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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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ume 2 of this Korean edition is the second half of the following original work:

Ask Pastor John

Copyrightⓒ 2024 by Tony Reinke

Published by Crossway, a publishing ministry of Good News Publishers Wheaton, Illinois 60187, U.S.A.

This edition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Crossway through rMaeng2, Seoul, Republic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his Korean edition copyright ⓒ 2025 by The Revival and Reformation Press, Seoul, Republic of Korea.

이 한국어판은 상기 원서를 2권으로 분권 출판한 것으로 그 책의 뒷부분에 해당합니다.

이 한국어판의 저작권은 알맹2를 통하여 Good News Publishers 와 독점 계약한 부흥과개혁

사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 (하)

발행일 2025년 10월 1일

지은이 토니 레인키

옮긴이 김희정

펴낸이 김은주

펴낸곳 부흥과개혁사

편집 권대영 디자인 박슬기 기획 이승영 마케팅 권성직

인쇄소 영진문원

판권 Ⓒ부흥과개혁사 2025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6길 9-20, 2층(서교동)

전화 Tel. 02) 332-7752 Fax. 02) 332-7742

홈페이지 http://rnrbook.com e-mail rnrbook@hanmail.net

ISBN 979-11-7540-011-5 (03230)

등록 1998년 9월 15일 (제13-548호)

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추구합니다. 부흥과개혁사는 부흥과 개혁이 이 시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조국 교회의 부흥과 개혁의 방향을 위한 이정표이자, 잠든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나팔 소리요, 깨어난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의 불길을 지속시키는 장작더미이며, 부흥과 개혁을

꿈꾸며 소망하는 교회들을 하나로 모아 주기 위한 깃발이고자 기독교 출판의 바다에 출항하였습니다.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

| 하권 목차 |

남성의 머리 됨, 총기, 중년의 위기에 대해 6

두려움 없는 여성, 여성의 아름다움, 단정함에 대해 38

운동, 체형에 대해 55

음식, 금식, 잔치에 대해 71

술, 담배, 마리화나에 대해 99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셀카봉에 대해 115

텔레비전, 영화, 오락에 대해 143

정욕, 포르노, TV의 노출 장면에 대해 177

사탄, 마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해 220

유기,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 불공평함에 대해 267

시련, 슬픔, 만성적 고통에 대해 288

죽음, 우울함, 버림받은 느낌에 대해 352

글쓰기, 문법, 시에 대해 385

한 교회의 교인이 되고, 떠나고, 찾는 일에 대해 397

은퇴, 노후 생활, 잘 마무리하는 삶에 대해 421

자살, 안락사, 살려는 의지에 대해 443

| 부록: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 461

| 에피소드 색인 464

| 상권 목차 |

| 존 파이퍼 저자 서문

| 시작하는 글: APJ의 간략한 역사 (왜 이 책을 쓰게 되었는가)

| 들어가며

성경 읽기, 성경을 소홀히 여김, 성경 암송에 대해

정치, 애국심, 문화 전쟁에 대해

직업, 소명, 과로에 대해

삶의 목적, 업무 능률, 게으름에 대해

돈, 쇼핑, 번영 복음에 대해

도박, 복권, 주식에 대해

투덜거림, 심통 부림, 자기 연민에 대해

욕설, 거짓말, 험담에 대해

연애, 연애의 신격화, 음행에 대해

결혼한 부부의 성, 침실 금기 사항, 식어 가는 매력에 대해

불임, 임신, 산아제한에 대해

힘든 결혼, 이혼, 학대에 대해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셀카봉에 대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트윗

우리가 말하거나 행동하는 모든 것( 트위터 게시물을 포함해 ) 은 하나님

을 영화롭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어야 한다( 고전 10:31 ). “하나님은

계획하시는 분이며, 목적을 가지신 분이다. 그리고 우리도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라고 부르신다.” 우리는 계획하고, 목적을 세운다. 그

리고 “우리는 ‘왜’가 ‘어떻게’를 결정하게 해야 하며”, 그 반대가 되

게 해서는 안 된다. 소셜 미디어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을 세우

기에 앞서 우리의 목적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트위터의 사용( 또는 남용 ) 에서, 무너뜨리기보다 세우는 일

에 이 플랫폼을 사용해야 한다( 엡 4:29 ). 온라인에 나아가는 내적 동

기를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나는 지금 칭찬하고 있는가, 아니면 인

정을 구하고 있는가? 소셜 미디어에 대해 내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아마 이것일 것이다.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조심하라,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셀카봉에 대해 115

파이퍼. 너는 지금 사람들의 찬사와 관심을 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모두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알고, 좋아하고, 칭찬했으면 하는 깊고

타락한 인간적 욕망과 맞서 싸워야 한다. 오, 예수님은 이런 마음에

대해 정말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마 6:1, 16; 눅 20:45〜47 ) !” 우리는 자

신은 작아지고 그리스도는 커지기를 소망한 세례 요한의 결단을 본

받아야 한다( 요 3:29〜30 ). “나는 단지 이런 고백이 내 모든 트윗 위에

깃발처럼 휘날리길 바란다. ‘예수님을 높이고, 파이퍼 목사는 낮아

지게 하소서.’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건 정말, 정말 어려운 일

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자기 자랑과 진리 자랑, 자기중심성과

그리스도 중심성을 구분할 것을 요구한다.”

또 하나의 함정은 겸손한 자랑이다. “겸손한 자랑은 이런 식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분께 초대받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겉

으로는 겸손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사실은 겸손으로 포장한 자기

자랑이다. 나는 이런 표현을 트위터 전역에서 본다. 사람들은 누가

자기에게 해 준 말을 마치 조심스럽게 되풀이하는 것처럼 말하지

만, 실상은 이런 식의 자랑이 곳곳에 널려 있다. 그런 글을 볼 때

마다 내 안에서는 뭔가 움찔하고 민망해진다.” 우리는 영향력을 끼

치기 위해 게시물을 올린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을 보게 하기 위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진리를 나누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면, 사적으로 말하는 것이

더 유익한 상황이라면, 굳이 공개적으로 꾸짖지 말라.1)

1) APJ 61: “Twitter Goals and ‘Humble Brags’” (April 3, 2013).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하)

온라인에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은 잘못인가

영향력을 갖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

향을 주려는 마음은 그리스도인다운 마음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소셜 미디어에서 “인플루언서”가 되려는 목표를 갖

고 활동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영향력 추구가 언제 명예욕으로 변

질되는가?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은 죄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려는

욕망은 그 본질상 죄가 아니다. 문제가 생기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다른 사람을 섬기려는 기쁨보다 내가 주목받고 칭찬받는 데서 오는

기쁨이 더 클 때, 바로 그때가 위험한 지점이다. 즉, “섬김의 기쁨

보다 주목받는 기쁨을 더 갈망할 때” 죄가 된다. 사람들이 나를 좋

게 보기를 바라는 마음 자체는 죄가 아니다. 단, 그 바람의 목적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며, 그 과정

에서 나를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라면 그 자체는 바른 열망

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존재 목적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존재하며 하나님이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분임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히 신뢰할 만하다는 사

실을 증언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고난 중에도 기쁨이 넘치며

다른 이들도 하나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발견하도록” 돕기 위해 존 재한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다.

그러나 자기 영광을 추구하며 행하는 종교적 행위는 은밀한 방식

으로 사악한 것이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헛된 영광을 경계하라고

여러 차례 경고하셨다( 마 5:16; 6:1〜6, 16〜18; 23:5 ). “이 모든 경고는, 내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셀카봉에 대해 117

생각에,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상급으로 삼고 있는지 시험해

보라는 목적이 있다. 이 말씀들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칭찬

에서 만족을 구한다면, 너는 아버지의 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결

국, 핵심은 여기에 있다.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의 보

물은 어디에 있는가? 명예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영향력을 가지려는 우리의 동기는 곧 우리가 무엇을 보물로 여기

는지를 드러낸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죄는 아니다.

사실, “영향력을 가지려 않는 것이 죄일 수도 있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를 원해야 한다. 우리 삶이 더

많은 사람을 복음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죄다. 우리는

더 많은 선한 일을 하고, 고통을 덜어 주기를, 특히 영원한 고통을

덜어 주기를 원해야 한다.” 이것이 곧 다른 사람을 위한 영향력 이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일이

얼마나 마음 깊이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모두 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려는 마음과 자기 영광을 구하려는 마음을 구별하기는 너무

어렵다. 이것은 성령과 육신 사이에서 계속 벌어지는 내면의 전쟁

이다( 롬 8:5〜7 ). 2)

2) APJ 983: “Is It Sinful to Seek Fame Online?” (December 30, 2016). 영향 력이라는 덕목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이 책 뒷부분의 “글쓰기, 문법, 시에 대해” 를 참고하라.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하)

자기 집착과 셀카봉

바울은 말세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 딤후 3:1〜2 ) 이 많아질 것

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면 브이로그, 셀카, 자기중심적 소셜 미디어

는 이 말세의 자기 사랑을 보여 주는 증거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렇다. 브이로그와 셀카, 자기중심적 SNS는 종종( 항상은 아니지만 )

이 마지막 시대의 자기 과시, 자기 집착, 자기도취의 표현이다. 하지

만 아니기도 하다. 이런 새로운 기술들이 새로운 종류의 죄를 만들

어 낸 것은 아니다. 이런 죄는 예전부터 존재했으며, 다만 새로운 기

술이 오래된 죄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 지금은 말세다. 우리는 사랑스럽고, 기다려지고, 모든 것

을 만족하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열렬히

소망하며 기쁘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최후의 마지막

날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이미 2천 년 전 초대교회 때 시

작된 말세와 매우 흡사하다.” 바울은 “말세에” 자기 사랑에 빠진 자

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지금 당장 “그런 사람들을

멀리” 해야 한다( 딤후 3:1〜5 ). 그들은 이미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은 바로 왜 우리에게 “자아”라는 것이 존

재하는가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아를 주신 이유는, 그 자아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아로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다. 하

나님은 자아를 기쁨의 대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기쁨을 누리는 주체로 주셨다. 즉, 거울 앞이나 셀카 속에서 행복을 찾는 초점이 되

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행복이 불타오르는 화로로서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셀카봉에 대해 119

자아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아를 자존감을 증명하는 도구로

주시지 않았으며 예배의 도구로 주셨다.” 실제로 하나님은 자아를

“욕망 공장”으로 의도하셨다. 그 자아는 “끊임없는 욕망”을 만들어

내고, 그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밖에 있는 기쁨”을 추구하게

만든다. 이 끝없는 욕망은 자아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그 욕망

은 “우리를 우리 자신 바깥으로, 더 나아가 이 세상 바깥으로 이끌

기 위해 존재한다. 이 세상 그 무엇도 궁극적인 만족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망은 결국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해 존

재한다.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시 16:11 ). “나는 소셜 미디어에 과몰입한 사람에게 이

렇게 말하고 싶다. 자아는 결코 우리를 만족하게 하도록 만들어지

지 않았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거나 높이는 일에서 만족을

찾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자아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3)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내 선한 행실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도 될까

소셜 미디어는 앞서 말한 겸손한 자랑처럼 우리가 한 선한 행실

을 세상에 알릴 새로운 기회를 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우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

3) APJ 1158: “Avoiding Pride in a World of Selfie Sticks and Social-Media Platforms” (February 12, 2018).

씀( 마 5:16 ) 을 따르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

지 말라”는 또 다른 예수님의 명령 ( 마 6:1 ) 을 어기지 않을 수 있 을까?

예수님은 우리가 겸손함을 지킬 수 있게 장차 받을 상급을 우리

의 동기부여로 삼으신다( 마 6:1 ).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악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받을 상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 상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므로 인간의 칭찬을 보태야겠다는 욕망이 생기고,

바로 그 점이 악한 동기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보상으로

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는 마음,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박수갈채로

채워 넣으려는 마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때의 가장 미

묘하면서도 치명적인 유혹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나팔을 불며 선한 일을 알리지 말

아야 한다( 마 6:2〜4 ). 구제할 때는 “급식소에서 봉사하는 사진”을

SNS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 의로운 행위는 “오른손이 구제하고 있

을 때, 왼손은 반대편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는 줄도 모를 정도로 조

용히” 해야 한다. 자기를 드러내려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예

를 들어, 어떤 비극적인 사건을 위해 다른 이들이 기도하도록 권면

하는 것과 자신이 그 사건을 위해 기도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이 차이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와 선행

및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의도

적으로 노력하라”고 명하신다( 마 6:5〜6 ).

그러나 여전히 “진짜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셀카봉에 대해 121

영광이 되도록 사람들에게 보이게 해야 한다는 명령은 어떻게 이해

해야 하는가( 마 5:14〜16 ) ? 우리는 은밀하게 섬기는 것을 목표로 삼아

야 하지만, 실제로는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세 가지 제

안을 소개한다.

1. 실제적 사랑의 행위는 많은 경우 “그 행위를 받는 사람이 모를

수 없다.” 예를 들어, 길에서 타이어를 교체해 주는 일을 하면서 그

사람이 보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공공장소에서 일어난 테러 상황

에서 한 아이를 구하려고 목숨을 걸고 행동한다면, 그 장면을 주변

사람들이 보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선한 행위는 숨길 수 없다. 그러

나 대다수 경우는 숨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온라인에서 어떤 사역에

기부하려 할 때 ‘익명으로 기부하기’라는 작은 버튼이 보인다고 해

보자. 진정한 시험이 아닐 수 없다. 익명으로 기부하겠는가, 아니면

자신의 이름을 남기겠는가?

2. 예수님은 우리 사랑의 목표와 목적을 다시 조정하신다. 선한

행동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드러내는 쇼가 아니다. 우

리가 선한 일을 하는 이유는 더 많은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

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단순한 공공의 선행자

들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구원받아 영

원히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자비 사역과 정의

사역의 가장 큰 이유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그 순간 중요하

게 여기는 집단에게 칭찬받기 위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3. 우리는 우리 안에 교묘하게 숨어 있는 ‘높임 받으려는 욕망’을

잘 알고 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으려는 욕구가 있다는 인

상을 주는 방식으로 공공의 자리에서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

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는 트위터, 인스타그램, 기타 SNS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이것은 육적인 것이지 거룩한 것이 아니다. 자기 과시

적 행위는 사람들을 밀어낸다.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끄는 것이 아

니라 도리어 멀어지게 만든다.

마태복음 5〜6장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

고, 가장 만족스럽고 영광스러운 분으로 귀히 여기는 것을 최고의

보상으로 삼으며 깊은 만족을 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칭찬이 마치 하나님의 칭찬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갈망해서는 안

된다. 그 갈망 자체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진실하게

사랑해야 하며, 그 사랑의 목적은 다른 이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이르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헛된 자아의 욕망이 아니라 영적인 갈망

으로 우리를 채워 주소서.”4)

소셜 미디어의 피상성

우리가 올리는 소셜 미디어 게시물은 그 댓글이 가볍고 하찮은

말들로 가득 차 있다면 당연히 피상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속지

4) APJ 1151: “‘Let Your Light Shine’—Should I Instagram My Good Works?” (January 26, 2018).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셀카봉에 대해 123

말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 고전 15:33 ).

“피상성은 매우, 매우, 매우 전염성이 강한 질병이다. 당신이 피상적

인 사람들과만 어울린다면, 거의 틀림없이 당신도 피상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피상적인 소셜 미디어나 TV 프로그램만 보고 있으면, 당

신도 거의 확실히 피상적인 사람이 된다.” 반대로,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며 그들의 길을 따를 때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시

119:63; 잠 13:20; 히 10:24 ). 5)

그러나 현실의 소셜 미디어에서는 “모든 사람이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대다수 말은 재치 있다. 재치 있는 응수이고, 농담이다. 이런

말들이 쌓이면 인생이 결국 피상적이고, 하찮고, 재치 있는 기독교

식 말장난으로 채워지게 된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올리기 적당한

콘텐츠가 될 뿐이다. 나는 이런 가벼움이 넘치는 분위기 위에서 진

정한 복음 전도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6)

소셜 미디어 사용을 위한 목표 설정

그러면 우리는 휴대전화와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을 어떻게 영원

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까? 복음을 전하고 덕을 세우는 일에

말이다. 소셜 미디어는 선을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트위

터가 생기기 전에는 전도지를 나누어 주거나, 문고리 광고를 돌리

5) APJ 1033: “Three Strategies for Overcoming the Superficial Life” (April 26, 2017).

6) APJ 1234: “Three Threats to the Joy of This Generation” (August 8, 2018).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하)

거나, 광고판을 임대하거나, 신문 광고를 내거나, 자동차 범퍼에 스

티커를 붙이거나, 신문사에 독자 투고를 하거나, 글과 책을 출판하

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하지만 지금은 바로 페이스북, 트

위터, 인스타그램, 유튜브, 블로그로 간다. “이제는 당신이 한 말 한

마디가 수천 명, 심지어 수백만 명에게까지 전달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는 새로운 상황이고,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이 맡기신

또 하나의 청지기 사역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한 모든 무책임한

말에 대해 책임을 물으신다( 마 12:36 ).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에

서 한 말도 포함된다.”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한 트윗 원칙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그리스도를 전하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

포”해야 한다( 벧전 2:9 ). 당신이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기로 했다면,

당신의 “사명”은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

의 소셜 미디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요소는 전파다. 진리를 씨처

럼 흩뿌려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알리는 것이다 ( 시 40:10;

96:3; 잠 15:7; 행 5:28 ). “그러므로 트윗을 올릴 때 기도하라. 블로그나 페이스북 게시물을 올릴 때도 기도하라. 하나님이 그 글에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정하신 방법으로 보내 주시기를 기도하라. 나는 그렇게 한다. 나는 거의 매일 성경 말씀에서 나온 글

귀들을 트윗 예약에 걸어 둔다. 그중 약 90%는 성경에서 직접 가져 온 것이다.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말씀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해 주소서. 누군가의 필요에 정확히 맞는 시간에 이 말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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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되게 하소서.’”

2. 악을 직면하라( 엡 5:11; 벧전 3:15 ). “인터넷에서 당신 삶의 주된 색

채가 어둠을 드러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손과 마음이 더러워질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하나님이 당신

마음에 무언가 바로잡아야 할 것을 짐으로 주실 때가 있고, 그럴 때

는 죄를 드러내야 할 때도 있다.”

3.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라( 요 8:32; 17:17; 롬 14:19; 엡 4:29 ). “그러

므로 우리는 입으로, 트위터 피드로, 페이스북 페이지에 성경을 정

확하게 인용하고 지혜롭게 해석한 말씀을 올려야 한다. 이것이 선

을 행하는 가장 안전한 길이다. 자신을 최소화하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최대화하라.” 생명을 주고, 사랑을 전하며, 은혜가

담긴 말을 하라( 잠 10:11; 15:4; 16:21, 24; 25:11; 고전 16:14; 엡 4:15; 골 3:16; 4:6 ).

4. 자신이 드러나게 하라. 소셜 미디어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드

러나는 창이다( 마 12:34 ). “당신은 모르고 있을지 몰라도, 당신은 온

종일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당신의 소셜 미

디어 사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분노하

는 사람인가, 냉소적인 사람인가, 모진 사람인가, 온유한 사람인가,

친절한 사람인가, 사랑이 많은 사람인가, 온전한 사람인가, 깨진 사

람인가?” 소셜 미디어 속 당신은 바로 당신 마음이 세상에 드러난

모습이다.

5. 누적 효과에 집중하라. “가끔 내 트윗은 하나님의 심판을 아주

강하게 지적하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상한 마음을 향해 매우 부드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하)

럽게 다가가기도 한다. 나는 각각의 트윗만 보지 않고, 수년에 걸쳐

수천 개의 트윗이 만들어 내는 전체적인 효과를 함께 본다. 지금까

지 나는 아마 17,000개 정도의 트윗을 보냈을 것이다( 2018년 기준 ).

그 모든 투자는 결국 ”그리스도를 높이고, 잃어버린 자를 구하며, 하나님 백성에게 영원하고 거룩한 기쁨을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소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7)

소셜 미디어에서 비판하기 전에

분노와 모욕의 불길이 금세 소셜 미디어 상에 번질 수 있다. 신앙 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조차도 말의 어리석음을 고려하지 않은 채

분노의 말에 불을 붙이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더 나은 방식으로 소

통해야 한다. 다음은 게시물을 올리기 전에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7가지 질문 일부다.

(1) 이 말은 사실인가? 가능한 한, 자명하게 사실인 것만 올려야 한다. 성경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진리가 가장 좋다. 거짓을 퍼뜨리

는 일은 언제나 피해야 한다. (2) 시기적으로 적절한가? 당신이 말

하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욥의 친구들은 우리에게 “진리도 부적

절한 때에 사용되면 불의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어리

석은 자는 잠언조차도 잘못 사용한다( 잠 26:7, 9 ). (3) 이 말은 덕이 되는가? “내가 소셜 미디어에 올리는 이 말이, 내가 말하고 있는 대

상이나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더 잘 알게 하고, 하나

7) APJ 1204: “How Can We Tweet to the Glory of God?” (May 30, 2018).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셀카봉에 대해 127

님을 더 신뢰하게 하며, 사람을 더 잘 사랑하고, 죄를 줄이고 거룩함

에 더 가까이 가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엡 4:29 ) ?” 물론 이는 때로

필요한 교정적 비판의 여지도 남긴다. (4) 이 말은 이 청중에게 적

절한가? 지금 말하려는 내용이 소셜 미디어라는 공간에 맞는가( 엡

4:29 ) ? 소셜 미디어는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맥락을 제공

하지 않는다. 그런 대화는 개인적으로 또는 일대일로 하는 것이 더

낫다. “사람들이 트위터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내가 가장 불만을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수많은 사람이 읽도록 공개적으로 말하는 내

용 중 상당수가 사실은 개인적으로 당사자에게만 말했어야 할 것들

이라는 점이다. 많은 말이 실제로는 한 사람에게 전할 말인데도 수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

점을 이해할 수 없다.” (5) 이 말은 미래의 하나 됨을 위한 것인가?

온라인에서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 그것은 거짓에 기반을 둔 공격

인가? 단순한 인신공격이나 무시하는 말인가, 아니면 진심으로

신자들 간의 화평을 바라는 마음에서 건설적인 비판을 하는 것

인가( 엡 4:1〜3 ) ? (6)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가? 우리는 죄 된 분노로

쉽게 자극받고 반응하므로, 분노 가운데 무언가를 전달하려 할 때

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약 1:19〜20 ). “분노하기를 더디하라. 말하기를

더디하라. 당신의 분노는, 또 나의 분노는 거의 확실히 의로운 것이

아니며, 당신이 기대하는 선한 결과를 결코 가져오지 못할 가능성

이 매우, 매우, 매우 크기 때문이다.” (7) 이 말이 그리스도를 높이

는가? “사람들이 당신 마음이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가치와 위대하

심 안에서 깊은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

128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하)

는가?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로 드러

내기 위해 존재한다. 사람들이 당신의 말에서 그것을 맛볼 수 있 는가?”8)

정치 관련 트위터에 대해

존 파이퍼 목사의 소셜 미디어 활동은 정치, 속보, 해시태그, 유행

이슈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 그는 이 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트

위터가 어떤 새로운 논란으로 불타오를 때, 파이퍼 목사는 어디 있

는가? 저기서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마치 지금 무슨 일이 벌

어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다. ‘지금 대법관 지명자를

잃게 생겼는데, 그걸 모르시나요? 제발 뭐라도 하세요!’”

파이퍼 목사는 정치적 이슈에 대해 언급하는 일에 매우 신중하다.

2018년 여름, 진보 성향의 신예 정치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

르테즈가 뉴욕 제14선거구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승리했는데, 사람

들은 이 일이 그해 가장 큰 이변이라고 했다. 그는 11월 본선에서도

승리했다. 파이퍼 목사는 그가 “사회주의에 있어 [버니] 샌더스

보다도 더 왼쪽에 있다”고 말했지만, 그의 사회주의 성향을 공개적

으로 비판하는 데는 주저했다. 이유는 세 가지다.

1. 권위에 대한 문제다. “국제 정치나 거시 경제 같은 이슈 대부분

은 내게 너무 복잡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그는 성경 전

8) APJ 1581: “Before You Tweet Criticism: Six Considerations” (January 29, 2021).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셀카봉에 대해 129

문가다. “사람들이 내게서 듣기 원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관점이다.

하지만 복잡한 사회 이슈에 대해 내 견해가 공적으로 말할 만큼 충

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요약하면 “나는 정

치적 현실이라는 세부적인 물줄기로 내려가기 전에, 그보다 훨씬

위쪽에서 성경과 씨름하는 사람이다.”

2. 교회에 대한 문제다. “나는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막는 것보다 그런 사회주의 미국 안에서 흔들림 없이 신실하고, 성

경적이며, 문화에 역행하는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세우는 일

에 백 배, 이백 배 더 열정이 있다. 나는 사회주의 미국 안에서, 무슬

림 미국 안에서, 공산주의 미국 안에서 신실하고, 성경적이며, 문화

와 구별되고,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세우는 일에 훨씬 더 큰

열정을 갖고 있다. 미국이 무슬림 국가가 되는 것을 막는 것보다, 공

산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막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말이다. 이런 점에

서 나는 많은 공적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 서 있다. 내 주된

부르심은 미국이 어떤 나라가 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

회 되도록 돕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미국이든 또는 세상의

어떤 민족이나 나라든 상관없이, 교회는 그리스도 왕국의 혁신적인

전초기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이퍼 목사는 자신의

방식을 일반화하거나 절대화하지 않는다. “나는 기쁘다고, 정말 기 쁘다고 다시 한번 말하겠다. 나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더 활발하게

활동하며, 공의롭고 지혜로운 법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그리스도인

들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쁘다.”

3. 말씀 중심 사역의 영향력에 대한 문제다. “나는 이렇게 느낀다.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열방의 유익을 위해, 또한 교회의 순결과

강건함을 위해 장기적으로 더 크고 지속적인 영향력은, 내 목소리

를 정치적으로 내는 데서 나오지 않고 인간의 영혼을 더 깊이 있게,

더 개인적으로, 더 영원한 관점에서 바라보며 그 영혼이 어떻게 가

장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 갈 수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데서 나올 것이다.” 목회자들은 “지역, 주, 국가 차원의 입법 문제들

에 대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

낄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들은 ( 심지어 정치 영역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포

함한 ) 성도들에게 “성경 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계속

강해하고, 거기에 적용할 수 있는 만큼 적용해 주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9) 성경적 진리를 선포하라. 그리고 “당신의 성도들이 예수 그

리스도 왕께 온전한 충성을 바치도록 촉구하라. 그들에게 평생 배

우는 순례자의 길에 서도록 도전하라.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서 하

나님의 성령을 신뢰하라.”10)

덧붙여 사실대로 말하면, 파이퍼 목사는 이 방송을 하기 정확히

3년 전 팟캐스트에서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물론 그는 그 발언을 하기 전 여러 가지 유보와 한계, 조심스러운 설명을 곁들 여 신중하게 접근했다.11)

9) APJ 1263: “Why Does Piper Avoid Politics and What’s Trending?” (October 15, 2018).

10) APJ 1804: “Politics, Patriotism, and the Pulpit” (July 4, 2022).

11) APJ 710: “How Should Christians Think about Socialism?” (October 20, 2015).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셀카봉에 대해 131

아침에는 휴대전화를 꺼 두라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충동적으로 휴대전화를 찾는다. 하

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이에 대해 몇 가지 경고가 필요하다. 첫째, 우리는 결코 소명과 분

리된 채로 깨어나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우리는 마음과 뜻

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섬

길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존 파이퍼 목사가 얼마나 죄인인지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 우리 대부분은 하나

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마음으로 충만한 채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이 과정에는, 완곡하게 표현한다 해도, 어느 정도 마음의 재

정비가 필요하다.”

존 파이퍼 목사는 자신의 마음과 자신이 겪는 유혹을 분석한 후,

우리가 모두 아침에 깨어날 때 마주하는 여섯 가지 마음의 문제를

소개한다. 먼저, 깨자마자 휴대전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세 가지 ‘달

콤한 유혹’부터 살펴본다. (1) 새로움의 유혹. 우리는 최신 소식에

뒤처지고 싶지 않다. “사람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가장 먼저 알고 싶

어 한다. 그래야 똑똑하고 민첩한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뒤

늦게 듣는 겸손한 자세를 취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2) 자아

의 욕구.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보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휴대전화를 열어 나에 대한 언급이나 리트윗을 찾는다. “우리

의 타락하고 죄 된 본성에는 인간의 자아가 주목받을 때 느끼는 과

도한 즐거움이 있다. 우리 중 일부는 너무 연약하고, 상처받고, 깨어

지고, 불안정해서, 우리에 대한 아주 작은 언급 하나만으로도 큰 만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하)

족을 느낀다. 마치 누군가가 우리에게 입을 맞추어 준 것 같은 기분

이다.” (3) 오락의 유혹. 우리는 잠시라도 즐겁고 싶어 한다. 그래서

소셜 미디어를 연다. 거기에는 “끝도 없이 쏟아지는 흥미롭고, 기괴

하고, 이상하고, 놀랍고, 충격적이고, 마음을 사로잡고, 귀엽고, 감동

적인 사진과 인용문과 영상과 이야기와 링크들이 있다.” 우리 중 많

은 이들은 이제 자극적이고 놀랍고 특별하고 환상적인 것을 향한

중독에 가까운 갈망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침대 위에서도 마

찬가지다. 이런 달콤한 유혹들 너머에는 또 다른 세 가지 회피의 동

기 곧 하루를 30분쯤 더 미루게 만드는 기피 본능이 있다. (4) 지루

함의 회피. 하루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침대에서 일어날

동기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마음속 공허를 채우기 위해 휴

대전화를 집어 든다. (5) 책임의 회피. 우리는 앞에 놓인 무거운 책

임과 마주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그 책임이 두렵기도 하고, 어쩌면

오늘의 과업에 대해 무능함을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부담을 느끼고, 결국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 기며 하루를 미룬다. (6) 고통의 회피. 아침에 우리가 휴대전화를 찾

는 것은 때때로 “가정 안의 심각한 인간관계 갈등, 질병이나 장애의

문제, 나를 반대하는 친구들 또는 극심한 신체적 고통, 즉 너무 아파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을 잠시나마 미루고 싶기 때 문이다. 그냥 조금 더 누워 있는 게 더 쉽고, 휴대전화는 그 도피를

부추긴다.12) 12) APJ 636: “Why Not to Check Your Phone in the Morning” (July 9, 2015).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셀카봉에 대해 133

하지만 우리가 새로운 정보의 유혹을 따라 휴대전화를 켰는데 끔

찍한 뉴스를 마주하게 된다면 어떨까? 자아 확인의 욕구로 무언가

좋은 반응을 기대하며 눈을 떴는데, 오히려 온라인에서 미움을 받

고 있다면? 즉흥적 오락의 유혹에 이끌려 책임을 외면하고 오직 즐

거움만을 추구했는데 “단 5분간의 회피 끝에 영적으로나 도덕적으

로 및 감정적으로 이전보다 더 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

었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나은 하루의 시작이 있다.

아침에 가장 먼저 켜는 것이 오디오 성경이 되도록 결단할 수 있다.

“우리가 아침 일상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그날의 일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열심을 내게 해 주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하루 동안 마주하게 될 모

든 현실 앞에 담대히 설 힘을 얻어야 한다. 우리보다 남을 낫게 여

기려고 결단할 수 있는 기쁨 어린 용기,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참

된 위대함을 추구하도록 도와주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말이다 ( 막 9:35 ) . 그것이야말로 아침의 진짜 목적

이다.” 우리는 아침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깨

어나야 한다( 시 5:3; 90:14; 143:8 ).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즉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 일을 의도적으로 계획해야 한다. 아침의

첫 결단은 전날 밤에 해야 한다.13)

13) APJ 637: “Don’t Waste Your Mornings” (July 10, 2015).

인터넷 중독을 끊는 방법

한 젊은이가 질문을 보냈다. 그는 음란물이나 게임에 중독된 것은

아니었고, 건전한 기독교 콘텐츠를 지나치게 소비하는 데 중독되어

있었다. 콘텐츠 자체는 유익하고 선한 것이지만, 그것이 그의 인간

관계를 방해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관심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좋은 선물의 과도한 사용을 어떻게 다

루어야 할까?

우선, “중독”이라는 말은 더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 경우,

“나는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뉴스( 또는 그 외 무엇이든 ) 를 죄에 이

르는 과도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렇

게 말하면 “내가 하는 일의 가치 및 내가 하지 않고 있는 다른 일들

의 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강한 욕구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이 더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욕망의 죄 된 불균형”으로

재정의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도덕적인 문제가 더욱 명확해 진다. 즉,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판단을 거스르며, 욕망의 강도에 굴복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죄 된 과도함, 욕망의 불균형,

자기 판단을 거스르는 행동이라는 문제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반면 중독이라는 표현은 너무 치료적이고 모호한 언어로, 이런 구체적인

죄들을 흐릿하게 감출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죄 된 충동 자체가 아니라, 좋은 콘텐츠를

과도하게 소비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질문은 “이것이 나쁜가?”가

아니라, “이것을 지나치게 하는 것이 나쁜가?”다. “다시 말해, 하나

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의 삶은 단지 나쁜 것을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셀카봉에 대해 135

피하고 좋은 것을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좋은 것을 올바른

동기와 적절한 균형 속에서 행하는 삶이다.”

다음은 네 가지 실천적 권면이다. (1) 성경 말씀에 깊이 젖어

들라.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하신 균형감이 당신 안에 본능처럼 자

리 잡게 되어, 어떤 습관이 유익하고 어떤 습관이 순종을 방해하는

지 분별할 수 있게 된다.” (2) 하나님께 기도하라. 자신이 시간을 낭

비하고 있는 부분 및 그것을 스스로 보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하나

님이 보여 주시기를 간구하라. (3) 당신이 가진 욕망의 강도가 하나

님이 주신 다양한 선한 일들과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하라. 가정과

직장, 교회에서의 관계뿐 아니라,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발견한 다른

모든 선한 일들과도 조화를 이루게 하라. (4) 당신이 균형 감각을

잃을 때 도와줄 수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친구들과 함께하라. 그

런 사람들과의 교제가 당신의 삶을 더 온전하게 해 줄 것이다.14)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휴대폰을 치우라

식사 시간마다 계속 휴대폰을 보는 남편이 자신을 거의 무시하는

14) APJ 657: “How Do I Choose between Two Good Things?” (August 7, 2015). “중독”이라는 용어를 “죄악 된 과도함”으로 대체하는 것에 대해 다음을 보라. APJ 530: “The Real Cost of Pornography” (February 11, 2015) (포 르노 중독에 대해), APJ 657: “How Do I Choose between Two Good Things?” (August 7, 2015) (디지털 미디어와 스마트폰 중독에 대해), APJ 1314: “How Do I Break My Entertainment Addiction?” (February 18, 2019) (게임 및 비디오 오락 중독에 대해), APJ 1702: “On Cigarettes, Vaping, and Nicotine” (November 8, 2021) (니코틴, 전자담배 및 흡연 중독에 대해).

것에 좌절감을 느끼는 아내가 있다.

남편이 저녁 식사 시간에 휴대폰을 치워야 하는 이유는 다음의

다섯 가지다. (1) 아내는 영원한 생명의 공동 상속자로서, 아내를 무

시하는 것은 아내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벧전 3:7 ). (2) 당신의 얼

굴은 호의를 가진 관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

은 곧 하나님이 주의 깊게 우리를 바라보심을 의미한다( 민 6:24〜26 ).

우리도 타인을 사랑함으로써 그런 관심을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

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우리를 향해 얼굴을 비추신다는 사실은 대단 한 영광이다. 하나님은 다른 무언가에 더 흥미를 갖고 집중하시는

분이 아니다.” (3) 그리스도처럼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해야 한다( 빌 2:3〜4 ). 자신의 유익( 화면 켜짐 ) 뿐 아니라 아내의 유익( 화면 꺼

짐 ) 을 살펴야 한다. (4) 지금 느끼는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말고, 마

땅히 느껴야 할 바에 따라 행동하라( 막 8:34 ). 가정 안의 불화가 남편

의 무관심을 유발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감정에 끌려 행동하지

말고, “마땅히 느껴야 하는 대로 행동하라.” (5) 그리스도처럼 아내

를 사랑하라( 엡 5:25 ). “아내가 마땅히 받을 대우가 아니라, 그리스도

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방식을 따라 아내를 대하라는 부르심을 받 았다.” 자기 자신을 죽이고 헌신해야 한다. “아내가 관심과 교제를

갈망하고 있는데도 이를 외면한 채 소셜 미디어에 몰두하는 남편은 주를 기쁘시게 하지 못하며 죄 가운데 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내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남편의 영적 상태에 따라

다음 여섯 가지 방법을 고려할 수 있다. (1) 그 문제를 그 순간이 아

닌, 더 적절한 시점에 말하라. (2) 비난하지 말고, 잃어버린 관계와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셀카봉에 대해 137

대화를 그리워한다고 남편에게 솔직하게 말하라. (3) 함께 식탁에

서 대화 나누는 시간이 아주 좋다고 표현하라. (4) 믿음의 공동체에

기도를 요청하라. (5) 이런 노력들이 오히려 부부 사이의 긴장감을

더 고조시킨다면, 신뢰할 만한 다른 부부를 불러 도움을 요청하라.

(6) 모든 일에서 “최대한의 존중과 도움 되는 태도”로 남편을 감동

하게 할 방법을 찾으라. 그래야 남편의 마음이 아내를 향해 굳어지

지 않는다. 기도하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이 가정 안에서 결

국 승리하도록 힘써 구하라.15)

스마트폰 버리기 한 청취자가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제가 결국 스마트폰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게 될 수도 있을까요?”

신약에 나오는 데마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날카로운 경고가

된다. 그는 사도 바울과 함께 일하던 동역자였지만, 결국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떠났다( 딤후 4:10 ). 사실, “세상이 데마를 망가뜨린 것

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데마의 사랑이 그를 무너뜨린 것 같다.” 마

찬가지로 “스마트폰 자체가 결혼이나 엄마의 역할 또는 영혼을 파

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마트폰 안에 있는 것들을 향한 사랑은

영혼을 파괴할 수 있다.” 이런 위험을 고려해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버리라”( 마 5:29 ). 스

마트폰에서 구형 폴더폰으로 돌아가는 것은 눈을 빼는 것보다는 덜

15) APJ 633: “Put Your Phones Away at the Dinner Table” (July 6, 2015).

138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하)

급진적인 일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있는 악과 싸우기 위해, 본

래 중립적이거나 좋은 것에 대해서라도 과감하게 조처할 준비가 되 어 있어야 한다.”

개인적인 순결을 위한 싸움은 내면 과 외면 , 두 전선에서 벌어 진다. “우리는 마음의 전선, 즉 내면의 전장에서 싸우고 있다. 예수

님 안에서 깊은 만족을 누리고, 예수님을 분명히 보고, 진심으로 사

랑하며, 가까이 따름으로써 말이다. 이는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스마

트폰조차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싸움이다.” 이것이 “가장 중

요한 전선”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더 사랑하라. 그러면 스마트폰

의 종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외적인 전선에

서도 싸우고 있다. 믿음을 넘어뜨리는 걸림돌들을 제거하거나 피하

려는 싸움이다”( 롬 13:14 ). “약물 중독자는 주사기를 가지고 장난치지

말아야 한다. 알코올 중독자는 브랜디를 집에 쌓아 두지 말아야 한다. 성적으로 유혹받기 쉬우면 컴퓨터에 차단 장치를 달아야 한다. 인생을 낭비하거나, 돈을 허비하거나, 짜증과 분노, 조급함에

시달리는 스마트폰 중독자는 폴더폰으로 바꾸어야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성경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율법주의도 아니다.

이것은 지혜다. 이것은 마음을 지키기 위해, 주를 위해, 가정을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함을 추구하는 모든 전선에서의 싸움이다.”

디지털 사용 습관을 지켜야 당신의 삶을 그리스도로 더 풍성히

채울 수 있다. “나쁜 영향을 제거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누군가가 그

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의 속박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단순히 스마트폰을 버리는 데서 오는 것이 아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셀카봉에 대해 139

니라, 그 공허함을 스마트폰의 쾌락이 아닌 예수님의 영광으로 채

울 때 온다. 스마트폰이 주는 속이고 사라지는 쾌락과 싸우기 위해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과 그리스도의 돌보심이라는 참되고 영원한

기쁨으로 맞서 싸우라.”16)

소셜 미디어 금식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유익한 또 하나의 훈련은 소셜 미디어 금식

이다. 이렇게 해 보라. “기간을 정하라. 예를 들어 일주일, 또는 내가

2년 전에 했던 것처럼 8개월 동안 트위터도 하지 않고 블로그도 완

전히 멈추라. 그리고 자기 영혼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라.

내 영혼이 ‘내가 알려졌으면, 팔로우 받았으면, 사람들이 내 글을 읽

었으면 하는’ 중독에 빠져 있었는지를 점검해 보라. 정한 기간에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글을 올리지도, 읽지도 말라. 이것이 바로

트위터 금식이요, 블로그 금식이다.”17)

댓글을 읽는가

“나는 가끔 읽는다. 그런데 그리 유익하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누

군가는 ‘도움이 되었다’고 고맙다고 말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심

한 욕설을 퍼붓는다.” 그래서 “댓글을 충분히 많이 본다고 해서 유

16) APJ 670: “When Should I Get Rid of My Smartphone?” (August 25, 2015). 기쁨을 기쁨으로 이기는 것, 즉 새로운 감정의 대체 효과에 대해 다음을

보라. APJ 850: “Can Pleasure in God Really Compete with the Pleasures of Porn?” (May 3, 2016).

17) APJ 62: “Fasting from Twitter and Facebook” (April 4, 2013).

140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하)

의미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70%는 도움을 받

았다고 하고, 30%는 말도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70%가 옳은 것 아니겠는가’라는 결론을 내리려면 정교한 분석이 필요할 것

이다. 물론 그게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공개된 반응을 저

울질하기보다, 믿을 만한 친구에게 피드백을 받고, 모든 게시 글에

대해 기도하는 것이 더 낫다.18)

140자 트윗 시대( 2006〜2017 ) 동안, 존 파이퍼 목사가 세상에 남길

마지막 트윗이자 정수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이것이다. “예수, 하나

님의 아들이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하여 그를 가장 사랑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고,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기

쁨을 얻게 된다.”

이 문장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서 전한 “가장 중요

한 복음”을 본떠 요약한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본질을 담은 트윗이다. “내 문장에서 가장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아마도 ‘그를 가장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라고 표

현한 것 같다. 보통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나 ‘그를 신뢰하는 모

든 사람’이라고들 하지 않나? 나 역시 이것이 복음을 설명하는 유일 한 방식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믿음보다 사랑을 강조한

것이 잘못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정통한 기독

18) APJ 62: “Fasting from Twitter and Facebook” (April 4, 2013).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셀카봉에 대해 141

교 신앙에 있어 마음의 애정( affection ) 은 필수적이다. “지난 2천 년

교회 역사와 수많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돌아보면, ‘그를 믿

는다’고는 하지만 마음의 변화는 전혀 없고 삶의 변화도 전혀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결국 잃어버린 자들이다. 그래서 나는 믿음

이 단순히 지적인 동의나 지옥행 면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

람이 가장 깊이 사랑하는 대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점

을 강조하고 싶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를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티켓이 아니라, 최고의 보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그런 티켓 정도로 여기며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19)

19) APJ 1026: “What’s the Last Thing You Would Tweet?” (April 10, 2017).

5년 후 파이퍼 목사는 ‘정당한 믿음’ 안에서 사랑의 근거를 제시하는 다음 책을 출판했다. John Piper, What Is Saving Faith?: Reflections on Receiving Christ as a Treasure (Wheaton, IL: Crossway, 2022).

텔레비전, 영화, 오락에 대해

너무 쉽게 지루해지는 마음

주머니 속 모바일 화면은 우리에게 “끝없이 흥미롭고, 기묘하고,

이상하고, 놀랍고, 충격적이고, 매혹적이고, 귀여운 이미지, 인용문,

영상, 이야기, 링크들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사

람은 이제 그토록 자극적이고 기이하며 비범하고 놀라운 무언가를

계속 갈망하는 데 거의 중독되어 버렸다.”1)

이런 패턴은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도 이미 있었다. 수세대에 걸

쳐 사람들은 스크린 속 빛나는 장면들 속에서 영광을 찾으려 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창조 안에 나타난 영광에 너무 쉽 게 싫증을 내기 때문이다. “처음 알프스를 보면 우리는 말문이 막힐

정도로 감탄한다. 산 아래 작은 산장을 빌려 며칠을 보내며 아침

1) APJ 636: “Why Not to Check Your Phone in the Morning” (July 9, 2015).

텔레비전, 영화, 오락에 대해 143

마다 경이로움에 젖는다. 그러나 넷째 날 아침이 되면 우리는 텔레

비전을 켠다.” 이것이 타락의 결과다. “그러나 장차 올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에도 싫증을 내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

인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상상력을 훈련해야 한다. 그 상

상력은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상상하는 것뿐 아니라, 지금 존재

하는 것들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능력”이기도 하다.2)

세상은 당신이 쿨하지 않기를 바란다

텔레비전 속 영광의 대체물들은 우리가 영원에 가까이 갈수록 그

힘을 잃는다. “나는 정직한 마음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더욱 순

결한 마음과 생각을 추구하는 여정에 함께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오늘날 오락 매체가 사실상 전 세계의 공통 언어가 되어 버린 시대

에, 이 제안은 곧 이방인이 되라는 부름이다. 나는 진심으로 확신

한다. 세상이 지금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철저하게 담대하고,

희생적으로 사랑하며, 하나님께 깊이 사로잡힌 괴짜들 곧 이방인들

이다. 다시 말해, 나는 세상을 위해, 세상에 ‘아니오’라고 말하자고

여러분을 초대하는 것이다. 세상은 쿨하고, 세련되고, 문화적으로

똑똑한, 자기 복제된 존재를 더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거짓말

에 수천 명의 젊은 그리스도인이 속아 넘어갔다.” 세상을 닮는다고

세상을 구할 수는 없다.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들과 영화들은 “자아를 죽이고 그리스도

2) APJ 195: “How Your Imagination Helps You See” (October 16, 2013).

를 높이는 삶과는 완전히 어긋난 태도와 행동들을 찬양하고 미화”

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콘텐츠를 계속 소비

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지금 말하는 만큼 거룩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그 많은 TV

프로그램들과 영화를 더는 볼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

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당신을 좀 튀는 사람처럼 볼 것이다. 그

리고 오늘날 사람들은 그것을 최악의 악으로 여긴다. 사람들은 별나

고 특이하게 보이는 것이 거룩하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더 악하다고

여긴다.”3)

어떻게 내 하찮은 삶을 극복할 수 있을까

피상성은 오늘날 문화 속에 만연한 “전염병”이며, 하나님이 창조

하신 아름다움과 영광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자

신( 창 1:26〜27 ) 과 같은 피조물들에 대한 “경이와 놀라움을 비극적으

로 상실”한 결과다. 우리의 영광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잠

재력으로 가득하며, 하나님이 아시는 방식으로 사물을 알고, 하나님

의 마음 안에 있는 그 정서로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데 있다. 그러 나 우리는 죄를 지어 “영광스러운 폐허”가 되었고, 우리의 잠재력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우리는 영광스러

운 현실에도 너무 쉽게 싫증을 느낀다.” 우리는 장엄한 로키산맥이

나 알프스, 히말라야를 찾아가며 하루 이틀은 숨 막히는 감탄에 빠

3) APJ 368: “Should Christians Watch Game of Thrones?” (June 20, 2014).

대해 145

진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면 그 산 위 산장 안에 앉아 텔레비전

속에서 경외심을 자아내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초라한 영화나 보고

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참으로 비극적이다. 이것이 바로

타락의 크고 비극적인 결과다.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피상

적인 삶을 살고, 쉽게 싫증을 내며, 두세 번 반복하면 흥미를 잃고

‘에이, 뭐’ 하고 말아 버리는 삶 말이다.

우리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내던지고, 하찮고 하잘것없는

대체물들을 소비하는 데 삶을 허비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 하찮음

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음은 다섯 가지 실제적인 반응이다.

(1) 회개하라. 지금의 상태로 이끈 모든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라.

“공허함과 무의미함, 끝없는 자극 추구 속에서 몸은 흥분하나 영혼

은 지쳐 가고 위대함을 갈망하는 이 잠에서 하나님이 나를 깨워 주

시도록 부르짖어 간구하라.” (2) 전념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인식할 수 있는 영적 사고방식을 기르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에 의

식적으로 순종하려는 여정에 자신을 헌신하라. 이 영광은 세상에 ( in the world ) 드러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 in the word ) 드러난다.” 골로

새서 3장 1〜3절의 바울의 명령을 “삶의 작전명령”으로 삼으라. 영

원한 영광에 마음을 두라. 빌립보서 4장 8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영혼을 깊어지게 하고 강하게 하며 정결하게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것들, 탁월한 것들”에 마음을 집중하라. (3) 지역 교회를 찾아야

한다. “말씀이 매우 진지하게 선포되며, 하나님의 말씀의 경이로움

을 경박한 농담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하며 얻는 기쁨으로 표현하

는 교회”를 찾아야 한다. (4) 영원을 마음에 둔 친구들을 찾아야

146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하)

한다( 고전 15:55 참고 ). “피상성은 매우, 매우, 매우 전염성이 강한 병

이다. 피상적인 사람들과만 어울리면 거의 틀림없이 자신도 피상적

인 사람이 된다. 피상적인 SNS나 텔레비전 프로그램만 계속 접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당신도 피상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5) 청교도

고전 작가들의 책을 읽어야 한다. 그들의 책은 “20세기나 21세기에

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책들로, 철저히 비피상적이며, 경박하

지 않고, 하찮지 않으며, 사람 중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4)

문화적 하찮음이 넘쳐나는 시대에, 하나님의 주권적 영광은 우리

영혼을 붙들어 준다. “수년 동안 나는 내 영혼에 가장 큰 위협이 아

내를 배신해 간음하는 것이나, 어떤 사역의 재정을 횡령하는 것이

나, 갑자기 믿음을 버리고 무신론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는 것, 또는

극심한 분노에 휩싸여 누군가를 해치는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

런 일들은 내게 큰 위협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내 영혼에 가장 위협

적인 것은 ‘하찮음’이라는 것이 서서히 스며드는 것이었다. 위대함

과 아름다움, 장엄함과 깊이, 경이로움과 경외 및 무게감 있는 영적

감각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내가 인생을 망

칠까 두려워한 것은 어떤 극적인 대죄 때문이 아니라, 경박함이라

는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한 방울의 물방울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실재들”과 “접촉”해야 한다. 이는 곧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감싸시며, 모든 곳에 스며 있는 “하

4) APJ 1033: “Three Strategies for Overcoming the Superficial Life” (April 26, 2017).

텔레비전, 영화, 오락에 대해 147

나님의 섭리”를 보고, 맛보고, 붙들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마음이 깨어날 때 하나님의 섭리는 “현대 문화가 주는 하찮

음의 영향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며, 심지어는 신성한 것까지도 가

볍게 여기는 이 시대의 널리 퍼진 습관에서 우리를 지켜 주는 데 큰

도움이 된다.” (1)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영혼이 하찮아지는 것을

막아 준다. “나는 마음 깊이 두려워한다. 내 마음이 작아지고 쪼

그라들어 겨우 유치한 TV 광고 노래나 속 빈 희극에만 기쁨을 느끼

는 수준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 두렵다. 이것이 내가 두려워하는

바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모든 곳에 미치는 섭리를 보고 누리는 일

이 바로 내 영혼이 작아지는 것을 막아 준 방패였다.” (2)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진부함, 하찮음, 경박함, 피상성 및 가볍고 우스운

말에 중독되는 이상한 현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막아

준다. 이런 현상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나누는 대부분의 대화

에까지 스며들었다.” 이제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하찮은 삶

과 결별하라.5)

“재충전”이나 자기 위로를 오락으로 해도 될까

우리에게는 반드시 재충전이 필요하다. “우리의 정신은, 적어도

존 파이퍼 목사의 정신은, 항상 분석과 종합의 극대화를 위해 팽팽

히 조이기만 할 수는 없다. 좀 더 느슨하고 수동적인 오락이 필요한

자리도 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어떤 오락을

5) APJ 1583: “Escaping the Fog of Triviality” (February 3, 2021).

즐기고 나서 마음을 정결하게 씻기 위해 영적인 목욕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올바른 오락의 방식이 아니라고 믿는다.” 오락이라는 이름으

로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지 말라. 대신, 오디오북을 고려해 보라.6)

지치고, 우울하고, 낙심할 때야말로 우리가 헛된 미디어에 가장

쉽게 무너질 때다. “슬픔과 피곤함을 텔레비전으로 달래려 하지

말라. 정신을 위한 순수하고 건전한 오락거리가 분명히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너무 적고 드물다. 텔레비전 대부분과 그 광고는

당신 영혼을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그것들은 거룩함과 순

결, 하늘을 향한 마음과 고귀한 영혼을 북돋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을 작고 어리석고 경박하고 유치한 존재처럼 느끼게 만든다.

단지 살아 있기만 할 뿐, 애니메이션으로 포장된 세속성 앞에서 무 기력하게 무너지는 수많은 노인의 대열에 합류하지 말라.” 대신, 다

시 말하지만, 오디오북을 들어 보라.7)

‘사인펠드’나 ‘프렌즈’ 같은 시트콤을 보는 게 뭐가 문제인가 “뭐가 잘못이냐?”는 질문은 근본적으로 당신 마음이 잘못된 무엇

인가를 최소화하려는 욕구에 지배받고 있다는 증거다. 즉, 거룩함이

나 믿음, 영적 능력, 예배, 잃은 자에 대한 열정, 선교, 정의를 극대화

하려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특정 미디어가 담고 있는 죄, 이를테면 음란한 말, 더러움, 어리석음, 저속한 농담( 엡 5:4; 골 3:8 ) 을

6) APJ 828: “How Do You Use Your iPhone and iPad in Christian Growth?” (April 1, 2016).

7) APJ 1069: “‘My Life Feels Pointless’” (July 19, 2017).

텔레비전, 영화, 오락에 대해 149

문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깊은 문제는 갈망의 부족이다. “그

리스도인 대부분은 이 시대의 정신, 대중문화와 대중적인 오락의

영향력 아래 너무 깊이 붙잡혀 있는 나머지 내가 말하는 이 ‘혁신적

인 방향 전환’은 그들에게는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성경 구절 몇 개로 경고를 던진다고 해서 그들의 사고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내게는 거의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 문제는 단순

한 조언이나 규칙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 일은 더욱 근본적인 전

환, 기적 및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필요한 일이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다.

당신의 마음은 더 깊은 것을 갈망하는가? 그리스도와의 더 깊은

친밀함을, 더 큰 영적 능력을, 하나님의 음성을 더 분명히 듣기를, 하나님의 뜻을 더 가까이 따르기를, 징계의 찡그린 얼굴보다 은혜

의 미소를 더 자주 보기를 갈망하는가? 당신은 그런 차원으로 생각

하는가? “당신은 이런 갈망을 품고 잠자리에 드는가? 이런 갈망이

당신의 삶을 이끌며 아침에 눈을 뜨게 하는가? 당신은 주일이라도

시간을 내어, 이런 갈망을 더 깊이 추구하며 주의 얼굴을 구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바로 그것이 핵심 문제다. 이 문제는 당신이 어떤 프

로그램을 클릭하느냐보다 만 배는 더 중요하다. 이 문제의 방향이

곧 그 문제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그러나 이 갈망이 없다면, 즉 예수

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런 갈망이 자라고 강렬해지고 있는 흐름 이

없다면, 당신이 어떤 오락을 소비하든, 그것에 대한 모든 답은 무의 미하다.” 이런 “새로운 열정” 없이는, 우리는 그저 이름만 가진 기독

교인, 최소한의 의무만 채우는 문화적 기독교인으로 남게 된다. 그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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