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훈 장편소설 타인의 계절

송성훈 장편소설

他人의 季節

- 1 -

차 례

제 1장

뮤지션 의 아픔

제 2장

그, 아름다운 결혼

제 3장

끝없는 고통

제 4장

평화통일 콘서트

- 2 -

송성훈

1965년 경북 봉화 출생 한국 문인협회 회원 한국 시인협회 회원 시집 들리지 않는 노래 , 가루눈의 시 , 촛불이 꺼지면 女子는 아름답다

- 3 -

뮤지션 의 아픔

- 4 -

1

타인의 슬픔, 타인의 눈물이 내 슬픔처럼 느껴지지 않는 음악은 똑같은 문장, 똑같은 사람 이름을 반복해서 읽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 5 -

1

작년 가을 위태 했던 나의 직장은 더 이상 수습이 불가능 할 정도로 최악의 결말을 맞았다. 나이트클럽 창립 10주년 기념행사 차원에서 소속 가수 들을 싹쓸이 물갈이를 하면서 나는 자동적으로 해고통지서를 받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한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종일 집에 누워있었고 비가 내리는 날은 새벽부터 밤중까 지 우산도 없이 비를 흠뻑 맞고 빗속을 미친 듯이 걸어 다니기도 했다. 한 낮에 길거리나 놀 이터에서 내 신세를 한탄하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강술을 마시다가 그대로 골아 떨어져 잠든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가로등 불빛이 쓸쓸한 길바닥에서 문득 눈을 뜨니 사방이 어둠속에 쌓여있었다.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선뜩하면서도 멍한 기분으로 가로등불빛 아래에 섰다. 마이클 잭슨의 ‘벤(Ben)’ 호세 펠리치아노의 명곡‘ 원스 데어 워즈 어 러브(once There was A Love)’ 그리고 ‘쓸쓸하

- 6 -

던 그 골목을 당신은 기억합니까. 지금도 난 기억 합니다’ 조덕배의 ‘나의 옛날이야기’를 부르 다가 고성방가 죄로 경찰조사를 받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 기억 때문에 나는 요즘 들 어서 바깥출입은 일체하지 않고 방에 들어박혀 노랫말 가사 쓰기에 열을 내고 있다. 연기 나는 동네 불고기 집, 사람냄새 물씬 짙은 떠들썩한 재래시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가족 간의 사랑을 그린 인형극‘애기 똥풀’ 같은 이미지가 느껴지는 가사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아름다운 유년의 추억과 어린 시절의 향수를 되새기게 하며 물질문명 속에 점차 잊혀 가는 엿 장수, 고물장수, 소독차, 서커스 등 6~70년대 잊지 못할 정겨운 추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가사 는 쉽게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방 안은 빈 술병과 함께 무절제하고 산만하게 널브러 져 있는 원고들과, 괴팍하고 탐욕스런 쓰레기 같은 언어 들, 그리고 어김없이 내 발치에 꾸깃 꾸깃 하게 구겨진 찢겨진 가요 책을 보는 내 마음은 땅거미 질 무렵 들리는 교회의 종소리처 럼 쓸쓸했다. 영롱하고 천진하게 빛나는 보석 같은 가사는 나를 외면했다. 나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다. 이 름만 되면 알만한 그런 톱클래스의 가수는 아니지만 2집 앨범까지 낸 ‘한국 가수 협회’ 에 등 록된 가수다. 첫 앨범에 수록된 8곡의 노래는 야생마처럼 와일드하고 다듬어지지 않는 곡 들이 많아서 음 악방송 PD가 ‘지금 이게 무슨 노래냐, 의미도 내용도 시사성도 전혀 없는 음악이라고’ 혹독하 게 비평했다. 나만의 고유한 특색을 살리기 위해 향토성과 서정성을 함축한 ‘시골집’ ‘징검다리’ ‘산 너머’ 등등 8곡이 수록된 첫 앨범은 세상에 빛조차 보지 못하고 폐기되다 시피 했다. 당시엔 음악 PD들이 거의 왕인데 내 음악이 수록된 레코드판을 던지면서 ‘이것도 음악이냐’ 며 내 면전에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는 투로 나를 무시할 때, 음악이고 노래고 다 때려치우고 나를 욕하고 무시하는 PD의 머리를 사정없이 깨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챈 옆에 있던 수석 PD선생이 내손을 끌고 주변의 커피숍으로 나를 데려 가 광분한 내 마음을 위로 해 주었다. 그는 우선 격분한 내 마음을 달래주기위해 음악 PD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대중성과 상업성에만 치중하다 보니 자기의 눈 밖에 벗어난 음악에 대해서는 잔인할 정도의 폭언을 서슴지 않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라며 진심으로 나를 위로해 주 었다. 그러면서도 음악 PD가 했던 말 중에서 나 만의 고유한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은 대중으로부터 멀어 질수 있다는 말은 백번 천 번 새겨들을 말이라며 조언도 아끼지 않았

- 7 -

다. 작사, 작곡 ,편곡까지 아우른 음악적 재능을 가진 그는 혹독하게 비판한 담당 PD 와는 전혀 다른 건설적이고 희망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서정성과 향토성이 짙은 8곡이 수록된 첫 앨범은 한국적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노래이며 추억과 향수가 가지런히 담겨 있는 주옥같은 노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개인적인 부분에만 치중하다보니 가장핵심이 될 수 있는 대중과의 소통이 상당히 결여된 부분과, 고지식할 정도로 서정성에 치우친 가사가 가장 큰 흠이라고 지적해주었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리듬과 대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직설적이고 화끈한 가사가 담긴 파워풀 한 댄스곡을 잘 조화만한다면 가수로서 충분히 대성 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미래를 제시해주 었다. 첫 앨범에서 뼈아픈 실패를 경험한 나는 수석PD가 조언 해 준대로 직설적이고 속 시원 한 가사가 담긴 파워풀하면서도 다이내믹한 댄스곡과 감성적인 포크송을 혼합하여 6곡이 수록 된 미니앨범을 내놓았다. 감성적인 리듬과 빠른 템포의 음악이 믹스된 2집 앨범은 처음부터 반응이 좋았다. 봄바람처 럼 경쾌한 마치 한편의 고전발레‘돈키호테’를 떠올리게 하는 2집 앨범은 가수로서의 내 위치 를 확고히 굳혀주는 듯했다. 지상파 방송에서도 출연섭외가 들어오고 전 국민이 즐겨보는 ‘전 국노래자랑’이라는 국민예능프로에 초청가수로 섭외되는 영광도 가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된 공공장소에 나가면 한 두 명 정도는 나를 알아보고 ‘아 거 이무개 노 래를 부른 가수지요.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하며 정중히 사인을 부탁하는 펜들까지 생겨났다. 그때 그 기분은 마치 하늘을 날아

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 이 기분에 중독된

가수들이 인기가 시들해지면 우울증에 걸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를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매력적인 저음과 감성적인 목소리로 ‘옐로보이스’ ‘음유시인’ 으로 펜들에게 열광적인 사랑을 받으며 가요계의 떠오르는 별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나와 매니저 사이에 불협화 음이 일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대중을 의식하고, 대중감각에 나의 음악세계를 맞추려 했고 아 무리 대중의인기로 먹고사는 직업 이라고 해도 내가 추구하고 싶은 방식으로 음악을 하고 싶 었던 나와의 마찰은 불 보듯 뻔했다. 너무 지나치게 대중을 의식하다 보면 품격 있는 음악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물질과 명예라는 타성에 젖어 끝내 내가 추구하고 자 했던 음악세계를 이 룰 수 없다는 의견과, 펜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대중가수가 대중을 너무 방치하거나 소홀히 한다면 끝내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마

- 8 -

침내는 꽃 한번 피워보지도 못하고 가수 생명이 끝 날수 도 있으니 가수로서 확고한 기반이 구축될 때 까지만 철저히 대중화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선명하게 엇갈렸다. 결국 나와 매니 저는 합일점을 찿 지 못하고 ‘계약파기’ 라는 마지막 단계까지 가고야 말았다. 뭔가 착잡한 그 런 느낌도 있었지만 내가 음악을 만드는 행위에 왜 굳이 대중이 연결돼야만 했던 해묵은 숙제 가 한꺼번에 풀리는 것 같아 그렇게 마음이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매니저와의 결별이 내 가수 생명을 단축시키는데 치명적인 결과였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매니저 없이 오직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만 대 중 속으로 다가가려했던 나는‘울산배꽃축제’에서 가수로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다. 기라성같이 쟁쟁한 가수들의 순서가 끝 이 나고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리던 내 순서가 되었다. 목표는 대중이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가수 김 향기를 통해 음악이라는 가치를 느끼게 해야 한다. 그런 확실한 인식을 가지고 무대에 섰다. 연출자 감독의 ‘큐’ 사인 과함께 나는 마침내 마이크 앞에 섰다. 비틀즈의 음악인 ‘이 매진 (Imagine)’을 선곡으로 불렀다 차별 없는 평등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염원하는 감성적인 비틀 즈의 노래에 구름같이 운집한 관중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음악적인 에너지 나 , 음악적인 욕구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막연히 20세기 최고의 록 그룹으로 추앙받는 비틀즈 의 음악이니까 남들이 좋아하니까, 의미도 모르면서 나도 좋아해야한다, 그래야만 음악에 대 한 무식함이 탄로 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비생산적인 생각을 가진 관객들로 밖에는 보이 지 않았다. 내가 이 무대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2집 미니앨범에 수록 된 ‘그런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나의 노래였다. 내가 지금껏 추구해왔던 내 음악세계와는 가장거리가 먼 노래였다. 교훈적인 의미도, 음악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음악적 특색도 하다못해 노래방에서 각 잡고 열창하고 싶어 하는 음악적 성향도 없는 그저 저속적인 노래에 지나지 않았다. 노랫말 가사도 유치하다 못해 주부들이 좋 아하는 삼류드라마의 특징을 그대로 빼다 닮았다. 낮에도 같이 영화보고 분위기 좋은 다방에서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뜨거운 밤을 얘기하는 그런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 9 -

여자의 부드러움과 섬세함 그리고 엄마 같은 포근한 그런 여자가 아니더라도 냉장고에서 음료수 꺼내주고 뒤돌아서서 가는 뒷모습 에서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없이 올라간 동꼬치마에 배꼽티를 입고 바다가 보이는 횟집에 앉아 망둥이에 초고추장을 찍어 먹으며 한손으로 내 몸을 뜨겁게 더듬는 그런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를 혼자 보지 왜 같이 보냐. 여자하고 마신다고 커피가 맛이 있느냐, 그리고 여자는 밤에만 필요하지 낮에도 필요 하느냐, 등등.......여성비하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놓아도,

- 10 -

추운 날 외등이 졸고 있는 후미진 골목의 포장마차에서 대합 탕에 소주 한잔 사 달라고 웃으며 말하는 그런 애인이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확 불 질러 버리고 싶은 이 저속한 노래에 열광하는 관객의 비유에 맞 추기 위해 노래아닌 노래를 부르며 웃고 울어야하는 나 자신이 갑자기 피에로가 된 기분이었다. 음악을 하는 가수가 대중들에게 휩쓸려 피에로로 전략한 그 기분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확 저질러버리고 싶은 욕망과 미쳐버리고 싶은 생각과. 음악을 조롱하는 세상과 대중에게 인 분을 끼얹어 버리고 싶은 욕망이 활화산처럼 치솟아 올랐다. 음악에 대한 대중들의 저속한 인식과, 저속한 가치를 이 기회에 확 바꾸어 버리고 싶었다. 내가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결과물을 냉정히 평가할 때 대중들의 외면을 받은 첫 앨범 때 만들어진 노래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어야할 노래였다. ‘산 너머’ ‘ 징검다리’ 두 곡은 통기 타를 치며 목청을 돋울 때면 내 머리위로 아드레날린이 밤하늘의 별빛처럼 강렬히 쏟아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연출자 감독과 음악감독의 각본에도 없는 ‘산 너머’를 반주도 없이 통 기타 를 치며 불렀다. 입 바로 앞에 마이크를 갖다 대놓고 노래를 부르라고 ‘큐’ 사인을 보내던 연출자 감독의 얼 굴빛이 순간 창백하게 변했다. 음악감독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마냥 멍한 눈으로 연출자 감독 의 얼굴빛만 살폈다. 문제는 구름처럼 몰려든 관객들이였다. 선곡을 불렸던 비틀즈의 ‘ 이매 진’ 에 대해서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내던 관중들의 기대심리가 극명하게 갈라지는 순간이었 다. 요즘 한참 지상파 방송을 뜨겁게 달구는 ‘그런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타이틀곡이 당연 히 나올 줄 알고 기대했던 관객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듯했다. 듣도 보도 못한 지루한 노래 에 여기저기에서 비난의 말들이 쏟아졌다 ‘지금 이게 무슨 노래냐 저 사람도 가수냐’ 노골적 으로 나를 비난하는 거침없는 말들이 쏟아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없이 커져갔다. 관객들의 불평과 원성이 워낙 컸던 탓에 한국 가요 사에 한 번도 없었던 가수의 노래도중 노 래를 중단 시키는 회계 망측한 불상사 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나 하나의 고지식한 행동으로 축제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회를 맡은 배우 겸 탤런트 출신의 미녀 MC는 일만 파장으로 커져가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1985년 ‘강변가요제’에 입상하며 데뷔 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김 미경을 깜짝 출연시키는 특단의 조치로 사태를 갈무리했다.

- 11 -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직설적이고 속 시원한 가사가 담긴 다이내믹한 댄스곡으로 한참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히트곡인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을 열창하여 눈송이처럼 커져가는 관객들의 소요사태를 진화시켰다. 그 다음날 조간신문과 연예신문, 지상파 방송에서는 머리기사로 ‘관객과 방송을 우롱한 정체 성 잃은 음악인’ 이라는 타이틀로 살벌하게 나를 비판했다. 관객과 방송진행자는 안중에도 없 고 각본에도 없는 독단적인 행동으로 음악인의 소양마저 져 버리고 한 광역단체의 유서 깊은 축제마저 망친 그는 이제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를 자격도 잃었거니와, 그런 기회를 주어서도 안 되며 가요계에서 두 번 다시 발을 딛지 못하도록 영구 제명시켜야 한다며 기사를 끝맺었 다. 그 일로 나의 짧을 가수 생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스스로를 뮤지션이라 여기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출발했던 가수의 길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나자 한동안 그 충격에서 벗어나 지 못했다. 가요계에 더 이상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언론과 방송매체가 결탁하고 나를 매장 한 진의를 알 수 없었지만 스스로 무 너 진건 내가아니라 물질의 노예가 된 가요계였다. 승부 조작설에 휩싸여 스포츠맨십이 땅에 떨어진 K리그의 방만한 운영처럼 어쩌면 가요계도 그 수 습을 답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돈과 직결만 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한 이 세상을 향해 나는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었다. 문득 지조 있는 한 뮤지션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 가수가 방송인터뷰에서 한말인데 두고두고 가슴에 와 닿아 힘이 들 때 마다 꼭꼭 되씹어 보는 말이다 사막에 지

몰라

갔는데

사막에서는

앞서가는

누나한테

길이

따로

‘누나

없었다.

어디로

그래서

그

가야돼?’하니까

가수가 누나가

어디로 하는

가야할

말이

‘너

가 가는 게 곧 길이야’그때부터 그 가수는 ‘ 아 그래 내가 가는 게 곧 길이구나.’ 의미심장한 말을 한 우리 시대에 몇 아니 되는 뮤지 선 이다‘ 더욱이 기자가 ’대중은 자신에 게 뭘 기대하면 좋겠느냐‘ 늘 물음에 그 가수의 답변역시 명품 이였다 ’ ‘나름대로 잘 살고 있 는 것 같으니까 잘 죽고 싶다는 말과 그리고 칠십 다섯 살 까지 살고 음악은 50살 까지 하고 한 10년은 사람들과 얘기하고 그러면서

지내고 싶다고 그러다 한가한 오후에 정원이 있는

집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독서를 즐기며 노후를 보내고 싶다’ 는 그 가수의 소박한 꿈이 그렇게 위대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자존심만은 꼿꼿한 가수였다. 그 가수를 나의 롤 모델로 삼고 싶었다. 일단 그렇게 마음을 정하니 의외로 홀가분해졌다 그래서 절망은 일종의 탐닉의 대상이었다. 자책할 생각도, 부정

- 12 -

할 생각도 없었다. 노래가 부르고 싶어지면 경기도 금촌 의작은 라이브카페를 찾았다. 가요계에서 검증된 가수라 업소주인은 대 환영 이였다 손님들은 많지 않았지만 음악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손님들도 종종 있었다. 나의 인기는 대단했다. 내 노래에 반한 손님들은 음악을 전염시키는 사람이라고 나를 과대평 가했다. 음악을 통해 모든 사람의 감정을 조절하는 경지에 까지 이른 가수라며 모든 수식어를 다 동원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라이브카페는 늘 손님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나 에 대한 입소문이 서울까지 퍼져 주말이면 내 노래를 듣고 싶어 서울서 원정 오는 팬들도 생겨났다, 주말이면 라이브카페는 작 은 공연장과도 같았다. 키가 큰 남자 , 다리가 예쁜 여자, 두상이 큰 남자,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 머리가 긴 여자, 배꼽티만 매일 입고 오는 여자 등등별의 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의 음악적 취향도 다양해 내 음악적 지식이 바닥이 날 정도였다, 엘비스 프레슬리, 스트 리밍 제이 호크스, 버디홀리 의 명곡들로부터 이글스의 ‘위치우먼’ ‘테이크 잇 투티 리미트’ 등 70년대 컨트리 록들을 부를 때 중년의 관객들은 추억과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 스스 로의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어색한 동작으로 발을 구르고 손을 흔들며 내 이름은 연호했다. 이글스의 대표곡 ‘호텔 캘리포니아’를 부를 땐 박수와 환호성이 터질듯했다. 타고난 옐로 보이스로 사랑을 노래하던 음유시인 조덕배의

‘꿈에’ 추가열의 ‘나 같은 건 없

는 건가요. 방미의 ‘ 올가을에 사랑할거야’ 정 태춘의 ‘서해에서’ 솔개트리오의 ‘여인’ ‘ 이동 원의 이별노래’ 그런 잔잔한 멜로디와 서정성이 깃든 노래까지 부르고나면 내 몸은 녹초가 되 기 일보직전이었다. 끝은 언제나 나 혼자만 남았다. 공연이 끝나면 인근포장마차 들려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고 주망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이어져 오던 생활도 3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서울 청담동에서 ‘황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던 강 사장이 내 소문을 듣고 금촌 라이브카페에 찿 아 왔다 장르를 초 월한 다이내믹한 나의 음악세계에 반한 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로 전속가수로 계약을 맺었다. 1급 가수에 준하는 천문학적인 몸 값 이었다. 단조로운 음악에 식상해 있던 손님들은 나의 등장으로 황제나이트클럽은 때 아닌 전성기를 맞았다. 음악이란 무기로만 승부하는 진정한 음악인으로 오래 기억될 수 있게 하기위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생소한 명곡 들 만을 선별하여 노래를 부른 덕에 나의존재는 손님들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인식이 되었다. 세계적인 음악가 알도 체카토의 지휘아래 베로나 필하모니의 환상적

- 13 -

인 연주를 듣는 듯한 감격을 맛보았다며 나의 음악세계를 높이 샀다. 허스키 하면서도 푹팔적인

가창력과 감성적인 목소리를 가진 내 노래에 반한 팬들은 50.7도

의 알코올 도수에도 불구하고 고소한 헤이즐넛과 달콤한 오렌지향이 조화롭게 입 안 가득 퍼 지는 맛과 거기에 생크림처럼 나긋나긋한 질감까지 더해진 ‘싱글몰드위스키’ ‘더 글렌리벳’ 에 곧잘 비유하기도 했다.

6~70년대 번안곡 들에 중년의 손님들이 열광했고, 미국 언더그라운드‘ 래퍼 덤피 운디드’ 의 곡에 젊은 충들이 열광했다. 하지만 가수 데뷔 초부터 세상과 많은 불협화음을 일으킨 좋지 않는 평판에 대해서 한 결 같이 전속가수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말 들이 많았고, 나 역시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언제 해고당할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업소사장과 총지배인은 내 음악세계와 뛰어난 노래실력에 열렬한 팬이 되었고 여론의 동향이 아닌 순수한 음악을 지향하는 내 입장을 우선 시하는 세심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전속가수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졌을 때 내 구명운동을 위해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섰다. 가요계, 언론계, 방송계를 찾아다니며 스티비원더나 레이 찰 스에 버금가는 재능 있는 가수의 매장은 가요계의 큰 손실뿐 만아니라 우리나라 음악계에서도 상당히 큰 손실이라 며 꺼져버린 가수생명을 살리려고 발이 쥐가 날 정도로 고군분투하였다. 마침내 꺼져버린 불씨가 살아날 조짐을 보였다. 나의 음악적 재능을 아까워하는 수많은 팬들 의 댓글이 하루에도 수만 건이 올라 검색차트 5위권 안에 진입할 정도로 나에 대한 동정여론 이 급물살을 타고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었다. 방송가요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연출자 감독과 음악감독은 나로 인하여 그 권위가 땅 밑 까지 추락한 아픈 과거의 기억이 너무나 큰 상처를 남아 심술궂을 정도에 나에 대해 배타적 이였다. 제멋대로고 응석받이고, 영악한 데다 PD나 연출자 감독 매니저 들이 제일 싫어하는 짓만을 골라 절묘한 시간에 맞추어 터뜨리는 그 현란한 눈속임은 마치 흡혈귀와 같았다며, 그런 기본 도 안 된 사람을 가요계에 복귀시킨다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후 폭풍이 몰아닥칠 거라며 나의 복귀를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싹수가 노란 나무는 미련두지 말고 과감하게 잘라 대재앙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며 검색차 트마저 차단해버렸다. 타오르던 불씨마저 꺼버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딱히 화를 내고 분노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달라질 것은 없지만 솔직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일말의 기적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 14 -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십만이 검색하는 ‘뮤직 카페’라는 인터넷에 팬들을 생각하 는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는 무정한 음악인이 한 광역시의 유서 깊은 축제행사에 음악감독, 연 출자 감독과 사전에 논의도 되지 않는 노래를 불러 축제분위기를 엉망으로 망쳤고, 무명가수 에서 유명가수로 키워준 매니저의 은공도 모르고 자신의 마음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무 토막 자르듯이 잘라버리는 은혜도 감사도 모르는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음악인은 가요계에서 영구 제명해야한다. 이런 글을 올려 인터넷 주소창이 폭주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일어났다. 감 독연출자의 댓글만을 믿고 ‘향사모 (향기를 사랑하는 회원들의 모임) 회원들은 하루아침에 나 에게 등을 돌렸다. 안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보면 안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어들이는 게 아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도 모르느냐. 이런 댓글이 하루에 도 수천 건 내 인터넷 게시판을 가득 메웠다. 화가 눅으러 들었다 가도 인터넷게시판에 올라 온 댓글을 보면 분노와 흥분이 파도가 밀려오듯 하루에도 수십 차례 내 마음을 할퀴고 지나갔 다. 나와 둘도 없이 절친했던 향사모 회장마저 ‘열길 물 길속을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르겠 다며’ 역정부터 내었다. 무명 가수에서 유명가수로 키워준 하늘같은 매니저를 일말의 망설임 도 없이 해고를 한 행위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비도덕적인 처사이며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 라고 분개하며 이시간이 이후로 향사모는 더 이상 존립할 이유가 없다며 향사모 해체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돌아갔다. 힘들 때나 괴로울 때나 언제나 내 곁에서 든든히 나를 지켜주고 후원해주었고, 내 음악세계 를 이 세상에 당당하게 펼칠 수 있게 구심점 역할을 해주었던 향사모

마저 나를 외면했다. ‘

아, 내가 잘못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인기와 부에 영합하지 않고 순수한 음악, 음악 적인 음악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그렇게 큰 죄란 말인가’ 피울음이 터져 나왔다 맨 정신으 로는 이 불합리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단골포장마차에 들려 술이 떡이 되도록 퍼 마셨 다. 소주잔을 들다 문득 깨달았다. 이렇게 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내 스스로 만든 자업자득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살다보면 사면초가에 놓일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는 의기소침해져 ‘하늘이 원망스럽고

세

상이 원망스럽구나’한탄하며 내실수를 세상과 운명 탓으로 돌렸다. 딱히 내실수와 실패를 제3 자의 탓으로 돌려 나의 실패를 실패가 아닌 그저 운이 없었다는 식으로 실패를 포장하고 합리 화 한다고 해서 실패가 아닌 것임을 나 역시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이

- 15 -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다가 나는 포장마차 앞에서 쓸쓸하게 빛나고 있는 가로등 불빛을 쳐다보 면서 슬쩍 울고 싶어졌다. 내가 죽지 않은 다음에야 음악은 얼마든지 대시할 수 있다 문제는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나 애대한 비난이 언제까지 이어질지가 관건이다. 그때까지 만이라도 있는 듯 없는 듯 죽어지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나는 도인처럼 집 에 묻혀 조용히 살았다. 그로부터 반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평소에 나의 타고난 음악적 재 능이 섞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한 강 사장이 나에 대한 비난여론이 잠잠해질 무렵 본격적으로 나의 구명운동을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방송, 언론 , 심지어는 정 관계 인사까지 찾아가 나 의 구명운동을 위해 발 벗고 나섰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역 공격을 당했다 전속 가수 직에서 해고시키지 않는다면 물리적 방법을 행사하겠다는 힘이 있는 자의 협박에 강 사장은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나를 해고시킬 명분을 만들 기위해 나이트클럽 창립 10주년 기념행사 차원에서 소속 가수들 을 대폭적으로 물갈이하는 특단의 대책을 내놓은 것이었다. 모든 일이 잘 풀려 다시 가수로서 활동을 재개하고 빠른 시일 내에 3집 앨범도 내고 그 앨범이 팬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 팬들의 사랑받는 가수가 되고 있었던 꿈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물심양면으로 나의 구 명을 위해 발바닥이 쥐가 날 정도로 뛰어다닌 강 사장은 재능 있는 아까운 인재를 버려야한다 는 죄책감에 내 어깨를 부여잡고 피 울음을 삼켰다. 창문으로 바다가 보이는 인천 월미도의 한 민박집에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퍼 마셨다. 낮에는 햇살에 금모래가 반짝이고 낮은 담장 너머에는 파도가 넘실거리고, 밤에는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이 점점이 빛나는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는 더 이상 추락하려야 추락할 곳 없는

막 다른 지점까지 와 있는 사람이니까 넓고 넓은 바다를 보며 내일의 희망을

설계하는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이 민박집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다면 바다의 풍경과, 짭조름한 소금 냄새도 나와함께 미쳐갈 것 같았다. 그런데 강 사장은 전혀 그렇지가 않는 듯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고 우울해진 분위기를 밝게 하기위하여 삶을 찬양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방을 작은 음악당처럼 꾸며놓고는 절망에 빠 진 나를 위로했다. 성공이든 실패든 모든 것은 한순간이기 때문에 이 고비만 잘 넘긴다면 현재의 이 고통이 전 화위복이 되어 성공에 이르는 가장 큰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나를 위로하였다. 음악을 포함 한 모든 예술창조는 농부가 되는 것과 같다. 농부의 일은 밭에 나가 씨를 뿌리고 때가되면 곡 식을 추수하는 일뿐 , 가뭄 , 흉년, 홍수, 천재지변 같은 날씨는 운명에 맡겨야한다. 할 수 있

- 16 -

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를 통해서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날씨 때문에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든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낙심할 것도 없다. 구구절절 가슴 에 와 닿는 말이 나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나와 강 사장은 나란히 해변을 걸었다. 바닷바람을 쐬며 걸 으니 거짓말처럼 용기와 희망이 생겼다. 가요계에서 영원히 퇴출 된 나를 포기할 만도 한데 강 사장은 프린스나 스터비원더 처럼 자기가 만든 곡의 모든 악기를 완벽하게 연주하고 라운지 사이키 델릿, 디스코 , 프리재 즈, 그리고 전자음악, 프리스타일 , 요즘에 랩까지 각 장르의 음악을 능숙하게 소화해내는 탁 월한 음악적 감각을 신이 준 능력 이라고 믿고 나의 음악적 재능을 신격화 할 정도로 그 믿음 이 대단했다. 모든 악기를 완벽하게 연주하지 못해도 기타라인을 만들 기위해 키보드를 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매료시킨다고 믿었다. 강 사장은 모든 장르의 음악을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생경한 이국의 리듬악기들이 울리면 두꺼운 손으로 철썩철썩 박수치며 추임새를 넣는 치코만(chico mann)의 음악을 특히 좋아했 다. 60년대 원시적인 아프로 비트에 , 아프로 쿠반 , 거기에 프린스타일 까지 흥겨운 건 다모 였으니 어떻게 흔들 어도 잘 어울리는 신명난 음악에 열광했다. 팝송이나 샹송처럼 노래 말을 이해하기 위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신명난 음악에 편히 몸을 맡길 수 있는 음악이야 말로 솔 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음악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상상 속에서 자신의 명의로 된 나이트클럽은 무한한 음악의 세계였으며 홀의 한 모퉁이도 음악의 편린이었다. 음악에 대한 강 사장의 애정은 특별했다. 70년대 흑인 음악 잡지인 ‘ 왁스 포에 덕스’ 와 산 하의 왁스 포에덕스 레코드에서 발매된 LP판을 1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구입했고 , 모든 분야의 음악을 두루 전렵하여 지식도 풍부했다.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없다면 그렇 게 다양한 음악을 좋아하기도 어렵다. 나는 강 사장 덕분에 치코만이란 가수를 알았다. ‘ 뱀파 이어 위크엔드’ ‘ 엘 구인초 ’를 비롯해 아프로비트가 섞인 인디팝록 음악이 그로인해 한때 유 행된 것도 알았다. 밴드음악의 느낌이 강했던 데뷔작 ‘ Manifest~겉으로 나타나다 ’ 와 ‘ 아 날로그 디드퍼트(Analog Drift)’ 두 곡을 듣고 제 정신이 아니었다. 특히 스페인어와 영어를 섞어서 노래한 ‘아날로그 디드퍼트’는 마치 순간순간 모습이 변하는 눈부신 저녁하늘처럼 더 없이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노래 중간 중간에 튀어나오는 스페인어는 모래, 바람 , 파도 소리 가 뒤섞여나는 합성어처럼 들려 그렇게 매력적일수가 없었다. 한번들 은 ‘아날로그 디드퍼드’를 1주일 만에 그대로 재현해내는 나를 보고 치코만이 내 앞에 있는 것 같다며 감격해하며 나를 뜨겁게 포옹했다. 치코만의 사건을 계기로 강 사장은 나의 탁월한

- 17 -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았고, 자신이 못다 이룬 가수의 꿈을 나로 인하여 이루어 보고 싶은 대 리기대감은 실로 대단했다. ‘호형호제’하며 친 동생보다 더 가깝게 대했던 나를 , 물론 외부의 압력의 의해서 라지만은 그래도 자신의 손으로 제명을 해야 한다는 서글픈 현실 앞에 나를 부여잡고 목 놓아 울었다. 마지막날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나와 강 사장은 꼼짝도 하지 않고 민박집에 틀어박혀 있었 다. 바닷가 마을에 내리는 비에서 짭조름한 미역냄새와 소금냄새가 났다. 강 사장과 나는 밤 의 빗소리를 들으며 울적한 마음을 노래로 달래고 있었다. 배호의 ‘울고 싶어’ ‘ 안녕’을 허스 키한 저음목소리로 구성지게 부른 강 사장은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보며 울었다. 배호의 ‘당신’ 까지 부르고나서 소주만 마셨다. 그리고 술에 취해 흐느끼는 모습에 나는 참았 던 울음을 터뜨렸었다 3년 전의 일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기도하는 자세로 경건하게 앉아 비를 맞으며 인천 월미도 바닷가를 배회하던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눈을 감았다. 어둠속 에서 그때처럼 빗소리는 후드득 후드득 계속 들렸고 , 나의 마음은 공허한 현실을 떠나 과거 의 기억 속으로 희미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삶을 찬양하는 음악 ,시 한편을 감상하는 듯한 서 정적인 가사가 귀에 와 닿는 음악 , 세대를 뛰어넘고 , 세월을 뛰어넘는 무한한 생명력으로 빛나는 음악이 붓으로 힘차게 써 내려간 행서체처럼 내 앞에 꿈틀대고 있었다. 나는 멜로디와 가사를 받아 적으려고 펜을 집어 들었다. 그때 물을 마시려고 거실로 나온 동 생 혜란 이가 놀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이제 그만 할 때도 안됐어? 노래도 좋고 음악도 좋지만 몸 생각 좀 해야 지. 그리고 엄마와 나도 좀 생각하고.” “혜란 아 이 못난 오빠 때문에 많이 속상했지” “오빠, 는

그걸

말이라고

유명가수보다도

더

해.

나는

뛰어난

오빠가

가수야

유명가수가

TV에

자주

안되어도

나온다고

좋아,

해서

,

아니

오빠

앨범이

수백

만장 팔린다. 고해서 뛰어난 가수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럼 혜란 이가 생각하는 훌륭한 가수의 기준이 뭔데?” “오빠, 나는 캐나다 출신의 톱 컨트리 가수 ‘샤니아 트웨인’이야말로 정말 훌륭한 가수라고 생각해 태어날 때부터 노래에 대한 소질이 남달랐던 그녀는 세 살 때부터 노래를 불러 주 위를 놀라게 했고, 8세의 어린나이에 관객 앞에 서서 노래를 불러 주위를 놀라게 했고, 8 살에 어린 나이에 관객 앞에 서서 노래를 불러서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3년 후

- 18 -

11살의 어린 나이에 정식 가수로 데뷔했지.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어. 끼니 도 때우기 어려운 가정형편에 의붓아버지의 폭력과 학대 속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 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와 계부가 모두 세상을 뜨면서 성인도 되기 전에 이복형제 셋을 부 양할 책임을 맡았어.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하는 탓에 투어는 엄두도 못 내고 고향 ‘온타 리온’ 주변에서만 노래를 불렀어. 이런 어려운 역경을 딛고 ‘샤니아 트웨인’ 은 컴온오버 (come on over)와 ‘유어 스틸 더 원(You’ re still The one’)을 세계적으로 히트시켜 여 성 컨트리 스타로서 정상에 우뚝 섰지. 오빠 정말 대단한 가수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가수야,

노래도

뛰어날

뿐

아니라

사생활역시

모범적

인 가수지, 노래는 뛰어난데 사생활이 문란한 우리나라 여가수 들이 얼마나 많아 나는 그런 여가수들이 예능 프로나 ‘나는 가수다’ 음악 오디오 프로에 나와 노래 부르는 것을 보면 정나미가 뚝 떨어져 아예 TV를 꺼버리지.” “그것은

오빠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열등감

같은데,

이를테면

자기보다

잘나가

가수를 보니까 배가 아픈 거지.” 혜란 이는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그건 네 마음대로 생각하셔.” 나는 던지듯 한마디하고 베란다 쪽으로 걸어갔다. 손바닥을 가슴 앞에 얌전히 모으고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면 몸매가 모델 뺨치는 30대 초반의 여자였다. 찰랑거리는 머릿결, 보드랍고 말랑거리는 피부, 가슴과 신체부위가 그림으로 그린 듯 섬세하며 어깨를 살짝 드러낸 블랙티셔츠에 진한 팬츠 블랙 부츠를 코디해 섹시한 매력을 뽐내었다. 그러나 어둠속에서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여인은 술에 취한 듯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보고 있는 내가 아슬아슬한 정도이다 . 가로등 불빛이 빛나고 있 는 슈퍼 앞에 멈추어선 그녀는 혼자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로등도 졸고 있는 비오는 골목길에 두 손을 마주잡고 헤어지기가 아쉬워. “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가사부분은 생각이 안 나는지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도무지 가사가 생 각나지 않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나의시선은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가 그녀에가 꽂히고 있었 다. 지금 까지 있었던 일, 음악에 대한 열정과 번민으로 고뇌하고 방황했던 지난날의 내모 습 을 보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입가에 탄식이 새어나왔다.

- 19 -

“오빠 ,지금 저 가로등 불빛아래 서있는 여자를 보니까 한심한 생각이 들지?” “한심하다기보다

그녀가

부르다만

노래를

끝까지

다

부를

수

있을까

이

생각을

하고 있었지?” “지금

내 눈에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있는 여자보다도

오빠가 더

측은하게 보

인단 말이야, 벌써 3년이야 3년 , 한두 살 먹은 아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촌 기 접어둔

청소년도 아닌데

이제 그만

음악이라는 그 지긋지긋한

악 몽에서

벗

어 날 때도 안 되나? 오빠가 언제 맨 정신으로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어? 지금 저 서는 가수의

빗속의

여자처럼

그냥

곱게

노래가

고…….오빠의

몸도

잠이라도

어떻고 그런

가눌 자면은

,노래

넋두리를

치게 했다고 주먹으로 가슴

수

말은

같지 들을

없을

안하지,

않는 때마다

정도로

노래에 엄마는

술에

취해

집으로

한국가요계가 열광하는

그놈의

한심한

음악이

들어와

어떻고,

어떤

대중은

어떻

우리

아들을

미

을 치며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동생은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미안하다.” 나는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때 혜란 은 평소와는 다르게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때 혜란 은 평소와는 다르게 기가 꺾인 내 모습을 보고 는 더욱 살기등등했다. “이 한 했어

얘기만은

하지

상황에 장남된 ,그런데

않으려고

했는데

도리로 아버지

오빠는

광주

꼭

곁을

‘비엔나

해야겠어,

아버지가

지키라고 엄마가

축제’

에

초대가수로

오늘내일하는

얼마나 간절하게 섭외가

되었기

위급 부탁을 때문에

하늘이 두 조각이 나더라도 참석해야 한다며 결국 아버지의 마지 막가는 임종 까 지 지 켜 보지 못했잖아 오빠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아버지보다 음악이 더 좋았던 거야, 안 그래? 그런 불효막심한 자식을 아버지는 마지막가시는 순간까지 오빠 걱정만 했어 손주 녀석을 꼭 보고 싶었는데……. 이 말을 하시며 운명하셨어. 엄마는 이 말을 오빠에게 하지 말라 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난 해야겠어. 오빠는 사람도아니 야 오빠 마음속에는 가족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음악밖에 없는 거야. 내말이 틀렸 다면 틀렸다고 말을 해봐” 숨도 쉬지 않고 그 많은 말을 한꺼번에 다 쏟아 붓고 는 베란다 문을 열어놓은 채 혜란 이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한참이나 거실바닥에 앉아 동생의 말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 카펫

- 20 -

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첫 앨범을 내고 내가 가수로 데뷔하던 날 어머니가 아버지의 축 하선물 이라며 비틀즈와 버금가는 ‘롤링 스톤즈’ 음반을 주었을 때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에 눈물이 핑 돌았다. 들을수록 감미롭고 독특한 떨림이 있는 롤링스톤즈의 매혹적 인 음색에 나 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던 지난날의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롤링스톤즈의 ‘ 기포러브’를 들으며 아버지 생각에 하염없이 울었다

엄마와 나 누나

셋이서 평생처음 해외여행을 떠났다. 여동생 혜란 이는 교생실습을 나가 함

께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아쉬워하면서도 3년간의 방황을 끝내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나를 대견해하며 찬조금까지 두둑하게 주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로 3시간을 날아가 중국 최 남단에 열대 휴양지 하이난 섬(海南島)에 도착했다. 그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날이 맑아 에메랄 드 빛 바다와 파란하늘은 마치 금방 그리다 만 화폭의 그림처럼 푸른색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 그리고 예술 같은 주변의 경관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연중 따뜻한 날씨 때문에 섬 곳곳이 야자수 천국이었다. 지구상 에 있는 야자나무를 이곳에 죄다 옮겨 심은 것처럼 수도 샐 수 없을 만큼 빽빽이 우거한 야자수에 엄마와 누나는 넋을 잃 었다. 그리고 이곳이 중국이 아닌 남태평양에 있는 섬처럼 이국적인 경치가 물씬 풍겨났다 중 국을 몇 번 여행하여 중국에 대한 식견이 남다른 누나는 끝없이 펼쳐진 야자수와 이국적인 풍 광 때문에 하이난 섬을 ‘동양의 하와이’ 라고 불리며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2위의 청정도시 라고 설명을 했다. 누나의 설명을 듣고 보니 왜 누나가 이곳을 여행지로 선택한 것이 이제야 확실히 이해가 되었다. 바로 우리 앞에는 일본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두 젊은 남녀가 팔짱을 다정하게 낀 채 귓속말로 얘기를 주고받으며 비췻빛 파도가 하얀 물결을 일으키는 바다 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두 청춘 남여의 다정스런 모습을 본 엄마는 무척속이 상했던지 , 아니면 사십을 앞두고 있는 나 이에 여태 애인도 하나 없는 내가 걱정스러워 보였던지 불쑥한 마디 내뱉었다. “향기야, 지금 교제하고 있는 아가씨는 있니?”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이번엔 누나가 나서서 한마디 거들었다. “엄마

향기가

지금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지만

- 21 -

한때

잘

나갔던

가수라고요,

내가

커피숍을

운영하면서

나와 노래를 는 말을

믿지

우리 향기

부를 때마다

않더라고요

덕을

얼마나

손님들에게 저

그래서

믿으며

모두

하나같이

부러워하던지.

그때

제

향기와

같이

이구동성으로

기분은

왕비가

된

많이 봤는지

가수가 내 친 찍은

아세요?

동생이라 고하자

가족사진을

훌륭한

동생을

기분이었지요.

동생이

보여주자 두었다고

그런

TV에 처음에

그제야 저를

향기가

제

얼마나

사귀는

여

자 친구 없겠어요? 너무 많다보니 감당이 안 되는 거겠지요” “누나, 너무 오버하지 마 만약 누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내가 이 나이 될 때까지 혼자이겠어?” 내가 기가차서 말하자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못하는

법이야.

너는

그동안

음악

때문에

정신이

딴

쏟았어도

이곳에

며늘아기도

곳에 가있었잖아 그런 네가 여자에게 관심이라도 있었겠니?” “누나

말이

맞다.

음악에

대한

열정의

10분의

1만

같이 왔을 거다.” “그렇겠지요.” 더 이상 발뺌을 못한 나는 웃으면서 말하고는 눈앞에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빛나는 백사 장, 푸른 하늘 , 풍성한 가지를 늘어뜨린 야자수 사이로 수영복을 입은 젊은 남녀들이 장사진 을 이루었다 유난히 젊은 남녀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대부분 신혼여행을 온 커플 같았다. 긴 생머리를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며 고속보트를 타고 내달리는 젊은 커플 뒤로 에메랄드 빛 짙푸른 바다는 햇볕을 받아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파란하늘과 하얗게 펼쳐진 백사장 은 정말 마법같이 신기한 것이어서 잠자코 말없이 보고만 있어도 세상의 모든 걱정 근심이 말 끔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보고 있어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처럼 질리지 않는다. 울창한 열대우림과 야자수, 아 름다운 해변을 중심으로 끝없이 늘어서 있는 세계적인 리조트, 새하얀 모래알 , 여기가 성경 에서 말하는 천국인가 싶었다. 나는 내가 음악이 없는 세상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 기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거 같아 불안할 정도였다 시간 순간순간 날이 맑거나 날이 흐리거나 눈이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기쁠 때나 슬플 때도 늘 음악은 나와 함께 있었다. 내가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있든 이름난 어느 호텔에서 도도한 시침 떼기 같은 얼굴로 도어걸과 프 런트로 이동하고 있든 시내의 한 영화관에서 섬세하면서도 담담한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담고 있는 순정영화를 보던 거친 생명력에 대한 동경 혹은 생명에 대한 찬가 가 느껴지는 카페에

- 22 -

앉아 술을 마시든 노천 온천에 편안히 몸을 맡기고 일탈의 망중한을 유유자적 즐기고 있든 언 제나 음악은 한 결 같이 내 곁에 있었다. 정신이 맑고 어떤 사물을 보고 아슴아슴한 느낌이 떠오르는 날에 기타를 튕기면 기다림. 설 렘. 그리고 아련한 추억과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한 마리 나비가 날아다니 는 곳처럼 눈앞에 선명하게 보였다. 그 멜로디는 음악의 매력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는 길로 나를 안내해주었다. 음악이 주는 그 묘미에 박정현의 ‘꿈에’ 나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 ’ 그런 좋은 노래를 부르고 나면 음악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심장 없는 육체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음악과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질긴 운명가도 같 은 불가분의 관계로 이어져 정해진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음악이라는 멍에 속에서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할 줄 알았고 그것은 예정된 숙명처럼 알며 살았다. 그런데 해안선을 따라 있는 야자수와 에메랄드 빛 짙푸른 바다와 울창한 열대우림과, 불타오 르는 듯한 그 강렬한 태양을 보자 세상에는 음악보다 더 아름답고 더 위대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중국 최남단 열대 휴양지답게 냄새마저 달랐다. 유행을 타 지 않는 ‘이스마엘 리베라’의 음악처럼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설레게 했다. 새하얀 모래알을 간직한 하이난 해변에 앉아 갖가지 수식어를 지닌 사진 속에서만 봤던 열대 휴양지의 아름다 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엄마와 누나가 내엽에 와서 앉았다. “에메랄드빛으로 물든 바다를 보니까 마치 천국에 온 기분이지” “응,

엄마,

푸른

하늘,

풍성한

가지를

늘어뜨린

야자수

나무사이에서

밀회를

즐기는 젊을 남녀를 보니까 , 왜 내가 여태껏 음악에 미쳐 살았던 내 자신이 후 회스러워 그리고 엄마 말대로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도 하고 싶어” “그게 정말이니?” 엄마 옆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누나가 반색을 하며 반겼다. “응, 누나 이런 여자와 함께라면 나는 결혼을 생각한 적이 있어.” 내말에 엄마와 누나가 동시에 꺄아악 소리를 지르며 놀랐다. “그럼 사귀는 여자가 있다는 거니?” “응 , 엄마.” “사귄지 얼마나 됐는데?” “나이트클럽 전속가수로 일할 때 손님으로 만났으니까 한 3년은 됐을 거야” “ 뭐하는 여자인데.”

- 23 -

꼬치꼬치 캐 묻는 엄마의 표정이 너무 밝아 왠지 슬쩍 웃음이 나왔다 “ 장차 엄마의 며느릿감이 어떤 여자면 좋겠어?” “

가정을 잘 로서는

더

꾸리고 아이를 이상

바라는

낳아 건강하게

것은

없어

잘 키우고

향기너와

사귀고

남편 내조만

잘한다면 나

있는

직장

아가씨

여성이

니?” “ 아니.” “그럼 어떤 직업을 가진 아가씬데?” “사진작가.” 내 말에 엄마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엄마는 가능하다면 지극히 평범한 여성을 며느릿감 으로 맞아들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전문직이나 예술 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정을 등한시하기 때문에 가정을 꾸리고 , 아이를 낳아 키우고 남편 내조와 시부모 봉양을 잘하는 , 그러니까 평범하면서 도 가족관의 우애가 깊은 그런 며느릿감을 원하고 싶었으리라 그래서 세 상을 겉 돌기만을 하는 자식을 든든하게 잡아주기를 기대했지만, 그런 다정다감하고 가정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여자라는 말에 끝내는 울음이 터질 듯한 얼굴로 변했다. “엄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아, 하지만 엄마가 걱정할 정도로 가정을 등한시 하는 여자 가 아니니까 안심해.” “그것은 너 생각이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동물만을 전문으로 사진을 찍는 친구 가있었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6개월에서

1년을

전국으로

돌아다니며

멧돼지,

말 ,사슴 , 고라니 , 쥐 , 두더지 ,산양 , 소 , 염소 , 삵 , 꿩 , 오소리 , 담비 심 지어는

멸종된 것으로

아는 고양잇과에

속한

한국야생 범까지

카메라로 찍은

그

친구는 그 재미에 푹 빠져 가정을 등한시하고 한국 범을 다시 카메라에 담고 싶 어

강원도,

경상도

,

깊은

산속을

헤매다

결국은

낭떠러지에

추락해

짧은

생을

마감했지.” 그때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에 엄마는 말을 하다 말다 깜짝 놀랐다. 나도 엄마처럼 몸 을 뒤로 젖히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쪽을 바라보았다. 관능적인 수영복을 입은 팔등신 아가 씨 두 명이 에메랄드 빛 이 눈부신 ‘섬 속에 섬’ 이라 불리는 웨스트 아일랜드 의 바다를 카 메라에 담고 있었다. 비췻빛 파도가 하얀 물결을 일으키는 바닷가에는 패러 세일링 , 제트 스 키 ,원드 서핑, 스노클링 같은 해양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더할 나위 없이 잘 어 울리는 남녀 카풀 들이 보기에도 아찔한 해양스포츠의 묘미에 빠져 환호성을 지르다가도, 갑

- 24 -

작스럽게 밀려오는 파도에 몸의 중심을 잃고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장면도 간혹 보였다. 바로 그 장면을 두 미희들이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거뭇거뭇한 숲이 아슬아슬 하게 보일정도로 관능적인 수영복을 입은 아가씨들을 더는 보고 있기가 민망해 풍성한 가지를 늘어 뜨린 야자수가 있는 해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두운 표정의 여운이 아직도 옆얼굴에 남아 있는 엄마는 아직도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엄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내가 교제하고

있는

아가씨는 그런

걱

정을 하지 않아도 돼 초등학교4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엄마와 단둘이 30년을 더 넘게 살았기 때문에 어느 여자보다도 가정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여자야, 정도 많고 눈물도 많고, 거기가 효심도 얼마나 깊은지 장한 효녀 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고.” 엄마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겁에 질린 듯 불안정했던 마음은 깨끗하 게 사라지고 앞으로 다가올 장밋빛 미래에 대한 부푼 기대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누나는 페도 라와 비슷한 모자를 삐딱하게 쓴 자세로 나를 보았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기 때문에 눈동자 속 에 드러난 감정변화를 쉽게 읽을 수는 없어도 ‘ 넌 참 대단한 여자와 교제하고 있어 내 올케 감으로는 딱이야!’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을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언제 한번 날을 잡아 그 아가씨와 함께 식사 한번 하고 싶은데.” 엄마가 너무 진지하게 말해서 나는 내심 놀랐다. 너무 놀라 한순간 불안했던 마음과 오만가 지 잡다한 걱정근심들이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 버렸을 정도였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 그것도 직업이 사진작가라는 것 때문에 장래 며느릿감으로서는 탐탁지 않게 여겼던 엄마의 마음이 장 한 효녀 상 앞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동시에 그녀를 떠날 수 없을 것이라는 느 낌이 비릿한 바다 냄새처럼 되살아났다. “ 응 알았어. 엄마, 빠른 시일 내에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볼게.” “아버지도 함께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갑자기 슬퍼져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우리는 ‘섬속의 섬’ 웨스트 아일랜드 에서 윈드서핑 , 스노클링 같은 해양스포츠를 마음껏 즐기며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단조로 운 일상생활에서 잠시 벗어나는 여유로 움도 즐겼다 에메랄드빛으로 물든 ‘섬 속의 섬’ 웨스트 아일랜드에서 이틀 동안 꿈같은 시간을 보낸 뒤 우리는 이국적이고 색 다른 경험을 하기위해 뎐 위안 온천 닥터 피시도 한번 둘러보았다 , 그리고 주요 관광지인 야롱만 다둥이 해수욕장 텬 야 하이 자오, 다샤오둥 톈을 둘러보고 나자 꼬박 이틀이 걸렸다

- 25 -

관광을 즐길 때도 ,호텔에 있을 때도 엄마와 누나는 너무나 행복해 했다. 꿈속 같은 시간이 흘렀다 . 대구의 한 여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간 여동생 혜란 이에게 전화를 할 때에는 엄마는 소녀처럼 수다를 떨며 마치 해외원정에 나간 축구 국가 대표 팀의 경기를 전하는 캐스터처럼 이곳에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전했다. 흰 모래밭과 야자수 나무가 남북으로 수십 키로 넘게 줄지어 있는 모습, 해안선을 따라 파라솔과 선 베드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모습 , 에메랄드 빛 바다와 한적하고 낭만적인 해변에 스쿠버 다이빙이나, 스노클링 ,바나나 보트 , 패러세일링 ,시워크 , 해양스포츠를 즐기는 모습. 짧은 반바지 차림의 남자와 럭셔리한 비키니 차림의 여 자들이 모래밭에 누워 바다를 바라보며 일광욕을 즐기거나 캔 맥주를 홀짝이며 여유로 운

시

간을 보내는 모습 유명관광지에서 펼쳐졌던 돌고래쇼와 악어 쇼, 중국을 대표하는 무술공연, 코끼리쇼와 .전통 혼례식 , 퍼시픽판타지 디너쇼. 수천여 마리의 열대어와 동화 속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조개와 예쁜 산호초, 그리고 무지갯빛 열대어 들이 살고 있는 바다 속 풍경을 그 대로 재현한 거대한 인공수족관 낙조 풍경을 감상하며 다양한 국적의 미식을 즐기며 흥미 진 지한 공연을 감상하는 리조트 등등. 사소한 것 까지 빼놓지 않고 다 말했지만 전화를 끊고 난 후에는 벌써 내일의 일정까지 전해 주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 날 하이난의 야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가볍게 저녁 식사 를 마치고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야시장 중의 하나인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싼야 야시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입구에 들어서서부터 현지의 생동감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었다. 기념품점과 옷가게, 과일가게 가 제일 먼저우리를 맞아 주었다. 시끌벅적하고 번잡한 우리나라 재래시장처럼 친숙한 생각이 들어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조개로 만든 장식품, 옷가방, 액세서리, 장난감, 화장품 그리고 가 정용 잡화, 열대과일들을 보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름도 알 수 없는 각종 다양한 과일이 넘쳐나는 만큼 과일로 즉석에서 만든 생과일 빙수는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할 신비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맛에 엄마와 누나는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는 맛이라며 감탄을 금 치 못했다. 우리처럼 얼음을 갈아서 만드는 게 아니라 생과일을 즉석에서 믹서로 갈아 원래 과일이 가지 고 있는 향과 맛을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해 얼음판 위에서 얼음과 함께 응축되게 하기 위해 과일을 밀다 보면 순식간에 생과일과 셔벗이 완성되었다. 평소에 돈 주고도 먹기 힘들었던 망 고가 가득한 빙수 한 그릇을 눈 깜짝할 사이에 뚝딱 해치우자 세상이 모두 내 발밑에 있는 기 분이었다. 현지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야시장을 다 둘러보고 나서 우리가 마지막 밤을

- 26 -

즐기기 위해 예약한 ‘나라다리 리조트’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조금 넘었다. 싼야 공항에서 차 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리조트는 객실마다 모두 개별 발코니에 플런지 욕조가 설치돼 있어 안락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최상급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1층 객실에서 문을 열면 바로 전용 풀장과 연결되어 있고 싼야 에서 유일하게 프라이빗 비치 를 갖고 있어 맨 발로 잠깐 나가면 하얀 백사장과 파도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기자기한 정겨운 산책길을 나서면 사방에 열대우림이 우거졌다 그 사이로 하이난 전통 조각 상에는 서정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인 조각예술품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엄마와 누나는 조각 예술품, 분수대 , 작은 연못을 카메라에 담기위해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댔다. 전통조각품들과 분수대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현란한 조명과 , 레이저 빔, 서치 라이트가 휘황찬란한 열정적인 무대 위에는 미국의 전설적인 가수 ‘제임스 브라운’ 의 모습이 보였다 환갑이 넘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기타를 치며 마이크를 들고 노래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고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평생을 살면서 한번 볼까 말 까하는 위대한 뮤지션의 등장 앞에 나는 미친 듯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크레이즈 하트’ ‘더브 레이브’를 열창하고 나자 관객들은 일어나서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그 의 노래는 오랜 기다림 끝에 짧은 순간 피었다가 순식간에 비처럼 날아가 버리는 벚꽃 같은 아련한 그리움을 닮았고 그리고 긴 세월을 돌아 마주하게 된 짧지만 강렬한 인연을 떠오르게 하는 노래였다. 그는 위대한 가수답게 박수로 화답하는 관객들을 위해 스페인 가수‘ 홀리오 이 글레시아’ 가 불려서 세계적으로 히트시킨 명곡 ‘나탈리’를 불렀다. 멀리 떠나버린 애인을 그리워하는 섬세하면서도 애절한 노래에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유려 한 금관악기와 잔잔한 드럼소리에 아름다운 기타소리가 어우러져 흐느끼듯 오르내렸다. 제임 스 브라운은 가슴으로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탈리’ ‘나탈리’하며 높게 올라가는 고음부 분에서 독특한 떨림이 있는 목소리로 떠나는 애인의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애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엄마와 누나, 구름처럼 운집한 관객들은 눈물을 찔끔거 렸다. 맑고 고운 미성과 감미로운 까지 더 해져 내생에 가장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순간이었 다. 홀리오 이글레시아 보다도 더 애절하게 나탈리를 불렀다 40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목 소리와 감수성, 관객들과 눈빛을 맞추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오래 전에 잃어버린 소중한 무엇인가를 이제야 되찾은 느낌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라 잃은 설움을 시장에 팔려가는 소로 비유한 반전 운동가 ‘세쿤다 콜롬’

- 27 -

이 작곡하여 미국 여가수 ‘조엔 바에즈’ 가 불러서 세계적으로 히트시킨 1940년대의 노래인 ‘돈나 돈나’를 불렀다

방파제까지 스멀스멀 차올랐던 붉은 노을이 스르르 밀려 내려가는 느낌

의 노래였다 그의 목소리는 흐트러진 벚꽃 같은 아련한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돈나 돈나’를 부르고 난 그는 뜻밖의 제안을 하였다. 관객 중에 노래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무대 위로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눈과 입으로 크게 웃으면서 말하는 목소리가 유난히 부드러웠다. 웃음이 기본표정처럼 느껴졌다 본능에 따 라 나도 모르게 내손이 올라갔다 제임스 브라운은 나에게 무대 위로 올라오라는 제스처를 했 다. 수많은 관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다리가 길어 보이기 하기위해 쇼트 팬츠를 입은 금발의 미녀가 나를 보고 살짝 윙크를 했다. 나는 보폭을 크게 하고 속도는 천천히 , 양 손은 배위 쪽에 다소 곳이 한 채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내 내가 무대에 오르자 여기저기 에서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련된 청바지에 데님셔츠를 입은 그를 보는 순간 , 나는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말로만 듣던 7~80년대 전설적인 뮤지션을 눈앞에 서보고 나니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 면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가 역류하는 것 같은 심한 떨림을 느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선이 반듯한 이마 뒤로 올백으로 넘겼고 머리카락이 목덜미근처에서 웨이브를 이루고 있는 모 습이 그렇게 근엄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가 악수를 청했다. 내 손을 맞잡은 그는 국적 과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코리아’ 라고 말했고 영어회화는 자신이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제임스 브라운은 만개한 장미꽃으로 꾸며진 테이블에 앉아있는 미모의 여성에게 무대 위로 올라오라는 사인을 보냈다. 팔등신의 미녀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비비크림으로 피부 톤은 정 리하고 전체적인 색조는 은은한 머리색과 맞춰, 자연스럽게 그라 데이션을 했고 속눈썹은 마 스카라로 고전적이면서도 우아해 보이는 눈매를 연출했다.

백옥같이 새 하얀 피부를 돋보이

게 하기위해 광대뼈와 얼굴전체를 감싸듯이 자연스러운 핑크베이지 계열로 마무리하여 마치 만개한 장미꽃을 보는 듯한 느낌에 숨이 턱 막혔다. 더욱이 청순하고 고전적인 이미지인데도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관능적인 카리스마가 느껴져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남성이 불끈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관능적인 스트라이프 원피스와 블랙재킷차림의 그녀 는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한국계 이민 3세라고 자기를 소개한 그녀는 내가 뮤지션이라고 대답을 하자 옆에 있던 제임스브라운이 깜짝 놀라며 나에게 정중히 노래를 부탁

- 28 -

했다. 생소한 동양인의 뮤지션의 출연에 무대는 물 끼얹듯 조용했고 구름처럼 운집한 관객들 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내 행동만을 예의 주시했다. 하이 난 전통 조각들이 있는 분수대에서 는 무지갯빛 물기둥이 하늘위로 치솟고 있었고 아기자기한 작은 연못 주위에서 다정한 연인들 이 달콤한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사뭇 긴장했지만 이런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나는 그에게 건네받은 기타를 손가락 으로 튕겨보았다. 정말 멋진 기타였다. 1970년대 전설적인 밥 딜런과 존 바에즈를 위해 만들 어졌던 컨트리 젠틀맨 수제 기타의 완벽한 복제품이다. 목과 몸통이 만나는 부분을 사선으로 절단해 접합한 독특한 모양새를 살 리 기위해 공작새를 조각했다. 섬세하고 중후하게 만들어 진 가죽 스트랩에는 금제버클이 달려있고 볼드체로 ‘BJ’ 라고 쓰여 있다 그도 숨죽인 채 지켜 보았다. 이마에서 가느다란 앞머리가 바람에 나뭇잎처럼 한들한들 나부꼈다. 나는 관객들 앞에 서 기타를 치며 멜라니 서프가 가 부른 ‘세디스트씽’을 불렀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세상에서 존재 하는 음악 중에서 가장 애절하고 애틋함이 담겨있는 이 노래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 우 주에 닿을 만큼

강하게 불타오르는 슬픔이 깔린 목소리로 마치 시 한편을 읊조리는

서정적

인 음색으로 흐느끼듯 하면서도 애절하게 불렀다. 강렬한 서치라이트 불빛 속에서 일순간 모 든 것이 정지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 노래에 빠진 관객들은 딱히 감정을 이입하지 않아도 내 노래에서 사랑하는 사랑과의 이별이 얼마나 슬프고 비통한 것인가를 깨닫는 것 같았다. 쉴세. 없이 부서지는 파도소리의 울림처럼 이어지던 내 노래가 끝나자 관객들 모두 자리에 일 어나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스포트라이트가 집중적으로 나에게 쏟아지며 사진기자 들은 현란한 손놀림으로 카메라셔터를 눌러댔다. 파도소리도 관중들의 박수소리도 요란하게 터지는 플래시 소리도 내 귀에는 아무소 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설적인 가수인 제임스 브라운보다 나에 대해 더 열광하는 관객들이 도 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이 어메이징한 현실이 전혀 실감나지 않아 오히려 불안할 정도였다. 강 렬한 서포트 라이트 불빛 속에 서있는 내가 마치 엘비스 프레스리, 존 레넌, 폴 메카트니 , 밥 딜런 , 존 바에즈와 같은 세계적인 톱 뮤지션이 된 기분이었다. 별이 반짝이는 검은 우즈를 닮은

눈동자와 베일 핑크색으로 매트하게 표현해 한 송이 꽃잎이 살짝 얹혀있는

러일으키는 그녀의 입술이

착각을 불

열리며 노래한곡을 더 청했다.

제임스브라운도 내 뛰어난 노래실력에 탄복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이번 에 영국 가수인 탐 존슨이 부른 ‘딜라이 라’를 불렀다. 1968년대 이 노래가 발표되자마자 세

- 29 -

계적으로 히트가 된 노래이다. 좋은 명곡은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세계인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 구약성경에 나오는 ‘삼손과 데릴라’에서 힌트를 얻어 쓴 가사로 이루어질 수 없는 애틋한 남녀의 사랑과 믿었던 여자에게 배신을 당하는 남자의 슬픔을 담고 있는 노래이다. 탐

존슨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독특한 떨림 있는 서늘한 목소리까지 최대한으로 살려 딜라이

라를 불렀다. 제임스 브라운과 함께 초대가수로 나온 일본 최고인기 록밴드 엑스 재팬(X JAPAN) 리더 사 사키는 처음에는 내 뛰어난 노래솜씨가 부럽다 는 듯이 선망어린 눈으로 지켜보다가 자기보다 레벨이 한 단계 높은 뮤지션이라는 것을 알고 무대 밖으로 나갔다. 내 노래가 끝나자 제임스 브라운도 ‘원더풀 원더풀’ 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필리핀 밴드의 지휘자도 한국에 스티비 원더와 버금가는 가수가 있었냐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경의를 표했다. 나는 귀가 따갑도록 듣 던 전설적인 뮤지션과 함께 무대 위에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전혀 실감이 가지 않아 볼을 꼬집어 볼 정도였다. 희끗한 머리카락이 목덜미 근처에서 웨이브를 이루고 있는 것 과, 선이 반듯한 이마 뒤로 올백으로 넘긴 머리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눈과 입으로 크게 웃 는 것을 보자 나는 비로소

그의 존재감이 생생하게 현실로 느껴졌다. 나는 아름다운 미인 통

역관에게 통역을 부탁하자. “제임스 브라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하세요.” 라고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심플한 듯 화려한 차이니스 레스토랑이 휘황찬란한 네온불빛 속 에서 흐릿하게 보였다. 흥분한 탓에 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이 뜨겁게 느껴졌다. “제가

평소에

되니

정말

하나의

존경하는 영광입니다.

레이블에서

제임스

브라운

뮤지션님을

현재

생존해있는

뮤지션

앨범을

만들

수

있다면

이렇게 중에서

누구와

무슨

가까이에서

직접

한명의

뮤지션과

단

레이블에서

어떤

뵙게 단

음반을

내고 싶냐 고 저에게 묻는다면 , 지금 이곳 하이난 에서 제임스 브라운 뮤지션님과 음반을 내고 싶다고 주저 없이 말할 것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인간이 느끼는 감 정을 여러 각도에서 동시 다발 적을 표현할 수 있는 선생님의 음악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선생님에

대해

가장

깊은

존경심과

신뢰가

느껴졌던

때

는 우리나라에서 내한공연을 할 때였고, 저는 그 당시 고등학생 이였지요. 선생님이

내한공연

당시

주옥같은

레퍼토리가

이어졌고

가장

감명

깊은

부분은

무릎을 끓고 ‘이즈 맨스 맨스 맨스 월드(it’s a man’s man’s man’s world)’라 는

노래를

부를

때

그

감동은

아직도

제

- 30 -

눈에

생생합니다.

남자들의

세상이지,

남자는 마치

차를 노아가

만들었고

기차를

만들었고

방주를

만들었던

것처럼

전기를 그러나

만들었고 곁에

전쟁의

보살펴줄

탄환을

여자

만들었지

가없다면

제

기억에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였던 거 같아요.” “제

노래에

담긴

가사말까지

정확히

기억해

내다니

당신은

타고난

음악성을

가진

뮤지션입니다.” 제임스 브라운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감격해 하며 나를 뜨겁게 포옹했다 처음 만 난 사이인데도 우리사이 에는 오래전부터 음악을 가르치고 배웠던 스승과 제자의 관계처럼 따 뜻한 정이 흐르고 있었다. 요란한 플래시가 터지며 관객들의 환호하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내생에 가장 잊지 못할 감동의 순간인 하이난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미국 권위 있는 CNN 방송에 제임스 브라운이 기타를 치고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나의 동 영상이 미국 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다. ‘뮤직 페스티벌’ 이라는 저명한 음악잡지에 한 기사가 절반 이상 차지하고 있었다,

나 에 대

프랑스, 영국, 스페인, 일본. 기타 나라 음악에 비해

음악성도 떨어지고 뮤지션 개개인의 창의력마저 최하급 수준에 미치지 못할뿐더러 음악을 창 조하는 과정 역시 음악 선진국 수준에 비해 현저히 질이 낮다, 음색이든 악기든 스타일 이든 뭔가를 고르고 결정하는 기본 가닥마저 설정되지 않는 50프로 부족한 음악, 미국의 음악이 메이저급 이라면 한국의 음악은 마이너리그 애서도 트리플A 밑의 한 단계인 더블[W ] A 로 비유했다, 미국의 음악과 비교 하자면 마약과 폭력이 난무하 는 뉴욕 동남부의 베레스크

풍자와 스트립을 뒤섞은 쇼

클럽 수준으로 혹평하고 있었다, 비

트나 선율 등을 하나씩 들을 때마다 그 다음엔 노래가 뭘 원하는지 알수있어야하고 노래가 원 하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 힙합, 전자음악, 라틴음악 정도는 소화해 낼 수 있는 실력이 있어 야 하는데 그것을 소화하여 자기음악으로 활용할 수 있는 뮤지션들이 과연 한국에는 얼마나 되겠느냐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그런 우리의 편견을 한 번에 종식시킨 한국 뮤지션이 등장해 미국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 놓 았다, 그는 프린스나 스티비 원더처럼 모든 악기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알았고 힙합, 전자음악, 라틴음악, 디스코, 부기, 일렉트로 심지어는 미국과 아프리카 사이에서 500년 동안 이어져온 아트로 비트에, 아프로 쿠반, 거기에 프리 스타일 까지 소화하여 자기음악으로 활용할 줄 아

- 31 -

는 한 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 뮤지션 이다, 굉장히 한국적인 음색과 ‘쿠세’를 선 보이면서도 ‘프리소올’ 즉 유행을 타지 않는 원색적인 목소리는 ‘캘리 페터슨’ 이나 브라질의 ‘아나 마조띠’ 같은 캐릭터와도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은 어느 격식에 구애 받지 않는 원초적 이면서도 알몸처럼 자연 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닌 목소리는 모든 장르의 음악을 리듬감 있는 저음의 템포로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고 원곡처럼 같은 감정을 되살려 주는 신비한 능력을 갖 춘 뮤지션 이다, 그는 에메랄드빛으로 물든 중국 최남단 열대 휴양지 하이난 섬에서 그의 음악적 재능을 증명 해 주었다, 멜라니 서프카의 ‘세디 스트씽’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이라는 의미가 담겨진 슬픈 연가를 이별이주는 아픔 때문에 신경 쇠약아 걸린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간의 내면에 깔려있는 슬픔까지 끌어내어 수많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리고 영국 뮤지션인 탐 죤슨의 ’딜라이라‘를 탐 존슨보다도 더 깊이 소화해 내는 타고난 천 재성을 유감없이 발휘 하였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현존하는 뮤지션 중 가장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있는 제임스 브라운마저도 주눅이 들게 만들었다, 전기적 사운 드가 가미되고 다양한 표현력과 함께 폭발적이고 다채로운 음색이 합일된 그의 노래를 역동적 이고 감성적으로 소화를 해냈다, 마치 아름다운 여자가 춤을 추는

형상이 눈앞에 보이는 듯 유연하게 처리하여 칭찬에는 너

무나 인색한 제임스 브라운마저 모든 수식어를 다 동원하여 그의 탁월한 음악적 실력을 입술 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였다, 경험에 의존하기 보단 스스로의 음악세계에 도전하여 그만 의 독창적이고 고유한 음악세계를 구축한다면 마이클 잭슨이나 비욘세 처럼 노래할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았다, 그의 음악은 상식과 통념의 틀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뮤지션들에게 카 운터펀치를 날리는 통쾌한 충격 이였다, 그 기사를 잃은 나는 설렘과 들뜬 흥분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한 변방에서 떠돌 기만했던 내 음악적 재능을 세계가 인정해준 특별한 날이었다, 엄마와 누나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다는 듯이 긴 가민가 하는 표정이었다, 대단히 기뻐하면 서도

또 한편 으로는 실망스런 빛을 역력히 드러내었다, 한국의 음악을 반나체로 춤추는 미

국의 저급한 클럽 수준 정도로 혹평 하고 있는 미국인의 인식에 대한 분노였고 우리 한국의 음악적 역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미국인들의 의식에 대한 안타까움 이기도 했다, 감정 표현을 쉽게 하지 않는 누나조차도 우리음악의 고유성과 독창성 우수성을 훼손하는 미국 인의 무지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었다, 한국음악을 혹평하는 불합리한 인식에 대해 무

- 32 -

엇이 잘못 되었는지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었는데 내게는 단순한 푸념같이 들렸다, 미국인들에 게는 우리나라 음악이 해석이 불가능한 이상한 뮤직으로 이해할지 모르나 일본이나 유렵에서 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음악을 ‘포리소울’ 계열로 분류하여 굉장히 수준 높은 음악으로 이해 하고 있다. 독특 하면서도 한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한국적 음색과 프리소올 의 핵심적인 음역 대를 구 사하는 길 옥윤 사단의 음반과 패티김의 감성적인 목소리는 세계 어느 유명 뮤지션들과 비교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뮤지션 이라는 내 말에

동생 헤란 이가 웃으며 고개는 끄덕이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이었다, 온가족이 한자리에 모여서 한국음악을 혹독하게 비평한 미국인들의 교만과 한국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지 못하는 무지함에 대해 가슴 이 후련해 지도독 비평하고 나자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나마 다행 서러운 것은 마이클 잭슨 이나 비욘세 같은 세계적인 레전드급 뮤지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뛰어난 음악 적 재능을 가진 가수로 나를 지목한 부분에서 가족들은 크게 위안을 받았다, 음악을 그만 했 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던 엄마와 누나의 희망사항이 세계가 나를 인정해준 역사적 사실 앞에 서 무너지는 순간 이었다. 중국 하이난 섬에서 내 노래에 열광하는 관객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한지 엄마와 누나 는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윤희를 만나고난 다음날부터는 엄마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무척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 이었 다. 사소한 일에도 웃음이 절로 나올 만큼 세상사는 재미가 두 배로 커진 것 같았다. 매일 생 선 초밥 갈비찜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정성 서럽게 만들어서 서울역 부근에 있는 윤희의 사무 실을 찾아가

자신이 손수 만든 음식을 장래 며느리 감이 될 윤희가 맛있게 먹는 재미에 인생

의 새로운 행복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엄마는 주말만 되면 윤희와 나를 차에 태워 서울이나 경 기도 부근의 맛좋기로 소문난 식당으로 데리고 다녔고 그 주변에 뛰어난 관광명소를

찾아다

니며 윤희의 환심을 끌기위해 최선을 다했다. 가족도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살아온 장 래 며느리 에 대한 엄마의 병적인 사랑이 나와 그녀 사이에 조금 남아있던 마음의 벽까지 허 물어 버렸다.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녀에게 쏟지 못한 관심과 사랑이 엄마로 인해 회복되자 서 먹 했

- 33 -

던 관계가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우리의 관계는 예전처럼 돌아왔다. 백마역 부근에 누나가 운영하는 음악다방 DJ 박스에서 LP판을 시대별 가수별 장르별로 구분 하고 있는데 엄마와 윤 희가 함께 다방으로 들어왔다. “음악다방 준비는 잘되어 가니? 엄마는 준비해온 맛있는 음식을 테이블 에 세팅을 하며 말했다. “역시 아들 생각해 주는 사람은 엄마 밖에 없다니까.” 나는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에 앉았다. 윤희는 준비해온 해물 탕을 냄비에 넣고 다시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버튼을 돌리자 새파란 불꽃이 보기 좋게 올라온다. 김 태정의 ‘백지로 보낸 편지’ 가 실내에 나지막이 울린다. 주방에서 달그락 거리며 식사를 준비하던 윤희가 싱 크대 수돗물에 손을 씻고는 걸려있는 수건으로 깨끗하게 손을 닦은 다음에 내 앞에 앉았다. “향기 씨가

부탁했던 ‘나는 가수다’ 오디션 프로를 찍은 사진을 어렵게 준비 했

어요?” “부탁한지가 얼마 되지 않는데 빨리 구했네요?” “누구의 부탁인데요.” 윤희는 분홍색 발레 백에서 은박지로 정성스럽게 싼 편지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방송국에서 PD 보조로 일하고 있는 내 친구에게 부탁하여 어렵게 구한 거예요.” “역시 우리 윤희의 수완은 제가 인정할게요.” “이

사진이 향기 씨에게

무슨 큰 도움이

될까 해서 구해

오긴 했지만 제가

볼

때는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요.” 윤희는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밝히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윤희씨

생각이

맞아요.

가수들의

노래

실력도

실력이지만

시청자들의

인기

작전

에만 더 몰입이 되어있어 주객이 전도된 느낌도 있고 인정에 흔들리는 공정치 못한 심사에 불만을 갖는 시청자도 있지만 마지막 우승자를 가리기 위한 결선에서 시청자들의 문자 투 표가 시작되자마자 벌어진 기현상만 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 지를 확인해 주는 좋은 실레지요. 그러면서도 정작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인 원석과도 같은 뮤지션 발굴과 감탄할만한 음악성을 가진 명곡에 대한 관심도는 그리 높지 가 않지요.” 나는 티브이에 출연한 가수들의 사진을 보며 씁씁 히 웃었다. “그건

저도

공감하는

부분이에요.

그

곡을

- 34 -

처음

부른

가수처럼

판으로

찍어낸

것처럼 비슷한

춤과 노래를

니라

탈락위기의

가수에게

으로

치열하게

울한

탈락이지 싶어도

경쟁하는

부르거나 실력이 투표하는

게

빼어난 가수에게 투표

시청자들과

아니라

정에

웃으며 결과에

출연자

이끌려

승복하는

들

봐주기

것을 보면

끼리

식으로

하는 게 실력과

밀고

실력

나가

오디션 프로의

아

억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뮤직에

관한

티브이

프로가

봇물

터진

듯

많은데

TV건

라디오

건

진짜

음

악을 듣기가 힘들어진 시대라고 말하는데 바로 그 점을 윤희씨가 예리하게 짚어 내는 것 같은 데요.”

“TV에 있는

나오는

요즘

의미마저도

노래를

없는

들어보면

형편없는

저것도

노래가

노래인가

얼마나

많아

싶고

노래가

담고

중국

하이난

섬에

서 우리 아들이 부른 노래에 비하면 지금 한창 뜨고 있는 노래는 노래도 아니지. 윤희도 함께 같아야 하는 건데.” 엄마는 윤희가 퍼준 해물탕 국을 수저로 떠먹으면서 말했다. 전기밥솥에서 밥통을 꺼내 테이 블에 내려놓고 엄마는 나를 마주 보며 앉았다. “지금 유행 하고 있는 노래 중에서 좋은 노래가 얼마나 많은데요. 다만 문제는 시청자나 대 중만을 너무 의식해 상업성에만 너무 치우 치다보니 좋은 음악을 들을 기회가 많이 좁아진 거지요.” 엄마가 준비해온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니 음악에 대한 생각들이 싹 사라졌다. 갈비찜을 먹 어보니 조린 간장과 육수가 알맞게 베여진 갈비찜의 맛은 천하일품 이었다. 음악다방 개업을 이틀 앞두고 백마역 근처에서 황제 나이트클럽 강 사장을 보았다. 나는 음악다방 광고지를 인 쇄소에서 찾아 나오는 길이었고 고층건물 들이 즐비한 거리에서 누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 층건물 뒤로 기우는 햇빛에 반사된 건물의 창문이 보석을 박아놓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마침 인근에 있는 여학교에서 교복 차림의 여학생 들이 우르르 몰려 드는 바람에

거리는 갑

자기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로 가득 넘쳐났다. 오늘 수업 중에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 들을 꺼내며 여학생들은 깔깔 웃고 있었다. 회사의 로 고가 새겨진 작업복을 입은 공원들이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귀가 아프 게 떠들어대는 여학생들이 눈에 거슬렸는지 빨간 불인데도 신호를 무시하고 무작정 도로로 뛰 어 들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도로로 뛰어드는 바람에 신나게 달리고 있던 자동차들이 급브레 이크를 밟는 ‘끼익’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 서 들렸고 귀청이 찢어 지는듯한 험악한 욕설과

- 35 -

입에 담기 민망할 정도의 거친 말들이 봇물 터진 듯 오고 갔다. 신호가 파란 색으로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던 여학생들은 눈앞의 광경이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았다. 단발머 리가 무척 잘 어울리는 여학생이 스마트폰을 꺼내 그 민망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행인들은 철없는 여학생들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마침 신호가 바뀌어 사람들의 틈에 끼여 횡단보도를 걸어가는 남자가 낮이 익다 싶었는데 바 로 황제 나이트클럽 강 사장 이였다. 강 사장 역시 조금은 침울한 표정으로 걷고 있어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황제에 서 술 취한 솜님들과 한바탕 싸움을 하고 난 뒤의 바로 그 표정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형님’ 하고 부르며 뛰어갔다. 그때 발레리나의 가녀린 어깨 안나 쿠르니 코바의 아름다운 몸매. 이 자벨 위페르의 탄력 있는 다리. 한 사랑의 관능적인 뒤태. 미인의 모든 요소를 다 갖춘 완벽 한 여자가 큰소리로 강 사장을 불려 세웠다. 횡단보도 앞에서는 내 모습이 쉽게 노출이 되기 때문에 반대쪽 도로 은행나무 쪽으로 이동했다. 반대쪽 도로에서는 강 사장과 그녀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분홍색 발레 백을 들고 있었다. 뉴욕 상류층이 즐겨 입는 패션과 액세서리로 치장한 그녀는 호주출신 슈퍼모델 미란다 커와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 입을 움직이며 웃는 모습,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는 모습, 분홍색 발 레 백을 오른손에 들고 있는 모습은 미란다 커가 입국할 때 발레 백을 들고 기자단과 팬들에 게 손을 흔들어 답례하는 바로 그 모습 같았다, 그때 그녀는 스포츠카의 앞문을 열었고 강 사 장은 웃으면서 조수석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쫓아갈까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강 사장 을 태운 빨간 스포츠카는 벌써 큰 도로 쪽으로 질주했다. 비록 짧은 순간에 먼발치로 강 사장 을 볼 수 있었지만 나는 강 사장의 현재의 근황을 자연스럽게 엿볼 수 있었다. 새로운 과제에 도전도 하고 잘 안되면 좌절도 해보고 친구들과 만나서 술도 나누고 손님들과 티격태격 싸워 도 보고 화해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등등,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즐길 삶의 페 이소스를 느끼며 삶이라는 일상의 속에서 삶을 경험하며 삶의 적응도를 키워 나가며 나름대로 잘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대도 있었을까? 홀리오 이글레 시아 나 레이찰스의 노래를 듣다보 면 나에 대한 생각이 났을 테지 하고 생각 했다. “동생의 음악은 매우 독창적이고 고유해, 훌륭한 음악엔 적당한 눈물과 슬픔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나 진한 슬픔이 있다 고해서 좋은 음악의 요소를 갖추는 것은 아니지. 그 슬픔을 끄집어내어 우리의 일상 속에 접목하여 타인의 아픔이 마치 나의 아픔처럼 느껴

- 36 -

질 때 비로소 동생은 훌륭한 뮤지션 이라고 말할 수 있지. 타인의 슬픔, 타인의 눈물이 내 슬픔처럼 느껴지지 않는 음악은 똑 같은 문장, 똑같은 사람 이름을 반복해서 읽는 행위에 지나지 않지.” 그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 마음 속에 강 사장이라는 끈적끈적한 존재감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무의식 적으로 애쓰고 있다. 강 사장만 떠 올리면 ‘인생과 음악은 동일하다 고로 인생은 음악이다.’ 라는 이상한 공식이 성립된다. 나와 그의 생각은 똑같아도 내게는 음악으로 인해 느끼는 고통과 슬픔이 더 많았다. 인기가 생기기 전 까지 힘들고 괴로운 생활은 뮤지션 이라면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으로 알고 발아 들 였다. 괴롭고 절망적인 실체를 껴안고 쨍 하고 해 뜰 날 만을 고대하며 모든 나쁜 것과 더럽 고 냄새나는 삶의 파편을 나 혼자서 떠안고 사는 것을 숙명이라 생각했다. 가수로 성공 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가 다 내 것처럼 느껴졌고 나를 좋아하는 수많은 팬들 때문에 외 로움을 느낄 틈도, 밥을 먹거나 잠자리에 들 시간조차 없을 것 같았다. 음반을 내고 전국 투어도 하고 일본이나 동남아 까지 해외 공연을 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무명의 뮤지션에서 마침내 서구 음반 차트를 평정하는 세계적인 레전드 급 뮤지션을 향해 내 꿈을 키워 왔건만 상업성과 대중의 틀에 갇힌 현실에 의해 내 꿈은 하루아침에 물거 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죽고 싶을 만큼 세찬 절망이 몰아 쳤지만 이제 부터라고 나는 생각했 다. 그 날 먼발치에서 강 사장을 본 나는 심란한 마음을 뒤로하고 택시를 타고 누나가 운영하 는 음악다방으로 돌아왔다. 입구로 들어서는데 나를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팬들과 딱 마주쳤 다. ‘한국의 비틀즈 김향기’ ‘제임스 브라운과 미국 음악계가 인정한 한국의 뮤지션’ ‘하이난의 음악 영웅’ 모든 수식어가 총동원된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성원을 해줄 때 나도 모르게 눈 물이 나왔다. “여러분들의 뜨거운 성원에 반드시 보답 하는 가수가 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힘주어 말했다. 자연스런 투명 메이크업에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순결함이 느껴지는 흰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하얀 치아가 보일 정도로 웃으면서 말 했다. “저는 김 향기 씨의 첫 앨범에 수록된 음악을 듣고 무척 감동을 받았어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쓰는 머릿수건의 성스러운 분위기와 가사가 담고 있는 신비한 의미가

서로 혼합

하여서 하나의 무늬가 되는 레이스처럼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순결함과 성스러움이 아스라 이 내려앉는 착각마저 들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마음을 뒤 흔든 것은 고향마을 동

- 37 -

구 밖 길을 걷는 듯한 설렘 이였어요. 동구 밖 길을 가로 지르며 흐르는 잔잔한 실개천 처 럼 잃어버린 고향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음악에 저는 타임머신을 타고 20 년의 과거로 되돌아가 봄 처녀가 된 기분 이였어요. 그런데 두 번째 미니 앨범은 다소 실망적이었어 요.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 품격이 떨어지는 두 번째 미니 앨범이 김 향기라는 가수를 세상 에 알려지게 했고 그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두 번째 앨범 은 매니저의 철저한 시나리오에 의해 만들어졌고 음악성을 배제하고 대중의 눈높이에만 제 작된 앨범에 음악인으로서 수치심을 느낀 김 향기 씨가 매니저와 한배를 탈 수 없다는 것 을 느끼고 결별을 하였지요.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한 광역시의 축제행사에 초대가수로 초청되어 연출자 감독 음악감독 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각본에도 없는 다른 노래를 불려 축제 행사를 망치는 공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방송과 대중들을 우롱 했지요. 엄청난 사태였고 그 파장이 일파만파 로 확대되어 결국 당신은 가수로서의 생명도 막을 내리게 되었지요. 저는 처음에는 언론의 편을 들었지요. 대중을 무시하는 상식 밖의 가수는 무대에 설 기회조차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 했지요. 그런데 음악 반주도 없이 관 객들의 야유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신은 혼자서 기타를 치며 불렸던 그 노래를 최근에 다시 한 번 듣게 되었지요. 그 노래를 듣고 당신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이 일시에 사라져 벼렸어요. 그때 관객들의 야유를 참아가며 불렸던 당신의 노래야 말로 음악다운 음악 이였 고 노래다운 노래였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지요. 대중 이라는 의식에 박혀 대중에 의 한, 대중만을 위한, 대중들을 위한 노래만을 고집하는 가수들에게 하이 킥을 날리는 통쾌 한 충격으로 다가 왔고 당신의 확고부동한 음악적 소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요. 중국 최 남단 열대 휴양지 하이난 섬에서 당신이 보여준 그 음악적 능력과 재능을 보고 당신의 열 렬한 팬이 되었지요. 김 향기 님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뮤지션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의 병적인 음악사랑 때 문에 마음적,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많았던 엄마, 누나, 동생도 나를 대견하게 바라보며 아낌 없는 박수를 보냈다. 비록 세상이 내 음악을 알아주지는 않지만 작은 소수의 사람들만이라도 내 음악을 이해해주고 사랑해준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세계적인

팝

가수인

레이디

가가도

열아홉

살

때

어렵게

계약한

음반사도

석

달 만에 그녀를 방출했지만 그녀는 그래도 기가 죽거나 포기하지 않았지요. 브리트니 스피어스 , 알라사 키스 , 푸시 캣톨스 같은 스타들의 곡을 쓰며 실력 을

키웠고

2008년

첫

음반을

내며

서구음반차트를

- 38 -

장악하는데

걸린

시간은

단

18개월 이였지요. 김 향기 씨도 레이디가가만큼 음악적 실력과 재능이 있고 당신 을

물심양면으로

우군이

있어요.

후원해주는 그리고

향사모(향기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까다롭기로

팬들의

정평이

난

모임)라는 제임스

든든한

브라운마저

주눅 들게 만든 각 장르의 음악을 소화해 내는 천재성이 있는 한 당신은 래기음 악 최고봉인 밥 말리(Bob Marley)나 소울 싱어의 전설 조스 스톤(Joss stone)에 버금가는 뮤지션이 될 거에요. 순백의 웨딩드레스와 같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귀여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분된 감정 이 가슴으로 차올라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어둡고 암울하게 보였던 나의 불투명한 미래에 큰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불현 듯 방금 귓가에 들렸던 레이디가가에 버금 가는 가수가 될 것이라는 말이 되살아났다. “아가씨의 말을 들으니 제가 세계적인 뮤지션이 된 기분인데요?” “ 머지않아 반드시 그렇게 될 거에요.” 그녀가 웃으면서 몸을 한번 비틀 때마다 짧은 원피스의 치맛자락이 위로 말려 올라가 슬쩍슬 쩍 드러나는 눈부신 허벅지가 빚어내는 숨 막히는 아름다움에 정신마저 몽롱해져서 나는 말을 잃었다.

“TV채널만 틀거나 라디오를 들으면 노래에 관한 예능프로가 우후죽순 쏟아지는 이 시대에

들을만한

음악이나

노래다운

노래가

없다고

탄식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가수의 입장으로서 김향기씨 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캐주얼 차림의 젊은 남자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 뜬금없이 말했다. 상당히 예민한 부분이 기 때문에 나는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현 시대의 음악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의 손을 들 어 준다면 우리 가요계의 품격을 절하시킨다는 오해의 소지를 받을 수 있고, 또 그렇다고 현 시스템의 음악에 동조해 가요계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다면 음악인으로서 양심을 져 버리고 부와 인기에 영합하는 그릇된 음악인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 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모인 수많은 팬들은 음악이 강물처럼 범람하는 이 시대에 음악다운 음악 노래다운 노래를 갈망하며 모인 음악을 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분명히 이들은 중국 최남단 열대 휴양지 하이난 섬에서 멜리나 서프카의 ‘세디스트씽’ 과 영국가수 탐 존슨 의 ‘딜라이라’ 를 멋들어지게 부른 내 노래 실력에 반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세디스트씽, 딜라 이라와 같은 주옥같이 아름다운 노래가 그리워서 모인사람들이다. 한 편의 시 와 같은 노래,

- 39 -

오래 오래 기억에 남는 노래, 짙고 풍부한 과일향이 느껴지는 노래,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며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과 같이 아름다운 노래, 애인의 손수건에서 맡았던 여인의 향기와 같이 맡았던 바나나 냄새와 풀 내음 같은 노래, 황량한 겨울을 이겨 낸 초목과 붉은 꽃의 조화가 끝없이 펼쳐진 산상화원에서 아스라이 내려앉은 저녁노을과 같이 아름다운 노래가 그리워 모 인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들이 흡족해 할 만한 말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서 더욱더 애간장이 탔다. “선생님의 솔직한 의견 만 말해주면 되는데 무엇을 그리 망설이세요?” 진주 빛 조명을 비춘 듯 맑은 얼굴의 여자가 안절부절못해 하는 내가 못내 안 되어 보였던지 슬쩍 한마디 던졌다. 나는 그녀의 말에 용기를 내어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밤하늘의 별 들이 어둠속에 하얗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일제히 내 쪽으로 얼굴을 향할 때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의 움직임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가고 별 들의 움직임을 조정 하는 거대한 은하계가 바로 내 앞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황홀한 광경은 처음이었다. 진주 빛 조명을 비춘 듯 맑은 얼굴의 여자가 쓸쓸해 지 지, 않도록 하기위해서 마침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제가 만

이렇게 그래도

들의

얘기하면

할

경제적인

말은

사람들이

나이가

해야겠습니다.

기반도

열악했을

어린놈이

6~70년대

뿐

더러

‘건방지다’라고

당시에는

문화생활을

말할지

문화생활을 즐길만한

모르지

즐길만한

국민

,공연장이나

오페

라 하우스도 그렇게 많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젊은이들에겐 새로운 문 화의 아이콘이 필요했지요,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려 클래 식 음악을 듣거나 팝송을 즐기면서 차 한 잔 할 수 있는 음악다방이 그 당시 문 화의

아이콘으로

들었지요. 문화

‘오디오’

급부상했습니다. 라는

음악다방이

단어조차

욕구’ 와 ‘젊은이의 끼’를

생소하던

생기자 시절

젊은이들이

음악다방은

마음껏 발산하는

한 문화의

구름처럼

‘젊은이들의

몰려 굶주린

축으로 굳건히

자리

를 잡았습니다. DJ박스에 앉아있는 DJ는 모든 젊은이들의 우상 이였고 , 그 인기 는

지금의

아이돌스타나

연예인

인기에

버금갔지요.

젊은이들의

모든

인기를

한

몸에 받는 DJ는 신청과 함께 신청곡에 담긴 애절한 사연들도 마치 시를 읊조리 듯 분위기 있게 낭송해 주었습니다. 유리스 믹스, 다미안 말라, 밥 말리, 엘비스 프레스리, 막스,

롤링스톤즈,

스콜피언스,

배리

밥

딜런

,수모키,

매닐로우,

둘리스

리차드

- 40 -

글리브,

,

비틀즈, 조엔

프린스,

바에즈,

팻분,

등등

리차드

수많은

가

수의 음악과도 만날 수가 있었지요. 춥고 배고픈

시절 젊은이의

쪽으로 결집하다

끼를 마음껏

보니 음악에

발산하는 문화가 돈이

대한 안목과

식견이 지금의 젊은이

들지 않는

음악

보다는 한

단

계 높았던 것 같습니다. 우수한 음악적 지식을 가진 젊은 층을 따라가다 보니 음 악도

자연적으로 팬들의

성향에 맞는

우수한

음악이 생산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뛰어난 가수와, 주옥같은 명곡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 같습니다. 좋은 음악에는 반 드시 좋은 소비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뛰어난 음악이라 고해도 대 중들이 그 음악을 외면하게 되면 불후의 명곡도 세상의 빛을 볼 수가 없는 것입 니다.

뮤지션들에게

음악을 향이

사랑하는

좋은

대중들부터

진부하거나,

저속하거나,

음악, 먼저

음악다운

변해야한다고

삼류

드라마와

음악을

요구하기에

생각합니다.

같은

허접한

대중들의 음악을

앞서

음악적

취

좋아한다면

음

악을 생산하는 가수나 , 음반사도 자연적으로 대중들의 취향에 따라 움직일 수밖 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음악다운 음악은 사라지고 음악 아닌 음악이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부터

변해야한다고

생각합니

다. 좋은 노래를 찾아서 부르는 것에만 그칠 것 이아니라 좋은 음악과 좋은 가 수가

나올

수

있는

새로운

음악적

풍토를

조성하자는

것입니다.

경제력

때문에,

궁핍한 가정환경 때문에, 사회적 환경 때문에, 음악의 길을 포기 한 뛰어난 실력 을

가진

가수

세상은 실력만 나라에는

들이우리나라에

가지고는 성공할

카루소,

에디뜨

얼마나

수 없다는

피아프,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풍토가 사라지지

스티비원더

와

같은

불세출의

자본주의

않는 한

우리

뮤지션은

절대

나오지 않습니다. 자본이 없어도 뛰어난 실력만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우리사회에 빨리

안착이 되어야

위대한

가수들이 탄생될

수 있는

것입니

다. 자본 이 있어야 성공한다는 말이 진리처럼 박혀있기 때문에 실력도 없고, 음 악성도 실을

없는 오합지졸 누구의

탓으로

같은 가수들이 돌리겠습니까.

대중들의

저는

자신

우상이 되어있는 있게

말할

수

이 안타까운

있습니다,

현

대중들이

요, 바로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입니다. 제 말이 틀렸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 한번 들어주십시오.” 나는 오른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수족관 옆에 있던 마르고 키가 큰 남자가 자리 에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긴

다리가

성기시다는

- 41 -

듯

선채로

꼬고

있던

대머리의

남자도

자세를

보이는

수염이

으로 ‘원더풀

빼내더니

바로하며 덥수룩한 가느다란

원더풀’을

박수를 남자는,

쳤다. 잠바

담배연기가

연호했다.

다방

나이는 안에

푹

환상적으로 안은

사십대 쑤셔

중반쯤이거나

넣고

있던

나울거리는

박수소리로

떠나갈

야윈

좀

더

오른손을

것처럼

박수를

듯했다.

박수치는

많아 밖 치며 사

람들의 모습이 가로등이 파르스름한 빛을 허공에 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음악다방 개업을 1시간 앞둔 나는 DJ 박스 앞에 앉아 마지막으로 손님들에게 할 첫 멘트와 첫 음악을 점검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잔뜩 긴장을 해서 그런지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흠흠’ 헛기침을 하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오른편에는 누나와 여종업원이 신청곡과 신청곡 에 얽힌 사연을 적을 종이를 예쁘게 정리하고 있다. 펜을 든 나는 원고 대본을 한 눈에 들어 오기 쉽게 큼지막한 글씨체로 새로 정리하고 중요한 부분에는 빨간 형광펜으로 밑줄을 쳐 두 었다. 엄마와 동생 혜란이, 향사모 회장과 총무는 긴장되고 흥분된 얼굴로 LP판을 시대별로 나열하고 있다. 1930년대 40년대에 활동했던 미국 흑인 연가 의 제왕 카루소와, 카루소를 롤 모델로 삼았던 ‘더 로렌드 헤즈’ 의 LP판을 보고, 이런 귀한 LP판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다는 듯 마치 신기한 보물 들여다보듯이 몇 번을 보곤 했다.

1970~80년대 분위기에 맞춰 최소한의 백열등을 조명만 남긴 컴컴한 DJ박스 안에는 그 당시 DJ박스처럼 편안하고 아늑해 보이지만 한편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개업시간 10분을 남 겨놓자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수많은 손님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손님들의 평균나이가 4~50대가 주류를 이루었고, 가뭄에 콩 나듯 2~30대 손님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여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학창시절 때의 유일한 문화공간이었던 아련한 추억과 향수가 서린 음악다방이 그리워서 찾아 왔을 게다. 음악다방 한 구석에서 사이다 한잔 시키고 앉아 DJ박스에서 들려오 는 나지막한 음성, DJ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을 사로잡을 신비한 마법 같은 언어로 감성에 그대로 파고들어 파격적인 흥분과 산뜻한 설렘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누구에게 위로 받고 싶었던 마음도 남자 친구와의 비밀여행에 들떠서 잠이 오지 않아 설레는 마음을 감 출길이 없어서, 푸르고 아슴한 밤 떠난 사랑이 정점을 찍을 때 울컥치 미는 그리움을 달랠길 없어서, 저녁나절 저물어가는 만이 내려다보이는 해변의 방파제에서 첫사랑의 여자와 함께 불 렀던 노래가 생각나서 등등, 이런저런 추억과 향수를 못 잊어 이 음악다방을 찾았을 것이다.

- 42 -

오후 7시 드디어 음악다방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축하 팡 파렛이 울리고, 뒤이어 손님들의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60평이나 되는 다방 안은 손님들로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DJ 박스 앞의 앞 테이블에 앉아있는 글래머러스한 몸매의 여자가 이렇게 감동적인 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 강렬해 내게 레이저 빔을 쏘는 것 같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곡을 틀 기전 오프닝 멘트를 하기위해 영화‘ 러브 스토리’의 주제곡을 멘트의 배경음악으로 깔았다. 푸르고 깊은 밤 외로움이 정점을 찍듯이 배경음악이 잔잔하게 깔리고 나는 오프닝멘트를 했다. “푸르고 깊은 잠 못 드는 밤, 노래를 그리워하는 어느 외로운 뮤지션이 달빛을 받 아

한줄기 길처럼

인지요. 드리고

가슴

빛나는 밤하늘을

떨리는

싶습니다.

야릇한

당신을

보고

체험이기에

보지

생전처음 불러보는 여기에

못하고는

이

계신

노래를

사랑노래라고 할

당신께도

부를

수

사랑노래를

없을

것

것 들려

같습니다.

이전에는, 아니 바로 전 까지는 혼자서 아무 노래나 마구 불렀던 저입니다. 그런 데 여기에

앉아계신 당신들의

허락 없이는

노래한 소절도 부를

수 없는

까닭이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아시겠습니까?” 당신의

사랑

없이는

내

잠

드는

못

간절히 문을 의

없이는

속에

내재된

밤,

노래를

청하나이다.

나이팅게일의

분들께

다시

곡으로

정태춘

노랫말의 노래의

처음

그러면

새이고

한

번 박은옥

저는

숙여

님의

어느

당신을

외로운

‘사랑하는

않기 않기

음악다방

이’

당신의

허락

때문입니다.

푸르고

깊은

무릎을

꿇고

부를

당신의

감사를

때문이고,

뮤지션이

사랑노래를 위해

우리

깊이

떠오르지

떠오르지

불러보는

싶습니다.

머리

가사가

감성이

그리워하는

생전

열어주십시오.

수 어린

그

수

‘뮤지션’을

곡을

앞에 있게

사랑만을

드립니다.

라는

당신

닫힌

노래하는 찾아주신

우리

뮤지션

선정했습니다.

감성의 한

마리

손님

여러

음악다방

첫

7~80년대

애

슬픈 템포 송과 서정성 짙은 음악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린 한국 가요사

에

몇

안

되는

보석

같은

의

시를

의

별들이

몹시도

아름다운

‘서해에서’

‘촛불’

‘

읽는듯하면서도

뮤지션이지요.

소리

없이 밤을

그

내리는

분의 눈

떠올리게

노래는

오는

하는

밤이

주옥같은

마치

예이츠와

연상되기도 곡

들이

베를레느

하고, 대

창가

부분이지

요. 시인의

마을’

‘떠나가는

배’

‘북한강에서’

그

외에도

수많은

명곡들이 있지만 ‘사랑하는 이에게’를 첫 곡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오프닝 멘트가 끝나고 첫

- 43 -

곡을 들자 나는 머릿속이 멍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도 작게들 리고 폭발적적인 성원도 음 악에 묻혀 아련하게 들렸다. 첫 곡이 끝나자 손님들의 신청곡과 신청곡에 얽힌 사연을 적은 메모함을 누나가 들고 왔다. 반짝 반짝 빛나는 은박지 상자 같은 메모함이 내 흥분된 마음에 불을 지폈다. 누나가 조그만 소리로 참잘 했다고 말하며 카운터로 돌아갔다. 마음이 ‘오디오’ 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7~80년대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과연 음악다방 행운의 첫 신청곡의 주인공은 누가될 것인가, 하는 긴장된 순간에 다방을 가 득 메운 손님들은 숨소리조차도 내지 않았다. DJ박스 앞의 앞 테이블에 앉아있는 글래머러스 한 몸매의 여자는 첫 신청곡의 행운의

주인공은 자신의 차례가 될 것이라는 얼굴 표정으로

나를 보고는 살짝 윙크를 했다. 그 아릿한 윙크에 밝고 조그만 불길이 내 온몸을 사르는 기분이었다. 신청곡 메모함에 손이 닿는 순간 불미한 생물의 꼬리처럼 내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 짝거리는 것처럼 내 심장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일제히 나에게도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손님들의 눈동자가 별처럼 초롱초롱 빛이 났다. 나는 신청곡 함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에 만져지는 수많은 종이의 촉감이 길가에 피어난 코스모스를 만지는 이상야릇한 쾌감이 느껴졌 다. 디지털시대의 도래로 역사 속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춘 한 왕조의 이름으로 우리 곁에서 사라질 뻔했는데, 오늘 지금 이 순간 내 손에서 새롭게 부활된 벅찬 감격에 나는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DJ박스 너머로 슬쩍 보니 동생 혜란 이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내 쪽을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에 나를 지켜주는 자애로 움이 서려 있었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어 불미한 생물의 꼬리처럼 느껴지는 메모지 한 장을 꺼내들었다. 음악 분위기에 맞춰 최소한의 백열등 조명만 남긴 DJ박스 안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DJ박스 너머로 서있는 사람의 호 리호리한 모습이 보였다. 블랙슈트를 입은 중년남자가 목을 길게 빼고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 다. 밝은 미소를 띠고 한손을 들어 응원을 보냈다.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준수하게 생겼지 만 웃는 인상이 약간 험악하다. 광대뼈 주위에 희미하게 떠 도는 붉은 기운이 눈초리와 입매 까지 날카롭게 만들어 섬뜩했다. 그런대도 눈길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어주었다. 나는 겉으로 는 웃었지만 가슴이 술렁거려 아드레날린으로 만든 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신청곡 메모지를 펼쳐드는 순간 폭발할 듯한 전율을 느꼈다. “지금

창

밖에는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헤어지던

그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의 것이

- 44 -

아픔

같은

아니다 라’며

밤이

조용히

내 옷깃을

내려오고

여미어

주며

어둠속으로

떠나버린

당신이여,

당신

내

첫사랑이

생각만

하면

내

오늘따라 마음은

사무치게

소녀처럼

그리운

기쁘고

밤입니다.

설렙니다.

사랑하는

이

아늑한

초 여름밤에 나는 원 없이 당신생각에 흠뻑 취해봅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이 한 잔의 커피를 다 마시기전, 나는 당신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들을 다 떠올릴 작정입니다.

강릉

모습,

바다위에

검은

경포대

모래사장위에

비누거품처럼

발자국을

하얗게

남기며

밀려왔다가

저 또

멀리로 밀려가곤

사라져 하던

가던 파도를

보면서 ‘가지를 찢는 아픔을 겪고 파란 싹이 돋아나는 사월’ 같다고 시인처럼 말 하며 한바탕 호탕하게 웃던 그 모습까지도, 비록 아픔을 남기고 떠나간 추억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리움이란 이 세상에서 둘도 없이 훌륭한 맑은 영혼의 샘’ 이라고 말하며 제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불렀던

솔개트리오의

‘아직도

못

다한

사랑’

이

오늘따라 너무나 듣고 싶습니다. 이 신청곡을

보내

드리기

전에

하늘아래에서

솔개트리오의

당신을

‘아직도

못

사랑하는 다한

숙이가

사랑’을

ㅡ

신청해주신

숙이님은 자리에서 한번 일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입을 마이크에 최대한 가까이 대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웅성웅성 대는 손님들 틈에 젊고 생기발랄한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부끄러운 기색은커녕 싱글싱글 웃었다. 너무도 당당한 태도에 놀란 나는 그녀를 슬쩍 훔쳐보았다. 그녀도 내 쪽을 힐금 거리고 있었다. 그 하얀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어렸다. 나 역시 혼이 나간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DJ박스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아서 내게 레이저빔을 쏘는 듯한 강렬한 눈빛으로 내 마 음을 요상하게 흔들었던 글래머러스한 몸매의 여자였다. 세상에 이런 우연의 일치에 그녀도 약간 고무된 표정이었다. 자리를 가득매운 손님들은 행운 의 주인공인 그녀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숙이님이 불멸의 어도 한

히트곡 제

솔개트리오의

10위안에

마음을

아쉬움과

연상되는 개

신청하신

사로잡는

연민을

노래이지요,

트리오의

들어가는

감성적인

‘아직도

못

다한

음악으로

제가

곧잘

주옥같은

갈대밭에

저

홀로

감미로우면서도 화음은

명곡입니다.

오직

우는

때로는 노래에만

- 45 -

새

사랑’은 듣는

아직도 로

혼신의 몰입하게

못

비유한 힘을 하는

우리가요계의

노래이며, 다한

사랑에

한편의 다해

언제들 대

풍경화가

부르는

솔

매력과신비가

느

껴지는

음악이지요.

우리의

심금을

반짝

울려주는

빛을

발했다

가요계의

사라지는

진정한

가수가

뮤지션인

아니라

오랫동안

솔개트리오의

‘아직

도 못 다한 사랑’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푸르고 깊은 밤에 어울리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걸맞은 솔개트리오의 ‘아직도 못 다한 사랑’ 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시냇물 흐르듯 조용하게 흘러나오는 그 노래는 푸른 밤이 흐르는 이 커피숍과 너무나도 잘 조화된 음악이었다. 체험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과연 그런 노랫말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날 정도로 타다 남은 사랑의 그리움과 기다림을 담고 있는 서정성 짙은 느린 템포의 감성음악에 가슴속에 남은 사랑이 떠올라 눈물 짓는 손님들의 모습이 종종 보였다. 지난날의 모든 추억들이 한꺼번에 이 음악다방으로 밀어닥친 느낌이었다. 방금 전까지 시끌시끌한 다방 안은 감미로운 음악만이 흐르고 있다. 아담한 몸을 깔끔한 정 장으로 단장한 40대 남성은 눈을 지그시 감고 발로 박자까지 맞추면서 아직도 못 다한 사랑 을 따라 부르고 있다. 몸짓이 노래에 취해있다. 정성스럽게 손질한 갈색머리,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옆에 앉은 여자는 앉은 채로 출렁이는 파도처럼 몸을 심 하게 움직이며 온몸으로 음악을 느끼고 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밝게 웃었다. 상큼한 피 부에 보조개가 잡히면서 볼 아래가 꽃망울을 터트린 것처럼 화사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추억 속의 음악을 통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황홀한 환상 같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작은 키를 커보이게 하기위하여 블랙웨지 펌프스차림으로 매끈하게 관리한 다리가 유난히 돋보이는 심플한 40대 여성이 신청한 노고지리 의 ‘찻잔’ 이 조용하게 울려 퍼지자 ‘ 아 그 노래’ 하며 지나간 추억들이 하나둘씩 새록새록 피어나는 기쁨 때문에 잔주름이 지도록 웃음 짖는 손님들의 행복한 얼굴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저절로 피어나왔다. 노고지리 의 ‘찻 잔’이 후반부로 진입하자 유행지난

양복을 입고 구석진 자리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던

마흔 아홉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는 테이블 앞에 놓여있는 빨간 꽃무늬로 장식한 메모지함에 서 신청곡 메모지를 자연스럽게 빼 들었다. 그리고 우아한 손놀림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신청곡을 적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연적 으로 들어야할 아름다운 음악이 어떤 것이 있을까. 왜 사람들은 그러한 추억속의 음악을 통해 지난 시절의 향수를 회상하는 걸까. 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좋은 음악을 통해 절망, 고통, 그 리고 번뇌의 실체를 잠시 내려놓으려는 걸까. 제 멋대로 자란 머리가 귀에 찰랑거리며 닿을 정도로 그런 생각에 골몰하며 신청곡을 적고 있는 것 같았다. 촌스러운 양복을 입어도 그렇게 후줄근하게 보이지 않을 만큼 중후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남자는 TV앞에서 손님과 얘기를 나

- 46 -

누고 있는 누나를 손짓해 부르려다가 손님과 얘기가 길어질 것 같자 자리에 일어서서 자신이 직접 신청곡을 적은 메모지를 DJ박스 앞에 앉아있는 나에게 직접 건넨다. 나를 보고는 눈 아래에 자글자글한 잔주름이 지도록 환하게 웃음 짓는 그 얼굴을 나는 밝은 미소로 답례했다. 그리고 그가 건넨 신청곡 메모지를 펼쳐보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앗’하고 탄성이 새어나왔다. “가수의

이름과

노래의

곡명은

모르나

제가

고등학교

시절

서울

왕십리

극장에

서 배우 알리다 캘 리가 주연한 영화 ‘형사’ 의 OST로 ‘죽도록 사랑해’ 라는 뜻 이

담긴

이탈리아의

노래인데

그때

들었던

그

노래가

생에

아무런

기쁨도

보람도 의욕도 없이 절망 속에 갇힌 나를 일으켜 세워 주었습니다. 노랫말의 의 미는 곰팡이 듣고

몰라도 사랑고백 냄새나는 싶습니다.

한번 못해보고

왕십리 그리고

떠나버린

극장한구석에서 비틀즈의

눈물을

중심멤버였던

첫 사랑에 삼키며 존

대한 그리움을

들었던

레넌의

‘엘

그 콘도

노래가

쾌쾌한 다시

파샤(철새는

날아간다)’를 한곡 더 부탁합니다. 알콩달콩 속삭이는 남녀손님사이에서 그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자리에 앉았다. 이 가운데 많은 손님들 중에 배우 ‘알리다 캘리’가 주연한 ‘형사’ 라는 주제곡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내 눈에는 그 사나이만큼 폭 넓은 음악적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보 였다. 영화음악을 좋아하였던 나는 미국의 전설적인 배우 ‘스티브 맥킨’ 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영화 ‘영광의 탈출’ 주제가 가 수록된 LP판 옆에 그가 신청한 영화 ‘형사’ 주제곡이 수록된 LP판을 찾을 수 있었다.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LP판을 틀었다. 워낙 오래된 LP판이라서 음향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LP판 특유의 ‘치직’ 거리는 잡음 속에 ‘죽도록 사랑해’ 라는 뜻이 담긴 이탈리아 노랫 말 한 소절 한 소절이 그의 감성에 그대로 파고들어 아련한 추억이 온몸으로 퍼져 가는지 두 눈을 꼭 감았다. 개구리 길게 노래하고 , 산새들과 이름 모를 풀벌레 울음소리, 무섭도록 우거 진 울창한 나무숲이 검디검게 물들어 하늘의 존재가 사라진 깊은 숲속에서 ‘알리다 캘리’가 사랑하는 님의 품에 안겨‘ 죽도록 사랑해’라는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는 그 장면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팝 적인 멜로디와는 전혀 생소한 이탈리아의 노래에 홀을 가득 메운 손님들 까지 ,훈훈한 공기를 뚫고 귓전에 스며드는 아름다운 여자의 음성 만 큼이나 감미로운 음악에 모두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길게 이어지면서 흐느끼듯 애절하게 울려 퍼지는 그 살 떨리는 독특한 떨림이 있는 이탈리아

- 47 -

가수의 목소리에 기존 음악과는 다른 매력을 지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는지 소근소곤 속삭 이던 대화도 귀를 씻고 들어 보려야 들어 볼 수도 없었다. 좋은 노래와 좋은 명곡은 세월을 뛰어넘어 무한한 생명으로 빛나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이로 운 목소리, 감성적인 멜로디, 그리고 생소한 이탈리아어가 가미된 독창적이고 고유한 음악이 주는 감동에 손님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묘한 하모니를 형성한 영화 ‘형사’의 주제곡은 흐 느끼는 듯한 멜로디와 함께 끝이 났다. 아쉬움이 잔잔하게 일었다. 실루엣처럼 투영되는 한 사람의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기구를 이용한 운동보다 체중을 이용한 운동으로 근육이 딱 적당하고 라인이 굉장히 여성스 럽 게 잡힌 배우 소채아를 닮은 30대 여성은 눈부시게 하얀 벽에 머리를 기대고 음악이 주는 감흥에 빠져있었다. 나는 그가 신청한 두 번째 곡도 틀었다. 빛나는 눈동자와도 같은 아름다 운 사랑의 슬픔을 조용히 생각하게 하는 비틀즈의 중심축이었던 존 레넌의 ‘엘콘도 파샤’를 능선너머로 조그만 구름이 흘러가듯 은밀하게 다방 안으로 스며들게 했다. 일명 ‘철새는 날아 간다.’ 라는 너무나도 유명한 신이 준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진 존 레넌의 엘콘도 파샤가 냇물 이 흐르는 것처럼 은은히 울려 퍼지자, 자신을 확대하고, 혐오하고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앉 아있던 50대 남자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화색이 돌았다. ‘꼭 듣고 싶었던 노래가 바로 이거야’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존 레논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가슴을 저릿하게 울리는 아름답고 슬픈 음악이 주는 그 진한 감동과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재의 삶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래서 꿈과 희망을 뒤로하 고 미지의 세계로 날아갈 수밖에 없는 철새의 슬픈 비상을 사랑과 이별, 눈과 고독에 비유한 그 전설적인 명곡이 주는 감동 때문에 다방 안은 새 빨간 태양과, 새하얀 눈 덮인 간이역과 술집, 길가포장마차에서 가락국수를 먹으며 ‘형이상학적 이냐, 형이하학적이냐’ 하는 주제로 열변을 토하는 사람들, 이런 가지가지의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정원의 화사한 꽃과 싱그러운 초록 향기가 느껴지다가 또 한편으로는 강렬한 햇살아래에서 가장 눈부 신 태양 같은 노래였다. 그 노래가 끝난 뒤에도 손님들은 명곡이 주는 감흥에 흠뻑 젖어있었 다. 낮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던 클라우디아 시퍼를 연상케 하는 글래머한 여성둘이 자 리에 일어나서 DJ박스 앞으로 사뿐 사뿐 걸어왔다. 도톰하고 완만한 눈썹에 아이라인으로 동 그랗게 셰이핑한 눈매에, 섹시한 붉은 립스틱을 입술에 발라, 더욱더 육감적으로 보였다. 보조 개가 살짝 나올 정도로 웃으면서 신청곡 메모지가 아닌 A4용지를 내게 건넸다. 정성스럽게

- 48 -

써 내려간 깨알 같은 글씨체였다. 그녀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가슴이 크고 예쁘며 전체적인 몸의 라인이 살아나고, 몸의 다른 부위는 서구적으로 가늘고 여리한데 가슴에는 매혹적인 볼 륨이 있어 S라인이 선명하게 살아난다는 것을 알았다. 윤기가 찰랑찰랑 흐르는 긴 머리도 그녀들의 미모를 한결 돋보이게 해주었다. 아이라인으로 동그랗게 셰이핑한 눈매가 지워지도록 웃음 짓는 그 얼굴을 나는 슬며시 외면했다. 내가 아무 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육감적인 몸매를 자랑하던 그녀들은 그만 기가 죽었다. 그녀들은 야릿 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들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수입원목으로 고풍스럽 게 장식된 넓은 다방 안엔 손님들로 가득차서 빈자리가 없었다. 다방 문을 밀치고 들어오던 손님들도 자리가 없는 것을 보고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과 향사모 회원들은 손 님들이 주문하는 차와 커피를 쟁반에 받쳐 들고 부지런히 다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엄마와 윤희도 손님들의 부름에 ‘네’하고 잰 걸음으로 달려갔다. 아주 먼 과거에서 떠내려 온 벅찬 희열 같은 기쁨을 잠시 억누르며 그녀들이 건네준 A4용지를 펼쳐 보았다. 내가 한 눈에 보고 편안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도록 띄어쓰기와, 문장이 끊기는 부분마다 세심하게 붉은 형 광펜으로 화살표시를 하여 더 없이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읽을 수 있게 한 세심한 배려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녀들을 향한 세심한 배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손을 흔들었

다. 도톰하고 완만한 눈썹에 아이라인으로 동그랗게 셰이핑한 매혹적인 눈매의 여자가 나만이 알 수 있는 은밀한 윙크를 보냈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정성들여 쓴 사연을 읽어나갔 다. “그리움 들이 별과 함께 내려오는 밤입니다. 이런 밤이면 으레 버릇처럼 듣고 싶 은

노래가 있습니다.

김세화씨의 때 이 새록새록 청아한

‘작은

연인들’

노래들을 무척 떠오릅니다. 산사의

얼마 전

늦은

정미조

택시 안에서 씨의

임수정씨의

‘개여울’을

듣게

좋아하였고 틈만

나면 불렀던 기억이

현실의

보여주는

풍경소리처럼

뜨거움을 신비한

그리움을

열정적인

떠올리게

‘연인들의

이야기’와

되었습니다.

여고시절

마치 어제의 목소리

하는

일처럼

보다는

목소리와,

어느 아릿한

눈물 같은 게 끼여 있는 여성만이 갖고 있는 임수정씨의 창법. 간결하고 무심하 게

노래하면서도

목소리에

낙엽이

떨어지는

짙은

김세화의 안개 같은 목소리, 잔잔한 호수에 물결이 이는

서정적인

음색이

돋보이는

촉촉한 목소리와, 때로는 아드

레날린이 비처럼 쏟아지는 듯한 정미조의 ‘개여울’을 듣고 싶습니다. 추억속의 명곡만을

- 49 -

들려주는 뮤지션음악다방의 무한한 발전을 진심으로 빕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여인들이낮게 떨리는 목소리로 신청곡과 신청곡에 얽힌 사연을 읽어 나간 나는 그녀들의 신청곡인 임 수정씨의 ‘연인들의 이야기’를 틀었다. 아주 먼 곳으로 달빛이 이 끄는 것 같은 임수정의 아릿 한 목소리가 허공에 매달린 샹들리에 불빛과 대형수족관 과 넓은 홀 안을 감미롭게 스며들었 다. 연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무작정 한 여자를 사랑하고 싶은 충동이 불 같이 일어났 다. 연인들의 이야기가 끝이 나고 뒤이어 김세화의 ‘작은 연인들’ 이 흘러나왔다. ‘언제 우리 가 만났던가, 언제 우리가 헤어졌던가, 만남도 헤어짐도 아픔이었지’ 첫 소절이 나오자 다방안 의 분위기는 더 훈훈해 진다. 친구와 싸운 일, 자존심 상한 일,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는 애인 때문에 상처받은 마음, 말 못할 고민으로

상심에 빠진 사람들도 추억 속에 노래가 흘러

나올 때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걱정 근심들을 잠시 내려놓았다. 역시 음악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다. 세상살 면서 웃을 일도 많이 없을 테지만 오늘 만큼 은 다방 안을 가득 메운 손님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7~80년대로 되돌아간 그런 행복한 얼굴이 었다. 노래가 홍수처럼 범람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노래를 잃어버린 것처럼 비어있는 가슴한 곳을 넉넉하고 풍요롭게 채워주는 감성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추억속의 노래에 손님들은 열 광했다. 간결하고 무심하게 노래하는

하면서 도 이곡이 주는 의미를 살리 기위해 개여울이

주는 몽환적인 신비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해 서늘하면서도 안개 같은 음정과 함께 독특한 떨림 이 있는 개성적인 창법이 마치 개여울에 앉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이 곡을 신청한 가슴이 크고 예뻐 전체적인 몸의 라인이 살아나 꼭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여 주인공 같은 그녀들은 노래에 깊이 취해있다. 개여울이 끝날 시간이 다가오자 11시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놓았던 휴대폰 벨이 울렸다. 그 제야 약간의 피로감이 몰려오는지 눈을 깜빡거리는 횟수가 많아졌지만, 행복하고, 꿈만 같은 시간을 보내어 장장 5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이런 행복한 순간은 처음이야.” 모델같이 밋밋한 몸매를 가진 여자 손님이 툭 던진 말이 내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시종일 관 7~80년대의 음악을 고집하면서도 느끼하지 않고, 촐랑대거나 또 그렇다고 너무 오버하지 않는 적절한 품위와 세련된 기교로 DJ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격력의 말처럼 들렸 다. 나는 음악다방이 끝났다는 짤막한 라스트 멘트로 음유시인 박인희 의 ‘끝이 없는 길’ 로 대신했다. 아름다운 서정시를 읊조리는 듯 한 감미로운 박인희 의 노래가 조용히 울려 퍼졌

- 50 -

다. 손님들은 방금 전까지 와르르 쏟아내던 말들을 거두고 영혼의 울림 같은 아름다운 노래에 귀를 쫑긋 세웠다. 손님들이 가고 없는 불 꺼진 다방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다방 안은 후덥지근한 열기로 차 있었다. 몸이 축 늘어지도록 피로감이 밀려왔다. 편안하게 앉은 자세에서 얼굴만 내밀고 깜빡거리는 눈으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쌍꺼풀 진 눈, 메마른 입술, 평소보다 하얗게 보이는 피부가 백인종의 피부처럼 하얗고 건조한 물기를 품고 있어서, 몸이 축 늘어질 정도로 내 몸 상태가 고단해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뜨자 천장의 샹들리 에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묘한 친밀감을 느꼈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소파 끝 에 있는 담배로 손을 뻗었다. 일어나 갑에서 한 개비 담배를 꺼냈다. 누나가 침대 대용으로 사용하는 소파 밑에 놓인 푸른 플라스틱 쓰레기통에 손님들이 피운 담 배꽁초와 찢겨진 메모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담배를 진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휴지통에 버 려진 찢겨진 메모지 한 장을 꺼냈다. 찢겨진 메모지에서 여자 분 냄새가 났다. 불을 붙이니 담배 불빛에 깨알같이 또박또박 쓴 글귀가 보였다. 눈처럼 하얗고 촉촉한 물기를 품고 있는듯 한 문장이 칡자향 같은 냄새로 내 눈앞에 점차 엷어지듯 나타났다. ‘손님들의 신청곡을 들을 때마다 귀 끝으로 느껴지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요. PS. 사랑해요, 잘생긴 DJ오빠.’ 순간 내 눈가에 엷은 이슬이 맺혔다. 콘서트 7080 프로에서 남궁옥분의 ‘나의 사랑 그대 곁 으로’ 가 그리다 만 정물화처럼 뿌옇고 축축한 다방 안에 살포시 내리듯 깔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지는 그런 밤이다. 잠은 오지 않고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무 심하게 흘려가는 시간은 내 지나간 과거시절처럼 변함없이 지나간다. 오늘은 항상 과거 진행 형이다. 심야 라디오 음악방송에서 코린 베일리래 의 ‘아이 케 포유( I care 4U)’ ‘너를 위해 서 고칠게’ 라는 감미로운 노래가 들린다.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아기 울음소리와 함께 묘한 하모니를 형성해 더욱더 감성적으로 들린다. 오늘처럼 잠 못 드는 밤에 잊지 못할 추억이 있 다. 중학교 2학년 때 나와 내 여자 친구는 열병에 걸린 것처럼 이종환씨 가 진행하는 ‘별이 빛나는 밤’ 심야음악방송에 중독되어 2년 동안 매회 거르지 않고 별이 빛나는 밤을 애청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종환씨가 진행하는 심야음악 방송에 대한 그리움과 감동보다는, 뭘 입 어도 옷

태가 사는 내 여자 친구에게 온통 내 마음이 쏠려있었다.

- 51 -

편안한 자세에서 라디오를 청취하기위해 꽉 조이는 청치마를 느슨하게 하기위하여 단추를 푸 는 순간 백옥 같은 배꼽이 보이고 몸을 한번 뒤척일 때마다 가늘고 날씬한 긴 다리사이로 언 뜻 언뜻 비치는 분홍색 팬티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매력 있고 아름다운 몸 매를 가까이에서 보면 더욱 빛이 나는 완벽하게 균형 잡인 바디라인을 보고는 가슴이 쿵쾅 쿵 쾅 뛰었던 기억밖에는 없었다. 이종환씨 가 진행하는 별이 빛나는 밤을 청취했던 그 당시 골 방의 밝기도 뜨거운 내 가슴에 불을 지피는데 크게 한 몫을 했다. 은은한 백열등 불빛 속에서 핏줄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고 눈부신 가슴이 살짝 드러날 때 그녀에게 어필하고 싶은 욕망이 굴뚝같이 치솟곤 했다. 불타오르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하며 알 리사 키스, 메르세데스 소사, 레이찰스, 라파엘 사딕, 이런 가수들의 음악을 들었다. 하지만 이런 가수들의 노래보다도 그녀가 뿜어내는 뜨뜻미지근한 숨결과 ,수분 크림처럼 녹 아드는 촉촉한 분 냄새 밖에 는 기억이 없다. 음악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보다 화사하고 빛을 머금은 듯 생기 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취하여 좋아하지도 않는 음악을 좋아하는 척 했다. 그 당시 만인의 연인으로 사랑받았던 영화 ‘젊은이의 양지’ 주연배우인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신 비로운 보라색 눈동자와,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칼, 도자기 같이 흰 피부, 과장되게 그린 짙은 아이라인과 강렬한 눈썹. 그리고 10대 소녀처럼 가느다란 허리, 예술적인 가슴라인으로 세상 모든 남자들의 애간장을 태우게 했던 세기의 여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내가 좋아하는 그녀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예쁜 외모뿐만 아니라 그녀는 문학과 음악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생소한 작가와 음악가의 이름이 줄줄 쏟아질 때면 내 귀를 의심하곤 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 들’에서 ‘당신에 대한 애 타는 사모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귀한 것이 될 것입니다 , 그리고 당신은 저의 심장에 대해서 더욱더 바꿀 수 없는 존귀한 보배가 되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저 의 유일한 그리고 소중한 친구이십니다. 이 도시에서 저를 사랑해 주신 분은 당신 한 분 뿐이 었습니다. 라는 감동적인 문구를 나에게 들려줄 때는 이 세상에서 나를 사랑해 주신 분은 그 녀 한 사람 뿐일 거라는 즐거운 상상도 들었다. 창가의 별들이 몹시도 아름다운 밤에 체호프와 배우 크니페르 의 연애 이야기, 카프카 가 약 혼녀 밀레나에게 향한 애틋한 사랑, 슈만이 아내 클라라를 생각하는 헌신적인 마음, 플로 베 르가 애인 루이즈 콜레에 대한 연민 등, 세계 명사들에 대한 일화를 거침없이 쏟아 놓는 그녀 의 빛나는 지성에 나는 감탄과 경의를 보냈다. 중학교 졸업을 끝으로 그녀는 읍내에 있는 여 고로, 나는 남고로 진학했다. 졸업식 날 시장부근에 있는 중국집에서 그녀와 함께 자장면을

- 52 -

먹었다. 그녀의 아릿한 숨결과 아련한 분 냄새를 더 이상 맡 을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 한 켠 이 찢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이런 침울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방긋 웃으며 “항기야 우리가 좋아하는 별밤을 더 이상들을 수 없어 섭섭하겠다.” 라고 말했다. 속이 뒤집혀진 나는 “그래 현희 네가 좋아하는 비틀즈나, 올리비아 뉴튼존 의 음악도 들을 수 없어 슬프다” 나는 차갑게 쏘아 붙였다. 기분이 좍 가라앉아있던 나는 항상 공주처럼 예쁘고 착해 보였던 그녀가 그 때 만큼은 마귀할멈처럼 미웠다. 그 만큼 그녀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녀가 내게 했 던 마지막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향기야, 인생이란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가는 열차와도 같은 거야. 놓쳐버린 열차 를

아쉬워한다고

해서

지나가

버린

열차가

너

하나만을

위해서

되돌아오지는

않아. 다음 열차를 기다리기 위하여 사람들이 없는 텅빈 역 대합실에 몇 시간이고 앉 아 있는 것과 같은 거야. 그래서 셰익스 피어는 ‘궁핍한 사람에게 마시게 할 약은 오 직 희망뿐’ 이라고 했어. 놓쳐버린 열차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다음 열차를 기다리 기 위해 몇 시간이고 앉아있는 인내하는 고통 없이는 성공이라는 축배를 들 수가 없 없는 거야‘ 그녀의 말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귓가에 뱅뱅 맴도는 것 같아 더욱더 내 마음을 아프게했 다. 잠 못 드는 밤 애써 잠을 청해보려고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은 나는 기억 속 깊이 잠재해 버린 과거와의 상념에서 넉다운이 된 기분이었다. 애써 잠을 청해보려고 해도 도무지 잠이 오 지 않았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집 앞에 있는 공원으로 나갔다. 어둡고 적막한 공원에는 아련 한 과거의 꿈을 망각 속에 되씹고 있는 듯한 가로등만이 쓸쓸히 빛나고 있었다. 나의 시야에 완전히 잡히는 것은 혼자가 된 외로움이 아니라 이 세상에 나 혼자 내쳐진 느낌 때문에 더욱더 비참한 생각에 잠겼다.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꿈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마시게 할 약은 오직 희망뿐이라고 했는데, 언론과 매스컴이 똘똘 뭉쳐 나를 죽이기 위하여 칼을 곤 두세우고 있는 이세 상에 내가 가수로서 내 꿈을 펼친다는 것은 정말 희박해 보였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 같았다. 폭주족이탄 오토바이 몇 대가 굉음을 울리며 내 앞으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시야에 번쩍거리는 라이트불빛 때문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등 뒤에 묵직하게 고여 있는 공기의 어둠에 몸을 맡기며 공원을 서성거렸다. 공원의 벤치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묘한 형체를 하고 있었다. 나는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 그녀가 즐겨 불렀던 둘 다섯의 ‘밤배’와 장덕의 ‘소녀의 가로등’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이 하

- 53 -

늘밑 어딘가에 나처럼 늙어갈 그녀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복 받쳐 울컥 눈물이 났 다. 그때 바로 내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김 선생님 아니세요?” 뒤 돌아보니 내가 단골로 가는 미용실 사장이었다. 마치 군대 갔다 돌아온 애인을 만나는 것 처럼 무척 반가워했다. 멋진 스팽글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얼핏 보면 하얀 마네 킹에 옷 입혀 놓은 듯한 밋밋한 느낌이지만 순간의 부주의로 은밀한 속살이 드러날 때 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미숙씨 께서 야심한 시간에 공원에는 왠 일로?” “ 잠이 오지 않아서요.”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한쪽 볼을 실쭉대며 해맑게 웃었다. 천사같이 선한 여자만이 할 수 있 는 순박한 웃음 이었다. 그리고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향기씨

덕분에

저는

요즘

다시

태어난

기분이에요.

뭐라고

표현할까

아-가도가

도 끝이 없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아요. 8시에 끝나는 영업시간을 1시간 단축하여 뮤지션 음악다방에 출근도장 찍는 재미로 살 지요? “아, 그러셨어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럼 개업식 때도 오셨나요?” “아니

그때는

단체

손님이

밀려있어서

가지

못했어요,

미안하지만

음악다방

개업

한지 한 달 후에 갔지요. 기대보다는 호기심 때문에 갔는데 DJ박스 안에서 강렬한 저녁 햇살을 등지듯. 근엄하게 앉아있는 향기씨를 보고 얼마나 놀라고 흥분됐는지 아세요.” “밤

분위기에

맞춰

최소한에

백열등

조명만

남긴

컴컴한

DJ박스

안에

앉아있는

저를 보고 놀랐다니요.” 이해하기 힘들다는 뜻으로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에는 잔뜩 힘이 실려 있어서 심하게 떨렸 다. 공원 밖이 갑자기 시끄러웠다. 술에 인사불성이 된 남자가 허공을 향해 냅다 소리치는 고 함소리에 서로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술 취한 사람의 고함소리가 누그러질 때까지 그 녀는 기다리고 있었다. 오장육보에 든 바람 이 빠질 정도로 시원하게 고함을 지르고 난 중년 남자는‘ 대평양 이든 대서양이든 당신이 부르면 무조건 무조건 달려 갈 거야’ 하는 유행가를 부르면서 비틀 비틀 거리면서 E마트 쪽으로 가고 있었다. 끈끈한 시선으로 그 남자를 쫓던 그 녀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인기 정상의 가수 공연 때 관람석의 맨 앞쪽에 앉아있던 저는 무대로 뛰어올라가

- 54 -

서 가수의 손을 한번 잡아 본 뒤 가수의 체취가 묻은 오른손을 일주일동안 씻지 않 고 지낸 적이 있었지요. 또 어릴 때는 가수의 노래도중 스커트, 나 하얀 스카프, 좀

더 심하면

착용하고 있던

팬티스타킹까지

벗어던지며 그

가수의 노래에

열광

한 적이 있었지요. 솔직히 그 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마음에 아련하게 와 닿거나, 감동의 도가니로 밀어 넣을 만큼 환상적이 거나, 음악성 짙은 울림도 아닌 저속한 노래인데도

왜 그때는

그 가수의

팬티스타킹까지

벗어

던졌던

곰곰이

보니

‘군중심리’

생각해

노래가

일이

그렇게 황홀하게

지금생각하면

같아요.

옆에

이해가

있는

느껴져 착용하고 가지

사람들이

있던

않아요.

이제와서

열광해서

소리치니

까 나도 덩달아서 소리치고 흥분하며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던 것 같아요.품위 없 는 짓인 줄 알면서도요.”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녀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진정하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 했다. 그녀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중단된 말을 이었다. “저는

손님들의

순간

숨이

신청곡과

멎어지는

향기씨가

느낌이

즉석에서

들었어요.

기타를

당신의

치며

부르는

감미로우면서도,

노래를

때로는

듣고

영혼의

울

림 같은 청아한 목소리로 혼신을 힘을 다해 탐존슨의 ‘프라우드 메어리’와 비틀즈 의

‘렛잇비(let

날린

이

it

be)를

머리에서부터

팬티스타킹을

던지며

부르는

발끝까지 열광했던

당신의

감성적이면서도

열광적인

노래에

느낌이었어요.

스커트나

착용하고

향기씨의

발꿈치에도

역류하는 최정상

가수의

노래는

아드레 있던 미

치지 못했어요. 더 나를 감동케한 것은 손님들의 신청곡이 하나같이 주옥같은 명 곡들 이였고 ’노래는 많지만 정말 노래다운 노래, 들을 만한 노래가 없다고‘ 이 구동성 으로 한목소리를 내는 이 시대에 그 개탄하는 소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별처럼 빛나는 노래들만이 나올 때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지요. 라디오 건. TV의 음악방송 품격

높은

프로그램 전부를 합한 것 보다 향기씨의 ’뮤지션‘ 음악다방이 훨씬 더 음악을

들려주었지요.

오죽하면은

뮤지션음악다방은

생방송을

해야한

다. 음악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는, 특히 음악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PD,작 가, DJ는 뮤지션 음악다방 DJ인 김향기 씨에게 음악의 기초부터 배우라는 말이 공 공연하게 나왔을까요. 뮤지션 음악다방을 다녀간 손님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그 입소문 때문에 지금 가요계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시끄러운 거 향기씨도 알 고 있잖아요.”

- 55 -

그녀의 표정에는 범접하지 못할 진실이 서려있었다. 침묵만을 일관하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충만한 감동으로 가득 찬 그 눈동자는 마치 백조가 헤엄치는 그윽한 호수와도 같았 다. 나는 그녀에게서 나는 베이비파우더 향을 맡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숙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저는

그렇게

대단한

뮤지션이거나

좋은

명곡만을

테마로 올리는 DJ는 절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음악은 거창하거나 아주 대단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은 제가 부르는 노래나, 제가 선곡하는 음악에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생각하는 음악에 대한 제 나름 대 로의 철학이 있다면 훌륭한 음악엔 반드시 적당한 감동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그러나 감동이 반드시 좋은 음악을 구성하는 백 프로의 요소는 아니지 요. 영혼의 울림과 같은 감동과 함께 그 감동에 걸 맞는 자기의 음악적 색깔이 병 행

되어야

의존하기

한다는

것이지요.

보단 스스로에게

그리고

가장

중요한

끊임없이 도전하며

좋은

것은

음악적

역설 같은

지식이나

경험에

음악을 구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색깔 있는 음악을 대중들에게 아낌없이 보여 줄 수가 있지 요.

이런

독창적이고,

고유한

음악만을

위주로

곡을

선별하다보니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받은 것 같아요.” “정말로

훌륭한

뮤지션다운

철학이에요.

우리나라

가수

중에

여기에

해당하는

분

이 있나요.” 그녀는 신이 빚은 듯한 늘씬한 각석미가 돋보이는 긴 다리를 벤치 앞에 있는 소나무 앞에 걸 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만지면 날아갈 듯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탄력 있고 윤기 나 는 다리를 만지작거리며 내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 것인지 두 귀를 종긋 세우고 있었다. 가로 등 불빛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별빛처럼 쏟아지고 있다.

“6~70년대에 활동했던 ‘배호’라는 뮤지션을 꼽고 싶어요. 그 가수가 죽은 지 반세 기가 훨씬 넘어도 아직도 노래방이나 카바레, 술집에 가면 배호씨의 노래가 아직 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지요. 잠시 동안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다가 우리들

의 기억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가수들, 한 두곡 히트 치다가 후속곡을 내지 못 하고, 무대 뒤를 명멸해간 반짝 가수들은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 가 요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아이돌스타나 걸 그룹들이 과연 반세기가 지난 뒤에도 사 람들 이 그들의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추억할까요. 제가 생각할 때는 10년도 못가 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한마디로 반짝 스타지요. 아이돌스타나,

- 56 -

걸 그룹들은 같은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춘 대중음악이기 때문에 그들 의 음악에는 국민들의 정서를 대변할 수 있는 혼, 정신, 의식 그런 가치가 없지요 그래서

음악 수명이

길지는 못하지요

그들에 비하면

배호라는 뮤지션의

수명은

참으로 대단하지요, 반세기가 아니라 한 세기가 흘려도, 아니 이 땅의 노래가 사 라지지 않는 한 배호의 노래는 영원할 것입니다. 음악에 대해 문외한 사람들이 배 호를 트로트가수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알고 있는 거지요. 한국인의 눈물 슬픔 ,비애, 한(恨) 통곡 우리 한민족만이 가지는 민족의 정서의 아픔을 자신의 음악 속 에

응고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고유한

음악으로

승화시킨

독보적인 뮤지션이

지요. 그래서 그분의 음악은 60년대나 2015년대나 그 음악이 주는 감동의 울림 은 조금도 변함이 없지요. 외국 뮤지션 중에서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한 뮤지션 들이 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우리에게 조금 생소한 ‘카리예 웨스트’ 라는 흑인 뮤지션을 꼽고 싶어요. 그의 데뷔 앨범과 마지막 두 장의 앨범을 통해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받았지요. ‘하트

브레이크(Heatr

break)’

심장마비라는

그의

노래는

마치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이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기를 솔직히 드러 낸 음악으로, 주류 음악계 의 지각변동을 일으켰지요. 내 기억에는 그 정도로 감정 선이 돋보이는 앨범은 이 제 것 그 어디에도 없었지요. 카리예 웨스트의 음악을 들을 때면 실존이 강조되어 허무가 된 건지, 허무 속에서 실존이 발견된 건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다가도 출렁 이는 푸른 파도가 끊임없이 육지로 달려들 듯 미래에 대한 절망과, 인간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존재에 대한질시, 생활에 대한 환멸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를 하는 기분이 느껴지는 음악이지요. 팝적인 멜로디와 악기 구성에 다양한 사운 드 효과와 심헐적인 보컬이 더해져 그 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하였고 그리 고 그는 무대에 올랐을 때 무릎을 끊고 절교하는 등. 노래에 완전히 심취된 퍼포 먼스 로 오랫동안 화제가 되었던 뮤지션이지요.“ “역시 음악적인 안목이 뛰어나네요.” 존경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녀가 벤치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휴대폰에 찍힌 전화번호를 확인한순간 그녀의 얼굴빛이 노오 래 지면서 안색이 창백 해보였다. 전화를 받지 않자 휴대전화가 계속 울렸다. 받고 싶지 않는 전화였는지 전원을 꺼 버렸다. 그리고 열정적인 섹시함을 담고 있는 체리망고빛 입술을 내 귀에 살짝 갖다 대었다.

- 57 -

“내가 으면

좋다고

죽자

못이기는

척

살자

따라

데이트한번

다니는

남자예요.

해주려고

백수인

했는데.

주제에

얼굴형이

생기기라도

범죄형에다가,

잘했 성격마

저 뭣 같애 정나미가 둑 떨어지는 거 있죠. 거기다 치마만 두룬 여자만 보면 발정 난 수캐처럼 끙끙 되지를 않나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남자의 조건을 거의 모두 완 벽하게 갖춘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도 드물긴 하지요.” 그녀는 묻지는 않는 남자의 얘기까지 줄줄 내 뱉고는 갑자기 내 팔장을 끼었다. 뿌리치려고 몸을 비틀려다 체리망고 빛 홍조가 입술과 양복을 살짝 물들여 청순 섹시하게 느껴지는 그녀 의 매력에 나는 판단력을 잃었다. 그녀가 하는 대로 순순히 응해 주었다. “향기씨 오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오늘 하루만 내 애인이 되어주실 수 있지요?” 내추럴하고 은은한 반짝임이 살아있는 눈썹을 깜박이며 말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나는 땅 만 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실망한 표정이 나타났다가, 나도 모르게 ‘OK’ 하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자 기쁨에 겨워 날아갈

몸짓으로

나를 와락 껴안았다. 나는

순간 당황하면서도 기분이 자릿했다. 백옥같이 흰 살결 풍만한 가슴과 매혹적인 엉덩이, 살 떨리도록 아릿한 뇌쇄적인 눈빛, 열린 듯 닫힌 듯 분간이 안가는 키스를 부르는 로맨틱한 입 술, 타이트한 속옷 사이로 은밀히 드러나는 풍만한 가슴, 지금까지 꿈꾸고 상상했던 내 이상 형의 조건을 모두 완벽하게 갖춘 여자였다 몸매의 절반을 가슴이 차지할 것 같은 인상을 주면서도 37.23.26 여성의 이상적인 몸매를 대변하는 세기의 배우 마릴린 먼로의 가슴과 허리, 엉덩이를 눈앞에 보고 있는 그런 착각마저 들게 했다. 온 세상 남자들이 꿈꾸는 ‘섹스 심벌’ 로 기꺼이 판타지의 상대 역할 이 되어준 ‘7 년 만의 외출’에서 열연한 마릴린 먼로가 지금 나를 안고 있는 느낌에 나는 장미의 정원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욕정을 억누르고 그녀를 나에게서 떼어 내었다. 손목시 계가 새벽2시를 가리키는 데도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넘실거렸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 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보도 한 가운데서 서로 부둥켜안고 뜨겁게 키스를 하고 있는 젊은 남 녀 곁을 지났다. 가까이 바라다 보이는 건물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평소 와 다름없는 풍경이었지만 단 한 가지 다른 점은 미술시간에 데생을 하듯 그린 듯한 건물이 우리를 손짓해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바(BAR)가 있는 2층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남녀 한 쌍이 앉아있 었다. 근육질의 몸을 캐주얼 차림으로 단장한 모습, 조직에 오래도록 몸담은 듯 썰렁한 기운 이 감도는 남자, 나를 쳐다보고는 눈썹을 심하게 찡그린 다. 그 표정은 둘 만이 오붓하게 즐

- 58 -

기는 데이트를 나 때문에 망쳤다는 표정이었다. 알맞게 술에 취한 삼심대 초반의 관능적인 여 자는 그 남자의 어깨에 몸을 슬며시 기대면서 느끼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야 이제 그만 일어나자 아까운 시간을 바(BAR)에서 만 보낼 수는 없잖아” 하면서 그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남자가 카운터로가 술값을 계산하는 동안 그녀는 기다리기 가 무료했는지 우리 앞에 있는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려고 허리를 숙였다. 그 바람에 입고 있던 초미니스커트가 더 이상 의상 역할을 하지 못해 핑크색 팬티와, 뇌쇄적인 엉덩이가 그대 로 드러났다. 나는 더 이상보기가 민망해 카운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물에 가라앉 은 것처럼 부옇게 보이는 나무로 된 원탁의자에 앉아 데킬라 한 병을 주문했다. 그녀와 정답 게 대화하는 동안 주문한 술이 나왔다. 하얀 접시 한가운데에 소금과 레몬이 소담스럽게 담겨 있었다. “이름을 부르니까 어색해요. 이제부터 오빠라고 부를게요, 괜찮지요” 그녀는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환하게 웃어주었다. 괜찮다 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무언가 위로받고 싶었던 그녀는 매력적인 오빠 를 얻었다는 들뜬 마음에 탄력 있고 윤기 나는 다리를 내 앞으로 쭉 뻗으며 기쁨에 겨워 함박 웃음을 지었다. “오빠가 생겨서 정말 기뻐요.” “나 역시 예쁜 여자동생이 생겨서 정말 좋은데.”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그녀는 반신반의 하며 되 물었다. “계속

존댓말을

쓰다가

제가

오빠라고

하니까

바로

말을

놓았는데

오빠라고

안

했으면 저에게 계속 존댓말을 썼겠지요.” “아마 그렇겠지 오빠라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말을 놓게 되었으니까.” “제가

오빠라고

부르기를 정말

잘 한

것 같아요

안

그랬으면 이렇게

가까워지지

도 않았겠죠.” “그렇지.” 속으로 백번 천 번 맞는 말이라고 하면서 나는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빈 잔에다 데 킬라를 가득 채워 건배를 제의하기 위해 내 옆얼굴을 살며시 쳐다보았다. 톡 쏘는 데킬라 거 품이 보글보글 술잔에 끊어 올랐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잔을 들어 ‘짠’하고 소리가 날정 도로 그녀의 잔에다 부딪친 다음에 50도가 넘는 독한 술을 입안에다 털어 넣었다. 행복이 시 그널 음악이 깔리는 것처럼 밀려왔다. 나는 빈 술잔을 들며 가벼운 웃음소리가 날 정도로 피

- 59 -

식 웃었다. 행복한 사람만이 지어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접시에 담긴 소금을 찍으며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이렇게 예쁜 동생을 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내 모습을 눈여겨 쳐다보고 있던 바(BAR) 여주인이 끈끈한 시선으로 술잔을 들이키던 내 얼 굴을 핥고 있었다. 심지어 입술위에 점까지, 그 눈동자는 사랑스런 배우 ‘오드리 햅번’ 이 로 마의 트레비 분수 앞에서 동전을 던지기 위하여 눈을 크게 지켜 뜬것과 흡사했다. 그녀의 매 혹적인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면서 아름다운 음악과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혹시

중국

최북단

휴양지

하이난

섬에서

미국

레전드

급

가수

제임스브라운과

함께 공연을 했던 가수 김향기씨 아니세요?” “맞습니다. 그런데 어 어떻게...?” 나는 너무나 놀라 말까지 더듬거렸다. 밀물처럼 밀려오던 잠이 한순간에 확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옆에 있던 빈 의자가 바닥으로 넘어지는 소 리에 테이블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손님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금방이라도 흘

러내릴 것 같은 검은색 튜브 톱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바보처럼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풍만한 가슴 굴곡, 우유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 결, 멋과 자유를 상징한 것처럼 예술처럼 풀어헤친 머리카락, 유난히 반듯한 어깨와 곱게 뻗는 팔, 발레동작을 펼치듯 우아하게 움직이 는 다리는, 잔잔하게 일렁이는 호숫가의 물결처럼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너무 감격해서 그녀 의 눈에는 눈물이 이슬처럼 맺혔다. 떨리듯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그때 선생님께서 부른 노래는 내 생애 가장 아름 다운

노래였어요.

무대

위에서

기타를

치며

멜라니

서프카의

‘쎄디스트씽”과

톰

존슨의 ’딜라이라‘를 부르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제가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를 때 사장님께서 그곳에 계셨습니까?” “네,

중국에

사는

친한

친구가

한번

다녀가라고

얼마나

극성을

부리던지

요?

그

성화에 못 이겨 중국에 갔는데, 마침 하이난 섬에 제가 좋아하는 가수인 제임스 브 라운 공연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 갔다가 깜짝 출연한 선생님의 노래를 듣게 되었 지요. 2년 후에 선생님을 제 가게에서 뵙게 되다니 이런 우연이 어디 있겠어요.” “듣고 보니 사장님과 저는 보통 인연이 아닌데요.”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멜라니 서프카의 ‘슬픈 연가’를 부르시는 선생님을 보고 느낀 건데 선생님은 노래

- 60 -

를 노래답게 부를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지닌 것 같아요. 조용한 노래는 조용한 노래답게

그리고

가장 따라하기

힘

지는

제임스

브라운의

‘맨스

저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고요.

주제곡인

‘마이

하트

윌

들면서도

맨스

고온(MY

월드’를 특히

헤비메탈 음악처럼

거의

팝의

Heart

완벽하게

디바

will

소화해내는

셀린디옹의

Goon)’과

카리스마가

영화

이탈리아

느껴

것을

보고

,타이타닉의

여가수

밀바가

부른 ‘유 월 해브 투 스윙 잇 미스터 파키나니(You’ll have to swing it’ MY P aganini)’

이

두곡은

너무나

환상적

이였어요.

나무에

눈

내리는

소리처럼

들리

기도 하다 물이 빠져 드러난 수로 위로 해가 지면서 빼어난 가을단풍을 닮은 붉 은

노을이

아스라이

깔리는

소리처럼

들리다가,

화물선도

끊어진

무인역을

지나

던 기차가 여러 번의 가파른 고갯길을 지나 깊은 가을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소 리처럼 ‘우먼

너무나 인

환성적인

러브(women

노래였어요.

IN

미국

Love)까지

싱어

불려

가수인

주었더라면

바브라 아마

내

스트레이 생애에

샌드의 가장

감

동적인 순간 이었을 거예요.” 그녀는 나를 만난 기쁨에 어찌 할 바를 몰라 호들갑을 떨면서 나를 만난 감격을 이기지 못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도 여사장을 보았다. 수정처럼 맑은 그녀의 눈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던 고혹적인 눈이었다. 내 얼굴을 태울 것 같이 뜨 거운 그녀의 시선 속으로 녹아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생겼다.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그녀의 눈 속 에 내가 비집고 들어가기는 나는 너무나 크고 거대한 존재였다. 나는 비로소 그녀의 뜨거 운 시선을 피부로 느낄 때부터 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제

음악을 이렇게

아름답고 제

마음에 쏙

들게

표현한 분은

사장님이

처음이십니다. 혹시 예전에 음악에 관련된 직종에 계시지 않았어요?” “음악에는 관심은 많았지만 음악에 관련된 직종에는 있지 않았어요.” 여사장은 직종이라는 단어에 조금 강한 액센트 를 주어 강조했다. “사장님의

음악적

수준은

거의

전문가

수준입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가수를

꼽는

다면 누굴 제일 먼저 거론하고 싶으세요?”

“80년대를 풍미한 팝스타 중의 한사람 인 프린스를 좋아해요.” “어떤 면에서 좋아합니까?” “프린스의 첫 앨범

음악은

포근하면서도

많은

것을

‘포유(For You)’를 듣고 혜성처럼

- 61 -

느끼게

해주어서

좋아하지요.1978년

등장한 그는 록, 불루스

재즈, 힙합,

핑크록,

소울,

뮤지션이지요.

뉴웨브

등

다양한

기라성

같이

장르의

뛰어난

음악을

수많은

자유자재로

뮤지션이

추구하는

있지만

유일무이한

프린스만큼

음악적

영역이 넓은 뮤지션은 없는 것 같아요.” 그녀는 말하면서도 넋이 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프린스와 같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화해 내는 나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에 반가움, 놀라움, 충격이 한데 뒤 섞여서 혼신이 온 것처럼 얼떨떨해진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그리워하고, 음악에 대한 갈증과 타는 목마름으로 똘똘 뭉쳐있다는 것을 확 연히 느낄 수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여사장의 그윽한 눈 속에 여전히 음악에 대한 변함 없는 애정이 담겨있다. “프린스의 음악 중에 가장 애정이 가는 곡은요?” 약간 들뜬 기분이 되어 그녀를 보며 말했다. “프린스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원도브스

크라이(when

Doves

cry)’

‘다이아

몬즈 앤 펄스(Diamonds and Pearls)’ ‘키스(Kiss)’를 좋아해요.” “프린스 말고 다른 뮤지션이나 좋아하는 음악은 없습니까?” “손을

꼽을수

없을

만큼

많지요,

산타나

스콜

피언스,

엘튼존,

비욘세,

토토,

블

랙 아이드 피스, 머라이어 캐리, 이글스, 로린 힐, 레이디가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요. 좋아하는 음악도 수 없이 많지만 특별히 애정이 가는곡 을 꼽으라면

리차드

글리브

‘상록수’

배리

매닐로우의

‘1984년

재즈

앨범’

가수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원써머 나인’ ‘스마일 어개인’ 스모키 ‘썸머’ 탐존슨 의 ‘워즈’를 좋아해요.” “오늘 비로소 음악을 진정 사랑하는 메니아 를 만난 것 같군요.” 나는 너무 감격스러워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과찬의 말씀이에요.” 여사장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조금은 의외라는 듯이 머리를 갸우뚱 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 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생각이 났다는 듯이 불쑥 물었다. “음악을 하는 전문가 선생님은 어떤 뮤지션의 곡을 좋아하세요?”

“7~80년대 추억의 영국 록 그룹 ‘스모키’를 좋아해요 ‘자정에 너를 만날 거야(‘l’ll Meet You At Midnight)’ 빌리 조엘의 ‘어니스트’ 영국 록 그룹 퀸의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

이글스의

‘데스

페라도’

영화

- 62 -

보디가드

주제곡

‘아이

유어

레들리’

제임스 브라운의 ‘아이 필 굿( I Feel good)’ 영화 내일을 향해 쏘라 주제곡인 ‘머 리 위로 빗방울 떨어 진다’ 보니의 ‘써니’ 제니퍼 로페즈‘람바다’ 스티비원더의 ‘이 젠트 쉬 러블리’ 비틀즈 ‘올 유 니드 이즈 러브(All you need is iove)’ ‘폴리즈 폴리즈미’

‘하드

데이

나잇’ 비틀즈

세대

가수인

클리프

리처드‘ 더영원스’

‘레이

프 캐럿’ ‘뉴 키즈 온더’ 영화 시스터 액트2의 삽입곡인 ‘조이풀 조이풀)’ 등 손을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지요.” “역시

음악을

하는

분답게

한

세대를

풍미한

레전드급

뮤지션의

주옥같은

곡들

만 엄선해서 말하니까 제가 음악에 대한 지식이 수십 단계 올라간 거 같아요.” 여 사장은 말을 하는 중에 내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내가 한눈 파는 사이 휴대폰 카 메라에 내 얼굴을 저장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인형 눈 같이 아름다운 눈을 살 짝 윙크 하듯 감았다. 옆에서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흥미 있게 듣고 있던 미숙이가 중간에서 말을 가로 채었다. “신토불이도 모르세요. 제가 옆에서 두 분이 나누는 대화를 한 시간 동안 듣고 있자 니 한국가수와 노래는 단 일절도 없는데 도대체 당신들은 한국 사람인가요?” 결코 술이 취해 신경질 적으로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말 속에는 진한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말에 여사장과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잠자코 있었다. 여사장 은 그제서야 나와 같이 온 미숙이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기분에만 몰입되어 상대방 의 기분을 우울하게 만든 것을 알고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90도 각도로 고개를 숙 였다.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가수

선생님을

우리가게에서

뵙게 되어 너무 감격한 나머지 제 기분대로 행동하여 본의 아니게 큰 실례를 했 습니다. 정중히 머리 숙여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미숙이 를 향해 큰 절을 하듯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그렇다고 큰 죄인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여 사장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녀도 방긋 웃으며 미슉이 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인 간적이고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오늘에서야 뵙게 된 거 같아 감개무량하다는 표정의 눈길이었다. 안개처럼 스몰스몰 피어오르던 긴장감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여사장은 사과하는 뜻에서 고가의 양주 한 병을 가져와 우리 빈 잔에다 채워주었다.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녀를 대하는 미숙이의 태도도 확실히 달려졌다.

- 63 -

“이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하여튼 정말 고마워요.” “제가

저지른

실수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소하지요.

실례지만

아가씨는

선생님과

어떻게 되는 사이예요?” “오빠, 동생 사이예요.” 미숙이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연인 사이예요.?” “사장님

넘겨짚지

마세요.

이

아가씨는

저와

같은

동네에

사는

동생이고,

제가

단골로 가는 미용실 사장이지요. 잠이 오지 않아서 집 주위에 있는 공원에 산책하 고 있는데 이 겁도 없는 아가씨가 공원에 오지 뭐예요. 그래서 잠을 이룰 수 없는 동병상련끼리 의기투합하여 바(BAR)에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 “아, 그랬군요.” 여 사장의 검은 눈은 밝게 반짝였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의미인지 모두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여사장은 컵을 쥔 손에 느긋하게 힘을 주면서 또 다른 손을 머리를 어루 만졌다. “저 보다 나이가 한참 아래인 것 같은데 동생으로 불려도 되지요?” “예.” 미숙이는 무척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볼까,

동생이 먼저

한

말이

한국음악을

무척

마음에

테마로

걸렸는데

올린사람이

한국

음악

동생이니까

쪽으로

동생부터

대화를

나누어

좋아하는

가수와

노래를 한번 읊어 봐요.”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미숙이는 손가락에 낀 18K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얼굴엔 당혹감이 스 며있었고, 그토록 아름다웠던 두 눈 역시 상심에 가득 차 있었다. 한 참을 생각하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좋아하는 가수는 많지만 그 중에 한경애씨 를 좋아해요. 그 분의 노래는 노래라 기 보다 마치 한편의 시를 감상하듯이 서정적인 색채와 감수성이 풍부한 노래가 대부분이지요. 증오와 회한으로 얼룩져있던 마음도, 낙엽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 만

같은

가을의

이

뚝뚝

묻어나는

와

낙심은

우리의

신비로움을

부드러우면서도

온데간데없이

심금을

느끼게

울려주는

사라지고 주옥같은

하는

목소리와

감미로운 말지요.

목소리에, ‘옛

노래이지요.

- 64 -

안개비와

가슴속에

시인의 그

같은

외에는

아릿한

감성

남아있는

증오

노래’

‘타인의

계절’은

딕

훼밀리의

‘흰구름

먹구름’ 김정호의 ‘하얀 나비’ ‘이름 모를 소녀’ 어니언스 ‘편지’ ‘사랑의 진실’ 전 영록의 ‘애심’ 전영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 서울 훼미리의 ‘애모’ 이 수미의 ‘여 고시절’

바람꽃의

‘비와

외로움’

김원중

‘직녀에게’

손정희

‘여름

그리기’

채은옥

의 ‘빗물’ 방주연의 ‘당신의 마음’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조항조의 ‘만약에’ ‘거 짓말’ 고한우의 ‘암연’ 박정현의 ‘꿈에’ 우순실의 ‘잃어버린 우산’ 김종서 ‘대답없 는 너’ 이은하의 ‘겨울 장미’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윤향기 의 ‘장미 빛 스카프’ ‘ 별이 빛나는 밤에’ 이용복의 ‘달맞이꽃’ ‘그 얼굴에 햇살’ 박상규의 ‘조약돌’ ‘임 희숙 의 ’내하나의 사람을 가고‘ 강승모의 ‘무정브루스’ 솔개트리오의 ‘여인’ 배따 라기 의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 하나요’ 산울림의 ‘청춘’ 조용필의 ‘그 겨울 찻집’ ‘창밖의 여자’ 김수철의 ‘못다 핀 꽃 한 송이’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요.” 미숙이 는 잔득 신이 나서 말했다. 겹겹의 행복이 완만한 물결을 이루며 조용히 밀려오는 것 처럼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밀려오는 행복을 이기지 못해 양주잔을 가만히 들어 보였다. 바로코 시대의 양식의 고풍스러운 감각이 돋보이는 도자기는 전 면이 꽃무늬가 조각 되어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뒷부분까지 백합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도자기의 고유한 특징 인 백옥같이 투명한 색깔을 살리기 위해 덧칠을 하여 유황을 입힌 부분은 보석처럼 아름다웠 고 섬세하게 조각된 푸른 나뭇잎 문양은 실제로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팔랑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원탁의자에 앉아 미숙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붉은 조명등 밑에서 석양빛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신비로 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선반에 진열된 술병에서 이동하여 내 얼굴에서 우뚝 멎었다. “제가 좋아하는 한국 가수와 노래에 대해 말했어요. 이제 오빠 차례예요.” 익살스러운 그녀의 귀여운 말투에 나는 기분이 좋아져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독한 양주의 미각이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해 더 없이 기분이 좋았다. “동생의

음악적

취향이

어쩌면

그렇게

나와

똑같을까.

내가

좋아하는

가수와

곡

들은 동생이 다 말한 것 같은데.” “빙빙 말꼬리를 돌리지 말고 어서 말해줘요.”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손을 무릎 위에다 올려놓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여사장이 귀를 쫑긋 세우면서 내 입만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는 데 출입문 밖에서 왁자지 껄한 소리가 들리더니 인형같이 생긴 여자 두 명이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하의가 실종된 듯

- 65 -

한 블랙 미니 드레스에, 빨간색 백, 굽 높이 하이힐을 신고 귀고리와 뱅글, 빈티지 스타일의 반지를 착용해 날아갈 것만 같은 발랄한 느낌의 여자가 우리 옆에 자리를 하고 앉았다. 갈색 으로 물들인 머리엔 진주구술로 만든 머리띠를 하고 있었으며 보정 속옷 사이로 하얀 가슴이 수줍게 엿보였다. 발랄 쾌활해 보이는 얼굴 역시 아름다웠고 은색 글리터를 얇게 칠한 눈가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더 돋보이게 했다. 옆에 앉아서 술을 홀짝이던 미숙이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바(BAR)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문을 나서보니 이슬비가 은 은하게 내리고 있었다. 내리는 빗소리가 서부영화의 전설이 된 작품 ‘황야의 무법자’에 흐르는 고독한 휘파람소리처럼 옛날의 향수를 자극했다. 비 내리는 시가지는 스산할 정도로 적적했다. 재활용수거함 옆에는 오물을 뒤집어쓴 옷 가지 들과 함께 말라붙은 바퀴벌레의 사체가 흉물스럽게 나 뒹굴고 있다. 공중전화 부수 안에는 먹 다버린 빵 봉지가 수두룩하고, 전화기는 번지 점프를 하듯 아래로 떨어져 전화선 하나에 겨우 몸체를 의지한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천장과 벽이 온통 시커멓게 그을려 있는 공중화장 실의 전경은 눈뜨고는 못 봐줄 정도로 불결했다. 미사일공격을 받은 것처럼 견고한 철제문은 폭삭 무너져 내리고, 바닥에는 썩은 오줌물이 고여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천장위에 걸려있던 형광등도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청소 도 구함이 있던 자리엔 누군가가 입었던 팬티가 마포걸레와 함께 섞여있다. 어디선가 매캐한 연 기냄새와 시체가

썩는 듯한 악취에 그녀는 손바닥으로 콧구멍을 막았다. 방금 빗속을 저벅거

리며 걸어가던 취객 한명이 미숙이 를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 남자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 에 옷이 젖어가면서도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이었다. 미숙이 와 나는 정보지를 우산처럼 쳐 들고 서로의 정보지가 부딪치지 않을 정도로 약간 거리를 둔 채 걸음을 서둘렀 다. 지나가는 영업용 택시가 우리 앞에서 클랙숀을 눌렀다. 그녀가 택시기사를 향해 승차거부 사 인을 보내자 택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빗속으로 총알처럼 달려갔다. 조금 전보다 빗줄기가 한결 굵어졌다. 장대비였다. 물이 보도위로 개울처럼 흘렸다. 밤하늘은 검은 잉크를 뿌려놓은 것처럼 거무칙칙했다. 고개를 돌리자 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아파트 불빛을 배경으로 그림자로 변한 상가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빈 술병이 나 뒹굴고 있는 성인회관 입구에는 역겨운 술 냄새와 누군가가 토해낸 음식냄새가 뒤 썪여 무척 불결해보였다. 나는 갑자기 견디기 힘든 피 로를 느꼈다. 달아났던 잠이 쏟아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중화 요리 집에서 훔친 검은 우산을 펼쳐들었다. 그녀와 나는 서로의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약간 거리를 둔 채 걸었다.

- 66 -

“늦은 밤 남자와 단 둘이서 우산을 같이 쓰고 빗속을 걸으 니 너무 기분이 좋은 데요.” 그녀가 입가에 웃음이 배시시 배어 나왔지만 얼굴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별을 예감했 기 때문이리라. 술기운 때문에 간이 커진 나는 복숭아 빛이 약간 도는 그녀의 볼에 뽀뽀를 하 려는데 콜택시가 앞에 와서 섰다. 휘청거리며 뒷좌석에 올라탄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오빠,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줘서 고마워.” 그녀를 태운 콜택시가 점차 굵어지는 빗발 속으로 사라졌다.

- 67 -

그 아름다운 결혼

- 68 -

2

‘대중들의 인기’ 라고 하는 것은 불꽃과도 같은 거야. 찰 나의 인기에 목숨을 내던진 너의 무모한 선택은 정말 어 리 석은 행동이야. 너는 음악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대 중들의 인기’를 사랑한 거야

2

- 69 -

한 달 전부터 약속이 되어있던 윤희의 사진 전람회에 참석했다. 화려한 금색 스팽글로 로코 코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건물 실내의 모습에 나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서양역사를 통틀어 가장화려하고 역동적이었던 바로코 로코코 시대의 예술을 마치 이곳에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 하였다. 은빛, 분홍색, 연두색을 주조로 한 실내장식과 로코코 시대 상류계급 여인들의 크림색 살결을 생생하게 묘사한 프랑스화가 ‘부셰’의 그림과.16세기 바로코 화가 프란츠 할스의 ‘카타 리나 후푸트와 유모’ 그리고 프랑스 베르샤유 궁전에서 우아하고 교양 높기로 유명했던 ‘퐁파 두르 부인’의 초상화 그림 앞에 발이 얼어붙은 듯 서 버렸다. 하늘에서 막 내려온 듯한 모습으로 노송을 배경으로 저녁놀이 막 물들기 전 무렵 장미꽃 정원 에 앉아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단테시집이 놓여있고, 팔꿈치 쪽에는 꽤 두터운 몇

권의 문학 서적이 보인다. 그 주위로 활짝 만개한 장미꽃들이 갖가지 모양으로 시선을 끌어 들인다. 장미꽃 꽃잎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이미지의 잎새 들 이 봉우리를 형성하며 하늘을 바 라보고 있다. 황금빛 저녁노을 속으로 사라질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벅차오르

게 한다. 후박나무에 은박을 입힌 18세기 바로크 양식을 재현한 안락의자 옆에서 젊은 사람들 과 대화를 하고 있던 윤희가 나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유명한 가수께서 내 사진 전시회에 왕림해 주어 정말 영광인데.” 그 말에 갑자기 목 안에서 무언가가 물컹하고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부플 린 말이라고 하지 만 그녀가 나를 유명가수로 믿어 의심치 않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윤희가

단순한

사진작가인줄

알았는데

전람회에

와서

보니까

세상에서

가

장 화려한 사진작가라는 것을 재확인했어.” 윤희는 기대했던 이상의 말에 기분이 좋아져 입이 귀 밑까지 찢어졌다. 웃는 얼굴이 그림속 의 퐁파두르 부인처럼 아름다웠다. 검고 긴 머리, 백옥처럼 하얀 피부, 외까풀이 매력적인 눈 에는 긴 속눈썹이 물결무늬처럼 가지런히 나 있어 한번 눈을 내리 깔 면 마치 물결이 일렁이 는 것처럼 속눈썹의 그림자가 생긴다. 핏줄이 드러날 만큼 가늘 디 가는 팔, 다리가 가질 수

- 70 -

있는 모든 미적 요소를 갖춘 길고 매혹적인 다리, 관능적인 몸은 S라인이 유연한 곡선을 그리 고 있어서 감탄사가 절로 쏟아져 나올 정도이다. 연약해 보이는 외모이지만 자세히 보면 르네상스 거장 미켈란젤로의 ‘시스터나 천장화’에서 등장한 남성 같은 우람한 근육에 힘과 위엄이 넘치는 무녀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윤희는 대화 를 나누고 있던 젊은 대학생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내게로 왔다. 풋풋한 향수향기에 기분이 야릇했다. 윤희는 자신의 작품이 전시된 관람장 으로 나를 안내했다. 바로코 로코코 사진작가 답게 그녀의 작품은 르네상스 이후 17~18세기 유럽의 예술을 그대로 재현 한 것 같았다. 그 중 나의 눈길을 끄는 작품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금색 스팽글로 로코코 시대를 떠올 리게 하는 ‘루이 비 통백’ 이었다. 축적 소유욕에 대한 욕구는 인간이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가 장 기본적인 행복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작품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작품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인간의 소유욕구가 그토록 비정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한 탐욕이 아닌 인 간 본성에서 비롯된 의지인 것을 깨닫게 해주어 절로 미소를 짓게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지만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인간의 소유욕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한 작품이야. 아주 감동적이야.” “음악을 하는 예술인답게 과연 대단한 안목이야.” “그 정도는 아닌데.” “향기야. 바로코 와 로코코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니?” 서양역사를 통틀어 가장 화려하고 역동적이었던 예술사조박에 떠오르지 않아 나는 머리를 긁 적거렸다. 무늬가 새겨져있고, 다리는 동물의 발처럼 생긴 은으로 만든, 눈으로 보기에도 고급 스러운 향료사진을 윤희는 올려다보았다. “나는

사진작가가

예술혼이

묻어나는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문학이나 그림이라면

꿈에도

가져본

충분히

내

적이

없었어.

인생을 투자할

한

사람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있는 그대로의 실물을 그냥 셔터만 누르는 행위를 별로 탐탁지 않게 느꼈지, 그것은 정성과 노력 없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일처럼 느껴 졌기 때문이지. 마치 그 행위가 지각없는 카메라가 물어다 준 허상일 뿐이라고 생 각했어. 그런데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사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일시에 재 편 성되는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어. 물론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바뀌는 전환점이 된 거지. 나는 그때 그 감동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그것은 바로, 저녁나절 저물어

가는

갈대밭이

내려다보이는

제방위로

- 71 -

빨갛게

지는

석양이었어.

저녁

하늘에는 새들이 낮게 비행을 하고, 석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갈대의 모습은 로코 코 시대 화가 ‘와토’가 그린 그림 같았어. 박스 플리츠(상자모양 주름)의 붉은 드레 스를 입고 섬약한 귀족 여인이 나를 보고 손짓하는 것 같았어. 나는 신기가 들린 것처럼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어.”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형용할 수 없는 벅찬 흥분감, 자신과 자신의 영혼까지 송 두리째 몽땅 맡겨 버릴 수밖에 없었던 숙명 같은 굴레, 평생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아도 여 한이 없다는 행복감이 그녀의 얼굴에 짙게 깔려있었다. 향을 태우거나, 향유를 넣어 덥히면 실내가 은은하게 향긋해질 것만 같은 향로에 시선을 박고 있는 나의 눈길이 무척 따뜻하게 느 껴졌다. “그래서 던

그

화려함을

잊을 수

없어

서양역사를

통틀어 가장화려하고

역동적

이었

바로코, 로코코 예술 사조를 전문으로 하는 사직작가가 되었구나.”

“그런 셈이지.” “만약

내가

다른

장르에

관심을

돌린

작가였다면

이

전시회에

어떤

성향의

작

품 이 출시되었을까.” 나의 얼굴에 닿는 윤희의 눈길이 밝은 빛처럼 따스하게 느껴졌다. 향로 왼쪽 ‘갑옷의 목가리 개’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나는 좀 의외에 질문에 벙어리처럼 입이 굳어버렸다. 난처한 표 정을 지으면서 소품대용으로 놓아둔 알루미늄 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바닥까지 게

뻗은

그

밑으로

리

위로

들여다보이는 소나무 발아래

거대한

순백색의

숲과

바다와

깎아지른

구름이

호수처럼

해일처럼

넘어가는

은가루를

계곡사이에 잔잔한데, 운해가

뿌린

돌로

인공적인 백색으로

듯한

만든

백사장

아치형

돌을

깎아

흐르고,

주위로

다리가 다듬은

깎아지른

곱

있고, 구름다

듯

절벽

위에 절벽이 놓인 겻 같은 산을 넘는 구름이 산호초로 둘러싸인 바다에

합류하는

그런

것

장면이

아닐까,

아니면

왕자웨이

여화

‘아비정권’의

한

장면에

있는

처럼

속옷차림의 여자가 불을 붙이지 않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들고 있는 장면. 아니면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나신의

여자가

춤을

추는

그런

모습들을

작품에

담지

않

았을까?” “여자가 등장하는 부분만 뺀다면 거의 일치해.” “그래도 내가 맞추긴 맞췄네.” 나는 자신 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웃고 말하는 사이에 바로크 양식의 틀에

- 72 -

포스트 모던한 빛깔을 입힌 19세기 안락의자 사진 옆까지 왔다. 섬세한 장식미 에 의자가 주 는 편안한 쉼을 주는 안정감마저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무소유를 실천하는 사람일지라도 권력 욕심만은 피해갈수 없는 가장 구미가 당기는 유혹인지도 모른다. 손에 넣은 것까지의 과 정, 갖고 싶고, 가져야 하는 권력의 욕심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은밀한 곳에 숨기곤 속살을 내 보이 듯 조금씩 내 비치다 끝내는 숨겨온 욕심을 일시에 세상에 드러 내는 인간의 검은 욕망을 너무나도 리얼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영국의왕 리처드3세가 물망에 떠올랐다. 1483년6월 권력을 찬탈해 나라를 다스렸으나 2년 뒤에 전사한 정도로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는 왕이다. 역사가와 문필가 들은 그를 위대한 잠재적 능력을 가진 희비가 엇 갈리는 왕이지만 중요한 것은 몸이 불편한 꼽추이면서 동시에 상대방을 교묘히 속이는 뛰어난 왕이다. 불세출의 지혜를 가진 리처드 3세보다 더 적합한 적임자는 없을 듯싶어 내 속내를 말했더니 윤희는 하얀 치아를 가지런히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내가 만약 저 의자에 앉으면 어울릴까?” 생각 없이 말을 뱉어 놓고 보니 윤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들 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두 볼이 유리공예처럼 빛나는 그윽한 미소였다. 가지런히 드러난 하 얀 치아도, 사슴 목처럼 가날 픈 목. 사심 없이 쳐다보는 호수 같은 눈동자, 흠집하나 없는 하 얀 피부가 더욱더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창문 밖으로 눈길을 돌리자 서울의 하늘은 검은 그림물감으로 칠해 놓은듯했고 군데군데에 손바닥만 한 새하얀 구름이 비쭉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문득 윤희와 처음 만나던 날이 떠올랐다. 그녀와 처음 만난 날은 황제 나이트클럽에서 전속가수로 활동하던 초창기 때였으니 3년전 어 느 늦은 여름 오후 무렵이었다. 그날 밤은 비가 추적추적 내려 넓은 홀 안에는 술을 마시는 손님들이 몇 테이블 밖에 있지 않았다. 나는 테이블 맨 앞에 앉은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신청한 전설적인 영국4인조 록그룹 비틀즈의 ‘예스터 데이’를 열창하고 있었다. 과거를 회상하며 과거를 그리워하는 노랫말에서 쇠비름과 엉겅퀴, 어른 한 키가 넘는 강아지풀 등 온 갖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서로 뒤엉켜져있던 중학교 교문 앞이 연상되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당사자인 나도 그 애틋함이 묻어나는 노래에 울적한 마음을 어쩌 지 못하고 있었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던 뒤였다. 나는 경기 도 파주시 금촌읍 에서 대학졸업 할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사 랑이 누구보다 남달랐다. 1940년생인 아버지는 1960년도 이십대 나이에 군대 입대하여 특무

- 73 -

상사로 전역할 때 까지 아버지가 군에서 보낸 세월은 35년 가까이 되었다. 서른두 살에 같은 마을에 살던 어릴 적 소꿉친구였던 어머니와 결혼하여 2년 후인 76년도 내가 태어났다. 아버 지가 뇌졸중으로 스러져 68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30년을 같이 생활했으니 ,아버지를 잃은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없는 빈 홀에 늦게까지 남아 ‘불효자는 웁니다’ 를 부르고 있었다. 그 때 출입구 쪽에서 사박사박 하이힐 굽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얼굴을 드는 순간 무대 앞으로 보름달같이 환한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물에 빠진 새처럼 몸을 가늘게 떨고 있지만 그 무 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여자였다. 비에 젖은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신 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숨이 차올랐다. 실내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더불어 정신이 혼미해졌다. 비에 젖어 찰싹 달라붙은 하얀 원피스는 이미 의상으로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정성스럽게 고데 기로 한 가닥 한 가닥 말아 올린 웨이브 머리엔 진주 구슬 같은 빗방울이 이슬처럼 맺혀 촉촉 이 빛나고 있었다. 휘감기듯 달라붙은 레이스 사이로 터질 듯한 하얀 젖가슴이 수줍게 엿보였 다. 그 한가운데 씨앗 같은 젖 쪽지가 물결처럼 어른거렸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배꼽에 만들어 붙인

액세서리별이 실제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아래엔 그녀의 매혹적인 검은 숲의

신비가 젖은 원피스 스커트 사이에서 은밀한 모습을 드러낸 채 나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물 에 빠진 새처럼 몸을 가늘게 떨 때마다 옷에 묻은 투명한 빗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주체할수 없는 슬픔 에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었다. “아저씨 7년 동안 제 목숨처럼 사랑했던 남자를 교통사고로 잃었어요. 오늘 그 사 람을

하늘나라로 보냈어요.

그 남자의

애창곡이었던

박 길라

의

‘나무와

새’라는

노래를 생음악으로 불러줄 수 있겠어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애원하다 시피 울먹였다. 그녀의 말투에는 감히 거역하지 못할 위엄이 서려있었다. “예, 잘 부르는 노래 솜씨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흰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 감정을 최대한 살려 가만가만 내리는 빗소리와 같은 저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진달래가 곱게 피던 날 내 곁에 날아오더니 작은 날개 가만히 접어서 내 마음에 꿈을 주었죠? 이제 서로 정이 들어서 떨어져 살 수 없을 때 외로움을 가슴에 안은

- 74 -

채 우린서로 남이 된 거죠. 신록이 푸르던 날도 어느 듯 다 지나가고 내 모습은 이 렇게 내 모습은 이렇게 야위어만 가고 있어요. 내 마음은 이렇게 내 마음은 이렇게 병이 들어가고 있어요. 아픈 마음 달래가면 서 난 누굴 기다리나요? 하염없이 눈물이 자꾸만 잎새 되어 떨어지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자꾸만 잎새 되어 떨어지는데.‘ 노래가 끝나는 순간 요란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넋이 나간 얼굴로 놀랍다는 표 정을 지었다. 일면식조차 없는 그녀여서 잠시 어색한 감이 있었지만 노래와 술잔이 비워지고, 미국4인조 그룹인 레스트 라이프의 ‘유레이즈 미 업’까지 부르고 나자 친숙한 연인관계처럼 가까워졌다. 마음과 영혼까지 사랑했던 여인에게 버림받은 배신감, 그래서 이성에게 마음이 끌리려고 할 때면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반드시 나타나는 숙명 같은 상처를 고해성사 하듯 그녀에게 고백했다. 그녀는 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살며시 감쌌다. 나는 잠시 저항하였 지만 마음 가는대로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껴안으면서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 리고 나란히 무대 의자에 앉아 다시 한번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었다. 품 안에 있는 그녀의 몸 을 으스러질 듯이 꼭 껴안자 그녀는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기 보다는 운명처럼 느껴 지는 거 있지요.” “저도 방금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어쩜 생각까지 똑 같이 일치할까요.” 내 품안에서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 밖에 없다는 어떤 신앙 같은 미소였다. 나 역시 그녀가 내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다. 그로부터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 믿고, 의지하며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연인관계가 되었다. 그녀와의 만남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 게 되살아났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어?” “이런 저런 생각.” “얼굴 표정이 몹시 행복해 보이는 것을 보면 그냥 여러 가지 생각이 아닌 것 같 은데?” “ 그래 보여?” 조금 전에 떠올린 첫 만남에 대해서 애기하고 싶었지만 윤희가 7년 동안 사랑했던 죽은 남 자의 기억이 떠오를까봐 말하지 않았다. “우리 어머님이 너를 한번 봤으면 해”

- 75 -

윤희가 뜻밖에 말을 꺼냈다. 나는 그녀가 왜 새삼스럽게 그 말을 꺼내는 지에 대해서 조심스 럽게 대답했다. “안

그래도

우리

어머님께서

윤희

어머님을

만나

뵙고

우리

결혼식을

서두르는

눈치야.” “그런 중대한 말을 왜 여태껏 하지 않았던 거야?” 윤희는 결혼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져 대단한 관심을 드러냈다. “자기도 한번 생각해봐 요즘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이 있었나.” “하긴 그래.” 윤희는 그래도 조금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더 이상 깊이 캐묻지 않았다. 번갯 불에 콩 볶듯 양가 어른이 만났다. 남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가슴 아픈 상처를 지니고 있는 두 분은 만나자마자 언니 동생하며 허물없이 지냈다. 자연스럽고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하는 동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바로크 시대부터 이어져 온 독일도자기 업체‘ 마이센’의 현 대 자기 에 전문 세프 가 조리한 바비큐 4가지, 여기에 7가지의 모듬 치즈와 야채스틱, 핫디 시, 디저트가 소담스럽게 담겨져 있었다. “여자 혼자 몸으로 따님을 너무 반듯하게 키웠어요. 전 도저히 못할 것 같아요.” 어머니는 약간 수줍어하는

미소를 띄며 그렇게 말하자 윤희의 어머니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도 보이지 않고 웃기만 했다. 눈 아래에 잔주름이 보기 좋게 모였다. 그녀는 쉰다섯 살 이나 먹은 나이치고 상당히 젊어 보였다. 날이 선 오뚝한 코 양 옆으로 나와 있는 주름살과 눈가에 잔주름만 없다면 삼십대 중반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곱게 늙는다는 말은 그녀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 나이에도 얼굴이 갸름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에도 상당히 공을 들인 것 같았다. 턱 바깥에서 얼굴 안쪽 방향으로 브러시를 굴리듯 발라 얼굴 가장 자리는 짙게, 안쪽은 옅게 표현 돼 갸름한 얼굴이 가 질 수 있는 매력을 최대 한 표현하였다. 입술은 옅은 색 립스틱을 입술 전체에 바른 후 좀 더 진한 자두 빛 계열의 색상을 입술 안쪽 에 발라 볼륨감이 있으면서도 섹시한 느낌을 주었다. 계량 한복에 감싸인 매혹적인 다리가 살 짝 드러나 있었다. 때로 네이비 색 재킷에 회색 바지를 입어 상체가 축소되는 느낌을 줘 좀더 날씬해 보이는 웨이터는 그녀에게 한 눈이 팔려 뒤로 넘어질 뻔 했다. 그 어이없는 광경에 윤 희는 혼자서 씩 웃었다. “윤희는 제 친딸 이상이에요.”

- 76 -

“윤희 어머님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여쭈어 봐도 괜찮겠지요?” “실례지만 방금 전에 쉰다섯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사실이세요?” “그럼 제가 몇 살 정도 되어 보이세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데 윤희 어머니는 좀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세월이 비껴간다는 말이 윤희 어머님을 두고 한 말 같아요.” “방금 전에 우리 딸을 친딸 이상이라고 하셨는데.” “아,

그거요.

윤희는

일에

쫓기면서도

우리아들

콘서트를

한번도

빠짐없이

참석

해 주었지요.” “그럼 우리 딸을 아드님 콘서트에 참석해서 만난 겁니까?” “그런

셈이지요.

저는

댁의

따님을

처음

보고

한눈에

반했지

뭐예요.

어쩌면

그

렇게 예쁘고 교양 있고 지적으로 보였는지 제 가슴까지 콩당 콩당 뛰지 뭐예요?” “우리

윤희를

그렇게

예쁘게

봐

주시다니

무어라

감사를

드려야할지

모르겠네요.

” 좀 지나치게 과장된 말인 줄 알면서도 어머니는 내 옆에 앉아 있는 윤희에게 살짝 윙크했다. 윤희는 밝은 미소만 지은 채 내 옆얼굴만 지그시 쳐다보았다. 머릿속에서 갑자기 고개를 들려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처음

뵌

자리에서

결혼이라는

말을

꺼내어

놀라셨겠지만

내일이라도

당장

우리

아들과 윤희를 짝 지었으면 하는데 윤희 어머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어머니의 말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해가 져서 등잔불을 막 켜기 시작했을 때처럼 등잔불이 밝은 불빛이 어두운 내 먼 과거의 아픔을 말끔히 밀어내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체면이 고 뭐고 다 벗어던지고 발치에 무릎을 꿇고 따님을 저에게 달라고 간곡히 애원하고 싶었으나, 한 집안의 운명이 달린 결혼은 즉흥적인 감정으로 처리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나이프로 치즈와 야채스틱을 마구 헤적거리는 행위로 내 마음을 대신 할 수밖에 없었 다. “언제 날을 받는 게 좋겠습니까?” “윤희 어머님 방금 뭐라고 하셨는지 잘 듣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만 더 말씀해 주실 수 있겠어요?” “언제 결혼식 날짜를 잡으면 좋겠느냐고 했지요.” 아나운서처럼 정확한 발음에 차분한 목소리였다.

- 77 -

“피 붙이라고는 따님 한 분이란 거 알고 있습니다. 친딸 이상 생각하며 따뜻이 보 살피겠습니다.”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시니 제 마음이 한결 가볍 습니다.” 윤희 어머니는 짧게 숨을 토해냈다. 격한 감정 때문에 눈가에 이슬이 고였다. 전원풍의 자연 적인 멋에 고급스러운 실내는 시끌시끌한 사람들의 소리로 복잡해졌다. 통 유리 벽면으로 들 어오는 햇살도 사람들에 가려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불쑥 나타난 사람들 때문에 서로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검은색 레깅스를 입고 그 위에 핑크색 색상의 짧은 팬츠를 입어 엉덩이와 허벅지 위쪽의 두툼한 부분을 효과적으로 가린 20대 초반의 여자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아랫배 를 자랑스럽게 내 보이며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상체가 퉁퉁한 자신의 단점을 보안하기 위해 알이 굵거나 디자인이 큼직한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목걸 이로 주위의 시선이 쏠리게 만들어 날씬하게 보이기 위한 것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상체가 퉁퉁한 편인데도 매우 날씬하게 보였다. 거기에다 화려한 뱅글 이나 손 목에 여러 번 감는 레이어드 팔찌를 끼어 자신의 세련미를 한껏 부각시켰다. 윤희의 어머니는 식사하는 내 모습을 친근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맞은편 옆 테이블에서 노부부의 웃 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제서야 결혼 날짜 얘기를 꺼냈다. “방금 때문에

전에도 짝이

미리 정해진

말씀 이상

드렸지만

윤희와

결혼날짜를

우리아들이

차일피일

미루고

혼기가 싶지

한참지난 않아요.

나이이기 제

생각은

한 달 후에 결혼 날짜를 잡았으면 하는데 사돈 생각은 어떠세요?” “한 달 후면 5월 달이네요. 계절의 여왕 5월 달에 결혼하면 신랑신부가 백년해로 한 다는 말도 있지요. 저도 대 찬성이에요.” “고마워요 사돈.” 어머니는 두 뺨을 빨갛게 물들인 채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윤희가 해 맑게 웃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외롭고 암울한 생활에서 벗어나자는 의미가 담기 웃음 같았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는 눈빛이었다. 나 역시 불미했던 지난날의 과거에 얽매여 젊을 꽃 피우지도 못한 채 시들어버리는 삶은 이제 안녕하고 싶었다. 내 인생에 밝은 서광이 비취는 것 같았다. 한 달 안으로 윤희는 나의 아내가 된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어두웠 던 과거의 그늘이 일시에 걷혀 지면서 행복을 꽉 움켜 쥔 것처럼 황홀해 졌다.

- 78 -

내가 윤희에게 사준 결혼반지는 국내 최고 톱스타, 장동건, 고소영 커플의 결혼반지로 선택 된 화제가 된 반지였다. 반지 중앙 스퀘어 안에 쇼파드의 트레이드마크인 작은 무빙 다이아몬 드를 넣은 이 반지를 낀 윤희는 영혼이 뒤 틀리는 것 같은 감동을 느끼고 입을 딱 벌렸다. 윤 희는 언제까지 그렇게 넋을 놓고 있었다. 나와 결혼 하겠다는 결심은 자기가 생각해도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빛이 역력했다. 우리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나와 동생을 쌍수를 들고 반겼다. 그때의 그 짜릿하고 신선한 충격은 두고 두고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그날을 추억하며 윤희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가 손을 나 의 머리 뒤로 돌려서 곳곳하게 선 내 머리를 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받쳐 들었다. 그리고 갑 자기 고개를 돌려 키스했다. 놀랍게도 나의 입술이 자동문처럼 스르르 열리면서 그녀의 혀를 받아들였다. 윤희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발뒤꿈치를 들어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도로 한 구석에 세워져있던 자전거가 우리의 과격한 몸동작에 밀려 바닥으로 나 뒹굴었다. 햇빛에 반사된 윤희의 눈빛은 보석처럼 영롱하게 반짝 거리고 있었다. 몸이 달아오른 나는 등 뒤로 돌아서서 그녀를 마주 껴안았다. 우리 옆을 지나던 중년여성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한참을 쳐다보았다. 여성의 발밑에는 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가 솜사탕을 맛있게 먹고 있다. 어메이징한 광경 앞에 동그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황금빛 레이스 장식 이 주렁주렁 달린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진열장속에 예쁘게 진열되어 있는 인형같이 생긴 귀 여운 아이였다. 예쁘게 땋은 머리엔 진주구슬이 이슬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으며 진주 핀 으로 고정시킨 레이스 앞에, 이름, 주소, 전화번호가 적힌 명찰이 앙증맞도록 예뻤다. 주위의 뜨거운 시선을 의식해 그녀를 내 곁에서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윤희가 내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도록 꼭 끌어안고 있었다. 나의 입술이 목을 타고 어깨부분으로 미끄러 져 내려가면서 한족 손으로 윤희의 가슴을 더듬으려 했다. “자기야 이제 그만해.” 윤희가 발밑에 꼬마아이를 의식해 나를 부드럽게 밀쳐 내었다. 접착 본드처럼 붙어있던 내 몸은

의외로 쉽게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갈 때 윤희가

오히려 나를 꽉 붙들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윤희의 입술을 미친 듯이 빨기 시작한 순간 에 그녀는 그 짜릿하고 흥분된 관능의 감촉에 이미 이성을 잃어버렸다. 머리에 피가 솟구쳐

- 79 -

흐르는 상황에서 벗어난 그녀는 손에 낀 반지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윤희의 비명소리에 놀란 나는 절제된 아름다움과 품위가 돋보이는 반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놀랄만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무빙 다이아몬드를 넣은 반지는 착용자의 작은 움직 임에도 다이아몬드에서 발산 되는 빛이 수시로 변하고 있었다. 달빛 은은한 ‘천연’ 조명아래 맥 월버 그 ‘칼멘 테마에 의한 판타지’의 감미로운 피아노 음악이 연주되고 있고 그리고 아찔 한 화이트 미니 드레스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미인과 와인 한잔 즐기는 모습이 연상 된 다. 마음이 연애하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 “윤희야.” “왜, 향기야.” 대답하는 목소리가 무척 부드럽고 감미 롭다. 그녀의 옥구슬 굴러 가는듯한 목소리는 마치 저녁 달빛이 비취는 호수를 산책하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멈춰버리면 좋을 텐데 하고 간절히 바랬던 천막형 방갈로의 추억이 떠올랐다. 은밀한 공간 속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유럽 황실풍 침대 옆엔 평면 TV가 달려있다. TV에는 광활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무대로 하여 ‘클레어 리’라고 하는 아일랜드 이민 가족이 3대에 걸쳐 벌이는 사랑과 삶, 이별, 그리고 죽음을 그린 ‘가시나무 새’ 가 방영되고 있었다. 사랑을 해선 안 되는 성직자를 사랑한 매기와 브리카사르 사랑이 너무나 애절하고 안타까워 윤희는 내 품에 안겨 흐느껴 울었다. 마침내 손꼽아 기다리던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아파트 창문을 통해 고개를 내밀자 해 뜰 시간이 한참이 지난 후인데도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하늘 전체가 희미하게 빛나는 구름으로 뒤 덮여있었다. 고층아파트 들이 밀집해 있는 동쪽하늘에 검은 잉크로 물들여 놓은 것처럼 거무칙칙한 구름이 낮게 드리워 진 것을 보니 문산 쪽에서는 한 차례 소나기가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 듯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 런지 임진강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비바람을 동반한 바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결혼 시각 전 까지 제발 비 가 그쳤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새하얀 물체처럼 어렴풋이 빛나는 하늘을 올 려다보았다. 그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검은 물체들이 가느다란 거미줄처럼 움직이는 게 식별되었다. 사자(死者)가 입고 있는 검은 옷을 두르고 고층 아파트들이 밀집해 있는 동쪽하늘을 가득 메 운 까만 점의 까마귀 떼라는 것을 알고는 머리끝이 쭈삣섰 다. 까마귀 들이 원을 그리며 아파 트 둘레를 울면서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아파트 위의 하늘이 희미하게 빛나는 구름이 밝아오 는 여명에 점차 명멸해 갈 때면 누에의 애벌레처럼 실을 감고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 80 -

깨를 뿌린 것처럼 그 구름 속을 점점이 떠다니는 까마귀 떼들은 매일 밤 소름끼치는 악몽에 고정출연하는 마귀할멈 같아 보여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파트 경비 초소 앞에서 색 바랜 남색 셔츠 윗옷의 앞쪽을 추켜올리던 경비 아저씨가 아파트 지붕 위를 맴돌고 있는 까마귀 떼들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전7시가 한참지난 시각이었다. 퇴근 시간이 한참지난 뒤인데도 아직까지 퇴근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근무 교대 자가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른쪽 이마에 커다란 흉터가 계급장처럼 붙어있는 온순하게 보이는 경비아저씨는 졸 린 눈으로 손목시계를 줄기차게 보고 있다가 기다리기가 무료했던지 기지개를 펴다가 나와 시 선이 마주쳤다. 순간 당황한 나는 까마귀 떼가 수없이 날아다니는 하늘 쪽으로 시선을 돌렸 다. 나는 언제까지나 팔짱을 낀 자세로 그렇게 있고 싶었다. 내가 결혼 하겠다는 말을 향사모 총무에게 했을 때 마치 자신이 결혼하는 것처럼 반가워했다. 작은 소요라곤, 사람들에게 돌린 청첩장에는 5월 15일 토요일 정오에 서울역 부근에 위치한 힐튼호텔 웨딩홀에서 결혼식을 올 린다고 적혀있는 것을 보고 향사모 회장이 집까지 찾아와 나의 노래를 아끼는 수많은 팬들과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을 초청해서 소 공연장에서 결혼식을 하자고 제안한 의견에 어머니가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뿐이었다. “안 된다 향기야, 일생에서 단 한번뿐인 결혼식을 콘서트 공연장처럼 치룰 수 없는 거다.

뭐니

뭐니

해도

결혼식의

주인공은

향기

네가

아니라

며늘아기인

신부가

돼야 하는 거야. 그러니 결혼식만큼은 이 어미의 뜻을 따라야 한다.” 어머니가 그토록 완고하게 내 의사를 무시하고 뜻대로 밀고 나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이 신성한 결혼을 음악공연처럼 가볍게 여기는데 분개하며 자신의 뜻을 절대 굽힐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에게 결혼 문제만큼 은 어머님의 의견을 따라야한다는 편지를 보내고 나서야 어머니는 불같은 성미를 가라 앉혔 다.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의 깜짝 이벤트에 대해선 별다른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친척들 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결혼식에 더 많은 관심과 신경을 썼다. 결혼식이 끝난 다음에 있는 피로 연은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의 의견에 따라 힐튼호텔 콘서트홀에서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황제 클럽 강 사장과, 한때 나의 매니저였던 기획사 음반 사장도 초대되었지만, 나와의 관계 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지 못한 시점에서 결혼식을 참석하기는 어렵다는 이유로 나의 전 매니저 였던 기획사 사장이 불참의사를 통보해왔다. 대신 강 사장만큼은 하늘이 두 조각이 나도 참석 하겠다는 연락을 해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결혼식을 될 수 있는 대로 조촐하게 치르

- 81 -

자는 어머니의 고집에 강 사장은 불만은 표시했다. 내가 신랑이기 이전에 공인에 속하는 뮤지 션이니 만치 결혼식을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의 의견처럼 공연장에서 성대하게 치루기를 바 랐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음악공연장 같은 장소에 결사반대했고, 심지어는 한 발짝 양보했던 피로연 장소로 정해진 콘서트홀마저 취소하려했다. 그것만큼은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어머니는 한발 뒤로 물러났다. 어머니는 결혼 식 장소를 공연장으로 하자고 제안한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는 내 가 어머님 편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결혼식을 어머님이 원하는 장소인 힐튼호텔 웨딩홀에서 치 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결국 나의 요청대로 피로연만은 힐튼호텔 콘서트홀에 서 거행하기로 했다. 공연장에서 결혼식을 치룰 수 없게 되어 한 폴 기가 꺾인, 향사모와 좋 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이 피로연장소가 콘서트 홀로 결정되자 그들은 마치 분단된 우리 한반 도 통일이 된 것처럼 좋아했다. 피로연 행사만은 외부 사람이 아닌 좋은 노래 부르기 회장인 강 사장이 사회자로 내정되긴 했지만 그 역시 현재 돌아가는 추이를 볼 때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피로연 행사에 대해서는 강 건너 불구경식으로 무관심으로만 일관하는 어머니의 태도에 강 사장은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피로연장소가 힐튼호텔 콘서트 홀로 정해진 것에는 크게 안도하 는 것 같았다. 그때

어디서 왔는지 까마귀 몇 마리가 머리 쪽으로 날아들었다. 여기저기 옷

가지들이 널브러져 있고 그 널브러진 옷가지 틈새에 몇 개의 숯덩이를 작은 줄에 매달아 쓰러 진 나무 가지처럼 보이는 바퀴벌레 들이 옷가지위에 드문드문 희게 말라붙은 까마귀 똥 위로 굼지럭 굼지럭 기어 다니고 있었다. 오른쪽 이마의 커다란 흉터가 계급장처럼 붙어있는 경비 아저씨는 아파트 앞에 있는 재활용함에서 쓸 만한 옷가지를 몇 개 골라들고 웃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하늘이 차차 높아지면서 뾰족하게 각이진 아파트 지붕위에 밝고 활기찬 태양이 살며시 고개 를 내밀고 있었다. 현재 저체온 증을 겪고 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로 병원에서 치 료를 받고 있는 이웃집 할머니는 경비아저씨로부터 건데 받은 옷가지를 신주 단지 모시듯 가 슴에 안고 있었다. 불과 30분전까지 만해도 어두컴컴하던 주위는 산뜻하게 밝았다. 희마하게 빛나는 구름으로 뒤덮여 있던 하늘은 투명 매니큐어라도 칠 한 것처럼 반짝였다. 하늘이 마치 내 기도에 응답이라도 한 것처럼 맑게 개었다. 아파트 공원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 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추와 무를 가득 실은 화물트럭에서 나오는 확성기소리, 고장 난 전자 제품이나, 컴퓨터, 고철, 노트북 고가 매입한다는 음울한 기계음소리, 자신의 주차구역에 불법

- 82 -

주차한 차주의 행방을 묻는 짜증 섞인 말소리, 그런 소리들에 귀가 먹먹해진 나는 아파트 창 문을 닫았다. 거실로 가보니 어젯밤 늦게 도착한 대구에 사는 작은집 엄마와 누나는 정성스럽 게 준비해온 음식을 아이스박스 안에 종류별로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었다. 주방에서는 어머니와 누나가 만드는 쇠고기 등심 요리에서 감칠맛 나는 고소한 냄새가 스멀 스멀 피어올랐다. 자가용을 타고 결혼식장인 힐튼호텔에 도착했다. 사회적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이유로 한때 금지 됐었던 호텔결혼식 규제가 풀린 뒤이어 맞춰 특급호텔들은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는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모습에서 서민적인 분위기로 새롭게 변모했다. 과거에는 많은 하객을 유지해 결혼식을 치루는 당사자의 부와 권력, 출세를 하객들에게 드러내 보이려 는 데만 신경을 썼지만 최근에는 하객수를 줄이고 예식을 과시용이 아닌 오직 성스러운 예식 으로서 예식을 차별화 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 호텔예식 문화의 달라진 모습이었다. 저렴한 가격대에서 최상의 결혼식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연회장 및 웨딩용 장식품, 식기 등을 개보수하고 고급화하여 호텔예식문화의 차별화를 선언하고 있었다. 우리일행은 웨딩홀 로 들 어서자 호화롭게 치장된 실내장식의 무게에 짓 눌려 현기증이 일었다. 레드 카펫이 깔린 웨딩 홀은 전원풍의 자연적인 멋과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핑크, 옐로 ,오렌지 ,퍼플, 분 홍, 블루 보라 등 생생한 꽃으로 꾸며진 수천 개 이상의 촛불장식과 순은 도금을 해 깨끗한 이미지를 주면서도 테두리에 화려한 금색 스팽글로 로코코시대를 따 올리게 하는 원형난간 홀 까지 포함해 두 개 층을 아울러 사용하는 웨딩홀은 마치 한 편의 로댕작품을 보는 것 같은 신 선한 감동을 주었다. 전문 아티스트가 수작업으로 만든 비즈와 화려한 조명이 빛나는 푸른 벽에는 시작도 끝도 없 고, 모든 존재를 초월한 공존과 포용의 느낌이 드는 수백 개의 연꽃무늬가 원을 그리며 매달 려있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미소로 답해주었다. 촛불을 켜둔 듯 은은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샹들리에의 앞에 있 던 강 사장은 미소를 띠며 내게 다가왔다. “동생 결혼 진심으로 축하해.”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자리를 빛내 주어 고마워 형.” “별 소리를 다해, 그런데 어머님과 가족들은 같이 오지 않았어?” “대기실에 있어.” “어머님을 찾아뵙고 사과를 드려야 하는데.” 강 사장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하얀 꽃 장식이 고상함을 더해주는 벽에

- 83 -

걸린 모던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주는 둥근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결혼 시간이 30분도 남지 않 는 시각이었다. 유럽풍 고급원목 양식으로 설계해 귀족적인 분위기가 나는 건물 쪽으로 떠들 썩한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족과 작은집 식구였다. 생애 최고의 순간에만 입을 수 있는 조선 시대 궁중 왕비 복을 걸친 가족들의 모습은 눈부실 정도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사이에 장 모님이 될 윤희 어머님도 함께 있었다. 전체적으로 물 흐르듯 크고 자연스럽게 웨이브를 했고 머리를 핀으로 살짝 고정시킬 때도 잔 머리는 살리고 앞머리 몇 가닥을 턱까지 길게 내려부드 럽게 웨이브를 준 헤어스타일이 단연 돋보였다. 그 옆에 함께 동행한 사람은 장모님의 친 동생으로 보이는 50대 초반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였다. 몸집이 당당하고 기품도 있고 혈색이 좋은 피부는 건강미가 넘쳐났다. 나와는 처 고모 부가 될 그는 대기업체에 다니는 중견간부라고 장모님이 소개했다. 맞춤식 정장에 연한 색상 의 물방울무늬 넥타이를 매 중후한 느낌을 주었다. 바지는 구두를 살짝 덮는 길이로 맞춰 다 리 상체보다 상당히 길어 보였다. 나는 장모님과 처 고모부 앞에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 다. “진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도리인데,

세상일에

쫓기며

살다보니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드립니다.” 나는 진심으로 사죄를 했다. 장모님과 처 고모부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요.” 그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황송해하며 두 손으로 처 고무부의 내민 손을 공손하 게 잡았다. 강 사장과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장모 님과 처 고모부를 의식해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려고 조심조심했다. 그런데 강 사장이 우리 앞을 막는 바람에 갑자기 혼란스러워 지면서 어떻게 사태를 수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 지고 말았다. 어머니도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어쩔 줄을 몰라 내 쪽만 넋 놓고 바 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 앞에 강 사장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목이 짧고 얼굴이 큰 것을 고려해 셔츠 칼라가 양쪽으로 넓게 벌어진 와이드 스프레드형 셔츠 를 입이서 그런지 목이 짧거나 얼굴이 커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짙은 색상의 타이를 매고 옅 은 색상의 재킷과 무난한 짙은 색상의 셔츠를 입어서 시선이 셔츠로 쏠리게 했다. “어머님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집안 대소사에 제가 본의 아니게 끼어 들 어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만 노여움을 푸시고 저의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 84 -

“괜찮습니다. 도

더

우리아들에게

지극정성으로

사장님에

우리아들을

대한

보살펴준

말을

귀가

사장님의

아프게 은혜에

들었어요. 오히려

제가

친형보다 감사를

드려야 도리이지요.” “어머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앓던 이가 쏙 빠진 기분입니다 하하하.” 강 사장이 유쾌하게 웃자 얼어붙은 분위기는 갑자기 화기애애하게 바뀌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하여 촉각을 곤두세웠던 웨딩 직원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표정이었다. 바로코풍 장식을 띤 촛대가 진열된 곳에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예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미리 알 수 있게 결혼식 장면이 생생하게 중계되고 있었다. 드디어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생애 최고의 순간 나 만의 맞춤 웨딩으로 품격 있게 보이기 위하여 중세시대 귀족복장을 하고 식장으로 입장하자 하객들 사이에서 탄성소리가 흘러 나왔다. 엉덩이 까지 덮는 연미복은 재킷 단추가 두 줄로 여러 개가 달려있는 더블브레스트 재킷과 흡사하여 허리와 엉덩이 라인 전체를 감싸줘 슬림하 게 보여 영국 황태자처럼 기품 있게 보였다. 바지는 일(一)자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엉덩이에서 발목까지 점진적으로 통이 좁아지며 구두 를 살짝 덮는 길이가 인상적이다. 주례사 앞에 선 내가 너무 젠틀해 마치 필하모니 오케스트 라를 지휘하는 수석 지휘자와도 같았다. 마주 하고선 주례사 선생은 초등학교 교장선생 같았 다. 마주 세워 놓은 것이 극과 극처럼 뚜렷하게 명암이 갈라질 만큼 대비되는 두 남자의 모습 에 하객들은 잠시 술렁거렸다. 주례사 선생에게 서는 3선 국회의원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비쩍 마른 몸, 상체와 하체의 불균형, 검버섯이 핀 너저분한 얼굴, 썩은 동태눈처럼 흐리멍덩 한 눈, 그런 외형적인 모습이 3선 국회의원이라는 찬란한 자부심과 명예마저 앗아가 버렸다. 드디어 신부 입장의 순서가 되었다. 결혼 행진곡에 맞추어 등장한 윤희는 영국의 황태자비 케이트 미들턴 보다 더 우아하고 화려했다. 어깨가 보일 듯 말 듯 살짝 드러나고 팔꿈치가 닿 은 높이의 허리선부터 스커트가 A자 형태를 그리며 얌전하게 퍼져나가는 ‘A라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S라인의 몸매를 더욱더 돋보이게 했다. 여미는 후크 부분앞쪽에 가슴을 볼륨감 있게 살려주는 보정 브래지어 까지 갖추고 있어서 가슴사이즈를 한 컵 정도 커 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스커트 부분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소리가 울렸다. 하얀 면사포 표면 에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비쳤다. 놀라울 만치 안색이 밝았다. 동쪽에서 비치는 아침햇살처럼 눈 부셨다. 탄력 있는 얼굴은 행복이 넘실거렸다. 꿈처럼 시야가 파르스름했다. 운하를 따라 예쁜 가로등 불빛이 빛나는 것처럼 느껴지고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듯 내 두 다리가 비틀 거렸다. 그 행복감을 견딜 수 없었다.

- 85 -

건물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고 눈앞이 갑자기 뿌옇게 흐려졌다. 어쩐 일인지, 몇 년 전 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안색이 창백하고, 병색이 완연한 아버지의 초췌 한 얼굴, 그리고 ‘네 결혼 하는 것을 보려고 했는데, 며늘아기와, 귀여운 손자 녀석도 품에 안 아보고 싶었는데’ 힘없이 중얼 거리며 해골 같은 얼굴에 눈물을 뚝뚝 떨구던 아버지, 아, 아버 지ㅡㅡ아주 순간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물이 김처럼 모락모락 오르는 내 얼굴이 하얀 면사포에 비쳤다. “아, 아버지ㅡ !” 나는 입술을 깨 물었다. 어머니 쪽을 돌아보니 손수건으로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치면서 슬 픈 얼굴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윤희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 줄때에야 참았 던 설움이 복 받쳤다. 강둑이 터진 듯 눈물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엄마가 볼까봐 흰색면장갑 으로 눈을 꾹꾹 눌렀지만 소용없었다. 사진사가 이 황당한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하다가 어머니를 부르려 했다. 나는 숨 죽여 울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같이 좋 은날 일생에 한번 밖에 없는 내생에 최고의 날에 가족들과 하객들 앞에 절대 눈물을 보일 수 는 없었다. 신부인 윤희에게 부케를 건네주고 3m가량 되는 뒤트레인(뒷자락)을 들고 입장했던 들러리가 내 앞에 나타나는 순간 거짓말처럼 눈물이 둑 그쳤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윤희를 안심 시키려고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녀도 해 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황실결혼식처럼 클래식하고 우아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 옆에선 내 모습이 거울에 비치었다. 라펠에 광택이 있는 실크 소재를 덧대 귀족적인 디 자인의 재킷스타일의 턱시도를 입은 내 모습은 내가 봐도 멋이 있었다. 발목이 알맞게 올라오 는 자줏빛 양말에 옥스퍼드 구두, 귀족적인 디자인의 재킷 스타일의 턱시도, 블랙 턱시도 수 트에 핀 턱 칼라셔츠에 나비넥타이, 놀라울 만치 기품 있어 보이는 몸의 균형, 호위하는 근위 병만 옆에 있다면 영락없는 영국왕세자의 모습이었다. 주례사가 끝이 났다. 부부가 되었다는 언약으로 합한 주를 마시고 예물반지를 교환했다. 어머니는 감정이 격해서 눈물을 흘린 내 모 습을 봤기 때문에 잔득 긴장이 된 얼굴로 내 쪽만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 앉은 누나가 귓속말 로 속살일 때마다 내 쪽을 보며 불안하게 몸을 움직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피로연이 시작되었 다. 피로연이라기보다 콘서트에 가까웠다. 초대한 손님 대부분이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 음악 다방 단골손님 이였다. 내 쪽은 어머니, 누나, 동생, 외에 대구에서 온 작은집 식구, 그리고 장모님과 처 고모부, 오늘로서 내 아내가 된 윤희뿐이었다. 특별초대 손님은 황제나이트 클럽 총지배인과 세 명의 전속가수들이 자리를 빛내 주었다. 반

- 86 -

짝 반짝 빛나는 밤무대의상을 입은 가수들을 보자 음악적 향수에 콧날이 시큰해졌다. 오직 나 만을 위해 준비된 특별 무대에 올랐을 때부터 나는 정말 위대한 가수가 된 기분이었다. 일찌 감치 사전 입장을 한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 들은 무대 앞을 가득 메우고 앉아 있다. 오페라 홀처럼 꾸며진 무대엔 객석의자가 양 옆에 놓여있고 우리가족과, 작은집 , 처가식구들이 앉아 서 많은 하객들의 인사에 미소 만 짓기도 벅찼다. 무대의 조명은 웨딩콘서트홀 답 게 촛불을 켜둔 듯 은은하고 아련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무대 뒤편을 저녁노을이 깔리는 낭만적 정취가 담긴 영상이 깔리고 귀에 익숙한 기타 전주가 흘렀다. ‘한국의 제임스 브라운’ ‘하이난의 영 웅’ 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든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은 다소 긴장하는 분위기였지만 이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일주일전 최종 리허설을 통해 나와 손발을 맞춘 황제 나이트클럽 전속 가수 세 명이 통기타 를 메고 무대에 올라왔다. 무대에 등장한 그들의 의상은 밤무대 옷이 아닌 80년대 한창 유행 했던 청바지와 셔츠 차림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핀 조명을 받으며 첫 곡인 리처드 막스 의 ‘Now g Forever(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연주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애틋하게 묻어 나 있는 노래에 윤희는 눈물이 글썽였다. 아바의 ‘아이 헤브어 드림(I have a dream)’ 까지 부르고 나자 힐턴 호텔 콘서트홀은 박수와 환호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영화 음악의 전설 엔니 모 모리 코네 대표작인 영화 ‘원스 어폰어 타임인 아메리카’와 돈 깁슨의 곡을 레이 찰스가 리메이크 하여 5주간 빌보드 차드 및 각종 음원차트에서 장상을 차지한 ‘아이 캔 스탑 러빙 유), 그룹저니의 ’오픈 암스(open Arms)’, 비틀즈에 버금가는 미국 전설적인 가수 롤링스톤이 ‘U2,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최고의 레이브 음악이라’고 극찬을 했고 ‘선데 이 모닝’의 도입부처럼 본격적인 드럼 비트가 들리면 이 노래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 한 그룹사운드 콜드 플레이‘ 에브리 티어드롭 이즈 어 워터폴(Every Tear drop Is A wa tearful)’ 까지 부르고 나자 객석에서는 관객들의 긴장한 숨소리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 소 리가 울렸다. 나는 머릿속이 멍했다. ‘와 와와’하는 함성소리도 바람소리처럼 들리고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손 흔들기 조자 벅찼다. 팬 사인회 까지 마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한 숨을 돌릴 수 가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럽풍의 아름다움과 품격을 느낄 수 있 는 블랙과 화이트 실버톤이 적적히 조화된 연회장은 다른 호텔의 연회장과는 비교가 안 될 정 도로 우아하고 화려했다. 내음 악을 아끼고 사랑하는 팬들만의 모임이라 분위기가 단숨에 달 아올랐다. ‘A라인’ 드레스에서 아찔한 화이트 미니 드레스로 갈아입은 윤희와, 답답해 보이는

- 87 -

턱시도에서 캐주얼한 정장차림을 한 내가 함께 등장하자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과 하객들이 환성을 지르며 맞아 주었다. 나와 윤희는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환하게 웃음 띤 얼굴로 다가와 진심으로 축화를 해주는 그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윤희는 연 신 싱글벙글 이다. “형수님 신혼여행은 어디로 정했어요?” “오스트리아 그라츠로 가기로 했어요.” 윤희의 대답에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은 와와 환호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오스트리아로 신혼여행지로 선택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세요?” “네,

있어요.

중세의

향기

품은

아름다운

도시를

꼭

한번

보고

싶었고

1483년에

서 1462년 사이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걸 작품인 ‘그란츠’대성당과 르네상스 양 식의 건물인 ‘란트 하우스’를 제 두 눈으로 보고 싶었어요.” “그러고 보니까 예식장도 그렇고, 이 연회장도 중세 냄 새가 물씬 난 특별한 이유가 있었군요.” “형님은 제 아내의 직업이 뭔지 모르세요?” 나는 강 사장을 보며 희마하게 웃었다. 무스를 이용해서 가르마를 약간 타고 옅은 감색 선글 라스를 낀 강 사장은 순간 당황했다. 나이에 비해 주름살이 작은 매끈한 얼굴은 희미하게 빛 나는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처럼 어두워졌다. 윤희가 실망스런 눈빛으로 강 사장을 쳐다보았 다. “매사에

빈틈없기로

소문난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제수씨

되는 사람의

직업도

모

른 다니 너무 서운한데요.” “경황이 없다 보니 제가 잠시 기억이 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정말 그런 중요한 것을 왜 기억해 내지 못했을까 하고 대단히 미안한 눈빛으로 윤희를 보면 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강 사장은 나의 가요계복귀를 위해서 온 힘과 정성을 쏟으며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 다녔다. 때로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비웃음 때문에 마음이 약해질 때면 ‘잡 새가 어찌 봉황의 넓은 뜻을 알겠는가?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면서까지 고군분투한 자신이 아 니었던가. 이 중요한 순간에 그 중요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 자신의 무관심에 대해, 땅을 치며 후회하고 싶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강 사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뇌 속에 저장된 기억의 장치를 다 동원하여 기름을 째내듯 짜내었다. 마침내 생각이 났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쳤다.

- 88 -

“신혼

여행지로

오스트리아로

정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입니다.

로코코

바로코

사진작가인 제수씨 에게는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에요, 안 그래요 제수씨?” “이제야 아주버니께서 제 마음을 알아주는군요. 호호호.” 서운했던 마음은 어느새 웃음으로 바뀌었다. 동생과 누나가 강 사장을 보고 정중하게 인사했 다. “어머

강

사장님

아니세요,

한번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도리인데

여기서

이렇

게 뵙게 되어 정말 죄송해요.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셨기에 올케가 배꼽을 잡고 웃 고 있나요?” “제수씨의 전문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얘기를 하셨어요.” 누나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우리

동생

일까지

마음써주시는 것도

너무나

고맙고

황송한데 올케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너무 과찬이십니다, 제가 제수씨에게 신경 써 준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강 사장은 손사래를 치며 기분 좋게 웃었다. 동생 혜란 이가 비어있는 강 사장의 잔에 술을 채웠다. 동생의 향기로운 살 냄새에 강 사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웠다. 실내가 점차 무르익 어갔다. 크게 웃고 떠드는 소리에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내 음악을 사랑하 고 아끼는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은 아름다운 여성 팬 들 앞 에서도 내 품위를 손상 시키는 저속한 행위는 일체하지 않았다. 그녀들도 멋지고 핸섬한 남자들 앞에서도 촐랑대거나 눈웃음 을 치는 행동은 가급적 삼가하고 있었다. 성자를 방불케 할 정도의 초연함을 느끼게 하는 아 가씨가 핸드백에서 미니 카세트를 꺼냈다. 카세트 안에는 테이프가 들어있었다. 꽤 오래된 것이어서 작동이나 할까 싶었지만 음악을 듣 고 싶은 충동으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찰칵 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음악이 나왔 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몸을 한 발짝 뒤로하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아름다운 노래 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무의식 적으로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왠지 행복한 음악으 로 둘러싸여 있는 푸른 불꽃처럼 보였다. 형형색색 빛나는 조명등 불빛 속에서 더 할 나위 없 이 잘 어울리는 남녀들이 감미로운 음악의 선율에 맞추어 춤을 추는 모습은 물마루가 하얗게 물보라를 치며 움직이고 있는 현상처럼 보이다가 새하얀 물체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처럼 느 껴졌다. 대형 스크린 화면에는 하얀 갈매기 무리들이 콘크리트 방파제위를 날아다니고 겹겹의

- 89 -

파도가 완만한 물결을 이루며 조용한 해변 마을로 밀려오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윤희가 그토록 소원하던 도시전체가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오스트리아 수도 인 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인 그라츠에 도착했다. 그라츠로 가는 직항 편은 없어 오스트 리아 수도인 빈에서 그라츠까지 기차를 이용했다. 창밖으로 펼쳐진 호주의 끝없는 대자연에 나와 윤희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큰 도시보다는 작은 마을이 더욱 아름답다. 프로방스 건물 형태인 삼각형 꼴의 빨간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그렇게

평화롭게 보일수가 없었다. 마을 입구와 주택가 주변에는 장미, 백합, 튤립 꽃이 활짝 피어있 어 고풍스런 주변경관 과도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5월과 6월의 그라츠 여행은 더욱 낭만적이 며 이 시기가 되면 오스트리아 작은 마을도 ‘빛의 화가’ 라 불리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모네 의 그림 속 한 장면처럼 멋지게 변신한다는 현지 가이드 말이 조금도 과장되거나 허세가 담긴 말이 아님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평온한 전원 풍경과, 깊은 산록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들꽃과 양귀비꽃이 피어 있는 야트막한 언덕, 그리고 한없이 인자해 보이는 허름한 밀짚모자를 쓴 현지인의 모습은 모 네의 그림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다소 원시적인 듯 하면 서도 뭔가 특별한 중세 역사의 향기 를 담고 있는

유럽 내륙 깊숙이 자리한 오스트리아의 풍광 앞에 윤희는 연신 카메라 플래시

를 터트렸다. 마치 밀림을 연상케 하는 울창한 숲이 광활하게 펼쳐진 평원에는 벤치와 적당한 휴식 공각이 마련되어 있고 일본식 아치형 다리도 간혹 눈에 띄었다. 계절이 봄인 탓도 있겠 지만 도무지 갈색이라곤 눈 씻고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소름끼 치도록 푸른 풍경 앞에 나는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10세기부터 현재까지 그라츠는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로 가기위해 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국경지역이라서 그런지 기차 안에는 다양한 유색 인종들로 들 끊었 다. 우리가 탄 열차는 풍경자체가 모네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평야를 계속 달려서 정오조금 지 난 무렵에야 최종목적지인 그라츠에 도착했다. ‘유렵문화수도’ 로 지정될 만큼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간직한 그라츠는 비옥한 분지로 흘러 들어가는 무르 강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중세의 향기를 그대로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바로크 풍 건물들이 거리 양 쪽으로 늘어서 있는 시 왼쪽 기슭에는 낙엽송이 빽빽한 슐로츠 베르그 산이 우뚝 솟아있다. 하늘은 유난히

- 90 -

맑아 푸른 산위로 작은 점 같이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새의 모습도 관찰되었다. 구시가지 중심으로 전차가 가로지르고, 중세의 멋스러움 이 넘쳐나는 바로코 양식의 유서 깊 은 거물을 보면서 윤희는 감탄과 흥분을 금치 못했다, 정말 장관이었다. 그 중 한 이색적인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비록 건물은 작지만 대지면적을 꽉 채우고 앉아있는 모습이 알프스 마을에서의 추억과 비슷한 감동을 선사한다. 특정 계층만을 위한 고 유한 건축문화 인, 바로코 양식을 서민속의 한 주거문화로 승화시킨 매우 개성적이면서도 독 창적인 건물 형태였다. 1층 목재 패널은 통나무 기둥을, 2층 외벽의 붉은 벽돌시트는 그라츠 라는 이름은 슬라브어그로 작은 섬을 뜻하는 ‘그라덱’에서 유래된 붉은 벽돌로 ‘작은 섬’을 상 징한다. 이 둘은 마치 세포처럼 연계해 독일 남부 숲속마을의 정취를 완벽하게 재현한 이층 오두막 집을 떠 올리게 했다. 중첩된 통나무와 붉은 벽돌이 포개져 창문까지 전원적인 멋이 살아있 다. 영락없는 숲속 오두막집 이미지다, 통나무집 이미지는 빛을 만나면 더 잘 드러났다. 집을 떠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이 숲처럼 다가와 인위적 구조물이 자연이 되고 마침내 중세의 역사 가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도시에 서민적 주거문화를 꽃피웠다. 누우면 그대로 나른한 잠이 쏟아질 것 같은 목가적 건물 모습에 나는 저절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그라츠 역에서 주요 볼거리가 모여 있는 구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천천히 걸으면서 아기자기한 구 시가지를 둘러 보니 우리가 마치 15세기에서 17세기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벌써 두 시간이나 걸었는데도 조 금의 피로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 머릿속에는 오직 아름다운 건물들에 관한 생각뿐이다. 다리 근육에 힘을 실을 때마다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중세의 멋스러움 을 간직한 고풍스런 건축 물을 대면한다는 기쁨에 발걸음마저 가벼웠다.

3시간 정도 걷자 윤희는 체력이 다 한 탓인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나도 다리에 힘이 빠 지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푸른 오월의 하늘에 솔개 한 마리가 머리를 곳곳이 세우며 비 행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그라츠 구 시가지의 배경이 되어주는 473m의 슐로츠 베르크 산에 도착했을 때 장미꽃으로 만든 그런 석양이 ‘그라체 평야’라고 알려진 비옥한 분지로 흘러 들 어가는 무르 강기슭으로 떨어졌다. 꼭 그 모습은 탁탁 타 들어가는 시뻘건 숯의 마지막 사투 처럼 너무 강렬한 색상의 석양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윤희가 내 옆에 앉았다. “내 생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석양이야.” “나도

그래

푸른

목초지대에

목가적

분위기

마음을 비로소 이해가 될 것 같아.”

- 91 -

때문에

유럽을

선호한

여행가들의

“꼭 홋카이도에 온 기분이야.” “일본 홋카이도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새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윤희는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더 없이 웃을 때면 우아하고 아름답 게 보이던 그녀도 말광 량이 소녀처럼 청순하게 보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아시아

동쪽

끝

홋카이도

철도여행’

이라는

프로그램에

말로만 듣던 홋카이도를 보게 되었지. 여름날의 홋카이도는 수십 벌의 옷을 갈아 입는 듯 했어. 여태껏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눈부신 녹색과 새파란 하늘. 색색의 꽃들로

치장한

초원,

거대한

화원과,

지평선

끝까지

뻗은

감자밭,

불곰이

사는

숲. 연어가 오르는 맑은 강물, 정말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곳이었어. 면적도 얼추 남 한만한 크기라고 하던데.” “응, 맞아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었네.” “뭔데?” “가미노

코이케

일명 ‘신의

아들 연못’

이란 이름의

신비한

늪이지. 수정같이

맑

은 물속 나무 사이로 에메랄드 빛 뜨거운 온천수가 1년 365일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샘솟는

까닭에 마치

비상구의 초록

빛 사각 표시등처럼

빛나는 신비한

늪

이지.”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 “자기야 저기 좀 봐.” 윤희는 눈짓으로 그라츠 시가지를 가리켰다. 발 아래로 울긋불긋한 지붕과 바로크와 고딕 양 식의 중세건물들이 불타오르는

석양 속에 휩싸여 있는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다. ‘탁탁’ 타 들

어가는 시뻘건 숯의 마지막 사투처럼 보이는 붉은 하늘에는 수십 마리의 솔개 떼들이 무리를 지으며 붉은 불길이 치솟는 하늘을 겁도 없이 횡단하고 있었다. 멋모르고 그 주변을 침범했던 까마귀들이 칼처럼 번득이는 솔개의 부리에 잔득 겁을 먹었는지 꽁지가 빠지도록 달아나 버렸 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입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윤희는 한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불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성이 순박하고 온화한 윤희를 인생의 반려자로 결심했 을 때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이런 온유한 여자와 함께라면 부부싸움도 하지 않고, 가시 돋 친 독설도 오고가지 않는 정말 깨가 쏟아지도록 알콩달콩 살 수 있지도 모른다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절망적이고 우울한 삶이 아닌, 슬픔이나 불행의 그림자가 한 점도 없는 산뜻하게 맑 은 날이 될 것이라고 크게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 92 -

나는 가능하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인생을 즐기고 싶었다. 음악만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음악이 존재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삶처럼 가정을 꾸리고 아 이를 낳아 기르며 오순도순 살고 싶었다. 지금 이렇게 중세의 향기를 품은 오스트리아 그라츠 를 발아래 굽어보고 있자니 40이 다 되어가는 나이를 먹도록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는 인생의 행복을 재발견한 느낌에 심장이 타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바로크 양식의 유서 깊은 건물들을 보면서 미래의 인생은 우중충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색이어야 했다.ㅡ음악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ㅡ 귀청을 찢는

생생한 목소리가 내 혼을 일깨웠다. ‘대중들의

인기로 먹고사는 가수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이미 죽은 모습이야.’ 한때 두 서너 곡 을 히트시켜 유명했지만 인기가 사라져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다 끝내 겨울바다로 뛰어들 어 생을 마감한 친구의 비통한 외침소리가 비수처럼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나는 3년 전에 죽은 친구의 환영이 되 살아나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막고 듣지 않으려 했다. “대중들의

인기를

의식해

대중들만을

위한

노래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으로서

이

미 음악인의 생명은 끝이 난 거야. 진정한 음악인은 대중이 아닌, 오로지 음악으로 서 승부를 걸어야 하는 거야. ‘인기’ 라고 하는 것은 불꽃과도 같은 거야. 찰나의 인기에 목숨을 내던진 너의 무모한 선택은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야. 너는 음악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대중들을 사랑한 거여.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 너는 애초부터 음악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어. 그런 형편없는 놈이, 음악에 대해 기본지식도 없는 놈이 대중이 아닌 음악을 선택한 내 숭고한 인생에 감히 훈계를 하려 들다 니, 당장 내 눈앞에서 썩 꺼지거라! 이놈아.” 마음속으로 사자후처럼 불을 뿜고 소리치자 소스라칠 만큼 묵직하게 가슴으로 차오르던 죽은 친구의 환영이 푸르르 몸을 떨며 내 발밑에서 얼음처럼 녹아 버렸다. 정말 다시 태어나고 싶 은 것일까. 낱말 퍼즐 짜 맞추듯이 앞으로 펼쳐진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 머리에는 쥐가 나고 몸마저 축 처진다. 나는 불타오는

석양빛에 휩싸인 그라츠 시가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주 비밀스러운 도시는 에메랄드빛 연못, 코발트빛 칼데라 호수가 있는 홋카이도처럼 눈부시 게 아름다웠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소리도 향기로웠다. 숨죽인 채 쳐다보자 심장의 고동 소리가 윤희에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쿵쾅거렸다. 내 생명처럼 여기던 음악에서 벗 어났는데도 기쁨이 샘물처럼 넘쳐흐르고 있었다. 앞으로는 대체 누가 내게서 넘쳐흐르는 삶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저 내 가슴 한가운데서 샘솟는 행복만이 내 정신과 육체를 지배할 뿐이었다.

- 93 -

그라츠의 유명관광 명소를 카메라에 담을 때도 윤희는 어린아이같이 즐거워했다. 꿈결 같은 시간이 흘렀다. 친정어머니에게 전화를 걸때는 영락없는 사춘기 소녀였다. 전화를 끊고 난 후 에는 입에 침을 튀기며 내일 둘러볼 관광지에 대해 의논했다. 시간을 벌써 나흘이나 흘렀다. 마지막 날 윤희가 꿈에도 잊지 못했던 그란츠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성당을 설립한 프리드리 히 3세의 문장(紋章)이 장식되어 있는 주출 입구가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웠다. 메타세 콰이어 두 그루가 수호신처럼 서 있는 광장남쪽에는 1485년에 그려진 고딕풍의 프레스코와 그림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슬로베니아 국기가 그려진 반팔 티셔츠를 입은 구레나룻이 매 우 인상적인 60대 노인이 세 번에 걸쳐 메뚜기 떼의 습격을 받아 고통에 빠진 도시의 모습을 묘사한 ‘저주의 그림’앞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성당내부 장식은 주로 웅장한 바로크 양식을 따르고 있다. 넓은 회중석과 성가대석 사이에는 성경에 나오는 좁은 문을 상징하는 개선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 양 옆에는 600년 전에 만들 어진 두 개의 호화스러운 성 유물 함이 있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정적 속에서 수백 명의 관 광객들이 차분하게 성당내부를 관람하고 있었다. 18세기 전형적인 로코코 스타일의 실크드레 스를 입은 금발의 미녀가‘ 성 자일즈의 기적’이라는 초상화 그림 앞에서 우아하게 포즈를 취 하고 있고 같이 온 일행으로 보이는 푸른 눈 의 아가씨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위해 자세를 잡고 있었다. 생소한 이국적인 언어가 대형벽시계의 초침소리와 함께 고요한 공기를 꿰뚫고 성당 안으로 울려 펴졌다. 그 소리는 훌륭한 조각상들과 그림으로 장식된 주설교단까지 들렸 다. 고딕양식으로 되어있는 수도원 예배당에서 윤희는 발을 뗄 줄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여 느 때보다 빠듯했던 관계로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인 란트하우스도 둘러보았다. 전면에는 둥근 창문들이 나있고 주랑이 설치되어 있었다. 기둥이 둘러싸인 마당에는 3층짜리 정자와 르네상스 풍의 분수가 있었다. 분수 앞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고개를 내밀고 흥미 진지한 표정으로 분수 주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출입 금지 구역 안에 들어가 관리인의 호통에 허둥지둥 당황하는 친구들의 모습 이 무척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흥미 있게 지켜보고 있다. 윤희는 핸드백에서 카메라 를

꺼내 르네상스 풍의 분수 앞에 천진난만하게 뛰어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찍었

다.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망울 속에서 맛보는 이편안한 안식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나의 얼굴을 보고 있는 윤희의 눈은 내게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이제 과거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다. 이제 음악이라는 멍에에 속박되어 내 인생을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는다. 속으로 몇 번 그 렇게 다짐하면서도 뱀처럼 가는 윤희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 94 -

처가댁에서 가까운 용산구 남영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단아한 거실에 아담한 침실, 그 리고 장모님이나 어머님이 와서 지낼 수 있는 방이 하나씩, 벽은 향토적인 느낌이 나면서도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묻어있는 연한 화이트 색으로 했고, 가구와 전자제품은 새로 출시된 제 품들로만 특별히 주문 한 것들이어서 무척 세련되고 고급스러웠다. 아파트 창문을 열면 싱그 러운 나무에 둘러싸인 남영역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눈에 들어왔다. 아파트 창문을 통해 고개 를 내밀자 오전 10시가 넘었는데도 주위는 일몰이 가까운 시간처럼 어두웠다. 하늘 전체가 먹 구름으로 뒤덮여있었고, 서울역 부근에 비를 몰고 오는 거무칙칙한 비구름이 잔득 드리워진 것을 보니 문산 이나 임진강 쪽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 일기예보 에도 비소식이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비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고 접이 식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지하 주차장에는 승용차가 세워져 있었다. 평소에는 전용 자가용을 이용하지만 오늘은 장모 님과의 단 둘만의 오붓한 시간이 예약되어있어서 택시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장모님과 사 전에 약속이 되어있었다. 아파트를 나서서 10분정도 걸어가면 남영역에 도착한다. 서울역을 가로 질려가는 지하철1호선에 속하는 역이다. 다른 역사와는 달리 출구가 하나밖에 없는 유일 한 역이다. 지상10미터 높이에서 전철이 지나가고, 그 아래로 4차선 도로가 뚫려 있는 조금은 특이한 역이었다. 50계단 위로 뻥 뚫려있는 역사를 보니 기분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지하철 주변에 바삐 오고가는 승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남영역에서 두 정 거정인 시청역에서 내렸다. 걱정하던 대로 시청역 출구를 나올 때부터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 기 시작했다. 시청을 벗어날 때부터 빗줄기가 상당히 거세어져 있었다. 서울시청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 아마추어 야구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빗속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마음 한 켠이 뭉클해지며 갑자기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주말 오후나, 학교수업이 없는 날 이면 나는 친구들과 함께 집근처에 있는 공터로 놀러가곤 했다. 기차놀이를 하거나, 말 타기 게임, 구슬치기, 딱지놀이를 하는 일도 있었지만 야구시합을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신기하게도 컨디션이 좋았다. 평소에는 삼진만 당하던 친구의 볼을 베드 중 앙에 맞추어 안타를 치거나 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1루수와 2루수 사이로 빠지는 2루타도 별

- 95 -

로 감격스럽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3루스 위로 날아가는 장외 홈런이 터질 때면 내 기분은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평상시에는 제구력이 너무 좋아 볼 끝이 살아 있는 친구의 볼을 베드에 맞추는 것 도 힘들었지만, 비가 뿌옇게 내리는 날이면 친구의 볼이 축구공 크기만 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비가 오지 않는 햇볕 쨍쨍한 날에 친구의 볼을 때려 홈런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친구가 미국 메이저 리그 전설급 투수 사이영 처럼 멋진 손놀림으로 공을 뿌렸다. 평소 실력 같으면 뛰어난 제구력과 빠른 스피드에 지레 겁을 먹고 베드조차 갖다 댈 수 없었 다. 그 날을 비가 오지 않는데도 친구의 공이 내 눈에 보였다. 솟구치는 흥분으로 날아오르는 공을 향해 힘껏 베드를 휘둘렀다. ‘따악’하는 기분 좋은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내가 친 공이 포 물선을 그리며 하늘높이 솟구쳤다. 보통 홈런이 아닌 공터 너머 콩밭까지 날아간 장외홈런 이 였다.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는 메이저리그 전설적인 투수 ‘사이영’으로 불리는 그 친구는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 시간이후부터 나는 그 친구의 볼을 원 없이 두들겨 댔다. 어느 새 목적지인 후암동에 도착했다. 시계를 쳐다보자 11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지만 비는 아직도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다세대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주택지로 돌아서자 앞쪽은 경사가 완만한 비탈길로 이어져 있 고 양쪽에는 새로 신축한 빌라와, 작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나는 접이식 우산을 펼 쳤다. 빗방울 하나가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듯 내 앞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너무 급하게 걷느라 몸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질 것 같았다.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서 우산을 쓰고 있는데도 바짓가랑이가 촉촉이 젖어있었다. 그 동안 몇 번 들렸던 장모님 집인데 도 쉽게 찾지 못한 것은 훤한 대낮이 아닌 주로 밤을 이용해 들렸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내 눈썰미가 부족한 탓이 그 원인이었다. 전화를 걸어 장모님에게 물어볼까도 생각했지만 내 기억력만 믿고 찾아 가기로 했다. 비는 장대비로 바뀌어 시야마저 희뿌옇게 보였다. 마침내 물어물어 장모님이사는 4층짜리 빌 라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콘크리트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문패에 장윤숙이라는 장모 님의 이름을 확인하고 인터폰을 누르자 곧 바로 회색철문이 열렸다. 파란색 롱스커트와 검은 색 티셔츠를 입은 장모님이 다가와서 나의 허리를 부서질 듯 껴안았다. 장모님 밭 밑에는 더 컵사이즈 말티즈가 발밑에 달라붙어서 동그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왕왕 짖어댔다. 백구처럼 귀엽게 생겼고, 푸들처럼 털이 곱슬곱슬하고 새카만 눈동자에 검정빛이 감도는 새하얀 눈자위 가 애완견보다는 마치 외국 인형에 가까웠다. 장모님이 품에 안아 머리를 쓰담아 주자 겨우

- 96 -

안심이 되었는지 나를 보고 더 이상 짖지 않았다. “세상에 단 한명 밖에 없는 아들 같은 사위가 온다 길래 얼마나 기분이 좋은 지 어 제 밤 한 잠도 못 잤는데.” 장모님은 나를 안으로 청하면서도 해 맑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거실로 들어가자 눈에 넣어 도 안차는 생후 1개월 정도 된 푸들새끼가 소파에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신경 쓴다고 청소했는데도 집이 좀 지저분하지?” 장모님의 말은 겸손 의 극치에 가까웠다. 원래 오래전에 지은 건물이라서 거실이 좁은데다가 많은 가구들이 거실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두 애완견의 집까지 있어서 너저분한 현상만은 피해갈수 없을 법 한 데도 마치 신혼집처럼 가구며 가재도구들이 질서 정연하게 정 돈 되어 있었다.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 베고니아 꽃향기 같은 향긋한 냄새가 났다. 팔걸이 부분에 공기 청정제가 부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장모님의 세심한 배려에 코끝이 찡해져왔다. 무엇보다 처가댁 집을 방문했을 때 느낀 점은 우리 집 안방보다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다. “처가댁에 오니까 너무 안락하고 좋은데요, 어머님.”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장모님은 한없이 사랑스런 눈길로 나의 얼굴 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원래 눈이 큰데다 조각이라도 한 것처럼 얼굴 윤곽이 뚜렷해서 쉰다섯 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요즘 들어서 몰라볼 정도로 장모님 얼굴에 빛이 났다. “사위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한데.” 쿡쿡 웃을 때마다 가녀린 목이 꿈틀거렸다. 주름진 피부가 약간 늘어져 있지만 아직도 30대 여성의 피부처럼 매끈했다, 특히 웃는 옆얼굴이 매력적이다. 보는 사람의 가슴이 떨리도록 애 틋함이 묻어 있었다. 긴장은 가시지 않았지만 나는 40대 초반 같은 장모님이 연인처럼 포근하 게 느껴졌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과

헤어져

있으니까

외롭지

요.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아요.

제가 친 어머님 이상 깍듯하게 모실게요. 네 어머님?” 그렇게 애원하자 장모님은 이번에는 소리가 나도록 웃었다. 그리고 트위스트 된 리본과 다이 아몬드가 세팅된 하트의 조화가 사랑스러운 디자인의 목걸이를 손으로 만지면서 말했다. “말이라도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마워.” “빈 말이 아니에요 어머님, 윤희는 말은 하지 않지만 혼자된 어머님 생각 때문에 많이 마음 아파하는 것 같아요.”

- 97 -

“나는 혼자 사는 게 편해, 혹시 알아 이 나이에 눈먼 남자라도 만나서 같이 살게 될지.” “어머님 그럼 사귀는 남자라도 있으세요?” 나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다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머님

이

제보니

교제하는

남자가

있지요.

사랑을

하면은

예뻐진다는

말이

괜

한 말이 아니었군요.” “넘겨

집지

마 괜히

해본 소리야

환갑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로맨스라니

생각만

해도 망측해, 그러니 두 번 다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일랑 하지 마세요, 귀여운 아드 님.” 귀여운 애교까지 떨며 극구 부인했다. “세월이 어머님을 비껴간 것 같아요. 제 결혼식에 참석한 강 사장이 어머님의 나 이를 묻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가 55세라고 말하자 믿지를 않기에 그럼 몇 살 정 도

되어

보이느냐고

묻자

많아봐야

42세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3년째 독수공방하고 있는 외 조카 와 맺어주고 싶다는 말까지 했지요.” 생각이 없는 인형처럼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듣고 있지만 표정만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예쁘 게 손질한 머리가 약간 흐트러질 정도로 조금은 신선한 충격을 받은 듯 했다.

“42세라는

말을

들으니까

괜히

소녀처럼

가슴이

떨리는데

강

사장

조카란

사람

말이야. 나이는 몇 살이고 현재 직업은 뭔데?” “관심 있으세요?” “조금.” 장모님은 소녀처럼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혼자 사는 외로움이 환갑이 가까워지는 장모님을 18세 소녀처럼 만들었다. “나이는

58세,

직업은

국영기업이사

거기다

강남

노른자

땅에

자신의

명의로

된

5층짜리 건물도 있어요. 시가로 따지면 백억 이상 가지요.” 백억 이상이라는 말에 장모님의 얼굴 표정이 확 달랐다. 장모님의 그런 모습을 보니 나 까지 기분이 묘했다. 장모님은 이제 갓 눈을

뜬 커피색의 털을 가진 푸들을 갓난아기처럼 가슴에

안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놀림이 마치 어린 아기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탄력 있고 윤기 나는 갸녀린 손가락으로 얼굴을 쓰다듬고 몸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갓난아기처럼 입을 뾰족하 게 내밀며 낑낑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귀엽고 앙증맞은 푸들은 장모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

- 98 -

은 채 얌전히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 윤희도 장모님을 닮아 무척애완견을 좋아했다. 우리 집에 왔을 때도 새끼 고양이를 지금 장모님처럼 품에 안고 머리가 닳아지도록 쓰다듬었다. 피 는 못 속인다는 말이 생각 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장모님은 새끼 푸들을 가슴에 안은 채로 안방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안방으로 들어 서자 호텔뷔페에 와있는 착각 마져 들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식탁에는 온갖 산해진 미와 함께 듣도 보도 못한 맛있는 요리들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참돔 요리와 함께 대 게 살 고로케, 당근과 귤 시럽을 곁들인 가리비, 성게 육수에 익힌 제주산 옥돔, 쑥, 드롭, 냉 이, 달래 곰취 등 봄에 나는 산채 나물을 이용한 일식 찜 요리, 여린 산초 순으로 향을 더한 초 된장 무침과 두릅에 유자 폰즈, 소스를 곁들인 문어 등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음식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호텔 디너A 코스나 임금의 수라상도 이보다 더 풍성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진수성찬이라고 말해주듯 맛있는 냄새가 코로 흘러 들었다. 주방에서는 해산물과 닭을 푹 삶아 만드는 해계탕 냄새, 머리가 돌 정도로 맛있는 냄새에 나는 시장기가 발동했다. 장모님은 해산물과 닭을 삶아 만든 해계 탕을 내 앞에 있는 상에 내려놓았다. “아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들어.” “어머님 머리 털 나고 이렇게 맛있는 요리는 처음이에요. 이 많은 요리를 어머님 혼자 다 하셨어요?” “그런 셈이지.” 장모님은 고개를 끄덕 거렸다. 내가 창문을 등지고 상 한가운데 기대듯 안자 장모님도 맞은 편에 앉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림에 담긴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손수 젓가락으로 맛있는 음식을 집어 입 안으로 넣어줄 때 나는 참새 새끼처럼 그 음식들을 잘도 받아먹었다. 쪽쪽 소 리를 내며 음식을 먹는 내 모습이 귀여워 보였던지 부드러운 손으로 내 볼을 어루만졌다. 입 에 살살 녹는 음식 맛에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10인 분 이상 되는 그 많은 양의 음식 을 30분도 안되어 뚝딱 해치웠다. 이렇게 살살 녹는 음식은 난생처음이었다. 상을 물리고 난 다음 장모님이 발라 엠 피아니시모 이탈리아 화이트 와인을 내 오셨다. “아들하고 오붓하게 한잔하고 싶은데.” “제가 바라던 희망사항이에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장모님은 특등석이라고 할 수 있는 TV 앞에 앉으라고 했다. TV앞에 앉자 그렇게 편안 할 수가 없었다. 방은 앙증맞 다고 해야 할지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아기자기한 소품과 꽃으로 꾸며져 있어서 동화

- 99 -

속의 왕자가 된 기분이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안쪽에 침실로 사용하는 방이 하나 더 있 는 듯 했다. 머리하나 들어갈 정도로 빠끔 열린 문틈으로 핑크빛 꽃무늬 시트를 씌운 침대와, 삿갓처럼 생긴 조명등 옆에 닥종이 인형이 보였다. 입이 귀 밑까지 찢어지도록 웃고 있는 뽀 글뽀글 파마머리의 두 할머니는 영락없는 우리 어머니 혹은 할머니의 모습이다. 눈과 입가에 밭고랑처럼 깊게 패인 잔주름이며 저승꽃인 검버섯이 그렇고 각기 다른 표정과 동작에서 저 마다 살아온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인형이었다. 뽀글뽀글 파마머리 옆에 박장대소 하며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할머니의 우스갯소리에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주름의 골이 더 깊어지도록 웃다가 찔끔 흘린 눈물을 훔쳐내고 머리가 부러질 정도로 뒤로 젖힌 채 목젖과 몇 개 남지 않는 치아가 드러나 도록 웃는 모습을 보는 내가 즐거웠다. 그 방이 아내 윤희가 사용했던 방이라고 장모님이 말 했다. 모두가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을 가꾸고 싶은 장모님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내 앞에 마주하고 있는 장모님은 그만큼 수수하고 성품이 반듯한 분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 을 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집에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흐뭇해졌다. 얼 굴을 마주하고 가까이에서 보니 예식장에서 보았을 때 보다 훨씬 더 젊고 고왔다. 온순한 눈빛이나 나긋나긋한 행동거지는 나이처럼 중후해 보이지만 피부와 얼굴을 처녀처럼 보드랍고 예뻤다. 단지 흠이 하나 있다면 눈가의 잔주름뿐, 전체적으로는 아직도 남자들의 호 기심을 자극할 만한 미가 남아있었다. “저, 어머님.” 너무 정다워 말을 건네 보았다. 순간적으로 장모님의 시선이 내 몸을 찔러 정신이 황홀했다. 무표정 때는 약간 야릇한 느낌이었는데 살짝 눈을 감고 윙크할 때는 숨이 턱 막히도록 매력적 이다. 쉰다섯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말 고왔다. 장모님의 미모를 보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참을 수 없는 욕정이 일어난 흉측한 마음에

살 떨리는 공포를 느꼈다. 어쩌자고 내

아내의 어머님에게 이런 욕정을 품은 내 자신이 무섭고 두려웠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건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들 불렸으면 말을 해야지요.” “어머님, 방금 제가 한말 기억나세요?” “강 사장님 외 조카 되는 분과 한번 만났으면 하는 거.

어머님 인생은 60부터

라는

기하급수적으로

말도

있잖아요.

요즘

TV와

신문을

보면

황혼결혼이

증가하

는 추세하고요. 의학도 발달되고 국민들 삶의 질 또한 높아져 평균수명도 2~30년

- 100 -

이상

연장된

거

모르세요?

어머님은

다른

또래에

여성들보다

115년

이상은

젊어

보여 충분히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설계할 수 있다고요.” “아들, 내가 그렇게 젊어 보여?” “그럼요 어머니.” “아들 말처럼 결혼이나 해 버릴까.” 장모님은 술잔을 기울이다 말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았다. 그리고 호수 같은 그윽한 눈으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미모를 집요하게 쫓았다. “아들, 내가 강 사장님 외삼촌보다 나이가 세 살 정도 적으니까, 얼추 잘 어울릴 것 도 같은데. 그치?” “제가 강 사장님의 외 조카를 한번 뵌 적이 있는데 어머님보다도 십 몇 년 이상은 더 들어 보인다고요.” “아들말대로 한번 일을 저질러 볼까?” 창밖에서는 빗발이 거세게 몰아쳤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중공군이 따발총을 갈기는 듯한 총성처럼 날카롭게 울렸다. 달빛 은은한 천연조명아래 목관 악기의 꽃으로 불리는 ‘플루 트 라이네케 협주곡’ 이 라이브로 연주되고 있고 한 손에 가볍게 들린 와인을 마시며 데이트 를 즐기는 장모님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침목을 지키자 취기

가 알맞게 올라 얼굴이 복숭아 빛처럼 발그레해진 장모님이 갑자기 오른쪽 볼에 기습적인 뽀 뽀를 했다. “나하고 30년 이상 같이 산 친딸보다 어쩜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아?” “어머님도 외로 우신 거지요,” “그럼 나도 사랑받고 싶은 여자인데.” 장모님은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봉긋하게 솟은 풍만한 가슴이 티셔츠 앞자 락을 뚫고 나오지 않을까 겁이 날정도로 팽창해져 있었다. 그때 온 몸이 찌르르 하면서 금방 이라도 앞자락을 뚫고 밖으로 나올 것만 같은 장모님의 가슴에 입을 대고 갓난아기처럼 빨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가에 얇은 미소를 띤 장모님은 나를 보고 웃고 있다. 남자들을 유혹하는

야릇한 눈빛을 짓고 있는 표정, 나는 손 에 든 술

잔을 한 번에 원샷 을 하고서 크게 숨을 내 쉬었다. “어머님, 제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지 마세요.” “내가 느끼한 눈빛으로 보니까 가슴이 콩당콩당 뛰니?”

- 101 -

“그럼요, 제가 봐도 이성적으로 느껴질 만큼 매력덩어리 라고요.” “어쩜 내가 좋아하는 말들만 골라서 할까.” 그리고 장모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5분도 채 안되 어 나왔다. 장모님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 핑크색 슬립을 입고 손에는 발렌타인을 들고 있었다. 윤기가 감도는 새카만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닿은 장모님은 한 떨기 수선화처럼 아름다웠다. 마음 같아서는 장모님을 품에 안고 침실로 가고 싶었으나 장 모와 사위의 성적관계를 우리나라 정서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에 나는 감탄으로만 애정표현을 대신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평상시에도 장모님을 볼 때마다 참 으로 예쁘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오늘은 더 특별히 아름답고 섹시했다. 장모님은 화보잡지 의 표지모텔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특히 핑크색 슬립 속에 감추어진 하얀 속살이 내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장미문양이 앙증맞게 붙어있는 핑크색 레이스 사이로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풍만한 가슴이 수줍게 드러났다. “이정도면 폐계는 아니지?” “폐계 라니 요. 30대 여자 몸 같은데요.” “정말?” “그런데 어머님, 손에 들고 있는 게 뭐예요?” 나의 시선은 장모님 손에 있는 양주에 멈추었다. “보면 몰라 양주지.” “어머님 대낮부터 술에 취하면 보기가 흉한데요.” “상관없잖아 오늘 자고 갈 거잖아.” 장모님은 눈짓으로 꽃무늬 시트를 씌운 침대를 가리켰다. 들고 있는 쟁반에는 다양한 종류의 과일이 소담스럽게 담겨져 있었다. 몹시 흥분하고 있는지 양주잔이 달그락 거리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장모님은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쟁반을 조심스럽게 놓더니 전광석화 같이 바른 손놀림으로 양주병을 땄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정적 속에서 벽시계의 초침소리만이 방 안의 고요한 공기를 꿰뚫고 울려 퍼졌다. “아들, 오늘 마음 푹 놓고 이 엄마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는 거야 알았지?” 장모님은 내 잔에다 술을 채워 주면서 터질 듯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요,

어머님

세상

모든

걱정근심

다

마실게요.”

- 102 -

내려놓고

이

순간만을

생각하며

술을

“역시 아들과 나는 뭔가 통 하는 게 있다니까.” 장모님은 나의 어깨를 두 손으로 살그머니 감싸며 매우 흡족한 듯이 웃었다. 검은 커튼을 친 방안의 분위기는 어슴푸레한 조명아래에 있는 것처럼 어두웠다. 장모님과 나의 둘 만의 오롯 한 술자리라 분위기가 단숨에 고조되었다. 장모와 사위라는 관계만 삭제한다면 어울리는 연인 처럼 보였다. 어머니보다 여덟 살 적은 장모님은 반듯하고 품위 있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가 끔 알맞게 취기가 올라 장난삼아 나를 껴안으면서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출 때는 짜릿한 스 릴을 느꼈다. 그 행복한 스릴을 느낄 때면 ‘이성을 잃으면 안 되지. 지금 앞에 있는 분은 여자 가 아니고 장모님이야’라고 내 스스로 나를 추슬렀다. 양주 한 모금을 천천히 넘기면서 장모와 사위는 연인처럼 그렇게 정이 들 수 있을까. 생각하 니 묘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몸에서 관능의 감촉이 어딘가로 빠져나가는 그런 기분이었다, 정신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술에 취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도저히 술잔을 놓을 수가 없 었다. 한 참이 지나자 빗소리가 잇따라 요란하게 울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 후에도 장모 님과 나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더는 무리라고 포기하듯 잔을 놓은 장모님은 내 품 에 안겨 축 늘어졌다. 나는 영혼이 빠져 나가는 것 같은 혼란을 느꼈다. 팔 안에 있는 장모님 의 몸은 내 몸 깊숙이 파고 들어왔으며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를 야릇한 소리를 내며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창밖이 어두워졌다. 푹푹 소리처럼 몰아치던 빗발은 언제 그랬 느냐 는 것처럼 조용했다. 벽 에 걸린 괘종시계가 일곱 번을 치고는 멈추었다. 커튼이 쳐진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보였 다. 달빛처럼 빛나는 가로등 불빛을 보고 있는데 장모님이 품속에서 몸을 뒤치락거리며 중얼 거렸다. “내가 윤희에게 전화 할 테니 오늘은 처가댁에서 자고가 알았지?” “네 어머님.” “내 귀여운 아들.” 장모님은 또 한 번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어머님 침대에 모셔다 드릴까요?” “이 상태로 조금만 더 있고 싶어 괜찮지 아들?” “그러믄요.” 나는 영혼이 뒤 틀리는 것 같은 혼란을 느끼면서도 키들키들 웃어 보였다. 내 품에 안긴 장 모님은 무척 행복해보였다. 손바닥에서 힘을 빼고 촉촉하고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한없이 부

- 103 -

드럽게 쓰다듬었다. 껴안으면 부서지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몹시 날씬해 보이는 몸을 나긋 나긋하게 마사지 해주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리고 등으로 손을 내려 견갑골에서 엉덩이 까지 정성스럽게 마사지를 해주자 장모님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온몸에 식은땀이 촉촉이 배어 나왔다. 가슴 앞에 있는 나의 손을 꼭 쥐었다. “힘들지 이제 그만해 자고 싶어. 나는 장모님을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장모님 곁에 가만히 드러누웠다. “아들 나 한번 안아주면 안 돼?” 장모님은 내손을 잡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안아달라고 어린아이처럼 보채는 장모님을 가 슴으로 끌어당겨 으스러지도록 안아주었다. 발렌타인의 열기와, 방안에 장모님과 단 둘이 있 다는 이상야릇한 분위기. 그리고 뜨거운 포옹이 가져다 준 황홀감은 장모님을 더욱더 미치게 했다. 우리는 기도하듯 이마와 이마를 맞댄다. 장모님을 내게서 때어 내려고 해도 내손이 마 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넘어 설수 없는 선까지 와 버린 것 같았다. 장모님의 숨결이 점점 뜨거워진다. 날씬한 몸은 내 가슴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나는 잠시 저항했지만 나의 마음 은 이미 강렬한 반응을 일으켜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흥분되어 있었다. 베이스볼처럼 봉긋 한 장모님의 젖가슴을 만지려다 절대해서는 안 되는 일인 줄 깨닫고는 황급히 손을 뺐다. “어머님 세상에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어요. 이 행위는 짐승보다 못한 짓 같아요.

제가

술에

취해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

같아요.

어머님

저의

무례함을

크게 꾸짖어 주세요. 굳이 이런 행위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방법으로 애정 표현을 할 수 있잖아요.” 장모님은 눈을 파르르 떨었다. 지금 이 행위가 얼마나 엄청난 범죄라는 것을 그제 서야 깨닫 는 것 같았다. 꽃잎처럼 파르르 떨고 있는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시트로 떨어져 번득 빛을 뿌렸다. “오히려 용서를 구해야할 사람은 나야, 노망도 들 나이도 아닌데 내가 주책 바가 지 지. 미안해 아들, 용서해 줘.” “용서는요. 다 애정 때문에 빚어진 일인데요.” 나는 침대 위에 있는 물티슈를 꺼내 눈물이 번져 엉망인 장모님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손만 잡고 있지만 이제는 두 사람이 하나 되려고 하는 천인공노할 행위가 사라진 셈이다. 큰방에서 먹다 남은 과일 안주의 시콤한 냄새 때문에 날파리 들이 들끊고 있다. 장모 님은 몇 번이나 내 손을 잡고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온몸에 고인 술의

- 104 -

열기도 조금씩 내려갔다. 술이 깨면서 잠이 확 달아났다. 덮고 자던 이불도 심하게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침대 밑으로 떨어져있었다. 잠이든 장모님의 입에서 숨소리가 크게 흘러나왔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그 얼굴을 한 참이나 바라보았다. 넘을 수 없는 선까지 넘어가려 했던 생각만 해도 아찔한 방금 전까지의 일이 없었던 일 같았 다. 앵두 같은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자는 모습이 사춘기 소녀처럼 청순해 보였다. 나는 장모님 의 잠자는 모습에서 뭔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은은한 취침 등에서 빛나는 한 떨기 꽃 같 이 보이지만 그래도 만지면 손끝이 뜨거울 소리 없는 정이 흐를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젊디젊은 나이에 일찍 남편을 잃고 너무 오랜 시간동안 혼자 지낸 외로움에 사위인 나를 이성으로 혼돈한 장모님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애틋한 마음에 떨리는 손으로 잠든 장모님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손끝에 와 닿는 보드라운 살 갗의 감촉이 오십대 중반의 여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탄력이 있었다. 스펀지 속에 파묻혀 있다 금방 나온 테니스공처럼 부드러웠다. 창문을 때리는 바람소리가 콩 볶는 소 리처럼 들렸다. 가로등 불빛이 장모님의 얼굴에 어슴푸레 비치고 있다. 울컥 치미는 사랑스런 마음을 나는 볼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신했다. 내마음속에 이미 욕망이란 없었다. 장모님도 몰라봤던 그 수게 같았던 나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더는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장 모님의 얼굴, 그때 잠꼬대 하는 소리가 들려 나는 손을 멈칫했다. 잠자면서도 시트가 내손인 줄 착각하고 쓰다듬고 있다. 이렇게 까지 손이라도 만지지 않으면 내게서 점점 멀어질 것 같은 장모님의 불안한 심리상태 를 읽을 수 있어 나는 코끝이 시큰했다. 나는 장모님의 얼굴을 껴안으면서 가볍게 입을 맞추 었다.

그리고 살며시 팔을 빼내 머리맡에 있는 마시다 만 양주병으로 손을 뻗었다. 일이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찬 공기를 들여 마셨다. 한 동안 억수 같이 퍼 붓던 비가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현관 계단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검은 고양이 두 마리가 나를 보더 니 ‘야옹’ 하고 울면서 경비초소 앞으로 달아났다.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잘한 소금결 정 같은 것이 손바닥에 끈적끈적 묻어있었다. 눈물 투성 이었던 장모님의 얼굴을 몇 번이나 닦았던 손바닥에 묻은 눈물이 마르면서 남은 결정체였다. 그 손바닥에 입을 갖다 대었다. 장 모님의 눈물 냄새가 짙게 풍겼다. 씻어도 마음으로 울었던 장모님의 이 눈물은 영원히 씻겨 지지 않으리라ㅡ 내 손바닥에 장모님의 눈물이 박제가 되어 남아있다. 내 발치 밑에 아무렇게 나 떨어져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손에 주어 들었다. 팬티만 걸친 채로 작 다리를 짚고 담배를 피운다.

- 105 -

억수같이 퍼 붓는 빗줄기를 보면서 담배연기 한 모금을 토해내는데 내 귀에 뜨듯 미지근한 더 운 바람이 훅 끼쳤다. 잠들었던 장모님이 어느 틈에 깨어나 내 옆으로 온 것이다. 50대 중반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탱글탱글한 가슴이 내 얼굴을 향해 산봉우리처럼 솟아 있었다. 장모님은 내 옆에 기대서서 어린애처럼 몸을 잔득 움츠렸다. 술 냄새를 풍기면서,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장모님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내 얼굴을 따뜻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밀려오는 행복을 이기지 못해 내 어깨에 편안하게 머리를 기대다가 시선이 내 손바닥을 가리켰다. “아들, 손바닥에 환하게 빛나는 게 뭐야?” “어머님의 눈물.” “내 눈물이 왜 손바닥에 있지?” “정말 몰라서 물어요?” “아하, 바로 그거!” 장모님은 그 제서야 기억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머님의 눈물은 너무 진한 것 같아요.” 손바닥에 소금 결정체처럼 말라붙은 눈물의 흔적을 눈으로 가리키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내 눈물을 아들이 빼앗아가 이제 눈물 흘리며 우는 일도 없겠네. 아들 제발 부 탁인데 그 눈물을 내가 돌려달라고 애원해도 절대 돌려주면 안 돼 알았지요?” “그건 곤란한데요.” “이렇게 부탁할게.” 어리광을 피우듯 내 몸에 찰싹 달라붙은 채로 장모님이 중얼 거렸다. 창밖으로 여름을 몰고 오는 후덥지근한 바람이 들어왔다. 장모님이 갑자기 몸의 중심을 잃은 것처럼 내 어깨에 기댔 다. 아련한 살 냄새가 느껴졌다. 지금까지 맡아본 적 없는 향기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머님 부탁 들어 주시는 대신 조건이 하나있어요. 들어 줄 수 있지“무슨 부탁인지 알아야 들어주든지 말든지 할게 아냐.” “그렇게

어려운

부탁은

아니에요.

울고

싶을

때

꼭

저에게

전화해

주세요.

이부

탁을 드리고 싶은 거예요.” “아들, 왜 그래야 하는데요?” 호수 같은 그윽한 장모님의 눈망울이 은은한 무드등 불빛에 출렁거렸다. “어머님

몰라서

그러세요?

저에게

눈물을

맡겨

- 106 -

놓으셨잖아요.

저에게

맡겨

논

눈

물을 찾아가야 눈물이 나올 게 아니에요.” “아참 그렇지.” 장모님이 기뻐 외치는 목소리가 내 귓전에 크게 들렸다. 내 얼굴에 장모님의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창 밖에는 천둥까지 치면서 장대같은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강 사장의 외 조카와 장모님은 만난 지도 어느새 2개월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에 둘은 가까 운 연인사이가 되었고, 사랑도 한 층 더 깊어졌다. 국영기업의 이사로 재직하는 강 사장의 외 조카는 장모님과 만난

지 60일째를 기념하기 위해 저녁식사에 나와 아내를 초대했다. 계절은

7월이 되었고 그 무덥던 더위가 절정에 이르렀다. 양복윗도리를 벗고 걷다보면 더운 바람이 살갖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거리는 새 파랗게 반짝이는 은행잎과 여름 신상품에 관한 광고로 넘쳐났다. 강 사장의 외 조카인 강길호 와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는 시청 앞 분수대였다. 약속 시간을 깜빡했는지 한 시간이나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 하며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는 가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 지루한 기계음 소리만 반복되다가 전화가 자동적으로 끊어져 버렸다. 더 이상 기다리다 못해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2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강길호가 우리 앞에 훌쩍 나타났다. 그의 얼굴을 쳐다 본 순간 나는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2시간 이나 기다리게 해 놓고도 조금의 미안한 마음이나 죄책감도 표정의 변화도 없는 그의 얼굴을 보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약속을 깜박 했어. 정말 미안해.” “저는 약속시간을 잊어버린 줄 알았지요.” 화를 삭인 나는 그렇게만 대꾸했다. 그는 여전히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이었 다. 옆에 있는 장모님의 얼굴빛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끝 부분만 살짝 웨이브지게 손질한 앞머리가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장모님은 강길호 대신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얼굴은 여 전히 아름다웠다. 한남동에 위치한 고급음식점은 시간이 많이 지연된 관계로 음식을 먹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봄돔과 상어 지느러미 찜, 사천식 매운 돌대구 전골을 잘하는 식당이 있 다며 그곳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좋아요.”

- 107 -

불쾌한 기분에도 다른 속 좁은 여자들과 달리 윤희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입이 바짝바짝 타 들어갔다. 강 사장과 친한 동생 관계로 지내는 친구 장혁의 말에 의하면 국영기 업의 이사라는 직함을 이용해 여자들을 유혹해 바람을 피워 헤어진 전 처와 하루라도 부부싸 움을 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했다. 제 풀에 지친 전 처도 복수차원에서 10년 연하의 젊은 남자와 바람을 피우게 되었고,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태했던 가정은 마침내 파국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남자들은 겉보기와는 달리 여자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본심 인검은 속내 를 감추고 아주 자상하고 부드러운 남자로 둔갑한다. 수없이 많은 모습으로 위장하는 카멜레 온 같은 야비한 남자에게 마음이 여린 장모님이 상처를 받을 것은 불 보듯 뻔 한 이치이다. 그 생각에 불안하고 초조해진 나는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의 그런 행동이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다는 듯이 식탁 테이블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서 상어 지느러미 찜을 젓가락으로 집적거리고 있었다.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 보다는 귓불까지 새빨갛 게 변하며 안절부절 하는 내 행동에 관심이 더 많다는 표정이다. 나는 어떻게든 그 늑대 같은 남자의 진면목을 확인하려고 그가 예민하게 반응을 보일만한 화제를 슬쩍 꺼내 보았다. “전 처와는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나요?” 내가 예상한대로 그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이제 내가 쳐놓은 올무에 걸렸구나 하고 생각하 는데 가식으로 똘똘 뭉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 분위기 좋은 자리에 헤어진 전 처 얘기를 하기는 좀 곤란한 것 같은데요. 장모 님 생각 좀 해주셔야지요.” 목소리도 차분함을 잃었다. 의도한바와 딱 일치되는 반응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렸다. 왜 그렇게 당황해하는 이유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뜻은

고 자상하며

추호도

없습니다.

거기다 따뜻한

장모님으로부터 마음을 가진

귀에

딱지가

앉을

분이라는 말을 듣고

어본 것입니다.” “윤숙씨 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네, 저와 만날 때마다 강 선생님의 자랑만을 얘기했으니까요.” “아, 그래요?” 내 말에 그는 무척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아, 그래서 전 처와 헤어진 이유를 알고 싶었군요.” “네.”

- 108 -

정도로

가정적이

그냥 궁금해서

물

“저의 전 처는 저보다 두 살 아래의 여자였어요. 어머님 친구의 중매로 만나 교 제 1년 후 결혼식을 올렸지요. 서울교대 출신으로 초등학교 교사였던 저의 아내는 첫째가

태어나자마자

교사직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지요.

오랜

시간

교직에

몸 담아서 그런지 성품이며 행동의 그렇게 예의바르고 반듯할 수가 없었지요. 한 마디로 에

모두가

오르는

이지

부러워하는

일이나,

않는 은밀한

1등

남들의

아내였지요.

눈밖에

결혼생활

벗어나는

행동은

선행으로 주위사람들로부터

20년 일체하지

존경과

동안

남들의

않았어요.

사랑을 한

구설수 눈에

몸에 받은

보 정말

착한 아내였어요. 가정형편상 학원에 다닐 수 없는 학생들을 모집하여 무료로 부 족한

과목을

가르쳐

주었고,

주말이나,

방학

때에는

서울외곽지역까지

가서

학생

들에게 자원봉사를 하였지요. 그런데 그 일이 우리부부의 사이에 큰 화근이 될지 누가 알았 겠습니까? 그곳에서 3년째

자원봉사로

활동하고

있던

노총각과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게

되었고

어느 날 갑자기 제 아내가 임신을 한 거예요. 저는 늦둥이가 태어났다며 그 아들을 안고

동창생모임까지

가서

자랑할

정도로

귀여워했지요.

그런데

6개월

뒤에

왠

남자가 밤중에 우리 집을 들이 닥쳤어요. 술에 고주망태가 된 그 사람은 자기아들 을 돌려달라고 때를 쓰며 심한 억지를 부렸지요. 저는 아내를 불러 숨김없이 이 상황에 대해 사실대로 말 하라고 윽박을 질렀지요. 제 아내의 입에서 나온 말이 늦둥이가 술 취해 난동을 부리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에 저는 하늘이 노래지는 충격을 받았지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유전자 검사를 해보자고 했고 검사결과 늦둥이 의

혈액형이 AB형으로

액형은

O형이었기

판명되었어요. 나는

때문이었지요.

결국

제

그 자리에 아내와

주저앉아 버렸지요. 제

저는

남남으로

갈라서게

혈 되었

지요.” 그는 나오지도 않는 눈물까지 억지로 찍어내며 말했다.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국영기업의 간부라는 직함을 내세워 습관적으로 여자들을 유혹하여 바람을 피우다 아내에게 들통이 나 이 혼을 당한 것을 삼척동자도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헤어진 전 처에게 모든 죄를 뒤 짚어 씌우 는 그의 용의주도한 행동에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아. 아 그런 아픈 상처가 있었군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그의 말을 신용한다는 뜻으로 일부러 고개를 끄덕 거렸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그가 어떻

- 109 -

게 나올지 흥미로 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이후 우리가 맛있는 요리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마다 그는 장모님과 윤희에게 선심을 쓰는 척 하며 맛있는 요리를 젓가락으로 손수 집어 주었 다. 중간 중간에 외간 남자와 바람이 나 그 남자의 자식을 임신한 전 처의 잘못을 덮어주지 못한 자신의 속 좁은 행동을 무척 후회하고 있다며 거짓 눈물까지 흘리는 용의주도한 제스처 로 장모님과 윤희에게 동정표를 얻기 위해 리얼한 연기까지 선보였다. 그의 비열한 행동에 갑 자기 속이 부글부글 끊어 오르면서 그의 면상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었다. 이 단란한 시간 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과녘을 빗나간 화살처럼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 나오는 말을 다시 입 안으로 삼킬 수 없었다. “방금, 강 길호씨가 한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하늘에 두고 맹세할 수 있 어요?” 말을 내 뱉은 순간 경솔한 판단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을 없었던 말 처럼 무마할 수는 없었다. 장모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흠칫 놀라며 주체할 수 없는 당혹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얼굴에서 두려운 빛이 사라지지 않았 다. 무엇보다 큰 소리로 변명을 하거나, 화 내지 않았다. “만약

제

말이

거짓말이

아니고

사실로

들어날

경우

제가

입은

정신적

고통과

인격적 모욕을 무엇으로 보상할거예요?” 오히려 허를 찔리고 말았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윤희가 매우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 라보고 있었다. “만약

강길호씨

말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제가

무엇으로

보상하면

분한

마음이

풀리겠습니까?”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말하자 그는 식탁 앞에 놓은 와인 잔에 눈길을 주며 말 을 이었다. “윤숙씨와 재혼을 원합니다.” “재혼이라고요?” 나는 놀라서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릴 뻔 했다. 하지만 일단 보상얘기를 꺼냈으니까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 고 생각했다. 그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밝혀 장모님과의 관계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꺼낸 말인데 말을 던져놓고 보니 내가 오히려 그의 꾀에 말려든 꼴이었다. 장모님과 윤희는 안절부절 하는 내가 측은하지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았 다.

- 110 -

“우리 나이에

장모님은

제가

장인어른이

생각해도 위암으로

세상에 세상을

때가 떠난

묻지 후

않는

15년

분이지요.

동안이나

40의

남자와

젊은 담을

나 쌓고

지낸 분이지요. 오직 딸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15 년 동안 여자 혼자 몸으로 이 험한 세상과 맛서 살아오면서도 딸 하나 반듯하게 키 기위해

외간

딸을 출가

눈길한번

시키고 나서

벗고 나서서 이상

남자에게

가깝게

혼자 적적하게

장모님과 맞는 지내는

주지

않고

강일중

지키며

사시는 모습이 보기가

짝을 알아보기

황제클럽

정절을

살아온

안쓰러워 제가

위해 동분서주 하던

사장님으로부터

분이지요.

당신에

중 저와 관한

발

친형님

얘기를

듣

고 제 귀가 솔깃해 졌지요. 그 만한 위치에 그 만한 재력가라면 장모님을 행복하 가해줄

가장

적임자로

여자를 바꾸거나

생각했기

여자가 마음에

때문이지요. 들지 않으면

그런데

권력과

재력을

헌 짚신짝 버리듯

이용해

버릴 수

쉽게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전처 얘기는 다 당신이 지어낸 말이고 병적일 정도로 바람을 피 우는

문란한

여자관계

때문에

전처와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그래서

전처와

헤어지지 않았나요?” “근거도 없는 꾸며낸 일로 나를 부정한 사람으로 매도하지 마시오.” 그는 분함을 참지 못해 손바닥으로 식탁을 쳤다. 그 바람에 물 컵이 기우뚱하며 식탁위로 쓰 러지는 바람에 물이 그의 앞으로 쏟아졌다. 오줌을 싼 것처럼 그의 바지 앞이 촉촉이 젖어 버 렸다. “도대체 그런 말 같지도 않는 말로 나를 모함에 빠트린 사람이 누구요?” 그는 펄펄뛰며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나를 향해 욕지거리를 하며 삿대질을 해도 별로 불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심장의 이동속도도 평상시처럼 일정한 것 같았다. 난 동을 부리는 상대 앞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고 있다는 나 자신에 대해 나, 스스로 놀랄 정도 이다. 만약에 장모님이 그의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자기야 이제 그만해.” 흠칫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시선을 돌리자 눈물에 젖은 눈망울로 간절히 애원하듯이 나를 쳐다보는 윤희의 애절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내 앞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나 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똑같은 자세에서 노려보자 방금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근거도 없는 거짓말로 나를 중상모독한 사람이 누구요?” “그것이 그렇게도 궁금합니까?”

- 111 -

“그렇소,

이

자리에서

그

사람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당신을

명예훼손죄와

무고죄로 고소할 것이오.” “ 그 사람의 정체를 밝히면 우리 곁에서 조용히 사라질 수 있습니까?” “그렇소.”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신의

문란한

사생활을

나에게

제보한

사람이

바로

강일중

당신의

삼촌

입

니다.” 그는 심한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다가 한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장모님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심한 절망감에 한 숨만 내 쉬었다. 장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불행을 미연에 방지했다는 뿌듯함에 어깨가 절 로 올라갔다. TV에서 야구 중계하는 소리가 들렸다. A자 모양으로 되어있는 미닫이문을 열자 열을 올리며 중계하는 캐스터의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 들었다. 9회말 2:0으로 뒤지고 있던 삼 성 팀에서 터진 쓰리런 3점 홈런 한 방으로 경기를 마무리 지은 것 같았다. 그래서 관중들의 환호성도 보통 경기 때보다 더 크게 들린 것 같았다.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A자 로 된 미닫이문이 열리며 처음 우리를 이곳으로 안내했던 여 종업원이 메모지를 들고 나타났 다. 그녀는 테이블에 메모지를 내려놓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겉모습은 다정다감해보여도 속마음은 늑대의 본성이 꿈틀대는 이중성을 지닌 강길호가 보낸 편지였다. 지금까지 만난 여자 중에서 자신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대한 것은 윤숙씨가 처음이 었고 숨이 턱 막힐 것 같이 아름답고 온순한 여자도 윤숙씨가 처음이었다는 마음만은 진실이 라는 것을 믿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유치한

편지였다. 수렁에서 빠질 뻔했던 장모님을

위기에서 구출해 냈다는 뿌듯함에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서 심장의 속도도 빨라지고 흥겨운 노랫가락이 저절로 나왔다. 우리 일행은 그 길로 택시를 타고 후암동에 있는 장모님 댁으로 갔다. 나는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키며 마음을 진정 시켰다. “어머님 이 세상이 무섭다는 “맞아,

나도

지금도

그

것을 또 한 번 뼈저리게 실감했어요.” 교활한

남자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오금이

저린다니까.

” 장모님의 얼굴에서 아직도 두려운 표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머님

그래도

이만

한

게

얼마나

큰

다행입니까.

썸씽 같은 일은 없었나요?”

- 112 -

2개월

동안

교제하면서

무슨

“나와

교제

하면서

노골적으로

자신의

검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어.

그런

지능

적인 사람일수록 잔머리는 잘 돌아가는 법이니까. 그는 절대 눈에 거스 리는 모난 행동은 하지 않았어. 다만 하루가 멀다 하고 집으로 찾아와 찰거머리처럼 현관문에 달라붙어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것이 그 사람의 주특기였지. 그 하나의 행 위만으로도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어.

때로는

현관문

뒤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내 앞으로 나타나 백송이가 넘는 장미꽃다발을 내 목에 걸어주며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를 불러 나를 눈물 짖게도 한 적이 있었어.” “그런 셈이지 그런데 노래 실력하나 만큼은 정말 대단했어. 그 사람 말로는 가수 협회에 등록된 회원이라고 하던데.” “그 남자가 가수였다고요?” 뜻 밖에 말에 얼굴이 불에 대인 것처럼 화끈히 달아올랐다. 나는 장모님의 그 말을 이해할 때 까지는 10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 교활한 남자가 한국가수협회에 정식으로 등록 된 가수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머님과 교제 하면서도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나요?” “많았지

분위기

좋은 바다

카페에 가서

직접 통기타를

치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분위기에 걸맞은 노래들을 불러주었어. 그중에 기 억 나는 노래가 있다면 ‘카사 블랑 카’ ‘모나코’ 엘튼존의 ‘로켓맨’ 비틀즈의 ‘오발 라디

오발랄라’

이데이 모그

라이트’ 온

비오비의

‘낫씽온유(Nothing

‘캘리포니아

더워터(Smoke

on

걸스’ the

십대의

on

you)’케이터

꿈(Teen

warter)’

age

메탈리카의

페리의

Dream)’ ‘엔터

‘라스트

딥

프라

퍼플의

샌드맨(Enter

‘스 sand

m an)’ 조동진의 ‘제비꽃’ 패티 김의 ‘빛과 그림자’ ‘연인의 집’ 사라부라이트만의 ‘넬라판타지’ 박학기의 ‘아름다운 향기’ 박선주의 ‘귀로’ 이 정옥의 ‘숨어 우는 바 람

소리’

최성수의

이광조의

‘사랑을

잃어버린

‘남남’ 이

치현의

‘사랑의

나’

유열의

슬픔’ 이용복의

‘이별이래.

장현의

‘나는

‘달맞이꽃’ 배호의

너를’

‘굿바이’

‘

마지막 잎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노래를 불러주었지.” “한국

가수와

가요는

그렇다 치고

외국가수와

노래

곡명을 다

기억하는

어머님이

더 대단한데요?” 나는 가볍게 숨을 몰아 내쉬고 나서 놀란 표정으로 장모님을 보면서 말했다. 저녁식사를 마 친 나와 윤희는 곧장 장인어른이 썼던 서재로 갔다. 장인어른이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위암으

- 113 -

로 세상을 떠난 뒤 지금까지 열 번도 채 청소하지 않았다는 장모님의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 문이다. 그 때문에 전통 창호지와 한지 느낌의 월 아트로 꾸민 고풍스러운 서재는 사용하지 않는 잡동사니를 아무렇게나 방치한 탓에 흉물스런 창고로 변해버렸다. 돼지우리처럼 지저분 해질대로 지저분해진 서재를 보자 청소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룻바닥은 청소를 하지 않아 오랜 세월동안 쌓인 먼지와 그을림으로 본래의 색을 잃어버렸다. 금방이라도 켜켜이 쌓인 잡 동사니 속에서 고양이만한 쥐가 튀어 나올 것만 같아 윤희는 바짝 긴장했다. 집에서 하는 대 로 청소한다면 며칠이 걸려도 끝내지 못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청소용역 업체에서 하는 방법 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서재 안으로 호스를 끌고 와서 소량의 물만 나오도록 수도꼭지를 약하게 틀어놓았다. 그러자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아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를 정도로 쌓여있던 먼지와 그을림 이 눈 깜짝할 사이에 씻겨 내려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본래의 색을 잃어버렸던 마룻 바닥도 제 색을 찾았고 먼지 속에 휩싸여 컴컴한 동굴 속 같았던 서재도 제 모습을 되찾았다. 벽과 천장에 모세혈관처럼 뻗어있는 거미줄을 걷어내자 이디 오피아 서남부에 있는 이조라 폭 포 앞에 와 있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돼지우리처럼 지저분해졌던 서재 안은 금세 술 한 잔

의 여유를 선사하는 아늑한 공간으로 변했다. 자투리 공간을 활용해 다기세트와, 다기를 넣어 차 한 잔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한쪽 벽에는 자수 공예품이 걸려있고 고가구나 도자기 골동품을 장식용 소품으로 활용하여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거대한 철제 책상과 느긋하게 쉴 수 있는 팔걸 이의자와 미닫이 식으로 된 TV와 냉장고를 밖으로 들어내자 서재 안은 운동장처럼 넓어졌다. 집으로 통하는 문의 벽에는 장인어른이 직접그린 유화그림 한 점이 걸려있다. 일몰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 옆에는 빛의 화가, 수련의 화가 라 불리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모네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수련연못’ 그림이 함께 걸려있었다. 까치발을 들어야 비로소 손이 닿을 수 있는 거실 장 맨 위에 내가 롤 모델로 삼고 싶은 호세펠리오의 음반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 래 칸에는 7~8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가수들의 테이프가 빼곡한 것을 보고 나는 숨이 막 힐 지경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도랑치고 가재 잡은 꼴이었다. 7~80년대의 테이프를 구하고 싶어도 쉽게 구할 수 없을 뿐더러 청계천 고물 상가를 이 잡듯 샅샅이 뒤져야 한 두 개쯤 나오는 아주 귀하면서 도 희소가치고 높은 테이프들뿐이었다. 가수 지망생 시절에 나는 음반수집가가 되고 싶었다. 가수들의 음악성향이 하나로 응축된 음반을 들을 때마다 닭살이 돋으며 참을 수 없는 희열이

- 114 -

복 받치곤 했다. 통기타를 치며 흐느끼듯 목청을 돋을 때면 영롱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햇살아 래 노랑나비가 날아오르는 느낌이 들곤 했다. 소집은 돈과 직결된 취미라서 경제적 부담이 많 았지만 음악이 주는 그 진한감동 때문에 음반취미 활동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내 노라 하는 수많은 가수들이 불렀던 죄진 사댁 셋째 딸의 원곡‘ 더 스 네이크(The snake)’ 터질 거예요의 원곡 ‘헤브아이 톨드유 레이틀리’등 소장가치가 큰 명곡이 수록된 음반을 발견하는 횡재와 기쁨도 갖게 하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가수들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내 몸 안에 죽어있던 세포가 다시 살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음악 적 장르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식 사재기를 고수했다. 발라드, 락, 토크, 라틴음악, 헤비메탈, 포크, 트로트 등 그 분야의 명곡들만 엄선해서 수집했다. 크리스터 경매에 까지 참가할 욕심 까지 내며 열성적으로 음반을 수집한 덕분에 1934년 미국 캔자스 뒷골목의 재즈클럽 양대 산 맥이었던 ‘레스터 영 대(對) 콜맨 호킨스의 재즈 배틀(The Battle of JazzㅡLester Young vs coleman Haw kins)’ 두 명의 색소폰 연주자의 목숨을 건 자존심을 벌인 음반까지 소장하는 감격도 맛보았다.1930년대 색소폰 연주자들은 콜맨 호킨스 처럼 빠른 템포의 스윙을 고집했 다. 재즈의 멜로디가 무거운 톤과 한 박자 빠른 템포의 스윙을 고집했다. 재즈의 멜로디가 무 거운 톤과 한 박자 빠른 비부라도(약간 떨림)의 스윙이 마치 색소폰의 교과서처럼 통하던 그 시대에 레스터 영의 등장은 1930년대 색소폰의 음악에 지각변동을 가져다주었다. 잔득함이 들 어간 묵직한 톤과 수전증 환자처럼 심하게 뒤 틀리며 떨림의 현상이 파도처럼 일어나던 그런 느낌의 멜로디가 아닌 노란 파스텔 론의 색감과 로맨틱한 리본장식이 겹겹이 매치된 로코코시 대 여성복장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초원위로 사뿐사뿐 걷는 듯한 색소폰 연주에 무대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내지도 못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간결한 방법으로 색소폰을 불었고, 마치 노랑나비가 배추 잎 위로 날아갈 정도의 느린 템포로 관객의 혼을 빼 놓았다. 가슴이 아릿할 정도의 뜨거운 저음으로 기교와 박력 넘치는 연주를 펼치던 당대 재즈 뮤지션 과는 완연히 구분이 되는 신화 같은 뮤지션의 탄생이었다. 비 내리는 밤 비밀스런 실험실을 연상시키는 폐쇄된 공간에서 자유분방하게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과 같은 떨림의 음악이었 다. 차가운 이미지 속에서도 감미로운 리듬과 감성적인 발라드 리듬까지 겸비한 신비스러울 만큼 완벽한 음악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넘쳐나는 음악적 재능을 200프로 활용하여 최고 재 즈 보컬리스트였던 빌리 할리데이 로부터 ‘색소폰 대통령’ 이란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솔로로 활동하게 된 그는 빌리할리데이 의 노래반주를 맡으면서 연인사이처럼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 115 -

레스터 영의 비브라토와 유려한 연주가 가장 잘 응축된 말년의 음반인 1956년에 발표한 ‘프 레스 앤드 테디(Pres and Teddy)’를 듣게 되자 온 몸이 수천볼트 고압전류에 감전 된 것과 같은 전율을 느꼈다. 나는 음반수집이 주는 무량한 감흥을 또 한 번 뼛속깊이 느끼게 되었다. 나와 둘도 없이 친한 친구인 번역가 장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조금 씩 수집에 빠지게 되면 성도착자처럼 본능에 만족하려는 행위처럼 변해간다.’는 말이 이제서 야 확실히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광기 자체가 목적이 아닌 음악성이 뛰어난 음반을 통 해 수집행위의 극치를 느끼기 때문에 친구의 말에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색소폰의 대통령’ 레스터 영의 음반 옆에 내 눈을 의심하게 하는 테이프가 있었다. 60년대 말 팝송원곡을 재해석해 부르는가 하면 팝송을 우리말로 번안해 부르는 노래로 인기를 끌었던 번안 히트곡들이 수록된 지구레코드 사에서 출시한 테이프도 있었다. 먼지가 부옇게 쌓인 테 이프를 휴지로 깨끗이 닦아내자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가수들의 이름이 기재되어있고 깨알 같은 글씨로 쓰인 노래 곡목이 수록되어 있었다. ‘회상의 노래’ ‘낙엽’ ‘목화 밭’ ‘어린 시절’ 등 수많은 번안가요들이 녹음된 테이프이었다. 그리고 비틀즈와 엘턴존의 노래도 한 두곡 첨 가 되어 있었다. 모든 음반소장품을 합친 것만큼의 가치를 가진 이 테이프를 두고두고 들으면서 음악이 주는 희열을 온 몸으로 느꼈다. 거실 장 맨 위에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 슨 호세펠리오의 음반이 테 이프 수집에 빠져있던 지난날을 떠올리게 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만 들었다. 서재를 깨 끗하게 청소한 상으로 장인어른의 서재를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은 이미 장모님에게 받아놓은 상태였다. 나는 그로부터 틈 만나면 장인어른이 쓰던 서재를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내가 늦게까지 서재에 있는 다고 생각했는지 식탁에는 항상 내 몫의 맛있는 식사가 차려져 있 었다. 오늘은 뮤지션 음악다방이 쉬는 날인데다가 비까지 오는 바람에 집에서 TV를 보며 오 랜만에 휴식이 주는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휴가철인데다 시간당 80m 이상 폭우가 쏟아져 지금 서울은 아비규환 이었다. TV에서는 엄 청난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 상황을 실시간대로 속보로 전하고 있었다. 전원 마을의 한 다세대 주택 반 지하 방에서 잠을 자던 중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빗물이 차오르면서 18개월 된 영아가 익사한 사건이 보도되고 있었다. 2층 침대의 1층에서 자던 이 영아는 숨졌지만 2층에서 자던 영아의 어머니와 6살 아들은 수방사 장병에 구조돼 다행히 화를 면했다. 70대 남성은 토사에 담벼락이 무너져 사망했으며 60대 여성은 급류에 휘말려 500m를 떠나 내려간 뒤 숨진 채 별 견 됐으며, 또 자신의 승용차에서 물건을 꺼내려 집 밖으로 나왔던 30대 남성은 토사에 인근

- 116 -

참나무가 쓰러지면서 깔려 숨진 사건도 보도 되었다. 또 다른 속보가 올라왔다. 27일 오전 8시 45분께 서울 서초구 우면동 우면산 터널요금소 출 구에서 집중호우로 인한 폭60m, 길이120m 규모의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했다. 흘러내린 토사 는 서초구 방배동 남태령 전원마을을 덮쳐 6명이 죽은 대형사건이었다. 산사태로 120세대 중 60세대가 한때 고립됐던 우면동 형촌 마을에서는 신세계 회장의 부인이 이날 자택지하실을 살피려 내려갔다가 밀려든 흙탕물에 미처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변을 당한 안타까운 사건이었 다. 그리고 강남역 일대 삼성사옥 인근 지역은 하수역류로 도로가 거대한 수로로 변한 화면이 나왔다. 이날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지하철 분당선 선릉역과 도곡역 배수 시설이 쏟아지는 폭 우를 감당하지 못해 선릉ㅡ수서 구간 열차의 운행이

중단 되었 다는 기자의 음성은

떨렸다. 대치동 은마 아파트를 둘러싼 100m내 도로가 물에

떨리듯

잠겨 북문 한 곳을 제외하곤 단

지로 진입하는 길이 모두 침수돼 주민들이 한때 고립됐고. 수십여 대 자동차가 물에 잠겨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이색적인 광경도 카메라에 잡혔다. 서울 남부 관문인 사당 사거리 일대도 물에 잠겨 오전 9시께 사당역 출입이 통제된 사건도 함께 전했다. 다른 지역에 비해 강남지역 의 피해소식들이 유난히 많았다. 오전 6시부터 9시까지 3시간동안 서초구에는 161mm, 강남 구에는 142mm의 물폭탄 이 투하 됐다며 강남지역의 시간당 강수량은 100년에 한번 나올만 한 수준이어서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강남구청 관계자의 말을 타당성이 있는 말이다.

TV화면에는 많은 비로 인근 양재천 도림천이 역류 물이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특히 지대가 낮은 강남역 일대는 인근 지역의 빗물이 고스란히 모이면서 한동안 호수를 방불케 했다. 서울 이외 중부지역에서도 피해 상황이 속속히 올라오고 있다. 경기 광주시 경안천 과 곤지암 천이 범람하면서 인근 독거 노인등 6명이 급류에 휘 말려 숨지고 1명이 실종되는 등 중부지역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모두 14명이 숨지거나 실종되고 주택 1000여 채가 침수되는 등 인명재산 피해가 속출한 보도에 옆에서 같이 TV를 시청하고 있던 아내 윤희는 너무나 놀라 입을 다물 지 못했다. 인명 재산 피해 소식은 그칠 줄을 몰랐다. 경기 광주시 송정동 경안천 일부 구간이 범람, 독 거노인 두 명이 숨졌고 또 비슷한 시각 곤지암 천도 넘치면서 초월 읍과 곤지암 일대 주민 4 명이 숨졌고 오포 읍에서는 여성 1명이 물살에 휩쓸려 실종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리고 오전 6시 50분께 경기 양주시 백석읍 기산리 계곡에서 배수 작업을 하던 산불 감시원 이 모씨가 급류에 실종됐고, 여주군 강천면에서는 부평천 옆 논에서 고랑을 내던 70대 노인이 급류에 휩

- 117 -

쓸려 사라진 사건도 있었다. TV화면은 피해 속보를 잠시 중단했다. 전국 뉴스 방송이 10분 나오다 끝나고 다시 피해 속보가 나왔다. 기상청 예보관이 나와 시간당 100mm 가까운 폭풍 우가 쏟아진 원인에 대해 의견을 내놓았다. 장마가 끝났는데도 훨씬 독한 폭우가 쏟아진 것은 한반도 대기의 불안정 탓으로 그 이유를 들었다. 이번 집중호우는 남서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하고 습한 기류가 하층으로 유입돼 상층의 건조한 공기 덩어리와 충동하면서 대류 현상이 발생 폭우가 집중됐다고 말했다. 한 나절 쏟아 지고 마는 게 집중호우의 통상적 패턴에서 한참 벗어난 원인은 고온다습한 남서기류가 사할린 부근의 고기압에 가로막혀 동쪽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한반도 상공에 계속 머물러 있기 때문이 라는 부연설명까지 곁들였다. 장마 후 집중호우 90년대 이후 11회 반복되면서 한반도가 아열 대성 기후로 변하는 것 아니냐는 캐스터의 질문에 그는 상당히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1973년부터 2010년까지 장마기간보다 더 많은 비가 내린 경우가 총 14번이라는 예를 들면서 지구온난화로 한반도가 아열대 기후에 들어왔다고 예보관은 확실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장마 가 끝났다고 하면 무조건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며, 하지만 늦가을까지 집중호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장마보다는 ’우기‘ 라는 개념을 도입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 다. 나는 TV전원을 끄고는 창가로 갔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 너머로 우산을 쓰고 아파트 경 비초소를 나서는 윤희를 보았다. 그녀는 일에 쫓기면서도 집안 살림과 집안의 크고 작은 대소 사에도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아버님 제사는 하늘이 두 조각이 나도 참석했고, 제사음식도 손수 만들었다. 또, 내가 몸이 허약해 보이면 경동 한약시장에 가서 수삼과 녹용을 사와 체력이 떨어진 내 몸을 혈기왕성한 20대 청년처럼 만들어 주기도 했다. 한 여자의 배신으로 마치 뻥 뚫린 밑바닥 없는 구멍과도 같았던 내 인생에 어느 날 불쑥 나타난 그녀 때문에 영국 황실의 황태자도 안 부러운 작금의 내 인생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윤희는 나보다 네 살적은 33세의 천사였다. 대대 로 손이 귀한 집에 장녀로서 태어났기 때문에 대를 이응 손주아들만 바라는 시어머니의 마음 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귀여운 손주를 시어머니에게 안겨드리기 위해 임신에 관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손이 많은 가문의 집에 시집왔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라고 농담 식으로 물으면 씁쓸히 웃으면서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몹시

드문

경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 118 -

폐경기가

한참

지난

60대

여성도

임신한 경우가 종종 있어 그러니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나는 그녀를 위로해 주기위해 이런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 주었다. 그럴 때마다 윤희는 고개를 저으며 한쪽 볼을 씰쭉대며 피식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온순한 여자가 지어보이는 웃 음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어 윤희 씨의 지극 정성에 감복한 삼신할머니가 반드 시 떡 두꺼비 같은 사내아기를 점제 해줄거야’ 항상 이런 말로 나는 윤희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혼자 외롭게 사시는 장모님을 생각하면 오장육보가 찢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더욱이 장모님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준 강길호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 떡 일어나게 된다. 그자가 정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개가천선을 하여 장모님 한분만을 바 라보며

산다고 하는 것은 개천에 용 나는 것만큼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설령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어 장모님과 재혼을 하여 한 지붕 밑에 같이 산다고 해도 가까 운 장래에 큰 사단이 날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이다. 나는 그런 인간기생충 같은 자는 두 번 다시 미련을 두지 않는 편이 내 인생에 훨씬 유익할 것이다. 여기서 더 이상 그자에게 미련을 가진다면 장래에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남기게 될지 도 모른다. 잊어야한다.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한다, 그 남자는 애초부터 내 인생에 없는 사람 이 되어야한다. 이 고비만 무사히 넘긴다면 성품이 온순하고 착한 남자를 만나 장모님은 그야 말로 깨가 쏟아지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지 않는가. 강길호라는 남자가 장모님의 인생에 더 이상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큼은 하늘이 두 조각나도 변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 은 장모님의 남은 인생을 위해서, 그리고 내 아내윤희를 위해서, 그 마음이 절대 변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하였다.

- 119 -

끝없는 고통

- 120 -

3

‘한국에서 순수음악 만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 하는 것 보다 더 어렵다는 것 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어.’

- 121 -

3

기상관측 이래 100년 만에 가장 많은 집중호우가 쏟아진 서울의 하늘은 언제 비가 그렇게 많이 왔느냐는 듯 쾌청하고 맑았다. 청명한 맑은 하늘에 천둥오리 떼가 한가롭게 날아가고 있 다. 나는 경쾌한 마음으로 차를 몰았다. 강촌 유원지 입구로 지날 때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흥겨운 콧노래 까지 부르며 일탈의 자유를 가져다주었던 행복은 어디론 가 달아나 버렸다. 벌써 오전 12시45분에 접어 들지 않았는가. 이제 공연시간은 불과 15분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피치를 올리는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차를 몰았다. 다행이 집중 호우로 인해 도로는 차량들이 적어 제한속도100K이상 까지 달릴 수 있었다. 강원 춘천시 남 산면 방곡리 강촌은 오늘도 평온하기 그지없다. 강촌 유원지를 병풍처럼 둘러싼 용화산 자락은 겹겹의 파도가 완만한 물결을 일으키며 조용 히 내 앞으로 밀려오는 것 같았다. 국도를 따라 달리는데도 용화산 에서 바람이 불어와 100K 속도를 거의 느낄 수 없다 . 이곳에서 살다가 서울로 유학 간 장혁은 ‘이렇게 자연경관이 수 려한 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자신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만날 때마다

고향 자랑을 하곤 했다. 귀에 딱지가 붙을 정도로 들었던 말이어서 건성으로 흘러들었지만 직 접 와 보니 고향예찬의 열을 올린 친구 장혁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실을 때마다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는 몸의 한쪽 구석에서 울마루 가 하얗게 물보라 치는 것 처럼 기운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길가의 가로수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총알처럼 달리는데도 속도감이 그렇게 빠르게 느껴지 지 않았다. 속도계기 바늘이 120K에 멈추어 있으면서도 6~70K 속도 밖에 느껴지지 않는 것

- 122 -

을 보면 독일의 아우토반처럼 도로사정이 좋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도로가 차의 주행에 미 치는 영향력이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혹시 계속해서 속도를 올린다면 심장이 타 버리 지 않을까. 문득,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심장이 숯 검정처럼 새까맣게 타 버려 얼굴 빛 마져 숫 검정처럼 거무 튁튁해 보이는 몇몇 운전자가 내 차를 추월했다. 끝없이 달리지 않으면 숨을 쉬지 못해서 질식사 해버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사람에게는 핸들을 잡고 달릴 수 있는 도로만 있다면 인생을 살아가는데 특별히 애로사항 이 없을 것 같았다. 마치 수많은 빗방울이 옅은 먹빛 하늘에서 내려오다가 바람에 부딪쳐 끊어질 듯 말듯하다. 눈 깜짝할 새 땅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침 강촌 유원지 인근 용화산 진입로 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주변으로 눈길을 돌리자 수마가 할퀴고 간 흔적이 참혹한 전쟁 터를 방불케 했다. 용화산 자락 산 중턱 절개면 바로 밑에 펜션 두 채가 위태롭게 서 있다. 이번 집중호우로 절개 면이 원자 폭격을 맞은 것처럼 해골구멍처럼 뻥 뚫려 있다. 보기만 해 도 아찔하다. 비는 그쳤지만 펜션과 바로 접해있는 4~50여m 높이의 산자락에서는 집중호우가 남긴 부산물인 흙탕물이 강물처럼 쏟아졌다. 아카시아 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가 우거진 펜션에서 30여m 가량 떨어진 능선에는 시간당 80~100m가 쏟아진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난 흔적이 화신이 폭발한 것처럼 끔찍했다. 하늘이 도와서 다행히 화는 면했지만 언제라도 매몰사고 가날 수 있는 위험한 지역이다. 요 즘 돈 있는 사람들은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이런 곳에 초호화 별장이나 펜션을 지어놓고 동화 속 주인공처럼 살지만 신세계 회장의 부인처럼 자연재해로 인하여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인생의 진가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봐야 비 로소 인생의 행복을 알 수 있지 않는가. 요즘 사람들은 무턱대고 넓고 큰 별장 같은 집을 선 호하지만 편안한 안식을 즐기기에는 구들장이 있는 황토집이 최고라는 사실을 아는 자가 또 몇 명이나 될까.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이런 위험천 만한 곳에 왜 펜션을 지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고 혀를 차며 지나가는 노인 뒤로 보 기만 해도 아찔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전망과 신선한 공기를 중요시해 산 중턱에 위치한 펜션 30여 채는 일촉측발 의 위기 를 맞 았다. 산업단지 공사로 바로 산등성이가 완전히 잘려나간 가운데 쏟아지는 거대한 토사와 자 갈을 막아줄 설비는 1m남짓한 높이의 플라스틱펜스는 산사태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엄청난 토사가 산자락에 있던 펜션을 덮쳤다. 거대한 흙물은 펜션 진입로를 뚫고 화단까지 쏟아져 들

- 123 -

어왔고 출입문까지 토사로 메워 버렸다. 나는 강촌 유원지를 지난 다음에도 거의 속도를 늦추 지 않고 오른쪽으로 핸들을 들렸다. 그러자 왼쪽에 대치면적 200미터제곱의 자그마한 땅에 지 하 1층 지상3층 연면적 524미터제곱 규모의 작고 오래된 라이브 카페 건물이 나타났다. 출입 구 앞에는 나를 환영한다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철근 콘크리트가 들어가지 않는 목조 구조에 외벽은 알루미늄시트와 유리, 고 밀도 목재 패 널이 더해진 형태다. 비록건물은 작지만 대지 면적을 꽉 채우고 앉아있는 모습이 만화 ‘짱구 는 못 말려’에 나오는 짱구의 집이 연상 되었다. 벽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덩굴도 기존의 무 겁고 권위주의 적인 시멘트 외벽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친근하고 포근한 이미지로 다가왔 다. 드럼소리, 기타소리, 섹소폰 소리가 귀를 파고 들었다. 독립문처럼 생긴 철문을 들어가 자 동차 주차 구역에 차를 세웠다. 공연장만을 노리는 자동차 절도범 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때인 만큼 키는 단단히 채웠다. 007가방을 들고 카페입구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카페창문 에서 고개를 내밀고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출입문 안으로 들어선 나를 반갑게 맞아주며 정중하게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도 있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에서 폭죽이 터지며 동시에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고 바라보는 수많은 관객들의 시선에 나는 숨이 멎어질 것만 같았다. 좋은 노래 부르기 회장인 강일중 사장은 나를 보더니 왼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공연 시간이 벌써 20분이나 지연되었다는 것은 은연중에 암시했다. 큰 홀을 꽉 메운 관객들 속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바로 강일중 사장의 외 조카이자 한때 장모님의 연인이었던 강길 호 였다. 옆에 있는 50대 남자는 노숙자와 같았다.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 사회적인 위치가 너무나 뚜렷하게 대비되는 두 남자의 모습에 보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 다.

강길호는 권력과 부를 한 손에 쥔 사회의 중심축에 있다는 자부심이 넘실거렸다.

탄력과 근육질이 알맞게 배합된 몸, 개기름이 번지르르 흐를 만치 혈색 좋은 피부, 무스를 발 라 8:2로 가르마를 타 기품 있어 보이는 헤어스타일, 그리고 몸에 붙는 네이비색 정장에 짙은 색상의 사선무늬 넥타이를 매 뚱뚱해 보이는 몸인데도 날씬한 느낌을 주었다. 나를 보더니 불 쾌한 표정을 감추고 쾌활하고 호탕한 웃음소리 까지 자신만만해 하면서도 여유로운 모습이었 다. 반면 옆에 앉은 50대 남자의 무기력하고 초라한 모습이 눈에 띄게 대비되었다. 나는 탈의 실 구석에 잇는 자못 옹골진 나무 신발장 앞에서 단 몇 초 만에 신발을 벗고 무대화를 신었 다. 그리고 단숨에 나무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2층 홀로 재빨리 들어갔다. 초췌한 모습을 관객들

- 124 -

에게 보이지 않게 하기위해 일부러 무대로 가지 않고 창가에 잇는 테이블까지 천천히 걸어갔 다. 그리고 현란한 조명이 빛나고 있는 무대에 오르는 순간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가 솟구쳤 다. 무대 바로 앞에는 조각이라도 한 것처럼 얼굴윤곽이 뚜렷한 40대 여성이 내 이름을 부르 며 ‘파이팅’을 외쳤다. 파도타기 응원처럼 파이팅

파이팅 하는 말로 넓은 홀 안이 떠나갈 듯

했다. 수많은 관객 앞에서 맛보는 이 행복한 순간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지금은 박재가 되 어버린 내 젊은 날의 전성기가 다시 부활할 것일까. 나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새로운 행복의 기운이 감돌았다. 마이크 앞에선 나는 제시 보이 킨스(Jesse Boy Kins)가 새롭게 발표한 싱글B4 the night is thru’)를 불렀다. 천천히 밀고 나오는 중저음에 느슨해지다가도 돌고래 같은 팔세토에 정신이 번쩍 드는 이 가수만이 가직 독특한 음정을 최대한 살리기 위하여 내 나름대로 안간힘을 썼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음 정, 감정, 기교를 다 무시한 새로운 음악에 대한 도전이었다. 인간의 내면 속에 가장깊이 숨어 있는 정신과 사상을 음악으로 표현해 내려는 푸른 불꽃같은 음악, 원초적인 알몸처럼 자연스 런 아름다움과 함께 감정을 이끌어내 발산하는 음악, 유행과 상관없는 음악인 ‘월드 솔’을 고 집하면서도 진솔하고 정직한 음악, 리듬감 있는 저음의 움직임은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고 감 정을 되살려 주기 때문에 여자들이 무대에 뛰어오르기도 하고 어머 어머 한 ‘떼창’이 나올 때 도 있는 관능적인 음악. 노래 할 때 관객들과의 눈을 맞추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퍼포먼스까지 그대로 본을 떠서 노 래를 불렀다. 천천히 밀고 나오는 중저음에 느슨해지다가도 돌고래 같은 팔세토 까지 똑같이 재현해 내자 여성관객들이 무대 위로 뛰어 오르는 일까지 벌어졌다. 관능적인 음악에 도취된 여성관객들은 나이, 체면, 품위 다 무시하고 손과 엉덩이를 흔들며 열광했다. 무대 위는 디스 코 음악으로 바뀌어 있었다. 7~80년대 유행했던 ‘컴백’ ‘헬로우 헬로우 미스터 몽키’ ‘퐁키 타 운’ ‘원 에이 티켓’ 까지 부르고 나자 내 몸은 땅으로 범벅이 되었다. 나는 잠시 음악이 주는 경이로운 광경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음악에는 분명 사람의 마음을 자동문처럼 스스로 열게 하는 마력 같은 것이 감추어져있었다. 흥겨운 리듬에 몸을 싣고 땀이 나도록

춤을 추다 보면

세상걱정 근심과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가 버리는 짜릿한 기분마저 전해진다. 실제의 자신보다 더 잘생기고 능력 있는 사회의 한 중심축을 담당하는 유명인사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나는 잠시 눈길을 들어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이 앉아있는 무 대 앞쪽을 바라보았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손뼉을 치며 열광하는 모습에 새로운 힘이 불 끈 솟는 것 같았다. 한 남자의 팔자 눈썹 아래에 서는 마치 초식짐승의 온유한 눈이 기기묘묘

- 125 -

한 빛을 내뿜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회생활에 대한 울분, 가족에 대한 울분, 친구에 대 한 울분, 아내 자식에 대한 울분이 쌓이고 쌓여서 거의 폭발일보 직전이었지만 음악이 주는 흥겨운 리듬 때문에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간 풍선처럼 잔득 부풀었던 울분이 풍선 바람이 빠 지듯 한꺼번에 스르르 빠지는 것 같았다. 그의 나이 보다 십년정도는 더 젊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모든 관객들의 시선은 한 여자에게 쏠려있었다. 그녀는 장인이 한 땀 한 땀 온 정성을 기울여서 수 작업한 옷 전체에다 튤립 꽃 으로 수놓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요즘 신세대 여자들 사이에 한창 유행하기 시작한 토끼 머리핀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 떨기 튤립 같은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늦은 밤 미숙이와 함께 술 한잔하기 위하여 들렸던 바(BAR)여 주인이었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검은색 튜브 톱 드레스를 입은 채 넋 나간 표정으로 내 얼굴을 보던 그녀의 출현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많은 관객들 앞에서 영화 보디가드 주제곡‘(I wll always love you)’를 불러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자, 처음엔 조용하며 감성적인 분위가가 활동적이면서도 , 역동적인 분위기로 변했고, 음악도 처음의 팝송과 컨트리 록에서, 가요와 트로트로 바뀌었으며 어느덧 처음의 지적이면서도 고상했던 분위기를 벗어나 가요무대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바(BAR)여사 장인 오세희와 듀엣으로 무대에 올라서 김미성의 ‘아쉬움’ 바람꽃의 ‘비와 외로움’ 김정호의 ‘날이 갈수록’을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우레 소리 같은 박수 소리가 홀에 울렸다. 공연 시간 도 어느덧 끝나갔다. 내가 무대 위에서 정식으로 그녀를

소개하자 관객들 사이에서 소곤거리

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인형 같이 생긴 저 여자 가수도 아닌데 어쩜 노래를 가수 뺨칠 정도로 잘할까.” “하이난 섬에서 김향기 씨를 보는 것 같애.” 오세희는 두 손을 배위에 모으고 관객들을 향해 인사했다. 나는 그녀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마이크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잡은 그녀는 나의 가요계 복귀를 진심으로 원하며 스티비원더 나 롤링스톤즈에 버금가는 가수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꾸란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 숙인 채 멍 하니 그 말을 들었다. 너무도 감동적이고 가슴 뭉클한 말이어서 마치 천상에서 들려오는 말 같았다. 그녀의 말처럼 한세대를 풍미한 뛰어난 가수가 되고 싶은 내 마음을 오세희 가 대신 말해주었다. “지금

이

으로

들은

자리에는 바에

향사모

의하면

회원들은

언론과

참석하지

매스컴의

뜻에

- 126 -

않는

것으로

동조하여

압니다.

사실상

제가

김향기씨와

귀동냥 결별

한 것으로 압니다. 다시 말해서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지요.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한 일입니다. 하지만 정의는 죽지 않았지요.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의 일 심단결하여

우리

김향기씨를

끝까지

지키고

든든한

조력자로

버팀목이

있다는 사실이지요.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이 있는 한 ,그리고 음악을 여러분들이 있는 한 김향기씨는

되어주고 사랑하는

가요계에 화려하게 컴백을 하여 한국 가요 사에

전무후무한 뮤지션으로 우리 팬들 앞에 다시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을 위해 우리 힘차게 파이팅 합시다. 여러분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고개를 숙이는데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순 간도, 음악을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외로웠던 순간도, 음악 때문에 겪은 마음의 상처와 충격을 이기지 못해 내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흐느껴 울던 그 순간도 오세희의 말 한마디에 봄눈 녹듯이 깨끗이 사라졌다. 나는 그녀와 나란히 가벼운 발을 끌면서 무대 앞 으로 나아갔다. 감정이 격해져 나도 모르게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방금 전까지 구름 위를 오를 것만 같았던 감격적인 마음이 그 도를 넘어서 밀물이 밀려오듯 눈물이 내 온몸으로 차올 랐다. 마이크 너머에서 울리는 나의 흐느낌 소리에 관객들은 조금 놀랐다. 불빛 속에서 우는 나방처럼 흐느낌소리가 웅웅 울리며 라이브카페 홀로 퍼졌다. 오세희가 안 쓰러운 듯 내손을 잡고 어깨를 살짝 안아 주었다. 내

흐느낌 소리만이 홀의 고요한 공기를

꿰뚫고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2층 나무계단을 타고 1층까지 울려 퍼졌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서 화장실로 들어 가 수돗물을 틀고 세수를 했다. 그래도 아직 온 몸의 신경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발길 을 차고로 돌린 것은 나의 우울한 모습을 팬들 앞에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밀려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차를 몰아 독립문처럼 생긴 라이브 카페 철문을 빠져나갔다. 앞쪽으로 시 야가 환하게 펼쳐지자 왼쪽에 강촌유원지를 병풍처럼 둘러싼 용화산이 한 눈에 들어왔고 그 건너편에는 산업단지 공사로 산등성이가 완전히 잘려나간 민둥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민둥산 왼쪽에는 참새 떼 무리들이 1m남짓한 플라스틱 펜스위로 날아다니고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는 자원봉사들과 군인들이 수해복구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온 몸을 감싸는 묵직한 피로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 127 -

밤새도록 심한 악몽에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눈을 떠도 어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그 악몽은 계속 이어지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조명등 옆에 있는 탁상시계를 훔쳐보았다. 오전11시, 방안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무겁게 가라 앉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문을 열 자 아직도 약하게 내리는 빗줄기가 베란다 난간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욕조실 거울을 보고 면도를 하면서 어제 있었던 공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순간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 하여 경솔하게 행동한 실수에 대해 아직 뚜렷한 참회의 방법이 머릿속으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이외의 부분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다. 내가 늦게까지 잔다고 생각 했는지 식탁에는 세끼양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내는 사진 전람회 때문에 조기출근한 모양이었다. 나는 쌀밥에 쇠고기 미역국, 계란 프라이, 고등어조림으로 아침 겸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서 식기를 싱크대에 넣어 수돗물을 틀어 불린 다음 수세미에 퐁퐁을 묻혀 깨끗하게 세척하여 식 기 함에 가지런히 정돈한 다음 친구 장혁 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혁은 즉시 휴대전화를 받았 다. 잡음이나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번역사무실이 아닌 것 같 았다. “장혁아, 미안하다 팬들에게 인사조차 드리지 못하고 말없이 가서.” “괜찮아,

나는

오히려

네가

걱정이

되어서

어젯밤

한

숨도

자지

못했어.

신호는

가는데 연결이 되지 않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너는 모를 거다. 강일중 사장님과 좋 은 노래 회원들의 마음은 아마 지금쯤 숯검정처럼 새카맣게 탔을 거야. 아참, 그리 고 그때 너와 함께 같이 노래 부른 오세희씨는 너 때문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 어.” 전화기를 타고 나를 원망하는 듯한 친구의 말소리가 전해졌다. 그 장면을 상상하자 온몸에서 털이 곤두서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 완용이보다 더 큰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 팬들에게 속죄를 해야 할 것 인가. 그러나 지금에 와서 속죄차원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용서를 구 한다고 해도 모양새가 그리 좋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한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수 많은 팬들에게 심려와 걱정을 끼쳐드린 나의 무책임한 행동이 너무나도 뼈저리게 후회가 되었 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신뢰의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금이라도 가는 것은 아닐까, 신뢰회복이 절 실하게 필요함을 깨달은 나는 친구 장혁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약속장소와 시간

- 128 -

을 정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숙대입구에 내려 동쪽 출구로 나 서자 집을 나섰을 때보다 빗줄기는 조금 약해진 것 같았다. 대학가 주변으로 색색의 간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친구 장혁과 약속한 레스토랑 모나코를 어렵사리 찾아 입구에서 가까 운 창가에 앉았다. 수입원목 으로 우아하게 장식된 넓은 레스토랑 안에 협주곡으로 손꼽히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 1번이 잔잔하게 물결치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밖으로 내려 다보이는 오른편 소원도의 마네킹에 입혀진 아찔한 화이트 드레스가 조명들에 더욱 아름답게 돋보였다. 약속한 시간이 되어 입구 쪽에 시선을 두고 있는데 미소를 띤 장혁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 다. “칼 같이 시간을 지키는 것은 여전하구나. 언제 왔어?” “방금.” 오랜만에 만난 장혁은 눈 밖에 벗어나는 행동으로 관객들을 놀라게 하는 나의 정신 상태를 감 정이라도 하듯 헬쓱한 나의 얼굴을 면밀히 관찰했다. “이번일로 맘고생이 심해. 많이 수척해 보이는데.” “사돈 남말 하긴, 자네도 나 못지않아.” 몇 마디 안부 인사가 오고 간 다음 장혁의 피골이 상접한 내 모습이 안쓰러워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자신만의

둥지에서 벗어나

세상에

나와야지

언제까지 대중과

방송

매

체와 담을 쌓고 살 건가…….” 시각 장애인처럼 언제나 검은 안경을 쓰고, 세상의 밝은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두운 빛만을 보 려고 고집하는 나를 보고 대중들, 특히 음악을 하는 가수들조차 속된말로 맛이 갔다고 들 한 다고 일러주었다. 음악다방을 통해 좋은 노래를 세상에 많이 보급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대 중들과의 소통을 통해 훌륭한 음악가로 거듭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했다. 강일중 사 장의 눈물겨운 구명운동 덕분에 가요계 복귀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눈이 번쩍 띄는 소식까지 전해주었다. 몇 초의 침묵이 며칠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는 쉰 듯 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 만 되풀이 하였다. 나는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면서 몇 일전 강일중 사장이 귀 뜸으로 했 던 며칠 내에 천지가 개벽하는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가요계 복귀를 두고 했던 말 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 갈

기분에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물론 친구의 말이 현실 가능한

- 129 -

일이 아닐지는 모르리라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말에서 미약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꿈이 현실화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화상으로 친구 장혁이가 가까스로 음반 기획사 대표를 설득시

키는데 성공했는지 자동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눈 에 들어왔다. 당당한 위용과 씩씩한 걸음에서 전쟁에 승리한 개선장군의 모습이었다. 나는 지금의 상황을 강일중 사장에게 말해야할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관계자와 만나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전까지 현제 일 을 장담 할 수 없기 때문에 잠시 유보하기로 했다. 어차피 음반사나 계약이 성립된 경우 매스컴이나 언론에 보도가 되게 되면 내가 말하지 않아 도 자연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본인인 내가 세상과 타협하려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다. 다만 잠시나마 무모할 정도로 순수 음악만을 고집하는 내 음악적 성향을 하양조절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향기야, 잠시 상의할 게 있는.” 얼굴에 곤란한 표정이 역력한 그가 내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 앉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니?” “이런 말 한다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무슨 말인데?” 틀림없이 대중과 관련된 말 일거라고 생각한 나는 왠지 맥이 풀려 버렸다. “진정한 은

음악인은

존경받아야

대중이 마땅한

아닌 훌륭한

오직

음악으로서

음악인의

승부를

자화상이야.

걸어야한다는

하지만

자본주의

너의

신념

세상은

뭐

뭐니 해도 물질을 최우선 두고 있는 이상 대중과 상업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 계에 있다는 것을 나보다 음악을 하는 너가 더 잘 알거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번 한번만 눈 딱 감고 내 뜻대로 따라줄 수 없겠니? 중국최남단 열대 휴양지인 하 이난

섬에서

제임스

브라운과

함께

공연했던

그

때의

노래들을

수많은

대중들

앞에 다시 한 번 더 불러줄 수 없겠니. 만약 그렇게만 한다면 기획사 대표가 가요계 복귀를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지 않겠어.” “기획사 대표가 제안한 말이니?” “응,

그래

지금

당장

OK하면

10분

안에

만나서

계약한다는

어.” 장혁은 지금이라도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좋아 그렇게 하겠어.”

- 130 -

말까지

전해

준댔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눈물이라도 한 바탕 쏟을 것처럼 눈자위 가 석양빛처럼 붉게 물들었다, 나는 길게 한 숨을 쉬고 나서 잠자코 담배만 피웠다. 장혁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방금 전에 온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했다. 정말 친구의 말대로 10분도 안되어 젠틀한 60대 후반남자와 쇼윈도에 진열대에 서 있는 마네킹 같은 여자가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남자와 여자는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유명인사여서 한 눈에 알아봤 다. 노란 빛이 도는 부드러운 오렌지 색 립스틱에 스커트 부분이 검은색인 원피스를 입고 화 려한 목걸이를 한 여자는 올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KBS1 TV 주말연속극 ‘도시의 여자’에서 극중 김 달중(김명훈) 재벌 2세

까도 남을 유혹하기 위해 속사댄스(속옷만 입고 추

는 춤)와 핫팬츠 차림으로 다리를 양옆으로 활짝 벌리는 소위 쩍벌춤을 추어 노출의상과 선정 적인 춤으로 우리사회에 크게 화재를 불러 일으켰던 배우 겸 인기가수로 크게 뜨고 있는 톱스 타다. 그리고 검은 머리칼에 금테안경 레스토랑 여주인의 그를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7~80년대를 풍미했던 통기타의 전설로 불리는 레전드 급 뮤지션이다. 음반 기획사 대표라는 말에 기묘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때는 가요계 복귀라는 말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어서 상대자에 대해 더 이 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막상 내 눈 앞에 있는 통기타의 전설로 불리는 상대 앞에 나는 그만 주눅이 들어버렸다. 나는 일단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간단한 통성명이 끝나기도 전 김만우는 ‘인기가수 제조기’라는 명성에 걸맞게 계약서부터 내밀었다. “장혁씨 로부터 충분한 설명을 들었을 줄 압니다. 저도 한때 음악을 한 사람으로 서 누구보다 도 김향기씨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대중과 타협하지 않고 오 직 대중에게 어필하려는 그 정신, 저는 정말 높이 삽니다. 하지만 지금은 음악만 가지고는

성공할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을

김 선생님께서도

피부로 뼈저리게

체험

음 했을 줄 압니다. 지금은 실력보다 외모와 주위의 배경을 더 중요시 하는 세상 입니다. 그런 우리취지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수가 있지요.” “예” 고개를 끄덕이며 김만우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광대뼈 주위에 희미하게 떠도는 붉은 반 점은 무척 다혈질 성격이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칼날 같이 우뚝 선 코끝이 무 척 깐깐하고 차가운 인상이어서 보기만 해도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가 악 기 중에서 가장 섬세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통기타, 그것도 7~8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통 기타 가수라는 게 도저히 실감나지 않았다. 그의 창작곡 들은 여느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와는

- 131 -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질적으로 달랐다. 낮게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은 목소리로 울려 퍼지 는 한편의 시(詩)적인 가사와, 머리끝이 쭈빗 설정도로 아름답고 세련된 기타 선율은 당시 7~80년대의 젊은이들의 가슴에 잊지 못할 음악적 감동을 주었고 그 시대의 송가가 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나는 김만우와 마주한 채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결코 칭송받을만한 음악인은 아닌 것 같았 다. 그가 키운 5인조그룹 ‘걸스 걸스’만 해도 그렇다. 멤버 중 3명이 20세를 넘지 않는 미성 년자이다. 미성년자 연예인에 대해 과다노출 의상이나 선정적인 춤은 아직도 우리정서에 맞지 않아 법으로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그런데도 영리 또는 흥행을 목적으로 과다노출도 부족해 지나치게 선정적인 ‘쩍벌춤’ 까지 개발하여 우리사회에 크게 논란을 빚었다. 엉덩이까지 드러 나는 핫팬츠 차림의 멤버들이 무대에 무릎을 대고 앉아 다리를 양옆으로 활짝 벌리는 동작을 반복하는 춤까지 추게 하여 무명가수들로 구성된 5인조 걸그룹을 5개월 만에 인기정상의 자 리까지 올려놓았던 주인공이 바로 김만우 이다. 영리와 흥행을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거의 무 시한다고 해도 좋을 만큼 거만한 태도를 취하며 계약서를 읽어보고 있는 나를 곁눈질로 바라 보았다. 일방적으로 명령식으로 되어있는 항목에 나는 자존심이 상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옆에 앉은 장혁은 화가분수처럼 솟구친다고 해도 절대로 감정을 표현해서도 안 되며, 눈 밖에 벗어나는 행동으로 상대자에게 밑 보여 계약파기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임을 상기시키기 위해 오른쪽 눈을 깜박 거렸다. 주문한 주스가 나왔다. 그가 한 모금 마시는 것을 보고 나서 궁금한 사항에 대해 물었다. “이

계약서에는

애당초 나의

자작곡이나 기존

곡에 대해

일절

언급이 없는데

여

기에 대해 제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 좀 해주실 수 있겠지요.” 나는 문서하나에 모든 자유와 생각과, 행동까지 제약받는 노예가 아니고 따라서 내 창작곡이 아닌 다른 가수의 노래만을 부르는 앵무새 가수가 아님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지만 그의 서슬 퍼런 불같은 성질에 내 의지는 불꽃처럼 사그라져 버렸다. “김향기씨

아직도

상황

판단이

되지

않습니까?

대중과

방송을

우롱한

당신을

더

이상 가요계와 방송매체에 두 번 다시 발을 들여 놓지 못하도록 언론과 방송이 합 의한 거 모르세요. 강일중 사장이 당신의 구명운동을 위해 발이 불이 나도록 뛰고 있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지요. 실력으로 보아 경력으로 보나, 연륜으로 보 나 나를

능가할 수 있는

음악인이 이 땅에

- 132 -

없는 나정도 되니까

이렇게 당신과

마주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됐겠지요.”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여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일부로 모른척하며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계약서를 읽는 시늉을 했다. 그는 금테안경 너머로 날카로 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구제불능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담배를 주머니에 있는 갑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지금

수능시험

보세요?

고작해

봐야

다섯줄

남짓한

문장으로

되어있는

계약서

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처음 접해 보는 계약서라서......” 나는 말끝을 흐리며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김 만우는 나의 비굴한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내가 지나칠 정도로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자 다시 기고 만장한 눈 빛으로 나의 약점을 파고 들었다. “우리와 하고

계약하기 싶다는

싫으면

가수들이

싫다고

줄을

말하세요.

섰어요.

김

심지어는

선생이

아니더라도

계약금은

고사하고

우리와 계약만

계약 해준다

면 1억에서 많게는 수십억까지 내놓겠다는 사람들도 많아요. 계약금 명목으로 돈을 지불한

경우는

김

선생이

처음입니다.

그만큼

당신의

음악

실력을

높이

평가했

기 때문이지요. 우리와 계약이 성사되지 못할 경우 어쩌면 가요계의 복귀는 영원 히 물 건너갔다고 봐도 무방비할거에요. 나도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요. 앞으로

한

시간

후에

‘나는

가수다’라는

예능프로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해야하기

때문 이지이요. 5분의 시간을 주겠습니다. 그때까지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우리와 계약을 할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는 각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오렌지 주스를 입도 떼지 않고 한 번에 들 이켰다. 잠시 동안의 침목을 깬 것은 그의 주머니에서 사납게 울어대는 스마트폰이었다. 그는 스마트폰에 찍힌 전화번호를 확인하고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양복 안주머니에서 고가의 스마 트 폰을

꺼내더니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귀를 열고 들으란 듯이 커다란 목소리로

더 들어댔다. “아니

80년대

한국

뭇

남성들을

울리고

웃겼던

김민선

양이

아니세요.

싱글

앨

범 ‘슈퍼 뮤직’을 발표하고 5년 만에 다시 팬들 곁으로 돌아 온 거 정말 축하 드려 요. 관록이 전혀 녹슬지 않았더군요. 이번 앨범에는 컨트리 록과 발라드 곡을 기 반으로

한

타이틀곡

‘슈퍼뮤직’

이

너무나

- 133 -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음악이에요.

그

리고 애시드 재즈 풍의 ‘라스트 러브’와 애절한 발라드 ‘슬픈 연가’는 김민선 양 의 음악세계를 한 단계 끌어올린 쾌거였습니다. 3개월 전에 서울홍대의 한 클럽에 서 진행된 기자 간담회에서 정말 멋질 말을 했더군요. ‘요즘 음악은 너무 한 장 르 에만 치중된 것 같다 나는 가수다 와 노시붕 같은 음악프로도 너무 상업적인 냄새가 짙다. 영리 또는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음악 오디오 프로는 당장 중단하고 부모와

자식세대를 뛰어넘은

연대의 감동을

줄

수 있는

건전한 음악방송

프로그

램을 통해 파스텔 톤의 색깔 같은 설렘이 있는 음악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말은 정 말 의미심장한 말이었어요. 김민선 양 우리 언제 한 번 공연하기로 해요. 안 그래도 근황이 궁금하던 차에 이렇게 전화까지 해주어 정말 고마워요.” 그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귀를 파고 들었다. 한국의 마돈나라는 김민선과의 전화 통화로 자신 의 건재함을 은밀히 과시하려고 , 손님들이 다 듣도록 일부로 큰 소리를 쳤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 장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심신이 모두 지쳐있는지 눈앞에서 일 어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서 손목시계를 보더니 테이블 앞에 놓인 계약서를 뺏다 시피 손에 움켜잡고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약하겠습니다.” 나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임을 깨닫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번기회를 놓치면 그의 말대로 가요계복귀는 영원히 물 건너 갈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어차피 계약할거면서 이렇게 사람의 애간장을 태워야 합니까.” 김만우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뺏다시피 한 계약서를 도로 내손에 쥐어 주었다. 일말의 망설 임도 없이 나는 계약서 서명 란에다 사인을 했다. 계약이 물 건너 간 줄 알고 멍하니 창밖으 로 보던 장혁은 계약이 성사될 것을 알고 뛸 듯이 기뻐하며 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의 머 릿속에 갑자기 미래의 청사진이 떠올랐다. 김만우와 계약한 조건은 모두 영리와 상업성만을 목적으로 계약한 것이지만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 다행 으로 생각했다. 나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김만우를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7~80년 한국 통 기타 음악의 중요한 축이었던 레전드 급 뮤지션이 음악을 영리와 상업성으로 이용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음악인의 길이 아니다. 대체 누가 김만우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7~80년대 국내 가요 중 7080세대가 뽑은 최고의 노래는 김만우 작사 작곡의 ‘저녁노을’ 이라는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 우울한 지식인의 내면적 정서와, 서민적 사람들의 애환을 거칠 것 없는 하피적 태도를 자유로운 가락에 담는가 하면

- 134 -

또 한편으론 단아한 기타 선율에 담아냈던 한국 통기타 음악계의 독보적인 뮤지션 중의 한 축 을 담당했던 전설이다. 7~80년대 당시 김만우는 번안가요로 시작했고, 관련 히트곡도 많이 남 겼지만 그는 당시 유행했던 컨트리 록과 외국 모던 포크를 모방하다 이내 창작곡으로 나아갔 고 ‘저녁노을’을 세상에 내어 놓은 후 더 이상 외국 곡을 부르지 않았다. 그의 창작곡 들은 어 느 통기타 가수들의 창작곡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막 피어오르던 청년 문화를 억압하는 군사정부의 서슬 퍼런 칼날아래서도 낮은 목소리로 울 려 퍼지는 암시적인 가사와 아름답고 단출한 기타선율은 젊은이들의 꿈과 이상그 자체였다. 암시적인 가사에서 그의 음반은 전량압수 되고 금지곡으로 묶이고 만다.

해금은 십년 뒤인

1987년 에야 이뤄졌다. 볼 온성 보다는 영롱한 모국어로 피어난 음악적 성취로 더 빛나는 그 의 음악은 그 당시 사회적 현실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지금 현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설날 전에 TV에서 살짝 비친‘노시봉 콘서트’에서 통기타의 전설이라는 그가 누락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런데 지금 TV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노시봉 콘서트를 보고 울고 웃었다며 애기를 하 면서도 정말 아쉬운 것은 이들과 우정을 쌓아온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음유시인 그의 부재를 두고 사람들은 말이 많았다. 부모와 자식세대를 뛰어넘은 진정한 음악인이었던 그가 여전히 다른 통기타 가수에 비해 조명 받지 못하고 있고 김창식, 오세환에 비해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없는 여전히 무명의 가수로 전략한 것에 대한 앙갚음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것은 단순한 패배감이나 절망감이 아니라 분명히 빛 나는 승리였다. 나는 기고만장 하게 서있는 그를 새로운 각도로 보게 되었다. 1968년 통기타 문화의 서막을 알린 선구자이자 일등공신인 그가 ‘노시봉 콘서트’를 통해 6~70년대 인기 못지않은 유명세를 누리는 김창식 오세환 트윈 폴리오에 비해 겨우 이름만 유지할 정도로 전략한 불행한 전설. 이 추잡한 세상과 추잡한 음악만이 난무하는 현실에 그는 많은 갈등과 혼돈을 겪었으리라. 볼 온성 보다는 영롱한 한국어로 피어난 주옥같은 명곡들인 자신의 음악이 그 때나 지금이나 제 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고 여전히 주류매체 관심의 바깥에 있다는 자신에 대한 서러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거칠 것 없는 히피적 태도를 자유로운 가락에 담기도하고 우울한 지 식인과 젊은이들의 내면적 정서를 단아한 기타 선율에 담기위해 자신의 영혼까지 불태운 음악 인이다. 군사정부는 그에게 ‘불온한 사상으로 민중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음악인’ 으로 간주하

- 135 -

고 그의 음반을 대부분 압수하거나 폐기처분 하였고 위대한 한 음악인의 인생마저 무참히 짓 밟았던 것이다.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보 복차원으로 상업성을 기반으로 한 음악 사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냄새나고 역겨운 들짐승처럼 보였던 그가 스티비 원더처럼 위대하게 보였다. 마음속에 응고되어 있던 불신감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서 불청결해 보이는 누런 치아 뿐 아니라 18금의 어금니까지 수정결정체처럼 곱게 느껴졌다. 창 넓은 창가에는 꽃다발이 세워져있었다. 푸른 잎이 꽤나 짙은 장미꽃다발은 이파리도 줄기 도 썩어가고 있었다. 화이트색 리본만이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빛났다.

오늘은 김만우 음반기획사에 입사한지 6개월 만에 공연을 하는 날이다. 기획사 녹음실에서 몇 번이나 리허설을 해서 사소한 부분까지 머릿속으로 숙지한 상태이다. 자명종 시계를 보니 오후 4시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내가 집으로 돌아온 시간이 새벽 1시10분이었기 때문에 3시간정도 밖에 자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늘 있을 공연 때문인지 잠은 벌써 달아나 버렸다. 나는 공들여 면도를 하면서 어젯밤 김만우와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면서 그가 했던 말을 곰 곰이 되 새겨보았다. ‘7080세대가 뽑은 최고의 노래는 자신이 작사 작곡한 ‘저녁노을’이지만 여전히 다른 통기타 가수들에 비해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대중을 의식하지 않는 순수 한 음악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 않았다. 지금 TV와 공연을 통 해 얼굴을 비치고 인터넷 공간에도 자주 오르는 김창식 공형주 트윈 폴리오처럼 대중의 사랑 을 받기 위해서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이중적인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나에게 한 말처럼 들린다. 한시라도 빨리 대중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으로 온몸이 근질거렸지만 오후 1시 에 예정되어 있는 공연시간 까지는 9시간이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번 공연의 반응을 봐서 기획사 사장인 김만우는 다음공연 일정을 잡기로 했다. 나는 서재에 가서 공연 일과표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보았다. 엊그제 기획사 녹음실에서 존 레넌의 아들 줄리안을 위해 폴 매카 트니가 만든‘헤이주드(Hey Jude)’, 자신을 버렸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증이 함께 묻어 나는 엔딩곡 ‘마더(Mother)’ 타이오 크르주 ‘Rock Starr’ 까지 부르고 나자 감탄과 경악을 감 추지 못한 김만우와 소속사 가수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 136 -

나는 공연 때 내가 부를 노래 중간 중간에 관객들에게 할 멘트를 적은 메모지를 가방에 넣 고, 평소에는 별로 입지 않는 옷과 짙은 감색구두, 중국 하이난 여행 때 썼던 모자와 선글라 스를 끼고 집을 나섰다. 침구 용품 가게와 스포츠 상점이 즐비한 곳에 있는 청담동 김만우 음 반 기획사 까지는 자가용으로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기획사 사장인 김만우 는 아직 심한 숙취현상으로 코를 드르렁 골며 자고 있었다. 내가 왔다는 메모지를 그의 머리 맡에 남겨두고 녹음실로 갔다. 나는 녹음실 책상위에 오늘 공연 때 내가 부를 노래가 녹음된 테이프를 두세 번 박복하여 들어 보았다. 한번 들은 기억만으론 충분한 그래서 반복해서 들을 필요조차 없는 버전이었다. 별다른 편곡 없이 서늘한 목소리로 밤의 신비로움을 불어넣어 원곡이 가지고 있는 노래의 맛을 색다르게 표현한 가창력이 단연 돋보였다. 그리고 간결하고 무심하게 노래하면서도 목소리에 자욱한 안 개가 끼여 있는 듯하면서도 또 때로는 현실의 뜨거움을 보여주는 풍요로운 목소리와 비어있는 공간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목소리, 여성적이고 소년 같은 목소리, 중성적이고 성숙한 목소리, 거침없는 허스키 보이스,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다재다능한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래는 내가 들어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역류하여 흐르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 애수어린 슬로 템포 포크송 음악은 서늘하고 안개 같은 목소리로 ‘포리 소올’ 계열로 분류하 는 음악은 포리소올 의 핵심적인 음역 대를 구사하는 캘리 페터슨이나 브라질의 아나 마조 띠 와 같은 거침없는 허스키 보이스와 같은 목소리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헤비메탈 음악은 돌 고래와 같은 팔세토에 정신이 번쩍 드는 목소리로.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아날로그 음악은 정원에 화사한 꽃과 싱그러운 향기가 느껴져 마음을 설레게 하는 내추럴하면서도 여성적인 감 성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소화 해 내는 내 음악적 감각에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가 나왔다. 이제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전대미문의 음악공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조용한 적막을 깨고 안채로 통하는 기획사 바깥문에서 노크 소 리가 들려왔다. 나의 손에서 갑자기 뜨거운 땀이 끈적끈적 배어 나왔다. “김향기씨.” 기획사 사장 김만우의 목소리였다. 나는 황급히 음악을 듣기위해 귀에 꼽았던 이어폰을 빼어 책상 앞에 놓고 나서 문을 열었다. “머리맡에 있는 메모지를 보고 향기씨가 온 것을 알았어. 몇 시에 온 거야?” “오전 7시에 왔어요.” “기획사에 입사하며 처음 공연이라 무척 긴장되었나보지.”

- 137 -

“네, 어젯밤 뜬 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는데도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아요.” “세계적인

레전드급에

속하는

제임스 브라운마저

주눅이

들게

한 향기가

이런

작

은 공연 앞에 긴장하는 것을 보니 뜻밖인데.” 그는 신기한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장3시간 동안 오늘 있을 공연을 레코딩한 테이프 를 들으며 완벽을 기하는 내 모습에서 무척 감동을 받았는지 내 어깨를 살며시 두들겨 주었 다. 김만우는 녹음실의 한쪽 구석 캐비넛에서 서류봉투를 꺼냈다. 오늘 공연의 최종리허설을 해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갑자기 서류봉투를 꺼내야 하는 것인지 마음속에서 의문이 불같이 고개를 쳐 들었다. 나의 이런 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류봉투를 보여 주었다. “내가 6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활동했던 내 음악의 모든 것이 이 서류 봉 투안에 집결되어있지.”

70년대 한국 통기타 음악의 중요한 중심인물이었던 가수들과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7~80년 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가수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서류봉투가 찢어져 나갈 정도로 가득 차 있 었다. 7~80년대 애수어린 슬로 템포 포크송 음악이 주는 공기를 한 편의

시를 감상하는 듯

한 문학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 가요계의 음유시인 정태춘, 이동원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 고 찍은 사진이 내 눈을 번쩍 띄게 만들었다. 하늘에서 붉은 꽃이 떼를 지어 떨어지는 것처럼 붉은 저녁노을이 깔리는 바닷가는 아직 황혼 속에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아니었다. 군데군데 썰물이 밀려와 겹쳐 바위처럼 툭 튀어 나와 있고 미처 겹치지 못한 썰물은 해안가 위에 엷게 떠 있었다. 선창가 사이로 검은 바다가 보였다. 그리고 해변에서는 조용한 어촌마을이 거의 보이지 않고 갈매기 소리도, 파도소리에 묻혀 사라지는 대신 바람에 노거수나뭇잎이 팔랑팔랑 떨어지는 소 리가 울린다. 그러면 붉은 해안선이 저 멀리까지 이어지면서 어디까지가 뭍이고 어디서부터가 바다인지 모를 정도로 끝도 없는 붉은 세계가 펼쳐진다. 붉게 물든 해안선 저인망 어선 옆에 김만우, 정태춘, 이동원 한국 가요를 대표하는 음유시인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말없이 몇 번을 보았다. 붉게 빛나는 거대한 바다에 삼켜지듯 장난감 같은 저인 망 어선이 흔들흔들 멀어져가고, 이제 두 번 다시 이 해변으로 돌아 올 수 없을 것처럼 신비 롭고 고요함으로 가득한 사진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하늘아래 둘도 없이 친근한 관계인 것만은 분명했다. “제가

좋아하는

가수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정말 대단해요.”

- 138 -

사장님을

보니까

새롭게

보이는데요,

나의 진심 어린 탄성을 듣고 김만우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어느 듯 공 연시간이 2시간 밖에 남지 않는 정각11시었다. 오늘은 희미한 구름이 끼고 한차례 소나기가 내릴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가 있었다. 20분이 지나자 김만우 소속사에 몸을 담고 있는 가수들 이 속속히 모습을 나타내었다. 속사댄스(속옷만 입고 추는 춤)와 KBS 1 TV 주말 연속극 ‘도 시의 여자’에서 극중 재벌 2세 김달중을 유혹하는 ‘혜지’역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던 배우, 가 수 MC까지 1인3역을 소화해내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정혜진이 맨 먼저 출근도장을 찍었다. 신이 내린 몸매와 피부니 뭘 걸친들 안어 울리는 게 없는 그녀는 튜브 톱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몸매가 완벽한 여자만이 소화해 낼 수 있는 의상을 입을 땐 겨드랑이 살이나 팔뚝 뒤 닭살 종아리와 무릎, 허벅지 까지 그리고 어깨와, 팔, 손, 다리와, 발끝까지 드러나는 모른 부위까 지 촉촉해 보이도록 보습로션을 꼼꼼하게 바른 그녀의 모습 앞에 나는 숨이 멎어질 것만 같았 다. 5분후에 80년대 한국 남성들을 잠 못 이루게 했던 한국의 마돈나로 더 잘 알려진 ‘뜨거운 밤’의 가수 김민선양의 모습도 보였다. 도톰하고 완만한 눈썹에 아이라인으로 동그랗게 셰이 핑한 눈매 청순한 핑크 컬러로 물들인 입술은 나이보다 15년 정도는 더 적게 보였다. 화이트 보트넥 드레스와 뱅글의 매치, 작은 키를 보완해주는 블략웨지, 펌프스와 매끈하게 관리한 다 리까지 80년대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김만우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듯한 얼굴 표정이었다. 이제 시간은 한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마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공연장으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그때 기획사 문이 열리며 바비인형 같은 팔등신 미녀 다섯 명이 등장 했다. 그가 심혈을 다 하여 키운 5인조 걸그룹‘ 걸스걸스’ 멤버들이다. 트레드 마크인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과다노출과 지나치게 선정적인 쩍벌춤으로 최고의 인기를 달리고 있는 걸그룹 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의상도 보기에 민망한 핫팬츠 차림에 가슴부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는 의상을 하고 있었다. 늦게 도착한 5인조 걸 그룹 때문에 20분 늦게 출발을 했다. 그래도 30분 만에 공연장소인 서울올림픽 체조 경기장에 도착했다. 왼쪽으로 돌아가자 오른쪽에 체조경기장 건물이 나타났 다. 아직 공연시간 전 이라서 그런지 관객들은 예상보다 많지 않았다. 기자단과 방송사 취재 단이 없는 것을 확인 하고나서 체조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우리 일행은 공연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공연장 뒤 쪽으로 돌아가서 가수대기들 룸이 있는 곳으로 갔다. 물론 이 장소에는 출연 진과 공연의 관계된 사람 외에 개미새끼 한 마리도 들어오지 못한다. 아방궁 같은 건물의 안

- 139 -

쪽에는 방송사, 신문사, 잡지사 취재 기자단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금박이로 된 문을 열자 미 리 와서 대기 하고 있던

이 공연을

주관한 ‘한국 컨트리 룩 헙회’ 이사장 과 임원들이 우리

일행을 뜨겁게 환영했다.

KBS, MBC, SBS 방송사 취재단이 취재경쟁에 열을 올렸다. 공연시간은 이제 20분여 분밖에 남지 않았다. 공연장 입구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김만우가 뒤에서 나를 뜨겁게 포옹했다. “한국 가요계에 가장 길이 남을 공연이 될 거야. 내가 아는 기라성 같은 가수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절대 향기를 능가할 수 있는 음악적 실력을 가진 가수는 보지 못했어. 미국 음악계와 제임스브라운이 감탄한 레전드 급 뮤지션답게 다시 한 번 ‘하이난 신화’를 재현해 주기를 바래.” “기대를 져 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무대 안으로 들어섰다. 1만 여명의 관객들이 내가 무대 위로 오르 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로 나를 뜨겁게 맞아주었다. 무 대 뒤편에 설치된 대형스크린 화면에는 중국 최남단 열대휴양지 하이난 섬에서 구름같이 운집 한 관객들 앞에서 기타를 치며 멜라니 서프가 ‘세디스트씽’을 애절하게 부르는 내 모습이 화 면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 화면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자리 에서 심장이 멎어 버릴 것만 같았 다. 관객들도 멜라니 서프카보다 더 애절하게 세디스트씽을 부르는 내 노래실력에 감탄과 충 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화면으로 바뀌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선이 반듯한 이마 뒤로 올백으로 넘겼고 머리카락이 목덜미 근처에서 웨이브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매력적인 제임스브라운과 내가 함께 노래를 부르는 화면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내 노래실력에 감복한 세계적인 뮤지션 제임스 브라운이 그의 트레드 마크인 눈과 입으로 크게 웃으며 나를 뜨겁게 포옹하는 장면에 서 1만 여 명의 관중들은 또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공연장의 대부분을 차지한 중년관객들은 추억에 젖은 명곡들이 쏟아져 나올 때 가끔 눈물을 훔치며 그 시절을 회 상하는 사람도 많았다. 드디어 공연의 막이 올랐다. 이 날 공연에는 깜짝 출연한 5인조 걸 그 룹의 트레드 마크인 핫팬츠 차림대신 시스루 상의를 입고 매혹적인 댄스를 선 보였고 걸그룹 의 리더 격인 수정은 쟈넷잭슨의 ‘이프(If)’를 특유의 섹시함으로 재해석해 중년 남성 팬들의 폭발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공연시작부터 무대를 뜨겁게 달군 여성5인조 걸그룹 걸스걸스는 대표곡인 ‘사랑을 말해봐’ ‘그 남자 그 여자’ ‘슬픈 연가’와 보니의 ‘써니’를 한국적 음색으로

- 140 -

믹스해 불러 공연장을 뜨거운 열기로 가득 채웠다. 무대에서 깜찍함과 다양한 퍼포먼스로 ‘쩍벌춤’의 불명예를 단 한 번에 종식시키는 귀염까지 토해냈다. 뒤이어 우정 출연한 한국의 마돈나 김민선이 자신의 불멸의 히트곡인 ‘뜨거운 밤’ ‘천상에서’를 독특한 음색과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관객들을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 다. 그녀의 익숙한 목소리가 흐르자 관중은 목청 높여 따라 부르며 공연의 묘미를 마음껏 만 끽하고 있었다. 마침내 내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공연장을 쩌렁쩌렁 울렸 다. 특수한 훈련을 받은 군인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오르자 ‘하이난의 영웅 김향기’ 라고 쓰인 플래카드와 대형현수막을 든 좋은 노래 부르기 회원들이 제일먼저 나를 반겨주었다. 존 레넌의 아들 줄리안을 위해 폴 매카트니가 만든 ‘헤이주드(Hey Jude)’ 자신을 버렸던 어머 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증이 함께 묻어나는 엔딩곡 ‘마더(Mother)’를 불렀다. 5인조 걸그룹 걸 스걸스와 한국의 마돈나로 불리는 김민선 무대가 공연 초반에 이미 끝나버린 후 공연은 어떻 게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래서다소 김빠진 공연이 되지 않을까 하는 관객들의 우려를 비틀즈의 노래로 말끔히 해소시켰다. 데뷔 5주년도 채 안 되는 나는 히트곡 하나 없이도 폭발 해 산화했고 공연장을 가득 메운 1만 여명의 관객들은 내 목소리가 뿜어내는 라이브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1952년 북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나 1979년 솔로로 나선 뒤엔 특유의 블루스 음악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고 전설의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의 ‘파리지엔’ ‘스틸 갓 더 블루스’를 구 슬프고 서정적인 노래를 불러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리고 컨트리 록의 건조한 정서 와 돌연 대서사시의 허무하고 관조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스트리밍 제이호키스, 버디홀리의 노래까지 부르고 나자 박수와 환호성으로 공연장이 떠나갈 듯 했다. 중년의 관객들은 학창시 절에 들었던 추억의 노래에 스스로의 에너지를 이기지못하고 현란한 동작으로 발을 구르고 손 뼉을 치며 귀에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오면 목청 높여 따라 부르기도 했다. 외국 곡의 마지막으로 80년대를 풍미한 팝스타 프린스의 ‘레츠고 크레이즈(Let’s Go Gtrazy) 와 니콜키드먼이 ‘물랭루즈’에서 열창했고, 마릴린 먼로가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에서 불렀던, 보석, 특히 다이아몬드에 치명적으로 약해지는 여성의 심리를 드러내준 ‘Gen tlemen pre fer blon)’ 두 곡을 부르고 나자 여성관객들 수십 명이 내 이름을 연호하며 무대로 올라 와 내 손을 잡고 우는 여성들도 속출하였다. 감동의 파노라마 길을 걷는 듯한 행복의 시간이 계속 되는 것을 가수로서 누리는 최고의 기쁨이었지만, 반면에 내 노래보다 내 이미지에 푹 빠진 관객이 생길까봐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

- 141 -

아무리 감동적인 공연이라도 끝나면 감동이 줄어드는 시간은 눈 깜짝할 순간이다. 나중에 뒤 돌아보면 이것도 생애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추억이 될 뿐이다. 어르고 달래서 무대 밖으로 돌 려보내고 나니 이마와 등 뒤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린다. 이제 공연이 끝나갈 시간도 30 분채 남지 않았다. 70년대 한국 통기타음악의 가장 핵심적인 축 이었으나 여전히 다른 통기타 가수에 비해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기획사 사장인 김만우의 ‘저녁노을’ 이동원의 ‘이별노래’ 김수철의 ‘못다핀 꽃 한 송이’ 장현의 ‘미련’ 김남훈의 ‘창가에’까지 부르고 나자 공연시간이 20분이나 초과 되었다. 내 노래에 심취한 관객들은 모두 자리에 일어나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KBS, MBC, SBS 방송 취재단들과 신문사 취재 기자단들은 모두 혼이 나간 표정으로 내 모습과 내 노래에 열광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취재하는 광경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3시간 20여분 공연이 끝나고 나오는 길에 내 앞을 스쳐가던 여성관객 두 명은 ‘15만원의 티켓 값이 조금도 아깝지 않는 생애 최고 의 공연 이었다.’ 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지루한 장마가 요 몇 일째 계속되는 가운데 마음까지도 우중충 기분이 들었다. 나는 딸기잼 을 바른 토스트를 반복해서 씹으면서 엷게 탄 일회용 커피를 물 대용으로 마셨다. 테이블위에 놓여있던 CD플레이어에서는 일주일전 체조경기장 공연 때 부른 70년대 컨트리 록 음악이 흘 러 나왔다. 뒤이어 구슬프고 서정적인 게리무어의 노래는 아침에 듣기에는 너무 슬퍼 어울리 지 않았지만 음악이라도 듣지 않으면 에너지가 솟아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트로트를 들 으며 정서 불안감만이 더 해만 갔다. 테이블 위에는 일간스포츠 신문이 펼쳐져 있었다. 문화 면에는 내 공연에 관한 기사가 자세히 나와 있어 읽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 머리기사에만 대충 눈길을 돌린다, ‘하이난의 영웅 김향기는 90년대 컨트리 음악계의 간판스타 가스 브룩스 와 엘비스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던 감미로운 목소리와 신사 보컬리스트 팻분(Pat Boone)의 복사판’ 이라는 큼지막한 제목기사에 호감이 가 신문을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라틴 곡의 거장 산타나와, 영국 헤비메탈의 개척자 아이언 메이든, 포크 컨트리에 기반한 록 음악으로 글로벌 팬의 마음을 훔치며 전 세계에서 1억2000만장 앨범을 팔았고 대한

그래미상을 관심을 불러

6차례나

수상한

‘록의

일으켰던 하이난의

영웅

- 142 -

전설’

이글수의

내한공연

김향기의 콘서트는

만큼이나

지

결국 초콜릿에

담

긴

부드러운

처럼

조용히

달콤함은

있었으나

퍼져나가는

깊은

초콜릿만이

맛은

가미되지

미국의

전설적인

뮤지션

제임스

브라운과

찬했던

김향기의

명성은

소문만

무성한

었다. 그의 노래실력은 에도

못

보석

특히

한국적

미치는

못한

스티비 말

고유한

특성인

아쉬움을

숙제로

원더처럼

잔치였다는

단맛이

남겨주었다.

버금가는

것을

어둠

가수로

확인시켜준

극

공연이

빌보드 차트에 이제 막 이름을 올린 20대 가수의 실력

형편없는

다이아몬드에

음색으로

가지는

수준이었다. 치명적으로

재해석해

니콜

키드먼이

약해지는

부르려고

여성의

노력하는

‘물랭루즈’에서 심리를

흔적은

열창했던,

드러내준

보였으나

노래를

노래라기보다

소음에 가까운 고성방가에 지나지 않았다. 노래를

아름답고

무엇이며 조용히

그 퍼져

감동적으로

노래의

주제가

나가듯이

부르기

위해서는

무엇인지를

음악역시

감동의

노래가

충분히 울림이

담고

이해할 관객들의

있는

때만 가슴에

의미와

내용이

초콜릿처럼

단맛이

조용히

퍼져

나

갈 수 있는 것이다. 김향기 씨의 노래는 부드럽고 달콤하며 아련한 향기를 가진 초 콜릿

과는

캐러멜에

거리가

가까운 풋

먼

노래실력이다.

과일 같은

입안에서

노래실력에

달그닥대는

사탕

관객들이 열광하는

같고,

끈적거리는

이유는 인기와

흥

행몰이를 위해 좋은 명곡들만을 선정해 불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은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방송사, 신문사가 말을 맞추어 돈을 주고 사주한 기자에게 그런 내용을 쓰라고 지시한 것이 틀림이 없었다. 원래 자신들의 눈 밖에 벗어나 미운 오리털이 박힌 공인들에 대 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근자근 밟아 아예 뿌리까지 잘라버리는 못된 습성이 있 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정도 일 줄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나를 제거하기위해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천인공노할 계획이 이제 수면위로 드러난 것 같아 고조 된 긴장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내 온몸을 파고들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 김만우 사장이 했던 말이 계속 귓가를 파고 들었다. “향기야

이번

공연으로

언론과

매스컴이

작당하여

너를

죽이기

위해

온갖

치졸

한 방법을 동원할 수 있어. 거기에 절대 휘말려서는 안 돼.” 그러고 보니 공연을 앞두고 일주일 전에 사복차림의 형사가 우리 집에 나타났었다. 그때는 엄 청난 큰 일이 일어난 것 같아 아내 윤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식탁 테이블에 펼쳐 진 일간 스포츠 신문이 나를 죽일 수 있는 식칼처럼 보여 마침표를 찍듯이 북북 찢어서 휴지

- 143 -

통에다 버렸다. 그 순간 주위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 내 존재감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강박 관념에 휩싸여 몇 번이나 베란다 문을 열고 우리 집 주변을 서성거리는 사복차림의 형사 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베란다 문 너머로 아파트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없는 것을 확 인하고 나서 아파트를 나섰다. 내가 기획사 사무실에 도착한 것은 출근시간이 1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김만 우의 분노 섞인 말소리만이 텅 빈 사무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노기충천한 말투로 보아 다 음공연 일정 때문에 공연관계자와 전화로 심한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방적으로 론과

한사람의

방송사의

평가하는 객들의

말만

말만을

것은

듣고

믿고

보았습니까?

것은

우리기획사에

차관님으로서

표정을

결정하는

바람직한 이름만

옳지

소속된

행동이

들어도

않는

김향기씨를

아니라고

가슴

일이라고

형편없는

봅니다.

뛰는

팝

봅니다.

그날

거물들의

언

가수라고 공연의

관

내한공연보다

절대 뒤지지 않았어요. 저도 라틴 록의 거장 산타나 나, 영국 헤비메탈의 개척자 아이언

메이든 최근의

기씨의

공연만큼

팝의 요정

감동적이거나

테일러

뜨겁지

스위프트의 내한공연도

않았어요.

그날

참석한

보았지만 김

1만여

명의

향

관객들

도 이글스 나 스컬피언스, 영국 록 그룹 스모키에 절대 뒤지지 않는 공연이었다 고

울먹일

정도였다고요.

그런데

일간스포츠에

실린

기사면

때문에

그런

뛰어난

가수를 빌보드 차트에 이제 막 이름을 올린20대 가수의 실력에도 미치지 못 한다 고

생각하는

있습니까. 에

따르는

문화관광부

물론,

차관님도

우리나라

수밖에는

전

별도리가

방송사와

문화와

언론사의

예술을

없지

꼭두각시와

다를

게

뭐가

체육

관광부의

결정

분들의

결정

총괄하는

않겠습니까.

하늘같이

문화 높으신

이라는데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들이 감히 거역을 할 수 있겠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저도

할

말을

해야겠습니다.

지금

방송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음악

오디오

프

로그램인 ‘나는 가수다’ ‘우리들의 일 밤’ ‘위대한 탄생’ ‘슈퍼스타K’ ‘불후의 명곡 투’ 도대체 이런 상업성 음악 포로가 난무하는 세상이니 진주 같은 보석이 제대로 눈에 들어 올리겠습니까? 그저

대중들의

인기와

흥행몰이에

만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길가다

보면

발에

채이고 채이는 게 음악인데도 들을만한 음악이 없다는 말까지 나오는 세상 아닙니 까?

사람들의

내면적

정서를

자극하지

못하는

음악은

대중들의

흥행몰이에는

성

공할지 모르나 십년도 못가서 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제 예가 좋은 사례가 되겠

- 144 -

네요. 70년대 한국 통기타 음악의 중요한 한 축이었으나 여전히 다른 통기타 가 수들에 비해 조명을 받지 못하다 보니,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없는 무명에 가깝지 요. 그런데도 7~80년대 국내 가요 중 7080세대가 뽑은 최고의 노래는 내가 작사 작곡한

‘저녁노을’이라는

설문조사가

나왔습니다.

한국

가요

사에 제

음악적

성취

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해도, 제 음악만큼은 국민들의 가슴에 깊이 남아 진한 감 동의 울림을 주고 있지요. 노시봉 콘서트에 내 이름이 누락되어도, TV와 인터넷 공간에도

오르내리지

못해도,

여전히

주류매체

관심의

바깥에

있어도,

지금

이순

간에도 대한민국 노래방에서 내 노래가 가장 많이 울려 퍼지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사람들의

내면적

정서를

자극하는

명곡은,

자식과

부모의

세대를

뛰

어 넘어 시대가 지날수록 더 애틋한 감동과 울림을 줄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상업주의에

치우쳐

시청자와

국민들에게

잘못된

모델을

보여주고

마치 그것이 국민들의 음악적 정서를 대변하는 양 모든 채널을 다 동원하여 홍보 와

광고에

음악적

열을

올리고

성향을 흐리게

있지요.

그런

하는 방송사

헛된

대중

객기를

조장하여

예술제작자 들의

시청자와

국민들의

말을 교과서처럼

신봉

하는 차관 당신도 그들과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김만우의 책상위에는 다음 공연 일정 계획서가 아무렇게나 내 팽겨져 있었다. 서울, 부산, 인 천, 대구, 광주, 울산 등 8개 광역도시를 순회하는 공연 계획서 허가 신청서도 함께 있었다. 책상위에는 팬 들이 보낸 격려편지와 공연을 보고 느낀 솔직한 마음을 적은 소감문과 팬레터 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기획사 김만우 사장은 조금 전까지 8개 광역도시 공연허가를 승낙 해 달라고 관계자와 전화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본래 사무실 직원들이 하는 일이지만 워낙 규모가 큰 전국투어 형식의 공연이나 보니 직접 전화를 하여 공연 일정을 확실하게 매듭 지으 려고 한 것 같았다. 김만우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나를 보고 의자에 앉아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의자에 앉았 다. 책상위에는 나에게 온 팬레터가 편지와 함께 쌓여있었다. 나는 수천 통이 넘는 팬레터에 손을 집어넣어 그중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분홍색 볼펜으로 예쁘게 쓴 팬 레터였다. 나는 떨 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읽어보았다. 밤하늘의 림픽

별처럼

체조

아름다운

경기장에서

가수

오빠의

향기오빠

별빛이

찬란함

밤,

저는

공연모습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지금

보면서

서울 이

올 편지

를 쓰고 있어요. 오빠의 감미로우면서도 때로는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는 열정적

- 145 -

인

노래는

지금껏

들어왔던

수많은

가수들의

노래에서

느껴보지

못한

진한

감

동을 받았어요. 저는 공연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뿐 만아니라 중국 하이난 섬에서 세계적인

뮤지션중의

한

분인

제임스

브라운과

함께

공연한

비디오테이프까지

모두 소장하고 있어요. 오빠의 노래들은 온종일 들어도 지겹지 않는데 특히 향토 성과 서정성을 함축한 ‘시골 집’ ‘징검다리’ ‘산 너머’ 등 8곡이 수록된 첫 앨범 은

정말

주옥같은

곡들뿐이었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세상에

빛조차

보지

못하

고 폐기되다시피 했다는 말을 듣고 저는 너무나 슬퍼 소리 내어 울었답니다. 그 중에서도 ‘시골집’ ‘징검다리’ ‘산 너머’는 제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18 번이

되었지요.

중국

하이난

부른 가수보다도

더 깊이

였는지

그리고

몰라요,

처럼 하루도 날의

섬에서

존슨이

감미롭게 부르는 오빠가

빠짐없이 들렸을

흥분된 기분은

톰

일주일이 지나도

‘달라이라’를

것을 보고 오빠가

음악DJ로

때 오빠가

부른

활동하는

원곡으로

얼마나 멋있게

음악다방

‘뮤지션’

기타를 치며 부르는

식지 않더군요. 오빠는

그

보

단골손님

노래를 들으며

그

다른 가수들처럼

T

V출연도 거의 하지 않고, 인터넷공간에도 자주 오르내리지 못해, 그리고 대중들에 게 어필할

수 있는

히트곡도 없는

무명에 가깝지만 그런데도

오빠의 노래만

들

으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가수 노래보다도 더 진한 감동이 느껴지는 오빠의 매력 은 어디에 있는 건지 지금도 미지수입니다. 오빠를 보고 느낀 건데 지금 한국 가요계는 주객이 전도 된 그런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식하다

무슨 이유

시피

하는데도

들인데도

왜 그들이

체

무엇

때문일까

인

위주로

가장 를

곰곰이

오빠,

한국에서

생각해

눈꼴

정평이

한국 가요계와 향기

현재

음악

이미지

제임스

나가는

향기오빠의

TV의

음악을 때문만은

절하시킨 노래와

구성된

아니겠지요.

지나치게 미국

음악인으로

뼈아픈 현실에

향기오빠가

도대 상업적

음악계와,

극찬한

저는 가슴이

최고라고

장

출연진

않는 이유가

흥행위주나,

위대한

예능프로를

가수들로

감동이 느껴지지

브라운마저

대중들은 삼류가수로 그래도

잘

진한

보았지요.

사나운

난

오디오 프로그램이

가장

부르는 노래에서는

몰아가려는

까다롭기로

픕니다.

때문일까요?

생각하는

오빠 아 팬

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이번 공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어요. ‘비가 온 뒤에

땅이

‘에디뜨

굳어진다는

피아프’

도

옛말도

처음부터

있잖아요. 유명세를

프랑스가 떨치지

- 146 -

낳은

않았어요.

세계적인 우리나라로

샹송뮤지션인 치면

노숙

자와 같은 집시 출신의 무명가수였어요. 그런

가수들을

세계에서

다

가장

열거하라면

유명한

뮤지션

장편소설 중의

분량보다도

하나인

편지가

레이디가가도

길어지겠어요.

미국남부

지금

허름한

재즈

카페에서 음악을 시장했다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는 오빠가 빠른 시일 내에 한국 을 대표하는 가수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빠는 항상 제 삶속에 있어 요. 저는 오빠의 노래로 하루를 시작하고 오빠의 노래로 하루를 마감할 정도니까 요. 저와 같이 오빠를 아끼고 사랑하는 수많은 팬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힘들어 도 ‘파이팅’ 알았죠? 오빠 정말 사랑합니다. 정말 좋은 노래 감사합니다. ㅡ향기 오빠를 사랑하는 열렬팬 현아가ㅡ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한통의 팬레터로 그동안 음악 때문에 받았던 상처와 슬픔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 김만우가 상심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사장님 다음 공연 일정이 취소가 되었나요?” 나는 안색을 바꾸며 걱정스런 얼굴로 물어보았다. 전화상으로 공연 일정이 전면 중단될 위기 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일부로 모르는 척 하였다. “통화할 때 대충 들어서 알겠지만 전국 8개 광역시 투어는 물 건너 간 것 같아.” “사장님께서

이번

공연만

성공적으로

치루면

광역투어는

사실상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말했지

아프다’라는

그런데

말이

문제가

있잖아.

생겼어.

자기보다

우리나라

뛰어난

속담에

실력과

‘사촌이

능력을

가진

땅을 사람을

사면 보면

배가 어

떻게 해서든 흠집을 내어 자기 발 에 두려거나, 아니면 더 이상 크지 못하게 뿌 리까지 잘라

버리려고 하는

못된 근성을

가진 사람들이 힘과

권력이 있는

사람

을 이용하여 공연 관계자 에게 공연허가를 하지 못하게 압력을 넣은 것 같아. 그 렇치 않고서야 확정된 공연을 취소 할 수가 없지.” “이럴 수 가.” 나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 모든 험난한 과정을 참고 견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 실력을 시기하고 비난하는 음악 관계자에게 시원하게 복수 하지 는 못할망정 눈을 뻔히 뜨고 보기 좋게 수모와 창피를 당하기 위해 그 모진 세월을 참고 견뎠 을까. 그러나 얄궂은 운명의 장난처럼 나를 그토록 집요하게 괴롭혔던 문제는 나를 놓아주지

- 147 -

않고

물 건너 간

것이다. 매일 아침마다 기획사 사무실을 출근할 일도 없고 제 3집 앨범을

준비하기 위해 기획사 녹음실에서 김만우와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교환할 일도 없고, 방송출 현을 위해 방송관계자와 만날 일도 없다. 무엇보다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들에게 내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건재 함을 알리기 위한 특단의 방편이었던 공연마저 취소가 된다면 사실상 그 들의 손에 놀아난 것 은 물론이요 내 가수 생명도 여기서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꿈에서 조차 생각하 고 싶지 않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가요계 복귀가 기정사실화 되었던 성공적 공연의 결과물 이 끝내는 나를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원인으로 작용하다니. 내 온 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리며 눈물이 핑 돌았다. “향기보다 내가 목 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야. 가요계에 안착하지 못하고 변방으로 떠돌 기만 했던 내 가슴에 쌓이고 쌓인 한을 눈물로 쏟았다면 서울시를 다 덮어 도 모자랐을 거야. 한국 통기타 음악을 대중화 시킨 것도 통기타 음악이 음악으로 서 확고한 기반을 구축화 시킨 것도 다 내가 이룩한 업적인데도, 나를 제외시키고 김 아무개

공아무개 오

아무개를 얘기할

때 내 심정은

오장육보가 찢어져

나가

는 아픔을 느꼈지 그것은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향기 일만은 참을 수 가 없어. 나 는 자네를 처음 본 순간 문득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아. 얼마나 기뻤고 감격 스러웠는지 때 묻지 않는 순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고 나는 내가 이룩하지 못 한 꿈과 희망을 향기동생에게 걸었던 거야. 한국에서 순수음악 만으로 대중의 사 랑을 받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어.” 냉담한 말투와는 달리 김만우는 한없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문득 잘 나가던 가수시절 자 신의 노래가 불온한 음악으로 낙인찍혀 금지곡이 되어버린 지난날의 시절이 뇌리에 떠올랐는 지 갑자기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향기야

결과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당했지 두 번 당하지는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동생 너 만은 내가 꼭 지켜준다.” 김만우는 나를 뜨겁게 포옹하며 몇 번이나 그 말을 되풀이했다.

- 148 -

한

번

기획사 사무실에서 3집 앨범이 마무리 되어간다는 소식을 전화로 통보 받았을 때 아내 윤희 의 목소리는 활기가 넘쳐났다. 윤희는 몇 번이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제 남편은 살 았습니다. 마치 생명의 은인이라도 대하는 듯한 과장스러운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치솟 는 기쁨으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희열을 이를 악물고 견디고 있었지만 윤희는 그런 내 마 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집요할 정도로 고맙다는 말을 수백 번 반복하면서 전화를 부여잡고 있 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지켜 주겠다고 울면서 맹세하던 김만우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 음을 알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내가 부여잡고 있는 전화를 빼앗다 시피 하여 내 귀로 3집 앨범이 마무리가 되어가는 단계 라는 말을 확인하고 수화기를 놓은 다음에도 꿈인가 생시인가 몰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최근 6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무엇 하나 현실에서 일어난 실제상황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내가 몸담고 있는 기획사도 상황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여직원 들은 여느 때처럼 책상 앞에 앉아 매킨토시 컴퓨터를 켰다. 기획사에 소속된 가수들의 공연 일정과 방송출연 팬들과의 만 남, 등 빽빽하게 짜인 스케줄 일정을 점검하고 있지만 계약된, 공연 일정이 취소될지 몰라 좌 불안석이다. 힘 있는 기관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기획사 사장인 김만우 에게 나의 사퇴를 끈질기게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들의 요청을 거절한다면 기획사에 소속된 모든 가수들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가는 것은 물론이며 나중에는 기획사 간판을 내려야 할 것이라는 경고까지 해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기획사에 소속된 직원들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 분으로 업무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하루도 빠짐없이 공연 스케줄이 취소되거나 변경되 는 것을 확인하고 있지만 진짜 내 3집 앨범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면 그때는 상황이 다르게 바뀔 수 있다. 나를 감싸고 도는 김만우를 그들이 곱게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갑자기 솟구치는 불안으로 아파트 통로와 마주한 욕실의 작은 창문이 제대로 잠겨 있는지를 확인했다. 나를 제거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들이 어떤 극단적인 방법도 서슴없 이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정도가 아니라,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그러 나 현실을 냉정히 생각해 보자. 나 한사람으로 인해 기획사에 소속된 수많은 가수들이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길거리에 나 앉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내 개인적인 사리사 욕만 채우기에 급급한 내 자신의 행동이 부끄럽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나는 양복을 벗어서 거 실 소파에 내 던지고는 넥타이를 풀고 거실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막 전성기를 달리고

- 149 -

있는 5인조 걸그룹 걸스걸스의 초췌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걸그 룹의 리더 격인 유리의 말이 귀에 쟁쟁하게 들렸다. “우리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

땀,

눈물,

노력이

있었는지

오빠는 잘 모를 거예요. 일각에서는 노래실력보다는 외모와 섹시한 춤으로 이 자 리에 안

오게

되었다고

되는 수면을

구하고 선정적인

연구한

말하지만

그건

취하면서 수많은 결과물로

춤이다.

우리

엽기적인

천만의

가수들의

걸

그룹의

율동이다.

말이에요.

6개월

춤과 퍼포먼스를 트레드

청소년들의

마크인 성욕을

동안

하루

4시간도

비교 분석하면서

‘쩍벌춤’을 자극할

수

연

개발했지요. 있는

성

적

인 춤이다 하여 논란과 비판이 많았지요.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우리가 추는 춤 을

통해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감동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찌르르

역류하

는 희열을 맛보았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지요. 방송 윤리 위원회에서 쩍벌춤 에

대해 시정요구

로

시정요구가

사항이 내려졌지만

철회되는

쾌거를

우리

이루게

걸그룹을 아끼는

되었지요.

팬

들이

팬들의 단식 우리5인조

농성으 걸그룹을

지켜낸 거지요. 그런데 오빠, 한 사람 때문에 우리의 매래가 위협을 받고 있어요. 오빠를 해고 하 지 않을 경우 우리 기획사에 소속된 모든 가수들의 공연 일정을 취소할 수 있다 는 말이 심심찮게 가수들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어요.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오 빠, 발로 우리 기획사를 나갔으면 해요. 제발 이렇게 부탁을 드릴게요.”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650밀리리터 병맥주를 꺼내서 병 채로 들이켰다. 툭 쏘는 보리 엑기 스가 식도를 타고 흘러 내려서 숯검정처럼 새카맣게 타 들어가는 뱃속의 열을 식혀 주었다. 자꾸만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유리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나는 맥주를 들이키면서 왜 지 금과 같은 상황이 오게 되었을까, 아무리 병적일 정도로 가요계 복귀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남의 눈에 피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까지 내 꿈을 이룬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일 이다. 나는 맥주를 들이키면서 열심히 머리를 굴려 이 위급한 상황을 모면할 방법을 생각했지 만 머릿속만 점점 더 복잡해져 갔다. 멍 하니 혼자서 술만 마시고 있자니 서글픈 생각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착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 마시는 행위 말고 또 무엇이 있으랴, 신세 한탄하고 있는 데 그 순간 머릿속에서 예리한 섬광이 번뜩였다. 어쩌면 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힌 모든 복잡한 문제들이 한 번에 해결된

- 150 -

것 같았다. 나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내 꿈이 이렇게 허망하게 좌절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 다. 나는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아무리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다고 해도 ‘가요 계의 이단자’ ‘가요계의 악마’ 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는 한 내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비 로소 깨달았다.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끊어 오르는 절망감을 토해냈다. 견딜 수 없는 자책감이 가슴깊이 파 고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수치, 분노, 슬픔, 비애 때문에 온 몸이 덜덜 떨리고 눈앞에는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암흑세계가 펼쳐졌다. ‘말도 안 돼, 내가 무엇을 크게 잘 못했다고 세상이 나를 갖고 노는 거야’ 다음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주방으로 뛰어갔다. 도 마 위에 놓인 식칼을 부여잡고서야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합리적인 판단을 포기 하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손이 따라가서 내 심장이 관통하도록 칼을 박아 미련 없는 삶을 끝 내고 싶었다. 남아있는 가족들과, 아내 생각을 한다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것 또한 잘 알 고 있다. 나는 결코 가족과 아내가 눈에 밟혀 이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수많 은 난제에 부딪혀 왔지만 그때마다 ‘내일’ 이라는 희망찬 날을 기약하며 모진 고통을 참아왔 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준 든든한 버팀목 같은 ‘내일’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이상 내 인생도 완전히 끝난 것과 다름없다. 창문 밖으로 눈길을 돌리자 서울의 하늘은 검은 그림물감으로 색칠한 듯 했고 군데군데에 손 바닥만 한 구름이 결핵을 앓은 흉터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우중충한 공기를 가슴으로 들이 마시고 나서 나는 또 다시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칼끝을 내 심장으로 향했다. 그때 삭막한 집 안의 공기를 뚫고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식칼은 든 채로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벨 이 울리자마자 일단 전화 받고나서 목숨을 끊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장윤희씨 댁이지요?”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웠다. “네, 그렇습니다. 만은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산부인과 병원인데요.” 산부인과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라면 용건은 크게 두 가지다. 좋은 소식과 좋지 않는 소식이다.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임신 여부 관계 를 확인하기 위한 의료적인 검사절차에서 임신을 했거나, 임신 몇 개월째라는 기쁜 소식이고 반대로 안 좋은 소식은 상상임신이나, 임신이 아닌 경우이다. 간호사가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밝은 소리로 말 하는 것을 보면 전자에 속하는 좋은 소식이다. 내가 아빠가 된다는 생각에 목

- 151 -

숨을 끊고 싶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축하합니다.

임신3개월입니다.

성별은

밝히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

다만은 대대로 손이 귀한 가문 같아서 장윤희씨 에게 만은 예외로 하겠습니다.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거나,

친구들이나

형제분들에게도

누설이

될

경우

쌍방이

법

적인 처벌을 받게 됩니다. 어느 누구에도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어요?” “네, 맹세합니다.” “믿겠습니다. 건강한 사내아기예요.” 하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난 다음 나는 너무 기뻐서 잠시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은 가족과 아내, 아들에게 평생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안겨줄 뻔 했던 나의 무모한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는 가슴을 쓸어내렸 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태어나지도 않는 아기가 나를 살렸다고 생각했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고 마치 죽었다가 살아 난 것처럼 감동 그 자체였다. 나는 지금의 전화내용을 아내 와, 우리 가족과 장모님에게 말해야할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당분간 유보하기로 했다.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된 나는 자동응답전화기 버튼을 누르자 전화기에 용건이 녹음된 유 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리는 제발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자진 사퇴를 요구하는 부탁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유리는 벨 음 이 세 번이나 울린 다음에야 전화를 받았다. “유리양 나 향기야.” ‘김 선생님 목소리가 오늘따라 무척 밝아 보이는데요. 그래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 어요? “ 자신의 요구사항에 대해 ‘예스’ ‘노우’를 분명히 밝혀달라고 했으면서 무슨 일로 전화했느냐 는 말에 불쑥 화가 치밀었다. “유리가 전화해달라고 했잖아.” “아, 참 제 정신 좀 봐. 깜박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그래 마음의 결정은 하셨어요?” 끈끈한 인간애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태도에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유리 가 그렇게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버렸다. 나는 문득 며칠 전에 걸려온 유리의 전화를 떠올렸다. 그때 삼촌뻘 되는 나에게 술 한 잔 하자는 말을 서슴없 이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요구사항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마치 사퇴압박에 시달리는 나를

- 152 -

진흙탕 속에 피는 연꽃으로 비유하며 내음악의 소신을 찬양하며 권력의 희생양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유리양 같은 기획사에 소속된 나에게 너무 쌀쌀맞게 대하는 것 같은데.” “저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마음은

너무나

아파요.

오빠같이

뛰어난

가수를

잃

는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요. 오빠, 우리 만나서 술 한 잔 해요. 시간 있으시지요?” “시간은 있지.” “앞으로 한 시간 후에 거기서 만나기로 해요.” 약속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유리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유리와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 는 그녀가 살고 있는 강남구 논현동 대저택 단지 맞은편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천막형 방갈로 이다. 오붓한 데다 신선하기까지 한 방갈로의 문을 열어젖히면 상상이 현실이 되는 광 경 앞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은밀한 공간속,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정갈한 침대, 그 옆엔 평 면 TV와 매킨토시 컴퓨터가 있다. 아직 유리는 도착 전이었다. 기획사 팀원들과 몇 번 들렸 던 곳이지만 이곳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내부 소품도 하나같이 명품이다. 가구명품 브랜드 ‘자르 댕 드빌’의 제품이 대부분이다. 럭셔리한 티 테이블과 에비앙 생수 다 섯 병도 있다. 이 카바나는 모두 10개 동이다.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이 쓴 소설 제목을 인용 한 ‘에덴의 동쪽.’ 중세 성곽 도시로 ‘나를 좀 지나가게 해 달라’ 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정 도로 세상에서 가장 좁은 골목의 이름을 인용한 ‘코토르’, 크고 작은 조각이 3천 6백 개 나 되고 고딕 건축의 파르테논 신전이라 불리는 프랑스 최고 걸작의 성당이름을 인용한 ‘아미엥 노틀담’ ...등등 이름도 그냥 갔다 붙은 게 아니라 건축문화와 유명한 문학작품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은밀한 공간의 하루 사용료는 대기업 사원의 한 달 치 봉급에 맞먹는 금액이다. 방갈로 룸 안에는 세계 20개국 와인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앙증맞 은 티 테이블 옆에 있는 책상 앞에 앉아 매킨토시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음악 파일 여러 편을 훑어 내렸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나타날 때마다 잠깐씩 스크 롤을 멈췄다. 셀린디옹, 아레사 프랭클린, 캐럴 킹, 벤지 휴스, 그레그 브라운 고개를 쏙 내밀 고 있는 제프 브리지스가 등장했다. 드디어 찾던 것이 나타난 나는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제 프 브리지스가 기타를 들고 ‘ 내 비석에는 이렇게 쓸 거예요. 죽기 위해 태어나다.’ 그런 내용 이 담긴 노래를 부르는 그의 동영상과 함께 유려한 금관악기와 잔잔한 멜로디가 흘러 나왔다.

- 153 -

“언제

오셨어요?

역시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만은

오빠를

따라

갈

가수가

없다

니까요.” 제프 브리지스의 동영상을 쳐다보며 유리는 놀랍다는 듯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그녀와 단 둘만의 만남은 기획사에 입사한지 처음이었다. “오빠와

단

둘만의

자리를

갖고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그

꿈이

이루어지게

되어

정말 기뻐요.” “한국

최고의

걸그룹인 리더인

유리양과 내가

단 둘만이

있다는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은 벌써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은데.” 나는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장난기가 발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리는 내가 찾는 음악파일을 쳐다보면서 속삭이기 시작했다. 나의 새빨간 귓불에서 그녀의 야릇한 숨결의 열기 가 전해졌다. “유리양 우리 술이나 한잔할까.” 건성으로 말을 하며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녀의 아름다움에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린 것처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은은한 세미 스모키와 내추 럴 핑크 컬러의 메이크업으로 성숙하고 섹시한 이미지를 유감없이 표현했다. 화사한 표정에는 절제된 분위가가 감돌고 팬티까지 살짝 보일 듯한 아찔한 화이트 미니 드레스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지난주에 방송된 SBS ‘댄싱 위드더 스타’에서 유리는 가슴과 허리가 과감하게 파인 드레스를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뽐내며 파트너인 댄스 스포츠 선수인 김창민과 숨 막히는 룸바를 선보였다. 특히 섹시한 리듬감으로 남성 시청자들을 녹다운 시켰다. 이날 방송에서는 춤이 끝난 후 파 트너 김창민이 유리의 이마와 볼에 살짝 키스하는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 KBS 1 TV 3박4일 에서 깜짝 출연한 그녀에게 남자 개그맨이 김창민이 자신의 이마와 볼에 키스할 때 기분을 묻 자 유리는 ‘룸바를 출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모니터링을 하면서 키스한 것을 알았다. 열심히 춤을 춘 내게 파트너가 감사의 표시로 한 것 같다며’ 활짝 웃는 모습이 떠올려졌다. 유리는 세계 20개국 와인들이 선반에 진열된 것을 보고 나서 감탄한 듯 이 말했다. “설마, 이 많은 와인을 다 마시자는 말은 아니겠지요?” “당연한 말이지.” “오빠는 이 많은 와인 중에서 특별히 마음에 드는 게 있으세요?” “냄새와 빛깔을 보고 와인의 품격을 구별하지, 내가 한번 시범을 보여 가장 좋은

- 154 -

와인을 골라보지.” 냄새를 맡기 위해 코 평수를 높이고 명품와인을 찾기 위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검푸 른 색깔이 유난히 돋보이는 와인에 내 시선이 멈추었다. 프랑스 노르망디 중심 도시인 ‘루앙’ 의 이름이 적혀있는 와인을 보고 나는 한 동안 내 눈을 의심했다. ‘40일간의 세계여행’을 쓴 작가 질 베르디와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 고향인 루앙에서 생산된 와인은 워낙 유명하여 프 랑스와 연계된 가까운 나라에서 조차도 구할 수 없는 와인이기 때문이다. 이 와인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나는 흥분을 잠시 억누르고 손으로 비틀어 뚜껑을 땄다. 그러는 사이에 여 종업원이 호텔 A 코스에 버금가는 요리가 쳐려진 상을 들고 나왔다. 고급스러운 룸 안에 맛있는 요리냄새가 가득했다. 유리와 나는 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우선 명품 중에서도 최상품으로 꼽히는 와인의 짙고 깊은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 와인을 잔에 다 반 정도 따랐다. “우와,

명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와인은

잔으로

떨어지는

소리부터

다른데

요.” “와인에

대한

기본지식이

대단한데

잔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와인의

질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오빠 정말 죄송해요.” “뭐가?” “우리들의 밥줄이 끊어지는 게 두려워 오빠에게 기획사를 떠나가라고 했던 말, 정 말 죄송하게 생각해요.” 나는 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유리양, 그런 자책감 갖지 마 모든 게 자업자득이야. 다 내가 만든 일인데 뭐.” “아니에요.

오빠

같은

진실한

음악인은

처음이에요.

정말

음악의

깊이와

가치를

알며 음악냄새가 나는 분은 오빠가 처음이었어요.” “유리양, 벌써 술이 취한거야?” “취하지

않았어요.

전

멀쩡하다고요.

나이가

적든

많든

요즘

잘

나가는

가수들을

보면 온몸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서 소름이 끼친 다구요. 대표적인 실예 를 하나 들어볼게요. 설날 전에 TV에 살짝 비친 ‘노시봉 콘서트’를 시청한 적이 있었어요. 진

모르나

나이든

세대들은

신세대인

통기타

우리에게는

음악이

별다른

뿜어내는

감흥이나

- 155 -

라이브의

신선한

매력에

충격을

받지

흠뻑

빠질

못했어요.

세 명이 나와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중간 중간에 자신들의 일화에 얽힌 에피소드까지 데

그들은

애기하며 자신들이

웃고

떠드는데

마치6~80년대의

저는

공감이

음악을

하나도

좌지우지

가지

했던

않았어요.

것처럼

그런

교만하게

말

할 때 마다 역겹다 못해 면상에다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더 나를 실망시킨 것은, 공이라는 사람이 하는 말이 참 어이가 없었어요. 자신들의 노래에 열광한 팬이 공 아무에게 말하기를 ‘선생님들과 같은 세대에 태어난 것 이 영광 입니다.’

광적인

팬이

한말을

온

국민들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처럼

미화시켜

말

하는데 참 어이가 없었어요. 자신들이 무슨 음악의 신이라도 되는 양 교만과 주 책을 떠는 모습이 눈꼴 사나워 못 봐주겠더라고요. 세 명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데 자신들의 노래는 몇 곡도 없고 다 다른 가수들의 노래와 외국곡인 팝송 위주 로

콘서트를 하면서도

마치 대단한

세계적인

가수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모습에

서 한국가수들의 일그러진 영웅 심리를 보는 것 같았어요. 그런 가수들에 비하면 기획사 사장님과 오빠는 정말 보석 같은 뮤지션이지요.” 나는 아무 말 없이 빈 잔에다 술을 채웠다. “유리양 오르내릴 내

다시

봐야겠는데

때 영리

생각이

틀렸어.

과다노출의상과

또는 흥행목적으로 음악에

대한

선정적인

결성된

안목과

춤으로

걸 그룹으로

감각이

7080세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가수보다

절대

뒤지지

가 않아, 충분히 팬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 “다른 사람이 아니고 오빠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 진짜 가수가 된 거 같은데 요.” 유리는 천진난만하고 밝은 성격이지만 무대에만 오르면 그 와는 반대로 병적일 정도로 성숙 하고 섹시하여 남자시청자들의 숨을 죽이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만이 개 성이 아닐까, 팬들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같이 ‘러브샷’을 하며 다정한 연인처럼 술을 마실 때는 곪을 대도 곪아 터진 한국 음악의 불안한 미래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부산에서 제법 유명한 제조업을 경영하는 사장의 딸인 그녀가 부모 의 곁을 떠나 가수의 길을 가기위해 겪었던 파란만장한 사연을 진솔하게 꺼낸 것도 그만큼 나 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확고하기 때문이었다. 유리는 술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내 옆으로 다 가와서 살그머니 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는 이제껏 맡아 본적이 없는 향긋한 향기에 석고처럼 굳어있던 말초 신경들이

- 156 -

우우 소리를 지르며 부활하는 것 같았다. “오빠, 요즘 들어서 가수라는 제 자신에 대해 넌덜머리가 나는 게 솔직한 심정이 예요. 톱스타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뻘 되는 남자를 상대하느라 죽고 싶은 생각이든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에요.” 유리는 술이 취하자 무명시절에서 겪었던 말 못할 사연들을 꺼냈다. 아직은 중요한 말을 숨 기고 있지만 유리의 표정에서 조금씩 숨기고 싶었던 아픔까지 내 보였다.

“TV에도

자주

나오고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인기가수들은

스트레스를

모르

고 살 것 같은데.” “오빠는 몰라서 하는 말 이예요.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채널을 다

동원하여 어떻게든

나와 몸

한번 섞으려고 얼마나

징그럽게 구는

지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유리는 가수로 데뷔할 때 그 데뷔를 빌미삼아 매니저와 방송관계자들이 몸을 요구했고 자신 은 가수가 되기 위해 그 요구에 기꺼이 응할 수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사연까지 솔직히 털어 놓았다. 유리는 땅이 꺼져라 한 숨을 내 뱉었다. “이 땅의 모든 여가수들이 가수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옷을 벗 어야 하는 이 불행한 일이 언제쯤 가야 끝이 날까요?” 유리는 지난날의 아픈 기억 때문에 마음이 아픈지 새카만 눈에 눈물이 어렸다. 그 충격적인 말에 측은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자 유리는 침통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블루 마스카라 를 사용해 속에서부터 한올 한올 채워 올려주는 느낌으로 꼼꼼하게 발라 인형 같은 눈매를 완 성한 속눈썹은 물기에 젖어 이슬처럼 촉촉하게 빛났다. 가운 스타일이 아찔한 화이트 미니드 레스는 가슴이 반 정도는 노출이 될 만큼 파여서 눈부신 가슴이 수줍게 엿 보였다. 내가 으스 러질 듯이 꼭 껴안자 유리는 사춘기 소녀처럼 해 맑은 미소를 지었다. “좀 더 꼭 껴안아주세요.” “그러다 숨이 막혀 죽으려면 어떡하려고.” “그래도 좋아요.” “정말?” “네, 오늘은 너무 기분이 좋아요, 사람 냄새 나는 오빠와 함께 있으니까 짐승 같은 남자들에게 유린당했던 제 몸이 본래의 깨끗한 몸을 돌아온 것 같아요.” “빈 말이라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 157 -

“빈 말이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오빠 CF촬영하는 동안 땀을 많이 흘렀어요, 그래서 부탁인데 제 등 좀 시원하게 밀어줄 수 있으세요?” 유리가 고혹적인 눈길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 눈길이 너무 강렬하고 애틋해 도저히 거부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욕실에 들어가서도 너무 기분이 좋아 박자도 맞지 않는 랩 을 흥얼댔다. 자기 딴 에는 좋아하는 랩을 흥얼거리긴 했지만 자신이 듣기에도 무슨 내용인지 몰라 웃기만 했다. 연배가 지긋한 방송사 PD들과 할아버지뻘 되는 재벌 회장들에게 성상납을 밥 먹듯 해서 그런지 내 보는 앞에서도 부끄럼 없이 옷을 벗었다. 유리의 백옥 같은 살결은 너무나 매끈하고 아름다워 사람의 몸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을 보는 것 같았다. 배꼽 아래서부터 피부가 눈부실 정도로 희고 여성만이 간직하고 있는 은밀한 숲이 빛의 화가 모네 가 그린 그럼처럼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유리는 내손을 자신의 신비한 젖가슴에 갖다 대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굳어있던 내 마음이 흔 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형언할 수 없는 그 따뜻함에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나도 모르게 입 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기도하듯 고개를 숙여 눈을 감았다. 조심조심 내 손을 자신 의 가슴에다 깊이 밀어 놓았다. 비밀의 신 비림은 부드럽고 향긋한 냄새로 가득했다.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가자 유리의 가녀린 손바닥이 갑자기 내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조금은 거 칠게 내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묻었다.

물속에 잠길 때처럼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었

다. 음악담당 PD나 재벌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거칠게 애무하고 싶었으나 마음이 약한 나는 암초에 부딪혀 물에 가라앉는 배처럼 허우적거렸다. 머리 위에서 유리의 달짝지근한 숨결이 느껴졌다. 손바닥으로 마치 갓난아기를 쓰다듬듯 부 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모든 남자들이 다 그렇게 한 다 해도 향기 너만은 그러면 안 된다고 외치는 양심의 목소리가 귓속에 울려 퍼졌다. 나는 부드 럽고 향긋한 유리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성적욕망이 발생하지 않으려 무진장 애썼다. 떨리 는 손으로 유리의 얼굴과 가슴부위를 만지면서 욕망을 가라앉혔다.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고, 우리는 가슴으로 서로 커뮤니케이션 중이다. 욕조바닥에서 따뜻하게 고인 순정 같은 진실함이 안개처럼 스멀스멀 밀려오는듯했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유리는 팬티에 목욕 가운만을 걸쳐 입고 냉장고에서 양주를 꺼냈다. 양주 한 병을 단 30분 만에 둘이서 다 비웠을 때 유리는 보드라운 손길로 내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유리는 나의 얼굴을 두 팔로 살그머니 안았다. 내 얼굴은 그녀의 가슴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

- 158 -

다. 나는 잠시 저항했지만 목에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유리는 내 얼굴을 껴안으면서 뜨겁게 키스했다. 그리고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아 다시 한 번 혀와 혀가 녹는 깊고 뜨거운 키스를 나 누었다. 팔 안에 있는 유리의 몸은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인어공주의 몸처럼 너무나 아름답 고 매력적이다. 나의 남성은 이미 내 마음의 사정권에 벗어나 강렬한 수축작용을 일으켜 무쇠 가마솥이라도 뚫을 듯이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나는 초가집 지붕에 열린 작은 박처럼 달려있는 유리의 젖가슴을 만지며 목욕가운 매듭을 풀 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를 안고 침대에 쓰러지려고 할 때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유리를 품 고 싶어 안달한다고 해도 향기 너만은 그 불쌍한 유리를 성적인 육체가 아닌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주어 그녀의 아픔과 고통을 따뜻이 녹여주어야 한다는 양심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 다. 온 몸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 내렸다. 한순간의 욕정과 탐욕을 다스리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나는 죄인처럼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유리양 미안해 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괜찮아요,

역시

오빠는

보통

남자들과는

질적으로

달라요.

여자를

이해하는

생

각의 깊이가 우주같이 큰 분이예요. 여자를 성적대상이 아닌 마음으로 품을 줄 아 는 오빠를 만나서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지 몰라요.” 유리는 나의 손을 잡으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마치 다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유리는 후회와 자책감으로 인해 죄인처럼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내 얼굴을 따 뜻하게 안아주었다. “키스 좀 해줄래요?” 나는 유리의 얼굴을 내 얼굴과 마주보게 끌어당겼다. 마음속으로는 세상의 짐승 같은 남자들 에게 상처받고, 성적 노리갯감으로 전략한 허울뿐인 불쌍한 여자를 따뜻하게 품어주어 그 꽁 꽁 언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고 싶었는데 내 의지대로 몸이 따라가 주지 못한 것이다. 칼날 같은 정신적인 의지도 유리의 아름다운 미모 앞에 속절없이 무너질 뻔하였다.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성적인 욕망감, 마음과 몸이 하나 되지 못할 때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 타나는 숙명 같은 그림자, 나는 평생 그 숙명 같은 그림자인 성적인 욕망감에서 영원히 자유 로울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깊이 한 숨을 내 쉬었다. “향기 사람은

오빠,

저는

오빠가

세상에

처음이에요.

태어나서 오빠,

나이가 제가

적든

많든

경솔했어요.

남자에게

우리

오빠라고

기획사에는

오빠

불러본 같은

심지가 굳은 분이 절실히 필요해요. 제발 부탁하는 건데 기획사를 떠나지 말아 주

- 159 -

세요. 끝까지 남아서 더럽고 부패한 세상과 싸워주세요.” 나의 뺨에 닿는 유리의 입술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방향을 바꾸어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가녀린 허리를 부러질 정도로 껴안았다. 그리고 새까맣고 윤기 나는 그녀의 머릿결에 얼 굴을 묻었다. 머리카락사이로 자스민 향기가 내 코끝을 자극했다. 이미 성적인 욕망을 사라졌 지만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드는 청순한 소녀 같은 유리는 자기 연민에 휩싸이면서 내 얼 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유리의 손길에 얼굴을 맡기고 정말 행복하고 포근한 휴 식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갔다.

기획사 사장인 김만우의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그 사실 만으로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거리의 풍경도 확연히 머리에 들어왔다. 버스정류장에서 손님들이 삼삼오오 앉아있는 모습도 눈에 익었다. 대로변을 지나 모퉁이로 진입하자 다세대 주택들이 눈에 들어 왔다. 이 주변은 몇 개월 전부터 도시재개발 지역으로 한창 아파트 공사가 진행중이였다. 철 거지역이라고 붉은 스프레이로 X(엑스)자 로 표시한 다세대 주택 현관 앞에는 사람들이 버리 고 간 전자제품과 생활필수품들로 가득했다. 철 거 지역을 지나 골목길로 진입하자 다세대 주택들이 나타났다. 이 주변은 아직 도시재개발 회사와 주민들 간에 보상 문제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은 재개발 지역으로 확정되지 않는 곳 이다. ‘재개발 결사반대’ 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는 교회주차장에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모 여앉아, 불경기와, 뼈 빠지도록 일해도 먹고 살 수 없는 극빈층에 대해 의견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주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로 더 심화되는 계층 간의 소득격차에 대해 얘기 를 나누고 있는 듯 했다. 얼마 전에 조선일보에 ‘일해도 먹고 살 수 없는 극빈층 340만 명, 한국 자본주의 절망’ 이라는 머리기사의 내용이 생각나 귀를 쫑긋 세웠지만 교회에서 울려 퍼 지는 찬송가 소리에 묻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얼굴에 주근께 투성 인 한 어른이 미간을 찌푸리고 ‘이놈의 세상’ 하며 독기 서린 말을 내 뱉으며 바닥에다 침을 탁 뱉었다. 나는 교회를 지나쳐 한참을 걸었다. 모퉁이를 돌고 꾀죄죄 한 주택가에서 ‘ㄱ’ 자형으로 꺾인 골목에서 세 번째 집이 기획사 사장인 김만우가 살고 있는 집이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건축한 오래된 이층 양옥집이다. 철제대문 앞에 너저분한 도둑고 양이 몇 마리가 주인대신 나를 먼저 반겼다. 집 앞에 있는 슈퍼 앞 평상에는 항상 서너 명의

- 160 -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얘기를 나누거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오늘은 모습이 보이지 않았 다. 허물어진 퇴락한 계단을 올라가 철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니 안에서 흘려간 유행가 노래 가 들렸다. 초인종을 누르자 얼굴이 반쪽이 된 김만우가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집 안으로 들 어서자 나무로 된 벽에는 금이 좍좍 가 있고 아날로그 음악의 상징인 전축이 가보처럼 유리관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만큼의 LP판이 가지런히 정돈 되어 있었다. 구석에는 담뱃갑과 참치 캔, 일회용 나무젓가락, 마시다 만 소주병이 있는 앉은뱅이 상, 최근의 심정을 말해주듯 빈 소주병 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 속에는 무언가가 썩 어 가는 듯 텁텁하고 시코롬한 냄새, 그럼 악취가 진동하는 냄새 역시 많아 본적이 없었지만 점차 익숙해지자 그 냄새가 향기처럼 느껴졌다. 김만우는 나를 앉은뱅이 상에 앉게 하고는 주방 쪽으로 갔다 나는 시선을 돌려 집안을 둘러 보았다. 가장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공연사진 들 이었다. 7~8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찍은 사진에서 그의 전성기시절을 조금 엿 볼 수

있었다. 사진 속에 있

는 유명 가수들의 시절을 조금 엿 볼 수 있었다. 사진 속에 있는 유명가수들의 얼굴표정에선 기운과 박력이 넘쳐났다. 나는 그 동안 폐를 끼친 것을 사과하고 이제 내 갈 길을 찾아 기획 사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쏟아 질 것만 같았다. 주방에서는 삼겹 살 굽는 냄새가 코로 흘러 들었다. 삼겹살 냄새에 술 생각이 간절해진 나는 주방 쪽을 보았 다. 그는 알맞게 구워진 삼겹살을 젓가락으로 집어 접시에 옮겨 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상추를 씻어 쟁반에 담은 다음 식기 함에서 술잔을 찾고 있다. 현관 밖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를 맡고 찾아온 고양이가 먹을 것을 달라고 울고 있었다. 나는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슬쩍 보았다. 라이온스 클럽마크가 새겨진 시계가 중심을 잃고 삐딱하게 기울어 있었다. 다행이다, 아내 윤희의 퇴근 시간이 되려면 아직은 몇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아내가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모든 일을 깔끔하게 매듭짓고 아내가 좋아하는 김치 찌게까지 만들어 저녁식탁에 올리고 싶었다. 요즘 들어 혼자 있는 시간이면 언제나 끊임없이 아내 윤희가 좋아 하는 음식만을 생각할 뿐 미래 지향적인 내 계획은 내 머릿속에서 지운지 이미 오래 전 이었 다. 그가 장만한 술상을 들고 왔다. 김만우는 조금 전의 풀죽은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활기차 보였다. 앉은뱅이 상 위에 삼겹살이 담긴 접시와, 상추, 된장을 올려놓았다. 소주병을 따서 찰랑찰랑하게 채워 내게 건넸다. 나는 두 손으로 잔을 받아들고 쓰디쓴 소주를 물마시듯 마셨다. 김만우 역시 내가 건넨 잔을

- 161 -

단 숨에 비운 다음 잔을 상에 내려놓았다. 나에게는 이 단란한 시간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외부세력의 강권적인 압력에 의해서 정들었던 기획사를 떠나더라도 그 와 의 관계만은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싶었다. 앉은뱅이 상 안쪽에 앉아있던 김만우가 갑자기 소 주병 뚜껑을 이빨로 따서 병 채로 나발을 불었다. 절반을 단숨에 들이키자 그의 안색은 붉은 색종이처럼 발그스레해졌다. 김만우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 물었 다. 그리고 고통에 질린 듯 눈을 찌푸리면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왠지 안스럽고 측은해 보였다. 나는 집에 들어설 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혼란이 있었다. 방은 궁상맞다고 해야 할지, 말 그대로 속이 텅 빈 껍질 같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눈뜨고 못 봐줄 정도로 옹색한데 그는 어떻게 태연할 수 있는지 내 머리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개를 옆 으로 돌리니 장난감 같은 무전기가 기우뚱하게 놓여져 있는 곳에 방이 하나 더 있는 듯 했다. 활짝 열린 문 뒤로 사용 불가능해 보이는 러닝머신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그와 도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궁색한 집이었다. 기획사 대표 인 김만우 는 경제인 연합회 회장처 럼 하루에 수억을 만지는 큰 손이였다. 기획사에 소속된 가수들이 벌어들이는 고정수입만 해 도 한 달에 수십억을 육박하였다. 기획사에 소속된 가수들이 공연 스케줄을 잡기위해 관계자와 만나 한 끼분의 식사금액으로 백만 원 이상을 쓸데도 있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옹색한 집에서 살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라 도 하겠는가. 더욱이 돈 앞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그의 인간됨을 볼 때 수영장과 골프장이 딸 린 호화저택이 먼저 떠올려졌다. 그런데 막상 눈앞의 현실을 보니 진시황 아방궁을 연상케 했 던 그의 집은 일반 서민들이 사는 집에 지나지 않았다. 집 안에 있는 가재도구나 전자제품은 모두 재활용 센터에서 주워온 것처럼 보이는 허접한 싸구려 뿐이었다. 전체적으로 궁핍한 가 정환경이라고 암시하듯 벽에 걸린 옷에서 역한 냄새가 코로 흘러 들었다. “저, 사장님.” 궁금증을 견딜 수 없어 말을 건네 보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시선이 내 눈과 마주쳤다. 움찔 했다. 웃으면서 술잔을 주고받을 때는 몰랐는데 웃음이 가시고 난 눈빛이 유난히 슬퍼 보인 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안고 있는 얼굴 같았다. 처음 보는 그 슬픈 얼굴에 나는 또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평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위풍당당해 보였던 그가 지금은 하 루끼니를 걱정해야하는 기초수급대상자처럼 보이는 것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제가 알고 있는 형님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어 보여요.”

- 162 -

“동생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어떤 데.” “걸어

다니는

은행,

인기가수

제조기

형님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지요.

형님이

5인조 걸 그룹인 ‘걸스걸스’ 만 벌어들이는 고정적인 수입만 해도 한 달에 5억이 넘는다고 들었어요.” “맞아. 드라마 촬영, CF만 찍어서 버는 수입만 해도 한 달에 5억이 되지.” 김만우는 술잔을 들어 한 번에 입안으로 털어놓고는 내 얼굴을 올려도 보았다. 그리고 쾡한 두 눈으로 집요하게 내 표정을 쫒았다. “걸그룹이

버는

수입이

몽땅

내

주머니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기

획사에 소속된 가수들만 해도 20명이 넘어, 그 중에 걸그룹 만큼 유명세를 탄 가 수들은

극히

가수들이지.

일부분이야. 그

가수들의

70프로는 콘서트나

대중들의 공연에서

인지도가 버는

없는

수입금은

무명가수에 우리기획사

가까운 사무실에

한 달 월세비도 안 되는 수준이지. 쉽게 말해 콘서트나 공연을 할 때 들어가는 돈이 1억이라면

그들이

공연수입금으로

버는

돈은

몇

천만

원에도

못

미친다는

거지.

한번공연을 할 때마다 8천만 원 적자가 나는 셈이지.” “그렇게나 많이요?” 현관문 밖에서는 고양이가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발로 현관문을 할퀴는 소리가 눈보라가 휭 휭 물아 치는 소리처럼 날카롭게 울렸다. 돈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그의 비정함을 상상 했던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내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자 그의 눈 아래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잡혔다. 거침없이 환하게 웃은 것이다. “적자를 보면서 까지 기획사를 운영하는 내가 우습게 보이지?” “아니에요.

너무나

존경

스러워요.

기획사

운영으로,

수백억,

많게는

수천억을

버

는 재벌기획사사장에 비하면 형님은 천사 이상이에요.” “내가 천사라고?” 김만우는 철철 흘러넘치는 술잔을 든 오른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술이 얼굴에 쏟아 지지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그때 마음속에서 기획사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굴 뚝같이 치밀어 올랐다. 이상한 일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사퇴를 강하게 저지하고 있 었다. 김만우는 활짝 웃으면서 억지로 미소를 띠고 나를 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속마음은 얼어붙은 소금기둥처럼 차가워졌다. 그리고 배신감에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한 표정, 그는 얼굴을 가리킨 술잔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가져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서 물마시듯

- 163 -

마셨다. “기획사를

떠나고

싶다는

말을

하기위해

나를

찾아온

거지?

부모자식이라고

해서

언제까지 같이 살 수 있는 건 아니지. 하물며 복잡한 이해관계가 맞물린 남남끼리는 언제 갈라설지 모르는 세상이지.” 그리고 김만우는 정면으로 나를 응시했다. 눈과 눈이 뒤엉킨 채 눈싸움을 하다가 마음에 간 직하고 있었던 말을 조심스럽게 내 뱉았다. “저

하나로

인하여

형님과

그리고

기획사에

소속된

가수들이

선의의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미리 화근을 없애기 위해 제가 사퇴를 하는 것 입니 다.” 내 말에 김만우가 웃었다. 무척 당황해하는 내 모습이 우스웠던 모양이다. 술잔을 쥔 손이 떨려 금방이라도 술이 내 앞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김만우는 온 몸을 심하게 떨면서 말했다. “내가

동생의

론에

종사하는

구겨

가면서

구명운동을 대중문화 인간

위해

발이

불이

제작자들에게

같지도

않는

나도록

갖다

놈들에게

뛰어다닌

바친

돈이

허리를

시간과,

얼마인데,

굽신굽신

방송사와 내

거렸던

언

자존심까지 내

짓밟힌

인격은 무엇으로 보상해 줄 건데. 이런 내가 안중에도 없는 동생의 이기적인 행동이 배신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내 멱살을 잡고는, 또 어깨를 밀며 불끈 화를 내었다. 하지만 나쁜 의도는 없는듯했다. 그리 고 미안하다며 싱긋 웃는 그 얼굴에 친근함이 어렸다. 나의 손이 어느 틈엔가 야위어 뼈가 불 거진 그의 어깨를 꽉 부여잡고 있었다. 김만우의 몸은 애처러울 정도로 야위었고 덥수룩한 수 염에 눈은 충혈 되어 있었다. 내가 기획사를 떠나고 싶다는 말을 한 번 더 끄집어낸다면 금방 이라도 통곡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슬픈 얼굴이었다. 입가엔 며칠째 깍지 않는 수염이 질갱이 풀처럼 매달려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입모양은 땟국이 절여 꾀죄죄한 것처럼 보인다. 영축 없 는 실작자의 모습이다. 언제나 고급 신사복에 물방울 넥타이를 맨 기품 있는 매니저 김만우 사장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어쩌다 인기스타 제조기라는 김만우 사장이 이렇게도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 있는지, 사람이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변할 수도 있을까. 이 모든 것이 나로 인해 벌 어진 참극 같아 나는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저를

위해

애써주시는

사장님의

은혜도

모르고

제 어떤 일이 있어도 그만 두겠다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 164 -

제

생각만

했습니다.

이

“동생,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김만우는 굵고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나를 부둥켜안았다. 슬피 우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도 끝내 대성통곡하며 서럽게 운다. 울음이 목에 까지 차 더 이상 나올 울음이 없었다. 김 사장 도, 나도 모든 울음을 다 쏟았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울어 서

손가락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

다. 온 몸은 축축이 땀으로 젖어 있고 이마와 얼굴에 눈물이 달라붙어 비에 흠뻑 젖은 생쥐 꼴이었다. 흐르고 있는 시간은 일시 정지하고 고요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다만 옆집에서 나오는 테크노 음악 소리 만 없다면 방안의 공기는 무덤같이 적막하다. 앞으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김만우 사장에게 한 약속만은 꼭 지키고 싶었다. 앉은뱅이 상 안쪽에 앉아있던 김만우가 갑자기 얼어붙은 듯이 들었던 술잔을 떨어뜨렸다. 바 닥으로 떨어지자마자 술잔은 ‘쨍그렁’ 하는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혼이 빠진 그 의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려진 현관문 틈새로 덩치가 산만한 남자가 서있었 다. 몸에 붙게 디자인한 재킷과 팬츠차림, 재킷은 어깨와 팔 부분을 검은색으로 처리해실제보 다 슬림 해 보인다. 낮은 촉수의 조명등과 적당한 취기 오른 알코올의 상승효과로 마치 눈물 이라도 흘린 것처럼 얼굴주위가 붉게 물들었다. “누구신데

주인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오는

겁니까.

주거침입죄로

경찰에

고소하기 전에 어서 가세요.” 김만우의 불쾌한 말에 사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산모처럼 볼록 튀어나온 배를 앞으로 쑥 내밀면서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사내가 거실의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베일 에 가려졌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길쭉한 팔자 눈썹아래에 알코올 기운 때문인지 그렇 지 않아도 딸기코처럼 붉은 사마귀가 더욱 기묘한 빛을 내 뿜었다. 눈과 코는 조잡한 조각품 처럼 흉측했고, 거칠고 메마른 얼굴은 온통 주근께 투성 이었다. 개구리눈처럼 불상 사납게 툭 튀어나온 눈에는 음흉한 빛이 가득했다. “찾아온 용건을 말하지 않으면 주거 침입죄로…….” 남자는 김만우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코앞까지 바싹 다가왔다. 김만우는 앉은뱅 이 상을 뒤로 밀치고 벌떡 일어서면서 그의 면상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사내가 가볍게 피하 는 바람에 오히려 김만우가 몸의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얼어붙은 방안의 공기

를 더욱 살벌하게 만들었다. 나는 끊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며 쓰러진 그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눈길한번 주지 않고는 안주머니에서 꺼낸 편지봉투를 김만우 앞 으로 휙 내던지며 금속성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 165 -

“제가 김 사장님을 찾아온 용건은 바로 이 사진 때문이지요.” 나는 바닥에 떨어진 편지봉투를 주어 내밀자 김만우는 상기된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그리고 편지 봉투 속에 사진을 꺼내려다가 다시 뒤돌아서서 그 사내를 힐끔 쳐다보았다. 시선이 부딪 힌 시간은 눈 깜짝할 정도나 되었을까. 사내는 거만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서는 사진을 본 소 감을 편지봉투에 적힌 연락처로 전해달라는

뜬구름 같은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현관 문 을

열고 나갔다. 사내가 사라진 다음에도 잠시 동안은 편지봉투 속에 들어있는 사진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엄청난 돌풍을 예고하는 무언가의 암시 같았기 때문이다. 식욕은 완전히 사러져 그 맛있던 삼겹살조차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윽고 김만우는 심호흡을 하며 긴장 을 풀며 편지봉투를 손에 들었다. 김만우의 차분한 얼굴을 보는 순간 내 자신이 바짝 긴장되었다. 처음으로 기획사 사장인 그 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에 약하고 눈물 많은 온유한 성격의 소유자 인줄 알고 있었는 데 이런 엄청난 현실 앞에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의연한 행동에 불안했던 내 마음이 안정 을 되 찿았다. 눈부신 햇살에 반짝거리는 편지봉투는 아직 그 속에 있는 내용물을 개봉하기 전이다. 군데군데 손때가 묻어 얼룩이 져 있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부분은 아침햇살에 반짝거리는 유빙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불안이 가슴가득 번지면서 나는 숨도 쉬지 않고 김만우의 행동만을 예의주시했다. 마침내 편지봉투가 개봉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는 차가운 금속이 부딪히는 것처럼, 때로는 넓적한 수국모양을 한 채 파도위에 엷게 떠 있는 유빙이 녹는 소리처럼 다양하게 들린다. 파르스름한 바다에 서서히 드러나는 등대 불 처럼 편지 봉투가 개봉되었다. 팬티만 입고 목욕가운을 걸친 유리가 내 목을 껴안고 뜨겁게 키스하는 장면, 둘이 침대에 나란히 누워 중요한 부분만 침대 시트로 살짝 가린 채 서로가 서 로를 집요하게 애무하는 장면, 등등, 거의 포르노 수준에 버금가는 사진들로 편지봉투가 찢어 져 나갈 정도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파르스름한 바다에 서서히 드러나는 등대 불처럼 보이는 사진들이 너무도 두려워서 내 자신이 마치 큰 죄를 저지른 흉악한 살인범처럼 느껴졌다. 공포 에 질려버린 김만우는 너무나 뜻밖의 큰 사건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넋이 나간 듯 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맞아 죽어도 좋으니까 그에게 매달려서 용서라도 빌고 싶은 심정 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도 일단 물이 엎질러진 상태에서는 그 물을 도 로 주워 담을 순 없다. 충격을 받은 김만우의 몸이 좌우로 흔들린다 싶더니 마침내 격분을 참 지 못해 손바닥으로 내 뺨을 인정사정없이 때렸다. ‘세상에 모든 가수들이 다 그런 비도덕적

- 166 -

인 행위를 한다고 해도 너 만은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너 놈 역시 보통남자들처럼 그저 그렇 고 그런 놈이었구나.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 당장 내 앞에서 꺼지거라 이놈아.’ 김만우 는 내 얼굴에 소주를 끼얹으며 그것도 부족해 침까지 뱉으며 자기분에 못 이겨 대발 노발했 다. 나는 그게 아니라고,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울며불며 하소연했지만 그는 내 말을 들 은 척도 하지 않고 내 목을 축구공처럼 자근자근 짓눌렀다. 얼마나 아픈지 울음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뼈가 으깨어지는 아픔을 참아가면서도 그의 화풀이 상대가 되 주었다. 발로는 분이 안 풀린다고 생각했는지 느닷없이 내 면상을 향해 주 먹을 날렸다. 예상치 못한 그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은 나의 코에서 시뻘건 피가 흘렀다. 김만 우는 주춤하는 나에게 저돌적으로 다가가 연거푸 주먹을 날렸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방어차 원에서 날아오는 그의 주먹을 손으로 막았다, 나의 얼굴을 금세 피범벅이 되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를 본 그는 그 제서야 가격한 자신의 행 동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정쩡하게 멈추어 서서

잔뜩 긴장한 얼굴에는 슬픔과 분노의 빛이 역력했다. 그때 갑자기 내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복 날 개패 듯 두들겨 맞아 쓰러지기 일 보직전이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하여 피 묻은 손으로 휴대전화를 받았다. 김만우는 소 독약과 피를 멎게 하는데 가장 탁월한 효과가 있는 연고를 가져왔다. 휴대 전화에서 무척 낯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통화상태가 좋지 않아 음성 변조한 목소리처럼 칙칙했다. “김향기씨 제가 보낸 선물 잘 받아 보았습니까.” 나를 조롱하는

목소리에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이가 덜덜 떨리며 머리끝이 곤두섰다. 나는

전화기에 입을 바짝 대고 고함을 질렀다. “당신

누구야,

나에게

무슨

원한관계가

있다고

짐승만도

못한

행동으로

나를

욕

보이는 거야?”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먼저 나를 물 먹인 사람이 누구인데 그 말을 하는 거야, 당 신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뻔뻔하군.” 전화 속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와 초인종 소리와 함께 자장면 배달 왔다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 혹시 강길호 아니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데 지글지글 잡음이 나면서 실 끊어진 연처럼 전화가 툭 끊겼다. 때

- 167 -

마침 괘종시계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재 발신 버튼을 눌렀다. “이제야 나를 알아보다니 조금 섭섭한데.” 틀림없는 그의 목소리였다. 장모님과 아내가 보는 면전 앞에서 보기 좋게 당한 그가 기필코 오늘 이 수모를 조망 간에 되돌려 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그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 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강길호가 거들먹거리면서 말했다. “그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다면 과연 어떤 일이 발생할까?” 나는 온 몸의 열기가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인기절정을 달리는 걸그룹 걸스걸스의 가수생명은 하루아침에 끝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김만우가 삼십년간 공들 인 기획사 를 문 닫는 일은 불 보듯 뻔 한 일이다. 나는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어떻게든 그 일만은 막아야 할 것 같아 전화기를 붙잡고 통사정을 했다.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그것만은 말아주세요.”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불쑥 튀어 나왔다. “위풍당당했던 기백은 다 어디로 갔나?” 대답하는 목소리조차 비꼬는 듯한 말투다. 끊어 오르는 분노에 두 다리가 심하게 비틀거렸 다. 조심조심 옆을 돌아보았다. 김만우의 옆얼굴은 장마철의 흐린 하늘처럼 어둡게 그늘져 있 었다. “이제 완전히 꼬리를 내린 건가 내 처분만을 기다리게.” “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그것만은.” “그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다니까 똥줄이 탄 모양이지?” 조롱하듯 비꼬는 소리가 내 귀를 무섭게 파고 들었다. 나는 감정을 억누르듯 초조한 목소리 로 말했다. “우리 전화상으로 말할게 아니라 일단 만나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얘기합시다.” 백기라도 흔드는 심정에 목소리 도 작아졌다. 고양이 가 바로 현관문 근처에 몇 번을 울었다. 강길호는 터져 나오는 기쁨을 참느라 킥킥거리면서 비웃듯이 말했다. “윤숙씨가

보는

앞에서

나를

크게

욕보였던

그

식당에서

만나지,

돌아오는

요번

토요일 오후1시 알았지?” 그렇게 말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흠칫 숨을 들이 키고 시선을 돌리자 눈물에 젖은 눈망울로 무엇을 간절히 애원하듯이 나를 쳐다보는 김만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일로

사장님과

기획사,

특히

유리에게

- 168 -

피해가는

일이

손톱만큼도

없도록

제 선에서 깔끔하게 매듭 짖겠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짐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가 ‘미안해요’ ‘염려하지마세요’ 라는 말 을 남기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나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심각한 절망감에 빠졌다. 이번일로 유리에게 피해가는 일은 손톱만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만약 이 불미스 런 사태로 유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면 나는 그를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하기로 마 음먹었다. 어디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ㄱ’ 자로 꺾어진 골목을 완전히 벗어나자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가로 등 앞으로 다가서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고 막을 파고들었다. 환호성과 함께 광분해서 떠드는 소리는 다세대 주택옥상에서 술판을 벌인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배꼽을 잡고 껄껄 소리 나게 웃는 목소리는 마치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조롱하고 비 웃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내가 쳐다보자 ‘뭘 쳐다보느냐’ 며 째려보았다. 지금

당장 옥상으로 올라가 그들을 때리고 싶은 마음이 불길처럼 타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내가 증 오하고 미워하며 때려 눕혀 자근자근 짓 밟아줄 대상은 다세대 주택 옥상에서 술을 마시고 있 는 사람들이 아니라 강길호 라는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잠시 그 자리 에서 멈추어 서서 전화상으로 나를 비웃고 조롱했던 강길호의 얼굴이 가로등처럼 보여 처연하 게 빛나는 불빛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하면 가장 잔인하게 복수할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김향기

선생님이지요?

20분후에

도착한다고

강

이사님께서

연락

주셨어요.

여기

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종업원이 나를 식당 귀빈석으로 안내했다. 층의 일부를 고급 원목으 로 고풍스럽게 꾸며 놓은 곳으로 15평정도의 아담한 공간에는 일본식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귀엽게 생긴 여종업원은 내 앞에 물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강 이사님께서 곧 오실 거예요.” 나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 귀여 우면서도 얼굴이 곱상하게 생긴 나 비넥타이를 맨 여종업원은 나가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고풍 스럽게 장식된 방안을 둘러보았다.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유화 ‘나나’의 그림에 내 시선이 멎었다. 속이 들여다 보일

- 169 -

만큼 하얀 피부, 가느다란 팔 다리, 육감적인 쇄골, 등 시원한 파도를 닮은 푸른색상의 칼라로 여성다운 관능미를 표현했다. 색조가 절제된

메이크업에 입술만으로 청순함을 준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소매 사이로 비집고 나온 겨드랑이 살, 팔뚝과 겨드랑이 살에 자신 이 없는 그녀는 소매가 좀 더 바깥쪽으로 커팅 된 스웨터를 입었다면 글래머러스한 S자 몸매 가 한결 더 돋보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데도 그림을 대하는 순간 터져 나오는 감동을 참을 수 없었고 손끝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림속의 모델인 ‘나나’는 프랑스 작가 에밀졸라의 소설 ‘나나’의 주인공이 다, 파리 뒷골목의 창녀 출신인 여배우 나나는 숙성되지 않는 풋사과 같은 어설픈 연기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미모와 교태로 자신의 단점을 훌륭히 커버하며 프랑스 최고의 여배우로 남성 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남성들에게 처절하게 유린당했던 파리 뒷골목 창녀시절 때에 아 픈 기억을 떠올리며 사회지도층에 있는 귀족 남성들을 유혹해 차례로 파멸시킨다. 그녀의 무 분별한 애정행각은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회지도층의 타락을 질타하는 한 단면도 포함되어 있 었다. 끝없는 욕망으로 신분상승을 추구하던 나나는 결국 천연두에 걸려 비극적 운명을 맞게 된다. 그림 속에 그녀는 지독한 고통과 좌절, 시련과 절명에 휩싸여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당 당하게 빛난다. 남자를 유혹 하기에 앞서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녀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게 울렸다, ‘하 루 중 해가 가장 아름다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바로 황혼이 깃 들 때예요. 강렬한 햇살대신 부드러운 빛으로 온 세상을 감싸고 강렬한 햇살 대신 부드러운 빛으로 온 세상을 감싸고 덮을 것은 덜어주며 다가올 휴식을 기다리는 시간,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길지도 않은 인생, 지금 내 모습이 가장 아름다울 때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나는 양복 안주머니 에서 손수건을 꺼내 머리와 어깨에 묻어있는 빗방울을 닦았다. 아침부터 예보에도 없던 음울 한 비가 시간당 50m 이상 내렸는데 식당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흰 손수건은 금방 물에 젖은 것처럼 축축해졌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 미안하네. 잠수교 차량 운행이 통제되는 바람에 좀 늦었 어.” 그럴듯한 변명을 늘여놓으며 강길호가 나타났다. 나는 예의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에 게 앉으라고 손 짖을 하고 자신도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짙은 팔자 눈썹에 여자들이 한 눈 에 반할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사회의 중추에 있다는 자부심 때문에 목소리는 늘 힘이 넘쳤고 박력이 있었지만 거무칙칙한 얼굴색이나 가슴이 섬 짓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매에서는

- 170 -

교활한 성격을 엿 볼 수

있었다. 무스를 이용해 8:2로 단정하게 가르마를 탄 머리는 염색을

하지 않아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나 있고 양복 옷깃에는 새하얀 비듬이 한두 개 떨어져 있 었다. 어쩌면 혼자 사는 홀 애비의 구질구질한 모습으로 나온 것은 장모님과의 재혼을 은근히 원하는 무언의 암시처럼 느껴져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원수 같은 나에게 긴히 의논 할 일이라니 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통 감이 오 지 않아. 결론적으로 긴히 의논할일부터 말해보게.” 역시 그는 생각보다 비열한 인간이었다. 남의 약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그 약점을 교묘 히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표정이 얼굴에 그 대로 드러나 있었다. 똑똑 문 을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여종업원이 음식이 차려진 쟁반을 들고 왔다. 심심한 굴을 넣고 버 무린 보쌈김치와, 제주산 흑돼지 편육을 굵직굵직하게 썰어 커다란 접시에 담은 보쌈, 김치말 이 국수, 알싸한 동치미 국물, 바다가재, 쇠고기 안심 등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음식에 절로 시장기가 느껴졌다.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여종업원은 테이블위에 음식을 가지런히 정돈했다. 음식을 나르는 손끝하나하나에서 예의범절이 철철 묻어났다. 방금 튀긴 나초 칩과 그릴의 깊은 향이 매력적인 와인을 식탁에 올림으로서 모든 것이 마무리 되었다. 그녀는 ‘맛있게 드시고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는 짤막한 인사말과 함께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강

이사님께서

어떤

경로로 유리양과

내가

함께

투숙했던 논현동

카바나의

사진

을 손에 넣게 되었는지 묻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그런 유치한 방법을 써 가면서 까지 손에 넣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 자리에서 남자답게 확실히 말해 주십 시오.” 그 의 표정에 심한 변화가 일어났다. 드디어 바라던 말이 나온 것 같아 기뻐 어쩔 줄을 모르 면서도 마치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것처럼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위해

얼굴에 심한 경련이 일

어날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는 말을 꺼내기 전에 내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릴의 깊은 향이 매력적인 와인을 잔에 채워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그의 길쭉한 눈동자가 발트 3국의 하나인 ‘리투아니아 빌뉴스’ 사진에 멈추어 있다. 숲과 호수에 둘러싸인 트라이 카는 리투아니아 옛 수도다. 낭만적인 칼베 호수가 마을 운치를 더 한다. 호수 한 가 운데에 섬에는 동화 속에서나 볼 법한 트라카이 성이 있다. 고풍스러운 중세 건물의 상징인 빨간 삼각형 지붕위로 솟은 뾰족한 첨탑, 보석처럼 아름다운 섬이 호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 어 건축 예술이 지닌 감동을 넘어서 신비함까지 더 해주고 있다.

- 171 -

나폴레옹이 러시아 정벌 길에 이곳을 지나다 ‘손바닥에 얹어 파리를 가져가고 싶다’ 고 말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한동안 아름다운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는 감탄의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빨갛게 변화된 눈이 내 쪽으로 날아와 화살처럼 밝혔다. 그와 눈이 마주 치차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자네의 장모인 윤숙씨를 원한다 해도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나?” 예상대로 그의 입에서 장모님의 이름이 거론되자 눈앞이 캄캄했다. 사면초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장모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 것만으로도 그의 속셈은 만천하 에 드러났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한숨 만 쉬고 있는 나를 보고 그는 숨도 쉴 틈도 주지 않고 윽박질렀다. “왜,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건가.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이말 하는 것이 뭐 가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고.” 그는 혀까지 끌끌 차며 나를 조롱했다. 순간 나의 뇌리에서 날카로운 순발력이 번뜩 스치며 지나갔다.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도 막다른 순간에는 고양이를 물지 않는가. 더 이상 물러설 것도 물러 설자리도 없는 이곳이 내게는 막다른 순간이다. 꽁지를 보이고 달아난다면 고양이 에게 덥석 먹히고 마는 쥐의 신세처럼 그의 먹잇감으로 전략하게 될 것이다. 여기 까지 생각 이 미친 나는 마치 각본에 짜여진

것처럼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반 정도

남아있던 와인 병이 테이블에 엎질러지면서 아수라장이 되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한 번 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테이블에 있던 음식들은 산사태가 난 것처럼 바 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나는 테이블에 쓰러진 와인을 병째 들어 나발을 불자 온몸에 술기운이 감돌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를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물리적인 방법을 행세해서라도 또 다른 협박이나 요구사항 을 하지 못하도록 미리 사전에 차단해야 하는 책임도 있었다. 나는 증오로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진을 이용하여 황당무계한 요구사항을 제시하는 것은 도저히 묵고할 수 없는 일이 리라. 어떻게 하면 지금 직면한 문제를 올바르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은 그 놈의 숨통을 조이는 것 밖에는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섣불리 그가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들어준다면 그것을 미끼로 더 큰 것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현명한 선택 같았다. 일단은 어떻게든 죽이지 않을 만큼 정도까지 상황을 몰아가서 그에게 항복을 받

- 172 -

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한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먼저 우선시해야 할 일은 그가 나를 만 만하게 보지 못하도록 나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 시켜 주어야 한다. 그때 머릿속에서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물리적인 방법은 한순간의 위기는 극복할 수 있겠 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역으로 이용당할 수가 있다. 물리적인 방법은 결코 그를 굴복시키지 못 한다. 만 가지 생각들이 부글부글 끊어 올랐다. 그는 이 세상에서 없는 편이 나은 인간이다. 자신의 권력과 부를 이용하여 수많은 여자들의 눈에 피눈물을 쏟게 했으며 사람들에게 해만 끼치는 기생충 같은 인간이 국영기업의 간부라니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 아닌가. 그런 놈들 이 중요한 요직에 앉아 있으니 부정부패와 뇌물수수, 공금 횡령, 등으로 우리나라가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지 않는가 물리적인 압력을 가해서라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을 때 최종적인 방 법으로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오만방자한 그의 행동은 내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한순간의 분을 참지 못해 물 의를 일으킨 내 행동에 대해 백배사죄했다. 강길호는 뺨이라도 한 대 칠 듯이 오른손을 들었 다. 그의 발치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이 닳도록 비는 내 행동에 들었던 오른손을 내려놓았다. 눈에 쌍심지를 켠 그는 내 인격을 무시하는 거친 욕설들을 퍼 부으며 분풀이를 하였다. 오른 손 엄지손가락으로 눈을 찌를 듯 삿대질을 하며 쌍시옷 자가 들어가는 막 말을 거침없이 퍼 부었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며 끊어 오르는 분을 삭였다. 내 머릿속에는 컴퓨터 그래픽처럼 앞으로의 진행상황이 일목요연하게 그러져 있기 때문에 한순간의 수모쯤은 충분히 참을 수 있 었다. 그의 거친 욕설과 훈계에 나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가 내 계획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그는 전혀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마치 짐승이나 자신의 몸종 다루듯이 인격적인 모 욕감을 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또, 한번 상을 엎어 보지 이 범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같은 놈아. 그 만한 배짱도 없는 놈이 감히 누구 앞에 추잡한 꼴을 떠는 게야. 왜, 한 번 더 엎어 보라니 까,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못 할 거 같으면 알코올 기운을 빌려서라도 하든지.” 그는 술병을 통째로 내 앞에다 갖다 놓았다. 그리고는 눈짓으로 마시라는 사인을 보냈다. 나 는 주눅들 것 같은 마음을 다독거리기 위해 그가 보는 앞에서 병째로 들고 나발을 불었다. 독 한 술기운이 식도를 타고 흘려 온 몸이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찌릇 찌릇했다. 500밀리미터나 되는 양의 와인을 한 방울도 안남 게 마셔버렸다. 그런 다음에 빈 술병을 테이블위에 공손히 놓았다. 그는 술기운을 빌려 다시 한 번 개망나니 짓을 해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참을 수

- 173 -

없는 분노에 이가 덜덜 떨리며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당장이라도 그의 머리 통을 한 대 내리칠 듯이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 어떻게든 철저하게 망가져 그의 눈을 속여야 한다. 나는 식은땀이 밴 손으로 다시 술병을 부 여잡았다. “술기운이 아직 부족한가보지. 한 병 더 줄 테니 마셔. 그리고 방금 전에 했던 것 처럼 술상을 확 엎는 거야 알았지 이 새끼야.” 이쯤하면 끊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미친 듯이 달려들어 술상을 엎지 않을까 하는 예측 과 반대로 고양이 앞의 쥐새끼처럼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내 모습에 강길호의 얼굴에는 희미 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좋아, 이정도로 해주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하겠어. 내 요구사항을 들어 줄 거 야 말거야?” “예, 예 강 이사님의 말에 따르기로 하겠습니다.”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나는 오래 기다리는 것은 딱 질색이야 쇳불도 단김에 빼라고 했는데 언제 날을 받는 게 좋겠어?” “강 이사님 편할 대로 하십시오.” 내가 말 잘 듣는 애완견처럼 고분고분하자 그는 더욱더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이제 나는 안 중에도 없다는 듯이 일사천리로 모든 것을 자기의 뜻대로 마무리 지으려했다. “지금이 8월 중순이니까 한 달 뒤인 9월 중순이 좋겠구만.” “예, 그렇게 알고 장모님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겠습니다.” “그전에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어 네놈도 기억하겠지만, 불과 몇 개월 전에 이

자리에서

윤숙씨와,

딸이

보는

앞에서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모욕을

주고,

상처를 준 일 기억하겠지?” “네, 기억하고말고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윤숙씨가 나를 얼마나 나쁜 놈으로 보겠어. 실추된 내 명예를 회복해야

되지

않겠어.

일주일

뒤에

윤숙씨와

자네의

집사람을

이곳으로

데리고

나와 그때 자네가 나에게 했던 말은 나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나와 윤숙 씨

사이를

이간질시키려고 지어낸

거짓말이었다고

밝히면서

나에게 무릎

끓고

사

과하는 거야 할 수 있지?” 그는 거칠게 소리쳤다.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렸다. 내가 쳐놓은 덧에 그가 보기 좋게

- 174 -

걸려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강길호는 당장 웃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는 지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셨다. 나는 술을 마시는 척 하면서 테이블 밑에 있는 빈 그릇에 술을 버렸다. 술에 완전히 녹초가 된 그는 자신의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 그렇다면 일이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각본에도 없는 단계까 지 머리에 계산했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다가 일부러 발을 걸어 자기실수로 미끄러진 것처럼 하여 계단 밑으로 떨어뜨려 추락사 시키는 것이다. CCTV가 설치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사람들이 서로의 어깨를 부축하고 계단을 오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눈속임 은 충분히 가능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진이다. 만약 죽은 그의 사체에서 그 문제의 사진이 경찰의 손에 들어간다면 그의 죽음이 단순한 사 고에 의한 우발적인 죽음이 아닌 미리 사전에 계획된 살인 이라는 것이 들통 날 수 있기 때문 이다. 범인은 당연히 사진 속 에 등장하는 나와 유리가 되는 것이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그를 제거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진의 행방부터 찾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 그를 부축하여 식당에서 나온 나는 사람들의 인적이 없는 외진 곳까지 그를 데려왔다. 사진을 찾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의 양복 안주머니를 뒤졌다. 투박하고 미끈한 사진의 감촉이 손끝에서 전해졌다. 그가 장모님에 관한 일을 확실히 매듭 짓기 위해 증거물인 사진을 가지고 나온 것을 알았다. 의외로 쉽게 사진과 필름까지 손에 넣었다. 술에 완전히

곯아떨어진 그는 시장 바닥이 자기

집 안방처럼 착각하고 큰대자로 뻗었다. 그때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수런대는 목소리가 들 렸다. 경동시장 입구 쪽으로 들어 설 때부터 우리 뒤를 바짝 뒤 따라 오던 건장한 체구를 가 진 남자들이다. 밤중의 취객들만을 노리는 전문 퍽치기 범 들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시 계를 보았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대였다.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아래 정확히 다섯 명의 남자들이 먹잇감을 노리고 달려오는 하이에나 무리들처럼 우리와의 간격을 서서히 좁혀왔다. 청색 천막으로 봉해져있는 건어물 평상위에서 도둑고양이 세 마리가 버려진 생선을 야금야금 먹고 있을 뿐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위기감을 느끼고 도망갈 장소 를 물색했다. 사방이 가로막혀 있는 막다른길이란 것을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고양이가 무심한 눈빛으로 내 쪽을 보고는 ‘야옹’ 하고 울었다.

- 175 -

“이건 꿈이야 불길한 꿈을 꾼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도주로가 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 았다. 후줄그레한 평상너머에서 성바오로 병원과 성매매업소가 줄지어 자리한 청량리 588번지 의 불빛이 나에게 손짓하듯 흔들리고 형형색색 빛나는 네온사인의 불빛만이 도심의 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쓰레기와 버려진 채소더미에서 피어오르는 시크름한 냄새가 나는 이곳은 저 불빛너머의 그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나는 바짝 코앞까지 다가온 사람들을 노려보았 다. 나는 반사적으로 평상 옆에 세워져있는 길이 1미터 정도 되는 나무 막대를 거머쥐었다. “빨리 일을 끝내고 떠나자.” 움직이는 무리 중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들짐승의 다급한 포효처럼 들려왔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를 휘둘렀다. 나의 완강한 저항에 두려움을 느꼈는지 그들은 쉽게 접근하지 못했 다. 시장 한쪽구석에 큰대자로 뻗어 있던 강길호는 양복 안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도단 당하지 않으려고 그들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었다. 의외에 상황 앞에 당황한 것 은 그들이었다. 술에 취해 몸도 가누지 못 할 것으로 알고 쉽게 접근 전을 시도했던 퍽치기 범들은 지갑만 살짝 빼내어 줄행랑을 치려고 했던 계획을 바꾸었는지 품에서 일본도 칼을 빼 내들었다. 이 순간까지도 마지막 남아있는 양심 때문에 살인만큼은 하고 싶지 않아 고민하던 그 중 한 명이 악을 쓰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강길호의 가슴에다 비수를 내리꽂았다. 순식간에 일 어난 일에 나는 너무나 놀라 ‘거기 누구 없어요? 사람 살려요’ 하며 소리쳤다. 우범지역을 순 찰하던 경찰차가 이상한 낌새를 직감했는지 사이렌 소리를 내며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어서 튀어.” 또 한 번의 목소리가 승냥이의 울부짓는 표호처럼 들렸다. “형, 칼을 맞은 취객이 내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아.” “야, 등신아 그 술 취한 놈 하나 해결하지 못해 이 난리야.” 이런 상태에서 시간을 끈다면 순찰을 도는 경찰들에게 검거 될 것으로 판단한 그들은 일촉즉 발의 위기상황을 단 한 번에 매듭짓기 위해 강길호를 향해 다가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예리 한 일본도를 심장에다 수차례 박았다. ‘악’ 하는 외마디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TV나 영 화에서만 보아왔던 살인사건이 지금 바로 내 앞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칼이 심장을 관통하는 소리가 내 있는 곳까지 전해졌다. 피 맛을 본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칼을 빼내고 각도 를 바꿔 다시 찔렀다. 강길호는 ‘악’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푸르르 떨 고는 시장바닥

- 176 -

에 그대로 쓰러졌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들은 내 쪽을 향해 비호같이 달려 들었다. 그들 이 쏜살같이 이동하는 바람에 그들과 나는 일직선이 되어 버렸다. 뒤로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는 것을 깨닫자 나는 방어차원에서 막대기 를 휘두르며 최후의 발악을 했다. 막대를 휘두르다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진 그 찰나를 이용 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스피드로 다가와 내 심장을 향해 칼을 내리꽂았다. 나는 살기위 해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 칼끝을 피했으나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칼끝은 심장을 벗어나 내 오른쪽 어깨에 깊숙이 박혔다. 피가 쏟아져 나오는 내 어깨를 내려다보고는 ‘사람 살려요’ 하고 소리쳤다. 그때였다. ‘잡새다 튀어’ 하는 소리와 함께 경찰순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혼비백산한 그들은 순식간에 경찰들의 포위망을 뚫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정신을 잃 고 바닥에 쓰러졌다. 피에 젖어 어깨와 등에 딱 달라붙은 살의 감촉이 어렴풋이 느껴질 뿐이 었다.

전치 6주의 진단을 받은 나는 한 달 보름동안 병원의 치료를 받고 퇴원을 했다. 어깨의 통증 은 완전히 낮지 않았지만 일상적인 생활은 하는 데는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 동안 병 원치료 때문에 미뤄왔던 목격자 증언을 하기위해 동대문 경찰서 강력 형사계를 찾았다. 시간 은 벌써 11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국영기업 이사 강길호의 살인사건인 만큼 매스컴이 지대 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경찰서의 철제 책상 앞에 앉아있는 지금의 상황은 교무실로 호출을 받았을 때 보다 더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학생의 신분을 어겨 선생의 꾸지람을 받는 문제 학생이 아니라 살인사건의 목격자 자격으로 이 자리에 선 것이다, 그것도 보통 참고인이 아니라 이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범인들에 관한 인상착의에 관한 것들이기 때문에 모든 형사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현장

조사에

나갔다가

차가

막히는

바람

에 좀 늦었습니다.” 약속시간이 20분이나 지난 다음에야 이 사건을 맡은 담당형사가 들어왔다. 그의 양손에는 금 방 자판기에서 뽑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들려 있었다. 20분이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함 을 표현한 커피였다. 일단 고맙다는 말을 하고 받아 들긴 했지만 형사가 주는 커피라 그런지

- 177 -

왠지 입에 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일부로 나를 위해 가져온 성의를 봐서 나는 눈 딱 감고 들이켰다. “아직도 몸도 성치 않는데 이렇게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빠른 시간 내에 보내드릴 테니까 묻는 말에만 성의 있게 답변을 해주시면 됩니다. 여기에 오면 의 례적 으로 하는 것이 신상명세에 관한 것이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생년월일, 나 이, 주소, 가족관계, 직업을 말씀해 주십시오.” 인상이 사납게 생긴 50대 초반으로 되어 보이는 형사반장은 마치 나를 범인처럼 대했다. 불쾌 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가 묻는 대로 인적사항을 거침없이 말해주었다.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을 능숙한 손놀림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들겼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

강길호씨와

김

선생님이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고

왜 곧장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지 않고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우범지역인

했는데 경

동시장에 간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형사 반장은 금테 안경너머로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내 얼굴 표정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 다. 분명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 죽은 강길호와 나의 석연찮은 동행에 대해 무슨 낌새를 느끼 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가 던진 물음에 일순간 당황했지만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바 짝 차려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환하게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반장님께서 로

그렇게

살해하기위해

묻는 미리

저의가 사전에

무엇인지 계획한대로

알고

싶군요.

우범지역으로

내가

강길호를

데려갔고,

그리고

의도적으 돈으로

미리 매수한 범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강길호가 술에 떡이 되어 길바닥에 쓰 러져 있으니 해치우라 그리고 범인 공모를 의심받지 않기 위해 일부로 어깨에 칼 까지 맞아 형사들의 의심을 피하는 용의주도함까지 보였다. 그렇게 생각 하는 게 아닙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에 뱅뱅 맴돌았지만 나는 그 말을 절대 입 밖으로 내 뱉지 않았다, 자칫하 다간 형사들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반장님도 남자가 아닙니까. 남자들이 술이 거하게 취하면 제일먼저 하고 싶은 욕 구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그야 물론 거시기 생각 아니겠습니까.” 반장과 옆에 있던 형사들의 얼굴에는 옅은 웃음기가 떠다녔다. 그제 서야 내 말에 수긍이 간 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178 -

“그때

주위

사람들의 진술은

범인들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검은

복면을 쓰고

있

어서 얼굴을 식별할 수가 없었다고 했는데 사실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에

강길호를

칼을 맞았는데

범인의

얼굴을

살해한

범인이

그 상황에서는

보지

못했습니까?

선생님도 범인의 만약

죽이려고

했다가

얼굴과 마주하고

선생님께서

그

실패하여

어깨쪽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범인의

얼굴을

기억해낸다

면 오리무중에 빠져있던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형사 반장은 두 손으로 커피를 들고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나는 마음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여기서 섣불리 말을 잘못한다면 범인으로 의심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워낙 경황중이라서 범인의 얼굴을 제대로 식별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범인이 눈만 가

내놓고 되어서

얼굴전체를 주변이

복면으로

칠흑같이

가리고

어둡기

있었기

때문에

때문에,

범인의

그리고

얼굴을

시간이

식별한다는

새벽1시 것은

불

가능 하지요. 단지 기억에 남는 인상착의가 있다면 범인들이 입고 있는 바지는 편 의점 알바 생들이 입고 있던 바지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것이 단서가 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왕 여기까지 말이 나온 김에 숨겨서 무엇 하겠습니까? 죽 은 피해자와 나를 찌른 그 범인의 눈은 정상적인 사람의 눈이 아니었어요.” 주위의 형사들은 모두 내게로 우르르 몰려왔다. 형사반장은 주머니에서 꺼내려던 담배를 도 로 집어넣고는 눈을 크게 지켜 떴다. 미궁 속을 헤매던 사건이 비로소 수면위로 떠올랐다는 기쁨에 손바닥이 불이 나도록 비벼댔다. 옆에 있던 형사가 궁금증을 참지 못해 먼저 선수를 쳐서 물어 보았다.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면 짐승의 눈이나 인조 눈이었습니까?” “개 눈이었습니다.” “개 눈이라고요?” 피곤을 풀려는 듯이 두 손을 목뒤로 돌리고 있던 30대중반의 형사가 놀라서 소리쳤다, 그 바 람에 갑자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솟구치는지 담당형사는 손수건으로 이마와 얼굴에 개기름처 럼 번진 땀을 닦았다. “김 선생님 혹시 이 칼은 본적이 있습니까?” 그는 책상서랍에서 투명한 비닐 주머니에 들어있는 일본 단검을 꺼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범인 중 한 명이 강길호를 찔러죽이고 자신까지 죽이려고 했

- 179 -

던 칼이었다.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반장은 나에게 별다른 협의 점을 찾지 못 했는지 협조에 응해 주어서 고맙다 며 나를 친절히 바깥까지 배웅해 주었다.

- 180 -

평화 통일 콘서트

- 181 -

4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 서로 다른 생각과 시각을 갖고 있는 남, 북한이 최초로 하나 되는 화합의 장인 콘 서트를 가수로서는 세계 최초로 군사분계선 DMZ에서 그 화려한 막을 열었다.

- 182 -

4

2년이란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강길호의 사건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함께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성매매 업소가 즐비한 청량리 588집장 촌에 가려다 변고를 당했 다는 사실을 주목하면서 언론과 매스컴은 도덕적인 면을 문제 삼아 나를 흠집 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결국 나는 2년 전 12월 중순 눈보라가 몰아치던 어느 날 오후 김만우의 기 획사를 떠났다. 그리고 한국가수협회에서도 제명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세력들이 내가 더 이상 가요계 음악과 관련된 모든 조직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도록 완전히 박탈해 버렸다. 그래서 나는 2년 동안 음악다방 뮤지션에만 처박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그래도 가혹한 운명은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세상 편만은 들지 않았다. 나를 꼭 빼닮은 귀여운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고 여동생 혜란 이가 교대를 졸업하고 수백 대 일 이라는 치열한 경쟁률 을 뚫고 교육부 산하 ‘영재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영재 교사가 되어 우리가족 뿐만 아니라 동 네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두 달에 한번 꼴로 강일중 사장과 기획사 사장인 김만우를 만나 우 리나라 가요계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도 하였다. 김만우 사장은 제임스 브라운 에게 부탁하여 미국 음악계 쪽으로 발을 한번 넓혀 보라고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나는 그때마 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제 풀에 지친 김만우 사장은 미국 진출에 대한 말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음악이 없는 내 삶에도 나름대로 행복은 있었다. 두 살 된 쌍둥이 아들과 집에서 온종일 뒹굴고 놀면 그날

- 183 -

하루가 어떻게 지나 간지도 몰랐다. 어떤 날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귀여운 아이를 품에 안고 마당으로 나와 짙은 보라색으로 물든 밤하늘을 집게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얗게 반짝이는 것 은 달, 노랗게 빛나는 것은 별, 달

옆에 있는 검은 것은 구름하고 말을 하면 내 말을 알아

듣는 지 토끼 같이 귀엽게 생긴 아들은 까르르 하며 웃었다. 웃는 그 모습이 어쩜 그렇게 귀 여워 보일수가 없었다. 내 귀여운 쌍둥이 아이는 나를 닮아 그런지 감수성이 풍부했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 온몸으로 파고드는 교회종소리, 북쪽의 검은 바다처럼 검은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하얀 점처 럼 점점이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새, 선명한 보라색 하늘에 유리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북두 칠성 그 어느 것 하나도 그냥 무심히 넘기는 일이 없었다. 만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 은 가녀린 집게손가락으로 그 대상을 가리키며 ‘아바 버버버’ 하며 말하는 모습은 꼭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향수야, 향민아 이제 아빠하고 그만 놀고 자야지.” 아내 윤희는 방 한가운데에 앉아 산더미 같은 두 아들의 빨래를 정리하면서 잠을 자라는 시늉 을 하면 두 아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만 껌벅껌벅 한다. 갈색으로 물들여 놓은 것 같은 머리는 침대 위를 뒹 굴며 생긴 흔적으로 한쪽 머리끝이 땅이 꺼진 것처럼 움푹 들어갔다. 동 생 향수는 엄마의 무릎에서 어리광을 피우다 절반을 감긴 눈으로 머리맡에 있는 곰 인형을 보 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러닝셔츠에 헐렁한 추리닝 바지차림으로 앉은뱅이 상에 놓여있는 소주 에 간 고등어를 안주삼아 하루가 끝나가는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고 있었다. 잠을 자라는 엄마 의 말에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만 껌벅껌벅 거리고 있던 향민 이는 어느 틈엔가 내 옆으로 쪼르르 기어와서 간 고등어를 달라고 맘마 맘마하며 보채고 있다. “당신 자정이 넘었는데 자지 않고 뭐 하고 있어?” 아내의 졸음 섞인 목소리에 망중한을 즐기려던 생각이 달아나 버렸다. 돌아보니 헝클어진 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살짝 윙크하듯 반쯤 감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늦은 시 간까지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내셔널 지오 그래픽 채널에서 예수의 잃어버린 일화를 집중 조명하는 ‘다빈치코드’를 시청하고 있는 중 이다. 아내 윤희는 술 생각이 났는지 냉장고 안에 서 650밀리미터 병맥주 두 병을 꺼내왔다. 병따개로 뚜껑을 따자 ‘펑’ 하는 소리가 울렸다. 맥 주병에서 흘러내린 거품이 쟁반으로 하얗게 흘러 내렸다. “자기야 우리 엄마가 향수 향민이 무척 보고 싶어 해. 내일 시간되면 엄마 모시고 경기도 덕소에 있는 별장한번 갔으면 하는데 자기 생각은 어때?”

- 184 -

별장이라는 말에 잠이 확 달아났다. 지금까지 아내와 살면서 별장에 관한 말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나를

낳기

아버님의 전

고향이

덕소에

경기도

사셨어,

남양주시

말이

별장이지

하도읍 촌집을

덕소야, 약간

어머님과

결혼하여

리모델링한

것뿐이야.

덕소에서 중고등학교 음악선생님 이셨던 아버님께서 사셨던 집이야.” 장인어른께서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좀 더 빛나는 인생을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내 가슴 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향수가 내 볼을 꼬집는 바람에 비 로소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 아침은 화창한 봄 날씨이다. 게다가 3월 들어서 부터는 도 로에 쌓여있던 눈도 조금씩 녹으면서 이제 완연한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물러 날 것 같지 않 던 끈질겼던 겨울도 정해진 계절의 법칙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아무튼 봄에는 온 사방이 꽃으로 아름답다. 꽃으로 뒤덮인 산과 들판은 오색물감으로 칠해 놓은 것 같고, 하늘도 파란색이 아니라 갖가지의 색으로 뒤덮인 것 같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주차장은 바람에 휘날려 떨어진 동백꽃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차가 몇 번이나 오간 자리는 타이어에 묻어있던 흙탕과 진흙이 주차장까지 흘러들어 황토 흙 범벅이다. 봄철에 접어들면 도로에 쌓인 눈이 녹으면서 온 동네가 장마철처럼 흙탕물 로 더러워진다. 이런 시기에는 봄이 아름답다는 말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겨울보다는 해 가 길어져 아직 어둠이 채 물러가지 않는 시간인데도 주위는 희뿌옇게 밝아왔다. 바지에 흙탕 물이 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산처럼 높게 치솟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은행과 농협, 상가가 한곳에 모여 있는 시가지를 지나 장모님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인 후암 역에 도착했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계시던 장모님은 나와 윤희를 거들떠보지 않 고 향수와 향민 이를 품에 안고 볼과 이마에 입 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유별난 장모님의 애정표현에 두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캥거루 새끼처럼 장모님 품에 좍 달라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차는 서울을 벗어나 아늑한 산 사이에 낀 좁은 평야, 한 발짝 벗어나 면 한 없이 이어진 산 밖에 없는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경기도 남양주시 하도읍 덕소면에 도착 했다. 봄방학 시즌이라서 그런지 고등학생

폭주족들이 요란한 오토바이 경적소리를 내며 몇

차례나 앞질러갔다. 서울에서 1시간 채 못 되는 곳이기 때문에 도심 생활에 찌든 사람들의 발 길이 1년 365일 동안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서울 근교에 있는 자연이 수려한 전원도시를 횡단 하는 폭주족들이 오토바이의 굉음을 울리며 통과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한 시골마을에 차를 세웠다.

- 185 -

번쩍 거리는 서울번호판을 단 에쿠스 승용차 세대가 서있었다. 우리 머리위로 참새 떼가 날 아갔다. 참새 떼 들은 이 마을에 아직도 무슨 미련이 남았다는 듯 천천히 날아갔다. 장모님의 품에 안겨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 향수와 향민은 처음 보는 참새의 모습이 너무나도 신기한 지 넋 놓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뻐하거나 놀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미있어하는 표정 도 아니었다. 장모님은 그런 향수와 향민이의 얼굴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 고는 소녀처럼 들뜬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모처럼 어려운 발걸음 했는데 한 며칠 푹 쉬어가도 되겠지?” “좀

어렵겠는 데요, 어머님.”

“가수 활동도 중단했잖아. 음악다방 며칠 쉰다고 손님이야 끊기겠어?”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음악다방이

제

유일한

낙이자

목구멍인데요.

더구나

토끼

같은 아들도 둘이나 생겼으니 허리띠를 졸라매고 그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해야지 요.” “가정생활은

나와

윤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들은

경제적인 부분은

신경

끊으세

요.” 별걱정도 다 한다는 듯이 장모님은 내말을 건성으로 흘러들었다. 지붕이 낮고 옆으로 긴 단 층 건물을 지나자 슬레이트 지붕에 초록색 페인트칠을 한 집들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주 변에는 벚꽃나무와 목련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지만 활짝 만개한 벚꽃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 운 미련으로 남았다. 얼마 쯤 가자 전망 좋은 산기슭에 그림 속에서 봄직한 아담한 집 한 채 가 나타났다. 전나무 숲 앞대지 200평에 지붕이 붉고 뾰족한 중세풍의 이층 양옥집이다. 장모 님은 핸드백에서 가느다란 줄 끝에 달려있는 열쇠로 문을 열었다. 사뭇 익숙한 손놀림으로 불 을 켰다. 천장에 반짝이는 크리스털 샹들리에 불빛이 금방이라도 은색 빛의 다발이 되어 쏟아질 것 같 았다. 마치 은색불꽃이 공중으로 스르르 올라가 잠깐 고였다 떨어지는 수증기처럼 이 아늑한 공간으로 내리비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정신이 혼미해졌다. 실내는 널찍한 거실과 주방이 있고 침실로 사용할 수 있는 다용도 실로 되어있는 단순한 구조지만 아담하고 오리엔탈 풍 분 위가가 물씬 나는 곳이다. 거기다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벽난로 옆에는 어젯밤 늦게까 지 술을 마시다 늦잠을 자 정리도 하지 않고 허둥지둥 뛰어나간 장인어른의 제취가 그대로 남 아있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요 귀여운 내 새끼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귀여워했을까?”

- 186 -

향수와 향민 이를 인형처럼 안고 있는 장모님의 눈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나 이내 냉 정을 되찾고는 환하게 웃었다. 저번에 들렸을 때는 모녀 단 둘 만이었는데 오늘은 사위와 귀 여운 손주들, 가족이 세 명이나 더 늘어나자 장모님은 무척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커다란 가죽소파에는 향수와 향민이가 어른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장모님은 귀여운 손주들의 선물이라며 요즘 한창 유행하는 분홍색 베이비 옷을 입혀 주었다. 열려져 있는 창문너머로 복 숭아 빛을 닮은 저녁놀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향수와 향민 이를 품에 안은 장모님이 2층으로 올라갔다. 윤희가 일기예보를 보기위해 TV를 켰다. 너무 낡고 오래되어 화면조차 나올 것 같지 않던 TV 에서는 저녁뉴스를 하고 있었다. 5공화국 때 청와대 경호 실장을 지낸 안현태의 유해가 5.18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립단지에 전격 안장하는데 국가 보훈 처가 주도적인 역할 을 한 것에 대해 시민단체가 반발하는 보도 내용이었다. 육사 17기 출신인 안씨는 전두환 군 부시절 청와대 경호 실장을 지낸 5공 인사로 5공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것이 밝혀지면서 1997년 징역 2년 6개월이 확정돼 복역한 바 있는 인물인데 국가 보훈처 의 어처구니없는 안 장 결장으로 국립묘지 설치의 진정한 의미도 훼손돼 버렸다면서 온갖 비리와 반역사적 만행을 저지른 죄인 들이 계속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사태를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시민사회 단체의 목소리를 이명박 정부는 목인 하고 있다는 보도내용에 장모님은 ‘죽일 놈들’ 하며 치 를 떨었다.

TV에나온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온 국민의 지탄 속에서도 주검 안장을 군사작전 하듯 해 내는 천박한 역사의식에 슬픔을 금할 수 없다’ 면서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 안간힘을 다하는 이명박 정부의 작태에 대해 1년 뒤에 있을 대선에서 반드시 그 책임을 물을 것‘ 이라고 목소 리를 높였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오순도순 지내는 화목한 시간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뉴스는 분위기를 흐리게 하는 것 같다며 장모님은 TV를 꺼버렸다. 토스터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식빵에 딸 기잼을 바르기 시작했다. 장모님의 발치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향수와 향민 이는 입맛을 다시 며 먹고 싶다고 보챘다. 윤희는 식탁 테이블에 턱을 괴고 그런 두 아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 다. 잼을 다 바른 식빵을 아기들이 먹기 좋게 칼로 잘게 썰어서 접시에 담고 먹으라고 밑으로 내려놓았다. 동생보다 성질이 급한 향민 이는 자기먼저 달라고 손을 앞으로 내민다. 작은 플 라스틱 숟가락으로 떠낸 식빵이 뚝뚝 떨어지자 딸기잼과 범벅이 되어있다. 향수와 향민이가 먹기 좋게 칼로 잘게 썰다보니 식빵이 잼과 혼합이 되어 이유식처럼 흐믈 흐믈 해졌다.

- 187 -

장모님은 그 위에다 잘게 썬 계란 후라이 와 우유까지 함께 첨가하여 세상에서 유일한 식빵 이유식을 만들어 냈다. 갑자기 향민이가 입을

벌리더니 ‘할머니 애는 이제 그만 태우시고 빨

리 주세요. 하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하얀 우윳빛과 딸기 빛으로 물든 식빵을 플라스틱 수저로 떠서 입에 넣어주자 향민 이는 참새처럼 잘도 받아먹는다. 장모님이 ‘맛있어 토끼야’ 하고 말 하자 향민은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다는 듯이 까르르 웃으며 더 달라고 입을 벌린다. 장모님 이 수저로 떠준 식빵을 오물오물 씹으면서 동생 향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엄마 품에 비스 듬히 안겨있던 향수가 ‘왜 나는 안 주느냐’ 며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하얀 우윳빛과 딸기 빛으로 물든 식빵이 담긴 접시를 향수 앞에 내려놓자 그 제서야 향수는 울음을 뚝 그쳤다. 접시에 입을 대고 쪽쪽 빠는 데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엽고 앙증맞을 수가 없었다. 배가 불렀던지 향수가 엄마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윤희는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쓰다 듬자 1분도 안되어 새록새록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향수와 향민이가 잠든 틈을 이용해 집에 서 준비해온 갈비찜과 쇠고기 등심으로 오랜만에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초봄이라도 밤에는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지는 심한 일교차 때문에 향수와 향민이가 감기가 들 수 있다며 장모님 은 벽난로를 피웠다. 싸늘했던 방안의 온도가 벽난로 때문에 훈훈해졌다. 창문 너머로 약하게 흩날리는 눈과 그 너머에 있는 마음의 불빛까지 훈훈하게 보였다. 장모님은 장작이 활활 타고 있는 벽난로 옆에 앉아 풀루트 를 들어 입술에 대고 여고시절 때 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유려한 금관악기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풀루트 만이 가질 수 있는 깊고 아름다운 음색에 깊이 빠져 들어 음악의 세계에 와 있는

착각 마져 들었다. 그

때 마을회관 쪽에서 펑펑거리는 소리와 함께 첫 폭죽이 미사일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그 소리 에 놀란 향수와 향민이가 잠에서 깨어나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장모님과 내가 품에 안 고 손으로 등을 쓰다듬어 주자 거짓말같이 울음을 뚝 그쳤다. 우리는 폭죽을 구경하기 위해 2 층 옥상으로 올라갔다. 행여 라도 감기에 걸릴까봐 두터운 솜이불로 눈만 나오게 칭칭 감싼 향수와 향민 이는 그 동안 몇 번이나 폭음이 울리고 밤하늘에 불꽃이 피었다가 지고 떨어지는 것이 너무나 신기한지 토기 눈처럼 눈을 동그랗게 지켜 뜨며 보고 있었다. 하늘에서도 여전히 폭음과 함께 폭죽이 터지면서 만들어내는 불꽃은 정말 장관 중에서도 장관 이었다. 점점이 흩어지면서 사그라졌다 모였다 를 반복하면서 대형 국화꽃 모양을 형상하다가 도 360도로 회전하면서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내는 불꽃의 극치 앞에 장모님과 아내는 아예 넋을 놓고 있다. 굉음 과 함께 밤하늘에는 대형 국화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꽃 보다는 손주들에게 더 관심이 많다는 듯 가슴에 안고 있는 향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모님

- 188 -

이 속삭였다. “향수와 향민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불꽃이지?” “네, 어머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모님이 두터운 솜이불에 감싼 향수를 살며시 안아 올렸다. 뜨겁게 타 올랐다가 천차만별의 갖가지 모양을 만들어 밤하늘을 색의 향연으로 만든 장관에 향수는 까르르 웃으며 바라본다, 메마르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향민 이는 나의 품에 안긴 채 불꽃 속에서 보이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얼굴을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 는 것 같았다. 아주 비범하고 사색적인 사상가처럼 보이기도 하고, 염세적이고 아주 내세적인 종교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호수처럼 맑은 눈에 긴 속눈썹이 역시 엄마 윤희와 많이 닮았다.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을 장식하는 폭죽이 올랐다. 그리고 세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 던 것처럼 고요해졌다. 꿈결 같은 색의 하늘이 펼쳐질 뿐이었다. 방으로 들어오자 장모님이 핸드백에서 아기자기하 면서도 귀여운 목걸이를 꺼냈다. 24K로 된 묽직 한 줄에 한가운데는 다이아몬드로 만든 하트 모양이 있는 금 목걸이다. 한 눈에 봐도 값어치가 나가는 귀금속이다. 윤희가 손으로 만지면 서도 믿기지 않다는 듯 말했다. “엄마 하트모양이 정말 다이아몬드야.” “보면서도 모르니.” “다이아몬드로

그렇지만

지금

금한 돈이

얼마인줄

알아

이정도의 금이면

몇

백만

원 정도는 되겠는데, 누구를 주려고 사온 건데, 설마 나하고 사위주려고 사온 것은 아니겠지?” 윤희는 목걸이의 주인을 알면서도 일부러 능청을 떨었다. “꿈도

야무져라

결혼 예물로

사준 귀금속

만해도 이정도의

목걸이는

열 개

이상

사 고도 남겠다. 주인은 따로 있으니 꿈께.” 장모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향수와 향민이의 목에 금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커다란 하트모양 의 금 목걸이가 무슨 장난감처럼 목에 달라붙어 대롱대롱 거리자 향민 이는 신기하다는 듯이 손으로 만졌다. 방금 전까지 불꽃으로 환하던 주위가 지금은 무서울 정도로 캄캄했다. 바람소 리만 천둥소리처럼 크데 들렸다. 세상은 우리들 밖에 없는 것 같았다. “향수야 향민아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잘 커야한다.” 얼굴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맞대었다. 장모님의 표정에는 두 손주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

- 189 -

는 친근감이 넘치고 있었다. 이렇게 눈을 맞추며 가까이서 쳐다보기는 장모님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윤희는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 생각이 간절한지 가끔 눈시울을 붉혔다. “향수야

향민아

사랑한다는

이

목걸이에

있는

이

할머니의

마음이야.

하트모양이 너희들도

이

보이지?

너희들은

할머니를

세상에서

세상에서 제일

가장 사랑해

줄 거지?” “할ㅡ마마ㅡ.” 알아 들었다는 뜻으로 향수와 향민은 웅얼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까르르 웃었다. 장모님은 너무너무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두 손주를 품에 안았다. 가 녀린 몸이 부서질 정도로 꼭 껴안았다. 말없이 안고 있는데 숨이 넘어갈 듯한 울음소리를 뒤 로하고 입술을 꽉 깨물며 목구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느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장모님은 두 손주를 품에 안은 채 힘없이 주저앉았다. 강둑이 터진 듯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 렸다. ‘이 무정한 사람아 무엇이 그리 급하다고 일찍 갔어. 이 토끼 같은 귀여운 손주도 품에 안아보지 못하고, 당신은 정말 무정한 사람이야’ 그때 장모님 가슴속에서 마구 요동쳤던 슬픔과 회환은 뜨거운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었을 뿐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15년 전에 세상을 떠난 남편을 가슴속에 묻었다가 오늘같이 좋 은 날 남편을 불러낸 것이다. “어머님

이제

장인어른

편안하게

가시게

그만

놓아주세요.

장인어른께서도

그것

을 간절히 바라고 계실 거예요. 향수와 향민이가 친 부모보다 어머님을 더 사랑할 거예요.” 나는 장모님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자 뜨겁고 따스한 무엇이 내 볼 위를 부 드럽게 스쳤다. 바로 눈앞에 장모님의 손이 있었다. 장모님은 그 언제 내가 그렇게 했던 것처 럼 슬픔과 연민으로 가득한 결정체인 내 눈물을 손바닥으로 따뜻하게 닦고 계셨다. “어머님 이제 울지 마세요. 알았죠?” “알았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난데 울긴 왜 울어?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 물인데.” 장모님은 뒤로 넘어갈 듯 웃었다.

- 190 -

7월이 되자 기온이 상승하면서 한 낮에는 체감온도가 36.5도를 넘어섰다. 가만히 앉아 있기 만 해도 땀이 비 오듯 줄줄 흘러내렸다. 평균기온보다 4도 이상 높아진 기상이변 때문에 한 밤에도 30도 이상 올라가 잠을 이룰 수 없는 열대야 현상까지 이어졌다. 더위에 무척 민감한 향수와 향민 이는 잠을 이루지 못해 몸무게가 5kg이나 줄어 들었다. 기력을 돋 구어 주고 탈 진한 체력을 보강해주는 건강식품으로 가장 으뜸으로 손꼽히는 완도 산 전복죽을 이유식 대신 대체해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손주사랑이 유달리 남다른 장모님은 발을 동동 구르며 자신의 아픔보다 더 아파했다. 보다 못한 장모님이 아예 우리 집에 들어와 살다시피 하면서 손주들의 건강을 손수 챙겼다. 동의보감과 본초강목 의 의학서적까지 들여다보면서 한 여름철의 무더위를 이길 수 있는 가 장 적합한 음식들만을 선별하여 손주들의 식탁에 올렸다. 장모님의 지극정성에 하늘도 감동했 는지 시름시름 앓던 야위어만 가 던 향수와 향민은 예전처럼 건강을 되찾았다. 몸무게가 5kg 이 더 늘어났고 우윳빛이 도는 피부도 한결 더 탄력 있고 하 애 졌다. 그래서 이제는 향수와 향민 이는 아빠와 엄마보다 장모님을 더 따르며 좋아했다. 목 놓아 울다가도 장모님의 얼굴만 보면 울음을 뚝 그치l고 방긋방긋 웃으며 좋아했다. 그러면 장모님은 통통한 볼이 금방 만들 어진 생크림의 표면처럼 뽀 얗고 만지면 녹아버릴 것 같은 눈송이처럼 하얀 얼굴을 닳아지도 록 쓰다듬는다. 장모님의 배를 베개처럼 베고 누워 긴 속눈썹을 깜박이면 마치 조그만 눈송이 가 내려앉은 것처럼 귀엽다. 오늘저녁은 장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김만우 사장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외출을 했다. 초록 잎으로 뒤덮인 잠실의 여름은 싱싱하고 활기가 느껴졌다. 도로가의 가로수들이 푸른 물감을 들인 것처럼 푸르고 가로등 불빛이 비칠 때마다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 푸르게 빛난다. 그날 잠실 롯데 백화점에 나와 보니 도심 속에서 바캉스를 즐긴다는 즐거운 콘셉트의 ‘시티 바캉스 (city bacanes)’ 행사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인사인해를 이루었다. 잠실 롯데 백화점 주변은 휘황찬란한 오색 네온사인의 불빛 때문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온 것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뿜는 숨이 공기를 녹일 정도로 뜨거웠다. 우리는 하얀 눈을 맞을 수 있는 ‘판타지 스노 파티’ 행사장으로 걸어갔다. 서울의 여름, 특히 잠실은 정말 무더운 지 역이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잠실야구장에서 프로야구 시합을 전할 때는 땀이 속옷까지 차오른 다. 내가 좋아하는 삼성 팀을 응원하기 위해 응원석 맨 앞줄에 앉았으나 푹푹 찌는 무더위 때문 에 야구 경기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191 -

야구장에 떠있는 무더위를 몰아내려고 빌딩숲을 뚫고 간신히 달려온 강바람도 수 만 명이 내 뿜는 열기 때문에 무서워 달아났다. 견딜 수 없이 무더위 잔인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오늘저녁은 그나마 바람이 제대로 불어와 다행이다. 게다가 매일 밤 하얀 눈을 맞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영화나 드라마에서 계절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 동원 된 특수 장치에서 내뿜는 차가운 바람의 온기가 아직까지 곳곳에 남아 한결 시원하다. 잔인하 다 싶을 정도의 무더위가 과학의 힘 앞에 한폴 그 기세가 꺾여가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행사 장에 도착했다. 서치라이트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무대 위에는 누드와 가장 근접한 섹시 패션인 비키 니 쇼가 그 열기를 더 하고 있다. 속옷만큼 야한 복장임에도 해변 가 와 물가에서 허용되는 유일무이한 단하나의 패션이며 여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좋은 몸매 상징인 비키니를 입고 워킹 을 하는 팔등신의 모델들이 무더운 한여름 밤의 열기를 시원하게 녹여주었다. 노출정도나 색 상 양에 따라 몸매가 달라지는 비키니차림의 모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십년 묵은 체중이 한 번에 날아가 버리는 희열을 느꼈다. 상의 앞부분 파인부분의 가슴골라인 끝으로 터질 듯한 힙 과 허벅지 사이의 격한 굴곡이 사과처럼 탱탱하다. 최고 섹시 테니스 스타 안나 쿠르니코바 엉덩이를 연상케 하는 모델을 보는 것만으로 황홀할 지경이다. 웬만큼 날씬한 몸매가 아니면 소화하기 힘든 디자인인 비키니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모델을 아내 윤희는 부러운 듯이 쳐다 보았다. 비키니. 패션쇼가 끝이 났다. 무대 위에는 실제 사람크기 헤리포터 테디베어, 헤리베어 와 원더우먼, 짱구, 캔디, 말갈량이 소녀 삐삐, 프란다스의 개, 성냥팔이 소녀, 인어공주 등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인기 캐릭터들이 무대 위에서 신나는 댄스공연을 펼쳤다. 향수와 향민 이는 인어공주 캐릭터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지만 인어공주가 주는 따뜻한 이미지에 마음이 끌 렸는지 손가락으로 인어공주를 가리키며 ‘아바’ 하며 흥분해 했다. 아직도 젖 냄새를 풍기는 가난아이인데도 깊은 빛이 감도는 눈동자에서 캐릭터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 를 보고서 그저 웃는 것처럼 보여도 빨간 입술을 슬쩍 움직일 때는 인어공주 캐릭터에 대해 알고 싶다는 무언의 암시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움찔 놀랐다. 무대에서는 5인조 클래식 앙상블이 ‘넬라판타지아, 향수, 챔피언’ 등 대중적인 곡 들을 연주 해 흥을 돋 구었다. 머리를 여자처럼 길게 묶은 첼리스트가 솔로로 ‘사운드 오브 뮤직. 코리아 판타지, over the rainbow’ 등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한다. 곡, 중간 중간에 불꽃이 피어오르 는 등 3만 2천발의 불꽃이 무더운 여름밤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상큼한 줄무늬 원피스

- 192 -

차림의 얼핏 하의실종 패션을 연상시키지만 보일 듯 말 듯 검정색 초미니 스커트를 입은 센스 만점의 ‘하의 패션’으로 눈길을 끄는 여성이 한 없이 피어오르는 불꽃을 쳐다보면 서 뭐가 좋 은지 방긋 웃고 있다.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에서 코믹한 말이 나왔는지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박장대소한다. 웃는 모습도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예쁘다. 더욱이 하의 실종 패션으로 늘씬한 각선미를 과시하 면서도 짧은 미니원피스의 불편함을 덜었고 여기다 핑크 백으로 포인트를 줘 더욱 상큼하면서 도 우아하게 보였다. 그 여자에게 시선이이 쏠려있는 것을 알아차린 윤희가 손톱으로 내 손등 을 꼬집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오색찬란한 서치라이트 불빛과 현란한 조명들이 빛나는 빛의 향연장과도 같았다. 마침내 오늘의 축제 하 이라이트인 스노파티가 시작되었다. 40여대의 특수 스노머신이 뿜어내는 함박눈에 구름같이 운집한 관객들은 탄성을 질렀다. 인공눈으로 뒤덮인 무대는 조명들이 꺼져버린 탓에 바다위에 서 둥둥 떠 있는 유빙과도 같았다. 그 리고 눈 폭탄을 뒤집어 쓴 사람들은 눈사람 같다 온 사방이 하얗다. 무대와 관객들의 경 계가 어디인지 모를 정도다 40여대의 특수 스노머신이 뿜어내는 함박눈은 롯데월드 주변을 하얗게 뒤덮었다. 무대 위에는 다시 현란한 조명등이 켜졌다. ‘쿨썸머 비보이 파티’ 와 뜨거운 삼바도 함께 곁들여진다. 자녀를 맡겨놓고 혼자 몰래 빠져나가 ‘삼바’를 즐기는 아빠들도 종종 눈에 뛴다. 행사진행요원이 곰 캐릭터로 변장해서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향수는 무섭다는

듯이 눈을 찡그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원래가 무서움을 많이 타는 아이다보니 나의 목을 껴안 고 얼굴을 가슴에다 깊이 박고는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다. “아가야 내가 무섭니?” 곰 캐릭터를 쓴 행사진행요원이 내 가슴에 머리를 박고 있는 향수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는 다. 아빠인줄알고 고개를 돌린 향수가 눈앞에 있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곰을 보자 ‘으앙’ 하고 무서워 울음을 터트렸다. 향수를 울린 것이 무안한지 진행요원이 머쓱하며 되돌아갔다. 다시 돌아와 솜사탕을 향수 손에 쥐어주었다. 환영속의 눈 기둥 같은 거대한 무대 주위가 하얀 눈 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 활활 타오르다 사라졌다.

- 193 -

9월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그 무덥 던 여름도 이제 한풀 꺾였다는 듯이 가을을 알리 는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렸다. 추석을 일주일 앞두고 덕소별장 옆에 있는 장인어른의 산소 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 3일 뒤에 금촌 공원묘지에 묻힌 아버지 산소에 갔다. 울창한 숲 속에 공원묘지가 있었다. 손질도 깔끔하게 잘되어있는 무덤 앞에는 누군가 다녀갔다는 흔적으 로 하얀 국화꽃이 놓여 있었다. 이 많은 무덤의 주인들이 모두가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인생의 덧없음이 피부로 와 닿았다. 어머님과 누나는 아버지 산소주위에 나 있는 잡풀들을 손 으로 뽑고 있었다. 산에서 부는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 묘지 앞에 있는 비석 에는 아버지 이름이 새겨져있고 시들어져 가는 앙상한 국화꽃이 놓여 있었다. 며칠 전 동생 혜란 이가 다녀간 흔적일 게다. 분홍색 리본만이 있는 형체만 남은 국화꽃을 보니 나도 언젠 가 국화 꽃 같이 시들어져 아버지처럼 땅속에 묻히리라 계단식으로 되어있는 묘지를 둘러보았 다.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똑같이 닮은꼴 을 한 무덤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어느 묘지의 어느 묘지나 모두 똑같이 닮은 쌍둥이 같았 다. 다정하게 머리를 맛 대고 있는 이 많은 주검들이 살아생전에도 그렇게 친했던 관계였을까 하고 생각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정말로 소중한 인연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뜨 끔했다. 내가 차가운 무덤들과 마음의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어머니가 옆으로 왔 다. “절은 안하고 뭐해.” 어머니의 말 속에는 먼저 간 아버지 생각에 슬픔이 가득 묻어 있었다. 내 가슴에 간직하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보고 싶은 마음이 되살아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왠지 내 마음속 의 슬픔은 어머니의 슬픔처럼 비슷했다. “당신 지금 손주 녀석들 보고 있지요. 대대로 손이귀한 가문인줄 알고 삼신할머니 께서 쌍둥이 아들을 주셨지 뭐예요. 한 날 한 시에 태어났지만 향민이가 10분 먼 저 태어났고, 향수가 10분 뒤에 태어났지요. 당신, 손주보고 싶다고 맨날 노래 불 렀잖아요. 자 한번 안아보세요. 입이 닿도록 말했잖아요. 자 한번 안아보세요. 이 먼 곳까지 왔는데 손주 녀석들 한번 안아주세요.” 어머님은 향수와 향민 이를 가슴에 안은 채 아버지 산소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향수 와 향민이도 덩달아서 ‘으앙’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금방 올라온 다른 성묘객들이 그 모습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얼른 어머님을 일으켜 세웠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어머님의 얼굴

- 194 -

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엄마 고정해, 엄마가 이러시면…….” 나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내가 참, 추책 바가지지. 며늘아기 앞에 눈물을 다 보이고.” “알면 됐어. 그러니 눈물 뚝 알았죠?” 엄마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아버지 생각이 간절해 담배 에 불을 붙이고 저승에서

피울 수 있도록 봉분 앞에 꽂아두었다. 어머니와 나란히 서서 가을

하늘도 올라가는 가느다란 담배연기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옆얼굴에 슬픔의 그늘이 짙게 드 리워져 있었다. “아버지

향기가

왔어요.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귀여운

쌍둥이

손주

녀석

들 보셨지요. 눈과 귀가 아버지 꼭 빼 닮았어요. 웃는 모습까지 도요.” 나는 인사말을 하며 국화를 바치고 향을 피웠다. 그리고 살아계실 때 그렇게 좋아했던 막걸 리를 두병이나 산소에 부어 드렸다. 네 번 절을 했다. 윤희와 누나는 향수와 향민 이를 안고 네 번 절을 했다. 이 무덤이 할아버지의 무덤이라는 것을 아는지 그렇게 웃고 까 불던 향수는 표정이 제법 진지하다. 먼 산에서 들리는 뻐꾸기 울음소리가 더욱더 애간장을 녹였다.

연말을 앞두고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는 팝 거물들의 내한공연소식에 온 국민들의 가슴이 설 레었다. 언론과 지상파 방송매체에서는 수십 년간 명성을 쌓아온 전설의 록 밴드는 물론 빌보 드 차트에 이제 막 이름을 올린 20대 스타까지 머리기사로 다룰 정도로 취재에 열을 올렸다. 우선 눈에 띄는 팀은 라틴 록의 거장 산타나의 내한공연이다. 1996년 이후 15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1969년 데뷔한 그는 라틴리듬과 록을 결합한 독특한 음악세계를 펼쳐왔다. 지난해엔 록의 명곡들을 재해석한 음반 ‘기타 헤븐’을 발매하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전설적인 뮤지션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산타나와 함께 듀엣으로 나서는 가수가 제임스 브라운이라는 보드 내용에 한국 음악 팬들의 관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1년 전에 서울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공연했던 미국 록 밴드의 전설 이글스나 영국 헤비메탈 의 개척자 아이언메이든, 세계3대 기타리스트 중의 하나인 에릭클립톤, 컨트리 음악의 요정으 로 불리며 현재 미국 음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싱어송 라이터인 테일러 스위트트의 공연 때

- 195 -

보다도 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저명한 음악 평론가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팬들의 광적 인 반응 원인에는 ‘김향기’ 라는 한국가수의 존재가 가미되어서 만들어낸 초월적인 현상이라 고 진단했다. 사람들이 기억 속에 완전히 잊혀 졌던 내 이름은 제임스 브라운의 내한공연을 통해 다시 팬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제임스브라운의 이름을 떠올렸을 때부터 왠지 가 슴이 뛰고 마음이 설렌다.

7년 전 중국 최남단 휴양지인 하이난 섬에서 그의 공연을 보았을 때다. 눈밭 에 홀로 서 있 는 고목처럼 느껴지는 강인한 인상을 받았다. 그의 음악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남태평양 의 거대한 해저동굴, 어느 날 집에 침입한 무장 강도마저도 단 한 번에 제압 할 정도로 힘과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음악,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무시무시한 강풍을 견디며 120일 동안 알 을 품는 펭귄처럼 끈기와 고독이 묻어있는 음악, 일상의 낮 익은 사물을 변형시켜 새로운 시 각을 부여하고 사물의 본질을 묻는 음악, 사탕처럼 달그락 대지 않고 캐러멜처럼 끈적거리지 않는 단맛이 어둠처럼 조용히 밀려나가 그 은근함 덕에 사랑의 전령이 되는 초콜릿 같은 음 악, 누구의 간섭도 지시도 거부하는 고집스러움, 연민과 사랑, 공동체 정신과 저항의식, 시니 컬한 웃음으로 가려버린 진정한 인간미, 그의 음악은 공존과 화해의 현장에서 만들어진 오케 스트라와 같은 음악이다. 제임스 브라운의 음악에는 그런 무엇이 있었고, 그것은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이 정원의 화사한 꽃과 싱그러운 음악, 내 추럴하면서도 남성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음악, 어디로 튈지 모르는 톡톡 튀는 매력과 토라져 삐죽거리는 이미지가 느껴지는 음악이니 하고 생각하는 것과 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사람은 나뿐인 듯 했다. 저명한 음악 평론가 들이 항상 그의 음악을 평할 때 수식어처럼 따라붙는 기존의 음악질서를 무너뜨리고, 그리고 그 위에다 자신만의 개성과 빛깔로 된 새로운 음악의 장르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개척정신이란 평만은 그를 제대로 평가한 것 같아 듣기에도 썩 잘 어울리는 말 같았다.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서울의 경치는 그저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뿐이다. 크리스마스 3일 앞두고서부터 주먹만 한 함박눈이 서울시가지를 하얗게 뒤덮여 마치 투명하 게 빛나는 눈의 도시로 둔갑한 것 같았다. 추위도 한층 기승을 부렸다. 코트 깃을 세우고 급 하게 걷다보면 내가 내쉬는 숨이 유리창에 긴 성에처럼 도시를 하얗게 물들일 것 같았다. 그리고 거리는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트리와 구세군 자선냄비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종소리 로 물들어갔다. 제임스브라운과 약속한 시간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묵고 있는 세종호텔 스위트룸이 만남장소였다. 내 쉬는 숨이 하얗게 김이서릴 정도로 추운날씨였지만 전설적인 뮤

- 196 -

지션인 제임스 브라운과 산타나를 만난다는 기쁨에 추위도 달아나 버렸다. 걸어가면서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여자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같이 동행한 황제클럽 강 일중사장은 몸을 잔득 움츠리고는 가죽장갑을 낀 두 손으로 얼굴과 목을 비비기 시작했다. 검 정색 귀마개와 마스크, 목도리에 무릎까지 오는 코트로 중무장한 그는 코트 깃을 세우며 앞만 보며 걷고 있었다. 가끔씩 나를 보고서는 그저 웃는 것처럼 공허한 눈동자를 슬쩍 움직일 뿐 이었다. 수수한 코트와 무릎까지 오는 긴 부츠, 전체적으로 웨이브를 넣으면서도 절제된 느낌 을 줌으로써 자연스러움 을 강조한 헤어스타일, 오른쪽 손에는 악어 핸드백을 들고 걸어가던 40대 여성이 김만우를 알아보고는 즉석에서 휴대폰 카메라로 기념사진을 요청했다.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 그녀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웃는 모습이 정말 귀여운 여자였다. 김만우는 그녀와 기념사진을 찍기 무섭게 우리는 서둘러 세종호텔 에 도착했다. 서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남산타워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는 호텔이라 그런지 분위기부터 뭔가 색 달랐다. 은행건물을 비롯해 고층건물들이 들어서있는 빌 딩숲에 들러 싸여있으면서도, 남산을 끼고 있어서 사계절모두 전망이 좋은 호텔이다. 벚꽃나 무를 비롯해 온갖 희귀종 나무들과 단풍나무들이 호텔주변에 즐비하다. 탁 트인 잔디밭 뒤로 하늘을 뚫을 듯이 치솟아있는 장엄한 남산의 산세가 병풍처럼 둘러싸여서 보는 이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새하얀 눈이 온 산을 뒤덮고 있는 설경의 파노라마는 어느 곳에 시선을 멈추고 있어도 질리 지 않는 겨울풍경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날개를 활짝 편 까마귀 몇 마리가 남산 케이블카가 있는 쪽으로 날아가며 까악 까악 울어댔다. 현대적이면서도 유럽풍 낭만을 간직한 호텔답게 건물 외부 뿐 아니라 내부 역시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뽀얗게 화장을 하고 연미 복과 비슷한 복장을 한 도어맨이 우리일행을 보고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실례지만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제임스브라운 선생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그럼 혹시 김향기 선생님이세요?” “네,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김향기 입니다.” 도어맨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잠시 주저하다가 마침 감청색 양복을 입은 남자에게 달려갔 다. 몸집이 넉넉하고, 위엄도 있고 기품이 넘쳐나는 남자는 도어맨으로부터 우리일행에 관한 설명을 듣고는 한걸음에 달려와 정중히 인사를 했다. 우리 손에 건네준 명함에는 ‘이사’ 라는

- 197 -

직함이 명기되어있었다. 사십대 초반밖에

보이지 않는 그가 대형호텔 이사라는 게 도저히 믿

기지 않았다. 손수 프런트까지 우리를 안내한 그는 프런트를 담당하는 여직원과 뭐라고 쏙닥 거렸다. 바비 인형 같은 몸매를 지닌 여 직언은 인터폰을 누르며 유창한 영어로 누군가의 대 화를 하였다. 잠시 후 이사와 여직원은 우리일행을 돌아보았다. 표정과 몸짓에는 예의범절이 몸에 베여있었다. 이사는 직접우리를 안내했다. 엘리베이터는 바로 한걸음 차이로 문이 닫혔다. 7~80년대를 풍미했던 세계적인 뮤지션을 만난다는 생각에 심장의 고동소리가 빨라지고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래서 잠시 마음도 가라앉힐 겸 계단 이 용을 건의하자 그는 흔쾌히 우리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스위트룸이 있는 10층까지 걸어가기 로 했다. 흥분된 마음도 진정시킬 겸 간단한 인사말과 안부정도는 영어로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여 걸어가면서 해야 할 말을 머릿속에서 숙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3층까지 올라갔 을 때도 머릿속에는 구체적인 인사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영어회화에는 어느 정도 자신 있다 고 생각했지만 막상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때에 인사말조차도 떠오르지 않다니 정말 한심 한 생각이 들었다.

8층을 올라왔을 때 위쪽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9층 정도일 것이다. 그런 다음에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가 들려서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 호텔의 엘

리베이터는 짝수와 홀수로 나누어 있기 때문에 각층마다 멈추어 계단을 이용하는 경우는 호텔 에 종사하는 직원들 외에는 거의 없다. 더욱이 지금 시간은 호텔 종사자들의 회의시간이 아닌 가. 구두 굽 소리를 최대한 안 들리게 하기위하여 한쪽 발을 끄는

걸음걸이 그 발소리가 예

사로이 들리지 않았던지 그는 귀를 쫑긋 세웠다. 제임스 브라운과 산타나가 묵고 있는 스위트 룸에서 완전히 발소리가 멎어버리자 그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송글 송글 맺혔다. 워낙 거 물급 인사라 언론사 기자와 방송취재 기자들을 따돌리려고 그들의 이름까지 가명으로 호텔 투 숙객 명단에 기재하였고, 만에 하나 있을 1프로 실수까지 염두에

두고 그들이 한국에 머물

동안 지낸 숙박 장소를 광장동 아차 산 자락 에 위치한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이라고 거 짓정보를 언론과 방송매체에 흘려보냈던 것이다. 그래서 찰거머리와 같은 기자들과 열성팬들로부터 시달림을 받지 않고, 호텔에 묵고 있을 동 안만 이라도 편안하게 보내고 싶다는 그들의 바램 을 들어주기 위해 쉐라톤 워커힐 호텔과 세 종호텔이 긴밀히 협조하여 그들의 보호 작전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의 돌발 상황은 보호 작전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위급한 순간이었다. 9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다음 계단을 통해 10층을 올라간 것은 사전에 제임스브라운과 산타나가 세종호텔에 오

- 198 -

기 전부터 그들의 일거 수 일 투족을 그림자처럼 미행하였다는 추측이 나온다. 9층 엘리베이 터를 내린 경우 자신이 찾는 목표지점이 바로 10층 스위트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브라운과 산타나는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 독일 심지어는 이슬람 문화권까지 가서 인종차별 정책의 부당함을 알리는 콘서트 공연도 수차 례 가진바 있다. 종교는 대립과 갈등이 아닌 사랑과 포용으로 서로를 끌어안을 때만이 종교로 서의 기능을 가질 수 있다고 역설해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래 서 그들의 공연 장소에는 여느 가수들보다 10배 이상 많은 경찰과 경호원들이 진을 치며 그 들의 경호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던 것이다. 테러리스트의 명단에 제거 대상 1순위가 미국 대 통령 오바마, 그 다음으로 그들이 대상자 명단에 오를 정도이다. 세종호텔이사는 흠칫 숨을 들이 마시고 무전기를 꺼내 현재의 비상사태를 보고했다. 그리고 나서 상대방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위하여 구두를 벗고 양말 차림으 로 신속하게 10층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10층 복도 코너 쪽에서 살그머니 복도 안을 들여 다보자 발소리의 주인은 마침 그들이 묵고 있는 스위트룸으로 들어가기 위해 만능키로 문을 열고 있는 중이었다. 분명히 그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전에 치밀한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허리춤에 보이는 권총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틀림없다, 제임스 브라운과 산타 나를 제거하기 위하여 지하세력에서 보낸 테러리스트가 분명했다. 빈 라덴이 이끌었던 알카에 다 요원처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모습,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인종차 별 정책의 부당함과 기독교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의 한 형제, 한사랑 주위를 주장한 연설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총살하려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끼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음악인으로서 인종차별 철폐 와, 종교관의 대립과 갈등으로 세계의 화약고가 되어버린 중동의 평화를 위해 몸 받쳐 헌신한 평화주의 가수인 그들이 한국에서 테러리스트들에게 암살을 당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 이었다. ‘쩔그럭 쩔그럭’ 열쇠구멍에 열쇠를 끼어 넣는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는 대포소리보다 더 크게 호텔전체에 울려 퍼졌다. 문이 열리기전에 비상벨이 울리며 호텔 청원경찰들이 들이 닥쳤다. 만능키로 문을 열고 그들이 있는 객실로 진입하려 했던 자객은 마치 악몽을 꾸고 있 는 것 같은, 그러면서 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스총을 쏘며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버렸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순식간의 일이었다. 청원 경찰들은 잠시 멈칫거리며 테러범이 사라진 복도 쪽을 쫓아갔다. 우리일행은 복도에서 잠시 멈칫거리며 그들의 숙소인 스위트 룸

- 199 -

쪽으로 갔다. 역시 착각은 아니었다. 초인종 벨을 누르려고 보니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초인 종 벨을 누르자 ‘헬로우’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제임스 브라운이었다. 나를 한눈에 알아본 그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뜨겁게 포옹했다. 그리고 우리 일행들에게 서툰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반갑게 맞았다. 산타나와 함께 있던 미모의 여자가 자리 에서 일어났다. 흩어져 있는 악보위로 상반신이 드러났다. 손에 공연 때 부를 노래가 적힌 메모지를 들고 있 었다. “김 선생님 7년 전 모습보다 훨씬 더 미남인데요.” 자세히 보니 7년 전 하이난 섬에서 통역을 맡았던 한국계 이민 3세 린다 김이였다. 눈부신 허 벅지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관능적인 스트라이프 원피스와 블랙 재킷 차림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그녀의 모습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계절이 계절인 만큼 따뜻한 옷차림과, 검은색 웨이브 머리카락을 조금 잘랐고, 블라우스 단추 를 목 끝까지 채운 데다 주얼리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다이아몬드 인터내셔널 어워드’ 에서 18차례나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기술력을 인정받아 지금도 여전히

고유한 전통을 간

직 하며 클래식한 디자인의 주얼리를 선보여 수많은 세계 각국의 연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다미아니’ 목걸이를 착용한 것만 뺀다면 7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나와 함께 동행 한 두 사람에 대해 소개하자 , 그녀는 곧 바로 제임스 브라운과 산타나에게 내가 한말그대로 유창한 영어로 통역했다. 그들은 김만우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그 또한 말로만 듣던 전설적인 뮤지션을 만난 기쁨에 머리를

긁적이며 웃기만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션을 만나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산타나는 영어로 한말을 린다 김이 통역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온화하게 웃고 있는 산타나를 바라보았다. 1969년 데뷔한 그는 라틴리듬과 록을 결합한 독특한 음악세계로 라틴 음악의 아 버지로 불릴 정도로 그 인기와 명성이 대단한 뮤지션이다 .열정적인 라틴음악의 리듬을 감미 롭고 애잔한 팝 적인 멜로디로 병행하여 새로운 그 만의 음악 세계를 탄생시켰다. 일상의 낮 익은 사물을 변형시켜 새로운 시각을 부여하고 사물에 본질을 묻는 새로운 음악적 장르로 전 세계에 1억만 장 이상의 앨범을 팔았고 그래미상 5차례나 수상한 ‘라틴음악’ 의 전설로 통한 다. 그의 화려한 음악세계가 말해주듯 산타나의 관록은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질 좋은 양복을 입고 있지만 위엄이라고 해야 할지, 당당함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보통 사람들보다 범상한 이미지를 느끼게 했다.

- 200 -

갸름하고 둥근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형사 콜롬보처럼 콧날이 오뚝했다. 눈썹과 눈의 거리가 너무 일정한 간격도 그만의 매력이다. 귀는 보통사람들보다 조금 크고 입술은 윗입술 과 아랫입술이 단아하고 머리는 귀밑을 약간 덮을 정도의 짧은 머리이다. 그 중후함에 우리 일행은 주눅이 들었다. 처음 대면하여 얼굴을 보고 있는데도 다정한 이웃집 형님을 만난 것처 럼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앉다보니 제임스브라운과 내가 나란히 앉고 산타나와 강일중, 김만 우가 맞은편에 앉는 구도가 되었다. 통역을 맡은 린다 김은 모두를 마주 볼 수 있게 한 중앙 에 앉았다. 제임스 브라운 옆에 앉는 게 자연스러 웠지 만 강일중과 김만우도 산타나와 나란 히 앉아있는 모습이 보기가 좋았다. 그렇게 앉고 보니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우리사이에 끼어 들 수 없을 만큼 친밀감이 형성됐 다. 마치 수없이 이 자리에서 이렇게 앉아 본적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임스 브라운과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7년 전 중국 최남단 열대 휴양지 하이난 섬에서 보았던 그 모습그대로였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선이 반듯한 이마 뒤로 올백으로 넘겼고 머리카락은 목덜미 근처에서 웨이브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자 4년 전의 기억이 떠올라 콧날이 시큰해졌 다.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스페인가수 홀리오 이글레시아가 불려서 세계적으로 히트시킨 명곡 ‘나탈리’를 부를 때 나탈리ㅡ나탈리ㅡ하며 높게 올라가는 고음부분에서 독특한 떨림이 있는 목소리로 마치 떠나는 애인의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고 있는 듣는 이로 하여금 애절함이 묻어 나는 목소리에 엄마와 누나, 그리고 구름같이 운집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그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나를 보고 조용히 웃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검은 흑진주처럼 검디검었다, 한참을 보고 있으 면 그 깊은 고요함 속으로 빨려 들 것 같았다. 그가 얼굴표정을 바꿀 때마다 우수에 찬

검은

눈동자가 파르르 움직였다. 그와 같이 음악을 하고, 음반제작을 함께한 매니저와 기획사 직원 들은 그 눈동자의 움직임만 보고도 그의 기분이 어떤 상태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정직한 눈이었다. 진실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그의 눈이 잠시 웃는 것 같더니 내 시선을 비 켜가 회의석 테이블 앞에 있는 소품에 멎었다. LNG선 유조선을 등에 태운 회전목마가 뱅글뱅 글 돌고 있는 매우 독창적이면서도 예술적인 감각이 돋보였다. 그 뒤쪽으로 카드놀이를 할 수 있는 바카라가 있었다. 그리고 왼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제임 스브라운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진지한 얼굴이었지만 늘 보여주던 위풍당당함과 활기참은 어 디에다 잠시 두도 온 것 같았다. 용기를 내어 서투른 영어로 반갑다는 인사말을 하려고 하는 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제임스브라운과 내가 동시에 문 쪽을 돌아다보았다. 문이 열리고 객실

- 201 -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좀 전에 이곳까지 우리를 안내했던 세종호텔이사와 청원경찰 두 명이었 다. 그들은 좀 전에 나타난 테러범에 관한 말을 하려고 객실로 들린 것 같았다. 산타나와 제 임스브라운이 그들의 등장을 매우 의안 해 하며 바라보았다. 젊은 이사는 방금 미국에서 한국으로 여행 온 미국사람처럼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조금 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해 언급했다. 지하조직인 알카에다에서 파견된 테러범으로 알고 있었는데 테러범이 아닌 외국인들이 투숙한 호텔만을 돌며 상습적으로 금품이나 돈을 훔치는 절도범이었다고 설명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나라가 범죄자들로 우글거리는 안 좋은 이미지를 외국인들에게 심어줄 수 있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그의 흔들리는 눈빛만 보 고도 젊은 이사의 심리상태가 얼마나 불안한지 알 수 있었다. 제임스 브라운과 산타나는 외국 공연 때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서 그런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염려할일 이 아니라며 멋쩍게 웃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들이 돌아간 뒤에 우리 일행은 제임스브라운, 산타나, 린다김 과 함께 호텔에서 조금 떨어 진 곳에 위치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5층짜리 건물 앞 에 3개 층이 노래방이고 2개 층은 공인중개사 사무실과 결혼 중매 업체 사무실이다. 지하 건 물만 카페이다. 우리일행은 지하 카페로 들어갔다. 자정까지만 영업을 한다고 입구에 적혀있 었지만 섹시하게 생긴 여자주인은 하루매상과 맞먹는 고가의 양주를 주문하자 카운터에 턱을 괴고 앉아 좋고 있던 얼굴에는 어느새 생기가 돌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음악에 대해 문외 한이라 그런지 우리일행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후줄근한 지하건물과는 달리 냉방시설이 잘 돼 있어서 추위는 금세 사라졌다. 오히려 더울 지경이라 서둘러 두터운 외투를 벗었다. “사장님들 입구에 적힌 영업시간은 신경 쓰지 마세요. 더 이상 손님을 안 받게 간판 불을 끄겠어요.” 우리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여주인은 알아서 셔터 문 까지 내리고 왔다. 편안한 게 대화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준 여주인의 마음씀씀이에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술이 몇 잔 오 가자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화기애애해져갔다. 제임스브라운은 미국 음악계의 현실이 상업주의 적으로 치닫는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미국 음악계의 중흥 기는 역시 우리들 이 활동했던 6~80년대라고 말하며 쓸쓸하게 웃었다. 이어서 한국음악계에 현실에 대해 알고 싶다며 진지하게 묻자 얼굴이 취기가 올라 불그스레해진 김만우는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답변 했다. “지금

한국

가요계의

성향은 ‘나는

가수다’ ‘불후의

- 202 -

명곡’ ‘위대한 탄생’

등등

이

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악 오디오 프로그램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 프로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나

가수들이

있고, 대중들

역시

사가

오디오

TV음악

한 흥행몰이에

마치

거기에 편승해 프로그램에

중점을 둔

한국가요계를

직장, 학교, 관한

것처럼

거들먹거리

공공장소에서도 가장

얘기지요.

방송프로 때문에

대표하는

음악보다는

중요한

시청률을

정말 좋은 명곡은

관심

높이기

눈을 씻고

위

찾아볼

래 야 찾아볼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지요. 음악이 음악으로서 자리를 잃고 저속한

예능프로의

희생양이

되어

대중들의

눈요깃거리로

전락한

실정이

되었지

요.” 김만우의 말은 진지함 그 자체였지만 한국 음악의 현주소를 세계적인 두 뮤지션 앞에 프레젠 테이션 식의로 말을 한 것이기 때문에 말을 해놓고도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 목 뒷부분까지 덮은 덥수룩한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더니 후들거리는 손으로 잔을 들었다. 아무 일없었다는 듯이 원 샷을 하더니 친밀감이 가득한 눈으로 산타나와 제임스 브라운을 쳐다봤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있던 산타나가 술잔을 비우면서 말했다. 린다 김이 곧바로 통역에 들어갔다. “이스라엘과

펠레스타인의

화합운동을

펼치고

있는

세계적인

유대인

지휘자

바

렌보임 이 나를 자기 집으로 초청해서 비디오 한 편을 보여주었어요. 전 세계 유 일한

분단국가인

있는

분단의

자

모두가

녹화한

상징인

하나의

장면

한국,

그것도

남과

임진각에서,

북이

1만

대치하는

여명의

군사분계선과

불과

세계적인

지휘자와

관객도,

감동,

하나의

염원으로

하나가

된

정말

이었습니다.

임진각

평화누리

야외대공연은

감격적인

베토벤의

7km에 연주

음악공연을

교황곡

9번

‘

합창’ 으로 공연의 막을 열었고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중동지역 다국적 연주 자

들로

구성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와

한국

성악가와

연합

합창단이

토해내는

평화와 화합의 선율은 정말 하나 된 아름다운 음악의 장이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 밴만 인이여 서로 포옹하라, 전 세계의 입을 맞추라’ 베토벤 교향곡 합창에 나오는 가사와 정말 귀가 막히게 잘 맞는 감동의 무대였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시각을 갖고 있는 남북한이지만 하나가 되리라는 희망을 보여 주는

평화콘서트를

보고

한편으로

마음이

아리고

한편으로

가슴이

아팠지만

음악이주는 진한 감동은 지금도 제 마음 깊은 곳에 남아있습니다.” 그는 분단된 한국의 아픔에 눈물 한 방울 떨구었다. 자신의 모국이 아닌 타국을 위해 눈물을

- 203 -

흘리는 그의 숭고한 마음에 우리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얼마 전 국회인사 청문희 생방송 TV프로그램이 떠올랐다. 대통령이 법무부, 국방부 장관으로 내정한 후임자에 대한 결격사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인사 청문회였다. 과반수가 훨씬 넘는 거대여당인 새누리당의 전폭 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후임자들이기 때문에 국회통과가 거의 확실해졌기 때문에 해보나 마나 한 인사청문회였다. 인사청문회에 심사위원으로 나온 여당과 야당의 대표의원들이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뉘어 내정자로 지정된 사람에게 질의응답 식으로 토론을 하고 있다. 인사청문회라 기보다는 야당 민주당은 흠집 내기와, 여당 새누리당 은 무조건식 감싸고 도는 형식이다.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으로 인준한 사람이 부장 판사시절 업소대표들로부터 받은 성 접대, 의 혹, 과 뇌물 청탁, 부인의 명의로 된 경기도 일산 25억짜리 빌라에, 민주당 의원들은 포커스 를 맞추어 집중 공략했다. 모든 조사 자료에 의한 정황으로 보아 자신의 죄상이 만천하에 드러나 그 자리에 얼굴을 들 고 앉아 있기조차 낮 부끄러울 텐데도 그는 태연하게 앉아 ‘사실무근’ 이라며 오리발만 내밀 고 있다.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자를 법을 집행하는 수장의 자리로 인준한 박 대통령이나, 자신의 부끄러운 치부가 드러남에도 ‘사실무근’ 이라며 발뺌하는 인사 내정자 들이 지금 산타나의 모습을 보았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자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우리의 대화를 귀로 쫑긋 세우며 듣고 있던 여주인의 얼굴을 봤을 때 처음 과는 표정이 사뭇 다르게 보였다. 낮선 이국 사람이라는 편견 때문만도 아니었다. 이스라엘과 펠레스타인의 화합운동을 펼치고 있는 세계적인 유대인 지휘자 바렌보임이 산타 나를 자기 집으로 초청 할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 앞에 크게 놀란 것 같았다. 그들의 얼 굴표정이나 몸 짓 화려한 제스처, 그리고 세계적인 뮤지션들의 이름이 줄줄 쏟아져 나올 때마 다, 아무리 음악에 대해 문외한 여주인이라 해도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챈

얼굴표정이다. 그래

미상을 6회 수상, 1억 5천만장의 음반 판매, 미국 ‘음악계의 전설’ 이글스. 영국의 전설적인 팝스타 엘톤존, 하나같이 ‘전설적인’ 수식어가

붙는 팝스타들의 이름과, 1966년 올림픽 체조

경기장의 내한 공연 등등, 우리가 주고받는 말에 여주인은 꿈인지 생시인지를 분간하지 못하 는 것 같았다. 어느새 그녀의 말투가 마지못해서 우러나온 경어에서 초등학교은사를 대하듯 정중한 말투로 바뀌었다. “첫눈에 봐도 범상치 않는 분 같은데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 좀 알 수가 없을까요?” 그녀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보며 애원하듯 부탁했다.

- 204 -

“음악

쪽에는

영관심이

없는가

보지요.

그러나

사장님은

축복을

받아도

보통축복

을 받은 게 아닙니다. 보통사람들은 죽었다가 열 번 이상 살아나도 한번 뵐까말까 한분이

한분도 아니고

자그마치 두

분이나

사장님 가게에

찾아왔으니 이보다

더

한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린다 김은 나와 여주인이 주고받는 말이 무척 재미있다는 듯이 산타나와 제임스브라운에게 통역을 한다. 산타나는 왼 속으로 담배를 든 채 오른 속으로 각 얼음을 술잔에 넣었다. 네모 모양의 동그랗고 작은 각 얼음 덩어리는 양주에 희석이 되어 싱그렇게 빛이 났다. 여주인이 자신들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산타나는 싱긋 웃는다. 그리고 눈썹을 올려 나에 게 신호를 보낸다. 인적사항에 대해 말해도 좋다는 사인이다. 린다 김이 손수 따라준 양주를 홀짝인 뒤에 손가락 끝에서부터 발등까지 전율이 쫙 들 정도로 두 사람의 프로필에 대해 여주 인에게 장황하게 설명했다. 불과 1시간 전까지 카운터에 턱을 괴고 앉아 졸면서 우리를 맞이했던 여주인은 전혀 다른 사람과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그래미상 6 회수상의 빛나는 그들의 화려한 경력과 1억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량과, 음반 매니지먼트를 기업화할 수 있는 엄청난 돈을 벌 었지만 그 수입의 70프로를 유니세프(국제아동기금)에 기부 했고, 음반기획사에서 로열티를 준 돈까지 아프리카 빈민구제 성금에 내 놓았다는 말에 ‘아하’ 그녀는 감탄을 하기위해 마치 숨을 멈추려고 하는 것 같았다. 불과 5개월 전에 폭탄 테러를 당해 20여명의 아까운 생명이 희생당한 팔레스타인 라말라 에서 평화, 화합을 기원하는 콘서 트를 했고, 12월31일 정오 가수로서는 세계최초로 유일한 분단국가인 서로 다른 생각과 시각 을 갖고 있는 남북한의 최초로 하나 되는 화합의 콘서트를 군사분계선 DMZ에서 갖기로 되어 있다는 나의 말에 제임스브라운과 산타나를 존경 스런 눈빛으로 내려다 짧은 숨소리를 몇 번 냈다. 진지한 얼굴에는 썰물처럼 밀려오는 감동이 잔잔하게 물결치고 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지’ 하며 감개무량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본다. 흥분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머릿속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세계 적인 레전드 급 뮤지션인 산타나와 제임스 브라운을 향해 존경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게 여주인을 떨리는 목소리로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말하려고 애썼다. “이렇게 대단한 가수 분을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

- 205 -

그녀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술잔을 들고 있는 산타나는 입가에 미소를 가득 지우며 그 녀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뭐라고 다시 말하려는데 산타나가 손을 들어 제지를 하더니 여주인 의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그녀는 너무 황송한 표정으로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았다. 가슴 을 꽉 움켜쥐는 듯한 흥분에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것이 꿈이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어 몇 번이나 눈을 깜박 거렸다. 꿈이 아닌 것을 알았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심정을 억누르며 그녀는 술잔을 입에 대며 우리의 눈치를 살폈다. 산타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끈끈한 눈 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제임스브라운도 웃으면서 그녀 쪽을 계속 관찰하고 있었다. 무슨 유머 스런 말을 꺼내려나 보다고 움찔하는 순간 그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가게여주인이 조심스럽게 일어서자 제임스 브라운이 나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다시 술자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김만우가 자리에 일 어나 건배를 제의하자 ‘브라보’ 하는 소리가 식당에 울렸다. 그리고 차례차례 나오던 안주와 술도 거의 끝나갔다. 산타나가 부르는 ‘예스터데이’ 에 우리는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내생 애 단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감성적인 목소리에 아드레날린이 머리부터 발끝 까지 곤두서는 듯했다.

12월 25일 드디어 한반도의 평화와 화합을, 더 나아가 통일을 염원하는 평화통일콘서트가 열리는 역사적인 날이 밝아왔다.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 서로 다른 생각과 시각을 갖고 있 는 남북한의 최초로 하나 되는 화합의 장인 콘서트를 가수로서는 세계최초로 군사 분계선 DMZ 에서 갖기도 된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다. 이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기 위해 군사분계선 DMZ 임시 공연장에는 수십 만 명이 넘는 인파와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취재 기자들과, 현지 에서 공연되는 콘서트를 생중계로 보내 드리기 위하여 미국 CNN, 영국 CBS, 일본 NAK, 중 국 CCTV, 독일, 프랑스를 비롯하여 30개국 나라에서 특파한 방송사 취재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 콘서트를 공동 주관한 남북한 실무진들이 한자리에 모여 평화통일콘서트를 개최 하게 된 의의와 취지를 설명하였다. 이 콘서트를 계기로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과 북한이 서로 다른 생각과 시각을 가진 이념논쟁에서 탈피하여 사랑과 화합으로 하나 되는 기틀을 마련하여 견고한 베를린 장벽이 무 너져 하나의 국가체제를 이룩한 독일처럼 38선이 무너지고 하루빨리 한반도의 통일을 이룩할

- 206 -

수 있는 발판을 만들자고 역설하였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통일을 염원하는 수십만 관객들 의 우렁찬 박수소리와 함께 카메라 후레시 가 터지며 ‘통일, 통일’을 염원하는 소리로 야외콘 서트장이 떠나갈 듯했다. 수수하지만 고급스러운 머리장식과 곱게 물들인 연분홍 한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성인 북한 측의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오르자 수십만의 관객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젊은 나이의 여자는 아담한 키에, 검고 윤이 나는 머리를 묶어 올리고 족두 대신 비녀로 질 려 고전적인 헤어스타일을 하였다. 수수하지만 연분홍 한복 겉옷에 장식된 화려한 황금빛과 은빛 자수로 수놓은 조끼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결 돋보이게 한다. 얼핏 보면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조선시대 왕비와 공자 같은 모습일수도 있으나 그 고전적인 한복사이로 살짝 보이는 볼륨감 있는 젖가슴은 그녀가 분명 섹시하고 매력적인 여인임을 말해준다. 정오의 햇살이 그 녀의 모습을 비출 때면 햇빛의 곡선을 따라 천차만별의 다양한 색으로 변하는 모습이 마치 일 곱 색깔의 무지개가 살랑살랑 춤추는 것처럼 보였다. 햇빛의 강도에 따라 예쁘고 아름답게 느 껴지는 보석처럼 보였다가, 또 때로는 네온사인 불빛이 아름다운 미국 라스베가스 야경처럼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환상적이었다.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에 이 현실자체가 너무 감격 스럽 다 고나 할까? 아님, 너무나도 황홀 하다고나 할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얼굴로 관객들의 뜨거운 성원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 그녀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남한 즉 사회자인 KBS 전국

노래자랑 MC인 남송해를 소개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40년 관록의 명MC인 남 송해 선생이 무대 위에 오르자 일명 남 송해 장미빚 인생’ 이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 무대에 오른 남한측 사회자 남 송해는 즉석에서 장밋빛 인생과 전선야곡을 불러 남북 분단의 아픔을 노래로 달랬 다. 드디어 평화통일 콘서트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군악대의 팡파렛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며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수천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남과 북이 대치하는 군사 분계선인 DMZ 야외 대공연장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 자요 작곡가인 안익태의 ‘코리아 환상곡’ 으로 공연의 막을 열었고 세계적인 지휘자 김명 훈 과, 남북한 연주단들로 구성된 통일 오케스트라와, 남북한 성악가와, 남북한 연합 합창단이 토 해내는 ‘우리의 소원’ 의 선율은 정말 하나 된 아름답고, 감격스러운 음악의 장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ㅡ 이 정성 다하여 통일ㅡ 통일이여 오라ㅡ

- 207 -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오라. 통일이여 오라. 남북한 평화와, 화합, 통일을 염원하는 평화통일 콘서트와 정말 귀가 막히게 잘 맞는 한민족 의 소원이 담긴 노래에 수십만의 관객들은 갑자기 숙연해졌다. 그리 고

이 콘서트의 하이라

이트인 우리들의 시간이 다가왔다. 수수하지만 고급스러운 머리장식과 곱게 물들인 연분홍 한 복을 입은 북한 측 사회자가 꾀꼬리처럼 고운 목소리로 라틴록의 거장 산타나와, 모든 이들의 왕이요 ‘미스터 다이너마이트’ ‘마스터 폴리즈 힘 셀프’ 라 칭하는 전설적인 뮤지션 제임스브 라운을 소개하자 DMZ평화통일 야외 콘서트 장은 열광은 도가니로 변했다. 영국 CBS 방송기자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선이 반듯한 이마 뒤로 올백으로 넘겼고, 머 리카락이 목덜미 근처에서 웨이브를 이루고 있는 제임스브라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위해 기자들이 넘어서 안 될 선까지 넘으며 취재에 열을 올렸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떠한 문제에 부딪쳤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폭력은 피해야 한다는 평화와 사랑의 내용을 담고 있는 마이 클잭슨의 ‘빌리진(Billie Jean)’ 과 ,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유 아 마이 선 샤인(You Are My hine)’ 커튼펄즈(cotton Fields)’를 불려 관객들의 감동을 이끌어냈다. 그의 트레드 마크 인 눈과 입으로 크게 웃으며 돌고래와 같은 팔세토에 정신이 번쩍 드는 목소리에 야외 공연장 을 가득 메운 수십만의 관객들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유아 마이 션 사인.’ 과 같은 감성적이면서 여성적인 리듬감이 느껴지는 노래를 정원 의 화사한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그런 아련한 감성적인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때 눈시 울이 붉히기도 했다. 제임스브라운의 공연이 끝나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끈적한 재즈음악이 라이브로 연주되고 있는 가운데 라틴록의 거장 산타나가 무대로 올라섰다. 미국 전설적인 맹 인 가수인 스티비 원더의 ‘이젠트 쉬 러블리’를 열챙했다. 거침없는 허스키 보이스와 흡사하면 서도, 또 때로는 애수어린 슬로템포 포크송 음악과 같은 서늘하고, 안개 같은 목소리로 록의 명곡들을 재해석한 음반 ‘기타헤븐’에 들어있는 주옥같은 명곡을 불려 그의 건재함을 알리기 도 했다. 콘서트공연장은 점점 그 열기를 더해갔다. 마침내 내 순서를 알리는 남한 측 사회자인 남 송 해 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대 뒤에 있는 대형 멀티비젼 화면에서 중국 하이난 섬에서 구 름같이 운집한 관객들 앞에서 기타를 치며 멜라니 서프카의 ‘세디스트씽’을 애절하게 부르는

- 208 -

내 동영상이 화면에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감정을 억누르고 마이크 앞에 섰다. 순간 수천 개의 카메라 스포트라이트가 터지며 구름같이 운집한 관객들은 숨소리 조차 죽이며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다양한 음악 적 재능을 선보여 미국 음악계를 발칵 뒤집 어 놓았던 나의 음악적 능력을, 50여 개국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한반도 군사 분계선 DMZ 야외 대 공연장에서 다시 한번 내 능력을 보여 달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는 눈빛으 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이크 맥도날의 ‘온 마이온’과 레이찰스의 ‘그대향한 사랑을 멈출 수 없어요( I can’ t stop loving you)’를 ‘통일을 향한 사랑을 멈출 수 없어요.’로 재해석하여 불려 수십만 관객들을 열 광하게 만들었다. 세계적인 뮤지션인 제임스 브라운과 산타나마저, 기존 원곡이 담고 있는 의 미를 다른 각도로 재 해석하여 발췌해내는 나의 뛰어난 음악적 능력에 혀를 내 두르며 감탄해 했다. 공연장대부분을 차지한 중년관객들은 ‘통일을 향한 사랑을 멈출 수 없다’는 의미심장한 가사를 음미하며,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손에 손을 잡고 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대 뒤편에 10미터 높이의 대형 물줄기 50여개가 하늘높이 치솟아 오르고, 수백 명 스턴트 맨 들이 와이어 줄을 타고 무대 위를 새처럼 날고 있는 와이어 액션 묘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깜작 출연한 초등학생 삼백여명의 아티스 틀이 평화와 화합을 상징하는 흰색 유니폼 을 입고, 수면위로 물방울이 흩어지는

일사분란 한 동작으로 무대 위를 종횡무진 누비더니

단 5분여 만에 대한민국 지도를 무대 위에 올려놓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 아름다운 아티 스들의 묘기에 수십만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갈채와 찬사가 쏟아졌다. 다음 순서인 세계적인 지휘자 김명훈의 지휘아래 남북한 연주단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와 남북한 성악가와, 남북한 연합 합창단이 토해내는 ‘그리운 금강산’ 과 ‘꿈에 본 내 고향’ 이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 그 장엄하고 역사적인 순간을 취재하기 위하여, 50여 개국의 방송사, 언론사 취재기자들이 카메 라 후레시 를 터뜨렸다. 다소 김빠진 공연이 되지 않을까 하는 관객들의 우려를 말끔히 해소 시켰다. ‘꿈에 본 내 고향’ 이 끝이 나고 아리랑이 울려 퍼지자, 무대뒤편에서 10미터의 높이의 대형 분수 50여개가 일제히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그 장엄한 광경을 빛내주기 위해 하늘에서 흰 눈이 소담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하얗게 내리는 흰 눈들이 약한 바람에 의해 공중에서 흩어져 마치 그 모습은 점점이 나부끼다 흩어지는 흰 나비 때처럼 보였다. 오늘의 메인 공연 이벤트 인 김만우 기획사 소속가수인 5인조 걸그룹 ‘걸스걸스’ 의 공연이 끝나고, 마침내 7~80년대

- 209 -

한국을 대표하는 통기타 가수인 김만우가 수십만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 위로 올라섰 다. 그의 불멸의 히트곡인 ‘저녁노을’을 불려 콘서트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폭발적인 박수

갈채를 받았다.

그 리고 분단의 아픔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상징하는 의미가 담긴 나 훈아의 ‘녹 슬은 기찻길’ 을 그의 구성지면서도, 한 맺힌 음색으로, 설움에 복받쳐 흐느끼는 듯한 감정을 쥐어짜는 듯 한 음정으로, 맑고 꾸밈없이 불렸다. 휴전선 달빛아래 녹슬은 기찻길 ㅡ 첫 소절부터 분단의 아픔을 형상화 하고 있는 그 의미의 노래에 수십만 관객들은 갑자기 숙연해졌다. 그리고 후반 부 부분에 ‘전해다오. 전해다오 고향 잃은 설움을ㅡ녹슬은 기찻길아ㅡ어머니 정 그리워 우ㅡ 는 이 마음’ㅡ 이 애절한 부분에서 마침내 김만우는 복받쳐 오르는 서러운 감정을 이기지 못 하여 목 놓아 울고 말았다. 순간 수십만의 관객들은 하나같이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흐느 껴 울기 시작했다. 평화통일 야외 콘서트 대 공연장은 눈물바다 되고 말았다. 여기저기에서 흐느껴 우는 관객들 의 울음바다에 수천 명의 외국 기자들과 외국 방송사 취재 기자들은 손등으로 연신 눈물을 찍 어내고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 탓에 더욱 침울해진 콘서트 공연장의 아련한 공기가 열기를 띤 피부에 휘감겼다. 군사 분계선 DMZ 야외 콘서트 공연장 무대 위로 선명한 무지갯빛 불꽃이 떠오르는 참이었다. 마지막 순서로 오늘의 공연을 빛낸 나를 비롯한 세계적인 뮤지션 제임스 브라운과 산타나 김만우가 함께 무대로 올랐다. 비명인지 감탄인지 모를 환호 같은 소리가 관 객들 사이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 잠시 후 우리들의 음악에 매료된 관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우리들의 이름은 연호하였 다. 세계적인 지휘자 김명훈이 지휘하는 통일 오케스트라가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을 연 주하고 있었다. 그 반주에 맞추어 제임스브라운이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렸다. 다이나믹하면서도 카리스마가 넘치는 레전드 음악이 아닌 전혀 새로운 음악의 창법에 수십만의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미국인의 음색이 아닌 한과 눈물로 점철된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노래를 부르는 제임스 브라운의 전혀 색다른 노래실력에 미국 CNN 취 재 기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낸 그의 뛰어난 노래실력에 MC40년 관록이 빛나는 사회자 남 송해 마저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선량한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마이크를 쥐고 있는 손등으로 떨어져 물큰한 땀과 섞였다. 남북한 성악가와, 남북한 연합 합창단이 토해내는 ‘우리의 소원’을 끝으로 모든 공연의 일정이

- 210 -

마무리 되었다.

남북한 분단의 상징인 군사분계선 DMZ에서 개최된 평화통일콘서트가 성공적으로 끝이 나면 서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남북한의 관계가 평화와 하합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북한 노동당 신문과 조선중앙 TV가 군사분계선 DMZ에서 개최된 평화통일 콘서트 공연장면을 실시간 마 다 방송으로 내 보내며 평화통일콘서트가 가지는 이미지의 중요성을 전 인민들에게 대대적으 로 홍보하였다. 북한이 가장 적대시하는 영원한 인민의 적인 미국인 뮤지션이 자국어인 영어 가 아닌 한국어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인민의 적이요, 남조선 통일을 방 해하는 극악무도한 나라라고 적대시하였던 미국인들을 새롭게 보는 대변화의 무드가 조성되었 다. 지난 반세기동안 단절되었던 국교수립의 움직임까지 보이면서 급기야 차관급으로 구성된 북미 대표단들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만나, 대립과 갈등으로 반복된 반목의 관계를 청산하 고 협력과 상생의 관계로 전환하는 놀라운 업적까지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지구촌의 유일한 분단국가요,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화약고와 같은 가장 위험한 분쟁 지역인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의 무드를 가져온 평화통일 콘서트 공연을 담은 음반이 한 달 만 에 전 세계 50여개 국가에 불티나게 팔려, 세계 음반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6억6천 만장의 음반이 팔려 나가는 대 판매고를 기록했다. 엄청난 음반 판매량 때문에 음반 매니지먼 트를 기업화할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수입을 벌어들였지만 우리 네 사람의 합의하 에 수입금 전부를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 돕기 성금으로 내놓았다. 이런 선행적인 이유 때문에 제임스 브라운과, 산타나 나와 김만우 사장은 한국뮤지션 최초로 세계적인 뮤지션대열 에 합류했다. 그래미상 유력한 후보로 오르는 쾌거를 이룩했다. 나와, 김만우의 음악을 거론할 가치가 없는 음악이라고 혹평했던 한국가수협회와, 한국음반협 회, 한국음악평론가 협회, TV지상파 매체와, 언론매체 관계자들도 이런 세계적인 추세에 발 빠르게 대응했다. 불과 한 달 전까지 나의 음악세계를 저속한 3류 급 가수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폐쇄적이고, 봉건적인 음악이라고 비평했던 언론사 음악 관계자들도, 언제 그런 기사를 썼느냐는 것처럼 내 칭찬하기에 급급했다. 저 멀리에 쟁반크기만한 태양이 보였다. 그 강렬한 태양을 보고 있는데 김만우 사장이 내 옆으로 다가와 중얼거렸다. “향기야, 언제까지 세상과 등 만지고 살 거야, 이제 세상을 용서하고, 세상 속으로

- 211 -

나와, 나와 손을 잡고, 하나님이 준 음악적 재능을 세상을 위해 쓰면 안 되겠니?” “형님 말씀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저는 이 모습 이대로가 좋아요.” “동생의 마음을 내 모르는 것만 아니지만 이쯤에서 못 이기는 척 내 의사를 따라 주 면 안 되겠어?” 눈을 가늘게 뜬 김만우의 눈가에 침통한 빛이 서렸다. 잠시 침목이 있었다. 아침부터 그야말 로 산을 에이는 혹독한 겨울날씨였다. 이가 떨리도록 추웠다. 겨울햇살 속에서 천천히 눈을 뜨자 천장의 형광등이 평소보다 선명하게 보이면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앞주머니에 있는 담배로 손을 뻗었다. 갑에서 한 개배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김만우는 바 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라이터에 밝고 선명한 불길이 오르면서 내가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이 붙였다. 눈앞에서 주홍색 조그만 불이 일면서 빨갛게 타 들어갔다. 담배를 문 입 술에 힘을 주면서 한 모금 담배연기를 깊이 들이키자 목구멍 끝에서 저릿한 경련이 일었다. 입안으로 삼킨 담배연기를 입 밖으로 길게 내뿜으니 담배연기에 섞여 메케한 매연 같은 냄새 가 점자 엷어졌다. “그럼, 동생은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담배 연기 속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담배를 문채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김만우가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중얼거리고 있었다. 살짝 와 닿는 어깨에 그의 뜨거운 제취가 느껴졌다. “누나가 경영하는 음악다방에서 DJ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입니다.” “누님이

경영하는

음악다방이라면

혹시

백마역

부근에

있는

뮤지션을

말하는

건

가?” “예.” “동생같이 것을

뛰어난

생각하지

음악가가

않는가.

그

조금만

실력을 더

썩히는

열심히

것이

노력하면

국가적으로 한국인

큰

손실이라는

뮤지션으로서

최초로

그래미상 수상은 물론, 빌보드 차트 마저 석권하여 한국인의 위상을 전 세계적으 로 떨칠 수 있는 이런 기회를 포기하다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 김만우는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굵고 선명한 눈, 둔탁하고 투박 한 입술, 햇빛을 보지 않고 사무실에서만 틀어박혀 생활한 그의 얼굴피부가 여자의 피부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윤기를 품고 있어서, 이가 딱딱 시릴 정도로 추운 날씨 때문에 더 창백하게 보였다. “우리나라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빛내주실 분은 제가 아니라 형님이 더 적임자 입니

- 212 -

다. 그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그 실력을 인정받 지 못했던 분이 바로 형님이 아니겠습니까. 이 땅에 제대로 된 가수들이 빛을 보 지 못하고 요계를

무명의 설움에

좌지우지

했던

한탄하고 있을

어두운

한국

때 실력도 없는

가요계를

이제형님이

가수들이 우리나라

가

나서서

해

교통정리를

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생도 그 일에 같이 동참하는 게 어떤가.” “저는

그

일의

적임자가

아닙니다.

대중들을

어필할

수

있는

히트곡

하나

없는,

무명에 가까운 제가 어찌 그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형님이야 말로 그

일에

통틀어

가장

적합한

형님의 불멸의

금도

노래방에서

그런

뛰어난

가수로 공

김,

이런

적임자

오

한심한

히트곡인

가장

음악적

취급하여

이지요.

많이

실력을 노시봉

7~80년대,

‘저녁노을’을 불러지는

가지고

마치

7~80년대

작태를

형님이

나서서

능가할 수

지금 있는

우리나라

바로

형님의

있으면서도

한국

가요계는

조차

통기타 원래의

형님을 음악을

모습대도

가요계를

곡이 없습니다.

노래가

콘서트에서

아무개가

그리고

노래가

아닙니까?

형님을

배제시키지

지

형편없는

않았습니까.

대변하는

것처럼

우상화하는

되돌려

놓아야

하지않겠습

니까? 가수는 대중들의 흥행몰이다. 인기로 그 실력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음 에

의한 음악적

않겠습니까?

실력으로만 가수의

예전이나,

지금이나

역량이

평가받는 그런

우리가요계를

한번

풍토를 조성해야

되돌아보십시오.

뛰어난

하지 음

악적 실력이나 능력보다는 돈, 배경, 권력을 등에 업고 음악을 하는 이런 저속한 가수들이 일들이

우리가요계를 다시는 우리

평정했다는

사실은

가요계에 일어나지

삼척동자도

못하도록

다

아는

형님이 나서서

사실입니다. 가요계 혁신

이런 운

동을 해주십시오. 이렇게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내 마음을 전했다. 가요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에서 우려 나온, 내 의중을 깊이 공감한다는 뜻에서 김만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나는 그와 헤어지고 음악다방 뮤지션으로 향했다. 오후 햇살을 받고 보석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보 도길 에 숨이 컥 막히도록 행복한 아지랑이가 가물가물 피어올랐다.

- 213 -

- 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