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의 주요 결론
이 연구의 주요 결론은 18장에 나와 있지만 처음부터 개괄적으로 설
명할 필요가 있다. 바울의 종말론은 두 개의 겹치는 시대로 형성되며,
새 시대가 현재에 들어와 두 개의 경쟁하는 권위와 통치의 영역이 만
들어진다. 성령의 은사는 신자를 새로운 영역에 연결하고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준비로 현재의 삶을 형성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파루시
아가 의로운 죽은 자의 부활과 인류의 심판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구히 발산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창조 질
서 전체가 새롭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과
영원한 영광을 함께 나누기를 고대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님과 함께 누릴 영생에 합당한 완전한 부활의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이 있다. 이
과거의 사건에서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적 종말론의 전망이 펼쳐진다.
바울은 묵시 신학자였지만 반드시 자신의 생애에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바울은 아마도 죽음과 육체적 부활 사이
의 일시적이고 육체가 없는 중간 상태를 믿었을 것이다. 바울은 행위에
따른 하늘의 보상을 지지했다. 바울은 고전적 의미의 지옥에 대해 이야 기하지 않았고, 영혼 멸절설 입장에 부합할 수도 있지만, 바울이 보편 주의자였을 가능성은 작다. 바울은 현재 물리적 우주의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갱신을 내다보았다.
2.1 소개
바울의 글을 직접 다루기 전에, 우리 연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학
계의 논의와 이 연구가 가장 직접적으로 기여할 분야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종말론은 물론 신약 성경이 탄생한 이래 계속
탐구한 주제지만, 그 역사를 모두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대신
신약 성경 주해와 신학 연구라는 본 연구의 특성뿐만 아니라 바울 정경
에만 전적으로 관심을 제한하기 때문에, 학술적 조사를 지난 세기로 제
한할 것이다. 여기서 조사한 대부분의 학술적 기여는 바울에 대한 것이
지만, 바르트나 몰트만처럼 그 범위가 더 넓은 것도 있다. 이러한 조직
신학자가 포함된 것은 이들이 바울 연구에 도움이 되는 통찰을 제공하 기 때문이고, 또한 이들의 공헌이 바울의 종말론 연구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어 앞으로 전개되는 논의를 이해하기에 관련성이 있기 때문 이다.
1930년 슈바이처를 시작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토론과 논
쟁의 윤곽을 주목할 것이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을 통해 펼쳐질 연구
의 무대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 단계에서 이 견해들에 대한
평가를 삼갈 것이다. 바울 자료 자체 연구를 수행하고 나서야 평가의
위치에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연구가 끝나면 이 장에서
제기된 몇 가지 논쟁의 쟁점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바라건대, 논의
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2 알베르트 슈바이처(1930)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사도 바울의 신비주의』는 바울의 ‘신비주의’,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 신학이라는 중심 주제에 대한 획기적인 연구가
되었지만, 바울의 종말론 연구에도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실
제로 슈바이처에게 있어 이 두 주제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바울의 주요 주장에 따르면 바울의 신비주의는 종말론적으로
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바울의 신비주의는 열렬한 종말론적 기대에 중심을 두고 있다.”1 ) 종말
론은 슈바이처가 시각적으로 묘사했듯 그리스도 신비주의라는 바울의
주제가 놓일 신학적 구조를 제공한다.
고정 장치로 기능하는 여러 실이 뻗은 거미줄은 감탄할 만큼
단순한 구조지만, 실이 풀리는 순간 절망적으로 엉킨다. 바울의
신비주의도 종말론의 틀 안에서는 감탄할 만큼 단순한 것이지 만, 이것에서 풀리는 순간 절망적으로 엉키게 된다.2 )
슈바이처는 바울의 종말론 개념이 초기 및 후기 히브리어 선지서, 에 녹서, 솔로몬의 시편, 바룩과 에스라의 묵시록을 바탕으로 한 후기 유 대 종말론, 특히 묵시 신학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했다.3 ) 슈바이 처가 ‘서기관’이라고 불렀던 바울의 동시대 유대인 신학자들의 종말론
1 ) Albert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trans. William Montgomery (New York: Seabury, 1968), 36.
2 ) Schweitzer, Mysticism, 140.
3 ) Schweitzer, Mysticism, 54.
은 특히 바룩과 에스라의 묵시록으로 대표되는 종말론으로서 다니엘서
를 비롯한 히브리 선지자가 표현한 기대치를 수용하여 이들을 조화시
키려 애썼다.4 ) 슈바이처는 바울의 모든 개념과 사상이 유대 종말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헬레니즘에 근거하여 바울을 설명하
려는 사람은 “개울가에 있는 정원에 물을 주기 위해 새는 물통에 물을
담아 먼 거리에서 가져와야 하는 사람과 같다”라고 주장했다.5 )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우주적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
을 수 없었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이 죽은 자의 일반적인 부활의 시작
이며, 따라서 “전통적인 종말론은 변화 없이 지속할 수 없다고 보았다.
메시아가 이미 육신을 입고 나타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에
맞추어 종말론적 기대가 재구성되어야 했다.”6 ) 슈바이처에 따르면, 바
울의 구속에 대한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연 세계를 종식시키고
메시아 왕국을 가져오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우주론적으로
잉태된 것이다.”7 ) 구속은 신자를 썩어질 세상에서 썩지 않는 세상으로
옮기며, 개인과 하나님 및 그리스도 사이의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세계
적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다.8 ) 이 세계적 사건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도래할 메시아 왕국이다.
예수의 재림과 함께 메시아 왕국이 도래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구속
을 위해 이루신 모든 일을 성취하는 것이므로, 예수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련의 종말론적 긴장과 문제를 일으킨다. 예수는 죽
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천사나 영적 권세자 보다 높임을 받으셨지만, “메시아 왕국이 시작하는 날에만 이 권세를 온전히 취하실 것”이다.9 )
그러므로 “첫 서신부터 마지막 서신에 이르기까지 바울의 사상에서 항 상 예수의 즉각적인 재림과 심판, 메시아의 영광에 대한 기대가 일관되
4 ) Schweitzer, Mysticism, 88-89.
5 ) Schweitzer, Mysticism, 140.
6 ) Schweitzer, Mysticism, 100.
7 ) Schweitzer, Mysticism, 54.
8 ) Schweitzer, Mysticism, 54.
9 ) Schweitzer, Mysticism, 63-64.
게 지배적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10 )
바울은 동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 시대 종말론을 제시하지만,
종말론에 대한 팽배한 인식을 바꾸어 놓는다. 메시아가 메시아 시대 이
전에 나타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로 바울에게 예수의 부
활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 대해 종말론적인 문제가 생겼다.11 ) 메시아는
오셨지만 예상대로 메시아 시대를 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슈바이처
는 예수의 부활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겉으로는 자연계의 시대로 보이
지만, 실제로는 부활을 통해 초자연 세계의 힘이 이미 피조 세계 안에 서 작용 중인 시기라고 주장했다.12 ) “예수의 부활과 함께 초자연적 세
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했다.”13 ) 예수의 부활과 함께
메시아 시대가 실제로 이미 시작했고, 일반적인 죽은 자의 부활이 진행 중이었다.14 ) 그리고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다가오는 구속이 이미 시작
했기 때문에 신자는 더 이상 천사와 영적 세력에게 종속되지 않는다.15 ) 예수가 부활하셨다면 지금은 이미 초자연적인 시대다. 바울은 “예수 의 부활을 고립된 사건으로 간주할 수 없었다. 바울은 일반적인 죽은
자의 부활이 시작하는 첫 번째 사건으로 간주해야 했다.”16 ) “미래의 메
시아가 친히 왕국이 오기 전에 살고, 죽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신
자는 다가오는 메시아 왕국에 참여하기 위해 부활의 존재 방식을 소유 해야 한다.17 ) 예수의 재림 전에 죽은 신자가 부활하여 예수가 오실 때
예수의 왕국에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가 오실 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이들도 부활의 존재 방식에 참여하기 위해 부 활하기 위해 죽어야 하는가? 슈바이처는 긍정도 주장하고 부정도 주
장했다. 이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며, 이
10 ) Schweitzer, Mysticism, 52.
11 ) Schweitzer, Mysticism, 98.
12 ) Schweitzer, Mysticism, 98.
13 ) Schweitzer, Mysticism, 99.
14 ) Schweitzer, Mysticism, 100.
15 ) Schweitzer, Mysticism, 64.
16 ) Schweitzer, Mysticism, 98.
17 ) Schweitzer, Mysticism, 95.
러한 방식으로 “평범한 존재 방식에서 벗어나 특별한 범주의 인류를
형성”한다.18 )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사람은 자연인이 아
니라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부활을 통과했기 때문에
부활의 존재 방식에 참여할 수 있다.”19 ) 다른 사람은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이지만, 그들은 부활의 존재 방식에 참여할 수 있다.
슈바이처는 이러한 실마리를 종합하여 바울의 그리스도 신비주의가
세 가지 주요 종말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은 죽음으로써 메시아 왕국
을 놓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로서 특별
하고 먼저 있는 부활을 통해 그 왕국에 참여한다는 것. (2) 그리
스도의 재림 때 살아 있는 사람은 부활 상태의 존재에 들어가기
위해 먼저 죽을 필요가 없으며,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단순한 변화를 통해, 즉 일종의 외피처럼
그들에게 달라붙는 자연적 존재를 벗겨 냄으로써 그 안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것. (3) 예수의 부활과 함께 일반적으로 죽은 자의
부활, 그와 더불어 초자연적 세계가 이미 시작했지만, 불멸에 의
한 사망의 대체는 우선 메시아 왕국으로 가도록 선택된 사람의
육체에서만 작동하며, 심지어 이들의 경우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20 )
마지막으로 슈바이처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영을 종말적인 인격, 즉
예수의 메시아적 인격의 생명 원리로 개념화했음을 지적했다. 그리스
도의 영에 참여하는 것은 메시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과 다름없다.21 )
성령은 부활 능력의 현현이며,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다
18 ) Schweitzer, Mysticism, 96-97.
19 ) Schweitzer, Mysticism, 96-97.
20 ) Schweitzer, Mysticism, 111.
21 ) Schweitzer, Mysticism, 165.
바울의
는 확신을 준다.22 ) 또한 성령의 소유는 신자가 이미 “자연적인 존재 상
태에서 벗어나 초자연적인 존재로 옮겨졌다”라는 것을 확인해 준다.23 )
종말론적 영 안에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육체 안에 있지 않음을 의미하
며,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24 )
2.3 게르하르두스 보스(1930)
슈바이처의 『사도 바울의 신비주의』 독일어 원본과 같은 해에 출간 된 게르하르두스 보스의 『바울의 종말론』은 바울 사상의 종말론적 성
격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설을 제시했다. 슈바이처의 주장이 훨씬 크게
영향을 미쳤지만, 보스의 주장은 오늘날 더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으
며 슈바이처의 주장에 비해 거부되거나 반박되거나 대체된 자료가 더
적다.
슈바이처와 마찬가지로 보스의 가장 큰 진전은 바울 신학의 불가분 하게 종말론적인 성격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실로 “사도의 종말론을 펼
친다는 것은 사도의 신학 전체를 설명한다는 의미다.”25 ) 바울에게 종
말론은 “철학적이고 신학적이며”, 바울의 가르침 안에서 하나의 항목
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 기독교의 거의 모든 기본 교리를 그 원
안에 끌어들여 상호 연관되고 종말론적인 얼굴색을 지닌 부분들로 만
든다.”26 ) 보스는 두 시대 또는 두 세계에 대한 바울의 개념, 유대 세계 관, 종말론과 구원론의 연관성,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바울의 부활 신 학, 성령, 천년왕국, 심판, 영원한 상태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바울의 종말론적 세계관은 두 시대 또는 두 세계를 중심으로 구성되 어 있다. 두 시대 사이의 대조는 에베소서 1장 21절에만 명시적으로
그려지고, ‘이 시대’가 등장하는 다른 여러 구절에서는 상대방을 전제
22 ) Schweitzer, Mysticism, 166.
23 ) Schweitzer, Mysticism, 167.
24 ) Schweitzer, Mysticism, 167.
25 ) Geerhardus Vos, ThePaulineEschatology (Phillipsburg, NJ: P&R, 1994), 11.
26 ) Vos, PaulineEschatology, 10–11.
하며 두 시대 사이의 대조가 암시된다( 롬 12:2; 고전 1:10; 2:6, 8; 3:18; 고후 4:4;
갈 1:4; 엡 2:2; 딤전 6:17; 딛 2:12 ). 27 ) 보스는 시간적으로 정의되는 시대 또는 이
온 ( aeon ) 의 개념이 효과적으로 ‘세계’의 형태를 취하며, 이렇게 되는 것
은 시간적 기간이 여러 특성의 특정 집합으로 정의되어 “구체적 성격
의 일관된 총체”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 외관을 살펴보
면 시대는 말하자면 세상을 구성한다.”28 ) 바울 종말론의 구조는 “지금
있는 세상( 시대 ) 과 앞으로 올 세상( 시대 ) 사이의 대립”에 기초한다.29 ) 이
점에서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 유대 신학 일반, 에스라4서와 바룩의 묵
시록 같은 묵시 문헌과 일치한다.30 )
보스는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종말론적 본질을 인식함으
로써 바울의 종말론과 구원론 사이의 통합적인 연관성을 분명히 했다.
보스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리스도와 우
주를 묶는 유대를 끊은 것으로 보았다. 보스는 “이 사건은 그리스도를
세상에서 내쫓았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진짜 집인 다른 세계로 들어가
기 위해 세상을 떠났다”라고 기록한다.31 ) 보스는 부활에 대해 부활의
종말론적 성격이 자명하다고 생각했으며, 부활 생명의 일반 시대가 시
작할 때 부활의 위치도 자명하다고 생각했다.32 )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
활이 “선언하고 신원하며 의롭다 하는 행위”기 때문에 자신의 법정적
체계에 부활을 포함시켰다.33 )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심으
로써 “죄의 궁극적인 지고의 결과가 종료되었음을 선언하셨다. 다시 말
해, 부활은 정죄 선고를 무효화했다.”34 )
탐구 범위가 슈바이처에 미치지는 못하나 보스도 바울의 신비주
의가 지닌 종말론적 성격을 인정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그리스도
27 ) Vos, PaulineEschatology, 12.
28 ) Vos, PaulineEschatology, 17.
29 ) Vos, PaulineEschatology, 36.
30 ) Vos, PaulineEschatology, 14, 26.
31 ) Vos, PaulineEschatology, 48-49.
32 ) Vos, PaulineEschatology, 44-45.
33 ) Vos, PaulineEschatology, 152.
34 ) Vos, PaulineEschatology, 151.
와 함께 부활한다는 것은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종말론의 두 가
지 근본 행위 중 하나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35 ) 다
시 말해,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부활은 신자의 종말론적 지위에 직접 적 용된다. 그리스도 안에 저장된 “부활의 힘”은 “여전히 현세에 거하는
자들”에게 선제적으로 종말론적 효과를 낳는다.36 )
보스는 성령의 종말론적 본질이 구약 성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으로 간주했고, 여기서 성령의 초자연적 현현은 미래 세계의 도래를 알
렸다.37 ) 성령과 메시아의 연관성에는 종말론적 투영38 ) 도 포함되었으 며, 성령은 “이스라엘의 미래 새 생명의 원천”으로 묘사된다.39 ) 성령
에 대한 바울의 견해에는 두 가지 종말론적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첫
째, 성령은 부활의 근원이며, 둘째, 성령은 “부활 생명의 토대”로서 성
령 안에서 “다가오는 시대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40 ) 성령은 사실 미
래 시대에 속하며 자신을 현재에 투영하여 “종말론적 활동에서 자신에 대한 예언”이 된다.41 )
보스는 그리스도의 ‘재림’( return ) 이라는 말을 비판하면서 “파루시아
는 ‘현존하게 되다’와 ‘현존하다’를 의미하며……파루시아라는 명사
는 ‘도착한다’라는 의미지 ‘돌아온다’라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지적
한다.42 )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그의 재림으로 알려지면 안 된다.43 ) 파루시아와 함께 바울은 계시 ( ἀποκάλυψις, 아포칼륍시스 ) 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임재를 언급한다. 계시라는 말은 주로 신자와 관련 있으며 이전에 숨겨졌던 예수의 영광이 이제 신자에게 드 러났기 때문이다. 파루시아는 주로 하나님 백성의 원수와 관련 있다.
35 ) Vos, PaulineEschatology, 45.
36 ) Vos, PaulineEschatology, 45.
37 ) Vos, PaulineEschatology, 160.
38 ) Vos, PaulineEschatology, 161.
39 ) Vos, PaulineEschatology, 161.
40 ) Vos, PaulineEschatology, 163.
41 ) Vos, PaulineEschatology, 165.
42 ) Vos, PaulineEschatology, 75.
43 ) Vos, PaulineEschatology, 75.
이들에게 복수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44 )
그리스도의 재림 후 죽은 자의 부활과 관련하여 보스는 부활의 범
위 문제를 탐구한다. 바울은 마지막에 죽은 자가 모두 부활할 것이라고
믿었는가, 아니면 죽은 자 중 일부만 부활할 것이라고 믿었는가?45 ) 보
스는 이미 바울에게 부활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 영적인 사건이라는 것
을 입증한 바 있는데, 성령에 참여하지 않는 비기독교인에게 어떻게 부
활이 적용될 수 있는가?46 )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악인의 부활에 대
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 24:15를 주의하라 ), 47 ) 우리는 바울이 가진 유
대교 신학의 유산을 고려할 때 이것을 가정해야 하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보스는 바리새인과 요세푸스가 죽은 자의 일반적인 부활을 믿었
지만 바울 시대 유대교에서 모든 이의 부활이 확고하게 확립되었는지
는 전혀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형
태로 부활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다”라고 말한다.48 ) 바울은 부활 후
심판에 불신자도 참석한다고 가정하지만, 완전히 부활하고 회복된 인
간보다는 육체가 없는 영혼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는
일부 유대 자료에서 발견되는 개념이다. 보스는 “부활과 심판이 모두
비육체적 상태의 악인을 다룰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라고 결론지
었다.49 )
보스는 바울의 천년왕국론 문제를 다루며 에스라4서와 바룩의 묵
시록 같은 일부 유대교 자료에 맞추어 바울을 읽으려는 현대의 노력
을 인정한다.50 ) 그러나 보스의 발견에 따르면 사도의 가르침은 전체적
으로 천년왕국론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는 사도가 특히 파루시아, 부
활, 심판의 결합된 성격처럼 종말론적 사건을 연결된 것으로 나타냄으
로써 중간 상태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보스는 현재 기독교인의
44 ) Vos, PaulineEschatology, 78-79.
45 ) Vos, PaulineEschatology, 215.
46 ) Vos, PaulineEschatology, 216.
47 ) Vos, PaulineEschatology, 223.
48 ) Vos, PaulineEschatology, 219.
49 ) Vos, PaulineEschatology, 224.
50 ) Vos, PaulineEschatology, 234.
상태가 “아주 높은 차원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영원하고 완성된 왕국의
절대적 상태보다 덜하거나 낮은 것은 어떤 것도 그 속편이 될 가치가
없다”라고 제안했다.51 ) 보스는 천년왕국론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네
본문( 고전 15:23-28; 살전 4:13-18; 살후 1:5-12; 빌 3:10-14 ) 을 검토한 후, 천년왕국
론을 옹호할 본문을 찾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52 )
보스에 따르면 부활과 심판은 사물의 종국적인 완성을 위한 두 가지
상호 연관된 행위인데, 이미 부활 안에 신원 선포가 담겨 있다.53 ) 그러
나 기독교인은 다가올 심판에 더 많은 연관성이 있다. 바울이 “개별 기
독교인 사이에 다가올 미래의 삶의 계급과 향유에 대한 차별”을 생각 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54 ) 이 모든 범위는 구원의 영역에 속한다.
부활과 심판 후 영원한 상태에는 슬픔, 죽음, 죄, 죄로 인한 악이 없을 것이며, “불명예와 연약함 같은 것은 천국의 생명 상태와 양립할 수
없다.”55 ) 죽음과 죽음으로 생긴 모든 것이 승리로 삼켜질 것이며, 몸은 신음하게 만드는 모든 것에서 해방될 것이다.56 )
2.4 루돌프 불트만(1948-1953)
루돌프 불트만의 『신약신학』은 ‘코스모스’, 의로움, 그리스도의 죽음 과 부활, 소망, 신자의 현재 삶 같은 바울 사상의 주요 주제가 종말론
형태를 가졌음을 인정했다. 불트만은 코스모스 또는 세계와 관련하여
바울에게 코스모스는 “공간 개념이 아니라 시간 개념, 더 정확이 종말론 적 개념”이라고 주장했다.57 ) 불트만에 따르면 바울은 시간 개념으로 인 간 활동의 세상을 시간이라는 조건 속에서 “지나가 버리는”( 고전 7:31 ) 것
51 ) Vos, PaulineEschatology, 235.
52 ) Vos, PaulineEschatology, 236-259.
53 ) Vos, PaulineEschatology, 261.
54 ) Vos, PaulineEschatology, 269-270.
55 ) Vos, PaulineEschatology, 308.
56 ) Vos, PaulineEschatology, 309.
57 ) Rudolf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Volume I, trans. Kendrick Grobel (London: SCM, 1952), 256
으로 간주했다.58 ) 그러나 그 자체로 세상은 “하나님에 대항하는 세력
의 영역이며, 그 세력에 둘러싸인 개인은 그 영향력 아래 타락했다.”59 )
그것은 이 시대의 통치자, 즉 이 시대의 신의 영역이다.
바울의 종말론적-역사적 코스모스 이해는 인류가 영적 세력에 노
예가 된 것을 수반하며, 그 책임은 인류 자신에게 있다. 바울이 이러한
영적 세력과 사탄에 대해 신화적 진술을 제공하는 이유는 이러한 종말
론적 코스모스 내에서 이들이 맡은 역할 때문이지 “우주론적 사변”에
관여하거나 “무섭거나 끔찍한 현상을 설명하거나 인간의 책임과 죄책
감을 덜기 위해서”가 아니다.60 ) 다시 말해, 불트만은 영적 세력에 대한
바울의 진술을 발굴하여 우주론적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바울의 진술은 본질적으로 우주론적이지 않고 신화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류가 여전히 세력의 노예로 남아 있지만 인간의 실패를 세력 때
문이라고 변명할 수 없다.
불트만은 바울이 로마서 2장 13절과 갈라디아서 5장 5절 같은 본문
에서 “종말론적 심판 가운데 다가올 미래의 의의 판결”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칭의의 종말론적 성격은 자명하다고 간주했다.61 ) 바울의 의 개
념은 현대 유대교에서 발견되는 의 개념과 유사하지만, 이점에서는 다
르다. 유대교에서 의는 “소망의 문제”인 반면 바울에게는 “현재의 현실
이다. 그리고, 현재의 현실도 된다고 표현하는 편이 조금 더 낫다.”62 )
즉, 바울의 독특한 종말론적 전망은 자신의 의 개념을 현대 유대교에서
발견되는 의 개념과 차별화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옛날 옛적에 일어난 사건이 아
니라” 우주적 사건으로 이해했다.63 ) 이러한 우주적 사건은 옛 시대의
세력을 제거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제사의 속죄 제물 이상이었다.
또한 “이 시대의 권세, 즉 율법, 죄, 죽음으로부터 풀려나는 수단 ”이
58 ) Bultmann, Theology, 256.
59 ) Bultmann, Theology, 256.
60 ) Bultmann, Theology, 257-258.
61 ) Bultmann, Theology, 273.
62 ) Bultmann, Theology, 278-279(강조는 원문).
63 ) Bultmann, Theology, 299.
바울의 종말론
었다.64 ) 불트만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그런 효과를 낼 수 있었
는지를 질문했고 “바울이 신비 종교에 나오는 신적 존재의 죽음을 유
비로 삼아 그리스도의 죽음을 묘사한다”라고 결론지었다.65 ) 이런 신비
종교에서는 신비의 신이 입교자에게 신적 존재의 죽음과 회생에 모두
참여할 권한을 부여하여 입문자를 죽음으로 이끈 다음 죽음에서 구해
낸다.66 )
그러나 불트만에 따르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신비 종교의 관
점에서만 해석한 것이 아니라 “영지주의 신화의 범주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또는 승귀와 연합한 것으로 간주하
여” 해석한다.67 ) 영지주의 신화는 구원자의 오심과 가심을 비하와 승
귀로 말하지만, 구원자가 이 땅을 떠난 것이 폭력적인 죽음으로 인한 것임을 암시하지는 않는다.68 )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비적인 신
적 존재의 죽음과 회생에 영지주의 신화 구원자의 비하와 승귀가 결합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불트만이 “구원 발생”이라고 불렀던 것으
로 본질로는 종말론적이며 옛 시대를 종식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를 동반하는 옛 세상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 우주
적 사건은 단순히 이미 시작한 종말론적 사건의 완성과 확증만을 의미 할 것이다.69 ) 몸의 구속을 가져올 이 우주적 드라마는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했으며, 그 완성이 가까워지고 있다.70 ) 바울은 최후의
심판과 “옛 세상을 끝내고 그리스도의 새 세상을 소개할 우주적 드라 마”에 대한 묵시적 기대를 굳게 붙잡고 있다.71 ) 주님의 그날은 그리스
도의 통치가 끝나는 날로, 왕국을 아버지께 넘겨주어 하나님이 모든 것
64 ) Bultmann, Theology, 297-298(강조는 원문).
65 ) Bultmann, Theology, 298(강조는 원문).
66 ) Bultmann, Theology, 298.
67 ) Bultmann, Theology, 298(강조는 원문).
68 ) Bultmann, Theology, 298.
69 ) Bultmann, Theology, 306.
70 ) Bultmann, Theology, 347.
71 ) Bultmann, Theology, 346.
의 모든 것이 되시는 날이다.72 )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과 파루시아 사
이의 시간은 “선포가 울려 퍼지는 지금( 고전 15:23-28 ) ”으로서 메시아의
통치를 구성한다.73 )
불트만은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 그것이 지닌 미래 지향적인 성격에
주목했다. 신자의 소망은 미래에 대한 자유와 미래에 대한 개방성인데,
이는 “믿음의 사람이 자신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순종으로 하나님께
넘겼기 때문에 갖게 되는 것”이다.74 ) 반면에 불신자는 자신의 자원에
의존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 의지하며 자신이 미래를 어느 정도 통제
할 수 있다고 잘못 믿는다. 믿음은 선포된 말씀에 대한 반응이며 그 자
체로 종말론적 구원 발생의 일부다.75 ) 실로 신자의 존재 전체가 종말론
적이다. 신자는 기쁨 속에서 존재하며 이는 궁극적으로 미래를 가리키
기 때문이다.76 )
그러나 삶은 미래에 대한 개방성과 미래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현재의 실제이기도 하다.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
으므로 더 이상 ‘세상’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으며, 그는 새로운 피조물
이다.77 )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첫 번째 사
례가 아니라 모든 신자의 부활 생명의 기원이다. 신자의 부활 생명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진행되므로 그 기원 안에 이미 존 재한다고 볼 수 있다.”78 ) 이제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신자에게는
“세상과 그 권세로부터의 자유도 주어진다.”79 )
72 ) Bultmann, Theology, 346.
73 ) Bultmann, Theology, 307.
74 ) Bultmann, Theology, 320.
75 ) Bultmann, Theology, 329.
76 ) Bultmann, Theology, 339.
77 ) Bultmann, Theology, 348.
78 ) Bultmann, Theology, 347-348.
79 ) Bultmann, Theology, 351(강조는 원문).
2.5 칼 바르트(1932-1968)
칼 바르트는 그의 『교회 교의학』 다섯 번째 권을 종말론에 할애할 계
획이었지만, 집필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교회 교의학』은
종말론적 통찰로 엮였으며, 주요 단원 넷을 할애하여 종말론 문제를 직
접 다룬다. 그것은 ‘종말’( CD III/2 §47.5 ), ‘성령의 약속’( CD IV/3.1 §69.4 ), ‘인
간의 정죄’( CD IV/3.1 §70.3 ), ‘소망의 주체와 소망’( CD IV/3.2 §73.1 ) 이다. 물론
바르트가 바울의 저술에만 국한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종말론에
대한 바르트의 공헌은 이후 바울 해석의 모양새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바르트는 ‘종말론’( CD III/2 §47.5 ) 에서 죽음의 주제를 다루었다. 죽음은 하나님 심판의 표지지만 “이 심판을 제쳐놓는다는 징표는 죽음의 패
배”를 뜻한다.80 ) 그러나 바르트는 죽음의 패배를 탐구하기 전에 인간
죽음의 암울함을 파고들었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대한 폭압적인 공격
이며,81 ) 무해하고 중립적인 부정이 아니다.82 ) 그러나 죽음은 그 자체로
폭군이 아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에 대해 옳고 피조물이 하나님에 대해 그르기 때문에” 통치하는 것일 뿐이다.83 ) 죽음의 파괴적인 역사는 하
나님 앞에서 우리의 허무함을 드러내고 인류에게 참을 수 없는 악을 가
져다주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실 하나님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두
려움에 근거를 두고 있다.84 )
인류의 마지막 대적인 죽음은 자유롭게 마음대로 작용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죽음을 그 직분에 임명하셨고 또한 해임하실 수도 있다. “하
나님은 죽음을 무장시키셨지만 또한 그 무장을 해제하실 수도 있다.”85 ) 바르트에게 이것은 우리가 죽음
80 ) Karl Barth, ChurchDogmatics, III/2: The Doctrine of Creation, ed. G. W. Bromiley and T. F. Torrance; trans. G. W. Bromiley (Edinburgh: T&T Clark, 1960), §47.5, 593.
81 ) Barth, ChurchDogmatics, III/2 §47.5, 593.
82 ) Barth, ChurchDogmatics, III/2 §47.5, 608.
83 ) Barth, ChurchDogmatics, III/2 §47.5, 608.
84 ) Barth, ChurchDogmatics, III/2 §47.5, 608.
85 ) Barth, ChurchDogmatics, III/2 §47.5, 608.
째 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오히려 죽음 속에는 죽음
의 주님도 계신다.86 ) 죽음의 공포는 사실 “죽음으로 우리가 마침내 살
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라는 사실에 기인한다.87 ) 따라
서 우리는 은밀한 죄와 죄책감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모든 영광을 빼
앗긴 채 그분 앞에 무력하고 벌거벗은 어리석은 모습으로 서게 될 것
이다.”88 )
그러나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은혜로운 하나님이시다. 그는 인
간을 위한 분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분의 영원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
신다.”89 ) 사실, 하나님이 인류에게 내리신 죽음이라는 저주는 “그분의
언약 무지개”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강하게 다가온다.90 )
죽음은 인류를 향해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의 어두운 면이다.91 ) 이는 죽
음에서도 “그는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되
실 것”이며 반드시 그 안에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일하실 것임을 의미 한다.92 )
바르트에게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더
이상 죽음을 자신들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오히
려 죽음은 그들 뒤에 있다. 이미 그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폐
하고 그들의 죄와 죄책감과 함께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드신 그분께 속
하기 때문이다.93 ) 종말론적 관점에서 볼 때, 구속과 화해, 죽음의 멸망
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시간의 종말, 마지막 날, 더 정확하게 각
개인과 인류에게 밝아오는 마지막 날의 마지막 밤 자정”을 의미한다.94 )
바르트는 이러한 통찰을 세 가지로 요약하며 첫째, 예수의 십자가와
86 ) Barth, ChurchDogmatics, III/2 §47.5, 609.
87 ) Barth, ChurchDogmatics, III/2 §47.5, 609.
88 ) Barth, ChurchDogmatics, III/2 §47.5, 610.
89 ) Barth, ChurchDogmatics, III/2 §47.5, 609.
90 ) Barth, ChurchDogmatics, III/2 §47.5, 610.
91 ) Barth, ChurchDogmatics, III/2 §47.5, 610.
92 ) Barth, ChurchDogmatics, III/2 §47.5, 610.
93 ) Barth, ChurchDogmatics, III/2 §47.5, 621.
94 ) Barth, ChurchDogmatics, III/2 §47.5, 622.
바울의
죽음의 폐지와 시간의 성취의 관계, 둘째, 마지막 때의 시작으로서 예
수의 부활과 그 결론으로서 영광의 재림 사이의 관계, 셋째, 예수의 부
활과 신자의 중생 사이의 관계를 인정했다. 신자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
지금은 감추어져 있으나 예수가 영광으로 재림하실 때 드러날 하나님
안에서의 삶으로 거듭났다.95 )
바르트는 ‘성령의 약속’( CD IV/3.1 §69.4 ) 에서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개
념을 탐구하면서,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뿐 아
니라 부활절 사건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리고 실로 성령의 선물은 이 두 사건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간
주되어,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하나의 연속적인 사건”으로 적절하게
이해된다. 이 세 단계에서 각자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 이다. 부활절 사건이든, 성령의 임재든, 그리스도의 최종 재림이든, “항
상 그리고 세 가지 형태 모두 이것은 이전에 오셨던 분의 새로운 오심 에 대한 문제다.”96 ) 그러나 바르트는 부활절 사건이 그리스도의 오심
의 다른 두 가지 양상에 대한 기본 패턴을 제공하기 때문에 전체 사건
을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하나의 긴 성취”로 묘사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고 가정한다.97 ) 바르트는 분명히 종말론적인 그리
스도 파루시아의 세 번째 단계( 이 시대 말의 재림 ) 에서 거꾸로 작업하면
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남은 모든 시간에 마지막 시간의 성격과 흔
적이 주어지기 때문에” 두 번째 단계( 현재의 성령의 시대 ) 에도 종말론적 의
미를 부여하고 따라서 원래의 부활절 사건에도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 한다.98 ) 실제로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새로운 창조가 이미 일 어났다고 말하기도 했다.99 ) ‘지금과 아직’이라는 종말론적 개념과 관련하여 바르트는 ‘아직’은
95 ) Barth, ChurchDogmatics, III/2 §47.5, 623.
96 )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V/3.1: The Doctrine of Reconciliation, ed. G. W. Bromiley and T. F. Torrance; trans. G. W. Bromiley (Edinburgh: T&T Clark, 1961), §69.4, 292–293.
97 ) Barth, ChurchDogmatics, IV/3.1 §69.4, 293.
98 ) Barth, ChurchDogmatics, IV/3.1 §69.4, 295-296.
99 ) Barth, ChurchDogmatics, IV/3.1 §69.4, 300.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
도 자신의 선한 의지며, 따라서 나머지 피조물은 그분의 상황에 참여
하고 적응할 수밖에 없다”라는 사실에 근거한다고 가정했다.100 ) 부활절
사건과 그리스도의 마지막 출현 사이의 이 기간은 아직 완성되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인 역동적인 기간으로, 화해했지만 아직 구속되지 않은
피조물이 화해 계시를 향해 그리고 그 계시로부터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기간이다. 피조물에게 이런 시간과 장소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두 가지 형태로 다시 오시는 사건 사이의 거리” 덕분
이다. 바로 이것이 “이 거리가 존재하는 선하고 친절하고 은혜로운 이
유”다.101 )
바르트는 ‘인간의 정죄’( CD IV/3.1 §70.3 ) 단원에서 “모든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구원의 매우 풍성한 약속”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최종적
인 위협의 철회”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102 ) 다시 말해, 바르트는 하나
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영원한 인내와 구원의 방향을 가리키며 보편적
화해를 가져오는 것인지 묻는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긍휼이 실패하지
않고 궁극적인 자비로 이어지기를 소망하고 기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103 )
바르트는 ‘소망의 주제와 소망’( CD IV/3.2 §73.1 ) 단원에서 지금과 아직
의 문제와 단일하게 유지되는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문제로 돌아갔다.
바울은 기독론적 이미와 아직 아님 사이에 분명한 모순이 있음을 인정
하지만, 이것은 “평면적인 모순이 아니다”라고 말한다.104 ) 그 대신 이
미와 아직 아님은 하나의 파루시아가 가진 동등한 형태다. 그리스도의
예언 활동의 시작, 지속, 완성은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고, 내일
도 그리고 영원히 오실 동일한 분”에 의해 수행되기 때문에 동등한 요
100 ) Barth, ChurchDogmatics, IV/3.1 §69.4, 329.
101 ) Barth, ChurchDogmatics, IV/3.1 §69.4, 334.
102 ) Barth, ChurchDogmatics, IV/3.1 §70.3, 477.
103 ) Barth, ChurchDogmatics, IV/3.1 §70.3, 478.
104 )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V/3.2: The Doctrine of Reconciliation, ed. G. W. Bromiley and T. F. Torrance; trans. G. W. Bromiley (Edinburgh: T&T Clark, 1961 ), §73.1, 910.
소다.105 ) 다시 말해, 이미 있는 것과 아직 없는 것 사이의 모순에 대한
바르트의 해결책은 전적으로 기독론적이다. 그리스도 부활의 ‘그때’에
는 오순절의 ‘지금’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다시 미래에 오실 ‘어느 날’을 포함한다.106 ) 모든 순간은 그리스도의 재림 안에서 하나다.
바르트는 기독교의 소망 개념을 기독교의 믿음과 사랑에 비유했다.
믿음이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받는 분이 의롭게 하는 것
이고, 사랑이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분이 거룩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신자의 소망은 부활의 ‘그때’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신 분을 향한 것이며, 따라서 성령 안에서 그분의 임재 안
에서 ‘지금’을 향한 것이다.107 ) 그럼에도 기독교인의 소망은 소망 되시
는 분에 대한 모든 참여에도 불구하고 소망 이상일 수 없다. 그것은 그
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분명하고 확실하지만, 미래에 대한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기대로서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며, “그 자체로 참인 것은 아
직 참이 되지 못했다.”108 ) 즉, 소망으로 주어진 기독교인의 실존은 다가
오는 시간에 아직 구원으로 실현되지 않았다.109 ) 그럼에도 신자는 마지
막 죽음의 이별에서 주님을 기대했고 또 주님과 함께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다가올 마지막 때에 기뻐할 것이다. 신자는 소망 가운데가 아
니라면 실제로 자신의 종말을 향해 바라보거나 움직일 수 없다.110 )
2.6 오스카 쿨만(1962)
1946년 독일에서 처음 출간된 쿨만의 『그리스도와 시간』은 바르트
와 불트만의 비판에 따라 1962년( 영어판은 1964년 ) 에 대폭 수정되었다. 쿨 만은 신약 성경 종말론의 구속사적 본질을 다루면서 “( 이미 성취된 ) ” 현재
105 ) Barth, ChurchDogmatics, IV/3.2 §73.1, 910.
106 ) Barth, ChurchDogmatics, IV/3.2 §73.1, 910.
107 ) Barth, ChurchDogmatics, IV/3.2 §73.1, 914-915.
108 ) Barth, ChurchDogmatics, IV/3.2 §73.1, 917.
109 ) Barth, ChurchDogmatics, IV/3.2 §73.1, 917.
110 ) Barth, ChurchDogmatics, IV/3.2 §73.1, 928.
와 “( 아직 성취되지 않은 ) ” 미래 사이의 긴장을 관찰했다.111 ) 쿨만은 이 긴
장을 설명하기 위해 지금은 유명한 디데이와 브이데이의 비유를 사용
했다.112 ) 디데이가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향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도 이들 세력에 대한 그
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한다. 그리고 브이데이가 전쟁의 최종 승리의 결
론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그분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승리를 보게 될 것이다.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는 전쟁의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이미 발
생했을 수 있지만 전쟁은 여전히 계속된다. 이 전투의 결정적인
효과는 모두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이
미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전쟁은 ‘승리의 날’까지 정해진 기
간 계속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시간 분할에 대한 인식
의 결과로 신약 성경이 의식하는 상황이다. 계시는 십자가 사건
이, 뒤따른 부활과 더불어, 이미 결론에 도달한 결정적인 전투라
는 사실에 대한 선포로 구성된다.113 )
쿨만은 신약 종말론의 현재와 미래의 긴장이 단지 파루시아가 실현
되지 못한 당혹스러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초대 교회가 개발한 해
결책일 뿐이라는 불트만의 주장을 반박했다. 오히려 쿨만은 신약 성경
의 구속사적 종말론은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 메시지의 핵심적 성
격에 속한다고 주장했다.114 ) 쿨만은 슈바이처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바
울( 또는 예수 ) 에 대해 종말론을 중심에 두지 않고 해석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15 ) 실제로 쿨만은 신약의 종
말론뿐 아니라 세계사에서 그리스도 사건의 중심적 의미를 지적했다.
111 ) Oscar Cullmann, Christ and Time: The Primitive Christian Conception of Time and History, rev. ed.; trans. Floyd V. Filson (Philadelphia: Westminster, 1964 ), 3.
112 ) Cullmann, Christ and Time, 3.
113 ) Cullmann, Christ and Time, 84 (강조는 원문).
114 ) Cullmann, ChristandTime, 3-4.
115 ) Cullmann,ChristandTime, 29.
우리의 시간 계산 체계는 연속적인 전진 계열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 즉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진행한다. “그 후 서로 반대
인 두 방향, 즉 하나는 앞으로 또 하나는 뒤로 연도가 열거되는데 ‘그리
스도 이후’와 ‘그리스도 이전’이다.”116 )
쿨만의 연구는 구속사가 전개되는 시간의 틀을 제공하는 헬라어 신
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시간 관련 용어( 특히 신학적 특성을 보여 주는 ) 에서 시
작했다.117 ) 쿨만에 따르면, “하나님은 구원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이러
한 순간 또는 기간을 선택하시고, 이 계획에 비추어 그 시간들이 합쳐
져 의미 있는 연대표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신다.”118 ) 쿨만은
영원이 ‘시간 밖’이거나 시간과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은
제한이 없는 시간이며, 영원은 무한한 시간이라고 주장한다.119 ) 따라서
시간은 “하나님이 자신의 은혜로운 사역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이다.120 )
시간을 순환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인간을 노예로 삼는 저주로 여기
는 헬라식 사고와 달리, 성경은 시간을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여 선
형적인 시간 이해를 제시한다. 이것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가 “항상 결정의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121 ) 시간의 진행성은 어
떤 일이 ‘성취’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능하 게 한다.122 ) 그리스도 사건의 결정적인 중간 지점이 “그 뒤에 놓인 모든
과정과 앞으로 놓일 모든 과정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것처럼, 선의 끝
에 있는 목표는 전체 과정에 “그곳을 향해 정진하게 만드는 추동력”을 제공한다.123 ) 성경적 종말론의 전체 구조는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 아 니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124 )
116 ) Cullmann,Christ and Time, 17, 118.
117 ) Cullmann, Christ and Time, 38-39.
118 ) Cullmann,ChristandTime, 44.
119 ) Cullmann,ChristandTime, 46, 62-63.
120 ) Cullmann,ChristandTime, 51.
121 ) Cullmann,ChristandTime, 52-53.
122 ) Cullmann, Christ and Time, 53.
123 ) Cullmann,ChristandTime, 53-54.
124 ) Cullmann,ChristandTime, 66.
쿨만은 다가오는 시대는 “단순히 원시적 시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
니다 ”라고 지적함으로써 플라톤의 시간에 제한되지 않는 영원 개념
에 반대했다.125 ) 오히려 신약 성경은 세 가지 시대를 보여 준다. 첫째로
창조 이전 시대, 둘째로 창조와 종말 사이의 현시대, 셋째로 종말론적
드라마가 펼쳐지는 다가오는 시대가 그 시대다.126 ) 첫 번째 시대와 세
번째 시대는 분명히 일치할 수 없지만 첫 번째 시대에는 창조가 아직
존재하지 않고 준비 중이기 때문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시대도 일치할
수 없다. 세 번째 시대에는 첫 번째 창조가 새로운 창조로 대체된다. 쿨
만의 요점은 “이 모든 것이 지속적으로 직진하는 시간의 틀에서만 일
어날 수 있으며, 시간과 시간에 제한되지 않는 영원이라는 이원론의 틀
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라는 것이다.127 )
쿨만은 자신이 세운 종말론 도식이 지연된 파루시아와 중간 상태라
는 바울의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쿨만은
결정적인 시간의 중심을 그리스도 사건으로 보는 것은 그 출발점이 미
래의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이라는 과거의 사실이기 때문에
파루시아의 명백한 지연으로 바울의 소망이 손실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바울의 소망은 “파루시아의 지연으로 건
드릴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다.128 ) 중간 상태와 관련하여, 쿨만은 신
자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죽으면 “육체가 벗겨진다”라는 생각에 대
한 바울의 강한 혐오감을 인정했다. 죽음으로 인한 ‘벌거벗음’은 불완
전한 상태며, 신자가 이미 성령을 보증으로 받았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다. 이 보증으로 마지막 날에 몸의 부활이 보장된다.129 ) 신약 성경의
모든 부활 소망은 과거의 사실, 즉 “사도들이 증언하는 구속의 선에서
중간 지점, 즉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기초한다.130 ) 또한 이
러한 소망은 전자의 사실에 기초한 또 다른 사실, 즉 성령의 부활 능력
125 ) Cullmann,ChristandTime, 67 (강조는 원문).
126 ) Cullmann, Christ and Time, 67.
127 ) Cullmann,ChristandTime, 67.
128 ) Cullmann,ChristandTime, 88 (강조는 원문).
129 ) Cullmann,ChristandTime, 239.
130 ) Cullmann,Christ and Time, 242.
이 부활하신 분을 믿는 사람 안에서 이미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
한다.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바로 그 성령
이 신자의 필멸의 몸도 살리실 것이다( 롬 8:11 ) 131 )
이것이 신자에게 주는 의미는 신자가 ( 과거나 미래가 아닌 ) 정확한 현재
에 살아야 하며, 미래까지 포함한 전체 시간의 구원 은사를 믿음으로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현재에 침입하여 때때로 미래
에만 온전히 발현되는 구속 작용을 가져온다.132 ) 그러므로 신자는 어
떻게든 시간을 뛰어넘을 능력이 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
의 주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현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지만 “미래의 구체적인 은혜의 선물에 참여하는 것은 항상 잠정적 인 것이다. 사도행전과 복음서에서 치유받은 사람과 죽음에서 살아 난 사람은 모두 마지막에야 비로소 살아나기 위해 실제로 다시 죽어야
한다.”133 )
2.7 에른스트 케제만(1965)
슈바이처가 ‘묵시적 바울’을 지도 위에 올려놓았다면, 케제만의 묵시
적 바울은 현대의 논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케제
만은 묵시적이라는 용어의 모호함을 지적하며 간단히 “임박한 파루시
아에 대한 기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했다.134 ) 케제만은 기독교 묵
시가 종말에 대해 불타는 예수의 기대에서 출발했다는 슈바이처의 견
해에 동의하는 “신약학자는 거의 없다”라고 지적한다. 슈바이처에 따
르면 예수는 종말에 대한 기대로 긴급하게 팔레스타인에 제자들을 선 교사로 파견했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신의 개입을 강요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멸망하고 말았다.135 ) 케제만은 슈바이처의 실패한 묵시적
131 ) Cullmann,ChristandTime, 242.
132 ) Cullmann,ChristandTime, 76.
133 ) Cullmann,ChristandTime, 76.
134 ) Ernst Kä semann, “On the Subject of Primitive Christian Apocalyptic,” in New TestamentQuestionsofToday, trans. W. J. Montague (London: SCM, 1969 ), 109n.1.
135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11. 케제만에 따르면, 슈바이처의 묵시적 접근은 역사
예수를 거부하면서 “천상적 인자의 역할 가운데 벌어지는 예수의 재
림”이라는 부활절 경험에서 비롯된, 원제자들의 중심적인 소망을 지적
했다.136 )
그리스도의 부활은 “보편적 부활의 여명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묵
시적으로 해석되었다.137 ) 인자, 즉 높아지신 예수는 최후의 심판을 견
디신 분이며, 하늘의 영광을 가지고 심판을 위해 다시 오셔서 죽은 자
의 보편적인 부활을 일으키실 것이다.138 ) 따라서 “세상 통치의 마지막
행위인 예수의 이름( 그리고 결과적으로 역사 과정 전체의 마지막 행위 ) 은 종말론적
전체에 결속되어 있다.”139 ) 이런 식으로 교회의 종말론적 특성에 “쿰란
공동체와 특히 밀접한 유사성”이 있음이 발견된다. 공통된 부활절 소망
으로 연합한 교회가 스스로를 지상에서 종말론적 새 언약을 대표하는
거룩한 남은 자로 여겼기 때문이다.140 )
바울의 묵시 사상을 구체적으로 고찰하기 위해 케제만은 불트만의
해석이 중요함을 인정했다. 불트만의 해석을 결정한 요소가 “사도의 현
재적 종말론을 자기 사상의 중심부에 단호하게 배치한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141 ) 그러나 바울의 현재적 종말론에 대한 이러한 고수는 주
로 미래 지향적인 묵시적 바울 읽기와 긴장 관계에 있다. 그리고 바울
이 “사도로서 가진 자의식은 바울의 묵시론에 기초해야 이해할 수 있
기 때문에” 바울의 묵시적 성격도 부정할 수 없다.142 ) 따라서 케제만에
게 현재와 미래의 종말론적 요소는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그의 편지 본문에 강제력을 가하고 싶지 않다면, 우
리는 그 안에 현재와 미래의 종말론 사이의 타협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143 )
비평의 전제에서 벗어나 “진정한 상황을 밝히지 않고 오히려 가려 버렸다”(113 ).
136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14.
137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14.
138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15.
139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15.
140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16.
141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31.
142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31.
143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31.
현재 종말론과 미래 종말론 사이의 이러한 ‘타협’은 그리스도의 부
활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활 후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신 그
리스도는 세상 권세가 자신에게 복종하고 죽음의 권세만 아직 종식되
지 않은 상태, 즉 “역사의 종말과 동일한 종말”을 보셨다.144 ) 따라서 그
리스도의 부활은 현재 일반 부활의 시작인 동시에 “오직 소망으로만
참여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인 현실이다.145 ) 그러나 케제만은 바울에
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로 죽은 자의 소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
치( 고전 15:20-28 ) 와 관련 있으며, 그리스도가 통치해야 하므로 그리스도
의 백성이 죽음의 손아귀에 놓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146 ) 현재 그
의 백성은 이미 육체적 순종으로 자신을 그리스도께 넘겨드리고 있으
며, 우주적 통치자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증언하고 “부활의 현실과 그
리스도의 흔들리지 않는 통치의 궁극적 미래”를 고대하고 있다.147 )
케제만에게 묵시는 또한 바울의 인간론에 근간을 이룬다. 영과 육 같
은 전문 용어는 인간의 개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사람
을 결정하고 사람을 점령하여 이원론적으로 대립하는 두 영역 중 하나
에 위치시키는 하늘 또는 땅의 힘을 의미한다.148 ) 인간은 결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외부의 힘으로 결정되고 그 힘에 굴복해야 하는 세상의
일부다. 신자의 삶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이 세상 권세 사이의 대결에
좌우된다.”149 ) 이런 의미에서 신자의 삶은 세상의 주권을 차지하기 위 한 우주적 경쟁을 반영하며, 따라서 “인간의 삶은 묵시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150 )
바울의 다른 중심 주제의 묵시적 성격과 관련하여 케제만은 하나
님의 의에 특히 주목했다. 부활의 의미가 현재이자 미래인 것처럼, 하
144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34.
145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34.
146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35.
147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35.
148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36.
149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36.
150 ) Käsemann, “Christian Apocalyptic,” 136.
나님의 의는 “바울의 이중 종말론”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151 ) 하나님
의 의는 그의 구원 활동이며,152 ) 따라서 구원은 믿음과 세례를 통해 이
미 존재하지만 종말의 파루시아를 통해야 실현될 것이다.153 ) 또한 하나
님의 의는 불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세
상의 반대 속에서 이룬 하나님의 승리”다.154 ) 이런 의미에서 케제만은
“디카이오쉬네 데우 ( 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 ‘하나님의 의’)는 바울에게 있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예수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155 )
따라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주로 개인에게 초점을 맞
추지 않으며, 전적으로 인간론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사실 온 세상을 향한 것이다.156 )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이러한 전 세계적 범위는 바울의 묵시론에 대한 또 다른 증거다. “그의
디카이오쉬네 데우 교리가 이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을
향해 뻗어 있으며, 세상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을 위해 세상을 되찾는
데 있다.”157 )
2.8 조지 엘든 래드(1974)
조지 엘든 래드는 『미래의 현존』에서 신약 성경의 종말론적 형태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었고, 그 완성이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미 시작한 종말론”으로 설명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 했다. 래드는 알베르트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들
이 귀납적 연구가 아니라 “예수를 그가 처한 환경의 관점에서 해석해
151 ) Ernst Käsemann, “‘The Righteousness of God’ in Paul,” in New Testament Questions ofToday, 170.
152 ) Käsemann, “The Righteousness of God,” 172.
153 ) Käsemann, “The Righteousness of God,” 170.
154 ) Käsemann, “The Righteousness of God,” 180.
155 ) Käsemann, “The Righteousness of God,” 180.
156 ) Käsemann, “The Righteousness of God,” 181.
157 ) Käsemann, “The Righteousness of God,” 181-182.
야 한다고 가정함으로써” 복음서 해석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슈바이처
는 이 환경을 유대 묵시로 이해했다.158 ) 래드는 C. H. 도드를 따르는 영 국 학문의 영향을 받았다. 도드는 종말론이 시간적으로 생각되는 마지
막 일과 관련이 적고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를 지닌 것들”과 더 관
련이 깊다고 보았다.159 ) 특히 하나님 나라는 역사의 종말에 발견되는
종말론적 실체가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영역이다.160 ) 래드
에게 하나님 나라는 “시간을 초월하고 영원하며 초월적이기 때문에 항
상 가까이 있으며 항상 인간에게 그 요구를 대고 있다.”161 ) 묵시 언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고대의 수단
이었을 뿐이다.162 ) 묵시는 “역사 너머에 있는” 반면, 소위 예언적 종말
론은 “역사 안에 있다.”163 ) 래드는 구약 성경의 소망을 탐구하며 그것이 종말론적 소망인 동
시에 지상의 소망임을 보였다. “히브리 사상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본
질적인 일치를 보았기 때문에” 구속에는 항상 땅이 포함된다는 것
이다.164 ) 여기에는 헬라 사상의 육체가 없는 비물질적인 ‘영적’ 구속
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165 ) 자연과 인간의 상호 관계 때문에 지구는 최
종적인 구속에 참여해야 하며,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
러내기 위해 악의 영향을 제거해야 한다.166 ) 이러한 정화를 이루기 위 해 자연의 질서는 파괴의 목적이 아니라 “낡고 불완전한 질서에서 생
겨나는 새롭고 완전한 질서에 길을 내주기 위해” 해체될 것으로 예 상된다.167 ) 구약의 선지자들은 피조물이 부패의 속박에서 해방될 것 을 내다보았으며, 이는 종종 광야가 열매를 맺고( 사 32:15 ), 사막에 꽃이
158 ) George Eldon Ladd, ThePresenceoftheFuture:TheEschatologyofBiblicalRealism, rev. ed. (Grand Rapids: Eerdmans, 1974 ), 4.
159 ) Ladd, Presence of the Future, 17.
160 ) Ladd,Presence of the Future, 17.
161 ) Ladd,Presence of the Future, 18.
162 ) Ladd,Presence of the Future, 18.
163 ) Ladd,Presence of the Future, 55.
164 ) Ladd,Presence of the Future, 59.
165 ) Ladd,PresenceoftheFuture, 59.
166 ) Ladd,PresenceoftheFuture, 59-60.
167 ) Ladd,PresenceoftheFuture, 61.
피고( 사 35:2 ), 불타는 모래가 식고 마른 곳에 샘물이 솟는( 사 35:7 ) 등의
물리적 용어로 표현되곤 한다. 이 모두 땅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질 것이기 때문( 사 11:9 ) 이다.168 )
래드는 이러한 언어를 문자그대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상징으
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세상의 종말론적인 흔
들림, 하늘의 붕괴 등에 대한 언어가 시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결론
지었다.169 ) 이러한 시적 이미지는 우주적 재앙, 이 시대의 종말, 다가올
시대의 시작을 묘사하는 신약 성경의 묵시 문헌에 개념적 소재를 제공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언어는 하나님의 위엄을 묘
사하는 데 사용되는 구약 시의 전통적인 언어에 기반을 두고 있다.170 )
따라서 신적 현현 언어의 상징적 특성은 경직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경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심오한 창조 신학과 창조 세
계에서 인간의 지위에 대한 표현이므로” 이러한 언어를 완전히 시로
축소하는 것도 불가능하다.171 )
그러므로 묵시적 종말론은 “예언적 종말론의 역사적 발전”으로 이
해해야 하며, 예언적 종말론은 마카비 시대 이후 역사적 현실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172 ) 묵시적 종말론과 예언적 종말론 모두 하나님 나라의
침입을 묘사하므로 본질적으로 파국적이어서 둘 다 갱신되고 구속되고
변화된 질서를 상상한다. 묵시에서 발견되는 극명한 이원론은 사실 예
언 문학이나 신학에서 발견되는 개념을 조금 더 선명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173 ) 그러나 래드에 따르면, 묵시적 종말론과 선지자들의 예언
적 종말론 사이에서 핵심적인 차이는 묵시적 종말론은 구속사에서 하
나님의 역동적 활동이라는 개념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묵시 사상가는
선지자와 달리 역사가 악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고 있다고 느끼며 절망
168 ) Ladd,PresenceoftheFuture, 61-62.
169 ) Ladd,PresenceoftheFuture, 62.
170 ) Ladd,PresenceoftheFuture, 62.
171 ) Ladd,PresenceoftheFuture, 62.
172 ) Ladd,PresenceoftheFuture, 101.
173 ) Ladd,PresenceoftheFuture, 101.
바울의 종말론
했다.”174 ) 역사의 종말에서 마침내 하나님이 악의 폭정에서 백성을 구
원하실 미래에만 소망이 있었다. 하나님은 미래의 하나님일 뿐이며, 이
론적으로만 현재의 하나님일 뿐이다.175 )
래드에 따르면 예수의 메시지는 묵시 사상이 아니라 예언적 소망의
메시지였다. 따라서 슈바이처가 주장한 것처럼 미래에만 개입하는 하
나님의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예
수의 설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176 )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는 “현시대
를 다가올 시대로 변화시키지 않고 현시대를 침범하는 하나님의 역동
적인 통치”다.177 ) 이 하나님 나라는 인간 안에서 그리고 인간을 통해
역사하지만,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기 때문
이다. 그리고 이 나라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예
수를 통해 메시아적 구원을 가져오며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178 ) 이 하
나님 나라를 받기 위해 신자는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여 하나님 나라 의 선물을 받고 그 축복 안에 들어간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성취의 시 대는 존재하지만 완성의 시대는 여전히 다가올 시대를 기다린다.”179 )
2.9 E. P. 샌더스(1977)
중요한 저서인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E. P. 샌더스는 바울
의 종말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자신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데
있어 “마지막 장소”에 남겨 둘 수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바울의 생 각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선언했다.180 ) 실제로 바울의 사
상에서 “신자의 완전한 구원과 불신자의 멸망이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174 ) Ladd,PresenceoftheFuture, 101.
175 ) Ladd,PresenceoftheFuture, 101.
176 ) Ladd,PresenceoftheFuture, 148.
177 ) Ladd,PresenceoftheFuture, 149.
178 ) Ladd,PresenceoftheFuture, 194.
179 ) Ladd,PresenceoftheFuture, 217.
180 )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 (Minneapolis: Fortress, 1977 ), 434.
것이라는 확신” 그리고 “기독교인이 미래 구원의 현재적 보증으로 성
령을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보다 더 확실한 요소는 없다.181 )
샌더스에 따르면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과 행위에
따라 심판받는 것( 즉, 선행에 대한 보상과 악행에 대한 처벌 ) 을 명확히 구분했다.
고린도 서신의 세 구절( 고전 3:10-15; 11:29; 고후 5:8-11 ) 에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182 ) 구원에 대한 바울의 확신은 바울의 완벽한 행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심판에서 바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점에서 바울은 전형적인 유대인이었다.
행위에 근거하여 심판받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으로 구원받는다
는 것은 랍비 문헌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따라서 “은혜에 의한 구원은
행위에 대한 형벌이나 보상과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183 ) 샌더스
는 언약의 일원이 된다는 개념을 중심으로 이를 반영하여 “선행은 [언
약] ‘안에’ 머무는 데 필요한 조건이지만 그것이 구원을 얻어내지는 못 한다”라고 말했다.184 )
샌더스는 바울의 종말론 개념과 유대 묵시 사상의 유사성이 세부적
이지 않고 일반적이라는 기존의 관찰을 확인했다. 바울은 종말 논의
에서 때와 시절을 계산하지 않았으며, 짐승의 환상을 비롯한 묵시 문
학 관습을 사용하지도 않았다.185 ) 이로 인해 샌더스는 회심과 부르심
을 받기 전에는 바울이 특별히 묵시적 사고를 한 것은 아니고 그러므
로 그리스도를 기존의 묵시적 틀에 “끼워 맞춘”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186 ) 그럼에도 “차이점과 유사점을 집계한다면, 파루시아에 대 한 기대는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사이의 일반적인 유사성에 해당
한다.”187 ) 마찬가지로 두 시대, 대립하는 세상의 세력, 종말론적인 마지
181 ) Sanders, PaulandPalestinianJudaism, 447.
182 ) Sanders, PaulandPalestinianJudaism, 516-517.
183 ) Sanders, PaulandPalestinianJudaism, 517.
184 ) Sanders, PaulandPalestinianJudaism, 517.
185 ) Sanders,PaulandPalestinianJudaism, 543.
186 ) Sanders,PaulandPalestinianJudaism, 543.
187 ) Sanders,PaulandPalestinianJudaism, 543.
막에 하나님의 승리로 해결된다는 점도 유사성에 속한다.188 )
인류가 처한 곤경에 대한 바울의 생각과 관련하여 샌더스는 종말론
적 순간까지 개인이 악의 시대 중에 억압받으며 옹호와 승리를 얻을 수
없다고 간주하는 묵시 문헌과 바울이 약간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것은 개인이 악의 세력과 지배에 종살이하고 있다는 바울의 개념과 일
치하지 않는다.189 ) 따라서 샌더스는 상당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인류
의 곤경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묵시 사상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된 것
으로 이해하기를 주저했다.190 ) 오히려 “바울은 인간의 곤경에 대한 개
념을 흥미롭게 조합한 것으로 보인다.”191 ) 결국 인류의 곤경은 궁극적
으로 의인에 대한 악인의 억압이 아니라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192 ) 2.10 J. 크리스티안 베커(1980, 1982)
바울 신학을 묵시로 다룬 최초의 저서는 요한 크리스티안 베커의
『사도 바울: 삶과 사상에서 하나님의 승리』다.193 ) 그 뒤에 나온 더 짧
은 책은 『바울의 묵시 복음: 다가오는 하나님의 승리』다.194 ) 특히 베커
의 첫 번째 저작은 케제만 이후 바울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묵시적 독법
을 대표했으며, 두 번째 저작은 첫 번째 저작의 주요 공헌을 보다 접근 하기 쉬운 형태로 정리하여 “교회를 위한 바울의 묵시 복음 도전”을 탐 구했다.195 ) 두 책의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베커의 주요 관심사는 바울 복음의 일관된 주제인 하나님의 승리였다. 이 승리는 “동트는 하나님
188 ) Sanders, PaulandPalestinianJudaism, 554.
189 ) Sanders,PaulandPalestinianJudaism, 554.
190 ) Sanders, PaulandPalestinianJudaism, 554.
191 ) Sanders, PaulandPalestinianJudaism, 554.
192 ) Sanders, PaulandPalestinianJudaism, 554.
193 ) J. Christiaan Beker, Paul the Apostle: The Triumph of God in Life and Thought (Philadelphia: Fortress, 1980 ).
194 ) J. Christiaan Beker, Paul’s Apocalyptic Gospel: The Coming Triumph of God (Philadelphia: Fortress, 1982 ).
195 ) Beker, Paul’sApocalypticGospel, 9.
의 승리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한 피조 질서의 임박한 구속에 대한 소
망”을 나타낸다.196 ) 베커에 따르면, 바울의 독특한 업적은 복음의 묵시
주제를 “인간 상황의 우발적 특수성으로 번역”한 것이다.197 ) 『사도 바울』에서 베커는 바울의 복음을 그리스도의 부활로 확증되고
수정된 묵시적 세계관에서 찾았다( 8장 ). 이 묵시적 세계관은 또한 그리
스도의 죽음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결정했다( 9장 ). 그런 다음 베커는 그
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사망( 10장 ) 과 율법( 11장 ) 이라는 두 주요 세
력 구조가 패배했음을 언급했다. 베커는 바울의 묵시적 복음의 결과
를 구속( 12장 ) 과 기독교인의 삶( 13장 ) 과 관련하여 탐구한다. 바울의 묵
시적 관점은 또한 교회( 14장 ) 와 이스라엘( 15장 ) 에 대한 베커의 이해도
형성했다. 베커는 “바울 사상의 모든 요소는 바울 복음의 일관된 주
제를 구성하는 동트는 하나님의 승리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왜곡
된다”( 16장 ) 라는 것을 보여 주고 책의 논지를 요약함으로써 책을 마무리 한다.198 )
베커는 유대 묵시 문헌에 대한 주요 학설을 조사한 후, 묵시가 “(1)
역사적 이원론, (2) 보편적인 우주적 기대, (3) 세상의 임박한 종말”
이라는 세 가지 기본 사상을 중심으로 작용한다고 요약했다.199 ) 베커는
묵시 문헌의 깊은 실존적 관심사에 주목하며 “여러 측면에서 순교의
신학”을 나타낸다고 보았다.200 ) 묵시 사상가는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 사이의 불일치”와 “토라에 대한 충실함과 그 명백한 무의미함 사이
의 긴장”을 깊이 인식한다.201 ) 묵시론자는 그러한 소망과 모순되는 것
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현재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
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소망 속에서 살아간다.202 )
슈바이처와 케제만이 주장했듯 베커도 바울의 묵시 사상이 “대부분
196 ) Beker, PaultheApostle, ix.
197 ) Beker, PaultheApostle, ix.
198 ) Beker, PaultheApostle, xi.
199 ) Beker,PaultheApostle, 136.
200 ) Beker,PaultheApostle, 136.
201 ) Beker,PaultheApostle, 136.
202 ) Beker,PaultheApostle, 136.
의 초기 기독교 사상가가 그랬던 것처럼 바울 사상의 중심 분위기이자
초점”이라고 생각했다.203 ) 실제로 바울의 묵시적 헌신은 “자신이 세계
사의 마지막 시간에 사명을 감당하는 시대의 사람”이라는 인식과 함께
바울의 성품과 생활 방식을 형성했다.204 )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
은 자의 마지막 부활 사이에 위치한 종말론적 사도다.205 ) 바울은 그리
스도 사건에 비추어 유대인의 종말론을 심오하게 수정했지만, 그러한
수정이 바울 묵시의 강도를 약화하지는 못했다.206 )
바울이 묵시를 수정한 것 중에는 전통적인 묵시 어법을 사용하지
않고 “묵시 시간표, 천국의 건축에 대한 묘사, 악마와 천사에 대한 설명
에 관여하지 않는 것”도 포함되었다. “바울은 복받은 자의 보상을 즐기
거나 악인의 고문을 기뻐하지 않는다.”207 ) 그리스도 사건은 전통적인
묵시 사상의 이원론 구조를 강력하게 수정했다.208 ) 죽음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 고전 15:26 ) 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미래 영광에 대한 현
재의 개방성과 현재에 대한 미래의 침투를 강조함으로써 전통적인 묵
시와 차별화한다.209 ) 미래 시대는 이미 존재하며, 지금 신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면서 새로운 피조물을 기뻐하고 이제는 그에 대한 권
리를 주장할 수 있다.210 )
베커는 바울에게서 전형적인 묵시적 사고에서 예상되는 것처럼 가 혹한 이원론을 보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이 각
인된 모형론에 비추어 보인다. 따라서 옛 시대와 새 시대의 차이에 대 한 바울의 견해는 옛 시대를 어둠으로만 간주하는 묵시적 유대교와 다 르다.211 )
203 ) Beker,PaultheApostle, 144.
204 ) Beker,PaultheApostle, 144.
205 ) Beker,PaultheApostle, 145.
206 ) Beker,PaultheApostle, 145.
207 ) Beker,PaultheApostle, 145.
208 ) Beker,PaultheApostle, 145.
209 ) Beker,PaultheApostle, 145.
210 ) Beker,PaultheApostle, 145.
211 ) Beker,PaultheApostle, 151-152.
‘옛 언약’ 시대는 그 자체로 (일시적인) ‘찬란함’(고후 3:7-
11)이 있으며, 출애굽 이야기는 신자에게 종말론적 의미가
있고(고전 10:1-13), 이스라엘의 특권은 실제적이고 지속적이
며(롬 9-11),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지만(롬 10:4), 율법은 ‘거
룩하고 의롭고 선하며’ 구원 역사에서 필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과거는 하나님 약속의 발자취를 담고 있으며, 이러한 약속은 버
려지지 않고 새로운 약속으로 이어진다.212 )
베커에 따르면 바울의 소망에 대한 이해에는 묵시적 특성이 있다. 그
것은 기독교인의 갈망 대상, 즉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서 악과 죽음에
대한 승리를 가리킨다.213 ) 바울의 묵시 사상은 그리스도 사건으로 결
정된다. 그리스도 사건은 옛 질서를 부정했고 “타락하여 고난 중에 있
는 피조물의 변화에 대한 소망을 시작하셨는데 피조물이 부패를 겪지
않고 구속되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롬 8:20 ). 214 ) 하나님의 영광이 이
타락한 세상에 임할 때, 그것은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현재의 죽음 구조와 분리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 목표가 우주의 존재
론적 무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변화이기 때문이다.”215 ) 이러
한 변화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표시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
순히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역사 속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에 바
울에게 있어 그 역사적 실체가 매우 중요하다.216 ) 따라서 바울은 믿음
을 “현재 실제와 미래 소망 사이의 모순을 견디고 그 긴장 속에서 살아
갈 능력”으로 이해한다.217 )
베커도 비슷하게 죽은 자의 미래 부활이라는 개념을 그것이 속 한 종말의 묵시적 사유 세계와 분리하여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
212 ) Beker,PaultheApostle, 150-151.
213 ) Beker,PaultheApostle, 149.
214 ) Beker,PaultheApostle, 149.
215 ) Beker,PaultheApostle, 149.
216 ) Beker, PaultheApostle, 150.
217 ) Beker, PaultheApostle, 356.
바울의
했다.218 ) 부활은 다가올 새로운 시대에 속하며 본질적으로 모든 현실의
재창조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
치와 미래의 죽은 자의 부활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219 ) 그러므로 그리
스도의 부활은 하늘의 주로 즉위하신 것을 나타내며, 묵시적인 죽은 자
의 보편적 부활과 피조 세계의 변화를 예고한다.220 )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격상 묵시적임을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역사의 변혁을 위해 역사의 끝이 아닌 역사의
한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221 )
베커는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바울의 해석은 두드러지게 묵
시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묵시적인 여
러 세력의 패배를 의미하고, 옛 시대의 마지막 심판을 의미하며, 하나
님의 우주적 승리를 시작하는 절대적으로 묵시적-우주적 사건인 그리
스도의 부활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222 )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음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는 죄, 율법, 육체의 존재론적 권세를 압도
했다.223 )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과 함께 세상 자
체가 심판받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옛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224 ) 따라
서 베커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로 바울의 묵시적 사고의 중
심을 형성한다고 여겼다. “바울의 구원론적 묵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하나님 중심 초점으로 결정된다.”225 )
케제만에 이어 베커도 바울서신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를 묵시 공 식으로 간주하여 하나님의 승리와 하나님의 우주적 구속 행위를 나타 냈다.226 )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의롭게 할 뿐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
218 ) Beker,PaultheApostle, 153.
219 ) Beker,PaultheApostle, 153.
220 ) Beker,PaultheApostle, 153.
221 ) Beker,PaultheApostle, 155.
222 ) Beker,PaultheApostle, 189.
223 ) Beker,PaultheApostle, 189.
224 ) Beker,PaultheApostle, 191, 206-207.
225 ) Beker,PaultheApostle, 211.
226 ) Beker, PaultheApostle, 262.
의 주권적 통치 아래로 옮김으로써 죄의 권세를 폐지”한다.227 ) 그러므
로 하나님의 의는 창조의 묵시적 운명을 시작하고 신자가 새로운 세계
의 규범에 따라 살아갈 영역을 확립한다.228 ) 마찬가지로 베커는 은혜
를 “악의 증가에 비례하여 증가하는 무차별적인 은혜의 신성한 저수지
로 가는 사적인 통로”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묘사했다.229 ) 사건인 은혜
는 죄의 힘에 반대하는 새로운 시대와 지배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은혜
의 묵시적 의미는 서구의 “개인주의” 개념을 넘어 우주적 힘과 그리스
도 안에서 우리 삶의 영역을 가리킨다.230 )
베커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과 성령과 교회의 종말론적 의미를
다룬 후 이스라엘의 문제로 눈을 돌렸다. 바울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과
달리 베커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31 ) 실제
로 구원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전략적
시대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미래에도 여전히 뚜렷한 실체”로
남아 있다.232 ) 따라서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선교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련 있으며 이스라엘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233 ) 베커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가 완수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에 한 백성
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롬 11:25-26 ) 234 ) 이스라엘은 그리스도 후에
도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남으며 교회에 흡수되지 않고 교회는 새
로운 이스라엘이 아니다.235 )
2.11 앤드루 링컨(1981)
앤드루 링컨은 『지금 있고 아직 오지 않은 천국』에서 바울의 종말론
227 ) Beker, PaultheApostle, 262.
228 ) Beker, PaultheApostle, 263.
229 ) Beker, PaultheApostle, 265.
230 ) Beker, PaultheApostle, 265.
231 ) Beker, PaultheApostle, 332.
232 ) Beker, PaultheApostle, 333.
233 ) Beker, PaultheApostle, 335.
234 ) Beker, PaultheApostle, 335.
235 ) Beker, PaultheApostle, 336.
바울의 종말론
적 전망의 핵심 요소가 바울의 우주론적 언어와 이미지라는 점에 주목 했다. 바울의 글에서 구원 메시지는 분리될 수 없는 우주적 드라마의
언어를 통해 제시된다.236 ) 이러한 언어에는 공간적, 시간적 범주와 함 께 수직적, 수평적 지시어가 포함되므로 “종말론은 천국뿐 아니라 마지
막 날도 포함한다”라고 할 수 있다.237 ) 종말론 연구는 종종 그렇게 행해
지듯이 후자에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링컨에 따르면 천국은 바울 종말
론의 두 시대 구조와 관련 있으며, 바울의 천국 언어는 묵시 문헌과 밀
접하게 관련 있다.238 )
먼저 갈라디아서에서 발견되는 하늘 예루살렘의 언어를 살펴본 링
컨은 새로운 종말론적 예루살렘에 대한 소망과 함께 구약 성경 예언
에서 풍부한 개념적 예표가 있음을 지적했다.239 ) 링컨은 이사야 2장, 54장 10-14절, 60-62장, 에스겔 40-48장, 스가랴 12-14장같이 마
지막 날에 열방이 올 세계의 중심지인 새롭고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구절은 그럼에도 지상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의 소망과 강하게 연속성을 유지한다고 지적했다.240 ) 그러나 이사
야 65장 17-25절은 새 예루살렘이 지상의 경계를 초월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하는 핵심적인 본문이다. 이 전망은 구약 성경에서 거의
배아 상태로만 발견되는 개념인 하늘 예루살렘이 나중에 발전하기 위 한 출발점이 된다.241 )
후기 유대교는 영광스러운 지상의 예루살렘에 대한 몇 가지 전통을
증명한다( 참고. 토비트서 13:9 이하; 14:7; 희년서 4:26; 시불라의 신탁 V, 250 이하; 414433; 솔로몬의 시편 11.8; 레위의 유언 10.5; 다니엘의 유언 5.7, 12 ). 242 ) 링컨은 새 예루
살렘을 옛 예루살렘의 갱신으로 보는 에녹1서 90장 28절의 예에 주목
236 ) Andrew T. Lincoln, Paradise Now and Not Yet: Studies in the Role of the Heavenly Dimension in Paul’s Thought with Special Reference to his Eschatology, SNTSMS 43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 5.
237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5.
238 ) Lincoln, Paradise Now and Not Yet, 8.
239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18.
240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18-19.
241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18-19.
242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19.
했다. 옛 예루살렘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새 예루살렘을 일으키지만, 그
것은 하늘에 선재한 것이 아니었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다른 유사한
예는 쿰란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참고. 1QM XII, 13 이하; 4QpIsa a 1, 7, 11; 새
예루살렘을 묘사한 아람어 단편 1Q32 ) 243 ) 이러한 본문은 예루살렘을 지상 국가
의 지상 수도로 삼는 새 시대에 대한 소망을 증명한다.244 ) 하늘 예루살
렘에 대한 바울의 개념은 바울서신 이후에 기록된 바룩2서와 에스라
4서에 나오는 새로운 종말론적 예루살렘이라는 묵시 개념과 공통점이
더 많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4장은 이 두 본문과 달리 현재의 예루살렘
을 율법, 죄, 사망의 지배를 받는 옛 시대에 속한 것으로 분류하기 때문
에 현재의 예루살렘에 대한 소망을 제시하지 않는다.245 )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사실 “공간적으로 묘사된 새 시대”로 간주된다.246 )
링컨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묘사된 하늘의 차원을 살펴보았는데, 바
울은 15장에서 그리스도와 신자 모두 하늘에 속한 존재로 묘사한다.247 )
고린도 교인은 인간의 몸이 새 시대에 속해야 한다고 상상할 수 없었지
만, 바울은 현재 그들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이 부활 시에는 이들을 다
스릴 것이며, 따라서 이들의 몸은 더 이상 약해지지도 썩어 없어지지
도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248 ) 이러한 의미에서 신자의 몸은 섬세하거
나 비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 될 것이다.249 ) 결국, 신자는
“하늘에서 왔거나 하늘로 갈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참고.
22절 ) 있고 그분의 부활 생명을 공유하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다.250 ) 이
것은 그들의 하늘에 속함이 전적으로 미래적인 것이 아니며 현재 그리 스도의 몸이 소유하는 존재 양식을 공유한다는 의미다.251 ) 이것은 하늘
과의 연결 고리를 구성하는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령이 하늘의
243 ) Lincoln, Paradise Now and Not Yet, 19.
244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19.
245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22.
246 ) Lincoln, Paradise Now and Not Yet, 25.
247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33.
248 ) Lincoln, Paradise Now and Not Yet, 42.
249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42.
250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50.
251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51.
바울의 종말론
충만한 생명을 미리 맛보게 하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인이 영적이라면
그들도 하늘에 속한다.252 )
다음으로 링컨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5장 10절과 12장 1-10절에
각각 나오는 하늘의 집과 셋째 하늘의 개념을 다룬다. 바울은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고 하늘의 몸을 소유하기를 기대하고,253 ) 이는 성령의 보
증을 통해 확실시된다. 이로써 “하늘의 몸을 입는 것이 기독교인의 존
재의 완성이자 목표라는 개념이 강화된다.”254 ) 성령은 현재 신자 내의
쇄신과 하늘의 몸의 완성 사이의 연결 고리다.255 ) 링컨은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의 우주론적 의미에 대해 여전히 모호한 입장이지만, 바울
이 단순히 천국에 대한 변형된 명칭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256 ) 그것은 우주론적 사변을 위한 천상적 공간이 아니라 하늘 에 계신 분이 낙원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바울의 소망을 확증하고자 그
리스도가 여신 천국에 대한 경험이다.257 )
빌립보서 3장 20-21절에서 천국은 신자가 속한 나라로 간주
된다.258 ) 이곳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통치하시는 곳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신자의 삶을 지배한다.259 ) 천국의 공간적 차
원은 “천국이 개인의 죽음과 파루시아 사이의 기간에 종말론적 구원
을 누리는 데 특징인 역할이 있다”라는 점에서 바울 종말론의 시간 요
소와 관련 있다.260 ) 그러나 천국은 구원의 최종 목표가 아니며, “천국은
정적인 영원 상태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구원 역사에 속한다.”261 )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영광을
입고 오실 때 구원이 완성되기 전의 일시적인 상태다. 그리스도는 신자
252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53-54.
253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65.
254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67.
255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67.
256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78.
257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84.
258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97-99.
259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101.
260 ) Lincoln, Paradise Now and Not Yet, 106.
261 ) Lincoln,ParadiseNowandNotYet, 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