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 - 2024 5 0 년







2023. 9. 9 가을 야유회

Downsview Dells Park Area #4 (2515 Jane Street, Jane & Keele 남서쪽)
1974 - 2024 5 0 년
2023. 9. 9 가을 야유회
Downsview Dells Park Area #4 (2515 Jane Street, Jane & Keele 남서쪽)
법학 56학번 유복영
법학 56학번 유영린
임학 57 유의종 아내 유신영봉
생물 60학번 한상희 경영 74학번 이이희
정치외교 75학번 나운택
영문학 77학번 이용우
농경제 77학번 심민섭
농경제 83학번 홍성호
건축과 84학번 김대식
1974년 4월에 토론토에서 교우회가 창립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50년이 되었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캐나다에서 한인 이민 역사와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고대 교우회는 이민 초기에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국땅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시절에 고 이종옥(경제 50) 선배님의
착안으로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불과 15명의 교우가 모여서 창립한 교우회지만 이 선배님의 헌신적이고 탁월한 Leadership에 힘입어
많은 교우들이 협조하고 수고함으로써 크게 성장 발전해 왔습니다. 이 선배님은 초대 회장을 역임한
후에도 거의 5년 전에 작고 하실 때까지 사모님과 더불어 교우들의 친목과 복리증진을 위해서 헌신하시고
모교의 발전을 위해서도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이 선배님은 1950년 6월에 고대에 입학 하자마자 6.25
전쟁이 발생하여 살아남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하셨으며 3년 후 휴전이 된 후에도 모교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우리 후배들처럼 아름다운 고대 Campus에서 학창 생활을 별로 해보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모교에 대한 사랑과 애교심은 대단했고 돌아가실 때까지 선후배들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은 실로 눈물겨울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런 훌륭한 분을 선배로 모시고 선배님 내외분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Toronto에서 이민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을 참으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훌륭한 교우들이 많이 나와서 토론토 교우회가 더욱 크게 발전하기를 차제에 기대해 봅니다.
역대 회장들과 임원들의 노고와 많은 교우들의 헌신적인 교우회 사랑에 힘입어 토론토 교우회는 다른
이민 초기에는 캐나다가 한국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월등히 부유한 선진국이었고 교육 면에서도 앞서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학위나 경력은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민자들과 우리
교우들도 전공과는 상관없는 직장이나 사업에 종사하는 어려움을 겪으며 삶을 개척해야 했습니다.
오늘날은 모국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세계적인 수준이 되었고 또한 교육 수준도 크게 발전하여
이민 와서 직업을 찾고 정착하는 것이 옛날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며 정착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수록 교우들 간에 긴밀한 관계와 협조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첫 50년을 교우들이 이민의 개척자로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며 이민 1세로서 경제적 안정과 자녀 교육에
중점을 두는 삶을 살았다면 다음 50년은 캐나다의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가고 공헌하는 차원의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는 교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50년 후에 창립 100주년을 맞을 때의 교우회는
모국과 모교가 눈부시게 발전하였듯이 크게 발전하여 이 나라와 사회에서 인정받고 칭찬 듣는 교우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임원들, 그리고 모든 교우들과 부인들의 혼신의 노력으로 오늘의 ‘토론토 교우회’ 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교 고려대학’ 의 역대 총장 중 가장 눈에 띄는 총장은 단연 김준엽 총장님으로 보여집니다.
토론토 교우회의 역대 회장들의 경우 이종욱 교우님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준엽 총장의 고대 사랑, 고대생 사랑은 얼마나 컸던지, 군부 정권의 압력에 맞서, 제자들의 희생
보다는 자신의 총장직 임기만료전 사퇴를 마다 하지 않은 총장이셨습니다. 왜정 치하에서 학병으로
끌려 갔다가 탈영하여 김구선생 휘하의 독립군에 합류하여 해방을 맞을 때까지 ‘지성인의 행위 실천’을 몸소 보여준 인격자셨고 해방 직후 독립운동의 경력을 앞세워 자리 차지하기에 혈안이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여 ‘아세아 문제 연구’의 금자탑을 세운 참다운 학자 이셨습니다.
역대 정권의 국무 총리 영입 권유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는 고려대학교 교수직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학자로서의 자긍심과 선비로서의 꼿꼿함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모교에서도
김총장님의 탄신 100주년 기념 행사를 지금 크게 벌리고 있는 것도 우연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김준엽 총장 일행들께서 토론토
50년전 토론토 교민의 숫자가 아마도 1천여명 정도였을 시절, 블루어 한인 타운에는 교민 업체래야 몇
개의 한인 식당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당시 토론토에는 우리 고대 교우를 전부 합쳐 봐야 십여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때 이종욱 선배님께서는 브라질을 거쳐 캐나다에 이민 정착하신 지 몇 년 안 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민 정착 초기에 자리잡기에 여념이 없던 시절에 7-8명의 교우들을 블루어의 한인식당에 모이게 하여
고대 교우회 토론토 지부 창립을 발의하신 교우회 토론토 창립자 이십니다. 토론토 교우회 첫번째 회장의
책임을 맡게 되신 이 교우님께서는 교우 소식 회람도 만드시고 자신의 사저로 교우들을 초치하여 이때
부터 교우들 식사 대접과 교우들의 이민 정착에 뒷바라지를 하셨는데 이러한 수고는 이 선배님이 몇 년
전 작고하실 때까지 사모님과 더불어 계속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50년 가까운 세월을 토론토 고대
교우회를 위해 자신의 생업에 앞서, 시간과 돈과 정성을 쏟아 부으신 내외분들이십니다.
이 선배님 내외분께서 토론토 교우회에 쏟으신 시간, 금전, 노력, 그리고 그 정성을 자신의 자산 증식에
쏟아 부었더라면 토론토에 큰 상업 빌딩 하나쯤은 마련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교우들의 업소
인근을 지나치시면 시간을 쪼개어, 들러 가시고 식사 시간대에 방문하실 경우, 식당 음식 값을 꼭 자신이
전액 부담하셔야 속이 풀리시는 마음이 재벌이신 신사 이셨습니다. 이민 초기 지갑이 얇기는 누구나 매
한가지인데 자신의 희생을 더 기쁨으로 여기신, 마음이 바다처럼 넓으신 분이셨습니다. 토론토 교우회
회원이면 이 선배님 댁에서 사모님이 정성스레 차려 주시는 식사 한번 대접받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 선배님과 사모님의 그 정성과 사랑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업습니다.
이 선배님은 소박하시고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는 정신이 철저한, 동. 서양 신사의 면모를 두루 갖춘 분 이셨습니다. 한참 후배에게도 반말을 쓰는 경우를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후배나 선배들의 어려움을
자신의 어려움처럼 걱정해 주시고 도우려고 애쓰신 분이시고 교우들의 기쁜 일이 있으면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신 참 사람 이셨습니다. 오늘의 토론토 교우회가 이루어진 것이 저절로 그리 된 것이 아님을 더욱
느끼게 되고 선배님의 남기시고 가신 그 빈 자리가 너무나 커서 앞으로의 토론토 교우회의 미래가 걱정이
사랑을 듬뿍 쏟은 교우님들과 부인들께서 먼저 하늘 나라로 서둘러 가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고려 대학교 교우는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가족입니다. 만나면 반갑고 언제 보아도 정겹고
끈끈한 고대 가족입니다. 이러한 느낌은 고대 교우들 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고 이 세계 어느 대학
출신들도 가져 볼 수 없는 자랑입니다. 그래서 고대는 훌륭한 그리고 특이한 대학입니다.
피겨 스케이팅 올림픽 금 메달리스트 김연아가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동계 올림픽 유치 프레젠테이션에서 유창하고 감명적인 그리고 정겨운 연설로 올림픽 위원들을 감동케
해, 동계 올림픽 유치경쟁에서 독일을 누르고 평창 올림픽으로 확정짓도록 큰 몫의 기여를 하는 것을
보면서 고대인의 출중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김연아 선수는 한 연예프로 인터뷰에서 연예기자가 김연아 선수를 놀려 주려고 연-고 정기전이라고
뱉았다가 고-연전 이지 어찌 연-고전 이냐고 핀잔 아닌 핀잔을 기자에게 날리는 재미 있는
최근의 뉴스에 의하면 일반 대중에게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한 개인 독지가가 고려대학교 발전 기금으로
써
630억원의 거금을 고려 대학교에 헌납했다는 소식입니다. 한국 국민들에게, 고려대학교가
얼마나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부부의 캐나다 생활과 고대동문회는 뗄수 없는 끈끈한 연결고리로 맺어져 있다. Mrs.고대라는게
그리도 자랑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캐나다에 온 후에야 알게 되었다. 웬만한 대가댁 동서지간 저리
가라 할 만큼 부인들간의 우애 또한 끈끈하다. 한국에서라면 이렇게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살기에 더욱 똘똘 뭉치게 되는 것 같다. 즐거워서 만나고 슬퍼서 만나고 또 외로워서
만난다. 여기에는 해병대와 호남향우회 이상가는 선후배간의 사랑과 존경심이 그리고 매기 회장단의
희생봉사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캐나다에 정착해서 얼마 안되어 우연히 야유회에 참석했을 때 어색하고 쑥스러워 주춤해하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 노선배님 한분이 옆에 오시더니 이것저것 물어보시고 관심을 가지셨다. 처음엔 왜 이러실까
의아할 정도였다. 어려운 것은 없는가 불편한 것은 없는가 먼저 손을 내밀어주신 것이었다. 새로 정착하여
모든게 낯설고 물설은 우리의 사정을 미리 아시고 여러가지 조언들을 아낌없이 해주셨다. 무엇보다 고대
우리는 그분이 좋아서 선배님댁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까지 하게 되었다. 오가는 길에 불쑥 우리집에
들리셔서 차한잔 하시길 좋아하셔서 즐기시는 쿠키나 캔디들을 준비해두곤했다. 알고보니 그분은
토론토 고대모임을 처음 만드신 대부이셨던 것이다. 부인 역시 나의 대학교 선배이시기도 해서 안팎이
선후배이니 더욱 돈독해졌다고 할까. 뭘 시키시면 꼼짝없이 순종해야만 했다. 덕분에 “당신들이
맡아줘야겠어요.” 라는 말씀 한마디에 김 견 선배(영문과 49)의 유고집을 편집하고 출판하는 일을
맡아하게 되어서 서울을 오가며 매달렸고 출판기념회까지 한맘성당에서 성황리에 잘 치루었다. 그래서 2
003년에 “달과 시와 음악과” 라는 책이 태어나게 되었다.
한번은 고대교우 독창회가 있다고 하여 고대에 음악대학도 있었던가 의아해 하며 참석해 보니 남편과
동기인 김정운씨(법학57)의 독창회였다. 아마추어를 능가하는 성악실력이 아까워 함께 즐기고 기량을
펼칠 자리를 마련하고자 이종욱, 김 견 두
예약하고 음악회 준비를 진행시켜나갔던 것이다.
딸아이의 해금연주도
한껏 빛이 났다. 특히
들려왔었다, 끈끈한 정은 푸른 잔디 위의 미래의
세계 유래없는 동문회로 소개되기도 했다.
훼어뷰몰 도서관(Fairview Mall)의 강당을
병실에서도 그분의 노래녹음이
예약하여 본국 동문회보에
해마다 풍성한 봄가을의 야유회와 화려하기까지 한 연말 파티는 고대의 또다른 힘을 보여준다. 역시
즐거운 자리이다. 야유회가 열리는 공원에 함께 따라갔던 유치원 손자가 이제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어 “할아버지 고대 야유회 안가셔요?” 하고 물어본다. 애들이 한참 커서 어른이 된 후에도 할아버지
할머니 따라 파크에 가서 공차고 바베큐 하고 상품타던 추억을 가질 것이다. 한번은 초등학생 손녀딸이
‘상품이 왜 크리넥스와 치약이지요?” 하고 의아해 하며 질문한 적이 있었다. 여럿이 골고루 나누어 가지려는 맘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나 보다. 매 년 등장하는 김소일 교우가 가져오는 통돼지 구이도 잊을
수 없다.
팔순 넘은 노인이 되어서도 고대교가를 부르며 “칼마시 케시케시” 교호를 외칠 때는 힘이 불쑥 불쑥 솟는 것 같은 남편은 고대라는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청년으로 변하는 것만 같다.
캐나다에 살면서 고대 와이프라는 것이 더욱 더 자랑스럽다.
그때는 그랬었지
경영 74학번 이이희
서울올림픽이 한창인 1988년 9월 중순, 세상물정에 아직 익숙하지 못했던 30대 초반의 아내와 어린
두 아들과 함께, 미지의 세계가 줄 수 있는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의 모습으로 피어슨 국제공항에 발을
내딛었다. 35년이라는 세월을 토론토에서 보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그때는 그랬다.
벤죤슨의 약물파동으로 호텔방에 비치된 일제 텔레비전에서는 아나운서의 감격과 흥분의 금메달 화면과
실망과 놀라움의 화면이 반복 재생기능으로 되풀이 되는, 그때는 그랬다.
당시 교우회 총무를 맡으셨던 주창균 선배님의 전화번호 한장으로 그해 가을 새교우 환영회에 어렵게
도착하여, 피곤한 심신을 풍덩 던져버린 , 교우회와의 첫만남은 전병웅선배님 회장시대, 회장단의 최진희
가수의 흐느적거리는 노래소리와 함께, 내 뇌리에 뿌리치지 못할 강렬한 힘으로 각인되었던, 그때는
그랬다.
이듬해 조병역선배님의 회장단 구성에 간사로 합류하여 김응하 선배님, 서광철 선배님과 함께 “고대의
밤”을 준비하며 많은 선배님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거의 매일 저녁 숱한 회의와 만남, 식사로 밤이
지새는 줄을 몰랐던, 그때는 그랬다.
간사로, 총무로, 교우회 회장으로 동분서주하며, 교우회의 활성화를 위해, 선배님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는다는 마음에 피로할 틈도 없었던, 그때는 그랬다.
어느덧 두 아들의 아비로, 네 손주의 할아버지로, 많은 후배들의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노년의 문턱에서, 희미해지는 이 땅에서의 삶의 마무리가,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상상 못했던, 그때는 그랬다.
문득, 35년의 토론토생활을 되돌아보며, 그때 다짐했던 교우회와의 고대사랑이 이렇게 절절할 것이라고는, 그때는 몰랐던, 그때는 그랬다. 그때는 그랬던 많은 것들이, 앞으로도 고대사랑에 조금 더
알아가는 그런 날들을 다짐하며. 모든 교우님들을 사랑합니다.
어릴 때 내가 살던 집에는 요즘 집들처럼 열고 닫는 창문이 없었다.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라 당시
시골집들은 대체로 볏짚을 섞은 벽으로 되어 있었고 출입문 외에는 사면이 꽉 막혀 있거나 창이 있더라도
조그만 봉창(封窓)이 고작이었다. 봉창이란 채광과 통풍을 위해 흙벽에 조그만 구멍을 뚫어 한지나 다른
종이로 바른 창으로 창틀도 없고, 열고 닫을 수도 없는, 말 그대로 봉해진 창을 말한다. 당시 시골에는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밤만 되면. 그야말로 암흑 천지로 변했다. 어른들이야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아이들은 해가 지고 나면 그 깜깜한 문밖으로 나가기가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었다. 그 때만 해도 드물긴
해도 가끔씩 늑대가 동네에 나타나기도 했고 웬 도깨비는 그리 자주 나타났던지 자고 일어나면 어젯 밤에
어느 동네 누가 밤 나들이를 갔다가 도깨비를 만나서 밤새 씨름을 하다가 새벽녘에야 온몸이 땀에 젖은
채 초주검이 되어 집에 들어왔다는 둥 하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얘기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 상황이니
땅거미가 진 후로는 감히 밖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 하고 급한 용변도 윗목에 놓아둔 요강으로 해결하곤
했다. 그렇다고 호기심 덩어리인 아이들이 바깥세상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에만 갇혀 있자니
바깥이 궁금하고 나가 보자니 겁이 났다. 그때 방안에 앉아서 바깥세상의 동정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바로 봉창이었다. 봉창에 작은 구멍을 내고 밖을 살며시 내다봄으로써 바깥의 동정을 살피는 것이다. 한껏 부풀려진 상상력과 함께 그 깜깜한 어둠 속을 빼꼼히 내다보면 늑대도 보이고 도깨비도 어른거리곤 했다.
예전에 시골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삼촌이었다. 스무 살이 채 안 되었을 그 삼촌은 국민학교 저학년이었던 우리들이 보기에 만물박사였다.
온갖 재미있고 무서운 옛날 얘기로 우리들의 넋을 뺏는가 하면, 역사, 정치, 국제관계를 넘나들며 해박한
지식을 과시했다. 미국이 어떻고 소련이 어쩌고 하면서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고, 일본놈
일어서니 조선 사람 조심해라”하고 결론을 내리면 우리는 이제 국제정세를 훤히 꿰뚫게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코리아’로 통하는데,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못 받아 “코리아가
아니다.”라고 해서 ‘노 코리아’로 통한다고 일갈하면, 우리는 그 해박한(?) 지식에 감동하여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삼촌이 어디서 “North Korea”라는 소리를 주워들었던 모양인데. North를
자기가 아는 Yes, No의 “ No”로 알아듣고는 순진한 우리들에게 아는 채 한 거였다.) 말하자면, 그
삼촌은 우리가 넓은 바깥세상과 통하는 봉창이었다. 그 삼촌도 자기가 아는 만큼의 좁은 봉창을 통해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든 채 우리는 그렇게 속 시원하게 친히 내다볼 수도 없고, 활짝
열어젖히고 고개를 내밀거나 나갈 수도
손가락 구멍으로 세상을 읽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근 도시로 진학을 하여 시골에서는 어쩌다 한 번씩 볼 수 있었던 버스를 매일
타고 등하교를 했다. 등하굣길에 도시를 가로 질러가는 버스 차창을 통해서 내다보는 도시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한 것들이었다. 금발의 멋진 서양배우들이 그려진 극장의 화려한 선전 간판과 각종 상점들과 넓은 포장도로와 네거리 신호등과 고층 빌딩과 ...... 지금까지 책에서만 보았고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것들이 차창 너머로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그 경이로움이란 어린 나에게 감당하기
벅찰 정도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나의 봉창 구멍은 차츰 넓어져 갔다.
거의 20여 년 전 내가 캐나다에 첫 발을 디딘 다음 날 아침부터 희끗 희끗 눈발이 날렸다. 그날만이
아니라 그렇게 시작된 눈은 시도 때도 없이 줄기차게 내렸다. 우리 식구가 임시 거처로 정하고 머물던
대로변 상가 위층에 있는 아파트는 도로 쪽 벽이 커다란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커다란 창인데도
외풍이 별로 느껴지지 않아 자세히 살펴보니 한국에서 흔히 보는 유리창과는 달리 유리가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캐나다의 추운 겨울에 대비해 만들어진 이중창을 통해 내다보는 이국의 거리 풍경은 그
이중창만큼이나 생소하기만 했다. 이튿날 아침 창밖을 내다보니 건물 뒤편 공터에 누군가 눈사람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그 눈사람은 내가 어렸을 때 만들곤 했던 그 눈사람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눈사람을 만들 때는 눈을 크게 한 덩어리 뭉쳐서 몸통 겸 다리로 쓰고 그보다 좀 작게 뭉친 덩어리를 그
위에 얹어 눈, 코, 입을 붙여 얼굴을 만들면 된다. 그런데, 캐나다의 눈사람은 몸통 부분이 두 덩어리로
되어 있었다. 서양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다리가 길어서 몸통과 다리를 따로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삼층 구조물처럼 훤칠하게 서 있는 그 눈사람의 모습은 이중창 너머로 보이는 거리의 차량들과 어지럽게 걸려
있는 외국어 간판들만큼이나 낯설고 멀어 보였다. 그렇게 낯선 이국의 풍경들을 창 너머로 물끄러미
바라보다 갑갑한 마음에 무작정 밖으로 나섰다. 이웃에 사는 듯한 여인이 하이!”하고 인사를 했다.
얼떨결에 나도 “하이!”하고 맞인사를 건넸다. 옆에 따라오던 딸아이는 움찔하며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내게 바짝 붙어왔다. 네 살이 채 안 되었던 딸아이는 그 후 누굴 만나러 가기만 하면 “영어 사람이야?
한국말 사람이야?”라고 불안한 눈빛을 보내며 물어오곤 했다. 딸아이의 눈에 비친 이국의 낯 선 풍광들이
우리와 바깥세상 사이에 놓인 저 이중창만큼이나 두텁고 멀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오늘도 밖에서 돌아오자마자 늘 하던 대로 컴퓨터 앞에 앉아 창을 연다. 창을 열고 들어가면 음악이 있고,
친구들의 안부편지가 있고, 세상 구석구석에서 일어났던 일,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언제부턴가 이 컴퓨터 속의 창이 바로 내가 세상과 통하는 봉창이 되었다. 낮 동안 들어온 메일을
확인하고 고국 소식들을 뒤적인다. 옆에서 지켜보던 딸아이는 한글들이 화면에 떠오르자 슬그머니 일어나
제 방으로 들어간다. 거실의 커다란 창 너머로 누군가 집 앞 작은 공원에 만들어 놓은 삼 단짜리 눈사람이
비뚤어진 입으로 빙긋이 웃고 있다.
저는 충남 대전에서 출생해 1975년 충남고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습니다.(육사 35기).
당시는 군사정권이 득세하던 시절로 지방의 고교생들로서는 S대 법대, 아니면 육사라고 불릴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출세의 한 방편이었던 거죠.
그런데, 멋진 제복에 반해 들어간 사관학교는 저의 길이 아니었음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관학교 입학
후 4~5개월이 지나면서 저의 번민과 고민이 시작되었고, 입교한지 꼭 1년 만에 자퇴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본의 아니게 재수를 하여, 아니 대입예비고사를 놓치는 바람에 3수를 하여 새로운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저는 학번으로 치면 고교 동기생들보다 2년이 늦은 77학번이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선택할 때, 남들은 어느 대학을 갈 것인지 고민한다는데, 저는 전혀 고민같은 걸 해본적이
없습니다. 그건 당연히 대 고려대였고, 고대 외에 다른 학교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려대야말로 석탑(Granite Tower)과 호랑이로 상징되는 호방한 학풍과 자유, 정의,
진리라는 민족대학의 지향점을 가장 선명하게 표방하는 최고의 대학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캠퍼스에 들어서면 그 웅장한 교문이 저의 가슴을 뛰게 만들고, 정면에 바라다 보이는 본관과 서관
시계탑의 위용에 눈물이 날 정도로 크나큰 자부심과 활활 타는 열정이 저를 설레게 했습니다.
고대생 배지를 단 학생들은 어딜가나 서로가 친근하기 그지없는 일체감을 느꼈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프라이드 못지 않게 고려대의 학력 수준은 다른 어느 대학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고 눈부셨습니다.
다만,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인지라
난무하는 등 공부에만 집중할 수 없었던 아쉬움도
저는 학교를 졸업한 후 해병대 장교를 거쳐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첫 직장은 대기업인 H그룹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입사한 부서에는 고대 출신 선배가 2명이나 있었고 제가 들어가자 너무너무 반색을 하며 반겨주었습니다.
업무에 대해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것은 물론이고, 회식자리도 자주 만들어 저를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차츰 알고보니 그 회사엔 유난히도 고대 출신이 많았습니다. 최고경영자(CEO)부터 중간
간부급까지 요직엔 예외없이 고대 출신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역시! 고대 출신은 어딜가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업무를 잘 수행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거니와, 또다른 장점으로는 조직에 화합을 잘하고 리더십도 뛰어나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선배님들 덕분에 저는 첫 사회생활을 무난히 통과했습니다. 지금도 대기업과 정부, 정계,
금융계, 언론계 등 사회 모든 분야에는 고대 출신들이 요직에 두루 포진해서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이
대한민국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 아니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하지 않습니까!
그후 저는 대기업 생활을 접고 언론의 길로 들어섰으며, 24년 전에 뜻한 바 있어 캐나다 이민을
결행했습니다.
낯선 땅에 이민을 와서도 저의 끈끈한 모교사랑은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고대’ 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뛰고 일체감을 느낍니다.
이민을 와서도 교민언론에 종사하다 보니 한인단체에 참석할 일이 많은데, 어딜 가도 고대 출신이라 하면
모든 분들이 우러러 봅니다. 말하자면 ‘인간 보증수표’라는 것이지요.
진정, 고대라는 브랜드 파워가 해외 이민사회에까지 이렇게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줄은 몰랐습니다!
가끔은 이민생활의 애환도 있지만 그럴때마다 “나는 대 고려대 출신이다!” 라는 사실을 되새기는 순간
어딘가에서 힘이 불끈 솟는 것을 느낍니다. 이같은 감정을 저만 느끼는 걸까요?
사랑하는 교우님들, 우리가 비록 낯선 타국땅에서 힘들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대 고려대’의 이름
하나로 받는 그 수많은 축복들을 가슴에 새기며 우리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을 소중하게 추억합시다.
교우님들 사랑합니다...
농경제 77학번 심민섭
토요일에 만나요! 호랑이들이여!
론(Lawn) field에서 펼쳐지는 우정의 한판 승부! 이어지는 수다가 곁들여지는 여흥!
토요일이 기다려진다. 생각만 해도 좋다. 직접 만나니 더 좋다. 그 토요일을 기다리며..
고려대학교! 내 청춘 때부터 꺽어진 140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까지 나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준
버팀목인 너! 가슴 저미도록 고맙다.
대인들이 다니는 고대! 다시 태어나도 나는 고대를 가리라!
교우회라 부르는(동창회라 부르지 않고) 우리만의 독특하고 친근한 만남!
우리는 고대!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헤이, 고대 얏!
회고해 볼때 이보다 더 좋은 학교가 있을까?
1. 2014년 3월 29일 두 아이들과 아내 그리고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거의 3년만이었다.
캐나다 토론토의 피어슨 공항인천공항까지는 일본을 경유해 무려 17시간 반이 걸리는 고생길. 대한항공
직행편도 있지만 나는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가격이 저렴한 대신 몸으로 시간 때우는 경유 방법을 택한다. 그리곤 그런 나의 결정에 대해 그 긴 시간이야말로 한국의 지인들을 볼 기대와 설레임을 더 길게 느끼게
해주는 모처럼의 특혜가 아니겠냐며 자위한다.
2. 한국에 갈 때마다 느끼는 불만 아닌 신기함이 있다. 에어캐나다는 나이가 드신 할머니 여승무원들이
많다는 점. 한국의 국적기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항공에서는 20대에서, 나이가 많아야 30대 초반이
될까 말까하는, 그야말로 젊음과 매력이 넘치는 한국 최고의 여성 승무원들이 좁은 기내 복도를 왕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이것을 좋게 볼 것인지, 아니면 나쁘게 볼 것인지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겠지만 나이가 50~60은 족히 되어 보이는 중년의 여성(약간 심하기로는 할머니)
들에게 그녀들의 외모를 따지기에 앞서 승객의 짐을 받아 좌석 위 짐칸에 낑낑대며 올려 놓으려는 모습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이번 비행에서도 3년 전에 보았던 당시에도 나이 지긋한 50대 여성 승무원이
그대로 일을 하는 것을 보며 “역시 대단한 캐나다”라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3. 비행기 안의 지루하고 기나긴 시간이 지나고 인천 공항에 내리니 이미 봄기운을 넘어 초여름을 가득
담은 바람이 코끝을 스쳐왔다. “캐나다는
4. 입국신고와 세관신고를 마치고 대합실의 문이 열리자 누나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다행이었다. 누나가
나오지 않았다면 (당시) 6~7만원이나 들여가며 택시를 잡아타고 어머니 집이 있는 (서울 노원구)
월계동으로 와야 했을 길이었다. 내가 캐나다로 처음 왔을 때가 1998년 7월. 그때의 한국 원화 가치와 26
년이 지난 요즘의 원화 가치는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원화의 숫자가 캐나다 달러 보다 0이 서너개 더
많이 붙어 있어 난 원화를 쓸 때마다 달러로 계산할 때에 비해 돈을 더 많이 쓰는 듯하여 내심 돈 쓰기가
불편할 정도다. 가령 캐나다 달러로 50불을 쓰는 것과 원화로 50,000원을 쓰는 것은 비슷하지만 원화
지출이 웬지 더 많이 쓰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얘기다.
5. 외국에 산다는 게 가장 힘든 부분 중 하나는 늙어가는 부모님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하는 일. 몇 년이
지나 어느날 그야말로 갑자기 많이 늙어버린 부모님 (나의 경우, 2014년 기준으로 아버지는 이미 7년
전에 돌아가셨으니 어머니만 계셨었다)과 맞닥뜨렸을
그 황망함을 어찌 표현할까... 그날도 집에
도착하니, 항상 그렇듯, 먼 길을 찾아온 자식을 한두 시간족히 문 밖에 나와 기다리셨단다. 그런 어머니를
뵙는 나의 마음은 그저 죄스럽고 죄송할 따름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옷가지 몇 벌 챙기고는 무작정 일찌감치 강원도 속초로 내달렸다. 괜시리
계획을 짠다고 시간을 허비하다 보면 하루 이틀이 그냥 날아갈 수 있음을 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살끝을 에이는 겨울 끝자락 속의 캐나다와 달리 한국은 벌써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혹독한 겨울을 끝내지 않고 날아온 사람에게 한국의 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게다가 천혜의 속초
바닷가의 훈풍이라니... 거기에 바로 내가 있었다.
6. 늦은 밤, 바닷가 선술집에서 회를 시켰다. 소주와 함께. 20년 전 일이 떠올랐다. 나의 절친한 어릴 적
친구와 30살 언저리에 찾았던 대포항에서 그 무슨 대단한 내용도 없었던 그 시간을. 그냥 회 한 점과
소주 한 잔이면 시덥지 않은 얘기 보따리가 줄줄이 풀어지던 젊음이 있던 시기. 그래, 맞다. 나는 그때
진정 젊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시덥지
그건 내가 늙었다는 반증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은 점점 신중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생의 가벼운 즐거움과 행복을 잃는다.
문득 입으로 들어가는 소주 맛이 갑자기 씁쓸했다. 봄바람의 항구 그리고 그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이른
새벽에 잠을 깼다. 그래도 피곤하지는 않았다. 전날 들어간 소주도, 아마 오후에 나그네의 몸이 담구었던 온천물의 효과를 이길 수 없었던 듯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물이나 불 아니면 바람과 같은 1차적인
물질과 인간의 근본과 반드시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그날 아침 난 운이 따랐다. 동해 저만치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을 본 것이다. 나도 모르게 소원을 빌었다.
7. 한국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어느새 3주가 지나가 버렸다. 어머니와 보내야 하는 한정된 시간을
나만이 아니라 어머니도 아쉬워하신다. 그럼에도 매일매일의 생활은 너무도 평범했다. 아니 평범함을
가장해야 했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나는 나대로 또 다시 이별을 해야
하는 슬픔을 내들키지 않으려 빈말을 하기도 하고... 그러나 어머닌 그러한 허세(?)를 내가 마침내 공항의
대기실을 나와 탑승장으로 들어갈 때에는 숨기질 못하셨다. 그만 눈물을 보이신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어색하게 지어 보냈다. 그게 사나이의 자세라고 헛된 믿음을 가지고. 그러면서 어머니 어서어서
들어가시라고 손짓을 날린다. 그것도 잠시 나 또한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어려워 애써 고개를
돌려보지만 그것이 혹여 어머니를 보는 마지막 순간이면 어쩔까 두려워 바로 다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도 말은 없으셨지만 같은 생각이셨을거야. 그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 그리고 어머니의
가장 큰 소원을 비셨을 것이다. “아들아, 잘 살거라..” 나도 마음 속으로 어머니에게 되새긴다. “어머니,
건강하세요. 오래오래 사시고요. 그리고 이 아들은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사랑합니다.”
(4년이 지난후 2018년 7월 3일 돌아가신 어머니의 임종을 나는 다행이도 지킬 수 있었다.)
2001년 6월 처음 이곳 토론토에 왔을 때, 낯선 환경과 문화, 그리고 언어의 장벽은 큰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캐나다가 제공하는 다양성과 포용성 덕분에 그 도전들이 오히려
성장의 기회로 바뀌었습니다. 이민자로서의 삶은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적응력과 인내심을 키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캐나다의 다문화 사회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소중한 인연을 맺고, 가족과 함께 안정된 생활을
꾸려가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특히, 이곳의 자연 환경과 사회적 안전망은 가족에게 큰 위안을 주었고,
개인적으로도 마음의 여유를 찾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민 생활이 항상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때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과
도전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신앙의 힘과 함께 고대 교우회는 제게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고대 교우회는 단순히 같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의 모임을 넘어, 이민 생활에서 정서적,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커뮤니티였습니다. 모국에서의 유대감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고, 고향의 친구들과의
끈끈한 연결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교우회는 제게 새로운 환경에서도 따뜻한 정과 지지를 느낄
수 있는 가족 같은 존재였고, 이민 생활의 고단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또한, 교우회를 통해 만난 선후배들과의
이민자로서의 삶이 주는 도전 속에서도 교우회는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이를 통해 저는
이곳에서 더 나은 삶을 꿈꾸고 실현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토론토 교우회는 수많은 동문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우정을 나누고, 지혜와 경험을
공유하며, 커뮤니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러한 소중한 전통과 유산을
이어오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쌓아온 소중한 인연과 결속력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교민 사회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長江後浪推前浪(장강 후랑 추전랑) “장강의 앞 물결이 뒷 물결을 밀어낸다”라는 중국의
속담이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앞선 세대가 뒤따라오는 세대에게 자리를 내주고, 새로운 세대가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50년 역시 새로운 후배들에 의해서 더 많은 성장을 이루며, 더욱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다시 한 번 캐나다 토론토 교우회 50주년을 축하드리며, 모든 교우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춛교우회
(2008년 작성 - 조성춘)
교우회의 탄생
1980-90년대 총장방문
고대의 밤 행사
정기 고연전
젊은 교우 영입 프로젝트 장학사업 교우회 홈페이지
교우회의 탄생
1974년 4월 셋째 토요일 저녁 블루어 한인타운에 있는 킴스
차이니즈 레스토랑에서 이종욱(경제50) 교우의 제안으로 첫
모임을 가졌다. 참석자는 이종욱부부 홍기표 박윤중 김현석
유복영 유영린 구연원 박문현 김정운 서정웅 정태훈 윤순한
한상희 한기연 교우. 모두 15명이었다. 이종욱 교우가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83년 김준엽 (제9대) 총장 방문
1983 년 김준엽 총장 일행(지청 사무처장, 김원기 교우회장, 이중재 교우회 상근부회장)이 토론토를
방문했다.
이종욱·김정운(법학57)·한상희 교우가 공로패를 받았다(한상희 교우는 교우회 본부의
해외이사를 역임했고 두 번에 걸쳐 <고대교우회보>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80년대 고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강의를 하면서 한국을 자주 드나든 관계로 교우회 본부와 토론토 교우회의 가교 역할을 도맡아 했다). 그즈음 토론토 교우회는 교우회 본부에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해마다 5백달러를 보냈었다.
고대의 밤 행사
1989 년 <고대의 밤> 행사를 1989년 10월6일(금) 오후 7시
토론토 교우회(회장 조병역·상학60)는 마캄시티 퍼포밍아트
시어터에서 <고대의 밤> 행사를 개최했다. 교우 가족과 토론토 한인 5백여 명이 참석해 공연을 함께 즐겼다. 고대
교우와 가족이 출연해 만든 이 공연은 호평을 받았다. 특히 ‘
미스터 고대 선발대회’에 이완식(상학60)·남용문(농경제62)·
민세기(금속공73) 교우 등이 출전해 큰 박수를 받았다.
정기고연전
고연전 축구 야구
1977년 축구 고연전을 시작했다. 첫해 0대 1 패. 1978년 1대 2 패. 1979년 0대 1 패.
“세 번을 내리지자 교우회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 또 져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선수를 뽑아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3월말부터 매주 토요일 서니브룩 공원에 모여 훈련을 했다. 선배님들의 후원 아래
후배들이 주축이 되어 팀을 꾸렸다.”(한상희·생물60)
그 결과, 1980년에는 연대를 대파했다. 11대 0.
충격을 받은 연대는 종목을 바꿔 야구경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1983~1985년 “고연전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기치 아래 국가대표 2루수 출신 주창균(농경제65) 교우가 감독을 맡아 파죽의 3연승. 당시
고연전은 6월 야유회를 겸해 열렸다. 마운드에 선 박기창 (원예65) 교우는 ‘국보투수 선동열’ 같은 신들린
피칭으로 3연승의 주역이 되었다.
정기고연전
고연전 골프
고대 교우들이 연대 동문들과 골프를 함께하기 시작한 것은 1976년이었다. 이민 초기 할 일도 많고 모두
바쁜 시절이라, 축구·농구·야구 등 구기종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덜 드는 골프 친선 정기전을 하자고 뜻을 모았다. 골프정기전은 1980년에 시작되었다. 상대적으로 골퍼 숫자도 많고 우수 골퍼도 많이
보유한 연대는 이 종목에서만큼은 오랫동안 우위를 점했다.
1990년대말부터 캐나다 이민자가 급증하면서 젊은 고대 교우들이 토론토에 대거 등장했다.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토론토 교우회는 2002년부터 ‘80년대 학번들’을 위한 여러 프로젝트를 기획,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들은 토론토 교우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사랑방모임
2002년 교우회(회장 김응하·독문63)가 만든 모임.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교우들이 부담없이 서로 편하게 만날
수 있도록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교우들 집을 돌아가면서
모임을 가졌고 바깥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민선배들이 사랑방모임 이름으로 젊은 후배들을
초대하기도 했는데, 김종성(축산71)· 최영권(기계공75)·
복형규(축산77) 교우 등의 집에서 모임이 여러 차례 열렸다.
여름캠핑
2002년 8월초 시빅홀리데이를 전후한 3박4일 동안 토론토 교우회 여름캠핑이 심코 주립공원에서 처음 열렸다. 이 행사
역시 새로 이민 온 80년대 학번들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젊은 교우들이 어린 자녀들과 함께 편하게 캠핑을 와서
캐나다의 정수인 대자연을 즐겨보라는 취지. 80~90년대
학번 교우들이 이 행사에 대거 참가했다. 교우회 여름캠핑은
2012년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한국에서 오는 이민자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가을야유회로 대체되었다. 젊은 교우 영입 프로젝트
김소일 교우님 주최 8090모임 2003년 가을 스카보로의 한식당 구미에서 김소일(임학61) 교우가 새로
이민 온 80년대 학번 십수명을 저녁식사에 초대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2008년부터 김소일 교우는
더프린서울관에 80~90학번 교우들의 가족까지 모두 초청하여 100명 가까운 젊은 교우 가족들이 매년
봄마다 함께 식사하고 어울리며 친분을 쌓고 친목을 다졌다. 이 모임은 10년 동안 계속 이어졌으며, 2018
년부터 김소일 교우는 8090모임을 ‘4050 청춘모임’으로 전환해 원로 선배님들을 대접해 오고 있다.
장학사업
이종욱(경제50) 교우가 장학기금 3만달러를 개별적 2015년부터 토론토 교우 자녀들을 대상으로 장학금 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이종욱장학금’은 이후 3년 동안 총 6명에게 혜택이 돌아갔다. 2016년부터는 이보 경(영어교육87) 교우가 동참해 1만달러를 장학기금으로 출연했다. ‘이보경장학금’은 2018년까지 교우 자
녀 6명에게 수여되었다. 2019년에 타계한 이종욱 교우의 가족과 김태강(법학59) 교우의 가족이 교우회에 찬조한 총 3천달러는 ‘이종욱김태강장학금’으로 조성되어, 대학에서 공부중인 젊은 후배 교우에게 전달되 었다.
2019년말 84학번 김대식(건축공) 이해승(전자공) 조현일(금속공) 교우가 장학기금 3천달러를 모아 교우 회에 기탁했다. 이 장학금은 이종욱 선배님의 뜻을 받든다는 취지로 ‘이종욱김대식이해승조현일장학금’이
라 명명되었으며, 2022년 총회에서 선발된3명의 교우자녀들에게 각천불씩 장학금을 수여했다.
www.geocities.com/tigertoronto
2000년 3월26일 문창균(건축공82) 교우가 최초로 토론토 교우회 홈페이지를 개설, 운영했다.
www.koreauniversitytoronto.com
2002년 5월21일 남상현(경영61) 교우가 초기 홈페이지를 확대 개편한 새로운 홈페이지의 문을 열었다.
www.koreauniversity.ca
2006년 한 차례 업그레이드를 했고, 2014년 3월 지금의 홈페이지로 발전했다. 남상현 교우에 이어
1980년 교우회보
2004년 교우회보
1989년 교우회보
2006년 교우회보
2019년 교우회보
2022 년 토론토교우회 슬로건으로 다시 새롭게 나아가는교우회
불식된것이아니라우려의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기대와 우려 속에서 저희 회장단은 지난 2년 동안 못했던행사를 조심스럽게 개최하려고 합니다 반세기 선배들이 쌓아온 빛나는 전통을계승하며앞으로교우들이더욱친목하고화합하는데모든노력과정성을쏟겠습니다 앞으로 1년 동안 교우회는 더많은교우들이더자주만나 서로돕고우정을나누는 교우회가될수 있도록 힘쓸 것을 다짐하며 새로이 출범하는신임회장단에교우여러분의
김대식 (건축 84)647-409-9045 이메일:maplehome@hotmail.com
부회장 : 조현일 (금속 84)647-887-0036 이메일:hicho123@hanmail.net
골프 위원장 이해승 (전자 84)905-702-4757 이메일:joellee0422@gmail.com
총무 : 오태훈 (전산 85)416-455-5855 이메일:terryoh5855@gmail.com
골프간사 예준호 (행정 90)416-624-8619 이메일:joonhoye@yahoo.ca
재무간사 박종화 (화공 94)416-523-9328 이메일:parkjonghwa75@gmail.com
홍보간사 김영상 (건축 99)647-383-7706 이메일:youngsangkim97@gmail.com
정기총회
봄 · 가을 야유회
송년파티
골프대회
소모임
전체 교우를 대상으로 하는 정기행사로 매년 3월에 개최한다. 전년도 회장단과 차기 회장단의 이취임식이
이루어지는 자리로, 전년도 회장단의 운영 및 행사를 돌아 보고 한 해동안 사용한 회비의 회계 결산 및 감
사를 진행한다. 차기 회장단은 다음 한 해 동안 봉사 할 임원들을 소개하고, 다음 행사 일정들을 안내한다.
필요한 경우 회칙을 개정하거나 발의된 안건을 의결할 수 있다.
봄 · 가을 야유회
매년 봄과 가을에 모든 교우가 모여 야유회를 개최하고 있다. 토론토의 아름다운 공원에 모여 회장단이
준비한 바베큐와 교우들이 가져온 음식으로 즐거운 식사시간을 갖고, 이 후에는 각종 게임으로 서로의
친목을 다지는 시간을 갖고 있다. 매년 6월에 봄야유회를 가져오다가 2014년에 처음으로 봄과 가을
두차례의 행사를 개최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연말에 한 해를 마무리하는 행사로 모든 교우들이 모여
나누는 자리이다. 대규모 연회장을 대여하여 식사와 음료를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즐거운 시간
을 보내고 있다. 가수를 초대하여 좋은 음악을 즐기거나, 댄스 강사를 초빙해 다함께 춤추는 시간을 갖기
도 하였다. 다양한 게임을 통해 푸짐한 선물을 제공하고 있다.
골프대회
교우회가 주관하여 총장배, 정기고연전, 명예총장배, 교우회장배등 매년 4회의 정기 골프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골프게임을 통해 다양한 연령과 성별의 교우들이 화합하고 교류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게임 이후에는 간단한 식사를 제공하고, 조별 우승자에게 상품을 수여하여 많은
교우들이 사랑하는 행사가 되고 있다.
소모임
토론토 교우회는 전통적으로 소모임 활동이 활발했으며, 교우회는 소모임을 적극 권장해 왔다. 다양한
소모임 활동이 교우회를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바둑·당구 등 많은 소모임이
있었으며, 2022년 현재 활동중인 모임은 다음과 같다.
고사모(고대를 사랑하는 미망인 모임)
작고하신 토론토 교우님들의 부인들이 2015년 10월30일에 결성했다. 원로 교우님들의 사모님 몇 분도 함께하는 모임이다. 회원들끼리 자주 만나 친목을 다지고 영원한 고대가족으로서 교우회 행사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연락처: 박기창교우(원예65)사모님
산행모임
2011년 5월부터 배장수(전자공78) 교우의 주도로 산행을 하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두차례씩 사계절
빠짐없이 산행하고 있으며, 여름에는 1박2일 산행여행도 다녀온다.
회장:배장수(전자공78) / 총무:정중호(금속공82)
알바트로스
2016년 80년대 학번을 중심으로 한 골프 모임. 이후 대상을 고대 교우 전체로 넓혔다. 시간이 맞는
교우들끼리 매주 한 두 번씩 만나고, 시즌중 한 달에 한 번 자체 골프대회를 개최한다. 2022년 현재 45 명. 겨울철에는 실내 스크린 골프장에서 모임을 갖는다.
회장:이호영(경제81)/ 총무:정중호(금속공82), 오태훈(전산과학85)
석란회
2003년 12월 교우회 송년파티에서 여자 교우들이 결성한 모임이다. 이듬해 1월 김태강(법학59) 교우를
초대회장으로 추대하고 거의 매달 모임을 가져왔다. 2018년부터는 오정자(원예64) 교우가 회장을 맡아
모임을 더욱 활발하게 이끌고 있으며 OB모임과 YB모임으로 효율적인 운영을 하고있다.
회장:오정자(원예64) / 총무: 박소영(국교82)
초대 회장단 (1974)
회장 이 종 욱
부회장 유 영 린
간사 한 기 연
4 대 회장단 (1977)
회장 홍 기 표
부회장 김 정 운
간사 한 상 희
7 대 회장단 (1980)
회장 임 태 빈
부회장 윤 순 한 한 상 희 총무 곽 흥 용 간사 정 필
2 대 회장단 (1975)
회장 유 복 영
부회장 유 영 린
간사 송 승 박
5 대 회장단 (1978)
회장 김 병 은
부회장 김 규 석
총무 한 상 희
간사 조 규 혁 성 춘 자
8 대 회장단 (1981)
회장 강 근 형
3 대 회장단 (1976)
회장 김 종 욱
부회장 유 복 영
간사 김 소 일
조 병 역
6 대 회장단 (1979)
회장 엄 기 옥
부회장 서 준 경
총무 조 규 혁
간사 송 승 박 오 정 자 김 동 호
9 대 회장단 (1982) 회장 서 준 경 부회장 조 병 역 총무 정 필 주
광 철
(골프)
10 대 회장단 (1983)
회장 유 영 린
부회장 정 필 주
총무 이 윤 상
간사 곽 일 성 김 경 숙 민 세 기
(1984)
회장 조 성 춘
부회장 김 소 일
총무 박 기 창 간사 김 현 철 윤 용 덕 민 세 기
13 대 회장단 (1986)
회장 박 문 현
부회장 전 병 웅
총무 이 윤 상
간사 김 현 철 김 복 영
16 대 회장단 (1989)
회장 조 병 역
부회장 김 응 하
총무 서 광 철
14 대 회장단 (1987)
회장 장 운 택
부회장 이 완 식
총무 김 현 철
간사 방 장 하
윤 덕 형 장 석 산
17 대 회장단 (1990)
회장 이 완 식 부회장 김 운 영
민 세 기
12 대 회장단 (1985)
회장 김 정 운
부회장 조 규 혁
총무 주 창 균 간사 김 운 영 윤 용 덕
15 대 회장단 (1988)
회장 전 병 웅
부회장 한 무 웅
총무 권 종 학
간사 윤 덕 형 박 종 식 이윤상 (골프)
18 대 회장단 (1991) 회장 김 경 석
서 민 석
이 이 희
19 대 회장단 (1992)
회장 서 민 석
부회장 김 현 철
총무 조 재 훈
간사
양 경 환 이 영 재 하 수 자 임태빈 (골프)
22 대 회장단 (1995)
회장 한 상 희
부회장 김 문 수
총무 왕 운 린
김 인 숙
최 승 관
간사
목 진 애
이완식 (골프)
25 대 회장단 (1998)
회장 남 상 현
부회장 김 동 진
총무 최 영 권
간사
20 대 회장단 (1993)
회장 김 소 일
부회장 김 만 호
총무 양 경 환
간사 이 재 준 하 수 자
정 순 진 이 종 석 백 명
(골프)
23 대 회장단 (1996)
함 병 섭
남 용 문
총무 이 상 진
이 종 석
민 세 기
간사
이 동 훈
김복영 (골프)
26 대 회장단 (1999)
회장 김 운 영
부회장 박 기 창 총무 김 범 기
김 인 숙
종 석
영 권
(골프)
21 대 회장단 (1994)
회장 조 규 혁
부회장 주 창 균
총무 이 동 훈 간사 김 영 효 이 현 자 이 한 수 양경환 (골프)
24 대 회장단 (1997) 회장 김 일 태
부회장 김 복 규
총무 이 종 석
간사
이 의 범 권 숙 자 이 종 성
27 대 회장단 (2000)
회장 김 복 규
부회장 양 경 환
최 승 관
형 규
창 균
(골프)
28 대 회장단 (2001)
회장 최 성 금
부회장 이 강 훈
총무 전 준 식
이 이 희
박 상 인
간사
이 종 훈 김 한 수 송준성 (골프)
31 대 회장단 (2004)
회장 박 기 창
부회장 이 종 석
총무 나 운 택
이 성 진
김 윤 성
간사
문 창 균
이 종 숙
정 혜 주
34 대 회장단 (2007)
회장 이 종 백
부회장 유 경 재
총무 손 병 길 간사 이 영 석 (골프/재무) 지 형 규 박 진 수 성 재 승
29 대 회장단 (2002)
회장 김 응 하
부회장 김 종 성
총무 황 희 성 간사 이 이 희 김 희 철
32 대 회장단 (2005)
30 대 회장단 (2003)
회장 이 윤 상
부회장 이 영 재
총무 윤 영 식 간사
최 영 권 성 우 제 권 동 운 서 향 남 석 원
총무 이 용 우
황 희 성
윤 성 호
이 수 현
간사
총무 이 성 진
간사
김 대 식
김 형 태
예 준 호 33 대 회장단 (2006) 회장 김 현 철 부회장 민 세 기
35 대 회장단 (2008)
회장 김 종 성
부회장 황 희 성
총무 이 영 석
간사 김응하 (고문)
성 우 제
석 원
박 영 준
김 윤 성 민 병 노 권 동 운 김 만 석 원
36 대 회장단 (2009)
회장 이 영 재
부회장 최 영 권
총무 이 영 석 간사 김 광 녕 김 만
재 승
영 준 최 한 태
회장 이 이 희
부회장 복 형 규
총무 이 영 석
김응하 (고문)
문창균, 임홍석
간사
한상철, 박상탁
김권식, 최한태
손혜선
40 대 회장단 (2013)
회장 최 승 관
부회장 임 병 설
총무 홍 성 호
남연주
신종원
간사
오태훈 (재무)
정성욱
박종화 (골프)
43 대 회장단 (2016)
회장 정 종 화
부회장 강 찬 아
총무 오 태 훈
주창균 (고문)
박명규 (골프)
박소영
회장 이 동 훈
부회장 김 윤 성
총무 성 우 제 간사
이승호 (재무)
성재승
손정훈
이상훈
안성희
39 대 회장단 (2012)
회장 최 영 권
부회장 김 광 영
총무 김 만 간사
한상철 (골프)
성재승 (재무)
최한태
박영준
조현영
간사
송상헌 (골프)
정성욱 (재무)
한정석
41 대 회장단 (2014)
회장 이 용 우
부회장 홍 성 호
총무 김 대 식
주창균 (고문)
김윤성 (골프)
이해승 (골프)
간사
남계승
오태훈 (재무)
장경수
이상길
44 대 회장단 (2017)
회장 임 병 설
부회장 이 영 석
총무 김 대 식
이윤상 (고문)
윤숙희 (재무)
간사
남연주 (골프)
오태훈 (골프)
박종화 (홍보)
42 대 회장단 (2015)
회장 김 광 녕
부회장 임 병 설
총무 김 대 식
최영권 (고문)
김춘규 (골프)
이해승 (골프)
간사
석경미
이상길
박영준 (재무)
조현영
45 대 회장단 (2018)
회장 김 구 약
부회장 조 현 일
총무 강 찬 아 간사
이윤상 (고문)
전건호 (재무)
한정석
김진석 (골프)
이해승 (골프)
이상훈 (골프)
46 대 회장단 (2019)
회장 성 우 제
부회장 조 현 일
총무 전 건 호
김종성 (고문)
강형석
간사
이상훈 (골프)
박영준 (재무)
박종화
49 대 회장단 (2022)
회장 김 대 식
부회장 조 현 일
총무 오 태 훈
이해승 (골프)
예준호 (골프)
간사
박종화 (재무)
김영상 (홍보)
47 대 회장단 (2020)
회장 전 준 식
부회장 김 대 식
총무 오 태 훈
송기선 (재무)
간사
김영상 (홍보)
50 대 회장단 (2023)
이 해 승 부회장 조 현 일
총무 정 성 욱
김권식 (골프)
간사
최성호 (재무)
전상현 (홍보)
48 대 회장단 (2021)
회장 홍 성 호
부회장 남 계 승
총무 김 서 연 간사
장경수 (골프)
예준호 (골프)
이시현 (홍보)
박종화 (재무)
김영상 (홍보)
51 대 비대위 (2024) 이 해 승, 김 대 식
2003년
2004년
2015년
2016년
2002년 8월 3일
2003년 8월 9일
2006년 8월 19일
2008년 8월 16일
2008년 8월 16일
2009년 8월 8일
2010년 8월 7일
2007. 11. 24.
*60
*60
*60
65 법학 이행자
50 경제 이종욱*60 상학 이완식*65 농경제
55
55
*60 법학
60
55 화학 김현석*61 경영 권훈 66 생물 양한우*
55 법학 남상빈 61 임학 김소일 66 상학 이승희
55
55
*61 경영
*67
56 경영 서덕우*61 화학 이성애 67 신방
56
56 법학유영린 61 교육정화자 67 전기공한기연
56 의학이강영 61 경제조규혁 67 금속공한진호
57 농학구연원*61 정외최성금 68 생물강기영
57 정외김규석 61 농경제한준도 68 식품공김신철
57 영문김일태 62 임학계정성 68 경영박태부
57 법학김정운*62 농학곽흥용 68 수학박홍배
57 농학박문현*62 영문김운영 68 경영이용우
57 임학박상하*62 농학김화일*68 화공조성호
57 임학유의종 62 농경제남용문 69 독문권종학
57 정외유호익 62 정치이봉재*69 경영김호영
57 법학윤순한*62 농경제장강일*69 농경제박광효
58 정외정의락 63 상학강경옥 69 불문정영석
58 법학한진택 63 상학강기호 69 사학조재훈
58 법학함병섭 63 경제김만호*69 재료공최설용
59 농화학김인규 63 독문김응하 69 전자공한해진
59 법학김태강*63 경영김종욱*70 원예권숙자
59 의학김형순 63 경제김진명 70 축산김복영
59 정외서준경*63
59 농화학 송재하 63 행정 정필주*70 국문 김인숙
59 행정오세붕 63
72 행정김범국 76
72 법학손석남 76 기계공최효건 80 전자공임규재
72 재료공안순구 76 식품공허기봉 80 금속공제경모
72 금속공유경재 76 산업공황희성 80 화학공최근오
72 화학윤덕형 77 화학공김경호 80 통계한승란
72 전자공윤용덕 77 토목공김광녕 81 농경제권영도
72 전기공이영재 77 화학공김윤성 81 농경제김규동
72 법학이의범 77 경영김진석 81
72 통계이종석 77 행정박화규*81 국문김진희
72 기계공홍현철 77 축산&경영복형규 81 수학김창식
73 화학김병년 77 전자공부기흡 81 사회김태완
73 국문김철 77 경제손병길 81 경제박정현
73 금속공민세기 77 농경제심민섭
73 경영박광희 77 사회유철수 81 경제이호영
73 산업공양영환 77 영문이용우 81 건축공조두현 73 건축공이용일 77 사회이희규 81 영문지형규 73 불문정순진
73 중문정연순 78 건축공강찬아 81 물리하배연
73 축산최봉식 78 건축공김구약 82 경영구진회
73 금속공허상 78 가정교육김혜순 82 경영김삼수
74 무역김동호 78 전자공배장수 82 통계김진영
74 지질김창선 78 전자공정종화 82 건축공문창균
74 전자공김학성 78 법학조성진 82 국교박소영 74 사회학과김한규 78 화학공황덕윤 82 경제배기석
74 무역송준성 78 무역홍주호 82 불문성우제
74 노문신한경*79 화학공김경천 82 교육오제영
74 사회오석진 79 전기공김기태 82 식품공유경재
74 경제윤승주 79 경제김대룡 82 국문윤성호
74 지질이동훈 79 축산민병노 82 전기공이수현
74 경영이이희 79 전자공박형운 82 독문이승호
75 법학김범기 79
75 정외나운택 79 기계공이양복
83 경영 안영기 87 독문 강형석 98 불문 한지연
83 재료공이호준 87 화학김형철 99 건축공김영상
83 건축공이흥재 87 기계공김형태 99 경영최성훈
83 영문임소영 87 영교박영신 00 식품공학신준범
83 농경제홍성호
영문서혜정
84 건축공김대식 87 영문장경수 04 경영정보강경진
영문학백웅진
84 수학박동준 90 중문문지혁원62 경제학주홍길
84 간호박원옥 90 기계공박상탁원71 교육학김주년
84 수학백승욱 90 언어학안성희원75 교육학조주연
84 국교석경미 90 행정예준호원80 교육학이강인
84 전자공송상헌 90 법학이상길원81 법학김제완
84 독문유복래*90 언어학이상훈원99 치의학김권식
84 수학윤숙희 90 국교이시현원01 미술교육김기숙
84 전자공이해승 90 동양사이지은원11MBA 이상영
84 불문임선주 90 심리이한선경연60 경영연구김성수
84 법학임재량 90 응용동물한정석경연64 경영연구이영철
84 교육정혜진 91 서문공형준경연65 경영연구김경보
84 심리조기준 91 농생물손혜선경연65 경영연구양태동
84 금속공조현일 91 응용동물양승우경연70 경영연구김완수 84 사학최미정 91 정보공이정길경연71 경영연구이종대
84 불문황철흠 92 농생물길리성경연71 경영연구최영진
85 통계강대석 92 무역김상현경연95 경영연구김우영
토목공김대중 92 농생물김태원 85 신문방송김서연 92 불문과나항렬
85 국문김영주 93 기계공박영준 85 산업공석원 93 토목공최한태
50
60
60
60
65
67
교우회 50주년 기념에 도움 주신 분들
2024. 6. 22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