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란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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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 Muted Notes

김유란 개인전 2 0 17.2.8 -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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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마디 대화 후... Oil on Canvas 162.2×130.3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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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말 사이에서

말에 대한 관심은 유년시절 가족 이외의 사람과는 말하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에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작가는 정 확한 병명까지도 말해주었는데, 그러한 명칭이 있다는 것 은 나름의 안도감을 준다. 명명되고 설명될 수 있는 것은 해결방법이 있음을 암시한다. 말에 대한 어려움은 개인의

김유란의‘하고 싶은 말’전은 하지 못한 말에 얽힌 이야기

특수한 경험이기 보다는 보편적인 문제이다. 말이란 인간

이다. 개념미술이 아닌 한 그림은 말이 없다. 만화처럼 말

을 인간이게 한 것이며 사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상징

풍선이 달려 있으면 편하겠지만, 만화는 그러한 해결책 때

적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고, 이 우주에서 태어난 이

문에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한 말풍선에 의존하

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주어진다. 어떻게 배웠는지 기

지 않고‘하고 싶은 말’을 그림이라는 또 다른 언어로 할

억이 나지 않는 자연스러운 모국어 외에도 이후에 제 2의,

수 있는 것은 모든 훌륭한 화가의 자질일 것이다. 사실은

3의...로 계속되는 지배적인 언어의 취득이 요구된다. 작

모든 작품 발표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공공영역에서 하

가의 유학생활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더욱 강하게 해주었

는 것이니 만큼, 이러한 전시제목은 동어반복적일 수 있

을 것이다. 말은 소통의 도구이지만 이 도구가 다시 인간

다. 그것은 작품이 일종의 조형언어라는 것일 뿐 아니라,

을 옭죌 수 있다. 말의 양면성은 세계를 특징짓는 수많은

작가는 전시를 기회로 직접적으로 발언해야 하는 경우가

역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역설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김유란은 스스로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 말에 관련된 트

출발로 해서, 수많은 제도 속에서 말을 매개로 한 소통의

라우마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그림은 말 그대로

출발점일 뿐이다. 작품에 대한 말은 잘해도 못해도, 심지

소통과 치유였다. 말로 안 되는 것은 그림으로 하면 되는

어는 작품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는 순간조차도 뭔가 불편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화면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었을 때

한 것으로 남는다. 특히 맨 마지막 문제는 그렇게 말로 할

같은 문제가 회귀한다. 작품에 대한 말은 물론, 작품 자체

수 있는 것을 왜 힘들게 그림으로 그리나 하는 의문을 낳

가 말인데 그 말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근본적인 문제

을 수 있다.

는 해결되지 않고 또 다른 차원에서 시작되며 이러한 과정 은 삶이 이어지는 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림에 관한

말은 최선의 경우에도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대해 근접할

한, 적어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에 좀 더 강도 높은 대면,

수 있을 뿐이지 일치될 수 없다. 단적으로 아직 우주나 생

거의 대결이라 해야 할 상황이 펼쳐진다. 이 대결은 매번

명의 비밀이 아직 안 풀려진 것은 그러한 불일치에서부터 ‘영도(零度)’(롤랑 바르트)에서 다시 시작해야하는 즐겁 온다. 말과 사물의 거리에 대한 얼마나 많은 철학적 논구

고도 괴로운 게임이다. 그림은 치유이지만 또 다른 병의

와 예술적 성찰이 이루어져 왔는가. 재현이나 표현의 문제

원인도 될 수 있다. 자연이나 타자와의 만남은 돌파구가

는 또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또는 확장하고자)하는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유란의 작품에는 이

추세는 말과 사물의 괴리가 인식되기 시작한 근대이후 문

러한 조우가 많이 표현되어 있다. 물론 그것들은 조우 그

예사조의 중심문제였다. 작품을 그자체로 봐주면 얼마나

자체라기보다는 조우 이후에 대한 기억과 반성, 즉 추체험

좋으련만 관객들은 끝없이 물어보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다.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요?’,‘어떤 내용을 말하는 것인가 요?’라고. 김유란의 작품은 보이는 것 외에 또 다른 말을

자유로운 붓 터치로 바람결에 날리는 향긋한 풀내음이 날

준비해야 할 추상미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촘촘한 재현

것 같은 작품 [서서히 사라진 기억]은 도시 속 공원에서 행

주의에 충실한 작품도 아니기에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복하게 놀았던 경험과 관련된 것이다. 행복했던 순간은 매

것이 동어 반복이 아니라면, 말에 대한 말을 주제로 하는

우 짧지만 기억은 길다. 작품은 그러한 기억을 다시 연장

메타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시부제에 묶여

하는 기회가 된다. 자연 속에서 행복했던 기억은 지나갔기

진 작품들은 작가의 절박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때문에 또한 슬프다. 그림을 포함한 언어는 이제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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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말한다. 작품 속의 도상들은 이미 멜랑콜리의 기운이

작품 [나와 너]는 작가가 목격한 두 유모차의 만남에서 시

있다. 화면 중간쯤에 잘린 나무둥치는 다른 이미지들보다

작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의 두 아이는 잠깐의 우연한 만

비교적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비록 완전히 죽지 않고 새

남 동안 그들만의 소통을 한다. 유모차 끌고 있는 어른들

로운 가지가 돋아나고 있지만, 그나마 가을 잎새처럼 누런

은 모노톤으로 처리되어 있는 반면 아이들은 초록빛 융단

잎이 생기고 있다. 원초적 자연이라고 할 수 없기에 위험

이 깔린 듯한 바닥, 그리고 잡다한 배경을 지워버린 검정

하지 않은 공원의 숲은 놀이터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색으로 돋보이게 하여 우연한 만남을 극적인 사건처럼 표

즐기는 이 또한 희미하게 표현되어 있다. 숨은 그림처럼

현했다.

풀숲에 거려져 있는 인간의 실루엣은 마치 땅으로 돌아간 인물처럼, 또는 투명인간처럼 보인다. 작가로 추측되는 인

어른들은 모르는 아이들의 언어에 대한 이야기는 작품 [우

간은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린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어]에서도 드러난다. 남자는 아 이의 키 높이에 맞춰 다리를 구부리고 마주하며 둘 다 팔

또 다른 푸릇한 숲 그림에서도 인체는 등장하지만 손과 발

을 뻗어 적극적인 신체언어를 구사하고 있지만 서로의 표

등 부분들로 나타난다. 기억의 잔상인 숲은 더욱 거칠게

정이 전혀 안 읽히게 표현되어 있음으로 인해 그 둘이 제

그려졌다. 자연은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넉넉한 무대가

대로 소통하고 있는지는 의문에 붙여진다. 작품 [말하지

되지만 인간들과의 만남은 그렇지만은 않다. 작품 [몇 마

않되 말하고 있는]은 오른 편의 앉아있는 개와 왼편의 서

디 대화 후…]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남자가 등장한다. 무

있는 사람을 마주하도록 배치했다. 작품 속 인간은 동물과

엇의 예술인 그림 속 남자는 몸짓이라는 무언의 언어를 날

무언의 대화를 하고 있지만, 인간이나 개의 표정은 보이지

린다. 자신의 표정을 감추는 거대한 손은 방어적이며, 그

않는다. 김유란이 소통의 대상으로 삼는 타자는 아이와 동

러한 행위가 일어난 동안의 침묵은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

물, 자연과 사물 등 광범위하다. 그만큼 다양한 언어가 필

을 것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한 것이 말이라면 손 또한 그

요하다. 작품 [눈사람, 그날의 기억]에서는 눈사람을 만드

렇다. 손과 두뇌는 같이 발전한다. 그래서인지 손과 눈을

는 엄마와 아이보다는 빨간 모자를 쓴 눈사람이 더 눈에

바로 연결하는 미술은 인지기능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시

들어온다. 대상은 인간을 대신하여 말한다. 김유란의‘하

기에 유용한 도구로 간주되기도 한다. 수화라는 손의 언어

고 싶은 말’은 소박한 희망사항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말

도 있지만, 손과 언어의 관계는 보다 근본적이다, 가령

/침묵에 관한 깊은 의미의 층을 건드린다.

‘말을 하는 존재, 즉 생각하는 존재만이 손을 가질 수 있 고 손으로 조작하며 작업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언급

말은 문학 뿐 아니라 현대철학의 주요한 주제였다. 그에

은 노동하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게 된 이유를 철학적으

관련된 대표적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세계는 사

로 조명한다.

실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엄격히 말해서 사실들은 정의될 수 없다. 이 철학자는 언어를 엄격한 사유의 중심에 두었

김유란의 작품에서 손은 상대와의 어색한 상황도 표현하

지만, 언어 만능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논리 철

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가득 들고 있는 만족스러움도 표

학 논고]에서 대상(사물, 존재물)이라는 낱말이 고유개념

현한다. 커피 잔을 가득 들고 있는 작품은 다른 부분에 비

어로 쓰이는 곳에서는 언제나 무의미한 사이비 명제들이

해 손이 강조되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반바지

생겨난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한계는 오직

입은 다리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품 [춥게만 살아가고

언어에서만 그어지며, 그 한계 건너편에 놓여 있는 것은

있다는 생각] 역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을

단순히 무의미가 된다. 사물들의 선천적인 질서는 존재하

강조하는 화법을 유지한다. 자세한 묘사가 말에 해당되는

지 않으며, 명제는 사물이 어떻게 있는가를 말할 수 있을

부분이라면, 붓질이 드러나는 거친 표현은 침묵에 해당하

뿐, 사물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트겐

는 부분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다 자세히 그리

슈타인은 우리가‘이것은 사람이다’,‘이것은 집이다’라

지 않는 김유란의 작품에서 침묵은 말만큼이나 중요하다.

고 말할 때, 무엇이‘이것’인가를 묻는다. 삶의 규칙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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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의 옷으로 포장되지만, 이 비유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

마디 대화후…]는 그러한 불편한 침묵을 표현한다. 또한

야 하는지를 서술하는데 봉사할 수 있을 뿐, 근거 짓는 데

많은 작품에서 발견되는 자세히 그리지 않은 부분 역시 침

는 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묵의 영역에 속한다. 피카르트는 과학의 비유를 들었지만, 그것의 응용영역인 기술은 그러한 모순을 증폭시킨다. 현

이처럼 말과 사물의 지시 관계는 명확한 것이 아니라 멀찌

대인은 새로운 기술적 관계망을 통해 더 많이 소통하지만

기 벌어져 있다. 말과 사물의 간극에 관련된 사유는 르네

소통에 더 목말라한다. 그림이라는 무언의 언어는 원활하

마그리트의 그림이나 이에 대한 미셀 푸코의 해석 등으로

지 않은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완충지대라고 할 수 있는

풍부하게 제시된 바 있다. 이 간극 때문에 지시된 사물은

침묵의 영역에 속한다. 머리와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수

미지의 것이 된다. [논리 철학 논고]에서는 보여 질 수 있

많은 상념들을 이성의 빛 아래 한 줄로 세우기를 권하는

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는 논제가 나온다. 결국 비트겐슈

시대에 회화라는 동시적인 언어로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타인은‘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

작가는 끊임없이 그 영역을 지키고자 한다.

으면 안 된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바로 그 침묵의 영역 이 작가들에게는 예술적 영감의 광대한 영역이 된다. 특히 관습적인 언어방식을 해체하고, 그 해체의 파편들과 간극 에서 작업하고자 했던 현대 예술가들이 사물들에서 발견 한 것은 이성의 동일성을 비켜가는 타자의 언어들, 즉 침 묵이었다.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때 항상 제 3자가 듣기 마련이며, 그 제 3자 가 바로 침묵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 침묵은 오늘날 아무런 효용도 없는 현상이다. 그 에 의하면 침묵은 사물들 속에 들어있는 만질 수 없는 어 떤 것을 강화시켜 주고 사물들이 이용당함으로서 입게 되 는 손상을 완화시켜 준다. 피카르트는 사물의 존재성이 침 묵 속에서 더욱 강화된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침묵 을 잃어버린 사회이다. 침묵 대신에 판을 치는 것은 공허 한 말들과 소음들이다. 피카르트는 과학이 지배적인 사회 에서는 더 이상 인간과 대상간의 진정한 만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술은 과학과 기술이 다 충족시키지 못 하는 간극을 주목해 왔다. [침묵의 세계]는 인간이 대상에 이르기 전에 대상은 미리 장악되고 그리하여 대상은 하나 의 과학적 결과를 제시할 뿐이라고 하면서, 과학적 세계 속의 인간은 침묵하는 실체를 갖지 못하고 매순간마다 그 앞에 제공되는 지나치게 많은 사물들로 인해 압박을 받는 다고 비판한다. 오늘날 인간들은 너무도 많은 사물들에 부딪히기에 인간 의 영혼에는 이젠 어떤 침묵하는 평안도 없고 다만 침묵하 는 불안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가령 김유란의 작품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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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 Oil on Canvas 113×145cm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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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되 말하고 있는 Oil on Canvas 113×145cm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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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그날의 기억 Oil on Canvas 130×1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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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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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는 물결 속과 같다. 불규칙적이고 예측가능 하지 않기에 어린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기쁨과 아쉬움으로 가득찬 것이고 하루하루 알게모르게 자라나는 식물의 모습에 감사한 마음이 번지는 것 아닐까. . . . 시간의 흐름과 변화, 축적되는 이미지에 대한 믿음이 있다. 이는 우리가 관계맺는 모든 관계에 대한 믿음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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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서로 다른 말을 하고있어 Oil on Canvas 113×145cm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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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그 날의 풍경 Oil on Canvas 120×150c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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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운 마음 Oil on Canvas 89.4×150c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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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게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 Oil on Canvas 80×80cm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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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뒤죽박죽 되었네 Oil on Canvas 91×116.8c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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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사라진 기억 Oil on Canvas 162.2×260.9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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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마음을 가리는 그림자 Oil on Canvas 80.3×116.8c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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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기 #1 나무 패널에 프라이머, 젯소 20×15c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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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기 #5 Oil on Canvas 26×18cm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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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기 #3 나무 패널에 프라이머, 젯소 15×20c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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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기 #2 나무 패널에 프라이머, 젯소, 돌, 헝겊, 개미 15×20c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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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란 yuran2yuran@gmail.com 2015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학부 서양화전공 졸업 2012 이화여자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전공 졸업 개인전 2017 하고 싶은 말, 갤러리 도스, 서울 그룹전 2016 2016 제주아트페어, 제주 2015 Art in London Work in Seoul 15X15, space bm, 서울 2014 Art in London Work in Seoul 14X14, Salon de H, 서울 2013 감정의 늪, 스페이스 15번지, 서울 2013 Expert Class, 경재정선기념관, 서울 2013 틀을깨다, 경재정선기념관, 서울 2012 MULLTIPLAY, 성북구립미술관 분관, 서울 2009 합병증-과잉 혹은 결핍, DIO ART CENTER, 인천

전시기획 _ 2017년 갤러리 도스 '다시보기' 기획공모 선정작가展 도록저작권 ⓒ 2017 김유란 이 작품집은 어떠한 경우에도 저작권자의 글로 적힌 동의가 없이는 전체로나 부분으로나 복사, 복제 또는 사진 및 기타 정보기기에 의해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발행 김유란 | 편집 Gallery DOS Publish | 제작 50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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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AN KIM SOLO EXHIBITION 2017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7길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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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 02 737 4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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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x. 02 737 4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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