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명: 10년의 이별 글쓴이: 미지 중심인물: 여공화, 이계남 소개글 아름다운 이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헤 어지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작품 10년의 이별. 그리고 10년의 이별을 연기하는 오프더레코드의 두 사람도 작 품과 함께 두 번째 이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별을 준비하는 평범한 연인들. 그들이 웃거나 울면서, 행복과 비극을 동시에 연기하는 모습을 작품에서 만나보세요.
추천사: 야매
덕질의 민족 여름호
│ 10년의 이별 │
연애 10년 차,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사귈 수 있냐는 질문을 수시로 들어왔다. 열아홉이었던 우리는 스물아홉이 되었다. 20대의 전부를 서로에게 바쳤다. 목이 탈 만큼 트랙을 내달렸던 10대 후반의 청춘과 무서울 것 하나 없이 살아왔던 내 20대에는 언제나 네가 있었다. 우 리를 아는 모두는 입을 모아 결혼을 예상했다. 여공화는 금메달을 따 면 청혼할 거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다. 대한 남아로 태어나 한번 말한 건 지킬 거라나, 뭐라나. 실제로 그는 금메달을 땄고, 청혼했다. 부케 사이에 빛나던 금빛 메달을 기억한다.
화남, 10년의 이별
하지만 현실은 소설처럼 로맨틱하지 못했다. 애정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기엔 몰아치는 고된 감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일에 휩쓸 렸고 너는 유명세에 바빴다. 결혼은 계속해서 미뤄졌다. 함께 살고 있 으니까 진짜 결혼은 늦어져도 돼, 하고 생각했다. 고작 그뿐이었다. 가족의 반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불치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다. 서 로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단단한 몸은 기대기에 역부족이 되었다. 털어놓는 말보다 숨기는 말이 많아졌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이별을 준비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를 너무 잘 알았기에, 마지막마 저도 어렴풋이 예감한다. 과거, 우리는 서로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여공화는 계속해서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주장했고, 나 또한 그냥 하는 말이야, 하고 너를 안심 시켰던 것 같다. 상상만으 로도 싫다며 입을 비죽이던 날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꺼지지 않는 불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열렬한 사랑도 결국엔 마 지막을 맞이하는 모양이었다. 평생 할 줄 알았던 수영을 관둔 나처럼, 운동 대신 예능인의 삶을 선택한 너처럼. 우리는 언제나 불완전한 형 태로 완전해지기 위해 변화했다. 태권도 전 국가대표의 이름으로 여러 프로그램에서 러브콜을 받 느라 그날도 늦게 귀가했다. 나는 네가 올 때까지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봤다. 개그맨이 농담하면 실없이 웃기도 했다. 웃음의 끝은 언 제나 짙은 한숨으로 마무리 지었다.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너 는 언제나 두 번째 번호를 누르기 전에 잠깐 주춤하는 버릇이 있었다. “안 잤어?” “조금 있다가 자려고, 밥은 먹었어?”
덕질의 민족 여름호
“PD님이랑, 스텝들이랑.”
“냉장고 두 번째 칸에 초코 우유 있어.”
옅은 술 냄새가 났다. 너의 뒤편으로 걸려 있는 메달이 눈에 들어 왔다. 빛을 받지 못해 거뭇거뭇한 색이었다. 모든 움직임은 마치 짜인 대본처럼 일정했다. 세월은 서로를 읽는 책이었다. 우리는 하도 읽어 서 책등이 닳고 변색한 책이었다. 동거를 시작했던 계기는 자연스러 웠다. 사귀는 것처럼 날짜를 정하지도 않았고, 점점 공화의 집에 나의 물건이 많아졌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칫솔 하나, 옷가지, 화장품, 그 리고 자잘한 생활용품까지. 어느새 내 집보다 그의 집이 더 편안해졌 을 때는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점이었다. “여공화, 할 말이 있는데.” 다 마신 우유갑을 접으며 네가 바라봤다. 한창 국가대표로 일할 적 에는 체급 관리다 뭐다 해서 술은 일절 입에 대지도 않았던 것 같은 데……. 무의미한 회상을 멈췄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연민은 달갑지 않다. 어둠 속에서 할 말을 기다리는 너를 본다. “이제 슬슬 내 집으로 돌아갈까 하고.” “아, 그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모든 걸 예상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만큼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우리는 한 번 도 이별을 겪어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네가 팔을 다쳤을 때 왔던 슬 럼프와는 차원이 달랐다. 어떤 시련에도 이겨낼 것처럼 굴던 우리는 많이 헤져 있었다. 금방 다친 상처는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알지 못 하는 새 사랑을 잃어버렸다. 이제 남은 건 과거에 느꼈던 감정을 되새 김질할 뿐이었다. 사랑의 상실도 재활이 가능할까? 자신이 없었다.
화남, 10년의 이별
그러기엔 나이를 너무 먹은 탓이었다. 잘 접은 우유갑을 내다 버린 네가 뒤늦게 대답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여행이라도 가자. 그 정도는 괜찮지?” 난데없는 제안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여행이라니, 마지막을 기념 하는 여행도 있던가. 하지만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이성을 재치고 일어났다. 마치 은퇴를 위한 마지막 시합이라도 나가는 듯, 삭막한 집 보다 나은 종장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승낙하기로 한다. “연차가 남긴 했어. 그런데 네가 괜찮을지 모르겠다.” “괜찮아.” 두 사람은 결국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수영장 시설 관장은 갑
작스러운 연차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드문 일이었던 탓인지 결국 승인했다. 공화는 어떻게든 시간을 조율한 것 같았다. “미안, 당일치기만 가능할 것 같아.” “상관없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사치스럽게 비행기를 타겠냐.” 농담하자, 공화는 픽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우리는 작은 가방을 든 채 좌석에 앉았다. 이별 여행이라니, 아이러니했다. 평소에는 훈련이 며 여러 일정으로 해외여행 한 번 제대로 오른 적이 없는 탓이었다. 아 쉬워하면서, 언젠가 신혼여행을 가게 되면 근사한 섬으로 떠나자고 했 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백색 모래사장에서 산책하며 색색의 산호 사 이에서 스노클링을 약속했던 기억이 났다. 둥근 비행기 창밖을 내려 다봤다.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익숙한 도시들이 까마득하게 내려다 보였다. 너는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듣고 있었다. 승무원이 멀리서부터 푸드 코트를 밀며 나타났다. 복도 중앙에서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덕질의 민족 여름호
“음료 드시겠어요? 오렌지 주스, 물 있습니다.”
“물 두 잔으로요.”
“물 두 잔으로요.”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승무원은 잠깐 웃더니 물을 따라 주었 다. 자연스럽게 컵을 받아서 들어 입에 가져다 댄다. 나는 어깨를 으 쓱이며 창문에 시선을 던진다. 결국 제주도만 여러 번, 최근에는 그마 저도 바빠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가을의 제주도는 영 처음이었다. 푸른 나무 대신 낙엽이 바닥을 모 포처럼 덮은 채였다. 그래도 푸른 바다만큼은 다르지 않았는데, 발 을 집어넣을 수도 없을 만큼 차가운 점을 제외하고는 그랬다. 언제나 사람들이 즐비했던 백사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함께 온전한 하루를 보 내는 게 얼마 만이더라, 떨어져 걷는 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일부러 즐거운 체하지도 않았고 그렇다 하여 애절하 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함께 음식을 먹고, 바다를 걷고, 카페에 갔다. 전부터 내가 가고 싶었던 오름을 오르기도 했다. 오름의 정상은 가까 운 바다와 마을이 한눈에 보였다.
“야, 사진 찍어줘?”
“아니.”
“왜, 너 지금 되게 각이 좋아.”
“사진은 기념하려고 찍는 거잖아, 계남아.”
헤어진 연인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함께 본 적이 있다. 너도 출연하라고 하면 어떡할래?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럼 우리가 헤 어져야 하잖아. 방금 이별 통보라도 받은 사람처럼 너는 울상이 되 어 있었다. 진짜 이별을 준비하는 너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화남, 10년의 이별 7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가슴이 저릿하게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여행은 즐거워지려고 오는 거잖아.” 내가 반박했다. “즐겁고 싶었는데, 솔직하게 어려워.” 우리는 가장 중요한 말을 내뱉지 않은 채 대화했다. 누구도 헤어지 자고 먼저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은근하게 회 피했다. 주어가 빠진 대화는 맴돌기 마련이었다. 침을 삼킨다. 네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보다 훨씬 선이 짙어지고 단 단해진 낯이었다. 확실하게 잘생겼다고 정의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카메라에 잡힌 네 얼굴은 팬이 많아지기 충분한 값을 하고 있었다. 그를 따라붙는 수식은 이랬다. 잘생긴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여공화, 장기연애 해바라기 여공화. 일반인 여자친구를 둔 여공화. 이제는 돌 아온 솔로 여공화가 되려나. 실없는 생각이 흐른다. “매니저 오빠한테는 뭐라고 말했어?”
“뭘?”
“우리 관계에 대해서……. 솔직히 곤란한 거 아니냐?”
“괜찮아.”
“네가 원한다면 늦게 알려도 돼. 나도 비밀로 해줄 수 있으니까.”
“…….”
나는 결국 운을 떼기로 결심한다. 작별을 고할 시간이 왔다고 생 각했다. 웅변하듯 또박또박 문장을 읽었다. 여태 내뱉지 못한 대사를 기어코 입에 담았다. “우리가 헤어졌다는 거 말이야.” 생각보다 매끄러운 목소리가 혓바 닥을 감쌌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슬프다기보단, 몽롱한 기분이었다. 현실감이 없었다.
덕질의 민족 여름호
“계남아.”
“알고 있었어, 우리가 소원해진 지 꽤 됐다는 거. 그래도 있잖냐, 나
쁜 끝은 아니라서 다행이야. 넌 내 20대의 전부였으니까.”
한 번 터진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언젠가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던 파도 소리는 그저 바위를 갉아 먹는 채찍질처럼 느껴졌다.
“나는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어려웠고.”
“후회 안 하겠어?”
“정으로 살아가기엔 아직 이르잖냐. 이혼 딱지보단 전 여자친구가 있었다~ 정도가 낫지 않겠어.”
“우리가 함께했던 세월이 있었으니까. 자그마치 10년이잖아.”
“길었네. 과거가 우리 발목을 잡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속에 있던 말을 모두 털어놓자, 그제야 갑갑했던 숨을 내쉴 수 있 었다. 보통 이별에는 어떤 표정을 짓더라, 나는 연기자가 아니었으므 로 순간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두꺼운 눈썹이 중 앙으로 찌푸려졌다. 너도 꼭 비슷한 얼굴이었다.
“행복해야 해.” “친구로 남을 수 있는 거지?”
“그럼, 종종 연락하면서 살자. 결혼하면 꼭 말하고……. 인마.”
“축의금 많이 내.” 장난스러운 웃음이 바람처럼 흩어진다.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다. 나 는 평생 우리가 함께일 줄 알았다. 그럼에도 마지막엔 누구도 울지 않 았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10년간의 연애는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았 다. 행복을 바라고, 괜찮은 추억으로 남겨두는 이상적인 이별을 맞이했 다. 내 청춘의 한 페이지를 모두 바쳤던 네가 진심으로 잘 되길 바랐다.
화남, 10년의 이별 9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공식적으로 이별을 선언한 후, 모든 게 다 끝났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헤어짐을 고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남아 있었다. 몇 해 전, 팔을 다친 적이 있었다. 등산하다 조금 긁혔을 뿐이었는 데, 매일 수영장에 들어갔다 나왔다 했더니 상처는 오히려 덧나기 시 작했다. 방수 밴드를 잘 붙였어야 했는데, 잠시 빼먹은 결과는 참혹했 다. 불어 터진 상처가 결국 흉터로 남은 셈이었다. 공화는 예쁜 팔에 흉이 났다며 잔뜩 속상해했다. 그때의 상처를 옷 위로 문질렀다. 짙 은 색의 얼룩으로 여태 남아 수영복을 입을 때마다 눈에 거슬렸다. 또 다시 과거를 회상한다. 기억을 제어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내가 뽀뽀할수록 사라지는 것 같지 않아, 응?” “팔에 뽀뽀하는 거 좀 웃기지 않냐?”
연신 내 팔에 대고 입 맞추는 너를 보며 웃는다. 차라리 입에 해주 라. 짧게 깎아 삐죽삐죽한 머리 위에 얼굴을 묻었다. 따가운 머리칼 도 그저 귀엽게만 느껴져서, 어쩔 수 없다는 양 얼굴을 비빈다. 실제 로 흉터가 옅어지기는 했다. 재작년에는 확실히 눈에 띄었던 것 같은 데, 이제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모를 정도로 사라졌다. 너는 내게 가장 큰 흉터가 될 거였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흉 터로, 아마 완전히 잊기 위해선 적어도 몇 해가 걸릴 거라고 생각한 다. 공식적인 연인이었던 마지막 날은 어둠이 내리던 공항 뒤편이었 다. 서로의 행복을 바라는데, 어째서 이렇게나 날카롭게 느껴지는 건 지 모를 일이었다.
10 덕질의 민족 여름호
#105. 한국 / 제주공항 뒤편 골목 / 밤
여공화 (담담한 목소리로) 우리가 왜 헤어져야 했을까. 이계남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을 뿐이야.오래 봤잖아, 우리.
여공화 (중얼거리며) 선택. 이계남 (가만 마주보다가) 인사하자.
계남, 천천히 팔을 벌린다. 공화, 잠깐 주저하다가 함께 안는다.
이계남 안녕, 여공화.
여공화 안녕, 이계남.
천천히 카메라 멀어진다. 음악 오르며 블랙아웃.
끝_20221031
화남, 10년의 이별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