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제^환불 다 막혔다$



정산금 지연 후폭풍, 소비자 피해 현실화 입점 업체 상품
티몬^위메프 사실상
티몬, 위메프 정산 지연에 따른 후
폭풍으로 소비자가 결제 취소를 하더
라도 돈을 돌려받지 못하는‘환불 불
가 사태’가 현실화했다. 신규 결제 역
시 막혔다. 티몬, 위메프가 매출을 일
으킬 수 없는 상황이라 입점업체(셀 러)에 대한 정산금 지급도 불투명하
다. 여행, 숙박 상품 판매에 강한 티몬, 위메프의 위기로 극성수기를 앞두고
휴가 대란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 인다.
사태 배경엔 모기업인 큐텐의 문어
발식 기업 확장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더구나 전자상거래의 경우 판
매 대금 정산 기간이나 관리 방법 등
을 다룬 법 규정이 아예 없다. 소비자
돈 1,000억 원을 돌려주지 못한 2021
년 머지포인트 사태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걱정에 당국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24일 티몬, 위메프에서 결제·취소 를 대행하는 주요 PG사(결제대행업
체)는 전날부터 기존 결제 취소 건에
한도를 설정하고 신규 결제는 차단했
다고 밝혔다. 티몬, 위메프와 계약한
PG사는 KCP, 토스페이먼츠, KG이니
시스 등으로 카드 결제·취소, 무통장
입금을 맡고 있다. 다른 결제 수단인
카카오페이 등 간편 결제 사업자 역
시 PG사와 같은 조치를 내렸다.
티몬, 위메프에서 소비자 구매로 발 생한 매출에 대해 PG사는 카드사로부
터 관련 금액을 받아 결제일 기준 2, 3일 안에 정산금으로 보낸다. 티몬, 위
메프는 이렇게 받은 돈을 보통 한 달
뒤 셀러에게 준다. PG사가 티몬, 위메 프에 새로 둔 취소 한도는 소비자 취
소 금액이 판매 금액을 넘어설 경우 초과분에 대해 환불을 막는 제도다.
PG사 관계자는“영세 업체들을 대
상으로 내려지는 경우는 있지만 티몬, 위메프 같은 큰 회사들이 적용을 받
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라고 전했 다. 문제는 현재 셀러, 소비자 이탈로
티몬, 위메프 매출이 급감하고 반대로
예약 취소는 몰리면서 소비자들이 결 제 금액을 돌려받기가 사실상 불가능
하다는 점이다. 티몬, 위메프 정산 지
연이 소비자에게 호텔, 여행 상품 예 약 취소로‘휴가를 망쳤다’는 불편을 넘어 금전적 손해까지 끼치고 있는 셈 이다. 한편, 대통령실 관계자는“금융당국 은 대표자와 주주 측에 자금조달 계 획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며“위메
프와 티몬이 소비자와 판매자 보호를

“수고 많았어요”
도이치모터스-산은‘수상한 거래’ 권오수 등 추가 주가조작한
주가 하락 유도 BW 등 연계 신종수법
2011~17년 12억원 투자해 110억 수익 검찰은 2010~12년 통정매매 사건만 수사 金여사 자금도 투입“최종 수익자 조사를”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 등
이 검찰이 기소한 주가조작 외에 신
주인수권부사채(BW) 등 파생상품과
연계한 신종 수법으로 60억 원 이상
의 시세차익을 얻은 것으로 파악됐
24일 한국일보가 금융전문가 A씨
의 조언을 받아 2011~2017년 도이치
모터스(도이치)의 공시 자료를 분석한
결과, 권 전 회장 일당은 도이치 신주
인수권을 낮은 가격에 주식으로 전환
하고 높은 가격에 팔아 110억 원(공
시기준 60억 원)에 달하는 차익을 거
둔 것으로 추산됐다. A씨는 2000년대
기관투자자 대상으로 BW 거래 구조
를 설계한 인물로, 도이치 주가조작의
‘주포’로 알려진 김모씨 지인이다.
A씨는“통정매매로 주가를 띄우고


정황
해 보유 주식 수를 늘리고, 이후 주가
를 다시 올리는 신종 주가조작 방식을
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
안 검찰과 재판부는 2010~2012년 통
정매매 방식으로 주가가 2,000원대에
서 8,000원대까지 오른 것만 주가조 작 사건으로 다뤘다.
신종 주가조작 방식을 이해하기 위
해선 BW 구조를 알아야 한다. BW는
회사채에 일정 기간 후‘행사가액’으 로 발행회사의 신주를 인수할 수 있 는 권리가 결합한 복합 금융상품이다.
與 신임 지도부·나경원^원희룡 등 참석 노타이 정장 차림으로 ‘러브샷’도 나눠
대통령실“당^정^대 통합, 격의 없이 소통”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24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만찬
을 가졌다. 4·10총선과 전당대회를 거
치며 갈등의 골이 깊어진 두 사람이 6
개월 만에 마주한 공식 자리다. 전날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지도부 등을 총 망라한 자리에 맞게 윤 대통령은“선 거가 끝나면 다 잊는 것”이라며 당정 의 화합을 주문했다. 한 대표 역시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치며 봉합에 나서는 모습이 었다. 하지만‘채 상병과 김건희 여사’
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윤 대통령은 모두발언을 통해 과열됐던 전당대회 분위기를 상기하며“이제 앞으로 당 정이 합심해 우리나라가 잘될 수 있게 한마음으로 잘 해나가자”고 강조했다. 한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윤석열 정 부의 성공과 정권 재창출을 위하여”라 고 외치며 화답했다. 다소 어색한 분위기도 감지됐다. 만 찬 전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던 윤 대통령은 한 대표에게 악수를 건네며 “수고 많았어요”라고 했다. 검사 시절 최측근이자 각별했던 후배에서 이제 는 공당의 대표가 된 한 대표에게 깍 듯한 예의를 보인 것이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식사 마무 리 발언을 통해“우리가 앞으로 하나












1차 세계대전은 기독교 종파들끼리 싸운 내란의 성 격이 강한 전쟁이었다. 한마디로 기독교는 비극과 수
치를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쟁을 수습하고 평화를 재건하는 일에서는 기독교는 여전히 무기력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성하는 기독교 지도 자나 교파는 어디에도 없었다. 승리주의는 그 기세가 꺾였다. 기독교 국가들이 제시한 전망은 이미 빛을 잃 어 버렸다. 불확실한 시대마다 그러했듯이 바로 이 때 에 교황청은 재빨리 보수적인 동맹자들을 찾기 시작 했다.
1922년에 아킬레라티(Achille Ratti)가 교황 피우 세 11세로 즉위하였다. 그는 선임자였던 베네딕투스 15세와는 달리 좁은 식격과 대범하지 못한 성격의 인 물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두려워하 여 소련을 카톨릭의 최고의 적으로 간주해 버렸 으며, 교회가 노동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기독교 민주주의 세력들과도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돈 스투르조(Don Sturzo)가 이끌던 “이탈리아 인민당(The Paratitio Populare)에 대한 태도도 변 화되었다(사회주의적이고 급진적인 기독교 노동가 정당). 이전의 교황과는 달리 피우스 11세는 “로 마의 문제(Roman Question)”를 해결하려는 목적 으로 그들을 버리고 무솔리니(Mussolini)를 택했 다.
1929년에 라테란조약에 서명하면서 교황 피우스 11 세는 “이탈리아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였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라테란조약이란, 이탈리아와 바티 칸사이에 맺어진 조약으로 교황청은 로마를 수도로 하는 이탈리아국가를 승인했고, 이탈리아는 바티칸 시티(Vativan City)에 대한 교황청의 주권을 인정하고 전적인 독립을 보장하다는 내용문이 담겨있다. 결국 스투르조는 추방되었고, 그의 후계자인 알시데 데 가 스페리(Alcide de Gasperi)는 수감되었으며 기독교 민 주당은 해체되었다.

▲ 피우스 11세 교황은 1929년 라테란 조약을 체결, 이탈리아 로부터 바티칸 시국의 주권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영토를 보 장받았다.
우파에 기댄 카톨릭
독일에서도 피우스는 우파보수 세력을 지원한 반 면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동 일하게 취급했다. 교황이 정치세력과 거리를 유지 하 였다면 적어도 기독교를 지지하는 세력과 파괴하는 세력을 구별해 낼 수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교황은 그 렇게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세속화를 비난하면서도
실제로는 권력과의 밀착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의 태도는 마치 기독교가
과거 로마제국과 동맹을 맺었던
때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였던
것이다. 그는 1천 5백년동안 서
방기독교를 이끌던 명제, 즉 “
교회는 세속권력자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를
충실히 따랐으며 (오늘의 개신교회도 이 노선의 줄
을 잡고 있다) 그에 대한 대가로 교회는 세속당국으
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다시말해 세속권력 아래에서 교회의 명령과 도덕 적인 교훈이 힘을 발휘했으며 (예수님에 의하면 교회 는 이와 반대노선에 있어야 함이 정상일진대) 주교와 신부들 또한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눅 4:5-8).
교회는 이처럼 세속정부의 지원을 받는데 익숙해 있었으며, 세속정부의 지원이 끊어질 것 같으면 교회 는 “위기의 시대”라며 정부를 압박하였다. 말이 압 박이지 실질적으로는 세속 국가의 지원 없이는 교회 가 존속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고 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무슨 해괴한 태도란 말인가. 신학자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Coram Deo”( 하나님 존전)에서!!
박해 중에도 투쟁을 전개한다는 기독교정신(로마 제국내에서 250년동안 해왔던 것처럼)은 사라져 버 렸다. 국가와 갈등에 빠지기보다는, 더 정확하게는(이 득이 없는 상대보다는) 비굴하더라도 동맹관계를 유 지하기를 원했던 것이다(요일 2:15-19/3:13/5:19-21).

파울하버 추기경은 1차 세계대전을 “정의로운 전 쟁의 원형”(The prototype of the just war)으로 기독 교 윤리학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의 카톨릭교회가 히틀러와 손을 잡은 것은 반 독일적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독일의 주 교들과 교황청 대사인 파첼리(Pacelli) 대주교, 그리 고 교황청은 2차 세계대전 내내 독일교회를 지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교황청이 두려워했던 것은 히틀러가 교회세력을 분열시켜 독일 카톨릭 교도들 이 교황청보다 나치에 더 충성하게 되지나 않을까하 는 문제였다. 역시 그리고 여전히 최종권위의 쟁탈전 왕국 주도권 문제였다.
바이마르 공화국(1918년 11월 혁명부터 1933년 나치정권이 수립될 때 까지의 독일공화국: 독일국 민회의가 바이마르에서 헌법을 채택했기 때문에 바이마르공화국이라 부른다)은 독일을 실질적으 로 지배했던 루터교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카톨릭교회는 이전보다 더욱 부유 해질 수 있었다. 이로인해 새로운 학교와 수도원들 이 세워졌으며, 수백종의 카톨릭신문과 잡지들이 등장하였고 수천개의 클럽들이 결성되었다.
카톨릭중앙당(Catholic Centre Party)의 역사학자인 칼바쳄(Karl Bachem)은 1931년에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늘날의 독일 카톨릭교회만큼 높은 수준의 단체 나 조직을 결성해 본 카톨릭국가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카톨릭 주교들은 나치세력을 탐탁치 않게 여 기고 있었다. 1930년에 브레스라우(Breslau)의 베트람 (Betram)추기경은 나치의 인종주의를 “중대한 오 류”로 나치의 민족주의를 “종교적인 기만”으로 파 악했다. 하지만 나치와 히틀러가 대중들 사이에 인기 가 높아지자 주교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파울하버추기경은 나치세력들을 훌륭한 기독교인 들과 사악한 기독교인들로 나누는 방식으로 자신에 게 쏟아질 비난들을 피하려 했다. 당시 대부분의 독 일 성직자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나치를 평가했다. 당 시 대부분의 독일주교들이 히틀러보다 자유주의와 민주정치를 더 증오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나치에 대한 지지도는 오히려 더 높아졌다. 심지어 히틀러를 매우 훌륭한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는 성직자들도 등 장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