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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우리 삶의 양식과 사회의 모습을 규정하는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더 좋은 삶과 사회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노동의 전환”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지난 겨울 발간한 <모심과 살림> 2호에서는 “새로운 삶과 사회를 여는 노동의 대안”을 주제로 우리 사회 노동의 현실을 진단하고 변화 가능성을 탐색해 보았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마련한 이번 자리가 좋은 노동(일)과 좋은 삶에 대해 더욱 넓고 깊게 이야기하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진행 15:00~15:20 소개와 인사

15:20~15:45 주제발표1

“한국사회 노동의 현실과 대안”

황 덕 순 |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15:45~16:10 주제발표2

“생명의 시선과 탈근대적 노동”

김 용 우 | 원주 한알마을 이사장

16:10~16:50 패널토론 김 재 겸 | 한살림서울 상무이사 이안소영 | 여성환경연대 정책국장 임 정 희 | 문화연대 공동대표

16:50~17:10 휴식

17:10~ 18:00 전체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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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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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 2

생명의 시선과 탈근대적 노동1) 류 하 |원주 한알마을

근대문명과 노동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 인간과 인류사회의 진화는 노동을 기초로 이루어져 왔다. 대륙을 이동하면서 수렵과 채 취로 종을 이어가던 인류는 수렵과 채취의 한계, 도구 사용과 초기 노동에 따른 진화로 점차 정착 사회를 이루었다. 애초에 노동은 생존과 생계를 위한 것이었지만, 잉여의 발 생으로 통치자와 제사장이 있는 국가가 만들어지면서 일하지 않고 먹는 계급이 생겼다. 인류 역사에서 일하지 않고 소득을 얻거나 직접노동의 비중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소 득을 얻는 노동의 발생은 오늘날 우리가 염원해 마지않는(?) ‘욕망의 노동’의 원천이 다. 현대 자본주의는 ‘생계를 위한 노동’과 ‘욕망을 위한 노동’이 변주를 이루는 사회이 다. 일부 구성원들은 여전히 생존의 필요, 즉 needs를 위한 노동을 하고 있지만, 일부 에서는 욕망, 즉 wants를 위한 노동과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근대문명은 무제한 성장의 패러다임 속에 인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약탈적 성장경제를 구축해 왔다. 사실 근대문명의 역사는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함께 시작 된 유럽세계의 비유럽세계 침략과 약탈에 기초한 것이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약탈과 인 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에 기초한 것이다. 인류가 지금과 같은 물질문명과 성장경제를 누 리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이며, 언제까지나 성장이 지속될 것이라고 믿는 것 자체도 허 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주류의 인식과 정책들은 지금 1) <모심과 살림> 2호에 수록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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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같은 경제체제와 성장이 지속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노동 역시 마찬가지로, 그러한 성장경제가 지속될 것이란 믿음 하에, 상품의 가치를 생 산하는 노동의 조건과 체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자본의 경우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 있어 노동의 조건과 체계를 고민했다면,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의 사회성과 해방을 중심으로’ 노동의 조건과 체계를 고민했다. 당연히 노동자가 미래 세상의 주인공 이고 이들이 주동이 된 혁명과 국가에 의한 사회 통제가 공산사회에 이르도록 해준다는 사고가 근대의 한 축을 지배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거대한 실험은 자본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산력이 높지도 않았고 인간 자율성을 증대시키지도 못한 채 실패로 끝나 대부분 국가자본주의로 회귀하였다.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에도 노동가치 이론에 근거한 노동운동과 노동 정치운동은 계속 되고 있지만, 달라진 점은 노동계급이 변혁의 주도세력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세력이 아 니라 점차 이익집단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도 더 이상 혁명 이나 사회주의 또는 노동계급 독재를 이야기하지 않고 대부분 사민주의적 진보담론으로 전환했으며, 여전히 성장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는 듯하다. 최근 나타나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에서의 노동은 그 자체로 근대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된 진보적 노동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 역시 대부분 해당 조직의 지 속적인 성장을 전제로 한 노동복지 운동의 하나로 제한되고 있다. 몬드라곤이나 볼로냐, 퀘벡 지역의 사례가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의 틀을 가지고 사적 소유에 근거한 자본 과 경쟁하면서 ‘협동촌 운동’과 ‘협동조합의 확산’이라는 협동운동의 진전을 보여주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근대문명의 위기를 넘어 ‘성장의 멈춤’이라는 탈근대의 측면, 즉 자연과 인간의 공생, 인간과 인간의 공생이라는 가치, 그리고 인간의 성숙과 사회적 공동체성의 진화 측면에서 노동 문제에 접근한 모델은 아닌 것 같다. 따라서 우리가 근대문명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노동의 성격’을 다루고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한다면, 근대문명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성장경제의 허상과 ‘진보’의 한계를 면밀히 보아야 한다. 근대경제의 근간이 되는 주체철학과 근대문명의 가치에 대한 성찰 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진화적 성숙과 인류문화의 공동체적 진화라는 관점 에서, 인간 내면의 욕망과 절제, 인간의 신령스러움(영성) 등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현대사회의 노동이 더 이상 필요를 위한 노동이 아니라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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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노동’이라는 점이다. 경제성장 신화에 기초한 노동은 생산된 물품이나 가치의 분배에 대한 문제의식만을 증대시킬 뿐 노예노동을 벗어난 노동해방운동의 방향, 또는 ‘노동의 진화’ 방향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토대 위에서는 모든 노동에 ‘진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터무니없이 정당성을 부여하 는 것일 수 있다. 나아가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특정 노동과 산업은 정당하지도 않 다. 이를테면 군수산업이나 핵 관련 산업 같은 것은 그 자체로 반평화적이고 반생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욕망의 노동에 있어서는 그 욕망에 따른 편리와 복리의 증진이 누군가의 노동에 근거한 것이거나 자연에 대한 약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찰을 바탕에 둘 때 비로소 생명협동운동 및 지역 공동체운동에서 노동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원칙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협동운동은 대체로 자본 주의적 경제성장과 근대문명의 욕망과 편리를 전제한 가운데 노동이 갖는 사회·윤리적 성격에 초점을 맞춰 왔지만, 공동체운동에서의 노동 문제는 자연과 관계 맺는 노동의 진 화적 성격과 공동체적 성격의 규명, 이에 따른 노동 윤리의 규명과 제정 과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생명운동 관점에서 노동 문제를 짚어보고 생명협동운동 과 지역 공동체운동에서 노동 문제에 접근하는 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근대문명의 성찰과‘성장의 한계’ 근대문명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설명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최근에 신시아 브라운Cynthia Stokes Brown이 쓴 『빅 히스토리』와 김종철 선생의 “성장시대의 종언”이라는 글에서 많 은 영감과 시사를 받았다. 이 두 자료는 1972년 로마클럽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나온 지 40주년을 기념해 2012년 3월 스미소니언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그림1>을 공통으로 다루고 있다. 이 그림은 호주 물리학자 그레엄 토너가 「성장의 한계」 보고서에 있던 시 뮬레이션 예측 도표에 2000년 시점의 현실 데이터를 입력해 실제와 예측이 어느 정도 맞았는가를 검토한 결과를 담고 있다. 해당 도표는 모두 여섯 항목-세계 인구, 비재생 가용자원, 1인당 산업생산물, 1인당 서비스, 1인당 식량, 환경오염-에 대해 2100년까지 어떻게 증감할 것인지 예측한 것인데, 여기에다 1970년부터 2000년까지의 실제 추이를 연결시켜 본 결과(진한 고딕선) 1972년의 예측(점선)과 놀랄 만큼 일치하고 있음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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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로마클럽의 예측과 30년 후 현실 비교

여주는 것이 이 그림이 전하는 핵심이다. <그림1>에 표현된 1970년에서 2000년까지의 예측과 실제 추이, 그리고 2030년이라는 기준선을 중심에 놓고 볼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의 자연 파괴적인 성장경제 체제는 2030년을 전후로 붕괴할 것이다. 또한 2030년 이전에 1인당 식량 생산이나 서비스 생산, 산업 생산 등은 정점을 찍을 것이다. 둘째, 2030년을 기점으로 세계 인구 증가도 정점을 찍을 것이며 그 이후로는 계속 감 소할 것이다. 셋째, 환경오염 역시 2040년경을 고비로 점차 완화될 것이다. 넷째, 2100년이 되면 세계의 산업생산을 비롯한 모든 지표가 1900년 수준으로 퇴보 할 것이다. 자원의 경우는 1900년의 1/4수준까지 떨어질 것이며 지구에 어떤 파국상황이 닥칠지 알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진단에는 단서가 붙어있다. 인구 증가 억제, 산업 성장의 제한, 적정기술의 개발 및 보급, 국제적 협력 등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경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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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한계」 저자들은 인류가 적절한 실천 지점을 20년 정도 놓쳤다고 보았다. 만일 20년 전에 인류 전체가 위험을 완화하기 위해 적절한 실천을 했다면 60억 정도의 인구 로 지구가 안정을 이루었을 거라는 뜻이다. 이들은 또한 현재 지점에서 인류가 삶의 태 도를 바꾼다면 약 80억 수준의 인구가 현재 유럽의 저소득국가와 비슷한 생활수준에 만 족한다는 가정 아래 파국 상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근대문명은 자본과 노동가치 중심 사회이다. 그 안에서 노동은 자본에 고용된 노예노동 이며 모든 상품의 가치는 노동만이 창출한다.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제시된 사회주의는 가치 창출의 주체인 노동자가 단결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평등한 분배경제를 실현하는 것 을 목표로 했지만, 이 역시 경제성장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경제성장이라는 것은 근대문명의 핵심 키워드다. 성장이 멈춘다는 것은 물질 량의 감소를 의미하며, 이것은 곧 노동력과 노동량의 감소를 의미한다. 물론 자본주의 내적으로도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면서 기계화나 자동 화, 첨단화를 통해 고용노동의 양과 질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낮아진다. 이것은 역으로 노동의 입장에서 볼 때, 근대문명이 사적 소유와 자본 축적을 통해 성장해왔고 ‘필요 노 동’에서 ‘욕망의 노동’으로의 변화를 끊임없이 강요해 왔지만, 종국에는 가차 없이 노동 을 버리거나 천시할 것임을 입증한다.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길이 막혀 있을 때 노예적 고용노동이 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마음과 삶의 자세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성장이 멈추어 가 는 상황을 맞게 된다면 엄청난 사회적 갈등과 계급 갈등, 인종, 민족, 국가 간 갈등 속 에서 예측하기 힘든 파국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클럽 보고서의 예측과 현실 진단은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 다. 이것은 현재와 같은 경제성장과 근대문명의 번영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인 만큼 지극 히 ‘비정상적인 시기’가 끝난 이후 인류의 삶과 자연과의 관계를 재구성할 것을 주문하 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적 협동운동의 소유와 노동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을 당시는 사회 전체적으로 모순과 고통이 극심한 상태였다.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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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노동 조건, 평균 수명, 아동 근로, 주거 환경, 교육, 보건 등 모든 분야에서 참혹 했던 당시 현실은 생산력 증대와 사회의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불합리하고 불평등하고 비 인간적인 사회의 단면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협동조합이나 공동체, 사회주의나 공산주 의, 복지사회, 또는 보다 합리적인 자본주의 등 다양한 대안적 논의와 실천이 나타났으 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여러 논쟁을 동반하면서 이어지고 있다. 대체로 진보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당시의 문제를 ‘생산 수단의 소유권’이 지닌 사적 성격과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사이의 모순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았다. 로버트 오언, 윌리엄 킹, 윌리엄 톰프슨, 푸리에와 생시몽 같은 협동조합이나 공동체 사상가들 이 그러하고, 맑스나 엥겔스 등과 같은 공산주의 사상가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산업자본 주의 문제의 핵심을 노동 결과물의 전유와 분배의 불평등, 즉 ‘노동의 소외’로 보았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소유 형태에 있어 ‘사회적 소유’를 핵심으로 주창했지만 현실에 서는 ‘국가적 소유’거나 ‘집단 소유’였다. 국가권력에 의해 모든 경제 행위가 중앙 통제 되는 국가계획경제, 시장교환이 아닌 강제 배분 경제 속에서 모든 인민은 완전 고용되지 만 직업 선택의 자유와 노동의 동기는 없다. 이렇듯 노동의 사회화를 기계적 평등주의로 받아들인 결과, 현장에서의 노동은 창의적이거나 자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 자율성의 신장과 성숙을 신뢰하지 않거나 억압하는 것으로, 근대 산업사회에 내재 된 기계적 세계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협동조합 선구자들의 경우 대체로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인식은 사회주의자들과 비 슷했지만 해결 방안은 달랐다. 대표적 협동조합 이론가인 윌리엄 킹은 당시 산업자본주 의 문제를 노동의 결과물이 노동자들에게 모두 돌아가야 한다는 ‘전노동수익권’ 개념으 로 해결하고자 했다. ‘자본’보다는 ‘누가 소유하느냐’가 더 큰 문제라고 보았던 그는,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만들고 가입하기만 한다면 노동과 자본이 결합할 수 있고 노동자 가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되어 모순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킹은 ‘산업 자본주의적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협동조합 자본’과 노동의 관계로 바꿈으로써 ‘전노 동수익권’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노동자들이 소비조합을 만들고 이 윤을 낸다면 ‘출자금과 이윤’이라는 두 가지 자본 축적의 원천을 갖게 되고 이를 이용해 생산자협동조합을 만드는, 즉 ‘협동조합 조합원이 노동 생산물 전체를 소유’하는 협동조 합 공동체 건설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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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오언과 윌리엄 톰프슨은 생산 수단을 공유하는 구체적인 공동체를 구상하고 실천 한 사람들이다. 이들 역시 자본의 원천에 대한 생각의 차이는 있지만, 공히 공동체 내에 농업과 제조업, 소비조합, 학교, 주택 등을 갖춘 이상촌을 구상하였다. 톰프슨은, 조합 원이 농업과 제조업에 교대로 근무하며 자발적 노동을 통해 구성원 전체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투자를 위한 잉여의 발생을 염두에 두었다. 이렇듯 초기 협동조합운동가들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을 넘어서기 위해 노동자가 자본을 소유하는 문제에 몰두했다. 이들은 자연파괴적인 성장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하는 문제, 즉 근대 산업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포괄적인 탈자본주의화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이들이 초점을 맞춘 것은 공동 소유를 통해 ‘노동 소외’를 극복하고 ‘노동의 사회성’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몬드라곤은 초기 협동조합 사상가들의 자본과 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을 구 체화한 실현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몬드라곤은 1956년 설립 이래 노동자 소유 기업 으로써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성장을 함께해 왔다. 그 과정에서 1980년대 초반의 세 계 불황기를 내부적 진통과 함께 겪었으며, 2008년 이후 세계 경제위기 속에서 제조업 그룹의 매출 감소와 고용 감소 등이 나타나기도 했다. 최근 몬드라곤의 소비조합 에로스 키의 경우 지속적인 인수합병 과정에서 비정규직 비중이 늘어나고 있으며 성장을 위해 해외 법인을 확대하고 있고, 해외 법인 노동자와 스페인 내 노동자의 대우가 다른 것으 로 파악되고 있다. 즉 성장추구적인 세계자본주의 내에서 노동중심성과 노동자 공동체성 을 추구하며, 초기 협동운동가들이 가졌던 노동의 사회성에 대한 문제의식과 자본주의의 합리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몬드라곤 모델은 분명 수많은 상찬에도 불구하고 근대 패러 다임 하에서의 제한된 모델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몬드라곤을 포함한 협동조합에서의 노동이 탈근대 문명의 보편 노동 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문명이 갖는 성장의 속성을 넘어서 자연과 인간의 공생에 기초한 자족의 추구와 이에 기반한 지역공동체적 자립 지 향 모델로 거듭나야 한다.

노동에 대한 근대적 시선과 생명운동의 탈근대적 시선 초기 산업자본주의에서 현대자본주의로의 흐름 속에 노동의 성격은 많이 변화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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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명의 극점에 이른 현실에서, 노동은 (소유권 의식의 변화와 생명의 존재 양식에 기초하여 볼 때) ‘사적 소유’와 ‘개인주의 노동 양식’으로부터 ‘공동체적 소유’와 ‘자율 노동’에 입각한 ‘공동체적 자기고용 양식’으로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 문제는 자본에 고용된 노동의 문제이며, 총자본 대 총 노동의 문제로 파악한다. 이는 자연과 관계 맺는 양식으로, 또는 생명존재와 공동체의 지속성에 필요한 자립 및 자급 방안으로 노동을 바라보는 생명협동운동의 시선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물론 생명운동 역시 근대문명 안에서 발생하는 노동 착취와 약탈 구조에 문제의식을 갖지만, 보다 큰 차원에서 근대적 자본과 노동체계 일반이 생명 생태계를 파 괴하고 생명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문명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다. 협동조합이나 공동체, 사회적 기업 등은 그 자체로 개인의 소유나 국가의 소유가 아닐 뿐더러 그 지향도 자본주의 일반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에 있다. 소유권 문제를 공동체 적 소유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노동 착취를 최소화하고 분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가능 하게 했지만, 자연에 대한 약탈적 착취를 통한 욕망의 추구와 자기 파괴적 성장을 멈추 지는 못했다. 또한 보편교육은 인간의 합리적 의식은 높였지만 편리와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제어하지는 못했다. 이에 비추어 생명운동이 지향하는 바는 결국 비재생적 자원을 이용해 성장과 욕망을 추 구하는 경제를 줄이는 대신, 재생적 자원을 이용하는 경제를 통해 생명의 터전인 지구에 서 지속가능한 삶을 실현하고 자연과 인간이 공생, 상생하는 공동체사회로 나아가는 데 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자급에 기초한 자립경제를 지향하며, 노동 문제에 있어 외부의 기제에 의해 움직이는 노예노동이나 타율노동, 욕망의 노동이 아니라 공동체적 존재로서 ‘자율노동’에 기초한 자기고용(self-employment) 노동을 지향한다. 본래 자기고용은 자 영업자들의 노동을 의미하지만, 공동체에서의 노동을 진화된 사회적 고용 형태로써 ‘공 동체 자기고용(communal self-employment)’ 개념으로 정립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필자 는 탈근대적 노동운동의 방향으로 ‘자율노동’과 ‘공동체 자기고용’을 적극 검토해야 한 다고 생각한다. 자율노동이란 인간의 존재적 각성에 의한 자발성과 열망에 기초한 노동이다. 이는 우주 적 존재로서 존재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동, 그리고 공동체 및 이웃(사회)을 위한 효 용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두 가지는 현상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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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자율노동은 개인적 차원에서 인간의 내적 성숙을 위한 수행 과정과 연동되며 또 한 공동체의 성숙 및 사회화와도 연동된다. 그것은 외부의 규율이나 지시, 대가보다도 내면의 깨우침과 성숙, 자발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노동이다. 다른 구성원에게 떠맡기는 노동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고 한몸임을 각성해가는 과정으로서의 노동이다. 노동의 결과 물 역시 존재 가치에 따른 기본 배분을 원칙으로 형평성과 민주성, 공동체성에 따라 분 배되어야 한다. 물론 효용 가치에 따른 노동을 ‘성과’에 따라 배분할 수 있지만 이것은 지극히 제한된 범위여야 하며 공동체 성숙 과정의 하나로써만 기능하는 것이 좋다. 따라 서 ‘공동체 자기고용’이란 공동체의 지향과 삶에 동의하고 그러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 공동체 구성원이 됨으로써 공동체 내에서 필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며 그것은 온전히 자 율노동에 기초한다. 협동조합은 결사체로서의 성격과 사업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기에 노동 역 시 결사체로서의 노동과 사업체로서의 노동이 존재한다. 전자가 존재 가치로서 사회적 지향에 대한 노동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효용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다. 예를 들어 한살 림의 경우 실무자(직원)와 활동가가 존재하는데 둘 다 ‘한살림의 지향과 삶’이라는 생명 가치에 근거하지만 실무자의 경우 훨씬 사업체적 성격의 노동에 가까이 가 있는 반면 활 동가는 결사체로서의 자율노동에 가깝다. 한살림의 활동가들은 내로 한 발짝 더 접근하 는 길이다. 노동해방을 향하는 노동 과정, 노동조직의 표현이며 미래의 유력한 노동조직 형태이다.”(김영곤.『한국의 공동체 자기고용』. 선인. 2009.)적 성숙을 통해 한살림 가 치를 삶에서 실현하는 삶의 지도자로서 길을 모색하고, 그렇게 되도록 내부에 장치를 만 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활동가들은 한살림 활동을 통해 조합원 전체가 성숙하고 삶의 지 도자로 성장해 나가도록 도모해야 한다. 물론 이 경우에 실무자의 영역과 겹치는 활동가 의 노동 영역은 조정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실무자는 자신의 노동 중심이 효용 가 치의 노동에 주어지지만 ‘공동체 자기고용’의 정신에 따른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각성과 성숙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공동체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 어야 한다. 결국 공동체의 자율노동과 자기고용은 존재 가치의 노동과 효용 가치의 노동으로 구분되 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외형상으로 이것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양자는 통합적으 로 공동체 내의 노동으로 존재하며 공동체의 존재성과 효용성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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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노동을 통해 공동체의 사회화를 실현한다. 양자의 노동은 둘 다 모두 존재 가치로서 의 존엄성 차원에서 존중되어야 하고 그에 걸맞는 내재적 성숙과 외재적 효용 생산이 함 께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이 모든 가치를 생산한다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 일이다. 생 명사상의 근본은 모든 존재의 상호 의존성과 신령스러움에 있으며 그에 따라 사람 또한 자연의 한 부분일 뿐임을 늘 강조한다. 그것은 노동이 모든 가치를 생산하고 규정한다는 근대적 시선을 벗어나는 것이며 우주 만물에 의지해 진화하는 존재로서 ‘일하는 사람’으 로 자신을 파악하는 것이다.

생명 가치 중심의 노동과 자기고용 오랫동안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노동, 행복한 노동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은 채 자본과 국가에 고용되기 위해 공부하고 기술을 익혀 왔다. 더러는 부모의 도움으로 자영업을 하는 사람도 있고 ‘사(士, 師)’ 자 돌림의 자격증을 가지고 자본에 고용되지 않은 채 사는 사람도 있다. 이는 모두 먹고사는 문제이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지향이었 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의 문명은 지속가능한가? 내 삶은 지속가능한 삶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노동하는가? 내 삶의 행복을 위한 노동은 무엇 인가? 나의 노동은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노동인가? 노동은 반드시 대가를 전제 로 하는가? 나의 노동이 나를 존재적 성숙과 깨달음으로 안내하고 있는가? 생명협동의 가치에 기반한 조합은 조합원이 공동 소유하며 자연과 이웃의 조화로운 생산 을 함께 나누고 잉여가 생기면 공동체운동의 목적에 따라 균등하게 나눈다. 생명협동운 동은 생명의 본질적 속성인 상호 의존적 존재들 사이 공생의 원리에 기초해 있으며, 공 동체적 생산과 노동, 소유, 호혜적 거래의 끊임없는 확장이자 이를 통해 자기 존재와 사 회를 성숙시키는 진화운동이다. 이는 곧 생산 방식에서부터 운송과 배송, 소비에 이르기 까지 전 과정에서 생명 가치에 입각해 물품과 노동을 바라보고 생명 가치의 확장과 생명 공동체운동의 지속가능성에 맞추어 적절한 배분을 합의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생명협동운동의 이러한 속성은 모든 과정에서 생명 가치와 공동체적 가치, 그리고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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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확장적 가치들을 중심에 놓고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더불어 그러한 기초 위에서 성숙을 지향하는 진화적 관점으로 노동과 분배를 바라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 기에서의 ‘분배’는 단순히 소비자 조합원이 지불하는 화폐 가치의 분배만을 의미하는 것 이 아니다. 어떤 물품이건 가치는 가격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보 면 모든 물질은 우주적 역사성과 현존의 가치를 가질 뿐 노동이 창출하는 가치(사용 가 치나 교환 가치)는 그리 크지 않다. 즉 각각의 과정에 관여하는 모든 자연과 인간의 가 치를 포함하기 때문에 분배에 있어서도 공동체적 삶을 위한 각자의 역할에 대한 배려와 형평에 따른 고려가 있을 뿐이다. 즉, 생활에 필요로 하는 물품을 나눈다고 할 때, 각각 의 노동은 가격이나 가치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존재 그 자체로서의 가치(존 재 가치)에 더하여 물품을 생산하고 운송하는 역할에 따른 노동 비중(효용 가치)으로 파 악되어야 한다. 물론 쉽사리 헤아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논의는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산자든, 실무자나 활동가, 소비자 조합원이든 생명협동운동의 가치에 대한 형식적 동의를 넘어 삶의 가치로서의 동의가 있어야 하며, 이러한 지향에 대한 합의와 내적인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그 전제 위에서 실무자나 활동가는 자본에 고용된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가치와 노동이 일치하는 ‘자기고용' 의 자족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전제 위에서만이 생산자와 소비자 조합원 을 매개하는 의미 있는 노동 및 활동의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 그것이 생산자와 소비자 들에 의해서도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흐름과 사회적 구심력 때문에 실무자와 활동가들이 자신의 노동을 생각하는 관점과 생명협동운동이 제시하는 노동의 방향이 늘상 일치하기 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이러한 근대체제와 사회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 할 수 있는 자율노동의 힘은 생명협동운동을 확장시키는 동력이 될 것이다. 생명협동운 동의 경제활동과 노동이 인간의 진화와 성숙에 기여하는 조건을 만들어내야 하며 이를 위해 자신의 가치관이 자신이 일하고 활동하는 공동체의 지향과 동일한 방향으로 향해 있는지 끊임없이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만일 생명협동운동이 시장에서 다른 기업과 경쟁하려 든다면 자연히 성장을 목표로 해야 하고 실무자나 활동가들에게 존재적 각성에 의한 노동보다는 효용 가치에 입각한 노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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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일 협동기업의 시장 독점을 지향하는 근대적 협동운동과 다를 바 없으며, 결국은 일하는 사람들이 공동체적 자율노동에 대해 회의하게 될 것이고 근대 노동체계를 선호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생명협동운동은 생명 가치에 기반한 다양 한 협동운동으로의 확장과 연대에 기초해 탐욕적이고 착취적인 노동시장을 호혜적 노동 선택으로 대체해 나가는 것과 함께, 공동체 내의 모든 노동이 ‘자율노동에 입각한 자기 고용’으로 존중될 수 있도록 정책·환경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것이다.

‘노동’개념의 변화를 모색하며 우리는 두 가지 전제 위에 서 있다.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근대문명이 성장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이러한 파국의 위기를 생명사상과 생명운동 이라는 틀을 통해 새로운 사회로 전환하며 인간과 사회의 성숙과 진화를 슬기롭게 이끌 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각자의 역할 - 생산자로서, 실무자와 활동가, 소 비자 회원으로서 - 안에서 공동의 목표를 향해 공동의 가치를 배우고 삶에서 실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생명사상은 근대문명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지만, 한편으로 근대성의 유제들 중 인간과 사회의 진화에 부응하는 진보적 요소들을 안고 넘어가기 때문에 근대문명과 직선적 위치 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문명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이는 포월抱越적 의미를 내포하 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분명하고 일관되게 유지해야 하는 것은 근대적 시선을 포괄하되 이것을 넘어선 자율과 자립, 자치에 기반한 생명 가치와 공동체적 시선이다. 그것은 이 론과 실제에 대한 끊임없는 토론뿐 아니라 성찰과 수행을 동반하는 과정이다. 누구든 노동 그 자체로부터 소외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노동해방은 노동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율적인 존재로서 삶의 일부인 노동을 즐기고 결과를 나 눌 수 있는 상황과 사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진정한 노동해방은 자신의 내 면에서 우러나는 노동으로 존재적 성숙을 도모하고, 사회적으로는 자연과 이웃과 더불어 자족하고 즐기는 노동을 하는 데 있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노동의 결과를 빼앗기는 노동도 아니지만, 그 결과물을 혼자만의 풍요를 위해 소유하거나 누리는 노동도 아니다. 자연을 착취하는 노동이 아니라 자연과 상생하는 노동이며, 외재적 지시나 강제에 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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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아니라 내적 성숙에서 우러나는 자율노동이다. 또한 결과물을 필요에 따라 나눌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 노동해방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개념에서 ‘노동’은 자본에 고용된 노동을 의미한다. 그것은 시장에서 상품으로 거래되기 위한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는 노동이며,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노동 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족 혹은 존재 가치 실현을 위한 일이나 작업, 확대해서 공동체의 존재 가치 실현이나 공동체 구성원의 효용을 위한 노동과는 개념상 많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사회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노동(labor)’이나 ‘노동자(laborer)’라는 개념 과 우리가 지향하는 ‘일과 활동’, ‘일하는 사람과 활동하는 사람’은 구분해야 하지 않을 까? 어찌 보면 생명공동체운동이나 한살림운동에서의 노동은 ‘살림의 노동’이자 자기고 용, 자율노동으로써의 성격을 갖는 것이기에 근대문명의 노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 은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언어를 만들어내지만 때로는 언어가 존재의 삶과 의식 을 규정하는 경우도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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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널토론 1

협동운동의 차원과‘노동의 전환’에서의 역할 김재겸 |한살림서울 상무이사

협동운동의 실천가로서 노동 문제를 생각할 때 ‘생활과 노동의 조직화’라는 관점에서 문 제를 바라보게 됩니다. 현대의 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 특히 투자은행이 세계경제를 드라이브해 가는 시대라 고 이야기 합니다. 금융자본주의의 무서운 점은 모든 가치를 자본 투자에 의한 미래가치 의 계산으로 바꾼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사고를 지배하고 있죠. 개인들의 생활 역시 미 래에 투자가치가 가져다 줄 이익에 모든 것을 맞춥니다. 재테크 혹은 펀드상품의 투자와 같은 행위를 일상화시키죠. 한마디로 투자 수익률에 의한 판단의 지배입니다. 이러한 시 대에서도 만일 일상생활을 떠받쳐 주는 가사와 돌봄 같은 생활의 영역이 증발되어 버린 다면, 지역 커뮤니티가 감당해내는 몫이 사라져 버린다면 세상이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 다. 페르낭 브로델에 의하면 우리 사회는 생활경제의 차원(물질세계), 교환이 일어나는 시장경제의 차원, 그리고 자본주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자본주의는 생 활과 부분적 교환의 영역이 아닌 데서 출발하여, 생활의 세계와 부분적 교환의 체계를 희생시키면서 성장해왔습니다. 사회제도의 측면과 함께, 생활의 영역이나 지역사회와 같은 근린, 생활 사회의 측면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투기자본의 욕망이 들끓고 있는 현대자본주의 세계를 변화시 키려 한다면 근린이나 생활사회 세계를 조직화하고 확장해 나가는 것이 꼭 필요한데, 협 동조합운동을 포함한 협동운동이 근린과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로버트 오언, 로체데일 선구자들은 소비의 조직화, 노동의 조직화 그리고 생산과 소비를 협동하는 방식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열어 왔습니다. 생활 시스템 자체의 변 화와 그와 동반되는 의식의 변화가 없이는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은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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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것입니다. 구성원들이 협동에 대한 의식이 없는데 협동적 경제시스템이 들어설 리 만 무하고 제도가 만들어지더라도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입니다. 노동 문제 역시 협동조합에 서 노동의 조직화라는 관점에 설 때라야 사회적 전망을 열어갈 수 있는 내면의 토대이자 콘텐츠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동 문제의 전망으로서 협동조합

① 소유와 참여 협동조합이나 다양한 형태의 기업에서의 노동 문제는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 니다. 우선은 ‘소유’입니다. 협동조합의 소유권은 조합원에게 있고, 조합원들이 출자 참 여를 하여 자본을 조성함으로써 투자자본이나 주식의 형태와 비교하여 자본 이윤의 극대 화를 추구하지 않고 결사체의 뜻과 운동의 미션대로 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기본이 됩니 다. 하지만 전통적인 협동조합들 중에는 국가 기관처럼 전락하거나 규제에 의해 심하게 통제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소유 형태가 사업체의 방향과 생산물의 내용을 결정한다면, 노동 참여의 형태는 자기 노 동에 대한 일상적인 결정 방식을 의미하며, 이는 업무 내용의 자기 결정권의 영역입니 다. 일본에서 시작된 노동 조직인 ‘워커즈 콜렉티브’ 사례를 보면, 운영에 참여할 수 있 는 장치를 두고 30인 이상의 경우 분할하는 등의 방식으로 참여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 역시 노동자들의 공동소유에 의한 노동자협동 조합이지만, 노동의 참여가 극대화된 조직입니다. 즉 몬드라곤은 노동자들의 민주적 의 결권, 자본에 대한 노동의 주권, 경영 참여, 보수의 연대성을 가진 노동 참여형 기업입 니다. 몬드라곤의 경영자들은 팀제와 같은 새로운 노동 방식이 시도될 때 해당 사례를 학습하고 조직에 적용해 왔으며, 제도적으로도 노동자 평의회 같은 기구를 두어 노동자 의 직접적인 운영 참여 구조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또한, 영리기업 중에서도 업무 단위 인 팀이나 셀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인사권의 일부를 포함해 운영을 과감하게 팀 단 위로 업무를 위임하는 제도를 운영하는 기업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노동의 자율권과 업무주체성의 강화가 결국은 업무집중도를 높이고 노동자들의 만족도를 높인다는 것입니 다. 소비자협동조합 경우는 구매에 참여하는 조합원의 결정권과 ‘일’을 통한 조합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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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를 동시에 실현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다수의 이용조합원이 소유하고 고용으로 출발한 직원들이 일상적 노동을 담당합니다. 그렇다면 ‘노동’으로 일상적인 운 영에 참여하는 담당자의 경우 어떻게 운영에 참여하면 좋을까요? ‘노동자 주권과 참여’ 를 원칙으로 가지고 있는 몬드라곤의 소비자협동조합인 ‘에로스키’에서는 일하는 조합원 인 노동자와 소비하는 조합원이 이사회를 5:5로 구성하는 구조로써 소비자와 노동자들이 동등하게 참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본 그린코프는 최근 노동자협동조합에 매장, 공급 등의 업무를 위탁하는 구조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② 개인 주체가 지역사회 주민으로 생활하는 관점 협동조합은 조직이 우선인 조직이기 보다는 지역사회의 개인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사 회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 조직입니다. 몬드라곤 복합체의 경우도 지역사회 속에서 한 개 인이 노동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몬드라곤 내의 1차 협동 조합은 파산할 수도 있지만, 노동자 조합원들은 사회보장 협동조합 등2차 협동조합에서 실업수당을 받고 재고용 훈련을 거쳐 다시 취업이 가능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한, 경기 침체로 광범위한 실업 상태에 처했던 퀘벡 지역의 노동운동은 스스로 대규모 기금을 조성하여 중소기업, 노동자협동조합 등에 투자함으로써 자신들 스스로 일자리를 만드는 전략을 선택해 오늘의 퀘벡 지역이 사회적 경제 중심의 풍요로운 지역으로 변화 하는 여건을 만들어냈습니다. 개인 들이 지역사회 주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협동조합에서 노동을 조직하는 것은 중요한 관점입니다.

③ 노동문제의 실천에 대하여 • 현실 경제 속에서 실현

협동조합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구축해내야 하는 과제와 현실 경제 속에서 지속적으 로 성립해야 하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이 사회적 비전을 잃을 때, 또 한 현실적합성을 잃어버릴 때는 스스로 소멸하거나 무의미한 기능적 기관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 노동 참여의 문제

한살림에서는 조합원 노동이라는 개념을 부여안고 조합원들이 업무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왔고 업무 주체나 조직이 비정규 노동으로 규정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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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2005년 조합원노동보고서가 제출된 이후에 조합원 노동이라는 개념이 우리 안에 들어왔으며 조합원들의 참여는 넓어졌고 매장운영에 있어 인사, 회의체계를 갖추는 등 체계화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왔습니다. 하지만, 노동의 참여 방식과 노동의 자기결 정권이라는 측면, 업무의 주체로서 자기 인식, 노동의 연대성 등에서 과제가 남아있습니 다. • 지역화된 노동, 지역에서 노동의 조직화

협동조합은 사람과 사람의 연결을 통하여 조합원 생활의 다양한 영역을 해결하는 곳입 니다. 한살림 생협은 지금까지 생산-소비의 협동을 통하여 먹을거리의 자치를 확장해 왔 다면, 지역의 다양한 영역으로 협동의 끈을 확장하는 것을 통해 생활의 다양한 문제에 자치력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가령 먹을거리 영역에서처럼, 돌봄의 영역에서, 에너지의 영역에서, 자치의 지평을 넓혀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활동에 서부터 한 걸음 나아간 협동조합과 같은 사업조직, 즉 업무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조합원들의 활동과 유대가 지역 속에서 협동적 사업체로 드 러나는 것을 통해 노동을 조직화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협동조합기본법은 소 규모 주체들이 노동을 조직할 수 있는 길을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역사회 다양한 영역에서의 협동적 노동의 조직화와 그 사업체 간의 연결은 다른 사람 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과 협력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의 훈련과 전망을 열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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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널토론 2

행복해지기 위한 노동의 전환: 맞벌이 VS. 맞돌봄-맞살림 이안소영 |여성환경연대 정책국장

‘새로운 삶과 사회를 위한 노동의 전환’이라는 포럼 제목에 마음이 설렌다. 우리가 꿈 꾸는 ‘함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기존 노동개념에 대한 재정의와 주류 패러다임을 전 환해내는 유쾌한 전복과 무릎을 치게 만드는 ‘너머’의 상상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노동'이라는 단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귀찮고 고통스럽 다’일 것이다. 우리의 ‘노동’은 언제부터, 왜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밥벌이를 위해’하는 무엇이 되었을까? 내게, 우리에게 ‘노동’은 무엇이며, 평화롭고 행복한 노동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래는 ‘노동’을 둘러 싼 몇 가지 단상들이다.

# 1.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어쩌면 아이를 키우기 위 해서 쇼핑몰 하나가 통째로 필요한 것 같다. 쇼핑몰을 선택하지 않기 위해 서울 대도시 에서 고군분투하는, 8시간 노동-시민단체활동가-맞벌이 엄마인 나와, 8시간 노동-맞벌 이 아빠인 남편은 상품으로 우리들의 삶을 대체하지 않는 대신 늘 시간이 부족하고, 싸 울 거리는 무수히 많고 반복된다. 누가 자연과 공존하며 착취하지 않는 방식으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를 돌볼 것인가? 도대체 무슨 시간과 에너지로? 나는 항상 저녁시간 과 주말을 바쳐 일하며 사회변화를 위해 헌신하는 활동가와 아직은 돌봄을 필요로 하는 아이를 상품이 아니라 시간과 공을 들여 키워야 하는 엄마역할 사이에서 방황한다. 기업 이든 시민단체이든 상관없이 임금노동자의 모델은 돌봄을 수행하고 있는 엄마-여성이 아 니라 가사와 육아의 책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개인’ 싱글-남성이다. 돌봄을 수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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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노동자의 표준모델이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 2. 나는 왜 8시간 정규직을 고수하는 걸까? 많은 이유가 있지만, 큰 이유 중 하나 는 남편과 관계에서 ‘평등’해지기 위해서다. 여성운동은 오랫동안 자신의 목표를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돌봄과 살림에서 ‘벗어나’ 임노동 시장에 참여하는 것으로 삼았다. 대부분 근대적 사회운동이 그렇다. 하지만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노인과 아 이가 현재 남성이 받는 임금을 기준으로 ‘평등’한 임금을 받으려면 우리는 성장과 개발 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생태계 파괴와 소비주의, 식민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여성 이 남성과 ‘평등’해지기 위한 기준은 무엇일까? 일회용 기저귀와 생리대는 여성을 자유 롭게 했을까? 월경을 하지 않는 남성을 기준으로 설계된 생산영역에 동등하게 참여하기 위해 자신과 아이와 지구생태계의 건강을 담보 잡히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자유 혹은 해 방이었을까?

# 3. 인간은 모두 돌봄을 받는 존재이자 돌봄을 제공하는 존재이며, 누구나 생의 어 느 순간 돌봄영역의 주체와 객체를 순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두가 임금노동자가 되 기 위해 가족과 공동체를 떠난 자리, 남은 건 국가/개인이 제공하는 돌봄서비스/돌봄시 설이다. 어린이집, 병원, 장애시설, 요양원, 실버타운. 낙후되고 간혹 인권유린적이며, 고비용이라는 현재 문제가 해결되면, 그 시설이 모두 질좋은 무상서비스로 제공되는 것 이 돌봄을 해결하는 대안이며 행복할까? 얼마나 더 많은 시설을 지어야 하며, 우린 또 얼마나 많은 세금을 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또 얼마나 많이 벌어야 할까? 이것은 자 연생태계와 농촌과 이주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고 가능한 일일까? 돌봄은 삶에서 필수적 이다. 돌봄서비스 영역이 필요하지만, 오히려 가족과 마을 단위, 근거리 내 돌봄 제공이 가능하도록 노동과 사회경제 시스템을 재구성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노동중심사회이다. 가정주부와 직장을 가지지 않은 청년들, 노인들, 자원 활동가들은 모두 사회와 사회구성원을 위해 가사, 육아, 환자와 노인돌봄, 가정 대소사 와 관계유지, 이웃 교류와 공동체 노동, 시민단체 자원활동, 지역사회 가꾸기와 환경보 호를 포함한 시민노동을 한다. 중요한 일/활동을 하지만 노동이라는 범주에도 들어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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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미성숙하거나’ ‘불완전하고’ ‘퇴물이 된’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받는다. 일-활동-노동이 위계화되지 않아야 하며, 노동/일/활동이 여가/보람/충만감이 분리되 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노동개념은 이렇게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1) 삶을 직접적으로 창조하고 유지하는 생계적 관점의 자급노동(일/활동)의 양을 늘린 다 2) 그래서 미래사회는 자원/기술/지본 집약적인 노동이 아니라 노동집약적이어야 할 것이다. 3) 삶의 필요를 줄이고 소비를 축소하며 마이너스 성장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가능하 다. 마이너스 성장은 화폐생산을 위한 임금노동과 상품을 위한 생산을 줄이는 일이 다. 4) 여성과 노인뿐 아니라 젊은 성인 남성이 돌봄과 살림, 공동체 노동, 살림노동, 생 존과 생활을 위한 노동에 더 많이 들어오는 것이 병행될 때 근본적인 전환을 이뤄 낼 것이다.

우리 모두가 평등하게 적게 벌고, 적게 일하고, 적게 쓰고, 행복하게 서로 돌보는 사 회로 전환할 수 있도록 사유하고 시도하면 좋겠다. 사회변화를 위한 운동조직들도 이런 방향으로 자신의 활동을 조직하면 좋겠다. 노동중심사회가 아니라 돌봄중심사회를 위해, 맞벌이가 아니라 맞돌봄과 맞살림이 핵심가치인 사회를 위해 이런 정책방향이 필요하지 않을까.

1. 여성과 남성, 사회 구성원 모두의 노동권과 돌봄권을 함께 보장한다 2. 돌봄분야 정책뿐 아니라 모든 국가정책과 사업에서 돌봄‧살림중심적 기획,집행이 필요하다 3. 마을 단위 공동체 복원, 세대간 어울림 등을 통한 서로 돌보는 사회환경을 조성한 다. 4. 단계적으로 임노동시간을 단축하여 모든 노동자가 일, 가정, 공동체, 휴식을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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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게 유지할 수 있게 한다 5. 고용된 임금노동을 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도록 생활임금제나 기본소득 지원책을 마련한다. 6. 성별, 연령, 계층과 관계없이 선택할 수 있는 모두를 위한 지역형 일자리를 만든 다. 7. 도시텃밭은 대도시의 기생성을 탈피하게 하고, 여러 세대가 어울리는 돌봄과 놀이, 교류의 공간으로 가능하게 만들자 8. 농사와 농사짓는 사람들의 삶이 지속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지원책을 수립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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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널토론 3

‘위험사회’와 ‘문화사회’를 통해 본 대안적 노동과 대안적 주체 임 정 희 |미학·문화이론/연세대 겸임교수

한국 사회에서 ‘문화사회론’을 둘러싼 주된 논의는 ‘노동사회에서 (생태적)문화사회로’ 의 전환 요구가 일상생활과 제도 및 정책 영역 전반의 문화적 재구성, 그리고 문화민주 주의의 확대를 주장한 시민운동으로서의 문화운동론과 문화정책과 문화공학을 구성 요소 로 삼은 문화정치론 내에서 대안사회론으로 다루어져 왔다.2) 비록 ‘문화사회론’의 토론 과 연구가 문화사회로의 이행에 관한 복잡한 문제들을 규명하지 못한 채 추상적인 개관 과 국지적 논의에 머물고 말았으나, 논의를 주도한 이들이 문화적 실천을 신자유주의 세 계화의 압력과 긴밀히 맞물리는 지점들로 파악함으로써 문화의 역할에 현실적인 의미를 드러내 주었고(문화가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의 호사거리가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배제적 폭력으로 야기된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핵심적 가치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자본주의 노동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생태적 문화사회를 적극적으로 명시화함으로써 급진 적 이론과 운동을 연구해 온 이들과의 활발한 논의가 가능해진 점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사회적 연대’와 ‘문화적 실천의 네트워크의 구성’을 통해 ‘자본-국가에 대항하며 자본 -국가를 넘어서는’ 문화사회로의 지속적인 이행을 그리는 이들에게 강력한 자극제가 되 었던 것은 유럽에서 발표된 ‘위험사회론’과 ‘문화사회론’이다.‘위험(Risiko)’이라는 용어 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개개인의 삶이 위험과 위협에 둘러싸여 있고 불안전성과 불확실 2)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의 전환에 관한 논의는 강내희, 심광현, 이동연 등 『문화과학』 동인들 내 에서 집중적인 토론으로 이루어졌다. 논의 결과는 “문화와 경제” 특집(『문화과학』15호, 98년 여름 호), 이어서 “21세기와 진보의 새로운 전망”(16호, 98년 겨울호), “문화사회로의 전환”(17호, 99년 봄 호), “노동과 노동거부”(19호, 99년 겨울호)로 발표되었다. 초기에 철학적 담론과 사회이론들을 주로 검토하던 『문화과학』 동인들은 문화사회론을 검토하면서 생태주의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게 되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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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특성으로 가지고 있음을 분석한 ‘위험사회론’, ‘노동 공유’의 형태를 띠는 자유시 간의 증대를 통해 개개인의 삶이 자율성을 토대로 삼아 공동체적 연대에 이르는 대안사 회의 길을 제시한 ‘문화사회(Kulturgesellschaft)론’은 한국 사회의 구체적 조건 위에서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새로운 지평을 상상하며 대안적 노동을 통해 창조적 삶을 추구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건네준다.

1. 위험사회를 넘어가는 대안적 주체

‘위험사회’론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그의 저서 『위험사회(Risikogesellschaft)』(Frankfurt/M.: Suhrkamp, 1986)에서 근대 산업사회에 서 고도의 생산력발전이 가져온 부작용들-위협과 재난-이 파국적인 위험 상황을 초래하 였다고 지적하면서, 문명의 위협에 당면하고 있는 사회를 위험사회, 세계위험사회라고 부르고 있다. 산업사회에서 위험사회로의 전환은 산업사회가 취한 결정으로 인해 통제될 수 없는 위협들이 등장하고, 사회적인 규범체계가 자신이 약속한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이다. 산업사회는 통계적으로 계산된 가능성에 의거하여 책임과 과실 추궁이 이루어지고, 이 계산 및 예측 가능성이 위험 부담을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제도들’을 유지 가능케 했던 사회를 말한다. 산업사회에서의 위험(예를 들면 작업 중 발생하는 위험, 독성, 환경파 괴, 실업 등)은 개인이나 사회 집단들의 결정과정이나 행동과정에서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잘못된 계산방식 때문에 등장한다. 반면 이와 대조적으로 위 험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위험을 책임질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위험문제를 해결할 수 있 는 전문가가 될 수 없다. 위험사회의 위험이 계산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것이기 때 문이지만, 이 새로운 유형의 계산 불가능한 위험이 실은 자연이 산업사회에 의해 침범되 고 전통이 해체됨으로써 생겨난, ‘제조된 위험(hergestellte Gefahren)’이기 때문에 위험 의 책임이나 과실 추궁이 불가능하다. 울리히 벡은 “위험을 인지하고 결정하는 방식들, 그리고 그 원인을 귀속시키고 보상을 할당하는 방식 자체가 이미 위험사회에서는 붕괴되 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체르노빌, 후쿠시마 같은 핵발전소 사고나 유전공학으로 야기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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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사고처럼 위험의 영향력이 잠재적으로 항상 포진하고 있어서 파국을 피할 수도 없다. 위험사회의 위험은 이처럼 ‘제도화된 무책임성’과 ‘위협의 사회적 폭발’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한편, 위협의 폭력이 특정 지역이나 특정 집단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지 구에 걸쳐, 동·식물 및 인간 모두에게, 그리고 초국가적으로, 생산과 재생산과정을 가리 지 않고 강타한다는 점에서, ‘파국적’이다. 산업사회의 위험이 공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제한성을 지니고 있던 것과 비교하면 위험사회의 파국성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위험사회에서는 ‘이것-아니면-저것’의 논리가 지배하는 ‘동서 질서체계(사회주의 국가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적대관계)와 좌우 질서체계(물질적인 재화의 분배를 둘러싼 좌파와 우파간의 적대관계)’도 해체된다. ‘이것’과 ‘저것’의 경계들(계급은 물론이고 시 간이나 국경에 따른 경계,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의 경계 등)이 해체되면서, 위험사 회에서 ‘이것’과 ‘저것’은 ‘이것이면서 저것이기도’ 하고, ‘이것이 아니지만 저것도 아 니기’도 하다. 즉 ‘이것’과 ‘저것’은 각각 분리되지 않고 연관을 맺고 있는 ‘이것-그리 고-저것’이라는 양가성의 논리적 특성을 지닌다. 어떤 제도영역도 삶의 확실성을 보장해 주지 못하면서 개인들은 무한한 자율을 부여받지만, 실상 개인들은 그들의 결정 과정에 서 아노미를 면할 수 없다. 따라서 위험사회에서는 일상화된 불안정과 공포를 견디고 다 루는 능력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핵심적인 자질이 된다. 자율과 아노미의 긴장상 태에 자리잡은 위험사회, 불안과 불확실성, 공포가 힘이 되는 위험사회, 이 위험사회에 등장하는 불확실성의 통제술이 극단적인 두 방향을 이루게 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 리 어렵지 않다. 지식(의 오만)에 기반해서 위험을 평가하고 위험을 부인하던지, 아니면 무지를 기반으로 공포를 조성하고 모든 것을 위험으로 보게 하던지.3) 3) 폴란드 출신의 사상가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현대성(liquid modernity)’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우리가 어떻게 ‘무겁고’ ‘고체적이고’ ‘예측-통제가 가능한’ 근대로부터 ‘가볍고’ ‘액체적이고’ ‘불안정 성이 지배하는’ 현대로 이동해왔는지를 탐구한다. 여기에서 ‘액체 근대’ 또는 ‘유동하는 근대’란 기존 근대사회의 견고한 작동 원리였던 구조ㆍ제도ㆍ풍속ㆍ도덕이 해체되면서, 위험과 유동성, 불확실성 이 증가하는 국면을 일컫는다. 바우만은 신뢰와 확신에 가득 찬 ‘고체 근대’가 맑스가 꿈꾼 혁명에도 그대로 녹아있다고 지적하면서, 그의 혁명 동기가 부르주아 지배질서를 송두리째 녹여버린 뒤 새롭 고도 향상된 견고한 것들이 지속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하려는 데 있었다고 분석한다. 신뢰와 확 신이 ‘고체 근대’의 구성요소였다면 위험과 불확실성이 액체 근대의 징표이다. 맑스의 시대와 지금 또는 고체 근대와 액체 현대를 구별짓는 것은 안정된 제도부재이다. 불확실성이야말로 개인화를 촉 진시키는 강력한 힘이다. 뭉쳐야 살던 시대에서 ‘흩어져야 살 가망이 있고 뭉치면 반드시 죽고 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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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벡의 재귀적 근대화론은 이러한 양 극단의 낙관주의적 통제술과 달리 모순에 대 처하는 삶의 기술로서 긍정적인 회의주의의 관점을 지닌 ‘의심의 기술’을 제안한다. 의 심의 문화는 확신과 믿음의 문화(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기초한 산업근대사회의 문화)에 서는 약점과 쇠퇴로 나타났던 의심을 배양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한 유 형으로 그리고 공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유형으로 만든다. 이러한 유형이 “어느 것 도 금지하지 않고, 어느 것도 강제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것도 의무화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대립적인 것, 가장 모순적인 것들은 의심(질문) 자체에 의해 전복되거 나 명료해 질 수 있기 때문에 위험이 무지를 의미하는 또 다른 단어임을 인정하고, 산업 사회에 기초해 있던 지식과 이성의 오만함을 직시하는 삶의 문화라고 하겠다.4)

의심은 모든 기술의 완전성과 기계적인 힘으로 치장을 한 근대적 사고와 행동들을 비판 적으로 기억하고, 그 과정에서 배제와 격리, 홀대와 무시되었던 것들과 결합하면서 자기 스스로 삶을 새롭게 조직하기 위하여 또는 자기를 어떤 주체로 구성하기로 결심하기 위 하여 행하는 문제제기이고, 자기 배려, 자기 비판을 통해 제 삶을 새롭게 사유하고 구성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점이다. ‘의심의 기술’이라는 개념은 주체형성 과정을 계보학적 으로 추적함으로써 주체를 객체화하는데 치중해 온 미셸 푸코가 주체는 어떻게 ‘자신을 다시 미적-도덕적 주체로 세울 수 있는가’하는 데로 관심을 옮기면서 언급한 ‘자기의 테크놀러지’와 다르지 않다.5) 이제 ‘의심의 기술’이나 ‘자기의 테크놀러지’는 ‘자기 실 현의 잠재력’, 또는 ‘자기 표현’으로서 주체화 과정에 실천적으로 개입한다.

6)

개인화 사회로 접어든 것이다. 탈근대의 조건을 모호성, 불확실성, 상대성으로 꼽는다는 점에서 바우 만도 다른 포스트모던 사상가들과 궤를 같이 하지만, 회의주의에 머물지 않고 사유의 실험대에 실천 적 전망을 이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 론을 통해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위협과 위험의 결과 및 특성을 밝힌 내용과 바우 만의 ‘액체 근대’의 작업은 유사하다.(지그문트 바우만,『액체 근대』, 이일수 역, 강: 2009) 4) 울리히 벡, 「위험사회」, 후기자본주의와 사회운동의 전망 (의암출판,1993),262-270쪽, 정치의 재발견: 위험사회 그 이후-재귀적 근대사회 (거름,1998), 280-306쪽 5) 미셀 푸코 외, 『자기의 테크놀러지』, 이희원 옮김, 문예출판사, 43쪽. “어쩌면 나는 지배와 권력의 테크놀러지에 지나치게 역점을 두어 왔는지도 모른다. 요즘 나의 관심은 점차 자기 자신과 타자의 상호작용, 그리고 개인이 행사하는 지배의 테크놀러지에서 얼마나 개인이 자기자신에게 작용하는가 에 대한 역사, 즉 자기의 테크놀러지로 기울어졌다.” 6) 서구 개인주의 발전 과정에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표현하고 대변하는 개인(소유집착적 개인주의)과 달리 칸트는 ‘자기 실현의 잠재력을 지닌 자로서의 개인’, ‘자기 표현적인 개인’이라는 새로운 개인 상을 제시하였다. 자기 대변적인 개인이 자기 통제와 관리, 그리고 근면과 성실을 중시하는 것과 달 리 ‘자기 표현적인 개인’은 선택의 자유가 지닌 가치를 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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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사회의 시기에 등장하는 여러 대안적인 사회개혁 논의들처럼 울리히 벡도 ‘새로운 행동의 사회’, ‘자기 창조의 사회’의 주체들을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행위자들 뿐만 아니 라, 어떤 자격이나 권위, 사회적 지위에 의해서도 통치의 자격을 부여받지 않은 ‘개성화 된 개인들’로 파악한다. ‘개성화된 개인들’은 정체성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불일치’와 ‘불화’7)를 경험하고 자신의 이중적인 면을 통해 ‘의심의 기술’을 익히는 이들로서, 산 업사회적인 자기 이해, 산업사회적인 생활 상태와 생활방식들(예컨대 소가족이 전제된 계급, 성 역할, 성별 노동분업, 결혼이 전제된 핵가족과 이 핵가족을 전제한 계급 개념 에 따라 그려진 사회구조 이미지)을 해체하고 다른 종류의 생활방식과 생활유형으로 교 체된 개인들이다. 이 개성화된 개인들은 산업사회에서처럼 ‘역할 담지자’가 아니라 ‘자 기 결정’의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온전히 개인의 자유 결정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강제 된 상황에서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행위자가 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 읽어 줄 것이라는 확신도 없이 자신의 고유한 전기를 작성해야 하고, 상호 독려와 신뢰를 기대하지 않으면 서 사회 관여나 참여를 스스로 결정하고 계획하고 상연해야 한다. 따라서 ‘개성화된 개 인들’은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특수한 가치와 관심을 근거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누구도 위협에 책임질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들의 참여 행위 는 매우 모순적이고 복잡하기 짝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좌이면서 우이고, 급진 적이면서 보수적으로, 민주적이면서 비민주적으로, 생태적이면서 반생태적으로, 정치적 이면서 비정치적으로 사고하며 그리고 행동한다. 모든 사람들은 다 염세성과 소극성, 이 상주의와 현실행동주의를 자신의 실제적인 자아의 한 부분으로 가지고 있다.”(울리히 벡, 1998:189쪽) 이 양면성은 ‘개성화된 개인들’이 벌이는 사회운동들8)이 이슈와 관심 에서 다양하고 통일성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활동형태에서 불확실성과 양가성을 보이고

7)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몫없는 자들의 몫’, 혹은 ‘셈해지지 않은 것들의 셈하기’라고 부르는 정치-미학적 과정에서 새로운 주체들-‘몫없는 자’, ‘셈 되지 않는 자’, ‘아무개’-은 ‘불화’와 ‘불일치’ 로서 이의를 제기하며, 기존의 공간 혹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그 자리를 이탈하거나 새로운 자리를 만들도록 틈을 내고 균열을 낸다. 랑시에르는 새로운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 정태적으 로 고정되어있는 정체성이 아니라, 기존의 체제 안에서는 자리를 갖지 못했던 어떤 ‘불화의 돌출’ 또 는 어떤 ‘부재의 자리’라고 파악한다. 예측과 계산없이 자기 결정을 구사해야 하는 울리히 벡의 ‘개 성화된 개인들’도 해체와 창조의 이중성을 부단히 경험한다는 점에서 불화와 불일치의 주체들이다. 8) 생활양식과 결합된 사회운동들로서 예를 들면 자연환경만이 아니라 도시환경에 관한 관심을 포함하 는 생태환경운동, 평화운동, 다양한 시민권 운동, 여성해방운동, 시민자치운동, 상품과 서비스의 생 산과 분배의 대안적 양식 또는 공동체적 양식을 추구하는 운동(기술공유운동 등), 그리고 운동일반 의 녹색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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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으로도 확인된다. 학자들 사이에는 개성화의 개념을 구성하는 두 축인 선택의 자유(자율)와 체제의 강제 (순응) 중에서 어느 면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주체의 역량에 대한 상이한 평가를 제시한 다. 자기 결정 능력에 근거하여 사회변혁의 담지자로서 주체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이미지와 기호(상품과 화폐와 신용)로 주조되는 탈근대 사 회에서는 사람들 간의 실제적 차이가 소멸될 뿐이어서 구별 경계를 전제로 하는 주체화 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체제 구속력에 근거하여 회의주의적 전망을 내놓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과 달리, 울리히 벡은 자기 표현적인 개인들이 밑에서 사회를 다시 조직하고 사회적 행동의 모든 분야와 영역에서 스스로 임무를 맡는 ‘아정치(亞政治, Subpolitik)’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아정 치는 ‘작은 것’ 그리고 ‘외형상 진부한 것’에서 폭발하고 이를 지렛대 삼아 큰 정치를 움직이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삶의 태도와 의미를 바꾸는 이들 이 ‘아정치’를 통해 ‘새로운 행동의 사회’, ‘자기 창조의 사회’, ‘스스로를 형성하고 있 는 시민사회’를 열고 있다고 파악한다(울리히 벡, 1998:182-200쪽). 물론 이 ‘새로운 행동’과 ‘자기 창조’의 주체들은 정태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정체성(산업사회에서처럼 노 동자, 자본가, 교수, 학생 등의)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주체화의 경 로를 체화하는 ‘살아있는’ 주체들이다. 살아있음의 상태를 바람직한 가치로 인정하고 받 아들여, 살아있는 것이 그 살아있음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보살피는 주 체이다.

울리히 벡의 대안 사회 주체들은 이기적 개인이나 폐쇄적 공동체에 예속된 개인이 아니 라, 개성적-자율적 개인이면서 타자와의 공생과 협력의 감각과 감정, 상상력을 지닌 ‘사 회적 개인’이다. ‘사회적 개인’이 주체인 사회에서는 개인이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구성 원이 아니라, 사회체계가 구성원들의 개인적 창조성을 넓혀주며, 구성원들을 위해 있게 된다. //대안적 생산양식에 대한 사회과학적 고민만큼이나 대안적 주체양식에 대한 인문 학적 고민없이는, 비노동으로 생각되었고 가치생산노동으로 배치되지 않았던 많은 활동 들을 노동관계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자본에 대항하여 새로운 삶과 사회를 만들어가는 노동의 창조성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로부터 분할된 비정규직 노동자, 잠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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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적 실업자, 언더 클래스, 호모 사케르, 대자적 의식을 획득한 소수자들의 행위가 사회체계 전반에 변동을 야기할 가능성은 등 그렇다면 우리 시대, 위험사회에서의 삶에서 살아있음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도록 배 려하고 보살피는 힘은 무엇인가? 삶의 활력(살아있음)의 표현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 까?

2. 문화사회를 추동하는 노동으로서의 문화예술적 활동

“이는 노동에 기초한 생산주의적 사회로부터 자유시간 사회, 즉 경제적인 것보다 문화적 인 것과 사회적인 것에 더 커다란 중요성이 부여되는 사회로의 이행, 한 마디로 독일인 들이 ‘문화사회’(Kulturgesellschaft)라고 부르는 사회로의 이행을 함축하는 것이다. 오 직 이러한 근본적인 이행만이(만일 이 용어가 평가절하되거나 유행으로 비난 받지 않는 다면 혁명적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만일 그런 이행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단지 가공 할 기술적 야만성을 낳게 될 것이다. 또 신기술의 가속적인 발전에 의해서 발생하는 노 동의 절감과 시간의 확보는 한편에서는 오직 사회적 배제와 빈곤, 대량실업만을 가져오 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을 심화시키게 될 것이다.”9)

앙드레 고르(Andre Gorz)가 ‘문화사회로의 근본적인 이행’을 요구할 1988년 당시만 해 도 사회체계 전반의 어떤 근본적인 이행이 없다면,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 가속 화되는 기술혁신에 의한 노동의 절감과 자유시간의 증대가 사회 전반에 걸쳐 사회적 배 제와 빈곤의 심화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을 동시에 확대할 것이라는 그의 경고는 유 럽에서조차 전반적으로 무시되었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오늘날 미국과 유럽, 그리고 한국에서도 임금노동에 풀타임으로 매어있는 임노동자와 이로부터 배제된 주변집단으로 대중이 분열되는 이중사회화와 양극화 경향이 ‘가공할 기술적 야만성’의 결과로서 도처 9) 앙드레 고르,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의 이행」, 후기자본주의와 사회운동의 전망,(의암출 판,1993), 3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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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목도되고 있다.

오늘의 세계는 어떠한가?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더불어 자본주의는 어떠한 견제 도 받지 않은 채 자신의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계화된 세계’를 지배하 는 것은 상품과 화폐의 자유로운 순환이다. 금융의 유통과 상품 시장은 전 지구적 수준 에서 막힘없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의 세계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유통의 대 상에만 국한된다. 그러나 살아있는 인간적 주체의 통일된 세계는 과연 존재하는가? 또 는 우리는 과연 오늘날의 ‘세계’가 자본의 자유로운 순환과 마찬가지로 노동의 자유로운 순환을 보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 주체들은 자유롭게 이동하고 그들이 원하는 곳에 정착할 기본적인 권리를 절대로 갖고 있지 않다.’ 모든 노 동의 이동은 통제 당한다.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과 함께 노동 역시 이동하지만, 그 이동 은 지극히 제한적인 수준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외국 인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는 노동의 이동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증명하 고 있다. 이 세계의 주인은 인간 주체가 아닌 사물(상품)과 기호(화폐와 신용)들인 것이 다. 세계는 하나가 아니다. 세계화된 하나의 세계란 다른 누구도 아닌 자본의 세계일 따름이 다. 압도적인 다수의 사람들은 이 세계의 풍요와는 거리가 먼 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상품도 화폐도 갖지 못한 자들로, 이들에게는 풍요로운 그 ‘세계’에의 접근이 근원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세계화된 세계의 외부에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된 세계’의 외부에, 상품과 화폐를 찾아보기 힘든 또 다른 세계에 갇혀있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오늘날 세계의 도처에서 장벽이 세워지 고 있다고 단언한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세계가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자본의 세계적 지배를 관철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는 결코 국가 사이의 경계의 문제가 아니다. 장벽은 같은 나라 안에서, 같은 지역 안에서 지속적으로 세계를 갈라놓고 있다. 도시는 분할되고, 다른 세계로 구분된다. 오늘날의 도시는 그 안에 장벽을 갖는 분할된 세계일 수밖에 없다. 삶의 조건에서부터 문화, 교육에 이르기까지 그 차이는 극복 불가 능한 수준에 이르고 만 것이다. 이른바 양극화는 국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계화가 가 져온 필연적인 결론일 뿐이다. 세계는 여전히 하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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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기 고르가 제시하는 것은 노동사회로부터 ‘문화사회’로의 이행이다. 이러한 전망은 맑스의 노동유토피아를 대체하는 것이기도 한데, 맑스의 노동 패러다임은 노동을 인간의 본질의 대상화이자, 해방적 의식과 능력이 형성되는 지점으로 보았던 것이지만 고르는 이를 비판하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생활세계에서의 자율적 활동의 발전을 새로운 전 망으로 제시한다. ‘살아 있는 형식-부여적인 불이며 살아 있는 시간에 의한 사물들의 형성으로서의 노동, 사물들의 과도성과 그것들의 순간성을 규정하는 것으로서의 노동’을 이야기한 맑스와 달리 우리가 일상적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은 세계를 창조하는 생기 있 는 얼굴로서의 노동, 또는 세계를 자유롭게 순환할 수 있는 노동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고용-비고용의 체제에서 그 어느 쪽으로건 강제당하고 있는 생기 잃은 얼굴의 노동이다. 그렇다면 창조적 주체의 가능성은 노동 밖에서 찾아야하는 것일까?

고르에게서 ‘경제적인 것보다 문화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에 더 커다란 중요성이 부여되 는 사회’, ‘노동이 아니라 문화활동이 삶의 중심적 활동이자 가치가 되는 사회’는 문화 를 노동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노동을 거부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거부 되어야 할 것, 즉 문화와 구별되는 노동이란 ‘노동의 소외 형식, 즉 임금노동적 형식’ 또는 소외된 노동이 자본 축적의 수단이 되는 생산양식이지, 인간적 삶의 특수한 유형으 로서의 노동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문화사회로의 이행이 특수한 삶의 유형으로서의 노동에 대한 거부 위에서 문화적 활동의 중심성을 천명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문화사회에서는 노동이 근본적 변형을 요구받을 뿐만 아니라, 삶의 활력의 표현으로서 세계 창조적인 힘 인 노동이 실질적으로는 세계와 주체를 창조하는 문화적 활동이자 문화적 힘일 수 있다 는 사실 자체도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문화사회론’이 노동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면, 노동은 문화사회를 형성하는 내적 역량으로 확보할 수 없게 되고 오직 자유시간의 문화적·사회적 활동만을 추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문화사 회는 자동기술화를 통해 노동을 해체시키고(노동시간의 단축) 그것을 문화 속으로 포섭 하는 체제로 작용할 것이다. 고르의 문화사회론은 과연 노동과 문화의 관계를 적대적으 로, 또는 분리적으로 사고하면서, 문화 활동을 활동 범주가 아닌 특수한 사회문화적 영 역으로 고착시킨 미학주의나 문화주의 같은 새로운 주관주의적 환원주의를 주장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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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일까?

고르가 분명하게 언표하고 있는 노동시간 단축의 두 가지 뗄 수 없는 목표를 보면 이 같 은 오해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노동 단축의 두 가지 목표란,“ (1) 모든 사람들의 노동시간을 줄여서 누구나 일할 수 있고, 그리고 또한 자신들의 노동생활의 외부에서 자 신들의 일에서는 발현될 수 없었던 개인적인 잠재력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2) 훨씬 더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숙련된, 복잡한, 창조적이고 책임있는 직업 활동 이는 그들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게 해 준다 - 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생산성 향상이 가장 더디게 이루어지는 분야는 이러한 후자의 활 동분야이다”. (고르, 1993: 376쪽)

그래서 실질소득의 상실없는 노동시간의 단축, 고용의 재분배, 즉 기본소득이 보장되는 자유시간의 정치를 주장하는 고르에게서 주의깊게 살펴야 할 지점은 노동시간이 단축되 더라도 노동은 의무이면서 동시에 권리의 기초이기 때문에, 소득에 대한 권리와 노동에 대한 권리의 불가분한 결합이 모든 남녀 시민적 권리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문화사회론이 파악하는 노동과 문화의 관계, 그리고 문화 개념을 분석하기 위 해 문화사회를 추동할 문화적 활동의 실질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문화적 활동은 경제 영역, 정치 영역처럼 사회의 한 영역 범주로 굳어지고 나아가 체계로서의 사회의 한 항 으로 응고된 문화예술 영역의 활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 범주라고 이해하여야 한 다. 문화예술적 활동을 영역 범주로 이해할 경우 삶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형식들은 역사 적인 관계들을 탈각시킨 채 보편성의 형식으로, 또는 이론적 구성물로, 즉 노동과 분리 된 문화적 활동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이해는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삶을 분할하여 조직하는 형식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삶의 변형 가능성을 차단하는 결과를 가 져온다.

문화사회에서 요구되는 문화적 활동은 노동의 외부가 아니라 그 안에서, 노동사회를 혁 신하는 변화요소로서 찾아져야 한다. 즉 노동관계 속에서 그동안 비노동으로 사고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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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가치생산 노동으로 배치되지 않았던 많은 활동들을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많은 비물질적 유형의 노동들이 특히 그러한 경우에 속하는데 다양한 서비스 노동(감정노동, 돌봄노동 등)들과 문화예술적 노동(감정의 투자를 통한 ‘특별화하기’와 향상의 충동을 지닌 예술 행동, 제의)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지적·소통적·정보적 활동 같은 비물질적 활동들은 노동과정에서 분리된 상품을 산출하지 않고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삶과 세계를 생산하기 때문에 상품적 노동력으로 되기 어려 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가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에 의해 재편되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물질노동과 비물질노동을 대립시키고 비물질노동이 지닌 특성을 편향적 으로 지원할 경우 물질노동에서 격리되거나 편입되지 못하는 인간적 활동력(신체적·정신 적 약자들, 신체적·정신적·정서적 장애를 지닌 이들)은 죽음을 맞게 되고, 비물질노동의 측정불가능한 성격이 자본주의 한계로 작동할 수 있는 지점을 덮어버리게 된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물질노동에 비물질적 활동을 대립시킬 것이 아니라 물질노동 과 비물질노동이 세계 창조의 자본주의적 방식을 넘어설 수 있는 문화적 힘으로 변형되 고 있음을 인정하고, 노동과 더불어 지적·정서적·신체적·윤리적 능력의 변화를 체험하면 서 통제와 훈육의 매카니즘을 뚫고 자기 진화하는 창조적 주체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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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운동이론지

<모심과 살림> 2호 (2013년 겨울)

모심의 눈 교황 프란치스코와 자본주의 넘기 |주요섭

제언 생명모성의 출현 |반아

[특집] 새로운 삶과 사회를 여는 노동의 대안 문명의 전환과 노동의 미래 |강수돌 생명의 시선과 탈근대적 노동 |류하 신자유주의 시대 여성의 삶과 노동 |임윤옥 협동조합에서의 노동 |김재겸 <좌담> 노동의 현실과 현실의 대안 |김신양 이안소영 장주영 황덕순

기고 공생과 호혜의 관점에서 한국 협동조합사 읽기 |이경란 농사 - 손과 발, 몸뚱이에 새겨진 오랜 기억 |백승우

살림의 길 생명문화] 종교적 혁명의 가능성 |이찬수 생활협동] 협동조합 붐이 끝난 뒤 |하만조 사회실천] 위기의 민주주의, 전환을 위한 민주주의 |정규호 지구의 창 다람살라의 스마트폰 |오은영 스위스 소매유통의 두 거대 소비자협동조합 코프·미그로 |우미숙 후쿠시마, 재난 이후의 삶과 대안 |시마무라 모리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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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차 모심과살림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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