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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기] 갱신으로서의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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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by Matthew Barrett

Originally published in English as The Reformation as Renewal by Zondervan, Grand Rapids, Michigan, USA.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HarperCollins Christian Publishing, Inc. through rMaeng2, Seoul, Republic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his Korean translation edition © 2026 by Revival and Reformation Press, Seoul, Republic of Korea

이 한국어판의 저작권은 알맹2를 통하여 HarperCollins Christian Publishing, Inc.와 독점

계약한 부흥과개혁사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갱신으로서의 종교개혁

발행일 2026년 3월 15일

지은이 매튜 바렛

옮긴이 소현수

펴낸이 김은주

펴낸곳 부흥과개혁사

편집 권대영 디자인 박슬기 기획 이승영 마케팅 권성직

인쇄소 영진문원

판권 Ⓒ부흥과개혁사 2026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6길 9-20, 2층(서교동)

전화 Tel. 02) 332-7752 Fax. 02) 332-7742

홈페이지 http://rnrbook.com e-mail rnrbook@hanmail.net

ISBN 979-11-7540-045-0 (93230)

등록 1998년 9월 15일 (제13-548호)

개혁을 꿈꾸며

교회들을 하나로 모아 주기 위한 깃발이고자 기독교 출판의 바다에 출항하였습니다.

약어 12

감사의 글 17

서문 19

1장 종교개혁의 보편성

1부

2장

수도원 제도

3장 이해를

스콜라 철학의 도래

4장

종교개혁이 스콜라 철학을 비판적으로

5장 종교개혁을 도발하다

비아 모데르나, 유명론, 토마스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실재론 및

구원론을 벗어난 중세 후기

6장 소생에서 탈선으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인문주의

7장

종교개혁 직전의 공의회주의, 교황우선주의, 교황직

루터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 비아 모데르나, 교황직

9장 종교개혁의 개혁

전례의 보편성과 갱신의 전망

튀르크족, 동맹

종교개혁의 중심을 규정하기

혁명가들

스트라스부르와 제네바의 종교개혁

제네바, 베른, 프랑스의 종교개혁 16장 보편적 교회를 위한 변증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4부 반( 反 )갱신

17장 로마 교회지만 보편적 교회일까?

반종교개혁, 가톨릭 갱신, 해독문(解毒文)

결론: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 927

발문 930

참고문헌 932

주제 색인 981

성경 색인 1018

비약적인 학문 발전이 그에 대한 대중의 수용까지 이르는 과정은 순탄하지도 않고 매우 더 디다. 교회에서 신학을 받아들이는 일이야 말로 이 말에 지극히 통감하게 되는 영역이다. 학문

의 통찰과 교회의 대응 사이의 이 과정은 특히 그것이 사변적이 아니고 실용적인 윤리와 함께 강한 개인주의라는 광범위한 문화에

길고 험난해 보일 수 있다. 새로움 을 흔히 오류 아니면 심지어 이단 비슷한 것으로 보고 두려워하는 경향도 있었으며, 미국 보

수 개신교, 특히 복음주의 계열에서 지식인과 학자에 대한 뿌리 깊은 의구심이 오랫동안 존재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역사신학 분야에서는 흥미로운 학문적 발전이 많았다. 헤이코 오베르만

은 중세 후기부터 종교개혁까지 지도를 다시 그렸다. 다른 위대한 학자들처럼 오베르만도 중

세 후기 신학 패러다임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 사이의 분명한 연관성에 주목하면서

조셉 로츠가 제공한 것과 같은 이전 세대의 통찰을 기반으로 삼았다. 오베르만은 로츠와 달리

오래 되어 낡고 굳어진 가톨릭-개신교 논쟁을 제쳐두고 중세 후기의 유명론과 마르틴 루터를 각자의 장점에 따라 평가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오베르만은 종교개혁 연구를 후대 교회의 태

도가 끼친 왜곡된 영향에서 해방했고, 다음 세대의 학자들을 위해 이 분야를 새롭고 유익한 방 식으로 개척했다. 오베르만의 제자인 데이비드 C. 스타인메츠는 오베르만이 발전시킨 신학적 계보학의 도전을 받아들여 이것을 성경 주해 역사에 적용했다. 그 후 스타인메츠의 제자인 리

처드 멀러는 이 두 가지 접근법을 개혁파 정통주의에 적용하여 18세기 초까지 그 이야기를 확 장했다. 그러는 가운데 오래된 신학 접근 방식이 떠오르는 인식론의 도전에 직면하면서 무너 지기 시작했다.

오베르만, 스타인메츠, 멀러는 박사 과정 학생들과 자기들의 연구에 영향을 받은 다른 많은 학자들과 함께 중세, 종교개혁, 근대 초기 사이의 관계를 지적, 신학 발전의 관점에서 이해하 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다. 개신교에서 통용되던 아퀴나스 해석은 원전에 비추어 볼

안 되고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종교개혁 신학이 구원론, 성례, 권위의 측면에서 중세의 유산과 결별했음에도 중세의 유산( 특히 신론 )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종교

그러나 역사학은 종교개혁에 대한 학문적 이해에만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지난 20년

동안 교부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루이스 애리스와 칼레드 아

나톨리오스 같은 학자들은 니케아 정통 신앙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재구성했다. 이제 우리는

4세기와 5세기의 위격( 휘포스타시스 ) 과 본질( 우시아 ) 같은 용어가 무엇을 의미했는지에 대해 훨

씬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 게 되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아우구스티누스를 날카롭게 구분 지

었던 오래되고 진부한 표현이 학계의 칼날을 맞았다. 가톨릭-개신교 패러다임이 그것을 통해

종교개혁을 이해할 때 왜곡된 렌즈가 된다는 것이 밝혀진 것처럼,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구분도 비슷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제도적 구분은 극명하고 명확하지만 지적 관계

는 훨씬 미묘하고 복잡하다.

이런 모든 학문적 발전은 필연적으로 교회, 특히 개신교 교회와 복음주의 교회에 대해 함의

가 있다. 그 함의 중 어떤 것은 충격적이다. 제임스 돌레잘, 매튜 바렛, 스티븐 더비 같은 학자

들이 이 새로운 통찰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제2차 런던 신앙고백』 같은 위엄 있는 개

신교 문서의 신학 이면에 깔려 있는 고전적 신론( 神論 ) 에 적용함에 따라, 이 주제에 대한 현대

복음주의자의 글 중 다수가 종교개혁자들과 그 계승자들에게서 정통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것

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런 일탈이 선의로 추구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고전적으

로 이해되는 단순성, 불변성, 수난 불능성에 대한 거부는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많은 부분을

보편적 교회의 정통 삼위일체론보다는 17세기 초의 성경 문자주의적이고 매우 문제가 많은

소키누스주의( Socinianism ) 에 더 가깝게 배치한다. 신론에 대한 정통으로 돌아가는 것은 뒤늦은

일이지만, 그것은 오로지 교회에 도움만 될 수 있다. 소키누스주의는 종교개혁에서 막다른 골

목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다시 한번 막다른 골목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다른 함의는 더 긍정적이다. 개신교는 오랫동안 가톨릭 신자들에게서 개신교가 혁신적인 일 탈이라는 비난을 받아 왔다. 이제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고 증명할 수 있다. 개신 교가 고백적이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같은 문서에 구현된 가르침에 헌신하는 한, 개신 교는 보편적이며 칼빈과 칼빈의 동시대 사람들이 주장한 것, 즉 교회의 전통을 부정하는 것 이 아니라 그 전통을 뒤덮고 있던 잘못된 첨가물에 맞서 교회의 진정한 전통을 확언함이 드러 난다.

그러나 학문적 돌파구가 실제 교회 생활로 이어지는 길은 결코 쉽지도 평탄하지도 않다. 내 가 언급한 학자들의 연구는 고도로 전문적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역사적 맥락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학문적 논쟁사에 대한 깊이 있는 친숙함을 보인다. 그러므로 이들 학자 중 한 명은 다 수의 대중이 주요 논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접근 가능한 도로 지도를 만들어 줌으로써 현대 그리스도인도 이런 새로운 통찰의 함의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문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평신도와 학생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종교개혁 의 신학적 보편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독자들을 종교개혁과 그 여파에 대한 더 깊은 지식으

로 부드럽게 안내한다. 이 책은 학문적 연구와 학생 및 교회의 일상생활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핵심 도구다.

지난 60년의 방대하고 설득력 있는 학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바렛의 주장을 모두 받

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에는 항상 시차가 있다. 예를 들어 아직도 토마스 아퀴

나스를 희화화한 구식의 신뢰를 잃은 표현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분명히 한동안 더 눈에 띌 것

이다. 어떤 분야는 이런 활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본문을 신중하게 읽고 사려 깊게 연구하면 결국 지나간 시대의 극단적인 논쟁을 극복할 것이다. 매튜의 책은 그 과정에 대한 은혜로운 기 여며, 이 책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이제 그에게 감사의 빚을 졌다. 2022년 성탄절에 그로브 시티 대학에서 칼 트루먼

종교개혁의 보편성

우리는 이 [보편적] 교회와 어떤 불일치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아닙니다. 오히

려 우리는 이 교회를 우리의 모체로 존경하므로 그 품에 남아 있기를 원합니다. -존 칼빈, 『사돌레토에게 보낸 답장』

루터는 보편적 전통과 결별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자의로 전통을 되찾고 있었고, 아우 구스티누스와 위대한 수도원 스승들의 가장 심오한 통찰을 [스콜라주의의] 뿌리에서 벗

어나 있던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에 적용했다.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라.”

-데이비드 예고, “보편적 루터”

모교회로 돌아오라는 이 소환은 1539년에 야코포 사돌레토가 쓴 편지로 제네바에 보낸 것 이었다. 사돌레토는 영향력이 작지 않은 추기경이었고, 경험 많은 신학자이자 숙련된 논객이

었으며, 로마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제네바라는 작은 지역에 자신의 편지 를 보낸 시기는 전략적이었다. 당시 존 칼빈은 추방당해 더 이상 제네바의 목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칼빈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지 않고 열성적인 기욤 파렐의 영향 아래 있던 제네바는 모교회의 부름에 답할 시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사돌레토에 따르면, 내기에 걸린 돈 이 컸다. 가톨릭교회를 떠나는 것은 영원한 죽음으로 끝날 수 있지만,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는 것은 영생의 보상이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1) 사돌레토의 주장은 설득력이 컸을 것이다.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종파 분립론자( schis-

1) Sadoleto, “Letter to the Genevans,” 40.

matic ) 들이었고, 제네바 사람들을 하나의 거룩하고

불 화 속으로 이끌었다. 사돌레토는 모교회를 떠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경고했다.2) 선택은 간

단했다. 1,500년 동안 하나님께 충실했던 가톨릭교회를 따르든지, 아니면 제네바 사람들이 추

방한 칼빈 같은 혁신자들이 이끄는 지난 25년의 ‘혁신’을 따르는 것이었다.3) 카르팡트라스의

추기경 사돌레토에 따르면, 추방된 제네바의 목사는 제네바 사람들을 오도하여 고대 교회의

길을 가르치지 않았고, 그들을 수많은 ‘참신함’에 빠져들게 했다.4)

사돌레토의 의견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교황직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한 것이었다. 종교개 혁자들은 교회에 새로운 교리를 도입한 이단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보편적이지 않았 고, 그들의 현대화는 보편적 교회를 배신했다. 설상가상으로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교회가 화 합을 표방할 때 불화를 일으켰다. 사돌레토는 제네바 사람들에게 “진리는 항상 하나지만, 거

짓은 다양하고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진다”라고 상기시켰다.5)

칼빈은 더 이상 제네바의 목사가 아니었으나 사돌레토에게 답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칼빈의 대답은 바다에 던져진 연약한 개혁교회의 구명조끼 같은 것이었으며, “로마 교회로 돌

아오라, 로마 교회로 돌아오라, 로마 교회로 돌아오라

외치는 거세고 연속적인 압력의 파

도 속에서 제네바 사람들을 지탱해 주었다. 그러나 칼빈의 대답은 또한 흥미로운 사실을 드러

내었다. 사돌레토의 소환은 칼빈에게 자신의 개혁 프로그램의 진정한 의도를 설명하도록 강요

했다. 사돌레토의 제의는 1520년대 초에 루터에게도 제기되었던 참신성 혐의에 대해 칼빈이

답변하도록 자극했다( 8-9장을 보라 ).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거룩

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을 떠나도록 이끌고 있다는 사돌레토의 주장

은 옳았을까?

누가 보편적인가?

칼빈은 그의 답변으로 사돌레토와 로마 교회 전체를 격분시켰음에 틀림없다. 칼빈은 사돌레 토에게 종교개혁은 보편적일 뿐 아니라 로마 교회보다 더 보편적이라고 말했다. 종교개혁자들

은 신기한 것을 팔면서 사람들을 이단적인 혁신으로 인도하지 않았다. 보편적 유산을 벗어난 곳이 있다면, 그곳은 로마 교회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칼빈이 지속하고 발전시킨 종교개혁은 갱신에 전념했기 때문에 칼빈은 개혁을 추구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이 로마 교 회의 가르침과 달리 성경에 충실할 뿐 아니라

2) Sadoleto, 43.

3) Sadoleto, 40.

4) Sadoleto, 42, 43. 사돌레토는 다른 신학자들처럼 공격적이지 않았다. 예를

그는

비판을 표명했으 며(참고. Consilium de Emendanda Ecclesia), 때때로 종교개혁자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성실함을 보였다. 그럼에도 사 돌레토는 제네바를 로마 교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5) Sadoleto, 46.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종교개혁이

흔들림 없이 고수하는 방식으로 이런 믿음을 표현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되찾아 올 필요가

있었다. 칼빈이 열렬히 말했듯이, “우리는 이 [보편적] 교회와 어떤 불일치가 있다는 사실을 부

인한다.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교회를 우리의 모체로 존경하므로 그 품에 남아 있기를 원한다.” 칼빈은 사돌레토에게 우리가 당신들보다 더 보편적이라고 말했다. “당신들의 일치보다 고대와

우리의 일치가 훨씬 가깝다”라고 칼빈은 주장했다. 그러므로 칼빈은 종교개혁이 무엇을 하려

고 했는지, 즉 “처음에는 무관심한 문맹자들에 의해 더럽혀지고 왜곡되었으며, 그 후에는 로

마 교황과 그의 파벌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고 거의 파괴된 고대의 교회 형태를 갱신하려는 시

도”라고 명확히 밝혔다.6)

칼빈의 말과 근본적인 주장은 이 책의 본질, 즉 이 프로젝트가 종교개혁의 새로운 지성적, 신학적 역사를 제시하는 메커니즘을 나타낸다. T. H. L. 파커의 표현으로, “성경뿐 아니라 쟁

점이 되는 주요 교리들에서 교부들이 자기편에 서 있다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공통된 신념

이었다. 혁신자들은 누구도 아닌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었다.”7) 이런 주장은 흔히 신학적, 심지

어 논쟁적 틀 속에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 주장은 오늘날 개신교나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충성도에 관계없이 종교개혁의 의도를 포착하는 역사적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 뚜렷한 역사

적 진실을 인식하기 위해서 개신교인일 필요는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이 주로 새롭고

현대적인 사상을 위한 혁명이 아니라,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의 회복과 갱

신이라고 생각했다.8) 종교개혁자들이 옳았다고 생각하는지는 신학적인 문제며 이 책이 다루

지 않는 주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이런 신학적 확신으로 자신들을 규정했는지는 종교개 혁 전체를 규정하는 역사 문제다. 데이비드 스타인메츠에 따르면,

종교개혁자들의 목표는 마치 하나님이 소멸 직전의 기독교 세계에 대해 이가봇이라고

쓰시고 언약을 파기하신 것처럼, 죽었거나 죽어 가고는 있는 교회를 새로운 기독교로 대

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개혁자들의 목표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토대 위에 세워지고, 복음을 왜곡한 중세의 혁신이 제거되며, 성경과 고대 기독교 저술가들의 권위에 종속되

고, 옛 교회의 가장 좋은 것을 계승하는 개혁된 보편적 교회였다. 그들이 보기에 이 복음 주의 교회, 개혁되고 징계받은 교회가 바로 그 보편적 교회였다. 더 이상 진정으로 보편적

인 체할 수 없었고, 더 위대하고 끊어지지 않는 전통의 수호자라는 주장이 명백히 거짓인

사람들은 로마 교회의 혁신가들이었다.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고대성을 제공하 는 것으로 생각했다.9)

6) Sadoleto, 62. 강조 추가.

7) Parker, “Introduction,” 64.

8) 그 동기는 혁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지만, 그 동기 자체와 그에 수반하는 개혁 프로그램은 보편적 정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9) 강조 추가. Steinmetz, Luther in Context, 129. 그리고 다시 “기독교 세계의 개혁을 위한 루터의 계획은 기독교의 고대성에 호소

개혁된 보편적 교회라는 호칭( 그리고 목표 ) 이 이 기획의 제목과 부제를 포착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자기들에게 보편적 교회에 대한 충성을 주장할 모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로마 교회 내부의 일탈, 특히 교황 제도로 인해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보편성을 개혁하고

복하며 갱신하기 위해 제자들을 동원했다. 다시 칼빈과 칼빈의 사돌레토에 보내는 답변은 종 교개혁자들의 동기를 엿볼 수 있는 창이다. 칼빈이 “온 세상에 퍼져 있는⋯⋯모든 성도의 집

단”으로 정의한 보편적 교회는 교리, 권징, 성례라는 세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다. 칼빈에 따르

면 종교개혁자들은 이 기둥들을 자기들의 순수하고 성경적인 의미에 따라 이해한 보편적 교

회와 손을 잡고 각 기둥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로마 교회는 이런 충실성을 훼손했다. “교회가 기초로 두어야 할 예언적

이고 복음적인 교리의 진리는 당신들의 교회에서 대부분 사라졌을 뿐 아니라 불과 칼에 의해 폭력적으로 쫓겨났다.” 칼빈은 “하나님의 신탁에 의해 전달되고, 거룩한 교부들의 저술에서 구체화되고, 고대 공의회에서 승인되어, 우리 종교가 공인한 모든 것을 맹렬히 박해하는 교회

를 위해 당신들은 나에게 강요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이 대목에서 칼빈은 몹시 흥분했다. “도

대체 고대 주교들이 교회에서 행사했던 참되고 거룩한 권징의 흔적이 여러분 가운데 어디에

남아 있는가? 여러분은 그들의 모든 제도를 경멸하지 않았는가? 여러분은 모든 교회법을 발

로 짓밟지 않았는가? 그리고 나는 성례에 대한 여러분의 사악한 신성모독만 생각하면 극도의

공포에 빠져든다.”10)

칼빈은 종교개혁의 핵심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확신했으며, 칼빈의 직접 증언에 따르면 칼빈

은 보편성이 더 많은 현대적 혁신으로 왜곡된 것에 대해 공포를 느꼈다. 브루스 고든은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교회가 가톨릭이라고 불리는 것을 몹시 싫어했을 것”이라고 말한다.11)

칼빈은 자신의 개혁 계획을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갱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보편성을 벗어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 로 로마 교회였다고 칼빈은 말했다.

로마 교회이긴 하지만 가톨릭(보편적)인가?

칼빈의 보편성 주장은 종교개혁의 개혁파에 국한되어 있던 독특한 주장이 아니었다. 종교개 혁의 독일파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했다. “(사돌레토에게 보낸) 칼빈의 편지를 읽고 감탄한 것으로

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물론 16세기에는 과거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야말로 혁명과는 가장 거리가 멀고 오히려 전통에 가장 가까 운 것이었다. 개신교인과 가톨릭 신자를 막론하고 16세기 그리스도인은 오래된 것이 새로운 것보다 낫다는 강력한 문화적 전제를 공유했다. 이런 전제는 종교뿐 아니라 시민적 및 문화적 관계, 예술과 건축, 법과 관습, 경제와 농업 관행, 즉 인간 사회에 특성을 부 여하는 모든 활동과 신념에 적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것이 더 좋으며, 질서가 잘 잡힌 사회에서는 새로운 것이 오래된 것을 대체해야 한다는 현대적 개념은 전반적으로 16세기 유럽에서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생각이었다. 문화적 편견은 건전하고, 검증 되며, 고대적이고, 여러 세대의 집단 경험에 뿌리를 둔 것을 선호했다”(127).

10) Calvin, “Reply to Sadoleto,” 63.

11) Gordon, Calvin, xi.

가 혁신과 이단으로 보편적 교회를 배신했다고 루터를 비난했을 때, 루터는 분노했다. “그들

은 우리가 거룩한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대해 루터

는 “우리가 진정한 고대 교회다⋯⋯당신들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다”라고 말했다.13) 그러

나 헨리에 대한 루터의 반응 외에도 독일 종교개혁자들 사이에는 보편성에 대한 수많은 다른

주장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비텐베르크의 그리스어 교수이고 『신학 총론』( Loci Communes, 1543 ) 의 저자이며 루 터교 일치의 기초 문서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설계자인 필리프 멜란히톤을 생각 해 보자. 멜란히톤은 신경에서 보편적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언급하면서, 종교개혁 교회

는 신경에 대한 충실성의 진정한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멜란히톤의 주장은 보편적 교회에 대 한 멜란히톤의 정의에 의존했다. 멜란히톤은 교회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임이며⋯⋯그 구성원들은 어디에 있든, 그리고 장소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모든 시대에 걸쳐 처음 부터 마지막까지 하나의 똑같은 표현 또는 참된 교리를 받아들이고 대외적으로 고백한다”라 고 말했다.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고 시간과 공간에서 흩어져 있지만, 지역적이고 가시적인 모

임은 하나의 똑같은 참된 교리를 고백하는지에 따라 그 모임이 이 보편적 교회의 일부인지를 알 수 있다. 멜란히톤의 평가에 따르면, 종교개혁의 신뢰성은 주로 눈에 보이는 것( 성체 앞에 무릎

을 꿇고, 성인의 성상을 공경하고, 바티칸으로 순례길을 가는 것 ) 이 아니라 교리의 보이지 않는 진리에 달려 있 었다.14) 종교개혁자들은 “하나이며 똑같은⋯⋯참된 교리”를 선포했고, 개혁교회들은 그 교리 를 오직 믿음으로 듣고 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모든 시대에 걸쳐” 분산되어 있는 모임의 일

부임을 알았다.15)

로마 교회는 자신이 순수하게 보편적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의 신학적 신념과 교회 구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멜란히톤은 말했다. “보편적이라고 불리는 것과 실제로 보 편적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보편적 교회의 교리, 즉 모든 때, 모든

시대의 증인에 의해 뒷받침되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가르친 것을 믿으며, 파벌, 이단, 이단 적 모임을 용납하지 않는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보편적이라고 부른다.”16) 교 황직은 종교개혁자들을 이단으로 비난할 수 있었지만, 개혁교회는 정통의 편에 서 있었다. 교 황직은 로마 교회에 속할 수 있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멜란히톤은 결론지었다.

12) “가톨릭교회는 수 세기에 걸친 부주의와 신학적인 이완으로 인해 도입된 혁신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개신교 공동체는 성경과 고대 교부들의 저술에 순종함으로써 이런 원치 않는 혁신들을 제거하고 더 오래되고 따라서 더 순수한 형태의 교회 생활과 사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Steinmetz, Luther in Context, 128.

13) LW 41:194.

14) 그러나 나는 14-15장에서 칼빈이 분명히 살아 있는 우상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고 주장하겠다.

15) CR 24.397-399.

16) CR 24.397-399. 참고. McGrath, ReformationThought, 160.

여러 종교개혁자에 따르면, 로마 교회는 보편성을 너무 좁은 의미로 정의하여

편성을 이 제도를 표시하는 휘장 수준으로 축소했다. 바티칸은 자녀를 제도의 우산 아래 두

었지만, 그 우산은 사도직 계승, 교황의 수위권, 실체 변화( 實體變化, transubstantiation, ‘화체설’이라고

도 함 ), 대사부( 大赦符, 흔히 면죄부로 알려져 있음 ) 같은 외형적 특징에 국한한 것이었다. 제도의 울타

리 밖에서는 구원이 불가능했다( 적어도 종교개혁자들의 마음속에는 동방 교회 전체에 대해 중대한 의문이 제기되 었다 ). 그러므로 구원론적, 교회론적 충실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응( 順應, conformity ) 이었다.

이런 순응은 로마 교회가 과거와 연속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며, 그 연속성은 로마 교회의 신앙( 대사부부터 연옥까지 ) 과 조직( 교황직부터 교황의 수위권까지 ) 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 로

마 교회가 보기에 종교개혁자들은 새로운 이단을 도입함으로써 연속성이라는 기본 원칙을 어 겼다. 그러므로 파문은 전적으로 적절했다. 교회는 정통이 아닌 바이러스를 제거할 필요가 있 었다.17)

이에 대응해 종교개혁자들은 보편성을 그렇게 좁고 외적이며 로마 교회에 국한된 것으로

한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연옥과 보속( 補贖, penance ) 은 고대 교회의 산물이 아니라 최근에 첨 가된 것, 심지어 현대의 타락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 둘을 모두 거부할 수 있었다. 칼

빈과 멜란히톤의 말로 돌아가면, 건전한 교리라는 보편성의 다른 기준이 드러난다.18) 그들은

보편성은 신학 문제라고 말했다. 보편적 교회와 종교개혁자들의 영적 유대는 제도적 외형보다

더 강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외형적인 국제적 일치를 원했고 심지어 갈망했지만, 그들의 교회

를 연결하는 끈은 복음의 연속성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혜를 간직함으 로써, 사도들뿐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인 교부 및 중세 대표들과도 손을 잡았다.

로마 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을 추방할 정치적, 교회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종교개혁자들 은 그렇게 쉽게 묵살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리 작거나 도전받거나 무력해 보일지라도 자 신들을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했다. 루터의 삶이 보여 주듯, 처음부터 종교개혁자들의 의도는 교회를 내부에서 개혁하여 교인들을 통해 진정한 보편 적 갱신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이단자들”을 축출한 것은 루터의 결정이 아니라 로마 교회의 결정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추방 위협을 받았을 때, 제도적 일체성을 위해 보편성의 핵심( 최초

의 교회와 하나의 똑같은 참된 교리를 고백하는 것 ) 을 희생하지 않았다. 로마 교회에 대한 순응의 제단에서 일체성( 보편적 일체성 ) 을 희생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교리의 보편성에 의해 입증된 일체성은 로 마 교회가 아무리 적대적으로 변할지라도, 보편적 교회와 자기들을 직접적으로 이어지게 만든 줄이었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가 혁신을 비난할 것을 염두에 두고, 멜란히톤은 『신학 총론』에 17)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가 (이신칭의 교리 같은) 혁신을 도입 하거나 (교황직과 주교 제도 같은) 교회의 전통적인 구조를 포기함으로써 가톨릭교회에서 탈퇴했다고 선언했다⋯⋯종교개혁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이런 연속성이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무시되었고, 그 결과 개신교는 어떤 의미에서든 그리스도교 교회로 간주될 수

McGrath, ReformationThought,

그 교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포용하고 있다. 이 가르침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리스도의 보편적 교회, 즉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모든 학식 있는 사람들의 합의다.”19)

칼빈, 루터, 멜란히톤은 이 노래를 부른 종교개혁자들의 거대한 합창단에 속한 사람일 뿐이 었다. 이 책에서 분명히 밝히겠지만, 보편성에 대한 종교개혁의 주장은 루터에서 멜란히톤까

지, 불링거에서 존 주얼까지, 칼빈에서 크랜머까지, 부처에서 버미글리까지 종교개혁의 심장

을 뛰게 한 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 대한 일부 오래된 역사와 새로운 역사는 보

편성에 대한 종교개혁 자체의 증언과 상반되는 범주 안에서 이 16세기 운동을 묘사하고 있다.

종교개혁에 대한 해석

지난 세기 동안 종교개혁이 스스로 고백한 정체성( 보편성 ) 이 항상 정확하게 평가되거나 이해

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자.

종교개혁을 분열과 세속주의의 씨앗으로 한탄하기: 세속화 이야기

종교개혁은 보편적 교회와 그것의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관점에서 일탈한 것으로 해석되

어, 한편으로 분열적이고 분파적인 모든 것, 다른 한편으로 현대적이고 세속적인 모든 것의 모

체라는 칭호가 붙었다. 이런 접근 방식은 여러 다른 색조를 띤다.

첫째, 어떤 사학자들은 주로 분열에 초점을 맞추고 종교개혁의 본질적인 분열성을 다양한

요인의 탓으로 돌린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자들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교

리인 만인제사장설을 가르쳤다. 여기에 ‘오직 성경’에 대한 믿음이 더해질 때, 각 그리스도인

은 성경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스스로 결정하는 자신의 중재자가 되었다. 이것은 개신교

의 위험한 생각이며 혁명적일 뿐 아니라 혁명 그 자체를 고취시켰다. 그 효과는 파괴적이었다.

교회적 및 정치적 권위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때때로 반란과 혁명으로 이어졌다.20)

다른 사람들에게는 종교개혁의 분열적 성격은 처음부터 보편성을 불가능하게 한 비판의 태

도에서 비롯했다. 프로테스탄티즘 ( 개신교 ) 이라는 호칭조차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기독교 에 대해 파괴적인 항의를 고착화한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그것이 기독교 세계를

19) LC 43, 15.

20) 그들이 종교개혁을 분열로 한탄하든 아니든, 어떤 사람들은 종교개혁이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기 위한 분열 또는 단절이라는 누 명을 씌운다. 예. Ryrie, Protestants; McGrath, Christianity’sDangerousIdea; McGrath, HistoricalTheology, 125. 21) Leithart, The End of Protestantism. 밴후저는 종교개혁에 대한 레이하트의 해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정한다. “그러나 레이하

동정적이냐에 따라,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을 분열의 원인으로 비난하는 것은 현재 진행 중인 현대적 수법일 수 있지만, 종교 개혁만큼이나 오래된 수법이기도 하다. 16세기에 로마 교회는 교회의 분열을 종교개혁자들의

탓으로 돌렸고, 일단 트리엔트 공의회가 결론을 내리자 이 비난은 공식적인 것이 되어 이후 몇

세기 동안의 궤도를 설정했다. 이 해석, 즉 종교개혁을 분열된 종파로 보는 해석은 이후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 반복되었다.22)

둘째, 어떤 해석자들은 교회의 분열을 종교개혁의 탓으로 돌리는 반면에, 다른 해석자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세속주의에 빠진 것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23) 이 두 가지 해석

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세속주의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

개혁자들이 어떤 의미에서 혁명가, 즉 종교적 혁명가일 뿐 아니라 정치적 혁명가였다는 사실 을 결정해야 한다. 해석의 방법도 절대 다르지 않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우위를 선포함으

로써 이 혁명을 일으켰고, 그것은 모든 개인과 사회에 자신이 믿는 바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부여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서로 동의할 수 없었고, 이후 개신교의 역사는 잇따라 교파 분열이 반복되었다. 해석학적 다원주의는 모든 사람이 본문에 대한 유일한 참된 해석을 가지고 있다

고 주장하고, 누구나 교회와 사회에 대한 성경의 배타적이고 합법적인 적용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에 종교적 다원주의를 초래했다. ‘오직 성경’은 그것이 개인의 권리를 위해 교회의 권위에

반항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이것은 결국 모든 사람이 자신의 권위가 되는 세속주의를 위한 방

법이 된다. 물론 종교개혁자들은 세속주의 혁명을 일으킬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개인의 해석으로 눈을 돌리자마자, 그들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교회의 믿음들을 우선하는 근

대성 및 자아의 승리로만 이어질 주관주의를 고양시켰다.

이런 해석은 중세 후기에 대한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한편으로 이 해석은 13세기에 둔스 스코투스와 함께 시작했으나, 14세기의 오컴의 윌리엄과 15세기의 가브리엘 빌로 대표되는

비아 모데르나( 근대 방식 ) 와 함께 절정에 달한 진정한 변화를 관찰한다. 비아 모데르나는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구현된 비아 안티쿠아( 옛 방식 ) 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4장에서 살펴보 겠지만, 토마스는 존재의 유비를 통해 창조주와 피조물이 서로 적절하게 관련될 수 있다고 믿 었다.24) 불가해한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하시지만 피조물은 유한하고 일시적이다. 하나님은

트와 달리 개신교의 근본적인 표현은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스스로를 종파 분립론자로 보지 않았고, 실제 로 분립론자도 아니었다. 항의한다는 것은 어떤 것, 즉 복음의 진실성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며,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교회 의 보편성을 포함한다. 그것은 또한 언제 어디서나 복음의 진리가 위험에 처할 때 선지자적 항의(부정적 표현)도 포함한다. 오직 일체성(sola unitas)은 문제의 일체성이 진리의 일체성이 아닌 한 충분하지 않다.” 그런 다음 밴후저는 이 책과 훨씬 일치하는 자 신만의 해석을 제시한다. “유일한 참된 개신교인, 즉 양심이 참으로 복음에 사로잡힌 성경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의 개신교인은 보 편적 개신교인이다.” Vanhoozer, BiblicalAuthorityafterBabel, 15. 22) 예. Denifle, Luther et le Luthéranisme, ch. 4. 23) Gregory, Unintended Reformation. 자신이 브레드 그레고리 이야기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고 있는 학자의 최근 사례가 Saak, LutherandtheReformationoftheLaterMiddleAges에 나와 있다. 24) “하나님이 만드신 사물의 형상은 신적 능력의 구체적인 유사상(likeness)에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은 그 분 안에서 단순하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발견되는 것을 분할되고 특수한 방식으로 받기 때문이다.” Aquinas, SCG 1.32.2.

순수 현실태 그 자체시지만, 피조물은 수동적 가능태에 의해 규정된다. 즉, 하나님은 존재하 고 계시나 피조물은 생성되는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서술은 유사성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져 야 한다.25) 예를 들어 피조물이 그의 마음속에 사랑을 소유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이 아무리 순

수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그림자일 뿐이다. 피조물의 사랑과 달리 하나님 의 사랑은 무한한 사랑, 영원한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 가장 거룩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유비

적( 類比的, analogocal ) 서술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참여 패러다임을 가정한다. 하나님은 ( 부분

없이 ) 단순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시다. 토마스가 말했듯이, “하나 님 안에서 신적 존재 자체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른 사물은 이렇지 않다.”26)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위해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생명이시다( 자존성 ). 그러므로 이 자

족적인 하나님은 피조물의 존재와 행복의 원천이시다. 바울이 사도행전 17장 28절에서 그리

스 시인의 말을 인용하여 아테네 사람들에게 말했듯이, 피조물은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27) 다시 말해서 참여는 존재의 유비에 의존한다.

(5장에서 살펴볼) 어떤 이유 때문에 스코투스는 유비적 서술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일의적( univocal ) 서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토마스가 직접적인 표적은 아니었다 ). 일의적 서술은 “술어를 두 개 이상의

주어에 완전히 비슷한 의미로 귀속시키는 것”이다.28) 스코투스에게 일의적 서술은 사람이 하

나님에 대해 가지는 지식의 유형에 대한 주장이지, 반드시 존재론적 주장은 아니었다( 앞으로 살

펴볼 것처럼 적어도 주로 존재론적 주장은 아니었다 ). 스코투스와 그의 제자들에게 일의적 서술은 순진한

행동처럼 보였다. 그러나 스코투스의 비평가들에게 유비적 서술을 일의적 서술로 대체하는 것 은 존재론에서 분리할 수 없는 심각한, 심지어 엄청난 변화였다. 스코투스 이전에는 아퀴나스 같은 스콜라 학자들이 순수 존재인 하나님에 대해 말한 후, 바로 이어서 존재의 유비에 대해 말했다. 형이상학과 신학은 후대의 스콜라 학자들과 달리 분리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피조물

에서 사랑이 술어로 사용되는 것과 “완전히 비슷한 의미”로 사랑을 하나님에 대해 술어로 사

용하면, 하나님은 다른 모든 존재 같은 또 하나의 존재가 되고, 단지 더 큰 존재가 될 뿐이다.

존재의 일의성( 一義性, univocity ) 이 반드시 피조물이 창조주에게서 전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함을

수반하지는 않지만, 이제 피조물은 세상에서 자신의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의 의지는

심지어 하나님의 의지를 떠나 자율적일 수 있으며, 하나님과 사람, 은혜와 본성, 신앙과 이성 이 서로 영향력과 관할권을 놓고 경쟁하는 경쟁 관계를 도입한다. 그 결과로 고전적 유신론으

서술은 “어떤 대상의

또는 “어떤 것을 한 부류에 할당하는 행위” 또는 “어떤 것을 어떤 행위나 완전성 을 소유하는 것으로 또는 다른 어떤 행위나 완전성에 속하는 것으로 명명하는 행위”로서, 일의적이거나 다의적이거나 유비적일 수 있다. 유비적 서술은 “한 대상에 완전성을 귀속시키면서 다른 대상들에 적용했을 때 그 완전성의 속성과 부분적으로는 같지만 부분적으로는 다른 의미로 그 완전성을 귀속시키는 것”이다. Wuellner, Dictionary of Scholastic Philosophy, s.v. “predication”에 두 정의가 모두 나와 있다.

26) Aquinas, SCG 1.32.3.

27) 행 17:28.

28) Wuellner, Dictionary, s.v. ‘predication,’ 강조 추가.

갱신으로서의

로 설명한 참여 패러다임의 직조물( tapestry ) 이 끊어지게 된다.29)

스코투스와 그의 뒤를 이은 오컴과 빌은 하나님의 의지를 그분의 지성보다 우위에 두고, ( 모 순 없는 상태를 침범하지 않는 한 ) 무엇이든 하실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주의주의( 主意主義, voluntarism ) 를 도입했다. 그들에 의해 구원에 대한 함의가 매우 중요해졌다. 하나님은 공로 행위에

대해 정해진 공의와 정의의 기준에 따라 보상하실 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만약 죄인이 최선을 다하고, 만약 죄인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행하면, 하나님이 받으시고 더

많은 은혜의 분배로 보상하실 것임을 ( 단순히 자신의 명령과 의지로 ) 선언하는 언약을 자유롭게 제정

하실 수 있다( 5장을 보라 ). 이 언약적이고 주의주의적인 패러다임은 성경뿐 아니라 초기 스콜라

학자들이 가르쳤던 은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배반한다는 이유로, 신( 新 ) 아우구스

티누스 학파( 예. 토머스 브래드워딘과 리미니의 그레고리오 ) 에게서 펠라기우스주의( 또는 기껏해야 반[半]펠라기 우스주의 ) 라는 비난을 일으켰다.

오컴의 주의주의 배후에는 유명론( 唯名論, nominalism ) 이 자리 잡고 있었다.30) 플라톤주의 전통

에서 유명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실재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 이상으로 확신하는 실재 론자였다. 실재는 마치 세계가 단순히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것인 것처럼 감각적인 것에만 한

정될 수 없다. 오히려 실재는 감각적 생성 세계와 가지적(可知的) 존재 세계라는 두 가지 층으 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초월에 대한 믿음은 보편자의 존재를 수반했다. 이것을 위해 플라톤주

의자들은 형상 또는 이데아 이론을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빨간색 정사각형과 파란색 정사각 형, 은색 정사각형과 금색 정사각형이 있지만, 그들의 유사성은 그들이 정사각형이라는 완전 한 이데아에 참여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논리에 따라 플라톤주의자들은 선, 진리, 아름다움 같은 초월적인 것을 가정할 수 있었다. 형상 또는 이데아가 별도의 영역에 존재하는 지( 플라톤은 초월적 보편자를 믿었다 ), 아니면 구체적인 개별자 안에 존재하고 내재하는지( 아리스토텔레스 는 구체적이고 내재적인 보편자를 믿었다 ) 에 대한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자신을 플라톤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모두 실재가 보편자의 존재에 의해 규정된다는 데 동의했으며, 특정한 이론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더라도 모두 실재론자 였다. 플라톤주의는 다른 고대 철학들과 달리, 모든 한계를 지닌 물질로 환원할 수 없는 초월 적 실재를 믿었다. 공간과 시간의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 신적 존재가 존재할 수 있었으며, 그 것은 다른 모든 존재가 살아가고 움직이고 존재하기 위해 의존하고 참여하는 신적 존재였다.

유신론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퀴나 스의 고전적 유신론 형태만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제쳐두고, 교부들에서 중세 성기에 이 르는 위대한 전통에서 일의성이 수용될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특히 반대 증거가 존재하므로 무리한 요구다(White, ed., The Analogy of Being:Invention of the Antichrist or Wisdom of God?을 보라). 더욱이 16-18세기의 개혁파 정통주 의자들은 흔히 존재의 유비를 전체적으로 고전적 유신론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멀러는 개혁파 정통주의자 대다수가 스코 투스의 존재의 일의성을 노골적으로 거부했음을 보였다. Muller, “Not Scotist,” 127-150을 보라.

30) 어떤 사람들은 그를 개념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믿는다. 5장을 보라.

것처럼 위대한 전통에 잘 맞는 것만은 아니었다. 실재론은 그것을 훨씬 뛰어 넘어, 감각적 세

계와 초월적 존재에 대한 참된 관점이었다. 5장에서 살펴볼 것처럼, 카파도키아 교부들에서

아우구스티누스까지, 보이티우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는 위대한 전통은 실재론적 형

이상학을 믿었다. 이들은 정교화 과정을 통해 실재가 하나님의 유사상에 어떻게 참여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플라톤주의를 비판적으로 전용했다. 예를 들어 토마스 아퀴

나스는 그의 독창적인 종합에서 플라톤주의를 수정하고 변형하여 이데아를 하나님의 마음속 에 둠으로써 피조물이 창조주의 유사상에 참여하는 것을 설명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용 어( 예. 현실태, 가능태 ) 를 사용하여 기독교 초월주의를 설명했다. 그러나 5장에서 설명할 이유 때 문에, 오컴은 보편자를 비논리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사실상 보편자는 우리가 부여하는 이름

에 불과하다. 그 결과로 개별적인 사물은 마음 밖에서 보편자에 의해 입증될 필요가 없다. 비 판자들의 눈에 오컴의 주의주의가 하나님의 지성에서 하나님의 의지로 관심을 돌렸다면, 오컴

의 유명론은 보편자에서 개별 사물, 즉 개별자로 관심을 돌렸기 때문에, 비판자들은 오컴에게

주관주의, 회의주의, 세속주의의 씨앗을 심었다는 책임을 돌렸다. 다시 한번 참여 패러다임은

유명론의 칼날에 의해 단절되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은 역사적 선례가 있는 해석이며, 4장과 5장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교부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스콜라 학자에 이르는 고전적 실재론 및 패러다임 전환

이 일어난 스코투스의 일의성과 주의주의 그리고 오컴과 빌의 유명론 사이의 차이를 규정하 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비록 근대로의 전환이 씨앗의 형태로만 존재 했다 하더라도 근대성이 더 늦게 온 것에 대해서도 이 중세 후기의 스콜라 학자들이 어느 정

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보는 급진 정통주의가 옳다.31) 일의성, 주의주의, 유명론의 결과를 무 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급진 정통주의는 종교개혁자들을 마치 주의주의와 유명론의 바이러

스 보균자인 것처럼 또는 다른 은유로 바꾸어 근대에서 싹을 틔운 씨앗을 뿌린 농부인 것처

럼 손가락질할 때 논란의 중심을 만든다. 비난의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종교개혁자들은 그

들의 주의주의에 따라 칭의는 이제 하나님이 일방적인 자신의 의지의 힘으로 단순히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법적 거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둘째, 그 결과로 급진 정통주의는 죄인 이 자신의 내적인 거룩한 변화를 위해 의존하는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친밀한 참여가 이제 의 문시된다고 믿는다. 유명론의 정신에 따라, 종교개혁자들은 선배들의 내적인 주입된 의( infused righteousness ) 를 외적인 전가된 의로운 지위( imputed righteous status ) 라는 법적 허구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법정이 의술을, 외부의 거래가 내부의 쇄신을 이긴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참여의 직조물을 끊어 버림으로써( 사람은 더 이상 의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이다.32)

예를 들어 존 밀뱅크는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 ) 이 보편적인 참여 구조를 파괴하고 그 결과로

일방적인 은혜의 선물로 인해 하나님을 죄인에게서 분리시켰다고 비난한다. 다른 사람들은 칼

빈을 주의주의자이자 유명론자라고 분류하고, 칼빈이 신성과 인성, 신앙과 이성, 성경과 과학

사이의 계몽주의라는 급진적 이원론의 문을 열었다고 확신하면서 이 합창에 동참했다.33) 그러

나 이 주장은 다른 많은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에 게 참여하는 메커니즘인 로마 교회의 성례주의( sacramentalism ) 를 재정의함으로써 창조주가 물

질 영역에서 그리고 물질 영역을 통해 은혜를 전달할 능력을 제거했다. 성체( Eucharist ) 가 그 대

표적인 예다. 또는 종교개혁과 성경 해석학을 생각해 보자.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의 문자적 의

미를 영적 의미보다 우위에 두었다는 주장이 있다. 고전적 실재론의 참여 원리 없이 그들의 성 경 해석학은 교부들의 풍유적이고 기독론적인 해석학에서 볼 수 있듯이, 정경 전체에 내재된

하나님 저자의 의도에 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들은 인간 저자와 그 인간의 문

법적-역사적 본문 표현에 몰두했다. ‘오직 성경’, 전가된 의, 문자적 의미 등 여기에는 하나님

에 대한 참여를 유지할 수 없고, 그 결과로 기독교 안에 근대 세계의 세속주의를 포함하는 주

의주의적, 유명론적 패러다임의 증상이 있다. 아마도 우리는 이런 해석을 세속화 이야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화 이야기는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가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했을 수 있는지를 간과하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계승자들, 즉 개신교 스콜라 학자들도 간

과하고 있다. 확실히 중세 후기에 스코투스, 오컴, 빌과 함께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 변화는 교

부 시대와 초기 형태의 스콜라주의( 특히 토마스주의 ) 를 포함하여 중세 성기를 상당히 벗어난 것이 었다. 5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런 변화가 단순히 철학적 변화인 것처럼, 비아 모데르나의 형

이상학이 신학적, 교회적, 문화적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처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세속화

이야기는 절반은 맞다. 이 형이상학적 변화의 영향은 현대에까지 여진을 남겼다. 그러나 비아

32) 여러 다른 학자들이 이 해석을 채택했지만, 항상 같은 강조점을 두거나 항상 같은 공격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이 야기의 한 형태는 서로 다른 방식과 서로 다른 정도이긴 했지만, 여러 현대 사상가에 의해 지속되어 왔다. 다음 문헌을 보라. Grummett, Henri de Lubac and the Shaping of Modern Theology; Milbank, Theology and Social Theory; Milbank, “Alternative Protestantism,” 25-41; Milbank, Pickstock, and Ward, eds., Radical Orthodoxy:A New Theology; Dupre, Passage to Modernity; Dupre, The Enlightenment and the Intellectual Foundations of Modern Culture; Boersma, Heavenly Participation (11, 84-94); Boersma, Nouvelle Théologie and Sacramental Ontology; Taylor, A Secular Age. Funkenstein,TheologyandtheScientificImagination; Gregory, Unintended Reformation; Meyendorff, Catholicityand the Church, 75; Ward, “The Church as the Erotic Community,” 167-204; Pickstock, After Writing, 156-157. 비평에 대 해서는 다음 문헌을 보라; Cross, Duns Scotus; Adams, Some Later Medieval Theories of the Eucharist; Adams, What Sort of Human Nature?; Horton, Justification, 1:311-335; 호튼은 Horan, PostmodernityandUnivocity, 7에서 따온 “스코 투스 이야기”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33) Milbank, Theology and Social Theory; Milbank, “Alternative Protestantism,” 25-41; Milbank, “Only Theology Overcomes Metaphysics,” 325-343; Milbank, Pickstock, and Ward, eds., Radical Orthodoxy; Oliver, “The Eucharist before Nature and Culture,” 331-351; Ward, “The Church as the Erotic Community,” 167-204; Ward, Cities of God, 161167. 이 의견들을 비평한 최선의 글은 Billings, Calvin,Participation,andtheGift다.

빚과 반항을 모두 포함하는 선이기 때문에 반드시 도전받아야 한다.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개신교 계승자들이 그 급진적 변화를 완전히 흡수하고

선구자

로서 근대적 방식을 발전시킨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가 있으나 세 가지만 생각해 보자.

첫째, 세속화 이야기 범주의 미묘한 차이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 세속화 이야기가 설득

력을 가질 수 있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종교개혁자들의 말 때문이며, 특히 그 말이 정반대가

되는 것을 확정하는 방식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교회에 대해 강경한 이분법처럼 보

일 수 있는 강력한 비판을 펼쳤기 때문에, 자신의 원칙을 배신한 유명론자나 주의주의자로 보

일 수 있다. 마이클 호튼은 “비판자들은 흔히 교회 대 국가, 하나님의 대리인 대 인간의 대리 인, 성스러운 것 대 세속적인 것, 계시 대 이성 등 종교개혁을 유명론에 묶는 끈으로서 ‘이원

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너무 과도하게 마치 구별이 완전

한 단절인 것처럼 가정하는 것이 아닐까? “이 비난은 구별을 곧 분리라고 가정하는데, 이는 루

터파나 개혁파가 이런 주제를 다루는 특징이 아니다. 사실상 종교개혁자들은 급진 정통주의

보다 더 현세적 도시, 공동의 은혜, 세상에서의 공동 소명을 확언했다.”34)

또한 설령 종교개혁자들이 주의주의와 유명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다음 주장은

모두 근거가 없다. (1) 운동으로서 종교개혁은 주의주의와 유명론을 흡수한 것으로 규정해야 한다. (2) 종교개혁자들은 주의주의와 유명론의 영향을 같은 정도로 받았다. (3) 종교개혁자 들은 주의주의와 유명론 체계를 전체적으로 흡수했다.35) 물론 어떤 종교개혁자들은 의문의 여

지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유명론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사학자는 루터 같은 종교개혁자들 이 주의주의와 유명론 철학의 구원론적 결과를 문제 삼았다는 증거를 적지 않게 가지고 있다.

5장과 8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독일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가 처음에 자신이 배웠고

심지어 실천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던 오컴과 빌의 주의주의적이고 유명론적인 칭의론에 반기 를 들면서 시작했다. 루터가 자신의 1517년 『스콜라 신학에 반대하는 토론』에서 오컴과 빌을 지목했을 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루터가 이전과 같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비록 다른 방식으

로 주의주의와 유명론의 흔적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루터는 비아 모데르나의 주의주의적이고 유명론적인 구원론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 이제 루터는 동료들에게 경고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젊은 자신을 교육한 사람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해 가 갈수록 자신의 항의가 보편적 교회,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더 확 신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 신학을 향한 루터의 여정은 비아 모데르나의 펠라기우 스주의적 또는 반펠라기우스주의적 주의주의적, 유명론적 구원론을 벗어나는 여정으로 묘사

34) Horton, 1:313.

35) 이 문제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가 5장에 나와 있다. Kolb, Martin Luther, 31; Rupp, TheRighteousGod, 87-101을 포함한 다 른 사람들이 이 점을 강조했다.

인 유산과의 연속성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둘째, 세속화 이야기는 신론과 신론의 형이상학적 토대( 즉, 고전적 실재론 ) 를 포함한 고전적 유

신론 및 그 정통성과 종교개혁이 가지는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이 비아 안티

쿠아의 실재론적 형이상학을 버리고 비아 모데르나의 유명론적 형이상학을 택했다고 주장하

는 것은 1세대 종교개혁자들이 이런 문제를 다루지도 않았기 때문에 매우 놀랍다. 그들의 관

심은 구원론과 교회론의 논쟁에 집중되어 있었다. 강조는 했을지 몰라도 형이상학이 성숙된 수준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37)

더 나아가 루터 같은 사람이 예컨대 스콜라 형이상학을 전면적으로 비난했을 때에도, 독자

들은 (1) 루터의 문맥은 흔히 루터가 반대하고 있는 특정 대상이나 사람을 명시하고 있으며, (2) 종교개혁의 이야기는 마치 루터에게 미친 유명론의 영향이 종교개혁 전체는 말할 것도 없 고, 유럽의 다른 종교개혁자들도 같은 운명을 겪은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루터와 함께 부침( 浮 沈 ) 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2세대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개혁파 스콜라주의 계승자를 보면 이들이 그 참여의 실재론

적 형이상학과 함께 고전적 신학을 버렸다는 것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또한 이들이 토마스주

의와 그것의 존재의 유비에 대한 의존성을 완전히 버리고 오히려 오컴의 구원론을 뒷받침하

는 스코투스의 주의주의 또는 유명론을 지지하는 일의적 서술을 완전히 따르며, 그리하여 피

조물이 창조주에 참여하는 것을 단절시켰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토마스주의를 다룬 4장에 서 살펴보겠지만, 많은 2세대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개혁파 스콜라주의 후계자들은 주입된

의와 실체 변화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판하는 것을 보류하지 않았으며, 토마스가 이 교

리들에 실재론을 적용한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수많은 분야에서 이들은 토마 스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심지어 그에게 빚을 지기도 했다. 이런 영역 중 하나는 형이상학과 그것이 신학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이들은 토마스의 실재론적 참여 패러다임에 동의하고, 토

마스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정통성에 동의하는 데 그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었다.38) 이런 연속성은 신론에만 국한하지 않고 성경 해석학, 자연신학, 섭리, 영혼-육체의 인 간론, 기독교의 덕과 윤리 등 다른 영역까지 확장했다. 이런 이유로 4장에서는 다양한 성향의

36) 이런 변화가 루터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에서 어느 정도 유명론에서 실재론으로 전환한 것을 의미했는지는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37) “처음 두 세대의 종교개혁자들에서 토마스주의자, 유명론자,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뿐 아니라 스코투스주의자의 특징이 분명히 보이지만,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발전된 형이상학이며, 그 형이상학이 존재의 일의성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을지에 대해 어떤 표시도 찾을 수 없다.” Muller, “Not Scotist,” 130. 38) 나는 토마스주의가 정통을 고수하고 그 근거를 설명한다고 주장한 유일한 형이상학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보나벤투라 같은 다른 사람들은 토마스에게 동의하지 않고 오컴 같은 유명론에 의지하지 않는 대안적인 형이상학을 제시했다(Copleston, History of Philosophy, 2:250-292를 보라). 또한 이후 장에서 다루겠지만, 다양한 집단(예. 수도원주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이 예를 들어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리처드 멀러 및 칼 트루먼 같은 사학자들이 보였듯이, 토마스주의 형이상학은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논쟁적이고 고백적인 저술에 전략적인 것으로 드러난 방식으로 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 쳤다.

개신교인이 토마스주의를 되찾아 온 수많은 방법을 강조할 것인데, 이 점은 리처드 멀러와 데

이비드 스타인메츠 같은 사학자들이 상세하게 증명한 것이다.39) 개신교 스콜라 학자들은 근대 초기에 살지는 않았더라도 근대 전야에 살았다는 점에서 이 는 결코 사소한 내용이 아니다. 참여의 끈을 끊고 근대성을 낳았다는 비난을 받을 만한 스코 투스-오컴 형이상학의 운반자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어야 한다. 그러나 멀러는 개 혁파 스콜라 학자들( 잔키, 데노, 드 베즈, 케케르만, 크러켄소프, 팀플러, 마코프스키 등 ) 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 에서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스코투스주의자의 언어는 개혁파 정통주의 사상의 특징이 절대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희화화한 글과 달리, “문서 증거는 특히 서술에 대한 논증의 다양한

수용과⋯⋯스코투스주의의 공식에 반하는 토마스주의자에 대한 긍정적 관심을 가리킨다.”40) “관심”이라는 단어로는 충분하지 않다. 멀러는 “그들은 참여 원리에서 유비를 근거로 사용함 으로써 아퀴나스를 반영했다”라고 말한다. “급진 정통주의와 (브래드) 그레고리의 부정적인 접 근 방식에 대항해서 우리는 훨씬 확고한 평결을 내린다. 존재 일의성의 함의에 대해 어떤 결론 을 내리든, 그 개념이 개신교 신학에 투입되었다는 주장은 지지할 수 없으며, 실제로 초기 근

대 개신교 사상이 ‘참여의 형이상학’에서 변화한 것을 입증한다는 주장도 지지할 수 없다. 요

컨대 존재의 일의성 개념이 초기 근대 개신교에 흡수된 것이 20세기와 21세기 세속 문화의

문제점을 설명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유감스러운 기만으로 보인다.”41)

그렇다면 세속화 이야기로 지속되는 오해는 과잉 반응 때문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비판자 들은 1세대와 2세대 종교개혁자들 속에서도 주의주의와 유명론의 흔적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 인가? 예를 들어 칼빈이나 피터 마터 버미글리가 예정이나 섭리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강조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그들이 스코투스, 오컴, 빌 같은 맥락에서 주의주의나 유명론 의 담지자였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직접적인 영향은 증명하기 어렵지만, 영향을 받을 수 있

었으나,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강조 에 의해서도 그것 못지않은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후자에는 실재론의 암묵적인 색 조가 있다. 마찬가지로 루터와 마르틴 부처가 법적 선언으로서 칭의를 강조했다면, 그것을 하 나님이 신적 재가에 의해 죄인의 최선의 공로를 받아들이는 근거가 되는, 오컴과 빌의 언약

적 주의주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전자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칭의를 그분의 아들의 실

제 의에 근거를 둔 반면에, 후자는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함을 승인하는 것을 좌우하

는 신의 의지를 기반으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수용을 결정했다( 펠라기우스주의 또는 반펠라기우스주 의 ). 42) 하나는 아무리 재배치되고 정제되었어도 여전히 참여 직물의 실을 포함하고 있지만, 다

39) 분명히 밝히지만, 이 책의 목적은 종교개혁자들이 유명론을 근대성에 도입했다고 비난하는 오해에 대한 비평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멀러, 스타인메츠 등의 학설은 자명하므로 내가 그것을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오히려 그들의 학문을 바탕 으로 종교개혁의 역사를 더 나은 관점에서, 즉 보편적 교회를 갱신하는 관점에서 조명한다.

40) “또한 (브래드) 그레고리와는 반대로, 거의 보편적인 수아레즈의 형이상학을 주장할 근거는 없다.” Muller, “Not Scotist,” 145.

41) Muller, “Not Scotist,” 145, 146.

42) Horton, Justification, 1:316, 322-333을 보라.

지와 그분의 말씀의 선언적 성격을 믿었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그분의 말씀의 선언적

성격을 믿는 모든 사람이 유명론적 주의주의자는 아니었으므로 이런 오류는 피해야 한다.

루터가 오컴과 빌의 유명론적, 주의주의적 형이상학에서 비롯된 구원론에 얼마나 적대적이 었는지를 고려하면, 이런 사례에서 차이가 더욱 분명해진다. 소르본의 유명론자들에 대한 칼

빈의 적대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한편 마르틴 부처, 피터 마터 버미글리, 지롤라

모 잔키 같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개혁주의 구원론의 결과에 부합하게 하기 위해 토마스주의 형이상학을 아무리 많이 수정해야 했어도, 자기들의 토마스주의 형이상학의 비판적인 전용은

분명히 드러낼 수 있었다.

더구나 단 한 가지 영향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

은 훨씬 복잡했다. 예를 들어 루터는 한 가지가 아닌 여러 다른 중세 사상의 흐름에 영향을 받

았다. 2장에서 살펴보겠지만, 독일의 신비주의는 루터의 경건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신비

주의는 신플라톤주의와 분리할 수 없으므로, 세속화 이야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루터의 경건 의 본질이 아우구스티누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기독교 플라톤주의의 실재론적 형이

상학에 의존할 때, 왜 루터가 유명론적 주의주의의 담지자인지 설명해야 했다.43)

셋째, 세속화 이야기가 주장하듯,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일방적인 법정적 전가의 선언

을 통해 참여 패러다임을 해체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칭의 신학을 구원의 서정( ordo salutis ) 맥락에서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주장은 칼빈이 자신의 칭의 교리를 그리스

도와의 연합이라는 더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교리 안에 두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칼빈 의 저술 전체, 특히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참여를 크게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칼빈은 참여를 구원론의 한 구석( 칭의 ) 에 국한하지 않고, 연합이 이

중 은혜( duplex gratia ), 즉 칭의와 성화를 규정하도록 허용했다.44) 구원의 서정에서 칭의가 성화 의 논리적 원인으로서 성화를 아무리 우선시하더라도, 칼빈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 하는 것, 즉 하나님과의 참여에 통로가 되는 연합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둘 다 필수 적이라고 여겼다. 토드 빌링스 등이 이런 오해를 바로잡는 데 앞장섰다.

칼빈의 이중 은혜 교리는 전적으로 법정적인 것으로도 환원할 수 없고 단순히 “그리스 도와의 연합”이라는 법정적이지 않은 설명으로도 환원할 수 없다. 칼빈의 견해는 환원할

수 없는 법정적인 것이지만, 외부적, 법정적 명령에 대한 법정의 유비는 칼빈의 그리스도 와의 연합과 이중 은혜에 대한 신학을 나타내는 배타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리 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칼빈의 신학은 참여, 입양, 전가, 놀라운 교환과 관련하여 명확하

43) Horton, 1:318도 로츠의 두 권으로 된 『독일의 종교개혁』에 대항하면서 이 점을 강조한다.

44) 예. Calvin, Institutes 3.6.1, 3, 4; 3.7.3; 3.8; 3.9.4. 나의 자매서(근간)를 보라.

칼빈은 유명론과 주의주의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았음에도 자신의 구원론에서 참여를 포기하 지 않았다. 칼빈은 단지 자신의 마음속에서 참여를 총천연색으로 묘사했을 뿐이다. 칼빈은 참

여의 변화적이고 내적인 힘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변화적인 것을 성화 안에 두었

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칼빈에게 참여 패러다임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법정적 그늘( 칭의 ) 과

변화적 효과( 성화 ) 를 모두 담아내면서도 종말론적 결과( 지복직관으로 올라가는 것 ) 를 무시하지 않을 만큼 다차원적이고 탄력적이었다.46) 또한 칼빈은 전가의 법정적 성격을 묘사할 때도 그 교리

를 비인격적이고 분리되어 있으며, 단지 외적인 것이고, 참여적 조치가 없는 것( 종교개혁자들에게

던져진 바로 그 비난 ) 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칼빈은 참여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그리스도는 우리

의 것이 되셔서, 그리스도가 가지신 은사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나누어 가지는 자로 만드

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기 위해 멀리서 우리 바깥에 있는 그 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입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 에,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가

45) Billings, Calvin, Participation,andtheGift, 23. 칼빈의 경우 성화에 대한 칭의의 논리적, 인과적 우선권에 대한 설명이 Fesko, Beyond Calvin; Horton, “Calvin’s Theology of Union with Christ and Double Grace,” in Justification, 1:72-96에 나와 있다.

46) Institutes 3.6-8, 11-14를 보라. 레이스는 아퀴나스와 칼빈을 인상적으로 비교하면서, 독자가 칼빈의 로마서 주석에서 6장까지 “참여의 강력한 조짐”을 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대부분 칼빈의 칭의에 대한 외적-전가적 이해보다는 변화로서의 칭의 에 대한 아퀴나스의 교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칭의에 대한 칼빈의 이해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칼빈의 방식과 결 합하여 우리의 구원에 대한 칼빈의 참여적 이해를 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발견한다”(Aquinas and Calvin on Romans, 5). 나는 레이스가 아퀴나스와 칼빈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칼빈에 대한 주장은 처음부터 외적-전가 적인 것을 배제하고, 마치 참여와 변화가 동의어인 것처럼, 참여가 변화에 의해 소진된다고 가정하고 있다. 이런 가정 아래서 종 교개혁의 칭의 교리는 항상 참여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참여를 왜 그렇게 좁은 틀로 정의해야 할까? 다시 말해 서 왜 참여를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제한해야 할까? 칼빈에 대한 비판은 처음에 참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종교개혁이 과 거에 대한 위협인지, 아니면 과거의 진전인지가 결정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후자의 정당성을 고려해야 할 이유가 존재 한다. 예를 들어 칼빈의 입양 교리를 생각해 보자. 인간의 경험에서도 고아가 자신의 새로운 가족에 참여하는 것은 그 가족의 새 로운 집에서 생활하는 것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 변화된 관계성은 전적으로 법정에서 그 아이가 더 이상 고아가 아니라는 판사의 선고에 의해 발생하고 그것에 의존한다. 이런 외부적이고 법적인 결정이 ‘참여’와 무관하거나 심지어 상반되는 것이라고 주장하 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이 결정이 없으면 참여는 그 기반을 잃게 된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적으로 입양되는 것은 얼마나 더 그 럴까? 요컨대, 토드 빌링스(Calvin,Participation,andGift) 같은 최근 학문의 함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 들은 로마서 같은 책에서 참여가 법정적인 것과 변화시키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을 인식했으며, 그런 이유로 그 개념이 발전 한 것이다. 레이스는 자신의 빈틈없는 연구에서 이 점을 인정하지만(빌링스도 이 점을 인정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고 상 을 받더라도, 우리의 모든 행위가 그 자체로 정죄받을 수 있다고 칼빈이 선언한다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5)라는 이유로 결국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질문은 충분히 공정하지만 독창적 인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개혁파 계승자들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첫째, 종교개혁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구별 했지만 결코 둘을 분리하지 않았으며, 전자는 후자의 근거와 원인이 되고 후자는 전자 없이는 법적 근거가 없다. 둘째, 칭의와 성 화가 분리되지 않는다면, 법적인 것이나 변화만으로는 참여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할 수 없다. 둘 다 독특한 방식으로 기여한다. 셋째,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 외적 전가적 용서는 참여적일 수 없는 것처럼, 왜 참여 자체를 그 전가적 용서의 반대쪽에 놓아야 할 까? 다시 입양의 예시가 다른 것을 보여 준다. 판사의 선언에 따라 고아는 새 집에서 식사를 하기도 전에 진정으로 가족의 일원이 된다. 넷째, 개혁파는 구원의 서정에서 법정적인 것(칭의)을 변화 사이에 놓았다. 첫째가 중생이고, 그다음이 회심과 칭의며, 칭의 는 반드시 성화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개혁파의 참여는 비판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더 크다. 이 런 비판에도 나는 “참여라는 주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점에서 칼빈과 아퀴나스 사이에 상당한 양의 조화가 존재한다”라는 레이 스의 결론을 높이 평가한다(12).

갱신으로서의

비난은 역설적이다.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성례를 포함하여 개혁주의 구원론과 교회론에 다양한 결과를 가져온 참여 패러다임을 제안하 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교부들에게 의존했다.

칼빈의 참여 신학은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구별된 연합을 확언하는 구원론에서 비롯된다. 칼빈은 성경과 보편적 자료(특히 이레네오, 아우구스티누스, 알렉

산드리아의 키릴로스)를 사용하여 광범위하고 단호한 참여 교리를 발전시켰다. 기도, 성

례, 율법에 대한 순종에서 신자들은 삼위일체적 삶에 통합된다. 신자들이 신앙으로 그리

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됨에 따라, 성부는 그분의 무상의 용서를 통해 관대하신 분으로

나타나시고, 성령은 신자들이 감사의 삶을 살 수 있게 힘을 실어 주신다. 이런 식으로 신

적 행위자에 대한 칼빈의 강력한 설명은 성화에서 인간 행위자를 약화하지 않고 오히려

일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은혜는 신자들이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에 참여할’ 수

있게 본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킨다. 더욱이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것’은 교

회 안팎에서 사회적 상호성과 선행이라는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모든 단계에서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칼빈의 설명은 인간의 활동과 번영에 대 한 참여적 비전에 근거하고 있다.48)

많은 칼빈 학자들은 이제 참여 개념을 포기하지 않고, 전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종교개혁의 비

전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필수적인 주제임을 인정한다.49) 종교개혁자들이 교부 시대 또는 중세의 어떤 사조( 思潮 ) 에 문제를 제기했을 때도 그들은 성례적 구원론과 교회론의 보편성을

보여 주기 위해 교부 시대 및 중세의 다른 강조점들과 동조했다. 종교개혁자들의 평가에 따르 면, 교부 시대 및 중세 선배들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혼합은 완전한 참여의 실재론적 형이 상학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정제, 즉 종교개혁의 구원론과 교회론에 비추어 그 개념을 더욱 성숙하게 만든 것을 의미했다.

또는 참여의 범주에 속하는 칼빈의 기독론과 그에 상응하는 영적 본질을 생각해 보자. 칼 빈은 골로새서 주석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이 편하다고 말할 때 무 엇을 뜻하셨는지 물었다. 칼빈은

47) Institutes 3.1.10.

48) Billings, Calvin,Participation,andtheGift, 17.

걸쳐 나타난다. Billings, Calvin, Participation,andtheGift; Gatiss, Cornerstones of Salvation, 43-68을 보라.

기 위해 한발 떨어져서 본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은 우리를 성부 께 올려 드리고, 동시에 자신이 성부와 하나시므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기 위함이다.”50) 승

천을 위한 강림의 패턴은 성삼위일체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칼빈은 『기독교 강

요』에서 이런 강림과 승천을 “놀라운 교환”이라고 불렀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야곱의 사다리에 비유하며 그것을 행복한 교환이라고 불렀다 ). “우리와 함께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써 그분은 우리를 자신과 함

께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고, 그분이 땅으로 내려오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승천할 길을 예비 하셨다.”51) 이 구절들과 칼빈의 참여에 대한 다른 많은 증거에 비추어, 줄리 캔리스는 칼빈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와 수단을 모두 참여적 교제가 되게 만든다”라고 썼다.52) 그는 또한

칼빈과 이레네오 사이에 다양한 유사점이 존재하며, 둘 다 “의식적으로 삼위일체적 맥락에서

플라톤적 참여 전통을 전하고”,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인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플라톤적 참여를 재구성”한 것을 보여 준다.53) 이레네오에서 칼빈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급진 정통주의가 기리는 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아퀴나스의 축과 반드시 경쟁하는 계보가 아니고, 현대 기독교가 참여의 회복에서 진정한 이익을 얻으려면, 그 강조점과 수정 사 항을 인정해야 한다.”54) 그러므로 단순한 수정만으로는 이 축을 포착할 수 없으며 갱신이 필요 하다.55)

많은 예를 들 수 있지만,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세속화 해석은 종교개혁자들이

마치 중세 후기에 주의주의와 유명론으로 전환하여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참여의 끈을 끊

어 버린 것을 영속시킨 사람들인 것처럼 비난의 화살을 종교개혁자에게 돌리는 데 호소력

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연속성의 끈이 존재할 뿐 아

니라 종교개혁자들과 비아 모데르나 사이에는 심각한 불연속성의 끈도 존재한다. 문제를 더욱

50) Comm.Col. 3:1.

51) Institutes 4.17.2.

52) Canlis, Calvin’s Ladder, 4.

53) Canlis, Calvin’s Ladder, 17. 참고. Adversus haereses, III.19.1. 캔리스는 칼빈이 단순히 플라톤적 상승의 사다리에 그리스도 를 추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 원을 깨뜨려서 여시고 그것을 자신에게 접목하신다”(44)라고 믿는다. 분명한 사실이지만, 캔리스는 또한 이것이 중세 신비주의와 스콜라주의를 개선한 칼빈의 독창적인 새로운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중세인이 참여 의 원을 그리스도에게 ‘접목’했기 때문에 이 주장은 너무 야심찬 것이다. 캔리스는 마치 칼빈이 “비인격적인 것들(신적 본성 안에 있는 영혼) 사이에서 인격적인 것들(성령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 사이로 ‘참여’를 옮긴 것처럼” 칼빈과 중세인들을 대 조한다(교제 대 순응, 그리스도 대 인간론). 그러나 이런 대조는 중세 참여 개념의 삼위일체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캔 리스는 칼빈이 그리스도를 참여의 지배 원리로 삼았다는 점을 지적하지만, 그 강조가 중세 신학자들에게서 완전히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 신학자 중 일부는 기독론의 렌즈를 통해 참여를 기술하기 위해 풍유를 사용하기도 했다. 중세의 참여 패러다임 은 삼위일체론적 기독론이었다(예. Legge, The Trinitarian Christology of St Thomas Aquinas; Torrell, Spiritual Master, volume 2 of SaintThomasAquinas). 캔리스의 분석을 좀 더 구체화하면, 칼빈이 ‘새로운’ 무언가를 기여했다면 그것은 그리스 도를 추가한 것이 아니라 참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그의 개혁된 정의와 결합한 방식(이것은 상승의 사다리에서 중세적 공로의 개념을 제거했다)이었다. 그럼에도 칼빈이 “자신에게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끼친 풍부한 중세의 신비주의 및 신학 전통 의 상속자”(46)였다는 캔리스의 말은 옳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은 플라톤주의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수정하고 변형했다. 캔리 스의 연구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이 Muller, Calvin and the Reformed Tradition, 204, 238-243, 281에 나와 있다.

54) Canlis, Calvin’s Ladder, 18.

55) Canlis, Calvin’s Ladder, 20.

도적인 교회를 따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연속성의 끈은 마치

종교개혁이 근대주의의 새롭고 심지어 세속적인 씨앗의 운반자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스코투

스, 오컴, 빌의 잘못에서 종교개혁자에 이르는 직선적이고 깔끔한 선을 그을 수 없게 한다.

종교개혁을 근대주의의 해방 또는 급진주의의 대항으로 기념하기

세속화 해석은 종교개혁을 한탄하는 사람들에게서 약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것이 역설적

인 것은 19세기와 20세기의 역사에서도 비슷한 세속화 해석이 나와서 오히려 크게 찬사를 받 았기 때문이다. 16세기부터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종교개혁을 슬픔과 분노의 정신으로 해석 했다. 그러나 현대 자유주의는 이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세속화에 대해 종교개혁자들에게 찬사 를 보냈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개인의 주관적인 절대적 의존을 중심으로 신학의 방향 을 전환하여 그리스도인의 경험에서 기준을 정하는 기준을 새로 만들었다.56)

이런 방향 전환은 아돌프 폰 하르나크와 그의 해체 프로그램에 이상적인 틀이었으며, 그 결 과로 전통적인 교리의 수정 또는 포기가 일어났다. 자유주의는 마치 종교개혁자들이 교회 권

위에 근거하여 채택된 의심할 수 없는 믿음인 교리에서 그리스도인을 처음으로 해방한 것처

럼 종교개혁에 도움을 요청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전통의 족쇄와 전통을 보호하는 교회에서 해

방되어, 이번에는 비판적 방법론을 통해 성경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종교개

혁자들은 결국 개인이 더 이상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거나 복종하지 않고 자기 내면의 종교적

직감을 탐구하고 심지어 신뢰할 수 있는 계몽된 미래로 꽃을 피운 씨앗을 심었다.57) 종교개혁 은 근대주의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애도든 찬양이든, 이런 해석은 각각 ( 다양한 방식으로 ) 공통의 근본 문제, 즉 ‘오직 성경’, 만인제사장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성경 해석, 성례적 세계관의 거부가 모두 결합되어 보편 성과 상반되는 것을 나타내는 종교개혁을 창조한다. 종교개혁의 주관주의는 분열과 세속주의 모두의 모체가 되었다.

56) Schleiermacher, Christian Faith, 738-749.

57) 예컨대 다음 문헌을 보라. Paul Tillich, Protestant Era;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Lectur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Ernst Troeltsch, Protestantism and Progress: The Significance of Protestantism for the Rise of the Modern World

성경 문자주의란 무엇일까?

개신교인이 된다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믿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와 성경 문자주의는 동의어가 아니다.

성경 문자주의는 성경의 최종 권위를 믿는 것을 넘어 성경에 제한적인 해석법을 강요하는 것이다. 성경 문자주의

는 다음과 같은 증상으로 식별할 수 있다.

(1) 비역사적 사고방식. 성경 문자주의는 해석의 역사와 신경 및 신앙고백의 권위를 거만하게 무시(C. S. 루이스 의 표현을 빌리면 연대기에 대한 우월감에서 비록한 경멸)하며, “신경은 필요 없고 성경만 있으면 된다”라는 개인주의적 경구를 읊조리는데, 이것은 실제로는 “권위는 필요 없고 나만 있으면 된다”로 번역된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이 급진적인 ‘홀로 성경’(solo scriptura)이 된다. 그 결과로 성경 문자주의는 이단을 경계하기 위해 고안된 신학이 성경 주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만든다.

(2) 무책임한 증거 본문 찾기. 성경 문자주의는 성경을 사전이나 백과사전처럼 취급하며, 마치 신학자가 어느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올바른 증거 본문, 장과 절을 발굴하고 그것들을 일치시키는 것처럼 취급한다. 성경 문자 주의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제시된 믿음에 국한하며 성경에서 선하고 필요한 결과로 교리를 추론하지 못한다.

(3) 반(反)형이상학. 성경 문자주의는 주석과 신학을 위해 철학을 사용하는 것을 과소평가한다. 성경 문자주 의는 특히 형이상학에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며, 존재에 대한 연구가 피조물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예. 순수 현실태)를 어떻게 보호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결과로 성경 문자주의는 마치 성경의 페이지가 흔 히 역사적 사건에 초점을 맞출 때 성경 페이지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바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신학과 경륜을 융합한다.

(4) 일의적 서술. 성경 문자주의는 인간에 대해 서술된 속성의 의미가 하나님에 대해 서술될 때에도 똑같은 의 미를 가지는 것처럼, 본문에서 하나님에 대해 사용된 언어도 하나님에게 직접적인 방식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결과적으로 성경 문자주의는 본문의 문자주의적 해석을 통해 하나님을 역사화할 위험이 있다.

(5) 제한적 계시. 성경 문자주의는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다양한 방식에 대해 의심하거나 심지어 무시하

고, 창조의 책(자연)을 외면한 채 성경에만 국한되어 있다. 성경 문자주의는 흔히 자연신학을 의심한다.

(6) 인간 저자에 대한 지나친 강조. 성경 문자주의는 한 인간 저자를 초월하는 신적 저자의 의도와 능력을 무시

한다. 결과적으로 성경 문자주의는 정경의 통일성과 기독론적 완수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영감이나 무 오성 같은 성경의 속성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형이상학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 요점들은 곧 출간될 나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에서 발췌한 것이다. 오늘날의 성경 문자주의에 대

해 비평한 글 및 권위에 대한 종교개혁의 이해로 돌아가야 한다는 요청에 대해서는 『개혁파 고백의 회복』(R. Scott Clark, Recovering the Reformed Confession)을 보기 바란다. 성경 문자주의(biblicism)라는 단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영어에서 ‘성경 문자주의’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827년에 소페이 핀간이 ‘성경 문자주의’를 비판하는 글에서였다. 1874년에 J. J. 판 오스테르제이는 그것을 ‘문자의 우상숭배’로 규정했다”(19)

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왔다. 복음주의 개신교는 다른 어떤 기독교 전통보다 종교개혁의 유산 에 대한 권리를 더 많이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복음주의 개신교가 때때로 현대 자유

주의의 역사적 가정과 크게 다르지 않게 종교개혁에 대한 해석을 발전시켜 왔다는 것은 참으 로 역설적이다. 현대 자유주의가 전통을 버리고 이성의 자율적 발판 위에 서는 계몽된 개인의

발생을 기리기 위해 종교개혁을 가리킨 반면, 복음주의자들은 때때로 종교개혁자에 대해 현대

성경 문자주의를 영속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것과 똑같은 전제를 구현했다. 복음주의 기관 과 교회에서 마치 종교개혁자들이 전통의 족쇄를 벗어 던진 급진주의자인 것처럼, 마치 사도

들 이후로 교회가 타락하고 상실된 것처럼 종교개혁의 이야기를 바꿔 말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부패한 교회를 벗어 버리고 중세 교회와 결별하여 더럽혀지지 않

은 자신들만의 교회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특정한 이야기를 붙들고 이를 ( 재 ) 해석한다. 루터는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비텐베르크 성교회 교회 문까지 행진하여 자신의 『95개 논제』를 못 박고 가톨릭교회의 모든

것에 대항하는 혁명을 시작했다. 존 녹스가 당대의 여성 통치자들에게 교회를 현세적 권위와

로마 교회에 대한 충성심 아래 유지하는 정치 세력을 몰아내라고 외쳤을 때, 그는 모든 종교 개혁자들을 본받은 것이었다. 나는 이런 해석을 ‘대립적 서사’( 對立的 敍事, oppositional narrative ) 라 고 부른다. 종교개혁을 보편적 교회에 반대하는 입장에 놓고, 특히 중세 스콜라 학자들을 겨냥 하기 때문이다. ‘대립적 서사’는 암흑기라는 말에 힘을 실어 주고 종교개혁자들이 모든 면에 서 오염된 교회에 항의하기 위해 성경 위에만 서서, 주먹을 높이 치켜들고 있는 모습을 묘사 한다.58) 이런 관점에서 종교개혁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네 가지 주요 신화( 더 있을 수 있지만 ) 가 ‘대립적 서사’를 특징짓는 경향이 있으며, 종교개혁의 자의식적인 보편성 추구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조짐을 보인다.59) 첫째, 이 해석에 따르면 종 교개혁은 반( 反 ) 전통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만을 믿었으며, 그것은 성경이 교회의 유일한 권위라는 것을 의미했다. 전통은 그들의 적이었고, 경쟁적인 권위로서 그리스도인을

58) 그러나 ‘대립적 서사’는 현대 복음주의보다 먼저 있었다. 19세기 카를 크리스티안 울만은 중세와 종교개혁 사이에 쐐기를 박 았다(그의 두 권으로 구성된 Reformatoren vor der Reformation을 보라). 유언 캐머런은 학자들이 중세 후기 종교 생활의 활 기를 고려함에 따라 지난 40년 동안에야 흐름이 바뀌었다고 말하지만, 그는 마치 루터 이전에는 모든 것이 좋았던 것처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Cameron, “Reconsidering Early-Reformation and Catholic Reform Impulses,” 5; Cameron, EuropeanReformation, 119. 59) 분명히 말하지만, ‘대립적 서사’는 무엇보다 정신이나 태도에 가깝다. 핵심은 개인이 이런 모든 주장을 견지하는지가 아니라(어떤 사람들은 일부만 수용할 수도 있다), 그들의 주장이 유지되느냐다. 또한 ‘대립적 서사’는 다양한 교단으로 흘러 들어갔으며, 침례 교나 장로교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조던 쿠퍼는 마르틴 루터가 중세 스콜라주의와 ‘급진적으로 단절했다’라고 주장하 는 자칭 ‘급진적 루터주의자’인 사람들을 다룬다. 쿠퍼는 또 이와 대조적으로 이렇게 주장한다. “루터 운동은 보편 교회 신학의 한 발전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고전적 유신론의 기본 가정 같은 초기 및 중세 교회의 신학적 확신을 수용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특정 본질주의적 형이상학 개념도 포함된다”(Prolegomena, 330). 쿠퍼는 루터교 신앙고백이나 심지어 루터 자신의 저술에 유 명론을 투영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일치 신조』(Formula of Concord)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논의의 여지 없이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며⋯⋯루터는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긍정하여, 그에 따라 확실히 그를 영광의 신 학자로 여기지 않는다”(281).

는 것이 올바른 성경 해석법이라고 믿었다. 둘째, 마치 사도 시대부터 참된 복음과 참된 교회

를 상실했다가 16세기에 의도적인 분립과 교회 분열을 통해 회복되어 충실히 보존된 것처럼, 종교개혁은 반( 反 ) 가톨릭( 반로마 가톨릭 ) 교회일 뿐 아니라 반(反)보편적 교회였다. 셋째, 종교개혁 은 반( 反 ) 중세, 구체적으로 반( 反 ) 스콜라주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스콜라주의가 교회의 믿음

과 실천 등 교회의 모든 잘못된 것을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종교개혁 신학은 중세 신학에 반

대인 것, 즉 스콜라주의의 사변적, 합리주의적, 엘리트주의적, 교황 중심주의적, 자연주의적 신 학에 대한 완전한 대안으로 세워져야 했다. 넷째, 종교개혁은 반( 反 ) 철학적이었으며, 기독교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된다고 확신했다. 루터는 중세 신학이 그리스의 이교도 사상

에 의해 타락했기 때문에 이성을 마귀의 창녀로 간주했다.

최고의 복음주의 학자들은 이런 ‘대립적 서사’를 피하고 역사적 뉘앙스를 가진 예들을 잘

살려서 종교개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복음주의 대중 사이에서는 ‘대

립적 서사’가 널리 퍼져 있는 기본 입장이며, 때로는 기독교 대학교와 신학교에서도 영속되고

있다. ‘대립적 서사’에 빠지는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두 가지 이유가

두드러진다. (1) 그들은 자신들의 개신교 믿음을 ( 항상 적이라고 할 수 있는 )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 신자들의 믿음과 구별하고 싶어 하며, 그래서 로마 가톨릭교회가 교부 시대와 특히 중세 신학

의 방대한 기간에 대해 합법적인 독점권을 행사했음에 틀림없다고 가정한다. 그것은 반대파의

입장에서, 종교개혁자들이 왜 그런 저항으로 반응했는지를 설명한다. 그들은 암흑기를 극복하

고 사도 이후 처음으로 성경의 빛을 소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2) ‘대립적 서사’는 복음주의

정신을 근본주의로 전환하는 목회자나 교수, 교회나 기관에게는 특히 전략적이다. 이것은 마

치 종교개혁자들이 해석자 자신이 처한 현대의 지역이나 운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급진적 변 화에 찬성했을 것처럼, 종교개혁자들을 현재의 해석자 자신의 의제만큼이나 급진적으로 해석

하면서, 여전히 종교개혁자들을, 그리고 자연스럽게 개신교 정체성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대립적 서사’에는 역사적 문제가 있다. 첫째, 그것은 개신교 자유주의가 기념하는

비슷한 해석 정신을 구현하지만, 다만 그 결과가 다를 뿐이다. 자유주의자들에게 이 저항자 해

석은 새로운 시대의 여명, 즉 현대주의의 도래를 의미했다. 복음주의자들에게 이 저항자 해 석은 새로운 시대의 여명, 즉 성경 문자주의의 도래를 의미했다. 그러나 두 해석 모두 종교개

혁자들이 과거를 버리고, 보편적 교회의 모든 것과 결별하고, 교회가 사도들과 순수한 기독교 로 돌아가는 길을 개척했다고 가정한다. 사도 시대 이후 모든 것이 암흑이었으나, 이제 종교개 혁자들이

갱신으로서의

지 못했다. 10-11장과 13장에서 살펴보겠지만, 로마 교회뿐 아니라 16세기의 정치 세력들은

종교개혁자들과 종교개혁 진영에서 출발했지만 후에 급진적으로 변한 사람들을 언제나 구분 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은 행정관( magistrate ) 들과 성직자들에게 이런 급진주의자들을 종교

개혁 프로그램을 배신한 종파 분립론자이자 극단주의자라고 설명하면서, 이런 혼란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60) 이것은 부분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이 당국의 급진주의자 처벌을 단호

하게 지지한 이유를 설명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이 종파주의자가 아니라 정통주의자라

고 주장했다.61)

셋째, ‘대립적 서사’가 종교개혁자들처럼 보편성의 렌즈를 통해 종교개혁을 보려는 데 어

려움을 느끼는 한 가지 이유는 균형 잡히지 않고, 지배적이며, 잘못 알려졌던 16세기의 신학

적 비전 때문이다.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교회

의 두 가지 가르침, 즉 (1) 구원론( 특히 칭의, 성사, 연옥 ) 과 (2) 교회론( 특히 성경, 교회, 사회에 대한 교황의

권위 ) 에 대항하는 데 시간을 바치고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았다. 대부분의 다른 불만은 이 두 교

리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조심하지 않으면

수많은 출판물만 보고 종교개혁이 교회 그리고 그것과 함께 과거, 특히 중세 과거와의 전면적

인 단절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것은 위험한 역사적 전제다. 예를 들어 이런 견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주의

와 싸운 것을 검토하면서, 교회가 이전에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한 것을 전제하지 않았다고 결

론 내리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것이다. 이런 견해는 최초의 스콜라 학자인 캔터베리의 안셀무

스( 3장을 보라 ) 와 그가 고전적 유신론을 옹호한 것을 보고, 종전에 교회가 성경의 권위에 대해

이해한 것을 안셀무스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것이다. 비슷한 방

식으로, 사학자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구원론과 교회론 논쟁( 결국 존재했던 유일한 교회 에서 파문당하는 결과를 초래한 논쟁 ) 을 바라보면서, 종교개혁자들이 보편성의 광범위한 식탁에서 다

른 수천 가지 관심사를 활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가정해서도 안 된다. 리처드 멀러의 경고 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종교개혁이 신학의 주요 주제 중 비교적 작은 수를 변경했다는 사 실을 처음부터 인식할 필요가 있다. 칭의, 성사( 聖事, sacrament, 개신교에서는 ‘성례’ 또는 ‘성례전’-옮긴이 ), 교회에 대한 교리들이 가장 큰 강조를 받은 반면에, 하나님, 삼위일체, 창조, 섭리, 예정, 종말 에 대한 교리는 행정관의 후원을 받는 종교개혁에 의해 거의 변경 없이 전통 그대로 수용되

60) 이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 사학자들은

용어, 즉 종교개혁의 급진파라는 용어를 사용 한다. 이 급진주의자들이 실제로 종교개혁 교회(루터교 또는 개혁교회) 내부에서 나왔고 그들의 항의가 특징이었기 때문에 이런 움직임은 충분히 사실이다. 그러나 행정관의 후원을 받는 종교개혁자들은 대개 급진주의자들을 종교개혁의 참되고 충실한 대 표자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들의 징계 조치가 입증하는 것과 같이, 행정관의 후원을 받는 종교개혁자들에 따르면 급진주의자들은 “우리에게서 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

61) “루터의 종교개혁은 제도주의로 인해 경험적 교회에

카를슈타트의 자율성도 똑같이 강력하게 거부 했다.” Pelikan, Obedient Rebels, 33.

이 책의 새로운 소개에 영감을 준 배경에는 멀러의 수정이 있다.

넷째, 멀러가 옳다면, ‘대립적 서사’는 종교개혁의 보편적 교회와의 연속성 및 종교개혁자

들이 로마 교회 및 급진주의자들과 벌인 논쟁에서 그 연속성의 중심적인 성격을 인식하지 못 한다. 사돌레토에 대한 칼빈의 답변에서 드러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립적 서사’가 얼마 나 부족한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상 칼빈 같은 사람이 ‘대립적 서사’를 채택했다면, 종교 개혁은 혁신적인 교리를 지지했으며 그러므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 밖

에 있다고 한 사돌레토의 요점을 증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새로운 교파는 물

론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려고 출발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교회를

개혁하려 했다. 비록 이 교회가 교황직의 혁신과 정치적 계략에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가톨릭교회가 여전히 참된 교회의 정당한 특징( 예. 세례 ) 을 소유하고 실천하고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자들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준비하면서 카를 5세에게 그들의 보편성 을 변호하는 글을 썼을 때, 요하네스 에크는 종교개혁자들이 교부들과의 연속성을 주장할 권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404개의 불같은 논제를 썼다. 에크의 비판이 있은 후 즉시 『아우크스부

르크 신앙고백』의 제안자들은 보편적 교회와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거듭 노력했다. 마

르틴 부처와 볼프강 카피토 같은 사람도 같은 일을 했다.63)

종교개혁자들은 권위에 대해 현대 근본주의자들의 경구인 “신경은 필요 없고 성경만 있으

면 된다”의 지지자는 아니었으며, 로마 교회의 잘못된 전통관( 교도적 ) 에 맞서 올바른 ( 목회적 ) 전 통관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최고 권위 위에 서 있었지만, 그것은 교회

에 의해 올바르게 해석되고 보편적 교회와 함께하는 성경이어야 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교회가 전통을 무오한 계시의 원천으로, 즉 성경과 동등하거나 때로는 성경보다 우월한 해석 의 권위로 격상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급진적 종교개혁자들이 전통을 신

학과 주석의 지침을 위한 권위와 원천으로 두는 일을 거부하는 것도 반대했다. 두 입장과 대조 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은 전통을 교회를 위한 목회적 권위로서 인정하고, 교회가 그 신경들과 공회의들에 책임지게 하고, 건전하고 정통적인 성경의 해석으로 교회를 인도했다. 데이비드

스타인메츠가 말했듯이, 종교개혁자들이 처음에는 전적으로 성경적인 신학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 가능

할 것이라고 낙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비성경적인 신학적 원천을 배제하려는 의도는 거의 없었다. ‘오직 성경’은 일반적으로 신학적 지혜의 유일한 원천으로서의 성경이 아

니라, 모든 신학적 원천과 주장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원천이자 규범으로서의 성경, 즉

62) Muller, “Scholasticism in Calvin,” 247.

63) BDS 3:321-338. 이 이야기는 Greschat, Martin Bucer, 94-95에 나와 있다. 이 책 전체에서 이 분노의 다른 예가 12장에 있다.

‘성경 우선’(prima scriptura)을 의미했다.64)

다시 말해서 ‘오직 성경’은 성경이 유일한 권위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급진주의자들의

입장이었다. 그 대신에 ‘오직 성경’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에 성

경만이 무오하고 충분하며 교회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라는 의미였다.65)

구원론과 관련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을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로 보았으며, 중세인

들이 아우구스티누스주의 구원론을 수용하는 한 종교개혁자들은 거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 았다.66) 수많은 사례가 있으며, 이 책에서도 그에 대해 살필 것이다. 잉글랜드 종교개혁 기간에

토머스 크랜머는 성공회 『강론집』( 1547년 ) 에서 ‘오직 믿음’으로 인한 칭의론을 다루면서 교부

시대와 중세 교회의 전통을 지지 근거로 많이 인용했다.67) 마찬가지로 마르틴 켐니츠도 트리

엔트 공의회를 반박하면서, 많은 교부가 이신칭의( 以信稱義 ) 를 가르쳤다고 주장했으며, 루터의

보편성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교부들의 의견을 사용했다.68) 물론 종교개혁자들은 시간이 지나

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보완하고 다듬게 된다. 그들은 이 교리를 통해 바울이 도

덕적 주입이 아닌 법정적 전가를 가르쳤다고 믿었다.69) 그럼에도 종교개혁자들은 아우구스티

누스가 예정뿐 아니라 중생과 회심에서도 은혜가 중요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장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도움을 받았다고 여겼다. 그들의 비판에도 종교개혁자들은 또한 ‘오직 은 혜’( sola gratia ) 가 교부 시대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최소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유

64) Steinmetz, Luther in Context, 129.

65) 나의 정의는 나의 책 God’s Word Alone, 23에 나온 것이다.

66) 우리가 여기서 찾아볼 수는 없지만, 나는 중세 후기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의미에 대해 논의하는 방대한 문헌이 존재한다는 것 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헤이코 오베르만은 “아우구스티누스 르네상스”(예. “Headwaters of the Reformation,” 40-88)를 주 장한 반면에 E. L. 사크 같은 현대인은 오베르만에 반대하여 “신학적 또는 철학적 이해와는 구별되는 역사적 이해”(Creating Augustine, 21)를 제안한다. 나의 평가로는 스타인메츠(Luther and Staupitz, 13-15)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다섯 가지 용례 를 인정할 균형 잡히고 미묘한 접근법을 제시한다. (1) “일반적으로 라틴 서방의 신학.” (2)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신학”(그 구성원들이 가르치는 대로). (3) “모든 중세 신학자들에게 공통된 명목상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보다 더 심오한 깊이에서 그리고 광범위한 쟁점에 대해 성아우구스티누스와 동의하는 수도회 안의 분파”(예를 들어, 우익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 (4) (예컨대 원 죄 및 예정과 같은 교리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강화 효과를 둔화하지 않고 그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신학 용어로 번역 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포용. (5) “특별한 경우에 자신들의 원래 사고를 넘어설 수 있는 신학적 경향의 구체화(예를 들어 펠라기우스주의보다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이 다섯째 점에서 종교개혁의 도래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었다. 예를 들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원래 가르침에 대한 충실성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어떤 의미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공로 문제에서 루터보다 더 아우구스티누스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준거 기준이 경향의 더 완벽한 구체화라면, 루터가 토마스 보다 더 아우구스티누스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 기획은 종교개혁자들이 다섯째 요점이 정당할 뿐 아니라 선하고 또 필요 하다고 믿었다는 가정 아래서 운영된다. 그들은 요점들 중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부합하는 것을 원했을 뿐 아니라, 개선이 나 개혁을 통해서라도 그것을 완성하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아우구스티누스적이며, 자신들의 반대자들 보다 훨씬 아우구스티누스적이라고 확신했다. 예를 들어 슈타우피츠가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루터를 상담하면서 루터가 빌 같은 유명론자의 제자가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임을 증명할 신학적 원칙을 제시했을 때 그 과정을 시작했다. 스타인메츠가 설 명하듯이, 슈타우피츠가 “인간보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학으로 격상했을 때, “그것을 유명론적 은혜 신학을 배제하는 원칙으로 의도했으며”, 그 후 루터는 이것을 개신교에 접목했다. “이 모든 원칙에서 슈타우피츠는 유명론자라기보다는 아우구스 티누스주의자였다는 점이 중요했다”(15). 종교개혁자들의 증언과 논쟁에서 판단할 때, 스타인메츠는 표적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었다.

67) Gatiss, First Book of Homilies에서 이것을 증명하는 리 개티스의 각주를 보라.

68) Chemnitz, Examination of the Council of Trent에서 그의 첫째 및 둘째 주제를 보라.

69) 예컨대 루터에 대해서는 Dokumente zur Luthers Entwicklung, 192, 11.25-27을 보라. 참고. Calvin, Institutes 3.11.15; Cameron, EuropeanReformation, 151.

것을 인식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는 다른 문제다 ).

종교개혁자들과 중세

상관관계는

또는 ‘아니오’가 아니라 ‘예’와 동시 에 ‘아니오’다. 중세 사상( 중세 초기, 중세 성기, 중세 후기에 ) 은 단색이 아니었다. 5장에서 살펴보겠지 만, 적어도 구원론에서는 중세 후기에 비아 모데르나( 오컴, 빌 ) 가 등장하면서 변화가 일어났는

데, 종교개혁자들은 이 변화가 교부들, 중세 초기의 중세 사람들, 중세 성기의 스콜라 학자들

등 비아 안티쿠아를 대표하던 많은 사람들을 배신했다고 믿었다. 비아 모데르나의 변화는 신

아우구스티누스 학파가 최악의 경우 펠라기우스주의를, 최선의 경우 반펠라기우스주의를 비

난하는 동기가 되었다. 루터 자신도 비아 모데르나의 구원론 속에서 훈련받았고, 종교개혁을

촉발한 해( 1517년 ) 는 루터가 공개 논쟁을 통해 비아 모데르나에 반대했던 바로 그 해였다. 다시

말해서 종교개혁의 구원론적 저항의 표적은 구체적이었다. 이것은 비아 모데르나가 유일한 표

적이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원론 논쟁이 칭의론에서 성례 체계로 옮겨 감에 따라, 피터 롬

바르드 같은 사람도 공격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대립적 서사’가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스콜라 학자들에 대해 광범위한 논쟁적 발언을 했음에도, 면

밀히 살펴보면 특정 개인과 운동이 표적이 된 것이지, 중세는 말할 것도 없고 스콜라주의 시대

전체가 표적이 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70) 4장에서 설명하겠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여러 가

지 면에서 스콜라주의에 빚을 지고 있었다.

철학의 경우, 종교개혁은 교황의 신학자들이 영광의 신학( 루터의 표현대로 ) 을 입증하기 위해 아

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를 전용한 방식에 대응한 것일지 모르지만, 종교개혁자들은 고대, 교부 시대, 중세의 철학에 의존했으며, 심지어 대학교와 아카데미에 교육 과정을 만들어 다 음 세대의 개신교인에게 이런 철학을 가르치게 했다. 필리프 멜란히톤은 피터 마터 버미글리 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서 충직했다. 종교개혁자들의 저서를 맥락으로 읽고 ‘이성’ 또는 ‘철학’

에 반대하는 구체적인 논쟁적 진술을 보면, 이성이나 철학의 오용에 대한 우려는 드러나지만 그리스 사상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리스 철학의 특정한 인식론 적, 형이상학적 헌신을 전제하지 않았다면, 로마 교회에 대한 그들의 격렬한 비판은 무의미했

을 것이고, 로마 교회는 그들의 이단 비판에 대해 더 많은 탄약을 보유했을 수 있다. 더욱이 종 교개혁자들에게 미친 철학적 영향의 유형은 한결같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일부 종교개혁자 들은 고전적 실재론에 크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른 점에서 일부 종교개혁자들은 유명

론과 주의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비아 모데르나의 구원론을 거부했지만, 그들 중 일부는 비아 모데르나의 더

살펴보는데, 이 단어는 중세 시대의 모든 스콜라주 의자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흔히 칼빈이 구원론에서 벗어났다고 말한 소르본 대학교의 교수들, 즉 스콜라주의자(라틴어) 또 는 소르본주의자(프랑스어)를 자신의 문맥에서 지칭한다. 리처드 멀러의 지식이 적절할 것이다(Muller, Unaccommodated Calvin).

복잡성을 고려하지 못한다.

점에 대해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는 예상외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대립 적 서사’가 종교개혁을 반( 反 ) 그리스 철학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돌프 폰 하르나크의 그리스화

논제의 과장된 말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기묘하다. 이런 잘못된 해석의 죽음에 대해 로버트 루

이스 윌켄의 선언을 되풀이할 가치가 있다. “초기 기독교 사상의 발전이 기독교의 그리스화에

해당한다는 개념은 그 유용성을 상실한 지 오래다. 한 세기 이상 초기 기독교 사상의 해석에

영향을 끼친 19세기 교리 사학자 아돌프 폰 하르나크의 사상에 작별을 고할 때가 왔다.”72)요

약하면 오늘날 근본주의 안에서 ‘대립적 서사’가 지속되는 것은 그것이 너무 보수적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자유주의적이기 때문에 결함이 있는 역사적 해석학이다.

이런 실수를 정확히 찾아냈다면, 그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역설: 가톨릭의 본질, 개신교의 원리

분열에서 세속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종교개혁에 돌리는 경향이나 종교 개혁을 현대 자유주의 또는 반대 급진주의의 황금기로 가는 다리로 찬양하는 대중적 경향에

도 불구하고, 모든 사학자들이 이런 해석의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존경받는 종교개혁 사 학자들은 이런 이야기가 종교개혁자들 자신의 의도를 간과하고 그들의 신학적, 교회적 비전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음을 인식했다.73)

예를 들어 지난 세기의 저명한 사학자 중 한 명인 야로슬라프 펠리칸은 더 나은 서사에 기

여했다. 그는 종교개혁의 저항자 정신을 부정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개신교의 원 리라고 부르는 것 안에 내재된 보편적 본질을 간과하지 않기 위해, 종교개혁자들을 결코 순종

적인 저항자가 아닌 것으로 해석하기를 거부했다.74) 과감하게 말하자면, 이런 관점에는 역설적 인 것 ( 반드시 모순은 아니지만 ) 이 있으며, 그것은 종교개혁의 진정한 천재성과 역사에 대한 독특한 기여를 드러내는 역설이다. 루터를 이단자이자 종파 분립자로 묘사한 로마 교회 초기의 ( 때로는

지금까지 계속되는 ) 과장된 말에도, “마르틴 루터는 최초의 개신교인이었지만, 그는 로마 가톨릭의 반대자 다수보다 더 가톨릭적이었다.” 펠리칸은 이 역설이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루터 종 교개혁의 중심에 놓여 있다”라고 생각한다.75) 이런 대담한 주장은 이 책의 핵심적인 특징이기

71) 이 점에 대해서는 Dieter, “Luther as Late Medieval Theologian: His Positive and Negative Use of Nominalism and Realism,” 31-48을 보라.

72) 그는 “그리스 문화의 기독교화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지만, 이 표현은 기독교 사상의 독창성이나 유대인의 사고방식과 유대인 성경에 진 빚을 포착하지 못한다”라고 덧붙인다.

73) 돌파구를 연 연구는 두 권으로 된 Lortz, TheReformationinGermany였다.

74) 이것은 그의 표현이다. Pelikan, Obedient Rebels를 보라.

75) Pelikan, 11, 강조 추가.

펠리칸을 현대적 해석에 깨우침을 받지 못한 사학자로 치부하기 전에, 펠리칸이 ( 아돌프 폰 하

르나크가 말한 것처럼 ) 이미 언급된 개신교 자유주의자 루터를 포함하여, 지난 세기의 수많은 루터

해석에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77) 20세기에는 사학자들과 전체 운동

이 종교개혁, 특히 루터를 쉽게 영향받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각자는 종교개혁에 대한

올바른 해석의 핵심인 역설을 놓쳤다. 그 역설은 다양한 방식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책에서 몇

가지 예를 소개할 것이다. 펠리칸에게 있어 루터의 교회론은 무엇보다 이 역설을 가장 뚜렷하 게 드러냈다.

가톨릭의 본질이란 주로 고대 교회에서 발전하여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서 루터

를 위해 구체화된(그러나 소진되지는 않은) 전통, 전례, 교리 및 성직자의 태도를 의미 한다.

개신교 원리란 루터와 그의 종교개혁이 기독교 복음의 이름으로 그리고 성경의 권위 를 가지고 수행한 이 가톨릭의 본질에 대한 비판과 재구성을 요약한 용어다.78)

펠리칸은 루터의 『시편 강해』를 인용하면서, 종교개혁 초기 루터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포착 했다. “그(루터)는 자신이 중세를 포함한 모든 시대의 ‘신자들을 계승하는 자리’에 서 있다고 생

각했으므로, 자신을 낳아 준 교회와 결별하는 것을 몹시 꺼려했다.” 루터는 “혁명가로서도, 심 지어 항의하는 비판가로서도 아닌, 일차적으로 교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교회의 학자와 교수

중 한 사람으로서” 항의를 표명했다. 다시 말해서 “루터는 교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다른 구성

원에게 교회를 창조하는 복음을 고려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급진주의자와 구 별해야 한다. 급진주의자들은 “다른 곳에서 더 순수한 교리나 삶을 찾기 위해 교회를 떠났을

지 모르지만, 루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루터는 오히려 교회에 대한 충실성을 중요하게 여 겼다. “루터는 자신의 소명이 자신을 배치했다고 믿는 곳에 머물렀고, 그 소명으로 자기 눈에 교회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이는 위험에 대해 교회를 향해 말했다. 그는 분리가 아니라 선포로, 분열이 아니라 말씀으로 그 위험을 바로잡고자 했다.”79)

루터가 로마 교회와 많은 갈등을 겪었음에도, 교황이 직접 루터를 파문함으로써 오늘날 우 리가 알고 있는 개신교회가 탄생했다. 루터는 교회와 교회의 갱신을 위해 헌신했다. 그 각도에 서 보면, 루터가 새로운 교회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교황이 자신의 교인 중 한 명을 제거함으

76) 그러나 이것은 이 책이 반드시 펠리칸의 논제를 현대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용하는 것에 동의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77) von Harnack, History of Dogma, 7:173을 보라. 경건주의, 자유주의, 바르트주의는 각각 그 자체의 루터를 가졌으며. 각 루터 는 다른 루터와 모순되었다. Pelikan, Obedient Rebels, 12.

78) Pelikan, 13.

79) Pelikan, 6, 강조 추가.

로써 새로운 교회가 생기도록 강요했다 80) 루터의 입장에서

창조하지 않았으며, 교황이 고대의 신앙을 거부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루터는 새로운 복

음의 창시자가 아니었으며, 교황이 옛 복음을 거부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루터는 교황이 이

행동( 파문 ) 을 통해 루터가 주장하던 복음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라고 주장 했다. 루터에게 이것은 교황이 루터뿐 아니라 복음 자체를 정죄했다는 의미였다.”81) 그리고 교

황은 복음을 정죄함으로써 보편적 교회를 정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로마 교회는 교회에 등

을 돌렸고, 루터는 교회 곁에 남았다.”82)

펠리칸만 그렇게 본 것이 아니었다. 지난 세기에는 여러 사학자들이 이 수정에 기여했으며,

다음 장에서 그중 많은 사람을 불러 올 것이다( 샤프, 오베르만, 스타인메츠, 오즈먼트, 멀러, 판 아셀트 등 ). 83)

예를 들어 스타인메츠는 다음과 같이 썼다,

루터가 과거에게 근거를 둔 방식은 가톨릭교회의 소위 고대 전통이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이 절대 고대가 아니라 교회 역사의 후기, 흔히 훨씬 후대에 가톨릭 생활과 사상에

도입된 혁신을 나타낸다는 확신에 달려 있다⋯⋯교회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임기 또

는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교회법 성문화 또는 피터 롬바르드의 스콜라 신학 도입보다 더

앞선 시대까지 연속적으로 추적할 수 없는 관습 및 사상을 고대의 것이라고 공포했다

⋯⋯루터보다는 덜했지만 멜란히톤과 칼빈에게 종교개혁은 성경의 의미에 대한 논쟁만 큼이나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저술에 대한 논쟁이었다.84)

스타인메츠는 20세기 말에 종교개혁 사학자 팀을 모집했으며, 이들은 세 가지 수정 사항을 제 안했다. (1) 종교개혁은 다원적이었다. 다양성이 16세기를 규정했으므로( 루터파, 개혁파 등 ), 사 학자는 종교개혁들( 복수 ) 을 위한 범주를 가져야 한다. (2) 종교개혁은 연대순으로 유동적 이 었다. 현대의 해석들은 종교개혁을 불연속성을 전제로 한 해석인 반작용으로 규정하지만, 더 나은 관점은 긴 16세기( 1400-1650년 ) 다. 종교개혁을 “중세 후기와의 단절이라기보다는 중세 후

80) 루터는 LW 41:193-196에서 정확히 이것을 말했다.

81) Pelikan, Obedient Rebels, 18. “그래서 루터의 눈에는 루터가 로마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로마 교회가 루터를 떠났다. 로마 교회가 복음을 용인하는 한, 로마 교회는 그 실수에도 루터를 위한 교회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로마 교회가 복음을 정죄하고 루 터를 내쫓았을 때, 로마 교회는 종파적이 되었다. 루터가 주장한 대로 복음이 있는 곳을 교회라고 한다면, 로마 교회는 복음을 정 죄함으로써 교회를 정죄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82) Pelikan, 18.

83) Schaff, The Principle of Protestantism, 53-128; Ozment, ed., The Reformation in Medieval Perspective; Ozment, Age of Reform, 1250-1550;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Steinmetz, Luther and Staupitz; Steinmetz, Luther in Context; Janz, Luther and Late Medieval Thomism; Farthing, ThomasAquinasandGabrielBiel(파딩은 이 계열의 사고를 Heinrich Hermelink, Die theologische Fakultät in Tübingen vor der Reformation, 1477-1534까지 추적한다); Zachman, “The Birth of Protestantism? Or the Reemergence of the Catholic Church?,” 17-30; Cameron, European Reformation, 127; Muller, “The Problem of Protestant Scholasticism,” 45-64; van Asselt, Introduction to Reformed Scholasticism, 1-9.

84) Steinmetz, Luther in Context, 128, 129.

교개혁은 대부분의 기독교 교리( 삼위일체, 창조, 기독론, 성육신 등 ) 의 수정이나 포기가 아니었다. 이

런 맥락에서 종교개혁은 구원, 교회, 사회에 대한 실제적인 질문과 관련이 있었다.85) 중세의 맥

락이 없다면 종교개혁은 마치 그것이 보편적 교회와 그것의 신앙을 벗어난 것처럼, 기독교의

전면적인 포기로 보일 수 있다. 사실상 종교개혁의 “생각은 무에서 생겨나지 않았다⋯⋯또는

성경만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에서 완전히 발달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86)

마찬가지로 루터 학자인 스콧 헨드릭스를 생각해 보자. 헨드릭스는 “종교개혁은 개신교 교

회들이 기독교 초기부터 존재했던 같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떠나는 교파 분열이 아니었다. 반

대로 로마 교회의 지배층인 교황들과 주교들이 교회를 배반하고 말하자면 이단자와 마귀의 거짓 교회로 떠났으나, 개신교인들( 루터가 보기에 주로 루터교인들 ) 은 항상 존재했던 참된 기독교와 참된 교회를 보존했다”라고 말한다.87) 루터가 “거짓 교회의 특징들을 열거할” 때, 그는 “대사 부, 성지 순례, 사적 미사, 연옥, 수도원, 교황”을 포함했는데, 이 모든 것에 루터는 “참신한 것”

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88) 루터가 이런 참신한 것을 폭로하려다 파문을 당하자, 루터는 자신

이 내부에서 개혁하고자 했던 교회와 결코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89)

그럼에도 루터는 자신 또는 종교개혁을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의 일부

로 생각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루터는 요한계시록 서문을 쓰면서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의 해당 구절에 대해 논평할 때, 이렇게 고백했다. “‘거룩한 그리스도 교회를 믿나이다’라

는 신조 구절은 다른 신조에 못지않은 신앙고백이다. 자연 이성은 어떤 안경을 써도 그 교회

를 알아볼 수 없다. 마귀는 당신이 불쾌감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추문과 분열로 그 교회를 덮

을 수 있다. 하나님도 당신이 속아서 그 교회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온갖 잘못 과 결점 뒤에 그 교회를 숨기실 수 있다. 우리는 그 교회를 눈이 아니라 믿음으로 알게 될 것 이다.”90) 종교개혁을 눈으로 판단하면 이단자들의 한 종파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을 믿음으로 판단한다면 그 교회는 신경과 교회의 정체성을 주장할 모든 권리가 있다고 루터 는 말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교황직과 동등하게 주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때때로 감히 자신들의 유대 관계가 더 강하다고 주 장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황의 계승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혈통을 건전한 교리 를 신봉하는 이들로 추적했으며, 그 혈통은 사도에게서 멈추지 않고 교부 시대와 중세 시대의

85) Bagchi and Steinmetz, eds., TheCambridgeCompanionntoReformationTheology, 3.

86) Janz, “Late medieval theology,” 5. 87) Hendrix, Martin Luther, 268. 88) Hendrix, 268. ‘수도원’을 포함하려면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루터는 당시 수도원 관행이 남용되는 것을 우려했는데, 특히 그것은 ‘오직 믿음’의 부정과 관련 있었다. 그러나 수도원 제도 자체는 역사 초기 수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참신한 것 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교부들의 수도원 제도를 칭찬하면서도 중세 후기 수도원 안에 스며든 부패를 비판했다(Institutes 4.13.8-13).

89) Hendrix, 268.

90) LW 35:410; WADB 7, 419-420.

교회로도 이어졌기 때문이다.91)

결론적으로 이런 해석에 대한 강조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개혁자들 자신의 인식

을 고려하면, 종교개혁의 이야기는 보편적인 교회에서의 반항적인 이탈 이야기가 아니라 갱신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은 비판자들을 따라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인식을 따라 보편성의 운동으로 규정해야 한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종교개혁자

들이 옳았는지 판단하기 위해 교부나 중세 신학자의 말을 캐내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것 자체

는 다른 기획이다. 그 대신에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종교개혁자 스스로 자신들의 개혁을 보편

성의 갱신으로 해석했는지를 분별하기 위해 종교개혁의 새롭고 지적이며 신학적인 역사에 귀

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은 복음주의적 보편성의 갱신이라고 할 수 있고, 종교개혁 개혁파의 평가 에 따르면 개혁주의 보편성의 갱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구는 과거의 교회를 지지하는 높

은 존경심과 우선권을 모두 담고 있다. 또한 이 문구들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통해 로

마 교회가 보편적 신앙을 오해하거나 보편적 신앙에 추가한 모든 주제와 관행을 개혁 ( 심지어 변

혁 ) 하려는 중요한 직감을 전달한다.92) 종교개혁자들은 도끼를 가지고 가서, 그 나무를 베어 불

에 던지고, 새 나무를 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나무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들은 단순히 그

나무의 야만적인 가지를 잘라냈을 뿐이다.93)

종교개혁이 스스로 복음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보편성의 갱신으로, 즉 하나의 거룩하

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되찾아 오는 일로 자세를 취했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

고자 하는 이야기다.94)

91) 정확히 말하면,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을 과거와의 완전한 연속성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신화는 이 책의 주장이 아니다. 동시에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을 과거와의 급진적인 단절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 과장된 그림이 이 책이 바 로잡고자 하는 것이다. 후자를 피하기 위해 나는 가능한 한 “개신교인과 가톨릭교인”보다는 “종교개혁자와 로마 교회” 또는 “개 신교인들과 교황직” 사이의 차이를 사용하겠다. 또한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의 맥락을 기술할 때 “로마 가톨릭”이라는 명칭은 다 소 시대착오적일 수 있으므로 이 명칭을 피하려고 노력하겠다. 92) “복음주의적 보편성”이라는 표현은 Pelikan, Obedient Rebels, 25에서 사용되었는데, 펠리칸은 과거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자 세를 설명할 때 “비판적 존경심”이라는 표현도 즐겨 사용한다. 내가 변혁이라는 단어를 삽입한 이유는 베른트 함, 미하엘 벨커, 폴커 레핀 같은 사학자들이 종교개혁을 중세와의 “단절”로 보는 것에 반대하고 그 대신에 “연속성과 혁신의 복잡한 관계”를 인정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갑작스러운 움직임도 고려하면서 점진적인 성장”을 관찰한다. Leppin, “Luther’s Transformation of Medieval Thought,” 116. 참고. Hamm and Welker, DieReformation,PotentialederFreiheit 93) 캔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스콜라 학자들에 대한 칼빈의 관계를 기술하기 위해 이 예시를 사용한다. “칼빈의 복음주의 기획 은 한 방향으로 거칠게 자란 나무를 다른 방향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 가지치기를 하는 것과 비슷하며, 그럼에도 그것은 같은 나 무다.” Canlis, Calvin’s Ladder, 43. 94) 나는 16세기의 세 시기인 1510-1530년대, 1530-1550년대, 1550-1580년대 모두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겠다. 그 대신에 나는 사상의 기원과 초기 성숙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대부분 처음 두 시기로 한정하겠다.

1부

우리는 기독교적, 정통적, 보편적 신앙을 온전하고 손상되지 않게 유지한다⋯⋯또한 우리는 최근 로마 교회만을 보편적으로 인정한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도 승인하지 않 는다.

–하인리히 불링거와 『제2 스위스 신앙고백』

르네상스, 인문주의, 종교개혁이 정의상 스콜라주의에 반대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 못되었다.

–빌렘 판 아셀트

영적 상승과 신비주의적 반대

종교개혁과 수도원 제도

성령을 통해 주시는 계시는 이해력을 밝혀줄 뿐 아니라 사랑의 불을 지핀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아가서 설교』

성경과 성아우구스티누스를 제외하고는 나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 인간, 만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해 준 책이 없다.

-마르틴 루터, 『독일 신학』 전집 서문

중세 수도원 제도의 부상

처음 2세기 동안 교회는 산발적인 박해를 경험하며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 라는 예수의 말씀에 매달렸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난당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박해의 열기가 심해지면서 그리스도 에 대한 진정한 헌신이 시험대에 올랐다.

그러나 4세기에 밀라노 칙령( AD 313년 ) 이 기독교를 허용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박 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종교로 승인하면 서 기독교는 결국 국교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용인 가능성은 교회에 딜레마를 안겨 주었다. 과거에 교회는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전했다. 순교는 그리스도인의 극히 예 외적인 헌신을 상징하며 진정한 정통성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기도 했다.1) 기독교가 국가에 의 해 받아들여지고, 그 결과로 수많은 정치적, 문화적 자유를 얻게 되자, 교회는 더 이상 짊어질 1) 루터는 이 표시를 인식하고 종교개혁자들이 겪은 고난을 자신들의 보편성을 나타내는 지표로 삼았다. LW 41:193-196.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충실함을 보여 주기 위해 척박하고 거친 환경인 광야로 가서

먹을 것이 없고, 지붕도 없고, 기도와 묵상에 방해되는

통을 견디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그리스도를 모방 할 수 있었다. 수사는 구주의 고난을 앎으로써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떤 금욕주의

수사들은 세상의 육체적 쾌락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동굴에 은둔하기도 했다.2) 사회에 남아 있

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금욕주의자들을 진정한 성인으로 우상화했고, 이것은 일반 평신도와

영적 생활에서 뛰어난 그리스도인 사이의 간격만 더 벌렸다. 이런 영적 엘리트 중 일부는 성

직자였지만, 다수는 광야의 수사였다. 교부들은 이런 존중심을 장려했다. 예를 들어 아타나시

우스는 영적 헌신의 모범을 보여 주기 위해 초기 기독교 전기의 한 형태인 『안토니우스의 생

애』를 썼다.3)

시간이 흐르면서 영적 생활을 목적으로 사회를 떠나는 것은 개인의 일일 뿐 아니라 공동체

의 사업도 되었다. 예를 들어 11세기에 누르시아의 베네딕토( 약 480-약 547년 ) 의 추종자들은 “베

네딕토 규칙”에 헌신했다.4) 베네딕토는 한때 동굴에 은둔하며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했지만, 그의 규칙은 공동체 전체에 대한 것으로 각 수사가 어떤 임무에 몇 시간씩 일할 것인지 할당 함으로써 각자의 일과를 규정했다. 수도원은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금식, 기도, 육체노동 같 은 훈련에 헌신할 준비가 된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수도원의 땅에서 직접 손으 로 일한다는 것은 단순히 재산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땅의 창조주를 섬기는 방법이 었다.

영적 상승

수도원 경험의 핵심에는 신비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영적 비전이 있었다. 신비적 또

는 신비주의라는 단어는 수도원 운동 자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최근에 발명된 단어다. 완

벽하지는 않지만, 이 단어는 11세기와 12세기, 그리고 그 후에도 수도원 신학자들을 기술하는 데 피할 수 없는 단어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에 대한 수 도원의 초점을 포착한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영혼의 목표이자 영적 상승의 정점이었다. 그러

2) “초기 수도원의 한 모토는 사람의 방문을 받은 사람은 천사의 방문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Ozment, AgeofReform, 83.

3) 수도원 제도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번성하기 시작했지만, 안토니우스 같은 은둔자들과 광야의 교부들은 수도원이 그 시대 이전 에 존재했다는 증거다.

4) 베네딕토 규칙은 처음에 수사를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1) 회수도자(會修道者), “수도원에 거주하며 수도원 규칙과 수도원 장 아래에서 봉사하는 수사.” (2) 독수도자(獨修道者) 또는 은세수도자(隱世修道者), “그들은 형제들의 진지에서 누구의 지원도 없이 광야에서 단독으로 전투에 나가 자신의 힘에 의존하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육체적, 정신적 유혹에 맞서 싸울 수 있다.” (3) 사라바이따, “가장 혐오스러운 종류의 수사들로⋯⋯그들은 어떤 규칙에 의해서도 용광로의 금처럼 시험을 받지 않았고 경험을 통 해 배우지 않았으며, 그 대신에 납처럼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자신이 하는 일에서 세상에 대한 믿음을 유지한다.” (4) 기로바꾸 스, “그들은 평생을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자신의 욕망에 탐닉하고 탐욕의 올무에 걸린다.” 기로바꾸스는 전체 중 가장 나쁜 수사다. 그다음에 이 규칙은 회수도자를 자세히 다루었다. Benedict of Nursia, Rule of Benedict, 7-8.

나 타락한 이 세상에서는 그 상승을 가로막는 많은 장벽( 부유함, 성적 욕망 등 ) 이 있다. 따라서 영

적 하강을 피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스스로 정 화해야 한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상승을 위해서는 비할 데 없는 헌신으로 하나님

을 관상( 觀想, contemplation)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굶주린 영혼을

위한 영적 양식인 성경을 주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천 국의 행복으로 가는 길을 보여 주므로,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숙고함으로써 직접 하나님을 관

상할 수 있다. 관상은 단순히 개인의 일이 아니라 수도원 규율의 공동체 생활을 통해 다듬어 진다.5)

수도원 생활은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상승의 사다리를 오를 기회를 24시간 내내 제공했으므

로, 수도원 생활은 민간인의 삶보다 훨씬 우월한 것으로 여겨졌다. 수사의 엄격하고 온 마음을

바치는 헌신은 결혼과 자녀 같은 실용적이고 물질적인 우선 사항에 정신이 팔린 대부분의 다

른 그리스도인과 분리된 그리스도인 계층을 형성했다. “그러므로 불가피하게 수도원의 신비

주의적 글에서 엘리트주의의 느낌을 자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수사가 세상에 등을 돌리 고 특수한 종교적 존재 방식에 헌신한 정도를 반영한다.”6) 예를 들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수사들이 여자가 아닌 하나님에게 몸과 영혼을 바쳤으므로, 그들을 천사에 비유했다.7)

수도원에 입회하는 것은 거룩한 희생으로 여겨졌다. 수사는 거룩한 삶을 위해 세상의 모든

안락함과 관심사를 포기했다. 수사는 헌신에 수반하는 모든 고통을 감수하면서 그리스도를 따

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으므로, 민간인에 비해 천국이 더 가까이 있었다. 백성 사이에서 사 목하는 사제조차 세속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영적 관상과 황홀경의 삶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수

사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다. 수사들은 영적 엘리트로서 초자연적인 것에 훨씬 많이 접근 할 수 있었고, 그들의 경험은 때때로 기적과 환상을 받는 것뿐 아니라, 천사와의 조화 및 귀 신과의 싸움에 의해 경계를 분명히 나타내었다.8)

중세에는 베네딕토회, 아우구스티누스회, 카르멜회, 은둔자( 카르투시오회 포함 ), 도미니코회, 프

란치스코회, 시토회, 클뤼니회 등 “가족”이라고 불린 다양한 수도회가 있었다.9) 우리는 이 중 시토회,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에 주목하겠다. 예를 들어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수

세기 동안 가장 영향력 있고 신비적 영적 생활을 규정하는 두 수도회이자 최초의 탁발 수도회 로 간주되었다. 종교개혁은 수도원의 영적 생활에 빚을 진 동시에 신비주의 사고방식에 잠재 된 전제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했다.

5) Davies, “Later Medieval Mystics,” 222.

6) Davies, 222.

7) Sermo de diversis 37; Schaff, HistoryoftheChristianChurch, 5:316에서 인용

8) Schaff, 5:314-317.

9) Schaff, 5:330-426.

흰색 예복으로 구별되는 시토회는 11세기 말에 설립되었으며, 금욕주의에 대한 추구, 베네

딕토 규칙에 대한 충성, 수도원 개혁의 추구가 그 특징이다.10) 땅을 경작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은 이들은 육체노동에 자부심을 가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확보하여

자신들의 탁월함과 영향력을 확대했다. 12세기에는 잉글랜드,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에

서 시토회를 찾아볼 수 있었으며, 십자군 전쟁과 종교 재판에서 교황직과 동맹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도미니코회 수사와 달리 시토회 수사는 주로 설교자가 아니었다. 일부 프란치스코회와

달리 시토회는 신진 스콜라 학자들을 수용하지 않았다.11) 그러나 그들의 가장 위대한 신비주

의자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수사는 스콜라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지적 성향조 차 신비주의적 층의 우위에 의해 덮여 있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1090-1153년 ) 는 자신이 클레르보에 설립한 수도원에서 이름을 받았다.

베르나르는 수많은 설교와 신비주의 출판물을 통해 개혁을 진전시켰다. 베르나르는 모든 수도

원의 신비주의와 스콜라 사상을 대립시키는 지나치게 단순화한 이분법에 반대했다.12) 그는 스

콜라 철학의 최고 대표자들과 맞먹는 신학적 예리함으로 정통을 수호하면서 두 가지를 모두 구현했다. 동시에 베르나르는 논쟁의 열기 속에서 편리한 스콜라주의 스타일에 국한하지 않 고,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시적 담론으로 표현한 체험적 신학을 추구했다.13) 베르나르의 문체

는 변증법적 어조를 선호했던 후대의 스콜라 학자들 사이에서는 흔하지 않았다. 베르나르 자 신이 말했듯이, “그곳( 학교 )에서 우리는 지혜가 가르치는 것을 듣고, 여기서는 그것을 내 것으 로 받아들인다. 그곳에서 우리는 가르침을 받고, 여기서는 깊은 감동을 받는다. 교육은 지식이 풍부한 사람을 낳는 반면에, (종교 생활에서의) 유대는 지혜로운 사람을 낳는다⋯⋯그곳에서 우리

는 지혜에 도달하고, 여기서 우리는 지혜를 통찰한다.”14)

베르나르는 자주 신비주의의 모델로 칭송을 받아 이후 중세 영적 생활의 기준이 되었다. 예

를 들어 베르나르의 저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와 그가 제시한 “당신은 나에게서 왜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 듣고 싶어 한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 때문이라고 대답한다”15)라는 논제를 생각해 보자. 베르나르는 그리스도인에게 하 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했지만, 또한 그리스도인에게 처음부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

10) 그들은 흰 예복을 입기 전에 갈색 예복을 입었기 때문에 회색 수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11) Schaff, HistoryoftheChristianChurch, 5:337-342.

12) Stiegman, “Bernard of Clairvaux, William of St. Thierry, the Victorines,” 132.

13) 베르나르의 저술은 SanctiBernardiOpera에 나와 있다.

14) Bernard of Clairvaux, Sup.Cant. 23.14 (I, 147.22-148.13). 참고. Leinsle, IntroductiontoScholasticTheology, 115. 15) Bernard of Clairvaux, OnLovingGod 1.1 (p. 174).

이 친히 주신 선물임을 상기시켰다. 베르나르는 다른 신비주의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게서 근거를 찾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원인인” 이유는 “하나님이 동력인(動力因)이자 목적인”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분이 친히 기회를 제공 하신다. 그분이 친히 갈망을 만드신다. 그분이 친히 그 갈망을 이루신다.”16)

스콜라 학자와 신비주의자 사이의 이분법 재검토

3-4장에서 스콜라 철학의 부상에 대해 다룰 때,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라는 유명한 경구에서 스콜라 철 학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최초의 스콜라 학자인 안셀무스가 이 경구를 읊조렸으며, 그의 뒤를 이은 주요 스콜라 학자들이 그것을 구현했다. 스콜라 철학은 때때로 수도원 및 수도원의 영적 생활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설정되 었다. 스콜라 학자들을 중세 신비주의자들과 나란히 놓을 때, 신비주의자에게서 “나는 경험하기 위해 믿는다”라 는 새로운 경구를 들을 수 있다. 사학자 스티븐 오즈먼트는 이 차이를 다음과 같이 포착했다.

스콜라 철학의 학습 프로그램이 질문에서 논증으로 진행했다면, 수도원 프로그램은 독서에서 명상 기도

와 관상으로 옮겨 갔다. 대학교는 학자들이 독서를 통해 질문을 만들게 훈련했다⋯⋯이런 교육 방식은 진리

가 어디에 있는지를 놓고 박식한 체하기, 학파적인 파벌, 언어적 싸움을 부추겼다. 수사들과 수녀들은 수도

원에서 묵상을 준비하기 위해 책을 읽었는데, 이는 논쟁 대신 기도하는 성찰로 이어졌다⋯⋯12세기의 새로

운 수도회에서 신학은 추상적인 교리 지식이 아니라 즉각적인 실천적 지혜였다. 그것은 교리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고, 변증법적 추론이 아니라 사랑과 관상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생 빅토르의 위그와

리샤르는 베르나르와 마찬가지로 신학의 끝은 신경의 진술이나 위대한 포괄적 신학 논문이 아니라 하나님 과의 정서적 연합이라고 믿었다. 비실용적인 지혜, 즉 개인과 사회를 교화하지 못하는 사상과 교리는 쓸모

없고 적절히 배척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세 영적 생활의 기본 원칙이었다(Ozment, The Age of Reform, 81, 82, 89)

오즈먼트가 대조를 한 것은 옳았지만, 스콜라 학자와 신비주의자 사이의 구분을 그렇게 크게 확대하는 것은 현 명하지 않다. 예를 들어 오즈먼트는 스콜라 학자 안셀무스가 그의 『프로슬로기온』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 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또한 에머로 스티그먼은 과장에 대해 경고했다. “수도원 신학은 그 원천, 목적, 방법에 서 스콜라 학자들의 신학과 구별될 수 있지만, 이 두 종교적 사고방식의 차이점을 과장하고, 현명하지 못하게 그 들을 분리하기가 쉽다”(Emero Stiegman, “Bernard of Clairvaux, Williams of St. Thierry, the Victorines,” 129). 스콜라 철 학과 수도원 제도는 수 세기 동안 겹쳤을 뿐 아니라, 스콜라 학자면서 신비주의자였던 주요 대표자도 여러 명이 나 있었다. 보나벤투라가 딱 들어맞는 사례다. 여전히 스콜라 철학의 진영에 쉽게 배치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에도

16) Bernard of Clairvaux, OnLovingGod 6.22 (p. 191).

신비주의 주제는 피할 수 없었다. 3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최초의 스콜라 학자인 안셀무스는 신론을 처음부터 끝

까지 이해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기쁨, 즉 관상과 기도와 헌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복을 위한 신앙의 탐구 로 다루었다. 마찬가지로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대표적인 스콜라 학자는 신학적 해답을 추구하는 목적이 바로 지

복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에 있다고 믿었다. 토마스가 『신학요강』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은 선 그 자체이 며, 선은 사랑의 원인이다⋯⋯그러므로 선 그 자체시며 진리이신 하나님의 비전에는 이해가 필연적으로 존재하

듯이,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쁠 것이다’라는 이사야 66장 14절의 말씀처럼, 기쁨 또는 즐거운 누림도 존재

한다”(Aquinas, Compendium of Theology, 165). 토마스는 신학이 관상으로 이어지며, 그 끝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스콜라 학자와 신비주의자 사이의 차이를 지나치게 확대하면 영적 유사성뿐 아니라 신학적 유사성도

간과할 위험이 있다. 또한 안셀무스나 토마스 같은 많은 스콜라 학자들이 수사들을 가르쳤고 그들의 소명을 여러 측면에서 영적인, 심지어 수도원적인 사업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런 예리한 대조는 현명하지 않다. 중세의 특 정 인물들, 특히 기독교에 대한 지성주의적 접근보다 훨씬 깊게 신비적으로 접근한 인물들을 스콜라 철학의 진영

이 아닌 신비주의의 진영에서 되돌아보고 찾는 것은 적절하다. 그러나 많은 중세인들은 어느 한 진영에 국한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원의 영적 생활의 더 급진적인 대표자들과 스콜라주의에 대한 그들의 비판에 주목할 필

요가 있다. 그럼에도 신비주의자와 스콜라 학자를 엄격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수도원 제

도는 종교개혁의 출현을 위한 배경으로 기능할 것이며, 종교개혁에 대한 수도원 제도의 영향이 평가될 것이다. 결

국 마르틴 루터 자신도 수도원 생활 내부에서 자신의 종교개혁의 돌파구를 경험했다. 그러나 이 독일의 종교개

혁자는 해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 요소들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 안에 사랑을 창조하신다면, 그리스도인은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 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그분을 사랑하는 방법은 측량할 수 없다.”17) 베르나르는 “세상 의 다양하고 기만적인 즐거움 속에서 항상 헛된 노력을 하면서 허둥거리고 있고” 그 결과로 “지치고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방황하는 마음을 거의 용납하지 못했다. 베르나르는 그런 사 람을 배고프지만 먹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 비유했다. “그것은 자신이 배를 채우고 있는 것

이 무엇이든 아직 남아 있는 먹을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굶주린 사람과 같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즐기기보다는 항상 얻지 못한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18) 베르

나르는 이런 사람은 “창조주보다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기뻐하기 때문에( 롬 1:23 )” 결코 “행복한

실현”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만유의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보다 하나 도 빠짐없이 모든 경험을 하는 것에 강한 욕망을 느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만물의 근원 이신 만유의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에만, 시편에서 자주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매달림으로써

17) Bernard of Clairvaux, OnLovingGod 1.1 (p. 174).

18) Bernard of Clairvaux, OnLovingGod 6.18 (pp. 188-189).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1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속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지식을 얻는다고 해서 상승하는 것이 아니다. 상승은 열망에 의해 일어난다. 신앙은 종

교적 사실에 대한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종교적 체험 그 자체다.20) 그러므로 애정은 도구 역할 을 하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속으로 올라가는 데 쓰

이는 수단이다.21)

베르나르는 이런 영적 상승의 본질( 그리고 성공 ) 을 조절하는 사랑의 단계를 네 가지로 구분 했다. 사랑의 첫째 단계는 기본적인 “육체적 사랑으로, 이것으로 사람은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한다.” 사랑의 둘째 단계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만⋯⋯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사랑할 때 일어난다. 셋째 단계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사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그의 달콤함을

직접 맛보게 되면, 우리는 오직 자신의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 순수하게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신의 육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제 우리

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이 얼마나 달콤하신지 맛

보았고 알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한다.”22) 사랑의 넷째 단계는 “사람이 오직 하나님을 위해 자

신을 사랑할 때” 일어난다.23)

이 영적 상승의 목적지는 어떤 모습일까? 베르나르에게 영적 상승은 그리스도인이 자신

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 때 절정에 이른다. “마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자신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 자신을 비

워( 빌 2:7 ) 거의 소멸되는 것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하늘의 사랑에 속하는 것이다.”24) 베르나

르가 빌립보서 2장을 언급한 것이 열쇠로, 성육신이 베르나르의 영적 생활의 중심점이 된 이

유를 보여 준다. 신인( 神人 ) 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은 육체적 사랑을 목격했다. 하나님은 인

간 자체의 모습을 취하심으로써 자신의 자석 같은 사랑을 인류에게 알리셨다. 이것은 모두 사 람을 이 같은 신성한 사랑 안으로 끌어들일 목적을 위함이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이익이 아 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구하는 이 이타적이고 겸손한 사랑의 본보기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종의 사고방식을 취하면, 그는 이 세상의 어떤 사랑보다 우월한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다.” 베르나 르는 포도주 통의 예를 사용했다. 큰 포도주 통에 작은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그 물방울은

19) Bernard of Clairvaux, OnLovingGod 6.19 (p. 189).

20) 자연과 성경뿐 아니라 체험은 신성한 계시를 위한 길이다. Stiegman, “Bernard of Clairvaux, William of St. Thierry, the Victorines,” 138을 보라.

21) 그리스도인의 체험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기반이므로, 베르나르는 의지의 자유에 힘을 실어준다. Stiegman, 136 이하.

22) Bernard of Clairvaux, OnLovingGod 9.26 (p. 194).

23) 사랑의 네 단계에 대해서는 Bernard of Clairvaux, OnLovingGod 8.23-9.30 (pp. 192-197)을 보라.

24) Bernard of Clairvaux, OnLovingGod 9.27 (p. 195).

열심히

주님의 기쁨을 향해 달려갈 때( 마 25:21, 25 ), 육체의 얽매임이 뒤에서 그를 붙잡지 않고 어떤 문 제도 그를 방해하지 않을 때” 발견된다. 이 사랑의 넷째 단계는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가장 독실하고 희생적인 순교자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그들은 육신

벗어나 “영원한 빛과 밝은 영원의 바다에 온전히 잠겼다.”26)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베르나르의 영적 비전에서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것은 그의 『아

가서 설교』에서 두드러진다. 베르나르는 젊은 수사 시절에 병에 걸렸다. 그는 너무 열심히 일

한 나머지 몸이 그 영향을 느끼고 휴식을 요구했다. 수도원에서 피정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베르나르는 생티에리의 기욤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함께 정원을 거닐며 아가서를 묵

상하며 원기를 회복했다. 1135년부터 별세할 때까지 베르나르는 아가서를 설교했다.

베르나르는 4중적 해석 방법을 사용하여 아가서를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 사이의 결

혼에 검증된 책으로 간주했다.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때 “최고의 행

복”을 느낀다. “성부는 성자 없이는 알려지지 않고

이다⋯⋯[그리고] 성부와 성자가 온전히 알려진 곳에서, 어떻게 성령이신 그들의 선하심이 알

려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27)

그래서 신부(新婦)가 키스를 청할 때 신부는 인간의 육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이 삼

중 지식의 은혜로 넘쳐나기를 간청한다. 신부는 성자에게 그것을 구한다. 이는 성자가 자

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계시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마 11:27). 그러므로 성자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렇게 할 때 성부를 계시하신다. 의심할 여

지 없이 그분이 이 계시를 주는 것은 입맞춤을 통해, 즉 성령을 통해서다⋯⋯그러나 성

령을 통해서 계시하기 위해 성령을 주실 때, 그분은 성령도 계시하신다. 그분은 주는 가

운데 성령을 계시하시고, 계시하는 가운데 성령을 주신다. 그분이 성령을 통해 주시는 계

시는 이해를 밝혀 줄 뿐 아니라, 또한 사랑으로 불을 붙인다(롬 5:5).28)

베르나르의 마지막 문장은 신비주의자의 궁극적 목적의 주요한 예다. 성령은 모든 수도원의

25) Bernard of Clairvaux, OnLovingGod 9.27 (p. 196).

26) Bernard of Clairvaux, On Loving God 9.28-30 (pp. 196-197). 이것은 베르나르가 미래의 육체적 부활을 다룰 자리가 없음 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이 문제를 길게 다룬다.

27) 베르나르에게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과 선하심이다.” Bernard of Clairvaux, SermonsontheSongofSongs, Sermon 8, 1.3 (p. 237). 그래서 성부는 성자에게 입맞춤하시며 그에게 자신의 신성의 신비를 온전히 부어 주시고, 사랑[성령]의 달콤함 을 불어넣으신다. Sermon 8, 6.6. 베르나르가 생티에리의 기욤과 함께 아가서를 묵상하게 된 자세한 내용이 Sermons, 209에 나 와 있다.

28) Bernard, Sermon 8, 2.5 (p. 238).

신다. 여기에 영혼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한 지침이 있다.

생 빅토르의 위그와 생 빅토르의 리샤르 생 빅토르의 위그( 약 1096-1141년 ) 와 생 빅토르의 리샤르( 1173년 별세 ) 도 베르나르와 다르지 않

았다. 그들 역시 영적 상승을 삼위일체와의 연합으로 기술했으며, 그들 역시 수도원 개혁을 추

구했지만 빅토르의 유산 안에서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 모두 한 손으로는 스콜라 철

학의 엄격함을, 다른 한 손으로는 체험적 경건을 꼭 잡고 있었다. 예를 들어 생 빅토르의 위그

는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훨씬 전에 포괄적인 기독교 신학 논문을 썼다. 어떤 사학자들은 생 빅

토르의 위그가 “빅토르의 신학적 성찰을 가톨릭 정통주의의 틀 안에서 유지했을” 뿐 아니라 “스콜라 철학의 방법으로 발전한 것을 일반적으로 수용하게 만든” 공로를 인정했다.29)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위그의 개념, 즉 그의 영적 주석 모델은 베르나르 못지않게 관상을 중

시했다.30)

생 빅토르의 리샤르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리샤르는 삼위일체 정통

주의를 옹호했다. 리샤르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한계 안

에서 기술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샤르는 사랑의 개념을 직접 사용하

여 한 위격 또는 두 위격 대신에 세 위격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자신만의 특징

을 더했다. 복수의 위격이 아니라면, 어떻게 사랑이 무상일 수 있을까? “무상의 사랑의 충만함

은 성부 안에 있고, 갚아야 할 사랑의 충만함은 성령 안에 있으며, 무상의 사랑과 갚아야 할 사

랑의 충만함 둘 다 성자 안에 있다.”31)

복수의 인격에서 복수의 신적 위격으로 이동한 리샤르의 논리는 영적 상승에 대한 리샤르 의 이해에 영향을 미쳤다. 성령은 성경에서 사랑의 은사로 묘사되기 때문에, 성령의 사명은 성

령이 내주하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주입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성령은

신성에 내재하는 합당한 사랑이 인간의 영혼에 불어넣어질 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것 이다. 사실상 이 성령이 이성적인 영혼에 들어갈 때, 그 영혼이 창조주에게 빚진 사랑을 창조

주를 향해 표현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성령은 그 영혼의 정서에 신성한 열정으로 불을 붙이고 자신의 성품과 비슷한 성품을 전달함으로써 영혼을 변화시킨다.”32)

11세기와 12세기에는 시토회가 두각을 나타냈지만, 13세기에는 탁발 수도회( 도미니코회와 프

란치스코회 ) 에 의해 그 명성이 가려졌다.

29) Stiegman, “Bernard of Clairvaux, William of St. Thierry, the Victorines,” 143.

30) Hugh of St. Victor’s MysteriesoftheChristianFaithandhisDidascalicon에 둘 다 나와 있다.

31) Richard of St. Victor, OntheTrinity 6.14 (pp. 219-220).

32) Richard of St. Victor, 6.14 (pp. 219-220). 영적 상승에 대한 리샤르의 기술이 그의 책 MysticalArk에 나와 있다.

갱신으로서의

옷을 입은 도미니코회 수사들

도미니코 수도회는 창시자 도미니코 구스만( 약 1170-1221년 ) 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도미

니코는 스페인 출신이었지만 일찍이 카스티야의 칼레루가에 있는 고향을 떠나 선교사가 되 었다. 도미니코는 랑그도크에서 발도파 사람들과 카타리파 사람들을 만났으나, 그들과 합류하

기보다는 가톨릭교회의 울타리 안에 남아 있기로 결심했다. 그럼에도 도미니코는 청빈과 설교

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서 엄청난 가치를 발견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을 전하고자 열망하는 13세기의 거리 설교자로서 음식을 구걸하는 생활 방식에 헌신했다. 도

미니코는 이전의 수도원 방법론에서 분명한 일탈을 보여 주었다. 이전에는 신비주의자들이 하

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사회에서 물러났지만, 도미니코는 지역적으로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 에게, 국제적으로는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회로 돌아갔다. 그의 방법론과 사명에

대한 반전은 수도원 제도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33)

도미니코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 1215년 ) 에 지원을 청원했으나,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

를 거절했다. 도미니코는 발도파나 카타리파처럼 반대파는 아니었지만, 인노첸시오 교황에게

는 또 하나의 수도회를 설립하는 것이 불필요하게 보였으므로, 교황은 도미니코에게 기존 아

우구스티누스회에 합류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인노첸시오의 후계자인 호노리오 3세는 전

임자와 생각이 달랐다. 도미니코는 교회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했고, 구걸과 설교를 강조하

는 그의 태도는 교회에도 도움이 되었다. 1216년에 호노리오는 새로운 수도회를 승인했고, 1217년에 도미니코와 그의 도미니코회 사람들은 수사( friar ) 로 임명되었다.34) 검은 옷으로 구

별되는 도미니코 수사들은 이제 교황의 승인을 받아 사회에서 설교할 수 있게 되었다. 도미니 코 수도회는 프랑스 남부에서 시작했지만, 곧 수많은 나라로 퍼져 나가 그들의 선교 방식을 실 천했다. 설립 후 수년과 수십 년 동안 도미니코 수사들은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스페인에서 독

일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에서 잉글랜드에 이르기까지 정착촌과 수도원을 설립했다. 도미니 코 수도회의 명성은 세 가지로 특징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

첫째, 도미니코회 수사들은 학문에 전념했다. 다른 수도회의 수사들과는 달리, 도미니코회

수사들은 스콜라 철학의 방법과 스콜라 신학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가장 유명한 신 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 4장을 보라 ) 가 그 전형적인 예가 된다. 그러나 신학 연구에 대한 도미 니코회의 헌신은 수도회를 기로에 놓이게 만들었다. 과거에 수도회는 수사들에게 육체노동을 하게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노동은 수도회의 물류적 필요와 심지어 영적 훈련에 도움이 되 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신학 공부에는 상 당한 시간이 걸리며, 특히 정확한 표현을 필요로 하는 스콜라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많은

33) Schaff, HistoryoftheChristianChurch, 5:420; Needham, TwoThousandYearsofChrist’sPower, 2:348. 34) 라틴어로 frater는 ‘형제’를 의미한다.

불가능했다.

은 자기 수사들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에게도 설교했다. 그들의 선포 스타일이 열정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청중의 회심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열정은 이단에 대해 적

대적인 형태를 띨 수 있었다.

셋째, 도미니코회는 종교 재판에 참여했다. 적지 않은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문제의 이단자 들을 표적으로 삼는 저격수가 되었다. 13세기 초부터 30년 동안 도미니코회는 보편적 기독교

를 벗어난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주요 유럽 국가에서 종교 재판의 대의명분을 주도하며 종

교 재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도미니코회 수사들은 상류 사회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청빈에 대한 헌신을

지지했지만, 청빈에 대한 논쟁으로 심각하게 분열된 적이 없었다.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에 대

해서는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회색 옷을 입은 프란치스코회 수사들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검은 옷을 입은 수사들로 구분되었다면,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회색 옷을 입은 수사들로 구분되었다. 검은 옷과 회색 옷을 혼동하는 것은 사소한 위반으로 보일 수

있지만, 중세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다른 수도회의 경쟁 이념을 혼동하는 것에 대해 쉽게 용서

받지 못했다.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1182-1226년 ) 에게서 그 이름을 따왔다.35) 도미니

코 구스만과 도미니크회 수사들은 스페인에서 기원했지만,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회 수사

들은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유명해졌으며, 그는 평생 탁발에 전념했으므로 가난 부인( Lady Poverty ) 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헌신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었다. 프란치스코와 프란 치스코회 수사들은 탁발 수사로 불렸다. 가난 부인과 함께 프란치스코와 그 뒤를 이은 프란치 스코 수사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설교했다. 그들은 이 모델, 즉 청빈과 설교가 사도들의 실천 에 기초한 것이라고 믿었고, 바로 그런 이유로 그들은 사도적 생활( vita apostolica ) 이라는 명칭을 얻었다.36)

프란치스코는 스콜라 신학에 동조하지 않았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특징인 단순한 삶을 이루어야 한다. 중세 스콜라 철학의 교양 있는 이론들은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가 난의 힘으로 열정을 다해 섬기려 했던 바로 그 사회의 극빈자들의 상황과는 무관했다. ‘프란치

35) 프란치스코회는 작은 형제회와 작은 탁발 수도사회로 불리기도 한다.

36) Steinmetz, Luther in Context, 127

규칙’은 제자들에게 가난이 그리스도인의

프란치스코회는 땅도 수도원도 교회도 사들이지 않았다.

도미니코는 인노첸시오의 지원을 끌어내는 데 실패했지만, 프란치스코는 실패하지 않았으 며, 이것은 제자들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무엇이 인노첸시오에게 새 수도회를 지원하게 설 득했을까? 꿈이었다. 1210년 어느 날 밤에, 교황은 잠을 자고 있었는데 예고 없이 성요한 라 테란 대성당( 로마 ) 으로 안내되었다. 그 성당은 거의 무너지고 있을 정도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 프란치스코가 나타나 두 손으로 성요한 라테란 대성당을 들어서 자신의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다음 성당의 안정성과 장수를 확립했다. 교황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의 정당성을 열렬히 인정했고, 이는 이탈리아와 다른 많은 유럽 국가에 수도회를 설립하는 원

동력이 되었다.

교황 인노센치오 3세에게 동기를 부여한 것은 단지 꿈만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카타리파는

적지 않은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인노첸시오는 그것의 적대적이고 심지어 이단적인 성격 때

문에 그 저항을 진압해야 했다( 7장을 보라 ). 인노첸시오의 관점에서 카타리파는 이단 운동이 교

회의 관할권 밖에서 얼마나 위태로울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주었다. 평신도들이 그 영적 운동

의 희생을 찬양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희생에 공감해서, 교황의 부유함과 가난 부인 사

이의 극명한 대조를 드러낸다면 더욱 위태로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노첸시오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 한 그룹의 신비주의자를 진압하는 동시에 다른 그룹의 신비주의자를 하나의 수

도회로 세울 수 있을 것이었다. 두 가지를 모두 달성하면 교황직에 충성하는 신비주의자들은

복을 받고, 교황직에 반대하는 신비주의자들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었다. 인노

첸시오는 그 비전을 실행에 옮겼다. 인노첸시오는 카타리파에 대한 십자군 전쟁( 알비 십자군 전

쟁 ) 을 시작하고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승인했다.37)

처음에는 축복처럼 보였던 것( 교황의 승인 ) 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프란치스코는 가난 부인 을 그의 길잡이이자 목표로 삼아 프란치스코회를 시작했다. 교황이 개입하면서 프란치스코회 는 장기적인 생존을 보장받는 단체가 될 기회를 얻었다. 박해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 는 반대파 집단과 달리, 교회가 승인한 수도회는 번창할 수 있었고 심지어 새로운 권력의 고지

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가가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었던 프란치스코에게는 관료주의가 달갑지 않았다. 프란치스코회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원래 의도와 달리 교황 호노리오 3세는 프란치스코 수도 회의 형식화를 밀어붙였다. 프란치스코의 원래 비전은 사라지고 있었으며, 결국 1220년에 프 란치스코는 사임했다. 프란치스코의 의심은 옳았다. 이듬해 교황의 추기경이었던 우골리노의 규칙이 프란치스코의 규칙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이 규칙은 가난 부인을 몰아내고 추종자 들이 법적으로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도 재산을 소유할 방법을 찾았으며, 프란치스코가 궁극

37) Ozment, AgeofReform, 99.

적으로 양심에 호소하는 것을 교황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으로 대체했다.38) 프란치스코의

단순한 영적 본질이 지배하던 수도회는 더 야망 있는 성직자들에 의해 압도당했다.

그러나 1224년에 프란치스코가 자신이 세운 수도회를 떠난다는 것은 그의 명성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보도에 따르면 그의 손과 발, 심지어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프란

치스코는 부상당한 희생자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처럼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

기적적인 흔적, 즉 성흔( stigmata ) 은 프란치스코에게 성인이 될 자격을 주었다. 결국 프란치스

코는 청빈, 탁발, 설교, 양심에 대한 충실,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신앙이라는 신비

체험의 기본 원칙에 여전히 헌신한 채 은둔자로 죽었다. 프란치스코는 죽기 전에 ‘유언’을 완

성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둥과 그 중에서도 거룩한 청빈을 거듭 강조하고,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규칙을 상기시켰다. 프란치스코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규칙이 교황직에 의해 부패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나는 어떤 형제도 설교의 필요성이나 박해를 피할 피난처를 구실로 교회나

다른 장소를 위해 스스로 또는 중개자를 통해 로마 교황청에게서 어떤 특권도 받지 말라는 명

령에 순종하기를 긴급하게 요구한다.”39)

우골리노 추기경과 함께 시작한 변화는 프란치스코가 별세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예를 들

어 프란치스코와 그의 영적 삶에 대한 비전은 스콜라 철학과 정반대였지만, 후대의 프란치스

코 수사들은 스콜라 철학을 수용했다. “새로 설립된 도미니코 수도회와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기독교와 고전 철학 사이의 화해를 시도했으며, 그것은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 새로운 자극

을 주었다.”40) 헤일즈의 알렉산더, 보나벤투라, 니콜라스 드 리라, 둔스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 엄 등 중세 성기와 중세 후기의 많은 스콜라 학자들이 프란치스코회 수사였으며, 이것은 종교 개혁이 출현할 무렵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어느 정도 발전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모든 프란치스코회 수사가 똑같지는 않았고, 어떤 수사는 다른 수사보다 훨씬 종말 론적이었다. 보나벤투라와 피오레의 요아킴, 이 두 사람을 예로 들어 보자. 요아킴은 보나벤

투라가 태어나기 15년 전에 죽었지만, 훗날에 있을 보나벤투라의 더 온건한 신비주의를 요아

킴과 요아킴의 종말론적 비전을 계승한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더 종말론적인 신비주의와 대 조하기 위해 먼저 보나벤투라를 살펴보겠다.41)

보나벤투라

보나벤투라( 약 1217-1274년 ) 또는 조반니 디 피단자는 최고의 스콜라 학자이자 헌신적인 영적

38) 프란치스코의 생각에서 “양심”에 대한 것이 Needham, Two Thousand Years of Christ’s Power, 2:343-345에 나와 있다. 39) Francis of Assisi, Brother Francis, 52. 40) Davies, “Later Medieval Mystics,” 223. 41) 스티븐 브라운은 이 둘을 비교하면서 그들의 언어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나벤투라의 다층적 언어 사용에는 그의 상 징과 은유를 지배하고 안내하며 풍요롭게 하는 일정한 규율이 있다. 이 규율은 신비주의 저자들과 그들의 뒤를 따르는 프란치스 코회 형제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극단적인 해석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Introduction,” in Bonaventure, Journey of the Mind to God, x를 보라.

신비주의자였다.42) 1257년부터 프란치스코

는 영혼의 순례기』 같은 책을 저술하여 프란치스코 신비주의의 신학적 기초를 놓았다. 보나벤

투라는 알베르노산에 은신하여 홀로 영적 상승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보나벤

투라는 “평안에 대한 내 영혼의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 조용한 은거지로 물러났다고 말

했다. 보나벤투라는 조용히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묵상하며 프란치스코 자신이 어떻게 관상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생각했다. 『순례기』는 보나벤투라가 발견한 것으로, 보나벤투라가 같은 영 적 탐구를 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쓴 매뉴얼이다. 보나벤투라는 하나님의 임재로 날아오르

는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천사를 통해 상승의 본질을 설명했다. 여섯 단계 또는 조명의 단계

는 영혼의 깨우침을 받은 상승을 명시한다.43)

보나벤투라의 『순례기』를 마치 보나벤투라가 혁신적인 영적 탐구를 추구한 것처럼 읽어서

는 안 된다. 영적 강조에 대한 보나벤투라의 개요는 그 이전의 사람들, 즉 교부들과 중세 사람

들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같은 중세 시토회 수사들

과 마찬가지로 보나벤투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생 빅토르의 리샤르와 아시시의 에디지오도

영적 상승의 사다리에서 자신들의 ‘단계’를 제시했으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보나벤투라도

자신의 『순례기』에서 프란치스코가 성흔을 받을 때 본 것 같은 천상의 존재인 치품천사( seraph ) 에게 호소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란치스코의 영향을 받았다.44)

자신보다 앞선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처럼, 보나벤투라도 행복을 “최고의 선( Supreme Good ) 을 누리는 것”으로 정의했지만, “최고의 선은 우리 위에 있으므로 누구라도 육체적 상승 이 아니라 마음의 상승으로 자기 자신 위로 올라가지 않는 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보나벤

투라는 이런 상승이 인간 자신의 힘에서 비롯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보나벤투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월한 힘이 우리를 들어 올리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 위로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런 도움을 받으려면 그리스도인은 “경건한 마음으로, 즉 이 눈물의 골짜기에서 간절한 기도로 간구함으로써” 자신을 낮춰야 한다.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적 상승을 위해 도움이 되는 열쇠다. 보나벤투라는 디오니시우스와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주의 신학』을 따라 기도는 “영혼의 모든 상승 노력의 어머니이자 기원”이라고 말했다.45)

보나벤투라가 스콜라 철학의 관점에서 제1 원리라고 명명한 하나님께로 올라가기 위해, 그 리스도인은 “육체적이고 시간적이며 우리 밖에 있는 흔적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일 단 물질세계를 지난 다음,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보나벤투라에게 마음은 하나님의 형 상 ( imago Dei ) 이었다. 마음과 하나님의 형상 사이의 연결이 보나벤투라의 논문 말미에서 중요

42) 어떤 사람들은 보나벤투라의 생년을 약 1221년으로 본다.

43) Bonaventure, Journey, 1.2.

44) 보나벤투라는 베르나르의 『성찰에 대해』와 리샤르의 『신비한 궤』 같은 책의 영향을 받았다. 리샤르, 에디지오, 프란치스코를 보나 벤투리와 비교한 내용이 “Introduction,” in Bonaventure, Journey, x-xv에 나와 있다.

45) Bonaventure, Journey 1.1.

리스도는 목적지일 뿐 아니라 길 그 자체며, 또는 보나벤투라의 표현으로는 창세기와 야곱 의 사다리를 암시하는 사다리다.46) 이 사다리에는 여섯 개의 상승 단계가 있으며, 창조의 6일 과 마찬가지로 이 여섯 단계는 영혼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기 위해 잘 정리되고 준비되어 있다.47) 이 깨달음의 여섯 단계( “관상의 고요함” ) 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피조물을 하나님의 자취로 간주함으로써⋯⋯눈에 보이는 창조 세계의 거울 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48) 보나벤투라는 신앙과 이성을 동원하며, 이들은 둘 다 하나 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한다( 히 11:3 ). “그러므로 영혼은 눈에 보이는 것

들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에 대한 성찰로 올라간다.”49)

둘째, 우리는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을 봄으로써⋯⋯눈에 보이는 창조 세계의 거울에서 하

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분의 본질, 그분의 능력, 그분의 임재로 그 피조 물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이다.”50) 보나벤투라는 사도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아리스토텔레스 를 종합하여, 오감을 사람이 영적인 것을 목격할 수 있게 영혼을 물질로 인도하는 문으로 기술 했다. 하나님은 단순히 창조 세계를 통해 일하실 뿐 아니라 창조 세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 신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빚을 진 보나벤투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에 서 이렇게 썼다. “이 보이는 세계의 피조물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나타내는데, 그 이 유는 부분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자 원형이며 목표기 때문이다.”51)

셋째, “우리 자신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거울을 통해 우리 마음의 얼굴 위에서 하나님 을 보게 된다. 그곳에는 가장 복되신 삼위일체의 형상이 찬란하게 나타난다.”52) 하나님의 형상

에서 삼위일체의 반영을 식별하기 위해 프란치스코회가 삼위일체의 반영으로 보는 ‘기억, 지 성, 의지’를 강조한 점에서 보나벤투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전달한 것이 분명 하다. 스콜라 철학의 원칙을 결코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보나벤투라는 자연철학, 이성철학, 도

덕철학이 이런 연결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53)

넷째, 우리는 “우리를 ‘통해서’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제1 원리를 관상한다.” 이전 단계에 서는 하나님이 영혼에 얼마나 가까이 계신지 밝혔지만, 제1 원리는 ‘내면’에서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데, 그것은 타락한 세상의 감각들이다. “많은 염려 로 인해 산만해져서 인간의 마음은 기억을 통해 자체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감각적 이미

46) Bonaventure, Journey 1.9.

47) Bonaventure, Journey 1.3-4.

48) Bonaventure, Journey 2.1.

49) Bonaventure, Journey 1.13.

50) Bonaventure, Journey 2.1.

51) Bonaventure, Journey 2.12.

52) Bonaventure, Journey 3.1. 강조 추가.

53) 예를 들어 자연철학을 생각해 보자. “형이상학은 사물의 본질을 다루고, 수학은 수와 도형을 다루며, 물리학은 자연, 힘, 확산 작 용을 다룬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제1 원리인 성부로, 수학은 성부의 형상인 성자로, 물리학은 성령의 은사로 이어진다.” Bonaventure, Journey 3.6.

보나벤투라는 넘

어져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의 비유를 사용했다. 누군가가 “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도움

을 주어야” 한다. 영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다. 그분은 육신을 취하심으로써 죄인의 중

보자가 되셨다. 그래서 “우리가 낙원에 들어가는 것처럼 진리의 향유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 면,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소망, 사랑을 통해 들어 가야 한다. 그분은 낙원의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 같으시다.”55) 보나벤투라는 소망과 사랑

으로 갈망과 애정, 즉 진실한 성품을 나타내려 했다. 그 결과 이미지가 변화하고 영혼이 위로

올라가며, 이것은 깨달음뿐 아니라 완전함도 가져다준다. 보나벤투라는 이런 상향 이동을 계

층적이라고 명명하고, 그리스도를 ‘최고위자’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의 배우자,

즉 온 교회와 모든 성화된 영혼을 정화하고 계몽하고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56)

보나벤투라에게 영적 상승과 성경 해석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존재한다. 보나벤투라 의 성경 해석법은 그의 영적 비전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최고위자( 그리스도 ) 와 계층적 과정( 상 승 ) 은 성경의 줄거리를 따라 움직인다. 보나벤투라의 세 가지 법을 생각해 보자.

법, 주요 부분,

영적 의미

법 주요 부분 영적 의미

자연의 법 모세의 법은 정화한다 비유적. 삶의 의를 위해 정화한다

성경의 법 선지자들은 깨닫게 한다 풍유적. 이해의 선명성을 위해 깨닫게 한다

은혜의 법 복음(복음 교리)은 완전하게 한다 유비적 . 영적 이동과 가장 달콤한 지혜의 인식을 통해 완전하게 한다 57)

이 세 가지 법은 정적인 평원 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이야기의 드라마와 함께 ‘그

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절정을 이룬다. 보나벤투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영을 위로 끌어올리

는 완전하게 하는 메커니즘으로 간주했다.58)

다섯째와 여섯째. 지금까지 보나벤투라의 여정은 외부( 창조 세계의 흔적 ) 에서 내부( 하나님의 형

54) Bonaventure, Journey 4.1.

55) Bonaventure, Journey 3.2. 강조 추가.

56) “그것은 이미지의 개혁, 신학적 덕, 영적 감각의 즐거움, 위로 올리는 이동에 의해 우리의 영이 계층적으로 될 때, 즉 정화되고, 계 몽되고, 완전해질 때 우리의 마음속으로 내려온다.” Bonaventure, Journey 4.4.

57) 보나벤투라는 이 세 가지 법을 모두 기술했으나, 계층적 도표는 내가 만든 것이다. Bonaventure, Journey 4.6.

58) “이 모든 지적인 빛으로 가득 차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집같이 신성한 지혜가 거주하는 곳이 되며, 그것은 하나님의 딸, 배 우자, 친구가 되고,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 자매, 공동 상속자가 되며, 그것은 성령의 전이 되며, 신앙이 기초를 놓고, 소망이 그것을 세우며, 영혼과 몸의 거룩함이 그것을 하나님께 바친다.” Bonaventure, Journey 4.8.

) 로 옮겨 갔지만,

으로 이동한다.59) 보나벤투라 같은 스콜라 학자에게 ‘위’로 이동한다는 것은 모든 완전성을 지 닌 하나님의 존재( 본질 ) 를 관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은 이런 목적에 도움이 된다. 상 승하는 영혼은 “하나님의 첫째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와⋯⋯나는 나다라는 것을 선언하면서, 일차적으로 그리고 주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60) 보나벤투라는 그 이

전의 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이 표현한 하나님에 대한 고전적 교리를 정리하여, 하나님을 가

장 완전하고 순수한 존재, 실로 순수 현실태 그 자체로 묘사했다.61) 그분의 존재는 단순하며, 부분이나 조성이 없고, 분할할 수 없고, 부패할 수 없다. 보나벤투라는 안셀무스의 말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면서, 이 “최고의 선은 그보다 더 큰 선은 생각할 수 없는 선”이라고 말했다.62)

보나벤투라는 완벽을 만드는 속성에는 모든 한계를 배제하는 완전성이 뒤따라야 한다고 추론 했다.63) 신적 자존성, 영원성, 불변성, 전능성을 제외하고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서 11장 36절

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라고 말한 그분이 될 수 없다. 영적 상승

의 기초가 되는 이런 기본 전제는 보나벤투라의 고전적 신론 개념에 달려 있다.64)

보나벤투라는 상승이 일어날 수 있는 기초인 순수 현실태로서의 하나님을 확립한 후, 삼위

일체의 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다시 한번 신적 단순성으로 돌아갔다. 신적 완전성에서 신적

위격으로의 이런 전환은 보나벤투라의 최상의 기술어(記述語 ) 인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을 중심 개념으로 두고 진동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마음의 눈으로 그 원리의 순수 현실태인 그 선의

순수성을 바라볼 수 있다면⋯⋯당신은 그 최고의 선의 최고의 소통 가능성을 통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위격은 그들의 최고의 선하심으로 인

해 필연적으로 최고의 소통 가능성을 가져야 하고, 최고의 소통 가능성으로 인해 그들은 필연 적으로 최고의 동일본질을 가져야 한다.”65) 성자가 신성에 있어서 성부와 동일본질이라면, 바 울이 말한 것처럼 성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골 1:15 ). “왜냐하면 형상이 표현된

유사상이라면, 우리의 마음이 본질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를 관상할 때, 우리의 인간성은 놀랍게 높아지고 형언할 수 없이 하나가 되며, 동시에 하나가

59) Bonaventure, Journey 5.1.

60) Bonaventure, Journey 5.1. 강조 추가.

61) 예. 다마스쿠스의 요안니스와 보이티우스

62) 보나벤투라는 짧지만 존재론적 논증에 대한 찬사까지 보냈다. Bonaventure, Journey 6.2.

63) 보나벤투라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유사점을 놓치기가 쉽지 않다. 보나벤투라는 『고백록』을 연상시키는 글에서 “존재 자체는 처음 이자 마지막이며, 영원하면서도 가장 현재적이고,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위대하며, 가장 실제적이면서도 가장 변하지 않고, 가 장 완벽하면서도 가장 광대하며, 지극히 하나이면서도 만물에 퍼져 있다”라고 썼다. Bonaventure, Journey 5.7(참고. 5.8). 64) 신의 단순성은 보나벤투라의 완전한 존재 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조성을 가진 존재는 “지극히 하나”일 수 없기 때문 이다. 그 결과는 영적 상승에 치명적이다. 그분의 존재는 “지극히 하나이면서도 널리 퍼져 있으므로, 만물 안에 있는 만물(all in all)이며, 만물은 많지만 그분의 존재는 그 자체로 오직 하나다. 그분의 존재의 지극히 단순한 단일성, 가장 고요한 진리, 가장 진 실한 선함을 통해, 그분의 존재가 그 자체 안에 모든 힘, 모든 모범, 모든 소통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물 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에게로 돌아간다. 그분이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전선(全善)하시기 때문이다.” Bonaventure, Journey 5.8.

65) 이 논리에 따라 그는 본성의 최고의 유사성, 최고의 상호 동등성, 최고의 영원한 공존, 최고의 상호 친밀성(perichoresis), 최고의 동일성, 본질의 절대적으로 분할되지 않음을 열거했다. Bonaventure, Journey 6.2.

가지 법에 따르면, 마지막 법은 순례자를 완전하게 하는 능력을 가진 복음으로 인도하는 은혜 의 법이다. 창세기를 이 유비적인 틀 안에서 읽으면, 모든 것이 앞뒤가 맞다. “그러므로 그것(우 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여섯째 날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여섯째 단계에서 그 조명의 완전함에 도달한다.”66)

확실히 보나벤투라는 이 상승이 하나님의 도움, 즉 하나님의 은혜 없이 시작( 1단계 ) 하거나

끝( 6단계 ) 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나벤투라는 인류의 타락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빛과 어둠의 대조를 사용했다. “참된 빛에서 변할 수 있는 선( 善 ) 으로 돌아섬으로써, 첫

사람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빗나갔고, 전체 인류는 원죄로 인해 정도를 벗어났으며, 원죄는 인

간의 본성을 두 가지 방식으로 감염시켰다. 원죄는 마음을 무지로, 육체를 정욕으로 감염시 켰다.” 무지는 보나벤투라가 실명하는 것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어둠과 빛을 자주 대조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원죄의) 결과는 사람이 눈이 멀고 구부러져, 은혜가 그를 도와주지 않는

한, 즉 의가 정욕과 싸우고 지식과 지혜가 무지에 대항하지 않는 한, 어둠 가운데 앉아 하늘의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은혜는 보나벤투라가 지혜, 은혜, 진리라고 불렀던 성육신하신 말

씀과 함께 왔다.67) 하나님의 은혜도 필요하지만 참여도 필요하다. 은혜는 신성에 참여하기 위한 길에 선행하고

길을 준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올라가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본성을 변형시키는 죄를

피해야 한다. 그 사람은 영혼의 자연적인 힘을 그 힘을 개혁하는 은혜의 영향 아래 두어야 하

며, 기도를 통해 그렇게 한다. 그는 그 힘들을 정화하는 정의의 영향력에 복종시켜야 하고, 이 것을 매일의 행동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는 그 힘들을 깨달음을 주는 지식의 영향력에 복종

시켜야 하고, 이것을 묵상을 통해 그렇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 힘들을 완전하게 하

는 지혜의 능력의 영향력에 넘겨주어야 하며, 이것을 관상을 통해 그렇게 해야 한다.”68)

보나벤투라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스콜라 철학의 탐구로 『순례기』를 마무리했지만, 전체

를 지적인 노력보다 영적 수련으로 구성했다. 상승의 순례는 사색을 수반할 수 있지만 결코 헌 신 없이는 불가능하다.69) “이 통과에서 완전해지려면 모든 지적 활동을 포기하고 가장 고상 한 애정을 하나님께로 옮겨 그분 속으로 변화되어 들어가야 한다.” 보나벤투라는 신비적이라

66) Bonaventure, Journey 6.7.

67) 보나벤투라는 이 점에서 바울처럼 생각하려는 것 같다. Bonaventure, Journey 1.7.

68) 강조 추가. 그리고 다시 “아무도 은혜, 의, 지식을 통하지 않고는 지혜에 도달할 수 없듯이, 아무도 예리한 중재, 거룩한 삶, 경건 한 기도를 통하지 않고는 관상에 도달할 수 없다.” 보나벤투라는 세 단계의 개요를 말했다. (1) “은혜가 의지의 의와 이성의 예리 한 깨우침의 기초가 되므로, 우리는 우선 기도해야 한다.” (2) “우리는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3) “우리는 진리의 장관을 바라보 아야 하며, 그 장관을 바라봄으로써 시온에서 참 하나님이 보이는 산 높이에 도달할 때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야 한다.” Bonaventure, Journey 1.8.

69) “그러므로 나는 먼저 독자를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악의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씻어 주신 그리스도를 통한 기 도의 탄식으로 초대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는 열정이 없는 단순한 독서, 헌신 없는 사색, 감탄 없는 조사, 환희 없는 관찰, 경건 없는 노력, 사랑 없는 지식, 겸손 없는 이해, 신적 은혜가 없는 공부, 신이 불어넣어 주신 지혜가 없는 거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 게 될 것이다.” Bonaventure, Journey pp. 1-3.

“감각, 지적 활동,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 즉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과 존재하는 모 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잊어버리고 가능한 한 모든 본질과 모든 지식 위에 계시는 그분과 연 합하도록 자신을 가지고 오라. 그리고 자신과 모든 것을 초월하여, 순수한 마음의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이동을 통해 신적 어둠의 초( 超 ) 본질적인 광채로 올라가라.”70)

보나벤투라의 마음에는 영적 상승이 청빈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헌신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

러나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의 비전의 진정한 목표로서 영적 청빈을 옹호함으로써 문자주

의적 해석에서 “가난 부인”을 구해 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수도회에도 반대하는 개혁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변화함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프란치스코의 원래

비전인 “가난 부인”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며 항의했다.71) 영성파 프란치스코회는 모든 재산

을 거부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마지막 시대가 다가왔다고 확신하는 종말론에 근

거하여 기존 수도회 유형에 맞서 목소리를 높였다. 종말이 가까웠다. 보나벤투라 이전에 이 더

급진적인 종말론적 신비주의에 영감을 준

피오레의 요아킴

요아킴이었다.

영성파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종말론은 고립된 상태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

들을 앞선 이탈리아 사람 피오레의 요아킴( 1135-1202년 ) 의 영향을 받았다.72) 요아킴은 젊은 시

절 시토회의 수사가 되어 결국 수도원장이 되었지만, 자기 아래에 있는 헌신적이지 못한 수사

들로 인해 좌절감을 느꼈다. 요아킴은 야망이 컸다. 프란치스코가 겨우 열 살이었을 때, 피오

레의 요아킴은 수도원을 설립하느라 바빴다. 요아킴이 교황 첼레스티노 3세의 승인을 얻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아직 청년이었다.

역사나 현재를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아킴의 비전은 독특했다.73)

요아킴의 역사 해석은 삼위일체론적이어서 구약 성경과 구약의 율법에 대한 두려움은 성부에 게, 신약 성경과 복음에 대한 신앙은 성자에게, 새로운 사랑의 시대는 성령에게 돌렸다. 이 새 로운 영적 시대를 여는 행위자는 권위주의 성직자들이 지배하던 성자 시대와 매우 대조적인 공동체적 구조를 가진 바로 그 수도회였다. 그러나 세속적 타협과 야망으로 오염된 수도회의

현 상태는 하나님 보시기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요아킴은 『영원한 복음』에서 이 세 시대 를 이해하고 교회의 타락에 맞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새로운 수도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요아킴에 따르면, 이 새로운 시대가 거의 다가왔으므로, 그의 추종자들은 세례 요한이 그리스

70) Bonaventure, Journey 7.5.

71) 보나벤투라는 양측을 통합하려고 했지만, 그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더 동조했다. 다음 문헌을 보라. Ozment, Age of Reform, 103, 110; Moorman,AHistoryoftheFranciscanOrder, 154.

72) 어떤 사람들은 그의 생년을 1132년으로 생각한다.

73) 요아킴의 다음 저서들이 관련이 있다. Liber de concordiae Novi et Veteris Testamenti; ExpositioinApocalypsim; Psalterium decem chordarum.

었을까? AD 1260년이었다.

영성파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요아킴의 부름에 귀를 기울였다.74) 그들은 프란치스코회 수 사들의 오염된 증언을 보고, 새로운 시대가 보상으로 내려올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프란치스코 의 원래 의도에 맞게 수도회를 열심히 개혁했다. 요아킴은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볼 만

큼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영성파 프란치스코회는 개혁된 수도회가 요아킴이 구상한 수도회,

즉 AD 1260년에 새 시대를 여는 수도회라고 확신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와 영성파 프란치스코회 사이의 논쟁은 13세기 후반에 걸쳐 치열하

게 전개되었지만 14세기 첫 20년 동안에 정점에 이르렀다. 교황 요한 22세는 꼰벤뚜알 프란

치스코회 수사들에 동조했으나, 그것은 영성파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에게 겁을 주지 못했고 오 히려 그들로 하여금 교황에 반대하도록 자극했다. 교황이 자신들과 대립했으므로, 요한계시록

에 따르면 교황은 교회를 미혹할 적그리스도임에 틀림없었다. 요아킴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피오레의 요아킴의 견해는 몇 가지 이유로 교황에게 정죄받았다. 첫째, 성자의 성직자 시대의 계승자로서 성령 시대 수도원 제도에 대한 요아킴의 공동체적 비전은 교황의 권위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었다. 요아킴이 폭력을 옹 호하지는 않았지만, 교황은 여전히 요아킴의 역사 해석을 불복종적인 시각으로 해석했다. 둘째, 요아킴은 삼위일 체의 위격들을 역사의 한 시대에만 할당함으로써 자기 이론이 삼신론(tritheism)이라는 위험을 무릅썼다. 고전적인

니케아 삼위일체론은 위격의 속성(태어나지 않은 성부, 아들인 성자, 영이신 성령)에 따른 각 위격의 차이를 강조했으 며, 각 위격이 자신의 영원한 기원 관계에 부합하는 구원 사역(예. 성부가 성육신하도록 성자를 보내신 것)을 전유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역사의 어느 시대를 바라보든, 어떤 구원 사역을 고려

하든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모두 하나로 활동하셨다는 점도 강조했다. 삼위일체의 외적인 사역은 분리할 수 없다. 그 위격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며, 각각 단순하고 분리할 수 없는 신적 본성의 실재이기 때문에 하나로 행동하신다. 그러나 요아킴은 위격들을 서로 완전히 분리하여 그들을 특정한 시대로 제한함으로써 삼위일체의 단순성을 위반 하는 것처럼 보였다. 더 나아가 요아킴은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 혼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즈먼트가 말했듯이, “요아킴의 비전에서는 세속 역사의 전개, 구원 역사,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성은 하나의 과정이었다”(Ozment, Age of Reform, 104). 이런 이유로 요아킴의 신학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에서 정죄받았다.

74) 영성파 프란치스코회에는 많은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첫째 세대, 다른 일부는 둘째 세대 지도자였다. 예. 피사의 프란 치스코회, 보르고 산 도니노의 제라르(그의 Introduction to the Eternal Gospel을 보라), 피에트로 올리비(그의 Commentary ontheApocalypse를 보라).

교황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자신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 들었을 때, 1317년부터 교황 칙서

를 잇달아 발표하여 자신의 판정으로 응답했으며, 청빈과 재산에 대한 영성파 프란치스코회

의 견해를 폐지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재산 소유권을 포기하고 정죄하는 문제가

아니라 영적 희생의 문제다. 더욱이 칙서들은 요아킴과 그의 추종자들을 정죄하며 그들의 역

사 해석을 부끄럽게 느끼게 만들었다. 성령은 구원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교회에 항상 계셨고

지금도 계속 계신다. 영원을 현재로 가져오는 더 높은 성령의 체험을 갈망하는 것은 옳을 수 있다. 그러나 핵심은 예언이 아니라 규율이다. “중세 교회는 소수의 사람들이 시간의 한계를

넘어 현세에서 진정한 ‘제3의 시대’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요아킴

의 예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드물고 신비한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신비주의는 개인이 현세의

한계를 순간적으로 넘어 영원을 접할 수 있게 해 주었다”라고 오즈먼트는 말했다. “수도원 제

도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순교라는 더 이상 실천할 수 없게 된 이상을 새로운 형태로 이어 가 는 것이었듯이, 14세기에 신비주의는 12세기와 13세기의 청빈 운동을 이어 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가난하게 될 수 없는 사람들은 마음과 정신으로 그렇게 되고자 했다.”75)

교황 요한의 칙서들이 발표된 후에 영성파 프란치스코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영성파 프

란치스코회 수사들은 더 이상 가톨릭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수도회를 개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추적당해 잡힐 이단자의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 작은 형제들( Fraticelli ) 을 잡아서 화형

에 처하는 데 종교 재판보다 더 나은 것이 있었을까? 종교 재판은 도미니코회에서 인원을 공

급받았으므로, 영성파 프란치스코회는 도미니코 수도회를 경멸하게 되었다.

극심한 박해에도 영성파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유럽 전역에서 숨어 지냈고 교황 요한

22세의 통치 기간에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다. 2세기 후, 마르틴 루터가 『95개 논제』를 발표하던 해에 교황 레오 10세는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오랫동안의 갈등으로 저주받았다고 판

단했다. 싸움을 벌이고 있는 두 편, 즉 꼰벤뚜알파와 영성파는 각 파의 지도자의 지배를 받으 며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했다. 레오 교황은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이미 한 독일 수사에게 영향을 미쳐 교회를 더 큰 논란에 휩싸이게 만들게 될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76)

중세 후기 독일 신비주의 14세기와 15세기에 이르러 과거 교황직의 분열과 점증하는 교회의 부패는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지경에

신선하고 훨씬 경건 한 영적 체험을 원했다. 이런 열망이 독일에 존재했고 도미니코회 수사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75) Ozment, Age of Reform, 115. 교황 요한의 개별 칙서 및 칙서들에 대한 미켈레 다 체세나와 오컴의 윌리엄의 응답들이 113114에 나와 있다. 또한 Leff, HeresyintheLaterMiddlesAges, 1:208도 보라.

76) 루터는 니콜라스 드 리라의 영향을 받았다(3장을 보라). Needham, Two Thousand Years of Christ’s Power, 345-346.

냈다. 더 나은 영적 길에 대한 열망으로, 14세기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요하네스 타울러 가 등장했고, 15세기에는 토마스 아 켐피스가 뒤를 이었다. 라인강을 따라 신비주의가 폭발적 으로 확산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교회 활동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 었다. 그러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전염성이 강한 경건이 생겨났다.

이 새로운 독일 경건주의는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수도회와 달리 그것은 공식적인 제

도나 조직도, 한 명의 지도자나 교수진도 없었지만, 모범, 선포, 문학적 성과로 포착되고 이어 졌다. 그것은 더 오래된 중세의 신비주의자들 및 그들의 수도회와 유사점을 공유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마음의 문제를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그것은 또한 영적 상승을 위

해 세상에서 물러났다. 그것은 또한 육체의 고행을 실천했으며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하나님

과의 신비로운 연합으로 가는 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중세 후기 독일 신비주의는 믿음이 아니라 강조점이긴 하지만, 몇 가지 측면에서 차

이도 있었다. 예를 들어 새로운 독일 신비주의자들은 중생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주요 교리이자 경험으로, 영적 입문의 기초이자 성화와 영혼이 신성과 최종적으로 연합하는

배후가 되는 원동력으로 주장했다. 새로 태어남에 대한 강조로 인해 어떤 독일 신비주의자들

은 스콜라 철학의 방법과 야망을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

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외적인 것( 예. 교회 직분, 성례, 채찍질 ) 에 대한 강조는 가장 중요한 것, 즉 마음의 회심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내적 초점을 우선시하기 위해, 새로운 독일 신비주의자들은 평신 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인 자국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함으로써

외형적인 예식은 수행할 수 있었지만, 예식을 받는 사람의 마음속에 예식의 의미를 심어 주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독일 신비주의자들은 백성의 언어로, 영적이면서도 단순한 방식으 로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이런 장벽을 극복했다.77)

에크하르트, 타울러, 수소 및 『독일 신학』

신비주의는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으나, 독일에서는 그 뿌리가 강했고 때로는 교회의 경계 를 훨씬 벗어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에크하르트 폰 호크하임( 약 1260-약 1327/28년 ) 으로도 알려 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생각해 보자. 에크하르트는 젊은 시절부터 도미니코회 수사로 훈련 받았으며, 14세기에 접어들면서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학문과 사목 활동을 병행하면서 다 양한 유형의 수도회에 자문을 제공했다. 에크하르트는 스콜라 학자였지만 다른 스콜라 학자 들( 보나벤투라, 생 빅토르의 위그, 생 빅토르의 리샤르 등 ) 과 마찬가지로 스콜라 철학이 자신의 신비적 영적 생활과 상충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의 핵심인 종합적 균형의 유형을 모델로 삼지는 않았다. 토마스는 그리스 철학의 장점과 한계를

77) 이런 차이점과 더 많은 내용이 Schaff, HistoryoftheChristianChurch, 5:240-242에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78)

예를 들어 에크하르트는 영원에서 인간이 탄생한 것을 지지했다. 인간은 지상에 존재하기

전에 영원에 존재했으며, 죽으면 영원의 상태로 돌아간다. 에크하르트는 “이 영원한 탄생 덕

분에 나는 영원 전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79) 에 크하르트에게 영원에서의 탄생은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을 뒷받침한다. 인간

은 영원 속에서 하나님과 연합했으며, 이제 현재의 상태에서 인간은 다시 하나님과의 연합을 향해 돌아간다.

중세에는 대학이 남성에게만 열려 있었다. 대학의 학문 용어가 라틴어였으므로, 대부분의 여성은 학문적 저작 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여성이 많은 사람이 감지하는 관념을 배울 수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를 들

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여성에게 설교했고 그 결과로 주목할 만한 추종자를 얻었다. 신비주의 사상을 전파하 고자 하는 여성들이 자국어를 쓰기 시작했다. “여성의 영적 글쓰기는 흔히 정해진 사고와 표현 양식에 더 가깝게

작업하는 남성보다 더 큰 혁신적 독창성을 보여 준다”(Davies, “Later Medieval Mystics,” 227). 기본적으로 여성은 남

성에게만 허용된 교육 체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용감하고, 심지어 대담하고 도전적이어야 했다.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틸트 (1212년생) 나 노리치의 줄리언(약 1342-1416년) 같은 여성은 당대를 대표하는 신비주 의자가 되기도 했다. 줄리언은 성경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연민과 사랑을 기술하기 위해 여성적 기술어를 사용 하는 방식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어머니의 봉사는 모든 봉사 중에서 가장 친밀하고, 자발적이며, 신뢰할 수 있다. 어머니의 봉사가 가장 진실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외에 누구도 이것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인간

어머니는 자신의 젖으로 자식에게 젖을 먹이지만, 우리의 사랑하는 어머니이신 예수는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먹

이시며, 가장 부드러운 호의로 모든 참 생명의 귀중한 양식인 성체를 통해 그렇게 하신다”(Julian of Norwich, 169170)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연합된 것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인간과 하나님 의 재결합을 이룰 수 있을지 궁금해 할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조언은 내면을 들여다보고 불꽃 78) “그가 주요 인물이었던 독일 도미니코 학파는 특히 『원인론』 같은 신플라톤주의 문헌의 영향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이 븐 시나가 매우 플라톤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의 영향을 보였다. 이 학파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진리의 통일성에 대한 포괄 적인 이해에서 철학적 입장과 신학적 입장을 결합하는 경향이었다. 지식, 성경, 자연 어느 것에서나 진실인 모든 것은 하나의 원 천, 하나의 뿌리에서 흘러나온다.” Davies, “Later Medieval Mystics,” 225; LW 3:4-5를 인용함. 79) Deutsche Mystiker des 14.Jahrhunderts:Meister Eckhart, 2:281; 에크하르트의 견해의 개요는 Ozment, Age of Reform, 128-133에 나와 있다.

에 제한되지 않고, “어떤 창조된 것, 어떤 무( 無 ) 도 건드리지 않은” 것으로 우리를 육체적 경험 을 넘어 하늘의 근원으로 인도한다.80) 어떤 기적에 의해 이 불꽃은 아담의 타락으로 꺼지지 않 고 그의 모든 자녀에게 계속 이어졌다. 피조물이 선한 일을 할 때마다 이 불꽃을 볼 수 있으며, 이것은 개별 피조물을 하나님께로, 이 땅 이전의 그 존재로 다시 불러온다.

다른 신비주의자들은 마음, 의지, 감정을 하나님에게 복종시키기 위해 영적 수련을 행하는

반면 에크하르트는 훨씬 존재론적인 연합을 주장했다. 예를 들어 6세기 철학자 보이티우스가

우리가 하나님의 유사상에 참여하는 것이 영원한 행복의 길이라고 말한 것은 그 전의 많은 교

부들과 그 후의 많은 중세 신학자를 대표한 말이었다.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행복을 소유

함을 통해서며, 행복은 사실상 신성이므로, 그들이 행복해지는 것은 신성을 소유함을 통해서

임이 분명하다⋯⋯그러므로 행복한 각 개인은 신성한 존재다.” 그러나 보이티우스는 “오직 하

나님만이 본질적으로 행복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더 구

체적으로 말했다.81)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저서는 참여에 의한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유

지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음으로써 직접 신성

속으로 흡수된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신비로운 재결합을 통해 하나님 안으로 들어 간다.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에 대한 통찰에서 나는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발견했다”라 고 말했다.82) 그러므로 현세에서의 존재는 어색하고 불편하며 심지어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초월하고 극복하여 신성 안에서 다시 연 합을 확립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완전히, 심지어 고립의 지점까지 분리해야 한다.83)

중세의 비판자에게 에크하르트의 견해는 하나님에 대한 교부들의 견해에서 기본이 되는 창

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도미니크회에서 프란치스코회에 이르기까지 중 세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에크하르트는 범신론으로 비난받았다. 참여를 제거할 때, 창조주

와 피조물이 어떻게 동일한 것이 되지 않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교황도 그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1329년에 교황은 에크하르트의 견해가 이단적이라는 이유를 28가지 열거했다. 에크하르트의 신학에 대한 논란에도,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영향력이 있었고, 요하네

스 라울러( 1300-1361년 ) 와 하인리히 수소( 약 1295-약 1360/66년 ) 같은 독일인이 에크하르트의 신비 주의를 지속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급진적인 결론 중 어 떤 것은 퍼뜨리지 않았다. 타울러가 외적인 것( 교황과 성례 ) 보다 내적인 것( 새 마음, 중생 ) 을 강조한

80) Davies, ed., TheRhinelandMystics, German Sermon 28 (p. 31). 참고. Davies, “Later Medieval Mystics,” 226. 81) Boethius, TheConsolationofPhilosophy, 3.10 (p. 71).

82) DeutscheMystikerdes14Jahrhunderts, 2:284; 1.11-22에 인용된 에크하르트의 말. 참고. Ozment, AgeofReform, 130. 83) Schaff, HistoryoftheChristianChurch, 5:238(참고. 6:259). 범신론이라는 비난에서 에크하르트를 옹호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오즈먼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저서의 요점과 그것이 에크하르트가 통제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창조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은 거리를 칭송하는 것이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었다⋯⋯에크하르트는 최종 분석 에서 영원한 탄생 너머의 모든 실재를 마지못해 인정했다. 에크하르트에게 인간은 세상에서 피조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어야 했다.” Ozment, AgeofReform, 132.

주의의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인 『독일 신학』을 저술했다.85) 누가 『독일 신학』을 저술했는

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책은 젊은 마르틴 루터에게 부인할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루터는 『독일 신학』을 성경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다음에 놓았다고 말했다. 이 장의 말미 에 신비주의와 종교개혁자라는 주제로 돌아가겠다. 지금으로서는 『독일 신학』이 루터 같은 젊 은 종교개혁자에게 영향을 준 이유는 그 책이 신약 성경을 근거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단순 하게 가르친 것과 모두 관련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겠다. 그 구원의 길은 다름 아닌 그리스 도다. 죄인은 아담 안에서 죽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게 되었다. 죄인은 거듭남으로 해 방되었다. 『독일 신학』은 행위를 칭의의 조건으로 삼기보다는 자유를 얻은 자의 기쁜 순종으 로 소개했다. 이것이 이 책의 그리스도 중심의 초점과 함께 루터가 이 책에 매료된 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독일 신학』을 종교개혁의 선구적 문서로 분류하는 것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86)

‘근대적 경건’ 운동

종교개혁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독일 신학』만이 아니었다. 근대적 경건( devotio moderna ) 운동은 16세기의 영적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이 에크하르트, 타울러, 수소 및 『독일 신 학』 신비주의의 본거지였다면, 네덜란드는 14세기에 교회 평신도였던 헤르트 흐로테( 13401384년 ) 의 영향으로 근대적 경건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다. 그러나 흐로테는 전형적인 평신도가

아니었고 설교에 대한 열정도 있었다. 흐로테는 교육도 잘 받았으며, 부유한 집안 덕분에 프랑

스,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예를 들어 마이스터 에크하

르트의 추종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에 설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는 모든 신학 교육은 경건을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목적이 흐로테의 ‘공동

생활 형제단’을 특징짓는 요소였다. 경건에 대한 한결같은 집중은 전염성이 있어서, 1384년에 흐로테가 별세한 후에도 그의 영적 생활 형태는 15세기까지 이어져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근대적 경건 운동은 반대하는 영적 태도가 아니라 교회와 병행하는 수도회의 생활 속

에서 운영되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의 삶을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근대적 경건 운동은 독일인 토마스 아 켐피스( 1380-1471년 ) 에 의해 계승되었다. 토마스 아

84) Schaff, HistoryoftheChristianChurch, 6:258-259.

85) Ozment, Age of Reform, 87, 특히 『독일 신학』과 루터에 대한 논평을 보라. 루터에 대한 타울러의 영향이 Leppin, “Luther’s Roots in Monastic-Mystical Piety,” 55-60에 나와 있다.

86) 샤프는 17세기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루터만큼이나 이 책을 찬양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독일인으로

아 켐피스는 흐로테가 죽은 해에 태어났고, 흐로테에게서 직접 배운 적은 없지만 흐로테의 신

비주의는 다른 누구보다도 토마스의 영적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87) 그러나 흐로테가 토마

스 아 켐피스에게 영향을 준 유일한 사람은 아니며, 아우구스티누스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그의 저서 곳곳에 나타난다. 그럼에도 토마스 아 켐피스는 영적 상승에 대한 견해에서 뚜렷한

차이가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이 비전은 토마스의 고전적인 영적 저서인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1420-1427년 기간 중에 집필되었으며, 각 장은 속담에 가까운 명언과 그 뒤에 나오는

예수와 제자 사이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첫 장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학문의 삶( 스콜라 철학

을 암시할 가능성이 큼 ) 과 경건의 삶을 극명하게 대비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 며, 예수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 밤낮으로 예수의 삶을 묵상하는 데 몰두해야 한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학문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경건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의심했다.

“당신이 겸손하지 않고, 그래서 삼위일체께 불쾌감을 주는데, 삼위일체에 대한 학식 있는 담

론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난해한 말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지도 의롭게 만들지도 못하며, 오직 고결한 삶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만든다. 나는 회개를 정의하는 방법을

알기보다는 내 영혼에서 회개를 경험하고 싶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스콜라 철 학을 비판했다. “당신이 성경 전체를 훤하게 다 알고 철학자들의 격언을 다 안다고 해도, 동시

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없다면 그것이 당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88) 신경보다 행위

를 옹호한 신비주의자가 있었다면, 그는 바로 토마스 아 켐피스였다.89)

『그리스도를 본받아』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은 영적인 것(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것 ) 과 대조적으로

이 세상의 것( 보이는 물질적인 것 ) 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다. 물러남은 육체의 죄 많은 본성과 하나

님의 자비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라는 반복적인 권면이다. “그

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사랑에서 마음을 거두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돌이키라.

자신의 감각적인 본성에 굴복하는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몰수 당하게 된다.”90)

이 서두의 충고 다음에 나오는 장들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된 수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 지만, 각 장의 핵심은 변화, 즉 자제를 통해 육체를 죽이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키우는 내적 변화에 대한 주된 관심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형식주의나 외부적인 것,

87) 예. Thomas à Kempis, PrayersandMeditationsontheLifeofChrist 88) Thomas à Kempis, Imitation of Christ 1.3. 그 후에 토마스는 스콜라 철학을 표적으로 삼았다. “유(類)와 종(種) 같은 철학적 단어에 왜 관심을 가져야 할까? 영원한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수많은 이론에서 자유로워진다”(3.2, p.6).

89) “우리가 난해한 질문에 대해 토론할 때만큼 악을 뿌리 뽑고 덕을 심는 데 부지런했다면, 우리 사이에 악이나 추문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며 수도원 공동체에서도 그런 방종이 없었을 것이다. 심판의 날이 오면 우리는 어떤 책을 읽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행 위를 했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될 것이며, 얼마나 토론을 잘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경건하게 살았는가를 질문받게 될 것이다.” Thomas à Kempis, 1.3.5.

90) Thomas à Kempis, 1.1.5.

지나친 의존을 의심스러 워했다. 그는 “수사 복장을 하고 머리를 삭발한다고 해서 수사 자신에게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수사를 구별하는 것은 삶에 대한 자신의 관점 변화와 자신의 욕정을 완전히 통

제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대조는 자기 이익을 위해 수도원을 이용하는 수사들을 향한 경고였다. “수도원에서 하나님과 영혼의 구원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슬픔과 불행

밖에 발견할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의 지극히 작은 자, 모든 사람의 종이 되지 않으려는 사람은

평화를 오래 누리지 못할 것이다.”91)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1) 모든 세상적인 염려를 포기하고 (2) 하나님을 관상하는 데 전념 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카르투시오회와 시토회에서 모범을 찾았지만, 광야의 교부

들이 이 두 가지 측면에서 가장 완벽한 모델이었다. “그들은 세속적인 일에서는 가난했지만, 은혜와 덕에서는 부유했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궁핍했지만,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은혜를 누렸다.”92) 우리는 아직 종교개혁과 수도원의 영적 생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평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광야 교부들에 대한 토마스 아 켐피스와 마르틴 루터의 의견 차이는 이미 선명하게 드러난다. 토마스 아 켐피스로서는 광야의 교부들을 모델로 삼으려면 고독과 침묵, 세상에서의 물러남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젊은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 마르틴 루터가 잘 알 고 있던 관행이었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모범적이라고 생각한 수도원 생활을 묘사했을 때, 그

는 루터의 경험을 묘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외출을 거의 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며, 그들의 식사는 빈약하고 옷차림은 거칠며, 노동 시간은 길고 말은 거의 하지 않

으며, 밤늦게까지 철야 기도를 하고 일찍 일어난다. 그들은 기도와 독서에 많은 시간을 보내지

만, 모든 일에서 이 수사들은 항상 자신을 절제한다.”93)

그러나 루터가 만인제사장설 같은 종교개혁의 신념에 도달하자, 토마스 아 켐피스는 수정된 계획을 권고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우리가 일시적인 기쁨을 추구하지 않고 세상일에 관심

을 두지 않는다면 우리의 양심은 얼마나 평온할까! 우리가 쓸데없는 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

을 신뢰하고 신성한 것들과 우리의 구원만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큰 평안과 평온을 누릴 수 있 을까!”라고 외쳤다.94) 루터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루는 평범한 신도들에게 농부, 사무원, 수

유모 등 자신의 직업이 ‘쓸데없는 일’이 아니라 성당의 사제나 수도원의 수사만큼이나 하나님 의 기쁨에 합당하고 하나님 나라에 유용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1521년에 루터가 말했듯이, 수도원 서약은 “농장에서

91) Thomas à Kempis, 1.17.2. 92) “이 거룩한 교부들은 우리 수사들에게 모범으로 주어졌으며, 그들의 모범은 미지근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느슨하게 되도록 유혹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거룩함으로 나아갈 수 있게 자극한다.” Thomas à Kempis, 1.18.3,4(p. 23).

93) Thomas à Kempis, 1.25.8(p. 42).

94) Thomas à Kempis, 1.20.4(p. 28).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들과 그리스도의 모든 충실한 친구들은 육체를 기쁘게 하는 것과 이 세상에서 번창하고 번영하는 것을 경멸하고, 모든 소망을 영원한 것으로 향했다. 그들의 모든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사랑 이 그들을 끌어내려 여기 아래에 묶어 두지 않게, 보이지 않고 영원한 것인 하늘로 향했다”(1.22.4). 그는 또한 영혼에 주입된 은 혜를 옹호했다. 3.54.8을 보라.

노동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다.”95)

또한 토마스 아 켐피스는 루터의 초기 숙적이었던 요한 테첼 같은 16세기 설교자와 달리 보

속, 연옥, 지옥 불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런 믿음은 여전히 존재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철저한 보속과 함께 엄격한 삶이 세상의 어떤 즐거움보다 더 큰 기쁨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철저한 보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파멸적이다. “지금

약간의 고통이 당신을 불안하게 만든다면, 지옥 불이 당신에게 무슨 일을 하겠는가?”96) 그리

스도인은 “선한 일에 신실하고 열렬하게 남아 있어야” 하며, 그러면 하나님이 적절한 상을 주 실 것이다.97) 이런 신실함의 모델을 루터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실함은 우리 자신에게

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된다. 모방에 의한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아

니라 그리스도를 모델로 삼는 죄인의 의에 의존한다.98)

스콜라 학자들을 비판한 신비주의자들: 제르송과 니콜라스

신비주의자는 세상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관상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지만, 그것이 모든

신비주의자가 똑같이 하나님을 관상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관상에 대한 스콜라 학자의 접근 방식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뀌었다.

프란치스코회의 후대 신봉자들( 예. 오컴의 윌리엄 ) 은 스콜라 철학에 대한 의심에서 스콜라 철학

의 방법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영적 전통이 그런 방향으로 나

아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5세기에 접어들면서 프랑스의 장 제르송( 1363-1429년 ) 은 그의 저

서 『신비주의 신학』에서 스콜라 사상에 대항하여 자신의 신비주의 신학을 정립했다. 제르송은

파리 대학교에서 스코투스와 오컴의 추종자들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추종자들과 지겹게 논쟁 을 벌이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제르송은 이런 지적 논쟁에 지쳐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이성의 길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감정으로 포장되어야 한다. 영혼이 하나님께로 가는 여정은 머리가 아니라 감성적인 마음을 통해 이루어졌다. 제르 송은 신학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지만, 영적 생활이 기독교 신앙과 삶의 적절한 초점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교리의 중요성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과의 관련성에 따라 주로 결정되는 것을 암시했다. 영원한 발생( generation ) 이나 영원한 발출( spiration ) 같은 삼위일체의 핵심 구성 요소

95) LW 44:295.

96) Thomas à Kempis, Imitation of Christ 1.24.6 (p. 38).

97) Thomas à Kempis, 1.25.1 (p. 39).

98) 루터는 “중세 후기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경건까지도 반대할 수 있었으며, 성공적인 모방을 위해 그리스도인은 처녀에게서 태어 나야 하고 갈색 눈을 가져야 하며 물

부름을 받았다는 확신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Steinmetz, Luther in Context, 139.

경에 충실할 것을 주장했다. 제르송은 고급 신학 어휘를 혐오했으며, 그

신학자들은 평 신도가 따를 수 있는 언어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실제로 제르송의 성경 문자주의적

방법은 기독교 신앙을 신학적 논쟁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인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성경의 도덕적 가르침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했다. 제르송은 신학 교육을 재구성하여 학

생 시간의 절반 이상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쓰이도록 할 것을 권장했다. 학생들에게 배정된 책

은 하나님에 대한 신비로운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문제들에 대한 끝없

는 논쟁을 다룬 신학 서적과 논문은 억제되어야 했다.99)

제르송의 수정주의 프로그램은 신학적 훈련보다 설교를 우선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제자 니콜라스 드 클레망주( 약 1363-1437년 ) 는 신학의 주된 목적이 강대상이 되도록 이런 강조 를 가속화했다. 교리보다 행함, 논리보다 사랑, 여기에 교인에게 다가가는 목회자의 방법이 있

었다. 그 밖의 것은 무의미했다. 제르송의 뒤를 이어 니콜라스는 스콜라 철학에 반대하는 반응 에서 표준이 된 반( 反 ) 지성주의를 키웠다.100)

반대 의견: 발도파

중세 기독교의 학문적 환경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은 12세기와 13세기 초에 살았던 프랑스

리옹의 페트루스 발데스 또는 발도에서 이름을 딴 발도파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발도는 그

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성경과 교부들의 저서

를 자세하게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발도는 부유한 사람으로서 그 후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 해 진지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발도는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 주기 위해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이것은 발도의 추종자들도 본

받은 일종의 세속 포기였다. 발도는 이 목적을 위해 가족도 남겨 두고 떠났다.

발도는 교회와 관련하여 교황의 수위권과 완전성을 부정하고 그 대신 성경을 교회의 최종 권위로 높임으로써 교황직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거부한 교리

중 다수는 이미 12세기에 발도파에 의해 폐기되었다. 예를 들어 발도파는 죽어서 연옥에 있 는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인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사실상 발 도파는 연옥조차 믿지 않았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나 사제가 맹세해야 한다는 것도 믿지 않

99) Gerson, Oeuvres completes, 1:113; 2:26-38; 3:242-243을 보라. Ozment, Age of Reform, 73-78에서 인용. 제르송이 자 신의 개정 교육 과정을 위해 선택한 구체적인 역사 자료에 대해서는 76-77을 보라. 제르송에 대한 논의가 Connolly, JohnGerson에 나와 있다.

100) Nicholas of Clèmanges, De studio theologico, 475-479. “니콜라스에게서 우리는 스콜라 철학에 대한 중세 후기 및 종교 개혁 비판의 전형이 된 강력한 반지성적 경향을 발견한다. 실제로 니콜라스는 중세 영적 전통의 핵심이었고 중세 내내 반대와 개혁을 촉진했던 종교적 반지성주의를 확장했을 뿐이다. 니콜라스에게 사랑이 지식을 능가하는 것처럼, 설교는 학문을, 교구는 대학을, 실천은 지적인 삶을 능가했다. 니콜라스는 순수한 학자의 흔한 특징인 비실용적인 천재성과 적용되지 않은 지식은 정 제된 죄악이라고 강하게 의심했다.” Ozment, AgeofReform, 79.

의존할 필요가 없도록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데 전념했다. 그러나 발도파는 학구적 인 단체가 아니었다. 이들은 청빈을 서약한 후 평신도 설교를 시작했다. 때때로 이들의 평신도

설교는 교회의 교리와 관습을 겨냥했다.

발도파는 제3차 라테란 공의회( 1179년 ) 에서 교황 알렉산데르의 승인을 요청했지만, 그들이

사역과 평신도 설교를 자임한 것이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반대에 부딪혔다. 발데스가 리옹으

로 돌아왔을 때, 대주교는 발도파가 이단 종파가 아니라는 증거를 원했다. 1180년에 발데스는 자신의 정통성과 보편성을 변호하기 위해 『발데스의 신앙고백』을 썼다. 발데스는 신경들의 삼

위일체론적 어휘를 긍정하는 것으로 신앙고백을 시작했다. “나 발데스와 모든 형제들은⋯⋯

성부, 성자, 성령이 동일본질이시며, 상호영원하시며, 상호전능하시며,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같은 신경에 포함된 대로, 삼위의 각 위격이 온전히 하나님이시며, 세 위

격이 모두 한 하나님이심을⋯⋯믿는 것을 모든 신자들에게 알린다.”101)

그런 다음 발데스는 신경의 구조를 따라 삼위일체에서 창조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육신으 로 옮겨 갔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은 발데스의 다음과 같은 전폭적인 고백이 었다. “우리는 보편적이고 거룩하며 사도적이며 흠이 없고, 그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하나의 교회를 믿는다.” 발데스는 자신이나 추종자들을 교회 밖의 사람이 아니라 교 회 안에 있는 사람으로 보았으며, 비록 교회가 사도의 전통을 유지하도록 개혁을 시도하고 있

었지만, 자신들을 그 누구에 못지않은 보편적 신자로 보았다. 발데스는 자신의 충성을 더욱 확

고히 하기 위해, 성사들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우리는 거기(교회)에서 베풀어지는 성사들

을 어떤 식으로든 거부하지 않는다⋯⋯우리는 성체, 즉 축성 후의 떡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

도의 몸과 피며, 여기에서 선한 사제에 의해 그 이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없고, 악한 사제에 의해 그 이하로 이루어지는 것도 없다는 것을 굳게 믿고 절대적으로 확언한다.” 사제의 직분

에 대해서도 발데스는 다시 한번 확언했다. “우리는 교회 직제, 즉 주교직과 사제직을 겸손히

찬양하고 신실하게 공경한다.”102)

발데스의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베로나 공의회( 1184년 ) 는 발도파를 파문했다. 추방된 발도 파는 다른 프랑스와 이탈리아 영토에서 살아남아 종교개혁이 도래할 때까지 버텼다.

12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황직의 권력은 더 크게 상승했다.103) 이 전례 없는 권력은 대부분

101) CCFCT 1:772.

102) Waldensius, The Profession of Faith of Valdes, 1180, 1:772-773.

103) 인노첸시오에 대해 더 알기 위해서는 Needham, Two Thousand Years of Christ’s Power, 2:325-332를 보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 알려진 로타리오 콘티의 정치적, 교회적 야망에 깊이 기인했다.104)

인노첸시오가 교황 수위권( 1198-1216년 ) 과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칭호를 채택하면서 교황

의 지위는 새로운 수준으로 상승했다. 인노첸시오 이전의 교황들은 자신들을 베드로의 대리자 로 규정하고, 베드로 사도를 대표하며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휘둘렀다. 그러나 인노첸시오는 베드로를 넘어 직접 그리스도까지 이동하여, 교황을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 했다. 인노첸시오는 이 칭호를 바탕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모든 왕과 총독에게 도전하며, 자신을 지상 최고의 통치자로 자리매김했다. 인노첸시오는 교회적 선언뿐 아니라 정치적 선언 도 실시하고 있었다. 모든 왕과 황제는 교황의 권력에 종속했다. 교황의 우월성은 누구보다도 앞섰다.

인노첸시오는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을 목표로 삼아 자신의 선언을 뒷받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인노첸시오가 이들 강대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면, 그의 통치 영역이 넓어져서 경쟁자 가 남지 않게 될 것이었다. 인노첸시오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권력 상승에 도전하는 자를 파문

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교회의 무기를 아끼지 않고 사용했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의 존왕이 스

티븐 랭턴을 새로운 캔터베리 대주교로 지지했을 때 인노첸시오는 존왕을 협박했다. 존왕이

인노첸시오의 승인을 받은 추기경을 지지하지 않으면, 인노첸시오는 모든 교회 예배를 금지하

겠다고 협박했다. 그것은 작은 협박이 아니었다. 어떤 성직자가 감히 교황에게 불복종할 위험

을 무릅썼겠는가?

존왕은 겁먹지 않고 스티븐 랭턴을 계속 지지했다. 인노첸시오는 성무 금지령으로 대응했

고, 그 후 6년 동안 잉글랜드 전역의 교회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이 성무 금지령은 존왕을

더욱 격분하게 만들었고, 교착 상태는 더욱 굳어졌다. 인노첸시오는 존왕이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존에게 영원히 지옥 생활을 하도록 판결을 내렸다.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 었기 때문에, 교황에 의한 파문은 지상에서 영혼이 받을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이었다. 그러나

인노첸시오의 파문은 정치적 파장도 일으켰다. 인노첸시오는 존왕에 대항하는 십자군 전쟁을 요구했다. 인노첸시오는 필요하다면 잉글랜드 왕좌에 새로운 왕이 앉을 때까지 전 유럽의 왕 들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존왕은 이제 무력한 존재가 되어, 왕직을 계속 유지하려면 인노첸시

오에게 항복해야 했다. 그가 항복했을 때, 교회는 다시 문을 열었고 존은 왕좌를 유지했지만, 그것은 교황이 소유한 왕좌였다. 인노첸시오가 잉글랜드에 대한 권력을 장악한 것은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인노첸시오는 독일과 프랑스에 대해서도 비슷한 전술을 사용했다.

인노첸시오의 통치가 끝날 무렵, 교황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 1215년 ) 를 소집했다. 이제 모 든 국가가 교황에게 복종했으므로, 주교뿐 아니라 왕을 대신하여 왕의 대표들도 파견되었다.

“이것은 교황 알렉산데르 3세(1159-1181년)와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년)가 교 황직을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공격한 정치적, 상업적 권력으로 변모시킨 시기였다.” AgeofReform, 98-99.

신자들의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가 존재하며, 이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하며, 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이자 희생제물이시다.”105)

둘째, 공의회는 실체 변화에 대한 공적인 승인을 표시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떡과 포

도주의 형태로 제대( 祭臺 ) 의 성체에 참으로 들어 있으며, 떡과 포도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분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를 했으므로, 이 일체성의 신비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받으신 것을 우리는 그분에게서 받는다.”106)

셋째, 공의회는 사제가 사제 서품에 의해 베드로의 열쇠의 힘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사제를 이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확인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직

접 주신 교회의 열쇠에 따라 올바르게 사제 서품을 받은 사제 외에는 누구도 이 성사를 집행 할 수 없다.” 세례 성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세례 성사는 나누어지지 않은 삼위일체, 즉 성

부, 성자, 성령의 부르심에 따라 물로 봉헌되며, 교회가 정한 형식에 따라 누구든지 올바르게

집행할 때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107)

넷째, 공의회는 보속 제도를 성사 자체에 결부시킴으로써 보속 제도를 강력히 주장했다.

“세례를 받은 후 죄에 빠진 사람은 언제나 참된 참회를 통해 회복될 수 있다. 처녀와 성욕 절

제자뿐 아니라 기혼자도 올바른 신앙과 선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받고 영원한 복을 받

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108)

인노첸시오 교황의 통치에는 공의회뿐 아니라 십자군 원정도 포함되었다. 그의 교황직이 수 위권의 자리로 격상되면서 반대파에 대한 관용의 가능성이 사라졌다. 13세기 초에는 카타리 파라는 집단이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교리적으로 카타리파는 중세 성기의 영지주의자들이 었다. 그들의 이름은 ‘우리는 선택받은 자, 순수하고 유일한 참된 교회’라는 메시지였다.109) 카 타리파는 또한 기성 교회에서 경제적 독립을 위해 투쟁한 것이 특징이다.

카타리파의 존재는 인노첸시오 교황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카타리파는 이탈리아( 이

곳에서는 파타리아파라고 불림 ) 뿐 아니라 특히 프랑스 남부( 이곳에서는 알비파라고 불림 ) 에서도 활동하는 국 제적인 조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카타리파인 알비파의 영토에서 교황 특사가 살해된 사건

105) CCFCT 1:741. 106) CCFCT 1:741-742.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와 우유성(偶有性)을 구분했다. 한편으로 물체는 본성, 본질,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의 실체는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눈에 안 보일 수도 있다. 그것의 실체는 그 물체의 정체성과 목적에 필수적 이다. 반면에 물체에는 우유성도 있다. 우유성은 외부적인 것이며, 때때로 눈에 보이기도 하고 비본질적이다. 우유성은 제거되 거나 변할 수 있지만 물체의 실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 13세기에 공의회는 자연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별을 사용하여 신학에서 실체 변화설을 정당화했다. 그들은 떡과 포도주가 사제에 의해 축성될 때, 우유성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고 말했다. 떡은 여전히 떡처럼 보이고 맛도 떡처럼 느껴진다. 포도주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축성의 순간에 실체는 변화하여, 그리스도 의 몸과 피로 변한다. 이후 장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별을 오용한 것이다.

107) CCFCT 1:742.

108) CCFCT 1:741-742.

109) 카타리파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 카타리파와 인노첸시오의 갈등에 대한 자세한 역사, 페트로브루시안 같은 다른 반대자들의 역 사에 대해서는 Needham, Two Thousand Years of Christ’s Power, 2:340을 보라.

할 충분한 이유와 동기를 부여했다. 탐욕스러운 북부 프랑스의 지원을 받게 된 인노첸시오는

알비 십자군 원정( 1209-1229년 ) 을 시작했다. 이 십자군 원정은 길고 잔인했으며, 더 정확히 말하

면 학살이었고, 죄 없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원정이었다. 20년의 원정이 끝날 무

렵 남부 프랑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십자군 원정은 교황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이단자 소탕은 교회적으로 유리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편리해서, 단기간에 외국 영토들을 교황의 권위에 따라 움직이게 만 들었다. 알비 십자군 전쟁 중에 인노첸시오는 종교 재판소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그것의 권

력을 교황직 쪽으로 재배치했다.110) 교황 특사들이 카타리파든 발도파든 비밀 모임의 작은 냄

새라도 맡을 수 있게 훈련받은 후 스파이처럼 파견되어, 종교범을 고문하고 처벌했으며 때로

는 반대자를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1227년에 이르러 교황직은 종교적 반대자를 처단하는 데

전념하는 전담 부서를 만들었다. 종교 재판소 요원들은 막강한 권한을 가졌을 뿐 아니라 자유

도 누렸으며, 교황에게만 복종했다.111)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이 교리적 이단인지 영적 이단인

지는 중요하지 않았다.112) 그러나 인노첸시오 같은 교황들은 가톨릭 교리와 관행을 수호하고

반대자들을 처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도회를 용인만 한 것이 아니라 지원했다.

수도회와 교황직

중세에 수도원 생활의 인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을 정도다. 수도원 생활에는 정

신적인 이유로 인한 존경도 있었지만 실용적이고 물질적인 혜택도 있었다. 중세 시대는 굶주

림에서 실업에 이르기까지, 전염병에서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위협이 특징이었다. 수도원

은 수많은 투쟁에서 안전한 피난처이자 식량, 영적 돌봄 및 신학, 철학, 예술 교육을 제공하는

소규모 공동체가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수도원이 풍요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수도원은 소

유한 토지를 경작하고 수확물을 거두어, 내부의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주었으며, 숙련된 수사

에게 프레스코화를 그리거나 수도원과 교회를 위한 조각상을 만들고 심지어 성당을 건축하는 예술가로 일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뛰어난 지성을 가진 수사들은 신학자나 철학자가 될 수 있 었고, 클뤼니회 같은 일부 수도회는 교황을 여러 명 배출하기도 했다.113)

110)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재위 기간(1159-1181년)에 종교 재판은 교구의 규율을 보장하기 위한 강압적인 주교 권한의 도구로 등장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년)는 교황직에 이 종교 재판을 집중시켰고, 그 후 이 종교 재판은 기존 수도회 또 는 탁발 수도회에서 선발된 교황 특사들이 수행하는 사법 절차가 되었다.” Ozment, AgeofReform, 95. 111) “종교 재판소의 활동으로 인해 (발도파 같은) 반대 운동은 비밀리에 모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우리가 가톨릭교회 자 체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 비해 중세 가톨릭 유럽에서 종교적 반대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주된 이유다.” Needham, Two Thousand Years of Christ’s Power, 2:340을 보라.

112) Ozment, AgeofReform, 95.

113) 수도원에서 배출된 교황에는 그레고리오 7세, 우르바노 2세, 파스칼 2세가 있다.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황의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는 데 수도회를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로마 교회

는 수도회에 다양한 특권을 부여했고, 수사들은 그 대가로 교황의 야망을 지지했다. 때때로 그

야망은 교리적인 것이었다. 교황은 종교 재판과 이단 제거를 주도할 수사들을 모집했다. 때때

로 그 야망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교황은 행정관들에 대해 교황직이 원하는 지배를 뒷받침하 기 위해 수사들에게 기대기도 했다.

이런 조치는 수사의 권위를 다른 교회 직분보다 높여서, 한쪽의 수사와 다른 쪽의 고위직 성

직자 및 주교 사이에 긴장을 조성했다. 그러나 권력과 영향력이 커지면서 정체성의 위기가 찾 아왔다. 수사와 교황의 상호 이익 관계는 역설에 가까웠다.115) 수사는 원래 세속에서의 도피를 대표했다. 이제 수사는 세상에서 정치권력을 잡기 위해 그리고 특별 면제를 받는 대가로 교황 의 행동을 지지했다. 비판자, 특히 16세기 종교개혁자에게 이것은 타협의 냄새가 나고 위선의 맛이 났다.

신비주의와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그 영적 본질 때문에 기억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러나 종교개혁 사학자들 은 종교개혁자들이 영적인 비전을 소유하고 전수했다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이 인정하고 있다.

16세기 종교개혁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변화하는 비전이 생겨났으며, 이 비전은 신 학과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비전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러나 그 비전이 중세 신비주의자에게

빚을 졌는지는 여전히 복잡한 문제로 남아 있다. 3장과 4장의 스콜라 철학에 대한 연구와 마

찬가지로 그 대답은 단순한 ‘예’도 아니고 ‘아니오’도 아니다. 더 나은 대답은 연속성과 불연속 성의 흐름을 인식하는 더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연속성 한편으로 종교개혁은 과거의 신비주의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종교개혁이 신비주 의의 토양에서 나왔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런 주장에는 유보 조건이 필요하다.116)

예를 들어 중세 후기 독일의 신비주의자들을 생각해 보자. 『독일 신학』과 요하네스 타울러

5:313, 331.

114) Schaff, 5:313.

115) Schaff, 5:325-327.

116)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5:241의 주장을 보라. 더 최근의 것으로는 Leppin, “Luther’s Roots,” 49-61을 보라.

마음

의 문제에 있어 타울러와 경쟁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 멜란히톤 역시 타울러를 칭찬하기는

마찬가지였다.117) 1516년에 루터는 무명의 저자가 쓴 또 하나의 독일 신비주의 논문을 접하

게 되었고, 큰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영적으로 고귀한 작은 책』으로 출판했다.118) 그러나 루터

가 입수한 책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루터는 후에 더 완전한 판본을 발견했고, 그것을 1518년

에 『독일 신학』으로 출간했다. 루터는 이 책에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성경과 성아우구스티누

스의 저서 외에는 이 책보다 내가 하나님, 그리스도, 인간, 만물에 대해 더 많이 배우게 된 책

이 없다.”119)

루터는 이 책에 짧은 서문을 써서, 자신의 마음속에 ( 이제 막 시작한 ) 종교개혁과 『독일 신학』

사이의 연관성을 드러냈다. 앞서 언급했듯이, 새로운 독일 신비주의자들의 장점 중 하나는 자

국어와 단순한 산문을 통해 글을 일반 그리스도인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점이었다. 루터는 자

기보다 앞선 이 운동이 교황직과 그 제도의 명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했다. 물론

비텐베르크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인 자신도 마찬가지로 그런 명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

에 그 비교가 매우 적합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이 종교개혁자는

이런 약점을 이용해 하나님의 지지를 호소했다.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그분

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재능이 뛰어나고 잘난체하는 설교자가 결코 선택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시 8:2)”. 루터는 꾸밈없는 독일어에 짜증을 내지 말라고 조언했다. “이 고귀한 작은 책

은 말과 인간의 지혜에서는 빈약하고 꾸밈이 없지만, 예술과 신성한 지혜에서는 더 풍성하고

더 귀중하다.”120)

그 해가 1518년인 것이 루터의 다음 말을 놀랍게 만든다. 루터는 이 작은 독일어 논문을 자 신의 보편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라고 생각했다. 루터는 자신과 비텐베르크 신학자들이 “마치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려는 것처럼 수치스럽게” 말한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말 했다. 일찍이 1518년에 루터는 자신이 새로운 믿음을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교회의 보편적 유 산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는 로마 교회의 비난에서 가시를 느꼈다. 그러나 루터는 이 오래 된 책인 『독일 신학』이 왜 대학의 교육 과정에서 빠져 있는지 물으며 증명의 책임을 로마 교회 에 돌렸다. 루터는 이 신학과 영적 생활에 대한 책을 되찾아 옴으로써, 자신은 고대의 뿌리로 돌아가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작은 책을 읽게 한 다음 신학이 우

117) 샤프는 또한 칼빈의 후계자 테오도르 드 베즈를 포함한 차세대 개혁파 사상가들은 타울러에 대한 높은 평가를 공유하지 않았지 만 그를 “예견자”로 간주했다고 지적했다. Schaff, 6:261. 118) WA 1:153. 119) LW 31:75. 120) LW 31:75.

이 알려지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독일 신학자들이 의심할 여지 없이 최고

의 신학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멘.”121)

루터 같은 초기 종교개혁자들도 ‘근대적 경건’ 운동의 영향을 받았을까? 이 질문은 논쟁되 고 있지만, 오즈먼트의 평가는 이런 논쟁을 뛰어넘어 근대적 경건의 기여를 정확히 집어낸다. “근대적 경건은 어떤 면에서는 16세기의 종교개혁 운동을 예상하고 도왔다고 말할 수 있지

만, 그것의 주요 성과는 종교개혁 직전에 전통적인 수도원 제도의 부흥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

것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본받아 자기 부인의 단순한 공동체적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원 시 교회 못지않게 중세 말에도 많이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122)

이 말이 맞으면, 중세 성기와 후기의 다양한 신비주의 전통은 종교개혁 직전에 교회가 생명

이 없고 어둠으로 가득 찬 영적 무덤이었다는 통념에 의심을 품게 한다. 수도원 생활의 발전과 활기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 준다. 중세는 평신도부터 성직자까지 영혼의 삶에 대한 진지하

고 꾸준한 헌신이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의 반응은 교황과 교황직의 부패와 대사부 제도로 인

해 수익성이 높아진 구원론 체계와 훨씬 관련이 깊다. 그렇다고 종교개혁자들이 대중의 경건

이나 수도원의 영적 생활을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문제 삼았다. 마르틴 루 터의 위기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 안에서 시작했다. 그리스도인의 회심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수도원의 관점은 로마 교회의 보속 제도 및 대사( 大赦 ) 제도와 결합하여 루터가 자

신의 그리스도인의 순례 여행을 재고하는 데 적합한 맥락을 제공했다. 동시에 종교개혁자들은

복음주의적 각성 후에도 중세의 신비주의를 계속 되찾아 왔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 한 비전을 발전시키기 위해 베르나르 같은 대표적 인물에 의지함에 따라 중세의 경건은 그들

의 신학뿐 아니라 그들의 영적 생활도 돋보이게 했다.123)

불연속성

그러므로 루터가 타울러와 『독일 신학』을 높이 평가했다고 해서 루터가 독일 신비주의를 전 적으로 또는 비판 없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타울러는 교회의 의식주의에 비판적이었지만, 그럼에도 교회의 충실한 종으로 남아 있었고 루터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혐오감을 느꼈던 교 회의 믿음 중 다수( 예. 중보자 마리아 ) 를 수용했다.124)

루터는 결코 신비주의자가 되지 않았으며, 신비주의자의 단점에 대한 진지한 비평을 유지

121) LW 31:76.

122) Ozment, AgeofReform, 97

123) 종교개혁자들을 신비주의자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되고 있다. Leppin, “Luther’s Roots,” 59를 보라.

124) 타울러의 마리아론에 대해서는 Schaff, HistoryoftheChristianChurch, 6:261-262를 보라.

험, 즉 보속 행위를 기반으로 한 영적 상승을 가정하는 경험에 의존했다. 각 수사는 수도원장

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다. 수도원장이 수사를 용서할 때 솔직함은 보상을 받았다. 그러

나 죄에 대한 현세적 형벌은 여전히 남아 있어 보속을 요구했다. 수사는 보속 요건을 만족시키

는 특정한 행위를 수행해야 했다. 이런 만족 행위의 강도는 죄의 심각성에 따라 달랐다. 마을

에서는 교회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동일한 관행을 시행했다. 그러나 수사만이 밤낮으로

이런 보속 제도에 헌신했다. 8장에서 살펴보겠지만, 마르틴 루터의 초기 종교개혁은 바로 이 런 수도원의 맥락에서 탄생했다. 젊은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에 들어가서 그 수도원

의 보속 제도 안에서 진지한 실천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루터는 『독일 신학』을 높이 평가했지만, 루터는 이 신비주의자의 구원론적 전제 가 만족을 줄 수 없음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루터는 내면( 주관적 경험 )으로 향하는 대신에, 자신의 외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의를 바라보았다.125) 믿음으로 바깥쪽으로 그리스도로 향함으로써, 신자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아들과 연합한 모든 자녀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은 혜, 자비, 사랑을 받는 데 훨씬 나은 기초를 가지게 되었다.126)

앞에서 언급했듯이, 수도회와 교황직은 흔히(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 서로를 지원하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루터의 초기 항의를 교황직에 국한된 것으로 해석하고 싶을 수도 있지만, 교 황 제도 자체는 일종의 우산과도 같은 것으로 그 아래서 수도원의 영적 본질( 그리고 그 구원론 ) 이 살아 숨 쉬었다. 1520년대 초, 루터는 한 쪽을 때리는 것은 다른 쪽을 주먹으로 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1521년에 루터는 『수도원 서약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판단』을 발표 했다. 그는 수도원 서약을 “가장 해로운 발명품”이자 “그것은 성경의 권위와 사례가 없기 때

문에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불렀다.127) 그는 “모든 수사는 서약에서 면제되어야 한다”라고 발 표했는데, 루터는 서약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무가치하다”라고 말했다.128) 그리고 루터는 흔히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가장 심각한 비난으로 돌아가서 수도원 서약은 사탄의 것이며, 마귀의 교리라고 말했다.129)

125) “이들(신비주의자들)과 달리, 그(루터)는 자신의 접근 방식에서 결코 주관적으로 되지 않았으며, 자신의 경험과 공부에서 나온 교리, 즉 이신칭의를 모든 단계마다 계속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가 루터에게는 항상 죄인이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 믿 음으로만 누릴 수 있는 실재로 남아 있었다.” Grimm, “Introduction,” in LW 31:73-74. 126) Grimm, 31:74. 해럴드 그림은 루터가 신비주의를 떠난 것이 ‘오직 믿음’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루터는 신비 주의자의 평온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루터는 본질적으로 사랑받는 이의 ‘달콤함’을 사랑으로 보는 신비주의 개념을 거 부하고, 사랑받는 이를 위해 고난당하고 수고하는 적극적인 사랑을 강조했다. 신앙인의 도덕 활동에 대한 이런 강조는 신비주 의적 수동성(평온), 관상, 황홀경과는 뚜렷하게 대조를 이룬다.” Grimm, “Introduction,” in LW 31:74. 127) LW 44:252. 128) LW 44:282. 129) LW 44:285, 289.

이 없고 불경스러운 생각만 가지고 서약하며 살아간다.”130) 루터 시대 수사들은 서약이 “비슷

하거나 동등한 것이 없는 여덕과 완전성의 업적”이며, 그러므로 수도원의 수사는 들판의 농부

나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보다 훨씬 우월한 소명( 그리고 천국으로 가는 훨씬 짧은 길 ) 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131)

루터는 수도원 서약이 당시의 보속 제도 안에서 해석될 경우에, 공로에 의해 결정되는 칭의

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132)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우리 자신의 행위나 다른 사

람의 행위에서 오는 은혜와 칭의를 용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앙은 은혜와 칭의가 오직 그리

스도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알고 끊임없이 고백하기 때문이다.” 서약을 하는 경우, 서약이 “의, 구원, 죄 사함을 위해 필요하다”라고 생각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전제 아래 서약해야 한다. 루

터는 “오직 믿음만이 필요하다”라고 믿었다.133) 이와 대조적으로 서약은 칭의의 근거( 오직 그리

스도 ) 와 칭의의 도구적 원인( 오직 믿음 ) 을 위협했다. “선한 삶을 살면 이런 생활 방식으로 구원을

얻고, 죄를 씻고 선행으로 부요하게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서약하는 사람은 오히려 신앙을 모

독하고 부인하는 불경한 유대인이자 신앙에서 배교한 자들임이 분명하지 않는가? 그들은 오

직 믿음에만 합당하게 속하는 것을 그들의 율법과 선행으로 돌린다.”134)

루터는 선행에 높은 가치를 두었지만, 선행의 자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이전이

아니라 이후다. 선행은 “실제로 죄 사함이나 평온한 양심과는 관련이 없으며, 선한 양심의 열

매일 뿐 아니라 이미 주어졌고 여전히 존재하는 용서의 열매다.”135) 루터는 교부 시대와 중세

시대 최고의 수사들도 이에 동의했다고 확신했다. 예를 들어 루터가 길게 인용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를 생각해 보자. 베르나르는 수사였지만, 자신의 서약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입증하는 공로나 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 베르나르는 “자신의 모든 신앙을 그리

스도께 두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아무런 희망도 두지 않았다.” 베르나르는 임

종할 때도 자신의 많은 선행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세를 위해서는 그 선행 중 어떤 것도 도움

이 된다고 믿지 않았다. 베르나르는 “청빈, 순종, 순결에 대한 자신의 서약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으며, 사실상 자신의 삶을 헛된 것이라고 부른다⋯⋯베르나르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 를 제외하고는 그 앞에 아무도 서지 못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130) LW 44:288 (참고. 281).

131) LW 44:295.

132) 과거의 모든 수사들이 루터가 지적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수사였다.

133) LW 44:286.

134) LW 44:280.

135) LW 44:279.

베르나르, 보편적 영적 생활

루터는 “나머지 성인들”도 같은 모델을 따랐기 때문에 베르나르를 예외라고 생각하지 않 았다. 루터는 교부들을 불러와서 그들을 “교부들이 정죄한 행위를 대대적으로 과시하고, 성인 들의 모범을 따른다는 명분 아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르치 는” 당시의 수사들과 비교했다.137) 다시 말해서 루터는 공로에 토대를 둔 서약에 대한 자신의

비난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보편적 교회와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루터의 보편성은 죽

음을 앞둔 베르나르의 모범뿐 아니라 그 이전의 많은 교부들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반면에 루

터 시대의 수사들은 헌신과 예배를 통해 어떻게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을 선하게 만

들기 위해 서약을 오용함으로써 수도원의 의도를 왜곡했다.

루터는 원칙적으로 서약에 반대하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서약은 인간의 발명품이며 지

금도 여전히 그런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완전히 우스꽝스러운 것은 아니다. 주어진 시간

동안만 자발적으로 복종을 서약하는 것에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138) 예를 들어 루터는 서

약이 다음과 같이 들린다면 그 서약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성아우구스티

누스의 모든 규칙과 함께 순종, 순결, 청빈을 주님께 서약합니다. 저는 저의 자유 의지로 서약 하며, 그것은 제가 그것이 좋아 보일 때 자유로이 저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음을 뜻합니다.”139)

이런 서약은 자발적인 봉사, 즉 신앙의 열매에서 나온 것이다. 이 경우에 서약을 하는 수사는

자신의 서약에 대해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된다.

그러나 루터는 많은 서약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해방의 햇살 아래 행해지는 것이 아

니라, 오히려 서약을 하는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기독교 본연의 질서를 뒤집는다고 우려 했다.140) 서약은 공로에 의한 칭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강요되며, 일단 서약을 하면 그 서약

은 의무가 되어, 수사에게 그 서약과 그것이 요구하는 모든 완전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감

당할 수 없는 짐을 지운다.141) 루터에게는 이신칭의만이 죄인을 해방하여 더 이상 양심의 짐을

지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또는 복음주의적 자유는 행위에서 양심을 해방하는 양심의 자유다. 행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행함에 신앙을 두지 않는 것이다.

136) LW 44:290. 어떤 사람들은 루터가 복음주의로 돌아선 후 신비적 경건을 버렸다고 주장하지만, 루터가 여기서 베르나르를 사용 한 것은 루터가 그렇게 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레핀은 더 나아가 루터의 신비적 측면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고 말한다. Leppin, “Luther’s Roots,” 53.

137) LW 44:291. 그리고 다시, “베르나르 등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이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충 만했기 때문에 독이 이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했다”(44:288-289).

138) LW 44:312.

139) LW 44:311.

140) 루터의 우려를 모든 수도회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회 규칙은 양심이나 규칙 자체에 위배되지 않는 한 순 종을 옹호했다.

141) LW 44:315.

복음을 통해 이 양심을 행위에서 해방시키셨고, 이 양심에게 행위를 신뢰하지 말고 오직 그분 의 자비하심에 의지하라고 가르치신다.”142)

서약을 공로의 도구로 전락시킴으로써, 교황과 교회법은 “자유에 대한 가르침이나 지식뿐 아니라 양심의 자유를 먼저 파괴한 후에, 양심을 행위의 올가미에 가두어 그리스도에게서 멀

어지게 한다.”143) 이런 이유로 루터는 마치 “의와 구원을 위해 필요한” 행위의 한 형태가 서약

인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해방된 양심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 즉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부어지고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사역”만을 바라본다. 루터는 속담의 강력 한 대조를 통해 자신의 요점을 포착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우리를 비난하고 정

죄할 만큼 나쁜 행위가 없지만, 또한 우리를 구원하고 변호할 만큼 좋은 행위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행위는 우리를 비난하고 정죄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행위( 사역 ) 만이 우리를 보호

하고 구원한다.”144)

요약하면 어떤 행위가 이루어지든 그것은 “그리스도의 행위가 우리를 위해 무상으로 아무

런 보상 없이 행해진 것처럼, 우리 이웃에게도 유익하고 유리하게 무상으로 아무런 보상 없이

행해져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행위가 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신앙을

통해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행위”가 될 수 있다.145)

루터는 이 제도를 시험해 본 후 부족한 점을 발견한 수사로서 말하고 있었다. 뤁루터는 서약

했지만, 그것은 루터가 아무리 노력해도 달성할 수 없는 공로 제도를 강요했기 때문에, 그 의

무가 자신의 양심에 절망적인 부담을 주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루터가 새롭게 발견한 지혜,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신이 발명한 것이 아니었다. 루터는 이런 ‘우상숭배’를 도입한 것을 ‘로마의 적그리스도’ 탓으로 돌렸다. “예전에는 수사들이 독신주의자였고 자유 의지에 따라 청빈과 순종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의 후계자들은 결국 수사들의 자발적이고 복음적인 모범을 강제적인 서약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오직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해하는 수사들의 남은 자를 보존해 주셨다. “성 베르나르 같은 여러 수사는 순결, 순종, 청빈 의 서약을 지켰지만, 그것은 서약 때문이 아니었다. 그 대신에 그들은 교부들과 복음의 고대적 인 모범을 따랐다.”146) 이런 보편성의 전통을 바탕으로 루터는 수도원 서약을 개혁하기 위한 자신의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142) LW 44:298.

143) LW 44:300.

144) LW 44:301.

145) LW 44:301. 146) LW 44:316.

16세기에 이르러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같은 더 오래된 중세 수사들의 순수한 의도는 변질

되었다. 스타인메츠는 “중부 유럽에서는 독신 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한 성직자들이 주교 에게 연간 세금을 납부하는 조건으로 가정부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허용되었다”라고 말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성직자의 계약을 직접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취리히의 개신교 개혁자

하인리히 불링거는 이런 비공식적인 성직자 가정의 자녀였다. 그럼에도 이런 계약이 준( 準 ) 공

식적인 승인을 받았음에도, 마을 사람들은 그런 가정부를 여전히 사제의 창녀로 간주했다.”147)

이런 타락을 목격한 루터는 수도원 서약을 나쁜 것으로 만들었다. 루터는 그것 대신에 대

체물을 제공했을까? 종교개혁자들은 대개 벽이 허물어질 때마다 새롭고 더 나은 벽을 세워

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혼란이 뒤따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칼빈과 그의 동료 목

회자들은 보속 제도에 따라 사제에게 고해하는 제도를 없애고, 목사가 가정을 방문하는 것으 로 대체하여 가족이 죄를 고백하고 주의 만찬을 준비하기 위한 목사의 지도를 받게 했다( 15장을

보라 ). 루터는 칼빈 같은 2세대 종교개혁자보다 훨씬 전부터 같은 방법을 실천했다. 루터는 수

도원 서약의 남용에 반대하고 사제의 부도덕에 항의했다. 그러나 루터는 수도원 독신주의를 개신교의 가정에 대한 비전으로 대체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혼인과 자녀의 아름다움을 고양

했다( 8-9장을 보라 ) 148) 더 이상 수사는 서방 기독교 세계의 영적 엘리트가 아니었으며, 개신교인

의 각 가정은 성도의 모임의 축소판이므로, 모든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그리

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했다.149)

수도원 서약에 대한 루터의 반응은 종교개혁과 수도원과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 주는 한 가

지 예일 뿐이며, 이 관계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표시, 즉 ‘예’와 ‘아니오’를 동시에 보여 준다.

다른 예들도 이런 관계를 돋보이게 할 수 있다. 설교를 생각해 보자.

성례로서의 설교: 강론 사제에서 설교하는 목사로

종교개혁이 처음으로 강해 설교를 도입했다는 잘못된 생각은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사라져야 마땅하다. 앞에서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를 살펴볼 때 분명히 드러났듯, 순회 설교는 ( 청빈과 함께 ) 사도의 모델을 배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예를 들어 도미니코 수 도회 이름에 약어 O.P. ( 설교자의 수도회 ) 가 붙는 것처럼 전체 수도회가 설교로 규정되기도 했다. 스타인메츠는 “‘말씀을 전하라’는

147) Steinmetz, Luther in Context, 131.

148) “성적 금욕과 금욕주의의 모델이었던 성인 대신에, 개신교인은 목사의 가족을 기독교 가정의 모델로 삼았다.” Steinmetz, Luther in Context, 132. 149) 내가 “서방” 기독교 세계라고 말하는 이유는 동방에서는 수도원 제도와 사제의 가족을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대한 이

런 감사는 종교개혁자들도 이해하고 있었다. 마르틴 부처에서 로버트 반즈에 이르기까지 개신

교인 중 적지 않은 수가 탁발 수도회에서 처음 등장했기 때문에 많은 종교개혁자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150)

그렇다면 종교개혁이 설교에 기여한 것은 무엇일까? 종교개혁의 공헌은 마치 그것이 발명품 인 것처럼 설교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세련된 은혜의 신학 아래서 설교의 중심을 잡았다는 것

이다. “강론된 말씀이 탁발 수사들과 중세 후기 강대상의 최고의 강론자들에게 아무리 중요

했다 하더라도 강론은 여전히 성사에 부수적인 것이었다.” 스타인메츠는 “강론은 구원하는 은

혜가 흩어져 있는 세례 성사, 고해 성사, 성체 성사에 대한 초대에 지나지 않았다. 중세 예배의

중심에 서 있던 것은 아무리 뛰어난 강론자라도 강대상에 선 강론자가 아니라, 아무리 표현을

잘 못하는 사제라도 제대에 선 사제였다.”151)

그러나 이런 대조에는 미묘한 차이를 밝힐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세례와 주의 만찬

을 베푸는 일에 진지했으며, 그들은 이 둘을 성례라고 부르고, 교회 예배 의식의 정기적인 순

환 안에서 지켰다. 그러나 스타인메츠의 지적에는 대체로 통찰이 있다. 중세 교회와 종교개혁

교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설교의 존부가 아니라 설교의 성례적 성격이었다. 스타인메츠는 루

터가 설교를 제3의 성례로 바꾸었다고까지 주장했다.152)

그런 점에서 루터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불링거와 칼빈은 설교를 성례라고 부르지 않았

더라도 설교를 성례로 취급했다. 그들은 성령이 말씀 선포에 동행하여 죄인을 중생하게 하시

고, 회심시키시며, 성화하신다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말씀에는 새 생명을 창조하는 힘이 있었 고, 듣는 사람을 징계할 권위가 있었다. 이것은 설교자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입이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고, 자기 백성을 살게 하며, 훈계하시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결론

고해에서 교리문답에 이르기까지 다른 많은 예를 들 수 있지만,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복잡 한 구조가 분명히 드러난다. 종교개혁 연구가는 ‘예’와 ‘아니오’라는 두 대답을 모두 하는 것이

150) Steinmetz, Luther in Context, 133. 151) “하나님이 모든 세대의 신자를 구원하신 것은 설교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떡, 포도주, 물의 요소와 결합한 말씀을 통해서였다. 강론은 죄인을 성례로 인도하지만, 그것 자체는 성례가 아니다.” Steinmetz, Luther in Context, 133-134.

152) “열쇠의 권세, 즉 죄를 묶고 푸는 권세는 복음 설교를 통해 행사되었다. 그(루터)는 성례의 권능이 성직 임명이나 교회 직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직분을 맡은 사람은 자기들이 지니고 있는 말씀에 의해 권위를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 의 권위가 아닌 다른 어떤 권위도 가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게 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설교된 말씀을 통해서 였다. 세례 성사와 성체 성사도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규정되었다⋯⋯그들에게 하나님의 보좌는 제대가 아니라 강 대상이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는 성찬이 아니라 설교다.” Steinmetz, Luther in Context, 134.

모든

이 아니었다. 정확하고 더 나은 분석에 따르면, 종교개혁은 개편을 비준했지만,

가 아니라 교부 시대와 중세의 오래된 고대의 길에 대해 갱신을 일으킨 것이었다. “종교개혁

은 가톨릭 내부자들 사이의 논쟁으로 시작했고, 세기 중반을 훨씬 넘길 때까지 가톨릭 신자들

과 과거의 가톨릭 신자들 사이의 논쟁으로 지속되었다.”153) 종교개혁자들이 트리엔트 공의회

에서 정죄받으면서 상황이 바뀌었지만, 그때에도 그들은 자기들이 로마 교회보다 훨씬 보편적

이라는 주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종교개혁의 보편성에 대한 주장이 스콜라 철학에 적용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다음 두 장에서는 16세기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들려 주는 좀 더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그림을 보여 줄 것이다

153) Steinmetz, Luther in Context,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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