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immy Chong Esqu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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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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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호 목사
필라 순복음교회
우리 조국은 역
사가들을 통해 100 번의 크고 작은 전 쟁을 치른 약소 민 족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제일 오랜 세 월, 36년 일제의 노 예 삶을 살고 난 후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으 나, 이데올로기 이념 갈등으로 남북 이 분단된 채 지금 북한은 예상보다 급변할 사태가 빨리 올 수도 있고, 혹 자는 통일을 대박이라 착각하고 있으 나, 북한은 핵무기로 서울을 잿더미 로 만들겠다고 위협하고 있으며, 고 국은 정치적 사회적 불안 속에 있지 만 그래도 고국은 경제 대국으로 도 약하고 있음을 하나님의 은혜임을 신 앙인과 불신자 간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조국은 바다를 통한 전쟁사에 서 이순신(1545-1598) 장군이 명량 해 전에서의 승리가 있지만, 6·25 전쟁 사에서 바다를 통해 풍전등화에 놓 인 조국을 이끈 주역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민 1세들이 기억하는 것은 검은 선글라스에 긴 파이프를 물고 준수 한 마스크를 쓴 채 6·25 전쟁의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영웅, 이름하여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장군이다.
미국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군인의 아들로 출생, 1903년 육군 사관학교 를 수석으로 졸업, 1930년 대장이 되 어 1936년 극동 정서에 밝아 필리핀
불가하다며 반대를 제기했다. 참모들
이 반대하는 이유는 역사상 500번의
상륙 작전에서 성공한 것이 세계 제2
차 대전 때 프랑스에서 있었던 ‘노르
망디’ 상륙 작전뿐이었기에, 참모들
이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승리할 확
률이 5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상황
이었기에 큰 모험일 수밖에 없었던 것
이다.
그러함에도 참모들의 보고를 받은
맥아더 장군은 단호히 결단을 내렸
다. 그는 말했다. “성공했던 기록만 있
으면 돼! 할 수 있다, 해 보자.” 그는 인
천 상륙 작전을 불퇴진의 용맹 속에
진두지휘하여 적을 압록강까지 몰아
내어 한국 전쟁사에 길이 기억되는 인
물이 되었다.
그는 전진을 거듭하여 중국 본토까
지 진격하려 할 때 중공군이 북한군
을 도와 인해 전술로 내려오자, 당시
트루먼(1884-1972)에게 중국 연안을
봉쇄하고 만주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것을 제의하며, 타이완에 국부군을
참전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트
루먼은 세계 3차 대전이 터질까 염려
하여 맥아더의 제의를 거절하였고,
맥아더는 1951년 사령관에서 물러났
다.
그는 전역하는 상하원 합동회의 고
별사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라는 뜻 깊은 말을
남기고 1964년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나라에서는 1956년 인천 자유공원에
동상을 건립했다. 1963년 <회상록>
을 쓰고, 이듬해 엘트리드 육군 병원
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오영 자서전 - 42 “아내의 치마폭을
필자이오영씨는ROTC출신장교,월남참전유공자가되어 전후방에서 복무를 마치고 도미, 전직 필라 한인회장을 거쳐, 전미주 한인회 총연합회 이사장 및 총회장, 필라 평통회장 및 상임위원, 대학동창회 및 필라지역 초대 재향군인 회장을 각 각 역임하고, 미국 사회 발전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에게 수여 하는‘EllisIslandMedalofHonor2009,USA’을수상한바 있다. 이 글은 필자 이오영씨가 지난 83년간의 일생을 진솔하 게 기록한 자서전이다. 필라 유일의 일간지인 한국일보에 “아 내의 치마폭을 잡고”라는 제목으로 매주 수요일자에 연재합 니다. -편집자 주-
8. 군 생활과 군이 내게준 혜택에 감 사 1). ROTC 3기, 임관후 마). 혹 한기, 동태 운반 트럭에 실려, 관대리에서 서울로---.
전방부대에서 초급 장교의 주말은 평 일보다 더 고달프다.
툭하면 비상 대기 근무가 많기 때문 이다. 미혼 시절 산과 들 위에 하늘이 전부인 전방에서 갈 때도 마땅하지 않
은데 비상 대기근무면 어떠냐고 하는
기분으로 생활하고 있었지만, 전시 상 황도 아닌데 전시상황처럼 자유활동 범위가 제한되어 있는 긴장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못된 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직 ‘국가와 국민 을 위한’ 국방의 의무를 다한다는 명분 으로 젊음의 행동 반경을 제한받고 있
는 것이다. 특히 전방에서의 소대장은 비상시를 불문하고 항상 위수지구 이 탈이 금지되어 있어 소속군단 관내에 서 행선지를 정확히 하고 움직여야 한
다. 서울에 애인이라도 있는 미혼 장교 들은 서울을 나가지 못해 안달이고, 결 혼한 선임 장교나 하사관 들은 빈번한 영내대기에 불평을 하기 마련이다. 젊 었을 때 야전에서 헌병생활은 남모르 는 고생과 어려움이 있기도 군 생활이 전부인 우리는 수십년을 거 스르는 군 경력 을 함께 공유하는 착각 에 빠지기도 한다. 언중유골이라고 어 떤 하사관은 듣고 있는 장교들에게 하 고싶은 말을
야전의 밤은 그렇게 소리없이 깊 어가기를 반복한다.
일거리를 서둘러 처리 하거 나 동료들에게 단단히 부탁해놓고 토 요일 밤 군단 부장과 중대장 이 퇴근 하 시기를 기다렸다 서울로 통하는 검문 소로 달려간다. 속초에서 서울로가는 동태트럭을 타기 위해서다. 당시 강원 도 관대리와 서울까지 교통편이 좋지 않아 토요일 밤에 서울에 갔다가 일요 일 저녁에 부대로 돌아오는 것은 그리 용이 하지 않은 때였다. 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