방황이어서 학업에는 큰 지장이 없었지만, 지금

아가시는 일이 발생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부

생각해보면 이루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 아

반장인 내게 대전에 함께 다녀오자 하셨다. 그

닌가? 지금까지 같이 있게 됐다면, 일흔 가까이

래서 처음으로 담임선생님과 함께 지방에 갔었

되신 아내를 모시고 살아야 할 뻔하지 않았는

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께는 창피해서 지방이

가? 자고로 부모님의 말씀은 하나님 말씀 다음

처음이란 이야기는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후

으로 언제나 옳으시다.

로도 꽤 오랫동안 나는 시골을 경험하지 못했 다. 그래서 시골에 친척이 있는 친구들이 늘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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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그때에 비로소 나는 정말 아름답고, 따뜻한 가 정도 발견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주위의 가정 모두가 어려움들을

무엇보다 가장 보람 있는 기억 하나는 학년 말

겪고 있는 듯이 보였다. 경제적으로든 가정적으

에 우리 반에서 진급이 어려운 학생들 둘을 담

로든 여러 가지 면에서 그러했다. 내 주위에도

임선생님의 부탁으로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는

잘 사시는 친척들도 있고 하였지만, 그렇다고

점이다. 학생이 학생을 가르치게 된 것이었다.

다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학생들의 평소 생활하는 모습에 관해

그때 ‘전국 반 대항 합창대회’라는 것이 처음

들으면서 나는 완전히 성인의 세계를 듣는 것

만들어졌고, 우리 학교에서도 출전할 반을 선발

같은 착각에 빠졌다. 친구들의 신세계를 듣는

하는 경연대회가 예고됐다. 다행히 우리 반에는

재미가 가르치는 수고를 훨씬 압도하였다. 다행

피아노 연주와 음악에 걸출한 인재들이 꽤 있었

히 그 만남이 길지는 않았고 그 친구들도 다 함

다. 그중의 한 친구가 피아노 반주를, 다른 한 친

께 진학할 수 있게 되어 더 이상의 호기심은 접

구가 지휘를 맡았다. 거의 완벽한 콤비였다. 우

어야 했다. 만약 그 만남의 시간이 길어졌더라

리는 본선을 꿈꾸며 열심히 연습하였고, 학교에

면 새로운 세계의 호기심으로 전혀 삶이 달라질

서의 연습만으로는 부족해 그 지휘자 친구 집에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까지 가서 연습을 하곤 하였다. 그때 그 친구 어머님이 얼마나 인자하셨고 사

즐겁게 먹었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담임선

랑으로 우리를 대해 주셨던지, 아직도 그 가정

생님께서는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나와 다른 친

의 따뜻함이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중학교 때까

구를 불러 담당 과목 채점을 시키시곤 했다. 그

지 어머님께 매 맞고 자란 나는 어머니가 물론

때 채점이 끝나고 나면 자장면을 사 주셨는데,

가장 고마우시기야 했지만, 때로는 두려움의 대

그 자장면 맛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맛있었고, 참

상이시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 매

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은근히 시험

도 필요 없이 늘 화기애애하고, 행복하고, 아름

마지막 날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친구들 앞에서

답고, 온화한 가정을 본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겉으로는 빨리 가야 하는 것처럼 못 마땅한 표

행복이요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반 학생 전체에

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그

게 제공해주신 음식도 너무 감사했다는 말씀을

때 그냥 집에 가보았자 어머니도 안 계시고 내

늦었지만 전하고 싶다.

가 대충 차려먹어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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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에는 다 좋은 일들만 있었고 좋은 추억

게 평안을 주고 기쁨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만 있던 것 같았지만, 내겐 혼자만의 큰 비밀도

물론 음악을 좋아했던 영향도 있었겠지만, 내

있었다. 불교 신자였던 나는 예배드리러 예배실

게 기독교의 DNA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

로 가는 게 너무 싫었었다. 그리고 그때는 사춘

도 든다.

기 때였기에 크리스천들이 오히려 가식으로만 보였다. 그 당시 그 훌륭하시고 온유하신 교목

초등학교 동창 가운데 아주 잘생기고 똑똑해

선생님이 순간적으로 위선자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늘 부러워하며 친했던 친구가 한 명 있었

예배실에 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예

다. 그런데 졸업하고 몇 년 지나서 만났을 때는

배실에 가지 않으려고 꾀를 부렸다. 주번이 마

백혈병으로 얼굴과 몸이 많이 망가지고 뚱뚱해

지막으로 열쇠를 잠그고 가는 것이 원칙인데,

졌으면서도, 열심히 교회에 나가며 기쁨을 잃지

내가 잠그겠다고 하고는 교실에 남아 있었다.

않는 것을 보았다. 그 친구의 권유로 단 한번 교

이러한 생각을 부추기시던 분은 어머니셨다.

회에 같이 나간 적이 바로 이 시기에 있었다. 하

원래 불교를 믿으시기도 하셨지만 직업상 많은

지만 난 의리도 없이 그 친구의 계속된 권유를

분들을 대하셔야 했던 어머님께서는 늘 크리스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친구는 결

천에 대한 어떤 인색함이나 말과 행동이 다르다

국 2년 후 피어보지도 못한 꽃다운 나이로 떠나

는 경험들을 내게 전해주셔서 그 영향도 많았었

갔지만, 학교에서 학교장으로 장례를 치렀을 정

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위선자

도로 주변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그때 그 친

는 교목 선생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예배

구가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내게 조심스럽게 내

에 참석하지 않고도 참석한 척한 것이 가장 큰

민 전도의 손길이었는데, 그때 나는 그의 손길

위선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을 끝내 뿌리치고 만 것이다. 교회에서 보았던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것은 불교를 믿는다는

남녀 학생들의 어울림이 내게는 부정하게 그리

나에게도 찬송가만큼은 너무 좋았고, 아무 거부

고 가면적으로 여겨졌었다. 주안에서의 기쁨을

감이 없었다. Home Room 시간 때 맨 처음 시

나는 방종으로 오해한 것 같다. 그 친구는 내게

그널 음악처럼 부르는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

보내신 아름다운 천사였는데…….

자여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찬양은 참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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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이랬던 내가 똑같이 믿지 않던 아내와 결혼하

었을까?

고, 결혼 1년 차에 아내가 기독교로 개종을 하

하나님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논

고 나도 1년이 안 돼 믿게 되고, 이제는 목사까

리적으로 변증 하며 전도하는가에 대한 변증 전

지 되었으니 이 세상에서 누가 끝까지 안 믿으

도를, 10여 년의 실제 캠퍼스의 전도의 경험과

리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학문적 연구를 통해 각 교회를 일깨우는 변증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가식이라고 폄하하고

전도 사역자로 세움을 받은 것은, 죄 많은 곳

핍박 아닌 핍박을 한 내 모습이 성경의 바울과

에 은혜가 많다는 말씀을 이루시는 것이 아닌

비슷하여 영어 이름을 사죄하는 심정으로 Paul

가 생각한다.

로 하였다. 이제는 20년 간을 구치소를 방문하 며 찬양과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고, 또한

우리 학교 교훈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은

매월 3일 간(금, 토, 주일)을 3시간 거리의 주립

참으로 성서적이고 훌륭한 교육적인 가르침임

감옥을 방문하여 많은 갇힌 형제들에게 주의 종

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때는 그저 문구가 좋다

의 길을 가도록 말씀을 가르치고, 신학교에 입

정도로 넘겼는데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에는 정

학시켜 학문의 길을 열어주고, 소망의 메시지를

말 복음에 잘 맞는 소중하고 귀한 교훈임을 뼈

전하고, 새로운 삶을 도전하여 감옥의 채플린으

저리게 느끼게 한다.

로 쓰임 받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우리 인간 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혹이라도 신일 고등학교에서의 귀한 가르침을 통해 나처럼 믿음이 없었던 많은 동창들이 주님

그리고 매주 목요일에는 캠퍼스에서 AF-

앞으로 돌아오고 나름대로 귀하게 쓰임 받는다

C(Apologetics For Christ) 클럽을 운영하

면, 귀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신일 고등학교를

며 학생들에게 변증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2

설립하신 네 분의 영락교회의 이사님들이 행했

Korean BBQ 사역으로 학생들을 대접하며 복

던 크리스천으로서의 비전과 사랑의 수고가 하

음과 함께 주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심으로, 우

나도 헛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 될 것이

리의 미래인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빛을 전하는

고, 많은 열매를 맺어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심을, 예배실을

셨다는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도망 다녔던 그때에는 내가 상상이나 할 수 있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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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지금까지의 인생에 있어 결론을 묻는다면,

(엘에이 ANC 온누리 교회 교도소 및 캠퍼스 사역 목사.

“여시면 닫을 자가, 닫으시면 열 자가 없다”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 파리6 대학 컴퓨터 전

계 3:7의 말씀이 삶의 결론이라고 후배들에게 남

공, 미주리 대학원 컴퓨터 사이언스 석사. 미주 총신, 미

기고 싶다.

주 캘빈 목회학 석사.변증 전도 강사 및 책 변증 전도 책 집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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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지혜로 쓴 오랜 편지

한창덕

연전에 내가 출간한 책 제목이다. 오랜 편지란

세상에 종교란 평안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현

종교의 경전을 이름이다. 특별히 기독교, 불교,

실은 불안을 조장하고 있는 형편이니 이보다 더

유교 경전에서 지혜라고 할 만한 내용들을 뽑아

큰 아이러니가 없다. 오랫동안 그 원인을 생각

서 나름 사족을 붙여 지혜서를 써 봤다. 쓰는데

하다 보니 진리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먼저

7년 정도 걸렸지만 내용을 준비하는 과정을 포

지혜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는 깨달음

함하면 근 20년은 될 것 같다. 원래는 환갑 즈음

이 들었다. 진리라는 측면에서는 다르게 보일지

해서 지나온 세월 터득한 가르침들을 정리해 볼

몰라도 지혜라면 서로 통하는 점이 많다는 사실

계획이었다가 조금 늦어졌다.

을 여러 경전을 읽으면서 새삼 알게 되었다. 예 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는

종교는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한다. 우

데 그 앞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이라는 조건

리나라는 종교적으로 다양한 편으로 특별히 기

이 달려 있다. 이 말이 곧 지혜로운 삶에 대한 강

독교와 불교가 쌍벽을 이루고 유교가 사상적 저

조라고 본다. 지혜의 문을 통해 들어오지 않은

변에 깔려있는 독특한 상황이다. 여러 종파에서

진리는 독선을 보이기 쉽고 위태롭다. 이런 관

교리를 내세우며 주장하는 진리는 저마다 다르

점에서 여러 경전을 들여다보니 공통적으로 드

다. 그 진리는 속성상 절대성을 주장하기 때문

러나는 덕목은 첫째가 참음이고 둘째는 만족,

에 갈등과 대립이 일어나기 쉽다. 작게는 한 가

그리고 마지막이 중용이다.

정 안에 불화가 생기고 세계적으로는 도처에서 비극적인 사태를 야기하고 있다.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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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욕을 참느니라. <구약성경 잠언>

서 균형을 맞춘다는 말이다. 이 세 가지 중에 가 장 어려운 것이 중용이다. 요즘처럼 좌파나 우

성현의 지혜 가운데서 자족하기를 구하라 하 시고 다음과 같은 계송을 남기셨다.

파든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과 성향이 대립하 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잘 쓰면 시의 에 적절했다고 하고 잘못 쓰면 시류에 영합했다

탐욕이란 우기에 오는 비처럼 그 욕심에 있어 만족할

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공자는 천하를 나누

줄 모른다.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만 많거니 지혜로운 사

어 가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말씀하기도

람은 그것을 떨어 버린다. <증일아함경 안반품>

했다. 그리고 더불어 행하기를 강권하는 한 가 지가 더 있는데 바로 베풂이다. 불교에서는 보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하면서도 그 나쁜 점을 알고 미 워하더라도 그 선한 점을 안다. <예기 곡례상>

시바라밀이라고 하여 큰 수행과정으로 설명한 다. 지혜로움에는 실천의 의미가 포함된다. 성 경 야고보서의 구절이다. “만일 형제가 헐벗고

참음을 성경에서는 오래 참음으로 더 강조하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

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

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

고……’라는 유명한 사랑장을 썼다. 예수는 일

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

곱 번을 용서하겠다는 제자 베드로에게 일곱 번

익이 있으리오.”

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말씀했다. 끝까지 참으라는 뜻이다. 불경 대반열반경에 보면 부

세 경전에서 찾아낸 구절이 팔백여 군데 될 듯

처는 만족에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먼저 욕심

싶다. 주로 예수, 부처, 공자의 말씀이고 그 외

을 적게 가지면 자연히 불만족이 사라지고 만족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의 글이다. 그런데 이 책

이 나타난다. 또 하나는 적게 얻었을 적에 후회

을 내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기독교 장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중용은

로가 부처님 말씀이 어쩌고 저쩌고 공자 왈 맹

극단을 피하고 화평과 조화를 이룬다. ‘화이부

자 왈 하는 게 타당한 일인지 의문이 들었고,

동’, ‘화 이불 류’ 라고 경전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친한 목사에게 자문을 받아 봤더니 교

중용을 권도라고도 하는데 권(權)이란 저울질해

인들에게 보이기는 곤란할 것 같다는 의견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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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다. 신앙적으로 의심을 받을 만한 개연성이 있

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이 목사님이 아니었

다는 얘기다.

다면 나 같은 스타일에 기독교인이 되기가 쉽 지 않았으리라.

내가 다니는 교회는 신일 재단과 같은 대한예

복음주의 교회의 장로로서 자유주의 신앙을

수교장로회 통합 측 교단에 속해 있다. 거기서

가지고 있다는 것이 거리낌으로 느껴졌지만 그

42년 동안 믿음 생활을 했고 십여 년 전에 장로

렇다고 억지로 교리에 맞춰가며 중직을 계속할

가 되었다. 우리 교단은 소위 복음주의를 교리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래서 책을 출간한 그해 연

로 삼고 있으나 내 신앙적 입장은 자유주의에

말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사실 나는 수석장로이

가까웠다. 책을 쓰면서 이 차이를 많이 의식하

기도 했지만 계급화된 교회의 직제가 탐탁치가

게 되었는데 그 연원을 따져보다가 문득 이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전례가 없는

선 목사님 생각이 났다. 타교 출신으로 신일고

일이라 교회에서 나를 어떻게 불러야 되는지 고

와 인연을 맺고 채플이라는 것을 처음 경험해

민인 것이다. 사임하면 더 이상 장로님이라고

보는 내게 목사님이 권한 책이 불교 반야심경

부르면 안 되는 건지 그냥 아무개 성도라고 하

이었다. 불경을 통해서 기독교로 들어선 경로

기는 그렇고. 나도 고민스러웠다. 그런 불편함

가 아마도 종교를 폭넓게 대할 수 있는 계기가

을 면하려고 교회를 떠날까도 했지만 그건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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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도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 같지 않았다. 다행

모습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백세

히 교회에서 은퇴로 예우를 하기로 해서 지금은

인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다는 점

우리교회 은퇴 장로에 이름이 올라 있다.

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든 살릴 수 있

벌써 이 년이 지났다. 아직 약간의 서먹함은 남아 있지만 시간이 가면 피차 익숙해지겠지.

는 생명은 무조건 살리고 보는 것이 사명이라고 응급진료로 유명해진 어느 의사가 말했다. 훌륭

『지혜로 쓴 오랜 편지』는 꼭 내가 쓴 책이라서

한 말씀이지만 어떤 생명이든지 결국 소멸된다.

보다, 이런 시도가 많이 있기를 기대한다. 그래

그 아쉬움에 종교가 위안을 주려고 영생을 이야

서 우리 사는 세상이 독선이 아닌 공동선으로

기한다. 그런데 정말로 영생을 믿는다면 악착같

나아가면 좋겠고 그 길에 일조하기를 희망하는

이 이생의 명줄을 놓지 않으려 매달리는 모습은

데 여태 별 반향은 없다. 유명인도 아니고 흥미

좀 모순이 아닌가. 오히려 때가 되면 평안히 끝

로운 주제도 아니니 홍보라도 좀 신경을 써야했

맺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성의가 더 좋

지만 그것 역시 돈이 드는 일이라 만만치가 않

을 듯싶은데. 물론 그때를 어찌 판단하느냐는

다. 이 글을 읽는 학우들 언제든지 메일로 우편

문제는 숙제로 남는다. 그런 이야기를 풀어보

주소를 보내주면 한 부씩 부쳐 드릴테니 홍보를

려면 죽음이 무슨 조화인지 새겨봐야 하고 불가

부탁하고자 한다.

불 종교를 거론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 가톨릭 성경 집회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올해로 퇴직한 지 십 년째다. 계획했던 제2인

“몸의 건강보다 좋은 재산은 없고 마음의 기

생을 책 쓰는 일로 시작해서 첫 작업은 마친 셈

쁨보다 큰 즐거움은 없다 비참한 삶보다 죽음이

이고 다음 작업에 들어가려고 한다. 차기작으로

낫고 지병보다 영원한 휴식이 낫다”

존엄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준비 중이다. 내가 당하고 우리가 거쳐야 할 절차다. 마지막

요즘 종교가 사양산업 모양으로 인기를 잃어

에 억울하단 맘 없이 고생하지 않고 깨끗하게

가는 마당에 공감할만한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

사라지면 존엄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니체는 자

지만 개인적으로나 또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하

연사는 비이성적인 죽음이라고 했다는데 그가

고 필요한 담론이라고 말하고 싶다. 얼마 전에

말한 자연사는 늙고 병들어 고통 속에 스러지는

일본에서 <70세 사망 법안, 가결>이라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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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이 출간된 적이 있다. 70세가 되면 의무적으로

증 받는 젊은 노년으로 들어서며 폼 잡을 일도

죽어야 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벌어지

없으니 등에 진 짐일랑 덜어놓고 하늘의 뜻 헤

는 상황을 가상으로 썼다. 일본은 세계에서 노

아리며 담담하게 미소 지을 수 있다면 정말로

인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다. 그래서 이런 웃픈

다행이겠네.

소설까지 등장한 것 같다. 우리도 조만간 일본 같이 초고령 사회로 진행할 것이 자명한 사실이 다. 무조건 생명은 살리고 본다는 의사의 말이

“하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사시가 운행하고 온 만 물이 생장하는데 하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논어 양화 편)

나 그 존엄성에 대하여 종교계에서 하는 주장은 거룩해 보일지는 몰라도 과연 현실적으로 제대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로 된 선택인지 깊이 따져봐야 할 시점이 머지

얼마인지 모를 나머지 生, 참고 만족하고 중용

않아 올 것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

으로 지혜롭게 살며 베푸는 즐거움도 누리면서

더라도 괜찮다’는 경전 지혜로 비춰보면 어떻든

내내 두루 평안들 하시기를……

지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된다는 명제는 그렇게 절실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제 어느덧 경로우대

email; hchangd@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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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으로 산 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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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일篇 김상호 『나의 이야기』 김성진 『나의 정형외과 수련기』 김연태 『현장現場에서 배우다』 김용성 『아직까지 기차 문을 못 열었답니다』 김한철 『원자력 안전과 안심』 민한기 『봉사의 즐거움』 박영대 『武俠 中國-그 의리와 지역감정의 세계』 신호현 『어느 거백의 일상』 안동준 『마터호른 등반기』 이상국 『나의 중국 생활 신변잡기』 이상권 『사물, 그리움, 소박함』 이영권 『때 늦은 취업 이야기』 이영식 『Face of fear』 이충호 『과거로 돌아가서 사는 삶』 임순기 『나의 하루』 장광순 『나의 인생이야기』 지정수 『교도소 담 안에서 기독 교도관으로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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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김상호

모교 신일고를 졸업하고 대학 3학년 때 가족 이민을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1976년 21살 나이였다. 직장 생활도 경험하지 못해서 여기서 만난 동기들이 사회 생활, 군대 이야기를 하면 참 재미있게 듣곤 했다. 내게는 공백의 세월이다. 일찍 결혼해 이듬해 첫딸을 낳고 둘을 더 낳아 세 아이를 키웠다. 지금은 위로 딸 둘이 결혼했고, 늦둥이 막내아들이 나처럼 내년에 장가를 일찍 간다고 한다. 손자가 둘 이다. 6년 전에 할아비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나의 이민 이야기이다. 누구나 다 똑같지는 않지만, 아내와 맞벌이 하며, 애들 키우며, 교회 다니며, 이곳 생활에 적응하려 애쓰며 평범하게 살아온 세월이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채워지는 공간이 더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한 다. 고생하고, 애들 키운 얘기, 가족사는 이제 나에게 그렇게 큰 의미를 주지 못한 다. 나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더 구성진 스토리도 많을 것이다. 40년을 함께 살고, 매일은 아니지만 나를 믿어준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 고맙고 감사 하다.

나는 앞으로 준비되고 펼쳐질 일들을 더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한다. 이 생각은 나 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기쁨을 동반하며, 주변에 크고 작은 영향력도 줄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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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개인적으로는 열정이 생겨 후반기 삶을 신나고 힘차게 만든다. 이 변화는 2009년에 처음 찾아왔는데 이때는 경제적으로도 힘들었던 시기였고, 이민 와서 사업만 했던 내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54살 때였는 데 나만을, 내 가족만 생각하는 내 모습이 내 삶에 큰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오랜 교회 출석과 교회 분쟁들이 주는 무력함, 짜증도 한몫을 했겠지. 지금 생각하면 그런 시점에 고맙게도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이웃과 커뮤 니티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으니 말이다.

맨 처음 생각했던 것은 자녀가 있는 가족들과의 하이킹이었다.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자연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아주 좋은 영향력이 퍼져나가리라 생각했 다. 점차 여러 종목을 추가하고 다양한 가족 레크리에이션도 제공했다. 지금 2019 년이니 그 일을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다. 올해부터는 종목마다 리더도 세우고, 사 회봉사 단체 등에 연계해 봉사활동을 추가로 소개하고 있다.

문득, 우리 친구들도 은퇴 시기의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정보도 공유하고, 사회봉 사의 기회도 마련해 주는, 스스로 보람을 느끼며 살아갈 적극적 노후를 권장하고 싶다. 중장년 누구나 모임을 시작할 수도 있고, 이들을 위한 교양 세미나도 소개하 고, 여행 정보나 취미 생활등도 콘텐츠로 올려놓을 수 있다.

(나의 오랜 미국 생활이, 또 이곳 생활에 녹아들 듯 익숙함이, 평생을 한국에서만 생활했던 친구들의 경우엔 조금 어색할 수 있겠다는 생각인데, 아무쪼록 내 생각 을 써 내려감을 이해 바란다.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모든 동문들에게 감 사하다는 말도 꼭 전하고 싶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에서 나이에 걸맞은 변화가 필요하다. 중장년 친구나 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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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운 이웃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시도도 중요하지만, 아직도 성장기 자녀들을 두고 있 는 가정에 조금 더 다가설 수 있다면 그게 좋지 않을까 싶다. 단지 무엇인가 무턱대 고 만들어 해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 같다. ‘함께’ 만들어 내고, ‘함께’ 호흡하 고, 만나는 이들에게 기쁨과 고마움을 선사할 수 있다면 그게 보람이고 성공이 아 닐까. 뭐 그리 대단한 것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특히 사람의 습관과 마음을 쉽 게 바꾸기란 참 어려운 일이겠지만 만남과 좋은 사귐은 반드시 따르리라 믿는다.

나는 요즘 이곳 남가주에 있는 미주 동기들과 자주 만나는 편이다. 두 달에 한번 은 정기로,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동기들만의 보이스 캠핑이 진행된다. 올 4월에 처 음 시도했는데 반응이 제법 뜨겁다. 11월 초에 두 번째 캠핑을 준비하고 있다. 그 래,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 외로워진다고 옆 사람이 말하는데 전적으로 동감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만나자, 먹자, 떠들자! 이런 자리가 그리운 나이가 아니겠는 가, 다들? 밴드도, 페북도, 인스타그램도, 동기들 만남도...... 돌이켜보면 개인적으로 나는 요즘 사람들과의 만남이 눈에 띄게 잦아졌다. 만나 자는 사람도 조금 늘었다. 사람 만나는 게 즐겁고, 새로운 만남은 새로운 일로 연결 되니 더욱 고마울 뿐이다. 특히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여러 사람들에게서 배울 수 있으니 더더욱 좋다. 나와 다시 연결된 5회 동기 밴드가 음악 감상, 산행, 골프, 모임 안내 등 다양한 놀이와 일상들을 알리고 있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그동안 이 민 생활로 만나지 못했던, 소식이 끊겼던 동기들의 이름을 발견할 때마다 너무 반 가워 흥분이 된다. 주변의 내 친구들의 경우도 일과 나이 혹은 취미 등에 많은 변화 가 있어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출발을 위한 모색의 적기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 하다. 매우 고무적인 변화다.

2009년에 시작된 The Best Gift Ever(www.thebestgiftever.org)는 내 인생의 일대 전환점이다. 큰 단체도 아니고 큰 일이 일어나는 곳도 아니지만, 아직도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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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음을 감사한다. 그래서 2019년은 여러모로 나에게 또 새로운 시작이다.

응원해 주는 가족들이 고맙고,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어 힘이 된다. 너무 기다리지 말자.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고 살자. 사람도 더 만나고, 손주와도 더 놀아주고, 작 년에 시작한 스페니쉬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친구가 만나자고 하면 달려가고, 모 임도 만들어 시작하고, 이메일, 페북, 카톡도 가급적 열심히 하고, 동영상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고, 아내가 명령하면 토 달지 말고, 양궁 등 건강을 위한 운동도 다 시 시작하고, 사회봉사도 참여하고, 캠핑도 가고, 나희농장 종상이도 찾아가고, 갈 종완이 뛰는 곳에 응원도 가고, 한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곳으로 떠나가 보고, 모 교 졸업 후 한번도 만나지 못한 동기들에게 먼저 연락도 해보고, 아름다운 시도 써 보고, 작곡도 해 보고, 기타도 배우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사진도 찍고, 젊 은이들과 교제도 하고, 카누 타기도 자주 하고, 늘 하고 싶었던 송어 낚시도 시작하 고, 친구와 음식도 만들어 먹고, 산행도 더 열심히 하고 말이다.

5회 동기들 문집에 올릴 글을 종혁에게서 부탁받고, 뭘 쓸 수 있을까 조금 고민도 했지만, <나의 이야기>를 타이틀로 해서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나열만 하고 끝난 것 같다.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만나서 함께 밥도 먹고 싶다. 산길도 함께 걷고 싶다. 친구가 연주하는 기타 연주에도 귀 기울이고 싶다. 모두가 더 늦기 전 에 말이다. 동년배 친구들이지만, 가족환경이나 경제 사정 혹은 건강 상태가 조금 씩 서로 다름을 고려한다 해도 인생 후반을 향해 “우리 모두 다 같이 힘을 내서 달 리자” 라고 말하고 싶다.(2019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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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나의 정형외과 수련기

김성진

정형외과 - 군대 이상의 엄격한 규율/ 절제된 분위기/ 살인적 업무로 인한 공포 매력적이기는 하나 지원하기엔 두려움부터 앞서

4년에 걸친 정형외과의국 생활기를 회고해볼 까 한다.

활을 어디에서 하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전방 이나 먼 지방에서 한다고 뻥을 좀 쳐야 했었다.

나는 3년 차 군대 생활을 서울 남서쪽에 있던

그런데 그만 너무도 솔직한 게 탈이라 서울에

방공포 미사일 부대에서 쾌적하게 보냈던지라

서 근무한다고 답하고 말았다. 퇴근 후 당장 병

정형외과의국 소식이라면 접하기가 비교적 쉬

원으로 나와 일 좀 배워보라 하신 거였고, 그때

웠다. 또한 주임교수님의 직접 주례 1호 수혜

그 말씀을 거절 못한 것이 뜻밖의 투 잡을 시작

자로서 입국 전 결혼이라는, 행운이라면 행운

하게 된 동기가 됐다. 덕분에 내 신혼생활은 엉

도 누린 바 있다.

망이 될 수밖에 없었고, 원칙을 강조하는 킴스

그런데, 소위 넌 킴(군에 먼저 다녀온 전공의

3년 차 의국장의 숨 막히는 몰아치기 강행군으

수련자) 인원은 군 제대 후 5월부터 근무를 서는

로, 넌 킴 1,2년 차는 그야말로 조상까지 욕먹

것이 상례였음에도, 나는 서울에 군부대가 있던

게 만드는 수모를 겪으며 피멍 든 발로 뛰어다

덕분에 4월부터 낮에는 부대로 출근하고, 퇴근

녀야만 했다.

후엔 병원으로 출근이라는 뜻하지 않은 이중생 활을 겪어야만 했다.

정형외과 의국 1년 차

그 이유는 그 당시 2년 차가 곧 되실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내 답변 때문이었다. 나에게 군 생

아침 미팅 때마다 X-ray 필름을 볼 수 있게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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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해야 하는 1년 차의 가장 큰 고역은 방사선과

정형외과 의국 2년 차

판독실에 묶여있는 필름들에 있었다. 디지털 시 대에 이런 말을 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전반기를 회고하자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나, 매일매일 필름을 준비

각이 심 동기에 대한 아픈 기억이다. 뇌 암으

하는 일은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우리들은 견디

로 고생하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심 동기에

다 못해 판독실의 키를 복사하여 밤에 몰래 들

게 먼저 심심한 조의를 표하고 싶다. 그와 더불

어가서 빼내오기도 했는데 꼬리가 길면 잡힌다

어 떠오르는 생각들은 한 마디로 악몽이다. 당

고, 방사선과 교수님께 불려 가서 도둑으로 몰

시 나는 대전성모병원에 근무하고 있었고, 결

리는 호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혼 일 년 만에 아들까지 얻어 병원 옆 아파트

1년 차 후반은 명동의 산재병원이라는 곳에서

로 이사까지 마친 뒤였으니, 매일 집으로 퇴근

근무했다. 어느 날 멀쩡하던 내 담당 환자가 새

할 수 있다는 기쁨만으로도 출근길이 충분히 행

벽에 갑자기 사망하는 사건 사고가 발생했다.

복해야 했다.

다행히 일처리가 잘돼서 교수님으로부터 큰 꾸

그런데 상황이 심상치 않게 바뀌었다. 2년 차

지람은 듣지 않고 한숨을 돌리던 차였는데, 느

인 내가 덜컥 의국장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닷없이 상급자 선생님께서 환자 사망에 대한 감

당시 의국원 구성은 1년 차로 변 선생이 있었

독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며 의국을 이탈해 종일

고, 2년 차 심 선생 그리고 나 이렇게 단 세 명뿐

행방불명이 되는 또 다른 사고(?)가 발생했다.

으로 3, 4년 차가 한 명도 없었다. 아마 그때 우

그로 인해 교수님은 크게 상심했고 의국 구성

리보다 병원 스태프 선생님들이 더욱 기가 막혔

원들 또한 모두 마음고생을 엄청 해야 했던 기

을 것 같다. 나도 2년 차라고는 하지만 1년 차

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를 막 끝내고 온 터라,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의

우리 상급자 선생님들이 얼마나 후덕한 분들이

국장이 됐다는 사실이 나 자신조차 더욱 황당

셨는지 새삼 경의를 표하고 싶다. 윗선에서 내

하게 했다.

려오는 압박을 어느 정도 막아주는 것은 물론,

하지만 맡겨진 과중한 업무에 죽기 살기로 매

당시 의국의 군대식 분위기를 쇠퇴시킴에 일조

달렸다. 그러던 중 3월이 지나 첫 달 월급을 받

하신 분들로 기억된다.

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외곽수당이 예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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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도 더 적게 지급되는 바람에 전 수련의들이 술

수님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나는 그날 파면 일보

렁거리는 일이 발생했다. 자연히 우리도 행동을

직전에서 다행히 김 교수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불사하게 되었는데, 나는 주동 중 한 명으로 그

징계를 면했다.

만 낙인찍혀 병원 측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그런데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엎친 데 덮

급기야 교수님께서는 나를 불러 데모에서 손 뗄

친 격으로 엉뚱한 사건이 또 터지고 말았던 것

것을 강요하셨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고 우리

이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신임 주니어 스태프

의 권리를 주장했고, 나는 더 큰 교수님의 미움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마찰을 불러일으켰

을 자처하고 말았다.

는데, ‘까라면 까라’는 식에 내가 무조건 적응할

그런데 그런 와중에 내가 미움 살 일이 또 하

수 없으니 갈등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 생겼으니, 바로 과장님 방에 귀하게 모셔둔

전말은 이랬다. 어느 날 회식 후 병원 근처에서

소위 ‘야마’라는 문제집을 몰래 복사해 돌려보

헤어질 무렵이었는데, 그 신임 주니어 스태프

고 가져다 놓은 일 때문이었다. 아뿔싸! 복사해

선생님께서 나를 찾는 거였다. 술기운에 뭔가

주는 집에서 딴은 잘해준답시고 원본을 깨끗하

전운이 감도는 분위기를 파악하신 과장님께서

게 제본해서 돌려준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야

나를 그 선생님과 분리시키려는 의도로, 간호

마’라는 문제집을 교수님들께서는 거의 ‘신성

사를 바래다주라며 얼른 택시에 태웠다. 그런데

시’ 하디시피 했고, 특히나 수련의들에게는 접

그 주니어 스태프 선생님이 택시 앞을 가로막

근금지를 취했기에 우리들은 더욱 열렬히 호기

아 섰다. 나는 운전기사에게 그분을 피해 가도

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복사를 하겠다고 건

록 요청한 후, 간호사를 내려주고서야 의국으로

의하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란 지레 짐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와 보니 지금은 고인이

무단으로 복사하였던 것인데, 복사해주는 사람

된 심 선생께서 얼굴이 잔뜩 부어 오른 채 얼음

의 과잉친절로 일이 커진 것이다. 어쩌나 마음

찜질을 하고 있었다. ‘형이 도망가 내가 대신 맞

졸이며 쩔쩔매다가, 에라 공부하겠다고 복사한

았다’고 하던 그 투정 어린 말이 아직도 내 귀에

건데 교수님도 설마 어쩌시려나 싶어 일단 모른

맴맴 울리고 있는 것 같다. 심 선생에게 너무 미

척하고 도로 갖다 놓고 요행을 바라기로 했다.

안했고, 실은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사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교

에 더욱 화가 났었다. 그 후 그 선생님에게 흠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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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 않으려고 진짜 죽어라고 일하고 챠팅 하고

대사건으로 기억에 생생하다. 모 스태프 선생님

등등...... 휴우~ 당시 같이 고생했던 변 선생과

이 VIP 환자를 소홀히 모시는 바람에 대표로 의

심 선생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더구나 뒷날

국장인 내가 가볍게 구타(?)당한 사건은 차라리

고인이 된 심 선생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겠다.

작은 추억일 뿐이다.

정형외과 의국 3년 차

정형외과 의국 4년 차

3년 차는 부평 성모자애병원(인천성모)에서

4년 차 후반에 우리 동기들은 모처럼 오랜만

일을 했다. 1년 차 없는 2,3,4년 차 인원으로 근

에 같이 모여 공부하고 생활할 기회를 가졌다.

무를 하게 되었으나 사실 2,3년 차 두 명이나 다

강남 유스호스텔에 합숙하여 열심히들 공부한

름없었다. 나는 일의 효율과 응급상황에 빨리

덕분에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합격하여

대처하기 위해 병원 근처의 연립주택으로 이사

자신들이나 가족에게는 물론 가르쳐주신 교수

를 하였다. 덕분에 밤에 신속히 병실 응급 상황

님들에게도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

에 대처하고 응급실에도 갈 수 있어 많은 응급 수술을 집도할 수 있었다. 그 일로 교수님께서

이후 나는 교수님께서 대전성모병원 스태프

특별히 아껴주시고 잘 가르쳐주셨는데 지면으

자리를 권하셨지만 결국 2년 차 때 사건 때문인

로나마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지 거부되어 문경병원으로 갔고, 일 년 후 대림

3년 차 후반에는 강남 성모병원(서울성모)의

성모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 방지거병원

국장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 의국에 가득 쌓

과 대림성모병원을 거쳐 2004년에야 서울 금천

인 소위 스페셜 필름이 골칫거리였다. 나는 그

구에 개업하였다.

것을 옆 회의실로 옮기는 작업을 강행했는데, 당시 의국원이던 후배 레지던트 임 선생과 허

이제 나는 개업 15년 차가 됐다. 그동안 병원

선생이 고생을 많이 한 덕에 의국을 넓게 쓸 수

을 찾아 준 신일 동기들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2년 차 의국원의 무단

드리며, 아무쪼록 신일고 5회 동기들 모두 건강

결근으로 인한 놀라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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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현장現場에서 배우다

김연태

경영학과 나온 놈이 스텐 자르고 용접하고 전 기용품, 전자 부속이나 만지작거리고 하는 그

그 충격을 확인했다. 그때 결심했다. 대기업 굴 레를 벗어나 나만의 인생人生을 걷자고!

험한 자동문 현장에서 일한다고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주변인들이 많은 것 같아 몇 자 적어 본다.

회사에 재직하면서 타 분야를 이리저리 알아 보고 조사하기에는 여러모로 여유가 없어 무작 정 사표부터 던졌다. 그런데 막상 대기업 배지

삼양식품 계리부와 LG 하니웰 재경부를 거치

떼고 세상에 덩그러니 나오니 왜 그리도 막막했

면서 그야말로 오리지널 관리직의 나름 엘리트

던지... 설상가상 IMF까지 겹쳐 앞이 캄캄했다.

라고 자부하고 있던 시절의 일이다. 어느 날 남

어린 두 딸들과 아내를 굶길 수는 없어 주차관

대문 야시장 선술집에서 허름한 잠바 차림의 중

리직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었다. 빌딩 고

년 사내가 꽤 많은 음식 값을 두둑한 ‘현금’으로

층에서 지하로 내려와 일하는 신세였지만 나는

지불하는 것을 목격했다. 말끔한 넥타이 차림

한탄보다는 매일을 열심히 살았다.

에 카드나 긁고 다닐 줄 알았던 나에게 그 모습 은 적잖은 ‘충격’ 그 자체였다. 대기업에 다닌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나의 꼼꼼한 성격을 알

고 해도 샐러리맨은 그 한계가 있고 카드 인생

아본 <우성 자동문> 대표이사가 나에게 부쩍 관

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또 한번은 그룹

심을 가지게 됐고, 때마침 <우성 자동문>의 관

에서 인정받는 임원이 퇴근길에 30cm 높이의

리직을 맡을 사람이 필요하다 하여 자동문 회사

결재서류를 갖고 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재차

와 나는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처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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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직에서 현장 기술을 조금씩 익혀나가는 정

계속 상상해보고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그러면

도였지만, 점차 기술 익히기에 흥미가 더해졌

작업 시의 자재 누락이나 순서가 뒤바뀌는 일

다. 특히 뭔가 현장이 꼬이는데 그걸 내가 해결

따위는 없다.

하는 게 무척이나 뿌듯했다. 도대체 내가 왜 문 과를 선택했었나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였다.

2. 일에도 순서가 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일의 순서는 지키자. 때

그래서 내가 이 일을 하면서 얻은 몇 가지 ‘체 험적인 교훈’을 적어보고자 한다.

에 따라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비극이 생 기고, 시간도 3배나 걸린다고 보면 된다.

1. 사전 준비는 철저히

3. 사소한 것이 큰 사고로 갈 수 있다

현장 들어가기 전前에 먼저 현장 작업 상황을

하찮다고 생각되던 것이 끝에 가서 발목을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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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는다면, 보통 난감한 게 아니다. 하찮은 것을 놓

하는 주인장의 모습이 저절로 눈에 선하다. 저

치지 않는 것이 바로 경험일 것이다. 평소 반드

녁 회식 모임 자리에서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

시 직접 해보고, 고민도 많이 하자. 그것이 바로

나 긴급 AS 현장으로 택시 타고 달려간 경우가

본인에게는 보약이 된다.

한두 번이 아니다. 모처럼 집 식구들과의 저녁 약속 자리를 바로 앞에 놓고도 차를 돌려야 했

4. 관련된 타 분야에도 관심을 갖자

던 적은 또 몇 번이나 됐던가. 그래서 나는 누

보통 기술자들은 소위 쟁이 기질이 있어서 그

구 하고도 시간 약속을 섣불리 하지 않는 버릇

런지는 몰라도, 자기 분야 이외에는 관심조차

이 생겼다.

갖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한 마디로 금물이다. 스

타인의 입장에서, 고객을 우선시하는 책임감

스로 자폐증 환자가 되려는 것인가. 주변 관련

에서 나름 더 부지런히 생각하고 움직이고 살았

분야의 영역을 두루 알아두면 내 분야의 영역은

는데 돌이켜보니 결국 그것이 나에게 큰 이득으

더욱 급속도로 확장이 된다.

로 돌아온 것 같다.

5. 시간을 벌자 언제부터인가 돈보다 중요한 게 ‘시간’이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게 만든 편집 위 원들을 원망하며 이만 글을 접는다.

새벽 5시부터 움직이면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 는 9시 전에는 이미 2-3개 정도의 AS 현장은 해 결이 완료된다.

6.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자동문이 건축물의 입구에 놓이다 보니 늘 긴 급성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요즘에는 조그마한 자영업 매장도 거의 자동문이 설치되는 추세인 데, 자동문 작동이 불능이라면 그날 장사는 한 마디로 꽝이다. 출입문 미작동으로 안절부절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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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기차 문을 못 열었답니다 김용성

저는 특별한 문재文才나 예능藝能이 없어 간단하나마 제 연보年譜로 대신하고 자 합니다.

1955년 3월 23일(음력) 현재 서해안고속도로 서천 인터체인지가 있는 충남 서

천군 서천읍 오석리에서 태어남. 집안에서 그래도 인재라고 서울 중학교로 가라 해서 어리바리 시험 봤다 낙방. 당시 성북초등학교 교사이던 사촌형님이 새로 생 긴 신일이 좋다고 해서 얼떨결에 시험 본 것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함. 시험 합격하 고 호적등본 내라고 해서 확인했더니 내가 아니었음. 1957.3.3.로 되어 있음. 오늘 날 같으면 합격 취소 사유임. 그 덕에 예비고사 체력장 득 보고 교직생활 2년 더함. 단, 예비군과 민방위 2년 더함. ■

1962.3∼1968.2 서천초등학교

1968.3∼1971.2 신일중학교 2회. 1학년 김동화 선생님, 2학년 최내옥 선생님,

3학년 문정일 선생님, 김동화 선생님 영향을 많이 받은지라 30여 년이 흐른 2000 년대 초반 용무와 함께 마산 경남대에 근무하시던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음. 호 영이가 교회 같이 다니자고 엄청 꼬드겼으나 아직도 자유로운 다신론자로 살아가 고 있음. ■

1971.3∼1974.2 신일고등학교 5회. 1학년 이대석 선생님, 2학년 성우경 선생

님, 3학년 박태남 선생님. 고1 봄 소풍 기간 중 바로 위의 형님을 잃었을 때 남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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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가 위로해 준 기억이 남. 지금도 고맙게 여김. ■

1974.3∼1978.2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생물교육과

1978.3∼1981.2 동대학원 석사(논문 쓰고 군대 가서 좀 겹침)

1980.11∼1983.1 양구군 동면 3군단 포병 측지 계산병

1983.3∼2000.2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생물교사

1983.4.24. 당시 초등학교 교사이던 최길순崔吉順과 결혼하여 아들(1985년

생), 딸(1991년생)을 둠. 현재 둘 다 미혼임. 조만간 고지서 날아갈 수도 있음. ■

2000.3∼2003.6 월곡중학교 생물교사. 장학사 시험에 3수 끝에 합격.

2003.6∼2009.2 서울특별시 교육청 성동 교육지원청, 과학전시관, 과학교육

활성화 추진단, 남산 탐구학습관 교육연구사, 장학사 ■

2009.3∼2010.8 신현고등학교 교감

2010.9∼2014.8 누원고등학교 제3대 교장

2014.9∼2017.8 선사고등학교 제2대 교장

2017.9∼2019.8 세종과학고등학교 제4대 교장

이상 제가 지금까지 지내온 이야기고요, 2019.8.31. 정년퇴임하자마자 집사람 과 함께 24일간 영국 자유여행 후, 태어난 곳인 충남 서천으로 귀향하기 위하여 조 그만 둥지를 2020년 봄까지 마련하고자 함. 주말에는 용인시 수지 집에서 보내고 주중에는 고향에서 자유인, 자연인으로 살기로 함. 집사람과 약속하기를 일 년에 한 달은 특정 국가에서 지내기로 함. 다른 가문들은 대부분 늙어서도 고향에 돌아 오지 않는데 두 분 사촌 형님과 위의 형님 두 분이 모두 귀향하여 저까지 모든 남 자 형제들이 귀향하는 특이한 집안임. 아마도 모두 공직생활을 하여 노년에 궁핍 하지 않은 까닭인지도 모르겠음. 게스트하우스 겸용이므로 친구들 오면 대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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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안전과 안심

김한철

1. 서 론

결시키는 전쟁무기로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었 다. 1942년 12월 미국으로 망명한 이탈리아 물

원자력은 사람이 감각적으로 경험하지 않은

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팀이 맨해튼 프로젝트의

것을 이론적으로 해석하여 개발한 최초의 에너

일환으로 건설한 인류 최초의 원자로 Chica-

지라고 할 수 있다. 물리학 역사에서는 기적의

go Pile이 임계(*주: 연쇄반응이 지속되는 상태)

해라고 불리는 1905년, 우리나라는 을사늑약으

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1945년 8월, 원자폭탄

로 외교권을 일본에게 강탈당하던 해에 스위스

이 일본에 투하되어 인류는 그 광대한 에너지

특허청에서 근무하던 약관 26세의 알베르트 아

를 목도하게 되었다. 그 후 미국의 핵추진 잠수

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함으로써 E

함 Nautilus호의 진수에 이어 1954년 구소련의

= mc2 이라는 질량-에너지 등가식이 세상에 등

Obninsk, 1956년 영국의 Calder Hall, 1957

장하였다. 즉, 우라늄 등의 핵분열이나 중수소

년 미국의 Shippingport 발전소를 비롯하여 원

등의 핵융합 반응 후 물질의 질량이 감소하는

자력발전소가 건설되었다[1].

만큼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전쟁 시절부터 군

다. 한편 과학자들은 방사성 물질을 만지작거

기술 장교들이 자발적인 세미나 등으로 불모지

리며 여러 유형의 방사선을 발견하고 중성자를

에서 원자력 입국의 꿈을 키웠다. 이들 애국심

이용한 핵분열 연쇄반응을 얻는 개념을 연구하

과 열정으로 무장한 일 세대 원자력 연구자들은

였다. 마침내 이 놀라운 에너지는 퀴리 부인이

이후 이승만 정부의 문교부 등에서 꿈을 이루어

일찍이 우려했던 것처럼 제2차 세계 대전을 종

나갔다. 한편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대

86

ㅣ 신일 5회 동기회


통령의 과학고문이었던 워커 시슬러 박사를 만

다. 그밖에 건설 중인 원전이 58기, 계획 중인

나 원자력이 우리나라의 에너지원으로 큰 역할

원전이 154기이다[3].

을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원자력 도입을 결정하

원자력은 석탄, 석유, 천연가스, 수력 등 모든

였다. 이에 따라 1956년 정부 조직으로 원자력

다른 에너지원에 비해 발전량 대비 가장 적은

과를 신설하고 한미원자력협정을 체결하였으

사망자 수를 나타내고 있다. Wikipedia[3]에

며, 1958년에는 원자력법을 제정하는 한편, 같

따르면, 1970년대 이래 원전은 화석연료를 사

은 해 10월에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를 설립

용했을 경우 발생했을 약 184만 명의 대기오염

하였다. 또한 원자력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해 한

관련 사망자를 구하고 약 640억 톤의 CO2 방출

양대와 서울대에 원자력공학과가 신설되었다.

을 줄이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1962년부터는 미국에서 도입한 Triga Mark-

런 한편 원자력 산업계는 지난 64년간의 원자

Ⅱ 연구로 운영을 시작하여 기초적인 실험과 교

력발전사에서 세 차례 대형 사고를 경험하였다.

육훈련, 동위원소 생산에 사용하였다[2]. 마침내

즉 1979년 미국 TMI-2 원전과 1986년 구소련

1978년에는 Turnkey 방식(*주: 구매자에게 완

체르노빌 원전, 그리고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성품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도입된 고리 1호기

다이이치 원전에서 원자로심이 녹아내리는 중

가 최초로 상업운전을 시작하였다.

대사고가 발생하였다. 각 사건은 피해 규모는

원자력발전소(이하 ‘원전’)는 입증된 기술만

달랐으나 모두 공중에게 큰 충격을 주어 원자력

사용하는 비교적 보수적인 산업체라고 할 수

발전을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한편 산업

있지만, 설계가 진화되어 현재는 한국의 APR-

계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설계와 전략을 개발하

1400을 비롯한 Generation III 원전과 미국의

며 대응해 왔다.

AP1000이나 유럽의 EPR 등의 Generation

원자력발전을 계속 추구할 것인가 하는 것은

III+ 원전이 건설되고 있으며, 2018년 4월 현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안정적인 에너지원을 확

재 전 세계적으로 449기의 상업용 원전이 가동

보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고, 일부 희귀한 중

중이다. 그중 99기가 미국에, 58기가 프랑스에,

대사고 시나리오에 대한 안전성이나 고준위 방

중국 46기, 일본 42기, 러시아 35기, 한국 23기

사성폐기물 사용 후 핵연료 영구처분의 장기 안

(*2019년 현재는 24기) 등과 같이 분포되어 있

전성의 보장 등의 측면에서 부정적 모습을 가지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87


고 있다. 따라서 각 나라의 원자력 정책은 크게

다. 그 후 원자로 용기가 중성자 조사에 의해 취

이 네 가지 조건을 고려하여 결정되어야 한다고

화(*주: 외부에서 힘을 받았을 때 물체의 연성이 저하하고 부서지

보는데, 어떤 요소를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의

기 쉬운 상태로 변화되는 현상)될

견이 갈리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탈 원전 정

Syndrome’의 영향 등으로 인해 사고 예방이 중

책에 대한 찬반 의견이 극심하게 충돌하는 가운

요하다는 관점이 부각되어 심각한 설계기준사

데 있다. 어떤 정책을 취해야 마땅한지를 논하

고인 냉각재상실사고에 대응할 수 있는 비상노

는 것은 필자의 몫이 아닌 것 같다. 본문에서는

심냉각계통을 비롯한 안전 관련 계통의 설계요

원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개념은 어떤 것

건을 정립하게 되었다. 또한 원자력산업에 대

이고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설명하고, 원전

한 규제를 독립적으로 하기 위해 진흥기관과 규

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안심할 수 있을까 하는

제기관을 분리하였다. 사실 1979년 미국에서

점을 성서적 관점에서 생각해 보고자 하였다.

TMI-2 발전소 사고가 나기 전에는 중대 사고

가능성과 영화 ‘China

는 발생 가능성이 예측되었으나 현실적인 사고

2. 원자력 안전 철학

로 보이지 않았다. 이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나 유의할 만한 환경오염도 없었으나 중대사고가

원전 안전에 대한 최상위 목표는 원자력안전

실제 일어났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주었고 그

법이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기본안전원칙

결과로 미국은 중대 사고에 대한 정책을 마련

에 나타나 있듯이 방사선에 의한 재해의 방지와

하고 관련 연구를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공공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4], 즉 국민과 환경을

미국의 원자력규제위원회(U.S.NRC)는 NUR

방사선 위해로부터 보호하는 것[5]이다.

EG-1150 등 안전규제에 근간이 되는 안전성평

처음 Shippingport 발전소를 건설할 때 이래

가보고서를 발행하였고, 리스크 정보를 활용하

로 미국에서 적용한 안전철학은 각국의 안전규

고 원전의 성능 평가에 기반하는 규제개념을 발

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은 위 원

전시켜 왔다. 리스크 정보는 원전의 전반적 안

자로에 대해 출력을 고려하여 대도시 피츠버

전도와 취약점을 확률론적 평가결과로써 정량

그에서 32 km 이상 떨어져 있는 원격지에 건

적으로 제시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 내재된 불

설하고 격납건물을 설치하는 것으로 결정하였

확실도가 커서 규제에 직접적으로 활용하기 곤

88

ㅣ 신일 5회 동기회


란한 부분이 있다.그러므로 유럽에서는 여전히

해 일련의 물리적 방벽을 구비하고, 방벽들의

보수적인 평가와 견고한 안전설비에 기초하여

유효성이 확보되도록 안전설비 등을 조합하는

안전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으며, 한

방식이다. 각 방호수준(단계)은 연속적, 독립적

국에서도 이 규제정책은 도입하지 않고 있다.

이며, 이는 효과적인 경영체계, 적합한 부지 선

한편 1986년 구소련에서 체르노빌 사고가 일

정, 안전여유도/다양성/다중성을 갖춘 공학적

어나자 전 유럽은 식품의 방사성 오염 등으로

설비의 설계, 포괄적인 운전절차서와 관행, 사

큰 공포에 사로잡혔고 여러 나라에서 원자력을

고관리절차서와 비상계획의 구비 등의 조합으

포기하는 정책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 사고에도

로 이루어진다[5]. 이 전략을 개괄적으로 표현하

미국 등은 원자로형의 설계개념이 다르기 때문

면 그림 1과 같다. 그림 2는 다중의 물리적 방벽

에 자국 원자로의 직접적인 문제가 아닌 것으로

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에는 도기 형(Ceramic)

결론을 내렸으나, 국제적으로 조직의 안전문화

핵연료 펠렛, 금속 피복재, 원자로용기 및 배관,

와 원자력안전협약에 의한 국제공조 감시체제

격납건물 등의 방벽과 발전소 밖의 제한구역과

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1년

저인구지역 등 부지의 격리개념이 포함된다[7].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통해서는 지진과

그리고 이 물리적 방벽을 건전하게 유지하고 방

지진해일 등의 외부사건에 의해 부지 내 다수

사성물질 방출의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필수안

기에서 동시에 중대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

전기능, 즉 원자로 반응도의 제어, 핵연료 냉각,

이 드러났고, 한국을 비롯한 각국의 원전에 이

방사성물질의 격리 등 세 가지 기능을 만족하는

동 형 발전기나 펌프, 수소제어설비 등 설계기

것이 항상 요구된다.

준을 초과한 조건(설계확장조건: DEC)에 대비 한 설비를 갖추게 되었다. 원전의 안전성 확보 방법의 근간은 심층방어 (Defence-in-depth: DiD) 전략이다. 이 전략 은 표 1[6]과 같이 원전의 모든 운전 상태에 대 하여 사고 예방을 추진하고 예방이 실패하더라 도 해로운 방사성 물질의 방출을 완화하기 위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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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Defence-in-Depth 수준 [6]

DiD 수준

목표

필수 설계 수단

필수 운전 수단

수준 1

비정상 운전 및 고장 예방

정상 운전 계통(감시 및 제어 계통 포함)의 보수적 설계 및 고품질의 건설

운전 규정 및 정상 운전 절차서

수준 2

비정상 운전 통제 및 고장 탐지

제한 및 보호계통, 기타 감시설비

비정상 운전 절차서/ 비상운전 절차서

수준 3a

설계기준 사고 통제 (단일 초기 사건 상정)

공학적 안전설비 및 사고 절차서

비상 운전 절차서

수준 3b

DEC를 통제하여 노심용융 방지

노심용융 미 발생 DEC에 대한 안전설비

비상 운전 절차서

수준 4

DEC를 통제하여 중대사고 영향 완화

노심용융 발생 DEC에 대한 안전설비, 기술 지원센터

보조 비상 운전 절차서/중대 사고관리 지침서

수준 5

상당량의 방사성 물질의방출 영향 완화

소내및소외 비상 대응 설비

소 내 및 소 외 비상 계획

그림 1. 심층 방어 전략 (* Containment: 격납 건물, RCS: 원자로 냉각재 계통)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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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그림 2. 방사성 물질 방출 방지를 위한 다중의 물리적 방벽


3. 성서적 관점의 안심

불확실성, 여러 가정사항의 현실성 등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 있어서 숫자만으로 안전을 단

원전이 안전하게 설계, 건설, 운영된다고 하

언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그러므로 앞 2절에 기

더라도 이에 대해 안심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술한 안전철학에서 근거하고 있는 제반 사항을

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안전하다고 느끼는가?

설계·건설·운전 단계에서 효과적으로 구현해야

사전적으로 ‘안전’은 위험이나 부상 등으로부터

하며, 이를 위해서는 설비와 인적, 조직적 요소

보호받거나 이러한 재해가 일어날 가능성이 없

등이 총체적으로 건전해야 한다.

는 상태[8], 또는 인지한 위해를 허용할 수 있는

성경을 보면 ‘대비’에 대한 표현이 여러 곳에

수준으로 통제할 수 있는 상태[9]를 뜻한다. 즉

나오는데(잠언 21:31, 아가 3:8, 에스겔 13:5,

우리는 위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느

요한계시록 16:14, 창세기 41:36 등), 이는 주

끼든지, 혹은 이를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보호

로 기습을 포함한 전쟁, 흉년 등에 대비하는 것

받을 때 안심하게 된다. 이는 원전의 안전성에

으로서,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재난에 대비하여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방사선 위해

합리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믿음 없다고 나무라

를 초래할 수 있는 사고의 발생빈도가 매우 낮

지 않으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

거나, 그러한 사고 시에도 방사선 영향을 허용

무리 대비를 잘 했더라도 궁극적인 안전은 하나

할 수 있는 수준으로 통제할 수 있으면 우리는

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시편 4:8

안심하게 될 것이다.

에서 다윗이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리스크(위험도) 수 준은 나라마다 다르나 대개 10-7/년 ~ 10-6/년 정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 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다.

도로 파악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원전 중대사고 로 인해 인명의 손실이 초래되는 사건은 조기사

4. 결 론

망의 경우 5x10-7/년, 암 사망의 경우 1x10-6/년 이라는 안전 목표를 설정하고 있으며[10], 확률

원자력은 지난 60여 년간 평화적으로 사용되

론적 안전성 평가 결과들은 이를 만족하는 것

어 비교적 안전한 에너지를 제공해 왔다. 한편

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분석수단의

중대사고 시 안전성과 사용 후 핵연료의 영구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91


처분에 관해서는 일부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ㅣ 참고문헌 ㅣ

노력이 진행 중이다. 그래서 원자력에 대해서

1. Wikipedia, “Nuclear Power Plant”

는 CO2 방출을 줄일 수 있는 안전하고, 지속가 능한 에너지원이라는 의견과 사람과 환경에 많

2. 위키 백과, “대한민국의 원자력 발전” 3. Wikipedia, “List of nuclear reactors” 및 “Nuclear Power”

은 위협을 가한다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원

4. 대한민국 정부, 법률 제13078호, 원자력 안전 법

전 안전의 목표는 국민과 환경을 방사선 위해로

5. IAEA, Fundamental Safety Principles, No. SF-1,

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현재까지 개발되어 온

2006.

안전철학은 설계, 건설 및 운전 단계에 걸쳐 심

6. IAEA, TECDOC-1791, 2016.

층 방어 전략과 물리적 방호벽의 건전성 및 필 수안전기능 유지 등을 통해 이를 달성하고자 하

7. U.S.NRC, Perspectives on Reactor Safety, NUREG/CR-6042, Rev.2,2002. 8. Oxford living dictionaries, “Safety”

는 것이다. 국내 원전에 대한 확률론적 안전성

9. Wikipedia, “Safety”

평가결과는 조기사망과 암 사망에 대한 안전 목

10. 김도삼, 성능목표(안) 설정 기술 배경 및 적용 방안,

표를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보

제14회 원자력 안전기술정보회의, 2009.4.6.-7.

증하기 위해서는 안전설비와 인적, 조직적 요소 등을 총체적으로 건전하게 유지하면서 안전 전 략을 지속적으로 이행해 나가야 한다. 혹시라도 재난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상정하여 합리적으로 대비하는 것은 성경적 믿음과 어긋나지 않으나, 궁극적인 안전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우 리는 인정해야 한다.

한국 원자력 안전기술원 위촉 규제원 한동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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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봉사의 즐거움

민한기

흔히 이르기를 사람은

의 정기적인 의정부역 ‘환경미화 봉사’와 ‘꽃길

계몽과 가르침만으로는

만들기’ 등의 봉사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더불

바뀌지 않는다고들 한

어 하고 있는 ‘제빵 봉사’를 통해서는 어려운 우

다. 그래서랄까, 말을 앞

리 이웃들에게 소중한 나눔의 정신을 구현하고

세운 행위보다는 직접적

있는데, 이는 봉사의 구심점이다. 적십자정신에

행동을 전제로 하는 자

맞게 재난과 사고에 따른 적십자 본연의 활동도

원봉사에 마음이 꽂혔다.

빼놓을 수 없다. ‘지역사회보장 협의체’와 ‘주민

봉사의 사전적 의미를 되새기자면, ‘국가나 사

자치위원회’를 통해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애쓰

과 금전적으로나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는 것’이다. 또한 자원봉사는 ‘사회 또는 공공의

직접 연결시켜주는 일에 고민을 함께 한다. 때

이익을 위한 일을 자기 의지로 행하는 것’이란

로는 직접 어려운 현장을 방문해 그들의 필요

함의를 갖고 있다. 나는 은퇴 후의 여유 있는 시

한 부분을 해결해주는 해결사로 나서기도 한다.

간을 활용해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자원봉사에

결국 이런 봉사 활동 등을 통해 일찍이 깨닫

꽂힌 내 마음을 투여하기로 했는데, 공직에서

지 못했던 자아를 재발견할 수 있음은 자신과

은퇴한 아내도 함께 하고 있다.

모두에게 큰 소득이 될 수 있다. 또한 그 뿌듯함

우리 부부는 ‘적십자 봉사회’와 ‘지역사회보장 협의체’ 그리고 ‘주민자치위원회’ 등에 소속해

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느낄 수 없는 소중 한 자산이다.

활동하고 있다. 먼저 ‘적십자 봉사회’는 월 2회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93


“武俠 中國”- 그 의리와 지역감정의 세계

박영대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이라는 크고 높은

관심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이상을 가슴에 품고 신일의 품을 떠난 지 45년,

2019년 9월 10일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지면을 통해 처음으로 재회하는 친구들도 꽤 있

로 미국 아마존에 필적하는 알리바바의 마윈(馬

을 것 같다. 무슨 이야기로 반가운 인사를 대신

雲) 회장이 55세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은퇴했

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하다가 내가 겪은 중

다. 1999년 저장성 항저우에서 창업, 20년 만에

국인들의 삶의 이야기 중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

시가총액 4,600억 달러의 초대형 기업으로 길

로 대신하려고 한다.

러낸 21세기 중국대륙 기업계 최대 풍운아 중

요즈음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전임 바이든 부

하나가 퇴장한 것이다.

통령 간의 시시비비나 영국 총리와 의회의 체

홍콩에서 활약한 중국 무협소설의 대가로 영

면을 가리지 않는 대결을 바라보면서 사람 사

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그간 집필한 소설만으

는 세상의 의리와 원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

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덩샤오핑(鄧小平)

게 된다. 오랜 이웃국가로서 우리에게는 애증

과 시진핑(習近平)을 팬으로 두었고 필자의 타

의 대상이기도 했던 중국에서 적지 않은 시간

이완 유학생활 중 중국문학의 새로운 세계에 눈

을 보냈던 필자는 중국인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을 뜨게 해 주었던 진용(金庸) 선생도 2018년

실생활에서 작동하는 의리와 원칙에 대해 관심

94세를 일기로 현실세계를 완전히 은퇴했다.

이 많다. 중국인들 의식 속에 숨어 있는 지역 감

알리바바 창업 이듬해인 2000년 7월 29일 홍

정도 중요한 관심 영역이다. 티베트나 신장위구

콩에서 36세의 사회초년생 마윈과 저명한 언

르, 내몽골 등에 대한 중국의 지역정책에 대한

론인이며 대작가인 76세의 진용이 처음 만난

94

ㅣ 신일 5회 동기회


다. 마윈은 서호 논검(西湖論劍)을 제의했고 진

국 초 북경시 개발계획으로 묘가 훼손의 위기를

용은 수락한다. 2000년 9월 10일 저장성 항주

맞자 당시의 민주인사 예 공차오(葉恭綽) 등이

에서 제1회 서호 논검이 개최되었다. 심판 겸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묘의 보존을 간청해 허락

좌장은 진용이었고 참석한 무림의 강호는 소후

을 받았다” 천광중이 서술하고 있는 내용의 대

(Sohu)의 장차오양(張朝陽), 왕이(網易)의 딩레

강이다. 벽혈검은 역사적인 사실을 다루고 있었

이(丁磊), 신랑(新浪)의 왕즈둥(王志東), 8848의

던 것이다. 그것도 잘못된 권력에 의해 억울하

왕쥔타오(王峻濤) 등 중국 IT 4대 천왕이었다.

게 처형된 대영웅, 남송의 위에 페이(岳飛) 장군

그렇지만, 결론은 새로운 IT 무림 맹주 알리바

에 버금가는 민중의 영웅 웬충환에 대한 추모의

바 마윈의 탄생을 알리는 선포식이 된다. 진용

정이 담겨 있었으니, 아무리 진용이라도 문학적

은 저장성 해녕시, 마윈은 저장성 항주시가 고

인 향기가 우선일 수는 없었으리라.

향으로 동향이다. 진용의 작품 중 「벽혈검」(碧血

천광중은 자신의 글의 제목을 『155년의 반역,

劍)이라는 작품이 있다. 처음 이 작품을 읽으면

370년의 의리』라고 붙였다. 과거의 적장(敵將)

서 진용의 작품으로는 어쩐지 문학작품으로서

인 웬충환의 억울함을 155년 만에 풀어준 청나

의 향기가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그 이유에 대

라 건륭제(乾隆帝)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청

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그 후

나라 치하에서 자신의 이름까지 감추어 가며 아

한참의 시간이 지난 2007년 어느 날, 갑자기 소

무런 이해관계 없이 대를 이어 웬충환의 묘를

설 속 주인공의 아버지 웬충환(袁崇煥)이 필자

지킨 사(舍)씨 가문의 의리를 칭송한 것이다. 그

앞에 나타났다. 천광중(陳光中)이 쓴 「풍경-경

러면서, 동화스시에지에(東花市斜街)의 한 중학

성 명인 고거 여일사」(風景-京城名人故居與

교 운동장 귀퉁이 낡은 가옥에서 아직도 선대의

軼事)를 통해서다. “청 태조 누르하치와의 요동

유훈에 따라 묘를 지키고 있는 사 씨 가문의 후

전투에서 승리한 명나라 장수 웬충환이 북경 성

손들을 위해 자신을 포함한 북경시민들이 아무

수비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모반의 누명을 쓰

런 역할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짙은 회한

고 1630년 어느 가을 날 천도 만화(千刀萬禍)의

을 드러내고 있다. 베이징에 오래 거주했던 필

책(磔)형에 처해졌다. 누군가가 시신의 일부를

자도 공연히 마음이 언짢아져서 어렵사리 현장

거두어 묘를 쓰고 대를 이어 관리해 왔다. 신 중

을 확인해 보기도 했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95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서 2012년 7월의 어느 여름날 저녁, 여수 세계박람회장의 중국 식당

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느끼는 광동 사람들 이 아주 많다.”

조부관(朝府館), 시가 3,000만 원이 넘는다는 원

광동 성 인구는 53개 민족에 1억 6백만 명이

형식탁에 10여 명이 둘러앉았다, 왼쪽에는 <광

라고 한다, 이 1억 6백만 명의 광동 성 사람들

동 성의 날 행사〉 대성황에 고무된 성의 최고위

에 대한 중국 내 타 지역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

관리가 앉아 연신 감사의 뜻과 함께 술잔을 권한

지, 아니 광동 성 사람들이 자신들에 대한 타 지

다. 그러다가 필자도 한마디 찬사로 술잔에 답

역 사람들의 정서가 어떻다고 느끼고 있는지 필

했다. “광동 성은 1980년대 이 후 중국 경제발

자는 잘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큰 사회적 공동

전의 최고 공신이다. 앞으로 광동 성 출신이 정

체가 자신들에 대한 어떤 특별한 정서가 존재한

부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지 않겠는가?”

다는 공통의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언뜻

광동 성 최고위 관리의 귀가 붉어지는 것이 보

수긍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우공이산의

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지나간 후

우화를 만들어내고,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겠

그가 물었다. “웬충환이라는 중국 장수를 아는

다는 의지를 사랑하는 이 사람들이 최소한 7천

가?” “후금 누르하치의 침공 때 북경 수비 사령

년 이상 대를 이어 살아오면서 어떤 믿어지지

관으로 억울하게 모함을 당해 처형된 명나라 장

않는 특별한 차별 의식과 관습을 만들어 아직까

군이 아니냐?”

지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닐

성공적으로 끝난 행사의 기분 좋은 여운과 적

것 같다. 5,100만 명 인구가 10만 km²가 안 되

당한 술기운, 그리고 제법 말귀를 알아듣는 외

는 좁은 땅덩이 위에 서로 살을 비비며 살면서

국인과의 대화가 즐거웠는지 그의 말에는 어느

도 때때로 어이없는 지역감정으로 인해 국가적

새 거침이 없어졌다. “광동 성은 예로부터 중앙

손실의 발생에도 하나가 되기 어려운 우리의 현

에서 벌을 받은 사람들이 귀양을 오는 변방이

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모두가 “믿음으

다. 웬충환은 광동 성 사람이고 하카 족(客家族)

로 일하는 자유인”으로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출신이다. 그가 베이징이나 그 주위의 북방 쪽

다하고 있으면서도 이번 문집 발간에 손발 걷어

사람이었다면 아니 최소한 하카 족 만이라도 아

붙이고 나서 함께 노력하는 우리 신일 동문들의

니었다면 그런 대우를 받았겠는가? 그때나 지

모습이 그래서 더욱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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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어느 거백의 일상

신호현

우선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 생 각되어 제목에 쓴 ‘거백’의 뜻부터 풀이하겠습

그랬다기보다는 제 마음이 자연스럽게 그런 방 향으로 열렸다고 하는 편이 옳겠지요.

니다. ‘거백’이라 하니 무슨 거창하거나 거대한

일 년 내내 아무 일 없이 놀고 쉬기만 한다면

뜻부터 생각나실 것 같은데 전혀 아닙니다. 요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요? 또 경제적으로도 너

새 젊은 친구들이 즐겨 쓰는 압축 용어로, ‘거

무 쪼들릴 수도 있겠지요. 다행스럽게도 저는

의 백수’를 줄인 제가 명명한 말입니다. 허긴 우

얼마 후에, 당시에 추구하던 모델과 근접한 근

리 나이에 아직까지 완백(완전한 백수)이 아니

무 형태의 직장을 찾을 수 있었고, 이해하며 적

고 시간을 할애해서 일을 부분적으로나마 하고

응할 수 있었던 점에 내심 안도하고 있습니다.

있으니 아주 감사한 일이지요.

새로운 패턴의 현재 직장은 우선 시간 제약이 크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무

사실 제 나이 육십이 되어 풀타임 직장을 퇴직

엇보다 큰 장점입니다. 또 적당히 일과 소득을

하고 한창 제2의 인생설계를 구상하던 당시, 기

함께 얻을 수 있으니 큰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

회가 되면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소위 워라벨을

면 균형과 안정을 맞출 수 있어 보입니다.

추구해 보고자 했습니다. 적당히 휴식을 취하며

다만, 업무의 특성상 파트타임은 분명 맞는데,

놀고 적당히 일하는 프리랜서의 삶이 요즘 젊

활동해야 할 시간대가 사전에 확실히 정해지지

은이들의 로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않고 불투명하다는 점이 다소 문제라면 문제이

솔직히 저는 그때만 해도 익숙하지 않은 개념에

긴 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제가 집에 있건 국내

무작정 동조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외 여행 중이건 간에 통화나 문자 혹은 카카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97


톡, 이메일 등을 통한 연락망을 항시 확보하고

언급도 하십니다. 아마도 집 밖에 머무를 수 있

있어야만 하는 것은 이제 필수입니다. 이 수단

는 자신만의 체류 공간이 퇴직 후에는 더욱 절

들을 통해 일을 처리할 수만 있다면 그다음엔

실하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저는 풍부한

제가 굳이 어느 공간에 있어도 전혀 상관이 없

경험이 녹아난 그런 의견에 정중히 이해는 보내

고 문제도 없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또 드물게

되 동의는 하지 않습니다.

내부 협의를 위한 대면 미팅이 필요한 경우도

저만의 착각일까요? 저는 감히 장시간 집구석

있습니다만, 그때는 회의 시간에 맞추어 열심히

을 지키고 있더라도 와이프 하고는 전혀 문제없

달려가면 됩니다. 혹시 해외에 나가 있는 예외

이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물론

적인 경우에도 양해를 구하고 미팅 날짜를 귀국

저도 약속이 생기거나 별도 볼일이 발생하면 당

후의 일정으로 조율하던지, SNS를 통해 검토의

연히 출타를 합니다. 하지만 특별히 볼일이 없

견을 보다 충실히 작성하고 보완하는 것으로 문

으면서 괜히 밖에 나가 배회하거나 아까운 시간

제는 종결될 수 있습니다.

을 죽이고 낭비할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제 와 이프도 저처럼 약속이나 볼 일이 있으면 자유롭

그런데 저의 업무형태가 이렇다 보니 사무실

게 외출을 합니다.

출근은 자연히 점차 줄어들게 되고, 반대로 집

저는 여기서, 우리가 나이를 먹어 갈수록 새삼

에 머무르는 시간은 점차 늘어나는 양상입니다.

느끼는 감정을 목도하고 솔직해져야 한다고 생

흔히들 퇴직 후 상남자의 조건에 대해 이렇게

각합니다. 친구도 물론 중요합니다. 다른 신경

말하지요. 설혹 약속이 없더라도 무조건 아침엔

써야 할 일도 여전히 많습니다. 그런데 가장 마

집 밖으로 나와야 하고, 어두워지면 그제야 당

음 써야 할 상대가 바로 매일 마주치는 일상의

당히 집을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럴지도 모

배우자라는 중요한 덕목보다 먼저일 수는 없습

르겠습니다. 그래야 가족들도 평화롭고 가정에

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생각

계신 마나님들은 특히 스트레스에 노출될 우려

은 다르겠지만, 제 경우만 보자면 자식들은 이

가 없다고 말씀들 하시니까요. 심지어 제가 아

미 가정을 꾸려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고, 국내

는 어떤 직장 선배님은, 남자는 무조건 집 밖에

직계가족 구성원이라고 해보았자 배우자의 존

자기가 앉을 책상과 의자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재만큼 유일무이하고 가히 절대적(?)인 존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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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없다고 단언해도 무방합니다. 당연히 마음과 시

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고요. 단지 대다수 가

간을 모두 배려해야 할 최우선 순위의 존재라

정주부들이 자신이 직접 요리하지 않은 요행의

생각하고, 화목한 가정의 긴밀한 화음을 위해

음식을 밖에서 담소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것만으

늘 존중하고 노력하고자 합니다. 다행히 우리

로도 매우 맛있게 행복해합니다. 물론 제 와이프

부부는 아직까지 서로가 가장 편한 존재라는 느

도 예외가 아니지요. 집 근처엔 얼마든지 다양한

낌에 함께 공감하고 있습니다.

식당들이 포진하고 있어 쉽게 접근이 가능합니

혹자는 묻습니다. 어떻게 집안에서 답답하게

다. 때로는 산보 겸 다소 떨어진 곳까지 함께 걷

장시간 붙어있으면서 배우자와 원만할 수 있겠

거나, 자동차로 조금 더 떨어진 외식 타운을 찾

느냐고요? 여기서 저만의 팁을 살짝 공개해드

아가는 선택의 호사도 행복하게 누립니다.

리겠습니다. (물론 이 방법이 모든 가정에 만사

요새 음식 값도 비싼데 허구한 날 외식만 하냐

형통으로 통하는 비법은 결코 아니니 참고만 하

고요? 꼭 비싼 음식이 아니더라도 합리적 가격

시기 바랍니다.) 요지는 가정주부의 가사 부담

대의 다양한 음식들이 주변에 넘쳐납니다. 맛난

을 과감히 드러내 감축하는 것에 있습니다. 부

음식에 소소한 일상의 부부간 정담이 빠질 수가

부간의 가사 분담도 좋겠지만 가사 총량 자체를

있겠습니까? 결국 젊었을 때 자칫 소홀했던 가

감축시키는 것이 저의 주안점입니다.

족에 대한 뒤늦은 보상이 여생을 원만하고도 화

저의 경우에 국한하면, 제가 집에 머무는 시간

목하게 이끌어가는 선순환으로 투자된다고 생

이 길어지면서 우리 부부의 사이는 그전에 비해

각하면 어떨까요? 우리 남자들의 잦은 출타에

훨씬 좋아졌습니다. 대화의 기회도 많아졌고 미

들어가는 교통비와 식비 혹은 주류비 등을 감안

처 몰랐던 상대에 대한 이해도도 훨씬 높아졌다

하면 감내할 만한 비용이 아니던가요? (집에서

고 여겨집니다. 어쨌든 저는 일반적으로 퇴직한

는 반드시 집 밥을 꼭 챙겨 드셔야만 하고 친구

남편들이 집을 사수하면서 가정주부들이 겪는

들과의 친교에 가치를 훨씬 더 중요하게 두시는

스트레스, 이른바 ‘삼식이 증후군’을 불식시키

분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무조건 ‘아침 출타, 저

고자 했습니다.

녁 귀가’ 사수를 하시는 것에 저는 토를 달지 않

구체적 방법 중 하나로는 가급적 외식을 자주 하는 것입니다. 꼭 럭셔리한 식당의 고급 음식

겠습니다.^^ ) 그리고 또 하나, 저희 부부는 생활 패턴이 거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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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에서 장시간 TV 시청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처지거든요. 올 겨울에

습니다. 아침 식사로 간단히 토스트와 과일 등

방문할 큰 딸네 천방지축 손자 녀석을 따라잡

을 먹으며 보는 뉴스나 시사프로그램, 그리고

고 어울리는 흉내를 위해서라도 기초체력 단련

늦은 저녁때 한두 편 정도의 드라마 시청이 전

은 절실한 숙제입니다. 그럼에도 올 가을 바람

부입니다. 나머지 시간의 대부분은 주로 서재에

의 충동질은 불현듯 저희 부부를 여행 캐리어와

머물며 이메일로 주고받은 자료 파일을 검토하

함께 무작정 집 밖으로 나서게 할런지도 사실

고 작업을 하기도 하고, 독서나 온라인 교육을

잘 모르겠습니다.

통한 외국어 강좌나 인문학 강좌를 듣기도 합니 다. 제 와이프는 미대 출신으로 십자수와 장신 구 제작이 취미인데, 물론 판매용은 아니고 주 위 지인들이나 자녀들에게 기념일 혹은 명절 때 선물하는 것을 큰 기쁨과 보람으로 삼고 있는 착한 심성의 주부입니다. 즉, 저희 부부는 함께 식사를 하며 소소한 대화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제외하면, 장시간의 대면 없이 각자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고, 드라마의 누구들 처럼 거실에서 하루 종일 소파에 앉아 TV 채널 만 돌리며 상대방의 스트레스만 팍팍 올려주는 장면의 연출은 거의 없는 것도 서로를 위해 너 무 다행스러운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활동에 안성맞춤인 인생의 가을을 맞아 여태까지 저희 부부에게 번번이 실패로 돌아왔 던 운동을 다시 시도하고자 마음먹고 있습니다. 천고마비의 맑음도 저희 부부의 뱃살 앞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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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마터호른 등반기

안동준

서북쪽으로부터 눈보라와 함께 세찬 바람이 거칠게 몰아친다. 그래도 등 뒤쪽의 벽이 어느 정도는 막아주고 있기 때문에 그건 좀 낫다. 가 끔씩 정면으로 급습하는 얼음 바람은 참기 힘들 다. 기온 자체는 영하 1도 정도로 견딜만하지만 눈과 비에 젖은 옷과 장갑이 체온을 사정없이 떨어뜨리고 있다. 간간히 멀리서 들려오는 낙석 소리는 마치 천

개와 행동 식 조금이 전부다.

둥소리와도 같다. 실제로 구분이 쉽지 않다. 배

간헐적으로 걷힌 구름 사이로 보이는 체르비

낭 속의 옷이란 옷은 모두 껴입었다. 권국환 박

니아 마을의 불빛이 포근하다. 몇 시간만 견디

사가 준 Emergency blanket도 푹 뒤집어썼다.

면 우리는 오늘 저녁 둘러앉아 피자와 맥주를

그래도 덜덜 떨리는 몸을 제어하기가 도통 쉽

마시고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참고

지 않다.

견디자. 생각은 희망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지

계속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우리는 일행 과 이런저런 잡담까지 섞으면서 쉬지 않고 앞으 로 나아간다. 아, 시간은 왜 이렇게 굼벵이처럼 더디게 흘러갈까? 그러고 보니 오늘 내 수고하 는 몸에 제공한 에너지원이라곤 고작 컵라면 한

만, 추위에 오줌보가 오그라들어 소변이 마려운 데도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고 힘들다. “아~, 이런 된장! 춥고 배고파. 시간은 왜 이 리 더디냐!” 새벽 여명이 돼서야 다행히 천둥과 번개가 사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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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지고 눈보라도 조금씩 잦아든다.

부터가 본격적인 등반이다. 지금 해발고도는 2,800m.

세계 3대 미봉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마터호

낙석이 쌓인 너덜지대를 지나고 만년설로 덮

른’을 오르는 등정 코스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인 지역을 또 두 번이나 가로지른 연후에 다시

오늘 우리는 이태리 방향에서 오리온 릿지를 통

수직으로 솟은 암벽을 올라가야만 우리는 오늘

해 정상에 오른 후에 훼르니를 거쳐 스위스로

등정의 목적지인 카렐 산장(3,850m)에 도착할

하산하는 길을 택했다. 여러 이유 중에 비용 절

수 있다.

감을 고려했음도 물론이다.

세계 도처가 이상기후가 아닌 곳이 없음을 새 삼 절감한다. 이곳도 예외일 수 없다. 올해 유난

체르비니아에 당도하니 날씨가 갑자기 너무

히 산에 눈이 적은 것도 그 탓이다.

좋다. 마침 산악자전거 다운힐 대회도 열리고

너럭바위 위에 쌓인 눈 상태가 불안해서 바위

있어 축제 분위기다. 하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와 얼음이 계속 부서져 미끄러지고 추락하기를

오래 지체할 시간은 없다. 휑하니 가볍게 동네

반복한다. 함께 줄이 묶인 후배가 그만 같이 떨

한 바퀴 돌아보고 곧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어지면서 등정에 제동이 걸렸다. 나도 추락하는

본격적인 고소 적응을 위해 케이블카로 2,800m까지 이동, 다시 3,800m까지 쉬지 않

낙석에 그만 귀와 어깨를 다쳤다. 피도 나고 몸 이 욱신거려 아프다.

고 걸어 올라갔다. 예의 고소증세가 나타나기

산장 조금 못 미친 곳에 오르자 10여 미터 높

시작하고 호흡도 거칠어진다. 일행들과 가볍게

이의 수직 암벽이 나타났다. 굵은 로프가 설치

사진도 찍고 잠시 휴식 후에 하산했다. 한여름

된 그곳에서 앞서가던 원정팀이 갑자기 우리를

인데도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로 붐빈다. 여유

먼저 가라고 앞세운다. 자세히 보니 그들 일행

를 갖고 하루를 푹 쉬면서 등반 준비를 하기로

중에 두 다리가 모두 의족인 장애인 한 명이 두

했다.

사람의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등정 중인 모양 이었다.

이튿날 우리는 아침 일찍 출발해 오리온 산장

마침내 산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

에 도착했다. 일기예보가 좋지는 않지만 지금

루 비박을 하고 다시 정상을 겨냥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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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박 세례는 우리가 아이젠을 착용하고 피켓을 쥐 고 암릉을 오르는 사이에 다시 눈보라로 바뀌며 이내 시야를 가려버렸다. 날씨도 갈수록 나빠져 천둥 번개가 노도와 같이 내려친다. 자연히 등 반 속도도 점차 느려질 수밖에 없고, 몸의 피로 도 역시 극심하게 상승한다. ‘그만 포기하고 하 산하자고 말할까?’ 갈등하며 고민하던 차에 마 저녁 식사는 컵라면으로 때우고 휴식을 취했다. 휴식 중에 조금 전 목격했던 의족 착용의 장애

침내 오버행 바위에 걸린 사다리와 정상의 십자 가가 눈에 들어왔다. 아, 성공이다.

인이 마침내 무사히 도착했다. 산장에 있던 모 든 사람들이 뛰쳐나와 환호를 지르고 박수로 응

드디어 정상.

원했다. 인간승리, 감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래 머물기엔 너무 위험하다. 고압선 아래에서나 들을 수 있는 전류의 흐름소리가 ‘

새벽 4시에 기상. 역시 예보된 대로 기상이 좋

윙윙’ 거리며 신경을 자극한다. 젖은 물건이라

지 못해서 걱정이다. 비가 간간히 흩뿌리고 있

도 잡으면 찌릿찌릿 전기가 오고, 번개는 계속

으니 출발도 자연히 지체됐다.

번쩍거려 서둘러 하산해야만 한다. 기껏 사진

7시나 돼서 우리는 산장 바로 뒤에 서있는 수

몇 장 찍고 우리는 그렇게 다시 하산 길에 나

직 암벽을 오르는 것으로 오늘의 등정 일과를

섰는데, 시간과 날씨를 고려한다면 스위스 쪽

시작했다. 암벽과 암릉을 올랐고, 다시 30m 정

으로 내려가기로 한 원래 계획은 무리다. 그래

도의 수직의 암벽에 도전했다. 수직 암벽 옆으

서 계획을 변경했다. 올랐던 길을 역으로 내려

로는 예전에 활약했던 가이드의 동판이 묵묵히

가기로.

서있다.수직 암벽을 통과하자마자 우리를 기다 리고 있던 것들은 서북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궂은 날씨로 어려운 하산 길이었다. 나와 함께

바람과 눈 덮인 암릉뿐이다. 아니 그보다 더욱

줄을 묶은 후배는 번개 파편에 맞아 눈 위가 부

격렬한 환영 인사는 우박 세례다. 그리고 그 우

어올랐다. 또 다른 일행 중의 한 명은 번개 파편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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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부터 내일 5시까지 추위와 배고픔과의 싸 움은 치열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긴 시간을 추위와 배고픔과의 사투를 벌이며 인내했다. 엷은 구름 사이로 저 먼 아래쪽에서 불빛의 움 직임이 보인다. 산 아래에서 카렐산장으로 올라 오는 헤드랜턴 불빛이 분명하다. 아마 시간은 이제 새벽 4시가 조금 지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빛이 마침내 눈앞에 나타났다. 독일에서 온 두 친구는 바쁜 등정 중에도 비스킷 몇 개와 에 너지 젤 하나를 배낭에서 꺼내 주고 올라갔다. 우리도 그제야 다시 하산 길에 나설 수 있었고 산장에도 무사히 도착했다. 산장에서 남들 먹으라고 누군가 두고 간 라면 을 무릎에 맞았다. 계속 몰아치는 눈보라는 시

세 개를 끓여 다섯 명이 게 눈 감추듯 나누어 먹

야를 빼앗았고, 시간은 너무 많이 지체돼 어둠

고 나니 추위에 떨었던 몸이 노곤해지고 잠이

이 급속히 찾아왔다.

몰려왔다.

헤드랜턴 불빛에만 의지해 능선 길을 내려왔

아마 잠시 눈만 감았다 뜰 요량으로 자리에 누

고, 다시 암벽을 로프로 하강하고 나서야 서북

웠었다. 그런데 깨보니 네 시간이 어느새 훌쩍

쪽으로부터 거칠게 몰아치던 바람은 우리를 자

지나 있다. 서둘러 일행을 깨우고 마을로 향했

유롭게 놓아주었지만, 그렇다고 안도하기엔 아

다. 눈앞에 음식물은 오락거리고 마음이 급했지

직 이르다. 산장까지 이 상태로 가면 여전히 두

만, 일행 중 연세 많으신 분이 몹시 지쳐 있어 저

시간 정도 걸릴 수밖에 없고, 눈보라에 새로 쌓

녁 늦게야 하산 완료, 오늘의 일정도 끝이 났다.

인 눈과 짙게 깔린 운무는 방향도 찾기 어려울

이미 거리의 음식점들도 모두 문을 닫은 상태라

정도다.

아쉽지만 간단한 안주와 맥주로 피로를 달랬다.

결국 비박을 결정했다. 하지만 지금 시간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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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3일 후에 오를 아이거를 위해 건배!


나의 중국 생활 신변잡기

이상국

- 글을 써 본 지 오래되어 글이라고나 할 수 있을지 겁이

는 당시 생태 블록을 생산하는 ‘자연과 환경’이

나지만, 회장님과 편집장님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끌

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투자 자금을 모으려 백방

쩍거리고 보니 읽어줄 친구들한테 미안한 마음입니다 -

으로 뛰어다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 게 우리 회사에서 투자도 해주고 또한 여러 곳

나는 1997년 IMF 사태가 발발하기 한 달 전에

을 소개해 주었다.

운 좋게도(?) 명예퇴직을 했다. 전체 종금사들이

우리는 이를 계기로 자주 만나 회사 경영 전반

모두 문을 닫고 졸지에 길거리로 내몰리던 당시

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며 회사의 도약을 위해

상황에서 그나마 한결 나은 상태로 일 년 반 가

중국 진출을 꿈꾸게 되었다. 마침 벤처캐피털협

까이를 놀다가 내 사업을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

회에서 주관하는 중국 투자에 관한 세미나에 초

하고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었는데,

청을 받아 북경을 방문하게 됐고, 세미나 진행

마침 이태준 군이 우리 동네에서 회사를 운영하

중에 북경 주재의 현지 한국인 강사들과 ‘자연

고 있어 자주 만나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과 환경’의 제품을 통한 중국 진출의 가능성을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반이었고 또한 종금, 증

가늠해볼 기회가 있었다.

권사, 건설사 해외근무 등 풍부한 경험을 가진

귀국해서 ‘자연과 환경’ 김 사장과 중국 진출

태준이의 충고를 받아 개인사업의 꿈은 접기로

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서 내린 결론은 중국

했다. 대신 벤처캐피털 임원으로 취직을 했다.

진출은 하되 중국과 합작법인을 설립하고, 추진

마침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오랜 기간 동안 함께 했던 후배로부터 도움 요청이 왔다. 후배

총괄은 내가 하기로 하여 졸지에 낯선 중국으로 의 진출이 갑자기 이루어지게 되었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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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나는 중국 진출을 위해 나름 새벽에 중국어 학원도 열심히 다니고, 중국 비즈니스에 관한 책을 위시해서 다방면의 책도 많이 읽으며 진출에 따른 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으면 개인적으로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쯤하고 싶다. 그보다 말 나온 김에 저수지 얘기를 좀 끼워놓 고 싶다. 합작선 덕분에 북경 부근의 저수지 곳 곳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 북경시 식수원으로

여기까지가 내가 타향살이를 십여 년 하게 된

쓰이는 ‘밀운 저수지’의 크기가 강남과 서초구

여정이고, 그 십여 년의 중국 생활 중 기억에 남

합친 넓이만큼 넓다. 그 물이 수로를 타고 ‘이

는 몇 가지를 적어볼까 한다.

화원’으로 흘러들어 북경 사람들의 식수로 일 부가 공급된다. 2008년 북경 올림픽 때 조정 경

첫째 사업에 대해 얘기하자면 빛 좋은 개살구

기장 물을 이 저수지에서 공급했으니 그 크기를

라고나 할까?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사업은 그

가히 가늠해볼 수 있다. 참고로 북경 주위에 있

렇게 만만하지만은 않고 참으로 어렵다고 말할

는 하천에는 50년 이상 한번도 물이 흐른 적이

수밖에 없다. 남들이 보면 우리가 설립한 회사

없다고 한다.

는 거의 환상적인 합작선을 잡은 것처럼 보인

둘째는 역시 친구들과의 추억이다. 나는 친구

다. 북경시 수리국 산하의 ‘수리 설계원’, ‘수리

복이 많다. 북경에서 나의 지위란 조그마한 중

공정 감리회사’, ‘수리공정 회사’가 당시 모두

소기업의 대표에 불과한데 대사관에 총영사급

우리의 합작선이었다. 설계원이 설계하면 공정

친구가 둘이나 있고 광업진흥공사 중국지사장

회사에서 공사를 할 것이고, 감리회사에서 감리

도 있으니 사람들로부터 나도 덩달아 한인 사

가 끝나면 수리 국장이 공사대금을 지급하라고

회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김동선 산자관과 박

할 것이니 겉으로만 본다면야 땅 짚고 헤엄치기

영대 문화관, 그리고 송석진 지사장이 바로 그

같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이 어디 상상 같

친구들이다.

기만 하겠는가? 너무 많은 변수가 기다리고 있

동선 군은 산업자원부에서 파견 나와 중국 진

었고, 그 이유를 다 설명하려면 끝이 없다. 하여

출 한국기업의 애로사항을 잘 해결해 주어 귀국

튼 나는 공장 짓고 생산하고 영업해서 공사도

후 더욱 영전하였다.

하다가 5년 만에 손들었다. 궁금한 친구들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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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박영대 문화원장은 참으로 훌륭한 친구이자


모든 공무원의 사표로서 존경받을 만하다. 문

‘토골 일산’이란 토요일 골프 일요일 등산을

화원장 재직 시에는 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어

줄인 말이다. 중국에서 골프는 모두들 신나게

렵사리 북경 문화원을 매입하여 개원시켰고, 각

치는데 박 원장은 골프를 치지 않아 함께 라운

종 문화행사를 개최하여 한중 문화교류에 지대

딩은 못해 보았고 김국장과는 몇 차례 어울린

한 공헌을 하였다.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면 우

것 같다. 한번은 김병돈 군과 민순기 사장이 놀

리 동문들을 초청하여 접대하는 일을 즐거워했

러와 한수 지도를 받았던 추억도 정겹다.

으며 대만 유학파답게 인민일보에 가끔 기고도

셋째는 취미활동이다. 나는 걷는 것을 무척 즐

하여 당시 김하중 대사와 더불어 최고의 중국통

긴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는 장위동에서 학교

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때가 한중관계가 최고로

까지 자주 걸어 다녔었다. 미아 삼거리에 살던

좋았던 시절이었고 중국인들로부터 두 분 모두

손창수 군과 대지극장 뒤 송정동에 살고 있던

가 큰 존경을 받았다.

홍정표 군은 나한테 붙잡혀 가끔 함께 걸어다니

송석진군의 인품에 대해서는 모두들 잘 알고

기도 했다. 지금도 광화문에서 친구들과 약속이

있듯이 북경 생활에 버벅대는 나를 잘 이끌어

있으면 잠실에서 걸어가기도 한다. 한강변을 따

주었고, 2002년 월드컵 경기 때는 혼자서 생활

라 걷다가 한양대를 끼고 청계천으로 걸어가면

하는 나를 집으로 불러 맛있는 한식으로 나를

쾌적한 트레킹이 된다.

위로해주며 함께 응원도 했고, 더 아름다운 추

이제까지 걸어다닌 추억 중에 가장 기억에 남

억은 천하제일 명산 황산을 함께 여행한 것이었

는 것은 27사단 사창리에서 팀스피리트 훈련

다. 물론 석진이가 안내하고 나는 그저 따라다

대비 100킬로미터 행군 훈련을 네 번 했던 것

니기만 하면 되었다. 석진이가 건강을 회복하면

과 내가 근무했던 신한그룹행사로 1984년 추석

또 한번 함께 가고 싶다.

무렵 전라남도 영암에서 출발해 남해안을 따라

이 무렵에 황호근 군이 친구와 함께 의료약품

걷다가 부산에서 부관페리 연락선을 타고 일본

사업을 한다고 자주 드나들었고 장남선 군도 사

시모노세키에 도착, 거기에서 히로시마와 고베,

업차 자주 들렀었다. 한번은 우연히도 호근, 남

오사카를 거쳐 교토 히라가타에 있는 백제시대

선, 영대, 동선이 그리고 나 다섯이서 소위 말하

학자 왕인 박사 무덤까지 1,100킬로미터를 걸

는 청요리에 배갈을 마신 적도 있었다.

어갔던 경험이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107


등산에 대한 애착 또한 유별나다. 중국에서 ‘토

타이 장성, 무티에니 장성 등등 만리장성 등산

골 일산’으로 세월을 보내던 중 2004년에 사스

코스만 해도 무궁무진하다. 언제나 다시 가볼

(SARS,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라는 괴질이

수 있으려나. 추억만 먹고 산다.

돌아 많은 한국인이 북경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

아직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 임기가 끝나는 내

다. 이때 북경을 지키고 있던 주재원들과 함께

후년부터는 다시 가 볼 수 있으려나. 중국의 명

사스 극복을 위해 북경 등산 구락부를 결성해서

산은 거의 돌았으니, 그동안 아껴 놓은 아름다

등산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고향 친구들과 매주

운 우리 강산과 가까운 일본의 명산이나 찾아다

등산을 하며 등산 대장을 6년 간 해본 경험이 있

녀볼 생각이다.

는 내가 자연스럽게 등산 대장을 맡아 귀국할 때까지 6년 간 산악회를 이끌었다. 그 이후 아

두서없이 쓴 글이 친구들 눈이나 어지럽히지 않았나 걱정된다.

직도 북경 등산 구락부는 매주 산행을 계속하고

2019년 10월 7일. 상국이가 두서없이 주저리

있다. 또한 고국으로 귀국한 옛 멤버들은 분기

주저리. 삼년 근, 육년 근 모두 더욱 정답게 건강

별로 서울 근교 산행을 하고 있다.

하게 자주 볼 수 있기를 기원하며…

많은 사람들이 북경에서 등산을 다녔다고 하 면 어리둥절해하며 묻는다. 북경에 무슨 산이 있냐고. 북경시 땅이 넓어 산이라고는 향산이 나 보일까 한두 시간 달려 나가야 산을 마주할 수 있다. 북경은 북서쪽 산악으로 둘러싸인 분 지다. 북경 인근에는 아름다운 산이 참 많다. 설 악산을 닮은 자운산이나 운몽산, 웅대함을 자랑 하는 2000 고지가 넘는 영산과 송산, 북경 관광 필수 코스인 용경협도 겨울에 얼음이 얼면 얼음 위를 걷는 등산도 환상적이다. 만리장성 중 최고의 위용을 자랑하는 팔달령 장성보다 몇 배가 아름다운 찌 엔코 장성, 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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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사물, 그리움, 소박함

이상권 작가 경력 한서대학교 아동미술학과 교수(현) 한국미술 청년작가회 회장 역임 한국아동미술학회 초대 회장 및 고문 역임 한국미술협회 이사 및 조각분과위원장 역임

개인전 11회 및 각종 단체전 400여 회 출품

이상권, 태초에

역대 대통령 동상 제작 수원 현충탑 공모 당선 제작 민병갈(천리포수목원 설립자) 흉상 제작 프란치스코 교황 해미 방문 기념조형물 제작 서울 정부청사 조형물 등 미술 조형물 다수 제작

이상권, 프란시스코교황해미방문기념조형물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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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트

내가 추구하는 형태는 소박하면서도 세련되어 있고, 투박하게 보이나 정리되어 있고, 자연스러우며 어느 공간에서도 저항감이 없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형태에 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늘 제작에 임 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와 선에 대한 나의 취향은 물고기, 해삼, 조개와 같이 물살의 저항에서 얻어진 유연하면서 함축 미 있는 바닷속 생물체의 형태와 선, 또는 해조류의 무 작위 하게 움직이는 율동이나 수면의 물결 운동에서 보 이는 자연스러운 상태에 매료되어 바다가 연상이 되는 “물결 이미지” 란 연작 작품을 몇 년간 발표하고 있지 만, 내 작품의 정신이 바다의 어떤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바다에서 출발된 motive를 가지고 몇년 간 제작하는 동안에 바다에서 육지로 육지에서 마음속으 로 옮겨지며 바다에서 받은 형태의 線의 영상은 먼 산의 sky line에서도 발견하였고, 어릴 적 추억 속에서도 발견하였으며, 시골 풍경과 농부의 얼굴에서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추구하는 정신을 굳이 글로 표현한다면 조그만 사물에 대한 소중함, 자연의 자연스러움에 대 한 사랑,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 영원한 것에 대한 그리움, 영원한 것에 대한 敬愛, 미지에 대한 동경, 생명체에 대한 신비로움 등을 간결하면서 소박하게 서정적 조형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작품 제작 시 기교적이거나 인공적인 것을 배제하는데, 이는 완전한 상태의 답답함보다는 불 확실한 가능성의 상태가 더 좋고, 표현된 상태보다는 표현되지 않은 상태가 더 美적이라고 믿기 때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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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이상권, 희망

이상권, 횃불

이상권, 흐름

이상권, 흐름2

이상권, 수원현충탑

이상권, 대곡리 풍경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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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늦은 취업 이야기

이영권

생활부장을 지냈던 이영권입니다. 졸업하고

밝혀질까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포항공항은 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 해군항공대 조종사로

초에 관련 항공법 위반으로 민항기의 취항 허가

10여 년 근무했고, 대한항공에 조종사로 입사

가 날 수 없는 공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여 또다시 약 10여 년 동안 조종사로 근무했

하고 안전보다는 돈벌이에 급급한 대한항공과

습니다.

건교부가 결탁하여 불법 취항을 눈감아왔기 때

그러던 99년 3월 15일의 일이었습니다. 우천

문입니다.

속을 뚫고 저는 포항공항에 착륙을 감행해야 했

이에 대해 저는 민항 사상 30여 년 만에 처음

습니다. 브레이크를 계속 강화했고 마지막에는

으로 건교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제기하였습니

허리가 휘도록 부기장과 함께 브레이크를 밟았

다. 그러나 건교부는 사고 관련 주요 자료들을

음에도 적절한 감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축소와 조작, 은폐와 왜곡으로 대응했습니다.

아니라, 갈수록 더욱 감속률이 저조해지는 기현

부기장으로라도 근무할 수 있게 배려하겠다는

상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동체가 활주로를 이

약속도 이행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에게 괘씸

탈하면서 승객 33명 부상과 항공기 대파로 약

죄를 적용해 수차례 대한항공에 해고 압력을 넣

210억 원의 재산 손실이라는 대형사고가 발생

었습니다. 결국 저는 사고 발생 약 2년 만에 대

했습니다.

한항공을 나오게 됐고, 현재까지 대한항공과 복

그런데 항공사는 모든 책임을 조종사들에게

직 소송 중에 있습니다.

뒤집어씌웠습니다. 그 이유는 조종사의 과실이 문제가 아니라 불법 취항의 항공사 측 과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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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한편으로는 가족 부양의 책임이 있는 한 집안


의 가장이 언제 끝날지 모를 지루한 재판에만 계 속 매달려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때마침 얼마 전 부터 출판사 <에우안겔리온>의 영업이사로 일 하게 됐습니다.<에우안겔리온>은 인천 교구 ‘미 래사목연구소’의 소장이신 차동엽 신부님께서 주관하는 월간 잡지 『참 소중한 당신』을 발행하 고 있습니다.<에우안겔리온>은 ‘복음’이라는 뜻 의 라틴어로서, ‘미래사목연구소’에서 그동안 연 구하고 개발한 내용을 대중화시키고자 시작된

는가?』 및 『공동체 사목기초』, 『소 공동체 기초

출판사의 이름입니다.

교실』, 『나의 신앙 우리 공동체』 등이 있습니다.

‘미래사목연구소’는 책과 미디어 등 문서를 통 하여 말씀을 전하는 연구소로서, 한국형 소공동

월간 잡지 『참 소중한 당신』은 3월 초에 가제본

체의 모델 개발과 신자 제 교육 및 본당 지도자

이 나오게 되고, 창간호는 3월 말경에 발간 예정

양성 프로그램 개발 등에 힘쓰고 있고, 초교구적

으로 있습니다. 참고로 월간 잡지 『참 소중한 당

인 연수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신』에 실릴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차동엽 노르베르또 신부님께서는 작년 말 2개 월에 걸쳐 저서 『가톨릭 신자는 무엇을 믿는가?』

1. 나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

라는 교재로 전 교구를 순회하시며 2천여 명의

2. 신명나는 삶을 위한 엔돌핀

사제와 지도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셨습니다.

3. 가톨릭 신앙의 자긍심을 키워주는 영성의 보

2002년에는 평화방송 TV를 통하여 6개월간 가

물들

톨릭 교리를 강의하셨고, 현재도 이 강의가 평 화방송에서(8시-AM/9시-PM) 재방송 중에 있 습니다.

** 저는 본관이 평창 ‘이’가로서, 천주교 최초의 영세자이신 이승훈님의 후손입니다. (때늦은) 취업 신고!

차 신부님의 저서로는 성구 사전 『말씀의 네트 워크』, 신개념 교리서 『가톨릭 신자는 무엇을 믿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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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 the fear

이영식

No. 1

한 생활을 감내하고 장교로 임관한 동기들에 비

존경하는 김성일 교수께서, 뭐라도 하나 써달

해서도 나의 학창 시절은 상대적으로 너무 쉬웠

라는 부탁의 카톡이 왔습니다. 존경한다는 건

다고 생각합니다.

거절하기 힘들다는 말과 동의어 거의 맞지요?

대기업에 취업했던 친구들은 새벽에 출근해서

문집을 만드느라 애쓰는 눈치인데, essey 한번

별 보고 퇴근하는, 치열한 삶을 살았지요. 글쎄

안 써보고 어찌어찌해서 운 좋게 박사학위는 받

요? 나도 그 정도로 열심히 살았을까? 그렇지 못

았지만 이참에 저의 무식이 만천하에 알려질까

하다면 왜 난 부당하게 과분한 대접을 받을까?

전전긍긍하면서도~, 뭐 어때! 친구들인데~ ㅎ

그것도 몇 년이 아니라, 그토록 오랜 세월을~.

ㅎㅎ, 이런 당돌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두려움

민망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 글을 써봅니다

에 도전해 봅니다.

No. 2 나는 가끔 생각해봅니다. 왜 사람들은 의사라

치료 결과가 제대로 안 나와 괴로울 때가 있습

는 직업을 의사 본인조차 민망할 정도로 인정해

니다. 의술이 짧아서 혹은 순간적인 방심으로

주는지요? (나의 착각?)

돌이키기 어렵게 나쁜 결과가 발생할 때도 있습

고딩 때 무수했던 뛰어난 친구들에 비하면 나

니다. 책에 다 나와 있는데, 게을러서 공부를 소

는 학업 성적도 초라했습니다. 인품이나 인물

홀히 하였거나 요령을 부리며 치료했을 때의 경

역시도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입니다. 또 육사나

우가 대개 그렇습니다.

공사에 들어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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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하지만 책에 모두 적혀 있으니 다시 두려움에


맞서 노력한다면 대부분 좋아집니다. 그럴 때

수롭지 않게 생각했지요. 근데 그때, 편입생에

참 미안하게도 환자 자신이 겪어야 했던 고생을

다가 위에서 내려온 유급생까지 무려 22명의 새

어느새 잊은 듯이,

동기가 생겨났습니다. 콩나물 교실처럼 변한 분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고 싶어요, 선생님!”

위기 속에서 1년을 지내고 본과 1년 올라갈 때,

이렇게 말해주는 환자도 있어요.

17명의 동기가 또 유급을 했어요. (원래 18명 낙제했는데 1명은 구제됐지요. 18이 어감이 나

난 치료를 할 때면 가끔, 이런 치료법을 처음

쁘긴 하지요.)

개발한 선학들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제대로 치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덕분에 본과 1년

료가 되는 과정이라고 하더라도 파골 세포에 의

1학기 때 처음으로 재시에 한번도 안 걸렸어요.

한 환자의 몸과 치료 부위는 일시적으로 상당히

스스로가 대견했습니다. ‘뭐 하면 된다!’, 이런

악화되는 듯 보이곤 하지요.

맘도 들었고요.

“선학들은 처음에 예후도 알 수 없고 몹시 두 려웠을 텐데 어찌 이런 치료법을 시도하려는 용 기를 가졌을까요?”

본과 1년 2학기 때엔, 유00이라는 유급생이 고딩 선배(3회)라는 걸 알게 되었고 물 만난 고 기처럼 매일 술 마시러 다녔습니다. (둘 다 술을

No. 3

좋아했어요) 2학기 성적은 바닥! 선배님은 또 유

나는 경희대 치대를 나왔습니다. 신일고처럼

급(3년째 본 1).

1차를 실패하고 입학하는 학교지요. 2차로 입 학하는 대학엔 나름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 것

어쨌든 본과 4년간에도, 매년 4,5명씩 유급을

같습니다. 한창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애들

당하는 제도에 난 환멸을 느꼈습니다. 뭘 제대

에게서 활기라곤 찾을 수가 없어요. 마지못해서

로 가르쳐 주지도 않으면서 시험이라는 모순된

다닌다고나 할까, 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시스템에 우롱만 당하는 느낌?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의사가 되어간다는 느낌이 없었지

예과 2년으로 진급 당시엔 13명이 유급을 했

요. 영양가 있는 의술을 배운다는 보람도 전혀

습니다. 성의 없이 다니니 그럴 수도 있겠다, 대

없었어요. 예를 들면, 박사 취득 후 모교에서 신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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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료 실습강의를 했던 당시를 생각해볼 수 있

도는 이쑤시개로도 빼겠더군요. 충치 치료, 틀

습니다. 기자재도 그렇고 강의 교재도 그렇고~

니, 초보적인 신경치료에 이르기까지.(그래도

도저히 그런 식으로 배워서는 신경치료를 할 수

아프던 치아가 안 아프다니 의술이 신묘하다는

있는 치의가 될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내가 왜

말도 들었어요. 정말 쪽팔렸어요.) 공부는 거의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신경치료를 못했는지

안 하고 마치 공돌이처럼 손으로만 진료했지요.

그때서야 이해가 됐습니다. 쉽고 재밌게, 뭔가

다른 군의관들도 도토리 키 재기, 당시에는 모

배운다는, 치의가 되어 가고 있다는 보람을 느

든 치대가 어떻게 하나같이 이론만 배웠나 봐

낄 수 있어야 배울 수가 있을 텐데... 어렵고 힘

요. (이것조차도 학교에서 똑바로 가르쳐주진

들기만 할 뿐 신경치료를 제대로 할 수도 없게

않았지만)

하면서, 마치 군사훈련이라고는 짜증나는 제식 훈련만 하다가 전투에 보내지는 것과 같은, 그

No. 4

런 식으로 배우니 되겠습니까.)

군대 2년 차 때, 신검 군의관으로 차출됐습니 다. 교육기간만 1달을 국군 통합병원에서 받았

어느덧 공붓벌레가 된 동기들도 미워졌습니다.

습니다. 근데 며칠 나가니, 이제 그만 나오라고

“니들이 그렇게 열심히 해서 겨우 경희 치대

하네요. 집에서 푹 쉬다가 파견 가래요. 원하면

냐? 또라이 새끼들!” 속으로 그랬습니다. 우리 동기들이 1980년 국

계속 나와도 되긴 된다! 난 그때 정신이 말짱했 기에 집에서 노는 걸 택했습니다. 테니스도 레

가고시에서 1등부터 6등까지 석권했습니다.

슨 받고, 바쁜 마누라(교직에 있었어요) 꼬셔 놀

(난 뭐 그냥 합격만 ~ ) 하지만 좋은 성적으로

러도 다니고.

합격한 동기도 진료를 잘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파견 나갔습니다. 갔는데~ 보통 1시면 끝내고~ 낚시, 관광, 테니스~ 저녁엔 음주~ 수

군대 가서 환자를 엄청 많이 봤습니다. 발치를 많이 했어요. 장비가 열악하니 어려운 사랑니 발치도 끌과 망치로만 조각내 빼곤 했습니다. (전문용어는 피합니다) 나중엔 웬만한 치아 정

116

ㅣ 신일 5회 동기회

당도 월급의 3배~ 모처럼 경제적으로 여유도 생기고, 즐거운 인 생이었어요! 시간이 많으니 생각도 많아졌습니다. 명문고


를 나왔으니 유식하게 성찰했다고 할게요. 참!

내 생애 처음으로 마음에서 우러나 공부를 했

내 경험상 병역비리는 없더군요. 돈 내고 빼냈

던 거 같아요. 같은 직책으로 보존과 들어온 해

다는 거, 난 거짓말이라고 믿어요. 나중에 신문

군 군의관 출신의 동기생 최 모는(나중에 경희

에 병역비리 대서특필 되는 거 보고 친한 친구

치대 부학장 역임 후 건강 나빠져 명퇴) 학생 때

들에게 물었더니 자기들도 부정하게 뺀 적은 없

우등생으로 정말 모범적이고 지독히 열심히 공

다고 했습니다. (법적 시효가 한참 지난 후라서

부하는 친구였는데, 나도 열심히 하니 나를 힘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지요)

겨워하고 그럴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교수님 들이 편견이 없는 것도 힘이 됐지요. 난 뭐 학생

신검 군의관 다녀온 후에 난 삐딱한 좌파(?)에

때 성적 불량자지만, 교수님들의 생각은 ‘치대

서 우 편향으로 돌아섰습니다. 나라 행정이 공

를 졸업했으면 잠재력은 같다’고 보시는 것 같

정했어요.

아서, 과거의 죄도 씻을 겸 열심히 했습니다. 선

어쨌든 치의로서 그간의 잘못이 파노라마처

의의 경쟁을 통해 박사 입학도 먼저 했고요, 교

럼 밀려왔습니다. 거의 1년간 파견 근무를 마

수하라고 권하기도 해 주시고, 과분한 사랑을

치고 다시 머리도 짧게 깎고 전투복 입고 자대

받았습니다.

로 돌아가니 군대를 다시 가는 거 같았어요. 근 데 자대 복귀 후 옛날처럼 하는 진료가 맘에 들 지 않더군요.

박사 입학시험 때는 대단한(?) 2년 선배님들과 같이 봤습니다. 전공은 다르지만 네 분 선배님 들과 같이 시험 친다는 자체가 영광이었고, ‘저런

No. 5

분들과 같이 보니 난 꼼짝없이 떨어지겠구나!’

제대 후 모교 보존과에 들어갔습니다. 교수님

기가 팍 죽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그분들 모두

들이 좋다! (실력이 좋다는 아니고, 인성이 좋

탈락하시고, 난 그만 합격!

다!) 당시 박사과정에서 치주학을 전공하는 절

Face the fear!

친의 추천으로 선택했지요. 무급 조교라는 이

역시 길고 짧은 건 대봐야 돼!

상한(?) 직책으로 수련의들과 똑같이 근무했습

또 느끼고 말았습니다.

니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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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6

빚이 많으니 당연히 열심히 했지요. 어느덧 20

보존과에서 1년 수련 후, 종합병원 과장으로

년이 지났습니다. 만으로 52살 된 2007년에 잠

갔습니다. 불과 1년 전에는 종합병원 인턴으로

실로 옮겼습니다. 마눌 빼곤 모두 반대했어요.

도 뽑히지 못했는데, 여기저기에서 오라고 하더

공릉동의 내과, 비뇨기과 동갑 친구들도,

군요. 1년간 보존학 한우물만 팠더니 치의로서

“이렇게 잘되는 치과를 옮겨?”

나름 경쟁력이 생겼어요. 당시엔 신경치료 제대

나름 충고도 하고 그랬습니다.

로 하는 치의가 적어서 ‘장님 나라 애꾸처럼’ 좋

잠실 개업식 때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났어요.

은 평가를 받았지요. 동기들과 study club을 만

(공릉동 개업할 때, 또 옆으로 확장 이전할 때,

들어서 다른 과 공부도 시작했습니다. 한 마디

인테리어를 아버지가 직접 해주셨지요) 아버님

로 공부가 끝이 없더군요. 하면 할수록 늘어나

계셨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이렇게요

는 의문부호! 벌써 치과를 옮긴 지 만 12년이 됐네요. 세월 어쨌든 3년간 과장으로 있다가 개업을 했습니

참 빠른 거 같습니다. 선택의 순간마다 주저했

다. 나에게 신경치료를 받은 선배가 마눌을 충

다면? 두려움에 맞서지 않았다면? 난 자부심 있

동질을 해서,

는 치의가 될 수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개업 비용은 모두 내가 빌려주겠다. 영식이는 개업하면 대성한다!” 뭐 이러니 마눌이 날 계속 못살게 해서~ 개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 루즈벨트

업했어요. 그간 집도 사고~ 박사과정 다니고 study도 했더니, 당시 수중에 현금 백만 원! (월

난 이 말 참 좋아합니다. 그리고 평범한 내가

급이 180만 원이었는데~) 어쨌든 백만 원에 빚

우연히 치대를 선택한 것도 최선의 선택 같습니

3,900만 원 얹어서, 이렇게 개업을 했어요. 여

다. 다른 직업을 선택했다면 고딩 친구들 같은

력이 없으니 월세 가장 싼 곳을 찾았고, 공릉동

뛰어난 인재들 틈에서 내가 어찌 경쟁이 됐겠습

에 개업했습니다.

니까?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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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과거로 돌아가서 사는 삶

이충호

1. 하노이에서 다시 비엔티안으로 가다

다. 8월 초에 타임머신을 타고 40년 전인 1980 년대 우리가 살았던 시절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으로 출국하게 되었다. “하노이에 가서 뭐하면서 지냈고 비엔티안은 또 왜 가려고 하느냐?”라고 묻는 지인들이 많 이 있어, 그 질문에 답을 주기 위해 이 글을 쓰 고 있다.

2. WFK(World Friends Korea) 자문단 2018년 한 해 동안, 30년 전 한국의 모습 그대

이라는 것은?

로를 재현하고 있는 하노이에서의‘WFK(Wor ld Friend Korea) 자문단 해외봉사활동’을 마

‘WFK-NIPA 자문단’은 대한민국 정부가 개

치고 금년 1월에 귀국한 이후, 잠시 아내와 함께

발도상국가의 경제산업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외 여러 곳을 여행하고 쉬면서 힐링의 시간

매년 100여 명의 퇴직자들을 선발하여 자신이

을 가졌다. 그러면서 또다시 내가 잘하고 좋아

쌓은 경험과 기술을 그들에게 전파하고 개도국

하고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찾다가 금

의 제도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해외개발원조

년 4월에 공고한 2019년 ‘WFK-NIPA 자문단’

(ODA) 사업의 일환으로 시행하는 ‘퇴직전문가

모집에 응모한 결과 정말 운 좋게 다시 선발됐

해외봉사단’을 말한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119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 자문단 모집요강 에 의하면 자문관의 자격요건으로 ‘민간·공공 부문 퇴직자 중 ICT, 산업기술, 에너지 자원, 무 역투자, 지역발전 분야에서 10년 이상 종사한 50세 이상의 전문가로서 개도국에 대한 봉사정 신이 있고 외국어로 강의와 회의 등이 가능한 정도로 의사소통이 원활한 수준’을 보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위와 같은 자문단의 자격 요건에는 많

해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어

이 부족하지만 운이 좋게 (내가 지원할 당시 우

철이 들고 지혜로워지면 과거로 돌아가 살고 싶

수한 경쟁자가 지원하지 않아서) 지난 2017년

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과거로 되돌아 갈

하반기에 ICT 정책분야 자문관으로 선발되어

수야 없지만, 나는 내가 살았던 30여 년 전의 과

2018년 한 해 동안 베트남 정보통신부로 파견

거와 비슷한 환경으로 돌아가서 1년을 살다 오

가 ‘베트남의 4차 산업혁명 대응전략 수립을 위

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한 자문’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금년 상반

하노이의 보통 사람들은 2-300불 내외의 작은

기에 실시한 자문단 공모에서는 정말 운이 좋아

월급으로 어렵지만 우리가 70-80년대에 그랬듯

또다시 선발되어 라오스 과학기술부로 ‘라오스

이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열심히 살고 있다.

과학기술정책’을 자문하기 위해 8월 초에 출국 할 예정이다.

하노이 시내는 차량 한 대 당 오토바이 10여 대가 함께 어울려 비좁은 도로를 곡예 하듯이 주행하기 일쑤고, 아파트나 대형건물 지하 1층

3. 과거로 돌아가서 산다는 것

도 대부분 오토바이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음식점이나 상점 별로 건물 앞 보도 위에는 오

“인생은 연습이 없는 일방통행이다”라는 말처

토바이를 주차, 보관해주고 200원 내외의 주차

럼 우리는 한번뿐인 생을 연습 없이 일방통행으

비를 받아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사는 가장

로 살기 때문에 실수가 잦고 후회도 많고 후회

들이 넘쳐난다.

120

ㅣ 신일 5회 동기회


큰길 안쪽 도로변에는 아침과 점심때 목욕탕 용 조그만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컵라면, 쌀국 수, 샌드위치, 삶은 계란, 간단한 쌀밥 등을 1달 러 미만으로 사 먹기도 하고 담배도 피우면서 쉬고 있는 젊은 직장인들로 넘쳐난다. 길을 걷 다 보면 리어카나 자전거에 빗, 요지, 헤라, 고 무줄 등 각종 생활용품을 싣고 다니며 행상하는 만물 장수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대로변에서 조금만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마치 70년대 삼양동이나 봉천동 언덕에 판자나

자문활동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천막을 치고 살았던 시절과 같이 무작정 도시로

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주하여 아주 좁은 방에서 함께 살고 있는 가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미국, 독일, 중

구들이 많이 있다. 또한 하노이 중심가에 있는

국, 일본과 베트남의 인접국인 말레이, 태국, 싱

호화로운 고층 아파트나 사무실 빌딩 숲 바로

가포르 등 주요 국가들의 대응동향을 분석하여

뒤편에는 분리수거를 하지 않아 음식물 찌꺼기

베트남 정부에 주는 시사점 도출

가 뒤섞여 넘쳐나는 쓰레기로 인한 악취로 몸살

② 베트남의 산업과 기술수준을 객관적으로

을 앓고 있기도 한다. 한마디로 하노이는 80년

파악하여 4차 산업혁명시대 도래에 따른 그들

대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재미있고 사람 냄새

의 기회와 도전요인 발굴

나는 구수한 도시라고 말할 수 있다.

③ 베트남이 현재 보유한 자원과 역량을 가지 고 우선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실행 가능한 계

4. 베트남 자문관으로서 한 일

획 수립 가이드라인 제공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지난해 베트남 정부

자문활동 내내 내가 35년 전 한국 정부(산업

의 4차 산업혁명 대비의 정책 수립을 도와주기

통상자원부)에서 근무하던 경험에 비추어 “지

위해 자문활동을 하였다.

금 시점에서 베트남이 해야 할 과제들은 무엇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121


일까?”라는 생각을 늘 하면서 실질적인 도움을

을 체크하고 자문활동 과제에 대한 글로벌 트렌

주기 위해 노력했다. 수시로 내가 1980년대 공

드를 구글링 하면서 오전 시간을 보낸다. 점심

무원 시작할 때의 근무환경과 휴일 없이 열심히

은 직원들하고 구내식당이나 사무실 인근 식당

일하던 때의 마음 가짐,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정

에서 같이 식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인접한

책을 기획하고 수립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수많

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동료 자문관들과 만나 베

은 시행착오들에 대한 경험도 공유하였고, 수

트남 맛집을 순회하면서 싸고 맛있는 베트남 음

시로 베트남 정부 고위층에 보고하기 위한 관

식을 즐긴다.

련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여 제공해 주기도 하 였다.

오후에는 집중적으로 연구 과제를 정리하고 부족한 정보나 자료는 한국에 있는 연구소에 이 메일로 요청한다. 그러다 보면 금방 5시가 되어

5. 하노이에서의 일상

사무실에서 조금 긴 파4 거리에 있는 집으로 퇴 근을 한다.

하노이에서 나의 하루는 여느 평범한 직장인 의 일과와 비슷하다.

퇴근 후에는 건강 유지를 위해 헬스센터에 등 록하여 매일 운동을 하고 주말이나 휴일에는 하

외부기관 방문이나 세미나 등 외부 회의가 있

노이 한인테니스클럽 회원들과 테니스를 하면

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월요일부터 금요

서 여가를 즐긴다. 그리고 자녀들이나 친구들이

일까지 6시 반에 기상, 8시 반경 베트남 정보통

하노이를 방문하는 시기에 맞춰 휴가를 내어 베

신부로 출근한다. 출근해서는 막냇동생이나 자

트남의 유명 휴양지인 하롱베이, 다낭, 후에, 달

식뻘 되는 베트남의 젊은 공무원들과 차 한잔을

랏, 사파 등에 가서 힐링의 시간을 보내는 여유

나누면서 오늘 해야 될 일들이나 추진하고 있는

도 즐기곤 했다.

과제들에 대한 진행사항들에 대해 의견을 교환 하는데, 때로는 간밤에 일어난 일들이나 박항서

6. 다시 비엔티안으로 간다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 결과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내 자리로 돌아가 간밤에 온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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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이렇게 과거로 돌아가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 다 보니 1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것 같다.


나라, 무한경쟁이 아닌 무경쟁인 나라, 자살률 이 가장 낮은 나라, 과로하지 않으니 과로사가 없는 나라, 과거를 탓하지 않고 헛된 미래보다 조금은 부족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사는 나라로 알려진 라오스로 간다. 얼마 전 인기리에 상영되었던 ‘인턴’이라는 영 지난 1년을 돌아보면 30여 년 전 묻어둔 타임캡

화 속에서 70세에 은퇴했지만 여전히 매력을 한

슐을 꺼내어 보는 기분이다. 살아남기 위해 바

껏 풍기는 멋진 시니어 인턴사원으로 연기한 주

쁘게 사느라 잊고 살았던 기억의 보따리를 풀

인공 벤(Robert De Niro)처럼, 40여 년의 공

어보는 놀랍고 신기하고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직생활을 통해 내가 경험하고 배운 모든 것들

이보다 더 여유롭고 멋진 일은 그리 많지 않을

을 곧 만나게 될 라오스 과학기술부의 젊은이

것 같다.

들에게 섬기는 마음으로 친절하게 인계해 주려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던 내가 국가

고 한다.

와 사회의 도움으로 40년간의 공직생활을 하면

해외에서 살게 되는 여섯 번째의 나라 라오스

서 큰 어려움이 없이 살았고 게다가 국가의 전

에서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내가 가

폭적인 지원으로 태국, 독일, 영국, 멕시코에서

서 라오스 정부에 무엇을 어떻게 도움을 주어야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복도 누렸기에 나는 분

할까? 비엔티안에서 나와 아내는 어떤 의미 있

명히 국가와 사회에 너무나 큰 빚을 진 자이다.

는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할까? 무지 설레는 마음

그래서 그동안 진 빚을 갚는 마음으로 젊은 베

으로 기다리고 준비하고 있다. 나의 부족한 부

트남 공무원들에게 나의 경험과 지식을 전수해

분을 세심하게 채워 주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주어 그들의 경제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

의 섭리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무조건 내편이

기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했다.

되어 왔던 아내의 기도와 사랑 듬뿍 담긴 손길

이제 8월 초에는 또다시 하노이보다 훨씬 못 사는 아시아의 최빈국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

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나와 함께 하기에 위 풍당당하게 비엔티안으로 간다.

으로 간다. ‘빨리빨리’는 없고 ‘천천히’만 있는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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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루

임순기

새벽 3시 20분

따르릉 소리가 비몽사몽간에 들린다. 눈을 뜨고 일어나 화장실로(세면실로), 어부인 은 쿨. ■

3시 40분

집을 출발. 25-30분 걸으며 첫새벽의 하늘을

당, 청소...) ■

5시 20분

현대 앞(창덕궁)에서 두 번째 환승. 710, 7025, 109 ■

5시 30분

현대그룹 빌딩 앞(현정은 회장) 원남동 도착,

보며 김포 터미널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오

종로 5가 연동교회로.

늘도 힘!!!

새벽 4시 15분

5시 30분 - 6시

연동교회 새벽 기도회 참석, 아멘.

388번 버스(김포-시흥) 김포에서 서울로 가는 첫 번째 버스에 승객들이 승차 한 다. 대리기사 1/3, 김포공항 직장인 1/5, 건물 관리 아줌마 아

고인이 된 노회찬의원의 ‘기억하고 싶은 6411 번 버스이야기’가 생각난다.

저씨 1/2, 나머지 는 나와 같은 소상공인들. 저 마다의 하루의 결의를 갖고 출발한다. ■

새벽 4시 35분

(2012년 10월 21일에 당 대표를 맡으며 한 연설) “6411번 버스가 있습니다. 서울시 구로구 가로수 공

김포공항(송정역) 도착, 601번(김포공한-대

원에서 출발해서 강남을 거쳐서 개포동 주공 2단지까지

학로-김포공항)으로 환승(4번째 버스). 대리 기

대략 2시간 정도 걸리는 노선버스입니다. 이 버스는 새

사, 건물 관리 여성들, 세브란스 병원 직원들(식

벽 4시 정각에 출발합니다. 두 번째 버스는 새벽 4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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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분에 출발합니다. 출발 15분 후에는 만석이 됩니다. 그

버스 이야기 |작성자 최길호 은혜의 창

후엔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복도 바닥까지 앉는 진풍경 이 매일 벌어집니다. 새로운 사람이 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매일 같은 사 람이 탑니다. 그래서, 시내버스인데도 마치, 고정석이 있 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타고, 어느 정류 소에서 누가 내리는지, 모두가 알고 있는 매우 특이한 버 스입니다. 이 버스에 타시는 분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 서 새벽 5시 반까지는 강남의 빌딩에 출근을 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각이기 때문에 매

나도 이름이 불리지 않는 투명 인간의 한사람 으로 하루의 과업을 연다. ■

오전 6시 - 오후 5시

광장시장 ‘부림 상회’에서 고객 만족 상인으로 근무. (오전 11시 어부인 출근) 아동 한복, 속치마, 속바지, 개량 한복과 함께 하는 친절한 점원, 하루를 뛴다. 가끔 친구들의 돌발 방문, 노포에서 막글 한잔

일 이 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한 분이 어쩌다가 결근

의 행복 또한 솔솔 하다.

을 하면 누가 어디서 안탔는지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다른 시간대에 이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 그 누구도

12시 30분

어부인과 된장찌개 등...을 시켜 점포에서 이

그 이른 새벽에 강남의 여러 정류장에서 내리는 5·60대

바구를 나누며 한술 뜬다.

아주머니들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분들이 아침에

‘부림 상회’ 문 닫고, 어부인과 광화문 행.

출근하는 직장도 이들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아들 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

신도시) ■

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 아가는 분들입니다.”

오후 6시 30분

김포 도착, 마을버스 52번 승차.

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 아주머니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 원 받는 이분들은 투명인간입니

오후 5시 30분

806번 좌석버스(김포 신도시-광화문-김포

만, 그 빌딩이 아주머니들에 의해서, 청소되고 정비되고 있는 줄 의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후 5시

오후 7시 집 도착.

오늘 하루도 하나님이 돌보아 주심, 감사합니 다. 아멘.

[출처] 굿바이 노회찬 의원! l 기억하고 싶은 641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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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이야기

장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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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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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교도소 담 안에서 기독 교도관으로서 만난 사람들

지정수

『내가 만난 사람들』

정치인 : 노 전 대통령과 국회의원 10여 명

공통점

저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생 스토리가 있다

■ 고위 공무원 : 장·차관, 장군 등 고위공무원 수십 명 ■

경제인 : 기업 회장단 등 수십 명

좌익사범 : 북한에 돌아간 미전향 감호자 등 좌익

사범 수십 명

수용자의 고백

1. 어머니를 못 죽이고 체포된 것이 한이었다고 했지

조폭 : 김태*외 각 지방 조직폭력 두목들 수십 명

만……

대도, 탈옥수, 사형수 : 소매치기 대도, 장기 탈옥수

- 봉사자들을 만나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았

및 사형수 수십 명 ■

사이비 교주 및 사기 역술인 : 영생교, JS 등 사이비

교주 및 사기 역술인 수용자 다수

더라면 사형수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 지존파 부두목 김현* 2. 어찌 아슬아슬한 줄타기 인생에서 이럴 줄 알았다.

외국인 : 42개 국가의 외국인 수용자

욕심 멈추었었더라면...

기타 :

3. “구속되어 인생 끝났다고 원망 좌절했지만… 약

장애인 수용자 및 벌금 미납 노역수 수십 명

3~6개월 지나고 나니~ 가정, 건강, 신앙의 중요함을

소년 및 노인 수용자, 고아 출신 상습 절도 보호 감호

깨닫게 되어 인생을 되찾게 되었어요.”

자 다수

* 전국 52개 교도소에서 재소자 55,000명 수용 중

- 전 청송교도소, 전 대전교도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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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으로 산 45년

04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 자유인篇

갈종완 『마라톤 단상』 강동식詩 『길/ 세월/ 그립다 한다』 고광표 『추억의 30년 전 한라산 백록담 산행』 고승경 『반가운 얼굴들을 생각하며』 김구섭 『신오열차信五列車』 김병돈 『억울하게 과소·왜곡된 고려에 대한 작은 변론』 김상호 『캠핑 이야기』 김성일 『이순(耳順)』 김수봉 『테트리스의 추억』 김영수·정윤식 『편지』 김용환詩 『마른바람/ 바다 밑바닥의 풍경화』 김윤갑 『수류화개水流花開』 김응원 『취미생활(趣味生㓉)』 김종선 『신문지 한 장』 김종진 『삶에 대하여』 김해만 『나의 사전 돌봄 계획서』 박명수 『내 이야기/ 마음씨』 서광석 『북한산성 문화답사』 손종득詩 『Roy D Son』 여운철 『지리산 일기』 유재석 『故 정한문 동기 유족돕기』 유태한 『홋가이도오 요꼬오』 윤상욱 『내 이름은 삼성』 윤성식詩 『나팔꽃과 둥굴레』 윤호영 『신일인, 아름다운 사람들』 이도희 『Annapurna Base Camp (ABC) Trekking』 故 이동준詩 『소망』 이병현詩 『사랑/ 함박눈』 이순규 『소중한 인연의 친구분들』 이종상 『스카이캐슬 리뷰』 이종혁 『걷다』 故 이철주 『학원선생, 학교선생』 장남선 『마지막 까지 내 곁에 남을 사람』 전영식 『덕담』 정유택 『일상의 행복』 조성천 『남은 15년!』 주인성 『나의 인생관』 최세양 『Don’t forget to remember』 한동표 『나는 지금도 달린다』 황호근 『스리랑카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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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마라톤 단상

갈종완

1. 나는 울트라 러너인가?

두물머리여 흐르는 것 사랑이어라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울트라 러너다.

사랑은 하나인 것을

지난해까지만 해도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해왔

두 갈래의 물이 만나 구름과 달을

다. 그런데 지난 4월, <성지순례 222킬로미터

베개 삼아 그냥 휘감아 흐를 일이지

울트라>에서 중도 포기 이후 나는 잠시 혼란스

어쩌자고 지난 옛 추억을 더듬어

러웠었다. 나는 과연 울트라 러너인가?

아픈 늑골에 상처를 쓰다듬는가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 물줄기가 함께 만나는 곳으로 15여 년을 울트라 마라톤을 해오

저만치 신음하는

던 내게 있어 그 언저리야말로 땀과 눈물이 흠

죽어가는 늙은 느티나무여

뻑 배인 추억의 장소라 하겠다.

먼 훗날 다른 사람을 위해 오늘의 시간을 바닷가로 묻으러 갔던

그래서일까?

옛사람들에게

정 호승 시인의 시 『두물머리』를 나는 좋아한다.

침향의식을 생각하게 한다

두물머리

고통은 이렇게 이겨내는 것이라고

물안개, 자욱한 강물을 본다

아, 두 갈래 물이 만나는 슬픔

강물도 어제의 강물이 아님을

그 흐르는 것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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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여 흐르는 것

전 2016년 다시 도전하여 나는 ‘꼴찌의 행복’을

그대로 흐르게 하라

그야말로 만끽했었다. 2017년에는 아예 남한산 성에서 중도 포기했고, 2018년에는 또다시 시

‘두물머리’는 내가 첫 울트라에 참가하여 93킬

간 외 완주를 했다. 지난해의 30분 시간외를 극

로미터에서 중도 포기해야 했던 <북한강 울트

복하려고 다시 도전한 올해는 완주는커녕 147

라>의 출발지다. 내가 첫 울트라를 완주했고 또

킬로미터 남한강변에서 무릎인대 부상으로 결

한 최고기록을 세우기도 했던 <천진암 울트라>

국 중도포기를 하고 말았다.

는 바로 강 건너의 ‘천진암’을 출발하여 남한강 변을 달리던 대회다. 게다가 ‘마재’는 <성지순례

2. Do의 행복

울트라>의 마지막 컷오프 CP가 있는 곳으로, 이 CP를 통과해야만 완주의 희망을 품어볼 수 있

곰곰이 이번 레이스를 되돌아보았다. 이번 <성

다. 그러나 이 CP를 제한시간 안에 주파하는 것

지순례 울트라>는 내게 무엇일까? 2012년7전 8

이 그리 녹록치도 않은데다가, CP를 통과했다

기로 첫 완주를 했을 때는 ‘환희의 송가’를 맘

고 완주가 담보되는 것도 아니다.

껏 불렀었다. 2015년 시간 외 완주를 했을 때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는 ‘겸허한 모국어로 기도하는 순례자’가 되겠

두물머리여 흐르는 것

다고 다짐했다. 2016년 완주를 했을 때는 ‘꼴

그대로 흐르게 하라

찌의 행복’을 터득했다. 2018년 시간 외 완주

한강은 모든 지난 일들을 품어 안고 오늘도 묵

를 했을 때는 ‘부록’이라도, ‘덤’이라도 좋다고

묵히 흐르고 있건만, 나는 ‘아픈 늑골에 상처’를

했다. 그런데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중도

새삼 들추어본다.

포기의 이번 레이스는 대체 내게 있어 무슨 의

7전 8기 끝에 2012년 첫 완주를 했지만 2년

미를 던져주었단 말인가?포기니까 실패? 무의

연속 ‘두물머리’ 언저리에서 연거푸 좌절해야

미?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이번

했고, 2015년에는 ‘마재’ 컷오프 CP를 통과하

레이스! 나는 불현듯 ‘행복한 러너’라는 생각이

기 위해 페이스를 올렸다가 중족골 피로골절을

불쑥 들었다. 부상을 입은 것이야 질타를 받아

입은 끝에 겨우 시간 외 완주를 했었다. 심기일

마땅하겠지만, 중도포기를 선택한 이번 레이스

132

ㅣ 신일 5회 동기회


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울트라임에 틀림없으리 라.나는 풀코스도 아니고 100킬로미터도 아닌 147킬로미터의 엄연한 물리적 거리를 내 두 발 로 주파한 것이다. 그 길의 굽이굽이에는 나의 땀과 눈물이 흠뻑 배어있다. 그러니 그 레이스 야말로 진정한 ‘울트라’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 인가?비록 명동성당의 골인 테이프를 가르지는 못하고 남한강 에이스 빌리지 언덕 위에 외로이 서있었던 고독한 러너의 모습이지만, 거기까지 가 ‘나의 울트라’였을 뿐이다. 비록 기대에는 미 치지 못했지만 나는 나 자신이 대견했다. 소개하며, 비록 비천한 삶일지는 모르겠지만 즐 나는 이번 레이스를 ‘Do의 행복’이라 부르기

겁게 노래를 부르며 살아간다.

로 했다.나는 완주만을 위해서, 또는 단지 도전

나는 즐거운 울트라 러너

만을 위해서 달린 것이 아니라 울트라 자체를

오늘도 달릴 수 있어

즐기기 위해 달린 것이다. 그것은 완주라는 하

행복한 러너

나의 목표만을 위해 달리는 방식이 아니고 울트 라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달리기 방식이다.

3. 꼴찌라도 당당한 나는 울트라 러너

다시 말해 ‘울트라를 하는’ ‘Do의 방식’이다. 나 는 오늘도 달릴 수 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아니한

중도포기를 한 이번의 레이스를 나는 ‘Do의

가? 문득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파

행복’이라 명명하며 애써 의미를 부여했지만 사

파게노’가 떠올랐다. 천방지축으로 ‘타미노 왕

실 ‘꼴찌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나

자’를 따라 ‘파미나 공주’를 구출하러 갔던 매력

는 불현듯 그 둘은 본질에 있어 차이가 없다는

적이고 잊을 수 없는 캐릭터 ‘파파게노’가 나는

걸 깨달았다. 중도포기는 분명 꼴찌의 그룹에도

좋다. ‘파파게노’는 자기를 ‘즐거운 새잡이’라고

속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완주 여부와는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133


상관없이 101킬로미터 주자가 아닌 222킬로미

있는 것이다.

터 주자다. 나는 비록 중도포기를 했지만 완주

꼴찌면 어떻고 중도포기면 어때?

의 기쁨을 누리는 101킬로미터 주자로서는 전

풀코스만이 갖는 ‘Do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

혀 알 수도 없고 경험해볼 수도 없는 ‘울트라만

는데!

의 세계’를 맛본 것이다. 사실 나도, 완주도 쉽

꼴찌가 자랑스러운 울트라 러너!

지 않고 달릴 때마다 힘들기만 한 222킬로미터

꼴찌가 당당한 울트라 러너!

보다는 101킬로미터 종목으로 전환하려고 했 었다. 함께 달렸던 많은 주자들이 소위 ‘하프 코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은 울트라 완주 때마다

스’로 변경한 올해는 더더욱 그랬다. 한낮의 더

늘 기쁨으로 함께 해왔던 곡이었는데 이번에 특

위가 시작됐던 오후 2시, 완주의 기쁨을 만끽하

히, 내가 ‘울트라 러너’임을 새삼 자각하면서 아

던 101킬로미터 주자들의 여유로운 환송을 받

예 ‘울트라 주제가’로 늘 곁에 두기로 했다. ‘러

으며 외롭게 울트라의 길을 떠나야만 했던 올해

너스 하이’와 맥을 통하고 있는 <대공 트리오>

는 특히나 그랬다.

와 <첼로 소나타 3번>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Do의 행복’의 원천을 다시 터득하 게 된 나로서는, 성지순례는 역시 ‘222킬로미

베토벤은 고난을 극복한 위대한 작곡가! 나는 꼴찌라도 당당한 울트라 러너!

터 풀코스’만이 특급 매력과 의미를 갖추었다 나름 생각하게 되었다.하프 코스를 넘어서야만

4. 고독한 러너가 되자

‘천진암 성지’를 지나 ‘앵자봉’을 넘을 수 있고, 험한 바윗길을 지나 ‘주어 계곡’에서 수묵의 산

나는 늘 동반해 달리기보다는 혼자 달리는 것

수화를 운치 있게 감상할 수 있다. ‘세월리’에서

을 선호한다. 혼자 달리기는 동반해 달리기보다

복원력을 잃지 않아야 ‘양근 성지’를 지나 환상

장점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

의 자전거길을 내달릴 수 있고, 마침내는 ‘두물

요한 점은 달리는 동안 내 몸의 소리에 귀를 기

머리’와 ‘마재 성지’에 도달해, ‘팔당’에서 희망

울여야 하는데 그것은 혼자서 달릴 때 특히 가

의 새아침을 맞이한 뒤에라야 비로소 작열하는

능하다.그런데 지나고 보니 가장 중요한 이 포

‘한강 주로’와 마지막 한판 승부수를 펼쳐볼 수

인트에서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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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은 나도 모르게 다른 주자를 많이 의식했던 것

전에 다시 대회에 참가했는데, 결국 <청남대 울

같다. 산길에서 길을 모르는 주자들은 나를 뒤

트라> 후엔 또다시 부르트고 몸도 잘 회복되지

따라 달렸고 처음 참가한 주자 역시 내 페이스

않아 2주일 내내 불완전한 휴식만을 취해야 했

를 따르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 나 자신에

다.그리고 역시 회복되지 못한 몸으로<성지순

게 집중하지 못하게 되고 자세가 흐트러졌던 것

례 울트라>에 참가하였다. 이렇게 회복되지 않

같다.더 큰 문제는 다른 주자가 나를 추월해 갈

은 몸은 당연히 근육의 탄력을 떨어뜨리는 방식

때 무의식적으로 페이스를 높였던 점이다. 특히

으로 시그널을 거푸 보내게 되는데, 욕심만 앞

‘손골 성지’에서 내려와 ‘탄천 구간’을 달릴 때,

세운 나는 자꾸만 내 몸을 다그치기만 했으니

평소 훈련코스라 자신감이 앞서 페이스를 올렸

어쩌겠는가.

던 실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덕분에 이번에 크게 깨달은 원리(?)가 하나 있

나는 비로소 내 욕심을 내려놓고 내 몸에게 미 안함을 전했다.

다. 다른 주자들뿐만 아니라 바로나 자신으로부

미안하다. 소중한 내 허벅지여!!

터 우선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

이번의 중도포기는 부상 악화를 사전에 차단

번에 지난해의 ‘30분 시간 외’를 극복하기 위해

한 것뿐만 아니라 나의 잘못된 레이스 방식을

절치부심했다. 지난해의 페이스 표를 만들었고,

반성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올해의 페이스와 비교해가며 달렸다. 그러니 달 리는 동안 내 머릿속은 올해보다는 지난해의 레 이스에 더욱 집착했을 듯싶다. 결국 내 몸의 소 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입력된 데 이터에만 내 몸을 맞추려는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어 아쉽고 후회스럽다.

기본적으로 혼자 달리며 Listen to your body 에 충실하자. 달리기에서 주인공은 Mind가 아니라 Body라 는 점을 명심하자. 동반 주자가 있건 없건 My Way를 고수하라.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우리 몸의 회복력에 관

추월하는 주자에게 ‘흔쾌히’ 추월을 허용하라.

한 것이다. 나는 <청남대 울트라> 2주 전에 미

복원력과는 다른 회복력에 대해서도 유의하자.

세먼지 속을 달리며 몸살감기를 된통 앓은 적

그리고 무념무상 현재의 달리기에만 집중하는

이 있다. 그 여파로 부르튼 입술이 채 아물기도

오, 고독한 러너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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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식 詩

길 Road 지친 이들은 슬프다. 고독한 이들은 술에 나를 담는다. 사랑에 아픈 이들은 죽음의 가느단 촛불에 날 비추인다. 이리 나만 외로운 건 아니다. 떠나라 떠나지 못하면 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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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강동식 詩

세월 나에겐 당신이 무엇인가 어느 맑은 날 한적함을 즐기다 우연함의 아름다움으로 내게 다가섰는가 아님 다가올 4월의 잔인의 참음과 5월의 찬란함으로 날 유혹한 겐가! 그래서 가벼운 바람 한 결에 사라진 내 소망도 그리 허망치 아니하다. 이 기다림을 인내하면 윤슬같이 빛나게 하는 사랑이 기다림이란 이름과 함께 날 축복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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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식 詩

그립다 한다missing 오늘의 또 다가온 새벽! 내게 많음을 주고 이젠 그와 친함을 같이했던 수많은 친한 이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간 한 친구를 기억한다. 박 민선! 가장 세상 본능과 자유로움을 지니고 우리 곁을 일찍이 떠나갔다. 그를 기억하자면 두 단어. 피아노의 열정과 섹스! 둘의 조합은 참으로 경이롭다. 합치와 세상과의 포갬과 일치가 아닌지. 위선과 멋쩍음보다는 자신의 자유로움을 지니고 그리고 그것이 재미없어 일찍 갔다. 더 자유인이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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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추억의 30년 전 한라산 백록담 산행

고광표

나는 이제까지 살아온 동안에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을 세 번 산행하 였다. 첫 번째 산행은 1974년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우리 친구들인 최삼 열, 전영식 및 정영훈과 함께 하였었다. 삼일 동안 비바람과 사투하며 죽 을 고생을 하고 한라산 백록담에 올랐으나 비구름으로 인하여 백록담을 눈에 담지는 못하고 하산하였다. 세 번째 산행은 2000년도에 우리 가족이 뉴질랜드로 이민 가기 전인 1999년 가을, 내 처와 두 아들과의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했었는데, 그때도 날씨가 여의치 못하여 역시 백록담을 눈에 담지 못하고 하산한 기억이 있다. 이제 두 번째 산행인 ‘추억의 30년 전 한라산 백록담 산행’에 대한 이야 기를 하고자 한다. 우리 가족은 1989년 가을 장인 어르신의 칠순을 축하 하기 위해 처가 식구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떠났었다. 그런데 그때 처 가 식구들 중 남자들만 한라산 백록담 산행을 하기로 하였다. 화창한 가 을 날씨에 시원한 바람과 함께 하는 산행이었으며, 칠순인 장인 어르신 과 제일 어린 다섯 살의 내 아들을 비롯하여 모두(아들을 거의 업고 산행 한 나를 제외한)가 힘이 드는 줄 모르고 부지런히 오른 결과 한라산 백록 담의 신비로운 자태를 난생처음 시야에 담을 수 있었고, 그 감격에 푹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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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 취해버렸다. 그때 나는 문득 대한민국 최고봉인 한라산에 삼대의 가족이 함께 올랐다는 생각에 내 마음이 뿌듯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산행 며칠 후에 친가를 방문하여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내가 처가 식구들과 한라산 백 록담 산행을 했던 바로 그날 아버지도 등산 모임에서 친구 분들과 함께 백록담 산행을 하신 바 있다 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우연의 일치 치고는 너무 절묘했다. 그날 아버지와 장인 어르신, 손자 및 나를 포함한 양가 삼대의 가족이 함께 백록담 산행을 한 진기한 경험이었다. 아버지는 나와 손자와 같이 그 날 산행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함께한라산 백록담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등산 모임 문집에 투고하셨고, 그 책이 발간되자 크게 기뻐하시며 내게도 그 문 집을 주셨다. 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작년에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진다. 이제 나는 내년 1월 말에 한국에서의 9년간의 생활을 접고 전에 살았던 뉴질랜드의 남태평양 해안 도시인 “타우랑가”라는 곳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다. 그곳에는 30년 전 백록담에 함께 올랐던 아 들이 결혼해서 며느리와 내년에 다섯 살이 되는 손자, 세 살이 되는 손녀와 함께 살고 있다. 이제 나는 내년 12월 크리스마스 연휴에 아들과 손자와 함께 ‘추억의 30년 전 한라산 백록담 산 행’과는 또 다른 추억 쌓기 ‘통가리로 국립공원 산행’(사진 참조)에나설 계획이다. 우리 친구들의 많 은 응원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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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반가운 얼굴들을 생각하면

고승경

생각만 해도 반가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짧게라도 참여하고파 글을 씁니다.

교정, 친구들, 최고의 선생님들... 늘 희망이 넘치던 활기찬 학내 분위기가 평생 뇌리에 남아 있습 니다.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걸어갔고 저 역시 그랬지만, 꼭 한번 함께 하고 싶었던 친구들 면면은 늘 머릿속에 남아 그리움으로 살아왔습니다.

나는 40세에 목사가 되어 미국에서도 작은 도시에서 목회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발간될 우 리들의 이야기가 모두에게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를 바랍니다. 빅토빌에서 고승경 PS해만아... 수고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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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오열차信五列車

김구섭

많은 꿈과 희망을 안고 甲寅역(1974년)을 출발한 신오열차는 甲戌역(1994년)과 甲申역(2004년)을 거쳐 甲午역(2014년)에 도착했다. 두근두근하며 열차에 올라탔 다. 열차 안에는 이미 많은 친구들이 타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과 관계의 흐름 속에 서 왁자지껄 이야기를 이어갔다.

영화 ‘인터스텔라’에 시간의 상대성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도일, 쿠퍼, 로밀리는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웜 홀을 넘어 가 밀러 행성에 도착하고 거대한 해일을 만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며 어쩔 수 없이 3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때 지구에서는 23 년 4개월 8일이 지난다. 밀러 행성과 지구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것이다. 영 화이지만 어디서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친구들을 졸업 후 40년 만에 만나 어색하였지만 곧 친숙해졌다. 고등학 교 시절에는 교류가 많지 않았던 친구들조차 더 가까워진 느낌을 받았다. “야∼ 오 래간만이다. 이게 몇 년 만이냐?” “벌써 40년 만이네.” “아이고 이게 누구냐? 너 하 나도 안 변한 거 같아.” “네 얼굴 가만히 보니 옛날 모습이 보여”

시간을 뜻하는 말에는 헬라어로 2가지가 있다. 크로노스(Chronos)는 주어진 물 리적인 시간이고 카이로스(Kairos)는 그 시간 속에서 각 개인의 인생의 의미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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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치가 접목된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시각과 시각 사이의 간격을 말하며, 카이로스 는 시각과 시각 사이의 공간과 기회 그리고 추억을 말한다. 신오열차에서의 고등 학교 때 추억의 카이로스의 시간은 친구들과 단절되었던 물리적인 40년의 크로노 스 시간을 단번에 뛰어넘어 영원으로 흐르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네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너 무슨 일을 하고 있다면서” “친구 누구 소식 아 니?” “누구는 지금 뭐 하고 있지?” “잘 지내고 있지?” “잘 살고 있지?” 이제는 나를 넘어 우리들의 관계를 향해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문득 “잘 지내고 있다는 것과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이지?” 자문해 본다.

그것은 바로 관계가 풍성한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와 내면의 나와 잘 지내고, 나와 너와 잘 지내고, 나와 자연과 잘 지내고, 나와 하나님과 잘 지낼 때에 비로소 “잘 지내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아닌가 한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 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일을 잘 감당하며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닮아가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잘 살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을 태운 신오열차는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나님과 의 관계를 이어주는 카이로스 적인 삶의 기회와 추억을 가득히 싣고, 甲辰역(2024 년)과 이 열차의 출발역이었으며 제2의 출발역이 될 甲寅역(2034년)을 향해 계속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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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과소·왜곡된 고려에 대한 작은 변론 김병돈

序論:

구이 땅(고조선)에 가서 살고 싶어 했다. 어떤 놈 이 말하기를 누추하다는데요? 공자 말하기를,

우리는 얼마나 바로 알면서 살았을까? 인생이

위대한 인물들이 우글거리는데 어찌 누추할 수

석양빛에 물들어가는 이즈음에도 아직 잘못 알

있겠는가?) (니가 가봤냐? CCTV라도 봤냐? 뭣

고 살고 있는 것은 없을까? 혹 내 인생이 잘못된

도 모르는 놈이 아는 체 하기는!)

앎을 굳게 믿고 살아가는 개그가 아닐까?

중국이 고조선, 고구려, 고려를 上國으로 여겼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을 group study하

을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에게는 상상할 수 없

면서 아직도 나는 속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는 헛소리로 들리게 우리는 만들어져 있다. 이

많이 들었다. 이성계 등의 신군부 세력들이 자

성계 등의 쿠데타 세력들과 일본 제국주의 학자

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들의 생

들, 친일 사학자들, 그리고 지금도 견고하게 우

존 전략인 事大主義를 고려에 뒤집어 씌워, 자

리 역사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친일 사학자의

신들과 같이 중국에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제자들에 의해서……

비루한 나라로 만들어버린 찬란한 황제 국 고려

고려사는 자신을 축출한 조선의 신군부 세력

제국. 수나라 양제와 문제가 도전했다가 자신들

이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기록한 역사임을

이 망해버리고, 당태종이 유언으로 덤비지 말라

전제로 하고 읽어야 한다. 마치 전두환이 기록

고 한 고구려. 논어 9장 子罕편에 적혀있는 공자

한 광주사태 속에서 광주사태의 참모습을 찾아

가 이민 가고 싶어 했던 찬란한 고조선(子欲居九

보는 것 같이……

夷 或曰 陋. 如之何? 君子居之 何陋之有!: 공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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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황제 국 고려를 뒤집은 쿠데타 세력들이 사대


주의로 도배한 고려사의 기록들 속에 숨겨진 고

성계 나이 60세)

려 황제국의 파편들을 간략히 정리해 본다. 괄

(합계 총병력 301,300명조차도 위화도 회군

호 표시 안의 내용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상

후 신 군부가 공양왕 3년(1391년) 1월에 5군을

의 기사 날짜이다.

줄여 3군으로 삼은 후의 병력이므로 그냥 산술

세종이 고백한 고려사 역사왜곡: ‘고려사에 공민

적으로 추론할 때, 1391년 1월까지 고려의 정규

왕 이하의 내용은 정도전이 마음대로 첨삭을 하여 고

군은 50만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

려의 史官이 쓴 본래 내용과 다른 곳이 매우 많으니 어

때로부터 200년 후 임진왜란 10년 전에 율곡 선

찌 후손들에게 바르게 전달될 수 있으리오. 없는 것만

생의 10만 養兵論과 비교하면 한숨만 나오는 국

도 못하다.’ ( 세종실록 원년 12월 25일 )

력의 차이다.)

‘대제학 유관 등에 명하여 정도전이 찬수한 고려사를 개수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원년 9월 20일)

2) 영토

‘세종이 윤회에게 이르기를 요사이 고려사를 읽어 보

50만 대군을 거느린 황제 국이라면 영토가 학

았더니 사실과 맞지 않는 것이 많으니 마땅히 고쳐야

교 때 배운 고려의 영토 즉 신의주부터 개마고원

할 것이다’ (세종실록 1년 9월 19일)

을 가로질러 함흥까지일 수는 없을 것이다. 고 려의 영토가 고구려의 영토를 능가하는 대국일

本論: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사실 몇 가지만 정리해 본다.

먼저 고려의 국력을 보면서 고려의 실상에 접 근해 보고자 한다.

a. 이성계 즉위 후 첫 하례에서의 알타리와 올량합 의 논쟁.

태조 2년 1393년 1월1일: 왕위 찬탈 후 6개월 1) 병력

시점(1392년 7월 17일 찬탈) 斡都里(알도리 즉

“태조(이성계)가 군적을 올리게 하니 마병, 보

알타이-현 알타이 공화국 지역)가 신년에 하례

병. 기선군(해군)이 합계 20만 8백 명, 驛吏등 유

하며 生唬(살아있는 시베리아 호랑이)를 바침.

역자가 10만 5백여 명이었다” (태조 2년 1393

이때 斡都里와 兀良哈(올량합-오랑캐)이 자신들

년 5월 26일: 왕조 찬탈 후 10개월 된 시점. 이

의 묵을 숙소를 두고 서열 논쟁을 함.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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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리 曰: “옛날에 고려 시중 윤관이 우리 땅

“요성까지 진격한 아군이 적을 급습해 함락시

을 평정하고 비석을 세워 ‘高麗地境’이라 했는

켰다. 12월 동녕부 함락 후 공문: 遼瀋(요심,요

데……” 알타리가 자신들이 먼저 고려의 지배를

양과 심양) 지역은 애초 본국의 영토였으나 원

받았으니 자신들이 더 서열이 높다고 주장하고

나라를 섬길 때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는 바람

있다. 즉 자신들이 고려와 황제와 제후국의 관계

에 행성의 관할로 두었던 것이다”(고려사 1370

임을 주장하고 있다고 보인다.

년 공민왕19년 11월)

고려가 황제 국으로서 제후국을 많이 두고 있 었다는 단서로 볼 수 있는 기록으로 “…… 옛날

d. 侍中 이인임을 서북면 도통사로 임명하고 동녕부

에는 공적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제후로 삼지 않

등 동·북면 요충지를 공략케 함. 이때 이성계가 기병 5

았는데 지금은 봉군 하는 사례가 너무나 흔합니

천 명,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이인임의 수하 장군으로

다.” (*우왕 4년 12월 병오일: 사헌부 疏)

참전하며 영토 확장이 자신의 공적인 양 기록한 내용:

“동쪽으로 황성(상경 용천부), 서쪽으로 바다(발 b.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가 알타이의 동쪽지방 에 살았었다는 내용.

斡東(알동, 알타이 산맥 동쪽): ‘穆祖 이안사(이

해), 북쪽으로 동녕부, 남쪽으로 압록강에 이르 는 광범한 지역에서 적이 일소되었다”(1370년 공민왕 19년 1월 갑오일)

성계의 고조부) 開元路 南京 斡東에 이르러 거주 하였다. 원나라 산길 대왕이 鐵嶺(철령-최영의 요동정벌의 빌미가 된 요하 강변 철령위 지역-

e. 고려의 여러 鎭(진. 군대 주둔지)들 중 하나인 공 험진의 관할지역.

현재도 같은 이름의 300만 도시) 이북을 취하려

여기 우리가 알 수 있는 몽골을 제외한 실린,

고 하여 사람을 두 번이나 목조에게 보내 항복

팔린, 안돈, 압란 등의 이름은 러시아와 같은 서

을 청하니 마지못해 항복하였다.’(태조실록 총

구 지역일 가능성이 너무나 농후해 보인다. 현재

서p12)

국내 학계에서는 이런 지역을 비정하지 못하거 나, 하더라도 근거를 대지 못하고 일본인들의 단

C. 공민왕이 원나라가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밀리자 원을 공격하여 고려의 舊土(옛땅)를 회복하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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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순한 추측만을 따를 뿐이다. “현재의 速頻(속빈), 失旳覓(실적멱), 蒙骨(몽


골), 改陽(개양), 實憐(실린), 八隣(팔린), 安

쉽게 이길 수 있었다고 보여지는 정황:

頓(안돈), 押蘭(압란), 喜刺兀(희자올), 兀里因

“어느 사람이 泥城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요

(올리인), 古里罕(고리한), 魯別(노별), 兀的改(올

동 군사가 모두 오랑캐 정벌에 갔기 때문에 성

적개) 지역은 원래 본국의 公嶮鎭 관할 구역으로

중에는 다만 한 사람의 지휘관이 있을 뿐이니,

진작 불러서 설득한 바 있으나 아직도 귀부하지

대군이 만약 이른다면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않고 있으니 이는 도리에 어긋난 일이다.…… 이

수 있습니다 하니 최영이 크게 기뻐하여 물품

에 다시 이필 등으로 하여금 방문을 지니고 가

을 후히 주었다”(1388년 우왕 14년 5월 22일)

서 귀부를 설득하게 하노니….”(고려사 1392년 3월 경자일)

3) 고려가 황제 국임을 알 수 있는 정황들과 명 이나 원나라에 대하여 상국임을 알 수 있는 내

f. 위화도 회군하는 반군들에게 보내는 우왕의 회유

용들.

문 속에 있는, 遼東(요동-요하는 중국의 3대 강임-고

a. 원구단은 황제 국만이 세울 수 있는 것이며 조선

조선, 고구려, 고려까지 우리 민족의 젖줄이었다고 보

의 쿠데타 세력들은 자신들의 사대 정책상 고려가 황

여짐)이 우리 국토이며 이 땅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제 국인 역사를 지우려는 의도를 알 수 있는 내용들:

하는 우왕의 절규.

“더구나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강토를 어찌 쉽사리 남에게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차라리 군

“원구는 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예절이니 이를 폐지하기를 청합니다.”(태조(이성계) 원년 8월 11일 예조 전서 조박의 상소)

사를 일으켜 대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에

가뭄이 심하므로 원단에서 제사 지내기를 변

나는 여러 사람들과 논의했으며, 그 사람들이

계량이 청하니, 세종 曰 ‘참람한 예는 행함이 불

모두 옳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어찌 감히 어기

가하다’ 변계량: 前祖(이씨 조선前 왕조들 고려,

는가?!! 그대들이 최영을 지목해 이러쿵저러쿵

고구려, 고조선) 2천 년 동안 계속해서 하늘에

하지만 최영이 나를 보호해 주고 있는 것은 경

제사 지냈으니 이제 와서 폐함이 불가합니다...

들도……”(우왕 14년 1388년 6월 갑진일 반군

세종 왈 ‘제후는 하늘에 제사 지내지 않는 것이

회유 문)

예의인데 땅이 넓다고 천자의 예를 분수없이 행

g. 이성계 일파가 회군하지 않고 정벌을 감행했다면

하리오.’ (세종실록 1년 6월 7일)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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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원나라의 중심세력들이 명보다 고려에 의탁하는

가지고 황주에 도착하자 왕(공민왕)이 대장군

모습. 명과 고려의 국력 비교 단서: 고가노가 군사

宋光美를 보내 죽여 버리게 했다.(1396년 공민

4만을 거느리고 강계(요하 지역)로 와서 고려로

왕 18년 11월 신미일)

투항했다.(1378년 우왕 4년 12월) -기해년에 심양의 군사와 백성 4만여 호가 고

結論:

려로 피난 갔는데…….(고려사 우왕 13년 2월) 이렇게 자신의 사신들을 죽여도 아무런 응징 c. 명나라의 창업주 주원장의 편지 속에 자신의 사

을 못하고 오히려 고려에게 협조를 부탁하는 저

신들을 마구 죽이는 고려에 대하여 투정이나 하는 명

자세로 일관하는 명과 원에 대해 고려가 上國이

나라 황제의 모습……

었다고 보는 것이 무리한 주장일까?

“중국을 통합한 지 3-5년, 이제 환관을 둔지

중국을 지배한 요나라와 금나라를 격퇴하고,

1-2년뿐이고 나와 12-3년을 동고동락한 者를

중국과 전 세계를 점령한 몽골 제국이 전 세계

사신으로 보냈는데(孫내시-고려사람) 사신을

에서 오직 고려에게만 병력, 세금 징수, 국명을

보내는 자마다 이렇게 때려죽이니 나는 다시는

그대로 인정하고, 어쩔 수 없이 사돈 관계를 맺

사신을 보내지 않을 작정이다. 제주말도 차일

었던 고려 제국! 금속활자, 팔만대장경, 상감청

피일 미루다가 1년도 지나서 보내면서 고작 4

자 등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이제 다

필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

시 돌아보고 새롭게 역사를 조명해야 하지 않

다.” (1373년 공민왕 22년 7월)

을까?

‘명나라 사신 임밀과 채빈 등이 귀국길에 개

한국말로 BTS를 떼창하는 전 세계 젊은이들,

주참(요령시)에 당도하자 호송관 김의가 채빈과

이 짧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세계 경제, 정치, 문

그의 아들을 죽이고 임밀을 납치해 북원으로 도

화, 체육의 중심에 들어가 있는 우리. 이씨 조선

주함’( 1374년 우왕 즉위년 11월 기사일 )

에 가려진 윗대 선조들의 위대한 역사가 이제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그 위대

d 원나라 사신도 죽여 버림.

한 역사의 저력이 맥동 치기 시작하는 것이 아

瑞原君 盧訔(노은)이 원나라 황제의 조서를

닐까! 새 시대가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148

ㅣ 신일 5회 동기회


캠핑 이야기

김상호

기 때문에 큰딸이 캠핑 가기를 조금 주저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들과의 계획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그렇다고 예약 자체를 취소하기엔 아까워 망 설이다 급하게 몇몇 동기들과 가기로 마음먹고 연락을 해서, 나를 포함해 김희주와 마창진 셋이 정확히 말하면 남가주 동기들의 캠핑 이야기 다.

가기로 했다. 일정이 수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주 중이라 공개적으로 하지 않았는데 김용성이 카

처음부터 동기들이 계획하고 진행했던 캠핑은

톡방에 올리라고 해서 올렸다. 그랬더니 박준량

아니었다. 내가 큰 딸 부부와 손자들을 위해 첫

이 자기도 가겠다고 휴가를 냈고, 멀리 샌프란

캠핑을 경험케 하려고 오래전에 예약을 해 놓은

시스코 근처에 사는 고형기도 비행기 예약을 하

‘Joshua Tree 국립공원’ 캠핑 계획이었는데, 예

고 오겠다고 한다. 이걸 보고 박성업이 오토바이

약된 2019년 4월 17일에서 19일까지의 2박 3

를 타고 와서 함께 하룻밤을 보냈고, 이종혁이도

일 기간은 마침 날씨도 좋고 예약이 쉽지 않은

사업으로 바쁘지만 시간을 내서 방문했다. 때마

기간이었다. 이 공원은 난처한 특징이 하나 있

침 엘에이를 방문한, 멕시코에서 사업하는 이정

는데, 캠핑장에 물이 공급되지 않아 사용할 물

균이 합세하자, 캠핑했던 친구들인 김희주, 마창

을 따로 차에 싣고 가야만 한다. 그러니 손자들

진, 박준량, 고형기, 박성업, 김상호, 그리고 캠

을 샤워시킬 수도 없고 세수도 대충 해야만 하

핑장을 찾아왔던 이종혁, 뒤풀이 식당의 백준호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149


점심을 간단히 하고 캠핑장에 도착해 텐트를 치 고 짐을 풀었다. 넷이서 몇 곳을 둘러보고 두 시 간 정도의 하이킹도 했다. 모두 힘들어하면서도 씩씩하게 잘 마쳤다. 첫날 저녁 김희주의 주방장 역할은 기대 이상 이었다. 준비해온 된장찌개로, 내가 피운 캠프 화이어로, 오래간만에 한잔씩 하며 참 많은 얘 기를 나눴다. 신일 시절 이야기 그리고 친구들 까지 함께 대규모의 저녁식사 자리가 마련됐고,

안부가 위주였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

우리는 모처럼의 회포를 풀 수 있었다.

었다. 남자들만의 보이스 캠핑이 이렇게 즐거운

의외의 호응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어쩌면

지 누가 상상했었겠나. 직장도, 사업도 뒤로 하

당연한 일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남가주에서 가

고 훌훌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동안 집안을

끔씩 만나던 친구들과의 처음 캠핑이 주는 낭만

위해 자식을 키우며 힘들었던 것도 잠시나마 잊

과 즐거움은 무엇이라 표현이 어렵다. 나의 입

고 싶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모두 외로웠을 테

장에서 보면 신일 졸업 후 43년 만에 처음 만나

고, 주변에서 이놈저놈 내게 말해줄 친구도 오

는 고형기, 이정균과의 회포는 극적이었다고 말

랫동안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린 서로 그냥

하고 싶다. 신일 시절의 모습을 연상하며 더듬

편했다. 미국 이민 와서 자주 만나지 못하던 친

어 본 얼굴들은 변함이 없어 보였다. 착각일 수

구들이 그동안 그리웠을 것이다. 이렇게 이틀,

도 있겠지만 내 눈은 그 시절에 머물고 있었으

삼일씩 함께 먹고 자본 적이 언제 있었는가? 너

니 당연한 일이다. 정말 반가웠다. 감격이라는

무 자유로웠다.

표현도 쓰고 싶다.

다음날 도착할 고형기, 이종혁, 박성업을 기대

캠핑 떠나는 날 아침에 차에 짐을 싣고 마창진

하며 불을 끄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을 기다렸다가 함께 박준량의 집으로 이동했다.

고형기가 멀리서 왔고, 이종혁이 멋진 모자에

거기서 김희주를 만나 짐을 옮겨 싣고 넷이서

카메라를 목에 걸고 등장했다. 저녁에 박성업이

차 2대로 캠핑장으로 향했다. 캠핑장 도착 전에

오토바이를 몰고 2시간을 달려 도착했다. 우리

150

ㅣ 신일 5회 동기회


는 함께 저녁 산책을 하며 Joshua Tree 국립공

녁 식사를 하며 우리의 첫 캠핑은 끝났다. 가을

원의 기이한 암벽, Joshua Tree, 그리고 사막의

캠핑을 약속하며 형기가 침낭과 깔판을 내게 맡

멋진 석양을 즐겼다. 사진을 서로 찍어 주며 멋

겼고, 가을에 만나자며 우리는 헤어졌다.

진 풍경도 담고, 감탄하기에 분주했다. 종혁이

2019년 11월 5일부터 7일까지 2박 3일간의

는 저녁까지 있다 떠나고, 고형기와 박성업은

두 번째 보이스 캠핑이 멋진 바닷가에서 있을

우리와 함께 늦게까지 지내며 하루를 머물렀다.

예정이다. 조금 전에 고형기가 비행기 티켓 끊

다음날 아침 식사 후에 박성업은 오토바이를

었다며 내게 전화를 했다. 그래 자꾸 만나자 친

타고 먼저 떠났다. 우리는 함께 철수하며 고형 기와 이정균이 머물 예정인 호텔로 향했다. 호

구들아. 더 늦기 전에……. 2019년 8월 18일

텔에서 몸을 씻고 기다렸는데 정균이가 나타났 다. 얼마 만인가! 잘생긴 얼굴에 가무잡잡한 그 대로였다. 그리고 모두 함께 식당으로 옮겨 저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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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耳順

김성일

사람의 나이에 대한 별칭은 크게 두 가지의 근

공자의 위 말에서 열다섯 살을 가리키는 ‘지

거에 준합니다. 하나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학志學’, 서른 살을 가리키는 ‘이립而立’, 마흔

말에 근거한 것으로, 그 대표적인 것이 성어 ‘불

살을 가리키는 ‘불혹不惑’, 쉰 살을 가리키는 ‘지

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 등입니다.

천명知天命’, 예순 살을 가리키는 ‘이순耳順’, 일

그리고 또 하나는 《예기》의 분류에 따른 것으

흔 살을 가리키는 ‘종심從心’이란 성어가 나왔

로, 대표적인 것이 성어 ‘약관弱冠’입니다.

습니다. 물론 공자의 이런 말들은 끊임없이 공

그중에서 우리가 주로 쓰는 것은 《논어》에 나

부를 하여 인격을 도야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

오는 공자의 말을 근거로 한 것인데요, 우선 그

이지요. 아무런 수양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내용을 직역하겠습니다.

있어도 이런 경지에 도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공자의 이 말씀은 원문을 직역한 것만으로는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자립하였으며, 마흔 살에는 미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해설을 덧붙이겠

혹되지 않게 되었고, 쉰 살에는 천명이 무엇인지를 알았

습니다. 물론 해설의 내용은 선현들의 이 글에

으며, 예순 살이 되어서는 귀가 순해졌고, 일흔 살에는

대한 해설을 기초로 하여 나의 인생 경험에서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게되

나온 견해를 약간 더한 것입니다.

었습니다.”(子曰, 吾十有五而志於学, 三十而立, 四

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 所欲不逾矩.)」

이 말은 《논어》의 <위정爲政>에 나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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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는 말은 그 나이쯤 되니까 약간이나마 세상 물정을 알게 되 고, 철이 들기 시작해서 사람이 사는 도리를 배


우고 특정 지식이나 기술 등을 공부해야 하겠다

즉 주변의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자기의

고 결심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대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략 십 대의 중반 즈음이 그야말로 인생의 진정

그래서 마흔 무렵부터는 그동안 지나온 인생

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

이 얼굴에 담겨지고 마음과 생각이 얼굴과 태도

겠지요.

에 투영되게 되어 진정한 자아의 모습이 형성되 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선현들께서는 마흔

‘서른 살에 자립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자립이란 말의 원문은 ‘立’인데요, 이는 무엇을

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들 말 씀하셨지요.

말하는 것일까요? 십 대에 공부에 뜻을 두어 짧 게는 한 십오 년, 길게는 거의 이십 년의 세월 동

‘쉰 살에는 천명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말은

안 기초를 닦고 내공을 쌓다 보니 학문이나 자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공자가 (하늘이 정해

신이 추구했던 공부에 어느 정도 성취가 생기게

준) 자기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뜻

되었고, 비로소 사람은 왜 살며, 어떻게 살아야

이라고 풀이했는데요, 일리가 있는 풀이입니다.

하는지 감을 잡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해진 운명을 알았다고 해석하는

그래서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立’이란 생

사람도 있습니다. 쉬운 말로 스스로 자신의 능 력과 그릇을 파악했다는 말이 되겠지요?

의 목표를 세우고 방향을 정한 것으로 해석할

하지만 그렇게 운명이 정해져 버렸다면 얼마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진정한 자립이라고 할

나 슬픈 일일까요? 운명론 외에 ‘지천명’에 대한

수 있겠지요?

다른 해석은 없는 것일까요? 나는 이렇게 믿고 싶습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에게 달렸지

‘마흔 살에는 미혹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은

만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므로 최선을 다 하

서른 즈음에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세우고, 한

되, 결과에 연연하여 그로부터 오는 희로애락의

십여 년 끊임없이 매진하다 보니 마흔 즈음이

감정으로 인해 자신의 몸과 마음은 물론, 주변

되자 나름대로 가치관이 확립되어 더 이상 세

사람들도 상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상일에 크게 미혹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되는 것이 바로 지천명’이라고 말입니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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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살이 되어서는 귀가 순해졌다’는 말은

마흔을 강强이라고 하는데, 벼슬에 나아갑니다. 쉰을

무슨 뜻일까요? 천지 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게

애艾라고 하는데, 정치에 참여합니다. 예순을 기耆라고

되어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하게 된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남에게 일을 시킵니다. 일흔을 노老라고 하는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그것보다는 인생의

데, 집안일을 물려줍니다. 여든과 아흔을 모耄라 하고,

경험과 그동안 쌓인 수양으로 인해 세상사나 타

일곱 살을 도悼라 하는데, 모와 도는 죄를 지어도 형벌

인에 대한 이해와 용납의 폭이 넓어져, 어떤 말

을 가하지 않습니다. 백 살은 기期라 하여 봉양을 받습

을 들어도 다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되었다는 뜻

니다.(人生十年曰幼, 學. 二十曰弱, 冠. 三十曰壯,

이 아닐까요? 다시 말하자면 남의 말을 경청

有室. 四十曰强, 而仕. 五十曰艾, 服官政. 六十曰

할 수 있는 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지

耆, 指使. 七十曰老, 而傳. 八十九十曰耄, 七年

요. 내가 이렇게 물음과 추측의 형태로 글을 쓰

曰悼. 悼與耄雖有罪, 不加刑焉. 百年曰期, 頤.)」

는 이유는 나도 이제 막 예순의 시작점을 출발 했기 때문입니다.

스물을 약이라 하는데 관례를 행한다는 말에 서 성어 ‘약관弱冠’이 나왔습니다. 약弱은 약하

‘일흔이 되니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좇았으

다 혹은 부드럽다는 뜻으로, 아직 완전히 성숙

되 법도를 넘어서지 않게 되었다’는 말은 공부

하지는 않았지만 성인 구실을 할 수 있는 나이

가 도저하고 수양이 완성된 일흔 살이 넘으면

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관冠이란 성년이 되어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갓을 쓰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인식을 올리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요?

는 것이지요. 바로 이 두 말이 합해져서 성어가 된 것이 바로 ‘약관’입니다.

다시 나이 해설로 돌아갑니다. 《예기》의 분류

위 말은 《예기》의 <곡례曲禮>에 나오는데요,

중에서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은 ‘약관’이란 성어

공영달孔穎達의 소疏1) 에서는 약관에 대해 다음

입니다.

과 같이 해설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열 살이 되면 유幼라 하는데, 배우기

「나이 이십이면 성인으로 관을 쓰는 예를 행하지만,

시작합니다. 스물을 약弱이라 하는데, 관례冠禮를 행합

신체는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았으므로 ‘약弱’이라고

니다. 서른을 장壯이라고 하는데, 아내를 맞이합니다.

합니다.(二十成人, 初加冠, 體猶未壯, 故曰弱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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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참, 70세의 나이는 두보의 시에서 유래한 ‘고

「여러분. 열다섯 즈음이 되면 학문에 뜻을 두

희古稀’2)라는 별칭도 있지요? 그런데 어떤가요?

고 공부를 시작하시오. 서른 즈음이 되면 인생

나이에 대한 별칭을 자세히 살펴보니 《논어》에

의 목표를 세우고 방향을 정하시오. 그리고 마

서 말하는 나이는 개인의 인격도야와 학문적 성

흔 즈음이 되면 세상일에 미혹되거나 남하고 비

취를 기준으로 한 것 같고, 《예기》에서 말하는

교하면서 방황하거나 고민하지 말고 꿋꿋이 자

나이는 유년과 노년의 복지까지를 포함한 일상

기 길을 가시오. 쉰 즈음이 되면 최선을 다 하

생활을 기준으로 한 것 같지 않나요?

되 결과에 연연하지 마시오. 그리고 욕심을 내 려놓고 인생을 관조하는 법을 배우시오. 예순

내가 원래 계획했던 원고의 내용은 여기까지

즈음이 되면 제발 듣는 귀를 가지시오. 자기 말

였습니다. 그런데요, 모교 5회 동기 모임에 나갔

만 앞세우지 말고 남의 말 좀 들으란 말이오. 생

다가, 존경하는 친구 김 연태 군의 견해를 듣고

각 있는 사람이라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 나

신선한 충격을 받아 가필을 하지 않을 수 없었

이 대에 그 정도 경지에 올라야 하지 않겠소? 그

습니다. 김 연태 군은 이렇게 말했지요.

렇게 되려면 열심히 공부하고, 수양을 해야 되

“이순이란 말은 혹시 예순 살이 되면 제발 귀

지 않겠소? 그러면 일흔 즈음에 마음에서 하고

가 좀 순하게 뚫려 남의 말 좀 잘 들으라는 공자

자 하는 대로 좇아도 법도를 넘어서는 일이 없

님의 ‘명령’이 아닐까? 경험을 해 보니 사람들

게 될 것이오. 우리 모두 제발 나잇값 좀 하고

이 나이를 먹을수록 귀가 더 꽉 막혀서 도통 남

삽시다.」

의 말을 듣지 않아요. 고집도 더 세지고, 자기 말

1) 소疏: 옛 서적을 보다보면 <주注>,<소疏>라는 용어가 많이 나오는

만 앞세우고,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하고……” 나는 잠시 숙연해졌습니다. 인생의 경험에서 나온, 정말 ‘도’에 가까운 친구의 말에 그동안 자

데요, 주>란 고서 원문의 뜻을 해설해 놓은 글을 말하고, <소>란 통하 게 한다는 뜻으로, <주>를 보충하여 해설해 놓은 글을 말합니다. 2) 조회가 끝나 돌아오는 길이면 봄옷을 잡혀/ 날마다 곡강에 가서 흠뻑 취해 돌아온다/ 가는 곳마다 술빚 깔려 있는 것이야 예삿일이지 만/ 인생 칠십까지 사는 것은 예로부터 드물었지/ 지천에 만개한 꽃

구字句 해석에만 매달려 귀도 막히고 생각도 막

들 사이로 나비들 어지러이 날아들고/ 잠자리는 물 위를 여유롭게 나

힌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거든요. 그래

치 구경이나마 서로 빗겨남이 없도록(朝回日日典春衣 每日江頭

서 김 연태 군의 견해에 맞추어 다음과 같이 공 자님의 명령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는구나/ 아름다운 봄날의 풍광이여! 함께 흘러가자꾸나/ 짧은 봄 경 盡醉歸 酒債尋常行處有 人生七十古來稀 穿花蛺蝶深深見 點水蜻蜓款款飛 傳語風光共流轉 暫時相賞莫相違) 이 시의 인생 칠십까지 사는 것은 예로부터 드물었지(人生七十古來稀)에서 70세를 가리키는 성어 ‘고희’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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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트리스의 추억 기억의 조각을 모으며 김수봉

30여 년 전 테트리스라는 게임이 한때 유행했었다. 신일 동산 시절의 여러 추억들이 지금 테트리 스 바처럼 내 머릿속을 분주히 오르내리고 있다.

제2외국어 선생님의 이런저런 기준에 못 미쳐 하염없이 운동장을 돌아야만 했던 일

고3 시절, 한 시간씩 시험과 문제풀이 반복으로 시험 감각을 키워주셨던 수학 선생님

국어 선생님 기획, 토요일 자율학습시간 주제 발표

정 모 군과 우 모 군은 바둑, 박 모 군은 오토바이, 지금은 생사마저 오리무중인 배 모 군의 불교 관련 이야기 등등 ■

연중행사였던 교련 검열, 검열관들 보다 더 멋졌던 우리 교감선생님

스쿨버스의 옥상 주차는 지금도 참 대단하다 여겨져!

뜨거웠던 그 열기, 장충체육관의 농구 코트

겨울, 스팀 위에 벽돌담처럼 빼곡했던 도시락들, 따끈따끈 비비고 흔들고

가을, 잊지 못할 ‘문학의 밤’ 행사, 추억으로 남은 타계한 박 모 군의 피아노 연주

수세식 화장실에 풍성히 비치된 두루마리 휴지들, 당시엔 흔치 않았지!

토요일 방과 후, 지금은 사역 중인 김 모 군과 의정부 무작정 버스 여행

요런 것도 삼삼히 떠오르네, 운동장 앞터의 배추 밭

아직껏 수유역 근처 여기저기서 종종 곡차를 기울이곤 하는 나는, 우뚝 솟은 백운대와 의연히 마 주하고 있는 『신일』의 그림자 속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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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김영수·정윤식 ‘편지’

김영수 / 정윤식

1984년6월1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신공항 건설 현장에서 정윤식이 보낸 글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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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 詩

마른바람 마른바람이 헛기침처럼 다가와 그래, 나는 아주 더 많이 외로워져야 하겠지 바람에 빛깔이 있는지 상상조차 했을까 물푸레나무 물그림자처럼 내면 깊이 흔들리던 너의 표정을 오호 바람의 그 빛깔 그 속삭임을 짐작이나 했을까 곁에서 정지화면처럼 짧았을 그 순간의 작별조차 한낱 새소리처럼 푸득 날아갔겠구나, 저 창백한 허공으로 마른바람이 헛기침처럼 다가와 물푸레 짙은 고독 문신하고 바삐 갈 길 재촉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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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김용환 詩

바다 밑바닥의 풍경화 이제 당신은 없습니다. 오래전 어느 날 滿潮가 都市의 마지막 저녁을 황금의 갈기로 잠재우며 끓어 넘치던 날 나는 그곳에 당신을 묻었습니다. 검은 천으로 추억을 싸서 미움의 몰약을 바르고 가만히 내려놓았습니다. 쉴 새 없이 都市의 바다엔 배가 떠나고 들어오고 그리고 지금은 코발트 빛 청량함으로 내 가슴을 가볍게 토닥이고 있지만 나는 압니다, 저 깊은 세월의 가벼운 탄식에 불과한 줄을 바다의 피부는 왜 이다지 두터운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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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화개水流花開

김윤갑

치악산 아랫자락 국형사에 만개한 산수유가 볼만하다. 맑은 날의 산수유도 좋긴 하지만, 산수유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비 오는 봄날이 제격이다. 맑은 날의 산수유는 추위를 뚫고 너무 일찍 피어나서 그런지 조금은 가녀린 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메마른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산안개 피어오 르는 비 오는 봄날의 산수유는 맑고 따스하고 풍성하다. 작은 꽃송이들이 함께 비에 젖어서 한 떨기 의 새로운 꽃으로 피어나는데, 연노랑색의 물감이 신록의 연한 푸르름 사이로 스며들면서 연출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한 폭의 정갈한 수채화다. 고둔치에서 내려오는 계곡 길로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절로 상쾌하게 해 준다. 지난 달만 해도 아이젠을 착용해야 등반이 가능했던 능선 길도 녹아 내려서 등산 동호인들의 발길을 재촉 하고 있다. 황골의 따뜻한 땅 자락마다 벚꽃이 활짝 피어서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산수유로 시작한 치악산 자락은 뒤를 이어 피어나는 벚꽃과 진달래꽃, 개나리꽃으로 어디를 둘러보아도 꽃들의 세상 이다. 이제 살구꽃과 복숭아꽃들이 가세하면 그야말로 꽃들의 경연장이 될 것이다. 얼어붙은 땅이 녹아내리고, 죽어 가는 듯 꺼칠하기만 했던 고목나무에서 새순이 돋아나고, 개울물 이 흘러내려서 강물을 이룬다. 겨우내 움츠려있던 대자연이 한꺼번에 새 생명의 기지개를 켜고 있 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봄을 ‘생명의 계절’이라고 했으며, ‘하늘의 본마음 은 봄에 있다(春者天之本懷춘자 천지 본회)’라고 헤아리신 모양이다. 새봄에 역동하는 삶의 현상을 넉자의 한자에 함축하여 표현하니 바로 水流花開수류화개라! 물은 흐르고 꽃들은 피어난다.

수류화개라는 글귀가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작품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명필로 유명한 ‘茶禪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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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선 송’이라고 할 수 있겠다.

靜坐處 茶半香初 정좌처 다반향초 妙用時 水流花開 묘용시 수류화개 고요히 앉아서 차를 한참이나 마셨는데도 향기는 처음과 다름이 없고 대자연의 묘한 이치가 나타날 때, 물은 흐르고 꽃들은 피어나네

이 작품에 사용된 한시의 원작자가 누구인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어쨌거나 추사가 이 시구를 매 우 애송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茶半香初’라는 글귀를 사용한 편액 등도 추사의 작품으로 전해 져 내려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추사가 차 한 잔을 음미하면서 대자연의 약동하는 이치를 깨닫는 여 유를 즐겼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향기롭고도 지혜로운 시구가 아닐 수 없다. 찻잔 속에 담긴 우주 변 화의 이치를 감지하는 경지의 글귀가 바로 ‘茶半香初 水流花開 다반향초 수류화개’라 할 수 있겠다.

수류화개라는 글귀가 나타나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중국 송 대의 시인이자 화가인 황 산곡의 시구를 들 수 있다.

萬里靑天 雲起雨來 만리 청천 운기 우래 空山無人 水流花開 공산 무인 수류화개 드넓은 푸른 하늘에, 구름은 일어나고 비는 내리며 너른 산 보아주는 이 없어도, 물은 흘러내리고 꽃들은 피어나는구나

이 시구는 대자연 속에 나타나는 우주의 용틀임을 표현한 글이다. 추사가 찻잔 속에서 우주의 변 화를 읽었다면, 황산 곡은 드넓은 대자연 속에서 우주의 변화를 간파해낸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추 사가 인용한 시구가 도교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반면에 황산곡의 시구는 불교적인 느낌이 든다고 생 각한다. 도교적이거나 불교적이거나 간에 삶의 새로운 한살이가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나면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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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은 별 다름이 없다. ‘물은 흘러내리고 꽃들은 피어난다’는 글귀에서 꽃의 이미지를 불로 변화시켜보면 다음과 같이 된 다. ‘물은 흘러내리고 불은 피어오른다’. 이것은 물이 가진 위치에너지와 불이 가진 운동에너지가 역 동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릴 때 가장 큰 힘을 쏟아 내며, 불은 낮은 곳에서부터 타오를 때 가장 크게 불어난다. 공자님은 이러한 상황을 설정하여 주역에서 이름 짓기를 ‘水火旣濟수화 기제’라 하여 상서로운 괘 로 풀이하셨다. 한의학에서는 인체가 병리상태에서 평형상태로 회복되는 치유기전의 대원칙을 ‘水 昇火降수승화강’이라고 한다. 물을 높은 위치로 되올려주고 불을 낮은 위치로 내려주는 것을 ‘수승 화강’이라고 하니 이를 괘상으로 나타내면 바로 ‘水火旣濟수화 기제’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눈 덮인 설산을 머리에 이고 뜨거운 마그마를 땅 속 깊이 품고 있는 지구의 자연변화나 맑은 이성 을 머리에 담고 뜨거운 정열을 몸속 깊이 담은 인체의 생리 대사나 그 기본 이치는 수류화개의 이치 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가냘프면서도 끈질기게, 서두르는 법이 없으면서도 도도하게 우주의 생명 현상은 되풀이되고 있다. 우리네 일상사도 물이 흐르듯 꽃이 피듯 그렇게, 부드럽고 힘차게, 차 분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향기롭게 이어져나가길 기원해 본다.

물은 흘러내리고, 꽃들은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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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취미생활

김응원

취미의 사전적 정의는 “전문적이나 본업은 아

그런데 즐기는 것도 즐거운 것도 한계는 있는

니나 재미로 좋아하는 일(것)”이다. 내가 ‘취미

것 같았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는 곳 근처의 연

활동’이라 하지 않고 ‘취미생활’이라 표현하는

습장 출입부터 뜸해지더니 필드에 나가자는 부

데는 이유가 있다. ‘활동’이라 하면 어떤 목적

름에도 썩 내켜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하에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여 활발히 움직이는

골프채와 부대 물건들이 집안 한구석에서 조용

것이 연상되는데 반하여 ‘생활’이라 하면 ‘활동’

히 쉬고 있다.

보다는 폭이 넓고 자연스러운 삶의 형태로 인식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취미활동’에서 ‘취미생활’로 변한 취 미가 나에게는 있다. 바로 ‘바둑’이 그렇다. 중

돌이켜 보면 많은 취미활동을 해 왔었다. 대

학생일 때 이웃집 형에게 처음으로 바둑을 배우

표적인 취미활동으로는 ‘골프’가 있다. 사회생

고, 본격적으로 열심히 공구(攻究)한 때는 동창

활을 하며 필요에 의하여 시작하였지만 스스로

들이 한창 당구를 배우던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

도 무척이나 즐거워했다.(물론 “소원이 퍼팅하

후 약 3개월 정도의 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다 그대로 숨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어떤 선

도 당구를 못한다(못한다가 맞나?).

배만큼은 아니지만) 매주 주말은 물론 쉬는 날

고교 때는 집이 북악터널 넘어 상명여대(그때

이면 거의 필드에 나가 골프를 즐기곤 했다. 또

는 여대였음) 앞에 있었는데 나에게는 불행하

한 퇴직 후에도 주중 골프를 무척이나 좋아했

게도 고교를 졸업하던 그 해 겨울에 북악터널

다. 연습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당연

이 개통됐다. 결국 나는 고교 3년 내내 자하문

시 했고, 열심히도 했다.

고개를 넘어 광화문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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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개를 넘어 미아삼거리를 지나 학교에 이르

국할 공간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시간 또한 별

는 길을 다녀야 했다. 북악터널을 관통하여 정

도로 할애해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러니

릉을 거쳐 가면 가까운 길을 3년 내내 멀리 돌

대국할 일정을 미리 협의해야만 했고, 장소(기

아서 학교를 다닌 것이다. 어쨌든 졸업 후 3개

원) 또한 따로 정해야만 했다. 그러니 바둑 한 판

월 동안 청계천 고서점을 뒤져 ‘바둑의 정석’을

두는 것조차 쉬울 리 없었고, 그러니 또한 ‘활동’

배울 수 있는 책들과 그 시절을 대표하던 기사

일 수밖에 없었다.

들(오청원, 사카다, 다카가와, 휴지사와 등) 대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바둑을 두기 위한,

국을 수록한 책들을 구입하는 일에 열심히 노

즉 대국을 위한 도구가 필요한가? 별도의 공간

력을 했다.

이 필요한가? 물론 잠시의 시간은 할애해야 한

이후 바둑을 둘 기회는 별로 없었는데 사회생

다. 그렇다 하더라도 날짜까지 따로 정해서 시

활을 하며 바둑을 다시 둘 기회가 생겼다. 사회

간을 낼 필요는 없다. 대국 상대가 정해지지 않

생활의 시작을 국민은행(C.N.B 지금의 K.B가

아도 괜찮다. 보이지 않는 많은 대국 상대가 항

아님)에서 했는데 당시 바둑을 즐기는 동료들

시 기다리고 있다. 어디서? 바로 ‘인터넷’이란

이 꽤나 많았다. 그때 비로소 내 바둑실력을 알

가상공간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

수 있었고, 특히나 박명수를 같은 행우로 맞이

이러니 ‘취미활동’이 아니고 ‘취미생활’인 것

하며 몇 번 대국을 했고 고수의 실력도 확인했

이다. 나의 경우는 이미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다. 그때 또 다른 동창으로는 홍성우가 있었다.

잠시라도 시간만 있으면(10분도 가함) 인터넷

이후 어찌하다 국민은행 대표로 은행연합회 주

으로 바둑을 즐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바

관의 은행 간 시합에도 박명수와 같이 출전한

둑을 두었고, 두고, 또한 둘 것이다. 비록 명수처

기억이 있다.

럼 고수는 못되더라도 즐거우니까 하수라도 즐

이후 나는 장기은행 계열의 카드사로 이직하

거울 수 있다. 고수와 대국할 필요가 없으니까.

였고, 장기은행 그룹의 바둑 동호인들과 교류를

모두들 100세 시대를 이야기한다. 또한 건강

하며 사회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때는 바둑

이 모든 것이라 얘기들 한다. 누구 말처럼 경제

을 두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우선 바둑을

력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정신건강 또한 못지

둘 수 있는 도구들(판과 돌)이 있어야 했으며, 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고금을 망라하고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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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둑을 ‘업’으로 삼은 사람 중에 알츠하이머(즉 치

요즘은 탁구 교습을 주에 2회씩 받고 있다. ‘취

매)로 고생하다 삶을 마감한 사람은 없는 것으

미활동’이 늘어난 셈이다. 특히 아내와 같이 하

로 알고 있다. 그만큼 바둑이 정신건강에 도움

면 좋겠다는 생각에 함께 다니고 있다.

이 된다는 것은 명확하다. 기왕이면 한 수 배워 봄이 좋지 않을까? 써놓고 보니 이상한 글이 된 것 같아 민망하기 그지없으나 바둑은 나의 유일한 ‘취미생활’이 란 것을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올려보았다.

내가 바둑을 두는 인터넷 사이트는 한국기원 에서 운영하는 ‘오로바둑’이다. ID는 ‘ewlim55’ 이고, 아마 6단으로 등록되어 있다. 대국할 친구 는 언제든 환영이다. (2019.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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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 한 장

김종선

다시금 생각하기조차 싫은 아주 창피한 이야기를 꺼내려니 우리 마님 얼굴이 어 른거린다. 벌써 30년 전의 이야기다.

때는 바야흐로… 88년 서울 올림픽이 장엄하게 열렸던 바로 그 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 민주화 열풍으로 각 기업들은 노조가 제철 만난 메뚜기들 처럼 여기저기 날고뛰고 설립 열풍이 몰아쳤다.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도 은밀하게 노조 설립이 물밑작업을 거쳐 막판 관할 구청의 서류제출만 남았던 상태. 나는 부위원장을 맡고 후배를 위원장직에 올렸다. 세상에 비밀은 없었다. 사용자 측이 우리가 진행하는 노조 설립 문제를 알게 된 것이다. 사무국장의 저녁식사 제의가 왔고, 우리는(위원장, 부위원장 2인) 한번 넘 어야 할 산이라 여겼기에 마다하지 않고, 중국집에서 총무상무와 사무국장 그리고 우리 다섯 명이 자리를 마주 했다. 줄다리기가 시작됐고, 예상대로 노조 설립에 대 한 방해공작도 무르익었고, 우여곡절 끝에 노조는 설립키로 결정됐다. 현판식 날 우리는 다시 사용자 측에게 답례로 식사대접 자리를 만들었다. 여기까 지는 O.K! 문제는 늘 그렇듯이 그다음 2차 술자리에 있었다. 행여나 팽팽하게 잘 잡고 있던 ‘정신 줄’이란 것을 우리가 그만, 아니 내가 그만 놓아 버린 것이었다. 어 떻게 집에 왔는지는 기억(보통 술꾼들의 경우……)이 물론 없다. 무사히 잘 온 것이 다, 믿었다. 그런데 비몽사몽 속에 누군가가 비집고 끼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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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형~부 정신 드세요? 정신 차려보세요!” 아, 당시 나는 ‘역곡’에 살고 있었다. 역곡역은 계단으로 내려오다 중간에 꺾여서 또 계단에 연결되었다가 다시 도로와 연결됐다. 내가 바로 그 계단의 중간 어디쯤 에 계셨다. 가지런히 신발과 옷도 벗어 놓고, 신문지 한 장 푹 뒤집어쓰고 달콤한 잠에 빠져 계셨다. 바로 그때 출근길의 처제가 등장해 그런 나를 따악 발견했던 것 이다(황망 민망?). 쥐구멍인지 집인지 비틀대며 간신히 교도소 철문처럼 굳게 닫힌 문 앞에 겨우 나 는 서 있었다. 그나마 그 신문지 한 장이 얼굴을 가려준 덕에 다행히도 나를 알아본 사람은 별로 없었을 거로 확신한다.

“남 여사님! 이렇게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데리고 사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 다. 모쪼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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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하여

김종진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여 자연의 변화가

시 생각이 상당히 짧고 좁은 시야에 머물렀던

현란한데, 그러다 보니 사람들도 계절마다 갈아

것 같다. 정기 급여 근로자가 전체 근로자 중에

입는 옷의 변화 역시 뚜렷하게 마련이다. 사실

서 차지하는 비율이 생각보다 훨씬 적다는 것

나는 직장생활을 26년 동안 하면서 생활이 너무

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개인마다 삶의 방식은

바쁘기도 했고 감수성이 떨어져서인지 사계절

각기 다르게 마련이지만 내 경우는 나 자신만

의 변화에 대해서는 크게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

의 독특한 취향의 여가생활이 없었고 스포츠 활

고 살아왔다. 또한 직장에 다니던 1980년부터

동도 거의 전무했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은

2006년까지는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에 치어

퇴 뒤 고교 동기 모임을 통해 마음 통하는 친구

동기 모임 참석이나 고교 친구들을 만날 엄두

들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소통은 삶의 활력이 되

도 내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던 내가 2006

고 살아가는 방식 자체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

년 10월 들어서 처음으로 정기 고교 모임에 참

고 있다. 마치 사계절의 변화에 대해서 내가 새

석했었다. 그리고 그때 직장 동료들과의 의례적

삼스럽게 반응을 보이고 감사함을 느끼는 것처

인 관계와는 전혀 다른, 허물없이 정감 넘치는

럼 말이다.

친구들의 마음을 벅차게 느낄 수 있었다. 신일

학창 시절에는 만남의 폭이 좁아 친한 친구 몇

고 5회 동기모임은 그때 2006년 10월부터 매월

하고만 친했다. 이제 세월이 흐른 뒤에 생각하

정기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니 만남의 폭을 일부러 제한할 필요가 없을 듯

샐러리맨의 생활이란 게 거의 회사와 연관되

싶고, 오히려 만남의 폭을 넓힘으로써 각기 다

어서만 돌아가고 사고하기 십상이다 보니 나 역

양한 개성의 친구들을 통해 본받을 점과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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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을 발취해내는 일 또한 즐거운 일이다. 직장 생

보지 않은 일에 대하여 판단하는 것이 어렵다는

활 중에 기쁜 일이건 힘든 일이건 별의별 일들

점과, 각자 생각이 서로 다름을 자연스럽게 받

이 있었겠지만 우연한 기회로 고맙게도 금연을

아들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과, 사

할 수 있었던 일이나, 매사 긍정마인드를 유지

람은 나이 들면서도 나의 부족함을 숨이 다하는

할 수 있었던 점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다. 그런

그날까지 배워야 한다는 점을 체득하게 되었다.

경험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겠고, 삶의 전

뒤돌아보면 80년도에 대우중공업 입사하여

반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어 매사에 감사하

97년도에 대우캐피탈로 사간 전보하던 당시 긍

는 마음을 갖게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정마인드로 바뀐 점, 98년도 경부고속도로에서

경우에도 불구하고 삶이란 정말 즐겁고 살아볼

서울로 상경 중 운전 부주의로 차량사고가 크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났으나 몸이 전혀 안 다친 점, 17년 6월 말 급

몸만 건강하고 긍정적인 마음만 잃지 않는다

성 심근경색이 우연히 조기 발견되어 잘 치유될

면 흘러간 세월의 그 모든 희로애락 그 자체가

수 있었음을 마음 깊이 고맙게 생각한다. 그래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다. 누구하고

서 더욱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매사에 감

든 짧은 만남도 소중히 여기고 보람으로 채울

사하며 삶을 즐겁게, 재미있게, 활기차게, 보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일보다는 오늘 하루를

있게 살아가고자 한다.

기쁘고 즐겁고 재미있고 보람 있고 기분 좋게 지내려고 열심히 노력을 하고 있다. 지나온 삶 역시 모두 만족스러울 수야 없겠지만 가급적 좋 은 기억으로 치환해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평안해진다. 사고방식 역시도 왠지 적극 적이고 긍정마인드로 바뀌는 것 같다. 벌써 회 갑이 한참 지났지만 살아가면서, 학교 다니면 서, 직장 생활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이 제 하나씩 꺼내 바뀐 계절에 맞춰 선택한 옷들 을 하나하나 만져보듯이 새롭다. 직접 경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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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전 돌봄 계획서 (advance care planning) 김해만

한 바퀴 돌고 덤으로 진행되는 삶의 여정에서,

『연명 의료 계획서』는 ‘말기 환자 또는 임종과

만약 내가 언제든 몸과 마음도 쇠잔해지고 의사

정에 있는 환자는 연명 의료의 유보 또는 중단에

표현도 여의치 않아 보람 있던 내 삶을 마쳐야

관한 자신의 의사를 담당의사와 상의하여 『연명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나의 삶의 어떤 대목

의료 계획서』를 작성하고, 환자가 향후 임종과

들이 중요했는지 또 죽음의 과정에서는 어떤 도

정에 있는 환자가 되었을 때 이를 근거로 연명

움을 받았으면 좋을지를 염두에 두고 미리 묵상

의료를 유보 또는 중단할 수 있으며, 이미 작성

해보고자 한다.

된 『연명 의료 계획서』라 할지라도 작성자는 언 제든 그 의사를 변경하거나 철회할 수 있다’로

보건복지부 산하 국민건강보험에서 발행한 <쉽

기술하고 있다.

게 이해하는 연명 의료제도>에 보면 연명 의료

‘사전 돌봄 계획(ACP Advance Care Plan-

란 ‘임종 과정에서 환자에게 심폐소생술, 혈액

ning)’은 일종의 ‘의료 유언’으로, 의료 유언에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및 그 밖의

따라 환자는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본인이 받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의학적 시술로서 치료 효

고 싶은 의료행위를 선택할 수 있고 의료진은

과 없이 임종 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것’이

그 결정에 따라주는 것을 의미한다. 국내에서는

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

<연명 의료결정법>에 따라 『연명 의료 계획서』

는 19세 이상의 사람이 향후 겪게 될 임종 단계

와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로 많이 알려져 있

를 가정하여 연명 의료에 관한 자신의 의향을

다. 그러나 ‘사전 돌봄 계획’은 이 둘을 아우르는

미리 밝혀 두는 문서다.

포괄적인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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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나의 ‘사전 돌봄 계획’은 아래와 같다.

것들이 있겠지만, 저 같으면 『사전 연명 의료 의

1. 나는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국민건강

향서』를 제출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

보험에 작성 제출하겠습니다.

족들과의 마지막 소풍에 기꺼이 함께 하겠습니

2. 나의 삶에 대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다. 화장되어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차(茶) 밭에

“없는 사람의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뿌려질 수 있다면 행복하겠노라고 말하겠습니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

다. 혹시 그것조차도 번거롭다고 한다면 화장터

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한 모퉁이에라도 훌훌 날려지기를 희망한다고

(고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한 사람 37.5도의 열기가 각기 모여 따뜻함

말하겠습니다. 나비가 되어 훨훨 춤추겠다고... 5. 제사 지내지 마라,

이 뭉쳐지게 되면 그 훈훈함으로 서로를 감쌀

내 생각이 난다면, 생전에 좋아했던 차(茶)와

수 있을 것이고, 추운 고통쯤은 감내할 수 있게

막걸리 한 사발 놓고 기억의 시간을 가졌으면

되겠지요. 나는 ‘더불어 함께’ 라는 마음을 가지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죽음(well dying)을 맞이

고 생활해 왔습니다(물론 반성도 늘 하지요). 놓

했고, 아름다운 여행을 떠난 나의 심중心中을

지 못하는 이유도 아직 더 해야만 하기 때문입

기억해주길...

니다. 우리들이 있기에... 3. 가족과 친구들이 알아주고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것들은?

참 멀리 갔구나 싶어도 거기 있고

가족, 학교 선후배, 사회 동료들 모두가 아름 다운 연을 맺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자

참 멀리 왔구나 싶어도

리에서건 귀퉁이 한구석에라도 앉아 함께 했던

여기 있다​

물건으로 기억해 주셨으면...

- 이대흠詩 천관天冠 에서

4. 죽음을 앞둔 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 인생의 통과의례를 마치고 긴 소풍을 떠나기

늘 고맙습니다, 한탁입니다.

직전에 마주선다면, 아마 적잖은 고통도 수반되 겠지요. 고통을 덜해주는 방법이야 알려진 많은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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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

박명수

하나. 아부이

계속 검약혔시유.

1920년 개성/ 고려동에서 태어났지유.

아그들아, 바르게 살아라.

태평양 전쟁 때 군속으로 싱가포르에 끌려갔 댔쥬. 육이오 사변 때 제2 국민병으로 부산에서 대 기했었쥬. 폐허이지만, 워쩌유, 꼬셨쥬. 으랏차, 힘을 썼쥬. 계속 분투혔지유. 아그들아, 착하게 살아라.

셋. 나

1955년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났시유. 태어나서 붕게, 살 길이 막막하더라구유. 열공혔쥬. 운명적으로 신일중핵교에 들어왔 시유. 신일고등핵교엔 자동 뻥으로써, 그리혀서 이 른바 6년 근 이어유.

둘. 어무이

2-3-2 시스템으로써 대학과 군대를 마쳤시유.

1929년에 여주/ 당남리에서 태어났시유.

그때에 틈틈이 홀로 산행하기를 시작혔지유.

태평양 전쟁 때 공출 땀시 콩을 썩은 조밥으로

국민은행에서 32년간 근무혔시유.

써 끼니를 때웠시유. 공부하러온 남동생 둘과 서울/ 광희동에서 육 이오사변을 겪었시유. 폐허지만, 워쩌유, 속아 넘어갔시우. 힘을 받고서, 으랏차, 힘을 줬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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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그 사이에, 으랏차, 딸 둘에 아들 하나. 아그들아, 아름답게 살아라. 이젠 산 따라 강 따라 놀아유, 어제두 오늘도 내일두. 함께 지내유, 오래오래.


마음씨

박명수

1. 유명산, 1975년 늦봄

았시유.

그때엔 1박 2일로써 가야 혔시유.

텐트를 말리려구 천변의 바위에 자리를 잡았지

청평에 가서, 설악면/가일리에 가는 뽀스를 탔

유.

지유.

멀리서 손짓으로 “어이, 이리 오게.” 하는 듯 혀

뽀스에서 함께 내린 아저씨한테 야영할 장소를

서, 갔지유.

여쭸지유.

노부부 왈, “우리가 시방 밥 먹고 있응게, 함께

“저기에 판판한 자리가 있네.”

먹세.”

텐트를 펼쳤지유. 뒤에서 들리는 소리, “한기가 올라올 텐디, 바닥

3. 당진군/석문면/교로리, 1978년 여름

에 이 가마니를 깔게.”

휴가를 명받은 나에게, 70 훈련단 내무반 동기 왈, “집에 가서 용돈 좀 타 오슈.”

2. 지리산, 1976.5.17. ~ 6.3.

천안 찍구, 당진 찍구, 어스름할 때 포구에 도

‘군대 가서 뺑이치기 전에, 산천경개 유람이나

착혔시유.

하자.’ 혔지유.

난지도에 가는 배가 끊겼지유.

알바로써 근근이 군자금을 마련혔시유.

‘워쩌나?’ 하는디, 앞에 쟁교가 오더라구유.

30박 31일을 잡구서, 쌀과 고추장을 짊어지구

“멸공!”, 그제나 이제나 제가 인사성이 밝아유.

서, 떠났쥬.

“여차저차 혀서 제가 여기에 이케 있어유.”

천왕봉에서 뽈대를 붙잡구서 비바람을 쫄딱 맞

“호오, 의리 있네. Follow me.”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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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초소 막사로 데불고 가더라구유.

그 집 아부지 왈, “네가 저러한 처지에 처하면,

중위 왈, “얘 좀 재워라.”

누군가 너를 돕기를 바란단다.”

4. 해운대, 가물가물, 1979년 or 1980년

7. 진부령, 1999년 9월 11일12일

워디에 갔다가, 해운대 바닷가에 들렀시유.

홀가분하게 터덜터덜 진부령을 향하여 마을길

그제나 이제나 주머니에 돈이 달랑달랑 혀유.

을 내려갔지유.

횟집에 들어가서, 회덮밥만 시켰쥬.

뒤에서 들리는 소리, “타실래요?”

옆 손님들이 생선회를 드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모녀가 속초로 가는 길이었시유.

일어서더라구유.

“대학교 1학년 때인 1974년부터 산행 하였지

누부 왈, “손님들이 제 까치만 댔다 아이가, 괘

유. 이제 백두대간 산행을 마쳤시유.”

안타, 고마 드이소.”

“어머, 제가 태어나던 해에 시작하셨네요. 글구 울 엄마랑 동갑이시네요.”

5. 남해 금산, 1981년 8월

보리암 산행 후 개울가에 텐트를 쳤지유.

8. 서울/망우리, 현재

그때엔 워디 구 그냥 텐트를 칠 수 있었시유.

대한국민의 따뜻한 마음씨, 최고.

땀범벅이 된 난닝구를 빨구 있었쥬. 부부동반으로 지나가시던 아지메 왈, “머시마 가 우예 빨래를 하노? 이 도.”

6. 불갑산, 가물가물, 1984년쯤

산행 후 텐트를 펼치는 디, 쩌그서 부르더라구 유. “비가 내리는디, 워찌 한 데에서 잔당가? 빈 방 이 있응게, 여기서 유하소.” 그 집 초등핵교 아들 왈, “처음 만나는 사람인 디유?”

174

ㅣ 신일 5회 동기회

단결!


북한산성 문화답사 - 300여 년 전 숙종이 다닌 길을 따라 -

서광석

숙종과 북한산성

을 분담해서 성을 쌓았으며, 성곽의 총길이는 약 12.7㎞에 달했다. - 훈련도감(수문~용암문)

1674년 숙종 즉위 첫해부터 북한산성 축성과

금위영(용암문~대남문) 어영청(대남문~수문)

관련된 찬반 상소문이 올라오는 등 오랫동안 논

산성 공사를 하면서 중요시되는 요충지에 중흥

란이 일자 숙종은 “도성은 지킬 수 없음을 익히

사 외에 12개의 사찰이 새로이 증설되었고, 그

헤아린 것이다. 북한산성의 축성은 백성과 더불

중심 사찰은 중흥사요 그 주지가 성능이다. 이

어 함께 지키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결단코

절은 승병의 군영이라는 뜻으로 치영(緇營)이라

그만둘 수 없다”라고 밝혀 논란에 종지부를 찍

불렀고 주지승은 팔도 도총섭(八道都總攝)을 겸

고, 숙종 37년(1711년) 4월 3일부터 그 해 10월

하였다. 아울러 승병 350여 명을 통솔하고 주둔

18일까지 약 6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많

케 하여 전국 사찰 승려들이 교대로 산성을 수

은 반대와 경제적인 악조건을 극복하고 완성하

비하게 하였다.

였다. 이는 숙종이라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임 금과 金宇杭(김우항) 金重器(김중기) 같은 현신,

북한지(北漢誌)

성능(聖能)이라는 걸승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장기간 축성 논란이 있었던 만큼 숙종은 공사를

북한산과 북한산성에 관한 기록에는 무엇이 있

신속히 끝내기를 원했다. 전국에서 부역에 동원

는가? 삼국사기나 고려사에도 나오기는 하지만

된 인원은 승군 등 총 10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

너무 미미하고, 조선왕조실록과 비변사등록에

다.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3군문이 구역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의 기록이 수록되어 있어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175


문 등 6개의 암문, 그리고 중성문 등 총 14개의 문으로 이루어졌다. 군사 지휘소인 동장대, 남 장대, 북장대의 3개의 장대가 있으며 그 중 동 장대가 북한산성의 총 지휘소 역할을 했다. 그 밖에 식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물 99개소와 저수지 26개를 지어 북한산성 축성 공사를 대 략 마무리 했다. 한편, 행궁은 유사시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는 어느 정도 의문을 풀어 줄 수 있기는 하지만 너

별궁이다. 북한산성 행궁은 숙종 37년(1711년)

무 방대하고 번잡하고 종합적으로 북한산성의

7월에 행궁 자리를 정하고 8월에 착공하여 이듬

이모저모를 살필 수 있는 문헌은 역시 성능(聖

해 5월에 130여 칸의 규모로 완공됐다.

能) 스님이 편찬한 북한지이다. 산성의 축성과 여러 사찰의 증설부터 승병의 모

숙종이 다닌 길을 따라

든 관리를 시종일관 감독한 성능은 영조 21년 (1745년) 북한산성을 하직하고 남쪽 화엄사로

2019년인 올해가 북한산성을 축성한 지 308년

내려간다. 성능은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여 한

이 되는 해다. 그래서 그 옛날 숙종 38년(1712

권의 책을 편찬하였다. 14개 항목으로 분류한

년) 5월 숙종이 북한산성을 행차하신 그 길을

이 책이 북한지이며 북한산성의 역사 지리서이

따라 북한산성에 오르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다. 30년이 넘는 긴 세월을 북한산성과 함께 살

고 할 것이다.

아온 노스님이 남긴 마지막 선물인 셈이다.

1712년 5월 숙종은 친히 북한산성을 둘러보러

북한지에 소개된 북한산성의 기록은 다음과 같

왔다. 창덕궁을 나와 지금의 독립문을 지나고

다.

돝재(지금의 독바위역 근처)를 넘어 북한산성의

북한산성의 전체 둘레는 12.7㎞에 이르고, 성

정문인 대서문에 들어섰다. 이때 숙종은 대서

곽시설은 수문 1개소와 북문, 대동문, 보국문,

문 양쪽 산인 원효봉과 의상봉 사이가 너무 낮

대성문, 대남문, 대서문의 6개 성문과 청수동암

고 넓으니 중성(重城)을 쌓지 않으면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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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는 의견을 내고 빠른 시일 안에 중성을 축조하 라는 어명을 내렸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행차 에 훗날 영조가 따라왔는데 그때 영조 나이가 18세였다. 대서문을 지나 포장된 길을 10여 분 가량 오르 면 넓은 주차장이 있는 곳이 나온다. 이곳이 얼 마 전까지 산성마을이 있었고, 옛날에는 하창 (下倉)이 있었던 하창마을이다. 이곳에서 다리 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가면 북문이나 백운대

함을 느끼게 한다.

를 오르는 길이요,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노적사

산영루에서 조금만 더 오르면 산성의 총지휘 본

와 태고사 길이다.

부인 중흥사 터가 나타난다. 현재 중흥사 중창

태고사 가는 길로 10여분쯤 오르면 성벽은 허

이 한창 진행 중에 있다. 중흥사 터 아래쪽에는

물어졌지만 문은 옛 모습 그대로인 성문이 눈에

중창(中倉)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띈다. 이 성문이 북한산성을 축조한 후 산성의

여기서 왼쪽 길은 태고사로 향하는 길이고 오

내성으로 축조한 중성문이다. 중성의 정문은 중

른쪽 길은 행궁으로 오르는 길이다. 오른쪽 길

성문이며, 문 옆에는 행궁과 부왕동에서 내려오

로 10여분 오르면 계곡 오른편에 상창(上倉)터

는 계곡물이 빠져나가는 수구(水口)가 있다. 중

가 나오고 상창터에서 오른쪽으로 난 좁은 산길

성문과 수구 사이에 조그만 방형의 암문이 무너

을 잠시 오르면 행궁이 나타난다. 행궁은 터가

진 채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당시 시구

좁아 일부는 계곡 위에 지어졌으며 이로 인해

문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1915년 북한산 홍수 때 전부 무너졌다고 한다.

중성문을 지나 잠시 오르면 팔도 도총섭의 성덕

숙종은 이 행궁에서 하룻밤을 유하고 다음 날

과 선정을 기린 20여 개의 탑비가 나타나고 그

대동문을 거쳐 동장대가 있던 시단봉에 올라 북

아래쪽에는 산성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계곡에

한산성을 둘러보았다. 오늘날 동장대에 올라 산

세워졌던 산영루 터가 있으며, 산영루 누각의

성을 바라보면 옛날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주춧돌과 돌기둥이 널 부러져 있어 세월의 무상

숙종이 시단봉까지 올라온 기록은 있지만 어느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177


코스로 하산하였는지의 기록은 없다. 하지만 추

하여 영건청(營建廳)을 두고 호조판서 김수항과

측하건대 대성문을 거쳐 하산하여 창덕궁으로

공조판서 이언강을 주관 당상(主管堂上)으로 하

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300여 년

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목재는 산성 밖의 삼천

전 숙종이 다녀갔던 산성 길을 따라 이 가을 한

동에서 가져다 썼다.

번 걷는 것도 꽤 운치 있는 산행이 되지 않을까

이때의 행궁은 내전(內殿)과 외전(外殿)으로 이

생각된다.

루어져 총규모가 124칸에 달했던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내전은 정전 28칸과 좌우 각 방 · 청

행궁(行宮)

(廳) · 대문 · 수라간(水刺間) 등 부속건물 25칸 이며, 외전은 정전 28칸과 외 행각 방(外行閣房)

조선 숙종 때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 북

· 누 · 청 · 곳간 · 대문 등 부속 건물 33칸으로

한산성 내에 지은 궁터이다. 이궁(離宮)이라고

이루어졌다. 현재는 내·외전으로 추정되는 건

도 불리는 행궁은 임금의 임시 숙소로, 임금이

물터와 축대 일부, 좌우의 담장터 등이 남아 있

거처하는 궁의 격에 맞추어 지은 관아건축이다.

고 건물터 곳곳에 기와조각들이 널려 있다. 내

이곳 행궁은 조선 숙종 37년(1711) 5월 북한산

전 터에는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초석 열이

성 축성을 감독하던 김우항(金宇杭)이 산성 내

정연하게 나타나고 있고, 기단과 석축의 흔적이

에 행궁을 지어야 한다고 진청하여 허락을 받

일부 남아 있다.

고 다음 해에 완공한 것이다. 험한 지세를 감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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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손종득 詩

Roy D Son 당산 전철역 승강장에 꾸역꾸역 어둠이 밀려오고 나에게도 어둑어둑 외로움이 밀려온다

2호선 전철은 빠르게 다가오지만 실적 없는 영업사원의 허전함은 느리게 반응한다

내 몸에서는 잡초 냄새가 난다 Alcohol에 젖은 잡초 Alcohol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게 아니고 막걸리 소주가 마음속 아픔을 헤집기에 그냥 흔들어 보는 거야, 잡초를 정신 차리고 똑바로 걸어가려고 말이야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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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일기 智異山日記

여운철

물이 맑은 ‘가네소’ 부근 너러바회에 앉아 막 걸리에다 간단한 요기를 했다. 흐르는 옥 같은 물에 머리를 감고, 발을 씻었다. ‘세석산장’까지는 멀고 숨이 찼다. 오후 4시 쯤 도착했다. 나는 이 코스가 평생 두 번째지만, 徐군은 올해에만 지리산 종주가 네 번째란다. 2017년 6월 1일부터 3일까지, 나의 오랜 친구

세석에서의 저녁은 그가 준비한 떡 불고기에

인 서광석(徐光錫) 군과 지리산을 횡단했다. 지

다, 내가 들고 간 소주 2병과 은제 복숭아잔 2개

리산의 한신 계곡으로 올라가 세석 산장에서 일

에 따라 마셨다. 하나는 조선시대 오리지널 은

박 후, 중산리 계곡으로내려와 진주, 통영을 거

잔(銀盞)인데, 내가 아끼는 물건으로 이 날 두 번

쳐 욕지도에서 또 일박했다. 욕지도에서 아침

째 쓰는 것 같다.

산책한 후 배를 타고 나와 통영 구경도 했다. 이 글은 2박 3일의 그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야외에서 저녁 먹을 즈음, 까마귀 몇 마리가 산 장의 난간에 앉았다.

1일 오전 11시쯤, 둘은 백무동에서 버스를 내

까마귀의 산 배경에는 아직 분홍빛의 철쭉이

려 한신계곡으로 올랐다. 계곡 입구 산장 겸 가

아름다웠고, 등성 너머로 바위산인‘촛대봉’이

게 주인 노파가 徐군을 반갑게 알아보며, 올라

보였는데, 다음날 새벽에 그곳에 올라가 일출을

가면서 마시라고 막걸리 한 병을 그냥 건넸다.

볼 참이었다. 날이 어두워져도 까마귀는 나뭇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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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지에 앉아서 ‘까악 까악’ 소리를 냈다. 푸른 하늘가에는 흰색 반달이 떠올랐고, 바람

달은 지고 까마귀 울며 별은 하늘에 가득한데 急風變雲對愁眠

은 급(急)해 흰 구름이 상하좌우 사방으로 모였

빠른 바람 급변하는 구름, 시름겨운 잠을 대하네..

다 흩어졌다를 했다. 이윽고 어둠이 찾아왔다.

智異山中歸蜀途

일찍 잠든 탓으로 새벽 3시경 잠을 깼다. 밖으

지리산 한가운데 귀촉도(소쩍새)

로 나오니 바람은 멎었고, 수십 억 개의 별빛과

夜半鳴聲到客棧

고요히 흐르는 은하수뿐이었다. 소쩍새 울음소

한밤중에 울음소리, 나그네 산장까지 들려오네..

리가 들렸다. 문득 당나라의 시인 장계(張繼)의 <풍교 야박(楓橋夜泊)>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새벽 4시 반, 둘은 랜턴을 켜고 촛대봉을 올

그는 오로지 이 詩 한 首만을 남겼는데, 이로 인

랐다. 5시 10분 해돋이가 시작되었다. 오랜만

해 고금을 통해 유명해졌다.

에 보는 장관이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적이 있 는 의유당 남씨(意幽堂 南氏)의 <동명일기(東溟

月落烏啼霜滿天

日記)>가 생각이 났다. (옛날에는 ‘의유당 김씨’

달은 지고 까마귀 울며 서리는 하늘에 가득한데

라고 잘못 알려졌었다)

江楓漁火對愁眠 강가 단풍, 고깃배의 불빛 시름겨운 잠을 비치네..

“급히 눈을 들어 보니, 물 밑 홍운(紅雲)을 헤앗고 큰 실

姑蘇城外寒山寺

오리 같은 줄이 붉기 더욱 기이(奇異)하며, 기운이 진홍

고소성 저 멀리 있는 한산사에서

(眞紅) 같은 것이 차차 나 손바닥 넓이 같은 것이 그믐밤

夜半鐘聲到客船

에 보는 숯불 빛 같더라. 차차 나오더니, 그 우흐로 적은

한밤중에 종소리, 나그네 뱃전까지 들려오네..

회오리밤 같은 것이 붉기 호박(琥珀) 구슬 같고, 맑고 통 랑(通朗)하기는 호박도곤 더 곱더라.”

나는 이 유명한 시를 패러디해서 또 한 首 읊 을 수밖에 없었다.

해돋이 전후로 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첩첩 능선은 가히 장관이었다. 중산리 계곡으로 내려

月落烏啼星滿天

오니, 徐군이 미리 예약한 택시 운전사가 기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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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있었다. 동호 강을 따라 내려가며 문익점

논개의 ‘의암’도 강 너머 멀리서 보였다.

의 목화시배지와 성철스님 생가를 지나쳤다. 그

....

의 집터에 지은 절 ‘겁외사(劫外寺)’ 건물들이 정

흐르는 강물은

말 겁나게(!) 들어차 있었다. 돌아가신 분이 봤

길이길이 푸르리니

다면 무엇이라 하셨을꼬? 그의 평생 화두, “이

그대의 꽃다운 혼

뭐꼬?(是甚麽?)”,,,

어이 아니 붉으랴

지리산 주변에는 자고로 ‘센 양반’들이 많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았던 것 같다. 함양 태수였던 최치원(崔致遠,

그 물결 위에

857~908?),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1331~1400), 조선 중기 도학의 맥을 잇는 일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논개>

두 정여창(鄭汝昌, 1450~1504), 깐깐한 백의정 승 남명 조식(曺植, 1501~1572), 우리 곁을 스

점심은 진주 시내 ‘천황식당’에서 소주를 곁들

쳐간 부처 퇴옹 성철(性徹, 1912~1993)과 빨

인 석쇠 불고기와 비빔밥을 먹었다. 열 평도 안

치산까지..

되는 작은 식당이지만, 식탁 등이 고색이 돌았

진주시에 내려 촉석루와 진주성을 멀리 바라 봤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는 처절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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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다. 90년 묵은 집이란다. 다시 버스를 타고 통영으로, ‘서호시장’의 난


전에 가서 멍게와 해삼에 맥주 한 캔 했다. 난

물 위에 어리어

전 주인 부부가 徐군을 엄청 반가워했다. 욕지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도行 3시 배를 탔다. 섬까지 가는 한려수도는 아 름다웠다. 날은 맑고 바람은 온화했다. 한산도,

창공에 빛난 별

비진도, 매물도... 다도해의 섬을 지나쳤다. 통영

물 위에 어리어

의 위대한 시인 청마(靑馬)의 시를 떠올려 본다.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깃발

내 배는 살 같이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바다를 지난다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산타루치아 산타루치아...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이윽고 ‘연화도’에 이르자, 이름대로 섬들이 연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잎, 꽃잎이 떠 있는 듯 했다. 통영의 시조시인 김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상옥의 <다도해> 가 이곳을 보고 지은 것은 아

아아 누구던가

닐까?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이제 막 솟아오른 반만 핀 꽃 봉우리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잠길 듯 둥근 연잎 떠 있는 물굽이로

유치환 <깃발>, 1939

잔잔히 흐르는 돛대 나비되어 숨는다.

나는 배 위에서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렸던(글

드디어 한 시간 반 만에 ‘욕지도’에 닿았다. 선

쓴이가 기억 안 난다) 한려수도 여행기에 나왔던

착장 바로 앞에 우리의 숙소가 있었는데, 이름

노래를 나직이 불러봤다.

이 좀 유치찬란한(?) ‘찬란한 부두 민박’이었다.

나폴리 민요인지 모르겠다.

모습도 약간 촌스러운 2층 집이었는데, 81세 노 인부부가 우리를 반겼다. 섬 일주 버스에 올라탔

창공에 빛난 별

다. 우리 나이 또래쯤 보이는 운전사가 운전하면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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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한다. 한참을 가더니, 운전사는 창밖을 보란다. 지금 고구마 줄기를 심는 분이 아무개 어르신인데, 욕 지도 고구마가 뭍의 것보다 배나 비싼 가격에 팔리는 특산품이란다. 버스를 밭 옆에 세워놓고 노부부와 한참이나 억센 사투리로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다시 버스는 달리고, 섬의 초등학교 얘기... 학 생이 24명, 선생님은 13명. 올해 2명이 졸업해 서 곳곳을 설명하는데 한마디로 ‘명 가이드’였

중학교에 입학했단다. 학교에서는 2명의 신입

다. 늘 싱글벙글, 인상이 좋았다.

생을 위해 “축, 누구누구 입학!”이라는 대문짝만

그는 정말 섬 구석구석 시시콜콜 모두 다 알고

한 현수막을 걸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또 몇 년

있었고, 설명도 정말 재미있다. 흔들리는 차 안

전 태풍이 몰아쳤을 때, 모든 전기시설이 파괴되

에서 그의 뒤통수와 큰 백밀러와 작은 백밀러에

어 송전탑 재건 등에 150억 원의 사업비를 전 주

비친 3면의 그의 모습을 핸드폰에 담았다.

민이 부담했단다. 어떻게? 섬 전체 “집집이 매달

이를테면, ‘삼녀도’ 절경에서 윤정희의 마지막

3,800원씩, 100년간(!)에 걸쳐 갚겠다”라고 섬

출연한 영화, ‘화려한 외출’을 몇 년도 찍었다는

주민들의 지혜를 모았다는 그의 설명에 승객들

것은 물론이고,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이 마을 출

모두 박수를 쳤다.

신 아무개 씨가 소개해서 언제 결혼해 파리에 몇 년 살았고 등등...

어느 집의 월남(越南) 며느리가 ‘하롱베이’로 찬탄했다는 먼바다를 보고나서야, 버스 일주는

6년 전에 그 부부가 이 섬을 다시 찾아 바닷

끝났다. 저녁은 포구의 한 식당에서 먹었다. 감

가에 무대를 설치하고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다.

성돔이 아직 철이 아니라서 고등어회를 시켰다.

TV에도 나온 적이 있다. 그때 친 곡명이 드뷔

역시 월남에서 온 자매가 서브를 했다. 회 3만 원

시의 <기쁨의 섬>,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등

짜리를 시켰는데, 얼마나 푸짐한지 남겼다. ‘할

이었다. 섬 주민 삼천 명 중 천여 명이나 모였었

매 바리스타’가 운영하는 유명한 커피숍에 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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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데, 벌써 문을 닫은 뒤였다. 돌아오는 길에 조그마한 안내판이 있었는데, 깜짝 놀랐다. 이중섭이 1953년인가 욕지도에 들러 이 그림을 남겼다고 그림을 컬러 프린트 까지 해서 세운 것이었다. 내 기억에 이 그림은 수년 전에 인사동 가람화랑에서 처음 공개되었 던 작품이다. 사방이 어두워지는데, 까마귀 한 마리가 전봇대 위에 앉았다. 이중섭의 전봇줄에

한 부두 민박’ 바로 옆에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앉아있는 그림인 <달과 까마귀>가 생각나서 셔

있었다. 해발 50m 정도의 숲이 그윽했는데, 안

터를 눌렀다. 이중섭의 ‘황소’ 시리즈를 포함한

내판을 보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메밀 잣밤나

대부분 그의 대표작은 통영에 살던 2년여 동안

무’ 군락지였다. 처음 보는 나무인데, ‘너도밤나

에 다 그려졌다고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무’의 일종이라고 한다.

마치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아를 時代’ 2년 동 안에 불후의 명작이 다 쏟아졌듯이... 내가 좋아하는 <달과 까마귀>도 그의 통영시 대(1952 ~ 1954)의 작품이다.

산책로를 지나 어느 집 담장 옆에 놓인 붉은 ‘고무 대야[盥]’ 안을 우연히 들여다봤다. 어릴 때 논바닥에서 본 뒤 몇십 년 만에 보는, 신기 하리만큼 작은 개구리 여러 마리가 오글거리고 있었다. 궁금해서 집에 와 인터넷 조회를 해봤

다음날 아침 6시, 아침 산책을 나갔다. ‘찬란

다. 전 세계에 7.7mm 내외의 개구리가 보고되 어 있는데 무슨 종명(種名)인지는 안 나온다. 그 런데 이 작은 생명들이 어떻게 고무 대야 안에 들어갔을까?

‘좌부랑개(座富浪浦)’라는 포구 옆 고샅은, 우 리나라 ‘근대 어촌의 발상지’라고 한다. 일제 강 점기 한창 때는 인구가 3만 명이 넘었다.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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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자체가 왜풍이 풍긴다. 벌써 19세기 말엽

다시 통영에 배로 도착했다. 문화와 전통의 항

부터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생선을 잡고, 일본

구도시, 통영항만이 눈에 들어왔다.

에 중계해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당시 ‘토미 우라(富浦)’라고 하는 자가 유력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작은 도시에서 근현대의 수많은 문 화예술인의 배출은 무슨 까닭일까?

100m 이내 골목 안에 주재소, 우체국, 경찰

청마 유치환 (柳致環, 1908 ~ 1967) 시인과 이

서, 양조장, 당구장, 목욕탕, 심지어 유곽(遊廓)

영도(李永道, 1916 ~ 1976) 시인의 20년이 넘

도 있다. 촌스러우면서도 정겨운 모습이다. 특

는 ‘플라토닉 러브’는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이한 것은, ‘간독’이라 하는 고등어 염장 지하

5천 여 통의 편지가 오고갔다. 이들의 이야기는

시설이었다. 이 곳 ‘간고등어’는 경상도는 물론

그들의 사후,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

만주까지 수출되었다. 간독 앞집에 사는 억센

는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그들의 애틋하고 순

사투리의 노파를 만났는데, 자신이 여든이 넘

수한 사랑이 이와 같은 시를 낳았다.

었고, 이 간독이 친정아버지가 지은 것이며, 평 생 이 동네를 못 벗어나고 있다고 하는 내용 같

그리움/ 유치환

았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오전 9시, 배를 타고 다시 통영으로 향했다. 아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름다운 욕지도 섬 포구의 갈매기도 우리의 이별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을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한 시간 반이 지나

날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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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통영은 박경리(朴景利, 1926~2008)의 <김 약국의 딸들>이라는 소설의 배경이다. <토지(土 地)>라는 대하소설을 아직 끝까지는 못 읽어봤지 만, 대단한 소설이다. 그의 외동딸 김영주는 불 화를 전공하는 미술 사학도이고, 그 사위는 <오 적(五賊)>의 시인, 유명한 김지하(金芝河, 1941~ ) 이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사상계』 잡지 를 들고 와서 이 시를 읽어 주면서 흥분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또 하나의 러브 스토리, 시인 윤동주(尹東 柱, 1917~1945)가 가장 흠모했던 백석(白石,

가무의 대가 하규일(河圭一, 1867 ~ 1960)에게

1912~1996)이라는 시인이다. 백석의 첫사랑

배우고,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

이 바로 ‘난’이라는 통영 여자였는데, 그녀 때

다. 그녀를 찍은 그림엽서를 인터넷에서 찾아

문에 세 번이나 왔다고 한다. 충렬사 앞에 ‘백

냈다.

석 시비(詩碑)’가 있다. 그는 한마디로 ‘모던 보

1939년 백석이 일제를 피해 만주로 간 게 영

이’에 대단한 미남이었다. 평안도 오산고보, 일

영 이별이 되고 말았다. 해방되자 그는 북한의

본 청산학원의 영문학과를 나와 조선일보에 근

조만식(曺晩植, 1883~1950) 선생 아래 눌러

무했다. 통영의 ‘난’과 헤어지고 실의에 빠진 그

앉았다. 김일성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하다가

는 함흥에서 18세의 기생 ‘진향(眞香)’을 만난다.

1995년 평양에서 83세에 죽고, 자야는 서울 요

‘자야(子夜)’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정 ‘대원각’ 여주인이 되어 1999년 83세로 세상

이 기생이 바로 천억 원의 전 재산을 법정(法

을 떠났다. 1995년 『내 사랑 백석』을 출간했으

頂, 1932~2010)에게 시주해 성북동 ‘길상사’를

며, 위의 사진들이 그들이 만났던 젊었을 때와

세운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이다. 그녀는

말년의 사진들이다. 아, 인생무상이다!

일찍이 집안이 망하게 되자, 당시 궁중 아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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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金春洙, 1922~2004)도 통영에서 났 고, 그의 문학 기념관이 이곳에 있다.

거리가 있다. <청자부>, <백자부>가 특히 유명 하다. 그는 조선백자를 무던히도 좋아해서 인사 동에서 골동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백자부> 의 한 구절이다.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불 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 날은 이리 순박(淳朴)하도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尹伊桑, 1917~1995) 은 유년기부터 통영에 살았다. 1957년 이후 파 리와 베를린에서 작곡을 했다. ‘동백림 간첩사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건’으로 잡혀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남북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한에서 모두 떠받드는 음악가이기도 하다. 통영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에 그의 이름을 딴 음악당과 기념공원이 있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나비의 미망인>, 오페라 <심청>외에 많은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작품이 있는데, 굉장히 동양적이고 선(禪)적, 도 가(道家)적 깊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우리들은 모두

내게는 난해하고 따분할 뿐, 그의 현대 음악은

무엇이 되고 싶다.

영 재미가 없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1959)

이중섭(李仲燮, 1916 ~ 1956)의<흰소>, <황소>, <달과 까마귀>등 대표작이 그의 통영 시대 2년 간에 제작되었다. 이중섭의 대표작 <소> 연작

김상옥(金相沃, 1920 ~ 2004)도 교과서에 나

이 통영에서 그려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

오는 시조 시인이다. 통영 중심지에는 김상옥

지 않다. 이중섭은 젊은 시절부터 소에 푹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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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가지 있다. 남의 나라와 다른 것이 있다면, ‘칼 칼한 맛’, ‘시원한 맛’ 그리고 ‘곰삭은 맛’이라고 생각한다. 반찬이 10가지 정도 나왔는데, 어느 서양인이 표현한 것처럼 그림 그릴 때 쓰는 ‘팔 레트’ 같다. 단지 유감스러운 것은 다 ‘플라스 틱 막그릇’이라는데 있다. 일본은 어느 시골구 석의 우동 집, 소바 집에서도 그릇은 다 ‘도자기 를 쓰는 선진국’이다. ‘멸치 회’에다 이곳 막걸 리를 곁들였다. 커억! 져 지냈다. <복사꽃과 새>는 올해 초, 나의 사

우리는 택시를 5만 원에 세 시간 빌려서 ‘미륵

부 이태호 교수가 기획한 노화랑의 ‘한국 미술

도’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달아 공원’ 앞바다

사의 절정 전’에 이중섭의 대표작으로 출품되기

의 많은 섬 위로 지는 일몰이 장관이라고 한다.

도 했다. 벚꽃이라고들 하는데, 내 눈에는 복사

근처에 회원권이 비싸기로 유명한 ‘ES 리조트’

꽃이다. 떨어지는 꽃잎과 바른쪽 위의 노랑나비

가 있었는데 지나치기로 했다. 좋은 이름 다 두

도 재미있다. 그는 닭도 많이 그렸는데, 두 마리

고 왜 ‘ET’처럼 들리는 ‘ES’ 리조트라고 하는 이

가 봉황처럼 공중에 날아 희롱하는 <부부>의 구

유를 모르겠다...

도를 보라!

‘풍화리 50리 길’을 택시로 돌았다. 섬, 바다, 굴 양식장 풍경이 아름다웠다.

어휴, 통영의 인물 소개가 너무 길어졌다. 화 가 전혁림(全赫林, 1915 ~ 2010)이나 인간문화

시내에 들어와서, ‘세병관(洗兵館)’을 가자고

재 자개장 김봉룡(金奉龍, 1903 ~ 1994) 등등

했다. 내가 처음 구경하는 곳이다. 17세기 초에

의 소개는 이만 생략해야겠다.

지어진 정면 9칸의 큰 건물로서 보물에서 국보

이윽고 통영에 도착해 아침을 먹었다. 유명한

로 격상된 건물이다.

서호시장 골목의 ‘만성 복집’에 가서 ‘졸복 탕’

‘洗兵館’ 현판은 36대 통제사 서유대(徐有大,

을 시켜 먹었다. 우리나라 음식의 특징은 여러

1732 ~ 1802)의 글씨라고 한다. 집에 와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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良器也. “旣張我弓 蕩掃凶鋒”, 弓之用大矣. 余受 節之明年夏, 爲亭於堂之西, 以爲射鵠之所焉. 盟 山成削, 誓海茫瀁, 洗劒解弓之遺, 躅槩可想矣. 羹 墻之慕, 當何如哉? 旣以名亭, 則此非帶鞬載櫜之 謂也. 戍樓殘月弓影尙掛, 舍是弓而奚爲遂, 以扁 掛弓而竊寓感慕之伔云. 戊寅仲夏.

져 보니 그는 대구서씨(大丘徐氏)이니, 같이 간

(괘궁정: 옛날 우리 조상 충무공께서 임진, 계사년의 어

徐군의 직접 선조인지 모르겠다. 세병관의 ‘세병’

지러움을 만남에 시를 지으시니, “근심하는 마음으로 뒤

은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두보의 시 ‘세병마(洗兵

척이는 밤, 쇠잔한 달은 활과 칼을 비추는구나”라고 하

馬)’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내가 여

셨다. 아! 활이라는 것은 군대에서의 훌륭한 기구다. “내

태껏 본 것 중에서 가장 큰 현판인 것 같다. 글씨

활을 당기니, 흉악한 칼날들이 소탕(掃蕩)한다”하니, 활

도 시원하고 내용도 철학적이고 시적이다. 徐군

의 쓰임은 대단하도다. 내가 통제사로 임명된 이듬해 여

이 멋지게 내 사진을 찍었다.

름, 당의 서쪽에 정자를 짓고 그곳을 활 쏘는 곳으로 삼

마루에 올라 건물을 살폈다. 가구(架構)가 시

았다.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은 산에 맹세하고, 넓고 넓

원시원하고 장대했다. 대들보 위에 범상치 않은

은 바다에 맹세하셔서, 칼을 씻고 활을 걸어두려고 남

현판 두 점이 걸려 있기에 읽으려 했지만, 너무

기신 행적은 상상함직한데, 지극한 추념(追念)은 어떻

멀어서 가물가물했다. ‘괘궁정(掛弓亭)’... ‘활을

게 함이 마땅할까? 이미 정자에 이름을 붙였으니, 이것

걸어놓는 정자’라는 뜻인데 궁금했다. 집에 와

은 활집과 칼집을 두르거나 얹어두자고 말하는 것이 아

서 인터넷에 물어보니, 내용을 해독해 나오는

니다. 수루(戍樓)의 쇠잔한 달에 활 그림자는 아직도 걸

사이트가 있었는데 약간 부정확했다. 나는 인터

려 있으니, 이 활을 놔두고 무엇으로 하겠는가? 결국 괘궁

넷의 잘 찍힌 도판과 대조해 구두점을 넣고 오

(掛弓)으로 편액을 걸고 감모(感慕)의 정성을 부친다. 무

탈자를 보완해 소개한다.

인(戊寅: 1698년) 중하(仲夏)에)

掛弓亭; 昔我先祖忠武公, 當龍蛇攘之時, 有詩

1698년경의 통제사를 조사해 보면, 이 의미

曰, “憂心轉輾夜, 殘月照弓刀” 噫, 弓者軍實中一

깊은 글을 짓고 아름다운 글씨를 쓴 인물이 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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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혀질지 모른다. 세병관을 보면서 의문점이 하나

딱 2천 원이 모자랐다. 잔 돈 천 원이 있었는데,

생겼다. 건물의 규모에 비해 용마루 끝의 ‘망새

徐군을 잘 아는 주인아줌마가 천 원마저 깎아주

(鴟尾)’가 너무나도 작다는 점이다. 세병 관내에

니 잔액은 ‘0 원’으로 마감했다. 내 원 참!

는 각종 공방들이 잘 복원되어 있었고, 인간문 화재들이 시연해 보였다.

얼마 전 술좌석에서 아호(雅號) 얘기가 오고 갔 었다. 이번 여행을 끝내면서 나의 50년 지기인 그의 호를 지어주고 싶었다. 내가 처음 벗의 아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 세병관 입구에 서있는

호를 지어준 것은 20년 전쯤, ‘청우당(聽雨堂)’

‘벅수’가 잘 가라고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원래

양인집(楊仁集) 아형(雅兄)이요, 이번이 두 번째

의 자리에서 25m 정도 이전한 것이라고 한다.

인 셈이다.

이번엔 통영 중앙시장에 들러 ‘통영 김밥’을

이번 여행을 끝내고 귀가하니, 삭신이 쑤시고

사 가지고 인근 식당에 들어가 뼈다귀 해장국

정신이 아득하다. 좋은 추억을 잊기 전에 기록

에 곁들여 먹었다. ‘꿀빵’도 노점에서 사서 한

하고자, 오늘 온종일 PC 앞에서 글을 썼다. 인

개씩 먹었다.

터넷이 부정확한 것도 있지만 자료와 도판을 절

드디어 오후 3시, 서울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반 이상을 도와줬다. 나는 인터넷 정보가 대체

실었다. 4시간 걸려 남부 터미널에 도착해 양재

적으로 쓸 만하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우리 둘

의 김치찌개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는

이서 찍은 것이고, 인터넷 도판도 서너 장 이용

육회에 막걸리를 한 병 시켰다. 며칠 만에 보는

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아래의 시 한 수로 이

‘서울 장수 막걸리’였다. 우리가 늘 하는 건배사

글을 끝낸다.

가 있다. “인생 기하, 대주 당가!” 그러고 나서 시 원한 냉면을 시켜 먹었다.

疊疊智異山 산첩첩 지리산 溶溶鏡湖江 물겹겹 경호강

아, 2박 3일 짧은 일정이었지만 徐군의 진행은 자(尺)로 잰 듯 반듯했고, 초(秒) 시계처럼 정확

點點多島海 점점점 다도해 靑靑兩人心 푸르고 푸른 두 마음

하고 빈틈없이 자연스러웠다. 회비도 각자 30 만 원씩 걷었었는데, 마지막 식사 값을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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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정한문 동기 유족 돕기 기억 되살리기 유재석

편집위원장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친구들에게 보냈던 메일과 함께 모금했 던 기록들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서 많은 기록들이 컴퓨 터에서 사라지고 일부만 남아 있어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보고를 하지 못 하게 되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정성껏 도와준 친구들에게 고맙 다는 말과 함께 제대로 기록을 남기지 못한 점 매우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정한문은 태안에서 약국을 하다 1990년대 중반 약국을 정리하고, 기원으 로 소일하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아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2000년 5월 건강이 아주 어려운 상태로 서울로 이송되어 왔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 박용두, 장남선, 박형섭 등 친구들의 도움으로 삼성의료원과 서울 중앙 병원에서 진료를 하였으나 끝내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이때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어서 우선 3-8반 친구들을 중심으로 한 달간 한시적으로 모금을 하였었습니다. (2000년 8월부터 미국에서 1년간 지냈는데, 그 기간 중 미국에서 컴퓨터를 도난당해 모든 기록을 분실하여 모금액과 참여자 명단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정한문이 타계한 이후 당시 대학교에 입학한 큰 딸과 초등학생이던 둘째 딸의 학비를 일부라도 도와주기 위하여 2000년 12월부터 권오양과 박용 두가 중심이 되어 본격적으로 모금을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10년을 목표로 모금을 시작하여, 매년 600만 원의 학비를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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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습니다. 이후 둘째가 고등학교 졸업하는 2011년 말까지로 연장하여 모금 및 학비 전달을 완료하였습니다. 정한문의 부인은 고대 동문들의 도움으로 고대구로병원에 취업을 하였다 가 현재는 정년퇴직을 한 상태이며, 큰 딸은 공군사관학교 도서관에서 사 서로 근무 중입니다. 둘째 딸도 대학을 졸업하고 동기의 주선으로 취업하 였다가 퇴직하고 현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준비 중에 있습니다(2019 년 2월 현재). 11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같은 마음으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유족을 대신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모금 외에도 여러모로 마음을 써 주신 분들께도 역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래에 그동안 도와주신 분들의 명단을 첨부하였습니다.(최선을 다하여 남겨진 기록을 확인하였으나, 혹시 실수로 누락된 사람이 있지 않을까 걱 정이 됩니다. 혹시 실수가 있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금 참여자 명단> 권오양, 김만수, 김병돈, 김세권, 김영대, 김용성, 김윤갑, 김준동, 김지훈, 김철수(8반), 김한철, 김해만, 김홍기, 박동진, 박영원, 박용두, 박인호, 박형섭, 서광석, 서용무, 소영 성, 손창수, 송석진, 신동훈, 오병주, 유기철, 유재석, 유재훈, 이광세, 이덕렬, 이서철, 이 운행, 이정균, 이창수, 故이철주, 장남선, 장동영, 전영식(5반), 주면길, 차달수, 차승균, 한석모, 한장섭, 허철, 황순모, 광화문모임, 차사랑, 5회동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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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가이도오 요오꼬 (북해도 여행) 유태한

키레이나 동기 7인이 북해도 정복 길에 올랐다. 아오이 소라(파란 공기)와 구린 개시끼(경치)들(시레토코의 5 호수의 고가 목도와 낯선 오호츠크 해변 과 아사히카와의 청호, 로프웨이의 만년설, 라벤다 향의 대 정원, 아칸호의 족탕과 구시로행 농도 등)이 말문을 막았으나 아메(비)를 잘도 피해 다녔고, 노미모노(먹거리)와 야생동물 여우 등을 정복하면서, 오호츠크해와 북방열 도와 태평양까지 보고 왔다. 숯불 바비큐 파티에서는 다양한 사케도 밤새 날러왔고, 다양하고 신선한 스시, 특히 도꼬로의 호타테(가리비), 샤리초 해변의 하모(갯장어), 아바라 시 성게 회덮밥, 그리고 소야목의 도리(닭) 덮밥 등은 물론, 가니(게)는 버꾹 상의 세밀한 조각 능력 덕분에 생애 먹어대기 호물호물 압권 기록을 수립 하면서 최종적으로 오차즈케까지 끌려 나왔답니다. 가나자와 호반 초록 숲의 방갈로는 (서울) 열대야를 잠재우며 우리들 맘 과 가슴까지 시원하게 단번에 사로잡으면서, 때론 칼바람같이 휘감아 도는 초여름 강추위의 피서는 누구는 밤새 싸온 옷 다 입게 하거나 렌터카로 몰 아냈으나, 키 토우스 삼림 공원과 아바시리 텐 토랜트에서, 또한 온천에서 의 도모다찌(친구들)의 정겨운 죠단(농담)은 밤낮으로 딸랑 전쟁을 방불했 고, 코 고는 소리와 낯선 잠자리로 단잠은 다소 설쳤지만, 그 느낌만은 어느 때보다 가며오며 즐겁고 상쾌 유쾌하기까지. 면책특권 오야붕 대총과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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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짱상 그리고 세기의 동전 왕 외에는 피곤한 줄도, 불만도, 짜증도 젠젠( 전부) 모르거나 없었으나. 다만 너희 애 들은 자는 시간 빼면 뭐 남냐? 눈 뜨면 먹고 참 단순하게 산 다는 것과 월드컵 단체응원도 못해 본 것은 좃도(조금) 아쉬웠고, 온천에서 덥히고 나와가 후라노 청과물 시장 앞에서 마그노날도냐? 돈부리 덮밥이 냐? 아침메뉴 고르다, ‘쿵’ 하며 발생한 경미한 기쓰와 또 후라노의 오이루 앵꼬 사건, 아바시리에서의 쇼 우쓰이(小水)의 용의자 사가쓰(탐색)를 빼고 는 다음(구체구)을 기약하며 서울역 티원에서 해산했다. 단결 1806종군기자 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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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삼성

윤상욱

“하이! 삼성” 하고 지나치며 아는 동네 아이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나도 “하 이” 하며 맞장구를 치고 손을 흔든다. 환갑을 넘긴 늙은 내가 십 대 아이들 과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를 하니 이상한 일이 아닐까?

나는 미국에 와서 계속 30년 넘게 건강을 위해, 아니 재미로 농구를 하였 다. 우리 때 ‘신일’ 하면 농구로 유명했고, 나 또한 그 덕에 농구를 좋아해서 지금까지 즐기고 있다.

이 나이에도 활기차게 애들과 농구를 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조 그만 교회의 목사로 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욕심부리지 않고 주어진 삶 에 감사하며 사는 소시민이다.

내가 사는 버뱅크에는 많은 공원과 체육관 역시 여러 개 있다. 지금은 주로 체육관에서 농구를 많이 하고 있지만, 몇 년 전 만해도 동네 공원에서 애들 과 농구를 많이 했다.

그때 애들이 내 이름(상욱) 발음이 어려워 그냥 한 때 근무했던 ‘삼성’을 내 이름으로 대체해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삼성’으로 알려지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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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고, 나와 놀았던 애들은 나를 자연스럽게 ‘삼성’으로 인사했고, 가끔 어른 이 된 친구들조차 차를 타고 가면서 나를 보고 ‘삼성’ 하며 아는 체를 했다. 그러면 나도 놀라며 유명 인사라도 된 듯 기분이 좋다.

어떤 고등학생은 내가 ‘삼성’이라고 이름을 소개하자, 내가 삼성전자의 주 인이냐고 물었던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하여 나는 ‘삼성’ 때문에 인사(?) 가 되고 삼성전자는 나로 인해 광고효과를 돈들이지 않고 보고 있으니 내 게 상이라도 줘야 되지 않을까 싶다.

내 이름은 ‘삼성’, 오늘도 영원한 ‘삼성맨’으로 국위를 선양하는 나는 애국 지사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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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식 詩

나팔꽃과 둥굴레 산다래가 익던 지난 가을날 고라니길 따라 산길 저편 칙칙하게 쓰러진 모습이 하도 처량해서 나들이 같이할 친구 있냐고 묻곤 했지 걱정스런 표정 쓸쓸히 미소만 짓더군 흰 저고리 보라색 치마 즐겨 입는 애교덩이 여자는 어떠냐고 알밤 터지는 소리에 산꿩 놀라 추억 남긴 가을 떠날 즈음 인적 없는 빈산 외로워 꽃무늬 화분에 담아 그저 겨울만 나게 했네 동구 밖 느티나무 집 울타리는 수줍은 처녀가 있지 아침나절 환하게 웃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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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잠 하품하는 둥굴레 곁에 두고 그저 한번 만나면 어떠냐고 눈 오는 산 바람 부는 들판 보며 봄이 오길 기다리면 어떠냐고 내년 봄에는 다래나무 새순 나오는 고향처럼 돌아가자고 벚꽃 잎이 바람에 무수히 지던 날 향기 많은 라일락은 아니어도 그 흔한 꽃잎 하나 없는 가난한 사내가 맘에 드는지 그녀가 오늘 아침 둥굴레 어깨위에 여린 손 살짝 얹어놓고 방긋이 웃으며 사랑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기적처럼 오는 거라고 보랏빛 웃음으로 참 환한 얼굴이더군

베란다 화분에 자란 둥굴레와 나팔꽃을 보며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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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인, 아름다운 사람들

윤호영

백 년 큰 뜻 모아 미아리 산 13번지에 숭고한

꿈에 나타난 대리석같이 차가운 하나님의 손을

가르침의 터 잡은 신일, 우리는 ‘그대’라 부른

깨달은 작은 고사리들이 상실과 불의의 시대에

다. 거기 붉은 얼굴빛에 빼어난 눈, 반짝이는 아

맞서 우리가 배우고 익힌 대로 광화문 네거리로

름다운 아이들이 모였더라. 골리앗도 두려워하

달려가 외쳤다.

지 않는, 머잖아 온 누리에 유비쿼터스로 자라 날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났더라. 이 아이들은

암울한 시절 1980년 5월, 요트 하나로 작은

해일같이 닥쳐올 알 수 없는 두려움의 시간들

국토를 떠나 1만 2천 km나 되는 태평양을 건너

도, 저 검푸른 마르바덴 숲 속 새벽녘 스산한 안

75일 만에 선망의 땅 산타모니카에 다다른 그대

개도 겁내지 않는 용기가 있더라.

신일인들은 진정한 도전자였다. 보이지 않는 곳 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민초民草와 함께, 나

1973년 4월 어느 날 국사 수업시간, 교실 앞문 이 벌컥 열리더니,

약한 발목과 시린 무릎으로 매일 아침 좁아지 는 어깨를 보듬으며, 땀 흘리고 즐거이 노래하

“야! 너희들은 신일인信一人 아니야?”

며, 일하는 이타利他의 사람들 위대한 이름, 신

당찬 외침에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서

일인이여!

던 친구들과 함께 ‘신일인이 이렇게 하냐?’고 꾸 짖는 선생님을 아랑곳하지 않고 교문을 박차고

우리는 자유인이다.

나와 4.19 탑에 뜻을 모두었던 어두운 시대를

그리하여 자유의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함께 아파한 신념의 사람들이었다. 에스더 여왕

참회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참 용기의 사람

200

ㅣ 신일 5회 동기회


들 신일의 아이들이여,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할 길, 사람이 덜 간 길, 바로 그 길을 우리는

슬피 곡哭하면 함께 울어주며, 울리는 꽹과리가

가자!

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다. 소리 요란한 빈 수레가 멋쩍어 먼동 트는 새벽

오늘도 두 갈래 길에 서서, 마음 저 깊은 곳으

마다 일어나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치우는 사람

로부터 울려오는 고요한 함성喊聲에 골똘히 귀

들, 좀 더 자고 두 손 모아 좀 더 눕고 싶을 때 분

기울이는 신일인들이여!

연히 일어나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가는 사람들! 우준愚蠢한 우보牛步로 정진하여 동트는 하늘 찬란한 빛을 우러러 껴안는 자! 우리는 허공을 향하여 주먹을 내지르는 권투 선수가 결코 아니다. 벗의 목소리가 어떤 빛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발이여! 이제 모두 일어나 안개 자욱한 아침부터 귀뚜 리 노래하는 곳, 거기 얼마쯤의 평화가 천천히 내리는 곳, 아름다운 동산 신일 동산으로 가서 고단한 영혼들 마침내 안식을 누리자.

인지, 좋아하는 놀이가 무어고 나비 채집은 하 는지에 관심 기울이는 장밋빛 벽돌과 제라늄 창 문, 지붕 위에 비둘기가 노니는 집에 사는 친구 를 부러워하는 이여! 우리는 배운 대로 살아감을, 비둘기처럼 순전 한 영혼을 지녔음을 융통성 없다 하며 폄하하지 않는다. 세상에 아부하는 처세술 개론과 교묘한 말도 우리를 움직이지는 못하리라. 허튼소리를 뱀 같은 지혜라 치부置簿하지 않 는, 광야曠野에서 외치는 미친 자, 너 신일의 아 들들아! ‘병신과 머저리’처럼 건전한 사람들, 꽃보다 아름다운 이들과 더불어 눈물 흘리는 따스한 사 람들아! 더듬은 자취 적어 아마도 더 걸어가야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201


Annapurna Base Camp (ABC) Trekking 이도희

2012년 9월 초 어느 날.

험 트레커들의 경험 수기와 사진 등을 꼼꼼히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다녀오지 않겠느냐?’는

체크해 트레킹에 관한 필요 지식을 쌓았다. 가

아내의 권유가 있었고, 또 몇 년 전부터인가 컴

령, 우기에는 거머리를 주의해야 하고, 고지가

퓨터에 놓여 있던 ‘안나푸르나를 가보자’는 친

높아질수록 산소가 부족하므로 이에 대한 대비

구 제안의 크리스마스 카드에도 눈길이 자주 가

가 절대 필요하며, 물은 가급적 끓인 물을 마시

곤 해서, 마침내 나는 트레킹 준비를 시작하게

는 것이 좋고, 자외선에 대한 피부 보호 및 침낭

됐다. 먼저 여행사를 찾아 프로그램(상품)과 일

준비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고, 돈을 지불해야

정 그리고 루트 등을 확인하고 휴가일을 손꼽아

전기를 사용(충전 등)할 수 있다는 기본 정보와,

보니 8일 정도가 무난할 것 같아서 여행사에 선

의류와 장비에 관한 모든 제반 사항 등의 정보

금을 보내고 신청을 했다. 그런데 꽤 오랜 날들

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또 우연한 기회에 이

을 기다려도 그 일정대로의 출발 여부가 가능

번 봄 안나푸르나와 킬리만자로 트레킹을 다녀

한지가 불확실해 보여 부득이 여행사와의 당초

온 분에게서 들은 생생한 경험담은 트레킹을 준

‘푼힐 전망대’ 일정에서 ‘베이스캠프(ABC)’ 일

비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정으로 변경하고, 본격적인 트레킹 준비에 나 서기로 했다.

한편 필요한 장비와 옷 그리고 물품들을 책장 옆에 준비물 목록으로 붙여 놓고 하나씩 점검

우선 안나푸르나 트레킹에 대한 책 두 권과 네

하면서, 수시로 중량도 확인(통관 및 포터에 대

팔 국가 여행 가이드북을 구입해 읽었고, 인터

한 사항)하며 최종적으로 18Kg으로 마무리하

넷 블로그와 카페 등에 실린 안나푸르나 유 경

였다. 이번 트레킹에 가지고 간 물품은 총 86종

202

ㅣ 신일 5회 동기회


168개 목록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 휴대전화(충전기), 카메라(배터리/충전기), 멀티어 댑터, 손난로, 멀티콘센트, 휘슬, 성경책 (20종/ 48)

※의류: 오리털 파카(상), 고어텍스 파카(내피분리 형/상), 위드 스토퍼(상), 패딩 조끼, 윈드 재킷(3), 속내

Annapurna Base Camp (ABC) Trek-

의(상하 3), 양말(8), 퍼프(3), 스카프(8), 등산 티(7), 등

king 제1일 차

산 바지(4), 동계 장갑, 반 장갑(2), 털모자, 우비, 벨트 (3), 모자(2), 선글라스 (이상 18종/ 51)

전날 저녁 퇴근해 물품들을 한번 더 점검하고

※약품: 압박붕대, 거즈 붕대(2), 일회 반창고, 휴대 알

짐도 꾸려 놓고 나니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들게

코올, 소염 파스, 침봉, 우황청심환, 산소 캔, 감기약, 소

됐다. 그나마 잠마저 설치고 새벽에 일찍 일어

화제, 진통제(2), 지사제, 비아그라, 고무장갑, 후시딘,

나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 뒤, 어머니께 큰 절

면봉, 호랑이약, 물파스, 과산화수소수, 포비돈, 에어 부

로 출발 인사, 아내와 함께 인천공항으로 향했

목(발목), 보호대(허리/무릎/종아리 2/발목) (22종/ 28)

다. 여행사가 지정한 곳에서 비행기 표와 여권

※간식: 커피믹스(12), 고추장볶음(6/튜브식 600g),

을 받아 들고 휴대전화 로밍 확인도 마친 후에

비상식(6/초콜릿 외 5종) (3종 24개) ※세면: 비누, 치약, 칫솔, 손톱깎이, 수건, 자외선 차 단제(2) (6종/ 7)

아내의 전송을 받으며 탑승 게이트로 이동했다. KE 695편 좌석 36C. 비행기는 순조롭게 인천 공항 이륙 후 약 6시간을 비행, 우리와 3시간 15

※기타: 물티슈(대 2/소 2), 여행 티슈(2), 휴지, 비닐

분 시차의 네팔(Nepal) 카트만두(Kathmandu)

봉지(다수), 지퍼 백(대 6/소 6), 쓰레기봉투(5), 돋보기,

트리부반(Tribhuvan) 국제공항에 현지시간 12

수면 마스크, 수첩, 필기도구, 사진(6), 여권 사본(2), 시

시경 무사히 도착하였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203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와서 우리가 약속한

승 안내 방송이 나오고 국내선 항공기를 타기

여행사를 찾느라 잠시 소요하고 있던 차에 몸집

위해 공항버스를 탔는데 다시 지연이 되어 대

이 좀 뚱뚱하고 얼굴이 거무스레한 남자가 다가

합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왔다. 그는 여행사 이름을 확인하며 현지 가이

다시 두 시간 여를 기다려 국내선 항공기에 탑

드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차량이 있는 곳으로

승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끝이 아니었다. 승무

안내했다. 하늘은 푸른데 날씨는 찌는 듯이 더

원의 안내 방송까지 마쳤는데도 현지 포카라 공

워 금방 이마와 온몸에 땀이 흠뻑 솟았다. 어느

항이 폐쇄되어서 오늘 포카라로 비행기가 들어

새 나타난 또 다른 현지인이 내 짐을 실은 카트

갈 수 없다며 내리라는 것이었다.

를 밀어주고 돈을 요구해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조금 황당한 기분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짐짓 모른 체하고 버스로 올라탔다. 하나

국내선 항공료를 환불받고 포카라 직행의 버스

둘씩 낯선 일행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마지막 두

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대합실을 빠져나와 미

사람이 합류했을 때는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고

니버스를 타고 카트만두 시내로 향했다. 도중에

있었다. 우리 일행은 국제선 공항 바로 옆에 있

우리는 여행사에서 준비한 사과와 배, 바나나

는 국내선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하나씩을 간식으로 받아 우선 급하게나마 허기

국내선 대합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트레

를 달랬다. 그리고 어느 식당으로 이동해 삼겹

커(trakker)들과 짐들로 북적거린다. 얼마를 기

살로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야 다시 버스에 올

다려 간단한 여객과 짐 조사를 마치고 국내선

랐다. 예정대로라면 포카라에 이미 도착해 페와

탐승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탑승 시간이

(phewa) 호수에서 멀리 조망되는 안나푸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탑승 안내 방송이 나오지

산군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쉽게

않아 불길한 예감이 들어 항공사 관계자와 가이

도 우리는 지금 포카라까지 가는 것조차 걱정하

드에게 물으니 포카라(pokhara) 공항에 문제

고 있는 처지다.

가 있어서 지연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기내

해가 지고서야 버스는 포카라로 출발했다. 비

식을 하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배

포장 산길을 가다 서다를 수 없이 반복하였고,

가 고프다. 그나마 집에서 출발 전에 조금 먹은

큰 언덕을 몇 개 넘고, 고속도로를 달려 카트만

것이 도움이 된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탑

두 공항에 입국 한 지 15시간 여 시간이 지나서

204

ㅣ 신일 5회 동기회


야 우리는 마침내 새벽 3시경 포카라 호텔에 도

않기 때문에 아직 인간이 오르지 못한 유일한

착했다. 여장을 풀고 낯선 잠자리에 누우니 쉽

곳이기도 하다.

지 않은 트레킹 첫날이 끝났음이 피로와 함께 몰려왔다.

우리는 포카라 시내를 빠져나와 아주 긴 시간 을 달려 우리를 기다리는셀파와 포터들이 모 여 있는 간데(kende/1,770m)라는 곳에 도착

Annapurna Base Camp (ABC) Trek-

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우리들이 별도로

king 제2일 차

가지고 간 카고 가방을 무게별로 각자 나누어 걸머지고 본격적인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그

몇 시간 안 되는 짧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우

을린 피부의 키가 작고 젊은 남자가 오늘부터

선 별도로 가지고 간 카고 가방에서 트레킹에

우리를 인도할 셀파(selpa)로 자신을 소개했다.

필요한 장비들을 꺼내 재정리하고 숙소 앞 복

트레킹에 동원되는 사람들은 가이드, 조리장,

도에 내놓는 것으로 트레킹 두 번째 날의 일정

셀파, 취사원, 포터 등으로 서열이 있다. 지금

이 시작됐다. 간단한 세면과 호텔식으로 조식

부터 낯선 트레킹의 시작이다. 오늘은 란드룩

을 마치자 일행은 트레킹 배낭을 가지고 승차하

(landruk/1,550m)이라는 곳까지 가야 하는데

고 카고 가방도 호텔 종업원이 버스에 실어 출

셀파를 뒤따라 내리막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셀

발을 알렸다. 포카라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호

파의 말로는 맞은편에 보이는 높은 산이 바로

텔 멀리 구름 같은 설산 고봉들이 눈에 들어온

오늘의 목적지인 ‘란드룩’이라 했다.

다. 버스는 포카라 시내를 빠져나가던 중 페와

우리 일행은 서로 초면이라 그렇게 대화도 없

호수 옆에 잠시 정차했고, 그곳에서 우리 일행

이 묵묵히 한참 동안을 오르내리고를 반복하며

은 필요한 만큼 환전을 할 수 있었다. 네팔에서

걸었다. 한국 산은 주로 바위로 짧은 오르막과

신성시하는 마차푸차레(machhapuchhre) 산

내리막으로 되어 있는 능선과 오솔길을 가는 것

봉우리가 멀리 흰 구름 위로 웅장한 자태를 드

이 대부분인데, 이곳은 몇 백 미터를 내려갔다

러냈다. 마차푸차레 산은 산봉우리가 물고기 꼬

가 다시 몇 백 미터를 올라가는 단조롭지만 쉽

리를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영어로는 피시

지 않은 트레킹 코스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테일(fish tail)이라 부르며 입산 허가를 내주지

들었다. 대부분의 오르막과 내리막은 엷은 편마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205


반찬이 잘 준비돼 한국에서 식사하듯 정말 맛있 게 많이 먹었다. 다시 다음 목적지인 데우랄리 (deurali/해발 2,100m)로 출발이다. 낯선 사람 들과의 낯선 산길의 동행은 한편으로는 외로운 생각도 들지만 또 한편으론 조용하고 편안한 감 정의 미묘함을 갖고 있다. 한참을 비슷비슷한 산길을 또 오르내려 데우 랄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럭키뷰식당’과 한 국인 트레커가 썼다는 ‘독도는 한국 땅 Dokdo 암 같은 돌로 나지막하게 계단이 적게는 몇 백

is Korea’s 한국인 환영합니다’라는 간판이 놓

개, 많게는 수천 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 있다. 일본인 트레커가 이 간판을 보고 화를

한 시간 반 정도 지나서 첫 로지(lodge)인 포

냈다는 말도 얼핏 들었다.

타나(pothana/1,890m)에 도착했다. 로지란

잠깐의 휴식을 끝내고 우리는 다시 다음 목적

우리나라의 산장과 비슷한 곳인데 숙박과 간단

지로 향했다. 돌계단을 내려갔다 오르니 멀리

한 세면과 샤워 그리고 식사가 가능한 곳으로

비스듬한 산 능선 산길 끝자락 즈음에 로지가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냉난방은 전혀 되

보인다. 이곳 로지의 공통점 중 하나는 파란색

지 않으므로 특히 동계 트레킹 시에는 이에 대

지붕이다. 저기까지 가야 한다. 시간이 어떻게

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물론 침낭은 유상

흘러가는지 가늠하지 못한 채 우리는 그렇게 트

혹은 무상으로 대여를 해 주지만 여러 트레커들

레킹을 하고 있었고, 설악산 높이 정도에 있는

이 사용하던 것임을 감안하면 청결과 위생적인

톨카(Tolka/1,707m)에 도착해 간식을 먹으며

면에서 개인이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다시 휴식을 취했다. 다시 우리가 출발에 나섰

로지에서 트레킹 첫 점심식사를 했다. 우리는

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급

한국식 식사를 해 주는 요리사와 그 일행들이

히 우비를 꺼내 입고, 다시 묵묵히 산행을 시작

함께 동행함으로 식사에 대한 별반 걱정은 하지

했다.

않아도 됐다. 식단은 밥과 국 그리고 여섯 가지

206

ㅣ 신일 5회 동기회

돌계단을 또다시 오르내림의 반복이 여러 차례


이어지던 끝에 드디어 오늘의 최종 목적지 ‘란드

이 깊어갔다.

룩(Landruk/1550m)’에 도착했다. 배정받은 숙 소에 들어가려는데 여기저기에서 거머리에 물

Annapurna Base Camp (ABC) Trek-

렸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해서 장갑을

king 제3일 차

벗어보니 내 손등에도 어느새 거머리가 붙어 피 를 빨고 있었다. 얼른 떼어 냈지만 피가 계속 난

버릇이란 묘한 것이다. 낯선 곳의 긴 시간 트

다. 이번엔 양말을 벗어보았는데 발목도 예외

레킹으로 깊은 잠에 빠졌다가도 평소 출근을 위

가 아니었다. 거머리가 제법 오래 붙어 있었는

한 기상 시간인 한국 시간으로는 6시쯤이고 현

지 몸이 통통하다. 얼른 떼어내고 발로 밟으니

지 시간으로는 새벽 3시 반 경에 무의식적으로

피가 엄청나게 터져 나와 바닥이 흥건해질 정도

잠을 깨 일어났다. 잠결에도 밤새 비가 오는 듯

다. 손과 발 두 군데에서 계속 피가 흘러 어떻게

해서 트레킹 걱정을 한 것 같다. 헤드 랜턴에 의

해 볼 방안이 없어 일단 알코올 솜으로 상처를

존해서 조용히 밖으로 나오니 언제 비가 왔는지

닦고 일회용 반창고를 붙였다. 비가 그친 구름 사

도 모르게 하늘은 맑았고, 흰 눈에 덮인 ‘안나푸

이로 만년설에 덮인 ‘안나푸르나 남봉’과 ‘히운출

르나 남봉’과 ‘히운출리봉’도 어둠 속에서 더욱

리봉’을 바라보며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함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다. 떠있는 달도 한국에

에 젖어든다.

서 익숙히 보던 보름달이다. 무수한 별들 속에

숙소에 여장을 풀고 젖은 옷을 한쪽에 모아놓

카시오페아와 북극성 그리고 북두칠성이 선명

고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니

하다. “아름답다. 정말 아름답다. 말로 표현할

저녁 식사 시간이다. 오늘 저녁은 제육볶음이

수 없도록 아름답다!” 사진기(일명 똑딱이)로 촬

다. 상추에 쌈을 하여 먹는데 유심히 상추를 살

영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다. 그래서 눈으로 찍

피던 한 분이 상추에서 거머리를 발견하면서 식

고 마음과 기억에 담기로 했다. 조망 좋은 곳에

탁이 갑자기 술렁거린다. 방금까지 맛있게 먹던

어느새 트레커들 여럿이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

상추가 갑자기 냉대를 받아야 하는 진풍경이 벌

르며 사진기를 삼각대에 받쳐놓고 촬영에 몰두

어졌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모두 숙소

하고 있다. 해가 서서히 떠오르면서 드디어 ‘안

에 들어 트레킹 둘째 날이자 로지에서의 첫 밤

나푸르나 남봉’과 ‘히운출리봉’이 음지에서 양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207


지로 자태를 드러냈다. 동시에 모두에게서 탄

bridge/1,340m) 로지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성이 쏟아져 나왔다. 자연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취하기로 한다.

또 위대한 것인가!

쉬었다가 내려오던 편안함을 잊은 채 다시 스

그렇게 새벽을 보내고 아침식사를 마치고 출

틱에 몸을 의지하여 묵묵히 오르내림을 반복한

발하였다. 아, 따끈한 보리차를 물통에 나누어

다. 당나귀가 양 옆으로 등짐을 지고 계단을 오

담는 것도 빠뜨릴 수 없다. 이곳은 물 사정이 좋

른다. 그래서 산길은 온통 배설물로 가득하다.

지 않아 끓인 물이나 생수를 구입하거나 일반적

그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면서 힘들어하는 모습

인 물에는 반드시 정화액을 타서 마셔야 하기 때

은 인간의 나약함을 그대로 보여 준다. 많은 땀

문이다. 우리가 머물었던 로지 맞은편 이름 모

을 흘리며 오르고 또 올라 한참 만에 지누(jhi-

를 산에 드문드문 주택이 몇 채씩 모여 있는 것

nu/1,780m) 로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점심

이 선명하다. 셀파는 그곳이 우리가 귀로에 지

식사를 하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400여 미

나칠 곳이라 일러주었다. 또한 ‘안나푸르나 남

터 위에 있는 촘롱 로지를 넘어야 한다. 시원한

봉’의 가운데 계곡을 건너 왼쪽 산기슭으로 보

물로 손을 씻고 잠시 쉬는데 한국인 여성이 물

이는 파란색 지붕 촘롱(Chhomrong/2,176m)

을 구하려고 안달이다. 마침 배낭에 가지고 있

로지가 바로 오늘 넘어야 할 곳이라고도 말해

는 물이 넉넉해서 한 통을 부어 주었더니 고맙

주었다.

다는 인사를 하고 촘롱으로 오르는 계단을 부지

작은 계곡에 설치된, 쇠줄로 만들어진 출렁다

런히 아니 열심히 올라간다. 멀리 희뿌연 구름

리를 건너서 산기슭에 끝없이 이어진 계단식

아래 산기슭에 오늘 아침출발했던 란드룩 로지

논 사이와 돌계단을 따라 우리는 걸어 내려가

가 아스라이 보인다. 깊은 브이 계곡을 건너 멀

기 시작했다. 밤새 내린 비로 계곡 곳곳에만들

리 왔음을 느낀다.

어진 수직의 폭포는 웅장한 소리로 발걸음을 멈

다시 돌계단으로 계속 올라 촘롱 로지에 도착

추게 한다. 그렇게 주변 경치에 홀려 한참을 내

했다. 일행들이 점심 식사를 하고 올라온 탓에

려오니 약 300m 정도 되는 긴 출렁다리가 나

비 오듯 한 땀은 고사하고 모두 지친 모습이 역

타났다. 그 웅장함에 겁도 나고 위축이 되어 아

력하다. 하지만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주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너 뉴 브리지(new-

까지는 이만큼을 더 올라가야 한다. 올라 온 곳

208

ㅣ 신일 5회 동기회


을 뒤 돌아 내려다보면 정말 많이 올라왔다는

한다. 여장을 풀고 저녁 식사를 하자마자 오늘

뿌듯함을 느낀다. 멀리 산허리부터 저 아래 계

정말 고생한 나의 다리를 쉬게 하고자 일찍 잠

곡까지 폭우로 붕괴되어 흉측한 모습을 보이는

자리에 들었다. 비가 다시 세차게 내리는 모양

곳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든 것이 큼직큼직하고

이다. 트레킹 셋째 날이고 로지에서의 두 번째

엄청난 것들이라 꼭 원시의 어느 시대에 와 있

밤이 지나고 있었다.

는 듯하다. 촘롱 로지 고개를 넘으니 하늘엔 구 름이 점점 많아지고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Annapurna Base Camp (ABC) Trek-

같다. 네팔에서 신성시한다는 마차푸차레 봉이

king 제4일 차

먹구름 사이로 흰 속살을 내민다. ABC로 가는 조그만 화살표를 보며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밤 12시에 잠에서 일어나 새벽녘까지 침낭 속

이제 계단으로 되어 있는 내리막이다. 끝도 없

에서 뒤척거렸다. 밤새 세차게 내리던 비는 새

는 저 아래 계곡까지 우리는 내려가야 한다. 그

벽이 되어서야 진정됐다. 멀리 구름 아래 있는

리고 다시 내려간 만큼 맞은편 산을 올라야 한

어제 지나온 촘롱의 로지들이 보인다. 그 옆은

다. 계단 높이가 일반 계단의 절반 정도 이므로

산 아래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벼랑이다.

오르내리는데 무릎이 그렇게 무리가 가지는 않

오늘의 목표지인 마차푸차레 봉이 환상적으로

겠지만 그래도 계단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보인다. 말로 표현할 단어를 찾아내기 어려울

어김없이 나타나는 계곡의 쇠 줄 다리를

정도이다. 그저 아름답다고 경탄할 수밖에 없

건너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시누아(Sinu-

다. 밤새 내린 비로 여기저기 수백 미터 높이

wa①/2,340m) 로지에 도착했다. 나무판에 흰

의 폭포가 형성된 맞은편 산기슭 역시 한 폭의

종이를 붙이고 한글로 또렷하고 큼직하게 쓴 간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뜨

판이 눈에 확 들어온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에

거운 보리차를 물통에 받아 배낭에 넣었다. 고

서 한국음식을 팝니다. 한국 라면 김치찌개 백

소 적응을 위한 혈관확장제가 부작용은 없는지

숙 김치 기타’ 한국인 트레커가 많이 다녀간다

점검할 겸 반 알을 복용했다. 그리고 이번 트레

는 증표다. 마차푸차레 봉은 여전히 흰 속살을

킹 일정 중 가장 먼 길의 오늘 일정을 시작했다.

먹구름 사이에 숨기고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이곳 시누아② 부터 ABC까지는 닭고기와 돼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209


지고기, 물소 고기를 식용으로 할 수 없다는 요

을 펼치고 있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길인데

지의 네팔어 및 영어로 쓴 간판을 지나쳐 시누

신비롭고 아름다움에 빠져 그 위험을 자칫 놓

아② 에 오르니 멀리 구름이 걷히고 태양빛에

칠 만했다. 그렇게 찾고 놓치고 하며 우리는 너

빛나는 마차푸차레 봉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덜지대와 숲길을 오르내려 오늘의 목적지인 데

다시 한참을 내려와 평평한 원시림 같은 울창

우랄리(Deurali/3,200m)에 도착했다. 도중에

한 숲길을 지났다. 여전히 마차푸차레 봉은 바

ABC를 중심으로 오르고 내려오는 세계 각국의

닷가의 등대처럼 시야에 고정된 채 점점 더 웅

수많은 트레커들과 ‘나마스테’(namaste/ 네팔

장하게 다가온다. 기암괴석과 숲을 지나 시야

인사말)를 교환하며 아주 피곤하고 힘든 여정의

가 탁 트인 곳에 이르니 멀리 계곡 아래 파란 지

오늘 트레킹을 무사히 안전하게 마치자 안도감

붕의 집이 보인다. 저곳에서 잠시 쉬어 갈 것이

에 마음이 따뜻해져 오는 느낌이다. 이제부터는

다.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50여 미

산소가 부족하여 고소증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터를 내려가 우리는 밤부(Bamboo/2,310m)

만 한다. 머리 감는 것과 샤워도 금지하므로 물

에 도착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여정을 계속했

티슈로만 땀을 닦아내야 하고, 체온과 혈관 수

다. 이번엔 마치 정글과도 같은 길이었다. 머릿

축 방지를 위해 몸을 따뜻하게 유지할 필요가

속에는 거머리에 대한 두려움이 쉬이 떠나지

있다. 준비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내일 새벽의

않는다. 그렇게 두 시간여를 다시 올라가 도반

출발을 위해 오늘도 어제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

(Dovan/2,505m)에 도착해서야 오전 일정의

었다. 트레킹 넷째 날이고 로지에서의 세 번째

마침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밤이 또 지나간다.

하늘이 많이 흐리더니 이윽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폭우였다. 우비를 입고 빗속으로 다

Annapurna Base Camp (ABC) Trekking

시 나섰다. 그렇게 폭우를 뚫고 나선 우리의 등

제5일 차

정 강행군은 너와지붕의 작은 휴식처 히말라야 (Himalaya/2,920m) 로지의 도착 및 짧은 휴식

오늘은 새벽에 트레킹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

과 다시 강행군의 순서로 계속됐다. 도처에 산

에 이른 조식을 빨리 마치고 고소 적응을 위한

사태로 무너져 내린 계곡 곳곳이 폭포수의 장관

약 한 알도 먹어 두고, 방한 의류로 단단히 무장

210

ㅣ 신일 5회 동기회


하고, 머리 보온을 위해 털모자도 눌러쓰고 나

랄리보다 500m 더 높은 위치다. 이제까지의 등

서야 헤드 랜턴으로 새벽길을 밝히며 그림자밟

정이 길 안내를 도맡았던 ‘마차푸차레 봉’만 바

기처럼 우리는 서둘러 출발했다. 갑자기 옛 기

라보며 걸어왔다면, MBC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억이 새삼스럽게 밀려온다. 20여 년 전 미친 듯

는 화려하게 등장하는 백설의 ‘안나푸르나 남

산에 다니던 때의 일이다. 매년 12월 말일이 되

봉’과 ‘히운출리봉’의 동쪽 면을 바로 마주 서게

면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오색약수에서 설악산

되어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다. 저

대청봉을 향해 헤드 랜턴을 켜고 밤새 오르던

마다 탄성이 절로 쏟아져 나오고 사진기 촬영 소

기억이 떠올랐다.

리로 새벽의 정적은 일시에 무너지고 만다. ‘안나

오늘은 ‘ABC(Annapurna Base Camp)’까지

푸르나 남봉’ 위엔 미처 빛의 꼬리를 숨기지 못한

가야 한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의 알파벳

달이 희미하게 저물어가고 있다. 그 아래‘ABC’

머리글자를 따서 ‘ABC’라고 한다. 고도를 조금씩

로 향하는 언덕길로는 벌써 많은 트레커들이 삼

높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차다. ‘고소

삼오오 행렬을 이루고 있다.

증’이 차지하는 의미가 심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나도 ‘MBC’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일행을 따

것 같다. 마음 한 편으로는 ‘괜찮아!, 괜찮을 거

라 다시 가던 길을 재촉해 나섰다. 한 걸음씩 걸

야!’ 하고 스스로를 달래 보는데, ‘혹시 낙오되

을 때마다 호흡하기가 어려워졌다. 발이 무거

는 거 아냐? 몸에 문제는 없을까? 설마 나에게

워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돌부리

나쁜 일이?’ 하는 또 다른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

들과 풀숲의 만만치 않은 저항마저 뚫고 능선까

럽혀 걸음걸이마저 불안해지는 느낌이다. 그런

지 오르니 멀리 ‘ABC’의 파란 지붕이 한눈에 들

가운데 우리는 길도 없는 칠흑을 단지 랜턴 불

어왔다. 사람 키보다 큰 바위에 ‘ABC까지 1시

빛에만 의존하며 고도를 조금씩 올려 걸었다.

간이 소요 된다’는 내용의 공지가 적혀 있다. 초

아침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계곡이 조금씩 밝

원이라 이곳엔 양들이 먹이를 찾아 자유롭게 풀

아졌고 멀리 파란 지붕의 마차푸차레 베이스캠

을 뜯고 있다. 이곳에선 안나푸르나 주봉 까지

프(Machhapuchre Base Camp)가 눈에 들어

는 보이지 않고 주변 봉우리들만 압도하듯 눈에

왔다. 우리는 그곳을 알파벳 머리글자를 따서

들어온다. 호흡이 힘들어 이젠 머리까지 아파온

‘MBC’라 부른다. 해발 3,700m로 숙소인 데우

다. 멀리 앞서 걷는 트레커들이 야속하기마저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211


하다. 하는 수 없이 두통약을 꺼내 먹고 다시 천

차올라 그것을 오르는데 네 번이나 쉬기를 반

근만근의 걸음을 옮긴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

복하면서 마침내 ‘ABC’(4,130m)에 안착할 수

해 걸음걸이를 세어보기로 했다. “백 스물둘, 백

있었다.

스물셋... 백 예순일곱...이백 십일...” 그렇게 숫

뜨거운 태양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건물을

자 세기를 계속하다 보니 풍경은 어느새 초원과

가로질러 뒤편으로 가니 그곳에 바로 꿈에도 그

너덜지대로, 그리고 눈 덮인 산 빙하가 만들어

리던 ‘안나푸르나가’ 격하게 나를 반긴다. 아니

낸 오묘한 계곡들로 변화무쌍하게 바뀌며 무거

푸근하게 내가 빨려 들어간다. 두통도, 호흡 곤

운 발길에 그나마 에너지를 불어넣어 준다. 모

란도 어느새 잊고 그저 홀린 듯 한참을 ‘안나푸

든것이 너무 새롭고 흥미롭고 신기하다. 고도가

르나’에 빠져들었다. 트레커들로 북적이는 언덕

높아지니 땀도 나지 않는다. 머리는 아프고 잘

위로도 올라가 보니 그곳엔 ‘안나푸르나’ 등정

걷지는 못하지만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감탄

중 영원한 산사람들로 이승을 떠난 산악인들과

이 절로 나온다.

셀파들의 사진 그리고 추억들이 간직된 작은 탑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돌아보니 마차푸차레 봉우리가 좀 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묵묵

이 서 있다. 나는 잠시 그들 맑은 영혼의 안식을 위해 묵념을 바쳤다.

히 서 있다. 점점 가까워지는 캠프를 보며 가슴

바로 발아래엔 빙하가 만들어 놓은 아주 깊은

이 벅차오름을 느낀다. 다시 마지막 남은 등정

심연의 계곡이 흐르고, 그 너머로 ‘안나푸르나’

길에 박차를 가해 올라간다. 그리고 긴 나무 장

가 있다. 여기까지 오는데 수십 년이 걸렸구나.

대 두 개에 만국기가 걸려 있는 곳까지 가까스

삼십여 년 전 회사 산악회에서 이곳 ‘안나푸르

로 도착했다. 만국기 곁엔 철판에 ‘ABC에 온 것

나’ 보다 북쪽에 있는 팡 봉(Fang/7,647m)을

을 환영한다’ 써진 철판이 놓여 있다. 하나 둘 먼

공략했는데, 그때는 사실 자의 반 타의 반 합류

저 도착한 트레커들의 움직임을 따라 다시 발끝

하지 못했었다. 그때 원정대는 두 차례의 눈사

에 힘을 모으고 가슴을 활짝 열고 심호흡을 크

태로 장비를 모두 잃어야 했고, 하산 도중엔 동

게 한 후 발걸음을 재촉한다. 마지막 계단을 올

료를 크레바스에서 잃어버릴 큰 위험까지 겪으

라가야 목적지인 ‘ABC’이다. 계단을 세어 보기

면서 결국 실패의 고배를 마신 채 귀국해야 했

로 했다. 모두 110개의 계단 행렬이었다. 숨이

었다. 실패한 원정대는 내게 양털로 짠 카펫을

212

ㅣ 신일 5회 동기회


선물했었다. 파란 하늘과 흑백의 명암이 선명한

연하게 그리고 슬프게 한다. 하산을 하면서도

안나푸르나’가 고딕체의 ‘ANNAPURNA’ 글씨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지나올 때 힘들고 어

와 함께 수놓인 카펫이었다. 이사를 다니면서도

려웠던 평원을 힘차게 가로질러 단숨에 ‘MBC’

늘 챙기며 책상 옆에 두고 언젠가 가리라 다짐

까지 내려왔다. 며칠 전 촘롱 아래에서 물을 나

했었는데 이번에 비록 트레킹이지만 나는 이곳

누어주었던 한국인 트레커를 만났다. 반갑지만

에 서 있다.

그도 빨리 가야 하기때문에 가볍게 인사를 나누

주변에도 돌아보니 크고 작은 돌들로 만들어

고 헤어졌다. 올라가던 시간은 그렇게 길고 오

진 돌탑들이 많았는데 그 역시 등반 도중에 사

래 걸렸지만 내려오는 것은 올라간 시간의 절

망한 이들을 추억하기 위한 돌무덤과 돌비석들

반도 되지 않아 금방 도착했다. ‘MBC’에 다 달

이라 한다. 특히 그 옆에 있는 파란색 탑이 작

아 뒤를 돌아보니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르지만

년 코리안 루트 개척을 하다 실종된 한국, 아니

산이 온통 휘덮였다. 이곳은 날씨가 수시로 변

세기의 산악인 박영석 대장의 것이란다. 가슴

하는 곳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이 뭉클했다.

‘MBC’에 도착하여 이른 시간이지만 오늘의

다시 ‘ABC’로 내려와 ABC 간판 앞에서 기념

일정을 마친다. 로지 식당에는 세계 각국에서

촬영을 하고 주변을 살피니 다른 간판에 쓰인

온 많은 트레커들이 카드를 치거나 담소를 나누

한글이 눈에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오시느라

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

고생하셨죠. 짐 내려놓으시고 잠시 쉬었다 가세

두터운 옷으로 갈아입고 숙소 밖으로 나와 산

요.” 점심으로 라면을 먹고 양지바른 곳에서 이

책을 하는데 주변이 온통 안개로 덮여 있어서

곳 경치를 마음에 담고 공기를 맘껏 마시며 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다시 숙소로 돌아와 이

간을 보내다가 다시 ‘안나푸르나’ 앞까지 왔다.

번 트레킹 일정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본다. 이

또 멀리 ‘안나푸르나’를 쳐다보고 사진 촬영을

제 내일부터는 귀국 아니 하산이다. 체력 소모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를 보충하기 위해 잠자리에 든다. 기온이 낮아

나니 이제 하산해야 할 시간이 됐다. 언제 또 올

침낭 안에 뜨거운 물주머니 넣고 잠자리에 들

수 있을까? 울컥 눈물이 솟는다. 언제 또 이곳에

면서 트레킹 다섯째 날이며 로지에서의 네 번

올 수 있을까 하는 미련이 잠시나마 마음을 숙

째 밤을 보낸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213


Annapurna Base Camp (ABC) Trek-

에 피어 있다. 지각 변동으로 생긴 비스듬하고

king 제6일 차

규칙적으로 돌출된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보인 다. 내려가며 뒤돌아보니 ‘안나푸르나’ 주변 봉

새벽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부터 이

우리들이 여전히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 동이

틀 동안 어제까지 왔던 산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트면서 산봉우리들은 금빛을 발하고 계곡의 꽃

데 올 때 이틀 걸린 길을 하루에 가야 한다. 아

과 물 그리고 흰 봉우리가 조화를 이룬다. 불과

무리 내리막길이라 하지만 그래도 오르막길도

어제 새벽에 출발했던 데우랄리 로지가 낯설지

있고 거리가 있기 때문에 걱정이 앞선다. 오늘

않게 다가와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또 내

도 아침식사를 마치고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출

려간다. 하늘은 어느새 파란빛을 내고 그 아래

발한다. 동트기 전 어둑한 ‘MBC’를 뒤로 하고

흰 구름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모든 것이

발걸음을 내딛는다. 어제 안개구름으로 가려졌

크다고 하기보다는 거대하고 웅장하다. 어떻게

던 ‘안나푸르나 남봉’에 눈이 내렸는지 새벽어

표현할 말과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도반 로

둠 속에서 눈부시게 밝은 빛을 발한다. 발걸음

지에서 보이는 구름에 둘러싸인 마차푸차레 봉

이 떨어지지 않는다. 더 있고 싶다. 아무 생각이

이 성스럽게 보인다.

나질 않는다. 그저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습관적

밤부 로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출발하니 내

으로 사진기를 꺼내 촬영해 본다. 미국의 그랜

려오던 즐거움이 다시 오르막 계단으로 멈춘다.

드 캐년과 같은 계곡 아래까지 내려와 바로 옆

계단 숫자를 일행과 함께 열심히 세다가 오히려

계곡물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더 지치는 듯해서 그만두고 오르는 일에만 열중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높고 큰 산들을 옆

하기로 한다. 엊그제는 이 계단을 쉽게 내려왔

에 끼고 걷는다. 눈사태로 무너져 내린 것 같은

는데, 인생과 삶이 결국 트레킹과 너무 흡사하

사람 키의 스무 배는 족히 될 듯한 높이의 거대

다고 느껴진다.

한 눈덩어리가 보인다. 어제 올 때는 어두워서

시누아② 로지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한

볼 수 없었는데 갈 때와 올 때의 안나푸르나 트

다. 시누아 로지는 낮은 곳과 높은 곳이 약 30m

레킹의 또 다른 모습이 흥미롭다. 높은 지대임

간격으로 나뉘어 있어서 임의로 낮은 곳을 시누

에도 불구하고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여기저기

아①, 높은 곳을 시누아②로 부른다. 로지마다

214

ㅣ 신일 5회 동기회


들러 잠깐씩 휴식을 취하면서 다시 걸음을 재

덮여 있어서 그 자태를 감추었다. 저녁 식사를

촉한다. 돌계단을 한참 내려가니 야크라 불리는

하고 나니 피로가 몰려온다. 나른한 몸을 침낭

물소가 길에 누워 있다. 조심스럽게 피해 살그

속으로 넣으면서 트레킹 여섯째 날이며 로지에

머니 촬영을 했다.

서의 다섯 번째 밤을 보낸다.

이제 촘롱까지 가야 한다. 촘롱은 로지와 마을 과 학교가 있는 곳으로 트레킹 코스 중 가장 넓

Annapurna Base Camp (ABC) Trek-

은 마을이다. 계단 한편에 노란색 페인트로 촘

king 제7일 차

롱(Chhomrong)이라 쓰고 화살표를 그려 놓았 다. 호흡이 점점 거칠어짐을 느낀다. 촘롱에서

오늘도 갈 길이 멀어 아침 일찍 기상, 출발 준

내려간 길고 깊은 계단을 다시 올라가야 하기

비를 모두 마치고 나서도 아직 일출 전이다. ‘안

때문이다. 시누아에서 촘롱 아래 계곡까지 오를

나푸르나 남봉’과 ‘희운 출리’는 오늘도 일행을

때는 그렇게 힘들게 올랐는데 단숨에 내려왔다.

실망시키지 않았다. 하얀 만년설을 입고 그 자

그리고 계곡 다리를 건너 숨을 고르고 다시 계

리에 묵묵히 자태를 드러내며 잘 가라고 인사를

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계단을 세어보리라.

하는 듯 보인다. 이내 아침 햇살이 드리우자 조

백 개를 세고 한번 쉬고 그렇게 백 개씩 세기를

금씩 그 색이 변모하며 너 나 할 것 없이 사진기

한번... 다섯 번... 열 번... 열다섯 번... 그리고

를 들이댄다. 출발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웅장하

스물다섯 번 정도 만에 오늘의 목적지인 촘롱에

고 화려한 변신을 놓칠 수 없기에 일행은 초조

도착했다. 계단이 약 2,500개 정도이다.

하고도 행복한 촬영에 집중한다. 언제 또 이곳

조금 전에 지나온 시누아 로지의 파란 지붕이

을 찾을 수 있으랴! 마음 한 구석엔 빠른 시일 안

저 아래 발밑에 보인다. 오랜만에 뜨거운 물로

에 다시 오리라는 성급한 계획을 세워보지만 그

몸을 씻으니 몸이 절로 날아갈 것 같다. 젖은 옷

게 어디 말처럼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아침 햇

가지와 여러 짐이 들어 있는 카고 가방을 다시

살에빛나는 <안나푸르나 남봉과 희운 출리, 등

주섬주섬 챙겨 놓고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서 별

대와도 같았던 마차푸차레>를 배경으로 처음이

이 쏟아진다. 아름답다. 어떻게 이런 세상이 있

자마지막 단체 촬영을 하고 나서야 우리는 귀

을까! ‘안나푸르나’ 봉우리 주변은 또 구름으로

로에 나섰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215


다시 이어지는 돌계단을 한참 내려가니, 산기

지에 도착하니 지프차들이 보인다. 점심 식사를

슭의 지누 로지와 계곡 건너 멀리 란드룩 로지

하려면 사울리(Syauli) 로지까지 비포장도로를

가 보인다. 란드룩에서 첫 밤을 보내며 아득히

걸어 내려가야 한다.

멀리 이곳 촘롱을 바라보았는데, 이제 이곳에서

셀파와 함께 조금 더 내려왔는데, 지프차를 타

거기 먼 그곳 란드룩 로지를 바라보고 있다. 인

고 간다며 뒤에서 부른다. 두 대의 지프차 지붕

생이란 게 결국 그런 거다. 돌계단을 하염없이

에 카고 가방과 취사도구들을 얹고 추가로 포터

내려가다가 작은 고사목 앞에서 다시 사진을 찍

들까지 지붕에 태운 채 사울리 로지까지 내려왔

었다. 하산 길의 일행 얼굴엔 피로함과 더불어

다. 우리는 그곳에서 네팔 식의 점심을 처음 먹

뭔가 허무함 같은 것이 묻어나 보인다.

어 보았다. 취사원들이 식사 뒷마무리와 짐 정

끝이 없을 것 같은 계단이 계곡에 설치된 쇠

리를 하는 동안 넉넉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지

줄 다리를 만나면서 끝이 나고 이제는 다시 오

프차를 이용해서 나야 폴까지 이동하였다. 원래

르막이다. 이번 트레킹에서 기억에 남는 것 중

일정은 사울리에서 이곳 나야 폴까지 걷기로 되

하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내려가면 계곡을 건너

어 있었다. 하지만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에 자

서 다시 오르고 또 내려가서 다리를 건너 오르

칫 일사병에 걸릴 우려가 있고, 지나치는 차량

기를 수 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계곡 아래로 가

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쓸 판이었기에 지프차 이

까워질수록 빙하가 녹은 물결이 내는 소리가 귀

동은 탁월하고 다행스러운 선택이었다.

가 멍 할 정도로 크고 시원하게 들려온다. 뉴브

나야 폴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그동

리지 로지를 지나 이제 갈림길이다. 이곳에서

안 함께 했던 셀파와 포터와의 아쉬운 작별 인

란드룩으로 가려면 왼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서

사를 나누었다. 버스를 타고 포카라로 이동하는

긴 쇠줄 다리를 출렁이며 건너야 하지만, 우리

동안 출발지였던 칸데를 다시 지나게 됐다. 불

는 나야 폴(Nayapul)로 가야 하기 때문에 오른

과 며칠 전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셀파를 따라

쪽 길로 접어들었다. 태양이 뜨겁다. 목이 마른

걸으며 저 무수한 산을 넘었다는 뿌듯함이 느껴

다. 이제 오르막은 없지만 뜨거운 태양이 마지

졌다. 그 뒤에 펼쳐졌던 소나기와 거머리 사건

막 남은 트레킹의 또 다른 복병이다. 그렇게 걷

그리고 로지에서의 하룻밤과 아침에 찾아온 백

고 또 걷고, 작은 계곡을 건너 시와이(siwai) 로

설의 ‘안나푸르나 남봉과 희운 출리’를 떠올리

216

ㅣ 신일 5회 동기회


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세계 최대 불

포카라 시내로 들어와서 시내 구경과 쇼핑을

교 4대 성지중의 하나인 보우 더 나트(Boud-

잠시 동안 하고 숙소인 포카라 호텔로 돌아왔

hanath)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시내에 있는 선

다. 오랜만에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친 뒤 저녁

샤인(Sun-shine) 호텔에서 일식으로 점심을 먹

식사를 하고 그동안의 감회를 서로 나눈 뒤 숙

고 네팔 카트만두 트리부반(Tribhuvan) 국제공

소에 돌아와 잠을 청하며 트레킹 일곱째 날을

항으로 왔다.

마감한다.

그동안 함께 했던 가이드로부터 20,129,608 번째로 ‘ABC’를 방문했다는 인증서를 받고 출

Annapurna Base Camp (ABC) Trek-

국 수속도 마친 연후에 우리는 비행기에 탑승하

king 제8일 차

였다. KE 696편 좌석 38G. 여섯 시간 정도 비 행으로 우리는 인천 국제공항에 안착했다. 그동

오늘은 모든 트레킹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안 동행했던 일행들과 가벼운 작별 인사를 나

날이다. 일찍 잠에서 일어나 해뜨기 전이지만

누고 카고 가방을 찾아 출국장으로 나오니 늦

호텔 주변을 산책하고 돌아와 짐 정리를 해서

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구순 노모와 아내가 나

호텔방 앞에 내놓는 것으로 출발 준비는 끝이

를 반긴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집으로 오는 동

났다.

안 차 안에서 짧게 나누고 집에 도착하여 노모

아침식사를 마치고 준비된 버스를 타고 포카

께 큰 절을 올리는 것으로 나의 트레킹 여행은

라 국내선 공항에 도착했다. 멀리 아침 햇살 아

종결됐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일정

래 구름처럼 보이는 그곳에 마나슬루 히말 주봉

완료.

들과 안나푸르나 히말 봉우리들이 희미하게나 마 아름다운 그림으로 떠 있다. 국내선 항공기 에 탑승하여 카트만두까지 날고 있는 동안에도 만년설의 하얀 산봉우리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 을 우리를 따라 왔다.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하여 다시 버스를 타고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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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동준 詩

소망

차라리 차라리 울려면 어서 오려무나

차연한 그날을 기다리는 이 바램도 어여쁜 꽃을 피우기 위한 이 애씀도 부서지는 고통 속에 숨었으니

메마른 대지에 뿌리박고 갈갈이 터지는 육체의 아픔으로 고갈되는 사랑을 위해 한 방울 이슬까지도 주워 농축시킴으로 한 송이 향기 그윽한 꽃을 위해 들풀은 오늘도 자지러진다.

누구를 위한 바램이며 무엇을 위한 망설임인가 무엇을 위한 침묵이며 무엇을 위한 외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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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차라리 차라리 울면서 어서 오려무나

기다랗게 목 빼어 내고 그날을 기다린다

(이동준 유고 시집, 목마른 달에서, 2017. 8. 21 )

故 이동준 동기는 인하대학교 대학원 졸업 1981 결혼 및 미국 유학 1989년 캐나다 이민. 퀘벡 한인신문사 운영. 퀘벡 J.C. 초대 회장 2006년 미국 이민 2016년 8월 21일 작고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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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현 詩

사랑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부모님의 사랑, 연인의 사랑, 친구의 사랑... 우리는 솜사탕 같이 달콤한 사랑만을 기대하지만 의외로 괴롭히는 사랑도 있다. 지나치는 아픔을 당시엔 느끼지 못했을 뿐, 자신도 모르게 망각 속에 잊혀져갔을 뿐 괴롭게 아팠던 사랑이 의외로 많다는 거다

사랑은 나이와 정비례한다. 누구나 가슴 저리는 애타는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피가 몸속에 잔잔히 흐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격정적인 뜨거운 사랑의 피를 가진 사람도 있다 어느 것이 참사랑인지 분간 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랑이 있어 하늘을 지나는 흰 구름만 보고도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도 새는 울지 않는다. 그러기엔 너무 이른 새벽인가보다. 오늘도 상쾌한 사랑이 내 몸 속 가득 차오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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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가슴 저리는 사랑으로 아파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니 얼핏 기억 속에 한번도 없는 것 같이 여겨진다. 하지만 이 생각은 절대로 옳지 않다. 사랑 속에 내가 너무 파묻혀 있었기에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괴로움과 반성의 길에서 헤매고 있다. 하지만, 자 이제 시작이다. 아직도 멋진 생각과 노력의 근성이 남아있지 않은가!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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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현 詩

함박눈

초겨울에 들어선 십이월. 창밖에서 숲속의 메마른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치는 소리에 겨울 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무상無常에 파묻혀 깜박 졸았나보다. 눈 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창밖을 바라보니 함박눈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바꾸어 놓았다. 초라한 과거까지 덮어주는 듯하고, 외출의 용기까지 주 는 듯도 해서, 난로의 기운이 다할 때 걸쳐 입던 시에라 코트를 걸치고 문 밖으로 나가 본다. 어느새 눈은 그치고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달님이 살며시 내려다보고 있다. 혼자서 하늘을 쳐다보며 옛 생각에 다시 빠져든다. 세상엔 아무 것도 없다. 그림자까지 모든 것이 무상이다. 오직 예 외가 존재한다면 한 가지 사랑뿐이다. 아직까지 온천지가 함박눈에 푹 덮여 있다. 따스한 사랑으로 온 천지가 덮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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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소중한 인연의 친구분들

이순규

말과 글의 의미를 이해하나 굳이 말이 필요 없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고,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소중한 인연 항상 건강 행복하시고 편하실 때 만나 소주 한잔씩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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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캐슬 리뷰

이종상

* 2019. 2. 12

까지 섞어서 올려봐야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어제 하롱베이 음악실 클래식 카페에서 이런

있겠다 싶기도 했지요. 사실 이 드라마가 말 그

저런 수다를 나누다가 최근 종영된 화제의 드라

대로 막장이거든요.

마 ‘스카이캐슬’에 꽤 많은 클래식 곡이 삽입되

돈과 명예와 자식들 입시경쟁을 위해서는 물

었다는 얘기를 했고…… 그래서 이걸 모아서 따

불을 안 가리고 심지어는 살인도 마다하지 않

로 한번 포스팅하자, 그리고 카페 주인장이 그

는 주인공들…… 중산 서민층 입장에서 보면 말

소임을 내게 부여한 바 있지요. 그래서 고민을

도 안 되게 럭셔리해서 괜히 주눅 들게 만들고

해 보았는데 유튜브에 ‘스카이캐슬’만 검색해도

위화감을 주는 그네들 집의 실내 인테리어……

여러 개의 동영상이 뜨지만 클래식 삽입곡 관련

그들이 사는 타운하우스 단지 이름이 이 드라

된 건 거의 없고…… 그래서 네이버 블로그를 검

마에서는 ‘스카이캐슬’인데 아마도 소위 일류대

색해 보니 두세 명의 블로거가 올린 이와 관련

를 지칭하는 스카이에서 따온 것이겠죠. (이 드

된 포스팅이 있더군요.

라마에 나오는 집들은 용인에 있는 코리아 CC

그 블로그의 url을 복사해서 옮겨 오면 간단하

의 타운하우스인데, 우리 집사람은 그 집을 분

긴 한데 혹시 저작권 시비에 휘말리지도 모르기

양할 때 친구를 따라서 같이 구경 갔었다고 자

에 그건 포기했습니다. (내가 전에 100만 원의

랑삼아 얘기하더군요.^^) 한 꺼풀만 벗기면 초

피해보상금을 물어낸 트라우마가 있어서...^^)

라하기 그지없는 주인공들의 내면과 그들이 내

그리고 가만 보니 우리 친구 중에 이 드라마를

뱉는 천박한 언사들......

본 친구가 거의 없는 듯해서 굳이 드라마 장면

224

ㅣ 신일 5회 동기회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 드라마에 삽입된 클래식 곡을 하나하나 살 펴보겠습니다.

잠깐 이 곡에 대해서 아는 척을 좀 하자면, 이 곡 연주에서 가장 고생하는 파트는 스네어 드럼 (작은북)인데, 오직 단 두 개의 리듬을 처음부터

1.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끝까지 약 15분간 똑같은 템포로 무한 반복해 야 합니다(물론 무한반복이야 아니지만, 300번

일단 맨 처음 삽입된 곡은 너무나도 많이 알려

은 넘는 듯). 그러는 동안 여러 악기들이 때로는

졌고 ‘울트라 교향곡’에서도 많이 소개되었던,

홀로, 때로는 같이 또는 여럿이서, 아니면 다 같

엘가의『위풍당당 행진곡』입니다. 주인공 중의

이 총주로 연주하며 자칫 지루하기 쉬운 이 똑

한 사람의 아들이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 걸 축

같은 멜로디와 리듬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아니

하하기 위해 ‘스카이캐슬’ 주민 중 한통속인 네

오히려 긴장감을 조성해 가며 이끌고 나가죠.

댓 가족이 마련한 축하파티에 그날의 주인공 가

이 드라마에서는 이발사인 아버지 슬하에서

족들이 입장할 때 자연스레 이 곡이 흘러나오

자라나 나중에 사법고시를 패스해서 지금은 법

죠.

대 교수가 된 차민혁과 육군 참모총장의 딸이며

실제로 그 드라마에서는 두툼한 봉투를 건네

그나마 우아함을 추구하는 노승혜의 부부, 그들

받은 실내악 연주자들이 파티 장 한쪽에서 이

의 고3 아들 쌍둥이들과 하버드 대학생 딸(나중

곡을 연주하는데, 더 웃기는 건 술이 거나해진

에 가짜 하버드생으로 밝혀짐)까지 모두 다섯

주인공들이 나중에 이 앙상블 팀에 주문한 곡이

명으로 구성된 한 가족의 갈등이 생길 때마다

그네들 말로 뽕짝이었습니다.^^

이 곡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어쩌면 ‘차민혁 테마’라고도 할 수 있

2. 라벨의 『볼레로』

는 곡인데, 이 드라마 음악 감독의 센스가 돋보 이는 건 비교적 작은 갈등 장면에서는 이곡의

드라마 ‘스카이캐슬’ 삽입곡 두 번째 순서로,

독주 악기 부분이 나오지만 갈등 구조가 복잡하

라벨의 『볼레로』입니다. 이 곡도 ‘울트라 교향

고 커질수록 중주 합주 내지 총주 부분으로 다

곡’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던 너무나도 잘 알려

르게 이곡을 삽입하고 있다는 겁니다.^^

진 곡이죠.

차민혁은 쌍둥이 아들 공부방에 작은 모형 피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225


라미드를 갖다 놓고는 너희들은 바로 저기 저

All Lie’라고 따로 있습니다.

피라미드의 정상까지 가야만 한다고 수시로 주 입시키며 애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데,

3.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

급기야는 이런 남편에게 질린 아내 승혜와 아들 쌍둥이가 의기투합해서 아버지의 팔다리와 사

바로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입니다. 이곡은 ‘스

지를 반짝 들어 문밖으로 쫓아내는 일이 벌어집

카이캐슬’ 주인공 중의 하나인 김주영(김서형 분)

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차 교수는 오히려 어마어

의 테마이기도 합니다.

마하게 큰 대형 피라미드를 주문 제작해서 거실

입시생 한 명당 수십억을 받는 명문대 입시 코

에 들여오며 의기양양해합니다. 이에 경악해서

디 역을 하는 김주영 쓰앵임(학부모로 분한 염

졸도 직전까지 가는 승혜와 두 쌍둥이들의 표정

정아가 선생님을 부르는 말)이 마치 성채와도

이 오버랩 될 때는 여지없이 이곡의 오케스트라

같은 자기 집 거실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거

총주 부분이 삽입됩니다.

나 음모를 꾸미면서, 얼굴에는 알듯 모를 듯 묘

이 차민혁 교수를 연기한 배우 이름은 이병철 인데 내가 처음 보는 배우이고 이 드라마에서는 조연이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가장 개성 넘치는 연기력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하게 옅은 미소를 띨 때 이 곡이 배경에 깔리며 팽팽한 긴장과 공포감을 조성하지요. 저는 이 곡을 처음 배웠던 고교시절 음악시간 이 아직도 잊히지 않고 뇌리에 각인되어 있습니

‘차민혁 테마’ 『볼레로』를 감상하시죠.^^ 발레

다. 한태근 선생님께서 슈베르트가 이곡을 작곡

리 게르기에프의 날카로운 눈빛과 이와 대조되

할 때의 상황 배경과 이 가곡의 가사 내용 및 분

는 이쑤시개 지휘가 일품입니다.^^

위기를 설명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곡은 슈베르트 작품번호 1번입니다. 슈베르

* 2019. 2. 13

트가 일찍 죽기도 했지만 아직 청년이었을 때

오늘 소개할 곡은 제 개인적 생각으로는 ‘스

괴테의 詩를 보고 감동받아서 작곡한 곡이란 뜻

카이캐슬’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삽입곡입니다.

이죠. 이 노래에는 총 4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어쩌면 이 드라마의 클래식 메인 테마 인지도

아버지와 아들과 마왕, 그리고 해설자......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드라마의 주제곡은 ‘We

226

ㅣ 신일 5회 동기회

한태근 선생님은 그때 제 기억으로는, 소니


의 둔탁한 녹음기에 테이프를 걸고 play 버튼

달래고 또 달래지만 곡이 끝날 때 아들은 이미

을 켰다 껐다 하시면서 각 대목의 상황을 차근

죽어 있죠.

차근 설명하셨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때의

이곡을 주영 쓰앵임의 테마로 쓴 음악감독의

그 성악가는 틀림없이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

의도가 절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카이캐슬’

우’였을 것입니다. 이분은 이 가곡에서 네 사람

의 김주영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일곱 살

의 음색을 각기 다른 창법으로 발성해서 이 곡

인가 그때쯤 미국의 어느 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의 긴박하고 절박한 상황을 아주 입체적으로 노

천재였지요. 그런데 엄마인 자신이 저지른 사고

래합니다.

로 지금은 장애를 안고 마치 동물처럼 사육되는

이곡에서 피아니스트의 오른손은 처음부터 끝

그런 처절한 아픔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

까지 빠르게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를 연주하며

녀는 그런 자신의 불행에 대한 보복의 상대로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말 위에는 마귀 들린 아

자신이 코디를 맡은 입시생과 그 가족을 희생양

들을 품에 안은 아버지가 타고 급하게 아들 치

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입시공부에 매진하게 한

료를 위해 달려가는데…… 아들은 계속 마왕이

다는 명분하에 조금씩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보인다고 두려움에 떨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방법으로 아이들의 영혼을 파괴시키고, 그 아이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227


는 다시 자기 부모에게 아주 사악한 방법으로

즐겨 감상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장담

복수하게 하지요.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녀의 내막도 모르고 3대째 의사 가문

그냥 이곡의 인트로만 듣고 “아~ 이 곡 나 알

을 만들려는 학부모는 자기 딸을 바로 그 주영

아!” 하고 아는 체를 하지만 뒷부분을 들려주면

쓰앵임에게 수십억을 주어가며 맡깁니다. 마치

아마 아는 사람 별로 없을 걸요. 제가 한번 들

아들이 마왕에게 시달려 죽는 줄도 모른 채 말

어보려고 했는데 도입부가 너무 화려해서인지

을 달리는, 슈베르트 『마왕』에 나오는 아버지

뒤로 갈수록 지루하더군요. 그래서 중간에 포

같이 말입니다.

기......^^

드라마에서는 주로 기악 버전만 나오는 것 같

그리고 또 하나 이곡이 유명하게 된 요인으로

았는데, 여기서는 앞에서 얘기한 ‘피셔 디스카

특이한 제목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니체라고

우’의 음성으로 감상해 봅시다. (사족: 『마왕』과

하는 걸출하지만 괴팍하기도 한 철학자도 관심

함께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중 ‘밤의

을 끌기에 충분한데다가, 그가 썼다는 더럽게

여왕의 아리아’도 같이 삽입했으면 어땠을까)

(?) 어려운 철학책의 제목을 갖다 붙였으니 말 입니다.^^

* 2019. 2. 14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입시생들은 학부모도

4.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자라투스트라는

같이 참여해서 입시 논술을 대비한 독서모임을

이렇게 말했다』

갖습니다. 외면상으로는 참 바람직한 공동체 모 습입니다. 그런데 여기도 한 꺼풀 벗겨 보면 그

R. 슈트라우스는 특히 교향시 장르에서 많은

민낯이 참으로 천박하기 그지없습니다.

명곡을 남긴 작곡가로 알고 있고 이곡도 바로

이 독서 토론모임에서는 ‘이기적 유전자’에 이

그의 대표적인 교향시 작품입니다. 그런데 사

어 두 번째로 선정된 니체의 이 책의 내용에 대

실 이 곡은 도입부가 너무나도 강렬하고 장엄해

해 토론하는데, 실존을 완성해 가는 니체를 ‘자

서 한번 들으면 절대 잊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뻑’이라고 해석하는 예서(서울대 의대 지망생)

사람들에게 익숙하긴 하지만, 솔직히 제 생각엔

에게 칭찬을 남발하는 차민혁 교수를 보면서 어

웬만한 클래식 애호가가 아니면 이 곡을 끝까지

안이 벙벙해지는 이유입니다.

228

ㅣ 신일 5회 동기회


바로 이 대목에서도 R. 슈트라우스의 이곡이 흘

바로 그 영상 한번 감상하면서 지구 위로 떠오

러나오죠. 그런데 이 대목은 어찌 보면 상당히 단

르는 듯한 태양과 승혜가 오함마로 벽을 허물고

선적이고 단순한 삽입곡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받아들인 햇살을 함께 떠올려 보시죠.^^

진짜 이곡이 멋지게 삽입되는 장면은 따로 있 습니다. 첫날 소개한 차민혁 교수의 아내 노승 혜는 남편 차 교수의 교육 방법이 마음에 들지

* 2019. 2. 15 5. 모짜르트 레퀴엠 중에서 『라크리모사』

않아 합니다. 그러나 그의 강압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끌려가고 있다가 어느 날, 그 인내의 임

오늘 소개할 곡은 미사곡입니다. 미사곡 중에

계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래서 노승혜(윤세아

서도 장례 미사곡인데 원어로 레퀴엠 또는 우리

분)는 인테리어를 리모델링하러 온 인부들의 오

말로 진혼곡이라고도 합니다. ‘스카이캐슬’에는

함마를 잠깐 빌려서 아이들 공부방의 벽을 허물

미사곡이 두 곡 삽입되더군요. 오늘은 그중의

어 버립니다. 차 교수가 아이들 집중력에 방해

하나입니다. 바로 모차르트 레퀴엠 중에서 『라

된다면서 공부방의 창을 모두 차단시키는 두터

크리모사』입니다. 레퀴엠은 많이 들어본 듯한

운 벽을 만들어 버렸던 것이죠. 승혜가 가냘프

데 갑자기 라크리모사라는 어려운 말이 나와서

고 연약한 몸매로 그 무거운 함마를 수차례 휘

당황스럽기도 하시죠?

두르자 드디어 허물어진 벽 틈으로 강렬한 햇살

미사곡 내지는 레퀴엠에 대해서는 아마도 ‘울

이 비집고 들어올 때에 바로 이 곡 『자라투스트

트라 교향곡’에서 몇 번 얘기한 걸로 알고 있습

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울려 퍼집니다.

니다만, 다소 복잡하고 어려워도 교양 차원에서

사실 이곡의 인트로는 다른 드라마나 영화 광

잠깐 리뷰해 볼까요?

고에도 엄청 많이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우 리가 너무도 잘 아는 영화 ‘죠스’나 ‘지붕 위의 바이올린’, ‘쉰들러 리스트’ 등의 테마를 작곡한

미사곡은 보통 이런 순서의 형식으로 구성됩 니다.

영화음악가 존 윌리엄스의 영화 ‘스페이스 오딧

키리에(자비송)

세에’의 오프닝에 삽입된 이곡의 인트로는 너무

글로리아(영광송)

나 인상적인 장면이었지요.

할렐루야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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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도(신경, 신앙고백)

8. 코무 니오(영성체송)

쌍투스(거룩하시도다) 베네딕투스(찬미받으소서) 아뉴스데이(하느님의 어린양)

영화 ‘아마데우스’에도 나오지만 모차르트는 이 레퀴엠을 작곡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 지요. 그래서 저기 저 부속가의 마지막 곡인 『라

레퀴엠도 미사곡의 일종이니까 이와 비슷하긴

크리모사』의 8마디까지만 모차르트 자신이 작

하지만 그래도 약간은 다르다고 생각하시면 되

곡했고, 그다음부터는 모차르트의 제자 쥐스마

는데, 작곡가에 따라서도 조금씩 다르기도 하

이어가 작곡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쥐스마이

죠. 영화 아마데우스에도 많이 삽입되어 우리에

어 말고도 많은 이가 이 뒷부분을 작곡했지만

게 친숙한 모차르트 레퀴엠은 이렇게 구성되어

쥐스마이어 버전이 가장 모차르트답다는 평가

있다고 합니다.

를 받고 있지요. 여기까지를 알고 나면, 제가 저 위에서 “‘스카

1. 입당송

이캐슬’에 삽입된 곡은 바로 모차르트 레퀴엠

2. 키리에

중에서 『라크리모사』입니다”라고 얘기한 게 무

3. 세켄티아(부속가, 연속된 노래) 6곡

슨 의미인지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으신지요?

- 디레스 이레(진노의 날) - 투바 미룸(놀라운 나팔) - 렉스 트레멘데(무서워야 할 대왕이시여)

그러면 ‘스카이캐슬’에서는 이 곡이 어떻게 쓰 였는지 알아봐야겠지요. 첫날부터 여기 클래식 카페에 계속 등장하는

- 레 코르다 레(기억해 주소서)

우리의 귀여운 캐릭터 차민혁과 노승혜 부부에

- 컴푸 타티스(사악한 자들이 혼란스러울 때)

게는 입시생인 아들 쌍둥이 말고 그 위로 누이가

- 라 크리 모사(눈물의 날)

하나 있는데, 얘는 하버드에 입학한 엄친 딸로

4. 오페르토리움(봉헌송)

서 모든 캐슬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죠. 그런

5. 쌍투스

데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한 이 엄친 딸이 가짜

6. 베네딕투스

하버드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모든 캐슬러

7. 아뉴스데이

들에게도 순식간에 소문이 짜~하게 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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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물론 엄마인 승혜와 쌍둥이 남동생들도 다 알

* 2019. 2. 16

고 있는데 오직 차민혁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

6.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피에 예수 Pie

습니다. 차민혁 입장에선 비록 자기 아들 쌍둥

Jesu』

이는 어제 나왔던 한서진(염정아 분)의 딸 예서 보다 성적이 낮아서 다소 열등감을 갖게 되지

오늘이 ‘스카이캐슬’ 클래식 삽입곡 마지막

만, 이 하버드생 딸이 있어서 자신의 자존심을

순서일 듯합니다. 어제 예고해 드린 대로 오늘

세울 수 있었고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도 레퀴엠 중의 한 곡입니다. 바로 앤드류 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 차민혁에게 식구들이 차

이드 웨버의 『피에 예수』입니다. 한글로 써 놓

마 이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안절부절 상태였

으면 어감이 좀 이상하죠. 원어로 『Pie Jesu』입

죠. 그런데 이걸 언제까지 숨기기만 할 수는 없

니다. 번역하면 ‘자비로운 예수’. 이 『Pie Jesu』

었기에 결국 그 딸은 아빠에게 문자로 자초지

도 레퀴엠에 들어가는 곡인데, 어제 들어본 모

종을 고백하고 맙니다. 직접 대면해서 말로 고

차르트 레퀴엠에는 이 『Pie Jesu』가 없습니다.

백할 자신은 없었기에 그 대신 문자를 택한 거

그런데 이 『Pie Jesu』 중 가장 유명한 건 가브리

겠지요.

엘 포레의 『Pie Jesu』입니다. 그래서 저도 『Pie

차민혁 휴대폰에서 이 자랑스럽기만 한 딸의

Jesu』 하면 으레 포레만 떠올렸고 웨버의 『Pie

문자 알림음이 울려오고, 차민혁의 환하던 표정

Jesu』는 사실 이 ‘스카이캐슬’을 통해서 처음 알

이 갑자기 온갖 구겨진 표정으로 바뀌면서, 이

게 되었습니다.

문자를 읽는 장면, 바로 이 『라크리모사』가 아 주 처연하게 흐릅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 알게 된 사실, 이 앤드류 로 이드 웨버가 그 유명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이 곡의 삽입 배경을 설명하려다 보니 좀 장황

작곡가라는 사실, 게다가 듣고 보니까 저는 포

스럽게 됐군요.^^ 이제 각설하고 이 경건하면서

레의 곡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그야말로 자비

도 처연한 곡을 감상하면서 우리의 귀여운 캐릭

하신 예수께 영원한 안식을 간구하는 듯한 간

터 차민혁의 입장에 빙의되어 보시죠.^^

절함과 그에 따른 평안한 위로를 받는 느낌이 었지요. 이런 『Pie Jesu』가 삽입되는 드라마의 장면도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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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우리나라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그 죄책감이 결국

서 가장 잘 나가는 입시 코디네이터 주영 쓰앵

은 사회에 대한 복수심으로 변질되고… 그로 인

임도 사실은 천재 딸과 관련된 불행을 평생 안

해서 이미 몇 명의 영혼과 가정이 파괴되고 말

고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라는 건 이미 말씀드렸

았지만… 결국 딸의 영혼을 위해 神께자비를 청

고…… 이 드라마도 마지막을 향해 가면서 이런

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

주영 쓰앵임의 과거와 그녀의 사악함이 거의 드 러나면서 결국 수사망이 좁혀오게 되고, 그녀

“자비하신 예수님

는 살인 혐의로 구속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그러자 그녀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데…… 장애를 가진 딸의 거처를 찾아가서 주 방으로 들어가 그 아이가 좋아하는 카레라이스

『Pie Jesu』의 가사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 드

를 직접 요리해서 두 접시를 들고 딸의 방으로

라마에 삽입된 웨버의 『Pie Jesu』와 포레의

가져갑니다. 그런데 그 카레는 극약을 타 넣은

『Pie Jesu』를 함께 들어보시죠.

상태였습니다. 동반 자살로 자신과 딸의 불행을 끝맺음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딸의 방에 들어서자 딸과의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하면서 결 국 이건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 서 카레를 먹으려고 마치 짐승처럼 달려드는 딸 을 저지하는데, 그럴수록 딸은 흥분해서 더 들 이대고 이제 어미는 필사적으로 이를 막아서는 눈물겨운 아귀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바로 그 와중에 이 곡이 배경으로 깔리는 것이죠. 상상 이 가시나요? 천재로서 아이를 키우고 싶었던 엄마, 그러나 자신의 잘못으로 아이를 평생 장애로 만든 것에

232

ㅣ 신일 5회 동기회

그간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걷다,

이종혁

(Rap 스타일로 읽어주세요)

관위’가 보이데. 생각했어. 저 쉐이들 똑바로 해 야 할 텐데 하고.

오늘도오오 걷는다마아는 정처없는 이바아 알길~

성대 앞 지나 혜화동 로터리에 돌아드니 배고 팠어. 롯데리아 있길래 들어갔어. 며칠 전 시청 앞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먹어봤는데 형편없는

오후에 걸었어. 세종대왕님 앞에서 시작해 안

퀄리티였어. 동생이 그나마 롯데리아 불고기 버

국동, 창덕궁--오늘 표는 다 팔렸다네--을 지나

거가 좀 낫다 했던 생각이나 ‘빅불’ 세트를 시켰

창경궁을 찍었어.

어. 로터리로 향한 자리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이종원이의 벚꽃이 죽인다는 말도 있고 해서

앉았어. 창밖엔 배달 오토바이들이 시야를 좀

들어갔어. 종원의 ‘죽이는 벚꽃’은 ‘가짜 뉴스’

가리긴 했지만 배달통마다 붙어있는 “아들아 안

였어. ‘죽벚’은 우리 소싯적 창경원 밤 벚꽃 놀

전하게 다녀와라” 스티커가 안전한 배달 활동에

이 시절의 전설이었어. 지금 창경궁의 벚꽃은 ‘죽

도움이 되겠다 생각됐어. 옆에서 필리핀 여자들

이는 벚꽃’이 아닌 ‘죽은 벚꽃’이었어. 타 고궁보

인 듯 큰소리로 타갈로그어로 대화해 거슬리긴

다 쇠락한 면은 있지만 뭔가 나름 개성 있는 궁

했지만 식욕이 청각을 눌렀어. 치사, 야박하게

같았어. 그냥 분위기가 그랬어. 손 좀 보면 괜

달랑 하나 던져준 케첩이 세트 상차림을 초라하

찮겠어.

게 만들어 가뜩이나 쓸쓸한 나그네를 따블로 쓸 쓸 쓸쓸하게 만들었어. 미국처럼 뭉텡이로 한주

나왔어. 혜화동 쪽으로 휘돌아 가다 보니 ‘선

먹 집어 주는 것도 낭비 같아 그렇지만 하나는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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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읍써뵌다 롯데야, 작게 외쳤어. 그나마 낫다는 이것도 비주얼상 사이즈는 그

야겠다 하고, 삼선교로 넘어가는 고개까진 올라 갔어.

런 대론 데, 버거 번을 들쳐 속살을 보니 역시 이

아이고. 먹었더니 쳐지는 거 아니겠어?

것도 부실해 보였어. 패티는 고기함량 15% 이

그래서 코스 수정, 대학로로 방향 전환했어. 다

하일 거고 그것도 들어간 두 개 패티 중 하나는

시 혜화동 로터리로 내려와 종로 쪽으로 걸음 옮

정상 두께인데, 두 번째 패티는 많이 얇아 보이

겼어. 로터리엔, 걔네들 필리핀 애들 맞지? ‘동

는 걸 보면 ‘빅불’ 등 더블 패티가 들어가는 버거

성’ 앞의 좌판이 걔네들 나와바린 거 같았어.

의 세컨드 패티는 좀 작은 패티를 써 순진한 소 비자들에게는 시각적으로만 포만감을 느끼게

다니다 보니 외노자들 엄청 다녔어. 신호등이

해주고 원가는 줄여보겠다는 ‘작은 사기 큰 이

나 거리에서 자기들 언어로 떠드는 걸 들으며,

익’일 거라 생각했어.

“그래 난 너희들 이해한다. 나도 미국에 돌아가

치즈는 어딘가, 왠지 때깔이 이상해 보였어.

면 같은 신세란다”, 속으로 말했어.

먹는 도중에도 치즈의 맛과 향은 전혀 안 느껴 지니 모르겠어. 뭔지 그나마 감자 프라이는 감 자 맛이 났어.

대학로도 역시 명동과 같이 손잡고 갔어. 사람 은 복작대는데 글쎄, “길거리에 떨어져 굴러다

얘들이 제일 신경 쓴 건 냄새, 불고기 양념 냄

니는 낭만 쪼가리라도 있을까?” 하고 봐도 없었

새 같았어. 버거 포장을 푸니 불고기 양념 냄새

어. 마로니에 공원 한가운데 서서도 찾을 수 없

가 잠깐 1초(?) 확 풍겼어.

었어. 낭만은 우리 마음속에 남는 거지 거리에

그래 그거였어. 불고기 버거의 히트 이유는 단 한 가지 ‘냄새’였어.

남을 순 없는 거였어. 파랑새도 무지개도 ‘일체 유심조’ 생각났어.

뭐 음식 타박한다고 하지 말어. 그냥 그렇단

슬슬 아파오는 다릴 끌고 택실 타고 호텔로 돌

얘기야. 여하튼 입으로 들어갔으니 먹은 거아

아갈까 하는 유혹의 맘이 살짝살짝 비칠만한 때

니겠어?

보니 ‘연동교회’라고 쓴 큰 돌덩어리가 눈앞에 딱 보였어.

나와서 미아리고개를 목표로 돈암동까진 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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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오호라 여가 우리 임순기가 다니는 연동교회


구만!” 하고 그 돌덩어릴 보며, 또 ‘바르게 살자’

가 나서, “여까정 왔는데 그냥 걷짜~” 맘먹었어.

가 떠올라 실소하며, “우리 신실한 순기 친구 축 복하소서!” 짧은 기도하며 돌아 섰어.

종로를 만나 우회전 해 내려가는데 아이고 힘

- 삐리리리릭 힘들어서 중간 생략 -

호텔로 돌아왔어. 찬물로 발바닥 식혔어.

들고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는지 양쪽 발에 고통

그리곤 어떻게 됐겠어? 뻗었어.

시작돼, “안 되겠다 지하철 타고 갈까?”

그 말을 이뤘어.

지하철 타는 법은 동생에게 배웠어. 걸어 내

발 따꼬 잤어.

려가기 힘든데 택시 타자 --버스는 어떻게 타 는 건지 몰라 못 타겠어-- 맘먹고 슬슬 내려가 는데 건너편엘 보니 오잉 저가 ‘광장 시장’이로 구만. 해서 맘을 바꿔 가보자 하고 길을 건너 들 어갔어.

한 바퀴 돌아보고 앉아 먹어볼까 하는데 자리 가 없어. 그래서 그냥 나오는데, “여까지 왔는데 그래도 녹두 몇 장은 사들고 가 어머니하고 먹 어야 되는 거 아닐까?” 생각했어. 어머니도 녹 둘 좋아하시거든, 북쪽 분이시니까. 난 어머니 가 만들어준 녹두가 제일 맛있어. 근데 한편으론 지친 몸에 그걸 싸들고 갈 생각 하니 까마득했어. 귀찮은 맘에 “에이 그냥 가자” 하고 나오다가, “그래도 어머니가 지금 호텔에 혼자 계셔 노인네 분명 아무것도 안 드시고 있 을 텐데.” 하는 맘에 돌아가 세 장을 사들고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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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선생, 학교선생

故 이철주

<굳이 선거를 해야 한다면 후보 가운데 가장

나의 고2 때 담임은 수학 선생이었다. 당시 우

어린 사람을 뽑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꼭 괜

리에게는 수학이 세 과목 있었는데, 이분은 수

찮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때는 덜 묻

열, 미, 적분을 가르치던 <수학 B> 선생이었다.

지 않았을까..窮餘之策이던가…같은 반응 조건

미적분에 관한 한 모르는 것이 없었던 분이다.

이면 오염은 시간의 함수일 테니까..>

그러나 문제는 학교의 선생으로는 적합지 않다 는 것이었다. 물론 그 당시의 고2, 3은 입시를

오랫동안 기억되는 선생은 대개 아주 어릴 때

앞둔 戰士이지 학생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

나,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의 선생일 것이다. 그

나 아무리 당면 과제가 입시이지만 학생들은 선

래서 이 시리즈를 끝내면서 나의 고2, 고3 때 담

생에게 단순한 ‘지식 전달자’ 이상의 역할을 기

임선생님 두 분을 회고하고자 한다. 이 분들에

대하는 것이다. 의지하고...

대해 언급하기 전에 당시의 배경을 아는 것이

이 선생은 탁월한 수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

중요할 것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생긴 지

만 아이들, 심지어 자기 반의 아이들에 대해서

얼마 안 되는 ‘신흥 사립 명문’이었다.(하.하.하…

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주 수입

남들이 다 그렇게 불렀다. 히히..) 학교를 설립

도 저녁에 자기 집에서 하는 과외 수업에서 얻

한 재단 이사장의 의욕도 엄청나서 전국의 이

는단다. 그때 우리 학교에는 그 선생 이외에도

름난 선생들을 많은 돈을 주고 스카우트 해왔

전국적으로 소문난 여러 과목의 족집게 선생들

단다. 그러다 보니 입시 위주로 선생 인선이 되

이 많이 있었다. 후에 대학을 들어오니 다른 고

었었다.

등학교 출신들이 우리 학교 선생들을 더 잘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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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과외를 받았는데… 어

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당한 사건이 있

쩌구...저쩌구... 우리가 모르는 것을 더 많이 알

었다.

고 있을 정도였다.

고2의 가을에 아버지가 부도를 내고 잠적하셨

그렇게 학생에 대해 관심이 없는 선생에게 입

다. (연속극 같은 스토리인데.. 왜 부도를 내면

시 전사들의 고민과 생각은 사치스런 것이었다.

잠적을 할까? 그리고 그 사건은 ‘사업을 하지 말

그저 학교의 전달사항이나 전해주는 그런 담임

라’는 우리 집의 또 다른 지침을 만들었다.) 어

과 우리의 관계였다. 이 선생이 얼마나 학생에

쨌든 나와 할머니와 내 동생, 셋만 남게 되었는

대해 관심이 없는가에 대한 일화 하나...

데 가끔 어머니가 들르셔서 생활비를 일부 주시

나의 친구 가운데 머리도 좋고, 중학교부터 6년

고 가시곤 했다. 당연히 등록금을 못 내고 있었

간 首席만 한 놈이 있었다. 언젠가 거론한 교수질

다. 그러던 어느 날의 종례 시간이었다. 그 당시

하는 Y라는 친구이다. 6년간 수석을 안 놓친다

의 종례 시간이라는 것은 지친 학생들의 나른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담임이면 자

함이 극에 달한 몹시 늘어지고 퇴폐적인 분위

기 반의 1등이자 전교 1등인 학생을 모르기도

기였는데, 갑자기 담임이 나를 부르면서 분위

쉽지 않을 것이다. 고2 말경, 그러니까 우리를

기가 반전되었다. 물론 담임이 나를 알 리가 없

담임한 지 1년이 다되어 가는 어느 날, 그 선생

다. 반의 모든 애들은 본능적으로 긴장하였다.

은 내 친구 Y를 보더니 문득 언제 우리 반에 왔

나라는 아이가 선생에게 거명당할 일이 없다는

는가고 물었다. (그때 우리는 우열반 제도였고

것은 내 친구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다.

수시로 성적과 본인의 희망에 따라 반이 바뀌

나는 엉거주춤하며 앞으로 나갔다. 담임은 다

곤 했었다.) 옆에서 듣는 내가 다 민망하였다.

가가는 나를 향해 굵직한 몽둥이를 내리 쳤는데

내 친구 Y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아무리 학생

나는 그대로 정수리로 받아내었다. 디..잉.. 평

에 대해 관심이 없어도 자기 반의, 아니 학교의

소에 무협소설을 많이 읽었으니 망정이지 아니

영원한 1등을,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언제 보았

면 큰일 날 뻔했다. 약간 휘청 하던 자세를 겨우

느냐는 식이니..

가다듬는데, 뒤이어 날아오는 담임의 욕설은 몽

서로 철저히 지식의 전달자와 수혜자로 보낸 고2였다. 그런 담임선생이 가끔은 담임의 역할

둥이 보다 더했다. “야, 이 쌍놈의 새꺄.. 니 아버지 뭐 해?”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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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가정교육을 잘 받았으니 망정이지 사고 칠 뻔했다. 나는 속으로 그랬다. ‘씨x, 나도 아버지가

정이 재미있었다. 이 선생님은 그 살벌한 고3 학 생들을 참 잘 어루만져 주셨다.

어디서 뭐 하는지 모르겠다.’ 그 뒤로 담임이 뭐라

시간이 지날수록 선생님의 국어 수업은 우리

고 하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니 아버

에게 안락함을 주었다. 그 당시 고3 교실의 전

지 뭐해..’라는 소리만 귀에 울리고 있었다. 종례

형적인 풍경은 시간이 나면 책상에 엎어져 자

가 끝나고 나의 단짝들이 나를 위로하려 하였

는 것이었다. 담임선생님의 국어 시간은 졸기

지만, 그들도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먼

에 딱 알맞았다. 책을 들고 교실 여기저기를 다

저 가라고 하고 빈 교실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니시면서 설명하시는 수업 방식과 조용한 말투

창밖으로 보이는 인수봉, 백운대와 북한산의 능

는 많은 학생들을 침몰시켰다. 선생님은 조는

선..(연구소를 정문서 들어올 때 그 능선이 보인

학생을 보면 그 학생 옆으로 가셔서 평소보다

다. 지금은 이웃한 아파트의 sky line이 일부 가

조금 큰 소리로 수업을 하셨다. 대개의 학생들

리고 있지만.. 이놈의 나라의 풍수지리는 아파

은 그 정도면 깨어났지만 ㅅㅊ이와 같은 중환자

트가 다 버려놓고 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아

들은 그 정도로 깨어나질 않았다. (ㅅㅊ이는 용

파트 헐기 국민운동’이 벌어질 것이다.) 마음이

유도 을왕리에서 나의 첫 이성 교제를 무산시킨

가라앉으며, 그 잘 생긴 능선이 편안히 다가왔

그 ‘설사 맨’과 동일 인물이다.) 그러면 선생님

다. 내가 할 일이 뭐 있겠나..

께서는 왼손으로는 책을 들고 읽으시면서, 오른

결과적으로 나는 그 선생에게 감사해야 한다.

손으로는 학생의 책상을 톡톡 두드리셨다. 침

그 해 겨울을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기계적으

을 질질 흘리며 깨어나 민망해 어쩔 줄 모르는

로 공부만 했으니까.. 그러나 지금도 그 선생을

학생을 슬며시 피하시며 학생의 입장을 세워 주

담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미적분을

시던 그 선생님..

가르치던 학원 선생이랄까..

나는 계속 한 분기 정도의 등록금이 밀려 있 었지만, 선생님은 언제나 그 크신 입으로 미소

해가 바뀌어 고 3이 되었다. 새로운 담임은 국

만 지으셨다. ‘야.. 힘내.’ 라는 말만이 용기를 불

어 선생님이었다. 국어 선생답게 입이 상당히

어 넣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미소는 누군가에

큰 선생님이었는데 몹시 수줍어하시는 듯한 표

게 위로를 받고 싶던 그 고3의 추위를 덮어 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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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다. 우리 반의 누구에게나 그런 미소를 지으실 수 있었던 선생님.. 하루는 선생님이 종례를 들어오셨는데 ㅅㅊ이 가 완전히 뻗어 자고 있었다. 우리가 깨우려 하 자 막무가내였다. 선생님께서 ‘얘..얘..’ 하며 깨 우려 하시는데도 팔을 휘저으며 뭐라고 투덜대 고 막무가내였다. 선생님께서는 웃으시면서 놔 두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간

실력 이전에 관심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략하게 종례를 마치고 나가셨다. 고3의 피곤함 을 잘 이해하시는 분이셨다. 우리는 선생님의

나의 짧은 인생 역정으로 너무 힘든 이야기

말씀에 충실하느라 ㅅㅊ이를 깨우지 않고 전부

를 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며 선생님이 되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음날 ㅅㅊ이에게 물으

고 싶다는 꿈 한번 없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니, 잠에서 깨어 보니 한밤중이더란다. 자기 말

‘Strum und Drang’의 시절을 보내는 꿈 많은

로는 아니라지만 우리 욕을 했을 것이다. (그 ㅅ

학생들을 미소로 지켜주는 선생님이 그립다.

ㅊ이는 잠에 관한 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다. 언

그리고 우린 잘 모르지만 지금도 그런 선생들

젠가는 집에 가는 버스에서 잠이 들었단다. 그

이 우리의 어린 학생들을 지켜주고 있을 것이

버스는 수유리에서 우리 학교를 지나 종암동 고

다. 언제나 선생님들은 위대하다.

대를 지나고 신설동, 청계천, 퇴계로, 서울역을

본 글은 월곡한담 1, “선생님″에서 옮겨옴

거쳐 후암동을 돌아오는 노선이었다. ㅅㅊ이가 잠에서 깨어보니 차는 고대 앞을 지나더란다.

故 이철주

단지 방향이 다시 수유리를 향하고 있는 것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재료연구부장.

문제였지만.. 그래서 다시 학교로 와서 도서관

1980년대 초 강철보다 5배나 강한 신소재인 아라미

에서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고 집에 갔단다.)

드 섬유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주역.

그 해 우리 반 아이들이 좋은 결과를 보인 것도 그분의 관심과 배려 탓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월곡한담(月谷閑談)’ 1, 2권 (이철주, 다할미디어 , 20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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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까지 내 곁에 남을 사람 장남선

결혼식 손님은 부모님 손님이고 장례식 손님은 자녀들의 손님이라고 합 니다. 장례식 손님의 대부분은 실상 고인보다 고인의 가족들과 관계있는 분 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마지막까지 내 곁에 남는 사람은 가족들이요 그중 에 아내요 남편입니다. 젊을 때 찍은 부부 사진을 보면 대개 아내가 남편 곁에 다가서서 기대어 있습니다. 그런데 늙어서 찍은 부부 사진을 보면 남편이 아내 쪽으로 몸이 기울여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젊을 때는 아내가 남편이 기대어 살고 나이 가 들면 남편이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를 향하여 여보, 당신이라고 부릅니다. 여보(如寶)라는 말은 “보배와 같다” 라는 말이고 당신(當身)은 “내 몸과 같다”라는 말입니다. 마누라는 “마주보 고 누워라”의 준말이고 여편네는 “옆에 있네”에서 왔다고 합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가장 귀한 보배요 끝까지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세월이 가면 어릴 적 친구도 이웃들도 친척들도 다 내 곁을 떠나게 됩니다. 마지막 까지 내 곁을 지켜줄 사람은 아내요 남편이요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가장 소 중하게 여기고 아끼며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살아보니 돈이 많은 사람보다, 잘난 사람보다 많이 배운 사람보다 마음이 편한 사람이 훨씬 좋았습니다. 내가 살려니 돈이다가 아니고 잘난 게 다가 아니고 많이 배운 게 다가 아닌 소박함이 있는 그대로가 제일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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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사람과 사람에 있어 돈보다는 마음을, 잘남보다는 겸손을, 배움보다는 깨 달음을, 서로를 대함에 있어 이유가 없고 계산이 없고 조건이 없고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물의 한결같음으로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고 평생을 두 고 함께 하고픈 사람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알고 그 마음을 소중히 할 줄 알고 너 때문이 아닌 내 탓으로 마음에 빚을 지지 않으려 하는 사람은 흔치 않더 라 하는 것도 배웠습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맑은 정신과 밝은 눈과 깊은 마음으로 가슴 에 눈빛과 뜨거운 시선을 보여주는 그런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보배와 같은 내 여보 OOO이었습니다. 사랑합니다. 내 여보 OOO. 마지막까지 내 곁에 남을 사람 OOO.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평생을 함께 살아온 이 자리에 계신 장 인, 장모님 같은 노부부라고 했던 33년 전 주례 선생님(이일천 교장선생님) 의 결혼식 축사가 기억납니다. 오늘 제 회갑에 참석해준 저의 가족 여러분 그리고 장인, 장모님 사랑합니 다. 특히 이 자리를 만들어준 내 여보 OOO 영원히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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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담

전영식

오늘 바쁘신 와중에도 새로운 출발을 고하고자 하는 전경택 군과 이우림 양의 결 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이곳까지 왕림해주신 하객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 인사드 립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두 사람의 앞날을 위해 무엇 인가 도움이 될 만한 팁을 주고자, 이 두 사람의 앞날에 행복과 사랑이 가득하길 기 원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전혀 모르던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꾸리고 일가를 이루는 날인 동시 에 전혀 모르던 두 집안이 만나 하나가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 자리에선 저는, 이들 부부가 앞으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 신랑의 아버지로서, 또 한 인생의 선배로서 몇 가지를 당부하고자 합니다. 첫째, 결혼은 둘만의 결합이 아니라, 두 집안과의 결합이라는 것을 확실히 새겨두 어야 할 것입니다. 신랑인 경택이는 처갓집 일을 내 집안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처 갓집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길 바라고, 또한 우리 집 며느리가 된 우림 양도 시댁 일에 대해 내 집안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보면 “처가 식 구나 시댁 식구 모두가 내 가족이구나”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둘째, 부부싸움은 가끔씩 하되, 요령껏 잘 싸우는 부부가 되라고 말하고 싶습니 다. 싸우더라도 각방은 쓰지 말아야 하고, 가출이나 외박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싸 울 때는 불만을 그때그때 표출하면서 시원스럽게 싸우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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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싸우되 일정한 룰을 정해 놓고 하라는 것입니다. 싸우더라도 시댁이나 친정 식구 들에 대한 비난은 하지 말아야 하고,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모욕하는 말을 해서도 안 되고, 더욱이 욕이나 폭력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화를 절제하지 못하고 던 지거나 부수는 행위 역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입니다. 부부간의 의견 충돌로 다툼이 있다 보면, 듣는 자가 세상 다른 말은 다 참을 수 있 어도 이 말을 들으면 꼭지가 돌아 버리는 말이 있는데, 상대방의 자존심에 치명적 인 상처를 주는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에게 쉽게 지 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로 남게 됩니다. 흔히 촌수를 따질 때에 부자간은 1촌이요, 형제간은 2촌이요, 부부간은 무촌이 라고 하는데, 이 무촌이라는 의미는 간격이 없다는 뜻이니 부부일심 동체가 되겠 지만, 돌아누우면 남이므로 전혀 관계가 없는 사이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 럼 가깝고도 먼 사이가 부부이고 처음 만날 날부터 죽는 날까지 남남일 뿐이니 상 대방이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인지하고, 지혜롭게 헤쳐 나가라는 것 입니다. 셋째, 부부라는 두 사람의 관계는, 일단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연합이다 보니 맞는 것보다는 서로 맞지 않은 것이 많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서로 좋은 부분만 보아 왔지만 차츰 실망스러운 부분도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 없고, 내가 약점이 많은 보통사람이듯이, 배우자 역시 나처럼 약점투성이의 보통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상대에 게 완벽하기를 강요하지 말아야 하며, 기대치를 높여서도 안 되는 줄 알면 마음 상 할 일도, 실망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서로를 배려하면서 여러 해 동안 같이 살아가다 보면, 두 사람 모두 상대방에게 중화되고, 서로에게 중화되다 보면 서로서로 닮아가는, 금슬 좋은 부부가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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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넷째, 두 사람이 같이 할 수 있는 취미를 만드는 것입니다. 혼자만이 즐기던 취 미가 있다면 이제부터는 같이 즐길 수 있도록 하고, 만일 같이 즐길 수 없다면 같 이 즐길 수 있는 취미로 바꾸도록 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서로의 유대관계는 더욱 단단해질 테고, 외로움도 없이 서로의 사랑이 식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결혼은 인생의 의미에서 새로운 출생입니다. 서로 각기 다른 환경과 가풍 속에서 자라난 신랑과 신부는 이제 자기들만의 새로운 환경과 가풍을 만들어 나가야만 하 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선 신랑, 신부는 이점에 유념하시고,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길 바 랍니다. 경택이, 우림이! 두 사람 모두 검은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서로 간의 사랑이 변 치 말고 행복한 부부 되세요!! 경택이, 우림이 사랑해요!!

이 글은 2019년 6월 2일, 전영식의 차남인 전경택 군의 결혼식에서 아버지 전영식이 신랑 전경택 군과 신부 이우림 양에게 들려준 덕담입니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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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일상日常의 행복

정유택

절필絶筆, 그 후 15년

사실 글을 쓰는 것은 내 업의 하나였다. 명색이 증권사 애널리스트 1세대다. 그러 니 보고서 작성하고, 글을 쓰는 것은 일상이었던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며 글쓰기 도 멈췄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다시 글을 쓴다. 동기 문집 발간이 계기다. 물 론 주제와 장르는 전혀 다르다. 그래도 감회가 새로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온전히 자의는 아니다. 자의 반 타의 반이다. 문집 얘기만 나오면 편집 장과 몇몇은 입에 거품 물고 기고를 독촉한다, 회장은 아예 한술 더 뜬다. 동기들 100% 참석이 목표란다. 불가능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 말이다. 이런 모습 떠 올리 면 왠지 섬뜩하다. 까닥 하단 후환(?)이 있을 것 같은 기우마저 들 정도다. 이러니 자의 반 타의 반이다.

만원의 행복

오랜만에 책 하나를 통독했다. 『만원의 행복』, 2013년에 펴낸 1회 선배들의 ‘산 우회 산행 100회 기념집’이다. 글도 기고받은 것이 아니라, 산행 틈틈이 기록했던 것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감흥이 잔잔하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이랄까. 소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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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도 희열을 느끼는 선배들의 감흥이 진득이 와 닿는다. 제호題號를 『만원의 행복』으로 하고, 글머리에 이 기록의 요체는 행복이라 단언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번 동기 문집에는 소재와 주제, 장르 등에 어떠한 제한도 없다 한다. 구성이 맛 갈질 것이다. 내용도 가지가지, 흥미로울 것이다. 예상외의 반전과 감동이 있을 수 있다. 한껏 기대해 본다. 그렇다 해도 그 바닥 정서는 역시 추억과 행복이 짙게 자리하지 않을까, 지레 짐 작해 본다. 마음은 아니다 아니다 해도, 세월이 흐를 만큼 흘렀다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어쨌든 만원이면 행복하다니, 나도 행복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나는 50대에 큰 곤욕을 치렀다. 빚보증이 화근이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여러 건이 동시 다발로 터졌다, 그나마 냉정하고 침착했더라면, 어렵사리 불은 끌 수 있었다. 안타깝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참, 바보다. 그 사연 구구절절 얘기해 본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저 염세厭世와 술에 젖어, 세상 등진 화백(화려한 백수)이었다 정도로만 해 두자. 화려했어야 할 내 50대는 이렇게 허무하게 너무도 허무하게 갔다. 요즘은 형편이 많이 좋아졌다. 굴레는 벗었고, 마음도 평정을 찾았다. 그럭저럭 사는 재미도 느낀다. 이참에 마음을 다시금 다독여 본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경구가 있다. 당나라로 공부하러 가던 원효대사가 한 밤중 무덤 옆에서 물로 갈증을 푼다. 다음 날 그 물이 해골에 고여 있던 물이었음을 알고는 비로소 깨달았다는 바로 그 경구다. 모든 것(一切)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唯心造). 인간의 흥망성쇠, 길흉화복, 희로애락은 모두 마음에서 발로 된 것으로, 결국은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뜻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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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하다. 그 참뜻을 헤아리기엔 식견이 너무 짧다. 그래도 번민하진 않는다. 우 린 도를 닦는 것이 아니다. 필부일 뿐이다. 그러니 그냥 평범하게, 세속적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즉, 세상사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심심찮게 듣 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렇다. 행과 불행은 재물이나, 바깥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 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마음의 차이일 뿐이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결코 비교 대상 이 아니다. 결국은 내 안에 있다. 값 비싼 대가 치른 뒤, 가로 늦게 깨우친 인생 교 훈이다.

일상日常의 행복

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다. 이거다 하고 딱히 내세울 건 없다. 무료하게 반복 되는 일상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사는 맛이 있다. 주위를 에둘러 본다. 아직 몸 건강, 정신 건강에 이상 없다. 가정 있고, 눈 뜨면 할 일 있다. 말 벗, 술벗도 여전하 다. 이 정도면 행복의 조건은 충분한 것 아니겠는가. 여기서 집 사람 얘기 안 할 수 없다. 분명 팔불출八不出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집 사람은 모든 풍상風霜을 나랑 같이 했다. 아니 때 거리 없어도 내색 못하는 심성이 니 몸 고생, 맘고생은 훨씬 심했다. 그런데 기가 막힐 노릇이다. 자기는 불행하다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단다. 가슴이 찡하다. 이건 고마운 정도가 아니다. 내겐 천사다. 그 덕에 아들 둘, 딸 하나 모두 올곧게 컸다, 일탈逸脫없이 올곧게 컸다. 잘 나고 못나고 떠나 그 자체가 대견하고 뿌듯하다. 그간 나를 등지고 떠난 이들이 꽤나 있다. 몇몇은 비수도 꽂았다. 이른바 배신이 다, 한恨과 분노와 적개심이 뒤 엉켰다. 사람에 대한 트라우마(trauma)가 생기고, 세상 비정함도 맛보았다. 한 마디로 전혀 생각지도, 겪어 보지도 못한 혼돈의 연속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기억 지우려 한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내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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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못난 탓인데, 뭘. 대신 밝은 면만 보고 생각한다. 내 곁에는 고맙고, 소중한 이들이 아직도 많다. 나 를 믿고 격려와 응원을 보내고,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이다. 특히 선배 한 분 은 친동생 이상 나를 아끼며, 절실할 때마다 발 벗고 도와주었다. 가히 각골난망刻 骨難忘이다. 경중의 차이일 뿐이다. 이런 마음은 모두에게 똑같다. 그리고 그 교분 이 수십 년이다. 나 스스로 소원한 적이 있다 한들, 흉금胸襟이 있을 수 없다. 만나 면 언제나 반갑고, 즐거울 뿐이다. 분당 이모 선생, 그리고 지금도 군소리 없이 술 사는 일산 거사도 그중의 하나다. 3년인가, 4년 전이다. 어느 일요일 밤늦게, 수원 김 모 선생으로부터 문자 한 통 이 날아들었다. 다음 날 모임이 있단다. 신세월이다.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곰곰 생 각하니, 그건 압력이었다. 꼭 나오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하나 정이 있었다. 그래 서 나갔다. 이렇게 동참하게 된 동기들과의 만남도 이제는 일상의 한 축이다. 처음 에는 서먹한 감도 있었으나, 잠시 뿐이었다. 만남을 거듭할수록 옛정에 새 정이 더해지니 좋다. 격의도 격식도 없어 좋다. 자 유분방해 좋다. 화두가 다양해 좋다. 오가는 대화가 정겹고, 진솔해 좋다. 그리고 술이 흥을 돋우니 더 좋다. 조금 운치 있게 표현해 보면, 만원보다 비싼 ‘이 만원의 행복’이다. 그만큼 질도 좋을 것이다.

빈 곳간은 다시 채우면 된다

이 글을 쓰는 데는 나름 용기가 필요했다. 긴 세월 화백(실토 컨데, 이건 집 사람 표현이다)이었으니, 마땅한 소재가 있을 리 없다. 신변 얘기를 하자니, 치부의 일단 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쓰기로 했다. 이유도 있고, 의미도 있다. 나는 절필이란 단어로 글을 시작했다. 이는 곧 사회와의 단절과 동의어였기 때 문이다. 같은 맥락이다. 다시 글을 쓴다는 것은 사회로의 조용한 회귀라는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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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는다. 초로初老에 맞이한 인생 3막의 서곡이라 해도 좋다. 내 인생 1, 2막은 영욕榮辱이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 그러기에 감회는 남다르다. 그렇다고 특별할 것도, 대단 할 것도 없다. 덤덤히 일상을 더듬어 보고, 마음 자세를 추스르는 정도면 충분하다. 잠깐 옆으로 샌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력이 있다. 그중 하나가 내 생활 과 마음이 질서 있게 정리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그렇다. 후련하다. 잊고 있던 자아가 꿈틀대고, 존재의 이유를 다시금 느낀다. 시쳇말로 곳간과 술잔은 비워야만 다시 채울 수 있다 한다. 취중 한담醉中閑談일 지 모르나. 지극히 옳은 말이다. 탐욕은 버리고, 베풀기도 하며 살란 함의含意를 갖기 때문이다. 내 곳간은 텅 빈 지 이미 오래다. 재물은 잃었고, 욕심은 버렸다. 역설이지만 지금 와서는 이게 희망이다. 이제부터는 조금조금, 차곡차곡 빈 곳간 을 채워 나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여건 되면 신세 갚아 보은 하고, 다 시 베풀면 된다. 마지막 남은 작은 바람이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도 꽤 나 걸릴 것이다. 그러나 서두르진 않겠다. 서두르면 낭패뿐 이란 건, 이미 체득한 심오한 경험칙經驗則이다, 게다가 곧 100세 시대다. 서두를 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래서 느긋이 기다릴 것이다. 세월 벗 삼아 노락老樂을 즐기며, 때를 기다릴 것이 다. 꿈은 언젠간 이루어질 테니까. 마지막으로 그럴듯한 일화 하나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IMF 이후 폴란드로 출장 간 적이 있다. 그때 한 주재원이 솔깃한 얘기를 했다. 내 관상은 인복人福을 타고 난 상이란다. 아니 남 돕다 생고생인데, 인복이라니. 그저 덕담이려니 했다. 그러나 단호했다. 앞으로 도와줄 사람이 훨씬 많을 거란다. 그 말 이 맞았다. 나는 많은 사람에게 신세를 지고, 과분한 도움을 받았다.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이 기회에 집 사람과 선배를 비롯한 이들 모두에게 감사의 뜻 다시 한번 전한다. 진심으로 감사한다. (2019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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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15년!

조성천

80까지는 숨 붙어 있을 텐데…… 남은 15년?

부모님과 나라에서 나를 가르치고 투자한 27년. 물론, 중간에 3년 미만의 나라에 보은 기간은 있었지.

직장에서 월급 받으며 나 자신을 완성시킨 28년. 덕분에 장가들고, 오늘날의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지.

조그만 사업 하며 배운 기술로 근근이 버틴 10년. 이젠 퇴물 취급에 눈치 보며 자유의 시간을 얻었는데……

당구장, 골프, 산 & 여행 다니기, 언어 보충?? - 식상하다! 어떻게 보내지? 무엇으로 나와 주변에게 기쁨을 주지?

그래~ 학원이라도 등록해서 요리를 열심히 배워야겠다! 혹시 시골마을 분교에라도 영양사로서 봉사기회가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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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관

주인성

백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 나 자신은

도…… 기쁨도…… 행복도……

그 백세의 3분지 2 쯤에 도달했다고 보면 맞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일생을 생로병사에 비유하

행복론(조지훈)

자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어느 누구나 비슷하 나, 어떻게 얼마나 늙고, 어떻게 얼마나 병치레

멀리서 보면 보석인 듯

를 하는 것은 각자의 운명처럼 다르다 생각합니

주워서 보면 돌맹이 같은 것

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배웠습니다. 사회

울면서 찾아 갔던 산 너머 저쪽

적 동물로 살아가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시

아무데도 없다

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인데, 누구나 이 세 가

행복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

지 관계를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삶

마음속에 만들어 놓고

이 결정된다고 봅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

혼자서 들여다 보며

한 정신이 깃든다고 합니다. 육체와 정신이 별

가만히 웃음 짓는 것

개가 아니고 혈과 기가 동시에 발현하며 음양

아아! 이게 모두 과일나무였던가

오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곳을 우리는 몸이

웃으며 돌아온 초가 삼간

라 부릅니다. 모두가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

가지가 찢어지게 열매가 익었네

해 평생 먹고, 마시며, 호흡하고 있습니다. 일 체유심조-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원

인생은 희극보다는 비극이요, 고독의 연속이

효 스님의 깨우침에 새삼 숙연해집니다. 사랑

라 생각됩니다. 고독에는 양적인 고독과 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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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고독이 있습니다. 양적인 고독은 젊은이의 고

라 했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비우고 법정 스

독이요, 음적인 고독은 늙은이의 고독입니다. 양

님의 무소유를 마음 깊이 공유한다면 남은 인생

적인 고독은 내게 없는 것에 대한 바람 - 다시

이 행복해지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말해 권력, 돈, 명예, 이성, 야망…… 음적인 고 독은 내게 있는 것들이 하나씩 없어지는 허무함

하숙생

- 다시 말해 건강, 돈, 의욕, 가족, 친구……우리

(작사: 김석야, 작곡: 김호길, 노래: 최희준)

가 살면서 돈은 얼마나 필요할까요? 유년, 소년, 청년기엔 그다지 없어도 지낼만했는데, 장가를

인생은 나그네 길

가고 청장년, 중년, 갱년기를 지나 지공 거사(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철을 공짜로 타고 다니는 거룩한 사람)가 되고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보니, 다다익선은 고사하고 없어선 안 될 물건이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되어 버렸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돈(김삿갓)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천하를 두루 돌아다녀도

구름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모두 너를 환영하고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나라와 집을 흥하게 하니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네 힘이 가볍지 않구나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갔다가도 다시 오고 왔다가도 다시 가니 산 사람도 능히 죽이고 죽는 사람도 살리는구나

석가세존의 법어에서 인생은 공수래공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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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forget to remember

최세양

때는 아마도 고등학교 1학년(1971년 가을?), 시내버스를 전세 내어 ‘동구릉’으로 소풍을 갔을 때였다. 소풍이 끝나고, 집으로의 개별 귀가가 못내 아쉬웠던 10여 명 은 무리 지어 동구릉 역(지금의 구리역?)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역 앞의 등나무 덩굴 아래로 모인 우리들은, 종태(?)가 기타를 치기 시작하자마 자 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젊은 수놈들이 정말 흥겹게 노 래를 불렀다. ‘비극’은, 이 수놈 무리 앞에, 젊은 여인 10여 명 건너편 벤치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는 우리들 중에서 제일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 는,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멋진 사나이 한 명을 여인들에게 특사로 파견하였다. 이 머저리가 몇 초도 걸리지 않아서 풀이 죽어 돌아왔다. 등나무 밑의 수십 개 눈알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머저리의 주둥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 다. “우리하고 놀기 싫다네.” 좌절할 우리들이 아니다. 곧바로 제2인자를 선발하여 다시 벤치로 파견하였다. 제법 시간이(아마도 2~3분?) 흘렀고, 짧은 대화 끝에 비틀거리며 돌아서는 제2인 자의 모습이 목격되었다. 등나무 밑으로 돌아온 이 친구가 노발대발하며, “아주 질 이 나쁜 년들”이니 상대도 하지 말잔다. 땅거미는 역 앞에서 스멀거리는데…… 모두가 진수성찬을 눈앞에 두고, 입맛만 다시며…… 한쪽에선 여인들을 성토하고, 또 한편에서는 ‘우리끼리라도’ 재미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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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자고 스스로들을 위안하는 모습이 참으로 ‘측은지심’ 그 자체였다. 의리의 사나이를 자부하던 쪼끄만 ‘돌쇠’가 과감하게 무리에게 제안하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가서 다 잡아오겠다.” 여기저기서 비아냥과 콧방귀, 너는 나설 데가 아니니 쓸데없는 짓 말라는…… 돌 쇠의 희생정신을 ‘무리의 수치’로 간주하는 듯 염려의 목소리가 등나무 밑을 가득 메웠다. 돌쇠 그가 누구인가? 수군거림을 뒤로한 채, 씩씩하게, 뚜벅뚜벅, ‘무소의 뿔’처 럼 여인들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여인들 앞에 다다른 돌쇠는 여인들을 하나씩 하나씩 눈여겨 살펴본 후, 그중에서 누가 두목인지를 바로 파악하였다. 조용히, 여 두목으로 보이는 여인의 뒤로 돌아가서, 여인의 양 옆구리에 두 손을 찔러 넣고는 “같이 놀자”라고 묵직하고 무거운 톤으로 강권해 번쩍 들어 올리려 하였다. 그러 나, 아이고…… 여인을 일으켜 세운다는 것이 그만 ‘양 가슴’을 움켜쥐었으니…… 돌쇠의 정신이 혼미해지는 그 순간…… 여두목은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돌쇠의 뺨을 향해 손바닥을 내리꽂았고…… 태권도로 몸을 다진 돌쇠는 잽싸게 고개를 돌 려 치명타를 피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여두목은 얼마나 세게 휘갈겼는지, 제풀에 뱅 그르르 돌며 땅바닥으로 내리 꽂히고 말았다.

‘무림의 고수’가 아니었더라면, 돌쇠의 볼 살은 해골에서 떨어져 나갔을 것이며, 목이 부러져 동구릉에서 ‘조선의 왕족’들과 해후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정신을 상 실한 돌쇠는 두 앞발을 여두목의 가슴을 움켜쥐었던 그 자세 그대로, 휘청거리며 등나무 밑으로 귀환하였다. 무직한 용기와 패기, 파멸에 가까운 퇴각에, 무리 전체는 어마어마한 함성과 웃 음으로 격려를 이어갔다. 그리고 바로 다 함께 노래를 부르며, 여인들은, 이제는 더 이상 우리와 공존할 수 없는, 이 지구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해서도 안 되는…… 우리는 더 이상 벤치의 여인들을 전혀 개의치 않고, 등나무 밑에서 수놈들의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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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시작하였다. 한참을 노래하고 춤추며 흥을 돋우면서 수놈들의 향연이 절정에 도달할 때쯤, ‘마법의 순간’이 도래하였다.(당시 불렀던 노래는 나건이, 종태, 석창 이의 트윈폴리오 노래가 주를 이루었던 것으로 사료되며, 춤은 당시의 트위스트와 쏘울이었던 것으로 회상한다.) ‘질이 나쁜 년’들이 ‘여두목’의 인솔 하에 벤치에서 등나무 밑으로 스멀스멀 기어 오더니, 함께 놀아달라는 듯 애처로운 눈빛과 몸짓 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어느 한 놈 머뭇거리지 않고 여인들을 무리 속으로 끌어당겼고, 곧 이 어 청춘남녀들의 춤과 노래가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황홀한 달밤’ 그 자체였다. ‘호사다마’라고…… 어디선가 돌이 날아들기 시작하였고, 저 멀리 역사 입구에서 동네 양아치(?)들이 온갖 야유를 퍼부으며 우리더러 꺼지라고 아우성이다. 우리는 같이 돌을 던지며 쫒아내려 하였지만…… 여인을 보호해야만 하고, 숫자도 중과부 족으로, 할 수 없이 역사 안으로 피신하였다. 기차가 도착하고, 돌팔매질 속에서 여인들을 무사히 기차에 태운 우리는…… 이 제부터 함께 기차 여행이 시작되었다. 기차 안은 84번 버스처럼 완전 콩나물시루! 돌쇠와 불량해 보이는 또 한 친구가 기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며,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여유로운 기차 칸을 찾아 헤매던 중, 텅텅 빈 기차 칸을 발견하였고, 우리 모두의 선남선녀들은 그 칸으로 이동하였다. 한창을 신나게 노래하며 춤을 추는데…… 문제의 그 여두목은 지은 죄가 너무 컸 다고 생각했는지, 함께 어울리지를 못하고 친구 둘과 차창에 기대어 부러운 눈으 로 지켜보기만 할 뿐, 감히 함께 어울리지를 못하였다. 이 때 돌쇠가 나서서 여두 목의 손목을 잡아 이끄니, 마지못해서라는 듯이 은근슬쩍 무리에 합류하여 함께 춤추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돌쇠의 심장은 콩캉 콩캉…… 환상의 기차 여행이 시 작된 것이다. 다시 ‘호사다마’, 검표원 아저씨가 들이 닥쳤다. “이 짜식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왔어? ‘우편 열차’라고 쓴 팻말이 안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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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 어마한 굉음에 기차 바퀴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돌쇠와 우리들 중에서 가장 착해 보이는 불량배가 검표원 아저씨께 통사정을 하였고, 아저씨는 자신의 옛 모습이 떠올랐는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 청량리역까 지 무사히 도착하기 바란다며 자리를 비켜주셨다. 이별의 시간이 오자, 청량리역은 이제 생이별의 슬픔에 직면하여 있었고, 모두가 아쉬운 마음으로 빠이빠이를 하며 집으로 귀가하였다. 시간이 흐르고, 신일고등학교의 1학년 4반은 서울시(전국?) 합창대회에 참가 반 으로 선발되어 세종문화회관에서 예선전을 치르게 되었다. 예선전 연습은 나운 영 선생님의 사모님인 나건 엄마의 지도 아래 나건의 집(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문제는 예선전 연습을 하던 중에 불거져 나왔다. 얌전하고 수줍음 많던 종태가 사 라진 것이다, 연습 도중에!!!!! 어머니의 엄명에, 돌쇠와 또 한 친구가 종태를 찾아 나섰고…… 옥상의 한 모퉁이에서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종태의 뒷모습이…… 종 태는 bee gees의 [Don’t forget to remember]를 조용히 읊조리고 있었다. 내막인 즉 그날, 기차여행의 마지막 종착지, 아니 1학년 소풍의 끝인 청량리역에 서 모두가 생이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종태는 그 여두목을 집까지 배웅해 주었 다는 것이다. 돌쇠의 좌절은 끝 모를 땅 속으로 꺼져 들었고, [Don’t forget to remember]는 돌쇠의 십팔번이 되어 이 나이까지도 돌쇠의 최우수 애창곡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태 덕분에 우리 무리들은 여두목의 인솔 하에 기타를 들고, 백운대, 일영, 송추, 장흥…… 교외선 주변의 유원지를 섭렵하였고, 춤과 노래로 청 춘의 황금기를 보냈다. 그리고 여인들이 국악예고를 다니던 덕분에, 새가 교태를 부리며 날아다닌다는 ‘새타령’도 감상할 수 있었다. 이 이후의 이야기는 먼 훗날 우리가 칠순이 되면…… 그때 가서, 먼 옛날의 이야 기를 다시 또…… 신일의 건아, 신일의 건아 ~ ~ ~ 하늘과 땅이 떨리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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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달린다

한동표

나는 어려서부터 몸이 많이 약한 편이었다.20대 초반에는 결핵성 늑막염을 앓아 서 평생 늑막 유착이라는 힘든 상황을 맞았고, 성인이 된 후엔 하루에 한 갑을 넘게 피우는 담배에 절제되지 못한 생활을 해가면서도 건강에 대해서는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생활을 했다. 해마다 받아온 건강검진에서는 부정맥 판정이 나와 앞으로 예의 주시하고 조심 해야 한다는 의사 소견이 항상 따라다녔다. 아마도 40대 후반까지 이런 생활을 쭉 이어나갔던 것 같다. 이랬던 내게 우연치 않게 마라톤대회에 참가할 기회가 생겼다. 참가번호표를 준 사람의 성의도 있고 또 호기심도 작용해서 뛰어 보기로 하고, 대회 당일 망신은 당 하지 말자는 생각에 연습도 조금 하고 나서는, ‘제2회 문화 마라톤대회’ 10km부문 에 출전했다.일요일 아침 일찍 문산 임진각 광장에 도착한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광 경에 꽤나 충격을 받았다. 형형색색의 운동복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임진각 광 장을 가득 메우고 각자의 에너지를 뿜어내는데 그야말로 신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나는 일요일엔 늦잠을 자고 종일 집에서 빈둥거리며 하루를 보내곤 했었다.) 어쨌 든 10km를 뛰고 들어와서 잠깐 쉬고 있는데 잠시 후 21km(하프마라톤)를 뛴 선수 들이 도착하는 게 아닌가! 내가 뛰어온 곳의 2배가 되는 거리를 저리도 가볍게 뛰어 들어오다니... 결과적으로 이날이 내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내 생활에 변화가 조금씩 생겨나면서 건강에도 신경이 쓰여 평생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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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을 것 같던 담배도 끊고 심장 강화를 위해 조깅부터 시작해서 10km, 하프까지 각종 대회를 참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하다 보니 기왕이면 좀 더 잘해보고 싶은 생각에 동네 동호회(묏골마라톤)에 가입도 하고, 고등학교 동문 마라톤 모임 (신일 OB마라톤클럽)도 새로 발족해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마라톤의 매력에 빠 져들었다. 이렇게 연습도 제법 하고 자신감도 생긴 터에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하기로 하 고 중앙마라톤에 첫 출사표를 던졌다. 30km까지는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거고, 남은 12km가 진짜 마라톤의 시작이라는 선배의 말을 되새기면서 조심했는데도 역시나 후반부에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힘들게 4시간 36분의 기록으로 완주에 성 공했다. 걸음을 걷기가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은 죄다 어디론가 날아가고 가슴 벅찬 감격스러움만 남아서 첫 완주의 기억은 오래도록 가슴에 잊히지 않는다. 이후 동아마라톤, 춘천마라톤, 철원마라톤 등 대한민국의 이름 있는 대회는 거 의 매년 빼놓지 않고 뛰고 있는 중이고, 색다른 매력의 강화도 갑비고차 울트라 100km 마라톤에도 참가해서 완주했고, 화대종주(지리산 화엄사~대원사까지의 47km 산악마라톤)도 몇 년째 참가해서 뛰고 있는 중이다. 젊었을 때 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당신은 일상생활에서는 큰 불편이 없겠지만 나 이가 들은 후엔 힘든 일이나 경사진 길을 오르내리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을 내 렸었는데, 이 말이 무색하게 나는 지금 건강하게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모든 게 마라톤을 열심히 한 덕이라는 건 나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지금도 열 심히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내게 있어 마라톤은 내 몸과 정신과 자연이 교감을 이 루는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힘든 몸을 힐링시켜주고 정신을 맑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이 운동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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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스리랑카 여행기

황호근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의 오랜 지배를 받다 수백 년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독립한 뒤 아직

한 아름다운 원시림과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곳 이다.

도 내분을 겪고 있는 인도양의 아름다운 섬 스 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며칠 머문 뒤, 숲 속

숙소에서 조식 대신 준비해준 샌드위치를 싸

의 작고 예쁜 도시 캔디에서 아시아 최대 규모

들고 어제 미리 예약해 두었던 차에 올라 여명

의 아름다운 정원인 페라데니어 식물원(Pera-

을 뚫고 산허리를 누비며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

denia Botanic Garden)을 만나고, 인간 욕망

하니 며칠 전 아담스 피크(Adam’s Peak)에서

끝판왕의 역사 현장 시기리야 바위성을 돌아보

본 일출과는 다른 느낌의 새벽이 펼쳐지고 있었

고, 이 나라의 영산 아담스 피크(Adam’s Peak)

고, 능선 아래를 뒤덮은 구름 위로 떠오르고 있

를 등산하고 내려와 호튼 플레인(HortonPlain)

는 태양은 지리산 운무 위로 수줍게 얼굴을 내

트레킹을 위해 오늘도 103호 개미가 되어 스리

미는 불덩이를 연상케 한다.

랑카의 울창한 열대우림을 뚫고 버스에 몸을 실

각국의 여행객들이 6시부터 개장하는 매표소

어 누와라 엘리여(Nuwana Eliya) 빅토리아공

앞에 줄지어 서있다. 쌀쌀한 날씨에도 자연에

원 옆 숲 속의 작은 산장에 숙소를 정했다.

대한 경외심을 느끼려는 따듯한 마음의 소유자

새벽 4시. 하늘엔 별이 총총히 떠있고 오랜만

들이다. 고원 초입에 들어서서 배낭 속 인화물

에 보는 새벽 별들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오

질, 비닐봉지 등을 검사하고 있는 요원들을 보

늘 일정은 해발 2,000여m에 위치한 호튼 플레

니 자연을 아끼려는 스리랑카인의 마음이 읽힌

인(Horton plain) 트레킹으로 고원지대에 위치

다. 검사소를 지나 넓은 평원을 눈앞에 두니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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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world’s end다. 멀리 능선이 실루엣을 이 루고 능선 사이로 호수와 강물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고 있으니 별천지에 와 있는 것 같다. 떠오르는 해는 커다란 바위를 비 추며 숲을 점점 더 푸른색으로 채색하고 있고,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하는 기막힌 광경이 계곡 속에 숨어있으니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풍경화 한 폭을 품 안에 넣은 것 같아 흐뭇하다. 늘한 기운이 피부를 스치고 이름 모를 풀들은

한 사람이 겨우 다닐만한 길이 계속 이어지고

이슬방울이 맺혀 은빛 자태를 뽐내고 평원을 가

왼쪽으로는 절벽이어서 오금이 저려온다. 한참

로질러 흐르는 맑은 냇물은 말없이 새벽을 깨우

을 걷다 보니 사람들이 웅성거려 다가가니 숲

고 있다. 붉은 기운이 대지를 감싸며 간간히 마

길이 끝나고 확 트인 개활지가 나타나며 Little

른나무의 앙상한 가지는 파아란 하늘에 박히어

World’s End에서 바라보는 광경보다 더욱 웅

한 폭의 그림을 이룬다.

장한 모습이 펼쳐지고 있다. 이곳이 오늘 트레 킹의 백미인 World’s End다. 좌측으론 천 길 낭

편안하게 펼쳐진 오솔길을 따라 숲 속을 지나

떠러지가 이어지고 전면은 산줄기가 연결되며

니 마음이 저절로 안정되고 구비 구비 산자락을

멀리 희미하게 호수와 강이 우아한 자태를 뽐낸

돌며 여유를 즐기다 보니 나무 위 원숭이(Pur-

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대자연의 장엄함이 한

ple faced leaf monkey) 한 마리가 열매를 따 먹으며 그의 영역을 얌전히 지키고 있다. 평온 함이 느껴지는 광경이고, 산책을 하는 유럽 젊 은이들도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오지의 자연을 벗 삼아 즐기는 모습이 평화롭기만 하다. 한 시 간여 숲 속 오솔길을 즐기며 따라가니 절벽 아 래로 확 트인 절경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이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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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장의 파노라마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노르웨

아름다운 풍광, 태고의 고요함이 함께하는 이

이의 트롤퉁가(Trolltunga) 같은 웅장함은 아니

곳에 서있음에 감사하며, 많은 날 안개에 가려

어도, 중국의 화산 같은 빼어남은 아니어도 푸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수백 개의 봉우리를 찬란

근함이 느껴지는 열대지방의 아늑한 비경이다.

하게 벗겨주는 밝은 빛줄기에 감사하며, 건강하

이 작은 마음이 어찌 큰 자연을 알겠소? 장엄

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한 경관을 넋 놓고 바라보다 돌아서려 하니 풀

오솔길을 따라 잡초 무성한 원시림 사이를 걷다

섶에서 사슴 한 마리가 움직이지도 않고 서있

보니 계곡을 스쳐가는 바람 따라 물줄기가 이어

다. 놀라 자세히 바라보니 오른쪽 어깨는 상처

진다. 지리산, 오대산 계곡의 맑은 물줄기가 떠

가 나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의 즐거움을

오른다. 지구 상 어느 계곡이건 인간이 건드리

위해 원숭이나 지금 본 사슴의 서식지를 파괴하

지만 않는다면 잘 보존되리라.

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눈에 보이 는 장엄한 이 풍경에 대한 느낌은 사슴이나 원 숭이나 나나 또한 같으리라.

무심히 흘러가는 시냇물에 손을 담그니 더러 운 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산자락 한 구비 돌아 언덕에 오르니 물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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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고, 숲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작지도 않 은 베이커스 폭포(Baker’s Fall)가 하얀 포말을 날리며 별이 쏟아지듯 흘러내리고 있다. 나이아 가라 같은 웅장함은 없어도 한 두어 시간은 즐 길만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 넋 놓고 앉아있다 보니 문득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日月逝矣 歲不我延 (해와 달은 지나가나 세월 은 나를 위해머무르지 않는구나.) 嗚呼老矣 是誰之愆 (오호라! 늙음이여! 이는 누 구의 허물인고?)

리라. 부디 인간의 손이 타지 않게 잘 보존되었 으면 좋겠다. 오늘도 어김없이 해는 서녘을 붉 게 물들이며 산자락 한 모퉁이로 넘어가고, 차 는 산길을 누비며홍차의 주산지인 차 향기 그득

내가 벌써 60을 훌쩍 넘긴 늙은이가 되어 있다

한 하푸탈레(Haputale)를 지나고 있다.

니 세월의 덧없음을 느낀다. 다음 목적지는 마을 전체가 차밭으로 둘러싸 물줄기를 따라 수상식물 들과 잘 어우러져

여 있고, 실론 차를 세계에 알려 거부가 된 영국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하게 하는 Governor’s

의 토마스 립튼(Thomas Lipton)경이 매일 절

pool, Lea of Muttong Pool, Chiminey Pool

경을 즐겼던 립톤 싯(Lipton’s Seat)다.

을 감상하며 한 시간여 걸어 다시 원점으로 돌 아왔다. 잘 보존된 자연이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을 것 같다. 구불구불 비포장도로를 따라 끊임없 이 울창한 삼림지대를 두어 시간 지나며, 잘 보 존된 원시림이 한편 부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 다. 눈에 담아둔 이 풍경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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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05

추억의 글마당

고교 글(신일교지 3,4호) ㅣ 신일문학회(3회) 신일회보 (영자신문포함) ㅣ 신일동문회보 ㅣ 동기회 카페글 모음

신일 3호. 1972.1.15 발행

신일 4호. 1973.2.26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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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교지 제3호, 제4호

영원히 빛날 희생정신, 소방관 故 이길렬 ※ 본고는 1986년 신일교지에서 발췌

나보다도 남을 위하여 신일의 정신은 살아서 숨쉬고 있다. 전국토의 곳곳마다 신일인들은 믿음과 자유 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나보다는 남을 위한 삶을 보내며 신일의 정신을 한껏 빛 내고 있다. 나보다도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항 상 남을 위해 생활하시는 분들이 계시다. 그중 한 분이 이길렬(李吉烈) 선배님이 시다. 그의 목숨까지 국가와 국민의 위해 바치신 선배님의 성신이야말로 신일인 의 정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영혼만이 남아 우리의 정신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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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진화에 어려움이 있다고 동료 소방관께서 말씀 해 주셨다. 하지만 인명 구조와 주민들의 수고 하셨다는 말 한마디에서 큰 보람을 느끼신다고 도 말씀해주셨다. 선배님 역시 그런 보람 때문 에 소방관 일을 택하셨을 것이다. 사고 당시 선 배님은 진화 작업반이 아닌 내근자이셨기 때문 에 현장에는 나가지 않아도 되셨다고 한다. 그

소방관 故 이길렬 (신일 5회)

러나 ‘상황 발생’ 보고에 따라 재빨리 튀어 나가 는 동료들과 형님의 등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음을 느끼고 사고 현장에 뛰어들어 불행을 당

불나비처럼

하신 것이다. 그냥 사무실에서 계서도 되는 것 을 선배님은 그의 강인한 희생정신에 못이겨 편

1985년 9월 8일 새벽 성북동 대원각 화재 현장

안히 앉아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에서 진화 작업 중 비탈길에 미끄러져 내린 탱

어느 모임에서도 줄곧 리더가 되어 이끄는 것

크차에 치여 희생되신 선배님은 불나비처럼 화

을 좋아하셨으며 적극적이고 명랑한 성격을 소

재현장에 뛰어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남의 생명

유하고 계셨다는 선배님은 특히 노래하는 것을

과 재산을 지켜 주는 것을 천직으로 삼는 소방

퍽 좋아하셨고 또 실지로 잘 하셨기 때문에 고

관들 중의 일원으로 서울 북부 소방서에서 근무

교 졸업 후 장고웅 씨의 조카인 장세형 씨와 함

하신던 중 이런 변을 당하신 것이다.

께 ‘그린비’라는 팝송 듀엣으로 젊은이들 사이

소방관들의 임무는 참으로 어렵다. 특히 겨울

에 제법 인기를 끌었으나 연예계의 비리에 환

철 화재 때는 몸으로 덮친 물이 곧바로 얼기 때

멸을 느껴 남에게 보람 있는 일을 하기로 마음

문에 몸이 얼음 덩어리 속에 묻히는 것이다. 어

을 먹고 형님이신 이동렬 씨의 뒤를 따라 소방

려움은 진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들 사

관이 되셨다. 맹렬 소방관으로 발이 닳도록 현

이에 소방관이 출동하면 세금을 물게 된다는 헛

장을 뛰시던 선배님은 3년 전 화재 예방 업무 부

소리가 나돌아 일찍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인 방호과 지도계로 보직을 옮긴 뒤 탁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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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셨다. 그가 담당

은 이사를 가셨기 때문에 뵐 수가 없었다. 그래

한 구역의 건물은 화재 예방 시설과 조치가 잘

서 형님 댁을 찾았지만 형님 동렬 씨는 살지 않

되어 있기로 소방서 내에서 정평이 나 있다. 복

고 그 곳엔 선배님의 누님과 어머님이 살고 계

잡한 건물 구석구석에 노출된 위험 요소들을 선

셨다. 어머님께선 기자들을 마치 친자식과 같이

배님은 하나도 방치해 두지 않으셨다. 이 소방

대해 주셨다.

관의 소방 구역 건물들은 불에 관한 한 완벽하

“어머님! 선배님의 평소 생활은 어떠하셨습니

다는 소문이 난 것도 선배님의 치밀한 행정 솜

까?”라는 질문에 “우리 길렬이는 평소 노래를

씨의 결과였다. 그것은 매사에 성실하신 선배님

좋아하고 착해서 친구들도 많았지. 가수까지 했

의 생활 그 자체이기도 했다. 동료 소방관들 사

었는데 생활이 안정치는 못했어. 겸사겸사 형을

이에서도 항상 좋은 관계로 인간관계를 맺어 오

따라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된 거야. 매사에 착실

신 선배님이시기에 빈소를 지키는 동료 소방관

했기 때문에 공무원 생활로 안정을 찾게 될쯤

들도 선배님의 죽음이 너무도 애석하다며 못내

사고를 당한 거지. 두 형제가 소방관 일을 하는

아쉬워했다.

것이 아주 좋았었는데.......”라고 어머님께선 오

1954년 9월 27일 서울 장충동 147번지에서

히려 웃으시며 답변해 주셨다. 그러나 어머님의

태어나신 선배님은 2남 2녀 중 차남으로 아버

얼굴에서 기자는 아들을 잃은 한국적 어머님의

님께선 8년 전 돌아가셨고 지금은 어머님 김주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또 선

완 씨가 살아 계신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

배님께서 내신 디스크를 보여 주시며 말씀해 주

했고 희망도 가수이셨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기

신 누님의 자상하신 모습에서도 동생을 생각하

악반에서 활동하시기도 했으며 종교도 무종교

는 깊은 뜻을 엿볼 수 있었다.

였으나 평소 나름대로 굳은 신념을 갖고 생활 하셨다. 아내 이숙희 씨와 결혼해서 2년 전 아

하늘도 운 장례식

들 준성 군을 보셨는데 평소 가정생활에도 매 우 충실하셨다고 한다. 기자는 도봉구 월계2동

공무원 생활 9년 만에 영광스럽게 눈을 감으신

에 소재하고 있다는 선배님의 댁을 찾았지만 현

선배님 장례식 날은 하늘도 울었다. 촉촉한 빗

재 아들 중성이와 둘이서 살고 계신다는 부인

방울이 내리는 날 동료들의 손에 의해 고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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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묻히신 선배님. 비록 육체는 땅속으로 묻히셨지

우리 길렬이를 항상 잊지 말고 생각해 줘요.”

만 선배님의 훌륭하신 영혼은 우리의 기억 속에 서 결코 지워질 수 없을 것이다. 신일의 자랑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노래 소리

자 영광이다. 자신의 몸을 태워서 온 세상을 밝 혀 주는 양초와 같이 선배님의 몸은 타서 없어졌

그렇다. 이런 선배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지만 삭막해진 이 사회를 조금씩 밝혀 주는 좋은

들이 선배님을 생각하고 지키고 따르는 것은 어

거름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이런 좋은 거름

쩌면 우리의 당연한 의무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을 뿌렸으니 이 땅에선 오직 좋은 열매만이 열릴

것은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 될 것이 아닌가?

것이다. 선배님의 정신을 항상 되새기며 우리는

신일의 등대로서 신일인의 정신을 단적으로 보

우리의 할 일을 잊지 말고 잘 해내야 한다. 좋은

여 주신 선배님 같은 분이 계신 한 신일의 횃불

열매나 아니냐는 이제 우리의 손에 달린 것이다.

은 영원히 꺼지지 않고 더 활활 타서 한국 속의

마지막으로 신일인들에게 한마디 부탁하신 어

신일로 아니 세계 속의 신일로 발돋움해 갈 것이

머님의 말씀이 지금도 귓전에서 떠나질 않는다.

다. 선배님의 노랫소리는 신일학원을 둘러싸고

“내가 마지막으로 부탁한 말은 여러분이 공부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 되길 바라고, 특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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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명은, 곧 그의 발전은 수많은 여백의 사람 과 시간을 배설해 놓았다. 사람 대신 온갖 기계

나를 찾는 삶

가 일을 다 해내니 그 결과로 시간이 산출되고 인력이 남게 된다. 그런데 남은 시간에서 인간 들은 향락의 도가니에 들어가 인간 본연의 자세

최창경 <고 1>

를 잃어 가고 있다. 안락과 방종은 손을 치며 추 악함은 춤을 추고 있다. 합법화된 퇴폐적 시상 과 호색 문학과 호색 미술이 현대 감각이니, 현 대 예술이니 하는 탈을 쓰고 판을 친다. 인간의 타락성이 갈수록 짙어감에 따라 낡은 죄는 이에

때는 바야흐로 과학 문명의 절정기에 처해 있

찬조자가 되며 그것이 거의 정상적이고 건전한

다. 인간은 날개 없이도 하늘을 날 수 있으며 지

것처럼 보여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죄악은 죄

느러미와 아가미가 없이도 물속을 왕래할 수 있

악을 낳고 불의는 불의를 키우고 있다는 것! 그

게 되었다. 인문의 향상은 하늘을 깨뜨렸고 지

것은 자아를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식의 발달은 땅을 덮었으니, 사람의 힘으론 못 할 것이 없는 듯 한 자만심에 빠질 수밖에 없는

다시 한번 우리 세대를 살펴보자. 구약시대 소

세상이 되었다.

돔과 고모라의 실상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지 않 은가? 서구 풍조의 추악함, 도덕규범의 전락은

그러나, 문명에 도취되고 세상 물질에 욕망이

난잡한 해학과 소음을 받들고 있다. 종교를 말

큰 인간들의 심신이 마비된 상태 에 놓여 있음

하는 자는 많으나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을 부인할 수 없으니 어인 일 인가? 추호의 편

사람이 드물며, 설교를 제 입으로 하고서도 실

견이나, 주관이 없이 우리의 머리와 가슴과 생

행 하는 자가 드물다. 우리 인간은 억지로 합리

활에 예리한 진리 분별의 칼끝을 대어야 할 것

화시키는 죄에 대한 전과 같은 스릴과 전율을

이다. 영국의 중세 산업혁명이 본보기가 되려니

맛보기 위해, 번번이 불의의 복용량을 늘이고

와, 급속도로 인간 생활 모습을 변화시키는 물

있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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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이것이 발달된 문화와 문명의 산물인가? 또한 산물이어야 하는가?

산 기운으로 된 영혼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자는 외형적인 것이요, 후자는 내 면적인 것이 다. 좀 더 설명하면 육체는 이 세상과, 영혼은 내

문제는 이 모순 덩어리 속에 나 자신들이 갇혀

세와 물질적, 정신적인 조화 및 교섭을 요한다.

있다는 사실이다. 이 흑암을 나 자신이 빚고 있 지나 않는가?

육은 흙 위에서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하는 것으로서 땅의 것을 먹고 입고 살다가 일

그러기에 인격이 숫자로 탈락되며 기하급수적

세기도 채 못 넘기고 사라 져가는 것이요, 영은

인구 증가는 그리됨을 도와준다. 그 가운데 올

영원불멸의 것으로 신의 섭리대로 살아서 그 자

바른 사상이 강력히 나서질 못하게 되자 인간은

체를 인식 보존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24

자신의 근본적 존엄성, 즉 하나님께서 직접 부

절에 기록된 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여하신 사람이 란 특권을 스스로 놓쳐 버린다.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그 꽃은

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라는 내용은 영혼, 곧 새 생명의 우월성을 가르

대체 “나”란 무엇인가? 기분과 외형에 구속되 고 도취되어 동분서주할 것이 아니라 엄숙한 마

쳐 주는 것이며, 단연히 육에 속한 인생의 안개 같은 무상함과 나약함을 말해 준다.

음과 긴장된 마음으로 깊이 있게 나를 되돌아 보아 발견되는 나를 솔직히 빛 가운데서 키워

이십세기의 발달된 지능과 과학을 자랑하고 문

야 하리라.

화를 이용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자 권리라 하 겠으나 그것을 오용함으로 일시적인 쾌락을 육

성서에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의 그릇에 담고자 하는 인간들은, 그들이 붙잡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 에 불어 넣으니

고 목적하는 육에 속한 세상의 것들이 그토록

사람이 산 영이 된지라」라고 했다. 기독교적 입

안개 같음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을 다시 살피려

장에서 말할 수 있듯이 사람(나)은 두 가지의 연

하지 않겠는가? 육만이 사람이라 한다면 정육

합체이니 곧, 흙으로 지음받은 육체와 하나님의

점에 즐비한 가축의 고깃덩이를 다시 보게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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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또한 관 속에 잠든 미이라를 유심히 볼 수밖

르기 위한 필요 불가결의 방법일 뿐이다. 그 표

에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육신을 소홀히 여

준은-그 거울은-모든 것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겨선 안 된다.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빚으신 신

보내심을 입은 그리스도밖엔 없다. 그 정당성은

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정신과

신의 존재성이 해결해 준다.

육신을 잘 돌보고 다루어 영혼을 키워 보람 있 는 생활을 영위해야 하니 죽기 전까지이다. 인

우리가 황금을 찾기 전에, 향수의 냄새에 취하

간의(육의) 죽음의 시점은 이 한 시간이 지나면

기 전에, 아리따운 여인의 눈에 바라보기 전에,

한 시간만큼, 일 분이 지나면 일 분 만큼, 일 초

먼저 나 자신을 엄숙히 찾아야 한다. 정녕 참된

가 지나면 그만큼 앞당겨진다. 우리는 누구에게

자아를 찾기 전에 참된 인생을 보낼 수 없는 것

나 약속된 죽음의 시점이 시계 소리 따라 다가

이다. 목표 없는 인생은 나그네의 하루에 지나

옴을 알아야 된다. 그렇다고 시간을 두려워하거

지 않는다. 표준 없는 인생은 이미 가치를 잊은

나 삶을 회피해서는 아니 되리라. 자신들이 생

때문이다.

명을 소유하고 있음이 어색함이 없고 주어진바 대로 당연함으로 여김 같이 죽음도 그러한 것

우리는 영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자로 삼

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때가 이르기 전

고 표준으로 삼아 목표가 무엇인지, 솔직하게

에 자신의 할 바 일이 무엇인지 알아 이루는 것

왜곡됨이 없이 그 거울에 자아를 비추어 봄으

이다. 그것은 자아 발견으로 가능하다. 자아를

로써 찾아내어, 가치 있는 삶을 누리어야 할 것

발견하기 위해서는 왜곡됨이 없는 거울에 자신

이다.

을 비추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 완전성을 지 닌 것은 하나도 없다. 혼란한 현 사회에서는 더 욱 그렇다. 인간의 목표가 바라는 표준이 없는 한....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선악과를 다 먹은 손의 연속된 선택이었기에. 그것은 소설이 아 니다. 인간의 손으로 꾸민 것이기에. 그것은 어 느 교리나 교파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목표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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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아침에 이기용 <고 1>

이 아침에

기다림을 배우는 기도문.

내 하나의 혈맥으로 흐르는 그것은

조용한

돛을 단

내 강변에도

꿈의 바다.

안개를 거둬 마시며 음악으로 밀려오는

이슬에 씻은 꿈이듯

지혜로운 사람들의 사랑,

바장이는 나래의 함성

사랑의 호흡

떨리듯 와 닿는 하늘에선 엷게

아아

선혈의 청각으로 호흡하고

이 아침에

모두가 서성이며

아침의 호흡은

긴 사랑을 준비한다.

모든 악대의 행군을 지휘하고 있다.

이 아침에

열리는 문 사이로

나는 계단을 밟아 오르는

왁자지껄한 이야기가 들리고

참으로 성실한 나의

창가엔

신봉자가 된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271


다는 것이며 이 마을 여자와 결혼을 하면 잘 살 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 마을의 이야기는

소독하는 날

오래 전부터 나에게 큰 신비감을 던져 주고 있 었다. 그런데 이제 그 신비의 장막을 실제로 벗 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는 소독 하러 간다는

임승철 <고 1>

주임무는 벌써 잊어버리고 한 가지 기쁨에 빠 져 있었다.

아침 8시. 예상외로 채소밭은 시골로 한참 들어 가야 했기 때문에 버스를 타야 했다. 소독에 꼭 방학이 시작되어 시골에 내려온지도 어느덧 한

필요하다는 네 친구가 텅 빈 시골 버스 안을 자

달이 되지만 이렇다 할 재미있는 생활을 찾지

리 잡자 이내 버스는 오산읍을 빠져 나와 시골

못하던 나에게 병진이의 뜻 하지 않았던 제의는

길로 접어 들었다.

큰 흥미를 안겨 주었다. 친구들은 못다한 방학 숙제 얘기로 괜히 열을 자기네 채소밭으로 친구들과 함께 소독하러 가

올렸고, 나는 채소밭이 가까와진다는 것을 의식

자는 것이다. 나로서는 소독을 처음하게 되는

하고 웬지 마냥 즐거웠다.

것이라서 흥미가 있었지만, 그보다도 우리 친 구들끼리만 하루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내 기대에 조금도 벗어

들어 쾌히 승낙했다.

나지 않은 전형적인, 시골 색채를 띤 신비스러 운 마을이 나타났다. 여기 저기 흩어진 초가와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채소밭이 있는 곳이 친

그런대로 잘 정리된 네모난 논밭들, 그리고 멀

구들이 언젠가 말했던 월경이라는 마을인데, 그

리 보이는 어린이 광장 농장-새로 정부에서 이

곳에 얽힌 이야기는 더욱 재미 있었다. 예로부

곳에 세우고 있다.-의 무지개 깃발은 그야말로

터 이 마을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도 죽지 않는

신비의 극치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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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그러나 점심을 제 때에 먹자면 신비에 젖어 있

유유히 뱀 껍질을 벗긴다. 그뿐인가! 그들은 아

을 시간도 없이 일을 서둘러야 했다. 제일 쉬운

직도 꿈틀거리는 발가벗은 알뱀을 성큼 입 안에

줄잡는 일은 유일한 중학생인 장원이에게 양보

넣고는 깨무는 것이다. 순간 나도 먹어보라는

하고, 나는 둘째로 쉽다는 소독기 젖는 일을 맡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나는 재빨리 자리를 피해

았다. 병진이와 철구는 가장 어려운 물통 나르

버렸다. 시골 아이들은 모두 땅군이라는 소리를

기와 소독약 뿌리는 것을 맡았는데도 그들은 농

아직도 새파란 입술로 뇌까리면서.....

촌 건아들의 긍지를 살리려는 듯, 내가 맡은 쉬 운 일보다 더욱 쉽게 일을 할 수 가 있었다.

많이 싸 왔다고 한 점심이 우리에겐 너무나 적 었다. 삽시간에 찬합을 깨끗이 비우고 난 우리

햇살이 제법 비치기 시작하자 미처 밀짚 모자도

는 새로운 먹을 것을 찾아야 했다. 마침 가까이

준비 못한 나의 머리는 사정없이 지끈거리기 시

보이는 수박밭에는 주인이 자고 있었다. 친구들

작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조금도 약한 소리

에게 수박 따오는 고역을 말기고 나는 망을 보

를 듣기 싫다는 조그만 영웅심에 서투른 솜씨로

았다. 다행인지 친구들은 그런데는 익숙했기 때

더위를 참아야 했다. 정말 더운 날씨다.

문에 쉽게 한자루 가득 채워 올 수 있었다. 수박 을 나누지 않고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좋았

정오가 넘어서야 겨우 1,600평의 채소밭이 소

지만 눈은 주위를 두리번거려야 했다. 먹으면서

독 약으로 덮혀질 수 있었다. 깊지도 않은 냇물

도 며칠 전에 설탕과 얼음이 섞지 않은 수박은

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을 끝내고 하는 목욕이라

먹지 않겠다고 지껄였던 말이 여간 거슬리는 것

서 그런지 어느 때 보다도 시원했다. 마냥 시원

이 아닐 정도로 별미였다.

하기만 할 때 별안간 논둑에서 다가오는 검은 물체는 나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뱀이다!’ 하

3시 반 차를 타자면 아직도 몇 시간 기다려야 했

고 외치고 있을 때, 벌써 나는 둑 위에 올라 있

지만, 수북이 쌓인 수박 껍질은 우리를 그곳에

었다. 친구들은 무엇이 우스운지 웃기만 할 뿐

오래 머물도록 용납하지 않았다. 기운없이 길을

피할 생각도 않았다. 더군다나 그들은 순식간에

재촉하던 중, 철구의 뜻하지 않은 의견으로 친

뱀을 땅 위에 쭉 뻗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는

구들은 발을 멈추고 말았다. 날씨도 더운데 남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273


은 차비로 막걸리나 한 잔 하자는 것이다. 나는

라도 치뤄드리고 용서를 빌자고.....

학생이 무슨 술이냐고 끝까지 버티었지만, 그들 이 간다고 우기는 데는 어쩔 수 없었다. 할 수 없

그러나 뜻밖에 그들의 입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

이 나만은 술을 안 먹는다는 조건으로 난생처

왔다. 그것도 나약한 나의 마음이 감당하지 못

음 술집에 들어가서 진풍경을 구경했다. 여간

할 너무나도 큰 폭소를.....

어색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들은 옆 좌석의 어 른들에 못지 않는 훌륭한 술솜씨를 보였다. 나

하기야 지금 생각하니 그 전날 포도서리까지 얼

만이 이방인처럼 무거운 침묵을 착잡히 지켰다.

굴 하나 변하지 않고 해 치우던 네가 아니냐는

드디어 주전자가 동이 나서 그들은 아쉬움을 남

눈치다. 그들은 지금도 내가 그들의 조름에 못

긴 채 나만은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으를 술집을

이겨 포도서리를 하고는 마음 속으론 몹시도 울

나와야 했다.

었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그 노인의 노한 얼굴 이 나에게 커다란 마음의 부담을 준다는 것을

그때였다. 저 쪽에서 뛰어 오는 노인은 분명 아

모를 것이다. 아는 것이 다만 나는 서울 학생이

까 그 수박밭 주인이다. 친구들은 뛰고 있었고,

고, 저희들은 시골 학생이라는 것뿐이다. 악의

나 역시 우선 뛰었다. 더 이상 숨이 차서 뛸 수

없는 이런 장난이 무서운 범죄의 씨앗으로 변할

없게 되어서야 뒤가 조용해졌다. 우리는 뛰는

까 두렵다. 채소만 소독할 것이 아니라 이 어린

것을 그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마음까지 깨끗이 소독하고 싶다.

아직도 여유만만하게 노래까지 부르며 행진해 나갔다. 나도 지기는 싫어서 열심히 따라는 불

이후 밥상을 대할 때마다 달려오는 원두막 노인

렀지만 아까 그 노인 생각이 나서 무척 마음이

의 생각이 나곤 한다.

괴로왔다. 사실 그 농부가 한 철을 땀 흘린 보람 이 너무나 어처구니 없이 짓밟힌 것이다. 더구 나 이 신비가 넘쳐 흐르는 이 마을에 더러운 정 복자의 발자국을 남긴다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친구들에게 안타깝게 호소해야 했다. 수박 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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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가을이 오면 남구현 <고 1>

밤의 쌀쌀함이 나에게 “벌써 가을이!” 하는 놀라움을 자아내게 한다. 불면 증 환자도 이제는 벌레들의 울음 소리에 긴긴 밤이 심심하지 않은 가을인 것이다. 옛부터 사람들은 春秋란 말로 세월을 표현했던가? 그중 가을은 특 히 그렇다. 가을은 세월은 절실히 느끼게 하는 것이다. 가을은 역시 낙엽을 노래하는 계절보다는 추억의 계절 이 아닐까? 어릴 때의 나! 특히 가을의 어 린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미소지어 지는 것은 누구나 공통된 것이 아닐까?

한나절 내내 설익은 밤의 노란 알맹이를 씹으며 지루한 줄 모르고 산을 타 는 소년, 이것이 나의 가을의 어린 시절이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따가운 햇볕을 맘껏 받으며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뛰에 다녔던 것이다. 때로는 고 추잠자리를 잡느라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신작로를 따라 뛰어 다닐 때도 있 었고, 메뚜기를 잡느라 논 한가운데를 헤치며 뛰어 다닐 때도 있었던 것이 다. 벌레들의 울음 소리에 놀라 잠을 깨면 다시 잠들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 름다운 가을의 밤에 어린 나는 여름의 뙤약볕 아래 동무들과 개울에서 물 장난치던 일이랑, 더위를 잊은 듯 높은 나무 위에서 노래하던 매미를 잡던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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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랑을 생각하고 미소를 지을 때도 있었고, 때로는 내가 언제나 어른이 될까? 하는 막연한 기다림에 어린 한숨을 쉴 때도 있었던 것이다. 쌀쌀함이 낮에까지 확대되어 점점 두터운 옷을 입어야 하는 늦가을이 오면, 어린 나 는 떫은 도토리를 씹느라 얼굴을 찡그리며 노란 은행잎과 빨간 단풍잎들을 책갈피에 끼워 누구에게 줄까 하며 동무들을 하나하나 손꼽았던 것이다.

이만하면 나도 가을의 푸른 하늘에 부끄럽지 않는 아름다운 가을을 가지 지 않았을까? 그러나 여기 파아란 가을이 올 때마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이 있다. 끝없이 밝은 파란 빛깔의 자연에 비해 인간 의 가을은 점점 담청색으 로 변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의 어린이들은 아스필드 위에서 그들의 가을 을 지내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 청소년, 소녀들은 기계의 배설물에 질식할 것 같은 것이다. 어른들의 낭만이 넘치는 가을의 추억을 들을 때, 요즘의 가을은 얼마나 보 잘 것 없는가?

나는 지금 안타까운 한숨을 쉰다. 앞으로 얼마나 지나야 모든 인간이 숨막 히는 현대 문명을 벗어나 맑디맑은 자연을 향해 몸부림을 칠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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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願 이해긍 <고 2>

값싼 넋두리라 나무라지도 마오. 숨겨운 몸부림도 역시 아니오. 나를 둘러싼 여섯 자의 黑棺을 벗어 나자는 삶의 연장을 願하는 바는 더욱 아니오. 다만 희뿌연 너의 부스러기를

‘너’

한 웅큼이나마 호흡하기를

오라를 풀지도 마오.

願하는 바이오.

이끼슬고 색 바랜 喪章을 메어 두지도 마오. 다만 회색 가여운 입술로 내 바램에 미소해 주오. 너다이 스러져 간 너의 影像. 다만 그대로 願할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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斷崖 전현철 <고 2>

압축된 空間과

파장의 해변 위로

핍박어린 호흡의 허덕함에

목각 인형의 무리는

승화하는 生命線을 끊다.

열지어 달려 수평선을 망가뜨리다.

松林 사이 들리는 음치의 합창,

천 갈래

그를 피해

만 갈래

출렁이는 물결에 고립하다.

산산히 부서지는 파도의 잔해,

단지, 하늘 날고픈 마음이 있어 저 바다 끝을 가고픈 마음이 있어

훗날, 지워질 발자욱의

밑 하얀 大海 속에

초라함은

미망, 生의 氣를 투신하다.

고운 백사장 위에 스스로이 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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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단풍

他界

권오양 <고 2>

김주병 <고 2>

빙점 하의 재생을 위하여 닥쳐 온

자신의 째임을 당하면서도

모진 투쟁의 대순환

노염은 사선을 그리며 번쩍인다.

그의 날카로운 도전 앞에

슬픔은 농도를 더해서,

힘 없이 주저앉는 노오란 손, 빠알간 손.

뇌성은 적막을 부수며 고막을 때린다.

겹치는 연륜 속에 찌그러 드는 자신의 모습을 밭일 깨진 거울에 비춰 보고는

하이얀 하늘도 죄가 있는지

대지진이 자신을 삼켜 주기를 바란다.

기쁨과 슬픔의 연속인 他界에 환희의 정열을 불어 넣는다.

변절의 제물이 되어 차디찬 대지 위에서 몸부림치는 노라.

자연은 하늘의 청초에 빠져 들고 하늘은 지연의 더러움을 감싼다.

위에서 보이는 너절한 타계 더러움도 오늘로써 마지막인가?

세상은 아마도 끝이 없는 향연의 대열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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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 황태영 <고 2>

놈은 오늘도 내게 끈덕지게 요구해 왔다. ‘이 친

니 아직은 모르겠으나 시골로 갈 지도 모른다고

구야. 그래 양보할 것도 종류가 있지 어느 놈이

힘없이 대답했다. 잠시 후 우린 헤어졌다. 난 괜

제 걸프렌드를 양보하드냐?’놈은 매사가 그랬

시리 우울했다.

다. 내가 모처럼의 후의로 내게 생긴 좀 색다른 걸 보여 주기만 하면 달라고 때를 썼다. 지난 일

그녀는 갔다. 걔 아버지가 대구 어디쯤에 농장

요일 그녀를 보여 줬더니 녀석의 근성이 발휘되

을 하나 사서 관리하기로 작정하고 온 식구들을

기 시작한 모양이다. 윽박지를 기세로 덤벼드

대구로 내려가게 했다는 것이다.

는 놈을 간신히 무마시키느라 무진 애를 썼다. 아그립바의 염세적인 표정을 수긍할 만하다. 도 오늘 방과후, 학교 다과점에서 그녀를 만났다.

대체 걔가 내 맘속 어디쯤에 존재했었길래 걔가

좀 수척해 있었다. 가뜩이나 흰 얼굴이 더욱 희

간 다음 내 마음은 이리도 공허하단 말인가? 방

어 보이는 것이 보기 좋았다. 무슨 걱정스런 일

과후 놈은 그것도 모르고 오늘도 내게 떼를 썼

이 있느냐고 물으니까 이사를 가야할 것 같다고

다. 덩치는 커다란 놈이 내게 애원을 하기도 하

했다. 걔 아 버지가 정년퇴직을 했다는 말은 들

다가 안되면 윽박지르기도 하고, 아무 말도 하

은 적이 있었다. 재차 어디쯤으로 가느냐 물으

기 귀찮아 대꾸도 하지 않고 교실을 나와 버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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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다. 그랬더니 놈은 뛰어 오면서 정말 이러기냐

놈이 웃통을 벗었다. 역시 놈은 체격이 좋다. 하

고 했다. 약이 바짝 오른 모양이다. ‘이 친구야.

지만 이렇게 된 이상,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

자네만 약이 오르나?’ 한참 눈을 부라리던 이 친

이다.

구가 입을 씰죽 거리더니 한마디 내뱉고 가 버 렸다. “내일까지 알아서 해”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우린 서로를 향해 달려 들었다. 아차 코를 한 대 얻어맞았다. 움찔했다.

놈은 내게 결투를 청했다. 아무 대꾸도 않는 내

이어 연타가 들어왔고, 결국은 발길에 채여 벌

가 더욱 꼴불견이었나 보다. 이따 방과 후 체육

렁 나자빠졌다.

관 옆으로 나오라고 수업시간 중 내게 쪽지를 전했다. 될대로 되라지. 가뜩이나 우울한데 싸

아, 하늘이다. 가을 하늘이라서 그런지 더 파란

움이나 한판 하면 직성이 풀리겠지.

것 같다. 놈이 주춤한다. 재빨리 일어나야 할 순 간이었지만 이렇게 파란 하늘을 놓치기 싫었다.

방과 후 놈과 난 나란히 체육관을 향해 묵묵히 걸었다. 뒤엔 모처럼의 좋은 구경을 놓치지 않

일어날 생각은 않고 하늘만 쳐다보는 나를 놈은

겠다는 듯 구경군놈들이 대여섯 따랐다. ‘죽일

이윽고 짓밟기 시작했다.

놈들, 누구 터지는 꼴을 봐야 직성이 풀리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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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령 박춘영 <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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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제3회 신일문학회 작품집 신일중고등학교 학생회 학예부 문예반 1972년 신일중고등학교 학생회 학예부 문예반에서 발간한 제3회 문학회 작품집에서 옮겨옴 (편집자주)

산문

가을의 정 이동준 <고 2> 옮겨보는 시선이 왠지 쓸쓸해 보임은 -오늘아침, 창을 열 때 확 밀려온 바람-, 이 바람이 가을을 몰고 왔음이리라. 이때를 피부에 느끼게 되면 무언지, 사람들은 성스러워 보이고 아름답게, 말쑥히 보인다. 나 자신이 서글퍼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일까? 하지만 가을은 나에게 있어선, 아니 모두가 그렇듯이 정겨운 계절이다. 살결을 간지럽히는 바람의 정 갈잎에 동그랗게 맺혀보는 이슬의 정 높은 하늘 중턱에서 단색의 무지개를 그려보는 하이얀 구름의 정 밤 하늘 별들의 다사한 정 모두가 가을의 친구이다. 나의 친구다. 가을은 나를 닮아 조용한 계절이다. 너무도 아름답고 몸서리치도록 아늑한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맑은 하늘 점점이 널린 구름밑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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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노라면 내가 오히려 계절을 닮아가고 있다. 가을을 닮고 있다. 발걸음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퍼득퍼득 생각나는 지난 가을의 일들이 나를 그리워한다. 고궁 망설임 없이 성큼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에 가을이 품에 안겨온다. 길고 짧게 얽힌 가지 사이로 보이는 듯한 지나버린 계절들 · 하얀 손길이 반기는 듯하다. 푸른색의 벤취위에서 윤무하는 낙엽은 갈길을 몰라 한다. 大地를 서성인다. - 발길에 스쳐오는 멍 멍의 속삭임.낙엽은 가을의 밀어다. 가을의 밀어를 듣고파서 난 여기 왔지않던? 고요함은 낙엽위에 한없이 내리고 저 나무들이 말없이 반겨 주기에 이 가을에 사람들의 발길은 더욱 조용한 명상속으로 잠겨드나 보 다. 그러기에 가을은 더욱 정겨운 친구가 되고… 갖가지 색들이 채색된 산으로, 산속으로 자꾸 깊어가는 것이다. 벗 없이 벤취에 앉아 나 또한 작은 명상속으로 빨려 들고 있다. 떨어지는 의미! 깊은 상념의 경지에 도달해서인가. 저 한잎 한잎의 슬픈 몸짓이 안타깝다. 가을은 떨어지는 계절이기에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우리에게- 더욱 정을 주는가보다. 향기 깊은 계절! 가을! 오솔길로, 네거리로, 산길로 자꾸 다가서는 얼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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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구석진 한 모퉁이에서 고세훈 <고 2> 어떤 날, 나는 소외당한 땅굴 속을 무디어진 발톱으로 깊숙이 긁어대는 새(鳥)의 놀이를 지켜본다.

돌을 깎고 흙을 다지며 충혈된 눈으로 핏덩이를 부르고 마침내, 마지막 남은 암벽을 뚫는다.

회색 허공을 선회하던 솔개는 자취를 감췄고 새는, 마지막 피를 토한 채 오랜 놀이를 그친다.

텅 빈 하늘은 한갖 회한(悔恨)으로 가슴을 파고들 뿐 밤새 문창호를 때리던 세찬 바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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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老僧)은 몰랐나보다.

한 촌부(村夫)의 노력은, 죽음을 의식하기엔 너무나 미약한 것이었나.

난 광활한 광야 한 가운데 서서히 나의 호흡을 침몰(沈沒)시킨다.

이젠 말없이 거친 손등을 쓸며 다시 긴 행렬에 참가해야 하는

나는 외로운 법당(法堂)에서 새 불씨를 위해 장작을 쌓는 정좌한 스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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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박승열 <고 2>

아침을 함쑥 마시어 알알이 고운빛에 열린 맑음

새벽을 여는 동터옴에 몸을 맡기노라면 스스러움에 몸 감싸듯 윤무하는 생각들이 화염을 내마시어 고개를 느럿고 때 지난 아침을 조망하여 나는 가벼운 찬탄을 느낀다

그냥 말갛게 지녀오는 상념들 가을 속 엉킨 염원들을 늦딸기 시큼한 맛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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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게 여물리노라면 밤새 달려온 나그네마냥 잎새에 엉킨 채로 조용한 순종을 갈구하는 정겨운 열매가 있다. 밤사이 대지를 돌던 내음새가 겹으로 모여 이렇게 적막한 수밀도를 이루어놓은 사랑스러움 속에 다만 철없이 다가오는 쌀쌀한 내음새

밤을 지난 날들이 일려놓은 이 기쁜 소리들은 정말 미덥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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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서 허영섭 <고 2>

길을 간다 안개 자욱한 들판을 걷는다 얼마쯤 왔을까

원망도 바램도 없이 파랗게 꺼져가는 불꽃은 아련한 영상 속의 먼 이야기 앞과 뒤를 분간할 수 없는 어제의 긴 설화 전설의 그림자만 뿌옇고

정복할 수 없는 입술에는 쓸쓸함이 굳어버린 의지가 (다리 하나 없는 안경이 콧등위로 흘러내리고) 허공에 그려진 얼룩진 환영 눈썹은 이슬로 촉촉이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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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분수는 온몸을 안개로 감싸 대기에 동화시키려는 듯 아무도 모르게 뻥그란 점으로 망각의 세계로 희미한 그림자만 남기고 좌절된 마음은 안개에 흡수되어 동정을 비는 처연한 미소 (이른 새벽의 검은 외투는 안개로만 표백되어 떠나야할 來日로만 보였지)

하늘을 부러 망각하고 오히려 쓸쓸함에 자처하려는 이방인의 가난한 욕심, 동경 길을 간다 안개 속을 걷는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을까 카오스의 소용돌이는 자갈들의 풍랑에 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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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젊은 날 권희영 <고 2>

어느날, 거울이 무서워지고 투쟁, 투쟁으로 피발린 여인네들과 같이

곤한 육체가

목욕을 했던 때를

봄을 맞으려 했으나

부끄러워 한다

왠지 모르게 식어져만 가는 청춘의 뜨거운 피

사랑은 커가기 마련이었고 암흑 속에 있었던

차거운 피

둥근 태양은

헛발 디딘 방황자의 모습은

벌겋게 떠오른다

동질성과 반복의 둘레에서 마지막으로

시간의 유한성을 탓했다

주먹을 쥐고 항거했던 그 잔영들은

그러나 다시금 와롭게 된 나

미친 개의 끓어오르는 거품 속에서

단풍이 들었기 때문인가 보다

사라지고 만다

이제는 쉬고 싶다. 평안히........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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離別賦 박태영 <고 2>

동녘빛에 눈방울 반짝거리고 빠알간 가슴안은 아가씨의 곱고 고운 발길 후광업은 부처암, 자비속에 미소 머금고 꽃신의 무용 속에 홀딱 빠졌다. 금박 은박 댕기드린 고운 머리칼 방울 방울 아롱지는 이슬 버리고

고이 고이 가마위에 태워 보낼 걸

색동 저고리 주홍 치마 차려 입자고

꼬옥꼭 싸매준 봇짐 속에

이슬맞은 방아깨비

이별이 한 품고 여울 이뤘다.

색바랜 구두 위에 들국화 가득 뿌렸고 혹시나 기다리는 고추 잠자리

숨은 달빛, 길잃은 별빛이

세월놓쳐 뱅뱅돌다 날개 잃었다.

흑단 짜내고 가을맞이 금풍에 바르르 떠는 초롱불 밑 흐르는 붓 끝, 감겨도는 슬픈 사연이 꿈결잡고 새겨보는 이름석자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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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물이 흘렀으면 김용환 <고 2>

모래 말라버린 모래 위를 간다.

강을 건너서 산

산마루에는 달을 업은 늙은 소나무가 서성거렸다.

달빛이 외로와 물결은 철없이 흘렀고 발길에 매이곤 채여 멀어갔다,

눈을 퍼올리면 별이....... 별은 물따라 흘렀다. 가빠진 숨결이 자색 연기가 마을에 자욱히 떠오르면 붉게 타고 푸르게 치솟는 물결

스스럼없이 별은 사라져 갔다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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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을 다시금 차고 싶다. 철없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심장이 뛰는 만큼이나 타며, 치솟는 물결을 헤어보고 싶다.

달은 또 노송 위에 앉았다 흐를 물이 없다 하늘에는 방황하는 별들의 헤메는 절규

이대로 날이 새면 별 들은 어디로 갈꼬? 파묻히며 걷는 갈라진 발길… 물·별·달 중얼거리며 모래 위를 간다. 모래밭 가슴이 물을 그리어 하늘을 쏘아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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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기도 안관식 <고 3>

이제 긴 그림자를 끌며 당신께 돌아가는 작은 문을 열었습니다.

주여 ! 당신은 당신이 주신 이 젊음이 당신을 향해 소망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지가 일으켰던 번뇌, 똘똘 뭉쳤던 반항, 우리를 속박하던 욕망의 사슬이 당신께 향한 손 끝에서 풀려 자유… 자유라는 무한을 펼칩니다.

한없는 매력으로 풍겨오는 반항에 스스로의 삶을 거부한 교만으로 속박당한 작은 영을 당신의 품으로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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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투정을 안은 어머니의 깊은 사랑으로 여름이 싫은 아기에게 폭염의 의미를 가르쳐 주소서.

긴 그림자를 끌며 태양이 지고 스산한 바람이 스치어 오면 폭염의 불꽃이 꺼지고 한줄 재로 바람에 날리는 그것이 우리들의 시대. 한 순간의 열정이었던 것을 깨달을 때 난 당신의 섭리대로 살아왔음을 또한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이제 당신께 손모아 올리는 이 기도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살고픈 젊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기도를 받아 주소서.

모교〈신일회보〉제22호 1973.7.18. 발행 8면에 실린 작품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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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신일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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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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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신일영자신문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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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모음

유재석(2003/01/06)

5회용 게시판입니다 5회 졸업생들의 장이 마련되었습니다. 경조사나 친구들에게 알릴 내용, 또 그냥 적고 싶은 말 무엇이든 좋습니다. 모두 많이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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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김윤갑(2003/04/29)

홍정표(2003/04/29)

정표야! 내 생각하면서 맛있게 들어라!

윤갑아! 실화를 읽고 이해 부탁한다.

그대가 잡수시고 그대의 아들이 뜯어먹고 있는 그 황구

김윤갑원장! 마누라가 오죽했으면 사랑하는 남편을 외

님의 뒷다리는 내가 챙겨드린 것일세! 맛있게 드시고,

박이 되는 몸보신 맛 기행에 보냈었겠나. 하루 전에 혹

나중에 “식후감”을 다시 올리시게! 어부인께서 그 귀중

시나 하고 웃으면서 배웅해준 남편이 다음날 술독에 쩔

한 황구님의 향기를 애써 창문을 열어서 쫓아 내보내신

어 흐느적거리며 역시나 하고 돌아 왔으니 하늘이 무너

다니..., 이 어인 일인가!!! 우리가 누구를 위해서 황구를

져 내리는 것 같았겠지. 하지만 매일 자네가 친히 하사한

애써 먹고 있는 것인가? 다 어여쁘신 우리 마나님들을

보약을 내가 직접 각종 양념을 첨가해 요리한 탕을 정성

행복하게 해드리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닌

껏 복용하고, 베란다에 나가서 하늘을 보며 간절히 “옛

가??? 모른척하고 가슴속으로 감사의 눈물을 흘리시지

날같이 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으니 조만간에 우리 집도

는 못 하실망정에 냄새난다고 타박이라니... (아마도 너

자네 집처럼 평화가 오지 않겠니??? 부끄럽지만 아래의

무도 좋아서 역설적으로 표현하시는 행동이 아니실까

실화(?)를 읽고 나면 조금이나마 나를 이해하는데 도움

싶기는 하네...) 그나저나,,,, 글을 올리실 때마다 글 솜

이 될 걸세. 부디 조롱이나 하지 말게나. * 어느 날 늙은

씨가 날로날로 일취월장하시는 것 같네. 한편으로 부러

나무꾼이 나무를 베고 있었다. (개구리) 할아버지! (나무

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 다른 친구들이 글 올리

꾼) ...거기.. 누구요? (개구리) 전 마법에 걸린 개구리예

기 주눅 들까 염려스럽다네 *^^* 중학교 입시에서 재수

요. (나무꾼) 엇! 개구리가 말을?? (개구리) 나한테 입을

를 했으니 형님 대접을 해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술

맞춰 주시면 사람으로 변해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

한 잔으로 일축한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네! 다

어요. 난 원래 하늘에서 살던 선녀였거든요. 그러자 할

음부터는 형 노릇 하시게! 술값도 혼자 다 내시고! 우리

아버지는 개구리를 집어 들고는 나무에 걸린 옷 주머니

집에도 황구의 향기와 더불어 평화가 찾아들었음을 슬

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나무를 베었다. (개구리) 이봐요.

며시 알려드리네! 내년 봄까지 유지 되어야 할 텐데...,

할아버지! 나한테 입을 맞춰 주시면 사람이 되어 함께 살

치악산 자락에서 늘푸른 김윤갑 드림.

아드린 다니까요! (나무꾼) 쿵쿵! <무시하고 계속 나무를 벤다> (개구리) 왜 내말을 못 믿어요? 난 진짜로 예쁜 선 녀라구요! (나무꾼) 믿어. (개구리) 그런데 왜 입을 맞춰 주지 않고 날 주머니 속에 넣어두는 거죠? (나무꾼)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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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여자 필요 없어. 너도 내 나이 되어봐. 개구리랑 얘

면 이제 무더운 여름철이 되어서야 시간이 날 것이다. 한

기하는 게 더 재미있지. (개구리) -_-;;

의원 문을 서둘러 닫고 아내와 함께 전주로 향했다. 오 후 4시가 채 안되었는데 벌써 고속도로는 붐비기 시작

김해만(2003/05/18)

했다. 여주에서 국도로 접어들기로 한다. 여주, 장호원,

윤창영(740311) 부활(?)

안성을 거쳐서 천안까지 가기로 했다. 시간은 좀 더 걸리

민한기 군에게서 긴급한 전화가, 윤창영을 만나다, 응원

겠지만, 이 좋은 봄날의 오후를 고속도로에서 무의미하

단장 윤창영 이거 죽었다고 인쇄까지 해서 가지고 다니

고 지루하게 보내고 싶진 않았다. 여주 장호원간 국도는

는 동기 수첩을 다시 확인하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별

일부러라도 드라이브를 즐기기 위해서 찾는 코스이기도

들과 눈을 맞추며.... 반추해봅니다. 지난 20주년 기념행

하지 않은가. 천안에 다다르자 성일이의 말대로 천안. 논

사에서 먼저 떠난 동무들을 추모하는 순서에 우리는 많

산 간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잘 뚫려있다. 다른 경부 고속

은 우리 동무들이 먼저 소천 한 것에 침묵으로 또 흐르는

도로와 달리 노폭도 넓고 노견도 넓다. 게다가 제한속도

눈물로 함께 하는 우리의 맴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대.!!!

가 110킬로이다. 120까지는 부담없이 달릴 수 있는 길

그 동무 중에 한 친구가 우리와 같이 숨을 쉬며 같은 무

이다. 나로서는 과속을 하고 있는 셈이다. 논산에서 다

대에서 연기를 하고 있으니... 우리의 무관심인지, 아니

시 서해안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전주로 향했다. 장호네

면 친구의 거시기인지 그 주인공은 바로 윤창영입니다.

약국으로 가는 길은 성일이가 너무나 자세하게 이메일

밴드부이고 농구경기장에서는 응원단장으로 단상에서

로 일러줘서 내 집 찾듯이 찾아갔다. 아니, 내 집 보다도

춤을 추던 그 친구가 모교의 언저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더 잘 찾아갔다. 나는 가끔 내 집도 헷갈리는 경우가 있

소통은 했습니다. 건강하답니다. 연락처는 011-735-

기 때문이다. 전주에 도착한 시간이 정확하게 오후 7시

5697입니다. 한탁입니다.

30분이었으니 그리 늦게 도착한 것은 아니다. 원주에서 출발한지 꼭 4시간 만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알맞게

김윤갑(2003/05/13)

도착한 것이다. 나와 성일이와 장호와 각각의 안사람들

5회 전주 지회 동문회 후기

과 함께 해물을 잘하는 집으로 갔다. 강원도 산골에서 온

5회 커뮤니티에 교대로 들락거리면서 전주로 오라고 유

우리 부부를 배려한 전주 친구들의 마음 씀씀이였다. 저

혹하는 윤장호와 김성일의 유혹에 결국 넘어갔다. 5월

녁 식사는 맛의 고향 전주답게 진수성찬이었다. 생합을

10일 토요일 오후! 날씨는 화창했다. 오늘을 넘겨버리

안주로 보해20을 마시다가 구은 조개를 안주로 마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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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도 했다. 그리고 굴밥을 먹었다. 안면도 굴밥과 달리 굴

많은 찬을 먹어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손바닥만한 갈

이 많이 들어있었고 푸성귀가 들어있어서 맛이 독특했

치 튀김에 각종 나물과 된장국 등이 푸짐하게 한 상 차

다. 순한 술이 술술 들어갔다. 2차는 덕진공원으로 향했

려져있었다. 안주인의 솜씨가 일품이었다. 그럭저럭 음

다. 커다란 호수를 건너가면 맥주를 마시면서 물 쇼를 감

식점을 차려도 웬만할 것 같았다. 김성일을 운전사로 임

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다. 현수교라서 출렁거리는

명하고, 장호와 우리 부부는 전주 시내 관광을 함께 했

느낌을 받으면서 걸어가는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내

다. 박사급 운전기사를 쓰는 사람도 그리 흔치는 않으리

가 취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두 다 취했었

라. 전동 성당에 도착하니 한참 미사 중이었다. 문 밖에

다. 봄 향기에 취하고, 보해20에 취하고, 풍광에 취하고,

서 망설이다가 염치 불구하고 슬쩍 들어가서 성당 내부

현수교에 취하고..., 3차는 성일이가 별장처럼 쓰고 있

를 둘러보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이 볼 만 했다. (아래 전

다고 자랑하는 아파트로 향했다. 밤이라서 전망을 확인

동 성당 관련 글 참조) 전동 성당 바로 옆에 경기전이 있

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백세주를 박스채로 갖다놓고

어서 들러보았다. 역시 볼거리가 다양했다. 수령이 수백

즐겁게 마셨다. 아내들이 술을 아껴서 마시라고 조언을

년은 된 듯한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이 수 없이 늘어서 있

해주는 바람에 2 병은 내일을 위해서 남겨놓았다. 아쉬

어서 시원하고 좋았다. (아래 경기전 관련 글 참조) 전주

운 대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새벽 두 시

시내 관광이 끝나고 마이산으로 향했다. 탑사로 오르는

에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김성일 박사 내외는

길은 온통 흑돼지 삼겹살집이었다. 탑사 코앞에서도 돼

벌써 일어나 있었다. 사모님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느라

지 갈비를 구워댔다. 어쨌든 맛있는 냄새가 났다. 탑사

고 바쁘셨고 김박사님은 베란다에서 풍광을 즐기며 차

는 말 그대로 탑 천지였다. 한 개인의 힘으로 이렇게 많

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해장이나 할까하고 백세주 박스

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볼 수 있게 하고 느낄 수 있게

를 들여다보니 어제 밤에 분명히 두 병을 남겨놓았는데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그 누

댕그러니 한 병만 남아있었다.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

구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인지. 내려오는 길 주위

고 하신 박사님 내외분에게 따질 염치가 없긴 하지만, 내

곳곳에 모조 탑들이 세워져있었고, 탑 중간에 기증한 이

가 잠든 사이에 혼자서 백세주를 비웠다고 생각하니 그

의 이름과 그가 소중해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천지

래도 섭섭해서 기어이 따져 묻고야 말았다. 시원하게 마

위공 사해형제(天地爲公 四海兄弟) 시혜불념 수혜불망(

시라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

施惠不念 受惠不忘)

다음이었다. 멋쩍었지만 고마웠다. 아침 식사 때 이렇게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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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영(2005/07/30)

우엔 며칠 만에, 어느 땐 몇 달 뒤, 어떤 땐, 1,2년 지나

누군가 널 위해

서야, 아차, 그때 하나님께서 날 도우셨구나, 깨닫게 되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는 것이었다. 동기 여러분,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하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

나님은 존재하십니다. 아무리 내가 부정하더라도, 눈에

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

보이지 않아도, 공기와, 압력이라는 게 존재하듯이 말입

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 형태로 어려운 환경에 있는 동

위해 기도하네 당신이 외로이 홀로 남았을 때 당신은 누

기들이 있다”는 이태준과 통화 후 지금 내 눈엔 눈물이

구에게 위로를 얻나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마음을 그대

살짝 맺히고, 가슴이 뭉클합니다. 바로 그들을 도울 수

홀로 잊지 못함을 조용히 그대 위해 누군가 기도하네 네

없는 내가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기도하겠습니다. 그들

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

을 위하여....

하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 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1980

이기영(2006/01/10)

년 첫 직장 대한생명을 뛰쳐나와 기자가 되기 위해 여러

애틀랜타의 친구들을 생각하며

차례 시험을 보고, 최종 실패한 뒤, 하나님과 담판을 위

지난 연말 미국에 있는 가족을 보러 갔다 올랜도에서 크

해 세끼 째 굶으면서 정릉 스카이길 옆 수풀 속에서 하

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시카고에서 남

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탓하는

쪽으로 두세 시간 떨어진 샴페인이라는 시골에 살고 있

자세로...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 훗날 알았

다. 샴페인은 University of Illinois가 있는 대학도시라

다. 내가 어리석고 하나님께 얼마나 우스꽝스런 행동을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여행 계획이 없었는데 주변의 한국

했는지를.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 후로도 다른 직

사람들이 죄다 여행들을 떠나는 바람에 분위기에 편승

장을 거쳐 주택은행에 정착, 22년을 다녔다. 그 동안 적

해서 우리도 떠나게 되었다. 애초에는 LA로 갈까 생각

쟎은 곡절을 겪으면서 나는 점차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

했는데 너무 멀어 플로리다 올랜도로 가기로 했다. 샴페

했다. 하나님은 나의 욕심을 들어주시지 않는다. 회개하

인에서 올랜도까지는 편도 1000마일(약 1600키로) 이

고, 통회하며, 눈물을 쏟을 때 조금씩 들어주신다. 시간

조금 넘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이었다. 이틀에 걸쳐

이 지나보면 어느새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걸 알게 됐다.

운전을 해야 했는데 마침 중간지점인 테네시주의 차타

그런데, 그런데, 그 사실을 바로 깨닫지 못한다. 어느 경

누가라는 도시에 신현태 동기가 호텔을 하고 있고, 애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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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랜타에는 이명근, 김명준, 우종인, 이훈, 김강식 동기들

이 집은 더 크단다... 종인이는 현재 쇼핑센터를 건설 중

이 살고 있어 여행 도중에 보기로 했다. 내가는 길에 먼

에 있다고 했다. 또 강식이는 요즘 춤에 푹 빠져있고 거

저 신현태 동기가 운영하는 호텔에서 하루 밤을 묵었다.

의 선수 수준이란다. 둘째 날에는 명근이 내외가 일식당

신 사장은 Hampton Inn이라고 힐튼호텔 계열의 프랜

으로 우리 가족을 데리고 가, 오랜만에 생선회를 배 터지

차이즈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데 방도 90여개로 꽤나 큰

게 먹었단다. - 우리가 사는 샴페인은 시골이 되서 제대

규모였고, 손님도 북적거리는 잘나가는 호텔이었다. 탄

로 된 일식, 한식당이 없고 생선 먹기가 아주 힘든 동네

탄하게 자리 잡은 모습이 참 보기에 좋았다. 저녁식사는

란다. 반면 시카고 근처는 세계적인 소도축장이 있어 소

신사장이 특별히 예약한 스테이크 집에서 현태 가족과

고기는 정말 맛이 끝내준단다.- 식사 후에는 명근이 이

함께 맛있게 했다. 애틀랜타는 올라오는 길에 들렸는데

웃들과 함께 노래방에가, 생각지도 않게 미국에서 새벽

원래 들리기로 한 일정보다 이틀이나 뒤에 가게 되었다.

까지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불렀단다. 명근이는 교회 장로

올랜도에 디즈니랜드며, 유니버설 스튜디오 등 놀이공

로, 명근이 부인은 집사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

원이 워낙 많아 원래 예정했던 3일에서 이틀 연장한 5일

고, 큰아들은 지금 신학대학에, 둘째는 비지니스를 전공

을 보냈다. 그런 바람에 애틀랜타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

하고 있다고 한다. 아주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어 보

진 오거스타에 살고 있는 강식이가 나를 본다고 운전하

기에 무척 좋았다. 친구가 왔다고 여러모로 신경써준 동

고 왔는데 보지도 못하고 그냥 내려가는 안타까운 일이

기들에게 무척이나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특히 잠자리

발생하기도 했다. 애틀랜타에 도착한 날 저녁에는 명근

까지 세심하게 돌봐준 명근이 부인께 깊은 감사의 말을

과 그 부인, 우종인과 그 부인, 명준이와 한식당에서 갈

전하고 싶고, 하여튼 여러 친구들 덕분에 호강하고 왔단

비며, 해물조림이며, 냉면을 맛있게 먹었다. 명근이의 말

다. 갑자기 계획된 여행이어서 미리 선물도 제대로 마련

에 의하면, 뉴욕에서 온 사람들이 애틀랜타 식당의 음식

하지 못한 거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하여간 네가

을 먹으면 맛이 없다고 하고, 시카고에서 온 사람들은 맛

건넨 오렌지색 티셔츠들을 입고 골프장에서 단체사진이

있다고 한다는데 우리는 무척이나 맛있게 먹었다. - 이

나 한 장 찍어 올리도록... 다시한번 고마웠다는 말을 전

말은 시카고 쪽 사람들이 좀 촌스럽고 맛을 잘 모른다는

하면서 또 보게 되기를 바란다. 기영

그런 의미로 사용된 것임. 애틀랜타에서 두 밤을 잤는데 명근이네 집에서 묵었다. 집이 얼마나 크고 좋은지... 모 두들 한번 가서 보도록, 그런데 난 보지 못했지만 명준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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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성(2006/06/22)

동기회를 사랑하는 많은 친구들, 그동안 열심히 봉사한

친구

친구들, 지금도 관심을 끊임없이 갖고 있는 친구들 모두

몇 번 망설이다 몇 자 적는다. 동기회가 더 좋게 발전하

모두 고맙다. 모두 모두 화이팅이다.

려고 이러한 일이 있나보다. 친구. 어린 시절 우리 중 일 부는 부모가 부자였을지라도 우리의 호주머니는 항상

송석진(2006/10/20)

빈털터리였던 것 같다. 그때 우리는 미아리 산 13번지에

김병돈 동기의 친구들 초대

서 그러한 빈털터리로 서로 만나 함께 학창시절을 보냈

많은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음식점이 아

고 함께 뛰놀았던 것 같다. 그동안 우리는 어려운 시절에

닌 집으로의 저녁 초대였고 평창동에 위치한 김병돈 동

정신없이 살다가 이제 다시 동기회라는 모임으로 다시

기의 사는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였던 모양입니다. 개교

만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현재 무엇이

4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한 신현태 동기

되어있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동창이란

회 미주회장과 고3 1학기 중 미국으로 이민한 김인승,

그 빈털터리 시절의 추억 때문에 만나서 반갑고 오랜 세

너무 자주(?) 얼굴을 보이는 윤여명을 환영하기 위해 김

월 서로 못보고 지냈지만 그래도 반가운 것이 친구인 것

병돈 동기가 특별히 마련했다고 합니다. 멋들어진 아홉

같다. 이제 우리는 곧 또 빈털터리가 되어간다. 이제 우

그루의 소나무와 더불어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정

리는 50이 넘었다. 조그만 일에도 노인이 되면 더 섭섭

원에서 맛보는 숯불 등심구이는 그야말로 일품이었으

해진단다, 우리는 곧 그렇게 되어간다. 그렇지만 우리만

며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서너 병의 조니 워커 블루는

은 자기를 자랑하지 말고 으시대지 말고 좋은 일은 모르

금방... 그동안 이런저런 사정으로 동기모임에 참석하지

게 하고 서로 어려운 친구들은 찾아가서 진정한 마음으

못했던 계명석, 이정근, 신학 공부 차 귀국한 최삼열 등

로 위로해주고 남은 삶을 아름답게 여유 있게 살아가보

몇몇 친구들이 모습을 보일 때마다 장중은 마치 이산가

자. 힘들지만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나를 섭섭하

족 상봉장처럼 서로 포옹하고 안부를 묻는 등 가슴 뭉클

게 대해주어도 친구니까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보자. 이

한 장면을 연출하였습니다. 최근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

귀선 목사님의 말씀대로 5-3=2 (오해-3=이해) 마지막

고 열성적으로 활동 중인 조현준이 고기 굽기를 자청하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동기회게시판은 서로 살아가면

자 역시 장기간 칩거하였던 신동익이 적극 거들고 나섰

서 좋았던 이야기로 또는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아름다

습니다. 김인승 부부가 도착하자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

운 이야기가 더 많이 올라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어 2차를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2차 장소는 다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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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3층 넓은 거실에 설치된 가정식 노래방이었습니다. 물론

여명, 최삼열, 조영률, 이상권, 장성택, 이환노, 이충호,

도우미 없는.... 5회 동기회의 영원한 총무 김해만이 사

서유영, 민순기, 오순방, 김인승, 신현태, 이종원, 김해

회를 맡은 2부는 장남선 동기회장의 인사, 미주지역 동

만, 조현준, 민한기, 윤호영, 계명석, 정윤식, 최철규, 김

기들의 소감과 근황소개, 새롭게 등장한 친구들의 신고

기옥, 김형수, 신동익, 김병돈, 송석진, * 이영권 동기는

식(?)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김인승, 김병돈 부부의 뚜엣

21일 아침 비행스케쥴 때문에 빛갤러리 전시회 관람후

등 간간히 노래 가락까지 곁들여져 흥취를 더할 수 있었

청주로 내려가게 되어 못내 아쉬워 하였습니다. 시간이

습니다. 10시 반경 개교기념 행사에 참석하신 LA 김길

허락하는대로 동기회에 참석하겠다는 약속도...

동 은사님께서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합류하 셔서 30여 년 전의 회고담을 들려주실 때 모든 친구들

김인승(2006/11/06)

은 한동안 학창생활의 회상에 잠기기도 하였습니다. 숭

18년 만에 조국을 방문

실대 중문과 교수로 재직 중인 오순방 동기의 기도 인도

만 18년이 넘어 조국을 방문했다. 처음에는 결혼 25주

와 교가 제창을 끝으로 만남의 자리는 아쉬운 막을 내리

년 기념으로 유럽을 가려했다가 아내의 부탁으로 중국

게 되었습니다. 조만간 재회를 기대하면서.... 헤어짐은

과 조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너희와 헤어지며 조국을 떠

언제나 섭섭하게 마련이지요. 아쉬운 마음을 금하지 못

나 미국에 산지도 벌써 33년이 넘었고 세월이 빨리 흘

한 친구들은 이미 자정이 가까운 야심한 시간에도 손을

렀지만 이번 여행을 하면서 또 너희와의 만남과....또 40

맞잡고 신일, 신일 파이팅을 목청껏 외치고서야 발길을

년 동안 못 보았던 국민학교 친구들과 또 친지들과의 만

돌렸습니다. 신현태 동기는 20일 오전 10시 출국하였으

남을 통해 나는 무척이나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

며 김인승 부부는 29일경 돌아갈 예정입니다. 윤여명은

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잘남도 아니고 또 나의 지위

중국출장을 다녀온 후 잠시 국내에 머물다가 출국할 계

도 아니고 다 너희들 때문이야. 이번 여행은 나의 일생에

획이며 11월에 또다시(?) 온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미주

서 가장 추억에 남고 소중히 간직하게 될 시간들이었다.

지역 동기명단에서 제외해야 할 듯.... 오직 친구들 사랑

나이 50에 이런 소리가 어울릴 줄을 모르지만 이 세상

하는 마음에서 뜻 깊은 자리를 준비한 김병돈 동기와 특

을 떠나도 미련 없을 만큼 너희와의 만남은 나에게는 소

히 어부인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염치없는 바램이지

중하였다. KBS프로그램 ‘해피 투게더’에서 “반갑다 친

만 다음에도 좋은 기회 주시기를 기대해 봅니다. - 참석

구야”보다 더욱 값진 시간을 보내게 되었음을 너희에게

해준 친구들 장남선, 서광석, 이정근, 백영인, 오 진, 윤

고백한다. 시간이 갈수록 얼마나 또 만나게 될 줄은 모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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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지만 이 지면을 통하여 한 사람 한 사람들에게 감사하

있겠지... 중 3을 마치면서 마지막 홈룸 시간에 한 사람

고 싶고 또 너희들을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다. 나의 아내

씩 교탁으로 나와서 한 마디 씩 했던 기억이 난다. 그중

도 부러웠고 또 좋았던 모양이야. 이곳에서 시차와 싸우

에서도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것, 권오양의 말. “앞으

며 벌써 일주일이 되었다. 나도 이곳에서 열심히 살게...

로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겠습니다” 그때 난 어렸고,

너희들이 자랑스러운 신일인이 될게... 집을 열어 친구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오양이가 별 우스운 놈이라

들을 대접해준 병돈이 내외와 공항에서부터 갈 때까지

고 잠깐 생각했는데 이내 ‘참, 어른스럽다’고 느꼈다. 그

같이한 둘도 없는 친구 명석이와 지금도 변함없는 동익

리고 그 느낌과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모든 것이

이, 명석이와 순규 등 연락해준 종원이, 또 같이 가정교

가(可)하나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성경 말

회 사역을 하는 한기, 또 나중에 만난 순규, 구영, 충호

씀을 깨닫기까지는 참 오래 걸렸다. 살아오면서 부끄러

와 주호에게 감사하며 모두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운 일도 해봤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사람을 수단으

를 기도한다. 이번에 본 조국이 자랑스럽고 또 가고 싶

로 대하지 말아야지. 남을 도와야지. 진정한 대화를 나눌

은 생각도 든다. 기회가 나는 대로 가도록 다짐해본다.

수 있는 벗이 내게 얼마나 있을까, 그 벗은 어디까지 날

고맙다! 친구야

이해할까? 시간의 압박감, 누구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 지는 못한다. 연약한 풀잎 같은 존재가 나, 인간이다. 내

윤호영(2007/05/30)

가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오십 중반 즈음에

신일OB합창단 멤버가 됐다. 6월 2일 이번 토요일 오후

난 사실 살아오면서 많은 부분에 대하여 자신감으로 차

4시 신일고 이봉수 기념관 4층 차이코프스키 홀에서 창

있었다. 자격증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발표회를 갖는다. 정말 부족한 점이 많지만 어쨌든 한

그게 통했다. 관심 분야도 비교적 많은 편으로 웬 만한

다. 독창 둘과 호산나중창단, 재학생 합창단의 노래도 있

잡동사니 지식도 있었다. 노래도 웬 만큼은 자신이 있기

다. 마지막 다 함께 부르는 교가는 개교 이래 처음으로 4

에 어줍잖게 웬 만한 시시한 합창단에도 들어가지 않았

부 합창으로 부른다. 홈페이지- 동호회&소모임- 신일

다. 하지만 오십 중반에 이르러 뭘 힘차게 해 볼 수 있는

OB합창단- 자료실 37번에 가면 최근 녹음한 교가를 들

절대 시간이 이미 지나가지 않았나 하는 초조함과 후회

을 수 있다. 멤버 중 5회가 젤 많다. 김종선, 민한기, 양

를 숨길 수 없게 됐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그때도 늦지

형국, 이종상, 이정필, 임순기, 조현준, 한동표, 나 9명이

는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래 그럴 수도

다. 한기와 형국이는 이번에 서지 못한다. 하반기와 내

308

ㅣ 신일 5회 동기회


년에 대활약을 약속했다. 나이 먹어서 무슨 짓이냐? 그

게 해주는 병우의 건강이(당이 좀 높다고 함) 우리 나이

런 거 왜 하냐? 이런 반응을 보이는 동기들도 있다. 틀

에 처한 상황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었습니

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취향이 달라도 와서

다.2008년 1월 21일 (Martin Luther King Day 이며

격려해 줄 수는 있는 것 아닌가? 이구아나나 개미를 키

大寒) 이곳 메릴랜드로 한국의 大寒의 영향권을 벋어나

우는 이들도 있지 않은가. 원래 취미는 다양한 것이기

지 못하는 것 같음.

에. 노래는 독창보다는 중창이, 중창보다는 합창이 좋은 것. 합창하고 집에 간 날이면 어부인으로부터 얼굴빛이

권영철(2008/12/11)

환해졌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다. 동기 여러분들의

동기 여러분 안녕하세요?

많은 왕림을 기대한다. 저녁식사로 뷔페도 준비했다....

동기 여러분 안녕하시죠? 제가 회장을 맡은 지 어느덧 1

By 김형수(2007/06/04)

년이 되었지만 제가 많이 부족한 관계로 여러분의 기대

호영아, 수고 많다. 난, 그날 의국 야유회라 못 간다. 미

에 많이 미치지 못하고 부족했던 점을 반성하며 내년에

안해. 그리고, 우리 아직 오십 초반 아니냐? 성대한 연주

는 좀 더 다른 모습을 보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부

회가 되길 바란다. ----------------

족했던 기억들이 있으신 부분은 여러분의 커다란 우정 과 따스함으로 덮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세계적

한영희(2008/01/21)

인 경기불황의 여파 속에 우리경제 환경이 매우 어려운

New York에 있는 우리 친구들

상황이지만 5회 동기 여러분은 5뚜기처럼 넘어지지 않

엇 그제 불현듯 복잡한 머리를 비우려고 계획 없이 뉴욕

고 지혜롭게 잘 헤쳐 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지

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박찬일 이와 최병우를 만났

난해에는 기쁜 일과 좋은 일도 많이 있었지만 슬픈 소식

습니다. 찬일이 집에서 하룻밤 묵으며 배우기 힘든 그

도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 곁을 떠난 영원한 보헤미안이

의 잔잔함과 그 뒤에 숨겨진 강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

며 아티스트인 박민선 동문의 타계는 우리에게 충격이

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나라

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명복을 빕니다. 5회

가 벌써 임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친구의 가정에(특

동기회의 정기총회 모임은 연말보다는 연초에 새롭게

히 내일 입대하는 큰 아들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함

시작하는 뜻으로 모이자는 중론에 따라 내년 1월 중순

께 하시기를 기도하며 메릴랜드에 있는 숙소로 향했습

경에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일정과 장소는 확정되는 대

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항상 말 재치로 우리를 즐겁

로 곧 여러분께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차기 총동문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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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회장을 우리 5회에서 맡게 됨에 따라 이사회에서 장

신없는 특히 아버지들, 그래서 아이들과 나중에는 소통

성택 동문을 추대하기로 하였습니다. 어려운 자리를 수

이 안 되고 결국 버려지는 아이들(?) 공부와 세상적인

락하여 주신 장성택 동문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 말씀

출세를 위해서 물질적으로 잘 살기위해서 STRESS를

드립니다. 이에 따라 우리 5회 동기회의 역할이 어느 때

받는 아이들에게 숨통을 터주고 부모와 대화를 만드는

보다 막중해지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

PROGRAM입니다. 이러한 운동이 계속되고 많은 곳에

하여 총동문회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중지를 모아야

서 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상호의 이야기를 올립

하겠습니다. 내년에는 많은 재미거리와 즐거움으로 여

니다. 윤갑이, 용진이, 그리고 상호 같은 친구 그리고 보

러분들이 만나서 담소할 수 있는 자리를 많이 만들도록

이지 않는 곳에서 남을 위해 열심히 사는 친구들이 신일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지도와 깨우침을 기대

의 자랑인 것 같다. 추신: 종진아 박 찬일이는 지금 뉴욕

하며 내년에는 좋은 소식만 접할 수 있는 한해가 되기를

에 살고 있고 전화 번호는 516-650-9211 이다. ---

기원하며 여러분의 가정에도 평강과 기쁜 소식만으로

아래---용성아, 지금 내 인생에서 이사업을 시작케 된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인사에 갈음하고자 합니다. 2008

것에 대해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구나. 족들

년 12월 11일 동기회장 권영철 배상

이 Volunteer로 아내의 적극적인 협조, 교회와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 다른 인종, 모든 종교의 벽을 넘어 아래

김용성(2009/07/26)

의 취지로 시작된 모임이다. 작지만 나, 가족 외에 다른

상호의 아름다운 일

이웃들에게 자유로움과 풍성함을 전할 수 있게 돼 얼마

아래 내용은 LA에 살고 있는 김상호 군과 온가족이 조

나 기쁜지 모르겠구나. http://blog.koreadaily.com/

그맣게 벌이고 있는 아름다운 운동의 내용입니다. 물질

media.asp?med_usrid=bestdaddy http://www.

적으로 풍족하게 살고자하는 마음보다 정신적으로 풍

the-best-gift-ever.blogspot.com/ 아래의 글은 시

부하게 남은 인생을 살고자하는 친구에게 격려의 마음

작할 때 교회 잡지에 올린 글이고, 첨부된 file은 다음 행

을 보냈으면 합니다. 한 달에 한번 아이들과 3시간 가

사입니다. 잘 지내구..상호 The Best Gift Ever 우리의

까운 공원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캠페인입니다.

모든 생활은 가정을 바탕으로 시작되고, 자녀들은 이 가

부모들이 봉사자로 나와 아이들괴 이야기도 하고 운동

정에서 태어나고 부모의 영향력 아래서 양육되어 집니

도 하며 대화를 하는 PROGRAM입니다. COMPUTER

다. 자녀들이 밝고, 아름다운 인격체로 다듬어지고 성장

GAME에 빠진 아이들, 가족을 위해서 돈 버느라 정

해서 대학에 보내어지길 바라는 마음은 모든 부모의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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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램일 것입니다. 또한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따뜻하고 훈

할 때면 내 자신이 참 멋있다고 느끼기도 했었다. 그런데

훈했던 가정을 기억하며 그들이 결혼한 후에도 그들의

왜 그랬을까? 아무도 없는 방에 불을 꺼두고 비 내리는

가정을 잘 꾸려 나가길 모든 부모님들은 누구나 바랄 것

창밖을 보노라면 괜스레 눈물이 나곤 했지. 친구들과 떼

입니다. 그러나 갈수록 성장기 자녀들과의 관계는 힘들

를 지어 다닐 때면 여학생들에게 야유를 보내고 껄렁하

어지고, 대화의 폭도 좁아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

게 굴면서도, 등교길 버스 안에서 훔쳐보던 여학생을 길

떻게 하면 아이들과 친밀하게 대화할 수 있고 가까이 갈

에서 단둘이 딱 마주치면 숨이 멎을 것만 같았지. 그리고

수 있는지 부모들의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인 제

참 외롭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던 시절 이제야 조금 알 것

자신도 아이들에게 “해라”, “하지 마라” 두 명령어만 많

같아. 지금 내가 지나는 이 시간을 아버지도, 선생님도

이 사용하며 아이들을 키우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 자녀

지나왔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나 한때는 순수했다는 것

들의 의견과 바람을 무시하고 지시했던 많은 일들이 지

을. 우리 인생에 깊이 각인된 그 시절의 순수는 절대 사

금은 후회로 남아 있습니다. 대학을 이미 졸업하고 각자

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똑바로 기억하자. 그때 우리에

직장을 다니며 집을 떠나 열심히 살고 있는 두 딸과 이

게 무엇이 오고, 무엇이 갔는지를.... 최인호 작가께서 얼

제 13살이 되는 막내 아들이 있는 저희 가정입니다. 늦

마 전 출간한 “머저리 클럽”이라는 제호의 책을

으막하게 저희 가정에 태어난 막내아들은 많은 것을 깨

친하게 지내는 친구에게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날은 술

닫게 해주었습니다. 딸들을 키우며 잘못했던 많은 실수

자리가 있어서 혹시 잃어버릴까. 가슴속에 책을 파묻고

들, 수 없이 야단치며 몰아 부친 기억들, 하지 못하게 막

[집 등기를 몰래 훔쳐 달아나는 가출소년처럼...]술을 먹

았던 많은 요구들...

었습니다. 다시 한번 70년대를 회상할 수 있게 해준 친 구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

김종선(2009/10/04)

니다.

머저리 클럽 그 당시 우리는 늘 조금은 화가 나 있었다. 때로는 누구

구창선(2009/10/10)

라도 제발 시비를 걸어주기를 바라며 퉤퉤 침을 뱉으면

신일5회 대단결을 촉구하며...

서 세상을 향해 눈을 부라렸고, 우리를 향한 어른들의 기

작금 동문회를 보면서 조금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 같

대를 무너뜨리는 것에 통쾌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공부

아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너

따위, 장래희망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멋대로 행동

무 소모임만 활성화되어 있고, 5회 전체모임이 다소 부

자유인으로 산 45년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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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하여 힘이 약화되어 있고, 소모임간 오해가 있어 서로

더우나, 미우나, 고우나... 참석하여 함께 산행을 같이한

비방까지 하는 경우가 있어 모처럼 오랜만에 참석한 동

산우회 5회 동기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앞으

문은 당황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일하는 신일

로도 많은 동기들과 자연 속에서 만나 과거 속으로 되돌

고 5회 동문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오해도 있을 수 있

아도 가보고, 같이 땀도 흘려보고, 산행하며 말도 안 되

고 기대가 많았기 때문에 실망도 크고 그로 인해 원망도

는 헛소리도 하며, 세속에서 찌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참된 사랑은 원수도 사랑하는

고, 건강도 지킬 수 있는 산우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 하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제 주님의 사랑으로 과거

겠습니다... 동기들의 많은 참여와 지도 편달 바랍니다.

의 미움과 원망이 있다면 다 용서하고 다시 학창시절로

우선 2010년도 산행 계획의 초안을 잡아 보았습니다.

돌아가 남은 인생 서로 열심히 사랑합시다. 해서 다음과

기본적으로 매달 첫 번째 토요일과 세 번째 일요일을 정

같이 제안합니다. 분기에 한번씩은 각자의 소모임을 중

기산행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주말은 번개

지하고 5회 연합모임을 갖기를 강력히 촉구합니다. 그래

산행이며 그때, 그때에 따라서 토요일 또는 일요일로 정

서 보다 많은 회원의 단결된 힘으로 보다 많은 활동을 할

하려 합니다. 네 번째 일요일은 가능하다면 총동창회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5회 동기회 임원, 각소모

신일 산악회 정기산행과 함께 하여 우리가 존경하고, 사

임 임원들이 서로 모여 5회 발전 방향에 대해서 협의할

랑할 수 있는 선, 후배 분들과 같이하려 합니다. 모든 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뜻을 같이 하는 동문은 주변의

정은 어디까지나 예정일 뿐, 동기들의 참여도나 상황에

동문들에게 널리 알려 반드시 5회 동문회가 단합하여 신

따라서 변경될 수 있습니다. 신오산우회의 ‘10년도 전

일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기도합니다.

반기 예비 산행 일지를 첨부파일로 공지하오니 검토하 시고 의견을 보내주시면 참고하여 반영하겠습니다. 신

김용훈(2010/01/19)

오 산우회 김용훈

신5산우회 김용훈 인사드립니다!!! 신오산우회 회장을 맡으면서, 2010년 새해가 밝아 왔습

주면길(2010/04/07)

니다. 우리 신일 5회 산우회를 맡아서 종행무진 봉사했

이 세상 남자들을 위한 소고

던 1대 서광석 동기와 2대 남궁원 동기의 지난 5년간 노

요즘 우스개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남자들 체면이 말씀

고에 깊이 감사드리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또

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게 아닌 스토리도 한번쯤은 알

한 우리 산우회를 위하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아두셔야 할 것 같아 올립니다. 이로 인해 발생되는 마눌

312

ㅣ 신일 5회 동기회


과 혹은 다른 여시들과의 모든 불상사에 대해 저자가 어

지 않는다. -_- 확실하게 말해야지 우리는 알아듣는다.

느 정도 책임을 지겠지요 그런데 누가 저자인지는 제가

원하는 거 있으면 표현해라! 1. 우리는 절대 날짜를 기억

알지 못합니다. qte 우리 남자들은 항상 ‘여자들의 세계’

할 수 없다. 축하받구 싶으면 생일이든 결혼기념일이든

에 대해 들어야 했다. 이제 우리들 세계에 대해 한번 이

달력에 동글뱅이 쳐놓구 계속 말해줘라. ‘그날 내 생일

야기 해보겠다. 이것이 바로 남자들의 세계이다. 이 규

인거 기억하징?’ 1.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면 나한테 말

칙 전부에 번호 ‘1’을 매긴 것은 모두 너무나 중요한 규

해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감과 동정

칙들이기 때문이다. 이 규칙을 프린트해라. 그리고 당신

을 원한다면...당신 친구들한테 말하면 되잖아... 1. 지금

이 남성이라면 그녀가 당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보

17달 동안 맨날 두통이라는데...그건 확실히 문제다. 나

여줘라. 당신이 여성이라면 냉장고 위 같이 눈에 확 띄

한테 말하지 말구 의사한테 가서 상의해봐라. 1. 남자가

는 곳에 두고 시간이 날 때 마다 보고 명심해라! 1. 화장

여섯 달 전에 말한 거 가지고 지금 따지지 말아라. 사실

실 좌변기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 해보자. 만약 좌변기 뚜

남자가 하는 말들은 7일만 지나면 효력 상실 상태라고

껑이 올라와있으면 내려라. 내가 좌변기 뚜껑을 올려놓

생각하면 될 것이다. 1. 길 다니면서 여자 쳐다보는 거

았으면 그냥 내리면 되는 거 아닌가? 내가 언제 한번이

걍 두면 안 되나? 남자는 원래 그렇게 타고난 인간들이

라도 당신이 변기 뚜껑 내려놨다고 소리 지르는 거 본 적

다. 어쩔 수 없으니..냅 둬라... 1.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있나? 1. 가끔은 나도 당신 생각 안 하고 있을 수도 있

첨 사귀기 시작했을 때 첫 두 달과는 절대 같을 수 없다.

다. 그냥 팔자려니 하구 살면 안 되나? 1. ‘토요일 = 스포

사랑은 변하는 것이다. 그냥 극복해라..여자 친구들한테

츠’.. 나에게 이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어쩔 수 없다. 1.

내 뒷 다마 좀 그만 까주라... 1. 나는 여자들처럼 다른 사

당신이 쇼핑 좋아해서 우리도 그럴 거라 생각하지만 우

람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게

린 절대로 그렇지 않다. 1. 머리 자르지 마라... 절대로.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라는 거 제발 기

긴 머리는 짧은 머리보다 예쁘다. 불변의 법칙이다. 남

억해주라.. 1. 나한테 “이 옷 어울려?” 라고 묻지 마라. 난

자들이 결혼하는 거 무서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결혼

기껏 웃옷 3벌 뿐이라 알 수가 없다. 1. “나 뚱뚱해?” 이렇

한 여자들은 하나같이 머리 짧게 쳐버려서 일지도 모른

게 묻지 마라. 당신 아마 뚱뚱할 거다. 우리한테 좋은 답변

다. 1. 울지 마라.. 그건... 우리에게 당신의 협박이다. 1.

을 기대하지 마라. 1. 오프사이드에 대해 서로 얘기할 수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라. 이거 하나 똑똑히 기억해둬라.

있을 때 까지 우리에게 그게 무엇인지 묻지 마라. 1. 내

미묘한 암시는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강한 암시도 통하

가 “왜 그래?” 하구 물었을 때 당신이 “아니야”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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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모른 척 해버린다. 하지만 난 당신이 거짓말하구 있

김성일(2012/09/24)

는 거 안다. 그러지 말자... 1. 넌 옷이 충분히 많다. 1. 글

자유게시판에 실은 글입니다. 우리 5회 게시

구 신발 인간적으로 넘 많다. 1. 글구 이거 읽어줘서 고

판에도 게제하고 싶어서……

맙다. 자기야.. 아마 이거 읽구 당신 빡 돌아서 나 침대에

달 아래 문득 계화향이. 소식蘇軾(동파東坡)은 그의 아

서 못 자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소파에서 자는 거 솔직히

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더불어 당송팔대가로

나 별루 상관 안한다. 캠핑 가서 노는 기분이다... unqte

칭함을 받는 위대한 문인입니다. 역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왕안석王安石이 신법을 시행하고 개혁을 주도하

남궁원(2011/12/15)

고 있을 때 소식은 신법에 반대했었습니다. 덕분에 여러

감사드립니다.

차례 좌천되어 지방을 전전하기도 했지요. 1076년의 추

지난 주, 저의 모친께서 91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하직

석 때, 대낮부터 대취하여 인사불성이 되었다가 밤에 깨

하셨을 때, 빈소를 찾아 위로해 주신 많은 친구들과, 오

어보니 추석날의 둥근 달이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습니

시진 못했어도 전화로 문자로 마음으로 위로해주신 모

다. 소식은 무려 4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던 동생 소철

든 분들께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 말씀 올립니다. 어머

이 그리워 <水調歌頭>라는 사詞를 지었습니다. (병신

니 생전에 잘 해 드리지 못한 죄송함과 후회는 오랫동안

년(1076년) 중추, 백주 대낮에 창음하고 대취하여 동생

씻기 힘들거라 생각되지만, 이번에 저에게 보여주신 동

소철을 그리워하며 이 글을 짓는다.) 저 달은 언제 떴는

기 여러분의 따뜻한 정 또한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

고/ 술잔을 들고 푸른 하늘에 묻는다/ 천상의 신선궁에

습니다. 감사합니다. 못난 자식이지만, 그럴수록 주변에

서는/ 오늘 밤이 어느 해의 어느 날일지/ 바람을 타고 천

잘하고 꿋꿋하게 건강하게 잘 사는 게 어머니가 바라시

상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옥을 깎아 만든 궁전/ 그 높은

는 것이리라 생각하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여러분과 가

곳의 추위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달을 보며 춤을 추

정에 건강과 행운이 늘 함께 하시길 빌며 직접 만나 인

니 그림자도 따라 춤을 추어/ (천상에 가는 것이)어찌 인

사드리지 못하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

간 세계에 있는 것과 비교할 수나 있을까/ 달은 주홍색

니다. 남궁 원 올림

누각을 돌아/ 비단 장식한 창문에 낮게 걸려/ 잠 못 이 루는 사람을 비추는구나/ 달은 사람에게 원한이 있을 리 없건만/ 어찌 항상 이별 때만 저리 둥글고 밝은지/ 사람 에겐 슬픔과 기쁨과 이별과 상봉이 있고/ 달에게는 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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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고 밝고, 차고 이지러질 때가 있지/ 이런 것들은 옛 부터

밤 달 아래 문득 계화향을 맡다>쯤 될까요? 캠퍼스에 계

어쩔 수 없었던 것/ 다만 바라기는 그대 오래토록 건강

화 만발하니 중추가절 가까워/ 밤바람에 실린 꽃향 진하

하고/ 천리 먼 곳에서도 저 달을 함께 볼 수 있기를……

게 퍼져온다/ 고개 들어 달을 보니 어머니 계신 고향집

(丙辰中秋, 歡飮達旦, 大醉, 作此篇, 兼懷子由.)明月幾

생각나/ 먹다 남긴 술, 홀로 잔 기울이니 처량함만 더해

時有 把酒問靑天

진다 滿園桂花近中秋/ 風吹夜來香益濃/ 擡頭望月思親

/不知天上宮闕 今夕是何年/ 我欲乘風歸去 又恐瓊樓

舍/ 殘酒獨酌尙凄凉 2012. 9. 24

玉宇 高處不勝寒/ 起舞弄淸影 何似在人間 轉朱閣 低綺戶 照無眠/ 不應有恨 何事長向別時圓/ 人 有悲歡離合 月有陰晴圓缺 此事古難全/ 但願人長久 千里共嬋娟 소식의 이 사는 <但願人長久> 라는 제목의 노래로 만들어져 가수 故 鄧麗君이 불렀습 니다. 추석이 한 일주일 남았나 봅니다. 저녁이 되면 매 일같이 캠퍼스의 중앙부로 난 길을 네 바퀴씩 걷는데(그 러면 대략 일만 보가 됨), 오늘 저녁엔 문득 기이한 향이 코를 찌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달 아래 향기의 근원을 찾 아보니, 아! 도처에 만발한 계수나무 꽃이었습니다. 그 동안 수년 동안 매일 걸었으면서도 계절이 가는지 꽃이 피는지 달이 뜨는지 느끼지 못하고 그냥 걷기만 하던 길 이었는데…… 아마 매진하는 일에 온통 마음이 가 있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오랜만에 홀가분 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계수나무 가지 비틀어 잡고 향도 맡아보고, 고개 들어 달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술에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감히 소식의 흉내를 내어 <壬辰秋 八月初九夜月下忽聞桂花香>이란 제목만 긴 칠언절구 를 지어봤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임진년 팔월 초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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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 이미 우리 곁을 떠나 하늘나라로 적을 옮긴 동기들 이 있습니다. 이곳 지면에 언급된 친구들도 있고, 그 렇지 못했던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 모든 친구들의 영면을 기원하며, 함께 했던 벗들의 그리움을 모아 보았습니다. - 편집자 주

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 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 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 구를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 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과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

By 故 조영률(2003-10-10)

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

芝蘭之校를 꿈꾸며

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계

♤지란지교(芝蘭之校)를 꿈꾸며♤ - 유안진 - (스피커

속되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 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

를 켜시면 지란지교 낭송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저녁을

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 하였다. 그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

럼에도 지금은 그 많은 구경 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두 곳 한두 가지만 제대로

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

감상했더라면, 두고두고 되새겨질 자산이 되었을걸./ 우

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

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管飽之交)를 말한다. 그

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道) 닦으며 살

애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聖賢) 같아지기를 바

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

라진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싶고, 내 친구

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

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 자리서 탄로 나는 약

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

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바랄 뿐이

하리라./ 그가 여성이라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

다. 나는 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 테고 내가

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더 예뻐 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며 은근하며 깊고 신

알 것이다. 때로 나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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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By 이종원(2006/10/02)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 눈 속 참대 같은

전번 주 금요일에 만나 대포 한 잔 하자니까 금요일에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 아첨 같은

는 교회일 때문에 바빠서 10월 18일에 만나기로 했는

양보는 싫어 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데.......먼저 소천을 하다니..... 명복을 빈다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 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김용성(2006/10/02)

사는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

두영아 잘가라

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맹 두영의 갑작스런 사고 소식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이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

다. 오래전 맹 두영이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교내 육상대회에서 100M 달리기에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 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

서 두영이는 우승을 하고 나는 1500M에서 우승을 하

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

고 400M 계주에서도 우승해서 3학년 7반이 종합우승

공을 애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되, 미친 듯

을 해서 함께 기뻐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26년 전 남대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문 뒤 양동 대한생명 전산실에 근무하던 신입사원 시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두영이는 한일 개발에서 근무하며 서울역 지하철 사무

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

소에 근무하여 자주 만났다. 어느 날 오후 소장한테 찐빠

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

를 왕창 먹고 안전모에 흙투성이로 사무실을 찾아온 적 도 있었다. 결혼하기 위해 선을 보면 지방 근무해야 된

김해만(2006/10/02)

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당시에 서울 지하철 공사장

맹두영 동문 빈소 안내

이 한일 개발로는 마지막 서울 공사장이었고 그 후로는

맹두영(7반) 동문의 소천 소식입니다. 빈소: 신촌세브란

계속 지방으로 가야 했음) 선만 보면 여자들한테 미역국

스 영안실 4호실 발인: 2006. 10.4.(수) 07:00 연락처

을 먹는다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만큼 조그만 거

빈소: 02-392- 0899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9월

짓말을 못하는 친구였다. 그래서 다음 선볼 때는 절대 그

20일에 통화한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충고했더니 결국 성공했다. 얼마 후 다시 찾아와서 고민을 말하는데 혼수로 장롱이며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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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살이를 색시가 준비해오는데 자기는 공사장 따라 지

김종선(2006/10/03)

방으로 자주 이사를 해서 혼수감들이 필요 없는데 하며

두영이놈 나쁜놈.......

고민을 했다. “나중에 헐값에 팔더라도 절대 이야기하지

자판이 어른거려 잘 안 보인다. 그러면 애도의 글도 쓰

말고 미친척하고 먼저 결혼식부터 올려” 했다. 결국 결

지 말란 말이냐. 아니다, 더 천천히 두영이를 생각하

혼에 성공을 하고 내가 미국으로 떠나오기 바로 전에 집

며 쓰란 말씀이시다. 같이 과외 공부하여, 같은 중. 고등

들이를 했다. 그것이 맹두영이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

학교를 함께 하였고, 같은 날 결혼하여, 여행도 함께한

을 몰랐다. 항상 해맑은 미소에 착하디 착한 친구였는

맹.두.영....... 너무나 많은 기억과 좋은 추억을 주고 간

데..... 가끔 동문 사이트를 통해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정말로 좋은 친구..... 부름에는 오묘한 뜻이 있다 시지만

것을 보았는데.... 연락을 해야지 하며 내일 내일 미루다

아직은 아닌데, 아닌데... 윤호영, 이종상친구와 함께 문

보니 나의 무심함과 게으름 때문에 결국은 연락한번 못

상을 하고 나는 멍하니 남았다 이런저런 상념 속에 있는

하고 떠나보내고 말았구나하는 후회감이 든다. 두영아

데 박승용이가 온다는 연락이 왔다 그놈 때문에 또 많은

내가 존경하는 어떤 신부님이 그러더구나 사람들이 세

눈물이......... 승용이놈도 울지를 못하고 서러움을 삼킨

상을 떠난다는 것은 하느님이 필요로 해서 불러 가신 것

다. 둘이서 흐느끼다. 멍하니 있고 다시 흐느끼다 또다

이라고.. 그래서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슬퍼만 하지 말

시 침묵 속... 그래요 이왕 빨리 부르셨으니, 좀 더 좋은

고 기쁘게 남은 생을 살아야 한다고... 나도 그 신부님의

자리에 앉혀 주세요 꼭!!! 다시 두영이를 보러 간다. 또

말씀대로 믿고 싶다. 그리고 단지 언젠가 우리 모두 가

다시는 볼 수 없기에 눈으로 실..........컷 보고 오련다.

야하는 길을 먼저 갔구나하고 생각 하고 싶다. 너의 밝은 미소와 성실함 그리고 열심히 살았던 모습들을 기억 속

윤호영(2006/10/03)

에 간직하며 나도 가야할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

두영아

때까지 열심히 살아 보련다. 걱정도 근심도 없는 아름다

밤 12시가 다 돼서 빈소를 찾았다. 막상 눈물은 나오지

운 세상에서 부디 잘 지내기를 바란다. 언젠가 다시 만나

않았다. 김종선이는 눈물을 흘렸다. 흐느끼며 울었다. 돈

겠지. 그때 이 세상에서 못다 나눈 이야기 나누자. 잘 가

암국민학교 때부터 동창인데, 같은 날 결혼해서 신혼여

라. 남은 가족들에게 멀리서 나마 심심한 위로를 보냅니

행도 함께 갔다니 대단한 인연이다. 두영이 동생 광영이

다. LA에서 김 용성이가

는 30년 만에 보았다.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지만 옛날 얼굴 그대로였다. 어제 오후 용두동 홈플러스에서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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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와 간단한 쇼핑을 하던 중 7회 강정철 후배의 전화를 받

장기성(2007/07/08)

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면서 가슴이 흔들렸다. 아

김수동

내도 당황한 듯했다. 종종 두영이 얘기를 했었기 때문에

중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렇다. 방

아내도 두영이를 안다. 믿어지지 않는 죽음. 나흘 전에도

학이면 반강제로 미술반에 나와서 그림 그리라는 미술

강북모임에서 만나 얘기를 나눴는데... “우리, 이대로 죽

선생님의 협박에 (이정수 선생님과 김영길 선생님) 부모

을 수 없잖아?”라는 30년 전 했다는 진담반 농담반 얘기

님의 눈총까지 받으며 마지못해 나갔는데 지금 大家로

도 반추하며 즐거워했는데... 두영아! 하나님께서 너를

활동 중인 이철수 선배와 최철환 선배를 이때 만났다.

부르신 거야. 뜻과 예정이 있으실 거야. 육정으로는 우

난 좀 얼치기로 그리는 시늉만 냈고 공부에 대한 주위의

리들과 가족들의 아픔이 크지만, 천국으로 갔으리라 믿

압박이 더 컸다. 수동은 내내 미술반 활동을 했다. 수동

는다. 생전의 해외선교는 누군가 이어받겠지. 고통과 슬

과는 같은 학년이고 명빈이와도 친해서 끊이지 않고 쉽

픔, 갈등과 질투, 분노와 기만, 협박과 아첨, 협잡과 비

게 어울렸다. 여유만만 신문방송학과를 보란 듯이 낙방

굴, 이 모든 것들을 멀리하고 황금빛 빛나는 영원한 나

하고 나는 대성학원을 다녔고 수동은 홍대 미대에 진학

라에서 안식하여라.

했다. 여름 방학이던가 영어가 써머스쿨에 걸렸다고 투 덜거렸다. 재수생이던 나를 붙들고 영어시험 지도를 부

이종원(2007/07/04)

탁해서 몇 번인가 광화문 다방에서 만났다. 방학이 끝나

곱슬머리 수동이는

갈 무렵, “기성아 니가 대신 시험 봐주면 안 되겠냐? 난

고 수동이는 디자인계의 큰 별... 대학학창 시 두뇌가 샤

(수동) 도저히 자신 없다. 어떻게? 모월 모일 모시가 시

프해서 항상 장학금으로 공부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한

험 날인데 전부 꽈가 다른 애들이고 시험 감독 역시 상관

국야구르트 홍보실은 수동이 덕분으로 야구르트 광고에

없는 조교가 들어오니까 답안지만 작성하고 나오면 되

일익을 담당했었다. 작년에 폐가 나쁘다고 하길래 광화

거든. 무슨 비밀협상이라도 된다는 듯 수동은 얼굴을 가

문모임에 한번 나와서 친구들을 보라고 하였더니 4월에

까이 들이 대면서 나지막히 목소리를 깔고 얘기했다. 내

참석한 것이 마지막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하늘나라

(수동) 학생증을 들고 가. 주민등록증까지. 대조할 때도

에서도 좋은 아이디어로 디자인을 계속하기를 멀리 중

있댄다. 어디 보자. 손톱만한 사진은 얼추 비슷하기도 한

국에서 기원한다. 남은 가족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중국

데. 머리를 볶아야 되나? 그거 자세히 안 본다. 시험내용

땅에서 빈다.!!!!!!!!!

은 내가 평소에 너한테 물어봤던 것들 하구 비슷할 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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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걸리면? 너야 재수생인데 뭐 잡아 가겠냐? 패겠냐?

김종선(2008/09/23)

나만 혼나는 거지. 만약에라도 걸리면 니가 오늘 갑자기

박민선 동기의 비보

병원에 수술 받으러 갔다던지 사고가 났다던지 횡설수

민선이가 갔다 하늘로, 땅으로.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간

설 어수선한 틈을 노려서 냅다 튄다. 시험에 떨어져서 빵

놈이라 지는 아쉬움 없겠지만 너무나 가볍게 가버리는

꾸나나, 걸려서 빵꾸나나 난(수동) 매한가지다. 근데 내

구나 허연 수염 쓰다듬으며 낄낄대던 모습 보름전인데

가 떨어지면 어쩔꼬…” 시험 당일, 수동은 홍대 근처에

천지의 기운으로 나을 것이라고 확신하드니 귀에는 그

얼씬거리지 않기로 하고 난 학원을 몇 시간 땡땡이 치고

놈의 호탕한 웃음소리 눈에는 허연 수염 쓰다듬는 모습

수동이 지시한대로 홍대에서 무사히 영어 시험을 치뤘

이놈아 그 많은 비디오 어떻게 할래? 그래 잘난 아들, 딸

다. 시험 점수가 너무 잘 나와도 안 된다는 지침과 함께.

걱정이야 없겠다. 그래도 그렇게 갈 수가 있니. 너가 없

아마 미대 영어는 교양필수 1년 정도였을 텐데 2학기는

으면 누가 그렇게 허튼 소리로 우리를 웃길까 ? 신일 음

혼자 힘으로 마쳤나 보다. 완전범죄의 기회와 쾌감과 감

악시간에 킬킬대며 피아노 치던 모습.. 진정 인생은 꿈인

동은 평생에 자주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분야를

가 보다.. 고맙다 친구야. 너가 있어 다른 세상 볼 수 있

홱 돌려 신촌 건축과로 들어간 후에 가끔 수동이 찾아왔

었다. 잘 쉬어라 친구야. 하늘나라에서도 즐겁게 피아노

다. 사진 관련 숙제를 의논하기도 하고. 아마 종로에 한

치며 사람들 웃기면서 살아라. 잘 가라.

국 야쿠르트 시절. 수동이 디자인한 라면, 화장품 이런 저런 추억이 아스라이 남아있다. 두려움 없이 우리는 때

윤호영(2008/09/27)

때로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이었다. 오랜만에 들렀다

문득 민선이 생각

가 내겐 해맑은 기억뿐인 수동의 訃音 듣고 友情 몇 자

가을을 보내며/ 마른 풀잎 맴돌아 피어오르는 물안개라서/

남긴다. 폐암으로 고생하였다니 고통을 함께 나누고 살

반짝이는 바람으로 흩어진다 나의 사람아/ 밤새도록 밤하

피지 못한 부족함을 용서하라. 동기동창 장기성 올림. 불

늘 기대어선 나무들 물든 잎새/ 가쁜 숨 몰아쉬며 저만치 가

철주야 원님(남궁) 활약에 늘 감탄하고 있음. 자카르타,

을은 떠났느냐/ 어디가야 지친 영혼 편히 쉬일까/ 언제쯤이

플라자 인도네시아 증축현장. 요기 담배 사러 왔다가 쌍

야 지친 마음 편히 쉬일까/ 차운 비에 매달려 흔들리는 잎

용건설 현장에 잡혀서 설계팀장 최소 2년 언도 받고 아

새라서/ 파르라니 별빛으로 떨어진 나의 사랑아/ 눈이 부

홉 달 째 중노동하고 있다.

신 억새꽃 밀려오는 바람에 나는 꽃잎/ 놀란 가슴 쓸어안고 얽힌 인연 쉬이 풀까/ 아무렇지도 않게 내 맘 곱게 접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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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신일 5회 동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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