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포럼] 포퓰리즘 시대의 민주주의: 정치의 실패인가, 전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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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사회포럼]

포퓰리즘 시대의 민주주의 정치의 실패인가, 전환인가?

일시

| 2018

장소

|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주최

|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 서울대 아시아도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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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금) 오후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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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14:00

사회

14:10 발표1

김윤철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좌파 포퓰리즘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의 진보정치모델?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14:20 발표2

포퓰리즘 을의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14:30 발표3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포퓰리스트 우파정당의 도전과 정당민주주의 딜레마 장선화 한국외대 외래교수

14:40 발표4

페미니즘과 포퓰리즘이 교차할 때 손희정 문화평론가

14:50 발표5

작은 포퓰리즘들의 시대, 어떻게 갈등을 새롭게 제도화할 것인가 정정훈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15:00 발표6

포퓰리즘과 한국정치 이승원 서울대 아시아도시센터 연구원

15:10

휴식

15:20

종합토론

16:30

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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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30


목차

발제1 좌파 포퓰리즘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의 진보정치모델?

장석준

...... 04

발제2 포퓰리즘 을의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민주주의: 포퓰리스트 우파정당의 도전과 정 발제3 포퓰리즘과 당민주주의 딜레마 발제4 페미니즘과 포퓰리즘이 교차할 때 포퓰리즘들의 시대, 어떻게 갈등을 새롭게 제도화할 발제5 작은 것인가 발제6 포퓰리즘과 한국정치

진태원

...... 22

장선화

...... 26

손희정

...... 30

정정훈

...... 35

이승원

......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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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1

좌파 포퓰리즘: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의 진보정치모델? 장석준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1. 들어가며

9월 9일 실시된 스웨덴 총선은 유럽 대륙을 휩쓰는 극우 포퓰리즘 바람의 위력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스웨덴 민주당(SD)은 이름이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파시스트 운동의 계승자 이자 반이민 선동에 주력하는 정당이다. 그런데 이 당이 17.53%를 기록하며 당당히 3대 정 당 중 하나로 떠올랐다. 그래도 민주당 득표율이 여론조사 지지율(25%까지 치솟았다)보다는 적게 나왔다며 안도하 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마음을 놓기는 이르다. 기존 좌파 대표정당 사회민주당과 우파 대 표정당 온건당은 모두 지난 총선보다 득표율이 떨어졌다. 반면 민주당은 4% 넘게 올랐다. 온건당과 민주당의 득표율 차이는 이제 2%밖에 안 된다. 우파 제1정당 지위가 민주당으로 넘어가기 일보직전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보루 스웨덴마저 이 모양이니 극우 포퓰리즘은 이제 유럽 정치의 이변이 아 니라 대세라 하겠다. 우파 포퓰리즘만이 아니다. 스페인 정치 지형을 바꾼 신진 정치세력 포데모스(Podemos)는 좌파 포퓰리즘이라 분류된다. 그런가 하면 이탈리아에서는 극우 포퓰 리즘(동맹당)과 혼종 포퓰리즘(오성운동)이 합작한 연립정부가 들어섰다. 게다가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대통령은 어쩌면 중도파 포퓰리즘의 드문 사례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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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럽다. 좌와 우, 중도를 넘어 웬만한 신생 정치세력은 다 포퓰리즘이라 불리는 것 아닌 가 싶기도 하다. 이럴수록 도대체 포퓰리즘이 무엇인지 더 헷갈리기만 한다. 어떤 정책이든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포퓰리즘’이라 딱지 붙이는 주류 언론과 지식인들의 관행 때문 에 혼란은 더욱 심해지기만 한다. 최근 이런 혼돈 속에서 나침반 역할을 할 만한 책이 나왔다. 벨기에의 원로 정치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해(For a Left Populism)>다. 무페는 이 책에 서 포퓰리즘을 ‘소수 엘리트 대 다수 대중’의 담론 전략을 구사하는 정치로 정의한다. 그는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에 전 세계가 포퓰리즘 정치가 확산될 수밖에 없는 ‘포퓰리즘 국면 (populist moment)’에 있다고 진단한다.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병리 현상쯤으로 바라보는 다른 논자들과 달리 무페는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기의 탈정치(post-politics)를 넘어 대중정 치를 부활시키는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이를 탈신자유주의 급진 개혁의 계기 로 만드는 ‘좌파’ 포퓰리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Mouffe, 2018). 이는 무페만의 특이한 주장은 아니다. 극우 포퓰리즘의 득세를 분석하면서 그 대안으로 포 퓰리즘의 좌파적 전유를 제시하는 또 다른 논자들이 있다. 미국의 진보파 논객 로버트 커트 너(Robert Kuttner)가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행정부 출 범 이후 미국 사회의 출구를,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 상원의원이 2016년 민주당 대통 령후보 경선 도전에서 보여준 것 같은 ‘진보적’ 포퓰리즘에서 찾는다(Kuttner, 2018). 무페나 커트너의 이런 논의는 유럽과 북미의 포퓰리즘 현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할 뿐만 아 니라 한국 사회의 진보정치 전망에 대해서도 상당한 시사와 영감을 준다. 현재 한국의 정치 지형은 2008년 이후 유럽, 북미 상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대서양 양안에서는 기존 주 류 정치 세력이었던 중도 좌우파가 오른쪽과 왼쪽의 포퓰리즘 흐름으로부터 협공을 당하는 모양새다. 반면 한국에서는 다른 나라의 중도파에 해당하는 현 여당을 포함한 ‘촛불 연합’이 극우적인 기존 지배정당 자유한국당을 포위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촛불 이후 한국에서도 부동산 가격 폭등,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논란, 예멘 난민 논쟁 등이 벌어지며 외국과 비슷한 포퓰리즘 현상이 나타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 정치의 노선과 전략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 것인가? 이미 포퓰리즘 국면의 한 가운데에 있 는 나라들의 경험과 이에 따른 이론적 시도들이 이 물음의 답을 찾는 데 분명 도움을 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무페의 정식화의 연장선에서 포퓰리즘 현상을 정리하려 한다. 그러면서 21 세기 진보정치의 과도적 형태로서 좌파 포퓰리즘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또한 한국형 좌파 포퓰리즘이 가능할지도 조심스럽게 타진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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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포퓰리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 - 포퓰리즘 일반의 특성 좌파 포퓰리즘 전략을 논하려면, 일단 포퓰리즘 일반을 살펴봐야 한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난점은 포퓰리즘이 전형적인 정치 용어라는 점이다. 즉, 태생부터가 엄밀한 개념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어떤 이들은 민주주의에서 정치가가 다수 유권자의 지지를 내세워 실행하는 거의 모든 정치 행위를 포퓰리즘이라 부른다. 또는 그런 정치 행위 중 특별히 엘리트의 시 각에 거슬리는 것에 포퓰리즘이라는 딱지를 붙이기도 한다. ‘포퓰리즘’을 지나치게 광범하게 사용하는 사례들이라 하겠지만, 그렇다고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포 퓰리즘’을 사용하는 이들이 일정한 흐름을 이룬다면, 이것 자체가 ‘포퓰리즘’의 한 용법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사회과학계에서는 뜨거운 쟁점, 그러면서도 좀처럼 합의에 도달하지 못 하는 쟁점이기도 하다. 라틴아메리카 포퓰리즘 현상 연구자인 프란치스코 파니짜(Francisco Panizza)는 이제까지의 포퓰리즘 연구를 크게 세 흐름으로 나눈다(Panizza, 2005). 첫째는 경험적 연구다. ‘포퓰리즘’이라 불리는 다양한 정치 흐름이나 현상을 모두 검토하고 그들 사 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논하는 방식이다. 둘째는 포퓰리즘을 특정한 사회 구조나 역사 국 면과 연결시키는 연구다. 20세기에 ‘포퓰리즘’이 가장 자주 언급된 지역인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사례(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가 이런 연구의 주된 소재가 됐다. 셋째는 위의 연구들에 바탕을 두면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혹은 대중 정치에 어떠한 성찰을 제기하는지 파고드는 연구다. 이 경향의 연구자들은 특히 포퓰리즘 사례에서 민주주의의 주 체라는 저 ‘인민/서민/민중(people)’이 형성되는 과정을 포착하고 분석하려 한다. 이 흐름의 선구자이자 대표자는 누가 뭐래도 아르헨티나 출신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정치학자 에르네 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다. 그는 영어로 발표된 첫 번째 저작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서 정치와 이데올로기(Politics and Ideology in Marxist Theory)>에서부터 포퓰리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무페를 비롯해 포퓰리즘의 좌파적 전유 가능성을 탐색하는 거의 모든 논의가 라클라우의 연구에서 발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을 무엇보다 특정한 담론 전략, 즉 ‘인민’을 구성하려는 담론 전략으로 바라본다. 그에게 인민이란 이런 담론 실천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항상 담 론 실천을 통해 (재)구성되는 무엇이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 실천에서 핵심은 인민과 적대하 는 ‘타자’를 제시하는 일이다. 인민이 먼저 있고 그와 대립하는 타자가 있는 게 아니라 타자 가 제시됨으로써 그와 대립하는 인민이 구성된다. 라클라우에게 포퓰리즘이란 이렇게 ‘인민 대 타자’의 담론을 구사해 인민을 실체화하고 이를 통해 기존 정치에 도전하는 정치 흐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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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Laclau, 1977[2011]; Laclau, 2005). 이런 라클라우의 명제에서 시작된 포퓰리즘론을 나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싶다 : 포퓰 리즘의 출발점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는 진단이다. 즉, 포퓰리즘의 전제는 어쨌든 모종 의 민주주의다. 이것이 포퓰리즘이 파시즘-나치즘과 구별되는 점이다. 포퓰리즘은 이 위기 를 극복한다는 명분 아래 단순명쾌한 정치적 대립전선을 제시, 구축한다. 그것은 소수 특권 층 혹은 엘리트 대 다수 인민(People, ‘서민’ 혹은 ‘민중’이라 할 수도 있겠다)의 대립구도다. 대립전선의 저쪽에는 특권층, 엘리트가 있다. 이들은 부당한 방식으로 한 사회의 부(자본), 권력, 지식을 독점하며 더 나아가 이 독점을 후대에 세습한다. 이들은 부, 권력, 지식의 독 점을 바탕으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누린다. 이들이 향유하는 불로소득은 고스란히 다수 대중 의 희생의 결과다. 대의민주주의의 정치 엘리트들 역시 포퓰리즘의 눈에는 적대 진영의 일 부다. 이들은 특권층과 부패로 얽혀 있다. 따라서 기성 정치인과 정당은 대자본, 금융세력, 고위 관료, 전문 지식인 등과 마찬가지로 깊은 불신의 대상이 된다. 대립전선의 이쪽에는 인민/서민/민중이 있다. 포퓰리즘은 ‘소수’ 적대세력에 맞서 최대한 ‘다 수’ 동맹을 구축하려 한다. 이 점이 영어에서 포퓰리즘의 어원이 되는 1890년대 미국 인민 당(People’s Party) 운동이 같은 시기 유럽의 노동계급정당들과 구별되는 대목이다. 유럽의 노동자정당들도 궁극적으로는 광범한 민중동맹을 구축하려 했지만, 미국 인민당은 처음부터 노동자와 농민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의 ‘인민’을 표상했다. 특권층, 엘리트의 반대편에 최대 한 다수의 인구를 결집시켜 인민을 구축하려 했다. 즉, 좌우를 불문하고 포퓰리즘의 기본 지형은 ‘소수 특권층, 엘리트’ 대 ‘다수 서민’ 구도다. 라클라우, 무페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대로 이 구도는 어느 사회든 자연스럽게 주어져 있 는 것은 아니다. 이 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도록 만들려는 치열한 노력이 끊임없이 전개돼 야 한다. 상식을 부단히 (재)구성하는 담론 실천이 필요하다. 이것을 포퓰리즘 일반의 첫 번 째 특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나 포퓰리즘 담론의 발화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포퓰리즘 담론은 특정한 주체를 통해 발화될 때에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소수 특권층을 공격하고 다수 서민을 규 합하는 담론은 그 담론을 발화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대중이 인정하는 정치가나 운동가가 발화할 때에 최고의 효과를 발휘한다. 최근 사례들을 보자. 스페인 포데모스는 낡은 정치 엘리트를 ‘카스트’라 비판하며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이 비판이 정장 입은 나이 든 기성 정치가에게서 나왔다면, 그리 호응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1978년생으로 꽁지머리에 청바지 복장을 한 포데모스 사무총장 파블로 이글 레시아스(Pablo Iglesias Turrión)의 입에서 이런 비판이 나왔기에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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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동당 사례도 흥미롭다. 2015년 영국 총선에서 당시 노동당 대표 에드워드 밀리밴드 (Edward Miliband)는 기존 ‘제3의 길’ 노선에 비해 상당히 좌선회한 정책들을 제시했다. 하 지만 총선 결과는 참담했다. 결국 밀리밴드 대표가 선거 패배를 책임지고 사임하자 당대표 선거가 실시됐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선거에서 수십 년간 당 내 주변인이었던 제러미 코빈 (jeremy Corbyn)이 돌풍을 일으키며 당선됐다. 코빈이 내세운 정책은 어찌 보면 밀리밴드 전 대표가 취한 좌선회 기조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밀리밴드는 ‘제3의 길’ 시기 정부 각료였던 반면 코빈은 노동당 안에서 ‘제3의 길’ 노선을 끈질기게 비판한 외골수 사회 주의자였다. 그래서 비슷한 방향을 약속하더라도 밀리밴드보다는 코빈 쪽이 더 반향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이렇게 포퓰리즘을 추구하는 정치가는 다수 서민과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노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런 동일시가 충분히 설득력을 발휘할만한 자원(이력, 정체성, 행위 등등)을 갖춰야 한다. 담론 전략이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나타나야 하듯이 이 자원 역시 정형화되어 있 지 않다. 이글레시아스에게는 상대적 젊음이 무기였지만, 밀리밴드의 젊음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버니 샌더스나 제러미 코빈은 상당히 연로한 정치가이지만, 오랜 반골 이력 덕분에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밖에 여성이라거나 비정규직 노동자 출신이라는 특성도 특정 상황에서 자원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포퓰리즘 담론을 구사하는 정치가가 일차적인 호 소 대상으로 삼는 대중과 해당 정치가가 일정한 정체성을 공유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포퓰리즘 일반에서 나타나는 두 번째 중요한 특성이다. 정리하면, ‘인민’으로 규합하 려는 대중이 쉽게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카리스마적 정치가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분 명히 이성 이전에 정서(affect)라는 요소가 작동한다. 라클라우(Laclau, 2005), 무페(Mouffe, 2018) 모두 이 점을 가감 없이 강조한다. 파시즘-나치즘 경험 때문에 대중 정치의 이런 측 면은 흔히 (특히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부정적으로 취급되곤 한다. 그러나 이는 분명 대 중 정치의 가장 근본적이면서 중요한 층위 중 하나다. 무페가 스피노자(B. Spinoza)를 빌려 강조하는 것처럼, “부정적 정서는 오직 더 강한 긍정적 정서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포퓰리즘 일반을 관통하는 특성으로 덧붙일 것은 기존 대의 민주주의 안팎을 넘 다는 정치 행위다. 무페도 강조하듯이, 포퓰리즘은 혁명운동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 포퓰리즘의 전제라는 사실은 포퓰리즘이 일단 기존 대의민주주의를 존중함을 뜻한다. 그럼에도 포퓰리즘은 대의기구를 불신한다. 의회나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가 정치 엘리트의 권력 독점 무대가 돼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기성 대의 민주주의는 부패했다. 그래서 포퓰리즘의 정치 활동은 기성 대의제도 안팎을 넘나들며 전개될 수밖에 없다. 부패 한 기성 대의 민주주의를 개혁하자면, 우선은 그 바깥의 대중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거리의 정치에서 출발하며 주류 정치 세력을 포위하려 한다. 의회 ‘안’에서 발언하고 행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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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라도 의회 ‘바깥’의 대중을 의식하며 자신들이 의회 밖 대중의 일부임을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포퓰리즘은 급진적인 대중운동형 정치와 상당 부분 겹치는 면이 있다. 엘리트들이 우파 버전이든 좌파 버전이든 포퓰리즘 일반을 불온시하고 혐오하는 주된 이유도 여기에 있 다.

- 포퓰리즘 국면 민주주의 역사에서 이런 포퓰리즘의 요소들을 갖춘 정치 세력은 끊임없이 존재했다. 하지만 유독 2010년대 들어 대세로까지 부상하고 있다. 무페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지 적한다.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실패 탓이다. 2008년 금융 위기로 신자유주의 시 대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금융화와 지구화가 다수 서민에게도 번영을 보장하다는 신화는 일 단 무너지고 말았다. 특히 금융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대서양 양안에서는 대중의 불만이 잔 뜩 끓어오른 상태다. 이 불만은 신자유주의 지구화를 주도한 엘리트들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고 엘리트들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제출된 대안인 ‘제4차 산업혁명’ 등등은 자동화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들지 모른다는 불안만 가중시키는 형편이다. 포드주의, 케인스주의가 대공황의 탈출구를 제시했던 1930년대와는 너무도 다르다. 특히 젊 은 세대일수록 불안감에 쉽게 전염된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이런 불만과 불안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인터넷, 스마트폰의 발달로 네트워크 사회가 도래하면서 인류는 인쇄 매체 시대나 대중 매체 시대와는 전혀 다 른 커뮤니케이션 환경에 놓이게 됐다. 이는 실시간 쌍방향 소통을 통해 참여 민주주의를 북 돋을 가능성도 내포하지만, 숙고와 숙의를 멀리 하는 반지성주의의 위험도 안고 있다. 포퓰 리즘이 품은 가능성 및 위험과 정확히 대응하는 이중성이다. 우리 시대의 특성이 이러하기에 포퓰리즘이 정치 세계의 대세로 부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이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을 십분 활용하면서 불만과 불안에 형체와 방향을 부여하 는 정치 세력들이 곳곳에서 줄이어 새로운 성공담의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엘리트들의 진단 이나 바람과는 달리 이들은 결코 민주주의의 예외적 일탈이나 유별난 병증이 아니다. 차라 리 이는 21세기 초 전 세계 정치의 기본 지형이다. 무페의 정식화에 따르면, 우리는 ‘포퓰리 즘 국면(populist moment)’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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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좌파’ 포퓰리즘의 필요성과 가능성 - 왜 ‘좌파’ 포퓰리즘인가? 포퓰리즘 국면에서 기선을 잡은 쪽은 지금까지는 안타깝게도 국수주의-인종주의를 내세우 는 극우파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부터 나치즘 부활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독일대안당(AfD) 까지 극우 포퓰리즘이 지구를 뒤흔들고 있다. 그러나 포퓰리즘 아닌 ‘건전한’ 정치와 포퓰리즘 정치를 대비시키는 주류 중도 좌우파 엘리 트의 시각으로는 이런 극우파 득세에 맞설 수 없다. 극우 포퓰리즘이 성장할수록 이들은 유 권자의 표심을 탓하고 민주주의의 허점을 탄식한다. 대중 투표의 결과가 계속 포퓰리즘 성 장 쪽으로 기운다면 대중 투표를 기피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식이다. 브렉시트 투표 결과 를 탓하는 영국 리버럴 언론(대표적으로 <가디언(The Guardian)>)의 논조에서 이런 심리를 읽을 수 있다. 무페는 실은 이런 주류 엘리트의 반-대중정치적 태도야말로 포퓰리즘 국면을 낳은 직접적 원인이라 지목한다(Mouffe, 2018).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합의한 주류 중도 좌우파는 이 합 의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균열을 낼 모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려 했다. 대중정치 무대가 살 아 있는 한, 이런 면역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장주의 우파든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주류든 예외 없이 체계적으로 엘리트와 대중의 거리를 벌리고 둘 사이에 유리 장벽 을 세우려 했다. 이른바 탈정치 혹은 포스트 민주주의(크라우치, 2008) 시대의 시작이었다. 포퓰리즘 국면에 대중은 바로 이 탈정치 기조를 뒤집으려 한다. 한 마디로 그들의 정치를 되찾으려 한다. 이제는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는 선언과 함께 정치 의제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쟁점과 관심사들을 다시 정치 무대에 불러들이려 한다. 그러면서 기존 엘리트를 가 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정치 세력에 (이 세력이 좌든 우든) 귀를 기울인다. 불행히도 대서양 양안에서는 이 열망에 극우파가 더 기민하게 부응하고 있지만 말이다. 무페는 여기에서 포퓰리즘의 다른 쪽 얼굴을 본다. 파시즘 부활의 위험과는 정반대의 가능 성, 즉 급진 민주주의의 반격이다. 어느 쪽이든 공통 기반은 대중정치의 부활이다. 신자유주 의 합의를 타파하고 새 시대로 나아가자면, 이 매개 고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텅 빈 기호인 ‘민주주의’(르포르, 2015)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비록 그 결과가 21세기판 파시즘으로 귀결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더라도 주류 엘리트의 반-대중정치 관성에 머물다가는 파시즘의 승리를 확정지을 뿐이다.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약이 필요하다. 그 도약을 무페는 ‘좌파 포퓰리즘’이라 칭한다. 좌파야말로 포퓰리즘 국면을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 특권층 대 다수 민중’ 담론은 본래 좌파에게 익숙한 무기였다. 포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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즘의 원형인 미국 인민당 자체가 좌파 성향 운동이었다. 좌파는 이 뿌리로 돌아가야 한다. 반-대중정치에 앞장선 ‘제3의 길’ 노선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의 제도적 관계로 대중정치를 대신한 20세기 사회민주주의 정치 또한 넘어서야 한다. 물론 무페가 말하는 좌파 포퓰리즘은 우파 포퓰리즘과 분명히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무페 에 따르면, 우파 포퓰리즘이 소수 엘리트의 반대쪽에 ‘국민 주권(national sovereignty)’을 중 심으로 한 인민을 두는 데 반해 좌파 포퓰리즘은 ‘인민 주권(popular sovereignty)’을 중심 으로 한 인민을 둔다. 전자가 민족주의, 배외주의, 인종주의로 인민을 구성하려 한다면, 후 자는 평등, 참여, 시민권(citizenship)으로 이를 시도한다. 여기에서는 무페의 이런 정식화를 좀 더 구체화해 좌파 포퓰리즘만의 특성을 나름대로 정리 하고 싶다.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첫째, 좌파 포퓰리즘은 특권층 대 인민 구도에서 ‘인민’ 항을 끊임없이 확장하려 한다. 미국 의 정치평론가 존 주디스(John B, Judis)는 좌파 포퓰리즘은 ‘엘리트 대 인민’의 이원적 대 립전선을 추구하는 반면 우파 포퓰리즘은 ‘엘리트 대 외부자 대 인민’의 삼원적 대립전선을 추구한다고 정식화한다(주디스, 2017).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파 포퓰리즘은 ‘인민’ 과 ‘외부자’의 구별을 통해 ‘인민’을 선별함으로써 엘리트 대 인민 구도를 만들고, 좌파 포퓰 리즘은 ‘인민’을 끊임없이 확장함으로써 엘리트 대 인민 구도를 만든다고 해야 한다. 우파 포퓰리즘은 늘 ‘외부자’(유대인, 무슬림, 유색인종, 이주 노동자, 난민 등등)를 지목함으 로써 인민을 구성한다. 그리고 외부자와 유착한 엘리트에 맞서는 인민의 대결 구도를 제시 한다. 반면 좌파 포퓰리즘은 새롭게 시민권을 요구하는 집단들을 통합함으로써 인민을 구성 한다. 그리고 인민의 이러한 확장에 따라 엘리트와 인민의 대결 구도 역시 거듭 재구성한 다. 즉, 우파 포퓰리즘은 언제나 배제를 강한 전제로 동반하는 통합(인종, 민족 등등)을 추 구한다. 반면 좌파 포퓰리즘은 보편성의 부단한 재구축을 추구한다. 여기에서 좌파 포퓰리즘이 추구하는 ‘보편성’은 역사적으로 좌파와 결합돼온 중심 가치 및 원칙과 관련된다. 위에 설명한 대로 무페는 이를 ‘평등’, ‘인민주권’, ‘보편적 시민권’이라 정 리한다. 즉, 좌파 포퓰리즘은 엘리트 대 인민의 대립전선을 구성하되 언제나 평등, 인민주 권, 보편적 시민권 등을 쟁점 삼아 적대(엘리트에 맞선)와 연대(인민‘들’ 사이의)를 구성한 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정식화(라클라우 ‧ 무페, 2012)에 따른다면, 이런 좌파 포퓰리즘 전략 에 따라 마침내 다양한 민주적 주체들 사이의 등가적 연대가 구성된다. 둘째, 좌파 포퓰리즘은 엘리트 대 인민의 담론 전략을 항상 자본주의 구조의 변혁과 결합시 킨다. 우파 포퓰리즘은 인민을 구성하기 위해 가상의 ‘외부자’를 동원해야만 한다. 그러면서 외부자에게 자본주의 구조에서 비롯된 모순의 책임을 전가한다. 복지 악화 책임을 이주 노 동자에게 돌리고, 산업 쇠퇴의 원흉으로 중국 등 신흥 공업국을 지목하며, 범죄와 질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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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을 무슬림이나 유색인종, 각성한 여성과 성소수자에게서 찾는다. 이런 점에서 우파 포퓰 리즘은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에게 가장 쓸모 있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되어준다. 반면 좌파 포퓰리즘은 보편적 인민과 대립하는 ‘엘리트’의 핵심이 자본이라 지목한다. 대자 본, 금융세력, 친자본 정치세력과 국가기구,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의 동맹이 다수 인민을 짓밟는 소수 특권층의 실체임을 정확히 이야기한다. 다만 과거 좌파 정치의 관성과는 달리 좌파 포퓰리즘은 자본주의 구조 비판을 대중의 자생적 비판의식과 결합시키려 한다. 예컨대 ‘카스트’(스페인)나 ‘갑질’, ‘금수저’(한국) 같은 자생적 담론에서 출발한다. 그러면서 이들 담 론을 항상 지배 블록 내 헤게모니 분파(한국의 경우라면 재벌)에 대한 공격과 접합시킨다. 셋째, 좌파 포퓰리즘은 단순한 포퓰리즘을 넘어 민중 참여 민주주의(popular democracy 혹 은 participatory democracy)를 지향한다. 포퓰리즘은 전반적으로 기존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다(태가트, 2017). 따라서 우파 포퓰리즘도 기성 대의구조에 한정되지 않는 정치 행위를 펼친다. 전통적인 엘리트 우파와 달리 우파 포퓰리즘은 대중운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중의 일상적인 정치 참여에는 분명한 한계선을 긋는다. 기성 정치 엘리트 를 공격하기 위해 대중을 일시적으로 동원할 뿐 대중 참여를 일상화하거나 제도화하려 하지 는 않는다. 반면 좌파 포퓰리즘은 단순히 담론 전략을 통해 인민을 구성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인민 이 실제로 역량을 발휘하도록 대중운동을 활성화하고 시민사회를 조직하려 한다. 또한 인민 이 실제로 국가기구 내에 현존하도록 대의민주주의를 끊임없이 개혁하고 참여민주주의, 자 치민주주의를 발전시키려 한다. 이것이 좌파 포퓰리즘 전략의 궁극 목표다. 어쩌면 좌파 포 퓰리즘은 그 자체로 완결된 전략이라기보다는 이런 민중 참여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이 행(과도)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이승원, 2018).

- 좌파 포퓰리즘과 탈신자유주의 급진 개혁 그럼 흔히 ‘좌파 포퓰리즘’이라 분류되는 흐름들(포데모스부터 제러미 코빈에 이르기까지)이 지향하는 이념, 정책은 무엇인가? 이는 ‘급진적 개혁주의(radical reformism)’로 요약될 수 있다.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를 바꾸는 개혁주의이되, 기존 사회민주주의와 구별되는 ‘급진 적’ 개혁주의라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급진적’이라는 것인가? 우선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보면, 버니 샌더스 돌풍 이후 ‘민주당을 점령하라(Occupy Democratic Party)’ 운동을 벌이고 있는 미국 좌파(대표적으로, ‘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 [DSA]’ 그룹이 있다)는 “공적인 전국민 건강보험 구축, 공립대학 등록금 철폐, 노동조합 권 리 강화, 일자리보장제” 등을 주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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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코빈 대표가 이끄는 영국 노동당은 2017년 조기총선에서 “철도 재국유화, 국민보건 서비스(NHS)를 부분 사유화 이전 상태로 원상복구, 대학 등록금 폐지를 포함한 국민교육서 비스(NES), 주택 임대료 통제, 국영 투자은행을 통한 재생가능에너지 중심 체제로의 전환” 등을 공약했다(Labour Party, 2017). 스페인 포데모스는 2016년 총선에서 연합좌파(IU, 공산당 중심 정당연합)와 선거연합(‘우니 도스 포데모스’)을 맺고 “공공 투자와 시민사회 참여를 통한 탈탄소-탈핵 에너지 체제로의 전환, 비정규직 축소, 산업별 단체협상 강화, 재계와 노동계가 함께 참여하는 [국민경제]전 략위원회 설립, 가계 소득과 법정 최저소득 사이의 차액을 현금 급여로 지급하는 소득보장 제도 신설, 단계별 대학 무상교육, 임대료를 가계 소득의 30% 이하로 한정하는 사회적 임 대료 개념 도입, 정부 공약 위반에 대한 소환투표제, 유럽연합 개혁” 등을 공약했다(Unidos Podemos, 2016). 이들 정책을 일관하는 흐름은 한 마디로 탈신자유주의다. 지금껏 중도좌우파가 추구해온 신 자유주의 합의에서 이탈해 정치의 중심 공간(the Center)을 새롭게 설정하고 전혀 새로운 합의로 나아가려 한다. 즉, 급진 개혁에서 ‘급진성’이란 기존 중심 공간을 인정하고 이를 바 탕으로 추진되는 개혁이 아니라 중심 공간 자체를 바꾸는 개혁임을 뜻한다. 그래서 신자유 주의 지구화-금융화를 중단하고 복지국가를 복원하며 이를 위해 긴축 정책을 폐기하겠다는 것이다. 동시에 탈탄소-탈핵 에너지 체제로의 전환,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 강화를 강조하며 각국의 낡은 대의민주주의 구조를 개혁하겠다고 한다.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이들 개혁은 기득권 세력과 노동 대중 사이의 세력 균형의 불가역적 역전을 꾀한다. 좌파 포퓰리즘 지향 세력들은 모두 현 국면이 신자유주의 시대가 저물고 미지의 새 시대로 나아가는 대전환기라 판단한다. 지구화-금융화의 궁지, 에너지 전환, 기후 변화, 기술 혁신 등이 모두 이런 전환을 재촉한다. 이런 전환기일수록 기존의 정책 합의나 상상력을 넘어서 는 비전을 과감하게 제시해야 한다. 그야말로 ‘급진적인’ 개혁 비전이 필요한 것이다.

- 좌파(진보) 정치의 거시적 흐름 속에서 좌파 포퓰리즘의 위상 이제까지 정리한 좌파 포퓰리즘 전략 구상은 세계 좌파 정치의 거시적 흐름에서 새로운 한 단계가 시작됐음을 뜻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은 가설들을 제시하고 싶다. 첫째, 좌파 포퓰리즘은 전통적인 노동계급 정체성이 해체된 이후에 좌파정치가 취할 수밖에 없는 방향이다. 19-20세기에 좌파정치(개혁 노선이든 혁명 노선이든)는 노동계급에 바탕을 두었다. 이는 잘 조직된 노동조합, 대규모 대중정당, 뿌리 깊은 노동자 지역공동체 문화 덕 분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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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자유주의 지구화 국면을 거치면서 이런 전통적인 자산들이 돌이킬 수 없이 해체됐 다. 오늘날 노동자는 유연화 공세 때문에 지극히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다. 안정된 정체 성이라 할 만한 게 없는 것이 정체성이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프레카리아트 (precariat)’라는 말이 이를 잘 형상화한다(Standing, 2011). 이런 상황에서 좌파정치는 라클라우와 무페가 1980년대에 선구적으로 설파한 대로 끊임없 는 담론적 실천을 통해 민주주의 투쟁들을 접합함으로써 등가적 연대를 구축하는 수밖에 없 다(라클라우 ‧ 무페, 2012). 즉, 좌파 포퓰리즘은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바우만, 2009)에 그나마 가능한 좌파정치다. 둘째, 좌파 포퓰리즘은 유럽을 포함해 전 세계 정치가 ‘아메리카화’(여기에서 ‘아메리카’란 미국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뜻한다)한 상황에서 좌파정치가 취할 수밖에 없는 방향 이다. 노동조합과 대중정당의 안정적인 협력 관계에 바탕을 둔 좌파정치는 주로 서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좌파정치의 발전을 꿈꾸는 이들은 늘 20세기 유럽 정치 지형을 모범으로 삼곤 했다. 한국 진보정당운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대로, 지금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노동조합의 세력이 약해진 상태이 고 이는 유럽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따라 노동조합-대중정당 연계에 바탕을 둔 유럽형 좌 파정치 전통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오히려 좌파들 사이에서는 유럽 정치에 비해 부정적인 사례로 취급받아온 미국이나 남미 정치의 특성이 여러 나라로 확산되고 있다. 선거 때마다 정치-사회 세력이 새롭게 배열되고 연대 혹은 적대하며 극히 유동적인 정치 지형을 보여준 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정치의 ‘아메리카화’ 상황에서 좌파 세력이 일단 선택할 수밖에 없는 방향이 좌파 포퓰리즘이라 할 수 있다. 좀 도식화해 말하면,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정당과 비교해 과도적인 예외쯤으로 취급돼온 미국 인민당이나 2000년대에 남미 대 륙을 분홍색으로 물들인 좌파 붐(브라질,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등)이 보편적 참고 사례로 부상하고 있다 하겠다. 셋째, 좌파 포퓰리즘은 ‘민주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가 진화해가면서 취할 수밖 에 없는 방향이다. 무페는 신진 좌파들을 ‘좌파 포퓰리즘’이라 분류하지만, 정작 그들 자신 은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이념 지향으로 스스로를 내세우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미국의 샌더스 운동 참여자들이나 영국 노동당의 코빈 지지자들이 그러하다. 이들이 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란 사회민주주의이되 ‘제3의 길’ 노선과는 단절한 좌파 사회민주주의를 뜻하기도 하고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복원에서 출발하되 20세기 사회민주주의에 비해 탈자본주의 지향을 보다 명확히 하는 급진 좌파 노선을 뜻하기도 한다(Panitch & Albo, 2018). 그런데 사회민주주의이든 다른 좌파 노선(대표적으로, 유럽 공산당들)이든 ‘민주적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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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민주적’의 함의는 대체로 기존 대의 민주주의의 승인이었다. 말하자면 대의 민주주의 라는 형식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대의 민주주의라는 형식이 정녕 민주적이기 위 해서는 대중 정치라는 내용이 갖춰져야 한다. 20세기에는 이 내용, 즉 대중 민주주의에 대 한 고민이 그다지 깊이 발전하지 못했다. 위에서 계속 지적한 바, 노동조합-대중정당의 협 력 관계로 이러한 대중 민주주의의 내용을 쉽게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이게 불가능해졌다. 대의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채울 민주적 대중정치의 내용을 좌파정치 주역들 스스로 새롭게 채워가야 하는 상황이다. 즉, ‘민주적 사회주의’의 ‘민주적’ 이 대의 민주주의의 승인이라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 민주적 대중정치의 주역이 된다는 적극 적 의미를 담아야 하는 시대가 됐다. 민주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세력이 좌파 포퓰리즘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듭 말하지만, 좌파에게 포퓰리즘의 문제설정 이란 대중정치라는 미지의 영역, 모험의 바다로 나아가기 위한 안내판인 것이다.

4. 한국형 좌파 포퓰리즘 전략 구성을 위해 - 한국 사회에도 좌파 포퓰리즘이 필요한 이유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이 추구해야 할 전략은 무엇인가? 20세기 진보정당의 고전 적 전략은 노동조합총연맹과의 강력한 동맹을 바탕으로 조직 노동의 지지를 받으며 이 중핵 을 에워싼 동심원 형태의 지지연합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민주노총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보정당 발전을 고민하는 흐름은 이런 경험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이런 발전 전략이 과연 21세기에도 통할까? 진보정당은 언제나 어느 정도는 넓은 의미의 ‘노동계급정당’(일부 속설과는 달리 이는 ‘대중정당’이나 ‘민중[국민]정당’의 대립어는 아니다)이겠지만, 그렇다고 지난 세기 노동계급정당들의 경험을 그대로 따라갈 수 있을까? 불행히도 현재 한국 사회 상황은 20세기식 진보정당 발전 전망에 대단히 불리하다. 20세기 중후반에 한국의 국가기구는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을 ‘추격’하는 근대화-산업화 전략을 통해 압축 성장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나라 안에서도 다수 대중이 엘리트의 성공 경로를 뒤따 라 중산층에 합류하려 한 ‘추격전’이 펼쳐졌다. 덕분에 자기 바로 위 계층은 선망하면서 자 기 바로 아래 계층은 잠재 경쟁자로 여기는 ‘추격의식(catch-up consciousness)’이 발전했다 (장석준, 2017).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이후 민주노동조합운동은 추격의식과 구분되면서 경합하는 새로운 집단의식, 즉 계급의식(class consciousness)을 잉태했다. 그러나 기업별 노동조합이라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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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형식과 임금 인상 중심인 투쟁 내용 때문에 계급의식과 추격의식 사이에 모호한 공존과 중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계급의식의 발전은 기업 내 자본과 대결하기는 하지만 기업 바 깥의 다양한 노동 분파와 연대하지는 못하는 불완전한 형태에 머물렀다. 강력한 기업별 노 동조합을 통해 지속적인 임금 인상을 달성할 수 있게 된 일부 노동 분파의 경우는 이런 불 완전한 계급의식이 중산층적 추격의식의 확산과 수렴하는 양상을 보였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전면 확산된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런 약점을 효과적으로 포획했다. 노동시장이 세분화되고 경쟁이 격화되면서 노동자들 사이에 계급의식이 확산되기보다는 추 격전 양상이 심각하게 확산됐다. 앞서서 계급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생각됐던 노동 분파 는 중산층의 일부로 흡수되기 시작했고, 나머지 노동 분파는 이들을 추격전의 기득권 집단 으로 바라보며 경쟁의 수레바퀴에 짓눌렸다. ‘추격사회’는 어느덧 계층이 세분화되고 계층 간 이동 가능성이 봉쇄된 ‘장벽사회(유종일, 2018)’로 굳어졌다. 한 마디로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성장에도 불구하고 계급의식은 저발전한 반면 추격의식이 과잉 발전했다. 이러한 추격의식은 이른바 ‘한국형 평등주의’(박권일, 2012)로 표출된다. 한 국형 평등주의란 추격전 자체를 부정하면서 계층적 차이의 철폐(보편적 평등주의)를 요구하 기보다는 추격전 내부의 공정성을 강조하는 흐름이다. 안타깝게도 외환위기 이후 세대 (post-IMF 세대)인 20-30대에서 이런 흐름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추격전의 트랙은 하나가 아니다. 장벽사회의 장벽 역시 하나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 서 불평등은 단일하기보다는 다층적이고 간단하기보다는 복합적인 면모를 띠게 된다. 이를 가장 정확히 포착한 개념은 ‘다중격차’다(한신대학교 공공정책연구소, 2016; 황규성 ‧ 강병 익 편, 2017). 다중격차는 최소한 세 가지 측면의 격차로 나타난다. 즉, 소득의 격차, 자산의 격차, 교육의 격차다. 소득 격차는 소속 기업의 규모(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 고용 형태(정규직이냐 비 정규직이냐)와 깊이 관련된다. 자산 격차는 자산 중에서도 특히 부동산 소유 여부에 따른 격차다. 교육 격차는 1차적으로는 대졸 여부, 2차적으로는 대학 서열 구조에 따른 격차다. 각 격차는 서로 다른 영역의 격차이면서도 상당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그러면서 서로 결합 돼 한국 사회의 격차(불평등)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한국 사회의 특성을 좀 더 역동적으로 이해하려면, 이 다중격차론을 추격사회의 문제의식과 결합시켜야 한다. 위의 3대 격차는 추격전의 3대 트랙이기도 하다. 기업, 부동산, 학벌이라 는 세 트랙에서 추격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 트랙에서는 대기업 정규직을 향해, 부동산 트랙에서는 수도권 혹은 대도시 아파트 소유(와 투기)를 향해, 학벌 트랙에서는 대학 서열 구조의 최상위 대학을 향해 추격전을 펼친다. 이 대목에서 다중격차가 단순히 ‘격차’만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각 트랙에서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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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우위자가 열위자를 향해 세워두는 ‘장벽’이기도 하다. 상대적 우위자는 최소한 자신의 현 재 지위를 방어하기 위해 ‘장벽’을 쌓는 일에 적극 참여한다. 가령 대기업이나 공기업 정규 직은 소속 기업에서 비정규직이 집단 투쟁과 교섭을 통해 정규직이 되는 데 반대하고, 아파 트 단지 주민은 해당 단지의 주택 매매 가격을 높게 유지하기 위해 담합하며, 일주 중산층 학부모는 이른바 ‘귀족학교’의 존치를 바란다. 이런 현실은 자본과 노동 사이에,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1%’와 ‘99%’ 사이에 선명한 대립선 을 긋는 고전적인 좌파 논의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1 대 99의 대립선이 분명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만큼이나 강력한 대립선이 ‘20%’와 ‘80%’ 사이에 그어지기도 한다. 즉, 중산층의 상당 부분 및 노동계급 일부와, 소득/자산/교육 측면에서 이들보다 열위에 있는 나머지 사 이에도 상당한 간극과 대립이 존재한다. 그럼 다중격차, 다중장벽을 무너뜨릴 주체는 누구인가? 문제가 복합적-다층적이므로 그 주 체 역시 단일할 수 없다. 소득(기업), 자산(부동산), 교육(학벌)의 각 트랙마다 따로 저항 주 체를 찾을 수밖에 없다. 물론 각 트랙의 저항 주체는 결국 서로 크게 중첩될 것이다. 하지 만 그렇다고 각 트랙의 저항 주체가 다 공유하고 수긍하는 단일한 호명 방식이 존재할 수는 없다. 여러 이름들이 있으며, 따라서 한 이름으로 아우를 수 없다. 말하자면, ‘노동계급’식의 호명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조합 조직화의 비약적 확장이나 진보정당의 순조로운 성장이 쉽지 않은 근본 이유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유럽과는 너무도 다른 것 이다. 그럼 이런 다양한 주체들이 다중격차, 다중장벽을 극복해나갈 방법은 무엇인가? 세 가지 경 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경로는 다중격차를 지탱하는 하부 구조가 이완되거나 붕괴하는 것이다. 가령 산업혁신 혹은 구조조정을 통해 현재의 대기업 중심 구조가 이완되거나 부동산 시장 규제 혹은 침체 로 아파트 가격이 하락하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저항 주체의 연대를 가 로막는 장벽 역시 약해질 것이다. 이런 변화 이후에 추진해볼만한 정치 전략의 선택지는 지 금 상상 가능한 범위를 넘어설 수 있다. 둘째 경로는 여러 ‘장벽’들을 뛰어넘는, 전에 없던 연대가 추진되는 것이다. 예컨대 민주노 총이나 산업별 노동조합 차원에서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기업 비정규직의 연대 방안이 성과 를 거두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즉, 그간 ‘사회연대전략’이라 불려온 시도나 구상이 실 제 성과를 거두는 상황이다. 셋째 경로는 일단 각 트랙에서 저항 주체가 충분히 ‘가시화’된 뒤에 ‘세력화’에까지 성공하 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협상’에 나서는 것이다. 소득(기업) 측면에서는 이미 ‘비정규직’이 라는 이름으로 이 과정이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자산(부동산)이나 교육(학벌) 측면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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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중산층 상층(아파트 소유 가구, 서울 소재 대학 입학 경쟁자)의 관심 이나 의제가 담론 세계를 지배한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 영역에서도 저항 주체가 가시화돼 야 한다. 가시화된 뒤에야 세력화와 협상도 가능하다. 그 동안 진보정당은 각 경로에 어떤 입장을 보였는가? 첫째 경로는 진보정당이 전혀 통제 할 수 없는 변수들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단기간에 진보정당이 집권할 수 없으므로 국가 정책으로 이런 상황을 앞당길 수도 없다. 둘째 경로는 ‘사회연대전략’이라는 이름으로 논의 를 거듭하기는 했지만, 힘 있게 추진하지는 못했다. 당장은 대중조직을 설득해 실현할 가능 성도 높다 할 수 없다. 결국 남는 것은 셋째 경로다. 현재 소득(기업) 측면의 약자-저항자인 비정규직 노동자에 한 정돼 있는 이 접근법을 더욱 확장해야 한다. ‘투명인간’(고 노회찬 의원이 남긴 유명한 표현 이다)인 자산(부동산), 교육(학벌) 등등의 피해 대중을 호명하려 노력하고 이들을 하나의 블 록으로 결집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이들을 아우르기 쉽지 않다면, 적대자를 호명함으로써 단 결을 호소할 수도 있다. 이 전략이란 결국 21세기 한국 사회 조건에 맞는 좌파 포퓰리즘일 것이다.

- 모색 : ‘갑질 없는 나라’와 ‘땅 대 땀’ 한국에서 진보정당운동은 이미 한국형 좌파 포퓰리즘 전략의 출발이 될 수 있는 시도를 한 바 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정의당의 핵심 슬로건이었던 “갑질 없는 나라”가 그것이다. 이 슬로건은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의미와 풍부한 가능성을 담고 있 다. 무엇보다도 ‘갑질’을 향한 공분은 한국 사회에 마침내 등장한 자생적 체제 비판 담론이다. 그 전에도 사회과학자와 사회운동가들은 ‘자본가계급’이나 ‘노동자계급’이란 말을 쓰고 ‘착 취’와 ‘수탈’을 고발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대중의 생활세계에 충분히 스며들지 못했다. 반면 ‘갑질’은 처음부터 대중의 경험 속에서 부상한 토착 언어다. 이 언어와 접합한 ‘갑질 없는 나라’ 비전은 다음과 같은 방향과 과제를 포괄할 수 있다. 첫째, ‘갑질 없는 나라’는 진보정당이 대결해야 할 세력을 명확히 지목한다. 그것은 ‘갑질하 는 자들’이다. 그들은 기업 규모와 지배력, 관료 체계, 부동산 소유, 학벌, 성별 같은 각종 위계에서 윗부분을 차지하며 여기에서 비롯된 권력으로 지대 수익을 착복하는 자들이다. 좌 든 우든 경제학 교과서는 시장 경쟁에서 얻는 이윤과 지대를 엄격히 구분하지만, 현대 자본 주의, 특히 한국의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이런 구분법이 잘 먹히지 않는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 지위는 세대를 넘어 상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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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갑질하는 자들’이란 지대 수익 추구자들과 상속자들의 중첩 혹은 연합이다. 촛불 시민들은 더 이상 이들 새로운 귀족의 지배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외쳤지만, 지금 한국 정치 에는 이들의 적수라 할 만한 세력이 눈에 띄지 않는다. 현 정부는 종합부동산세 조금 올리 는 데도 몸을 사리는 중이다. 진보정당이 이 빈곳을 채우지 못한다면, 그 존재 의의를 달리 어디에서 찾겠는가. 지대 수익 추구자 + 상속자 연합의 적대자라는 것이 진보정당의 첫 번 째 정체성으로 여겨질 정도로 이 과제에 매진해야 한다. 둘째, ‘갑질 없는 나라’는 한국 사회의 긴박한 당면 과제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그것은 다들 갑질에 고개 숙이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만한 나라부터 만드는 일이다. 갑질이 횡행하는 이 유 중 하나는 그런 갑에게라도 굽신 거리지 않으면 당장 생계가 막막한 현실이다. 그래서 갑질을 당하는 일자리라도 차지하려고 을들끼리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최소한의 생계를 해결할 다른 통로들이 있다면, 을들의 경쟁이 그리 치열하지 않아도 될 테고 굳이 갑질을 견뎌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 통로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복지제도다. 최소 2년은 생계를 보장할 정도의 실 업수당이고, 노인 빈곤과 자살을 줄일 수 있을 정도로 실질적이며 보편적인 기초노령연금이 며, 민간 주택시장을 위협할 정도로 공급되는 공공주택, 사회주택이다. 그러고 보면 ‘갑질’이 도마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그 시점에 ‘복지국가’ 역시 대중의 열망으로 부상한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한데 복지국가를 건설하자면 국가 재정이 대폭 늘어나야 한다. 복지와 산업정책을 중심으로 이제껏 국가기구와 시민사회가 경험하지 못한 수준으로 재정을 확대해야 한다. 복지 예산 점증 기조에서 벗어나 거의 충격 요법에 가깝게 복지 지출을 급증시켜야 하며, 그만큼 조세 기반과 규모도 늘려야 한다. 하지만 현 정부는 소득 분배가 악화되는 와중에도 복지 급증증세에 주저하고만 있다. 여기에 진보정당의 긴급한 과제가 있다. 한국 사회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재정 확대의 사회적-심리적 장벽을 돌파할 수 있도록 진보정당이 앞장서야 한다. 셋째, ‘갑질 없는 나라’는 진보정당이 어떤 성장 전략을 밟아야 하는지도 말해준다. 갑질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길은 실은 갑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수많은 을들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 갑이 공격받는다고 을이 강해지지는 않지만, 을이 강해지면 자 연히 갑은 위축된다. 그럼 을들은 어떻게 강해지는가? 오래된 답이 지금도 정답이다. 단결 해야 한다. 을들은 노동조합으로, 협동조합으로, 시민사회의 다양한 조직들로 뭉쳐야 한다. 달리 말하면, ‘을들의 민주주의’(진태원, 2017)를 성장시켜야 한다. 이는 갑과 을의 세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진보정당 성장의 동전 반대면이나 다름없다. 을들이 무정형 상태를 탈피할수록 진보정당의 사회적 토대도 실체를 얻게 된다. 따라서 진보정당과 사회운동, 풀뿌리 조직들의 동반 성장 전략이야말로 가장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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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한 진보정당 성장 전략이다. 한국형 좌파 포퓰리즘 전략의 또 다른 출발점으로 고려해볼만한 것은 부동산 불로소득 문제 를 중심으로 소수 특권층 대 다수 서민 구도를 구축하는 방안이다.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층 의 불로소득은 주로 토지, 주택 소유에서 비롯된다. 반대로 서민들은 소득이 낮을수록, 젊을 수록, 여성일수록 전월세가 인상으로 고통 받는다. 따라서 부동산 문제를 중심으로 특권층을 규정하고 이에 맞선 동맹을 확장해나갈 수 있다. 토지+자유연구소는 이미 “‘땅’이 아닌 ‘땀’이 대우받는 사회”라는 슬로건을 제시한 바 있다. ‘땅 대 땀’이라는 이 담론을 고스란히 진보정당의 담론 전략으로 활용할 수 있다. 여기에서 ‘땅’은 물론 부동산을 형상화하지만, 그렇다고 부동산 불로소득자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 다. 부동산 불로소득 동맹이라 할 수 있는 재벌, 고위 관료, 우파 언론, 부동산 투기에 동참 하는 중산층 상층 등등을 포괄한다. 반면 ‘땀’은 불로소득에 기댈 수 없는 다수 서민을 상징한다. 또한 넓은 의미의 노동 종사 자, 일하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아니, 현직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실업자까지 포괄할 수 있다. ‘땀’이 ‘땅’의 대립어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즉, 서로 이해가 갈리기도 하는 정규직 노 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현직 노동자와 실업자, 실거주용 1주택 소유 가구와 무주택 가구, 장년층과 청년층, 수도권 주민과 비수도권 주민, 대도시 주민과 중소도시 및 농촌 주민 등 을 최대한 아우르려는 담론이다. 다른 여러 복잡한 문제를 통해 이해가 충돌할 수 있지만, 불로소득을 쟁점 삼아 대립전선을 그으면 이들 간의 협력과 연대를 추진할 수 있다. 물론 한국형 좌파 포퓰리즘을 구체화하자면, 이상의 논의 말고도 진보정당의 정치 행동 양 식 재정립, 지도자군 육성, 한국 상황에 맞는 탈신자유주의 급진 개혁 정책의 개발 등등을 더 짚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일단 한국형 좌파 포퓰리즘의 발단이 될 만한 담론 전 략을 검토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끝>

<참고문헌> 라클라우, 에르네스토 ‧ 무페, 샹탈. 2012.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이승원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르포르, 클로드. 2015. 19~20세기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 홍태영 옮김, 서울: 그린비. 바우만, 지그문트. 2009. 액체근대, 이일수 옮김, 서울: 강. 박권일. 2012. 소수 의견. 서울: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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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일. 2018. 「격차 사회? 장벽 사회!」,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99780&ref=kko#09T0). 이승원. 2018. 「직접민주주의의 정치철학적 기반에 관한 연구」, <시민과 세계> 제32호. 장석준. 2017. 「중산층 추격사회, 진보의 상식을 깨다」,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64506#09T0). 주디스, 존. 2017. 포퓰리즘의 세계화: 왜 전 세계적으로 엘리트에 대한 공격이 확산되고 있는가, 오공훈 옮김, 서울: 메디치미디어. 진태원. 2017. 을의 민주주의: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서울: 그린비. 크라우치, 콜린. 2008. 포스트 민주주의: 민주주의 시대의 종말, 이한 옮김, 서울: 미지북 스. 태가트, 폴. 2017. 포퓰리즘: 기원과 사례, 그리고 대의민주주의와의 관계, 백영민 옮김, 서 울: 한울. 한신대학교 공공정책연구소. 2016. 다중격차: 한국 사회 불평등 구조, 서울: 페이퍼로드. 황규성 ‧ 강병익 편. 2017. 다중격차2: 역사와 구조, 서울: 페이퍼로드. Kuttner, Robert. 2018. Can Democracy Survive Global Capitalism?. New York: W.W.Norton & Company. Labour Party(UK). 2017. For the many, Not the Few. (https://labour.org.uk/wp-content/uploads/2017/10/labour-manifesto-2017.pdf) Laclau, Ernesto. 1977[2011]. Politics and Ideology in Marxist Theory, London: Verso. Laclau, Ernesto. 2005. On Populist Reason. London: Verso. Mouffe, Chantal. 2018. For a Left Populism, London: Verso. Panitch, Leo & Albo, Gregory. 2018. The Socialist Challenge Today : Syriza, Sanders, Corbyn. London: Merlin Press. Panizza, Francisco(ed.). 2005. Populism and the Mirror of Democracy, London: Verso. Standing, Guy. 2011. The Precariat : The New Dangerous Class. London: Bloomsbury Academic. Unidos Podemos. 2016. 50 Pasos para Gobernar Juntos. (http://www.izquierda-unida.es/sites/default/files/doc/50_Pasos_Para_Gobernar_Junt os_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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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2

포퓰리즘 을의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진태원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1. 국내의 포퓰리즘 용법과 그 효과 몇 년 전에 「포퓰리즘, 민주주의, 민중」이라는 글에서 나는 한국에서 포퓰리즘 담론의 기 묘한(심지어 도착적인) 용법을 지적한 바 있다.1) 곧 외국에서, 특히 서유럽 및 영어권에서 포퓰리즘은 주로 우파 내지 극우파를 지칭하는 용어인데 반해 국내에서는 주로 ‘좌파’(반드 시 정치적 좌파일 필요는 없으며, 언론에서 통용되는 의미에서)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으며, 특히 복지정책을 비난하기 위한 목적에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국내에서 포퓰리즘 의 발신자는 거의 대부분 경제신문과 ‘조중동’, 곧 우파 내지 극우파 언론이며, 그와 연결돼 있는 우파 정치 세력이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10여 년 동안 ‘좌파 정권’에게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우파 언론과 정치권이 공격 무기로 활 용하던 주요 어휘들 중 하나가 바로 포퓰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2) 그런데 알다시피 이명박 ㆍ박근혜 정권이 이러한 의미의 포퓰리즘, 곧 ‘무책임한 대중영합주의’로 이해된 포퓰리즘 정치와 무관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명박의 ‘747 공약’이나 박근혜의 ‘474 공약’만큼 ‘무책임한 대중영합주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파 언론에서 이를 포퓰리즘이라 고 비판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1) 진태원, 포퓰리즘, 민주주의, 민중 , 을의 민주주의: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그린비, 2017에 재수록. 2) 국내 보수 언론의 편향된 포퓰리즘 용법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정재철, 한국 신문과 복지 포퓰리즘 담론 , 언론과학

연구 11권 1호, 20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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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국내에서 포퓰리즘 용어법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그 것은 주로 ‘무책임한 대중영합주의’를 추구하는 ‘좌파 정치’를 비난하기 위한 우파들의 수사 법적ㆍ정략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것이 대중적인 용법으로 확산되고 있다. 둘째, 이 러한 용법의 정치적 효과는 자유주의 정치의 위기를 은폐하고 오히려 자유주의 정치를 정상 화 또는 규범화한다는 점이다. 내가 말하는 자유주의 정치란 몇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 다. 1) 가능한 한 대중들의 정치적 참여의 기회를 봉쇄하는 가운데 보수 양당의 정치적 헤 게모니를 유지하는 것 2) 재벌 중심의 경제 체제를 보존하면서 조금 더 효율적인 또는 조금 더 공정한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것 3) 신자유주의적 사회화에 따라 확산되는 불평등 및 광범위한 대중들의 삶의 불안정성을 가능한 통치의 한계 범위 안에서 유지하는 것 4) 남 한과 북한의 적대적 관계를 기능주의적 평화 체제(또는 ‘평화안보 체제’?)로 전환하되, 한미 동맹의 기조를 유지하는 것.

2. 포퓰리즘의 배경 포퓰리즘의 확산과 심화는 국민국가 체계에 기반하여 구성된 근대 정치의 위기의 이면이 다. 1990년대는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화된 시기이다. 국경 의 장벽이 약화되면서 자본의 이동과 사람들의 이주가 증대하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각 나 라에서 국민주의nationalism(또는 민족적 국민주의ethnic nationalism)와 인종주의가 창궐하 던 시기가 이 시기였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기존의 복지국가 정책들이 약화되거 나 해체되기 시작했고, 국민국가가 갖는 정치의 자율성 역시 시장의 논리가 사회 전체로 확 산됨으로써 훨씬 더 위축되었다. 높은 실업률이 만성화되고 불안정한 일자리가 증대함에 따 라 사람들의 삶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국민주의와 인종주의가 세력을 얻으면서 문화적ㆍ종교 적 갈등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정치가들은 고통 받는 서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시장의 요구에 대해 더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정치 영역 자체에 수익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시장 원리가 도입 되면서 정치의 공공성과 대표성이 위협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도권 내의 좌파와 우 파 정당 대신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정치적 노선을 내걸면서 주로 국민주의적(ㆍ인종 주의적) 정서와 서민들의 피해 의식에 호소하는 정치 세력들이 등장했다. 프랑스의 민족전 선이나 오스트리아의 자유당 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세력이 유권자들의 상당한 호응을 얻 게 되면서 기성 정치 세력 역시 극우 정치 세력의 노선이나 정책을 무시하기 어렵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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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정치 영역 자체가 시장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 는 이상, 그리고 국민국가 단위에 기반을 둔 정치적 대표 체계가 와해되기 시작한 이상, 기 성 정치 세력이든 새롭게 등장한 극우 정치 세력이든 서민들의 관점에 기반을 둔 정치를 수 행하기는 어려웠으며, 이주자들을 겨냥한 치안 정치만 더욱 노골적으로 전개되었다. 사람들 의 삶의 조건의 향상과 민주주의적 참여의 증대 없이 전개되는 이러한 치안 중심의 정치는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과 환멸을 조장하면서 정치적ㆍ사회적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만 을 낳았다. 이것이 지난 20여 년 이래 유럽에서 포퓰리즘 정치가 확산된 배경을 이루게 되 었다.

3. 포퓰리즘의 쟁점 따라서 흔히 자유주의 정치학자들이 주장하듯, ‘성숙한 민주주의’(이 문구의 숨은 뜻은 ‘선진 자유주의’ 정치 체제일 것이다)를 포퓰리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문제를 표면적 으로 이해하는 것(다시 말하면 포퓰리즘을 일시적인 병리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순환논리에 만족하는 것에 불과하다. 포퓰리즘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위기 내지 한 계를 드러내주는 데 자유민주주의를 그 대안으로 호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을의 민주주의’의 관점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은 쟁점들을 제기할 필요가 있 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을의 민주주의란, 주어진 영토 안에 존재하는 가장 광범위한 시민 대중들이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원리상으로든 사실상으로든 복종하는(또는 복종하게끔 강제되는) 정치권력(및 다양한 형태의 물질적ㆍ상징적 권력)을 역으로 통제할 수 있는 집단 적인 역량을 획득하여 자신들의 집단적ㆍ개인적 운명을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 결정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1)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의 문제 이는 법학적ㆍ철학적으로 본다면, 이른바 “인민주권”을 의미한다. 인민주권과 관련하여 리 프리젠테이션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다. ‘대의’ 또는 ‘대표’는 인민주권이 아니라, 샤츠슈나이더의 표현을 빌리면, ‘절반의 인민주권’을 의미한다고 간주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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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리프리젠테이션의 문제가 인민주권의, 따라서 포퓰리즘의 핵심 쟁 점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는 첫째, 미국의 한 정치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대표의 반대말 은 참여가 아니라 배제”3)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면 리프리젠테이션은 일차적 으로 “틀 짜기framing”4)를 의미한다. 낸시 프레이저는 지난 20여 년 동안 자신이 수행해왔 던 정의의 두 가지 차원, 곧 재분배와 인정을 넘어서 세 번째 차원을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 고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곧 정체성의 차원인데, 이는 리프리젠테이션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정체성이란 일차적으로 사회정치적인 정체성을 가리키며, 이는 국민적 정체 성이나 계급적 정체성, 인종적 정체성 또는 여성적 정체성의 문제 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둘째, 리프리젠테이션의 문제는 단순히 이미 주어져 있는 정치적 틀 내에서 누구 를 자신의 지지자로 포섭할 것인가, 어떻게 적대적 정파 및 세력을 약화시키고 우리의 세력 을 강화할 것인가, 따라서 결국 어떻게 집권당이 되고 대통령이 될 것인가의 문제로 국한될 수 없다. 그것은 누가 과연 대표될 만한 존재자인가, 누가 대표 가능한 이들의 범주에 속하 고 대표 불가능한, 또는 대표되지 않아도 무방한 이들의 범주에 속하는가, 그러한 분할은 어떤 기준에 따라 작동하며 그것은 계급적 관계 내지 젠더 관계 또는 인종적이거나 국민적 관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또한 그것을 어떻게 전환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2) 착취의 문제 3) 배제의 문제

3) David Plotke, “Representation is Democracy”, Constellations, vol. 4, no. 1, 1997. 4) 낸시 프레이저, 지구화 시대의 정의, 그린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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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3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포퓰리스트 우파정당의 도전과 정당민주주의 딜레마 장선화 / 한국외대 외래교수,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실행위원

1. 정치적 현상으로서의 포퓰리즘, 포퓰리스트 정당 ∙ 최근 “포퓰리스트” 정당 프레임의 특징 - 민주주의 제도적 절차 내에서 경쟁하는 정당 - ‘엘리트 대 대중’ 대립 구도의 정치적 동원 및 고착화 - 자국민 대 이민자 ‘포용과 배재’ 균열 심화 - 포퓰리즘은 단독이 아닌 좌/우 이념과 결합해서 정치화, (상대적으로) 이념적 우파와 보다 큰 친화성 ∙ 포퓰리즘에 대한 지지와 비판 - 지지논리: 민주주의에 필연적 정치세력, 일반대중 대 기득권 - 비판논리: 포퓰리스트 정치세력 집권 시 민주적 규범 전복 가능성 ∙ 정치적 현상으로서의 포퓰리즘을 둘러싼 이론적 쟁점 - 사회 균열의 변화에 따른 정치적 균열의 조응 - 정치적 동원에 따른 반이민 이슈의 어젠다화 - 20세기 후반부에 걸쳐 지속된 유럽의 근대적 정당체제 변화 가능성 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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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포퓰리스트 우파정당 개념 ∙ ‘포퓰리스트(populist)’/ 극우(extreme)/ 급진(radical) 정치세력 - 이념차원과 대중동원방식에 따라 차이 - ‘포퓰리스트 우파 정당(Populist Right Party)’ 특징 ü 강령 및 공약: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레토릭 탈각 혹은 약화 ü 선거운동: 대중적 (인종주의적 선전 자제) ü 주요 정책: 자국민 우선 주의적 대내외 정책 (국가주의적 성향 약화) ü Mudde의 포퓰리스트급진우파정당(PRRP)보다 온건한 특징 ∙ 포퓰리스트 우파 정당의 정의 (장선화 2017, 79) - 기존 정치 엘리트들이 공유하는 민주주의적 가치 및 통합적 대외 정책에 대한 반대, 권위주의적 질서 옹호, 자국민 중심주의의 결합을 특징으로 하는 정당

3. 포퓰리스트 우파정당의 다양성: 북유럽 포퓰리스트 우파정당의 예 ∙ 북유럽 정당민주주의의 딜레마 - 전통적 중도 좌-우 주요 정당의 득표 하락, 포퓰리스트 우파정당 부상 - 스웨덴: 2014년에 이어 2018년 총선 후 우파정당과 연정 거부, 정부구성의 어려움 - 중도 좌-우 선거연합과 안정적 정권 교대 축, 높은 수준의 의회 내 합의의 특징이 포 퓰리스트 우파정당 부상과 충돌 - 기득권 엘리트 정당 카르텔 대 신생 자국민 대중 옹호 정당 북유럽 포퓰리스트 우파정당의 특징 - 반 이민 이슈를 복지재정문제와 연관시켜 정치 쟁점화(신광영 2014, 2016) 스웨덴민주당, 핀란드인당 - 복지 담론을 북유럽 특유의 보편적∙평등적 시민권 담론에서 국민국가 관점으로 재구성 (reframing)(Nordensvard and Ketola 2015) - 포퓰리스트적 레토릭: 자국민 중심적 사회권 보호를 통해 경제적 재분배 확대 가능성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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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우정당(extreme right parties)(Widfeldt 2015), 국가주의적 포퓰리스트 정당(Westinen 2014, 123-148), 인종적 국가주의이자 반엘리트주의 정당(Mudde 2007)에 부합하지 않음

4. 북유럽 4개국 포퓰리스트 우파정당 비교: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진보당(FrP) Fremskrittspariet (Progress Party)

덴마크 인민당(DF) Dansk Folkeparti (Danish People's Party)

스웨덴민주당(SD) Sverigedemokraterna( Sweden Democrats)

핀란드인당(Ps) Perussuomalaiset (Finns Party)

창당(년)

1973년 조세저항운동에 기반

1995년

1988년

1995년 구 핀란드농민당 (1959-1995)

강령·정책

개인적 자유, 시장자유주의, 작은 정부 지향 엄격한 이민정책추구

작은 정부 지향 엄격한 이민정책 도입 EU 반대

반이민정책 복지재정 축소

반이민정책

이념적 위치

보수적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우파포퓰리즘 중도에 가까운 온건우파

우파 포퓰리즘 민족주의 유럽회의주의

우파 포퓰리즘 복지 쇼비니즘

중도기반 포퓰리즘 핀란드 복지국가지지 중도에 가까운 우파

주요 지지기반

노동자

미숙련 노동자

노동자 (구 사민당 혹은 온건당 지지자)

블루칼라 노동자 (구 사민당 지지자) 중도 이념성향

선거공약

엄격한 이민정책 글로벌 경제·자유화 옹호

엄격한 이민정책 세금 감축

비 (非)유럽 이민 및 난민 축소 복지재정 축소 세금 감축

기존 정당 정치 비판 유럽회의주의(eurosce pticism) 글로벌 경제 비판

연립가능성/ (단독)집권 가능성

보수당과 연정 구성(2013년~)/ 없음

있음(2001년부터 자유-보수 연정지지)/ 없음

없음/ 없음

2015년 연정 참여/ 없음

*출처: 장선화 2017. “북유럽 포퓰리스트 우파정당의 성장과 정당체제 변화,” 한국정치학회보 51(4): 83.

5. 의제들 ∙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 민주주의에 내재된 포퓰리즘 - 민주주의 제도적 절차 내에서 포퓰리즘의 극단화 위험은 통제/흡수/방임 가능한가? - 20세기에 이례(deviant case)에 해당했던 극단주의적 우파 정치세력이 21세기에는 정상 ∙ 사례로 편입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 혹은 평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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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퓰리스트적 정치 동원 세력 형성/부상/극단화의 역사적 배경과 통시적‧동시적 비교 사 례 연구 필요 ∙ 정치적 레토릭과 실재의 확임: 포퓰리스트 정당 리더십, 조직적 속성, 핵심 주장, 지지 기 반 등 복합적 구성요소에 대한 실증적 이해 필요 ∙ 근대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당민주주의 제도와 규범적 딜레마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성찰 필요 ∙ 포퓰리스트 정당 현상 지속 후 예측 가능한 제도적 차원의 변화: - 유지: 중도 좌-우 주요 정당 주도 연립정부 참여에 의한 온건, 중도화 가능성 - 부분적 유지: 중도 수렴에서 분산으로 ü 보다 우파 혹은 좌파 정당지지 안정화 ü 분산적 21세기적 다당체제의 등장 - 변화: 집권을 통한 기성 정당에 대한 대체


발제 4

페미니즘과 포퓰리즘이 교차할 때5)

손희정 / 문화평론가

“극우와 기독교가 만나는 곳에 ‘가짜뉴스 공장’이 있었다.”

한겨레가 단독 보도한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대한민국 언론사 에 남을 만한 문장이다. 성소수자나 난민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차별을 선동하는 가짜뉴 스의 레토릭이 보수 기독교의 레토릭과 비슷하다는 점은 페미니스트들을 비롯한 많은 연구 자, 활동가들이 계속 주목해왔던 문제였다. 한겨레가 이 ‘합리적 의심’이 ‘팩트’임을 확인시 켜준 셈이다.

가짜뉴스에는 올해 초 제주도에 들어온 예맨 난민에 대한 것도 있었다. 자극적으로 조작 된 내용이 퍼지면서 한국인들 사이에 난민에 대한 공포가 갑작스럽게 형성됐고, 그렇게 자 라난 반(反) 난민 정서는 청와대 청원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거짓말에 폭발적으로 반응했던 사람들 중에는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여성과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있었다. 특히 트위터와 여 초 커뮤니티에서 이슬람의 여성혐오적 문화를 문제 삼았고 여성할례와 조혼풍습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이 강조되었다. ‘한남’도 해결 못하는 국가에 ‘예남’까지 ‘들여오면’ 도대체 어떻게 하겠느냐는 불안이 온라인을 타고 흘렀다.6) 이런 상황은 포퓰리즘과 페미니즘의 관계에 대 5) 이 발표문은 2018년 10월 8일 자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 “페미니즘과 포퓰리즘이 만날 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

니다. 6) 가짜뉴스가 효과를 발휘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짜뉴스가 100%의 순수한 거짓말로 이뤄지지 않

는다는 것이다. 가짜뉴스는 다소간의 팩트를 바탕으로 거짓이 덧붙여진다. 그리고 그 거짓을 정말인 것처럼 보이게 하 는 것은 가짜뉴스 수용자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대상에 대한 편견과 혐오, 그리고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이다. 반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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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고민하게 했다.

1. 극우 포퓰리즘이 페미니즘을 스키밍(skimming)하여 가면으로 삼을 때: 마린 르펜의 예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마린 르펜은 국민전선의 창립자이자 전 총재였던 장-마리 르펜의 딸이다. 장-마리 르펜은 강고한 남성 가부장의 얼 굴을 한 극우였다.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인 그는 불법 이민자 추방과 주 35시간 노동제 폐 지 등을 주장하고, 홀로코스트를 “역사에 있어서 사소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반유대주의를 분명히 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임신중단권에 대해 “반 프랑스 인종학살”이라고 부르면서 여성 유권자들을 겁먹게 했다. 당시 국민전선의 반유대주의와 여성혐오적 성격은 당의 대중 적 지지기반 확장에 방해가 됐다. (반유대주의로 유럽 내에서 세력 기반을 확장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평가된다.) 아빠 르펜 시절 국민전선에는 남성 지지자가 월등히 많았던 것은 그의 여성혐오적인 정치적 입장 때문이었다. 반전은 마린 르펜이 당권을 잡고 아버지 르펜을 숙청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를 축출함으로써 딸 르펜은 반유대주의 극 우의 이미지를 벗겨내고 국민전선을 현대화시켰다. 그는 오히려 국민전선이 진보적인 가치 를 지향하고 있다고 설파하는데, 그때 자신의 ‘여성’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프랑 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표방하고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옹호하는 딸 르펜은 확실히 세련 되고 젊은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7)

국민전선의 약진을 젠더정치로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딸 르펜 이후 당의 여성 지지자 층 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가 실제로 진보적 가치 를 지향하는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그의 포퓰리스트로서의 진가가 드러난 플로우를 비판했던 페미니스트들은 이슬람 문화의 여성혐오적 성격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더 복잡한 사유가 필 요하다는 것이었고, 여성혐오 문화 자체를 바탕으로 난민을 비인간화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던 것. 이런 고민과 다양 한 논의들 안에서 “경계 없는 페미니즘” 페이지가 개설되었고, 약 40명의 필자가 동참하여 릴레이 형식으로 약 40개의 포스팅이 올라왔다. https://www.facebook.com/feminismwithoutborders (검색일: 2018년 11월 24일) 7) 아빠 르펜을 지지할 수 없었던 프랑스 여성 유권자들이 딸 르펜을 지지하게 된 배경에 대한 논평은 Angelique Chrisafis, “‘We feel very close to her’: can ‘fake feminist’ Marine Le Pen win the female vote?”, The Guardian, 2017.03.18. 참고.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7/mar/18/front-national-anger-marine-le-pen-female-supporters (검색일: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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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포퓰리스트란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신념과 무관하게 무엇이든 하는 이들을 일 컫는다. (가장 쉬운 예로 트럼프가 민주당원일 때에는 여성의 낙태권을 지지했던 내용들을 인용하곤 한다.8)) 그들은 대중이 겪고 있는 위기를 과장하고, 그 원인과 해결책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그 자리에 “대중 vs 엘리트”라는 전선이 형성된다. 예컨대 ‘진짜 프랑스인’의 고통 에 무관심한 기득권의 정치적 올바름 추구가 당신의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식이다. 그렇게 포퓰리스트는 박탈감을 느끼는 대중의 분노와 원한의 감정에 어필한다.

물론 기득권과 싸우고 대중에게 말 건다는 이유에서 포퓰리즘을 ‘정치적 가능성’으로 논하 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포퓰리즘의 작동 원리 내에는 “다원주의를 배격”하고 공동체 내 소수자를 배제함으로써 내적 단결을 지속하는 혐오와 배제의 정체성 정치가 존재 한다는 점9)에서 포퓰리즘을 가능성으로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예컨대 르펜의 ‘여성 정 치’가 어떻게 포퓰리즘으로 휘어지는지 보자. 그는 “나는 프랑스 여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 이다. 그런데 누가 그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일자리를 빼앗는가? 난민이다”라고 선동한다. 그 리하여 르펜에게 페미니즘은 정치학이 아니라 수사학이 되어 버린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 면 여성에 대한 진보적 정책 기조를 유지했을까? 문득 극우 정치인의 딸이자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었던 자가 한국여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기억하게 된다.

2. 현실정치가 관심도 없으면서 페미니즘을 힙한 악세사리로 삼을 때: 대한민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대통령의 예 문재인 정권을 포퓰리스트 정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요즘 같은 식이라면 문정권 역 시 중도 우파 포퓰리즘 정권으로 기록될 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드는 요즘이다. 최근에는 경 제정책과 노동정책에 있어서 그런 평가를 면하기 힘들텐데, 사실 문정권의 포퓰리스트적 면 모는 무엇보다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에 대한 태도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선언한 이후 그가 보여준 행보는 “차별금지법 필 요 없다, (군대 내) 동성애에 반대한다, 낙태죄 폐지는 시기상조, 탁현민은 첫 눈이 와도 못 나간다” 등이었다. 2015년 이후 ‘여성’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촛불광장에서 도 “혐오없이 민주주의는 가능하다”, “페미니즘이 민주주의를 완성한다” 등을 말하면서 ‘페

『포퓰리즘의 세계화』, 오공훈 옮김, 메디치, 2017. 9) 얀 베르너 뮐러, 『누가 포퓰리스트인가』, 노시내 옮김, 마티, 2017. 8) 존 주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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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존’을 형성함으로써 스스로를 가시화시켰던 여성-시민, 여성-유권자를 고려하지 않을 수 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호기’에 가능해진 ‘원팀 정치’에는 여성을 끼워줄 수 없었던 형제들의 네트워크의 수장은 별 수 없이 여성 및 소수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포퓰리스트의 면모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5천년을 함께 살았고 70년을 떨어져 살았다”는, 관대하게 표현하자면 ‘정치적 수사’이고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조작된 역사’가 추구하는 ‘(젠더화된) 단일 민족’이 라는 판타지와 연결되어 있다. 그 ‘조작된 역사’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가능’하게 했고, 여전 히 한반도에 살고 있는 다양한 소수자들을 매우 적극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우리는 즉각적 으로 ‘한국 흥행 영화에서 괴물이 되어 버린 조선족’과 ‘예맨 난민 반대 청원 70만명’ 등의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정권이 ‘그러해도 괜찮다’는 싸인을 계속 주고 있다는 것은, 과연 과 도한 해석인가?) 현재 유일하게 “잘 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대북 정치가 활용하고 있는 내 적 결속을 위한 동력이 “여성과 소수자를 배제하는 ‘브로맨스’10)에 기반 한 민족뽕”임을 사 유하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3. 페미니스트가 기꺼이 포퓰리스트가 되고자 할 때: 발표자 본인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하지만 포퓰리스트가 페미니즘을 이용할 때만큼이나 곤란한 것은 페미니스트가 기꺼이 포 퓰리스트가 되기를 선택할 때다. 그가 생각하는 ‘여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력을 다른 소 수자에 대한 혐오로부터 끌어오기로 마음먹기는 쉽고, 그만큼 유혹적이다.

그러나 작가 들개이빨은 이런 명대사를 남겼다. “인간을 혐오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지만 쉬운 건 결코 위대할 리 없지.”

10)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형제애는 ‘브로맨스’라는 형식을 띤다. “문재인-김정은, 오늘부터 1일”이라든가 “첫눈 오면 놓아

주겠다” 같은 로맨스의 수사가 정치적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여성을 정치적 주체에서는 배제하되, 그 이야기의 소비자로 소환해내는 묘기를 선보인다. 남성 원팀 정치가 여성을 ‘표밭’으로만 여긴다는 의미다. 로맨스가 된 정치는 달달하지만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여성 배제는 씁쓸하다.” (손희정, “가부장제 이후는 아직 오지 않았다”,

신문 , 2018.09.03.

《경향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9032049015&code=990100#csidx64c289097cac1f4bd5d53866 d877617 검색일: 2018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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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페미니즘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좌파 포퓰리즘’. 이름은 어쩌면 상당히 아름다울 수 있는 어떤 기획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고민 안에서다. (아마도 각자 머리 속에 가지고 있는 ‘포퓰리즘’에 대한 이해와 정의가 달라서일 수도 있겠다. 나에게 “좌 파+포퓰리즘”은 “뜨거운+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리의 운동은 과연 위대해질 수 있을 것인가?


발제 5

작은 포퓰리즘들의 시대, 어떻게 갈등을 새롭게 제도화할 것인가 정정훈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1.좌파와 포퓰리즘의 마주침 최근 포퓰리즘이 사회운동진영이나 비판적 연구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논점으로 떠오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로서는 실천적으로는 그리스 시리자나 스페인 포데모스의 전진 이, 이론적으로는 라클라우와 무페 등의 포퓰리즘 논의가 급진적인 정치학으로서 포퓰리즘 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즉 전통적으로 우파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온 포퓰리즘 에 대한 좌파적 전유의 가능성을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포착하게 된 것이 오늘날 포퓰리 즘에 대한 진보적 관심의 계기가 아닐까?

그러나 반드시 포퓰리즘에 대한 좌파의 문제의식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현상인 것 같지는 않 다. 포퓰리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성 정당을 비롯한 기존 정치문법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대중들의 직접행동이 갖는 막강한 영향력과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 동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좌파는 기존의 정당제도를 비롯한 대의체제에 의해 대표되지 못하는, 혹은 대표 불가능한 대중들의 직접적인 행동이야 말로 기존 질서를 변혁하기 위한 실천적 동력이라는 관점을 기본적으로 견지해 왔다. 모든 혁명의 기본이 기존 국가장치의 장악력으로부터 벗어나는 대중들의 봉기라면 대중들의 운동 그 자체는 좌파 정치의 근본적 대상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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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좌파는 기성 체제와 제도들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im-mediate) 대중들의 직접행동을 어떻게 조직화할 것인가를 고민하여 왔다. 그리고 이 점이 좌파 정치의 또 다른 중심적 문 제설정일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겪는 고통과 질곡의 원인을 상상된 단일한 적으로부터 찾아내고, 그 적을 타파할 동력을 상상적 동일성에 입각한 상징에서 발견하려는 대중들의 자생적 투쟁을 과학적 인식에 기초한 노동계급의 지도하에 조직화하려는 시도가 좌파정치의 오래된 기획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 기획에서는 대중들의 자발성에 기초한 정념적 인식을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된) 정당을 통해 합리화하고 조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에는 언제나 늘 내 적 긴장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당은 대중없이 혁명을 할 수도 없지만, 동시에 대중의 정 념을 결코 합리화하거나 완벽히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내적 긴장으로 인해 좌파 정 치의 역사는 이러한 기획의 성공이 매우 드믈뿐만 아니라 그 기획은 실패의 요소를 필연적 으로 내포할 수밖에 없음을 경험적으로만이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증명하여 왔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좌파 포률리즘의 실천과 이론은 대중들의 운동과 관련된 좌파의 오래 된 기획에 내재하는 난점을 나름대로 돌파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일 수도 있다. 특히 이론 적 차원에서 라클라우와 무페 등은 포퓰리즘을 정치의 조건이나 해방적 정치를 위한 근본적 실천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대중들의 운동을 발본적으로 긍정하는 관점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2.대중들로의 복귀로 충분한가? 진태원이 잘 지적한 바와 같이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증상이라고 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서 민주주의, 혹은 정치적인 것의 조건이라고도 규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곧바 로 민주주의나 해방의 정치와 등치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포률리즘은 오히려 민주주 의의 아포리아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진태원 편, (『포률리즘과 민주주의』, 2017)

이는 스피노자를 경유하면서 발리바르가 제기한 ‘대중들로의 복귀가 갖는 위험성’이라는 논 점과 연결되는 문제의식이다. 민주정이 대중들 전체에 의해 직접적으로 소유되는 권력으로 이해될 때, 대중들의 정념적 차원은 그 권력으로 민주정을 파괴할 수 있다는 모순이 존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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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2005)

발리바르는 민주주의를 모든 정체가 지속되기 위한 원리적 경향, 즉 “민주주의를 국가-또는 국가장치-의 변혁/전환”(『스피노자와 정치』, 201)으로 파악하는데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론 이 갖는 변혁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변혁적 경향이 스피노자가 민 주주의를 하나의 정체로서 규정하는데 실패하게 만들었던 대중들의 정념이란 문제를 사라지 게 할 수는 없다. 국가의 기초가 대중들이고, 대중들은 일차적으로 정념적 존재라면 대중들 은 국가의 민주화를 추동하는 계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가의 해체나 절대주의화를 끌어 내는 경향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국가의 민주화 경향을 가동시키는 조건들 과 국가의 절대주의화 경향을 억제하는 조건들에 대한 해명일 것이다. 그리고 이 해명에는 결국 대중들의 정념을 ‘누가’,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관건적 문제가 놓여 있다.

좌파 포퓰리즘을 주창하는 이론가들의 진전된 논리와 뛰어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는 것 역시 대중들의 운동에 고유한 대중들의 상상, 혹은 정념의 문 제이다. 대중들의 요구가 항상 민주주의적인 것이라는 보장은 없기에 어떻게 그 정념들을 중화하고 합리화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더욱이 그 이론적, 실천적 한계로 인해 더 이 상 대중들의 투쟁을 지도할 좌파 정당 모델에 입각할 수 없다면, 대중들로의 복귀가 민주주 의의 실현이 아니라 대중들 자신에 의한 민주주의의 파괴로 이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3. 소문자 포퓰리즘들의 시대 나 역시 대중들의 운동이 민주주의의 조건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리고 대중들의 운동은 기본적으로 포퓰리즘적 성격을 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종의 동어반복이지만 포퓰리즘적인 대중들의 운동은 민주주의 ‘모순적’ 조건일 수밖에 없다. 나로서는 이 모순적 조건에 대한 이론적 해명을 내놓을 역량은 없지만, 포률리즘적 ‘대중운동’이 민주주의의 우 회할 수 없는 조건이라면 적어도 한국의 구체적 현실에서 그것이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는가를 짚는 것으로부터 포퓰리즘에 대한 사고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많은 논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정치에서 포퓰리즘은 변수라기보다는 상수였고, 정상적 정치로부터의 탈궤라기보다는 한국적 정치의 상궤였다. 최소한 소위 양김시대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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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김시대의 지역주의나 노사모로 시작되어 확산된 정치적 팬덤 활동은 한국정치를 규정하는 핵심적 요소들이었다. 포퓰리즘은 한국 정치의 역사를 구성하는 핵심적 계기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 정치가 포퓰리즘에 의해 완전히 압도되거나 포퓰리즘적 운동이 결정적 으로 한국의 정치지형을 규정해온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포퓰리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부상하고 있는 지금에도 한국사회의 향로에 관건적 역할을 행사하는 거대한 포률리 즘적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극기부대, 반성동성애 운동하는 보수기독교 등으로 대표되 는 우파 포퓰리즘적 현상이 존재하는가 하면, 소위 개혁진영의 달빛기사단 등과 같은 문재 인 팬덤 혹은 노무현주의 대중운동이 포퓰리즘적 정치운동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포퓰리즘적 운동도 한국 정치지형에 결정력을 행사할 만큼 큰 영향력을 확보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지금은 다수의 상징들에 의해 결집되는 작은 포퓰리즘들이 각축하는 시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태극기부대나 보수기독교 우익 대중운동, 노무현주의 대중운동들 그리고 그 보다 작은 정치인 팬덤들과 같은 작은 포퓰리즘들이 제도 정치의 영역에서 각축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 정치의 영역만이 아니라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의 영역에서도 작은 포퓰리즘적 현상들이 드러나고 있다. 페미니즘의 대중적 실천에 반대하여 남성의 권리와 반페니즘의 명 분하에 집결하는 남성 대중운동, 동성애 및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에 기초하여 결집하는 기 독교 대중운동, 한국남성들만이 아니라 성소수자와 난민들에 증오를 분출하며 결집하는 생 물학적 여성 대중운동과 같은 현상들이 현재 한국사회를 역동을 구성하는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대중운동’들은 제도정치에 의해 충분히 매개되지 못하거나 매개될 수 없는 상태 에 처해있으며, 그래서 제도 정치의 절차를 우회하거나 그것을 부정하며 직접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제도 안에 직접적으로 기입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 어떤 운동도 아직 헤 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온오프라인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운동들은 분명 한국 사회의 중요한 쟁점들을 놓고 격돌하며 격돌이 어떻게 결론 나는가에 따라 한국사회의 성격 역시 재규정되겠지만, 그렇다고 대중들의 거대한 집결을 이끌어낼 만한 큰 포퓰리즘은 아직 등장하지는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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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포퓰리즘적 현상은 날로 강화되나 그렇다고 거대한 포률리즘적 운동이 등장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상태가 바로 지금의 국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제 도 정치에 의한 갈등의 대표와 매개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상태도 아니다. 즉 제도 정치의 기능 부전 내지는 무능력으로 인하여 포퓰리즘적 현상은 사회적 갈등의 영역에서 확산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제도 정치 영역을 잠식할 수 있는 거대한 포퓰리즘 운동은 등장하지 않은 상태. 바로 작은 포퓰리즘의 시대에 우리는 지금 도달해 있는 것이 아닐까?

4. 갈등을 새롭게 제도화하기 대표제 정치의 핵심은 사회적으로 갈등하는 당사자들이 직접적으로 충돌하여 그 갈등을 해 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대표자들의 매개를 통해서 제도적으로 해결하는 절차에 있 다. 즉 갈등의 제도화야말로 대표제의 핵심이고 대표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갈등들이 매개될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꼭 그러한 것만은 아니지만, 포퓰리즘은 갈등들이 제도의 영역에서 자신 매개자를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에 활성화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매개 없는 정치, 혹은 대표를 통한 갈등의 제도화를 부정하고 대중의 직접행동을 통한 정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민주주 의는 근본적으로 대표제를 통해서만 작동한다는 관점 역시 지지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에 서 포퓰리즘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어떤 조건이라는 라클라우의 관점을 수용한다. 보다 정확 히 말하자면 대중들의 운동이야말로 민주주의, 나아가서 정치의 어찌 할 수 없는 기초라는 스피노자의 관점을 나는 견지한다. 그러므로 동시에 대중들은 항상 상상에 의해 교통하는 존재들이며 대중들 자체가 언제나 정치 자체를 파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그의 논점을 받아들인다. 즉 민주정치는 대중들의 운동들로부터 분리된 제도들만으로는 성립할 수도 없 고 유지될 수도 없지만, 동시에 대중들의 직접적 운동에만 근거해서도 작동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작은 포퓰리즘들의 시대라는 현재 국면에서 대중들의 운동에 기초하면서도 대중적 행동의 직접성/즉각성(im-mediacy)으로 복귀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정치적 기예는 어떻게 가능할 까? 이는 결국 대중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을 어떻게 다시 정치 제도 안에 매개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즉 갈등을 어떻게 다시 제도화할 것인가가 현재의 국면에서 한국 사 회의 민주주의를 버전업하기 위한 중요한 물음이라는 말이다. 나는 물음에 답변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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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방향 가운데 하나가 선거 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승자독식형 소선거구제가 아니라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같은 선거제도는 대중들의 자발적 운동이 갖는 에너지를 일정 하게 제도 정치의 회로 안으로 끌어들이고,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다양하게 매개하여 제도 적으로 해결해가는 하나의 방안일 수 있다는 것이다.

대중들의 역량과 역동에 기대면서도 대중들의 정념을 어떻게 순치해갈 것인가라는 좌파 정 치의 오래되고, 복잡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또한 지난한 고민과 복잡한 사고 그리고 치밀한 실천을 통해서 주어질 수 밖에 없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그러한 답변을 모색해 가기 위한 하나의 가능한 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국면에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도 대중들 의 운동이 없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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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6

포퓰리즘과 한국정치

이승원 / 서울대 아시아도시센터 연구원

1. 포퓰리즘 ‘포퓰리즘적 현상’이 중요한 이유는 ‘대중’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구성하는가 혹은 양분된 정 치지형에서 대중을 어느 쪽에 서 있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 고 이것은 기성 집권세력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현상일 것이며, 도전하는 세력에게는 가장 열정적인 정치 참여의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포퓰리즘이 도전하는 세력, 혹은 피억압세력,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열정적인 정치 참여의 계기를 제공할 수 있는 이유는 포퓰리즘적 계기가 기성 제도와 위계질서의 한계를 넘어 출 현하고, 따라서 포퓰리즘적 흐름에 동참하는 대중들은 기성 의사결정 과정과 게임의 규칙에 의해 제약받지 않고 스스로 그 규칙들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기성 제도와 위계질서에서 바라볼 때는 혼란스럽고 불안정하며 급기야는 폭력적 이거나 불법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혹은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게 낙인을 찍기도 하다. 또한 문제해결 과정으로서의 기성 제도와 질서의 권위를 더 이상 신뢰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아직 새로운 제도적 대안을 마련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포퓰리즘 현상은 그 과도기적 흐름(제도->비제도->신제도)에서 기성 제도를 부정하는 힘을 갖은 자 이자 동시에 새로운 제도를 구성할 것으로 여겨지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형성하 게 된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우리’와 ‘적’을 가르는 정치 전선을 형성하고 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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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정치적으로 구성하는 ‘포퓰리즘적 전략’에서 ‘대중’이 수용하는 가치가 얼마나 폐쇄적이 고 배타적인지 혹은 얼마나 개방적이고 수평적인에 따라서 그 포퓰리즘 전략은 ‘우파 포퓰 리즘’과 ‘좌파 포퓰리즘’으로 분류될 수 있다.11)

포스트 맑스주의 차원에서 포퓰리즘을 연구해온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에 따 르면, 포퓰리즘은 ‘권력자들’에 맞선 ‘패배자들’을 둥원하여 사회를 두 진영으로 분리하는 정 치적 경계 구축의 전략으로 정의된다. 이런 의미에서 포퓰리즘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정치 프로그램으로 제한되지 않고, ‘복지국가’나 ‘신자유주의 국가’와 같은 특정한 정치 레짐으로 규정되지도 않는다. 즉 포퓰리즘은 위와 같이 기성 권력에 맞서기 위한 대중 동원에 필요한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동원할 수 있으며, 여러 제도적 틀과도 조화가능하다. 따라서 포퓰리즘 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좌파나 우파 어느 한 측면의 정치적 현상이 아니라, 좌, 우, 중도 등 어느 측면에서도 가능하며 혹은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진보적인 정책을 취하면서도, 지자자 외부에는 보수적이며 배타적인 정책을 취하는 양가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도 하다.

2. 불안의 심화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포퓰리즘은 하나의 공동점을 가지고 있다. 모든 포퓰리즘 은 ‘불안’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불안이란 무언가 ‘나’에게 고통을 줄 것 같으나 아직 그 인과관계가 설명되지 않은 채 반복되는 기이한 현상에 대한 감정상태이다. 과거 미국 민중 당을 비롯 20세기와 21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좌우파 포퓰리즘 모두(이탈리아 오성 운동, 영국 브랙시크, 그리스 시리자, 스페인 분노한 사람들(los indignados)과 포데모스, 중 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자스민 혁명, 홍콩의 노란우산, 대만 해바라기 혁명, 한국의 촛불혁 명, 태극기 부대 등) 공통점은 대의제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감과 대의제의 한계로 드러나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따른 사회적 고통의 차이가 커질수록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불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불안’을 대의제와 사회적 고통의 관계로만 단순화시킬 수는 없다. 과거 냉전적 대립과 전쟁, 테러, 극단적인 문화적 충돌과 새로운 인종주의의 확산, 인구절벽, 지 구온난화와 재앙적 환경 파괴의 위협,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전통적 일자리 소멸 등에 따 11)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대중’을 정치적으로 ‘우리’가 되도록 구성하려할 때 사용하는 정치적 언어, 정책, 담론들

이 가지고 있는 ‘공감’과 ‘정동’에 관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특정한 정책이나 지도자에 대한 지지여부로 얽히는 것이 아니라, 상식, 웃음과 슬픔, 연민, 위로, 소비 성향, 생애주기 등 공감과 정동이 작동하는 모든 영역에서 복 합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향후 연구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주제로 남기도록 하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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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불안 또한 저마다 다른 포퓰리즘의 특징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 초반 이후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신자유주의 지구화 구호와 함께 모라토리움, 국가채무, 구조조정, 민영화, 탈규제, 초국적 기 업, 신용평가, 노동시장 유연화 등 낯선 경제용어와 국제관계 언어들이 전 세계를 지배했다. 1990년대 말 우리가 겪은 IMF금융위기 또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문제는 이 흐름이 국가 간은 물론 사회 내 사회경제적 양극화, 불평등, 차별을 빠르게 심화시켰다 는 것이다.

불안은 고통스런 현상의 출현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그 현상을 설명하고 해법 을 마련하는 시도들이 점점 실패하거나 줄어들면서 미래에 대한 부정적 예측이 확산될 때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의 책임을 위임받은 대의제 정치집단과 엘리트-관료주의 집단들 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는 불안이 커질수록 줄어들게 된다. 신뢰가 줄어들수록 불안은 커져 간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불안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은 정권교체와 무 관하게 지속적으로 악화되어왔으며,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은 고립되고, 정당운동은 엘리트관료화되었으며, 시민사회는 ‘민관협치’와 ‘정부 보조금’, ‘민간위탁’, ‘사회적 경제’, ‘사회혁 신’ 등을 명분으로 정부에 포섭되면서 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자율성은 사라지고, 정부와 기 업에 보다 더 의존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왔다.

소위 좌파 혹은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6월항쟁을 한국 민주화의 중요한 계기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차라리 싸울 적이 분명했던 지난 10여 년 시절은 이 불안을 정부와 집권 세력 탓으로 돌리며 일말의 희망으로 위로했을지 모른다. 혹은 우파의 경우, 노동운동과 ‘참여연 대’(?)‘를 탓했을 것이고 지금도 탓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 탄핵정국 이후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이런 ‘정부 탓’도 왠지 모를 금기어가 되는 듯하다. 어느 영화 속 늑대의 형상을 한 악인이 그 악과 싸우다 지쳐버린 주인공에게 씁쓸히 결정타를 먹이는 듯 뱉어낸 한마디가 있다. “희망을 잃은 자들을 지배하는 것처럼 쉬운 것은 없지”.

‘좌파’에겐 적이 사라지거나 모호해졌고 오히려 좌파에겐 대권 경쟁자나 반대정파 세력 등 이 보다 선명한 적이 되고 있는지 모르고, ‘우파’에겐 적이 분명해졌다. 반문연대, 민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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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전교조, 성소수자 집단, 메갈... 무엇인가 우울하고 무거운 마음이 드는 건 지금 상황에선 우리 사회에서는 좌파 포퓰리즘보다는 우파 포퓰리즘이 확산될 조건이 훨신 더 많 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3. 탈구적 현상 사회적 불안은 탈구적 현상에 대한 대중들의 정서적 반응이다. ‘정서적’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불안 자체가 탈구적 현상을 우파적으로든 좌파적으로든 혹은 보수적으로든 진보 적으로든 타개하려는 시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탈구란 기존 (민주적) 질서, 제도 혹은 신념체계가 보편적 수준에서 유지되지 못하는 한계상 황이 드러나는 상태이다. 이것은 기존 질서 내부의 방식이나 제도적 효과로는 해결은 물론 설명조차 할 수 없는 사건의 발생을 의미한다. 라클라우는 탈구를 기존 대의제가 대표할 수 없거나, 또는 기존 정치적 독해코드로는 상징 불가능한 어떤 것이 출현하는 계기라고 설명 하고 있다. 따라서 탈구적 사건이란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부정과 재구성의 ‘가능성’을 제공 한다.

따라서 탈구는 이중 운동의 메카니즘을 촉발한다. 이중 운동의 한 축에는 바로 ‘구성성’이 있고 그 반대 축에는 ‘전복성’이 작동한다. 즉 민주주의 정치가 복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다. 탈구적 사건이 발생하면 한계가 드러나고 위기에 처한 기존의 정치사회적 질서를 다시 복원시키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반면 기존 질서 자체가 사회적 고통과 탈구적 사건의 구조 적 원인이라는 해석과 함께 이 구조 자체를 철저히 재편하려는 시도도 발생할 수 있다. 물 론 전자는 기존 질서를 포함한 여러 특권적인 제도, 관계, 기구, 윤리, 지식을 점유하고 있 는 세력의 시도가 주를 이룰 것이다.

안정된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기존 선거제도와 의회 중심주의, 그리고 사법적 판단을 더욱 강조할 수 있고, 때로는 경찰력, 군사안보 세력, 보수 언론. 거대기업 등과의 동맹도 시도할 수 있다. 위기일수록 ‘전문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억제할 수 있다. 기존 대의제 질서를 더욱 철저히 하면서 대중들이 집단적이고 대안적 정치활동 대신 개별 유권자로서 대의제에 더 신뢰를 줄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펼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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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탈구적 사건을 전복의 논리와 결합시키려는 시도는 사실상 더 복잡하고 힘든 정치적 실천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탈구적 사건을 경험한 대중들은 자신의 사회 내 위치, 사회적 정체성이 뒤틀어지면서 기존 질서 내 위치로 돌아갈 수도, 어떤 위치를 새로운 사회적 정체 성으로 선택해야할지 혹은 선택받게 될지 처음부터 확실히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97 년 IMF 구조조정이후 해고된 노동자들은 다시 정규직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비정규직이라 는 전혀 낯설고 불안한 상태를 쉽게 받아드릴 수 없었다. 청년실업률, 질 낮은 일자리 수, 가계부채의 증가, 소득분위 상위 10%의 사회적 부 점유율의 지속적인 상승 지표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개개인의 생계유지 능력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청년들은 계속해서 취업준비만 할 수도, 결혼과 연애를 쉽게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청년 창업을 쉽게 할 수도 없는 상황 이 계속되고 있다. 학부모들은 대학졸업 후에도 여전한 높은 청년취업률을 보면서 자녀들에 게 대학입시 위주 공교육을 더 강하게 권유해야할지 공교육 탈출을 선택해야할지 고민의 연 속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국민소환제와 국민발안제 등의 개혁적 제도 도입이 무산되면서 대중들은 아무 견제기능 없이 또 다시 모든 주권적 권한을 실망감만 안겨준 의회에 위임을 해야할지, 그렇다고 대의제를 넘어선 직접민주주의 기반 자기 정치를 할 수 있을지 고민조 차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선택의 고민은커녕 그 고민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대다수 대중들과 현 질서나 제도, 정치세력을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 정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수십 년 동안 반공주의적 안보 논리와 애국주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경험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기억 속에 각인되어 삶의 윤리로 규정되어 있는 전쟁경험 세대들에 게는 사회의 분화와 갈등,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빠른 소통방식의 변화, 전통적 가족의 재구성 등은 자신들의 언어가 사라지고 상대적 박탈감이 높아지는 불 안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탈구적 사건을 통해 드러난 기존 질서와 제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시도 들, 광장에서 유튜브 등 온라인으로 이어지는 태극기 부대와 보수 기독교 단체들의 새로운 정치방식, 김진태, 정제원, 홍준표 등의 담론 정치 등을 포함해서 그리고 그 시도들과 함께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라클라우는 탈구가 단지 어떤 안정성을 흔드는 부정적인 것이아니라 모든 정치가 가능한 ‘자유, 일시성, 그리고 가능성 (freedom, temporality, and possibility)’의 순간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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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정치가 가능한 탈구적 상태가 바로 구성성이나 전복성이라는 정치적 시도로 귀결되 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이든 평범한 대중이든 불안이라는 정서적 반응이 먼저 표출되는 상 황에서는 어떤 정치적 시도도 쉽게 제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즉 탈구적 상태로 해석되 는 대의제에 대한 실망에 따른 불안의 확산은 바로 포퓰리즘 현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불안의 확산은 개인주의 및 자기계발의 학산, 자살률의 증가, 결혼과 취업 포기, 혐오 범죄 등 개인화된 삶의 포기로 이어지는 경향이 크고, 이것은 불안의 악순환을 초래했다. 기존 사회운동이 침체되는 현상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탈구적 상태는 ‘일시적이며 정태적 균형상태(a temporal static equilibrium)’로 귀결 되는 경향을 가지기도 한다. 그람시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만일 탈구적 계기가 전통적인 지 배계급과 다양한 대중 집단 어느 쪽에서도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 계기는 일시적이며 정태적 균형상태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정태적 균형상태란 경험하는 사건들이 ‘절망적이며, 진보세력은 성숙되어 있지 못하고, 결국 보수든 진보든 그 어떤 집단도 승리를 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심지어 보수세력은 지배자를 요구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런 상황을 그람시A. Gramsci가 ‘인터레그넘interregnum’이라 부른다. 인터레그넘이란 헤 게모니 기획을 중심으로 설정된 질서와 신념 체계들이 위기에 처하게 되는 상황이다. 이 위 기는 기존 질서와 신념 체계들이 이 불안한 상황에 대해 아무런 해법도 제시하지 못하고 오 히려 불안의 무게를 가중시키는 원인처럼 해석되는 경향을 보일 때 발생한다. 정부가 신뢰 를 주기는커녕 적폐의 대상이 될 때, 기업이 사회경제적 삶의 질을 높이기는커녕 불평등과 차별의 원인으로 인식될 때, 의회, 정당정치, 지식인, 미디어, 공교육 등 어느 것도 믿을 수 있기는커녕 불만의 대상이 될 때, 기존 헤게모니 질서는 흔들리게 된다. 대의제 정치, 생애 주기, 세대 간 소통, 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 등이 점차 희석화된다.

4. 포스트 민주주의 vs. 포퓰리즘 라클라우와 함께 포퓰리즘을 대중을 정치적으로 구성하는 실천 측면에서 분석하면서 ‘좌파 포퓰리즘a left populism’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를 제도적으로 확장시킬 것을 주창하 는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이런 인터레그넘 상황에서 포퓰리즘이 시작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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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포퓰리즘은 이 위기에 대한 대중의 직접적인 정치적 대응이 아니다. 위기에 대한 첫 번째 대응은 헤게모니 세력이 먼저 시작한다. 위기가 붕괴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 헤게모니 세력은, 특히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세력은 ‘평등’과 ‘대중주권’이라는 민주적 가치를 축소하 고, 대중들을 탈정치화시키고, 관료제를 강화해 나간다. 무페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콜린 크 라우치Colin Crouch의 포스트 민주주의post-democracy 용어를 차용한다. 포퓰리즘은 오히 려 이에 대한 저항의 표현, 즉 불안에 대응하는 정치의 원초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 민주주의 상태에서 정치는 엘리트 중심 의회정치와 관료주의로 축소되고, 대중은 그 선택지가 최소화된 유권자로 전락하게 된다. 즉 포스트 민주주의 상태에서 통치 정당을 정 하는 대중의 선택은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중도좌파나 중도우파 사이의 양당 교체 수 준으로 축소된다. 이외의 대안은 포스트 민주주의에서는 보장되지 않고, 다양한 차이들이 경 합할 수 있는 기회는 제도적으로 철저히 차단되며, 이 중도를 넘어서는 사람들은 모드 ‘극 단주의자extremists’로 보이거나 ‘포퓰리스트’로 취급되고 악마화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좌파’가 사라지거나 중도화되는 이념적 경로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권적 엘리트 중심 권력에 맞선 저항이 불평등에 의한 고통이 심화된 영역에서 출 현하게 된다. 그런데 서구에서 이러한 저항은 1990년대 오스트리아 자유당FPÖ과 프랑스 국 민전선the Front National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우익에게서 시작했다. 이들은 민족주의 와 대중주권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기성 엘리트 정치세력에 대한 대항을 키워나갔다.

2008년 유럽을 강타한 경제위기는 포퓰리즘 지형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좌파 또한 대중 주권과 수평주의/평등주의를 결합해 나가면서 경제위기 이후 긴축 정책에 맞선 대중적 저항 을 형성해 나갔다. 그리스에서는 아카낙티스메노이(Aganaktismenoi, 권한을 가진 자들), 스 페인에서는 15-M 인디그나도스(Indignados, 분노한 자들)들이, 프랑스에서는 뉘 드부Nuit

Debout 운동이 저항을 폭발시켰고, 이전 미국의 ‘월가 점령운동’ 등을 따라 광장을 점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제레미 코빈이 당수가 된 이후 새롭게 변화하는 유럽 최대 좌파정당인 영 국 노동당의 변화도 그 중요한 사례이다.

그리스, 스페인 그리고 영국의 사례가 중요한 것은 이 포퓰리즘적 저항운동들이 제도정치와 접합지점을 찾으면서 정치권력을 만들어 나갔다는 것이다. 운동이 스스로 제도정치와의 접 합을 시도하지 않거나, 시도하더라도 수동적으로 흡수되는 경우와 달리, 그리스와 스페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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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주체들의 적극적 실천을 보여주었다. 물론 시리자는 유럽연합과 IMF 등의 강력한 대 응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포데모스도 내적 갈등이 드러나곤 있지만, 이것을 보고 포 퓰리즘 정치가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사례는 여전히 대안 정 치모델로 확산디면서 기성 엘리트 정치구조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좌파당Die Linke, 포르투갈의 좌파블록Bloco de Esquerda, 프랑스의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a France Insoumise도 유사한 사례이다.

5. 포퓰리즘과 문재인 정권 한국 정치와 관련해서 포퓰리즘을 연구할 때 몇가지 현실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첫째, 우리는 노스텔지아적 순수성을 민족이든, 조국이든, 국민이든 지키기 위해 혐오와 배 제, 경쟁과 차별을 방조하거나 정당화하고, 사회를 전체주의화하려는, 하지만 결국 아 무 문제도 해결할 수 있기는커녕 결국 민주적이고 경합적인 정치의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하면서 모든 사회적 위기와 불안의 원인이 되어 버리는 우파 포퓰리즘의 확산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둘째, 우파 포퓰리즘에 맞서는 방식은 모든 포퓰리적 현상을 부정 또는 억제하는 것일까?

셋째, 아니면 우파 포퓰리즘에 맞서는 것은 민주적 포퓰리즘, 진보적 포퓰리즘, 좌파 포퓰리 즘을 구성하는 것일까?

넷째, 나아가 우파 포퓰리즘에 맞서는 좌파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보다 급진적으로 확산하 고 제도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까?

우선 어떤 이름인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정치 현장에서 ‘좌파 포퓰리즘’이나 ‘민 주적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로 대중들과 만날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포퓰리즘은 특정 이데올로기나 구체적인 정치 프로그램의 이름도 아니다. 라클라우에 따르면, 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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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권력자들’에 맞선 ‘패배자들’을 둥원하여 사회를 두 진영으로 분리하는 정치적 경계 구 축의 전략으로 정의된다. 이런 의미에서 포퓰리즘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정치 프로그램으 로 제한되지 않고, ‘복지국가’나 ‘신자유주의 국가’와 같은 특정한 정치 레짐으로 규정되지도 않는다. 즉 포퓰리즘은 위와 같이 기성 권력에 맞서기 위한 대중 동원에 필요한 다양한 이 데올로기를 동원할 수 있으며, 여러 제도적 틀과도 조화가능하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전통적 인 의미에서 좌파나 우파 어느 한 측면의 정치적 현상이 아니라, 좌, 우, 중도 등 어느 측면 에서도 가능하며 혹은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진보적인 정책을 취하면서도, 지자자 외부에는 보수적이며 배타적인 정책을 취하는 양가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2018년 한국사회에서, 현 정권을 포함한 좌파 진영을 ‘난민 반대’, ‘성 소수자 혐오’, ‘귀족 노조’, ‘페미 혐오’, ‘최저임금제와 경제정책 실패’, ‘북한 퍼주기’ 등의 언어로 적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확장하려는 우파 포퓰리즘에 맞서 어떤 언어와 정책 으로 대중들을 새롭게 구성할 것인가이다. 또한 현 정권처럼 연이은 초기 공약 후퇴와 달리 이런 소위 좌파적 언어를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도 중요하다.

현재 문재인 정권은 초기 여러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언어들을 ‘촛불혁명’이라는 중심기표를 통해 자신들의 지배담론으로 만들었고, 이를 통해 어려움 없이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문 재인 정권과 민주당은 탈원전 에너지 정책, 최저임금제 도입, 교육정책, 소득주도 성장, 사 회혁신, 부동산 정책, 정치개혁 등에서 연이어 표리부동한 모습을 보이면서 스스로 ‘촛불혁 명’ 정권으로서의 헤게모니를 약화시키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자유한국당이 우파 포퓰리즘적 방식을 통해 자신들을 지지하는 대중을 새롭게 구성해 나가고 있는 반면 자유한국당 내 권력다툼이 심해진다고 해서, 이들이 대중을 구성 하는 언어적 호명이 중단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은 지지 대중의 범위 를 점차 축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 정권은 집권 이후 공약실현의 추진력이 그 엄청나게 높았던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우파 저항에 밀려 어려울 때마다 ‘촛불 시민’의 지지를 호소

하기보다, 오히려 소위 ‘촛불 시민’ 사이의 균열을 방조하고 공론화위원회, 온라인 국민청원, sns를 통한 메시지 정치나 경사노위 등을 통해서 정권의 정치적 한계와 정책적 표리부동을 이해시킬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지지세력의 이탈을 야기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 라, 문재인 정권 지지자들의 ‘우리’ 내부에서 ‘적을 규정’하는 전선이 증식되는 상황은 좌우 를 떠나 그 정치적 효과는 그리 긍정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다양성과 차이가 하나의 등가 관계를 형성하는 ‘대중’이 아니라 ‘순수함’을 강조하면서 ‘순수하지 못함’에 대한 처벌식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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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과정은 대중들의 참여를 주저하게 할 수 있으며, 전체주의적 경향에 빠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 영국 수상 마거릿 대처가 퇴임 직후 한 인터뷰에서 임기 중 최고의 업적이 무 엇이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토니 블레어와 신노동당’이었던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 아야 할 것이다. 현재 탄핵 후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누군가 동일한 질문을 던졌 을 때, 마거릿 대처와 유사한 답변이 그리고 짧게 스쳐지나가는 입가의 미소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결국 우파 포퓰리즘에 대항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를 ‘대적자’로 설정할 것인지, 그리고 이 대적자에 대항할 ‘우리’를 얼마나 더 평등하게 확산할 것인지 이다. 이는 현재의 납세자나 유권자 혹은 무비판적 지지층으로 ‘우리’를 제한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를 ‘대중 주권’과 미래의 영역으로까지12) 확장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이고 나아가 피할 수 없 는 논쟁과 성찰이 따르는 지적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6. 포퓰리즘과‘사회운동’ 포퓰리즘과 관련해서 주목해야할 또 다른 부분이 ‘사회운동’이고, 이것이 제도정치와 겹치는 부분도 포함된다. 그 겹치는 부분이란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공부문의 민간위탁’, ‘사 회적 경제’, ‘청년 정책’ 및 ‘사회혁신’ 영역과 같이 정부재원 지원을 앞세운 ‘제도화’ 및 ‘정 형화’ 과정 그리고 ‘공론화위원회’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같은 사실은 대의제에서 불리한 지점을 돌파하기 위해 직접민주주의로 포장해서 설정된 ‘숙의 민주주의’나 ‘민관협치’ 이름 으로 추진되는 제도적이고 제한적인 협의틀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현재 이 과정은 한편으로는 약화된 시민사회 영역과 사회운동을 지원하는 듯해 보이지만, 의회가 배제된 상태에서 관이 관리하고 바쁘고 살기 벅찬 민이 밤새 동원되어 논의하고 아 이디어까지 다 냈는데 책임지는 이러한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 방식은 다른 한편으로 이 관리와 지원 프레임에 ‘선택된 자들’과 ‘선택되지 못한 자들’을 나누고, 사회의 다양한 발전경로들을 차단한다. 이는 결국 사회운동이 점차 정부에 포섭되면서 정부에 대한 시민사회의 의존성을 높이는 경향성을 보인다. 아마도 현 정권은 ‘촛불 시민’이 외친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가치를 그 독특한 엘리트-관료주의, 그리고 민주당이라는 여과기를 통 12) 단순히 시간적 의미만 아니라, 노동, 국경, 생산 관계, 생애주기, 가족 구성, 교육의 의미 등 수많은 변화결과가 얽혀있

는 지점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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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확장시키려 하기 때문에 이런 경향성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 여과기를 통과하지 못하는 사회운동이나 가치는 배제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반복되거나 심화될 경우, 결국 또 다른 의미에서 우파 포퓰리즘으로 변질될 가능성도 크다.

따라서 현 정권과 여당이 우파 포퓰리즘에 대항하면서 ‘촛불 시민’의 지지를 증가시키기 위 해서는 내부의 엘리트-관료주의를 제거하고, 자유와 평등, 그리고 대중주권이 이 여과기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제도화될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열어줘야 한다. 이때 정당은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정당 간의 민주적이고 경합적인 협력 또한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우파 포퓰리즘에 대항하기 위해 지금은 경향적으로 보이는 또 다른 방식의 우파적 포 퓰리즘을 불러드린다면, 그 결과는 누가 다시 집권에 성공하더라도 대중의 불안, 사회경제적 양극화, 불평등, 차별과 혐오는 줄어들기 어려울 것이다.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 세력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노동운동’ 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회운동의 의미와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만큼 이에 대한 비판과 논쟁 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사실 1987년 이후 ‘경제성장’ 담론, 그리고 신자유주의 문화가 우 리 ‘운동’ 영역에 얼마만큼 파고들어 왔는지에 대한 철저한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한다. 조직 내 규범과 조직운영 원리에 스며든 신자유주의적 경향성을 찾아내고, ‘포스트 민주주의’로부 터 벗어나 고유한 정치적 특성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질문 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1) 노동운동 그리고 ‘NGO’로 명명되면서 분류/재정의화되고 있는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스 스로 차용하고 있는 조직 발전전략은 기업의 조직화 방식과 어떻게 다른가? 2) 조직 내 권위주의나 차별 및 배제를 제거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이며 어떤 효과를 내고 있는가? 3) 자신들의 활동activity를 운동movements라고 한다면, ‘정확히’ 무엇을 위한 운동인가? 4) 외부 의존도를 낮추면서 조직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스스로 생산하고 있는 고유한 ‘자원’ 은 무엇이고, 그 자원은 조직 구성원들 사이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는가? 공동생산, 공유재, 자립 5) 스스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정치는 무엇이며 정치적 개입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6) 사회적 가치 실현, 나아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와 원리들의 급진적 제도화를 위한 연대 와 협력을 위한 조직의 전환transformation에 대해 얼마나 열려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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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의 경우,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나 우파 포퓰리즘에 포섭되지 않기 위한 내적 노력일 것이며, 4~5는 사회운동이 정치적으로 무기력해지거나 특정 정치세력에게 포섭되지 않으면 서 추가하는 가치를 민주적으로 새롭게 제도화할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한 외적 개입이라 할 수 있다.

이 질문들은 답을 찾아야할 질문들 중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질문들에 대 한 답을 찾아가면서 노동운동과 다양한 사회운동들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경험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는 우리 사회 내 우파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민주적 사회운동이것이 좌파 포퓰리즘 으로 불리든 안불리든 간에을 새롭게 전개할 수 있고,

둘째, 문재인 정권이 이러한 민주적 사회운동의 기류 위에서 보다 탈엘리트-관료주의적이며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며,

셋째, 보다 더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이렇게 열린 공간에서 공정하고 수평적으로 경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고, 넷째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급진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제 도적 경험이 많이 쌓이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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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시대의 민주주의: 정치의 실패인가, 전환인가? 발행일 2018. 11. 30 발행처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 (소장 : 장은주 교수) 담 당 김건우 간사 02-6723-5248 ips@pspd.org Copyright ⓒ참여연대, 2018 ※본 자료는 참여연대 웹사이트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정부보조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대표전화 02-723-5300 회원가입 02-723-4251 홈페이지 www.peoplepower21.org 공식SNS 트위터 페이스북 @peoplepower21 주소 03036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9길16 (통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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