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집]기아대책 미션투게더21(E-book)

Page 1


“나는 웨스터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조선과 그 민족을 자신의 생명같이 사랑한 헐버트 선교사의 유언입니다.

140년 전, 조선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알렌 선교사를 비롯해 수많은 선교사들은 이 땅을 위해 눈물로 씨를 뿌렸습니다.

이들의 기도와 헌신은 지금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기초가 되었고, 복음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하던 이 민족의 희망이자, 헐벗고 굶주린 자들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되돌아볼 때입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한 외국 선교사들을 기억하며, 한국 교회가 다시금 회복되어 또 다른 선교지로 나아가는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때입니다. 희망친구 기아대책은 한국기독교 140주년을 맞아, 이 땅에서 흘린 선교사들의 땀과 눈물을 한국교회 성도들과 함께 기리며, 세계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을 나누며 기도하고자 합니다.

“Mission Together21”을 통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온 세계에 전하는 사역에 함께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기아대책 목회자미래비전네트워크 대표섬김이 김문훈 목사 미션 투게더 21과

기아대책 홈페이지에서 선교사역에 대해 더 찾 아보고 후원자로 동역할 수 있습니다.

본 묵상집은 21일 동안 매일, 140년 전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외 국인 선교사의 이야기와 성경말씀을 함께 묵상하며, 나의 부르심 과 기아대책의 선교 사역을 놓고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구 성되었습니다.

또한, 3번의 주말 특집 ‘초기선교사의 발자취와 유산’을 활용하여 우리 주변에 남아 있는 선교 유적지를 직접 방문하며 신앙의 발자 취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묵상집은 전세계에 떡과

말씀묵상

선교사 이야기 기도

기도합니다. 여러번 읽으며 하나님 의 뜻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구합니다 01 03 04 02

묵상한 날을

체크해 보세요

p

p

1일차 메어리 F 스크랜튼(시란돈)

2일차 쉐핑(서서평)

3일차 제임스 아담스(안의와)

4일차 사무엘 마펫(마포삼열)

5일차 윌리엄 스왈른(소안론)

6일차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아편설라)

7일차 제임스 스카스 게일(기일) 특집 ㅣ 초기선교사의 발자취와 유산 - 서울

8일차 윌리엄 린튼(인돈)

9일차 윌리엄 J. 맥켄지(매건시)

10일차 샐리 쿠퍼(거포계)

11일차 호러스 뉴턴 알렌(안련)

12일차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원두우)

13일차 프랭크 W. 스코필드(석호필)

14일차 사무엘 F 무어(모삼열) 특집 ㅣ 초기선교사의 발자취와 유산 - 광주

15일차 어니스트 킬보른 (길보륜)

16일차 프레데릭 밀러(민노아)

17일차 유진 벨(배유지)

18일차 로버트 하디(하리영)

19일차 윌리엄 쇼(서위렴)

20일차 제임스 홀(가락홀)

21일차 던컨 맥래(마구례)

메어리 F 스크랜튼 (시란돈)

메어리 스크랜튼은 감리교 선교사로 1885년 아들 윌리엄과 함께 한국 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사회는 유교적 가치관이 강해 여성들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성들이 의료서비스를 받을 기회도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 여성 교육과 의료선교에 헌 신하며 조선 사회에 깊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은 정동병원을 설립해 많은 질병을 치료하며 복 음을 전파했습니다. 이후 병원을 남대문 근처로 이전하며 의료사역을 확장하는 한편, 상동교회를 설립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조선 여성 교육의 새 장을 열다

1886년, 메어리 스크랜튼은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인 이화학 당(현 이화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여성들에게 거의 허락되지 않았던 교육의 문을 여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초창기에는 학생을 모집하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스크랜튼의 헌신 과 노력 끝에 점점 더 많은 여성이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습 니다. 이화학당에서는 한글 교육뿐만 아니라 서양 과학, 성경 공부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으며, 이는 훗날 수많은 여성 지도자와 교 육자를 배출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한국 여성들에게 희망을 심다

메어리 스크랜튼은 단순한 교육자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국 여성들이 단순히 배움을 넘어,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정신적, 지적 성 장을 강조했으며, 여성들이 사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였습니다. 또한, 경제적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스크랜튼 가족이 남긴 유산

한국에서 30년 이상 헌신한 메어리 스크랜튼은 1909년 한국에서

생을 마감하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습니다. 스크랜튼

가족이 설립한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 교육의 중심이 되었고, 보구

녀관에서 시작된 여성 의료 선교는 한국 여성 의료인의 탄생을 이

끄는 중요한 역할을 해 이후 이화여대 의과대학으로 발전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이 땅의 사람들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나는 이 땅

의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다.”

나와 전세계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나를 부르심 나의 다짐과 기도

선교사역

선교사역 후원하기

스크랜튼 선교사 가족을 통해 여성 교육과 의료 선교의 길을 열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들의 사랑과 헌신을 본받아 우리도 소외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삶을 살게 하소서.

과테말라 (장경순, 박윤정) 산마을 사랑의 이삭 교회에 새로운 목회자를 보내주시고, 어린이 결 연사업과 성경공부, 성교육 사역이 하나님의 은 혜로 풍성하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결연아동들과 그들의

2일차

의료

선교의 초석, 생명을 살리는 손길

쉐핑(서서평)

쉐핑 (서서평)

쉐핑은 한국 간호 교육과 의료 선교에 헌신한 선교사로, 단순한 간 호사 역할을 넘어 간호 교육 체계를 확립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여성 권익 신장을 위해 힘썼습니다.

간호와 선교 사역의 시작

1901년 뉴욕 성 마가 병원 간호학교를 졸업한 쉐핑은 신학 공부를 마친 후 1912년 한국에 입국하여 광주 제중병원에서 간호 선교사 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간호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녀는 간호 인력을 양성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한국 간호 교육의 개척자 1917년,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 군산 간호사 3명을 초청해 교 육하는 등 간호사 양성을 위한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1923년, 일본 간호협회의 방해 속에서도 한국 여성 간호사들을 조직하여 조선 간호부회(현 대한간호협회)를 창립하며 한국 간호 교육 발전에 기 여했습니다.

독립운동 지원과 여성 교육

1919년 3·1운동 당시, 쉐핑은 부상당한 독립운동가들을 치료하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또한, 광주에서 여성 성경공부반 을 운영하다가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26년 광주 이일학 교(The Neel Bible School)를 설립, 가난한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 회를 제공했습니다.

마지막 사역과 헌신

쉐핑은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 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35~45

는 좌우명을 실천하며 23년간 헌신했습니다. 과로로 건강이 악화

된 그녀는 1934년 광주 제중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며, 유해는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그녀의

정신은 한국 간호사들의 선서식에서 기려지고 있습니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나를 부르심

선교사역

선교사역 후원하기

쉐핑 선교사의 삶을 통해 섬김의 참된 의미를 깨 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저 또한 그녀처럼 사 랑과 희생으로 이웃을 돌보며 하나님의 뜻을 실 천하게 하소서.

아르헨티나(장영호, 백미영) 비레이 델 피노의 교사들이 에세이사 아가페 교회의 아동사역에 잘 합류하여, 아동들의 숫자가 두 배, 세 배로 늘어나도록 인도하소서.

물가 상승으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도 아동사 역과 포르모사의 지도자 사역에 필요한 재정 을 채워 주시어 사역이 차질 없이 진행되게 하 소서.

50여 명의 초등학생과 중학생 주일학교 모임이 기쁨과 감사 가운데 진행되며, 아동들이 믿음 안에서 자라가도록 축복하소서. 리셋, 루쓰, 브리셋, 사라, 난시 자매들이 기쁨 으로 주일학교를 섬기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신을 통해 큰 열매를 맺게 하소서.

나의 다짐과 기도

되다

제임스 아담스(안의와)

제임스 아담스 (안의와)

아담스는 1894년 12월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 로 한국에 파송되었습니다. 1895년 5월부터 부산선교지부에서 한 국어를 공부한 뒤, 1897년 11월에 대구선교지부에 가족과 함께 부 임했습니다.

아담스 선교사는 1897년 11월 대구선교지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 리며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대구제일교회는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교회로서 아담스 선교사가 초대목사로 시무하는 동안 1903년 사월 교회를 시작으로 무등교회, 월배교회, 침산교회, 신당교회, 범어교 회, 서문교회, 남산교회, 효목교회, 감산교회 등 10개 교회를 분립 하였습니다. 또한 1900년 11월 대남소학교(현 대구종로초등학교), 1906년 5월 계성학교(현 계성중·고등학교)를 설립해 교육선교에도 힘썼습니다.

의료선교와 대구동산병원

대구선교지부 책임자로서 아담스는 1899년 12월에 의사인 존슨(장 인차) 선교사와 함께 예배당 옆 초가를 고쳐 제중원을 세우고 서양의 술로 진료했습니다. 1903년 동산선교기지로 제중원(현 대구동산병 원)을 이전해 의료선교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1909년에는 나환자요 양소(현 애락원)를 설립하여 한센병 환자치료에 앞장섰으며, 1916 년에 내당동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아담스복음전도기금

1922년, 아담스는 자신의 전 재산을 헌납하여 ‘아담스 복음전도기 금’을 설립했습니다. 이 기금은 경북 지역의 선교사와 전도자들을 지

오늘의 말씀

마태복음 13:31~32

원함으로써 지속적인 복음 전파에 사용되었으며, 1930년까지 경북

지역에 72개의 교회가 세워지는 데 기여했습니다.

가족들의 헌신

아담스의 부인 넬리 아담스(탁넬니)는 대구제일교회 부인주일학교 교

장으로서 여성교육과 전도에 힘썼고 1909년 10월 하나님의 부름을 받

아 은혜정원에 묻혔습니다.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삼형제 에드워드(안

두화), 벤자민(안변암), 조지(안두조)와 딸 도로시 모두 한국에서 사역했

습니다. 특히 장남 에드워드는 대구선교지부에서 활동하면서 계명대학 을 설립하고 이사장, 학장으로서 대학발전에 헌신했습니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제임스 아담스 선교사의 헌신과 사랑을 본받아, 맡 겨진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섬김의 삶을 살아가 게 하소서. 그 사역을 통해 세워진 교회와 의료 선교 가 오늘날까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이게 하소서.

에콰도르(장다슬, 전수미) 치안과 안전을 지켜주

시고, 쿠엥카 아동결연센터를 포함한 스텝들과 1천여 명의 아동 및 청소년들이

사무엘 마펫 (마포삼열)

사무엘 마펫 (마포삼열)

마펫은 한국 교회의 기초를 닦고, 평양을 기독교 중심지로 성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평양 최초의 교회 개척과 신학교 설

립, 기독교 교육 발전에 헌신하며, 이후 한국 교회 성장의 초석을 마련 하였습니다.

평양 선교와 장대현교회 설립

마펫은 1890년, 아펜젤러, 헐버트 등과 함께 평양으로 이동했습니

다. 당시 평양은 외국인에게 폐쇄적인 지역으로 선교 활동이 쉽지 않 았습니다. 1893년 한석진, 최치량 등과 함께 평양 최초의 교회인 장 대현교회를 설립 후, 1899년,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해 보다 많은 사 람들이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장대현교회는 이후 1907년 평양 대부 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어 한국 교회의 중요한 역사적 장소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평양신학교 설립과 교육 선교

마펫은 1901년, 6천여 평의 부지에 평양신학교를 설립,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습니다. 평양신학교는 1907년 첫 졸업 생 7명을 배출한 이후, 1909년에는 130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습니 다. 마펫은 1918년부터는 숭실중학교와 숭실대학의 교장을 역임하 며, 기독교 교육 발전에도 헌신했으며, 그의 노력은 한국 사회에서 기 독교가 뿌리내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열린 장로교 총회에서 ‘마펫 목사 선교 40주년 사업회’가 발족되었으 며, 그의 공헌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마펫 가문의 헌신적인 선교 활동

아내 앨리스 마펫은 1897년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평양여자기

독병원에서 봉사하다가 1912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들 사무엘 마펫 주니어는 미국과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955년 한국에 돌아와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로 활동했으며,

아들 하워드 마펫은 1948년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대구 동산병

원에서 의료 선교를 수행했습니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마펫 선교사의 헌신을 본받아, 나도 복음의 기

초를 세우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의 수고로 세

워진 교회와 신학교가 계속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파라과이(김정진, 김은자) 인디언 청소년들이

음악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고 해당 마을의 자립을 위한 빵 공장 건축이 은혜 가운데 마무 리되게 하소서.

에벤에셀 학교가 원활히 운영돼 신학생들이

윌리엄 스왈른 (소안론)

스왈른은 한국 기독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선교사로, 평양과 관서 지방 선교, 교육·교회 개척, 찬송가 작사, 농업 선교 등 다양한 활 동을 펼쳤습니다.

평양 선교와 교육 사역

1893년, 스왈른은 마펫, 그레햄 리와 함께 평양 및 관서지방 개척선 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곧 이듬해 원산으로 옮겨 게일 선교사와 동역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숭실학당(현 숭실대학교) 책임자로

하며 한국 기독교 교육에 기여했습니다. 또한, 조선예수교장로회 공 의회 초대 회장을 맡아 한국 장로교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평 양신학교 설립에도 참여하여 교회 지도자 양성에 힘썼습니다. 찬송가 작사와 신앙 교육

그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네 죄를 회개하 고’, ‘찬송하는 소리 있어’ 등 여러 찬송가를 작사하여 한국 교회 예배 문화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또한 성경통신과정을 개설하여 신앙 교육 을 체계화하였으며, 이를 통해 수많은 신학생을 배출했습니다.

농업 선교와 실천적 사역

스왈른은 단순한 전도를 넘어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선교를 펼쳤습니 다. 숭실대학 농학 교수로 활동하며 기독교적 가치를 실천하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

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

전도지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전도지를 받은 김익두는 전도지로

코를 풀었다가 “그렇게 하면 당신 코가 썩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걱

정되어 밤을 새웠다고 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김익두는 기적적으로

복음을 믿게 되었으며 스왈른의 세례를 받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해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스왈른의 도움으로 회심한 이기풍은 전

라도, 제주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스왈른의 헌신 덕분에 평양은

기독교 중심지로 성장하였으며, 그가 남긴 찬송가와 신앙 교육 유산

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교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라인에게로다 선교사역 후원하기

나를 부르심

선교사역

스왈른 선교사의 헌신적인 사랑과 실천적 신앙 을 본받아, 나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며 살게 하소서. 그의 사역을 통해 심어진 복음의 씨앗이 오늘날에도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네팔(김갈렙, 임여호수아) 2023년11월에 발생 한 지진으로 여전히 고통받는 주민들의 삶의 터 전이 조속히 복구되게 하소서 IT 교육을 받은 아동들과 신학교육과정 학생들이 네팔 과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리더로 성장하게 하소서. 2025년 AG교단의 180여 교회 방문이 부흥의 계

오늘의 말씀 로마서 1:16~17 나의 다짐과 기도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아편설라)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아편설라)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인천 제물 포에 도착했습니다.

한국 선교와 교육 활동

조선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1886년 6

월 8일, 그는 배재학당(현 배재대학교)을 설립하여 조선 청년들에게 서양식 교육을 제공하고 많은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이곳에서 영어, 과학, 서양 철학 등의 교육이 진행됐으며, 이후 한국 근대 교육의 중요 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교회 설립과 성경 번역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기독교 복음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활발한 교 회 설립 활동을 펼쳤습니다. 1887년, 정동감리교회를 설립하였으 며, 이 교회는 이후 한국 감리교회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정 동교회는 예배 공간임에 동시에 조선 사회에 신앙과 교육의 가치를 전파하는 중요한 거점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성경 번역에도 적 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여하여 한 글성경을 번역했으며, 1890년부터는 로스 번역본『예수성교누가 복음전서』을 개정하였습니다. 1892년에는 마태복음 한글 번역을 완성하는 데 기여하며 조선인들에게 성경을 보다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조선 사회와 독립운동 지원 아펜젤러는 단순한 선교사 역할을 넘어,

오늘의 말씀

요한복음 6:32-35

희망과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습니다. 그의 활동은 이후 독립운동

과 민족 계몽 운동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순교와 유산

1902년 6월 11일, 아펜젤러는 전라남도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

역자협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이동하던 중, 군산앞바

다에서 일본 기선 기타마루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배가

침몰하는 과정에서 조선인을 구하려다 익사하였으며, 향년 44세

의 젊은 나이에 순교하였습니다.

“이렇게 생명의 떡을 이 백성에게 떼어주다니 그 얼마나 큰 은혜인가!”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나를 부르심

선교사역

나의 다짐과 기도

선교사역 후원하기

아펜젤러 선교사의 사랑과 헌신을 본받아, 복음

과 이웃을 위해 섬기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의 수고로 뿌려진 믿음의 씨앗이 오늘날에도 열매 맺으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게 하옵소서.

S국(제다니엘, 박안나) 싸** 지역에 영어학원 오 픈을 위한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게 하소서. 푸**** 교회 성도 아기 노이의 발목이 완치되고, 원**와 싸* 교회 그룹홈을

잇는 다리

제임스 스카스 게일 (기일) 제임스 스카스 게일 (기일)

제임스 게일은 캐나다에서 대학 시절부터 선교에 대한 열정을 품었 고, 1885년 프랑스에서 반년을 보내며 선교 활동을 경험했습니다. 1887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윌더와 포먼이 토론토를 방문한 이후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선교의 시작과 40년간의 헌신

1888년 토론토 대학 YMCA 후원으로 12월 15일 부산에 도착한 게일 은 기독교 확산과 성경

동서양의 가교 역할에도 큰 역할을 했 습니다. 한국명 ‘기일’은 ‘낯선 자’ 혹은 ‘기이하거나 놀라운 사람’이라 는 뜻으로 풀이되었고,

사상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낭 만적인 선교사로 평가받았습니다.

게일은 3개월간 개신교의 산실이었던 소래에서 머물렀습니다. 이곳에 서 한국의 언어와 문화, 사람, 한국기독교의 초기상황을 배우며 반평 생 한국사역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892년 6월 미망인 해리엇 깁슨 과 결혼한 후 원산을 거점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연동교회의 초대 장로인 고찬익과도 알게 되었습니다. 연동교회는 게일이 한국 선 교를 펼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1대 담임목사로 사역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3개월간 마펫, 서상륜과 함께 중국과 만주를 거쳐

요한일서 1:12~15

역의 표준을 정립했습니다.

한국 문학과 문화 연구에도 기여

게일은 언어학적 재능뿐만 아니라 한국 문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 습니다. 1895년『천로역정』을 완역하여 출간했으며, 이는 한국어

로 번역된 최초의 서양 소설로서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또한,『구운 몽』과 『도깨비와 민담』등을 영어로 번역하여 서양에 한국을 소개

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그는 ‘한국의 마테오 리

치’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내 언제까지 내 마음에 한국을...”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나의 다짐과 기도 선교사역 후원하기

나를 부르심

제임스 게일 선교사의 깊은 사랑과 헌신을 본받

아, 나도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소 서. 그의 노력으로 전해진 복음이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역사하게 하옵소서.

선교사역

B국(한희준, 메이진우) 오랜 시간동안 발생한 쿠 데타가 종식되고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학사관 학생들 8명이 그리스도께 온전히 헌신하 며, 180명 아동들이 방과후 교실 등을 통해 다양 한 배움을

여정

초기선교사의 발자취와 유산 - 서울

세브란스병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

새문안교회

이화여자고등학교

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역사박물관

한국의 개신교 문화유산에는 하나의 특징이 있다. 교회와 학교, 병원, 그리고 묘지가 하나의 세트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도 선교 스 테이션으로서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 배제학당과 이화학당, 세브 란스 병원, 양화진 묘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새문안교회는 한국 교회의 어머니 교회라는 상징을 담아 어머니의 치마 폭을 형상화해서 지어졌다. 새문안교회는 4살 때 고아가 된 독립운동가 김규식을 새문안교회 언더우드 목사가 양자로 입양했고, 언더우드의 도 움으로 미국에서 박사까지

일교회 청년들과 배재학당, 이화학당 학생들은 이곳에서 독립선언서와

지하 독립신문을 몰래 등사해 밖으로 전달했다.

고종이 직접 학교 이름을 지은 배재학당에서는 육영공원의 교사인 헐

버트가 근대 학문을 가르쳤다. 헐버트가 한글로 지은 『사민필지』는 ‘선

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으로, 헐버트는 조

선 사람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해 알기를 바랐다. 배재학당의 학생

들은 헐버트에게 직접 『사민필지』에 대한 수업을 들으며 세계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또한, 이화학당은 최초로 여학생 체조 수업을 했다. 양반들은 체조 수

업에서 여자가 다리를 들어 올리는 일은 조선 사회의 법도에 맞지 않는

다며 수업을 반대했고, 심지어 한성부는 정식으로 공문을 내 체조를 즉

각 중단하도록 통보했다. 이화학당은 당시 조선 사회의 여성에 대한 차

별적인 시선 탓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여성도 스포츠에 참여할 수 있다

는 인식을 한국 사회에 심어 주었다.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인 제중원은 신분 차별을 넘어 천민의 아들도 의 사로 양성했다. 박서양은 의료 선교사 에비슨의 도움으로 제중원에서

의학을 배워 의사가 되었고, 이후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그의 수술 장면은 한국 초기 병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의료 선교사 헤론의 죽음을 계기로 조성되 었다. 1890년, 헤론이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다 이질로 사망하자, 선교 사들은 조선 정부에 한양 내 외국인 묘지를 요청했다.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이화박물관

끝없는 사랑, 한국을 품은 믿음의 가문

윌리엄 린튼 (인돈)

윌리엄 린튼 (인돈)

윌리엄 린튼 선교사는 1891년 미국 조지아주에서 태어났으며, 어 린 시절 가족을 모두 잃고 외롭게 성장하다가 조지아 공대에 진학 하였으며, 노스애비뉴 교회의 헐 박사의 도움을 받으며 학업을 이 어갔습니다. 한국 선교사로의 부름

1911년, 린튼은 한국선교사로 사역하다 안식년으로 들어온 프레스톤 선교사의 강연을 듣고 한국 선교사로 헌신할 결심을 하였고, 대학을 졸업한 다음 해 9월 20일 목포항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에서의 활동

린튼은 군산 선교지부로 임명받아 한국어를 배웠고, 영명학교에서 영

어와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1917년에는 영명학교의 교장이 되어 교육 에 헌신하였으며, 1926년 전주로 이동하여 신흥학교를 운영하며 교육 자 양성에 힘썼고 1933년에는 신흥학교를 정식 중등학교로 승격시키 는 데 기여했습니다.

대전대학교 설립과 교육 사업 한국전쟁 이후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대전기독학관을 운영 했습니다. 1954년 해외선교부 승인을 받아 대전대학교(현 한남대학 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며, 1959년 대학 정식 인가를 받았습니다. 린 튼 선교사는 한국에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교육기관을 세우 는 데 집중하였으며, 기독교 학교 운영과

오늘의 말씀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

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이사야 58:8~12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한국에서 교육, 의료 및 사회 봉사 활동을 펼쳤습니다.

아들 휴 린튼은 한국전쟁 당시 해군장교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 했고, 아내 로이스는 결핵퇴치를 위해 애쓴 공로로 국민훈장을 받 았습니다. 휴 린튼의 아들 스티브 린튼(인세반)은 유진벨 재단을

설립하여 북한 의료지원사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동생 존 린튼(인 요한)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응급의료체계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119 응급 구조 시

스템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린튼 가문의 한국 사랑은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나를 부르심

선교사역

선교사역 후원하기

윌리엄 린튼 선교사의 헌신과 사랑을 본받아, 하

나님이 맡기신 자리에서 복음을 실천하게 하소 서. 그의 가문이 한국에 보여준 사랑처럼, 나의 삶도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U국(최선봉, 김효영) 불교 지역 ‘호*나’에서 진행 되는 어린이 성경 캠프를 통해 많은 영혼들이 예 수님을 영접하는 구원의 역사가 넘치게 하소서.

가정교회 세미나에 참석한 현지 목회자들이 성령 의 인도에 따라 제자 삼는 사역에 헌신하게 하소서.

나의 다짐과 기도

윌리엄 J. 맥켄지 (매건시)

윌리엄 J. 맥켄지 (매건시)

멕켄지는 캐나다 출신의 독립 선교사로, 조선의 소래교회를 중심으 로 선교 활동을 펼치며 한국 개신교 초창기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 습니다. 조선인 성도들과 자립적인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며, 한국 기독교 교육과 교회의 기초를 닦는 데 헌신했습니다.

멕켄지는 조선 최초 한옥교회인 소래교회를 기반으로 기독교 교육을

교육을 제공하여, 한국 교회가 외국 선교사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는 것에 주력했습니다. 그의 노력은 소래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가 신앙적 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 최초의 남녀공학 설립과 교육 선교

멕켄지는 당시 조선에서 보기 드문 남녀공학 학교인 김세학당을 설립 하며 기독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교육을 확산했습니다. 당시 유교 적 전통이 강했던 조선 사회에서 남녀가 함께 교육을 받는 것은 혁신 적인 시도였으며, 이는 한국 기독교 교육의 기초를 닦는 데 중요한 역 할을 했습니다.

그는 교육을 통해 조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으며, 학생들 에게 성경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학문을 가르쳐 지적·신앙적으로 성장 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오늘의 말씀

요한복음 12:24-25

그의 이른 죽음은 당시 선교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그의 헌신과

희생이 캐나다 장로교회가 한국 선교를 공식적으로 결정하는 큰 전환점

이 되었습니다. 그리어슨 부부, 푸트 부부, 맥래 부부에 더해 약혼녀였던

맥컬리를 포함, 184명 이상의 캐나다 선교사들이 한국을 찾았습니다.

559일 동안 죽도록 조선을 사랑한 사람

“나의 마음은 더는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평안하다. 예수님은 나의 유일

한 희망이다. 그러나 나의 몸은 고통이 심해서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

다. 그러나 죽음이 아니길 바란다. 그것은 조선을 위해서이다. 많은 사람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나를

짧지만 강렬했던 사역이 믿음의 씨앗으로 심긴 것

처럼 나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심기게 하옵소서.

V국(박철규, 김경희) 전쟁 중 개척된 기쁨의 교 회를 통해 피난민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전쟁 이 속히 종식되게 하소서. 지역 내 깨어진 가정들이 회복되고 소외된 청소 년들을 위한 돌봄 공간이 마련되게 하소서. 아동

샐리 쿠퍼 (거포계)

샐리 쿠퍼 (거포계)

쿠퍼는 젊은 나이에 한국으로 선교를 떠나, 여성 신앙 교육과 강원도 선교 활동에 헌신한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원산을 중심으로 성경 교

육을 확립하고, 여성 지도자 양성을 위한 성경학원을 세우며, 험난한 강원도 지역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원산에서의 교육 선교와 여성 지도자 양성

1908년, 스카렛 신학교를 졸업한 후 22세의 젊은 나이로 부산항에 도 착한 쿠퍼는 이후 원산으로 이동하여 교육과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남감리회 선교사 캐롤과 노울스가 설립한 루씨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으나, 점차 성경 교육에 주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여성 지도자 양성을 위한 성경학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후 원자의 이름을 따 앨리스 콥 여자성경학원을 설립했습니다. 이곳은 한국 여성들이 신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 되었으며, 이 후 보혜여자관으로 정식 개교했습니다. 읽기, 쓰기 외 교회역사, 주일 학교 운영, 성경 등을 배우고 전도 실습도 하는 정규과정을 통해 수많 은 여전도인들이 배출되었습니다.

1938년, 한국선교 30주년 기념식에서 쿠퍼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 해 600여 명의 성도들이 원산중앙교회에 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40년,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한국을 떠나야 했고, 이후 미국에 서 신학 교육을 지속하며 한국을 위한 지원을 이어갔습니다.

강원도 선교와 부흥운동

쿠퍼는 강원도 고성, 양양, 속초를 도보로 순회하며 교회를 세우고 복 음을 전파했습니다. 산골을 오르내리며 교회를 돌보다 폐렴에 걸려 고생하기도 하고

한국전쟁과 전후 복귀

1947년, 쿠퍼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공산 치하에 놓인 원산으

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대신 서울에서 성경학교를 개설하여 여성 교육에 힘썼으며, 공산군을 피해 남쪽으로 온 여성들을 대상으로 구 국기도단을 조직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긴급히 대피했으며, 이후 일본과 미국에서 한국인 교회를

돌보며 선교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은퇴와 유산

1953년, 대전신학원 교수로 신학생들을 양성했습니다. 1957년 은

퇴, 미국으로 귀국하였으며, 1978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나를 부르심

선교사역 쿠퍼 선교사의 헌신과 사랑을 본받아, 하나님이 맡기신 자리에서 희생적인 섬김을 실천하게 하 소서. 그녀가 남긴 선교의 유산이 오늘날 나의 삶으로 이어지게 하소서.

J국(폴, 그레이스) 주일학교

11일차

복음의 시작, 믿음의 씨앗을 뿌리다

호러스 뉴턴 알렌 (안련)

호러스 뉴턴 알렌 (안련)

1883년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었으나 적응하지 못하던 알렌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주한미국공사관의 부속의사로 입국했습니다. 이는 한국 의료 선교의 새 역사를 여는 첫걸음이었습니다.

제중원의 설립과 한국 근대 의료의 시작

1884년 12월, 갑신정변 중 심각한 부상을 입은 정부 고관 민영익 (명성황후의 조카)을 치료했고 극적으로 살려냈습니다. 민영익 치

료 이후, 알렌은 한국에 병원이 필요함을 역설하였고, 1885년 4월 10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이 설립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의 제중원에서 의료선교사 헤론과 여 의사 엘러스도 합류해서 진료하였습니다. 이후 제중원 내 의학교 를 설치해 최초로 서양의학교육을 시작했으며 교수는 알렌과 언더 우드였습니다. 마침내 1904년 실업가 세브란스의 지원으로 건물 을 마련해 세브란스 병원의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제중원은 한 국에 갓 들어온 선교사들의 합법적인 선교 전초기지로서 언더우드 가 교사자격으로, 스크랜튼은 의사로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제중 원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는데, 알렌의 한국어 선생이었던 노 춘경이 성경을 몰래 가져다 읽고나서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였고, 이 공동체를 기반으로 새문안교회, 정동교회, 남대문교회가 설립 되었습니다.

의료 선교에서 외교 활동까지 알렌은 의료활동을 멈추고, 미국으로 귀국하였다가 1890년부터 미 국공사관 서기관으로 활동하며 한국으로 돌아와 외교관으로 일했 습니다. 미국으로 수많은 서신을 보내며 일본의 만행을 알렸지만,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오늘의 말씀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알렌은 한국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서 서양 의학을 도입하고, 한국 의료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그의 헌신은 제중원에서 시작해 현대

한국 의료의 뿌리가 되었으며, 한미 관계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그의 사랑과 희생은 여전히 한국 의료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 습니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나를 부르심

선교사역

후원하기

본받아,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기회를 통해 이웃을 섬기며 선한 영 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의 의료 선 교의 유산이 계속해서 이어지며, 많은 사람들에 게 치유의 소망을 전하게 하소서.

캄보디아(김윤정) 언롱슬라엥, 스와이엄삐어 센 터의 40여명의 교사, 스태프가 말씀으로 변화되 고 400여명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고 말씀으로 바르게 가르칠 수 있도록 지혜 주소서.

두 아동개발센터가 스스로 센터를 운영할수 있는 교회와 학교로 자립하도록 은혜내려 주 소서.

매일 운전하며 오고 가는 길이 안전을 지켜주 소서.

누가복음 10:33~37 나의 다짐과 기도

12일차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원두우) 복음과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원두우)

언더우드는 한국 개신교의 초석을 놓은 대표적인 선교사입니다. 1885년 4월 5일, 조선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조선 에서 기독교 신앙이 생소했던 시기, 언더우드는 의료 선교사인 알

렌과 협력하여 조선인들에게 성경공부 및 예배를 통해 복음을 전할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한국 선교와 교회 설립

언더우드는 조선에서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주력했습니

다. 1887년,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새 문안교회는 처음 14명 성도들과 시작되었지만, 이후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는 중요한 거점이 되었습니다. 평양 지역에는 장대현 교회(1900년)를 설립했고, 이 곳은 한국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됩니다. 교육과 의료 선교 활동

언더우드는 단순한 선교 활동을 넘어, 조선인들의 교육과 의료 환경 개선에도 힘썼습니다. 그는 1886년 경신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설 립하여 조선인 청년들에게 서양 교육을 제공했고, 고아원을 세워 조선 의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이후 1915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설립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한 국 근대 교육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경 번역과 출판 활동 언더우드는 1887년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 성경을 바탕으로 성경 번 역을 진행하여 한글과 국한문 혼용 성경을 출판했습니다. 1890년 『한영자전』을 편찬, 1899년에는 『한영문법』을 출간하여 한국

마태복음 28:16~20

어 연구에도 기여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

인 선교사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언더우드와 가문의 선교 유산

언더우드는 단순히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한

국 개신교의 기초를 닦고 교육과 학문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 습니다. 그는 1916년 10월 1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아들 호러스 호튼 언더우드(1890-1951)는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 교)의 3대 교장을 역임하며 한국 교육 발전에 기여했으며, 손자와 후

손들 역시 한국에서 의료, 교육, 선교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나를 부르심

선교사역

나의 다짐과 기도

선교사역 후원하기

언더우드 선교사의 헌신과 믿음을 본받아, 하나

님 나라를 세우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의 신앙 과 교육 유산을 토대로 한국 교회 및 사회에서 계속해서 열매 맺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I국(문설주, 화심) 154군, 40개 광역시, 6개 주에 전 도책임자가 임명되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소서.

20년 동안 세워진 제자들이 교회 사역을 잘 감당 하며 지역사회를 복음으로 변화시키게

프랭크 W. 스코필드 (석호필) 조선의

프랭크 W. 스코필드 (석호필)

스코필드는 수의학자로 활동하던 중, 191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 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초청을 받아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 니다.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넘어, 그는 한국의 정치·사회 문제에 깊

은 관심을 가지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3·1운동과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다

스코필드는 세브란스병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한국인들과 긴밀히 소통하며 일제의 식민 통치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요청을 받아, 3월 1일 서울에서 벌어진 만 세운동을 직접 촬영했습니다.

그는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며, “3·1운동 만세 시위와 일본군의 탄압”을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특히, 일본군 이 무고한 조선인들을 학살한 제암리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이를 해외 에 보고함으로써, 국제 사회가 일본의 잔혹한 식민 통치 실상을 알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의 정 당성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독립운동 지원과 강제 추방

3·1운동 이후에도 스코필드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 습니다. 언론을 통해 일본의 탄압을 폭로했고, 서대문 감옥을 심방하 고 유관순 등이 겪은 고문과 매질을 확인하고 위로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일제의 감시가 심해졌고, 결국 1920년 그는 “가장 과격한 선 동가(Arch Agitator)”라는 명목으로 강제 추방당하게

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오늘의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6:6-8

동을 멈추지 않았고, 언론과 강연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와 독립을 지 속적으로 지지했습니다. 1958년,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다시 한국

을 방문한 그는 ‘스코필드 기금’을 조성하여 고아들을 돕고 연세대학

교에서 강의를 하며 후학을 양성했습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삶과 유산

스코필드는 한국을 “두 번째 조국”이라 부르며, 생애 내내 한국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1969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인정하여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으며, 1970년 4월 1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 았습니다. 스코필드는 생전에 “내가 죽으면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

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나의 다짐과 기도 선교사역 후원하기

나를 부르심

선교사역

스코필드 박사의 정의로운 삶과 헌신을 본받아, 진리를 위해 용기 있게 나아가게 하소서. 그의 사랑과 희생이 남긴 유산처럼, 나의 삶도 하나님 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르완다(김기현, 박지만) 카두하 교회를 통해 해당

지역에 복음의 씨앗이 뿌리내리게 하시고, 사역하시는 목회자가 지역사회에서 복음의 열매를 거두게 하소서. 카구구 센터의 아이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14일차

사무엘 F 무어 (모삼열) 존귀한 영혼,

백정 해방

사무엘 F 무어 (모삼열)

무어(1860~1906)는 미국에서 태어나 1892년 한국에 파견된 감리 교 선교사였습니다. 초기에는 서울에서 사역하다가, 백정(천민 계 층) 선교에 집중하면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보통 내 한한 선교사들은 연지동 ‘선교언덕’에서 한국어와 문화를 1년간 배 운 뒤 사역을 시작했으나 무어는 한강변 초가집에서 백정들과 직접

생활하며 한국어를 익혔습니다. 백정들에게 배운 한국어는 상스러 운 표현이 섞여있어

있게

백정 선교와 신앙 교육

당시 백정들은 조선 사회에서 천대받던 계층이었으며, 기독교 선교사 들조차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어는 백

정과 함께 생활하며 복음을 전파했고, 교육과 의료 사역을 통해 신앙 과 사회적 신분 해방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는 백정들에게 직접 한 국어와 성경을 가르쳤으며, 1898년 강원도 지역에서 2년 동안 12개 교회를 설립하며 복음을 확산했습니다. 한국인 목회자 양성과 교회 개척

무어는 기독교를 전파하며 곤당골교회 개척 등 자립적인 한국 교회 를 세우는 데 집중했습니다. 특히 백정 출신의 박성춘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한국인 지도자로 성장하도록 지원했습니다. 박성춘은 이 후 한국 최초의 개신교 목회자로서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백정 해방운동과 민권 운동 참여

무어는 단순한 전도가 아닌 사회적 개혁과 신앙을 결합시켰습니다.

백정 출신 기독교인들과 함께 백정 차별 철폐 운동을 전개했으며, 고

종에게 청원서를 제출하며 1895년 6월 백정신분을 철폐하는 포고문

이 나붙게 되었습니다. 무어는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 박성춘이 개

막연설을 하도록 도왔고, 이후 백정들이 차별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

도록 교회 설립을 주도하였습니다.

말년과 유산

1906년, 무어는 14년간의 사역을 끝으로 폐결핵으로 하나님의 부르

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헌신으로 천대받던 계층에게 복음이 전해졌 고 교회가 신분 해방과 평등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나를 부르심

마태복음 23:1~12 나의 다짐과 기도 선교사역 후원하기

선교사역

무어 선교사의 헌신과 사랑을 본받아, 소외된 이 웃을 섬기며 복음의 의미를 실천하게 하소서. 그 의 수고로 시작된 신앙과 평등의 정신이 이어지 고,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게 하옵소서.

마다가스카르(박지은) 수도와 남부 프로젝트를 통해 가정이 회복되고 굶주림이 해소되며 무너 진 복음이 다시 굳건히 세워지게 하소서. 함께 사역하는

특집 2

은혜의 여정

광주양림교회 글 허은철 (총신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광주 양림동산

광주 양림동은 교회, 학교, 병원이 모인 개신교 선교 스테이션으로 근대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광주 양림교회는 1907년 광주 남학교 운영비로

850원을 지원했는데, 이는 당시 쌀 95가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 러한 성도들의 자발적 지원은 교회 설립자 유진벨 목사의 교육관에 영 향을 받은 것이었다. 유진벨은 선교사가 세운 학교가 좋은 시설을 갖춘 교육기관으로 성장하길 바랐는데, 이는 광주 양림교회 성도들이 지역 학교 발전에 적극 참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908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유진벨 선교사를 통해 광주 근대 교육 기관인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했다. 숭일학교는 멋진 건물로 유명해 마을 주민들의 관심을 받았으며, 우편엽서로도 제작되었다. 숭 일학교는 보통과와 고등과를 설치해 교육과정을 확장했으며, 4년제 교 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새로운 학습 기회를 제공했다. 1923년 숭일학교 졸업생들은 목사, 교사, 유학생, 의사, 사업가 등으로 활약했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서 인재를 배출했다.

광주 수피아여고는 여성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학교였다. 3·1운동 당시 학생들은 지하실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고 시위에 참여했다. 교사 박애

순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학생들을 보호하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기도 했다. 수피아여고는 연극 ‘열세집’을 공연하며 독립운동 정신을 높였다.

광주학생항일운동 때는 격문을 만들어 시위에 참여했으나 강제 휴교되

었다. 학생들이 만든 백청단은 태극기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주 민들에게 태극기를 설명하고 한글을 가르쳤다. 특히, 백청단은 대한민

국 임시정부 김구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수피아여고 학생들의 독립운

동에 대한 헌신을 알렸다.

광주기독병원의 전신(前身)인 광주 제중원은 나병·결핵 치료 전문 병원

이었다. 윌슨(Robert Willson) 선교사는 나병 환자들을 위한 주일학교 와 숙소를 운영하며 복지를 지원했다. 이 모습에 감동한 최흥종은 목사

가 되어 나주에 호혜원을 설립해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1932년 ‘조선 나병근절책연구회’를 만들어 나병 문제 해결에 앞장섰으며, 나병 환자 150명과 함께 조선총독부로 행진하며 인권을 외쳤다. 서서평(Elisabeth Shepping) 선교사도 광주제중원에서 의료 활동을 하며 고아와 나병 환 자를 돌보았다. 그녀는 거지들에게

등 섬김 의 삶을 실천했다. 이들의 헌신은 섬김을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에서 비 롯되어 광주 시민들의 이웃 사랑으로 확대되었다.

광주기독병원 전신 제중원

쉐핑 서서평 묘비

어니스트 킬보른 (길보륜)

어니스트 킬보른 (길보륜)

킬보른은 19세기 말 한국과 일본에서 성결교회 선교를 개척하고 복

음을 전파하는 데 헌신한 선교사입니다. 그는 단순한 선교 활동을 넘어 신학교 설립과 출판 사역을 통해 한국 성결교회의 초석을 다

졌으며, 평생을 선교에 바쳤습니다.

선교사의 길을 걷다

1894년, 킬보른은 시카고에서 열린 무디교회 선교대회에서 앨버트 심 프슨의 강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전신기술자였던 그는 이 를 계기로 29세의 나이에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심하였으며, ‘전신 기사선교단’을 조직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899년, 그는 무디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신학을 공부한 후, 1902년 만국성결연맹에 서 목사 안수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선교 활동을 시작했으며, 일본 에서 동양성서학원을 설립하여 선교사들을 훈련했습니다. 1917년 10 월 31일 성결교회의 공식 출범을 이끌었습니다.

동양선교회와 한국 사역의 확장

1904년부터 동양선교회를 조직하여 선교사 파송과 복음 전파에 집 중했습니다. 1910년 한국에서 복음전도관이 정식으로 설립되었으 며, 1917년에는 일본 중심이던 선교 본부를 한국으로 이전하여 성결 교회의 부흥을 더욱 가속화했습니다. 또한,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 학대학교)을 설립하여 성결교회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을 배출하는 기 반을 마련하였고, 이는 한국 성결교회가 체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사역과 유산 일본, 한국, 중국에서 신학교

오늘의 말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 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3~10

그는 1928년 4월 1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뇌일혈로 소천했으 며, 그의 마지막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수십 년간

수백만 명을 전도하였고, 나의 소유라고는 송곳 한 개 박을 만한 땅

도 없으며, 가족도 없으며, 내 생애를 쓰다가 남은 돈 50달러뿐인

것이 나의 기쁨이요 자랑이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나의 다짐과 기도 선교사역 후원하기

나를 부르심

선교사역 킬보른 선교사의 헌신과 기도의 삶을 본받아, 나도 주님의 복음을 위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 게 하소서. 그의 수고로 세워진 복음이 오늘날

에도 계속해서 부흥하며, 주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말라위(김성걸, 민지희) 현지의 모든 사역자들

이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 충만하게 하소서.

말라위 2026년 12월 졸업을 앞둔 릴롱궤 아동개

발센터 사역이 끝까지 잘 진행되어, 받은 사랑이

이웃과 지역 사회에 계속 흘러가게 하소서.

릴롱궤 희망참빛초등학교의 교실 증축이 안전하 고 순조롭게 진행되며, 더 많은 아이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소서.

프레데릭 밀러 (민노아)

프레데릭 밀러 (민노아)

밀러는 한국 기독교 선교와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선교사로, 충 청도 청주 지역을 중심으로 교회와 학교 설립, 순회 전도를 통한 복 음 전파, 찬송가 편찬에도 참여하는 등 한국 교회 예배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 선교와 청주 선교 아버지로 활동

밀러는 1893년 서울 예수교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본격적인 선 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894년에는 충청도 청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순회 전도를 통해 지역 선교에 집중했습니다. 1900년 김홍경과 함께 청주에 교회를

공동체를 조직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청주제일교회 설립과 교육 선교

밀러는 1904년 현 청주제일교회를 세워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 했습니다. 청남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서양식 교육을 제공했 고, 1907년에는 부인과 함께 청신여학교를 설립, 여학생들에게도 성 경과 기초 교육을 가르쳤습니다.

민노아학당 운영과 광범위한 선교 활동

밀러는 1897년 민노아학당을 운영해 기독교 교육을 더욱 확장해 갔 습니다. 이 학당에서 청년 시절의 도산 안창호가 예수를 믿게 된 일화 는 밀러의 선교 활동이 한국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오늘의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4-40

떠났지만, 그는 선교 사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36년 미국으로 돌아

간 후에도 한국 기독교 발전을 위해 지원을 이어갔고, 1937년 10월 6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청주 노회는 1984년 한국 선교 100주년

기념으로 일신여고 양관 옆에 그를 기리기 위한 묘비를 세웠습니다.

한국 기독교와 찬송가 발전에 기여

밀러는 1902년부터 통합공회 찬송가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찬송가를 작

사했습니다. 당시 그에게 “예수가 누구라고 조선까지 와서 고생인가. 미 국으로 돌아가지”라고 수군거린 사람들에게 찬송가로 답을 했는데 그 찬송가가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주의 말씀 듣고서’, ‘맘 가난한 사 람’, ‘예수 영광 버리사’, ‘공중 나는 새를 보라’도 그가 지은 곡들입니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선교사역 후원하기

나를 부르심

선교사역 밀러 선교사의 헌신과 사랑을 본받아, 복음을 전 하며 찬양으로 하나님을 높이게 하소서. 그의 수 고로 남겨진 신앙의 유산이 계속해서 열매를 맺 으며, 나 또한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하소서.

말리(정인권, 유관숙) 무슬림 지역 아이들이 기 독교 문화를 통해 영적 변화를 경험하게 하소서. 현지의 모든 사역자들이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 충만하며 선교사의 질병이 치유되게 하소서.

나의 다짐과 기도

유진 벨 (배유지)

유진 벨 (배유지)

유진 벨은 한국 기독교 선교와 교육, 의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선교 사였습니다. 그는 전라남도 목포와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 동을 펼치며 개척교회를 세우고, 기독교 교육을 통해 신앙인을 양

성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한국 선교의 시작

유진 벨은 미국 켄터키주 출신으로, 1894년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 사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졸업한 루이빌 신학교 교장의 딸과 결혼했으나,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1895년, 그는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부산에 도착했으며, 남장로교 호남선교부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선교 철수를 주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선교 사역이 큰 도전에 직 면하였습니다. 1897년, 목포 선교부 개설소식을 들은 유진 벨은 거처 를 목포로 옮겨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의료사역과 동시에 목포교회(양동제일교회)를 개척하고, 교육을 통한 신앙인 양 성을 중요하게 여겼기에 동료선교사와 함께 정명여학교, 영흥학교를 세웠습니다.

광주 숭일학교 설립과 신앙 교육

1907년, 유진 벨은 광주 양림동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숭일학교를 시 작했습니다. 수피아여학교도 유진 벨의 사랑방에서 시작해 동료 선교 사의 사랑채로 이전하며 기독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신앙과 학문을 겸비한

오늘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7

잃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선교 사역을 감당하며, 학교와 교회를 세우

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기독교 교육을 통해 조선의 미래를 변화

시키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1925년, 광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으 며, 30년간 한국에서 사역한 그의 유해는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선교사역 후원하기

나를 부르심

선교사역 유진 벨 선교사의 헌신과 사랑을 본받아, 어려움

나의 다짐과 기도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며 교육과 섬김을 통해 하 나님 나라를 이루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의 수 고로 세워진 믿음의 유산이 계속 이어지며, 나

또한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하옵소서.

잠비아(홍현기, 서재현) 영락기독학교와 은혜중 고등학교가 말씀 중심의 교육기관으로 잘 정착 되며, 교사와 교직원, 이사회가 하나 되어 말씀 에 순종하는 학교가 되게 하소서.

피셍게와 카페파 마을 주민들과 깊은 신뢰 관계

를 이루고, 기아대책이 이곳에 잘 정착하여 사역 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웨스턴 프로빈스의 가뭄 프로젝트와 긴급구호

식량 지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며, 선교사들과 봉사자들의 안전을 지켜 주소서.

로버트 하디 (하리영)

로버트 하디 (하리영)

로버트 하디(1855~1939)는 캐나다 출신으로, 교사와 의사로 활동 하다가 1890년대 한국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1890년 의사 자격을 취득한 후 선교 단체 ‘SVM(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가

입하며 해외 선교를 결심했고, 1893년 9월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처음에는 부산에서 선교를 시작했으나, 이후 강원도 원산으로 이동 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본격적인 의료·복음 전도 활동을 펼쳤습니 다. 캐나다 선교부 지원을 받아 1893년 원산에 선교센터를 설립했

하디는 원산에서 의사이자 선교사로 활동하며 선교센터를 중심으로 전도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00년, 미국 감리회 선교사 윌리엄 맥길 과 함께 본격적인 강원도 지역 선교를 시작했으며, 교회 설립과 성경 교육을 통해 신앙 공동체를 구축하는 데 힘썼습니다.

1903년 10월에는 원산에서 강원도 최초의 지경리 교회를 설립했으 며, 이 지역에서 본격적인 신앙 훈련과 복음 전파 활동을 전개하였습 니다. 그의 사역은 한국 교회 자립을 돕는 체계적인 신앙 교육으로 확 장되었고, 현존하는 양양교회, 강릉중앙교회도 설립했습니다.

원산 대부흥운동과 영적 각성

1903년, 중국 의화단 사건 이후 원산으로 피신해 온 캐나다 여성 선교 사 메리 화이트와 루이스 맥컬리는 8월부터 9월까지 특별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하디 역시 이 기도회에 적극 참여하며

거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공개적으로 통회했습니다. 당시 기도회는 한국 전역으로 확산됐으며, 이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

여 본을 보였노라

평양 부흥운동과 한국 기독교 성장 기여

요한복음 13:12-17

1907년, 하디는 평양에서 부흥운동을 이끌며 한국 기독교의 체계적

인 부흥을 주도했습니다. 이는 한국 기독교가 급격히 성장하는 계기

가 되었습니다. 또한, 기독교적 윤리 실천을 강조하며 한국 사회 변화

에 기여하였고, 교육과 신앙 훈련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선교 전략

을 도입했습니다.

1909년부터는 협성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신학 교육 발전에 기여 했고 <신학세계>를 창간, 신학적 연구와 목회적 방향을 제시했습니

다. 45년 하디의 교육, 의료, 전도사역은 한국 복음전파의 중요한 유 산이 되었습니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선교사역 후원하기

나를 부르심

선교사역 하디 선교사의 회개와 부흥을 본받아, 진실한 신 앙을 회복하며 복음 전파에 헌신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의 기도와 헌신이 한국의 부흥을 이끌 었듯이, 나도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모잠비크(류지만, 박민경)벵겔레니 마을 아이들 이 영육간에 잘 성장하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게 후원이 이어지도록 해 주소서 이웃 마을인 발루꿰니, 미틸레니, 시나바니로 복 음이 확장되도록 해 주소서.

나의 다짐과 기도

쇼(서위렴) 윌리엄 쇼(서위렴)

윌리엄 쇼는 한국 감리교 선교사로서 교육과 신학교 설립, 군종제 도 창설에 기여했으며, 그의 가족은 4대에 걸쳐 한국에서 선교와 교육에 헌신했습니다.

선교사 길을 걷다

윌리엄 쇼는 1916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교 졸업 후, 제1차 세계대전 시, 미군 육군 군목으로 복무했습니다. 이후 1921년 콜롬비 아대학원에서 수학한 후 감리회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본격적인 선 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펼친 교육과

1926년까지 광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한국 청년들에게 서양식 교육 을 가르쳤으며, 이후 감리사로 평양, 영변, 만주, 해주 등지에서 목회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32년에는 신창에서 사역하며 평양 요한학 교를 설립, 한국 교역자 양성에도 기여했습니다.

한국전쟁과 군종제도의 창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시, 조지 캐롤 신부 등과 함께 일본을 거쳐 다 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당시 국방부 장관과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한국군을 위한 군종제도의 필요성을 건의했습니다. 미군과 협의를 거 쳐 1950년 9월 25일 한국군 군종제도가 공식 승인되었고,

립이사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기금을 모아 신학교의 목회

관과 숙소를 건립하며, 신학생들이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학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가족의 헌신과 희생, 말년과 유산

그의 아내 애들라인 쇼는 성화촌을 설립하여 전쟁 고아와 여성 교육을

도왔으며,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업을 중단

하고 미 해군 장교로 입대, 참전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 9월 서울 탈

환작전 중 전사했으며, 그의 손자 윌리엄 로빈슨 쇼는 하버드대학교에

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과 미국 간 교육 교류를 위해 왕성히 활동

했습니다. 1961년, 윌리엄 쇼는 은퇴한 후 미국으로 귀국했으며, 1967 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에서 하나님의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나를 부르심

마태복음 16:21-28 나의 다짐과 기도

선교사역

군종제도를 세워 군인들에게 신앙의 길을 열었 던 윌리엄 쇼처럼, 나도 어느 자리에서든 주님 의 복음을 전할 용기를 주시고, 어떠한 환경 속 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가게 하소서.

페루(윤태호, 김정현) 교회학교를

20일차

홀(가락홀)

제임스 홀은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 감리회 소속 의료 선교사로, 한 국 기독교 선교 초기 의료와 교육을 통해 복음을 전한 인물입니다. 그는 퀸즈대학 의과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에 참여하면서 해외 선교에 대한 소명을 깨닫고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1889

년, 뉴욕 벨뷰대학(Bellevue University)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891년 12월 한국에서 본격적인 의료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평양 개척 선교와 의료 활동 1892년 3월, 감리교 조선 선교부의 평양 선교 개척 결정으로 홀은 평

의주 등 북부 지역 선교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평양은 외 국인과 기독교에 대한 반감으로 선교가 쉽지 않았지만, 홀은 해충 피 해와 전염병으로 고통 받는 주민들을 돕고, 천연두와 이질로 힘들어하 는 사람들을 위해 백신과 의료 지원을 제공하며 신뢰를 얻었습니다.

청일전쟁 속에서 희생되다

1893년, 홀은 평양에 정착해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의료 및 교육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면 서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고, 많은 이들이 부상과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홀은 전쟁 중에도 부상자와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멈 추지 않았으나, 결국 일본군의 의심을 받아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아 군, 적군 상관없이 치료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그곳에 서 전염병에 감염되어 1894년 10월 1일 평양에서 순교했습니다.

오늘의 말씀

을 누가 바라리요

로 돌아갔지만,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1897년 다시 한국에 왔습니다. 그녀는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김점동)를 양성했으며, 훗날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현 고려대 의과대학)설립에도 기여했습니다.

1913년 광혜여원에 여성의학반을 만들었으며, 졸업생들이 시험에 응 시해 의사면허를 받을 수 있게 했고, 1930년에는 동대문여성병원과 여성의학강습소도 설립했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 여성들은 기독교 신

앙과 정신을 바탕으로 의사가 되어 의료 지원이 절실한 조선 여성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또, 로제타 홀은 점자 사용법을 한글 맞춤

법에 적용하려고 노력했고 한국 최초의 시각, 언어장애인 교육도 실시

했습니다. 로제타 홀은 43년 동안 한국선교에 헌신하고 1935년 미국

으로 돌아간 후 1951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유언에 따라 한

국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남편과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나를 부르심

로마서 8:24 나의 다짐과 기도

선교사역 아픈 자를 치료하며 복음을 전한 제임스 홀처럼 나도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도록 인도 하시고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 는 믿음을 허락하소서.

남아공(양승록, 이정미)아바신학교

길을 밝히다

던컨 맥래(마구례)

던컨 맥래(마구례)

맥래는 함흥과 원산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며 한국 기독교 교육의 초석을 다진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였습니다. 함흥을 한국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 선교의 시작

맥래는 1868년 할리팩스 달하우지대학교와 장로교신학대학에서 수 학한 후, 1898년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됐습니다. 그의 한국 선교는 맥켄지 선교사의 순교를 계기로 시작됐습니다.

맥래는 한국 선교에 대한 강한 열정으로 3년 동안 한국 학생선교협회 의 도움을 받아 지속적으로 선교위원회에 청원서를 제출했고, 그의

끊임없는 요청에 감동한 선교위원회는 마침내 그를 한국 선교사로 파 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함흥 선교와 교육 활동 1899년 5월 3일, 맥래는 함흥을 방문하여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 작했습니다. 1904년, 함흥 선교부를 설립하여 복음 전파와 교육 활동 을 확대했으며, 1906년 성진에서 여성 의료 활동을 지원하며 제1병 원 설립에도 기여했습니다. 특히 1907년에는 영생남학교를 설립하 여 기독교적 가치관을 바탕에 둔 교육을 제공했습니다.

3·1운동과 독립운동 지원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맥래는 함흥에서 독립운동 을 지원했습니다. 그는 영생학교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도록 격 려했고, 만세 시위에 나선 학생들과 지역 주민들을 보호하며 일제의 탄압을 견뎠습니다. 한국전쟁 후 영생학교 출신 동문들은 1956년 재건위원회를 발족했

고, 1990년에는 학교가 다시 공식 인가를 받아 ‘영생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부활했습니다. 2007년에는 학교 100주년 기념 사료집이

발간되며 그의 교육 선교 유산이 기려졌습니다.

일본의 탄압과 저항, 기독교 교육과 선교 유산

맥래는 1907년, 함흥에서 일본군이 폭압적인 연좌제를 시행하자, 그는

이에 강력히 항의하며 이 사실을 캐나다 선교부에 보고했습니다. 이 사

건은 이후 “함흥에서의 무서운 대학살”이라는 제목으로《대한매일신

보》에 보도되며, 일제의 폭정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교육과 신앙을 통해 한국의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와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선교사역 후원하기

나를 부르심

복음의 씨앗을 심 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다음 세대가 주님의 길 을 떠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내 삶에서도 진리 를 위해 담대히 나아가게 하소서.

F국(이산지, 김요단) 생*교회 사역과 한국어 센터 개설을 통해 복음 전하는 기회가 확장되게 하소서.

지역 가정 심방, 직업훈련 등을 통해 많은 이들의

3 대구 청라언덕

여정 초기선교사의

유산 - 대구

글 허은철 (총신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대구 청라언덕에는 윌리엄 베어드와 제임스 아담스 선교사가 세운 선교 스테이션이 있다. 아담스는 대구의 지리적 중요성, 인구, 넓은 광야 등

을 이유로 선교 기지를 세울 필요성을 느꼈다. 베어드와 아담스의 노력 으로 1893년부터 4년 동안 대구제일교회를 창립 과정을 겪었다. 이 시 기에 선교사 주택, 예배당, 제중원, 학교 등의 건물도 세워졌으며, 대구 의 교통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었고, 이후 대구는 경상도 의 대도시로 발전했다.

교남YMCA는 일제 강점기 신간회의 독립운동이 진행된 기독교계 기관 이다. 이곳은 신간회 대구지회의 사무공간이자 여러 활동의 중심지였 다. 신간회 대구지회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로 구성되었 고, 이상화 시인이 간사로 활동했다. 이들은 분회와 반회를 만들고 강연 회와 야학을 개최, 민중 교육에 힘썼다. 교남YMCA는 신간회의 좌우합 작과 실력 양성 운동이 동시에 일어난 중요한 장소였다.

청라언덕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주택이 모여 있는 지역으로, 현재는 대 구 근대사 관련 박물관들이 모인 공간이다. ‘동무 생각’ 노래의 배경인

청라언덕은 박태준과 이은상의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이 노래는 청라

언덕을 배경으로 한 짝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청라언덕에는 ‘스윗즈 주택’, ‘챔니스 주택’, ‘블레어 주택’ 등 미국식 주택 3채가 있어 선

교박물관, 의료선교박물관, 교육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 곳은 대구의 발전과 근현대사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청라언덕은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역사적 공간이다.

계성학교는 아담스의 고민과 기도로 설립된 학교로, ‘여호와를 경외하

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의 잠언 1장 7절 말씀을 토대로 운영되었다.

계성학교는 예절을 교칙처럼 여긴 학교였고, 교칙에는 학생이 술과 노

름에 빠지거나 욕설을 해서는 안 되며 교사가 학생에게 경어를 쓰게 하

는 조항이 있었다. 한편 계성학교의 수업료, 교과서, 학용품은 모두 무료

였으며, 대구의 학생이 예의, 지식, 신앙을 모두 배울 수 있는 학교였다.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의 전신인 대구 제중원은 서양 의학의 우수성을

대구에 알린 병원이었다. 의료선교사 존슨은 백내장 수술을 통해 환자

들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고, 대구 약령시에서 ‘미국 약방’을 운영했다.

제중원은

자들을 치료했다. 6·25전쟁 중에는 군인들을 치료하고 최초의 아동병

원을 설립해 구제 활동을 했다.

대구제일교회 자료

동산병원(제중원)

묘원

참고문헌

대한예수교장로회 새문안교회, 『새문안교회 100년사(개정증보판)』, http://www.saemoonan.org/ebook2016/ecatalog5.asp?Dir=268

새문안교회, <간추린 새문안교회 역사 이야기>, http://www.saemoonan.org/ebook2016/ecatalog5.asp?Dir=230, 정동제일교회, 『하늘의 뜻이 정동에서 이루어지다: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부터 현재까지 정동제일교회 이야기』, http://ebook.everzone.co.kr/chungdonghistory/index.html

박지훈, “[톡톡!우리교회-서울 정동제일교회 파이프오르간] 1918년 국내 최초 설치”, 국민일보, 2016.11.13.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5/0000951895?sid=103

배재학당역사박물관(서울 중구 서소문로11길 19 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삼웅, “기독교와 역사의식 깨우친 계기 된 배재학당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 오마이뉴스, 정치, 2021.12.22.,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2336722?sid=100, 박성래, 「역사속 과학인물 - 개화기 교과서 “사민필지”의 저자 미국 호머 헐버트(1863~1949년)」, 『과학과 기술』 3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2001, 40쪽.

임동근. “국립한글박물관, ‘지리 교과서 사민필지’ 발간”, 연합뉴스, 생활/문화, 2020.10.08.,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1930603?sid=103

문화체육관광부 국립한글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 한박웃음(2021.03 제91호)”, https://www.hangeul.go.kr/webzine/202103/sub1_2.html, 2023.03.04.

이해성,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 “첫 한글교과서 사민필지, 한글·한국 사랑 넘쳤죠”, 한국경제, 사회, 2014.10.07.,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5/0003169263?sid=102

이소연, “국내 최초 세계지리 교과서 ‘사민필지’ 복간본 출간”, 동아일보, 2022.02.07.,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3409414?sid=103

임동근, “국립한글박물관, ‘지리 교과서 사민필지’ 발간”, 연합뉴스, 2020.10.08.,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1930603?sid=103

김지은, “1886년 우리나라 최초 근대 여성교육기관 ‘이화학당’ 창립”, 문화일보, 2022.05.30., 사회,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1/0002515543?sid=102. 정태화, “[대한민국 스포츠 100년](8) 신여성의 스포츠활동 (상)”, 마니아타임즈, 일반, 2020.03.14.,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425&aid=0000104497

연합뉴스, “<한국스포츠 100년> ①이화학당의 체조시간”, 연합뉴스 1999.08.08., https://m.sports.naver.com/general/article/001/0004455966

김승태, 「양화진 외국인 묘지 설정 과정 재검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소식』 7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6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양화진이란- 외국인 묘지로서 양화진의 시작”, http://yanghwajin.net/yanghwajin/about02.php

심용환, “[노컷V] 백정의 아들 박서양, 청진기를 들고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CBS노컷뉴스, 2017.12.15.,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79/0003045218?sid=102 한원석,「유진 벨 선교사의 학원 사역이 광주 지역사회와 교회에 끼친 영향 연구-광주중앙교회를 중심으로-」, 총신대학교 목회신학전문대학원 목회학과 선교학전공 박사학위논문, 2023. 김빛나,「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광주 지역 선교 연구:의료, 교육, 교회 개척 사역을 중심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선교문학전공 석사학위논문, 2010.

이진구,「미국 남장로교 광주 스테이션의 교육 선교-숭일·수피아학교를 중심으로-」, <고고와 민속> 12, 한남대학교박물관, 2009.

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회,「3.1 만세운동에 앞장 선 민족학교 - 광주 수피아여고」, <사학> 132, 대한사립학교장회,2013. 민진영,「일제하 광주의 여학생 조직과 여성 교육」, <호남학> 44,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09.

이영식,「광복 이후 광주 선교스테이션의 의료활동과 대 사회적 역할」, <한국교회사학회지> 54, 한국교회사학회, 2019.

신광재, “[정사로 읽는 전라도 역사기행]푸른 눈을 가진 광주의 어머니 서서평(엘리제 쉐핑, 1880~1934)”, 광주매일신문, 2021.11.17. http://www.kjdaily.com/article.php?aid=1637144958560593222

최영경, “한일장신대 설립자 서서평 선교사 다큐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개봉”, 국민일보, 2017.03.29.,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5/0000980747?sid=103 이재호·박승호, “[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빛고을의 진정한 魂 오방 최흥종(下)”, 아주경제, 2021.04.23., https://www.ajunews.com/view/20210421154809558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분당허브교회,“한국 초대교회에 길을 묻다(3) 광주 스테이션 발표교안”, 2024. 강희찬,「윌리엄 베어드의 대구 선교에의 기여」,<배위량학 논총> 1, 배위량아카데미, 2023.

이상규,「제임스 아담스의 내한과 베어드 휘하에서 아담스의 부산에서의 활동」, <배위량학논총> 6, 배위량아카데미, 2023.

배재욱,「배위량의 2차 전도 여정과 순례길로서의 가치」, <신학과 목회> 45, 영남신학대학교, 2016. 김동규, “교육, 교회 기둥 세우는 과정” 일제 속 활동 美 선교사 편지, 공개”, 국민일보, 2024.12.18.,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5/0001746668?sid=103

김동규, “안의와 선교사 일제강점기 속 사역 담긴 편지 발굴”, 국민일보, 2024.12.19.,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5/0001746766?sid=103

윤정훈, “[백년학교] 계성학교, 대구 중등교육의 시금석이자 3·1운동의 주역”, 매일신문, 2022.08.07.,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8/0000769770?sid=004

장영훈, “[메디시티 대구]의료선교박물관, 청라언덕-은혜정원 등 역사와 전통 깃들어”, 동아일보, 2016.05.25.,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2974917?sid=105

손원천, “대구 시내 걷다 만난 네명의 삶…같은 시간 다른 낭만 엇갈린 삶”, 서울신문, 2022.05.12.,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3272330?sid=103

함영훈, “삼성 이병철, 봄 이상화, 청라 박태준..대구 인물기행”, 헤럴드경제, 2022.04.21.,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6/0001980554?sid=103

김현수, “[두 발로 투어 – 대구 이야기] 5. 독립운동의 근거지 교남YMCA”, 경북일보, 2021.09.29, 기획,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84366

남정원, 「1920년대 후반 신간회 대구지회의 설립과 활동」, 『계명사학』 17, 계명사학회, 2006

박은석,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 사적지 ‘대구 교남YMCA 회관’을 가다”, 평택시민신문, 2017.10.25, 기 획.특집-신간회 특집기사, http://www.pt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43614

안병관,「아담스 목사의 대구·경북지역 선교에 관한 고찰」,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역사신학전공 석사학위논문, 2012.

송현강.「영남 지역 기독교 유적지 연구」,<고고와 민속> 13, 한남대학교중앙박물관, 2010. 이정은,「대구제중원(동산병원)이 근대의료체계 형성에 미친 영향」, 계명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석사학위논문, 2002.

대구역사문화대전, “신간회 대구지회”, https://www.grandculture.net/daegu/toc/GC40001510 김헌,<한국기독교문화유산답사기-사도행전 29장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 도서출판 지식공감,2022.

김재현, <한반도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 KIATS(2014)

후원기간 종료시 또는

정보제공 동의 철회시까지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