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덕지게어깨동무 vol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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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Vol.12

20세기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는 어땠을까

1990년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건설위원회 ‘이철규-이내창 영혼의형제 결연식’ 치러 옛 소식지 <어깨동무>를 들춰보며 유가협과 우리 추모사업회 ‘응답하라 1994’ 그 지질한 시절아! 광화문에서 만난 1989년



이내창 기념사업회 vol.12


목차

권두칼럼

촛불과 이내창은 어디를 바라보는가

이시백

004

포토에세이

‘기억 나누기’ 또는 ‘기억을 계승하기’

장임원

008

과거청산

2018, 의문사를 다시 조사할 국가기구를 세워야 하는 해

신명철

014

의문사 유가족 아카이브 : 사랑과 명예와 이름을 남기기 위해

강남규

024

특집

알기

이내창 의문사 재조사하라

028

20세기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는 어땠을까 : 기억의 파편 모으기

030

1990년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건설위원회 ‘이철규-이내창 영혼의형제 결연식’ 치러

조종국

032

옛 소식지 <어깨동무>를 들춰보며

김성희

037

유가협과 우리 추모사업회

박찬영

042

‘응답하라 1994’ 그 지질한 시절아!

김산환

046

광화문에서 만난 1989년

전성태

052

추모사업회 10년 결산 보고 : 그와 한 아름다운 약속

성백술

060

차이를 직시하고 균열을 함께 마주하기 : 영화 <공동정범>을 보고

고두현

078

<공동정범> 관람후기 : 특별한 공감

조현준

081


생각하기

연극으로 세상읽기

김경락

086

김용수

090

김신철

095

블랙리스트와 미투me too 운동 용수의 노조이야기

노조할 권리 총회에 다녀와서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몫을 나누고 마음도 나누고 어깨걸기

099

이내창의 후배다

비와당신 활동보고

107

2018년 기념사업회 총회 아듀 2017년 민주동문회 송년회, 5기 민동을 기대하며

함께하기

정상길

113

이내창기념사업회 2018년 사업계획

116

페북동정

118

혼자가 아님을 알 때, 더 단단해졌다

128

2017년 하반기 사업일지 마음을 함께하니 당당해졌다

2017년 이내창기념사업회 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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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과 이내창은 어디를 바라보는가 이시백

소설가

촛불이 이겼다. 그리고 세상은 조금 더 밝아졌다. 말(馬)이 나라를 구했다느니, 최순실의 딸이야 말로 의인이라는 풍자적인 우스 갯소리도 나돌지만, 다 쓰러져가는 민주의 불빛을 지킨 것이 시민이라고 입을 모 아 말한다. 그런데 그 ‘시민’은 누구일까. 촛불이 바꾼 세상에는 다방면에 걸쳐 눈에 띄는 변화가 체감된다. 과연 어둠의 시절은 끝나고, 시나브로 ‘그날’이 온 듯도 하다. 블랙리스트로 차별되던 이들의 이름이 호명되고, 여기저기서 개혁의 정책들이 펼쳐지는 걸 보면 과연 세상이 바 뀐 듯도 하다. 시절은 바야흐로 봄기운이 완연하다. 꽃샘추위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다. 촛불이 맞이한 만화방창의 시절 에도 한기가 여전한 ‘시민’도 있다. 혹한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여전히 공장의 굴뚝 을 타고 오르고, 거리에서 천막을 치고 외쳐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비감하다. 훈풍 속의 한기는 더욱 견디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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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광장을 메우던 깃발들 속에 눈을 끄는 문구가 있었다. <장수풍뎅이연구회>, <민주묘총>과 <혼자 나온 사람들>, <으어>와 같은 깃발들 이었다. 말하자면, 그동안 대형 노동조직이나 진보단체들의 깃발에 따라 조직되 고, 지휘되던 집회에 대한 새로운 변화이며, 자발적인 시민의 참여라는 점에서 일 단 참신하다. <민주묘총>이 시사하는 <민주노총>에 대한 풍자는 그간 대형 노동단 체들이 드러낸 수직적 조직과 경직된 슬로건, 귀족화하는 전문 운동조직의 한계를 꼬집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수긍할 만하다. 무대에 올라 뜨거운 말로 수많은 시민 들을 선동하던 이들이, 정권의 중심에 들어가 감투를 뒤집어쓰고 또 다른 권력을 누리는 것에 대해 <으어>라고 외치는 분노도 공감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이 하루아침에 밝혀진 것은 아니다. 찬바람을 맞으며 거리에서 나눠주는 해고 노동자들의 전단지를 펼쳐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구겨 넣은 이들이 누구였으며, 천막에서 끼니를 끊은 채 울부짖던 사람들 곁을 무심히 지나치던 이들은 누구였던가. 과연 다 쓰러져가는 민주의 불빛을 지킨 것이 ‘시민’ 이라고 우리는 입을 모아 말할 수 있을까.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은 장엄하였다. 그러나 그런 날이 오기까지, 광장의 한구 석에서 켜던 쓸쓸한 몇 개의 촛불은 더욱 장엄하였다. 승리한 촛불도 감동적이지 만, 그날이 오기까지 패배해온 촛불들이 더욱 아름답다. 바로 그 쓸쓸한 촛불들이 야 말로 세상을 바꾼 깃발들이었다.

<1987>이라는 영화가 세간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무고하 고 순정한 생명들이 온갖 고문과 고통 속에 죽어간 역사의 기록들은 뒤늦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공감의 눈물을 자아낸다. 인혁당 사건을 비롯하여 광주 민 중 학살, 그리고 전태일에서 이내창에 이르기까지 그 무수한 희생들은 아직도 음 습한 의혹 속에 가려져 있다. 우리는 그 무고한 죽음들이 가리키는 손끝을 바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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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칼럼

아야 한다. 그것은 힘없고, 가난하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라고 해서 차별되거 나, 무시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깃발이었다.

촛불은 ‘내가 아닌’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연대의 불빛이다. 모 여대 학생들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교내 집회와, 성주의 사드 집회에서 등 장하던 ‘외부 세력 반대’라는 말이 가슴을 찌른다. 따지고 보면 시민은 모두가 외 부세력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 다”는 헌법 제1조 제2항에 등장하는 국민도 낱낱으로 나누면, 서로가 서로에 대 한 외부세력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 정권들은 국민들을 낱낱이 쪼개는 일 에 골몰해왔다. “학생은 학교에서 공부나 하고, 노동자는 공장에서 열심히 일만 하 는” 세상을 꿈꿔왔다. 광장이 아름다운 것은 <장수풍뎅이 연구회>든, <으어>든 민 주노총이든, 진보정당이든, 성소수자 단체의 깃발이든,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함 께 외치며 나아가는 것이다. 자본과 독재 권력의 태생적 속성은 차별과 서열화에 있다. 직업과 성별과 지역 과 연령과 이데올로기와, 필요하다면 코의 넓이를 가지고도 국민들을 차별화하고 서로가 외부세력이 되도록 갈라쳐 왔다. 우리 스스로가 서로를 외부세력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해 마르틴 니묄러 목사가 이런 시를 남겼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다. 하지만 나는 침묵했다. 왜냐하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 그들은 유대인들을 잡아갔다. 하지만 나는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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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엔 노동운동가들을 잡아갔다. 나는 이때도 역시 침묵했다. 왜냐하면 나는 노동운동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엔 가톨릭교도들을 잡아갔다. 하지만 나는 침묵했다. 왜냐하면 나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하지만 이미 내 주위에는 나를 위해 큰 소리로 외쳐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내창은 자신만의 깃발을 들지 않았다. 다른 깃발들을 향해 ‘외부 세력’이라고 반대하지 않았다. 아직도 음습한 의혹과 잔혹한 폭력의 어둠에 덮여 있는 그의 죽 음은 이 세상의 모든 차별과 서열에 대한 희생이었다. 광장이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노동자와 농민과 교수와 학생과 시인과 동성애 자가 어떠한 차별도 없이 하나의 촛불을 켜들고 한 방향을 바라보고 외친 그 함성 에 있다. 이내창이 외치던 그 함성에는 ‘외부 세력’이 없었다.

*  나치에 저항한 평화운동가로 반체제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된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시 <그들이 왔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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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기억 나누기’ 또는 ‘기억을 계승하기’ 장임원

오늘 저는 ‘기억 나누기’ 또는 ‘기억 계승하기’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 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아주 가까운 두 사람의 죽음을 체험합니다. 먼저는, 제가 학 생시절, 학생운동하면서 존경했던 장준하 선생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이른바 실족 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장준하 선생님의 죽음이 전혀 규명되지 못하고 있어요. 그 다음에, 제가 중앙대학교 교수를 하면서 우리 내창 열사,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폭력적 국가권력이 계속 의문사라고 얘기하죠. 유림해수욕장 해변에서 실족사해 서 죽었다고 합니다. 공교롭게 다 실족사예요. 장준하 선생님은 산에서 실족하셨 고, 우리 내창 열사는 유림해수욕장 해변에서 실족사 했다고 해요. 두 죽음 다 (고 개를 저으며) 아닙니다. 폭력적 국가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겁니다. 특히, 저는 내창 열사의 죽음에 대해서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요.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어 요. 제가 그 증거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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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저한테 전화가 왔어요. 내창이가 그렇게 됐습니다, 하고. 8월 15일 저 녁때, 그 전화를 받았어요. 정말 청천벽력이었죠. 현장으로 내려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을 얘기했던 오현상 교수한테 전화를 넣어서 “자 네, 현장에 나하고 같이 내려가서 진실을 밝혀야겠다.” 그래서 그 이튿날 학생들과 같이 해서 여수를 거쳐서 거문도로 들어갔습니다. 유림해수욕장으로 들어가서 덕 촌리 이장을 먼저 만났어요. 내창이가 배를 타고 왔노라. 배라고 할 것도 없는 작은 배예요. 덕성호라고, 덕성호 선주 이○우를 만났습니다. <중대신문> 기자를 대동하 고요. 제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세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기억을 계승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우가 다 진실을 얘기했어요. 다 진실을 얘기했습니다. 기자가 녹음을 했어요. 제가 메모를 했고요.

그리고 도연주와 도연주의 애인 백. 백이라는 친구는 당시에 해양대학을 재학 중 이면서 군대에 가 있었어요. 신분은 군인이었어요. 틀림없는 일행이었습니다,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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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림없는 일행! 지난 번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인터뷰가 나오는데 그게 바로 제가 메모하고 녹음했던 거예요. 확고한 증인이 여기 서 있는 거예요. 도연주와 백과 이 내창이 유림해수욕장에 도착했고, 도연주가 누군가에게 (이내창을) 넘겨준 겁니 다. 배가 거문도에 들어갈 때 서도의 끝자락에 먼저 도착하는데 거기서 사람들을 내려주고 서도로 들어가요. 거기가 선착장이에요. 도연주가 누군가에게 (이내창 을) 넘겨주고 서도의 끝자락으로 가는 거예요. 거기서 다음에 오는 훼리호를 타고 선착장으로 간 겁니다. 그게 왜 확인이 되었냐 하면 뱃사공 이○우하고 덕촌리 이 장하고 틀림없이 세 사람이 유림해수욕장이 도착했다는데 두 사람의 행방을 못 찾 아요. 그래서 유림해수욕장 선착장, 동도의 선착장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사 람들 생각에는 유림해수욕장에서 재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동도의 선착 장에서 재회를 합니다. 이 얘기는 뭐냐, (이내창을) 넘겨주고 서도 끝자락으로 가 서 거기에서 다시 배를 타고 들어오는 길인 겁니다. 일행이라는 사실, 그리고 넘겨 주는 과정이 다 확인이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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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다음으로 현장에서의 내창이 모습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윗도리가 벗겨져 있어 요. 허리띠가 없어요. 신발은 신겨져 있고, 안경은 벗겨져 있어요. 나중에 안경을 찾았어요. 콧잔등에 상처가 있고, 상처가 많았어요. 이건 뭐를 의미하냐?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도망가지 못하게 해놓은 겁니다. 때리기 위해서 안경을 벗긴 겁 니다. 그리고 내창이를 배에 태워서 먼 바다로 나갑니다. 유림해수욕장 해변은 가 끔 일본 상품의 쓰레기들이 도착하는 데에요. 먼 바다에서 던지더라도 유림해수욕 장으로 오게 되어 있어요. (내창이는) 엎드린 상태로 있었어요. 의식을 잃게 가격 을 가한 다음에 먼 바다로 나가서 익사를 시킨 겁니다. 부검 결과에도 익사입니다. 서울대 이영빈 교수, 저, 오현상 교수가 부검현장에 들어갔습니다. 결정적인 게 있 어요. 뇌 경막하출혈이, 그 덩어리가 5센티 내지 6센티에요. 부검 소견이 의식을 잃을 정도의 가격의 결과로 의심된다는 거였어요.

아까 분명하게 폭력적 국가권력에 의한 거다, 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이○ 현우의 진실이 다 바뀌는 거예요. 다 바뀌어요. 삼호다방 최○의 진술도 다 바뀌어 요. 그게 무엇에 의해서 바뀌느냐? 대단한 권력이 아니면 그거 바꿀 수 없어요. 제 가 그 이후로도 두서너 차례 더 거문도에 갔었어요. <한겨레신문> 기자들하고 갔 었어요. 우리가 도착해서 이것저것 다시 확인하니까 이○우가 도망을 갔어요. 그 러더니 2,30분 있다가 다시 왔어요. 그러면서 “제가 위증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더라고요, 사시나무 떨 듯이 떨면서. “너는 진실만을 말하면 된다” 그랬죠. 그 런데 이○우는 도저히 진실을 말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 후의 형편을 보면 진실을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도연주, 명백하게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내창이 를 유림해수욕장으로 유인한 거예요.

내창이의 죽음 전후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발생했어요. 평양에서 있었던 세 계청년축전 말고도 국민대생 김정환군이 암매장당할 뻔했던 사건이 바로 그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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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었어요. 그 때 제가 끝까지 안타까웠고 확인 못한 것은 그 똑똑했던 내창이가 왜 거기를 갔을까? 그게 제가 못 푸는 숙제에요. 내창이가 똑똑했기 때문에 가야 만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이것만 제가 추정하는 것이고, 그 외에 제가 말씀드린 것은 백 프로 다 사실이에요. 제 나이가 팔십을 향해서 갑니다. 우 리 중앙대학교 젊은 재학생들과 기억 나누기, 기억을 계승하고 싶어서 말씀드렸 습니다.*

*  이 글은 2017년 8월 15일,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前교수이자 이내창기념사업회 前회장이셨던 장임원 선생님의 추도 사를 녹취,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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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운동의 기록

2018, 의문사를 다시 조사할 국가기구를 세워야 하는 해 신명철

세상이 요동치고 있다. 4월 말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했고, 5월 북 미정상회담마저 전격적으로 성사됐다. 미국의 중간선거와 맞물려 평화 공세가 범 람할 듯싶다. 1989년에도 요동쳤다. 문익환, 황석영, 임수경 그리고 그를 데리러 간 문규현의 방북까지 거칠 게 없었다. 남과 북의 경계는 허물어질 듯 보였다. 금 기가 깨지고 나면 벌어진 틈새는 돌이킬 수 없을 거라 믿었다. 그해 여름 이내창 이 죽었다. 당시 전대협 의장이었던 임종석이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다. 그 이름을 거론할 때마다 이내석 형의 눈빛은 흔들렸다. 주름으로는 감추어지지 않는 애절함, 쓸쓸 했다. 유가협 어머니들이 민가협 부모에게 했다는 ‘살아남은 자는 뭐라도 할 수 있 지 않느냐’는 위로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죽은 자와 함께 하는 삶은 도처에서 눈 물과 마주한다. <공동정범>에서 보면 용산 유가족들이 감옥에 들어간 이들을 위해 전국을 다니며 투쟁하다, 막상 그들이 형을 마치고 나오자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 고야 만다. 백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씁쓸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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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 재조사 일인시위와 <공동정범> 단체관람은 여러모로 생각거리를 던져 주었다. 실천할 방도가 우리 안에 있었고, 우리끼리도 충분하다는 것에 놀랐다. 왜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까. 기대효과는 부차적이다. 이내창의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게 중요하지, 다른 조건은 별 의미가 없었다. 영화를 보는 이유가, 보고난 감상이 각기 달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 관점은 낡았다. 과거청산 과제를 풀기 위한 방도를 조직에서 찾으려 했던 생 각은 유통기한이 지났다. 실속 없이 무겁기만 해서는 나잇값을 하기 어렵다. 과제 는 지속성인데, 그것에도 구애받지 말자고 다독인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물이 든 모양이다. 발랄한 영화를 함께 보는 기획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사가 가능하지 않고, 굳이 필요로 하지도 않는 현재는 과거청산운동에도 변 화를 요구한다. 집단성보다는 개인의 선택, 삶의 진로에 초점을 맞춰야 그나마 현 실적일 수 있다. 다만 과거청산을 역사로 바라보거나 현실 속의 과제로 인식하거 나 상관없이 실천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일까. 제안도 준 비도 어설퍼 보이는데, 막상 닥치면 의미 있게 치러내는 이내창기념사업회의 활 동은 묵은 먼지를 털어내라 한다. 객관화하기 쉽지 않다. 내게는 풀지 못한 수수 깨끼이다.

이내창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념사업회 존재만으로는 충분조건을 갖추지 못한다. 지극히 당연하기만 자주 잊기도 한다. 특별법이, 국가조사기구가 이내창 사건의 진실을 밝혀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현실은 냉혹하고, 메아리는 공허하 다. 한때 의문사는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였지만 이제는 빛이 바랬다. 이름을 기억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잊혀져가는 사건이다. 진상규명도 쉽지 않을뿐더러 이제 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는 말들은 거침이 없다. 역사의 아픔 정도로 받아들이 고, 재단을 만들어 기념사업을 하자는 요구가 힘을 받는다. 그게 현실이다. 앞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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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운동의 기록

로 더 거세질 테다. 진심으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가능할지 안 할 지는 몰라도 될 때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내가 나에게 답을 해야 한다. 의문사 사건은 웬만한 권위와 실력으로는 밝혀내기 어렵다. 그만한 조직과 국민 적 관심은 허망한 욕심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려놓지 못하기 때 문이다. 죽은 자가 있고, 죽음의 진실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평할 수 없 기 때문이다. 객관화가 안 되기 때문이다. 제3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여의도 국회에는 수많은 민원인들로 넘쳐난다. 날마다 토론회, 공청회가 열리 고, 1인시위와 기자회견이 끊이지 않는다. 절실함에는 크기와 부피를 구분할 수 없다. 그 틈바구니에 과거청산 법안이 있다. 행안위 소위에서 더디게 검토하고 있 다. 여기까지도 숨 가쁘게 왔다. 법안을 만들고, 의견을 조율하고, 국회의원들이 통과시킬 명분을 갖게 내용을 만드는 일도, 보좌관들을 적극적은 동조자로 설득해 내는 일도, 입법조사처와 법안의 쟁점을 추리고 보완해서 대안을 제시하는 일도, 시민사회와 유족의 의지를 담아내는 일도, 국회의원 지역구의 민심을 보여주는 일 도, 토론회와 공청회 등을 조직하고 실현해내는 일도 모두 입법 활동의 내용이다. 품이 많이 들기도 하고, 공부가 필요하다. 날마다 국회에 출근하다시피 해야 그나 마 국회의원들이 의식을 한다. 과거청산의 길 닦기이다. 그 일에 누가, 몇 사람이 나 움직였을까. 대개는 이 노고를 자임하지 않는다. 훈수만 난무하고, 모임은 번창 한다. 무슨 대안이라도 있느냐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다. 공짜는 없다. 누가 대신 해주기를 바라는 일도 염치없다. 국회의사당 앞 이내창 재조사 1인시위는 그나마 구경만 하는 미안함을 조금 덜게 해주었다.

국가에 의해 온전하게 과거청산이 이뤄질 것이란 생각은 철없거나 위악적이다. 조금씩 풀어 가다보면 실타래가 풀릴 거라는 생각도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과거청 산 과제는 국가의 본질을 깨우치고 각성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과거청산운동 강좌가 이내창기념사업회 회원과 동떨어진 사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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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강좌

란 평가는 안타깝다. 의문사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당위가 목표일 수 없고, 선언이 동력이 될 수 없다. 실패를 하기 위해서 뛰어들 때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 나의 현실 인식이다. 반성이 되는 지점은 많다. 쉽게 판단하고 가볍게 결정하면 항시 문제가 드러나 게 마련이었다. 과거청산운동이 관심을 갖기 어렵다는 점을 알면서도 간과했다. 20대와 함께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들의 현재를 고려하지 못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다. 강좌는 상반기와 하반기가 극명하게 갈렸다. 기운이 빠지는 현상이라 보기에는 편차가 너무 컸다. 강좌는 교습이 아니기 때문에 아카데믹할 수밖에 없 다. 그 기준에서도 수미일관하지 않았다. 적당히 두루뭉술하게 섞어놓고, 곶감 빼 먹듯 영양가를 챙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모호했다. 그래도 성과가 없지 않았다. 5번째 강의인 ‘한국과거청산의 딜레마:의문사를 중 심으로’ 강좌는 과거청산의 역사와 과제, 논점을 제대로 짚어주었다. 그동안 깊이 있는 연구와 성찰, 고민이 부족했다는 자성을 하게 만든 강좌였다. 이 강좌의 내용 을 좀 더 풍부하게 채워서 4회 내지 6회의 강좌를 만들어 젊은 친구들과 만나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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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운동의 기록

다. 이내창기념사업회 회원들과 공부하는 자리를 만들면 우리가 선 자리가 어디인 지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눈이 밝아지겠다.

과거청산 과제 중 진상규명운동은 20세기 마지막 날들로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여정을 거치고 있다. 특별법 제정을 통한 국가조사기구의 설치 입법활동이 하나 이다. 명예회복과 기념사업이 둘이고, 셋째는 재심을 통한 국가배상이다. 이 일 가 운데 이내창이 있다. 벅차다. 어렵기도 하지만 아무리 애써봐야 나아지는 게 보이지 않는다. 현실이 다. 조건이기도 하다. 무엇 하나 번듯하지 않다. 과거청산운동의 시작이고, 민주화 운동의 핵심 동력이자 부채이기도 한 의문사는 왜소해질 대로 왜소해졌다. 그래 도 아직까지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요구가 힘을 받고 있다. 100만 에 이른다는 학살 피해자 중에 10분 1도 해결이 안됐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니면 특별법 개정도 설득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 동조사단에 이내창기념사업회가 들어가 있는 이유이다. 의문사 유족 아카이브를 만드는 이유이다. 우리가 우리를 강화하고, 기억하고, 투쟁할 때 우리가 존재한다.

일제 때 금을 찾아 땅의 맥을 끊어놓은 폐금광 터는 흔적도 없었다. 해방 이후에 는 금 채굴이 없어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아 증언에 의존해야 했다. 2017년 10 월 시굴조사는 5군데 지표면을 긁어냈다. 유족들의 증언은 종종 엇갈리거나 혼재 되어 있어, 장소를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아산에서 한 달 사이에 수백 명이 학살당 했고, 동시다발로 발생하다 보니 기억은 흐릿할 수밖에 없었다. 시굴조사 마지막 날 진화위에서 이곳은 학살지역이라는 팻말을 박아놓은 자리를 파보기로 했다. 포 크레인 삽으로 긁어낸 흙에서 유해가 나왔다. 전날 공동조사단원 중 하나가 아이 를 낳는 꿈을 꿨다 했다. 5차 유해발굴 조사가 한창인 설화산 자락, 숲은 헐거웠다. 낙엽은 부토가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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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사건 5차 유해발굴

못하고 쌓여 얼음을 물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무들도 곧지 못했다. 아름드리 나무가 없는 것은 일제 때 벌목 때문일 게다. 금광을 찾는 이들이 주위를 초토화시 켰을 수도 있다. 후손의 손길이 살뜰해 보이는 묘지를 지나 나지막한 구릉을 넘으 면 학살의 현장이다. 전쟁 때에는 반대편 쪽에서 민간인들을 몰고 올라왔다 한다. 야트막한 야산 곳곳에 칡을 캔 구덩이가 파헤쳐져 있었다. 전쟁 이후 무서워서 아 무도 올라오지 않았다는 산에 사람들이 발자취를 남겼다. 겨울을 벗어나지 못한 나무들은 칡에 감겨 간신히 숨이 붙어 있었다. 그 아래 흙 은 몇 개의 층을 이루고 있었다. 유난히 굵은 밤나무는 수령이 50년은 돼 보인다 했다. 두 갈래 줄기를 뻗은 밤나무는 우람했다. 이곳의 정령이었을 밤나무 아래에 서 유해가 나왔다. 유해는 규정성을 갖지 못했다. 무방비로 쏟아졌다. ‘켜켜이’라는 부사어가 뒤엉 켜 있었다. 인민군에 의해 쫓겨났다 수복한 후 인민군에 부역한 이의 가족들을 죽 였다. 학살하고는 짚을 덮고 불을 질렀다 한다. 총알이 건너편 마을로 넘어올 만 큼 마구잡이로 쏘았다. 유해는 검게 그을려 있거나 타다만 섬유와 고무가 눌어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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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운동의 기록

어 있었다. 여성과 아이가 주로 나왔다. 아이의 두개골은 종잇장처럼 얇았고, 굵 은 모래보다 조금 큰 유치도 뒤섞여 나왔다. 두개골과 함께 묻힌 은비녀가 엄마였 음을 증명했다. 고립을 자초한 것인지, 세상을 연 것인지 구분하기 모호한 유해발굴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비를 막는 가림막이 쳐지고, 물길을 내고 마대로 보를 쌓았다. 보름이 지나도록 아래로 아래로 파고들면서 굴 입구를 찾고 있다. 흙 을 조심스럽게 파내면 유해가 나오고, 부서지지 않게 드러내 햇빛에 마르면 사진 을 찍고 걷어냈다. 다시 흙을 파들어갔다. 반복이다. 끝도 없이 삐죽삐죽 드러나는 유해 아래 어디쯤 굴 입구가 있을 테다. 사방 어디에서도 멀리 바라보이지 않는 은밀함은 고독함을 대신하지 못했다. 천 막 2개동과 화장실은 사람이 떠나면 온기를 잃었다. 어둠이 내리기도 전에 찬바람 이 골로 몰려왔다. 낮 동안 물기를 내뿜은 흙은 다시 얼음이 박히고, 밤사이 땡땡 해졌다. 아침에는 삽이 들어가지 않았다. 유해발굴조사는 3월 내내 이어진다. 몇몇은 한 달 장기휴가를 내고 숲에 들어갔 다. 책임감이라는 묵은 단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행보이다. 아산시의 예산으로 진행을 해 경제적 부담은 덜 수 있었다. 감식까지는 두 달 정도 걸릴 예정이다. 이 내창기념사업회에서는 이혁승, 고두현이 참여했다. 고무적이다.

아카이브 사업은 정경식, 박태순에 이어 허원근, 이덕인으로 이어졌다. 이덕인 은 아암도에서 노점을 하다 강제 철거에 몰려 망루를 세워 저항했다. <공동정범> 의 주인공들과 비슷하게 저항은 외마디 비명이었다. 조직적이지도 치밀하지도 못 했다. 철거와 진압은 신속했고 폭력을 앞세웠다. 망루에 올라갔다. 겨울 초입의 날 씨에 소방관은 물을 쏘아댔다. 바닷가 끝 쪽 망루는 고립되었다. 해가 떨어지자 바 닷바람에 얼어붙었다. 11월 25일 아암도는 춥고 배고팠다. 살려면 항복을 하고 내 려가야 했다. 이덕인과 1명은 탈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1명이 내려가 체포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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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 21주기 추모제

는 사이에 망루를 빠져나와 가슴 높이 바닷물 속에 뛰어들어 축대로 향했다. 28일 바다에서 로프를 온몸에 감은 채 사체로 발견됐다. 아버님은 422일 여의도 농성에서부터 빠짐없이 시위와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말이 없으신 분이었다. 수줍게 웃기도 했다. 화를 내거나 주장을 강하게 하는 모습 을 보지 못했다. 소극적이기도 하고 긍정적이기도 했다. 그를 만나기로 했다. 아카 이브팀원이 대거 인천으로 향했다. 장사하는 횟집으로 오라 한 아버님 마음을 받 았다. 폐를 끼치는 게 편하게 해드리는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연안부두는 쇠락했다. 아버님보다 늙었다. 송도가 해수욕장이던 시절에는 연안 부두, 월미도는 아암도와 더불어 손꼽히는 데이트 코스였다. 이곳이 유원지였다 는 사실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했다. 연이어 서 있는 횟집 가건물들은 지나치게 큰 간판을 힘겹게 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금세 목청이 높아졌다. 전사였던 시절로 돌 아가 있었다. 가게를 다 팽개치고 나섰던 시절이 아스라하다. 오래된 사진에는 맨 앞쪽에 이덕인 어머니의 모습이 있었다. 그때는 젊었다. 옹색한 횟집에는 평일이 라 손님이 한 팀밖에 없었다. 뭐가 불만인지 계속해서 타박을 한다. 늘 윽박지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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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운동의 기록

놈에게 고개 숙이는 삶을 지켜봐야 하는 시간이 아렸다. 영상작업과 구술을 받기 전에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날 얘기는 주로 신변잡기에 머물었는데, 낯가림이 심한 아버님이 어린 친구들에게도 말길을 터주길 바라서였다. 해병대 출신에 권투를 했다니 그의 젊은 시간이 궁금했다. 부 모들은 헤어질 때 손을 놓지 못했다. 이렇게 떠나가고 나면 자식이 없는 빈 공간이 새삼스러울 테다. 잊히는 게 두려운 사람에게 시간은 너무 빨랐다. 해가 지고 난 평일의 횟집 거리에 외등이 켜졌다. 거리는 비어 있었다. 돌아보면 아카이브 사업은 무모했다. 아카이브 사업은 개별 기념사업회가 독자 적으로 하기에는 벅찬 장기 과제인 게 분명하다. 1년은 그나마 성공적으로 풀어갔 는데, 앞으로가 걱정이긴 하다. 무모하지 않으면 의문사는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생각이 나만의 강박일까. 2017년에 이어 2년째 계속하고 있는 아카이브 사업은 우리 수준에 맞게 속도와 순서를 다시 잡아가야 한다. 2월에 토론회를 열어 추모 사업회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고, 논의도 했지만 기대가 크지 않다. 이내창기념사 업회가 이 일을 감당하고 채워낼 지혜를 모을 때다. 힘 받을 계기를 찾아내야겠다.

2017년 하반기에서 2018년 봄을 맞기까지의 과거청산운동은 이내창기념사업 회의 활동과 맥을 같이 한다. 중심에서 멀어지지 않으려, 함께 하려 노력했다. 민 주동문회와의 동행은 자연스러웠고, 큰 힘이 되었다. 심규한, 변승철, 신기정 전현 직 대표단의 적극적인 참여와 격려가 돋보였다. 과거청산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버팀목이 돼주기를 바란다. 이내창 의문사 사건 재조사 일인시위, 청와대 청원, 과 거사특별법 입법활동, 의문사 유족 아카이브와 과거청산 강좌 등 과거청산운동 사 업이 많다. 수고한 시간들이다. 고맙고 애틋하다. 2018년은 특별법의 통과를 위해 집중하기를 요구한다. 의문사 사건을 조사할 국가기구를 다시 세울 최적의 시간이다. 그 일이 즐거운 사람, 꼭 필요한 사람이 국가기구에 들어가고, 과거청산 과제를 연구했으면 하는 바람은 언제나 현재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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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다.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나를 드러낸다. 국가폭력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국 가기구는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유일한 처방이다. 그렇다 해도 국가의 재조사가 과거청산운동의 종착점은 아니다. 국가라는 틀 속 에서 국가기구를 통해 의문사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려 하지만 국가의 본질에 대해 회의하지 않고서는 국가폭력의 실체에 접근하지 못한다. 근본적인 질문 속에서 현 실적인 방안을 강구하고 실천한다. 비록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느껴질지 라도 말이다. 질문 없는 실천은 공허하다. 이내창기념사업회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하고, 답을 해야 한다. 이내창이 먼 바다 끝자락 거문도에서 찾으려 했던 게 무엇이었을까. 그를 그곳까지 이끌어 간 힘은 책임감이었을까, 아니면 용기일까. 무모함일까. 1989년 8월 15일 모두의 관심이 판문점으로 몰릴 때 남도 여수에서 104Km 떨어진 거문도 유림해수욕장 에서 이내창이 죽었다. 나는 그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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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운동의 기록

의문사 유가족 아카이브: 사랑과 명예와 이름을 남기기 위해 강남규

그의 이름은 이남우. 아니, 13년 전부터 그의 이름은 밀양 할배. 남들이 불러주 는 이름도, 스스로 부르는 이름도 밀양 할배. 2014년 여름, 학생기자로 밀양에 농활 겸 취재를 갔을 때 이남우 할아버지를 인 터뷰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담당한 마을은 평밭마을. 일단 마을 어르신 과 관계를 쌓으라는 선배 기자의 조언에 따라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 던 70대 이남우 할아버지를 찾아가 앉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ㅎ매체에서 왔고,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인터뷰를 요청하게 됐…” 말을 다 못 끝냈다. 할아 버지는 이런 상황이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우리가 왜 싸우 고 있는지, 지난 10년간 어떻게 싸워 왔는지, 쟁점이 무엇인지, 우리가 그 쟁점들 에서 무엇을 주장하는지, 그것이 어떤 과학적 사실들에 의해 지지되는지. 이 얘기 들을 참고자료 하나 없이 30분 가까이 늘어놓으시는 걸 보고 나는 혀를 내두를 수 밖에. 할아버지의 말은 이렇게 끝났다. “근데 느그 어디서 왔다꼬?” 그 이야기들 속에 이남우 할아버지 본인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끊임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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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신들의 투쟁을 왜곡하려 드는 언론들과 정치권들에 맞서기 위해 철저히 객관 적이고 치밀해야 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송전탑에 반대하는 것이지, 자신이 누구 인지는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10년간 무수한 인터뷰를 해왔을 것이다. 그는 ‘이남우’가 아니라 ‘밀양 할배’로서 생각하고 발언 하고 행동해왔고, 그의 말을 듣겠다는 언론들도 ‘이남우’가 아니라 ‘밀양 할배’의 말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장기간 투쟁해온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지에 대해 처음으로 고민하게 된 경험이었다.

그리고 여기, 장기간 투쟁해온 또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김을순. 아니, 30 년 전부터 그의 이름은 의문사 유가족, 갱식이 엄마. 남들이 불러주는 이름도, 스 스로 부르는 이름도 의문사 유가족, 갱식이 엄마. 김을선 어머니는 87년에 의문사한 정경식 열사의 어머니다. ‘의문사 유가족 디 지털 아카이브’ 프로젝트로 구술사에 참여한 그는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억울하다 는 말부터 꺼냈다. 자식을 잃은 억울함, 그리고 그 자식이 왜 죽었는지를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한 억울함, 밝혀낸 사실들을 인정받지 못하는 억울함. 김을순 어머니 의 생애사를 듣기 위한 질문들을 던져도 이야기는 어느새 다시 정경식 열사의 죽 음으로 돌아왔다. 87년 6월 그때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떻게 열사의 시신을 발견했 고, 누가 의심스러운지, 무엇이 의심스러운지, 정부와 경찰과 회사가 이 문제를 어 떻게 은폐하려 들었는지. 수십 년간 반복해서 얘기해온, 그래서 김을선 어머니가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이야기. 의문사 유가족의 시간은 가족을 잃은 과거의 그 시점에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 질 때가 많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그의 가족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를 정확히 알기 전까지는 애도를 끝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실이 규명되지 않 은 의문사 유가족들은 필연 애도를 끝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삶으로 돌아 오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김을선 어머니도 오랫동안 의문사 유가족으로서만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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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운동의 기록

왔고, ‘갱식이 엄마’로서만 행동해 왔다. 김을선의 이야기는 굳이 남에게 할 필요 없는 것이었고, 언론도 정치권도 김을선의 이야기는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김을선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야 ‘의문사 유가족 디지털 아카 이브’ 프로젝트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가족을 잃은 후부터 수십 년간 ‘OOO 어 머니, OOO 아버지, OOO 형제자매’로만 말해오고 또 기록돼 온 유가족 개개인에 게 그들의 이름을 되찾아주고,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 ‘자기 존재를 지우고 누군가의 무엇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음에도 유가 족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소선. 아니, 48년 전부터 그의 이름은 모든 노동자들 의 어머니.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달라”는 아들의 유언에 따라 ‘이소 선’을 지우고 ‘어머니’로 살다가 돌아가신 이. 그의 삶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동의 할 테지만, 그는 ‘태일이 엄마’이기 이전에 한 명의 강직하고 위대한 투사였다. 전 태일 만큼이나 이소선도 그랬다. 그러나 우리는 이소선의 전기는 잘 알지 못한다. 그가 자신의 서사를 지워버리고, 오직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살아가는 길을 택했 기 때문에. 그리고 이소선에게 말을 이끌어내는 자도 누구나 ‘전태일 이후’에 대 해서만 물었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그렇다. 유가족들은 죽은 가족의 ‘대리인’으로 싸웠지만, 그들의 투 쟁은 그 자체가 민주화 투쟁이고, 따라서 그들 하나하나가 모두 민주화 운동가들 이다. 그들이 싸웠기에 사회는 조금 더 투명해질 수 있었고, 조금 더 역사를 반성 할 줄 알게 됐다. 그들이 싸워서 만든 제도들 덕분에 오늘날의 유가족들이 조금이 나마 덜 힘들게 싸울 수 있게 됐다. 한 사회의 민주화는 그렇게 온다. 왜 역사는 죽 은 민주화 운동가들의 생애사는 기록하면서도 또 하나의 민주화 운동가들인 유가 족들의 생애사에는 무관심한가. 그들 역시 민주화 운동가이기에, 그들의 삶도 기 록될 가치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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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살아왔고, 이제 죽음이 좀 더 가까 워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돌려주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의문사 유가족 디 지털 아카이브’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하 게 되어 정말 다행이고 보람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내창의 친구들’로 살 아오기를 자처한 선배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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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운동의 기록

이내창 의문사 재조사하라 편집부

2017년 8월 15일, 28주기 기제에서 이내석 큰형님은 이번 정부에서는 의문사 의 진실이 밝혀지리라는 희망을 내비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슨 일이든 세 번은 기회를 준다고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셨을 때 아, 이젠 되었구나. 뭔가 밝혀지겠구나. 그런데 그렇게 쉽게 우리 마음먹은 대로 안 되었습니다. 역시 공권력이란 게 무섭구나. 그런데 요번만은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요번마저 안 밝 혀지고 흐지부지 또 넘어가면 역시 그 정부가 그 정부구나. 역시 공권력은 안 되는 구나. 저는 희망을 가지고 있고, 여러분도 희망을 가지고 다 같이 노력해서 유종의 미를 거둡시다.” 큰형님은 이내창기념사업회가 내창이형 진실규명을 위해 더 적 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요청하신 것이었다. 유가족의 간절한 부탁을 2018년 2월에야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2월 3일 이 내창기념사업회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이내석 큰형님의 <이내창 의문사 재조사 촉구 탄원서>를 보냈다. 그리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 일부 개정안’이 법사위 논의를 앞두고 있던 2월 6일~2월 7일에는 국회 앞에서, 3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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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3월 7일에는 청와대 앞에서 의문사 재조사와 진상규명, 과거사법 개정을 촉구 하는 피켓 시위를 벌였다. 2월, 매서운 날씨에도 이내석 큰형님이 함께 시위에 참 여하셨으며, 기념사업회와 민주동문회 회원들이 함께 해서 더 의미가 깊었다. 신 성호 회원이 현수막을 제작해주었다.

국회 앞 2월 6일 : 심규한, 이예진, 이원근, 노용헌 2월 7일 : 이내석(큰형님), 심규한, 김성희, 변승철, 김경주, 이예진, 이원근, 노용헌

청와대 앞 3월 6일 : 이내석(큰형님), 심재한, 고재영, 백기욱, 노용헌, 이원근, 이예진, 김기수 3월 7일 : 이내석(큰형님), 심재한, 이혁승, 변승철, 노용헌, 이원근, 이예진, 김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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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세기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는 어땠을까

기억의 파편 모으기 ◊◊ 1990년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건설위원회 ‘이철규-이내창 영혼의형제 결연식’ 치러 ◊◊ 옛 소식지 <어깨동무>를 들춰보며 ◊◊ 유가협과 우리 추모사업회 ◊◊ ‘응답하라 1994’ 그 지질한 시절아! ◊◊ 광화문에서 만난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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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은 이내창 열사를 의문의 죽음으로 떠

책임감을 가지고 기념사업회를 운영해온 사무

나보낸 지 30주기가 되는 해다. 30주기가 단

국장, 간사들의 기억을 모아보기로 한 것이다.

순한 기념이나 의례로 그치지 않고, 기념사업

필자로 참여한 사람들은 조종국, 김성희, 박찬

회의 미래와 과제를 새롭게 설정하는 전환점이

영, 김산환, 전성태다. 20~30년 전의 기억을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동안 이내창기념사

정리해달라는 편집부의 요청에 필자들은 당혹

업회는 다양한 사업들을 구상하고 진행해왔다.

하면서도 기획의 취지와 목적에 선뜻 동의하

대표적인 사업이 ‘의문사유가족 디지털 아카이

며 자신이 활동한 시기를 돌아보는 어려운 작

브’ 구축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업을 해주었다.

‘의문사유가족 디지털 아카이브 사업’이 기념

이들의 기억은 안성교정, 흑석시장, 용산의 추

사업회의 역할을 연대의 관점에서 외부로 확장

모사업회 간판 아래에서 1990년대의 한 시절

하는 것이라면, 내부적으로도 기념사업회가 한

을 같이 했던 다른 누군가의 기억과는 맞지 않

일을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즉, 기념사업

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시점에서 이들

회가 걸어온 3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정리

이 그 시절 추모사업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

하고, 기록함으로써 30주기 이후의 기념사업

는가하는 것이다. 30주기를 얼마 앞두지 않은

회를 준비하는 것이 30주기의 중요한 과제가

현 시점에서 우리가 잊고 있었거나 흐릿해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 있는 초창기의 생각들, 가치들, 이름들, 사

이번 특집은 기념사업회의 역사를 되돌아보기

건들을 다시 만나는 일은 반갑고도 가슴 아리

위해 기획되었다. 30년의 역사는 기념사업회

다. 어떤 기억이든 ‘우리’의 기억이기에 소중하

를 거쳐 간, 그리고 지금도 지키고 있는 무수

다. 따로 청탁은 하지 않았지만, 1999년 10주

한 사람들의 애정과 헌신이 모여 만들어온 것

기 자료집 <의문의 죽음, 그리고 10년>에 실

이다. 무수한 사람들의 땀과 고민, 흔적을 품고

린 성백술 선배의 글을 기록 보존 차원에서 덧

있는 역사를 한꺼번에 정리할 수는 없기에 편

붙였다.

집부에서는 기념사업회가 어떻게 만들어졌는

기념사업회 30년의 역사는 이렇듯 기념사업

지, 초창기의 활동들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회와 함께 했던, 그리고 지금도 함께 하고 있

부터 정리해보기로 했다. ‘이내창열사추모사

는 많은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파편

업회건설준비위’가 만들어졌던 1990년부터

을 모으는 방식으로 재구성될 것이다. 다음호

10주기였던 1999년까지를 “20세기 이내창

에는 2000년대 기념사업회에서 일한 사람들

열사추모사업회”로 명명하고, 일정 기간 동안

의 기억을 실을 예정이다.(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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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990년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건설위원회 ‘이철규-이내창 영혼의형제 결연식’ 치러 조종국

원고를 쓰라는 연락을 받고 까짓것 두어 시간이면 쓰려니 생각했다. 몇 차례 마 감 약속을 어기고 결국 설 연휴까지 미루게 되었다. 사실 수 년 만에 다시 시작한 ‘출근’ 탓에 차분하게 앉아 원고 쓸 만한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그냥 핑계이거나 꾸며낸 말은 아니다. 아무리 사정이 그래도 짬을 내서 자리 잡고 앉았으면 후다닥 썼을지 모르지만, 그놈의 시작이 어려웠다. 이유는 뻔했다. 쓰기가 싫었거나, 뭐라 고 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걸 피하고 싶 었다는 말이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벌써 근 30년이나 된 일이다. 안타깝게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일 몇 없다. 세세 한 과정이나 일화는 흐릿하고 큰 덩어리가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세월 탓도 아 니고, 풍화된 기억 탓도 아니다. 함께 건넜던 그 때 그 시대의 강이 넓고도 깊어서, 그 때 우리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던 탓이리라. 분명한 것은, 같은 염원으로 많은 것을 공감하고 연대했던 그 추억이 한낱 후일담으로 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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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1989년 10월 6일 ‘전대협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머지않아 ‘추모사업회’를 만 들자는 제안이 나왔다. ‘추모사업회’라는 명칭이 생소하지 않았던 가슴 아픈 시대 였다. 학기말이 되자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과 총학생회장 선거 국면으로 접어들었 고, 추모사업회 결성 준비도 선거 이후로 미뤄 질 수밖에 없었다. 김성희(문창84), 박지훈(영어87)이 총학생회장과 부회장에 당선되었고, 겨울방학 때 다음해 총학 생회 사업을 준비하면서 ‘이내창 열사 추모사업회 건설준비위원회’(이하 ‘추사건 준위’) 활동 준비를 시작했다. 까닭은 모르지만 2월 졸업을 앞둔 내가 당연히 추 사건준위를 맡는 것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건설준비위원회’라는 거창한 이름과 는 달리 사실상 ‘유령조직’에 가까웠다. 총학생회 산하 조직도 아니고 동아리연합 회나 인권복지위원회 같은 별도 기구도 아니었다. 제대로 직제를 갖춘 공식 기구 가 아님에도 활동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무소불위’의 조직이기도 했다.

처음 계획은 학교 내 각 자치 기구를 아우르는 재학생 중심의 추모사업회를 결 성하고, 다음 단계로 민주동문회 차원으로 확장해서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할 수 있 는 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정은 달랐다. ‘무소불위’는 고사하고 ‘건 설준비위원회’라는 명칭도 허울 좋은 말이었다. 별도로 책정된 예산도 없고, 추사 건준위 위원장 이외 소속 인원도 전혀 없고, 공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총 학생회를 비롯한 여러 자치기구가 모두 우호적이어서 큰 장애는 없었으나 내실 있는 진상규명 활동과 추모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조직 체계를 갖출 계제가 아니 었던 것이다.

1990년 새 학기가 시작되자 얼떨결에 ‘나홀로 위원장’이 된 나는 추모사업회 ‘건설’은 커녕 당장 벌어진 일을 감당하기에도 버거운 처지가 되었다. 첫째 과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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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이 ‘이철규-이내창 영혼의형제 결연식’(이하 ‘의형제 결연식’)을 추진하는 일이었 다. 당시 조선대 이철규와 중앙대 이내창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는 싸움은 공안 정국의 폭압적인 분위기를 뒤엎는 분수령이 될 만한 기세였다. 그해 5월 전남대에 서 열기로 되어 있던 전대협 출범식 당일 조선대에서 ‘의형제 결연식’을 진행하기 로 계획하고 실무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그런 일을 대놓고 전화로 협의하거나 준비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 었다. 무슨 의논이라도 하려면 인터넷은 물론 이메일도 스마트폰도 없는 시절이 라 전화와 편지가 아니면 사람이 직접 오가는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3월부터 광주-안성-서울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다녔다. 주로 낮에 광주에 가서 심 야에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광주에 갈 때는 기차나 고속버스를 탔는데, 언제나 돌 아오는 길이 문제였다.

조선대 또는 전남대, 충정로 어딘가에 있던 어느 단체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나면 언제나 막차시간이 임박해 허둥대기 일쑤였다. 허겁지겁 광주역에 도착하면 마지막 기차가 방금 떠났으니 역사 밖으로 나가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막차가 떠나고 나면 광주역 광장 한쪽에서는 우렁찬 호객 소리가 난 무했다. ‘전주!’를 외치는 호객꾼을 따라가 가장자리에 세워 둔 택시를 타면 네 명 이 타서 자리를 다 채울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총알택시’로 불리는 유용한 심야 교통수단이었다. 광주역에서 전주역까지 그야말로 총알처럼 날아갔다. 전주역에 서 다시 대전역까지, 대전역에서 천안역까지, 천안역에서 평택까지, 평택에서 안 성까지, 어떤 날은 평택역에서 수원역을 거쳐 서울까지 내달렸다.

그 밤에 그렇게 달려야할 만큼 긴박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음 약속을 지키려면 서둘러 안성 또는 흑석동 학교로 돌아가서 총학생회와 협의를 하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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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광주로 와야 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다시 안전하게 약속을 잡아 둔 그 지역에 반나절이라도 미리 와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기도 했다. 실시간 연락이 불 가능하던 시절에, 드러내놓고 나다니기 조심해야 하는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려 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자주 갔던 광주에서 ‘영혼 의형제 결연식’ 관련 협의를 했던 조선대 친구들과 몇 몇 전남대와 남총련 관계자들은 거의 모두 가명이나 별명을 썼다. 대부분 수배자 이거나 ‘요주의’ 인물들이라 정해진 시간을 지켜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약속 장소 를 수시로 바꾸는 탓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나는 수배자가 아니었어도 만나 는 상대들이 죄다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라 어쩔 수 없었다.

1990년 5월 19일, 중앙대 학우들은 전대협 출범식을 참가를 막는 경찰의 봉쇄 를 피해 동이 틀 무렵 광주 외곽 극락강역에 내려서 산 넘고 물 건너 삼삼오오 무 리를 지어 조선대로 모여들었다. 오전 11시로 예정된 ‘영혼의형제 결연식’을 치 르기 위해서였다. 결연식이 끝나면 흩어져서 다시 전남대로 집결해서 밤에는 제4 기 전대협 출범식에 참가하는 일정이었다. 나는 하루 전 광주에 가서 의형제 결연 식 준비를 하고 뜬 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사전 예고한 경찰의 봉쇄망을 뚫고 속 속 조선대로 들어오는 후배들을 맞았던 그날의 기억은 더 많은 세월이 흘러도 쉬 이 바래지 않을 것이다.

이후 추사건준위 이름으로 민가협(민주회실천가족운동협의회)과 유가협(전국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당시는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였음) 모임에 나가면서 연대 활동에도 참여하고, 초기 추모사업회연대회의에도 적극 참여했다. 당시 ‘이 한열 추모사업회’ 대표가 우상호 의원(더불어민주당)이었고, 지금의 인권재단 사 람의 박래군 상임이사도 유가협 활동가로 자주 만났다. 박종철 열사 아버지 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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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선생,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여사, 창신동의 유가협 보금자리 ‘한울삶’에 서 작고하신 이소선 어머니도 자주 뵈었다.

1991년, 졸업생 신분으로 추사건준위 일을 한다며 머물렀던 학교를 떠났고, 어 쩌다 영화기자 일을 시작해서 생업에 몰두했다. 이듬해 발족한 추모사업회 설립 과정에 어떤 기여도 못하고, 수년간 추모사업회 회원의 도리도 하지 못한 과오는 언설로 참회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리라. 부끄럽기 그지없다. 나의 오늘은, ‘이내 창’에게 빚진 여생에 불가할 따름이다.

*  조종국_90년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건설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84년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고, 현재는 영 화진흥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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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식지 <어깨동무>를 들춰보며 김성희

지난 연말 이사를 하면서 묵은 짐들을 들춰볼 기회가 있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관련 자료가 작은 여행용 가방에 가득 담겨 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희미하 지만, 안산에서 안양, 화정으로 그리고 경기도 광주에 가서 10년 살다가 또 다시 서울로 돌아와 몇 번 이사를 하는 동안에도 누군가에게도 맡기지 못해 보관해온 것들이다. 몇몇 동문들이 이사를 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내게 보내준 것들도 있다. 내창형 학생시절 판화 ‘시대가 선량을 농민을 투사로 만들었다’도 그 중 하나다.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가지고 있겠지만 아주 먼 훗날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당시에는 국가기록원 같은 곳에 넘겨줄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퇴행의 세월을 경험하면서 그 생각을 싹 지웠다. 자료들 가운데 이내창추모사업회 옛 소식지들도 몇 종 있다. 핸드폰도 없던 시 절이니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마다 소식지 내는 일에 우리는 꽤 정성을 쏟았다. 지 닌 것 중 가장 오래된 1993년 11월호를 들춰본다.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삶의 방 편을 찾아 경황이 없던 시절에도 네다섯 명이 매달 만나 편집회의를 하면서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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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소식지 : 1993-10,11 이내이 한 해사업평가, 재정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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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를 함께 만들었다. 돌이켜보니 386컴퓨터도 나오기 전이다. 보석글이나 한글 2.0 같은 한글 워드 프로세서로 문서를 편집한 파일을 플로피디스크에 담아 프린터가 있는 곳을 물 색해 출력을 했다. 당시 출판사에 다니던 김선미가 퇴근시간 뒤에 사무실에 있는 도트프린트로 ‘몰래’ 출력을 해오면 그것을 칼로 오려서 사진 위 아래로 텍스트 를 붙이고 흑석동 교문 앞 복사가게에서 발행 부수만큼 인쇄한 뒤 봉투에 넣어 우 체국에서 발송을 하는 방식으로 정기간행 소식지를 제작했다. 뒤에 서원(사진85) 이장길(연극영화 83)이 편집대행 기획사를 운영하게 되면서 소식지는 컴퓨터편 집과 마스터 인쇄로 진화했다. 공교롭게 두 사람 모두 이른 나이에 세상을 버렸 다. 뒤에 위상혁(문창88), 정보영(문창89), 우지영(의류89), 이정남(가정관리90), 이정주(문창90) 같은 이들이 편집부에 결합하면서 지면이 더 풍성해졌다. ‘어깨 동무’라는 제호는 역시 재치가 넘치는 박성용(문창 84)이 지었다. 1993년 11호는 A4사이즈 12쪽, A3 6장을 반으로 접어 가운데를 중철로 제본 한 것이다. 그 해 11월에 제막한 안성교정 이내창열사 추모비가 표지 사진이다. 제호 아래 발행처 주소는 흑석3동 명수한의원 지하로 되어 있다. 2쪽에는 ‘함께 읽는 시’로 브레히트의 ‘동요하는 사람에게’가 실려 있고 3쪽 ‘유리창’이라는 칼 럼 꼭지에 서원의 글이 실려 있다. 전남 장성으로 내려가 농민회 활동을 하던 서 영석(지역개발학과84)이 임신한 아내와 함께 탑골공원에서 열린 농민대회에 참석 한 일을 전하며 당시 대통령이던 김영삼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 회담 뒤 ‘세계화’를 내걸고 농민을 수탈하며 신자유주의를 향해 질주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4쪽부터 6쪽까지는 특집이랄 수 있는 한 해 사업에 대한 평가 다. 갓 제대한 임병수(조소86)와 박찬영(문창86)이 활동비 15만 원을 감수하며 상 근 간사로 합류했다는 소식을 읽으면서 코끝이 시큰해졌다. 난방도 안 되던 명수 한의원 지하실에서 월 15만원으로 그들이 어떤 세월을 견뎠는지 잘 알기 때문이 다. 왜 군에서 풀려나자마다 또 그 사무실로 달려올 수밖에 없었는지 그 심정을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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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다 잘 알 것 같기 때문이다. 사업 평가는 그 해에 목표로 정했던 네 가지, 첫째 추모비건립, 둘째 자료집 발간, 셋째 학번별 학과별 동아리별 동문 모임을 조직, 넷째 등산, 사진 등 취미 모임과 강좌개설을 통해 대중적인 기반을 넓히자는 것에 대해 돌아보고, 사인진상규명, 조직 강화, 홍보, 재정에 대해 평가를 싣고 있다. 그 해에 의문사 진상규명 국회청원 서명운동이 시작되었고, 연대사업으로 유엔인권 대회에 이철규 추모사업회 황차은 간사가 참여해 국제사회에 의문사 사건을 호소 한 일, 백서발간을 다음해로 넘긴 사정을 밝히고 있다. 조직사업에 대해서는 86학 번들이 단연 모임에 앞장서왔는데, 88학번 89학번이 이 못지않게 모임에 열을 내 고 있으며, 등산모임 사진 강좌 진행계획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1994년에 몇 차 례 등산을 함께 했고, 사무실을 용산으로 옮긴 뒤에 사진학과 88학번 장성백의 지 도로 흑백사진 촬영과 인화를 실습하는 강좌가 진행되기도 했다. 홍보에 대한 평 가는 단연 소식지를 한 호도 결호 없이 정기간행 한 것이 성과지만 그 해에 진행 된 한겨레신문 이공순기자 공판(안기부가 이내창열사 사건에 대한 한겨레신문보 도를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한)에 대해 회원들에게 잘 알리지 못한 점 등을 한계로 적어놓았다. 재정사업에 대해서는 각 학번별로 100만 원씩 모아 추모비건립기금 을 마련하기로 하고 88학번이 앞장 선 일을 평가하면서도 매달 80만 원 정도의 경 비가 드는데 고작 10여 명이 20만 원밖에 회비가 걷히지 않는 현실을 염려하고 있 다. 7쪽에는 당시 영화관련 잡지에 있던 조종국(문창과84)이 ‘말콤X’나 ‘까미유끌 로델’ 같은 당시 개봉된 좋은 영화를 소개하는 문화면이 배치돼 있다. 그 해 10월 의 총 수입은 37만 원이었다. 정기회비가 27만 원이었고 우리 부부가 결혼을 하 면서 10만 원을 특별회비로 냈다. 지출은 월세와 전기세 등 사무실 유지비 9만 7 천 여 원, 간사 두 사람 월급 30만 원, 소식지 인쇄 8만 원, 발송비 3만 2천 원, 봉 투제작비 2만 5천 원 등 홍보비 약 14만 원으로 모두 1백만 원이 좀 넘어 그 달은 69만여 원 적자였다. 결혼 당시 뒤 늦게 대학원에 진학해 있던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속초에 가 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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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등산을 하는 것으로 신혼여행을 대신할 형편이었기에 10만 원 특별회비는 전 체 결혼식경비 150만 원 중에서 꽤 큰 결심이었다. 그런데, 결혼식 자체가 총여학 생회장이던 구혜영이 주선해 안성교정 학생회관 앞 연못가에서 음대학생들의 연 주, 문창과 사진학과 연극영화 학과 등 예술대 후배들이 제 일처럼 나서준 덕에 가 능했기에 고마움을 표한 것인데 당시에는 너무 그것밖에 내지 못해 괴로워한 기 억이 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우리들은 이내창기념사업회(당시는 추모사업회)를 중심 으로 가족 같은 정을 이어갔다. 이제 죽고 없는 서원 등과 나눈 정은 가족보다도 더 깊었다. 사회구성체 논쟁이니 정세분석이니 거대한 이야기만 나누다가 사회에 나온 뒤 우리는 각자 자기 앞에 놓인 생계를 마주해야 했다. 조직이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였고 개인들은 아무런 대책이 도 없었다는 점도 뒤늦게 깨달았다. 당황 스러웠지만 서로 의지하면서 고민을 나누고 마음을 다독였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 각에 그나마 어려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다행히 추모사업회는 깃발을 내리지 않고 지금껏 잘 유지되어왔다. 당시에 비하 면 회비도 늘었고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회원도 늘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 런데 그 시절 늘 우리 곁에 있던 많은 이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아 가슴 한켠이 시 리다. 바람이 있다면 우리가 처음 출발할 때 지녔던 그 마음, 어린 학생으로서 무지막 지한 국가권력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분한 일들에 대해 기억을 보존하고 이러한 일들이 더는 되풀이 되지 않는 세상을 향해 우리사회 일각의 아주 작은 책임을 지 고자하는 그 마음을 유지했으면 하는 것이다.

*  김성희_96년, 故 서원과 함께 이내창추모사업회 간사로 일했다. 문예창작학과 84학번이며, 현재 <한살림>에서 일하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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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협과 우리 추모사업회 박찬영

이십 오년 전의 기억을 더듬는다는 것은 간단한 물음이 아니다. 기억이란 언제 나 조합되고 자기중심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객관성을 담보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 렇지만 그 기억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되새겨 보는 시간이 되기에 충 분한 것이었다. 이내창 추모사업회는 91년에 발족하여 흑석시장 내 지하공간에 사무실을 열었 다. 이내창 열사의 뜻을 계승하는 문제와 의문사 진상규명이라는 시대적 소임이 숙제로 남겨져 있었다. 추사가 만들어진 이후 사무실 운영은 성백술(문창과 81) 선배가 혼자서 지키고 있었다. 추모사업회의 초창기라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세우 거나 조직을 강화하는 문제는 논의만 무성하던 때다. 92년 12월 초에 임병수(조소 과 86)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당시 나는 부산에 거주하며 92년 대선을 맞아 공정 선거 감시단 활동을 부산민청과 함께 하고 있을 때였다. 내년부터 추모사업회 일을 이내창 열사 동기들이 맡아서 새롭게 꾸려 나가기로 결정이 되었다며 나에게 간사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을 하였다. 저는 망설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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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고 답하였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서 이내창 동지와의 결의를 지켜나 가는 일이였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93년 초에 짐을 싸서 지하 사무실로 옮겼다. 작은방 두 칸에 사무공간이 있는 지 하실이지만 무엇을 하고자 하는 열정은 대단히 높았다. 성백술 선배는 이제 너희 들이 내창이 동기들이니까 잘 풀어나가 보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식사도 공 동으로 하고 잠도 함께 자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인식되어져 술집이 문을 닫는 늦 은 시간에도 술을 사들고 오는 곳이었다. 처음 몇 달은 모두가 그런 생활에 행복 하게 보였다. 93년 3월 중순에 운영위원회를 하면서 그 해 사업계획을 정하게 되었는데 안성 교정에 이내창 열사 추모비를 건립하는 사업과 의문사 진상규명 백서를 발간하는 사업을 펼쳐 나가기로 뜻을 모았다. 이외에도 회원 확대사업과 회의를 정례화 하 는 문제가 논의 되었다. 그때 운영위원으로 참석했던 사람들은 모두 추모사업회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성백술, 차일환, 신명철, 김운성, 서원, 간사인 임병수와 나 는 거의 빠짐없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내창 열사의 뜻을 계승하는 사업에 도덕 적 책임감이 컸던 사람들 중심으로 추모비 건립 위원회를 만들고 건립 기금을 모 아 나가면서 일은 본격화되었다. 설계와 시공은 김운성 선배가 맡았고, 학번별 책 임자를 정하여 건립위원 참여를 독려하는 홍보를 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대외협력 일을 내가 맡게 되어 유가협을 처음 방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가협을 처음 찾았을 때 유가협의 어른들이 나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직도 기억 에 생생하다. 이내창 열사는 추모사업회도 있고 그 뜻을 잇겠다는 동지들이 많은 것이 부럽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내창 열사의 가족이 유가협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설득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그것이 이듬 해부터 내가 유가협에서 일을 하는 이유가 되었다. 유가협에는 의문사지회가 있었는데 군의문사 가족이 많았고 학생운동, 노동운 동 과정의 의문사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허원근 일병, 박상구 상병 등 군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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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비롯해 신호수, 정경식, 박창수, 이철규, 이내창 열사들이 포함되었다. 유가 협은 열사정신 계승사업과 의문사 진상규명 사업을 핵심 사업으로 선정하여 사회 적 공론화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의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국회 청 원 백만인 서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간 것이 훗날 대통령직속의 의문사진상규명 위원회를 발족시키는 촉매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열사 추모사업회가 만들어져 지역별로 산재하고 있었 는데 이를 한데 결속시킨 것이 90년 초에 ‘전국열사추모사업회연대회의’로 태동 하였다. ‘전국열사추모사업회 연대회의’도 초창기라서 그런지 유가협이 중심이 되 어 회의와 사업이 정해지고 있었다. 우리 추모사업회는 ‘전국열사추모사업회 연대 회의’에서 이철규 추모사업회, 박창수 추모사업회와 함께 중심 역할을 맡게 되어 연대사업의 영역이 넓어졌고 수많은 추모제에 참여하는 책임감 또한 커지게 되었 다. 매년 거행되는 민족민주열사 합동추모제 준비에 실무 참여를 하게 되면서 유 가협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열사사업이 추모사업을 넘어 민주국가의 정체성으 로 자리매김해 나가는 것이 역사적, 시대적 소명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 추모사업회가 안성교정에 열사 추모비를 건립하였을 때 개막식에 참여하 신 여러 유가협분들이 많이 부러워하셨다. 열사 추모비를 세우는 일은 모두의 마 음을 모아내지 않으면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였기에 한편의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이내창 열사 추모비 건립은 그 당시 우리의 마음이었고 최소한의 예의였다. 한 시대를 비켜나갈 수 없는 사람이라면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 당시 건립기 금 모금을 위해 민주동문회 명부를 보며 전혀 일면식도 없는 분들에게 많이도 전 화를 했었다. 이내창 동지와 함께 했던 민족해방 전선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 는 결의는 여전히 가슴 속에 살아 존재한다. 한번 태어나면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것이 모든 생명의 본분이다. 그래서 중요 한 것이 어떻게 사는가의 모습으로 남는다. 가장 좋은 세상은 추모할 수 있는 것이 적어지는 사회일 것이다. 지난시대의 울분과 비탄을 넘어 촛불시대의 격정과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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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이내창, 그가 바랐던 사람 사는 세상을 우리는 지켜가야 할 것이다. 우리 추모사업회가 앞장서서 유가협을 지원하는 후방사업을 심도 있게 고민하 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추모사업회와 유가협의 관계는 동지적 혈연관 계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지쳐서 사람이 그리울 때 유가협 의 한울삶을 찾아가는 일을 생활화하는 것은 새로운 용기를 얻는 계기가 되고도 남는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이 유가협 가족분들이기 때문이다. 열사를 추모하는 사업은 생활운동이기도 하다. 생활운동의 하나로 우리는 가족들 손잡고 유가협의 어른들을 찾아보는 일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이내창 열 사의 얼과 뜻이 유가협이라는 넓고 큰 품과 함께 나아갈 때 더욱 값있는 일이 될 것이다.

*  박찬영_93년 이내창추모사업회에서 대외협력 간사를 담당했고, 94년~97년까지 유가협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문예 창작학과 86학번이며, 현재 산청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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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94’ 그 지질한 시절아! 김산환

모기 한 마리가 윙윙 울었다. 본래 흰색이었을 테지만 땟국물에 얼룩덜룩해진 난 닝구(이렇게 써야 느낌이 산다) 속 등골을 따라 미지근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천 정 언저리 한쪽 벽에 뚫린, 지상의 바닥과 높이가 거의 같은 작은 미닫이 봉창 너 머로는 빗줄기가 추적추적 내렸다. 바야흐로 계절은 장마철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바닥에 깐 요나 덮으려는 이불 모두 넉넉하게 습기를 머금어서 좀 채로 깔 수도, 덮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흑석시장 골목에서는 또 술에 취한 사내 몇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빗속을 허우적거렸다. 휴~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 다. 1994년 여름. 나는 흑석시장 후미진 골목 끝 명수대 한의원 지하에 있던 추모 사업회(이하 추사) 사무실 골방에서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며 속절없이 여름을 보 내고 있었다. 지금도 명징하게 떠오르는 이 장면이 그 때 추사 상근 간사로 활동하 던 시절의 자화상이라 하겠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참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올 듯 말 듯 하다가 끝내 오지 않 은 민주주의의 절망이 그랬고, 이십대 청춘을 지하실 골방에서 처박혀 보내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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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심정이 그랬다. 나는 남들보다 2년 많은 6년을 꽉 채우고 어찌어찌 졸업은 했 지만 사회에 적응할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떤 일을 하겠다거나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폭탄 돌리기를 하듯이 추사 간사 자리가 넘 어 왔고, 가진 거라고는 미안함과 죄책감 밖에 없던 나는 덜컥 승낙을 하고 말았 다. 사실 그 시절의 우리 모두는 그랬다. 이내창이라는 이름 석 자 앞에서 자유로 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평생을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빚을 우리 에게 주고 갔다. 물론 이 빚은 강요가 아닌, 그 시절의 우리 모두가 기꺼이 받아 안 았던 ‘자발적 수용’이었다. 당시 추사 사무실이 깃들었던 흑석시장 안쪽 명수대 한의원 지하실은 추사 회 원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했다. 지금이야 아주 특별한 날이 아니면 흑석동에 갈 일이 없지만, 당시에는 안성 캠퍼스 출신들이 흑석동에 자주 출몰(?)했다. 이들 가운데는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해 시간 때울 곳을 찾아다니던 회원도 있었고, 운동 (축구나 야구 같은 운동이 아니다)을 업으로 삼은 활동가나 백수가 직업인 회원들 도 있었다. 남들은 다 한 졸업의 기회를 잡지 못해 흑석동 캠퍼스로 수업을 들어 오는 이들도 있었다. 더러 흑석동 달동네에 둥지를 튼 회원들도 있어 퇴근길에 오 가며 사무실을 들렀다. 이들이 있어 온종일 혼자 사무실을 지켜야 하는 간사 입장 에서는 덜 심심했다. 그러나 늘 반가운 손님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추사 사무실 한켠에는 우중 충한 골방이 있었다. 이 방은 흑석동에서 술추렴하던 동문들에게는 여인숙과도 같 았다. 개미집이나 안동장, 흑석시장에서 술판을 벌이다 거나하게 취하면 이 우중 충한 방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들 손에는 항상 소주 몇 병과 쥐포, 오징어 같은 안 주가 들려 있었다. 그들과 술대작(본래 자취방은 다른 곳에 있었지만 그곳에서 자 는 일도 많았다)을 하는 일이 힘겨울 때도 많았다. 특히, 새벽 한 두시에 들이닥쳐 감놔라 배놔라 하는 동문들을 웃는 얼굴로 맞이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럴 때 면 눈에서 레이저가 미친 듯이 나갔지만 그러나 어찌 그들을 외면할 수 있으랴.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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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외로 꼰 채 한쪽 귀로 듣고 또 한쪽 귀로 흘리며 그들의 넋두리를 받아줄 수 밖에. 그들 가운데 일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취해 찾아오던 단골손님도 있었 지만, 그 이름을 이 지면에까지 옮기고 싶지는 않다. 그 해 여름, 지하실의 눅눅한 방에서 무더운 장마와 씨름할 때 북한에서 부고가 날아들었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것이다. 어쩌면 이 사건은 그 해 가장 큰 뉴스 가 아니었나 싶다. 17인치 브라운관 TV에서는 하루 종일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 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터진 소식이라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만약 이때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지 않고 예정대로 남북정 상회담이 열렸다면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 그날따라 오가는 선후배도 많았는데, 우리들은 반세기 북한을 통치했던 김일성 주석의 죽음이 미칠 한반도 정세를 걱정 하며 이야기를 나눴던 일이 선하다. 꿈도 없고, 미래도 없이 버려진 것처럼 1년이란 시간을 추사 사무실에서 보낸 것 같았지만 그 시절 그래도 연애를 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연애는 지질하기 짝 이 없었다. 그 때 우리의 연애라고 해야 사무실에서 죽 때리면서 흑석시장에서 사 온 떡볶이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참 심심하고 지루 한 연애였다. 착한 애인은 늘 한강이 보고 싶다고 했다. 한강의 노을을 보며 여의 도의 강변을 거닐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참으로 무지하고, 한심했던 나는 단 한 번도 그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 지하실 밖으로 나가는 일이 왜 그렇게 힘들었을 까. 그 때를 돌이킬 때마다 나란 존재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월급을 30만원(정말 악착같이 챙겨 받았다)씩 받는 상근 간사의 첫 번째 임무가 사무실을 지키는 것이 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 간사가 한두 시간 농땡이 친다고 뭐 랄 회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붙박이처럼 사무실만 지켰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탓일 게다. 명수대 한의원 지하실에서 보낸 1년이 늘 불행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내창 형에게 빚을 진 마음이 있듯이, 회원들은 자신을 대신해 일하는 간사에게 항상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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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한 마음이었다. 그들은 애써 사무실을 찾아 위로해줬고, 늘 진심으로 나를 위해 줬다. 그런 회원들의 진심을 알기에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다잡고 1년이란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사진과 동기 장성백에게 사진을 배운 것은 행복한 기억이자 사진 을 찍을 줄 알아야 하는 여행작가와 여행전문기자로 살게 될 미래의 나를 위해서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해 추사 내 동아리로 사진반을 운영했는데, 성백이가 사진을 찍는 법에서 인화하는 작업까지 풀코스로 가르쳤다. 어떻게 구한 것인지 는 가물가물하지만 당시 나에게는 못도 때려 박을 만큼 튼튼하다는 니콘 FM2 사 진기가 있었다. 이 사진기로 이런저런 사진을 찍은 후 목요일(왜 이 요일은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이 날까?) 저녁에 모여 필름 현상과 인화 작업을 했다. 이 때 곰팡내 풀풀 나는 골방은 암실로 변했다. 그 방에 있던 이불 가운데 가장 크고 무거운 빨 간색 밍크 담요로 문을 막고, 그 안에서 필름을 현상했다. 그 무더운 여름,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용액 속에 담긴 인화지를 살살 흔들어주면 은근하게 상이 맺히는 것을 신기해하며 바라봤다. 용액의 온도를 낮추기 위해 사용했던 쭈쭈바를 허리춤에 쓱쓱 닦아낸 후 쭉쭉 빨며 히죽히죽 웃던 모습이 생생하다. 1994년 추모사업회의 과제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맑은책집 운영이 었다. 안성캠퍼스에 내창이형 동상을 세우고 남은 돈과 회원들의 모금 등을 통해 마련한 돈으로 안성캠퍼스 2차동(맞나?)에 있는 맑은책집을 인수했다. 추사에서 맑은책집을 운영하려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우선은 이 공간을 통해 재학생 들과 이내창을 연결해주려고 했다. 또 학생들이 책을 통해 진보적 의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물론, 맑은책집이 잘 되어 추사 운영비에 보 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러나 맑은책집이 생각만큼 수익이 나지 않 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장을 맡아 운영하던 회원과 아르바이트생 급여를 지불 하고 나면 특별히 남는 게 없었다. 특히, 이 공간을 통해 이내창이란 존재를 재학 생들에게 알려나가겠다는 계획은 생각만큼 실현되지 못한 것이 훗날에도 아쉬움 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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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또 다른 고민 가운데 하나는 추모사업회의 전망이었다. 우리들은 ‘이내 창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한계를 벗어나 좀 더 외연을 확대하려는 고민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안성 캠퍼스에는 민주동문회가 없었다. 이내창추모 사업회가 민주동문회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추모사업회라는 울타리 로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모든 동문들을 끌어안을 수는 없었다. 특히, 그 때는 운 동권이 NL과 PD로 나뉘어서는 서로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렸던 시절이었다. 이 내창추모사업회는 NL의 집합소와 진배없었기에 PD계열 동문들이 설 자리는 없 었다. 또 이내창과는 인연이 없지만 스스로를 ‘민주화를 열망하는 애국시민’이라 생각하는 동문들이 스스럼없이 어울리기에도 조금은 닫힌 구조였다. 그러나 회원 모두가 추모사업회를 좀 더 열린 공간으로, 좀 더 다양한 동문들이 함께 할 수 있 는 모임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바람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끝내 새로운 결론을 도 출해내지는 못했다. 또 추모사업회를 기념사업회로 전환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념사업회로 전환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많아 결국 추모사업회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게 됐다. 그리고 또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매달 소식지를 발간하고, 4.19에 맞춰 북한산 산행과 수유리 묘지 참배를 하고, 8.15 기제에 맞춰 광주를 다녀왔던 것은 정해진 활동이라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러나 그 때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생각나지 않는 다. 이십여 년이란 세월이 기억의 대부분을 가져갔다. 다만, 간사로 일하면서 보람 보다는 자괴감을 더 많이 느꼈던 것은 분명하다. 만약, 그 시절 내가 어떤 단체나 연대사업 분야에서 일하겠다는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면 결과는 조금 달랐을 것이 다. 하지만 나에게 추사 간사 자리는 얼떨결에 주어진 것이었다. 나는 간사를 마칠 때까지도 여전히 내가 무엇이 되고, 또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를 정하지 못했다. 어찌어찌 1994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우리는 다시 상근 간사를 고민해야 했다. 이제 다시 폭탄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릴 시간이었다. 어쨌든 이내창추모사업회라 는 조직은 영위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상근 간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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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했다. 지금은 중견 소설가로 문단을 이끌고 있는 후배 전성태를 어떤 감언이 설로 꾀어 후임 간사로 세웠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는 별 저항(?) 없이 상근 간사 자리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건 아마도, 이 글 서두에서 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내창에게 진 빚’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성태도 순순히 간사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성태에게 후임 간사를 넘기면서 속이 후련했다. 앓던 이가 쏙 빠진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성태에게 너무 미안했다. 내가 지고 있던 멍에를 억지로 떠넘긴 것 같 았다. 그가 일 년 동안 견디거나 치러야할 고난이 뻔히 보였다. 그런 후배를 위해 내가 해준 유일한 도움은 추사 사무실을 흑석동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이다. 더 이 상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술판을 벌이는 못된(?) 회원들의 성화 속에서 간사 일 을 하게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았다. 성태가 추사 간사로 일하지만 소설가 지망생 으로 열심히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을 배려해주고 싶었다. 이듬해 봄 추모사업회는 흑석동 시절을 마감하고, 용산 시대를 열었다. 이것으로 간사로서의 내 임무는 마 침표를 찍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추사 간사로 일했던 1년이란 시간이 마치 절망의 늪에서 허우 적거린 것처럼 비쳐질 수 있겠다 싶다. 그러나 그 시절의 절망과 번민은 추사 간사 라는 자리를 맡아서가 아니다. 시대가 안겨준 것이다. 최영미 시집 제목처럼 ‘시대 의 우울’에 빠져 있던 시절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것이다. 나와 다른 자리에 있 던 사람들도 제각각의 방식으로 그 시절 그 절망의 강을 건너 지금 여기까지 왔다. 이내창, 그가 우리 곁에서 떠났던 때의 나이보다 거의 두 배를 살아낸 지금, 그 시 절의 거의 모든 기억들은 가물가물하지만, 우리가 이내창이고자 했던 마음은 시절 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  김산환_94년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 간사로 일했다. 1988년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으며, 현재는 <꿈의 지도> 대표 로 출판인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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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만난 1989년 전성태

1995년 나는 3학년을 마치고 휴학한 채 추모사업회의 상근간사로 일했다. 이 내창을 잃은 지 6년째 되던 해였다. 때마침 부모님이 시골 살림을 정리하고 상경 해서 추사 사무실에 출근하는 1년여 동안은 신정동의 부모님 집에서 지냈다. 나 로서는 서울 생활이 처음이었고, 열여섯에 집을 떠난 후 십년 만에 다시 부모님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추모사업회 사무실은 흑석시장에 있었다. 시장을 가로질러 막다른 골목의 건물 지하였는데 창고로나 쓸 만한 공간이었다. 북쪽 천장 모서리에 잇대어 난 작은 창 으로 행인들의 발목이 보였다. 사무실은 여러 모임들의 살림이 조금씩 섞여 있었 다. 두 벽을 두른 책장에는 세계문학전집과 월북작가대표문학50인선, 사회과학 서적들과 문예지들이 곰팡이를 피우며 꽂혀 있었는데 대부분 초기 사무실의 관리 자였던 성백술 선배가 남긴 책들이었다. 일부 책에는 동작구 시민단체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당시 대학원생인 성백술을 비롯한 신명철, 한명옥, 엄철회, 박성용 선배 등으로 꾸려진 문예집단 진달래가 남긴 농민운동 관련 자료들도 있었다.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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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는 짧은 기간 동안 집단창작을 하다가 활동을 멈춘 상태였다. 거기에 사진과 현장 출신 졸업생들이 안쪽 내실을 통째로 인화실로 꾸며놓고 회원 배움터로 사 진교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서원, 김미선 선배가 몇 해 이끌어온 사진교실이 그해 봄에는 시들했다가 용산으로 이사한 여름에는 장성백 형이 맡아서 진행했다. 아마 그게 마지막 사진교실이었을 것이다. 해동이 되면서 지하실의 벽체가 축축하게 젖 어 내렸다. 누전으로 전등이 나가곤 했다. 봄비 내리던 날 컴퓨터가 다운되면서 다 쓴 단편소설을 잃은 일도 있었다. 살림을 살폈지만 회원들이 차츰 졸업하면서 추모사업회는 자연스럽게 동문회 구실을 겸하게 되었다. 이내창과 학생운동을 함께하고 그의 사후 진상규명 투쟁으 로 학창시절을 보낸 선배 회원들이 갓 새내기 직장인이 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면 서 처지들이 달라졌다. 선배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모두가 분주해 보였다. 전 임 간사였던 김산환 형이 사무실 근처에서 자취하면서 《사람과 산》 기자로 취직해 가고, 이규성 형이 흑석동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서원, 장건상 형이 지금의 중대병 원이 있던 자리의 상가에 낸 기획사 사무실은 동문들의 또 다른 아지트처럼 보였 다. 청맥서점의 방현석 형이 자주 불러 밥을 먹이기도 했다. 선배들의 졸업은 내게 묘하게 보였다. 이내창에게 강하게 결속되어서 무슨 분리불안장애를 겪는 아이들 처럼 사회의 문턱에 엉거주춤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 습하고 퀴퀴한 지 하실에 모여드는 선배들의 유대감이 유별나 보이기도 했다. 몇 년을 일상성을 박 탈당한 채 살아온 선배들에게 취업과 진로라는 생활인으로서의 낯선 현실이 조금 버겁게 다가온 건 아닌가 싶었다. 왜 그렇지 않을까?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 너지고 학생운동은 급격히 퇴조하였는데, 친구의 의문사를 풀지 못한 채 그들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내창이 있어서 그들은 교문 밖에서 흩 어지지 않고 매우 독특한 공동체를 유지했는지 모른다. 장임원 교수님이 추사 출범 이래 계속 회장직을 맡아주셨다. 친구를 잃은 학생 들에게는 이내창을 안고 가는 삶이 당연한 일이지만 장 교수님이나 뒤를 이은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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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희 교수님의 입장은 또 다를 수 있다. 그분들이 한결같이 우리 곁을 지켜준 일 이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각별하게 여겨진다. 이런 분들을 일러 어른이라 하겠지. 차일환, 신명철, 성백술, 김성수 선배가 든든한 맏형 노릇을 해주었다. 신임 사 무국장은 ‘짬이 형’이라는 별호가 혀에 더 익은 전상삼 선배가 맡았다. 이동희, 김 문수, 김선주, 김성희, 김원주, 김운성, 양은모, 김지헌, 박성용, 이장길, 조종국, 김서경, 서원, 서병훈, 이광희, 박찬영, 이정훈, 이태형, 박명환, 서병수, 장건상, 조환준, 최유희, 김근한, 황선태, 김영상, 김경주, 유윤형, 박희성, 박지훈, 장남신, 장순철, 조은희. 이규성, 이예진, 위상혁, 장성백, 강동길, 김경락, 김선미, 김태호, 김혜숙, 오병석, 우지연, 곽현주, 이미림, 이태경, 정수희, 이상길, 이원근, 정원옥, 이지원, 방지영, 정순호, 박경근, 한준, 황광원, 김창영, 심규호, 박지영, 배성희, 우 지영, 이계현 회원이 운영위원회다 기제다 해서 크고 작은 모임이 있을 때 참여해 주었다. 김현숙, 장미경, 김혜진, 김태연, 한선희 등 후배들이 신입으로 가입해 막 내역할을 해주었다. 살림도 한결 나아졌다. 회비가 부쩍 늘어 매달 100만원 내외 가 걷혔다. 명필름의 이은 심재명 부부 동문이라든가 원순재, 안명숙, 문흥식, 백 판성 회원 등 회비를 꼬박꼬박 챙겨주고 전화하면 친절하게 응대해 주던 선배들 도 기억난다. 내가 미처 챙겨 기록하지 못한, 세월이 앗아간 이름들이 아주 많다. 4월 무렵에는 민주동문회와 함께 용산에 새 사무실을 얻어 이사했다. 국제빌딩 맞은편, 40층짜리 주상복합 ‘래미안 용산’이 들어선 자리의 낡은 빌딩 2층이었다. 지하실을 탈피한 것만으로도 사무 여건이 아주 좋아졌다. 위층에 있는 인력사무소 로 일용직 노동자들이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고, 뒤창으로 폐지 수집상 마당과 여 인숙 골목이 보였다. 민주동문회도 상근간사를 배치했는데 갓 졸업한 제윤주 씨가 맡았다. 민주동문회도 결성된 지 몇 년 되지 않아 규모가 잡혀가고 결속력이 좋을 때였다. 제윤주 씨와 나는 도시락을 싸와서 한강 둔치까지 걸어가 먹고 오기도 했 다. 인근에 있는 출판사 서울문화사에 다니는 이동희 형이 자주 와서 사무실 소파 에서 낮잠을 자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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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교정에 운영 중인 맑은책집을 맡을 간사를 새로 선임해야 했는데 회원이나 졸업생이 나서지 않아 구인광고를 내서 안성시 보개면에 사는 송경원 씨를 영입 하게 되었다. 사회과학서점으로 출발한 맑은책집은 펜시 물품도 들이고 문학기행 도 기획하는 등 여러 변화를 꾀했지만 이미 경영이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여 전히 안성교정에서 이내창을 호흡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이었다. 맑은책집에서 아르 바이트를 한 많은 후배들이 추억을 공유했다. 문창과 96학번인 김서령은 소설가 가 된 후 신문 칼럼에서 맑은책집을 추억했다. ‘대학 시절, 학교에는 <맑은책집>이 라는 손바닥만 한 문학전문서점이 있었다. 나는 용돈이 떨어지기 전에 꼭 사고 싶 었던 소설과 시집을 조심조심 고르곤 했다. 한강의 《여수의 사랑》도 맑은책집에서 샀고 김한수의 《그대, 기차 타는 등 뒤에 남아》도 그곳에서 샀다’ 송경원 간사는 이후 2001년 여름까지 6년을 맑은책집을 맡아 고군분투했다. 추 모사업회는 책임 주체로서 여력이 없어서 맑은책집을 송 간사에게 맡겨놓다시피 했다. 내가 상근간사를 마치고 복학했을 때도 송 간사가 사업이나 운영에 대한 어 려움을 토로했지만 팔을 걷고 돕지 못했다. 여러 차례 사의를 표했는데 실상 사의 마저도 책임 있게 접수해 줄 사람이 없어 그녀는 6년이나 적자일로의 서점을 떠나 지 못했다. 2001년 여름에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맑은책집을 철거하겠다고 통보 했을 때 비상총회가 열리고 맑은책집의 경영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이 있었던 것으 로 안다. 점검 결과 송경원 씨의 방만한 경영이 지적되어 경질하는데, 저간의 사정 들을 감안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회원이 아닌 사람이 오랜 시간 애를 쓴 것이다. 이후 최현주, 이예진, 홍우림 회원이 차례로 운영을 맡아 맑은책집을 살려 보려고 힘썼지만 2005년 문을 닫았다. 한편 추모사업회 연대회의가 발족되어 정기적으로 창신동 유가협에서 실무단 모임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졌는데 6월에 열리는 민족민주열사합동 추모제가 연대기구에게는 가장 큰 연례행사였다. 단독주택의 유가협에 가면 선배 박찬영 형이 간사로 상주하고 있었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인 박정기 어르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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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따뜻이 맞아주었다. 정초부터 전두환이 구속되고 연말에 노태우 구속으로 이 어진 해로 유가협의 어머니 아버지들과 의왕의 서울구치소 앞으로 집회를 나가기 도 했다. 대부분 두 독재자의 치하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이라 시위가 격렬해 졌다. 건강 상태도 좋지 않은 분들이 많아서 추모사업회 간사들은 시위보다 부모 님들을 보호하느라 더 정신이 없었다. 김상진열사기념사업회의 오기출 선생님, 이 철규열사추모사업회의 황차은 간사, 김철수열사기념사업회의 한현우 간사가 열 심히 출석했다. 광주에서 온 황차은, 한현우 씨는 유가협에서 하룻밤 묵고 가야 해 서 회의가 끝나면 유가협 앞 곱창골목에서 양배추와 깻잎, 들깨가루로 볶은 돼지 곱창을 사다놓고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한현우 씨는 1991년 고등학교 3학년으로 분신한 친구 김철수를 기리며 이 길 로 뛰어들어 지금도 추모사업회를 지키고 있다. 작년에 김철수 열사의 모교인 보 성고 교정에 우여곡절 끝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26년 만이고, 한현우 씨가 그 세 월 동안 그 일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 하나 세우려고 어디도 가지 않고 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울컥해졌다. 유가협에 드나들던 스물세 살 현우 는 정말 친구의 추모비를 학교에 세우고 싶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광주에서 지내 는 현우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했더니 이내창 열사를 망월동에 모셔놓았을 때는 일 년에 한 번씩은 이내창네 누나 형들을 보곤 했는데 이천으로 이사 간 후에는 만 나지 못한다고 아쉬워했다. 현우는 내가 운동판에서 만난 인연 중에 가장 가슴 아 픈 사람이다. 나는 이 동생을 떠올리면 어디 후미진 곳에 홀로 두고 온 것처럼 한 없이 미안하다. 황차은 씨하고도 23년 만에 전화 통화를 했다. 그때는 누나라고 불렀는데 그녀가 전화기 너머로 나를 높여 불러서 나는 차마 누나라 부르지 못했 다. 나는 아무 호칭도 사용하지 않은 채 통화를 했다. 우리가 참 어린 시절에 그렇 게 만났다고 했더니 황차은 누나가 말했다. “뭐시가 에리당가. 우리가 세상 프레 임을 다 짜던 시절이었는디.” 정말 그랬을까? 봄이 오면 광주에서 현우랑 셋이 만 나 밥을 먹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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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사무실은 겨우 한 해만 유지했다. 이듬해 봄 계약이 끝나자 흑석동 서달로 14길의 중국집 2층에 사무실을 구해 이사했다. 사무실이 비좁아서 그때까지 끌고 다니던 많은 장서를 대부분 정리했다. 상근자를 더 구하지 못해 비상근 체제가 되 면서 내가 마지막으로 근무한 상근간사가 되었다. 머잖아 이 사무실도 폐쇄되어 별도의 추사 사무실은 갖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 나에게 얼마만큼 기억이 남아 있을지 의문이었다. 상근간 사 이후 나는 추모사업회에서 몇 걸음 떨어져 지냈다. 그래도 1989년에서 1995 년 무렵까지 선배 동료들과 함께 한 시간은 두루뭉술하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막 상 이름들을 하나씩 기억해내고 기록해갈 때 생각지도 못한 격통이 일고는 했다. 곁을 떠버린 사람들, 소식이 끊긴 사람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월 때문이었다. 지난겨울 백남기 어르신의 영결식이 있던 11월 5일 2차 촛불집회에서 나는 광 화문 이순신 장군상 앞에서 낯익은 깃발을 발견했다. 인파를 헤집고 들었더니 서 병훈 형이 깃발을 들고 앉아 있고, 주변에 낯익은 선배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내가 막내라서 서병훈 형에게서 깃발을 물려받았다. 30년 전 안성교정 교문을 내려다보며, 여수 전남병원에서, 흑석동 로터리에서, 용산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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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실 앞에서, 광주 톨케이트에서, 망월동에서, 한양대에서 나는 이 정겨운 사람 들하고 길바닥에 앉아 있었지. 우리가 앉은 광화문의 자리는 메인 스피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멀리 앞자리의 시민들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면서 우리는 충분히 인사를 나 눌 수 있었다. 집회가 시작되어 의례를 위해 모두 일어서라는 사회자의 안내가 나 왔던 모양이었다. 나는 선배들이 아구구, 하며 네 발로 일어서는 모습에 웃음이 나 왔다. 대학교 학생회 깃발을 바라보며 우리 아이가 왔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빼 는 선배도 있었다. 누군가 과자를 한아름 사다가 풀었는데 혈당 탓에 패스하는 선 배도 있었다. 모두가 반갑고 행복해 보였다. 당장 거꾸러뜨려야 하는 박근혜의 청 와대가 눈앞에 있었지만 선배들은 하염없이 주위를 살폈다. 새로운 세대들이 우 리의 깃발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기적과 같은 역사를 목도하는 일은 감 격스러웠다. 우리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모’라는 눈물겨운 깃발 아래 모 여서 아이들을 낳고 서로 지켜봐주고, 여름이면 가족 캠핑을, 여성회원들을 위한 힐링 엠티를 조직하고, 그런 생활투쟁을 통해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온 30년. 나 는 선배들을 둘러보았다. 당신들의 삶이 옳았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겠다는 생 각이 들었다. ‘추모’가 ‘기념’으로 바뀌는 진정한 시간을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 다.

*  전성태_1995년 이내창추모사업회 상근간사로 일했다. 문예창작학과 89학번이며 소설가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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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업회 10년 결산 보고

그와 한 아름다운 약속* 성백술

이내창열사가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 산도 변한다는데 끝없이 변화를 강요하는 역사의 거친 격랑 속에서 추모사업회 회 원들 또한 숱한 부침의 세월을 거듭해왔다. 돌이켜보건대 열사가 우리의 곁을 떠났던 1989년은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염원하던 이 땅 민중의 투쟁과 야만적인 공안정국의 칼날을 마구 휘두르던 반통일 독재세력과의 대립이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던 시기였다. 청천벽력 같은 비보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시점과 공간에서 날아왔다. 남한의 전대협 대표로서 평양축전에 참가했던 통일의 꽃 임수경이 반세기 동안 남 과 북을 가로막았던 휴전선을 열어젖히며 귀환하던 바로 그날이었다. 아무런 연고 도 없는 거문도 유림해수욕장에서 이내창열사가 싸늘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우리는 오열조차 할 수 없었다. 이철규 열사를 그렇게 참혹하게 보냈음에

*  이 글은 1999년 발간되었던 <의문의 죽음, 그리고 10년>에 실린 성백술(92년도 추모사업회 사무국장)선배의 글을 다 시 싣는 것이다. “20세기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가 한 일을 가장 잘 정리한 글로서 기록적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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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우리는 설마 그런 일이 우리 자신에게 닥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열사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한 50여 일의 사인진상규명투쟁은 길고 처절했 다. 하지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해 10월 6일, 분노에 찬 열사의 시신 을 바람부는 광주 망월 묘역에 묻어야만 했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다짐하고 또 다 짐했는지 모른다. ‘이내창 열사를 분단의 땅 식민지 조국에 묻지 말고 우리의 가슴 속에 묻어야 한다’고. 그것은 단순하고 추상적인 구호나 외침으로서가 아니었다. 열사의 사인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숭고한 애국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우리 모두의 바람이요, 열사에게 바칠 수 있는 마지막 약속이었던 것이다.

열사의 사인진상규명을 위해 투쟁으로 밤낮을 지새우던 1989년은 그렇게 쏜살 같이 흘러갔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졸업식장, 우리는 또 한 번 비탄의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의 졸업식장에서 함께 졸업하지 못한 이내창 열사에게 명예 학사 학위가 수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봄이 왔다. 교정엔 새내기들을 맞느라 북적북적한 가운데 푸릇푸릇한 새싹과 같은 또 하나의 깃발이 새롭게 세워졌다. 열사의 사인진상규명과 정신계승을 모태로 하는 이내창열사 추모사업회(이하 추 사) 건설준비위원회의 깃발이었다. 비록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살아남은 자들 에겐 그를 위해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사인진상규명과 열사정신계승! 추사 10년은 이 두 가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달려온 투쟁과 곡절의 세월이었다.

1990년 추사 건준위는 열사의 사인진상규명과 정신계승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사인진상규명 자료집을 발간했다. 동시에 89년 5월 이내창 열사에 앞서 공안정국 의 희생자가 된 조선대의 이철규 열사와의 영혼의형제 결연식을 추진하였다. 결연 식은 90년 5월 19일 조선대에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8월 15일에는 1주기 추모 제가 망월동 묘역과 범민족대회장에서 동시에 치루어졌다. 추사건준위는 안으로 조직적 기반을 다지는 한편, 이 땅의 수많은 열사 희생자들의 뜻을 한데 모으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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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국추모사업회연대모임에 참여했다. 9월에는 열사정신계승주간을 선포하여 그 정 신을 기리고, 이듬해 2월에는 졸업준비위원회 주관으로 중앙대 흑석동 캠퍼스에 추모상징물을 제막하기도 하였다.

1991년, 2주기에도 8월 15일 망월동 추모제와 9월 열사 정신계승주간은 진행 되었다. 그러나 추사 건준위의 노력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졸업생들의 배출과 함 께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여러 가지 사업의 추진에도 한계를 드러낼 수밖 에 없었다. 추사 건준위는 새로운 틀과 방향성을 모색해야만 했다. 졸업한 선배들 을 중심으로 11월부터 추사 건준위 확대 결성을 위한 발기인대회를 추진하였다. 발기인 대회를 통하여 12월 21일 흑석동 캠퍼스에서 많은 민주동문과 재학생, 전 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여러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사업회 준비위원회가 결 성되었다. 민주동문회 임헌영 회장과 사건 당시 이내창 열사의 부검에 참여하였으 며 사인진상규명을 위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의과대 장임원 교수를 공동위 원장으로 모셔왔다. 추사 건준위는 중앙대 민주동문회와 함께 사무실 기금 마련을 위해 일일주점 등 동문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행사를 벌여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1992년 1월, 흑석동 시장내에 공동으로 사무실을 마련하고 정식 으로 추모사업회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공동회장 임헌영, 장임원). 3주기 추모사업회는 어렵게 마련한 사무실이 졸업한 동문들의 사랑방이 되면서 사인진상규명과 열사정신 계승사업을 더욱 힘있게 펼쳐나갈 수 있었다. 당시 의문 사 사건을 집중보도하여 유력한 용의자의 한 사람이었던 안기부 인천분실의 도연 주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를 당한 <한겨레신문> 이공순 기자의 공판투쟁에 지속적으로 참가하고 전국 추모사업회연대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이 내창 열사와 의형제를 맺은 조선대 이철규 열사 추모사업회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져나갔다. 범민족대회 준비기간 중 3주기 결연식 행사를 가졌는데, 특히 흑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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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에 이내창 열사를 비롯한 중앙대 7인 열사의 벽화를 제작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훼손되었던 일은 두고두고 한스러운 기억으로 남는다. 이후 추사는 3주기 추 모제와 열사정신 계승행사, 전국적인 집회 등의 참여와 정기총회 및 송년회를 통 하여 지속적인 조직력과 결속력을 다져나갔다.

1993년 추사의 가장 큰 목표는 이내창 열사의 추모비 건립이었다. 추사는 새해 벽두부터 이를 위한 조직적 진용을 갖추고 만반의 사업 준비에 착수했다. 추사는 조직적 역량을 결집하여 추모비 건립기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였으며 이를 위 한 일일주점 개최, 이내창 열사와 관련된 각종 기념품 판매, 학번별 개인별 기금모 금, 모교인 학교당국에의 지원 요청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병행하여 4주 기 추모제와 열사정신 계승을 위한 여러 가지 행사가 진행되었으며 사회 각계각 층과 동문, 재학생, 학교당국, 유가족 등의 후원에 힘입어 목표액이 초과 달성되었 고, 마침내 그 해 10월 중앙대 안성 교정 내에 이내창 열사 추모비와 묘역이 조성 되었다. 추모비 제막식은 고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와 유가 협 어머니들, 동문, 재학생, 유가족 등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외 에도 열사정신 계승과 재학생 후배들과의 연대를 위한 사업방향의 일환으로 추모 비 건립기금의 잔여금으로 안성캠퍼스 내의 사회과학 서점 ‘맑은 책집’을 인수 운 영하게 되어 재학생 후배들의 장학사업에 기여하는 등 긍정적인 성과를 얻게 되 었다. 한편, <한겨레신문> 이공순 기자의 공판투쟁에서는 <한겨레신문>과 이공순 기자의 보도가 무죄로 확정됨으로써 열사의 사인진상규명에 한 걸음 다가서는 개 가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 국내외 정세의 변화는 우리 사회에 또 한 차례의 격변을 예고하 고 있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인한 동서냉전의 해체와 문민정권의 출범, 신 자유주의와 문화 상업주의 등에 따른 끝없는 이념적 혼란과 현실과의 괴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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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에서 노동운동권을 포함한 제반 사회운동은 침체할 수밖에 없었고 추사와 회원들 또한 그러한 현실의 변화를 피부로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추사는 그 어느 단체 못지않게 회원 간의 단합을 위한 체육대회 개최, 4·19행사 참여, 8 월 15일의 추모제 행사, 9월의 정신계승주간 행사, 정기총회 및 송년회를 어김없 이 그리고 줄기차게 진행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열사의 사인진상규명의 길은 요원해보였고 추사의 성 격조차 회원의 단합과 상호 친목도모 수준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각종 행사에 참여하는 회원의 숫자나 회비를 내는 회원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어 회 비 징수에 사업의 사활을 걸 정도가 되었다. 사무실은 흑석동 시대를 마감하고 용 산시대를 지나 충무로에서 다시 흑석동으로, 마침내는 사무실조차 없는 무주공산 시대로 바뀌어갔고, 간사는 상근에서 비상근으로 다시 비상근조차 없는 연락처로 변하게 되었다. 때로는 사무실 월세를 내지 못하여 전전긍긍해야 했고 간사 활동 비나 소식지 발행비조차도 제대로 조달할 수 없는 형편에까지 이르러 마침내는 누 가 간사인지조차 모를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추사의 입장 을 대변하고 회원들의 근간소식을 전해주었던 소식지 <어깨동무>까지도 두세 달 에 한 번에서 일 년에 한두 번으로 바뀌었다가 그마저 소식이 뚝 끊기고 말았다.

우리가 절망과 좌절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동안, 우리가 보이지 않는 희망의 출구를 찾아 절해고도를 헤매고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끝없이 변화하고 있다. 모 든 것이 뒤바뀐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세상이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이 또한 이 세계의 역사이기도 했다. 우리 역사 이래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던 ‘국민의 정 부’의 등장 또한 변화라면 그 중의 한 변화였고 현재 유럽을 휩쓸고 있는 좌파 정 부와 ‘제3의 길’의 등장 또한 최근의 일이다. 국민의 정부와 햇볕포용정책 덕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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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몰라도 분단된 남과 북의 해빙 무드가 이처럼 무르익은 때도 일찍이 없었다. 돈 만 있으면 누구든지 금강산 구경도 가고 백두산에도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하지 만 국민의 대다수가 IMF의 긴 터널 속에서 달랠 길 없는 침묵과 울분의 길을 걷고 있는 동안에도 민주화의 외침은 끊이지 않았고, 이 땅의 독재치하에서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열사와 희생자들의 사인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싸움도 끊이 지 않았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국민의정부가 약속했던 민족민주열사 사인진 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이행을 촉구하며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들은 얇은 비닐천막 안에서 새우잠을 자가며 그 추운 겨울을 나야 했다.

이런 때에 스러져가는 추사의 기둥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 었다. 그들은 바로 이내창 열사와 함께 공부하고 뜻을 같이 했던 소위 ‘88 꿈나무’ 들이었다. 바람부는 땅 광주 망월 묘역에 열사의 시신을 묻으면서 ‘우리는 이내창 열사를 분단된 식민지 조국에 묻지 말고 우리들 가슴 속에 묻어야 한다’고 다짐하 고 또 약속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들은 추사 재건을 위한 비상운영체제를 소 집하고 끊어져버린 소식지를 다시 발행하였으며 98년 정기총회와 송년회를 통하 여 추사를 학번별 집단지도체제(?)로 재조직해내었다. 물론 한동안 뜸했던 전국추 사연대모임에도 재결합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제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1999 년을 맞아 ‘제2의 건국(?)’을 선언한 추사(회장 강내희, 중앙대 영문과 교수)는 이 제 10주기 사업추진 기획단을 구성하고 이내창열사 자료집 발간, 인터넷 홈페이 지 제작, 다큐멘터리 영상물 제작, 10주기 추모예술제, 유작 동판 기념물 제작 등 많은 일들을 활기차게 기획, 추진하고 있다.

그 일들이 어떤 성과로 남게 도리 지는 아직 장담할 순 없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희망임에 분명하다. 절망을 딛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 나 있으리라는 것, 그것이 우리 자신일 수도 있고, 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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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득한 2천 학번대 후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희망이 우리를 다시 모으고 일어서게 하는 힘의 원천임을 다행히도 우리는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와의, 그리고 우리 자신과의 아름다운 약속을 끝까지 지키려 한다. 끝 까지 지키려 노력하는 것, 그 자체가 아름답다. 추사 10년, 우리는 한 일이 없다. 열사의 죽음은 아직도 의문사란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고, 조직적 기반은 명맥 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사 10년, 우리는 많은 일 을 했다. 우리는 열심히 살아냈고, 또 우리의 중심에 이내창 열사가 있음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기며 만남을 지속해왔다. 그 힘이 있는 한, 우리의 의지는 결코 꺾이 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열사를 땅에 묻지 않고 가슴에 묻었으므로. 그리고 그와 한 아름다운 약속을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잊지 않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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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마무리에는 “추모사업회 일꾼으로 열심히 활동하신 회장님 이하 사무국장, 간사님들께 지면을 빌어 노고를 치하드립니다”라는 편집부 주석이 달려 있다. 하지만, 이번 특집 필자들의 원고를 받으면서 기록에 오류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정정하여 다시 게재한다.

·장임원 · 전 중앙대 의과대학 교수(회장, 1992년~1998년) ·강내희 · 전 중앙대 영문학과 교수(회장, 1999년~ 현재) ·조종국(90년 ·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건설준비위원회 위원장) ·김경주, · 진교림(91년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건설준비위원회 간사) ·성백술(92년 · 이내창추모사업회 사무국장), 임병수(간사) ·한명옥(93년 · 사무국장), 임병수(간사), 박찬영(간사) ·김종헌(94년 · 사무국장), 김산환(간사) ·전상삼(95년 · 사무국장), 전성태(간사) ·김성희, · 故서 원(96년 간사) ·장건상(98년 · 사무국장), 박지훈(간사)

** 1997년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에서 일하셨거나 집행진에 대해 알고 계신 분의 제보를 받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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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8.15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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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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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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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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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입주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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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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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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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추모비건립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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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차이를 직시하고 균열을 함께 마주하기 : 영화 <공동정범>을 보고 고두현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여러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간다. 공동체 안에서는 여러 관계들이 있고, 그로 인한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지난 3월 함께 관람한 영화 <공동 정범>(2017, 김일란·이혁상)은 용산 참사에 대한 이야기지만, 나에게는 동시에 공 동체가 무엇인지, 공동체 안의 균열을 어떻게 마주할지에 대해 깊은 일깨움을 주 는 이야기로 읽혔다. 2009년 1월 20일, 용산 남일당 건물에서 일어난 화재로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당했다. 검찰은 농성했던 철거민 다섯에게 사망자 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공동정범으로 기소한다. 원인 미상의 화재 현장에서 살아 나기 바빴던 사람들을, 공동으로 모의하여 살인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몰아간 것이 다. 그 때문에 4년 후 옥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그들은, 그날의 기억이 불러온 깊은 상처와 단절된 관계로 서로를 상처 준다. 김일란, 이혁상 두 감독은 용산 참사의 진상규명과 해결을 위해 이 갈등을 봉합하거나 숨기지 않고 직시하고 드러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참사 당시의 아픔을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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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랜다. 고립된 위치가 상처와 오해를 키운다. 홀로 화초를 키우던 김주환은 “겉 보기에는 씽씽하니까 내가 아픈 줄을 몰라”라며 술에 취해 아픔을 호소하고, 상도 동의 재개발 현장에서 섬처럼 살아가는 천주석은 “그렇게 아파할 때 나 이렇게 아 프다고 얘기할 사람이 없는 거야”라며 고립감을 토로한다. 두 감독은 성실하게 다 섯 사람을 찾아가 당시에 각자 어떤 처지에 놓여있었는지, 지금 무엇이 중요하다 고 느끼는지, 어떤 것이 마음 아픈지 차분히 이야기를 듣는다. 영화는 날 선 기억들이 서로를 대면하는 순간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부딪혀 새로이 공동의 것으로 화하는 순간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영화 속 이충연 은 자신이 농성을 주도했음에도 아버지를 버려둔 채 화재 현장에서 가장 먼저 뛰 쳐나갔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응어리진 마음에 천주석은 그런 이충연의 탈출을 나무라기도 한다. 기억을 교환하기 위해 마주한 장소에서 다른 철거민 김창수가 이충연에게 “불이 난 상황에서 살려고 뛰어내린 거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자책을 하거나 미안한 감정을 가질 필요 없다”고 위로를 하고, 그제서야 이충연은 마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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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짐을 내려놓는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이 과정을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자주 놓친다. 갈등이 벌어 지면 갈등을 없는 셈 치거나 다른 중요한 일이 있으니 나중에 해결하자고 하거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의 발언을 요식적으로 청취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 미 지나간 과거, 벌어진 갈등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것들을 공동체에서 어떻게 규정할 지는 함께 고민할 문제다. 기억은 개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공동체가 함께 만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철거민 사이의 갈등이 용산 참사를 일으킨 무리한 진압, 그 과오를 숨기기 위해 철거민들을 살인의 ‘공동정범’인양 몰아간 불합리한 재판, 이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할 진짜 책임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있는 현실 탓에 발생한 일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이에 앞서 철거민 사이에서의 차이와 갈등을 직시하자고 말한다. 그것이 선행될 때 비로소 진정한 문제 해결로 나아갈 수 있고, 그 시도 속에서 공동체 내의 화해와 고통받은 이의 치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은 그간 균일하다고 믿어왔던 공동체에 대한 감각 에 질문을 던진다. 동등한 주체라고 생각했던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성별과 직책에 따른 미시적인 권력 차이가 존재해왔고, 그것이 폭력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는 사 실을 많은 공동체에서 고통스럽게 깨닫고 있다. 나 역시도 내가 소속한 여러 공간 에서 관계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요즘이다. 공동체 안의 차이와 균열을 직시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영화 <공동정범>은 그 과정을 잘 통과한다면, 다 시금 새로운 공동체가 가능할 것이라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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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정범> 관람후기

특별한 공감 조현준

지난 3일 이수역 메가박스 아트나인에서 다큐영화 <공동정범>을 봤다. 주변 에 추천하고 싶어 첫 수기를 작성했으나 당시 영화관 관람을 추천하기에는 너 무 늦게 본 감이 있었다. 이에 목적을 바꿔 ‘이런 영화가 있다’, 그리고 ‘내가 다 큐 영화를 보는 이유는 이러하다’는 것을 그간 뉴스 정치면에 무관심한 입장을 표명했던 20대에게 특히 힘주어 전달하고자 부족하지만 진심을 담은 글을 써 보려 한다.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공동정범>은 - 모두가 익히 아는 영화 <1987>, <귀향> 등과는 달리 - 용산 참사를 큰 주제로 한, 100% 사실만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뒤에서 더 말하겠지만 관람 중에 눈앞의 모든 영상이 사 실이라는 감각을 문득 느끼는 순간 피어나는 충격과 감정은 다큐 영화의 장점 이라고 생각하며, 특히 <공동정범>은 이 장점을 자연스럽게 강조했다고 생각한 다. 덧붙여 <1987>, <귀향> 등, 같은 맥락에 놓을 수 있는 많은 영화들도 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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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큰 의미와 울림을 줬다.

누군가 2009년 1월 20일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는 철거민들 본인의 잘못 이 아니냐고 내게 묻는다면 이 영화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나도 당시 중학생일 때 언론사회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기억할 뿐더러* 내가 짧은 글로 완결성 있게 답할 수 있는 질문도 아닌 것 같다. 당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하 였고, (만들어진)사회의 시선과 언론의 보도는 그들을 사회부적응자, 배부른 소 시민, 또는 ‘준도심테러자’로** 비추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더 크게 도모하 고자 농성을 한 것이 아니다. 또한 사회성이 결여된 결과 사회에 테러를 자행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을 먼저 죽음의 문턱으로 내몬 것은 당시 사회의, 국가 내 사익 추구 권력집단의 어떠한 인물들이 대표한다. 영화를 본 후에도 당시 언 론의 보도와 사회 분위기를 인용해 전적으로 농성자들의 잘못이라고 한다면, 본 인 인생에도 철거민들에게 들이댄 것과 마찬가지의 완벽하고 냉정하며 이성적 인 잣대를 들이대어 결점 없이 나이스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영화 가 제시하는, 철거민들이 사회 주류로부터 받은 삶의 고통이*** 자신에게 들이닥 쳤을 때 이의 없이 겸허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 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그리고 맥주 한잔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같이 사진을 찍은 김일란 감독님이 내게 영화가 어땠는지 물으셨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재

*  2008.01.01. ~ 2009.01.19.(참사 직전일) ‘용산철거’를 키워드로 뉴스기사 검색 결과 ‘단 한 건’의 연관기사만이 검색 결과로 나온다. https://tuney.kr/gzL4FU **  2009.02.10. 김석기 기자회견 https://tuney.kr/gzMuoC ‘준도심테러자’라는 단어는 김석기의 발언이지만 국가권 력을 맹신하며 언론이 곧 정의라는 입장의 사회 구성원들은 곧잘 이런 단어 사용을 ‘규범’으로 받아들이고 인용하였다. 당시 김석기의 태도는 이러한 사회 현상에 일조했다. ***  이 부분은 역시 다큐멘터리 영화인 ‘두 개의 문’에 더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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밌었다’고 말하기 조심스러웠다. 또 단지 ‘재미’만 느꼈던 것도 전혀 아니다. 하 지만 영화로서 봐도 재밌다. 재미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요소는 출연진의 감정 선과(픽션이 아닌 실제다) 다큐영화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반전들이다. 이는 같은 유형의(혹은 동일한 대주제를 상정한) 다큐 영화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인간 관계’에서의 반전이며, 이 때문에 나는 <공동정범>이 앞으로도 정말 보기 힘든 유 형의 다큐 영화일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우선 영화로서 봤을 때 재미있 다는 인상을 처음 받은 것은 영화의 가장 첫 장면이다. 용산 참사 피해자들이자 구속,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철거민 5인의 참사 직후 모습이 차례로 이름 캡션과 함께 나오는데, 한 피해자의 이름이 나와 있으나 화면에는 그로 추정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장면이 넘어가는 순간 누군가 들것에 실려 구급차로 이송되고 있 고, 먼저 나와 있던 이름은 바로 그의 이름이다.‘이건 다큐 영화에서 기대하지 못 한, 익숙한 장면 진행 방식 같은데’라는 생각이 스치는 동시에‘이 다큐 영화는 뭔 가 다르구나’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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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예감대로 영화는 영화관에 들어 오기 전의 내 예상과 달랐다. 보통 내 또래에 비해 한국 근대사와 정 계 이슈에 일찍 노출되었다고 생각 하는데, 다큐 영화 혹은 군부독재 시절을 다룬 영화는 항상 관람하 기 힘들었다. 그만큼 내성을 가지 기 어려운 - 또한 내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 주제들이고, 혹은 내 배경 때문에 영상이 더 현 실감 있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공동정범>은 달랐다. 모두가 잊어가는 현 실과 역사의 잔인함만 부각시켜 ‘내 인생’을 살고 있는 나를 묵직하게 꾸짖는 대 신 ‘당사자들의 인생’을 제시한다. 피해자 한명 한명에 집중해 내면을 보여주고 그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들 또한 사람이며, 강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약하기 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훌륭한 영상미가 더해져 관객은 너무나 자연스 럽게 출연진에 공감하고, 이것이 <공동정범>이 여타 다큐 영화와 다르게 사실 을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내가 무슨 대단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아 는 선에서 이러한 감정과 공감을 일으키는 정치 관련 다큐 영화는 없었다. 그렇 기에 <공동정범>은 새롭고, 재밌으나, 마냥‘재미있다’는 감상으로 끝날 수 있는 영화도 아니다.

물론 이 대목 때문에 관객 중에는 ‘이 영화 왜 만든 거냐’고 꾸짖는 분들도 더 러 계신다고 한다. 용산참사의 당사자들, 사회적 약자의 문제 해결 방안 제시에 만 집중하지 않고 공동체의 내부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 언짢으신 것이 다. 하지만 공감을 먼저 유발하고자 관객에게 먼저 솔직하게 다가오는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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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는 같은 목표를 이룰 수도 있다. 큰 참사의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감 정은 항상 우리에게 무게감을 주고 우리는 그 심정을 함부로 헤아리려 할 수 없 다. 어떤 참사든 당사자가 가장 힘든 일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 는 피해자들이 당면한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을 주려 한다. 그렇다면 만약 피해자들이 먼저 우리에게 진실한 모습으로, 자신의 인간적인 면 모를 선뜻 보여준다면 어떨까. 나 또한 참사 피해자들을 직접적으로 대면해 공 감해볼 만한 기회가 없었고 다큐멘터리나 뉴스로 공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 다.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를 돕자’는 크고 당연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공동정범>은 이 패러다임을 바꿔 피해자들의 내면을 긴 호흡으로 진솔하게, 또 다양하게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우선 공감하고 더 나아 간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경우에 따라 공감에서 그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에도 ‘피해자들에게 공감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는 출연진 들이 진심을 다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나온 목소리를 들려줬고 이를 다시 강 조하는 좋은 영상미로 엮어줬기에 가능한 공감이며, 기존에 때로는 터부시 되었 던 ‘피해자의 심경을 헤아려 보려는 시도’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나는 이것이 지속된다면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일란 감독님께 서 2~30대 많은 사람들이(특히 여성) 영화로서 재밌어 서너 번씩 보는, 감독님 께도 의외인 반응을 보인다고 말씀하신다. 반복해서 보는 사람들은 ‘치유 영화’ 로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보는 유명한 영화도 좋지만, 한번쯤은 아무도 보지 않은 나만의 특별 한 영화는 어떨까. 무거운 역사적,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영화 중 관람객에게 정 신적 스트레스와 트라우마, 비통함을 동반하는 영화는 이런 맥락으로 추천하기 힘들지만, 공동정범은 사회 다큐영화에 거부감이 있거나 아직 관람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심지어 사실만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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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연극으로 세상읽기

블랙리스트와 미투me too 운동 김진휘(김경락)

연극 88

블랙리스트를 온 몸으로 저항하며 힘들어 하던 연극계가 또 한 번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착잡하고 암담하고 괴롭고 우울하기까지 하네요. 저는 그의 행각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96년도에 첫 연출로 연극계에 엄청나게 초라하게 데뷔한 후 20여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술자리에서 소문 아닌 소문으로, 뒷담화로 그의 범죄 사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왜 그때는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을까요? 부끄러울 뿐입니다. 이윤택! 그의 독특한 연습방법과 연출법, 배우 훈련법은 늘 화젯거리였고 결과물 은 항상 센세이셔널했습니다. 많은 관객들이 찾았으며 꽤나 유명한 작품들을 탄생 시켰고 능력 있는 배우들을 배출해냈지요. 그러나 저는 그의 연출방법과 배우훈련 법에 동의 할 수 없었습니다. 결과물이 좋다고 과정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늘 결과물은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난 여전히 그의 훈련 방법에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연습방법과 배우들과의 소통, 배우훈련법은 연출가들에게는 작품의 주제 이상으로 고민거리입니다. 관객 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의 문제를 공연내용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보여주느냐를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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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는 문제는 바로 연습방법과 배우들과의 소통, 참여하는 배우들의 훈련방법으 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연극 역사상 한 획을 그었던 연출가들은 대 부분 새롭거나 창의적인 혹은 획기적인 연습방법과 배우훈련법을 개발해낸 이들 입니다. 연출가들은 작품의 내용이 정해지면 그 다음 고민으로 배우들과 어떻게 만 날까(연습)를 고민합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방식으로 관객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요. 연극 연습방법이니 배우훈련법이니 이런 전문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면 책 한 권 을 써도 모자라는 부분이라 더 깊이 들어갈 수 없어 아쉽지만 아무튼 그의 연습방 법과 배우훈련법은 늘 화젯거리였고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내가 동의 할 수 없 었던 부분은 그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되는 식이었습니다. 거칠고 모욕적이며 폭 압적인 그의 연습방법과 소통방법은 굳이 성폭행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미 범죄 수 준이었으니까요. 그는 그만의 방법을 이용해 어떻게든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것 도 아주 기가 막히게. 결국 길었던 꼬리는 잡혔고 그만의 방법은 결국 권력이었고 폭행이었죠. 몸 사리 고 있는 소위‘대가’들이 꽤나 있지 싶습니다. 연극계만이 아닐 거라고 확신합니다. 무용계는 어떨까요? 연예계는요? 문학계는 먼저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 이런 일 이 생기게 된 걸까요? 누군가는 SNS에서 이게 모두 다까끼 마사오 덕분이라고 합 니다. 적폐라고 하지요. 뿌리는 무엇일까요? 어디서부터 솟아나기 시작한 걸까요? 권력이 있는 곳에는 그 권력으로 누군가를 억압하고 착취하려는 의지가 생기게 되 나 봅니다. 억압과 착취는 권력의 본성일까요? 여기서 우린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 문을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질문합니다. 그 많던 문학인들은 시인의 범죄를 몰랐을까요? 알고 있었다면 왜!? 도대체 왜 가만히 있었을까요? 저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했지 만 저는 이윤택의 행각을 알고 있었습니다. 정의를 외치던 동년배 연출가들과 작 가들, 문학인들은 칠순을 바라보는 연출가의 파렴치한 행각과 곧 죽음을 앞둔 노인 네의 행각을 정말 몰랐을까요? 그 동안 왜 그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도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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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묵했을까요? 시인과 연출가 주변엔 항상 많은 이들이 따라 다녔지요. 많은 이들이 쳐다보니 당 연히 권력이 생기게 되고 그 권력을 쓰고 싶었겠지요. 국가 권력에 의한 폭력이든 개인권력에 의한 폭력이든 권력은 폭력을 수반하네요. 폭력은 권력의 본성일까요? 만약 고은이 시인이 아니라 시골범부였더라도 동네 처녀들 주무르고 다녔을까요? 이윤택이 평범한 동네 아저씨였어도 동네 처녀를 방으로 불러들였을까요? 이건 정 말 잘 모르겠습니다. 위치와 권력이 그들을 그런 괴물로 만든 건지 아니면 위치와 권력과는 상관없이 원래 그런 사람들로 태어난 건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억압과 착취들, 성적 폭력과 성차별로부터 우리는 얼마 나 정의로울까요? 더러워서 피하는가? 못 본 척 참는가? 그 정도였는지는 몰랐다? 허벅지에 손을 올려 주물럭거린 정도는 봐줘도 되고 옷을 벗기고 속옷에 손을 넣고 삽입하는 건 안 된다? 물론 법률적 형량이 다를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정말 다른가 요? 무슨 얘기를 하냐고요? 우리 모두의 책임론을 말하고 싶은 거지요! 적폐란 어느 한 곳을 도려낸다고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무좀처럼 치질처럼 또 재발하고 재발할 것입니다. 가해자는 당연히 범죄입니다만 방관자들 과 방조자들은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할까요?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어릴 때부터 방관이 습관화되면 결국 가해자로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해자는 뚜렷하게 구 분되니 쉽게 알 수 있지만 방관자들은 숨어버리면 찾아낼 방도가 없습니다. 더 무 섭지요 방조자, 방관자. 숨어있는 잠재적 가해자입니다. 어디 한두 곳이 아닙니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쌓여온 적폐는 너무나도 뿌 리 깊고 튼튼해서 한 두 곳 파헤친다고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파헤칠 동안 적폐들도 살아남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치겠지요. 잘못하다가는 다시 적폐들에게 잡아 먹혀 버릴지도 모르지요. 역사가 증명하잖아요. 더구나 제일 중요 한 것은 적폐청산의 주체입니다. 적폐청산은 누가 해야 하는 걸까요? 누가 해야 가 장 잘, 확실하게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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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듣고 싶은 노래입니다. 우리는 그 옛날 ‘학원자주 쟁취투쟁’으로 가사 를 바꿔 부르기도 했지요. 부끄럽고 죄송하기도 해서 이번에는 공연소개는 생략합 니다. 노래나 들읍시다. 김호철님 작사 작곡입니다.

“~~죽느냐 자주학원(민중권력) 쟁취하느냐 역사 위에 피어 만발한 의혈의 이름(해방의 불꽃)으로 투쟁하리라 민족해방(노동해방) 그 날을 위해 학원자주 (민중권력) 쟁취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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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용수의 노조이야기

노조할 권리 김용수

학교 다닐 때 문창과라고 하면 타과생 반응이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 ‘똘아이’ 아 니면 ‘운동권’. 그 말을 좀 풀어보면, 문창과 학생은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였거나 ‘ 학생회 간부’ 이미지가 강했던 모양이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조합 간부라고 하면 붉 은 띠 머리에 두르고 투쟁조끼를 입은 모습이 제일 우선순위로 떠오를지 모른다. 달 리 말하면, 투쟁만 일삼는 과격분자 이미지가 강하다.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겪은 서유럽의 일부 국가는 초등학생 때부터 노동인권 교 육을 시킨다. 중학생이 되면 모의 단체협상 교육을 시키는 나라도 있다. 한쪽은 사 용자, 다른 한쪽은 노동자 대표 역할을 하며 노동조합을 경험하고, 단체협상의 전 략과 전술을 가르치고, 배운다. 고등학교를 마치면 대부분 노동자의 길을 걷기 때 문에, 노동인권에서부터 단체협상의 전략과 전술은 노동자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교육이 아닐 수 없다. 노동조합이 사회발전에 순기능을 한다고 믿기 때 문에, 파업권도 인권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권리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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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밑에 거뭇거뭇 몇 올의 수염이 돋아날 무렵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방현석의 ‘새벽출정’, 안재성의 ‘파업’,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를 통해 노동과 노동자의 삶을 ‘간접적으로’ 익힌 나는 양복쟁이 샐러리맨이 된 이후 ‘자본의 앞잡이’ 까진 아니어 도 노동 감수성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다닐때 노조와 노 동자의 삶에서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체 노조 가입률이 10% 남 짓이니, 90%의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잘 모른다. 나도 그 ‘90%’의 ‘평범한 노동자’ 중 한명일 뿐이었다. 매일매일 만원 버스 안에서 깊은 피로를, 매월 월급명세서를 받으며 짧은 안도를, 잦은 야근과 접대를 통해 소심한 분노를 배웠으나, 노조하면 나와는 다른 삶으로 인식했다.

자판기 노조? 2005년 1년여의 준비 끝에 노동조합 설립신고를 하고, 상급 단체인 공공연맹( 현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에서 교육을 나와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자판기 노조’가 되면 안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처음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다가 세월이 흐 를수록, 조합 밥을 먹을수록 그 말의 의미를 곱씹게 됐다. 노동조합 총회를 준비하 다가 유일하게 정족수 걱정을 안하는 총회는 임금협상 잠정협상안 의결을 받는 날 이다. 승진과 전보가 있는 인사위원회 다음날이면 인사에 불만이 있는 조합원 면 담이 끊이지 않는다.(우리 조합은 인사위원회 의결권은 없지만 참관권 및 발언권 이 있다) 육아휴직을 원하거나 상사와 불화를 겪고 타부서 전보를 원하는 조합원 들도 자주 찾는 편이다. 즉, 자신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어야 조합의 문을 두 드린다. 이런 조합원들이 처음에는 얄밉기도 하고, 솔직히 싫기도 했다. 조합에서 무슨 행사를 준비하거나 같이 하자고 하면 갖은 핑계로 이리저리 빠져나가기 대장 이 자신에게 불이익이 생기면 제일 먼저 조합을 찾는 경우가 왕왕 있어왔다. 이래 서 상급단체 간부들이 ‘자판기 노조’가 되면 안된다고 그렇게 열을 올리며 말했구 나, 매순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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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귀족 노조는 없다! 현대자동차와 같은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가 파업을 하면 언론에서 ‘귀족 노조’ 딱지를 붙이고, 여론 몰이를 한다. 파업 1일당 손실은 얼마며, 국가경제에 끼 치는 악영향에 이르기까지 짐짓 점잖을 떨며 말 같지 않는 훈계를 일삼는다. 그 배 면에는 ‘먹고 살만한’ 대기업 노동자(노동조합)가 정규직 이기주의(자기 밥그릇 챙 기기) 때문에 파업을 일삼는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사실 문제는 이 프레임이 대중 들에게 잘 먹힌다는 데 있다. 파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는 한 어떠한 정당한 주 장도 ‘소귀에 경 읽기’처럼 취급된다. 보수․진보 매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파업 관련한 보도는 엇비슷한 것이, 광고주인 (대)기업,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이고, 그것 이 어느 순간 내면화되어 이런 일방의 시각이 자리잡았다고 생각한다.

1996년 12월 26일 신한국당이 정리해고도입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을 날치기 했 다. 1998년부터 2007년까지 10년 소위 민주 정권에서도 노동법 개악은 계속됐다. 김대중 정부는 IMF프로그램 일환으로 정리해고제와 노동시장유연화를 적극 추진 했고, 노무현 정부 때는 노사관계로드맵의 일환으로 비정규직악법을 통과시켰다. 누군가 말했듯 ‘민주당 정권이 닦아놓은 신자유주의 고속도로 위를 이명박근혜 정 권이 질주’하다 최순실 국정농단, 박근혜 탄핵으로 잠시 주춤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노동조합! 노조할 권리? 얼마전 파업 중인 KBS 새노조 파업 현장을 찾아 연대발언을 하고, 약간의 파업연 대 기금을 전달하고 왔다. 간간이 상급단체에서 요구하는 투쟁기금에 십시일반 부 조를 하긴 했지만 조합 창립 13년 만에 처음으로 파업 현장을 찾고, 연대발언을 하 며, 기금까지 전달하는 ‘연대의 기쁨’을 맛보았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KBS 새노 조 조합원 중 축구팀 기자들, 아나운서들이 지지발언을 마치고 돌아서는 내게 찾아 와 깊은 감사의 인사를 건네주었다. 기자와 취재원으로 만나다 같은 민주노총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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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6 KBS 새노조 지지방문

원으로 ‘다시’ 만나는 자리, 노동의 가치와 투쟁의 정당성을 함께 공감하며, 연대를 통해 노동자로써 ‘하나’되는 소중한 경험을 하고 왔다. 공영방송 정상화와 고대영 퇴진을 앞당기는데 작은 기여를 했다는 경험은 우리 같은 작은 조합에서는 큰 의미 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법이 있어도 노동자가 혼자 감당하기 힘들다. 불법부당한 지시에 저 항하기 위해, 개인이 아닌 집단 저항을 위해 노동조합이 있는 것이다. 법보다 주먹 이 가깝다는 말이 있다. 주먹은 즉각 반응하지만 법은 기껏해야 원상회복이고 또 오 랜 시간이 걸린다. 법에 호소하기 전에 실질적인 저항권을 노동조합을 통해서 행사 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졌다.

그런 면에서 ‘자판기 노조’라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것이 백배 낫다. 문창과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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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와도 ‘똘아이’도 아니고 ‘운동권’도 아닌 노동조합 활동가가 될 수 있다. 직장생활 17년, 노동조합 활동가로 13년 동안 내가 얻은 깨달음은 ‘아무도 내 권리를 대신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있어야 ‘내 권리’도 지켜지는 것이고, 내 권 리가 중요하듯이 동료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어야 ‘내 권리’도, 노동조합도 지 켜지는 것이다. 그러니 주저 말고 노동조합의 문을 두드리고, 노조할 권리를 누리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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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에 다녀와서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몫을 나누고 마음도 나누고 김신철

문창 85

이 글은 한해의 고단함이 저마다의 어깨에 내려앉아 있는 것 같은 무교동 뒷골 목, 골뱅이 포차 원탁에서 “형, 오늘 총회 어땠어요?”라고 대뜸 묻는 정원옥 신임 운영위원장의 질문에 대한 뒤늦은 대답이다.

총회 다음날 새벽 서울에 눈이 내렸다. 이른 아침에 거의 일어난 적이 없고 간밤 술을 적잖게 마셨는데 묘한 기운에 눈을 떴다. 밖을 보니 하얀 겨울아침이 펼쳐져 있었다. 가슴이 서늘했다. 그 서늘함 속에 정원옥의 질문을 생각했다. 저것이 단순 히 총회에 대한 소감을 묻는 것이었을까. 의문형이 아니라 무언가 꼼짝없이 사람 을 붙드는 완곡한 청유형이나 명령형이 아닐까 하는 낭패감이 들었다.

‘아, 이 대책 없이 과거에 붙들린 인간들과 엮이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은 사실 1년 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참에서부터 들었던 생각이다. 늦가을부터 시작 된 촛불이 겨울 칼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1년 전 겨울, 광화문에 가면 거의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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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주 이내창의 깃발을 만났다. 반가운 한편 나는 이 깃발이 늘 죽음처럼 서늘해서 피 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해 가을 망월동 묘지로 가는 동광주 톨케이트에서 밤새 허 기와 추위에 떨면서부터였는지 모른다. 서둘러 벗어나고 싶었다. 장례가 치러지 는 내내 바람도 거세 만장을 든 대나무는 천 근 무게를 어깨에 보냈다. 나한테 이 내창은 그렇게 무겁고 춥고 서늘했다.

내창이 형에 대한 기억은 많지는 않지만 뼈저린 데가 있다. 아마 88년 늦가을이 었을 것이다. 그는 누구에게나 형이라 했는지 모르지만, 한참 동생인 내게 “신철이 형, 저 좀 도와줘요.”라고 했다. 총학생회 선거 유세 직전 그는 연설 준비를 도와달 라고 했다. 비록 조직이 다 와해돼 끈 떨어진 연이었지만 노선이 격렬하게 다른 내 게 그렇게 부탁했다. 정원옥의 저 위 질문처럼 뿌리칠 수가 없어 예술대학 학생회 실에서 며칠을 함께 했다. 그 며칠 그토록 진지하게 혼신의 힘을 다하며 자기만의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많이 보지 못한 탓에 나는 그 며칠만으로 그에게 표 를 주었다. 유세 이후 두어 차례 내리에서 막걸리를 마셨는데, ‘품성이 정말 뛰어 나서 총학 후보로 선택되었다.’는 풍문은 한낱 소문이었구나 싶었다. 조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열정과 단호한 결기를 느꼈었다. 그 몇 개의 기억이 끝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참담한 소식을 들었다.

그 뒤로 바람결에 추모사업회 이야기를 들었다. 동광주 톨케이트의 찬 아스팔트 에서 느낀 부채감, 미안함, 거친 분노 같은 것이 세월 속에 더 뒤엉켜 멀찍이서 바 라보았다. 솔직히 다가갈 어떤 끈도 없었지만. 안타까운 일이자만 추모는 시효가 있는 것이어서 그러다 말겠지 하고 말았던 거 같다. 그런데 거의 30여 년을 어깨 동무하고 여럿이 함께 끈덕지게 버티고 있다. 추모사업회가 언제부터 기념사업회로 바뀌며 체념적이고 무력한 ‘추모’를 버리 고, ‘기념’하고 실천하려고 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 언제부터 이 많은 사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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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 어느 집회에선가부터 세월호의 노란 리 본과 기념사업회 깃발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과거와 기억은 늘 지금 현재 의 무엇을 결정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일그러지고 비틀린 과거는 그만큼 더 크게 지금 현재에 작동된다는 것도 절감하게 되었다. 지 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냥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총회는 가족적이면서도 풍성하고 어떤 기운을 느끼게 했다. 한 발이 늘 과거의 어떤 시간에 붙들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두들 늘 지금 현재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있었고 밝고 유쾌했다. 무엇보다 1년간의 풍성한 사업 보고가 경이로웠 다. 국가 차원의 단체도 이만큼을 할 수 없을 텐데, 이 대책 없이 끈질긴 인간들은 그 많은 일들을 해내고 있었다. 눈 먼 국가 예산들이 가문 땅에 빗방울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으로 아는데, 그 예산의 일부라도 이내창기념사업회의 몫이 되 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근 들어 정치에 뒤늦게 뛰어들겠다 고 하는 이들이 참 많다.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는지 귀에 들어오는 어떤 말도 없는 데, 그들 중 일부에게 이 사업들에 대한 견해를 한번 물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2017년 사업들은 그만큼 값지고 일개 사업회가 감당했다고 믿기 힘든 것들이었 다.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사업’ ‘과거사 특별법 추진’ ‘다음 세대의 과거 청산’ 강 좌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들 사업이 작은 사업회의 주요 활동이고 성과라는 데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총회는 그래서 유익했다. 디지털 아카이브의 구축 현황과 앞으로 계획은 듣는 그 자체로 교육적이었다. 디지털 아카이브에는 더 많은 돈과 시간과 사람들이 결집했 으면 좋겠다. 대게의 총회라는 것이 긴 회계 보고와 임원진 선출 등으로 지겨운 시 간인데, 앉아 있으면서 좋은 강좌 하나를 들은 유익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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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기획 강좌 ‘지연되는 정의와 역사의 반복’ ‘한국 과거 청산의 딜레마’ 중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려 했는데, 혼수상태로 1년을 보내면서 마음뿐이었다. 다음 강좌가 어떻게 더 진화할지 궁금하고 기대되기도 했다. 2018년에 강좌가 개설되 면 꼭 하나는 듣고 싶다. 잘 기획해 주길 빈다. 사람을 모으고 생각을 모으는 기획 속에 알차게 펼쳐졌으면 좋겠다.

짐작했겠지만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기념사업회 소식을 나처럼 접하는 이들이 생 각보다 많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늘 마음으로만 참석하고 도망쳤던 그 심정 을 모르지 않는다. 일상의 자리에서 어떤 부채감을 느끼는 곳을 기웃거리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도 안다. 나도 그랬다. 지나간 아픈 과거고, 괴로워서 잊 고 싶은 것이고 생각하면 분노만 치솟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내창기념사업회는 그렇게 무거운 곳이 아니다. 지난겨울부터 차가운 도심에서 조금씩 느낀 것이지만, 주축 활동가들의 모습이 참 따듯했다. 이들은 저 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몫을 나누고 마음도 나누고 있 었다. 친구처럼 피붙이처럼. 그래서 “형, 오늘 총회 어땠어요?”라는 저 질문이 의문형이 아니어도 기꺼이 접 수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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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의 후배다>

비와당신 활동보고

2017년 3월 31일, “당신 곁의 노동” 토크콘서트 2017년 3월의 마지막 날. 우리는 “우리에게 노동조합이 필요한 이유”와 비정규직 노동자와 우리가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기 위해 토크콘서트를 열었습니다. 성공회대 하종강 교수님의 강의로 1부를 채웠고, 은수미 선생님, 윤화자 분회장님, 졸업생 강나루의 말로 2부를 엮었습니다. 그 누구도 ‘연대’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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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았지만, 그들의 모든 말 속에 ‘연대’의 의미가 숨어있었습니다. 우리 함께 살아야 한 다는 것,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것, 함께 싸워야 한다는 것, 그래서 노동조합이, 연대 가 필요하다는 말을 나누었습니다.

2017년 4월 7일, 비와당신 서포터즈 첫 만 남의 날 비와당신을 다시 시작해보자고 미안 비와 당신 서포터즈의 몇 명은 더 많은 사람들과 비와 당신 을 함께 하기 위해서 4월 7일, 비와당신 서포터즈 첫 만남의 날을 만들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 났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1년을 계획했습니다.

2017년 4월 13일, 세월호 3주기 노란리본 만들기 학내 청소노동자들과 함께 <자유인문캠프>에서 주최한 “세월호 3주기 기억주 기, 노란 리본 만들기”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2년 전, 모두를 울렸던 그 안타까운 참사를 기억하면서, 나라가 무엇이냐 울붑짖었던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그러니 우 리 잊지 말고 밝혀야 할 것들이 얼른 밝혀지기를 기도하고 행동하면서 살자고 각 자의 마음으로 다짐하면서, 리본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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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2일, 청소노동자의 봄; 청춘 비와당신 서포터즈는 “청소 노동자의 봄; 청춘”에 참여해 청소노동자들과 함께 봄의 거리를 걸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진다고, 꽃이 핀다고, 하늘이 맑아진다고 진짜 봄이 온 걸까요? 청소노동자의 권리가 꽃 펴야 진짜 봄이 옵니다. 청소노동자 들의 진짜 ‘봄’을 위해 언제나 함께 걷자고 다짐했습니다.

같은 날, “우리일터 새로고침” 비정규직 노동자 촛불문화제에서 중앙대학교의 청소노동자인 윤화자 분회장은 “오늘 청소노동자들 다 모여서 행진하니깐 참 좋 더라고요. 그리고 여기 자동차 만들고 쇳덩어리와 배 만들고 핸드폰 고치는 젊은 노동자들 만나니까 힘이 많이 나네요. 우리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설움 많이 받 았잖아요. 저는 노조하면서 우리가 뭉치면 우리들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걸 배웠 어요. 비정규직 모두 모여 힘을 합쳐 좋은 세상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발 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2017년 5월 19일, 청춘; 광장사업 5월에는 축제기간을 이용해 비와당신 서포터즈의 부스사업을 했습니다. 날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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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맞게 부채를 제작하고, 스티커와 엽서를 만들어 저렴한 가격에 판매했어요.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2017년 5월 29일, 연대의 날 비와당신 서포터즈들은 지금까지 각급 학생회가 해왔던 ‘감사의 날’ 사업의 긍 정적인 부분은 공유하면서도, 문제의식 또한 갖고 있었습니다. 학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단순한 감사만을 표하는 것은 그들의 ‘희생’과 ‘봉사정신’을 기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학내 노동자들을 학내의 구성원으로 인정 하고, 그들이 처한 문제에 같이 공감하고 연대해야 한다고 여겼고, 그래서 연대 의 날이라는 사업을 기획해 함께 청소를 하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을 가졌습니다.

연대의 날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이른 새벽, 학생들이 오기 훨씬 전에 중앙대학교의 아침을 깨우는 분들이 있 습니다. 학생들이 무심코 버리는 쓰레기들을 치우면서도 학생들을 사랑하 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바로 ‘청소노동자’입니다. 항상 보고 있으면서도, 신경 쓰면서도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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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고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전하지 못한 이들이 있 습니다. 이제 우리 ‘학생’들이 먼저 다가가고자 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당신, 학내 노동자와 학생을 연결하고자 ‘비와당신 서포 터즈’와 ‘사회과학대학 학생회’에서 조그만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함께 청 소를 하며 청소노동자들의 고민을 듣고, 보고, 몸소 느끼는 기회를 만들었 습니다. 청소노동자분들에게는 평소에 학생들에게 부탁하고 싶었던 말이나, 학생들 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행동들을 직접 알려주실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학 생들이 일도 열심히 도와드릴 것입니다. 학생들에게는 단순한 감사의 인사 가 아닌 직접 같은 일을 하며 느끼는 연대가 더 큰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2017년 5월 31일, 여성 노동자로 산다는 것 5월의 마지막 날 비와당신 서포터즈는 “여성 노동자로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 으로 토크콘서트를 열었습니다. 1부에서는 2013년 학내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투 쟁을 다룬 영화를 상영해 함께 감상했고, 2부에서는 한국여성노동자회 배진경 대 표, KTX 승무원 김승하님, 금천수요양병원의 심희선님, 학내 청소노동자 윤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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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노동운동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여성 노동 자 문제, 여성 노동자들만이 겪을 수밖에 없는 특수하고 이해할 수 없는 노동조건. 그들은 ‘여성’ 노동자로서 더 힘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토크콘서트를 열면서,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노동의 현장에서 부조리하고 견딜 수 없는 일 들을 당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2017년 9월 16일, 치우자 / 우리가 / 공간을 캠페인 한 학기 동안 일련의 사업드을 진행하면서 조 금 더 학우들이 많이 참여하는 캠페인 같은 것을 벌여보자는 마음으로 기획한 사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학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더 일찍 출근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할 수 있 도록, 우리가 우리 손으로 노동조건을 가꾸었으 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학내노동자들 의 요구가 다양한 만큼 참여하지 못한 단위들이 많이 있었지만, 비와당신 서포터 즈가 치우공 캠페인을 기획했던 취지와 마음만은 모두 이해했을 것입니다. 학내 노동자들이 해야 하는 ‘본래’의 일 외에, 하지 않아도 되는 추가적인 일을, 우리가 만들지는 말자는 그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랐습니다.

2017년 9월 28일, 노동하기 좋은대학 캠페인 학내 인권 주간을 맞아 “노동하기 좋은대학”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학우들이 직 접 참여해서 만들 수 있는 현수막 제작, 초-중-고급으로 이어지는 비정규직 노동 자, 중앙대학교 학내 노동자에 대한 문제풀이, 스티커와 엽서나눔을 하였습니다. 당시 만들었던 현수막은 학내에 걸어 많은 학우들과 학내 노동자들이 볼 수 있게 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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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일 ~ 22일, 비와당신 세미나 11월부터는 총 3번의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여러 가지 기획을 하고 사업을 진 행했지만, 늘 부족한 느낌이 들었고 새로 들어오는 서포터즈들이 있어 노동문제에 대해 조금 더 공부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2017년 노동 문제 이슈, 미조직비정규 노동자 전략조직화에 대해 공부와 토론을 병행했습니다.

2017년 12월 22일, 감사증 전달식 2017년을 끝으로 중앙대학교에서 4명의 청소노동자가 퇴직하게 됩니다. 이에 비와당신 서포터즈는,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서 감사증을 만들어 전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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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정리 및 후기 비와당신 서포터즈는 1년 동안 여러 시도들을 하면서 성공하기도 하고 깨지기 도 했습니다. 머리 속으로만 상상하던 사업들을 직접 해보지 않았다면 겪지 못했 을 경험이었습니다. 비와당신이 이렇게 여러 상상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이내창 열사 기념사업회의 장학금이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감 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 해의 활동을 마무리하는 시점입니다. 또한 새로운 1년을 계획해야 하는 시점 이기도 합니다. 지난 한 해 열심히 활동했던 덕분에 내년에도 더 활동하고자 하는 동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학우들에게 비와당신 서포터즈에서 아직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비와당신 서포터즈에서 활동했던 한 학우는 ‘비가 스며들어 삶을 적셨던 경험’ 이라고 비와당신에서의 활동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비와당신 서포터즈에게 행복 한 2017년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활동하면서 적극적인 노동자-학생 연대 가 왜 필요한지, 학생들이 왜 노동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하고 알리 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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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기념사업회 총회

12월 9일(토), 이내창기념사업회의 2017년 송년총회가 NPO지원센터에서 열렸 다. 2017년 사업보고 및 재정보고가 있었으며, 2018년 사무국 구성 및 사업을 제 안하여 회원들의 인준을 받았다. 먼저, 2017년 사업보고는 기존사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도 신규 사업에서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었다.

“한 해가 저물고 다시 한해를 맞는다. 이내창기념사업회는 모든 회원과 함 께 어깨동무하고 한걸음 한 걸음 나아가려 한다. 조금 더딜지라도 지치지 않 고 끈덕지게 우리의 길을 가려 한다. 뒷짐 지기에는 우리는 젊디젊은 ‘청년 이내창’이다.” - 서병훈 전 운영위원장의 2017년 활동 총평 중에서

2017년 한 해 동안 추진된 사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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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신규사업

•의문사 유가족 아카이브 구축사업 •대중강좌 ‘다음세대의 과거청산’ •내창이형과 함께하는 거문도답사기행 •회원배가운동

기존사업

•8·15 28주기 기제 •장학사업 제4회‘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중앙문화’, ‘비와 당신’ 선정 •끈덕지게 어깨동무 10, 11호 발간 •과거사 특별법 법안 상정을 위한 입법청원운동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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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그것이 알고 싶다> ‘수상한 동행, 그리고 거짓말 - 故 이내창씨 죽음의 비밀’


의문사유가족 아카이브 구축 사업 2017년의 가장 큰 사업으로 의문사유가족의 삶을 기록하는 디지털 아카이브 구 축사업을 꼽을 수 있다. <인권재단 사람>과 <49통일평화재단>의 공모사업에 지원 하여 각기 6백만 원, 5백만 원을 지원받아 진행되었다. 기념사업회 회원과 재학생 18명이 참여한 대규모 프로젝트다. 아카이브팀은 3월 8일∼4월 28일까지 매주 수 요일, 8차례의 사전교육을 통해 사업진행에 필요한 이론과 실무를 익혔다. 아카이 브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기획팀 : 신명철, 정원옥, 전경미 / 구술팀 : 강곤, 강남규, 이찬민, 조은희 / 영 상팀 : 고두현, 양주연, 장민경 / 사진·자료 수집팀 : 조환준, 노용헌, 최호식, 이재각 / 아카이브팀 : 이혁승 / 스토리펀딩 홍보팀 : 백기욱, 장미경, 김형준

상반기에는 정경식의 어머니 김을선 님, 박태순의 어머니 홍흥유 님, 허원근의 아버지 허영춘 님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였고, 하반기에는 이덕인의 아버지 이기주 님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혁승이 의문사유가족 아카이브 홈페이지를 구축하 였고, 2018년에는 수집한 자료를 업로딩 하여 공개할 예정이다.

다음세대의 과거청산 강좌 <다음세의 과거청산> 강좌는 피해자들과‘더불어’우리 자신의 생존과 삶의 조건 을 바꾸기 위한 실천으로서의 과거청산을 지향하며,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푸는 과 거청산을 넘어서 국가폭력의 역사를 밝히고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과거청산을 실현할 다양한 시각과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대중강좌로 기획되었다. 2017년 상반기에는 “지연되는 정의와 역사의 반복”이라는 주제로 한국 과거청산 의 성과와 과제들을 짚으면서 시민사회가 비판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지점들을 살 펴보았다. 하반기 강좌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과거청산 과정에서 부딪히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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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형태의 갈등과 충돌, 윤리적 선택이 요청되는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한국 과거청산의 딜레마: 과거청산 에 대해 질문해야 할 것들”로 기획되었다. 상반기에는 인권운동단체를 비롯한 시민단체, 기념사업회 회원, 대학원 생 등 21명이 신청하여 강좌의 열기가 높았으나, 하반기에는 공식 사이트를 통한 신청자 가 저조한 가운데 평균 10명 미만으로 강좌가 진행되었다. 강좌 개설의 목적과 대 상이 불분명하였다는 운영위원회의 지적이 있었고, 6회 연속 강좌 참여가 부담스 러우며 원하는 강의만 들어도 되도록 신청방식을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수강자들 의 요청이 있었다.

내창이형과 함께 한 거문도 답사 기행 6월 15일(금)∼17일(일)까지 1박 3일 동안 내창이형의 마지막 숨길을 따라 함께 걷는 거문도 답사기행이 있었다. 이석표, 심규한 등 민주동문회 선배들과 기념사업 회 회원 15명이 함께 그리움의 섬임에도 불구하고 멀기만 했던 거문도를 다녀왔다. 내창이형의 시신이 발견되었던 유림해수욕장에서 제사를 지낸 후 형의 행적을 따 라 섬을 둘러보는 일은 조환준의 안내로 진행되었다. 밤에는 유림해수욕장에서 내 창이형의 삶과 죽음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 영화제와 함께 거문도 답사기 행의 소회를 기록했다.

28주기 기제 68·15 28주기 기제에는 93명이 참가하였다. 기념사업회 회원들의 참여를 독려 하는 전화 연락을 일일이 하는 등 조직화의 열의가 높았던 덕분이다. 민주동문회 회 원들과 재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지게 늘어난 반면, 기념사업회 회원들의 참여가 평년 수준이었던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기제의 내용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가 있 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서도 정성껏 기제가 치러졌다는 평가다. 초대 기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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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회장이신 장임원 선생님은“기억의 단절”을 염려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가 능한 한 많이 전달해주고자 긴 추도사를 해주셨다. 누리울림의 노래공원과 이상하 동문의 음향 찬조가 있어서 기제가 더 빛났다. 2부 추모제 역시 내실이 있었던 것으 로 평가되었다. 사회자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진행, 이혁승의‘의문사유가족 디지 털 아카이브 사업’에 대한 보고가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평가다. 한편, 28주기 기제에서는 학교 버스 2대를 대여해서 단체로 이동했다. 자차 이용 자가 많아 버스 2대를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학교버스’를 타고 단체로 기제에 참여 했다는 상징성이 유가족의 만족도를 높였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식사의 경우, 업체 선정에 문제가 있었다. 100인분을 주문하였으나 밥이 60인분 밖에 오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지 못해 난감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식사 장소의 협소함도 30주 기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될 경우, 문제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제4회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이내창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는 진보적 활동을 벌이고 있는 모교 동아리를 지원 하는 장학사업,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가 2017년에도 계속되었다. 올해부터는 민주동문회와 공동으로 주최하게 되어 더욱 의미가 깊었다. 민주동문회가 1백만 원, 기념사업회가 1백만 원을 지원하였는데, 올해 새롭게 진행된 사업들이 많아 재 정이 넉넉지 못한 관계로 지원금의 전체 규모는 늘어나지 않았다. 제4회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에는 흑석교정과 안성교정에서 진보적 활동을 하고 있는 6개의 동아리가 지원하였고,‘중앙문화’와‘비와 당신’이 선정되어 각기 1 백만 원을 지원받았다.

회원(회비)배가운동 회원(회비)배가운동이 3월 6일 선포된 이후 2017년 내내 진행되었다. 회원배가 운동 전 48명이었던 회원의 수가 2017년 12월 5일 기준 123명으로 늘어났다.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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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히 상반기에 운동의 열기가 뜨거웠고, 8·15 기제를 정점으로 현재는 약간 주춤한 상태이나 2018년에도 회원(회비)배가운동을 지속할 계획이다.

구분

회원배가운동 전

회원배가운동 성과

현재(12월 05일)

회원수

48명

75명 증가

123명

회비(월)

645,000원

985,000원 증가

1,630,000원

특별회비

9명의 회원이 2,070,000원 납부 회원배가운동 성과 요약(3월 6일∼12월 5일)

2017년 하반기 사업일지 일시

장소

내용

7월 13일∼7월 14일

전남 진도 허영춘 아버지 자택

의문사유가족 아카이브팀 허영춘(허원근의 아버지)님 면 담 진행

7월 26일

경기도 일산 홍흥유 어머니 자택

의문사유가족 아카이브팀 홍흥유(박태순의 어머니) 면담 진 행

8월 2일

<끈덕지게 어깨동무> vol.11 발간

8월 7일

경남 진동 김을선 어머니 자택

김을선 어머니 추가 영상기록(고두현)

8월 15일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

28주기 기제

8월 17일

인천 이기주 아버지 운영 식당

의문사유가족 아카이브팀 이기주(이덕인의 아버지) 사전면 담 진행

8월 29일

국회 이재정 의원실

의문사유가족 아카이브팀 이기주(이덕인의 아버지) 면담 진 행

9월 23일

광화문 광장

<생명평화 일꾼 백남기 농민 1주기 추모대회> 참가

10월 9일

당산 서병훈 운영위원장 사무실

제5차 운영위원회(8·15 기제평가 및 하반기 사업 논의)

10월 16일

한울삶

의문사유가족 아카이브팀 허영춘(허원근의 아버지)님 면 담 진행

10월 17일∼11월 21일

서울시 NPO지원센터

<다음세대의 과거청산 강좌>, ‘한국 과거청산의 딜레마: 과 거청산에 대해 다시 물어야 할 것들’, 매주 화요일 19::00, 총 6회 진행

11월 17일

당산 서병훈 운영위원장 사무실

제6차 운영위원회(총회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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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2017년 민주동문회 송년회, 5기 민동을 기대하며 정상길

4기 민주동문회(심규한 회장) 총회 및 송년회가 2017년 12월 16일 학교에서 150여 명의 동문들이 모인 가운데 진행 되었습니다. 4기 민주동문회는 정기운 영위원회가 격월 간격으로 2년 동안 빠 짐없이 운영되었고, 촛불집회와 언론동 문들의 파업집회연대, 백남기 농민 명 예졸업장 수여 활동, 재학생 영화상영 회 등의 정기적인 행사를 연중 꾸준히 진행하였습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운 영위원회와는 정기운영위원회를 상호 참석하며 교류하였으며, 2017년부터는 이내창기념사업회가 먼저 해오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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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재학생 장학금 지원사업 “우리는 이 내창의 후배다” 장학사업도 함께 하고, 내창이형을 만나러 가는 거문도 기행 등 에도 이석표 선배님, 심규한 회장님 등 이 참석하는 등 활발한 교류를 하였습니 다. 4기 민동의 활동으로 송년회 및 총 회 참석 인원이 크게 늘어났고 동부모 임, 서남부모임 등 동문들이 부담 없이 나올 수 있는 지역별 모임이 만들어지기 도 했습니다. 모두 4기 심규한 회장님이 안정적으로 잘 이끌어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2017년 민주동문회 송년회에서는 사 전 행사로 백남기 동문 유가족과 교육 부총리, 총장님이 참석한 가운데 고 백 남기 선배님 명예졸업장 수여식이 있 었고, 지난 민동의 활동들을 돌아보며 광화문클럽선배님들, 양창훈선배, 심 규한회장님에 대한 감사패 증정과 87 학번이 준비한 ‘1987 동문 영화상영 회’ 등에 대한 안내, 민동실천윤리 발표 등과 함께 인기 많이 받으셨던 김정민 동문의 국악공연, 누리울림의 애국교 가 축하공연 속에 2018년~2019년 민 동을 이끌어나갈 5기 회장으로 신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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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학번)동문을 선출하였습니다. 5기 민동은 “기억의 공동체를 넘어 동문들 현재의 삶을 나누며, 살아갈 미 래를 소통해 가는 꿈의 연대”를 지향해 가려고 합니다. 다양한 동문들의 삶을 교류하고 모임이 구성되며 다양한 모 임, 각계 모임 동문들이 운영위원이 될 수 있으며 여러 사람이 함께 구성하는 집행국 체계를 꾸려 나갈 예정입니다. 내창이형과도 인연이 깊은 신기정 동문 이 회장님이 되셔서 올해는 이내창기념 사업회와 함께 이내창-백남기 동문을 찾아가는 순례도 함께 할 것 같습니다.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더욱 깊은 인연으 로 이내창, 백남기 동문의 의혈의 정신 을 함께 이어 나갈 것입니다. 감사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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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기념사업회 2018년 사업계획 2018년 1월 27 ~ 28일, 운영위는 안성에서 1박 2일 워크숍을 하며 2018년 사업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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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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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기

혼자가 아님을 알 때, 더 단단해졌다

2017년 하반기 사업일지

이내창기념사업회 2017년 5차 운영위원회 회의록 시간 : 2017년 10월 9일(월) 16시 00분 장소 : 서병훈 운영위원장 사무실(당산역 근처) 참석자 : 서병훈, 김경주, 정원옥, 김용수, 이혁승, 이원근, 김기수, 백기욱, 심규한(민동), 변승철(민동) 논의 결과

1. 8·15 기제 평가 1) 조직 및 홍보: 93명 참가. 민주동문회, 재학생의 참여가 두드러지게 늘어난 반면, 기념사업회 회원의 참여는 평년 수준이었음. 그러나 기념사업회 회원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전화 연락을 하는 등 조직화의 열의는 높았던 것 으로 평가됨. 2) 기제 및 2부 추모 --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서도 기제는 정성껏 잘 치러졌다고 평가됨. 누리울림의 노래공연, 이상하 동문의 음 향 찬조 등으로 기제가 더 풍성해짐. -- 장임원 선생님의 추도사가 특히 좋았던 것으로 이야기됨. “기억의 단절”을 염려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을 모두 전달해주고자 했던 장임원 선생님의 추도사를 녹취해서 이번 호 <끈덕지게 어깨동무>에 싣기로 함. -- 2부 추모제는 사회자의 딱딱하지 않은 진행, PPT 자료의 준비 등으로 집중도가 높았으며, 특히 이혁승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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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유가족 아카이브사업’에 대한 보고가 훌륭했던 것으로 평가됨. 아카이브 사업의 진행 경과에 대해서 는 총회와 기제를 통해 정기적으로 보고하기로 함. 3) 버스 대여 및 식사 -- 자차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아 버스 2대를 모두 채우지는 못했지만, ‘학교버스’를 타고 단체로 이동했다는 상 징성이 유가족의 만족도를 높였을 것으로 기대됨. 향후에도 학교버스를 계속 이용하기로 함. -- 식사의 경우, 업체선정의 문제가 있었음. 밥이 60인분 밖에 오지 않는 등 실수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식사 를 제대로 하지 못했음. 음식의 가짓수보다는 질에 더 신경을 써야 함. 식사 장소의 협소함은 30주기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될 경우, 문제가 될 것으로 예상됨. 4) 제안 -- 서병훈 운영위원장 : 기제 후 안성캠퍼스로 이동해 식사와 2부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어떨까? 대식당을 빌려 서 식사와 2부 행사를 진행하고, 총학생회, 조소과 건물, 기념비 등 내창이형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들을 투 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 고려해볼 만함. -- 심규한 회장 : 30주기에는 안성캠퍼스에서 추모전야제를 하고, 1박 후 기제 참여하는 방안도 상상해볼 수 있 음. 30주기에 거문도 답사를 한 번 더 다녀오면 좋겠음. -- 변승철 부회장 : 30주기에 맞춰 백남기, 이내창을 기억할 수 있는 다큐영화 사업을 기획하는 것도 좋겠음. -- 백기욱 : 30주기에는 8·15 기제와 별도로 5.18주간이나 10월 대동제 때 4.19열사, 백남기 선배와 이내창 을 기억할 수 있는 ‘의혈 열사 추모문화제’를 기획해볼 수도 있겠음. -- 정원옥 : 30주기 관련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내창기념사업회 30년사 발간위원회’ 발족을 제안함. 기념사업 회 전현직 운영위원장, 사무국장, 간사, 편집장 등이 발간위원이 되어 기념사업회가 걸어온 길을 재구성하는 것이 어떨까.(2018년도 사업으로 제안하기로 함)

2. 2017 하반기 사업 공유 1) 의문사 유가족 아카이브 사업: 하반기 아카이브 모임이 10월 11일 있을 예정. 그동안 모은 자료들을 아카이브 로 구축하여 홈페이지를 여는 작업이 11월 30일까지 진행되어야 함. 2) 다음세대의 과거청산 강좌 -- 10월 17일~11월 21일 매주 화요일, “한국과거청산의 딜레마: 과거청산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할 것들”이 라는 주제로 6차에 걸쳐 NPO지원센터에서 강좌가 진행됨. -- 기념사업회에서 60만원 지원하기로 함. -- 상반기 강좌에 대한 평가가 있었음. 전반적으로 강좌 내용이 어렵고, 체계적이지 못했으며, 주제의식이 불분 명했다는 의견임. 과거청산 강좌를 처음 들으러 오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을 수준으로 난이도를 낮추고, 강 좌의 주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토론 시간을 더 늘려야 한다고 평가됨. -- 강좌 기획에 대해 운영위원회 차원에서 논의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고, 어떤 강좌를 듣고 싶은지에 대한 기념 사업회 내 수요조사가 있어야 함. 3) <끈덕지게 어깨동무> vol.12 : 10월 20일(금) 어깨동무 편집회의가 열릴 예정. 4) 과거사법 관련 입법운동 진행 상황에 대한 간략한 보고를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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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기

3. 송년총회 준비 - 기조 : 신입회원을 환영하는 자리가 되도록 기획하기로 함. - 일시, 장소 : 12월 9일(토), 흑석동 캠퍼스 강의실 빌려보기로 함. - 총회 자료집 : 2017년 사업 결산 및 2018년 사업계획을 담은 자료집 발간하기로 함. - 초청장 발송하기로 함. - 2018 운영위원회 구성 : 운영위원장, 사무국장 사퇴의사 밝힌 가운데 2018년 운영위원회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 가에 대해 11월 첫 주에 6차(마지막) 운영위원회를 개최하여 논의하기로 함. 송년 총회 준비 모임.

4. 민주동문회 백남기 선배 명예졸업장 수여 무산에 대한 심규한 회장님의 보고가 있었음. 민동은 빠른 시일 내에 비상운위를 소 집하여 대응할 예정.

5. 기타 안건 여성 회원들만의 1박 2일 여행, 기획해보기로 함.

제6차 이내창기념사업회 운영위원회 회의 결과 시간: 2017년 11월 7일(월) 저녁 7시 30분 장소: 당산역 인근 서병훈 운영위원장 사무실 참석자: 서병훈, 변승철, 김경주, 노용헌, 정원옥, 김기수, 백기욱 안건

1. 총회 준비 1) 일정(확정) -- 일시 : 2017년 12월 9일(토) 3~5시 -- 장소 : 서울특별시 NPO지원센터 품다(대강당) -- 뒤풀이 장소 : 이북만두 2) 총회 순서 (사회: 이원근) -- 운영위원장 개회사(서병훈) -- 2017년 사업보고 (정원옥 사무국장) -- 2017년 재정보고(김기수 총무/이원근 보고) -- 감사의 마음 전달: 김선주, 서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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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이브팀 재학생 포함 격려 -- 2018년 운영위원장 및 사무국장 인준 -- 2018년 운영위원 및 강곤(어깨동무 편집장) 인사 -- 2018년 기존(지속)사업 및 신규 사업 제안 -- 2018년 민주동문회 임원진 및 사업소개 -- (시간이 허락될 시) 반가운 얼굴들, 뒤풀이에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 소개 및 인사 -- 폐회 3) 홍보 -- 웹자보 제작 : 강지우(문구, 이원근) -- 초대장 제작 및 발송 : 강지우 디자인/신성호 제작(문구, 이원근/정원옥) -- (설문조사) 2017 이내창기념사업회 돌아보기 : 백기욱 이미 진행 -- 문자 홍보 : 백기욱 -- 전화 홍보 : 8.15 기제 때처럼 나누어서 -- 플래카드 : 신성호에게 제작(문구, 김용수) 4) 자료집 제작 (정원옥) -- 2017년 기념사업회 사업 평가/기념사업회 주요사업/사업일지/함께 일한 사람들/재정보고/ 2018년 사업 제안으로 구성 5) 당일(사무국) -- 음료/다과 준비

2. 민주동문회 총회 일정 및 사업 제안 공유 - 총회 일정 : 2017년 12월 16일 17:30~20:00, 중앙대 R&D센터 11층 - 정재계, 언론계 활동 중인 동문들, 총동문회장 포함 2~300명 참석 예상 - 백남기 선배 명예 졸업장 건 : 백도라지님 민동 사과 수용, 학교와 긍정적으로 합의될 듯

3. 2018년 신규 사업 제안 1) 가칭 <이내창기념사업회 30년사> 발간 제안 -- 개인 기억은 <끈덕지게 어깨동무>에 싣고, 사료적 가치를 담은 기록 중심으로 편찬 -- 서병훈 책임편집, 강한기, 이원근, 김용수, 이주연 등 집필 가능한 사람들로 편집진 구성

2) <내창이형과 함께 하는 거문도 기행> 민주동문회와 공동 추진 -- 5 ·18 묘역(백남기 선배 묘소, 내창이형 가묘) → 전남 보성(백남기 선배 고향)→ 거문도 3) 민주동문회, <이내창의 후배다> 포함하여 장학사업 확대: 구체적 방안 추후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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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기

4. 기타 논의 - 2017년에는 기념사업회와 민주동문회 운영위원회에 사무국장 등이 교차 참석해왔으나 2018년에는 1년에 두 차례(8.15 기제 전/ 총회 전) 공동운영위원회 개최하기로 함 - 내석 형님이 성희형을 통해 제안한 청와대에 청원편지 보내기는 내창이형 사건만 따로 알리기보다는 전체 의문 사진상규명 요구와 함께 진행되는 것이 중요하므로 보류하기로 함

2017년 12월 18일 비상운영위원회 참석 : 고두현 노용헌 김기수 김경주 서병훈 백기욱 변승철 이원근 이혁승 정원옥 전경미 총 12명 참석 1. 2018년 사업준비 운영위원 워크숍일정 : 2018년 1월 27-28일 경기도 일대

2. 총회에서 제기된 기념사업회 공간의 문제 1) 논의 과정의 문제점 : 총회에 상정되기 전에 운영위안에서 충분한 토론없이 진행되어 내외부에서 문제제기 있 었음. 긴박한 업무를 제외하고는 운영위 단톡방에서 충분히 그리고 민주적으로 논의합시다. 2) 공간의 타당성 : -- 아카이브팀의 사업내용 상 구술과 영상 홈페이지 정리 등의 협업이 절실한 상황이고 자료의 정리 보관에 따 른 작업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임 -- 운영위 회의와 어깨동무 편집회의 및 30주년 준비작업을 위해서라도 공간이 필요함 -- 더 길게 내다보면 민동과 함께 공간을 공유하며 이내창,백남기 기념사업을 확대시킬 수 있는 토대마련 3) 공간의 목적성 : -- 아카이브팀의 사업을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진행하는 공간으로 목적을 분명히 하고 기념사업회 소모임이 나 회의공간으로도 사용할수 있음 -- 1년 정도 한시적인 운영을 하되 공간마련 은 기념사업회 사업비와 특별회비로 충당하기로함 -- 아카이브 사업 취지를 공유되면 민동측에서도 특별후원 가능하다고 하심

3. 운영위원 대거 확충위해 노력 - 들어오긴 쉬어도 나가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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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함께하니 당당해졌다

2017년 이내창기념사업회 결산 월

수입

1월

2016년이월

지출

출금

회비

2월

3월

1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회비 추모연대회비

50,000

유해발굴지원

200,000

1

특별회비 이혁승

100,000

특별회비 신기정

100,000

특별회비 한명옥

200,000

특별회비 조종국

100,000 120,000 1,000,000 아카이브 제본비

95,000

1

근조기

25,000

김혜진

호스팅비

5,000

1

추모연대회비

50,000

회비

20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1

49재단 강의지원

600,000

1

이내창의 후배다

2,000,000

1

170,000

회비

1 1,417,930

추모연대회비

50,000

1

근조기

38,000

유수

100,000

1

어깨동무 제작비

1,189,178

어깨동무 편집비

900,000

회비

1 밀린비용 1,526,250

특별회비 변승철

150,000

이자

302 추모연대회비

50,000

1

정경식열사 30주기 화환

69,000

1

어깨동무 배송비외

474,600

1

유가협 식대지원

100,000

1

이내정형님 부의금

100,000

회비

회비

1 865,670

추모연대회의 합동추모제

8월

1 663,490

이내창의 후배다 뒷풀이 지원

7월

1

회비

특별회비 정희일

6월

1 713,350

이내창의 후배다 민동지원금

5월

비고

673,590 정원스님 장례위원

특별회비 임현택

4월

입금 15,754,710

1 1,506,490

추모연대회비

50,000

거문도 답사 지원

809,120

김종중열사장례위원

20,000

근조기

94,300

진실정의결의대회

100,500

김성희 외 1,526,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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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기

2017년 이내창기념사업회 결산

수입

지출

출금

특별회비(홍수정)

100,000 370,000 추모연대회비 원고료(이찬민,장민경) 815 기제 지원

50,000 200,000 1,336,350

회비

1,560,790

이자

26 추모연대회비 어깨동무 제작비

10월

50,000 1,158,853

어깨동무 배송비 외

561,630

어깨동무 편집비

300,000

근조기

52,800

조영삼열사 장례위원

50,000

추모연대 특별회비

50,000

운위 뒷풀이 지원

245,000

추모연대회비

50,000

49재단 강좌지원

600,000

총회 대관비

100,000

기제현수막

45,000

추모연대회비

50,000

회비

11월

정순호

1,561,190

회비

12월

비고

1,000,000

민주동문회 기제 지원

9월

입금

특별회비(유윤형)

1,560,910 총회초대장

263,420

추모연대 양말구입

500,000

총회 초대장 디자인

50,000

회비

1,531,350

아카이브 잉여금

1,90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총회 선물

119,100

총회 지원

214,000

13,545,851

이월금

22,657,077

36,202,928

자동이체 및 후원 계좌입니다. 국민은행 0250 - 1036 - 8426 추모사업회(정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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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항목

수입결산

회비

정기회비

15,107,890

특별회비

2,070,000

사업수입

이내창후배다 민동지원금

1,000,000

기제 민동지원금 기타수입

이자 아카이브 잉여금

370,000

지출항목 사업비

연대사업

328 1,900,000

홍보비

지출결산

후배다 지원

15%

거문도 답사 지원

809,120

6%

아카이브 제본비

95,000

1%

추모연대회비

650,000

5%

단체경조

249,000

2%

유해발굴지원

200,000

1%

진실정의결의대회

100,500

1%

유가협 식대지원

100,000

1%

49재단 강의지원

1,200,000

9%

어깨동무제작

2,348,031

17%

발송비

1,036,230

8%

편집디자인비

1,200,000

편집회의비 200,000

1%

1,246,520

9%

815기제

1,381,350

10%

조문기 및 부의금

310,100

20,448,218

2,499,500

4,784,261

0%

2,627,870

2%

310,100

0% 행사뒷풀이 호스팅, 도메인

수입계

2,904,120

9%

총회

비품 업무추진

비고

0%

어깨동무 원고료 행사

경조비

%

2,000,000

지출계

415,000

3%

5,000

0%

420,000

100%

13,545,851

13,545,851

회비를 내주시는 분들 CMS

곽동건, 허동준, 김유승, 이주연, 손수지, 박광채, 이화순, 김경욱, 김영호, 이영미, 연용호, 강만진, 김남섭, 박소영, 신성호, 박상희, 박인식, 김서경, 김형균, 권경우, 전상삼, 김재근, 이예진, 최수연, 박현주, 백광문, 강지우, 고철주, 이차연, 장복례, 고재영, 이경호, 안진걸, 홍성일, 정춘호, 연창훈, 최재영, 김경환, 위상혁, 박천삼, 황광원, 최영화, 황인석, 박형오, 손문진, 서준혁, 최영희, 이원혜, 서준용, 오승아, 이대건, 이홍렬, 김문영, 한 준, 김경아, 박준현, 강한기, 한정순, 김정은, 김충교, 박찬일, 김신철, 김일림, 이지원, 이원근, 홍우림, 이상재, 이정주, 양은모, 장일모, 최승현, 홍준의, 함 철, 정상길, 서정헌, 박응진, 안인숙, 안명숙, 조형준, 우유섭, 이상재, 이주현, 김현동, 김성희, 이태경, 정보영, 신명철, 곽현희, 박성훈, 권향숙, 이남영, 박희성, 최호식, 조환준, 박철민, 구혜영, 김용수, 이동희, 최 호, 최문경, 강남규, 김태엽

자동이체 김기수, 정순호, 백기욱, 송은진, 김산환, 정성중, 박상규, 강동길, 김경주, 노용헌, 정원옥, 전경미, 원순재, 서병훈, 김형구, 박응식, 강민구, 이상길, 이혁승, 방현석, 고 현 특별회비 한명옥, 조종국, 임현택, 정희일, 신기정, 변승철, 이혁승, 유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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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세요 담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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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fe.daum.net/19890815 • naechang.lee@gmail.com

함께 만들어요. 하나, 2018년 다음 호 편집위원 되기

둘, 기고하기

자주 안 모입니다.

어떤 형식과 내용의 글이라도 좋습니다.

회의는 짧게, 뒤풀이는 길어질 수 있습니다.

나누고 싶은 생각,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

일은 찾아서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합니다.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느릿느릿 갑니다.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끈덕지게 함께 갈 열의와 책임감이면 충분합니다.

회원 자녀의 기고에는 소정의 원고료가 지급됩니다.

찍은 날

2018년 5월 16일

펴낸 날

2018년 5월 21일

펴낸 이

강내희

펴낸 곳

이내창 기념사업회

연락처

사무국장 정원옥 010-2373-3387

cafe.daum.net/19890815

조환준, 김경주, 이원근, 정원옥, 백기욱, 신성호, 강곤, 김용수, 이주연, 강지우가 힘 모아 책을 만들었습니다. 권두칼럼을 보 내주신 이시백 소설가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번 호 특집인 <20세기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는 어땠을까>에 기억의 파편을 어렵 게 모아주신 조종국, 김성희, 박찬영, 김산환, 전성태 님에게 특별한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20세기의 추모사업회를 돌아보는 일이 30주기를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영화 <자백>에 이은 기념사업회의 두 번째 기획 상영회 <공동정 범>의 후기를 보내주신 고두현, 조현준 님 고맙습니다. 김신철님이 보내주신 총회 후기는 기념사업회가 앞으로도 어깨동무하 며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페이스북 담벼락의 사진과 글을 쓰도록 허락해주신 모든 회원 여러분께 감사드립 니다. 표지 디자인은 김경주, 인쇄는 상지사, 발송은 신성호가 애써주었습니다. 12번째 <끈덕지게 어깨동무>의 발간이 많이 늦어진 데 대해 필자들과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깊이 사과드립니다. 전적으로 편집부의 게으름 탓입니다. 13호부터는 편집장 을 맡은 강곤이 보다 참신하고 특별한 특집과 기획으로 회원 여러분을 찾아뵐 것을 약속드립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를 계 속 사랑해주시고 기다려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남과 북은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겨 나갈 것이며,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 ・ 2018 남북정상회담 ‘판문점 선언문’ 가운데

노동의 가치와 존엄은 이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들 자신이, 우리의 부모들이, 우리의 아들딸들이 바로 노동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의 가치와 존엄은 바로 우리 자신의 가치와 존엄입니다. 노동이 제도에 의해, 또는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홀대받고 모욕받지 않는 세상을 생각합니다. ・ 문재인 대통령 노동절 메시지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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