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미야 시집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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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미야 시집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서울셀렉션 시인선 001


류미야 2015년 『유심』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 『눈먼 말의 해변』이 있다. 2018년 공간시낭독회문학상, 2019년 올해의시조집상, 2020년 중앙시조신인상을 수상했다.

디자인 이찬미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류미야 시집 초판 1쇄 발행 2021년 3월 30일 지은이 류미야 펴낸이 김형근 펴낸곳 서울셀렉션㈜ 편  집 지태진 디자인 이찬미 등  록 2003년 1월 28일(제1-3169호) 주  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6 출판문화회관 지하 1층 (우03062) 편집부 전화 02-734-9567 팩스 02-734-9562 영업부 전화 02-734-9565 팩스 02-734-9563 홈페이지 www.seoulselection.com 이메일 hankinseoul@gmail.com ⓒ 2021 류미야 ISBN 979-11-89809-44-7 03810 • 책 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 잘못된 책은 구입하신 서점에서 바꾸어 드립니다. • 이 책의 내용과 편집 체제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이 책은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2021년 창작집 발간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발간되었습니다.


서울셀렉션 시인선 001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류미야 시집



시인의 말

드디어 아니 여전히 봄이다.

작년 그 봄이 돌아온 것인지, 잠시 숨었던 모습을 드러낸 건지 모르지만 오늘의 꽃을 피워 올리는 그가 반갑기만 하다.

사랑할 만한 것들은 언제나 곁에 있고, 있었다. 우리가 늘 잊고 또 잊었을 뿐.

한 줌 생의 순간들이 훗날의 온 생을 흔드는 그리움이 된다.

사무치게 살자.

살자.

2021년 3월 류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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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머리를 감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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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자리 • 14 저녁의 미장센 • 15 그래서 늦는 것들 • 16 붉은 피에타 • 17 가을 아침의 기도 • 18 호접胡蝶 • 19 작약꽃 필 무렵 • 20 아침 호수공원 • 21 자명한 생 • 23 가을 • 24

6


두통약을 먹으며 • 25 눈물점 • 26 꽃피는 아홉 살 • 27 달에 울다 • 28 은둔자의 노래 • 29 자존 • 30 모사模寫 • 31 몽상가 류보柳甫 씨의 일일 • 32 종설 • 34 기리는 노래 • 35

제2부 잠든 배 • 39 강과 새 • 40 장마 • 41 아우라 • 42 시소 • 43 별 • 44 감자 • 45 개미와 우공 • 46 생 • 47 심금心琴 • 48 꽃과 책 •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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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 • 50 맹목 • 51 질투嫉妬 • 52 비누, 파르티잔 • 53 봄 • 54 인도사과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 55 발목 • 56 팔월, 소낙비 • 57 그를 기억하는 수인번호 • 58 내가 종이컵을 버리는 0.1초 사이 • 59 결핍 • 60 목련나무 그늘에 서면 • 61 공중저울 • 62 양말 • 63 물구나무서기 • 64

제3부 감정교육 • 67 두 눈은 듣고 귀는 보았네 • 68 레트로액티브Retroactive • 69 드리나강의 다리 • 70 고독의 안부 • 72 그리운 오지奧地 • 73

8


전지적 지구 시점 • 74 어떤 풍경 • 75 그들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 76 순수의 시대 • 77 레 미제라블 • 78 근린近隣 • 79 물오르는 봄 • 80 붉은 사과를 기다리는 풍경 • 81 호구 이야기 • 82 목격자 • 83 데스마스크 • 84 냉정과 열정 사이 • 85 물음표에게 길을 묻다 • 86 노새의 노래 • 87 백년추어탕 • 88 나비에게 • 89

해설 지상의 눈물점을 찾아주었네 _서윤후 시인 •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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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머리를 감으며

풀고 또 풀어도 엉켜드는 낮꿈의 가닥을 잡아보는 시린 새벽의 의식儀式

너에게 세례를 주노니 잘 더럽히는 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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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자리

나는 눈물이 싫어 물고기가 되었네 폐부를 찌른들 범람할 수 없으니 슬픔의 거친 풍랑도 날 삼키지 못하리

달빛이 은화처럼 잘랑대는 가을밤 몸에 별이 돋아 날아오르는 물고기 거꾸로 박힌 비늘도 노櫓 되어 젓는

숨이 되는 물방울…… 숨어 울기 좋은 방…… 물고기는 눈멀어 물을 본 적이 없네 그래야 흐를 수 있지 그렇게 날 수 있지

생은 고해苦海라든가 마음이 쉬 밀물지는 내가 물고기였 던 증거는 넘치지만, 슬픔에 익사 않으려면 자주 울어야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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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미장센

암전 후 에필로그는 대개 일인칭시점

아무도 울지 않은 아침은 진부해서

꽃 한 번 피고 질 동안 잊지 않고 저녁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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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늦는 것들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혹은 한자리에서 잊히기나 하는지요 날리는 저 꽃잎들 다 겨울의 유서인데요

그런 어떤 소멸만이 꽃을 피우나 봐요 사랑을 완성하는 것 물그림자에 비친 언제나 한발 늦고 마는 깨진 마음이듯이

철들고 물드는 건 아파 아름다워요 울음에서 울음으로 서로 젖는 매미들 제 몸을 벗은 날개로 영원 속으로 날아가요

폐허가 축조하는 눈부신 빛의 궁전 눈물에서 열매로 그늘에서 무늬로 계절이 깊어갈수록 훨훨 가벼워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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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피에타

사랑하는 모든 것은 서쪽으로 떠났다 쓸리는 상처에 온통 마음이 기울듯 하루가 멍드는 자리 눈시울이 붉다

왼편 심장 가까이 사연을 문지르고픈 누군가의 사모思慕로 생의 저녁은 온다 서녘에 사무치는 건 어린 양이 되는 일

상처를 빨아주던 네 살 적 어머니가 따뜻한 붉은 혀로 시간을 핥으신다 무릎을 내어주시는 나의 서쪽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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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아침의 기도

버즘나무 코끝이 몰래 붉어졌습니다

철 늦은 간구는 통회만 무성합니다

미련한 가을입니다

벌레만 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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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胡蝶

강철 돛을 매달라 누군가 말했지만 무엇과도 못 바꿀 이것이 나의 생시 날개는 쉬 찢겼어도 다디단 꿈 맛보았지

나는 슬프지도 나약하지도 않아 대낮의 조롱鳥籠은 날 가둘 수 없네 바람의 궁륭을 타고 죄의 눈썹 떨구며

가벼이 허물 벗고 죽도록 살다가는 사랑 속에 죽겠네, 이것은 나의 방식 그림자 죄 다 지우고 꿈속이듯 아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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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약꽃 필 무렵

쓸쓸한 저녁이야 곧 오고 말 테지만

밤 모르는 아가들 함박웃음 피고

설움도 모르는 오월은 환호작약

꽃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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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호수공원

얼마나 숱한 슬픔 밤새 흘러들었는지 희붐한 아침 물낯서 눈물 냄새가 난다

마음이 수런대는 날 아침 물가로 가면

서러운 어느 창은 서서 밤을 걸어오고 세상엔 슬픔 많아 흰 수선화 핀다

마음이 수런대는 날 아침 물가로 가면

고단한 몸들은 다 어디서 비 그을까 어두운 귀 기울이면 작은 새 울음소리

마음이 수런대는 날 아침 물가로 가면

호수 닮은 하늘도 하늘 담은 호수도 터진 발 내려놓는 된바람도 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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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미지의 감식가. 견자見者의 눈과 경청의 귀는 필참이다. 먼 길의 탐험이니 고독과 고통도 필수다. 오래된 양식을 밀고 가는 류미야 시인도 그런 자취가 역력하다. 정형시의 새로운 미 학을 꿈꾸기 때문이다. 확장과 심화의 모색은 갱신의 성취로 이 어진다. “물고기는 눈멀어 물을 본 적이 없네/그래야 흐를 수 있 지/그렇게 날 수 있지”라고 되뇌듯, 무릇 도약은 아름답다. 눈이 멀더라도 날개가 타더라도 갈망은 비약의 자양이다. “왼편 심장 가까이 사연을 문지르”거나 “붉은 혀로 시간을 핥”는 여정을 골 똘히 짚어내듯. 그래서 나비에게 건넨 “무혈의 전사轉寫”를 ‘무혈 의 전사戰士’로도 읽게 된다. 시인 또한 붓의 전사를 마다치 않 을지니. 이러한 시적 개진의 발화들이 널리 개화하길 기대한다. ‘오래된 미래’처럼 선취된 정형시의 오랜 새로움으로. 미지에 이마를 부딪는 당당한 외로움으로.

_정수자 시조시인

류미야 시인의 시는 삶의 적막과 공허를 두 손으로 가만하게 감 싸는 사랑의 언어이다. 사랑의 간구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에 간 절하겠는가. 시인의 시편들은 꽃핌과 낙화, 보름과 삭망 사이쯤 에 놓여 있지만, 열매와 빛과 생의生意를 가꾸는 쪽으로 나아간 다. 그래서 류미야 시인의 시편들은 향상向上의 시편들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한편, 꽃대를 곧게 세우는 부드럽고 넓은 땅이 있듯이 시인의 짧은 시행의 미려美麗한 시는 큰 생각을 그 대지 로 삼고 있다. 우주적인 시간도 그 대지요 모천母川이나, “어머니 의 옛 궁宮”도 그 대지이다.

_문태준 시인

ISBN 979-11-89809-44-7 03810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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